조선 지리 서원 전고 /사전전고(祀典典故) 서원 등

우라나라서원의 기록 명종5년 소수서원이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는 (기록)

아베베1 2009. 12. 8. 23:26

 

          

 연려실기술 별집 제4권
 사전전고(祀典典故)
서원(書院)



우리나라는 옛날에는 서원이 없었으나 가정(嘉靖 가정은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1522~1566) 연간(1542)에 주세붕(周世鵬)이 풍기 군수(豐基郡守)가 되었을 때에 풍기군의 속현인 순흥(順興)은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의 본관(本貫)이며, 살았던 옛터이므로 거기에다 그의 사우(祠宇)를 창건하여 선비들이 장수(藏修)하는 곳으로 삼았는데, 곧 백운동(白雲洞)이다. 《후청쇄어》
이황(李滉)이 세붕을 이어 군수가 되어, 조정에 건의하여 송(宋) 나라의 고사에 따라 사액(賜額)한 것과 책을 내려줄 것, 토지와 노비를 내려줄 것을 청하였더니, 명종 5년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 사액하고, 또 신광한(申光漢)에게 명하여 기문(記文)을 짓게 하였다.서원에 사액하는 것과 책을 내린 것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명신록》
○ 주세붕이 황해 감사가 되었을 때에 해주에 문헌당(文憲堂)을 세웠는데 향선생(鄕先生) 문헌공(文獻公) 최충(崔冲)을 모신 것이었다. 사우와 강당(講堂)ㆍ재사(齋舍)가 모두 향교의 제도를 모방하였다. 그리고 유생을 뽑아서 거처하게 하고 경비를 공급하였다. 이로부터 다른 도의 각 고을에서도 서원을 세우는 자가 있었다. 만력 4년 선조 9년 에 이르러서는 백운동서원을 세운 지가 겨우 30여 년밖에 되지 않는데, 모든 지방에서 다투어 본받게 되니 조정에서는 혹 사액과 사서(賜書)한 곳도 있으나, 명현을 모시는 사우이거나 특수한 지방이 아니면 얻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향사도 없으면서 서원을 세운 것이 더욱 많으니 대개 60~70개 소나 되었다. 《후청쇄어》
○ 서원은 송 나라 때에 비롯하여 원(元) 나라의 말기에 성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소수서원을 창건한 후에 각지에서 계속 건립하게 되었는데, 영천(永川)에는 임고서원(臨皐書院), 함양(咸陽)에는 남계(灆溪)서원, 송도(松都)에는 숭양(崧陽)서원, 성주(星州)에는 천곡(川谷)서원, 해주에는 문헌(文憲)서원, 능성(綾城)에는 쌍봉(雙峯)서원, 양주에는 도봉(道峯)서원, 예안(禮安)에는 도산(陶山)서원, 안동에는 수곡(樹谷)서원, 영천(榮川)에는 이산(伊山)서원, 강릉에는 구산(丘山)서원, 대구에는 획암(畫巖)서원이 그것이다. 이것들은 선대의 학자가 살던 곳이거나, 혹은 왕래한 곳으로 사우(祠宇)를 아울러 세워서 향사하였다. 이외에도 또 많이 있다. 《동각잡기》
○ 각 지방의 향교는 곧 공자묘가 있는 곳이다. 조정에서 관원을 보내 교육하므로 모든 서원에 비교하면 존비(尊卑)가 있다. 그러나 서원의 선비는 주세붕이 처음 세워 선비 중에서 해액자(解額者 향시(鄕試)에 합격한 사람)가 거하게 하고, 비록 해액자가 아니라도 반드시 글을 많이 아는 자로서 보충하도록 규율을 세웠으므로, 거기에서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면 들어가지 못하였다. 향교는 생원ㆍ진사에 합격한 자는 가지 아니하고 대개 용렬한 잡것들이 병역을 피하기 위한 자가 많았으므로, 그때 사람들이 향교를 천하게 보고 서원을 높이고 받들었다. 그러나 무지한 자가 스스로 원유(院儒)를 가탁하여 수령을 깎고 추었으므로 수령 또한 삼가고 두려워하였다. 《후청쇄어》
○ 한산(韓山)의 문헌서원(文獻書院)이 이미 창건되었는데, 모든 유생이 가(稼) 가정(稼亭) 이곡(李穀)ㆍ목(牧) 목은(牧隱) 이색(李穡) 부자의 좌차(坐次)가 나란히 되는 것을 의심하여 서울에 있는 자손 이덕형(李德泂)에게 묻고 학식이 높은 여러 선비에게 물었더니 모두 결정하지 못하였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에게 가서 물었더니, 항복이 말하기를, “옛날에 오기량(吳紀亮)의 아들 즐(騭) 부자가 함께 중서령(中書令)이 되어서 조회 때에는 늘 임금이 운모 병풍(雲母屛風)을 주어 사이에 치고 따로 앉았으니, 이제는 장자(樟子)를 사이에 치고 격좌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 드디어 그 말을 따라 장자를 치고 앉게 하였다. 《죽창한화(竹窓閒話)》
목은의 화상이 문헌서원에 있었는데, 권근(權近)이 찬(贊)을 지어서 그 뒤에 쓰기를, “영락 갑오 9월 하한(下澣) 문인 권근 기(記)”라 하였다. 덕산(德山)에 있는 이씨의 옛집에 또 목은의 영당이 있었는데, 그 기문에 정덕(正德) 갑술이라 하였다. 화상이 처음에 두 벌 있었는데, 그 중 한 벌은 치관(豸冠)을 쓰고 서대(犀帶)를 띠며, 붉은 비단 옷을 입고 수염이 반백인 것은 지금서원의 소장본이 그것이다. 영당본은 그것으로부터 전해온 것이며, 한 벌은 야인(野人)의 복색이었는데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서원본은 임진병란에 잃어 버렸는데, 뒤에 일본으로 사신 갔던 자가 얻어 왔다. 일본의 노인이 주면서, “이것은 옛날의 귀인 도화(貴人圖畫)”라고 하였다. 사신이 돌아와서 그 자손에게 주었는데, 타국으로 돌아다닌 지가 오랜 세월이 되었으므로 깁[生綃]이 찢어져서 그 아래 절반이 없어졌다. 자손이 두 벌을 모사(模寫)하여 한 벌은 태창동(太倉洞) 이 중추(李中樞)의 집에 봉안하고, 한 벌은 구본과 아울러 문헌 사당에 봉안하였다. 《미수기언(眉叟記言)》
○ 배천(白川) 문회서원(文會書院)은 선조가 어필로 써서 사액하였더니, 임진년 병란에 편액은 불에 탔는데 숙종이 다시 어필로 액을 써주었다.
○ 홍가신(洪可臣)이 부여 현감(扶餘縣監)이 되었을 때, 비로소 의열서원(義烈書院)을 세우고 백제의 충신 성충(成忠)ㆍ계백(階伯)ㆍ흥수(興首)와 고려 정언 이존오(李存吾)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려고 하는 날 밤에, 가신의 꿈에 네 사람이 와서 인사를 하고 착한 일에 감동하는 빛이 있었으며, 김씨 성을 가진 서생(書生)이 집사(執事)로 재사(齋舍)에 갔는데, 이날 밤 또 꿈에 네 사람이 같이 문에 들어오면서 읍을 하고 당에 올라왔다고 한다. 《죽창한화(竹窓閒話)》. 이 일은 유성룡(柳成龍)이 지은 <서원기(書院記)>에 상세하게 말했다.
광해 때, 평양에 인현서원(仁賢書院)을 세우고 조정에서 향사의 예를 어떻게 할지 결정하지 못하였다. 감사 김신국(金藎國)이 아뢰기를, “향사의 잘못은 김계휘(金繼輝)에게서 시작한 것입니다. 대개 기자(箕子)는 동방의 성군(聖君)으로 이미 국가의 사전(祀典)에 실려 있는데, 다시 사자(士子)들이 사사로이 향사하는 것은 외람한 것입니다. 팔조(八條)의 교(敎)가 처음 동방에 펴졌으니, 이제 서원을 구도(舊都 평양)에 세우고 많은 선비가 모여서 장수(藏修)하고, 그가 끼친 가르침을 강명(講明)하면 족한 것이요, 제사를 지내는 것은 불가합니다.” 하였다. 《염헌집(恬軒集)》
○ 서울의 북쪽에 조계동(曹溪洞)이 있다. 이이첨(李爾瞻)이 조계동의 조자(曹字)가 조식(曹植)의 성자(姓字)와 같은 것을 이유로 사당을 세워서 조식을 향사하려 하여 서원을 짓고, 그 무리를 모아서 제 주구(走狗)들을 길렀다. 임숙영(任叔英)이 듣고 웃으며 말하기를, “조계에 조남명을 향사한다면 공덕리(孔德里)에는 공자를 향사해야 한단 말인가.” 하였다. 계해년 인조반정 후에 예조에서 아뢰기를, “선정신(先正臣) 조식의 서원을 근년에 중흥동(中興洞) 어구에 세웠는데, 요새 들으니 어떤 사람이 모두 헐고 그 위패를 던지기까지 하였다고 하는데 지극히 해괴한 일입니다. 이 서원은 적괴(賊魁) 이첨이 주장한 것이므로 유식한 사자(士子)는 한 사람도 참여하지 않고, 처음에 창설할 때부터 지금까지 지키는 자는 모두 무뢰한 흉도로서, 서울과 지방에 폐를 끼쳐 원망하는 사람이 많았었으므로 이제 이런 변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서원에 대한 원망은 비록 이첨으로 말미암은 것이나, 조식은 유현(儒賢)인데 어찌 이첨의 개인적인 사람이겠습니까. 인심이 이와 같으니 실로 사림의 욕됨이 되니, 청하옵건대, 소속 고을에 영을 내려, 군인을 많이 정해서 엄숙하게 금단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소암집(踈庵集)》 《월사남궁록(月沙南宮錄)》
○ 효종 때 서필원(徐必遠)의 상소로 인하여 조정에서 비로소 서원에 대해서 제한하는 규정을 만들기로 의논하였고, 숙종 갑자년에 이르러서는 명을 내려 각 도에 서원을 사사로 세우는 것을 금하였다. 영종 신유년에는 무릇 갑오년 이후에 창설한 것은 모두 훼철하였는데, 이것은 모두 금령을 범하고 사사로 세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서필원의 소 결(缺)
○ 영종 신유년 영조 7년 4월에 전교하기를, “갑오년에 법을 정한 후에 조정에 아뢰지 아니하고 사사로이 사원(祠院)을 세우거나 또는 기설(旣設)된 서원에도 사사로이 추향(追享)한 자는 유현(儒賢)이거나 대신이거나를 막론하고 모두 철거하고, 당시에 그것을 알고 묵인했던 감사는 이미 죽은 자 외에는 모두 파직하고, 수령은 잡아다가 처벌하며, 앞장서서 주창한 유생은 5년 동안 과거에 응하지 못하게 하고, 이후에 아뢰지 않고 세운 사원 및 추향자를 알고도 묵인하는 감사는 잡아다 처벌하며, 수령은 고신(告身)을 빼앗고 삼등을 내리는 율로 다스리게 하고, 유생은 멀리 귀양을 보내라.” 하였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아뢰기를, “근년에 이 일로써 공문을 발표한 일이 있었는데, 소위 조사한다고 하고 책임 얼버무리기만 일삼으니 실로 잘못된 것입니다. 또 서원 외에 향현사(鄕賢祠)라 일컫고, 혹은 영당(影堂)이라 일컫고서 그 중에 세력이 있는 자면 감사와 수령이 덮어주는 폐단이 없지 않으니, 이후로는 감히 그 같은 짓을 못하게 하라는 뜻으로 비변사로부터 특별히 공문을 보내 엄하게 단속하고, 또 조사한 보고가 온 후에, 조정에서 다만 훼철하라고 말하면 반드시 그 영대로 즉시 거행할는지 꼭 알 수 없으니, 여기에 대해서는 각 도의 감사로 하여금 따로 관원을 파견하여 직접 가서 훼철시킨 뒤에 사실대로 보고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하게 하였다.
○ 10월에 정언 어석윤(魚錫胤)의 상소에 비답하기를, “아아, 저 태학에 이미 성묘(聖廟)를 받들었고, 각 도에는 향교(鄕校)가 있는데 막중한 대성(大聖)을 어찌 감히 사사로 서원을 세워 받들 수 있겠느냐. 지명이 비록 같으나 조정에서 명령한 것이 아니니, 변변치 못한 선비들이 또 어찌 감히 마음대로 서원을 세우겠느냐.이 폐단을 버리지 아니하면 태학을 도리어 경하게 보고 사사 원우(院宇)를 중하게 볼 것이며, 나라에서 태학과 향교를 설치한 도리와 선비들의 풍습을 바로하고 성인을 높이는 뜻이 차차 희미해 질 것이니, 태산(泰山)에 제사한 것을 배척한 공자의 말씀을 어찌 과하다 하겠는가. 위패는 거두어 향교에 묻고 화상은 거두어다 각 성전(聖殿)에 받들면, 높이고 중히 여기는 예가 갖추어 지리라.” 하였다.
○ 영종 때 명을 내려 예안(禮安)의 도산서원과 해주의 소현서원의 그림을 그려 올리게 해서 보았다.


경기(京畿)
개성부(開城府) 숭양서원(崧陽書院) 만력 계유년에 세웠으며 선조 계축년에 사액하였다. : 정몽주(鄭夢周) 태조조에 들어 있다.ㆍ서경덕(徐敬德)ㆍ김상헌(金尙憲) 인조조의 정승ㆍ김육(金堉) 효종조의 정승ㆍ조익(趙翼) 효종조의 정승 ○ 곁에 정몽주 화상이 있다.
화곡서원(花谷書院) 만력 기유년에 세웠으며 선조 갑인년에 사액하였다. 화담이 살았던 옛 터 : 서경덕(徐敬德)ㆍ박순(朴淳) 선조조의 정승ㆍ허엽(許曄) 선조조의 명신ㆍ민순(閔純) 추배(追配)하였다.
오관서원(五冠書院) 신유년에 세웠으며 을축년에 사액하였다. : 박상충(朴尙衷) 자는 성부(誠夫)이며 호는 반남(潘南), 시호는 문정공(文正公)이다. 보문각(寶文閣) 직제학을 지냄. 목은(牧隱)의 문하생(목은의 문인이란 말의 잘못된 기록임. 목은의 매부로서 나이는 네 살 아래임) : 박세채(朴世采) 숙종조의 정승
숭절서원(崇節書院) 현종 병오년에 세웠으며 숙종 계유년에 사액하였다. : 송상현(宋象賢) 선조(宣祖) 임진조에 들었다.ㆍ김연광(金鍊光) 호는 송암(松巖)이며 송도(松都)에 살았다. 임진년에 회양(淮陽) 부사로서 사절(死節)하여 예조 참판을 증직하였다.ㆍ유극량 선조 임진조에 들었다.
강화(江華) 충렬사(忠烈祠) 인조 임오년에 세웠으며 무술년에 사액하였다. : 김상용(金尙容) 인조조의 정승ㆍ이상길(李尙吉)ㆍ이시직(李時稷)ㆍ홍명향(洪命享)ㆍ황선신(黃善身)ㆍ권순장(權順長)ㆍ김겸(金兼) 이상은 동벽(東壁)에 모셨다.ㆍ심현(沈誢)ㆍ윤전(尹烇)ㆍ송시영(宋時榮) 호는 야은(野隱)ㆍ구원일(具元一)ㆍ강흥업(姜興業) 이상은 서벽(西壁)에 모셨다. 모두 강도사절(江都死節)에 상세하다.
서하영당(西河影堂) 갑자년에 세웠다. : 이민(李敏)ㆍ조관빈(趙觀彬)
□□영당(□□影堂) 병술년에 세웠다. : 이인엽(李寅燁)
보명영당(保明影堂) 영종 을축년에 세웠으며 갑곶나루[甲串津]에 있다. : 이성량(李成樑) 명 나라 영원백(寧遠伯)ㆍ이여매(李如梅) 명 나라의 도독(都督). ○ 모두 중국인이다.
양주(楊州) 도봉서원(道峯書院) 만력 계유년에 절터에 세웠으며 계축년에 사액하였다. : 조광조(趙光祖) 기묘년의 명신ㆍ송시열(宋時烈)
석실서원(石室書院) 숭정(崇禎) 갑오년에 세웠으며 현종 계묘년에 사액하였다. :김상헌ㆍ김상용ㆍ김수항(金壽恒) 현종조의 정승ㆍ민정중(閔鼎重) 숙종조의 정승ㆍ이단상(李端相)ㆍ김창협(金昌協)
청절사(淸節祠) 병인년에 세웠으며 신사년에 사액하였다. : 김시습(金時習) 단종조에 들었다. 곁에 박세당(朴世堂)의 화상이 있다.
임간서원(臨澗書院) 임진년에 세웠다. : 남을진(南乙珍) 고려 문하부사(門下府事)이며, 호는 사천(沙川)ㆍ조견(趙狷) 태조조에 들어 있다.
파주(坡州) 파산서원(坡山書院) 융경(隆慶) 무진년에 세웠으며 효종 경인년에 사액하였다. : 성수침(成守琛)ㆍ성수종(成守琮)ㆍ백인걸(白仁傑) 선조조의 명신ㆍ성혼(成渾)
자운서원(紫雲書院) 만력 기유년에 세웠으며 숭정□에 사액하였다. : 이이(李珥) 선조조의 명신ㆍ김장생(金長生)ㆍ박세채
풍계사우(豊溪祠宇) 숙종 갑술년에 세웠으며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오두인(吳斗寅)ㆍ이세화(李世華)ㆍ박태보(朴泰輔)
여주(驪州) 기천서원(沂川書院) 만력 기축년에 세웠는데 임진병란에 불에 타 없어지고, 인조 을축년에 사액하고 기유년에 중건하였다. : 김안국(金安國) 기묘의 명현ㆍ이언적(李彦迪) 명종조의 명현ㆍ홍인우(洪仁祐)ㆍ정엽(鄭曄)ㆍ이원익(李元翼)ㆍ홍명구(洪命耉)ㆍ이식(李植)
고산서원(孤山書院) 숭정(崇禎) 병인년에 세웠으며, 무자년에 사액하였다. : 이존오(李存吾) 자는 순경(順卿)이며 호는 석탄(石灘)이요, 본관은 경주이다. 고려 정언(正言)이 되어 신돈(辛旽)을 책하는 상소를 하여 장사 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되었다가 죽었다.
광주(廣州) 절현사(節顯祠) 무진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김상헌(金尙憲)ㆍ정온(鄭蘊)ㆍ홍익한(洪翼漢)ㆍ윤집(尹集)ㆍ오달제(吳達濟)
구암서원(龜巖書院) 정사년에 세웠으며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이집(李集) 자는 호연(浩然)이며, 호는 둔촌(遁村)이고,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벼슬은 고려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이다.ㆍ이양중(李養中) 호는 석탄(石灘)이며 벼슬은 고려 형조 참의ㆍ정성근(鄭誠謹) 갑자화적(甲子禍籍)조에 들었다.ㆍ정엽(鄭曄)ㆍ오윤겸(吳允謙)ㆍ임숙영(任叔英)
수곡서원(秀谷書院) 을축년에 세웠으며, 숙종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이의건(李義健) 자는 의중(宜仲)이며, 호는 동은(峒隱)이요, 본관은 완산(完山)이다. 벼슬은 공조 정랑이며 집의를 승직하였다.ㆍ조속(趙涑)ㆍ이후원(李厚源) 효종조의 정승
명고서원(明皐書院) 신축년에 세웠으며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 조익(趙翼)ㆍ조복양(趙復陽)ㆍ조지겸(趙持謙)
수원(水原) 매곡서원(梅谷書院) 숙종 갑술년에 세웠으며 을해년에 사액하였는데 갑진년에 불에 탔다. : 송시열(宋時烈) 화상(畫像)이 있다.
남양(南陽) 용백사(龍栢祠) 병오년에 세웠으며 현종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 한 제갈량(漢諸葛亮)ㆍ송 호안국(宋胡安國)ㆍ윤계(尹棨)
안곡서원(安谷書院) 현종 무신년에 세웠으며 경종 신축년에 사액하였는데, 기유년에 철폐하였다가 경신년에 복구하였다. : 박세훈(朴世勳) 호는 백촌(栢村)이며, 벼슬은 첨정인데 이조 참의를 증직하였다.ㆍ박세희(朴世熹) 기묘의 명현ㆍ홍섬(洪暹) 선조조의 정승
장단(長湍) 임강서원(臨江書院) 인조 계미년에 세웠으며 숙종 갑술년에 사액하였다. : 안유(安裕) 향(珦)이라고 이름을 고치고 호는 매헌(梅軒)이다. 문묘에 배향하였으며 시호는 문성(文成)이다.ㆍ이색(李穡) 태조조에 들었다.ㆍ김안국(金安國)ㆍ김정육(金正堉) 모두 기묘의 명현
용인(龍仁) 심곡서원(深谷書院) 효종 경인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조광조(趙光祖)
충렬사(忠烈祠) 만력 병자년에 세웠으며 광해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 정몽주(鄭夢周)
양근(楊根) 미원서원(迷源書院) 현종 신축년에 세웠다. : 조광조ㆍ김식(金湜) 기묘 명현ㆍ김육(金堉)ㆍ남언경(南彦經)ㆍ이제신(李濟臣) 추가하여 배향하였다.
안성(安城) 도기서원(道基書院) 무신년에 세웠으며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 김장생(金長生)
남파서원(南坡書院) 신미년에 세웠다. : 홍우원(洪宇遠)
포천(抱川) 용연서원(龍淵書院) 숙종 병진년에 세웠으며 신미년에 사액하였다. : 이덕형(李德馨) 선조조의 정승ㆍ조경(趙絅)
화산서원(花山書院) 숭정 을해년에 세웠고 현종 경자년에 사액하였다. : 이항복 선조조의 정승
김포(金浦) 우저서원(午渚書院) 무자년에 세웠으며 신해년에 사액하였다. : 조헌(趙憲)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義兵將)
지평(砥平) 운계서원(雲鷄書院) 계사년에 세웠고 숙종 갑오년에 ‘용문(龍門)’이라 사액하였다. : 조성(趙晟) 호는 양심당(養心堂)이며, 벼슬은 의영 고령(義盈庫令)에 이르렀다.ㆍ조욱(趙昱) 명종조의 유일(遺逸)ㆍ신변(申忭)ㆍ조형생(趙亨生) 호는 둔곡(遯谷)이며, 벼슬은 현감이고 욱(昱)의 손자이다. ○ 위의 두 위[二位]는 처음에 함께 배향[幷亨]하였다가 숙종 갑오년에 전교로 인하여 따로 향현사(鄕賢祠)를 세웠다.
교하(交河) 신곡서원(新谷書院) 계해년에 세웠으며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윤선거(尹宣擧)
풍덕(豐德) 귀암서원(龜岩書院) 을묘년에 세웠으며 신유년에 사액하였다. : 이이(李珥)
이천(利川) 운봉서원(雲峯書院) 갑자년에 세웠다. : 서희(徐熙) 호는 복천(福訓)이며 시호는 장위공(章威公)이다. 벼슬은 태보내사령(太保內史令)을 지냈다.ㆍ이관의(李寬義) 호는 율정(栗亭)이며,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ㆍ김안국(金安國)
금천(衿川) 충현서원(忠賢書院) 효종 갑오년에 세웠으며 숙종 병진년에 사액하였다. : 강감찬(姜邯贊) 고려 태사(太師)인데 시호는 인헌공(仁憲公)이다.ㆍ서견(徐甄) 태조조에 들었다.ㆍ이원익(李元翼)
□□영당(□□影堂) 인조가 옛터에 집을 짓게 하고 유상(遺像)을 봉안하였다. : 이원익(李元翼)
과천(果川) 민절사(愍節祠) 숙종 신유년에 세웠으며 신미년에 사액하였다. : 성삼문(成三問)ㆍ박팽년(朴彭年)ㆍ이개(李塏)ㆍ하위지(河緯地)ㆍ유성원(柳誠源)ㆍ유응부(兪應孚) 모두 단종조에 상세하다.
노강서원(鷺江書院) 을해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박태보(朴泰輔)
호계서원(虎溪書院) 숙종 신유년에 세웠다. : 조종경(趙宗敬) 호는 독암(獨庵)이며 전한(典翰)을 지내고, 승지에 증직되었다.ㆍ조속(趙涑) 종경(宗敬)의 손자이다.
사충서원(四忠書院) 영종 을사년에 세웠다가 정미년에 훼철(毁撤)하고 을해년에 중건하였는데 각각 화상이 있다. : 김창집(金昌集)ㆍ이이명(李頤命)ㆍ조태채(趙泰采)ㆍ이건명(李健命)
마전(麻田) 미강서원(嵋江書院) 신미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허목(評穆) 숙종 때의 정승
인천(仁川) 학산서원(鶴山書院) : 숙종 임오년에 세웠고 정해년에 사액하였다. : 이단상(李端相)ㆍ이희조(李喜朝) 호는 간암(艮庵)이며 추향하였다. 이조 참판을 지냈고 찬성을 증직하였다.
연천(漣川) 임장서원(臨漳書院) 정해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주자 화상(朱子畫像)
가평(加平) 잠곡서원(潛谷書院) 갑신년에 세웠다. : 김육(金堉)
영평(永平) 옥병서원(玉屛書院) 기축년에 세웠고 계사년에 사액하였다. : 박순(朴淳)ㆍ이의건(李義健)ㆍ김수항(金壽恒)
고양(高陽) 문봉서원(文峯書院) 무진년에 세웠고 기축년에 사액하였다. : 민준(閔純)ㆍ남효온(南孝溫) 갑자화적(甲子禍籍)조에 들었다.ㆍ김정국(金正國)ㆍ기준(奇遵) 기묘 명현ㆍ홍이상(洪履祥)ㆍ정지운(鄭之雲) 자는 정이(靜而)이며 호는 추만(秋巒)이고, 사재(思齋)의 문인이다. 일찍이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저술하였다.ㆍ이신의(李愼儀) 선조조의 명신ㆍ이유겸(李有謙) 참의를 지냈으며 호는 만회(晩晦)이다.
통진(通津) 영당(影堂) 기사년에 사액하였다. : 장만(張晩)
양성(陽城) 덕봉서원(德峯書院) 을해년에 세웠고 경인년에 사액하였다. : 오두인(吳斗寅)


홍충도(洪忠道 충청도의 별칭)
공주(公州) 충현서원(忠賢書院) 만력 신미년에 세웠고 천계(天啓) 을축년에 사액하였다. : 주자(朱子)ㆍ이존오(李存吾)ㆍ이목(李穆) 무오당적(戊午黨籍)조에 들었다.ㆍ성제원(成悌元) 명종 유일(遺逸)ㆍ조헌(趙憲)ㆍ김장생(金長生)ㆍ송준길(宋浚吉)ㆍ송시열(宋時烈)ㆍ서기(徐起) 선조 때의 학자
청강서원(滄江書院) 숭정 무진년에 세웠고 숙종 임술년에 사액하였다. : 황신(黃愼)
도산서원(道山書院) 계유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권득기(權得己) 호는 만회(晩悔)이며, 예조 좌랑을 지냈는데 이조 참판을 증직하였다.ㆍ권시(權諰)
부용강영당(芙蓉江影堂) 숙종 경인년에 세웠다. : 이만원(李萬元) 호는 이우당(二憂堂)이며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평안도 관찰사[箕伯]를 지냈다.
청주(淸州) 쌍천서원(雙泉書院) 계유년에 세웠다. : 신식(申湜) 호는 용졸재(用拙齋)이며, 대사헌을 지냈고 이조 판서를 증직하였다. 퇴계(退溪)의 문인이며 광해조 때 폐모 의논에 불참하였고, 《가례언해(家禮諺解)》를 저술하였다. 효도로 고향에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신항서원(莘巷書院) 융경(隆慶) 경오년에 세웠고, 현종 경자년에 사액하였다. : 이색(李穡)ㆍ이이(李珥)ㆍ경연(慶延) 자는 징군(徵君)이며, 본관은 청주(淸州)인데 현감을 지냈으며, 성종 때는 유일(遺逸)로 주부(主簿)를 지냈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 박훈(朴薰) 기묘 명현ㆍ김정(金淨) 기묘 명현ㆍ한충(韓忠) 기묘 명현ㆍ송인수(宋麟壽) 을사당적(乙巳黨籍)에 들었다.ㆍ송상현(宋象賢)ㆍ이득윤(李得胤) 호는 서계(西溪)이며, 괴산(槐山) 군수를 지냈다.
화양서원(華陽書院) 을해년에 세웠고 병자년에 어필(御筆)로 사액하였다. : 송시열(宋時烈) 화양동(華陽洞)에 또 만동묘(萬東廟)가 있는데 계미년에 세웠고, 명 나라의 신종(神宗)과 의종(毅宗)을 향사한다.
국계서원(菊溪書院) 신사년에 세웠다. : 박증영(朴增榮) 호는 눌재(訥齋)이며, 교리를 지냈다.ㆍ변경복(卞景福) 호는 백음(栢陰)이다.ㆍ이덕수(李德洙) 호는 이유당(怡愉堂)이며, 대사간을 지냈다.ㆍ이수언(李秀彦) 호는 농계(聾溪)이며, 대사헌을 지냈다.
기암서원(機巖書院) 숙종 기묘년에 세웠다. : 강백년(姜栢年)
송천서원(宋泉書院) 숙종 정해년에 세웠다. : 김사렴(金士廉) 벼슬은 안렴사(按廉使)이다.ㆍ최유경(崔有慶) 호는 죽정(竹亭)이며, 참판을 지냈고 시호는 평도공(平度公)이다.ㆍ이정간(李貞幹) 벼슬은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지냈고 시호는 효정공(孝靖公)이다.ㆍ박광우(朴光祐) 을사당적조에 들었다.ㆍ이지춘(李之春) 호는 삼우당(三友堂)이며, 장령을 증직하였다.ㆍ조강(趙綱) 호는 모계(慕溪)이며 현감을 지냈고, 승지를 증직하였다.ㆍ이대건(李大建) 이시발(李時發)의 부(父)이다. 호는 오촌(梧村)이며 진사에 급제하고 27세에 죽었다. 사람들이 관중안자(館中顔子)라 하였다. 우상(右相)을 증직하였다.ㆍ이제신(李濟臣)ㆍ최석정(崔錫鼎) 숙종조의 정승ㆍ이인혁(李寅爀) 호는 매산(梅山)이며 사복정(司僕正)을 지냈다. 이상 3인을 추배하였다.
백록서원(白麓書院) 숙종 경인년에 세웠다. : 권상(權常) 호는 남강(南岡)이며, 동흥군(東興君)으로 봉하였다. 동지(同知)를 지냈고 영상을 증직하였다.
송곡서원(松谷書院) 숙종 임진년에 세웠다. : 변시환(卞時煥) 호는 일공(一筇)이며 흥덕(興德) 현감을 지냈다.
봉계서원(鳳溪書院) 숙종 임진년에 세웠다. : 김우옹(金宇顒) 선조조의 명신ㆍ신송(申誦) 호는 하은(霞隱)이며, 감사를 지냈고 이조 판서를 증직하였다.ㆍ신집(申潗) 호는 종산(鍾山)이며 지평(持平)을 증직하였다.
□□영당(□□影堂) 경인년에 세웠다. : 이색(李穡)
체화당(棣華堂) : 노계원(盧繼元) 호는 송헌(松軒)이다.ㆍ노후원(盧後元) 호는 국헌(菊軒)이다.ㆍ노종원(盧從元) 호는 매헌(梅軒)이며, 지평을 지냈다.ㆍ노일원(盧一元) 호는 죽헌(竹軒)이다.
표충사(表忠祠) 영종 신해년에 세웠고 병진년에 사액하였다. : 이봉상(李鳳祥) 병사로서 영종 무신년에 순절하였다. 시호는 충민공(忠愍公)이며, 좌찬성을 증직했다.ㆍ남연년(南延年) 영장(營將)이다. 시호는 충장공(忠壯公)이며 병조 판서를 증직하였다.ㆍ홍림(洪霖) 비장(稗將)을 지냈고, 병조 참판을 증직하였다.
충주(忠州) 운곡서원(雲谷書院) 만력 경자년에 세웠고 숙종 병진년에 사액하였다. : 주자(朱子)ㆍ정구(鄭逑)
팔봉서원(八峯書院) 만력 임오년에 세웠고, 현종 임자년에 사액하였다. : 이자(李耔) 기묘 명현ㆍ이연경(李延慶) 기묘 명현ㆍ김세필(金世弼) 기묘명현ㆍ노수신(盧守愼) 선조조의 정승
누암서원(樓巖書院) 숙종 갑술년에 세웠고, 임오년에 사액하였는데 갑진년에 철훼(撤毁)하였다가 을사년에 복구하였다. : 송시열(宋時烈)ㆍ민정중(閔鼎重)ㆍ권상하(權尙夏)
충렬사(忠烈祠) 숙종 정축년에 세웠고 영종 정미년에 사액하였다. : 임경업(林慶業)
문의(文義) 노봉서원(魯峯書院) 만력 갑인년에 세웠고, 효종 무술년에 사액하였다. : 송인수(宋麟壽)ㆍ정렴(鄭)
검담서원(黔潭書院) 숙종 갑술년에 세웠고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송준길(宋浚吉)
덕천사우(德川祠宇) 숙종 갑술년에 세웠다. : 유희령(柳希齡) 호는 몽암(夢庵)이며 호조참의를 지냈다.ㆍ유흥룡(柳興龍) 호는 숙옹(塾翁)이며 감찰을 증직하였다.ㆍ우신언(禹愼言) 호는 묵재(默齋)이며, 찰방을 지냈다.ㆍ정응창(鄭應昌) 호는 유항(柳巷)이며 공조 좌랑을 증직하였다.
괴산(槐山) 화암서원(花巖書院) 천계 임술년에 세웠다. : 이황(李滉)ㆍ이문건(李文楗) 호는 검재(黔齋)이며 승지를 지냈다.ㆍ노수신(盧守愼)ㆍ김제갑(金悌甲) 목사를 지냈고, 영상을 증직하였다. 호는 의재(毅齋)이다.ㆍ유근(柳根) 광해조의 문형(文衡)ㆍ이신의(李愼儀)ㆍ허후(許詡) 이상(貳相)을 지냈고 시호는 정간공(貞簡公)이다.ㆍ박세무(朴世茂) 헌납을 지냈고, 호는 소요당(逍遙堂)이다.ㆍ전유형(全有亨) 호는 학송(鶴松)이며 형조 참판을 지냈다.
아산(牙山) 인산서원(仁山書院) 경술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김굉필(金宏弼) 무오당적조에 들었다.ㆍ조광조(趙光祖)ㆍ정여창(鄭汝昌) 무오당적조에 들었다.ㆍ이언적(李彦迪) 명종 명현ㆍ이황ㆍ기준(奇遵)ㆍ이지함(李之菡) 선조 때 사람ㆍ홍가신(洪可臣) 호는 만전(晩全)이며 판서를 지냈다.ㆍ이덕민(李德敏) 처사이며 참봉을 지냈고, 호는 송파(松坡)이다.ㆍ박지계(朴知誡) 4인은 무신년에 추향하였다.
현충사(顯忠祠) 숙종 병술년에 세웠다. : 이순신(李舜臣) 선조조의 명신ㆍ이완(李莞) 순인의 종자(從子)이다. 의주 부윤(義州府尹)을 지냈고 병조 판서를 증직하였다.ㆍ이봉상(李鳳祥)
연기(燕岐) 봉암서원(鳳巖書院) 신묘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한충(韓忠) 기묘 명현ㆍ김장생(金長生)ㆍ송준기ㆍ송시열
제천(堤川) 남당서원(南塘書院) 만력 경진년에 세웠다. : 이황(李滉)
영춘(永春) 송파서원(松坡書院) 계축년에 세웠다. : 윤선거(尹宣擧)
보은(報恩) 상현서원(象賢書院) 가정(嘉靖) 기유년에 세웠고 만력 경술년에 사액하였다. : 김정(金淨)ㆍ성운(成運) 명종조의 유일(遺逸)ㆍ성제원(成悌元) 명종조의 유일로 보은(報恩) 현감을 지냈다.ㆍ조헌(趙憲) 신유년에 추향하였다.ㆍ송시열 을해년에 추향하였다.
산앙사영당(山仰祠影堂) 숙종 정해년에 세웠다.ㆍ송시열ㆍ권상하(權尙夏)
단양(丹陽) 단암서원(丹巖書院) 현종 경자년에 세웠고, 숙종 임신년에 사액하였다. : 우탁(禹倬) 고려 때에 좨주(祭酒)를 지냈다. 호는 역동재(易東齋)이며 자는 보안(甫安)이며, 안향(安珦)의 문인이다.ㆍ이황(李滉)
목천(木川) 도동서원(道東書院) 기축년에 세웠고 병진년에 사액하였다. : 주자(朱子)ㆍ정구(鄭逑)ㆍ김일손(金馹孫) 무오당적에 들었다ㆍ황종해(黃宗海) 호는 오천(杇淺)이다.
홍산(鴻山) 청일서원(淸逸書院) 천계 신유년에 세웠고 숙종 갑신년에 사액하였다. : 김시습(金時習)
창렬사(彰烈祠) 삼학사(三學士)를 향사하였다.
옥천(沃川) 창주서원(滄洲書院) 만력 무신년에 세웠고,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 조헌(趙憲)ㆍ김집(金集)ㆍ송시열ㆍ송준길ㆍ곽은(郭垠) 호는 용촌(龍村)이며 승지를 지냈다. 효종 경인년에 따로 창주사우(滄洲祠宇)를 세워서 향사하였다.
용문영당(龍門影堂) 무인년에 세웠다. : 송시열
호계사우(虎溪祠宇) 숭정(崇禎) 신묘년에 세웠다. : 남수문(南秀文) 호는 경재(敬齋)이며 직제학을 지냈다.
대곡영당(代谷影堂) 계사년에 훼철하였다. : 전팽령(全彭齡) 호는 송정(松亭)이며 감사를 지냈다.
표충사(表忠祠) 갑인년에 사액하였다. : 조헌(趙憲)ㆍ조완기(趙完基)
신창(新昌) 도봉서원(道峯書院) 경술년에 세웠다. : 조익(趙翼)ㆍ조극선(趙克善) 자는 유선(有善)이며 호는 야곡(冶谷)이다. 효행이 있어 정문을 세웠으며 유일(遺逸)로 장령(掌令)을 지냈고 이조 참의를 증직하였다.
청풍(淸風) 봉강서원(鳳崗書院) 신해년에 세웠으며 임자년에 사액하였다. : 김식(金湜)ㆍ김권(金權)
황강서원(黃江書院) 영종 병오년에 세웠고 정미년에 사액하였다. : 권상하
연산(連山) 돈암서원(遯巖書院) 숭정 계유년에 세웠고, 현종 경자년에 사액하였다. : 김장생ㆍ김집ㆍ송준길ㆍ송시열
귀산서원(龜山書院) 임오년에 세웠다. : 윤전(尹烇)ㆍ윤순거(尹舜擧)ㆍ윤원거(尹元擧) 자는 백분(伯奮)이며 벼슬은 진선(進善)을 지냈다.
팔현서원(八賢書院) 임오년에 세웠는데, 지금은 액(額)을 충곡(忠谷)이라 한다. : 백제 장군 계백(階伯)ㆍ박팽년(朴彭年)ㆍ성삼문(成三問)ㆍ이개(李塏)ㆍ하위지(河緯地)ㆍ유성원(柳誠源)ㆍ유응부(兪應孚)ㆍ김익겸(金益兼)
휴정서원(休亭書院) 기묘년에 세웠다. : 유무(柳懋) 호는 휴계(休溪)이며 찰방을 지냈다.ㆍ이항길(李恒吉) 호는 과암(果庵)이며 참봉을 지냈다.ㆍ김망(金望) 호는 삼육재(三六齋)이며 현감을 지내고 승지에 증직되었다.ㆍ권□(權□) 호는 반곡(盤谷)이며, 감사를 지내고 영상에 증직되었다.
보령(保寧) 화암서원(花巖書院) 만력 경술년에 세웠고 숙종 병인년에 사액하였다. : 이지함(李之函)ㆍ이산보(李山甫)ㆍ이몽규(李夢奎) 호는 천휴당(天休堂)이며, 추향되었다.
홍주(洪州) 녹운서원(綠雲書院) 임자년에 세웠고, 숙종 임신년에 사액하였다. : 박팽년(朴彭年)ㆍ이개(李塏)ㆍ하위지(河緯地)ㆍ성삼문(成三問)ㆍ유성원(柳誠源)ㆍ유응부(兪應孚)
혜학서원(惠學書院) 숙종 을유년에 세웠고 경종 임인년에 사액하였다. : 이세귀(李世龜) 호는 양와(養窩)이며, 목사를 지냈다.
용계서원(龍溪書院) 숙종 갑오년에 세웠다. : 윤증(尹拯)
황간(黃澗) 모현서원(慕賢書院) 임오년에 세웠다. : 조위(曺偉) 무오당적조에 들었다.ㆍ박영(朴英) 중종조의 명신ㆍ김시창(金始昌) 호는 풍정(嵐亭)이며, 효절(孝節)로써 삼강록(三綱錄)에 실렸다.ㆍ박응훈(朴應勳) 호는 오촌(梧村)이다.ㆍ송시열(宋時烈)
송계서원(松溪書院) 현종 정미년에 세웠다. : 남지언(南知言) 호는 삼괴당(三槐堂), 참봉을 지냈다.ㆍ박유동(朴惟東) 호는 일석(一石)이며, 참봉을 지냈다.
한천서원(寒天書院) 정유년에 세웠고 병오년에 사액하였다. : 송시열(宋時烈)
서천(舒川) 명곡서원(鳴谷書院) 임인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이산보(李山甫)ㆍ조헌(趙憲)ㆍ조수륜(趙守倫) 자는 경지(景至)이며, 호는 풍옥헌(風玉軒)이고, 호조 좌랑을 지냈으며, 병조 참판에 증직되었다.ㆍ조속(趙涑) 수륜(守倫)의 아들이며, 추향되었다.
부여(扶餘) 의렬사(義烈祠) 만력 을해년에 세웠고, 선조 정축년에 사액하였다. : 성충(成忠) 백제(百濟)의 좌평(佐平)을 지냈다.ㆍ흥수(興首) 백제의 좌평을 지냈다.ㆍ계백(階伯) 백제의 장군ㆍ이존오(李存吾) 고려의 우정언(右正言)을 지냈다.ㆍ정택뢰(鄭澤雷) 호는 화강(花岡)이며, 광해조 때 남해(南海)에 귀향갔다. 지평에 증직되었으며 추향되었다.ㆍ황일호(黃一皓) 호는 지천(芝川)이며 시호는 충렬공(忠烈公)이고 찬성에 증직되었다.
부산서원(浮山書院) 을해년에 세웠고 숙종 기해년에 사액하였다. : 김집(金集)ㆍ이경여(李敬輿) 인조조의 정승
청안(淸安) 귀계서원(龜溪書院) 만력 계축년에 세웠다. : 이준경(李浚慶) 명종조의 정승ㆍ서사원(徐思遠) 호는 낙재(落齋)이다. 현감을 지냈다.ㆍ박지화(朴枝華) 자는 군실(君實)이며, 호는 수암(守庵)이고 본관은 정선(旌善)이다. 교관(敎官)을 지냈고, 예서(禮書)에 정통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물에 빠져 자결하였다.ㆍ이득철(李得澈) 위에 보라. 호는 신곡(莘谷)이다.ㆍ이당(李瑭) 호는 방촌(芳村)이며 참봉을 지냈고 추배되었다.
□□사우(□□祠宇) 영종 기미년에 세웠다. : 금성대군 유(錦城大君瑜) 시호는 정민공(貞愍公)이며, 단종조의 사람이다.ㆍ이보흠(李甫欽) 본관이 영천(永川)이며, 순흥(順興) 부사를 지냈고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영동(永同) 초강서원(草江書院) 만력 계축년에 세웠다. : 박연(朴堧) 호는 난계(蘭溪)이며, 세종조의 명신이다.ㆍ박사종(朴嗣宗) 호는 읍청(挹淸)이며 참봉을 지냈다.ㆍ송방조(宋邦祚) 병조 좌랑을 지냈다.ㆍ송시영 위에 보라ㆍ송시열ㆍ윤황(尹煌)
화암사우(花巖祠宇) 현종 병오년에 세웠다. : 장항(張沆) 호는 눌재(訥齋)이며,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냈고, 시호는 문현공(文顯公)이다.ㆍ박흥생(朴興生) 호는 국당(菊堂)이며 현령(縣令)을 지냈고 공조 참의에 증직되었다.ㆍ장필무(張弼武) 호는 백야(栢冶)이며, 자는 무부(武夫)요, 시호는 양정공(襄貞公)이다. 청렴결백한 장군으로서 절도사를 지냈고, 병조 판서에 증직되었다.ㆍ박인(朴忍) 만호(萬戶)를 지냈다.ㆍ장지현(張知賢) 호는 삼괴당(三槐堂)이며 감찰을 지냈다. 임진왜란에 순절하였는데 병조 참의에 증직되었다. 필무(弼武)의 아들이다.
회덕(懷德) 숭현사(崇賢祠) 만력 기유년에 옮겨 세웠다. : 정광필(鄭光弼) 중종조의 정승ㆍ김정(金淨)ㆍ김장생(金長生)ㆍ송시열(宋時烈)ㆍ이시직(李時稷)ㆍ송인수(宋麟壽)ㆍ송준길(宋浚吉)ㆍ송시영(宋時榮) 이시직과 송시영의 사당은 따로 있다.
정절사(靖節祠) 갑자년에 세웠다. : 송유(宋愉) 호는 쌍청당(雙淸堂)이다.ㆍ백팽년(朴彭年)ㆍ송갑조(宋甲祚) 호는 수옹(睡翁)이며, 참봉을 지냈고 영상에 증직되었다.ㆍ송상민(宋尙敏) 호는 석곡(石谷)이며 좌랑을 증직하였다.ㆍ김경여(金慶餘) 부제학을 지냈으며 영상에 증직되었다. 호는 송애(松崖)이며 추배되었다.
종회사영당(宗晦祠影堂) 숙종 정축년에 세웠다. : 주자(朱子)ㆍ송시열(宋時烈)
용호사우(龍湖祠宇) 정축년에 세웠다. : 강학년(姜鶴年) 호는 복천(復泉)이며, 장령을 지냈고 대사헌에 증직되었다.ㆍ강세귀(姜世龜) 호는 삼휴당(三休堂)이며, 대사간을 지냈다.
미호서원(渼湖書院) 정유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송규렴(宋奎濂) 호는 제월당(霽月堂)이며 참찬을 지냈고, 시호는 문희공(文僖公)이다.
이성(尼城) 노강서원(魯崗書院) 갑인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윤황(尹煌)ㆍ윤문거(尹文擧)ㆍ윤선거(尹宣擧)ㆍ윤증(尹拯)
온양(溫陽) 정퇴서원(靜退書院) 기사년에 세웠다. : 조광조(趙光祖)ㆍ이황(李滉)ㆍ맹희도(孟希道) 호는 동포(東浦)이며 수문제학(修文提學)을 지냈다. 사성(思誠)의 부(父)이며, 추향되었다.ㆍ홍가신(洪可臣)
충효사우(忠孝祠宇) 숭정 갑술년에 세웠다. : 이순신(李舜臣)ㆍ강봉수(姜鳳壽) 호는 창암(窓巖)이며 참찬에 증직되었다.ㆍ조상우(趙相禹) 호는 시암(時庵)이며 참판에 증직되었다.ㆍ강백년(姜栢年)ㆍ윤현(尹俔) 호는 양심당(養心堂)이며 도사(都事)를 증직하였고, 추향하였다.
면천(沔川) 향현사(鄕賢祠) 병술년에 세웠다. : 이안눌(李安訥)
대흥(大興) 우천향현사(牛泉鄕賢祠) 정해년에 세웠다. : 이약수(李若水) 호는 우천(牛泉)이며 진사에 합격하였고, 기묘 명현이다. ○ 소정방사(蘇定方祠) 제사(諸祠)조에 들어 있다.
청산(靑山) 덕봉서원(德峯書院) 신사년에 세웠다. : 조헌(趙憲)ㆍ송시열(宋時烈)
임천(林川) 칠산서원(七山書院) 정묘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ㆍ유계(兪棨)
예산(禮山) 덕잠서원(德岑書院) 을유년에 세웠고 갑오년에 사액하였다. : 김구(金絿) 기묘 명현
집성사영당(集成祠影堂) 기축년에 세웠다. : 주자ㆍ송시열
평택(平澤) 포충사우(褒忠祠宇) 신축년에 세웠고 갑신년에 사액하였다. : 홍익한(洪翼漢)ㆍ윤집(尹集)ㆍ오달제(吳達濟)
향현사(鄕賢祠):우남양(禹南陽) 호는 운곡(雲谷)이며, 처사를 지냈고, 집의에 증직되었다.
한산(韓山) 문헌서원(文獻書院) 만력 갑오년에 세웠고, 경술년에 사액하였다. : 이곡(李穀) 고려조에서 한산군(韓山君)으로 봉하였으며, 호는 가정(稼亭)이다.ㆍ이색(李穡)ㆍ이종학(李種學) 호는 인재(麟齋)이며 제학(提學)을 지냈다.ㆍ이개(李塏)ㆍ이자(李耔)
진천(鎭川) 백원서원(百源書院) 가정(嘉靖) 임오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이종학(李種學)ㆍ김덕숭(金德崇) 호는 모재(慕齋)이며, 본읍 군수를 지냈고 참의에 증직되었다.ㆍ이여(李畬) 호는 송광(松匡)이며 문학(文學)을 지냈다.ㆍ이부(李阜) 호는 행원(杏園)이며, 교리를 지냈고 현량과에 합격하였다. 김유신(金庾信) 사당은 제사(諸祠)조에 들어 있다.
지산서원(芝山書院) 임인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최석정(崔錫鼎) 숙종조의 정승
서산(瑞山) 성암서원(聖岩書院) 을해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유숙(柳淑) 고려조에서 찬성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희공(文僖公)이고, 자는 순부(純夫)이며, 호는 사암(思庵)이다.ㆍ김홍욱(金弘郁) 호는 학주(鶴洲)이며 판서에 증직되었다.
인정서원(仁政書院) 중간에 폐지하였다가 다시 세웠다. 송곡향현사(松谷鄕賢祠)라고도 한다. : 유방택(柳方澤) 호는 금헌(琴軒)인데 고려조에서 판서운관사(判書雲觀事)를 지냈다.ㆍ정신보(鄭臣保) 본관은 서산(瑞山)이며 고려조에 인주(麟州) 수령을 지냈다.ㆍ정인경(鄭仁卿) 신보(臣保)의 아들인데, 고려조의 중찬(中贊)을 지냈으며, 시호는 양렬공(襄烈公)이다.ㆍ유백유(柳伯濡) 방택(方澤)의 아들인데 호는 저정(樗亭)이며, 이조 판서를 지냈고, 시호는 문정공(文靖公)이다.
연풍(延豐) 원천사(源泉祠) 기축년에 세웠다. : 이기홍(李箕洪) 호는 직재(直齋)이며 집의(執義)를 지냈다.
해미(海美) □□영당(□□影堂) 임진년에 세웠다. : 남구만(南九萬) 숙종조의 정승
진잠(鎭岑) 집성사(集成祠) 숙종 갑술년에 세웠는데, 각각 화상이 있다. : 주자(朱子)ㆍ송시열(宋時烈)
은진(恩津) 갈산사(葛山祠) 숙종 계사년에 창건하였다. : 강응정(姜應貞) 생원에 합격하였고, 호는 화재(和齋)이다.ㆍ서익(徐益) 호는 만죽헌(萬竹軒)이며, 의주 목사를 지냈다.ㆍ양응춘(楊應春) 호는 도곡(道谷)이며, 현감을 지냈고,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금곡사(金谷祠) 무진년에 중건하였다. : 김수남(金秀南) 호는 만치당(萬癡堂)이며, 병조 정랑을 지냈고, 승지에 증직되었다.
비인(庇仁) 청절사(淸節祠) 경인년에 세웠다. : 유기창(兪起昌)ㆍ유여림(兪汝霖) 기창(起昌)의 아들인데 예조 판서를 지냈으며, 시호는 경안공(景安公)이다.
전의(全義) 뇌암서원(雷岩書院) 기묘년에 세웠다. : 이상(李翔) 본관은 우봉(牛峯)이며, 이조 참판을 지냈으며, 호는 타우(打愚)이다.
덕산(德山) 회암서원(晦庵書院) 기축년에 세웠다. : 주자(朱子)ㆍ이담(李湛) 호는 정존재(鄭存齋)이며, 부학(副學)을 지냈다.ㆍ조극선(趙克善)
석성(石城) 봉호서원(蓬湖書院) 숙종 계유년에 세웠다. : 윤문거(尹文擧)


경상도(慶尙道)
순흥(順興) 소수서원(紹修書院) 가정(嘉靖) 임인년에 세웠고 명종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 안유(安裕)ㆍ안축(安軸) 자는 당지(當之)이며, 호는 근재(謹齋)요, 본관은 복주(福州)이다. 고려조에서 문과에 급제하여 찬성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고,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에 봉해졌다.ㆍ안보(安輔)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고, 시호는 문경공(文敬公)이다.ㆍ주세붕(周世鵬) 호는 신재(愼齋)이며 참판을 지냈고 예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단계서원(丹溪書院) 효종 임진년에 세웠다. : 김담(金淡) 이조 판서를 지냈고, 시호는 문절공(文節公)이다.
기영사(耆英祠) 병진년에 세웠다. : 금축(琴軸) 호는 송계(松溪)이며, 진사이다.ㆍ남몽오(南夢鰲) 호는 삼송(三松)이며 진사이다.ㆍ박선장(朴善長) 호는 수서(水西)이며, 도사를 지냈다.ㆍ권호신(權虎臣) 호는 도은(陶隱)이며, 생원이다.
금성단(錦城壇) 영조 임술년에 세웠는데 은액충신신단(恩額忠臣神壇)이다. : 금성대군 유(錦城大君瑜)
도계견일사(道溪見一祠) 효종 정축년에 세웠다. : 이수형(李秀亨) 호는 도촌(桃村)이며 평시령(平市令)을 지냈다.ㆍ이여빈(李汝馪) 호는 취사(炊沙)이며 전적(典籍)을지냈다.
초계(草溪) 청계서원(淸溪書院) 가정 갑자년에 세웠다. : 이희안(李希顔) 명종조의 유일(遺逸)ㆍ김치원(金致遠) 호는 탁계(濯溪)이며, 찰방을 지냈고, 추향되었다.ㆍ이대기(李大期) 호는 설학(雪壑)이며, 정랑을 지냈다.
송원서원(松原書院) 강희(康熙) 임신년에 세웠다. : 안우(安遇) 호는 노계(蘆溪)이며, 현감을 지냈다.ㆍ노필(盧㻶) 호는 묵재(墨齋)이며, 지평을 지냈다.ㆍ안극가(安克家) 호는 뇌암(磊巖)이며, 현감을 지냈고 추향되었다.ㆍ노극성(盧克誠) 호는 매죽와(梅竹窩)이며 직장을 지냈고 추향되었다.
영주(榮州) 이산서원(伊山書院) 가정 무오년에 세웠고, 선조 갑술년에 사액하였다. : 이황(李滉)
삼봉서원(三峯書院) 숭정 계미년에 세웠다. : 김이음(金爾音) 호는 삼로(三路)며, 본관은 함창(咸昌)이고, 호조 참판을 지냈다.ㆍ이해(李瀣) 명종조 사람ㆍ김개국(金盖國) 호는 만취(晩翠)이며, 정랑을 지냈고, 집의에 증직되었다.ㆍ김융(金隆) 호는 물암(勿巖)이며, 참봉을 지냈고, 승지에 증직되었다.
오계서원(汚溪書院) 만력 계미년에 세웠다. : 이덕홍(李德弘) 호는 간재(艮齋)이며, 현감을 지냈고 참판에 증직되었다.
의산서원(義山書院) 만력 경술년에 세웠다. : 이개립(李介立) 호는 성오당(省吾堂)이며, 현감을 지냈고 참판에 증직되었다.ㆍ김응조(金應祖) 호는 학사(鶴沙)이며 좌윤(左尹)을 지냈다.
장암서원(壯巖書院) 갑자년에 세웠다. : 홍익한(洪翼漢)ㆍ윤집(尹集)ㆍ오달제(吳達濟)
귀산정사(龜山精舍) 만력 을묘년에 세웠는데, 상현사(象賢祠)라고도 한다. : 김담(金淡)ㆍ박승임(朴承任) 호는 소고(嘯皐)이며 대사간을 지냈다.ㆍ김늑(金玏) 호는 백암(栢巖)이며, 이조 참판을 지냈고, 판서에 증직되었다.ㆍ김영조(金榮祖) 호는 망와(忘窩)이며, 이조 참판을 지냈고, 추향되었다.
사계정사(泗溪精舍) 효종 경자년에 세웠다. : 황효공(黃孝恭) 호는 귀암(龜巖)이다.ㆍ나이준(羅以俊) 호는 매헌(梅軒)이며 사간을 지냈다. 병자호란에 진사로서 홀로 성전위판(聖殿位版)을 배행(陪行)하였다.
용궁(龍宮) 삼강서원(三江書院) 숭정 계미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정몽주(鄭夢周)ㆍ이황(李滉)ㆍ유성룡(柳成龍)
소천서원(蘇川書院) 신사년에 세웠다. : 전원발(全元發) 호는 국파(菊坡)이며 고려조에서 병부 상서를 지냈고 축산부원군(竺山府院君)에 봉해졌다.
마산리사(馬山里社) 융경(隆慶) 무진년에 세웠는데 완택향사(浣澤鄕社)이다. : 정귀령(鄭龜齡) 호는 삼수(三樹)이며, 현감을 지냈고,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ㆍ정옹(鄭雍) 수찬을 지냈다.ㆍ정사(鄭賜) 직제학을 지냈으며 찬성에 증직되었다.ㆍ정환(鄭渙) 응교를 지냈다.ㆍ정광필(鄭光弼)
기천정사(箕川精舍) 현종 기유년에 세웠다. : 문근(文瑾) 기묘록(己卯錄)에 있다.ㆍ문관(文瓘) 근(瑾)의 아우이며, 호는 옥계(玉溪)고, 승지를 지냈다.ㆍ이구(李搆) 기묘록(己卯錄)에 있다.ㆍ이문흥(李文興) 호는 몽암(夢庵)이며, 대사성을 지냈다.ㆍ안준(安俊) 호는 노포(蘆浦)이며 고려조에서 판봉상(判奉常)을 지냈다.
충효사(忠孝祠) 갑신년에 세웠다. : 반유(潘濡) 찰방에 증직되었다.ㆍ반충(潘沖) 호는 관물당(觀物堂)이다.
용곡리사(龍谷里社) 을축년에 세웠다. : 강응청(姜應淸) 호는 삼산(三山)이며 인의(引儀)를 지냈다.ㆍ강제(姜霽) 호는 백석(白石)이며, 이조좌랑을 지냈다.ㆍ강우(姜䨞) 호는 석봉(石峯)이며, 현감을 지냈다.
개령(開寧) 덕림서원(德林書院) 임진년에 세웠고 병진년에 사액하였다. : 김종직(金宗直)ㆍ정붕(鄭鵬)ㆍ정경세(鄭經世)
예안(禮安) 도산서원(陶山書院) 만력 갑술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이황(李滉)ㆍ조목(趙穆)
역동서원(易東書院) 융경 경오년에 세웠고, 숙종 병술년에 사액하였다. : 우탁(禹倬)
청계서원(淸溪書院) 정미년에 세웠다. : 이식(李埴) 퇴계(退溪)의 아버지이며 진사이다.ㆍ이우(李堣) 호는 송재(松齋), 호조 참판을 지냈다. 퇴계의 숙부이다.ㆍ이해(李瀣)
분강서원(汾江書院) 숙종 기묘년에 세웠다. : 이현보(李賢輔)
향현사(鄕賢祠) 만력 임자년에 세웠다. : 이계양(李繼陽) 진사이며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퇴계의 조부이다.ㆍ김효려(金孝廬) 진사이며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동계정사(東溪精舍) 숙종 기묘에 세웠다. : 금난수(琴蘭秀) 호는 성성재(惺惺齋)이며, 현감을 지냈고, 승지에 증직되었다. 퇴계 문인인데 징역(徵辟)하여도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영양(英陽) 영산서원(英山書院) 효종 신묘년에 세웠고, 숙종 갑술년에 사액하였다. : 이황(李滉)ㆍ김성일(金誠一)
향현사(鄕賢祠) 숙종 기사년에 세웠다. : 남민(南敏) 당(唐)의 안렴사(按廉使)였다. 신라가 영양군(英陽君)으로 봉하고, 의령 남씨(宜寧南氏)의 시조(始祖)로 삼았다. 본래의 성명은 김충(金忠)이며, 천보연간(天寶年間)에 중국 사신으로 왜(倭)에 갔다가 표류(漂流)되어 영해(寧海)에 표착되었다. 남으로부터 왔다 하여 성(姓)을 남(南)으로 하사하였다.
인동(仁同) 동락서원(東洛書院) 을미년에 세웠고 병진년에 사액하였다. : 장현광(張顯光)
오산서원(吳山書院) 만력 갑술년에 세웠고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 길재(吉再)
소암서원(嘯巖書院) 갑술년에 세웠다. : 채몽연(蔡夢硯) 호는 투암(投巖), 이조 참의에 증직되었다.ㆍ채무(蔡楙) 호는 백포(栢浦), 병랑(兵郞)을 지냈다.
현암사(賢巖祠) 임신년에 세웠다. : 장잠(張潛) 호는 죽정(竹亭), 진사이다.
선산(善山) 금오서원(金烏書院) 융경 임신년에 세웠고, 만력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길재(吉再)ㆍ김종직(金宗直)ㆍ정붕(鄭鵬)ㆍ박영(朴英)ㆍ장현광(張顯光)
월암서원(月巖書院) 숭정 무진년에 세웠고 계유년에 사액하였다. : 김주(金澍) 호는 농암(礱巖)이며 본관은 선산(善山)이다. 고려조에서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지냈다.ㆍ하위지(河緯地)ㆍ이맹전(李孟專) 단종 때 생육신(生六臣)이다.
낙봉서원(洛峯書院) 숭정 병자년에 세웠다. : 김숙자(金淑滋)ㆍ김취성(金就成) 호는 진락(眞樂), 처사이다.ㆍ박운(朴雲) 호는 용암(龍岩)이며 진사이다.ㆍ김취문(金就文) 호는 구암(久庵), 대사간을 지냈다.ㆍ고응섭(高應涉) 호는 왕곡(枉谷), 사성(司成)을 지냈다.
무동향현사(茂洞鄕賢祠) 임오년에 세웠다. : 전좌명(田佐命) 호는 성암(性庵), 좌랑을 지냈고, 우상(右相)에 증직되었다.ㆍ이우(李瑀) 호는 옥산(玉山), 이(珥)의 아우이다. 군자정(軍資正)을 지냈다.ㆍ전윤무(田胤武) 호는 가정(檟亭), 현감을 지냈다.
□□영당(□□影堂) 숭정 임오년에 세웠다. : 장현광(張顯光)
칠곡(漆谷) 사양서원(泗陽書院) 효종 신묘년에 세웠다. : 정구(鄭逑)ㆍ이윤우(李潤雨) 호는 석담(石潭), 대사간을 지냈고,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군위(軍威) 남계서원(南溪書院) 태창(泰昌) 경신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유성룡(柳成龍) ○ 또 김유신 사당이 있고, 제사(諸祠)조에 들어 있다.
칠원(漆原) 덕연서원(德淵書院) 신묘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주세붕(周世鵬)ㆍ배세적(裵世績) 호는 정곡(靜谷), 현감을 지냈다.ㆍ배석지(裵錫祉) 호는 율리(栗里), 현감을 지냈다.ㆍ황협(黃悏) 호는 독회당(獨悔堂), 처사이다.ㆍ주박(周博) 세붕(世鵬)의 아들. 자는 약지(約之), 호는 귀봉(龜峯), 교리를 지냈다.
동래(東萊) 충렬사(忠烈祠) 을사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송상현(宋象賢)ㆍ윤흥신(尹興新) 다대포(多大浦)의 첨사를 지냈다.ㆍ노개방(盧蓋邦) 교수(敎授)를 지냈으며 승지를 증직하였다.
충렬사(忠烈祠) 을축년에 세웠다. : 정발(鄭撥) 부산 첨사를 지냈다.ㆍ조영규(趙英珪) 양산(梁山) 군수이다. 호조 참판에 증직되었다.ㆍ문덕겸(文德謙) 교생(校生)이다.ㆍ김희수(金希壽) 비장(裨將)이다ㆍ송백(宋伯) 호장(戶長)을 지냈다.ㆍ김상(金祥) 부민(府民)이다.ㆍ송봉수(宋鳳壽) 비장을 지냈고, 판관에 증직되었다.ㆍ신여로(申汝櫓) 겸인(傔人)이다. ○ 문 밖에 정포(旌褒)된 이는 상현의 첩 금섬(金蟾)과 발(撥)의 첩 애향(愛香)이다.
함안(咸安) 서산서원(西山書院) 숙종 갑신년에 세웠으며 계사년에 사액하였다. : 이맹전(李孟專)ㆍ조려(趙旅)ㆍ원호(元昊)ㆍ김시습(金時習)ㆍ성담수(成聃壽)ㆍ남효온(南孝溫) 단종 때의 생육신이다.
도림서원(道林書院) 계미년에 세웠고 정축년에 사액하였다. : 정구(鄭逑)
덕암서원(德巖書院) 만력 정사년에 세웠다. : 조순성(趙純性) 동지좌중군(同知左中軍)을 지냈다. 태조가 여러 번 불러도 나아가지 않았다.ㆍ박한주(朴漢柱) 정언을 지냈으며, 승지에 증직되었다. 무오당적에 들었다. 호는 우졸재(迂拙齋)이다.ㆍ조종도(趙宗道) 호는 대소헌(大笑軒)이다.
송정서원(松亭書院) 임인년에 세웠다. : 조임도(趙任道) 지평에 증직되었다.
영산(靈山) 덕봉서원(德峯書院) 임오년에 세웠다. : 이후경(李厚慶) 호는 외재(畏齋), 현감을 지냈고 참의에 증직되었다.ㆍ이도고(李道攷) 호는 복재(復齋), 처사이다.
도천서원(道泉書院) 을해년에 세웠다. : 신사장(辛斯藏) 호는 곡강(曲江),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냈다.ㆍ이중(李中) 예조정랑을 지냈다.ㆍ배학(裵鶴) 호는 임천(林泉), 참봉을 지냈다.
함창(咸昌) 임호서원(臨湖書院) 신미년에 세웠다. : 표연말(表沿沫) 무오당적에 들었다.ㆍ홍귀달(洪貴達) 갑자화적에 들었다.ㆍ채수(蔡壽)ㆍ권달수(權達手)ㆍ채무일(蔡無逸) 호는 휴암(休庵), 헌납을 지냈고, 추향되었다.
도계정사(陶溪精舍) 경진년에 세웠다. : 유포(柳砲) 호는 가촌(嘉村), 현감을 지냈다.ㆍ유달준(柳達遵) 호는 대암(臺巖), 생원이다.ㆍ이겸(李謙) 호는 수헌(睡軒), 진사이다.ㆍ정윤해(鄭允海) 호는 서귀재(鋤歸齋), 참봉을 지냈다.ㆍ이영갑(李英甲) 호는 야옹(野翁), 도사를 지냈다.
아곡정사(雅谷精舍) 경진년에 세웠다. : 박눌(朴訥) 찰방을 지냈으며 참판에 증직되었다.ㆍ남영(南嶸) 호는 고산, 군수를 지냈다. 참판에 증직되었다.ㆍ박성민(朴成敏) 호는 수묵옹(守默翁)이다.ㆍ남근명(南近明) 호는 수운(峀雲), 현감을 지냈고 참판에 증직되었다.ㆍ유종인(柳宗仁) 호는 취미(翠微)이다.ㆍ홍약창(洪約昌) 호는 귀촌(龜村), 임진년에 순절하였다.
언양(彦陽) 반귀서원(磻龜書院) 임진년에 세웠다. : 정몽주(鄭夢周)ㆍ이언적(李彦迪)ㆍ정구(鄭逑)
양산(梁山) 송담서원(松潭書院) 정유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백수회(白受繪) 호조 참의에 증직되었다.
충렬사(忠烈祠) 병자년에 세웠다. : 조영규(趙英圭) 군수를 지냈고, 참판에 증직되었다. 임진년에 순절하였다.
경산(慶山) 고산서원(孤山書院) 경오년에 세웠다. : 이황(李滉)ㆍ정경세(鄭經世)
장기(長鬐) 죽림영당(竹林影堂) 을유년에 세웠다. : 송시열
연일(延日) 오천서원(烏川書院) 만력 무자년에 세웠으며 계축년에 사액하였다. : 정습명(鄭襲明) 고려조에서 추밀(樞密)을 지냈으며, 시호는 영양공(榮陽公)이다.ㆍ조몽주(趙夢周)
□□방묘(□□傍廟) 경신년에 세웠다. : 정사도(鄭思道) 호는 설곡(雪谷)이다.ㆍ정철(鄭澈) 선조조의 정승
자인(慈仁) 관란서원(觀瀾書院) 경자년에 세웠다. : 이언적(李彦迪)
용계서원(龍溪書院) 기축년에 세웠다. : 최문병(崔文炳) 호는 성재(省齋), 좌윤을 증직하였다.ㆍ이광후(李光後) 호는 매헌(梅軒)이다.ㆍ이창후(李昌後) 호는 죽헌(竹軒)이다.ㆍ김응명(金應鳴) 호는 취죽당(翠竹堂), 생원이다.
울산(蔚山) 구강서원(鷗江書院) 무오년에 세웠으며, 갑술년에 사액하였다. : 정몽주(鄭夢周)ㆍ이언적(李彦迪)
신녕(新寧) 백학서원(白鶴書院) 무오년에 세웠다. : 이황(李滉)ㆍ황준량(黃俊良) 호는 금계(錦溪), 자는 중거(仲擧)이다. 지평(持平)과 성주 목사(星州牧使)를 지냈다.
귀천서원(龜泉書院) 병인년에 세웠다. : 권수(權銖) 임진 때 사람 ○ 다른 책엔 “명천사(鳴泉祠) 현감 윤명운(尹明運)을 향사한다.”고 되어 있다.
하양(河陽) 금호서원(琴湖書院) 갑자년에 세웠다. : 허조(許稠) 세종조의 정승이다.
밀양(密陽) 예림서원(禮林書院) 만력 정축년에 세웠고 숭정 을유년에 사액하였다. : 김종직(金宗直)ㆍ박한주(朴漢柱)ㆍ신계성(申季誠) 호는 송계(松溪), 처사이다.
삼강향현사(三江鄕賢祠) 가정 계해년에 세웠다. : 민구령(閔九齡) 호는 욱재(勗齋), 처사다. 다섯 형제가 삼강(三江)에 집을 짓고 살고, 우애가 매우 두터웠다. 무신[虎臣]이 천랑(薦郞)하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아니하였다.ㆍ민구소(閔九韶) 호는 경재(敬齋)이다.ㆍ민구연(閔九淵) 호는 우우재(友于齋)이다.ㆍ민구주(閔九疇) 호는 무명당(無名堂)이다.ㆍ민구서(閔九叙) 호는 삼매당(三梅堂)이다.
중봉충효사(中峯忠孝祠) 정해년에 세웠다. : 손인갑(孫仁甲)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義兵將)이다.ㆍ노개방(盧盖邦) 교수였다. 임진란 때 함께 죽었다.ㆍ손약해(孫若海) 인갑(仁甲)의 아들이다. 함께 죽었다.ㆍ신동현(申東顯) 호는 매당(梅堂), 판관에 증직되었다.
승려사우(僧侶祠宇) : 서산대사 휴정(西山大師休靜)ㆍ홍제당 유정(弘濟堂惟政)ㆍ기허당 영규(奇虛堂靈圭) 모두 임진란 때 의병장이다.
청도(淸道) 자계서원(紫溪書院) 만력 무인년에 세웠고 현종 신축년에 사액하였다. : 김극일(金克一) 호는 절효(節孝), 일손(馹孫)의 아버지이다. 지평을 지냈고, 집의에 증직되었다.ㆍ김일손(金馹孫)ㆍ김대유(金大有) 기묘록(己卯錄)에 있다.
남계서원(南溪書院) 숙종 경진년에 세웠다. : 김지대(金之垈) 고려조에서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지냈고, 시호는 영헌공(英憲公)이다.
선암서원(仙巖書院) 융경 무진년에 세웠다. : 박하담(朴河淡) 호는 소요당(消遙堂), 생원이다. 효행으로 여러 번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자는 응청(應淸)이다.
남해(南海) 충렬사(忠烈祠) 숭정 계유년에 세웠으며, 영조 때 사액하였다. : 이순신(李舜臣)
단성(丹城) 도천서원(道川書院) 고려 때 창건하였으며 만력 임자년에 중건(重建)하였다. : 문익점(文益漸) 호는 삼우당(三憂堂)이며, 우문제학(右文提學)을 지냈고, 시호는 충선공(忠宣公)이다.
두릉서원(杜陵書院) 무자년에 이건(移建)하였다. : 권도(權濤) 호는 동계(東溪), 대사간을 지냈고,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도정서원(道正書院) 경진년에 세웠다. : 정탁(鄭琢) 선조조의 정승
청곡향현사(淸谷鄕賢祠) 임오년에 세웠다. : 이천경(李天慶) 호는 신당(新堂), 본관은 벽진(碧珍), 남명(南冥)의 문인이다.
거창(居昌) 도산서원(道山書院) 현종 병신년에 세웠으며 임인년에 사액하였다. :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정온(鄭薀)
완계서원(浣溪書院) 현종 갑진년에 세웠으며 숙종 경신년에 사액하였다. : 김식(金湜)
용원사우(龍源祠宇) 병인년에 세웠다. : 문위(文緯) 자는 순부(純夫), 호는 모계(茅溪), 본관은 단성(丹城), 거창(居昌)에 이거(移居)하였다. 남명(南冥)과 덕계(德溪)의 문인이다. 독행(篤行)으로 천거되어 교관(敎官)에 제수되었다.
원천서원(源泉書院) 신묘년에 세웠다. : 윤순거(尹舜擧)ㆍ변벽(卞璧) 호는 귀산(龜山)이다.ㆍ전팔고(全八顧) 호는 원천(源泉)이다.
포충사(褒忠祠) 영종 정사년에 세웠으며 무오년에 사액하였다. : 이술원(李述原) 무신년에 순절(殉節)하였으며, 대사헌에 증직되었다.
경충사(景忠祠) 결(缺) : 신명익(愼溟翊) 승지에 증직되었다.
용천향현사(龍泉鄕賢祠) 결(缺) : 형사보(刑士保)ㆍ유자방(柳子芳)ㆍ이계준(李繼俊)ㆍ전팔고(全八顧)ㆍ전팔급(全八及)ㆍ서숙(徐䎘)
성주(星州) 천곡서원(川谷書院) 가정 무오년에 세웠고 계유년에 사액하였다. : 정이천(程伊川)ㆍ주자(朱子)ㆍ김굉필(金宏弼)ㆍ정구(鄭逑)ㆍ장현광(張顯光)
충현사(忠賢祠) 만력 임인년에 세웠다. : 이조년(李兆年) 대제학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열공(文烈公)이다.ㆍ이인복(李仁復) 고려조에서 대제학을 지냈고, 흥안부원군(興安府院君)에 봉해졌으며, 호는 초은(樵隱),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ㆍ이숭인(李崇仁) 호는 도은(陶隱), 고려조에서 대제학을 지냈다. 태조조에 들어 있다.ㆍ정곤수(鄭崑壽) 선조조의 명신
향현사(鄕賢祠) 병신년에 세웠다. : 김맹성(金孟性) 호는 지지당(止止堂), 이조 정랑이다.ㆍ도형(都衡) 호는 행정(杏亭)이며 병조 좌랑이다.ㆍ송희규(宋希奎) 을사당적에 들어 있다.ㆍ김희삼(金希參) 호는 칠봉(七峯), 부사를 지냈다.ㆍ홍계현(洪繼玄) 호는 대암(臺巖), 처사이다ㆍ여희림(呂希臨) 지평을 지냈다.
회연서원(檜淵書院) 천계 임술년에 세웠으며 숙종 경오년에 사액하였다. : 정구(鄭逑)ㆍ김우옹(金宇顒)ㆍ이윤우(李潤雨)
노강영당(老江影堂) 숙종 신묘년에 세웠다. : 송시열(宋時烈)
유계서원(柳溪書院) 숙종 임오년에 세웠다. : 정곤수(鄭崑壽)ㆍ이순(李淳) 호는 야로(野老)이다.ㆍ박찬(朴澯) 호는 설봉(雪峯)이다.
청천서원(晴川書院) 임진년에 세웠다. : 김우옹(金宇顒)ㆍ김담수(金聃壽) 참봉을 지냈으며 호는 서계(西溪)이다.ㆍ박이장(朴而章) 이조 참판을 지냈으며 호는 용담(龍潭)이다.
신계향현사(新溪鄕賢祠) 숙종 계유년에 세웠다. : 이승(李承) 호는 청휘당(晴暉堂), 별제(別提)에 증직되었다.
향현사(鄕賢祠) 숭정 경오년에 세웠다. : 송사이(宋師頤) 호는 신연(新淵), 참봉을 지냈다.ㆍ이홍량(李弘量) 호는 육일헌(六一軒), 참봉을 지냈다.ㆍ이홍우(李弘宇) 호는 모재(茅齋), 현감을 지냈다.ㆍ이홍기(李弘器) 호는 용재(容齋), 현감을 지냈다.
안봉영당(安峯影堂) 숭정 을해년에 세웠다. : 이장경(李長庚) 고려조 사람. 농서군공(隴西郡公)ㆍ광산부원군(廣山府院君)에 봉해졌다.ㆍ이백년(李百年) 밀직사사(密直司事)를 지냈다.ㆍ이천년(李千年)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냈다.ㆍ이만년(李萬年) 시중(侍中)에 추봉되었다.ㆍ이억년(李億年) 문과에 합격하였다.ㆍ이조년(李兆年) 위에 보라.ㆍ이인기(李麟起) 평양 부윤을 지냈다.ㆍ이승경(李承慶) 평장사를 지냈다.ㆍ이포(李褒) 문하시중을 지냈다.ㆍ이원구(李元具) 호는 가정(稼亭), 성산군(星山君)을 봉했다.ㆍ이인복(李仁復) 위에 보라.ㆍ이인임(李仁任) 출향(黜享)되었다.ㆍ이인민(李仁敏)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이다.ㆍ이숭인(李崇仁) 앞에 있다.ㆍ이직(李稷) 태조조의 정승ㆍ이제(李濟) 태조조의 명신ㆍ이사후(李師厚) 한성윤(漢城尹)이다.ㆍ이육(李稢) 호는 지강(芝江), 감사를 지냈다.ㆍ이광적(李光廸) 공조 판서를 지냈다.
덕봉충렬사(德峯忠烈祠) 경진년에 세웠다. : 박영서(朴永緖) 갑자년 이괄의 변에 들어 있다.
옥천충렬사(玉川忠烈祠) 을사년에 세웠다. : 이사룡(李士龍) 성주 포수(星州砲手)인데, 청 나라가 명 나라를 칠 때 청 나라에 징발되어 가서 탄환을 빼고 공포를 세 번 쏘다가 발각되어 난작(亂斫) 살해되었다.
안의(安義) 용문서원(龍門書院) 만력 임오년에 세웠고, 현종 임인년에 사액하였다. : 정여창(鄭汝昌)ㆍ임훈(林薰) 명종조의 유일ㆍ임운(林芸) 호는 첨모당(瞻慕堂), 연은전(延恩殿) 참봉을 지냈다.ㆍ정온(鄭薀)
성천서원(星川書院) 계미년에 세웠다. : 송준길(宋浚吉)ㆍ이숙(李䎘) 숙종조의 정승
역천사우(嶧川祠宇) 숭정 을해년에 세웠다. : 정유명(鄭惟明) 호는 역양(嶧陽), 진사이다.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본관은 초계(草溪), 온(蘊)의 아버지이다. 효성이 지극하였다.ㆍ임득번(林得蕃) 호는 석천(石泉), 진사이다. 지평에 증직되었다.
귀연사우(龜淵祠宇) 갑술년에 세웠다. : 신권(愼權) 호는 요수(樂水), 선교랑(宣敎郞)을 지냈다.ㆍ성팽년(成彭年) 호는 석곡(石谷), 진사이다. 지평에 증직되었다.
황암사우(黃巖祠宇) 정유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곽준(郭䞭) 《임진록(壬辰錄)》에 들어 있다.ㆍ조종도(趙宗道) 위에 보라.ㆍ정용(鄭庸)ㆍ유개(劉盖) 두 의사(義士)의 사당은 따로 있다.
산청(山淸) 서계서원(西溪書院) 만력 병오년에 세웠으며 정사년에 사액하였다. : 오건(吳健) 선조조의 명신
영해(寧海) 단산서원(丹山書院) 만력 병오년에 세웠다. : 우탁(禹倬)ㆍ이곡(李穀)ㆍ이색(李穡)
인산서원(仁山書院) 병자년에 세웠다. : 이휘일(李徽逸) 참봉
구봉정사(九峯精舍) 현종 병오년에 세웠다. : 박의장(朴毅長) 자는 사강(士剛), 본관은 무안(務安)이다. 병사(兵使)를 지냈으며, 호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임진왜란 때 경주를 탈환하였고 다섯 번 병사를 지내는 동안 청렴하고 근신하기가 한결 같았다.ㆍ박홍장(朴弘長) 의장(毅長)의 아우, 자는 사임(士任), 목사를 지냈다.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적에게 굽히지 아니하였으므로 나라의 명령을 욕되게 하지 아니하였다.
향현사(鄕賢祠) 숭정 기사년에 세웠는데, 충렬사라고도 한다. : 박종문(朴宗文) 도사를 지냈다.ㆍ정담(鄭湛) 《임진록》에 들어 있다.
도계정사(陶溪精舍) 임진년에 세웠다. : 박선(朴璿) 호는 도와(陶窩), 교관을 지냈다.ㆍ권경(權璟) 호는 대은(臺隱), 지평을 증직하였고, 추향되었다.
함양(咸陽) 남계서원(藍溪書院) 가정 임자년에 세웠으며 만력 정미년에 사액하였다. : 정여창(鄭汝昌)ㆍ정온(鄭薀)ㆍ강익(姜翼) 호는 개암(介庵), 참봉을 지냈고, 추향되었다.
별사(別祠) 숭정 갑술년에 세웠다. : 유호인(兪好仁) 성종조의 명신
당주서원(溏洲書院) 만력 신사년에 세웠으며 현종 경자년에 사액되었다. : 노진(盧禛) 선조조의 명신
백연서원(栢淵書院) 기유년에 세웠으며 사액되었다. : 최치원(崔致遠) 자는 고운(孤雲), 시호는 문창후(文昌侯)이다.ㆍ김종직(金宗直)
도곡향현사(道谷鄕賢祠) 신사년에 세웠다. : 조승숙(趙承肅) 호는 덕곡(德谷), 고려조에서 부여 감무(扶餘監務)를 지냈다.ㆍ정복주(鄭復周) 호는 죽당(竹堂), 고려조에서 전농사(典農事)를 지냈다.ㆍ노숙동(盧叔同) 호는 송재(松齋), 대사헌을 지냈다. 청백리(淸白吏)이며, 옥계(玉溪)의 증조부이다.ㆍ노우붕(盧友朋) 호는 신고당(信古堂), 참봉을 지냈고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귀천 향현사(龜川鄕賢祠) 임오년에 세웠다. : 박맹지(朴孟智) 호는 춘당(春塘), 교리이다.ㆍ양관(梁灌) 호는 일로당(逸老堂), 동돈녕(同敦寧)을 지냈다.ㆍ강한(姜漢) 호는 금헌(琴軒), 현감을 지냈다.ㆍ표연말(表沿沫)ㆍ양희(梁喜) 호는 구졸재(九拙齋), 이조 참판을 지냈다.ㆍ하맹보(河孟寶) 호는 우계(愚溪)이다.
영덕(盈德) 신안영당(新安影堂) 임오년에 세웠다. : 주자(朱子)
남강서원(南江書院) 천계 신유년에 세웠다. : 이언적(李彦迪)ㆍ이황(李滉)
흥해(興海) 곡강서원(曲江書院) 만력 병오년에 세웠다. : 이언적(李彦廸)ㆍ조경(趙絅)
영천(永川) 임고서원(臨皐書院) 가정 을묘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정몽주(鄭夢周)ㆍ장현광(張顯光)
도잠서원(道岑書院) 만력 계축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조호익(曺好益) 임진란 때 의병장이다.
도계향사(道溪鄕社) 숙종 정해년에 세웠다. : 박인로(朴仁老) 만호이다. 호는 무하옹(无何翁)이다.
입암서원(立巖書院) 계미년에 세웠다. : 장현광(張顯光)ㆍ정사진(鄭四震) 호는 수암(守庵), 세마(洗馬)를 지냈다.
송곡서원(松谷書院) 임오년에 세웠다. : 유방선(柳方善)ㆍ곽순(郭珣)ㆍ이현보(李賢輔)ㆍ심지원(沈之源) 호는 만사(晩沙)이다.
경주(慶州) 서악서원(西岳書院) 가정 신유년에 세웠고 천계 계해년에 사액하였다. : 설총(薛聰) 시호는 홍유후(弘儒侯)이다.ㆍ김유신(金庾信)ㆍ최치원(崔致遠)
옥산서원(玉山書院) 융경 임신년에 세웠고, 만력 계유년에 사액하였다. : 이언적(李彦迪)
숭렬사우(崇烈祠宇) 숙종 경진년에 세웠고 신묘년에 사액하였다. : 최진립(崔震立) 임진란의 여러 장수[諸將]조에 들어 있다.
귀강사우(龜岡祠宇) 경오년에 세웠고 화상이 있다. : 이제현(李齊賢) 호는 익재(益齋), 자는 중사(仲思)이다. 고려조에서 시중(侍中)을 지냈으며,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다.
동강사우(東江祠宇) 숙종 정해년에 세웠다. : 손중돈(孫仲暾) 호는 우재(愚齋), 이조 판서를 지냈고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경절공(景節公)이다.
인산영당(仁山影堂) 기해년에 세웠다. : 송시열(宋時烈) 을사년에 조령(朝令)으로 중건하였다.
진주(晉州) 은열사(殷烈祠) 천희(天禧) 신유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강민첨(姜民瞻) 병부 상서ㆍ추밀원사를 지냈으며, 시호는 은렬공(殷烈公)이다.
덕천서원(德川書院) 임인년에 세웠고 만력 기묘년에 사액하였다. : 조식(曺植)ㆍ최영경(崔永慶) 《기축록(己丑錄)》에 있다.
산성정충당(山城旌忠堂) 임진년에 세웠다. : 김천일(金千鎰)ㆍ최경회(崔慶會)ㆍ김시민(金時敏)ㆍ양산숙(梁山璹) 이하는 동무(東廡)ㆍ김상건(金象乾)ㆍ김준민(金俊民) 거제(巨濟) 사람ㆍ강희열(姜希烈) 의병장이다.ㆍ조경형(曺慶亨) 진해(鎭海) 사람ㆍ최기필(崔琦弼) 판관을 지냈다.ㆍ유함(兪晗)ㆍ이욱(李郁)ㆍ강희복(姜希復) 의병장이다.ㆍ장윤현(張胤賢) 수문장(守門將)을 지냈다.ㆍ박승남(朴承男) 판관을 지냈다.ㆍ하계선(河繼先)ㆍ최언량(崔彦亮)ㆍ고종후(高從厚) 이하는 서무(西廡)ㆍ이잠(李潛) 의병장이다.ㆍ이종인(李宗仁) 김해사람ㆍ성영달(成穎達) 우후(虞侯)이다.ㆍ장윤(張潤) 사천(泗川) 사람ㆍ윤사복(尹思復) 첨정(僉正)을 지냈다.ㆍ이인민(李仁民)ㆍ손승선(孫承善) 의병대장(義兵代將)이다.ㆍ정유경(鄭維敬) 주부(主簿)를 지냈다.ㆍ김태백(金太白) 수문장을 지냈다.ㆍ박안도(朴安道)ㆍ양제(梁齊) ○ 또 충민사(忠愍祠)가 있는데 김천일과 황진(黃進)과 최경회(崔慶會)와 장윤(張潤)만을 향사한다.
대각사우(大覺祠宇) 만력 경술년에 세웠다. : 하항(河沆) 호는 각재(覺齋), 징사(徵士)다.ㆍ손천우(孫天佑) 처사이다.ㆍ김대명(金大鳴) 군수를 지냈다.ㆍ하응도(河應圖) 현령을 지냈다.ㆍ이정(李瀞) 목사를 지냈으며, 임진년에 왜를 친 공이 있다.ㆍ유종지(柳宗智) 처사이다.ㆍ하수일(河受一) 정랑(正郞)을 지냈다.
종천사우(宗川祠宇) 정사년에 세웠다. : 하홍탁(河弘度) 호는 겸재(謙齋), 진사이다.ㆍ하진(河溍) 호는 태계(台溪), 헌납을 지냈다.ㆍ하연(河演) 시호는 문효공(文孝公), 세종조의 정승
임천사우(臨川祠宇) 을유년에 세웠다. : 이준민(李俊民) 자는 자수(子修), 호는 신암(新庵), 본관은 전의(全義)이다. 좌참찬을 지냈으며, 시호는 효익공(孝翼公)이다.ㆍ강응태(姜應台) 수찬을 지냈다.ㆍ하증(河憕) 처사이다.ㆍ한몽삼(韓夢參)
신당서원(新塘書院) 무자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조지서(趙之瑞) <갑자화적(甲子禍籍)>에 들었다.
정산향현사(鼎山鄕賢祠) 무인년에 세웠다. : 유백온(兪伯溫) 호는 정산(鼎山), 생원이다. : 정온(鄭蘊)ㆍ강숙경(姜叔卿)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ㆍ하조(河潮) 벼슬은 지평(持平)ㆍ이제신(李濟臣) 처사ㆍ이담(李淡) 처사ㆍ하천주(河天澍) 처사ㆍ진극경(陳克敬) 처사ㆍ박민(朴敏) 승지에 증직되었다.
□□사우 신축년에 세웠다. : 조임도(趙任道) 지평에 증직되었다.
인계향현사(仁溪鄕賢祠) : 최탁 벼슬은 익찬(翊贊)
사천(泗天) 귀계서원(龜溪書院) 만력 병오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이정(李禎) 호는 귀암(龜岩)이며, 자는 강이(剛而), 본관은 사천(泗川)이다. 중종 때 괴과(魁科)에 합격하여 부제학을 지냈다. : 김덕함(金德諴) 인조조의 명신
합천(陜川) 이연서원(伊淵書院) 만력 병술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
신천서원(新川書院) 천계(天啓) 갑자년에 세웠다. : 하연(河演)ㆍ하우명(河友明) 호는 연당(蓮塘)ㆍ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냈으며 효도로써 정문(旌門)이 세워졌다.ㆍ하혼(河渾) 찰방(察訪)ㆍ김유(金紐) 호는 박재(璞齋), 별제(別提)를 지냈다.
용연서원(龍淵書院) 경자년에 세우고 정미년에 사액(賜額)하였다. : 박인(朴絪) 호는 무민당(无悶堂), 참봉이다.ㆍ박소(朴紹) 중종조의 명신(名臣)
명곡향현사(明谷鄕賢祠) 기미년에 세웠다. : 배일장(裴一長)
삼가(三嘉) 용암서원(龍巖書院) 만력(萬曆) 계묘년에 세우고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 조식(曺植)
고암사우(古巖祠宇) 신미년에 세웠다. : 노흠(盧欽) 호는 입재(立齋), 진사이다.ㆍ이흘(李屹) 호는 노파(蘆坡), 고려 때 세마(洗馬)를 지냈다.ㆍ임진무(林眞懋) 호는 임곡(林谷), 진사이다.
평천서원(平川書院) 무진년에 세웠다. : 정옥량(鄭玉良) 호는 경재(耕齋), 현감(縣監)을 지냈으며, 승지(承旨)에 증직되었다. 효성이 지극하였고, 청백리(淸白吏)이다.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의령(宜寧) 덕곡서원(德谷書院) 갑오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이황(李滉)
창녕(昌寧) 관산서원(冠山書院) 갑오년에 세웠고 신묘년에 사액하였다. : 정구(鄭逑)
연암향현사(燕巖鄕賢祠) 갑오년에 세웠다. : 이장곤(李長坤) 기묘(己卯)의 명현(名賢)ㆍ성안의(成安義) 호는 부용당(芙蓉堂), 승지를 지냈으며 이조 판서를 증직하였다.ㆍ이승언(李承彦) 벼슬은 참군(參軍), 찬성(贊成)에 증직되었다.
물계(勿溪) 세덕사(世德祠) 기축년에 세웠다. : 성송국(成松國) 고려 시중(侍中)이다.ㆍ성삼문(成三問)ㆍ성제원(成悌元)ㆍ성담수(成聃壽) 호는 문두(文斗)이다.ㆍ성수침(成守琛)ㆍ성수종(成守琮)ㆍ성운(成運)ㆍ성혼(成渾)ㆍ성윤해(成允諧) 호는 판곡(板谷), 현감을 지냈다.
봉화(奉化) 문암서원(文巖書院) 만력(萬曆) 갑진년에 세웠으며 사액(賜額)하였다. : 이황ㆍ조목(趙穆)
문계리사(文溪里社) 갑자년에 세웠다. : 금휘(琴徽) 벼슬은 사온령(司醞令)이다.ㆍ금원정(琴元貞) 호는 농수(聾叟), 진사(進士)이다.ㆍ유종개(柳宗介) 벼슬은 학유(學諭)를 지냈고 참의(參議)에 증직되었다.ㆍ금축(琴軸) 호는 남계(南溪), 참봉이다.
반천리사(盤泉里社) 병진년에 세웠다. : 김중청(金中淸) 호는 구전(苟全), 승지를 지냈다.
현풍(玄風) 도봉서원(道峯書院) 만력 정사년에 세웠는데, 사액하였다. : 김굉필(金宏弼)ㆍ정구(鄭逑) ○ 서원 곁에 따로 사당이 있다.ㆍ곽승화(郭承華) 진사(進士)ㆍ원개(元凱) 참봉(參奉)ㆍ배신(裴紳) 호는 낙천(洛川), 자는 경여(景餘), 교관(敎官)을 지냈다.ㆍ곽율(郭) 호는 예곡(禮谷), 생원(生員)이다.
예연서원(禮淵書院) 숙종 갑인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곽준(郭䞭)ㆍ곽재우(郭再佑)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義兵將)이다.
송담사우(松潭祠宇) 숙종 계유년에 세웠다. : 박성(朴惺) 호는 대암(大庵), 부사(府使)를 지냈다.
청백사(淸白祠) 숙종 정해년에 세웠다. : 곽안방(郭安邦) 군수(郡守)ㆍ곽지운(郭之雲) 호는 연일당(燕日堂), 호조 좌랑을 지냈다.
풍기(豐基) 욱양서원(郁陽書院) 현종 임인년에 세웠다. : 이황(李滉)ㆍ황준량(黃俊良)
우곡서원(愚谷書院) 숙종 갑신년에 세웠다. : 유운룡(柳雲龍) 호는 겸암(謙巖), 목사(牧使)를 지냈다.ㆍ황섬(黃暹) 호는 식암(息庵), 대사헌을 지냈다.ㆍ이준(李埈) 호는 창석(蒼石), 부제학(副提學)이다.ㆍ김광엽(金光曄) 호는 죽일(竹日), 응교(應敎)를 지냈다.
예천(醴泉) 정산서원(鼎山書院) 만력(萬曆) 정축년에 세우고 숙종 정사년에 사액하였다. : 이황(李滉)ㆍ조목(趙穆)
봉산서원(鳳山書院) 갑술년에 세웠다. : 권오복(權五福) 무오당적(戊午黨籍)에 들어 있다.
향현사(鄕賢祠) 숭정(崇禎) 무인년에 세웠다. : 조용(趙庸) 호는 송정(松亭), 예조 판서를 지냈으며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ㆍ윤상(尹祥)ㆍ권오복(權五福)ㆍ정총(鄭塚)
고령(高靈) 도암서원(道巖書院) 병오년에 세웠다. : 김면(金沔)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義兵將)이다.ㆍ이기춘(李起春) 호는 옥산(玉山)이며 처사(處士)이다.
문연서원(文淵書院) 병자년에 세웠다. : 박윤(朴潤) 호는 죽연(竹淵)이다.ㆍ박택(朴澤) 호는 요락당(樂樂堂), 처사이다.ㆍ윤규(尹奎) 호는 월오(月塢), 처사이다.ㆍ박정번(朴廷璠) 호는 학암(鶴巖), 승지를 증직하였다.ㆍ최여계(崔汝契) 호는 매헌(梅軒)이며, 처사이다.
운천서원(雲川書院) 신묘년에 세웠다. : 홍익한(洪翼漢)ㆍ윤집(尹集)ㆍ오달제(吳達濟)
영연사(靈淵祠) 신묘년에 세웠다. : 신덕린(申德麟) 호는 순은(醇隱), 대제학을 지냈다.ㆍ박은(朴誾) 갑자화적(甲子禍籍)에 들어 있다.ㆍ정사현(鄭師賢) 호는 월담(月潭), 처사(處士)이다.
매림사(梅林祠) 정해년에 세웠다. : 정수강(鄭壽崗) 생원(生員)ㆍ오선기(吳善基) 호는 한계(寒溪), 처사이다.
상주(尙州) 도남서원(道南書院) 만력(萬曆) 병오년에 세웠고 정사년에 사액하였다. : 정몽주(鄭夢周)ㆍ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이언적(李彦迪)ㆍ이황(李滉)ㆍ노수신(盧守愼)ㆍ유성룡(柳成龍)ㆍ정경세(鄭經世)
옥성서원(玉城書院) 숭정(崇禎) 임신년에 세웠다. : 김득배(金得培) 호는 난계(蘭溪), 고려 상락군(上洛君)이다.ㆍ신잠(申潛) 기묘년의 명현(名賢)ㆍ김범(金範) 명종 때의 유일(遺逸)이다.ㆍ이전(李琠) 호는 월간(月澗)이며 현감을 지냈다.ㆍ이준(李埈) 전(琠)의 아우이다. 앞에 있다.
근암서원(近嵒書院) 을사년에 세웠다. : 홍언충(洪彦忠) 갑자화적(甲子禍籍)에 들어 있다.ㆍ이덕형(李德馨)ㆍ김홍민(金弘敏) 호는 사담(沙潭), 전한(典翰)을 지냈다. 범(範)의 아들이며 승지에 증직되었다.ㆍ홍여하(洪汝河) 호는 목재(木齋), 사간(司諫)을 지냈으며 고종후(高從厚)의 외손이다.
속수서원(涑水書院) 효종 정유년에 세웠다. : 신우(申佑) 안렴사(按廉使)이다.ㆍ손중돈(孫仲暾) 좌참찬을 지냈고 시호는 경절공(景節公)이다.ㆍ김우굉(金宇宏) 호는 개암(開巖), 부제학을 지냈다.ㆍ조정(趙靖) 자(字)는 안중(安仲), 호는 금간(黔澗), 본관은 풍양(豐壤)이다. 봉상정(奉常正)을 지냈으며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증직되었다.
백옥동영당(白玉洞影堂) 임진년의 병화(兵火)에 불타고 그 뒤 을해년에 중수했다. : 황희(黃喜)ㆍ김식(金湜) 호는 사서(沙西), 이조 참판을 지냈다. 시호는 충간공(忠簡公)이다.ㆍ김충(金冲) 호는 서대(西臺)이다.ㆍ고인계(高仁繼) 호는 월봉(月峯), 벼슬은 사예(司藝)이다.ㆍ송량(宋亮) 호는 우곡(愚谷)이다.
봉산서원(鳳山書院) 현종 갑진년에 세웠다. : 노수신(盧守愼)ㆍ심희수(沈喜壽) 선조 때의 정승ㆍ성윤해(成允諧) 호는 판곡(板谷), 현감을 지냈다. 연(連)의 조카이며 사부(師傅)를 제수(除授)받았으나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흥암서원(興巖書院) 임오년에 세우고 을유년에 어필(御筆) 사액하였다. : 송준길(宋俊吉)
충렬사(忠烈祠) 기축년에 세웠다. : 권길(權吉) 상주(尙州)의 판관(判官)이다ㆍ김종무(金宗武) 찰방(察訪)ㆍ정기용(鄭起龍)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ㆍ박걸(朴傑) 호장(戶長)을 지냈고, 임진년에 권길과 함께 죽었다. 따로 사당을 지어 향사(享祀)한다.
연악서원(淵岳書院) 신묘년에 세웠다. : 박언성(朴彦誠) 호는 낙지정(樂志亭), 감찰(監察)에 증직되었다.ㆍ김언건(金彦健) 호는 운정(芸亭), 감찰에 증직되었다.ㆍ강응철(康應哲) 호는 남계(南溪), 찰방이다.
화동서원(化東書院) 무자년에 세웠다. : 김상용(金尙容)ㆍ김상헌(金尙憲)
운계서원(雲溪書院) 신묘년에 세웠다. : 신석번(申碩蕃) 호는 백원(白原), 장령(掌令)을 지냈다.
안동(安東) 호계서원(虎溪書院) 만력(萬曆) 병자년에 세우고 병진년에 사액하였다. : 이황(李滉)ㆍ유성룡(柳成龍)ㆍ김성일(金誠一)
주계서원(周溪書院) 만력 임자년에 세우고 계유년에 사액하였다. : 구봉령(具鳳齡) 호는 백담(栢潭), 이조 참판을 지냈다.ㆍ권춘란(權春蘭) 자는 언회(彦晦), 호는 회곡(晦谷)이다. 사간을 지냈으며, 퇴계(退溪)와 백담(栢潭)의 문인(門人)이다.
삼계서원(三溪書院) 만력 계축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권벌(權撥) 명종 때의 명신(名臣)
병산서원(屛山書院) 만력 계축년에 세웠다. : 유성룡(柳成龍)ㆍ유진(柳) 성룡(成龍)의 아들이다. 호는 수암(修巖), 참판에 증직되었고 추향(追享)되었다.
도동서원(道東書院) : 우탁(禹倬)
청성서원(靑城書院) : 권호문(權好文) 호는 송암(松巖), 처사(處士)이다. 퇴계의 문인(門人)이다.
물계서원(勿溪書院) 현종 신축년에 세웠다. : 김방경(金方慶) 고려 첨의중찬(僉議中贊)이다.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지고, 시호는 충렬공(忠烈公)이다.ㆍ김응조(金應祖) 호는 학사(鶴沙), 참판을 지냈다.ㆍ김구용(金九容) 호는 척약재(惕若齋), 전판교(典判校)를 지냈다.ㆍ김양진(金揚震) 호는 허백당(虛白堂), 참판을 지냈다.
경광서원(鏡光書院) 융경(隆慶) 무진년에 세웠다. : 배상지(裴尙志) 호는 백죽당(栢竹堂), 고려 사복정(司僕正)이다.ㆍ이종준(李宗準) 무오당적(戊午黨籍)에 들어 있다.ㆍ권우(權宇) 호는 송소(松巢), 이계정사(伊溪精舍)로 옮겨져 독향(獨享)된다.ㆍ장흥효(張興孝) 호는 경당(敬堂), 추향(追享)되었다.
노림서원(魯林書院) 효종 계사년에 세웠다. : 남치리(南致利) 호는 비지(賁趾), 처사이다.
도연서원(道淵書院) 계유년에 세웠다. : 정구(鄭逑)
사빈서원(泗濱書院) 을축년에 세웠다. : 김진(金璡) 호는 청계(靑溪),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성일(誠一)의 아버지이다.ㆍ김극일(金克一) 호는 약봉(藥峯), 사성(司成)을 지냈고, 성일(誠一)의 형이다.ㆍ김수일(金守一) 호는 귀봉(龜峯)이다.ㆍ김명일(金明一) 호는 운암(雲巖), 생원이다.ㆍ김성일(金誠一)ㆍ김부일(金復一) 호는 남악(南岳), 사성을 지냈으며 성일의 아우이다.
덕봉서원(德峯書院) 갑신년에 세웠다. : 김용(金涌) 호는 운천(雲川), 병조 참의를 지냈고 참판에 증직되었다. 수일(守一)의 아들이다. ○ 묵계정사(默溪精舍)로 이봉(移奉)하였다.
묵계정사(默溪精舍) 병자년에 세웠다. : 옥고(玉沽) 호는 응계(凝溪), 장령(掌令)이다.ㆍ김계행(金係行) 호는 보백당(寶白堂), 대사성(大司成)을 지냈다.ㆍ김용
이계정사(伊溪精舍) : 권우(權宇) 경광서원(鏡光書院)에서 옮겨 모셨다.
백록리사(栢麓里社) 효종 임진년에 세웠다. : 이종준(李宗準)ㆍ이홍준(李弘準) 호는 눌재(訥齋), 진사이다.ㆍ정유일(鄭惟一) 호는 문봉(文峯)이며 대간(大諫)을 지냈다.ㆍ홍준형(洪俊亨) 호는 매헌(梅軒), 참봉이다.ㆍ김성구(金聲久) 감사(監司)를 역임했다. 추향(追享)되었다.ㆍ권두인(權斗寅) 정랑(正郞)을 지냈다. 추향되었다.
대구(大丘) 연경서원(硏經書院) 가정(嘉靖) 갑자년에 세우고 현종 경자년에 사액하였다. : 이황(李滉)ㆍ정구(鄭逑)ㆍ정경세(鄭經世)
향현사(鄕賢祠) 숭정(崇禎) 기묘년에 세웠다. : 김경창(金慶昌) 호는 계동(溪東), 지평(持平)을 지냈다.ㆍ이숙량(李叔樑) 호는 매암(梅庵), 왕자사부(王子師傅)를 지냈다. 현보(賢輔)의 아들이며, 퇴계의 문인(門人)이다.
이강서원(伊江書院) 숭정 병자년에 세웠다. : 서사원(徐思遠) 호는 낙재(樂齋), 호조 정랑(戶曹正郞)을 지냈다. 앞에 나왔다.
낙빈서원(洛濱書院) 을미년에 세웠고 갑술년에 사액하였다. : 박팽년(朴彭年)ㆍ하위지(河緯地)ㆍ유성원(柳誠源)ㆍ성삼문(成三問)ㆍ이개(李塏)ㆍ유응부(兪應孚)
표충사(表忠祠) 경술년 때 세웠으며 현종 13년에 사액하였다. : 신숭겸(申崇謙)ㆍ김낙(金樂) 고려 때의 정승ㆍ신원길(申元吉) 승지(承旨)에 증직되었다.
향현사(鄕賢祠) 을묘년에 세웠으며 귀암서원(龜巖書院)이라고도 한다. : 서침(徐沉) 호는 귀계(龜溪), 제처사(制處使)로서 환상(還上)의 모곡(耗穀)을 감면해 주었으므로 사람들이 사당을 세워 은공을 갚았다.ㆍ서거정(徐居正)ㆍ서성(徐渻)
상덕사(尙德祠) 기축년에 세웠다. : 이숙(李䎘) 흉년에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여 소생시켰으므로 도내 인심이 그에게 쏠렸다.
황청향현사(黃淸鄕賢祠) 갑술년에 세웠다. : 손처눌(孫處訥) 호는 모재(慕齋)이다.
백원향현사(百源鄕賢祠) 임신년에 세웠다. : 서시립(徐時立) 호는 전귀당(全歸堂), 참봉을 지냈으며 호조 정랑에 증직되었다. 효자이다.
남강향현사(南崗鄕賢祠) 갑술년 봄에 세웠다. : 박수춘(朴壽春) 호는 국담(菊潭), 임진왜란때 의병(義兵)을 일으키고 순절(殉節)하였다.
사양서원(泗陽書院) 신묘년에 세웠다. : 정구(鄭逑)ㆍ이윤우(李潤雨)
하동(河東) 영계서원(永溪書院) 기묘년에 세웠다. : 정여창(鄭汝昌)ㆍ김성일(金誠一)
청하(淸河) 학산서원(鶴山書院) 무진년에 세웠다. : 이언적(李彦迪)
거제(巨濟) 반곡서원(盤谷書院) 갑신년에 세웠다. : 송시열(宋時烈)ㆍ김진규(金鎭圭) 호는 죽천(竹泉),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ㆍ김창집(金昌集)
김산(金山) 경렴서원(景濂書院) 무자년에 세웠다. : 김종직(金宗直)ㆍ최선문(崔善門) 공조 판서를 지냈고 시호는 문혜공(文惠公), 청백리(淸白吏)이다.ㆍ이약동(李約東)ㆍ조위(曺偉)ㆍ김시창(金始昌) 앞에 나왔다.
진보(眞寶) 봉람서원(鳳覽書院) 만력(萬曆) 임인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이황(李滉)
김해(金海) 신산서원(新山書院) 만력 무오년에 세웠는데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 조식(曺植)ㆍ신계성(申季誠)
예암향현사(禮巖鄕賢祠) 무자년에 세웠다. : 조이추(曺爾樞) 호는 사우당(四友堂)이다.
창원(昌原) 회원서원(檜原書院) 숭정(崇禎) 갑술년에 세웠는데 사액하였다. : 정구(鄭逑)ㆍ허목(許穆)
운암향현사(雲巖鄕賢祠) 신사년에 세웠다. : 박신윤(朴身潤) 호는 우곡(愚谷)이다.
의성(義城) 빙계서원(氷溪書院) 가정(嘉靖) 정사년에 세웠으며 선조 병오년에 사액하였다. : 김안국(金安國)ㆍ이언적(李彦迪)ㆍ유성룡(柳成龍)ㆍ김성일(金誠一)ㆍ장현광(張顯光)
학산충렬사(鶴山忠烈祠) 숙종 정축년에 세웠다. : 박팽년(朴彭年)ㆍ하위지(河緯地)ㆍ유응부(兪應孚)ㆍ성삼문(成三問)ㆍ이개(李塏)ㆍ유성원(柳誠源)ㆍ오두인(吳斗寅)ㆍ이세화(李世華)ㆍ박태보(朴泰輔)
진민사(鎭民詞) 정덕(正德) 정축년에 세웠다. : 김용비(金龍庇) 고려조의 태자첨사(太子詹事)이다.
장대서원(藏待書院) 임자년에 세웠다. : 김광수(金光粹) 호는 송은(松隱), 진사이다.ㆍ이민성(李民宬) 호는 경정(敬亭), 승지를 지냈다.ㆍ신원록(申元祿) 호는 매당(梅堂)이다.ㆍ신지제(申之悌) 자는 순보(順甫), 호는 오봉(梧峯), 승지를 지냈고,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본관은 아주(鵝州)요, 의성(義城)에 살았다.
충렬사(忠烈祠) : 김홍술(金洪術) 고려조의 장군(將軍)이다.
청송(靑松) 병암서원(屛巖書院) 무인년에 세웠으며 임오년에 사액하였다. : 이이(李珥)ㆍ김장생(金長生)
송학서원(松鶴書院) 계미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이황(李滉)ㆍ김성일(金誠一)ㆍ장현광(張顯光)
문경(聞慶) 소양향현사(瀟陽鄕賢祠) 숙종 계사년에 세웠다. : 김낙춘(金樂春) 호는 인백당(忍百堂)이다.ㆍ정언신(鄭彦信) 선조 때의 정승이다.ㆍ심대부(沈大孚) 호는 가은(嘉隱), 헌납(獻納)을 지냈으며 추향(追享)되었다.ㆍ이심(李襑) 호는 색은(穡隱), 찬성(贊成)에 증직되었으며 추향되었다.
한천향현사(寒泉鄕賢祠) 숙종 정축년에 세웠다. : 안귀손(安貴孫)ㆍ신숙빈(申叔彬) 처사(處士)이다. 개(槩)의 손자이다.ㆍ성만징(成晩徵) 호는 추담(秋潭), 교관(敎官)을 지냈고 추향되었다.
고성(固城) 갈천서원(葛川書院) 임진년에 세웠다. : 이암(李嵒) 호는 행촌(杏村),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에 봉해졌다.ㆍ노필(盧㻶)ㆍ어득강(魚得江)ㆍ조사석(趙師錫) 숙종 때의 정승
충렬사(忠烈祠) 만력(萬曆) 갑인년에 세웠으며 계묘년에 사액하였다. : 이순신(李舜臣)
유월사(柳月祠) 기축년에 세웠다. : 심광세(沈光世) 호는 휴옹(休翁), 벼슬은 사인(舍人)이다.
비안(比安) 귀천서원(龜川書院) 숙종 기미년에 세웠다. : 박서생(朴瑞生) 호는 율정(栗亭), 대사헌을 지냈고 청백리(淸白吏)이다.ㆍ이우(李瑀)


전라도(全羅道)
임실(任實) 구고사우(九臯祠宇) 경자년에 세웠다. : 김천일(金千鎰)ㆍ박번(朴蕃) 호는 인덕정(仁德亭), 벼슬은 교수(敎授)이다.ㆍ박훈(朴薰) 호는 수심정(收心亭), 진사이다.ㆍ홍붕(洪鵬) 호는 경재(敬齋), 벼슬은 첨정(僉正)이다. 추향되었다.ㆍ이흥순(李興淳) 호는 운암(雲巖), 사간(司諫)을 지냈다.ㆍ조평(趙平) 호는 운학(雲壑), 벼슬은 세마(洗馬)이다.
부안(扶安) 도동서원(道洞書院) 가정(嘉靖) 갑오년에 세웠다. : 김구(金坵) 고려 평장사(平章事)이다.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ㆍ김여맹(金汝孟) 구(坵)의 아들이며 문한학사(文翰學士)이다.ㆍ최수손(崔秀孫) 호는 고궁당(固窮堂), 진사이다.ㆍ성중엄(成重淹) 무오화적(戊午禍籍)ㆍ김석홍(金錫弘) 호는 옹천(瓮泉), 군수(郡守)를 지냈다.ㆍ홍익한(洪翼漢)ㆍ최필성(崔弼成) 수손(秀孫)의 아들이다.ㆍ김계(金啓) 호는 설강(雪江), 참판을 지냈다.
파산서원(巴山書院) 계유년에 세웠는데 지금의 이름은 동림서원(東林書院)이다. : 유형원(柳馨遠) 호는 반계(磻溪)이다.ㆍ유문원(柳文遠) 호는 삼우당(三友堂), 진사이다.ㆍ김서경(金瑞慶) 호는 담계(澹溪)이다.
유천서원(柳川書院) 숙종 임진년에 세웠다. : 허진동(許震童) 호는 동상(東湘), 판관(判官)을 지냈다.ㆍ김택삼(金宅三) 호는 농암(礱岩), 벼슬은 주부(主簿)를 지냈다.
청계서원(淸溪書院) 무자년에 세웠다. : 송세정(宋世貞) 호는 도봉(道峯), 진사이다.ㆍ이승간(李承幹) 호는 석호(石湖)이다.
담양(潭陽) 의암서원(義巖書院) 만력(萬曆) 계축년에 세웠다. 숙종 신유년에 사액하였다. : 유희춘(柳希春) 을사년의 명신(名臣)이다.
귀산서원(龜山書院) 갑신년에 세웠다. : 송순(宋純)ㆍ송정순(宋廷筍) 호는 물염(勿染), 벼슬은 예조 정랑(禮曹正郞)이다.ㆍ김언욱(金彦勗) 호는 서석(瑞石), 벼슬은 사평(司評)을 지냈다.ㆍ김응회(金應會) 호는 청계(淸溪), 벼슬은 별제(別提)를 지냈다.ㆍ이안눌(李安訥)ㆍ나무춘(羅茂春) 호는 구봉(九峯), 이조 참의에 증직되었다.ㆍ송희경(宋希璟) 호는 노송(老松)이며 벼슬은 판결사(判決事)이다.ㆍ송징(宋徵) 호는 율옹(栗翁), 진사이다.ㆍ김대기(金大器) 호는 만덕(晩德), 처사이다.
익산(益山) 남촌서원(南村書院) 천계(天啓) 계해년에 세웠다. : 이공수(李公遂) 호는 남촌(南村)이며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 고려 때 익산부원군(益山府院君)에 봉해졌다.ㆍ소세량(蘇世良) 호는 곤암(困庵), 대사간을 지냈다.ㆍ소세양(蘇世讓)ㆍ이약해(李若海) 명종조에 들어 있다.ㆍ소동도(蘇東道) 호는 면와(眠窩), 감사를 지냈다.ㆍ소영복(蘇永福) 호는 발영당(發永堂), 진사이다.ㆍ소광진(蘇光震) 호는 후천(后泉), 벼슬은 교리(校理)다.
전주(全州) 화산서원(華山書院) 만력(萬曆) 무인년에 세웠으며 임인년에 사액하였다. : 이언적(李彦迪)ㆍ송인수(松麟壽)
서산사우(西山祠宇) 인조 병술년에 세웠다. : 최양(崔瀁) 호는 만육(晩六), 대제학을 지냈다.ㆍ최덕지(崔德之)ㆍ송영구(宋英耈)ㆍ이계맹(李繼孟)ㆍ이흥발(李興浡)ㆍ이기발(李起浡) 호는 서귀(西龜), 도승지(都承旨)를 지냈다.
인봉사우(麟峯祠宇) 숭정(崇禎) 병술년에 세웠다. : 최명룡(崔命龍) 호는 석계(石溪), 진사이다.ㆍ김동준(金東準) 호는 봉곡(鳳谷), 감찰을 지냈다.
학봉사우(鶴峯祠宇) 현종 기유년에 세웠다. : 이정란(李廷鸞) 전주 부윤(全州府尹)을 지냈다.ㆍ신중경(申重慶) 호는 금서당(琴書堂)이다.ㆍ이상진(李尙眞) 숙종 때의 정승이다.
진도사우(珍島祠宇) : 노수신(盧守愼)ㆍ이경여(李敬輿)ㆍ정홍익(鄭弘翼)ㆍ김수항(金壽恒)ㆍ남이성(南二星) 호는 의졸(宜拙), 예조 판서를 지냈다.ㆍ신명규(申命圭) 호는 적안(適安), 집의(執義)를 지냈다.ㆍ이민서(李敏叙)ㆍ조태채(趙泰菜)
나주(羅州) 경현서원(景賢書院) 만력 계미년에 세웠고, 정미년에 사액하였다. :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조광조(趙光祖)ㆍ이언적(李彦迪)ㆍ이황(李滉)ㆍ김성일(金誠一)
정렬사(旌烈祠) 만력 병오년에 세웠으며 정미년에 사액하였다. : 김천일(金千鎰)ㆍ김상건(金象乾)ㆍ양산숙(梁山璹)ㆍ임회(林檜)
월정서원(月井書院) 경자년에 세웠고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 박순(朴淳)
반계서원(潘溪書院) 갑술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박상충(朴尙衷)ㆍ박소(朴紹)ㆍ박세채(朴世采)ㆍ박태보(朴泰輔)
미천서원(眉泉書院) 숙종 임신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허목(許穆)
죽봉사우(竹峯祠宇) 갑진년에 세웠다. : 유준(柳浚) 호는 사교당(四矯堂), 벼슬은 판관(判官)이다.ㆍ유상운(柳尙運) 숙종 때의 정승이다.
송재사우(松齋祠宇) 임오년에 세웠다. : 나세찬(羅世纘)ㆍ임형수(林亨秀)
창계서원(滄溪書院) 경인년에 세웠다. : 임영(林泳)
설재서원(雪齋書院) 무진년에 세웠다. : 정가신(鄭可臣) 호는 설재(雪齋), 벼슬은 중찬(中贊)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정공(文靖公)이다.ㆍ정식(鄭軾) 병조 판서를 지냈으며 시호는 경무공(景武公)이다. 가신(可臣)의 5대손이다.ㆍ신장(申檣) 호는 암헌(巖軒)이며 숙주(叔舟)의 아버지이다.
영광사우(榮光祠宇) 숙종 임진년에 세웠다. : 이원(李黿) 무오당적(戊午黨籍)에 들어 있다.ㆍ이해(李懈) 호는 모산(茅山), 진사이다.ㆍ이영우(李永祐) 호는 야은(野隱), 진사이다.ㆍ이유경(李有慶) 호는 오풍(五楓), 사부(師傅)를 지냈고 정랑(正郞)에 증직되었다.
서하사우(西河祠宇) 숙종 갑신년에 세웠다. : 이민서(李敏叙)ㆍ이건명(李健命)ㆍ이관명(李觀命)
□□영당(□□影堂) : 오자치(吳自治) 참판을 지냈으며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양평공(襄平公)이다.
장성(長城) 필암서원(筆菴書院) 만력 경인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김인후(金麟厚) 인종 때의 명신(名臣)
모암서원(慕巖書院) 전조(前朝) 때 세웠는데 인조 무자년에 중수(重修)하였다. : 서능(徐稜) 고려 시중(侍中)을 지냈으며 절의(節義)와 효도가 지극하였다.ㆍ조영규(趙英圭) 군수를 지냈다. 앞에 있다.ㆍ조정로(趙廷老) 영규(英圭)의 아들인데 별검(別檢)에 증직되었다.ㆍ최학령(崔鶴齡) 호는 율리(栗里), 진사이다.ㆍ정운룡(鄭雲龍) 호는 하곡(霞谷), 왕자사부(王子師傅)를 지냈다.
봉암서원(鳳巖書院) 정축년에 세웠다. : 변이중(邊以中) 호는 망암(望庵), 벼슬은 종정(宗正)을 지냈고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ㆍ변경윤(邊慶胤) 호는 자하(紫霞), 예조 정랑을 지냈으며 참의에 증직되었다.
추산서원(秋山書院) 을유년에 세웠다. : 기건(奇虔)ㆍ기효간(奇孝諫)ㆍ기정익(奇挺翼) 호는 송암(松巖), 참봉이다.
□□영당 임인년에 세웠다. : 김영렬(金英烈) 병조 참판을 지냈으며 우의정에 증직되었다. 의성군(義城君)을 봉했고 시호는 양효공(良孝公)이며, 호는 맹암(孟巖)이다.
학림서원(鶴林書院) 임진년에 세웠다. : 김영렬(金英烈)ㆍ박희중(朴熙中) 호는 위남(葦南), 벼슬은 직학(直學)을 지냈다.ㆍ김은(金穩) 호는 학천(鶴川), 벼슬은 부사(府使)를 지냈다.ㆍ김응두(金應斗) 호는 서천(逝川), 응교(應敎)를 지냈다.ㆍ박준철(朴濬哲) 호는 기양(岐陽), 진사이다.
영광(靈光) 수강서원(壽崗書院) 기묘년에 세웠다. : 송흠(宋欽)ㆍ이장영(李長榮) 호는 죽곡(竹谷), 대사간을 지냈다.
용암사우(龍巖祠宇) 임술년에 세웠다. : 윤황(尹煌)ㆍ윤선거(尹宣擧)
장천사우(長川祠宇) 임진년에 세웠다. : 심우신(沈友信) 첨정(僉正)을 지냈으며 참판에 증직되었다. 임진왜란 때 사절(死節)하였다.ㆍ이제형(李齊衡) 호는 취수헌(醉睡軒), 군수를 지냈다.ㆍ이단석(李端錫) 호는 쌍호(雙壺), 문과 병사(文科兵使)를 지냈다.
용계사우(龍溪祠宇) 임자년에 세웠다. : 강항(姜沆) 임진록(壬辰錄)에 있다.ㆍ윤순거(尹舜擧)
무장영당(畝長影堂) 태종이 화상(畫像)을 내렸다. : 이천우(李天祐)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에 봉해졌다.
백산사우(栢山祠宇) 경종 계묘년에 세웠다. : 이세필(李世弼)
백산영당(栢山影堂) 임진년에 세웠다. : 이제현(李齊賢)
광주(光州) 월봉서원(月峯書院) 숭정(崇禎) 병술년에 세웠으며 효종 을미년에 사액하였다. : 박상(朴祥)ㆍ박순(朴淳)ㆍ기대승(奇大升)ㆍ김장생(金長生)ㆍ김집(金集)
포충사(褒忠祠) 만력 신축년에 세웠으며 신묘년에 사액하였다. : 고경명(高敬命)ㆍ고종후(高從厚)ㆍ고인후(高因厚)ㆍ유팽로(柳彭老)ㆍ안영(安瑛)
의열사(義烈祠) 만력 갑진년에 세웠으며 신유년에 사액하였다. : 박광옥(朴光玉) 자는 중수(重粹), 호는 회재(懷齋)이다. 지평(持平)을 지냈고 율곡의 문인이다.ㆍ김덕령(金德齡)ㆍ오두인(吳斗寅)
천동사우(泉洞祠宇) 갑신년에 세웠다. : 이민서(李敏叙)ㆍ이건명(李健命)
경렬사우(景烈祠宇) 갑신년에 세웠다. : 정지(鄭地) 삼도절제사(三道節制使)가 되었으며, 시호는 경렬공(景烈公)이다.ㆍ정충신(鄭忠信)ㆍ김상의(金尙義) 귀성 부사(龜城府使)이다.
운암서원(雲巖書院) 병진년에 세웠다. : 송제민(宋濟民) 호는 해광(海狂), 처사이다.ㆍ권운(權韗)ㆍ송타(宋柁) 호는 화암(禾庵), 진사이다.
태인(泰仁) 남고서원(南皐書院) 만력 정축년에 세웠으며 을축년에 사액하였다. : 이항(李恒)ㆍ김천일(金千鎰)
무성서원(武城書院) 만력 을묘년에 세웠으며 을축년에 사액하였다. : 최치원(崔致遠)ㆍ신잠(申潛)ㆍ정극인(丁克仁) 호는 불우헌(不憂軒), 정언(正言)을 지냈다.ㆍ송세림(宋世琳) 호는 눌암(訥庵), 예조 정랑을 지냈다.ㆍ정언충(鄭彦忠) 호는 묵재(默齋), 참봉을 지냈다.ㆍ김약묵(金若默) 호는 성재(誠齋), 양주(楊州) 목사를 지냈다.ㆍ김관(金灌) 진사
모충사(慕忠祠) 병오년에 세웠다. : 백광언(白光彦) 첨사(僉使)를 지냈으며 병조 판서에 증직되었다.ㆍ김덕린(金德麟) 훈련원 판관(訓練院判官)을 지냈다.
보성(寶城) 정충사(旌忠祠) 숙종 정사년에 세웠으며 경오년에 사액하였다. : 안홍국(安弘國) 보성(寶城) 군수를 지냈으며 찬성(贊成)에 증직되었다.
용산사우(龍山祠宇) 만력 정미년에 세웠으며 숙종 정해년에 사액하였다. : 박광전(朴光前) 호는 죽천(竹川), 벼슬은 익위(翊衛)를 지냈으며 승지에 증직되었다. 퇴계의 문인이다.
대계서원(大溪書院) 효종 정유년에 세웠으며 숙종 갑신년에 사액하였다. : 안방준(安邦俊)
양산사(梁山祠) 신묘년에 세웠다. : 염세경(廉世慶) 효자(孝子)이다.
무장(茂長) 충현사(忠賢祠) 만력 무신년에 세웠으며 광해군 때에 사액하였다. : 이존오(李存吾)ㆍ유희춘(柳希春)
도암향현사(道巖鄕賢祠) 신미년에 세웠다. : 김질(金質) 호는 영모당(永慕堂), 진사이다.
죽산향현사(竹山鄕賢祠) 숙종 계유년에 세웠다. : 오익창(吳益昌) 호는 사호(沙湖), 공조 정랑을 지냈다.
순천(順天) 옥천서원(玉川書院) 가정(嘉靖) 갑자년에 세웠고, 무진년에 사액하였다. : 김굉필(金宏弼)
정충사(旌忠祠) 계묘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장윤(張潤)
충민사(忠愍祠) 만력 경자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이순신(李舜臣)ㆍ이억기(李億祺)ㆍ안홍국(安弘國)
지봉서원(芝峯書院) 계유년에 세웠다. : 이수광(李晬光)
겸천서원(謙川書院) 숙종 경인년에 세웠다. : 조유(趙瑜) 호는 처곡(處谷), 고려조의 절신(節臣)인데, 태조조(太祖朝)에 들었다.ㆍ조숭문(趙崇文) 유(瑜)의 아들이며, 사육신(死六臣)과 함께 화를 입었다. 병사(兵使)를 지냈고, 추향되었다.ㆍ조철산(趙哲山) 숭문(崇文)의 아들이요, 성승(成勝)의 사위다. 육신(六臣)의 변에 함께 화(禍)를 입었다.
청사사(靑莎祠) : 정소(鄭沼) 호는 청사(靑莎), 진사이다. 본관은 연일(延日)이다.
여산(礪山) 죽림서원(竹林書院) : 조광조(趙光祖)ㆍ이황(李滉)ㆍ이이(李珥)ㆍ김장생(金長生)ㆍ성혼(成渾)ㆍ송시열(宋時烈)
향현사(鄕賢祠) 임진년에 세웠다. : 남명한(南溟翰) 호는 취은(醉隱), 주부(主簿)에 증직되었다.ㆍ남두건(南斗健) 호는 경재(敬齋)ㆍ이계맹(李繼孟) 기묘록(己卯錄)에 들어 있다.ㆍ이순인(李純仁) 호는 고담(孤潭), 승지를 지냈다.
김제(金堤) 용암서원(龍巖書院) 임자년에 세웠다. : 조간(趙簡) 호는 열헌(悅軒), 시호는 문량공(文良公)이다.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다.ㆍ이계맹(李繼孟)ㆍ나안세(羅安世) 호는 달계(達溪), 교리를 지냈다.ㆍ윤추(尹推) 호는 농은(農隱), 장령을 지냈다.ㆍ이세필(李世弼)ㆍ나응삼(羅應參) 호는 구산(龜山), 처사이다.
백석사우(白石祠宇) 계사년에 세웠다. : 유읍(柳揖) 호는 백석(白石), 벼슬은 자의(諮議)를 지냈으며 지평에 증직되었다.ㆍ조속(趙涑)
임파(臨陂) 봉암서원(鳳岩書院) 경오년에 세웠으며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김집(金集) 앞에 있다.ㆍ김구(金絿)
동복(同福) 도원서원(道源書院) 무신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최산두(崔山斗)ㆍ정구(鄭逑)ㆍ임억령(林億齡)ㆍ안방준(安邦俊)
금산(錦山) 성곡서원(星谷書院) 만력 정사년에 세웠으며 현종 계묘년에 사액하였다. : 김신(金侁) 중국에 가서 참정(參政)을 지냈다.ㆍ윤택(尹澤) 호는 율정(栗亭), 찬성을 지냈고,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 본관은 무송(茂松)이며, 공민왕 때에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냈으며 고향인 금주(錦州)에 돌아가 죽었다.ㆍ길재(吉再)ㆍ김정(金淨)ㆍ고경명(高敬命)ㆍ조헌(趙憲)
종용사(從容祠) 숭정(崇禎) 갑술년에 세웠으며 현종 계묘년에 사액하였다. : 고경명(高敬命)ㆍ조헌(趙憲)ㆍ고인후(高因厚)ㆍ변응정(邊應井)ㆍ안영(安瑛)ㆍ유팽로(柳彭老)ㆍ이광륜(李光輪)ㆍ조택기(趙宅基)ㆍ한순(韓楯)ㆍ승 영규(僧靈圭)
향현사(鄕賢祠) : 한교(韓皦) 벼슬은 직학(直學)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ㆍ이유택(李惟澤) 호는 송곡(松谷), 현감을 지냈다.
반계서원(磻溪書院) : 이유태(李惟泰) 용강서원(龍江書院) : 송준길(宋浚吉)ㆍ송시열(宋時烈)ㆍ유계(兪棨) 산천사(山泉祠) : 윤선거(尹宣擧)ㆍ윤증(尹拯)ㆍ윤추(尹推) 부이영당(富移影堂) : 길재(吉再)의 네 군데 서원(四院)은 모두 영종 신유년에 철폐(撤廢)하였다.
무안(務安) 송림서원(松林書院) 정해년에 세웠으며 임술년에 사액하였다. : 김권(金權)ㆍ유계(兪棨)
녹동서원(鹿洞書院) 숭정 경오년에 세웠으며 계사년에 사액하였다. : 최덕지(崔德之)ㆍ최충성(崔忠成) 덕지(德之)의 손자이다. 호는 산당(山堂), 진사이다.ㆍ김수항(金壽恒)ㆍ김창협(金昌協)
죽정사우(竹亭祠宇) 신유년에 세웠다. : 박성건(朴成乾) 호는 오한(五恨), 현감을 지냈다.ㆍ박권(朴權) 호는 고광(孤狂), 벼슬은 정언이다.ㆍ박규정(朴奎精) 호는 수옹(壽翁), 생원이다.ㆍ이만성(李晩成)
서하사(西河祠) 정사년에 세웠다. : 조행립(曺行立)
고부(古阜) 정충사(旌忠祠) 숭정 신미년에 세웠으며 정유년에 사액하였다. : 송상현(宋象賢)ㆍ신호(申浩) 군수를 지냈으며 판서에 증직하였다. 시호는 무장공(武壯公)이다.ㆍ김준(金浚) 목사를 지냈으며 찬성에 증직되었다. 정묘록에 들어 있다.
도계서원(道溪書院) 계축년에 세웠다. : 이희맹(李希孟) 호는 익재(益齋), 시호는 문안공(文安公)이다.ㆍ김재(金齋) 호는 오봉(鰲峯), 장령을 지냈다.ㆍ최안(崔安) 호는 모암(慕庵), 직장(直長)을 지냈다.ㆍ김지수(金地粹) 호는 태천(苔川), 승지를 지냈다.ㆍ김제안(金齊顔) 호는 죽헌재(竹軒齋), 민(閔)의 아우이다.
흥양(興陽) 쌍충사(雙忠祠) 임술년에 중건(重建)하였고, 사액하였다. : 이대원(李大源) 벼슬은 녹도 만호(鹿島萬戶)이다. 명조조 을묘왜변에 상세하다.ㆍ정운(鄭運)
정읍(井邑) 충렬사(忠烈祠) 경신년에 세웠다. : 이순신(李舜臣)
고암서원(考巖書院) 갑술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송시열(宋時烈)
장흥(長興) 예양서원(汭陽書院) 만력 임자년에 세웠다. : 이색(李穡)ㆍ남효온(南孝溫)ㆍ김광원(金光遠) 호는 월봉(月峯), 진사이다.ㆍ신잠(申潛)ㆍ유호인(劉好仁) 호는 육방(六放), 진사에 급제하여 참봉을 지냈고 율곡의 문인이다.
연곡서원(淵谷書院) 무술년에 세웠으며 병오년에 사액하였다. : 민정중(閔鼎重)ㆍ민유중(閔維重)
월천사우(月川祠宇) 임오년에 세웠다. : 문익점(文益漸)ㆍ문위세(文緯世) 호는 풍암(楓巖), 목사이다.
양강사우(楊江祠宇) 경진년에 세웠다. : 김경추(金景秋) 호는 죽정(竹汀) 또는 송정(松亭)이다.
충렬사우(忠烈祠宇) 신미년에 세웠다. : 한온(韓薀) 벼슬은 부사(府使)를 지냈으며 병조 판서에 증직되었다.ㆍ정명세(鄭名世) 호는 독곡(獨谷), 현감을 지냈고 승지에 증직되었다.
포충사(褒忠祠) 숙종 을유년에 세웠다. : 선세강(宣世綱) 호는 매곡(梅谷), 영장(營將)을 지냈으며, 참판에 증직되었다.
죽천사우(竹川祠宇) 을사년에 세웠다. : 위덕의(魏德毅) 호는 청계(聽溪), 병조 좌랑을 지냈고, 참의에 증직되었다.
감호영당(鑑湖影堂) 숙종 정사년에 세웠다. : 전녹생(田祿生) 호는 야계(壄溪), 벼슬은 고려조의 사인(舍人)이다.ㆍ전유추(田有秋) 호는 송담(松潭)
남평(南平) 봉산서원(蓬山書院) 숭정 경인년에 세웠으며 현종 정미년에 사액하였다. : 백인걸(白仁傑)
풍산사우(楓山祠宇) 숙종 무오년에 세웠다. : 정준일(鄭遵一) 호는 향북당(向北堂), 참봉이다.ㆍ김만영(金萬英) 호는 남포(南浦), 벼슬은 세마(洗馬)이다.ㆍ임세정(任世鼎) 호는 일신재(日新齋), 지평을 증직하였고, 추향되었다.ㆍ정익신(鄭翊臣) 호는 초심당(草心堂), 참봉이다.
용구사우(龍丘祠宇) 병술년에 세웠다. : 서봉령(徐鳳齡) 호는 용구(龍丘), 참봉이다.ㆍ조상우(趙相愚) 추향되었다.
능주(綾州) 죽수서원(竹樹書院) 융경(隆庚) 경오년에 세웠으며 갑오년에 사액하였다. : 조광조(趙光祖)ㆍ양팽손(梁彭孫) 기묘록(己卯錄)에 들어 있다.
포충사우(褒忠祠宇) 만력 을유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최경회(崔慶會)ㆍ조현(曺顯) 병사(兵使)에 증직되었다.ㆍ문홍헌(文弘獻) 진사인데 지평에 증직되었고 계사년에 전사(戰死)하였다.
도산사우(道山祠宇) 효종 병신년에 세웠다. : 안방준(安邦俊)
용담(龍潭) 삼천서원(三川書院) 현종 정미년에 세웠고 숙종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안자(顔子)ㆍ백정자(伯程子)ㆍ숙정자(叔程子)ㆍ주자(朱子)ㆍ제갈무후(諸葛武侯)
순창(淳昌) 화산서원(花山書院) 만력 정미년에 세웠다. : 신말주(申末舟) 호는 귀래공(歸來公), 형조 참의를 지냈다.ㆍ김정(金錚)ㆍ김인후(金麟厚)ㆍ고경명(高敬命)ㆍ김천일(金千鎰)
남원(南原) 노봉서원(露峯書院) 기축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홍순복(洪順福) 호는 고암(顧庵)이며 진사인데 기묘 명현(己卯名賢)이라 부른다.ㆍ최상중(崔尙重) 호는 미능재(未能齋), 사간(司諫)을 지냈다.ㆍ오정길(吳廷吉) 호는 해서(海西), 벼슬은 정자(正字)다.ㆍ최온(崔薀) 호는 폄재(砭齋), 승지를 지냈다.ㆍ최휘지(崔徽之) 호는 오주(鰲州), 벼슬은 익위(翊衛)이다.
현계서원(玄谿書院) 숙종 신사년에 세웠다. : 이능간(李凌幹) 문하시중을 지냈으며 영천부원군(寧川府院君)에 봉해졌다.ㆍ정염(丁焰) 호는 만헌(晩軒)이며 광주 목사이다.ㆍ변유(邊瑜) 호는 정묵재(靜默齋), 추향되었다.ㆍ정견(丁涀) 호는 육졸(六拙), 추향되었다.
요계서원(蓼溪書院) 갑술년에 세웠다. : 김화(金澕) 호는 재간당(在澗堂), 참봉이다.ㆍ이상형(李尙馨) 호는 천묵재(天默齋), 수찬을 지냈고 부제학에 증직되었다.ㆍ김지순(金之純) 호는 담암(澹巖), 참봉이다. 추향되었다.ㆍ김지백(金之白) 호는 용암(舂巖), 참봉이다. 추향되었다.
고암서원(高巖書院) 갑술년에 세웠다. : 진극순(陳克純) 호는 환성당(喚醒堂), 처사이다.ㆍ황신귀(黃信龜) 호는 운계(雲溪), 벼슬은 도사(都事)이다.
영천서원(寧川書院) 만력 무오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안처순(安處順) 호는 사재당(思齋堂), 판관을 지냈다.ㆍ정환(丁煥) 호는 회산(檜山), 벼슬은 도사이다.ㆍ정황(丁熿) 을사록(乙巳錄)에 들어 있다.ㆍ이대유(李大㕀) 호는 활계(活溪), 좌랑을 지냈다.
방산서원(方山書院) 계미년에 세웠다. : 노진(盧禛)ㆍ윤효손(尹孝孫)ㆍ최행(崔荇) 호는 성만(星灣), 좌윤(左尹)을 지냈다.ㆍ이경석(李景奭) 인조 때의 정승
우룡서원(右龍書院) 만력 기묘년에 세웠고 사액되었다. : 노진
충렬사(忠烈祠) 만력 임자년에 세웠고 계사년에 사액하였다. : 정기원(鄭期遠)ㆍ이복남(李福男)ㆍ임현(任鉉)ㆍ김경로(金敬老)ㆍ신호(申灝)ㆍ이덕회(李德恢)ㆍ이원춘(李元春)ㆍ오흥업(吳興業) 추향되었다. 정유왜란 때에 순국했다. 칠충신사(七忠臣祠)라고도 한다.
정충사(旌忠祠) 인조 기축년에 세웠으며 계사년에 사액하였다. : 황진(黃進)ㆍ고득뢰(高得賚) 군수를 지냈으며 우윤(右尹)에 증직되었다.ㆍ안영(安瑛)
용호영당(龍湖影堂) 영종 갑자년에 세웠다. : 송 여남전(宋呂藍田)ㆍ주자(朱子)
곡성(谷城) 덕양사우(德陽祠宇) 만력 기축년에 세웠고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신숭겸(申崇謙) 선조 22년에 세웠고 숙종 21년에 사액하였다.
□□영당 정사년에 세웠다. : 안유(安裕)
강진(康津) 서봉서원(瑞峯書院) 만력 경인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이후백(李後白)ㆍ백광훈(白光勳)ㆍ최경창(崔慶昌)
월남영당(月南影堂) : 이의경(李毅敬) 고금도(古今島)의 관왕묘(關王廟)에 진린(陳璘)과 이순신을 배향하였다. 제사조(諸祀條)에 들어 있다.
장수(長水) 창계서원(滄溪書院) 기축년에 세웠다. : 황희(黃喜)ㆍ황수신(黃守身) 세조 때의 정승ㆍ유호인(兪好仁)ㆍ장응두(張應斗) 호는 송탄(松灘), 생원이다.
옥과(玉果) 영귀서원(詠歸書院) 계유년에 세웠다. : 김인후(金麟厚)ㆍ유팽로(柳彭老)ㆍ이흥발(李興浡)ㆍ신이강(辛二剛) 호는 청파(靑坡)이다.
용안(龍安) □□영당 : 이단하(李端夏)ㆍ이세필(李世弼)
운봉(雲峯) 용암서원(龍巖書院) 갑술년에 세웠다. : 정몽주(鄭夢周)ㆍ박광옥(朴光玉)ㆍ황일호(黃一皓)ㆍ변사정(邊士貞) 호는 도탄(桃灘), 첨정(僉正)을 지냈다.ㆍ노형필(盧亨弼) 호는 운제(雲堤), 벼슬은 사부(師傅)이다.ㆍ서식(徐湜) 호는 명암(銘巖), 효자(孝子)이다.
창평(昌平) 송강서원(宋江書院) 임오년에 세웠으며 을유년에 사액하였다. : 정철(鄭澈)
절산사우(節山祠宇) 숙종 기축년에 세웠다. : 박이관(朴以寬) 호는 보옹(葆翁), 벼슬은 보덕(輔德)을 지냈다.ㆍ박이홍(朴以弘) 이관(以寬)의 아우이다. 호는 월영(月暎), 진사이다.
내동사우(內洞祠宇) 계해년에 세웠다. : 우유일(禹惟一) 호는 이우당(二友堂), 벼슬은 전적(典籍)이다.
죽림사우(竹林祠宇) 숙종 무자년에 세웠다. : 조수문(曺秀文) 호는 죽림(竹林), 진사이다.ㆍ조호(曺浩) 호는 운곡(雲谷), 수문(秀文)의 아들이다.ㆍ조부(曺溥) 호는 삼청당(三淸堂), 벼슬은 전적이다.
함평(咸平) 기산사우(箕山祠宇) 숙종 을유년에 세웠다. : 박정원(朴鼎元) 호는 동호(東湖), 벼슬은 도사다.ㆍ이후정(李后定) 호는 만안(晩安), 응교를 지냈고 기묘년에 절개를 지켰다.
월산사(月山祠) : 이순신(李舜臣)ㆍ이덕일(李德一) 벼슬은 우후(虞侯)이다. 추향되었다.
수산사우(水山祠宇) 숙종 기축년에 세웠다. : 임영(林泳)
증산사우(甑山祠宇) 숙종 임오년에 중건하였다. : 김덕생(金德生) 호는 증산(甑山), 용력(勇力)과 기절(氣節)이 있었고, 벼슬은 좌명공신(佐命功臣)이다. 태종의 잠저(潛邸) 때 몸바쳐 보호하였다. 뒤에 원통하게 죽었다. 세종 때에 증직되었다.
모평사우(牟平祠宇) : 이유인(李有仁) 호는 파우(破愚), 참봉이다.
금구(金溝) 귀성사우(龜城祠宇) 숙종 신사년에 세웠다. : 윤순거(尹舜擧)ㆍ윤증(尹拯)
육송사우(六松祠宇) 현종 계묘년에 세웠다. : 김관(金瓘) 병조 판서를 지냈으며 시호는 공양공(恭讓公)이다.ㆍ김승서(金承緖) 호는 귀암(龜巖), 참봉이다.ㆍ송정기(宋廷耆) 호는 죽계(竹溪), 추향되었다.ㆍ김천서(金天瑞) 참봉이다. 추향되었다.
해남사우(海南祠宇) 경인년에 세웠다. : 이순신(李舜臣)ㆍ유형(柳珩)ㆍ이계년(李桂年) 첨정(僉正)을 지냈으며 참판에 증직되었다.ㆍ이유길(李有吉) 현령(縣令)을 지냈으며 참판에 증직되었다. 이 두 사람은 추향되었다.
흥덕(興德) 동산서원(東山書院) 숙종 신사년에 세웠고, 경종 신축년에 사액하였다. : 이경여(李敬輿)ㆍ이민서(李敏叙)ㆍ이건명(李健命)ㆍ이관명(李觀命)
창효사(彰孝祠) 신해년에 세웠다. : 오준(吳浚) 직장(直長)에 증직되었다.
고산(高山) 화산서원(華山書院) 갑오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김장생(金長生)ㆍ송시열(宋時烈)
제주(濟州) 귤림서원(橘林書院) 만력 무인년에 세웠고 숙종 임술년에 사액하였다. : 김정(金淨)ㆍ송인수(宋麟壽)ㆍ정온(鄭薀)ㆍ김상헌(金尙憲)ㆍ송시열(宋時烈) 별사(別祠)ㆍ이약동(李約東)ㆍ이회(李禬) 호는 만오(晩悟), 제주 목사를 지냈다.
광양(光陽) 향현사(鄕賢祠) 현종 병오년에 세웠다. : 최산두(崔山斗)
무주(茂朱) 주계영당(朱溪影堂) 영종 을사년에 세웠다. : 주자(朱子)
죽계(竹溪) 향현사(鄕賢祠) 계사년에 세웠다. : 김신(金侁) 고려조의 참정(參政)이다.ㆍ장필무(張弼武)
진안(鎭安) 모혜사(慕惠祠) : 이우성(李羽成)ㆍ이현익(李顯益)
화순(和順) 추모영당(追慕影堂) 인조 무자년에 세웠다. : 홍명하(洪命夏)ㆍ홍우익(洪禹翊) 현감


강원도(江原道)
강릉(江陵) 오봉서원(五峯書院) 가정 병진년에 세웠다. : 공자 화상(孔子畫像)
송담서원(松潭書院) 천계(天啓) 갑자년에 세웠고 경자년에 사액하였다. : 이이(李珥)
향현사우(鄕賢祠宇) 순정 갑신년에 세웠다. : 최치원(崔致遠)ㆍ최응현(崔應賢) 호는 수헌(睡軒), 대사헌을 지냈다.ㆍ박수량(朴遂良) 기묘록에 들어 있다.ㆍ최운우(崔雲遇) 호는 도경(蹈景), 횡성(橫城) 현감을 지냈다.ㆍ최수(崔洙)ㆍ박공달(朴公達)ㆍ최수성(崔壽峸)
□□영당 정해년에 세웠다. : 오명준(吳命峻)
원주(原州) 충렬사(忠烈祠) 현종 무신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원충갑(元冲甲) 호는 응양(鷹揚), 상호군(上護軍)이다. 시호는 충숙공(忠肅公)이다.ㆍ김제갑(金悌甲)ㆍ원호(元豪)
도천서원(陶川書院) 숙종 계유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허후(許厚)
칠봉서원(七峯書院) 만력 임자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원천석(元天錫)ㆍ원호(元昊)ㆍ정종영(鄭宗榮)ㆍ한백겸(韓百謙) 호는 구암(久庵)
광암향현사(廣巖鄕賢祠) : 정시한(丁時翰) 벼슬은 진선(進善)이다.
□□영당(□□影堂) 병인년에 전교(傳敎)를 내려 세웠다. : 익안대군방의(益安大君芳毅)
춘천(春川) 문암서원(文巖書院) 만력 경술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이황(李滉)ㆍ이정형(李廷馨)ㆍ조경(趙絅)
도포서원(道浦書院) 정축년에 세웠다. : 신숭겸(申崇謙)ㆍ신흠(申欽)ㆍ김경직(金敬直) 호는 우정(憂亭), 벼슬은 사간(司諫)이다.
운곡영당(雲谷影堂) 갑신년에 세웠다. : 김수증(金壽增) 호는 곡운(谷雲), 참판을 지냈다.ㆍ김창흡(金昌翕)
울진(蔚珍) 귀암서원(龜巖書院) 병인년에 세웠다. : 김시습(金時習)
고산서원(孤山書院) 기미년에 세웠다. : 임유후(任有後) 호는 만휴(萬休), 병조 참판을 지냈다.ㆍ오도일(吳道一) 호는 서파(西坡), 반대당의 배척을 받아 본 고을 수령으로 나온 적이 있었다.
향현사(鄕賢祠) 임자년에 세웠다. : 남사고(南師古)ㆍ주경안(朱景顔) 효자(孝子)이다. 지평에 증직되었으며, 추향되었다.
몽양재(蒙養齋) 숙종 임진년에 비로소 향사하였다. : 전이석(田爾錫) 효자(孝子)ㆍ주필대(朱必大) 생원(生員)
귀장서당(龜藏書堂) : 전구원(田九畹) 생원
삼척(三陟) 부동사우(府東祠宇) 만력 기묘년에 세웠다. : 김효원(金孝元) 호는 성암(省庵)
용산서원(龍山書院) : 이세필(李世弼)
통천(通川) 휴산사우(休山祠宇) 기사년에 세웠다. 경덕사(景德祠) : 정구(鄭逑) 상렬사(尙烈祠)ㆍ최윤덕(崔潤德)
평해(平海) 명계서원(明溪書院) 갑자년에 세웠다. : 황응청(黃應淸)ㆍ황여일(黃汝一) 호는 해월(海月), 공조 참의를 지냈다.
향현사(鄕賢祠) 강희(康熙) 신해년에 세웠다. : 정담(鄭湛) 임진록에 들어 있다.
명고리사(明皐里社) : 김담(金譚) 호는 탁계(卓溪)ㆍ장효갑(張孝甲) 호는 동명(東溟), 벼슬은 첨추(僉樞)이다.ㆍ장온(張薀) 호는 매헌(梅軒), 효자(孝子)이다.
영월(寧越) 창절사(彰節祠) 숙종 을축년에 세웠고 기축년에 사액하였다. : 박팽년(朴彭年)ㆍ성삼문(成三問)ㆍ이개(李塏)ㆍ유성원(柳誠源)ㆍ하위지(河緯地)ㆍ유응부(兪應孚) 민충소사(愍忠小祠)ㆍ엄흥도(嚴興道)
평창(平昌) 둔계사우(遯溪祠宇) 갑술년에 세웠다. : 곽세익(郭世翼) 호는 둔계(遯溪), 벼슬은 사예(司藝)이다.
이천(伊川) 부서사우(府西祠宇) 을해년에 세웠다. : 박태보(朴泰輔)
철원(鐵原) 포충사(褒忠祠) 을사년에 세웠고 무신년에 사액하였다. : 김응하(金應河)
금화(金化) 충장사(忠壯祠) 병신년에 세웠다. : 원호(元豪)
충렬사(忠烈祠) 경인년에 세웠고 임진년에 사액하였다. : 홍명구(洪命耈)
고성(高城) □□사(□□祠) 경오년에 세웠다. : 조지겸(趙持謙)


황해도(黃海道)
송화(松禾) 도동서원(道東書院) 만력 정사년에 세웠고 기묘년에 사액하였다. : 주자(朱子)ㆍ조광조(趙光祖)ㆍ이황(李滉)ㆍ이이(李珥)
안악(安岳) 취봉서원(鷲峯書院) 만력 기축년에 세웠고 숭정(崇禎) 정축년에 사액하였다. : 주자(朱子)ㆍ이이(李珥)
황주(黃州) 백록동서원(白麓洞書院) 만력 무자년에 세웠고 신축년에 사액하였다. : 주자(朱子)ㆍ김굉필(金宏弼)ㆍ이이(李珥)
은율(殷栗) 율곡서원(栗谷書院) 만력 계축년에 세웠고 숙종 신묘년에 옮겨 세웠다. : 주자(朱子)ㆍ김굉필(金宏弼)ㆍ이이(李珥)
충효사우(忠孝祠宇) 신묘년에 세웠다. : 박훈(朴薰) 호는 장련(長連)이며 현감을 지냈다.
김천(金川) 도산서원(道山書院) 숙종 임술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이제현(李齊賢)ㆍ이종학(李種學)ㆍ조석윤(趙錫胤)
민충사(愍忠祠) 갑술년에 세웠고 임진년에 사액하였다. : 이중로(李重老) 좌방어사(左防禦使)이다.ㆍ이성부(李聖符) 우방어사(右防禦使)이다.ㆍ박영신(朴榮臣) 풍천 부사(豐川府使)ㆍ이사주(李師朱) 이천 부사(伊川府使)ㆍ윤정준(尹廷俊) 옹진 현령(瓮津縣令)ㆍ권호원(權浩源) 훈국초관(訓局哨官)ㆍ장면(張緬) 훈국초관ㆍ방흡(方潝) 방어군관(防禦軍官). 갑자년 이괄(李适)의 변조에 상세하다.
평산(平山) 동양서원(東陽書院) 숭정 임오년에 세웠고 숙종 정축년에 사액하였다. : 신숭겸(申崇謙)ㆍ이색(李穡)
구봉서원(九峯書院) 숙종 병자년에 세웠고 정축년에 사액하였다. : 박세채(朴世采)
태백산성사(太白山城祠) 고려 때 세웠는데 임진ㆍ정유년의 병화로 불에 탄 것을 병자년에 중건하였다. : 신숭겸(申崇謙)ㆍ복지겸(卜智謙) 고려 때 사람으로 시호는 무공공(武恭公)이며, 철상(鐵像)이 있다.ㆍ유금필(庾黔弼) 고려 때 사람이다. 시호는 충절공(忠節公)이며, 철상이 있다.
재령(載寧) 경현서원(景賢書院) 을미년에 세웠고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주자(朱子)ㆍ이이
수안(遂安) 용계서원(龍溪書院) 현종조 임인년에 세웠고 숙종조 무자년에 사액하였다. : 한(漢) 나라 관녕(管寧)ㆍ이연송(李連松) 고려 평장사(平章事)를 지냈고 수안군(遂安君)에 봉해졌다.ㆍ강백년(姜栢年)
연안(延安) 비봉서원(飛鳳書院) 융경(隆慶) 경오년에 세웠고 경신년에 사액하다. : 주자(朱子)ㆍ최충(崔冲)ㆍ김굉필(金宏弼)ㆍ성혼(成渾)ㆍ이이(李珥)ㆍ박세채(朴世采)
현충사(顯忠祠) 숭정 무인년에 세웠고 숙종 갑신년에 사액하였다. : 이정암(李廷馣)ㆍ신각(申恪)ㆍ송덕윤(宋德潤) 첨사(僉使)ㆍ장응기(張應祺) 군수(郡守)ㆍ김대정(金大鼎) 부사(府使)ㆍ조광정(趙光庭) 생원이다.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해주(海州)에 살았다.
문화(文化) 봉강서원(鳳崗書院) 갑신년에 세웠고 기묘년에 사액하였다. : 주자(朱字)ㆍ조광조(趙光祖)ㆍ이황(李滉)ㆍ이이(李珥)
정계사원(程溪書院) 경술년에 세웠고 무자년에 사액하였다. : 유관(柳寬) 세종 때의 정승이다.
충효사(忠孝祠) 신묘년에 세웠다. : 유언겸(兪彦謙) 효자(孝子)ㆍ홍진(洪禛) 현령을 지냈는데 병자호란 때 전사하였다.
신천(信川) 정원서원(正院書院) 만력 경진년에 세웠고, 현종 신해년에 중건하였으며, 숙종 경인년에 사액하였다. : 주자(朱字)ㆍ조광조(趙光祖)ㆍ이황(李滉)ㆍ이이(李珥)
해주(海州) 소현서원(紹賢書院) 만력 병술년에 세웠고 경술년에 사액하였다. : 주자(朱字)ㆍ조광조(趙光祖)ㆍ이황(李滉)ㆍ이이(李珥)ㆍ성혼(成渾)ㆍ김장생(金長生)ㆍ송시열(宋時烈) 청성묘(淸聖廟)는 제사(諸祠)조에 들어 있다.
문헌서원(文憲書院) 가정(嘉靖) 기유년에 세웠고, 경술년에 사액하였다. : 최충(崔冲) 호는 성재(惺齋), 시호는 문헌공(文憲公)이다. 고려 태사(太師)이다. 자는 호연(浩然)이며, 해동부자(海東夫子)로 일컬어진다.ㆍ최유선(崔惟善) 충(冲)의 아들이다. 시호는 문화공(文和公)이며, 추향하였다.
충렬사(忠烈祠) 문헌서원 곁에 따로 세웠다. : 최영유(崔永裕) 본관은 수원(水原)이다. 고려 때에 홍건적(紅巾賊)이 침입하였을 때 해주 목사로서 인신(印神)을 못에 던지고 물에 빠져 죽었는데 통인(通引)과 통인의 개도 따라 죽었다.
장련(長連) 봉양서원(鳳陽書院) 숭정 을해년에 세웠고 병자년에 사액하였다. : 박세채(朴世采)
배천(白川) 문회서원(文會書院) 동서양사(東西兩祠)가 있는데 선조의 어필(御筆)로써 사액하였다. : 이이(李珥)ㆍ성혼(成渾)ㆍ조헌(趙憲)ㆍ박세채(朴世采) 이상은 서사(西祠) 4위ㆍ안당(安瑭)ㆍ신응시(辛應時)ㆍ오억령(吳億齡)ㆍ김덕함(金德諴) 이상은 향현동사(鄕賢東祠) 4위
봉산(鳳山) 문정서원(文井書院) 신유년에 세웠고 숙종 계미년에 사액하였다. : 이이(李珥)ㆍ김장생(金長生)ㆍ김집(金集)ㆍ강석기(姜碩期)
충렬사(忠烈祠) 숙종 무자년에 세웠다. : 김만수(金萬壽) 공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무과 출신으로 부사를 지냈다.ㆍ강찬(姜燦)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ㆍ김천수(金千壽) 형조 참의에 증직되었다.ㆍ김백수(金百壽) 병조 참의에 증직되었다.ㆍ김구수(金九壽) 병조 참의에 증직되었다.ㆍ김광협(金光鋏) 병조 참판에 증직되었다.ㆍ이옹(李蓊) 울진(蔚珍) 현감을 지냈다. 모두 임진 의병이다.
서흥(瑞興) 화곡서원(花谷書院) 병술년에 세웠다. : 김굉필(金宏弼)ㆍ이이(李珥)ㆍ김귤(金橘) 호는 검재(儉齋), 이조 참판을 지냈고, 시호는 문경공(文敬公)이다.
강령(康翎) 충렬사(忠烈祠) 인조 계미년에 세웠다. : 유응부(兪應孚) 본 고을의 현감을 지냈다.ㆍ유빈(柳蘋) 본 고을의 현감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백현(白峴) 싸움에서 전사하였다.ㆍ정린(鄭麟) 본 고을 현감을 지냈고, 병자호란 때 토산(兔山)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장연(長淵) 용암서원(龍巖書院) 선조 기축년에 세웠고, 경종 신축년에 사액하였다. : 주자ㆍ이이


평안도(平安道)
안주(安州) 청천서원(淸川書院) 계해년에 세웠고 정해년에 사액하였다. : 을지문덕(乙支文德)ㆍ최윤덕(崔潤德)ㆍ이원익(李元翼)ㆍ김덕함(金德諴)
충민사(忠愍祠) 신유년에 세웠고 임술년에 사액하였다. : 남이흥(南以興) 병사(兵使)ㆍ김준(金浚) 본 고을의 목사이다.ㆍ이상안(李尙安) 강계(江界)ㆍ김상의(金尙毅) 귀성(龜城)ㆍ박명룡(朴命龍) 벼슬은 우후(虞侯)이다.ㆍ이희건(李希建) 용천(龍川)ㆍ장돈(張暾) 죽천(竹川)ㆍ김양언(金良彦) 태천(泰川)ㆍ송덕영(宋德榮) 맹산(孟山)ㆍ김언수(金彦壽)ㆍ한덕문(韓德文)ㆍ송도남(宋圖南) 영유(永柔)ㆍ윤혜(尹惠) 박천(博川)ㆍ함응수(咸應秀)ㆍ양진국(楊晉國)ㆍ임충서(林忠恕) 이들은 정묘년에 순절(殉節)하였다.
강서(江西) 학동서원(鶴洞書院) 계해년에 세웠고 병인년에 사액하였다. : 김반(金泮)
강동(江東) 청계서원(淸溪書院) 숙종 신해년에 세웠다. : 이황(李滉)ㆍ조호익(曺好益)ㆍ김육(金堉)
자산(慈山) 의열사(義烈祠) 신해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최춘명(崔春命) 벼슬은 고려조에서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지냈다.ㆍ홍명구(洪命耈)ㆍ최경후(崔景候) 본 고을 부사이다.ㆍ김지저(金之佇) 판관
□생사(□生祠) 갑신년에 세웠다. : 이세재(李世載) 감사ㆍ정석빈(鄭碩賓) 부사ㆍ김의만(金義萬)ㆍ조익징(趙益徵) 부사
철산(鐵山) 쌍충사(雙忠祠) 융경 임신년에 세웠고 경술년에 사액하였다. : 이원정(李元禎) 고려 때 철주(鐵州) 방어사(防禦使). 백마장군(白馬將軍)으로서 몽고난때 입절(立節)하였다.ㆍ이희적(李希勣) 판관으로 함께 죽었다.
충무사(忠武祠) 숙종 을해년에 세웠다. : 정봉수(鄭鳳壽)ㆍ김여기(金礪器)ㆍ정인수(鄭麟壽)
희천(熙川) 상현서원(象賢書院) 만력 병자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김굉필(金宏弼)ㆍ조광조(趙光祖)
용강(龍岡) 오산서원(鰲山書院) 을미년에 세웠으며 신해년에 사액하였다. : 김안국(金安國)ㆍ김정국(金正國)
정주(定州) 봉명서원(鳳鳴書院) 무술년에 세웠으며 신해년에 사액하였다. : 김상용(金尙容)ㆍ김상헌(金尙憲)
신안서원(新安書院) 임오년에 세웠으며 병신년에 사액하였다. : 주자 화상(朱子畵像)
순안(順安) 성산서원(星山書院) 숭정 정해년에 세웠으며 병자년에 사액하였다. : 정몽주(鄭夢周)ㆍ한우신(韓禹臣) 호는 정안(靜安), 추향되었다. 벼슬은 내자정(內資正)이다.
강계(江界) 경현서원(景賢書院) 만력 기유년에 세웠으며 갑인년에 사액하였다. : 이언적(李彦迪)
성천(成川) 학령서원(鶴翎書院) 숭정 갑술년에 세웠으며, 현종 경자년에 사액하였다. : 조호익(曺好益)ㆍ정구(鄭逑)ㆍ박대덕(朴大德) 호는 합강(合江)
쌍충사(雙忠祠) 선조 기해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정의(鄭顗) 고려조의 중랑장(中郞將)이다.ㆍ최춘명(崔椿命) 고려조의 추밀부사(樞密副使)다.
창성(昌城) 충렬사(忠烈祠) 기해년에 세웠고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김응하(金應河)
평양(平壤) 충무사(忠武祠) 경술년에 세웠고 숙종 정사년에 사액하였다. : 을지문덕(乙支文德)ㆍ김양언(金良彦)
충정서원(忠正書院) 정해년에 세웠다. : 홍익한(洪翼漢)ㆍ홍명구(洪命耈)
무열사(武烈祠) 제사조(諸祠條)에 상세하다.
용곡서원(龍谷書院) 효종 무술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선우협(鮮于浹)
인현서원(仁賢書院) 가정 갑자년에 세웠고 무신년에 사액하였다. : 기자수용(箕子睟容)
벽동(碧潼) 구봉서원(九峯書院) 숙종 정축년에 세웠고, 신사년에 사액하였다. : 민정중(閔鼎重)ㆍ민유중(閔維重)
귀성(龜城) 정공사우(旌功祠宇) 계미년에 세웠고 갑신년에 사액하였다. : 박서(朴犀) 고려조의 병사(兵使)이다. 침공한 몽고병을 방어한 공으로 정원 대도호(定遠大都護)에 승진했다.ㆍ김경손(金慶孫) 분도장군(分道將軍)이다.
영변(寧邊) 약봉서원(藥峯書院) 숙종 무진년에 세웠고 정해년에 사액하였다. : 조광조(趙光祖)
선천(宣川) 주자서원(朱子書院) 신사년에 세웠다. : 주자(朱子)ㆍ이이(李珥)
충렬사(忠烈祠) : 김응하(金應河)ㆍ김만중(金萬重) 벼슬은 문형(文衡)이다.ㆍ박태보(朴泰輔)
충민사(忠愍祠) : 임경업(林慶業)
삼충사(三忠祠) 고려 목종 때에 거란(契丹)과 싸워 전사하였다. : 양규(楊規) 벽상공신(壁上功臣)이며, 서북도순검사(西北都巡檢使)이다.ㆍ김숙흥(金叔興) 벽상공신이며, 서북도지사(西北都指使)이다.ㆍ유백부(庾伯符) 통주부서(通州府署)
삭주(朔州) 금창서원(金昌書院) 정해년에 세웠다. : 김익호(金翼虎) 호는 만학재(晩學齋), 효행과 우애가 있고 학문이 깊었다.
곽산(郭山) □□서원 인조 기축년에 세웠다. : 이원(李黿)ㆍ홍경우(洪儆禹) 호는 월포(月浦), 벼슬은 봉상첨정(奉常僉正)이다.
태천(泰川) 둔암서원(遯庵書院) 무술년에 세웠다. : 선우협(鮮于浹)ㆍ김익호(金翼虎)
희천(熙川) 상현서원(象賢書院) 만력 병자년에 세웠고 갑술년에 사액하였다. : 김굉필(金宏弼)ㆍ조광조(趙光祖)
박천(博川) 지천사우(遲川祠宇) 정해년에 세웠다. : 최명길(崔鳴吉)
의주(義州) 읍내사우(邑內祠宇) 숙종 16년 경오에 세웠다. : 을파소(乙巴素) 고구려의 국상(國相)ㆍ김상헌(金尙憲)
백마산성사우(白馬山城祠宇) 숙종 35년 을축에 세웠다. : 강감찬(姜邯贊)ㆍ임경업(林慶業)
영유(永柔) 삼충사(三忠祠) 제사(諸祠)에 들어 있다.


함경도(咸鏡道)
함흥(咸興) 문회서원(文會書院) 가정 계해년에 세웠으며, 선조 병자년에 사액하였다. : 문선왕(文宣王) 화상 사우(祠宇) 만력 정미년에 세웠는데 문회서원의 서쪽에 있다. : 이계손(李繼孫)ㆍ유강(兪絳) 감사를 지냈으며 시호는 숙민공(肅敏公)이다.ㆍ이후백(李後白)ㆍ한준겸(韓浚謙)ㆍ이광하(李光夏) 감사ㆍ남구만(南九萬)ㆍ문덕교(文德敎) 호는 동호(東湖), 좌랑을 지냈고 행실이 올바름이 많았다. 임진왜란 때 아버지와 아우 선교(善敎)가 왜병에게 살해되자 공은 의병을 수창(首倡)하였으나 자기가 지은 임진록엔 이 일을 말하지 않았으므로 창의사(彰義祠)에 들지 못했다. 현종 정미년에 추향되었다. 영종 때에 도령(都令)에 증직되었다.
운전서원(雲田書院) 정미년에 세웠다. : 정몽주(鄭夢周)ㆍ조광조(趙光祖)ㆍ이황(李滉)ㆍ이이(李珥)ㆍ성혼(成渾)ㆍ송시열(宋時烈)ㆍ조헌(趙憲)ㆍ민정중(閔鼎重)
창의사(彰義祠) 현종 병오년에 세웠다. : 백응상(白應祥) 임진왜란 때에 묘파보(妙坡保) 권관(權管)으로 본부(本府) 판관에 승진되고 의사(義士)와 더불어 창의(倡義)하였다.ㆍ유응수(柳應秀) 삼수(三水) 군수를 지냈으며 판서에 증직되었다. 임진년에 아버지가 적에게 살해됨을 통분히 여겨 중위장(中衛將)으로서 창의(倡義)하여 원수를 갚았다. 선조가 명을 내리어 별장(別將)을 삼았는데 영남에서 왜를 토벌하다가 전사하였다.ㆍ이유일(李惟一) 부사(府使)인데 참의에 증직되었으며 동위장(東衛將)으로서 창의하였다.ㆍ한인제(韓仁濟) 벼슬은 우후(虞侯)이다. 참의에 증직되었으며, 방원 만호(坊垣萬戶)로서 중위장(中衛將)이 되어 의병을 일으켜 북진(北鎭)에 주둔하고 있는 적을 여섯 번 격파하였다.ㆍ박중립(朴仲立) 벼슬은 만호이며 참의에 증직되었다. 좌기장(左騎將)으로서 창의하였다.ㆍ이희록(李希祿) 벼슬은 첨정이며 우윤(右尹)에 증직되었다. 유생(儒生)으로 의병을 일으켰다.ㆍ정해택(鄭海澤) 벼슬은 만호(萬戶)이며 우윤(右尹)에 증직되었다. 우위장(右衛將)으로서 의병을 일으켰다.ㆍ박길남(朴吉男) 만호이며 참의에 증직되었다. 의분심과 지략(智略)과 훌륭한 활솜씨로 의병을 일으켰다.ㆍ박응숭(朴應嵩) 벼슬은 만호이며 군기정중위장(軍器正中衛將)에 증직되었다. 정유년에 유응수(柳應秀)를 대신하여 별장(別將)이 되었다.ㆍ이사제(李思悌) 판관이며, 부정(副正)에 증직되었다. 임진년에 나이 겨우 19세였으나 끝까지 충성을 다하였다.ㆍ한경상(韓敬商) 참봉이며 감찰에 증직되었다. 생원으로서 동위장(東衛將)이 되었고 임기응변과 지려(智慮)가 뛰어났다.ㆍ김응복(金應福) 직장(直長)이며 감찰에 증직되었다. 학식과 기절(氣節)이 있었고 격문을 전하여 적을 물리쳤다. 뒤에 문과에 올랐다.
영흥(永興) 흥현서원(興賢書院) 만력 임자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정몽주(鄭夢周)ㆍ조광조(趙光祖)ㆍ이계손(李繼孫)
길주(吉州) 명천서원(溟川書院) 병오년에 세웠고 병자년에 사액하였다. : 조헌(趙憲)
향현사(鄕賢祠) : 허유례(許惟禮) 판서에 증직되었고 시호는 효장공(孝莊公)이며 길성군(吉城君)에 봉해졌다. 적개공신(敵愾功臣)이다.ㆍ원충서(元忠恕) 참의에 증직되었다.ㆍ허진(許珍) 유례(惟禮)의 증손인데 도사(都事)에 증직되었다.ㆍ김국신(金國信) 금부도사에 증직되었다.ㆍ허수민(許秀敏)ㆍ허대성(許大成) 유례의 5대 손이다.ㆍ허성일(許誠一) 유례의 6대 손이다.
경성(鏡城) 창렬사우(彰烈祠宇) 병오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정문부(鄭文孚) 임진록에 들어 있다.ㆍ이붕수(李鵬壽) 지평에 증직되었다.ㆍ강문우(姜文佑) 판결사(判決事)에 증직되었다.ㆍ최배천(崔配天) 판관(判官)에 증직되었다.ㆍ지달원(池達源) 좌랑에 증직되었다.ㆍ이희당(李希唐) 훈련부정(訓練副正)에 증직되었다.ㆍ이기수(李麒壽) 좌랑에 증직되었다.ㆍ박유일(朴惟一) 좌랑에 증직되었다.ㆍ서수(徐遂) 좌랑에 증직되었다.ㆍ오경헌(吳慶獻) 판결사(判決事)에 증직되었다.
□□묘우(□□廟宇) 고려조에 육진(六鎭)을 개척한 공으로 사당을 세운 것이다. 부(府)의 서쪽 2리에 있다. : 윤관(尹瓘)ㆍ오연총(吳延寵) 평장사(平章事)이며 시호는 문양(文襄)이다. 선조 16년에 창건하였다.
청덕당(淸德堂) 을사년에 세웠다. : 성하종(成夏宗) 병사(兵使)이다. 창흥군(昌興君)으로 봉해졌고 청백리(淸白吏)이다.
흥혜사우(興惠祠宇) 숙종 계미년에 세웠다. : 이광하(李光夏) 판윤(判尹)으로서 선비 양성에 공을 세웠다.
회령(會寧) 현충사우(顯忠祠宇) 숙종 계미년에 세웠고 정미년에 사액하였다. : 정문부(鄭文孚)ㆍ신세준(申世俊) 첨지(僉知)였는데 참의에 증직되었다.ㆍ최언영(崔彦英) 벼슬은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이다ㆍ오윤적(吳允迪) 벼슬은 군기시주부이다.ㆍ허관(許灌) 벼슬은 군기시주부이다.ㆍ정여경(鄭餘慶) 벼슬은 예빈봉사(禮賓奉事)이다.ㆍ윤립(尹岦) 벼슬은 예빈(禮賓)ㆍ이희백(李希白)ㆍ오준례(吳遵禮) 모두 수문장(守門將)이다.
□□사우(□□祠宇) 만력 병진년에 세웠다. : 김우옹(金宇顒)ㆍ이윤우(李潤雨)ㆍ김시양(金時讓)
종성(鍾城) 종산서원(鍾山書院) 현종 병오년에 세웠고, 숙종 병인년에 사액하였다. : 정여창(鄭汝昌)ㆍ기준(奇遵)ㆍ유희춘(柳希春)ㆍ정엽(鄭曄)ㆍ김상헌(金尙憲)ㆍ정홍익(鄭弘翼)ㆍ정온(鄭蘊)ㆍ조석윤(趙錫胤)ㆍ유계(兪棨)ㆍ민정중(閔鼎重)ㆍ남구만(南九萬) 두분(二公)이 추향되었다.
행영사우(行營祠宇) 을사년에 세웠다. : 황보인(皇甫仁)ㆍ김종서ㆍ김응하(金應河)
온성(穩城) 충곡서원(忠谷書院) 만력 병오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기준(奇遵)ㆍ김덕함(金德諴)ㆍ유계(兪棨)
덕원(德源) 용진서원(龍津書院) 을해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송시열(宋時烈)
창주영각(滄洲影閣) : 주자(朱子)의 화상(畫像)
문천(文川) 문포서원(文浦書院) 갑술년에 세웠다. : 송시열(宋時烈)ㆍ민정중(閔鼎重)
□□영당(□□影堂) : 공자의 화상(畫像)
단천(端川) 복천영당(福川影堂) 임오년에 세웠다. : 문선왕(文宣王)의 화상(畫像)
경원(慶源) 충렬사(忠烈祠) 임신년에 세웠다. : 김응하(金應河)ㆍ최진립(崔震立)
북청(北靑) 노덕서원(老德書院) 숭정 갑오년에 세웠고 을축년에 사액하였다. : 이항복(李恒福)ㆍ김덕함(金德諴)ㆍ정홍익(鄭弘翼)ㆍ이상진(李尙眞)ㆍ오두인(吳斗寅)ㆍ이세화(李世華)
안변(安邊) 옥동서원(玉泂書院) 만력 무신년에 중건하고, 임오년에 사액하였다. : 이계손(李繼孫)ㆍ김상용(金尙容)ㆍ조석윤(趙錫胤)
삼현사(三賢祠) 만력 병오년에 세웠다. : 이경승(李慶承) 호는 율도(栗島), 문과에 합격, 판관을 지냈다ㆍ이선승(李善承) 호는 미곡(薇谷), 감찰을 지냈다.ㆍ이지온(李之馧) 호는 빈교(貧郊), 참판을 지냈다.
정평(定平) 망덕서원(望德書院) 병자년에 세웠다. : 정몽주(鄭夢周)ㆍ조광조(趙光祖)ㆍ김상헌(金尙憲)ㆍ조익(趙翼)ㆍ민정중(閔鼎重)
무산(茂山) □□사우(□□祠宇) 신묘년에 세웠다. : 남구만(南九萬)


[주D-001]장수(藏修) : 공부하는 것을 말하는데, 후세에 서당이나 서원을 장수하는 장소라고 칭하였다.
[주D-002]소수서원(紹修書院) : 조선 중종 때 주세붕이 세운 서원.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으로, 중국에서 시초의 서원인 주자(朱子)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계승[紹]하여 닦는다[修]는 뜻으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고 하였다.
[주D-003]지명이 비록 같으나 : 예를 들면 우리나라에 운곡(雲谷)이라는 지명이 있으면 주자(朱子)가 살았던 중국의 운곡을 따라 주자의 서원을 세웠었다.
[주D-004]태산(泰山)에 …… 하겠는가 : 노(魯) 나라의 진산(鎭山)인 태산에 노 나라의 임금이 아니면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것인데, 권신(權臣) 계씨(季氏)가 태산에 제사를 지내므로 공자가 태산의 산신(山神)이 그 제사를 받지 않으리라는 뜻으로 말하였다.
[주D-005]절현사(節顯祠) : 현절사(顯節祠)의 오기인듯 하다.
사전전고(祀典典故)
여러 사당[諸祠]

○ 삼성사(三聖祠)는 황해도 문화현(文化縣)의 구월산(九月山)에 있으며, 환인(桓因)ㆍ환웅(桓雄)ㆍ단군(檀君)을 향사(享祀)하는 사당인데, 봄과 가을에 나라에서 향과 축문을 내려 제사를 지낸다.
○ 숭령전(崇靈殿)은 평안도 평양성 밖에 있으며, 단군과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을 향사하는데, 봄과 가을에 나라에서 향과 축문을 내리어 중간 제사[中祀]를 지낸다.
숙종이 근신(近臣)을 보내어 치제(致祭)하였는데, 어제(御製)한 단군사(檀君祠) 시에 이르기를,

동해에 성인이 일어나시니 / 東海聖人作
일찍이 요와 한때라 들었다 / 曾聞竝放勳
산마루에 사당이 있으니 / 山椒遺廟在
박달나무에 상서로운 구름이 둘러 있도다 / 檀木擁祥雲

하였다.
영종(영조(英祖)) 원년에 ‘숭령전(崇靈殿)’이라고 편액(扁額)을 내리고, 기유년에 전참봉(殿參奉) 두 사람을 두었다.
○ 숭인전(崇仁殿)은 평안도 평양성 밖 기자묘(箕子墓) 옆에 있는데, 기자를 향사하는 전각이며, 봄과 가을에 나라에서 향과 폐백을 내렸다.
고려 숙종조 때에 정당문학(政堂文學) 정문(鄭文)이 건의하여 기자의 무덤을 찾아 사당을 세워 중간 제사를 지냈는데, 충숙왕(忠肅王)이 평양부에 명하여 기자사(箕子祠)를 세우고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세종조에 판한성부사 권홍(權弘)이 임금에게 글을 올리기를, “기자의 어짊은 온 천하 만대에 이르도록 다 함께 경모하는 바입니다. 공자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은(殷) 나라에 3인(三仁 미자(微子)ㆍ기자(箕子)ㆍ비간(比干))이 있다.”고 하였으며, 우리나라의 예약과 문물이 중화(中華)와 견줄 수 있는 것은 기자가 조선에 봉함을 받아서 팔조의 교화[八條之敎]를 시행한 까닭이오니, 동방에 끼친 공이 대단히 크므로 태조가 개국한 뒤에 사전(祀典)의 첫머리에 기자를 실었사오니, 옛 성인을 존중하고 숭배하는 것이 지극하였습니다. 그러나 묘에 사적을 새긴 비가 없어서 공덕을 세상에 찬양하여 나타낼 수 없사오니, 청컨대, 문신을 시켜 비문을 지어 묘 아래에 세워 후세에 전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참찬 변계량(卞季良)에게 명하여 비문을 짓게 하여 묘 아래에 세웠다.
○ 기자전(箕子殿)은 평안 감사가 참봉을 선출ㆍ임명하여 지켜왔다. 광해조 계축년, 정사호(鄭賜湖)가 감사로 있을 때에, 칭호를 고쳐 ‘숭인전(崇仁殿)’이라 편액을 내리고, 선우식(鮮于寔)을 기자의 후손이라 하여 숭인감(崇仁監)으로 임명하니, 품계는 정6품이었다. 그런데 정묘년의 난리에 숭인감인 선우흡(鮮于洽)이 노(虜 청병(淸兵))에 항복하였으므로, 조정에서 그 죄를 논하여 관직을 삭제하여 버리고, 그 도에 명하여 다시 선우 성 가진 자를 뽑게 하였더니, 감사 김시양(金時讓)이 태주(泰州) 사람 선우경(鮮于慶)을 임금에게 아뢰어 보고하였다. 조정에서 명하여 그가 적손인지 지손인지를 조사하게 하니, 시양이 다시 아뢰기를 “멀고도 아득한 명족의 후예를 누가 원손인지 지손인지 알아낼 수 있겠습니까. 다만 그 성이 ‘선우’인 까닭에 그 명에 응한 것뿐입니다.” 하였다.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
선우씨를 기자의 후손으로 삼은 것은 소식(蘇軾)이 선우신(鮮于侁)에게 준 시와 조맹부(趙孟頫)가 선우추(鮮于樞)의 글씨본에 쓴 서문에 ‘선우씨가 기자의 후손’이라고 한 것을 취한 것이니, 이 말도 또한 근거가 박약하다. 광해조 때에 정치가 어지러워 서로 허위로 만든 것은 반정 초에 즉시 폐지했어야 마땅한데, 지금까지 그대로 좇고 있으니 탄식할 일이다. 《하담파적록》
뒤에 전감(殿監)을 고쳐 ‘참봉’으로 하였다.
인조 계해년에 관원을 보내어 치제하고, 정축년에 묘정비(廟庭碑)를 세웠다.
숙종 기미년에 도승지를 보내어 치제하고 기축년에 또 승지를 보내어 치제하였다.
○ 숭덕전(崇德殿)은 경상도 경주부(慶州府)의 남쪽 월남리(月南里)에 있으며,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를 향사하는 곳으로 세종 11년에 창건하였다. 매년 중추(仲秋)에 향과 축문과 폐백을 내려 제사지냈다.
경종(景宗) 3년에 전각의 편액을 하사하고, 참봉 한 사람을 두었다. 박씨와 김씨 두 사람의 참봉을 두었다.
○ 영종 28년에 비를 세웠다.
경순왕(敬順王) 영당(影堂)은 경주에서 동북쪽으로 4리 되는 곳에 있는데, 절일(節日)마다 경주의 아전들이 삼반(三班 지방 관아에 딸린 관노ㆍ사령 등의 총칭)을 거느리고 제사지냈다.
경종 3년에 편액을 하사하고 참봉을 두었다. 영당을 뒤에 사당으로 삼았다.
○ 동명왕묘(東明王廟)는 고구려 동명왕을 모신 사당이며, 평양성 밖에 있는데 단군과 함께 모신 사당이다.
고려 숙종이 동명성제사(東明聖帝祠)에 옷과 폐백을 올리고 제사를 지냈다. 사당은 평양 인리방(仁里坊)에 있는데, 고을 사람들이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이 사당에 가서 기도를 드렸다. 세상에 전하여 오기를 ‘동명성제사’라 한다.
고려 때의 동명사(東明祠)는 아마도 지금의 숭령전(崇靈殿)인 듯하다. 다만 단군과 아울러 향사한 것이 어느 때부터 시작하였는지 자세히 알 수 없다.《평양지(平壤志)》에는 단군동명사(檀君東明祠)는 세종 11년에 처음으로 설치되었다고 하였다.
영종 을유년에 전교하기를, “이제 들으니 고구려의 동명왕이 나라를 처음 세운 해가 곧 을유년이라고 이른다 하니, 2천년 후에 다시 그 해를 만났다. 제문을 지어 내리니,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제사를 행하게 하라.” 하였다.
○ 온조왕묘(溫祚王廟)는 옛날에는 충청도 직산현(稷山縣)의 동북쪽에 있었는데 지금은 남한산성(南漢山城)에 있다.
직산에 있던 옛 사당은 세조 11년에 창건한 것으로 나라에서 봄과 가을에 축문과 향을 내려 치제하였는데, 선조(宣祖) 정유년에 왜병들이 불을 질러 태워버렸으므로 곧 폐지되었다. 계묘년에 충청 감사 유근(柳根)이 백제의 시조 온조묘를 직산에 다시 세우기를 청하였다. 본 고을의 읍지(邑誌)에는 임진병란 때 불에 탄 후 그대로 폐지되었다고 하였다.
인조 병자년 3월에 남한산성에 온조묘를 세웠다. 《문헌비고(文獻備考)》에는 남한산성 사당의 창건 연월은 상고할 수 없다고 하였다.
병자년 겨울에 임금이 남한산성에 있을 때, 예조 판서 김상헌(金尙憲)을 보내 제사하였다.
○ 숭의전(崇義殿)은 경기도 마전군(麻田郡)의 서쪽 5리 되는 곳에 있으며, 고려의 태조ㆍ현종(顯宗)ㆍ문종(文宗)ㆍ원종(元宗)을 향사하였다. 처음에 고려 태조의 어진(御眞)이 마전 앙암사(仰岩寺)에 있었으므로 그곳에 사당을 세운 것이다.
○ 태조(이성계) 임신년에 명하여 전조 태조(太祖 고려 태조)의 신주를 마전군에 옮겨 봉안하고 때에 따라 제사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고려조의 혜왕(惠王)ㆍ현왕(顯王)ㆍ충경왕(忠敬王 원종)ㆍ충렬왕(忠烈王)은 모두 백성에게 공로가 있으니, 마전에 있는 태조의 사당에 부제(祔祭)하기를 청하나이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고려조의 성왕(成王)은 중국을 사모하여 문물을 일으켜서 백성이 그 혜택을 받았으며, 문왕(文王)은 근신(謹愼)하게 부조(父祖)의 업을 지켜 세상을 태평하게 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였으며, 공민왕(恭愍王)은 홍건적(紅巾賊)을 두 번 섬멸하여 삼한(三韓)을 다시 중흥케 하고 상국(上國 중국)을 잘 섬겨 한 나라를 편안하게 하였사오니, 모두 우리나라에 공로가 있었습니다. 또한 태조묘(太祖廟)에 부제하기를 청하나이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좇았다. 《동각잡기》
6년 정축에 마전군의 귀의군(歸義君) 왕우(王瑀)를 치제(致祭)하는 글에, “온 세상의 백성에게 공이 있는 자는 마땅히 만세에 무궁한 제사를 누리나니, 경의 선대에서 비로소 삼한을 통일하고 5백 년 동안 문물 제도를 드리웠으니 백성에게 미친 공덕이 깊도다. 마땅히 그 세대를 영원히 전하여 무궁한 제사를 누려야 할 것이나, 흥폐와 존망은 천도(天道)의 상리인지라, 쇠퇴한 말세에 이르러 정치는 잔폐하고 백성은 원망하여 선세(先世)의 종묘 제사가 끊어지게 되었다. 내가 덕이 없는 몸으로 하늘의 은총을 입어 혁명의 첫머리에 이에 고전(古典)을 상고하여, 경이 능히 선대의 어진 것을 닮았으므로 작위와 식읍(食邑)을 봉하여 선대의 제사를 이어 받들게 한 것은 실로 옛 3대의 예(禮)를 좇은 것이다.경이 바야흐로 장차 선대의 예물을 닦아서 정성스러이 삼가고 능히 효도하여 나라와 함께 즐거움을 같이하려 하였더니, 몇 해가 되지 않아 하늘이 빼앗아 갔으니 아아, 슬프다. 부음을 들은 이후로 지극히 애석한 마음 유달리 깊어서, 이에 유사에게 명하여 예로써 장사하게 하고 영구(靈柩) 앞에 전(奠)을 드리게 하니, 경의 영(靈)이 어둡지 않거든 나의 지극한 회포를 살펴주오.” 하였다. 그리고 곧 그 아들 상장군 조(珇)로서 귀의군(歸義君)에 습봉(襲封)하여 왕씨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그 도(道)의 관찰사에게 명하여 가까운 고을의 인부를 징발하여 고려 태조 신성왕묘(高麗太祖神聖王廟)를 마전에 세웠다. 《국조보감》
세종 7년에 유사가 말하기를, “국가의 종묘에서 제사 받드는 것은 다만 5실(室)인데, 전조(고려)의 사당에는 8위(位)를 지내니 예에 합당하지 아니하다.” 하여, 이에 다만 태조ㆍ현종ㆍ문종ㆍ원종만 남겨두고 춘추 이중삭(二仲朔 음력 2월과 8월)에 향과 축문을 보내 제사하게 하였다.
12년에 전교하기를, “고려의 임금으로 공덕이 있는 자는 이미 제사를 받들게 했으나, 능(陵)이 무너진 곳을 개수하지 아니한 것은 차마 그대로 둘 수 없는 바이니, 능이 있는 곳은 마땅히 소재지의 관리로 하여금 땔나무를 베는 일을 금지하고 때때로 수축하고 보호하게 하라.” 하였다.
문종 원년에 숭의전에 편액을 하사하고, 고려 현종의 원손을 공주(公州)에서 찾아내어, 순례(循禮)라는 이름을 주어 부사(副使)로 삼고 전답과 노비를 하사하였으며, 마전현(麻田縣)을 승격시켜 마전군으로 하고, 교관(敎官)을 두어 왕씨의 자손을 가르치게 하며, 고려의 명신으로서 공덕이 있는 자를 택하여 사당(숭의전)에 배향하였다. 문종의 하교는 문종조 고사에 들어 있다.
문종이 숭의전을 짓고 사람들을 시켜 왕씨의 후손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였다. 왕순례(王循禮)라는 자가 성명을 바꾸고 평민 행세를 하는 자가 있었는데, 마침 이웃 사람과 밭을 갈다가 밭 이랑을 다투던 끝에 그 사람이 관에 고하게 되었다. 임금이 곧 명하여 문과에 급제시켜 특히 3품에 올려 숭의전사(崇義殿使)로 삼아 왕건 태조의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다. 《추강냉화(秋江冷話)》 《후청쇄어(侯鯖瑣語)》에는 명종조에 지었다 하였으나 그릇된 것이다.
숭의전의 배향 문종이 명하여 배향하였다.
태사 개국(太師開國) 무공공(武恭公) 복지겸(卜智謙)
태사 개국 장절공(壯節公) 신숭겸(申崇謙)
태사 개국 충렬공(忠烈公) 홍유(洪儒)
태사 문하시중(門下侍中) 인헌공(仁憲公) 강감찬(姜邯贊)
태사 개국 무열공(武烈公) 배현경(裴玄慶)
태사 내사령(內史令) 장위공(章威公) 서희(徐熙)
태사 개국 충절공(忠節公) 유금필(庾黔弼)
수 태보(守太保) 문하시중 문숙공(文肅公) 윤관(尹瓘)
문하시중 문열공(文烈公) 김부식(金富軾)
문하시중 위열공(威烈公) 김취려(金就礪)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 문정공(文正公) 조충(趙冲)
첨의령(僉議令)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
정당문학(正堂文學) 김득배(金得培)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이방실(李芳實)
중서평장사(中書平章事) 안우(安祐)
수 문하시중(守門下侍中)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
세조가 일찍이 강녕전(康寧殿)에 임어하고 명하여 숭의전부사 왕순례를 입시하게 하여 어찬(御饌)을 내리고, 신숙주(申叔舟)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내가 그대에게 사사로운 은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다. 세종께서 왕씨의 뒤를 세우려고 하셨으나 성취하지 못하셨고, 태종(문종)이 비로소 숭의전을 세우셔서 그 제사를 잇게 하셨으니, 이제 나는 선세(先世)의 뜻을 받들어 이은 것이다.” 하였다.
중종 7년에 관리를 보내 소뢰(小牢 염소나 돼지를 제물로 하는 제사)로써 숭의전에 제사 지냈다.
왕태조(王太祖)의 화상(畫像)이 처음에는 문경(聞慶)의 양산사(陽山寺 봉암사(鳳巖寺)의 속칭)에 있었는데, 신우(辛禑 우왕(禑王)) 5년에 왜변(倭變)으로 말미암아 풍기(豐基) 용천사(龍泉寺)로 옮겨 모셨다가, 선조(宣祖) 병자년에 그 해당 관아에 명하여 의장(儀仗)을 갖추어서 숭의전으로 옮겨 모셨다. 《후청쇄어》
선조 을사년에 경기 감사 이정귀(李廷龜)가 숭의전을 중수한 후, 청하여 나라에서 향과 축문을 보내 제사지내고, 명하여 왕씨의 후손 왕곤(王鵾)을 전감(殿監)으로 삼았다.
숭의전은 마전의 강 언덕에 있는데, 왕태조가 궁예에게서 벼슬할 때, 송경(松京)을 왕래하며 쉬던 곳으로서, 아마도 태조의 고택(故宅)이었던 관계로 인하여 ‘숭의전’이라 한 것 같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제사지낼 고기를 몰래 베어 가지고 간 일이 있었는데, 그날 밤에 제관(祭官)의 꿈에 세 왕이 전상(殿上)에 나란히 앉아서 화를 내며 고기 도둑질한 자를 끌어다가 목베는 것을 보았다. 다음날 아침에 그 사람을 조사하였더니, 그 사람이 즉시 자수하여 응분의 죄를 받았으며, 또 숭의전 안에 두었던 유장(帷帳 휘장과 장막)과 기구를 몰래 훔쳐서 지고 나오던 자가 문까지 미처 이르기 전에 팔과 다리가 묶인 것 같아서 한 걸음도 옮기지 못하고 드디어 잡힌 사실이 있었다. 이러한 일이 있었으므로 고을 아전들이 엄숙히 존경하는 마음으로 제사를 지내고 감히 조금도 게을리하지 못하였다. 《지봉유설》
○ 관왕묘(關王廟)는, 하나(남묘(南廟))는 숭례문(崇禮門) 밖에 있고, 하나(동묘(東廟))는 흥인문(興仁門) 밖에 있는데, 안무왕(安武王) 관우(關羽)를 향사하였다.
남묘(南廟)는 흙으로 만든 소상(塑像)이며, 동묘(東廟)는 구리쇠로 만든 동상(銅像)이다. 《갑진만록(甲辰漫錄)》
경칩(驚蟄)과 상강(霜降)일에 제사지내고 축문에는 ‘조선 국왕’이라고 하였다.
○ 일찍이 임진년과 정유년의 왜란 때에 관우의 신령이 여러 번 나타나 신병(神兵)으로써 싸움을 도와주어 명 나라 장수와 군사들이 모두 말하기를, “평양의 싸움에서 이긴 것과 도산(島山)에서의 싸움과, 삼도(三道)에서 왜병을 구축할 때 관우의 신령이 늘 나타나 음조(陰助)하였다.” 하였다. 행주(幸州) 싸움에서 이길 때에도 신병이 나타났다 한다. 《임진록(壬辰錄)》에 상세하다.
중국에는 관왕묘가 없는 곳이 없으니 이것은 세상에 전하기를, “고황제(高皇帝 명(明) 나라 태조(太祖)) 때에 관우의 신령이 꿈에 나타나서 음호(陰護)한 공이 있었으므로 온 나라가 모두 관우를 제사지냈다.” 한다. 《지봉유설》
정유년 겨울에 명 나라 장수가 울산(蔚山)의 적진을 공격하다가 불리하게 되니, 무술년 1월에 퇴병하였는데 명 나라 장수 유격(遊擊) 진인(陳寅)이 힘써 싸우다가 적의 탄환에 맞아 쓰러진 것을 싣고 서울로 돌아와서 치료하면서 숭례문(崇禮門) 밖에 있는 산기슭에다가 사당 한 채를 창건하고 그 가운데 신상(神像)을 설치하여 관공(關公 관우)을 모셨더니 장수 양호(楊鎬)를 비롯하여 모든 장수가 은(銀)을 내어 그 비용을 도왔고, 우리나라에서도 또한 은으로 도왔다. 그 사당이 낙성되자 선조(宣祖)께서도 가서 보았는데, 비변사(備邊司)의 모든 관료들이 임금의 행차를 따라 사당 앞뜰에 나아가서 재배하였다.그 신상은 흙으로 만든 것으로서 낯은 진한 대추[重棗]와 같이 붉고, 봉(鳳)의 눈이며, 수염은 배까지 드리웠으며, 그 좌우에 소상(塑像) 둘이 큰 칼을 가지고 모시고 서 있는데 관평(關平 관우의 양아들)과 주창(周倉 관우의 부하 장수)이라고 이르며, 의젓하여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이로부터 모든 장수가 출입할 때마다 참배하였으며, 모두 동국을 위하여 신령의 도움으로 적을 물리치기를 빌었다. 5월 13일에 사당에서 큰 제사를 지냈는데, 이날은 바로 관왕의 생일로 만일 우레나 이상한 것이 있으면 이는 관왕의 신령이 이른 것이라고들 하였다.
이날의 일기가 청명하다가 오후에 검은 구름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큰 바람이 서북쪽으로부터 불어오며 우레 소리와 아울러 소나기가 오다가 조금 후에 그쳤다. 뭇사람들이 모두 기뻐하며 말하기를, “관왕의 신령이 하림한 것이다.” 하였다. 그 후에 바로 또 안동(安東)과 성주(星州) 두 고을에 관왕묘(關王廟)를 세웠는데, 안동에서는 나무를 깎아서 신상을 만들었고, 성주에서는 흙으로 소상을 만들었는데, 성주에서는 신령의 이상한 흔적이 현저하게 나타났다고 한다. 얼마 안 되어 왜놈의 추장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죽고 주둔해 있던 모든 왜병이 철수해 갔으니, 이것 또한 이치로는 측량하기 어려운 일이다.옛날에 부견(苻堅)이 진(晉) 나라를 침범해 왔을 때, 진 나라 사안(謝安)이 정절(旌節 대장에게 준 표신(標信))과 기고(旗鼓 군기와 북)로써 장자문(蔣子文)의 사당에 가서 빈 일이 있었는데, 뒷날 사현(謝玄 사안(謝安)의 조카)의 대승을 말하는 자는 “장자문의 신령이 도운 것이다.”라고 말하는 자가 있었다. 하물며 관왕의 강대(剛大)한 기운으로 어찌 신령의 영험이 없었을까보냐. 관왕묘 앞에 두 개의 긴 장대(長竿)를 세우고 한 장대에는, ‘하늘을 돕는 큰 임금[協天大帝]’이라 쓰고, 다른 한 장대에는, ‘위엄이 중국에 떨쳤다[威辰華夏]’고 썼는데, 그 글자가 서까래와 같이 굵어 바람으로 인하여 반공에 휘날려 멀고 가까운 사람들이 모두 쳐다 보았다. 《서애집》
서울 서강(西江)에 사는 사람들이 어느 날 밤에 모두 놀라 많은 사람들이 산골짜기로 피해 달아나고, 혹은 세간을 싣고 동서로 이사하기도 하였다. 서강을 지나던 사람이 그 까닭을 물으니, “밤중에 병마(兵馬)가 서로 죽이는 소리가 들리더라.”고 말하여 서울에서 온 사람들이 듣고 서로 놀라고 전파하며 무슨 변이 있지 않을까 의심하였다. 그 뒤에 사람들이 의심하기를 이것은 남관왕묘의 신령이 한 일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한다. 《서애집》
만력(萬曆) 30년에 명 나라의 신종황제(神宗皇帝)가 4천 금(金)을 무신(撫臣) 만세덕(萬世德)에게 부쳐서 조선 서울에 관왕묘를 세우도록 하였는데, 그 조서에 이르기를, “관공의 신령이 본래 중국에서 나타났었는데, 왜란을 평정하는 역사에도 뚜렷한 도움을 받았다 하니, 조선에서도 당연히 신주를 모셔야 한다.” 하였다. 이에 동대문 밖에 땅을 택하여 대신에게 명하여 감독하게 하였는데, 경자년부터 역사(役事)를 시작하여 3년 만인 봄에 준공하였다. 그 소상(塑像)은 그림의 모양에 의한 것이며, 전각(殿閣)ㆍ행랑ㆍ문간ㆍ쇠종과 북을 설치하여 놓은 것이 무릇 백여 칸이나 되는데, 모두 중국의 제도에 의한 것이다. 편액(扁額)에 쓸 것을 명 나라 조정에 청하여 명 나라 임금의 뜻을 받아 ‘현령 소덕왕 관공의 묘[顯靈昭德王關公之廟]’라고 세웠다. 허균(許筠)이 왕명을 받들어 관왕묘 비문을 지어 올린 것은 뒤에 결국 세우지 아니 하였다. ○ 《문헌비고》에는 이르기를, ‘선조 35년에 동묘를 세웠다.’고 하였다.
숙종 신미년에 숙종이 지나는 길에 동관왕묘(東關王廟)에 들어갔는데, 좌의정 목내선이 아뢰기를, “마땅히 주 무왕(周武王)이 상용(商容)의 정문[閭]을 지나가다가 구부리고 경의를 표시한 식례(式禮)를 모방하여 관우묘에 식례를 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니, 우의정 민암(閔黯)이 아뢰기를, “배례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사오며 식례도 부당하옵니다. 손을 들어서 읍을 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니, 임금이 암(黯)의 의논을 따랐다. 신미년에 또 남묘(南廟)에도 지나는 길에 들어갔는데, 전과 같이 읍을 행하였다.
경인년에 임금이 여러 신하에게 이르기를, “관왕묘에 배례를 하지 않고 읍을 하는 것이 과연 예법으로 보아 잘못된 것이 없겠는가. 선조(宣祖)께서 관왕묘에 친히 제사를 지내실 때에는 반드시 읍례는 행하지 아니하셨을 것이다.” 하니, 좌의정 서종태(徐宗泰)가 아뢰기를, “그때는 명 나라 장수와 함께 가셨으니 혹 배례를 행하셨을 것이오나, 지금까지도 반드시 영구히 준수할 것은 아닙니다. 관왕은 본래 연대가 다른 명장으로 선성(先聖)이나 선사(先師)와는 차이가 있어 읍을 행하는 이외에 다른 예가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명하여 《선조실록(宣祖實錄)》을 상고하여 내게 하니 실록에, “선조는 재배를 행하였다.”고 되어 있었다. 임금이 명하기를, “앞으로는 이에 따라 배례를 행하라.” 하였다. 《국조보감》
영종(英宗 영조(英祖)) 정미년에 임금이 관왕묘에 임어하여 재배의 예를 행하였다.
관왕묘는 또 전라도 강진군(康津郡) 고금도(古今島)에 있으니, 선조 정유년에 명 나라의 도독(都督) 진린(陳璘)이 창건한 것이다. 숙종 갑자년에 다시 수리하고 따로 한 사당을 그 곁에 세우고 진린을 주향(主享)으로 하고 이순신(李舜臣)을 배향으로 모셨다.
관왕묘의 하나는 안동부(安東府)에 있는데, 선조 무술년에 진정영도사(眞定營都司) 설호신(薛虎臣)이 창건하고 석상을 봉안하였다. 처음에는 안동부 성문 안 북산 꼭대기에 있었고, 또 석비(石碑)를 세우고 임진왜란 때 명 나라 장병이 동으로 나와 조선을 구원하고, 왜군을 정벌한 사실을 기록하였다. 그 뒤 병오년에 서악(西嶽)의 동대(東臺)에 옮겼다.
관왕묘의 하나는 성주목(星州牧)에 있다. 선조 정유년에 명 나라 장수 모국기(茅國器)가 창건한 것으로서, 여기에는 흙으로 만든 소상(塑像)이 있는데 신령스럽고 이상한 일이 매우 현저하게 나타났다. 처음에는 성문 밖에 있었는데, 영종 3년에 남정(南亭) 아래로 옮겨 세웠다.
관왕묘의 또 하나는 남원부(南原府)의 성(城) 서문 밖에 있는데, 선조 기해년 사이에 명 나라 도독 유정(劉綎)이 창건한 것으로서 묘정비(廟庭碑)가 있다. 숙종 42년에 신상(神像)을 고쳐 세웠는데, 모두 중국의 제도를 그대로 모방하고, 명 나라의 총부중군(摠府中軍) 이신방(李新芳)과 총부천총(摠府千摠) 장표(蔣表)와 총부천부(摠府千夫) 모승선(毛承先)을 배향하였다.
숙종 37년에 명을 내려 여러 도에 있는 관왕묘의 제사를 선무사(宣武祠)의 예에 따라 경칩과 상강에 향과 축문을 내려보내 본도에서 제사를 행하도록 하였다.
독신묘(纛神廟)는 옛날에는 서울 성안 동남쪽에 있었던 것을 이제 도성안 서북방 예조 청사 곁으로 옮기고, 군중(軍中)의 군기(軍旗) 곧 사독(四纛)에 제사를 지내는데 경칩과 상강에 제사를 행하였다.
○ 선무사(宣武祠)는 서울 남문 안 태평관(太平館) 서쪽에 있다. 명 나라 병부 상서 형개(邢玠)와 경리(經理) 양호(楊鎬)를 향사하였는데, 계춘(季春 음력 3월)과 계추(季秋 음력 9월)ㆍ중정(中丁 중순 사이에 드는 정(丁)일)에 제사를 행한다.
○ 일찍이 선조 무술년에 형개의 임진왜란 때의 공로를 표창하기 위하여 그의 생전에 생사당(生祠堂 살아 있는 이를 모시는 사당)을 창건하였다. 갑진년에 선조가 하교하기를, “지난 번 정유년에 적병이 승리의 기세를 타고 멀리 휘몰아 들어왔을 때에, 경리 양호가 평양으로부터 배나 빨리 달려 서울에 들어와 여러 장수를 지휘하여 각 도로 나누어 왜적을 치게 하여 왜적이 드디어 패해 도망하고 우리 강토를 회복하였다. 또 어떤 고난도 참는 맑은 지조는 티끌 하나도 취하지 않았으며, 호령이 엄숙하고 명백하여 한 사람도 감히 범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공을 이루기 전에 간신의 모함을 입었다. 옛날에 사당을 세우면 반드시 배향이 있으니, 내가 양경리를 선무사에 배향하고자 한다. 널리 공론을 채집하여 아뢰라.” 하였다. 대신 이하가 모두 가하다 하여 드디어 배향하라 명하였다.
어필(御筆)로 ‘번방(제후의 나라)을 재건하였다[再建藩邦]’는 네 자를 써서 달았다.
선조가 일찍이 명 나라에 가는 사신에게 명하여 양경리(楊經理)의 초상을 북경에서 구해 오라 하였으나 얻지 못하였는데, 광해 경술년에 비로소 구해다가 드디어 사당 안에 봉안하였다.
선조가 처음에 명하여 양호의 공덕비를 사현(沙峴) 지봉(芝峰)이 말하기를 ‘모화관 서쪽에 있다.’ 한다. 에 세우고, 김현성(金玄成)으로 하여금 쓰게 하였다. 후에 양호가 명 나라에 간 우리나라 사신에게 말하기를, “조선에서 나를 위하여 비를 세웠다 하는데 그 비를 탁본해 보여 주기를 청한다.” 하였다. 광해군이 그 비가 작아서 내용을 상세하게 다할 수 없음을 한탄하고, 곧 명을 내려 다시 풍부한 내용을 기록할 수 있는 큰 비를 신문(新門) 밖에 거듭 세웠는데, 이정귀(李廷龜)에게 글을 짓게 하고 한호(韓濩)에게 쓰게 했다. 《일월록(日月錄)》에 이르기를, ‘일설에는 사현(沙峴)의 작은 비는 이해룡(李海龍)이 쓰고, 신문 밖의 비는 김현성이 썼다.’ 하니, 여기에 한호가 썼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 민충단(愍忠壇)은 홍제원(弘濟院) 남쪽에 있는데, 명 나라 황제가 임진왜란 때 왜군을 정벌하다가 전사한 중국 장병에게 제사를 내리던 곳이다. 처음에 선조 계사년에 명 나라 황제의 뜻을 받들어서 민충단을 쌓고 위패는 봉상시(奉常寺) 신실(神室)에 간직해 두었었는데, 영종 경진년에 영종이 친히 임하여 신실을 둘러보고 명을 내려 한 칸 집을 선무사의 뜰 동쪽에 세우게 하고, 선무사 제사지내는 날에 똑같이 제사를 행하게 하였다.
무열사(武烈祠)는 평양부 서문 안에 있으며, 명 나라 병부 상서 석성(石星)ㆍ제독 이여송(李如松)ㆍ좌협장(左協將) 양원(楊元)ㆍ중협장(中協將) 이여백(李如栢)ㆍ우협장(右協將) 장세작(張世爵)을 향사하였다. 선조 계묘년에 창건하였고, 사당 안에 네 사람의 화상을 걸어 두었는데, 정묘병란 때에 모두 잃어버렸다. 석성과 이여백의 화상이 남아 있었으므로 드디어는 위패로써 대신하게 하였다. 숙종 기축년에 비로소 예관을 보내 치제하고 수호를 잘 하도록 명하였다. 그 뒤로부터는 나라에서 봄ㆍ가을로 향과 축문을 내려 제사를 지냈다.
○ 충민사(忠愍祠)는 순천(順天) 좌수영(左水營) 동문 밖 5리 되는 곳에 있고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을 향사하였는데, 수사(水使) 이억기(李億祺)와 보성 군수(寶城郡守) 안홍국(安弘國)을 배향하였다.
선조 신축년에 창건하였는데, 춘추로 향과 축문을 내려 제사를 행하였다.
○ 청성묘(淸聖廟)는 해주목 동문 밖에 있는데 백이(伯夷)ㆍ숙제(叔齊)를 향사하고 있다.
숙종 신사년 3월에, 비국의 여러 신하를 불러 볼 때 임금이 이르기를, “일전에 해주 유생의 상소에 말하기를, ‘산 이름은 수양산(首陽山)이요, 마을 이름은 형제동(兄弟洞)이기 때문에, 사당을 세워 백이ㆍ숙제를 향사하였다 하고 이에 편액을 내려 주기를 청한다.’ 하였는데, 선인(先人)이 남긴 풍도를 상상하니 실로 천고에 비할 바 없는 감회가 있다. 그를 특별히 허락한다.” 하고 그해 여름 4월에 임금이 친히 수양산의 백이ㆍ숙제의 사당의 칭호를 ‘청성묘(淸聖廟)’라 정하고 어필로 써서 정원(政院)에 내렸다.정원에서는 ‘문회서원(文會書院)’ 사액(賜額)의 예에 따라 본원에서 어필을 그대로 본을 떠서 현판에 새겨 근시(近侍)를 보내 걸기를 청하니, 숙종이 또 어필로 발문(跋文)을 써서 그 아래에 첨가하여 새기도록 하였다. 그 사(辭)에 이르기를, “근자에 해주 유생 최황(崔況) 등의 상소로 말미암아 이제 묘의 사액을 청한 것을 특히 윤허하고, 따라서 어필로 액호(額號)를 써서 내려 이에 그 맑은 바람을 상상하여 천년이 지난 오늘에도 존경하는 마음을 일으킨 뜻을 붙이노라.” 하였다.
○ 삼충사(三忠祠)는 영유현(永柔縣 지금의 평안남도 평원군(平原郡))에 있다. 제갈무후(諸葛武侯 촉한(蜀漢)의 재상(宰相) 제갈량(諸葛亮))와 악무목왕(岳武穆王 남송(南宋)의 무장(武將) 악비(岳飛))과 문신국공(文信國公 송말(宋末)의 충신 문천상(文天祥))을 향사하였다.
처음 선조 때에 사당을 창건하고, 제갈무후를 향사한 것은 이 고을(영유현)에 와룡산(臥龍山)이 있기 때문이다. 숙종 때에 특명으로 악무목을 합향(合享)하라는 전교를 내리기를, “내가 송사(宋史)를 읽다가 악무목의 사실에 이르러 시대는 다를망정 천년 후에도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켰다. 특히 제갈무후의 사당에 합향하여 먼 후세까지 훌륭한 명성을 잊지 않도록 하라.” 하였다.영종 경오년에 또 문신국공을 합향하는 전교에 이르기를, “이제 중국에 간 사신이 얻어온 문승상(文丞相 문천상)의 유상(遺像)을 보니, 그 영특한 기운이 사람을 쏘고, 그 정충(精忠)과 의열(義烈)은 사람에게 존경심을 일으키게 한다. 영유현에 있는 와룡사(臥龍祠)는 선조께서 용만(의주)에 파천해 계실 때에 고금이 다를 망정 느낀 바 있어 창건한 것이며, 악무목의 추후 배향도 고금이 다를 망정 느낀 바 있어 한 것인데, 이제 신국공을 배향하려 하는 것도 역시 고금이 다를망정 느낀 바 있어 하는 것이다. 아아, 와룡과 무목과 신국은 그 충성은 한가지이니, 근시(近侍)를 보내 함께 치제하도록 하라.” 하였다.
○ 소정방사(蘇定方祠)는 대흥(大興) 대잠도(大岑島 《여지비고(輿地備考)》에는 지금 예산현 관내인 대흥현조에 들어 있으나 잘못 기록된 듯함)에 있다. 이것은 대흥군에는 소정방이 백제(百濟)를 공격할 때의 유적(遺跡 임존성(任存城)이 있던 곳)이 있기 때문이다. 고려 때는 춘추로 향과 축문을 내려 치제하였다.
○ 김유신사(金庾信祠)는 진천현(鎭川縣) 길상산(吉祥山)에 있다. 신라 때 사당을 세우고 봄ㆍ가을로 향과 축문을 내려 제사를 지냈었고, 고려 때도 그대로 행하였는데, 조선에 와서는 태조 8년에 비로소 향과 축문을 내리는 것을 정지하게 하고, 그곳에 있는 관리를 시켜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김유신의 사당은 또 군위현(軍威縣)에도 있는데 단오날에 고을 사람들이 제사를 지낸다.
○ 을지문덕사(乙支文德祠)는 평양 창광산(蒼光山) 남쪽에 있다. 현종(顯宗) 11년에 세웠는데, 숙종 3년에 충무사(忠武祠)라고 편액을 내렸다.
을지문덕사는 또 안주(安州 평안남도)성 남쪽 3리 되는 곳에도 있는데, 숙종 23년에 사액하여 ‘청천사(淸川詞)’라고 편액을 내렸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4권
 사전전고(祀典典故)
악(嶽 명산(名山))ㆍ바다ㆍ독(瀆 강하(江河))ㆍ산천(山川)

악(嶽)은, 남에는 지리산(智異山) 남원(南原)ㆍ중부에는 삼각산(三角山) 서울의 북쪽ㆍ서에는 송악산(松嶽山) 개성부(開城府)ㆍ북에는 비백산(鼻白山) 정평(定平) 이다.
바다(海)는, 동해(東海) 양양(襄陽)ㆍ남해(南海) 나주(羅州)ㆍ서해(西海) 풍천(豐川) 이다.
독(瀆)은, 남에는 웅진(熊津) 공주(公州) 과 가야진(伽倻津) 양산(梁山), 중부에는 한강(漢江) 서울의 남쪽, 서에는 덕진(德津) 장단(長湍) 과 평양강(平壤江) 평양 과 압록강(鴨綠江) 의주(義州), 북에는 두만강(豆滿江) 경원(慶源) 이다.
단(壇)에는 다만 단을 둘러싼 담이 하나 있고, 단이 없으면 묘우(廟宇) 삼간(三間)이 있다.
명산 대천은, 동에는 치악산(雉嶽山) 원주(原州) 이요, 남에는 계룡산(鷄龍山) 공주(公州)ㆍ죽령산(竹嶺山) 단양(丹陽)ㆍ우불산(亏弗山) 울산(蔚山)ㆍ주흘산(主屹山) 문경(聞慶)ㆍ금성산(錦城山) 나주(羅州) 이요, 중부에는 목멱산(木覓山) 서울[都城] 안 이요, 서에는 오관산(五冠山) 장단(長湍) 과 우이산(牛耳山) 해주(海州) 이요, 북에는 감악산(紺嶽山) 적성(積城) 과 의관령(義舘嶺) 회양(淮陽) 이다.
이 밖에 또 서에 마니산(摩尼山) 강화(江華), 남에 한라산(漢拏山) 제주(濟州), 북에 백두산(白頭山) 갑산(甲山) 을 더 넣었다. 이상은 사전(祀典)에 추가해서 실린 것이다.
남에는 양진 명소(楊津溟所 명소는 수신(水神)에게 제사지내는 곳) 충주(忠州) 와 양진(楊津) 양주(楊州), 서에는 장산곶(長山串) 장연(長淵) 과 아사진송곶(阿斯津松串) 안악(安岳) 과 청천강(凊川江) 안주(安州) 구진익수(九津溺水 평양(平壤)), 북에는 덕진 명소(德津溟所) 회양(淮陽) 와 비류수(沸流水) 영흥(永興) 이다. 단(壇)이 없으면 묘우(廟宇) 삼간이 있다.
신좌(神座)는 북쪽에서 남으로 향해 있고, 중춘(仲春 음력 2월)과 중추(仲秋 음력 8월)에 제사를 지낸다. 1월에 먼저 원장제(元狀祭)를 행한다. 축문에는 국왕의 성과 이름을 일컫고, 악(樂)은 없으며, 천(川)ㆍ독(瀆)에는 축문과 폐백을 물에 가라앉힌다. 제물은 악(嶽)ㆍ해(海)에는 각각 그 지방의 토산물을 썼으며, 독에는 모두 흑색을 쓴다. 명산ㆍ대천의 축문에는 ‘국왕’이라 칭한다.
○ 인조 19년에 비로소 마니산에 제사를 지냈다.
○ 숙종 16년에 서흥현(瑞興縣) 황해도 서흥군 에 독질(毒疾)이 있어서 백성이 많이 갑자기 죽으므로, 임금이 친히 제문을 지어 관리를 보내 본도의 명산에 제사를 지냈다.
○ 가뭄이 심할 때에는 비 오기를 비는 망제(望祭)를 지낸다. 즉 북쪽 교외(郊外)로 나가서 악ㆍ해ㆍ독 및 모든 산천의 신위를 설치하고 각각 그 방위에서 모두 안을 향하여 망제를 한다. 기미년에 북단(北壇) 기우제(祈雨祭) 헌관 영풍군(靈豐君) 식(㵓)이 올린 소에, “돼지 한 마리의 제물로 악ㆍ독ㆍ산천 19신위를 향사하니 조각조각 잘라서 보기에 너무나 빈약합니다.” 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이와 같이 행한 지가 이미 오래되어 증설할 수 없습니다.” 하여, 증설하자는 논의가 드디어 그쳤다.
○ 계미년에 예조 판서 민진후(閔鎭厚)가 아뢰기를, “한라산은 해외의 명산으로 홀로 사전(祀典)에서 누락되었습니다.” 하니, 숙종이 명하여 대신에게 수의(收議)하게 하였다. 영의정 신 완(申琓)이 헌의(獻議)하기를, “명산ㆍ대천이 모두 사전에 실려 있는데 한라산만이 홀로 누락되었으니 예조의 계사(啓辭)에 이른바 《오례의(五禮儀)》가 완성되기 전에는 탐라가 아직 귀순하지 않은 때이므로, 이로 인해 누락된 것 같다는 것이 그럴 듯합니다. 사전에 추가해서 기재한다 해도 아마 거리낄 바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윤지완(尹趾完)은 헌의하기를, “본주[濟州] 계본(啓本)에 이른바, 《오례의》를 편찬ㆍ완성할 때에 제주는 순종하기도 하고 거역하기도 했다는 말은 고증할 만한 말이 아닙니다.혹 해외로 구별하여 내지와 다르다 하여 그런 것이 아닐는지요. 국전(國典)에 없는 것을 이제 새로 행하기는 어렵사오나, 다만 제주의 사세가 다른 모든 도(道)의 주(州)ㆍ군(郡)과는 다른 점이 있으니, 만일 본주로 하여금 춘추로 제후가 봉내(封內 제후가 맡아서 다스리고 있는 나라 안)의 산천에 제사하는 예(禮)와 같이 향사한다면 혹 무방할 것 같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전교하기를, “한라산이 해외의 명산으로 홀로 사전에 들지 않아 흠궐(欠闕)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영상의 논의에 의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 숙종이 온양 온천에 행행(行幸)하게 되니 예조에서 아뢰기를, “행행하실 때 경과하는 도중에 있는 명산ㆍ대천의 제사를 한강에는 오는 3월 3일에 행하고, 과천(果川) 관악산(冠岳山)과 직산(稷山) 성거산(聖居山)에는 각각 그곳에 주필(駐蹕)하시는 날에 설행하고, 온정(溫井)에는 8일에 설행하되 향축(香祝)과 폐백은 서울에서 내려 보내고, 신명에게 제물로 바칠 양(羊)이나 돼지 등의 희생(犧牲)은 그 도에서 바치도록 하옵소서.” 하니, 그대로 좇았다.
○ 영종 정해년에 좌상 한익모(韓翼謩)의 아룀으로 말미암아 영종이 명을 내리기를, “백두산의 망사(望祀)를 비백산(鼻白山)의 예에 따라 설행하라.” 하고, 갑산부(甲山府)에서 80리 되는 망덕산(望德山)에 제각(祭閣)을 세웠다.
○ 사방에 있는 명산과 해(海)와 독(瀆)의 제사는 그 의식이 대단히 존엄하였으니, 옛날에 이른바, 책명(冊命)에 천자의 이름이 있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런데 신이 듣자오니, 호남 인사들의 말이, ‘지리산(智異山)의 제사에 지방관이 직접 가서 제사지내는 것을 즐겨하지 아니하여, 교생(敎生)을 시켜서 대리로 행사하게 하고, 축사(祝辭)에 국왕이 삼가 신하 아무[某]를 보냈다.’라고 하옵는데, 교생이 헌관이 되면 마땅히 ‘삼가 신하 교생을 보내어……’라고 일컬을 것이니, 그 외람하고 뒤섞여서 불경(不敬)함이 심합니다. 이것은 비단 지방관의 죄일 뿐만 아니라 감사도 그 책임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오니, 이 뒤에도 만일 이 버릇을 계속한다면 감사와 수령에게 불경의 죄를 가하기로 하고, 제례를 마치고 각 도의 감사는 어느 관원 아무를 헌관으로 삼아 제사를 행한 사실을 즉시 계문하도록 하면, 묵은 폐단을 깨끗이 제거하게 될 것이며, 신(神)을 공경하는 예에도 거의 가할 것입니다. 《백헌집(白軒集》 경자년 차자
연려실기술 별집 제4권
 사전전고(祀典典故)
악(嶽 명산(名山))ㆍ바다ㆍ독(瀆 강하(江河))ㆍ산천(山川)

악(嶽)은, 남에는 지리산(智異山) 남원(南原)ㆍ중부에는 삼각산(三角山) 서울의 북쪽ㆍ서에는 송악산(松嶽山) 개성부(開城府)ㆍ북에는 비백산(鼻白山) 정평(定平) 이다.
바다(海)는, 동해(東海) 양양(襄陽)ㆍ남해(南海) 나주(羅州)ㆍ서해(西海) 풍천(豐川) 이다.
독(瀆)은, 남에는 웅진(熊津) 공주(公州) 과 가야진(伽倻津) 양산(梁山), 중부에는 한강(漢江) 서울의 남쪽, 서에는 덕진(德津) 장단(長湍) 과 평양강(平壤江) 평양 과 압록강(鴨綠江) 의주(義州), 북에는 두만강(豆滿江) 경원(慶源) 이다.
단(壇)에는 다만 단을 둘러싼 담이 하나 있고, 단이 없으면 묘우(廟宇) 삼간(三間)이 있다.
명산 대천은, 동에는 치악산(雉嶽山) 원주(原州) 이요, 남에는 계룡산(鷄龍山) 공주(公州)ㆍ죽령산(竹嶺山) 단양(丹陽)ㆍ우불산(亏弗山) 울산(蔚山)ㆍ주흘산(主屹山) 문경(聞慶)ㆍ금성산(錦城山) 나주(羅州) 이요, 중부에는 목멱산(木覓山) 서울[都城] 안 이요, 서에는 오관산(五冠山) 장단(長湍) 과 우이산(牛耳山) 해주(海州) 이요, 북에는 감악산(紺嶽山) 적성(積城) 과 의관령(義舘嶺) 회양(淮陽) 이다.
이 밖에 또 서에 마니산(摩尼山) 강화(江華), 남에 한라산(漢拏山) 제주(濟州), 북에 백두산(白頭山) 갑산(甲山) 을 더 넣었다. 이상은 사전(祀典)에 추가해서 실린 것이다.
남에는 양진 명소(楊津溟所 명소는 수신(水神)에게 제사지내는 곳) 충주(忠州) 와 양진(楊津) 양주(楊州), 서에는 장산곶(長山串) 장연(長淵) 과 아사진송곶(阿斯津松串) 안악(安岳) 과 청천강(凊川江) 안주(安州) 구진익수(九津溺水 평양(平壤)), 북에는 덕진 명소(德津溟所) 회양(淮陽) 와 비류수(沸流水) 영흥(永興) 이다. 단(壇)이 없으면 묘우(廟宇) 삼간이 있다.
신좌(神座)는 북쪽에서 남으로 향해 있고, 중춘(仲春 음력 2월)과 중추(仲秋 음력 8월)에 제사를 지낸다. 1월에 먼저 원장제(元狀祭)를 행한다. 축문에는 국왕의 성과 이름을 일컫고, 악(樂)은 없으며, 천(川)ㆍ독(瀆)에는 축문과 폐백을 물에 가라앉힌다. 제물은 악(嶽)ㆍ해(海)에는 각각 그 지방의 토산물을 썼으며, 독에는 모두 흑색을 쓴다. 명산ㆍ대천의 축문에는 ‘국왕’이라 칭한다.
○ 인조 19년에 비로소 마니산에 제사를 지냈다.
○ 숙종 16년에 서흥현(瑞興縣) 황해도 서흥군 에 독질(毒疾)이 있어서 백성이 많이 갑자기 죽으므로, 임금이 친히 제문을 지어 관리를 보내 본도의 명산에 제사를 지냈다.
○ 가뭄이 심할 때에는 비 오기를 비는 망제(望祭)를 지낸다. 즉 북쪽 교외(郊外)로 나가서 악ㆍ해ㆍ독 및 모든 산천의 신위를 설치하고 각각 그 방위에서 모두 안을 향하여 망제를 한다. 기미년에 북단(北壇) 기우제(祈雨祭) 헌관 영풍군(靈豐君) 식(㵓)이 올린 소에, “돼지 한 마리의 제물로 악ㆍ독ㆍ산천 19신위를 향사하니 조각조각 잘라서 보기에 너무나 빈약합니다.” 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이와 같이 행한 지가 이미 오래되어 증설할 수 없습니다.” 하여, 증설하자는 논의가 드디어 그쳤다.
○ 계미년에 예조 판서 민진후(閔鎭厚)가 아뢰기를, “한라산은 해외의 명산으로 홀로 사전(祀典)에서 누락되었습니다.” 하니, 숙종이 명하여 대신에게 수의(收議)하게 하였다. 영의정 신 완(申琓)이 헌의(獻議)하기를, “명산ㆍ대천이 모두 사전에 실려 있는데 한라산만이 홀로 누락되었으니 예조의 계사(啓辭)에 이른바 《오례의(五禮儀)》가 완성되기 전에는 탐라가 아직 귀순하지 않은 때이므로, 이로 인해 누락된 것 같다는 것이 그럴 듯합니다. 사전에 추가해서 기재한다 해도 아마 거리낄 바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윤지완(尹趾完)은 헌의하기를, “본주[濟州] 계본(啓本)에 이른바, 《오례의》를 편찬ㆍ완성할 때에 제주는 순종하기도 하고 거역하기도 했다는 말은 고증할 만한 말이 아닙니다.혹 해외로 구별하여 내지와 다르다 하여 그런 것이 아닐는지요. 국전(國典)에 없는 것을 이제 새로 행하기는 어렵사오나, 다만 제주의 사세가 다른 모든 도(道)의 주(州)ㆍ군(郡)과는 다른 점이 있으니, 만일 본주로 하여금 춘추로 제후가 봉내(封內 제후가 맡아서 다스리고 있는 나라 안)의 산천에 제사하는 예(禮)와 같이 향사한다면 혹 무방할 것 같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전교하기를, “한라산이 해외의 명산으로 홀로 사전에 들지 않아 흠궐(欠闕)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영상의 논의에 의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 숙종이 온양 온천에 행행(行幸)하게 되니 예조에서 아뢰기를, “행행하실 때 경과하는 도중에 있는 명산ㆍ대천의 제사를 한강에는 오는 3월 3일에 행하고, 과천(果川) 관악산(冠岳山)과 직산(稷山) 성거산(聖居山)에는 각각 그곳에 주필(駐蹕)하시는 날에 설행하고, 온정(溫井)에는 8일에 설행하되 향축(香祝)과 폐백은 서울에서 내려 보내고, 신명에게 제물로 바칠 양(羊)이나 돼지 등의 희생(犧牲)은 그 도에서 바치도록 하옵소서.” 하니, 그대로 좇았다.
○ 영종 정해년에 좌상 한익모(韓翼謩)의 아룀으로 말미암아 영종이 명을 내리기를, “백두산의 망사(望祀)를 비백산(鼻白山)의 예에 따라 설행하라.” 하고, 갑산부(甲山府)에서 80리 되는 망덕산(望德山)에 제각(祭閣)을 세웠다.
○ 사방에 있는 명산과 해(海)와 독(瀆)의 제사는 그 의식이 대단히 존엄하였으니, 옛날에 이른바, 책명(冊命)에 천자의 이름이 있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런데 신이 듣자오니, 호남 인사들의 말이, ‘지리산(智異山)의 제사에 지방관이 직접 가서 제사지내는 것을 즐겨하지 아니하여, 교생(敎生)을 시켜서 대리로 행사하게 하고, 축사(祝辭)에 국왕이 삼가 신하 아무[某]를 보냈다.’라고 하옵는데, 교생이 헌관이 되면 마땅히 ‘삼가 신하 교생을 보내어……’라고 일컬을 것이니, 그 외람하고 뒤섞여서 불경(不敬)함이 심합니다. 이것은 비단 지방관의 죄일 뿐만 아니라 감사도 그 책임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오니, 이 뒤에도 만일 이 버릇을 계속한다면 감사와 수령에게 불경의 죄를 가하기로 하고, 제례를 마치고 각 도의 감사는 어느 관원 아무를 헌관으로 삼아 제사를 행한 사실을 즉시 계문하도록 하면, 묵은 폐단을 깨끗이 제거하게 될 것이며, 신(神)을 공경하는 예에도 거의 가할 것입니다. 《백헌집(白軒集》 경자년 차자
연려실기술 별집 제4권
 사전전고(祀典典故)
악(嶽 명산(名山))ㆍ바다ㆍ독(瀆 강하(江河))ㆍ산천(山川)

악(嶽)은, 남에는 지리산(智異山) 남원(南原)ㆍ중부에는 삼각산(三角山) 서울의 북쪽ㆍ서에는 송악산(松嶽山) 개성부(開城府)ㆍ북에는 비백산(鼻白山) 정평(定平) 이다.
바다(海)는, 동해(東海) 양양(襄陽)ㆍ남해(南海) 나주(羅州)ㆍ서해(西海) 풍천(豐川) 이다.
독(瀆)은, 남에는 웅진(熊津) 공주(公州) 과 가야진(伽倻津) 양산(梁山), 중부에는 한강(漢江) 서울의 남쪽, 서에는 덕진(德津) 장단(長湍) 과 평양강(平壤江) 평양 과 압록강(鴨綠江) 의주(義州), 북에는 두만강(豆滿江) 경원(慶源) 이다.
단(壇)에는 다만 단을 둘러싼 담이 하나 있고, 단이 없으면 묘우(廟宇) 삼간(三間)이 있다.
명산 대천은, 동에는 치악산(雉嶽山) 원주(原州) 이요, 남에는 계룡산(鷄龍山) 공주(公州)ㆍ죽령산(竹嶺山) 단양(丹陽)ㆍ우불산(亏弗山) 울산(蔚山)ㆍ주흘산(主屹山) 문경(聞慶)ㆍ금성산(錦城山) 나주(羅州) 이요, 중부에는 목멱산(木覓山) 서울[都城] 안 이요, 서에는 오관산(五冠山) 장단(長湍) 과 우이산(牛耳山) 해주(海州) 이요, 북에는 감악산(紺嶽山) 적성(積城) 과 의관령(義舘嶺) 회양(淮陽) 이다.
이 밖에 또 서에 마니산(摩尼山) 강화(江華), 남에 한라산(漢拏山) 제주(濟州), 북에 백두산(白頭山) 갑산(甲山) 을 더 넣었다. 이상은 사전(祀典)에 추가해서 실린 것이다.
남에는 양진 명소(楊津溟所 명소는 수신(水神)에게 제사지내는 곳) 충주(忠州) 와 양진(楊津) 양주(楊州), 서에는 장산곶(長山串) 장연(長淵) 과 아사진송곶(阿斯津松串) 안악(安岳) 과 청천강(凊川江) 안주(安州) 구진익수(九津溺水 평양(平壤)), 북에는 덕진 명소(德津溟所) 회양(淮陽) 와 비류수(沸流水) 영흥(永興) 이다. 단(壇)이 없으면 묘우(廟宇) 삼간이 있다.
신좌(神座)는 북쪽에서 남으로 향해 있고, 중춘(仲春 음력 2월)과 중추(仲秋 음력 8월)에 제사를 지낸다. 1월에 먼저 원장제(元狀祭)를 행한다. 축문에는 국왕의 성과 이름을 일컫고, 악(樂)은 없으며, 천(川)ㆍ독(瀆)에는 축문과 폐백을 물에 가라앉힌다. 제물은 악(嶽)ㆍ해(海)에는 각각 그 지방의 토산물을 썼으며, 독에는 모두 흑색을 쓴다. 명산ㆍ대천의 축문에는 ‘국왕’이라 칭한다.
○ 인조 19년에 비로소 마니산에 제사를 지냈다.
○ 숙종 16년에 서흥현(瑞興縣) 황해도 서흥군 에 독질(毒疾)이 있어서 백성이 많이 갑자기 죽으므로, 임금이 친히 제문을 지어 관리를 보내 본도의 명산에 제사를 지냈다.
○ 가뭄이 심할 때에는 비 오기를 비는 망제(望祭)를 지낸다. 즉 북쪽 교외(郊外)로 나가서 악ㆍ해ㆍ독 및 모든 산천의 신위를 설치하고 각각 그 방위에서 모두 안을 향하여 망제를 한다. 기미년에 북단(北壇) 기우제(祈雨祭) 헌관 영풍군(靈豐君) 식(㵓)이 올린 소에, “돼지 한 마리의 제물로 악ㆍ독ㆍ산천 19신위를 향사하니 조각조각 잘라서 보기에 너무나 빈약합니다.” 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이와 같이 행한 지가 이미 오래되어 증설할 수 없습니다.” 하여, 증설하자는 논의가 드디어 그쳤다.
○ 계미년에 예조 판서 민진후(閔鎭厚)가 아뢰기를, “한라산은 해외의 명산으로 홀로 사전(祀典)에서 누락되었습니다.” 하니, 숙종이 명하여 대신에게 수의(收議)하게 하였다. 영의정 신 완(申琓)이 헌의(獻議)하기를, “명산ㆍ대천이 모두 사전에 실려 있는데 한라산만이 홀로 누락되었으니 예조의 계사(啓辭)에 이른바 《오례의(五禮儀)》가 완성되기 전에는 탐라가 아직 귀순하지 않은 때이므로, 이로 인해 누락된 것 같다는 것이 그럴 듯합니다. 사전에 추가해서 기재한다 해도 아마 거리낄 바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윤지완(尹趾完)은 헌의하기를, “본주[濟州] 계본(啓本)에 이른바, 《오례의》를 편찬ㆍ완성할 때에 제주는 순종하기도 하고 거역하기도 했다는 말은 고증할 만한 말이 아닙니다.혹 해외로 구별하여 내지와 다르다 하여 그런 것이 아닐는지요. 국전(國典)에 없는 것을 이제 새로 행하기는 어렵사오나, 다만 제주의 사세가 다른 모든 도(道)의 주(州)ㆍ군(郡)과는 다른 점이 있으니, 만일 본주로 하여금 춘추로 제후가 봉내(封內 제후가 맡아서 다스리고 있는 나라 안)의 산천에 제사하는 예(禮)와 같이 향사한다면 혹 무방할 것 같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전교하기를, “한라산이 해외의 명산으로 홀로 사전에 들지 않아 흠궐(欠闕)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영상의 논의에 의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 숙종이 온양 온천에 행행(行幸)하게 되니 예조에서 아뢰기를, “행행하실 때 경과하는 도중에 있는 명산ㆍ대천의 제사를 한강에는 오는 3월 3일에 행하고, 과천(果川) 관악산(冠岳山)과 직산(稷山) 성거산(聖居山)에는 각각 그곳에 주필(駐蹕)하시는 날에 설행하고, 온정(溫井)에는 8일에 설행하되 향축(香祝)과 폐백은 서울에서 내려 보내고, 신명에게 제물로 바칠 양(羊)이나 돼지 등의 희생(犧牲)은 그 도에서 바치도록 하옵소서.” 하니, 그대로 좇았다.
○ 영종 정해년에 좌상 한익모(韓翼謩)의 아룀으로 말미암아 영종이 명을 내리기를, “백두산의 망사(望祀)를 비백산(鼻白山)의 예에 따라 설행하라.” 하고, 갑산부(甲山府)에서 80리 되는 망덕산(望德山)에 제각(祭閣)을 세웠다.
○ 사방에 있는 명산과 해(海)와 독(瀆)의 제사는 그 의식이 대단히 존엄하였으니, 옛날에 이른바, 책명(冊命)에 천자의 이름이 있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런데 신이 듣자오니, 호남 인사들의 말이, ‘지리산(智異山)의 제사에 지방관이 직접 가서 제사지내는 것을 즐겨하지 아니하여, 교생(敎生)을 시켜서 대리로 행사하게 하고, 축사(祝辭)에 국왕이 삼가 신하 아무[某]를 보냈다.’라고 하옵는데, 교생이 헌관이 되면 마땅히 ‘삼가 신하 교생을 보내어……’라고 일컬을 것이니, 그 외람하고 뒤섞여서 불경(不敬)함이 심합니다. 이것은 비단 지방관의 죄일 뿐만 아니라 감사도 그 책임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오니, 이 뒤에도 만일 이 버릇을 계속한다면 감사와 수령에게 불경의 죄를 가하기로 하고, 제례를 마치고 각 도의 감사는 어느 관원 아무를 헌관으로 삼아 제사를 행한 사실을 즉시 계문하도록 하면, 묵은 폐단을 깨끗이 제거하게 될 것이며, 신(神)을 공경하는 예에도 거의 가할 것입니다. 《백헌집(白軒集》 경자년 차자
         
 연려실기술 별집 제4권
 사전전고(祀典典故)
여러 제단[諸壇]

원단(圓壇)은 한강 서동(西洞)에 있으며, 이조 개국 초기에 하늘을 숭배하여 제사를 지내던 곳이었는데, 뒤에 드디어 폐지하고 거행하지 아니하였다.
○ 태조(太祖)와 태종(太宗) 때에 비오기를 빌기도 하고, 혹은 곡식이 잘 익기를 빌기도 하였으며, 세조가 일찍이 친히 제사한 일도 있으나, 그 후에 드디어 거행하지 아니하였다.
태종 신묘년에 정부에서 말하기를, “천자가 아니면 하늘에 제사할 수 없다.” 하므로 원구단(圓丘壇)을 파하였다. 혹은 말하기를, “진(秦) 나라는 서쪽에 있으므로 다만 서방의 백제(白帝)에게만 제사를 지냈다. 우리나라는 동쪽에 있으니, 또한 동방의 청제(靑帝)만을 제사지내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여, 드디어 다시 남쪽 교외에 원단을 쌓았다.
임진년에 예조에서 글을 올려 아뢰기를, “삼가 《예기》를 상고하오니 공자가 말씀하기를, ‘노(魯) 나라의 교제(郊禘 제천(祭天))는 예가 아니다. 천자가 아니면 감히 하지 못하는 제사를 노 나라가 행하고 있으니 주공(周公)의 법도가 쇠퇴했도다.’ 하였습니다. 《춘추》 호씨전에 말하기를, ‘서인(庶人)은 오사(五祀)를 제사하지 못하고, 대부는 사직(社稷)을 제사하지 못하며, 제후는 천지(天地)를 제사하지 못한다.’ 하였으니, 이것은 고의로 차등을 둔 것이 아니요, 대개 바꿀 수 없는 정리(定理)입니다. 바라옵건대, 원단의 제사를 혁파하여 국가 만대의 법전을 바로하옵소서.” 하였다. 이에 태종이 명하여 파하였다.
을미년에 영상 유정현(柳廷顯)을 보내서 원단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이보다 앞서 교사(郊祀 하늘에게 드리는 제사)는 예문에 의거하여 폐지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가뭄이 심하였다. 예문관 제학 변계량(卞季良)이 소를 올려 아뢰기를, “제후로서 하늘에 제사한 것은 노 나라와 기(杞) 나라ㆍ송(宋) 나라입니다. 선유(先儒)들이 《논어》에 주를 내기를, ‘무우(舞雩)는 하늘에 제사지내 비오기를 비는 곳이다.’ 하였으니, 옛사람들이 비오기를 빌 때 반드시 하늘에 제사한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나라는 단군께서 하늘로부터 내려오셨으니, 중국 천자가 분봉(分封)한 것이 아닙니다. 명 나라 태조 고황제(高皇帝)가 보낸 조서에 우리나라의 지난 일을 모두 말하였으니, 또 하늘에 제사한 일도 반드시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이에 ‘의식(儀式)은 우리나라 본래의 풍속을 따르고, 법은 옛날부터 전해온 제도를 지키라.’고 허락하였으니, 그 뜻이 대개 해외의 나라는 처음에 명을 하늘에서 받았으니 그 하늘을 제사한 예가 매우 오래되어 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남교(南郊)에서 하늘에 제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태종이 그대로 좇고 제문을 변계량에게 지어 올리라고 명하였다. 그 제문의 대략에, “성인(聖人)이 예법을 제정하시니, 오직 천자라야 하늘에 제사할 수 있고, 소국(小國)의 임금은 감히 제사하지 못하게 되어 있으므로 근세에 와서 원단의 제사를 정지한 것은 대개 이 때문입니다. 어찌 일호라도 불경한 생각이 있어서이겠습니까.” 하였다.
영성단(靈星壇)은 남교에 있다. 입추(立秋) 후 진일(辰日)에 제사를 지냈는데, 3품 관리가 4배하였다. 제사를 마치고는 다만 축(祝)과 제물을 불에 살랐는데 지금은 폐지하였다.
노인 성단(老人星壇)은 남교에 있는데, 제사를 지내는 법은 영성단과 같았으며, 추분에 제사를 지냈는데 지금은 폐지하였다.
풍운뇌우단(風雲雷雨壇) 산천의 신령과 마을 터를 지키는 성황신(城隍神)은 같은 단에 모신다. 은 남교 청파역동(靑坡驛洞) 난송(亂松) 사이 에 있다. 신좌(神座)는 그 가운데 남향하여 있는데, 산천신은 왼편에 있고, 성황신은 오른편에 있다. 모두 남향하여 있다. 중춘(仲春)과 중추에 제사를 지내고, 축문에는 조선국왕 신 아무라는 성(姓)ㆍ명[諱]을 호칭한다. 산천에는 국왕의 성ㆍ휘를 호칭하고, 황신에는 ‘국왕’이라고만 칭한다.
○ 숙종 정축년 23년 에 임금이 풍우뇌우단에 비를 비는 제사를 지낼 때에 전교를 내려 이르기를, “옛날에 명 나라 태조(太祖)가 날이 가무는 것을 민망히 여기고 대단히 염려하여, 도보로 산천단(山川壇)에 나가기까지 하였는데도 그 피로를 스스로 잊었다 한다. 나는 일찍이 교단(郊壇)에 거동할 때, 단의 문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서 수레[輿]를 내렸으니, 그 걸어간 뜻에 비하여 볼때 어찌 어그러진 것이 아니겠는가. 내 마음에 진실로 미안하다. 이번에는 예조에 명하여 수레에서 내리는 곳을 조금 먼 곳에 설치하게 하여 내 마음을 조금 편케 하라.” 하였다.
○ 45년 기해 에 제주 목사 정동후(鄭東後)가 장계하여 아뢰기를, “본도에 본래 풍우뇌우단이 있어 천여 년을 내려오면서 경건하게 향사를 받들어 왔습니다. 임오년에 이형상(李衡祥)이 제주 목사가 되어서는, 주ㆍ현관(州縣官)의 본분으로서는 감히 하지 못할 일이라고 하여 장계를 올려서 철폐하였던 것입니다. 그 후부터는 기후가 고르지 못하고 재해가 자주 일어났으니, 만일 옛날과 같이 다시 풍우뇌우단을 설치하고, 한라산에 제사를 지내는 의식에 따라 향과 축문을 내려 보내주시면 본분에 감히 하지 못할 일을 한다는 혐의도 없을 것이며, 또 백성들의 의혹도 풀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명하여 대신에게 의논하게 하고 이에 좇았다.
○ 제성단(祭星壇)은 함흥부(咸興府) 남쪽 40리 되는 도련포(都連逋)에 있다. 태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창설하고 태백성(太白星)을 제사한 곳이다. 개국 초기에는 해마다 단오날에 궁중 대관(大官)을 보내 임금의 옷과 안장 갖춘 말로 치제(致祭)하다가, 그 후부터는 본궁(本宮)에서 특별히 사람을 선택해 보내 의장을 설치하고 치제하였다.
○ 선농단(先農壇)은 동교(東郊) 동대문 밖 보제원 동동(普濟院東洞)에 관경대(觀耕臺)가 있다. 에 있다.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를 향사하였는데, 신좌(神座)에 신농씨는 북에서 남으로 향해 있고, 후직씨는 동에서 서로 향해 있다. 경칩 후 첫 해일[吉亥]에 향사한다.
○ 서적전(西籍田)은 개성부(開城府) 동쪽 20리 되는 곳에 있다. 마을 이름은 ‘전농(典農)’이라 하고, 관가(官家)의 건물이 있는데, 이름하기를, ‘형향각(馨香閣)’이라 한다. 창고가 있어 제사에 쓸 각가지 곡식을 저장한다. 본래 고려 때의 교채 공전(郊采公田 공신에게 지급할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교외에 설치한 공전)으로서 조선에 와서 이내 적전(籍田 임금이 친경하는 토지)으로 삼고, 적전에 매어 있는 노비를 시켜 경작하게 하여, 그 수확한 곡식으로 종묘ㆍ사직 이하 일년간 정례적으로 행하는 제향의 자성(粢盛 제기에 담는 곡식)과 종묘에 천신(薦新)하는 6곡(六穀)을 바치게 하였다.
○ 동적전(東籍田)은 동교 10리 되는 곳에 있는데 마을 이름은 역시 ‘전농’이라 한다. 관청 건물이 있는데, 이름하여 ‘필분각(苾芬閣)’이라 하고, 창고가 있어 제사에 쓸 각가지 곡식을 저장하였다가, 종묘 이하 수시로 행하는 별제(別祭)의 자성과 종묘에 천신하는 6곡을 바치게 하였다.
○ 선잠단(先蠶壇)은 동교 동소문(東小門) 밖 에 있으며, 서릉씨(西陵氏 잠신(蠶神))를 향사하였는데 음력 3월 첫 사(巳)일에 향사한다.
○ 성종 8년 3월에 선공감(繕工監)에서 창덕궁(昌德宮) 후원에 채상단(採桑壇)을 축조하고는 중군전(中宮殿)의 친잠례(親蠶禮)를 행하고, 이내 선정전(宣政殿)에 임어하여 내외명부의 하례를 받고, 백관도 연영문(延英門)에서 전문(箋文)을 올리고, 하례를 드렸다. 이보다 앞서 예조에서 아뢰기를, “3월 2일은 곧 첫 사일[吉巳]이나 뽕잎이 아직 피지 않았으니, 다시 3월 안의 사일로 날을 택하여 행하기를 청합니다.” 하고, 또, “두씨(杜氏)의 《통전(通典)》황후친잠의(皇后親蠶儀)에는 궁에서 나가고 돌아올 때와 단에 오르내릴 때에 음악을 연주한다 하였고, 《송사(宋史)》의 친잠의에는 악을 연주한다는 것이 없으나, 《통전》의 옛 제도에 의하기를 청합니다.” 하고, 또, “황후의 친잠복(親蠶服)은 ‘국의(鞠衣)’라 하옵는데, 《예기》에, ‘국의를 선제(先帝)에 바친다.’ 하고, 주(註)에 이르기를 ‘옷 빛깔을 국화의 누른 빛과 같이하는 것은 뽕잎의 움이 틀 때의 빛깔을 상징하는 것이다.’ 하였으니, 왕비의 친잠하실 때의 옷은 국의(鞠衣)로 하옵기를 청합니다.” 하여, 임금이 그대로 좇았다.
○ 우단(雩壇)은 동대문 밖에 있다. 구망씨(句芒氏) 목정(木正)ㆍ축융씨(祝融氏) 화정(火正)ㆍ후토씨(后土氏) 토정(土正)ㆍ욕수씨(蓐收氏) 금정(金正)ㆍ현명씨(玄冥氏) 수정(水正)ㆍ후직씨(后稷氏)를 향사하였는데, 맹하(孟夏 음력 4월)에 제사를 지낸다.
○ 기우제(祈雨祭)는 날을 가려서 지내지 않았다. 그러나 감응이 있으면 입추 후에 사례하는 보사(報祀)를 지냈다.
○ 현종 원년 7월에 심한 가뭄이 계속되었다. 나라 제도에는, 입추 후에는 비를 비는 일이 없었으나. 이에 이르러서는 특별히 기우제를 거행하였다.
○ 영조 기미년에 옛날부터 내려오는 전례에는 우단에 임금이 친제를 행한 일이 없었으나, 이때에 와서는 《주례(周禮)》의 ‘용이 나타나면 기우제를 지낸다.’는 뜻을 준행하여 5월에 우단을 친제하였더니, 그 다음날에 비가 왔다.
○ 기우제는 12차(次)에 걸쳐 행하기로 정하였는데, 제일 첫 번째는 삼각산(三角山)과 목멱산(木覓山)과 한강에서 행하고, 두 번째는 용산강(龍山江)과 저자도(楮子島)에서 행하며, 세 번째는 산천의 우단[雩祀]에 제사지내고, 네 번째는 사직과 북교(北郊)에서 행하며, 다섯 번째는 종묘에서 행하고, 여섯 번째는 삼각산과 목멱산과 한강에서 행하며, 일곱 번째는 용산강과 저자도에서 행하고, 여덟 번째는 산천의 우단에서 행하며, 아홉 번째는 북교와 모화관(慕華館)에서 동자(童子)의 기도와 아울러 행하고, 열 번째는 사직과 경회루에서 동자의 기도와 아울러 행하며, 열한 번째는 종묘와 춘당대(春塘臺)에서 동자의 기도와 아울러 행하고, 열두 번째는 5방(五方) 토룡제(土龍祭)를 행한다. 동단(東壇은 선농단(先農壇) 곁에 있고, 남단(南壇)은 한강 곁에 있으며, 중앙단(中央壇)은 종각(鐘閣) 곁에 있고, 서단(西壇)은 양화도(楊花渡) 곁에 있으며, 북단(北壇)은 북교의 여단(厲壇) 곁에 있다.
○ 영제(禜祭)는 오래도록 장마가 있을 때에 서울의 사문(四門)에 나아가 다락 위에서 날이 개기를 비는 제사를 행한다. 옛날에는 문 안에서 행하였는데, 동문(東門)의 수침(水沉)으로 말미암아 지금은 다락 위에서 행한다.
○ 사한단(司寒壇)은 동대문 밖에 있는 빙실(氷室) 북쪽에 있다. 현명씨(玄冥氏)를 향사하는데, 12월에(음력) 얼음을 저장할 때와 춘분날 빙고의 문을 열 때에 제사를 행한다.
○ 영종 정해년에 하교하기를, “현명씨는 또 우단(雩壇) 향사의 제5위인데, 우단에는 임금이 이름을 쓰는데, 이 제사에는 서명이 없으니 같은 신에 대하여서 어찌 제도가 다르겠는가.” 하고, 명하여 대신 서명하게 하고 축문에는 현명 아래에 ‘씨(氏)’ 자를 첨가하라 하여 곧 정식이 되었다.
○ 마조단(馬祖壇)은 동문 밖에 있다. 마조 《주례(周禮)》의 주(註)에 이르기를, ‘천사성(天駟星)이다. 방성(房星)이 용마(龍馬)가 된 것이다.’ 하였다. 를 향사하였는데, 중춘(仲春) 보름 절기가 지난 후 강일(剛日)에 제사를 지내다가 지금은 폐지하였다.
○ 현종 10년에 사복시(司僕寺)에서 아뢰기를, “마조 등의 제사를 어느 때부터 폐지하였는지는 알지 못하오나, 전관목장(箭串牧場)에 세 곳의 축단(築壇)이 있으므로 시속에서 그 이름을 ‘마보단(馬步壇)’이라 하옵는데, 그 기지터가 완연하게 보입니다. 이제 중춘의 달이요, 또 말이 병에 잘 걸리는 날[馬疫之日]도 닥쳐왔으니, 마조제(馬祖祭)를 설행하기를 청하나이다.” 하니, 그대로 좇았다.
○ 영종 8년에 사복시에서 말이 마역에 전염되어 많이 죽는다고 마조제를 설행하기를 청하여 그대로 좇았다.
○ 선목단(先牧壇)ㆍ마사단(馬社壇)ㆍ마보단(馬步壇)은 동대문 밖에 있다. 선목 《주례》주에는 ‘맨 처음에 말을 기른자’라 한다. 과 마사 맨 처음에 말을 탄 자라 한다. 와 마보 말을 해치는 귀신 를 향사하였는데, 중하(仲夏 음력 5월)의 중간 절후를 지낸 후, 강일(剛日)에 선목에 제사를 지내고, 중추(仲秋)의 중간 절후를 지낸 후 강일에 마사에 제사를 지내고, 중동(仲冬)의 중간 절후를 지낸 후 강일에 마보에 제사를 설행하였었는데 지금은 폐지하였다.
○ 영종 기사년에 우역(牛疫)의 전염이 심하여 전관목장 안에 단을 쌓고 선목에 제사지냈다.
○ 마제단(禡祭壇)은 동북교(東北郊)에 있으며, 치우신(蚩尤神)을 향사하였는데, 강무(講武)하기 하루 전날에 제사를 지낸다. 신위에는 웅석(熊席)을 깔고, 활고 화살을 앞에 두고 활꽂이[弰]를 뒤에 세우고, 큰 기[大旗] 두 개를 남문 밖에 세웠었다. 지금은 폐지하였다.
○ 포단(酺壇)은 마보와 단을 같이하고 포신(酺神) 《주례》주에, ‘인물에게 재해를 주는 신’이라 한다. 을 향사하는데 제사는 일정한 날이 없고, 황충(蝗虫)과 명충(螟虫)의 피해가 있으면 제사지낸다.
○ 여단(厲壇)은 북교에 있는데, 성황신(城隍神)과 주인 없는 귀신을 향사한다.
○ 봄철에는 청명날에, 가을에는 7월 15일에, 겨울에는 10월 1일에 여제(厲祭)를 지낸다. 3일 전에 성황단에 고하는 축문에 이르기를, “장차 모월 모일에 북교에 단을 설치하고, 이 구역 안[闔境]의 모든 주인 없는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니, 신의 힘을 입고자 하옵니다. 주인 없는 모든 귀신을 모두 불러모아 여단으로 가도록 하옵소서.”라고 한다. 여제에는 성황신의 자리는 단위에 남향하여 마련하고 제사받지 못하는 귀신은 단 아래 좌우로 서로 향하게 한다.
○ 개국 당초에 권근(權近)이 임금에게 글을 올려 명 나라의 법에 의하여 여귀(癘鬼)에 제사를 지내고, 이것을 ‘여제’라 하였다. 모든 고을에 이르기까지 모두 단을 마련하고 제사를 지냈다. 《대동운옥(大東韻玉)》
○ 권근이 올린 소의 대략에, “옛날부터 무릇 백성 중에 공이 있는 자와 죽음으로써 나라 일에 힘을 다한 자에게는 치제(致祭)하지 아니한 때가 없으며, 또한 옛날의 제왕(帝王)으로 자손이 없어서 제사를 받지 못하는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태려(泰癘)와 국려(國癘)의 법이 있습니다. 지금 홍무(洪武)의 예법은 그 법이 매우 구비되어 있으므로, 우리나라 조정의 제례도 모두 명 나라의 예법을 따르고 있는데, 오직 이 여제 한 가지의 일만은 홀로 거행하지 아니하니, 귀로 듣고 눈으로 볼 수 없는 은미한 속에서 혹은 원통한 감정을 품고 있을 것이며, 혹은 분한 원한을 품고 있을 것이니, 그것이 맺혀 흩어지지 않고 굶주려서 밥을 구하는 자(귀신)가 어찌 없겠습니까. 이것은 원기(怨氣)가 쌓여 질병이 생기고 화기가 상하여 변괴를 일으키기에 족할 것입니다. 무릇 무후한 귀신에게 제사지내는 여제의 법을 한결같이 홍무의 예제(禮制)에 따라 시행하옵소서.” 하였다. 수창궁에 화재가 있은 후 재해를 구하는 말을 올리라는 왕명에 응해 올린 소. 《양촌집(陽村集)》
○ 정종 2년에 여제단을 설치하고, 주ㆍ현에도 단을 설치하라고 명하였다.
○ 고려 때, 극성(棘城 황주(黃州)) 땅이 여러 번 병화를 겪었으므로 백골이 들[野]에 드러나 있어 날이 흐리고 비가 내리면, 귀신의 원통해 하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나고, 그 훈증한 기운이 역질을 일으키는 근원을 이루어, 역질이 점점 침투, 전염하여 황해도 일대의 백성이 많이 요사하므로, 국가에서 매년 춘추로 향축을 내려 제사지냈다. 문종 때에는 이 역질이 경기도에 침범하였으므로 임금이 걱정하여 친히 제문을 지어 관원을 보내서 제사를 지냈다. 제문은 문종고사조에 들어 있다.
○ 선조 정축년에 돌림병이 불길같이 성하게 일어나므로, 근신을 보내서 평안도와 황해도 양도에 여제를 행하였다.
○ 숙종 무인년에 임금이 친히 제문을 지어 중신을 보내 동ㆍ서ㆍ남 삼교(三郊)에 여제를 행하였고, 기묘년에는 근신을 동교ㆍ서교와 팔로에 나눠 보내 여제를 지냈는데, 개성(開城)과 강화(江華)는 남녀의 신위를 다르게 하였다.
영종 때에 또 여러 번 특별 여제를 행하였다.
○ 정충단(旌忠壇)은 진주(晉州) 촉석 강변(矗石江邊)에 있다. 임진왜란에 절사한 사람을 향사하는데, 해마다 춘추로 나라에서 향축을 내려 제사를 행한다.
○ 민충단(愍忠壇)은 하나는 서문 밖 홍제원(弘濟院) 곁에 있는데, 명 나라의 정동관군(征東官軍)의 제사를 지낸다. 위의 선무사(宣武祠)조에 상세하다. 하나는 평양 을밀대(乙密臺) 북쪽에 있다.
개성부와 벽제역(碧蹄驛)에 있었던 것은 지금도 상고할 수 없다.

[주D-001]강일(剛日) : 일진(日辰)은 갑ㆍ을ㆍ병ㆍ정 등 십간(十干)의 순서로 되는데, 갑ㆍ병ㆍ무 등은 강일(剛日)이요, 을ㆍ정ㆍ기 등은 유일(柔日)이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4권
 사전전고(祀典典故)
음사(淫祠)

고려 때에 덕적산(德積山)ㆍ백악산(白岳山)ㆍ송악산(松岳山)ㆍ목멱산(木覓山) 등에서 봄, 가을로 환시(宦寺)와 무당[巫張]이 여악(女樂)을 벌여 제사를 지내게 하였는데, 이 제사를 ‘기은(祈恩)’ 이라 한다. 태종이 이르기를, “신(神)은 예(禮)가 아니면 흠향하지 아니한다.” 하고, 예관(禮官)을 시켜 고전(古典)을 널리 상고한 뒤 이것을 없애고 조관(朝官)을 보내 향(香)을 갖고 가서 제사를 지내게 했다. 병조(兵曹)는 중방(重房)의 전례(前例)에 따라 해마다 축수재(祝壽齋)를 설행했는데, 임금이 이르기를, “길고 짧은 것은 명이 있는 것인데, 기도(祈禱)는 하여 무엇하느냐.” 하고, 드디어 모두 파해버렸다. 《국조보감》
○ 개성부(開城府)는 민속(民俗)이 신도(神道)를 좋아하여 송악산에 사당을 짓고 제사지냈다. 이 제사 이름을 ‘대왕제(大王祭)’라 불렀는데 전국에서 물결처럼 달려와서 지성으로 섬기는 바람에 경비의 소모가 한이 없었으며 남녀가 뒤섞이는 바람에 추문(醜聞)이 많이 생겼다. 명종 병인년에 유생들이 발분(發憤)하여 이 음사(淫祠)를 불태우고 잡신의 상(像)을 헐어버렸다. 왕대비(王大妃)가 중인(中人 환관)을 시켜 가서 말렸으나 유생이 듣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명을 내려 유생들을 금부(禁府)로 잡아다가 그 죄를 다스리려고 하자 조정의 신하들이 많이 간하고 성균관과 사학(四學)에서 상소하여 다투니 명을 내려 석방하였다. 《석담유사(石潭遺事)》
우리나라는 문물(文物)의 빛남이 볼 만하나 무당과 불상에 비는 오랑캐의 풍속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조종조(祖宗朝)로부터 임금이 병이 나 승려들과 무당들이 인정전(仁政殿)에서 경을 읽으면서 빌었고, 또 송악신사(松岳神祠)를 높여 더욱 극진히 숭봉하였다. 제사를 지낸 뒤에 무녀들이 잔치를 베풀면 개성 유수(開城留守)도 들어가 참여하여 무녀와 함께 노래와 춤을 추면서 조금도 괴이한 줄 몰랐다. 무당의 내왕과 신사(神祠)에 소용되는 집물(什物)은 모두 역참(驛站)을 통하여 관에서 공급하였다. 성종조에 이르러 처음 말하는 자가 있어 이를 폐지한 적이 있었는데, 중종 기묘년에 국속(國俗)이 크게 변하였다. 《상촌휘언(象村彙言)》
송악신사(松岳神祠)는 성종 때의 대신이 건의하여 엄금하게 하였으나 임금의 외척[戚里]과 귀족[貴家]들이 옛날 풍습을 답습하였고, 시정(市井)의 부상(富商)들이 호화롭게 차려서 한번 차리는 비용이 중류 가정 한 집 재산이 다 들어가는 정도였다. 문정왕후(文定王后) 때는 환관[中官]과 궁녀들의 왕래가 도로에 이어졌으며 왕실의 주방(廚房)이 바치는 것만도 적지 않았다. 여기에 모여든 남녀가 산골짜기를 메우고, 여러 날을 머물고 있어 추문이 적지 않게 있었다. 개성부에 사는 강 생원(生員)이 앞장서서 유생(儒生) 40여 명을 이끌고 가서 사당을 불사르고 상(像)과 시설을 깡그리 부수었다. 문정왕후는 진노(震怒)하여 모두 잡아다가 중죄를 가하려고 여러 날을 옥에 가두었으며, 유수 심수경(沈守慶)도 미리 막지 못하였다고 견책(譴責)을 당하였다. 삼사(三司)에서 번갈아 소장을 올려 석방하기를 청하였지만, 달이 넘어도 문정왕후의 진노가 풀리지 않더니, 명종께서 틈을 봐서 여러 번 간하자 비로소 석방을 허락하였다. 무당들은 ‘반드시 귀신의 벌이 있을 것’ 이라고 겁을 줬지만 그 뒤에 강씨는 아무런 재앙도 없이 오래 살았고, 유생들도 사마시(司馬試)와 문과(文科)에 오른 자가 적지 않자 사람들의 의혹이 비로소 풀렸다.
송악신사는 폐지된 지 몇 해 뒤에 차츰차츰 다시 세워졌다. 《송도기이(松都記異)》
○ 최영(崔瑩)이 죽은 혼신이 가장 영험(靈驗)이 있어 능히 화와 복, 재앙과 경사를 만들며, 만약 업신여기거나 불경한 자는 그 자리에서 즉시 죽는다 하여 시골 사람들이 겁을 먹고 제사를 엄숙하게 지냈다. 홍주(洪州) 삼봉(三峯)에 최영사(崔瑩祠)가 있다. 《미수기언(眉叟記言)》
○ 나주(羅州) 성황사(城隍祠)의 귀신이 매우 영험이 있어, 그 앞을 지나가는 자가 말에서 내리지 아니하면 즉시 탄 말이 죽는다는 것이다. 홍윤성(洪允成)이 그 고을 목사가 되었다. 하리(下吏)가 알려주었으나 말을 듣지 아니하고 말을 탄 채 지나가다가 얼마 못 가서 말이 죽어 넘어졌다. 윤성이 매우 화가 나서, 즉시 그 말을 잡고 술 한 동이(一盆)를 싣고 군졸들에게 명령하여 활과 화살과 칼과 도끼를 사당으로 갖고 가게 한 뒤에 귀신을 꾸짖어 말하기를, “네가 내 말을 죽인 것은 고기를 먹고 싶어 한 일일 것이다. 만일 먹지 않으면 내가 네 사당을 불 태우리라.” 하고, 드디어 성을 내어 그 사당을 불살라버리고 돌아왔다. 그 신사는 멀리 총사(叢祠)로 옮겼는데 그 후에 고을 사람이 혹 제사를 지내게 되면 그 귀신이 “먼저 홍 지주(洪地主)에게 청한 뒤에 제사지내라.”고 했다 한다. 이로부터 제사지내는 자는 반드시 윤성부터 지내게 되었다 하였다. 《오산설림(五山說林)》
○ 성종 2년에 전교하기를, “조종조에서는 무당이 성안에 살 수 없었는데, 근래는 금령(禁令)이 차츰 해이해졌다. 혹 섞여서 사는 자가 있으면 곧 성 밖으로 축출하라.” 하였다. 《국조전모(國朝典謨)》
○ 인순왕후(仁順王后)가 병환 중에 있을 때이다. 한 시녀(侍女)가 요망한 무당[妖巫 즉 사인(士人)의 딸로 종실(宗室) 요경(堯卿)의 처이다.]을 대내로 끌어들여 오로지 기도와 푸닥거리를 일삼고, 약은 쓰지 않다가 점점 더해서 승하하기에 이르렀으므로 사람들이 원통하고 분하게 여겼다. 삼사(三司)가 합동하여 시녀와 무당의 죄를 다스리기를 청했지만 임금이 따르지 않고 이르기를, “그 실상을 구명(究明)하면 사람들의 말과는 같지 않다.”고 했다. 여러 번 계청하자 비로소 옥관(獄官)에게 명하여 국문(鞫問)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석담일기》
○ 선조(宣祖)가 이이(李珥)에게 명하여 마니산(摩尼山) 초청사(醮靑祠)를 지어 올리라고 하였다. 이이가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전하께서 이미 그 잘못된 길[左道]임을 아시고 간관(諫官)에게는 지어 올리라고 강요하지 못하시고 소신(小臣)에게 명하시니, 이는 간관은 잘못된 도[左道]로써 임금을 섬길 수 없고, 강관(講官)은 잘못된 도로써 임금을 섬길 수 있다는 것입니까.” 하였다. 《조야기문(朝野記聞)》
○ 청풍군(淸風郡) 사람이 어디서 목상(木像)을 구하여 신으로 모시고 해마다 5, 6월간에 공관(公館)에 모시고 제사를 크게 떠벌리면 지방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김연수(金延壽) 첨지(僉知) 가 원으로 부임하여 무당과 앞장선 사람을 잡아다가 매를 때리고 그 목상을 불태워버린 뒤로, 요망스런 제사가 드디어 끊어졌다. 《패관잡기》
○ 판서 송천희(宋千喜)는 성품이 강직하고 과감하였다. 일찍이 영남의 관찰사로 있을 때에 어떤 무당이 부처님 제자로 자칭하면서 말하기를, “나는 병든 자를 낫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다.” 하자 온 도(道) 내 사람들이 그 요술(妖術)을 믿고 전하였다. 단골 중에는 그 무당의 요구를 채워주려다가 파산(破産)까지 하고도 싫어할 줄 모르는 자가 있었다. 천희가 듣고 화내어 말하기를, “제가 감히 내 지방에서 요술을 피워?” 하고 잡아다가 옥에 가두고 곤장을 쳐서 죽게 하니, 온 도민이 두려워했다. 《패관잡기(稗官雜記)》 천희의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 영종(영조) 21년에 명하여 맹제(盲祭)ㆍ무제(巫祭)ㆍ독경제(讀經祭)의 명칭을 모두 없애버렸다. 맹인기우(盲人祈雨)와 무녀기우(巫女祈雨) 및 이어(移御)할 때에 맹인독경제(盲人讀經祭) 등은 그 이름만 남고 없어진 지 오래인데도 오히려 봉상시(奉常寺) 제안(祭案)에 기록되어 있었는데, 모두 없애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