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7월 산행/2009.12.9 도봉산 무수골

조선4대 임금이신 세종대왕의 9男 영해군 묘역 탐방

아베베1 2009. 12. 11. 13:48

 

 

 

 

 

 

영해군파(세종대왕 9남) 약사

해군은 세종대왕의 9남이며 어머니는 신빈(愼嬪) 청주김씨(淸州金氏)이다. 어렸을 때부터
너그러웠고, 자라면서는 덕의와 절의가 있어 스승과 공부할 때는 화려함을 기뻐하지 않았다.
후손들에게 관인대도(寬仁大道)와 검소질박(儉素質朴)의 본을 보여 주었다.
영해군은 평산신씨를 부인으로 맞아 영춘군(永春君) · 길안도정(吉安都正) 2남과 딸 하나를 두었다. 43세에 별세하였으며 나라에서는 안도(安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묘소는 서울 도봉산 무수동에 있고 전북 남원시 사매면 대신리 소덕사(昭德祠)에는 영해군의
위패를 모셨다. 소덕사에서는 해마다 음력 5월 5일 기신제를 지내고 있으며 사당명은 공의 관계(官階)가 소덕대부(昭德大夫)이기 때문에 소덕사라고 일컫게 되었다.

장남 영춘군은 부친의 인덕을 바탕으로 효행이 지극해 왕실의 은총을 받았다. 영춘군의 차남
강녕군은 알뜰하게 가꿔진 꽃밭과 정결한 집을 가졌었는데 연산군의 내폐(內嬖)가 이 집을 탐내어 빼앗고자 했다. 그러나 강녕군은 불응하자 내폐의 고자질로 연산군은 크게 노해 주인과 가노를
붙잡아 가두고 문초했다. 이런 연유로 강녕군 부자와 여러 형제는 남해 섬으로 귀양살이를 갔다.
두어 달 뒤 중종반정으로 관작이 회복되었고, 중종대왕은 특별히 정국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으로 공훈록과 비문에 그 사적을 표기케 하고 <삼강행실록(三綱行實錄)>에도 기록토록 지시했다.
영춘군은 완천군(完川君) · 강녕군(江寧君) · 순성부정(蓴城副正) · 덕녕부정(德寧副正)의 4남과 딸 둘을 두었다. 품계는 승헌대부이고 시호는 화목을 이루었다는 뜻으로 `목성(穆成)'이다.
영해군의 산소 국내(局內) 오른쪽 묏부리 기슭엔 남곤(南袞)이 글을 짓고 김희수(金希壽)가 글씨를 쓴 신도비(서울특별시 문화재 제106호)가 서 있다.
차남 길안도정은 시산군(詩山君) · 청화수(淸化守) · 송계군(松溪君) · 은계군(銀溪君) · 벽계도정(碧溪都正) · 옥계군(玉溪君) 등 6남을 두었으나 옥계군은 외아들 운천군(雲川君)을 둔 뒤 후사가 없었다.

영해군의 장손 완천군의 동생인 강녕군과 종형제간 되는 시산군은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와
도학(道學)으로써 의리를 맺어 친히 사귀었다.
송나라 때 정자(程子) · 주자(朱子)가 왕에게 올렸던 글을 간행하여 중종대왕에게 봉사하였으며,
또 숭선정(嵩善正) · 장성수(長城守) 등과 연명으로 상소해 억울하게 수감된 문신 박상(朴祥) · 김정(金淨)을 석방시켰다. 그리고 문란한 여악(女樂)을 고쳐 주도록 극간도 했다.
시산군은 기묘사화로 두번째 수난을 겪으면서 신사무옥(辛巳誣獄)사건에 휘말려 살신성인하였다.
이렇게 영해군으로부터 3대손까지 큰 피해로 말미암아 생졸연대를 알 수 없고 묘소까지 실전되었다

( 자료출처  전주이씨 영해군파 자료 임)

 

  도봉산 주위에는 많은분의의 묘지가 있다

  방학동에는 조선 11대 임금이신 연산군 과 거창신씨 묘지 , 방학동 조선 4대 임금이산 정의공주 와 죽산 안씨 안맹담 내외분의 묘지 등

  도봉산 무수골에는 전주이씨 영해군파 산소인 조선4대 임금이신 세종대왕의 9남이신 영해군과 아드님이신  영춘군 길안도정  평산신씨 묘지 탐방을 하였다

  도봉산을 많이 다녀도 사진을 촬영할 시간이 없어 사진기를 준비한 김에 몇장 찍어 보았습니다     

  영해군의 2남이신 갈안도정

   문인석

  최고위의 묘지가 영해군 (寧海君) 산소이다

  세종의 9남이신 영해군 산소

  전면에서 바라본 영해군 산소의 모습

 寧海君諡安悼公당之墓

 

  우측 문인석

 좌축 문인석

 

  묘지 됫면의 용맥

 뒤에서 바라본 조망

  전면의 모습이 방학능선이다

 

 

   영해군 부인 신씨 지묘

 

 충노 김씨 묘지

  강녕군 산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