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7월 산행/2009.12.9. 무수골 왕족묘 탐방

조선4대 세종임금의 손자 이신 영춘군 이인 신도비 탐방 (2)

아베베1 2009. 12. 11. 14:13

 

 

 

 

 

 

 

 

 

 

 

 

 

 

 

 

 

 

 

 

  유명조선국숭헌대부영춘군신도비명 병서

  글 남곤 ,글씨는 승정원주서관 겸 춘추관기사관 김휘수

 

  장남 영춘군은 부친의 인덕을 바탕으로 효행이 지극해 왕실의 은총을 받았다. 영춘군의 차남
강녕군은 알뜰하게 가꿔진 꽃밭과 정결한 집을 가졌었는데 연산군의 내폐(內嬖)가 이 집을 탐내어 빼앗고자 했다. 그러나 강녕군은 불응하자 내폐의 고자질로 연산군은 크게 노해 주인과 가노를
붙잡아 가두고 문초했다. 이런 연유로 강녕군 부자와 여러 형제는 남해 섬으로 귀양살이를 갔다.
두어 달 뒤 중종반정으로 관작이 회복되었고, 중종대왕은 특별히 정국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으로 공훈록과 비문에 그 사적을 표기케 하고 <삼강행실록(三綱行實錄)>에도 기록토록 지시했다.
영춘군은 완천군(完川君) · 강녕군(江寧君) · 순성부정(蓴城副正) · 덕녕부정(德寧副正)의 4남과 딸 둘을 두었다. 품계는 승헌대부이고 시호는 화목을 이루었다는 뜻으로 `목성(穆成)'이다.
영해군의 산소 국내(局內) 오른쪽 묏부리 기슭엔 남곤(南袞)이 글을 짓고 김희수(金希壽)가 글씨를 쓴 신도비(서울특별시 문화재 제106호)가 서 있다.
차남 길안도정은 시산군(詩山君) · 청화수(淸化守) · 송계군(松溪君) · 은계군(銀溪君) · 벽계도정(碧溪都正) · 옥계군(玉溪君) 등 6남을 두었으나 옥계군은 외아들 운천군(雲川君)을 둔 뒤 후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