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詩/경상도를 안찰하러 나가는 최함일

경상도를 안찰하러 나가는 최함일 직랑을 보내며[送崔咸一直郞出按慶尙

아베베1 2009. 12. 14. 23:05

동문선 제4권
 오언고시(五言古詩)
경상도를 안찰하러 나가는 최함일 직랑을 보내며[送崔咸一直郞出按慶尙]


고중지(高中址)

금정산은 높고 높아 / 金井山高高
바위 많은 봉우리가 천목산 같아라 / 巖巒似天目
그 아래는 동래성 / 下有東萊城
연기와 노을 고목에 서려 있네 / 煙霞棲古木
세상에서 말하는 신선 사는 곳 / 世稱神僊居
땅은 맑고 사람은 속되지 않았네 / 地淸人不俗
한낮에도 구름 기운 찌는데 / 白日雲氣蒸
온천은 산골짝에 솟아오른다 / 湯泉涌山谷
나그네들 그 옆에 묵어 가면서 / 行旅館其傍
깊은 겨울에도 목욕한다 / 方冬得漱沐
들 다리는 호수에 눌러 있고 / 野橋壓平湖
작은 정자는 끊어진 산기슭에 기대섰다 / 小亭依斷麓
옛날의 그 소하 신선이 / 云昔蘇嘏倦
흰 사슴을 타고 와서 놀았다더니 / 來遊騎白鹿
객사는 그 누가 지은 것인고 / 客舍誰所營
장관이 천하에 제일이로다 / 壯觀天下獨
북쪽 마루의 이름은 적취인데 / 北軒名積翠
한 쪽에는 천간 옥[竹]이로세 / 一面千竿玊
달밤에 매화 가지 차갑고 / 月夜梅梢寒
가을 바람에 귤과 유자 익는다 / 秋風橘柚熟
동쪽으로 바라보면 고운대 / 東望孤雲臺
바다에 솟은 푸른 봉우리 뾰죽하여라 / 插海翠峯矗
잠깐을 노닐어도 / 暫時寄遊賞
한평생 마음에 흐뭇하리라 / 平生心意足
나는 본래 그곳 사람 / 我本箇中人
긴 강이 초가 집을 끼고 흘렀다 / 長江遶茅屋
공명을 그릇 좇아 부질없이 / 謬學功名流
진토에서 허덕이지만 / 塵土空碌碌
지금도 꿈속에 / 至今清夢裏
멀리 창랑 구비를 그리네 / 遙想滄浪曲
이제 황화를 전송하여 보내노니 / 再拜送皇華
날 위하여 소나무와 국화를 보호하소 / 爲我護松菊

東文選卷之四
 五言古詩
崔咸一直郞出按慶尙[高中址]

金井山高高。巖巒似天目。下有東萊城。煙霞棲古木。世稱神僊居。地淸人不俗。白日雲氣蒸。湯泉涌山谷。行旅館其傍。方冬得漱沐。野橋壓平湖。小亭依斷麓。云昔蘇嘏僊。來遊騎白鹿。客舍誰所營。壯觀天下獨。北軒名積翠。一面千竿玉。月夜梅梢寒。秋風橘柚熟。東望孤雲臺。揷海翠峯矗。暫時寄遊賞。平生心意足。我本箇中人。長江遶茅屋。謬學功名流。塵土空碌碌。至今淸夢裏。遙想滄浪曲。再拜送皇華。爲我護松菊

 


동문선 제11권
 오언배율(五言排律)
고슴도치섬[猬島]으로 귀양가는 시어 최함일을 전송하며 [送崔侍御咸一貶猬島]


설문우(薛文遇)

곧은 절개는 참으로 간관 / 直節眞烏府
서툰 재주 가진 나는 채각관 썼네 / 微才忝豹冠
창자의 금수야 같으리오만 / 豈同腸錦繡
뱃속의 구슬을 다 쏟아 놓네 / 相倒腹琅玕
태평성대에 비록 도움 못 되나 / 盛代雖無補
군료들 모두 다 눈 높이 보았네 / 群僚盡聳觀
임금을 받들 마음이 오로지 / 致君心不分
나라를 근심하여 머리 세었네 / 憂國鬢空殘
아유하는 장우는 하도 많지만 / 佞首多張禹
알아주는 비간은 워낙 적은 것 / 知音少比干
이때에 거주가 갈리니 / 此時分去住
어디서 평안을 물어나 볼까 / 何處問平安
시루가 깨어진 걸 돌아볼 이 누구인고 / 甑破憐誰在
하늘은 높아도 쉬 듣는다네天高聽不難
농천산은 옛 산 그대로 / 龍泉還古嶽
위도에는 신관일세 / 猬島是新官
두 땅에 다 비치긴 외로운 달뿐 / 兩地孤輪月
쪽배에 드리우리 낚싯대 하나 / 扁舟一釣竿
또 만날 때가 고대 오리니 / 重逢當有日
잘 가소 가거든 밥 더 자시소 / 好去更加飡


[주D-001]채각관(豸角冠) : 해채(獬豸)라는 동물이 부정(不正)한 사람을 보면 뿔로 떠받는다고 하므로 어사(御史)가 채각관(豸角冠)을 쓴다.
[주D-002]창자의 금수(錦繡) : 시와 글을 잘함. “비단 창자에 수 놓은 배[錦膓繡肚].”
[주D-003]아유(阿諛)하는 장우(張禹) : 한(漢) 나라 성제(成帝) 때에 당시 외척(外戚)왕씨(王氏)가 전정(專政)하였는데 장우(張禹)는 감히 곧은 말을 못하고 아첨하는 말을 하였다. 주운(朱雲)이 그를 탄핵하다가 난간까지 꺾은 일이 있다.
[주D-004]비간(比干) : 은(殷) 나라 주(紂)의 충신, 주의 음란을 사흘 동안이나 굳이 간하니 주가 노하여 죽였다.
[주D-005]하늘은 높아도 쉬 듣는다네 : “하늘은 높아도 낮은 것을 듣는다.”는 말이 있다.
동문선 제21권
 칠언절구(七言絶句)
범주유진주남강(泛舟遊晋州南江)

최함일(崔咸一)

갈매기와 오리는 쌍쌍이 물을 나는데 / 鷗鴨雙雙掠水飛
영산홍은 푸른 유리(강물)에 거꾸로 비추네 / 映山紅倒碧琉璃
화공은 모를 테지 이 온갖 경치가 / 畫工未意千般景
모두 서생의 한 수 시에 들어온 줄을 / 盡入書生一首詩
東文選卷之二十一
 七言絶句
泛舟遊晉州南江[崔咸一]

鷗鴨雙雙掠水飛。映山紅倒碧琉璃。畫工未意千般景。盡入書生一首詩。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4권
 전라도(全羅道)
부안현(扶安縣)

동쪽으로 김제군(金堤郡)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13리, 남쪽으로 고부군(古阜郡)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18리, 흥덕현(興德縣)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52리, 북쪽으로 만경현(萬頃縣)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12리, 서쪽으로 바닷가에 이르기까지 11리, 서울과의 거리는 5백 77리이다.
【건치연혁】 부령현(扶寧縣)은 본래 백제 개화현(皆火縣)이었는데, 신라 때 부령 혹 계발(戒發)이라고도 칭한다. 으로 고치어 고부군에 붙였고, 고려 때에도 그대로 붙여 두었다가 후에 감무를 두어 보안(保安)을 겸임하였다. 보안현은 본래 백제 흔량매현(欣良買縣)이었는데, 신라 때 희안(喜安)으로 고치어 고부군에 붙였고, 고려 때 보안으로 고치어 고부군에 그대로 붙여 두었다가, 후에 부령감무로 겸임하게 하였으며, 신우 때에 두 현에 각각 감무를 두었다. 본조 태종 14년에 보안을 다시 부령에 합쳤고, 15년에 또 나누었다가 8월에 다시 합쳤으며, 다음해 7월에 또 나누었다가 12월에 두 현을 또 합치어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익년(翌年)에 흥덕진(興德鎭)을 파하여 본현에 옮겨서 부안진(扶安鎭)이라고 부르고, 병마사(兵馬使)로써 판사(判事)를 겸하게 하였고, 세종 5년에 규례대로 고치어 첨절제사(僉節制使)로 만들었다가 후에 현감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
【군명】 개화ㆍ부령(夫寧)ㆍ계발(戒發)ㆍ보안ㆍ낭주(浪州)ㆍ흔량매ㆍ희안.
【성씨】 【부령】 김ㆍ장(張)ㆍ황(黃)ㆍ이(李)ㆍ신(辛), 심(沈). 내성(來姓)이다. 보안 한(韓)ㆍ송(宋)ㆍ황(黃)ㆍ호(扈)ㆍ안(安)ㆍ임(林)ㆍ임(任). 고촌 호(扈).
【풍속】 풍속은 단자(蜑子 중국 남방 해변가에서 생활하는 종족)와 같다. 이규보의 시에, “습속은 남방 단자와 많이 같으니 현으로 된 것이 잠총국(蠶叢國)으로부터 시작된 줄 어느 누가 믿으랴.” 하였다.
【형승】 변산천부(邊山天府) 이규보의 시에, “변산(邊山)은 예로부터 천부(天府)로 불리면서, 긴 재목 잘 뽑아 동량(棟樑) 재목에 대비하네.” 하였다. 강산청승(江山淸勝) 앞 사람의 시에, “강과 산의 맑고 좋음은 영주(瀛洲)ㆍ봉래(蓬萊)와 겨룰 만하니, 옥을 세우고 은을 녹인 듯 만고에 변하지 않는다.” 하였다.
【산천】 변산 보안현에 있다. 지금 현과의 거리는 서쪽으로 25리인데, 능가산으로도 불리고, 영주산으로도 불린다. 혹 변산(卞山) 이라고도 하는데, 말이 돌아다니다가 변(邊)으로 되었다 한다. 변한(卞韓)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이 이 때문이라 하나 그런지 아닌지 알지 못한다. 봉우리들이 백여 리를 빙 둘러 있고 높고 큰 산이 첩첩이 싸여 있으며, 바위와 골짜기가 깊숙하여, 궁실과 배의 재목은 고려 때부터 모두 여기서 얻어 갔다. 전하는 말에는 호랑이와 표범들이 사람을 보면 곧 피하였으므로 밤길이 막히지 않았다 한다. ○ 이규보의 기에, “변산은 나라 재목의 부고(府庫 창고)이다. 소를 가릴 만한 큰 나무와 찌를 듯한 나무 줄기가 언제나 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층층의 산봉우리와 겹겹의 산등성이가 올라가고 쓰러지고 굽고 퍼져서, 그 머리와 끝의 둔 곳과 밑 뿌리와 옆구리의 닿은 곳이 몇 리나 되는지 알지 못하겠으나, 옆으로 큰 바다를 굽어보고 있다.” 하였다. 『신증』 김종직의 시에, “우강(禺强 신의 이름이다. 《장자(莊子)》에 우강을 얻어 북극(北極)을 세웠다 함.)이 힘써 옮긴 뜻 상상하니, 까마득한 몇 만년 땅의 주축(主軸)을 누르기 위함일세. 성루[譙樓]는 바로 높은 푯말[標]과 맞섰고, 바다는 이내 짙은 안개 걷혀 시원하다. 울창한 좋은 재목 일천 봉우리에 모였고, 소담한 보찰(寶刹 큰절)은 뭇 마귀(魔鬼)들도 알고 있네. 산 가운데 몇 개의 황망한 일은, 춘경(春卿 이규보의 자)의 백 마디 시 끌어 냄일세.” 하였다. 행안산(幸安山) 현의 남쪽 10리에 있다. 석불산(石佛山) 현의 서쪽 20리에 있다. 바다 현의 서쪽 25리에 있다. 동진(東津) 통진(通津)이라고도 한다. 벽골제(碧骨堤)와 눌제(訥堤)의 물이 합해져 북쪽으로 흘러 이 나루가 된다. 현의 동쪽 16리에 있다. 사포(沙浦) 현의 서쪽 25리에 있다. 장신포(長信浦) 현의 서쪽 20리에 있다. 유포(柳浦) 현의 남쪽 50리에 있다. 덕달포(德達浦) 현의 북쪽 20리에 있다. 굴포(堀浦) 현의 서쪽 25리에 있다. 구도(鳩島) 현의 서쪽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둘레가 20리이다. 위도(蝟島) 현의 서쪽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둘레가 30리이며, 어량(魚梁 살을 매어 고기를 잡는 장치)이 있다. ○ 설문우(薛文遇)가 시어(侍御) 최함일(崔咸一)이 위도로 귀양가는 것을 전송한 시에, “곧은 절개라야 참 오부(烏府 어사대)인데, 변변찮은 내 재주로 치관(豸冠 어사)을 더럽혔네. 수놓은 비단같은 재주야 어찌 같으랴만 배 속에 들어 있는 보배 서로 쏟았었네. 성대(盛代)에서 보탠 것은 비록 없지만, 동료들은 모두 다 높이 보았네. 임금을 착하게 하려는 마음 버리지 못해, 나라 걱정에 두 귀밑털 헛되이 쇠는구나. 간사한 무리들은 장우(張禹) 따위가 많은데, 서로 알아주는 비간(比干) 같은 이는 너무 적다. 이 때에 갈라져서 그대는 가고 나는 머무르니, 어느 곳에서 평안함을 물을 것인가. 시루는 깨어졌는데 누가 애석해 하나. 하늘은 높아도 듣기는 어렵지 않다네. 용천(龍泉)은 도리어 옛 옥터로 돌아갔는데, 위도(蝟島)는 이 새 벼슬이로다. 두 곳에는 외로이 둥근 달 떴는데, 조각배엔 한 낚싯대로다. 다시 만날 날이 있을 터이니, 잘 가서 먹는 것 조심하게나.” 하였다. 계화도(界火島) 현의 서쪽 30리에 있는데, 조수가 물러나면 육지와 연결된다. 우진암(禹陳巖) 변산 꼭대기에 있다. 바위가 둥글면서 높고 크며 멀리서 보면 눈빛이다. 바위 밑에 3개의 굴이 있는데, 굴마다 중이 살고 있으며, 바위 위는 평탄하여 올라가 바라볼 수 있다.
【토산】 조기[石首魚]ㆍ오징어[鳥賊魚]ㆍ청어ㆍ은어[銀口魚]ㆍ홍어(洪魚)ㆍ준치[眞魚]ㆍ웅어[葦魚]ㆍ붕어[鯽魚]ㆍ숭어[秀魚]ㆍ갈치[刀魚]ㆍ새우ㆍ조개[蛤]ㆍ게[蟹]ㆍ굴[石花]ㆍ송이[松蕈]ㆍ모시[苧]ㆍ죽전(竹箭) 도이곶(都邇串) 및 모든 섬에서 난다. ㆍ사기그릇(磁器). 『신증』 사슴.
【성곽】 읍성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1백 88척, 높이가 15척이요, 안에 샘물이 12개 있으며, 동쪽 서쪽 남쪽 3면에 모두 성문다락[譙樓]을 세웠다. 『신증』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만 6천 4백 58척, 높이가 15척이요, 안에 샘물이 16개 있다. ○ 김종직의 시에, “천길 산봉우리 누관(樓觀)이 기이하여 억지로 쇠약하고 피로한 몸 이끌고 높은 곳에 의지했네. 금을 녹여 낸 듯한 해는 군산도(群山島)에 떨어지고, 흰 것을 묶어 세운 듯한 연기는 벽골피(碧骨陂)에 비꼈어라. 몸이 반 공중에 있으니, 눈 가는 곳이 멀고, 시는 일만 형상 더듬자니 술잔 놓기 더디구나. 능가산은 예로부터 천부(天府 하늘이 마련한 창고)로 불렸는데, 오늘날 쇠잔한 용모 대할 줄 어찌 기약했으랴.” 하였다.
【관방】 금모포영(黔毛浦營) 현의 남쪽 51리에 있다. ○ 수군만호(水軍萬戶) 1명인.
【봉수】 월고리산 봉수(月古里山烽燧) 현의 서쪽 75리에 있는데, 남쪽으로 무장(茂長) 소응포산(所應浦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점방산(占方山)에 응한다. 점방산 봉수(占方山烽燧) 현의 서쪽 61리에 있는데, 남쪽으로 월고리에 응하고 북쪽으로 계화도(界火島)에 응한다. 계화도 봉수 북쪽으로 만경현 길관봉수에 응하고 남쪽으로 점방산에 응한다.
【누정】 취원루(聚遠樓) 곧 성의 남쪽 문루(門樓)인데, 서쪽으로 변산(邊山)을 대하고, 북쪽으로 큰 바다를 바라보며, 동쪽과 남쪽은 큰 들을 임하였다. ○ 이행(李行)의 시에, “높은 봉우리는 석보(石堡)를 이고 섰고, 상위(象緯 하늘)는 누 가운데 닿았네. 바다 위 돋은 해는 벌겋게 물결 흔들고, 구름에 잠긴 산은 푸른 것이 공중을 찌른다. 옷 가다듬고 세속 먼지 털어버리니, 탈태하여 신선 궁에 오른 듯하네. 해질 녘에 긴 수풀 아래서는, 두 겨드랑이에 신선한 바람 스며든다.” 하였다. ○ 허종(許琮)의 시에, “높은 누 바람불어 흥취가 유유한데, 해 저문 들 밖에는 말 한 필 오는구나. 아득하게 외로이 뜬 배는 어디로 가는 것이냐? 그대에게 부탁하여 같이 타고 봉래산 찾아가련다.” 하였다. 청원루(淸遠樓) 객관 동쪽에 있는데, 현감 성수겸(成守謙)이 세웠다. 『신증』 김종직의 시에, “소쇄(潚洒 산뜻하고 깨끗한 모양)함이 참으로 팔영루(八詠樓)와 같은데, 순식간에 지어진 화려한 누각 성후(成侯 성수겸을 말한다)에게 하례한다. 외딴 마을 조석(潮汐)은 시 읊는 소리에 응하고, 먼 산의 구름 안개 바라보는 속에 걷혀진다. 공무를 벗어나서 마음 놓고 술잔 잡는데, 무더위 힘 없어지니 어느덧 가을이네. 돌아가기 허락 받은 병든 손이 맑은 흥에 취하여, 바다 머리 장기(瘴氣) 속에 머물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노라.” 하였다. 김영(金瑛)의 시에, “바다 산 1천 리에 웅장한 누 있는데, 태수(太守)의 재명(才名), 곽세후(郭細侯)이네. 3월이라 들꽃은 혼연(渾然)히 떨어지려 하는데, 한 주렴의 봄 안개는 전부 걷히지 않는구나. 작은 연꽃 화장하고 처음으로 물에 뜨고, 푸른 대엔 우수수 유달리 가을 기운 모였어라. 담담한 아지랑이, 방초(芳草) 우거진 물가에서 미인(美人)들은 공연히 바라보다 몇 번이나 머리 긁었나.” 하였다. 망해대(望海臺) 변산에 있다. 『신증』 개풍루(凱風樓) 김종직의 시에, “개풍루 위 마음대로 올라와 보니, 발해(渤澥 서해) 동쪽 빈 터는 지형 더욱 깊숙하네. 낚싯대 두 길쯤 솟은 해는 불그스레 은은하고, 천 두락 맑은 못은 푸른 것이 침침하다. 거민(居民)들은 고기잡이의 이익을 다투어 찾는데, 게으른 손은 상궐(象闕 하늘같은 대궐)에만 마음이 달려 있네. 당발(棠發 감사를 말함) 2년에 무슨 일 하였나. 난간에 의지하여 그런대로 세상 마음 씼었노라.” 하였다.
【학교】 향교 현의 남쪽 2리에 있다.
【역원】 부흥역(扶興驛) 현의 서쪽 2리에 있다. 동진원(東津院) 동진 언덕에 있다. 수세원(手洗院) 현의 남쪽 60리에 있다. 금설원(金設院) 현의 남쪽에 있다.
【불우】 소래사(蘇來寺) 신라의 혜구두타(惠丘頭陀)가 창건한 것인데, 크고 작은 두 소래사가 있다. ○ 정지상(鄭知常)의 시에, “옛 길은 적막하여 솔뿌리 엉겼는데, 하늘이 가까워 북두칠성 만질 수 있네. 뜬구름 흐르는 물 따라 손이 절에 이르고, 붉은 단풍 푸른 이끼 속에 중은 문을 닫았구나. 가을 바람 다소 차갑게 지는 해에 불고, 산 달 점점 맑아오니 잔나비 맑게 운다. 기이하다, 수북한 눈썹의 한 늙은 중이여, 오랜 세월 인간 세상 꿈꾸지 않았구나.” 하였다. ○ 이곡(李穀)의 시에, “높고 뛰어난 해안산(海岸山)이라 일찍 들었는데, 한가함을 틈타서 마음 놓고 등반 하였네. 사람들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듯 사다리가 1천 척이요, 중은 구름과 반 칸 집을 나누었다. 고요하게 있어도 아직껏 얽맨 세상 벗지 못했으니, 세상의 인연을 어찌 감히 상관할쏘냐. 푸른 산속 어느 날에나 내 머무름 용납할까, 대지팡이 짚신으로 날마다 왕래한다.” 하였다. ○ 중 원감(圓鑑)의 시에, “바닷가에 명산(名山) 있음을 옛날부터 들었더니, 다행히도 찾아가서 오랜 소원 풀었어라. 일만 골짜기의 연기와 안개는 가고 쉬는 속에 있고, 일천 겹 싸인 섬들 돌아보고 바라보는 사이에 있네. 의상암(義湘庵 절 이름) 높이 솟아 하늘이 기둥에 잇닿아 있고, 자씨당(慈氏堂 당(堂) 이름) 깊숙하여 돌이 관문(關門) 되어 있네. 세상 피해 높이 살긴 이만한 곳 없으리니, 고달픈 새 미리 알고 돌아온 것 자랑한다.” 하였다. ○ 중 선탄(禪坦)의 시에, “바위 아래 잔잔한 옥같은 시냇물, 산인(山人 산속에 사는 중을 말함)의 꿈 끊어지니 밤기운 쓸쓸하구나. 두견새도 역시 서루(西樓)의 달 좋아해서 밤이면 배꽃 핀 가지 위에서 울고 있다오.” ○ “한 평생 가는 곳마다 낮은 등잔처럼 설움 받으니, 사해의 풍진(風塵) 속에 부평처럼 붙여 사네. 5경의 산 기운 물처럼 서늘한데, 누워서 베개 위에 떨어지는 남계(南溪) 소리 듣는다.” ○ “안장한 말 타고 세상일에 바쁘다가 머리 반백(半白)되었는데, 능가(楞伽)에서 병얻어 일찍 와서 쉬었노라. 한 줄기 강 안개 비에 서산은 저무는데, 성근 주렴 길게 걷고 누에 내리지 않는구나.” 하였다. 도솔사(兜率寺) 내(內)ㆍ외(外)의 두 도솔이 있다. ○ 이곡의 시에, “산 찾는 것이 신선 찾기 위함은 본시 아니지만, 천리를 유람함이 어찌 우연이겠나. 호겁(浩劫 불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큰 재화(災禍))이 인연 되어 내원(內院 도솔천(兜率天)의 내부인데, 곧 미륵 보살의 처소를 말함)으로 돌아와서, 상방(上方 산 위의 절) 세계에서 모든 하늘[諸天 불교에서는 하늘이 여덟으로 되어 있는데, 그 여러 하늘은 마음을 수양하는 경계를 따라서 나뉘어 있으며, 이 여덟의 모든 하늘을 말함]에 고백한다. 학(鶴)이 와서 암두(巖頭)에 전각 일찍 지었고, 용은 가도 돌 틈의 샘물 아직 남아 있다. 심히 부끄럽다. 향산(香山) 백거사(白居士)처럼 결사(結社)를 못했는데, 머리 이미 희었구나.” 하였다. 의상암(義湘庵) 신라 중 의상(義湘)이 살던 곳이다. ○ 김극기의 시에, “기묘한 일만 겹 바위 높은 하늘에 비껴 있어, 위로 구름 끝까지 올라가니, 길 비로소 끊어졌다. 홀연히 의상대사의 여운(餘韻) 있음이 기쁘고, 하늘에 닿은 옛 잣나무 어둠 속 바람에 읊조린다.” 하였다. 청림사(淸臨寺) 중 선탄의 시에, “구름 떠돌아도 옛 산을 생각하고, 사슴은 숨어서 깊은 숲으로 돌아가네. 부귀영화는 다만 흙같은 것인데, 높고 한가함을 금주고 산 다네. 솔 바람에 학의 울음소리 들려오고, 고개 마루 뜬 달은 거문고에 가득하네. 이 뒤로는 세상의 좋은 경치 사람이 와도 찾을 곳이 없으리.” 하였다. 원효방(元曉房) 신라 때 중 원효(元曉)가 거처하던 곳인데, 방장(方丈 절의 주지가 거처하는 방)은 지금도 남아 있다. ○ 이규보의 시에, “산 따라 높은 사다리 지나고, 발 포개어 좁은 길 걷는다. 위에 백 길 산꼭대기 있는데, 효성(曉聖 원효대사의 별칭)이 일찍 방 지었도다. 신령스런 발자취 어딘지 아득하고, 유영(遺影 화상)은 아소(鵝素 종이폭)에 남아 있구나. 다천(茶泉)은 찬 구슬처럼 고였는데, 한 웅큼 마셔보니 젖같은 단맛이라. 이 땅에 옛날에는 물이 없어서 불도들이 머무르기 어려웠더니, 원효대사 한 번 와서 머문 뒤로는 맑은 물이 바위 구멍에서 솟아 났다네. 우리 스님 그 높은 자취 이어 받아서, 짧은 갈옷 입고 여기 와 살고 있다네. 여덟 자 방을 한 번 둘러보니, 오직 한 켤레의 신발만이 남아 있도다. 옆에서 모시는 이 또한 없어서 홀로 앉아 아침저녁 보내고 있네. 소성(小性 원효대사)이 이 세상에 다시 나오신다면, 감히 허리 굽혀 절하지 않을 쏜가.” ○ “좋은 일 들은 지 오래였는데, 신령한 자취 아득해 찾을 수 없네. 깊은 곳 다람쥐는 배고파서 굴을 나오고, 외 학은 고달파서 숲에 앉는다. 탑 그림자는 그늘져 끊어지고, 종소리는 멀리 가서 잠잠하네. 언제나 묵수(墨綬 검은 인끈인데 곧 지방관을 말함) 풀고 자유 몸 되어 여기다 깊숙히 띠집 지을꼬.” 하였다. ○ 김극기의 시에, “육방성(六方聖 육방은 동ㆍ서ㆍ남ㆍ북ㆍ상ㆍ하를 말하며, 육방성은 모든 부처님을 말한다.)을 아득히 생각하니, 남긴 자취 어디서 찾으려나. 다만 들 사슴같이 돌아왔을 뿐이니, 계림(鷄林)에 간 것 무슨 흠이리. 각수(覺樹 보리수임. 부처님이 정각(正覺)을 이루던 곳을 덮었던 나무라 하여 말한 것임)에는 천가지 꽃 떨어지고, 진공(眞空)에는 달 하나 침침하구나. 아직도 남은 것은 무진장하여 산과 물이 스스로 높고 깊도다.” 하였다. 불사의방장(不思議方丈) 신라 때 중 진표(眞表)가 살던 곳인데, 1백 척 높이의 나무 사다리가 있다.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면 곧 방장(方丈)에 이를 수 있고, 그 아래는 모두 무시무시한 골짜기이며, 쇠줄로 그 집을 잡아 당겨서 바위에 못질하였는데, 세상에서는 바다의 용이 만든 것이라 한다. ○ 이규보의 시에, “무지개 같은 사다리 발 밑에 길다랗구나. 몸을 돌려 곧장 내리면 만길이 넘는다. 지인(至人 도덕이 극치에 이른 사람)은 이미 가고 자취마저 없는데, 옛 집은 누가 붙들었기에 아직도 쓰러지지 않았나. 장육(丈六 1장 6척의 불상 이라는 뜻)은 어느 곳으로부터 나타나는고. 대천(大千) 세계는 그 가운데 감추었네. 완산(完山)에 이은(吏隱)하는 세상 일 잊은 나그네, 손 씻고 와서 한 조각 향 태운다.” 하였다. 문수사(文殊寺) 진표가 세운 것인데, 돌 부도(浮屠)가 있다. 실상사(實相寺) 이상의 불우(佛宇)는 모두 변산에 있다.
【교량】 동진교(東津橋) 동진 위에 있다. 신우(辛禑) 초년에 왜선(倭船) 50여 척이 웅연(熊淵)에 배를 대어 적현(狄峴)을 넘어서 부령현(扶寧縣)을 노략질하고, 동진교를 헐어서 우리 군사로 하여금 더 나아가지 못하도록 하였다. 상원수(上元帥) 나세(羅世)가 변안열(邊安烈) 등과 더불어 밤에 다리를 구축하고, 군사를 나누어 적을 공격하여 마침내 크게 승리하였다.
【사묘】 사직단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현의 북쪽 5리에 있다. 여단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고읍성(古邑城) 현의 동쪽에 있는데, 둘레가 5백 척이고, 안에 샘이 6개 있다. 보안폐현(保安廢縣) 현의 남쪽 30리에 있다. 고촌향(鼓村鄕) 현의 남쪽 27리에 있다. 신덕소(申德所) 현의 동쪽 5리에 있다.
『신증』 【명환】 본조 소효식(蘇效軾)
【인물】 고려 김구(金坵) 희종조(熙宗朝)에 과거에 올라 벼슬이 찬성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며, 문장이 그 당시에 으뜸이었다. 매양 표문(表文)을 짓는데, 일을 따라 문장을 꾸민 것이 모두 이치에 맞았다. 원 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 왕악(王鶚)이 매양 표사(表辭)를 볼 때마다 반드시 잘 했다고 칭찬하면서 그의 얼굴 보지 못함을 한하였다. 『신증』 본조 성중엄(成重淹) 과거에 급제하여 홍문관 박사(弘文館博士)가 되었으며, 문장으로 이름이 있었다. 연산조(燕山朝)에 사화(史禍)를 만나 귀양갔다가 마침내 피살되었다. 지금의 임금 초년에 부제학을 추증하였다.
『신증』 【효자】 본조 송세정(宋世貞)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아버지가 종기를 앓는데, 상처를 빨아 병이 나았다. 아버지가 죽자 3년 동안 묘에 여막을 짓고 살았다. 후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너무 슬퍼하더니, 병이 되어 죽었으므로 정문을 세웠다. 이성간(李成幹) 젊었을 때 어머니가 종기를 앓는데, 상처를 빠니 병이 곧 나았다. 아버지가 오랜 병이 있었는데, 몇 년 동안 밤낮으로 시약(侍藥)하고, 옷을 벗지 않았다. 병이 위태하자 똥을 맛 보았고, 죽자 3년 동안 죽을 마셨다. 문랑(文郞) 아버지가 악질(惡疾)을 앓는데, 손가락을 잘라 술에 타서 먹이니 병이 나았다. 일이 나라에 보고되어 정문을 세웠다. 최필성(崔弼成) 어머니가 유종[乳癰]을 앓는데 입으로 빠니 병이 나았다. 아버지가 오랜 병으로 백약(百藥)이 무효하고, 의사의 말은, “박쥐가 있으면 고칠 수 있다.” 하였다. 때는 추운 겨울이라 구하여도 얻지 못하여 울면서 하늘에 호소하니, 박쥐가 저절로 나오므로 잡아 약에 타서 먹였더니 병이 과연 나았다. 후에 또 병이 위태하자 똥을 맛보았고, 죽자 매우 슬퍼하며 예를 다하였다. 일이 나라에 보고되어 상으로 벼슬을 내렸다.【열녀】 본조 김씨(金氏) 일찍 남편을 여의었는데, 부모들이 다시 시집보내려 하자, 김씨는 다른 사람에게는 시집가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강물에 빠져 죽으려 하니, 부모들이 그만 두었다. 김씨는 한평생 흰 옷을 입고 제사를 받들며 고기를 먹지 않았다.
【제영】 입촌봉연사(入村逢燕社) 이규보의 시에, “직무를 수행하느라고 겨를이 없어, 역말 타고 평탄한 들 달려 가는데, 길가에는 꽃이 어지럽고, 뉘집인지 대나무가 동산 덮었네. 등나무는 얽히어 넘어지는 덩굴 붙들고, 괴화나무는 쓰러져 외로운 뿌리를 드러낸다. 달리는 수레는 학을 모는 듯하고, 가벼운 복장은 잔나비도 따를 만하구나. 호숫가에는 봄 안개 자욱하고, 만점(蠻店)에는 장운(瘴雲 독기가 어린 구름)이 따스하네. 이끼 살아나니 새 빛이 더해지고, 조수 사나우니 옛 흔적 지나누나. 마을로 들어오니 연사일이라 바다를 바라보며 오번(鰲番)을 묻는다. 옛 방죽은 새벽에 수문 여는데, 빈 성은 낮에도 문 닫았구나. 군의 아전은 도로에서 맞이하고, 읍 수령은 나와서 술 항아리 연다. 고달픈 것은 모두 나라일이고, 마음에 흥겨움도 또한 임금의 은혜이네. 모래 가에는 갈매기 홀로 춤추고, 숲 밖에는 새들이 조잘대누나. 늙은이들 놀라서 피하지 말라. 서생(書生)은 높은 체하지 않는다네.” 하였다. 만리장도분백마(萬里壯濤奔白馬) 앞사람의 시에, “한 봄에 이 강머리 세 번을 지났는데, 나라일이니 어찌 한 번인들 쉬지 못한 것 원망하랴. 만리의 세찬 물결 백마가 달리는 듯하고, 천년 묵은 늙은 나무 푸른 용이 누운 듯하다. 바다 바람은 불어 만촌(蠻村)의 피리와 어울리고, 모래 위 달은 갯가의 나그네 배를 맞는구나. 호위하고 가는 추동(騶童)은 응당 날 괴이하게 여기리라. 좋은 경치 만나면 오래 서서 머물렀으니.” 하였다. 고석낭용평작려(古石浪舂平作礪) 앞사람의 시에, “흐르는 물소리 속에 저녁 되고 다시 아침 되니, 바다 마을 울타리는 그리도 쓸쓸하구나. 호수가 맑으니 마음의 달은 교묘하게도 도장 찍은 듯하고, 개포 넓으니 포구로 이른 조수 마구 삼킨다. 오래된 돌 물에 잠겨 편평한 숫돌 되었고, 부서진 배 이끼에 싸여 다리 되었네. 강과 산 일만 경치 노래로 표현 다 못하겠으니, 단청하는 화필(華筆)을 청하여 묘사하리라.” 하였다. 호로혜혜음상엽(蝴蟧嘒嘒吟霜葉) 김극기의 시에, “언덕 위의 싸늘한 바람 짤막한 쑥대 굴리니, 나부껴 떠도는 것 도리어 나그네 신세와 한가지네. 매미는 맴맴 단풍잎을 노래하고, 귀뚜라미 귀뚤귀뚤 달빛을 지저귄다. 오직 눈송이[雪華]만 귀밑을 침노할 뿐, 다시는 세상의 일 가슴 속에 이르지 않네. 슬피 노래하느라 아직은 고향 꿈 이루지 못하고서, 앉아서 동헌(東軒)의 새벽 해 붉어오는 것 기다린다.” 하였다. 수학소다교목로(水鶴巢多喬木老) 이첨(李詹)의 시에, “봄 추위는 손을 속여 옷 속에 스며드는데, 들 넓고 하늘 낮아 저물도록 못 돌아가네. 물학이 많이 깃드니 높은 나무 늙었고, 현관(縣官)의 문닫으니 아전 백성 드물다.” 하였다. 계산원근누대호(溪山遠近樓臺好) 중 선탄의 시에, “산과 시내 원근에 있어 누대도 좋고, 연기 오르는 동서쪽엔 촌락(村落)이 이루어졌네.” 하였다. 설진암변애일신(雪盡巖邊愛日新) 앞사람의 시에, “바위 가엔 눈 다하여 날로 새로워지니 좋고. 금구(錦鳩) 나는 동네 밖에는 태평스런 봄일세. 봄바람은 마치 사군(使君 원님)의 덕과 같아서, 마을이나 산중이나 한모양으로 고르구나.” 하였다. 도서미망표묘간(島嶼微茫縹緲間) 안숭선(安崇善)의시에, “멀리 푸른 바다 보고 가까이 산을 보니, 섬들은 아득한 사이에서 가물거리네. 해가 날마다 채찍으로 재촉하되 제대로 하지 못할까 두려우니, 봄바람 쉽게 불어 붉은 얼굴 늙어간다.” 하였다. 해문잔월낙한조(海門殘月落寒潮) 서거정의 시에, “하늘에는 보슬비 늦은 아침에도 내리는데, 누가 황금 빚어 버들가지 물들였나. 골짜기의 맑은 바람 먼 소리를 내는데, 해문(海門 해협(海峽))에 지는 달은 찬 조수에 떨어진다. 한 누각 고요하여 편히 잠자기에 마땅한데, 옛 나루는 쓸쓸하여 다만 누운 다리뿐일세. 가는 곳마다 강산은 시 짓기에 알맞은데, 졸필이라 끝내 묘사 못해 부끄럽구나.”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동도(東道) 끝이 5리. 서도(西道) 끝이 10리. 남상(南上) 끝이 10리. 남하(南下) 처음이 10리, 끝이 20리. 상동(上東) 끝이 10리. 하동(下東) 처음이 5리, 끝이 15리. 상서(上西) 처음이 10리, 끝이 20리. 하서(下西) 처음이 10리, 끝이 30리. 일도(一道) 북쪽으로 끝이 10리. 이도(二道) 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 염소(鹽所)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15리. 소산(所山) 남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5리. 건광(乾光) 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 입상(立上) 남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35리. 입하(立下) 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 좌산내(左山內) 서쪽으로 처음이 35리, 끝이 70리. 우산내(右山內) 서쪽으로 처음이 35리, 끝이 60리. ○ 고촌향(鼓村鄕)은 남쪽으로 27리이며, 신덕소는 동쪽으로 5리이다.
【성지】 우금성(禹金城) 우금암(禹金巖) 기슭에 있다. 둘레는 10리인데, 묘향사(妙香寺)가 그 안에 있다. 점모포진(點毛浦鎭) 남쪽으로 50리에 있다. 성지(城池)는 지금은 폐했고 창(倉)이 둘이다. ○ 수군만호(水軍萬戶)가 1인. 혁폐(革廢) 격포진(格浦鎭) 서쪽에 있으며 변산(邊山) 서쪽 기슭 끝 바닷가에 있다. 조수가 차면 호수를 이루고 썰물 때는 갯바닥이 된다. 인조 때에 처음으로 진(鎭)을 설치하고 별장(別將)을 두었는데, 숙종 4년 성을 쌓은 후에 감영(監營)에 속하게 하고, 제방(堤坊)을 쌓고 물을 막았는데, 헌종 9년에 폐했다. 옛 군영(軍營) 장신포(長信浦) 남쪽에 있다. 국초(國初)에 부안현에다 진을 두었을 때에 영(營)을 둔 곳이다.
【창고】 창(倉) 5 읍내에 있다. 북창(北倉) 북쪽으로 10리. 해창(海倉) 서쪽으로 30리. 사창(社倉) 남쪽으로 30리이다.
【진도】 동진(東津) 동쪽으로 15리. 김제와 전주로 통한다.
【교량】 대교(大橋) 서쪽으로 10리. 중교(中橋) 위와 같다. 장교(長橋) 남쪽으로 10리이며 동진 상류이다.
【토산】 대[竹]ㆍ옻[漆]ㆍ뽕[桑]ㆍ감ㆍ호두ㆍ잣.

[주D-001]현으로……잠총국(蠶叢國)으로부터 시작 : 유사 이전에 촉(蜀) 지방에 잠총국(蠶叢國)이 있었다 한다. 여기에서는 태고적부터 있었던 오랜 고을이라고 한 것이다.
[주D-002]간사한 무리들은……많은데 : 한(漢) 나라 사람이니, 자는 자문(子文)이다. 경서(經書)를 분명히 익혀 박사(博士)가 되었으며, 원제(元帝) 때 태자에게 《논어》를 가르쳤다. 성제(成帝)가 즉위한 뒤, 사부(師傅)의 예로 높였고, 하평(何平) 말년에 안창후(安昌侯)를 봉하였다. 병으로 물러가기를 청했는데, 나라에 큰 정사가 있으면 반드시 함께 의논하여 정하였다. 성제가 왕씨(王氏)를 의심하고 일찍이 우한테 물었는데, 자기는 늙고 자손들은 약하여, 감히 왕씨 배척하는 바른 말을 못하였다. 그랬더니 주운(朱雲)이 장우를 지목해서 아첨하는 신하라고 하였다는 고사이다.
[주D-003]고달픈……자랑한다 :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새도 고달프면 돌아갈 곳을 안다.”라는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주D-004]이은(吏隱) : 하급 관리로 그럭저럭 지내는 것을 이은(吏隱)이라고 한다.
[주D-005]바다를……묻는다 : 오(鼇)는 큰 자라인데, 바다에 있는 삼신산을 큰 자라 세 마리가 각각 메고 다닌다 한다. 그러므로 바다를 바라보면서 삼신산을 이고 있는 큰 자라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는 말이다.
고려사절요 제21권
 충렬왕 3(忠烈王三)
경인 16년(1290), 원 지원 27년

○ 봄 정월에 대장군 원경(元卿)을 원 나라에 보내어 일본이 변경을 침범하는 것을 아뢰었다.
○ 장군 오인영(吳仁永) 등이 원 나라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내안(乃顔)의 잔당 합단적(哈丹賊)이 장차 우리나라 변방을 침범하려 한다." 하여, 첨의찬성사 홍자번(洪子藩)과 판밀직사 정가신(鄭可臣) 등은 병부에서 군사를 선발하게 하고, 안전을 경상도 도지휘사(慶尙道都指揮使)로, 김지숙(金之淑)을 전라도 도지휘사로, 송분(宋玢)을 충청도 도지휘사로 삼았다.
○ 2월에 중군만호(中軍萬戶) 정수기(鄭守琪)를 보내어 금기산(禁忌山) 골짜기에 주둔하게 하며, 좌군만호 박지량(朴之亮)은 이천현(伊川縣) 지경에 주둔하게 하며, 한희유(韓希愈)는 쌍성에 주둔하게 하고, 우군만호 김흔은 환가현(豢猳縣) 지경에 주둔하게 하며, 나유(羅裕)는 통천(通川) 지경에 주둔하게 하여 합단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 모든 왕(王)과 재신과 추신ㆍ승지ㆍ반주(班主 수석관원)로 하여금 각기 쌀 7석씩을 내게 하고, 방리(坊里)의 서민도 등급에 따라 쌀을 내게 하여, 동계방수군(東界防戍軍)의 군량에 충당하였다.
○ 이때 헛소문이 퍼지기를, “적병이 이미 국경을 쳐들어 왔다." 하여 중외가 소란하였다. 홍자번 등이 강화도로 피해 들어갈 것을 건의하니, 허공(許珙)ㆍ최유엄(崔有渰)이 유독 반대하기를, “지금 주상께서 원 나라의 서울에 계시는데, 어찌 뜬소문을 믿고 우리 마음대로 국도를 옮길 수 있느냐." 하였다. 자번 등이 원로와 재상들을 모아 놓고 상의하자, 모두 옮겨야 된다 하니, 공이 말리지 못하고 당리(堂吏) 문정(文証)에게 말하기를, “여러 의견이 이러하니 막을 수는 없지마는, 나와 너는 송경(松京)을 지키며 왕명을 기다리자." 했다. 모든 재신과 추신들이 다 말하기를,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허중찬(許中贊)이 가를진정한다.' 하더니, 지금은 나라 일을 그르치는구나!" 하였다. 허공이 집에 돌아와서 자손들을 불러 말하기를, “나는 꼭 이 곳에 머물러 있을 것이니, 너희들 중에 나를 따르지 않는 자가 있다면 내 자손이 아니다. 반드시 법으로 처치하리라." 하였다. 얼마 안 되어 인후(印侯)가 원 나라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황제께서 다시 강화도로 수도를 옮긴다는 말을 듣고, 왕께 명하시기를, '그 말이 만약 사실이라면 주모자를 압송해 보내라.'고 하셨다." 하니, 나라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허공의 식견에 탄복하였다.
○ 3월에 사리첩목아(闍梨帖木兒)가 사람을 보내어 쌍성에 주둔하였다.
○ 원 나라의 황제가 '금자경(金子經)'을 베끼기 위하여 글씨 잘 쓰는 중을 징발하였다. 이리하여 중 35명을 원 나라에 보냈다.
○ 전 지첨의부사(前知僉議府事) 김주정(金周鼎)이 졸하였다. 주정은 젊어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였고, 침착하고 관후하여 말이 적었으며, 경솔하게 아무나 사귀지 않았다. 과거에 부성위(富城尉)에 뽑혀 갔는데, 이때 북방의 적병이 대거 침입하여 나라가 소요하였으나, 주정은 적을 방비하고 백성을 위무하여 위엄과 은혜가 모두 드러났으니, 한 지방이 그를 칭송하였다. 다루가치(達魯花赤)와 왕경의 유수군(留戍軍), 합포(合浦)의 진수군(鎭守軍), 둔전군 등을 파한 것이라든지, 김방경(金方慶)의 사면을 청한 것은 모두가 주정의 계책이어서 왕이 더욱 중하게 여겼다. 동정 때에 태풍으로 배가 뒤집혀 관군이 많이 빠져 죽었는데, 주정이 계책을 써서 빠진 자들을 건져 내어, 구제된 자가 매우 많았다. 그러나 응방도감사(鷹坊都監使)가 되어 매와 개를 가지고 임금의 사랑을 받아서 자못 권세를 부리기도 했다.
○ 왕과 공주ㆍ세자가 원 나라에서 돌아왔다.
○ 원 나라의 황제가 조(詔)하여 동녕부(東寧府)를 파하고, 다시 우리 서북의 여러 성을 돌려 주니, 왕이 그 총관(摠管)이었던 한신(韓愼)ㆍ계문비(桂文庇)를 대장군으로, 현원열(玄元烈)을 태복윤(太僕尹)으로, 나공언(羅公彦)ㆍ이한(李翰)을 장군으로 삼았다.
○ 여름 4월에 불경을 베낄 중 65명을 원 나라에 보냈다.
○ 5월에 최함일(崔咸一) 등 31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 왕이 잔치를 베풀고, 서북에 있는 여러 성의 사람으로서 본국에 환부한 자는 모두 연회에 참여하여 왕을 모시는 것을 허용하였다.
○ 합단(哈丹)이 해양(海陽) 지방에 침입해 왔다.
○ 군사를 점검하는데, 5품 이하의 문관으로부터 내시(內侍)ㆍ다방(茶房)ㆍ3관(三官)ㆍ5군(五軍)ㆍ금학양관(禁學兩官)에 이르기까지 모두 종군하게 하였다.
○ 장군 김연수(金延壽)를 원 나라에 보내어 합단이 침입했음을 보고하게 했다.
○ 6월에 대장군 한신(韓愼)에게 명하여, 서경(西京)의 군사를 거느리고 동계에 가서 합단을 방어하게 하였다.
○ 장군 김흥예(金興裔)를 원 나라에 보내어 매를 바치게 했다.
○ 김연수가 원 나라에서 돌아왔는데, 황제가 조하기를, “적을 토벌할 군사가 고려에 이르자면 길이 돌아서 멀 것이니, 마땅히 함평부(咸平府)로부터 남경 해양(海陽)으로 나가 적의 길을 단절하도록 하라." 하였다.
○ 가을 7월에 다시 서북 여러 성(城)에 수령을 두고, 장군 정복균(鄭復均)을 서경유수로 삼았다.
○ 원 나라의 개원로(開元路) 다루가치(達魯花赤) 팔독만(八禿滿)이 사신을 보내어 군량을 요구하였다.
○ 부지밀직사사 정인경(鄭仁卿)을 서북면 도지휘사로 삼았다.
○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 김운(金惲)을 원 나라에 보내어 절일을 하례하게 하였다.
○ 왕이 재신과 추신을 불러서 적을 방어할 계책을 의논하니, 첨의참리(僉議叅理) 인후(印侯)가 아뢰기를, “성상께서 친히 동계로 나가셔서 적의 길을 끊으소서. 적이 만일 가까운 지경까지 침입해 오면, 성상께서는 강화도로 들어가시고, 신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막게 하소서." 하니, 왕이 이르기를,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 내가 어찌 먼저 피하여 민심을 동요하게 하랴. 적이 아무리 기세등등하여 몰려올지라도, 나는 3군(三軍)의 후군이 되어 사직을 보전하겠다." 하였다.
○ 8월 1일 신미에 일식이 있었다.
○ 장군 조함(趙瑊)에게 불경을 베낄 중을 딸려서 원 나라에 보냈다.
○ 왕과 공주ㆍ세자가 마제산에서 사냥하였다.
○ 한희유(韓希愈)를 판밀직사사로 삼았다.
○ 대장군 유비(柳屁)를 원 나라에 보내어 구원병을 청하고, 또 강화로 가서 적을 피할 것을 아뢰니, 황제가 이에 따랐다.
○ 세자가 전 추밀원부사 홍문계(洪文系)의 딸을 맞아들여 비(妃)로 삼았다.
○ 9월에 왕과 공주가 도라산(都羅山)에서 사냥하였다.
○ 위위부윤(衛尉府尹) 민훤(閔萱)을 전라도 지휘사(全羅道指揮使)로,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 엄수안(嚴守安)을 충청도 지휘사로 삼았다.
○ 원 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와서 '장경(藏經)'을 수보(修補)하였다.
○ 왕이 수강궁(壽康宮)에서 독기[纛]에 제사지냈다.
○ 상장군 차신(車信)을 원 나라에 보내어 처녀 17명을 바치게 하였다.
○ 겨울 10월에 원 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사면령을 반포하였다.
○ 부인과 노약자를 강화에 옮겼다.
○ 11월에 국사(國史)와 보문각(寶文閣)ㆍ비서시의 문적을 강화도로 옮겼다.
○ 대장군 유비를 원 나라에 보내어, 합단이 쌍성에 침입한 것을 보고하게 했다.
○ 궁인들을 강화도로 옮기고, 또 태조의 소상(塑像)을 옮겼다.
○ 원 나라에서 평장사 사리첩목아(闍梨帖木兒)를 보내어 합단을 토벌하는 것을 돕게 하였는데, 사리첩목아가 사람을 보내 와 고하기를, “국왕은 마땅히 서울에 머물면서 우리 군사를 호궤(犒饋)해야 한다." 하였다.
○ 세자를 원 나라에 보냈는데, 정당문학(政堂文學) 정가신(鄭可臣), 예빈윤(禮賓尹) 민지(閔漬) 등이 따라갔다. 세자가 북경에 이르러 홍군상(洪君祥)의 집에 사관을 정하고 있었더니, 하루는 황제가 편전(便殿)으로 세자를 인견하고 안석에 기대어 묻기를, “네가 읽는 것이 무슨 글이냐." 하니 대답하기를, “스승인 학자 정가신과 민지가 이곳에 와 있으므로, 숙위하는 여가에 가끔 그들께 《효경(孝經)》ㆍ《논어(論語)》ㆍ《맹자(孟子)》 등의 글을 질문하고 있습니다." 하니, 황제가 크게 기뻐하면서, “정가신을 불러 와 보라." 하였다. 세자가 데리고 함께 들어오니 갑자기 일어나 의관을 정제하고 책하기를, “너는 비록 세자라 할지라도 나의 생질이요, 저 사람은 비록 제후의 신하지만 학자이다. 어찌 나로 하여금 의관을 차리지 않고 보게 한단 말이냐." 하고는, 이어 자리를 권하고, 우리나라 역대의 서로 전해 온 차례와 정치가 잘 되고 못 된 역사와 풍속의 아름다운 점 등을 물었는데, 진시(辰時)에서 미시(未時)에 이르기까지 들으면서도 권태의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그 뒤에 공경(公卿)에 명하여 교지국(交趾國)의 정벌을 의논할 때에, 조서로 고려국 세자의 스승 두 사람도 불러서 같이 의논하게 하니, 두 사람이 건의하기를, “교지는 먼 곳에 있는 오랑캐이니, 군사를 괴롭혀 가며 정벌하기보다는 사신을 보내어 불러오게 하고, 만일 그들이 잘못된 생각을 고집하고 복종하지 않거든 그 죄를 성토하고 정벌하면, 일거에 만전(萬全)을 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여, 건의가 황제의 뜻에 맞았다. 이리하여 가신에게는 한림학사 가의대부(翰林學士嘉議大夫)를 제수하고, 민지에게는 직학사 조열대부(直學士朝列大夫)를 제수하니, 당시 사람들이 이를 영광으로 여겼다.
○ 원 나라에서 조인규(趙仁規)를 고려국 왕부단사관(高麗國王府斷事官)으로 삼고, 금호부(金虎符)를 하사하였다.
○ 12월에 안전(安戩)을 충청도 도지휘사로 삼았다.
○ 합단의 군사 수만 명이 화주(和州)와 등주(登州) 두 고을을 함락시켜, 사람을 죽여서 양식으로 하고 부녀자들을 윤간하고는 포(脯)를 떴는데, 만호 인후(印侯)를 보내어 이를 방어하게 했다.
○ 원 나라의 평장사 설도간(薛闍干)ㆍ사리첩목아(闍梨帖木兒)와 우승(右丞) 탑출(塔出) 등이 보기병(步騎兵) 1만 3천 명을 인솔하고 왔다.
○ 정해일에 왕이 강화도로 피란하고,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 송분(宋玢)에게 명하여 왕경(王京)에 머물러 지키게 하였는데, 분이 서울을 버리고 강화도로 도망해 왔고, 서경 유수 정인경(鄭仁卿)도 또한 서경으로부터 도망해 왔다.
高麗史節要 卷之二十一
 忠烈王[三]
[庚寅十六年 元 至元二十七年]

春正月,遣大將軍元卿如元,奏日本犯邊。○將軍吳仁永等,還自元,言,乃顏餘黨哈丹賊,將侵我東鄙,僉議贊成事洪子藩,判密直事鄭可臣等,調兵于兵部,以安戩,爲慶尙道都指揮使,金之淑,爲全羅道都指揮使,宋玢爲忠淸道都指揮使。○二月,遣中軍萬戶鄭守琪,屯禁忌山洞,左軍萬戶朴之亮,屯伊川縣界,韓希愈,屯雙城,右軍萬戶金忻,屯豢猳縣界,羅裕,屯通川界,以備丹賊。○令諸王,宰樞,承旨,班主,各出米七碩,坊里庶人,出米有差,以充東界防戍軍糧。○時,訛言,賊兵已闌入國境,中外洶洶,洪子藩等,議欲避入江華,許珙,崔有渰,獨不可曰,今,王在京師,豈可信流言,擅移國都,子藩等,會耆老宰相議之,皆曰當遷,珙,不能止,謂堂吏文證曰,衆議如此,不可沮也,吾與爾守松京,以待王命,諸宰樞皆曰人皆謂許中贊,鎭定國家,今其誤國乎,珙歸家,召子孫曰,吾當留此,若輩有不從我者,非吾子孫,必處以法,未幾,印侯,自元來曰,帝,聞還都江華,命王曰,其言若實,執首謀者以來,國人聞之,服珙智識。○三月,闍梨帖木兒,遣人來戍雙城。○帝,以寫金字經,徵善書僧,於是,遣僧三十五人如元。○前知僉議府事金周鼎,卒,周鼎,少好學,沈厚寡言,不妄交遊,初調富城尉,時北兵大至,國家驚擾,周鼎,備敵撫民,威惠竝著,一方稱之,其罷達魯花赤王京留戍軍,合浦鎭守軍,屯田等軍,請赦金方慶,皆周鼎策也,王,益重之東征之役,颶風覆舟,官軍多溺死,周鼎以計拯溺,所活甚衆,然爲鷹坊都監使,以鷹大媚王,頗張威福。○王及公主,世子,至自元。○帝,詔罷東寧府,復歸我西北諸城,王,拜其摠管韓愼,桂文庇,爲大將軍,玄元烈爲太僕尹,羅公彥,李翰,爲將軍。○夏四月,遣寫經僧六十五人如元○五月,賜崔咸一等三十一人及第。○王,置酒,以西北諸城人還附本國者,悉許侍宴。○哈丹,入海陽界。○點兵,自五品以下文官及內侍,茶房,三官,五軍,禁學兩官,皆令從軍。○遣將軍金延壽如元,奏哈丹入寇。○六月,命大將軍韓愼,將西京兵,禦哈丹于東界。○遣將軍金興裔如元,獻鷂。○金延壽,還自元,帝詔曰,討賊軍至高麗。則道路回遠,宜自咸平府,出南京海陽,截斷賊道。○秋七月,復置西北諸城守令,以將軍鄭復均,爲西京留守。○元,開元路達魯花赤,八禿滿,遣使來索軍糧。○以副知密直司事鄭仁卿,爲西北面都指揮使。○遣知僉議府事金惲,如元賀節日。○王,召宰樞,議禦賊,僉議參理印侯曰,上親將出東界,以斷賊路,賊如闌入近境,上入江華,使臣等,領兵禦之,王曰,民惟邦本,予豈先避,以撓民心,賊雖長驅而至,予爲三軍之殿,以全社稷。○八月辛未朔,日食。○遣將軍趙瑊,押寫經僧如元。○王及公主,世子,獵于馬堤山。○以韓希愈,判密直司事。○遣大將軍柳庇,如元乞師,且奏避賊江華,帝從之。○世子,納前樞密院副使洪文系女爲妃。○九月,王及公主,獵于都羅山。○以衛尉府尹閔萱,爲全羅道指揮使,判司宰寺事嚴守安,爲忠淸道指揮使。○元,遣使,修補藏經。○王,祭纛于壽康宮。○遣上將軍車信,以處女十七人,獻于元。○冬十月,元,遣使頒赦。○徙婦人老弱于江華。○十一月,移國史及寶文閣,秘書寺文籍于江華。○遣大將軍柳庇如元,奏哈丹入雙城。○徙宮人于江華,又遷太祖塑像。○元,遣平章事闍梨帖木兒來,助討哈丹,闍梨帖木兒遣人來告曰,國王宜留京城,以犒吾軍。○遣世子如元,政堂文學鄭可臣,禮賓尹閔漬等從行,世子至京,館于洪君祥家,一日,帝引見便殿,隱几而臥,問爾讀何書,對曰,有師儒鄭可臣,閔漬在此,宿衛之暇,時從質問孝經,論,孟,帝大悅,試喚可臣來,世子引與俱入,遽起而冠,責曰,爾雖世子,吾甥也,彼雖陪臣,儒者也,何得令我不冠以見,仍賜坐,問本國世代相傳之序,理亂之迹,風俗之宜,自辰至未,聽之不倦,其後,命公卿議征交趾,有詔高麗世子之師二人,與召同議,二人議曰,交趾遠夷,勞師致討,不如遣使招來,如其執迷不服,聲罪征之,一擧可以萬全,對稱旨,於是,授可臣,翰林學士,嘉議大夫,漬,直學士,朝列大夫,時人榮之。○元,以趙仁規,爲高麗國王府斷事官,賜金虎符。○十二月,以安戩爲忠淸道都指揮使。○哈丹兵數萬,陷和,登二州,殺人爲粮,得婦女聚麀而脯之,遣萬戶印侯禦之。○元平章事薛闍干,闍梨帖木兒,右丞塔出等,率步騎一萬三千人來。○丁亥,王避兵于江華,命知都僉議司事宋玢,留守王京,玢棄京城,奔入江華,西京留守鄭仁卿,亦自西京逃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