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부록 |
|
임진년에 하교(下敎)하여 권농하고, 특별히 기전(畿甸)의 재해를 입은 고을의 춘수미(春收米)를 세 말씩 감해 주었다. 여름에 가뭄이 들자 하교하여 자신을 책망하기를, ‘나의 마음은 백성을 사랑하는 데 간절하지만 백성들이 그 혜택을 입지 못하고 있다. 극기(克己)의 공부가 철저하지 못한 바 있고, 마음을 비워 받아들이는 도량이 넓지 못한 바 있어서, 기강(紀綱)을 진작(振作)시키려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퇴폐와 타락의 근심은 더욱 심해지고, 실공(實功)에 힘쓰려고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허위(虛僞)의 습관은 오히려 많아지니, 모두 나의 과실이다. 정전(正殿)을 피하고 더욱 하늘을 공경히 섬기는 정성을 돈독(敦篤)하게 할 것이니, 마땅히 정부에서 직언(直言)을 널리 구해서 내가 미치지 못하는 점을 도와야 할 것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6경(六卿)의 우두머리에 있는 자가 과연 능히 용사(用捨)를 공정하게 하고 시비(是非)를 분명히 한다면, 관사(官司)는 적임자를 얻고 조정은 화정(和靖)해질 것이다. 방악(方岳)의 신하가 출척 유명(黜陟幽明)하는 것이 한결같이 공정한 마음에서 나오고, 절진(節鎭)의 장수가 항상 진루(陣壘)를 대한 것처럼 감히 게으르거나 소홀하게 하지 않는다면, 조가(朝家)에서 위임한 중임을 거의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효부(孝婦)가 원한을 품자 3년 동안 가뭄이 들었고, 연신(燕臣)이 통곡(慟哭)하자 5월에 서리가 내렸다. 만약 지극한 원한을 펴지 못한 자가 있으면 중외(中外)의 관원들은 상세히 살펴서 아뢰도록 하라. 옥사(獄事)를 판결하고 송사(訟事)를 청단(聽斷)하는 데 이르러서도 세력의 강약(强弱)을 보아 입락(立落)하지 말고, 한결같이 사실의 곡직(曲直)에 따라 처리한다면, 소민(小民)들이 거의 원통함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또 근래 사대부(士大夫)들의 풍습이 아름답지 못하고 염우(廉隅)가 너무 승(勝)하여 벼슬자리를 비워두는 일이 갈수록 심해진다. 옛날 임진년· 계사년 병란(兵亂) 뒤 잿더미만 눈에 가득한 날 사대부들이 감히 노고(勞苦)를 말하지 못하고 다 연곡(輦轂)에 모여서 분주히 직무를 수행하였는데, 지금의 사대부들은 이와 다르니 내가 실로 개탄스럽게 여긴다.’ 하였다. 계사년에 하교하여 권농하고, 굶주린 백성을 진휼하였다. 즉위(即位)한 지 40년이 되었으므로 종묘에 고(告)하고 진하(陳賀)하였으며, 반교(頒敎)·반사(頒赦)하였다. 대신(大臣)과 문무(文武) 2품 이상이 빈청(賓廳)에 모여서 아뢰었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전하(殿下)께서 사복(嗣服)하신 이래 성덕(聖德)과 홍업(洪業)으로서 마땅히 유양(揄揚)하고 크게 칭찬해야 할 것을 참으로 일일이 손꼽아 다 들 수가 없습니다. 단종(端宗)의 복위(復位)에서 성상의 효성이 더욱 빛이 났고, 곤위(坤位)가 거듭 바로된 데서 일월(日月)이 정명(貞明)하였습니다. 신종(神宗)의 망극(罔極)한 은혜를 추모하고, 효종(孝宗)의 「지통(至痛)하다.」는 하교(下敎)를 체념하여 단(壇)을 쌓아 향사(享祀)하자, 대의(大義)는 천하(天下)에 천명(闡明)되고 풍성(風聲)은 온 나라를 움직였습니다. 생각건대 우리 선조 대왕(宣祖大王)께서는 실로 지극한 덕(德)과 크나큰 공(功)이 있었으므로, 군신(群臣)들이 우러러 존호(尊號)를 청하자, 처음에는 사양하시다가 끝내 받으셨습니다. 대개 어찌 옳지 못한데도 성조(聖祖)께서 구차스럽게 받으셨겠습니까? 신 등이 전하께 바라는 바는 또한 오직 성조께서 행하신 바를 따르는 데 있고, 감히 예대(豫大)의 설(說)을 만들어 성상(聖上)의 겸손을 지키시는 덕(德)에 누를 끼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해마다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곤궁하니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근심하고 두려워하고 있다. 비록 조종(祖宗)께서 이미 행했던 전례가 있다고는 하나 덕이 없는 내가 감히 바랄 바가 아니다. 결단코 윤허하여 따르기 어렵다.’ 하였다. 이에 대신(大臣)이 누차 아뢰어 간청하고, 또 백료(百僚)를 거느리고서 대궐 뜰에서 호소하였다. 세자(世子)가 상소(上疏)하여 여러 신하들의 의논을 따르기를 청하고, 두 왕자(王子)가 여러 종친(宗親)을 거느리고 상소하여 청하니, 왕이 뒤에 마지못해 따랐다. 군신(群臣)이 의논하여 존호(尊號)를, ‘현의 광륜 예성 영렬(顯義光倫睿聖英烈)’이라 올렸다. 하교하기를, ‘어약(御藥)에 쓰이는 생우황(生牛黃) 때문에 며칠 안에 수백 마리의 많은 소를 도살하였다. 비록 축물(畜物)이긴 하지만 마음에 측은하다. 도살을 5일까지 한하여 우선 정지하게 하라.’ 하였다. 가을에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무재(武才)를 시험보였다. 정언(正言) 홍계적(洪啓迪)이 상소하여 논하기를, ‘ 금액(禁掖) 안에서 노래하고 떠드는 소리가 있으니, 정성(鄭聲)의 훈계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만약 간신(諫臣)의 말이 아니었다면 이런 해괴한 일을 어찌 알았겠는가? 모여서 노래하고 떠든 자들을 조사해 내어 엄중히 징계하고, 구사(丘史)로서 궐정(闕庭)에 출입하는 자들을 모조리 엄금(嚴禁)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서 홍계적에게 표피(豹皮)를 하사하여 포상하였다. 감진 어사(監賑御史)를 호남(湖南)에 보냈다. 하교하기를, ‘내탕(內帑)의 은자(銀子) 1천 냥을 호서(湖西)에, 8백 냥을 기영(圻營)에 내려 보내 진자(賑資)에 보태도록 하라. 그리고 강도(江都)의 쌀 1만 석(石)을 호남(湖南)에, 연해(沿海)의 곡식 1만 석을 제주(濟州)에 옮겨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겨울에 천둥이 울렸기 때문에 하교(下敎)하여 자신을 책망하고 구언(求言)하였다. 갑오년에 하교하기를, ‘진정(賑政)과 권농(勸農)을 바로 이때 신칙(申飭)해야 할 것인데, 질병(疾病)이 이와 같아서 친히 스스로 별도로 하유(下諭)할 수 없으니, 정원(政院)에서 문장의 문구(文句)를 만들어 여러 도(道)의 감사(監司)와 유수(留守) 및 감진 어사(監賑御史)에게 하유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때 성후(聖候)가 오랫동안 위예(違豫)한 가운데 있었는데, 약원(藥院)에서 물오리를 올리니, 왕이 말하기를, ‘《예기(禮記)》 월령(月令)에, 「둥지를 엎지 않으며, 새끼와 알을 취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옛 성인(聖人)이 생육(生育)의 뜻을 취한 것이다. 이렇게 봄이 화창하여 만물(萬物)이 생육하는 때를 당해서 차마 상해(傷害)할 수가 없다. 병을 치료하는 데 절로 다른 방도가 있을 것이니, 어찌 꼭 이것을 취해야 하겠는가? 다시는 들이지 말라.’ 하였다. 재차 제주(濟州)의 공인(貢人)을 차비문(差備門) 밖에 불러서 진정(賑政)과 백성의 고통을 상세히 물었다. 전염병이 극성을 떨고 있다는 말을 듣고, 약물(藥物)을 내려 보내 구료(救療)하게 하였다. 송조(宋朝)의 주염계(周濂溪)·장횡거(張橫渠)·정명도(程明道)·정이천(程伊川)·소강철(邵康節)·주회암(朱晦庵) 등 여섯 현인(賢人)을 성전(聖殿)에 승배(陞配)하고, 반교(頒敎)하였다. 9월 19일에 군신(群臣)들의 진연(進宴)을 받았다. 을미년에 하교(下敎)하여 권농(勸農)하고, 굶주린 백성을 진휼(賑恤)하게 하였다. 대신(大臣)에게 명하여 의금부(義禁府)·형조(刑曹)의 당상관(堂上官)과 함께 빈청(賓廳)에서 회의(會議)하여 품지(稟旨)해서 체수(滯囚)를 재처(裁處)하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진도(珍島) 한 군(郡)에 10년 동안 흉년이 들어 남아 있는 백성들이 지탱하여 보전할 수 없다 하니, 해외(海外)의 피폐한 백성이 혹 원한을 품고 펴지 못한 나머지 위로 천화(天和)를 범해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찾아서 물어 아뢰게 하라.’ 하였다. 병신년에 감진 어사(監賑御史)를 제주(濟州)에 보냈다. 왕이 말하기를, ‘양전(量田)한 지 이미 오래 되어 경계(經界)가 바르지 않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왕정(王政)은 반드시 경계(經界)로부터 시작한다.」 하였다. 반드시 8도(八道)에 풍년이 들어 한꺼번에 하기를 기다린다면, 끝내 기약이 없을 것이니, 이에 빨리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친히 제문(祭文)을 짓고 제주(濟州)의 굶어죽은 사람들에게 제사를 내렸다. 하교하기를, ‘《예기(禮記)》 월령(月令)에, 「드러난 뼈를 가려 주고, 썩은 살을 묻어준다.」 하였으니, 대개 산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죽은 사람에게 미루어 미치는 것이다. 더구나 탐라(耽羅) 한 지역의 백성들이 전후로 굶어 죽은 자가 수천에 이른다 하니, 거두지 못해 들판에 뼈를 드러내 놓은 시신이 반드시 많을 것이다. 생각하건대, 나도 몰래 측은한 생각이 드니, 수신(守臣)으로 하여금 묻어주고 아뢰게 하라.’ 하였다. 가뭄이 들자 하교(下敎)하여 자신을 책망하고, 군신(群臣)들을 훈칙(訓勅)하였다. 은자(銀子) 2천 냥을 기영(圻營)에 내려 주고 진자(賑資)에 보태 쓰게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 계복(啓覆)을 행하지 않은 지가 3년이 되었다. 혹은 범죄(犯罪)가 지극히 중한데 법(法)을 집행하기 전에 경폐(徑斃)하기도 하고, 혹은 정리로 보아 용서할 점이 있는데도 한결같이 판결이 지체되기도 하므로, 작년에 이것을 염려하여 반드시 시행하고자 했지만, 나의 병 증세가 더하여 실행하지 못하였다. 올해는 결단코 시행하고자 한다.’ 하고, 마침내 9월에 계복하여 그 계동(季冬)을 기다려 형을 집행하게 하였다. 정유년에 여러 도(道)의 감사(監司)들에게 하교하여 권농하고, 제언(堤堰)을 수리하게 하면서 말하기를, ‘병으로 앓는 동안에도 오로지 생각은 모두 백성에게 있다. 이 말은 입에만 올리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심복(心服)에서 나온것이다.’ 하였다. 이때 왕이 여러 해 위예(違豫)했는데, 눈병과 다리의 마비 등의 증상으로 가장 괴로와하였다. 그래서 장차 온천(溫泉)에 목욕하려고 호서(湖西)의 수신(守臣)에게 하유(下諭)하여 백성의 고통을 찾아 묻고 행재(行在)에 장문(狀聞)하게 하였다. 3월에 온천에 거둥하여 경기(京畿)·호남(湖南) 두 도(道)의 나이 80세 이상인 자에게 사족(士族)과 상한(常漢)을 논할 것 없이 모두 가자(加資)할 것을 명하고, 감사(監司)와 차원(差員)·수령(守令)을 인견(引見)하여 백성의 고통을 찾아 물었다. 관원을 보내 송시열(宋時烈)·이귀(李貴)·김집(金集)·홍익한(洪翼漢)·윤집(尹集)의 묘소(墓所)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윤집의 사당을 세우고 자손을 녹용(錄用)하였다. 진휼청(賑恤廳)의 당상관(堂上官)으로 하여금 재차 유개(流丐)를 갯가에 모아 마른 양식을 나누어 주게 하고, 환궁한 뒤 도신(道臣)에게 차원(差員)을 정해서 거처를 잃은 유개에게 계속 주도록 명하였다. 특별히 호서(湖西)의 병신년 조의 대동미(大同米)를 결(結)마다 두 말씩 감해 주었다.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였다. 하교(下敎)하기를, ‘근래에 궐내(闕內)에서 술을 파는 자가 있다 하니, 일이 매우 놀랍고 해괴하다. 유사(攸司)로 하여금 형률을 상고하여 과죄(科罪)하게 하라.’ 하였다. 왕이 왕위에 오른 지 사기(四紀)에 직접 만기(萬機)를 관장하고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부지런하여 밥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다. 그러다가 중신(中身)을 지나자, 나쁜 병이 끊이지 않으니, 지난 을유년에는 춘궁(春宮)에게 선위(禪位)하고자 하였다. 춘궁이 상소(上疏)하여 굳이 사양하고, 종친(宗親)·대신(大臣)·문무 백관(文武百官)으로부터 아래로는 방민(坊民)의 기로(耆老)에 이르기까지 분주히 다투어 간(諫)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므로, 마침내 성명(成命)을 정지하였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하교하기를, ‘5년 동안 고질(痼疾)을 앓는 나머지 눈병이 더 심해졌다. 물건을 보면 더욱 어두워 수응(酬應)하기 점점 어려워지니, 나라일이 염려스럽다. 국조(國朝)와 당(唐)나라 때의 고사(故事)에 의해 세자로 하여금 청정(聽政)하게 하라.’ 하였다. 세자가 진장(陳章)하여 극력 사양하니, 답하기를, ‘여러 해 동안 고질을 앓은데다 눈병이 또 심하여 사무(事務)가 지체되니, 병으로 앓는 동안 걱정이 대단하였다. 너에게 명하여 노고(勞苦)를 대신하게 하니, 이것은 곧 국조(國朝)의 고사(故事)이다. 네가 어찌 사양하겠는가? 아! 부탁(付託)하는 것이 지극히 무겁고 너의 책임이 지극히 크니,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혹시라도 게을리하지 말라. 공경과 게으름의 구분에 따라 흥하고 망하는 것이 이에 나뉘어지니, 두려워하지 않으며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서경(書經)》에 말하기를, 「오로지 한 생각으로 시종 학문에 종사하라.」 하였으니, 너는 마땅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재차 올린 상소에 답하기를, ‘어제 비지(批旨)로 훈계(訓戒)한 말을 너는 공경하고 조심스레 받들어서 다시 사양하지 말라. 그리고 또 근일의 일은 처분(處分)이 바르고, 시비(是非)가 명백하여 백세(百世) 뒤라도 미혹되지 않을 것이다. 일이 사문(斯文)에 관계되니 생각건대 중요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말하는 것이니, 너는 나의 뜻을 따라 혹시라도 흔들리지 말라.’ 하였다. 이에 앞서 봉조하(奉朝賀) 송시열(宋時烈)을 양조(兩朝)에서 예우(禮遇)하던 유현(儒賢)이라 하여 왕이 빈사(賓師)로 대접했는데, 그 문도(門徒) 윤증(尹拯)이 역적 윤휴(尹鑴)에게 빌붙어 오래 전부터 송시열에게 이의를 제기하고자 하였다. 송시열이 윤증의 아버지인 윤선거(尹宣擧)의 묘문(墓文)을 찬술할 때 유양(揄揚)한 바가 그의 기대에 맞지 않자, 윤증은 이 일로 인해 유감을 품고 제 마음대로 고쳐서 물리쳤다. 또 송시열에게 보내는 의서(擬書)를 지어 죄상(罪狀)을 늘어놓으니, 이에 유림(儒林)은 분열되고, 조정의 의논은 마구 흩어져 반세(半世) 동안 윤증이 스승을 배반한 것을 당연한 도리로 여기는 데로 쏠렸다. 왕도 또한 그 일의 실상을 통촉하지 못하고, 일찍이 ‘아버지와 스승은 경중(輕重)이 있다.’고 하교(下敎)하였는데, 병신년에 이르러 묘문(墓文)과 의서(擬書)를 직접 얻어 읽어 보자 비로소 그 빙자하여 허구날조한 정상을 살피고 드디어 하교하기를, ‘아버지와 스승의 경중(輕重)에 대한 설(說)을 일찍이 이미 하교하였으나, 한 번 의서와 묘문을 상세히 본 뒤로 내가 깊이 의리(義理)를 연구하여 시비(是非)가 크게 정해졌으니, 후세(後世)에 할 말이 있게 되었다. 나의 자손된 자들은 모름지기 이 뜻을 따라 굳게 지키고 흔들리지 않아야 옳을 것이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또 비지(批旨)에다 춘궁(春宮)을 교유(敎諭)하니, 반복된 정녕(丁寧)한 가르침이 일성(日星)처럼 밝게 걸려 만세(萬世)에 연익(燕翼)의 계획을 남겨주었다. 사륜(絲綸)이 한 번 전파되자 사림(士林)이 모두 펄쩍 뛰며 경하하였다. 왕이 또 손수 화양(華陽)·흥암(興巖) 두 서원(書院)의 액호(額號)를 써서 걸게 하고, 관원을 보내 제사를 내렸다. 하교하기를, ‘인주(人主)가 현인(賢人)을 존경하는 것이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다면 거의 선비의 추향을 바로잡고 사설(邪說)을 사라지게 할 수 있을 것이니, 나의 뜻이 어찌 우연한 것이겠는가?’ 하였다. 화양은 곧 송시열을 조두(俎豆)하는 곳이고, 흥암은 곧 송준길(宋浚吉)을 조두하는 곳이다. 무술년에 감진 어사(監賑御史)를 평안도(平安道)에 보냈다. 왕이 말하기를, ‘강봉서(姜鳳瑞)의 격쟁(擊錚) 때문에 「대신(大臣)에게 의논하라.」는 하교(下敎)가 있었는데, 내가 평소 강씨의 옥사(獄事)에 대해 마음속으로 항상 측은하게 생각하였다. 《주역(周易)》에 말하기를, 「착한 일을 많이 쌓은 집에는 반드시 여경(餘慶)이 있고, 나쁜 일을 많이 쌓은 집에는 반드시 여앙(餘殃)이 있다.」 하였다. 임창군(臨昌君)은 소현(昭顯)의 혈손(血孫)으로서 그 자손들의 번연(蕃衍)함이 당(唐)의 분양(汾陽)에 비길 만하니, 선인(善人)에게 복을 내리는 이치가 과연 분명하다. 이명한(李明漢)의 문집(文集)을 열람하다가 강석기(姜碩期)의 시장(諡狀)에 이르러 그가 어진 재상이었던 것을 알았고, 또 경덕궁(慶德宮)의 높은 곳에서 소현(昭顯)의 사당을 바라보고 그 신도(神道)의 외롭고 단출함에 서글픈 생각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 세 건의 일에 느낀 바 있어 드디어 절구(絶句) 셋을 지었다. 작년에 수상(首相)이 관작을 회복해 주는 일을 진달(陳達)했을 적에 마음에 망설이는 바가 있어서 능히 다 말하지 못하고 단지 관작의 회복만을 허락했는데, 대개 강석기가 화(禍)를 입었던 것은 단지 그 딸에게서 연유했기 때문이다. 옛적 을미년에 연신(筵臣) 이단상(李端相)이 김홍욱(金弘郁)의 원통함을 남김없이 말하였을 적에 효묘(孝廟)께서 한숨을 쉬고 탄식하셨지만, 「일이 선조(先朝)에 관련된 것이라서 감히 의논할 수가 없다.」고 하교하였었다. 그런데 그 뒤에 마침내 김홍욱의 관직을 회복해 주셨으니, 성조(聖祖)의 은미한 뜻을 알 수가 있다. 헌의(獻議)하는 여러 대신(大臣)들은 이 뜻을 알아 주었으면 좋겠다.’ 하였다. 또 2품(二品) 이상과 삼사(三司)로 하여금 회의(會議)하게 하니,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원통하다고 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왕이 말하기를, ‘나의 뜻이 먼저 정해졌고, 공의(公議)도 크게 같으니, 신리(伸理)의 은전(恩典)을 조속히 거행하도록 명하라.’ 하였다. 이에 소현 세자빈(昭顯世子嬪)의 위호(位號)를 회복하고, 그 묘소를 봉(封)하였다. 강석기와 김홍욱에게는 제사를 내리고 증직(贈職)하였으며, 자손을 녹용(錄用)하였다. 하교하기를, ‘나의 병이 고질이 되어 계복(啓覆)에 친림(親臨)하는 것은 형세로 보아 할 수 없으니, 집마다 옥사(獄事)의 판결이 지체되어 유사(瘦死)할 뿐이다. 계복 역시 형인(刑人) 가운데 있으니, 변통(變通)의 방도가 없을 수 없다. 대벽(大辟)으로 처단(處斷)할 즈음에 스스로 판단하기가 어려움이 있으면 세자가 스스로 마땅히 면품(面稟)할 것이며, 지금부터 이후로 무릇 형인(刑人)의 공사(公事)에 관계된 것은 일체 동궁(東宮)에 입달(入達)하도록 하라.’ 하였다. 친히 제문(祭文)을 지어 성황단(城隍壇)과 여단(癘壇)에 제사를 내렸다. 기해년에 태조조(太祖朝)의 고사(故事)에 따라 성산(聖算)이 예순이 되었으므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내국 제조(內局提調) 이이명(李頤命)이 아뢰기를, ‘태조 대왕(太祖大王)의 향년(享年)이 일흔을 넘긴 것은 근고(近古)에 없는 일인데, 예순에 기로소에 들어가셨습니다. 비록 근거할 만한 것은 없으나, 고(故) 상신(相臣) 심희수(沈喜壽)와 김육(金堉)이 찬(撰)한 서문(序文)과 《선원보략(璿源譜略)》에 모두 그 일을 기록하고 있고, 또 본소(本所) 서루(西樓)의 제명(題名)한 곳에 사롱(紗籠)을 설치하여 봉안(奉安)하였으니, 이는 반드시 들은 바가 있어서 그러할 것입니다. 이번에 이집(李楫)이 상서(上書)하여 청한 일은 이미 고사(故事)에 근거하고 있고, 왕세자(王世子)의 희구(喜懼)하는 정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나는 본래 병이 많아 쉰을 스스로 기약할 수 없었는데, 이미 쉰을 넘었으니, 항상 「태조께서 예순에 기로소에 들어가셨으니, 나도 만약 그 나이가 되어 성조(聖祖) 아래에 제명(題名)한다면 또한 거룩한 일이다.」고 생각해 왔다. 이제 세자(世子)가 이 일을 누차 청하니, 내가 그 희구하는 정을 생각하여 이에 허락하노라.’ 하였다. 이에 기로소에 영수각(靈壽閣)을 세워서 어첩(御牒)을 봉안(奉安)하였다. 4월에 왕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기로소의 여러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은술잔을 하사하였다. 또 음악을 내려 기로소의 여러 신하들이 물러나와 기사(耆司)에서 잔치를 벌였다. 하교하기를, ‘관무재(觀武才)를 혹은 2, 3년 간격으로 혹은 4, 5년 간격으로 하는 것이 고례(故例)였다. 그런데 내가 여러 해 동안 병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에 설행(設行)하지 못한 지 지금 10년이 되었다. 명관(命官)으로 하여금 대신해 거행하여 위열(慰悅)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9월에 왕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군신(群臣)의 진연(進宴)을 받았다. 삼남(三南)에 균전사(均田使)를 나누어 보냈다. 연령군(延齡君)의 상차(喪次)에 친히 곡림(哭臨)하였다. 경자년에 성산(聖算)이 예순이 되었다 하여 진하(陳賀)하고 반교(頒敎)하였다. 6월에 왕의 환후(患候)가 더욱 무거워지니, 세자가 재차 대신(大臣)과 중신(重臣)을 보내어 종사(宗社)·산천(山川)에 기도하였다. 8일 진시(辰時)에 왕이 경덕궁(慶德宮)의 융복전(隆福殿)에서 군신(群臣)을 버리니, 춘추(春秋) 예순이었다. 이날 경성(京城)의 모예(旄倪)· 여대(輿儓)들까지 궐하(闕下)에 달려나와 마치 부모처럼 곡(哭)하였고, 심산 궁곡(深山窮谷)에 이르기까지 바삐 달려와서 호읍(號泣)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중궁(中宮)이 원상(院相)에게 하교하기를,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평일의 거룩한 덕행을 조신(朝紳)들이 모르는 바 아니나, 그래도 오히려 다 알지 못하는 점이 있을 것이다. 여러 가지 정무(政務)에 수응(酬應)하시느라 누차 침식(寢食)을 폐하셨고, 하늘을 공경히 섬겨 재앙을 만나면 공구(恐懼)하셨다. 사시(四時)의 기후가 간혹 고르지 못하거나 우설(雨雪)의 절기가 만일 시기를 잃어 무릇 농사에 피해가 있으면 곧 근심이 얼굴빛에 나타났고, 날씨의 흐리고 맑음과 바람이 어느 방향에서 부는가 하는 것 등을 비록 밤중이라도 반드시 여시(女侍)로 하여금 살펴보도록 하셨다. 백성에 대한 걱정과 나라에 대한 일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 잠시도 잊지 않아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근심하고 근로하심이 시종 하루와 같아 여러 해 동안 계속 손상된 나머지 성수(聖壽)를 단축시키게 된 것이다. 상장(喪葬)의 제구(諸具)에 이르러서는 경비를 진념(軫念)하여 일찍이 조치한 바가 있었다. 모든 여러 가지 제기(祭器)는 이번에 내려 주는 은자(銀子)로 만들도록 하고, 또 이 3천 7백 금(金)은 대행 대왕께서 진휼의 자금으로 미리 준비해 두셨던 것인데, 이제 지부(地部)에 내려 국장(國葬)의 비용에 보태 쓰도록 한다. 습렴(襲殮)의 의대(衣襨)도 또한 대내(大內)에서 준비해 쓸 것이니, 만일 부족한 것이 있을 경우 해조(該曹)에서는 다만 써서 보이는 것을 기다렸다가 들여보내도록 하여 평일에 백성을 구휼하고 경비를 절약하던 지극한 뜻에 힘써 따르도록 하라. 습렴(襲殮)할 때는 대신(大臣)·예관(禮官)·승정원(承政院)·삼사(三司)에서 입시(入侍)하는 것이 예(禮)이다.’ 하였다. 왕은 영명(英明)·특달(特達)·관홍(寬弘)·근검(勤儉)하였으며, 효성(孝誠)의 돈독함은 천성에서 나와 시선(視膳)할 때부터 기쁜 낯빛으로 모시는 도리를 다하였다. 사복(嗣服)하자 천승(千乘)의 존귀함으로 증자(曾子)와 민자건(閔子騫)의 행실을 몸소 실천하여 자의(慈懿)·명성(明聖) 두 동조(東朝)를 받들어 섬겼는데, 새벽과 저녁으로 승환(承歡)하여 화기(和氣)가 애연(藹然)하였다. 해마다 태묘(太廟)에 친히 향사(享祀)하고 봄·가을로 반드시 원릉(園陵)을 전알(展謁)하였다. 여러 능(陵)을 두루 참배했는데, 더러는 두세 차례에 걸쳐서 하기도 하였다. 생각건대, 우리 국가는 성신(聖神)이 계승하여 풍성한 공렬(功烈)이 드높고 빛났으며, 관덕(觀德)의 묘우(廟宇)와 숭보(崇報)의 의전(儀典)이 거의 모두 이룩되었는데도, 왕은 오히려 미진하게 여겼다. 효사(孝思)를 미루고 넓혀서 말하기를,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한 것은 존주(尊周)의 의리이니 밝히지 않을 수 없는데, 자수(字數)가 가지런하지 않은 것은 여러 묘우의 예(禮)가 마땅히 다른 점이 있어서는 안된다.’ 하였다. 이에 태조(太祖)와 태종(太宗)의 시호(諡號)를 추가로 올렸고, 인조(仁祖)는 중흥(中興)의 대업(大業)을 이루고, 효종(孝宗)은 춘추(春秋)의 대의(大義)를 밝혔으므로, 높여서 세실(世室)로 삼았다. 단종 대왕(端宗大王)은 선위(禪位)한 이후 수백 년 동안 나라 사람들이 원통하고 억울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으나 열성(列聖)이 어떻게 할 겨를이 없었는데, 왕이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결단을 내려 서둘러 욕의(縟儀)를 거행하니, 종묘(宗廟)의 전례(典禮)가 질서가 있게 되었고, 신(神)·인(人)이 모두 기뻐하였다. 별도로 중종(中宗)의 신비(愼妃)의 사당을 세워 제사지냈다. 왕은 학문을 좋아하고 문치(文治)를 숭상하였으며, 유교(儒敎)를 숭상하고 도학(道學)을 존중하였다. 한가로이 보내는 여가에도 손에 책을 놓지 않았고, 경전(經傳)·사서(史書)와 제자 백가(諸子百家), 우리 동방(東方)의 문집(文集)까지도 섭렵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무릇 한 번 본 것은 평생 잊지 않았다. 날마다 세 번 경연(經筵)을 열어 부지런히 노력하며 게을리하지 않았고, 모년(暮年)에 이르러서도 자주 강관(講官)을 인접(引接)하였으며, 글에 임하여서는 이치를 분석하여 견해가 분명하고 투철하였다. 일찍이 《심경(心經)》의 ‘마음의 동정(動靜)’을 논하기를, ‘출몰(出沒)이 일정하지 않고 발동하기는 쉽지만 제어하기는 어려운 것으로 마음 같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동(動) 가운데 정(靜)이 있고 정(靜) 가운데 동(動)이 있다.」는 설이 있다는 것이다.’ 하였다. 《주역(周易)》의 ‘납약(納約)’의 설을 논하기를, ‘이것은 대신(大臣)이 어렵고 험난한 때를 당해 마지못하여 이런 방도를 쓸 수 있는 것이며, 만일 치평(治平)한 세상에 사잇길을 통해 임금에게 결탁한다면 옳지 않다.’ 하였다. 대유괘(大有卦)의 구사효(九四孝)를 논하기를, ‘강하고 부드러움이 중도(中道)를 얻은 연후에야 밝혀 비추고 강건하여 결단할 수 있다. 만일 혹시라도 단지 부드럽기만 하고 엄(嚴)하지 않거나 단지 엄하기만 하고 부드럽지 않다면, 어떻게 능히 그 소유한 대중을 보전할 수 있겠는가?’ 하고, 육오효(六五爻)를 논하기를, ‘너무 부드러우면 인심(人心)이 해이해지기 쉽다. 그러므로 반드시 위엄을 필요로 하는 것인데, 《중용(中庸)》에 이른바 「강함을 나타내고 꿋꿋하여야 고집함이 있기에 족하다.」는 것은 위엄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또 역대(歷代)의 일을 논하여 말하기를, ‘ 한(漢)의 성제(成帝)가 이미 적방진(翟方進)으로 하여금 자살(自殺)하도록 하고서 또 후하게 장사(葬事)지내 주도록 하였으니, 하늘에 응하는 도리가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송 경공(宋景公)은 좋은 말을 하자 형혹성(熒惑星)이 1도(一度)를 옮겨갔으니, 군주의 말은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내가 지난 역사를 보니 실로 소인(小人)인 줄 알지 못하고서 쓴 사람도 본래부터 있었지만, 더러는 소인인 줄 알면서 쓴 사람도 또한 있었으니, 이는 대개 사의(私意)를 제거하지 못한 데서 연유한 것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군주에게 신하가, 아비에게 아들이 모두 간(諫)할 수 있는 도리가 있다. 부소(扶蘇)가 서적을 불사르고 유생(儒生)을 파묻는 것을 보고 어찌 간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다행히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면 이런 화(禍)는 없었을 것이니, 이것이 어찌 부소의 허물이겠는가? 혹자가 이것을 부소의 과실이라 하는 것은 잘못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연개소문(淵蓋蘇文)이 비록 악했을지라도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장수에게 명하여 정벌하게 했다면 옳았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친정(親征)을 하지 않았다면 비록 공(功)은 없을지라도 그렇게 큰 실수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현종(玄宗)은 세째 아들을 죽이고 자부(子婦)를 궁인(宮人)으로 맞아들였으니, 이는 태종(太宗)의 규문(閨門)이 바르지 않은 데서 연유한 것이다.’ 하였다. 왕은 임어(臨御)하신 지 46년 동안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조심하고 두려워 하며 한결같이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위안(慰安)하는 것으로 임무를 삼았다. 하늘을 공경히 섬기려는 정성이 위로 하늘에 이르렀고 여상(如傷)의 인덕(仁德)이 아래로 백성에게 미쳤다. 나라는 남북(南北)의 경보(警報)가 없어 경내(境內)가 편안했고 백성들은 하늘과 땅의 포용해 주는 은혜에 싸여 생업(生業)에 안락하였는데, 왕은 한(漢)·당(唐)의 나라가 부유하고 백성이 많은 정치를 비루하게 여긴 나머지 개연히 삼대(三代)의 융성(隆盛)에 뜻을 두어 조처와 사업(事業)이 수신(修身)·제가(齊家)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이 없었다. 관저(關雎)와 인지(麟趾)의 덕화(德化)가 이미 집안과 나라에 흡족하였고, 주관(周官)의 제도가 찬란히 다시 밝혀졌다. 예악(禮樂)과 문물(文物)이 열조(列祖)의 광휘(光輝)를 더하였고, 큰 계획과 큰 사업은 후사(後嗣)의 한없는 복을 열었다. 이것은 바로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이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신주(神州)가 육침(陸沈)되고 일월(日月)이 캄캄하게 어두워졌으나, 한 줄기의 의리(義理)가 좌해(左海)의 지역에서 어둡지 않았다. 돌이켜 보건대, 지난날 우리 인조 대왕(仁祖大王)은 ‘ 비풍(匪風)· 하천(下泉)’의 원통함을 안고서 ‘고황 백등(高皇百登)의 수치’를 남겼고, 우리 효종 대왕(孝宗大王)께서는 대지(大志)를 분발하여 장차 큰 일을 하시려 하여, ‘지극한 통한이 마음속에 있다.’는 하교를 내리셨으니, 귀신을 울릴 만하였다. 흉적(凶賊)을 제거하고 수치를 씻으려는 뜻은 밝기가 해와 별 같았는데, 하늘이 계획을 기약할 수가 없어 궁검(弓劍)을 갑자기 버리니, 지사(志士)의 분통이 지금까지도 하루와 같다. 그러나 고금을 통해 멸할 수 없는 춘추(春秋)의 대의(大義)가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희미해지자, 왕은 이것을 크게 두려워하며 분연히 한 몸으로 짊어지고 이에 갑신년이 거듭 돌아오는 날에 황도(皇都)가 함락된 일을 슬퍼하시어 금중(禁中)에 단(壇)을 설치하여 멀리 의종 황제(毅宗皇帝)를 제사하였는데, 장차 제사를 지내려는 때에 출척(怵惕)· 참달(慘怛)하여 참으로 천지(天地)가 무너지고 분열되는 것을 친히 보는 듯이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 임진년에 재조(再造)한 은혜는 만세(萬世)토록 잊을 수 없다.’며 궁성(宮城) 북쪽 정결한 곳에 단(壇)을 설치하고, ‘대보단(大報壇)’이라 명명(命名)하여 해마다 태뢰(太牢)로 신종 황제(神宗皇帝)를 제사하였으며, 친히 ‘지감시(志感詩)’와 서문(序文)까지 지어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화답(和答)해 올리게 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만약 신종 황제가 천하(天下)의 군대를 동원하여 구원해 주지 않았다면, 우리 나라가 어떻게 오늘이 있을 수 있겠는가? 황명(皇明)이 속히 망한 것은 반드시 동정(東征)에 연유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는데, 돌아보건대, 우리 나라는 나라가 작고 힘이 약해 이미 복수(復讎)·설치(雪恥)를 하지 못하였고, 홍광(弘光)이 남도(南渡)한 후에도 또한 막연히 그 존망(存亡)을 알지 못하니 매양 생각이 이에 미칠 때마다 늘 개탄하며 한스럽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신종 황제가 선조 대왕에게 망룡의(蟒龍衣)를 하사하여 지금도 궁중에 보관되어 있는데, 때때로 꺼내 펼쳐보면 처참한 감회를 금할 수가 없다. 명(明)나라의 우리 나라에 대한 은혜가 한집안과 같은데도, 강약(强弱)의 형세에 구애되어 지금 저들을 복종해 섬기니, 천하에 어찌 이처럼 원통한 일이 있겠는가?’ 하였다. 또 일찍이 제갈양(諸葛亮)의 일을 논하면서 왕이 말하기를, ‘제갈양이 한(漢)나라를 회복(恢復)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몰랐던 바 아니었으나, 그 마음을 다하였을 뿐이다. 신종 황제의 생사 육골(生死肉骨)의 은혜를 어찌 차마 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병자년부터 지금까지 6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인심(人心)이 해이해져 점차 처음과 같지 않으니, 이 때문에 개탄스럽게 생각한다.’ 하였다. 《대명집례(大明集禮)》를 간행(刊行)할 것을 명하고 친히 서문(序文)을 지었으며, 한인(漢人)으로서 흘러들어와 우거(寓居)하는 자는 그 자신에게는 늠료(廩料)를 주고 그 자손(子孫)은 수용(收用)하게 하였다. 또 황조(皇朝)의 성화(成化) 무렵에 하사한 인적(印跡)을 괴원(槐院)의 고지(故紙) 가운데에서 얻자 왕이 말하기를, ‘왕위를 계승하는 날에 매양 청(淸)나라의 국보(國寶)를 쓰니, 마음이 아직까지 편안하지 않았는데, 이제 황조의 사본(賜本)은 전획(篆劃)이 어제 쓴 듯하니, 이것으로 모각(摹刻)하여 금보(金寶)를 만들어 보관해 두었다가 쓰도록 하라.’ 하였다. 이는 대개 왕이 인조(仁祖)·효종(孝宗) 양조(兩祖)의 뜻을 추념(追念)하여 일생 동안 사모(思慕)하면서 차마 잠시도 잊지 못한 나머지, 또 후세 자손들로 하여금 이 금보를 받아서 왕위를 계승하며 황조의 망극(罔極)한 은혜를 잊지 않도록 만들려 한 것이니, 그 지극한 정성과 애달파하는 뜻은 신명(神明)에 질정할 수 있고 영원히 후세에 할 말이 있을 것이다. 한(漢)나라 문제(文帝)가 단상(短喪)을 한 이래로 신하가 임금을 위해 최복(衰服)을 입는 제도가 폐지되고 시행되지 않았다. 그뒤 수천 년 동안 예(禮)를 좋아하는 군주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잘못된 제도를 그대로 계승하여 끝내 바꾸지 못하였다.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하순(下詢)하기를, ‘《오례의(五禮儀)》의 흉례(凶禮) 가운데의 「오모(烏帽)·흑대(黑帶)」의 제도는 민순(閔純)의 의논에 따라서 이미 개정(改正) 하였으나 단령의(團領衣)·포과모(布裹帽)는 변경하지 못하여 고제(古制)에 미진한 바 있다. 옛 제도를 회복하는 것이 옳겠는가?’ 하니, 대신(大臣)과 유신(儒臣)이 주자(朱子)의 ‘군신복(君臣服)’으로 대답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이 일은 주자의 정론(定論)이 있으니 본래 의심할 것이 없다. 과단성 있게 시행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대상(大喪)이 났을 때 여러 신하들이 유교(遺敎)를 받들어 고례(古禮)대로 최복(衰服)을 입고, 시사(視事)할 때는 포모의(布帽衣)을 착용하여 한 번에 천고(千古)의 오류를 깨끗이 씻고 영원히 후세의 법으로 삼았으니, 이것은 더욱 왕의 고명(高明)하신 과단(果斷)으로서 삼대(三代)보다 훨씬 뛰어난 것이다. 어찌 한(漢)·당(唐) 무렵에 일컬어지는 명철(明哲)한 군주들이 비슷할 수가 있겠는가? 송유(宋儒) 정이(程頤)가 말하기를, ‘부자(夫子)가 요순(堯舜)보다 낫다는 것은 사공(事功)을 말한것이다. 요순(堯舜)은 천하(天下)를 다스렸는데 부자가 또 그 도(道)를 미루어서 만세(萬世)에 전하였으니, 요순의 도가 부자를 얻지 않았다면 또한 어디에 근거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아! 상제(喪制)는 인간의 대륜(大倫)이나 삼대(三代)의 제도가 천 년 동안 폐지되었다. 그런데 오늘에 이르러 이것을 다시 시행하여 후세의 왕자(王者)로 하여금 의거하여 법(法)으로 취하게 하였으니, 이 일로 미루어 논한다면 비록 ‘삼대(三代)보다 낫다.’고 말해도 될 것이다. 여러 신하들이 존시(尊諡)를 올리기를, ‘장문 헌무 경명 원효(章文憲武敬明元孝)’라 하고, 묘호(廟號)를 ‘숙종(肅宗)’이라 하였으며, 이해 10월 21일 갑인(甲寅)에 명릉(明陵) 갑좌(甲坐) 경향(庚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처음에 인현 왕후(仁顯王后)의 장사 때 왕이 곡장(曲墻)을 치우치게 쌓지 말고 정자각(丁字閣)도 또한 복판에 자리잡도록 하여 장릉(長陵)의 우측(右側)을 비워 둔 제도를 모방하도록 명하였는데, 이는 대개 백성의 힘을 재차 수고롭게 할 것을 미리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왕세자(王世子)가 사위(嗣位)한 지 4년 만에 훙(薨)하니, 이 분이 경종 대왕(景宗大王)이다. 숙빈(淑嬪) 최씨( 崔氏)가 1남(男)을 탄생하니 바로 우리 사왕 전하(嗣王殿下)이시다. 중궁 전하(中宮殿下)는 서씨(徐氏)로 달성 부원군(達城府院君) 서종제(徐宗悌)의 따님이다. 명빈(榠嬪) 박씨(朴氏)는 연령군(延齡君) 이훤(李昍)을 낳았으나 일찍 졸(卒)하였다. 경종(景宗)은 청은 부원군(靑恩府院君) 심호(沈浩)의 따님에게 장가들었으며, 뒤에 함원 부원군(咸原府院君) 어유귀(魚有龜)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모두 후사(後嗣)가 없다. 아! 위대하신 상제(上帝)께서 이 백성을 사랑하고 돌보아주시며 하토(下土)를 보살펴 주시어 넓고 넓은 구주(九州)가 오랑캐의 손아귀에 넘어간 지 백 년인데, 기자(箕子)의 봉강(封疆)한 구역만은 8조(八條)의 가르침이 쇠하지 않았다. 5백 년 만에 왕자(王者)가 일어날 시기를 당하여 성인(聖人)을 낳으시어 총명(聰明)·예지(睿智)한 자질을 내려주시고 강의(剛毅)·과단(果斷)의 용의(用意)로 도와주시어 왕으로 하여금 종욕(從欲)의 정치(政治)를 성취하도록 하였다면, 장차 세도(世道)를 만회(挽回)하여 옛 선왕(先王)의 왕업(王業)에 앞지를 수 있었을 터인데, 선왕께서 반드시 얻어야 할 수(壽)를 내려주지 아니하여 이 세상으로 하여금 대성(大成)의 지역에 오를 수 없도록 하였으니, 아마 하늘도 기수(氣數)의 굴신(屈伸)에는 어쩔 수 없어서 그랬던 것인가? 이는 바로 천하(天下) 만세(萬世)의 무궁한 애통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황극(皇極)의 바름을 세우고 인륜(人倫)의 어둠을 밝히니, 대경(大經)·대법(大法)이 천지에 세워져서 어긋나지 않는다. 백세(百世)를 기다려도 의혹되지 않을 것이니, 사람들의 가슴속에 스며들어 있는 심후(深厚)한 인택(仁澤)은 장차 천만 세(千萬歲)에 이르도록 더욱 더욱 드러날 것이다. 아! 거룩하도다.” 하였다. 【원전】 41 집 110 면 【분류】 *역사-편사(編史)
[주D-001]임진년 : 1712 숙종 38년.[주D-002]방악(方岳) : 방악(方嶽)과 같음. 곧 동악(東岳) 태산(泰山), 남악(南岳) 형산(衡山), 서악(西岳) 화산(華山), 북악(北岳) 항산(恒山)의 사악(四岳)으로서, 사방의 제후(諸侯)를 통괄하는 사람인데, 흔히 각도(各道)의 도신(道臣)이란 뜻으로 쓰임.[주D-003]출척 유명(黜陟幽明) : 유(幽)는 혼암(昏暗)한 관리, 명(明)은 명철(明哲)한 관리. 즉 혼암한 관리는 내쫓고 명철한 관리는 승진시킴을 말함.[주D-004]‘효부(孝婦)가 원한을 품자 3년 동안 가뭄이 들었고, : 옛날 제(齊)나라의 효부(孝婦)에게 억울한 죄를 뒤집어 씌어 죽인 고을 원의 그릇된 처사(處事)에 하늘이 노하여 3년 동안 비를 내리지 않았다는 고사(故事).[주D-005]연신(燕臣)이 통곡(慟哭)하자 5월에 서리가 내렸다. : 추연(鄒衍)이 충성을 다해 연(燕)나라 혜왕(惠王)을 섬겼는데도 왕이 참소하는 말을 듣고 옥에 가두자, 원통함을 못이겨 하늘을 우러러 통곡했더니, 5월에 하늘이 서리를 내렸다는 고사(故事).[주D-006]임진년 : 1592 선조 25년.[주D-007]계사년 : 1593 선조 26년.[주D-008]연곡(輦轂) : 서울.[주D-009]계사년 : 1713 숙종 39년.[주D-010]유양(揄揚) : 칭찬하여 치켜 세움.[주D-011]금액(禁掖) : 궁중(宮中).[주D-012]정성(鄭聲) : 춘추 시대(春秋時代) 정(鄭)나라의 가요(歌謠)가 음란하고 외설적인 데서 온 말. 음란하고 야비한 소리의 가락.[주D-013]갑오년 : 1714 숙종 40년.[주D-014]을미년 : 1715 숙종 41년.[주D-015]병신년 : 1716 숙종 42년.[주D-016]계복(啓覆) : 조선조 때 임금에게 상주하여 사형수를 다시 심리하던 일. 이는 승정원(承政院)에서 추분(秋分) 후에 곧 계품하여 9월·10월 중 날짜를 정해서 시행하였고, 죄인을 사형할 때에는 12월에 집행하였음.[주D-017]경폐(徑斃) : 형(刑)의 집행 전에 죽는 것.[주D-018]정유년 : 1717 숙종 43년.[주D-019]행재(行在) : 임금이 궁을 떠나 임시로 머무는 곳.[주D-020]유개(流丐) : 떠돌이 거지.[주D-021]병신년 : 1716 숙종 42년.[주D-022]사기(四紀) : 1기(紀)는 12년.[주D-023]중신(中身) : 마흔 살이 지난 나이.[주D-024]을유년 : 1705 숙종 31년.[주D-025]병신년 : 1714 숙종 40년.[주D-026]무술년 : 1718 숙종 44년.[주D-027]번연(蕃衍) : 자손이 늘어서 많이 퍼짐.[주D-028]분양(汾陽) : 당(唐) 현종(玄宗) 때의 장수 곽자의(郭子義)를 말함. 분양왕(汾陽王)에 봉해졌기 때문에 흔히 곽분양(郭汾陽)이라 부름. 안녹산(安祿山)의 난을 평정하는 데 큰 공(功)을 세웠음. 아들 여덞에 사위 일곱 명이 모두 조정에서 귀현(貴顯)하였고, 손자 수십 명은 다 알아보지 못하여 문안 때면 턱만 끄덕일 뿐이었다고 함. 인신(人臣)으로서의 영화와 자손의 번성함을 이야기할 때 흔히 예로 드는 인물임.[주D-029]을미년 : 1655 효종 6년.[주D-030]유사(瘦死) : 옥중(獄中)에서 병으로 죽음.[주D-031]대벽(大辟) : 사형(死刑).[주D-032]기해년 : 1719 숙종 45년.[주D-033]사롱(紗籠) : 현판(縣板)에 먼지가 앉지 못하게 덮어 씌우는 사포(紗布).[주D-034]경자년 : 1720 숙종 46년.[주D-035]모예(旄倪) : 노인(老人)과 소아(小兒).[주D-036]여대(輿儓) : 하인(下人).[주D-037]동조(東朝) : 대비(大妃).[주D-038]한(漢)의 성제(成帝)가 이미 적방진(翟方進)으로 하여금 자살(自殺)하도록 하고서 또 후하게 장사(葬事)지내 주도록 하였으니, : 적방진(翟方進)은 한(漢) 성제(成帝) 때의 승상(丞相). 유학(儒學)에 통달하여 당시에 이름이 났음. 기원전 70년에 형혹성(熒惑星)이 심성(心星)을 범하는 성변(星變)이 일어나자 성제가 이에 해소하기 위해 승상인 적방진을 자살하게 하고 뒤에 후하게 장사지내 주었음.[주D-039]송 경공(宋景公)은 좋은 말을 하자 형혹성(熒惑星)이 1도(一度)를 옮겨갔으니, : 송(宋)나라 경공(景公) 때에 형혹성(熒惑星)이 심성(心星)을 침범하니, 경공이 이를 근심하여 사성(司星) 자위(子韋)를 불러 물었는데, 경공이 자위와 더불어 말하면서 덕(德)있는 말 세 가지를 하였더니, 자위가 “하늘이 반드시 인군(人君)께 세 가지 상(賞)을 내려서 오늘 저녁에 마땅히 형혹성이 삼사(三舍:사는 30리)를 옮겨 갈 것입니다.” 하였는데, 과연 이날 저녁에 형혹성이 30리를 옮겨 갔다고 하는 고사.[주D-040]여상(如傷) : 백성을 다친 사람 보듯 함.[주D-041]관저(關雎) : 《시경(詩經)》 주남(周南)의 편명(篇名)으로, 후비(后妃)의 덕(德)이 있는 숙녀(淑女)의 아름다움을 칭송한 시임.[주D-042]인지(麟趾) : 《시경(詩經)》 주남의 편명으로, 왕비가 임금의 자손을 번창하게 하는 것을 말함.[주D-043]신주(神州) : 중국(中國).[주D-044]육침(陸沈) : 나라가 외적(外敵)의 침입으로 망함.[주D-045]좌해(左海) : 우리 나라.[주D-046]비풍(匪風) : 《시경(詩經)》 회풍(檜風)의 편명(篇名). 주(周)나라 왕실(王室)이 쇠미(衰微)한 것을 보고 현인(賢人)이 근심하고 탄식하며 지은 시(詩)임.[주D-047]하천(下泉) : 《시경》 조풍(曹風)의 편명(篇名). 주(周)나라 왕실이 쇠퇴함에 따라서 소국(小國)이 전혀 왕실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여러 가지로 곤경을 겪게 되자 거기에 감회가 있어 지은 시임.[주D-048]‘고황 백등(高皇百登)의 수치’ : 백등(白登)은 산명(山名). 산서성(山西省) 대동현(大同縣) 동쪽에 있음. 한(漢)의 고조(高祖) 즉 고황(高皇)이 흉노를 공격하다가 이곳에서 7일 동안 포위당한 일을 말함.[주D-049]갑신년 : 1704 숙종 30년.[주D-050]출척(怵惕) : 두려워 마음이 편하지 않음.[주D-051]참달(慘怛) : 마음이 아프고 슬픔.[주D-052]임진년 : 1592 선조 25년.[주D-053]홍광(弘光) : 명(明)나라 말엽 복왕(福王) 주유숭(朱由崧)의 연호(年號:1645). 경사(京師)가 함락된 뒤 남경(南京)으로 가서 홍광제(弘光帝)라 칭하였음.[주D-054]생사 육골(生死肉骨) : 죽은 사람을 살려서 그 백골에 살을 붙인다는 뜻으로, 매우 깊은 은혜를 말함.[주D-055]병자년 : 1636 인조 14년.[주D-056]성화(成化) : 명(明) 헌종(憲宗)의 연호.[주D-057]구주(九州) : 중국(中國).[주D-058]5백 년 만에 왕자(王者)가 일어날 시기 : 《맹자(孟子)》에 “5백 년 만에 제왕(帝王)이 한 번 일어난다.”는 말이 있음.[주D-059]종욕(從欲) : 《논어(論語)》 위정편(爲政篇)의 “70에는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좇아서 했지만, 법도에 벗어남이 없다.”에서 나온 말로 70세를 가리킴. |
|
|
부록 |
|
묘지문(墓誌文)에 이르기를, “아! 삼가 생각건대 우리 숙종 현의 광륜 예성 영렬 장문 헌무 경명 원효 대왕(肅宗顯義光倫睿聖英烈章文憲武敬明元孝大王)의 휘(諱)는 순(焞), 자(字)는 명보(明普)로, 현종 대왕(顯宗大王)의 적사(嫡嗣)이고 효종 대왕(孝宗大王)의 손자이다. 모비(母妃)는 명성 왕후(明聖王后) 김씨(金氏)로,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청풍 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의 따님이다. 왕(王)의 소자(小字)는 용상(龍祥)이다. 효묘(孝廟)께서 일찍이 꿈을 꾸시니 명성 왕후의 침실(寢室)에 어떤 물건이 이불로 덮여 있었는데, 열어보니 용(龍)이었다. 효묘께서 꿈에서 깨신 뒤 기뻐하여 말하기를, ‘장차 원손(元孫)을 얻을 길조(吉兆)로다.’ 하고, 이에 미리 소자(小字)를 지어 기다리게 하였다. 신축년 8월 15일 신유(辛酉)에 이르러 왕이 경덕궁(景德宮)의 회상전(會祥殿)에서 탄강(誕降)하시니, 실로 숭정(崇禎) 기원 14년이었다. 왕이 다섯 살 때 명성 왕후가 산병(産病)이 있어 진지를 드시지 못하자, 왕이 반드시 꿇어앉아 미음을 올렸고 근심하는 빛이 안색에 나타났다. 왕후가 말하기를, ‘네가 권하니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시며 억지로 죽을 드셨다. 왕이 일찍이 기르던 참새 새끼가 있었는데, 이 새가 죽자 버리지 말고 묻어주도록 하였다. 내국(內局)에서 우락(牛酪)을 취하는데 그 송아지가 비명을 많이 지르자, 왕이 그 까닭을 묻고 나서는 우락을 먹지 않았다. 어버이를 사랑하는 정성과 동물에게까지 미치는 인덕(仁德)이 어려서부터 이미 이와 같았던 것이다. 을사년에 여러 대신(大臣)들이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김좌명(金佐明)·김수항(金壽恒) 등을 원자 보양관(元子輔養官)으로 삼아 드나들며 강학(講學)하도록 할 것을 청하였는데, 송준길이 처음 왕(王)을 뵙고 현묘(顯廟)께 고(告)하기를, ‘종사(宗社)와 신민(臣民)의 복(福)이 실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였다. 현묘께서 내시(內侍)에게 명하여 왕(王)을 불러 나오게 하니, 왕이 송준길을 향하여 재배(再拜)하였는데, 예모(禮貌)가 법도에 맞았다. 정미년에 책봉(冊封)하여 왕세자(王世子)로 삼았다. 기유년에 어가(御駕)를 따라 태묘(太廟)를 배알(拜謁)하고 또 입학례(入學禮)를 행하였다. 경술년에 관례(冠禮)를 행하고 신해년에 가례(嘉禮)를 행하였다. 갑인년에 현종이 승하[禮陟]하자, 왕(王)이 보위(寶位)를 계승하였는데, 슬픈 호곡(號哭)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니, 백관(百官)과 위사(衞士)들이 애처로와 감히 쳐다보지 못하였다. 왕은 왕위를 이은 이래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공경하고 두려워하며 한결같이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걱정하는 것을 제일의(第一義)로 삼아 선왕(先王)의 뜻과 사업(事業)을 계승했으며, 대신(大臣)들에게는 일에 따라 계도(啓導)해 줄 것을 권면하였다. 왕이 한 마음으로 학문을 익히며 밤이 깊도록 독서를 쉬지 않으니, 명성 왕후 또한 그 지나치게 부지런한 데 걱정하였다. 신릉(新陵)의 석물(石物) 역사(役事)가 매우 거창하였는데, 왕이 자교(慈敎)를 받들어 영릉(寧陵)의 옛 석물을 옮겨다 쓰도록 명해 백성들의 힘을 크게 덜었다. 그 당시 팔로(八路)에 재황(災荒)이 들어 백성 중에 간혹 기곤(飢困)을 견디지 못하여 스스로 목을 매고 죽는 자가 있었다. 왕이 크게 놀라고 측은하게 여겨 빨리 여러 도(道)에 하유(下諭)하여 백성들이 구렁에 뒹굴거나 유산(流散)하는 것을 면하게 하였다. 신해년 이전에 묵은 포곡(逋穀)을 면제해 주고, 금년의 조부(租賦)는 지용(支用)할 만큼 계산해 그 수량을 경감해 주며, 기내(畿內)는 부역(賦役)이 빈번하므로 진상(進上)하는 호피(虎皮)를 특별히 감해 줄 것 등을 명했던 것이다. 또 첨정(簽丁)을 정지하고 상방(尙方)과 태복(太僕)에서는 우선 연시(燕市)의 무역(貿易)을 폐지하도록 하니, 시초(始初)의 덕화(德化)에 인심이 흡족해 하였다. 을묘년에는 황금(黃金) 1백 60냥과 은(銀) 1만 6백여 냥을 지부(地部)에 내하(內下)하여 관북(關北)의 포곡(逋穀) 8만여 석(石)을 면제하도록 명하였다. 또 하교(下敎)하기를, ‘바야흐로 애구(哀疚)하는 가운데 있으니 방물(方物)이나 물선(物膳)을 잠시 진상하지 말라.’ 하였다. 여름에 가뭄이 들자 친히 사직단(社稷壇)에 기도를 올리고 특별히 여수(慮囚)하라고 명하였다. 왕이 홍수·가뭄과 기근(飢饉)에 대하여 우근(憂勤)·척려(惕慮)함이 이로부터 40여 년 동안 마치 하루와 같았다. 언제나 번신(藩臣)에게 하서(下書)하여 백성들을 안집(安集)시키고 구제할 것을 당부하였고, 민간(民間)에 효유(曉諭)하여 향토(鄕土)를 떠나지 말 것을 권유했다. 세시(歲時)에는 반드시 별도로 유시하여 모두 일찰(一札) 십행(十行)으로 지극한 뜻이 애연(藹然)하였다. 계해년에 어사(御史)를 따로 파견하여 여러 도(道)에 선유(宣諭)하니, 부로(父老)로서 지팡이를 짚고 가 듣고서 감읍(感泣)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무릇 요역(徭役)를 경감하고 조세(租稅)를 면제해 주며, 묵은 포곡(逋穀)을 감면하고 새로운 공납을 정지한 것이 전후로 몇 억만(億萬)으로 셀 정도였다. 만일 경비가 바닥이 나면 군량(軍糧)의 저축을 옮겨 쓰고 내탕(內帑)의 재물까지 기울였으되, 또한 애석하게 여기지 않았다. 어용(御用)하는 인삼(人蔘)은 경감하여 절반만 바치게 하였고, 세공(歲貢)· 삭선(朔膳)은 여러번의 절감을 거친 나머지 지금까지 태관(太官)의 공봉(貢奉)으로 복구되지 않은 것이 많이 있다. 기후(氣候)가 가물면 묘사(廟社)와 교단(郊壇)에 친히 기도를 올리는 일이 많았는데, 찌는 듯한 무더위에도 재실(齋室)에는 들어가지 않았고 책축(冊祝)은 반드시 자신을 책망하도록 하였다. 그래도 비가 내리지 않으면 죄수(罪囚)를 소석(䟽釋)했고, 혹은 길가에 연(輦)을 멈추고 붙잡혀 오는 죄수를 타일러 보내기도 하였으며, 또는 왕옥(王獄)에 거둥하여 친히 경중(輕重)을 처결하기도 하였다. 재해를 입은 지방은 반드시 어사(御史)를 보내 진휼(賑恤)을 감독하게 하였다. 탐라(耽羅)는 멀리 해외(海外)에 있는데, 몇 년 동안 연이어 기근(飢饉)이 들자, 또 근신(近臣)에게 명해 선박에 곡식을 실어 가져다 먹이도록 하였다. 진도(珍島)에서 10년 동안 곡식이 여물지 않자, 원기(寃氣)가 있는지 의심하여 방문(訪問)하도록 유시하였으니, 이것은 모두 왕의 깊은 인애(仁愛)와 지극한 은택으로 사람의 골수(骨髓)에 스며들었던 것이다. 왕은 재앙을 만나 경계하고 두려워하기를 박상(剝床)보다도 심하게 하였다. 큰 재앙 이외에 비록 성도(星度)를 침범하거나 햇무리가 해의 주위를 둘렀더라도 반드시 교지를 내려 자책(自責)하며 널리 직언(直言)을 구하였고, 또 여러 신하들에게는 화합하는 자세와 공정한 마음을 가질 것을 당부하였는데, 하늘을 공경하고 극히 조심하는 정성이 저절로 언어의 겉에 드러났다. 만기(萬機)의 수응에 조금도 지체됨이 없었고, 간혹 아침밥을 저녁에 들며 새벽이 다가왔건만 그래도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 을유년에 내선(內禪)의 명이 있어 신(臣) 또한 여러 신하들을 따라 입대(入對)하였는데, 결국 반한(反汗)의 은혜를 입게 되었다. 그러나 우러러 성교(聖敎)를 받들고 보니, 몸을 손상한 빌미는 대개 우근(憂勤)에 있었다. 성심(聖心)이 왕위를 벗어던지고 만년을 우유자적하게 보내려고 지극히 바랐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런데 질병이 난 뒤 왕세자가 정사를 대신하였으나, 왕은 그래도 국사(國事)에 경경(耿耿)하며 편히 쉬실 여가가 없었다. 신(臣)이 감히 심신(心神)을 편하게 수양해야 한다는 말로 한가로이 모시고 있을 때 간곡하게 말씀드리면 왕이 ‘나의 습성이 그러해서 변경할 수 없노라.’ 하였다. 왕이 병환을 앓은 지 10여 년이 되었는데 경자년 6월 초8일 계묘(癸卯)에 경덕궁(慶德宮)의 융복전(隆福殿)에서 여러 신하들을 버리고 세상을 떠나시니, 재위(在位) 46년이고 수(壽)는 60이었다. 아! 슬프도다. 이날 온 서울의 백성들이 궐하(闕下)로 달려나왔고, 비록 대례(儓隷)·하천(下賤)일지라도 부모(父母)처럼 슬피 곡하며 모두 ‘우리 성주(聖主)께서 백성들 때문에 수를 줄이셨다.’고 하였다. 혜순 왕비 전하(惠順王妃殿下)께서 대신(大臣)에게 하교(下敎)하시기를, ‘성상의 평일의 성덕(盛德)을 조신(朝紳)들이 모르는 바 아니나, 그래도 혹시 다 알지 못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수응(酬應)이 몹시 넓고 많아 밤이나 낮이나 쉬지 못하셨고, 더러는 침선(寢膳)을 폐하기도 하셨다. 공경스럽게 상천(上天)을 섬기며 재앙을 만나면 두려워하셨고, 혹시 비와 눈이 제때를 어기거나 바람과 햇볕이 조화되지 않아 농사에 피해가 있으면 우려를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흐리고 개인 날씨며 바람이 어느 방향에서 불 것인가 하는 것 등을 혹시 스스로 살피기가 어려우면 반드시 시자(侍者)에게 물어보셨다. 나라일과 백성에 대한 걱정을 잠시나마 잊지 않으시며 항상 마치 미치지 못한 듯하시더니, 근로(勤勞)가 빌미가 되어 성수(聖壽)를 단축시키고 말았다. 상장(喪葬)의 제구(諸具)에 있어서는 경비(經費)를 진념(軫念)하시어 일찍이 조치(措置)가 있었으니, 제기(祭器)를 제조하는 은(銀)을 마땅히 상방(尙方)에 내릴 것이다. 또 앞으로 백성을 진휼(賑恤)할 것에 대비하여 은자(銀子) 3천 7백여 냥을 별도로 마련해 두었으니, 지금 국장(國葬)의 비용에 보태 쓴다면 민폐(民弊)를 덜 수 있을 것이다. 대내(大內)에 보관해 둔 의대(衣襨)는 부족함이 없을 듯하니, 해조(該曹)에서는 다만 적어서 보이는 것만 기다렸다가 준비해 올려 평일에 비용을 줄이시던 뜻에 힘써 따르도록 하라.’ 하셨다. 또 하교하시기를, ‘성상께서 국사(國事)에 근로(勤勞)하신 이외에 서사(書史)를 매우 좋아하시어 제술(製述)이 아주 많았다. 조정(朝廷)에 보일 만한 것들을 일찍이 이미 깊이 보관해 두었노라.’ 하시고, 이에 동궁(東宮)에게 명하여 내다보이도록 하셨다. 아! 우리 성비(聖妃)께서 성덕(盛德)을 보고 느끼시어 유의(遺意)를 받들어 계승하시는 것은, 지인(至仁)을 선양(宣揚)하고 방본(邦本)을 영원히 굳건하게 할 수가 있을 것이다. 더구나 신(臣)이 내하(內下)하신 어제(御製)를 엎드려 읽어보면 대부분이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걱정한 저작이었으니, 무릇 우리 생명을 가진 무리들이 장차 어떻게 선왕(先王)의 은혜를 추보(追報)할 수 있으랴? 옛날에 주공(周公)이 문왕(文王)의 덕(德)을 칭송하기를, ‘해가 중천에 떠오르도록 밥 먹을 여가가 없었고 만민(萬民)을 다 화합(和合)하게 하시었다. 천명(天命)을 받으심은 중년이었는데, 그 나라를 다스린 지 50년이었다.’고 하였다. 우리 선왕(先王)께서는 어린 나이에 왕위를 계승하셨는데도 도리어 문왕이 나라를 다스린 데 미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천리(天理)이겠는가? 그러나 안일함이 없으셨던 덕은 왕에게 있어서 오히려 그 작은 것일 뿐이다. 왕은 시선(視膳)하는 때부터 양전(兩殿)을 받들어 섬겼으되, 기쁜 낯빛으로 공경하고 순종하였다. 그러다가 국휼(國恤)을 당하자 슬퍼함이 절도를 넘었고, 영여(靈輿)에 배사(拜辭)하고 돌아오는 길에도 여전히 가슴을 치며 통곡하였다. 명성 왕후께서 병이 많았는데, 왕은 항상 걱정하고 애를 태우며 정성을 다해 간호하였고, 장렬 대비(莊烈大妃)를 섬김에 있어서도 또한 조금도 차별이 없었다. 거처하는 만수전(萬壽殿)과는 서로 거리가 약간 멀었는데, 왕이 일찍이 대비(大妃)께서 급환이 나셨다는 말씀을 들으시면, 신발을 신을 겨를도 없이 빠른 걸음으로 달려가서 문안하였다. 일찍이 양전(兩殿)을 위해 진연(進宴)하려고 하였으나 재해를 만났으므로 중지하였고, 병인년에야 비로소 풍정(豊呈)을 올렸다. 계해년에 명성 왕후께서 승하하시고, 무진년에 장렬 대비께서 또 승하하시니, 왕의 애훼(哀毁)함이 예(禮)를 넘었는데, 한결같이 갑인년과 같았다. 매년 태묘(大廟)에 친히 향사(享祀)하였고, 더러는 무시(無時)로 전알(展謁)하기도 하였다. 봄 가을로 반드시 능(陵)을 참배하여 여러 능을 두루 다 둘러보았는데, 간혹 두세 번에 걸쳐 참배하기도 하였다.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한 의리를 들어 태조(太祖)의 시호(諡號)를 추가로 올리고, 자수(字數)가 여러 묘(廟)에 비해 모자란다 하여 태종(太宗)의 시호를 추가로 올렸으며, 인조(仁祖)는 중흥(中興)의 대업(大業)을 이루고 효종(孝宗)은 《춘추(春秋)》의 대의(大義)를 밝혔다 하여 세실(世室)로 정했다. 공정왕(恭靖王)은 예전에 묘호(廟號)가 없었는데 추가로 올려 정종(定宗)으로 했고, 경기전(慶基殿)에 있는 태조(太祖)의 어용(御容)을 모사(摹寫)하여 영희전(永禧殿)에 봉안(奉安)하였다. 무인년에는 단종(端宗)의 대위(大位)를 추복(追復)하였다. 대개 정축년에 선양(禪讓)이 있고 난 이후 인정(人情)이 원울(寃鬱)하게 여겼으나 수백 년 동안 감히 말하지 못했던 것이고, 열성(列聖)께서도 미처 겨를을 내지 못했던 일이었다. 왕이 깊이 생각한 끝에 결단을 내리고 빨리 욕의(縟儀)를 거행하니, 종묘(宗廟)의 의례는 질서가 있게 되었고 신(神)·인(人)이 함께 기뻐하였다. 아울러 그 육신(六臣)들까지 함께 제사지내 신하의 절개를 장려하였다. 중묘(中廟)의 신비(愼妃)는 예(禮)에 처리하기 곤란한 점이 있었으므로, 묘(廟)를 세워 제사하였다. 왕은 종친(宗親)을 대우함에 있어서 은혜가 깊었다. 고(姑)·매(妹)·공주(公主)가 질병이 있거나 상(喪)을 당했을 경우 반드시 모두 친림(親臨)하였다. 소현 세자빈(昭顯世子嬪) 강씨(姜氏)가 일찍이 죄(罪) 때문에 폐출(廢黜)되었는데, 왕이 그 원통함을 살피고 그 지위(地位)를 추복(追復)하였다. 그 손자인 이혼(李焜)과 이엽(李熀)이 흉인(凶人)의 무함을 받았으나, 온전할 수 있었으며, 총우(寵遇)가 여전하였다. 역적 종친(宗親)인 이정(李楨)과 이남(李柟)은 그 도당과 불궤(不軌)를 도모하고, 이항(李杭)은 국모(國母)를 해칠 것을 도모하여 모두 경전(磬甸)하였는데, 염습(殮襲)과 장례(葬禮)를 법도대로 행하라고 명하고 은혜를 폐하지 않았다. 왕이 오랫동안 후사(後嗣)가 없다가 무진년에 후궁(後宮) 장씨(張氏)가 비로소 우리 사왕 전하(嗣王殿下)를 탄생하니, 빨리 원자(元子)의 명호(名號)를 정하라고 명하였다. 기사년에 인현 왕후(仁顯王后)는 사제(私第)로 물러나 살고 장씨를 올려서 왕비(王妃)로 삼을 것을 명하였다. 갑술년에 하교하기를, ‘기사년의 일을 돌이켜 생각해 보건대 나도 모르게 마음속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진실하고 정성스러운 마음을 살피지 못한 채 잘못 양좌(良佐)를 의심하였었다. 내가 일찍이 공평한 마음으로 차근차근 따져보고 환히 깨닫게 되어 크게 회한(悔恨)을 느낀 나머지 몸을 뒤척이며 잠들지 못한 지 여러 해가 되었다. 이제 윤음(綸音)을 내려서 다시 곤위(壼位)를 바르게 하니, 이는 천리(天理)의 공변됨에서 나온 것이며, 종사(宗社)의 묵묵한 도움을 힘입은 것이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나라의 운수가 태평한 데로 돌아와 중전이 복위되었으니, 백성에게 두 주인이 없는 것은 고금의 공통된 의리다. 장씨의 왕후(王后) 인수(印綬)를 회수하라.’ 하였다. 또 기사년에 목숨을 걸고 간(諫)했던 오두인(吳斗寅)·박태보(朴泰輔) 등에게 관작(官爵)을 추증하고, 정려(旌閭)할 것과 그때 화(禍)를 즐기고 명의(名義)를 범한 자들을 처형하고 귀양보낼 것을 명하였다. 그 뒤에 또 하교하기를, ‘지금부터 기록하여 방가(邦家)의 제도로 만들되, 빈어(嬪御)가 후비(后妃)에 오르지 못하도록 하라.’ 하였다. 아! 천승(千乘)의 존귀한 몸으로 안연(顔淵)·민자건(閔子蹇)의 행실을 몸소 행하여 선조(先祖)를 받들며 효도를 생각하고, 종친(宗親)에게 돈독하여 풍속을 순후하게 하며 전열(前烈)에 광휘(光煇)를 더하고, 이륜(彝倫)을 바르게 펴지도록 한 것은 바로 전세(前世)의 현명한 군주들 가운데서도 드물게 듣는 바이다. 이것들은 모두 왕이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아서 국가에 가르침을 이룬 것으로서, 백세(百世)를 기다려도 의혹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대개 천하에는 대의(大義)란 것이 있고 이것은 만고(萬古)에 이르도록 없을 수 없는 것인데, 시간이 흐르고 일이 바뀜에 따라 장차 어두워져 사라지려고 하였다. 왕이 홀로 자신의 한 몸으로 이를 짊어지고, 이에 갑신년 봄 금원(禁苑)에다 단(壇)을 설치해 의종 황제(毅宗皇帝)를 멀리서 제사하였으니, 숭정(崇禎)의 운(運)이 끝난 날이 다시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장차 일을 거행하려는 날 왕이 감상(感傷)에 잠기고 슬퍼하여 천지(天地)가 무너지고 찢어지는 것을 참으로 눈으로 직접 본 것처럼 하였다. 또 궁성(宮城) 북쪽의 정결한 곳에 단(壇)을 마련할 것을 명하여 ‘대보단(大報壇)’이라 이름하고 신종 황제(神宗皇帝)를 해마다 제사지냈으니, 임진년에 재조(再造)한 은혜를 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왕은 일찍이 《대명집례(大明集禮)》를 간행할 것을 명하여 친히 서문(序文)을 지었다. 한인(漢人)으로 흘러 들어와서 우거하는 자에 대해서 그 자신에게는 늠료(廩料)를 주고 그 자손은 수용(收用)하였다. 신(臣)이 일찍이 괴원(槐院)의 고지(故紙) 가운데서 명조(明朝) 성화(成化) 무렵게 하사한 인적(印跡)을 얻어서 올렸는데, 즉시 모각(摹刻)해서 국보(國寶)로 만들라 명하고, 이 다음부터 사위(嗣位)할 때는 청(淸)나라 국보를 사용하지 말고 이 국보를 전(傳)하라고 유명(遺命)하였으니, 대개 장차 만세(萬世)의 자손(子孫)들로 하여금 명나라의 은혜를 잊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아! 《춘추(春秋)》 대일통(大一統)의 의리를 유독 우리 동방이 대대로 백 년을 지켰으니, 뒷날 중국(中國)이 다시 맑아지면 길이 천하 후세에 말할 수 있는 것이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이 점이 더욱 왕이 백왕(百王)보다 뛰어나고 삼고(三古)를 아울러 그 의리를 천지(天地)에 세울 수 있되, 어긋나지 않는 것이다. 왕은 학문을 좋아하고 문학을 숭상하며, 유학(儒學)을 높이고 도(道)를 중히 여겨 평소에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만년에도 오히려 강연(講筵)을 열어서 경전(經傳)과 서사(書史)를 강론(講論)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제자 백가(諸子百家)로부터 동방(東方)의 문집(文集)에 이르기까지 섭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한 번 열람(閱覽)한 것은 평생 동안 잊지 않았으며, 글을 보면 이치를 분석함이 분명하고 견해가 투철하셨다. 《심경(心經)》을 강론하며 마음의 동정(動靜)을 논하기를, ‘출몰(出沒)이 무상(無常)하고, 쉽게 발동하여 제어하기 어려운 것으로 마음 같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동(動) 가운데 정(靜)이 있고 정(靜) 가운데 동(動)이 있다.」는 설이 있게 된 것이다.’ 하고, 《주역(周易)》의 납약(納約)의 설을 논하기를, ‘이 경우 대신(大臣)이 어렵고 험난한 시기를 당했을 때 마지못해 이 방도를 쓸 수 있겠지만, 만일 치평(治平)한 세상에 사잇길을 통하여 임금에게 결탁한다면 옳지 않다.’ 하였으며, 진(秦)나라 부소(扶蘇)의 일을 논하기를, ‘군신(君臣)·부자(父子)가 모두 간(諫)할 수 있는 도리가 있으니, 부소가 시서(詩書)를 불사르고 유생(儒生)을 파묻는 것을 보고 어찌 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행히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면 이런 화(禍)는 없었을 것이니, 어찌 부소의 허물이겠는가? 혹자가 그것을 부소의 허물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였다. 또 당(唐)나라 때의 일을 논하기를, ‘연개소문(淵蓋蘇文)이 비록 나빴다고는 하지만, 태종(太宗)이 장수(將帥)에게 명해 정벌했다면 오히려 옳았을 것이며, 만일 친정(親征)을 하지 않았더라면 비록 공(功)이 없었더라도 또한 큰 실책은 되지 않았을 것이다. 현종(玄宗)이 세째 아들을 살해하고 며느리를 맞아들였으니, 이는 태종(太宗)의 규문(閨門)이 부정(不正)한 데서 연유한 것이다.’ 하였다. 왕은 경연(經筵)에 나가면 구이(口耳)의 학문을 취(取)하려 하지 않고 반드시 경전의 가르침을 직접 실천에 옮기려고 하였다. 일찍이 《예기(禮記)》를 강론하고 하교하기를, ‘증자문(曾子問) 한 편(篇)에서 「군훙(君薨)」 이하로부터는 길사(吉事)를 말한 것이 적다. 내가 이로 인하여 하순(下詢)하고자 함이 있으니, 또한 「어떻게 할까[如之何]」 하는 뜻이다. 《오례의(五禮儀)》의 흉례(凶禮) 가운데 오모(烏帽)와 흑대(黑帶)의 제도는 민순(閔純)의 의논으로 인해 이미 개정하였는데, 단령의(團領衣)와 포과모(布裹帽)는 변경하지 않았으니, 옛 제도를 회복하는 것이 옳겠는가?’ 하니, 대신(大臣)과 유신(儒臣)이 주자(朱子)의 《군신복의(君臣服議)》에 의거할 것을 청하였다. 답하기를, ‘이 일은 원래 주자의 정론(定論)이 있으니 본디 의심할 만한 것이 없다. 과단성 있게 시행하라.’ 하였다. 대상(大喪)을 당하자, 백관(百官)이 유명(遺命)을 받들어 고례(古禮)대로 최복(衰服)을 입었고, 정사를 볼 때는 포모의(布帽衣)을 입었다. 아! 한 문제(漢文帝)가 단상(短喪)한 이래로 신하가 임금을 복(服) 입는 예가 오랫동안 폐지되었고, 우리 나라도 포모포(布帽袍)로 성복(成服)을 했으므로 오히려 고례가 아니었으니, 진실로 성학(聖學)의 고명(高明)함이 아니었더라면 역대의 구습(舊習)을 따라 행하던 폐해를 어찌 능히 죄다 개혁하여 삼대(三代)의 고제(古制)를 회복할 수가 있었겠는가? 오늘날 비록 천하(天下)에 시행할 수 없다 하더라도 왕자(王者)가 일어난다면 반드시 와서 취하여 모범으로 삼을 것이다. 왕은 또 명조(明朝)의 전례(典禮)를 고증하여 왕비(王妃)와 세자빈(世子嬪)의 종묘(宗廟)를 알현하는 예(禮)를 정하여 시행하였다. 왕이 처음에 《주수도설(舟水圖說)》을 저술하여 대신(大臣)에게 내보이며 말하기를, ‘군주는 배와 같고 신하는 물과 같다. 물이 고요한 연후에 배가 안정되고 신하가 현명한 연후에 군주가 편안하다. 경(卿) 등은 마땅히 이 도(圖)의 뜻을 본받아 보필(輔弼)의 도리를 다하여야 할 것이다.’ 하였는데, 비유가 정절(精切)하고 사리(辭理)가 창달(暢達)하였다. 매번 사륜(絲綸)이 나오면 환하기가 운한(雲漢)과 같아서 사신(詞臣)이 감히 대신 초(草)하지 못하였고, 대내(大內)에 있는 정(亭)·각(閣)의 편제(扁題)·명기(銘記)는 잠경(箴儆)이나 우계(寓戒)의 말이 아닌 것이 없었다. 왕은 강연(講筵)에서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이름을 휘(諱)하였다. 문묘(文廟)에 송(宋)의 주염계(周濂溪)·장횡거(張橫渠)·이정(二程)·소강절(邵康節)·주자(朱子) 등 육현(六賢)을 정전(正殿)으로 올렸으며, 양무(兩廡)의 한(漢)나라 순황(荀況) 이하 열 사람을 내치고 송(宋)의 양시(楊時)·나종언(羅從彦)·이동(李侗)·황간(黃幹) 및 우리 나라의 이이(李珥)·성혼(成渾)·김장생(金長生)을 배향(配享)할 것을 명하였다. 어필(御筆)로 친히 송시열(宋時烈)의 화양 서원(華陽書院)과 송준길(宋浚吉)의 흥암 서원(興巖書院)의 편액(扁額)을 쓰니, 현덕(賢德)이 있는 이를 숭상하여 선비의 추향(趨向)을 통일하기 위함이었다. 일찍이 태학(太學)에 거둥하여 여러 유생(儒生)들을 모아 놓고 학업(學業)을 면유(勉諭)하였으며, 명조(明朝)의 제도를 따라서 별도로 계성묘(啓聖廟)를 세웠다. 또 하번(何蕃)·진동(陳東)·구양철(歐陽澈)의 사우(祠宇)를 세워 사기(士氣)를 격려할 것을 명하였다. 왕은 선조(先朝)의 빈사(賓師)·노신(老臣)에 대하여 공경과 예의를 다하였고, 현사(賢士)를 예(禮)로 대우하여 산림(山林)에서 정승에 임명된 이가 또한 몇 사람이었다. 또 문사(文士)를 삼선(三選)하고 호당(湖堂)에 사가(賜暇)하여 문풍(文風)을 권면하였다. 왕은 또 무략(武略)이 강(强)하지 않은 점을 근심하여 매양 교외(郊外)에 거둥하는 기회가 있으면, 노중(路中)에서 조련(操鍊)을 시켰다. 때로 강상(江上)에서 열무(閱武)하거나 후원(後苑)에서 시재(試才)한 뒤 포상(褒賞)을 크게 내려 장신(將臣)을 후하게 대접하고 사졸(士卒)을 후하게 돌보았다. 일찍이 관수정(關壽亭)의 묘(廟)에 거둥하여 영유(永柔)의 무후사(武侯祠)에 악무목(岳武穆)을 아울러 배향(配享)해 장사(將士)의 마음을 흥기(興起)시킬 것을 명하였다. 무술년 병으로 자리에 누웠을 때 숙위 장사(宿衞將士)를 소견(召見)하여 병으로 시열(試閱)하지 못하는 의사를 면유(面諭)하고 또 주육(酒肉)을 하사하니, 무사(武士)들이 모두 감읍(感泣)하며 목숨을 바치고자 하였다. 왕이 척계광(戚繼光)의 진법(陣法)이 왜적을 방어하는 데는 편리하지만 호족(胡族)을 방어하는 데는 불리하다 하여 여러 장수들에게 헤아리고 의논하여 변통시킬 것을 명하였다. 또 전란(戰亂)을 예비(豫備)하지 않으면 갑작스런 변고에 대응할 수 없다고 하여, 강도(江都)와 남한(南漢)의 성(城)을 증축(增築)해 도민(都民)과 함께 입보(入保)하는 계획을 강정(講定)하도록 명하였다. 또 북한(北漢)과 백제(百濟)의 고성(古城)을 증축하였다. 이보다 먼저 효종(孝宗)·현종(顯宗) 양조(兩朝) 때 양호(兩湖)에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였는데, 왕이 계속 영남(嶺南)에 시행할 것을 명하였다. 장차 백성의 부세(賦稅) 제도를 크게 변경시켜 양역(良役)의 편고(偏苦)를 덜어 주고, 팔도(八道)의 토지를 개량(改量)하여 경계(經界)를 바로잡으려 한 것이었다. 말년에 먼저 삼남(三南)의 토지를 개량할 것을 명하였는데, 아직 복명(復命)하지 않은 사신(使臣)이 있고, 양역의 의논은 미처 품재(稟裁)하지 못하여 결국 천고(千古)의 유한(遺恨)이 되고 말았으니, 신민(臣民)의 지극한 아픔이 더욱 여기에 있다. 왕의 영명(英明)함은 천성(天性)에서 타고난 것이었으며, 기모(氣貌)가 맑고 엄숙하여 의(義)를 보면 결단이 혁연(爀然)하였고 선(善)으로 옮기되 힘차기가 바람과 우뢰 같았다. 일찍이 왕위에 올라 단단히 마음을 먹고 선치(善治)을 도모하여 나라의 예(禮)를 개정(改定)하였다. 뭇 소인들이 어진이를 해치고 적신(賊臣)이 난(亂)을 도모하여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왔는데, 왕이 이에 조용한 가운데서 일을 진행시켜 흉역(凶逆)을 쓸어 없애버리니, 종사(宗社)가 다시 안정되고 세도(世道)가 맑고 밝아졌다. 곤의(坤議)가 한 번 기울어지니 간흉(奸凶)이 뜻을 얻고 유언(流言)이 끝이 없어 일이 말로 하기 어려움이 있었는데, 왕이 이에 뜻을 돌이켜 회오(悔悟)하자 일월(日月)이 다시 새로와지고 중전이 다시 바로잡혀 궁중이 엄숙하고 맑아졌다. 이런 것은 다 왕의 밝은 예지(睿智)의 비추는 바에 의해 얼마 안 가서 정상으로 회복된 경우인데, 항상 인애(仁愛)의 마음을 간직한 관계로 대옥(大獄)에 억울하게 걸려든 자가 적었다. 왕은 항상 스스로 기질(氣質)의 조급하고 사나운 점을 경계하여 혹은 윤음(綸音)을 내리고 혹은 시(詩)를 지어보이며 항시 성찰(省察)의 공부를 더하였다. 질병이 있을 때는 심기(心氣)를 가장 가다듬기가 어려운 것인데, 10여 년 동안에는 일찍이 사기(辭氣)가 너무 지나친 적이 있지 않았으니, 만년의 조존(操存)의 유익함은 더욱 수명(壽命)을 연장시킬 수 있었다. 기해년에는 태조(太祖)의 고사(故事)에 의해 기사(耆社)에 이름을 올리고 노신(老臣)들에게 연회를 내렸다. 온 나라 안이 바로 북두(北斗)와 남산(南山)의 축수(祝壽)를 올렸는데, 하늘이 돌보지 않아서 끝내 수를 다 누리지 못하였으니, 아! 애통한 일이다. 어찌 하늘을 원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왕은 일찍이 ‘경계 십잠(儆戒十箴)’과 ‘권학문(勸學文)’ 등의 글을 저술하여 동궁(東宮)에게 내렸다. 정유년에 대리(代理)의 명이 있었으므로, 동궁이 잇따라 장주(章奏)를 올려 굳이 사양하니, 왕이 답하기를, ‘눈병이 또 극심하여 수응(酬應)하기가 매우 곤란하다. 너에게 대리를 명하는 것은 바로 국조(國朝)의 고사(故事)에 의한 것이니, 네가 어찌 사양할 수 있겠는가? 부탁하는 바의 일이 지극히 무겁고 너의 책임이 지극히 크니,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공경하고 조심하여 감히 혹시라도 나태한 일이 없도록 하며, 시종 학문의 연구에 유념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답하기를, ‘어제 훈계(訓戒)한 말을 너는 공경히 받들라. 근일의 일은 처분(處分)이 바르고 시비(是非)가 분명하니 백세(百世)에 의혹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일이 사문(斯文)에 관계된 것이니, 생각건대 중요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특별히 말하는 것이니, 너는 나의 뜻을 따라 혹시라도 동요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대개 송시열(宋時烈)과 윤증(尹拯)의 스승·문생[師生]에 관한 일이 한 시대의 쟁단(爭端)이 되었는데, 왕이 비로소 시비(是非)를 결정하였기 때문에 이런 분부가 있었던 것이다. 아! 도심(道心)으로 서로 전(傳)하는 것은 바로 왕의 가법(家法)이고, 십잠(十箴)의 경계는 이미 정일(精一)한 뜻에 근본하였다. 학문에 힘쓰라는 당부와 사문(斯文)에 대한 부탁이 간절하게 반복되었으니, 이연(貽燕)의 계책이 그 또한 지극하다 하겠다. 왕은 검소한 생활을 숭상하여 절약하였고, 간언(諫言)을 따르기를 물흐르듯 하였다. 곤의(袞衣) 이외에는 비단옷을 입지 않았고, 침전(寢殿)은 자리가 떨어져도 갈지 않았으며, 위(幃)·장(帳)은 모두 청포(靑布)를 사용하고 아침 저녁의 수랏상 반찬은 몇 그릇에 지나지 않았다. 근신(近臣)이 먼 지방의 진귀한 물건을 귀중히 여기지 말라고 말하자, 즉시 은서피(銀鼠皮)를 불살라버리도록 명하였다. 또 대내(大內)로 낙타를 끌고 들어온 것을 간(諫)하는 자가 있자, 밤중에 궁문(宮門)을 열고 내쫓아 보냈고, 간신(諫臣)이 금원(禁苑)에 지은 소각(小閣)이 대로(大路)에 임한 것은 불가하다고 말하니, 즉시 그날로 헐어버릴 것을 명하였다. 왕의 겸손한 덕(德)은 또 천성(天性)에서 나와 일찍이 성지(聖智)를 스스로 과시하지 않았다. 계사년에 여러 신하들이 성덕(聖德)에 아름다움을 돌려서, ‘현의 광륜 예성 영렬(顯義光倫睿聖英烈)’로 존호(尊號)를 올릴 것을 청하니, 왕이 엄중한 말씀으로 굳이 거절하다가 오랜 뒤에야 마지못해 따랐으나, 속마음으로는 즐거워하지 않았다. 신(臣)이 삼가 천지(天地)에 상고하고 왕고(往古)에 증험해 보건대, 왕의 성덕(盛德)·홍규(弘規)는 드높고 빛나며, 가언(嘉言)·미정(美政)은 역사에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어 삼대(三代) 이후로 견줄 만한 이가 없으니, 아마 이른바 ‘넓고 커서 백성이 능히 형용할 수가 없다.[蕩蕩乎 民無能名焉]’는 것이라 할 것이다. 아! 위대하도다. 영의정(領議政) 신(臣) 김창집(金昌集)·우의정(右議政) 신(臣) 이건명(李健命) 등이 의논하여 존시(尊諡)를 ‘장문 헌무 경명 원효(章文憲武敬明元孝)’, 묘호(廟號)를 ‘숙종(肅宗)’, 전(殿)을 ‘효령(孝寧)’이라 올리고, 이 해 10월 21일 갑인(甲寅)에 명릉(明陵) 갑좌(甲坐) 경향(庚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처음 인현 왕후(仁顯王后)의 장사를 지낼 때 왕이 우측(右側)을 비워두는 제도로 하도록 명하고, 장릉(長陵)을 모방해 곡장(曲墻)을 치우치지 않도록 쌓고 정자각(丁字閣)도 또한 중간에 위치하도록 하였으니, 재차 백성을 수고롭게 할 것을 미리 근심한 것이었다. 왕의 원비(元妃)는 인경 왕비(仁敬王妃) 김씨(金氏)로,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보사 공신(保社功臣) 광성 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의 따님인데, 경신년에 훙(薨)하였다. 계비(繼妃)는 인현 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로,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여양 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의 따님인데, 신사년에 훙하였다. 혜순 왕비 전하(惠順王妃殿下) 김씨(金氏)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경은 부원군(慶恩府院君) 김주신(金柱臣)의 따님이다. 숙빈(淑嬪) 최씨( 崔氏)는 연잉군(延礽君) 이금(李昑)을 낳았고, 명빈(榠嬪) 박씨(朴氏)는 연령군(延齡君) 이헌(李昍)을 낳았는데, 일찍 서거(逝去)하였다. 사왕 전하(嗣王殿下)의 전비(前妃)는 단의 왕후(端懿王后) 심씨(沈氏)로, 증(贈) 영의정(領議政) 청은 부원군(靑恩府院君) 심호(沈浩)의 따님이고, 중궁 전하(中宮殿下) 어씨(魚氏)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함원 부원군(咸原府院君) 어유귀(魚有龜)의 따님이다. 연잉군은 군수(郡守) 서종제(徐宗悌)의 따님에게 장가들었고, 연령군은 수찬(修撰) 김동필(金東弼)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우리 전하(殿下)께서 신(臣)이 경악(經幄)의 구신(舊臣)으로서 근년에 오랫동안 의약(醫藥)의 시중을 들었다 하여 마침내 유궁(幽宮)의 지명(誌銘)을 신에게 분부하셨다. 신이 감당할 수 없다고 굳이 사양하였으나 끝내 허락받지 못했다. 돌아보건대 신의 문사(文辭)와 견식(見識)으로는 진실로 천일(天日)의 모습을 그려낼 수가 없다. 하지만 임어(臨御)하신 지 이미 오래 되어 기록할 만한 것들이 많기에 삼가 그 공덕(功德)의 큰 것들만 적었다. 또한 감히 겉치레로 사실이 아닌 것을 기록하여 길이 천지(天地)의 큰 은혜를 저버리지 못하는 바이다.” 하였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이명(李頤命)이 짓고, 병조 참판(兵曹參判) 이정신(李正臣)이 썼다. 【원전】 41 집 107 면 【분류】 *왕실-궁관(宮官)
|
영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