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초의 의병 곽재우 /남명 조식관련 기록

明鏡臺 在闍窟山 (南冥先生集卷之一)

아베베1 2009. 12. 28. 18:11

 南冥先生集卷之一
 七言絶句
明鏡臺 在闍窟山 


斧下雲根山北立。   袖飜天窟鳳南移。

 

冷然我欲經旬返。    爲報同行自岸歸。 鳳。

 

古朋字。先生自言

明鏡臺在闍窟山

斧下雲根山北立袖飜天窟鳳南移冷然我欲經旬返爲報同行自岸歸鳳古朋字先生自言

 

해동잡록 3 본조(本朝)
조식(曹植)


○ 본관은 창녕으로 자는 건중(建仲)이며 자호(自號)는 남명(南溟)이다. 기량이 크고 조행은 과단성 있고 확실하였다. 유일(遺逸)로 여러 번 부름을 받았으나 응하지 않았다. 한번은 궁에 들어가 편전(便殿)에서 임금을 대하고 정치와 학문의 방법을 극간하여 임금의 칭찬을 받았다. 그 후 두류산(頭流山) 백운동(白雲洞)에 들어가 집 하나를 짓고 편액(扁額)을 ‘산천재(山天齋)’라 하고 깊이 숨어 늙었다. 죽어 대사간(大司諫)에 추증되었다. 저작(著作)한 학기(學記)와 문집(文集)이 세상에 퍼져 있다. 선생이 일찍 문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많은 사람을 얻어 각각 많은 일들을 부탁하고, 나는 오히려 물러앉으려 하는 것은 재주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내가 평생에 단 하나 장점이 있는 것은 죽어도 구차하게 남을 따르지 않는 것이다. 사군자(士君子)의 큰 절개는 오로지 출처(出處 정치에 나아가거나 정치에서 물러앉는 것) 한 가지 일에 있을 뿐이다.” 하였다. 유사(遺事)
○ 금방울[金鈴]을 차고 각성을 촉구하며 호를 성성자(惺惺子)라 하였다. 일찍 이 방울을 문인(門人)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이 물건의 맑은 소리가 경계와 반성을 주는 것으로 사람이 차면 매우 좋은 것이다. 내가 귀중한 보물이라 생각하여 주는 것이니 잘 보전하겠는가? 이것이 언제나 의대(衣帶) 사이에 있으면서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규칙적으로 깨우치고 꾸짖고 책망해 주니, 경외(敬畏)하고 삼가 방울에 득죄(得罪)하지 말지어다.” 하니, 문인이 묻기를, “이것이 고인이 옥을 찼던 뜻이 아니겠습니까?”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이것의 의의가 절실하니 옥 차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 일찍 문인에게 말하기를, “천하에 제일 철문관(鐵門關)이 있으니 이것은 화류관(花柳關)이다. 너희들이 이것을 뚫을 수 있는가? 이 관(關)은 금석(金石)도 녹여버리는 것이니, 평소에 조행(操行)이 있다 하더라도 여기에 이르게 되면 모두 녹아 흩어지고 남는 것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 일찍이 신명사도(神明舍圖)를 좋아하였는데, 여기에는 이관(耳關)ㆍ목관(目關)ㆍ구관(口關) 3관(關)이 있고, 모두 큰 깃발을 세우고 명(銘)에 이르기를, “3관(關)이 닫혀지면 들판이 깨끗하여 버려진 것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자굴산(闍崛山) 명경대(明鏡臺)를 왕래하며 여러 해를 서식하였는데 언제나 문을 닫고 홀로 앉아 책을 보며 새벽에까지 묵묵히 종일을 보냈다. 거처하는 방은 고요하여 소리 하나 없었으나 때로 손가락으로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있어서, 아직도 독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 높은 풍도(風度)와 준엄한 절개는 사림(士林)의 의표(儀表)가 되기에 충분하여서, 아는 이와 모르는 이까지 반드시 추상 열일(秋霜冽日) 같다고 말하였다.
○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고문을 배웠으나 성취하지 못했고, 퇴계(退溪)의 글은 본시 금문(今文)이니, 비유하면, 나는 비단을 짜다가 필(匹)을 이루지 못하여 세상에 쓰이기에 어렵고, 퇴계는 깁을 짜서 필(匹)이 되었으니 쓰일 수 있는 것이다.” 하였다.
○ 선생이 계시던 서실(書室)은 모두 단청을 칠하였으니, 이는 그 밝고 깨끗한 것을 취한 것이었다. 문인이 묻기를, “단청은 빈한한 선비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니, 선생이 농담하기를, “나는 부귀한 기상이 있어서 너희들처럼 괴롭고 담박한 모양과는 같지 않다.” 하였다.
○ 손수 신명도(神明圖)를 만들었는데 안에는 신명진군 총재(神明眞君冢宰)가 있어서 깨우치는 것을 주로 가르치고, 밖에는 백규사구(百揆司寇)가 있어서 성찰 극기(省察克己)를 주로 하였다. 또 삼관(三關)에 모두 큰 깃발을 세우고 각각 심기(審幾 살피는 것과 기미) 두 자가 써 있고, 계속하여 명(銘)을 적었고 그 공용(功用)을 적었다. 종시(終始)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 선생과의 사귐이 깊어서 천하의 참된 선비라고 믿었다. 동상
○ 후에 두류산(頭流山) 백운동(白雲洞)을 얻어, 8, 9 칸을 짓고, 《역(易)》의 대축(大畜)의 뜻을 따서, 그 서실에 편액하기를, ‘산천재(山天齋)’라 하고, 창 바른쪽에 경(敬) 자를 쓰고, 왼쪽에 의(義) 자를 적었다. 또 그 옆에 고인의 경(敬)을 논한 요긴한 글을 써서 항상 바라보면서 마음으로 반성하였다. 〈행장〉
선생의 독서는 장(章)마다 해석하고 구(句)마다 풀이하는 것이 아니고, 혹 한 열 줄 읽어 가다가 자기에게 절실한 곳에 가면 그때는 알고 넘어갔다. 언제나 학자를 가르치며 말하기를, “사람이 도회지의 큰 시장에 놀러 가면 금은 진보가 없는 것이 없다. 종일 거리를 오르내리면서 그 값을 묻고 하지만 끝내 자기 집 소용물(所用物)은 아니고 단지 남의 집 일인 것이다. 차라리 나에게 쓰일 한 필 포목(布木)이나, 한 마리 고기를 사오는 것만 못한 것이다. 지금 학자(學者)들이 성리학(性理學)을 고성방담(高聲放談)하고 있지만 자기에게 얻어지는 것이 없으니, 이것과 다를 게 있겠는가.” 하였다.
○ 항상 논하기를, “학자는 단지 그 혼수(昏睡)함을 깨우칠 뿐이다. 눈을 뜨면 스스로 천지일월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였다. 이리하여 학도들을 위하여 글 가르치는 것을 논한 적이 없고, 단지 자신으로 하여금 스스로 터득하도록 하였다.
○ 선생은 동생과 우애가 심히 돈독하여, “한 몸의 지체(支體)라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다.” 하고, 같이 한 담 안에 살면서 출입하는 데 두 문이 없었다.
○ 창산 조씨(昌山曹氏)는 세상에 드러난 성인데 조서(曹瑞)라는 이가 있으니, 그는 왕태조(王太祖)의 외생(外甥)이었으며, 그 후 자손이 계승하여 9대에 걸쳐 평장사(平章事)를 지내고 대대로 위인(偉人)이 있었다.
○ 전부터 《참동계(參同契)》를 즐겨 보며 지극히 좋은 점이 있어서 학문에도 도움이 있다 하여, 모든 저술(著述)에 이 말을 즐겨 썼다.
○ 선생은 가수정사(嘉樹精舍)를 지어, 그 집 이름을 ‘계복(雞伏)’이라 하였으니, 이것은 덕을 수양하는 것이 마치 닭이 알을 품은 것과 같다는 뜻에서 딴 것이다. 동상
○ 선생은 사람됨이 만물 밖에 홀로 우뚝 서서 높이 한 세상 위를 보았다. 그 맑은 풍도와 엄준한 절개는 소보(巢父)ㆍ허유(許由)와 읍(揖)하고 변수(卞隨)와 백이(伯夷)를 벗할 수 있을 것이다.
○ 선생은 산수를 매우 좋아하여 천석(泉石) 좋은 곳은 다 유람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특히 두류산(頭流山)의 산수를 좋아하여 열한 번이나 왕래하면서도 싫어하지 않았다. 《유두류산록(遊頭流山錄)》이 세상에 전한다.
○ 언제나 선비들과 이야기하다가 말이 정치의 잘못과 민생의 곤궁에 이르게 되면, 주먹을 불끈 쥐고 흐느끼며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
언제나 말하기를, “염락(濂洛) 이후로 저술하고 주석한 것이 학문의 계제(階梯)와 맥락(脉絡)을 환히 하기를 일성(日星) 같이 하였으니, 신학 소생(新學小生)들이 책만 펼치면 훤히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나 단지 그 마음가짐이 깊고 얕은 것은, 그것을 구하는 성의가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을 따름이다.” 하였다.
○ 그 서실을 ‘뇌룡사(雷龍舍)’라 한 것은 ‘시동처럼 앉아 있어도 용이 드러나고[尸居龍見] 깊은 못처럼 침묵하여도 뇌성이 울린다[淵黙雷聲]’는 말에서 딴 것이다. 산거정사(山居精舍)에 있어서도 또 ‘뇌룡(雷龍)’이란 이름을 걸고, 그 옆에 쓰기를, “뇌성은 어두컴컴한 것[晦冥]이고, 용은 깜깜한 것이다[淵晦].” 하였다. 용면(龍眠)을 시켜서 뇌성과 용의 형상을 그린 그림 한 폭씩을 좌우에 걸었다.
○ 무진년에 부름을 받았으나, 가지 않고 봉사(封事)를 올리기를, “자고로 권신(權臣)으로 나라를 마음대로 하는 자가 있었고, 척리(戚里 임금의 외적)로 나라를 마음대로 하는 자도 있었고, 환시(宦侍 내관(內官))로 나라를 마음대로 하는 자는 있었지만, 서리(胥吏)가 나라를 마음대로 한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정사가 대부(大夫)의 손에 있어서도 안 되는 것인데 하물며 서리에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공경대부(公卿大夫)는 위의(威儀) 있게 앞뒤로 있지만 서로들 정사를 하인들에게 맡겨 심지어 군민서정(軍民庶政)과 방국기무(邦國機務)가 모두 이들에게서 나오니, 이 때문에 도필지수(刀筆之手 서리(胥吏))가 여기서 재물을 모으고, 백성들은 밖에 흩어졌으니 왕망(王莽)이나 동탁(董卓)같이 간악한 이도 이러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였다. 본집(本集)
○〈제심경후록(題心經後錄)〉에 이르기를, “이 책은 꼭 대낮 큰 시장의 평천관(平天冠 임금이 쓰던 위가 편편한 관의 한 가지)과 같아서 비단 살 사람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것을 머리에 얹게 되면 참소를 당하여 주살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람들이 이 책을 싫어할 뿐더러 살인도구로 보는 것이 평천관뿐만의 문제가 아니다. 많은 인간은 모두 긴 잠에 들었고, 인류는 금수와도 같이 단지 묵묵히 한 세상을 지날 뿐이다.
○ 두류산 백운동이라 제목한 시에 이르기를,
천하 영웅이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 天下英雄所可羞
일생 근력을 유후에 봉해지는 데 있음이네 / 一生筋力在封留
무한한 청산 봄바람의 얼굴 / 靑山無限春風面
서벌동정으로는 분명 거두지 못하리라 / 西伐東征定未收
하니, 말이 기이하고 엄장하여 속된 티가 한 점도 없다.
○ 무진년 봉사(封事)에서 각 사(司) 하리(下吏)의 방납(防納 공납을 대신 바치고 뒤에 배로 받는 것)의 폐단을 논하면서 말하기를, “하리들이 각기 주ㆍ현을 나누어서 자기들 것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공물을 상납하는 자가 그들 구족(九族)의 것을 모아서 가업을 전매(轉賣)하여 관사(官司)에 들여놓지 않고 사실(私室)에 공납하는데, 백 배가 아니면 받지 않으니, 뒤에는 계속 줄 것이 없어서 도망하는 자가 속출하는 것입니다. 주(州)와 현(縣)의 신민들의 공물(貢物)을 어찌 쥐새끼들같은 서리들이 가져서야 되겠습니까? 비록 망국지세(亡國之世)라 하더라도 이런 꼴은 없었던 것입니다. 국가는 다만 빈 그릇만 안고 있어 앙상하게 뼈가 드러났으니, 장차 나라는 나라 꼴이 아니요 도적은 임금 계신 수레 밑에 가득 찰 것입니다.” 하였다. 상동
○ 선생이 사람을 가르치는 것은 각각 그 재주에 따라 가르쳤다. 질문이 있으면 반드시 의심스러운 뜻을 분석 해부하여 주었다. 그 말이 세밀하여 털끝까지 들어가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훤하게 알게 한 뒤에야 그만두었다. 〈행적(行跡)〉
○ 벗을 취하는 데도 방정하여 친구로 삼지 못할 사람이면 설사 벼슬이 높고 귀한 사람이라도 시궁창 보듯 하고 그와 대하는 것을 수치로 생각하였다. 이 때문에 교제가 넓지 않았다. 산야(山野)에 물러나 살면서도 세상을 잊지 못하여, 맑은 저녁 달 밝은 밤이면 언제나 홀로 슬피 노래하고, 노래가 다 되면 눈물을 지웠으니, 옆에 사람은 수상하게 여기긴 하였으나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상동
○ 집에 있으면서도 엄격하여, 집 종들이나 시중드는 자들도 머리를 만지고 더벅머리를 정연히 하지 않으면 가까이 갈 수 없었다. 〈묘지(墓誌)〉
○ 남의 나쁜 일을 들으면 혹시나 한 번이라도 만날까 두려워하여 마치 원수를 피하듯 하였다. 언제나 깊숙한 방에 고요히 거처하면서 책상을 닦고 책을 펴 심안(心眼)을 모아 묵관(墨觀)하며 깊은 사색에 잠기며 책 읽는 소리는 내지 않았다. 눈은 음란한 것을 보지 않고, 귀는 엿듣지 않으며, 엄숙하고 경건한 마음이 항상 마음에 있어서 게으른 빛을 보이지 않았다. 상복중에 있을 때에는 애모하여 피눈물을 흘리고 질대(絰帶)를 풀지 않았으며, 제사에는 반드시 준비를 하여 음식을 알맞게 조리하고 식기를 깨끗이 씻는 것 등은 주방의 노비에게만 맡기지 않고 반드시 몸소 하였다.
○ 일찍이 한 신진 소년이 청반(淸班)에 올라 명예를 날리는 것을 보고, 남에게 말하기를, “재주가 있어 자신에 넘쳐 있으니 후일 현명한 사람과 능한 사람을 해치는 일이 이 사람한테서 나지 않는다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그 후 과연 높은 벼슬에 올라 몰래 흉당(凶黨)들과 결탁하여 선비들을 섬멸하였다. 상동
광풍 슬슬 불어 천리에 훈훈하고 / 光風習習醺千里
높이 뜬 학 훨훨 십주에 내려온다 / 高鶴飄飄下十洲
무릉운(武陵韻)을 차운하여
몇 장 남긴 유묵(遺墨)은 귀신이 보호하여 쥐도 썰지 못하고 좀도 먹지 못하며 풍우(風雨)가 썩히지도 못한다. 한훤 선생 화병 뒤에 적음
○ 한 선비가 글재주가 몹시 있었으나 성질이 몰래 남을 시기하였다. 남명(南冥)이 우연히 뭇 사람이 모인 회합에서 그를 보고는 물러나서 남에게 말하기를, “내가 미간(眉間)을 살펴보고 그 사람의 위인을 알았다. 모양은 반듯하나 마음속에는 화심(禍心)을 먹고 있으니 만약 뜻대로 높은 벼슬에 오르면 좋은 사람들이 위험할 것이다.” 하였다. 그 후에 과연 그러하니 사람들이 그 현명함에 감복하였다. 〈묘지(墓誌)〉
○ 해오리[鷺]가 희고 까마귀가 검은 것은, 해도 검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비도 이것을 씻을 수 없는 것이다. 비록 자신이 더러워졌으면 하지마는 어찌 될 수 있는 것인가. 남명서(南冥書)
○ 공(公)은 연서지명(燃犀之明 어두운 곳을 밝게 비치는 것)이 있고, 나는 대분지탄(戴盆之嘆 벼슬 구하기에 급급하여 인사 닦을 겨를이 없다는 사마천의 탄식)이 있는데 눈병이 겹쳐 어두워 사물을 보지 못하니, 명공(明公)이 구름을 헤쳐 눈을 좀 밝게 해 줄 수 없는가. 답퇴계서(答退溪書)
○ 내신(內臣)들은 당파를 세우기를 용이 연못에 뛰놀듯 하고, 외신(外臣)은 백성을 박탈(剝奪)하기를 이리가 들에 뛰놀듯 하니, 껍질이 다 없어지면 털이 붙을 데가 없습니다. 〈기묘 봉사(己卯奉事)〉
○ 아래로 인사를 배우고 위로 천리(天理)에 달통하는 것, 이것이 덕에 나아가는 순서인데, 인사는 버리고 천리를 담론하니, 이것은 입으로만의 이치일 뿐이다. 자신을 반성하지 않고 많이 듣기만 하는 것은 귀 밑의 학문[耳底之學]일 따름이다.
○ 소관(小官)은 아래서 희희낙락 주색에 빠지는 것을 낙으로 삼고, 대관은 위에 둥둥 떠서 오직 뇌물만 늘리고 백성들의 원통함은 다스리려 하지 않습니다. 상동
○ 선생이 말하기를, “내가 두류산과 덕산동(德山洞)에 들어간 것이 세 번, 청학동(靑鶴洞)에 들어간 것이 세 번, 용유동(龍遊洞)에 들어간 것이 세 번, 백운동(白雲洞)에 들어간 것이 한 번, 장항동(獐項洞)에 들어간 것이 한 번이나, 어찌 정말 산을 탐내고 물을 탐하여, 그런 내왕에 번거로움을 꺼리지 않았겠는가. 화산(華山)의 절반이라도 빌려서 늙어 죽을 땅으로 삼을까 하였으나, 일은 마음과 어긋나 알면서도 머물지 못하고, 박 같이 시골 집에 얽매여 있으니, 어찌 답답하지 않겠는가.” 하고는 시를 짓기를,
몸을 온전히 하려는 온갖 계획이 모두 어긋나니 / 全身百計都爲謬
방장산도 이제는 맹서를 어기누나 / 方丈於今已背盟
하였다. 《두류산록(頭流山錄)》
○ 쌍계동구(雙溪洞口)에 푸른 단애(斷崖)가 양쪽으로 열려 한 길을 넘었다. 학사(學士) 최치원(崔致遠)이 손수 넉 자를 적어, 바른쪽에는 ‘쌍계(雙溪)’라 하고, 왼쪽에는 ‘석문(石門)’이라 썼다. 획이 사슴 정강이 만한 큰 글자가 깊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상동


[주D-001]소보(巢父) …… 백이 : 요(堯) 임금 때에 요 임금이 천자의 지위를 허유(許由)에게 사양하니 허유가 나쁜 소리를 들었다 하여 멀리 가서 영천(潁川)이라는 냇물에 귀를 씻었더니, 소보(巢父)라는 노인이 송아지를 끌고 가다가 그 귀 씻는 이유를 듣고 그런 더러운 물은 송아지도 먹일 수 없다 하여 상류로 끌고 가서 먹었다는 전설이 있고, 탕(湯) 임금이 하(夏) 나라를 정복하고 변수(卞隨)에게 천자가 되라 하니 변수도 도망가서 산속으로 들어갔다 하고, 주(周) 나라의 무왕(武王)이 은(殷) 나라를 치려할 제 불가하다고 항변하던 백이(伯夷)는 수양산(首陽山)에서 고사리를 캐어 먹다가 굶어 죽었다 한다. 모두가 의리에 합하지 아니하면 온 천하의 왕이 되라 하여도 받지 않던 사람들이다.
[주D-002]염락(濂洛) : 염(濂)은 송 나라의 큰 학자 주돈이가 출생한 곳이요, 낙(洛)은 정호(程顥)와 정이(程頤)가 출생한 곳으로, 그들은 유교의 철학인 성리학에 큰 공헌이 있는 사람들이다.
[주D-003]용면(龍眠) : 용면(龍眠)은 송(宋) 나라의 유명한 화가 이백시(李伯時)의 호인데, 우리나라에는 그 용면이라는 호를 가진 화가가 있지 아니하다. 여기에는 화가의 대명사로 용면이라 한 것 같다.

명종조 고사본말(明宗朝故事本末)
명종조의 유일(遺逸)


임자년(1552)에, 8도에 명하여 유일(재야한 어진 선비)을 천거하게 하니, 성수침(成守琛)ㆍ이희안(李希顔)ㆍ조식(曹植)ㆍ성제원(成悌元)ㆍ조욱(趙昱)은 행실이 뛰어났으므로 6품에 곧장 등용시켰다가 모두 이내 현감을 임명하였다. 수침은 대궐에 와서 사은하고 예산 현감을 주었으나 부임하지 않으니, 조정에서 수침이 노모가 있어 멀리 떠나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적성(積城)으로 옮겨 주었으나 또한 가지 않았다.희안은 고령(高靈) 현감으로 가고, 조식은 벼슬을 주어도 가지 않다가 단성(丹城) 현감으로 임명하니 소를 올려 곧은 말을 하고는 부임하지 아니하고, 제원은 보은에 가서 치적이 있었으며, 조욱은 장수에 간 지 얼마 안 되어 을묘왜변을 만나자 버리고 돌아갔다. 《후청쇄어》
○ 말년 병인에 이조에 명하여 육조(六條 지(知)ㆍ인(仁)ㆍ성(聖)ㆍ의(義)ㆍ충(忠)ㆍ화(和))를 구비한 사람을 가리게 하니, 그 명목은 ‘경전에 밝고 행실이 닦인 것’이었다.
○ 이때에 판서 민기(閔箕)가 아뢰기를 “육조를 구비한다 함은 명칭이 과중하니, 다만 경전에 밝고 행실이 닦였다는 것으로 고쳐서 명을 내리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여섯 사람이 천거되니, 이항(李恒)은 태인(泰仁)에 살고 성운(成運)은 보은에, 전 참봉 임훈(林薰)은 산음(山陰)에, 진사 김범(金範)은 상주에, 생원 한수(韓脩)와 참봉 남언경(南彦經)은 서울에 살았는데 글을 내려 부르고, 병으로 못 오는 이는 의원을 보내고 약을 주어 융숭한 뜻을 보였다. 전후하여 오는 이는 곧 불러보고 모두 6품 벼슬을 임명하였다.전에 임자년에 불렀던 유일로 이때(병인년)까지 살아있는 이는 오직 조식 뿐이므로 의논들이, “산림에 있는 어진 이는 조식 같은 이가 없으니, 이번 6명과 함께 불러오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이에 모두 역말을 타고 오게 하여 사정전에 입대시키고 임금이 백성 다스리는 도리를 묻기를, 그 문목(問目)을 두 벌을 써서 하나는 임금의 책상에 두고 한 벌은 부름받은 이에게 주어 묻는 데 따라 대답하게 하였다. 《동각잡기》ㆍ《후청쇄어》
이준경이 차자를 올리니 그 대강은, “지금 사람을 취하는데 명목이 과중하니 반드시 육덕(六德 지ㆍ인ㆍ성ㆍ의ㆍ충ㆍ화)을 구비한 사람으로 기준을 삼으면 성인의 경지에 가까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기에 들기가 어려울 것이요, 또한 착한 이를 취하는데 일정한 한계가 없어야 한다는 옛 말씀의 뜻에도 어긋날까 합니다. 비록 백이(伯夷)ㆍ유하혜(柳下惠) 같은 성인보다 한 등급 아래인 사람도 그 덕이 완전히 구비되지 못하고 치우친 데가 있었는데, 하물며 후세의 선비가 어떻게 이 완전한 덕을 갖추겠습니까.예전에 좌웅(左雄)이 하나를 듣고 열을 아는 것으로 표준삼아서 인재를 선발하였는데, 후세 사람들이 치우친 것이라 하였고, 주공(周公)은 한 사람이 다 갖출 것을 바라지 말라는 뜻으로 노(魯) 나라 때에 훈계하였으니, 옛사람의 선비를 뽑던 법을 대체로 알 수 있습니다. 예조에서 아뢴 대로 그 명칭을 고치도록 하소서.” 하였다. 《동고집》
○ 육조를 구비하였다는 사람들이 부름을 받고 서울로 오는 날에 임금이 삼제학(三提學 대제학ㆍ부제학ㆍ직제학)을 불러 책문으로 시험할 계획을 세워 과거 보이듯이 하려 하였는데,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어질다고 해서 불렀으니, 이렇게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하여, 불러보고 말로만 논란하였으니 그 어찰 문목을 보면 전시에서 선비에게 책문하는 체제와 비슷하였다. 《후청쇄어》
○ 임금이 인심ㆍ도심에 관한 학설을 남언경과 한수에게 물었으나 대답하지 못하였다. 《괘일록》
○ 성운이 사직하고 오지 않으므로 여러 번 명을 내렸더니, 최후에 서울에 와 차자만 올리고 사은하지 않은 채 고향으로 돌아갔다.
○ 전지를 내려 육조가 구비된 이를 구하니, 임금의 뜻은 처음에 왕손의 사부를 삼으려 함이었다. 국조 전례에 다만 왕자사부만 있고 왕손에는 사부가 없었던 것인데, 순회세자(順懷世子)가 죽은 뒤에 임금의 조카인 선조에게 뜻을 두고 특별히 왕손사부를 설치하려 함이었다. 천거된 여섯 사람이 모두 왕손을 가르치기에 맞지 않으므로 왕자사부는 또 다른 사람을 시켰다. 《후청쇄어》


성수침(成守琛)

성수침은, 자는 중옥(仲玉)이며, 호는 청송(聽松)이요,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대사헌 세순(世純)의 아들이다. 계축년에 나서 신축년에 유일로 천거되어 참봉을 제수하고, 임자년에 주부를 제수하였으나 매번 나아가지 않고 파평(坡平) 산중에 은거하다가 갑자년에 죽으니, 나이 72세였다. 집의를 증직하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 공이 나면서부터 비범하였는데, 어려서 장난을 즐기지 않아 어른과 같았고, 천성이 효성스러워 어려서부터 효성스러운 아이라 불리었다. 부친상을 당하여 3년을 죽만 마시고 제수를 친히 장만하였으며 새벽에 일어나서 산소를 쓸고 향을 태우며 절하기를 혹독한 추위와 더위에도 폐하지 않았다. 아우 수종(守琮)과 함께 일찍이 조광조(趙光祖) 문하에 출입하여 모두 명망이 있었으니, 식자들이 영특함은 아우가 낫고, 돈후하고 화하기는 모두 공을 칭찬하였다. 《월정별집(月汀別集)》ㆍ《명신록》
○ 중종 기묘년 당시에 선비들의 명성이 너무 성하므로 공이 근심을 하고, 또 친상을 당한 뒤로 몸이 쇠약하여 세상에 나아가 활동하지 못할 것을 스스로 깨달아 마침내 문을 닫고 나오지 않으며 과거 준비도 아니하였다. 집이 북악산 기슭에 있었는데 송림 속에 서당 두어 칸을 지어 ‘청송(聽松)’이라 이름하고 홀로 그 가운데에 거처하면서 학문으로 낙을 삼았다.
○ 태학의 선비들이 공의 거상한 효행을 들어 조정에 아뢰려 하니, 공의 친구 상진이 말리기를, “성수침 형제는 학문에 힘쓰는 선비라 장차 대성할 것이 기대되는데, 한 가지의 착함을 들어 일찍 이름이 세상에 들리게 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 신축년에 조정에서 유일을 뽑아 쓰려 하니, 김안국(金安國)이 장차 공을 천거하려 하여 홍봉세(洪奉世)에게 묻기를, “자네는 성군의 절친한 친구이니 이 사람의 경지를 논할 수 있겠다.” 하니, 봉세가 말하기를, “자질이 높고 학문이 성취되었으니, ‘죽으므로 도를 잘 지킨다.’는 옛말은 이 사람이 해당할 것이다.” 하였더니, 안국이, “이에 그칠뿐이가.” 하였으니, 그 신망을 받음이 이와 같았다. 안국이 비록 실지로 천거하지는 않았으나 조정에서 후릉(厚陵) 참봉을 제수하였다.
○ 여러 차례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사은만 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혹 물으면 말하기를, “나는 대대로 벼슬한 신하이니 왕명을 받고 태연히 있을 수는 없지만, 병으로 능히 벼슬을 살지 못할 것만은 이미 결정되었다.” 하였다. 경신년에 특명으로 사지(司紙)를 제수하니, 영상 상진이 편지로 나올 것을 힘써 권하였는데, 공이 답하기를, “예전에 문립(文立)이 정경(程瓊)을 천거하지 않았음은 정경의 천성이 평탄하지 않고 늙어서 다시 세상에 뜻이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니, 공은 나를 아는 이가 아닌가.” 하고 마침내 나아가지 않았다.그가 죽으니 원근 사람들이 말하기를, “산림이 비었다.” 하였다. 사간원에서 아뢰기를, “전 현감 성수침은 병으로 사절하고 벼슬하지 않고 문을 닫고 옛 도를 힘써 행하여 검약하게 몸을 마쳤으니, 참으로 한 나라의 착한 선비요 당대의 일민입니다. 바라건대 그 상장(喪葬)에 특전을 베푸시어 성스런 조정에서 어진 이를 높이고 노인을 존경하는 뜻을 밝히소서.” 하였다. 임금이 즐거이 좇아서 곽(槨) 한 벌을 주고 경기 감사에게 명하여 쌀과 조를 부의하였으며, 또 사헌부 집의(執義)를 증직하였다. <행장> 《동각잡기》
○ 공이 파주 우계(牛溪)에 집을 정하고, 그 서실을 ‘죽우(竹雨)’라 이름 지었으며, 집 가에 뽕나무를 심어 숲을 이루고 누에를 치지 않으니, 혹 그 까닭을 물으면, “내가 그 아래에서 거닐 적에 푸른 잎은 그늘을 지우고 맑은 바람이 솔솔 불어 오니 이만하면 족하다.” 하였다. <행장> 《해동잡록》
○ 천품이 매우 높아 중후하고 충신하며 키가 크고 골격이 빼어나서 형상이 매우 훌륭하고, 기뻐하고 성냄을 함부로 나타내지 않고, 때에 맞게 말하고 웃으니, 바라보면 엄연히 그 덕스러움을 알 수 있었다. 본래 뜻이 담박하여 세속 밖에 멀리 뛰어나서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명리를 초개만도 못하게 여겼고, 그 학문은 자신을 반성하여 몸을 닦는 데 힘을 써서 성(誠)으로 주장을 삼고, 일찍이 사람들에게 가벼이 말하지 않았다. 《율곡집》
○ 공이 일찍이 배우는 이에게 말하기를, “도는 큰 길과 같고 성현의 가르침은 해와 별처럼 밝아서 알기에 어렵지 않으나, 요는 힘써 행하여 그 앎을 채우는 데 있으니 말로만 하는 학문은 전혀 일을 이루지 못한다.” 하였다.
○ 그 필법은 아름다움을 구하지 않고 오직 매우 예스럽고 노색창연함을 주로 하며, 득의할 때는 묘하기가 하늘이 빚어낸 것 같았으니, 이는 비록 말단적인 유희이나 그 풍격이 세속에 뛰어남을 짐작하게 한다. 어떤 사람이 그 선조의 비문 글씨를 청하니, 그 글은 이계전(李季甸)이 지은 것이었다. 공이 한참 보다가 말하기를, “자네가 이계전이 한 일을 아는가.” 하니,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공이, “남추강(南秋江)이 지은 <허후전(許詡傳)>에 이 사람 일이 적혀 있다.” 하고 다시 말하지 않으니, 그 사람이 그 뜻을 깨닫고 감히 다시 청하지 못하였다. <행장>
○ 성운(成運)이 속리산 아래에 살며 초당을 짓다가 끝을 못냈더니, 성제원(成悌元)이 보은 현감으로 있으면서 관청의 목수를 보내어 그 일을 마치니, 공이 이를 듣고 사람에게 말하기를, “현감이 관청의 목수를 시켜 사가의 일을 하게 하고, 사가에서도 태연히 이를 받는 것은 무슨 일인가.” 하였다. 그 사람이 주회암(朱晦庵 주희(朱熹)의 호)이 정사를 지을 때에 관청의 도움을 거절한 일을 말하니, 공이, “반드시 그런 온당치 않은 점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옛날 주회암이 정사를 지으려는데 안무사가 이를 듣고 관의 힘으로 세우려 하니, 회암이 말하기를, “만약 그렇다면 내가 차라리 정사를 세우지 않겠다.” 하였으니, 공의 이 말이 이 일과 정히 합하나 안무사는 지금의 관찰사이니, 한 도의 주인으로서 한 도의 힘을 움직이어 한 정사를 지음은 참으로 온당치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수령은 규찰을 맡은 관찰사에 비할 것이 아니니, 그 남은 힘으로 초당 하나 짓는데 도왔다고 의(義)에 해될 것이 무엇이리오. 그러나 공이 의를 편안히 하여 비록 일호의 주고 받는 것이라도 구차한 근심이 있을까 염려하였으니, 이것이 곧 성현이 조심조심하여 사욕을 극복하고 덕을 온전히 하는 일이다. 참으로 보통 사람이 헤아릴 수 있는 바가 아니니, 후학은 마땅히 공경하여 지켜서 잃지 말아야겠다. 《전언왕행록》
○ 공이 스스로 찬을 짓기를, “그 모습이 말랐으나 그 모양은 또한 옛스럽다. 나이 40세에 아직도 한 포의로다. 처음에 먹은 마음 변하지 않으니, 시종 어김이 없네.” 하였다.
○ 성운이 일세의 인물을 논하면서 청송을 제일이라 하였다. <대곡행장(大谷行狀)>


이희안(李希顔)

이희안은, 자는 우옹(愚翁)이며, 본관은 강양(江陽) 합천(陜川) 이요, 동중추 윤검(允儉)의 아들이다. 유일로 등용되어 전옥서 참봉(典獄署參奉)ㆍ장악원 주부(掌樂院主簿)를 거쳐 벼슬이 군자감 판관(軍資監判官)에 이르렀다. 기미년에 죽으니 나이 56세였다.
○ 공이 조식(曹植)으로 더불어 지기가 되어 내외를 모두 통하였다. 두 사람이 다 임자년 천거된 유일로, 조식은 여러 번 불러도 응하지 않고 공은 전후로 세 번 벼슬을 하였는데, 조식이 시를 지어 주기를,

산해정(山海亭) 가운데서 꿈을 몇 번이나 꾸었나 / 山海亭中夢幾回
황강(黃江)의 늙은이 머리에 눈이 가득하구나 / 黃江老漢雪盈腮
반생에 세 번 서울에 갔으나 / 半生三度朝天去
군왕의 면목 보지도 못하고 왔구나 / 不見君王面目來

하였으니, 산해는 조식의 정자 이름이요, 황강은 공을 가리키는 것(공이 사는 초계(草溪)에 황강이 있다.)이다. 《후청쇄어》
○ 고령 현감(高靈縣監)이 되었는데 감사 정언각은 사특한 사람이어서 공의 어진 것을 질투하여 매우 위세를 부림으로 공이 벼슬을 버리고 갔더니, 언각이 아뢰어, 치죄할 것을 계청하였다. 호조 판서 조사수(趙士秀) 또한 경연에서 아뢰기를, “수령이 제대로 고을을 다스리지 못하여 국고를 탕갈하고 어찌할 계책이 없으면 곧 벼슬을 버리고 가니, 죄가 대단히 큽니다. 지금 흉년에 백성이 곤궁한데 중앙이나 지방이 다 법을 무시하고 있으니 언각이 청한 대로 이희안을 치죄하소서.” 하였다.장령 유중영(柳仲郢)이 아뢰기를, “모든 탐욕스럽고 백성을 학대하는 수령은 반드시 벼슬을 버리고 가지 못하는 것이니, 능히 벼슬을 버리는 이는 반드시 탐욕하고 백성을 학대하지는 않습니다. 또 조정에서 선비를 대우함에 있어 마땅히 예절을 숭상하여 염치를 기를 것이요 속박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지금 희안이 유일로 등용되었다가 한번 벼슬을 버렸다 하여 중한 벌로 다스리면 조정에서 선비 대우하는 체면을 손상시킬까 염려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장령의 말이 옳으나 판서의 말은 시국을 수습하는 데 적절하니 좇지 않을 수 없다.” 하여, 공이 이 때문에 마침내 폐고되니, 사림에서 애석해 하였다. 《서애집》
○ 효성과 우애가 극진하며 착한 일에 독실하고, 학문을 좋아하며 사람을 사랑하고 사물에 부지런한 마음은 비할 데가 없었다. 두라면 두는 것은 유하혜(柳下惠) 같고, 통하고 슬기로움은 진동보(陳同父 진량(陳亮)의 자) 같으며, 도학을 보호하는 뜻이 있고, 도를 바라보고도 보지 못한 듯이 여긴 자이다. 재주는 활쏘기와 말타기를 겸하여 무예를 닦는 사람 중에 뛰어났으나 끝내 세상에 쓰여지지 못하였다. 조남명(曹南冥)이 지은 묘비
○ 공이 일찍이 조식으로 더불어 두류산에 놀러가서 동쪽 고개에 오르는데 삼가식현(三呵息峴)이라는 고개가 있었다. 공이 홀로 채찍을 흔들며 먼저 올라서 말을 제일 높은 봉에 세우고 말에서 내려 바위에 기대어 부채를 흔드니, 여러 사람은 한 걸음 한 걸음 오르는데 사람과 말이 땀이 비 오듯 하면서 한참만에 당도하였다. 조식이 면전에서 공을 책하기를, “자네는 말의 힘을 믿고 앞으로 나갈 줄만 알지 멈출 줄을 모르는구나. 후일에 바른 일 하는데 능히 남의 앞에 서게 되면 좋지 않겠는가.” 하니, 공이 사과하기를, “내가 벌써 자네의 책망이 있을 것을 짐작하였네. 내가 과연 잘못했네.” 하였다.


조식(曹植)

조식은, 자는 건중(楗中)이며, 호는 남명(南冥)이요, 본관은 창녕이다. 임자년의 유일로 선조 때 여러 번 불렀으나 매번 나가지 않았다. 벼슬이 전첨(典籤)에 그쳤으며, 임신년 5월에 죽었다. 대사간을 증직하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 공은 천성이 개결하여 젊어서 과거 준비를 하였으나 즐기는 바가 아니었다. 하루는 성수침을 백악봉 아래로 찾아갔다가 그 세상 일을 끊은 것을 보고 마음에 즐겨하여 드디어 고향으로 돌아가 벼슬하지 않고 지리산 아래에 살았다. 방 안에 단정히 앉아서 졸음이 오면 칼을 어루만지며 자지 않았다. 칼 머리에 명(銘)이 있는데, “안으로 밝은 것은 경이요, 밖으로 끊는 것은 의이다.” 하였다.한가하게 거처하기를 오래하자 깨끗하게 욕심이 없어져 절벽이 우뚝 솟은 기상이 있었으며 주고 받는 것을 구차히 않고 허여함이 적으며, 남의 착함을 들으면 좋아하고 남의 악함을 들으면 미워하여 고을 사람의 착하지 않은 자는 자기를 더럽힐 것같이 보므로 고을 사람이 감히 청탁을 하지 못하였다. 《석담일기》
○ 공의 기품이 높고 지조가 굳어서 유일로 여러 번 불러도 나아가지 않다가, 한번은 서울에 와서 편전에 입대하여 나라 다스리고 학문하는 방법을 극진하게 아뢰니 임금이 칭찬하였다. 뒤에 두류산 백운봉에 들어가서 한 집을 지어 ‘산천재(山天齋)’ 라 이름하고, 드디어 깊이 숨어서 일생을 마쳤다. <유사(遺事)>
○ 임자년에 두 번째 단성 현감(丹城縣監)으로 부르니, 이때는 권간(權奸 윤원형(尹元衡)이 나라 일을 맡아서 문정왕후를 그릇 인도하여 사림이 기운을 잃었을 때라, 비록 공론이라 칭탁하고 유일을 천거하였으나 다만 허식이므로 공이 벼슬에 뜻이 없어 상소하여 사직하고 겸하여 시국의 폐단을 아뢰기를, “정숙하신 대비께서는 다만 깊은 궁중의 한 과부일 뿐이며, 어린 전하께서는 선왕의 외로운 아들에 지나지 않으시니, 백천 가지 재변과 억만의 인심을 어떻게 감당할 것입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음악이 슬프고 옷이 희니, 망할 징조가 이미 나타났습니다.” 하니, 임금이 기뻐하지 않으면서 대비에게 욕이 미쳤다 하였다.이때에 상진(尙震)이 좌상이었는데, 이제신(李濟臣)을 시켜 《송사(宋史)》 영종기(英宗紀)를 빼내어 구양수(歐陽脩)가 말한, 자전은 깊은 궁궐의 한 부인이라는 말을 내놓고 변명하기를, “조식이, 옛사람이 임금에게 고한 말을 인용하여 국가의 위태로운 형세를 지극히 말한 것이요, 거만한 말이 아닙니다.” 하였다. 임금 또한 일사(逸士)로 대우하여 결국 죄를 주지 않았다. 《석담일기》ㆍ《후청쇄어》
이황(李滉)이 공의 상소를 보고 사람에게 말하기를, “무릇 상소는 직언을 하여 회피하지 않음을 귀하게 여기나, 모름지기 곡진하고 부드럽게 하여 뜻은 곧으면서 말은 순하게 하여 과격하고 불공한 병통이 없도록 해야 한다. 그런 뒤에야 아래로 신하의 예를 잃지 않고 위로 임금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니, 남명의 상소는 참으로 금세에 얻기 어려운 바이나 말이 지나쳐서 비방하는 데 가까우니 마땅히 임금께서 보시고 노하겠다.” 하였다. 《퇴도언행록(退陶言行錄)》
○ 성수침이 또한 공과 서로 뜻이 같아 친하였다. 이제신이 두 선생께서 서로 허여하고 중히 여기는 뜻을 성혼에게 물으니 혼이 말하기를, “가친이 남명의 단성소(丹城疏)를 보고는 예봉이 너무 드러났다 하고, 말씀하시기를, ‘오랫동안 건중과 떨어져서 그가 크게 진보하여 이미 혼연일체가 되었으리라 여겼더니, 과연 이 말씨와 같다면 아직도 미진함이 있지 않는가.’ 하시었다.” 하였다.
○ 육조를 구비한 사람이라 하여 부름을 받고 입대할 때에 여러 사람은 모두 간략하게 아뢰었으나, 공이 홀로 아뢰기를, “신이 아뢰고자 하는 것은 전하께서 물으신 이외의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라.” 하니, 아뢰기를, “20년내로 민생이 날로 흩어져서 촌락이 점차 쇠망하여지니, 이는 신이 알 수 없는 일입니다.” 하고, 인하여 임금과 신하 사이에 화평하지 않아서는 안 됨을 말하였다. 임금이 인하여 묻기를, “옛사람이 삼고초려(三顧草廬)하지 않으면 나오지 않으려 하였음은 무슨 뜻인가.”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공명(孔明)이 생각하기에 감당하지 못할까 하여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공명이 거의 50년을 경영하였으나 겨우 솟발[鼎足] 모양을 만들었고 한 나라를 회복하지 못하였으니, 그 재주를 알 만합니다.” 하였다. 이는 공이 여러 번 불러도 나오지 않으므로 임금이 삼고로 물은 것이고, 공의 대답은 또한 감당하지 못할 것으로 말을 한 것이다. 전첨(典籤)을 제수하였으나, 받지 않고 물러났다. 《후청쇄어》ㆍ《동각잡기》
○ 공은 이항(李恒)과 젊을 때 친구이다. 부름을 받았을 때에 한 곳에 모였는데, 공이 말끝마다 이항을 희롱하기를, “항지(恒之)는 큰 당적이야. 나는 자네의 큰 당에 연루되어 공초에 따라온 격이다.” 하니, 이는 선의의 농담이다. 《후청쇄어》ㆍ《동각잡기》
○ 선조 때에 여러 차례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고, 다만 상소하여 당시 의논의 잘잘못을 진술할 뿐이었다. 임종시에 그 제자에게 말하기를, “후세 사람이 나를 처사라 하면 가할 것이나, 만약 유자(儒者)로 지목한다면 실지가 아니다.” 하였다. 문인이 더 가르침을 청하니, 공이 말하기를, “경ㆍ의(敬義) 두 글자는 해와 달 같아서 하나라도 폐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그 첩이 들어가 영결하기를 청하였으나 끝내 허락하지 않고 죽었다. 부고가 아뢰어지니 대간과 조신들이 시호를 주어 포장(襃獎)하는 뜻을 보이도록 청하였으나, 임금이 전례가 없다고 윤허하지 않고, 부의만을 하사하였다. 그의 문인에 김우옹(金宇顒)ㆍ정인홍(鄭仁弘)ㆍ정구(鄭逑)가 가장 드러났다. 《석담일기》
삼가 상고하건대 공은 세상을 피하여 홀로 서서 뜻과 행실이 준엄하고 깨끗하니, 참으로 일대의 일민(逸民)이다. 다만 그 의논과 저술을 보면 학문에는 실로 본 것이 없고 상소한 글도 경세제민의 계책이 아니니, 비록 세상에 나와서 시행함이 있었더라도 그 능히 정치에 성공함은 기필할 수 없다. 문인 권중(權重)이 공을 ‘도학군자’라고까지 하였는데, 참으로 실지보다 지나치는 말이다.그러나 비록 근대에 처사라는 이들로서 시종 절개를 완전히 지켜서 천 길 절벽처럼 우뚝 서기를 공과 같이 한 이가 별로 없다. 술객(術客) 남사고(南師古)가 일찍이 사람에게 말하기를, “올해에 처사성(處士星)이 빛이 없다.” 하더니, 얼마 안 되어 공이 죽으니, 공은 시대에 응하여 태어난 비상한 선비라 할 만하다. 《석담일기》
○ 공이 일찍이 문인에게 말하기를, “내가 허다한 인재를 얻어서 허다한 일을 맡기고, 나는 물러나 앉고 싶으니 재주가 없기 때문이다. 내 평생에 다만 하나의 좋은 점이 있으니, 죽더라도 구차히 남을 따르지 않는 것이다. 사군자의 대절은 오직 출처를 분명히 하는 한 가지 일에 달렸을 뿐이다.” 하였다. <유사>
○ 항상 쇠방울을 차고 정신을 깨우치며 방울을 ‘성성자(惺惺子)’라 이름하였다. 일찍이 이 방울을 문인에게 주며, “이 물건의 맑은 소리가 깨우침을 주니 사람들이 모두 차면 좋겠다. 내가 이 중한 보배를 주겠으니, 항상 허리에 차고 조금만 동작이 있어도 경계하고 꾸짖어서 매우 공경하고 두려워할 만하니, 이 방울에 죄를 얻지 말라.” 하였다. 제자가 묻기를, “옛사람이 옥을 차던 뜻이 아닙니까.” 하니, 공이, “이것의 뜻이 더 간절하니, 옥을 차는 것과 같은 데 그칠 뿐만이 아니다.” 하였다.
사굴산(闍崛山) 명경대(明鏡臺)에 왕래하며 거처하기 여러 해였는데, 항상 문을 닫고 홀로 앉아 새벽까지 글을 읽으니, 종일토록 고요히 한 소리도 없다가 때때로 손가락으로 책상 건드리는 작은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아직 글을 보고 있음을 알았다.
○ 거처하는 서실에 모두 단청을 하였으니, 이는 밝고 깨끗함을 취해서였다. 문인이, “단청은 선비에게 합당한 것이 아니라.” 하니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부귀한 기상이 있어서이니, 자네들의 빈곤하고 담박한 모양과는 같지 않다.” 하였다.
○ 가수정사(嘉樹精舍)를 짓고 그 당호를 ‘계복(鷄伏)’이라 하니, 함양함이 닭이 알을 품는 것과 같다는 뜻을 취함이었다.
○ 그 서실의 이름을 ‘뇌룡사(雷龍舍)’라 하니, 이는《장자》의 “송장처럼 가만히 있지만 용의 기상이 나타나고, 못처럼 잠잠하지만 우레소리가 난다.”는 말을 취함이었다. 그 곁에 쓰기를, “뇌성이 나면 깜깜하고 용이 보이면 깊다.” 하였다.
○ 산야에 물러나 있어도 능히 세상 일을 잊지 못해 하였으니, 매양 달이 밝으면 홀로 슬피 노래를 부르고 노래가 끝나면 눈물을 흘리나 곁에 사람이 전혀 알지 못하였다.
○ 일찍이 선비들과 함께 말을 하다가 당시 정치의 잘못과 민생의 곤궁한 데 말이 미치면 팔을 걷어붙이고 목이 메어 눈물까지 흘렸다.
○ 한 선비가 글 재주가 있으나 천성이 음험하였다. 공이 우연히 여럿이 모인 데서 보고 물러나와 사람에게 말하기를, “그 위인이 겉모양은 평탄한 것 같으나 속에 남을 해칠 마음을 품었으니, 만약 높은 지위에 올라 뜻대로 하면 어진 선비가 위태로우리라.” 하였다. 그 뒤에 과연 맞으니 사람들이 그 밝음을 탄복하였다. <묘지(墓誌)>
○ 공이 하종악(河宗嶽)의 아내(진주에 사는 과부)가 음행하였다는 일로 이정(李楨) 귀암(龜巖) 과 의견이 같지 않아서 절교까지 하였는데, 노수신(盧守愼)이 듣고 말하기를, “남명이 평생에 벼슬을 좋아하지 않고 세상 밖에 높이 뛰어났는데, 한 부인의 음행이 무슨 관계가 있기에 친구와 절교까지 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하니, 공이 듣고, “소재(蘇齋)가 전하는 말만 듣고 깊이 나의 본뜻을 알지 못하기에 이런 말을 한다.” 하였다. 《월정만필》 ○ 하(河)는 공의 처남이고 이(李)는 하의 매부이니 공의 동서가 된다.
○ 공이 절의를 숭상하여 깊이 숨어 벼슬하지 않고, 글을 짓는 것도 기걸하고 범상하지 아니하니, 이를테면

청컨대 천석종(千石鐘)을 보시오 / 請看千石鐘
크게 때리지 않으면 소리가 없다 / 非大叩無聲
만고의 천왕봉(天王峯 지리산 최상봉)은 / 萬古天王峯
하늘이 울어도 산은 울지 않는다 / 天鳴山不鳴

와 같은 시는, 시로서 호방하고 웅장할 뿐만 아니라, 또한 남명의 자부(自負)가 얕지 않다. 다만 괴상한 것은 한 대를 전하여 제자 정인홍(鄭仁弘)이 많은 살륙을 빚어내어서 백 년의 윤기(倫紀)를 무너뜨린 것이다. 그러나 귀산(龜山)의 육상(陸常)에 대해서와 어떠한가. 《상촌집》


성제원(成悌元) 병인년에 나서 재취하였으나 후사가 없다.

성제원은, 자는 자경(子敬)이며, 호는 동주소선(東洲笑仙)이요, 본관은 창녕(昌寧)이니, 대제학 석용(石瑢)의 후손이다. 유일로 천거되어 보은 현감(報恩縣監)이 되고 기미년에 죽으니 나이 54세였다.
○ 나이 열 대여섯에 성인의 학문에 뜻을 두고 유우(柳藕)가 김굉필(金宏弼)의 성리학을 받았다는 것을 듣고, 《대학》을 가지고 가서 배움을 청하자, 유우가 나이 적음을 의심하여 거절하니, 제원이 열 번이나 가서 청하여 비로소 만나 보고, 드디어 마음을 침잠하여 공부하였다.
○ 젊어서 부친을 잃었는데, 힘써 배웠으며, 드높고 꿋꿋하여 매우 뛰어났다. 글을 지음에 넘쳐 흐르는 물 같아서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고, 의술ㆍ복서ㆍ지리의 말단에 대해서도 섭렵하지 않은 게 없었다. 《전언왕행록》
○ 천성이 호걸스럽고 용기있게 나가고 우뚝하였는데, 주광(酒狂)으로 행세하니, 사람들이 그 포부를 알 수 없었다. 《전언왕행록》
○ 초가집에서 죽을 먹어도 고요히 티끌 속세를 벗어난 기상이 있었다.
○ 공이 일찍이 초정(草亭)에 거하는데 이지함(李之菡)이 찾아와서 함께 신한림(申翰林)의 준미정(遵美亭)에 갔다. 신이 조촐한 술자리를 마련하였는데 마침 노래를 잘 부르는 한 남자가 있어 노래를 부르게 하자 한 곡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공이 갑자기 그치게 하고 그 사람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좌중이 그 까닭을 몰랐는데 공이 말하기를, “소리가 매우 슬프니 상사가 있을 듯하므로 함께 즐길 수 없기 때문이다.” 하더니, 얼마 후에 들으니 그 사람의 어머니가 먼 곳에 있는데 그날 저녁에 부고가 왔다 하였다. 《노서일기(魯西日記)》
○ 공이 일찍이 명산에 놀다가 서원(西原 청주(淸州)의 옛 이름)을 지나는데 목사가 기생 춘절(春節)을 종행하게 하였다. 공이 이와 함께 원근을 두루 놀아 오랜 시일이 지나고 시종 한 자리에 자면서도 범하지 않았다. 공이 산에 노닐 때에 산수가 맑고 빼어나서 마음에 맞는 곳에 이르면 곧 그림으로 모사하고, 또 시를 지어 화폭 끝에 썼는데, 산에서 내려올 때에는 수십 폭이 되었다. 공이 그 기생에게 말하기를, “내가 너를 범하지 않았어도 사람들은 반드시 나와 관계가 있다 하고 너를 가까이 하지 않을 것이다. 너의 생계는 다만 이 종이에 달렸으니 이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보이면 나를 잊지 않는 이가 너를 많이 도와 주리라.” 하였다.왜란 후 경자년에 감찰사 성아무개가 청주 목사와 술자리에서 옛이야기를 하다가, 옆의 사람이 그 기생이 아직도 살았다 하므로 목사가 불렀더니, 나이 이미 팔십여 세였다. 감찰이 바로 공의 형의 손자임을 듣고는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면서, “오늘 동주(東洲)의 손자를 볼 줄 몰랐다.” 하며, 스스로 말하기를, “비록 당시에 관계는 없었으나 어찌 차마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리하여 드디어 종신토록 절개를 지키고 시화폭을 첩으로 만들어 이 고을을 지나는 이름난 이에게 보이면 후히 주지 않는 이가 없어 이로써 생활을 하였더니, 난리 중에 그 화첩을 잃었다 하였다. 《노서일기》
○ 성운이 속리산에 숨어 고요하고 담담하게 살며 거문고와 글로 즐겼다. 조식이 일찍이 찾아왔는데, 공이 마침 자리에 있었다. 조식과 공은 비록 초면이나 친하기가 옛 친구 같았으며, 서경덕(徐敬德)과 이지함(李之菡)이 또한 동행하여 와서 함께 수일을 즐겼다. 조식이 떠나려 하자 공이 미리 전별하는 자리를 중도에 베풀고 홀로 따라가 전송하며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이별하기를, “자네나 내가 다 중년으로 각기 다른 곳에 있으니 다시 보기를 어찌 기약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준경이 이를 듣고 탄식하기를, “당시에 응당 덕성(德星)이 하늘에서 움직였으리라.” 하였다. 얼마 후에 공이 죽었다. 《전언왕행록》 <대곡행장>
○ 공이 일찍이 한 중과 보름 동안 잠 안 자는 내기를 하였는데, 중은 열 사흘째 되어서 쓰러져서 정신없이 며칠을 자고, 공은 열 다섯 밤을 그대로 새우고 난 뒤에도 잠자고 먹는 것이 평상시와 같았다. 《전언왕행록》


조욱(趙昱)

조욱은, 자는 경양(景陽)이며, 호는 용문(龍門), 또는 우암(愚庵)이다. 19세에 생원ㆍ진사 양장에 합격하고 임자년에 유일로 천거받아 벼슬이 장수 현감(長水縣監)에 이르렀다.
○ 어려서 뛰어난 천품을 가지고 글을 지으면 번번이 사람을 놀래었다. 나이 겨우 십여 세에 한강에서 뱃놀이를 하는데 문사가 많이 모여 그에게 시를 짓게 하니, 즉시,

청산은 면면히 섰고 / 靑山面面立
한수는 유유히 흐르네 / 漢水悠悠下
높이 솟고 넘쳐 흐르는 산수 사이에 / 峨洋山水間
그 누가 음을 아는 자인가 / 誰是知音者

하니, 온 좌중이 경탄하였다.
○ 조광조가 일찍이 말하기를, “여러 제자 중에 도를 구하는데 독실하기는 조욱만한 이가 없다.” 하더니,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시를 지어 슬퍼하기를,

비와 눈이 섞여 분분하니 어둔 안개가 엉기도다 / 雨雪交紛兮陰霧凝
평평한 길이 험해지니 산이 높이 솟았구나 / 平路險隘兮山崚嶒
하토(下土)는 아득하여 해를 볼 수 없는데 / 下土茫茫兮不見日
봉황새 높이 날아 어디에 의지할까 / 鳳鳥飄飄兮焉可憑
쑥덤불 가시숲인데 만리나 날고 싶다 / 蓬叢棘林兮萬里思飛騰

하니, 이로부터 은거할 뜻이 있었다.
○ 기묘사화에 조광조의 문인들이 옥에 갇혔는데, 공은 나이가 가장 적음으로 해서 화를 면하고, 형 성(晟) 호는 양심당(養心堂) 과 함께 삭녕(朔寧)에 집을 짓고 의리를 강마하다가 뒤에 용문산(龍門山)에 와서 사니, 그 동리를 돈촌(豚村)이라 하였다.
○ 공이 일찍이 해주 문헌서원(文憲書院)을 지나는데 여러 선비가 심원록(尋院錄)에 제명(題名)하기를 청하니, 다만 한 절구를 쓰기를,

나그네 길에 서성거리고 오래 돌아가지 못하니 / 客路棲棲久未還
하늘이 나를 시켜 해서(海西 황해도의 별칭)의 산을 다 보게 하는구나 / 天敎看盡海西山
성명을 서원에 남길 필요가 없으니 / 不須姓字留書院
미쳤다는 이름이 이미 세간에 가득하네 / 嬴得狂名滿世間

하였더니, 여러 선비가 누구인가 몰라 의심하다가 뒤에 비로소 듣고 공임을 알았다.


이항(李恒)

이항은, 자는 항지(恒之)이며, 호는 일재(一齋)요, 본관은 성주(星州)이다. 기미년에 출생하다. 병인년에 사축(司畜)을 제수하여 역말을 타고 입대하였으며, 임천(林川) 군수가 되었다가 얼마 후에 사직하고 가니, 선조께서 교서를 내려 장령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벼슬이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그쳤으며 《석담일기》에는, “계유년에 3품직을 제수하니 순서를 뛰어서 발탁되었다.” 하였다. 태인(泰仁)에서 죽으니 나이 78세였다.
○ 공이 서울에서 자라다가 태인에 물러가서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이 많은데 만약 여러 글을 널리 보려면 정력이 전일하지 못할까 두려워서 《대학》만 가지고 읽으며 생각하여 일평생의 사업으로 삼았다.
○ 공은 자질이 강하며 굳세고, 기상이 웅위하며 호방하여 범상하지 않고, 용력이 뛰어나서 어려서부터 장난할 때에 동리 아이들이 겁내어 굴복하였다. 자라서 놀기를 좋아하며 협기가 있어 만 리를 달리려는 뜻이 있으며, 씨름 활쏘기 말타기가 일시의 으뜸이어서 억센 적과 주인을 배반한 종이 있으면 반드시 가서 제압하였다. 일찍이 무과 준비를 하니, 남치욱(南致勖)ㆍ치근(致勤)ㆍ민응서(閔應瑞) 같은 이도 선생의 지휘를 따랐으며, 사람들이 공을 비록 미치광이로 지목하였지만 또한 그 비상한 사람임을 아는 이가 있었다.나이 이십 팔구 세에 판서인 백부가 불러 꾸짖으니, 깨달아 반성하여 곧 그 놀던 친구를 사절해 보냈다. 마침내 《대학》을 읽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박송당(朴松堂) 영(英)을 좇아 오래 스승으로 모셨으며, 외기도 하고 생각하기도 하여 일찍이 말 위에서 책을 들고 생각에 잠기다가 갑자기 관원 행차의 벽제(辟除)를 범하여 종은 붙들리고 말만 가는데도 끝내 공은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독실하고 전심함이 이와 같은 게 많았다. 송인수(宋麟壽)가 전라 감사로 갔을 때, 제일 먼저 공을 찾아 도를 강론하고 말하기를, “실천하는 공부는 장횡거(張橫渠 송 나라 도학자로서 예법의 실천으로 이름이 있었다.)보다 못할 게 없다.” 하였다.
○ 공이 백의로 임천 군수가 되니, 조식이 희롱하여 말하기를, “이(李) 조대(措大 변변치 못한 선비)가 하루아침에 군수가 되었으니, 어찌 화의 빌미가 되지 않을지 보장하겠는가.” 하였다. 《석담일기》


성운(成運)

성운은, 자는 건숙(健叔)이며, 호는 대곡(大谷)이요, 본관은 창녕이다. 부원군 여완(汝完)의 후손이다. 정사년에 출생하다. 벼슬이 집의ㆍ사섬시 정(司贍寺正)에 그치고, 기묘년에 죽으니 나이 85세였다.
○ 자질이 단정하고 지기가 호탕하였으며, 그 학문은 오로지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기르는 데 힘썼으므로 그 말이 법이 있고 그 행동이 떳떳함이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세상에 수용되지 못하였다.
○ 신묘년에 생원ㆍ진사에 합격하였는데 기묘사화가 있은 뒤이므로 유학(儒學)이 땅에 떨어졌다. 공이 시를 지어 슬퍼하고 드디어 속리산으로 가 일생을 마칠 계획을 세웠다. 보은(報恩)에서 장가들고 거기에 살았다. 보은의 종곡(鍾谷)에 우거하여 산수를 즐기며 문을 닫고 도를 구하여 조예가 깊었다. 임인년에 참봉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 공은 나면서 아름다운 자질이 있었고 일찍이 세속의 그물을 벗어났다. 그 형 우(禹)가 을사사화에 비명으로 죽으니, 이로부터 더욱 세상에 뜻이 없고 속리산에 은거하였다. 시가 그 인품과 같아서 한가롭고 아담하여 서호처사(西胡處士)의 운치가 있으니, 그 시의 아름다운 구절은, 이를테면

봄옷은 몸에 맞추어 두 소매가 짧고 / 春服稱身雙袖短
옛 거문고가 손에 편하니 일곱 줄이 길구나 / 古琴稱手七絃長
십 년 동안 산중의 약을 다 맛보았으니 / 十年嘗盡山中藥
손이 오면 때로 입에 향기를 맡네 / 客到時聞口齒香

와, 조식을 송별하는 시에,

높은 기러기 홀로 바다 남쪽으로 날아가니 / 冥鴻獨向海南飛
정히 가을 바람에 나뭇잎 떨어지는 때로다 / 正値秋風木落時
땅에 가득한 낟알을 닭과 오리가 쪼는데 / 滿地稻梁鷄鶩啄
푸른 구름 하늘 가에 절로 기심(機心)을 잊었네 / 碧雲天末自忘機

와 같은 것이다. 《상촌집(象村集)》
○ 조식이 말하기를, “공이 몸 닦기를 옥과 같이 하여 사람이 무어라 말할 수 없다.” 하였다.
○ 공이 아들이 없으나 스스로 종손이 아니므로 양자를 세우지 않고, 처남 김천부(金天富)의 아들 가기(可幾)를 기르고 가르쳤으며, 또 중형이 을사년에 죽고 딸이 하나 있는데 의지할 데가 없으므로 가기의 아내를 삼고 후사를 부탁하니, 가기가 유언을 받들어 기년복을 입고 그 아들의 대까지 제사 지냈다. <대곡행장(大谷行狀)>
○ 종곡(鍾谷)의 토지와 노비는 본래 자기 처가인 김씨 집에서 온 것이므로 처조카에게 도로 주어 형의 딸과 함께 살게 하였다.
○ 집에서 몇 리 떨어진 곳에 경치가 볼 만한 계곡이 있으므로 그 사이에 조그마한 집을 짓고 한가한 때마다 소를 타고 가서 고요히 홀로 앉아 거문고 두어 곡을 타면서 스스로 즐길 뿐이요, 사람이 들으려 하면 타지 않았다. 《석담일기》
○ 본래 아름다운 산수를 좋아하여 경치 보는 데에 취미를 붙여 시에 나타내고, 읊은 다음에는 술을 두서너 순배를 마시어 얼근하면 그치고, 즐겨 근심을 잊어 늙는 줄을 몰랐다. <묘지>
○ 선조 무진년 6월에 처사 성운에게 쌀을 하사하고 또 매(鷹)를 주었으니, 임금이 공의 종시 벼슬을 사양하는 그 풍절(風節)을 높이 여겨 특별히 하사한 것이다. 《조야첨재》
○ 이황이 매양, “건숙의 맑게 숨은 풍치는 사람으로 하여금 존경하는 마음을 일으킨다.”고 칭도하였다. 공이 조식과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는데 조식은 드높고 뛰어났으며, 공은 순박하고 진실하며 화평함으로 조절하였다. 조식이 매번, “건숙은 순수한 금과 아름다운 옥 같아서 내가 미치지 못한다.” 하였다. <행장>


한수(韓脩)

한수는, 자는 영숙(永叔)이며, 호는 석봉(石峯)이요,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유일로 천거되어 벼슬이 지평(持平)에 그쳤다. 선조 계유년에 3품직을 제수하고 갑술년에 지평으로 입시하여 임금이 학문의 요긴한 점을 묻는데 능히 명쾌하게 대답하지 못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많이 웃었다. 이이(李珥)가 임금께 아뢰기를, “착한 사람도 여러 가지가 있으니 학문과 행실을 겸비한 사람이 있고 행실은 깨끗하면서 학문이 부족한 사람이 있으니, 한수는 곧 행실은 깨끗하면서 학문이 부족한 자입니다. 한 마디 말이 뜻에 맞지 않는다고 착한 선비를 가벼이 보아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석담일기》


임훈(林薰)

임훈은, 자는 중성(仲成)이며, 호는 자이당(自怡堂)이요, 뒤에 고사옹(枯査翁)이라 고치고 사람들은 갈천 선생(葛川先生)이라 부른다. 경신년에 출생하다. 경자년에 생원에 입격하고, 병인년에 언양 현감을 제수하고 벼슬이 판결사에 이르렀으며, 갑신년에 죽으니 나이 85세였다.
○ 계축년에 홍문관의 천거로 사직서 참봉(社稷署參奉)을 제수하니 도신(道臣 감사(監司))이 공 형제의 효행을 아뢰어 갑자년에 정문을 명하였다. 병인년에 유일로 천거되어 역마를 타고 올라와 궁궐에 나아갔다. 임금이 불러 보고 정치하는 도리를 물으니, 공이 아뢰기를, “인군의 정치와 교화는 수신이 제일이니, 오로지 수신의 도에 힘을 써서 마지 않으면 이른바 나라를 다스리는 도와 학문을 하는 방도는 다른 데서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였다.선조 초년에 비안 현감(比安縣監)에 제수되었는데 하직하는 날에 임금의 편전으로 불러 보고 하문하기를, “네가 학행이 있다함을 들었으니 할 말이 있으면 말하라.” 하니, 대답하기를, “선왕조에 일찍이 한번 불리어 치도를 물으시기에 신이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으소서 하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물음에도 감히 다른 말씀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신이 보건대 예로부터 제왕들이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는 것을 말하지 않은 이가 없으나 뚜렷한 효과는 적으니, 그 병통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그 하나는 으레 유자의 말을 보통으로 여겨 더 살피지 않음이요, 그 하나는 스스로 노력하여 쉬지 않는 공부가 없어 마침내 해이하여지기 때문이오니,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유자의 말을 상투적인 말로 알지 마시고 스스로 노력하여 쉬지 않는 공부를 더욱 하소서.” 하였다.
○ 광주 목사(光州牧使)가 되었을 때에 선조가, “수령으로 맑은 덕이 있는 이를 가리라.” 명하니, 감사가 공을 천거하고, “공이 청렴결백하여 백성들이 그를 지목하기를 ‘얼음 병[氷壺]’이라 합니다.”는 말을 하였다.


남언경(南彦經)

남언경은, 자는 시보(時甫)이며, 호는 동강(東岡)이며,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목사 치욱(致勖)의 아들이요, 무양공(武襄公) 치근(致勤)의 조카이다. 유일로 불리어 벼슬이 부윤(府尹)에 이르렀다.
○ 젊어서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을 좇아 수업하고, 명종 병인년에 이조에서 경학에 밝고 행실이 닦인 사람으로 공과 한수(韓脩)를 천거하니, 임금이 명하여 포의를 입은 그대로 편전에 소대시켜 임금의 뜻에 맞아 참봉을 제수하고 6품에 올렸다. 얼마 뒤 지평 현감(砥平縣監)에 보임되었으나 병으로 돌아갔으며, 기축년에 전주 부윤으로 있다가 물러나 양근(楊根) 영천동(靈川洞)에 돌아와서 죽으니, 나이 67세였다.


김범(金範)

김범은, 자는 덕용(德容)이며, 호는 후계(后溪)요, 본관은 상산(商山)이다. 부제학 상직(尙直)의 5대 손이다. 임신년에 나서 중종 경자년에 진사의 장원에 올랐고, 유일로 천거되어 특별히 옥과 현감(玉果縣監)을 제수받아 관에서 죽었다.
○ 병인년에 이조에 명하여 6조를 구비한 선비를 가리게 하니, 그 명목은 경학에 밝고 행실이 닦인 자라는 것이다. 추천된 이가 여섯 사람인데 이항ㆍ성운ㆍ임훈ㆍ김범ㆍ한수ㆍ남언경이다. 김범이 조식과 함께 동시에 들어가 알현하였는데 임금이 정치하는 도리를 묻자, 대답하기를, “마음을 기르고 덕을 굳게 잡으며 학문을 강론하고 이치를 밝힘이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이 됩니다.” 하였다. 《대동운옥(大東韻玉)》


정렴(鄭) 붙임 정작(鄭碏)

정렴은, 자는 사결(士潔)이며, 호는 북창(北窓)이요, 본관은 온양이다. 순붕(順朋)의 아들로서, 병인년에 나서 정유년에 진사에 오르고 벼슬이 포천 현감(抱川縣監)에 그쳤으며, 기유년에 죽었다. 나이 44세였다.
○ 공은 맑고 욕심이 적어서 한 점의 찌꺼기도 없으며, 총명이 남보다 뛰어나서 한두 번 글을 읽으면 모두 외었으며, 자라서는 모든 데 통하지 않음이 없어 천문ㆍ지리ㆍ음악ㆍ의약ㆍ복서ㆍ산수ㆍ한어(漢語)를 배우지 않고도 잘하였다. 일찍이 그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 가서 중국인과 통역 없이 말을 하니 모두 놀라며 말하기를, “천하의 기이한 재주이다.” 하였다. 또한 새와 짐승의 소리를 알아들어서 산속에 살 때에 능히 산 아래 사람이 하는 일을 알고 말하기를, “그 집에서 바야흐로 무슨 일을 한다.” 하여서, 뒤에 알아보니 과연 틀림이 없으니, 이는 그 학문이 선가(禪家) 진단(陳摶)의 유(類)에서 나온 듯하다. 《국조기사》
○ 일찍이 중국에 가니, 마침 유구국(琉球國)의 사신이 왔는데 이 또한 이인(異人)이었다. 그가 본국에 있을 때에 역수(易數)로 미루어서 중국에 가면 진인(眞人)을 만날 것을 알고, 오는 길에 물어 찾으며 북경까지 와서 여러 나라 사신이 거처하는 곳을 두루 찾다가 공을 보고 깜짝 놀라며 자신도 모르게 절을 하고, 그 행장 속에서 작은 책자를 꺼내서,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날에 중국에 들어가 진인을 만나리라.’ 고 쓴 것을 공에게 보이면서 말하기를, “진인이라 함은 공이 아니고 누구겠는가.” 하며, 주역을 가르쳐 달라 청하니, 공이 곧 유구어로 가르쳤다.이에 여러 나라 사신들이 듣고 다투어 와서 공을 만났는데, 공이 각각 그 나라 말로 메아리처럼 대답하니 모두 놀라서, “천인(天人)이시다.” 하였다. 어떤 이가 공에게 묻기를, “세상에 새와 짐승의 소리를 알아듣는 이가 있는데, 다른 나라의 말소리는 곧 새와 짐승의 유이니, 그 말을 알아듣는 것은 혹 될 수 있겠으나 그 말을 함은 이상하지 않은가.” 하니, 공이 말하기를, “나는 듣고 아는 것이 아니라, 안 지가 이미 오래이다.” 하였다.공은 삼교(三敎 유교ㆍ불교ㆍ선교)를 관통하였으나 근본은 성학(聖學)으로 돌아와서 그 가르침은 오로지 효제에 힘을 썼으며, 《소학》과《근사록》으로 초학의 길잡이를 삼았다. 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성인의 학문은 인륜을 중히 여기므로 오묘한 곳을 말하지 않았고, 선교나 불교는 오로지 마음을 거두고 성을 깨닫는 것으로 근본을 삼으므로 위로 천리를 통하는 곳은 많으나, 아래로 인사를 배우는 일은 전혀 없으니, 이것이 세 교가 다른 바이다. 《북창집(北窓集)》
○ 32세에 진사에 합격하고 과거 공부에 힘쓰지 않았으며, 추천으로 장악원 주부 겸 의(醫)ㆍ상(象 천문(天文))ㆍ주(籌 산수(算數))의 삼학(三學) 교수를 제수받았고, 포천 현감을 지냈다. 을사사화에 아버지가 고변할 때에 극력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크게 미움을 받았고, 또 그 아우가 해치려 하므로 이를 피하여 과천 청계산(淸溪山), 양주 괘라리(掛蘿里)에 많이 숨어 있었다. 항상 하인을 시켜 약을 지어 이른 아침에 다려 먹은 뒤에야 말을 하였고, 기유년에 죽으니 나이 44세였다. 《국조기사》
○ 공은 호걸스럽고 기개와 절조가 있었다.
○ 공이 천성이 고기를 즐기지 않고 술을 잘 마시어 두서너 말도 취하지 않았으며, 또 휘파람을 잘 불어 일찍이 금강산 절정에서 휘파람 소리를 내었더니, 소리가 바위 골짜기를 울리므로 중이 놀라 저[笛] 소리로 알았다가 뒤에 공의 휘파람인 것을 알았다. 《북창집》
○ 깊이 숨어 인적을 끊고 연단화후(鍊丹火候)의 법을 닦더니, 하루는 자기의 만가(挽歌)를 짓기를,

일생에 만 권 글을 다 읽고 / 一生讀罷萬卷書
하루에 천 잔 술을 다 마시며 / 一日飮盡千鍾酒
높이 복희(伏羲) 이상의 일을 말하고 / 高談伏羲以上事
세속의 이야기는 애당초 입에 내지도 않는다 / 俗說從來不掛口
안회(顔回)는 30세에 죽어도 아성(亞聖)이라 불렸는데 / 顔回三十稱亞聖
선생의 수명은 어찌 그리 길었는고 / 先生之壽何其久

하고, 마침내 앉아서 죽었다. 세상에 전하기를, “나면서 능히 글을 할 줄 알았고, 또 대낮에 그림자가 없었다고 한다.” 하였다. 《북창집》
○ 공의 아우 작(碏)은, 자는 사경(士敬)이며, 호는 고옥(古玉)이요, 공보다 27년이 아래다. 정작도 이인(異人)으로 형을 좇아 수련하는 학문을 배워서 36년을 독신으로 지내면서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았고, 술을 즐기며 시를 잘 지었으며, 또 의학에 깊어서 신통한 효험이 많았다. 나이 70세에 또한 미병(微病)으로 앉아서 죽었다. 《북창집》


[주D-001]삼고초려(三顧草廬) : 중국 삼국 시대에 촉(蜀) 나라의 유현덕(劉玄德)이, 제갈공명(諸葛孔明)이 은거하고 있는 초가집을 세 번이나 찾아가서 겨우 만나 군사(軍師)로 삼았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주D-002]솟발[鼎足] 모양 : 제갈공명이 유현덕의 촉 나라를 도와 중국을 조조(曹操)의 위(魏) 나라와 손권(孫權)의 오(吳) 나라와 함께 세 나라가 솟발처럼 대치하게 하였다.
[주D-003]성성자(惺惺子) : 성성은 혼미하지 않고 깨우쳐 있다는 말인데, 여기서는 방울소리가 사람의 마음을 깨우쳐 준다는 것이다.
[주D-004]귀산(龜山) : 양귀산(楊龜山)은 정자(程子)의 문인으로 도학자인데, 그의 제자 육상(陸常)이 후일에 악한 일을 하였다.
[주D-005]그 누가 …… 자인가 : 옛날에 백아(伯牙)가 고산류수곡(高山流水曲)을 타니 그의 친구 종자기(鍾子期)가 듣고, “산은 높고 물은 넓게 출렁이며 흐르는구나.[山峨峨 水洋洋]” 하였으니, 참으로 지음(知音)하는 자였다.
[주D-006]서호처사(西胡處士) : 송(宋) 나라 임포(林逋)의 호로, 그는 서호(西湖)에서 처사로 살면서 매화와 학으로 벗을 삼았다.
[주D-007]진단(陳摶) : 중국 5대말의 도사(道士) 진도남(陳圖南)인데, 신선의 술법과 역리에 정통하였다.
[주D-008]아래로 …… 일 : 《논어》에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이란 말이 있는데, 이는 아래로 인사를 배워서 위로 천리를 통하다는 말이다.
[주D-009]연단화후(鍊丹火候)의 법 : 신선가(神仙家)의 수양법에 외단(外丹)ㆍ내단(內丹)의 법이 있는데, 외단은 금석물(金石物)로 장생불사하는 약을 만드는 것이다. 약은 불을 때서 만들므로 불 때는 시간을 정하는 것을 화후(火候)라 하고, 내단은 호흡도인(呼吸導引)의 법으로 체내의 단(丹)을 결성시키는 방법인데, 여기에도 그 시간이나 순서를 화후라 한다.


釣隱先生集卷之二
 祭文
闍窟山祈雨文 又代宜守作 b_023_542b


曰惟名山。鎭玆百里。扶輿磅礴。昭著靈異。興雲作雨。潤物澤民。亘古亘今。罔愆霈恩。間有慳秘。或由人事。023_542c雨暘不時。職司攸致。方玆農月。溝澮乾涸。種不入土。田疇龜坼。十日不雨。尙云無禾。彌月密雲。蒼生奈何。守土之官。罪實在躬。方內山靈。亦欠神功。吁此權柄。將焉以施。伏惟神靈。降監民斯。上訴玄宰。俯垂甘霔。沛然三尺。片時有裕。蘇枯遂生。澤及四境。豈但吾民。邦國之慶。仰之彌高。盡禮盡誠。神聽不忒。莫間幽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