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초의 의병 곽재우 /용재집 기록된 자굴산

자굴산의 봄빛은 멀리 허공에 뜰 듯해라 / 闍窟春光遠欲浮

아베베1 2009. 12. 28. 18:31

용재집(容齋集) 제2권
 오언율(五言律)
의령(宜寧)으로 근친(覲親) 가는 정운경(鄭雲卿)을 보내며 3수(三首)


일찍이 대궐 섬돌을 밟았고 / 早展花磚步
지금은 근친 길을 떠나누나 / 今兼綵服行
옥당에서 막 하직하고 물러나 / 玉堂初下直
역마 타고 다시 장도에 오르네 / 馹騎復長程
경연에선 주상의 은총 입었고 / 經幄勤三接
유림에선 대명을 독차지하였지 / 儒林擅大名
빨리 조정에 돌아와 입대해도 / 遄歸催入對
어버이 마음 오히려 위로되리 / 猶得慰親情

흰 구름 서린 사굴산은 멀고 / 白雲闍崛遠
가을 물 맑은 낙동강 잔잔해라 / 秋水洛江平
돌아가는 노 재촉이 성화인데 / 歸棹如星火
잔을 들매 형제가 한자리로세 / 稱觴共弟兄
조정에선 시종을 추중하였고 / 朝廷推侍從
향리에선 은영인 줄 알았지 / 鄕曲識恩榮
작은 시로 증별 노래 대신하니 / 小什當歌詠
오히려 후생을 권면할 만하여라 / 猶堪勸後生

정진 나루 물 질펀히 흐르는데 / 鼎津流浩渺
나의 집은 그곳 강가에 있었지 / 吾舍在其涯
예전에 심은 대는 천 개이련만 / 舊竹應千箇
새로 옮긴 매화는 몇 가지런고 / 新梅定幾枝
옛날에 놀던 시절 꿈만 같은데 / 昔遊渾似夢
가지 못하고 그저 시만 읊노라 / 未去但吟詩
부로들이 만약 내 소식 묻거든 / 父老如相問
머리털 이미 세었다 말하지 마소 / 休言鬢已絲

 오언율(五言律)  용재집(容齋集) 제2권
정운경(鄭雲卿)의 시에 차운하다. 5수(五首)


이름은 마치 사굴산처럼 무겁고 / 名垂闍崛重
마음은 흡사 정진 물인 양 맑아라 / 心似鼎津淸
이별한 후 소식이 끊기었더니 / 別去音塵隔
보내온 서신 흉금을 다 쏟았구나 / 書來底裏傾
하늘과 땅이 우리를 용납하니 / 乾坤容我輩
시와 술은 전생부터 맺은 인연 / 詩酒自前生
아름다운 경치 보면 그대 생각노니 / 美景思携手
아련히 내 낀 꽃 도성에 가득해라 / 煙花滿洛城

새로 보낸 시에서 깊은 정 알고 / 新詩知繾綣
종횡으로 쓰인 가는 글자 보노라 / 細字看縱橫
지금은 머리에 온통 백발이니 / 此日頭渾白
어느 때나 반가운 눈길로 만날꼬 / 何時眼共明
강호에 물고기는 제 길 찾았것만 / 江湖魚得計
종고는 새의 마음에 맞지 않아라 / 鍾鼓鳥非情

우리 양쪽의 하염없는 상념은 / 兩地無窮思
붓끝으론 결코 그리지 못하겠네 / 毫端寫不成

헤어진 지 오래매 오늘 슬퍼하고 / 乖闊悲今日
함께 어울려 놀던 옛날 생각노라 / 遊從記昔年
악기와 노래로 만류하던 그해 / 笙歌留舊歲
가인의 붉은 분 서천에 빛났지 / 紅粉耀西天
당시의 행락이 일장춘몽 같나니 / 行樂如春夢
벼슬길은 바로 이별의 자리로세 / 名途是別筵
서로 그리워도 만나지 못하는데 / 相望不相見
쇠잔한 머리털 어느새 허옇구나 / 衰鬢坐蕭然
정주(定州)에 있을 때 제석(除夕)에 함께 놀던 것을 추억하며 이렇게 언급한 것이다.

재상 자리는 내 분수에 안 맞아 / 鼎台非我分
산골짜기에 있는 내 집을 생각노라 / 丘壑憶吾家
오늘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았나니 / 今日知魚樂
새로 보낸 시편 말편자와 맞먹누나 / 新篇當馬撾
첩첩 산을 마주하고 높이 읊조리며 / 高吟對疊巚
날이 저물 때까지 꼿꼿이 앉았노라 / 危坐到棲鴉
어찌하면 우리 서로 반겨 만나 / 安得逢迎地
할 말 잊은 채 함께 차를 달일꼬 / 忘言共點茶
누옥(陋屋)이 또한 정수(鼎水) 가에 있기 때문에 언급한 것이다.

그대가 고향으로 떠난 뒤로 / 自君之出矣
누구와 더불어 다시 글을 논하리 / 誰與更論文
돌아오는 길 도리어 천리인데 / 歸路還千里
올봄은 또 반이 이미 지났구나 / 今春又半分
옛 소리 참으로 화답할 이 적고 / 古聲眞寡和
천리마는 무리가 빈 지 오래라네 / 絶足久空群
한 글자를 가벼이 놓지 말지니 / 一字休輕下
그 가치 황금 몇 근과 맞먹는다네 / 黃金直幾斤


[주D-001]강호에 …… 않아라 : 여기서 물고기는 고향인 의령(宜寧)에 가 있는 정운경을, 새는 조정에 몸 담고 있는 작자 자신을 비유하고 있다. 《장자》 지락(至樂)에, “해조(海鳥)가 노(魯)나라 교외에 내려앉자 노후(魯侯)가 그 새를 사당에 모셔 놓고 구소(九韶)의 음악을 연주하고 태뢰(太牢)의 성찬(盛饌)을 올리니, 새가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근심하고 슬퍼하며 고기 한 점 술 한 잔 먹지 못한 채 사흘 만에 죽고 말았다. 이는 자기를 기르는 방식으로 새를 기른 것이지 새를 기르는 방식으로 새를 기른 것이 아니다.” 하였다.
[주D-002]물고기의 즐거움 : 장자(莊子)와 혜자(惠子)가 강물 위 다리를 거닐다가 장자가 “피라미가 조용히 노니니 이는 물고기의 즐거움이로다.” 하니, 혜자가 “그대는 물고기가 아닌데 어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는가?” 하였다. 이에 장자가 “그대는 내가 아닌데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르는 줄 어찌 아는가?” 하니, 혜자가 “나는 그대가 아니므로 진실로 그대를 알지 못하니, 그대는 물고기가 아니므로 그대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르는 것은 분명하다.” 하였다. 《莊子 秋水》 여기서는 정운경의 자득한 즐거움을 뜻한다.
[주D-003]새로 …… 맞먹누나 : 정운경이 새로 보낸 시편을 받아 보니 그가 직접 말편자 소리를 울리며 찾아온 것과 같다는 뜻이다.


 칠언율(七言律)   용재집(容齋集) 제3권
전주 부윤(全州府尹)으로 부임하는 소언겸(蘇彦謙)을 보내며

훌륭한 아우께서 또 수령을 맡으니 / 小難今日又專城
향리 사람들 모두 근친의 영광 알리라 / 鄕里爭知彩服榮
앉아서 온 고을을 효우로 감화시키고 / 坐使一方歸孝友
장차 최상의 실적 올려 공경이 될 테지 / 行看上最入公卿
높은 벼슬 분수에 넘쳐 나는 부끄럽고 / 靑雲愧我叨非分
우뚝한 그대 큰 명성 떨치리 기약노라 / 獨步期君擅大名
무단히 눈물 흘린다 괴이쩍어 마시라 / 莫怪無端雙涕淚
부모 없는 이 몸 형제의 정에 슬프다오 / 蓼莪身事鶺鴒情
병든 아우가 죄로 수감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포주성의 흥겹던 놀이 아직 기억나건만 / 勝遊猶記抱州城
지금은 생각노니 영욕이 서로 다르구려 / 今日相思異悴榮
알지 못하겠다 완산에 국사가 필요한지 / 未信完山須國士
사굴산에 낙향한 장경을 다시 말하노라 / 更論闍崛滯長卿
선비의 득실은 참으로 운수소관인 것 / 儒冠得失眞關數
이 늙은이 부침하며 명성만 훔칠 뿐일세 / 老子浮沈只竊名
그대의 머리털이 하얗게 센 뒤엔 / 待得吾君頭白後
지금의 내 마음을 틀림없이 아시리라 / 定應知我此時情
이때 운경(雲卿)이 벼슬을 잃고 고향 의령(宜寧)으로 돌아가 있었는데, 그가 소갈병을 앓는다는 말을 들었기에 이렇게 언급하였다.

[주D-001]훌륭한 아우 : 소세양(蘇世讓)의 자가 언겸(彦謙)으로, 역시 용재와 벗인 소세량(蘇世良)의 아우이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주D-002]알지 …… 말하노라 : 지방관인 전주 부윤 자리가 국사(國士)인 소언겸이 앉기엔 부족하며, 게다가 운경(雲卿) 정사룡(鄭士龍)처럼 훌륭한 선비가 고향인 의령의 사굴산 아래에서 낙척(落拓)한 신세로 살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는 뜻이다. 장경(長卿)은 한(漢)나라 때 부(賦)에 능하였던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자(字)로, 그가 늘 소갈병(消渴病)을 앓았다 한다.
용재집(容齋集) 제3권
 오언시(五言詩)
팔월 사일에 단계(丹溪)를 지나며

단계는 나를 전송해 주고 / 丹溪送我去
사굴산은 나를 영접해 주누나 / 闍崛迎我來
전송과 영접 모두 무심하니 / 送迎兩無心
나의 행차 바야흐로 유유해라 / 我行方悠哉
가을 국화 한창 빛깔이 고우니 / 秋花好容色
다른 꽃들 다 볼 겨를 없구나 / 細瑣莫能該
계절도 이미 저물어가는 제 / 時節亦已晩
한 번 향기 맡고 세 번 서성인다 / 一嗅三徘徊
평생 산림에 은거하리 맹세했건만 / 平生丘壑盟
앉아서 백발의 재촉만 받누나 / 坐受華髮催
사람 일은 쉬이 끝나지 않으니 / 人事未易了
탄식하매 오장이 찢어지는 듯 / 歎息腸內摧
짧은 해는 이제 곧 기울 참이라 / 短日迫將夕
보금자리 찾는 새 숲으로 나누나 / 歸鳥投林隈
말을 채찍질해 오솔길로 접어드니 / 策馬就微徑
서풍이 나를 위해 슬퍼하는 양 / 西風爲我哀
용재집(容齋集) 제7권
 남유록(南遊錄) 경오년
취원루(聚遠樓) 의령(宜寧)에 있다.

주인의 정사 처리는 참으로 능숙해 / 主人政事少全牛
여유로운 솜씨 새로 백척 누각 지었군 / 遊刃新修百尺樓
사해 문장이 여기 한 번 돌아보았으니 -누각에 강혼(姜渾)의 기(記)가 있다. / 四海文章曾一顧
천년의 명승지 틀림없이 길이 전해지리 / 千年名勝定長流
정진의 가을 물은 환히 맑아 볼만하고 / 鼎津秋水明堪翫
사굴산의 봄빛은 멀리 허공에 뜰 듯해라 / 闍窟春光遠欲浮
훗날 이 누각 오를 땐 내가 늙었을 터 / 他日登臨吾便老
옛 숲과 산은 그때까지 은근히 잘 있겠지 / 慇懃好在舊林丘
 용재집(容齋集) 제7권
 남유록(南遊錄) 경오년
강 주부(姜主簿)를 곡하다. 이름은 효정(孝貞)인데 귀가 먹어 집 밖을 나가지 않았다. ○ 2수(二首)

아침에 진토의 일 사양하고 / 朝辭塵土役
저녁에 죽림의 은자 되었도다 / 晩作竹林儂
세상일 어찌 귀를 기울이랴 / 世事寧關耳
천유라 종적을 펼치지 않았지 / 天遊不布蹤
그 이름 익히 들은 지 오랜데 / 久聞名已熟
갑자기 집을 나가니 눈물 흐르오 / 遽出涕無從
사굴산 서남쪽 기슭에 / 闍窟西南麓
처량한 무덤이 서 있구나 / 凄涼馬鬣封

보계(譜系)는 공목의 후손이요 / 系惟恭穆後
집은 정암 물가에 있도다 / 宅是鼎巖濱
그 숙덕은 고을 사람 공경했고 / 宿德鄕閭敬
맑은 흉금으로 어조와 친했었지 / 淸襟魚鳥親
풍류가 이날 비어서 없고 / 風流虛此日
기구에 이 사람을 잃었도다 / 耆舊失斯人

뉘라서 다시 긴 대를 보랴 / 誰更看脩竹
술 거르던 두건에 티끌이 이누나 / 塵生漉酒巾

[주D-001]천유(天遊) : 아무런 걸림이 없이 자연스러운 상태로 노니는 것을 뜻하는 말로, 《장자》 외물(外物) 편에 “사람의 몸 안에는 텅 빈 공간이 있어 마음이 그 속에서 천리(天理)에 따라 자연스럽게 노닌다.” 하였다.
[주D-002]갑자기 …… 흐르오 : 제목의 원주(原註)에 보이듯이, 고인이 평소 귀가 먹어 집 밖을 나가지 않다가 이제 운명하여 시신(屍身)으로 널에 실려 밖을 나가니 슬프다는 것이다.
[주D-003]풍류(風流)가 …… 잃었도다 : 풍류스럽던 고인의 모습을 이제 볼 수 없게 되었고, 고을의 숙덕(宿德)이 있는 부로(父老) 한 사람을 잃었다는 것이다.
[주D-004]긴 대를 보랴 : 소식(蘇軾)의 〈정혜원해당(定惠院海棠)〉에 자신의 한가한 모습을 읊으면서 “여염집이건 절이건 묻지 않고, 지팡이 짚고 문을 두드려 긴 대를 보노라.[不問人家與僧舍 拄杖敲門看脩竹]” 하였다. 《古文眞寶 前集》
[주D-005]술 …… 이누나 : 도연명(陶淵明)이 두건을 벗어서 탁주를 걸렀다는 고사를 차용한 것으로, 이제 술 거를 일이 없어 두건에 먼지가 일겠다는 뜻이다.
용재집(容齋集) 제9권
 산문(散文)
의령현제명기(宜寧縣題名記) 현감(縣監) 김의종(金意從)을 대신해서 짓다.

현은 옛날 신라의 장함(獐含) 땅인데 언제 처음 생겼는지는 알 수가 없다. 경덕왕(景德王)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고, 그 후 이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그사이 변혁(變革)을 겪고 부속(附屬)이 바뀐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징험할 기록이 없다. 아, 고을의 건치(建置)와 연혁은 큰일임에도 오히려 징험할 수 없다니. 게다가 이 고을에 수령이 된 이는 혹 6년, 3년 또는 1, 2년 또는 1년도 못 채우고 임기를 마쳐서 마치 나그네가 여관에 잠시 머무는 것처럼 잠깐 사이에 훌쩍 떠나 버린다. 그리하여 옛사람은 멀어지고 새 사람은 또 옛사람이 되고 마니, 그 성명이 그대로 묻혀서 전해지지 않는 것이 괴이쩍을 것도 없다.
나는 불초한 몸으로 외람되이 수령의 직책을 맡았는데, 재주는 할계(割鷄)에 부끄럽고 직임은 제금(製錦)에 무거우니, 깊은 못가에 이른 듯 얇은 얼음을 밟는 듯하다는 비유로도 나의 두려운 마음을 형언할 수 없다. 날이 가고 또 날이 가서 임기가 차니, 어깨의 무거운 짐을 풀어놓게 된 것은 비록 나 자신으로서는 다행스럽다. 그러나 새 사람으로부터 옛사람이 되고 옛사람으로부터 멀어진 사람이 되니, 몸이 금석(金石)처럼 변치 않는 것이 아니거늘 서운한 마음이 없을 수 있으리요. 이에 생각해 보건대, 옛날에도 역시 이와 같아 세월이 얼마 지나지 않아 수령의 성명을 기억하지 못하여 늙은 아전이나 백성들조차도 죄다 알 수 없게 되었으니, 어찌 이 고을의 큰 흠이 아니리요. 이제 현의 옛 장부들을 모아서 박공 습(朴公習) 이하 53원(員)의 성명을 찾아 아래에 열거함과 아울러 그들의 임기 연월(年月)을 기록하고 건치한 것이 있으면 역시 썼다. 그리고 불초의 이름을 이어 적어서 감히 스스로 겸양하지 않은 것은, 이것이 이름을 적는 장부일 뿐이기 때문이지 감히 달리 의의(意義)를 둔 것은 아니다.
개벽(開闢)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땅이 있고 수령이 있은 지 몇 갑자(甲子)가 지났는지 모르지만, 기록에 보이는 것은 경오(庚午)를 두 차례 주행(周行)한 데 불과하고 이보다 이전의 것은 전해지지 않으니, 참으로 탄식할 만하다.
오호라, 사굴산(闍窟山)은 모습이 바뀌지 않고 정진(鼎津)은 물이 길이 흐르건만, 유유한 천고의 세월 동안 이곳을 거쳐간 사람이 그 몇이런고. 과거는 이미 지나갔지만 앞으로 훗날은 무궁하니, 계속하여 이름을 써서 실추함이 없기를 실로 훗날의 군자에게 바라노라.

[주D-001]할계(割鷄) : 닭을 잡는다는 말로, 작은 고을을 다스리는 것을 뜻한다. 공자의 제자 자유(子游)가 무성(武城)의 수령이 되어 예악(禮樂)으로 고을을 다스리는 것을 보고 공자가 “닭을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리요.[割鷄焉用牛刀]” 한 데서 유래하였다. 《論語 陽貨》
[주D-002]제금(製錦) : 비단을 마름질한다는 말로, 고을을 다스리는 것을 뜻한다. 정(鄭)나라 자피(子皮)가 나이 어린 윤향(尹向)을 시켜 읍(邑)을 다스리게 하려 하자, 자산(子産)이 이르기를 “그대에게 좋은 비단이 있다면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을 가지고 바느질하는 법을 배우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 데서 유래하였다. 《春秋左傳 襄公31年》
용재집(容齋集) 제10권
 [산문(散文)]
통정대부(通政大夫) 행 창원 부사(行昌原府使) 정공(鄭公) 묘갈명 병서(幷序)

공의 휘는 광보(光輔)이고 자는 운지(運之)이며 동래 정씨(東萊鄭氏)이다. 이 집안이 세상에 드러난 것은 고려 좌복야(左僕射) 휘 목(穆)으로부터 시작하였다. 그 후 8대(代)에 이르러 휘 귀령(龜齡)은 결성 현감(結城縣監)으로 벼슬을 마쳤다. 현감이 휘 사(賜)를 낳았으니, 그는 집현전 직제학으로서 어버이 봉양을 위해 진주 목사(晉州牧使)로 나갔다. 목사가 휘 난종(蘭宗)을 낳았으니, 그는 네 차례 과거에 급제하고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올랐고, 저명한 장상(將相)이 되었고 익혜(翼惠)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필법이 당대에 으뜸이라 비록 아이들이나 하인들조차도 그 이름을 알았다. 공은 바로 그의 장남이다. 지금 영중추부사공(領中樞府事公) 광필(光弼)은 의정부 영의정의 자리를 역임하여 조야(朝野)가 바야흐로 시귀(蓍龜)인 양 의지하고 있으니, 바로 공의 아우이다.
공은 소싯적부터 과거 공부를 하여 누차 낙방의 고배를 마셨고, 마침내 문음(門蔭)으로 벼슬에 올라 공과(功課)를 쌓음으로 해서 여러 차례 승진하여 통정대부에 이르렀다. 내직(內職)으로는, 먼저 와서 별제(瓦署別提)가 되었고, 주부(主簿)가 된 것이 세 곳이었으니, 사재감(司宰監)ㆍ종부시(宗簿寺)ㆍ군자감(軍資監)이다. 그리고 재차 사헌부 감찰이 되었고, 장원서 장원(掌苑署掌苑), 평시서 영(平市署令), 장례원 사의(掌隷院司議), 종친부 전부(宗親府典簿)가 되었다. 첨정(僉正)이 된 것이 세 곳이었으니, 장악원(掌樂院)ㆍ예빈시(禮賓寺)ㆍ제용감(濟用監)이다. 그리고 통례원 봉례(通禮院奉禮)가 되었다. 외직(外職)으로는 먼저 연산 현감(連山縣監)이 되었고, 평양부 판관(平壤府判官)이 되었다. 군수가 된 것이 다섯 곳이었으니, 정선(旌善)ㆍ풍기(豐基)ㆍ금산(錦山)ㆍ순창(淳昌)ㆍ초계(草溪)이다. 부사(府使)가 된 것이 두 곳이었으니, 창원(昌原)과 연안(延安)이다. 공은 네 차례 품계가 올라 당상관(堂上官)에 이르렀으며, 외읍(外邑)을 맡아 다스린 것이 아홉 고을에 이르렀으니, 비록 크게 현달했다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현달한 셈이다.
공은 천성이 방정하고 근엄하며 관직에서는 봉직(奉職)에 힘써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으니, 공을 좋아하지 않는 자들은 이로써 헐뜯었지만 그러나 공은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늙은 나이에 이르지도 않아서 벼슬을 버리고 은퇴하여 의령(宜寧) 사굴산(闍崛山) 아래 살면서 그렇게 여생을 마치리라 작정하였다. 부제학군(副提學君)이 매양 휴가를 내어 공을 뵈러 오는데, 경연(經筵)의 임무가 무거워 오래 슬하에서 뫼실 수가 없었다. 그래서 친구들이 다투어 공에게 조정으로 돌아올 것을 권하였으나 공은 듣지 않았으며, 아우 영중추부사공도 간절한 우애로 서신을 보내어 역시 그렇게 청한 것이 전후로 이어졌으나 끝내 공의 뜻을 굽힐 수 없었으니, 그 본성을 지킴이 대개 이와 같았던 것이다.
공이 병환 중일 때 부제학군이 조정에 청하여 역마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 시약(侍藥)하였으나 끝내 효험을 보지 못하고 갑신년 3월 9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68세이다. 오호라, 슬프도다. 고자(孤子)들이 그 영구(靈柩)를 모시고 광주(廣州) 성달리(省達里)로 돌아가 안장하였으니, 선영(先塋)을 따른 것이다.
공의 배필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대호군(大護軍) 이격(李格)의 따님으로 공보다 26년 먼저 세상을 떠났으며, 4남 4녀를 낳았다. 아들의 맏이 한룡(漢龍)은 수원 판관(水原判官)이고, 둘째 사룡(士龍)은 바로 부제학군으로 19세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또 중시(重試)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바야흐로 문명(文名)을 떨치고 있다. 셋째 원룡(元龍)은 진사(進士)이고, 넷째 언룡(彦龍)은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이다. 딸의 맏이는 감찰(監察) 이희업(李煕業)에게 출가하였고, 둘째는 유학(幼學) 박종상(朴從庠)에게 출가하였고, 셋째는 부장(部將) 이윤우(李允耦)에게 출가하였고, 넷째는 평사(評事) 이응(李膺)에게 출가하였다. 판관은 참봉(參奉) 유계근(柳繼根)의 딸을 아내로 맞아 4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순우(純祐)ㆍ순지(純祉)ㆍ순복(純福)ㆍ순호(純祜)이다. 부제학은 부장(部將) 성렬(成烈)의 딸을 아내로 맞았고, 진사는 호군(護軍) 박진(朴軫)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도사는 부사(府使) 이희옹(李希雍)의 딸을 아내로 맞아 1남을 낳았으니, 순가(純嘏)이다. 감찰은 2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안국(安國)과 안방(安邦)이다. 안방은 겸사복(兼司僕)이다. 딸은 남응규(南應奎)에게 출가하였다. 평사는 2남을 낳았으니, 양정(揚廷)과 빈정(賓廷)이다.
장례일이 얼마 남지 않아서 부제학군이 나와 지기(知己)의 친분이 있는 터라 공의 행장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묘도(墓道)에 새길 비문(碑文)을 부탁하였으니, 감히 승낙하고 명(銘)을 짓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글은 다음과 같다.

공의 선조는 / 公之祖先
고려 때 공을 세워서 / 奮庸高麗
작위가 복야에 이르러 / 爵爲僕射
당대에 명망이 높았어라 / 望隆一時
그 단서 끊임없이 이어서 / 厥緖聯聯
베풂은 두텁되 보답은 더뎠지 / 施厚報遲
직제학은 어버이를 위하여 / 直學爲親
영화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 棄榮若遺
먼 고을의 목사가 되어서 / 屈牧遠州
즐거운 마음으로 봉양하였네 / 色養怡怡
음덕을 쌓고 누리지 않았으니 / 積德不食
오직 후손에게 끼쳐 주었도다 / 惟後之貽
익혜공이 이를 거두었으니 / 翼惠是收
이치가 어긋남이 없구나 / 理無參差
과거에 급제하고 공신이 됨에 / 擢科策勳
마치 누군가가 도와주는 듯 / 若或相之
장수가 되고 재상이 되어서는 / 或將或相
두 직책에 모두 적임자였어라 / 出入咸宜
무엇으로써 증명할 수 있는가 / 何以爲證
승상이 써 놓은 글이 있다네 / 丞相之辭
공은 바로 그의 맏아들이라 / 公其胄子
아버지의 복을 이을 입장이지 / 享有當菑
영추공이 바로 그 아우이고 / 領樞是弟
제학은 바로 그 아들이라 / 提學吾兒
일족이 크고 존귀해지니 / 族大以貴
보고 듣는 이 모두 감탄했지 / 觀聽嗟咨
당상관의 반열은 / 堂上之班
지위인즉 낮지 않나니 / 位則不卑
아홉 고을의 수령이 되었으니 / 九邑之長
운수가 어찌 좋지 않았다 하리요 / 數豈云奇
늙을수록 더욱 원로가 되었건만 / 老而彌元
세상 사람들과는 배치되었지 / 與世背馳
사굴산의 기슭과 / 闍崛之麓
정진의 물가가 / 鼎津之湄
바로 낙토(樂土)이니 / 是惟樂地
이곳에 돌아감에 무얼 주저하리요 / 歸歟何疑
내가 한마을 이웃으로 살면서 / 我隣我里
더러 술도 마시고 바둑도 두었지 / 或樽或棋
땔나무 할 산들이 있고 / 採有陵丘
낚시질 할 못이 있어라 / 釣有陂池
여생 마치도록 한가히 노닐어 / 卒歲優游
오래오래 장수하리라 했더니 / 曰期曰頤
큰 운수는 머물지 않는 법 / 大運不留
한 번 병환을 치료치 못했구나 / 一疾莫醫
저 푸른 하늘이 밝다 여겼더니 / 謂蒼昭昭
어이해 갑자기 여기에 이르렀나 / 胡遽止斯
남은 경사 후손에게 돌아갔으니 / 餘慶有歸
이치가 끝내 날 속이지 않았구나 / 終不我欺
광주의 이 산기슭에는 / 廣州之原
솔과 가래나무들 무성하여라 / 松梓猗猗
어찌 새 무덤이 없으리요 / 豈無新阡
고인은 조고를 생각하였도다 / 祖考我思
이곳에 돌아와 안장하노니 / 反葬於是
선조의 무덤이 여기 있도다 / 先兆在玆
이 무덤의 비석을 새겨서 / 刻此墓石
밝게 보여 주노니 무너뜨림이 없기를 / 昭示無隳

[주D-001]시귀(蓍龜) : 거북과 시초이다. 옛날에 일의 시비와 길흉을 점치던 것으로 사물을 판단하는 기준을 뜻하며, 나아가서 모든 의문을 판별해 주는 원로나 국사(國士)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주D-002]승상이 써 놓은 글 : 익혜공(翼惠公) 정난종(鄭蘭宗)의 묘갈(墓碣)을 어느 승상이 썼던 듯하다.

 

農山先生文集
  農山文集卷之一
   
   
 

闍崛山唱酬

山深四月發天風策病登臨一披胸暮向白蓮菴裏宿三杯飛越最高峯

玆山尙帶十年顏高鳥啼人若有端天地如今滄海變澗阿何處碩人寬獨有千巖當面好剩敬諸子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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襟寒回頭却憶重峯老寺裏飯盟時更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