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최씨 금석문 등/최내길 묘표(崔來吉墓表)

완천군(完川君) 증 영의정 휘 내길 묘표 (평도공파)

아베베1 2009. 12. 28. 23:09
1663년(현종 4년)에 건립한 이 비석은 정두량(鄭斗卿)이 비문을 짓고, 윤문거(尹文擧)가 글을 썼다.
묘표의 주인공은 최내길(1583~1649년)은 전주최씨로 휘는 내길이고 자는 자대(子大)이며 호는 이재(頤齋)이다. 1583년(선조 16년)에 태어나 1606년(선조 39년)에 사마시에 급제, 1611년(광해군 3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등용, 1623년 아우 명길(鳴吉) 등과 함께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에 책록되고,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 때 왕을 호종, 완천군(完川君)에 봉해졌다. 한성부 좌·우윤(漢城府左右尹), 장흥부사(長興府使) 등을 역임하며 선정을 베풀어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다. 병자호란 때는 다시 왕을 남한산성으로 호종, 1648년 경기도관찰사를 거쳐 이듬해 공조판서를 배수(拜受) 하였으나, 5월 초1일에 67세의 나이로 졸하였다.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묘표는 죽은 사람의 벼슬명·이름·생몰연월일·행적·묘주(墓主) 등을 새겨 무덤 앞에 세우거나 평편히 놓는 푯돌이다.

 

崔來吉 墓表
公諱來吉字子大崔系全州始祖純爵在麗朝爲上將軍世繼冠冕文貞公宰平度公有慶敬節公士康皆至大官
曾祖諱嶪別提祖諱秀俊學生考諱起南受業牛溪登苐歷淸顯卒永興府使
以次子領議政完城府院君鳴吉靖社勳贈領議政學生公左贊成別提公吏曹判書公完城兄也
妣全州柳氏兵曹參判永立女也生于萬歷癸未丙午擧司馬辛亥登第選槐院歷典籍直講司藝癸未反政與謀錄勳拜掌樂正陞通政拜禮曹參議甲子賊适叛扈駕陞嘉善封完川君歷漢城左右尹刑工曹參判庚子出宰長興邑人慕之立碑稱仁似春陽淸如秋水政化如此後宰淸州綾州之然
丙子扈駕南漢陞嘉義乙酉與會盟祭資憲拜都摠管戊子拜京畿監司病遞己丑拜工曹判書五月初一日卒壽六十七
先是病上遣醫同疾訃聞震悼賻禮有加贈領議政葬于龍仁紫鳳山之南
公樂昜平坦至當事人莫敢于私夫人宗室益城君亨齡女也一男三女男後胤登苐壯元官文學子昇早六女長適主簿李齊賢無子次郡守尹鴻擧次持平李堥
後胤二男一女男錫三錫命皆士人女幼尹鴻擧二男五女長抗都事次摠士人女長適鄭正陽次洪受疇次朴泰辰皆士人餘幼
李堥三男二女長適進士李潤朝次士人權松萬男幼
崇禎紀元之後三十六年 癸卯 月 日
通政大夫承政院同副承旨知製敎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 鄭斗卿 撰
嘉善大夫行龍驤護軍 尹文擧 書

 

(公)의 휘(諱)는 내길(來吉)이요, 자(字)는 자대(子大)이다. 전주 최씨(全州崔氏)의 세계(世系)는 고려(高麗) 때 상장군(上將軍)이었던 순작(純爵)을 시조(始祖)로 삼아 대를 이어 가며 높은 벼슬을 하였다. 그리고 문정공(文貞公)과 재상(宰相)인 평도공(平度公) 유경(有慶), 경절공(敬節公) 사강(士康)은 모두 큰 벼슬에 이르렀다. 증조(曾祖)는 별제(別提)로 휘는 업(嶪)이고, 할아버지는 학생(學生)으로 휘는 수준(秀俊)이다. 고(考)는 휘가 기남(起南)이니, 우계(牛溪)의 문하(門下)에서 공부하여 등제(登第)하였고, 청직(淸職)과 현직(顯職)을 거쳐서 영흥 부사(永興府使)로 벼슬을 마쳤다. 차자(次子)는 영의정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 명길(鳴吉)로 정사공신(靖社功臣)에 훈봉(勳封)되었으며, 영의정에 증직된 학생공(學生公), 좌찬성 별제공(別提公), 이조 판서공(吏曹判書公)은 완성부원군의 형이다. 비(妣)는 전주 유씨(全州柳氏)로 병조 참판 영립(永立)의 따님이다.
공은 만력(萬歷) 계미년(1583년)에 태어나서, 병오년(1606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그리고 신해년(1623년)에 등제(登第)하여 승문원에 발탁되었고, 전적(典籍)·직강(直講)·사예(司藝)를 역임하였다. 계미년에 반정(反政)에 참여하여 공신(功臣)에 녹훈(錄勳)되었고,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제수되었다. 그 뒤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자(陞資)되어 예조 참의에 제수되었다. 그리고 갑자년(1624년)에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임금님을 모시고 피난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자되었으며, 완천군(完川君)으로 봉훈(封勳)되었다. 그 뒤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과 우윤(右尹), 형조와 공조의 참판을 역임하였고, 경자년에는 장흥(長興)에 수령으로 나갔는데, 읍민(邑民)이 공을 사모하여 비석(碑石)을 세웠다. 비석에 이르기를, “인(仁)이란 봄날의 맑고 푸름과 같고, 가을에 정화되는 물과 같다.”라고 하였고, 그 뒤에 청주(淸州)와 능주(綾州)에 수령으로 나갔을 때도 이와 같은 일이 있었다. 병자호란(胡亂)이 일어나자 임금을 모시고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피난하여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자되었으며, 을유년(1645년)에는 회맹제(會盟祭)에 참여하여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품(陞品)하여 도총관(都摠管)에 제수되었다. 그리고 무자년(1648년)에 경기 감사(京畿監司)에 제수되었으나 병환(病患)으로 체직(遞職)되었다. 기축년(1649년)에 공조 판서에 제수되었다가 5월 1일에 사망하니, 향년(享年)은 67세였다. 이에 앞서 임금께서 의관(醫官)을 보내 병을 진찰하게 하였는데, 공의 부음(訃音)을 듣고 임금께서는 깊이 애도하고 부물(賻物)를 내리는 한편 영의정으로 증직(贈職)하였다. 용인(龍仁) 자봉산(紫鳳山) 남쪽(지금의 기흥읍 공세리)에 장례를 모셨다.
공은 일에 임하여서는 공평하게 다스렸고, 사적인 일에는 사람을 즐겨 부리지 않았다. 부인은 종실(宗室)인 익성군(益城君) 형령(亨齡)의 따님이며, 1남 3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후윤(後胤)이요,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여 벼슬이 문학(文學)이었으나 어렸을 때 타계(他界)하였고, 장녀는 주부(主簿) 이재현(李齊賢)에게 출가하였으나 자식이 없고, 다음은 군수(郡守) 윤홍거(尹鴻擧)에게 출가하였으며, 다음은 지평(持平) 이무(李堥)에게 출가하였다. 후윤은 2남 1녀이니 아들은 석삼(錫三)과 석명(錫命)인데 모두 사인(士人)이며, 딸은 아직 어리다. 윤홍거는 2남 5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도사(都事) 항(抗)이요, 차남은 사인 총(摠)이며, 장녀는 정정양(鄭正陽)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홍수주(洪受疇)에게 출가하였으며, 다음은 박태진(朴泰辰)에게 출가하였는데, 모두 사인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이무는 3남 2녀를 두었는데, 장녀는 진사 이윤조(李潤朝)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선비 권송만(權松萬)에게 출가하였으며, 아들은 모두 어리다.

숭정(崇禎) 기원(紀元) 후 36년(1663년) 계묘년 월 일.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동부승지 지제교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承政院同副承旨知製敎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 정두경(鄭斗卿)은 글을 짓고, 가선대부(嘉善大夫) 행 용양호군(行龍驤護軍) 윤문거(尹文擧)는 글을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