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신립 장군 신도비(펌)

신립장군 아드님 휘 신경 동성군(東城君) 신공(申公) 묘표

아베베1 2010. 1. 13. 21:41

서계집 제14권 묘표(墓表) 15수(十五首)
 
동성군(東城君) 신공(申公) 묘표


공은 휘는 경인(景禋), 자는 자정(子精), 성은 신씨로, 평산(平山) 사람이다. 전대의 숭겸(崇謙)은 고려 태조의 장수가 되어 동수(桐藪)의 싸움에서 전사하였고, 6대조 문희공(文僖公) 개(槩)는 세종(世宗)을 도왔다. 증조 문절공(文節公) 상(鏛)은 중종(中宗) 때 현달하였고, 조부 휘 화국(華國)은 벼슬하지 않았다. 부친 휘 입(砬)은 판윤으로, 선조(宣祖) 때 북로(北虜)를 섬멸하여 명장(名將)이 되었는데, 남구(南寇)가 서울에 육박해 들어오자 황급히 시정(市井)의 자제 수천 명을 이끌고 충주(忠州) 강가에서 적을 맞아 싸우다 군대가 패해 물에 빠져 죽었다. 모친 정경부인(貞敬夫人) 전주 최씨(全州崔氏)는 만호(萬戶) 필신(弼臣)의 따님으로, 만력(萬曆) 18년(1590, 선조23) 10월 28일에 공을 낳았다.
공의 두 형은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 경진(景禛)과 동평군(東平君) 경유(景裕)이고, 공은 실로 막내이다. 3세에 부친을 여의고, 26세에 무과에 입격하여 선전관에 배수되고, 도총부 도사에 서용되었다.
기미년(1619, 광해군11)에 모친상을 당하고, 신유년(1621)에 탈상하였다. 당시 광해가 혼암하고 포학하여 아우를 죽이고 어미를 유폐하자, 평성군이 은밀히 세상을 바로잡을 뜻을 가졌다. 공은 평성군과 합심하여 모의를 했는데, 평성군이 박승종(朴承宗)에게 시기를 당해 효성(曉星)으로 쫓겨 가 수자리를 살게 되자, 뒷일이 고스란히 공에게 떠넘겨졌다. 그리하여 승평(昇平 김류(金瑬)), 연평(延平 이귀(李貴))과 왕래하며 논의하여 마침내 인조(仁祖)를 모시고 반정을 하였다. 처음 교동 현감(喬桐縣監)에 제수되고 곧이어 연안 부사(延安府使)로 발탁되었는데, 부임하기도 전에 자급을 뛰어넘어 경기 수군절도사에 배수되었다. 그해 겨울에 2등 공신에 책록되고 동성군(東城君)에 진봉(進封)되었다.
갑자년(1624, 인조2) 봄에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병사를 거느리고 들어가 상을 호위하고 공주(公州)로 어가를 호종하여 호위대장의 일을 행하였다. 이괄이 주벌되자 다시 임소로 갔다.
을축년(1625, 인조3)에 호남 절도사가 되었다.
정묘년(1627)에 호란이 발생하자, 1만여 명을 거느리고 구원하러 강화(江華) 행재소(行在所)에 들어가다가 미처 당도하기 전에 북로(北虜)가 떠났으므로 곧바로 진(鎭)으로 돌아갔다. 그 뒤 10년 동안 황해 병사, 수원 부사(水原府使), 삼도 수군통제사를 역임하였다.
을해년(1635)에 포도대장이 되었다.
병자년(1636)에 남한산성이 포위되자 체부(體府) 소속으로 중군(中軍)이 되었는데, 언제나 분투하여 적에게 항거하니 성중(城中)이 공에게 의지하였다.
정축년(1637) 봄에 포위가 풀리자 이에 대한 공로로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오르고 통제사에 배수되었는데, 당시 난을 겪어 남쪽 변방이 중시되었으므로 재차 진무하러 나간 것이다.
신사년(1641)에 지돈녕부사가 되고 호위대장과 포도대장을 겸하였다.
임오년(1642)에 다시 경기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계미년(1643) 봄에 평성군이 병이 나 공을 그리워하니, 상이 평성군을 위해 공을 불러들였는데, 미처 도착하기 전에 평성군이 졸하였다. 특별히 공을 어영대장으로 임용하였다.
공은 평성군이 졸한 뒤로 곡을 그치지 않아, 이로 인해 병이 들어 5월 30일에 마침내 별세하니, 향년 54세였다. 상이 슬퍼하며 철조(輟朝)하였다. 7월에 광주(廣州) 우치(牛峙)의 간좌(艮坐) 언덕에 안장하였다.
공은 풍채가 좋고 수염이 아름다웠으며, 천성이 단정하고 진실하였다. 금대(琴臺)의 화(禍)가 가슴에 지극한 통한으로 남아 평생토록 생선을 먹지 않았다. 평성군을 아비처럼 섬기고 가르침을 가슴에 새겨 해이해지지 않았으며, 귀한 신분이 되어 따로 살게 되었어도 언제나 곁에서 문안하였다. 친구를 만나면 반드시 은의(恩義)를 독실하게 하였으며, 변방을 진무할 때는 청렴하고 삼가는 태도를 지니고 군대를 거느림에 위엄과 은혜가 있어 병사들이 기꺼이 명령에 따랐다. 포도대장이 되어서는 도적을 잘 적발해 내니 사람들이 그 명석함에 감복하였다. 스스로 상의 은우(恩遇)를 받았다고 여겨 어려운 시국을 만나 언제나 분발하여 목숨 바칠 것을 생각하였다.
전 부인 고흥 유씨(高興柳氏)는 일찍 죽어 판윤(判尹)의 무덤 곁에 안장하였다. 후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호군 성길(星吉)의 따님으로, 서사(書史)에 능통하고 아녀자로서의 규범이 있었다. 향년 72세로 졸하니 공의 묘에 부장하였다.
공은 아들이 없고, 이 부인(李夫人)이 딸 하나를 낳았는데, 제용감 정 이경과(李慶果)에게 출가하였다. 일찍이 평성군의 작은 아들 도정(都正) 해(垓)를 후사로 삼으려 하였는데 미처 청하기도 전에 도정이 죽었다. 공이 졸한 뒤 대신이 말을 하여 추후에 해를 공의 후사로 삼았다. 해는 아들 둘을 두었다. 여석(汝晳)은 현감이고, 여철(汝哲)은 판서이다. 이경과의 세 아들은 도(燾), 암(黯), 훈(勳)이고, 두 딸은 정재한(鄭載漢)과 진사 박명의(朴明義)에게 출가하였다.


[주D-001]숭겸(崇謙)은……전사하였고 : 견훤(甄萱)이 신라의 도성에 쳐들어왔을 때 고려 태조가 정기(精騎)를 이끌고 출동하여 공산(公山)의 동수(桐藪)에서 맞아 싸웠는데, 견훤의 병사가 태조를 포위하여 사태가 매우 위급하였다. 신숭겸은 대장으로서 용모가 태조와 흡사하였는데 자신이 대신 죽겠다고 청하고는 어거(御車)를 타고 나가 싸우다가 전사하였고, 태조는 이로 인해 위기를 벗어났다. 《象村稿 卷26 申崇謙神道碑銘, 韓國文集叢刊 72輯》
[주D-002]금대(琴臺)의 화(禍) : 부친 신립(申砬)이 임진왜란 당시 탄금대(彈琴臺)에서 왜적과 싸우다 물에 뛰어들어 전사한 일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