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세 판관공 휘 희수 등/휘 방조 기수 관련 기록

宋子大全拾遺卷之八 (配全州崔氏。將仕郞耆 壽女)

아베베1 2010. 1. 14. 22:48

한수재선생문집(寒水齋先生文集) 제31권
 묘표(墓表)
익찬(翊贊) 이공(李公) 유언(惟彦) 묘표


공은 휘가 유언(惟彦)이요 자는 미재(美哉)로서 경주인(慶州人)인데, 시조는 신라(新羅) 개국의 원훈(元勳) 알평(謁平)이다. 그 뒤에 휴(攜)라는 이가 아조에 와서 판한성 부사(判漢城府事)를 지냈으며, 1세를 건너 휘 귀정(龜禎)이 별제(別提), 휘 주(䲖)는 만호(萬戶), 휘 양국(良國)은 금부 도사(禁府都事)였는데, 이상이 공의 고조ㆍ증조ㆍ조부이다. 별제의 아우는 군수 귀서(龜瑞)인데, 귀서가 사의(司議) 즉(鯽)을 낳고, 즉은 봉사(奉事) 대방(大邦)을 낳고, 대방은 첨지(僉知) 탁(啅)을 낳았다. 첨지가 도사공의 양자로 가서 장사랑(將仕郞) 최기수(崔耆壽)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여 만력(萬曆) 신해년 1월 15일 공을 낳았다.
공은 문재(文才)가 뛰어나 10여 세 때부터 시부(詩賦)를 잘 지었고 을미년에 벼슬길에 올라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되었는데, 학도가 매우 많아 뒤에 통현(通顯)한 자가 많이 배출되었다. 기해년에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로 옮겼다가 곧 금오랑(金吾郞)으로 낭천현(狼川縣)을 맡아 나갔다. 갑진년에 해직되어 광릉(廣陵)의 삼전포(三田浦)로 돌아왔다가 신해년에 익찬(翊贊)이 되었고, 정사년 6월 29일 병으로 세상을 마쳐 광주(廣州) 가락동(可樂洞) 신향(辛向)의 둔덕에 장사 지내었다.
공은 성품이 관후하고 마음이 깊었으며 생산(生産)을 일삼지 않고 서사(書史)를 즐겼는데, 집 안이 썰렁하게 가난한 것도 개의하지 않았다. 호수 위에 작은 정자를 지어 ‘관어(觀魚)’라 이름하였는데, 도사공이 살던 터의 곁에 위치하였다. 옛날 도사공이 율곡(栗谷)ㆍ사암(思菴 박순(朴淳))과 그 정자에서 서로 시를 읊고 함께 놀던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는데, 공이 할아버지 뒤를 이어 다시 정자를 세우고 고명한 벗 좋은 친구들과 항상 시 읊고 술 마시는 것으로 스스로 만족하면서 강호(江湖)에 흠뻑 취한 채 세상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조정에서 공의 그러한 점을 가상히 여겨 계방(桂坊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을 제수한 일이 있었는데 공이 마지 못해 응하긴 했으나 물러 나오는 즉시로 호상(湖上)에 달려가 벼슬에 연연하는 생각이 없었다. 함께 노닐던 이들은 모두 당대의 대인(大人)ㆍ군자(君子)들로서 예를 들면 동춘(同春)ㆍ우암(尤菴)ㆍ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 형제와 같은 이들이 가장 서로 가까운 사이였다.
처음에 동래 정씨(東萊鄭氏) 주부 경창(慶彰)의 딸을 아내로 맞았으나 자녀가 없었고, 두 번째로 고성 이씨(固城李氏) 충의위(忠義衛) 순고(循古)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 하나를 두었다가 홍기욱(洪箕勗)에게 시집보냈으며, 세 번째로 문화 유씨(文化柳氏) 학생(學生) 시화(時華)의 딸을 맞아 4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옹()ㆍ원(願)ㆍ효(顤)ㆍ예(預)이고 딸은 송정채(宋廷采)에게 시집갔다. 그리고 측출(側出)로 아들 신(䪿)과 사위 김경성(金慶星)이 있다. 손자 단필(端弼)ㆍ단좌(端佐)ㆍ단룡(端龍)과 권세형(權世衡)의 아내가 된 손녀는 맏아들 소생이며, 손자 단보(端輔)와 생원 정형주(鄭衡周)ㆍ신헌(申憲)ㆍ윤명주(尹命周)의 아내가 된 손녀들은 둘째 아들의 소생이고, 손자 단현(端玄)과 송재현(宋載顯)ㆍ임성필(任聖弼)의 아내가 된 손녀들은 셋째 아들의 소생이다. 그리고 사위 홍씨는 아들 회(懷)를 두고 딸은 이무(李堥)에게 시집보냈으며, 사위 송씨의 아들 국빈(國賓)은 생원이다.
나는 공과 척속(戚屬)으로서 소년 시절부터 공을 자주 찾아 뵙고 그에게서 옛날 장자(長者)의 기풍이 있는 것을 적이 우러러보아왔던 터인데, 지금 단필 형제가 찾아와 묘도문을 부탁하는 것을 감히 사양할 수 없어 대략 이상과 같이 적어 비에다 새기게 하였다.

宋子大全拾遺卷之八
 墓表
副護軍李君 墓表陰記 116_167d


慶州之李。自謁平佐羅祖啓封。至高麗尤盛。本朝開運。有敬中,培中,達衷,誠中一時四公。大有名稱。誠中官議政。其六世孫奉事大邦生四男。文行卓異。人將期以四公。然皆不達而沒。其第三諱晫。字子明。其曾祖郡守龜瑞兄別提龜禎嗣再絶。君出爲其所後116_168a 孫都事良國子。都事所後父䲖。與君本生祖鯽。皆有官名。坦夷跌宕。不事邊幅。性嗜酒。遇輒酩酊。與朋徒吟哦永夕。弟家甚貧。業之以同居。二兄落南。常望雲流涕。嘗語子孫曰。吾兄弟不振。而猶敬愛於人者。以有孝義也。李爾瞻與君連姻。人或勸之仕。君不應。其黨安應老怙奪君藏獲。李相國弘胄亟假君折衝階。蓋欲藉此以免就訟也。其後仍其階爲衛將。則澤堂李公植在銓時也。年五十七而終。因以折衝衛將題其主。配全州崔氏。將仕郞耆壽女。君家故饒。崔氏承君意。樽糟之外。不數數然也。以故家事益落。而亦不116_168b 以爲意。男惟善。次惟卨親癠。截三指進血。次惟彥縣監。次惟獻。孫,頗,䫝,顜長房出。,願,顤三房出。而䪿,頟,。其側出也。長房女爲成晥,權時,李尙妻。其季及三房女皆幼。君兄弟皆不見知於世。而其可知者存。今草廬公惟泰。實君從子。狀君行甚悉。將不患於後人之不知矣。余與草廬縣監遊。略記之如此。銘曰。慶李祖孫。有兄弟四。祖顯而孫否。其德則類。不食之報。將於後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