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세 의령공 휘 충성 ,지성 등/處士 諱 弼成 묘표

處士 諱 弼成 묘표

아베베1 2010. 1. 17. 23:41

耳溪集卷三十一
 墓碣銘
處士崔公墓碣銘 幷序 241_577a


靖陵之世。士類蔚興。實由趙文正之功。而及至己卯禍作。名編黨籍者。皆足以名世而燾後。余於扶安崔處士見之矣。處士諱弼成。完山人。高麗侍中阿之七世孫。戶曹參議霮之四世孫也。曾祖匡之。集賢殿直提學。祖生明。京市殿直。考秀孫。進士。號固窮。妣崔氏。241_577b司正孝老之女。非一崔也。公生於成化癸卯。幼而穎秀。長而篤學。與內從成博士重淹。爲道義交。成公及於燕山戊午之禍。公自是絶意名利。遯跡鏟光。事親盡孝。兄弟五人。同居共被。鄕里化之。固窮公嘗植五槐於庭曰。吾子五人登科。當懸皷於此樹。已而皆中大小科。邑人謂之五鼓里。公連遭父母喪。親負土成墳。廬墓六年。毁瘠成疾。朝廷薦其孝。中廟嘉之。命與弟繼成。並旌其閭。世稱二連。靜菴趙先生擧公於賢良。己卯錮廢。杜門不出。學者多從之遊。丙午。卒于家。肅廟甲午。道內章甫立祠本縣。殿直,固窮曁公241_577c及弟處菴。以淸名純行。俎豆一鄕。公族曾祖烟村諱德之。當文廟末年。見幾而作。人服其明哲。亦享靈巖。何其盛哉。配光山卓氏。生二男。長淸無后。次海參奉。生二男。芬副護軍,蘭參奉。女部將金忠朴妻。護軍一男潤。參奉二男淵,澗。處士傍孫鎭衡。列其言行。千里來京師。求余言刻墓石。年代旣遠。事蹟未詳。謹稽己卯諸賢傳曰。崔某奉母至孝。才兼文武。嗚呼是可以知公矣。於是乎銘。銘曰。
靖陵中興。士無不揚。才全行篤。名達身藏。三世四賢。俎豆一堂。風聲遠樹。式此南方。

 梅山先生文集卷之三十九
 墓誌銘
處士愼公墓誌銘 幷序○己酉 296_288c


靈巖郡東槎谷。有坐坎之原。卽故處士愼公諱聖弼衣履之藏也。閱百世而無墓銘。公五代孫在夏。抱狀謁銘於不佞。不佞病閣筆硏久矣。在夏相守苦懇。要以準請爲度。感其深誠。遂力疾而敍之。公字汝賚。敬庵其號也。始祖恭獻公諱修。以宋開封府人。隨海舶東來。仕高麗。有子諱安之。兵部尙書。事載麗史。後受貫于居昌。入本朝有諱幾。寶文提學。學問志節。爲296_288d鄕邦所慕。立祠以祭之。子諱後庚通禮。隨婦翁烟村崔公德之居靈巖永保村。子孫遂世居焉。累傳至諱喜男。觀察使。以文學淸謹著名。亦祭於社。是爲公高祖也。曾祖諱餘慶判官贈左承旨。祖諱諴監察。考諱光翊成均生員。甲子擧義旅。妣延安李氏。縣監泰吉女。文淸公後白其曾祖也。公器度儼然。孝悌天植。養親備物。極其滋味。致雪鯉夜雉之瑞。愉色婉容。未或少懈。雖有憂戚強笑語。用寬親心。母夫人晝燭數十年。不見天日。卲齡癃病。公不解夜帶。嘗糞甜苦。以驗劇歇。斷指灌血。用延危喘。又築壇祭北斗。祈以身296_289a代。歷七晝夜不避風雪。及喪哀毁逾制。幾滅性。墓所稍遠。而不廢日省。號絶不能成聲。行路垂泣。樵牧咨嗟。咸稱愼孝子。制除而述記哀文。用寓追慕。一鄕擧公行誼。道伯將聞于朝。公力挽而止。事載邑誌。公以肅宗甲寅卒。距其生丙寅。爲四十九歲。配高興柳氏。贈參判重輝女。有男壽萬。女適崔抗。繼配全州李氏。贈參判重美女。男義萬,憲萬,濟萬,載萬,龜萬。女適吳大輔。昌言義萬出。昌鼎,昌恒,昌漸。憲萬出。昌遠。濟萬出。昌觀,昌晉。龜萬出。昌鼎子師心,師典。昌恒子師顔。昌漸子師訥。昌遠子師中。昌觀子師國。昌296_289b晉子師元。玄孫以下不記。公生長名門。惇行孝友。爲一方模範者。原于學問。其所論辨。往往有深造獨詣者。大爲士友所推詡。且於程子存養德性之說。用力眞篤。因以敬自號。有零稿可傳。有本者如是夫。在夏兼示素隱公遺稿。素隱公名天翊。卽公從父。而公長胤壽萬爲其孫焉。素隱公淸名雅望。表準士林。而公之行治。得於素隱之敎焉。往哲云稱人之善。必本其父兄師友。厚之至也。竊附斯義。爲公之銘。銘曰。
躬行孝悌。在先毋忝。德厚流光。裕後無憾。本之則存。得諸觀感。仰述素隱。庶幾弗僭。矢辭于銘。用昭玄埳。


기묘록 속집(己卯錄續集)
별과시 천거인


별과시(別科時)에 천거한 사람들로 서울 밖에서 천거된 사람은 모두 1백 20명인데 천과(薦科)에 오른 사람은 28명이며 따로 14명이 전하는데, 나머지 78명은 아마도 그 착한 행실이 아주 없어질까 두려워 똑같이 기록한 듯함.


경외관동천인

참봉 노우명(盧友明)은 본관이 함양(咸陽)으로 조행(操行)과 명망이 있었으며 학술이 있고 단정하였으며 성품이 깨끗하고 담박 고요하였다.
참봉 유맹달(柳孟達)은 본관이 임천(林川)으로 천성이 순정(淳正)하였으며 성질이 활달하고 효행이 두드러졌으며 재능이 있었다.
이상 두 참봉은 유일(遺逸)로서 벼슬을 받았다가 연좌되어 파직되었다.
유학 박계효(朴繼孝)는 본관이 삼가(三嘉)로 학행과 재질이 있었고 기개와 도량이 강정했다. 예의를 다하여 상례를 모셨다.
생원 송석현(宋錫賢)은 본관이 영광(靈光)으로 마음이 투철하고 효우가 돈독하였으며 재행(才行)이 뛰어났고 재능이 있었다.
생원 임말손(林末孫)은 본관이 수원(水原)으로 조행이 있고 언행이 청렴하였으며 남을 가르치기에 부지런하였다.
생원 변벽(卞碧)은 본관이 거창(居昌)으로 학행과 기식(器識)이 있어 어버이를 섬김에 거스름이 없었다.
생원 형사보(邢士保)는 본관이 거창으로 효행과 학문이 있었다. 임오과(壬午科)에 올라 벼슬이 전적(典籍)에 이르렀다.
유학 유자방(柳子房)은 본관이 거창으로 조행과 기식이 있었으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친우에게 믿음이 있으며 경사(經史)에 두루 통하였다.
좌랑 정경(鄭瓊)은 효행이 드러났으며 학문이 두루 통하였다. 이하는 모두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다.
판관 박찬(朴璨)은 재행과 효렴이 있었다. 이상 두 사람은 벼슬이 군수에 이르렀다.
생원 이종경(李宗慶)은 학행과 기식이 있었는데, 연경(延慶)의 아우이다.
생원 신겸(愼謙)은 조행이 있었고, 여유가 있었다.
진사 정세경(鄭世卿)은 재행과 효행이 있었다. 추천으로 벼슬에 올랐다가 파직되었다.
참봉 김석홍(金錫弘)은 학행과 조행이 있었다.
진사 홍등(洪縢)은 선을 좋아하고 잘못을 반성하여 잘 고쳤으며,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일찍이 유일(遺逸)로 벼슬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생원 신광록(申匡祿)은 학행이 있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벗을 지성으로 사귀어 자상하게 인정을 다하였다.
유학 이후(李煦)는 재식이 있어 집에 있으면서 고요히 심성을 길러 옛사람의 학풍이 있었다.
진사 여희단(呂希端)은 학행과 재행이 있었다.
사부(師傅) 목희증(睦希曾)은 조행이 있었으며 성질이 질박하고 유순하였다.
진사 이문건(李文楗)은 침중(沈重) 숙성(夙成)하였으며 효우(孝友)에 돈독하였다. 충건의 아우가 급제하여 벼슬이 승지(承旨)에 이르렀는데, 을사년에 집안에 화를 당하여 귀양갔다가 죽었다.
사부 여희림(呂希臨)은 효심이 많았다.
진사 김안도(金安道)는 배우기를 좋아하고 검행(檢行)하였다. 영상 김령(金鈴)의 아들로 음직을 받아 벼슬이 군수에 이르렀다.
진사 이백록(李百祿)은 배우기를 좋아하고 검행하였다.
진사 신명화(申命和)는 순후하고 삼가며 효행이 있었다.
생원 김인손(金麟孫)은 경학에 밝고 지조가 있었다. 후에 이름을 단(亶)이라 고치고 임오과에 올라 벼슬이 참의에 이르렀다.
생원 허금(許䃢)은 결백하고 조심스러웠는데 벼슬이 부사에 이르렀다.
참봉 김만억(金萬億)은 언행을 삼가고 학문을 좋아했다.
도사(都事) 홍사부(洪士俯)는 결백하고 언행을 조심하여 벼슬이 부사에 이르렀다.
참봉 김창(金琩)은 언행을 아주 조심했다.
유학 김진종(金振宗)은 향하는 바가 견실하고 확고하였다. 무자년에 급제하여 을사년에 벼슬이 전적에 이르렀다가 귀양가 죽었다.
진사 원계채(元繼蔡)는 지조가 있는데 을묘년 식년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서에 이르렀다.
생원 박세훈(朴世勳)은 재주와 식견이 있는데 세희(世熹)의 형이다.
군수 이은(李誾)은 지조가 있고 결백하였으며 학식이 있었다.
전 도사 이세번(李世蕃)은 학식과 지조가 있었다.
생원 이선장(李善長)은 학식과 지조가 있었다.
생원 우순필(禹舜弼)은 학행이 있었다.
전 현감 최상(崔祥)은 조행이 있었다.
진사 이세웅(李世雄)은 뜻이 돈독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치부를 하지 않았다.
유학 박두남(朴斗南)은 몸가짐을 잘하여 조행이 특이하였다.
생원 송미창(宋彌昌)은 재행이 있었다.
유학 윤거신(尹居莘)은 학행이 있었다.
참봉 이광식(李光植)은 효행과 일을 잘 처리하는 국량이 있었다.
생원 박번(朴蕃)은 효행과 학술이 있었다.
유학 문준(文濬)은 뜻이 돈독하여 옛것을 좋아하였다.
유학 문회지(文繪地)는 뜻을 돈독하게 행하였다.
유학 한계유(韓繼愈)는 뜻이 돈독 견실하였으며 학문에 재능이 있었다.
유학 김인범(金仁範)은 기절(氣節)과 재능이 있었다.
유학 진건(陳騫)은 뜻이 돈독하여 옛것을 좋아하였으며 재주와 문식이 있었다.
유학 허초(許礎)는 지조가 떳떳하였으며 재기(才氣)가 있었다.
진사 허자(許磁)는 재행이 있어 계미년 알성별시(謁聖別試)에 올라 벼슬이 찬성에 이르렀으며 을사년 위공원훈(僞功元勳)으로 삭탈되었다.
유학 김시창(金始昌)은 학행이 있었다.
생원 박훈(朴薰)은 근실하여 실행력이 있었다.
생원 이영우(李永祐)는 마음씀이 거침없었으며 뜻을 세우는 데 지조가 있었다.
유학 유여주(兪如舟)
생원 신세경(申世卿)
유학 김윤종(金尹宗)은 김식(金湜)의 문인으로 명천(明川)에 귀양갔다가 풀려 상주(尙州)의 집에서 죽었다.
유생(儒生) 서경덕(徐敬德)은 본관이 개성(開城)으로 스스로 고향으로 내려가 거처하니, 남들이 향거(鄕擧 향리에서 위로 인재를 천거함)하였다.
유학 윤환(尹瓛)은 본관이 여주(驪州)로 지절(志節)이 방정하고 효행과 학술이 있었다.
유학 정소(鄭韶)는 본관이 남양(南陽)으로 문학을 좋아하였으며 어머니가 병에 걸리자 손가락을 잘랐다.
유학 이윤문(李允文)은 본관이 충주(忠州)다.
유학 김증(金增)은 본관이 청주(淸州)다.
생원 상진(尙震)은 본관이 임천(林川)으로 기묘년 동별시(冬別試)에 올라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시호를 성안군(成安君)이라 추증하였다.
유학 김극양(金克讓)은 본관이 보령(保寧)으로 문음으로 벼슬이 군수에 이르렀는데, 좌의정 극성(克成)의 아우다.
생원 김숭종(金嵩宗)은 본관이 음성(陰城)이다.
진사 이난손(李蘭孫)은 본관이 온양(溫陽)으로 갑신년 별시에 올라 벼슬이 정랑에 이르렀다.
이상 일곱 사람은 모두 학식이 있었다.
생원 이해(李蟹)는 본관이 나주(羅州)로 재주와 덕행을 겸비하여 실천력이 독실하였으며, 경(經)에 밝고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과거공부를 일삼지 않았다.
생원 박이홍(朴以洪)은 본관이 창평(昌平)으로 마음씀이 순박하고 독실하였으며, 효도와 우애가 돈독하였다.
생원 장응두(張應斗)는 본관이 장수(長水)로 효제(孝悌)ㆍ충신(忠信)이 남달리 뛰어났으며 재학(才學)을 겸비하였다.
진사 최필성(崔弼成)은 본관이 부안(扶安)으로 지극한 효도로 부모를 섬기고 문ㆍ무의 재주를 겸비하였으며 빈한하면서도 구차하게 취함이 없었다.
유학 어득한(魚得漢)은 본관이 고성(固城)으로 학식이 있었다.
진사 김응청(金應淸)은 본관이 영덕(盈德)으로 학식이 있었고 몸가짐이 성실했으며, 착한 것으로 사람들을 인도하고 빈곤하면서도 잘 사는 것을 도모치 않았다.
생원 김세보(金世寶)는 본관이 청도(淸道)로 거상(居喪)에는 죽을 마시었으며 또한 재예(才藝)가 있었다.
진사 김상(金湘)은 본관이 문경(聞慶)이며 말이 적었고 벼슬에 나아가 군수에 이르렀다.
진사 손계돈(孫季暾)은 본관이 경주(慶州)로 청렴하고 강직하며 학식이 있다.
진사 이인견(李仁堅)은 본관이 영천(榮川)으로 마음 가짐이 청렴하고 뜻을 이루기 위해 나아감에 구애됨이 없었으며 학식이 있었다.
생원 이정(李涏)은 본관이 인동(仁同)으로 재주와 학식이 뛰어났다.
생원 박덕손(朴德孫)은 본관이 함안(咸安)으로 문학을 좋아하고 웃어른을 공경했으며 고향에서 공순하였다.
진사 금원정(琴元貞)은 본관이 봉화(奉化)며, 수차에 걸쳐 과거를 보았으나 합격하지 못하고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로웠다.


미란시 인물

난리 이전 정부의 육조ㆍ대간ㆍ시종ㆍ팔도 방백은 다음과 같다.
영의정 정광필(鄭光弼)
좌의정
우의정 안당(安瑭)
좌찬성 최숙생(崔淑生)
우찬성
좌참찬 이자(李耔)
우참찬 이유청(李惟淸)
좌사인(左舍人) 이청(李淸)
우사인(右舍人)
검상(撿祥) 장옥(張玉)
이조 판서 신상(申鏛)
참판 윤은보(尹殷輔)
참의 정충량(鄭忠樑)
정랑 정완(鄭浣)
정옥형(丁玉亨)
이충건(李忠楗)
좌랑 구수복(具壽福)
이인(李認)
호조 판서 고형산(高荊山)
예조 판서 남곤(南袞)
병겸판(兵兼判) 이장곤(李長坤)
참판 방유녕(方有寧)
참지 성운(成雲)
형판(刑判) 김정(金淨)
공겸판(工兼判) 김령(金鈴)
한성 판윤 한세환(韓世桓)
대사성 김식(金湜)
판결사 이세정(李世貞)
도승지 유인숙(柳仁淑)
좌승지 윤자임(尹自任)
우승지 공서린(孔瑞麟)
좌부승지(左副承旨) 박세희(朴世熹)
우부승지(右副承旨) 홍언필(洪彦弼)
동부승지(同副承旨) 박훈(朴薰)
주서(注書) 이기(李芑)ㆍ안정(安珽)
대사헌(大司憲) 조광조(趙光祖)
집의(執義) 박수문(朴守紋)
장령(掌令) 김인손(金麟孫)
최산두(崔山斗)
지평(持平) 이연경(李延慶)
이희민(李希閔)
대사간(大司諫) 이성동(李成童)
사간(司諫) 유여림(兪汝林)
헌납(獻納) 송호지(宋好智)
정언(正言) 김과(金鈛)ㆍ이부(李阜)
예문제학(藝文提學)
봉교(奉敎) 채세영(蔡世榮)
조구령(趙九齡)
대교(待敎) 권예(權輗)
이공인(李公仁)
검열(檢閱) 이구(李構)
신잠(申潛)
김신동(金神童)
강은(姜㶏)
대제학(大提學) 남곤(南袞)
제학(提學) 김정(金淨)
부제학(副提學) 김구(金絿)
직제학(直提學)
전한(典翰)ㆍ정응(鄭譍)
응교(應敎) 기준(奇遵)
부응교(副應敎) 장옥(張玉)
교리(校理) 조우(趙佑)
부교리(副校理)
수찬(修撰) 권적(權磧)
부수찬(副修撰) 심달원(沈達源)
박사(博士)
저작(著作) 경세인(慶世仁)
정자(正字) 권장(權檣)
김명윤(金明胤)
감사(監司)
경기(京畿) 한효원(韓效元)
충청(忠淸) 신공제(申公濟)
전라(全羅) 김안국(金安國)
경상좌(慶尙左) 이항(李沆)
상동(上同) 문근(文瑾)
강원(江原) 김굉(金硡)
황해(黃海) 김정국(金正國)
함경(咸鏡) 손중돈(孫仲暾)
평안(平安) 허굉(許硡)
개유수(開留守)ㆍ조원기(趙元紀)


난후 인물

난 후 추죄(追罪) 때에 정부 6조(六曹)ㆍ대간(臺諫)ㆍ시종(侍從)은 다음과 같다.
영의정(領議政) 김령(金鈴)
좌의정(左議政) 남곤(南袞)
우의정(右議政) 이유청(李惟淸)
좌찬성(左贊成) 이계맹(李繼孟)
우찬성(右贊成) 장순손(張順孫)
좌참찬(左叅贊) 한세환(韓世桓)
우참찬(右叅贊)
이조 판서(吏曹判書) 심정(沈貞)곤(袞)으로 대신하다.
참판(叅判) 김근사(金謹思)
참의(叅議)
호판(戶判) 고형산(高荊山)
예판(禮判) 신상(申鏛)
병판(兵判) 권균(權鈞)
형판(刑判) 홍숙(洪淑)
공판(工判)
한판윤(漢判尹)
판결사(判決事) 이세정(李世貞)
대사성(大司成)
병참판(兵叅判) 방유녕(方有寧)
대사헌(大司憲) 이항(李沆)
집의(執義) 유관(柳灌)
장령(掌令) 서후(徐厚)
채침(蔡忱)
지평(持平) 오준(吳準) 이순(李純)으로 바꾸다.
이영부(李英符)
대사간(大司諫) 이빈(李蘋)
사간(司諫) 남세준(南世準)
헌납(獻納) 남효의(南孝義)
정언(正言) 조침(趙琛)ㆍ한승정(韓承正)
도승지(都承旨) 윤희인(尹希仁)근사(謹思)로 대신하다.
좌승지(左承旨) 박호(朴壕)
우승지(右承旨) 성운(成雲)
좌부(左副) 윤은필(尹殷弼)
우부(右副) 조옥곤(趙玉崑)
동부(同副) 김희수(金希壽)
주서(注書) 정세호(鄭世虎)
이기(李巙)
대제학수(大提學守) 이행(李荇)
제학(提學) 이항(李沆)
부제학(副提學) 이사균(李思鈞)
직제학(直提學)
전한(典翰) 이지(李遲)
응교(應敎) 유부(柳溥)
부응교(副應敎) 김영(金瑛)
교리(校理) 임추(任樞)
부교리(副校理)
수찬(修撰) 권예(權輗)
부수찬(副修撰) 손수(孫洙)ㆍ이환(李芄)
박사(博士)
저작(著作)
정자(正字)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4권
 전라도(全羅道)
부안현(扶安縣)


동쪽으로 김제군(金堤郡)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13리, 남쪽으로 고부군(古阜郡)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18리, 흥덕현(興德縣)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52리, 북쪽으로 만경현(萬頃縣)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12리, 서쪽으로 바닷가에 이르기까지 11리, 서울과의 거리는 5백 77리이다.
【건치연혁】 부령현(扶寧縣)은 본래 백제 개화현(皆火縣)이었는데, 신라 때 부령 혹 계발(戒發)이라고도 칭한다. 으로 고치어 고부군에 붙였고, 고려 때에도 그대로 붙여 두었다가 후에 감무를 두어 보안(保安)을 겸임하였다. 보안현은 본래 백제 흔량매현(欣良買縣)이었는데, 신라 때 희안(喜安)으로 고치어 고부군에 붙였고, 고려 때 보안으로 고치어 고부군에 그대로 붙여 두었다가, 후에 부령감무로 겸임하게 하였으며, 신우 때에 두 현에 각각 감무를 두었다. 본조 태종 14년에 보안을 다시 부령에 합쳤고, 15년에 또 나누었다가 8월에 다시 합쳤으며, 다음해 7월에 또 나누었다가 12월에 두 현을 또 합치어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익년(翌年)에 흥덕진(興德鎭)을 파하여 본현에 옮겨서 부안진(扶安鎭)이라고 부르고, 병마사(兵馬使)로써 판사(判事)를 겸하게 하였고, 세종 5년에 규례대로 고치어 첨절제사(僉節制使)로 만들었다가 후에 현감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
【군명】 개화ㆍ부령(夫寧)ㆍ계발(戒發)ㆍ보안ㆍ낭주(浪州)ㆍ흔량매ㆍ희안.
【성씨】 【부령】 김ㆍ장(張)ㆍ황(黃)ㆍ이(李)ㆍ신(辛), 심(沈). 내성(來姓)이다. 보안 한(韓)ㆍ송(宋)ㆍ황(黃)ㆍ호(扈)ㆍ안(安)ㆍ임(林)ㆍ임(任). 고촌 호(扈).
【풍속】 풍속은 단자(蜑子 중국 남방 해변가에서 생활하는 종족)와 같다. 이규보의 시에, “습속은 남방 단자와 많이 같으니 현으로 된 것이 잠총국(蠶叢國)으로부터 시작된 줄 어느 누가 믿으랴.” 하였다.
【형승】 변산천부(邊山天府) 이규보의 시에, “변산(邊山)은 예로부터 천부(天府)로 불리면서, 긴 재목 잘 뽑아 동량(棟樑) 재목에 대비하네.” 하였다. 강산청승(江山淸勝) 앞 사람의 시에, “강과 산의 맑고 좋음은 영주(瀛洲)ㆍ봉래(蓬萊)와 겨룰 만하니, 옥을 세우고 은을 녹인 듯 만고에 변하지 않는다.” 하였다.

 

『신증』 【효자】 본조 송세정(宋世貞)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아버지가 종기를 앓는데, 상처를 빨아 병이 나았다. 아버지가 죽자 3년 동안 묘에 여막을 짓고 살았다. 후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너무 슬퍼하더니, 병이 되어 죽었으므로 정문을 세웠다. 이성간(李成幹) 젊었을 때 어머니가 종기를 앓는데, 상처를 빠니 병이 곧 나았다. 아버지가 오랜 병이 있었는데, 몇 년 동안 밤낮으로 시약(侍藥)하고, 옷을 벗지 않았다. 병이 위태하자 똥을 맛 보았고, 죽자 3년 동안 죽을 마셨다. 문랑(文郞) 아버지가 악질(惡疾)을 앓는데, 손가락을 잘라 술에 타서 먹이니 병이 나았다. 일이 나라에 보고되어 정문을 세웠다. 최필성(崔弼成) 어머니가 유종[乳癰]을 앓는데 입으로 빠니 병이 나았다. 아버지가 오랜 병으로 백약(百藥)이 무효하고, 의사의 말은, “박쥐가 있으면 고칠 수 있다.” 하였다. 때는 추운 겨울이라 구하여도 얻지 못하여 울면서 하늘에 호소하니, 박쥐가 저절로 나오므로 잡아 약에 타서 먹였더니 병이 과연 나았다. 후에 또 병이 위태하자 똥을 맛보았고, 죽자 매우 슬퍼하며 예를 다하였다. 일이 나라에 보고되어 상으로 벼슬을 내렸다.【열녀】 본조 김씨(金氏) 일찍 남편을 여의었는데, 부모들이 다시 시집보내려 하자, 김씨는 다른 사람에게는 시집가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강물에 빠져 죽으려 하니, 부모들이 그만 두었다. 김씨는 한평생 흰 옷을 입고 제사를 받들며 고기를 먹지 않았다.

 

중종 21년 병술(1526,가정 5)
 7월3일 (갑신)
전라도 관찰사 유관이 장계를 올려 도내의 효행과 절의를 보고하다

전라도 관찰사 유관(柳灌)이 장계(狀啓)를 올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도내(道內) 각 고을에 효행(孝行)이 뛰어난 자들이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담양부(潭陽府) 서원(書員) 권복(權福)은 일찍 어미를 여의었으므로 은혜에 보답하지 못함을 매우 슬프게 여겨, 매달 1일과 15일에 정성을 다해 제사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비를 섬길 적에는 아침 저녁으로 꼭꼭 문안했고, 아비가 죽어서는 밤낮으로 섧게 울었습니다. 삼년상(三年喪)을 치른 뒤에도 기일(忌日)이 든 달에는 술과 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장수현(長水縣) 유학(幼學) 김경손(金敬孫)은 아비가 죽자 빈소(殯所)를 떠나지 않고 몸이 바싹 여위어 예(禮)에 지나치게 슬퍼했습니다. 물고기와 짐승을 잡아 팔아 어미를 봉양하면서도 항상 맛있는 음식을 사다 드렸기 때문에 1백 살이 넘어서야 죽었습니다. 경손의 나이도 70이었지만 3년 동안 물만 마시고 슬피 울면서 여묘살이를 했습니다. 그간에는 집에 급하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흥덕현(興德縣) 녹사(錄事) 오준(吳俊)은 아비가 종기를 앓을 적에 고름을 입으로 빨아내기도 하고 인분(人糞)을 맛보기도 했습니다. 아비가 죽어서는 예에 지나치게 슬피 울면서 양념 친 음식과 채과(菜果)를 먹지 않았습니다. 나주(羅州) 정병(正兵) 최치강(崔致江)의 양녀(良女) 출신 아내인 능금(能今)은 남편이 죽자 아침저녁으로 피눈물을 흘리면서 섧게 울었고, 봄 가을로 의복을 만들어서 제사지낸 뒤 불에 태웠습니다. 지금 19년이 되었는데도 처음 마음을 변치 않은 채 슬피 울면서 예(禮)를 끝까지 지킴은 물론이고 고기도 먹지 않았습니다.
부안현(扶安縣) 진사(進士) 최필성(崔弼成)은 어미가 유종(乳腫)을 앓아 심한 고통을 당했었습니다. 그런데 약을 먹어도 효과가 없자 입으로 종기를 빨아 치유시켰습니다. 아비인 진사 최수손(崔秀孫)이 악질(惡疾)에 걸려 백약이 무효인 채 달이 지날수록 점점 더 심해졌습니다. 의원이 ‘박쥐를 잡아야 치유시킬 수 있다.’ 했으나 때마침 겨울이라서 아무리 잡으려 찾아보아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부르며 통곡하자 박쥐가 절로 날아왔으므로 이것으로 약을 만들어 먹이니, 그 병이 치유되었습니다. 전 직장(直長) 한숭석(韓崇錫)은 어미가 악성 종기를 앓아 거의 죽게 되자 이를 입으로 빨아서 치유시켰고, 어미가 죽어서는 슬퍼하면서 극진히 삼년상을 치렀습니다. 또 아비 상(喪)을 당해서는 직접 제물을 마련했고, 여묘살이와 제사에 한결같이 지성을 다했습니다. 강진(康津) 별시위(別侍衛) 고수검(高守儉)은 부모상을 당했을 때 아울러 삼년 간 여묘살이를 했고, 이어 분묘 곁에 살면서 아침저녁으로 제사지냈습니다. 국기일(國忌日)에는 술과 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또 검소한 음식으로 제사지내 온 지 25년이 되었지만 조금도 해이함이 없었기 때문에 온 고장이 효자로 추대하고 있습니다. 고부군(古阜郡) 향리(鄕吏) 이성호(李成浩)의 아내 금이(今伊)는 남편에게 쫓겨나자 그 동생이 개가(改嫁)시키려 했으나 죽기로 맹세하고 따르지 않았습니다. 결국 친정에서 도망하여 시집으로 다시 찾아가니, 이를 딱하게 여긴 시아버지가 아들 성호에게 다시 동거(同居)하게 했습니다. 남편이 죽자 주야로 통곡하면서 삼년상을 치른 뒤에도 그대로 상복을 입은 채 방에다 영좌(靈座)를 설치해 놓고 아침저녁으로 제사지냈습니다. 그리고 남편이 살았을 때와 똑같이 의복을 철따라 만들어 두었습니다.
별시위(別侍衛) 이숙손(李叔孫)은 어미 상을 당하여 예(禮)에 지나치게 슬퍼했고 여묘살이를 하면서는 한 번도 집에 내려오지 않았으며, 삼 년 동안 술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옥구현(沃溝縣) 별시위 두세준(杜世俊)은 그 어미가 병이 들어 50여 일동안 누워 있었지만 의대(衣帶)를 벗지 않은 채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는가 하면 인분(人糞)을 맛보아 병 증세를 증험하기도 했습니다. 어미가 죽은 뒤에는 집사람들과 이야기하지 않았고, 어미가 즐기던 물건이면 힘껏 구해다 영전에 바쳤습니다. 또 삼년상을 끝내도록 밤낮으로 통곡 소리가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장성현(長城縣) 단암 역리(丹巖驛吏) 차순년(車舜年)은 지극한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겨 특별히 맛있는 음식을 얻으면 반드시 어버이에게 바쳤습니다. 가절(佳節)을 맞을 때마다 어버이를 위해 잔치를 베풀고 헌수(獻壽)했으며, 반드시 고장의 부로(父老)를 초청해서 함께 즐기게 했습니다. 그 아비 차인보(車仁甫)가 임질(淋疾)에 걸려 소변이 막혀 기절해서 쓰러지자, 순년은 아비를 끌어안고 하느님을 부르면서 살려달라고 애걸했습니다. 이어 아비의 양경(陽莖)을 2일간 입으로 빨자 요도(尿道)가 트였습니다. 이리하여 소변이 통하게 되어 다시 살아났습니다. 전주부(全州府) 생원(生員) 박세직(朴世直)은 타고난 성품이 충후해서 나이 10여 세에 어미를 여의자 3년 동안 애모(哀慕)했고, 늘 어미를 끝까지 섬기지 못한 것을 슬퍼했습니다. 그래서 아비 섬기기를 더욱 삼갔고, 음식물을 봉양함에 있어 아비의 마음에 맞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아비가 죽자 삼 년 동안 죽만 마시고 양념 친 음식을 먹지 않았으며 짚신에 저장(苴杖)을 짚고 동구(洞口) 밖을 나가지 않았습니다. 사노(私奴) 김천동(金千同)은 어미가 악성 종기를 앓자 즉시 손가락을 잘라 태워서 이를 술에 타 먹였습니다. 그랬더니 어미의 병이 즉시 치유되었습니다.
유학(幼學) 박형문(朴衡文)의 처 김씨(金氏)는 남편의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 머리를 빗지 않았고 아침저녁으로 직접 제물을 올렸으며, 밤낮으로 통곡하였습니다. 삼년상을 마친 뒤에도 철따라 옷을 만들어 분묘 앞에 가 곡제(哭祭)한 다음 이를 신주(神主) 앞에 놓아두었고, 철이 바뀌면 전의 옷을 치우고 새옷으로 바꿔놓고는 깨끗한 곳을 가려 울면서 전의 옷을 태웠습니다. 반혼(返魂)하여 제사 지냄에 있어 지금까지 태만하지 않았습니다. 김제군(金提郡) 사노(私奴) 난금(難今)은 그 어버이가 살았을 때는 마음을 다해 효성으로 봉양했고, 어미가 죽은 뒤에는 삼년 간의 여묘살이를 끝낸 다음 이어 분묘 곁에 살았습니다. 또 부지런히 주인(主人)을 섬겼으므로 주인이 늘 궁핍함을 우려해서 마음을 다해 도와주고 있습니다. 또 철따라 수확하는 물건도 주인에게 바치지 않고는 차마 먼저 맛보지 않았습니다. 유학 윤사인(尹師仁)의 아내 박씨(朴氏)는 25세 때 남편을 여읜 뒤 지금까지 16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흰 옷에 검소한 밥을 먹으면서 절일(節日)과 기제(忌祭) 때는 몸소 분묘 앞에 가 초상 때처럼 섧게 울었습니다. 학생(學生) 서치명(徐致明)의 양녀(良女) 출신 아내인 마비(馬非)는 30세 때 남편을 여의었습니다. 그 뒤 21년 간 상복(喪服)을 벗지 않은 채 위판(位版)을 모시고 흰 장막을 쳐놓았습니다. 그리고는 겨울 여름으로 의복을 만들어 영전 앞에 가져다 놓았고, 아침저녁으로 제사지냈습니다. 만경현(萬頃縣) 최치강(崔致江)의 양녀 출신 아내인 금이(今伊)는 37세에 자식도 없이 남편을 여의었습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17년이 되도록 흰 옷을 입고 있고, 고기를 먹지 않은 것은 물론 양념 친 반찬도 먹지 않았습니다. 평상과 장막을 갖추어 신주(神主)를 모신 뒤 향로와 꽃병을 놓고 아침저녁으로 상식(上食)했고, 철따라 나는 새 음식물도 갖추어 올렸습니다. 또 철따라 옷을 만들어 영전에 가져다 놓는데, 전의 옷을 새옷으로 바꿀 때는 그 때마다 반드시 전의 옷을 불태웠습니다. 매달 1일이나 15일, 속절(俗節)에는 병을 앓거나 비바람이 치지 않는 한 반드시 분묘에 올라갔습니다.”
【원전】 16 집 517 면
【분류】 *윤리-강상(綱常)


[주D-001]빈소(殯所) : 발인(發靷)할 때까지 관(棺)을 놓아두는 방을 말한다.
[주D-002]헌수(獻壽) : 오래 살라는 뜻으로 술잔을 올리는 것.
[주D-003]저장(苴杖) : 상중(喪中)에 짚는 검은 지팡이.
[주D-004]절일(節日) : 철따라 드는 명절을 말한다.

중종 23년 무자(1528,가정 7)
 8월21일 (경신)
예조가 효자와 절부에게 상과 복호·정문하여 표창할 것을 건의하다

예조가 효자와 절부(節婦) 등에 관한 공사를 가지고 입계하기를,
“전일에 상께서, 쇠퇴한 세상에 이런 효자와 절부가 있는 것은 그 행실이 가상한 일이니, 포상(褒賞)하는 절목(節目)을 다시 마련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분부하셨습니다. 신들이 정표(旌表)할 만한 것을 고찰해 보건대, 대개 단지(斷指)를 한 것은 특히 일시적인 성의와 감격으로 인해 하는 것이고, 오랜 해가 되도록 효행이 변함 없는 사람이라야 그 효행이 더욱 높은 법인데, 단지한 사람을 옛적의 준례에도 정표했으므로 약간의 사람은 정표해야 합니다. 지난 조광조(趙光祖) 때에 효행이 더욱 특이한 사람을 각도에 이첩하여 모두 뽑아서 신보(申報)하도록 했었는데, 이번의 이 사람들은 그때에 현저하지 못했었으니 실적이 차이가 있었는가 싶습니다. 그러나 보고 듣기에 비록 특이하지는 않을망정 한 가지 일이라도 효행에 관한 것이 있다면 마땅히 물품으로 상을 주고, 그 중에 조금 특이한 사람은 복호(復戶)하고, 또 그 중에 몸을 아끼지 않은 소행이 뚜렷한 사람은 정문(旌門)하여 표창해야 합니다. 문안(文案)으로 본다면, 이 중 특이한 사람은 비록 《삼강행실(三綱行實)》에 실린 사람이라 하더라도 더 할 것이 없으니 마땅히 정문하여 표창해야 합니다. 다만 상께서 절행(節行)을 아름답게 여겨 포상하시려는 뜻을 궁벽한 시골이나 항간 사람들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전교하신 뜻을 이 공사에다 판부(判付)하여 이문(移文)한다면, 외방에서 또한 상의 뜻이 있는 데를 알고 더욱 권면 장려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뜻은 알았다.”
하였다. 그 공사는 다음과 같다.
“전주(全州) 사노(私奴) 김천동(金千同)·강릉(江陵) 유학(幼學) 최응록(崔應祿)·진사(進士) 신명화(申命和)의 아내 이씨(李氏)·함종(咸從) 유학 노인석(盧仁碩)·안주(安州) 군사(軍士) 박호(朴好)의 딸 박덕(朴德)·중부(中部) 사비(私婢) 말덕(末德)·포천(抱川) 한량(閑良) 권거경(權居敬)은 부모를 위하고, 개천(价川) 양녀(良女) 막시(莫時)는 지아비를 위해 육신을 아끼지 않고 손가락을 끊어 태워서 약에 타먹였는데 모두 병에 차도가 있었습니다. 충주(忠州) 전(前) 혜민서 참봉(惠民署參奉) 하숙륜(河叔崙)은 다리의 살을 베고 또한 손가락을 끊어 어미의 병을 치료하였고, 우봉(牛峯) 충순위(忠順衛) 이윤동(李潤童)의 아내 홍씨(洪氏)는 전에 절행이 특이한 때문에 복호(復戶)하여 권장했는데, 그 뒤에도 20여 년이나 정성과 공경이 나태해지지 않고 지절(志節)이 더욱 굳었습니다. 이들의 특이한 행실은 비록 《삼강행실》에 실린 효자나 열부(烈婦)라 하더라도 이들 보다 더할 수 없습니다.
담양(潭陽) 서원(書員) 권복(權福)·장수(長水) 유학 김경손(金敬孫)·흥덕(興德) 녹사(錄事) 오준(吳俊)·부안(扶安) 진사(進士) 최필성(崔弼成)·전 직장(直長) 한숭석(韓崇錫)·강진(康津) 별시위(別侍衛) 고수검(高守儉)·고부(古阜) 별시위 이숙손(李叔孫)·옥구(沃溝) 별시위 두세준(杜世俊)·장성(長城) 역리(驛吏) 차순년(車舜年)·전주(全州) 생원(生員) 박세직(朴世直)·삼척(三陟) 유학 김숭손(金崇孫)·양구(楊口) 호장(戶長) 유담(柳潭)·함종 전 여수(旅帥) 유인달(劉仁達)·순안(順安) 전 참봉(參奉) 박만근(朴蔓根)·고원(高原) 유학 서상인(徐尙仁)·옥천(沃川) 교생(校生) 임세화(林世華)·결성(結城) 유학 유항(兪恒)·김제(金堤) 사노 난금(難金)·홍산(鴻山) 수군(水軍) 김원손(金元孫)·중부 사노 박달(朴達)·옥천 역리 양노(梁老) 등은 각기 부모를 위하여 생전에는 효도를 다하고 사후에는 예법을 다해 조행이 특이했습니다.
나주(羅州) 양녀(良女) 능금(能今)·고부 양녀 금이(今伊)·김제 양녀 마비(馬非)·만경(萬頃) 양녀 금이·가산(嘉山) 갑사(甲士) 방권(方權)의 아내 윤씨(尹氏)·옥천 역리 양녹(梁祿)의 아내 막장(莫藏)·덕산(德山) 양녀 보덕(寶德)·남부(南部) 고 부사(府使) 최계사(崔季思)의 아내 남씨(南氏)·김제 고 유학 윤사임(尹師任)의 아내 박씨(朴氏)·전주 유학 박형문(朴衡文)의 아내 김씨(金氏)·옥천 양녀 석을금(石乙今)·서부(西部) 고 첨지(僉知) 정석희(鄭錫禧)의 첩 양녀 정금(貞今)·운산(雲山) 고 유학 유해(兪諧)의 첩 양녀 중지(中之) 등은 지아비가 죽은 뒤에 상례(喪禮)를 거행하기에 정성이 극진하였는데, 오래도록 달라지지 않아 절행이 가상했습니다. 담양 정병(正兵) 정이(鄭利)·정한(鄭漢)·정진(鄭進)·정윤(鄭倫)은 함께 한 장내(場內)에서 살면서 어미를 봉양하되, 효도하고 우애하는 정이 지성에서 나와 또한 가상했습니다.
전항의 김천동·최응록·하숙륜·신명화의 아내 이씨·노인석·권거경·박덕·말덕·막시·이윤동의 아내 홍씨 등은 《대전》대로 정문하고 복호하며, 서원 권복·유학 김경손·진사 최필성·별시위 두세준·생원 박세직·유학 유항·녹사 오준 등은 관직으로 상주고, 유학 서상인·양녀 능금·양녀 금이·양녀 마비와 금이·사노 박달·역리 차순년과 양노 등은 복호하고 물품으로 상주며, 한숭석·고수검·이숙손·김숭손·유인달·박만근·임세화·김원손·유담·난금·박형문의 아내 김씨·윤사임의 아내 박씨·유해의 아내 중지·방권의 아내 윤씨·양녀 석을금·보덕·정금·막장·최계사의 아내 남씨·정이 정한 정진 정윤은 물품으로 상을 주어 권장함이 어떻겠습니까?”
【원전】 17 집 28 면
【분류】 *윤리-강상(綱常) / *군사-군역(軍役) / *인사-관리(管理) / *신분(身分)


[주D-001]여수(旅帥) : 5대(隊)인 1백 25명의 군사를 거느리는 우두머리이다.

剛齋先生集卷之九
 墓表
默齋崔公墓表 a_271_201c


扶安士人崔君觀錫,元錫。以其八世祖默齋公行蹟。來示余曰。吾諸族竭力經紀。將豎表于墓。不可無陰記。而世代久遠。文蹟散逸。略掇譜牒傍註及家傳舊聞者如斯。願賜一言以賁之。按公諱活。字濬遠。全州人。高麗侍中文成公阿。爲鼻祖。三傳至諱霮。入我朝。官戶曹參議集賢殿提學。號月塘。卽公之五世也。高祖諱匡之。直提學。曾祖諱生明。以生員薦授京市殿直。文宗朝。從季父煙村先生德之恬退。時人。擬之二疏。始家于扶安。祖諱秀孫。進士。遊金寒暄門。有271_201d至行。考諱繼成。生員。與兄進士弼成。俱蒙㫌孝之典。事載三綱錄。三世四公。俱腏鄕祠。妣某氏。某官某女。蓋公生於孝友之門。有篤行邃學。而累經兵火。家乘殘缺。生卒年月。亦不傳。况實蹟乎。公伯仲二兄。同發解。赴省試。到恩津之沙橋。並沒于浩洋。公不勝傷悼。遂絶意科宦。扁其居曰默齋。而飭躳讀書。敎導後進。薦授禮賓寺奉事。亦不就。此爲可據之最。而其述先貽後。足以推之矣。何必多乎哉。墓在縣南席洞子坐原。配扶寧金氏。通政義貞之女。止浦文貞公坵之後。墓在公墓下。有三男長時立。仲山立。季善立。長季皆271_202a奉事。孫曾以下。不能盡錄。余之陋劣謏寡。非可以闡幽於久遠者。而觀錫從遊多年。且嘗爲之記月塘公遺墟碑。重感其世德之綿延。輒忘蕪拙。略書此。俾歸刻焉。


전라도(全羅道)
임실
(任實) 구고사우(九臯祠宇) 경자년에 세웠다. : 김천일(金千鎰)ㆍ박번(朴蕃) 호는 인덕정(仁德亭), 벼슬은 교수(敎授)이다.ㆍ박훈(朴薰) 호는 수심정(收心亭), 진사이다.ㆍ홍붕(洪鵬) 호는 경재(敬齋), 벼슬은 첨정(僉正)이다. 추향되었다.ㆍ이흥순(李興淳) 호는 운암(雲巖), 사간(司諫)을 지냈다.ㆍ조평(趙平) 호는 운학(雲壑), 벼슬은 세마(洗馬)이다.
부안(扶安) 도동서원(道洞書院) 가정(嘉靖) 갑오년에 세웠다. : 김구(金坵) 고려 평장사(平章事)이다.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ㆍ김여맹(金汝孟) 구(坵)의 아들이며 문한학사(文翰學士)이다.ㆍ최수손(崔秀孫) 호는 고궁당(固窮堂), 진사이다.ㆍ성중엄(成重淹) 무오화적(戊午禍籍)ㆍ김석홍(金錫弘) 호는 옹천(瓮泉), 군수(郡守)를 지냈다.ㆍ홍익한(洪翼漢)ㆍ최필성(崔弼成) 수손(秀孫)의 아들이다.ㆍ김계(金啓) 호는 설강(雪江), 참판을 지냈다.
파산서원(巴山書院) 계유년에 세웠는데 지금의 이름은 동림서원(東林書院)이다. : 유형원(柳馨遠) 호는 반계(磻溪)이다.ㆍ유문원(柳文遠) 호는 삼우당(三友堂), 진사이다.ㆍ김서경(金瑞慶) 호는 담계(澹溪)이다.
유천서원(柳川書院) 숙종 임진년에 세웠다. : 허진동(許震童) 호는 동상(東湘), 판관(判官)을 지냈다.ㆍ김택삼(金宅三) 호는 농암(礱岩), 벼슬은 주부(主簿)를 지냈다.
청계서원(淸溪書院) 무자년에 세웠다. : 송세정(宋世貞) 호는 도봉(道峯), 진사이다.ㆍ이승간(李承幹) 호는 석호(石湖)이다.
담양(潭陽) 의암서원(義巖書院) 만력(萬曆) 계축년에 세웠다. 숙종 신유년에 사액하였다. : 유희춘(柳希春) 을사년의 명신(名臣)이다.
귀산서원(龜山書院) 갑신년에 세웠다. : 송순(宋純)ㆍ송정순(宋廷筍) 호는 물염(勿染), 벼슬은 예조 정랑(禮曹正郞)이다.ㆍ김언욱(金彦勗) 호는 서석(瑞石), 벼슬은 사평(司評)을 지냈다.ㆍ김응회(金應會) 호는 청계(淸溪), 벼슬은 별제(別提)를 지냈다.ㆍ이안눌(李安訥)ㆍ나무춘(羅茂春) 호는 구봉(九峯), 이조 참의에 증직되었다.ㆍ송희경(宋希璟) 호는 노송(老松)이며 벼슬은 판결사(判決事)이다.ㆍ송징(宋徵) 호는 율옹(栗翁), 진사이다.ㆍ김대기(金大器) 호는 만덕(晩德), 처사이다.
익산(益山) 남촌서원(南村書院) 천계(天啓) 계해년에 세웠다. : 이공수(李公遂) 호는 남촌(南村)이며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 고려 때 익산부원군(益山府院君)에 봉해졌다.ㆍ소세량(蘇世良) 호는 곤암(困庵), 대사간을 지냈다.ㆍ소세양(蘇世讓)ㆍ이약해(李若海) 명종조에 들어 있다.ㆍ소동도(蘇東道) 호는 면와(眠窩), 감사를 지냈다.ㆍ소영복(蘇永福) 호는 발영당(發永堂), 진사이다.ㆍ소광진(蘇光震) 호는 후천(后泉), 벼슬은 교리(校理)다.
전주(全州) 화산서원(華山書院) 만력(萬曆) 무인년에 세웠으며 임인년에 사액하였다. : 이언적(李彦迪)ㆍ송인수(松麟壽)
서산사우(西山祠宇) 인조 병술년에 세웠다. : 최양(崔瀁) 호는 만육(晩六), 대제학을 지냈다.ㆍ최덕지(崔德之)ㆍ송영구(宋英耈)ㆍ이계맹(李繼孟)ㆍ이흥발(李興浡)ㆍ이기발(李起浡) 호는 서귀(西龜), 도승지(都承旨)를 지냈다.
인봉사우(麟峯祠宇) 숭정(崇禎) 병술년에 세웠다. : 최명룡(崔命龍) 호는 석계(石溪), 진사이다.ㆍ김동준(金東準) 호는 봉곡(鳳谷), 감찰을 지냈다.
학봉사우(鶴峯祠宇) 현종 기유년에 세웠다. : 이정란(李廷鸞) 전주 부윤(全州府尹)을 지냈다.ㆍ신중경(申重慶) 호는 금서당(琴書堂)이다.ㆍ이상진(李尙眞) 숙종 때의 정승이다.
진도사우(珍島祠宇) : 노수신(盧守愼)ㆍ이경여(李敬輿)ㆍ정홍익(鄭弘翼)ㆍ김수항(金壽恒)ㆍ남이성(南二星) 호는 의졸(宜拙), 예조 판서를 지냈다.ㆍ신명규(申命圭) 호는 적안(適安), 집의(執義)를 지냈다.ㆍ이민서(李敏叙)ㆍ조태채(趙泰菜)
나주(羅州) 경현서원(景賢書院) 만력 계미년에 세웠고, 정미년에 사액하였다. :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조광조(趙光祖)ㆍ이언적(李彦迪)ㆍ이황(李滉)ㆍ김성일(金誠一)
정렬사(旌烈祠) 만력 병오년에 세웠으며 정미년에 사액하였다. : 김천일(金千鎰)ㆍ김상건(金象乾)ㆍ양산숙(梁山璹)ㆍ임회(林檜)
월정서원(月井書院) 경자년에 세웠고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 박순(朴淳)
반계서원(潘溪書院) 갑술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박상충(朴尙衷)ㆍ박소(朴紹)ㆍ박세채(朴世采)ㆍ박태보(朴泰輔)
미천서원(眉泉書院) 숙종 임신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허목(許穆)
죽봉사우(竹峯祠宇) 갑진년에 세웠다. : 유준(柳浚) 호는 사교당(四矯堂), 벼슬은 판관(判官)이다.ㆍ유상운(柳尙運) 숙종 때의 정승이다.
송재사우(松齋祠宇) 임오년에 세웠다. : 나세찬(羅世纘)ㆍ임형수(林亨秀)
창계서원(滄溪書院) 경인년에 세웠다. : 임영(林泳)
설재서원(雪齋書院) 무진년에 세웠다. : 정가신(鄭可臣) 호는 설재(雪齋), 벼슬은 중찬(中贊)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정공(文靖公)이다.ㆍ정식(鄭軾) 병조 판서를 지냈으며 시호는 경무공(景武公)이다. 가신(可臣)의 5대손이다.ㆍ신장(申檣) 호는 암헌(巖軒)이며 숙주(叔舟)의 아버지이다.
영광사우(榮光祠宇) 숙종 임진년에 세웠다. : 이원(李黿) 무오당적(戊午黨籍)에 들어 있다.ㆍ이해(李懈) 호는 모산(茅山), 진사이다.ㆍ이영우(李永祐) 호는 야은(野隱), 진사이다.ㆍ이유경(李有慶) 호는 오풍(五楓), 사부(師傅)를 지냈고 정랑(正郞)에 증직되었다.
서하사우(西河祠宇) 숙종 갑신년에 세웠다. : 이민서(李敏叙)ㆍ이건명(李健命)ㆍ이관명(李觀命)
□□영당(□□影堂) : 오자치(吳自治) 참판을 지냈으며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양평공(襄平公)이다.
장성(長城) 필암서원(筆菴書院) 만력 경인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김인후(金麟厚) 인종 때의 명신(名臣)
모암서원(慕巖書院) 전조(前朝) 때 세웠는데 인조 무자년에 중수(重修)하였다. : 서능(徐稜) 고려 시중(侍中)을 지냈으며 절의(節義)와 효도가 지극하였다.ㆍ조영규(趙英圭) 군수를 지냈다. 앞에 있다.ㆍ조정로(趙廷老) 영규(英圭)의 아들인데 별검(別檢)에 증직되었다.ㆍ최학령(崔鶴齡) 호는 율리(栗里), 진사이다.ㆍ정운룡(鄭雲龍) 호는 하곡(霞谷), 왕자사부(王子師傅)를 지냈다.
봉암서원(鳳巖書院) 정축년에 세웠다. : 변이중(邊以中) 호는 망암(望庵), 벼슬은 종정(宗正)을 지냈고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ㆍ변경윤(邊慶胤) 호는 자하(紫霞), 예조 정랑을 지냈으며 참의에 증직되었다.
추산서원(秋山書院) 을유년에 세웠다. : 기건(奇虔)ㆍ기효간(奇孝諫)ㆍ기정익(奇挺翼) 호는 송암(松巖), 참봉이다.
□□영당 임인년에 세웠다. : 김영렬(金英烈) 병조 참판을 지냈으며 우의정에 증직되었다. 의성군(義城君)을 봉했고 시호는 양효공(良孝公)이며, 호는 맹암(孟巖)이다.
학림서원(鶴林書院) 임진년에 세웠다. : 김영렬(金英烈)ㆍ박희중(朴熙中) 호는 위남(葦南), 벼슬은 직학(直學)을 지냈다.ㆍ김은(金穩) 호는 학천(鶴川), 벼슬은 부사(府使)를 지냈다.ㆍ김응두(金應斗) 호는 서천(逝川), 응교(應敎)를 지냈다.ㆍ박준철(朴濬哲) 호는 기양(岐陽), 진사이다.
영광(靈光) 수강서원(壽崗書院) 기묘년에 세웠다. : 송흠(宋欽)ㆍ이장영(李長榮) 호는 죽곡(竹谷), 대사간을 지냈다.
용암사우(龍巖祠宇) 임술년에 세웠다. : 윤황(尹煌)ㆍ윤선거(尹宣擧)
장천사우(長川祠宇) 임진년에 세웠다. : 심우신(沈友信) 첨정(僉正)을 지냈으며 참판에 증직되었다. 임진왜란 때 사절(死節)하였다.ㆍ이제형(李齊衡) 호는 취수헌(醉睡軒), 군수를 지냈다.ㆍ이단석(李端錫) 호는 쌍호(雙壺), 문과 병사(文科兵使)를 지냈다.
용계사우(龍溪祠宇) 임자년에 세웠다. : 강항(姜沆) 임진록(壬辰錄)에 있다.ㆍ윤순거(尹舜擧)
무장영당(畝長影堂) 태종이 화상(畫像)을 내렸다. : 이천우(李天祐)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에 봉해졌다.
백산사우(栢山祠宇) 경종 계묘년에 세웠다. : 이세필(李世弼)
백산영당(栢山影堂) 임진년에 세웠다. : 이제현(李齊賢)
광주(光州) 월봉서원(月峯書院) 숭정(崇禎) 병술년에 세웠으며 효종 을미년에 사액하였다. : 박상(朴祥)ㆍ박순(朴淳)ㆍ기대승(奇大升)ㆍ김장생(金長生)ㆍ김집(金集)
포충사(褒忠祠) 만력 신축년에 세웠으며 신묘년에 사액하였다. : 고경명(高敬命)ㆍ고종후(高從厚)ㆍ고인후(高因厚)ㆍ유팽로(柳彭老)ㆍ안영(安瑛)
의열사(義烈祠) 만력 갑진년에 세웠으며 신유년에 사액하였다. : 박광옥(朴光玉) 자는 중수(重粹), 호는 회재(懷齋)이다. 지평(持平)을 지냈고 율곡의 문인이다.ㆍ김덕령(金德齡)ㆍ오두인(吳斗寅)
천동사우(泉洞祠宇) 갑신년에 세웠다. : 이민서(李敏叙)ㆍ이건명(李健命)
경렬사우(景烈祠宇) 갑신년에 세웠다. : 정지(鄭地) 삼도절제사(三道節制使)가 되었으며, 시호는 경렬공(景烈公)이다.ㆍ정충신(鄭忠信)ㆍ김상의(金尙義) 귀성 부사(龜城府使)이다.
운암서원(雲巖書院) 병진년에 세웠다. : 송제민(宋濟民) 호는 해광(海狂), 처사이다.ㆍ권운(權韗)ㆍ송타(宋柁) 호는 화암(禾庵), 진사이다.
태인(泰仁) 남고서원(南皐書院) 만력 정축년에 세웠으며 을축년에 사액하였다. : 이항(李恒)ㆍ김천일(金千鎰)
무성서원(武城書院) 만력 을묘년에 세웠으며 을축년에 사액하였다. : 최치원(崔致遠)ㆍ신잠(申潛)ㆍ정극인(丁克仁) 호는 불우헌(不憂軒), 정언(正言)을 지냈다.ㆍ송세림(宋世琳) 호는 눌암(訥庵), 예조 정랑을 지냈다.ㆍ정언충(鄭彦忠) 호는 묵재(默齋), 참봉을 지냈다.ㆍ김약묵(金若默) 호는 성재(誠齋), 양주(楊州) 목사를 지냈다.ㆍ김관(金灌) 진사
모충사(慕忠祠) 병오년에 세웠다. : 백광언(白光彦) 첨사(僉使)를 지냈으며 병조 판서에 증직되었다.ㆍ김덕린(金德麟) 훈련원 판관(訓練院判官)을 지냈다.
보성(寶城) 정충사(旌忠祠) 숙종 정사년에 세웠으며 경오년에 사액하였다. : 안홍국(安弘國) 보성(寶城) 군수를 지냈으며 찬성(贊成)에 증직되었다.
용산사우(龍山祠宇) 만력 정미년에 세웠으며 숙종 정해년에 사액하였다. : 박광전(朴光前) 호는 죽천(竹川), 벼슬은 익위(翊衛)를 지냈으며 승지에 증직되었다. 퇴계의 문인이다.
대계서원(大溪書院) 효종 정유년에 세웠으며 숙종 갑신년에 사액하였다. : 안방준(安邦俊)
양산사(梁山祠) 신묘년에 세웠다. : 염세경(廉世慶) 효자(孝子)이다.
무장(茂長) 충현사(忠賢祠) 만력 무신년에 세웠으며 광해군 때에 사액하였다. : 이존오(李存吾)ㆍ유희춘(柳希春)
도암향현사(道巖鄕賢祠) 신미년에 세웠다. : 김질(金質) 호는 영모당(永慕堂), 진사이다.
죽산향현사(竹山鄕賢祠) 숙종 계유년에 세웠다. : 오익창(吳益昌) 호는 사호(沙湖), 공조 정랑을 지냈다.
순천(順天) 옥천서원(玉川書院) 가정(嘉靖) 갑자년에 세웠고, 무진년에 사액하였다. : 김굉필(金宏弼)
정충사(旌忠祠) 계묘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장윤(張潤)
충민사(忠愍祠) 만력 경자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이순신(李舜臣)ㆍ이억기(李億祺)ㆍ안홍국(安弘國)
지봉서원(芝峯書院) 계유년에 세웠다. : 이수광(李晬光)
겸천서원(謙川書院) 숙종 경인년에 세웠다. : 조유(趙瑜) 호는 처곡(處谷), 고려조의 절신(節臣)인데, 태조조(太祖朝)에 들었다.ㆍ조숭문(趙崇文) 유(瑜)의 아들이며, 사육신(死六臣)과 함께 화를 입었다. 병사(兵使)를 지냈고, 추향되었다.ㆍ조철산(趙哲山) 숭문(崇文)의 아들이요, 성승(成勝)의 사위다. 육신(六臣)의 변에 함께 화(禍)를 입었다.
청사사(靑莎祠) : 정소(鄭沼) 호는 청사(靑莎), 진사이다. 본관은 연일(延日)이다.
여산(礪山) 죽림서원(竹林書院) : 조광조(趙光祖)ㆍ이황(李滉)ㆍ이이(李珥)ㆍ김장생(金長生)ㆍ성혼(成渾)ㆍ송시열(宋時烈)
향현사(鄕賢祠) 임진년에 세웠다. : 남명한(南溟翰) 호는 취은(醉隱), 주부(主簿)에 증직되었다.ㆍ남두건(南斗健) 호는 경재(敬齋)ㆍ이계맹(李繼孟) 기묘록(己卯錄)에 들어 있다.ㆍ이순인(李純仁) 호는 고담(孤潭), 승지를 지냈다.
김제(金堤) 용암서원(龍巖書院) 임자년에 세웠다. : 조간(趙簡) 호는 열헌(悅軒), 시호는 문량공(文良公)이다.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다.ㆍ이계맹(李繼孟)ㆍ나안세(羅安世) 호는 달계(達溪), 교리를 지냈다.ㆍ윤추(尹推) 호는 농은(農隱), 장령을 지냈다.ㆍ이세필(李世弼)ㆍ나응삼(羅應參) 호는 구산(龜山), 처사이다.
백석사우(白石祠宇) 계사년에 세웠다. : 유읍(柳揖) 호는 백석(白石), 벼슬은 자의(諮議)를 지냈으며 지평에 증직되었다.ㆍ조속(趙涑)
임파(臨陂) 봉암서원(鳳岩書院) 경오년에 세웠으며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김집(金集) 앞에 있다.ㆍ김구(金絿)
동복(同福) 도원서원(道源書院) 무신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최산두(崔山斗)ㆍ정구(鄭逑)ㆍ임억령(林億齡)ㆍ안방준(安邦俊)
금산(錦山) 성곡서원(星谷書院) 만력 정사년에 세웠으며 현종 계묘년에 사액하였다. : 김신(金侁) 중국에 가서 참정(參政)을 지냈다.ㆍ윤택(尹澤) 호는 율정(栗亭), 찬성을 지냈고,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 본관은 무송(茂松)이며, 공민왕 때에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냈으며 고향인 금주(錦州)에 돌아가 죽었다.ㆍ길재(吉再)ㆍ김정(金淨)ㆍ고경명(高敬命)ㆍ조헌(趙憲)
종용사(從容祠) 숭정(崇禎) 갑술년에 세웠으며 현종 계묘년에 사액하였다. : 고경명(高敬命)ㆍ조헌(趙憲)ㆍ고인후(高因厚)ㆍ변응정(邊應井)ㆍ안영(安瑛)ㆍ유팽로(柳彭老)ㆍ이광륜(李光輪)ㆍ조택기(趙宅基)ㆍ한순(韓楯)ㆍ승 영규(僧靈圭)
향현사(鄕賢祠) : 한교(韓皦) 벼슬은 직학(直學)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ㆍ이유택(李惟澤) 호는 송곡(松谷), 현감을 지냈다.
반계서원(磻溪書院) : 이유태(李惟泰) 용강서원(龍江書院) : 송준길(宋浚吉)ㆍ송시열(宋時烈)ㆍ유계(兪棨) 산천사(山泉祠) : 윤선거(尹宣擧)ㆍ윤증(尹拯)ㆍ윤추(尹推) 부이영당(富移影堂) : 길재(吉再)의 네 군데 서원(四院)은 모두 영종 신유년에 철폐(撤廢)하였다.
무안(務安) 송림서원(松林書院) 정해년에 세웠으며 임술년에 사액하였다. : 김권(金權)ㆍ유계(兪棨)
녹동서원(鹿洞書院) 숭정 경오년에 세웠으며 계사년에 사액하였다. : 최덕지(崔德之)ㆍ최충성(崔忠成) 덕지(德之)의 손자이다. 호는 산당(山堂), 진사이다.ㆍ김수항(金壽恒)ㆍ김창협(金昌協)
죽정사우(竹亭祠宇) 신유년에 세웠다. : 박성건(朴成乾) 호는 오한(五恨), 현감을 지냈다.ㆍ박권(朴權) 호는 고광(孤狂), 벼슬은 정언이다.ㆍ박규정(朴奎精) 호는 수옹(壽翁), 생원이다.ㆍ이만성(李晩成)
서하사(西河祠) 정사년에 세웠다. : 조행립(曺行立)
고부(古阜) 정충사(旌忠祠) 숭정 신미년에 세웠으며 정유년에 사액하였다. : 송상현(宋象賢)ㆍ신호(申浩) 군수를 지냈으며 판서에 증직하였다. 시호는 무장공(武壯公)이다.ㆍ김준(金浚) 목사를 지냈으며 찬성에 증직되었다. 정묘록에 들어 있다.
도계서원(道溪書院) 계축년에 세웠다. : 이희맹(李希孟) 호는 익재(益齋), 시호는 문안공(文安公)이다.ㆍ김재(金齋) 호는 오봉(鰲峯), 장령을 지냈다.ㆍ최안(崔安) 호는 모암(慕庵), 직장(直長)을 지냈다.ㆍ김지수(金地粹) 호는 태천(苔川), 승지를 지냈다.ㆍ김제안(金齊顔) 호는 죽헌재(竹軒齋), 민(閔)의 아우이다.
흥양(興陽) 쌍충사(雙忠祠) 임술년에 중건(重建)하였고, 사액하였다. : 이대원(李大源) 벼슬은 녹도 만호(鹿島萬戶)이다. 명조조 을묘왜변에 상세하다.ㆍ정운(鄭運)
정읍(井邑) 충렬사(忠烈祠) 경신년에 세웠다. : 이순신(李舜臣)
고암서원(考巖書院) 갑술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송시열(宋時烈)
장흥(長興) 예양서원(汭陽書院) 만력 임자년에 세웠다. : 이색(李穡)ㆍ남효온(南孝溫)ㆍ김광원(金光遠) 호는 월봉(月峯), 진사이다.ㆍ신잠(申潛)ㆍ유호인(劉好仁) 호는 육방(六放), 진사에 급제하여 참봉을 지냈고 율곡의 문인이다.
연곡서원(淵谷書院) 무술년에 세웠으며 병오년에 사액하였다. : 민정중(閔鼎重)ㆍ민유중(閔維重)
월천사우(月川祠宇) 임오년에 세웠다. : 문익점(文益漸)ㆍ문위세(文緯世) 호는 풍암(楓巖), 목사이다.
양강사우(楊江祠宇) 경진년에 세웠다. : 김경추(金景秋) 호는 죽정(竹汀) 또는 송정(松亭)이다.
충렬사우(忠烈祠宇) 신미년에 세웠다. : 한온(韓薀) 벼슬은 부사(府使)를 지냈으며 병조 판서에 증직되었다.ㆍ정명세(鄭名世) 호는 독곡(獨谷), 현감을 지냈고 승지에 증직되었다.
포충사(褒忠祠) 숙종 을유년에 세웠다. : 선세강(宣世綱) 호는 매곡(梅谷), 영장(營將)을 지냈으며, 참판에 증직되었다.
죽천사우(竹川祠宇) 을사년에 세웠다. : 위덕의(魏德毅) 호는 청계(聽溪), 병조 좌랑을 지냈고, 참의에 증직되었다.
감호영당(鑑湖影堂) 숙종 정사년에 세웠다. : 전녹생(田祿生) 호는 야계(壄溪), 벼슬은 고려조의 사인(舍人)이다.ㆍ전유추(田有秋) 호는 송담(松潭)
남평(南平) 봉산서원(蓬山書院) 숭정 경인년에 세웠으며 현종 정미년에 사액하였다. : 백인걸(白仁傑)
풍산사우(楓山祠宇) 숙종 무오년에 세웠다. : 정준일(鄭遵一) 호는 향북당(向北堂), 참봉이다.ㆍ김만영(金萬英) 호는 남포(南浦), 벼슬은 세마(洗馬)이다.ㆍ임세정(任世鼎) 호는 일신재(日新齋), 지평을 증직하였고, 추향되었다.ㆍ정익신(鄭翊臣) 호는 초심당(草心堂), 참봉이다.
용구사우(龍丘祠宇) 병술년에 세웠다. : 서봉령(徐鳳齡) 호는 용구(龍丘), 참봉이다.ㆍ조상우(趙相愚) 추향되었다.
능주(綾州) 죽수서원(竹樹書院) 융경(隆庚) 경오년에 세웠으며 갑오년에 사액하였다. : 조광조(趙光祖)ㆍ양팽손(梁彭孫) 기묘록(己卯錄)에 들어 있다.
포충사우(褒忠祠宇) 만력 을유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최경회(崔慶會)ㆍ조현(曺顯) 병사(兵使)에 증직되었다.ㆍ문홍헌(文弘獻) 진사인데 지평에 증직되었고 계사년에 전사(戰死)하였다.
도산사우(道山祠宇) 효종 병신년에 세웠다. : 안방준(安邦俊)
용담(龍潭) 삼천서원(三川書院) 현종 정미년에 세웠고 숙종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안자(顔子)ㆍ백정자(伯程子)ㆍ숙정자(叔程子)ㆍ주자(朱子)ㆍ제갈무후(諸葛武侯)
순창(淳昌) 화산서원(花山書院) 만력 정미년에 세웠다. : 신말주(申末舟) 호는 귀래공(歸來公), 형조 참의를 지냈다.ㆍ김정(金錚)ㆍ김인후(金麟厚)ㆍ고경명(高敬命)ㆍ김천일(金千鎰)
남원(南原) 노봉서원(露峯書院) 기축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홍순복(洪順福) 호는 고암(顧庵)이며 진사인데 기묘 명현(己卯名賢)이라 부른다.ㆍ최상중(崔尙重) 호는 미능재(未能齋), 사간(司諫)을 지냈다.ㆍ오정길(吳廷吉) 호는 해서(海西), 벼슬은 정자(正字)다.ㆍ최온(崔薀) 호는 폄재(砭齋), 승지를 지냈다.ㆍ최휘지(崔徽之) 호는 오주(鰲州), 벼슬은 익위(翊衛)이다.
현계서원(玄谿書院) 숙종 신사년에 세웠다. : 이능간(李凌幹) 문하시중을 지냈으며 영천부원군(寧川府院君)에 봉해졌다.ㆍ정염(丁焰) 호는 만헌(晩軒)이며 광주 목사이다.ㆍ변유(邊瑜) 호는 정묵재(靜默齋), 추향되었다.ㆍ정견(丁涀) 호는 육졸(六拙), 추향되었다.
요계서원(蓼溪書院) 갑술년에 세웠다. : 김화(金澕) 호는 재간당(在澗堂), 참봉이다.ㆍ이상형(李尙馨) 호는 천묵재(天默齋), 수찬을 지냈고 부제학에 증직되었다.ㆍ김지순(金之純) 호는 담암(澹巖), 참봉이다. 추향되었다.ㆍ김지백(金之白) 호는 용암(舂巖), 참봉이다. 추향되었다.
고암서원(高巖書院) 갑술년에 세웠다. : 진극순(陳克純) 호는 환성당(喚醒堂), 처사이다.ㆍ황신귀(黃信龜) 호는 운계(雲溪), 벼슬은 도사(都事)이다.
영천서원(寧川書院) 만력 무오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안처순(安處順) 호는 사재당(思齋堂), 판관을 지냈다.ㆍ정환(丁煥) 호는 회산(檜山), 벼슬은 도사이다.ㆍ정황(丁熿) 을사록(乙巳錄)에 들어 있다.ㆍ이대유(李大㕀) 호는 활계(活溪), 좌랑을 지냈다.
방산서원(方山書院) 계미년에 세웠다. : 노진(盧禛)ㆍ윤효손(尹孝孫)ㆍ최행(崔荇) 호는 성만(星灣), 좌윤(左尹)을 지냈다.ㆍ이경석(李景奭) 인조 때의 정승
우룡서원(右龍書院) 만력 기묘년에 세웠고 사액되었다. : 노진
충렬사(忠烈祠) 만력 임자년에 세웠고 계사년에 사액하였다. : 정기원(鄭期遠)ㆍ이복남(李福男)ㆍ임현(任鉉)ㆍ김경로(金敬老)ㆍ신호(申灝)ㆍ이덕회(李德恢)ㆍ이원춘(李元春)ㆍ오흥업(吳興業) 추향되었다. 정유왜란 때에 순국했다. 칠충신사(七忠臣祠)라고도 한다.
정충사(旌忠祠) 인조 기축년에 세웠으며 계사년에 사액하였다. : 황진(黃進)ㆍ고득뢰(高得賚) 군수를 지냈으며 우윤(右尹)에 증직되었다.ㆍ안영(安瑛)
용호영당(龍湖影堂) 영종 갑자년에 세웠다. : 송 여남전(宋呂藍田)ㆍ주자(朱子)
곡성(谷城) 덕양사우(德陽祠宇) 만력 기축년에 세웠고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신숭겸(申崇謙) 선조 22년에 세웠고 숙종 21년에 사액하였다.
□□영당 정사년에 세웠다. : 안유(安裕)
강진(康津) 서봉서원(瑞峯書院) 만력 경인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이후백(李後白)ㆍ백광훈(白光勳)ㆍ최경창(崔慶昌)
월남영당(月南影堂) : 이의경(李毅敬) 고금도(古今島)의 관왕묘(關王廟)에 진린(陳璘)과 이순신을 배향하였다. 제사조(諸祀條)에 들어 있다.
장수(長水) 창계서원(滄溪書院) 기축년에 세웠다. : 황희(黃喜)ㆍ황수신(黃守身) 세조 때의 정승ㆍ유호인(兪好仁)ㆍ장응두(張應斗) 호는 송탄(松灘), 생원이다.
옥과(玉果) 영귀서원(詠歸書院) 계유년에 세웠다. : 김인후(金麟厚)ㆍ유팽로(柳彭老)ㆍ이흥발(李興浡)ㆍ신이강(辛二剛) 호는 청파(靑坡)이다.
용안(龍安) □□영당 : 이단하(李端夏)ㆍ이세필(李世弼)
운봉(雲峯) 용암서원(龍巖書院) 갑술년에 세웠다. : 정몽주(鄭夢周)ㆍ박광옥(朴光玉)ㆍ황일호(黃一皓)ㆍ변사정(邊士貞) 호는 도탄(桃灘), 첨정(僉正)을 지냈다.ㆍ노형필(盧亨弼) 호는 운제(雲堤), 벼슬은 사부(師傅)이다.ㆍ서식(徐湜) 호는 명암(銘巖), 효자(孝子)이다.
창평(昌平) 송강서원(宋江書院) 임오년에 세웠으며 을유년에 사액하였다. : 정철(鄭澈)
절산사우(節山祠宇) 숙종 기축년에 세웠다. : 박이관(朴以寬) 호는 보옹(葆翁), 벼슬은 보덕(輔德)을 지냈다.ㆍ박이홍(朴以弘) 이관(以寬)의 아우이다. 호는 월영(月暎), 진사이다.
내동사우(內洞祠宇) 계해년에 세웠다. : 우유일(禹惟一) 호는 이우당(二友堂), 벼슬은 전적(典籍)이다.
죽림사우(竹林祠宇) 숙종 무자년에 세웠다. : 조수문(曺秀文) 호는 죽림(竹林), 진사이다.ㆍ조호(曺浩) 호는 운곡(雲谷), 수문(秀文)의 아들이다.ㆍ조부(曺溥) 호는 삼청당(三淸堂), 벼슬은 전적이다.
함평(咸平) 기산사우(箕山祠宇) 숙종 을유년에 세웠다. : 박정원(朴鼎元) 호는 동호(東湖), 벼슬은 도사다.ㆍ이후정(李后定) 호는 만안(晩安), 응교를 지냈고 기묘년에 절개를 지켰다.
월산사(月山祠) : 이순신(李舜臣)ㆍ이덕일(李德一) 벼슬은 우후(虞侯)이다. 추향되었다.
수산사우(水山祠宇) 숙종 기축년에 세웠다. : 임영(林泳)
증산사우(甑山祠宇) 숙종 임오년에 중건하였다. : 김덕생(金德生) 호는 증산(甑山), 용력(勇力)과 기절(氣節)이 있었고, 벼슬은 좌명공신(佐命功臣)이다. 태종의 잠저(潛邸) 때 몸바쳐 보호하였다. 뒤에 원통하게 죽었다. 세종 때에 증직되었다.
모평사우(牟平祠宇) : 이유인(李有仁) 호는 파우(破愚), 참봉이다.
금구(金溝) 귀성사우(龜城祠宇) 숙종 신사년에 세웠다. : 윤순거(尹舜擧)ㆍ윤증(尹拯)
육송사우(六松祠宇) 현종 계묘년에 세웠다. : 김관(金瓘) 병조 판서를 지냈으며 시호는 공양공(恭讓公)이다.ㆍ김승서(金承緖) 호는 귀암(龜巖), 참봉이다.ㆍ송정기(宋廷耆) 호는 죽계(竹溪), 추향되었다.ㆍ김천서(金天瑞) 참봉이다. 추향되었다.
해남사우(海南祠宇) 경인년에 세웠다. : 이순신(李舜臣)ㆍ유형(柳珩)ㆍ이계년(李桂年) 첨정(僉正)을 지냈으며 참판에 증직되었다.ㆍ이유길(李有吉) 현령(縣令)을 지냈으며 참판에 증직되었다. 이 두 사람은 추향되었다.
흥덕(興德) 동산서원(東山書院) 숙종 신사년에 세웠고, 경종 신축년에 사액하였다. : 이경여(李敬輿)ㆍ이민서(李敏叙)ㆍ이건명(李健命)ㆍ이관명(李觀命)
창효사(彰孝祠) 신해년에 세웠다. : 오준(吳浚) 직장(直長)에 증직되었다.
고산(高山) 화산서원(華山書院) 갑오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김장생(金長生)ㆍ송시열(宋時烈)
제주(濟州) 귤림서원(橘林書院) 만력 무인년에 세웠고 숙종 임술년에 사액하였다. : 김정(金淨)ㆍ송인수(宋麟壽)ㆍ정온(鄭薀)ㆍ김상헌(金尙憲)ㆍ송시열(宋時烈) 별사(別祠)ㆍ이약동(李約東)ㆍ이회(李禬) 호는 만오(晩悟), 제주 목사를 지냈다.
광양(光陽) 향현사(鄕賢祠) 현종 병오년에 세웠다. : 최산두(崔山斗)
무주(茂朱) 주계영당(朱溪影堂) 영종 을사년에 세웠다. : 주자(朱子)
죽계(竹溪) 향현사(鄕賢祠) 계사년에 세웠다. : 김신(金侁) 고려조의 참정(參政)이다.ㆍ장필무(張弼武)
진안(鎭安) 모혜사(慕惠祠) : 이우성(李羽成)ㆍ이현익(李顯益)
화순(和順) 추모영당(追慕影堂) 인조 무자년에 세웠다. : 홍명하(洪命夏)ㆍ홍우익(洪禹翊) 현감


己卯錄續集
別科時薦擧人

京外所薦摠一百二十人。登薦科二十八人。別有傳十四人。餘七十八人。懼其善行泯滅。而並錄之。


京外官同薦人
參奉廬友明咸陽人。有操行有名望。學術端正。淸修恬靜。
參奉柳孟達林川人。天性淳正。宇量宏大。孝行卓異。有能幹。
右兩參奉。以遺逸授官。坐罷。
幼學朴繼孝三嘉人。有學行才器。氣度剛正。居喪盡禮。
生員宋錫賢靈光人。秉心不苟。孝友純篤。才行特異。有幹能。
生員林末孫水原人。有操行言行廉。敎誨不倦。
生員卞碧居昌人。有學行器識。事親無違。
生員郉士保居昌人。有孝行有學問。登壬午科。官至典籍。
幼學柳子房居昌人。有操行器識。孝親信友。博通經史。
佐郞鄭瓊。孝行卓異。學問該通。 已下皆京居人
判官朴璨。有才行有孝廉。 右兩人官至郡守
生員李宗慶。有學行有器識。延慶之弟也。
生員愼謙。有操行有恬靜。
進士鄭世卿。有才行有孝行。以薦補官坐罷。
參奉金錫弘。有學行有操行。
進士洪縢。好善樂誨。不應擧。曾以遺逸授官。不起。
生員申匡祿。有學行。孝友至誠。委曲盡情。
幼學李煦。有才識。居家靜養。有古人風。
進士呂希端。有學行有才行。
師傅睦希曾有操行。質朴柔遜。
進士李文楗。沈重夙成。篤於孝友。忠楗之弟。及第。官至承旨。乙巳遭門禍。坐謫而卒。
師傅呂希臨。孝心不苟。
進士金安道。好學檢行。領相金鈴子。授蔭職。官至郡守。
進士李百祿。好學檢行。
進士申命和。醇謹有孝行。
生員金麟孫。通經操守。後改名亹。登壬午科。官至參議。
生員許䃢。廉介謹愼。官至府使。
參奉金萬億。謹愼好學。
都事洪士俯。廉謹自守。官至府使。
參奉金琩。謹愼不苟。
幼學金振宗。所向堅確。戊子及第。乙巳官至典籍。被謫而終。
進士元繼蔡。有志操。乙卯式年及第。官至判書。
生員朴世勳。有才識。世熹之兄也。
郡守李誾。操守廉正。有學問。
前都事李世蕃。有學問操守。
生員李善長。有學問操守。
生員禹舜弼。有學行。
前縣監崔祥。有操行。
進士李世雄。篤志好學。不求營生。
幼學朴斗南。持身不苟。操行特異。
生員宋彌昌。有才行。
幼學尹居莘。有學行。
參奉李光植。有孝行幹局。
生員朴蕃。有孝行學術。
幼學文濬。篤志好古。
幼學文繪地。志篤行。
幼學韓繼愈。篤實志學有才。
幼學金仁範。有氣節有才。
幼學陳騫。篤志好古。且有才藻。
幼學許礎。志操不苟。有才氣。
進士許磁。有才行。登癸未謁聖別試。官至贊成。以乙巳僞功元勳削奪。
幼學金始昌。有學行。
生員朴薰。謹實有行。
生員李永祐。用心不苟。立志耿介。
幼學兪如舟。
生員申世卿。
幼學金尹宗。以金湜門徒。杖流明川。蒙放終于尙州家。
儒生徐敬德開城人。已下鄕居人爲鄕擧。
幼學尹瓛驪州人。志節方正。有孝行學術。
幼學鄭韶南陽人。好文學。母病斷指。
幼學李允文忠州人。
幼學金增淸州人。
生員尙震林川人。登己卯冬別試。官至領議政。 贈謚成安君
幼學金克讓保寧人。以門蔭。官至郡守。左議政克成之弟。
生員金嵩宗陰城人。
進士李蘭孫溫陽人。登甲申別試。官至正。
右七人皆有學識
生員李蟹羅州人。才行兼備。踐履篤實。明經孝親。不事擧。
生員朴以洪昌平人。用心淳謹。孝悌夙著。
生員張應斗長水人。孝悌忠信超出。才學兼備。
進士崔弼成扶安人。奉母至孝。文武才兼。貧無苟取。
幼學魚得漢固城人。有學術。
進士金應淸盈德人。有學術。所守誠謹。責人以善。窮不營生。
生員金世寶淸道人。居喪啜粥。且有才藝。
進士金湘聞慶人。沈靜寡言。登▣▣▣官至郡守。
進士孫季暾慶州人。廉退剛正。有學術。
進士李仁堅榮川人。存心廉直。不苟進取。有學識。
生員李涏仁同人。才學過人。
生員朴德孫咸安人。好文學。敬長上順鄕里。
進士琴元貞奉化人。累擧不中。孝養其母。友愛兄弟


未亂時。政府六曹臺諫侍從八道方伯
領議政 鄭光弼。左議政。右議政 安塘。左贊成 崔淑生。右贊成。左參贊 李耔。右參贊 李惟淸。左舍人 李淸。右舍人。檢祥 張玉。吏判書 申鏛。參判 尹殷輔。參議 鄭忠樑。正郞 鄭浣。丁玉亨。李忠楗。佐郞 具壽福。李認。戶判書 高荊山。禮判書 南衮。兵兼判 李長坤。參判 方有寧。參知 成雲。刑判書 金淨。工兼判 金鈴。漢判尹 韓世桓。大司成 金湜。判決事 李世貞。都承旨 柳仁淑。左承旨 尹自任。右承旨 孔瑞麟。左副 朴世熹。右副 洪彥弼。同副 朴薰。注書 李巙 安珽。大司憲 趙光祖。執義 朴守紋。掌令 金麟孫。崔山斗。持平 李延慶。李希閔。大司諫 李成童。司諫 兪汝霖。獻納 宋好智。正言 金鈛。李阜。藝文提學。奉敎 蔡世榮。趙九齡。待敎 權輗。李公仁。檢閱 李構。申潛。金神童。姜㶏。大提學 南衮。提學 金凈。副提學 金絿。直提學。典翰 鄭譍。應敎 奇遵。副應敎 張玉。校理 趙佑。副校理。修撰 權磧。副修撰 沈達源。博士。著作 慶世仁。正字 權檣。金明胤。監司。京畿 韓效元。忠淸 申公濟。全羅 金安國。慶尙左 李沆。上同 文瑾。江原 金硡。黃海 金正國。咸鏡 孫仲暾。平安 許硡。開留守 趙元紀。


亂後追罪時。政府六曹臺諫侍從
領議政 金鈴 左議政 南衮。右議政 李惟淸。左贊成 李繼孟。右贊成 張順孫。左參贊 韓世桓。右參贊。吏判書 沈貞 代衮。參判 金謹思。參議。戶判書 高荊山。禮判書 申鏛。兵判書 權鈞。刑判書 洪淑。工判書。漢判尹。判決事 李世貞。大司成。兵參判 方有寧。大司憲 李沆。執義 柳灌。掌令 徐厚。蔡忱。持平 吳準 遞李純。李英符 遞表憑。大司諫 李蘋。司諫 南世準。獻納 南孝義。正言 趙琛。韓承正。都承旨 尹希仁 代謹思。左承旨 朴壕。右承旨 成雲。左副 尹殷弼。右副 趙玉崐。同副 金希壽。注書 鄭世虎。李巙。大提學守 李荇。提學 李沆。副提學 李思鈞。直提學。典翰 李遲。應敎 柳溥。副應敎 金瑛。校理 任樞。副敎理。修撰 權輗。副修撰 孫洙。李芄。博士 權檣。著作。正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