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봉산 관련 기록/도봉의 여러기록 (왕조실록등)

머리 돌려 도봉산을 멀리 향하여 / 回頭道峯山

아베베1 2010. 2. 4. 01:55


사가시집 제14권
 시류(詩類)
잠 상인(岑上人)이 부쳐온 시에 차운하다.


 

 


나에게 한 이랑 전원이 있어 / 我有一畝園

 

초여름엔 초목이 무성하나니 / 孟夏草木敷

연꽃은 삼백여 송이가 있고 / 有蓮三百朶

버들은 수십 그루가 있으며 / 有柳數十株

포도는 마유가 달리는 듯하고 / 葡萄走馬乳

죽순은 용추가 나오는 듯하네 / 竹筍生龍雛
계절을 느끼며 친구를 생각하니 / 感時思故人
울적한 회포를 금할 수가 없어 / 心緖鬱以紆
머리 돌려 도봉산을 멀리 향하여 / 回頭道峯
바라보며 망설이기만 했었다오 / 極目空踟躕
어제야 서신이 내게 이르렀으니 / 昨日尺書至
시 생각은 봄 하늘처럼 광대한데 / 詩思蕩春空
위에서는 기나긴 이별을 말하고 / 上言長別離
밑에서는 무궁한 생각을 말했네 / 下言思無窮
나는 바라건대 상인과 더불어 / 我願與上人
하나는 구름 하나는 용이 되어 / 爲一雲一龍
구름과 용이 서로 의지한다면 / 雲龍相倚附
어찌 이별하는 일이 있을쏜가 / 何曾有別離
이것으로 만고를 마친다면 / 以此終萬古
만고에 그치는 때가 없을 걸세 / 萬古無休時

 


[주D-001]포도(葡萄)는 …… 듯하고 : 마유(馬乳)는 포도의 일종으로, 본디 당 태종(唐太宗) 때에 섭호국(葉護國)에서 바쳐온 것이라고 하는데, 전하여 포도를 가리킨다.
[주D-002]죽순은 …… 듯하네 : 죽순의 껍질이 알록달록하기 때문에 탁룡(籜龍), 또는 용손(龍孫) 등으로 일컬어지는데, 용추(龍雛) 역시 죽순을 형용한 말이다.
사가시집 제8권
 시류(詩類)
양주(楊州)의 누원(樓院)에서 강경순(姜景醇)의 운에 차하다.

작은 비 내려 들판은 점점 푸르러가는데 / 小雨平郊綠漸勻
매실은 진작 맺었고 살구는 맺기 시작하네 / 江梅已子杏初仁
십 리라 강산이 참으로 그림처럼 화려하니 / 江山十里眞如畫
새로운 시 써내매 글자마다 보배롭구나 / 寫出新詩字字珍

뉘 집의 울타리엔 사립짝을 닫았는고 / 誰家籬落掩柴門
버들 그늘 화려한 꽃이 또 한 마을일세 / 柳暗花明又一村
석양에 절뚝말 타고 갈 곳 몰라 주저하는데 / 日暮蹇驢不知處
다리 밑의 흐르는 물에 밝은 달이 비치누나 / 小橋流水月明痕

도봉산 아래 깨끗한 정사 하나가 있으니 / 道峯山下一精廬
골짝 가득 솔바람이 오만 데서 불어오네 / 滿壑松風萬籟噓
내 일찍이 이십 년 전에 글을 읽던 곳인데 / 二十年前讀書處
다만 지금은 꿈인 듯도 아닌 듯도 하여라 / 祗今如夢又非歟

누각에서 술잔 들며 한번 활짝 웃노라니 / 擧酒高樓一笑開
무수한 청산은 우뚝한 무더기를 이루었네 / 靑山無數矗成堆
십 년 동안 귀래의 흥취만 읊었을 뿐인데 / 十年空賦歸來興
백발은 다정하여 자꾸만 재촉을 하는구나 / 白髮多情故故催

[주D-001]십 년 …… 뿐인데 : 귀래(歸來)의 흥취란 바로 도잠(陶潛)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온 말로, 즉 십 년 동안이나 전원으로 돌아가려는 마음만 가졌을 뿐, 참으로 돌아가지는 못했음을 의미한다.
서계집 제7권
 서(序) 9수(九首)
수락산(水落山)을 유람하며 지은 시의 후서
성소부부고 제26권
 부록 1 ○ 학산초담
학산초담(鶴山樵談)

제왕의 문장은 반드시 범인(凡人)을 초월하게 마련이다. 우리 역대 임금의 작품들이 대개는 《대동시림(大東詩林)》에 보이는데 그 밖에는 전하는 것이 없다. 현재 임금은 하늘이 낸 어진 임금으로 무릇 교유(敎諭)하는 말을 손수 지었는데, 질박하고 엄숙하여 기백(氣魄)이 있었다. 그러나 시는 있다는 소리를 못 들었다. 그러던 차에 신묘년(1591, 선조24) 가을에 외간(外間)에 임금의 작품이라고 전하는 절구(絶句)가 있었으니 다음과 같다.
한밤에 칼 어루만지니 호기가 무지개를 토해라 / 撫劍中宵氣吐虹
웅장한 마음은 우리 동방을 안정시키고자 했더니 / 壯心曾欲奠吾東
이제껏 그 사업은 한단의 걸음 / 如今事業邯鄲步
가을 바람에 고개 돌리니 한스럽기 그지없네 / 回首西風恨不窮
시격(詩格)이 노련하고 건장하여 시인에 못지 않았는데, 어찌 그 이듬해 변고가 있을 줄을 알았으리오.

동궁(東宮)이 또한 임금 되기 전에 시[詞藻]에 뜻을 두어 고서(古書)를 많이 모았다. 언젠가 삼청동시(三淸洞詩) 한 수를 지었는데, 그것이 진사(進士) 유희발(柳希發)의 궤 속에 있다기에 그에게 삼가 청하여 읽어보았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푸른 이내 속에 붉은 골짜기는 그늘졌는데 / 丹壑陰陰翠靄間
맑은 시냇가 기이한 풀들이 천단을 에웠도다 / 碧溪瑤草繞天壇
노을 어린 옥솥에 단약은 익어가나 / 煙霞玉鼎靈砂老
다래넝쿨에 달 비치고 솔바람 일어도 학은 아직 돌아오지 않네 / 蘿月松風鶴未還

시화(詩話)가 맑고 서늘하며 자법(字法)도 또한 기이하다. 임금의 제작은 저절로 세속 시인들의 구기(口氣)와는 다르다. 아, 존경할 만하다.
희발(希發)은 문화 유씨(文化柳氏)로 광해군의 처남인데, 벼슬은 이조 참판을 지냈으며 계해년(1623)에 사형되었다.

우리나라의 시학(詩學)은 소식(蘇軾)과 황정견(黃庭堅)을 위주로 하여 비록 경렴(景濂) 같은 대유(大儒)로도 역시 그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나머지 세상에 이름 날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찌꺼기를 빨아 비위를 썩게 하는 촌스러운 말을 만들 따름이니, 읽으면 염증이 날 정도이다. 성당(盛唐)의 소리는 다 없어져 들을 수가 없다. 매월당(梅月堂)의 시는 맑고 호매(豪邁)하고 세속을 초탈하였다. 타고난 재주가 뛰어나서 스스로 다듬고 꾸미는 데 마음을 두지 않았다. 더러는 마음을 쓰지 않고 갑자기 지은 것이 많기 때문에 간혹 가다가 박잡한 것도 섞여 결국 정시(正始)의 시체는 아니다.
망헌(忘軒) 이주지(李冑之)의 시는 침착ㆍ노련하여 나의 중씨(仲氏)가 대력(大曆 당 대종(唐代宗)의 연호)ㆍ정원(貞元 당 덕종(唐德宗)의 연호) 연간의 작품과 가깝다고 여겼다. 그러나 소식ㆍ두보(杜甫)로부터 나왔는데도 대체가 순박치 못했다. 충암(冲庵)은 맑고 굳세고 기이하고 아름다워 작가라고 할 만하되, 거친 말[生語]과 중첩되는 말[疊語]이 약간 많다. 그 후에는 퇴폐한 것을 일으킨 자가 없다. 융경(隆慶 명 목종(明穆宗)의 연호)ㆍ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연간에 최가운(崔嘉運)ㆍ백창경(白彰卿)ㆍ이익지(李益之) 등이 비로소 개원(開元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 시대의 공부를 전공하여 정화(精華)를 이루기에 힘써서 고인에게 미치고자 하였으나, 골격(骨格)이 온전치 못하고 너무 아름답기만 하였다. 당(唐)의 허혼(許渾)ㆍ이교(李嶠)의 사이에 놓더라도 바로 촌뜨기의 꼴을 깨닫게 되는데, 도리어 이백(李白)ㆍ왕유(王維)의 위치를 앗으려고 한단 말인가? 비록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학자는 당풍(唐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세 사람의 공을 또한 덮어버릴 수는 없다 하겠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의 자는 열경(悅卿), 강릉인(江陵人)이다. 처사(處士)로서 시호는 청간(淸簡)이다. 이주지(李冑之)의 이름은 주(冑)이며 고성인(固城人)으로 벼슬은 정언(正言)이다. 중씨(仲氏)는 하곡(荷谷) 허봉(許篈)이다. 자는 미숙(美叔), 양천인(陽川人)이며 벼슬은 전한(典翰)이다. 충암(冲庵) 김정(金淨)의 자는 원충(元冲), 경주인(慶州人)으로 벼슬은 형조 판서(刑曹判書)이고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가운(嘉運)의 이름은 경창(慶昌), 호는 고죽(孤竹)인데 해주인(海州人)으로 벼슬은 부사(府使)이다. 창경(彰卿)의 이름은 광훈(光勳), 호는 옥봉(玉峯)인데 해미인(海美人)으로 벼슬은 참봉(參奉)이다. 익지(益之)의 이름은 달(達), 호는 손곡(蓀谷)이며 홍주인(洪州人)으로 쌍매(雙梅) 첨(詹)의 서손(庶孫)이다.
가운(嘉運)은 제고봉군산정시(題高峯郡山亭詩)에
오래된 고을이라 성곽도 없는데 / 古郡無城郭
산재에는 다만 수풀뿐 / 山齋有樹林
백성도 아전도 흩어져 쓸쓸한데 / 蕭條人吏散
물건너 마을에 겨울 다듬이 소리 / 隔水搗寒砧
라 하였다. 창경(彰卿)은 제화시(題畫詩)에,
문서 기록은 백발을 재촉하는데 / 簿領催年鬢
시내와 산이 그림 속에 들었구려 / 溪山入畫圖
모래톱 평평하니 옛 언덕이 예로구나 / 沙平舊岸是
달빛은 하얀데 낚싯배 외로워라 / 月白釣船孤
하였고, 제승축시(題僧軸詩)에
지리산은 쌍계가 승경이오 / 智異雙溪勝
금강산은 만폭이 기이하다던데 / 金剛萬瀑奇
명산엔 몸소 가보도 못하고서 / 名山身未到
매양 스님을 보내는 시만 짓누나 / 每賦送僧詩
하였다. 익지(益之)는 산사시(山寺詩)에,
흰 구름 속에 절이 있으니 / 寺在白雲中
흰 구름이라 중은 쓸지를 않네 / 白雲僧不掃
손이 오자 그제사 문을 여니 / 客來門始開
골짜기엔 온통 송화만 흐드러졌구나 / 萬壑松花老
하였고, 회주시(回舟詩)에,
병든 가을 해오리 모래밭에 내려앉고 / 病鷺下秋沙
늦매미는 강가 나무에서 울어대네 / 晩蟬鳴江樹
흰 물마름에 바람 일자 배를 돌리니 / 回舟白蘋風
꿈속에 서담엔 비가 내리네 / 夢落西潭雨
하였다.

최경창(崔慶昌)ㆍ백광훈(白光勳)ㆍ이달(李達) 3인의 시는 모두 정시(正始)의 법을 본받았는데, 최씨의 청경(淸勁)과 백씨의 고담(枯淡)은 귀히 여길 만하나, 기력(氣力)이 미치지 못하여 다소 후한 결점이 있었다. 이달의 부염(富艶)함은 그 두 사람에 비하면 범위가 약간 크긴 하나, 모두 맹교(孟郊)와 가도(賈島)의 테두리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최경창ㆍ백광훈은 일찍 죽었고, 이달은 늙어서야 문장이 크게 진보하여 자기 나름대로 일가를 이루어, 그 기려(綺麗)를 거두고 평실(平實)로 돌아갔다. 나의 중형이 자주 칭찬하기를,
“수주(隨州 당(唐)의 유장경(劉長卿)을 가리킴)와 어깨를 겨룬다고 하더라도 큰 손색이 없을 것이다.”
하므로 내가,
“문장이란 세상의 흥망을 따르는 것이니 송(宋)은 당(唐)만 못하고 원(元)은 송만 못한 것은 형세상 어쩔 수 없는데, 어찌 이대(二代)를 뛰어넘어 당시의 작가와 우열을 다툴 이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중씨는,
“한퇴지(韓退之)는 당 나라 사람인데 유자후(柳子厚)가 ‘곧장 자장(子長 사마천(司馬遷)의 자)과 함께 달린다.’고 하였으니, 자후가 어찌 헛말을 할 사람인가? 이달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하였다. 그러나 나는 끝내 그렇게 여기지를 않았다.

나의 중형의 시가 처음에는 동파(東坡)를 배워서 전아(典雅) 순실(純實)하고 온건(穩健) 노숙(老熟)하더니, 호당(湖堂)에 뽑히자 《당시품휘(唐詩品彙)》를 익히 읽어 시가 비로소 청건(淸健)해졌다. 늙마에 갑산(甲山)으로 귀양 갈 때, 이백시(李白詩) 한 부를 가지고 갔었기 때문에, 귀양이 풀려 돌아온 뒤의 시는 천선(天仙) 이백(李白)의 말을 깊이 체득하여 장편이고 단편이고 휘몰아치는 기세여서 일찍이 이익지가 말하기를,
“미숙 학사(美叔學士 미숙은 허봉의 자)의 시를 읽으면 공중에 흩날리는 꽃을 보는 것 같다.”
하더니, 중씨가 불행히 일찍 죽어 원대한 포부를 제대로 펴보지 못했고, 남긴 글마저 흩어져 미처 수습하지도 못했는데, 임진왜란에 찾아낼 겨를도 없이 다 병화(兵火)에 타버렸으니 죽어도 잊지 못할 슬픔이 어찌 끝이 있겠느냐. 내가 경호(鏡湖 강릉(江陵)의 별칭)에 살 때, 놀라움이 우선 가라앉자, 일찍이 외던 것을 생각해 내어 보니 겨우 5백여 편이라, 베껴서 세상에 전하여 사라지지 않도록 기대하고자 한다. 그러나 다만 태산(泰山)의 일호(一毫)일 뿐이다.

최경창(崔慶昌)의 자는 가운(嘉運)이니 융경(隆慶 명 목종(明穆宗)의 연호) 무진년(1568, 선조1)에 진사(進士)를 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종성 부사(鍾城府使)가 되었는데, 어떤 일로 강등(降等)되었다가 국자 직강(國子直講)을 제수받고는 세상을 떠났다. 언젠가 북경(北京)에 가 조천궁(朝天宮)에서 시를 다음과 같이 지었다.
한밤이라 구슬단에 백운을 쓸고 / 午夜瑤壇埽白雲
향 피우고 멀리 옥신군에게 절한다 / 焚香遙禮玉宸君
달 아래 절하는 모습 보는 이 없고 / 月中拜影無人見
아름다운 나무만 겹겹이 궁문 가리웠네 / 琪樹千重鎖殿門

삼청의 이슬기운 주궁을 적시고 / 三淸露氣濕珠宮
봉피리 부는 신선 달밤에 배회했건만 / 鳳管裵廻月在空
동산길에 지금은 향기로운 수레 끊기고 / 苑路至今香輦絶
푸른 복사 붉은 살구 봄바람 한창일세 / 碧桃紅杏自春風
하였다. 어떤 도사(道士)가 있었는데 성은 진씨(秦氏)이고 이름은 지금 기억에 없다. 그 또한 시를 잘 지었다. 이 시를 크게 칭찬하여 통주(通州) 하청관(河淸觀)까지 쫓아와 그 책에 제(題)해주기를 청하였는데 시를 다음과 같이 지었다.
벽우는 진계를 상징하고 / 碧宇標眞界
현단은 태청과 가깝네 / 玄壇近太淸
난새는 주포수에 깃들고 / 鸞棲珠圃樹
노을은 자미성을 감돌았네 / 霞繞紫微城
삼원의 보록은 비장되어 있고 / 寶籙三元秘
금단은 구전으로 이루어졌네 / 金丹九轉成
지거를 탄 사람 보이지 않고 / 芝車人不見
공중 저 밖에 피리 소리만 / 空外有簫聲
이 시가 중국에 전파되어 왕봉주(王鳳洲 명(明) 왕세정(王世貞)의 호) 선생이 대단히 칭찬하였다. 충장공(忠壯公) 양조(楊照)의 무덤에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운중에 해 지자 불빛이 산을 비치니 / 日沒雲中火照山
선우는 이미 녹두관에 다가왔네 / 單于已近鹿頭關
장군이 홀로 천 명을 거느리고 나아가서 / 將軍獨領千人去
한밤에 요하 건너 싸우다 돌아오지 않았구려 / 夜渡遼河戰未還
이 시는 당인(唐人)의 수준에 못지 않으니 중원(中原)에서 사랑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백광훈(白光勳)의 자는 창경(彰卿)이고, 글씨 쓰는 법은 왕희지ㆍ왕헌지에 가까우며, 첫 벼슬은 예빈시 참봉(禮賓寺參奉)에 임명되었다. 언젠가 홍경사(弘慶寺)를 지나다가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가을풀 쓸쓸한 전조의 절 / 秋草前朝寺
낡은 비석엔 학사의 글 / 殘碑學士文
유수는 천년토록 의구한데 / 千年有流水
해질 무렵 떠가는 구름을 보네 / 落日見歸雲
임오년(1582, 선조15)에 병으로 서울집에서 죽었다. 난설(蘭雪) 누님의 감우시(感遇詩)는 다음과 같다.
요즘 최씨 백씨 무리들이 / 近者崔白輩
성당을 법삼아 시를 익혀 / 攻詩軌盛唐
적막하던 대아의 음률이 / 寥寥大雅音
이들 만나 다시금 크게 떨쳤네 / 得此復鏗鏘
하료는 마냥 광록이고 / 下僚因光祿
변방의 고을살이 적신이 슬프네 / 邊郡悲積薪
나이나 벼슬이 모두 쇠락하니 / 年位共零落
이제야 믿겠네 시가 사람을 궁하게 함을 / 始信詩窮人
난설헌(蘭雪軒)의 이름은 초희(楚姬)이고 자는 경번(景樊)이니, 초당(草堂) 엽(曄)의 딸이며 서당(西堂) 김성립(金誠立)의 아내이다. 난설헌의 강남곡(江南曲)은 다음과 같다.
남들은 강남땅 좋다 하지만 / 人言江南樂
나보기엔 강남땅 시름겹기만 / 我見江南愁
해마다 모래톱 포구에 서서 / 年年沙浦口
애끊는 마음으로 가는 배만 바라보네 / 腸斷望歸舟
빈녀음(貧女吟)은 또 다음과 같다.
가위를 손에 잡으니 / 手把金剪刀
추운 밤 열손가락 곱네 / 寒夜十指直
남 위해 시집갈 옷 지어주건만 / 爲人作嫁衣
해마다 도리어 혼자 살다니 / 年年還獨宿
채련곡(采蓮曲)은 다음과 같다.
가을이라 긴 호수엔 비취옥이 흐르는데 / 秋淨長湖碧玉流
연꽃 깊숙한데 난주 매어두고 / 荷花深處係蘭舟
물건너 님을 만나 연밥을 던지다가 / 逢郞隔水投蓮子
남의 눈에 그만 띄니 반나절이나 무안해라 / 剛被人知半日羞


임제(林悌)의 자는 자순(子順)이니 나주인(羅州人)이다. 만력(萬曆 송신종(宋神宗)의 연호) 정축년(1577, 선조10)에 진사가 되었다. 본성이 의협심이 있고 얽매이질 않아서 세속과 맞질 않았으므로 불우했고 일찍 죽었다. 벼슬은 의제 낭중(儀制郎中 예조정랑 겸 지제교(禮曹正郞兼知製敎)의 별칭)에 그쳤다. 죽은 뒤에 어떤 이가 ‘역괴(逆魁 정여립(鄭汝立)을 말함)와 더불어 시사를 논하면서 항우(項羽)는 천하의 영웅인데 성공치 못한 것이 애달프다 말하고 나서 마주 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무함했는데 그 말이 삼성(三省)에 전해지자 그 아들 지(地)를 국문하니 지(地)가 그의 선친이 지은 오강(烏江)에서 항우를 조상한다는 부(賦)를 올리므로 인하여 용서받아 변방에 귀양 가게 되었다. 그의 평사 이영을 보내는 시[送李評事瑩詩]는 다음과 같다.
북방 눈 내리는 용황의 길 / 朔雪龍荒道
음산한 바람 부는 발해 바닷가 / 陰風渤澥涯
원융의 서기를 맡은 이는 / 元戎掌書記
일대의 미남아로다 / 一代美男兒
칼집엔 별을 찌르는 칼 있고 / 匣有干星劍
주머니엔 귀신도 울릴 시가 들었네 / 囊留泣鬼詩
변방 모래 바람 금갑옷에 자욱한데 / 邊沙暗金甲
쪽문 위의 달 홍기를 비치누나 / 閨月照紅旗
옥문관 걸음 어딘들 안 가리오 / 玉塞行應遍
공신각에 화상 걸기 머지 않으리 / 雲臺畫未遲
바라보니 머리카락 곤두세우고 / 相看豎壯髮
먼 길 떠날 슬픈 빛 짓지 않네 / 不作遠遊悲
시격(詩格)이 양영천(楊盈川 당(唐)의 양형(楊炯))과 매우 비슷하다.
제(悌)의 호는 백호(白湖), 벼슬은 북평사(北評事)를 지냈다. 《잠영보(簪纓譜)》를 상고해 보면 ‘제(悌)의 맏아들은 탄(坦)이고 호는 한정(閒亭)인데 벼슬을 하지 않았고, 둘째 아들은 기(垍)인데 호는 월창(月牕), 벼슬은 좌랑(佐郞)이다.’ 하였다.
탄(坦)은 혹 지(地)의 개명(改名)이 아닌지?
백호(白湖)의 규원시(閨怨詩)는 다음과 같다.
열다섯 살 월계 아가씨 / 十五越溪女
남보기 부끄러워 말도 없이 헤어졌네 / 羞人無語別
돌아와 겹문 닫고는 / 歸來掩重門
배꽃에 비친 달 보며 울었네 / 泣向梨花月
산사시(山寺詩)는 다음과 같다.
한밤중 숲 속에 중이 자는데 / 半夜林僧宿
무거운 비구름이 초의를 적시누나 / 重雲濕草衣
느지막에 사립을 여니 / 巖扉開晩日
깃든 새 그제서야 놀라서 나네 / 棲鳥始驚飛
영(瑩)은 고성인(固城人)으로 자는 언윤(彦潤), 호는 남고(南皐)이니 청파(靑坡) 육(陸)의 손자로 벼슬은 목사(牧使)를 지냈다.

중형의 경흥압호정(慶興狎胡亭)에 제한 시는 다음과 같다.
국경에서 스산하게 바라다 보니 / 塞國悲寒望
인가의 연기는 귀방과 접했구나 / 人煙接鬼方
산은 외로운 장막 밖을 에웠고 / 山圍孤障外
물은 무너진 능 옆으로 흘러드는구나 / 水入毁陵傍
초가집에 해 바뀌도록 병들었는데 / 白屋經年病
푸른 모에 한밤중 서리 내렸네 / 靑苗半夜霜
이곳에 오르자 가장 서글퍼지니 / 登臨最蕭瑟
까칠한 수염은 낙엽과 함께 누렇구나 / 衰鬢葉俱黃
임자순(林子順)이 크게 칭찬하며 그 운자로 화답하려 하였으나 종일 궁리해도 뜻대로 되질 않자 시를 보내기를,
백옥과 청묘는 열자의 사기로다 / 白屋靑苗十字史
하였으니, 셋째와 넷째 구절이 사실(史實) 기록임을 말한 것이다. 금성 객관(金城客館)에 옛사람이 추(秋) 자로 압운하여 판각해서 못을 박아 걸어 놓았는데, 최고죽(崔孤竹)이 차운하기를
서글픈 대평소 소리 옛고을에서 나는데 / 殘角生古縣
깊은 강물은 어둠속 급히 흐르네 / 沈河急暝流
으스레한 등불 아래 초객의 꿈이요 / 疏燈楚客夢
한밤중 중선의 다락일레 / 半夜仲宣樓
찬 비 비록 개었으나 / 寒雨雖逢霽
고향 생각 또다시 가을을 만났네 / 歸心更値秋
라고 했다. 중씨가 이어 읊기를
나그네 만리길 가매 / 行人萬里去
말 멈추어 차가운 물을 먹이네 / 駐馬飮寒流
큰 길엔 온통 꽃다운 풀들 / 芳草遍官道
저녁 연기 역루에서 피어오르네 / 晩煙生驛樓
나그네 회포는 어렴풋 꿈과 같아서 / 旅懷渾似夢
봄이라지만 거의 가을 같고나 / 春事半如秋
라고 했다. 고죽이 보고,
“봄시를 가을 추(秋) 자로 압운하기는 가장 어려운 것인데 이 글귀는 옛 사람보다 훨씬 뛰어났다.”
하였다.

내 생각에 누대 현판은 모조리 케케묵은 시들이라, 비록 청신한 구절이 있다 하더라도 가려내기 쉽지 않으니, 지을 필요가 없다. 임자순(林子順)이 언젠가 가학루(駕鶴樓)를 지나갔는데, 판시(板詩)가 많아 만여 개나 되므로, 그 되지 않은 잡소리를 싫어하여 관리(館吏)를 불러 말하기를,
“이 현판들은 관명(官命)으로 만든 것이냐? 아니면 안 만들면 벌을 주었느냐?”
하니, 그의 말이,
“만들고 싶으면 만들고 말고 싶으면 안 만들지요. 어찌 관명이나 처벌이 있겠습니까.”
하자, 자순이,
“그렇다면 난 짓지 않겠다.”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이들이 다 웃었다. 임진왜란에 적이 관사를 불살라 남은 게 없었으며, 불사르지 않은 곳은 현판을 철거하여 불 속에 던져버렸다. 아마 하늘도 시가 높은 벽에 걸려 있는 것을 싫어했으리라.

누제(樓題)에도 좋은 시구가 또한 더러 있다. 임진년에 내가 어머니를 모시고 난리를 피하여 북변으로 들어가다가 곡구역(谷口驛)에 이르니, 임형수(林亨秀)가 지은 시의 항련(項聯)에
꽃이 고개 숙이니 술 취한 미녀의 얼굴 같고 / 花低玉女酣觴面
산이 끊어지니 바닷물 마시는 푸른 용의 허리 같구나 / 山斷蒼虯飮海腰
하였다. 시어(詩語)가 청절(淸絶)하니 어찌 누제라 하여 흠잡을 수 있겠는가.
형수의 자는 사수(士遂)이고, 호는 금호(錦湖)이다. 평택인(平澤人)으로 벼슬은 목사를 지냈는데, 정미년 벽서(壁書) 사건 때 원통하게 죽었다.

어촌(漁村)의 시는 혼후하고 부염하기가 호음(湖陰)에 못지 않은데, 송계(松溪)가 중종 이래 대가를 평하되 그 선(選) 중에 어촌이 들지 않았으니, 도대체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내가 북변의 누제(樓題)를 보다가, 공의 시를 읽고는, 눈을 씻고 장단을 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영동역시(嶺東驛詩)는 다음과 같다.
총과 욕이 유유하다 두 가지 다 놀래니 / 寵辱悠悠兩自驚
표령한 남은 목숨 그 어디에 붙일까 / 飄零何處着殘生
하늘가 해질 무렵 고향 그리는 눈물 / 天邊落日懷鄕淚
국경밖 늦가을 고국 떠나는 마음일세 / 寒外窮秋去國情
구름송인 어지러이 날아 산은 온통 새까맣고 / 雲葉亂飛山盡黑
둥근 달 나직이 비치니 온바다는 밝아라 / 月輪低照海全明
나그네신세 오늘밤 유난히 시름겨워서 / 羈愁此夜偏多緖
푸른 등불 마주하여 앉아 지샜네 / 坐對靑燈到五更
수성역(輸城驛)에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고향 떠나 가을 지나 국경 성에 머무니 / 去國經秋滯塞城
낯선 땅 풍경은 모두가 고향을 그리게 하네 / 異方雲物摠關情
넓은 강 건너고 싶으나 사공 없고 / 洪河欲濟無舟子
겨울나문 말라가도 겨우살인 매달렸네 / 寒木將枯有寄生
일신을 도모함이 곧은 길 아님 우습고 / 自笑謀身非直道
세상 속여 헛된 이름에 붙들림 오히려 부끄럽네 / 還慙欺世坐虛名
새벽 문을 열고 푸른 바다 마주하니 / 曉來拓戶臨靑海
아침해 밝고 밝아 간담을 비치네 / 旭日昭昭照膽明
이와 같은 작품들이 어찌 호음(湖陰)무리만 못하단 말인가? 아래 시의 제4구는 안로(安老)가 죽었지만 그의 잔당은 아직 다 죽지 않았음을 가리킨 것이다.
어촌(漁村) 심언광(沈彦光)의 자는 사형(士炯)이니 삼척인(三陟人)이다. 벼슬은 이조 판서이고 시호는 문공(文恭)이다.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의 자는 운경(雲卿), 동래인(東萊人)이며 벼슬은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이다. 송계(松溪) 권응인(權應仁)은 안동인(安東人)이니 벼슬은 학관(學官)이고 이조 참판 응정(應梃)의 서제(庶弟)이다. 안로(安老)의 성은 김씨(金氏), 자는 이숙(頤叔), 호는 희락(希樂), 연안인(延安人)이고 벼슬은 좌의정을 지냈다. 탐욕스럽고 간사하며 조정의 일을 제멋대로 하였으므로 중종 정유년(1537)에 사사되었다.
어촌의 사과꽃 지다[來禽花落]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오련붉은 꽃 봄을 도와 늙은 가지에 피니 / 朱白扶春上老柯
눌 위해 단장하는고 야인의 집에 / 爲誰粧點野人家
한밤중 비바람에 초췌할까 두렵더니 / 三更風雨驚僝僽
다닥다닥 핀 사과꽃 모조리 다 졌구나 / 落盡來禽滿樹花
송계(松溪)의 촉석루시(矗石樓詩)는 다음과 같다.
구름 사이 새어나는 희미한 달이 잔잔한 물결을 비추어 주니 / 漏雲微月照平波
잠자던 해오리 나직이 날아 물언덕 모래톱에 내려 앉는다 / 宿鷺低飛下岸沙
물가 정자에 발 거두고 기둥 기대어 앉아 있으니 / 江閣捲簾人依柱
나룻머리 노 젓는 소리 밤이라 크게 들리네 / 渡頭鳴櫓夜聞多
중씨가 근래 시인을 평하되, 소재 상공(蘇齋相公)을 대가로 여기고,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을 그 다음으로 쳤다. 이익지(李益之 익지는 이달(李達)의 자)는 중씨의 시ㆍ문이 모두 고공(高公)보다 낫다고 치는데 논란은 오래되었으나 결판이 나지 않았다. 내가 권응인(權應仁)을 만나게 되어 물어보니, 이익지의 말이 옳다고 하였다. 권응인이 갑산(甲山)으로 귀양 가는 중씨를 보내는 시의 항련(項聯)에
라 하니, 고사 인용이라든가 대우(對偶)가 다 적절하다. 중형이 서애(西厓)에게 부친 시에 또
갑자년 참상을 말하지 마라 / 莫言甲子泥塗日
응당 경인년에 하강하는 때를 맞으리 / 應値庚寅下降年
하였다.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의 자는 과회(寡悔)니 광산인(光山人)이다. 벼슬은 영의정이고,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의 자는 이순(而順)이니 장흥인(長興人)이다. 벼슬은 목사이고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자는 이견(而見)이니 풍산인(豐山人)이다. 벼슬은 영의정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중형이 귀양 가기 전 옥당(玉堂)에 있을 때 꿈속에서 시를 짓기를
텃밭에 채마 부치노라니 솜씨야 늘었다만 / 稼圃功夫進
천상은 꿈결에도 어렴풋 / 煙霄夢寐稀
오직 가의의 눈물만 남아 / 唯殘賈生淚
밤마다 차가운 옷을 적실 뿐 / 夜夜濕寒衣
하더니, 가을이 되자 갑산(甲山)에 귀양 가게 되었다. 누님이 평시에 또한 꿈속에서 지은 시에
푸른 바단 신선 사는 요해에 젖어들고 / 碧海浸瑤海
청난은 채봉을 기대었구나 / 靑鸞倚彩鳳
연꽃 스물일곱 송이 / 芙蓉三九朵
서리같이 싸늘한 달빛 아래 지는구나 / 紅墮月霜寒
하더니 이듬해 신선되어 올라가니, 3에 9를 곱하면 27로서 누님 나이와 같으니, 인사에 있어 미리 정해진 운명을 어찌 피할 수 있겠는가.

누님의 시문은 모두 천성에서 나온 것들이다. 유선시(遊仙詩)를 즐겨 지었는데 시어(詩語)가 모두 맑고 깨끗하여, 음식을 익혀 먹는 속인으로는 미칠 수가 없다. 문(文)도 우뚝하고 기이한데 사륙문(四六文)이 가장 좋다. 백옥루상량문(白玉樓上樑文)이 세상에 전한다. 중형이 일찍이,
“경번(景樊)의 재주는 배워서 그렇게 될 수가 없다. 모두가 이태백(李太白)과 이장길(李長吉)의 유음(遺音)이다.”
라고 한 적이 있다. 아, 살아서는 부부금슬이 좋지 못했고, 죽어서는 제사받들 자식이 없으니 옥이 깨진 원통함이 한이 없다.

이옥봉(李玉峯)은 사문(斯文) 조원(趙瑗)의 소실이다. 그 시가 몹시 맑고 강건하여, 거의 아낙네들의 연지 찍고 분 바르는 말들이 아니다. 남편을 따라 진주부(眞珠府)로 가는 길에 노산묘(魯山墓)를 지나면서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
닷새는 장간이요 사흘은 영월이라 / 五日長干三日越
참담한 노릉 구름 슬픈 노래 끊어지네 / 哀歌唱斷魯陵雲
이 몸도 또한 왕손의 딸이라서 / 妾身亦是王孫女
이 땅 두견새소리 차마 들을 수 없구려 / 此地鵑聲不忍聞
서군수(徐君受)의 소실이 액서(額書)와 단율(短律)을 부쳐준 데 사례하기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
여위고도 굳세게 하늘밖의 정취 써서 이루니 / 瘦勁寫成天外態
유공권(柳公權) 서체의 남은 자취 보여주네 / 元和脚跡見遺蹤
진서는 나부끼는 가운데 봉새처럼 날아오르고 / 眞書翥鳳飄揚裏
큰 글씨는 뭉게구름이 응집되었네 / 大字崩雲結密中
시험삼아 산헌에 걸고 보니 호랑이가 뛰는 듯 / 試掛山軒疑躍虎
문득 강각에 거니 용이 오르는 양 / 乍臨江閣訝騰龍
위부인 필재 바야흐로 건장한 줄 알거니와 / 衛夫人筆方知健
소야란의 재주라고 어찌 공교함을 독차지할 것인가 / 蘇惹蘭才豈擅工
몸은 마치 혜초가지 같아도 생각은 씩씩하며 / 體若蕙枝思則壯
가녀린 손 파대공 같건만 글씨를 쓰면 웅장하여라 / 手纖蔥玉掃能雄
정신적인 사귐이 만리를 문묵으로 통하니 / 神交萬里通文墨
여의주를 갚기 위해 백옥동자에게 알리노라 / 爲報螭珠白玉童
그 아우 또한 시를 잘 지어, 언젠가 절구 한 수를 읊었는데, 그 하구는 다음과 같다.
창 열고 새백 달빛 아래 거니노라니 / 開窓步曉月
이슬은 매화가지에 함초롬하구나 / 露濕梅花枝
그 전집을 보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옥봉(玉峯)의 이름은 원(媛)이고 완산인(完山人)인데, 충의(忠義) 봉(逢)의 딸이다.
원(瑗)의 자는 백옥(伯玉), 호는 운강(雲江), 임천인(林川人)으로 벼슬은 승지(承旨)이다. 서군수(徐君受)의 이름은 익(益), 호는 만죽(萬竹), 부여인(扶餘人)으로 벼슬은 부사(府使)다.
옥봉의 규정시(閨情詩)에
언약하신 서방님 어이 이리 더디신가 / 有約郞何晩
뜰가의 매화는 이울려 하는데 / 庭梅欲謝時
갑자기 가지 위에 까치소리를 듣고 / 忽聞枝上鵲
헛되이 거울 비쳐 눈썹 그리네 / 虛畫鏡中眉

최고죽(崔孤竹) 등이 언젠가 말하기를,
“우리나라 지명은 중국만 못하여 시 지을 때 지명을 구사할 수 없다.”
하며 늘 한스럽게 여겼는데, 소재(蘇齋)의 시에
길은 막다른 평구역이오 / 路盡平邱驛
강물은 깊어라 판사정 앞에 / 江深判事亭
라는 것을 보니, 상하구가 모두 속어를 썼건만 구법이 온당 적절하다. 그러니 대가의 솜씨는 자연 여느 사람과 다름을 알겠다.

이익지(李益之)는 젊어서 화류계(花柳界)에 출입한 실수로 말미암아, 그 재주를 시새우는 자들이 그것을 가지고 비방하였고, 심지어는 ‘어머니도 잘 대우하지 않고 부인과의 예의도 닦지 않았다.’ 하며 비난해 마지않았다. 양봉래(楊蓬萊)가 강릉 부사(江陵府使)로 부임했을 때 그를 빈사(賓師)의 예로 대우하자, 강샘하는 이들이 선대부(先大夫 허균의 아버지 허엽(許曄)을 가리킴)에게 무근한 말을 하여 선대부께서 편지로 익지를 사절토록 권하였다. 양봉래가 답장을 보내기를,
“오동꽃은 밤비에 지고, 바닷가 나무는 봄구름 속에 사라진다.[桐花夜雨落海樹春雲空]라고 시를 짓는 이달(李達)을 만약 소홀히 대접한다면 진왕(陳王)이 갓 응탕(應瑒)과 유정(劉楨)을 잃을 때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하였다. 그 후에 대우가 약간 소홀해지자, 익지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겨 작별하였다.
나그네의 떠나고 머무름은 / 行子去留際
주인의 눈썹 사이에 달렸나니 / 主人眉睫間
오늘 아침 반기는 빛 없으니 / 今朝失黃氣
우리 집 고향산 그리워지네 / 舊宇憶靑山
노 나라에선 원거를 잔치해 주고 / 魯國爰居饗
남정에는 의이로 돌아갔다네 / 南征薏苡還
가을바람에 소계자의 신세로 / 秋風蘇季子
또다시 목릉관을 떠나노라 / 又出穆陵關
이에 양봉래가 놀라고 뉘우쳐 대접하기를 전과 같이 하였다.
봉래(蓬萊)의 이름은 사언(士彦), 자는 응빙(應聘), 청주인(淸州人)으로 벼슬은 부사(府使)이다. 선대부(先大夫)의 이름은 엽(曄), 자는 태휘(太輝), 호는 초당(草堂)이며 벼슬은 부제학(副提學)이다.
봉래의 국도시(國島詩)는 다음과 같다.
단청한 누대에 보라빛 연기 떨치며 / 金屋樓臺拂紫煙
구름길에 용을 타고 여러 신선 내려오네 / 濯龍雲路下群仙
청산도 또한 인간속세 싫어선지 / 靑山亦厭人間世
푸른 바다 같은 만리장천으로 날아드누나 / 飛入滄溟萬里天


연산군이 집정하였을 때, 강혼(姜渾)은 도승지(都承旨)가 되어 가장 총애를 받았다. 언젠가 연산군이 출제하기를
한식동산에 삼월은 다가오고 / 寒食園林三月近
비바람에 꽃지는 새벽은 싸늘해라 / 落花風雨五更寒
하고, 승지ㆍ사관ㆍ경연관에게 칠언율시를 지어 바치게 하였는데, 강혼의 시는 다음과 같다.
청명이라 대궐 버들 찬 연기 서렸는데 / 淸明御柳鎖寒煙
쌀쌀한 봄바람 새벽들어 한층 더 미친 듯하구나 / 料峭東風曉更顚
붉은 꽃잎 땅을 덮도록 내버려두고 / 不禁落花紅襯地
휘날리는 버들개지 온 하늘에 자옥하구나 / 賸敎飛絮白漫天
물건너 높은 누각에 구슬발 걷히니 / 高樓隔水搴珠箔
꽃구경 가는 좋은 말 비단안장 빛나네 / 細馬尋香耀錦韉
금동이술 다 마시고 취하여 별원으로 돌아오노라니 / 醉盡金樽歸別院
단청한 난간가에 오색드림 나불리네 / 綵繩搖曳畫欄邊
하였다. 연산군이 크게 칭찬을 하며 금은 보화를 많이 하사하였다.
강혼(姜渾)의 자는 사호(士浩), 호는 목계(木溪), 진주인(晉州人)이며 벼슬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이고,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응교(應敎) 기준(奇遵)이 온성(穩城)으로 귀양 가 있는데, 서울로부터 사약이 내려왔다. 그는 조용히 시를 읊어 스스로 만사를 다음과 같이 지었다.
해 지자 하늘은 먹빛 같고 / 日落天如墨
산 깊어 골짜기는 구름 같구나 / 山深谷似雲
천년토록 지키자던 군신의 의는 / 君臣千載意
슬프다 하나의 외로운 무덤뿐 / 惆悵一孤墳
이 시를 읽으면 사람으로 하여금 심장과 간장이 다 찢어지게 한다.
기준의 자는 자경(子敬), 호는 복재(服齋), 행주인(幸州人)이며, 벼슬은 응교(應敎)에 그쳤다.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최원정(崔猿亭)이 항상 화(禍) 입을까 두려워 세상 밖에 방랑했건만, 마침내 그의 숙부(叔父)의 참소를 받아 형벌을 면치 못하게 되었는데, 그가 만의사(萬義寺)에 제(題)한 시는 다음과 같다.
옛 불전에 몇 중이 있고 / 古殿殘僧在
나뭇가지엔 저물녘 경쇠소리 맑아라 / 林梢暮磬淸
산굽이는 천리나 아스라한데 / 曲通千里盡
담장은 우뚝 뭇산 하마 낮아 뵈네 / 墻壓衆山平
나무는 하 늙었으니 몇 살이나 되었누 / 木老知何歲
새들의 지저귐도 곳에 따라 유달라라 / 禽呼自別聲
어려운 세상 죄의 그물 근심했더니 / 艱難憂世網
오늘이야말로 부끄럽다. 나의 삶이여!/今日愧余生
시어(詩語)가 맑고도 빼어났다. 끝구는 대체 그 화 입을 것을 미리 헤아렸단 말인가?
원정의 이름은 수성(壽城), 자는 가진(可鎭), 강릉인(江陵人)이며, 처사(處士)이고,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그의 숙부 세절(世節)의 자는 개지(介之), 벼슬은 호조 참판(戶曹參判)이다. 원정의 망천도시(輞川圖詩)는 다음과 같다.
가을달이 서녘산에 내리니 / 秋月下西岑
어두운 연기 먼 나무에 피어나네 / 暝煙生遠樹
끊어진 다리에 복건쓴 두 사나인 / 斷橋兩幅巾
그 누가 망천의 주인인지 / 誰是輞川主


장음정(長吟亭) 나공 식(羅公湜)은 웅장한 글과 곧은 절개가 천세에 빛난다.
외로운 배는 일찍 매어야만 하니 / 孤舟宜早泊
풍랑은 으레 밤 깊으면 더하다네 / 風浪夜應多
라는 구절은 선배들이 이미 칭찬하였던 것이고, 원숭이 그림 제한 절구 두 편을 손곡(蓀谷 이달(李達)의 호)은 그림 속에 시가 있다고 칭찬하였으니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산원숭이 포도를 안고는 / 山猿擁馬乳
다리로 긴긴 가지를 밟는구나 / 脚踏長長枝
떨어진 열매 주울 때 / 收拾落來顆
뉘 능히 암수를 구별하리오 / 誰分雄與雌
또 이런 시도 있다.
늙은 원숭이 그 무리를 잃고 / 老猿失其群
마른 나무 등걸 위에 해는 지네 / 落日枯査上
동그마니 앉아 고개조차 까딱 않으니 / 兀坐首不回
아마도 일천 봉의 메아리 듣나 보네 / 想聽千峯響
아랫시가 더욱 기발하다.
나식(羅湜)의 자는 장원(長源), 안정인(安定人)이며,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호)의 문인. 을사사화에 형인 부제학(副提學) 숙(淑)과 함께 참화를 당했다. 그의 여강시(驪江詩) 상구(上句)는 다음과 같다.
푸른 강가에 해는 저물고 / 日暮滄江上
하늘이 차니 물결은 절로 이네 / 天寒水自波
다른 야사(野史)를 참고해 보면 최원정(崔猿亭)의 시로 되어 있다. 그의 숙부인 세절(世節)이 이 시를 가지고 그를 참소했다고도 하나, 어떤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화원시(畫猿詩)의 아랫수를 《기아(箕雅)》에서는 원정(猿亭)의 시라고 하였는데, 혹 잘못이 아닌가 한다.


손곡(蓀谷) 이익지(李益之)의 한식시(寒食詩)에
배꽃에 비바람 치는 한식철인데 / 梨花風雨百五日
병객으로 떠돈 지 삼십년일세 / 病客江湖三十年
라든지, 임귀성(林龜城)에게 보낸 시에
해마다 떠돌이라 옷은 벌써 해어지고 / 頻年作客衣還弊
몇 달을 집 떠나니 허리품 줄었구나 / 數月離家帶有餘
범숙(范叔)의 이 가난 뉘 가엾이 여길 건가 / 誰憐范叔寒如此
소진(蘇秦)처럼 곤궁하여 못감을 스스로 비웃노라 / 自笑蘇秦困不歸
라든지, 노산묘시(魯山墓詩)에
봄바람에 귀촉새 울음 애닯고 / 東風蜀魄苦
해 저물녘 노릉은 스산도 해라 / 西日魯山寒
등의 시구는 대우(對偶)가 자연스럽고 침착하고 돈좌(頓挫)하다. 세상 사람들은 더러 바람 앞의 꽃이라 하여 결점으로 여기나, 글쎄 미처 생각을 못해서 하는 말이 아닌지?

김충암(金冲庵 충암은 김정(金淨)의 호) 시집 속에 ‘청산금야월(靑山今夜月)’이라는 시는 바로 용재(容齋) 이 문민공(李文愍公)의 작품으로 시법(詩法)이 같지 않다. 편찬한 자가 잘못 엮은 것이다. 내가 승축(僧軸)을 보니 충암(冲庵)의 시가 있었는데 다음과 같다.
고개 너머 한산사에 / 嶺外寒山寺
스님 만나니 문득 반가워라 / 逢師眼忽靑
돌샘 가의 같은 병든 나그네 / 石泉同病客
천지간에 하나의 부평초 / 天地一浮萍
성긴 빗속 가물거리는 등불은 싸늘한데 / 疏雨殘燈冷
잔 들자 들려오는 먼 바닷소리 / 持杯遠海聲
창 열고 거듭 두런거리다 헤어지니 / 開窓重話別
구름 설핏 샛별만 밝구나 / 雲薄曉星明
이 시가 본집에는 없으니, 당시 편자가 혹 미처 못본 것인가?
문민(文愍)의 이름은 행(荇), 자는 택지(擇之), 덕수인(德水人)이며 벼슬은 좌의정이다. 시호는 문민(文愍)이었는데 문정(文定)이라 고쳤다가 다시 문헌(文獻)이라 고쳤다. 용재(容齋)의 제화시(題畫詩)는 다음과 같다.
후둑후둑 소상강에 비가 내리고 / 淅瀝湘江水
아스라이 보이네 반죽의 숲 / 依俙斑竹林
그러나 거기서 묘사키 어렵기는 / 此間難寫得
아황ㆍ여영의 심정 / 當日二妃心
서직사벽시(書直舍壁詩)는 다음과 같다.
늙마에 분주타 보니 병은 약속이나 한 듯 찾아오고 / 衰年奔走病如期
봄 흥취라야 많지 않으니 시까지 지을 건 없다 / 春興無多不到詩
졸다 깜짝 놀라 깨니 꽃철이 늦었구나 / 睡起忽驚花事晩
한 차례 보슬비가 장미를 적시누나 / 一番微雨濕薔薇
‘합천서 자규 소리를 듣다[陜川聞子規]’ 한 시는 다음과 같다.
강북 봄경치 밤이라 더 서글퍼서 / 江陽春色夜凄凄
잠깨자 까닭없이 나그네 맘 설레이네 / 睡罷無端客意迷
세상 만사 고향에 돌아감만 못하니라고 / 萬事不如歸去好
건너 숲에 울어대는 자규 소리 잦아라 / 隔林頻聽子規啼
주운영(朱雲詠)은 다음과 같다.
허리에 칼이 있으니 청할 게 무어 있소 / 腰間有劍何須請
땅밑에 사람 없어도 또한 노닐 만하네 / 地下無人亦足游
가석하다 한 나라 조정의 괴리령은 / 可惜漢廷槐里令
일생에 영신 머리 베기만을 알았구려 / 一生唯識佞臣頭


나의 중형이 언젠가 이손곡(李蓀谷)의 유송경시(遊松京詩) 가운데
대궐 앞 거둥하던 길엔 가을풀 스산하고 / 宮前輦路生秋草
누대 아래 격구하던 뜰엔 저녁 소를 먹이누나 / 臺下毬庭放夕牛
라는 구절을 칭찬하였으나 사인(舍人) 홍적(洪迪)의,
누대는 비었어도 반월대요 / 臺空猶半月
각은 황폐하나 옛 첨성각이네 / 閣廢舊瞻星
하는 시만큼 절실하지는 못하다.
홍적(洪迪)의 자는 태고(太古), 호는 하의(荷衣)이며, 남양인(南陽人)이다.

나의 중형이 일찍이,
“홍덕공(洪德公)ㆍ이명보(李明甫)의 시는 모두 일가라 이를 만한데, 홍덕공은 장편을, 이명보는 칠언율시를 특히 잘 짓는다.”
고 칭찬하였다. 그리고 또,
“명보(明甫)는 반드시 대제학(大提學)이 될 것이다.”
하더니, 후에 명보는 나이 겨우 서른이 넘자 대제학에 임명되고, 벼슬로는 예조 판서(禮曹判書)의 반열에 오르게 되니, 대제학이 되리라던 말이 비로소 증명되었다. 홍(洪)은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는 하였건만 불행히도 뜻을 얻지 못하여 벼슬이 변변치 못하였으니, 재주와 팔자는 이처럼 같지가 않다.
덕공(德公)의 이름은 경신(慶臣), 호는 녹문(鹿門)이며 남양인(南陽人)이다. 만정당(晩全堂) 가신(可臣)의 아우로 벼슬은 부제학(副提學)을 지냈다. 명보(明甫)의 이름은 덕형(德馨), 호는 한음(漢陰), 광주인(廣州人)이며, 벼슬은 영의정이고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홍덕공(洪德公)의 봉래풍악가(蓬萊楓嶽歌)를 나의 중씨가 아침 저녁으로 한번 죽 읊으면서 장단을 맞추며 감탄하였다. 그 시는 이태백(李太白)의 천로음(天姥吟)에 영향을 받은 것인데, 종횡(縱橫)ㆍ억양(抑揚)에 한 자도 세속에 찌든 태가 없다. 반통투수사(飯筒投水詞)ㆍ기택요(沂澤謠) 등 작품은 모두 호방하며 기력이 있으나, 율시(律詩)나 절구(絶句)는 장편만은 조금 못하고, 산문 또한 간결하고 엄정하다. 운부(雲賦)ㆍ격구부(擊毬賦) 같은 작품은 양봉래(楊蓬萊)가 몹시 부러워하며,
“사마 장경(司馬長卿)과 천년 뒤에 고하(高下)를 다툴 만하다.”
하였다.

명 나라 사람의 시를 이손곡(李蓀谷)은 하중묵(何仲黙 중묵은 하경명(何景明)의 자)으로 첫째를 꼽되 나의 중형은 이헌길(李獻吉 헌길은 이몽양(李夢陽)의 자)을 최고로 여겼고, 윤월정(尹月汀)은 이우린(李于麟 우린은 이반룡(李攀龍)의 자)을 그 두 사람보다 뛰어났다고 여겼으니, 정론(定論)을 내릴 수 없다. 봉주(鳳洲 명(明) 나라 왕세정(王世貞)의 호)의 말은,
“비교하자면 헌길(獻吉)은 높고 중묵(仲黙)은 통창하며 우린(于麟)은 크다.”
하고 그도 또한 누가 첫째요, 누가 다음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익지(益之)가 하루는 율시 한 수를 내어 보이며,
“이것은 세상에 전하지 않는 중묵의 시일세.”
하기에, 처음에는 진짜인지 가짜인지 몰라서,
“이 시는 맑고 뛰어났으니, 율시 고르는 자가 빠뜨렸을 리 없습니다. 아마도 당신의 의작일 겁니다.”
하니, 익지가 자기도 모르게 껄걸 웃었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나그네 이불에 스미는 가을 기운에 밤은 깊어가고 / 客衾秋氣夜迢迢
그윽한 집 성긴 반딧불만 고요 속을 나는구나 / 深屋疏螢度寂廖
밝은 달은 뜰에 가득 서늘한 이슬은 함초롬 / 明月滿庭凉露濕
푸른 하늘은 물 같은데 은하수는 아득해라 / 碧天如水絳河遙
이별의 꿈 고개고개 넘다 깨니 / 離人夢斷千重嶺
대궐 누수 소리 십이교에 여운지네 / 禁漏聲殘十二橋
지척에서 새삼 동각로 그립건만 / 咫尺更懷東閣老
고관의 말굽 소린 하늘처럼 아득해라 / 貴門行馬隔雲霄
짜임새와 구어(句語)가 대복(大復 하경명의 호)과 꼭 같아서, 감식안(鑑識眼)이 있는 사람이라도 구별하기 쉽지 않다. 이 시는 바로 이익지가 월정(月汀)에게 올린 작품이다.
월정(月汀)의 이름은 근수(根壽), 자는 자고(子固), 해평인(海平人)이며 벼슬은 예조 판서이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임진난에 신노 제이(申櫓濟而 제이는 자)와 같이 북쪽으로 가는데, 명종(明宗)의 제삿날이 되었다. 그가 객창(客窓)에서 다음과 같이 지었다.
선왕[明宗]이 이날 세상 뜨실 때 / 先王此日棄群臣
유언은 정녕 새 임금 부탁이었네 / 末命丁寧托聖人
선조 이십육년 종묘 제례도 못 모시게 되니 / 二十六年香火絶
센머리로 울부짖는 건 오직 유민들 / 白頭號哭只遺民
뜻이 몹시 서글퍼서 익성군(益城君) 홍성민(洪聖民)이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어떤 사람은 ‘절(絶)’ 자를 고쳐 ‘냉(冷)’ 자로 하기도 하는데, 뜻은 좋으나 격은 먼저 글자만 못하다.
노(櫓)는 고령인(高靈人)이며 생원(生員)이다. 선대의 누로 과거에서 보류되어 급제를 못했다. 성민(聖民)의 자는 시가(時可), 호는 졸옹(拙翁), 남양인(南陽人)이며, 벼슬은 판중추부사에 그쳤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명 나라 사람 등계달(滕季達)의 자는 진생(晉生)인데 오인(吳人)으로 글과 시를 잘하고, 글씨를 잘 쓰며, 또한 천하의 명산 대천을 두루 돌아다녔고 스스로 북해(北海)라 호하였다. 소재(小宰) 한세능(韓世能)이 계유년(1573, 선조6)에 우리나라에 조서를 반포할 때 북해(北海)가 따라왔는데, 그때 습재(習齋) 권벽(權擘)ㆍ문봉(文峯) 정유일(鄭惟一)ㆍ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종사관(從事官)이 되고, 석봉(石峯) 한호(韓濩)가 글씨를 잘 썼기 때문에 수행하였었다. 북해가 네 분과 서로 몹시 좋아하여 여러 번 시문으로 주거니 받거니 하였다. 그때, 나의 중형은 태사(太史 사관(史官)의 별칭)로 임금을 모시고 거침없이 일을 기록하자 조사(詔使)가 누구냐고 물으니 재상인 김계휘(金繼輝)가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이름은 모요, 자는 모라 대답하였다. 북해가 만나고자 하였으나 기회가 닿지 않았다. 갑술년(1574, 선조7)에 나의 중형이 사신으로 중국에 갔을 때 조천궁(朝天宮)에서 서로 만나보고 늦게 만난 것을 한스러워하였고, 중형이 우리나라로 돌아온 뒤에도 북해는 여러 번 사신 편에 편지를 보내어 문안하였다. 첨사(詹事) 황홍헌(黃洪憲)ㆍ도헌(都憲) 왕경민(王敬民)이 임오년(1582, 선조15)에 조서를 반포하러 올 때 북해가 나의 중형에게 편지를 전해 달라 부탁하고, 또 그들에게,
“모의 벼슬이 선위사(宣尉使)가 되지 않았으면 반드시 도감(都監)이 됐을 것이오. 당신들은 그를 소홀히 대해서는 안 되오.”
하였다. 첨사가 의순관(義順館)에 이르러, 역관 곽지원(郭之元)에게 물어보고 중형이 나와서 기다리고 있음을 알게 되자, 편지를 보이고 한편 쥘부채[手扇]를 선사하였다. 나의 중형도 율시를 지어 두 사신에게 인사하자, 서로 돌아보며 감탄하기를,
“번국(藩國 우리나라를 말함)에도 또한 인재가 있구려.”
하였다. 귀국하자 첨사가 북해에게,
“노형은 참으로 사람을 볼 줄 아십니다그려.”
하였다. 이것은 당성군(唐城君) 홍순언(洪純彦)에게 들은 말이다.
권벽(權擘)의 자는 대수(大手), 안동인(安東人)이며 벼슬은 감사(監司)이다. 정유일(鄭惟一)의 자는 자중(子中), 동래인(東萊人)이며 벼슬은 대사간(大司諫)이다. 한호(韓濩)의 자는 경호(景浩), 삼화인(三和人)이며 진사(進士)로 벼슬은 호군(護軍)이다. 김계휘(金繼輝)의 자는 중회(重晦), 호는 황강(黃岡), 광주인(光州人)이며, 벼슬은 대사헌(大司憲)이다. 홍순언(洪純彦)은 역관(譯官), 남양인(南陽人)이며 광국공신(光國功臣)에 녹훈되었다.

사구(司寇) 정유일(鄭惟一)이 세상을 뜨자, 북해(北海)가 듣고 다음과 같이 만사를 지었다.
그리워라 지난날 현도 땅에 노닐 때 / 念昔游玄菟
청강 위에 일산을 기울이고 즐긴 일 / 傾蓋淸江上
싸늘한 달빛 감미로운 술잔에 일렁이고 / 寒月漾芳罇
눈송인 털방장에 엉기었었지 / 雪花凝毳帳
그해 다섯 사람은 다리에 올라 / 斯年五子上河梁
바람머리에 손잡고 일어나 세 번이나 노래 불렀지 / 握手臨風起三唱
헤어진 뒤 갑자기 신선이 되어 / 別來何自遽游仙
학 타고 놀 속 만릿길을 소요하다니 / 萬里逍遙鶴背煙
가을밤은 쓸쓸하고 화표주에 / 秋夜冷然華表柱
푸른 하늘 가없는데 그대 오기만을 바라누나 / 碧天無際望君還
말쑥하고 속기가 없어 읽으면 마음이 시원해진다. 중국인이 인재를 아끼기가 대개 이와 같다.

황 조사(黃詔使 황홍헌을 가리킴)의 시를 사람마다 시원찮게 여겼으나 나의 중형만은,
“이런 재주는 예로부터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했지만, 남들은 믿지 않았다. 《풍교운전(風敎雲箋)》에 첨사(詹事)의 글이 실린 것을 보면, 문법이 간결ㆍ엄숙하고 전아ㆍ미려하며 온후ㆍ순수하였으니 나의 중형은 인재를 아는 분이라고 할 만하다.
중추(中樞) 최립(崔岦)은 문장이 간결(簡潔)하고도 예로워서 당대의 대가가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더러 그의 시는 문만 못하다고 한다. 그러나 정랑(正郞) 하응림(河應臨)을 제(祭)하는 시는 다음과 같다.
나무 찍는 소리 쩡쩡 울려라 산새도 슬퍼하네 / 伐木丁丁山鳥悲
홀로 와 어느 가지에 칼을 건단 말가 / 獨來懸劍向何枝
재주와 명망이 당시의 비방을 이기지 못했는데 / 才名不救當時謗
사귐 도는 응당 저승 가야 알리라 / 交道還應入地知
영해에서 작별한 뒤에 영 이별을 하다니 / 瀛海別回爲此別
역정에서 시 지은 뒤 그대 시가 끊어졌네 / 驛亭詩後斷君詩
평생 술만 보면 다 마시고야 마시던 님 / 平生對酒須皆飮
궤연에 부어놓은 한잔 술 살피실지 / 倘省靈牀奠一卮
역시 근엄하고도 기발하며 건장하니 어찌 문만 못하다 할 것인가.
최립(崔岦)의 자는 입지(立之), 호는 간이(簡易), 통천인(通川人)이며 벼슬은 형조 참판이다. 하응림(河應臨)의 자는 대이(大而), 호는 청천(菁川), 진주인(晉州人)이다. 경재(敬齋) 하연(河演)의 오대손(五代孫)이며 벼슬은 수찬(修撰)이다.

나의 중형은,
“문장을 배우려면 반드시 한퇴지(韓退之) 글을 익히 읽어, 우선 문호를 세우고, 다음으론 《좌씨전(左氏傳)》을 읽어 간결체를 배우고, 다음에는 《전국책(戰國策)》을 읽어 문장력이 종횡무진케 하고, 다음에는 《장자(莊子)》를 읽어 신출귀몰(神出鬼沒)하는 솜씨를 연구하고, 《한비(韓非)》ㆍ《여람(呂覽)》으로 지류를 통창케 하고, 《고공기(考工記)》ㆍ《단궁(檀弓)》을 읽어 뜻을 가다듬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익히 읽어 자유자재롭고 뛰어난 태를 키우는 것이다. 시를 배울 때는 먼저 《당음(唐音)》을 읽고, 다음으로 이백(李白)의 시를 읽되, 소동파(蘇東坡)ㆍ두목(杜牧)은 그 솜씨만 따면 그만이다.”
하였다.

나의 중형은 언젠가,
“내가 평생에 번천(樊川 당(唐) 나라 두목(杜牧)의 호)을 익히 읽은 탓으로 문장이 높지 못하다.”
고 한탄하였고, 이익지(李益之) 또한,
“소동파ㆍ황산곡의 시가 내 폐부에 달라붙은 지가 이미 오래인지라, 시어를 만듦에 성당(盛唐)의 품격이 없다.”
하였다. 그러나 시 짓기를, 소동파ㆍ황산곡처럼 하면 그만이지, 하필 새삼스레 도연명(陶淵明)ㆍ사영운(謝靈運) 사이를 꾀할 것인가.

나의 중형의 만년의 글은 유자후(柳子厚)와 너무도 같아서, 주한정기(晝寒亭記)ㆍ축려문(逐癘文) 등 작품은 가히 대씨당(戴氏堂)ㆍ축필방(逐畢方)등 문과 서로 어슷비슷하다. 최입지(崔岦之)가 화기(畫記)에 대해서 말하기를 철로보지(鐵鑪步志)만 못지않다고 하였다. 그러나, 비명(碑銘)과 묘지(墓誌)는 무엇보다도 그의 장기인데도 세상 사람은 다 모르고, 보아도 아는 이가 드무니, 후세에 반드시 양웅(揚雄)이 있어 알아 줄 것이다.

임진년에 왜구(倭寇)가 서울을 함락하고 바로 철령(鐵嶺)을 넘었다. 장계(長溪) 황정욱(黃廷彧)이 북청(北靑) 진남루(鎭南樓)에 올라 한탄하기를,
“정입부(鄭立夫)가 살았더라면 왜놈이 어찌 능히 철령을 넘었으랴.”
하더니, 7월에 회령(會寧)에서 사로잡혔다. 장계의 문장은 우뚝하고 웅건하며 속기가 없다. 조선초로부터 문병(文柄)을 잡은 자가 모두 사가독서(賜暇讀書)한 자 가운데서 나왔지만 장계만은 그렇지가 않아 세상에선 그를 영화롭게 여기지만 지난해 난리에 화를 유달리 더 입었다.
황정욱(黃廷彧)의 자는 경문(景文), 호는 지천(芝川), 장수인(長水人)이며 벼슬은 병조 판서이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정입부(鄭立夫)의 이름은 언신(彦信), 호는 나암(懶庵), 동래인(東萊人)이며 벼슬은 우의정인데, 기축년(1589, 선조22) 정여립(鄭汝立)의 옥사(獄事)에 원통하게 죽었다. 뒤에 신원되었다.

경인년(1590, 선조23)에, 병부 주사(兵部主事) 왕사기(王士驥)는 봉주(鳳洲 왕세정(王世貞)의 호)의 아들로 우리나라 사신의 복물(卜物 사신이 가지고 가는 공물(貢物))을 검열하러 왔다가 마침 한집에 있게 되었다. 통역을 통하여 우리나라 문장을 보기 원하자 어떤 이가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의 호)가 지은 정암(靜庵) 비문(碑文)을 보였다. 주사가 소매에 넣고 가며,
“우리 아버지께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하고, 또
“명(銘)은 추역산송(鄒嶧山頌) 같으면서도 광염(光焰)은 더하고, 서(序)는 법언(法言) 같으면서도 넓고 크기는 그보다 나으니, 당신네 나라에도 이런 인물과 이런 문장이 있단 말입니까?”
하였다고 한다.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자는 효직(孝直), 한양인(漢陽人)이며 벼슬은 대사헌(大司憲), 시호는 문정(文貞)이고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소재(蘇齋)의
바다 달에 벌레 소리는 끝지고 / 海月蟲音盡
산 바람에 이슬 기운 걷혔네 / 山風露氣收
라는 구절은 소릉(少陵 두보(杜甫)의 호)의 시집 중에서 찾는다 해도 흔히 얻을 수 없는 것이며
애초에 우의정 사임하고 / 初辭右議政
문득 판중추 되었다네 / 便就判中樞
라는 구절은 대우(對偶)가 자연스러워 솜씨를 부리거나 깊이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돌아간 자기 아버지 신도비(神道碑)를 지을 때는 밋밋하여 굴기(崛奇)한 곳이 없으니, 아마도 기발하게 하려고 마음 쓰다가 도리어 옹졸해진 것이 아닌가 한다.

나의 중형은 논평하기를, 국초 이래 문은 경렴당(景濂堂)을 제일로 치고, 지정(止亭)을 다음으로 치며, 시는 충암(冲庵)의 높음과 용재(容齋)의 난숙함을 모두 미칠 수 없다고 여겼다. 나의 망령된 생각으로는 충암은 세련되지 않은 것 같고 용재는 너무 진부하니, 시 또한 경렴을 으뜸으로 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지정 남곤(南袞)의 자는 사화(士華), 의령인(宜寧人)이며 벼슬은 영의정,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기묘사화 때 간인(奸人)의 괴수이다.

가사(歌詞)를 지으려면 반드시 글자의 청탁(淸濁)과 율(律)은 고하(高下)를 분간해야 하는데, 우리나라 음률(音律)은 중국과 달라서, 가사를 짓는 이가 없다. 공용경(龔用卿)과 오희맹(吳希孟)이 왔을 때,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의 호)이 차운하지 않자, 세상에서는 체면을 유지했다고들 하였다. 그 후에 소퇴휴(蘇退休)가 시강(侍講)의 운에 차운한 시에,
마음이 서글픈 이 발 걷고 다시 보니 / 傷心人復卷簾看
꽃다운 풀빛 위에 눈길이 멈추네 / 目斷凄凄芳草色
라는 구절은 화공(華公)이 여러 차례 칭찬하였으니, 모두 음률에 맞아서인지, 아니면 다만 그 말씨의 아름다움을 취한 것인지?
소퇴휴의 이름은 세양(世讓), 자는 언겸(彦謙), 진주인(晉州人)이며 벼슬은 찬성(贊成)이고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나의 누님이 언젠가 ‘시를 지으면 운율에 맞다’고 차칭하면서 소령(小令)짓기를 좋아하기에, 내 속으로 남을 속이는구나 하였는데, 《시여도보(詩餘圖譜)》를 보니 구절마다 옆에 동그라미와 점으로, 어떤 자는 전청(全淸)ㆍ전탁(全濁)이고 어떤 자는 반청(半淸)ㆍ반탁(半濁)이라 하여 글자마다 음을 달았기에 시험삼아 누님이 지은 시를 가지고 맞추어 보니, 어떤 것은 다섯 자 어떤 것은 세 자의 착오가 있을 뿐, 크게 서로 어긋나거나 잘못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제야 걸출ㆍ고매한 천재적인 소질로 겸손하게 힘썼기 때문에 많은 노력을 하지 않고서도 이처럼 성취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의 ‘어가오(漁家傲)’ 한 편은, 모조리 음율에 맞고 다만 한 자가 맞지 않았다. 사(詞)는 다음과 같다.
뜰에는 봄바람 스산하고 / 庭院東風惻惻
담머리엔 한그루 배꽃 희어라 / 墻頭一樹梨花白
옥난간에 기대어 고향 그리나 / 斜倚玉欄思故國
갈 수는 없고 / 歸不得
하늘과 맞닿은 우거진 꽃다운 풀빛만이 / 連天芳草凄凄色
비단방장 비단창도 쓸쓸히 닫겼는데 / 羅幙綺窓隔寂寞
단장한 얼굴에 두 줄기 눈물 붉은 가슴 적시네 / 雙行粉淚霑朱臆
강북과 강남은 무성한 나무가 가리었는데 / 江北江南煙樹隔
이 그리움 어이하리 / 情何極
산 높고 물은 아득 님 소식은 없으니 / 山長水遠無消息
‘주(朱)’ 자는 마땅히 반탁(半濁) 글자를 써야 하는 자리인데 ‘주(朱)’ 자는 전탁(全濁)이다. 하긴 소장공(蘇長公) 같은 재주로도 굳이 운율에 맞추지를 않았거든 하물며 그만 못한 사람일까보냐.

나의 중형 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쓸쓸한 들에 북두성 자루는 드리웠고 / 斗柄垂寒野
부서진 배 여울 모래에 놓였구나 / 灘沙閣敗船
이것을 소재(蘇齋) 상공이 몹시 칭찬하여 당인(唐人)에 못지않다고 하였다.

나의 중형의 산역에 살다[居山驛]라는 시는 이러하다.
새벽 별빛 아래 먼 길 떠나는 고각 소리 들리는데 / 長路鼓角帶晨星
터벅터벅 청주 고역정으로 향한다 / 倦向靑州古驛亭
나하동 그윽하고 산은 웅기중기 / 羅下洞深山簇簇
시중대(侍中臺)를 감도는 바다는 아득아득 / 侍中臺廻海冥冥
천년 전 부러진 창 모래에 묻혀 짧고 / 千年折戟沈沙短
십리 황무지는 비 온 뒤에 비린내 나네 / 十里平蕪過雨腥
옛일은 아득해라 물을 데 없고 / 舊事微茫問無處
두어 가락 젓대 소리 차마 어이 들을 건가 / 數聲橫笛不堪聽
삭계례(朔啓例)에 따라 그 시가 대궐에 들어가니, 주상이 보고 몇 번이나 감탄하고는 오륙구(五六句)에 이르러서는,
“작구법(作句法)이 의당 이래야 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조사(詔使) 황번충(黃樊忠)이 거련관(車輦館)의 반송(蟠松)을 읊었는데, 그 맨 끝구에 한(韓) 자를 압운하니, 나의 중형이 한 선자(韓宣子)가 각궁(角弓)을 읊은 일을 인용하여 짓기를
라 하였다. 이숙헌(李叔獻) 선생이 그 당시 원접사였는데 이 시를 버리고 쓰지 않자, 고제봉(高霽峯)이 크게 한탄하고 애석하게 여겼다. 홍당릉(洪唐陵)이 몰래 황공(黃公)에게 보이니, 황공이 전편을 손으로 베껴 가져오게 하고는 한동안 고개를 끄덕이었다. 중국 사람은 시의 공정을 아는 것이 이러하다.
숙헌(叔獻)의 이름은 이(珥), 호는 율곡(栗谷), 덕수인(德水人)으로 벼슬은 일상(一相)에 이르고 시호는 문성(文成)이며 문묘에 배향되었다. 당릉(唐陵)은 당성(唐城)의 잘못인 듯하다. 당성은 역관 홍순언(洪純彦)의 호이다.
율곡(栗谷)의 산중절구는 다음과 같다.
약 캐다 갑자기 길을 잃으니 / 采藥忽迷路
산마다 온통 가을 낙엽뿐 / 千峯秋葉裏
산승이 물 길어 오더니 / 山僧汲水歸
숲가에 피어나네 차 달이는 연기 / 林末茶煙起
성을 나서는 느꺼움[出城感懷]이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아득히 사방에는 먹구름만 가득해도 / 四遠雲俱黑
중천엔 해 정히 밝구나 / 中天日正明
외론 신하의 한줌 눈물을 / 孤臣一掬淚
한양성 향하여 뿌리노라 / 灑向漢陽城


근세 어떤 선비가 지리산(智異山)에 유람갔는데, 한 외진 숲에 이르니, 폭포는 이리저리 흐르고 푸른 대 우거진 가운데 한 띳집이 있는데, 한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섰다가, 선비를 보고는 몹시 반기며 손을 맞아 솔 아래 앉혀 놓고 막걸리에 나물국으로 대접하고는 말하기를,
“이 늙은 것이 평소에 머리 빗기를 좋아하여 하루에 꼭 천 번은 빗어내린다오.”
하면서 쪽지를 내어 놓는데, 그 속에 든 것이 바로 머리를 빗는다는 소두시(梳頭詩)였다.
얼레빗으로 솰솰 가려 낸 다음 참빗으로 훑되 / 木梳梳了竹梳梳
천 번이나 훑어내니 이는 벌써 없어졌네 / 梳却千廻蝨已除
어떻게 하면 만 길 되는 큰 빗 구하여 / 安得大梳長萬丈
백성의 이 모조리 훑어 없앨꼬 / 盡梳黔首蝨無餘
선비가 자신도 모르게 뜰 아래 내려가 절하고 그 이름을 물으니 숨기고 알려 주지 않았다. 이튿날 친구들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하고는 두세 사람이 같이 다시 찾아가보니 집은 그대로 있었으나 사람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성혼 호원(成渾浩原 호원은 자) 선생이 청양군(靑陽君)을 애도한 시에,
속세에 벼슬살이 진정 뉘가 참인고 / 宦遊浮世定誰眞
역려에서 만나니 바로 친구일레 / 逆旅相逢卽故人
오늘의 이별 자리 한 가락 노래로 / 今日祖筵歌一曲
고향 봄동산에 가서 누울 그대 전송하네 / 送君歸臥舊山春
하였으니, 이른바 길게 읊는 가락의 서글픔이 통곡보다 더하다는 게 바로 이것이 아닌가?
선생의 호는 우계(牛溪)이고 창녕인(昌寧人)이다. 벼슬은 참찬(參贊)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간(文簡)이며 문묘에 배향되었다. 청양군(靑陽君) 심의겸(沈義謙)의 자는 방숙(方叔), 호는 손암(巽庵)이며, 청송인(靑松人)으로 벼슬은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다.

차천로 복원(車天輅復元 복원은 자)의 글은 당시 사람들이 웅문(雄文)이라 일컬었다. 글(文)이란 기(氣)로써 주를 삼아야 하건만 복원(復元)은 하찮은 부스러기를 주워 모았고, 사륙문(四六文)은 전아(典雅)해야 하는데도 복원의 사륙문은 순정치 못하고 거칠다. 시는 그보다 더 못하다. 그의 일본기행고(日本紀行稿)가 매우 많아 천여 수나 되지만, 읊을 만한 글귀는 하나도 없다. 다만 명천(明川)으로 귀양 갈 때 지은
하늘가에 성난 소린 발해의 파도 / 天外怒聲聞渤海
눈속에 시름겹긴 음산의 빛이로다 / 雪中愁色見陰山
라는 구절은 정말 웅혼(雄渾)하다. 그러나 전편이 다 그렇지는 못하다. 만약 복원이 조금만 사리를 추구하여 많이 짓거나 빨리 짓는 데 치우치지만 않았다면, 고인의 경지에 이르기는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천로(天輅)의 호는 오산(五山)이며, 연안인(延安人)으로 벼슬은 봉정(奉正)이다.

복원(復元)이 이필이 형산에 돌아가기를 비는 표[李泌乞還衡山表]를 지었는데,
객성이 임금자릴 여러번 침범하고 / 屢犯客星於帝坐
늘 경월이 천혼을 두드렸네 / 常叩卿月於天閽
라는 구절이 있어 세상에서 적절하다고 일컬었다. 우리 중형이 상주 목사(尙州牧使)로 가는 윤칠계(尹漆溪)를 보내는 시의 항련(項聯)에 역시
경월이 잠시 대궐을 하직하자 / 卿月暫辭天北極
복성이 먼저 낙동강을 비추누나 / 福星先照洛東江
라는 구절이 있으니, 차천로의 표에 비하면 나은 것 같다.
칠계(漆溪)의 이름은 탁연(卓然), 자는 상중(尙中), 호는 중호(重湖)이며 칠원인(漆原人)으로 벼슬은 형조 판서에 이르렀고 시호는 헌민(憲敏)이다.

한익지(韓益之)가 어떤 일로 파직되어 농사를 짓기로 하고 온 식구가 원주로 내려갔다. 배가 종실(宗室) 순치수(順致守)의 별장에 닿았는데, 수(守)는 마침 활을 쏘고 약을 캐던 터라 사람을 달려 보내어 누구냐고 물어왔다. 익지(益之)는 대답을 하지 않고 절구 한 수로 대구하기를
공자의 풍류가 무리에 뛰어나니 / 公子風流自不群
봄이 오자 살구꽃 마을에 낚시질하네 / 春來漁釣杏花村
쪽배 탄 나그네가 정겹게 문안드리니 / 扁舟過客勤相問
이 사람은 금양의 옛 원이라오 / 我是衿陽舊使君
라 하자 수가 배를 타고 뒤쫓았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그때 한익지는 금천 군수로 있다가 파면되어 가는 중이고, 순치(順致)는 금천에 은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익지(益之)의 이름은 준겸(浚謙), 호는 유천(柳川)이다. 청주인(淸州人)으로 벼슬은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익(文翼)이며, 인조의 장인이다.

이익지(李益之)가 최가운(崔嘉運)을 따라 영광(靈光)에 노닐 적에, 사랑하는 기생이 있어 자금(紫錦)을 사주려는데, 그 비단 살 돈을 마련할 수 없어, 익지가 시로써 다음과 같이 빌었다.
장사아치 강남 저자에서 비단을 파니 / 商胡賣錦江南市
아침 해가 비치자 자주빛 안개가 피어나는구나 / 朝日照之生紫煙
미인은 그걸 사서 치마며 허리띠를 만들려는데 / 美人欲取爲裙帶
주머니 더듬어야 돈은 없구려 / 手探囊中無直錢
가운(嘉運)이 말하기를,
“손곡(蓀谷)의 시는 한 자가 천금이니 감히 비용을 아끼랴.”
하고는 한 자에 각각 세 필씩 쳐서 그 요구에 응해 주었으니, 그 재주를 아낌이 이와 같았다.

동파(東坡)의 시에
슬프다 사하 물가 십리의 봄 / 惆悵沙河十里春
한 차례 꽃 이울자 다음 꽃 새로워라 / 一番花老一番新
비낀 저녁 놀에 작은 누각 예 같건만 / 小樓依舊斜陽裏
그 당시 춤추던 이 어디 갔는지 / 不見當時垂手人
라는 것이 있는데, 손곡(蓀谷)이 죽은 아내를 슬퍼한 시에도 또한 동파의 말을 답습했으니 그 시는 다음과 같다.
깁 방장엔 향내 가시고 거울엔 먼지 / 羅幃香盡鏡生塵
닫힌 문엔 복사꽃만 쓸쓸한 봄날 / 門掩桃花寂寞春
작은 누각엔 옛날처럼 달은 밝은데 / 依舊小樓明月在
발 걷고 달 즐길 이 그 누구런가 / 不知誰是捲簾人
이 시는 무르녹게 곱고 정겨워 전사람의 말을 쓴 줄도 모를 정도다. 익지(益之)가 기생을 너무 좋아한 것으로 남에게 비방을 받으면서도 정에 끌린 것이 이러하단 말인가.

당 나라 장우(張祐)와 최애(崔涯)가 창루(娼樓)에 제시(題詩)를 해 주었는데, 만약 칭찬을 하면, 네 말[馬]이 끄는 수레가 그 문을 메우고, 그 시가 기생을 헐뜯으면 손님도 끊겼다. 신차소(申次韶) 선생이 상림춘(上林春)이라는 기생에게 준 시에
제오교 머리에 내 낀 버들 비꼈고 / 第五橋頭煙柳斜
밤들자 바람 자고 날씨도 해맑아라 / 晩來風日轉淸和
노르스름한 열두 난간에 아가씨 옥과 같으니 / 緗簾十二人如玉
대궐 안 시인들도 말 가는 대로 찾아드네 / 靑瑣詞臣信馬過
라 하니, 기생의 명성은 이로 인해 십배나 올랐다. 이익지(李益之)가 옥하선(玉河仙)이란 기생을 비웃기를
빗자루 같은 머리털 그나마 센데다가 / 頭如刷箒色如銀
암말 않고 앉은 꼴 귀신 같구나 / 黙坐無言似鬼神
몸에 걸친 비단옷도 얻어 입은 듯 / 遍身綺羅疑借著
고작해야 곽충륜에게나 시집가겠군 / 只宜終嫁郭忠輪
이라 하였다. 충륜(忠輪)은 장님인데 돈은 있었다. 이 기생은 유명했었으나 익지(益之)의 시가 나오자 문득 그 집이 쓸쓸해졌다. 똑같이 이름난 기생이로되, 한 시로 그 값을 올릴 수도 내릴 수도 있었으니, 어찌 다만 기생뿐이겠는가? 대개 선비도 이와 같았다.
차소(次韶)의 이름은 종호(從護), 호는 삼괴(三魁)로 고령인(高靈人)이다. 벼슬은 예조 참판에 이르렀는데, 연경에 사신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송도에서 죽었다.
삼괴(三魁)의 상춘(傷春) 절구에
한 사발 차 마시자 졸음 막 깨니 / 茶甌飮罷睡初醒
이웃에서 들려오는 붉은 옥피리 소리 / 隔屋聞吹紫玉笙
제비도 오잖고 꾀꼬리도 날아갔는데 / 燕子不來鸎又去
뜰에 가득 붉은 꽃잎만 지네 소리도 없이 / 滿庭紅花落無聲
라는 시가 있다.


임자순(林子順)은 스스로 소치(笑癡)라 호하였다. 우리 중형이 언젠가 기생들의 고사를 모아 글을 지었는데, 화치(和癡)의 고사를 따서 이십사령(二十四令)을 지었다. 자순(子順)이 칠언시로 제하기를
추리고 가린 명기 스물넷인데 / 揀得名花二十四
소치의 차지는 하나도 없네 / 笑癡之物一無之
인간 만사 다 거짓이라고 / 人間萬事皆虛僞
곳곳마다 풍류랑은 소치라 말들 하네 / 處處風流說笑癡
라 하였는데, 그의 글은 흔히 볼 수가 없다. 이른바 《수성지(愁城志)》라는 것은 문자가 생긴 이래로 특별한 글이니, 천지간에 절로 이런 문자가 없어서는 안 된다.

익지(益之)의 시를 세상 사람들은 기생에 대한 실수 때문에 트집을 잡지만, 그의 동산역시(洞山驛詩)에
이웃집 어린 며느린 저녁거리도 없어 / 隣家少婦無夜食
비맞으며 보리 베어 풀섶길로 돌아오네 / 雨中刈麥草間歸
축축한 생솔가지 불도 안 붙는데 / 靑薪帶濕煙不起
문 들어서자 어린 것들 옷 잡고 칭얼대네 / 入門兒女啼牽衣
라 하였으니, 시골 살림의 식량 딸리는 보릿고개 실정을 직접 보는 듯하다. 그의 이삭줍기노래[拾穗謠]에는
논에서 이삭 줍는 어린이 하는 말 / 田間拾穗村童語
온 종일 이리저리 주워야 소쿠리도 안 차요 / 盡日東西不滿筐
올해는 벼 베는 이 솜씨 하 좋아 / 今歲刈禾人亦巧
한톨이라도 흘릴세라 관창에 다 바쳤대요 / 盡收遺穗上官倉
라 하였으니, 흉년에 시골 사람의 말을 마치 친히 듣는 듯하다. 영남도중(嶺南道中)이란 시에서는
영감은 솥 지고 숲길로 가버렸는데 / 老翁負鼎林間去
할멈은 어린 것을 데리고 따라가질 못하네 / 老婦携兒不得隨
사람 만나 떠돌아다니는 괴로움 넋두리하되 / 逢人却說移家苦
종군하기 육년이라 부자도 이별이라오 / 六載從軍父子離
라 하였으니, 부역에 허덕이는 백성들이 살 수 없어 유리 신고하는 모습이 한편에 갖추 실려 있다.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들이 이 시를 보고 가슴 아파하며 놀라 깨달아, 고달프고 병든 자를 어진 정치로 잘 살게 한다면, 그 교화에 도움됨이 어찌 적다 할 것인가. 문장을 지음이 세상 교화와 관계가 없다면 한갓 짓는데 그칠 뿐일 것이니, 이러한 작품이 어찌 소경의 시 외는 소리나 솜씨 있는 간언보다 낫지 않겠는가.

이망헌(李忘軒 망헌은 이주(李冑)의 호)이 진도(珍島)로 귀양 갈 때, 이낭옹(李浪翁 낭옹은 이원(李黿)의 자)을 작별하는 시에
바닷가 정자에 가을밤도 짧은데 / 海亭秋夜短
이번 작별에 새삼 무슨 말 할꼬 / 一別復何言
궂은비는 깊은 바닷속까지 연하였고 / 怪雨連鯨窟
험상궂은 구름은 변방에까지 이었네 / 頑雲接鬼門
흰 구레나룻에 파리한 안색 / 素絲衰鬢色
두려운 눈물 자국 적삼에 그득 / 危涕滿痕衫
이소경(離騷經)의 말을 가지고 / 更把離騷語
그대와 꼼꼼히 따질 날 그 언제런가 / 憑君欲細論
라 하였다. 그가 제주도로 이배(移配)될 제, 배가 막 뜨려는데 친동생이 뒤쫓아 왔다. 떠나면서 시 한 수를 읊어 작별하기를
찌걱거리는 노 굳이 멈추고 한평생을 서러워하니 / 强停鳴櫓痛平生
백일은 밝게밝게 우리 형제를 비추네 / 白日昭昭照弟兄
정위새 와서 바다를 메우기만 한다면 / 若敎精衛能塡海
한 덩이 탐라도를 걸어서도 가련만 / 一塊耽羅可步行
하였으니 천년 뒤에도 읽는 이의 애를 끊어지게 하리라. 김경림 명원(金慶林命元 경림은 봉호)이 우리 형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낭옹(浪翁)의 이름은 원(黿), 호는 재사당(再思堂)이며, 경주인(慶州人)이다. 벼슬은 예조 정랑에 이르렀다. 무오년에 장류(杖流)되었고, 갑자년에 원통하게 죽었다. 망헌(忘軒)의 아우의 이름은 여(膂), 자는 홍재(弘哉)이고 벼슬은 수찬(修撰)에 이르렀다. 명원(命元)의 자는 응순(應順), 호는 주은(酒隱)이고 경주인이다. 벼슬은 영의정에 이르렀고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우리 형의 이름은 성(筬), 자는 공언(功彦)인데 벼슬은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고 호는 악록(岳麓)이다.
망헌(忘軒)의 만성시(漫成詩)에
나이 드니 풍상은 두렵기만 하고 짓궂은 병은 더욱 떠날 줄 모르는데 / 老怯風霜病益頑
외로운 처마 아침해에 포단에 앉았네 / 一簷朝旭坐蒲團
이웃 중이 가버린 뒤 사립 다시 닫았는데 / 隣僧去後門還掩
산구름만 돌난간을 스쳐 지날 뿐 / 只有山雲過石欄
이라는 것이 있다. 중에게 준[寄僧] 시는 또 다음과 같다.
종소리는 달을 두드려 가을 구름에 지고 / 鍾聲敲月落秋雲
산비는 주룩주룩 그대는 안 보이네 / 山雨翛翛不見君
염정은 닫히고 불길만 보이는데 / 鹽井閉門唯有火
개울 너머 인기척 밤깊도록 두런두런 / 隔溪人語夜深聞


한 경홍 호(韓景洪濩)는 글씨를 잘 쓸뿐더러 시도 잘 지었다. 그러므로 한경당(韓敬堂 경당은 한세능(韓世能)의 호)ㆍ등북해(滕北海 북해는 등계달(滕季達)의 호)ㆍ황규양(黃葵陽 규양은 황홍헌(黃洪憲)의 호)이 모두 그를 시인으로 대접했다. 임궁아집시(琳宮雅集詩)를 경홍(景洪)에게도 운을 화작하게 하였으니, 중국인이 그를 중히 여기는 것이 또한 이와 같았다. 언젠가 《봉주집(鳳洲集)》을 보니, 한 태사(韓太史)의 《동행록(東行錄)》에 발문을 지은 것이 있는데, 거기에서 한석봉(韓石峯)의 글씨를 칭찬하되 액자(額字)는 양속(羊續)보다 나아서 성난 사자가 돌을 후벼대는 것과 같다고 비유하였고 해서(楷書)는 왕헌지(王獻之)와 비슷하고 초서(草書)는 바로 회소(懷素)와 같다고 하였으니, 참으로 경홍을 잘 알아주었다고 하겠다.
다른 책을 상고하면 호(濩)의 자는 경호(景浩)인데, 여기서 경홍(景洪)이라 하였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혹은 자가 둘인지?
근세에 이현욱(李顯郁)이라는 이가 있어 시마(詩魔)에 걸렸는데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의 호) 상공(相公)은 그런 줄도 모르고 굉장히 칭찬을 하였다. 이익지(李益之)가 어느 날 상공을 뵈러 가니 상공은 현욱(顯郁)의 시를 보여주며 그에게 고하(高下)를 품평케 하였다. 그러자 이익지는
봄이 오는 걸음걸인 느릴 것도 없고 서두는 것도 아닌데 / 步復無徐亦不忙
봄빛은 동서남북으로 고루 비치네 / 東西南北遍春光
라는 구절을 들어,
“이것은 정말 문장가의 말투입니다. 우리나라 서ㆍ이(徐李) 같은 분도 일찍이 이런 말은 못했습니다. 게다가 이 사람은 나이도 어리니 필경 시마(詩魔)가 붙은 것입니다.”
하였지만, 상공은 그렇게 여기질 않았으나 얼마 있다가 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그가 허영주(許郢州)에게 차운한 시에
봄 산길 외져 돌아가는 나무꾼에게 물으니 / 春山路僻問歸樵
손가락으로 앞산 돌길을 가리키네 / 爲指前峯石逕遙
중도 백운도 어두운 골짜기로 돌아간 뒤 / 僧與白雲還暝壑
달은 푸른 바다 찬 밀물을 따라 오르네 / 月隨滄海上寒潮
세상살이 늙을수록 도무지 믿을 수 없는데 / 世情老去渾無賴
유흥만은 요즘에도 삭을 줄 모르누나 / 遊興年來獨未銷
둘러보니 외로운 배 벌써 자취 아득한데 / 回首孤航又陳迹
물 건너 드문 종소리만 한밤에 은은해라 / 疏鐘隔渚夜迢迢
라 하였고, 이익지에게 차운한 시는 다음과 같다.
바람에 휘몰려 놀란 기러긴 편편한 모래밭에 내려앉고 / 風驅驚雁落平沙
물맵시 산빛엔 어스름 빛 자욱해라 / 水態山光薄暮多
용면(龍眠)시켜 이 경치 그림폭에 옮기려 하는데 / 欲使龍眠移畫裏
고깃배의 젓대소린 이를 어쩐다지 / 其如漁艇笛聲何
말들이 모두 속기가 없고 격이 또한 노숙하다. 시마(詩魔)가 떠난 뒤로는 일자무식이 되어 마치 추매(椎埋)처럼 되어버렸다.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의 자는 여수(汝受)이고 한산인(韓山人)인데 벼슬은 영의정에 이르렀다.

정용(鄭鎔)의 아들 백련(百鍊)이 일찍이 중풍에 걸렸는데 하루는 스스로 말하기를,
“어떤 젊은 서생을 만났는데, 연화관(蓮花冠)을 쓰고 용모는 눈빛[玉雪] 같았다. 그는 스스로 이르기를 ‘나는 당 나라의 아사(雅士) 요개(姚鍇)로 이장길(李長吉 장길은 이하(李賀)의 자)과 친한 친구 사이인데, 안탕산(雁蕩山)에 산 지 2백년이 된다. 조선의 산천이 가장 아름답다기에 한라산에 옮겨 산 지도 천 년 가까이 되었다. 다시 금강산으로 가려고 하다가 자네와 인연이 있으므로 삼각산에 와 살게 되었다. 그런 지도 벌써 30년이 되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여기에 왔다.’고 했다.”
하였다. 그의 시는 다음과 같다.
만리라 큰 바다에 날은 저문데 / 萬里鯨波海日昏
벽도꽃 그림자 하늘문에 비치네 / 碧桃花影照天門
신선 수레 한 번 쉬면 천년이 훌쩍 지난다던데 / 鸞驂一息空千載
구령의 신선 피리 소리 한밤에 들리누나 / 緱嶺靈笛半夜聞
또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삼각산에 깃든 지 삼십년인데 / 棲身三角三十春
남녘 구름 바라보며 늘 울었네 / 日日每向南雲哭
솔바람 소리는 용음 소리만 못한데 / 松風不如龍吟聲
난안은 또 삼릉학만 못하도다 / 蘭雁又下三陵鶴
삼릉학은 오지를 않고 / 三陵鶴不來
도봉 앞엔 가을 달만 어둡구나 / 蜀道峯前秋月黑
어떤 이가 난안(蘭雁)이 무슨 뜻이냐고 묻자, 난초가 시들 무렵이면 철새인 기러기가 오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한다. 이렇게 한 해 남짓 지나더니 시마(詩魔)가 떠나자 병도 나았다. 이현욱(李顯郁)의 시마는 장편 대작도 다 지을 수 있었고, 산문(散文)도 다 원숙했는데, 정백련에게 걸린 시마는 격은 현욱보다 나았지만 율시는 절구에 못 미쳤으니, 더구나 그 문(文)이야 말할 게 있겠는가. 요개(姚鍇)의 이름은 전기(傳記)나 소설(小說)에도 보이지 않으니, 혹 당 나라 말기에 절구로 이름난 이가 아닌가 한다. 우리 중형은 그의 오언 절구를 사랑하여 성당(盛唐)에 못지 않다고 여겼다. 그가 노산(魯山)의 구택(舊宅)에 제(題)한 시는 다음과 같다.
사람은 복사꽃 핀 강 언덕을 지나가고 / 人度桃花岸
말은 버들에 스치는 바람 소리에 운다 / 馬嘶楊柳風
노을진 산 그림자 속에 / 夕陽山影裏
노산군댁은 쓸쓸도 하여라 / 寥落魯王宮
청명날 남에게 주다[淸明日贈人]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이월이라 제비가 바다를 뜨니 / 二月燕辭海
고을마다 꽃이 가득할 때로다 / 千村花滿辰
청명이면 으레 취한 지도 / 每醉淸明節
올 들어 하마 삼십년일세 / 至今三十春
춘만(春晩)이란 시는 다음과 같다.
봄잠 자고 나서 술잔 따르니 / 酒滴春眠後
걷은 발 앞에 꽃이 흩날리네 / 花飛簾捲前
덧없는 인생 얼마나 살리 / 人生能幾何
비 내리는 하늘을 창연히 바라보네 / 悵望雨中天
추일(秋日)이란 시는 다음과 같다.
국화는 빗속에 꽃 드리우고 / 菊垂雨中花
뜨락의 오동잎은 가을에 놀래누나 / 秋驚庭上梧
오늘아침 갑절이나 서글퍼짐은 / 今朝倍惆悵
어젯밤 시골 꿈을 꾸어서일세 / 昨夜夢江湖
그의 문금(聞琴)이란 시는 이러하다.
아름다운 여인 붉은 비파를 끼고 / 佳人挾朱瑟
삐비 같은 섬수를 희롱하누나 / 纖手弄柔荑
갑자기 유수곡 타니 / 忽彈流水曲
집이 고릉 서녘에 있네 / 家在古陵西
익지가 또,
밝은 달은 큰바다 저문 줄도 모르고 / 明月不知滄海暮
구의산 기슭엔 흰 구름만 자욱 / 九疑山下白雲多
이란 구절을 전해 주었는데, 이런 구절은 이미 꿈의 경지에 든 것이다. 백련(百鍊)의 아우 감(鑑)은 나와 절친하므로, 상세한 얘기를 갖추 들었다.
용(鎔)의 호는 오정(梧亭)이고 해주인(海州人)이다. 시로 세상에 알려졌으나 일찍 죽었다. 감(鑑)의 호는 삼옥(三玉)인데 벼슬은 정랑(正郞)에 이르렀다.

김충암(金冲庵)의 비로봉에 올라서[登毗盧峯]란 시에
해는 비로봉 위에 지고 / 落日毗盧峯
동해는 먼 하늘인 양 아스라해라 / 東溟杳遠天
푸른 바위에 불을 지펴 자고 / 碧巖敲火宿
옷소매를 나란히 자욱한 안개 속을 내려오다 / 聯袂下蒼煙
하였는데, 우리 중형의 시는
팔월이라 한가위 밤에 / 八月十五夜
비로봉 위에 홀로 서다 / 獨立毗盧峯
계수나무에 하늘 서리 차갑고 / 桂樹天霜寒
하늬바람결에 외기러기 그림자 / 西風一雁影
라 하였으니 충암(冲庵)의 시와 같은 가락이라 할 만하다.

고이순(高而順 이순은 고경명(高敬命)의 자)의 귤시(橘詩)는 다음과 같다.
평생을 소강남에서 마음껏 조으니 / 平生睡足小江南
귤밭 속 길이란 훤하여라 / 橘柚林中路飽諳
주황빛 열맨 예같건만 어버인 기다려 주질 않으시니 / 朱實宛然親不待
육적(陸績)이 있은들 그 뜻 어이하리 / 陸郞雖在意難堪

심어촌(沈漁村 어촌은 심언광(沈彦光)의 호)의 두견시(杜鵑詩)는 다음과 같다.
삼월이라 임금 여읜 이 마음 아픈데 / 三月無君弔此身
두견새 울음에 한결 더 슬프구나 / 杜鵑聲裏更悲辛
산중에서도 신하의 도리 폐치 않으니 / 山中不廢爲臣義
서천에서 재배하던 사람에 비기노라 / 準擬西川再拜人
이 두 시의 뜻은 너무도 서글프니 모두 충심에서 나온 것으로 어버이 생각, 임금 사랑하는 정성이 말 밖에 넘친다. 저 화려하게 꾸미기나 하는 자는 정말 시틋하다.

보락(保樂) 김안로(金安老)가 과거에 급제하기 전에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봄은 우 임금이 정리한 산천에 무르녹고 / 春融禹甸山川外
풍악은 순 임금 뜰 새짐승 사이에 아뢴다네 / 樂奏虞庭鳥獸間
라는 시를 보이면서,
“이 구절은 그대가 평생 드날릴 점(占)이라네.”
하였다. 꿈을 깨고 보니, 무슨 뜻인지도 몰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었다. 연산군이 병인년(1506, 연산군12)에 율시로 제를 내는데, 바로 ‘봄날 이원제자가 악보를 본다[春日梨園弟子閱樂譜]’라는 것이었고 간(間) 자로 압운(押韻)하라는 것이었다. 보락(保樂)이 갑자기 꿈속의 구절이 생각났는데 글제의 뜻과 꼭 들어맞으므로 이것으로 항련(項聯)을 메웠다. 그때 문경공(文敬公) 김감(金堪)은 대제학이고, 문경공 김안국(金安國)은 예조 좌랑으로 대독관(對讀官)이 되었는데, 시를 읽다가 이 구절에 이르러,
“이 시는 귀신의 말이다.”
하였다. 그러나 김감은 그렇게 여기질 않았다. 모재(慕齋 김안국의 호)가 말하기를,
“이름을 떼어 본 뒤 이 수재(秀才)를 불러서 따져 물으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김감이 방을 내어 걸고, 보락을 불러 물어보니, 과연 꿈속에 신이 일러 준 것이었다. 이 일로 해서 모재를 시를 잘 알아보는[藻鑑] 사람이라 일컫게 되었다.
감(堪)의 자는 자헌(子獻), 호는 선동(仙洞)이고 또 다른 호는 일재(一齋)인데 연안인(延安人)이다. 벼슬은 일상(一相)에 이르렀다. 안국(安國)의 자는 국경(國卿), 호는 모재(慕齋)이고 의성인(義城人)이다. 벼슬은 일상(一相)에 이르렀고 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송와잡설(松窩雜說)》에는 이 일이 정소종(鄭紹宗)의 일로 되어 있는데 근거가 분명하며, 또한 《국조방목(國朝榜目)》을 참고해 보아도, 연산군 갑자년(1504) 11월 별시에 어제(御題)는 춘방이원한열방악(春放梨園閒閱放樂)이었고 시는 칠률(七律)이었는데 제4등은 정소종(鄭紹宗)으로 되어 있어, 송와(宋窩 이기(李墍)의 호)가 기록한 것과 딱 들어맞는다. 여기서 김안로(金安老)라 한 것은 잘못 전해진 것 같다.


우리나라 아낙네로서 시 잘하는 사람이 드문 까닭은, 이른바 ‘술 빚고 밥 짓기만 일삼아야지, 그 밖에 시문(詩文)을 힘써서는 안 된다.’ 해서인가? 그러나 당인(唐人)의 경우는 규수로서 시로 이름난 이가 20여 인이나 되고 문헌 또한 증빙할 만하다. 요즘 와서 제법 규수 시인이 있게 되어 경번(景樊 허난설헌의 호)은 천선(天仙)의 재주가 있고 옥봉(玉峯) 또한 대가임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선비인 정문영(鄭文榮)의 아내가 남편 대신 남에게 준 시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바람 불고 이슬 내린 열두 층 요대에 / 風露瑤臺十二層
아롱진 구름 모롱이에 도사(道士)의 경 읽는 소리 끊기었네 / 步虛聲斷綵雲稜
솔숲 새에 그립단 말 부치고파도 / 松間欲寄相思字
병꾸러기 장경은 무릉에 누웠다네 / 多病長卿臥茂陵
생원(生員) 신순일(申純一)의 아내가 글 잘하고 시 잘 지었는데 절구 한 수가 전하고 있으니 다음과 같다.
구름은 험상궂고 하늘은 물같은데 / 雲險天如水
높은 다락 곧 날 듯하네 / 樓高望似飛
무단히 밤새 내리는 비에 / 無端長夜雨
십년이라 그리운 서방님 생각 / 芳草十年思
양 부사(楊府使)의 첩도 시를 잘했는데 추한시(秋恨詩)는 다음과 같다.
우수수 가을 바람 오동 가지 흔들고 / 秋風摵摵動梧枝
하늘은 까마득 기러기 낢도 더디어라 / 碧落冥冥雁去遲
깁창에 기댔어도 사람 하나 안 보이고 / 斜倚綺窓人不見
눈썹 같은 초생달만 서녘 섬돌에 내리네 / 一眉新月下西墀
또한 모성(某姓)의 아내라고 전하는 이의 시는 다음과 같다.
그윽한 시내는 서늘만 하고 달은 아직 안 떴는데 / 幽磵冷冷月未生
충충한 등 덩굴 길에 드리웠고 다니는 이는 드물어라 / 暗藤垂路少人行
촌집은 정녕 맞은편 봉우리 너머려니 / 村家知在前峯外
엷은 안개 성긴 별빛 속에 외방앗소리 들려라 / 淡霧疏星一杵鳴
송강(松江) 정 상공(鄭相公 이름은 철(澈))의 소실이 남편의 호색(好色)을 간한 시는 다음과 같다.
도헌 벼슬 낮지도 않고 / 都憲官非下
그 충성 나랏님도 아시는 터인데 / 忠誠聖主知
나라를 경륜할 솜씨를 가지고 / 徒將經國手
부질없이 날마다 기녀(妓女)만 마주하시다니 / 日日對蛾眉
사문(斯文) 권붕(權鵬)의 계집종은 이름이 금가(琴哥)인데 또한 글을 알아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장흥동에서 처음 헤어지고는 / 長興洞裏初分手
승학교 가에선 남몰래 애가 끊겼다오 / 乘鶴橋邊暗斷魂
해질 무렵 방초에서 헤어진 후론 / 芳草夕陽離別後
꽃지는 그 어디에선들 임 생각 안 했으리 / 落花何處不思君
이런 작품은 이루 다 손으로 꼽을 수가 없다. 문풍(文風)의 성함이 당 나라 사람에게도 부끄럽지 않으니 또한 국가의 한 성사(盛事)이다.
순일(純一)은 충경공(忠敬公) 신점(申點)의 아들로 벼슬은 군수이다. 아내는 이씨니 군수 경윤(景潤)의 딸이다. 양 부사(楊府使)의 이름은 사언(士彦)이다.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자는 계함(季涵)이고 연일인(延日人)이다. 벼슬은 좌의정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붕(鵬)의 자는 경유(景游)인데 안동인(安東人)이다. 찬성(贊成) 정응두(丁應斗)의 사위이며 벼슬은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다.
송강의 우야시(雨夜詩)에
차가운 밤비는 대숲에 후두둑 떨어지고 / 寒雨夜鳴竹
가을 들자 풀벌레 침상으로 다가오네 / 草蟲秋近牀
흐르는 세월을 어이 머무르게 하며 / 流年那可住
자라는 백발을 어이 말리리 / 白髮不禁長
라고 하였고, 통군정시(統軍亭詩)에는
강 건너 가서 / 我欲過江去
곧장 송골산에 오르고 싶네 / 直登松鶻山
서녘 화표주의 학을 불러 / 西招華表鶴
구름 사이에 함께 노닐고지고 / 相與戲雲間
라고 하였으며, 의월정시(宜月亭詩)에는
백두산은 하늘에 연달아 솟고 / 白嶽連天起
성 외호의 물은 바다에 깊숙이 들어가네 / 城川入海遙
해마다 꽃다운 풀길 위로 / 年年芳草路
해지는 다리를 건너들 간다 / 人渡夕陽橋
라고 하였고, 추야시(秋夜詩)에는
우수수 잎 떨어지는 소리 / 蕭蕭落葉聲
후둑이는 성긴 비 인줄 알았네 / 錯認爲疏雨
아이 불러 문 밖에 나가보라니 / 呼童出門看
시내 남녘 나무에 달 걸렸다고 / 月掛溪南樹


박사(博士) 김질충(金質忠)이 병이 위독하기 하루 전에 지은 시에
삼년이나 약 먹고도 사람은 아직 앓고 / 三年藥力人猶病
하룻밤 빗소리에 꽃은 활짝 피었구나 / 一夜雨聲花盡開
하였으므로, 학사(學士) 김홍도(金弘度)가 보고는,
“김모(金某)가 얼마 안 가서 세상을 뜨겠다.”
하더니 이튿날 새벽에 돌아갔다.
질충(質忠)의 자는 직부(直夫)이고 광주인(光州人)으로 벼슬은 호조 좌랑이다. 홍도(弘度)의 자는 중원(重遠)이고 호는 남봉(南峯)이며 안동인(安東人)으로 벼슬은 전한(典翰)이다.

강릉부(江陵府)는 옛 명주(溟州) 땅인데, 산수의 아름답기가 조선[東方]에서 제일이다. 산천이 정기를 모아가지고 있어 이인(異人)이 가끔 나온다. 국초(國初)의 함동원(咸東原)의 사업이 역사에 실려 있고, 참판 최치운(崔致雲) 부자의 문장과 절개가 또한 동원(東原)만 못지 않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의 호)은 천고에 동떨어지게 뛰어났으니, 온 천하에 찾아보더라도 참으로 찾아볼 수 없으며, 원정(猿亭) 최수성(崔壽城) 또한 뛰어난 행실로 일컬어지고, 중종조의 어촌(漁村) 심언광(沈彦光)과 최간재(崔艮齋)의 문장이 세상에 유명하다. 요즘 이율곡(李栗谷) 또한 여느 사람과는 다르다. 우리 중씨(仲氏)와 난설헌 또한 강릉의 정기를 받았다 할 수 있다. 현재는 최운보(崔雲溥) 이후에는 등과(登科)한 사람이 없어, 이인(異人)이나 문인[翰士]을 만나기 쉽지 않다. 그런데도 과거한 선비는 전혀 볼 수 없으니, 또한 극히 성했다가는 쇠해지는 것이 만물의 이치인가보다.
동원(東原)의 이름은 부림(傅霖), 호는 난계(蘭溪)이며, 강릉인인데, 벼슬은 대사헌(大司憲)이고, 시호는 정평(定平)이다. 치운(致雲)의 자는 백경(伯卿), 호는 경호조은(鏡湖釣隱)이며, 강릉인인데, 벼슬은 이조 참판이다. 그의 아들은 이름이 응현(應賢), 자는 보신(寶臣), 호는 수재(睡齋)이며, 벼슬은 대사헌이다. 간재(艮齋)의 이름은 연, 자는 연지(演之)이며, 강릉인인데, 벼슬은 참찬이고 시호는 문양(文襄)이다. 운보(雲溥)의 자는 대중(大仲)인데, 연지의 당질(堂姪)이다. 아버지 해(瀣)는 벼슬이 한림(翰林)이다.

강릉부에서 구경할 만한 곳으로는 경포대(鏡浦臺)가 으뜸이요 한송정(寒松亭)이 다음간다. 이곳을 구경하는 사신(使臣)이 하 많은데도, 사람 입에 전파된 가구(佳句)ㆍ경어(警語)가 하나도 없으니, 이 어찌 묘사할 절경(絶景)이 너무나 무궁해서가 아니겠는가. 두로(杜老 두보(杜甫)를 가리킴)나 맹양양(孟襄陽 맹호연(孟浩然)을 말함)이 이 경치를 본다면
오와 초는 동남으로 트였고 / 吳楚東南坼
하늘과 땅은 밤낮으로 들뜬 듯하구나 / 乾坤日夜浮
라든지, 또
운몽택엔 기운이 찌는 듯 / 氣蒸雲夢澤
파도는 악양성을 뒤흔든다 / 波撼岳陽城
등의 구절이 반드시 현판에 걸렸을 터인데, 우리나라 인재는 중국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또한 알 만하다.

명 나라 사람 산동 참의(山東參議) 여민표(黎民表)의 자는 유경(惟敬)인데 시를 잘하였다. 장 시랑의 훌륭한 맏아들 초보(肖甫)에게 부치다[寄張侍郞佳胤肖甫]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온 냇벌엔 백 번 이상 싸운 자취 / 滿目川原百戰餘
나그네 시름과 이운 풀은 한결같이 스산하다 / 旅情衰草共蕭疏
쓸쓸한 산 오래된 역에선 말탄 가을 손을 만나고 / 寒山古驛逢秋騎
먼 숲과 가물대는 불빛은 밤낚시로다 / 遠樹殘燈見夜漁
땅이 소상강에 가깝고 보니 저녁 비는 늘 내리고 / 地近瀟湘多暮雨
분포에 기러기는 온다만 고향 소식 드물구나 / 雁來湓浦少鄕書
벗은 정녕 아득한 하늘가에 있거니 / 故人政在雲霄外
안개 낀 물가에 서글퍼 정처 없어라 / 怊悵煙波未定居
이 시가 우리나라에 퍼져서, 《송계만록(松溪漫錄)》에는 나 장원 만화(羅壯元萬化)의 시로 실려 있는데, 글자가 잘못된 것이 많으니, 송계(松溪)는 전하는 사람의 말을 들었을 뿐이기에 착오를 면치 못했던 것이다.
《송계만록》을 참고하건대, 만화(萬化)는 만호(萬湖)라고도 하는데 어떤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의당 다시 상고해야 할 것이다.

명 나라 사람 중 글로 이름을 날린 십대가(十大家)는 공동(崆峒) 이헌길(李獻吉)ㆍ양명(陽明) 왕백안(王伯安)ㆍ형천(荊川) 당응덕(唐應德)ㆍ좨주(祭酒) 왕윤령(王允寧)ㆍ안찰(按察) 왕신중(王愼中)ㆍ심양(潯陽) 동분(董玢)ㆍ녹문(鹿門) 모곤(茅坤)ㆍ창명(滄溟) 이반룡(李攀龍)ㆍ봉주(鳳洲) 왕세정(王世貞)ㆍ남명(南溟) 왕도곤(汪道昆)인데, 이공동(李崆峒)은 오로지 서한(西漢)만 본받고, 왕세정ㆍ이반룡은 난삽한 글귀가 선진(先秦)을 앞지르고자 하고, 왕남명(汪南溟)은 화려하고 건실하며 동분ㆍ모곤은 평이하고 원숙하며, 왕신중은 풍부하다. 그러나 명 나라 사람은 모두 역겹게 여기며 진부하고 속되다고 한다. 나의 의견도 거의 같다.
백안(伯安)은 문(文)을 전공하지 않고 학문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박잡함을 면치 못하고, 형천(荊川)은 전아 순실(典雅純實)하여 모두 대가가 될 만하다. 왕원미(王元美)의 무리가 명인(明人)의 문장을 서한(西漢)에 비기고, 이헌길(李獻吉)을 태사공(太史公 사마천을 말함)에게 비기고, 우린(于鱗)은 양자운(揚子雲)에게 비기고, 자기는 사마상여(司馬相如)에게 비겼으니, 그 자기 자랑이 너무도 심하다.
우리나라 김계온(金季昷)ㆍ남지정(南止亭 지정은 남곤(南袞)의 호)ㆍ김충암(金冲庵 충암은 김정(金淨)의 호)ㆍ노소재(盧蘇齋 소재는 노수신(盧守愼)의 호)의 글은 명 나라 십대가 속에 넣어 동심양(董潯陽)이나 모녹문(茅鹿門)에 비긴다면 그다지 못할 것 없으나 중국에서 팔을 휘두르고 뽐낼 수 없음이 안타깝다.
계온(季昷)의 이름은 종직(宗直), 호는 점필재(佔畢齋)이며, 선산인(善山人)이다. 벼슬은 이조 판서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점필재가 제천정운(濟川亭韻)에 차운한 시에
꽃을 흩날리고 버들을 꺾는 반강 바람에 / 吹花劈柳半江風
돛그림잔 석양 기러기를 진 채 건드렁거린다 / 檣影擔搖背暮鴻
한 조각 고향 생각에 부질없이 기둥에 기대니 / 一片鄕心空倚柱
흰 구름만 날아서 술 실은 배를 스치는구나 / 白雲飛度酒船中
라 하였고, 보천탄즉사(寶川灘卽事)란 시에는
복사꽃 필 때 이는 파도 그 몇 자런가 / 桃花浪高幾尺許
은빛 바윈 이마까지 묻혀 보이도 않는구나 / 銀石沒頂不知處
쌍쌍이 나는 가마우지 옛 놀던 자갈밭 잃고는 / 兩兩鸕鶿失舊磯
물고기 입에 문 채 줄과 부들 속으로 날아드네 / 銜魚却入菰蒲去
라 하였으니, 참 좋다.


명 나라 사람으로서 시로 이름난 이로는 대복(大復) 하경명(何景明)ㆍ공동(崆峒) 이몽양(李夢陽)이 있어 사람들이 이백(李白)ㆍ두보(杜甫)에 비긴다. 한 시대에 잘 한다고 칭도된 자는 화천(華泉) 변공(邊貢)과 박사(博士) 서정경(徐禎卿)ㆍ태백(太白) 손일원(孫一元)ㆍ검토(檢討) 왕구사(王九思)인데, 하경명ㆍ이몽양의 장편칠률(長篇七律)은 근체(近體)ㆍ고체(古體)를 다 잘 쓴다. 이우린(李于鱗)ㆍ왕원미(王元美) 역시 이대가(二大家)라 일컬어지며, 오국륜(吳國倫)ㆍ서중행(徐中行)ㆍ장가윤(張佳胤)ㆍ왕세무(王世懋)ㆍ이세방(李世芳)ㆍ사진(謝榛)ㆍ여민표(黎民表)ㆍ장구일(張九一) 등이 모두 나란히 달려 앞을 다투었다.
우리나라의 김계온(金季昷)ㆍ김열경(金悅卿)ㆍ박중열(朴仲說)ㆍ이택지(李擇之)ㆍ김원충(金元冲)ㆍ정운경(鄭雲卿)ㆍ노과회(盧寡悔) 등의 작품이 비록 하경명ㆍ이몽양ㆍ왕세정ㆍ이우린에게는 못 미친다 하더라도 어찌 오국륜ㆍ서중행 이하 사람에게야 뒤지겠는가. 그러나 칠자(七子)로 더불어 중국에서 서로 겨루지 못함이 한스럽다.
중열(仲說)의 이름은 은(誾), 호는 읍취헌(挹翠軒)이며 고령인(高靈人)이다. 벼슬은 수찬(修撰)이다. 18세에 문과 급제하고 연산군 갑자년(1504)에 사형되었다.
그때 나이는 26세였다.


요즘 중국인의 문학은 서경(西京)의 시조(詩祖)인 두보(杜甫)를 숭상하기 때문에 두보의 경지에까지는 이르지 못하더라도 이른바 고니를 새기다가 집오리를 만드는 셈은 된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은 문(文)은 삼소(三蘇)를, 시는 황정견(黃庭堅)ㆍ진사도(陳師道)를 배우므로 저속하여 취할게 없다. 시 잘한 최경창(崔慶昌)ㆍ백광훈(白光勳)ㆍ임제(林悌)ㆍ허봉(許篈)은 모두 일찍 죽고, 다만 이익지(李益之) 한 사람이 있을 뿐인데 이익지는 비방이 산더미 같으니, 세상이 너무도 재주를 아끼지 않는다.

중국 근래 명사로 글 잘하는 이 중에 요천(瑤泉) 신시행(申時行)ㆍ영양(穎陽) 허국(許國)ㆍ동록(洞麓) 여유정(余有丁)ㆍ상서(尙書) 육광조(陸光祖)ㆍ사업(司業) 원응기(苑應期)ㆍ강주(康洲) 나만화(羅萬化)ㆍ시랑(侍郞) 심일관(沈一貫)ㆍ규양(葵陽) 황홍헌(黃洪憲)ㆍ백담(柏潭) 손계고(孫繼皐)ㆍ태사(太史) 심무학(沈懋學)ㆍ곤명(崑溟) 위윤중(魏允中)ㆍ태사(太史) 이정기(李廷機)가 더욱 두드러지고, 글을 잘하여 후세에 입언(立言)할 만한 정도는 이루 헤아릴 수도 없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옥당 벼슬을 하는 사람도 눈으로 어로(魚魯)를 구별 못하며, 제고(制誥) 벼슬을 띠고 있는 사람도 사륙문(四六文)에 익숙지 못하여 심지어는 잘하는 이에게 차작을 해서 자기 직책을 메워가기까지 하니, 남의 의론이나 추종하는 사람들이 다 그렇다. 고평(考評)을 하는 이도 또한 그 이름만 따라 등수의 고하(高下)를 매기니, 조선조에는 신시행(申時行)ㆍ허국(許國)의 무리를 바라볼 만한 사람도 없거든, 하물며 중국의 칠자(七子)와 재주를 겨룰 수 있겠는가.
대개 명 나라 사람은 학문을 애써 쌓아서 문과에 오른 사람도 등잔불을 켜놓고 새벽까지 글을 읽어 늙어 죽을 때까지 공부를 하기 때문에 그 시문(詩文)이 모두가 혼후(渾厚)하고 기력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의 경우는 문구(文句)나 잘 꾸며서 과거를 보는데 과거에 붙게 되면 곧바로 책 버리기를 원수같이 한다. 우리나라가 예전에는 문헌으로 일컬어졌는데, 이제 와서는 문헌이 어찌 이다지도 미약하단 말인가. 이 어찌 윗사람이 장려하고 이끌어 성취시키지 못해서가 아니겠는가. 아니면 혹 세상이 말세가 되고 풍속이 저속해져서 인재가 옛날에 미치지 못해서인가?
그러나 사람마다 다 요순(堯舜)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인데, 하찮은 하나의 기예를 어찌 스스로 할 수 없다고 포기하여 진력하지 않을 것인가. 애써 공부를 계속하면 고인에게 미치기도 어렵지 않을 것인데 하물며 칠자(七子)라든지, 신시행(申時行)ㆍ허국(許國) 따위일까보냐. 우선 이것을 써서 스스로를 경계한다.

선대부(先大夫)께서 언젠가 말씀하시기를,
“우리나라 사람은 중국의 고사(古史)만 전공하여 우리나라 사적은 알지 못하니 근본을 힘쓰는 도리가 결코 아니다.”
하셨다. 그러므로 두 형과 나는 모두 《동국통감(東國通鑑)》을 읽었다. 그러나 젊었을 때에는 생각하기를, 읽을 만한 책이 하도 많은데, 하필 이것을 읽을 것이 무엇인가 하였었다. 그러다가 황 조사(黃詔使)가 태평관(太平館)에 이르러, 관반(館伴)인 정임당(鄭林塘) 상공(相公)에게 고려와 신우(辛禑) 부자의 내력을 묻자 상공이 입만 벌리고 대답을 못하니, 우리 중형이 들어가 대답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야 비로소 선대부의 높은 견식이 여느 사람보다 매우 뛰어났음을 알게 되었다. 아, 재주가 임당(林塘) 같은 분으로서도 중국 사신과 문답할 때에 곤욕을 당했으니, 사신의 접반관이 되어 본국의 일을 몰라서 되겠는가.
임당(林塘)의 이름은 유길(惟吉), 자는 길원(吉元)이며 동래인(東萊人)이다. 벼슬은 좌의정에 이르렀다. 유길의 사제극성(賜祭棘城)이란 시에
성조에선 죽은 이에게도 은혜 베푸사 / 聖朝枯骨亦霑恩
해마다 쓸쓸한 담장에 제사를 내려주시네 / 香火年年降寒垣
제사 마친 단 위엔 비바람도 잦아지고 / 祭罷上壇風雨定
흰 구름만 바다인 양 앞 마을에 자옥해라 / 白雲如海蒲前村
라 하였고, 영유이화정(永柔梨花亭)이란 시에는,
꽃샘 비바람은 옛 시에도 있거니와 / 落花風雨古人詩
올봄 꽃은 공교롭게도 늦장부리네 / 花到今春巧耐遲
꽃 필 때 되면 응당 달이 있겠고 / 直至開時應有月
그중의 봄빛 자규야 알고말고 / 個中春色子規知
라 하였으며, 또 그의 몽뢰정춘첩(夢賚亭春帖)이란 시는 다음과 같다.
선대의 백발 판서 / 白髮先朝老判書
한가컨 분망컨 깜냥대로 편안했네 / 閑忙隨分且安居
고기잡이 영감 봄 강이 따사롭다면서 / 漁翁報道春江暖
꽃도 피기 전이건만 쏘가릴 진상하네 / 未到花時進鱖魚


최보(崔溥)의 자는 연연(淵淵)이요 나주인(羅州人)으로 호는 금남(錦南)이다. 문장에 능하여 문과와 문과중시에 거듭 급제하여 임금의 명을 받들어 제주도에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으로 갔다가, 부친상을 당하여 바다를 건너오다 풍랑을 만나 표류한 지 40일 만에 태주부(台州府) 임해현(臨海縣) 우두(牛頭) 외양(外洋) 땅에 배가 닿게 되었다. 당두채(塘頭寨) 천호(千戶)가 왜구(倭寇)라 무고하였으나 최보가 질문에 척척 응답하였으므로 화를 모면하였다. 항주(杭州)에 이르자, 삼사관(三司官)이 본국의 역대 흥망과 군현의 건치(建置), 산천ㆍ예악ㆍ인물에 대하여 매우 꼼꼼히 물었으나 최보의 대답이 마치 대를 쪼개듯 하므로, 삼사관이 모두 감탄하였다.
돌아오자 성종이 일기를 쓰도록 명하므로 이를 써서 바치니, 모두 3권이다. 최보의 시는 흔히 볼 수 없는데, 송사를 읽다[讀宋史]라는 시에
등잔불 돋우고 다 읽고 나선 문득 긴 한숨 짓노니 / 挑燈輟讀便長吁
중국 천지엔 대장부랄 사람 하나 없구나 / 天地間無一丈夫
삼백 년 내려온 중국 전토를 / 三百年□中國土
어쩌자고 늙은 선우에게 내어 주었나 / 如何付與老單于
하였다. 시가 침착하고 노련하니, 그 사람 됨됨이를 짐작할 만하다.
최보의 벼슬은 사간(司諫)인데 연산군 갑자년(1504)에 처형되었다.

성종(成宗) 때 정의 현감(旌義縣監)에 이섬(李暹)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최보(崔溥)보다 앞서 역시 풍랑으로 표류하여 양주부(揚州府) 굴항채(崛港寨)에 닿으니, 채관(寨官)이 가두고 상부에 아뢰어 문초하게 하였다. 이섬이 옥중에서 지은 시에
열 폭짜리 돛폭은 바람도 못 가리고 / 布帆十幅不遮風
라는 구절이 있으므로, 책임자가 보고 그가 해적이 아님을 알아 잘 대우하여 마침내 본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섬(暹)은 무인(武人)이라 전할 만한 여행 기록이나 기사(記事)가 없어 애석하다.

가정(嘉靖) 임술년(1572, 명종17) 간에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의 호) 정 상공(鄭相公)의 이웃 사람으로 해상(海商)을 업으로 하는 자가 풍랑으로 표류하여 절강성(浙江省) 영파부(寧波府)에 닿자, 지부에서는 호패를 근거로 신원을 확인하고 북경으로 보냈다. 북경을 가는 길이 공 천사(龔天使 조선에 사신왔던 공용경(龔用卿))의 집을 지나게 되었다. 공씨(龔氏)는 그때 국자감 좨주(國子監祭酒)로 벼슬을 사직하고 집에 있었다. 조선 사람이 왔다는 소문을 듣고는 역관(譯官)에게 청하여 길을 늦추어 상인과 이야기를 나눈 결과, 상인이 호음의 가계(家系)와 벼슬 지낸 경위를 말하자, 공씨가 크게 놀라 데리고 집으로 가서 처자를 나오라 하여 인사시키고, 호음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서 전해 달라고 부탁하고는 또 후히 대접하여 보냈으니, 공씨가 호음에게 심복함이 이와 같았다,

장흥(長興) 사람 이언세(李彦世)가 왜인(倭人)에게 사로잡혀 남번(南蕃)으로 팔려가게 되었다. 배를 타고 주야(晝夜) 40일을 가서야 중국의 광서(廣西) 향산현(香山縣) 땅에 닿았다. 그는 한 배에 탄 중국 상인에게 물어서 그곳이 명(明) 나라 지방인 것을 알았다. 그는 동반자[火伴]와 함께 밤을 타 도망쳐 그 지방 지현(知縣)에게 호소하니 지현이 처음에는 만인(蠻人)이 올린 고장(告狀)이라고 하여 팽개쳐 버리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자 며칠을 울부짖으니 그제서야 조사 심문하였다. 이언세는 글을 좀 알았는데 ‘조선국(朝鮮國)의 장흥(長興) 사는 사람으로, 해전을 하다가 왜적에게 사로잡혀 오랑캐 배에 넘겨졌다.’고만 썼다. 그것을 본 지현이 남웅부(南雄府)에 압송하니 삼사관(三司官)이 그 문초에 의거, 북경으로 이송했다. 그때 마침 동지사(冬至使)가 북경에 도착하였으므로, 그 사행과 같이 돌아오게 되었다. 언세는 남창(南昌)과 항주(杭州)ㆍ소주(蘇州)의 풍경이며 북경ㆍ남경의 훌륭한 경치를 말하기는 하나, 자세하지는 못하다.

승지(承旨) 이정립(李廷立)이 지은 표류된 사람들을 돌려보내 준 데 감사하는 표[謝刷還漂海人口表]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만 이랑 파도 헤치고 / 越萬頃之波濤
빛나는 요 임금 땅에 나아갔다가 / 就堯如日
천리라 고향 땅에 돌아오게 되었으니 / 返千里之桑梓
우 임금 같은 임금 아니었던들 고기밥 되었으리 / 微禹其魚
이 글은 대우(對偶)가 적절하고 뜻이 좋다. 전편을 볼 수 없음이 섭섭하다.
이정립(李廷立)의 자는 자정(子正), 광주인(廣州人)으로, 호는 계은(溪隱)이고, 벼슬은 이조 참의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신묘년(1591, 선조24) 겨울에 중국 상인 20여 명이 사탕을 팔다가 우리나라 제주도에 표류되었다가 서울로 압송되어 왔었다. 내가 친구와 같이 가서 보고 소주와 항주의 풍속을 물으니, 그 중 한 사람이,
“당신은 외국 사람으로서 어떻게 중국 풍토를 역력히 아십니까?”
하였다. 그 중에 장덕오(莊德吾)란 사람이 있어, 자기 말로 복건(福建) 장포(漳浦) 사람이라 하기에, 내가 시랑(侍郞) 장국정(莊國禎)과 시랑 주천구(朱天球)가 당신의 이웃인가고 묻자 장덕오가 놀라며,
“장 시랑은 저의 당숙(堂叔)이고 주 시랑은 한 동네 사람입니다.”
하였다. 내가 또
“그러면 태사(太史) 장이풍(莊履豊)과 어사(御史) 이명(履明)은 당신 당형제(堂兄弟)이겠구려.”
하자, 덕오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저희끼리 이야기하며 껄껄대고 웃었다. 역관이 말하기를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기를 ‘수재가 나이 젊어도 중국의 일을 잘 안다고 하더라.’고 했다. 왕신민(王信民)이라는 자가 나에게,
“무슨 벼슬이요?”
하고 묻기에, 무자년에 과거하여 국자감생(國子監生)이 되었다 하니, 왕씨가,
“언제 추천되지요?”
하고 물었다. 대개 중국에서는 국자감 학생이 으레 이부(吏部)에 추천되기 때문에 그의 말이 이와 같은 것이다.

학관(學官) 양대박(梁大樸)은 시를 잘하며 순평하고 전아하였다. 일찍이 자기의 한 연구를 자랑하였는데
산귀신은 밤마다 금정불을 엿보고 / 山鬼夜窺金井火
물새는 가을이라 석당 연기에 잠들었네 / 水禽秋宿石塘煙
하였으니, 시구가 절로 좋다.
대박(大樸)의 자는 사진(士眞), 호는 청계(淸溪) 남평인(南平人)으로 벼슬은 학관(學官)이었다. 임진년 왜란 때 고제봉(高霽峯)을 따라 의병을 일으키고 무기며 군량을 모두 자기집에서 대었다. 군중에서 병으로 죽자 병조 판서를 증직하고 시호를 충장(忠壯)으로 내렸다.

상사(上舍) 정지승(鄭之升)이 시를 잘했는데 임자순(林子順 자순은 임제(林悌)의 자)의 무리가 몹시 추장하였다. 세상에 전하는 한 편 시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돋아나는 풀잎 속에 왕손의 한 스며들고 / 草入王孫恨
피어나는 꽃잎따라 두견이 시름을 더하누나 / 花添杜宇愁
물가엔 사람 하나 보이지 않고 / 汀洲人不見
바람에 목란배만 일렁이누나 / 風動木蘭舟
스님을 전송하다[送僧]란 시는 다음과 같다.
당신은 서에서 돌아오고 나는 또 서로 가니 / 爾自西歸我亦西
봄바람 한 지팡이 가는 길은 높고 낮네 / 春風一杖路高低
그 언제 달 밝은 밤 소요사에서 / 何年明月逍遙寺
동녘 숲 두견이 울음 함께 들을꼬 / 共聽東林杜宇啼
또 한 연(聯)은 다음과 같다.
손이 돌아가자 문을 닫으니 남은 건 달빛뿐 / 客去閉門惟月色
꿈 깨자 빈 산엔 흩어지느니 솔바람 소리 / 夢廻虛岳散松濤
그 전집을 볼 수 없음이 안타깝다.
지승(之升)의 자는 자신(子愼), 호는 총계(叢桂) 온양인(溫陽人)으로 정렴(鄭)의 조카이다. 벼슬은 하지 않았다.

송익필(宋翼弼)이란 자도 시를 잘하니, 그의 산설(山雪)이란 시는 다음과 같다.
밤새도록 내린 찬 눈 층대에 수북 쌓였는데 / 連宵寒雪壓層臺
다른 산에 묵은 주승 돌아오질 않았네 / 僧在他山宿未廻
등잔불 깜박이는 작은 절집 신령한 바람 고요한데 / 小閣殘燈靈籟靜
소나무 스쳐오는 밝은 달 홀로 보네 / 獨看明月過松來
구격(句格)이 맑고 뛰어나니, 어찌 사람의 지체로서 어찌 그 좋은 말까지 무시할 것인가.
송익필(宋翼弼)의 자는 운장(雲長), 호는 귀봉(龜峯)으로 흉인(凶人) 사련(祀連)의 아들이다. 본디 사천(私賤)의 자식이나, 문학의 조예가 뛰어나서 우계(牛溪) 성혼(成渾),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서로 친했다. 아우 한필(翰弼)은 자는 사로(師魯), 호는 운곡(雲谷)인데 역시 시를 잘했다. 익필(翼弼)의 저물녘 남계에 배를 띄우다[南溪暮泛]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꽃에 홀려 돌아오기 하마 늦었고 / 迷花歸棹晩
달 뜨기 기다리다 여울 내려오기 머뭇거렸네 / 待月下灘遲
거나한 가운데도 낚싯대 드리우니 / 醉裏猶垂釣
배는 흘러가도 꿈은 그대로 / 舟移夢不移
한필(翰弼)의 우음시(偶吟詩)는 다음과 같다.
어제 비엔 꽃이 피더니 / 花開作日雨
오늘 아침 바람에 그 꽃 지는구나 / 花落今朝風
애닯다 한철 봄이 / 可憐一春事
비바람 속에 오고 가누나 / 往來風雨中


최전 언침(崔澱彦沈 언침은 자)이 신동(神童)이란 이름이 있었다. 어려서 금강산에 노닌 적이 있었는데 그 길로 영동(嶺東) 산천을 구경하고 경포대에 이르러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봉래산 한번 들어 삼천년을 / 蓬壺一入三千年
은바다 아득아득 물은 맑고 얕아라 / 銀海茫茫水淸淺
난새 타고 피리 불며 오늘 홀로 날아왔건만 / 鸞笙今日獨飛來
벽도화 꽃 그늘에 님은 아니 보이네 / 碧桃花下無人見
중형이 그 시를 매우 칭찬하고 그 운자에 이어 읊기까지 하였는데, 그는 불행히도 일찍 죽었다.
전(澱)의 호는 양포(楊浦)니 해주인(海州人)으로 진사(進士)였다. 양포(楊浦)의 늙은 말[老馬]이란 시는 다음과 같다.
늙은 말 솔뿌리 베고 누워 / 老馬枕松根
꿈결에 천리길 가네 / 夢行千里路
가을바람 나뭇잎 지는 소리에 / 秋風落葉聲
놀라 깨니 지는 해가 뉘엿뉘엿 / 驚起斜陽暮
어복등(魚腹燈)에 제한 시는 다음과 같다.
멱라수는 흘러 흘러 끝이 없는데 / 楚水流無極
굴원(屈原)은 불평을 원망했네 / 靈均怨不平
지금 물고기 뱃속에서도 / 至今魚腹裏
속마음 밝은 것은 간직했겠지 / 留得寸心明

금각(琴恪)의 자는 언공(彦恭)이니 봉성인(鳳城人)이다. 중형에게 12세 때 글을 배워 육경(六經)을 통하고 자사제집(子史諸集)을 두루 읽지 않은 게 없었다. 글 짓기를 전중(典重)하고도 온화하고 아름답게 하여 이미 작가가 되었는데 그의 조대기(釣臺記)ㆍ주류천하기(周流天下記)ㆍ한발문(旱魃問) 등의 글이 세상에 전한다. 16세에 해외에 유학하였다. 복충증(腹蟲症)을 얻어 집에 있으면서 《풍창랑화(風牕浪話)》를 지으며 심심풀이로 세월을 보내다가 무자년(1588, 선조21) 가을에 죽었다. 죽는 날에 스스로 명(銘)을 짓기를,
“봉성인(鳳城人) 금각(琴恪) 자(字) 언공(彦恭)은 9세에 글을 배우고 18세에 죽는다. 뜻은 원대하나 수(壽)는 짧으니 운명이로다.”
하였고, 또 다음과 같이 만사를 지었다.
아버님 어머님 / 父兮母兮
나 때문에 울지 마세요 / 莫我哭兮
《조대집(釣臺集)》 4권이 있다.

종실(宗室)인 금산수 성윤(錦山守誠胤)은 자가 경실(景實)인데 우리 중형에게 글을 배웠다. 그의 시는 온정균(溫庭筠)과 이상은(李商隱)을 숭상하여 그들의 시풍을 터득하였다. 그의 향렴체(香奩體)란 시는 다음과 같다.
부용성 밖 예주궁에 / 芙蓉城外蕊珠宮
난새 수레로 허 시중을 맞네 / 鸞馭來迎許侍中
앵무부는 달 밝은 밤에 읊조리고 / 鸚鵡賦吟明月夜
숙상 갖옷은 비단 병풍에 걸려 있네 / 鷫鷞裘掛錦屛風
추운 비단 방장엔 향로까지 곁들였고 / 寒重繡幕漆香獸
꿈 깬 은등잔엔 등화[玉蟲]가 맺혔네 / 夢罷銀燈結玉蟲
앵무새에 말 전하노니 자주 손을 물리쳐서 / 傳語雪衣頻撝客
운우의 정 총총히 흩어지게 말아다오 / 莫敎雲雨散悤悤
달[姮娥]을 읊은 시는 다음과 같다.
운모병풍 썰렁하고 아름다운 방장 비었는데 / 雲母屛寒寶帳虛
옥같은 달에 이슬만 함초롬 맺혔구나 / 露華徧濕玉蟾蜍
항아가 장생약이야 얻었다 한들 / 姮娥縱得長生藥
해마다 홀로 사는 애달픔 어쩌지 / 爭奈年年恨獨居
자못 부귀롭고 아름다운 운치가 있다. 임진왜란에 어버이를 하직하고 임금을 호종하기에 갖은 고생을 다하였으니 배운 바 정신을 저버리지 않았다 할 만하다.
금산(錦山)의 호는 매창(梅窓)으로 성종(成宗)의 4세손(世孫)이요, 왕자 익양군 회(益陽君懷)의 증손이다. 그 아버지는 청원도정 간(靑原都正侃)이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양정집(梁廷楫)은 호남 사람으로 나이 10세에 글을 잘 써 고향에서 신동(神童)으로 소문났었다. 스님에게 보내는 시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노닥노닥 기워 입은 한 늙은 영감 / 百結一老翁
지팡이 의지하여 바위 아래 서 있어 / 倚杖巖下立
머리 돌려 뭔지 기다리는 듯하니 / 回頭如有看
필경 동해바다 달일 테지 / 應待東溟月
어린 나이에 임금의 잔치에도 초대받았었으나 불행히 세상을 떴다.

근세 선비들은 예(禮)를 병으로 여기고 다만 허무(虛無)를 말하고 욀 뿐만 아니라 술에 취한 채 수레를 타고 태연히 거리를 나돌아다니며 조금도 꺼리낌이 없는 이가 있는데 엄숙한 선비나 단아한 선비조차 이에 물들었다. 요즘 박엽 숙야(朴燁叔夜 숙야는 자)라는 사람이 있어 시문(詩文)을 잘하나 불행하였다. 기생집[秦樓]에서 나의 글씨 솜씨와 시법을 보고 본떠 가는 곳마다 벽에다 써대었는데 뒷사람이 와 보고는 으레 이를 아무개 글씨다 하였다. 그의 상춘곡(傷春曲)은 다음과 같다.
연분홍 꽃 오련한 푸른 잎은 아침햇살 머금고 / 妖紅輭綠含朝陽
꾀꼬리 읊조리고 제비는 지지배배 남의 시름 자아내네 / 鸎吟燕語愁人腸
이끼 자욱 이슬에 함초롬 비취빛으로 젖었는데 / 苔痕漬露翡翠濕
흩날리는 눈같은 살구꽃은 연지빛으로 향기롭다 / 杏花撲雪臙脂香
봉황 무늬 저고리는 흐르르 얇아 봄추위 스며드는데 / 鳳衫輕薄春寒襲
은병풍 기대어서 이별을 슬퍼하네 / 斜倚銀屛怨離別
서방님 한 번 떠나 돌아오질 않아 / 藁砧一去歸不歸
손꼽아 기다리던 그 봄도 또 삼월이라니 / 屈指東風又三月
선자가리개[仙子障]에 제한 시는 다음과 같다.
하얀 옥꽃 족두리에 무지개옷 입고서 / 白玉花冠素霓裳
손으로 바둑알 잡고 생각만 거듭 / 手拈棋子費思量
몇 해 두고 바둑은 두질 않으니 / 經年不下神僊著
아마도 선경엔 세월이 긴가보이 / 想是蓬萊日月長
달 나라 궁전[月殿]에 제한 시는 다음과 같다.
창창한 밤 꽃동산 / 花苑夜蒼蒼
등불 들고 해당화 구경 / 移燈賞海棠
이슬은 붉은 너울에 스미고 / 露華侵絳帕
향기는 다홍 치마에 배어드네 / 香氣襲紅裳
고래론 황금빛 자물쇠 만들고 / 鯨製黃金鑰
소라는 백옥상에 아로새겼네 / 螺雕白玉牀
가던 구름 저물녘 비 되어 내리니 / 行雲著行雨
돌아가면 초 양왕을 뵙게 되겠네 / 歸見楚襄王
이울어가는 봄[殘春]이란 시는 다음과 같다.
먼지 탄 병풍은 우중충한데 / 屛暗下流塵
엉긴 구름 비단 수렐 옹위하듯 / 凝雲護綺輪
버들 꽃은 어지러이 흩날리고 / 斷絲縈落絮
제비새낀 이우는 봄을 재재거리네 / 雛燕語殘春
졸음기 붉은 볼에 피어나고 / 睡思生紅頰
눈물 자국 푸른 수건에 젖네 / 啼痕染翠巾
용이 서린 옥대의 거울은 / 盤龍玉臺鏡
눈썹 그릴 미인을 기다릴 뿐 / 只待畫眉人
선동요(仙洞謠)는 다음과 같다.
푸른 새 깃으로 금자(錦字) 전하니 / 靑鳥翩翩錦字通
광한전엔 옥피리 소리 / 玉簫吹煙廣寒宮
알고 말고 선동 안의 꽃같은 여인 / 情知洞裏如花女
웃으며 멋쟁이 허 시중을 가리킬 것을 / 笑指風流許侍中
시격(詩格)이 나와 비슷하며 자획(字畫)은 분간할 수 없어 진짠지 가짠지 사람들이 정말 의심하게 된다. 이 때문에 내가 화류가에 드나든단 소문을 얻게 되었으니 우습다. 옛사람이 찻집[茶肆]ㆍ술집[酒坊]에도 도리상(道理上) 들어가지 않았거든 하물며 이보다도 더한 기생집일까보냐? 서진(西晉) 말(末)의 선비가 청담(淸談)을 숭상하자 오호(五胡)가 중국을 어지럽게 했고, 당(唐)이 망할 무렵 세상 풍속이 풍류를 즐기자 칠성(七姓)이 쟁립(爭立)하였으니, 이 두 가지를 겸하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요행일 뿐이다.
박엽의 호는 국창(菊窓), 반남인(潘南人)이며 벼슬은 평안 감사를 지냈다. 계해년(1623) 인조반정 때에 사형되었다.

두남(斗南) 김일숙(金一叔)은 글은 보통이었으나, 남을 풍자하는 작품으로는 그 당시에 으뜸이었다. 이웃에 어른(丈人)이 있었는데 앞니가 길어 홀(笏) 모양 같았음으로, 다음과 같이 찬(贊)을 지었다.
나이 일흔에 / 生年七十
긴 것이라곤 이[齒]니 / 所長者齒
이는 홀을 만들만 허구려 / 齒兮可爲笏兮
또 이웃사람이 눈이 가늘어 겨우 볼 수 있을 정도였는데 다음과 같이 찬을 지었다.
모든 것 보고 싶지 않아 한세상을 하찮게 보는 자인가 / 不欲觀諸眇視一世者邪
보이는 것이 작으니 / 其見者小
우물에서 하늘을 보는 자 아닌가 / 豈非坐井觀天者邪
그 눈동자를 보면 / 觀其眸子
그 사람 무슨 수로 속마음 숨길쏜가 / 人焉瘦哉
나의 중형이 그에 대한 이야기를 잘하였다.
김두남(金斗南)은 원주인(原州人)이며 응남(應南)의 사촌 동생이다. 음관으로 부윤(府尹)을 지냈다.

내가 다리를 앓아 핑계삼아 장인댁에 가니, 중형은 내가 나들이 않음을 빈정대어 시를 지어 보냈는데 첫 수는 다음과 같다.
하늘이 태왕(太王)을 사모하는 자네 마음 알아 / 天意憐君慕太王
짐짓 두 다리에 온통 부스럼이 나게 했구나 / 故敎雙脚遍生瘡
이웃이 지척이나 오히려 멀다 혐의하니 / 隣家咫尺猶嫌遠
하물며 물마름 우거진 십리길이랴 / 何況蘋洲十里長
또 다른 수는 다음과 같다.
체 짧은 수레도 안 타는 자네 / 知君不駕短轅車
덩그런 황문이 한길가에 서겠네 / 高處黃門大路隅
세상이 온통 공사에만 종사한다면 / 擧世若從公事業
이 세상 어디메서 잠부를 찾을꼬 / 人間何地覓潛夫
대개, 태왕이 그 비를 사랑하기에 세상에서 애처가를 태왕이라 부르는 것이다. 황문은 옛날 어떤 사람이 그 아내를 너무 사랑하여 그 친구가 빈정대기를,
“열녀는 홍살문을 세워 정문을 삼으니 정남(貞男)은 마땅히 황문을 세워야겠지.”
하였다 해서 쓴 것이니, 그 풍류와 익살이 모두 이와 같다.

익지(益之)가 일찍이 ‘낙화(落花)’를 읊기를
슬프다 진분홍에 또 연분홍 / 惆悵深紅更淺紅
한꺼번에 풀풀 날아 작은 뜰에 지는구나 / 一時零落小庭中
푸른 이끼에 붙어 남는 것만은 못하나 / 不如留著靑苔上
바람 따라 동서로 흩날리는 것보단 낫구나 / 猶勝風吹西復東
하니, 어의(語意)가 함축되어 있다. 또 감회를 읊은 절구 두 수는 다음과 같다.
성궐은 들쑥날쑥 솟을대문 늘어섰는데 / 城闕參差甲第連
오후의 집 풍악소리 하늘 높이 울리는구나 / 五侯歌管沸雲煙
패릉교 위 나귀 탄 나그네 / 灞陵橋上騎驢客
양양땅 맹호연 만은 아니라오 / 不獨襄陽孟浩然
둘째 수는 다음과 같다.
벼슬 높은 고관들 가는 곳마다 만나게 되고 / 好爵高官處處逢
수레는 물 흐르듯 말은 용 같네 / 車如流水馬如龍
장안 밭두렁에 부질없이 고개 돌리니 / 長安陌上空回首
지척인 대궐문 아홉 겹이 가렸구나 / 咫尺君門隔九重
용나루를 건너며[渡龍津]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가을이라 강물은 용나루에 급히 내리니 / 秋江水急下龍津
나루의 아전은 배 멈추고 웃었다 성냈다 / 津吏停舟笑更嗔
서울 나들이 그 무슨 소용 / 京洛旅游成底事
십년을 오가도 포의인 것을 / 十年來往布衣人
그 뜻이 몹시 서글프니 참으로 불우한 사람의 시다.

양봉래(楊蓬萊) 선생의 아량과 풍도는 세상의 숭상받는 바가 되거니와, 나의 돌아가신 아버지와 사마(司馬)ㆍ문과(文科)를 모두 같이 합격하였으므로, 그 사귐이 가장 친밀한데 문장이 높고 빼어나 구름을 앞지를 듯한 기상이 있고, 행서(行書)ㆍ초서(草書)를 잘 쓰는데 그 쓰는 법이 마치 용이나 뱀처럼 분방하며, 본성이 벼슬살이를 우습게 알고 산수에 정을 붙여, 짚신과 밀로 결은 나막신차림으로 어느 때고 가지 않는 날이 없었다. 바위 골짜기에 사는 이들이 사강락(謝康樂 강락은 육조(六曹) 진(晉)의 사영운(謝靈運)의 봉호)에 비겼다. 언젠가 강릉 부사(江陵府使)가 되었을 때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거사비(去思碑)를 세운 일도 있었다. 언젠가 금강산에서 시를 읊기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
봉래섬의 백옥루를 / 蓬萊島白玉樓
소문으로만 들었더니 이제야 구경하네 / 我昔聞之今則游
운모병 들러 치고 호박구슬 베개삼고 / 雲母屛圍琥珀枕
산호 발걸이로 수정발 거두었네 / 水晶簾捲珊瑚鉤
벽도화 피고 지니 일천 년인데 / 碧桃開落一千年
서왕모 머물기는 팔만 년이라네 / 王母淹留八萬秋
요대 맨 위에 호올로 서니 / 瑤臺上表獨立
흰 구름 누른 학은 한가롭게 가는구나 / 白雲黃鶴去悠悠
읽으면 사람으로 하여금 훨훨 노을처럼 공중에 나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지게 한다.
봉래의 금수정(錦水亭)시는 다음과 같다.
비단물 은모래는 마냥 고운데 / 錦水銀沙一樣
골구름 강비 속에 갈매기 산뜻 / 峽雲江雨白鷗明
진인 찾아 그릇 봉랫길에 들었거니 / 尋眞誤入蓬萊路
고기잡이 배를 동구 밖으로 내몰진 마오 / 莫遣漁舟出洞行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가 죽은 뒤, 오세억(吳世億)이란 자가 갑자기 죽더니 반나절 만에 깨어나서는, 스스로 하는 말이, 어떤 관부(官府)에 이르니 ‘자미지궁(紫微之宮)’이란 방이 붙었는데 누각이 우뚝하여 난새와 학이 훨훨 나는 가운데 어떤 학사(學士) 한 분이 하얀 비단 옷을 입었는데, 흘긋 보니 바로 하서였다. 오씨는 평소에 그 얼굴을 알고 있는데, 하서가 손으로 붉은 명부를 뒤적이더니,
“자네는 이번에 잘못 왔네. 나가야겠네그려.”
하더니, 다음과 같이 시를 지어 주었다고 했다.
세억은 그 이름 자는 대년 / 世億其名字大年
문 밀치고 와서 자미선 뵈었구려 / 排門來謁紫微仙
일흔에 또 일곱 된 뒤에 다시 만나리니 / 七旬七後重相見
인간 세상 돌아가선 함부로 말하지 마오 / 歸去人間莫浪傳
깨어나자 소재 상공(蘇齋相公)께 말씀드렸다. 그 뒤에 오씨가 일흔일곱 살에 죽었다.
인후(麟厚)의 자는 후지(厚之), 울주인(蔚州人)이며 벼슬은 교리(校理)이고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하서(河西)가 충암(冲庵) 시권에 제한 시는 다음과 같다.
오기를 어디로부터 왔으며 / 來從何處來
가기를 또한 어디를 향해 가는고 / 去向何處去
가기도 오기도 정한 자취 없이 / 去來無定蹤
유유한 세월 백년 남짓이로구나 / 悠悠百年許


양봉래(楊蓬萊)의 풍악에서[在楓岳]란 시는 다음과 같다.
백옥경 봉래도에 / 白玉京蓬萊島
허허 넓은 연파는 태고적이고 / 浩浩煙波古
맑고 따사로운 날씨도 좋구나 / 熙熙風日好
벽도화 그늘에 한가로이 오가니 / 碧桃花下閒來往
학 탄 신선 피리소리에 세월은 간다 / 笙鶴一聲天地老
신선 같은 풍채와 도인 같은 느낌이 짙다. 자동(紫洞) 차식(車軾)이 흉내내기를 다음과 같이 했다.
아침엔 현포에 저물녘엔 봉래산에 / 朝玄圃暮蓬萊
산달 걸린 박연폭포요 / 山月鉢淵瀑
향풍어린 계수대라 / 香風桂樹臺
동해를 굽어보며 마고에게 절하고 / 俯臨東海揖麻姑
삼십륙동천에 돌아가노라 / 六六壺天歸去來
원숙하기는 하나. 격(格)이 미치지 못한다. 나의 중형도 다음과 같이 화답하였다.
학은 훤칠하게 제비는 높게 낮게 / 鶴軒昂燕差池
삼신산에 돌아와 오색 구름에 나는구나 / 三山歸去五雲中飛
이 천지간 석자짜리 지팡이에 / 乾坤三尺杖
포의로 한 세상 보내누나 / 身世一布衣
바윗머리 나무에 긴 칼 척 걸어 두고 / 好掛長劍巖頭樹
맑은 시내에 손 담그고 영지풀잎 씹네 / 手弄淸溪茹紫芝
비록 좋기는 해도 마침내 양봉래의 신선 같은 운치에는 미치질 못한다. 이익지(李益之)에게 읊게 한다 해도 미치지 못할는지 모르겠다. 양봉래의 시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산 위에 또 산 있으니 산이 땅에서 나오고 / 山上有山山出地
물가에 또 물 흐르니 물 속에 하늘 어리었네 / 水邊流水水中天
아득해라 이 몸 공허 속에 있거니 / 蒼茫身在空虛裏
연하도 아닌 것이 선경도 아니로세 / 不是煙霞不是仙
불게(佛偈)와도 비슷하다. 또 다음과 같은 것도 있다.
금옥루대에 보랏빛 안개 떨치고 / 金屋樓臺拂紫煙
용이 나는 구름길에 신선 내려오네 / 躍龍雲路下群仙
청산도 인간 세상에 역겨웠던지 / 靑山亦厭人間世
푸른 바다에 어린 구만리 장천 속에 날아들었네 / 飛入蒼溟萬里天

삼천 년 만에 익는다는 신선 복숭아 / 蟠桃子熟三千歲
한밤중 하얀 난새 쌍으로 왔네 / 半夜白鸞來一雙
중천에 신선 서왕모 내려오니 / 中天仙郞降王母
아롱진 바다기운 구름창에 이었네 / 玲瓏海氣連雲牕
역시 그를 따라 배울 만하다.
차식(車軾)의 자는 경숙(敬叔), 호는 이재(頤齋), 연안인(延安人)이며 벼슬은 군수이다. 《기아(箕雅)》를 참고하건대 ‘金玉’은 ‘金屋’으로 되었고, ‘躍龍’은 어떤 본에는 ‘濯龍’으로 되어 있다.

내 누님의 보허사(步虛詞)는 다음과 같다.
난새 타고 한밤 중 봉래도에 내려서 / 乘鸞夜下蓬萊島
기린수레 한가로이 몰고 아름다운 풀 밟기도 하네 / 閒碾麟車踏瑤草
바닷바람은 벽도화를 불어 꺾어오고 / 海風吹折碧桃花
옥소반엔 가득찬 외만한 대추 / 玉盤滿摘如瓜棗
또 다음과 같이도 읊었다.
구화의 치마폭에 육수의 웃옷 입고 / 九華裙幅六銖衣
학의 등 싸늘바람 자부로 돌아왔네 / 鶴背冷風紫府歸
비취 바다 달도 지고 은하수 기우는데 / 瑤海月沈星漢落
옥피리 소리 속에 상서구름 날리네 / 玉簫聲裏霱雲飛
유몽득(劉夢得)을 본받았으나, 맑고 뛰어나긴 그보다 더하다. 유선사(遊仙詞) 백편은 모두 곽경순(郭景純 경순은 동진(東晋) 곽박(郭璞)의 자)의 남긴 뜻인데, 조요빈(曺堯賓) 따위로는 미치지 못한다. 나의 중형과 이익지가 모두 모방하여 지었으되, 마침내 그 울을 넘지 못했으니, 우리 누님은 천선(天仙)의 재주라 할 만하다.

양봉래(楊蓬萊)의 선종암(仙鍾巖)에 제한 시는 다음과 같다.
거울속 부용은 서른 여섯인데 / 鏡裏芙蓉三十六
하늘가에 바라뵈는 일만 이천 봉 / 天邊螻䯻萬二千
그 가운데 한조각 창주석에는 / 中間一片滄洲石
한 백년 동안에 시라고 말할 수가 있다오 / 可以言詩此百年
박 상공(朴相公)이 끝구절을 고쳐,
동녘에 온 해객이 졸기에 합당하네 / 合著東來海客眠
하자, 봉래가 온당하다고 하여 드디어 고치고 나중에 지천(芝川 황정욱(黃廷彧)의 호) 황 상공(黃相公)에게 말하니 상공이,
“이는 공의 시어(詩語)가 아니니 바른 대로 말하시오”
하므로 봉래가 지천의 식견에 크게 탄복했다. 지천은 봉래를 잘 알아보는 사람이라고 할 만하다.
박 상공(朴相公)의 이름은 순(淳), 자는 화숙(和叔), 호는 사암(思庵), 충주인(忠州人)이며 벼슬은 영의정이고 시호는 문혜(文惠)이다. 사암의 퇴계 선생이 남으로 돌아감을 전송하며[送退溪先生南還]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고향생각 끊임없어 고리인 양 이어지니 / 鄕心不斷若連環
한필 말로 오늘아침 한관 떠나네 / 一騎今朝出漢關
추위에 고갯매화 봄인데도 못 피니 / 寒勒嶺梅春未放
늦은꽃 응당 늙은 신선 돌아오길 기다리리 / 留花應待老仙還
총병(總兵) 양조(楊照)의 사당에 제한 시는 다음과 같다.
철갑옷 금빛칼도 이미 흙이 되었고 / 鐵衣金劍已塵沙
사당집 소나무 전나무엔 저녁 까마귀 지저귀네 / 廟間松杉噪夕鴉
슬프다 중국 날센 장수 죽었으니 / 惆悵漢家飛將死
갈대 피리 소리만 백낭하 자주 넘네 / 胡笳頻度白狼河
청풍(淸風) 한벽루(寒碧樓) 시는 다음과 같다.
나그네 그리움 외로이 절로 시름 생기니 / 客心孤廻自生愁
앉은 채 강물소리 듣노라 다락에서 내려올 줄 모르네 / 坐聽江聲不下樓
내일 또 벼슬길로 가버린다면 / 明日又登官道去
흰 구름에 단풍은 누구 위한 가을일꼬 / 白雲紅樹爲誰秋
견 상인(堅上人)에게 보내는 시는 다음과 같다.
오랫동안 입은 은혜이기에 이 마음 궁리 많아 / 久沐恩波役此心
새벽 닭소리에 조회 나갈 비녀를 꽂네 / 曉鷄聲裏戴朝簪
강남 땅 들집은 하마 황폐했겠지 / 江南野屋今蕪沒
산승을 고용하여 대밭을 돌보게 했네 / 却倩山僧護竹林
짧은 거문고에 제한 시는 다음과 같다.
역산에서 그 누가 오동나무 잘랐는가 / 嶧山誰採鳳凰枝
벼락친 자욱 있어 깎아보니 더욱 기이해 / 雷斧餘痕斲更奇
소리 알 이 이미 갔다 서러워 마라 / 休恨賞音人已逝
옷깃 비추는 저 달이 바로 종자기라네 / 照衿明月卽鍾期
이양정(二養亭) 벽에 제한 시는 다음과 같다.
산새 소리 어쩌다 외마디 들리고 / 谷鳥時時聞一箇
침상은 쓸쓸해라 여러 책 흩어졌네 / 匡床寂寞散群書
가엾어라 백학대 앞 저 물도 / 可憐白鶴臺前水
산문을 나서자 이내 진흙 머금으리니 / 纔出山門便帶淤


신기재(申企齋)의 동산시(洞山詩)는 다음과 같다.
봉래도는 아득아득 지는 해 시름겹고 / 蓬島茫茫落日愁
흰 갈매기 해당숲에 다 날아갔네 / 白鷗飛盡海棠洲
오늘에야 비로소 명삿길 밟게 되니 / 如今蹈踏鳴沙路
이십년전 옛꿈에 놀던 데라오 / 二十年前舊夢游
나는 그곳에 가 본 뒤에야 이 시의 절묘함을 알게 되었다.

내가 언젠가 꿈에 한 곳에 이르니 거친 연기, 들풀이 눈길 닿는 데까지 끝없는데, 불탄 나무의 껍질 벗겨진 데에 다음과 같이 썼다.
원통한 기운 끝없어 / 冤氣茫茫
산하가 한 빛이로다 / 山河一色
세상엔 사람 하나 없고 / 萬國無人
중천에 달도 침침하네 / 中天月黑
잠에서 깨어 몹시 언짢게 여겼었는데 임진란에 서울이나 시골을 막론하고 피를 흘리고 집들이 불탐에 이르러서 이 시가 바야흐로 징험이 되었다.

무위자(無爲者) 천연(天然) 스님은 집안이 본래 좋았으나 잘못 중이 되었는데 씩씩하여 기개가 있었다. 언젠가 지리산(智異山) 성모(聖母) 음사(淫祠)가 대중에게 혹하게 한 것을 분하게 여겨, 이를 쳐부수었다. 남명 선생(南冥先生)이 용사천연전(勇士天然傳)을 지었으며 양송천(梁松川)이 그 책머리에 다음과 같이 제하였다.
주먹 한번 휘둘러 산꼭대기 돌 깨부수니 / 張拳一碎峯頭石
갈 곳 없는 잡귀가 대낮에 울더라 / 魍魎無憑白晝啼
양봉래(楊蓬萊)ㆍ박사암(朴思庵)과 나의 중형이 모두 천연의 친구가 되었다. 천연이 약간 시를 알아 우리 중형에게 준 시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잘못 고기 배에 걸린 용 곤핍함을 슬퍼하고 / 枉罹魚腹嗟龍困
닭우리에 그릇 떨어진 봉황새 쇠해만 가네 / 誤落鷄巢欲鳳衰
임진란에 정화상(靜和尙)을 따라 여러 번 전공을 세웠다고 한다.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자는 건중(楗仲), 창녕인(昌寧人)이며 벼슬은 전첨(典籤)이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송천(松川) 양응정(梁應鼎)의 자는 공섭(公燮). 남원인(南原人)이며 벼슬은 부윤(府尹)이다. 정화상(靜和尙)은 휴정(休靜)이니 호는 청허(淸虛)이다. 임진란 때 승병 대장으로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이 되었다. 시를 잘하였다. 송천의 어양교를 지나다[過漁陽橋]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나무빛이며 풍경은 태평세월 그렸는데 / 樹色煙光畫太平
강다리는 아직도 옛이름을 띠었구나 / 河橋猶帶舊時名
이주곡(伊州曲) 양주곡(涼州曲)이 소소곡 같았더라면 / 伊涼若是簫韶曲
어찌 오랑캐놈들이 양경(兩京)을 침범하였으리 / 豈使胡雛犯兩京
청허의 한성도중(漢城道中)이란 시는 다음과 같다.
바닷가 나무엔 가을 서리 내리고 / 海樹落秋霜
초관엔 이른 기러기 떠나네 / 楚關鴻去早
종산 외론 새 나는 하늘가에 / 鍾山獨鳥邊
나그넨 배 안에 늙어만 가네 / 客子舟中老


중형이 무위자(無爲者)에게 준 시는 다음과 같다.
천왕봉 위로 나는 듯 달려가 / 天王峯上走如飛
천 년 묵은 돌덩이 주먹으로 부수고 돌아왔네 / 手碎千年片石歸
애닯다 영웅은 속절없이 늙어가고 / 可惜英雄空老去
산속에 밝은 달이 닫힌 사립문 비추네 / 碧山蘿月掩柴扉

두만강가 나뭇잎은 시들고 / 豆滿江邊木葉衰
여기저기 외론 산엔 깃발만 펄럭이네 / 孤山處處見旌旗
산속에 하늘을 떠받칠 솜씨 버려졌으니 / 山中褒却擎天手
슬프다 월지국 선우 머리 벨 이 그 누구런가 / 怊悵何人斮月支
그에 대한 칭찬이 이와 같았다. 또 장편 시의 머리 두 구절은 다음과 같다.
무위자는 사람중에 용이니 / 無爲者人中龍
전생엔 바다를 가르던 금시조(金翅鳥)였는데 / 前身擘海金翅鳥
벼락이 한밤에 천왕봉에 떨어졌네 / 霹靂夜下天王峯
말이 매우 기발하였는데 전편을 못 외우겠다. 필경 무위자의 책속에 있을 것이다.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의 호)이 이우정(二憂亭)에 제한 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물가에 가로 세로 밀물은 지고 / 洲渚縱橫潮漸退
나무숲 우수수 기러기 손이 오네 / 樹林搖落雁來賓
조어(造語)가 기이 건장한데 전한(典翰) 엄흔(嚴昕)은 하찮게 보니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엄흔(嚴昕)의 자는 계소(啓昭)이고 호는 십성(十省)이다. 영월인(寧越人)으로 벼슬은 전한(典翰)을 지냈다.

남추강(南秋江 추강은 남효온(南孝溫)의 호)의 한식시(寒食詩)는 다음과 같다.
흐린 날 울 밖에 저녁 해 나고 / 天陰籬外夕陽生
한식날 봄바람에 들 물은 맑다 / 寒食東風野水明
배에 가득찬 장사아치 끝없이 지껄이는 말 / 無限滿船商客語
버들꽃 필 무렵이라 고향의 정일레라 / 柳花時節故鄕情
안자정을 꿈에 보다[夢子挺]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부귀 영화 덧없는 꿈 저문 산 앞에서 꾸니 / 邯鄲一夢暮山前
넋과 넋 만남이란 정말 우연이라 / 魂與魂逢是偶然
가는 비 뜰에 내리고 봄은 쓸쓸한데 / 細雨半庭春寂寞
살구꽃 수없이 지네 붉은 돈처럼 / 杏花無數落紅錢
상사일 성남에서[上巳日城南]란 시는 다음과 같다.
성남이고 성북이고 살구꽃 붉은데 / 城南城北杏花紅
해는 꽃 서녘에 있으니 꽃 그림잔 동에 있네 / 日在花西花影東
외로이 말 탄 병든 늙은이 철 바뀜에 놀라니 / 匹馬病翁驚節候
비낀 바람이 성가퀴에 눈물을 흩뿌려주네 / 斜風吹淚女墻中
이상 몇몇 시는 당인(唐人)에 못지 않다. 귀신론(鬼神論) 일편은 학문이 극히 높다. 훌륭한 재주를 지녔어도 펴보지 못했으니 아깝다.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의 자는 백공(伯恭)이고 의령인(宜寧人)인데 진사(進士)를 지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안자정(安子挺)의 이름은 응세(應世)이고 호는 월창(月窓)이며 죽산인(竹山人)이다. 진사(進士)를 지냈다.
남추강(南秋江)의 성거산(聖居山)에 제한 절구는 다음과 같다.
동녘에 해 높이 돋으니 / 東日出杲杲
신령스런 비에 나뭇잎 지네 / 木落神靈雨
창 열자 온갖 시름 스러지니 / 開牕萬慮淸
병든 몸이 날개가 돋는 듯 / 病骨欲生羽


무절공(武節公) 황형(黃衡)은 무장(武將) 출신으로, 또한 글과 글씨에 능했다. 경오년(1510, 중종5)에 왜구를 진압하고 몰운대(沒雲帶)에 올라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높은 대에 깃발 세우니 큰 바람 이는구나 / 建節高臺起大風
바다 구름 갓 걷히고 해는 둥실 붉어라 / 海雲初捲日輪紅
하늘에 비겨 칼 어루만지며 자주 고개 돌리니 / 倚天撫劍頻回首
탄환만한 대마도가 가까이 보이는구나 / 馬島彈丸指顧中
조어(造語)가 기이하고 장엄하여 마치 그 사람을 보는 듯하다. 어찌 인재가 옛사람에게 못 미치랴.
무절(武節)의 이름은 형(衡)이요 창원인이다. 무과급제로 공조 판서를 지냈다. 시안(諡案)을 상고컨대 형의 시호는 장무(莊武)이지, 무절이 아니었다.

《승암시화(升庵詩話)》에 명초(明初) 이래 재상의 업적을 논함에 있어 유성의(劉誠意 성의는 유기(劉基)의 봉호)를 제일로 치켜세웠다. 성의가 실로 어질긴 하지만 재상의 업적에 대해서는 소문난 게 없다. 영락(永樂) 연간에는 하원길(夏原吉)을 제일로 삼고 삼양(三楊 양사기(楊士奇) 양영(楊榮) 양보(楊溥))은 그 축에 들지 않았으니 그 의논 또한 온당치 못하다. 이 문달공(李文達公 문달은 이현(李賢)의 시호)이 그를 헐뜯어 심지어는 문달이 나륜(羅倫)을 내쳤으니, 비록 흠이 됨을 면할 수는 없으나, 그 공정한 것만은 숨길 수 없는 것이다. 정덕(正德) 연간에 이르러는 거드름스럽게 자기 아버지를 제일로 쳤다. 젊어서는 비록 괜찮은 사람이었으나 입각(入閣)하여서는 임금의 외척을 연줄로 삼았으니 이미 올바른 선비는 아닌데, 공평하여 사심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가정(嘉靖) 이래로 명정승은 문정공(文正公) 사천(謝遷)과 충의공(忠毅公) 양부(楊傅)가 더욱 드러나게 유명했는데, 소인(小人)도 제일 많았다. 계악(桂萼)ㆍ방헌부(方獻夫)ㆍ장총(張璁)ㆍ엄숭(嚴嵩)ㆍ이본(李本)이 모두 소인들인데, 그 중 엄숭은 은총을 20여 년이나 독차지했다. 그 뒤에는 소사(少師) 서계(徐階)ㆍ소부(少傅) 이춘방(李春芳)이 다 명정승인데, 서소사(徐少師)는 남들이 사마공(司馬公)에 비겼으니, 오랫동안 논정(論定)하는 일을 담당했었다. 융경(隆慶) 이래로 고공(高拱)ㆍ장거정(張居正)은 모두 약골(弱骨)이었으며 신시행(申時行)은 기롱을 면할 수 없었고, 승상(丞相) 마자강(馬自强)ㆍ소부(少傅) 허국(許國)ㆍ소보(少保) 왕석작(王錫爵)이 모두 괜찮은 사람이었으나 그들의 사업은 삼양(三楊)에게 비기면 누가 나은지는 모르겠다. 인재가 날로 저하되니 개탄스러운 노릇이다.

우리나라 명상(名相)은 황ㆍ허(黃許 황희(黃喜)와 허조(許稠))를 제일로 삼는다. 세상에서는 더러 전조(前朝 고려(高麗))의 과제(科第)를 병폐로 여기기도 하는데, 과연 그 뒤에는 별로 이름난 사람이 없었다. 중종 때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은 전인(前人)에 부끄럽지 않다.
황희(黃喜)의 자는 구부(懼夫)이고 호는 방촌(厖邨)인데 장수인(長水人)이다. 벼슬은 영의정을 지냈고 시호는 익성(翼成)으로 세종묘정(世宗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허조(許稠)의 자는 중통(仲通)이고 호는 경암(敬庵)인데 하양인(河陽人)이다. 벼슬은 좌의정을 지냈고 시호는 문경(文敬)으로 세종묘정에 배향되었다.
정광필(鄭光弼)의 자는 사협(士協)이고 호는 수부(守夫)인데, 동래인(東萊人)이다. 벼슬은 영의정을 지냈고 중종묘정에 배향되었다.


단간공(端簡公) 정효(鄭曉)의 《오학편(吾學編)》에 우리나라가 여진(女眞) 이만주(李滿住)를 정벌한 일의 본말(本末)이 아주 자상히 실려 있는데, 강순(康純)ㆍ어유소(魚有沼)ㆍ남이(南怡)의 이름을 대서특필하였다. 이 세 사람은 진실로 장군감으로 국사(國史)에 그 이름이 드러났으니 이보다 큰 영광이 무엇이겠는가?
강순의 자는 태초(太初)요 신천인(信川人)이다. 음관으로 좌의정을 지냈고 남이의 옥사(獄事)에 죽었다.
어유소는 충주인(忠州人)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영의정을 지냈고 시호는 정장(貞莊)이다.
남이는 의령인(宜寧人)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병조 판서를 지냈다. 의산위(宜山尉) 남휘(南暉)의 손자(孫子)이고 익평(翼平) 권람(權擥)의 사위로 유자광(柳子光)의 무고에 의해 살해되었다. 남이의 정남(征南)이란 절구는 다음과 같다.
백두산 돌은 칼 갈아 닳아지고 / 白頭山石磨刀盡
두만강 물은 말 먹여 마르리라 / 豆滿江流飮馬無
사나이 스물에 북을 정벌치 못하면 / 男兒二十未平北
후세에 그 누가 대장부라 하리오 / 後世誰稱大丈夫


척 총병(戚總兵 척계광(戚繼光)을 가리킴)은 위명(威名)과 사업이 남의 이목에 번쩍거릴뿐더러 또한 시문에 능하여 이창명(李滄溟)의 무리가 치켜세웠다. 임회후(臨淮侯) 이언공(李言公)의 자(字)는 유인(惟寅)인데, 또한 시문에 능하여 다음과 같은 시가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바람은 밀물소리 휘몰아 섬들 떠들썩하고 / 風捲潮聲喧島嶼
해에 비낀 돛 그림자 누대에 오르네 / 日斜帆影上樓臺

요즘 스님으로 시 잘 쓰는 사람이 많지 않는데, 유정산인(惟政山人)은 당(唐) 나라 구승(九僧)의 유를 배워 시가 몹시 맑고 고고하였다. 행사(行思)도 자못 좋은 시구가 있어서 상서로운 오색구름 아롱지니 나물 먹는 중이 아니다[慶雲爛熟非筍蔬]라는 구가 있다. 요즘 홍정(弘靜)이란 분이 또한 시를 잘하여 스님을 칭송하다[送僧]란 시가 있었는데 우리 중형(仲兄)이 몹시 칭찬했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지난 해 헤어질 땐 가을 강물에 단풍 지더니 / 去年別紅葉秋江波
올해 작별에는 봄 산언덕에 매화가 지네 / 今年別落梅春山阿
물결은 아득하고 산언덕은 가렸는데 / 波杳杳山阿隔
단풍잎 지는 매화 이 시름 어이하리 / 紅葉落梅愁奈何
유정(惟政)의 호는 송운(松雲)이다. 행사(行思)와 같이 일본에 사신갔었다. 이 두 분의 시가 같이 《기아(箕雅)》에 들어 있다.

백대붕(白大鵬)은 천한 종으로 중의 대열에 끼었다. 시를 잘 하였으므로 우리 중형과 승지(承旨) 심희수(沈喜壽)가 다 대등한 벗으로 사귀었는데
가을 하늘에 엷은 그늘 어리어 / 秋天生薄陰
화악의 그림자 침침해라 / 華岳影沈沈
라는 시는 우리 중형이 칭찬해 마지않았다. 우리 백형을 따라 일본에 오간 일이 있으며, 아름다운 시가 매우 많다.
백대붕은 전함사(典艦司)의 종이다. 심희수의 자는 백구(伯懼)이고 호는 일송(一松)으로 청송인(靑松人)이다. 벼슬은 좌의정을 지냈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내가 어려서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여러 형님들이 사랑하고 가엾게 여겨 차마 다그치거나 나무라지 않았기 때문에 게을러 빠져서 독서에 힘쓰지 않았다, 차츰 자라서는 남들이 과거하는 것을 보고 좋게 여겨 덩달아 해 보았으나, 글치레나 하는 것이 장부의 할 짓은 아니었다. 이제 어지러운 세상을 만났으니, 세상에 나갈 뜻은 이미 사그라졌다. 10년 글읽기로 작정했으나, 아, 그 또한 늦었도다. 《학산초담(鶴山樵談)》 1부(部)를 짓는다.
명 신종(明神宗) 21년 계사년(1593, 선조26) 양월(陽月) 연등(燃燈)한 뒤 사흘 만에 교산자(蛟山子)는 쓰다.

[주D-001]한단의 걸음 : 한단학보(邯鄲學步)의 준말. 연(燕) 나라의 소년 수릉(壽陵)이 조(趙) 나라 서울 한단 사람의 한가하고 우아한 걸음걸이를 배우려다 제 걸음까지 잊어버린 고사. 자기 본분을 잊고 남의 흉내만 냄을 이름.
[주D-002]이듬해 변고 : 1592년(선조 25)에 일어난 임진왜란을 말함.
[주D-003]정시(正始)의 시체 : 정시는 위 제왕(魏齊王)의 연호. 그 당시 사대부들이 청담(淸談)을 숭상하였는데, 그 후 진(晉) 나라 때 죽림칠현이라 불리는 혜강(嵇康)ㆍ완적(阮籍) 등이 그 풍조를 더욱 발전시켜 형성한 표일(飄逸) 청원(淸遠)한 시체.
[주D-004]적신(積薪) : 섶을 쌓을 때 맨 먼저 쌓은 것이 맨 밑에 깔린다는 뜻에서 먼저 임용된 관리가 나중에 임용된 자보다 지위가 낮은 것을 말함.
[주D-005]삼성(三省) : 강상 죄인(綱常罪人)을 추국하는 세 아문(衙門). 곧 의정부(議政府)ㆍ사헌부(司憲府)ㆍ의금부(義禁府)
[주D-006]정미년 벽서(壁書) 사건 : 1547년(명종 2)에 일어난 양재역(良才驛) 벽서 사건. 을사사화 당시 대윤(大尹)을 숙청한 소윤(小尹)의 윤원형(尹元衡)ㆍ이기(李芑)ㆍ정순붕(鄭順朋) 등이 대윤의 잔여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집권층인 자신들을 비방하는 내용의 벽서를 조작하여 그 혐의를 유림들에게 뒤집어 씌워 송인수(宋麟壽)ㆍ이약빙(李若氷)은 사사(賜死)되고, 이언적(李彦迪)ㆍ정자(鄭磁)는 극변안치(極邊安置)되는 등 많은 유림들이 화를 당했음.
[주D-007]정묘교……신하로다 : 정묘교 곁에 별장을 짓고 살았던 당 나라의 허혼(許渾)과 초 나라에 삼려대부(三閭大夫)로 있다가 상관대부(上官大夫)와 근상(靳尙)의 참소를 입고 쫓겨난 굴원(屈原)을 말한다.
[주D-008]갑자년 참상 : 1504년(연산군 10)에 일어난 갑자사화를 말함. 앞서 연산군의 생모 윤씨(尹氏)의 폐위를 찬성했던 많은 사람들이 참화를 당했음.
[주D-009]노산묘(魯山墓) : 영월(寧越)에 있는 조선조 제6대 왕 단종의 무덤. 숙부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찬탈되어 노산군에 봉해짐. 나중 1698년(숙종 24)에 복위(復位)되고 묘효(廟號)가 추증되었음. 능호는 장릉(莊陵).
[주D-010]진왕(陳王)이……유정(劉楨) : 진왕은 위(魏) 조식(曹植)의 봉호(封號). 응탕과 유정은 건안칠자(建安七子) 가운데 두 사람.
[주D-011]괴리령 : 한 성종(漢成宗) 때의 주운(朱雲)을 말함. 성종에게 상방검(上方劍)을 빌려주시면 영신(佞臣) 장우(張禹)를 베겠다고 하였다. 임금이 노하여 죽이려 하여도 난간을 붙잡고 “신은 용봉(龍逢)ㆍ비간(比干)을 따라 저승에 노닐고 싶습니다.” 하여 마침내 임금의 용서를 받고, 직신(直臣)이라고 칭찬을 받았다. 《漢書 卷67 朱雲傳》
[주D-012]동각로(東閣老) : 한(漢) 나라 공손홍(公孫弘)이 승상이 되어, 동각을 지어 어진 선비를 맞아들인 고사. 여기서는 윤근수(尹根壽)를 가리킴.
[주D-013]소재(小宰)……반포 : 소재는 명 나라 한림원 편수(翰林院編修)의 별칭. 이때 명 목종(明穆宗)이 죽고 신종(神宗)이 즉위하였는데, 한림원 편수 한세능과 이과 도급사중(吏科都給事中) 진삼모(陳三謀)가 우리나라에 와서 신종이 등극했다는 조서를 반포하였다.
[주D-014]첨사(詹事)……반포 : 첨사는 한림원 편수의 별칭이고 도헌은 공과급사중(工科給事中)의 별칭. 이때 명 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와 황태자 탄생의 조서를 반포하였다.
[주D-015]다섯 사람 : 1573년(선조 6)에 명 나라 사신 한세능(韓世能)이 왔을 때 같이 어울렸던 우리나라의 권벽(權擘)ㆍ정유일(鄭惟一)ㆍ유성룡(柳成龍)ㆍ한호(韓濩)와 등계달(滕季達) 자신을 말함.
[주D-016]소령(小令) : 사체(詞體)의 하나. 58자 이내의 사(詞)를 소령이라 함.
[주D-017]한 선자(韓宣子)가…… 읊은 일 : 한 선자는 춘추(春秋) 시대 진(晉) 나라 대부 한기(韓起)를 말함. 선(宣)은 그의 시호. 각궁(角弓)은 《시경(詩經)》 소아(小雅)의 편명인데, 이 시는, 주(周) 나라 임금이 친족(親族)을 멀리하고 소인들을 가까이 하므로, 친족들이 임금을 원망하여 부른 노래이다. 한 선자가 일찍이 노(魯) 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노 나라 대부 계 무자(季武子)와 연향(宴享)하는 자리에서 서로 수호(修好)를 잘하자는 뜻에서 《시경》 각궁(角弓)의 “내 형제 내 겨레만은 서로 멀리하지 마시오.[兄弟婚姻 無胥遠矣]”라는 구절을 읊었던 고사이다. 《左傳 昭公 二年》
[주D-018]노 나라……잊을쏜가 : 진(晉) 나라 대부 한 선자(韓宣子)가 노 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노 나라의 대부인 계 무자(季武子)의 집에서 연향할 때에 거기에 좋은 나무[嘉樹]가 있는 것을 보고 한 선자가 그를 좋다고 칭찬하자, 계 무자가 말하기를 “제가 반드시 이 나무를 잘 북돋아 길러서 공께서 각궁(角弓)을 읊은 뜻을 잊지 않겠습니다.” 한 데서 온 말이다. 《左傳 昭公 2年》
[주D-019]서ㆍ이(徐李) : 조선 시대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던 서거정(徐居正)과 이 행(李荇)을 합칭한 말인 듯하나 자세하지 않음.
[주D-020]용면(龍眠) : 호가 용면산인(龍眠山人)인 송(宋) 나라 때의 화가 이공린(李公麟)을 말함. 이공린은 박학(博學)한데다 시(詩)ㆍ서(書)ㆍ화(畫)에 모두 뛰어났음.
[주D-021]추매(椎埋) : 사람을 죽이고 파묻어서 그 죄적(罪跡)을 완전히 감춤. 또는 도굴꾼이 무덤을 파헤치고 물건을 꺼내가 버리는 것을 말하기도 함. 전하여 전에 있었던 것이 감쪽같이 없어진 것을 비유한 말임.
[주D-022]구령(緱嶺)의 신선 피리 소리 : 춘추 시대 주 영왕(周靈王)의 태자(太子) 진(晉)이 피리를 매우 잘 불어서 피리로 봉황새의 울음 소리를 내곤 했는데, 그가 도사(道士)인 부구공(浮丘公)과 숭산(嵩山)에 올라가 30여 년 만에 구씨산(緱氏山)으로 신선이 되어 올라갔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구령은 곧 구씨산을 가리킨다.
[주D-023]용음(龍吟) : 용의 울음 소리. 또는 피리 소리를 일컫기도 함.
[주D-024]육적(陸績) : 삼국(三國) 시대 오(吳) 나라 사람으로 효성이 매우 지극하였는데, 그가 6세 때에 원술(袁術)의 집에 갔다가 그 집에서 귤(橘)을 내오자 귤 3개를 품 안에 싸가지고 와서 모친께 드린 고사가 있음. 《三國志 吳志 陸績傳》
[주D-025]병꾸러기……누웠다네 : 장경(長卿)은 전한(前漢) 때의 문장가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자. 그는 무제(武帝) 때에 효문원 영(孝文園令)을 지내다가 병(病 : 소갈증)으로 사직하고 무릉(茂陵)에 들어가 살았다.
[주D-026]칠자(七子) : 명(明) 나라 때에 문학(文學)으로 이름 높았던 일곱 사람. 전칠자(前七子)와 후칠자(後七子)가 있는데, 전칠자는 이몽양(李夢陽)ㆍ하경명(何景明)ㆍ서정경(徐禎卿)ㆍ변공(邊貢)ㆍ강해(康海)ㆍ왕구사(王九思)ㆍ왕정상(王廷相)이고, 후칠자는 이반룡(李樊龍)ㆍ사진(謝榛)ㆍ양유예(梁有譽)ㆍ종신(宗臣)ㆍ왕세정(王世貞)ㆍ서중행(徐中行)ㆍ오국륜(吳國倫)임.
[주D-027]삼소(三蘇) : 북송(北宋) 시대 문장가였던 소순(蘇洵)과 그의 아들인 소식(蘇軾)ㆍ소철(蘇轍) 형제를 합칭한 말.
[주D-028]삼사관(三司官) : 옥사(獄事)를 다스리는 관리.
[주D-029]금자 : 전진(前秦) 두도(竇滔)의 아내 소씨(蘇氏)가 직금회문시(織錦回文詩)를 남편에게 보낸 고사로, 아내의 편지, 또는 아름다운 시구를 뜻함.
[주D-030]칠성(七姓) : 후량(後梁)ㆍ요(遼)ㆍ후당(後唐)ㆍ후진(後晉)ㆍ후주(後周)ㆍ송(宋) 등 7국을 말함.
[주D-031]태왕(太王) : 주 문왕(周文王)의 조부 고공단보(古公亶父). 《맹자》 권2에 “옛날에 태왕은 여색을 좋아하여 그의 비를 사랑하였다. [昔者 大王好色 愛厥妃]” 하였음.
[주D-032]이주곡(伊州曲)……소소곡(簫韶曲) : 이주곡과 양주곡은 당(唐) 나라 때에 주로 기생들이 부르던 풍류 곡조이고, 소소곡은 정중한 순 임금의 음악임.
[주D-033]금시조 : 불경(佛經)에 나오는 새. 수미산(須彌山) 북쪽 철수(鐵樹)에서 살면서 입으로 불을 토하여 용을 잡아 먹는다고 함.
성소부부고 제26권
 부록 2 ○ 서(序)
청허당집 서(淸虛堂集序)

불법(佛法)이 동쪽으로 삼한(三韓)에 들어오기는 신라 중엽부터였다고 한다. 그사이 불문(佛門)에서 일컬어진 이가 수없이 많았으나, 거의가 교장(敎藏)이나 율장(律藏) 두 가지에 벗어나지 못하여, 탑묘(塔廟)를 존숭(尊崇)하고 과보(果報)를 내세워 한 세대의 이목(耳目)을 용동(聳動)시켰을 뿐이었다.
염화(拈花)의 밀지(密旨)와 면벽(面壁 달마(達摩)가 9년 동안 벽을 향하여 참선한 고사)의 미의(微意)는 조금도 간파하지 못한 채, 아무 사(師)는 아무 전(傳)을 받고 아무 조사(祖師)는 아무 법(法)을 전했다고 하는데, 그 문도(門徒)가 또 덩달아 이를 기념하는 데 끊임이 없어, 높다란 비(碑)를 세우고 커다란 종(鍾)을 만들어 공렬(功烈)을 과시하는가 하면, 보전(寶殿)과 연궁(蓮宮)이 총림(叢林 사찰(寺刹)을 이름)을 빛나게 장식하되 수천 년을 하루와 같이 하였으니, 어찌 너무 참람된 관습이 아니겠는가
오직 도봉(道峯) 영소 국사(靈炤國師)가 중국에 들어가 법안(法眼 일체의 법을 환히 비춰 보는 눈)ㆍ영명(永明 영원히 밝은 불법)의 전수를 받고, 송(宋) 나라 건륭(建隆 태조의 연호) 연간에 본국으로 돌아와 불풍(佛風)을 크게 천양(闡揚)하여 말법(末法)을 구제함으로써, 조사(祖師 달마(達摩)를 말함)가 서쪽에서 온 뜻이.비로소 선양(宣揚)되고, 동토(東土)에 가사(袈裟)를 두른 이가 드디어 임제(臨濟 교종(敎宗) 이름)ㆍ조동(曹洞 교종이름)의 종풍(宗風)을 계승하게 되었으니, 선종(禪宗)에 끼친 공로가 어찌 적다 하겠는가.
사(師)의 정법안장(正法眼藏)은 도장 신범(道藏神範)에게 전수되어 청량(淸涼)의 도국(道國), 용문(龍門)의 천은(天隱), 평산(平山)의 회해(懷瀣)ㆍ현감(玄鑑)ㆍ각조(覺照), 두류(頭流)의 신수(信修) 등 6세(世)를 거쳐 보제 나옹(普濟懶翁)을 얻었고, 나옹은 오랫동안 중국에 있으면서 모든 선지식(善知識)을 널리 찾아 두루 통[圓通]하고 즉시 체득[卽詣]하여 울연(蔚然)히 선림(禪林)의 사표가 되었다. 또 그의 법을 전수 받은 이는 남봉 수능(南峯修能)이 적사(嫡嗣)가 되었고, 정심 등계(正心登階)가 이를 바로 계승하였는데, 정심은 벽송 지엄(碧松智嚴)의 스승이다. 벽송은 다시 부용 영관(芙蓉靈觀)에게 전수하였는데, 그 도(道)를 체득한 이는 오직 청허 노사(淸虛老師)를 수위(首位)로 일컫고 있다
사의 휘(諱)는 휴정(休靜), 고향은 안서(安西 해주(海州)의 옛이름)로 소시에 유가(儒家)의 글을 익혀 이미 대의(大義)를 통하였고 사장(辭章)에도 능하여 과거(科擧)볼 만한 정도의 공부는 매우 하찮게 여겼다. 뒤에 두류산(頭流山)에 노닐다가 갑자기 큰 서원(誓願)을 발(發)하여 부용(芙蓉)의 문하(門下)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법을 받아 팔교(八敎)를 통(通)하고 삼관(三觀)을 통하였으며, 도(道)는 기미(機微) 이전에 비추고 생각은 번뇌 밖으로 벗어났다.
그 영원한 밝음과 간결한 조예는 곧장 달마(達摩)ㆍ노능(盧能 혜능(慧能)의 속명)의 맥락을 접하고, 심ㆍ성(心性)을 설(說)하는 묘(妙)는 남양(南陽 남양의 혜충(慧忠)을 말함)ㆍ영가(永嘉 영가의 원각(元覺)을 이름)ㆍ백장(百丈)ㆍ남천(南泉)과 어깨를 나란히 함으로써, 혜일(慧日)이 거듭 밝고 지등(智燈)이 더욱 빛났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그림자를 보거나 말을 듣고 그대로 집착하거나 믿는 자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삼사(三舍 1사(舍)는 30리)나 물러설 것이며, 진ㆍ정(眞正)을 훼방하고 개미가 큰 나무를 흔들려다가는 스스로 아비지옥에 떨어지는 업보를 지을 것이니, 소위 하등(下等)사람은 도(道)를 듣고 도리어 크게 웃는다는 말이 어찌 허위이겠는가.
사는 대법(大法)을 간직하고 명산(名山)에 두루 머무른 법랍(法臘)이 이미 70년이나 된다. 은고(銀鼓)를 보방(寶坊)에서 울리고 금륜(金輪)을 향지(香地)에서 굴려 군미(群迷 중생의 미혹)를 다 깨뜨리고 현불(玄拂 승도(僧徒)를 지휘하는 봉(棒))을 혼자 세워, 도봉(道峯)ㆍ보제(普濟)의 가르침이 이에 이르러 더욱 크게 밝아졌다. 저 교(敎)ㆍ율(律)에 구구하여 과(果)ㆍ보(報)나 믿는 이와 비교하면 그 거리가 어찌 백만 유순(由旬)뿐이겠는가.
아, 그런데 금언(金言 부처의 말)이 장차 부결(剖決)되려고 옥첩(王氎)이 갑자기 재(灰 청허(淸虛)의 죽음을 뜻함)로 화(化)하여, 기수(祇樹 부처가 설법한 기원정사(祇園精舍)를 이름)에 그늘[陰]이 없어지고 자항(慈航 자비의 배로 제도중생을 뜻함)에 노[櫂]를 잃었으니, 인ㆍ천(人天)의 비통함이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종봉 정공(鍾峯政公 정공은 유정(惟政)을 높인 말)은 사(師)의 가르침을 듣고 흥기(興起)한 이이다. 지당(智幢)이 이미 꺾이고 계보(戒寶)가 오랫동안 사장(死藏)된 것을 염려하여, 그 유문(遺文)을 주워 모아 영모(永慕)하는 뜻을 붙이려 하였으나, 그 글을 간행하기도 전에 정공(政公) 또한 가고 말았다. 열반(涅槃)에 들던 날 저녁에 문인(門人)들을 불러 부탁하기를,
“나의 사부(師父)의 유문(遺文)을 내가 간행하지 못하고 갑자기 감으로써 처음의 마음을 저버리게 되었으니, 너희가 나의 정성을 잊지 않고 그 일을 마쳐 준다면, 내가 지하(地下)에서 눈을 감을 수 있겠다.”
하고 이어,
“거사(居士 허균(許筠)을 이름)는 우리 교(敎)와 은미한 인연이 있다.”
하고는, 이 서문을 부탁하였다.
그의 문인 혜구(惠球)가 나를 찾아와서 그 망사(亡師)의 말을 전하고 서(序)를 청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그렇다, 그런 연유가 있었다. 청허는 나의 선친께서 집우(執友 뜻을 같이한 벗)와 같이 보았고, 나도 젊었을 때 서찰(書札) 사이에서 보아 왔다. 지난해 서쪽 지방에 나가 노닐 때, 객사(客舍)에서 노사(老師)를 만나 직접 묘체(妙諦)를 듣고 봉심(蓬心 흐트러진 마음)이 금세 없어졌으며, 노사 또한 사후(死後)의 비문(碑文)을 나에게 부탁하였다. 그러나 나는 유가(儒家)의 선비이다. 불교와는 전혀 서로 맞지 않는데, 어찌 그 행적을 모사(模寫)할 수 있겠는가. 그대의 사부가 이를 알고 부탁하였는지 모르겠다.”
하였다. 그리고는 이에 선대(先代)의 세의(世誼)를 감념(感念)하여 감히 끝내 사양하지 못하고, 그 사법(師法)의 서로 전수한 자취를 서술하고, 노사에 관한 줄거리를 대충 기록해 보낸다. 그러나 석가(釋迦)의 머리 위에 똥을 바를 수 없는 일인데, 혹 나의 혀[舌]를 뽑는 업보가 돌아올까 염려된다. 그 유문(遺文)의 현묘(玄妙)하고 탈쇄(脫灑)함은, 보는 이가 스스로 짐작할 것이므로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다.
황명(皇明) 만력(萬曆) 기원 40년 임자년(1612, 광해군4) 맹춘(孟春)에 양천(陽川) 비야거사(毗耶居士) 허단보(許端甫)는 쓴다.

[주D-001]염화(拈花) : 염화미소(拈花微笑)의 준말. 석가(釋迦)가 연화(蓮花)를 따서 제자에게 보였는데, 아무도 그 뜻을 해득하는 자가 없고 다만 가섭(迦葉)이 미소(微笑)하였으므로, 석가가 그에게 불교(佛敎)의 진리(眞理)를 전수한 고사. 전하여 불교의 진리를 말함.
[주D-002]말법(末法) : 불교의 용어로 삼시(三時)의 하나. 부처가 세상을 떠난 지 오래되어 교법(敎法)이 쇠퇴해진 시기. 삼시는 즉 정법(正法) 5백 년, 상법(像法) 1천 년. 말법 1만 년을 합칭한 말인데, 이 밖에도 여러 설이 있음.
[주D-003]정법안장(正法眼藏) : 청정법안(淸淨法眼)과 같은 말로서 선가(禪家)에서는 이를 교외별전(敎外別傳 : 말이나 문자를 쓰지 않고 따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것)의 심인(心印)으로 삼음.
[주D-004]팔교(八敎) : 천태종(天台宗)에서 말하는 화의사교(化儀四敎)인 돈교(頓敎)ㆍ점교(漸敎)ㆍ비밀교(秘密敎)ㆍ부정교(不定敎)와 화법사교(化法四敎)인 장교(藏敎)ㆍ통교(通敎)ㆍ별교(別敎)ㆍ원교(圓敎)를 합칭한 말.
[주D-005]삼관(三觀) : 관법(觀法)의 내용을 3종으로 나누는 것. 즉 천태종(天台宗)에서 말한 공관(空觀)ㆍ가관(假觀)ㆍ중관(中觀)을 말함. 이 밖에 화엄종(華嚴宗)ㆍ율종(律宗) 등 각 종에 각기 다른 삼관이 있음.
기술잡록(記述雜錄)
권상하(權尙夏)

회옹 부자(晦翁夫子 주희(朱熹))는 주자(周子 주돈이(周敦頤)를 높인 말)ㆍ정자(程子 정호(程顥)와 정이(程頤)를 높인 말)ㆍ장자(張子 장재(張載)를 높인 말)의 뒤에 태어나서 여러 사람의 말을 절충(折衷)하여 경전(經傳)을 발휘(發揮)해서 만세의 보전(寶典)으로 만들었으니, 이른바 여러 현인(賢人)을 집대성(集大成)했다는 말이 참으로 거짓이 아니라 하겠다.
그러나 회옹 부자가 죽고 나서는 성학(聖學)이 전해지지 않아서 괴이한 논설(論說)들이 시끄럽게 나와 사도(斯道 성인의 도)가 묻혀 버리고 드러나지 못하였는데, 하늘의 도움으로 우리나라에 참된 유학자(儒學者)가 배출되어 유학의 문을 열어젖히고 성리(性理)의 호리(毫釐)를 분석하였으니, 그 이학(理學)을 밝힌 공이야말로 저 염락(濂洛)이 융성했던 시대보다 신속하고도 훌륭했다 할 것이다. 그러다가 우리 우암 선생에 이르러서는, 그들이 밝혀 놓은 이학을 더욱 확대시키고 천명(闡明)하여, 멀리는 고정(考亭 주희가 살던 지명으로, 곧 주희를 가리킴)의 정통(正統)을 연접하고 가깝게는 제유(諸儒)의 업적을 집대성하여 거룩하게 백세의 종사(宗師)가 되었으니, 그의 공이 크다고 이를 만하다.

회옹은 공자(孔子) 이후의 일인자(一人者)요, 우암은 회옹 이후의 일인자이다.

선생은 훌륭한 덕과 크나큰 업적으로 백세의 종사가 되었으니, 그의 한마디 말과 문자(文字) 하나하나가 모두 무궁토록 후세에 전할 만하다.

선생의 문집(文集) 가운데는 어떤 글을 막론하고 취할 것은 그 전문(全文)을 다 취해서 넣어야지, 산삭(刪削)하는 일은 큰 안목(眼目)을 지닌 사람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다. 경의(經義)와 예의(禮疑)는 모두 본집(本集) 가운데 편입시켜야 하며, 시집(詩集)은 《주자대전(朱子大全)》의 예(例)에 따라 차례대로 편입시키는 것이 매우 온당하나, 다만 연월(年月)의 선후를 상고하기가 용이치 못한 점이 있다.

도봉산(道峯山) 무우대(舞雩臺)의 남쪽에 푸른 절벽이 높다랗게 깎아질렀는데, 그 아래는 큰 바위가 시내를 가로질러 있다. 이 바위에다 선생이 친히 써 놓은 회옹(晦翁)의 시(詩) 두 구(句)를 새겨 놓았는데, 필력(筆力)이 웅장하고 힘차서 만 길이나 되는 산봉우리와 서로 겨룰 만하였다.
선생은 옥천(沃川)에서 생장(生長)하여 어릴 때부터 중봉(重峯 조헌(趙憲))의 풍도(風度)를 익히 들었던 터라, 평소에 그를 존경하고 숭앙하기를 석담(石潭 이이(李珥))의 다음으로 하였는데, 선생이 지은 비문(碑文)ㆍ행장(行狀) 등의 문자에서 이 사실을 볼 수 있다.

선생이 제주(濟州)에 안치(安置)되었을 때, 특별히 임경업(林慶業) 장군을 위하여 전기(傳記)를 지었는데, 임 장군에 대한 표장(表奬)이 곡진하였으니, 이는 대체로 말세의 느낌에서 나온 것이었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이 계축년(1613, 광해군5)에 올린 소(疏) 가운데, 대비(大妃 선조(宣祖)의 계비인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역모(逆謀)에 가담했다는 등의 말이 있고 이어서 그러나 결코 대비를 폐출(廢黜)해서는 안 된다는 뜻을 나타낸 사실이 있는데, 춘당(春堂 송준길(宋浚吉)) 선생이 정한강의 이 소(疏)를 보고서 하루는 미촌(美村 윤선거(尹宣擧))에게,
“정공(鄭公)의 이 사실을 어떻게 보는가?”
하고 묻자, 미촌이,
“광해군(光海君)을 달래려고 하면 그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네.”
하고 대답하니, 춘당 선생은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우암 선생이 뒤에 그 말을 듣고는,
“길보(吉甫 윤선거(尹宣擧))의 말은 매양 이해(利害)를 주장하는 것이 이와 같다.”
하였다.

이(尼 윤증(尹拯)이 이산(尼山)에 살았으므로 그를 가리킴)는 탄곡(炭谷 권시(權諰))이 장인(丈人)이고 권유(權惟)ㆍ권기(權愭)가 처남(妻男)이었으므로, 젊었을 때부터 다년간 한방에서 지냈고, 그의 아우(윤증의 아우인 윤추(尹推)를 말함)는 이유(李)가 장인이고 이삼달(李三達)이 처남이었으므로 정분(情分)이 천륜(天倫)에 가까운 사이이니, 서로 돈독히 믿는 사이임을 알 수 있다.
남인(南人)들은 ‘허견(許堅)과 이남(李枏 왕족(王族)인 복선군(福宣君))이 비록 죄가 있기는 하지만, 그들을 역적(逆賊)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대체로 역적이란 군상(君上)을 모해(謀害)한 자를 이르는 말이다. 그러나 허견과 이남은 분수에 넘치는 것을 바랐으니, 무언가 기대하는 것이 있기는 하였다. 그리하여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 김석주(金錫胄)의 봉호)이 강압적으로 옥사(獄事)를 일으켜 대신(大臣)들을 마구 살해하였으니, 이는 사림(士林)의 크나큰 화(禍)였다.’ 하였다.
윤증은 마음속으로, 선생이 거제(巨濟)에서 유배(流配) 생활이 풀려 돌아오면 훈척(勳戚)들을 내쫓고 윤휴(尹鑴)ㆍ허적(許積) 등의 무리에게 신원을 해 주어야만 지극히 공정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선생의 뜻은 왕실(王室)을 반석(盤石)처럼 편안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공을 쌓는 일이요 죄를 짓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때문에 윤증이 크게 경악하여 권이정(權以鋌 권시(權諰)의 손자요, 송시열의 외손자며, 윤증의 처질(妻姪)이다)에게,
“너의 외조(外祖 송시열을 가리킴)가 장차 천 길이나 되는 구덩이에 빠져 죽을 것이다……”
하였다. 그의 주견(主見)이 이러했기 때문에, 뒷날에라도 혹 남인이 다시 득세하게 되면, 윤증 자신 역시 선생의 고제(高弟)이기에 화(禍)를 면치 못할까 염려한 나머지, 선생과 파당(派黨)을 약간 달리하여 호신(護身)의 계책을 도모하려 했던 것이다. 이것이 소위 같은 서인(西人) 중에서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갈라지게 된 원인이다.
송자대전(宋子大全) 부록(附錄) 제2권
 연보(年譜) 1
만력(萬曆) 46년 무오. 선생 12세

《격몽요결(擊蒙要訣)》을 배웠다.
수옹공이, 선생이 출생할 때 아름다운 징험이 있어 특이한 자질을 타고났고 도량과 재주가 탁월하여 남보다 뛰어나므로, 언제나 성현(聖賢)이 되는 사업으로써 책임 지우며 격려하기를,
“주자(朱子)는 후세의 공자이고 율곡(栗谷)은 후세의 주자이니, 공자를 배우려면 마땅히 율곡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하고, 드디어 율곡 선생의 《격몽요결》을 가르쳤는데, 선생이 이미 다 배우고서 말하기를,
“이 글처럼 하지 않으면 사람이 될 수 없다.”
하며, 척연(惕然)히 스스로 분발하는 뜻이 있었다. 수옹공이 손수 《기묘록(己卯錄)》과 《해동야언(海東野言)》 등을 등초(謄抄)하여 주면서 말하기를,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을 배우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였고, 또한 청교(靑郊)에서 시를 지어 보이기를,
매월당 앞 물 흐르고 / 梅月堂前水
도봉산 위 구름 끼었네 / 道峯山上雲
하였으니, 대개 겸하여 김열경(金悅卿 김시습(金時習))도 사모하게 하려 한 것이다.
송자대전(宋子大全) 부록(附錄) 제11권
 연보(年譜) 10
숭정(崇禎) 62년 기사. 선생 83세

1월 초하루는 기사(己巳) 29일(정유) 상소하여 원자(元子)의 위호(位號 작위(爵位)와 명호(名號))에 대해 논하고, 이어 송원소(訟冤疏 억울함을 변론한 소)를 올렸다가 엄한 꾸지람을 받고 제주(濟州)로 귀양 갔다.
이때 윤증의 당이, 선생이 우계 선생(牛溪先生)의 흠을 들추어내어 헐뜯었다 하여 끝없이 선생을 물고 늘어졌다. 그러므로 선생이 소를 올려 윤증이 무함한 시말(始末)을 자세히 진술하고 또 수옹공의 무함당한 것을 변론하였으며, 이어 증의 부자가 절의(節義)를 배척하고 세도(世道)를 퇴패하게 한 내용을 말한 다음 상에게, 교화(敎化)의 근원에 힘쓰고 성학(聖學)을 밝혀 사설(邪說)을 종식(終熄)시키기를 청하였다. 그런데 상소문을 완성하고 난 뒤에, 선생이 상이 정의(廷議 조정의 의논)를 물리치고 갑자기 원자(元子)의 위호를 정하니 여러 신하들이 중궁(中宮)의 춘추가 아직 젊어서 앞 일을 알 수 없는 데다가 왕자가 태어난 지 겨우 몇 달인데 위호를 정하는 것은 너무 서두르는 일이라고 대답했다는 말과, 이조 판서(吏曹判書) 남용익(南龍翼)이 극력 간쟁하다가 꾸지람을 당했다는 말과, 상이 또 조정에서 다시 간하는 말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모든 것을 묻지 말라고 명했다는 말을 들었다. 이에 선생이 사류(士流)들이 왕자(王子)를 좋아하지 않고 흉도(凶徒)가 또 유위한(柳緯漢)을 사주하여 상소로 무함할 것을 의심하고는 그 소를 올렸다. 그 소의 대략에,
“오늘날 인사(人事)의 잘못 중에는 건본(建本 세자(世子)를 세우는 일)의 계획을 일찍 정하지 않는 것보다 더 큰 잘못이 없는데, 군신(群臣) 중에는 한 사람도 국가에 충성을 바치는 이가 없습니다. 다행히 상의 마음이 건본하는 쪽으로 쏠려 원자의 호칭(號稱)을 서둘러 정하여 만세(萬世)의 터전을 세우셨으니, 종사(宗祀)와 생민을 위한 염려가 보통이 아니십니다. 그러나 신의 생각에는 오히려 석연(釋然)치 못한 점이 있습니다. 처음 왕자의 임신 소식을 듣고 온 나라 신민의 기대가 대단했었는데, 정작 탄생하신 뒤에는 전하를 위하여 국본(國本)을 정하기를 청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고, 지금 성단(聖斷 임금의 결단)이 이미 결정되셨는데도 천안(天顔)의 지척 앞에서 오히려 순종하려 하지 않아 간단한 말로 책임이나 면하려 하고 혹은 서둔다는 말로 반대의 뜻을 분명히 드러내니, 아, 이것이 무엇하는 짓입니까? 이는 평소의 속셈이 그러해서가 아니겠습니까? 비록 전하께서 위엄으로 억눌러 묵묵히 물러가기는 하였으나 즐거운 마음으로 복종하지 않는 것임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때가 달라지면 일이 달라지고 일이 달라지면 변란이 생기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이미 결정하신 일인데도 여러 신하의 마음이 오히려 이와 같으니, 이것이 어찌 때가 달라지면 일이 달라질 징조가 아니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원자라 명칭하는 것이 직접 세자로 봉하는 것만 못하고 건본(建本)만을 보여 주는 것이 호칭을 정하여 동궁(東宮)으로 삼으시는 것만 못하니, 전하께서는 빨리 결단을 내리어 의심치 마시고 봉호(封號)를 내린 다음 사보(師保)를 선택함으로써 온 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전하에게 사자(嗣子)가 있음을 알게 하신다면, 국가가 반석처럼 단단해지는 것이 여기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하고, 또 귀양 간 여러 흉인(凶人)의 석방을 청하였는데 이는 상이 비록 후사(喉司 승정원(承政院)의 별칭)의 말에 따라 위한(緯漢)을 먼 섬으로 귀양 보내기는 했으나 큰 화가 곧 일어나려 하기 때문이었다. 이어 선생이,
“이는 국가의 대사(大事)이다. 더구나 오늘날 상하의 촉망(屬望)이 왕자(王子)를 버리고 어디 있기에 이처럼 서두르기만 하고 조용히 처리하지 못하는가? 또 여러 신하가 정후(正后 중궁(中宮))도 왕자를 낳을 것이라고 주달한 것은 일이 생기기 전에 주도면밀하게 처리해야 된다는 염려에서이니, 상을 위하여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다.”
하고, 수백 마디에 달하는 소(疏)를 기초하였다. 즉,
“송 신종(宋神宗)이 28세에 철종(哲宗)을 낳았는데, 그 어머니는 후궁(後宮) 주씨(朱氏)였습니다. 횡거(橫渠) 장자(張子)가 그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하자, 정자(程子)가 횡거의 충성을 찬미하였고 주자(朱子)와 여동래(呂東萊)가 그의 충성을 한천편(寒泉編 《근사록(近思錄)》을 가리킨다)에 드러냈으니, 장자ㆍ정자나 주자ㆍ여동래의 생각이 모두 같았던 것은 종사(宗祀)에 대한 순수한 천리의 바름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천리라 한다면 오늘날 인심이라 해서 어찌 다르겠습니까?”
하였고, 또,
“오늘날 여러 신하들이 위호를 정하는 것이 너무 빠르다고 하는 것은, 송 철종은 그때 10세였는데도 오히려 번왕(藩王)의 위(位)에 있다가 신종에게 병이 있은 뒤에야 비로소 태자에 책봉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때에는 가왕(嘉王)과 기왕(岐王)의 위협이 있었는데도 오히려 이처럼 여유 있게 처리한 것은 제왕(帝王)의 거조는 항상 여유 있는 것을 귀히 여기는 것이기 때문인데, 더구나 혐의와 위협이 없는 오늘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오늘날 여러 신하가 정후(正后)도 왕자를 낳을 것이라고 말한 것은 일이 생기기 전에 미리 주도면밀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염려에서입니다. 이것이 중종 때 이언호(李彦浩)의 말과 비슷하나 언호의 말은 사(邪)였고 여러 신하의 말은 정(正)입니다.”
하였고, 또,
“과거에 허목(許穆)이 상소하여 국본(國本)이 정해지지 않았다고 진언(進言)하자, 고 상신(相臣) 정태화(鄭太和)가 ‘원자가 탄생하신 날이 바로 국본이 정해진 날입니다.’ 하였으므로, 허목의 말이 먹혀들지 않았습니다. 그 뒤 적휴(賊鑴) 등이 허목의 말을 부연하여 암암리에 화기(禍機)를 도발시켜 끝내 영사(領事) 신(臣) 김수항(金壽恒) 이하를 축출하였기 때문에 역적 허견(許堅)의 역모(逆謀)가 더욱 방자해졌습니다. 지금은 성명(聖明)께서 위에 계시므로 이런 걱정은 없으나 아첨하는 종자들이 만세(萬歲) 뒤에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대개 선생의 뜻은 간사한 무리들이 이로 인하여 화를 빚어낼까 염려하여 상으로 하여금 깊이 살피게 하려는 것이었다. 자제(子弟)와 문인들이 모두 이 소가 화를 도발시킬 것이라 여기고 번갈아 가며 간하고 말렸으나 선생은 끝내 듣지 않았다. 이 소가 들어가자, 상이 진노(震怒)하여 그날 밤으로 승지(承旨) 이현기(李玄紀)ㆍ윤빈(尹彬)과 옥당(玉堂) 남치훈(南致薰)ㆍ이익수(李益壽) 등을 불러 선생의 소 가운데 ‘10세였는데도 오히려 번왕의 위에 있다가 신종에게 병이 있은 뒤에야 비로소 태자에 책봉되었다.’는 말을 반복하다가 하교(下敎)하기를,
“송모(宋某)는 산림(山林)의 영수(領首)로서 감히 이의(異議)를 제기하니, 부도(不道)한 무리들이 장차 뒤를 이어 일어날 것이다.”
하였다. 이때 좌우에서 현기 등이 없는 사실을 마구 날조하였다. 상이 윤증의 일을 묻자, 현기 등이 증의 부자를 극력 찬양하고 선생을 공격하였다. 상이 선생의 삭출(削黜)을 특명하고 또 선생을 위하여 변명하는 자는 비록 대신이라도 용서치 않는다 하고는 드디어 윤증을 수록(收錄)하였다. 윤빈(尹彬)이, 선생이 노쇠하여 망언(妄言)을 한 것이니, 너그러이 용서할 것을 청하자, 상이 노하여 빈을 나국(拿鞫)하라 명하였다가 바로 먼 변방으로 귀양 보내었으니, 이때가 2월 1일이었고 이날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이때 조정이 일변(一變)하여 윤휴의 무리가 다시 들어갔다. 대사간(大司諫) 이항(李沆)ㆍ정언(正言) 목임일(睦林一)ㆍ장령(掌令) 이윤수(李允修)ㆍ지평(持平) 이제민(李濟民) 등이 합계(合啓)하여 선생에게 죄주기를 청하면서,
“국가에 큰 경사가 있어 명호가 이미 정해지고 분의(分義)가 이미 정해졌는데, 감히 방자하게 상소하여 인심을 현혹시켰으니, 먼 변방으로 귀양 보내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지난 을유년 세자(世子)를 책봉할 때, 이경여(李敬輿)가 인심(人心)이 소란하여 평온하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하자, 인조(仁祖)께서 안치(安置)를 특명하였는데, 더구나 송모는 국본(國本)이 이미 세워졌고 분의가 정해진 뒤에도 감히 불복(不服)의 뜻을 가졌고, 또 인용한 송조(宋朝)의 일은 신하로서 차마 말할 수 없는 바이다.”
하고, 제주도 귀양 보낼 것을 특명하였다. 당시의 사류(士類)들도 거의 다 쫓겨났다.

2월 초하루는 기해(己亥) 8일(병오) 제주를 향해 출발하면서 아들 기태(基泰)를 보내어 효종(孝宗)의 수찰(手札)을 바치게 하였다.
이때 화색(火色 화색(禍色)을 말함)이 이미 박두하여 사람들이 모두 선생을 위해 두려워하였으나, 선생은 오직 한결같이 국가만을 걱정할 뿐, 일신(一身)의 화복은 염두에 두지 않고 태연한 마음으로 길을 떠나면서,
“나는 책임을 끝까지 다했다. 죽고 사는 것은 운명이다.”
하였다. 문인과 친지 중에는 혹 눈물을 흘리는 사람까지 있었으나, 선생은 웃으면서 소씨(蘇氏)의 철심석간(鐵心石肝)이란 말과 주자(朱子)가 유 원성(劉元城)을 논평한 말을 들어 깨우쳐 주었다. 이에 앞서 영상(領相) 김수흥(金壽興)이 상께 아뢰기를,
“효종(孝宗)께서 송모에게 수양(修攘 안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밖으로 오랑캐를 물리치는 것)의 대계(大計)를 논한 수찰(手札)을 내린 적이 있는데, 송모는 배도(裴度)가 옥대(玉帶)를 반납(反納)한 고사(故事)에 따라 자진 반납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상께서 선색(宣索)하셔서 국사(國史)에 빠진 곳을 보충하고 성조(聖祖)께서 뜻한 일을 후세에 드러나게 하소서.”
하자, 상이 특별히 사관(史官)을 보내어 수찰을 바치라 하였다. 선생은 그 어찰(御札) 중에 말한 곡절이 많으므로 소(疏)를 올려 그 내용을 자세히 진술해야 되겠다는 뜻으로 회계(回啓)하고 사관을 먼저 돌려보낸 다음 소를 지어 올리려는 차에 귀양의 엄명이 내렸다. 선생은 수찰을 올리는 일은 이미 왕명(王命)이 있었고 또 회계까지 하였으니, 지금 죄를 입었다 하여 중지할 수 없다면서 친히 봉배(封拜 봉함하고서 절하는 것)한 다음 아들 기태에게 주어 대신 예궐(詣闕)하여 바치게 하였다. 기태가 서울에 당도해 보니, 상의 노여움이 대단하였고 또 군흉(群凶)이 조정에 가득하므로 감히 올리지 못하고 선생을 뒤따라 제주로 돌아왔다.
○ 지난 갑인년에 선생이 화를 입었을 적에 친지 중에 어떤 이가, 어찰을 바치어 화를 면할 계획을 세우라고 권하자, 선생은 크게 놀랐다. 그러므로 귀양 갈 적에는 그 어찰을 조카 기덕(基德)에게 주어 깊이 간직하게 하였으나, 혹시 남의 말을 듣고 만일의 요행을 바랄까 염려하여 거듭 당부하는 편지를 보내어 이르기를,
“내 차라리 죽을지언정 어찌 차마 이 어찰을 가져 구차히 살기를 구하여, 우리 효종대왕께서 은밀히 당부하신 뜻을 저버리겠는가? 일이 급박하게 되었을 때에 혹 나를 살릴 의사를 가진 사람이 와서 이 어찰을 달라고 해도 네 눈을 뽑아 줄지언정 이 어찰을 내주어서는 안 된다.”
하였다. 그런데 이때 어찰을 바치려 한 것은 상의 교지가 있었을 뿐 아니라 이 기회에 국사(國史)에 빠진 것을 보충하기를 바라서였으나 끝내 바치지 못하였다.
○ 11일(기유) 연산(連山)을 지나다가 문인 정천(鄭洊)을 보내어 사계 선생의 묘소에 글을 고하게 하였다.
그 글에,
“문인 송모가 조정에 죄를 입고 멀리 제주로 귀양 가는 길에 문원공(文元公) 사계 김 선생 묘소를 지나면서도 참배하지 못하는 것은, 이천(伊川)이 귀양 가는 길에 숙모(叔母)를 찾아뵙고 가기를 청한 것을 주자(朱子)가 불만(不滿)으로 여겼다는 일을 선생께 배운 적이 있기 때문에 감히 묘소에 올라 참배치 못하고 송강(松江)의 후손(後孫)인 정천을 시켜 글을 고합니다. 생각건대 군성(群聖)을 모아 대성(大成)한 분은 공자이고 군현(群賢)을 모아 대성하신 분은 주자입니다. 전후의 성현이 그 법도는 다 같다고 하나, 박문약례(博文約禮)가 지극하고 공부역행(功夫力行)이 도저하여, 요(堯)ㆍ순(舜)ㆍ우(禹) 이후로 대성의 도에 부합되지 않음이 없기는 주자처럼 완전한 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율곡 선생의 학문은 오로지 주자만을 높여서 ‘내가 다행히 주자 뒤에 나와서 학문이 거의 틀리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하였는데, 선생께서는 바로 그 계통을 이으셨습니다. 전에 선생이 강론하실 때를 보면, 비록 정자(程子)ㆍ장자(張子)의 말이라도 이동(異同 서로 같지 않은 것)이 있으면 취사(取捨)하지 않은 바가 없었고, 또 일찍이 ‘주자가 아니었다면 공자(孔子)의 도가 밝아지지 못했고 밝아지지 않았다면 도가 전해지지 못했을 것이다.’ 하신 말씀을 소자는 귀담아 듣고 가슴속에 간직하여 비록 성인이 다시 나온다 하여도 이 말씀은 변경할 수 없을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악기(惡氣)가 모여 이루어진 윤휴 같은 자가 나와서 감히 주자를 공격하고 배척하는 데 여력(餘力)을 남기지 않으므로 소자가 제 분수도 헤아리지 못하고 그를 극력 배척하였다가 미움을 사서 거제(巨濟)로 귀양 가기까지 하였습니다. 이전에 윤선거는 우계 선생 댁의 문객(門客)이고 또 제자(弟子)이면서도 윤휴를 적극 도와 사문(斯文)을 해치므로, 소자가 난신적자(亂臣賊子)를 다스리려면 먼저 그 무리부터 다스려야 한다고 춘추의 법에 의거하여 선거까지 아울러 공격하였더니, 그 자식 증이 스스로 반성하여 제 아비의 허물을 덮을 생각은 하지 않고 도리어 소자를 원수로 여겨 드러내 놓고 공격하여 윤휴의 형세를 더욱 성하게 하고 종국(宗國)을 거의 망하게 하였는가 하면, 감히 율곡 선생까지 비방하므로 소자가 경악을 금할 수 없어 그를 공격한 말이 혹 너무 과격했던 듯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소자를 원수로 대하여 파도와 같은 공세(攻勢)를 퍼붓는데, 그의 동조자들은 대부분 과거에 율곡 선생을 공격하던 사람들의 자손입니다. 지금 조정에 일이 있어 소자가 귀양 가게 되고 윤증이 날뛸 것이므로, 소자는 진실로 우리 도가 나로 말미암아 다 망하지 않게 된다면 비록 만번 죽어도 한이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곧이어 생각건대 선생의 가르침을 받았으나 힘써 실천하지 않아서 아직 기질(氣質)을 변화시키지 못한 탓으로, 이것이 혈기(血氣)의 사심(私心)에서 나온 것이요 혹시 의리의 올바른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만일 소자의 처사가 과연 사심에서 나온 것이라면 남해(南海)의 신(神)에게 벌을 받을 뿐만 아니라 선생에게 죄를 받음이 심할 것입니다. 우선 이 글로써 선생의 존령(尊靈)에 고하여 조문석사(朝聞夕死)의 터전으로 삼을까 하오니, 바라건대 선생은 살펴 주소서.”
하였다. 윤증이 원한을 품고 암암리에 선생 해칠 계획을 세운 것은 그 조짐이 지난겨울부터 드러나기 시작했다. 선생이 지난겨울 영릉(寧陵)에서 돌아오자 문원공(文元公)의 증손(曾孫) 만준(萬埈)이 허둥지둥 달려와서 선생에게 고하기를,
“증의 군흉(群凶)들과 큰 화(禍)를 일으키려 하는데, 그 화가 제일 먼저 선생에게 닥칠 것입니다.”
하였고, 또 이성(尼城 윤증이 사는 곳)에서 온 어떤 사람이 전하기를,
“증의 당이 선언하기를 ‘시대(時代)가 장차 변할 것인데, 송모가 가장 먼저 화를 당할 것이고 그 나머지도 차례로 화를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했습니다.”
하였는데, 이때 와서 보니 두 사람의 말이 과연 틀리지 않았다. 이어 흉도(凶徒)들이 한결같이 윤증을 떠받들어 대사헌(大司憲)에 추대하고 또 증의 부자를 이끌어서 윤휴를 신원(伸冤)하였으니, 이때에 이르러 증의 부자가 윤휴를 도운 사실이 숨김없이 드러났다. 그러므로 선생이 선사(先師)에게 고한 바가 이러하였다.
○ 12일(경술)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의 서문을 썼다.
《차의》가 오래전에 완성되었으나, 잘못된 곳이 있을까 염려하여 계속 정정하다가 이때에서야 비로소 서문을 지어 권상하에게 주면서,
“오늘부터는 이 《차의》를 그대와 중화(仲和 김창협(金昌協))가 서로 상의하여 수정하되, 동보(同甫 이희조(李喜朝))는 사람이 찬찬하니, 함께 상의하도록 하라.”
하였다.
○ 16일(갑인) 문인 권상하와 이별하며 후사(後事)를 부탁하였다.
권공(權公)이 흥농(興農)에서부터 배행(陪行)하여 14일(임자)에 태인(泰仁)에 이르러 하룻밤을 지나고 새벽에 일어나자 선생이,
“율곡 선생의 수적(手蹟 석담 일기(石潭日記) 따위)이 매우 많고 또 사계 선생이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이공(李公)과 율곡의 비문(碑文)을 산정(刪定 글의 자구(字句)를 깎고 다듬어 정리하는 것)할 때 왕복한 문자(文字)와 행장(行狀) 초본(草本)을 신재(愼齋)께서 수집하여 깊이 간직하였다가 말년에 나에게 전해 주셨는데, 나는 이를 치도(致道 권상하(權尙夏))에게 부탁하려 한다. 나의 입장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실로 미안하기는 하나, 치도는 부디 잘 지켜 율곡의 자손이 달라고 하더라도 이는 다른 물건과 다르므로 내주어서는 안 된다. 내가 당초에는 박화숙과 함께 간수하기로 했으나 지금 화숙이 저러하니, 어찌하겠느냐? 후일 나의 손자 주석(疇錫)이 살아 돌아오거든 함께 간직하는 것도 무방할 것이다.”
하였고, 또,
“《이정전서(二程全書)》의 분류(分類)를 그대와 함께 의논하여 범례(凡例)를 정하려고 정본(淨本 정리된 책)을 화양동에 갖다 두었으니, 돌아갈 때 가져다가 수정하되, 《근사록(近思錄)》과 《어류(語類)》에 보이는 것은 주자의 설과 섭씨(葉氏)의 주(註)를 본조(本條) 밑에 기재하는 것이 좋을 듯하니, 요량하여 하라.”
하였고, 또,
“《어류》를 소분(小分)한 것이 흥농(興農) 서가(書架)에 있으니, 역시 가져다가 검토 교정하라.”
하였고, 또,
“《퇴계전서(退溪全書)》의 차의(箚疑)를 시작하여 겨우 1권까지 진행되었으니, 치도가 그 일을 끝마쳐서 나의 뜻을 이루어 달라.”
하였다. 이날 권공이 배사(拜辭)하고 돌아갔다.
○ 24일(경신) 강진(康津)에 당도하였고 26일(임술) 백련사(白蓮寺)로 옮겨 머물렀다.
백련사는 해변에 위치하였으므로 이곳에 머무르며 바람이 자기를 기다렸는데, 그 고장 선비들이 와서 선생을 영접하고 위로하는 이가 많았다. 선생은 문인 박광일(朴光一)ㆍ박중회(朴重繪) 등과 경전(經傳)을 강론하였다.

3월 초하루는 무진(戊辰) 배를 출발시켜 4일(신미) 제주(濟州) 북포(北浦)에 정박하였다. 5일(임신) 성(城)으로 들어갔고 6일(계유)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금오랑(金吾郞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의 별칭) 이 세형(李世馨)은 백사(白沙) 문충공(文忠公)의 증손으로 선생을 호송함에 있어 정성을 다하였다. 백련사에 6일을 머물렀으나 순풍(順風)을 만나지 못하자, 선생은 행지구속(行止久速 가고 멈추고 빨리 하고 더디게 하는 것)이 금오에게 달려 있지만, 육지에 오래 머물러 있는 것을 매우 불안하게 여기고 금오에게 배를 정돈하여 빨리 출발하기를 청하였다. 선생은 이미 권상하에게 후사(後事)를 부탁하였고 또 자손을 훈계하는 데 정녕(丁寧 간곡하고 자상한 것)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때 회석(晦錫)의 고아(孤兒)가 그 외조(外祖) 이단하(李端夏)의 집에서 자라고 있었는데, 선생은 그를 잊지 못하는 마음이 가장 간절하였다. 이에 이공(李公)에게 편지를 보내어 주자의 벽립만인(壁立萬仞 만 길의 절벽에 서서도 굽히지 않는다는 뜻)과 직지일자(直之一字 사람에게는 곧음밖에 없다는 뜻)란 말로써 간곡히 자신의 뜻을 전하고 이러한 뜻을 들어 회석의 고아에게 가르쳐 주기를 부탁하였다. 배에 오를 적에는 또 불성부직(不誠不直 성실하지 않으면 정직하지 못하다는 뜻)이란 네 글자로써 증손(曾孫) 일원(一源) 등을 경계하는 한편, 주자행장(朱子行狀)을 읽어서 앞으로의 수용(受用)을 삼도록 하였고, 또 문자(文字)로써 권(權)ㆍ윤(尹) 등 여러 외손자를 경계하였다. 이미 발선(發船)하여서는 풍랑이 사나워 밤이 되어서야 가까스로 소안도(所安島)에 닿았고, 2일(기사) 소안도에 머물면서 바람이 자기를 기다렸다. 3일(경오) 다시 발선(發船)하여 겨우 대양(大洋)으로 들어서자 높은 파도가 사나워 배가 거의 뒤집힐 지경이었으므로 사공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면서 돛을 내리고 부처에게 빌 뿐이었다. 그러나 선생은 태연한 표정으로 단정히 앉아 주자(朱子)의 비하축융봉(飛下祝融峯)이란 시구를 외고 있었다. 손자 주석(疇錫)이 제문(祭文)을 지어 바다에 던지고 제사를 지내자, 파도가 잠잠해졌다. 밤이 깊은 뒤에 다시 돛을 올리고 출발하여 이튿날 아침에 북포(北浦)에 닿아 해변 갯마을에서 하루를 지내고 이튿날 비로소 성(城)으로 들어갔다. 위리안치된 뒤로는 매일 손자 주석과 함께 《주자대전(朱子大全)》ㆍ《주자어류(朱子語類)》ㆍ《역학계몽(易學啓蒙)》ㆍ《강목(綱目)》 등의 책을 보았다.
○ 15일(임오) 두 아우와 손자 주석에게 글을 주어 귤림서원(橘林書院)에 고하게 하였다.
서원은 바로 김충암(金冲菴)ㆍ송규암(宋圭菴)ㆍ김청음(金淸陰)ㆍ정동계(鄭桐溪) 네 선생을 모신 곳이다.
○ 숙종 21년(을해)에 선생을 여기에 배향(配享)하였다.
○ 율곡과 우계 두 선생의 출향(黜享 문묘(文廟)의 배향을 철폐시키는 것) 소식을 들었다.
원주(原州) 사람 안전(安)이란 자가 상소하여 율곡과 우계 두 선생을 문묘(文廟)의 배향에서 내쫓을 것을 청하고, 또 선생을 종통(宗統)을 어지럽히고 국본(國本)을 동요(動搖)시킨 죄목(罪目)으로 얽어매어 안율(按律 법에 따라 처벌하는 것)하기를 청하였다. 또 관학(館學)ㆍ대간(臺諫)이 서로 뒤를 이어 양현(兩賢)의 출향을 청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관학ㆍ대간이, 또 선생이 양현의 남은 글을 주워 모은 것과 윤증을 극력 배척한 것으로 죄를 삼았다. 선생이 이 소문을 듣고, 만년(晩年)의 영광으로 여기고 또,
반궁의 요려 앞에 이르러 / 却到泮宮腰膂處
님 위한 눈물 옷깃 적시네 / 泣麟餘涕謾沾裾
란 시를 지었다.

윤3월 초하루는 무술(戊戌) 12일(기유) 주자의 객위자목설(客位咨目說)에 따라 야복(野服)을 만들라 하였다.
선생은 끝내 풀려나지 못할 것을 알고 심의(深衣) 등 예복을 가져왔었고 이제 다시 야복을 만들라 하였으니, 상의 하상(上衣下裳)의 제도이다.
○ 《논맹혹문정의통고(論孟或問精義通攷)》를 편수(編修)하였다.
선생은 일찍이 《논어혹문》ㆍ《맹자혹문》 중에서 다만 모설(某說)의 잘잘못만을 말했을 뿐, 그 설을 기재하지 않은 것을 유감으로 여기고, 정문(程門) 여러 제자들의 말이 수록된 《정의(精義)》를 구하려 한 지가 거의 40여 년이나 되었는데, 말년에 이선(李選)이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그 책을 구해 왔으므로 선생이 그 책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이에 그 설(說)을 고거(考據)하고 손수 표지(標識)를 가하여 혹문의 해당 조항 밑에 붙여 빠지고 생략된 것을 보충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주자의 취사(取捨)한 이유를 알게 하고 《논맹혹문정의통고》라 이름하였다. 또 서문(序文)을 쓰고 권상하에게 편지를 보내어 뒤를 이어 교감 수정하라 하였다.

4월 초하루는 정묘(丁卯) 5일(신미) 가율(加律 형을 더 하는 것)의 계(啓)가 있었다는 말을 들었다.
선생의 조카 기덕(基德)과 종손(從孫) 강석(康錫)이 이 소식을 가지고 오자, 온 집안이 경황(驚惶)하여 통곡하였으나, 선생은 웃으며,
“나는 이 몸을 시인(時人 송시열을 모해하는 사람)에게 내어 준지가 이미 오래다.”
하고 책 보기를 그치지 않았다.
○ 9일(을해) 문곡(文谷) 김공(金公)의 후명(後命 유배(流配)된 죄인에게 사약(賜藥)을 내려 죽이는 것)을 듣고 망곡(望哭)하였다.
선생은,
옥도의 구슬픈 바람 대나무에 불어오니 / 沃島悲風吹竹樹
전후의 그 충정 하늘만이 알리라 / 丹衷前後上天知
란 시를 지었다.
○ 29일(을미) 동생 성보(誠甫)와 이별하였다.
선생의 밑 동생 감정공(監正公)이 선생을 따라 제주까지 왔다가 이때 병이 심하여 이별하고 돌아가자, 선생이 슬픈 심정을 금치 못하여,
단장의 해문에서 수평선 바라보니 / 魂斷海門空極目
하늘 가 저 기러기 차마 못보겠네 / 不堪天末雁行聯
란 시를 지었다.

5월 초하루는 병신(丙申) 4일(기해) 효종(孝宗)의 휘일(諱日 죽은 날)이므로 곡하고, 글을 지어 자신의 뜻을 서술하였다.
그 글에,
“4일 기해에 효종대왕의 휘일을 당하여 새로 빌려 든 집에 수찰(手札)을 봉안(奉安)했다. 전에 봉안했던 곳은 벌레가 있고 냄새가 더러워서 수찰을 모실 만한 곳이 못 되기 때문이었다. 이날의 비통이 전보다 갑절이나 더하였다. 듣건대 저들은 효종의 세실(世室)을 미리 정하자고 한 것을 나의 죄로 삼아 심지어 국문(鞫問)을 청하기까지 한다 하니, 저들의 마음에는 효종의 덕이 세실을 정하기에 부족하다고 여기나 감히 말할 수 없으므로 미리 정했다는 것을 문제로 삼아 나를 죄주려고 하는 것이다. 옛날 주자(朱子)는 고종(高宗) 때 나서 고종에서 벼슬하였으나 고종의 세실을 청하였는데도, 저들은 모두 적휴(賊鑴)의 도당이므로 주자를 본받을 수 없다고 여기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 경제(漢景帝) 원년에 신도가(申屠嘉)가 무제(武帝)의 세실을 정하자는 사실도 보지 못했단 말인가? 이는 《사략(史略)》 2권에 있는데, 오늘날 어찌 이를 보지 못한 사람이 있다 하겠는가? 만약 효종의 덕이 세실을 정하기에 부족하다면, 어찌 하후승(夏侯勝)이 무제(武帝)에게 한 것과 같이 직접 배척하지 않았겠는가? 휴의 도당은 일찍이 아들인 금상(今上) 앞에서도 명성대비(明聖大妃 현종비(顯宗妃))를 배척했으니, 어찌 손자인 금상 앞에서 효종(孝宗)을 배척하지 못하겠는가? 나는 이 말을 듣고는 원통하고 억울함을 금할 수 없으나 호소할 곳이 없었다가 이날을 당하니, 곡성이 하늘까지 사무치고 눈물이 구천(九泉)까지 흐름을 깨닫지 못하였다. 삼가 생각건대 효종대왕은 성덕(盛德) 지선(至善)이 아님이 없었다. 작은 나라로서 명(明) 나라를 위해 춘추대의(春秋大義)를 밝힌 것은 삼성(三聖 우(禹)ㆍ주공(周公)ㆍ공자(孔子))의 공(功)을 계승하기에 충분하였다. 비록 그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무궁한 후세에 교훈을 전한 것은 《춘추(春秋)》와 다름 없으니, 어찌 관덕(觀德 현덕(顯德)과 같은 뜻)의 표본이 될 만하지 않은가? 저들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만든 것은 실로 선거(宣擧)의 죄다. 선거가 일찍이 말하기를 ‘구천(句踐)은 속임수를 썼고 경연광(景延廣)은 미친 짓이었다.’ 하였고, 또 반락태오(盤樂怠傲 놀고 즐기며 남을 경멸하고 오만한 것)하다는 말로 효종대왕의 우근척려(憂勤惕勵 걱정하고 두려워하며 자신을 닦는 것)를 논한 적이 있는데, 지금 저들이 선거를 높여 감히 세실에 대해 잘못이라 말하니, 통탄스럽다.”
하였다. 또 종형(從兄) 충현공(忠顯公)과 송상민(宋尙敏)의 제문(祭文)을 지어 그들의 절의(節義)를 드러내는 한편, 군흉(群凶)이 나라를 어지럽히고 상도(常道)를 파괴한 것을 말하여 손자 주석에게 주어 조만간 돌아가서 그들의 묘소에 고하라 하였다.
○ 14일(기유) 나국(拿鞫)을 윤허하고 읍정(邑庭)에 전지(傳旨)하였다.
수찬(修撰) 김방걸(金邦杰)이 상소하여 선생의 경자년에 제의한 예론(禮論)과 경신년에 올린 차자(箚子)에서 관고(貫高)의 일을 인용한 것과 효종의 세실(世室) 세우기를 청한 것과 태조(太祖)에게 시(諡)를 올리게 한 것과 계축년에 김수흥(金壽興)에게 준 편지 내용과 병인년 봄에 지은 애공(哀公)이 탄식스럽다는 시 등을 열거하여 선생의 큰 죄로 삼아 사형(死刑)을 청하였다. 양사(兩司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의 합칭)의 권해(權瑎)ㆍ이현기(李玄紀)ㆍ김주(金澍)ㆍ이수징(李壽徵)ㆍ심발(沈橃)ㆍ이만원(李萬元)ㆍ조식(趙湜)ㆍ이원령(李元齡) 등이 합계(合啓)하여 나국(拿鞫)을 청하고 또 문곡(文谷) 김공(金公)에게 사사(賜死)하기를 청하자, 심재(沈榟)ㆍ이관징(李觀徵)ㆍ민종도(閔宗道)ㆍ윤심(尹深)ㆍ이우정(李宇鼎)ㆍ유명천(柳命天)ㆍ권대제(權大載)ㆍ윤이제(尹以濟)ㆍ유하익(兪夏益)ㆍ권유(權愈)ㆍ신후재(申厚載)ㆍ오시복(吳始復)ㆍ박상형(朴相馨)ㆍ정박(鄭樸)ㆍ이서우(李瑞雨)ㆍ유명현(柳命賢)ㆍ박정설(朴廷薛)ㆍ유하겸(兪夏謙)ㆍ이의징(李義徵)ㆍ목임유(睦林儒)ㆍ이현기(李玄紀) 등이 또 상소하여 대간(臺諫)의 청에 따르기를 청하니, 상이 김공(金公 김수항(金壽恒))의 사사(賜死)는 명하였으나 선생을 나국(拿鞫)하라는 청은 윤허하지 않았다. 적신(賊臣) 조사기(趙嗣基)가 또 상소하여 선생의 죄를 모함하는가 하면, 명성대비(明聖大妃)까지 무욕(誣辱 없는 사실을 만들어 모욕하는 것)하였고, 또 군흉(群凶)들이 장추(長秋 왕비(王妃))의 폐위(廢位)를 계획하고는 선생을 빨리 제거하려 하여 나국을 극력 간청하였다. 그리고 삼사(三司)가 입대(入對)를 청하여 수백여 가지에 달하는 선생의 죄상(罪狀)을 합계(合啓)하고, 또 상을 위협하여 말하기를,
“만일 신등이 논한 것에 일호라도 사실과 다른 것이 있다고 여기신다면 변명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하므로, 상이 드디어 선생의 나국을 윤허하였으니, 바로 4월 21일(정해)이었다. 이날 음산한 바람이 크게 일어 나무가 부러지고 궁궐이 진동되었는데, 3일 뒤에 중궁(中宮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 폐출(廢黜)의 변고가 생겼다. 중외(中外)의 유생(儒生) 수백 명이 궐문 앞에 모여 선생을 위해 통곡했고, 문인 이기주(李箕疇)ㆍ이조(李竨)ㆍ이만형(李萬亨)ㆍ박세휘(朴世輝) 등이 계속 상소하여 선생의 원통함을 호소하다가 모두 먼 변방으로 귀양 갔다. 이때 금오랑(金吾郞) 권처경(權處經)은 권대운(權大運)의 족속으로 봉명(奉命)을 자청하고 와서 무슨 명으로 왔다는 것을 숨기고 말하지 않았으나, 선생은 후명(後命) 때문에 온 것임을 짐작하고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후사(後事)를 부탁하였다. 그리고 권상하(權尙夏)에게 영결(永訣)을 알리는 편지에서, 주문(朱門 주자학(朱子學))의 전통을 계승하기를 부탁하였고, 또 장남헌(張南軒)이 우제사(虞帝祠)를 세운 것초인(楚人)들이 소왕(昭王)을 제사한 고사에 따라 화양동(華陽洞) 절벽 아래에 한 칸의 사당(祠堂)을 세워 명(明) 나라의 신종(神宗)과 의종(毅宗)을 제사하라 하였다. 조금 뒤에 권처경이 금부(禁府)의 관리에게 명하여 선생을 끌어내어 당(堂)에서 거리가 먼 객사(客舍) 뜰아래 꿇어앉히고, 교생(校生)으로 하여금 당상(堂上)에서 교지(敎旨)를 읽게 하였다. 선생이 위리(圍籬)에서 나올 적에 성조(聖祖 효종대왕을 가리킨다)의 수찰(手札)과 명성왕후(明聖王后)의 수찰을 소매 속에 넣고 나와서, 공청(公廳)에 놓고 마지막 작별을 고하려 하였다. 그러나 처경이 이것마저 허락하지 않고 당상(堂上) 탁자(卓子) 위에 봉안(奉安)하라 하므로 선생이 앞으로 나아가 그 수찰을 바치었다. 전지 읽기가 끝나자 선생이 사배(四拜)하였다.
○ 17일(임자) 별도포(別刀浦)로 옮겼고, 26일(신유) 발선(發船)하여, 27일(임술) 남해(南海) 증도(甑島)에 닿았다.
선생은 군명(君命)을 지체할 수 없다고 말하고 속히 포구(浦口)로 나가서 바람을 기다리자고 청하여, 드디어 포구 가로 옮겨 10일 동안 머문 뒤에 배에 올랐다. 선고비(先考妣)에게 고하는 글을 지어 손자 주석(疇錫)에게 주어 묘소에 고하게 하였다. 즉,
“불초(不肖)가 태어날 때 상서가 있었다 하여 아름다운 이름을 지어 주셨습니다. 불초가 어렸을 적에는 망녕되이 한번 떨쳐보려는 마음을 가지고 성인(聖人)도 배워서 될 수 있다고 여겼더니, 철이 날 만한 나이가 되어서는 기질(氣質)에 구애되고 물욕에 가리어 하루 사이에도 가르침을 어기고 이치를 거스르는 바가 항상 10에 8, 9가 되었습니다. 그럴 적이면 항상 꾸짖고 권면(勸勉)하면서 ‘불세(不世)의 아름다운 상서를 헛되게 만들 작정이냐?’ 하셨고, 또 ‘주자(朱子)는 후세의 공자(孔子)이시고 율곡(栗谷)은 후세의 주자이시니, 공자를 배우려면 마땅히 율곡에서부터 시작해야 된다.’고 책려(策勵)하고는 불초에게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읽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기묘록(己卯錄)》ㆍ《해동야언(海東野言)》 등의 책을 손수 초(抄)하여 불초에게 주면서 ‘정암(靜菴)을 배우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셨고, 또 일찍이 청교역(靑郊驛)에서,
매월당 앞의 물이요 / 梅月堂前水
도봉산 위의 구름일세 / 道峯山上雲
라는 시를 지어 보여 주셨으니, 대개 김열경(金悅卿 김시습(金時習))도 사모하신 것입니다. 불초가 성동(成童)이 되어서는 과업(科業 과거 공부)도 겸하여 익히라 하면서 ‘집안의 생계(生計) 역시 소홀한 것이 아니다.’ 하셨고, 또 오로지 과업에만 전념할 것을 염려하여 ‘나의 증조(曾祖)는 팔자가 좋아서 어진 두 아드님을 두었고 사위 역시 명현(名賢)이었으니, 이 어찌 과거의 영화에 비교될 바이겠느냐?’ 하셨고, 또 호란(胡亂)을 당하여 행재소(行在所 임금이 거둥하여 일시 머무는 곳)로 가실 적에 도중에서 보낸 편지에 ‘난리가 났다 하여 학업을 게을리 말라.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은 것이다.’ 하셨습니다. 불초는 평소에 이와 같은 교훈을 받았기 때문에 두 분을 여읜 뒤로는 감히 우매(愚昧)에 그칠 수 없다고 다짐하고 드디어 김 선생(金先生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 나아갔더니, 사문(師門)의 가르침은 한결같이 주자(朱子)를 주로 하고 율곡을 대유(大儒)로 여겼습니다. 불초는 이때서야 가정에서 배운 노맥(路脈)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이 30이 가까워져서야 비로소 음사(蔭仕)에 참여하고는, 고을이나 하나 얻어 어머님을 봉양할 계획을 세웠었는데, 갑자기 오랑캐의 난리를 만나 천지가 뒤집혔으므로, 정묘년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오신 아버님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산중에 은거하며 거친 음식이나마 어머님의 뜻을 봉양하기로 하였습니다. 만약 아버님의 고궁(固窮 곤궁하다 하여 변치 않고 뜻을 견고히 지키는 것) 안의(安意 마음을 편히 가지는 것)의 절개가 아니었다면, 불초가 어디에서 본받아 끝내 뜻을 지킬 수 있었겠습니까? 효종대왕이 즉위하신 처음에 외람되게도 부르심을 받았고 어머님에게 음식을 내리어 우대하시는 은혜를 입더니, 오래지 않아서 청 나라 오랑캐에게 참소가 들어가 나라가 위태롭게 되었으므로 드디어 평민으로 돌아와서 집 안에 들어앉아 글을 읽고 거친 음식으로나마 어머님을 봉양하면서 평생을 마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뒤 효종대왕께서 큰 뜻을 품고는, 친구 김익희(金益煕)가 조상(吊喪)하러 오는 편에 은밀히 성의(聖意 임금의 뜻)를 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불초는 복을 마친 뒤에 감히 끝내 은거할 수 없어 임금의 부르심을 따라 겨우 경기(京畿)에 이르렀을 때 성후(聖候 임금의 건강)가 편치 못하여 급히 부르신다는 말을 듣고 허둥지둥 달려가 상을 뵈었으니, 계합(契合 의사가 서로 맞는 것) 지우(知遇)가 천고(千古)에 드물 정도였습니다. 드디어 목숨을 바치기로 허락하였는데, 겨우 반년 만에 효종이 승하하셨습니다. 이에 가만히 천운(天運)을 보니, 간 이를 보내고 계승한 이를 섬기는 의리를 제대로 따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 현종(顯宗)의 온양(溫陽) 거둥에 수행하고 다시 궁문(宮門)으로 들어간 것은 정릉(貞陵)의 원통함을 위해서였으니, 이는 곧 아버님께서 일찍이 그 서론만을 제기하고 감히 끝까지 다 말씀하지 못하신 바이며, 쌍청당(雙淸堂 송시열의 8대조 송유(宋愉))께서도 스스로 계획하셨던 바입니다. 정릉을 복위(復位)시키던 처음에 꿈속에 이상한 징험(徵驗)이 나타났으므로 선대(先代)의 뜻을 조금이나마 받들었다고 여겼었습니다. 이어 불행히도 간얼(姦孼)의 소생(所生)인 윤휴(尹鑴)란 자가 옅은 식견으로 감히 주자의 도를 헐뜯는데, 명문(名門)의 자제인 윤선거(尹宣擧)가 소당(少黨 젊은 무리)을 동원하여 그자의 말이 행해지고 세력이 성해지도록 도와주므로 불초가 매우 걱정이 되어 스스로 분수도 요량하지 않고 나서서 감히 맹자(孟子)와 주자의 거피벽사(距詖闢邪 편벽된 행동을 막고 사악한 말을 물리치는 것)하던 의리를 본받아 죽음을 무릅쓰고 배격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원수를 만들어 지난 을묘년에는 끝내 윤휴의 모함을 받아 북쪽으로 귀양 갔다가 다시 남쪽으로 옮겼고 또 남쪽에서 더 남쪽인 거제(巨濟)에 위리안치되었다가 6년 만에 성은을 입어 풀려났고 이어 소명(召命)을 받았습니다. 불초도 자신의 종적(蹤跡)이 불안함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감히 정자(程子)가 서경 국자감(西京國子監)에 응했던 의리에 따라 소명에 응하였다가, 성모(聖母 명성왕비(明聖王妃))에게서 머물라시는 수찰(手札)을 받았으니, 이는 바로 아버님이 젊었을 때 과거장(科擧場)에서 지으신 ‘친필로 조서(詔書) 내려 사마광(司馬光)을 만류한 고 태후(高太后 송 영종(宋英宗)의 비(妃))이다.’ 한 고사와 같았으므로 마음에 감동되어 그럭저럭 몇 달 동안 있다가 돌아왔습니다. 그 뒤에 다시 나간 것은 오로지 존주대의(尊周大義)를 밝히고 효종의 세실(世室)을 세워 대법(大法)을 밝히기 위함이었는데, 이때부터 윤휴의 잔당(殘黨)이 밤낮으로 기회를 노리다가 다시 오늘의 화를 일으켜, 불초가 처음 제주로 귀양 갔다가 다시 나국(拿鞫)의 명을 받게 된 것입니다. 명령은 성화(星火)같이 엄하고 박해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아 쇠약한 몸에 천식(喘息)이 심하니, 아마도 중도에서 죽을 것 같습니다. 북으로 영릉(寧陵)을, 동으로 송추(松楸)를 바라보며 영결(永訣)을 고할 뿐, 다시는 참배하고 성묘하는데 성심을 다하지 못하겠으니, 아, 슬픕니다. 대개 불초가 가르침을 받는 데 부지런하지 않은 바 아니고 가르침을 받은 지가 오래되지 않은 바 아니나 기질이 편벽되어 남과 화합하지 못하였으므로 오늘의 화를 당하게 되었으니, 이는 바로 큰 불효(不孝)입니다. 이제야 탓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불초가 이렇게 된 근본을 따져 보면 실은 주자를 높이고 춘추대의(春秋大義)을 밝힌 데서 비롯된 것이니, 이는 끝내 아버님의 유교(遺敎)를 저버리지 않은 것이요, 또 율곡ㆍ우계 두 현인(賢人)과 함께 배척을 당하였습니다. 옛날 군소(群小 많은 소인)가 학궁(學宮 태학(太學))을 헐고 성현(聖賢)의 소상(塑像 흙으로 만든 우상(偶像))의 허리를 자르고 어깨를 끊었으며, 또 위로 정자(程子 정이(程頤))를 공격하여 참(斬)하기를 청하는 모욕을 가하고 끝내는 주자에게까지 그 화가 미쳤으나, 주자는 정자와 함께 배격당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여기셨습니다. 오늘에는 주자만이 배격을 당할 뿐 아니라, 적휴(賊鑴)가 공자도 휘(諱)할 것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인[奴]의 복장을, 공자가 송(宋) 나라를 지날 때 입었던 미복(微服)에 비교하였고 또 공자를 모독하는 말을 글제로 하여 대성전(大成殿)에서 과거(科擧) 보였으니, 놀랍고 참혹함이 소상의 허리를 자르고 어깨를 끊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옛날 노동(盧仝)은 《춘추》 만을 가져 종시(終始)를 연구했을 뿐이었는데도 한퇴지(韓退之)가 ‘그의 자손은 10대까지 사죄(死罪)를 용서받아야 된다.’ 했는데, 청음 선생(淸陰先生 김상헌(金尙憲))은 한 몸으로 천경지의(天經地義)를 도맡아 천하 후세에 많은 공을 남겼는데도 지금 그 손자가 생명을 보존(保存)치 못하였고 또한 충정(忠正)하기 때문에 억울하게 죽었으니, 이는 모든 백성이 슬퍼하는 바입니다. 대저 영욕(榮辱)이란 때에 따라 있는 것이니, 다만 어떠한 사람과 함께하였는가를 따질 뿐입니다. 그러므로 좋지 못한 명예가 위로 아버님에까지 미쳤으나 불초는 부끄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더욱이 효종대왕께서 아버님을 총애하고 권장하신 말씀이 일성(日星)처럼 빛났음이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청음 선생이 아버님의 대절(大節)을 묘갈문(墓碣文)에 드러내었고 신재(愼齋) 김 선생(金先生 김집(金集))이 웅건한 필력(筆力)으로 아버님의 휘(諱)를 비석 전면에 써서 가상(嘉尙)히 여기는 뜻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묘표(墓表)의 글은 아버님께서 항상 칭찬하시던 종제(宗弟) 준길(浚吉)의 글이옵니다. 여러 현인들이 아버님의 절의를 드러냄이 이와 같으니, 저 여우나 쥐 같은 무리가 함부로 떠드는 말을 어찌 따질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괴이한 것은 지난 정묘년에 아버님께서 불초에게 보낸 편지에, 윤팔송(尹八松 윤증의 조부 황(煌))을 호담암(胡澹菴 송 나라 호전(胡銓))에 비교하셨고, 또 팔송이 지은 아버님의 만사(輓詞)에서 서궁(西宮)에 나아가 인목대비를 뵌 일을 극찬(極讚)하였는데, 지금 그 손자인 윤증이 끝없는 무함을 하고 있으니, 이는 그 잘못이 우리 집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저희 집안에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아, 말은 끝났으나 뜻은 한량없고 또 죽음에 임한 즈음이어서 말에 조리가 없으니, 부모님의 존령(尊靈)은 살펴 주소서.”
하였다. 또 한 장의 편지로 박화숙에게 영결을 고하면서,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심(人心)을 바로잡으라는 효종대왕의 명을 받았으므로 감히 세도(世道)를 자임(自任 스스로의 책임으로 여김)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말과, 적휴(賊鑴)를 공격하면서 선거까지 공격하였다가 오늘과 같은 화를 입게 된 뜻을 말하였으며, 끝으로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이 인의(仁義)를 배우다가 잘못되었다는 말을 인용하여, 선거에게 가언(嘉言)ㆍ선행(善行)이 있어서 도리어 세상을 의혹시키고 백성을 속인다는 것을 밝혀서, 화숙의 자각(自覺)을 바랐다.
○ 28일(계해) 해남(海南) 읍내에 도착하였다.
이때 선생에게 병이 생긴 지 오래였으므로 별도포(別刀浦)에서 발선(發船)할 때부터 자손들이 따르며 간호하기를 청하였으나, 처경(處經)이 허락하지 않고 또 노비까지도 엄금하여 배에 동승(同乘)하지 못하게 하였다. 해남에 도착한 뒤에 자손들이 밤을 틈타 들어가서 선생을 뵈니, 선생이 그제야 국모를 폐출(廢黜)한 사실과 오두인(吳斗寅) 등이 상소하다가 죽은 사실을 듣고 대성통곡하면서,
“사태가 이러한데 신하된 자가 살아 있어서야 되겠느냐?”
하고는 곡기(穀氣)를 끊고 곧 효종대왕의 계지술사(繼志述事)한 일을 자세히 말한 다음, 흉도(凶徒)들이 세실(世室)을 미리 청한 것을 죄로 삼은 내용을 서술한 상소문을 기초(起草)하였다.

6월 초하루는 병인(丙寅) 3일(무진) 장성(長城)에 도착하였다. 삼현려비(三賢閭碑)의 음기(陰記 비석 뒷면에 새기는 글)를 짓고 문곡(文谷) 김공(金公) 묘지문(墓誌文)을 지었다.
이때 선생은 이미 곡기를 끊어 숨이 곧 넘어갈 것 같았다. 그러나 처경이 길 떠나기를 재촉하여 인부(人夫)를 동원하여 선생을 가마에 태워 겨우 이곳에 당도하여서는 더욱 위중하여 더 지탱하지 못할 듯하므로 처경이 머물면서 병을 조리하기를 허락하였다. 이에 선생이 조금 소생(蘇生)되어 정신을 가다듬고 훈계하는 글을 자손들에게 전하기를,
“주자는 음양(陰陽)ㆍ의리(義利)ㆍ흑백(黑白)을 판단함에 용감하고 엄격하기가 마치 일도양단(一刀兩斷)하듯 하여 의위(依違 마음에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것)하거나 인잉(因仍 어름어름하여 일시의 미봉만을 생각하는 것)함이 조금도 없었으니, 이는 바로 《대학(大學)》의 성의장(誠意章)의 일이다. 주자는 이와 같았기 때문에 마침내 아성(亞聖 공자에 버금 가는 성인)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고 만 길의 절벽 위에 서서 만세에 공로를 끼친 것은 도리어 자사(子思)ㆍ맹자(孟子)보다 나은 점이 있다. 그러나 독서(讀書)ㆍ궁리(窮理)가 지극하지 않았다면 어찌 이렇게 될 수 있었겠느냐? 그러므로 《대학》의 가르침은 반드시 격물치지(格物致知)를 먼저하는 것이다. 대개 시비(是非) 사이에 의위(依違)하면 끝내는 음과 이와 흑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니, 이는 모두 사람들이 하기 쉬운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에는 음과 양이 있고 일에는 이와 의가 있고 물(物)에는 흑과 백이 있어 《논어》에 “자리가 바르지 않으면 앉지 않는다.” 한 것과 《소학(小學)》에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는다.”고 한 것 등을 말한다. 일상생활에 항상 접하는 것이니 너희들은 경계하라. 천근(淺近)한 것만을 보면 심원(深遠)한 것을 잊을 염려가 있으니, 너희들은 저 이윤(尼尹)을 보지 못하였느냐? 흑수(黑水)가 주자를 공격하고 나서자, 윤증이 처음에는 의위(依違)하였다가 마침내는 서로 뜻이 맞아 겉으로 배척하고 속으로 도와 그 형세를 키워서 끝내는 큰 화가 천하에 가득하여 집과 나라를 파괴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므로 맹자와 주자가 사설(邪說)을 배척하는 데 죽을힘을 다하고 원수처럼 여겼던 것이다. 털끝만큼의 착오가 천 리(千里)로 어긋나는 것인데, 하물며 그 착오가 털끝만할 뿐이 아닌 것이랴? 저 이윤인들 말류(末流)가 이러한 데까지 이르리라는 것을 어찌 알았겠느냐? 애석할 뿐이다. 변변치 못한 내가 망녕되이 맹자와 주자가 피행(詖行)을 막고 사설(邪說)을 멸식(滅熄)시킨 일을 본받고 또 난신(亂臣)ㆍ적자(賊子)는 누구나 죽여야 한다는 훈계를 독실히 믿었다가 귀양 길에서 죽는 참변을 당하게 되었으나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흑수(黑水)가 ‘공자를 휘(諱)할 것 없다.’ 하고 주자를 공격하는 것을 일삼는가 하면, ‘아들이 어머니를 신하로 할 수 있다.’는 말로 명성왕후(明聖王后)를 모욕하자, 그 잔당이 서로 이어 마침내 공자를 모욕하는 말을 과거(科擧)의 제목(題目)으로 삼아 대성전(大成殿) 앞에 게양(揭揚)하였고, 효종대왕의 세실(世室)을 미리 서둘렀다 하여 물의를 일으켰으며, 명성왕후가 두 번씩이나 모욕을 당하였고 양현(兩賢 율곡과 우계)이 문묘(文廟)에서 축출당하였다. 감히 말할 수 없는 보다 더 큰일도 있지만 차마 말할 수 없다. 내가 이러한 때에 죽는 것을 모욕이라 보겠느냐, 아니면 당연하다고 보겠느냐? 주자는 공자 소상(塑像)의 허리와 어깨가 끊기고 이천(伊川)의 학이 금지 당한 때를 당하여 주자에게 참형(斬刑)을 가하자는 상소가 한탁주(韓侂胄)의 무리에서 나왔고 조자직(趙子直)ㆍ여자약(呂子約)ㆍ채계통(蔡季通) 등 여러 현인이 계속 눈앞에서 죽어갔으며, 문인 중에 어떤 자는 선생을 배반, 부과(赴科 과거에 응시하는 것)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공자가 미복(微服)으로 송(宋) 나라를 지난 고사(古事)로써 풍간(諷諫 슬며시 나무라는 뜻을 붙여서 비유로 남을 깨우치는 것)하기도 하였으나, 주자는 ‘내가 만 길의 절벽 위에 서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어찌 우리 도(道)의 빛이 아니겠는가.’ 하였고 또 우둔지장(遇遯之章)을 지어서 임금에게 올리지는 못하였으나 ‘가슴이 끓어오른 나머지 당장 죽는다 해도 후회하지 않고 의혹하지 않겠다.’ 하였으니, 대개 주자의 학은 궁리(窮理)ㆍ존양(存養 존심(存心) 양성(養性))ㆍ천리(踐履 실천)ㆍ확충(擴充 나에게 있는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넓혀 채우는 것)을 주로 삼고 경(敬)으로 시종(始終)을 관통하는 공력(功力)을 삼은 것이다. 그리고 임종(臨終)할 때 문인들에게 전수한 진결(眞訣)에 ‘천지가 만물을 내는 소이(所以)와 성인이 만사를 수응하는 소이는 직(直)일 뿐이다.’ 하였다. 다음날 다시 물었을 적에는 ‘도리는 다만 이와 같을 뿐이니, 모름지기 노력하여 견고히 지키라.’ 하였다. 공자는 ‘사람이 태어나는 이치는 본디 직(直)한 것이다. 직하지 못하면서 생존하는 것은 요행인 것이다.’ 하였고 맹자가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른 것도 이 직일 뿐이었으니, 이는 공자ㆍ맹자ㆍ주자 세 분 성인의 헤아림이 동일한 것이다. 그러나 글을 읽어 이치를 밝히지 못하면 직하지 못한 것을 직으로 여기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사문(師門)의 가르침은 직일 뿐이다. 우리 조상(祖上)의 덕으로 말하면 유씨(柳氏) 할머니가 젊은 과부로 절개를 지킨 것, 쌍청(雙淸) 할아버지가 세상을 피해 은거한 것, 서부(西阜) 할아버지가 효도로 새[禽鳥]를 감응시킨 것, 문충공(文忠公) 규암(圭菴)이 진충성인(盡忠成仁)한 것, 이씨(李氏) 할머니가 첩의 요구를 사절한 것, 습정 선생(習靜先生)이 간흉(姦凶)을 배척하다가 비명에 가신 것, 나의 아버님 수옹 선생(睡翁先生)이 몸을 돌보지 않고 절개를 세운 것, 충현공(忠顯公) 야은(野隱)이 대의(大義)를 세워 백세에 우뚝한 것 등은 모두 주문(朱門)의 정법(正法)에 어긋남이 없으니, 너희들은 힘쓰라. 가까운 데서 본받으면 성공하기 쉬운 법이니, 너희들은 가까이는 선조의 덕을 지키고 멀리는 주문을 높인다면 내가 구천(九泉)에서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다.”
하였고, 또 선대(先代)의 삼현려(三賢閭)를 드러내어 밝히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하여 ‘삼현려’ 세 글자를 큰 글씨로 쓰고, 이어 음기(陰記)를 지었으며, 자손에 대한 경계와 여러 가지 일에 대한 분부가 자세하지 않음이 없었다.
문곡(文谷) 김공(金公)의 여러 자제(子弟)가 김공의 시말(始末)을 갖추 기록, 그 외사촌(外四寸) 이담(李湛)을 시켜 선생에게 묘지명(墓誌銘)을 청하므로 이군(李君)이 노중(路中)에서 선생을 뵙고 기록을 바쳤는데, 이때에 선생이 자제(子弟)에게 명하여 받아쓰라 하고 입으로 불렀다. 자제가 선생의 기력이 너무 쇠약한 것을 걱정하여 간단히 몇 줄의 글로 완성하기를 청하자, 선생이,
“그리해서는 안 된다. 이 글이 후세에 큰 의논이 될 것인데, 어찌 소략(疏略)하게 다루겠느냐?”
하고는, 문자의 서차(敍次)와 포철(鋪綴)에 잘못됨이 없도록 하였고 또 명문(銘文)을 손수 써서 이군에게 주었다. 이튿날 이군이 조용한 여가에 선생을 뵙자, 선생이,
“문곡의 묘지명(墓誌銘)은 나의 정력이 이 지경이 된 까닭에 끝내 뜻대로 되지 못하였다.”
하고 이어서,
“내 일찍이 문곡과 함께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를 증정(證訂)하자고 상의했었는데, 오늘날 일이 이 지경이 되었구나. 《대전차의》의 증정을 치도(致道)에게 부탁했으니, 함께 완성하기를 바란다는 뜻을 중화(仲和 김창협(金昌協))에게 전하라. 이것이 바로 계지술사(繼志述事)하는 도이다.”
하였다.
○ 7일(임신) 정읍(井邑)에 도착하였다. 8일(계유) 진시(辰時)에 관(館)에서 후명(後命 귀양 간 죄인에게 사약을 내리는 일)을 받았다.
흉도(凶徒)가 선생의 병세가 위급하다 함을 듣고 혹시 도중에서 운명할까 염려하였다. 이에 권대운(權大運)ㆍ목내선(睦來善)ㆍ김덕원(金德遠)ㆍ민암(閔黯) 등이, 선생의 죄악이 이미 드러났으니 국문(鞫問)할 것 없이 바로 사사(賜死)하자고 청하므로 상이 즉시 윤허하였다. 선생이 장성(長城)에 머물렀을 적에 정확하지는 않으나 이미 이런 소문을 어렴풋이 들었다. 처경이 다시 길을 독촉하여 노령(蘆嶺)을 넘어 밤에 정읍에 도착하였다. 선생은 후명이 내렸음을 듣고 곧 상소문을 기초하여 전후(前後)의 출처대의(出處大義)와 원통함을 품고 죽는다는 뜻을 말하고, 또 성조(聖祖 효종)의 수찰(手札)을 손자 주석(疇錫)에게 맡겼으니 조만간에 바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는 뜻을 말하고는, 처음 어찰(御札)을 바치려 할 때 지은 상소문과 성조(聖祖)ㆍ성모(聖母 명성왕후)의 수찰을 손자 주석에게 주어 바칠 수 있는 날을 기다려 바치게 하였다. 후명이 이르자 아들 기태(基泰)가,
“국법(國法)에 형(刑)을 집행할 때 현일(弦日 상현일(上弦日)과 하현일(下弦日))을 피하는 것이므로, 문곡 상공(相公)이 사약(賜藥)을 받을 때에도 현일을 피했었다.”
하면서 금랑(禁郞) 박이인(朴履寅)과 논쟁하자, 선생이 듣고 엄히 꾸중하면서,
“내 생명은 곧 다하려 한다. 숨이 끊어지기 전에 빨리 후명을 받는 것이 어찌 마땅하지 않겠느냐?”
하고, 약 들이기를 재촉하였다. 이때 자손과 문인들이 들어가 뵈니, 선생이 기운이 끊어지려 하였으나 눈을 떠 권상하를 보고 그의 손을 잡으며,
“내가 항상 조문석사(朝聞夕死)로써 자기(自期)했더니, 지금 80세가 넘었으나 끝내 들은 바가 없이 죽는 것이 나의 한이다. 오늘 같은 세상에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하니, 나는 웃으며 지하(地下)에 돌아갈 것이다. 이후의 일은 오직 치도(治道)만을 믿는다.”
하였다. 권공(權公)이,
“돌아가신 뒤에 어떤 예를 적용할까요?”
하고 묻자, 선생이,
“《상례비요(喪禮備要)》를 따라야 할 것이나, 반드시 《가례(家禮)》를 주로 삼고 미비된 점은 《상례비요》를 참작 사용하라.”
하였다. 또,
“공복(公服)을 사용할까요?”
하고 묻자, 선생이 머리를 흔들며,
“나는 평소 공복을 만든 적이 없다.”
하였다. 또,
“심의(深衣)는 의당 사용해야 하겠지만, 그 다음에는 무슨 옷을 사용할까요?”
하고 묻자, 선생이,
“주자가 치사(致仕)하고 한가로이 지낼 적에 상의하상(上衣下裳)의 의복을 입었으니, 내 일찍이 이를 모방하여 만들어 두었다.”
하였다. 또 그 다음을 묻자,
“난삼(襴杉)은 명(明) 나라의 유제(遺制)이다.”
하고, 이어서,
“묘도(墓道)에는 큰 비석(碑石)을 세우지 말고 다만 조그만 돌을 세운 다음 치도가 간단하게 몇 줄의 비문을 지어 누구의 묘라는 것만을 드러내라.”
하고, 또,
“학문은 주자를 주로 삼고 사업은 효종대왕이 하고자 한 뜻을 주로 삼아야 한다. 우리나라는 나라가 작고 힘이 약하여 뜻을 이룰 수는 없으나 항상 ‘인통함원 박부득이(忍痛含冤迫不得已 원통함을 품고 어찌할 수 없어서 한다는 말)’ 여덟 글자를 가슴속에 새겨 뜻을 같이하는 사람끼리 전수하여야 할 것이다.”
하고, 또,
“주자의 학문은 치지(致知)ㆍ존양(存養)ㆍ실천(實踐)ㆍ확충(擴充)인데 경(敬)으로 시종(始終)을 관통(貫通)한 것이니, 이는 면재(勉齋 황간(黃榦))가 지은 주자행장(朱子行狀)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하고, 또,
“천지가 만물을 내는 것과 성인이 만사를 수응하는 것은 직(直)일 뿐이므로 공자와 맹자 이후로 전수한 것이 다만 이 하나의 직 자뿐이었고, 주자가 임종(臨終)하실 때 문인들에게 말한 것도 이 직 자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하고, 또,
“옛 분들은 어찌하여 정릉(貞陵)의 복위(復位)를 청하지 않고 소릉(昭陵)의 복위를 먼저 청하였는가? 내가 벼슬하여 한 일은 오직 이 한 가지일 뿐이나, 후세 사람에게 할 말이 있게 되었다.”
하고, 또,
“태조대왕(太祖大王)의 추시(追諡)에 대하여는, 만약 평상시라면 내 어찌 이를 서둘렀으랴마는 오늘날의 사태를 보건대 존주(尊周)의 의리가 어둡고 막혀 거의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내가 여기에 권권(眷眷)했던 것이다. 박화숙이 의견을 달리하였으나 참으로 쉽게 구하기 어려운 친구이다. 우연히 이 일에만 의견이 맞지 않은 것이다.”
하고, 또 김만준(金萬埈 김장생의 증손)의 손을 잡고,
“너희 집안의 화를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느냐?”
하였다. 만준이,
“증조부의 문집(文集) 판본(板本)의 보관 문제를 선생께서 항상 염려하셨습니다마는 지금은 운반하여다가 서원(書院)에 두었습니다.”
하자, 선생이,
“집람서(輯覽序) 중 개정(改正)한 두 글자를 다시 새겼느냐?”
하므로 만준이,
“이미 고쳤습니다.”
하였다. 조금 뒤 금리(禁吏 의금부(義禁府)의 관리)들이 들어와서 자손들을 쫓아내어 옆에 있지 못하게 하였다. 이 고장 사람 임한일(任漢一)이 지난밤부터 선생을 모시는 데 정성을 다했는데, 이때도 또 공생(貢生) 이후진(李厚眞)과 함께 선생을 모셨다. 선생이 눈을 떠 그들을 보고 시간을 묻고는,
“내 목숨이 다하려 하니, 후명을 받기 전에 죽을까 염려이다.”
하고 약 들이기를 재촉하는 뜻이 보였다. 이어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고는,
“내가 곧 죽게 되었는데, 어찌하여 약이 이리 더디냐?”
하였다. 조금 뒤 약이 들어왔으나 선생은 이미 약을 볼 수 없었다. 금리가 앞으로 나와서 큰소리로 약을 내린다는 뜻을 고하자, 선생이 곧 몸을 일으켜 앉아서 상의(上衣)를 가져오라 하고는 다시 뒤로 기대며 눈을 감았다. 한일이 공생을 시켜 직령의(直領衣)를 갖다 드리게 하자, 선생이 어깨를 약간 움직이며 입히라 하였다. 한일이,
“지금의 기력으로는 일어나서 옷을 입으실 수 없습니다.”
하자, 선생이 곧 손으로 옷깃을 당겨 가슴 위에 갖다 대었다. 한일이 바로 그 뜻을 깨닫고 옷을 펴서 몸 위에 걸친 다음 누운 자리 채 받들어 청상(廳上)으로 나왔다. 금랑(禁郞)이 교생(校生)에게 교지(敎旨)를 읽히는 동안에 선생이 옷으로 무릎을 가리고 눈을 감은 채 앉아서, 때로는 몸을 굽히려 하는 듯도 하였고 때로는 경청(傾聽)하는 듯도 하다가 드디어 약 사발을 받아 마시고 자리에 누워 서거하였다. 선생이 서거하던 전날 밤에는 흰 기운[白氣]이 하늘을 가로질렀고 서거하던 날 밤에는 규성(奎星)이 땅에 떨어져 붉은 빛이 이곳 옥상(屋上)에 뻗치니, 읍인(邑人)들이 감탄하며 이상하게 여겼다. 이때 문인들이 치상(治喪) 절차를 한결같이 선생의 유명(遺命)에 따라 관(棺)은 부판(付板)을 사용하였다. 문인으로서 복(服)을 입은 이가 1백여 명이었는데, 모두 황면재(黃勉齋)가 주자의 복을 입은 의식에 따라 백포건(白布巾)에다 수질(首絰)을 두르고 흰 띠에다 상복을 입었으며, 본도(本道 여기서는 전라도를 이른다)의 선비들도 와서 초상(初喪)을 도와주는 이가 많았고, 읍재(邑宰 고을의 원) 권익흥(權益興)도 상구(喪具)를 주선하는 데 정성을 다하였다.
○ 이때 자손과 문인들은 처경의 엄금 때문에 들어가지 못하였는데, 선생이 거의 숨이 다하려는 사이에 홀연히,
“해가 이미 저물었느냐? 아이들은 어디에 있느냐?”
하므로, 이후진(李厚眞)이,
“도사(都事)의 명이 엄하여 들어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자, 선생이 몸을 돌리고 미소를 지으면서,
“어쩌면 그리 심하게 구느냐.”
하였다. 조금 뒤 조카 기학(其學)과 종손(宗孫) 종석(宗錫)이 보은(報恩)으로부터 달려와서, 도사가 군졸(軍卒)을 풀어 사관(舍館)을 세 겹으로 포위하여 지친(至親)과 문인들이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다가 종석이 격분하여,
“천하에 어찌 이런 법이 있느냐?”
하고는 군졸을 떠밀어 여러 겹의 포위를 뜷고 바로 선생의 처소로 들어가 여러 차례 선생을 부르니, 선생이 비로소 눈을 떠 종석의 손을 잡고,
“네가 왔구나. 하마터면 너를 보지 못할 뻔했다. 이미 결서(訣書)를 만들어 두었는데, 그것을 보았느냐?”
하고는 독서ㆍ수행(修行)과 성심으로 조상을 받들 것을 경계하고, 또,
“네 아들은 잘 있으며, 요사이 무슨 글을 읽느냐? 부디 잘 가르치도록 하라. 그 아이가 나의 선인(先人)의 제사를 받들 아이이다.”
하였다. 조금 뒤 금오리(金吾吏 의금부(義禁府)의 관리)가 들어와서,
“시간이 되었으니, 여러분은 다 물러가시오.”
하였다. 김극돈(金克惇)이 종석에게,
“대감께서 누운 자리가 매우 불결하니, 지금 그 자리를 바꾸지 않으면 후명을 받은 뒤 되모실 적에는 새 자리로 바꾸어 깔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하므로 종석이 자리를 바꿀 뜻을 고하자, 선생이 정신이 혼미한 중에서도 손으로 자리를 만지면서,
“이 자리가 좋다. 나의 선인(先人)은 평생 이런 자리도 깔아보지 못하셨는데, 어찌 바꾸겠느냐?”
하였다. 전지(傳旨)를 들을 적에,
“송모(宋某)는 혼조(昏朝) 얼신(孼臣 간신(奸臣))의 자식으로……”
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하늘을 세 번 쳐다보고 지극히 원통해 하는 기색이 있는 듯하였다. 염습(殮襲)할 적에 두 눈을 감지 않았으므로 수암(遂菴) 권공(權公)이 여러 번 손으로 쓰다듬었으나 끝내 눈을 감지 않았다. 뒤에 권공이 그 문인 윤봉구(尹鳳九)에게 당시의 일을 말할 적에는,
“나의 선생은 지하(地下)에서도 눈을 감지 못하셨을 것이다.”
하면서, 눈물이 앞을 가리곤 하였다.
○ 12일(정축) 발인(發靷)하였다.
상여(喪輿)를 쓰지 않고 다만 죽격(竹格 상여 대신 대나무로 만든 멜틀)에다 유지(油紙)로 시신(尸身)을 덮었을 뿐이었다. 지나는 곳마다 사우(士友)들이 하인[奴]을 보내어 운상(運喪)을 돕게 하였고, 평소 선생과 의견을 달리하던 사람도 간혹 와서 조상(吊喪)하고 하인을 보내어 운상을 돕게 하고는,
“이 어른의 상사(喪事)에 어찌 차마 태연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는 이도 있었다. 이때 원근(遠近)에서 호상(護喪)하는 이가 매우 많았고 친지(親知)들은 혹 화가 더해질 것을 염려하면서도 상여의 앞뒤에 서기를 서로 다투었다. 북도(北道)의 선비도 와서 조곡(吊哭)하는 이가 있었다.
○ 15일(경진) 흥농(興農)에 도착하였고 24일(기축) 관(棺)을 바꾸었다.
선생의 시체를 입관(入棺)할 때 명성왕후(明聖王后)가 하사한 홍사반령(紅紗盤領)과 녹사반령(綠紗盤領) 한 벌씩을 넣었다.

7월 초하루는 을미(乙未) 18일(임자) 수원(水原) 만의(萬義) 무봉산(舞鳳山)에 임시로 장사 지냈다.
이전에 부인(夫人)의 장사 때 선생이 부인의 무덤 오른편을 비워 두게 하여 자신의 묻힐 곳으로 삼았었는데 마침 풍수(風水)가, 합폄(合窆)이 산운(山運)에 맞지 않는다 하므로 합장하지 못하였다. 선생의 유명(遺命)에 따라 상례의 절차를 한결같이 사례(士禮)를 의거했으므로, 달을 넘겨 장사 지내는 제도를 적용하였고 원근에서 와서 구경한 자가 거의 1천여 명이었다.

[주D-001]가왕(嘉王)과 기왕(岐王) : 송 영종(宋英宗)의 아들 조호(趙顥)와 조군(趙頵)의 봉호(封號)이다.
[주D-002]이언호(李彦浩)의 말 : 중종(中宗) 9년에 김정(金淨)과 박상(朴祥)이 신비(愼妃)의 복위(復位)를 청하자, 대사간(大司諫) 이행(李荇)과 대사헌(大司憲) 권민수(權敏手)는, 신씨가 복위된 뒤에 아들을 낳는다면 원자(元子)로 삼기가 어렵다 하여 반대하였는데, 이언호(李彦浩)가 그들의 반대를 도와준 것을 말한다.
[주D-003]소씨(蘇氏)의 철심석간(鐵心石肝) : 감정(感情)이 전혀 없다는 말. 소식(蘇軾)이 이공택(李公擇)에게 준 편지에 보인다. 《東坡續集 11册 卷6》
[주D-004]유 원성(劉元城)을 논평한 말 : 유안세(劉安世)는 벼슬에 있을 때 극간(極諫)하여 숨김이 없었고 죄를 주면 바로 받아들였다고 평한 말을 이른다. 《朱子語類 卷130》
[주D-005]주자(朱子)가 불만(不滿)으로 여겼다 : 정이(程頤)가 부릉(涪陵)으로 귀양의 명을 받은 뒤에 바로 떠나지 않고 숙모(叔母)를 찾아 뵙기를 청한 일이 있었는데, 주희(朱熹)가 임금의 명을 받고 즉시 출발하지 않고 지체한 일을 못마땅하게 여긴 것을 말한다.
[주D-006]요려(腰膂) : 허리와 팔이 잘린 공자(孔子)의 소상(塑像)을 말한다. 이는 주희가 어떤 사람에게 준 글에 “근자에 들으니, 향교(鄕校)가 승방(僧房)이 되고 공자의 소상이 허리와 팔이 잘린 채 길가에 버려졌다.” 한 말을 전용(轉用)한 것이다.
[주D-007]세실(世室) : 오랜 세대를 두고 천묘(遷廟)하지 않는 위패(位牌)를 모시는 종묘(宗廟).
[주D-008]하후승(夏侯勝)이 무제(武帝)에게 : 한 선제(漢宣帝)가 즉위하여 무제(武帝)의 덕을 기리고자 무제(武帝)의 묘악(廟樂)을 만들기를 명하자, 군신(群臣) 중에서 유독 하후승만이 반대하여 말하기를, “무제가 비록 사이(四夷)를 물리치고 국경(國境)을 개척한 공이 있으나, 선비를 많이 죽였고 지나치게 사치스러워 백성을 괴롭혀 …… 백성에게 덕이 없으니, 묘악을 만드는 것은 마땅치 않다.” 하였다. 《漢書 卷75》
[주D-009]경연광(景延廣)은 미친 짓 : 이는 다른 대신들은 거란(契丹)에게 칭신(稱臣)하는 표문을 보내자고 하는데, 연광만이 거란 사신에게, 우리나라에 대검(大劍) 10만 자루가 있으니, 싸우고 싶거든 얼마든지 오라고 호언장담하다가 그 뒤 급습해 온 거란의 군사에게 사로잡혀가서 자살한 것을 인용하여, 효종과 송시열의 북벌(北伐) 계획을 부질없는 짓이라고 비유한 말이다.
[주D-010]관고(貫高)의 일 : 이는 한(漢) 나라 때 고조(高祖)가 조왕(趙王) 장오(張敖)를 모욕 주었다 하여 관고가 고조를 죽이자고 청하였는데, 그 뒤 조왕이 체포되었을 때 스스로 나서서 사건을 독담하여 갖은 체형(體刑)을 받으면서도 끝내 조왕의 무죄를 변명하므로 고조가 장하게 여기고 방면해 주었으나, 신하로서 임금을 시해하려 하였으니, 다시는 임금을 섬길 면목이 없다면서 자살한 것을 말한다.
[주D-011]태조(太祖)에게 시(諡)를 올리게 한 것 : 송시열의 발론(發論)으로 숙종(肅宗) 9년에 태조에게 정의광덕(正義光德)이란 시호를 추상(追上)한 일을 말한다.
[주D-012]장남헌(張南軒)이 우제사(虞帝祠)를 세운 것 : 장식(張栻)이 계주(桂州)의 태수(太守)가 되어 우제사(虞帝祠)를 세워 제사한 것을 말한다. 《朱子大全 卷1 虞帝廟迎送神樂歌詞》
[주D-013]초인(楚人)들이 소왕(昭王)을 제사한 고사 : 당 헌종(唐憲宗) 14년에 한유(韓愈)가 지은 《양주의성현역기(襄州宜城縣驛記)》에 “동북에 우물이 있는데, 세상에서는 소왕정(昭王井)이라 하고 이 우물 동북쪽으로 수십 보 밖에 소왕묘(昭王廟)가 있는데, 지금은 다만 초가(草家) 한 칸만이 있을 뿐이나 해마다 10월이 되면 백성들이 모여 제사 지낸다.”고 한 것을 말한다.
[주D-014]태어날 때 …… 아름다운 이름 : 송시열을 임신했을 때 그 어머니 곽씨(郭氏)가 명월주(明月珠)를 삼키는 꿈을 꾸었고 출산되기 직전에 그 아버지가, 공자(孔子)가 제자들을 거느리고 집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하여 그의 소자(小字 어릴 때의 이름)를 성뢰(聖賚)라 한 것을 말한다.
[주D-015]복위(復位)시키던 …… 징험(徵驗) : 권이진(權以鎭)의 아버지 권유(權惟 송시열의 사위)가 정릉 참봉(貞陵參奉)이 되어 입직(入直)하던 날 밤 꿈속에 어떤 부인이 적의(翟衣)를 입고 정자각(丁字閣)에 앉아 권유를 급히 불러서 “3백 년 동안 폐해졌던 나의 지위를 회덕(懷德)의 대유(大儒)가 회복시켜 주었는데, 나는 그분의 장래에 있을 화를 구해 줄 수 없으니 어찌 한스럽지 않은가?” 했다 한다. 《黃江問答》
[주D-016]하인[奴]의 …… 미복(微服) : 이는 정축년 호란(胡亂)에 강화성(江華城)이 함락되자, 세자(世子)가 종실(宗室)인 진원군(珍原君) 세완(世完)을 시켜 남한산성에 있는 인조(仁祖)에게 보고하려 할 때 윤선거(尹宣擧)가, 진원군의 말을 끄는 하인이 되기를 자청한 일을 그 아들 윤증(尹拯)이 공자가 난을 만나 미복으로 송(宋) 나라를 지나간 일에 비유한 것을 말한다.
[주D-017]흑수(黑水) : 윤휴(尹鑴)가 여주(驪州) 여강(驪江)에서 살았으므로 그를 배척해서 일컫는 말. 즉, 여(驪)는 검다[黑]는 뜻이 있으므로 흑(黑)으로 바꾸어 소인(小人)임을 암시한 것이고 강(江)은 물[水]이므로 이를 합하여 흑수라 한 것이다.
[주D-018]우둔지장(遇遯之章) : 한탁주(韓侂胄)가 정권을 잡아 조정을 어지럽히고 도학(道學)을 위학(僞學)이라 지목하자, 주희(朱熹)는 자신이 누조(累朝)의 지우(知遇)를 받았고 또 시종(侍從)의 직(膱)에 있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다 하여, 간사한 무리가 임금의 총명을 가리는 화(禍)를 극언(極言)하고 또 승상(丞相) 조여우(趙汝愚)의 억울함을 밝히는 수만 언(數萬言)에 달하는 봉사(封事)를 초(草)하였다. 이에 자제와 문인들이 번갈아 가며 화를 사게 될 것이라고 간하였으나 그가 듣지 않자, 채원정(蔡元定)이 들어가서 시초(蓍草)로 점을 쳐서 결정하기를 청하였다. 그리하여 점을 쳐서 둔(遯)이 가인(家人)으로 변한 불길한 괘가 나오자, 그는 비로소 아무 말 없이 물러 나와 그 초고(草稿)를 불에 넣었다 한다. 《朱子年譜》
송자대전(宋子大全) 제96권
 서(書)
이동보(李同甫)에게 답함 - 무진년(1688) 6월 5일

더위와 장마가 계속되는 가운데 신병이 더욱 악화되어 이 몸이 죽을 날이 매우 가까이 왔는데, 어찌 오늘 천리 밖 고인(故人)의 편지를 받아 볼 줄이야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너무도 놀랍고 반가운 나머지 묵묵히 아무 말도 못하였네.
서문(序文) 2첨(籤)은 잘 보았네. 상첨(上籤)은 비록 겸허한 편이나 굽은 것을 바로잡는 데 너무 직절(直截)한 듯하기에 삼가 하첨(下籤)을 취하겠네. 다만 영본(嶺本)이 이미 전포(傳布)되었다 하니, 일이 이미 끝난 뒤라 무슨 도리가 있겠는가.
구황(救荒)에 대한 조례(條例)는 회옹(晦翁)의 유법(遺法)을 사용했으리라 생각되네. 그러니 회옹의 덕택이 이곳 해우(海隅)의 창생(蒼生)에게까지 미쳤다 하겠네.
회옹은 당시에 자신이 지나간 강산(江山)을 미처 구경할 겨를이 없었는데, 동보(同甫)는 빠짐없이 탐방하고 있으니, 혹 오늘날의 형편이 순희(淳煕 송 효종(宋孝宗)의 연호) 때와 달라서인지, 아니면 백성의 어려움을 급하게 여기는 마음이 회옹에게 미치지 못해서인지 모르지만, 한번 웃음직한 일일세. 다만 상상하건대, 활달한 기분으로 산에 올랐다가, 낭랑하게 읊조리며 날아서 내려오는 일은 의상(意象)에 있어서는 비록 넓고 좁으며 크고 작은 차이는 있으나, 그 엄격히 묵계(默契)되는 의취(意趣)야말로 속사(俗士)가 엿볼 바가 아닌데, 그 즐거움을 함께하지 못한 것이 유감일세. 그러나 자네가 구경한 데가 구룡연(九龍淵) 최하의 한 폭포에는 미치지 못했으므로 스스로 내가 약간 낫다고 여기네. 그 폭포는 박연(朴淵)에 비하여 높이가 갑절이나 되고 그 기세의 웅장함이 천하에 둘도 없을 듯하네. 내뿜는 물줄기가 마치 쏟는 듯하여 도저히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었네.
일찍이 도봉(道峯) 산길에 남긴 나의 필적(筆跡)이 제현(諸賢)들의 배려에 의하여 새겨졌으나, 뒤에 윤휴와 허적의 무리가 나를 미워하여 이를 파 버렸다 하는데, 이번에 만폭동(萬瀑洞)에 새겨진 주자의 시(詩)가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하니, 혹 오늘날 군자(君子)의 지론(持論)이 전날보다 약간 완화되었기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네. 횡거(橫渠 송 나라 장재(張載))의 동명(東銘)을 늘 외워 왔건만, 실없는 농담이 가끔 나오곤 하니, 혹 구습(舊習)이 없어지지 못한 때문이 아닌지, 우스운 일일세.
오미자(五味子)는 일찍이 가제(家弟)를 위하여 부탁한 것인데, 참으로 기쁘기 이를 데 없네. 이 밖의 세 가지 약재(藥材)에 대해서도 아울러 감사드리네.


별지
일전에 왕복(往復)한 서신이 누설되어, 혹 무슨 곡절이 생겼을까 염려일세. 그때 내시(來示)를 보고 나서 나의 뜻이 시원하던 참에, 평소 자네를 의심해 오던 절친한 사람을 만났기에 내가 그 사람에게, 이제는 그 의혹을 풀 수 있겠는가 하였더니, 그 사람이 놀라고 기뻐하면서 그 서신을 보자고 매우 간절히 청하므로 잠시 꺼내 보였다네. 혹 이것으로 인하여 전파된 것이 아닌지 모르겠지만, 그 사람 이외에는 이를 아는 사람이 없다네. 그러나 이보다 앞서 자네가 구설(口舌)의 시끄러움을 면하고 싶은 의사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 어찌 그럴 리야 있겠는가마는,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경원(慶元) 당화(黨禍) 때의 일을 잘 간파하지 못한 듯하네.
또 새로운 비방이 적지 않다고 하니, 이 또한 우스운 일일세. 들으니 자네가 언젠가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아무[某 송시열을 가리킴]는 진정 주자에 미칠 수 없다. 요즈음 대윤의 연보(年譜)를 보았지만, 주자가 만약 이를 보았다면 어찌 그 정도에 그치고 말았겠는가. 이로 미루어 본다면 아무는 진정 주자에 미칠 수 없다.’고 하므로, 저들이 듣고 크게 노하여 장차 나의 뒤를 이어 자네를 탄핵하려 한다고 하기에 내가 듣고 웃으며, 이는 저들의 탄핵을 기다릴 필요도 없이, 온 사류(士類)가 탄핵을 가해야 옳을 일이라고 하였네. 왜냐하면, 주 선생(朱先生)의 각하(脚下)에 어찌 감히 급불급(及不及)이란 어휘를 쓸 수 있느냐는 말일세.
그러나 주자가 어찌 그 정도에 그치고 말았겠느냐는 말은 진실로 확론일세. 왜 주자가 소식(蘇軾)과 육구연(陸九淵)과 임율(林栗)을 배척한 일을 보지 못하였던가. 임율은 다만 역서명(易西銘)을 논하다가 그 본의를 상실하고 거기에 미혹되어 돌아서지 못하였을 뿐인데, 주자의 박정(駁正)이 극히 준엄하여, 탄핵까지 받기에 이르렀어도 후회하지 않았으니, 지금 만약 대윤의 반복 휼광(反覆譎誑)하여 음사(淫辭)를 방조하는 것을 보았다면, 그 배척이 어찌 무부무군(無父無君)과 솔수식인(率獸食人) 정도로만 그치겠는가. 지금 그 유독(流毒)은 이미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네.
옛날에 왕 상서(汪尙書 송 나라 왕응신(汪應辰))가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소씨(蘇氏)의 시를 쓴 선비 두 사람을 선발하자, 주자의 배척이 엄절(嚴切)하였을 뿐만이 아니었는데, 지금 대윤의 무리가 지공거가 되어 장주(莊周)가 성인을 업신여기는 말을 글제로 내어 선비를 선발하였으니, 세도(世道)가 어떻게 되었는가. 이는 윤휴의 작용(作俑 좋지 않은 일의 발단을 만드는 것)과 대윤의 당조(黨助)가 아니겠는가. 참으로 두려운 일일세.
저들이 나더러 우옹(牛翁 성혼을 말함)을 비방한다고 하는 말은 무엇을 가리킨 말인지 알 수 없네. 사람으로 하여금 몹시 당황스럽게 하네. 그러나 주자가 일찍이 선배를 경시(輕視)하는 일을 들어 배우는 이들을 경계하는 한편, 선배를 너무 존외(尊畏)하여 이의(異議)를 제기하지 못하고 좌우로 눈치를 살피며 뜻을 굽혀 주선(周旋)할 뿐, 의리(義理)의 시비와 문의(文意)의 당부(當否)를 알지 못하는 것을 그르다 하였는데, 저들이 만약 내가 망녕되이 의리와 문의를 논하는 것을 들어 우옹을 비방했다고 한다면, 이는 주자의 대훈(大訓)을 알지 못한 탓일세. 대저 주자의 이 전후(前後) 두 말씀에서 천리(天理)와 인욕(人慾)의 분별을 볼 수 있으니, 배우는 이는 이를 반드시 알아야 하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저번 서신에, 탄사(灘祠) 운운한 말은 과연 저쪽의 서당(書堂)을 가리킨 것일세. 전일 용담(龍潭) 홍석(洪錫)이 지명(地名)으로 인하여 협곡(峽谷) 중에 정(程)ㆍ주(朱)의 사우(祠宇)를 건립하려 하기에 내가 적극 만류하기를, 어찌 이 다음의 일을 생각하지 않느냐고 하였으나 그가 듣지 않았네. 그 뒤에 수호(守護)하는 사람이 없는가 하면, 후임자(後任者)가 이를 그르다고 배척하여 수직(守直)하는 전복(典僕)까지 빼앗고 마을 사람들이 마구 더럽혀 차마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그제야 그가 개탄하기를, 송모(宋某)는 참으로 성인이라고 하였네. 이는 부유(婦孺)라도 다 짐작할 바인데, 그 사람만이 알지 못하고 있다가 자신의 망발을 깨닫지 못하고 몹시 후회하게 되었던 것일세. 또 저번에 철원재(鐵原宰)가 사계 선생의 사당을 건립하려 하기에 내가 역시 적극 만류하여 그만두었으니, 오늘날 저쪽에서 사우(祠宇) 건립을 중단한 것은 잘한 일일세.
작은 사우에 고청(孤靑 서기(徐起))을 모시겠다는 계획은 조금은 경우가 다르네. 고청이 천한 신분으로서 굴기(崛起)하여 훌륭히 다사(多士)의 사장(師長)이 되었으니, 그 조예의 여하는 알 수 없으나 대개 죄과(罪過)가 있는 사람은 아니네. 그러나 지금 그런 분을 봉사(奉祀)하는 일은 아무래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네.
이상 외람된 말은 모두 가르침을 청하고 미혹을 깨우치자는 성의에서 나온 것이니, 이 다음 인편에 회시(回示)해 주기 바라네.

[주D-001]동보(同甫)는 …… 탐방 : 이희조가 숙종 14년(1688) 4월에 강원도 평강 현감(平康縣監)으로 있을 때 금강산 구경을 간 일을 말함. 《芝村集 卷5 答尤菴先生》
[주D-002]만폭동(萬瀑洞)에 …… 시(詩) : 현종 3년(1662) 3월에 송시열이 금강산을 유람할 때 만폭동 반석(盤石)에 주희(朱熹)의 ‘맑은 시내 흰 돌과 취향을 함께하고, 갠 달 맑은 바람 특별히 전하리[淸溪白石要同趣 霽月光風更別傳]’라는 시를 친필로 써서 새겨둔 것을 말한다. 《宋子大全附錄 卷4 年譜》 《宋子大全隨箚 卷9》
[주D-003]경원(慶元) 당화(黨禍) : 경원은 송 영종(宋寧宗)의 연호. 주희가 당시의 권신(權臣) 한탁주(韓侂胄)를 탄핵하자, 그 원한을 품고 도학(道學)을 위학(僞學)이라 배척하여 주희의 관작(官爵)을 삭탈함과 동시에 승상 조여우(趙汝愚) 등을 축출하고 도학자의 등용을 금한 일을 말한다.
【산천】 삼각산(三角山) 양주(楊州) 지경에 있다. 화산(華山)이라고도 하며, 신라 때에는 부아악(負兒岳)이라고 하였다. 평강현(平康縣)의 분수령(分水嶺)에서 잇닿은 봉우리와 겹겹한 산봉우리가 높고 낮음이 있다. 빙빙 둘러서 양주 서남쪽에 이르러 도봉산(道峯山)이 되고, 또 삼각산이 되니, 실은 경성(京城)의 진산(鎭山)이다. 고구려 동명왕의 아들 비류(沸流)ㆍ온조(溫祚)가 남쪽으로 나와서,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가 살 만한 땅을 찾았으니, 바로 이 산이다
아계 이상국 연보
 아계 이상국 연보(鵝溪李相國年譜)공의 휘는 산해(山海), 자는 여수(汝受), 호는 아계(鵝溪)이며, 본관은 한산(韓山)이다.가정(稼亭) 문효공(文孝公) 휘 곡(穀)의 8대손이다.목은(牧隱) 문정공(文靖公) 휘 색(穡)의 7대손이다.
융경 5년 신미(1571, 선조4). 공의 나이 33세.

공이 승지(承旨)로 있었는데, 성암 선생(省庵先生)이 청풍군(淸風郡) 임소에서 몸이 편찮다는 말을 듣고 약을 지어 가지고 서둘러 가서 구완하고 그대로 모시고 서울로 왔으나, 증세가 더욱 악화되었다. 공이 이에 종남산(終南山) 기슭에다 작은 집 한 채를 별도로 짓고 휴양하기에 적합한 곳으로 삼았다. - 종남산 기슭은 곧 송 송정공(宋松亭公)이 처음 거처했던 곳이다. 성암공이 토정공과 함께 터를 잡고 말하기를, “도봉(道峰)과 문필봉(文筆峰)이 이곳을 공조(拱照)하고 있으니, 필시 기재(奇才)가 있는 자손이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그 뒤에 공의 손자인 이조 정랑 후(厚)와 한림 구(久)가 서로 을유년(乙酉年)과 병술년(丙戌年)에 잇따라 출생하였다.
양촌선생문집 제12권
 기류(記類)
진관사 수륙사 조성기(津寬寺水陸社造成記)

근본에 보답하고 조상들을 추모함은 왕도 정치의 우선하는 바요, 만물을 이롭게 하고 창생을 구제함은 불법에서 중히 여기는 바이니, 비록 두 가지 것이 다르기는 하나 모두 인심(仁心)의 발로와 자효(慈孝)의 정성으로서 저절로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옛날 어진 제왕과 밝은 군왕의 도리는, 조상을 존숭하고 종친(宗親)을 공경함으로써 효도하는 도리를 넓혔고, 혜택을 넓히고 대중을 구제함으로써 인(仁)의 도리를 넓혔으니, 근본에 보답하는 일이 지극하고 만물에 이롭게 하는 일이 넓었다고 하겠다.
불설(佛說)에 따르면 사람은 죽어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그가 지은 선악에 따라 윤회(輪廻)하여 태어나는데, 부처가 능히 자비(慈悲)로 고통을 없애고 기쁨을 주며 허덕이는 고난에서 구제하여 줄 수 있으므로, 산 사람이 만일 부처를 섬기고 중을 대접하는 일을 하여 복리로 인도하면, 죽은 귀신이 주림에서 배부르게 되고 괴로움에서 즐겁게 되어 성불(成佛)하여 영구히 윤회의 응보(應報)를 면하게 되고, 산 사람도 잘 되게 된다고 한다. 이러므로 효자(孝子)와 자손(慈孫)과 우매한 지아비나 지어미에 이르기까지 모두 휩쓸려 다투어 부처에게 돌아가되, 혹시라도 미치지 못할까 걱정하여 온 세상이 물밀듯이 높이고 숭상하는데, 수륙무차평등회(水陸無遮平等會)가 더욱 그 법 중에 가장 좋은 것이다.
홍무 정축년(1397, 태조6) 정월 을묘일에 주상께서 내신(內臣 궐내에서 친근히 모시는 신하) 이득분(李得芬)과 사문신(沙門臣) 조선(祖禪) 등에게 명하기를,
“내가 국가를 맡게 됨은 오직 조종(祖宗)들께서 적경(積慶)하신 덕이니, 조상의 덕 보답하는 일에 힘쓰지 않아서는 안 되겠고, 또 신민(臣民)이 혹은 나랏일로 죽었지만 혹은 스스로 죽은 자 가운데 제사 맡을 사람이 없어 저승길에서 굶주리고 전도(顚倒)하되 구제할 수 없음을 생각하매, 내가 매우 민망하게 여긴다. 그래서 옛절에다가 수륙도량(水陸道場)을 마련하고 해마다 재회(齋會)를 개설하여 조종(祖宗)들의 명복을 빌고 또한 중생(衆生)들에게도 복되게 하고 싶으니, 너희들이 가서 합당한 곳을 살펴보라.”
하였었다. 사흘 지난 정축일에 이득분 등이 서운관(書雲觀) 신(臣) 상충(尙忠) 양건(陽建) 및 사문(沙門) 지상(志祥) 등과 함께 삼각산에서 도봉산까지 둘러보고 복명하기를 ‘모든 절들이 진관사만큼 좋은 데가 없습니다.’ 하니, 이에 상(上)이 도량을 이 절에 설치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대선사(大禪師) 덕혜(德惠)와 지상 등에게 명하여 중들을 불러 모아 일을 시작하도록 하였는데, 내신(內臣) 김사행(金師幸)이 더욱 힘써 그달 경진일에 역사를 시작하였다. 2월 신묘일에 상께서 친히 임하여 보시고 3단(壇)의 위치를 정하였으며, 3월 무오일에 또한 거둥하여 보셨는데, 가을 9월에 공사가 끝났다. 3단이 모두 3칸 집인데, 중ㆍ하 두 단은 좌우에 또한 욕실(浴室)이 각각 3칸씩 있고 하단(下壇)은 좌우에 따로 조종(祖宗)들의 영실(靈室)을 각각 여덟 칸씩 설치했으며, 대문ㆍ행랑ㆍ부엌ㆍ곳간 등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어 모두 59칸이라, 사치스럽지도 않고 누추하지도 않아 제도에 맞았다.
이달 24일 계유에 상이 또한 친림(親臨)하여 보시고 28일 정축에 신(臣) 권근(權近)을 명소(命召)하여 그 시말을 기록해서 후세에 보이도록 하셨다. 신 근(近)이 그윽이 듣건대, 인륜의 도리는 효도보다 앞서는 것이 없고, 왕자(王者)의 덕도 또한 효도보다 더 큰 것이 없다고 하니, 종묘에 제사 받드는 예절과 추존(追尊)하여 높이는 의식(儀式)이야말로 왕자가 근본을 보답하는 효도 중에서 무엇이 이보다 더하겠는가.
그러나 성인들의 마음은 오히려 스스로 족하게 여기지 않아 교제(郊祭)에 배향하고 명당(明堂 왕자(王者)의 태묘(太廟))에 배향하였으니, 그 존중하기를 극진하게 한 것이다.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주상 전하께서 신무(神武)한 자질과 인효(仁孝)한 덕으로 천명(天命)을 받아 국가를 창건하시매 공이 조종(祖宗)에게 빛나고 은택이 만물에 덮였는데도, 조상 받들려는 생각이 낮이나 밤이나 더욱 정성스러워, 하늘에 배향(配享)하는 제사를 이미 극진하게 하고도 부처에 귀의(歸依)하려는 마음이 또한 간절하여, 하늘에 계신 우리 조상들의 영혼으로 하여금 친히 부처의 복[佛記]을 받아 묘한 인과(因果)를 증험하시도록 하고 제사 못 받는 귀신들에게도 모두 복리와 혜택을 보게 하였으니, 성효(誠孝)에 감동되는 바 지극하고도 극진하다. 이 마음을 미루어 만물에 미치기를, 친(親)한 데서부터 소원한 데로, 그윽한 데서부터 밝은 데로 하여 가되, 이제부터 한없이 하여 간다면, 그 공덕의 큼과 혜택의 원대함을 어찌 헤아릴 수 있으랴.

[주D-001]수륙무차평등회(水陸無遮平等會) : 차별없이 수륙의 잡귀(雜鬼)들을 위하여 올리는 재(齋)이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16권
 지리전고(地理典故)
총지리(摠地理)

우리나라 땅의 경계는 해좌(亥坐) 사향(巳向)인데 정동은 경상도의 영해부(寧海府)이니, 서울에서 7백 45리 떨어져 있으며, 정서는 황해도의 풍천부(豐川府)이니, 서울에서 5백 35리 떨어져 있으며, 정남은 전라도의 해남현이니, 서울에서 8백 96리 떨어져 있으며, 정북은 함경도의 온성부(穩城府)이니, 서울에서 2천 1백 2리 떨어져 있다. 동과 서를 합치면 도합 1천 2백 80리요, 남과 북을 합치면 2천 9백 98리가 된다.
○ 고려 때에는 은병(銀甁)을 돈으로 썼는데 이것을 ‘활구(闊口)’라고 했으며, 우리나라의 지형을 본뜬 것이라고 한다. 지금은 활구의 제도를 보지 못하나, 대개 우리나라 땅 모양이 좁고 길어서 서울에서 남쪽으로는 장흥에 이르기까지 9백 75리요, 북쪽으로는 강계에 이르기까지 1천 3백 30리가 되며,동북쪽으로는 경흥에 이르기까지 2천 3백 59리요, 서남쪽으로는 진도에 이르기까지 9백 리가 되며, 서북쪽으로는 의주에 이르기까지 1천 1백 40리요, 동남쪽으로는 울산에 이르기까지 9백 20리이며, 동쪽으로는 영해(寧海)에 이르기까지 5백 40리요, 서쪽으로는 고양(高陽)에 이르기까지 30리이니, 이것을 보면 활구가 둥글고 길쭉한 모양임을 알 수 있다. 《소문쇄록》
○ 전라도의 김제군 벽골제호(碧骨堤湖)를 경계로 해서 전라도를 호남이라 부르고, 충청도를 호서라고도 부른다. 또는 제천에 의림지호(義林池湖)가 있기 때문에 충청도를 호서라고 한다.
○ 경상도의 고을들은 조령과 죽령 두 고개 남쪽에 있기 때문에 영남이라 부른다.
○ 강원도는 바닷가에 있는 9군(郡)이 단대령(單大嶺) 동쪽에 있기 때문에 영동이라 한다. 단대령은 대관령이라고도 하기 때문에 강원도를 또 관동이라고도 한다.
○ 황해도는 경기해(京畿海)의 서쪽에 있으므로 해서라고 부른다.
○ 함경도는 철령관(鐵嶺關)의 북쪽에 있으므로 관북이라 부르며, 평안도는 철령관 서쪽에 있으므로 관서라고 부른다. 《역대아람(歷代兒覽)》
○ 우리나라의 도읍을 정했던 곳은 한두 곳이 아니다. 김해는 금관국(金官國)의 도읍이었고, 상주는 사벌국(沙伐國)의 도읍이었고, 남원은 대방국(帶方國)의 도읍이었고, 강릉은 임영국(臨瀛國)의 도읍이었고, 춘천은 예맥국(濊貊國)의 도읍이었으니, 이들은 모두 조그마한 지경을 점거한 것으로 지금의 소읍 같은 것은 이루 셀 수 없이 많다.경주는 동경(東京)으로 신라 1천년의 도읍터인데 산천이 서로 둘러 있고 땅이 기름진데, 그 중에 문천(蚊川) 한 구비가 노닐 만하고 나머지는 별로 기이한 명승지가 없다. 평양은 기자(箕子)가 도읍했던 곳으로 팔조(八條)의 정치와 정전의 제도가 아직도 뚜렷하게 남아 있으니, 지금의 외성(外城)이 그것이다. 그 후에 연 나라 위만(衛滿)에게 점거되었다가 또 고구려가 도읍한 곳인데, 그 국경은 남으로 한강에 이르고 북으로 요하에 이르렀으며 군사 수십만을 거느린 가장 강한 나라이었다. 고려에서는 서경(西京)을 설치하여 봄과 가을에 왕래하며 순유(巡遊)하는 곳으로 삼았으니, 지금도 사람과 물자가 풍부한 것은 모두 그 남아 있는 교화 때문이다. 영명사(永明寺)는 바로 동명왕(東明王)의 구제궁(九梯宮)이니 기린굴(麒麟窟)과 조천석(朝天石)이 있으며 영숭전(永崇殿)은 고려 장락궁(長樂宮)의 터이다. 도읍의 진산(鎭山)은 금수산(錦繡山)이요, 그 윗봉우리는 모란봉인데, 모두 작은 산으로서 송도와 한성의 주산(主山)처럼 웅장하거나 높지는 않다.북쪽에는 내[川]가 없으므로 몽고 군사가 휘몰아 쳐들어왔고, 남쪽은 강이 둘렀으므로 묘청(妙淸)이 점거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니 한스러운 일이다. 성문은 넓고 크며 누각은 높으며, 동쪽에는 대동문(大同門)ㆍ장경문(長慶門)의 두 문이, 남쪽에는 함구문(含毬門)ㆍ정양문(正陽門)의 두 문이, 서쪽에는 보통문(普通門)이, 북쪽에는 칠성문(七星門)이 있다. 8도에서 오직 이 도읍터만이 서울과 서로 겨룰 만하다. 동쪽 10리 밖 구룡산(九龍山) 밑에 안하궁(安下宮)의 옛터가 있는데 어느 시대에 지은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아마 별궁인 것 같다.
성천(成川)은 송양국(松壤國)의 도읍이었고 옛 강동(江東)은 양양국(陽壤國)의 도읍이었는데, 비록 지형은 좁으나 산과 물이 좋아 경치가 좋고 그 중에도 용강산성(龍岡山城)은 가장 웅장하여, 지금까지도 높이 솟아 허물어지지 않았다. 전해 오는 말로는 용관국(龍官國)이라고 하는데 어디에 근거한 말인지 알 수가 없다. 부여는 백제의 도읍터로 탄현(炭峴) 안에 반월성(半月城)터가 아직도 뚜렷하다.비록 백마강으로 참호를 삼았으나 좁고 얕아 왕자가 거처할 곳은 되지 못하니 그렇기 때문에 소정방(蘇定方)에게 멸망되고 말았다. 전주는 견훤이 점거했던 곳이나 오래 못 가서 고려에 항복했는데, 지금도 고도의 유풍이 있다. 철원은 궁예가 점거했던 곳으로서 태봉국(泰封國)이라 불렀는데, 지금도 겹성[重城]의 옛 터전과 궁궐의 층계가 남아 있으며 봄이면 꽃이 어지러이 핀다. 땅의 형세가 험하고 막혔으므로 강을 따라 물건을 운반하기가 어렵다.
오직 송도만은 왕씨(王氏)가 왕업을 일으킨 땅으로, 5백 년 기업을 튼튼히 한 곳이다. 곡봉(鵠峯)을 주산으로 하고 줄기가 뻗어 산세가 둘러 있으니, 비록 작은 산이라도 모두 구역이 정해져 있다. 물이 맑고 깨끗하여 방방곡곡에 놀 만한 곳이 많다. 고종 이후로 강화에 도읍을 옮겼는데, 이곳은 바다 속에 있는 조그마한 섬으로서 도읍이라고 일컬을 수가 없다.우리 태조가 개국하면서 도읍을 옮길 뜻이 있어 먼저 계룡산 남쪽에 가서 지세를 살펴보고 서울의 규모를 생각하다가 얼마 안 되어 이를 중지하고 한양에 도읍을 정하였다. 술자가 말하기를, “옛날에 공암(孔巖)이 앞에 있다는 참언이 있고 삼각산이 서쪽으로 서역평(曙驛坪)에 연해 있어 참으로 아름다운 땅이라 했더니 뒤에 다시 보니, 모든 산이 밖을 향해 달아나는 형세이므로 백악 남쪽과 목멱산 북쪽이 제왕 만대의 땅으로서 하늘과 함께 무궁할 것이다.”고 하였다.세속에 전하기를, “송경(松京)은 산과 골짜기가 사면을 쌓고 있어 서로 감싸고 감추어 주는 형세이기 때문에 시대마다 세력을 부리는 권신들이 많고, 한도(漢都)는 서북쪽이 높고 동남쪽은 낮기 때문에, 큰 아들이 가볍게 되고 작은 아들이 무겁게 될 형세이므로 오늘날까지 왕위의 계승과 명공(名公)ㆍ높은 대신에는 대개 작은 아들이 많다.” 하였다. 《용재총화》
○ 비류(沸流)와 온조(溫祚)가 부아악(負兒岳)에 올라가서 살 만한 땅을 골랐는데, 비류는 미추홀(彌趨忽)에 도읍하고 온조는 위례성(慰禮城)에 도읍했다. 뒤에 온조(溫祚)는 도읍을 남한산성 곧 지금의 광주(廣州)로 옮겼다가, 또 북한산성으로 옮겼는데 바로 이곳이 지금의 한양인데, 그가 정한 명당(明堂)은 어디인지 알 수 없다.한양이 이씨(李氏)의 도읍터라는 것이 도선(道詵)의 도참(圖讖)에 써 있었기 때문에 고려가 남경(南京)을 한양에 세워 오얏나무를 심고 이씨(李氏)의 성을 가진 사람을 골라서 이씨를 부윤(府尹)으로 삼았다. 임금도 또한 해마다 한번씩 순행하고 용봉장(龍鳳帳)을 묻어서 지세를 눌렀다. 내가[서거정(徐居正)] 일찍이 《고려사》를 상고해 보건대, 한양의 명당은 다만 임좌(壬坐) 병향(丙向)의 자리라고만 쓰여 있고 어디라고는 명백히 말하지 않았는데, 지금 경복ㆍ창덕 두 궁(宮)의 정전(正殿)이 모두 임좌 병향인 것을 보면, 고려 때 말한 곳이 아마 이 두 궁(宮)터에서 벗어나지 않은 듯하다.근래에 술사 최양선(崔揚善)은 승문원 옛 터가 바로 명당이라 했고 어느 사람은 또 종묘의 낙천정(樂天亭)이 명당자리라고 하나 모두 얕은 소견이며 믿을 수 없는 말들이다. 《필원잡기》
○ 세조가 인지의(印地儀)를 만들어 노래[歌]로 찬송했는데 그 법제는 동(銅)을 부어 24위(位)의 그릇을 만들고 그 가운데를 비워 구리 기둥을 세우고 옆으로 구멍을 뚫어 그 위에 구리 저울을 놓고 낮추고 올리면서 보게 하였으니 이것을 규형(窺衡)이라 불렀다.땅을 측량할 적에 영구(靈龜 지남철)로 사방을 바로잡았으니, 오시(午時) 초일각(初一刻)이 어느 표(標)에 멀고 가까운가를 알려고 하면 먼저 묘시(卯時) 초일각이나 혹은 유시(酉時) 초일각에 표를 해서 엿보게 하고, 다시 묘시와 유시에 표한 곳을 먼저 법에 의해서 사방을 바로잡아 정오(正午) 초일각에 표한 곳을 어느 방위 몇 각(刻)으로 정한다.이렇게 한 뒤에 명당으로부터 끈으로 앞의 묘시(卯時) 초일각까지 재어서 1천 1백 척에 표하면 세 곳의 오정(午正) 일각(一刻)의 표가 3천 3백이 될 것이니, 이것으로 24위를 바로잡고, 가로 세로와 구부러지고 바른 것을 모두 이것으로써 바로잡았다. 임금이 일찍이 이륙(李陸)ㆍ김유(金紐)ㆍ강희맹(姜希孟) 등을 불러서, 이 법을 강론하고 후원에서 시험하게 하였더니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이에 곧 영릉(英陵) 사산(四山)을 측량하였으며, 그 뒤에 또 경성의 지형을 측량하도록 명하고 모두 이 법을 쓰게 하였다.그러나 경성은 민가가 즐비하여 측량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부득이 이륙 등의 어리석은 의견을 썼으니 한 성 안에 무릇 표를 세운 곳은 모두 이 법을 써서 바로잡고 원근ㆍ고저ㆍ대소ㆍ평험(平險)에 이르기까지 역시 종이에 베끼고 그 속에 24위를 정하고, 지상에서 가장 가까운 곳 하나를 측량하고 이를 줄여서 작은 자로 하면, 다시 땅을 재지 않아도 이 자로 땅 위에 그은 곳을 재어 보면, 번거롭게 걸으면서 재지 않아도 산하와 천지와 성곽과 집들이 모두 제곳을 떠나지 않으면서 원근과 고저가 자연히 추호도 차이가 없게 될 것이다. 《청파(靑坡)》
○ 곤륜산(崑崙山) 한 줄기는 큰 사막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동쪽으로 의무려산(醫巫閭山)이 되고 이곳으로부터 크게 끊어져서 요동 들판이 된다. 들판을 건너가서 불쑥 일어난 것이 백두산이 되어 여진과 조선의 경계에 있으니 이것이 곧 《산해경(山海經)》에 이른바 불함산(不咸山)이다. 북쪽으로 뻗친 한 줄기가 두 강을 끼고 영고탑(寧古塔)이 되고, 남쪽으로 뻗어나간 한 줄기가 조선 산맥의 맨 첫째가 된다. 산꼭대기에 있는 큰 못[池]으로부터 분수령이 되어 남쪽으로 내려간 것은 연지소봉(燕脂小峯)ㆍ백산(白山)이 되고 허항령(虛項嶺)ㆍ보다회산(寶多會山)ㆍ완항령(緩項嶺)ㆍ설령(雪嶺)이 된다.이곳으로부터 동쪽으로 뻗쳐서 장백산이 되고, 한 줄기는 북쪽으로 달려 경성ㆍ부령(富寧)을 지나 두만강을 끼고 동쪽으로 뻗어 경흥에서 그친다. 설령으로부터 남쪽으로 달려서 두리산(豆里山)ㆍ참두령(斬頭嶺)이 되며, 서쪽으로 꺾어져 남쪽으로 가서 황토령(黃土嶺)ㆍ천수령(天守嶺)ㆍ조가령(趙可嶺)ㆍ후치령(厚致嶺)이 되고, 북쪽으로 꺾어져서 태백산이 되며, 그 중간에 뻗친 한 줄기는 서남쪽으로 내려와서 함흥부가 된다.
○ 태백산으로부터 서쪽으로 내려가서 백계산(白階山)이 되고, 남쪽으로 부전령(赴戰嶺)이 되며, 서남쪽은 초황령(草黃嶺)ㆍ설한령(雪寒嶺)이 되며 서쪽으로 뻗친 한 산맥은 평안도가 된다. 원 산맥 줄기는 남쪽으로 내려가서 상검산(上劍山)ㆍ하검산(下劍山)ㆍ오봉산(五峯山)ㆍ마유령(馬踰嶺)ㆍ두미령(頭尾嶺)이 되며, 또 동으로 꺾어졌다가 남쪽으로 내려가서 거모령(巨毛嶺)ㆍ쌍가령(雙加嶺)ㆍ거차리령(巨次里嶺)이 되고, 모흘(亇屹)ㆍ마유령(馬踰嶺)ㆍ노인치(老人峙) 3령은 모두 안변(安邊)ㆍ영풍(永豐)에 있다. 가 되고 박달치(朴達峙)가 되며,동쪽으로 꺾어져 세 지방의 분수령이 되는데 동쪽에서 일어나 철령이 되고, 동북쪽으로는 황룡산(黃龍山)이 되고, 남쪽으로 뻗쳐서 축곶령(杻串嶺)ㆍ추지령(楸池嶺)ㆍ금강산ㆍ회전령(檜田嶺)ㆍ진부령ㆍ흘리령(屹里嶺)ㆍ석파령(石波嶺)ㆍ설악(雪岳)ㆍ한계산(寒溪山)이 되고, 오색령(五色嶺)ㆍ 연수파(連水波)ㆍ오대산ㆍ대관령ㆍ두타산ㆍ백복령(百復嶺)이 되었으며, 서쪽으로 꺾어져 태백산이 되고, 서남쪽으로는 우치(牛峙)ㆍ마아령(馬兒嶺)ㆍ소백산ㆍ죽령이 되고,또 불쑥 솟아서 월악(月岳)ㆍ주흘산(主屹山)ㆍ조령ㆍ의양산(義陽山)ㆍ청화산(淸華山)ㆍ속리산ㆍ화령(火嶺)ㆍ추풍령이 되고, 황악(黃嶽)ㆍ무풍령(舞豐嶺)ㆍ대덕산ㆍ덕유산ㆍ육십치(六十峙)ㆍ본월치(本月峙)ㆍ팔량치(八良峙)ㆍ지리산이 된다.
○ 세 지방의 분수령으로부터 산세가 불쑥 일어나서 철령이 되고, 한 가지는 동남쪽으로 뻗쳐 내려가다가 금성(金城)ㆍ 금화(金化) 사이를 지나 꾸불꾸불 내려가서 영평(永平) 백운산이 되고, 적목치(赤木峙)가 되었으며, 북쪽으로 되돌아서 주엽산(注葉山)이 되고, 축석현(祝石峴)이 되었으며, 서북쪽으로는 불곡산(佛谷山)이 되고, 남쪽으로 내려가서 도봉산ㆍ삼각산ㆍ백악ㆍ인왕산이 되고, 한양 경성이 되었다.
○ 검산령(劍山嶺)으로부터 남쪽으로 거차리령(巨次里嶺)에 이르러, 서쪽으로 뻗은 한 줄기는 남쪽으로 내려가서 청량산, 고달산(高達山)이 되고 곡산(谷山)ㆍ학령(鶴嶺)이 된다. 이곳으로부터 두 산맥으로 나뉘어져 한 산맥은 서쪽으로 내려가서 황해도가 되고, 한 산맥은 남쪽으로 뻗쳐 이천(伊川)ㆍ토산(兔山)ㆍ금천(金川) 경계를 지나서 화장산(華藏山)ㆍ성거산(聖居山)ㆍ천마산ㆍ오관산(五冠山)이 되고 송악 송경(松京)이 된다.
○ 황해도 산맥은 학령(鶴嶺)으로부터 서쪽으로 뻗쳐 덕업산(德業山)이 되었으며, 북쪽으로 내려가서 재고개(梓古介)ㆍ석달령(石達嶺)ㆍ증격산(甑擊山) 곡산의 진산 이 되고, 서쪽으로 꺾어져 수안(遂安)의 언진산(彦眞山)ㆍ망진산(望眞山)이 되며 서쪽으로 뻗은 한 줄기는 황주(黃州)의 구현(駒峴)이 되며, 정맥은 남쪽으로 내려가서 고음초산(古音初山)이 된다. 또 두 산맥으로 나뉘어져 서쪽으로 뻗친 한 줄기는 태산준령(泰山峻嶺)이 되고, 가로 뻗쳐서 서흥(瑞興)ㆍ봉산(鳳山)이 되고, 끊기지 않고 북쪽으로 뻗쳐서 대현산(大峴山)ㆍ자비령(慈悲嶺)ㆍ파령(岊嶺)ㆍ동선령(洞仙嶺)이 된다.남쪽으로 뻗은 한 줄기는 동쪽으로 꺾였다가 다시 서쪽으로 돌아 차유령(車踰嶺)이 되고, 정족산(鼎足山)이 되며, 남쪽으로는 평산(平山)ㆍ면악(綿岳) 혹은 멸악산(滅惡山)이라고도 한다. 이 된다.남쪽으로 뻗은 또 한 가지는 배천(白川)의 치악산과 연안의 비봉산(飛鳳山)이 된다. 정맥은 서남쪽으로 가다가 해주의 창금(唱金)ㆍ수양(首陽)ㆍ북고(北高)의 여러 산이 되고, 또 들로 내려가서 평강(平崗)이 되며, 서북쪽으로 내려가 신천(信川)의 치산(雉山)ㆍ달마산(達摩山)이 되며, 북쪽으로 돌아서 문화(文化)의 구월산이 된다.
○ 덕유산은 경상ㆍ전라ㆍ충청 세 도(道)의 어귀를 차지하고 서쪽으로 뻗은 한 가지는 다시 북쪽으로 돌아 고달산(高達山)과 전주 동쪽에 있는 진안(鎭安)의 마이산이 되는데 두 돌봉우리가 치솟아 하늘에 닿았으며, 서북쪽으로는 웅치(熊峙)가 되고, 서쪽으로 뻗친 한 산맥은 전주부(全州府), 동쪽은 위봉산성(威鳳山城), 북쪽에는 기린봉(麒麟峯)이 되었으며, 한 산맥은 전주의 서북쪽에 이르러 건지산(乾止山)이 된다.
○ 마이산의 한 산맥은 서남쪽으로 가다가 북으로 뻗어 금구(金溝)의 모악(母岳)이 되며, 서남쪽으로 뻗어 순창의 부흥산(復興山)과, 정읍의 내장산과, 장성의 입암산(笠巖山)ㆍ노령(蘆嶺)이 되고, 또 남쪽으로는 나주부 금성산(錦城山)이 되었다.입암산으로부터 동쪽으로 뻗어 추월산(秋月山)ㆍ광덕산(廣德山)이 되고, 동남쪽으로 무등산이 되며, 남쪽으로 장흥의 천관산(天冠山)에 이르고, 서북쪽으로 돌아 영암의 월출산이 되며, 남쪽으로 만덕미(萬德尾) 황등산(黃等山)에서 그치고, 동북쪽으로 돈 것은 송광(松廣) 계족산(鷄足山)이 된다.
○ 마이산의 또 한 줄기는 웅치(熊峙)로부터 북으로 뻗쳐 한 줄기는 석산(石山)이 되며 거꾸로 내려가다가 구봉산(九峯山)ㆍ주취산(珠崒山)ㆍ운제산(雲梯山)ㆍ탄현(炭峴)ㆍ이치(梨峙)가 되며, 대둔산(大芚山)이 되어 충청도 지경에 들어가서 금수(錦水)를 등지고 돌아 계룡산이 된다. 계룡산 한 줄기가 서쪽으로 내려가다가 크게 끊어져서 판치(板峙)가 되고, 불쑥 솟아서 북치(北峙)가 되며, 공주부 월성산(月城山)이 된다.
○ 월성산 한 줄기는 서남쪽으로 뻗어 백제의 옛 수도인 부여의 부소산(扶蘇山)이 된다.
○ 속리산 한 줄기는 서쪽으로 뻗다가 북으로 달려 거질화령(巨叱火嶺)이 되고, 달천(達川)을 끼고 동쪽으로 꺾어져 서북쪽으로 가다가 삼생산(三生山)ㆍ두타산이 되며 죽산 경계에 이르러 칠장산(七長山)이 된다. 칠장산으로부터 한강을 따라 서북쪽으로 오다가 흩어져서 한남(漢南)의 여러 산이 되고, 양지(陽智)를 따라 남ㆍ동ㆍ북쪽으로 가다가 여주의 영릉(英陵)이 되고, 용인으로부터 곧장 북으로 뻗은 것은 남한산성이 된다.광교산(光敎山)으로부터 남쪽으로 뻗어서 화성이 되고 북으로 뻗어 청계산(淸溪山)ㆍ관악산이 되며, 서쪽으로 뻗어 수리산(修理山)ㆍ소래산(蘇來山)이 되고 통진의 문수산(文殊山)에 이르러 바다를 건너서 강화부가 된다.
○ 칠장산으로부터 서남쪽으로 뻗은 것이 한 영맥(嶺脈)이 되어 대문령(大門嶺)과 마일령(磨日嶺)이 되며, 전의(全義)에서 크게 끊어졌다가 서쪽에서 일어나 차령(車嶺)이 되며, 또 서쪽으로 무성(武城)ㆍ오서(烏棲)ㆍ가야(伽倻) 등 여러 산이 되며, 흩어져서 내포(內浦)의 여러 산이 된다.
○ 태백산 동쪽 줄기는 동남쪽으로 가다가 금장산(金莊山)ㆍ백암산(白巖山)ㆍ평해(平海) 경계가 되고 주령(珠嶺)ㆍ삼승령(三乘嶺)이 되며, 서쪽으로 꺾여져 영해(寧海) 북쪽에 이르러 월명산이 되며, 바다를 따라 남쪽에 이르러서는 신라의 고도인 경주의 금오산이 된다.고개 동쪽 11읍(邑) 영해ㆍ영덕(盈德)ㆍ청하(淸河)ㆍ흥해(興海)ㆍ영일ㆍ경주ㆍ장기ㆍ울산ㆍ언양(彦陽)ㆍ기장(機張)ㆍ동래 의 물은 모두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며 경주에서 서쪽으로 뻗어 북쪽으로 돌아서 대구부가 된다.
○ 지리산 서쪽 줄기는 화개(花開) 남쪽에 이르러 하동의 경양산(慶陽山)이 되며, 청천강(菁川江)을 끼고 동쪽으로 뻗어 곤양(昆陽)ㆍ사천ㆍ진해의 북쪽을 지나서 창원의 청룡산이 되고, 가락국의 고도인 김해에 이르러 구지봉(龜旨峯)이 된다.
○ 주취산(珠崒山) 북쪽 한 줄기는 서쪽으로 내려가서 탄현(炭峴)이 되고 운제산(雲梯山)ㆍ정토산(淨土山)이 되며 용화산(龍華山)이 되었으며, 기준(箕準 기자(箕子)의 후손으로 위만에게 쫓겨 남쪽으로 피난감)의 옛 성터가 그곳에 있다.
○ 평안도 산맥은 설한령(雪寒嶺)으로부터 서쪽으로 뻗은 두 줄기 중의 한 줄기가 희천(熙川)의 적유령(狄踰嶺)을 따라 서남쪽으로 뻗어 또 두 갈래로 나뉘어져 북으로 내려간 것은 위원(渭原)ㆍ초산(楚山) 두 읍의 여러 산이 되고, 서남쪽으로 뻗은 것은 흩어져서 청천강 이북과 압록강 이남 여러 고을의 산이 된다.
○ 설한령의 한 줄기는 서남쪽으로 뻗어 영원(寧遠)을 따라 서북쪽으로 가서 묘향산에 이르러 두 강 사이를 끼고 꾸불꾸불 내려가다가 알일령(遏日嶺)과 유현(柳峴)이 된다. 안주 구봉산(九峯山)에 이르러 다시 남쪽으로 뻗어 자모산(慈母山)과 서경 평양부의 금수산(錦繡山)이 된다.
○ 양덕(陽德) 남곡산(南谷山) 북령(北嶺) 산맥의 한 줄기는 서쪽으로 내려가서 함박산(含朴山)이 되고, 거꾸로 북으로 내려가서 성천(成川)의 검학산(劍鶴山)이 된다.
○ 자모산의 한 줄기는 영유강(永柔江) 서쪽을 따라 서남쪽으로 뻗어 용강(龍崗)의 황룡산(黃龍山)이 된다.
○ 총전령(葱田嶺)의 한 줄기는 거꾸로 북쪽으로 내려가서 강계부(江界府)와 폐 4군의 여러 산이 된다.
○ 강원도 오대산의 서북쪽 한 줄기는 홍천 동쪽에 이르러 세 줄기로 나뉘어 하나는 서북쪽으로 내려가서, 춘천의 봉의산(鳳儀山)이 되는데 옛 맥국(貊國)의 땅이다. 한 줄기는 서남쪽으로 내려가서 원주부 치악산이 되며, 한 줄기는 서쪽으로 뻗어 검의산(劍倚山)ㆍ팔봉산(八峯山)이 되고 용문산(龍門山)에서 그친다.
○ 두만강은 바로 토문강(土門江)이며 백두산 큰 못이 근원이다. 동쪽 흐름 수십 리는 물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데 돌 틈을 따라 백리를 숨어 흐르다가 비로소 큰 물이 솟아나서 동량(東良)ㆍ북사(北斜)ㆍ지하(地河)ㆍ목하(木河)ㆍ수주(愁州)ㆍ동건(童巾)ㆍ다온(多溫)ㆍ속장(束障) 등을 거쳐 경원 회질가(會叱家)에 이르고, 남쪽으로 흘러 경흥ㆍ사차마도(沙次磨島)에 이르러 나뉘어서 5리를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여지승람》
무산(茂山) 서북에 있는 냇물은 근원이 설잠(雪岑) 북쪽에서 나왔고, 박하천(朴下川)은 근원이 장백산 북쪽에서 나왔는데, 두 물이 합쳐져서 두만강으로 들어가고 무산을 거쳐서 동쪽으로 회령에 이르고 북쪽으로 꺾어져 종성을 거쳐 온성(穩城)에 이르고, 동쪽으로 꺾어져 남으로 흐르다가 경원을 지나 경흥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 훈춘강(訓春江)은 근원이 여진 땅에서 나와 동림성(東林城)에 이르러 두만강으로 들어간다. 《여지승람》에는 경원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 수빈강(愁濱江)은 근원이 백두산으로부터 나와서 북쪽으로 흘러 소하강(蘇下江)이 되는데, 혹은 속평강(速平江)이라고도 한다. 공험진(公嶮鎭) 선춘령(先春嶺)을 지나서 거양(巨陽)에 이르고 다시 동으로 1백 20리를 흘러 아민(阿敏)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여지승람》에는 경흥으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 함흥의 성천강(成川江) 혹은 군자하(君子河)라고도 한다. 은 그 근원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갑산(甲山) 경계 화기령(樺岐嶺) 태백산 남쪽 에서 나오고, 하나는 희천(熙川) 경계 황초령(黃草嶺) 동남쪽 에서 나와 합류하여 함흥부 서북쪽 탑란동(塔蘭洞)을 지나서, 성 남쪽 만세교(萬歲橋)에 이르고 함흥부 남쪽 35리 도련포(都連浦)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 초원(草原)의 금강진(金江津)은 근원이 검산령(劍山嶺) 동쪽에서 나와 초원의 남쪽을 지나서 바다로 들어간다.
○ 영흥(永興)의 용흥강(龍興江)은 그 근원이 넷이 있으니, 하나는 함흥부 서쪽 50리 떨어진 정변사(靜邊社)에서 나오는데 이름을 비류수(沸流水)라고 한다. 그 물 근원인 구멍의 둘레가 5척 3촌이요, 깊기는 끝이 없으며 물이 솟아 내가 된다.또 하나는 함흥부 서북쪽 2백 10리 거리의 마유령(馬踰嶺) 희천(熙川)의 경계 요해지에서 나왔고, 하나는 함흥부 서쪽 1백 80리 거리의 애전현(艾田峴) 맹산(孟山) 경계에서 나오고, 다른 하나는 양덕현(陽德縣) 거차령(居次嶺)에서 나와서 고암(庫巖)에서 송어탄(松魚灘)과 합했는데, 이름을 횡천(橫川)이라 한다. 용신당(龍神堂)을 지나서 진정사(鎭靜寺) 서쪽 절벽 밑에 이르러 창경연(鶬鶊淵)이 되었다.그 밑에 광탄(廣灘)이 있고 광탄 가운데 백마같이 생긴 흰 돌이 있는데, 그 돌이 물 속에 잠기고 물 위에 나타나는 것을 보고 물의 수위를 짐작한다. 읍성 동북쪽을 지나서 이 강물이 남쪽으로 흐르다가 고원(高原)의 덕지탄(德之灘)ㆍ문천(文川)의 전탄(箭灘)과 합해서 바다로 들어간다.
본 이름은 횡강(橫江)인데, 하륜(河崙)이 사신이 되어 이곳에 이르렀을 때, 도순문사(都巡問使) 강회백(姜淮伯)이 중류에 술자리를 베풀고 “함흥부는 도조와 환조께서 터를 정한 자리이며, 또 태조께서 여기서 탄생하셨는데, 아직도 이 강에 이름이 없으니 또한 한 가지 흠이 아닙니까?” 하니 하륜이 용흥(龍興)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 의주의 압록강은 혹 마자하(馬訾河)라 하고 청하(靑河)ㆍ용만이라고도 하는데, 서쪽의 요동 도사(都司)까지 1백 60리가 된다. 근원은 백두산인데 남쪽으로 흘러 갑산(甲山)ㆍ혜산진(惠山鎭)을 거쳐 혜산강(惠山江)이 되고 허천강(虛川江)과 합한다.
○ 허천강은 근원이 북청ㆍ북제령(北諸嶺)ㆍ벌성포천(伐成浦川)인데, 산 북쪽 파천(波川)ㆍ독산천(禿山川)ㆍ황수천(黃水川) 등 여러 물과 합해서 북쪽으로 흘러 갑산(甲山)ㆍ청주기(靑州岐)에 이르고 허천역(虛川驛) 옆을 지나 허천강이 된다. 장백산 서쪽 여러 냇물과 합했고, 또 운총천(雲寵川)과 합류하여 혜산강으로 들어간다.
○ 두 강이 합해서 서쪽으로 흐르다가 삼수(三水)의 경계로 들어가서 압록강이 되고, 가을파지(加乙波知)에 이르러 장진강(長津江)과 합하니, 장진강은 곧 부전령(赴戰嶺)과 황초령(黃草嶺) 이북에 있는 물이다. 또 서쪽으로는 후주강(厚州江)과 합해서 서북쪽으로 흘러 무창(茂昌)ㆍ여연(閭延)을 지나 남으로 꺾여 흘러서, 옛 우예(虞芮)에 이르러 자성강(慈城江)과 합하고, 서남쪽으로는 위원(渭源) 경계에 이르러 독로강(禿魯江)과 합한다.
독로강은 그 근원이 둘인데, 하나는 희천(熙川) 적유령(狄踰嶺)에서 나와 신광진(神光鎭)을 지나고, 하나는 함경도 경계 화을첩(和乙岾) 밑 설한령(雪寒嶺) 북쪽 총전령(葱田嶺) 서남쪽에 있는 물 밑에 나와서 평남진(平南鎭)을 거쳐 강계(江界) 입석(立石)에서 합하여 북쪽으로 흘러 강계에 이르며, 남쪽은 독로강이 되고, 서쪽은 위원 북쪽 오로량(吾老梁)에 이르러 압록강으로 들어간다.
○ 초산(楚山) 산양회(山羊會)에 이르러 건주위(建州衛) 만주강(滿洲江)과 합하며, 만주강은 혹은 파저강(婆猪江)이라고도 하고 또는 퉁가강(佟家江)이라고도 하는데, 아이보(阿耳堡)에 이르러 동건강(童巾江)과 합한다.
동건강은 근원이 고리산(古理山)과 숭적산(崇積山)에서 나와 남쪽으로 꺾어져 서쪽으로 흐르다가 희천(熙川) 경계에 있는 우현진(牛峴鎭)과 운산(雲山) 경계의 차령진(車嶺鎭)의 여러 냇물과 합쳐서 서쪽으로 흘러 압록강으로 들어간다.
○ 벽동(碧潼)ㆍ창성(昌城)ㆍ삭주를 거쳐 의주 북쪽에서 옥강(玉江)과 합한다.
옥강은 의주 동북쪽 60리에 있는데 그 근원은 천마산(天磨山)과 여자산(呂子山)에서 나와 옥강진(玉江鎭)에 이르러 압록강으로 들어가는데, 그 속에서 담청색 옥이 나기 때문에 옥강(玉江)이라고 한다.
○ 적도(赤島) 동쪽에 이르러 세 갈래로 나뉘어지는데, 하나는 남쪽으로 흘러 굽이쳐서 구룡연(九龍淵)이 되는데, 이것을 압록강이라 하니 물빛이 오리 머리 같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하나는 서쪽으로 흘러 서강(西江)이 되고 하나는 중류를 따라 흐르는데, 이것을 소서강(小西江)이라 한다.검동도(黔同島)에 이르러 다시 합쳐서 하나가 되고 수청량(水靑梁)에 이르러 또 두 갈래로 나뉘어져, 한 갈래는 서쪽으로 흘러 적강(狄江)과 합하고 적강은 압록강 서북쪽에 있으니 오랑캐 땅에서 동북쪽으로 흘러 내려왔다. 한 갈래는 남쪽으로 흘러 큰 강이 되어 위화도를 거쳐 암림곶(暗林串)에 이르러 서쪽으로 흐르다가 미륵당(彌勒堂)에서 다시 적강과 합하여 대총강(大摠江)이 되어 고진강(古津江)과 합한다.
고진강은 근원이 보광산(普光山) 북쪽 선천(宣川) 경계 에서 나와서 식송진(植松鎭)을 거쳐 미륵당에서 삭주 지경의 천마산 남쪽 여러 냇물과 합류하여 이루어진 강이다. 옛 정령(定寧)ㆍ옛 영주(寧州)ㆍ옛 인산(麟山)을 지나 서쪽으로 흘러 압록강으로 들어가는데, 천순(天順) 연간에 서장관 강기수(姜耆壽)가 여기 빠져 죽었기 때문에 서장강(書狀江)이라고도 한다.
○ 남쪽으로 서해로 들어간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여진이 일어난 곳에 압록강이 있었다.” 하였고 옛 기록에 “천하의 세 곳에 큰 강이 있으니 황하ㆍ장강ㆍ압록강이 이것이다.” 하였다.
○ 안주(安州) 청천강은 혹은 살수(薩水)라고도 하는데, 그 근원은 영변(寧邊) 묘향산에서 나와서 10여 리를 흐르다가 어천(魚川)과 합한다. 어천은 근원이 적유령(狄踰嶺)에서 나와 동쪽으로 10리를 흘러 어천이 되었다. 영원 서쪽 경계에 있는 물이 서쪽으로 40리를 흐르다가 희천(熙川) 봉단성(鳳丹城)에서 합하고 아래로 흘러 영변 장항진(獐項津)이 된다.이 강은 안주부 동남쪽에 이르러 화천강(花遷江)이 되고, 또 남쪽으로 5, 6리를 흐르다가 안주 무골도(無骨島)에 이르러 또 구음포진(仇音浦津)과 합한다. 구음포진은 근원이 초산과 벽동(碧潼) 지경에서 나와 운산(雲山)의 동천(東川)이 되고 영변을 거쳐 동쪽으로 흐르다가 또 개천(价川) 장항강(獐項江)과 합한다. 장항강은 바로 묘향산 남쪽 분탄(犇灘)의 하류인데 동천과 합쳐서 남쪽으로 흐르다가 안주 북성(北城) 아래에 이르러 청천강이 되고 서쪽으로 30리를 흐르다가 박천강(博川江)과 합한다.
○ 박천강은 근원이 창성(昌城)의 부운산ㆍ삭주의 천마산ㆍ청룡산ㆍ옛 구주(龜州)의 팔령산(八嶺山)에서 나오는데 청천강과 합류하여 태천(泰川) 동쪽에서 오지천천(烏知遷川)이 되고, 남쪽으로 흘러 구성(龜城)의 구림천(仇林川)ㆍ팔령천(八嶺川)과 합해서 동쪽으로 흘러 박천(博川) 서쪽에서 곶적강(串赤江)과 합해서 박천강이 된다. 이 강이 가산(嘉山) 동쪽에 이르러 대령강(大寧江)이 되어 정주 가마천(加磨川)과 동쪽으로 흐르다가 합하고, 고성진(古城鎭)에 이르러 청천강과 합하며 남쪽으로 흐르다가 노강(老江)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는 대정강(大定江)이라 하였고, 옛날에는 개사강(蓋泗江)이라 불렀는데, 세상에서 전하기를, “주몽이 북부여로부터 남쪽으로 달아나다가 여기에 이르니, 고기와 자라가 모여서 다리를 만들었으며 이로 인하여 무사히 건넜기 때문에 이름을 대령강이라 하였다.” 한다.
○ 평양의 대동강은 그 근원이 둘이 있으니, 하나는 영원(寧遠) 가막동(加幕洞)에서 나와 남쪽으로 흐르다가 맹산현(孟山縣) 북쪽에 이르러서 다시 꺾여 서쪽에서 흘러가다가 덕천 경계에서 삼탄(三灘) 영원 맹산(孟山)의 물이 여기에 이르러서 합쳐 흐르기 때문에 삼탄이라고 부른다. 과 합쳤고 남쪽으로 흘러 개천(价川) 경계에서 순천강(順川江)이 된다. 다시 순천 경계에 이르러 성암진(城巖津)이 되었는데, 위에는 사탄(斜灘)이 있고 밑에는 기탄(岐灘)이 있으며 자산(慈山) 경계에 이르러 우가연(禹家淵)이 되어 은산(殷山)의 대천(大川)과 합했으며 이로부터 다시 동쪽으로 흘러 강동 경계에 이르러 잡파탄(雜派灘)이 된다.
○ 하나는 양덕(陽德) 북쪽 문음산(文音山)과 오강산(吳江山) 및 맹산의 대모원동(大母院洞)에서 나와 다시 합해서 성천(成川)의 비류강이 되어 흘골산(紇骨山) 밑을 지나는데 산 밑에 사석혈(四石穴)이 있어 물이 그 구멍 속으로 통해 흐르다가 솟아 올라 서쪽으로 나왔기 때문에 이름을 비류강이라 한다. 다시 꺾어져 남쪽으로 흐르다가 강동 경계에 이르러서 잡파탄과 합류하여 서진강(西津江)이 되고 다시 웅성강(熊城江)과 합한다.
웅성강의 근원은 옛 양덕 북쪽 40리에 있는 고원(高原) 경계 우라발산(亏羅鉢山) 거차리령(巨次里嶺) 남쪽 에서 나오는데, 흘러서 양덕(陽德)의 남천(南川)이 되고 곡산(谷山)으로 들어가서 말흘탄(末訖灘)이 되어 곡산 여러 냇물과 합한다. 이 물은 다시 수안을 지나 북쪽을 삼등(三登) 남쪽에 이르러서 웅성강이 되고, 또 서북쪽으로 흘러 서진강으로 들어간다.
○ 평양성 동북쪽에 이르러 마탄(馬灘)이 되고, 성 동쪽에 이르러 백은탄(白銀灘)과 대동강이 된다. 이로부터 서쪽으로 흘러 구진익수(九津溺水)가 되고 그 하류는 평양강과 합한다. 평양강은 근원이 순안(順安)의 법홍산(法弘山)에서 나와서 보통문(普通門) 밖을 지나 웅성강과 합류하여 중화 서쪽에 이르러 이진강(梨津江)이 되고, 강서의 구림천(九林川)과 합해서 용강(龍崗) 동쪽에 이르러 동쪽 급수문(急水門)으로 빠진다.
○ 금천(金川)의 저탄(猪灘)은 근원이 수안의 언진산(彦眞山)에서 나오는데 아래로 흘러 흑석탄(黑石灘)이 되고 보음탄(甫音灘)이 되며 신계(新溪) 서쪽을 지나서 사팔적탄(沙八赤灘)이 된다. 이 물은 평산(平山) 북쪽에 이르러 기탄(岐灘)이 되고 또 남쪽으로 가서 전탄(箭灘)이 되며, 저탄에 이르러 비로소 커져 하류는 금천 조읍포(助邑浦)의 조운(漕運)하는 곳이 된다.
○ 남쪽은 말롱포(末籠浦)가 되고, 그 남쪽은 배천(白川), 동쪽은 금곡포(金谷浦)의 조운하는 곳이며, 또 그 남쪽은 광정도(匡正渡)와 벽란도가 된다.
○ 서울의 한강은 옛날에는 한산하(漢山河)라 일컬었고, 고려에서는 사평도(沙平渡)라 일컬었다. 그 근원은 둘인데, 충주의 금천(金遷)으로부터 흘러온 것을 남강이라 일컫고, 춘천의 소양강으로부터 온 것을 북강이라 일컫는다.
○ 남강은 그 근원이 둘이 있으니, 하나는 강릉의 오대산 우통수(于筒水) 금강연(金剛淵)에서 나온다. 한강이 비록 여러 곳의 물을 받아들였지만 우통수가 그 주류이다. 오대산 물이 두타산 북림계(北臨溪)와 삼척의 죽현(竹峴) 물과 합해서 남쪽으로 흘러, 정선 동쪽 여량역(餘粮驛)을 지나 군(郡) 북쪽에 이르러 광탄진(廣灘津)이 되고, 군 남쪽은 대음강(大陰江)이 되고, 군 서쪽은 용암연(龍巖淵)이 된다.또 흘러가다가 영월 후진(後津)이 되고 금봉연(金鳳淵)에 이르러 금장강(錦障江)과 합한다. 금장강은 바로 평창(平昌)의 연촌진(淵村津) 하류이며, 또 서쪽으로 주천강(酒泉江)과 합하는데 주천강은 바로 원주 동쪽 주천현 거슬산(琚瑟山) 여러 물의 하류이다.또 남쪽으로 흘러 영춘(永春)에 이르러서 눌어탄(訥魚灘)이 되고, 또 남쪽으로 흘러 남진(南津)이 되며, 서남쪽으로 흘러 단양에 이르렀으며, 북쪽으로는 상진(上津)과 하진(下津)이 되고, 서쪽은 소요항탄(所要項灘)이 된다. 또 북쪽으로 꺾어지고 서쪽으로 흘러서 청풍강이 되고, 병풍산 밑에 이르러 북진(北津)이 되며, 제천의 광탄(廣灘) 하류에 와서 합하고, 충주 북쪽 10리에 이르러 북진이 되며, 충주 서쪽 10리 금천에 이르러 달천(達川)과 서로 합한다.
○ 하나는 근원이 보은의 속리산에서 나와 산 위에서 물이 세 줄기로 나뉘어지는데, 그 하나는 구요(九遙) 팔교(八橋)의 냇물이 되어 서쪽으로 흐르다가 북으로 꺾어져 청주 동쪽에 이르러 청천(靑川)이 되고, 청천은 파곶(葩串) 하류와 합하여 괴산에 이르러 괴진(槐津)이 되며, 연풍천(延豐川)과 합한다. 또 북쪽으로 충주 서남쪽에 이르러 달천이 되고, 서쪽으로 금천에 이르러 청풍강과 합하고, 서쪽으로는 월락탄(月落灘)이 된다.그 서쪽에 가흥창(嘉興倉)이 있고, 또 그 서북쪽으로는 원주의 흥원창(興元倉)이 있는데, 섬강(蟾江)과 합한다. 섬강은 바로 오대산 서쪽 횡성(橫城)ㆍ원주의 여러 물인데 서쪽에서는 여주의 여강(驪江)이 되고 양근(楊根)의 대탄(大灘)과 월계천(月溪遷)이 된다. 군(郡) 서쪽 45리 병탄(幷灘)에 이르러 북강과 합하기 때문에 세속에서는 이수두(二水頭)라고도 한다.
○ 북강(北江)은 그 근원이 둘이 있으니, 하나는 인제 서화현(瑞和縣) 소파령(所波嶺)ㆍ소동라령(所冬羅嶺)과 춘천 기린현(基麟縣)의 네 냇물이 합쳐서 인제 미륵천(彌勒川)이 된다. 이 물은 서쪽으로 흘러 주연진(舟淵津)이 되고 양구 남쪽에 이르러 초사리탄(草沙里灘)이 되며, 춘천 동북쪽에 이르러 청연(靑淵)ㆍ주연(舟淵)ㆍ적암탄(赤巖灘)이 된다. 또 춘천부 북쪽 6리에 이르러 소양강이 되고, 우두산(牛頭山) 서쪽에 이르러 보제진(菩提津) 하류와 합했다.그 하나는 회양(淮陽)의 화천(和川) 하류에서 덕진(德津)이 되어 은계(銀溪)와 합했으며, 양구의 대연(大淵) 하류에서 회양ㆍ용연(龍淵)ㆍ남곡(嵐谷)의 물이 되어 금성(金城)의 남천(南川)이 되었고, 철령 남쪽 금강 서쪽에 있는 여러 냇물이 모두 합해서 금성(金城)이 보제진이 되는데 속칭 모천(牟遷)이라고도 한다. 이 물이 서쪽으로 흘러서 통구(通溝) 다경진(多慶津)이 되고 금강 남쪽의 물이 서쪽으로 흘러오다가 양구의 곡계(曲溪)와 합치고 서쪽으로 흘러와 합쳐서 낭천(狼川)에 이르러 마탄(馬灘)이 되고, 남쪽으로는 대리진(大利津)이 된다.또 춘천 북쪽에 이르러 모진(母津)이 되고 우두촌(牛頭村) 앞에 이르러 소양강과 합해서 서쪽으로 흘러 신연진(新淵津)이 된다. 또 홍천강과 합해서 가평 동쪽에 이르러 안판탄(按板灘)이 되고, 양근(楊根) 서쪽에 이르러 용진(龍津)이 되고 병탄에 이르러 남강과 합한다.
○ 남강과 북강이 합해서 서쪽으로 흐르다가 광주(廣州) 경계에 이르러서 도미천진(渡迷遷津)이 되고, 광진(廣津)이 되고 또 송파(松波)ㆍ삼전도ㆍ저자도(楮子島)ㆍ뚝섬 두모포(豆毛浦)가 된다. 경성 남쪽에 이르러 한강도가 되고 또 서쪽으로는 서빙고ㆍ동작진ㆍ흑석(黑石)ㆍ노량(露梁)ㆍ용산강ㆍ마포ㆍ남타(南沱)ㆍ율도(栗島)ㆍ토정(土汀)ㆍ현석(玄石)ㆍ서강(西江) 농암(籠巖)이 된다. 금천(衿川) 북쪽에 이르러 양화도(楊花渡)가 되고, 양천 북쪽에 이르러 공암진ㆍ행주가 된다.또 교하(交河) 서쪽에 이르러 임진강과 합하고, 통진 북쪽에 이르러서는 조강(祖江)이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임진강은 그 근원이 둘이 있으니, 하나는 안변(安邊)과 영풍(永豐) 냇물이 남쪽으로 흐르다가 방장치(防墻峙)를 지나서 이천(伊川)으로 들어간다. 미탄(美灘)의 물은 근원이 박달치(朴達峙)에서 나와서 서남쪽으로 흐르다가 합해서 옛 성진(城津)이 되며 신계(新溪) 경계를 지나 안협의 제당연(祭堂淵)이 된다.평강(平康) 분수령 물은 안협(安峽)의 저구리탄(猪仇里灘)이 되고 이 물이 합해서 포리진(浦里津)이 되어 토산으로 들어가서 동천(東川)이 된다. 다시 삭녕에 이르러 삭녕도가 되고 연천 서쪽에 이르러 징파도(澄波渡)가 되며, 마전(麻田)에 이르러 후근도(朽斤渡)가 되어 양주의 대탄(大灘)과 합한다.
○ 그 하나는 철령 물이 서쪽으로 꺾어져 남으로 흐르다가 평강(平康)의 정자연(亭子淵)을 지나서 철원의 체천(砌川)이 되는데 양쪽 언덕이 모두 석벽이어서 섬돌 같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이 물은 순담(筍潭) 화적연(禾積淵)을 지나서 영평 북쪽에 이르러 직탄(直灘)이 되고, 또 서쪽으로 흐르다가 영평의 전탄(箭灘)과 합한다.포천의 여러 물은 북쪽으로 흐르다가 백로주(白鷺洲)가 되고 백운산의 여러 냇물과 합해서 흐르다가 영평 남쪽에 이르러 전탄이 되고, 또 마흘천(磨訖川)이 되며, 양주 북쪽에 이르러 대탄이 되고, 서쪽으로 흐르다가 연천의 아미천(峩嵋川)과 합하여 마전으로 들어가서 삭녕강과 합한다.
○ 적성(積城) 북쪽에 이르러 이포진(梨浦津) 구연강(仇淵江)이 되고, 장단 동쪽에 이르러 두기진(頭耆津)이 되며, 사미천(沙彌川)과 합해서 용산진과 임진도(臨津渡)가 되고, 동남쪽으로는 덕진(德津)이 된다. 다시 교하(交河) 북쪽에 이르러 낙하도(洛河渡)가 되고, 봉황암을 지나 오도성(烏島城)에 이르러 한수와 합한다. 오도성은 속칭에 오두현(鼇頭峴)이라 한다.
○ 공주의 금강은 근원이 옥천(沃川)의 적등진(赤登津)에서 나오고, 적등진은 근원이 덕유산 서북에서 나오니, 장수ㆍ진안의 여러 냇물이 합해서 북쪽으로 흐르다가 용담(龍潭) 달계천(達溪川)이 되고, 무주에 이르러 대덕산(大德山)ㆍ적상산(赤裳山) 냇물과 합해서 금산 경계에 이르러 소이진(召爾津)ㆍ지화진(只火津)이 된다. 다시 이 물은 옥천에 이르러 호진(虎津)이 되고, 또 북쪽으로 흘러 적등진이 된다.상주 중모현(中牟縣) 물은 황간(黃澗)ㆍ영동(永同)을 지나고, 속리산 물은 보은ㆍ청산(靑山)에서 합류해서 북쪽으로 화인진(化仁津)이 되고, 회인(懷仁)을 지나서 말흘탄(末訖灘)이 되며, 서쪽으로 흘러 문의에 이르러서 이원진(利遠津)이 되는데, 이것을 또 형각진(荊角津)이라고도 한다. 이 물은 또 서쪽으로 동진(東津)과 합하고, 연기(燕岐)ㆍ동진ㆍ진천(鎭川)ㆍ청안(淸安)의 여러 냇물이 합류해서 청주 작천(鵲川)이 되고, 남쪽으로 흘러 목천ㆍ전의의 여러 냇물과 합해서 동진이 된다.다시 공주 북쪽에 이르러 금강이 되고 남으로 꺾어져 웅진과 부여에 이르러 백마강이 된다. 또 은진(恩津)에 이르러 강경포(江景浦)가 되고, 또 서쪽으로 꺾어져 석성의 고다진(古多津)ㆍ임천(林川)의 남당포(南堂浦)ㆍ한산(韓山)의 상지포(上之浦)ㆍ서천의 진포(鎭浦)가 되어 바다로 들어가는데, 임천에서 서천포에 이르기까지를 모두 진포라고 한다.
○ 계룡산 한 골짜기의 물이 동쪽으로 흐르다가 진잠(鎭岑) 남쪽에 이르러 차탄(車灘)이 되고 진산(珍山)의 옥계(玉溪) 하류와 합했으며 또 동쪽으로 공주ㆍ유성에 이르러 여러 냇물과 합해서 회덕의 갑천(甲川)이 되고, 또 선암천(船巖川)이 되며 북쪽으로 흘러서 형각진(荊角津)으로 들어간다.
○ 나주의 영산강은 그 근원이 여덟이 있는데, 하나는 담양의 추월산(秋月山)에서 나오고, 하나는 창평(昌平)의 무등산 서봉학(瑞鳳壑)에서 나오고, 하나는 광주의 무등산에서 나와서 합하여 남쪽으로 흐르다가 서쪽으로 꺾어져 칠천(漆川)이 되며, 하나는 장성의 백암산에서 나오고, 하나는 노령 남쪽에서 나오는데 흘러가다가 합해서 선암도(仙巖渡)가 되며, 하나는 능주(綾州)의 여참(呂岾) 북쪽에서 나와서 화순의 물과 합해서 흐르다가 다시 남평(南平)을 둘러 서쪽으로 흐르고, 하나는 영광 수연산(隨緣山)에서 나와서 작천(鵲川)이 되고,하나는 나주 북쪽 도야산(都野山)에서 나와서 장성천이 되는데, 합해서 흐르다가 나주 동쪽에 이르러 광탄이 되고 나주 남쪽은 영산강이 되는데, 이 강의 본이름은 금강진(錦江津)이다. 다시 서쪽으로 흘러 회진강(會津江)이 되고 무안에 이르러 대굴포(大掘浦)가 되고 덕보포(德甫浦)가 되며, 남쪽으로 흘러 두령량(頭靈梁)이 되고 서쪽으로 흘러 영암해로 들어간다. 고려 때에 이 물을 거슬러 흐르는 3대강(三大江)의 하나라고 하였다.
○ 광양의 섬진강은 근원이 진안(鎭安)의 중대(中臺) 마이산에서 나와서 합하여 임실의 오원천(烏原川)이 되고, 서쪽으로 꺾어져 남쪽으로 흘러 운암(雲巖) 가단(可端)을 지나서 태인의 운주산(雲住山) 물과 합하여 순창의 적성진(赤城津)이 되는데 이것을 ‘화연(花淵)’이라고도 한다. 이 물은 또 저탄(猪灘)이 되고, 또 동쪽으로 흘러서 남원의 연탄(淵灘)이 되며, 또 순자진(鶉子津)이 된다. 다시 옥과에 이르러 방제천(方梯川)이 되며, 곡성에 들어가서 압록진(鴨綠津)이 되고, 구례에 이르러 잔수진(潺水津)과 합하였다.잔수진은 근원이 동복(同福) 서석(瑞石) 동쪽에서 나와 현(縣) 남쪽 달천(達川)이 되고, 남쪽으로 흘러 보성 북쪽에 이르러서 죽천이 되는데, 이것을 또 ‘정자천(亭子川)’이라고도 한다. 다시 동북으로 흘러 순천의 낙수진(洛水津)이 되며, 잔수진에 이르러 순자강과 합하여 남쪽으로 흐르다가 화개(花開) 서쪽 경계에 이르러 용왕연(龍王淵)이 되는데, 여기는 바닷물이 들어오는 곳이다. 또 광양 남쪽 60리에 이르러 섬진강이 되는데, 그 동쪽 언덕은 바로 하동(河東)의 악양(岳陽)으로서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고려 때에는 이 물이 거슬러 흐르는 3대강의 하나라 하였고, 이름을 ‘두치강(斗峙江)’이라 하였다.
○ 만경(萬頃)의 신창진(新倉津)은 근원이 고산(高山)의 남천(南川)에서 나오는데, 운제산(雲梯山)과 주취산(珠崒山)의 물이 현(縣) 남쪽을 지나 흘러서 전주 북쪽으로 들어가 직연(直淵)이 되고 안천(鴈川)이 된다. 이 물은 또 삼례역(參禮驛) 남쪽에 이르러서 전주 남천의 북류와 합하며 또 서쪽으로 흘러 옥야(沃野)ㆍ이성(利城)을 거쳐 김제 경계에 이르러 신창진이 되는데, 바닷물이 들어온다. 만경현을 지나서 북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
○ 부안의 동진(東津)은 내장산과 노령 북쪽 여러 냇물이 합해서 북으로 흘러서 고부(古阜)의 모천(茅川)이 되며, 서쪽으로 꺾어져 태인의 남천(南川)과 합해서 북쪽으로 흘러 부안의 동진이 된다. 금구(金溝) 상왕산(象王山)의 물은 김제의 벽골제(碧骨堤)가 되고 서쪽으로 흘러 동진으로 들어간다. 흥덕(興德) 우등산(牛登山) 물은 고부의 눌제천(訥堤川)이 되어, 북쪽으로 흐르다가 동진으로 들어가고 서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 경상도의 낙동강은 근원이 태백산에서 나와서 동쪽으로 꺾어져 서쪽으로 흐르다가, 다시 꺾어져 남쪽으로 흘러서 경상도의 중간을 가로지르며, 또 동쪽으로 꺾어져 남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태백산 동쪽 줄기는 바다를 따라 남쪽으로 흐르고 서쪽 줄기는 서쪽으로 흐르다가 남으로 꺾어지며, 남쪽은 지리산에 이르고 다시 동쪽으로 가서 김해에 이른다. 경상도는 모두 한 수구(水口)를 이루니, 낙동강은 상주 동쪽을 말함이다.낙동강의 상류와 하류는 비록 지역에 따라 이름은 다르지만, 모두 통틀어 낙동강이라 부르며, 이 강은 또 ‘가야진(伽倻津)’이라고도 한다. 강 동쪽은 좌도(左道)가 되고, 강 서쪽은 우도(右道)가 된다. 고려 때에는 이 강과 호남의 섬진강ㆍ영산강 두 강을 거슬러 흐르는 3대강이라고 하였다.
○ 태백산의 황지(黃池)는 산을 뚫고 남쪽으로 나와서 봉화에 이르러 매토천(買吐川)이 되며, 예안에 이르러 나화석천(羅火石川)과 손량천(損良川)이 된다. 또 남쪽으로 흘러 부진(浮津)이 되며, 안동 동쪽에 이르러 요촌탄(蓼村灘), 물야탄(勿也灘), 대항진(大項津)이 된다.영양ㆍ진보(眞寶)ㆍ청송의 여러 냇물이 모두 합하여 서쪽으로 흘러 용궁(龍宮)의 비룡산(祕龍山) 밑에 이르러 하풍진(河豐津)이 된다. 풍기ㆍ순흥(順興)ㆍ봉화ㆍ영천의 물은 합하여 예천의 사천(沙川)이 되고, 문경(聞慶)ㆍ용연(龍淵)ㆍ견탄(犬灘)의 물은 남쪽의 함창(咸昌) 곶천(串川)에 와서 합한다.
○ 상주 북쪽에 이르러 송라탄(松蘿灘)이 되며, 상주 북쪽 동북 35리에 이르러 낙동강이 되며, 의성ㆍ의흥(義興) 여러 냇물은 군위ㆍ비안(比安)을 거쳐 와서 합쳐진다.
○ 선산 북쪽에 이르러 견탄(犬灘)이 되며, 선산부(善山府) 동쪽에서는 이매연(鯉埋淵)이 되고 여차니진(餘次尼津)이 되며, 선산부 동남쪽으로는 보천탄(寶泉灘)이 되었다. 속리(俗離)ㆍ황악(黃岳) 동쪽 물은 지례(知禮)의 감천(甘川)이 되어 금산(金山)ㆍ개령(開寧)을 거쳐 합친다.
○ 인동 서쪽에 이르러 칠진(漆津)이 되며, 성주 동쪽에 이르러 소야강(所耶江)이 되고 동안진(東安津)이 되니, 바로 대구 서쪽 경계이다. 영천(永川)ㆍ신령(新寧)ㆍ하양(河陽)ㆍ자인(慈仁)ㆍ경산(慶山)의 여러 물과 합하여 대구의 금호(琴湖) 달천진(達川津)이 되어 모두 합치고, 또 남쪽으로 흘러 무계진(茂溪津)이 되어 현풍(玄風)을 지나 서쪽으로 흐른다.
○ 고령 동쪽에 이르러 개산강(開山江)이 되며, 성주의 가천(伽川)은 고령으로 들어가서 합천의 야천(倻川) 하류와 합하여 동쪽으로 흘러서 다시 합친다.
○ 초계(草溪) 동쪽 창녕 서쪽에 이르러 감물창진(甘勿倉津)이 되며, 거창 덕유산 동남쪽 여러 냇물은 합하여 합천의 남강(南江)이 되고, 또 초계의 황둔진(黃芚津)이 되어 동쪽으로 흘러가서 합한다.
○ 영산(靈山) 서쪽에 이르러 기음강(岐音江)이 되어 촉석강(矗石江)과 합하여진다.
○ 진주의 촉석강은 그 근원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지리산 북쪽 운봉(雲峰) 경계에서 나와서, 함양의 임천(瀶川)이 되고 남쪽으로 흘러 용유담(龍遊潭)이 되고 엄천(嚴川)이 된다.이 물은 산청 경계에 이르러 안의의 동천(東川) 하류와 합하여 진주 서쪽에서 우탄(牛灘)이 되며, 단성(丹城)에 이르러 신안진(新安津)이 되는데, 삼가(三嘉)의 여러 냇물이 흘러 합쳐서 진주 서쪽에 이르러 소남진(召南津)이 된다. 하나는 지리산 남쪽에서 나와서 산을 돌아 동쪽으로 흐르다가 진주 서쪽에서 합쳐서 청천강(菁川江)이 되며, 성(城) 아래에 이르러 촉석강이 된다. 다시 동쪽으로 의령에 이르러 정암진(鼎巖津)이 되며, 영산(靈山)의 기음강(岐音江)에 이르러 낙동강과 합하고, 칠원 북쪽에 이르러 모질포(亐叱浦)가 된다. 이 물은 다시 흘러서 매포(買浦)가 되는 것이니, 이것을 혹은 ‘무포(茂浦)’라고도 한다.창원 북쪽에 이르러 주물연진(主勿淵津)이 되며, 밀양 남쪽 30리, 김해 북쪽 50리 경계에 이르러서 뇌진(磊津)이 되는데, 이곳은 혹 ‘해양강(海陽江)’이라고도 한다. 청도와 밀양의 물은 응천(凝川)이 되어서 영남루(嶺南樓)를 남쪽으로 돌아서 합쳐진다.
○ 또 동쪽으로는 삼랑창(三浪倉)이 있고 남쪽으로 흘러 옥지연(玉池淵) 황산강(黃山江)이 된다. 또 남쪽으로 양산(梁山)의 동원진(東院津)이 되며, 또 남쪽으로는 세 갈래 물이 되어서 김해부 남쪽 취량(鷲梁)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 보충 : 은하수의 형상은 하늘의 반쪽을 가로질렀는데, 동북쪽에서 시작하여 서남쪽에서 그쳤는데, 머리는 간방(艮方)이고 꼬리는 곤방(坤方)이다. 우리나라에 큰 강이 셋이 있는데, 압록강ㆍ대동강ㆍ한강으로서, 이 세 강은 모두 머리는 간방이고 꼬리는 곤방이다. 《성호사설》
○ 보충 : 우리나라 지도가 옛날에는 모두 평평하고 정방형이기 때문에 형세를 알 수 없었다. 영종(英宗) 경인년에 신경준(申景濬)에게 명하여 <동국지도(東國地圖)>를 만들게 하니, 관청에 보관했던 십여 가지를 내어 오고 또 널리 여러 사람들의 금ㆍ고본(今古本)을 찾아 내었으나, 정항령(鄭恒齡)이 가지고 있는 것이 가장 완전하였다.여기에 약간 교정을 더해서 <열읍도(列邑圖)> 8권과 <팔도도(八道圖)> 1권과 <전국도(全國圖)> 한 폭을 만들었는데, 주척(周尺 주 나라 척도(尺度)를 기준으로 삼음) 두 치로 한 선(線)을 하고 세로는 76선, 가로는 1백 31선으로 하게 하였다. 또 동궁에게 이와 같이 만들어 바치도록 하고, 임금이 친히 짧은 서문을 지어 족자 위에 썼다. 정씨(鄭氏)의 지도는 항령의 아버지로부터 시작하여 항령의 아들 원림(元霖)에 이르러 보충되었으니, 대개 3대(代) 50여 년이 걸려 비로소 이루어진 것이었다.

 연원직지 제5권
 회정록(回程錄) ○ 계사년(1833, 순조 33) 3월
4일

맑음. 사대자를 출발하여 40리를 가다가 책내(柵內)에 이르러 이내 머물렀다.
해 뜬 뒤에 떠났다. 오른편으로 봉성(鳳城)을 두고 지름길을 택해서 왼편으로 봉황산(鳳凰山) 밑을 따라갔다. 가면서 봉황산의 기이하고 수려함을 바라보니, 갈 때에 멀리서 보던 것과 비교할 정도가 아니었다. 별도로 봉황산기(鳳凰山記)가 있다.
책문 안에 채 이르기 전 5리 지점에 만부(灣府)의 군교(軍校), 통인(通引), 인로(引路) 무리들이 모두 전례에 따라 나와 대기하고 있었다. 그래서 비로소 우리나라의 위의(威儀)를 차리고 갔다.
이때 만부 사람은 들어온 지 이미 여러 날이었다. 길가의 구경꾼들 중에는 우리나라 사람이 많고 그 나라 사람은 적었다. 금문법(禁門法)이 이처럼 허술하니, 두 나라의 국경이 매우 허술하였다.
가서 책문 안에 이르렀다. 선래 군관(先來軍官)의 돌아온 편에 가서(家書)를 받아 보았으니, 선래 군관은 지난달 25일에 서울에 도착했던 것이다. 또 편지를 써서 만부의 파발 편에 부쳤다.
밤에 정사를 찾아가 보았다.

봉황산기(鳳凰山記)

《일통지(一統志)》에,
“봉황산은 도사성(都司城) 동쪽 300리 지점에 있다. 산 위엔 10만 군중을 수용할 만한 돌로 쌓은 옛 성이 있는데,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칠 때 여기에 주필(駐蹕)했었다.”
하였다. 이른바 옛 성이라는 것은 바로 지금 일컫는 바 ‘안시성(安市城)’이다. 10일 일기에 자세히 보인다.
산은 봉성 책문 사이에 있고 산 밑을 빙 둘러 작은 길이 있는데 바로 지름길이었다. 이 길을 거쳐 가면서 우러러보니, 푸른 봉우리가 1000길이나 우뚝 솟아 있었다. 관(關) 안팎 2000여 리 사이에는 오직 창려현(昌黎縣)의 문필봉(文筆峯)만이 약간 서로 겨룰 만하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도봉산(道峯山), 금강산(金剛山), 청량산(淸涼山), 월출산(月出山) 같은 여러 산들이 비록 기이하고 높다는 것으로 이름이 났지만, 첩첩이 솟은 봉우리들이, 마치 불꽃이 훨훨 타오르는 수만 개의 횃불을 꽂아 놓은 듯한 봉황산에 비하면 도리어 손색이 있을 듯싶다. 하얀 꽃이 공중에 떠 있는 듯한 동남쪽의 네댓 봉우리는 더욱 기특해서, 참으로 아침 해돋이에 보는 부용(芙蓉)처럼 매우 사랑스러웠다.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의 《연기(燕記)》에 대략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봉황성에 이르러서 산에 오르는 노정을 물었더니, ‘산에 오르는 길이 20리, 산에서 책(柵)에 이르는 길이 또 20리인데, 산길이 매우 험악하므로 오늘은 책에 도착할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동남쪽의 작은 길을 따라 산 아래로 향했다.
길의 멀고 가까움과 산 안의 승경(勝景)에 대해 물었더니, 산 위에 석문(石門)이 있고, 석문에 들면 대령사(大寧寺), 조양사(朝陽寺), 관음굴(觀音窟), 약왕전(藥王殿)이 있다. 여기에서 동쪽 작은 길로 해서 대령사에 이르는 데 10여 리, 대령사에서 동남쪽으로 안시성에 이르는 데는 60리가 된다고 했다.
또 몇 리를 가서 산 아래에 이르니, 길 왼편에 산신묘(山神廟)가 있고, 산신묘 왼편에 짧은 비석이 있었다. 드디어 말에서 내려 산을 오르니, 봉우리의 형세가 더욱 가파르고, 이따금 사방이 몇 길씩 되는 흰 돌이 있었다. 또 1리쯤 가니, 왼편에 10여 길 되는 절벽이 나온다. 층층 쌓인 돌이 30보 가량을 마치 병풍을 가로 벌여 놓은 것처럼 서로 연달아 있었다. 길은 벽 사이로 나서 겨우 말 한 필이 드나들 만하였는데, 이것이 이른바 ‘석문(石門)’이다. 문안은 평평한 길이어서 수레 두 대가 나란히 다닐 만하였다.
또 서남쪽으로 수 리를 가서 대령사에 이르렀다. 석문에서 여기까지는 양쪽 산이 골짜기를 끼고 서로 시새우는 듯 솟아 있어, 발길을 옮기고 얼굴을 돌릴 때마다 더욱 기이한 경치였다. 또 남쪽으로 4, 5백 보를 가다가 산꼭대기에 이르러서 뒤를 돌아보았더니, 수십 개의 기이한 봉우리가 마치 붓끝처럼 뾰족하고, 그 사이에 사관(寺觀)의 부연 끝이 듬성듬성 보였다. 북쪽으로 큰 돌봉우리가 땅에서 수십 길 솟았는데, 그 절벽에 마치 제비집이나 벌집처럼 매달린 조그만 집이 있었으니, 바로 관음굴이다.
서북쪽 봉우리 아래에 조양사가 있고, 조양사의 왼편 기슭이 관음굴 앞에 이르러 갑자기 3, 4길 우뚝 솟았다. 그 위에 약왕전(藥王殿)과 낭랑묘(娘娘廟)가 있는데, 모두 공중에 세워 암석을 인해 장벽(墻壁)을 만들었다. 대개 이 산은 오로지 봉우리 때문에 승경으로 유명하다. 꼭대기에 갑자기 동부(洞府 신선(神仙)이 사는 고장)가 이루어지고, 수많은 바위들이 숲처럼 빽빽이 서 있으나 험준한 산의 드센 모습은 전연 없으니, 이번 걸음에서 보던 산수 중 제일 장관이었다.
드디어 말을 타고 산등성이를 따라 남으로 몇 리를 내려와서 큰 구렁 가운데로 돌아들고, 또 동으로 몇 리를 내려오다가 다시 돌아서 북쪽으로 몇 리를 간 뒤에 골짜기 어귀를 빠져 나오니, 길이 돌아서 남쪽으로 나 있었다. 앞에는 험준한 재가 있어 좁은 길을 분별할 수 있었다.
골짜기를 따라 내려가니, 돌들이 울퉁불퉁 어지러워서 말이 잘 가질 못했다. 또 돌아서 북으로 몇 리를 더 가니 지형이 조금 펀펀했다. 비로소 골짜기 밖으로 벗어나니 확 트인 펀펀한 들판이었다. 또 남쪽으로 10리를 채 못 가서 책문에 이르렀는데, 해는 아직도 20리를 갈 만큼 남아 있었다. ……”
대개 이번 걸음에는 처음 떠날 때부터 반산(盤山), 각산(角山), 여산(閭山), 천산(千山) 및 이 봉황산을 유람할 계획을 미리 세웠었는데, 오직 반산만을 제대로 보게 되고, 각산과 여산은 비와 눈에 막히고, 또 다소 곤란한 일로 인해 역시 천산의 유람도 정지하였다. 일이 이처럼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가위 십중팔구이고 보면, 어찌 반드시 봉황산 하나에 마음이 끌리랴! 성신이 혼자 가 보고 싶다고 하기에 역시 만류하였다.
천산 서쪽, 봉황산 남쪽에 청량산(淸涼山)이 있어 봉성에서 170리 거리가 되는데, 봉우리의 기이한 것 또한 한 번은 볼만하다고 한다.
 임하필기(林下筆記) 제8권
 인일편(人日編)
경신(敬身)

문절공(文節公) 조원기(趙元紀)는 9세 때에 항상 장기를 두었다. 그의 아버지가 보고서 아내에게 가만히 말하기를, “우리 아이가 이미 무익한 일을 배웠으니, 어떻게 훌륭하게 되겠는가.” 하였다. 공이 이 말을 듣고 울면서 고하기를, “우연히 배웠는데 무익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만약 몸에 해가 된다면 어찌 감히 배워서 어버이에게 걱정을 끼쳐 드릴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마침내 평생토록 장기를 두지 않았다.

퇴계는 어려서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방 안에 혼자 앉아서 본원(本原)을 함양하였다. 사람을 대할 때에는 비록 오만한 기색을 두지 않았지만 절로 범하기 어려운 기색이 있었다.

회재(晦齋)는 크게 정력(定力 번뇌와 망상을 제거한 선정(禪定)의 힘)이 있어서 아무리 갑작스럽게 일이 닥치더라도 말을 빨리 한다거나 안색을 바꾼 적이 없이 정정(靜正)하게 스스로를 지켰다. 전주(全州)에 있을 때 절일(節日)에 민간 놀이가 행해졌는데, 감사(監司)인 김공(金公)은 품행이 단정한 사람이었는데도 가끔 돌아보며 웃었지만, 선생은 아무것도 보지 않는 것처럼 초연하였다.

일재(一齋) 이항(李恒)은 도봉산(道峯山) 망월암(望月菴)에 올라가서 마음을 거두고 무릎 꿇고 꼿꼿이 앉아 있었는데, 마침 승려들이 당(堂) 안에서 소란스럽게 떠들자 일어나 그 쪽을 쳐다보았다. 조금 있다가 스스로 뉘우치기를, “마음이 육체의 노예가 되었으니, 어떻게 공부를 하겠는가.” 하였다.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이 어슬렁어슬렁 들어오는 문인을 보고 꾸짖어 말하기를, “고어(古語)에 이르기를, ‘제1보(步)를 걸으면 마음이 제1보에 있고, 제2보를 걸으면 마음이 제2보에 있다.’ 하였으니, 이것을 몰라서는 안 된다.” 하였다.
잠곡유고 제9권
 서(序)
구루정기(傴僂亭記)

누대(樓臺)와 정사(亭榭)를 짓는 사람들은 모두가 적막한 것을 싫어하고 번잡한 것을 좋아하며, 기둥을 높게 세우고 보기에 화려하게 하여, 멀리는 강호(江湖)의 나루터 가에 세우고, 밖으로는 교외의 논밭 사이에 세운다. 그러나 묘시(卯時)에서 유시(酉時)까지 관아에서 일을 보느라 한번 올라가 볼 겨를이 없어서 도리어 인근 사람이나 지나가는 객이 그 위에 올라가서 한가롭게 소요하는 것만도 못하니, 실로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세운 것이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다. 혹은 대문을 걸어잠가 다른 사람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사람도 있으니, 어찌 크게 우스운 일이 아니겠는가.
내가 우거하고 있는 집의 뒤편에 세 칸짜리 집을 세울 만한 작은 언덕이 있었다. 이에 드디어 띠풀을 엮어서 초가집을 세우고는, 안쪽에 있는 당(堂)을 공극당(拱極堂)이라 이름하고 그 바깥쪽에 있는 정자를 구루정(傴僂亭)이라고 이름하였는데, 이는 지붕이 낮아서 머리가 부딪히므로 반드시 허리를 구부린 다음에야 움직일 수가 있으므로 그렇게 이름지었다.
그 정자의 크기는 비록 작지만, 위치해 있는 곳은 높고도 기이하며, 바라다 보이는 곳은 넓고도 멀다. 바위는 우뚝하고 소나무는 푸르러서 마치 조각한 것 같기도 하고 꽂아 놓은 것도 같아 창 밖에 우뚝하니 서 있는 것은 목멱산(木覓山)의 잠두봉(蠶頭峯)이고, 용처럼 꿈틀대고 호랑이처럼 쭈그리고 있어서 달려가기도 하고 멈추기도 하여 서로 마주 대하여 돌아보고 있는 것은 백악산(白岳山)과 낙산(駱山)이다. 난새가 멈춘 듯 아름답고 고니가 서 있는 듯 우뚝하여 마치 날아가려다가 날아오르지 않은 듯한 것은 필운산(弼雲山)이고, 붓을 꽂은 듯 뾰족하고 홀을 세운 듯 우뚝하여 나아가려고 하다가 서 있는 듯한 것은 도봉산(道峯山)이다.
수락산(水落山)은 노원(蘆原)의 뒤편에서 마치 불곡산(佛谷山)을 전송하는 것 같고, 무악산(毋岳山)은 안현(鞍峴)의 위에 있으면서 마치 부아봉(負兒峯)을 좇는 듯하여, 기괴한 형상과 이상한 모양새가 여기저기 겹쳐서 나타난다. 그리고 백운봉(白雲峯)과 인수봉(仁壽峯) 등 여러 봉우리가 저 멀리 구름 하늘 밖 아득한 곳에 삐쭉하니 솟아 있는 모습이 더더욱 경외스럽고 사랑스러우니, 아침이면 아침대로 저녁이면 저녁대로 안개와 구름이 변화함에 따라 혹 숨기도 하고 드러내기도 하며, 혹 합해지기도 하고 혹 떨어지기도 한다. 그 누가 성시(城市) 안에 이처럼 신선의 경치가 있는 줄을 알겠는가.
저 강호의 경치와 교외의 흥취가 즐겁기는 하지만 항상 거기에 머물러서 살 수는 없으니, 한번 가고 두 번가는 사이에 해가 이미 짧다. 그러니 어찌 이곳에서 잠자고 거처하며 이곳에서 먹고 숨쉬면서 천변만화를 보며 마음과 눈을 즐겁게 하고 사시 팔절(四時八節)에 항상 창가에서 마주 대하는 것만 같겠는가.
나는 팔도(八道)를 두루 유람하였지만 경치를 감상할 마음이 일어나는 곳은 보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70여 년이 지난 뒤에 비로소 명승지를 얻어서 정자를 지었으니, 돌 틈 사이의 물은 갓끈을 빨 만하고 바위 사이의 물은 양치질을 할 만하며, 대나무를 쪼개 만든 수로(水路)로 물을 대어 연못에는 연꽃을 심을 수가 있고, 고기를 기르고 학을 기르며 만물을 친구로 삼을 수가 있다. 종일토록 적료하여 시장통의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 오지 않으니, 이는 참으로 평소 꿈속에서도 생각지 못하던 곳이다.
비록 그러하나 큰길을 한번 바라다보면 여염집들은 땅에 나지막하게 있고, 두 대궐 쪽을 바라다보면 대궐 용마루가 하늘에 접해 있다. 이에 도성 사람들이 구름과 같이 오가며 보는 자가 많으니 나도 모르게 마음이 떨려서 높게 짓는 것이 혐의스럽다. 이 때문에 처마와 서까래를 낮게 하고 담장을 낮게 한 다음 소나무와 대나무로 뒤편에 울타리를 쳐서 검소함을 밝게 드러내 보였다.
높은 데 있으면서는 위태로움을 생각지 않아서는 안 되고, 방에 들어와서는 내려다보는 것을 생각지 않아서는 안 된다. 그러니 어찌 감히 마음이 상쾌해지는 것만 좋아하여 처사(處士)처럼 창가에 기대어 공상 속에 잠겨서야 되겠는가. 옛 솥의 명(銘)에 이르기를, “일명(一命)의 관원은 허리를 낮게 굽히고, 재명(再命)의 관원은 허리를 굽히고, 삼명(三命)의 관원은 머리를 수그린다.” 하였다. 나는 이 말에 깊이 느껴지는 바가 있어 머리를 수그리고서 나의 정자 이름을 지었다.

[주D-001]묘시(卯時)에서 유시(酉時)까지 : 옛날에 관원들이 묘시에 출사하여 유시에 퇴근하였다

점필재집 시집 제16권
 [시(詩)]
여름날에 금중에 숙직하면서 응제하여 두 수를 짓다[夏日禁直應制二首]

시강원은 금호문의 동쪽에 위치하여 / 侍講司存金虎東
도봉산 높은 곳에 조용하기도 하여라 / 道山高處且從容
동글동글한 자주빛 오얏은 옥사발에 떠 있고 / 團團紫李浮磲椀
우뚝 솟은 푸른 소나무는 계궁을 그늘지우네 / 落落靑松蔭桂宮
진경이 외일 과시함은 느끼지 못하겠고/ 未省晉卿誇畏日
초객이 웅풍부 지은 것은 가소롭구나 / 堪嗤楚客賦雄風
미천한 신하가 훈현곡에 화답하면서 / 小臣擬和薰絃曲
다시 남와의 장양하는 공을 하례하노라 / 更賀南訛長養功

흰 모시옷 검은 모자에 땀이 흠뻑 젖어라 / 白紵烏紗汗正濃
분수 넘친 금화전에 무능한 나를 두시었네 / 金華非分著疎慵
해 바퀴 정오에 이르니 꽃그늘은 말아 들고 / 日輪午駐花陰卷
대궐 모서리 서늘하니 대자리 그림자 없어졌네 / 闕角凉生簟影空
때로는 아첨 집어다 졸린 눈에 뻗지르고 / 時點牙籤挑睡睫
한가히 누수 들으며 저녁 종을 기다리기도 / 閑聽銅漏待昏鐘
성상께선 오히려 백성의 더위를 염려하여 / 九重尙軫元元熱
감옥에까지 얼음을 나눠 주도록 윤허하도다 / 更許頒氷岸獄中

[주D-001]진경이 외일……못하겠고 : 더위를 느끼지 못함을 비유한 말. 진경은 춘추 시대 진(晋) 나라의 정경(正卿)이었던 조순(趙盾)을 가리키는데, 《좌전(左傳)》 문공 7년(文公七年)에 “조최(趙衰)는 겨울날의 태양이요, 조순은 여름날의 태양이다.” 한 주에 “겨울의 태양은 사랑스럽고, 여름의 태양은 두렵다.[冬日可愛 夏日可畏]”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2]초객이 웅풍부 지은 것 : 초객은 전국 시대 초 나라의 문장가인 송옥(宋玉)을 가리키는데, 그가 지은 〈풍부(風賦)〉에 의하면 “맑고 시원하여 이목(耳目)을 틔워 주는 것은 대왕(大王)의 웅풍(雄風)이다.”고 하였다.
[주D-003]훈현곡 : 임금의 시문(詩文)을 비유한 말. 순(舜) 임금이 오현금(五絃琴)을 만들어 타면서 〈남풍시(南風詩)〉를 지어 노래하였는데, 그 노래에 “남풍의 훈훈함이여 우리 백성의 성냄을 풀어 줄 만하도다[南風之薰兮 可以解吾民之慍兮]”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4]남와의 장양하는 공 : 와(訛)는 변화(變化)의 뜻으로서, 즉 여름철에 시물(時物)이 장성(長盛)하여 변화하는 것을 말한다. 《書經 堯典》
청음집 제2권
 칠언절구(七言絶句) 110수(一百十首)
축석령(祝石嶺)에서 도봉(道峯)을 바라다보다

맑은 새벽 돌아오매 눈은 얼어 맑거니와 / 淸曉歸程凍雪晴
높이 솟은 도봉산은 옥 솟은 듯 아름답네 / 道峰高出玉崢嶸
이 년 동안 변방에서 늘 그리던 곳이기에 / 二年關塞經心處
꿈속에서 가는 건가 오늘 되레 의심하네 / 今日還疑夢裡行
청음집 제9권
 조천록 시(朝天錄 詩) 136수 문 14수(一百三十六首 文 十四首)
영설(詠雪) 시의 운을 차운하다
청음집 제9권
 조천록 시(朝天錄 詩) 136수 문 14수(一百三十六首 文 十四首)
영설(詠雪) 시의 운을 차운하다

햇빛 받아 흩날리매 찬란하기 꽃과 같고 / 映日飄零爛似花
바람 따라 춤을 추매 내려오다 비껴 나네 / 逐風飛舞整還斜
찬 빛 놓고 달 속 사는 옥토끼와 힘 겨루고 / 寒光共鬪月中兎
하얀 색깔 지붕 위의 까막에게 나눠 주네 / 縞色先分屋上鴉
화로 끼고 술 마심이 이런 때의 흥이거니 / 擁鑪開酒此時興
물 건너편 어느 집서 매화꽃을 보려는가 / 隔水看梅何處家
어젯밤에 꿈에서 본 고향 모습 그대로라 / 昨夜依然故園夢
천 겹 겹친 도봉산과 백악 솟아 있었다네 / 道峯千疊白差差
청장관전서 제9권
 아정유고 1(雅亭遺稿一) - 시 1
서씨(徐氏)의 동장(東莊)에 놀면서

짝짝이 손을 잡고 발걸음 가지런히 하여 / 儔侶聯翩步屧齊
도봉산 서편에 있는 서씨의 정자 찾아가네 / 徐家亭子道峯西
그윽한 꽃은 중을 만나 이리저리 떨어지고 / 幽花漠漠逢僧落
밝은 달은 부산히 손을 맞느라 낮게 뜨네 / 白月紛紛向客低
전처럼 얽힌 마름은 그림자 많은 나무인 듯 / 依樣亂萍多影樹
칠분쯤 차가운 비는 잘 울리는 시내인 듯 / 七分寒雨善鳴溪
두 번째 유람 때맞추어 제비 따라와서 / 重遊政逐新來燕
함께 잠자니 도리어 대대의 깃듦과 같네 / 幷宿還同對待栖
시냇가에 말없이 우뚝 섰으니 / 溪頭無語立亭亭
고운 아지랑이 끝없이 푸르구나 / 嵐靄娟鮮透底靑
봄 만난 기수 이제 막 싹이 트고 / 祇樹逢春初蘊秀
비 내린 구암 더욱더 신비롭다 / 癯巖歷雨最鍾靈
술값은 사시사철 빚만 질 것인가 / 酒錢未必尋常負
꽃 소식 이제부터 이십번풍(二十番風) 지났구나 / 花信從它二十零
나무와 돌뿐인 곳에 담박하게 살았지만 / 木石之濱棲澹泊
도리어 예스런 모습 개운한 기상 다시금 보겠네 / 却看貌古又神醒

[주C-001]서씨(徐氏) : 서상수(徐常修)를 가리킨다.
[주D-001]이십번풍(二十番風) : 꽃소식인 이십사번 화신풍(二十四番花信風)을 말한다. 한 달이면 기(氣)가 둘, 후(候)가 여섯으로 소한(小寒)에서부터 곡우(穀雨)까지 4개월에 걸쳐 모두 24후로서 5일마다 한 후씩 계산하여 꽃 한 가지에 해당시키는 방법이다.《焦氏筆乘
추강집 제2권
 시(詩)○칠언율시(七言律詩)
말 위에서 즉흥으로 읊다 진퇴격(進退格)
추강집 제2권
 시(詩)○오언고시(五言古詩)
신축년(1481, 성종12) 9월 11일 숙도(叔度)ㆍ종지(宗之)와 함께 송도(松都)를 유람하기로 약속하고 서울을 출발하다

선비는 사방 유람할 뜻 있거늘 / 士有四方志
속인들은 도리어 알지 못한다네 / 諸兒却未知
내 벗 조숙도와 / 有友曺叔度
시인 이종지는 / 詩人李宗之
다행히 평생의 교분을 얻어 / 幸得百年分
평소에 품은 생각 잘 안다오 / 平生知襟期
짐 싣는 노새 한 마리 거느리고 / 相將馱一驢
필마 타고 해아를 따르게 했네 / 匹馬隨奚兒
하늘 닿은 도봉산 푸르디푸르니 / 參天道峰
두루 돌아보며 나그네 시름 푸네 / 歷覽舒孤羈
가을 강은 붉은 비단 수놓았고 / 秋江綉紅錦
가을 풀은 온통 어지럽게 날리네 / 秋草長離披
강과 산은 이렇게도 빼어나건만 / 江山縱奇絶
늙은 이 사람 시로 담지 못하네 / 老夫不能詩

[주D-001]해아(奚兒) : 아이종이다. 당나라 이상은(李商殷)이 지은 〈이하소전(李賀小傳)〉에 의하면, 이하가 제공(諸公)들과 노닐 때에 항상 아이종〔小奚奴〕으로 하여금 비단 주머니〔錦囊〕를 지고 따르게 하다가, 시를 지으면 곧바로 주머니 속으로 던져 넣었다고 한다.
 춘정집 추보(追補)
 연화문(緣化文)
양주(楊州) 해촌(海村)의 덕해원(德海院) 조성을 위한 연화문(緣化文)

도봉산 아래 / 道鳳山之下
해촌이란 등성이 있는데 / 有原曰海村
도성에서 겨우 한 번 쉴 거리라서 / 距城僅一息
행인이 다투어 분주히 이른다 / 行人競來奔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올 즈음이면 / 至若夏秋交
빗줄기가 항상 세차게 퍼붓고 / 密雨恒傾盆
엄동에는 눈이 정강이까지 쌓여 / 窮冬雪沒脛
매서운 한기 속에 해가 저문다 / 寒嚴日仍昏
헐벗고 서서 어디에 깃들 것인가 / 赤立何所寓
벌판에 처한 형세가 짐승이 웅크린 듯하다 / 野處如獸屯
내가 측은하게 여겨 / 鄙夫爲惻然
널리 존비(尊卑)에 고하여 / 普告卑與尊
이에 원 하나를 창건하려 하니 / 於焉創一院
음덕은 갖추어 논하기 어려우나 / 陰德難具論
한기를 따뜻하게 하고 습기를 말리며 / 燠寒乾其濕
고통과 괴로움이 기쁨으로 변할 것이다 / 苦辛變懽忻
천자가 거듭 선을 권하고 / 帝明重勸善
성상이 마침 은혜를 베푸니 / 聖上方推恩
원컨대 각기 돈을 시주하여 / 願言各施錢
인정에 일조하기 바란다 / 仁政一助云


 춘정집 추보(追補)
 연화문(緣化文)
양주(楊州) 해촌(海村)의 덕해원(德海院) 조성을 위한 연화문(緣化文)

도봉산 아래 / 道鳳山之下
해촌이란 등성이 있는데 / 有原曰海村
도성에서 겨우 한 번 쉴 거리라서 / 距城僅一息
행인이 다투어 분주히 이른다 / 行人競來奔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올 즈음이면 / 至若夏秋交
빗줄기가 항상 세차게 퍼붓고 / 密雨恒傾盆
엄동에는 눈이 정강이까지 쌓여 / 窮冬雪沒脛
매서운 한기 속에 해가 저문다 / 寒嚴日仍昏
헐벗고 서서 어디에 깃들 것인가 / 赤立何所寓
벌판에 처한 형세가 짐승이 웅크린 듯하다 / 野處如獸屯
내가 측은하게 여겨 / 鄙夫爲惻然
널리 존비(尊卑)에 고하여 / 普告卑與尊
이에 원 하나를 창건하려 하니 / 於焉創一院
음덕은 갖추어 논하기 어려우나 / 陰德難具論
한기를 따뜻하게 하고 습기를 말리며 / 燠寒乾其濕
고통과 괴로움이 기쁨으로 변할 것이다 / 苦辛變懽忻
천자가 거듭 선을 권하고 / 帝明重勸善
성상이 마침 은혜를 베푸니 / 聖上方推恩
원컨대 각기 돈을 시주하여 / 願言各施錢
인정에 일조하기 바란다 / 仁政一助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