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봉산 관련 기록/망월사 관련 기사(문헌)

망월사 관련 기록

아베베1 2010. 2. 4. 15:02

명재유고 제1권
 시(詩)
김신수(金新叟)와 이미숙(李美叔) 상경(尙絅) 에게 부쳐 보내다


정수암에 와서 머무는 중에 / 來棲淨水庵
홀연히 망월사 중을 만났는데 / 忽逢望月僧
그에게 들으니 두 큰 선비가 / 聞說二大士
문회 통해 학문 날로 향상된다네 / 文會學日增
생각하면 벗들끼리 모이는 낙을 / 言念聚友樂
옛 분들도 자주자주 말씀했으니 / 古人曾屢稱
관선이니 보인이니 하는 말씀은 / 觀善輔仁語
천 년토록 가슴에 담을 교훈들 / 千載可服膺
독서는 전심(專心)이 중요하다는 / 讀書貴收心
성현의 교훈 직접 들은 듯하니 / 聖訓如面承
한공이 자식을 경계한 글은 / 韓公戒兒作
내용이 고루하여 취할 게 없지 / 陋矣無足徵
어찌하면 한자리에 모여 앉아서 / 安得合丈席
밤 깊도록 심도 깊게 토론 벌일까 / 細討深夜燈
어느새 한 해가 또 저물고 있어 / 聊持歲暮懷
벗들에게 이 감회를 부쳐 보내네 / 眷言寄良朋


 

 관선은 친구들끼리 서로 좋은 점을 보고 배우는 것을 말한다. 《예기(禮記)》 학기(學記)에 “대학의 교육 방법은 좋지 않은 생각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을 예(豫)라고 하고, 적절한 시기에 가르치는 것을 시(時)라 하고, 감당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가르치는 것을 손(孫)이라 하고, 서로 좋은 점을 보고 배우도록 하는 것을 마(摩)라고 한다.” 한 데서 나온 말이다. 보인(輔仁)은 벗을 통해서 자신의 인격을 수양한다는 뜻으로, “군자는 학문으로써 벗을 모으고, 벗으로써 인을 돕는다.〔君子 以文會友 以友輔仁〕”는 증자(曾子)의 말에서 나온 것이다. 《論語 顔淵》
: 당(唐)나라 한유(韓愈)의 시 부독서성남(符讀書城南)으로, 아들 부(符)에게 독서하기를 권면하는 내용이다. 《韓昌黎集 卷6》

 

 

청장관전서 제9권

 아정유고 1(雅亭遺稿一) - 시 1
서씨(徐氏)의 동장(東莊)에 놀면서


짝짝이 손을 잡고 발걸음 가지런히 하여 / 儔侶聯翩步屧齊
도봉산 서편에 있는 서씨의 정자 찾아가네 / 徐家亭子道峯西
그윽한 꽃은 중을 만나 이리저리 떨어지고 / 幽花漠漠逢僧落
밝은 달은 부산히 손을 맞느라 낮게 뜨네 / 白月紛紛向客低
전처럼 얽힌 마름은 그림자 많은 나무인 듯 / 依樣亂萍多影樹
칠분쯤 차가운 비는 잘 울리는 시내인 듯 / 七分寒雨善鳴溪
두 번째 유람 때맞추어 제비 따라와서 / 重遊政逐新來燕
함께 잠자니 도리어 대대의 깃듦과 같네 / 幷宿還同對待栖
시냇가에 말없이 우뚝 섰으니 / 溪頭無語立亭亭
고운 아지랑이 끝없이 푸르구나 / 嵐靄娟鮮透底靑
봄 만난 기수 이제 막 싹이 트고 / 祇樹逢春初蘊秀
비 내린 구암 더욱더 신비롭다 / 癯巖歷雨最鍾靈
술값은 사시사철 빚만 질 것인가 / 酒錢未必尋常負
꽃 소식 이제부터 이십번풍(二十番風) 지났구나 / 花信從它二十零
나무와 돌뿐인 곳에 담박하게 살았지만 / 木石之濱棲澹泊
도리어 예스런 모습 개운한 기상 다시금 보겠네 / 却看貌古又神醒


[주C-001]서씨(徐氏) : 서상수(徐常修)를 가리킨다.
[주D-001]이십번풍(二十番風) : 꽃소식인 이십사번 화신풍(二十四番花信風)을 말한다. 한 달이면 기(氣)가 둘, 후(候)가 여섯으로 소한(小寒)에서부터 곡우(穀雨)까지 4개월에 걸쳐 모두 24후로서 5일마다 한 후씩 계산하여 꽃 한 가지에 해당시키는 방법이다.《焦氏筆乘》
명재유고 제1권
 시(詩)
옛날을 생각하며

망월사에 뜬 달은 그대로인데 / 望月月長在
부여의 왕들은 어디로 갔나 / 扶王何處歸
아득하고 아득한 망국의 한을 / 悠悠亡國恨
산승이 어떻게 알 수 있으랴 / 山僧那得知
【불우】 회암사(檜巖寺) 천보산에 있다. 고려 때 서역(西域) 중 지공(指空)이 여기에 와서 말하기를, “산수 형세가 완연히 천축국(天竺國) 아란타(阿蘭陀) 절과 같다.” 하였다. 그 뒤에 중 나옹(懶翁)이 절을 세우기 시작하였으나 마치지 못하고 죽었고, 그 제자 각전(覺田) 등이 공역을 마쳤다. 집이 무릇 2백 62칸인데, 집과 상설(象設)이 굉장ㆍ미려하여 동방(東方)에서 첫째였고, 비록 중국에서도 많이 볼 수 없을 정도였는데, 목은(牧隱)이 기문을 지었다.
○ 고려 왕자 중 원경(圓鏡)의 글씨가 남루(南樓) 동서 벽과 객실(客室) 서편 다락에 남아 있다. 필중이 이르기를, “대정(大定 금국(金國) 세종의 연호) 갑오년에 서도(西都)가 반역하여 서북 방면 길이 막혔다. 그때 금국 사신이 오니, 춘천(春川)길을 따라서 인도하여 맞아 들였다. 금국 사신이 절에 들자 상설에 예배하고, 모여서 글씨를 보았다. 한 사람은, ‘귀한 분의 글씨이다.’ 하고, 한 사람은, ‘이것은 산인(山人)의 글씨이니, 나물과 죽순을 먹은 기운이 자못 남아 있다.’ 하였다. 중이 옆에 있다가 사실을 알리니, 두 사람이 모두 제 말이 맞았음을 기뻐하고 이에 시를 썼다. ‘왕자는 고량(膏粱) 기운이 반쯤 남았고, 중은 소윤의 흔적이 오히려 남았네. 미친 장지(張芝)와 취한 회소(懷素)는 온전한 골기가 없었다. 이 글씨는 당년에 중된 것이 문득 한이로구나.’ 하였다.” 한다.
○ 김수온(金守溫)이 지은 중창기(重創記)에, “우리나라 산수 경치가 천하에 이름이 났으며, 불사로서 그 사이에 있는 것이 또 몇 십 개인지 모르지만, 인사(仁祠) 제도의 극진한 것과 법왕(法王)ㆍ행화(行化)의 체제를 갖춘 것은 회암(檜巖)같은 것이 없다. 옛적 천력(天曆 원 나라 문종의 연호) 연간에 서천박가납제존자(西天博伽納提尊者)가 이 절터를 보고, ‘서천 아란타사 터와 꼭 같다.’ 하고, 또 ‘가섭불(迦葉佛) 때에 벌써 큰 도량이 되었다.’ 하였다. 이에 먹줄을 잡아 측량하여 그 자리를 정할 때에 오래 된 주추와 섬돌을 발견 하였다. 그리하여 당시에는 임시로 집을 덮어서 그 대개를 표시했을 뿐이었다. 얼마 뒤에 현릉왕사보제존자(玄陵王師普濟尊者)가 지공에게 삼산(三山)과 양수(兩水)에 대한 기(記)를 받고, 드디어 여기에 와서 살았다. 이에 크게 창건하고자 하여, 책임을 나누어 맡기고 바쁘게 불연(佛緣)을 모집하였다. 그러나 공역이 반도 못되어서 왕사도 또한 서거(逝去)하였다. 그의 제자 윤절간(倫絶澗) 등이 왕사의 이루지 못한 뜻을 생각하여, 그가 남긴 규모를 계승하여 공역을 마쳤다.” 하였다.
○ 목은 문정공이 기를 쓰기를, “보광전(普光殿) 5칸이 남으로 향했고, 전 뒤에는 설법전(說法殿)이 5칸이다. 또 그 뒤에는 사리전(舍利殿)이 1칸이고, 또 그 뒤에는 정청(正廳)이 3칸이다. 정청 동쪽과 서쪽에 방장(方丈)이 두 곳인데 각 3칸이다. 동쪽 방장 동편쪽에는 나한전(羅漢殿)이 3칸이고, 서쪽 방장 서편에는 대장정(大藏殿)이 3칸이다. 보광전 동쪽과 서쪽에서 좌우로 나뉘어, 여러 전이 우뚝하게 섰고, 여러 요사들이 높고 낮게 되었으며, 종루(鐘樓)ㆍ사문(沙門)과 부엌의 장소와 빈객(賓客)의 자리가 질서정연하다. 지붕이 연달아 뻗쳤고, 골마루가 덩굴처럼 돌아서 높고 낮고 아득한 것이 동서를 모르겠다. 무릇 집 지은 것이 2백 62칸이었다.” 하였다.
○ 이로부터 재간(才幹) 좋은 사람이 대마다 끊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혹 불전을 시작했으나 승료(僧寮)까지는 미처 못했고, 혹 종루는 보수했으나 객실에는 미치지 못하여, 동쪽을 수리하자 서쪽이 벌써 기울고, 남쪽을 고치면 북쪽이 또 상했다. 이는 절이 큰 까닭에 일이 거창했고, 일이 거창한 까닭에 사람이 능히 두루 짓고 다 잇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나라의 큰 총림이 거의 빈 집이 되었다.
○ 성화(成化 명(明) 나라 헌종(憲宗)의 연호) 임진년 봄에 대왕대비 전하께서 하성부원군(河城府院君) 정현조(鄭顯祖)에게 의지(懿旨)를 전해서 말씀하시기를, “내 한 부인으로서 조부의 여음(餘蔭)을 받들어 우리 세조대왕을 돕고, 성자 신손(聖子神孫)을 낳아 길렀다. 이것은 비록 황천(皇天)이 동방(東方)을 돌보신 것이나, 또한 오랜 세대로 덕을 닦은 것이 불법에 근본하였던 것이다. 예부터 자애로운 어미가 그 자손을 보호하고자 하고, 충신이 그 임금의 장수를 빌고자 하면, 오직 삼보(三寶 부처)에 귀의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회암은 동국에서 큰 가람(伽藍 절)이다. 세 화상(和尙)이 서로 이어서 개산(開山)하였는데, 세 개의 산과 두 가닥 물 사이라는 말이 지공(指空)에서 비롯하였으니, 실상 임금의 장수를 빌고 나라를 복되게 하는 곳이다. 내 들으니, 터 쌓은 것이 견고하지 못하고, 전사(殿舍)의 섬돌을 잡석(雜石)으로 쌓았기 때문에, 창건한 지 오래 되지 않아서 집이 벌써 퇴락하였다 한다. 지금 간각(間閣)의 제도는 옛날대로 하여 고치지 않고, 뜰에 박힌 것은 모두 다듬은 돌로써 바꾸고자 하는데, 공역(工役)을 계산하니 초창하는 것보다 두 배나 된다. 경(卿)도 또한 덕을 심은 인과(因果)가 있었으므로, 공주(公主)와 짝할 수 있었으니, 경은 힘을 다해서 나의 넓은 원심(願心)을 이루게 하라.” 하였다. 현조(顯祖)가 대답하기를, “세상에서 모두 중수(重修)하는 일이 새로 시작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합니다. 재물과 곡식 저축이 많다 하더라도, 진실로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성공할 수 없습니다. 지금 정양사(正陽寺) 주지(住持) 처안(處安)은 부지런하고 민첩하며, 일을 감당할 만한 재질로서, 그를 따를 자가 적습니다.” 하니, 의지(懿旨)로써 허락하였다. 드디어 처안(處安)을 회암사에로 이주(移住)시키고, 재물과 곡식 따위 비용은 내수사(內需司)에서 전적으로 맡아서 모자라는 대로 보급하여 쓰임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부원군도 또한 개인의 재산을 내어서 모자라는 것을 제공하였다. 처안이 승도(僧徒)와 속인(俗人)으로서 자원(自願)하는 자를 모집하고, 일한 것을 계산하여 품값을 주도록 아뢰었다. 날마다 만 여명을 사역 시켰으나 감독하지 않아도 저절로 힘껏 하였다. 그 해 월 일에 시작해서 거의 열 석 달을 지나 마쳤다. 전사(殿舍) 칸살은 다시 고친 것이 없고, 난간과 담의 넓고 좁음도 보태거나 줄인 것이 없어도 방문과 문 차면이 더욱 넓어졌고, 단청을 칠하여 더욱 현란하였다. 백여 년 퇴락한 옛 절이 일조에 새로운 보찰(寶刹)로 변하게 되었다.” 하였다.
○ 이색(李穡)의 시에, “노송나무 푸르고 돌 기세 완악 한데, 잎 사이 풍우로 공중 기후가 차다. 늙은 중 출정(出定)하여 성색(聲色)을 잊으니, 머리 위에 구슬 같이 세월이 달리는 구나.” 하였다.
○ 성임(成任)의 시에, “손에 익은 여장(藜杖) 짚고 절 찾아가니, 장송(長松)이 바위에 기대어 나지막하네. 산 이름을 중에게 묻지 않고, 문에 걸린 현판에서 큰 글자 본다. 만학(萬壑)에 구름 피니 숲이 더 깊고, 천년 일 아득한데 새 자주 운다. 삼사탑(三師塔)이 칡덩굴 넘어 있어 꼭대기에 오르려니, 마음 더욱 아득하다.” 하였다.
봉선사(奉先寺) 주엽산(注葉山) 광릉(光陵) 남쪽 둔덕에 있다.
○ 김수온(金守溫)이 지은 기문에, “봉선사(奉先寺)란 것은 우리 대왕대비 전하께서 세조 대왕을 위해서 창건한 것이다. 성화(成化) 기원(紀元) 4년에 우리 세조 대왕께서 승하하시니, 여러 신하가 양주(楊州) 땅에서 동쪽으로 30리 지점에 터를 가렸는데, 산은 주엽(注葉)이고 둔덕은 운악(雲岳)이다. 그해 12월에 세조 대왕의 현궁(玄宮)을 받들어 장사하니, 예(禮)대로 한 것이다.” 하였다. 대왕대비께서 의지(懿旨)를 내리기를, “우리 대행대왕께서 몸소 큰 변란을 만나, 백성이 크게 원망하는 것을 바로잡았으니, 성스러운 덕과 높은 공은 동방이 생긴 이래로 비교할 데가 없다. 국가가 불행하여 갑자기 뭇 신민을 버리시니, 아, 애통하다. 옛 제도를 상고하니, 선왕의 능침(陵寢)에는 반드시 정사(精舍)를 설치하였다. 지금 큰일을 마쳤으니, 경들은 절 지을 터를 살펴서 아뢰어라.” 하였다. 이에 임금께서 하성부원군(河城府院君) 신 정현조(鄭顯祖),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신 한명회(韓明澮), 능성부원군(陵城府院君) 신 구치관(具致寬) 등을 제조(提調)로 삼았다. 능실(陵室) 남쪽에 깊숙한 구역 하나가 있는데, 산이 감돌았고 물이 차서 절 터로서 알맞으므로, 신 현조 등이 아뢰어서 허락을 받았다.
○ 기축년 6월에 짓기 시작하여, 가을 9월에 마쳤다. 칸살을 계산하면 총 89칸이고, 검고 붉은 것을 발라서, 극히 선명하였다. 불전과 승료(僧寮)가 빛나고 넓으며, 방울과 목탁이 바람만 불면 절로 울렸다. 천석(薦席)과 상탑(床榻)이 곱고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으며, 빗장과 방망이 따위 도구와, 집기 따위도 넉넉하게 구비하여, 여러 사찰 중에 비교될 곳이 없었다. 전지(田地)와 노비ㆍ전곡(錢穀) 등 상주하기 위해 밑천으로 하는 숫자는, 영구히 부처와 중의 공양을 위한 것으로서 별도로 문부(文簿)가 있으므로, 여기에 언급(言及)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해 9월 7일에 세조를 위한 천도(薦度)를 크게 베풀어서 낙성(落成)하였다. 또 의지(懿旨)에 이르기를, “절을 지었으나 능침과는 둔덕이 서로 격했으니, 절 곁에다가 진전(眞殿)을 지어서 하늘에 계신 대행대왕의 혼령도 불법(佛法)에 귀의하게 하여, 저승에서 노니는 데에 이롭게 하라.” 하였다. 이에 절 동쪽에다가 영전(影殿)을 건립하고 숭은전(崇恩殿)이라 이름하였다. 참봉(參奉) 두 사람을 두어서 새벽과 저녁에 배알하게 하고, 초하루와 보름에는 반드시 헌관을 보내서 능실(陵室)과 같이 예배하였다. 이에 제조 신 정현조 등이 돌아와서 일이 완성됨을 아뢰니, 예종 대왕(睿宗大王)께서 ‘봉선사’라는 편액을 하사하였다.
○ 들으니, 예부터 왕자(王者)의 일어남이 후(后)의 덕에서 일어나지 않은 이가 없었다. 하(夏) 나라의 도산(塗山)과 주(周) 나라의 태사(太姒)의 사적은 경전에 나타났고, 그 일도 빛남이 있다. 우리 대왕대비 전하께서는 우리 세조를 보좌하였다. 잠저에서부터 보위에 오르기까지, 영특한 지략과 과단함으로써 성덕(聖德)에 이바지하였다. 집을 변화시키고, 국가로 만들어서, 큰 명(命)이 붙는 데가 있게 하였다. 사적(史籍)을 살펴도 성덕의 높음과 내조(內助)한 공이 백왕(百王)에서 우뚝하였다. 비록 도산이 하(夏) 나라를, 태사가 주(周) 나라를 도왔다 하더라도, 우리 대비 전하보다 낫지는 못하리라.
○ 들으니, 산 사람을 섬기는 데에 공경을 다한 자는 반드시 죽은 이를 섬기는 예를 다하고, 처세(處世)하는 가르침을 높이는 자는 반드시 출세(出世)하는 법을 온전히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충신과 효자가 임금과 어버이를 섬기는 데에, 능히 그 덕을 온전히 하는 도이다. 우리 대왕대비 전하께서 선왕(先王)을 위해 애통해하는 정성과, 추모하고 기도하는 뜻에 이미 정성과 공경을 다했다. 큰 가람을 묘역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창건했고, 삼보(三寶)의 가르침을 펼쳐서, 초승(超昇)하는 편제(便梯)를 일으켰다. 이것은 임금을 섬기고 어버이를 섬기는 데에 그 덕을 더욱 온전히 한 것이며, 여러 어진 덕을 겸비한 후비들과 나란히 할 수 있다. 또한 전대 제왕에도 드물게 있는 훌륭한 일이다.
○ 강희맹(姜希孟)이 지은 〈종명(鐘銘)〉에, “삼가 생각건대, 세조 승천 체도 열문 영무 대왕 전하(世祖承天體道烈文英武大王殿下)께서는 구오(九五)에 오르시고 금륜(金輪)에 임어(臨御)하시니, 신화(神化)가 미치는 곳에 가까운 데는 편히 여기고 먼 데서는 두려워하였으며, 백성과 만물이 모두 즐거워하였다. 그러나 14년이 되어 불행히도 숙연(宿緣)은 다하였고 명수(命數)는 피하기 어려우며, 뭇 신하들은 복이 없어 문득 승하하심을 당하였다. 지금 우리 주상 전하께서는 효성이 신명(神命)과 통하여, 우러러 호곡하심이 다함 없었다. 깊은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여, 세상이 끝나도록 영원히 사모하였다. 이에 광릉(光陵) 곁에다가 큰 절을 영건(營建)하여 ‘봉선사’라 이름하고, 유사에게 큰 종을 주조(鑄造)하도록 명하였다. 해당 관원이 왕의 뜻을 받들고 이에 부씨(鳧氏)를 상고하고, 금과 주석을 헤아려, 여섯 가지 재료를 형성하였다. 본[模範]이 이루어질 무렵에 신에게 명(銘)을 짓도록 명하시었다. 신이 가만히 생각하니, 종이라는 기물이 쇠로 된 것 중에서는 가장 크다. 그 소리가 용용(舂容)하여 먼 데는 놀라게 하고 가까운 데는 두렵게 하며, 그 묘함이 위로는 삼천(三天)까지 통하고 아래로는 육도(六塗)를 겸한다. 타왕(吒王)이 윤회(輪回)를 받고 꿈에도 종치기를 원했고, 제파(提婆)가 두번 울려서 크게 진교(眞敎)를 일으켰다. 인연 공덕(因緣功德)을 어찌 모두 말하랴. 지금 이 종으로써 육부(六府)를 깨우치니, 어찌 특히 도려(道侶)가 깊은 각성(覺醒)을 말하며, 아득한 무리가 고뇌(苦惱)를 그칠 뿐이리요. 반드시 아득한 현궁(玄宮)에도 통하여, 좌우에 들리면, 돈연(頓然)히 불지(佛智)를 더하여, 피안(彼岸)에 속히 오를 것이다. 하물며, 우리 세조대왕은 성한 덕과 높은 공이 만고에 빛나고, 우리 사왕 전하(嗣王殿下)의 근본에 보답하고 영원히 추모하는 정성이 천지와 함께 다함이 없음에랴. 이러한 바를 종정(鐘鼎)에 붙여서 영원히 전하지 아니할 수 없다. 삼가 절하며 머리 조아리고 명(銘)하기를, “능침 곁에다 보찰(寶刹) 지으니, 금벽(金碧)이 우뚝하게 솟아났구나. 법악(法樂)이 인간의 세계와 하늘에 울리니, 묘한 소리 유명(幽明)을 화하게 한다. 그 중에 커다란 방망이 있어, 고래가 투그리듯 소리가 높다. 연모로써 두드려서 울리기만 하면, 귀 있는 자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법은 제진(諸塵)을 떠나지 않고, 삼기(三紀)가 합친 다음 이루어진다. 듣는 것이 있어도 들림이 없고, 마땅히 실(實)을 듣는 본성이 있다. 능히 듣는 자, 어찌 옳으랴. 본래는 실상, 청정(淸淨)뿐이다. 청정하면 때와 더러움 없이 이것을 이름하여 대원경(大圓經)이라 한다. 사람마다 이 이치 갖추어져서, 한 번만 들어도 깨치게 된다. 위로 통함은 아가니(阿伽尼)에게, 옆으로 둘리는 건 항하사(恒河沙)까지 법이 다하면 끝없는 삶의 복리가 이루어진다. 열성(列聖)이 올라서 바로 보니, 모든 형체 있는 것이 삼매에 든다. 삼광(三光)의 돗수가 순리로 되고, 만 백성이 요사(夭死)와 역질이 없다. 진묵검(塵墨劍)이 지나도록 요도(瑤圖)와 함께 나라는 반석 같아 견고하리라. 산이 평지 되고 바다는 말라도, 공덕은 마침내 닳지 않으리라.” 하였다.

개경사(開慶寺) 옛날에는 현릉(顯陵) 동쪽에 있었는데, 능침과 가깝다하여 지금은 남곡(南谷)에 옮겼다. 중대암(中臺菴)ㆍ백운암(白雲庵)ㆍ소요사(逍遙寺), 소운암(小雲菴) 아울러 소요산에 있다. 고령사(高嶺寺) 고령산에 있다. 청룡사(靑龍寺)ㆍ망월사(望月寺)ㆍ회룡사(回龍寺)ㆍ원통사(圓通寺)ㆍ영국사(寧國寺) 아울러 도봉산에 있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어느 해에 산 밑 절을 지었나. 객이 와서 종일토록 맴돌고 있다. 창문 여니 구름이 처마를 헤쳐 들고, 베개 비기니 시냇소리 땅을 울려 들린다. 옛 탑은 층이 있어 공중에 부옇게 섰고, 동강난 비는 글자 없이 반쯤 퍼렇게 묻혔다. 늙어서 인간 일, 죄다 버리고 돌아가지 않기로 중과 의논한다.” 하였다.
은석사(恩石寺)ㆍ범굴사(梵窟寺) 아울러 기슭에 있다.
○ 서거정의 시에, “한 줄기 긴 강이 맑디맑구나. 강 위에 푸른 산은 백층이로세. 절은 허공에 있어 놀과 연했고, 깊은 바위틈을 가느라 덩굴 잡는다. 불전에 향 사르며 예배 드리고, 밝은 창 햇살 쬐는데 중과 말한다. 화겁(火劫)이 망망하매 진계(塵界)는 작다. 한낮에 승화(昇化)할 인연이 없구나.” 하였다.
묘적사(妙寂寺) 묘적산에 있다. 김수온(金守溫)의 기문이 있다.
○ 신종호(申從護)의 시에, “한가히 생대(生臺) 밑에 앉아 있으니, 임궁(琳宮)에 밤들어 적적하구나. 매화(梅花) 보고 시 지으니 격(格)이 여위고, 차 달이며 술 마시니 취기 가신다. 깊은 원(院)에 바둑 소리 급하고, 주렴(珠簾)에 촛불이 일렁거린다. 밤이 새면 서울로 떠나야 할 터, 돌아가야 할 길이 아득도하다.” 하였다.
불곡사(佛谷寺) 불곡산에 있다. 수락사(水落寺) 수락산에 있다.
○ 서거정의 시에, “수락산 속 수락사에 물 마르고, 돌 나와 이해 저문다. 황학(黃鶴)이 나는 옆에 하늘이 낮고, 검은 구름 끄는 데 빗발이 난다. 거년에 중 찾아 여기 왔더니, 구렁에 눈 쌓였고 달이 밝았다. 금년에도 중 찾아 여기에 오니, 바윗가에 봄 꽃이 피었다 진다. 거년에도 금년에도 내왕하던 길, 산천은 역역하게 예와 같아라. 이끼 낀 길 미끄러워 청려장 짚고, 샘물이 흐르는데 바람이 분다. 식후(食後)에 들리는 종소리 예전대로다. 벽 위에 시기(詩記) 있는데 먼지 덮였다. 홍수(紅袖) 고금(古今)이란 것, 어찌 구래공(寇萊公)뿐일까. 왕공(王公)의 호기(豪氣) 적음을 내 한번 웃노라. 스무 해 만에 처음으로 얻은 벽사롱(碧沙籠).” 하였다.
○ 앞사람의 서문에, “젊었을 때 여러 산사(山寺)에서 글을 읽었다. 수락산에 왕래한 것도 또한 두 번이며, 이 시를 우연히 벽 위에다가 적은 지도 지금 30여 년 전이다. 그저께 일암 전상인(一菴專上人)이 이 시를 베껴 와서 나에게 보이며, ‘장단 백태수(長湍白太守)가 외우는 것을 적었다.’ 하면서, 나에게 그릇된 글자를 바로잡아 주기를 요청하였다. 나는 시를 지어도 갑자기 짓고 문득 버려서 한두 마디의 말로 상자에 남겨 둔 것이 없다. 하물며 광망한 소년 적에 지은 것으로 유전(流傳)시킬 뜻이 없었으니 어찌 기록하였겠으며, 32년 전 일이 아득하게 꿈속 같아서 그때 지은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데, 또 어찌 그릇된 글자를 알 수 있으랴. 그러나 한번 읽어보니, 운자(韻字) 단 것과 글자 놓은 것에 불만스러운 곳이 있다. 반드시 나의 유치한 시절의 잘못이거나, 혹 외우는 자의 잘못이 아닐까. 우선 그냥 두었으나, 옛일을 생각하니 능히 느낌이 없을 수 없다. 드디어 근체시(近體詩) 여섯 수를 지어, 일암 법좌하(法座下)에 드렸다. 일암은 그때 불암사에 머물고 있었는데, 수락사와는 겨우 10여 리이다. 후일 일암과 함께 한번 놀게 된다면 나의 말을 마치겠다.” 하였다. 그 시(詩)에, “산중(山中) 옛절에 유람하던 일, 손꼽으니 지금 벌써 30년이다. 객과 함께 거닐면서 많은 시간을 중을 위해 머물렀다. 한가한 긴 날, 꽃이 짙고 대나무 빽빽하여 지역이 깊고, 나무 늙고 바위 돌아 작은 누(樓)를 안았다. 다시 한 번 스님과 가보고 싶다. 소년 적 지난 일이 유유하여라.” 하였다.
○ “유유한 지난 일은 소년 적일세. 취한 중에 필세(筆勢)가 용솟음쳤다. 판벽(板壁)에 내 쓴 것은 무심하였고, 화등(花藤)에 중 베낌은 다사(多事)도 하다. 붉은 소매 푸른 비단은 본분 아닌 것이 부끄럽고, 흰머리 누른 티끌 속에 늙음이 밉다. 다시 한 번 스님과 가보고 싶다. 높은 봉에 또 오르면 쾌함 있으리.” 하였다.
○ “다시 최고봉(最高峯)에 오르고 싶다. 정(井 별 이름)을 지나 참(參 별 이름) 만지면 가슴 시원하리. 한낮에 새 한 마리 머리로 날아 지나고, 푸른 산은 여러 용이 눈아래 노는 듯, 금은(金銀) 불찰(佛刹)은 3천 계(界)이고, 금수(錦繡) 강산은 백 두 겹이다. 다시 한 번 스님과 가보고 싶다. 해질 무렵 앉아서 차를 끓이며.” 하였다.
○ “저녁 해 떨어지고 차 끓는 소리, 청산은 거만한 듯 아랑곳없다. 굽어보니 구름은 평지에 일고, 쳐다보니 폭포는 반공(半空)에 난다. 꽃비는 누(樓)에 가득 옷이 다 젖고, 베갯머리 송도(松濤)는 뼈에 사무친다. 다시 한 번 스님과 가보고 싶다. 청련(靑蓮)과 결연(結緣)하여 여생 보내리.” 하였다.
○ “여생에 결연하기 첨 마음일세. 서글퍼라 연래에 눈 같은 머리. 원(願) 맺기가 옅지 않음 누가 알리. 산에 들면 안 깊을까 항상 염려라. 스님과 다시 한 번 가보고 싶다. 총림(叢林)과 가깝구나 불암 촌서(村墅)가.” 하였다.
○ “총림이 불암산 가까이 있고, 산 밑에는 내 집이 두어 칸 있다. 도잠(陶潛)의 세 가닥 길, 적막하여도 양로(楊老)의 한 구역 집 반환(盤桓)하노라. 나물 캐고 죽순 구워, 예삿일이고 국화 보내고 매화 맞았다 하여라. 다시 한 번 스님과 가보고 싶다. 저문 나이 내 신세가 함께 따르리.” 하였다.
불암사(佛巖寺) 불암산에 있다.
○ 앞사람의 시에, “우리 집 서쪽 영(嶺)에 절이 있는데, 여러 벗들과 손잡고 함께 놀았다. 달 숲에 송뢰(松瀨) 소리, 두릉(杜陵)이 묵었고[宿], 늙은 나무 굽은 바위 이백(李白)이 썼다. 객자(客子)가 안 오니 원숭이 서럽고, 노승(老僧)이 잠들려니 산새가 운다. 아득한 띠끌 세상 어느 곳인가. 흰 구름 땅에 가득, 길을 몰라라.” 하였다.
석천사(石泉寺) 수락산에 있다.
○ 앞 사람의 시에, “천불산(千佛山) 높푸르러 겹쳐졌는데, 발자국 미끄러워 칡을 잡는다. 구름이 노목을 덮어 매 집이 높고, 물이 샘에 흘러와 용이 숨었다. 손님은 시를 쓰려 석탑(石塔)을 쓸고, 스님은 예불(禮佛)하며 종을 울린다. 올라가 임해 보니 동남쪽이 죄다 보인다. 건곤(乾坤)을 굽어보니 가슴 시원해.” 하였다.
홍복사(弘福寺) 홍복산에 있다. 정토사(淨土寺) 주 서쪽 59리 지점 백련산(白蓮山)에 있으며, 의숙공주(懿淑公主)의 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