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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물처럼 시련을 딛고 일어선 거목 호암 이병철 (스크랩)

아베베1 2010. 2. 10. 11:03

흐르는 물처럼 시련을 딛고 일어선 거목 호암

머니투데이 | 오동희 기자 | 입력 2010.02.10 08:31 | 누가 봤을까? 50대 남성, 대구

 
[머니투데이 오동희기자][[호암 탄생 100년 기획] 100년전 '어둠의 시대'에 태어나 빛이 된 경영의 달인]





↑고 호암 이병철 삼성 창업주.

오는 12일은 한국 재계를 대표하는 고 호암 이병철 삼성 창업자의 탄생 100년이다. 호암은 삼성을 비롯해 분가한 한솔, CJ, 신세계 등 한국 대표 기업의 토대를 마련한 한국 경제계의 거목이다.

그의 탄생 100년이 우리 사회에 던져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호암은 대한제국이 일본의 군화 발에 짓밟혀 강제 병합을 당하던 1910년 '어둠의 시대'에 태어났다. 방황과 절망을 벗으로 삼아 살던 그는 1938년 삼성상회를 시작으로 해방과 한국전쟁, 산업화의 과정을 지나며 두 번의 암 선고에도 굴하지 않는 기업가 정신을 보였고 1987년 폐암으로 영면하기까지 그 누구보다도 치열한 삶을 살았다.

삼성을 일구는 과정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일부 있지만, 그 누가 그와 같은 삶을 살 수 있었을까. 100년전 태어난 그가 우리 젊은이에게 줄 수 있는 메시지를 그의 삶을 통해 되짚어봤다. < 편집자주 >

◇평범한 학생..졸업장 없는 인생
졸업장은 하나의 과정을 마무리했다는 증명서다. 호암은 졸업장을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다.
1910년 2월 12일 경남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에서 이찬우 공과 안동 권씨의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호암은 6살 때 초등학교(구 국민학교)에 가지 않고, 서당 '문산정'에서 한문을 배웠다.





↑1927년 17살 청년 호암 이병철(왼쪽)의 모습.

학문에 있어서 첫 과제는 천자문. 보통 친구들은 두 세 달 만에 통독했지만 그는 일 년이나 걸렸다. 서당에 5년 다니는 동안 그는 '논어'와 '자치통감'을 뗐지만 다른 친구들에 비해 빠른 편이 아니었다. 그의 스승은 "문산 선생님의 손자가 이래가지고서야"라며 종종 매를 들기도 했다.

그의 조부인 문산 이홍석은 당대 영남의 최고 유학자 중 한 명인 허성재의 문하생으로 시문과 성리학에 두각을 나타냈고, '문산문집'을 펴낼 정도로 학문이 높았다. 그런 조부에게서 공부에는 시원치 않은 손자가 난 셈이었다.

11살이 되던 해인 1921년 처음으로 집을 떠나 시집간 둘째누나가 있는 진주시 지수보통학교에서 짧은 첫 유학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호암은 중교리의 좁은 세상이 아닌 더 넓은 세상을 봤고, 몇 개월 후 서울에서 사는 사촌형을 따라 외갓집이 있는 서울 가회동에서 수송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서울에서의 성적도 서당에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석차는 전체 50명중 35~40등에 머물렀다. 보통학교 4학년을 마친 호암은 5, 6학교 과정을 거치지 않고 중학부로 진학했다. 중학부를 다니던 어느 날 부친으로부터 "네 혼담이 이뤄져 12월 5일 혼례를 올리게 됐으니 내려오라"는 말을 듣는다. 그의 나이 16살인 1926년 두 살 위인 박두을 여사와 가정을 꾸리게 됐다.

호암은 결혼 후 일본 유학을 결심했다. 중학부를 마치지 않고 그는 1929년 일본으로 건너가 이듬해 와세다대 전문부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하지만 1년여간의 일본 유학 생활은 각기병(티아민 결핍에 따른 근육, 관절 이상)으로 접게 된다.

호암이 받은 졸업장이나 학위는 72세 때인 1982년 미국 보스턴대학에서 명예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은 게 유일하다. 호암은 아산 정주영 현대 창업자와 함께 반드시 졸업장만이 미래를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호암의 나이 72세였던 1982년 보스턴대학에서 명예경영학박사 학위를 받고 있는 호암(사진 중앙). 호암은 정규 교육과정에서 졸업장을 한번도 받지 못했다.

◇실패에서 배운 호암
호암의 성공학에는 반드시 실패라는 씨앗이 앞선다.
호암은 각기병으로 일본에서의 유학을 중도 포기하고 귀향한 후 술과 노름으로 시간을 보냈다. 일본으로 유학 가던 길 3000톤급의 부관연락선에서 일본인들로부터 받은 치욕(멀미가 심해 1등실로 옮기려다가 일보 순사로부터 조선인은 1등실에 탈 수 없다며 쫓겨났던 일)도 뇌리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식민 치하에서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야겠다는 의지도 꺾였던 시절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세 자녀였다. 나이 스물다섯에 세 아이의 아버지로서 부끄러운 나날을 보내던 그는 골패 노름에 빠졌다가 귀가하는 어느 날 저녁 문득 잠든 세 아이를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한다.

"세 아이의 아버지로서 지금껏 허송세월을 보냈구나. 이제라도 뜻을 세우고 인생과 직면해야 돼"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호암의 첫 사업의 씨앗은 부친으로부터 받은 300석 정도(당시 화폐로 3만원)의 재산이다. 그 재산 중 일부로 그는 정현용, 박정원 등 두 친구와 각각 1만원씩 투자해 협동정미소를 1936년 설립하지만 그해에만 자본금의 3분의2를 날렸다.

시장의 흐름을 잘못 판단했기 때문이다. 인천곡물시장에서 쌀 가격이 오르면 사고 내리면 파는 패턴으로 순식간에 손실을 보자 호암은 오를 때 팔고, 내릴 때 사는 '역발상'으로 큰돈을 벌게 됐다.

실패를 성공의 씨앗으로 삼은 첫 사례였다. 이어 곡물을 운송하는 운수업에서도 성공을 거뒀다. 일본인이 차량 10대로 운영하던 '히노데 자동차'를 인수한 뒤 10대를 추가로 구입해 운수업을 시작했다. 그는 김해평야에 200만평의 토지를 소유할 정도로 많은 돈을 벌었다.

그는 식산은행(현 산업은행)으로부터 대출을 해 땅을 사 모으기 시작했고 금세 만석꾼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그가 기방을 다니며 풍류에 빠져 있을 때 위기는 또 다시 닥쳐왔다. 1937년 중일 전쟁의 군비조달을 위해 식산은행이 모든 대출을 회수키로 한 것.

그는 대출을 갚기 위해 보유한 토지를 싼 값에 처분했고 만석꾼이던 그의 손에는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만이 남게 됐다. 2년 사이에 거부가 됐다가 다시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오는 '천당과 지옥'을 경험했다.

그는 마산에서의 사업을 접고 여행을 떠났다. 서울을 거쳐 평양, 신의주, 원산, 흥남에 이어 만주, 북경, 청도를 거치며 더 넓은 세상을 보고 1938년 3월 삼성의 모태가 되는 삼성상회의 꿈을 키웠다.





↑조선양조주식회사를 경영하던 젊은 시절의 호암 이병철.

빈손으로 다시 대구시 수동(현 인교동)에서 꿈의 터전을 세웠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숫자이자 '강력하고 큰 것'이라는 의미를 담은 '삼'(三)과, '높고 밝고 영원히 빛난다'는 뜻의 '성'(星)을 합쳐 '삼성상회'라는 무역회사를 설립했다. 중국을 돌면서 청과물이나 건어물 등을 수출하는 시장의 성공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예상은 적중했고, 이듬해에 사업을 넓혀 양조장 사업에 뛰어들었다. 일본인 무네이로부터 '조선양조'를 사들였고, 연간 막걸리 생산량이 8000섬 정도인 조선양조를 통해 다시 '만석꾼'의 반열에 올랐다. 사업을 일으켜도 일본 식민지 하에서의 기쁨은 크지 않았던지 호암은 와세다대 재학시절 친구였던 이수근에게 회사를 맡기고 술집만 찾았다.





↑삼성그룹의 모태가 된 1938년 대구에 설립한 삼성상회 전경.

◇불굴의 의지로 일군 삼성
그러던 중 해방을 맞았다. 대구에서 일하던 호암은 아들 셋, 딸 다섯 등 가족과 함께 1947년 서울로 향했다. 그리고 1948년 삼성물산공사를 설립했으나 2년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또 다시 거의 전 재산을 잃었다. 그를 다시 재기할 수 있도록 한 것은 대구에 두고 온 '조선양조'였다. 전쟁통에서 견뎌낸 조선양조에서 김재소 사장과 이창업 지배인은 그동안 모아 놓은 '3억원'을 호암에게 전했다.

이를 밑천으로 호암은 부산 대교로 2가에 '삼성물산주식회사'를 설립, 1년만에 자본금의 20배인 60억원으로 회사 규모를 키웠다. 그는 전후 한국경제를 위해서는 제조업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제당업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제일 강한 의지로 일하자는 뜻에서 '제일제당'으로 이름을 지었다. 1953년의 일이다. 이듬해에는 의식주 중 가장 앞 에 나오는 '옷'감을 만들기로 했다. 이것이 '제일모직'이다.

2개의 제조업체 설립 이후 호암은 전후 한국사회에서 본격적인 기업 인수를 통해 규모를 키웠다. 1957년 한일은행, 천일증권을 인수했고, 58년에는 삼척시멘트, 안국화 재, 상업은행, 동일방직, 권영물산, 한국타이어를 인수했다. 이듬해에는 조흥은행까지 인수하면서 몸집을 불렸다.

하지만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들어선 혁명정부에 한일은행, 상업은행, 조흥은행 등 3개 은행을 헌납하게 됐다. 뒤이어 정치권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은 대가로 한국비료를 빼앗기고, 1980년에 들어선 군사정권에는 TBS를 빼앗기는 등 총 5개의 회사를 국가에 헌납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호암이 불굴의 기업가 정신으로 1960년대말부터는 시작한 전자 업종과 중공업, 석유화학 등은 오늘날 글로벌 기업 삼성의 씨앗이 됐다.





↑1982년 한 모임에서 고 정주영 현대 창업주(오른쪽)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고 호암 이병철 삼성 창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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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희기자 hu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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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 이병철 탄생 100주년] 자본금 3만원 삼성상회서 4개그룹 346조 글로벌기업으로

12일 호암탄생 100주년… 삼성 역정

“내가 호암을 만난 것은 이미 그가 노년에 접어든 이후였지만 그때도 그는 젊은이보다 더한 진취적 의욕에 불타고 있었다.”(잭 웰치 전 제너럴일렉트릭 회장)

일제 강점기인 1938년 대구에서 태동한 삼성상회(三星商會)는 72년이 지난 현재 ‘한국의 삼성’이 아닌 ‘세계의 삼성’으로 우뚝 서 있다. 회사 규모는 138만배나 성장했다. 그 중심에는 호암 이병철 삼성 선대 회장의 흔적이 오롯이 남아 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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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관은 정복당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우리에게 주어진 발전의 기회다.”

호암은 1987년 생애 마지막 신년사에서 공격적 투자를 주문했다. 반도체 사업에 대한 거액의 투자로 그룹 전체가 무너질지 모른다는 소문이 나돌 때였다. 고난이 닥칠수록 더욱 흐트러지지 않는 자세로 도전하는 것, 바로 호암의 일생이었다. 호암은 1910년 2월12일 경남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에서 비교적 유복한 집안의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올해로 꼭 100주년이다. 유년 시절 한학을 공부하다가 12세에야 진주 지수보통학교 3학년에 입학했다. 중동중에 입학한 1926년 12월에는 고 박두을 여사와 혼인했다.

 1930년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했지만 학업을 끝까지 마치지는 못했다.

 

호암이 1938년 3월, 28세의 나이로 250평 남짓한 점포를 사서 개장한 삼성상회의 자본금은 불과 3만원. 앞서 26세 나이로 경남 마산에 세운 협동정미소가 중·일전쟁 발발로 좌초한 뒤 재기해 내놓은 첫 결실이었다. 청과물과 건어물을 사고 파는 이 회사는 현재 호암의 3남 이건희씨가 물려 받아 키운 삼성그룹과 장녀 이인희씨가 고문으로 있는 한솔그룹, 장남 이맹희씨에게 물려준 CJ그룹, 막내딸 이명희씨가 회장인 신세계그룹 등으로 성장했다. 호암은 1948년 사업 무대를 영남상권에서 수도권으로 넓혔다.

 

그해 11월 서울 종로2가에 삼성물산공사를 창립했다. 이어 창업 1년 반 만에 무역업계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곧 이어 불운이 닥쳤다. 얼마 뒤 터진 한국전쟁으로 사업기반을 모조리 잃어버린 것. 그렇다고 물러설 호암이 아니었다.

 

1·4 후퇴 때 부산으로 내려가서 삼성물산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이를 바탕으로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을 연이어 설립한 것이다. 삼성그룹의 틀을 갖춘 그는 1950년대 후반 은행 민영화 과정에서 흥업은행, 조흥은행, 상업은행의 지배주주 지분을 획득하면서 기반을 탄탄히 했다.

▲ 1972년 서울 장충동 자택에서 호암(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과 막내딸 명희, 셋째 아들 건희, 큰딸 인희, 그리고 손자 재용(이건희 전 회장 아들)이 호암의 62번째 생일을 맞아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삼성 제공

 

삼성그룹이 비약적 발전을 이룬 것도 1950년대부터다. 제일제당을 통해 전량 수입에 의존하던 설탕을 대규모로 생산했다. 호암은 1969년 삼성전자를 설립하면서 그룹의 근간을 소비재 대체산업에서 자본재 수출산업으로 전환시켰다. 삼성전자의 성공을 기반으로 1970년대 들어서는 제일합섬과 삼성전기, 삼성석유화학, 삼성중공업 등 그룹의 골격을 잡았다. 70년대 삼성그룹 자산은 연평균 41%, 매출액은 48%씩 증가할 정도로 승승장구했다.

 

호암의 나이 67세인 1977년에는 반도체 산업에 진출, 글로벌 삼성의 토대를 닦았다. 오늘날 범 삼성가의 4개 대기업군 총자산은 국내 최대 기업집단인 삼성그룹의 317조 5000억원을 포함해 모두 346조원. 1938년 삼성상회 자본금 3만원의 현재 가치는 2억 5000만원 정도로 추산된다. 자산이 72년 만에 138만배나 불어난 셈이다.

 

국민 경제의 측면에서 삼성의 비중도 엄청나다. 삼성그룹의 2009년 기준 매출은 200조원 정도.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을 대략 1000조원 정도로 잡으면 한국 경제가 창출하는 가치의 5분의1이 삼성에서 나온다는 뜻이다. 올해 정부 예산(292조 8000억원)의 3분의2에 달한다. 27만 7000명인 삼성 임직원은 국내 경제활동인구(2400만명)의 1%가 넘는다.

 

이병철 전 회장의 피땀이 어린 삼성전자는 지난해 136조 500억원의 매출과 10조 9200억원의 영업이익을 달성, 국내 기업 중 처음으로 매출 100조원·영업이익 10조원 기록을 세웠다.

 

특히 지난해 달러 표시 매출로 1183억달러(원·달러 환율 1150원 적용)를 기록, 2009년 회계연도의 미국 휼렛패커드(1146억달러) 실적을 넘어서며 세계 최대 전자업체에 등극했다. 제품별로는 D램 메모리 반도체와 TV 등은 세계 시장에서 부동의 1위를 달리고 있다.

 

휴대전화 역시 핀란드 노키아에 이어 20%대의 점유율로 2위에 올라 있다. 또한 삼성전자의 브랜드 가치만 175억1800만달러(약 20조 1450억원)에 달한다.

이두걸·강아연기자 douzirl@seoul.co.kr


 

 

 

 

湖巖 이병철 생가 둘러보기

 

< 2009.. 1. 14 >

 

자리한 곳 : 경남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 723

 

의령읍내에서 20여분 거리

 

 

湖巖 이병철 <1910 ~ 1987 >

 

호암 생가는

안채, 사랑채, 대문채, 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안채는 다시 부엌과 부엌방, 2, 대청으로,

사랑채는 방 2개와 대청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문채에는 솟을대문 양쪽으로 방 2개가 배치되어 있다.

 

배후 전경.        대문채

사랑채 내부.     사랑채

 

생가 입구 < 월요일은 휴관 >

 

호암 생가는

삼성 그룹의 창업자이자 우리나라의

경제 발전을 이끈대표적 기업가인

호암 이병철 선생의 태어난 집이다.

 

그 동안 몇 차례의 증·개축을 거쳐 은은하고

고고한 멋을 풍기는 오늘의 모습으로 단장되었단다.

 

 대 문 채

 

1851년 이병철 선생의 조부께서 전통 한옥 양식으로 지었으며

호암선생은 유년 시절과 결혼하여 분가하기 전까지 이 집에서 살았다

 

 사 랑 채

 

안 채

 

풍수지리에 의하면,

이 집은 곡식을 쌓아 놓은 것 같은 노적봉(露積峯)

형상을 하고 있는 주변 산의 기가 산자락의 끝에 위치한 생가 터에

() 되어 맺혀 있어 그 지세가 융성할 뿐만 아니라,

멀리 흐르는 남강이 물이 빨리 흘러들어지 않고 생가를 돌아보며

천천히 흐르는 역수(逆水)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명당 중의 명당이라고 한다.

 

생가를 복원할 때 본채가 지어진 연대를 남기기 위해

대들보의 상량문을 옮겨 놓았다 한다.

< 辛亥年(1851) 癸巳月辛卯日乙未時立柱上樑>

 

장 독 대

 

 

사 랑 채

 

 바위의 모양이 마치 벼가마를 쌓아 놓은 것 같아 재물이 모이는 명당이 되기도 했단다.

 

바위가 마치 돈을 차곡차곡 쌓아 놓은 것 같이 보여

관광객들은 한 번식 안아보며

재물복이 쏟아지기를 기원<?> 한단다.

 

 호암 선생 조부는 3형제였고 좌우에 둘째, 세째 조부의 집도 있다

 

 

 

 

 

별장으로 사용하는 집이란다.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부자의 기를 받아 보기 위해

방문객이 줄을 잇고 있단다.

 

부를 이룬 집안의 명당 터를 한 번 둘러보며

기분 전환하고 힘을 내어 어려움을 이겨냈으면 하는

마음이다.

 

 

* * * * * * *

 

追記

 

의령에 갈 기회가 생기면

읍내 재래시장을 찾아 이 곳의 명물 망개떡을 사 먹어보고

의령 소고기 국밥을 먹어 보기를 권해 봅니다.

 

5일장이 서는 날(3, 8) 

찾아 가면 TV에도 소개 정도로 유명한

재래시장 소고기국밥을 먹어 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병철 생가를 찾아 기를 받아 보고

귀로에 주남저수지를 둘러 철새를 구경하고 돌아오면

하루를 즐겁고 뜻있게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총수 생가 탐방 |② 삼성그룹 故 이병철 회장
| 기사입력 2008-01-19 15:09 | 최종수정 2008-01-19 15:30

◇“금성체 山으로 둘러싸인 명당중 명당”◇

대기업 생가 탐방 두 번째는 삼성그룹 창업자인 호암 이병철 회장 생가이다.
한양대 박정해 겸임교수와 함께 꼬박 네 시간을 달려 경남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 장내마을에 위치한 생가에 도착했다. 대진 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전 생가를 방문한 적이 있다는 박 교수는 당시엔 서울에서 당일 코스로 다녀올 생각은 못했다고 말했다.

이병철 회장 생가는 타계 20주기를 맞아 지난해 11월 19일 일반에 완전 공개됐다.
부자 기(氣) 받기 위해 방문객 문전성시
이병철 회장 생가는 1851년 이병철 회장의 조부가 전통 한옥양식으로 건립한 것을 호암재단이 관리해 오다 지난해 새로 단장해 완전 개방했다. 그간 본채와 사랑채는 몇 차례 증·개축을 거쳤으며, 국내 최고 대목수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신응수 씨가 최초 형태로 복원해놓았다.
생가가 개방되자 평범한 시골마을인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에 일반인들의 발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이병철 회장 생가에서 기를 받으면 기업인들은 사업이 번창하고, 일반인들은 부자가 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렇다할 관광자원이 없는 의령군 입장에서도 호재를 만난 셈. 생가 개방 이후 평일 100∼200명, 주말에는 300∼400명의 방문객이 찾고 있다고 한다.

“연초이다 보니 방문객이 급증했습니다. 새해에 부자되고 싶은 마음에 지난 일요일에는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기둥을 붙잡고 부자되게 해주세요’ 라고 비는 사람들부터 집 주변 바위에 손을 얹는 등 부자의 기를 받으려는 사람들로 문전성시입니다.”
이무형 관리소장의 말이다. 이 소장은 가족단위 나들이객이나 단체 관광객, 풍수지리가 등도 찾아 생가 안팎을 꼼꼼하게 둘러보고 있다고 했다.
방명록에도 ‘한국 경제 거장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고 갑니다.’ ‘경제 발전의 주역인 고인의 덕을 배워 부자되고 싶습니다’ 등 방문객들의 바람들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

생가는 전체 부지 1861㎡에 안채와 사랑채, 대문채, 광 등으로 이뤄져 있다. 안채는 다시 부엌과 부엌방, 방 2개, 대청으로, 사랑채는 방 2개와 대청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담한 토담과 바위벽으로 외부와 구분되고, 나무와 대숲이 적절히 조화를 이뤄 정갈하고 운치 있는 경관으로 시선을 잡아끈다.

재물이 쌓일 수밖에 없는 명당

생가 안내판에는 생가에 대해 ‘곡식을 쌓아 놓은 것 같은 노적봉 형상의 산 기운이 산자락 끝에 자리 잡은 생가에 혈(穴)이 되어 모이고, 남강물이 생가를 돌아보며 천천히 흐르는 역수(逆水)를 이루고 있어 재물이 쌓일 수밖에 없는 명당’이라고 적혀있다.
박정해 교수는 생가가 평지에 있는 것 같지만 산의 맥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주산인 자굴산에서 좌청룡 줄기가 힘차게 뻗어와 산줄기 끝자락에 자리 잡아 있습니다.
기(氣)는 바람을 만나면 흩어지는데 이처럼 이병철 회장 생가는 자굴산 자락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다 끌어안아 줍니다. 여길 보세요. 좌청룡에 해당하는 곳도 큰 바위가 끌어안은 형상입니다. 쉽게 말해 전체적으로 기가 센 자리이며 이런 곳에서 인물이 나오면 큰 인물이 나옵니다.”

박 교수는 이병철 회장 생가는 용(풍수에서는 산줄기를 용으로 표현한다)자체가 가까이 끌어안은 형국이어서 발복(發福)이 당대에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용은 물이 있어야 사는데 생가 내 우물이 쏟아나는 곳이 혈처라는 것. 입수룡이 안채에 들어가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 명당임을 입증하는 증거이다. 물이 생겨나는 자리를 풍수지리에서는 진응수(眞應水)라 부르는데 용의 기세가 강하면 용의 생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용맥 좌우에서 따라오는 수기(水氣) 역시 강해야 한다. 진응수는 명당의 증거이자 큰 인물을 기약하는 길수라는 것이다.

“남산에 올라보면 서울도 주변의 높은 산들로 둘러싸여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동그랗게 산들이 안아주는 평탄한 지형으로 서울 자체가 명당임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작게 보면 이병철 회장 생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의 상징인 금성체의 산들로 둘러싸인 명당 중의 명당입니다.”

이병철 회장이 성장한 장내마을은 ‘담안마을’이라고도 하는데 그 이유는 이처럼 주변 산들이 마치 담을 둘러친 것과 같은 형태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박 교수는 좋은 집터는 바람이 없고 온화하고 안정된 느낌을 받는다면서, 땅을 비롯한 주변의 색도 전체적으로 밝고 잔디와 나무도 잘 자라는 이유가 맥을 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열매도 나무의 가장 작은 가지에서 열리듯이 혈과 맥도 마찬가지라는 것.

“발전소에서 보낸 전기가 고압선을 통해 형광등을 켜듯이, 집도 산줄기가 끝나는 곳에서 혈을 맺습니다. 풍수지리는 지형이나 방위, 자연현상이 바탕인데, 그 용어가 바람(風), 물(水), 땅(地) 그리고 이치(理)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이병철 회장 생가가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병철 회장의 생가가 명당이라는 것은 풍수지리 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부분이다.

박시익의 《한국의 풍수지리와 건축》에 따르면 호암 생가는 노적봉에서 내려온 내청룡 끝부분에 자리 잡고 있는데, 주산으로부터 장룡을 이루고 내려온 청룡은 이 집의 주룡이 되는 한편 집의 좌측 울타리와 같은 형태를 이룬다고 한다.

용의 길이는 발복 기간을 나타내므로 장룡에서는 발복 기간도 장기간이 된다. 호암 집안이 대를 이어 재벌이 된 것은 이러한 장룡의 기운 때문인 것으로 해석된다. 남강은 호암 생가가 있는 쪽으로 역수를 이룸으로써 생기가 더욱 강하게 발생한다는 것.

이병철 회장 생가는 전체적으로 남서향의 평탄한 대지 위에 자리 잡고 있으며, 전형적인 한옥으로 一자형 평면 형태로 남서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이런 대지에서는 정남향으로 배치하기 쉬운데, 이병철 회장 생가는 주룡의 맥과 건물 방위를 일치시키는 배산임수 원칙을 정확하게 따랐고, 그 결과 경제를 일으키는 대재벌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양혁진 기자(dwhj@ermedia.net)·사진 이태인 기자

 

총수 생가 탐방 |④효성그룹 故 조홍제 회장
| 기사입력 2008-02-17 13:36



◇청룡백호로 감싸진 명당 중 명당◇

“이렇게 한 동네나 마찬가지인 곳에서 나라를 대표할 만한 여러 재벌가문이 배출됐다는 것이 그냥 우연이라고 하기엔 놀랍네요.”

“그렇죠? 그래서 풍수지리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이 근방 재벌 생가 답사는 기본교재요, 전공필수와 같은 것이었죠.”

경남 의령군과 함안군 경계에는 남강이 흐르고, 그 남강의 중간에는 솥 모양으로 생긴 바위가 하나 있다. 이 지역 사람들은 이 바위를 ‘솥바위’라고 부른다. 차를 타고 경남 함안군 군북면의 효성 생가를 찾아가며, 박정해 한양대 사회교육원 교수는 잘 알려진 얘기라면서 ‘솥바위 전설’에 대해 말했다.

“조선 후기에 어느 도인이 이 솥바위에 앉아 놀면서 ‘앞으로 이 근방에서 나라를 크게 세우는 부자 세 명이 태어날 것이다’라는 예언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그 예언이 적중했는지, 우연의 일치인지 이 솥바위 인근에서 삼성의 이병철, LG 구인회, 효성 조홍제가 태어났어요.

모두 생가가 이 솥바위로부터 반경 20리 이내입니다. 즉, 의령군 정곡면 증교리에서 이병철이 태어났고, 진양군 지수면 승산마을에서 구인회가, 함안군 군북면 신창마을에서 조홍제가 태어난 것이죠.”

삼성, LG, 효성 생가가 반경 20리에

그러고 보니 일치하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삼성, 금성(LG그룹 전신), 효성 등 그룹명에 별성(星)자가 들어가 있다. 이것도 하나의 우연의 일치인지, 박 교수에게 물어보았다.

“그 얘기도 풍수지리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미 나온 얘기죠. 북두칠성에 두 개의 별을 더해서 구성(九星)으로 풍수지리를 해석하기도 하는데, 구성(九星) 중에서 제일성 탐랑성(貪狼星)과 제2성 거문성(巨文星) 그리고 제6성 무곡성(武曲星)은 길한 기운을 발산합니다. 그래서 삼길성(三吉星)이라 하는데 거기에서 가운데 길(吉)자를 뺀 나머지로 삼성이라 이름하였다 합니다. 효성(曉星)의 사명은 삼성보다 뛰어나고 반드시 삼성을 앞서겠다는 뜻으로 풀이됩니다.”

풍수지리는 음양오행을 기초로 정리된 학문이다. 즉 자연이치를 정리한 것으로 자연과학이라는 것. 풍수(風水)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풍수지리의 원리는 산과 물이 기본이다. 산은 움직이지 않고 정지해 있으므로 음(陰)이라 한다. 물은 흐르는 것으로 움직여 운동하므로 양(陽)이라 한다.

우주의 모든 만물은 음양의 조화로 이루어진다. 사람의 경우 음에 해당하는 여자와 양에 해당하는 남자가 서로 만나야 자식을 낳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음에 해당하는 산과 양에 해당하는 물이 서로 어울려 배합되는 곳에서 혈(穴)이 이루어진다.

사방 산들이 안아주는 포근한 자리

경남 함안군 군북면에 위치한 효성생가는 마을의 뒤편 논밭사이에서 규모가 큰 옛 문벌 집안의 기와집들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다. 집 앞과 뒤에는 수백 년된 나무들이 집안의 뿌리를 전해주는 듯 당당하게 서 있다. 아쉬운 것은 연락을 했음에도 관리인이 출타 중이어서 생가 내부를 볼 수 없었다는 것. 야트막한 담 너머로 훑어본 생가는 삼엄한 느낌이 들 정도로 정갈하게 관리되고 있었지만, 대문 외부로 굳게 잠긴 자물쇠는 서울 한복판도 아닌 시골임을 감안할 때 아쉬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이렇게 생가 내부를 볼 수는 없었지만, 박 교수는 사방 산들이 안아주는 포근한 자리에 위치해 재벌이 탄생할 만한 명당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무곡 금성체 형상의 주산인 백이산에서 발맥한 용은 은룡(隱龍)으로 동네 앞의 논두렁을 타고 입수하고 있다고 한다. 원래 안산(案山)은 혈에서 바라볼 때 약간 낮으면서 푸근하게 맞아들이는 형상을 하여야 한다. 반대로 안산이 험하거나 너무 높으면 안 된다는 말도 될 수 있다. 그러나 예외가 인정되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회룡고조혈일 때는 안산이 높고 험해도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안산이 곧 주산으로서 조상에 해당되는 주산은 손자나 자식을 귀여워하고 예뻐하기 때문에 괜찮다는 논리인 셈. 이곳 효성 생가가 위치한 곳은 백이산에서 출발한 용맥이 긴 행룡을 마치고 하나의 열매에 해당되는 혈을 맺게 되는데, 여기서 다시 자신이 온 곳 즉 백이산을 되돌아보는 형상을 하고 있다. 이것이 회룡고조(回龍顧祖)이다. 따라서 안산이자 주산이 바로 백이산이 되는 것으로 안산이 높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좌우 청룡백호도 마치 구슬을 꿰어 놓은 것처럼 둥글둥글한 무곡 금성체로 감싸고 있다.

무곡 금성체는 구성 중에서 합양복덕궁(闔陽福德宮)으로 주로 부귀를 관장하며 번창한다고 한다. 주산과 안산 그리고 청룡백호가 모두 무곡 금성체로 마치 구슬을 꿰어 놓은 듯 하다고 한다.

“전국의 이름난 부자 치고 풍수지리에 식견과 관심이 없는 집안이 없을 정도입니다. 이곳 효성 생가도 예외가 아니죠. 청룡백호로 감싸진 넓은 들판은 평탄하고 원만하여 풍수서에서 말하는 명당의 표본처럼 아름답습니다.”

◇서양도 풍수지리 열풍◇

월스트리트도 풍수지리로 책상 배치

총수 생가탐방을 진행하면서 독자들의 풍수지리에 대한 관심을 읽을 수 있었다.

기사와는 다른 견해를 보인 독자와 다음 탐방 예정지가 어디냐고 묻는 독자도 있었다. 미국과 유럽, 홍콩 등에서는 지금 풍수지리가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고 한다.

중국과 한국을 포함한 동양권 정도, 그중에서도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의 전유물이 아닌가 라고 단순하게 생각하던 선입견을 지워버린 것.

미국에도 풍수지리는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하는데, 가령 미국의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은 이사할 때나 묘지를 조성할 때 반드시 풍수지리 전문가로부터 자문을 받는다고 한다. 그래서 부동산업자들이 모든 상담을 진행해 놔도 풍수지리 전문가가 동의하지 않으면 더 이상 진행이 되지 않을 만큼 영향력이 크다는 것.

또한 우리가 흔히 풍수지리하면 묘지풍수를 떠올리게 되는데 풍수지리는 묘지만이 아니고, 오히려 주택과 상가 사무실 등 우리 실생활에 훨씬 많이 응용하고 사용할 수 있는 분야로 인식되고 있다고 한다.

실례로 현재 사무실의 배치와 책상배치 그리고 인테리어 등에 응용되어 널리 사용되고 있다.

박정해 교수는 이처럼 풍수지리가 서양에서 재평가되어 각광을 받는 반면, 우리 사회는 미신이라 업신여기는 풍조가 남아 있음을 안타까워했다.

“풍수지리는 대학의 부동산학과와 인테리어학과 등에서 정규 커리큘럼으로 수업이 진행된 지 오래입니다. 앞으로는 건축학과 등의 건축설계과목에서도 풍수지리는 필수 정규과목으로 선정될 것입니다. 풍수지리는 묘자리뿐 만 아니라 오히려 인테리어 측면에서 사용가치 측면이나 활용도에서 더 높은 평가와 대우를 받을 수 있는 분야입니다.”


경남 함안 = 양혁진 기자(dwhj@ermedia.net) 사진 이태인 기자

총수 생가 탐방 |③ LG그룹 故 구인회 회장
| 기사입력 2008-01-26 14:18 | 최종수정 2008-01-26 14:27



◇두 줄기 물길이 합쳐지는 명당◇

남해고속도로 지수IC에서 5분이면 닿는 지수면 성내리 상동마을의 LG 창업주 구인회 회장 생가는 최근 생가 개방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이병철 회장 생가만큼이나 공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안채와 바깥채 사이의 잔디와 정원수는 금방 손질한 듯 깔끔하며, 마당에 서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면 풍수를 모르는 일반인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힘을 가지고 있다.

구인회 회장이 태어난 마을은 구 회장뿐만 아니라 GS그룹으로 분리된 승산 허씨 집안의 고가들도 여럿 포함돼 있어 풍수지리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겐 빼놓을 수 없는 답사지가 되고 있다.

LG 구인회 회장 생가 탐방을 나서면서 한양대 박정해 겸임교수는 ‘물’이야기를 꺼냈다.

“물이 곧 돈인데 이곳은 물이 앞에도 흐르고 뒤에도 흐릅니다. 예로부터 풍수연구가나 풍수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많이 찾은 이유가 그것입니다.” 박 교수는 LG 구인회 회장 생가뿐만 아니라 마을 자체가 명당에 위치해 있다고 했다. 집보다는 터가 그만큼 좋다는 것.

물자리가 들어오는 곳은 두 줄기인데 나가는 곳은 산이 감싸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쉬운 예를 들어볼까요. 한강물도 굽이쳐서 흐릅니다. 물이 안아주는 곳이 명당이며 땅값이 비쌉니다. 옥수보다는 압구정이, 흑석동보다는 용산이 그래서 비싼 거죠. 압구정이나 용산은 풍수지리적으로도 이미 명당임이 입증된 곳입니다.”

우리나라는 백두대간이 동쪽에 있어 물이 동에서 서로 흐르는 게 일반적인데 서울의 대표적 하천인 청계천은 서에서 동으로 흐른다는 것. 박 교수는 LG 구인회 회장 생가의 물도 서에서 동으로 흐른다고 한다.

“풍수에서 물은 재물을 관장한다고 하는데 이곳은 서출동류(西出東流)한 두 줄기의 냇물이 합수하는 곳입니다. 이것은 부귀영화의 길지임을 입증하는 것이죠.”

박 교수는 안산은 아미사(蛾眉砂) 형태로 굉장히 아름다우며, 또한 무곡 금성체로 부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산의 형태를 띠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곳에서 용맥이 춤추듯이 흘러나와 생가로 부드럽게 입수되고 있다는 것. 형국론으론 봉황포란형(鳳凰抱卵形)으로 봉황이 양쪽 날개로 알을 품은 형국이며 이 또한 부를 상징하고 있다고 한다.

용맥이 춤추듯 흘러나와 생가로 입수

이처럼 LG 구인회 회장의 생가는 마을 자체가 엄청난 동네라고 한다. 북극성을 중심으로 9개의 별 즉 구성(九星)이 우주만물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그중에서도 제6성인 무곡성(武曲星)이 부(富)를 관장한다. 그런데 이 동네의 주산을 비롯하여 좌우 청룡백호 등의 뭇 산이 무곡성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는 것. 무곡성의 성정은 재물이 날로 쌓여 자손들의 영화까지 누릴 인연으로 물이 들어오는 곳이 여러 곳이며 나가는 곳은 한 곳인 게 명당이라는 것이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사람이 살만한 곳 네 가지 조건이 제시돼 있는데 첫째가 지리(地理), 둘째가 생리(生利), 셋째가 인심(人心), 넷째가 산수(山水)이다.
여기에서 지리는 풍수지리의 준말로 특히 수구 즉 물이 빠져나가는 곳이 좁아야 한다고 했다. 즉 돈이 빠져나가는 것이 적어야 한다는 것. 둘째 생리는 먹고 살 만한 들판이나 직장이 있어야 한다고 했고 셋째가 인심이고 넷째로 주변 산수가 평안하고 아름다워야 한다는 것이다.
LG 생가는 특이하게도 지금 사람이 거주하고 있다. 대문을 들어서자 사적지에 온 듯한 다소 엄숙해지는 마음을 빨랫줄에 걸린 옷가지들이 생생한 현실감으로 정겹게 인사한다.

관리인인 하진자 씨는 출타 중이어서 만날 수 없었지만 생가 탐방 중에 실제 사람이 거주하는 곳은 처음이어서 기분이 편안해졌다. 생가에 사람이 거주하는 것은 어떤지 박 교수에게 물어봤다. “생가라는 것도 결국 집입니다. 그냥 관리만 이뤄지는 것과 사람이 거주하는 것은 다릅니다. 당연히 현재 사람이 살고 있는 것이 좋습니다.”
LG 생가는 이처럼 거주하는 사람이 있어 찬찬히 집을 둘러보고 있노라면 손님을 맞기 위해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 금방이라도 문을 열고 나올 것만 같은 착각 속에 빠져들게 한다.
‘가족간의 인화(人和)’를 엿볼 수 있는 방산정과 모춘당

LG가문의 자녀교육을 한마디로 말하면 ‘가족간의 인화(人和)’를 존중하는 유교식 가르침으로 대표된다. 구인회 회장 생가에는 이런 유교적 규범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여러 곳 남아 있다. 먼저 구 회장의 조부인 만회공을 추모 기념하기 위해 세운 방산정(防山亭)이 있다. 또한 아버지인 춘강 재서공을 추모하기 위한 모춘당(慕春堂)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방산정 바로 옆의 모춘당은 구자경 명예회장이 한국전쟁 당시에 불 타 없어진 자리에 조부를 추모하고 자녀들의 교육과 가풍을 익히는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새로 건립한 사당이다.
모춘당의 눈에 띄는 곳에는 ‘형제 간 종족간에는 서로 좋아할 뿐 따지지 마라. 검소함으로 집안을 다스리고 공경함으로 몸을 닦아라. 작은 분을 참지 못하면 마침내 어긋나게 된다’ 등 만회공이 내린 가훈이 기둥마다 붙어 있다.
LG가는 모춘당을 완공한 후에 친자 교육 외에도 집안에 새 며느리나 사위를 맞으면 1년에 한 번 그들과 함께 고향을 방문하여 이곳에서 가풍을 익히도록 했다고 한다. 이 행사는 주로 명예회장의 부인이 주도하는데, 조상을 기리는 곳에서 함께 자며 가훈을 새기고 가풍을 숭상하는 것을 몸에 배도록 했다는 것이다. 구 회장 생가 옆집은 구인회 씨의 큰집으로 동생 구철회가 큰집의 양자로 적을 올리면서 그곳에 그의 유적이 남아있다.

이 마을에서 구씨 생가에 해당되는 집은 이들 두세 집 정도이다. 오른쪽으로 상동 하동 마을 전체를 덮고 있는 기와집 대부분은 승산 허 씨 집안의 고가다. 그만큼 허씨 세력을 중심으로 뿌리를 내린 마을이다. 자손이 많은 구씨 가문이지만 이런 유교적 가르침은 70년 이상 지속됐던 허씨 가문과의 동업관계에서도 빛을 발했다. 심각한 불협화음 없이 양 가문은 평탄하게 기업을 이끌었고, 분리과정에서도 큰 잡음 없이 마무리 됐던 것도 이러한 양가의 ‘인화’를 중요시한 가풍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주변의 말이다.

경남 진양군 지수면=양혁진 기자(dwhj@ermedia.net), 사진 이태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