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황희 관련 기록

고 영의정 황희(黃喜), 고 좌의정 김사목(金思穆)등 서너명 이라는 기사

아베베1 2010. 2. 11. 23:18

고종 9년 임신(1872, 동치 11)

 

 

 근정전에서 정조의 조하에 친림할 때 행 도승지 윤병정 등이 입시하였다

○ 사시(巳時).
상이 근정전(勤政殿)에 나아가 정조(正朝)의 조하(朝賀)에 친림하였다. 이때 입시한 행 도승지 윤병정, 좌승지 김성근, 우승지 김익용, 좌부승지 왕정양, 우부승지 유기대, 동부승지 유성환, 기사관 - 원문 빠짐 - , 별겸춘추 조병호(趙秉鎬)ㆍ박정양(朴定陽)ㆍ최봉구(崔鳳九)ㆍ김영목(金永穆)ㆍ박용대(朴容大), 기사관 김학진(金學鎭), 검교직제학 조영하(趙寧夏)ㆍ이재면(李載冕)ㆍ민승호(閔升鎬)ㆍ조성하(趙成夏), 직제학 남정순(南廷順), 검교직제학 한경원(韓敬源), 직제학 조경호(趙慶鎬), 검교직각 이세용(李世用)ㆍ홍은모(洪殷謨)ㆍ이호익(李鎬翼)ㆍ강찬(姜), 대교 한기동(韓耆東), 검교부제학 정건조(鄭健朝)ㆍ이명응(李明應)ㆍ조경하(趙敬夏), 부제학 홍원식(洪遠植), 검교전한 이기호(李起鎬)ㆍ권정호(權鼎鎬)ㆍ김성균(金性均), 전한 홍만식(洪萬植), 응교 박정양(朴定陽), 부응교 김연수(金演壽), 교리 박용대(朴容大), 부교리 이수만(李秀萬), 수찬 이재순(李載純)ㆍ김영목(金永穆), 부수찬 민영목(閔泳穆)이 차례로 나와 시립하였다.
때가 되자, 통례가 외판을 계청하였다. 상이 원유관(遠遊冠)에 강사포(降紗袍)를 갖추어 입고 여(輿)를 타고서 사정문(思政門)으로 나갔다. 약방 제조 김병교, 부제조 윤병정이 앞으로 나아가 문안 인사를 하였다. 문안 인사를 마치자, 통례가 꿇어앉아서 여에서 내리기를 계청하니, 상이 여에서 내렸다. 근정전으로 나아가 어좌(御座)로 올라갔다.
통례가 꿇어앉아서 규(圭)를 잡기를 계청하니, 상이 규를 잡았다. 윤병정이 표신(標信)을 내어 작문(作門)을 열기를 청하였다. 2품 이상의 신하들이 들어와서 자리로 나아갔다. 찬의가 ‘사배(四拜)’를 창하니, 종친과 문무 백관들이 사배례를 행하고 이어 꿇어앉았다. 대치사관(代致詞官)이 치사(致詞)하기를 청하였다. 치사하기를 마치자, 찬의가 ‘사배(四拜)’를 창하니, 종친과 문무 백관들이 사배례를 행하고, 이어 꿇어앉았다.
김익용이 꿇어앉아서 전교(傳敎)를 청하였다. 찬의가 ‘사배’를 창하니, 종친과 문무 백관들이 사배례를 행하고 이어 꿇어앉았다. 찬의가 ‘진홀삼고두(搢笏三叩頭)’를 창하니, 종친과 문무 백관들이 홀(笏)을 꽂고 세 번 머리를 조아렸다.
찬의가 ‘산호(山呼)’를 창하니, 종친과 문무 백관들이 손을 모아 이마에 얹으면서 ‘천세(千歲)’라고 소리쳤다. 찬의가 ‘산호’를 창하니, 종친과 문무 백관들이 손을 모아 이마에 얹은 다음 ‘천세’라고 소리쳤다. 찬의가 ‘재산호(再山呼)’를 창하니, 종친과 문무 백관들이 손을 모아 이마에 얹은 다음 ‘천천세(千千歲)’라고 소리쳤다. 찬의가 ‘출홀부복흥사배(出笏俯伏興四拜)’를 창하니, 종친과 문무 백관들이 홀을 꺼낸 다음 엎드렸다가 일어나 네 번 절하고, 이어 꿇어앉았다.
선전목관(宣箋目官)이 전목(箋目)을 읽어 아뢰었다. 선전관(宣箋官)이 전문(箋文)을 읽어 아뢰었다. 읽기를 마치자, 전의(典儀)가 꿇어앉아서 예물함(禮物函)을 유사에게 주기를 계청하였다. 통례가 꿇어앉아서 예가 끝났다고 아뢰었다.
판중추부사 이유원(李裕元), 영의정 김병학(金炳學), 우의정 홍순목(洪淳穆)이 앞으로 나아가 상주하기를,
“금년은 바로 우리 태조 대왕께서 개국하신 지 여덟 번째 맞는 회갑으로, 정월 1일에 정전(正殿)에 임어하여 조하를 받으시니, 국운이 새롭게 되었습니다. 아침 일찍 수고로이 거둥하셨는데, 성상의 체후는 어떠하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결같다.”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침수와 수라는 어떠하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결같다.”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대왕대비전의 기후는 어떠하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결같으시다.”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왕대비전의 기후는 어떠하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결같으시다.”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대비전의 기후는 어떠하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결같으시다.”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중궁전의 기후는 어떠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안순하다.”
하였다. 김병학이 아뢰기를,
“올 임신년은 바로 우리 태조 대왕께서 왕업을 열어 후세에 전한 지 여덟 번째 맞는 회갑이 되는 해입니다. 이 임신년을 맞이하여 대궐을 중건하고 정전에 임어하여 조하를 받으심에, 모든 사람들이 다 경축하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남전(南殿) 제1실의 어진(御眞)과 경기전(慶基殿)의 어진이 햇수가 오래 되어 희미해졌다. 이번에 다시 모사하고자 하니, 앞으로 하교가 있을 것이다.”
하자, 이유원이 아뢰기를,
“신이 호남 감사로 있을 적에 어진을 우러러 뵈었는데, 그때에도 역시 희미하여 다시 모사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의논이 있었습니다. 신이 우러러 뵈온 지 이미 20년이나 지났으니, 영정에 더욱더 희미해진 곳이 있을 듯합니다.”
하고, 김병학이 아뢰기를,
“남전의 어진 역시 희미한 곳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쓰라고 명하고서 전교하기를,
“태묘의 현책(顯冊)을 장차 친히 올릴 것인데, 남전 제1실의 어진이 모사한 지 오래 되어 희미하니, 금년에 다시 모사하는 것이 참으로 인정과 예문에 합당하다. 전에 다시 모사할 때에는 모두 도감을 설치하였으니, 이번에도 사체에 있어서 다르지 않게 하여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근거로 삼을 만한 우리 조정의 고사가 있다. 지금부터는 모사하는 등의 절차를 종친부(宗親府)로 하여금 날짜를 가린 다음 규정을 정해 놓고 거행하라고 분부하라.”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금년에 내가 장차 어용(御容)을 다시 그릴 것인데, 이는 내가 추호라도 웅장하고 화려하게 하려는 뜻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삼가 영묘조와 정묘조 때의 고사를 살펴보건대, 10년마다 어진 한 본을 모사하여 이것이 그대로 우리 조정의 규례가 되었다. 지금 나의 이 거조는 실로 영조와 정조 두 조정에서 이미 시행한 규례를 본받는 데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이는 선대의 뜻을 이어받는 한 가지 일인 것이다. 경기전의 어진은 앞으로 감사의 장계가 올라오기를 기다려서 날짜를 가려 다시 모사하라. 그리고 이번에는 어진을 안에서 그리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이번에 어진을 다시 그리는 거조는 옛 법도에 비추어 볼 때 오히려 늦은 감이 있습니다.”
하고, 김병학은 아뢰기를,
“두 성조(聖朝) 때에는 10년마다 한 본씩 모사하였으므로 어진이 한두 개가 아닙니다.”
하였다. 상이 쓰라고 명하고서 전교하기를,
“영중추부사의 금년 나이가 90세가 넘었다. 우리나라의 대관(大官) 가운데 이 나이를 누린 사람은 불과 3, 4명 밖에 되지 않으니, 오늘의 이 일은 참으로 드물게 있는 일이고 아주 상서로운 일로, 나의 뜻을 표하는 거조가 없을 수 없다. 친손자와 외손자 가운데 초사(初仕)할 만한 사람을 이름을 알아본 뒤에 등용하라. 그리고 의복과 음식은 연례로 내리는 것 이외에 숫자를 더 보태어 실어보내며, 이어 사관을 파견하여 문안하고 오라.”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신들은 앞으로 나오라.”
하였다. 대신들이 앞으로 나왔다. 나오기를 마치자, 상이 이르기를,
“영중추부사의 나이가 90세가 되었으니, 이는 참으로 아주 큰 국가의 상서(祥瑞)이다. 지난번에 입시하였을 때 그의 근력을 보니, 아직도 강건하여 나이 어린 사람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하니, 김병학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우리나라의 대관들 가운데 90세를 넘긴 사람은 불과 서너 명밖에 되지 않습니다. 고 영의정 황희(黃喜), 고 좌의정 김사목(金思穆)이 모두 이 나이를 넘겼는데, 그 복됨과 근력은 이 대신에게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영중추부사의 경우는 오복이 모두 갖추어졌다.”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이 대신의 강건한 근력은 신의 근력으로서도 당해 낼 수가 없습니다.”
하고, 김병학이 아뢰기를,
“이 대신은 나이가 90세가 되었는데도 매일 책을 보는데, 날마다 본 책의 내용을 항상 기억하고 있으니, 그 총명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하고, 홍순목이 아뢰기를,
“이 대신이 90세까지 장수하는 것은 바로 평소에 조섭을 잘한 소치입니다.”
하였다. 통례가 꿇어앉아서 규를 놓기를 계청하니, 상이 규를 놓았다. 통례가 꿇어앉아서 여를 타기를 계청하니, 상이 여를 타고서 사정문으로 들어갔다. 유기대가 표신을 내어 엄(嚴)을 해제하기를 청하였다. 상이 대내로 들어가니, 대신들이 차례로 물러나왔다.
○ 사시(巳時).
상이 자경전에 나아가 진강하였다. 이때 입시한 강관 정기세(鄭基世), 참찬관 정태호(鄭泰好), 시독관 왕성협(王性協), 가주서 허윤(許綸), 기주관 박봉진(朴鳳軫), 별겸춘추 김학진(金鶴鎭)이 각각 《시전》 제6권을 가지고 차례로 나와 엎드렸다.
상이 이르기를,
“사관은 좌우로 나누어 앉으라.”
하였다. 상이 전에 배운 글을 한 번 외우고, 이어서 책을 폈다. 정기세가 ‘아행기야(我行其野)’에서 ‘아행기야 삼장(我行其野三章)’까지 읽고, 이어서 뜻풀이를 하였다. 상이 서산(書算)을 정기세에게 주라고 명하였다. 상이 새로 배울 글을 10번 읽고 나자 정기세가 서산을 도로 바쳤다. 상이 이르기를,
“이 편은 윗장과 확실히 서로 비슷하다. 이때에는 살 곳을 잃은 백성들이 원망하거나 풍자하는 바가 없었으니, 충후한 의리를 볼 수 있다. 이 두 장을 보면 그 나라가 다스려졌는지 어지러웠는지 알 수 있다. 당시의 임금이 만약 인정(仁政)을 행했다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이 때문에 효도하지 않고 공손하지 않은 백성들이 이로부터 있게 되었다.”
하니, 정기세가 아뢰기를,
“상하 양편이 과연 같은 말 뜻입니다. 백성들이 이미 그 나라에서 편안하지 못하여 옮겨 다른 나라로 가서 혹시 거두어 구휼해 줌을 받을까 기대했었지만 역시 받지 못하였으니, 원망과 노여움이 얼굴 빛에 나타나고 가혹한 책망이 말에서 드러나는 것은 진실로 인정상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조금도 이런 뜻이 없고 완곡하게 돌려서 말을 한 것은 충후한 의리에서 성대히 나온 것입니다. 이는 오로지 선왕(先王)의 덕화가 더욱 오래되었지만 없어지지 않은 것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선왕(宣王)은 나라를 중흥시킨 임금인데 이때의 백성들이 무엇 때문에 이 시를 짓게 되었는가? 진실로 의심할 만하다.”
하니, 정기세가 아뢰기를,
“나라를 중흥시킨 임금으로 은(殷) 나라 고종(高宗)과 주(周) 나라 선왕을 아울러 일컫고 있으나, 선왕은 은 나라 고종에 미치지는 못한 듯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이와 같은 데에는 이르지 않았으므로 선유(先儒)들이 ‘선왕 시대가 된다는 것을 볼 수 없다.’고 한 것은 그럴 듯합니다. 혹시 유왕 초기인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과연 그럴 듯하다. 주 나라의 선왕(先王)의 교화가 백성들의 마음속에 두루 미쳤기 때문에 비록 위태롭고 어려운 시대에 이르렀지만 장과 구마다에 충후한 말이 아닌 것이 없다.”
하니, 정기세가 아뢰기를,
“주 나라가 융성했을 때에 있어서는, 대사도(大司徒)가 향삼물(鄕三物)을 가지고 만민을 가르치고 손님으로 삼아 추천하였습니다. 삼물은 바로 육덕(六德)과 육행(六行)과 육예(六藝)입니다. 육행은 곧 부모에게 효도하고[孝], 형제간에 우애하며[友], 구족간에 화목하고[睦], 인척간에 정분이 도타우며[婣], 남을 위해 힘쓰고[任], 없는 자를 구휼하는[恤] 것입니다. 이로써 손님을 추천하였으니, 자연 교화가 백성들의 마음에 두루 미친 것이 있을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 시는 백성들의 곤궁함이 오히려 다 말하기조차 어려운 지경이어서 친척과 헤어지고 조상의 무덤을 버리고 다른 나라로 간 것이다. 만약 윗사람이 어진 정치를 행했다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하니, 정기세가 아뢰기를,
“백성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것은 오로지 윗사람이 어떻게 이끄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훌륭한 정사를 펴고 인(仁)을 베푼다면 그에 안착하여 옮기는 것을 중하게 여기는 백성이 어찌 흩어져 다른 나라로 갈 리가 있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요순(堯舜)과 걸주(桀紂)의 백성은 똑같지만 백성이 선하고 선하지 않은 것은 오직 윗사람이 어떻게 이끄느냐에 달려 있다. 만약 어진 정치를 베풀어 의지할 곳 없는 홀아비, 홀어미, 어려서 부모를 잃은 아이, 늙고 자식 없는 사람들로 하여금 위로하여 따라오게 하고 편안하게 해준다면, 백성들이 어찌 다른 나라로 가겠는가.”
하니, 정기세가 아뢰기를,
“성교를 매우 흠앙합니다. 이는 실로 백성들의 복입니다. 요순이 천하를 인으로 이끄니 백성이 따랐습니다. 임금이 되어서 요순 시대의 정사를 행한다면 백성들이 모두 요순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이어서 아뢰기를,
“이 시를 지은 것이 비록 주 나라의 도가 쇠퇴할 때지만 그 충후한 풍속은 오히려 남아 있었으니, 인정의 오묘함을 묘사한 것을 통해 더욱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옛날 선왕(先王)의 시대에는 육행(六行)으로 사람을 가르쳤으되 교화가 행해지고 풍속이 아름다웠으니, 어찌 서로 원망하고 서로 풍자하는 말이 있었겠습니까. 교화가 점차 희미해지고 풍속이 더욱 박해져 더러는 부모의 나라에서 살 곳을 얻지 못하기도 하였지만, 그래도 인척(姻戚)들이 서로 구휼해 주기를 기대했었는데 또 얻지 못하였으니, 곤궁하고도 절박하였다고 이를 수 있습니다. 어찌 원망과 풍자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마는 오히려 용서할 수 없는 정상을 후히 용서하고 기필코 꾸짖어야 할 대상에 대하여 가볍게 책망하였으니, 충후한 뜻이 말 사이에 넘칩니다. 이것이 《시경》의 가르침이 사람으로 하여금 온유하고 돈후하게 하는 이유입니다.
게다가 대체로 사람의 정리는 사람들이 서로 구휼해 주길 바라기 때문에 처음에는 기대가 크지 않을 수 없고 중간에는 요행을 바라고 끝내 얻지 못하면 할 수 없이 떠납니다. 이 때문에 맨 첫 장에서 거(居)라고 말한 것은 오래 머무르겠다는 뜻이요, 이 장에서 숙(宿)이라고 말한 것은 잠시 동안 임시로 살겠다는 뜻이요, 끝 장에서 이(異)라고 말한 것은 떠나면서도 오히려 용서한다는 뜻입니다. 그 순서에 따라 깊고 얕은 것이 곡진하다고 할 만합니다.”
하였다. 왕성협이 아뢰기를,
“이 장은 혼인한 연고로 그가 거두어 구휼해 줄 것을 기대했다는 것을 말하였습니다. 《사기(史記)》에 평원군(平原君)이 신릉군(信陵君)에게 편지를 보내서, ‘내가 혼인에 스스로 부친 것은 위급하고 어지럽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혼인 관계는 근심이나 재난에서 서로 구원하는 것을 귀중하게 생각합니다. 지금은 돌봐주지 않았으니, 거의 금수에 가깝습니다.”
하고, 정태호는 아뢰기를,
“강관과 유신이 남김없이 다 진달하였으므로 신이 다시 아뢸 것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책을 덮었다. 이어 하교하기를,
“영중추부사(領中樞府使 정원용(鄭元容)을 가리킴)의 제절(諸節)은 요사이 어떠한가?”
하니, 정기세가 아뢰기를,
“잠자는 것과 먹는 것은 다행히 전과 같습니다만, 추운 겨울철을 당하여 자연 전에 미치지 못하는 때가 많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지난번에 전 도령(都令)의 말을 들으니, 정승을 지낸 동래(東萊) 정씨(鄭氏)가 15사람이나 된다고 하였다.”
하니, 정기세가 아뢰기를,
“신의 선조인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의 직계 자손 가운데 정승이 12사람이 되니, 한 가문 안을 통틀어 말하면 과연 15사람이 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지난번에 영상이 아뢴 바를 들으니 영중추부사의 복력(福力)은 곽 영공(郭令公)에 견줄 수 있겠다. 문중에 또한 혼인한 지 60년이 넘은 자가 많다고 하니, 이는 진실로 드물게 있는 성대한 일이다.”
하니, 정기세가 아뢰기를,
“신의 선조 중에 회혼례를 행한 사람이 많고, 요즈음에도 3차례나 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의 숙부가 80대 노인인데 감히 맏형 앞에서는 노인이라고 칭하지 못한다고 하니, 또한 매우 귀한 일이다.”
하니, 정기세가 아뢰기를,
“과연 그렇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문익공의 제사를 받드는 것은 관직이 높고 녹봉이 후한 자손이 하는데, 항렬로 논하지는 않는가?”
하니, 정기세가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의 집안에서 장차 대대로 봉사할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일찍이 다른 데 실려 있는 것을 보니, 영의정이 된 사람은 매우 많은데 《매복록(枚卜錄)》에는 그렇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정기세가 아뢰기를,
“국조 500년 동안에 정승이 360명이고, 영의정이 150명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황익성(黃翼成 황희(黃喜)를 말함)은 영의정이 되었는가?”
하니, 정기세가 이르기를,
“그렇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양파(陽坡 정태화(鄭太和)를 말함)도 영의정이 되었는가? 양파의 정승의 업은 능히 문익공의 공렬을 이었다.”
하니, 정기세가 아뢰기를,
“신의 선조인 익헌공 정태화는 여러 번 영의정이 되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영중추부사는 재상을 30여 년이나 지냈으니 매우 희귀한 일이다. 내년에는 더욱이 규장각에 들어간 지 60년이 되니, 진실로 규장각에서 처음 있는 일이며 또한 매우 희귀하다.”
하자, 정기세가 아뢰기를,
“내년이 과연 직각(直閣)에 제수된 해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록 날씨가 차가운 때를 만났으나 아직도 뜰 안을 출입하는가? 80대의 근력이 60여 세 된 사람과 다름이 없다고 말들을 한다.”
하였다. 상이 사관에게 자리로 돌아가라고 명하였다. 또 물러가라고 명하니, 신하들이 차례로 물러나왔다.
[주D-001]향삼물(鄕三物) : 주대(周代) 향학(鄕學)의 교육 과정 중의 육덕(六德), 육행(六行), 육예(六藝)를 말한다. 육덕은 지(知)ㆍ인(仁)ㆍ성(聖)ㆍ의(義)ㆍ충(忠)ㆍ화(和)이고, 육행은 효(孝)ㆍ우(友)ㆍ목(睦)ㆍ인(婣)ㆍ임(任)ㆍ휼(恤)이고, 육예는 예(藝)ㆍ악(樂)ㆍ사(射)ㆍ어(御)ㆍ서(書)ㆍ수(數)이다.

[주D-002]곽 영공(郭令公) : 곽자의(郭子儀)를 말한다. 삭방 절도사(朔方節度使)로 있을 때 안사(安史)의 난을 평정하여 그 공으로 분양왕(汾陽王)에 봉해지고, 토번(吐蕃)을 크게 파한 공으로 상보(尙父)라는 호를 받았다. 벼슬은 중서령(中書令)에 이르렀다. 충신(忠信)과 위명(威名)이 드러난 자로 당대에서는 으레 곽자의를 꼽았다. 《唐書 卷137》
○ 사시(巳時).
상이 자경전에 나아갔다. 약방이 입진하고, 진강을 하기 위하여 함께 입시하였다. 이때 입시한 도제조 홍순목, 제조 이승보, 부제조 정기회, 직각 강찬(姜), 교리 장시표(張時杓), 주서 김홍집(金弘集), 기사관 김재정(金在鼎), 별겸춘추 김명진(金明鎭), 영돈녕부사 홍순목, 강관 박규수(朴珪壽), 참찬관 정기회, 시독관 장시표, 가주서 김홍집, 기사관 김재정, 별겸춘추 김명진이 각각 《시전》 제7권을 가지고 차례로 나와 엎드리고, 의관(醫官) 이경년(李慶年)ㆍ 김재호(金在瑚)ㆍ 이석주(李碩柱)ㆍ이호석(李好錫)이 나와 기둥 밖에 엎드렸다.
상이 이르기를,
“사관은 좌우로 나누어 앉으라.”
하였다. 홍순목이 앞으로 나와 아뢰기를,
“가을 비가 계속 내려 날씨가 연일 고르지 못한데, 성상의 체후는 어떠하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결같다.”
하였다. 홍순목이 아뢰기를,
“침수와 수라는 어떠하십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한결같다”
하였다. 각전(各殿)에 대해 안부를 묻고 나서 홍순목이 아뢰기를,
“의관이 대령하고 있습니다. 입진하여 성상의 기후를 자세히 살펴야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이경년 등이 차례로 입진한 다음 물러나 기둥 밖에 엎드렸다. 홍순목이 말하기를,
“맥후(脈候)를 아뢰라.”
하니, 이경년 등이 일어났다가 엎드려 아뢰기를,
“맥후는 좌우 삼부(三部)가 고릅니다.”
하자, 홍순목이 말하기를,
“탕제(湯劑)는 달리 의논해 정할 것이 없겠소?”
하니, 이경년 등이 아뢰기를,
“의논해 정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가을 비가 지리한데 추수에 방해가 없겠는가?”
하니, 홍순목이 아뢰기를,
“수확할 즈음에 방해되는 바가 없지 않을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난번 듣건대 대신이 편찮았다고 하던데 지금 과연 쾌차한 것인가?”
하니, 홍순목이 아뢰기를,
“신이 지난달 보름쯤부터 본래 앓던 담현증(痰眩症)으로 여러 날을 고생하다가 요즘 조금 나았습니다만, 아직도 병 기운이 남아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요즘 더운 기운과 찬 기운이 일정하지 않아 감기를 앓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하니, 홍순목이 아뢰기를,
“이러한 때 건강을 조절하기가 어려우니, 더욱 잘 보존하소서.”
하였다. 상이 약방에게 먼저 물러가라고 명하니, 이승보가 의관을 거느리고 물러나왔다. 상이 전번에 배운 부분을 한 번 외우고 나서 책을 폈다. 박규수가 ‘봉봉서묘(芃芃黍苗)’부터 ‘서묘오장(黍苗五章)’까지 읽고 이어 장구를 해석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진강 책자의 음(音)과 토(吐)에 잘못된 곳이 많아 연일 제기하여 신칙하였는데도, 전번에 배운 내용의 앞부분에 있는 남(藍) 자를 남(籃) 자로 잘못 적은 것을 또 고치지 않았다.”
하니, 홍순목이 아뢰기를,
“이는 교정을 정밀하게 하지 않은 소치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대문(大文)의 음과 토 가운데 언해(諺解)와 맞지 않는 것이 많아 강독(講讀)을 옳게 하지 못하게 되는데, 또 배송(背誦)한 뒤에 비로소 그 잘못을 알게 되는 것도 있다.”
하니, 박규수가 아뢰기를,
“글자의 음을 잘못 읽게 되면 뜻도 따라서 어그러지게 됩니다.”
하자, 홍순목이 아뢰기를,
“책자를 유신으로 하여금 교정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더욱 정밀하게 교정하도록 하라.”
하자, 장시표가 아뢰기를,
“삼가 하교대로 정밀하게 교정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서산(書算)을 강관에게 주도록 명하였다. 상이 새로 배운 부분을 열 번 읽고 나자, 박규수가 서산을 반납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장에서, 소백(召伯)이 가서 신백(申伯)의 성읍(城邑)을 경영하여 왕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고 한 것은 실로 직분을 안 자의 일이다. 소백은 바로 소공(召公)의 후예인데, 이번 역(役)에 있어 하러 가는 자로 하여금 원망함이 없도록 하였으니, 그 어짊이 조상의 업적을 계승할 만하여 그 덕을 백성들이 사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자, 박규수가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가 지당하십니다. 소백은 바로 소공의 후손 소호(召虎)로서 방숙(方叔)과 더불어 선왕(宣王)의 정치를 도왔던 자입니다. 주(周) 나라에는 주백(周伯)과 소백(召伯)이 있어 섬(陜) 땅의 동서를 나누어 주관하여 천하의 제후를 거느렸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섬 땅의 동과 서는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가?”
하자, 홍순목이 아뢰기를,
“섬 땅은 바로 기내(畿內)의 가까운 지역입니다.”
하니, 박규수가 아뢰기를,
“소공이 대사공(大司空)의 관직을 맡았는데, 제후를 봉하여 세우는 것을 대사공이 주관하여 그 경계를 나누어 정해서 가까운 지역의 제후에게 명하여 그 성읍을 지어주도록 하였으니, 이는 주 나라 왕가의 옛법입니다. 지금 소백이 그 직임을 세습하여 마침내 스스로 가서 신백의 봉읍을 경영한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는 바로 우리나라에서 제택(第宅)을 지어 하사하는 것과 같은 것이구나.”
하니, 박규수가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신백은 바로 신후(申后)의 나라이겠다.”
하니, 홍순목이 아뢰기를,
“신백은 바로 선왕(宣王)의 외삼촌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과연 그렇구나.”
하였다. 홍순목이 아뢰기를,
“또 신후(申侯)가 있는데, 평왕(平王)의 외삼촌이 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 신백은 두 사람인 것 같다.”
하니, 박규수가 아뢰기를,
“그 아들이 세습하여 봉해진 것 같습니다.”
하자, 홍순목이 아뢰기를,
“이는 대대로 주 나라 왕가의 사위가 된 나라입니다. 유왕(幽王) 때 신후가 태자 의구(宜臼)를 거느리고 그 나라로 가서 피난하였는데, 그 뒤 태자를 세워 왕으로 삼아 동천(東遷)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포사(褒姒)의 난(亂) 때 견융(犬戎)을 거느리고 들어와 친 사람도 신후이다.”
하자, 홍순목이 아뢰기를,
“이는 신후의 죄입니다.”
하였다. 박규수가 아뢰기를,
“이때 제후를 봉하고서 성읍을 경영하는데 역에 나아간 자들로 하여금 가서 원망함이 없도록 하였으니, 선왕(宣王)의 중흥의 기상을 볼 수 있는바 또한 대아(大雅) 숭고(崧高)의 뜻입니다. 이 장에서 말한 바 수레, 소, 보행자(步行者), 승거자(乘車者)가 매우 분답(紛遝)한 것을 통해 그 일의 중대함을 알 수 있는데, 사람들이 모두 기꺼이 나와 힘써 일을 하였습니다. 게다가 숙숙(肅肅), 열열(烈烈) 등의 말을 통해 그 기율이 정제되어 시행하는 데 있어 문란하지 않음을 알 수 있으니, 선왕의 덕이 어찌 훌륭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백성들을 은혜로써 부렸기 때문에 원망함이 없었던 것이다.”
하자, 장시표가 아뢰기를,
“《주역》에, ‘즐겁게 백성을 부리면 백성들이 그 노고를 잊는다.’ 하였습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의 실정을 살필 수 있다면 수고롭다 하더라도 원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채미시(采薇詩)에, ‘우리 수자리가 끝나지 않으니 누구를 시켜 돌아가 빙문(聘問)하게 하지 못하는도다.’ 하였습니다. 이 시에서, ‘우리 일이 이미 이루어지고 나야 돌아가 편히 살게 될 것이로다.’ 하였으니, 또한 필시 공역(功役)이 완성되지 않으면 감히 돌아가는 것을 말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소백이 가서 신백의 제택(第宅)을 경영하니 남국(南國)에서 이로써 민심이 기뻐하였고, 사읍(謝邑)의 공역이 이미 이루어지니 왕의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이 때문에 멀고 먼 길을 일하러 가는데도 원망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기뻐 흔쾌히 받아들이는 뜻이 거의 기장의 이삭이 비를 만난 것과도 같았으니, 이에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도로써 백성을 부리면 수고롭더라도 원망하지 않는다는 뜻을 볼 수 있습니다.”
하니, 정기회가 아뢰기를,
“맨 앞 장의 ‘우거진 기장의 이삭을 비가 촉촉히 적셔준다.’고 한 구절은 뜻을 흥기시키는 것일 뿐만 아니라 자연 깊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하늘이 비로써 촉촉히 적셔주면 기장의 이삭이 쑥쑥 자라니, 임금의 치화(治化)가 성대하여 덕교(德敎)가 두루 미치면 신하가 각기 그 직분을 지키고 백성들이 각기 그 업에 편안히 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른바 군자는 전왕(前王)이 어질게 여긴 바를 어질게 여기고 그 친히 한 바를 친히 하며, 소인은 전왕이 끼쳐준 즐거움을 즐거워하고 그 이익을 이롭게 여긴다고 한 것과 같으니, 어찌 뭇 사무가 자질구레하게 되고 생민이 흩어져 떠돌게 되는 근심이 있겠습니까. 이때 선왕이 신백을 봉하여 장차 남쪽 지방을 경영하여 다스리려고 하였는데, 만약 맡길 만한 사람을 얻지 못하였다면 밤낮없이 근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소백과 같은 신하가 있어 노역을 마다하지 않고서 그 일을 이루어냈으니, 왕의 마음이 비로소 편안하게 된 것입니다. 옛말에, ‘수고로이 어진 이를 구하여 편안히 어진 이에게 맡긴다.’ 하였으니, 이에서 편안하게 어진 이에게 맡긴다는 뜻을 볼 수 있습니다.”
하자, 홍순목이 아뢰기를,
“이 시는 5장에 지나지 않는데도 주 나라 선왕(宣王)의 중흥의 업을 찬란히 볼 수 있습니다. 그 지의(旨義)에 세 가지가 있으니, 선왕이 밤낮없이 진념(軫念)하는 것과 소백이 성심으로 부지런히 왕명을 시행해 나가는 것을 볼 수 있고, 또 대중들이 그 은혜를 입어 그 노고를 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장차 군사를 출동하도록 명하여 대부(大夫)가 공역(功役)에 나아가게 될 때 위에서 체득하여 살펴 그 은혜가 아래에까지 미치게 되면 자연히 그 노고를 잊고 왕사(王事)에 힘을 다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선왕은 중엽 때의 임금인가?”
하니, 홍순목이 아뢰기를,
“선왕의 시대는 바로 주 나라 왕가에 있어 8, 9세 되는 후손이니, 중엽에 해당합니다.”
하자, 박규수가 아뢰기를,
“대수(代數)로는 중엽이 아닙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감히 여쭙기를, 요즘은 과연 무슨 책을 읽고 계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성통보(萬姓統譜)》이다. 이제 막 제왕세계(帝王世系)를 보았는데, 이 책에 실려 있는 바는 명 나라 목종(穆宗) 황제에서 끝난다.”
하자, 박규수가 아뢰기를,
“목종 융경(隆慶) 연간 이후가 만력조(萬曆朝)입니다. 이러한 책들은 비록 상고하여 보는 데는 빠르지만 근거가 분명하게 제시되는 정사(正史)만 못합니다. 주 나라 왕가의 세계를 상고하고자 한다면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상세하게 실려 있습니다. 이제는 성학(聖學)이 점차 고명한 경지에 오르고 있으니, 《사기》나 《한서(漢書)》 등의 책을 열람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홍순목이 아뢰기를,
“이 책은 열람하기에 편리하게 만든 책에 불과합니다. 전사(全史)를 항상 앞에 놓아두고 수시로 상고하여 열람하신다면 기억해 두는 데 크게 보탬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제 채록(采綠) 시를 강하였는데, 소주(小註)에, ‘《이아(爾雅)》에 이르기를’ 한 것이 있기에 《이아》를 가져다 상고해 보니, ‘녹(綠)은 곧 욕(蓐)이다. 녹죽의의(綠竹猗猗)와 같은 뜻인데 녹죽의 녹 자는 바로 그 색(色)이다.’ 하였는데, 이 설은 의심스럽다.”
하니, 박규수가 아뢰기를,
“고서(古書)에도 녹죽을 왕추(王芻)라고 해석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명물(名物)은 실로 궁구할 수 없는 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기》는 어느 대(代)에서 끝나며, 이것을 잇는 역사책이 무엇인가?”
하자, 박규수가 아뢰기를,
“사마천의 《사기》는 삼황 오제(三皇五帝)에서 시작하여 한(漢) 나라 무제(武帝)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그 뒤에 반고(班固)가 《전한서(前漢書)》를 짓고 범엽(范曄)이 《후한서(後漢書)》를 지었으며, 일대(一代)마다 일대의 정사(正史)가 있게 되어 명 나라에 이르러서도 《명사(明史)》가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기》는 국정(國政)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그 외에도 볼 만한 것이 많이 있다.”
하자, 박규수가 아뢰기를,
“《명사》는 더욱이 한 번 열람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찍이 《명사》를 보니, 신종(神宗) 이후의 일에 불만스러운 표현이 많았다. 이는 필시 청(淸) 나라 사람이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심지어 명 나라의 정사가 날로 쇠퇴함에 그 나라가 대신하였다고 한 것까지 있다. 이는 건륭(乾隆) 때 지어진 것인가?”
하자, 박규수가 아뢰기를,
“이는 장정옥(張廷玉)이 만든 것입니다. 청 나라의 신하가 만든 것이기 때문에 자연히 이와 같은데, 또 기휘(忌諱)한 것이 많아 호(胡)나 노(虜) 등의 글자는 모두 피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러한 일은 끝내 큰 도량이 될 수 없을 것이다.”
하자, 박규수가 아뢰기를,
“강희(康熙) 연간에 지어진 책들은 일찍이 스스로 넓디 넓은 큰 도량이라 허여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강관은 대국(大國)의 일에 대해 필시 환히 알고 있을 것이다. 《명사》를 모두 보았는데, 청 나라 초기의 일도 실려 있는 것이 많다.”
하자, 박규수가 아뢰기를,
“명 나라 태조의 원대한 왕업과 계책은 법으로 삼을 만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하니, 홍순목이 아뢰기를,
“한 나라 이후 오직 명 나라가 천하를 얻어 정통이 되었으면서도 법을 세운 것이 엄하고 혹독하였습니다. 비록 간관(諫官)을 용납하지 않았어도 큰 뜻을 품고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으면서 그 의(義)를 위해 죽는 일이 서로 이어졌으니, 마치 동한(東漢)의 말기와도 같았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필부(匹夫)로서 천하를 얻은 것은 오직 한 나라 고조(高祖)와 명 나라 태조가 같은데, 명 나라 법은 과연 엄하고 혹독한 결점이 있다.”
하니, 박규수가 아뢰기를,
“명 나라의 제도를 오늘날의 청 나라가 거의 다 따라 쓰고 있어 백성들이 지금껏 그 은택을 입고 있으니, 모두 우리 명 나라 태조의 덕입니다. 이로써 생각하면 어슴프레 명 나라 황실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원(元) 나라의 법이 너무 문란하였기 때문에 명 나라 태조가 천명에 응하여 필부로서 천하를 얻었으니, 제도를 정하고 법을 세우는 데 있어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주례(周禮)》에 이른바 ‘형벌이 나라를 어지럽히면 중한 법전을 쓴다.’ 한 것이 이 뜻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중국에서 아직까지 명 나라를 생각하고 있는 것은 필시 그 초기에 원 나라의 어지러움을 제거하였고 청 나라 사람들이 그 뒤를 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에게는 실로 잊기 어려운 은혜가 있다. 가령 중화(中華)에 명 나라를 이어 일어나는 천자가 있다면 인심이 과연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하니, 박규수가 아뢰기를,
“의당 어찌 될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의 청 나라는 끝내 지리적인 위치가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나라 이외에는 의관(衣冠)의 나라가 없는가?”
하니, 홍순목이 아뢰기를,
“한 조각 건정(乾淨)한 지역은 오직 우리 청구(靑邱) 한 곳뿐입니다.”
하자, 박규수가 아뢰기를,
“의관(衣冠)에 있어 옛 제도를 다시 보고 싶어하는 것은 한인(漢人)만 그런 것이 아니라 만주인(滿洲人)들도 중화의 제도를 아름답다고 여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인지상정이다. 만주인들도 그러는데 더구나 한인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하자, 박규수가 아뢰기를,
“저들 중에는 우리나라의 의관을 보고 혹 흠모하여 한번 가져다 스스로 입어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인들은 의당 우리나라 사람과 상종하겠지만 만주인들은 그럴 리가 없을 것 같다.”
하자, 박규수가 아뢰기를,
“만주인 가운데도 청탁(淸濁)의 구별이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만주인들은 본래 북쪽의 인종인데, 청 나라 초기에 따라 들어온 것인가?”
하니, 박규수가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황성(皇城) 안에는 팔기인(八旗人)만 거주하고, 13성(省)에도 만주인이 주방장군(駐防將軍)이 되어 각각 만주인 병사를 통솔하는데, 진(鎭)의 법령이 매우 엄하여 한인들을 침범하여 어지럽힐 수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한인을 끝내 만주인과 비교하였을 때 아직까지도 간격이 있기 때문이겠다.”
하니, 박규수가 아뢰기를,
“한인 가운데 기무(機務)를 □□하는 자가 드뭅니다.”
하자, 홍순목이 아뢰기를,
“관원을 임명하는 즈음에 권요직(權要職)에는 만주인을 임용하고, 문학(文學)에는 한인을 임용한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겉으로는 한결같이 대우하는 것 같은데, 안으로는 실로 차이가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육부(六部)의 상서(尙書)를 어찌하여 두 사람으로 나누어 두겠는가.”
하자, 박규수가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구문 제독(九門提督)은 어떤 관직인가?”
하니, 박규수가 아뢰기를,
“성문(城門)을 감독하여 살피는 직임일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태학사(太學士)는 재상직인가?”
하니, 박규수가 아뢰기를,
“명 나라 승상(丞相) 호유용(胡惟庸)이 반란을 일으켜 복주(伏誅)되고 나서는 마침내 다시 승상을 두지 않고 육부의 사무를 모두 황제가 친히 보는 것으로 귀속시켰습니다. 이에 고문(顧問)할 만한 신하가 없을 수 없었기 때문에 성조(成祖)가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이끌어 나오도록 하여 기무에 참여하여 듣도록 하였습니다. 이후로 점점 임무가 중해져 태학사의 칭호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대국에 내각(內閣)의 관원이 있었는데, 지금도 그러한가?”
하니, 홍순목이 아뢰기를,
“명 나라 때부터 내각을 설치하여 태학사가 승상의 일을 행하였는데, 지금도 아직 각로(閣老)라는 칭호가 있다고 합니다.”
하자, 박규수가 아뢰기를,
“끝내 옛날 재상의 권한에까지는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라에 정해진 재상이 없다는 것이 가한 일인가? 반란을 일으킨 자가 필시 그 관직을 이용하여 한 것은 아니었을텐데, 이 때문에 그 관직까지 없앤 것은 지나친 것이 아닌가?”
하니, 박규수가 아뢰기를,
“그 권한이 무거웠기 때문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그 권한을 조금 줄이면 되었을 것이다.”
하니, 박규수가 아뢰기를,
“어진 이를 얻어 그에게 맡기는 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는 실로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이니 관직에 달려 있는 문제가 아니다. 중국의 대신(大臣)은 육부의 일을 겸하여 관장하였는데, 아조(我朝)의 상신(相臣) 가운데도 병조 판서를 겸한 예가 있었다. 세조 대왕이 일찍이 영의정으로서 병조 판서를 겸하였고, 귀성군(龜城君) 이준(李浚)도 그러하였다. 숙묘조(肅廟朝) 때 고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에게 어찰(御札)을 내렸는데, 거기에, ‘경에게 겸 병조판서를 임명하고자 한다.’ 한 것이 있었다. 이로써 본다면 그때 비록 실제로 제수하지는 못하였다 하더라도 필시 불가하지는 않았던 것인 듯하다. 겸 병조판서로 명소(命召)하는 일이 지금까지 남아 있으니, 다른 조(曹)는 모르겠지만 이조와 병조는 겸할 수 있을 듯하다.”
하니, 홍순목이 아뢰기를,
“지금의 세 재상은 비록 겸하여 관장하는 관직으로 칭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군국(軍國)의 기의(機宜)를 통솔하여 우의정의 경우 형옥(刑獄)을 전담하여 맡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귀성군 이준은 필시 영특하였을 것이다.”
하니, 홍순목이 아뢰기를,
“영특하였기 때문에 18세에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할 수 있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교복록(校卜錄)》에, 세조의 조카라고 하고 있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세조는 어찌 곧바로 영의정이 되었는가?”
하니, 홍순목이 아뢰기를,
“계제(階梯)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 당시의 반차(班次)는 어려운 것 같다.”
하니, 홍순목이 아뢰기를,
“그 당시에는 제도가 초창기의 형태여서 지금 상고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도위(都尉) 가운데 판서가 된 자가 있었다.”
하니, 홍순목이 아뢰기를,
“도위에게는 처음 받는 자급이 있고, 차례로 자급이 오르는 것이 바로 옛 규례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옛 규례에 있어서는 과연 자급에 따라 관직을 임명하였다. 옛날에 종실이나 도위 가운데 과거에 급제한 사람도 많았는데, 성종조(成宗朝) 때 ‘서대(犀帶)를 한 사람이 과거에 응시하는 것이 끝내 어떻겠는가.’ 하고는 중지하도록 명하였다. 이는 《문헌비고(文獻備考)》에 실려 있다.”
하니, 박규수가 아뢰기를,
“그 당시 과거의 이름은 알 수 없습니다만, 혹 등준시(登俊試)나 발영시(拔英試) 같은 것이었을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나라의 전장(典章)에도 연혁(沿革)이 많았다. 좌우 정승이라는 칭호도 있고, 배극렴(裵克廉)이 또 일찍이 문하시랑(門下侍郞)이 되었다.”
하니, 홍순목이 아뢰기를,
“한 나라 때에는 우승상(右丞相)을 높였으니, 주발(周勃)이 면직되고 나자 진평(陳平)이 좌승상으로서 그 자리에 올랐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육부(六部)라는 칭호는 육조(六曹)와 한가지인가?”
하니, 박규수가 아뢰기를,
“송 나라 때에도 일찍이 육조라고 칭하였습니다.”
하자, 홍순목이 아뢰기를,
“주 나라 때부터 육관(六官)이라 칭하였는데, 육부니 육조니 후대로 내려오면서 각기 다르게 칭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일찍이 《고려사(高麗史)》를 보니, 참람한 제도가 많았다.”
하니, 박규수가 아뢰기를,
“고려 초에도 일찍이 연호(年號)가 있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연호는 본국(本國)에서는 혹 사용할 수 있다 하더라도 어찌 다른 나라에게 쓸 수 있겠는가.”
하니, 홍순목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청 나라의 태조와 태종이 미처 중국으로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명사(明史)》의 서법(書法)에서는 정통(正統)을 그 나라로 귀결시킨 듯하니, 이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니, 박규수가 아뢰기를,
“《명사》의 정통은 숭정(崇禎 명 나라 의종(毅宗)의 연호) 17년에 순사(殉社)했을 때 끝납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만세의 공론이 없었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홍광(弘光 명 나라 복왕(福王)의 연호) 이후는 정통으로 귀결시키기 어렵겠다.”
하니, 박규수가 아뢰기를,
“명 나라의 정통은 영력(永曆 명 나라 영명왕(永明王)의 연호) 16년에서 끊어지니, 정통으로 적어야 할 것입니다. 청 나라 세조는 정통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는 촉한(蜀漢)의 예와 같은 것이다.”
하니, 홍순목이 아뢰기를,
“홍광, 융무(隆武 명 나라 복왕의 연호), 영력은 명 나라의 정통이 아직까지 남아 있던 때이니, 장무(章武 촉한 소열제(昭烈帝)의 연호)가 한 나라의 정통을 이은 것과 동일한 법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홍광 때의 지방(地方)은 남송(南宋) 때만하였다.”
하니, 박규수가 아뢰기를,
“그런데도 주색(酒色)에 빠져 인도(人道)를 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전복되는 데 이른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나라가 비록 쇠퇴하였다 하더라도 덕을 닦을 수 있었다면 중흥할 수 있었을 것인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하니, 박규수가 아뢰기를,
“청 나라 세조가 처음 중국에 들어온 순치(順治) 원년이 바로 장렬 황제(莊烈皇帝 의종을 말함)가 순사(殉社)한 때입니다. 이 태조의 아들 태종이 바로 칸[汗]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칸은 태조인 듯하다.”
하니, 박규수가 아뢰기를,
“태조는 이름이 누루하치[魯花哈赤]이니, 바로 칸의 아비입니다. 세조의 아들이 성조(聖祖) 인황제(仁皇帝)인데, 조(祖)라고 칭하게 된 은미한 뜻은 ‘비로소 천하를 통일하였으니, 후세에 역사를 찬수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후로는 청을 정통으로 쓰게 하고자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대개 강희(康熙 청 나라 성조의 연호) 원년이 바로 영력 16년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고조(高祖)라고 칭해야 했을텐데 어찌하여 성조라고 칭한 것인가? 금(金) 나라에도 성종(聖宗)이라 칭한 왕이 있었다.”
하니, 홍순목이 아뢰기를,
“예전에 광무제(光武帝)가 백료들에게 조서를 내려 봉사(封事)에 성(聖)이라는 칭호를 쓰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후로 천자의 묘호(廟號)에 성(聖) 자를 쓰게 된 듯하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요금(遼金)이 정통이 될 수 없었던 것은 남송이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송 나라 조정에서는 명현(名賢)이 배출되었는데도 어찌하여 천하를 통일하지 못하였는가?”
하니, 박규수가 아뢰기를,
“북송(北宋) 때도 연운(燕雲) 이북의 땅을 온전히 소유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 당시 밝은 임금과 어진 재상은 오로지 덕을 닦는 데 힘써 정치가 민생을 안정시킴으로써 무력을 지나치게 써서 토지를 개척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진실로 그렇겠다. 덕이 없이 다스린다면 땅이 넓다 하더라도 어디에 쓰겠는가.”
하니, 홍순목이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가 지당하십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토지를 널리 개척하게 된 것은 진(秦) 나라 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하니, 박규수가 아뢰기를,
“우(禹) 임금의 오복(五服)은 5천 리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교화는 사해(四海)에 미쳤으니, 성인(聖人)의 교화는 본래 이와 같은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신의 둘째 아들은 착실하게 공부하고 있는가?”
하니, 홍순목이 아뢰기를,
“여름에 약간 공부를 하였는데 겨울에도 경서(經書)를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대신이 비록 이와 같이 말한다 해도 공론(公論)을 들을 수 있게 될 것이다.”
하니, 홍순목이 아뢰기를,
“우매한 듯한데 식견을 확충한다면 혹 크게 진보할 가망이 있을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참찬관의 노친은 잘 계신가?”
하니, 정기회가 아뢰기를,
“편찮은 데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올해 70여 세인가?”
하니, 정기회가 아뢰기를,
“79세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일찍이 듣건대, 고 영중추부사가 치제(穉弟)라고 부르던데, 나이가 몇 살이나 적은 것인가?”
하니, 정기회가 아뢰기를,
“신의 아비가 신의 백부(伯父)보다 열두 살이 적습니다.”
하였다. 홍순목이 아뢰기를,
“회혼(回婚)을 지낸 지 이미 여러 해 되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집안에서 회혼을 지낸 것이 몇 차례인가?”
하자, 정기회가 아뢰기를,
“신의 선조(先祖) 양세(兩世)와 종조(從祖), 백부 및 신의 아비 해서 모두 다섯 차례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과연 다섯 차례나 되니 참으로 희귀한 일이다.”
하자, 홍순목이 아뢰기를,
“이 집안이 장수와 복록을 누리는 성대함은 대대로 있어 온 일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고 영중추부사가 직각(直閣)에 임명되었던 일의 회갑(回甲)이라 하니, 귀한 일이다.”
하니, 홍순목이 아뢰기를,
“7월 8일이 바로 임명되었던 날입니다. 그래서 그날 각료(閣僚)들이 모두 모여 치제(致祭)하였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각료들이 치제하는 것이 옛 규례인가?”
하니, 홍순목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영중추부사와 영돈녕부사도 모두 나와 참석하였는가?”
하니, 홍순목이 아뢰기를,
“영중추부사는 시골에 있으면서 다른 일이 있어 올라오지 못하였고, 신은 가서 참석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고 영중추부사가 생존하여 이날을 지내게 되었다면 더욱 기뻤을 것이다.”
하니, 홍순목이 아뢰기를,
“국조(國朝)의 상신(相臣) 황희(黃喜)와 김사목(金思穆)은 모두 수(壽)가 90세에 그쳤습니다. 게다가 김사목은 상상(上相)을 거치지 않았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고 영중추부사가 상신에 임명되었던 것이 30년은 되지 않는가?”
하니, 정기회가 아뢰기를,
“신축년에 상신에 임명되었으니, 올해로 33년이 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30여 년을 상부(相府)에 있었던 것은 더욱 희귀한 일이다.”
하니, 홍순목이 아뢰기를,
“이 상신은 세간의 복을 갖추어 누렸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 아들은 숭품(崇品)에 이르고 그 손자는 초헌(軺軒)을 타는 반열에 올라 3세(世)가 각신(閣臣)으로서 생존하였던 바 있으니, 매우 귀한 일이다. 고 영중추부사가 일찍이 도령(都令)이 된 바 있었는가?”
하니, 홍순목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3세가 도령이 되고 또 3세가 부제학이 되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한림(翰林)의 경우 어떠하였는가?”
하니, 홍순목이 아뢰기를,
“양세(兩世)는 한림을 지냈는데, 그 손자는 아직 되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책을 덮고, 사관에게 자리로 돌아가라고 명하였다. 이어 대신에게 먼저 물러가라고 명하였다. 또 물러가라고 명하니, 신하들이 차례로 물러나왔다.

 자경전에서 강관 정기세 등이 입시하여 《시전》을 진강하였다
○ 사시(巳時).
상이 자경전에 나아가 진강하였다. 이때 입시한 강관 정기세(鄭基世), 참찬관 정태호(鄭泰好), 시독관 왕성협(王性協), 가주서 허윤(許綸), 기주관 박봉진(朴鳳軫), 별겸춘추 김학진(金鶴鎭)이 각각 《시전》 제6권을 가지고 차례로 나와 엎드렸다.
상이 이르기를,
“사관은 좌우로 나누어 앉으라.”
하였다. 상이 전에 배운 글을 한 번 외우고, 이어서 책을 폈다. 정기세가 ‘아행기야(我行其野)’에서 ‘아행기야 삼장(我行其野三章)’까지 읽고, 이어서 뜻풀이를 하였다. 상이 서산(書算)을 정기세에게 주라고 명하였다. 상이 새로 배울 글을 10번 읽고 나자 정기세가 서산을 도로 바쳤다. 상이 이르기를,
“이 편은 윗장과 확실히 서로 비슷하다. 이때에는 살 곳을 잃은 백성들이 원망하거나 풍자하는 바가 없었으니, 충후한 의리를 볼 수 있다. 이 두 장을 보면 그 나라가 다스려졌는지 어지러웠는지 알 수 있다. 당시의 임금이 만약 인정(仁政)을 행했다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이 때문에 효도하지 않고 공손하지 않은 백성들이 이로부터 있게 되었다.”
하니, 정기세가 아뢰기를,
“상하 양편이 과연 같은 말 뜻입니다. 백성들이 이미 그 나라에서 편안하지 못하여 옮겨 다른 나라로 가서 혹시 거두어 구휼해 줌을 받을까 기대했었지만 역시 받지 못하였으니, 원망과 노여움이 얼굴 빛에 나타나고 가혹한 책망이 말에서 드러나는 것은 진실로 인정상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조금도 이런 뜻이 없고 완곡하게 돌려서 말을 한 것은 충후한 의리에서 성대히 나온 것입니다. 이는 오로지 선왕(先王)의 덕화가 더욱 오래되었지만 없어지지 않은 것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선왕(宣王)은 나라를 중흥시킨 임금인데 이때의 백성들이 무엇 때문에 이 시를 짓게 되었는가? 진실로 의심할 만하다.”
하니, 정기세가 아뢰기를,
“나라를 중흥시킨 임금으로 은(殷) 나라 고종(高宗)과 주(周) 나라 선왕을 아울러 일컫고 있으나, 선왕은 은 나라 고종에 미치지는 못한 듯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이와 같은 데에는 이르지 않았으므로 선유(先儒)들이 ‘선왕 시대가 된다는 것을 볼 수 없다.’고 한 것은 그럴 듯합니다. 혹시 유왕 초기인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과연 그럴 듯하다. 주 나라의 선왕(先王)의 교화가 백성들의 마음속에 두루 미쳤기 때문에 비록 위태롭고 어려운 시대에 이르렀지만 장과 구마다에 충후한 말이 아닌 것이 없다.”
하니, 정기세가 아뢰기를,
“주 나라가 융성했을 때에 있어서는, 대사도(大司徒)가 향삼물(鄕三物)을 가지고 만민을 가르치고 손님으로 삼아 추천하였습니다. 삼물은 바로 육덕(六德)과 육행(六行)과 육예(六藝)입니다. 육행은 곧 부모에게 효도하고[孝], 형제간에 우애하며[友], 구족간에 화목하고[睦], 인척간에 정분이 도타우며[婣], 남을 위해 힘쓰고[任], 없는 자를 구휼하는[恤] 것입니다. 이로써 손님을 추천하였으니, 자연 교화가 백성들의 마음에 두루 미친 것이 있을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 시는 백성들의 곤궁함이 오히려 다 말하기조차 어려운 지경이어서 친척과 헤어지고 조상의 무덤을 버리고 다른 나라로 간 것이다. 만약 윗사람이 어진 정치를 행했다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하니, 정기세가 아뢰기를,
“백성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것은 오로지 윗사람이 어떻게 이끄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훌륭한 정사를 펴고 인(仁)을 베푼다면 그에 안착하여 옮기는 것을 중하게 여기는 백성이 어찌 흩어져 다른 나라로 갈 리가 있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요순(堯舜)과 걸주(桀紂)의 백성은 똑같지만 백성이 선하고 선하지 않은 것은 오직 윗사람이 어떻게 이끄느냐에 달려 있다. 만약 어진 정치를 베풀어 의지할 곳 없는 홀아비, 홀어미, 어려서 부모를 잃은 아이, 늙고 자식 없는 사람들로 하여금 위로하여 따라오게 하고 편안하게 해준다면, 백성들이 어찌 다른 나라로 가겠는가.”
하니, 정기세가 아뢰기를,
“성교를 매우 흠앙합니다. 이는 실로 백성들의 복입니다. 요순이 천하를 인으로 이끄니 백성이 따랐습니다. 임금이 되어서 요순 시대의 정사를 행한다면 백성들이 모두 요순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이어서 아뢰기를,
“이 시를 지은 것이 비록 주 나라의 도가 쇠퇴할 때지만 그 충후한 풍속은 오히려 남아 있었으니, 인정의 오묘함을 묘사한 것을 통해 더욱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옛날 선왕(先王)의 시대에는 육행(六行)으로 사람을 가르쳤으되 교화가 행해지고 풍속이 아름다웠으니, 어찌 서로 원망하고 서로 풍자하는 말이 있었겠습니까. 교화가 점차 희미해지고 풍속이 더욱 박해져 더러는 부모의 나라에서 살 곳을 얻지 못하기도 하였지만, 그래도 인척(姻戚)들이 서로 구휼해 주기를 기대했었는데 또 얻지 못하였으니, 곤궁하고도 절박하였다고 이를 수 있습니다. 어찌 원망과 풍자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마는 오히려 용서할 수 없는 정상을 후히 용서하고 기필코 꾸짖어야 할 대상에 대하여 가볍게 책망하였으니, 충후한 뜻이 말 사이에 넘칩니다. 이것이 《시경》의 가르침이 사람으로 하여금 온유하고 돈후하게 하는 이유입니다.
게다가 대체로 사람의 정리는 사람들이 서로 구휼해 주길 바라기 때문에 처음에는 기대가 크지 않을 수 없고 중간에는 요행을 바라고 끝내 얻지 못하면 할 수 없이 떠납니다. 이 때문에 맨 첫 장에서 거(居)라고 말한 것은 오래 머무르겠다는 뜻이요, 이 장에서 숙(宿)이라고 말한 것은 잠시 동안 임시로 살겠다는 뜻이요, 끝 장에서 이(異)라고 말한 것은 떠나면서도 오히려 용서한다는 뜻입니다. 그 순서에 따라 깊고 얕은 것이 곡진하다고 할 만합니다.”
하였다. 왕성협이 아뢰기를,
“이 장은 혼인한 연고로 그가 거두어 구휼해 줄 것을 기대했다는 것을 말하였습니다. 《사기(史記)》에 평원군(平原君)이 신릉군(信陵君)에게 편지를 보내서, ‘내가 혼인에 스스로 부친 것은 위급하고 어지럽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혼인 관계는 근심이나 재난에서 서로 구원하는 것을 귀중하게 생각합니다. 지금은 돌봐주지 않았으니, 거의 금수에 가깝습니다.”
하고, 정태호는 아뢰기를,
“강관과 유신이 남김없이 다 진달하였으므로 신이 다시 아뢸 것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책을 덮었다. 이어 하교하기를,
“영중추부사(領中樞府使 정원용(鄭元容)을 가리킴)의 제절(諸節)은 요사이 어떠한가?”
하니, 정기세가 아뢰기를,
“잠자는 것과 먹는 것은 다행히 전과 같습니다만, 추운 겨울철을 당하여 자연 전에 미치지 못하는 때가 많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지난번에 전 도령(都令)의 말을 들으니, 정승을 지낸 동래(東萊) 정씨(鄭氏)가 15사람이나 된다고 하였다.”
하니, 정기세가 아뢰기를,
“신의 선조인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의 직계 자손 가운데 정승이 12사람이 되니, 한 가문 안을 통틀어 말하면 과연 15사람이 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지난번에 영상이 아뢴 바를 들으니 영중추부사의 복력(福力)은 곽 영공(郭令公)에 견줄 수 있겠다. 문중에 또한 혼인한 지 60년이 넘은 자가 많다고 하니, 이는 진실로 드물게 있는 성대한 일이다.”
하니, 정기세가 아뢰기를,
“신의 선조 중에 회혼례를 행한 사람이 많고, 요즈음에도 3차례나 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의 숙부가 80대 노인인데 감히 맏형 앞에서는 노인이라고 칭하지 못한다고 하니, 또한 매우 귀한 일이다.”
하니, 정기세가 아뢰기를,
“과연 그렇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문익공의 제사를 받드는 것은 관직이 높고 녹봉이 후한 자손이 하는데, 항렬로 논하지는 않는가?”
하니, 정기세가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의 집안에서 장차 대대로 봉사할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일찍이 다른 데 실려 있는 것을 보니, 영의정이 된 사람은 매우 많은데 《매복록(枚卜錄)》에는 그렇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정기세가 아뢰기를,
“국조 500년 동안에 정승이 360명이고, 영의정이 150명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황익성(黃翼成 황희(黃喜)를 말함)은 영의정이 되었는가?”
하니, 정기세가 이르기를,
“그렇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양파(陽坡 정태화(鄭太和)를 말함)도 영의정이 되었는가? 양파의 정승의 업은 능히 문익공의 공렬을 이었다.”
하니, 정기세가 아뢰기를,
“신의 선조인 익헌공 정태화는 여러 번 영의정이 되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영중추부사는 재상을 30여 년이나 지냈으니 매우 희귀한 일이다. 내년에는 더욱이 규장각에 들어간 지 60년이 되니, 진실로 규장각에서 처음 있는 일이며 또한 매우 희귀하다.”
하자, 정기세가 아뢰기를,
“내년이 과연 직각(直閣)에 제수된 해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록 날씨가 차가운 때를 만났으나 아직도 뜰 안을 출입하는가? 80대의 근력이 60여 세 된 사람과 다름이 없다고 말들을 한다.”
하였다. 상이 사관에게 자리로 돌아가라고 명하였다. 또 물러가라고 명하니, 신하들이 차례로 물러나왔다.
[주D-001]향삼물(鄕三物) : 주대(周代) 향학(鄕學)의 교육 과정 중의 육덕(六德), 육행(六行), 육예(六藝)를 말한다. 육덕은 지(知)ㆍ인(仁)ㆍ성(聖)ㆍ의(義)ㆍ충(忠)ㆍ화(和)이고, 육행은 효(孝)ㆍ우(友)ㆍ목(睦)ㆍ인(婣)ㆍ임(任)ㆍ휼(恤)이고, 육예는 예(藝)ㆍ악(樂)ㆍ사(射)ㆍ어(御)ㆍ서(書)ㆍ수(數)이다.

[주D-002]곽 영공(郭令公) : 곽자의(郭子儀)를 말한다. 삭방 절도사(朔方節度使)로 있을 때 안사(安史)의 난을 평정하여 그 공으로 분양왕(汾陽王)에 봉해지고, 토번(吐蕃)을 크게 파한 공으로 상보(尙父)라는 호를 받았다. 벼슬은 중서령(中書令)에 이르렀다. 충신(忠信)과 위명(威名)이 드러난 자로 당대에서는 으레 곽자의를 꼽았다. 《唐書 卷1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