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경인년 산행/2010.3.30. 삼각산 산행(행복)2

2010.3.30. 삼각산 백운대 주변의 스케치

아베베1 2010. 3. 31. 21:27

 

 올해만에 집에서 출발하여 백운대를 가기로 마음먹고 차를 기다려도 오지않는다

 다른 버스를 타니 ...뒤에 차량이 따라온다 신속하게 뒤에  버스를 타고 도선사 입구에 하차하여  산행을 시작하여서

 제2 매표소를  접근하여 쉴새없이 달린다  전일 무리한 탓인가 땀만 흐르고 진행은 되지않는다 베낭이 무거운 느낌이 든다

 하루재 아래에서 잠시 옷을 간편하게 하고 하루재 정상부로 접근하여 산악구조대 인수봉 산장  위문으로 백운대를 접근하여 한참을 기다리다가

  약 2시간 정도를 주변을 구석 구석 돌아보고 일행과 함께 백운대 후사면 여우굴 효자비로 하산한 산행이었다  , 

  기다리고 탐방하고 약 5시간 반정도의 산행이었다

    하루재에서 바라본 仁壽峯의 모습

     북한산 산악구조대의 모습

    인수봉 철모바위도 잡고

    수락의 철모와 참으로 비슷하다

     萬景臺의 모습

   白雲臺의 太極旗와 아베베

    두컷

    인수봉의 모습

    숨은벽 능선의 모습

   인수봉을 배경으로

   만경대의 모습

   원효봉능선에서 말바위 주변 암릉부  

   백운대 후사면 모습

 

 

   만경대 의 모습

    바위사위에서 원효능선을 배경으로

   원효봉의 모습도 보이고

   백운대 정상부

 

청장관전서 제3권
 기(記)
북한산(北漢山) 유람기 


이틀 밤을 묵고 다섯 끼니를 먹으면서 산의 내외에 있는 열한 개의 사찰과 암자(庵子)ㆍ정자(亭子)ㆍ누(樓)를 각각 하나씩 관람하였다. 보지 못한 것은 암자가 하나 사찰이 둘이니, 봉성사(奉聖寺)와 보국사(輔國寺)이다. 중은 ‘이는 사찰(寺刹) 중에서 최하의 것이다’ 하였다. 함께 유람한 사람은 자휴(子休 남복수(南復秀)의 자)와 여수(汝修 남홍래(南鴻來)의 자)와 나 3인이었다. 시(詩)는 모두 41편이며, 암자(庵子)ㆍ사찰ㆍ정자ㆍ누각에는 각각 기(記)가 있다.
이 산은 대개 백제(百濟)의 고도(古都)이니 우리 조종(祖宗)께서 군사를 훈련하고 양곡을 저장하여 보장(保障)하는 곳으로, 서울과의 거리는 30리다.
문수문(文殊門)으로 들어가 산성(山城)의 서문으로 나왔다. 때는 신사년(영조 37, 1761) 9월 그믐날이다.

세검정(洗劍亭)
수많은 돌을 따라 올라가니 정자는 큰 반석 위에 있다. 돌은 흰 빛인데, 시냇물은 돌 사이로 흐른다. 난간에 의지하여 바라보고 있노라니 물소리가 옷과 신을 스쳐갔다. 정자의 이름은 세검정이며 왼쪽에는 선돌[立石]이 있는데 ‘연융대(鍊戎臺)’라 새겨져 있다.

소림암(小林庵)
세검정의 북쪽 수십 보 되는 곳에 석실(石室)이 있고, 3개의 석불(石佛)이 앉아 있는데, 예로부터 내려오며 향화(香火)가 끊어지지 않는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굴(窟)만 보았고 감실(龕室 탑 밑에 있는 작은 석실로 여기서는 불단(佛壇)을 말함)은 없었는데, 지금은 작은 지붕을 만들어 덮었다. 중은 이를 정화(淨和)라고 한다.

문수사(文殊寺)
저녁때 문수사에 이르러 평지를 굽어보니 하늘의 절반쯤 오른 듯하다. 불감(佛龕 불상을 모신 감실)을 큰 석굴(石窟)로 만들었다. 감실을 따라 좌우로 구불구불 걸어가는데 물방울이 비오듯하여 옷을 적신다. 끝까지 가자 돌샘이 있는데 물빛이 푸르고 차갑다. 좌우에는 5백 나한(羅漢)을 나란히 앉혀 놓았다. 석굴의 이름은 보현사(普賢寺)라고 하기도 하고 문수사라고도 한다. 삼불(三佛)이 있는데 돌로 만든 것은 문수보살(文殊菩薩)이고 옥(玉)으로 만든 것은 지장보살(地藏菩薩)이며, 금으로 도금한 것은 관음보살(觀音菩薩)이다. 이 때문에 삼성굴(三聖窟)이라고도 한다. 굴 옆에 칠성대(七星臺)라고 부르는 대(臺)가 있다. 여기에서 머물러 밥을 먹고 북으로 문수성문(文殊城門)에 들어갔다.

보광사(寶光寺)
날이 저물어 성문에 이르니 바로 산이 끝나는 곳이다. 성문의 아래는 지형이 약간 낮고 단풍나무[楓]ㆍ남나무[楠]ㆍ소나무[松]ㆍ삼나무[杉]가 수없이 많으며, 텅 빈 골짜기에는 메아리가 잘 울린다. 찬 기운이 처음으로 사람을 엄습하였다.
드디어 보광사에 이르러 법당(法堂)의 오른쪽 조정(藻井 화재를 예방한다는 뜻으로 수초(水草) 모양의 그림을 그려넣은 천장)에 세 사람의 성명(姓名)을 크게 써 놓았다.
화상(和尙)들은 모두 무예[兵]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으며, 벽실(壁室)에는 창ㆍ칼ㆍ활ㆍ화살 등을 저장하고 있었다.
항혼 무렵에 태고사(太古寺)에 도착하여 투숙하였다.

태고사(太古寺)
절의 동쪽 산봉우리 밑에 고려(高麗)의 국사(國師)인 보우(普愚)의 비(碑)가 있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호)이 찬술하고 권주(權鑄)가 글씨를 썼다. 국사의 시호는 원증(圓證)이고 태고(太古)는 호이다. 신돈(辛旽 고려 말엽의 요승(妖僧))이 권세를 잡자 글을 올려 그 죄를 논하였으므로 당시의 임금에게 축출되었으니 불가로서 탁월하게 충절이 있는 자이다. 입적(入寂)하자 사리(舍利) 백 개가 나왔는데 이것을 세 곳의 부도(浮屠 사리탑)에 저장하였다.
비음(碑陰 비의 후면)에 우리 태조(太祖)가 나라를 세우기 전의 벼슬과 성명(姓名)이 있는데 벼슬은 ‘판삼사사(判三司事)’라고 되어 있다.
상(上 영조를 가리킴)이 금년에 특별히 명하여 비각을 지어 덮게 하였다.
숙민상인(肅敏上人)이라는 자가 있는데 조금은 글을 알고 성품이 온화하고 담박하여 말을 나눌 만하였다.
조반을 먹고 용암사(龍巖寺)로 향하였다.

용암사(龍巖寺)
이 절은 북한산의 동쪽으로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북쪽에는 다섯 봉우리가 있는데 큰 것이 셋이니, 백운봉(白雲峯)ㆍ만경봉(萬景峯)ㆍ노적봉(露積峯)이다. 그러므로 삼각산(三角山)이라 부른다. 인수봉(仁壽峯)과 용암봉(龍巖峯)은 작은 것이다.

중흥사(重興寺)
용암사를 떠나 오던 길을 따라 내려가니 지대가 조금 평평하였다. 거기에 중흥사(重興寺)라는 절이 있는데 고려 시대에 세워진 것이다. 11개의 사찰중에 가장 오래되었고 크다. 앉아 있는 금불(金佛)은 높이만도 한 길[丈]이 넘었다.
승장(僧將)이 개부(開府 부(府)를 창설하는 것)하여 주둔하고, 팔도(八道)의 승병(僧兵)을 영솔하였는데, 이름은 ‘궤능(軌能)’이라 하고 직책의 이름은 ‘총섭(總攝)’이라 하였다. 옆에 마석(磨石)이 있는데 암석에다가 그대로 조각한 것이었다.

산영루(山映樓)
중흥사에서 비스듬히 걸어 서쪽으로 가면 숲이 하늘을 가리우고 맑은 시냇물이 콸콸 흐른다. 갓[冠]같기도 하고 배[舟]같기도 한 큰 돌이 많은데, 쌓이고 쌓여 대(臺)를 이룬 것도 간혹 있었다.
대개 세검정과 같으나 더 그윽하였다.

부왕사(扶旺寺)
이 절은 북한산 남쪽 깊은 곳에 있다. 골짜기는 청하동(靑霞洞)이라 하는데 동문(洞門)이 그윽하고 고요하여 다른 곳은 모두 이와 짝하기 어렵다.
임진 왜란 때 승장(僧將)이었던 사명대사(四溟大師 이름은 유정(惟政))의 초상이 있는데, 궤[梧]에 의지하여 백주미(白麈尾 흰 사슴 꼬리로 만든 총채)를 잡았으며, 모발은 빠져 없고 배를 지나는 긴 수염만이 남아 있다. 서쪽 벽에는 민환(敏環)의 초상이 있다. 쉬면서 점심을 먹었다.

원각사(圓覺寺)
남쪽 성문(城門)에 올라 서해를 바라보니 하늘과 연접되었다. 마니(摩尼)의 여러 산이 바다 사이에 있어 주먹만하였다.
나한봉(羅漢峯)이 있으니 높이 솟은 모양이 부처[浮屠]가 서 있는 것 같다. 그 아래에 절터가 있는데 고려 시대에 3천 명의 중이 거처하였으므로 ‘삼천승동(三千僧洞)’이라 한다.

진국사(鎭國寺)
산영루를 등지고 험악한 길을 이리저리 찾아 북으로 가면 세 길쯤 되는 돌에 ‘백운동문(白雲洞門)’이라고 새겨져 있다.
돌길을 따라 사문(寺門)에 당도하니, 붉은 나무와 흰 돌이 훤하게 구렁을 이루고 물소리가 시원하고 맑게 들리었다.

상운사(祥雲寺)
진국사로부터 상운사에 이르는데는 적석(積石)이라는 고개가 사이에 끼어있다. 해질녘에야 절에 도착하여 밥을 먹고 투숙하였다.
아침에 서암사(西巖寺)로 향하는데 골짜기로 3~4리쯤 가니 물이 폭포를 이루었다가 구불구불하게 흘렀다.
대개 고개[嶺]의 좌우는 자못 넓고 깊었다.

서암사(西巖寺)
성의 서문에서 가까운 곳에 큰 누(樓)가 물과 돌이 교차된 곳에 임하여 있다. 바람이 이는 거센 여울과 소나무에서 나는 바람소리, 텅 빈 가운데 음운(音韻)이 생기니 쏴쏴하는 빠른 소리는 비오는 것 같아 대면하여 말하여도 음성을 분별할 수가 없다.
이 절은 가장 낮지만 유독 깨끗하고 시원한 것으로 소문이 났다. 밥을 먹고 진관사(津寬寺)로 향하였다.

진관사(津寬寺)
서문에서 10리쯤 나오면 들에는 밭이 많고 높은 곳은 사람들의 무덤이 되어 있다. 남쪽으로 작은 골짜기를 찾아가니 비로소 숲이 있다.
이 절은 바로 고려의 진관대사(津寬大師)가 거처하던 곳이다. 큰 돌기둥 수십 개가 아직도 시내의 왼쪽에 나란히 있다. 숲과 돌의 아름다움은 비록 내산(內山 성안의 산)만 못하지만 불화(佛畫)의 영묘(靈妙)하고 기이한 것 만은 못지않았다.


 

선조 29년 병신(1596,만력 24)
 3월3일 (경오)
병조 판서 이덕형이 중흥동 산성을 둘러보고 주위의 형세를 그림으로 올리다

병조 판서 이덕형(李德馨)이 아뢰기를,
“신이 1일에 나아가 중흥동(中興洞)에 못 미쳐 촌막에서 자고 이튿날 아침에 동구(洞口)에 이르러 서북쪽의 외성(外城)을 살펴보았습니다. 삼각봉(三角峰)이 높이 솟아 있고 그 곁에 두 봉우리가 차례로 나열해 섰으며, 성자(城子)는 끝봉우리의 허리에서부터 시작되어 시내의 어구 언덕에 이르러서 끝났습니다. 남쪽 외성은 시내의 암벽에서부터 시작되어 위로 서남쪽 최고봉에 이르러서 끝났습니다. 성(城)에 석문(石門)의 옛터가 있는데 이는 이른바 서문(西門)으로서 중간에 한 가닥의 길이 있어 곧바로 중흥사(中興寺)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길은 산비탈로 나 있는데 계곡은 굴곡이 졌으며, 길가에 운암사(雲巖寺)의 옛터가 있었습니다. 오솔길로 나뉘어져 벽하동(碧霞洞)으로 들어가는데, 벽하동은 중흥사가 있는 산 뒤에 있고 길은 백운봉(白雲峯)에 이르러 끊어졌습니다. 내성(內城)으로 들어가니 성에는 석문이 있는데 절과의 거리는 수백 보 가량 되었습니다. 사문(寺門)을 지나 동남으로 가다가 길이 셋으로 나뉘었는데, 하나는 동문(東門)으로 통하여 왕래하는 길로 성 밖에 수도암(修道菴)·도성암(道成菴) 등의 암자가 있고 그 밑은 곧 우이동(牛耳洞)이며, 하나는 동남문(東南門) 석가현(釋伽峴)으로 통하여 사을한리(沙乙閑里)로 내려가는 길이며, 하나는 문수봉(文殊峯)을 넘어 창의문(彰義門)으로 통하는 탕춘대(蕩春臺)의 앞들이 내려다 보이는 길입니다. 석가현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 뻗다가 서쪽으로 향해 산세가 높이 일어나 문수봉이 되고, 문수봉으로부터 세 봉우리가 서쪽으로 뻗어내려 동구의 외성에 일어난 곳, 즉 앞에 이른바 서남쪽의 최고봉과 서로 접하게 되는데 형세가 극히 험악합니다. 문수(文殊)·승가(僧伽)·향림(香林) 등의 절이 산 허리에 나열해 있는데, 우이동·사을한리와 경성의 사현(沙峴)·홍제원(弘濟院)의 좌우 도로가 역력히 한 눈에 들어옵니다. 성자(城子)가 또 미로봉(彌老峯)의 허리로부터 시작되어 도성암의 상령(上嶺) 및 석가현을 거쳐서 위로 문수봉에 이르러 그쳤으니, 이것이 그 대세인 것입니다. 모든 봉우리는 아래로 뻗어내려 산록(山麓)이 되고 골짜기의 양편은 견아(犬牙)처럼 얽히었으며, 각처의 시내는 폭포를 이루어 흘러서 모두 동구로 나가는데 지세가 몹시 급하고 비좁아 넓지 못하므로 사람이 살기에는 불편합니다. 그러나 오직 중흥사(中興寺) 상단의 좌우 골짜기만은 토지에 육기(肉氣)가 있어 그런대로 의지해 살 만합니다. 삼각봉의 후면은 절벽이 깎아 세운 듯하고 그 밖은 곧 서산으로 통행하는 길인데 미륵원(彌勒院)으로부터 우이동(牛耳洞)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도성암의 상령(上嶺)과 석가현·문수봉에 지름길이 있기는 하나 사면의 산세가 높고 험절하니, 진실로 10여 인이 지키게 되면 적의 무리 수만 명이 있어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며, 또 중첩된 산봉우리가 원근을 가리고 있어 적이 성을 에워싸고자 하여도 그 형세가 실로 어려울 것입니다. 만약 산허리 요해처에 돈대(墩臺)를 설치하여 망보게 하고 그 속에 곡식을 비축해 두며, 하동구(下洞口) 및 도성령(道成嶺)·석가현(釋伽峴) 등 몇몇 곳을 굳건히 지키면 천험(天險) 만전의 형세가 있을 것입니다. 설사 적병이 그 속으로 들어온다 하더라도 두 마리의 쥐가 굴을 다투는 형세가 있어 아군의 다소를 헤아리지 못할 것입니다. 도성(都城) 근처에 이와 같이 유리한 지세를 두고도 방치하였으니 애석한 일입니다. 흠이라면 도로가 매우 험하여 출입할 일이 있을 때 인력이 배나 수고롭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 안의 약간 평평한 곳에는 사람들도 머물러 있기에 해롭지 않다고 여길 것입니다. 성첩이 무너진 것은 10분의 7∼8이 되는데, 수축을 한다 해도 높은 봉우리의 정상은 인력의 소비가 커서 용이하게 해내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혹시 각도의 승도(僧徒)를 소집하여 요해처에 집을 짓게 하고서 지역을 나누어 역(役)을 맡겨 주어 성자를 수축하게 한면, 민심도 의뢰하는 곳이 있게 되고 일도 쉽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주회(周回)의 지세를 그림으로 그려 아룁니다.”
하니, 상이 비변사로 하여금 의논하여 이뢰게 하였다.
【원전】 22 집 655 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군사-관방(關防) / *예술-미술(美術)

군정편 3(軍政編三)  (만기요람의 내용)
 총융청(摠戎廳)
북한산성(北漢山城)

〈설치 연혁(設置沿革)〉 북한산성은 삼각산(三角山)의 온조(溫祚)의 옛터에 있다. 숙종 37년 신묘(1711년)에 대신 이유(李濡)가 건의하여 산성을 쌓고 행궁(行宮)을 세우고 향곡(餉穀)ㆍ군기를 저장하여, 방위하는 곳을 만들었다. 성의 둘레 7,620보, 성랑(城廊) 121, 장대(將臺) 3, 못[池] 26, 우물 99, 대문 4, 암문(暗門) 10, 창고 7, 큰 절 11, 작은 절 3. 관성소(管城所)를 설치하였다. 성의 향곡은 선혜청에서 책정하여 보낸다. 성첩ㆍ군기는 훈련도감ㆍ금위영ㆍ어영청의 3개 영에서 창고를 설치하고 구역을 나누어서 지키며, 경리청(經理廳)을 설치 향교동(鄕校洞)에 있다 하여 관리하였다. 영종 23년 정묘(1747년)에 북한이 당연히 총융청의 근거지가 되어야 하므로 왕의 특명으로 경리청을 폐지하고, 합쳐서 본청에 붙이게 하고 전적으로 북한을 주관하게 하였다. 교련관 3명을 증설하여 그대로 훈련도감ㆍ금위영ㆍ어영청의 3창고의 감관으로 삼았다. ○ 정종 6년 임인(1782년)에 총융사(摠戎使) 이창운(李昌運)이 감원 대조규[減額大節目]를 작성하여, 경리군관 4명을 감원하고 본청 군관 3명만 남겨 두었다. 〈관제(官制)〉 정종(正宗) 17년 계축에 총융사 이방일(李邦一)이 본청의 재정이 피폐하므로 성첩을 수축하는 일을 삼군문(三軍門)에 환속시키기를 계청하였다. 관성소의 재목대금이 200냥인데 이식을 받아서 해마다 북한의 도로 수선에 보충 사용한다. ○ 청사ㆍ사찰(寺刹)을 수리할 때에는 군량증액조[添餉條]ㆍ월정고시조[月課條]ㆍ또는 공명첩(空名帖)ㆍ보토소(補土所) 등의 돈은 청구하여 사용한다. 별아병천총 관성장(別牙兵千摠管城將) 1명 정종 6년 임인에 관계의 차서에 구애됨이 없이 사람을 선택, 자의 임용하여 전적으로 곡물의 출납을 관리하고, 1주년마다 교체(交遞)하도록 규례를 정하였다. 숙종 37년 신묘에 성을 쌓은 뒤에 병사나 수사의 정력을 가진 사람으로 계청 임명하여 처음에는 행궁소 위장(行宮所衛將)이라 하였고, 뒤에는 도별장(都別將)이라 하였으며, 경종 2년 임인(1722년)에는 관성장이라 개칭하였다. 영묘(英廟) 23년 정묘(1747년)에는 경리청을 폐지하여 본청에 합속(合屬)한 뒤에 중군이 정례로 겸임하였고, 40년 갑신에 군제를 고치어 5개 영으로 만들 때[時]에 방어사(防禦使)의 경력이 있는 사람으로 선임[擇差]하여 중부천총(中部千摠)을 겸임하여 항시 본성에 머물게 하였다. 47년 신묘에 총융사 김효대(金孝大)의 계청에 의하여 관성장은 종전대로 중군이 겸임하도록 하였다. 정종 16년 임자(1792년)에 군제를 고치어 3개 영으로 만들 때에 아병천총겸관성장(牙兵千摠兼管城將)으로 명칭을 고쳤다. 파총 1명, 초관 5명, 별파진초관 1명, 수첩총(守堞摠) 2명, 교련관 4명, 기패관 5명, 군기감관 1명, 군관 3명, 부료군관 20명 매월에 궁술을 고시하여 성적을 봐서 유급으로 한다. 그 가운데 산직감관(山直監官) 3명도 들어간다. 문부장(門部將) 3명, 수첩군관 200명 경기의 각읍에 산재한다. 산성의 원역 46명. 서원 5명 고지기 11명, 대청지기 2명, 사령 5명, 군사 12명, 문군사 11명이다. 군제(軍制) 1사(司) 5초, 파하군(把下軍) 30명, 별파군 200명, 아병 5초 경기의 각 읍에 산재. 표하군 109명. 19명은 유급. 〈치영(緇營)〉 승병(僧兵)을 설치하고 치영이라 하였다. 중흥사(重興寺)에 있다. 총섭(摠攝) 1명 본시는 종전부터 거주하는 중으로 임명하였는데 정종 21년 정사(1797년)에 수원유수 조심태(趙心泰)의 계청에 의하여 용주사(龍珠寺)의 중으로 번갈아서 임명하게 하였다. 중군승(中軍僧) 1명, 장교승(將校僧) 47명 유급. 승군 372명 73명은 유급. 태고사(太古寺)는 태고대(太古臺) 아래에 있다. 136칸이다. ○ 경서(經書)ㆍ통사(通史)ㆍ고문(古文)ㆍ당시(唐詩)의 판목을 저장하였다. 중흥사는 등안봉(登岸峰) 아래에 있다. 149칸이다. ○ 치영이 있는 곳이다. 보국사(輔國寺)는 금위영의 창고 아래에 있다. 76칸 진국사(鎭國寺)는 노적봉(露積峰) 아래 중성문(中城門) 안에 있다. 104칸. 부왕사(扶旺寺)는 휴암봉(鵂巖峯) 아래에 있다. 111칸. 국녕사(國寧寺)는 의상봉(義相峯) 아래에 있다. 70칸. 보광사(普光寺)는 대성문(大城門) 아래에 있다. 75칸. 원각사(元覺寺)는 증봉(甑峰) 아래에 있다. 81칸. 용암사(龍巖寺)는 일출봉(日出峰) 아래에 있다. 88칸. 상운사(祥雲寺)는 영취봉(靈鷲峰) 아래에 있다. 89칸. 서암사(西巖寺)는 수구문(水口門) 안에 있다. 민지암(閔漬菴)의 옛 터. ○ 107칸. 이상의 11개 사찰에는 각각 승장 1명, 수승(首僧) 1명, 번승(番僧) 3명을 둔다. 봉성암(奉聖菴)은 귀암봉(龜巖峯) 아래에 있다. 25칸. 원효암(元曉菴)은 원효봉 아래에 있다. 10칸. 문수암(文殊菴)은 문수봉 아래에 있다. 행궁(行宮) 상원봉(上元峯) 아래에 있다. 내정전(內正殿) 28칸, 행각(行閣) 15칸, 수라간(水剌間) 6칸, 변소 3칸, 내문(內門) 3칸, 외정전 28칸, 행각 18칸, 중문(中門) 3칸, 월랑(月廊) 20칸, 외문 4칸, 산정문(山亭門) 1칸. 〈제창(諸倉)〉 관성소는 상창(上倉)에 있다. 대청 18칸, 내아(內面) 12칸, 향미고(餉米庫) 63칸, 군기고 3칸, 집사청(執事廳) 3칸, 군관청(軍官廳) 4칸, 서원청(書員廳) 4칸, 고지기 집[庫直家] 5칸, 월랑 2칸, 각문(各門)이 7. 중창(中倉) 대청 6칸, 향미고 78칸, 고지기 집 5칸, 대문 2칸. 하창(下倉) 대청 6칸, 향미고 34칸, 고지기 집 8칸, 대문 2칸. 별고(別庫) 행궁 옆에 있다. ○ 대청 3칸, 향미고 12칸, 고지기 집 5칸, 대문 2칸. 이상의 상창ㆍ중창ㆍ하창ㆍ별고를 ‘관성 4창(管城四倉)’이라 한다. ○ 별관(別館)이 4개처 산영루(山英樓) 10칸, 사정(射亭) 6칸, 동장대(東將臺) 3칸. 어제비각(御製碑閣) 1칸. ○ 동장대는 숙종 18년 임진에 왕의 특명에 의하여 세웠다. 훈련도감창[訓倉] 대청 18칸, 내아 8칸, 향미고 60칸, 군기고 16칸, 중군소 4칸, 낭청소(郞廳所) 5칸, 서원청 5칸, 구류간(拘留間) 3칸, 행각 11칸. 금위영창[禁倉] 대청 18칸, 내아 6칸, 향미고 54칸, 군기고 13칸, 중군소 5칸, 서원청 4칸, 월랑 8칸. 어영청창[御倉] 대청 18칸, 내아 7칸, 향미고 48칸, 군기고 10칸, 중군소 4칸, 서원청 2칸, 월랑 12칸. ○ 산성 부근의 토지는 구역을 나누어 획정한다. 신둔(新屯)ㆍ청담(淸潭)ㆍ서문하(西門下)ㆍ교현하(橋峴下)는 훈련도감창의 구역이며, 미아리(彌阿里)청수동(靑水洞)ㆍ가오리(加五里)ㆍ우이동(牛耳洞)은 금위영창의 구역이며, 진관리(津寬里)ㆍ소흥동(小興洞)ㆍ여기소(女妓所)ㆍ삼천동(三千洞)은 어영청의 구역이다. 속둔(屬屯) 4개소 : 갑사둔(甲士屯) 양주의 누원(樓院)에 있다. ○ 본시 병조의 목장이었는데 숙종 40년 갑오(1714년)에 본둔이 북한산성과 상호 보장(保障)해야 될 지점이라 하여, 연품하여 북한에 속하게 하고 토지를 개간하는대로 세를 징수하며, 환미(還米)를 두어서 모두 모곡을 받아서 둔속의 경비에 충당하고, 남는 액수는 원환곡(元還穀)에 보태게 하였다. 수유둔(水逾屯) 양주에 있다. 갑사둔에 속한다. ○ 본시 양향청(糧餉廳)의 둔이었는데 경종 원년 신축(1721년)에 경리청당상 민진후(閔鎭厚)가 요청하여 이를 북한에 속하게 하고 환조(還租)를 설치하였다. 금암둔(黔巖屯) 양주 금암에 있다. ○ 숙종 45년 기해(1719년)에 매입 설치하였다. 환조를 설치하고 모두 나누어서 모곡을 거두어 둔속의 경비에 충당한다. 신둔(新屯) 북한산성의 서문 밖에 있다. 금암둔에 속한다. ○ 숙종 46년 경자에 경리청 당상 민진원(閔鎭遠)이 매입 설치하였다. ○ 갑사ㆍ금암 2둔에는 모두 별장이 있다. 금암별장은 영종 37년 신사(1761년)에 고 별장 이성신(李聖臣)의 아들 인량(寅亮)을 영구히 별장에 임명하고 대대로 승전하도록 왕명을 받았다.

[주D-001]온조(溫祚)의 옛터 : 백제의 서울을 뜻함. 온조는 백제의 시조.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의 셋째 아들로 재위 B.C. 18년~A.D. 28년. 처음 위례성(尉禮城 : 광주(廣州))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가 백제로 고쳤으며, 말갈(靺鞨)의 침입이 잦아 타격을 받았다. B.C. 5년 서울을 남한산(南漢山)으로 옮겼음.
[주D-002]이유(李濡) : 1645년(인조 23)~1721년(경종 1). 자는 자우(子雨), 호는 녹천(鹿川), 본관은 전주(全州). 좌의정을 거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이르렀음.
[주D-003]공명첩(空名帖) : 성명을 적지 아니한 서임서(叙任書).
[주D-004]김효대(金孝大) : 1721년(경종 1)~1781년(정조 5). 자는 여원(汝原), 본관은 경주(慶州). 영조 때 총융사를 지내고, 나중에 형조 판서에까지 이르렀음.
[주D-005]민지암(閔漬菴) : 암자(菴子)의 이름. 민지는 인명(人名). 1248년(고려 고종 35)~1326년(충숙왕 13). 자는 용연(龍涎), 호는 묵헌(黙軒). 정승을 지냄.
[주D-006]수라간(水剌間) : 궐내의 진지를 짓는 곳.
[주D-007]월랑(月廊) : 행랑의 별칭.
[주D-008]민진후(閔鎭厚) : 1659년(효종 10)~1720년(숙종 46). 자는 정순(靜純), 호는 지재(趾齋), 예조판서ㆍ한성부판윤을 거쳐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에 오름.
[주D-009]민진원(閔鎭遠) : 1664년(현종 5)~1736년(영조 12). 자는 성유(聖猷), 호는 단암(丹巖), 본관은 여흥(驪興). 좌의정에 이름.
[주D1-001]관성소(管城所) : ‘관성소(管城所)’의 ‘所’가 어느 본에는 ‘將’으로 되어 있음.
[주D1-002]정종(正宗) : ‘정종(正宗)’의 ‘正’이 어느 본에는 ‘英’으로 되어 있음.
[주D1-003]공명첩(空名帖) : ‘공명첩(空名帖)’의 ‘名’가 어느 본에는 ‘亡’으로 되어 있음.
[주D1-004]교체(交遞) : ‘교체(交遞)’의 ‘遞’가 어느 본에는 ‘替’로 되어 있음.
[주D1-005]영묘(英廟) : ‘영묘(英廟)’의 ‘廟’가 어느 본에는 ‘宗’으로 되어 있음.
[주D1-006]때[時] : ‘때[時]’가 어느 본에는 ‘則’으로 되어 있음.
[주D1-007]선임[擇差] : ‘선임[擇差]’의 ‘差’가 어느 본에는 ‘定’으로 되어 있음.
[주D1-008]파하군(把下軍) : ‘파하군(把下軍)’의 ‘把’가 어느 본에는 ‘標’로 되어 있음.
[주D1-009]고문(古文) : ‘고문(古文)’의 ‘文’이 어느 본에는 ‘今’으로 되어 있음.
[주D1-010]104 : ‘104’가 어느 본에는 ‘百單四’로 되어 있음.
[주D1-011]향미고(餉米庫) : ‘향미고(餉米庫)’의 ‘餉’이 어느 본에는 ‘納’으로 되어 있음.
[주D1-012]5 : ‘5’가 어느 본에는 ‘4’로 되어 있음.
[주D1-013]60 : ‘60’이 어느 본에는 ‘16’으로 되어 있음.
[주D1-014]6 : ‘6’이 어느 본에는 ‘7’로 되어 있음.
[주D1-015]54 : ‘54’가 어느 본에는 ‘48’로 되어 있음.
[주D1-016]13 : ‘13’이 어느 본에는 ‘16’으로 되어 있음.
[주D1-017]2 : ‘2’가 어느 본에는 ‘4’로 되어 있음.
[주D1-018]12 : ‘12’가 어느 본에는 ‘20’으로 되어 있음.
[주D1-019]서문하(西門下) : ‘서문하(西門下)’의 ‘門’이 어느 본에는 ‘閘’으로 되어 있음.
[주D1-020]미아리(彌阿里) : ‘미아리(彌阿里)’의 ‘阿’가 어느 본에는 ‘河’로 되어 있음.
[주D1-021]청수동(靑水洞) : ‘청수동(靑水洞)’의 ‘靑’이 어느 본에는 ‘淸’으로 되어 있음.
[주D1-022]삼천동(三千洞) : ‘삼천동(三千洞)’의 ‘千’이 어느 본에는 ‘淸’으로 되어 있음.

訓鍊都監
[都城分守字內]

【都城分守字內】自敦義門至肅靖門一千五百十四垜。共四千八百五十步。城廊二十四所。仁旺山險絶。不築五處八十步。英宗乙丑。改定。有頹圮處。以軍二十名。定將校率領。改築間把守。○頹城改築匠募。戶料,兵布。初一間米三十石。二間至五間各二十石。六間至十間各十八石。十一間至十五間各十六石。十六間至二十間各十五石。布則每米三石各十疋式。城門改築。亦用此例。正宗庚子。定式。○北漢山城分守字內。山暎樓北邊。從露積峯至白雲峯西邊。有頹圮處。以本局物力改築。肅宗辛卯。定式。○東,南關王廟墻垣頹圮則三營並力修築事。正宗丁未。定式。每朔初十日。送校摘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