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삼봉 정도전 선생의 행장

삼봉 정도전 선생 행장(高麗國奉翊大夫檢校密直提學寶文閣提學) (펌)

아베베1 2010. 4. 9. 09:48

삼봉집 제4권
 행장(行狀)
고려국 봉익대부 검교밀직제학 보문각 제학 상호군 영록대부 형부상서 정 선생 행장(高麗國奉翊大夫檢校密直提學寶文閣提學上護軍榮祿大夫刑部尙書鄭先生行狀)


본관(本貫)안동부(安東府)봉화현(奉化縣)              부[考] 검교 군기감(檢校軍器監) 균(均)
조부(祖父)비서랑 동정(秘書郞同正) 영찬(英粲)      증조부(曾祖父) 호장(戶長)공미(公美)

선생의 성은 정(鄭), 휘(諱)는 운경(云敬), 자는 ☐☐인데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이모 집에서 자랐다. 나이 어떤 본에는 연[年]자가 없음. 겨우 10여 세에 학문에 분발하여 영주 향교(榮州鄕校)에 들어갔다가 복주목(福州牧 지금의 안동(安東))의 향교로 올라 갔다. 처음에 들어갔을 적에는 여러 학생들이 업신여기더니, 공부를 하는데 매양 수석을 하니 고을의 원들이 모두 중하게 여겼다. 외삼촌 한림(翰林)안장원(安壯原 원(元)자를 휘하기 때문에 원(原)자로 쓴 것임) 이름은 분(奮)이며 어머니의 오빠임. 을 따라서 개성으로 와 학문이 날로 성취되어 십이도(十二徒)에 노닐었는데, 여러 학생 가운데서 유명해졌고 자라서는 한림 유공(劉公 이름은 동미(東美))과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근재(謹齋)안공(安公 이름은 축(軸))의 칭찬을 받게 되고, 가정(稼亭) 이공(李公 이름은 곡(穀))과 나이를 따지지 않는 벗[忘年交]이 되었다. 동방의 산수가 좋다는 말을 듣고서 가정 이공이 선생과 가 보기를 청하므로, 선생이 기꺼이 천리길을 멀다 하지 않고 도보로 따라갔다가 영해부(寧海府)에 이르러 머물러서 어떤 본에는 이(而)자가 없음. 글을 읽은 것이 수년이나 되었다. 또 고(故) 간의 대부(諫議大夫) 윤공(尹公 이름은 안지(安之))과 삼각산(三角山)에서 글을 읽었는데 한 번 본 것은 다 기억하였고 대의(大義)를 통하고는 곧 그쳤다.
병인년(1326, 충숙왕13) ☐월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지순(至順) 원년(1330, 충혜왕 복위17) 10월에 송천봉(宋天逢)의 방(榜)에서 동진사(同進士)로 오르고 2년 정월에는 상주목(尙州牧)의 사록(司錄)이 되었다. 그때 용궁 감무(龍官監務)가 뇌물을 받았다고 무고한 자가 있어서, 안렴사(按廉使)는 선생에게 명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그러자 선생은 용궁현에 가서 감무를 보고는 묻지도 않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관리가 부정을 하는 것이 비록 나쁜 짓이지만, 그 역시 재주가 법을 농락하고 위엄이 사람을 두렵게 할 만한 자가 아니면 뇌물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 감무는 늙어서 직임을 수행하지 못하는데 사람들이 무엇이 두려워서 뇌물을 주겠습니까?’하였다. 사람을 시켜 어떤 본에 이 위에 안렴(按廉) 두 자가 있음. 무고인 것을 안 안렴사는 탄식하여 말하기를, ‘요즈음 관리들은 모두가 까다롭게 따지는 것으로 능사를 삼는데, 사록(司錄 정운경을 가리킴)은 정말로 장자(長者)이다.’ 하였다.
이 고을 출신인 환자(宦者) 하나가 천자(天子 원(元)의 황제임)에게 괴임을 받았는데, 사신으로 와서 상주에 들러 선생에게 무례한 짓을 하려고 했다. 선생이 곧 벼슬을 버리고 떠나가니 아전과 선비들이 길에서 울부짖으며 울었다. 그러자 환자는 부끄럽고 두려워서 밤에 용궁까지 뒤따라 와서 이마에 피가 흐르도록 조아리고 사과하면서 돌아가기를 간청했다.
3년 4월에 전교(典校)에 들어가 교감(校勘)이 되고, 4년(지순(至順)은 4년까지 없으니 혹 지원(至元)의 잘못인 듯함. 다음의 5년ㆍ6년도 마찬가지임) 3월에는 주부(注簿)에 임용되었다가 윤8월에 낭계(郞階) 어떤 본에는 개(皆)자로 됨. 에 올라 도평의 녹사(都評議錄事)를 겸하였다. 이때 원사(院使 다사(茶事)를 맡은 원나라의 벼슬)인 장해(張海)가 어향사(御香使)로 오는데 국가에서는 선생으로 접반 녹사(接伴錄事)를 삼았다. 어향사는 강릉(江陵) 기생을 사랑하여 데리고 왔다. 선생이 들어가 공사를 이야기하는데도 기생은 뻔뻔스럽게 한자리에 앉아 있었다. 선생이 꾸짖어 내려보내니 어향사는 성을 냈다가 얼마 후 다시 위로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그를 추하게 여겨, 그 직을 사면하고 돌아왔다.
동 5년 9월에 삼사 도사(三司都事)로 옮겼다가 동 6년 10월에 통례문 지후(通禮門祇候)를 제수받고, 지정(至正) 원년(1341, 충혜왕 복위2) 6월에 전의주부(典儀主簿)가 되었다. 그때 자급(資級)은 다 승봉랑(承奉郞)이었다. 2년 8월에 덕직랑(德直郞)으로 올라 홍복도감 판관(弘福都監判官)이 되고, 동 3년 ☐월에 밀성군 지사(密城郡知事)로 나갔는데, 이때 재상 조 영휘(趙永暉)가 밀성 사람에게 받을 빚이 있어서 어향사 안우(安祐)를 통해 본군 밀성 에 공문을 보내어 받아 보내도록 했다. 그러나 선생은 그를 묵살하고 시행하지 않았다. 밀성의 영접나간 아전이 어향사가 김해부(金海府)에 달려 들어가 교외[郊] 어떤 본에는 교(郊)자가 없음. 까지 마중나오지 않았다고 부사(府使)를 매질하는 것을 보고는 빨리 달려와서 아전의 우두머리와 함께 들어와서 아뢰는 말이, ‘김해부사가 까닭없이 욕을 당하고 있으니 지금 명(빚 받으라는 명)을 따르지 않으면 어떤 욕을 당할지 모릅니다.’ 했으나 선생은 듣지 아니하니 온 고을 사람들이 위태롭게 생각했다. 어향사가 군에 들어와서 인사를 나눈 다음 묻기를, ‘전번에 공문 보낸 일은 어찌되었소.’ 했다. 선생은 답하기를, ‘밀성 사람이 빚을 진 것이 있더라도 조상(趙相 조영휘를 가리킴)이 스스로 받을 일이지 상공께서 물을 일이 아닙니다.’ 하니 어향사가 성을 내어 좌우의 사람으로 포위하게 하였다. 선생이 정색(正色)하고서, ‘이제 들 밖까지 마중나와 즐겨 천자의 명령을 맞는데 어찌하여 나를 죄주십니까? 상공께서 덕음(德音)을 펴서 먼 지방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고 감히 이런 일을 하십니까?’ 하니 어향사는 할 말이 없어 그만두었다.
관직이 갈릴 적에는 선생이 공무로 밖에 있다가 고을에 들어가지 않고 곧장 떠났다. 그러자 밀성 사람들은 월봉(月俸)을 마땅히 행자(行資)로 드려야 한다고 가져 왔으나 부인이 그를 받지 않았다.
동 4년 9월에 복주목 판관(福州牧判官)으로 옮겼는데 그 고을 호장(戶長)권원(權援)은 전에 향교에서 같이 공부하던 벗이었다. 부임하던 날 저녁에 술과 안주를 가지고 만나보기를 청하였다. 선생이 불러들여 같이 술을 마시며 이르기를, ‘지금에 내가 자네와 더불어 술을 마시는 것은 옛정을 잊지 않음이다. 내일에 만일 법을 범함이 있으면 판관으로서 자네를 용서하지 않으리라.’ 하였다.
그 고을 승정(僧正 중[僧]의 벼슬)이 옹천(瓮川) 역로에서 도둑에게 해를 당하고 겨우 숨만 붙어 있었다. 역리(驛吏)가 그를 보고는 그 연유를 물으니 승정은 말하기를, ‘내가 베[布] 몇 필을 가지고 모씨의 집을 가는데 밭에 거름 주던 일꾼들이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을 보았으며, 아무 곳을 가다가 사람들이 밭에서 김매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얼마쯤 가는데 뒤에서 어떤 사람이 큰소리로, 「나는 밭에 김매는 사람이다. 불러서 이야기하려 하였는데, 대답하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 하더니 대답할 겨를도 없이 나를 치고 베를 빼앗아 갔습니다.’ 하였다. 역리가 그를 부축하고 집으로 들어갔으나 얼마 안 가서 죽었다.
아전들은 김매던 자를 잡아다가 목사(牧使)에게 알렸고 김매던 자도 자복했다. 그리하여 옥사가 이루어졌는데, 그때 선생이 다른 곳에서 돌아와서, 말하기를 ‘승정을 죽인 자는 이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하니, 목사는, ‘이미 자복하였소.’라고 말했다. 선생은 ‘어리석은 백성이 국문(鞫問)의 고초를 견디지 못하여 겁을 먹고서 헛소리를 한 것입니다.’고 하니 목사는 ‘그러면 공이 밝게 처리하시오. 나는 알지 못하겠소.’ 했다.
선생이 밭에 거름 주던 주인을 불러 ‘내가 들으니 네가 일꾼들에게 술을 먹일 적에 승정(僧正)이 지나가니 승정의 베를 말한 자가 있다고 하는데 숨기지 말라.’고 하니, 밭주인의 대답이, ‘한 사람이 좌중에서 말하기를 「승정의 베로 술값을 보충하겠다.」고 했습니다.’ 하였다. 선생은 이에 그 사람과 그의 아내를 구속해 왔다. 그리고 그 사람은 밖에 두고 먼저 그 아내부터 국문하기를, ‘아무 달 아무 날에 너의 남편이 베 몇 필을 너에게 주었다 하는데 그 베가 어디서 생겼다고 하던가?’ 하니 그 아내는 대답이, ‘아무 달 아무 날 남편이 베를 가지고 와서 빌려준 베를 받았다고 했습니다.’라고 하므로, 선생이 그 사람을 불러 묻기를, ‘빌려 주었던 어떤 본에는 차(借)자 밑에 포(布)자가 있음. 사람이 누구인가?’ 하니 그 사람은 말이 막혀서 사실을 자복하였다. 목사와 아전들이 놀라서 물으니, 선생은 말하기를, ‘대개 도둑이란 그 종적을 감추고 누가 알까 두려워하는 것인데, 그가 「나는 김매는 자이오.」한 것이 바로 거짓인 것입니다.’ 하였다.
동 5년 ☐월에는 조정으로 들어가 삼사판관(三司判官)이 되고, 동 6년 10월에는 봉선대부(奉善大夫) 서운부정(書雲副正)이 되고, 이해 겨울에 하정사(賀正使) 서장관(書狀官)으로 연경(燕京)에 갔다. 이때 황후 기씨(奇氏)가 황제의 사랑을 독차지하여 내시(內侍)들 중에 우리 나라 사람이 많았는데 술과 안주를 가지고 와서 대접하는데 꽤 거만스러웠다. 선생이 정색하며, ‘오늘 대접하는 것은 옛 임금을 위하는 것이다.’라고 하자, 내시들이 놀라서 ‘우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대는 큰 수재(秀才)이십니다.’ 하였다.
동 7년 3월에 성균 사예(成均司藝)가 되고 그 해 12월에 봉상 전교 부령 직보문각 지제교(奉常典校副令直寶文閣知製敎)에 올랐다가, 동 8년 2월에 양광도(楊廣道)안렴사로 나가고, 이듬해 9년 10월에는 교주도(交州道)안렴사로 나갔다. 선생이 가는 곳마다 고을에 기강이 엄숙하게 섰다.
선생이 양광도에 계실 적에 가정(稼亭)이 그 선조의 분묘를 참배하기 위하여 한주(韓州)에 돌아와 있었다. 선생이 찾아가 뵙고 웃고 이야기하기를 평민으로 있을 때처럼 하였다.
선생이 술에 취하여 비스듬히 누워서 가정에게 하는 말이, ‘우리들은 이만하면 현달(顯達)했다고 할 것이오.’ 하니 가정은, ‘나는 네 번이나 재상의 자리에 있었는데도 오히려 내 위에 있는 자가 있었거늘, 자네는 지금 겨우 안렴사 4품직을 맴돌면서 감히 현달하였다고 말하는가?’ 하니 선생이 답하기를, ‘어찌 동해 가를 유람하던 때를 생각하지 않으시오.’ 하니 가정이 크게 웃었다.
동 10년 4월에 전의 부령(典儀副令)이 되고 이듬해 11년 정월에는 전법총랑(典法摠郞)이 되었는데, 옥(獄)이 다스려져서 원통하고 지체됨이 없었다.
【안】 《고려사》 본전(本傳)에는 아래와 같이 기술되었다.
〈운경(云敬)이〉전법총랑(典法摠郞)으로 전보되었다. 공민왕(恭愍王)이 즉위하고 운경과 좌랑 서호(徐浩)를 시켜서 법을 맡게 했더니, 권귀(權貴)에게 흔들리지 않아서 왕은 그들을 불러 술을 하사했다. 그러자 상서(尙書) 현경언(玄慶言)이 말하기를, ‘양궁(兩宮)과 침전(寢殿)은 금하기를 심히 엄하게 하는 곳인데, 지금 외인(外人)들이 규제 없이 출입하여, 궁전(宮殿)ㆍ사문(司門)ㆍ환시(宦寺)의 직책을 지금 홀지(忽赤)에 맡게 하니 시사(視事)할 때에 궁전의 수위가 근엄해야 하는데, 지금은 좌우가 시장과 같아서 임금에게 아뢴 일이 말도 끝나기 전에 이미 밖에 새어 나가니 형(刑) 관장하는 관리를 가까이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지금 정운경과 서호에게 침전에서 술을 하사하는 것도 모두 옛날 제도에 어긋납니다.’ 하니 공민왕이 그를 옳게 여겼다.

동 12년 9월에 또 전주목사(全州牧使)로 나갔는데 봉순대부 판전교시사(奉順大夫判典校寺事)의 차함(借啣)으로 갔다. 이때 전주는 늦은 봄에서 초여름까지 가뭄이 심하였는데 선생이 부임하는 날 큰 비가 와서 관리와 백성들이 매우 기뻐하였다 한다.
이에 앞서 중이 장가를 들어 살림을 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중이 밖에 나가서 상처를 입고 산길에서 죽었다. 그 아내가 목사에게 정소(呈訴)를 하였으나 증거가 없어서 오래도록 판결이 나지 못하고 있었다. 선생이 도임하던 날 그 아내가 또 와서 정소하였다. 선생이 즉시 그 아내를 국문하여, ‘사통한 남자가 있느냐?’ 하나, 그 아내는 없다고 말하면서 다만 이웃에 사는 홀아비 하나가 일찍이 저를 놀리기를 ‘늙은 중만 죽으면 일은 된다.’라고 하였다.
이에 선생은 그 홀아비와 그 어떤 본에는 그[其]자가 없음. 어미를 잡아오게 했다. 그리고 홀아비는 밖에 두고 그 어미만 문초하기를. ‘아무 달 아무 날 아들이 집에 있었느냐 밖에 있었느냐?’ 하니, 그 어미는 답하기를, ‘그날 아들이 밖에서 들어와 하는 말이, 「아! 고되다. 친구와 술을 취하게 마셨다.」 했습니다.’ 하였다. 그래서 곧 그 홀아비에게 같이 술을 마신 자가 누구냐고 추궁하니 그 홀아비는 말이 막혔고 과연 중을 죽인 자였다.
그때에 어향사 노모(盧某)가 횡포가 아주 심하여 가는 곳마다 수령들을 능욕하였다. 그리고 달려서 고을에 들어오고는 들 밖까지 영접 나오지 않았다고 죄목을 잡았다. 선생이 예(禮)를 인용하여 굴하지 않고서 즉일로 벼슬을 버리고 떠나가니 부로(父老)들이 울부짖었다. 어향사도 부끄러워 사과하고 만류하였으나 듣지 않았으며, 그 뒤 여러 번 조정에서도 명이 있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병신년(1356, 공민왕5) 7월 중산대부(中散大夫) 병부 시랑(兵部侍郞)으로 불려 무반(武班)의 전선(銓選)을 맡았는데 그 전형과 주의(注擬)가 아주 공평하였다.
이해 9월에는 서해도(西海道)찰방(察訪)으로 군수품을 겸하여 관리하라는 명령을 받고 나갔다. 이때는 군사를 일으키는 처음이라서 군량이 가장 긴급하였는데, 선생이 곡식 수십만 어떤 본에는 만(萬)자 아래에 곡(斛)자가 있음. 석을 운반하되 한 달 만에 일을 끝마치니, 국가에서 여러 도에 독촉할 때에는 서해도를 끌어다가 말을 했다.
지정 17년(1357, 공민왕6) 2월에 중대부(中大夫) 비서감 보문각 직학사(秘書監寶文閣直學士)가 더해지고, 4월에는 존무강릉 겸삭방도 채방사(存撫江陵兼朔方道採訪使)가 되었다. 삭방도 여러 고을이 오랫동안 여진(女眞)에게 함몰되어 국경이 분명히 나누어 있지 않아서 전투가 벌어지면 백성들이 이리저리 흩어졌다. 선생이 강역을 정하고 백성의 살림을 보살피되 그 지방에 알맞게 하니, 백성들이 편하게 여겨 부로(父老)들 수백 인이 조정에 천장(薦狀)을 올렸고, 지금도 그 일이 칭송된다.
그 해 7월 대중대부(大中大夫)를 제수받고 이듬해 18년 2월에는 본직(本職)으로서 형부사(刑部事)를 맡게 되었다. 그러자 도평의사(都評議司)에서 내려온 송사가 있었다. 선생은 재상에게 말하기를, ‘백관의 차례를 정하여 능한 자를 쓰고 무능한 자를 물리치는 것이 재상의 일이며, 법을 지켜 행하는 데 있어서는 각각 맡은 관원이 있으니, 일마다 묘당(廟堂)에서 간섭하는 것은 백관을 침해하는 것입니다.’고 했다. 그러자 송사(訟事)하는 자가 폭주(輻輳)하였는데, 선생이 판결하기를 처음에는 유의하지 않는 것처럼 하다가도 두 사람이 함께 와서 송사할 때에는 판결이 너무나도 정당하여 이긴 자나 진 사람이 다 공평하다고 하였다. 공민왕이 그를 가상하게 여겨 19년 3월에 영록대부(榮祿大夫)형부 상서(刑部尙書)를 초수(招授)했다.
동 20년 겨울에 공민왕이 남쪽을 순행하였는데 선생이 따라 가 충주(忠州)에서 뵈니 공민왕은 크게 기뻐하며 인견(引見)하고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23년 7월에는 봉익대부(奉翊大夫) 검교밀직제학 보문각 제학 상호군(檢校密直提學寶文閣提學上護軍)을 제수하였으니 이는 그 편의를 좇아서였다.
25년 겨울에 병으로 사양하고 영주(榮州)로 돌아왔다가 26년 정월 23일 을사에 병으로 집에서 돌아가니 수(壽)가 62세였다. 선영의 묘 아래에 장사를 지냈는데, 그곳은 영주읍에서 동으로 10리쯤이다.
이해 겨울 12월 18일에 부인 우씨(禹氏)가 돌아가서
【안】 포은 봉사고서(圃隱奉使藁序)에 이르기를, ‘아버지가 돌아가서 분상(奔喪)하여 영주(榮州)에서 2년을 살았는데, 이어 어머니 초상을 또 당하여 대략 5년을 지냈다.’고 했다. 이 두 말이 반드시 하나는 착오가 있을 것이다.
선생과 부장(祔葬)하였는데, 우씨는 영주(榮州)의 사족(士族) 산원(散員)우연(禹淵)의 딸이다.
선생이 평소에 집안 살림을 일삼지 않았고 세상의 공리에도 담박하였으나 손님이 오면 반드시 술자리를 벌였으며, 부인도 살림의 유무를 헤아리지 않고 알맞게 찬구(饌具)를 장만하여, 어진 이를 친하고 착한 이를 벗하는 뜻에 순응하였다.
아들 셋이 있는데, 큰 아들은 도전(道傳)으로 임인과(壬寅科)에 진사(進士)로 합격하여 지금은 선덕랑 통례문 지후(宣德郞通禮門祇候)에 올랐으며,
【안】 공이 을사년(1365, 공민왕14)에 통문 지후가 되었는데 여기에서 지금 통문 지후가 되었다는 것은 의심스럽다.
둘째는 도존(道存), 셋째는 도복(道復)인데 모두 글 읽은 선비이다. 그리고 딸이 하나 있어 선비 황유정(黃有定)에게 시집갔는데 성균 사예(成均司藝) 황근(黃瑾)의 아들이다. 손자 두 사람은 진(津)과 담(澹) 어떤 본에는 영(泳)으로 되었음. 모두가 어리다.
아들 도전이 삼가 행장을 쓴다.


[주D-001]십이도(十二徒) : 고려 때 개경에 있었던 열두 사학(私學). 곧 문헌공도(文憲公徒)ㆍ홍문공도(弘文公徒)ㆍ광헌공도(匡憲公徒)ㆍ남산도(南山徒)ㆍ서원도(西園徒)ㆍ문충공도(文忠公徒)ㆍ양신공도(良愼公徒)ㆍ정경공도(貞敬公徒)ㆍ충평공도(忠平公徒)ㆍ정헌공도(貞憲公徒)ㆍ서시랑도(徐侍郞徒)ㆍ구산도(龜山徒). 그 중에서 가장 권위가 있고 성황을 이루던 곳이 최충(崔沖)의 문헌공도였다. 《高麗史 選擧志 學校》
[주D-002]동진사(同進士) : 과거 등급의 하나. 고려시대에는 과거에서 을과(乙科) 3인, 병과(丙科) 7인, 동진사(同進士) 23인, 합하여 33인을 자ㆍ오ㆍ묘ㆍ유년에 뽑았는데, 조선 정종 때 동진사를 고쳐서 정과(丁科)라 했다. 《高麗史 選擧志, 燃藜室記述 政敎典敎》
[주D-003]홀지(忽赤) : 위사(衛士)를 일컫는 몽고(蒙古) 말. 고려 충렬왕(忠烈王)이 태자(太子)로서 원(元)나라에 가 있을 때에 독로화(禿魯花 뚜루화)가 된 사람에게 처음으로 붙여진 이름인데, 그 뒤 충렬왕이 즉위하여 번(番)을 짜서 숙위(宿衛)하게 하였음. 화아지(火兒赤)라고도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