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최씨 시조공에 대한 기록/문충공 만육공 자료

않은 자리에 풀도 안나는 최씨 고집 만육공 최양 ( 문충공)

아베베1 2010. 5. 25. 15:27

않은 자리에 풀도 안나는 최씨 고집 만육공 최양
전주최씨 문충공계의 후손 최선능(崔善能)의 손자(孫子)로 문충공계 시조 최군옥(崔群玉)의 8세손으로 휘는 양(瀁)이며 자는 계승(季丞) 호는 만육(晩六)이고 시호는 충익공(忠翼公)이다.
그의 할아버지 최선능(崔善能)은 전주최씨 문성공계의 시조 문성공 최아의 사위이기도하다.   또 일본 대마도를 정벌한 정남대장군 위정공 최칠석은 그의 작은 할아버지이고 고려 충신 3은의 한사람 포은 정몽주는 그의 외삼촌이다.
고려 말기의 문신으로 고려 우왕 때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서 이부상서와 대제학을 지냈다. 고려가 망하고 정몽주가 조선 태종 이방원에 의하여 살해되자 작은할아버지 위정공과 함께 벼슬을 버리고 전주 대승동 봉강리로 내려가 은거(隱居) 생활을 했다.

후에 조선 태조가 친구로서 예(禮)를 갖추어 예관(禮官)을 보내 논밭(田畓)을 주었으나 받지 않고 거절했다. 청렴 강직한 성품으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소위 않은 자리에 풀도 안난다는 소위 "최씨 고집"을 만들어 낸 장본인이다
"만육공 최선생 행장"에는 ;
"공의 휘는 양이고 자는 백함(伯涵)이며 만육은 스스로 만든 호이다. 공의 조상은 영남의 상산(尙山)에서 호남의 전주로 옮겨와 명문 거족이 되었다.

공의 웟 대 할아버지는 최군옥으로 고려에서 벼슬을 하여 벼슬이 추밀원지사 진현관 대제학에 이르렀고 송나라 철종 원우 원년에 축하 사신으로 중국에 들어가니 사마광, 여공저, 범조우 등이 정이를 숭정전 설서로 천거하고 최군옥을 문하시랑에 천거했으나 얼마 안가서 정이가 파직되어 돌아가게 되므로 최군옥이 소철, 손각 등의 모함이 있음을 설명하고 잘못된 것임을 주장하여 파직되어 고려로 귀국하니 완산부원군으로 봉해졌다.

그 후에 다시 위정공 정남 대장군 최칠석이 서북면 도지휘사로 다시 완산부원군에 봉해졌다. 공의 아버지는 최지로 발난반정좌명공신 문하찬성사이고 어머니는 영일 정씨로 벽상삼한 산중대광 수문하시중 판삼부사 령경령전사 일성부원군 정관의 딸로 덕으로 의를 지키고 성실과 부지런함으로 내조를 했다.

공은 지정 신묘년 8월 경자일에 어떤 노파가 나타나 어머님께 말하기를 '이 아이는 동쪽 마을 호장에게 맡겨 키우라'는 태몽을 꾼 뒤에 태어났으므로 그 말을 따라서 이웃 마을 호장에게 맡겨 키우므로 이름을 양(養)이라고 했다고 한다.

공이 8세가 되어 글자를 깨치고 호장에게 말하기를 '내 이름은 누가 지었습니까?' 하고 물으니 호장이 말하기를 '부모님이 지으셨다'라고 하니 '부모님이 주신 이름을 고치지는 못하겠고 그 글자에 '水'변을 붙여 '瀁'이라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하므로 듣는 사람들이 모두 감복했다. 공은 태어날 때부터 그 바탕이 보통 아이들과 달라 일찍이 가정을 떠나 남의 손에서 자랐으나 놀이를 할 때도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나이 14세에 마을 사람 몇 명과 멀리 유두 놀이를 갔는데 시냇가에 이르러 시를 지어 말하기를 '보통 사람 안목으로 시냇가에 다다르니 저녁 노을이 붉게 타도다'하고 스스로 탄식하여 말하기를 '배우지 않고 산 놀이를 하는 것은 담벼락에 얼굴은 대고 서 있는 것과 같구나'라고 했다.

이렇게 하여 정몽주의 제자가 되었으니 정몽주는 공의 외삼촌이다. 이 때부터 학문에 힘써 열심히 공부하니 조금도 게으른 기색이 없고 행동 하나 하나가 법도에 어긋남이 없으니 엄연히 큰 사람의 기상이 있었다. 정몽주는 공보다 나이가 15세 많으나 항상 공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자를 부르며 말하기를 '나이는 비록 나보다 어리나 도(道)는 나보다 위다'라고 했다.

기미년 가을에 세 번이나 백일장에 나가 모두 장원을 했으며 경신년 봄에 드디어 과거에 나가 장원으로 급제하니 그 명성을 크게 떨쳤다. 임술년에 보문 검열원 아승 수찬에 선발되어 전헌부 정교로 자리를 옮겨 일 할 때우리 나라에 '주자집주'와 운봉호씨의 '4서'가 들어와 성균강학지관으로 있는 문정공 목은 이색과 정몽주 두 분이 바로잡고 절충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공이 아직 어린 소년으로 강론을 듣고 피곤함을 모르고 묵묵히 소임을 다하는 것을 보고 이색이 칭찬하여 말하기를 '최양은 항심(恒心)이 있는 사람이구나'라고 했다. 이 때 김구용, 박상충, 박이중, 이숭인 등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성균관, 보문관, 예문관 등에서 학문을 했으나 공이 가장 높은 자리에 있었다.

계해년 겨울에 봉선대부 성균사 예지제교가 되어 한강 남쪽에 내려가 민정을 살피고 돌아와 간의대부 예문관 직제학겸 지전농관사가 되었다.

이 때 고려 공민왕이 중국 명나라에 불경스런 정책을 취하므로 공이 상소로 음(陰)과 양(陽) 그리고 중화(中華)와 오랑캐(夷)의 차이를 설명했는데 그 상소문에는 ;
'명나라 황제가 나라를 세울 때 우리나라가 가장 먼저 찾아가 조공을 바치니 황제께서 크게 기뻐 하셨고 명나라 군대가 우리나라를 침략하지 않으니 원나라의 사신이 끊어지고 사신 홍사범, 정몽주 등이 명나라 사신이 되고자 하례사를 주청하여 성을 하사 받아 하늘같은 은혜를 입었으니 이를 살펴본 즉 전하께서는 그러한 각별한 은총을 잊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요즈음 늙은 중(스님)들이 권한을 남용하므로 신하들은 의심하는 마음에 매달려 한탄만 하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려고 하지 많으며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만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신(臣)은 천자(天子)에게 죄를 지은 제후국(諸侯國)이 오래가는 것을 들은 바가 없습니다.

지난 7월초에 서울과 지방에서 같은 날에 발생하여 우레 같은 소리가 산천을 진동시키고 사람과 가축이 죽고 놀래 날뛰는 일이 하루 종일 이어졌는데 이러한 일이 신이 가장 걱정하는 것입니다. 중국은 양(陽)이고 제후(諸侯)는 음(陰)이니 장차 종사에 변고가 있을까 우려됩니다.

땅의 도리는 아래로 음을 쌓고 위로 하늘의 양을 따라야 하는데 잘못된 때(時)에 잘못된 방향으로 움직이면 하늘이 이를 경계하여 벌을 내린다는 말은 절대로 헛되이 지어낸 말이 아닐 것입니다. 신이 엎드려 생각하건대 요즈음 중국에 사대(事大)함이 오히려 불경하게 한 허물이 있으니 신하된 자로서의 분수가 이렇게 변하기 시작했으니 전하께서 잘 다스리기 바랍니다.

소인배가 머리를 들고 같은 무리들을 조정에 끌어들여 조정에 소인배가 가득하고 무신들이 득세하여 사방을 지키고 안팎으로 돌아가며 서로의 이익만 챙기니 사졸은 추위와 배고픔에 떨고 백성들은 사방으로 흩어지니 설사 불행히도 변방에서 전쟁이 난다면 나라의 장래가 어찌 될 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군자는 양이고 소인은 음이니 양이 일어서면 음은 엎드리고 음이 무성하면 양이 약해지므로 군자와 소인의 경우도 이와 같으므로 둘은 함께 가지 못하며 함께 쓰지 못합니다.

군자는 소인을 다스림에 도로서 행하고 소인은 군자를 기만함에 있어서 사술로 하니 한번 기만하고 한번 다스림에 안전함과 위태함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군자는 공적인 일에 마음을 쓰며 의로서 일을 하며 임금이 잘못하면 임금을 꾸짖어 좋은 일을 하게 하고 잘못을 물리치므로 친해지기 어렵고 멀어지기 쉬우나 소인은 사사로운 일에 마음을 쓰고 세력을 쫗아 이익을 따르면서도 자신을 용서하는 말로 아첨하며 따르는 때문에 친해지기 쉽고 멀어지기 어렵습니다.
이 위급한 상황에서 잘못을 바로잡으십시오 전하. 근자에 간교하고 아첨하는 자들이 하늘을 기만하고 있으니 임견미, 이사용, 지윤 등이 바로 그들입니다.'라고 했다. 이로서 공은 소인배들의 모함을 받아 양주로 척출 당했다. 다음해인 갑자년 가을에 죄가 사하여져 서울로 돌아와 예문관 직제학이 되고 같은 해 겨울에 이성계를 따라 서북면을 정벌하게 되었다.

명나라 황제가 칙명으로 세공을 올려 금과 은 그리고 좋은 말이 황제가 요구하는 양에 미치지 못하자 황제가 진노하여 명나라 사신이 곤장을 들고 우리나라로 들어오게 되므로 홍상재 등이 멀리까지 마중을 나갔다.
을축년에 공은 성균관 대사성 지경연전사가 되어 명나라에 축하 사신으로 가게 되었다. 당시에 모든 신하들이 다투어 뇌물을 바쳐가며 사신으로 발탁됨을 피하려고 하는데 임견미가 말하기를 '정몽주와 최양은 평소 바르고 똑똑한 선비이니 이번 사신으로 적당한 인물입니다' 하니 임금이 불러서 말하기를 '이번 사신은 경들이 가는 것이 좋겠다고 많은 신하들이 말하는데 경들의 뜻은 어떤가?'하였다.

이에 포은이 말하기를 '물과 불은 피할 수 없는 것인데 하물며 천자의 부름을 어떻게 피할 수가 있겠습니까?'하고 대답하니 임금이 다시 공에게 물었다. 공이 대답하기를 '신이 황제의 용안을 뵙게됨은 신하가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일이므로 신이 바라는 바입니다'하고 대답했다.

드디어 중국에 가서 천자를 알현하고 글을 올려 간절한 뜻을 말하니 황제께서 특별히 미납된 공물을 탕감해 주고 좋은 말을 많이 길러 줄 것을 명령했다. 병인년 봄에 추밀원 직제학 진현관 판교평의사사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다. 기사년 봄에 명나라 황제의 손자를 태자로 봉함에 축하 사신으로 가다가 바다에서 바람을 만나 배가 부서지고 공물은 모두 바다에 잠겼으며 많은 사람이 죽었고 공은 살아서 중국에 들어가 죄를 청하게 되었다.

이에 황제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대의 나라는 신하들이 서로 사신이 되기를 꺼려 날자가 급박하여 바람 없는 날을 기다리지 못하고 그대를 보낸 일을 잘 한 것이나 그러다 보니 환란을 당한 것이다. 그대는 지난번 정몽주와 함께 온 자가 아닌가?'라고 하니 공이 당시 사정을 진솔하게 설명하고 공물을 줄여 줄 것을 청하니 황제가 예부에 특명을 내려 잘 대해 주라고 했다. 그 해에 윤승순과 함께 '창왕을 폐위하고 왕씨를 새로 왕으로 세우라'는 황제의 명령서를 가지고 귀국하니 공의 스승 포은, 목은 두 사람이 일을 정리하여 공양왕을 옹립하니 공양왕이 교서를 내려 말하기를 '왕씨가 아닌 자가 왕위에 있은 것은 제후국의 불행이다.

갑인년에서 기사년에 이르는 사이에 우왕과 창왕의 난으로 간신들이 나라 일을 전횡하는지라 명나라의 질책이 지엄함이 그치지 않았는데 만약에 경들이 없었다면 누가 끊어진 종사를 이어 자손에게 물려주게 했겠는가! 특별히 공을 문하찬성사에 제수하고 보문각 대제학 겸 이부상서 호조상서 시사 춘추관사 영서운관사에 임명한다'라고 했다.

임신년 4월에 포은이 이방원에게 살해되니 공은 은퇴하여 남쪽으로 내려가 중대산에 깊이 숨은지 3년이 되었다. 을해년 봄에 태조께서 숭록대부 영의정 좌의정 두 개의 벼슬을 주면서 불러도 나가지 않고 가족과 함께 완산의 봉강 선영 아래에 살기를 8-9년 했다. 경신년 7월에 태조가 온양에 온천욕을 하려 와서 한림 이유지에게 선물을 들려 공에게 보내 부르나 공은 병을 핑계삼아 나가지 않았다.

태조는 다시 예조참의 조영무를 보내 공을 부르니 공은 거친 옷을 입고 가죽띠를 맨 채 행궁에 들어가 태조와 만났지만 임금과 신하의 예의는 갖추지 않았다. 태조가 용상에서 내려가 공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내 친구 최양이 왔는가? 본지 오래더니 머리가 많이 희어졌구려. 비록 벼슬은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놀러 오지도 않는가?'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같은 마을에서 태어나 한 이불 속에서 자랐고 함께 과거에 급제하여 같은 조정에서 벼슬하고 정이 깊어 형제같이 지냈으나 지금은 서로의 입장이 다릅니다.
임금은 신하를 버릴 수 있어도 신하는 왕을 버릴 수 없어 사신을 따라 왔습니다'하니 태조가 매우 기뻐하여 완산공으로 부르고 땅 800결을 하사했다. 공이 두 번 절하고 받지 않으며 말하기를 '태조와 더불어 고려 조정을 모실 때 임금의 총애로 받은 녹이 많아 태조가 도와주지 않아도 자손이 먹고살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이에 여러 신하들이 임금의 명령을 거역한다고 죄를 주자고 하였지만 태조가 말하기를 '내가 여기까지 와서 만나자고 한 것은 이럴 줄 알고 한 것이다. 광무황제는 천자임에도 엄광을 친구로 대했는데 나는 제후 왕으로 어찌 충신을 죽일 수가 있겠는가!'라고 했다.

갑진년 5월 16일 경진시에 봉강의 집에서 돌아가시니 그해 가을 8월 경오일에 선산에 장사를 지냈다. 아! 공은 포은의 조카로서 스승으로 모시고 배운 것이 오직 임금과 신하의 의리였으며 태조가 어질고 큰 도량으로 옛 정을 버리지 못하고 친구의 예의로서 대하니 이는 중국 주나라 무왕이 주나라를 세울 때 백이와 숙제를 얻지 못함과 같다. 공은 태조로부터 충분히 작위를 얻을 수 있었으나 빛나는 교훈을 남겨 천고의 충신으로 남으니 태조가 크게 감탄하여 하교하기를 '이는 마땅히 자손에게 녹을 줄 일이다'라고 했다.

공의 12대 손자 장령 최경악이 비로소 나에게 공의 사적을 적어 달라고 부탁하지만 오래된 일을 지금에 이르러 아름답게 꾸미기 어려워 양촌 권근이 적은 공의 묘 비석을 보고 이와 같이 적으니 더 말을 추가 할 수가 없다. 기축년 5월 19일 대광보국 숭록대부 판중추부사 이휘가 적었다.

(公諱瀁字伯涵晩六自號也其先自嶺之尙山移居于湖之全州遂爲巨族遠祖諱 玉仕高麗官至樞密院知事進賢館大提學宋哲宗元佑時入中國上大賀禮事司馬光呂公著范祖禹等
擧程(臣頁)崇政殿設書薦 玉爲門下侍郞未幾伊川()歸 玉遂陳蘇孫領袖事赤()還焉始封完山府院君其後有諱七夕爲征南大將軍西北面都指揮使再封完山府院君(公之從祖)考諱贄撥亂反正佐命功臣門下贊成事 延日鄭氏愼德守義誠謹(立羽)祚壁上三漢三重大匡守門下侍中判三部事領景靈殿事日城府院君云瓘之女也公以至正辛卯八月
庚子生 有娠夢老 曰此兒宣養於東隣戶長家遂囚其言寄養於隣家名之以養字公之八歲始曉書字謂長者曰吾名誰賜   曰父母賜之曰然則父母所賜不可改也加其字邊以爲瀁字何如聞之者驚歎公生質異於凡兒雖早離   家庭之訓而遊戱必戒非禮之事十四與山人數三遠涉頭流臨水而詠曰俗顔臨溪恍發紅仍自嘆曰不

與遊山其猶正墻面而立也遂往征圃隱先生圃隱卽公之內舅也自是勵志向學眞積篤行少無情慢之 容周旋動止儼然有大人之儀圃隱長於公十有午年而常不呼名以字稱之曰年雖後我道則先我己未 秋連魁三場庚申春遂擢壯元名聲大振壬戌選補文院檢閱俄昇修撰遷至典憲府正校時牧隱先生李
文靖公請置成均講學之館盖經書始到東方而惟朱子集註及雲峰胡氏四書而己圃隱牧隱兩先生方 編摩緝註隱括折衷公()然少年參聞講論久任文墨無勞苦之色牧隱極嘆崔瀁可謂有恒心者也於是金九容朴尙衷朴宜中李崇仁 公子弟好學者始爲成均進賢寶文諸館而以公首之癸險進奉善大夫成均司藝知製敎出按漢南還
拜右諫議大夫藝文館直提學兼知典農官事是時恭愍王進用宵小不敬天朝公上疏曰皇明()興之初我國先歸入朝是爲高皇帝所大嘉之大明之兵不踐西界元主之使永絶北路向者洪師範鄭夢周等秦平蜀之賀仍奉賜姓之命尤荷九重之春顧此則殿下難忘之殊渥今者老()專權金義壇事朝臣執狐疑之心庶官嘆奔之役莫肯遺使上國有欲嫁禍於生靈臣未聞獲罪於天子延祚於邦朝也向者七月之初京外同日地震殷殷如雷川岳振蒜人畜驚 蒼黃失措者終日而止此臣之深愚也中國陽也諸侯陰也恐將有宗社之變故也地道積陰上順乾陽理
不當動而動於非時天之垂警示戒必不虛作臣伏()近愆事大之禮不顧臣子之分如此之變發於殿下勵治之日也小人居首引汲同類布滿朝廷專用臣守 之四境內外交締相與爲利士卒飢寒百姓逃散設使不幸邊塵一起則未知國家將何以措之君子陽也 小人陰也陽立則陰伏陰盛則陽微君子之於小人如陰陽之屈强故不可幷去不可幷用君子抑小人以
行其道小人去君子而施其術一去一抑安危決矣而君子以公爲心以義行事責難於君進善閉邪故難  親而易疎小人以私爲心()勢循利容說於君阿()承順故難疏而易親正在殿下下之之如何耳近者巧飾奸()欺岡天聰者有之林堅味李士庸池奫等是於是爲 小之所忌出知楊州翌年甲子秋賜還拜藝文館直提學是年冬從太祖征西北面高皇帝移 喩罪增定歲貢以金銀良馬之未準數皇帝震怒杖流入朝使臣洪尙載等于遠州乙丑公特拜成均館大司成知慶筵殿事是年當聖節之賀諸臣爭賂謨避使介之行林堅味曰鄭夢周崔瀁平日簡直士也可當此行王命召曰今行衆議在卿卿意如何圃隱曰水火不可避況於天朝乎問及公公曰親膽天日之容始 通王覲之道此臣()願也赴京進表辭直意懇高皇帝特除未納之貢以定種馬之數丙寅春樞密院直提學進賢館判校評議司事拜霜臺侍史司諫院大司諫己巳春以賀封皇孫太子入朝至海中遭(風具)風船敗貢載 失萬死及生赴朝待罪帝曰爾國陪臣相避來使日迫遣汝不待風日之善行矣故見此患也爾得非前日 鄭夢周同差來者耶公公悉陳其時請除歲貢事帝特命禮部優禮以送是歲與尹承順領聖旨還自京師
與牧隱圃隱兩先生推載恭讓呼壽萬歲整頓紀綱更承正統王敎曰邦國不幸自甲寅至己巳有禑昌之亂奸臣壇柄國事靡止被天朝譴責之嚴若無卿等之靡監誰繼旣絶之祀以延子孫耶特除公門下贊成事尋進寶文閣大提學兼吏部尙書戶曹尙書寺事春秋館事領書雲觀事壬申四月圃隱伏節以終公南
走深入中臺山免俗者三年矣乙亥春我太祖大王以崇錄大夫議政府領左二相召之不起於是率妻子 築居于完山鳳岡先瑩下()形八九年庚辰七月我太祖大王幸浴溫陽命翰林李攸之以幣召之謝病不起復命禮曹參議趙英茂諭  意以不行君臣之禮公布衣革帶入見于行宮太祖下床握手曰吾友崔瀁來耶見之久矣爾髮白矣雖未
在朝何不時時來見()于休宮公封曰生於同里長於一()科第一榜出入同朝情深昔日之兄弟禮殊今日之顔面王雖負我我不忍負王故隨使來太祖深喜使食
完山公田八百結之祿公再拜不受曰與王北面之日祿厚寵深家儲甚供奴僕煩多更無王思子孫衣食 自足矣左右欲罪之太祖曰()來此而求見者欲如此而己光武爲天子而以友待嚴光吾以諸侯之王欲害忠賢之士乎甲辰夏五月十六日庚辰卒于鳳岡之私第秋八月庚午葬于先塋之側鳴呼公以圃隱之甥姪師事圃隱其所講磨者只
是君臣大義而惟我太祖大王深仁大度不廢故舊之情待以賓友之禮此乃西山當日所未得於武王者公能得之於我聖祖事光簡冊使千古忠義之士長爲感嘆於聖祖溫宮下敎矣此間當有子孫錄矣其十二代孫前掌令景岳甫於余親聊托易名之書久遠之事今難揄揚之謹取權陽村所作公墓誌若是 次其母曰無稽之言. 己丑五月十九日. 右大匡輔國崇祿大夫行判中樞府事李徽之撰)" 라고 되어있다.

해 설 :

최선능(崔善能)
전주최씨 문충공계로 문성공 최아의 사위이며 문충공 최군옥의 4세손(고손자), 위정공 최칠석의 아버지이며 만육 최양의 증조 할아버지이다. 벼슬이 추충보절공신(推忠補節功臣)으로 삼중대광 문하 찬성사를 지냈고 상산부원군(商山府院君)이라는 존호를 받았다. 전주최씨 문충공계는 같은 전주를 본관으로 하지만 문성공계와는 다른 혈족(血族)으로 고운 최치원의 선대(先代)에서 경주최씨(慶州崔氏)에서 나누어졌다는 설이 있다. 문성공계 등 전주최씨(全州崔氏)와 구분(區分)하기 위하여 완산최씨(完山崔氏)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문충공 최군옥(文忠公 崔群玉)
고려 중기 사람으로 전주최씨 문충공계의 시조이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문충공계는 문성공계 등 다른 전주최씨와는 다른 혈족으로 문성공계 등 전주최씨는 중국 청하에서 살다가 도래(渡來)하여 왔으나 문충공계 전주최씨는 한국 전통적인 토착(土着) 최씨라고 한다. 공의 후손 정남 대장군 위정공 최칠석의 행장 "위정공 정남 선생 행장(威靖公征南先生行狀)"에는; "선생의 성은 최씨이고 휘는 칠석이며 자는 중칠이다. 처음에는 휘가 지였고 자는 중연 이었으나 고쳤다. 선생의 선조는 상산(尙山)에서 옮겨와 완산군(完山君)에 봉(封)해지므로 전주 최씨가 되었다...."라고하여 경상도 상산에서 전라도 전주로 와서 전주최씨가 되었다고 적혀있다.

위정공 최칠석(威靖公 崔七夕)
고려 말기의 장군으로 일본 대마도를 정벌하여 정남선생(征南先生)이라고 하기도 한다. 공의 휘는 지(池)이며 자는 중연(重淵) 이었으나 대마도를 정벌하고 개선한 날이 7월 7일이므로 고공양왕이 칠석(七夕)이라는 이름을 새로 내려 줌으로 휘를 칠석으로 그리고 자를 중칠(重七)로 고치게 되었다 한다.
문성공 최아의 사위 최선능의 둘째 아들로 고려 말기에 동양 세계를 뒤흔든 왜구를 토벌하고 왜구의 본거지 대마도를 정벌하여 공을 많이 세웠고 조선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포은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죽이자 종손 만육 최양과 함께 벼슬을 버리고 전주로 내려가 은거하다가 돌아가셨다.

포은 정몽주.
고려 말기의 충신, 학자로 자는 달가, 호는 포은.
한방신의 종사관으로 여진족 정벌에 참여했고 배명친원(背明親元)의 외교정책에 반대했다. 1380년 이성계(조선 태조)와 함께 왜구 토벌에도 참가했다.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려고 하자 이를 반대하여 이들을 숙청하려다가 선죽교에서 이방원(조선 태종)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성리학에 뛰어났고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시조가 되었다. 목은 이색, 야은 길재와 함께 고려의 3은이라고 한다.

고려 우왕(禑王)    1364-1398. 고려 32대 왕. 1375년에서 1388년까지 재위했다.

이부(吏部)   고려시대 상서성 6부의 하나. 조선시대 이조에 해당한다.

상서(尙書)    고려시대 관직. 이, 호, 예, 병, 형, 공 6부에 두었던 정3품의 관직. 후대로 내려오면서 판서, 전서 등으로 자주 바뀌었다. 지금의 장관.

대제학(大提學)
조선시대 관직. 정2품 관직으로 홍문관과 예문관에 두었다. 본인이 사퇴하지 않는 한 종신까지 재임했다

조선 태종(太宗)   1367-1422. 조선 3대 왕. 1400년에서 1418년까지 재위했다.

조선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
1335-1408. 조선의 초대 왕. 1392년에서 1398년까지 재위했다. 함경도 영흥 출신으로 전주이씨의 조상이지만 조선 개국 초기에 한 때 경주이씨라고 하기도 했다. 그는 당시 고려 영토가 아닌 쌍성총관부 관할지에서 태어났고 쌍성총관부에서 그의 아버지 이자춘과 함께 벼슬을 하고 있었으나 1365년 고려 장군 유인우가 쌍성총관부를 공격 할 때 협력하여 고려에서 벼슬을 하고 왜구를 무찔러 벼슬이 높아졌고 최영이 요동을 정벌할 때 압록강의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세웠다. 조선 왕조가 세워지고 나서 왕으로서 권위와 정체성을 창조하기 위하여 전주를 본관으로 하게 되었고 이를 강조하기 위하여 세종 때 용비어천가를 만들었다

송나라 철종 원우 원년.  1086년. 고려 선종 3년. 거란 요나라 도종 대안 2년. 병인년. 2월에 최충, 김원충, 최제안이 종묘에 배향을 했다.

지정 신묘년.  1351년. 고려 충정왕 3년. 중국 원나라 순제 지정 11년. 신묘년.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년에 태어나서 1396년에 돌아가셨다. 고려 말기의 성리학자로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와 함께 고려 3은 중의 한사람. 조선의 개국에 반대하였고 정몽주, 김구용과 함께 우리 나라에서 성리학을 일으켰다.

성균관(成均館)
조선시대 최고의 국립대학. 입학 자격은 15세 이상 양반가의 자제로 4부학당이나 향교(鄕校)의 졸업자 또는 소과(진사시와 생원시)의 합격자에게 주었다. 고려 국학(國學)에서 이름을 바꾼 것으로 1894년 갑오경장 전까지 조선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다.

예문관(藝文館)
예문관은 고려시대 제도를 만들고 명령의 전달을 맡아보는 관청으로 고려 태조가 태봉의 제도를 계승하여 원봉성, 학사원이라고 하다가 현종때 한림원, 1275년(고려 충열왕 1년)에 문한서 1298년에 사림원, 1308년 예문춘추관, 1362년(고려 공민왕 11년)에 예문관으로 불렀다. 대제학, 제학, 직제학, 응교, 공봉 등이 있었다. 조선시대 임금의 명령을 기록하던 관청으로 태조때는 예문춘추관이라 부르다가 1401년(조선 태종 1년) 예문관과 춘추관을 분리하였다. 제학 이상은 다른 부서에서 겸임했으며 영사, 대제학, 제학, 직제학, 응교, 각 1명, 봉교, 시교 각 2명, 검열 4명이 있었다. 영사는 정1품으로 영의정이 겸임했고 대제학은 정2품, 제학은 종2품, 직제학은 정3품 당하관이며, 응교는 정4품, 봉교는 정7품이다

봉선대부(奉善大夫)  고려시대 문산계의 하나. 1308년(고려 충렬왕 34년) 종4품으로 제정하고 1356년(고려 공민왕 5년) 조산대부로 바꾸어 불렀다.

간의대부(諫議大夫)   사의대부(司議大夫). 고려시대 문하부의 관직 이름.

직제학(直提學)
고려시대 예문관, 보문각, 진현관, 우문관 등에 있었던 정4품 벼슬. 조선시대 집현전, 예문관, 홍문관에 종3품으로 각 1명이 있었으며 예문관의 직제학은 도승지가 겸직했으며 조선 말기에는 도승지가 홍문관의 직제학도 겸직했다. 규장각에도 직제학 2명이 있었고 정3품 당상관에서 종2품까지였다. 규장각의 직제학은 홍문관 부제학 후보로 정해진 사람으로 다른 부서의 관원이 겸직했다.

고려 공민왕(恭愍王)   1330-1374. 고려 31대 왕. 1351년에서 1374년까지 재위했다.

명나라(明)
1368년 원나라 말기의 혼란기를 틈타 가난한 농부의 아들 주원장이 홍건적에 가담하여 양자강 유역을 점령하고 원나라를 북쪽으로 몰아낸 후 세운 중국의 나라. 남경(南京)을 수도로 하고 외국에 대해 소극적 정책을 썼으나 성조가 북경(北京)으로 천도를 한 다음 만주와 몽골을 제압하고 베트남(安南)을 복속 시켰으며 남쪽을 거쳐 인도양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그 후로 황제에는 범용(凡庸)한 인물이나 어린 사람이 많아 내부 기강이 해이해 져 결국 1644년 이자성에 의해 베이징이 함락되고 의종이 자살하므로 멸망했다. 조선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으며 임진왜란 때는 구원군을 보내주기도 했다.

원나라(元)
몽골족(蒙古族)의 징기스칸(成吉思汗, Chingis Khan)이 세운 세계 제국. 몽골족은 만주 서북부 하이라얼(海拉爾) 부근에 살던 유목민으로 1206년(고려 희종 2년) 예수카이(也速該)의 아들 테무진(鐵木眞, Temudjin, 원나라 태조)이 몽골족을 통일하고 스스로 징기스칸(위대한 황제)라고 했다. 1234년 오고타이(태종)가 금나라를 멸망시키고 1260년 쿠빌라이(忽必烈, 세조)가 수도를 연경(베이징)으로 옮기고 나라 이름을 대원(大元)이라고 했다. 1368년 명나라 태조 주원장에 의해 멸망했다. 원나라는 고려를 6차에 걸쳐 침입해 왔으며 결국 고려를 속국으로 만들고 일본까지 침략하다가 실패하는 등 강력한 군사력을 이용하여 세계를 지배했다.

앉은 자리에 풀도 안나는 최씨 고집 만육공 최양

전주최씨 문충공계의 후손 최선능(崔善能)의 손자(孫子)로 문충공계 시조 최군옥(崔群玉)의 8세손으로 휘는 양(瀁)이며 자는 계승(季丞) 호는 만육(晩六)이고 시호는 충익공(忠翼公)이다.

그의 할아버지 최선능(崔善能)은 전주최씨 문성공계의 시조 문성공 최아의 사위이기도하다.
또 일본 대마도를 정벌한 정남대장군 위정공 최칠석은 그의 작은 할아버지이고 고려 충신 3은의 한사람 포은 정몽주는 그의 외삼촌이다.

고려 말기의 문신으로 고려 우왕 때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서 이부상서와 대제학을 지냈다. 고려가 망하고 정몽주가 조선 태종 이방원에 의하여 살해되자 작은할아버지 위정공과 함께 벼슬을 버리고 전주 대승동 봉강리로 내려가 은거(隱居) 생활을 했다.


후에 조선 태조가 친구로서 예(禮)를 갖추어 예관(禮官)을 보내 논밭(田畓)을 주었으나 받지 않고 거절했다. 청렴 강직한 성품으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소위 앉은 자리에 풀도 안난다는 소위 "최씨 고집"을 만들어 낸 장본인이다

"만육공 최선생 행장"에는 ;
"공의 휘는 양이고 자는 백함(伯涵)이며 만육은 스스로 만든 호이다. 공의 조상은 영남의 상산(尙山)에서 호남의 전주로 옮겨와 명문 거족이 되었다.

공의 웟 대 할아버지는 최군옥으로 고려에서 벼슬을 하여 벼슬이 추밀원지사 진현관 대제학에 이르렀고 송나라 철종 원우 원년에 축하 사신으로 중국에 들어가니 사마광, 여공저, 범조우 등이 정이를 숭정전 설서로 천거하고 최군옥을 문하시랑에 천거했으나 얼마 안가서 정이가 파직되어 돌아가게 되므로 최군옥이 소철, 손각 등의 모함이 있음을 설명하고 잘못된 것임을 주장하여 파직되어 고려로 귀국하니 완산부원군으로 봉해졌다.

그 후에 다시 위정공 정남 대장군 최칠석이 서북면 도지휘사로 다시 완산부원군에 봉해졌다. 공의 아버지는 최지로 발난반정좌명공신 문하찬성사이고 어머니는 영일 정씨로 벽상삼한 산중대광 수문하시중 판삼부사 령경령전사 일성부원군 정관의 딸로 덕으로 의를 지키고 성실과 부지런함으로 내조를 했다.

공은 지정 신묘년 8월 경자일에 어떤 노파가 나타나 어머님께 말하기를 '이 아이는 동쪽 마을 호장에게 맡겨 키우라'는 태몽을 꾼 뒤에 태어났으므로 그 말을 따라서 이웃 마을 호장에게 맡겨 키우므로 이름을 양(養)이라고 했다고 한다.

공이 8세가 되어 글자를 깨치고 호장에게 말하기를 '내 이름은 누가 지었습니까?' 하고 물으니 호장이 말하기를 '부모님이 지으셨다'라고 하니 '부모님이 주신 이름을 고치지는 못하겠고 그 글자에 '水'변을 붙여 '瀁'이라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하므로 듣는 사람들이 모두 감복했다. 공은 태어날 때부터 그 바탕이 보통 아이들과 달라 일찍이 가정을 떠나 남의 손에서 자랐으나 놀이를 할 때도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나이 14세에 마을 사람 몇 명과 멀리 유두 놀이를 갔는데 시냇가에 이르러 시를 지어 말하기를 '보통 사람 안목으로 시냇가에 다다르니 저녁 노을이 붉게 타도다'하고 스스로 탄식하여 말하기를 '배우지 않고 산 놀이를 하는 것은 담벼락에 얼굴은 대고 서 있는 것과 같구나'라고 했다.

이렇게 하여 정몽주의 제자가 되었으니 정몽주는 공의 외삼촌이다. 이 때부터 학문에 힘써 열심히 공부하니 조금도 게으른 기색이 없고 행동 하나 하나가 법도에 어긋남이 없으니 엄연히 큰 사람의 기상이 있었다. 정몽주는 공보다 나이가 15세 많으나 항상 공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자를 부르며 말하기를 '나이는 비록 나보다 어리나 도(道)는 나보다 위다'라고 했다.

기미년 가을에 세 번이나 백일장에 나가 모두 장원을 했으며 경신년 봄에 드디어 과거에 나가 장원으로 급제하니 그 명성을 크게 떨쳤다. 임술년에 보문 검열원 아승 수찬에 선발되어 전헌부 정교로 자리를 옮겨 일 할 때우리 나라에 '주자집주'와 운봉호씨의 '4서'가 들어와 성균강학지관으로 있는 문정공 목은 이색과 정몽주 두 분이 바로잡고 절충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공이 아직 어린 소년으로 강론을 듣고 피곤함을 모르고 묵묵히 소임을 다하는 것을 보고 이색이 칭찬하여 말하기를 '최양은 항심(恒心)이 있는 사람이구나'라고 했다. 이 때 김구용, 박상충, 박이중, 이숭인 등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성균관, 보문관, 예문관 등에서 학문을 했으나 공이 가장 높은 자리에 있었다.

계해년 겨울에 봉선대부 성균사 예지제교가 되어 한강 남쪽에 내려가 민정을 살피고 돌아와 간의대부 예문관 직제학겸 지전농관사가 되었다.


이 때 고려 공민왕이 중국 명나라에 불경스런 정책을 취하므로 공이 상소로 음(陰)과 양(陽) 그리고 중화(中華)와 오랑캐(夷)의 차이를 설명했는데 그 상소문에는 ;
'명나라 황제가 나라를 세울 때 우리나라가 가장 먼저 찾아가 조공을 바치니 황제께서 크게 기뻐 하셨고 명나라 군대가 우리나라를 침략하지 않으니 원나라의 사신이 끊어지고 사신 홍사범, 정몽주 등이 명나라 사신이 되고자 하례사를 주청하여 성을 하사 받아 하늘같은 은혜를 입었으니 이를 살펴본 즉 전하께서는 그러한 각별한 은총을 잊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요즈음 늙은 중(스님)들이 권한을 남용하므로 신하들은 의심하는 마음에 매달려 한탄만 하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려고 하지 많으며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만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신(臣)은 천자(天子)에게 죄를 지은 제후국(諸侯國)이 오래가는 것을 들은 바가 없습니다.

지난 7월초에 서울과 지방에서 같은 날에 발생하여 우레 같은 소리가 산천을 진동시키고 사람과 가축이 죽고 놀래 날뛰는 일이 하루 종일 이어졌는데 이러한 일이 신이 가장 걱정하는 것입니다. 중국은 양(陽)이고 제후(諸侯)는 음(陰)이니 장차 종사에 변고가 있을까 우려됩니다.

땅의 도리는 아래로 음을 쌓고 위로 하늘의 양을 따라야 하는데 잘못된 때(時)에 잘못된 방향으로 움직이면 하늘이 이를 경계하여 벌을 내린다는 말은 절대로 헛되이 지어낸 말이 아닐 것입니다. 신이 엎드려 생각하건대 요즈음 중국에 사대(事大)함이 오히려 불경하게 한 허물이 있으니 신하된 자로서의 분수가 이렇게 변하기 시작했으니 전하께서 잘 다스리기 바랍니다.

소인배가 머리를 들고 같은 무리들을 조정에 끌어들여 조정에 소인배가 가득하고 무신들이 득세하여 사방을 지키고 안팎으로 돌아가며 서로의 이익만 챙기니 사졸은 추위와 배고픔에 떨고 백성들은 사방으로 흩어지니 설사 불행히도 변방에서 전쟁이 난다면 나라의 장래가 어찌 될 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군자는 양이고 소인은 음이니 양이 일어서면 음은 엎드리고 음이 무성하면 양이 약해지므로 군자와 소인의 경우도 이와 같으므로 둘은 함께 가지 못하며 함께 쓰지 못합니다.


군자는 소인을 다스림에 도로서 행하고 소인은 군자를 기만함에 있어서 사술로 하니 한번 기만하고 한번 다스림에 안전함과 위태함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군자는 공적인 일에 마음을 쓰며 의로서 일을 하며 임금이 잘못하면 임금을 꾸짖어 좋은 일을 하게 하고 잘못을 물리치므로 친해지기 어렵고 멀어지기 쉬우나 소인은 사사로운 일에 마음을 쓰고 세력을 쫗아 이익을 따르면서도 자신을 용서하는 말로 아첨하며 따르는 때문에 친해지기 쉽고 멀어지기 어렵습니다.
이 위급한 상황에서 잘못을 바로잡으십시오 전하. 근자에 간교하고 아첨하는 자들이 하늘을 기만하고 있으니 임견미, 이사용, 지윤 등이 바로 그들입니다.'라고 했다. 이로서 공은 소인배들의 모함을 받아 양주로 척출 당했다. 다음해인 갑자년 가을에 죄가 사하여져 서울로 돌아와 예문관 직제학이 되고 같은 해 겨울에 이성계를 따라 서북면을 정벌하게 되었다.

명나라 황제가 칙명으로 세공을 올려 금과 은 그리고 좋은 말이 황제가 요구하는 양에 미치지 못하자 황제가 진노하여 명나라 사신이 곤장을 들고 우리나라로 들어오게 되므로 홍상재 등이 멀리까지 마중을 나갔다.


을축년에 공은 성균관 대사성 지경연전사가 되어 명나라에 축하 사신으로 가게 되었다. 당시에 모든 신하들이 다투어 뇌물을 바쳐가며 사신으로 발탁됨을 피하려고 하는데 임견미가 말하기를 '정몽주와 최양은 평소 바르고 똑똑한 선비이니 이번 사신으로 적당한 인물입니다' 하니 임금이 불러서 말하기를 '이번 사신은 경들이 가는 것이 좋겠다고 많은 신하들이 말하는데 경들의 뜻은 어떤가?'하였다.

이에 포은이 말하기를 '물과 불은 피할 수 없는 것인데 하물며 천자의 부름을 어떻게 피할 수가 있겠습니까?'하고 대답하니 임금이 다시 공에게 물었다. 공이 대답하기를 '신이 황제의 용안을 뵙게됨은 신하가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일이므로 신이 바라는 바입니다'하고 대답했다.

드디어 중국에 가서 천자를 알현하고 글을 올려 간절한 뜻을 말하니 황제께서 특별히 미납된 공물을 탕감해 주고 좋은 말을 많이 길러 줄 것을 명령했다. 병인년 봄에 추밀원 직제학 진현관 판교평의사사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다. 기사년 봄에 명나라 황제의 손자를 태자로 봉함에 축하 사신으로 가다가 바다에서 바람을 만나 배가 부서지고 공물은 모두 바다에 잠겼으며 많은 사람이 죽었고 공은 살아서 중국에 들어가 죄를 청하게 되었다.

이에 황제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대의 나라는 신하들이 서로 사신이 되기를 꺼려 날자가 급박하여 바람 없는 날을 기다리지 못하고 그대를 보낸 일을 잘 한 것이나 그러다 보니 환란을 당한 것이다. 그대는 지난번 정몽주와 함께 온 자가 아닌가?'라고 하니 공이 당시 사정을 진솔하게 설명하고 공물을 줄여 줄 것을 청하니  예부에 특명을 내려 잘 대해 주라고 했다. 그 해에 윤승순과 함께 '창왕을 폐위하고 왕씨를 새로 왕으로 세우라'는 황제의 명령서를 가지고 귀국하니 공의 스승 포은, 목은 두 사람이 일을 정리하여 공양왕을 옹립하니 공양왕이 교서를 내려 말하기를 '왕씨가 아닌 자가 왕위에 있은 것은 제후국의 불행이다.

갑인년에서 기사년에 이르는 사이에 우왕과 창왕의 난으로 간신들이 나라 일을 전횡하는지라 명나라의 질책이 지엄함이 그치지 않았는데 만약에 경들이 없었다면 누가 끊어진 종사를 이어 자손에게 물려주게 했겠는가! 특별히 공을 문하찬성사에 제수하고 보문각 대제학 겸 이부상서 호조상서 시사 춘추관사 영서운관사에 임명한다'라고 했다.

임신년 4월에 포은이 이방원에게 살해되니 공은 은퇴하여 남쪽으로 내려가 중대산에 깊이 숨은지 3년이 되었다. 을해년 봄에 태조께서 숭록대부 영의정 좌의정 두 개의 벼슬을 주면서 불러도 나가지 않고 가족과 함께 완산의 봉강 선영 아래에 살기를 8-9년 했다. 경신년 7월에 태조가 온양에 온천욕을 하려 와서 한림 이유지에게 선물을 들려 공에게 보내 부르나 공은 병을 핑계삼아 나가지 않았다.

태조는 다시 예조참의 조영무를 보내 공을 부르니 공은 거친 옷을 입고 가죽띠를 맨 채 행궁에 들어가 태조와 만났지만 임금과 신하의 예의는 갖추지 않았다. 태조가 용상에서 내려가 공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내 친구 최양이 왔는가? 본지 오래더니 머리가 많이 희어졌구려. 비록 벼슬은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놀러 오지도 않는가?'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같은 마을에서 태어나 한 이불 속에서 자랐고 함께 과거에 급제하여 같은 조정에서 벼슬하고 정이 깊어 형제같이 지냈으나 지금은 서로의 입장이 다릅니다.

임금은 신하를 버릴 수 있어도 신하는 왕을 버릴 수 없어 사신을 따라 왔습니다'하니 태조가 매우 기뻐하여 완산공으로 부르고 땅 800결을 하사했다. 공이 두 번 절하고 받지 않으며 말하기를 '태조와 더불어 고려 조정을 모실 때 임금의 총애로 받은 녹이 많아 태조가 도와주지 않아도 자손이 먹고살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이에 여러 신하들이 임금의 명령을 거역한다고 죄를 주자고 하였지만 태조가 말하기를 '내가 여기까지 와서 만나자고 한 것은 이럴 줄 알고 한 것이다. 광무황제는 천자임에도 엄광을 친구로 대했는데 나는 제후 왕으로 어찌 충신을 죽일 수가 있겠는가!'라고 했다.

갑진년 5월 16일 경진시에 봉강의 집에서 돌아가시니 그해 가을 8월 경오일에 선산에 장사를 지냈다. 아! 공은 포은의 조카로서 스승으로 모시고 배운 것이 오직 임금과 신하의 의리였으며 태조가 어질고 큰 도량으로 옛 정을 버리지 못하고 친구의 예의로서 대하니 이는 중국 주나라 무왕이 주나라를 세울 때 백이와 숙제를 얻지 못함과 같다. 공은 태조로부터 충분히 작위를 얻을 수 있었으나 빛나는 교훈을 남겨 천고의 충신으로 남으니 태조가 크게 감탄하여 하교하기를 '이는 마땅히 자손에게 녹을 줄 일이다'라고 했다.

공의 12대 손자 장령 최경악이 비로소 나에게 공의 사적을 적어 달라고 부탁하지만 오래된 일을 지금에 이르러 아름답게 꾸미기 어려워 양촌 권근이 적은 공의 묘 비석을 보고 이와 같이 적으니 더 말을 추가 할 수가 없다. 기축년 5월 19일 대광보국 숭록대부 판중추부사 이휘가 적었다.

(公諱瀁字伯涵晩六自號也其先自嶺之尙山移居于湖之全州遂爲巨族遠祖諱 玉仕高麗官至樞密院知事進賢館大提學宋哲宗元佑時入中國上大賀禮事司馬光呂公著范祖禹等
擧程(臣頁)崇政殿設書薦 玉爲門下侍郞未幾伊川()歸 玉遂陳蘇孫領袖事赤()還焉始封完山府院君其後有諱七夕爲征南大將軍西北面都指揮使再封完山府院君(公之從祖)考諱贄撥亂反正佐命功臣門下贊成事 延日鄭氏愼德守義誠謹(立羽)祚壁上三漢三重大匡守門下侍中判三部事領景靈殿事日城府院君云瓘之女也公以至正辛卯八月
庚子生 有娠夢老 曰此兒宣養於東隣戶長家遂囚其言寄養於隣家名之以養字公之八歲始曉書字謂長者曰吾名誰賜 曰父母賜之曰然則父母所賜不可改也加其字邊以爲瀁字何如聞之者驚歎公生質異於凡兒雖早離 家庭之訓而遊戱必戒非禮之事十四與山人數三遠涉頭流臨水而詠曰俗顔臨溪恍發紅仍自嘆曰不

與遊山其猶正墻面而立也遂往征圃隱先生圃隱卽公之內舅也自是勵志向學眞積篤行少無情慢之 容周旋動止儼然有大人之儀圃隱長於公十有午年而常不呼名以字稱之曰年雖後我道則先我己未 秋連魁三場庚申春遂擢壯元名聲大振壬戌選補文院檢閱俄昇修撰遷至典憲府正校時牧隱先生李文靖公請置成均講學之館盖經書始到東方而惟朱子集註及雲峰胡氏四書而己圃隱牧隱兩先生方 編摩緝註隱括折衷公()然少年參聞講論久任文墨無勞苦之色牧隱極嘆崔瀁可謂有恒心者也於是金九容朴尙衷朴宜中李
崇仁 公子弟好學者始爲成均進賢寶文諸館而以公首之癸險進奉善大夫成均司藝知製敎出按漢南還
拜右諫議大夫藝文館直提學兼知典農官事是時恭愍王進用宵小不敬天朝公上疏曰皇明()興之初我國先歸入朝是爲高皇帝所大嘉之大明之兵不踐西界元主之使永絶北路向者洪師範鄭夢 周等秦平蜀之賀仍奉賜姓之命尤荷九重之春顧此則殿下難忘之殊渥今者老()專權金義壇事朝臣執狐疑之心庶官嘆奔之役莫肯遺使上國有欲嫁禍於生靈臣未聞獲罪於天子延 祚於邦朝也向者七月之初京外同日地震殷殷如雷川岳振蒜人畜驚 蒼黃失措者終日而止此臣之深愚也中國陽也諸侯陰也恐將有宗社之變故也地道積陰上順乾陽理 不當動而動於非時天之垂警示戒必不虛作臣伏()近愆事大之禮不顧臣子之分如此之變發於殿下勵治之日也小人居首引汲同類布滿朝廷專用臣守
之四境內外交締相與爲利士卒飢寒百姓逃散設使不幸邊塵一起則未知國家將何以措之君子陽也  小人陰也陽立則陰伏陰盛則陽微君子之於小人如陰陽之屈强故不可幷去不可幷用君子抑小人以 行其道小人去君子而施其術一去一抑安危決矣而君子以公爲心以義行事責難於君進善閉邪故難
親而易疎小人以私爲心()勢循利容說於君阿()承順故難疏而易親正在殿下下之之如何耳近者巧飾奸()欺岡天聰者有之林堅味李士庸池奫等是於是爲 小之所忌出知楊州翌年甲子秋賜還拜藝文館直提學是年冬從太祖征西北面高皇帝移 喩罪增定歲貢以金銀良馬之未準數皇帝震怒杖流入朝使臣洪尙載等于遠州乙丑公特拜成均館大
司成知慶筵殿事是年當聖節之賀諸臣爭賂謨避使介之行林堅味曰鄭夢周崔瀁平日簡直士也可當 此行王命召曰今行衆議在卿卿意如何圃隱曰水火不可避況於天朝乎問及公公曰親膽天日之容始 通王覲之道此臣()願也赴京進表辭直意懇高皇帝特除未納之貢以定種馬之數丙寅春樞密院直提學進賢館判校評議
司事拜霜臺侍史司諫院大司諫己巳春以賀封皇孫太子入朝至海中遭(風具)風船敗貢載 失萬死及生赴朝待罪帝曰爾國陪臣相避來使日迫遣汝不待風日之善行矣故見此患也爾得非前日 鄭夢周同差來者耶公公悉陳其時請除歲貢事帝特命禮部優禮以送是歲與尹承順領聖旨還自京師
與牧隱圃隱兩先生推載恭讓呼壽萬歲整頓紀綱更承正統王敎曰邦國不幸自甲寅至己巳有禑昌之
亂奸臣壇柄國事靡止被天朝譴責之嚴若無卿等之靡監誰繼旣絶之祀以延子孫耶特除公門下贊成
事尋進寶文閣大提學兼吏部尙書戶曹尙書寺事春秋館事領書雲觀事壬申四月圃隱伏節以終公南
走深入中臺山免俗者三年矣乙亥春我太祖大王以崇錄大夫議政府領左二相召之不起於是率妻子
築居于完山鳳岡先瑩下()形八九年庚辰七月我太祖大王幸浴溫陽命翰林李攸之以幣召之謝病不起復命禮曹參議趙英茂諭
意以不行君臣之禮公布衣革帶入見于行宮太祖下床握手曰吾友崔瀁來耶見之久矣爾髮白矣雖未
在朝何不時時來見()于休宮公封曰生於同里長於一()科第一榜出入同朝情深昔日之兄弟禮殊今日之顔面王雖負我我不忍負王故隨使來太祖深喜使食
完山公田八百結之祿公再拜不受曰與王北面之日祿厚寵深家儲甚供奴僕煩多更無王思子孫衣食
自足矣左右欲罪之太祖曰()來此而求見者欲如此而己光武爲天子而以友待嚴光吾以諸侯之王欲害忠賢之士乎甲辰夏五月十
六日庚辰卒于鳳岡之私第秋八月庚午葬于先塋之側鳴呼公以圃隱之甥姪師事圃隱其所講磨者只
是君臣大義而惟我太祖大王深仁大度不廢故舊之情待以賓友之禮此乃西山當日所未得於武王者
公能得之於我聖祖事光簡冊使千古忠義之士長爲感嘆於聖祖溫宮下敎矣此間當有子孫錄矣其十
二代孫前掌令景岳甫於余親聊托易名之書久遠之事今難揄揚之謹取權陽村所作公墓誌若是 次其母曰無稽之言. 己丑五月十九日. 右大匡輔國崇祿大夫行判中樞府事李徽之撰)" 라고 되어있다.

해 설 :


최선능(崔善能)
전주최씨 문충공계로 문성공 최아의 사위이며 문충공 최군옥의 4세손(고손자), 위정공 최칠석의 아버지이며 만육 최양의 증조 할아버지이다. 벼슬이 추충보절공신(推忠補節功臣)으로 삼중대광 문하 찬성사를 지냈고 상산부원군(商山府院君)이라는 존호를 받았다. 전주최씨 문충공계는 같은 전주를 본관으로 하지만 문성공계와는 다른 혈족(血族)으로 고운 최치원의 선대(先代)에서 경주최씨(慶州崔氏)에서 나누어졌다는 설이 있다. 문성공계 등 전주최씨(全州崔氏)와 구분(區分)하기 위하여 완산최씨(完山崔氏)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문충공 최군옥(文忠公 崔群玉)
고려 중기 사람으로 전주최씨 문충공계의 시조이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문충공계는 문성공계 등 다른 전주최씨와는 다른 혈족으로 문성공계 등 전주최씨는 중국 청하에서 살다가 도래(渡來)하여 왔으나 문충공계 전주최씨는 한국 전통적인 토착(土着) 최씨라고 한다. 공의 후손 정남 대장군 위정공 최칠석의 행장 "위정공 정남 선생 행장(威靖公征南先生行狀)"에는; "선생의 성은 ?羚씬隔? 휘는 칠석이며 자는 중칠이다. 처음에는 휘가 지였고 자는 중연 이었으나 고쳤다. 선생의 선조는 상산(尙山)에서 옮겨와 완산군(完山君)에 봉(封)해지므로 전주 최씨가 되었다...."라고하여 경상도 상산에서 전라도 전주로 와서 전주최씨가 되었다고 적혀있다.

위정공 최칠석(威靖公 崔七夕)
고려 말기의 장군으로 일본 대마도를 정벌하여 정남선생(征南先生)이라고 하기도 한다. 공의 휘는 지(池)이며 자는 중연(重淵) 이었으나 대마도를 정벌하고 개선한 날이 7월 7일이므로 고공양왕이 칠석(七夕)이라는 이름을 새로 내려 줌으로 휘를 칠석으로 그리고 자를 중칠(重七)로 고치게 되었다 한다.
문성공 최아의 사위 최선능의 둘째 아들로 고려 말기에 동양 세계를 뒤흔든 왜구를 토벌하고 왜구의 본거지 대마도를 정벌하여 공을 많이 세웠고 조선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포은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이방원(조선 태종)이 죽이자 종손 만육 최양과 함께 벼슬을 버리고 전주로 내려가 은거하다가 돌아가셨다.

포은 정몽주.
고려 말기의 충신, 학자로 자는 달가, 호는 포은.
한방신의 종사관으로 여진족 정벌에 참여했고 배명친원(背明親元)의 외교정책에 반대했다. 1380년 이성계(조선 태조)와 함께 왜구 토벌에도 참가했다.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려고 하자 이를 반대하여 이들을 숙청하려다가 선죽교에서 이방원(조선 태종)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성리학에 뛰어났고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시조가 되었다. 목은 이색, 야은 길재와 함께 고려의 3은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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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성시조 소벌도리 공적사적 (삼국사기 기록편)

후미 자료 참조.

 

 

                                     우리나라 최씨(시조를 달리하는) 성씨의 유래

 

본관은 문헌에 대략 300여 본이 기록되어 있으나 거의가 지명뿐, 그 중 시조가 분명히 밝혀져 있는 것은 불과 40여 본이다. 주요한 본관은 경주(慶州) ·계림(鷄林) ·전주(全州) ·동주(東州:철원) ·해주(海州) ·삭녕(朔寧) ·강릉(江陵) ·화순(和順) ·강화(江華) ·영천(永川) ·탐진(耽津:康津) ·수원(水原) ·영흥(永興) ·수성(隋城) ·우봉(牛峰:金川) ·충주(忠州) 등이다. 최씨는 한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씨족의 하나로, 역사에서 숱한 명신 ·학자 ·문인을 배출한 신라시대 이래의 전통적 명문거족이다.

 

최씨의 원조는 신라의 전신인 사로(斯盧:서라벌, BC 50?) 6촌(村) 중의 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沙梁郡)의 촌장 소벌도리(蘇伐都利)이다. 《삼국유사》에 보면 6부(部) 촌장들은 모두 천강인(天降人)처럼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 6촌에 6성(李 ·崔 ·孫 ·鄭 ·裵 ·薛)을 각각 사성(賜姓)한 것이 32년(신라 유리왕 9)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최씨의 실질적인 시조는 신라 말기의 대문장가인 최치원(崔致遠:24세손)이다. 오늘날 거의 모든 최씨의 관향(貫鄕) 분파가 최치원을 1세로 하는 경주최씨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동조동근(同祖同根)을 주장하는 최씨의 전모를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다만 그 선대 세계(世系) 및 분파 연원을 체계화한 《경주최씨상계세보(慶州崔氏上系世譜)》를 통해 그 대강을 짐작할 수밖에 없다. 이 세보에 따르면 최치원은 소벌도리의 23세손이 되는데, 최치원의 전대(前代)에서 분파한 관향으로 개성 ·삭녕 ·동주 최씨와 전주최씨의 일파가 있고, 최치원의 장손(長孫)인 승로(承老)의 후손에서 함양(咸陽) ·청주(淸州) ·영흥 ·충주 ·용강 ·수원 ·부안(扶安) ·강릉 ·강화 ·화순 ·통천(通川) ·양주(楊州) ·원주(原州) 최씨 등이 분파되었으며, 이 밖에 해주 ·진주(晉州) ·탐진 최씨가 최치원의 지손(支孫)에서 분파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이 세보에 대해서는 이론이 많아 최근에 나온 《아동최씨고(我東崔氏考)》에서는 많은 비판을 가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최씨가 소벌도리와 최치원을 잇는 신라인의 후예가 된다는 데에는 이론이 없는 것 같다. 신라 말기의 치원 ·승우(承祐) ·언위(彦 ) 등 3인이 똑같이 당(唐)나라에 유학, 과거에 급제하고 돌아와 문명(文名)을 날려 ‘일대삼최(一代三崔)’라 불렸거니와 특히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최고의 번영을 누렸는데, 그 중에서도 해주최씨와 우봉최씨가 특히 세력을 떨쳤다. 최씨는 신라 ·고려시대에 명망을 높이고 권세를 누린 최씨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의외로 쇠침하여 겨우 상신 7명, 대제학(大提學) 4명, 문과급제자 437명을 배출하였다. 오늘날 127본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1960년도 국세조사에 보면 총 20만 4154가구에 인구 119만 2662명으로 성별순위는 258성 중 제4위였으며, 1985년도 조사에서도 가구수 45만 4696가구, 191만 3322명으로 전국 274성 중 역시 제4위였다. '

 

[전주최씨] 전주최씨는 계보가 복잡하다.

 

 최군옥(崔群玉)을 시조로 는 일파, 최균(崔均)을 시조로 하는 파 와 또 최아(崔阿)를 시조로 하는 파가 있는

데 세보에 따르면 균은 치원의 지손이요, 군옥은 동주최씨의 시조 준옹(俊邕)의 후손으로 되어 있다.

 

이 중에서 가장 많은 인물은 최균파(派)에서 나왔다.

 

위의 3파를 합하여 전주최씨는 조선시대에 상신 3명, 대제학 2명, 청백리 3명, 문과급제자 109명을 배출하여 최씨 중에서 가장 빼어났다. 중흥(中興)의 조(祖)로는 유경(有慶)을 들 수 있다.

상신 ·대제학 ·청백리가 모두 그의 자손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대표적 인물은 명길(鳴吉)인데, 그는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1등공신으로 대제학 ·영의정을 역임했으며,

그의 아들 석정(錫鼎:숙종 때 영의정) ·석항(錫恒:경종 때 좌의정) 형제도 정승을 지냈다.

특히 석정은 당시 소론(少論)의 영수로서 당론의 소용돌이 속에서 6차례나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한편 군옥의 후손으로는 고려 말기의 절신(節臣)으로 《두문동(杜門洞) 72현록(賢錄)》에도 들어 있는 양(瀁)이 있다. 그 밖의 인물로는 고려 말기의 좌참찬 부(府), 태종 때의 예문관 직제학 덕지(德之), 선조 때의 황해도 관찰사를 역임한 철견(鐵堅) 등이 있고,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크게 활약한 기필(琦弼) ·균(均) ·경행(敬行) 등도 있다. 전주최씨는 경기 화성(華城), 전북 남원(南原) ·김제(金堤) ·부안, 전남 영암(靈巖) 등에 동족부락을 이루고 있다.

 

우리나라 최씨(崔氏) 가운데서도 역사상 가장 많은 인재(人才)를 배출해낸 전주 최씨(全州崔氏)는 동본(同本)이면서도 계보(系譜)를 달리하는 4계통(系統)이 있다.

[전주최씨연원보(全州崔氏淵源譜)]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 정종(靖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숙종(肅宗) 때 병부 상서(兵部尙書)와 신호위 상장군(神虎衛上將軍)을 지내고 완산부개국백(完山府開國伯)에 봉해진 최순작(崔純爵)을 시조(始祖)로 하는 계통과, 역시 고려 때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내고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에 봉해진 최군옥(崔群玉)을 시조로 하는 계통이 있으며, 또 다른 계통은 고려 인종(仁宗) 때 문과에 급제한 후 1174년(명종4) 동북로 도지휘사(東北路道指揮使)로 조위총(趙位寵)의 난에 순절하여 완산군(完山君)에 추봉된 최 균(崔 均)을 시조로 하는 일파와, 완산부개국백 문열공(文烈公) 최순작의 7세손으로 충숙왕(忠肅王)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라 완산군(完山君)에 봉해진 최 아(崔 阿)를 시조로 하는 계통이 있다. 


 그러나 [전주최씨인물사(全州崔氏人物史)]에는 문성공(文成公) 최 아(崔 阿)가 원종(元宗) 때 보문각 대학사(寶文閣大學士)를 지낸 최정신(崔正臣:문열공 순작의 현손)의 3자(三子) 입평(立枰:정당문학과 상호군을 역임)의 맏아들로 기록되어 있고 문열공(文烈公) 순작계(純爵系)와 합보(合譜)가 이루어진 것으로 전하고 있다.


 역사상 가문을 빛낸 인맥(人脈)을 계통별로 살펴보면 문열공 순작(純爵)의 아들 숭(崇)이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역임했고, 손자 남부(南敷)는 문종(文宗) 때 공부 상서(工部尙書)를 거쳐 수문전 태학(修文殿太學) 겸 대장군(大將軍)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 전(佺)은 희종조(熙宗朝)에 비서소윤(秘書小尹)을 지내다가 당대 권력가의 전횡을 개탄하여 병을 핑계하고 벼슬에서 물러났다.


 한편 강직한 성품으로 권력을 남용하던 무리들을 탄핵하다가 10여 년이나 귀양살이를 했던 정신(正臣)의 아들 득평(得枰)은 1278년(충렬왕4) 18세의 약관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형부 상서(刑部尙書)에 이르렀으나 성품이 너무 청백(淸白)하고 정직하여 미움을 받아 외직인 김해부사(金海府使)로 좌천되었다가 사임하고 청주(淸州)의 대율리(大栗里)에 살았다.


 득평의 아들 재(宰)는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중서령(中書令)을 거쳐 지평(持平)이 되었고, 1347년(충목왕3) 정치도감(整治都監)이 설치되어 각 도의 양전(量田)이 실시될 때 판관에 임명되었으나 "전왕(前王) 때의 잘못을 그 당시의 실무자가 다시 파헤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라고 개탄하며 병을 핑계로 부임치 않았다. 충정왕 때 지양주사(知襄州事)로 나갔다가 원나라 강향사(降香使)가 와서 존무사(存撫使)를 욕보이는 것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귀가했다가 감찰 장령에 특진되고, 1362년(공민왕11) 상주 목사(尙州牧使)로 있을 때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으로 남으로 피난하는 왕(王)을 호종(扈從)하는 관리들을 푸대접하여 한때 파직, 뒤에 감찰대부(監察大夫)가 되고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진 뒤 전리판서(典理判書)로 전임. 우왕(禑王) 때 완산군(完山君)에 다시 봉해졌다.


 전주 최씨(全州崔氏)의 중흥조(中興祖) 유경(有慶)은 감찰대부(監察大夫) 재(宰)의 아들로서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에 있을 때 환자(宦者) 윤충좌(尹忠佐)의 교만방자함을 탄핵하고, 1375년(우왕1)에 전법총랑(典法摠郞)에 이어 양광도 안렴사(楊廣道按廉使)를 거쳐 요동정벌 때에는 서북면 전운사 겸 찰방(西北面轉運使兼察訪)이 되고 최 영(崔 瑩)이 실각한 후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올랐다. 1392년 이성계(李成桂)의 조선개국을 도와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이 되었으며 청렴결백(淸廉潔白)을 일생의 지표로 삼아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고, 효행이 뛰어났다.


 그의 여섯 아들이 모두 현달하여 가세(家勢)를 크게 일으켰는데, 유경(有慶)의 장남 사위(士威)는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지냈고, 차남 사의(士儀)는 세종(世宗) 때 상호군(上護軍)을 거쳐 태종 때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를 지내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삼남 사규(士規)는 중백부(仲伯父) 덕성(德成)에게 글을 배워 학행(學行)으로 도판관(都判官)에 천거되었고 도관 좌랑(都官佐郞), 영평 군수(永平郡守)를 거쳐 1405년(태종5) 24세 때에 사헌부 지평을 지냈다.


 사남(四男) 사강(士康)은 음보(蔭補)로 벼슬에 올라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며 명성를 떨쳤으며,두 딸은 성녕군(誠寧君)과 금성대군(錦城大君)에게, 손녀딸은 임영대군(臨瀛大君)에게 출가시켰다. 

오남(五男) 사용(士庸)은 세종 원년에 상의원 직장(尙衣院直長)을 지내고 실록청 당랑(實錄廳堂郞)에 뽑혀 서강원(書講院)에 들어갔다가 1423년(세종5)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거쳐 상호군(上護軍)을 지냈다.

 

문신(文臣)의 가문에서 충절의 맥을 이어온 선조들의 기개를 이어 효(孝)로써 가문을 더욱 빛낸 육남(六男) 사흥(士興)은 유복자(遺腹子)로 태어나 학문을 좋아했으며 시문(詩文)에 능했고, 효심(孝心)이 극진하였다. 모친의 환후가 위중하므로 하늘에 기도하고 다리의 살을 베어 탕약으로 대신하고 지성으로 간병하여 치유시킴으로써 성종이 정려(旌閭)를 내리고 정려각을 충북 진천군 문맥면에 세웠다.

 

1605년(선조38)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했던 기남(起南)은 전적(典籍)과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거쳐 수찬(修撰), 장령(掌令), 교리(校理) 등을 지내고 황해도 암행어사(黃海道暗行御史)로 나갔다가 의정부 검상과 홍문관 부응교(副應敎)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중 래길(來吉), 명길(鳴吉), 혜길(惠吉) 3형제는 인조반정(仁祖反正)에 훈공을 세웠던 공신(功臣) 들이다.

기남의 둘째 아들로 광해군(光海君) 때 별시문과(別詩文科)에 급제했던 래길(來吉)은 정사3등공신(靖社三等功臣)으로 장악원정(掌樂院正)을 거쳐 예조참의(禮曹參議)에 올라 이 괄(李 适)의 난이 일어나자 공주(公州)로 왕을 호종하여 완주군(完州君)에 봉해졌고, 한성부 좌우윤(左右尹)을 거쳐 참판(參判)을 역임한 후 장흥 부사(長興府使)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으며, 경기도 관찰사와 공조 판서(工曹判書)를 지냈다.


 병자국란(丙子國亂)의 명상(名相)인 명길(鳴吉)은 가문을 명문의 반석 위에 올려놓은 인물이다.

몸집은 잔약하고 작았으나 앉아 있는 모습이 금석(金石)과 산악(山岳)처럼 크고 무거워서 정기(精氣)가 곁에 있는 여러 사람에게 번졌으며, 자제들도 감히 우러러 보지 못했다고 [지천유사(遲川遺事)]에 기록되어 있다.

특히 그는 푸른색과 초록색을 가리지 못할 정도로 속된 세상일은 살피지 않았다.

그의 조카가 당나귀를 타고 왔는데 "네 말의 귀가 어찌 그리 기냐?"고 하자 조카가 웃으면서 "이것은 나귀이지 말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때의 일이다. 어느 관청에서 기와 500장을 달라고 청하였다.

명길이 제사(題辭:결재)하기를 "500장은 너무 많으니 한 우리를 주라"고 하자 모두 웃었다.

기와 한 우리는 천 장을 말함인데 그는 백 장으로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그는 이조 판서(吏曹判書)로서 척화(斥和)와 화의(和議)의 갈림길에서 현실적 정세에 적응키 위하여 강화(講和)를 해야 한다는 주화론(主和論)을 주장했다.

 

척화신 김상헌(金尙憲)이 통곡을 하며 갈기갈기 찢어놓은 화의 문서를 명길이 주워서 이으며, "이를 찢어 버리는 사람이 없어서도 안되고 또 이를 주워 붙이는 사람이 없어서도 안된다" 고 말하며 찢어 버리고 싶은 것을 통곡하는 마음으로 주워 모았던 그였다. 명길과 함께 양명학(陽明學)을 공부했고, 효종(孝宗) 때 영상에 올랐던 조암(釣巖) 이시백(李時白)은 명길의 위대했던 여섯 가지 공적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첫째는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가담하여 반정이념을 구현했고,

둘째는 잦은 예론(禮論)에 있어 명륜(明倫)을 밝게 드러내놓은 것이며,

셋째는 이 괄(李 适)의 난에 혼자 적중에 뛰어들어 적의 선봉(先鋒)을 흩어놓은 용공(勇功)이었으며,

넷째는 병자국란에 모진 비방과 곤욕을 대의(大義)로 헤치고 주화(主和)를 실행하여 종사(宗社)를 보존할 수 있었던 소신이며,

다섯째는 심양(瀋陽)으로 들어가 청(靑)나라가 요구하는 조선의 징병을 거절한 공로이며,

여섯째는 나라의 위협 아래에서도 신명(身命)을 바쳐 사명(事明)의 도리를 다했던 것이다. 

 

명길의 아우 혜길(惠吉)도 인조반정의 훈신으로 공신에 책록되었으나 3형제가 공신으로 기록되면 혁명(革命)의 공신력이 없고 명분이 서지 않으므로 사양했다고 한다.

완릉군(完陵君) 후량(後亮)의 아들 석정(錫鼎)은 명길(鳴吉)의 손자로 응교(應敎) 후상(後尙)에게 입양하여 당세에 명성이 높았던 박세채(朴世采)와 남구만(南九萬)에게 학문을 배우고 현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과 교리(校理)를 지내고 숙종(肅宗) 때 부제학(副題學)으로 당시의 영의정이었던 김수항(金壽恒)을 논척(論斥)하다가 파직되기도 했으나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했고, 노론(老論), 소론(少論)의 격렬했던 당쟁 속에서 많은 파란을 겪으면서 전후 8번이나 영의정(領議政)을 지내며 당시 크고 작은 정치적인 사건에 그의 입김이 미치지 않은 일이 없을 정도로 뛰어난 정치 능력을 발휘했다.

 

특히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던 석정은 조부(祖父)인 명길(鳴吉)의 학문을 계승하여 정제두(鄭齊斗)와 더불어 양명학(陽明學) 발전에 힘썼으며 [경세정운도설(經世正韻圖說)]을 비롯한 [명곡집(明谷集)], [예기류편(禮記類篇)] 등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석정의 아우 석항(錫恒)은 숙종(肅宗) 때 좌참찬(左參贊)을 거쳐 우의정(右議政)에 올라 실록청 총재관(實錄廳總裁官)으로 [숙종실록(肅宗實錄)] 편찬을 주관하고 좌의정(左議政)에 이르렀다.
 석정의 아들 창대(昌大)는 1694년(숙종20) 문과에 급제한 후 검열(檢閱)과 부수찬(副修撰)을 거쳐 암행어사(暗行御史)가 되어 전국을 돌며 백성들의 억울함을 왕에게 호소했고 경서(經書)와 제자백가(諸子百家)에 밝았으며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곤륜집(昆侖集)]을 저술했다.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올라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내고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로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에 추봉되었던 문충공(文忠公) 군옥(群玉)의 인맥으로는 그의 맏아들 송년(松年)이 고려 의종(毅宗) 때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중의대부(中議大夫)로 밀직사사(密直司使)를 역임했고, 차남 구년(龜年)은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을 거쳐 문하찬성(門下贊成)을 역임한 후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봉작(封爵)되어 가문을 일으켰다.


 문숙공(文肅公) 유(완산부원군 희평의 차남)의 아들 선능(善能)은 추충보절공신(推忠補節功臣)으로 삼중대광문하찬성사(三重大匡門下贊成事)에 올라 상산부원군(商山府院君)에 봉작(封爵)되었고, 선능의 둘째 아들로 우왕(禑王) 때 해도 만호(海島萬戶)를 지낸 칠석(七夕)은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 겸 원수(元帥)가 되어 칠월 칠석날에 대마도(對馬島) 정벌에 공을 세워 사명(賜名)을 받았으며, 조선이 개국된 후 경기우도 수군절도사(京畿右道水軍節度使)를 역임했다. 고려 말 충신 정몽주(鄭夢周)의 생질로 우왕(禑王)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이부 상서(吏部尙書)와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했던 양(瀁:문하찬성사 지의 맏아들)은 고려가 망하자 전주(全州) 대승동 봉강리(大勝洞鳳崗里)에 은거(隱居)하며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켰으며, 태종(太宗)이 친구의 예로 전답(田畓)을 주었으나 끝내 받지 않았고, 청렴강직한 성품으로 매서운 절개를 굽히지 않았다. 인조(仁祖) 때 형제가 함께 이 괄(李 适)의 반란을 평정한 공으로 진무공신(振武功臣)에 책록되었던 응일(應一)은 한풍부원군(漢豊府院君)에 봉작되어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지냈으며,

 

그의 아우 응수(應水)는 결성군(結成君)에 봉해진 후 선천 부사(宣川副使)를 역임했다. 전주 최씨의 또다른 계통인 사도공(使徒公) 균(均)의 인맥으로는 그의 아들 보순(甫淳)이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아우 보연(甫延)과 함께 열심히 수학(修學)하여 문과에 급제한 후 황주(黃州) 장서기(掌書記)를 시작으로 벼슬길에 나가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참지정사(參知政事), 형부 상서(形部尙書) 등을 지내고 1226년(고종13) 감수국사(監修國史)로서 수찬관(修撰官)이 되어 [명종실록(明宗實錄)]을 찬수했으며 수태사판이부사(守太師判吏部事)에 이르렀고,

 

그의 아우 보연(甫延)은 형부 상서(刑部尙書)를 역임했다.

보순(甫淳)의 아들 형제 중 장남 윤이는 상약국 봉어(尙藥局奉御)가 되어 왕의 건강관리를 맡아보았고, 차남 윤개(允愷)는 강직한 성품으로 당시 집권층에서 전횡을 일삼던 최 의(崔  )가 현량한 선비들을 대우하지 않고 경박한 무리들의 참소에 현혹되어 무모한 살육을 일삼자 이를 개탄하여 벼슬에서 물러났었는데, 최 의가 죽자 좌부승선(左副承宣)에 발탁되고 이어 이부(吏部)와 병부(兵部)의 상서(尙書)가 되어 인사권(人事權)을 장악하였다.


 균(均)의 현손(玄孫)으로 대제학(大提學)과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를 역임했던 비일(毗一)의 아들 성지(誠之)는 충선왕(忠宣王)을 따라 원(元)나라에 다녀와 동지밀직사(同知密直事)와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 광양군(光陽君)에 봉해졌으며, 충선왕을 보필하여 조정의 기강확립과 조세(租稅)의 공평, 인재등용과 농잠업의 장려, 동성결혼금지와 귀족횡포 엄단, 각염법(  法) 실시와 토지개혁 등 혁신정치에 총책을 담당하였다.

 

특히 시(詩)와 글씨에 뛰어났던 그는 원(元)나라에서 배워온 역수학(易數學)으로 고려 학계에 크나큰 공헌을 하였다.
인품(人品)과 덕망(德望)이 탁월하여 가문을 대표하는 인물로 손꼽혔던 문도(文度)는 전법판서(典法判書)와 첨의참리(僉議參理)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사검(思儉)을 비롯한 5명의 손자들이 대(代)를 이어 효행으로 이름을 떨쳤다. 

자주 군사(滋州郡事) 용(溶)의 아들 부(府)는 조선이 개국된 후 예문관과 춘추관의 수찬관(修撰官)을 역임했고 광주 목사(光州牧使)와 동부대언(同副代言)을 거쳐 세종(世宗) 때 경기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천추사(千秋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와 대사헌(大司憲)과 공조(工曹) 및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했다. 문열공(文烈公) 순작(純爵)의 후손으로 또 다른 일파(一派)를 이루었던 문성공(文成公) 아(阿)의 후손에서는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공조 참의(工曹參議)와 제학(提學)을 역임했던 담( )이 유명했다.


 혼탁한 정국을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전주(全州)로 낙향하였던 담은 옥류동(玉流洞) 냇가의 기암(奇巖) 위에다 한벽당(寒壁堂)을 짓고 양촌(陽村) 권 근(權 近), 만육당(晩六堂) 최 양(崔 養)을 비롯한 명사(名士)들과 교류(交流)하면서 학문과 풍월(風月)로 자적했다.


 그의 아들 4형제가 모두 현달했는데, 맏아들로 우왕(禑王) 때 문과에 급제했던 광지(匡之)는 조선 태종(太宗) 때 집현전 제학(集賢殿提學)을 역임했으며, 광지의 아우 직지(直之)는 나주 판관(羅州判官)과 순창 도사(淳昌都事)를, 셋째 득지(得之)는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하여 막내 덕지(德之)와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


 1405년(태종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했던 덕지(德之)는 사관(史官)과 교서관 정자(敎書館正字), 김제 군사(金提郡事) 등을 거쳐 남원 부사(南原府使)로 나갔다가 사임하고 영암(靈巖) 영보촌(永保村)에서 학문연구에 진력했다.

그외 [동국통감(東國通鑑)] 편찬에 참여했던 명손(明孫), 세조(世祖) 때 호조 참판(戶曹參判)과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했던 효자(孝子) 한경(漢卿), 충청 감사(忠淸監司)와 형조 참판을 지낸 응룡(應龍), 효행으로 정려(旌閭)가 내려졌던 필성(弼成), 무신(武臣)으로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된여림(汝霖) 등이 유명했으며, 운철(云哲)의 아들 균(均)은 아우 강(堈)과 함께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스스로 <풍운장(風雲將)>이라 하며 고성(固城)과 사천(泗川) 등지에서 전공을 세웠다.


 한편 이시애(李施愛)의 난 때 독전어사(督戰御使)가 되었던 현(晛)은 병조 참지(兵曹參知)와 대사성(大司成), 부승지(副承旨)를 거쳐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제자백가(諸子百家)는 물론 역학(易學)과 음양(陰陽)을 비롯한 불교경문(佛敎經文)까지도 정통했던 명룡(命龍)은 대사헌(大司憲)에 증직되고 전주의 인산서원(麟山書院)과 부안(扶安)의 옹정서원(甕井書院)에 배향되었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군량보급을 지원하다가 진주성(晋州城)이 함락되자 남강(南江)에 투신했던 기필(琦弼)은 창렬사(彰烈祠)에 제향되었고, 처중(處中)은 명(明)나라 내란을 평정하는 원군으로 갔다가 심양(瀋陽)에서 순절하여, 명나라 황제가 <만고충신최처중>이란 글씨를 고국에 보내왔다.

 

그밖의 인물로는 인조(仁祖) 때 류효립(柳孝立)의 역모를 사전에 고변하여 영사3등공신(寧社三等功臣)으로 평완군(平完君)에 봉해졌던 산휘(山輝)와 소현세자(昭顯世子)를 심양에 배종했던 탁(濯)이 유명했으며, 현감 세영(世榮)의 아들 방언(邦彦)은 숙종 때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위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고 상의원 첨정과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냈다. 광벽(光壁)은 영조(英祖) 때 등과(登科)하여 설서(設書)를 지낸 뒤 장헌세자(莊獻世子)가 참혹하게 죽음을 당하자 벼슬을 사임했다가 그후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과 병조 참판(兵曹參判)을 역임했다. 근세에 와서도 전주 최씨는 충의(忠義)와 절맥(節脈)을 가통(家統)으로 지켜온 선현(先賢)의 위업을 받들어 사회의 각 분야에서 많은 인물들이 국가에 공헌하고 있다.

 

[경주최씨(慶州崔氏)] 우리나라 최씨(崔氏) 중에서도 가장 뿌리가 굵은 경주최씨(慶州崔氏)는 사로(斯盧)의 6촌(村) 중 돌산고허촌장(突山高墟村長:사량부) 소벌도리(蘇伐都利)를 원조(遠祖)로 받들고, 그의 24세손으로 전하는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을 시조(始祖)로 하여 누대로 살아온 경주(慶州)를 관향(貫鄕)으로 삼아 명문거족(名門巨足)의 문호(門戶)를 열었다. 857년(신라 헌안왕1) 신라의 사량부(沙粱部)에서 출생했던 고운은 어려서부터 총명, 민첩하고 학문을 좋아했으며 [10년안에학문의 대가(大家)를 이루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라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13세 때 혼자 당(唐)나라에 건너가 18세에 빈공과(賓貢科)에 금방(金榜:장원)하여 선주율수현위를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라 치적(治績)을 쌓아 승무랑시어사내공봉(承務郞侍御史內供奉)에 오르고 자금어대(紫金魚袋)를 승사(承賜)받았다. 879년(헌강왕5) 당나라 반적인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키자 관군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참전했던 고운은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문명을 떨쳤다.[...다만 천하의 사람이 다 죽이기를 생각할 뿐 아니라 또한 땅 속의 귀신들도 이미 죽이기를 의논했노라...] 반적 황소가 이 격문을 읽다가 혼비백산하여 자기도 모르게 의자에서 굴러 떨어졌으리만큼 가슴을 꿰뚫는 세찬 힘을 지닌 글로서 천하를감탄시킨 명문으로 알려졌다. 특히 고운은 관계에 나가서도 학문에 힘을 기울여 [중산복궤집]과 [육조사적(六朝事蹟)]에 오른 [쌍녀분기담(雙女墳奇談)], [계원필경(桂苑筆耕)] 등의 명저(名著)를 저술했으며, 884년(헌강왕10) 28세가 되던 해 10월 당나라 희종(僖宗)의조서(詔書)를 받들고 귀국하여 시독 겸 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국정이 문란하고 기강이 어지러움을 개탄하여 외직(外職)을 자청하고 태산(太山:태인), 함양(咸陽), 부성(富城:서산) 등지의 태수로 나갔다.

894년(진성여왕8) [시무10여조(時務十餘條)]를 상소하여 국정의 어지러움과 민생의 도탄을 구하려 했으나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세상에 뜻을 버리고 퇴관하여 산천을 소요하며 소풍농월(嘯風弄月)과 휘호농필(揮毫弄筆)로 울적한 마음을 달래다가 만년에는 가족을 모두 데리고 가야산(伽倻山)으로 들어가 961년(고려 광종2)에 95세로 선화(仙化)했다고 한다.

 특히 고운(孤雲)은 당시 동이(東夷)라고 멸시해 오던 동방인(신라인)으로서 당나라 명사(名士)들과 학문으로 겨루어 조금도손색이 없었다고 한다. 고운이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그와 친교가 두터웠던 고운(顧雲)이 이별을 아쉬워하며 지은 시(詩)가고운이 당나라에서 명성을 떨쳤던 활약상을 뒷받침해 준다.

 [내가 들으니 바다 위에 세 마리 금자라가 있어 그들은 머리에 높은 산을 이고 있고, 산 위에는 황금의 궁궐, 산 아래에는 한없는 바다로되 그 중 푸른 계림이 있어 거기 특이한 인물이 태어나니 그는 3세에 바다를 건너 문장으로 중원을 감동케한 이로서, 18세에 문단에서 마음껏 겨루며 단 한번의 화살로 금문책(金門策:과거)을 맞추었노라] 이 한편의 시를 통해서 중원을 주름잡던 고운의 자취를 엿볼 수 있으며, 그가 남긴 심오한 문장은 깊은 함축 속에 많은 뜻을 간직하여 우리 한문학의 조종(朝宗)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조선전기의 문장가로 알려졌던 서거정(徐居正)은 그의 [필원잡기(筆苑雜記)]에 이르기를 [계원필경을 봄에, 아직도 알지 못할 곳이 있으니 당시의 기풍이 이처럼 놀라웠음은 아직도 이땅의 문장이 일찍이 예와 같이 않음이로다]라고 했으며, 성종(成宗) 때의 대문호였던 성현(成俔)은 그의 [용재총화(傭齋叢話)]에 [우리나라 문장은 최치원으로부터 비롯된다(我國文章始發於崔致遠)]고 쓰고 있다.

 또 효종(孝宗)과 숙종대(肅宗代)의 학자 홍만종(洪萬宗)은 그의 [소화시평(小華詩評)]에서 [최치원의 시는 격률이 엄격하고...표현에 뜻이 깊은 함축이 있어 직접적 표현 대신 끊이지 않는 여운이 있다]라고 평했다. 일찍이 신라의 국정을 개탄했던 고운은 [계림은 누른잎과 같고, 송도는 푸른 소나무와 같다.]고 말하여,고려가 신흥국가로 융성하리라는 예시(豫示)를 왕건(王建)에게 보냈으며, 그의 자손들과 문하생들이 고려 건국초에 출사하여 벼슬을 지냈으므로 후일 현종(顯宗)은 [최치원이 고려 창업에 은밀한 공이 있다]하며 내사령(內史令)에 증직하고 문창후(文昌侯)로 증시(贈諡)하였으며, 조선 때 와선 인조(仁祖) 명종(明宗) 선조(宣祖) 임금이 [문창후 최치원은 우리 동방의이학시조(理學始祖)이니 그의 자손은 귀천이나 적서를 막론하고 비록 먼시골에 사는 사람까지라도 군역(軍役)에 동원하지 말라]고 전교(傳敎)하였다.

이렇게 신라 말과 고려 초기에 명망을 떨쳤던 경주최씨는 문창후 최치원의 후대에서 관가정공파(觀稼亭公派)와 판서공파(判書公派)를 비롯하여 광정공파(匡靖公派)와 계림군파, 충렬공파(忠烈公派), 정랑공파(正郞公派), 사성공파(司成公派), 문밀공파(文密公派),문정공파(文正公派), 화숙공파(和淑公派) 등 크게 26파로 분파(分派)되어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명문거족의 지위를 굳혀왔다.

 

[월성최씨(月城崔氏)]는 현재의 경주(慶州)시를 비롯하여 월성군(月城郡)일대에 터를 잡아 세거해왔다. 시조(始祖)는 최치원(崔致遠), 자(字)는 고운(孤雲), 시호(諡號)는 문창후(文昌侯)이며 경주최씨의 시조(始祖)이시다.
 그러나 월성최씨(月城崔氏)는 조선 선조때의 인물로 무과(武科)에 올라 공조참판(工曹參判)겸 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에 이르고 임진왜란때 창의(倡義)하여 훈공(勳功)을 세웠으며 인조 병자호란 때 순절한 최진립(崔震立)을 기세조(起世祖)로 하여 경주최씨(慶州崔氏)에서 분적(分籍)한 후 월성(月城)이라 관향(貫鄕)을 정하여 계대(系代)를 이어오고 있다.
 주요 상계파(主要上系派)를 보면 부사공파(府使公派), 배반파(排盤派), 견곡파(見谷派), 이조파(伊助派)로 크게 나눌 수 있으며, 지파(支派)중 가암파(佳岩派)를 중심으로 보면 일부 자손들이 4세(世) 최대기(崔大基)·최원기(崔源基)의 대(代)를 전후하여 영양(英陽) 울산(蔚山)·영덕(盈德)의 영해(寧海)·의령(宜寧)·함안(咸安) 등지로 옮겨 살았고,6세 최종만(崔宗萬)·최종선(崔宗善)의 대(代) 이후에 영일(迎日)·영천(永川)·광양(光陽)
등지에도 터를 잡게 되었다.
 그리고 8세(世) 최제종(崔濟宗)이 안동(安東)의 서후면(西後面)으로 옮겨가 세거하였고, 일부 11세(世) 최현태(崔鉉泰) 이래로 영주(榮州)에 그리고 14세(世) 최병효(崔炳孝) 이래로 진천(鎭川)에 각각 정착하여 살아던 것으로 보인다.
 1930년경에 이르러 월성최씨(月城崔氏)의 자손들은 경북 영일군 동해면(慶北 迎日郡 東海面)과 당시의 경주군 내남면(慶州郡 內南面)·강서면(江西面)·견곡면(見谷面)·천북면(川北面)등지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다.
 1세(世)인 최진립(崔鎭立)의 자(字)는 사건(士建), 호는 잠와(潛窩)이고, 사후(死後)에는 정무(貞武)의 시호(諡號)를 받았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2년 후에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정유재란 때 결사대 수백명을 이끌고 서생포(西生浦)의 왜적을 격멸했다.
 이어 권율장군과 함께 도산(島山)에서 대승하여 선무공신(宣武功臣)이 되었다.
 그뒤에 경기수사 겸 3도통제사(京畿水使兼3道統制使) 전라수사(全羅水使)를 걸쳐 공주영장(公州營將)으로 있을 때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남한산성이 포위되자 용인 험천(險川)에서 적군과 싸우다가 전사 하였다. 후에 병조판서(兵曹判書)가 추증되고 고향에 정문이 세워졌다.
 5세(世) 최경로(崔慶老)는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영조 4년 소론계(少論系)에서 일으킨 이인좌의 난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워 분무공신(奮武功臣) 2등에 책록 되었다.
 그 이후 3읍(邑)의 수령을 역임하면서 모두 치적(治績)이 있었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올랐으며 3대(代)가 추증되었다.

 

[태인 최씨(泰仁崔氏)]의 시조(始祖)는 최치원(崔致遠)의 후손으로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대사성(大司成)을 역임하였고, 태산(太山)으로 낙향(落鄕)하여 동인지교(東人之交)를 편수한 최 해(崔 瀣)의 6세손 최용전(崔勇田)이다. 용전은 조선(朝鮮) 연산군(燕山君) 때 예빈시
판사(禮賓寺判事)에 올라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자 관직을 버리고 환향(還鄕)한 후 1530년(중종25) 안릉(安陵)으로 이주(移住), 정착 세거(定着世居)하였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용전(勇田)의 고향인 태인(泰仁)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한편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계대(系代)를 알 수 없는 최인길(崔仁吉)을 시조(始祖)로 기록하고 있으나 문헌이 실전(失傳)되어 정확히 상고(詳考)할 수 없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은 효종(孝宗) 때 참봉(參奉)을 역임하였고, 태인(泰仁)의 용계서원(龍溪書院)에 제향된 서림(瑞琳)이 유명하고, 용전(勇田)의 손자 효근(孝根)은 호군(護軍)을 지내 당대에 뛰어났다. 제학(提學)을 지낸 흡(洽)은 효근의 증손으로 참봉(參奉)을 역임한 아들 덕연(德淵)과 함께 가문을 이어온 인물이다.
 그 외 제방(濟邦:참봉), 제국(濟國:참봉), 제읍(濟邑), 제벽(濟酸) 4형제는 덕연의 아들로 각 일파(一派)로 분파(分派)되었고, 후손에서 정규(正珪)가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정민(正敏)은 중추부사(中樞府使)를 역임하였다.
 부호군(副護軍)에 오른 상우(尙 ), 참봉(參奉)을 역임한 영희(永熙), 현감(縣監)을 지낸 희도(熙道) 등이 가문을 유명하게 했다.

 

[수원 최씨(水原崔氏)]는 최씨 득성시조(得姓始祖) 소벌도리(蘇伐都利)의 후손으로 경주 최씨(慶州崔氏)와 동원(同源)이다. 수원 최씨는 동성동본(同姓同本)이면서 시조(始祖)를 달리하는 두 계통으로 나뉘어 지는데, 한 계통은 고려 때 산원동정(散員同正)을 역임한 최 정(崔 靖)을 시조로 하고 또 한 계통은 고려 예종 때 수주(水州)의 호장(戶長) 최상저(崔尙 )를 시조로 한다. 가문을 빛낸 인물을 살펴보면, 고려 때 문신(文臣)이며 효자(孝子)인 최누백이 유명하다.  그는 수원(水原)에서 호장(戶長)을 지낸 상저(尙 )의 아들로, 그의 나이 15세 때 아버지가 사냥을 하다가 호랑이에게 해를 당하였다.
 누백이 호랑이를 잡으려는 것을 어머니가 말리니 "아버지의 원수를 어찌 갚지 않겠습니까" 하며 도끼를 들고 추적하자, 호랑이는 이미 그의 아버지를 먹고 배가 불러 누워 있었다. 누백이 곧장 달려가 "너가 우리 아버지를 먹었으니 나는 마땅히 너를 먹으리라" 하고 호랑이를 꾸짖어 말하니 호랑이가 꼬리를 흔들며 엎드렸다.
 그러자 얼른 도끼로 찍어 죽이고 그 배를 갈라 아버지의 뼈와 살을 내고 호랑이의 고기는 독에 담아서 냇물 가운데 묻고 아버지의 해육(骸肉)을 그릇에 담아 홍법산(弘法山) 서쪽에 안장하고 3년 동안 여막(廬幕)에살았다.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조선 세종때 왕명으로 엮은 수신서)]에 그의 이러한 행적이 수록되어 있다 그 후 문과에 급제하여 의종(毅宗) 때 기거사인(起居舍人)에 올라 1153년(의종 7) 금(金)나라에 가서 용흥절(龍興節)을 축하하고 돌아와 1155년(의종 9) 국정(國政)에 관한 왕의 자문에 응했으며 뒤에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이르렀다.
 충렬공(忠烈公) 자성(滋盛)은 성품이 강직하고 민첩하여 여러 벼슬을 훌륭히 역임하였다.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를 거쳐 1121년(예종 16) 동북면병마가 되고 1127년 (인종 5)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참지정사(參知政事)를 거쳐 이듬해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역임했다. 1129년(인종 7) 상서좌복야, 참지정사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1133년(인종 11)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 치사(致仕)하였다.
 고려 현종(顯宗) 때 현신(賢臣) 사위(士威)는 1010년(현종 1) 통군사(統軍使)에 보직되어 강조(康兆)등과 함께 30만 군사를 거느리고 통주(通州:평북 선주)에 나가 거란의 침입을 방어하였으며 그 후 태자태사(太子太師)에 올랐고 1052년(문종 6) 왕이 "검교태사내사령(檢校太師內舍令) 최사위가 선왕조(先王朝)에 청절(淸節)과 직도(直道)로써 많은 도움이 있었고 국난(國難)을 구제하고 종사(宗社)를 편안히 보존하여 나라의 중흥을 일으켜 국가에 이익을 끼친 바 많았다"하여 묘정(廟庭)에 배향케 하였다. 그 외 고려 때 신호위보승별장(神虎衛保勝別將)을 역임 중 조선이 개국되자 금부도사(禁府都事)에 임명되었으나 취임을 거부한 원(原), 조선 중종(中宗) 때 정국공신(靖國功臣)이 되고 길성군(吉城君)에 봉해진 유정(有井)이 있으며, 명원(明遠)은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지냈다.  

 

 

[동주최씨] 철원(鐵原)최씨라고도 하는데, 동주(東州)는 철원의 고려 때 지명이다. 시조는 고려의 개국공신 최준옹(崔俊邕)이다. 고려 말기의 최영(崔瑩)을 고비로 조선시대에는 두드러진 인물이 없다. 준옹의 현손 석(奭)의 아들로, 고려 예종 때 집현전 대학사를 지낸 유청(惟淸) 때부터 가문이 번창하기 시작했는데, 그의 아들 당( )과 선(詵)이 유명하다. 당은 신종 때 문하평장사를 지냈고, 선은문하시랑평장사를 지냈다. 고려 말기의 명장 영은 유청의 현손이며 동원부원군 원직(元直)의 아들이다. 그는 강직청렴한 명장이요 명재상으로서 왜구를 무찔러 전공을 세운 것을 시작으로, 10여 차례에 걸친 왜구 소탕과 함께 수차례의 내란에 공을 세웠으나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李成桂)의 군사와 맞섰다가 결국 참형을 당하고 말았다. 현대의 인물로는 국학(國學)의 대가 남선(南善)이 유명하다.

 

[해주최씨] ‘해동공자(海東孔子)’로 알려진 충(沖)의 아버지 온(溫)을 시조로 한다. 온은 해주 여러 대에 걸쳐 목민관(牧民官)을 지낸 후 해주의 수양산(首陽山) 아래서 세거(世居)했었다. 해주최씨는 고려시대에 많은 학자 ·명신을 배출하였고,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 45명을 냈다. 대표적 인물은 동방 유학의 비조(鼻祖)인 충으로, 그가 개경(개성)에서 연 구재학당(九齋學堂)은 한국 사학(私學)의 효시가 되는데, 수많은 영재를 배출하여 오늘날까지 ‘해동공자’로 추앙을 받고 있다. 충의 아들 유선(惟善)과 유길(惟吉) 형제 역시 당대의 뛰어난 인물들이다. 5대손 윤의(允儀)는 예학(禮學)에 밝아 《상정고금예문(詳定古今禮文)》(50권)을 편찬하였다. 조선시대의 대표적 인물로는 세종 때의 학자요 청백리인 만리(萬理)가 있는데, 그는 충의 12대손으로 세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에 반대한 일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그 밖에 시와 문장에 뛰어났던 경창(慶昌), 선조 때 이조판서를 지낸 황(滉) 등이 있고, 조선시대에 배출한 유일한 영의정 규서(奎瑞)가 있다.

 

[삭녕최씨] 고려 명종 때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낸 최유가(崔兪嘉)를 시조로 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영의정 2명, 대제학 1명, 문과 급제자 32명을 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항(恒) ·흥원(興源) ·한기(漢綺) 등이 있다. 항은 집현전 부수찬(副修撰)으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고 영의정을 두 차례나 역임하였다. 흥원은 항의 증손으로 선조 때 유성룡(柳成龍)의 뒤를 이어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조선 실학의 거두인 한기는 항의 14대손으로, 영 ·정조 때에 융성했던 실학이 학문으로서 이론적 ·사상적으로 미숙하던 것을 철저한 경험주의 철학을 바탕으로 무실사상(務實思想)을 전개하여 실학의 체계를 확립한 학자이다. 사가(史家)들이 그를 가리켜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의 가교자(架橋者)’라 평할 만큼 그는 한국 사상사에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삭녕최씨는 주로 경남지방에 많이 살고 있는데, 특히 사천군 사천면(泗川面) ·정동면(正東面) ·사남면(泗南面) 일대에 특색 있는 동족부락을 이루고 있다.

삭녕 최씨(朔寧崔氏)는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최천로(崔天老)를 시조(始祖)로 하고,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낭장(郎將)을 지낸 최선보(崔善甫)와 경전 부사(慶殿副使)를 역임했던 최연(崔 )을 각각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을 이어왔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낭장(郎將) 선보(善甫)의 아들 충(忠)이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고, 충의 아들 윤문(潤文)은 우찬성(右贊成)을 역임하였으며, 윤문의 셋째 아들 사유(士柔)가 태종(太宗) 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춘추관 기사관(春秋?記事官)을 역임한 후 장흥고사(長興庫使)를 거쳐 노인직(老人職)으로 지승문원사(知承文院事)에 올랐다. 그의 아들 항(恒)은 삭녕 최씨 가문을 명문의  반석(盤石)위에 올려 놓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조선 초기 훈구파(勳舊派)의 대학자로서 세조(世祖)를 도와 문물제도(文物制度) 정비에 큰 역할을 했다. 집현전 부수찬(集賢殿副修撰)으로 정인지(鄭麟趾), 박팽년(朴彭年) 등과 함께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에 참여했으며, 집현전 교리(校理)로 오례(五禮)를 찬진했고, 집현전 응교(應敎)로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창제에 참여, 이어 [동국정운(東國正韻)], [훈민정음해례(訓 民正音解例)], [용비어천가보수(龍飛御天歌補修)] 등을 찬진했다.
 역사(歷史), 언어(言語), 문장(文章)에 능통하여 당대의 팔문장(八文章)의 한 사람으로 명나라에 보내는 표전문(表箋文)은 거의 그가 담당하여 썼다.
 또한 항(恒)은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도와 계유정난(癸酉靖難)에 공을 세워 정난일등공신(靖難一等功臣)으로 책록되어 도승지(都承旨)에 올랐고, 형조(刑曹), 공조판서(工曹判書), 예문관 대제학, 이조 판서(吏曹判書) 등을 역임했으며, 우의정(右議政) 및 좌의정(左議政)을 거쳐 두 차례나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근면 성실하고 겸손을 바탕으로 한 그의 성품으로 40년 동안 벼슬길에 있으면서 한 번도 탄핵을 받거나 외직(外職)으로 물러난 적이 없었으며, 저서로는 [태허정집(太虛亭集)], [관음현상기(觀音現相記)]를 남겼다.
 광해군(光海君) 때 어우당(於于堂) 류몽인(柳夢寅)이 지은 [어우야담(於于野談)]에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항(恒)이 알성 문과(謁聖文科)에 장원급제 할 무렵 세종(世宗)이 꿈을 꾸었다.
 꿈 속에 한 마리의 큰 용(龍)이 성균관 서편 잣나무에 서리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깨어나 사람을 시켜 가보게 했더니 한 선비가 그 잣나무 아래에 누워 낮잠을 자고 있었다. 이윽고 과거(科擧)를 보고 장원급제한 사람을 찾아보니 다름아닌 바로 그 선비였으며 훗날 명신(名臣)이며 대학자(大學者)가 된 태허정(太虛亭) 최 항(崔 恒)이었다.
 그로부터 그 잣나무를 장원백(壯元柏)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조선조에 예조참의(禮曹參議)를 지낸 영린(永潾)과 좌찬성(左贊成)을 지낸 영호(永灝)는 항(恒)의 아들로 가문을 더욱더 빛냈다.
 항(恒)의 증손이자 전첨을 지낸 수진(秀珍)의 아들인 흥원(興原)은 1555년(명종 10) 진사가 되어 1568년(선조 원년) 증광문과에 급제하고 장령(掌令), 정언(正言), 집의(執義), 사간(司諫), 동래부사(東萊府使)를 역임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순찰사(都巡察使)가 되었고, 이어 우의정(右議政), 좌의정(左議政)에 승진하여 영의정(領議政)에 기용되었다.
 영평부원군(寧平府院君)에 봉해졌고 죽은 뒤 호성공신(扈聖功臣) 2 등에 추록되었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어모장군(禦侮將軍)을 지낸 영(穎)의 아들 상중(尙重)은 1576년(선조 9) 사마시(司馬試)를 서쳐 1589년(선조 22)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검열(檢閱)이 되고 1600년(선조 33) 헌납, 지평(持平)을 거쳐 1602년(선조 35) 사간(司諫)을 지냈으며 도승지(都承旨)에 추증(追贈)되고 대사헌(大司憲)에 가증(加贈)되었다.
 변( )의 아들 동립(東立)은 1585년(선조 18) 진사가 되어 임진왜란 때 능참봉(陵參奉)으로 임금을 의주(義州)로 호종하고 후에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1595년(선조 28) 봉교(奉敎)를 거쳐 1597년(선조 30) 병조좌랑(兵曹佐郞)을 지냈으며,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1599년(선조 32) 병조 정랑(兵曹正郞)에 올랐다.
 뒤에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고 부임하여 이도(吏道)를 바로 잡았다.그의 동생 동식(東式)은 당대의 문관(文官)이며 의병장인 우성전(禹性傳)의 문인(文人)으로, 1594년(선조 27)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안변부사(安邊府使)로 나가 관개(灌漑) 사업을 크게 일으켰고, 1612년(광해군 4) 보덕(輔德)을 거쳐 이듬해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상중(尙重)의 아들인 연은 1603년(선조 36)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예조 좌랑(禮曹佐郞), 장령(掌令), 응교(應敎), 집의(執義), 사간(司諫) 등을 역임하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을 지냈고 후에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연의 동생 온( )은 1609년(광해군 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은퇴하여 성리학(性理學) 연구에 전념하다가 1653년(효종 4)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이르렀다.
 행(荇)의 손자이며 휘지(徽之)의 아들인 계옹(啓翁)과 시옹(是翁) 형제는 삭녕 최씨(朔寧崔氏)가문을 문(文)의 가문으로 더욱 빛냈다.
 계옹(啓翁)은 지평(持平)으로 동지사 서장관(冬至使書狀官)이 되어 청나라에 다녀 온 후에 정언(正言), 지평(持平)을 지냈고 그의 동생 시옹(是翁)은 윤 증(尹 拯)의 문하생으로 지평(持平)이 되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 학자로서 실학파(實學派)의 거두(巨頭)이며 한국 사상사(韓國思想史)에 중요한 업적을 이룩한 한기(漢綺)는 항(恒)의 14세손이다.
 1825년(순조 25)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의 연구에 전심하였고, 1872년(고종 9) 아들 병대(柄大)가 고종의 시종(侍從)이 되자, 노인직(老人職)으로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철저한 경험주의 철학을 기반으로 무실사상(務實思想)을 전개하여 실학의 철학적 기반을 확립했고, 교육사상에 있어서 직업교육을 제창했다.
 성리학의 배타적이고 고루한 입장에서 벗어나 자유분방한 이론을 전개한 점에 있어서 한국 사상사(韓國思想史)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고, 또한 삭녕 최씨(朔寧崔氏) 가문을 덕망있는 가문으로 이르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강릉최씨] 고려시대의 경흥부원군(慶興府院君) 최필달(崔必達)을 시조로 하고 있다. 《경주최씨상계세보》에 보면, 그는 경주최씨의 시조 치원의 후손인 승로(承老)의 증손이다.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는 32명으로 전주 ·해주 ·경주 최씨에 다음가는 숫자이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치운(致雲)과 수성(壽城)을 들 수 있다. 치운은 시조 필달의 16대손으로 세종 때의 명신이었으며 특히 형옥(刑獄)에 밝아 왕명을 받고 《무원록(無寃錄)》을 주석하였다. 수성은 치운의 증손으로 성리학에 일가를 이루었으며 시문 ·서화 ·음률 ·수리(數理) 등 다방면에 뛰어난 당대의 기재절필(奇才絶筆)이었다. 강릉최씨에는 시조를 달리하는 일파가 있으니 그 시조는 고려 충숙왕의 부마(駙馬)인 문한(文漢)이다. 그는 고려 말기에 강릉으로 낙향했는데, 그 자손들이 강릉과 충북 충주에 문호(門戶)를 열어 현재 삼척 ·양양 ·평창 등지에 수천 호가 거주하고 있다. 주요인물로는 조선 세조 때 이조참판을 지낸 자점(自霑), 성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세건(世楗), 인조 때 진주목사를 지낸 응천(應天) 등이 있다.

강릉 최씨(江陵崔氏)는 본관을 같이 하면서도 상계(上系)를 달리 하는 다음 3계통(系統)이 있다.
 첫째는 고려 때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삼한벽상 개국찬화공신(三韓壁上開國贊化功臣)에 책록되어 영첨의좌정승(領僉議左政丞)을 역임한 후 경흥부원군(慶興府院君)에 봉해졌던 충무공(忠武公) 최필달(崔必達)의 계통이고, 둘째는 고려 태조(太祖)의 부마(駙馬)로 대경(大卿)에 올랐던 최흔봉(崔欣奉)의 계통이며, 또 다른 한 계통은 고려 충숙왕(忠肅王)의 부마(駙馬)로 삼중대광(三重大匡) 판군기시사(判軍器寺事)에 올랐던 충재(忠齋) 최문한(崔文漢)을 시조(始祖)로 하는 계통이다.
 이들 각 계통별로 가문의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충무공(忠武公) 필달(必達)의 증손 숭언(崇彦)이 고려 때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명주부원군(溟州府院君)에 봉해졌으며, 13세손 한주(漢柱)는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대중대부(大中大夫)로 종정경(宗正卿)과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내고 명주군(溟州君)에 봉해졌으므로 이들, 필달,숭언,한주는 강릉 최씨가 자랑하는<삼군(三君)>이다.
 고려말에정선군수(旌善郡守)를 지내고 중정대부(中正大夫)로 삼사 좌윤(三司左尹)을 역임했던 동강(東崗) 원량(元亮)의 손자 치운(致雲:국자생원 안린의 아들)은 조선 전기의 명신(名臣)으로 세종(世宗) 때 훌륭한 치적(治績)을 남겼다.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가는 1390년(공양왕2) 6월 19일 강릉에서 태어난 조은(釣隱) 치운(致雲)은 조선 태종(太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세종(世宗) 원년(元年)에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를 시작으로 벼슬길에 나가 여러 주요관직을 두루 역임하며 덕망(德望)과 식견(識見)을 인정받아 국정(國政)을 논할 때마다 왕(王)의 자문에 응했고, 다섯 차례나 명(明)나라를 다녀오면서 외교적인 업적을 남겼다. 특히 조은(釣隱)은 왕명(王命)을 받아 [대명률(大明律)]을 참고로 [무원록(無寃錄)]을 주해(註解)하여 위로는 형조(刑曹)로부터 아래로 군옥(軍獄)에 이르기까지 억울한 옥사(獄事)가 없도록 하였고, 천성이 청백하여 왕이 내려준 전답(田畓)과 노비를 일곱 번이나 사양하였다.
 그는 평소에 술을 좋아했는데, 세종이 그의 건강을 걱정하여 친필(親筆)로 계주(戒酒)의 어찰(御札)을 내려 주었다.
 조은은 그 어찰을 벽에다 붙여 두고 출입할 때마다 경계하였는데, 어쩌다가 바깥에서 폭음(暴飮)을 하고 오는 경우, 부인이 머리를 들어 주면서 어찰이 붙은 벽을 가리켜 보이면 취중에도 번번히 사죄(謝罪)하는 모습을 지었다고 하며, 술이 깨면 "내 임금의 은혜에 느껴서 술을 경계할 것을 늘 마음 속에 두었으나 다만 술을 만나면 전날의 경계를 갑자기 잊어버리고는 취하기에 이른다"고 하였다.
 치운(致雲)의 둘째 아들 응현(應賢)은 단종(端宗) 때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임명되었으나 고향에 계신 노모(老母)의 봉양을 위하여 강릉 훈도(江陵訓導)에 머무르다가 세조(世祖) 때 강원도 도사(江原道都事)직을 억지로 받게 되자 6년의 의무기간 동안 고향 근방의 수령(守令)직을 주청(奏請)하여 영월(寧越)과 고성(高城)을 맡아 목민관(牧民官)의 임무를 다했다.
 1480년(성종11) 모친상을 당하자 여막(廬幕)을 짓고 3년 동안 시묘(侍墓)하면서 한번도 집에 내려오지 않았으며 3년상을 마치자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 승정원 부승지(承政院副承旨), 예조 참의(禮曹參議), 충청도 관찰사, 대사헌(大司憲), 경주부윤(慶州府尹),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 등을 역임했다.
 한편 응현(應賢)의 셋째 아들로 1504년(연산군10)에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했던 세절(世節)은 당시 폭군의 난정이 극심하였던 시대라 억울하게도 그 해에 등과(登科)한 이들의 발표가 보류된 채 중종반정(中宗反正)을 맞았다. 중종(中宗)이 즉위하자 그는 성균관 유생이 중심이 되어 <신(臣) 등은 등과(登科) 출신으로서, 비록 얼마 안 되는 효(效)도 남기지 못했다 하더라도 문반(文班)의 일원(一員)으로서 갖출 바를 갖추고 그 이력(履歷)을 쌓은 지는 오래입니다.
 오늘날 방(榜)을 파(罷)하고 직(職)을 거두어 한 포의지사(布衣之士)가 되었으니 새삼스레 유관(儒冠)을 쓰고 성균관에 나가려 하여도 후배들의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고 물러나서 밭이랑에 엎드리려 하여도 평화로운 세상에 버린 물건이 될 것이 뻔하온데......>로 시작되는 장문(長文)의 상소(上疏)를 올려 왕으로부터 인정을 받아 장원급제를 추인(追認)받게 되었다.
 그 후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을 시작으로 벼슬에 올라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거쳐 호당(湖當)에 뽑혔으며 이조 정랑(吏曹正郞)과 지제교(知制敎), 좌우부승지(左右副承旨), 황해(黃海)와 경상도 관찰사 등을 역임한 후 대사헌(大司憲),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형,호조(刑戶曺)의 판서(判書)를 지냈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고제(高弟)로 학문이 뛰어났고 문장과 서예,미술,음악 등에 출중하여 <사절(四絶)>이라 불리웠던 수성(壽 )은 어려서부터 의지와 기개가 남달리 고매하고 지혜가 뛰어나서 19세 때 이미 문예(文藝)에 일가(一家)를 이루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다.
 일찍이 기묘사화(己卯士禍)의 원흉(元兇)이었던 남 곤(南 袞)이 산수도 한 폭을 김 정(金 淨)에게 보내어 화제를 요구해왔다.
 마침 수성이 김 정의 집을 방문했다가 이를 보고 그 위에 쓰기를 <떨어지는 해는 서산으로 내리고 외로운 연기는 먼 나무에서 나온다(落日下西山 孤烟生遠樹), 복건 쓴 서너사람 망천의 주인은 누구인고(幅巾三四人 誰是輞川主>라고 하였다가 남 곤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기묘사화가 일어난 후 수성은 시국 형편에 강개하여 승지(承旨)로 있던 숙부(叔父) 세절(世節)에게 "세사가 이같이 되어가는데 굳이 벼슬하여 무엇을 구하고져 하시오. 안전하게 산수간(山水間)에서 여생을 보전하는 것만 못할 겁니다."하며 다음과 같은 시(詩)를 보냈다

<해 저문 창강 위에 날은 차고 물결이 절로 이네(日暮蒼江上 天寒水自波), 외로운 저 배 일찌감치 대여라 밤이 오면 풍랑이 높아지리(孤舟宣早 伯風浪夜應多)> 1519년(중종14) 안처겸(安處謙) 일당이 일으킨 신사무옥(辛巳誣獄) 때 수성은 간신들의 모함을 받아 끝애 극형에 처해졌다. 1521년(중종16) 10월 21일 진시(辰時)에 처형되니 이 때 수성의 나이는 35세였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그날 흰 무지개가 태양을 뜷고 지나가고 하늘이 수 백리가 진동하였다고 하며, 짙은 안개가 사방을 가려서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된지가 수일이나 되었다고 한다. 수성의 제자 이달형(李達亨)이 발(簾)로 시체를 염습하여 산골에 임시로 가매장하고 밤에 그 옆을 지키고 있었는데 꿈에 수성이 나타나 <적막한 내 무덤을 뉘라서 찾아오리, 처절한 원숭이 소리나 벗하련다, 발에 싸여 온 후, 멀리 시체 덮어준 그 사람을 생각하노라>하는 시(詩)를 읊었다. 임진왜란 때 28세로 백의창의(白衣倡義)하여 전공을 세웠던 배천(配天)은 선조(宣祖)로부터 어의(御衣)와 망건(網巾)을 하사받고 회령 교수(會寧敎授)와 사복시 첨정(司僕寺僉正)을 역임했다. 세절(世節)의 증손이며 수성(壽 )의 손자인 기벽(基 )은 광해군(光海君) 때 박사(博士)로서 태학(太學)인 성균관에서 교수(敎授)하고 있을 때 영창대군(永昌大君:선조의 아들, 인목대비의 소생)을 서인(庶人)으로 만들어 강화도에 위리안치시키고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대궐에 나가 "삼강(三綱)이 끊어지고 구법(九法)이 무너졌나이다." 하며 극간(極諫)을 하였고, 조카 문한(文漢)으로 하여금 당시 전횡을 일삼던 이이첨(李爾瞻) 일당의 목을 베라는 항소문(抗疏文)을 올리도록 하였다가 동생 기백(基 )과 함께 성균관에서 퇴관당하여 향리인 원주로 내려갔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 후에 억울함이 풀렸다. 그의 아들 4형제가 모두 현달하여 강릉 최씨를 더욱 빛냈는데, 맏아들 문오(文澳)는 군수(郡守)를 거쳐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을 역임했고, 차남 문활(文活)은 군수를 지내고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으며, 셋째 문발(文潑)은 세속의 명리(名利)를 초탈하고 시주(詩酒)와 더불어 보내며 595수(首)의 주옥 같은 시(詩) 3권 2책에 담은 [취석시집(醉石詩集)]을 남겼다. 막내 문식(文湜)은 1630년(인조8) 중형인 문활(文活)과 함께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持平)을 거쳐 헌종(憲宗) 때 장령(掌令)과 헌납(獻納)을 지내고 숙종조(肅宗朝)에 황해도 관찰사, 승지(承旨), 대사간(大司諫), 예조참판, 도승지(都承旨)등을 역임했다. 고려 태조의 부마(駙馬)로 대경(大卿)에 올랐던 최흔봉(崔欣奉)의 후손에서는 그의 12세손 입지(立之)가 고려조에서 문하평리(門下評理)와 상호군(上護軍)을 지내고 평장사(平章事)에 증직되어 강릉군(江陵君)에 추봉되어 후손들이 강릉으로 시적(始籍)되었으며, 그의 아들 3형제 중 맏아들 안소(安沼)가 평장사(平章事)로 강릉군(江陵君)에, 차남 안빈(安瀕)은 이부 전서(吏部典書)로 예성군(芮城君)에 봉해졌고, 막내 안면(安沔)은 이부 전서를 역임하여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그외 강릉군(江陵君)에 봉해졌던 유연(有漣:안소의 아들)과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지낸 유의(有 ) 형제가 유명했으며, 유연의 아들 이( )는 조선 초기에 대사헌(大司憲)과 공조(工曹) 및 형조(刑曹)의 판서(判書)를 지내고 경상도 도관찰사에 이르렀고, 그의 아들 경인(景仁)이 감사(監司)를 역임했다. 충숙왕(忠肅王)의 딸 선덕공주와 혼인하여 부마(駙馬)가 되었던 문한(文漢)은 기울어져가는 고려의 국운을 일으켜 보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으나, 자기를 태우고 동분서주하던 애마(愛馬)가 강릉 옥천동 용지(龍池)에서 용(龍)으로 변하여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는 고려의 운명이 다한 것을 깨닫고 그대로 강릉에 정착하여 강릉 최씨의 또다른 계통의 시조가 되었다. 충재공(忠齋公) 문한(文漢)의 후손에서는 그이 손자 윤(允)이 사포서 사포(司圃署司圃)를 역임한 후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고 슬하에 아들 3형제 중 둘째 자호(自湖)는 세종 때 무과에 급제하여 대사간(大司諫)과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지냈으며, 막내 자점(自霑)은 성종(成宗) 때 등과(登科)하여 감찰(監察)과 정언(正言)을 거쳐 홍문관교리(弘文?校理)를 지내고 평강(平康),고성(高城),금성(金城) 등지의 군수(郡守)를 지내며 선정(善政)을 베풀었고 훌륭한 치적(治績)을 남겨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1525년(중종20)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했던 연(演:자점의 손자)은 호당(湖當)에 선임되어 사가독서를 했으며, 홍문관 제학(弘文?提學)과 수찬(修撰), 장령(掌令), 필선(弼善) 등을 거쳐 충청도 어사로 나가 민정을 살폈고, 승정원 우부승지(承政院右副承旨)를 지낸 후 인종(仁宗) 때 중종의 [애책문(哀冊文)]과 [시책문(諡冊文)]을 지었다.
 그 후 명종(明宗) 초에 지중추부사와 한성 판윤(漢城判尹)을 지내고 지의금부사로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다.
 그의 조카 운우(雲遇)는 명종(明宗) 때 횡성 현감(橫城縣監)을 역임했고, 인조(仁祖)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진주 목사(晋州牧使)를 역임했던 응천(鷹天)이 문장과 서예, 음율(音律) 등에 정통하여 문명을 떨침으로써 강릉 최씨를 더욱 빛냈다.

 

[간성 최씨(杆城崔氏)]는 강릉 최씨(江陵崔氏)에서 분적(分籍)된 계통으로 고려 태조의 부마(駙馬)로 대경(大卿)을 지내고 강릉군(江陵君)에 추봉된 최흔봉(崔欣奉:강릉 최씨 일파의 시조)의 후손 최무동(最茂東)을 시조로 하는 계통과 역시 강릉 최씨 일파의 시조 최필달(崔必達)의 후손으로 고려 말에 문과에 판도판서(版圖判書)와 상호군(上浩軍), 첨의평리(僉議評理) 등을 지내고 조선조에서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역임한 후 간성군(杆城君)에 봉해졌던 최지순(崔之洵)을 시조로 하는 두 계통이 있으나 상계소목(上系昭穆)을 고증할 문헌이 전하지 않아 정확히 상고(詳考)할 수 없다.
 [간성최씨정축보(杆城崔氏丁丑譜)]에 의하면 지순(之洵)의 손자 효민(孝敏)이 조선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과 호조 참의(戶曹參議)를 지내며 직간(直諫)을 하다가 함경북도 온성(穩城)으로 유배되어 그 곳에 살면서 뿌리를 내리게 되었고, 그의 손자 준량(俊良:일명 漢良)이 명종조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략장군(宣略將軍)으로 부사직(副司直)을 지내고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올라 내자시주부(內資寺主斧簿)를 역임한 후 함경남도 이원(利原) 지방에 살았으므로 후손들이 이원파조(利原派祖)로 받들고 있다고 한다.

 

[화순최씨] 시조는 《조선씨족통보》 등에 고려시대의 최언(崔堰)으로 되어 있으나 《화순최씨세보》에는 계대(系代)를 알 수 없는 언의 원조(遠祖) 세기(世基)로 되어 있다. 세계는 언에서부터 확실히 나와 있다. 그의 아들이 계신(繼臣)인데, 계신의 두 아들 영호(永浩)와 영유(永濡) 대에서 2파로 갈라졌다. 영호는 고려 충렬왕 때 좌우위 보승산원(左右衛保勝散員)을 지냈고, 영유는 공민왕 때 해주목사를 지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당대의 저명한 성리학자로 대사헌(大司憲)이 추증된 영경(永慶)이 있다.

 

[통천 최씨(通川崔氏)]의 시조는 고려 때 정의대부(正義大夫)로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중서좌상시(中書左常侍), 감찰어사(監察御使) 등을 역임한 최경현(崔景賢)이다. 그의 두 아들 사순(事舜)과 우순(遇舜)의 후대에서 증손 유(侑)가 문하평리(門下平理)를 지냈으며, 녹(祿)의 아들 운해(雲海)는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호군(護軍)으로 고우(高郵)의 싸움에서 전공을 세워 통천 최씨(通川崔氏)의 가문을 빛낸 대표적 인물이다. 운해는 아버지의 전공(戰功)으로 공민왕(恭愍王) 때 충용위 산원(忠勇衛散員)에 기용되었고 조전병마사(助戰兵馬使)에 올라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수차에 걸쳐 왜구를 격퇴한 뛰어난 장군이었다.

 그는 조선(朝鮮)이 개국하자,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책록되고 (門下評理)로 양광도 절제사(楊廣道節制使)가 되어 왜구를 격파하였고1396년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로서 경상도 병마도절제사(慶尙道兵馬都節制使)가 되어 영해에서 왜구를 격퇴하여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으며, 이성도 절제사(泥城道節制使)를 거쳐 참판승추부사(參判承樞府事)로서 사직했다. 운해의 아들 윤덕(潤德)은 어려서부터 활을 잘 쏘아 아버지와 함께 사냥을 다녔고 싸움터에 나가 전공(戰功)을 세워 부사직(副司直)이 되었다.

 1433년(세종15) 파저강(婆猪江)의 야인(野人) 이만주(李萬住)가 국경을 침범하여 백성을 괴롭히므로 왕명을 받들어 토벌하고 돌아오니, 세종이 매우 기뻐하며 친히 영접하여 노고를 위로한 후 우의정(右議政)에 특진시켰다. 그는 장군(將軍)으로 30여 년간 변경에서 위력을 떨쳐 벼슬이 좌의정(左議政)에까지 올랐으며 궤장( 杖)을 하사받아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한편 녹(祿)의 후손이며 자양(自陽)의 아들인 입( )은 조선(朝鮮)중기의 학자로서 문장에 능하고 학문이 뛰어났으며, 임진왜란 때 승문제조(承文提調)로 외교문서 작성의 제1인자였고, 여러차례 명(明)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문명(文名)을 날렸다. 특히 시(詩)와 글씨가 뛰어나 그의 문장과 차천로(車天輅)의 시(詩), 한호(韓濩)의 글씨는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불리웠다. 그 외 인물로는 윤덕(潤德)의 아들 숙손(淑孫)이 조선 때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지냈고, 숙손의 동생 광손(廣孫)은 군수(郡守)를, 윤덕의 동생 윤옥(潤玉)은 수찬관(修撰官)을 역임하여 명문(名門)인 통천 최씨(通川崔氏) 가문을 유명하게 했다.

 

[강화최씨] 강화 최씨(江華崔氏)의 시조(始祖) 최익후(崔益厚)는 경주 최씨(慶州崔氏) 시조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의 후손으로 고려 중엽에 사복시소경(司僕寺少卿),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지냈고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라 강화(江華)에서 터를 잡고 살았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강화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2세 효장(孝章)이 고려 때 도평리(都評理)를 지냈으며 3세 중의(重義)는 시중(侍中)을 지냈다. 중의(重義)의 동생 광의(光義)는 지도성사(知都省事)를 역임하였고, 광의(光義)의 아들 근(瑾:충숙공)은 1232년(고종 19) 상장군(上將軍)으로 이 통(李 通)의 난을 토평(討平)하고 수문각 대제학(修文閣大提學)을 거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올라 문하시중(門下侍中)과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였다.
 그의 아들 종수(宗秀)가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거쳐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를 지냈으며, 손자 유( )는 선부전서(選部典書), 수문각 대제학(修文閣大提學),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 예부상서 등을 역임했고,수진(秀眞)은 감찰어사(監察御史)를 거쳐 직제학(直提學)을 지냈다. 백전(伯全)의 손자이며 판사(判事)를 역임한 홍(泓)의 아들인 용소(龍蘇)는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냈고 1394년(태조 3)에는 회례사(回禮使)로 일본에 건너가 포로로 잡혀간 본국인(本國人) 570여 명을 데리고 왔으며, 1397년(태조 6)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를 거쳐 다음 해 강원도 도관찰사가 되고 1400년(태종 1) 도진무(都鎭撫)를 역임한 후 1403년(태종 3) 승녕부윤(承寧府尹)이 되었다.
 1413년(태종 13)에는 형조 판서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공조판서, 좌군 도총제(左軍都摠制)를 역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에 이르렀다.
 용소(龍蘇)의 동생 귀수(龜壽)는 목은(牧隱) 이 색(李 穡),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 길 재(吉 再)와 교유하며 벼슬이 사복경(司僕卿)에 이르렀는데 조선이 개국되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가 충신의 절개를 지켰다.
 한편 수진(秀眞)의 아들 항(恒)은 감찰어사(監察御史)를, 항의 아들 유간(有澗)은 개성소윤(開城少尹)을 지냈다.
 중종 때 예조 판서를 역임한 한문(漢文)은 귀수(龜壽)의 증손이며, 그의 아우 자윤(自潤)은 기묘사화의 원흉인 남 곤(南 袞) 일당의 비행을 논척(論斥)하고 양주 사천(楊洲沙川)으로 퇴거하여 살았다.
 귀수(龜壽)의 현손(玄孫) 수(琇)는 1590년(선조 23) 과거에 등제하여 부제학(副提學)을 거쳐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역임하고 개성유수(開城留守)를 거쳐 판윤(判尹)에 이르렀다.

 중종 때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순(淳)과 당대 성리학의 대가 기대승(奇大升)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선조 때 장령(掌令)을 지낸 시망(時望)은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하였고, 희립(希立)은 선조 때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의 휘하에서 공을 세우고 김천일(金千鎰), 최경회(崔慶會) 등과 함께 진주(晋州) 싸움에서 순절하여 강화 최씨의 가문을 영광되게 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용소(龍蘇)가 있다. 그는 고려시대에 공조전서(工曹典書) 등을 지냈고, 조선 태조 때에는 회례사(回禮使)로 일본에 건너가 포로로 잡혀간 본국인 570명을 데리고 나왔으며,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官)을 거쳐 명(明)나라에 사신으로 들어가 태조로부터 ‘관서부자(關西夫子)’의 칭호를 받았다. 그 밖에 중종 때 대사간을 지낸 순(淳), 선조 때의 임진왜란에 전공을 세운 시성(時聖) ·희립(希立) 등이 있다.

 

[계림 최씨(鷄林崔氏)]의 시조(始祖)는 본래 경주인(慶州人)으로 신라 때 계림부 태수(鷄林府太守)를 지낸 최윤순(崔允順)이며, 그의 후손들이 경주 최씨(慶州崔氏)에서 분적(分籍)하여 그를 시조(始祖)로 삼고 계림(鷄林)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를 살펴보면 참의(參議)를 지낸 강(江)의 일파(一派)와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진 세준(世俊)의 일파(一派)가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산 최씨(牙山崔氏)]의 시조(始祖) 최예립(崔禮立)은 판이부사(判吏部事)를 역임한 해주 최씨(海州崔氏) 최 온(崔 溫)의 21세손으로 조선조에서 사과(司果)를 역임했고 선대(先代)부터 세거(世居)해 온 아산(牙山)에서 정주(定州) 지방으로 이주하면서 선조(先祖)의 고향인 아산(牙山)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그의 손자 석창(碩昌)은 조선에서 충익위(忠翊衛)를 지냈고, 석창의 아들 극준(克峻)은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했다.

 

[죽산 최씨(竹山崔氏)]는 소벌도리(蘇伐都利)의 원손(遠孫)이 죽산군(竹山君)에 봉해졌으므로 본관(本貫)을 죽산(竹山)으로 하여 계대(繼代)를 이어왔으나, 중간계보(中間系譜)가 병화(兵火)로 실전(失傳)되어 소목(昭穆)을 밝힐 수 없으므로 죽산군(竹山君)의 원손(遠孫)인 일죽공(一竹公) 최효운(崔孝雲)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그는 조선조에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 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지내고 홍문관대제학(弘文?大提學).지경연사(知經筵事)에 이르렀으며,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일세조 효운(孝雲)의 아들 세형(世亨)이 부총관(副摠管)을 지냈고, 그의 아들 충좌(忠佐)는 조선 세조(世祖)의 맏아들 덕원군(德源君) 서(曙)의 사위가 되었다.
 충좌(忠佐)의 아들 영( )은 면천 군수(沔川郡守)를 지냈고, 영의 아들 임(琳)은 1636년(인조14) 병자호란 때 안방준(安邦俊)과 함께 창의(倡義)하여 전쟁에 공(功)을 세우고 사재감직장(司宰監直長)을 지냈으며, 개천 군수(价川郡守)를 역임한 침(琛)은 형인 임(琳)과 함께 삼정사(三亭祠)에 제향(祭享)되었다.
 그외 많은 후손들이 관직에 등용되어 가문을 더욱 빛나게 하였다.

 

[한남 최씨(漢南崔氏)]는 고려조에서 합문지후(閤門祗候)를 지낸 최홍연(崔洪衍)을 시조(始祖)로 하며, 그의 후손 계방(繼芳)이 고려조에 수사공(守司空), 상서 우복야(尙書右僕射), 참지정사(參知政事), 판삼사사(判三司事) 등을 역임하였다. 계방의 아들 함( :자는 자화, 시호는 문간)은 예종조(睿宗朝)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1125년(인조3) 우정언(右正言), 지제고(知制誥)가 되었고, 이듬해 이자겸(李資謙)의 난(亂)이 일어나자 국새(國璽)를 가지고 행재소(行在所)까지 왕을 시종하였으며 예부 시랑(禮部侍郞), 한림시독학사(翰林侍讀學士)로 만수절사(萬壽節使)가 되어 금(金)나라에 다녀왔다. 그후 병부 상서(兵部尙書), 판삼사사(判三司事)를 거쳐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를 지냈으며, 문장(文章)에도 능하였다. 그후의 세계(世系)에 대하여서는 자료가 부족하여 상고(詳考)할 수 없다.

 

[고부 최씨(古阜崔氏)]는 경주 최씨(慶州崔氏)의 시조(始祖)인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의 후손으로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를 역임하고 평북 구성(平北龜城)에 정착한 최 척(崔 陟)을 시조(始祖)로 하고 선조(先祖)들의 전세거지(前世居地)인 고부(古阜)를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후손 용인(龍仁)은 조선에서 참의(參議)를 역임하였으며, 치민(致敏)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또한 치항(致恒)은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고, 종수(鐘秀)는 감찰(監察)을, 태덕(泰德)은 의관(議官)을 역임했다. 그외 희철(喜哲:오위장), 의걸(義杰:별장), 득룡(得龍:부사과) 등이 유명했고, 종익(鐘翼)은 주부(主簿)를 역임하여 장사랑(將士郞)에 오른 호정(虎精)과 함께 가문을 대표했다.

 

[양주 최씨(楊州崔氏)]의 시조 최 억(崔 億)은 득성조(得姓祖) 소벌도리(蘇伐都利)의 후손으로 고려 때 학문과 덕행으로 명성이 높아 태사(太師) 에 천거(薦擧)되었고, 1353년(공민왕2)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역임하여 양주군(楊州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억(億)을 시조(始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양주(楊州)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그후 문경공(文敬公) 억(億)의 아들 연(淵)이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했고, 손자 숙(淑)은 병조전서(兵曹典書)를 지냈으며, 증손  경운(慶雲)은 공조전서(工曹典書), 경운의 아들 항(沆)은 집의(執義)를 역임하였다.

대표적인 인물인 정안(井安)은 1433년(세종15) 우정언(右 正言)을 거쳐 1437년(세종19) 이 천(李  )의 종사관으로 함경도(咸鏡道)에 침투한 야인(野人) 정벌에 공을 세웠으며 그후 벼슬이 부사직(副司直)에 이르렀다.
정안의 동생 정연(井涓)은 군수(郡守)를 지냈으며 정연의 아들 결(潔)은 감찰(監察)을 역임하였다. 혼(渾)의 아들 홍도(弘渡) 는 1539년(중종34)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1545년(인종1) 저작(著作)을 거쳐 1564년(명종19) 부정(副正)이 되었다가 동래부사 (東萊府使)를 역임한 후 부제학(副提學)에 이르렀다.

 홍도(弘渡)의 동생 홍개(弘漑)는 임진왜란 때 순절(殉節)하여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추증되었다.

 후손 정걸(挺傑)은 1636년(인조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왕을 호 종(扈從) 하였으며 적군을 쳐부수는 데 용맹이 뛰어나 많은 공훈을 세웠다.
 그외 완(浣)은 조선 때 감찰(監察)을 역임했으며 정해(挺海)는 절제사(절節制使)를, 극태(克泰)는 군수(郡守)를, 선태(先泰)는 부사(府使)를 지내 가문을 빛냈다.

 

[직산 최씨(稷山崔氏)]는 최씨(崔氏)의 득성조(得姓祖) 소벌도리(蘇伐都利)의 후손인 최홍재(崔弘宰)를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본래 장군(將軍)의 아들로 태어난 홍재(弘宰)는 기(氣)를 숭상하고 말 달리기를 좋아하여 명장(名將) 윤 관(尹 瓘)을 따라 여진을 정벌하여 공을 세워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를 역임한 후 서북면 병마사(西北面兵馬使)가 되어 포주(抱州)를 수복하였다. 그후 의주성(義州城)을 쌓는데 공을 세워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형부상서(形部尙書)#판삼사(判三司)를 거쳐 참지정사(參知政事)#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등을 역임하고, 한때 순천(順天)으로 유배되었다가 판리부사(判吏部事)로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책록되고 수사공 우복야(守司空右僕射)#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직산(稷山)에 토착(土着)하여 세거하면서 본관(本貫)을 직산(稷山)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직산 최씨(稷山崔氏)의 가문을 빛낸 인물 중 홍재의 아들 서(瑞)는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냈고, 온(溫)은 의종(毅宗) 초에 판합문사(判閤門事)에 올라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1170년(의종24) 판중근 병마사#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 문본(文本)은 음보(蔭補)로 산정도감판관(刪定都監判官)이 되었고 1275년(충렬왕1) 승선(承宣)에 승진 후에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이르러 명망높은 가문을 더욱 빛나게 하였다.

 

[해주 최씨(海主崔氏)]의 시조(始祖)는 해주(海州)의 목민관(牧民官)으로 선정을 베풀었으며 또한 문명(文名)이 높았꼬 뒤에 판이부사(判吏部事)를 역임한 최 온(崔 溫)이다. 선조(先祖)들이 일찍이 대령군(大寧郡) 수양산(首陽山)밑에서 누대(累代)에 걸쳐 세거(世居)하였으므로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해주(海州)로 삼고 문호(文戶)를 열었다. 대표적인 인물은 황해도 대령군에서 시골 향리인 온(溫)의 아들로 태어난 동방유학(東方儒學)의 비조이며 해동공자(海東孔子)로 일컬어지는 충(沖)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고 1005년(목종8) 20세의 나이로 갑과(甲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우습유(右拾遺)를 거쳐 1013년(현종4) 국사수찬관(國史修撰官)이 되어 태조(太組)에서 목종(穆宗)까지의 실록편찬(實錄編撰)에 참여하였다.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 형부상서(刑部尙書), 중추사(中樞使)를 거쳐 1047년 (문종1)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어 법률관들에게 율령(律令)을 가르침으로서 고려 형법(刑法)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여러 관직을 역임하면서 농번기(農繁期)의 공역 금지와 국가재정 낭비를 금하도록 상소하여 이를 실행케 했다. 그후 동여진(東女眞)의 동태를 파악, 국방경계의 강경책을 쓰도록 하는 등 많은 업적을 세워 1053년(문종 7) 궤장( 杖)을 하사받았고 추충찬도협모동덕치리공신(推忠贊道協謀同德治理功臣)으로 개부의동삼사, 수태사 겸 문하시중, 상주국 치사(上柱國致仕)가 되었다.
 1055년(문종 9) 내사령(內史令)으로 치사(致仕)한 뒤 사숙을 열어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으며 그의 제자들은 문헌공도(文憲公徒)라 불리웠다.
 문장(文章)과 글씨에 능하여 해동공자(海東孔子)로 추앙되었으며 그가 개경 송악산 기슭에 문을 연구재학당(九齋學當)은 우리나라 사학(私學)의 효시가 되었다.
 학문이 뛰어났고 굳건한 성품의 소유자인 충은 태어나 벼슬에서 물러날 때까지 4대의 왕조에 걸쳐 50여 년간 권력과 유학(儒學)의 중심인물로서 나라의 큰 일에는 모두 자문하여 고려의 국정(國政)을 좌우했다.
 1068년(문종 22) 9월에 그가 죽으니 왕은 태의감(太醫監) 이 염(李 鹽)에게 조서를 가지고 가게 하여 조위(弔慰)하고 시호(諡號)를 문헌(文憲)으로 내려주며 정종(靖宗)의 묘정에 배향케 하였다.
 뒤에 선종(宣宗)의 묘정에 배향하여 해주(海州)의 문헌서원(文憲書院)에 제향하였다.

저서에는 [최문헌공 유고(崔文憲公遺稿)]가 있고 필적으로는 개성(開城) 귀법사 제영석각(歸法寺題詠石刻), 거돈사 원공국사승묘탑비문(居頓寺圓空國師勝妙塔碑文), 직산(稷山) 홍경사 개창비문(弘慶寺開創碑文) 등이 있다.
 해동공자(海東孔子) 충(沖)의 아들 유선(惟善)과 유길(惟吉)도 훌륭한 업적을 남겼는데, 아버지가 유훈(遺訓)으로 남긴 계이자시(戒二子詩)를 받들어 명문(名文)의 전통을 이었고 이 유훈은 지금까지 해주 최씨(海州崔氏)들이 정신적 규범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명문 유학자(儒學者)의 가문에서 태어난 유선(惟善)은 학문이 깊고 사리에 밝았으며 여러번 지공거(知貢擧)가 되었다.
 1030년(헌종21)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가 1047년(문종 1) 어사잡단(御史雜端)을 거쳐 형부 상서(刑部尙書)를 역임하였다.
 또한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로 있을 때는 공부 시랑(工部侍郞) 이득로(李得路)와 함께 조상 회장사(弔喪會葬使)가 되어 금나라에 다녀왔다. 1061년(문종 15) 판상서 예부사(判尙書禮部事)를 거쳐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가 되어 추충찬화 강정수제공신(樞忠贊化康靖綬濟功臣)의 호를 받은 후 여러 관직을 거쳐 문하시랑(門下侍郞)에 이르렀다. 수태위(守太慰), 중서령(中書令)에 추증되었다. 유선(惟善)의 동생 유길(惟吉)은 호부 상서(戶部尙書), 태자빈객(太子賓客),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를 거쳐 1077년(문종31) 수사공(守司空) 섭상서령(攝尙書令)에 올랐다. 사제(思齊)는 충(沖)의 손자이고 유선(惟善)의 아들로 1054년(문종 8) 문과에 급제하고 1081년(문종 35) 예부 상서(禮部尙書)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송나라에 다녀와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중추원사(中樞院使),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역임, 1090년(선종 7) 수사공(守司空), 판리부사, 상주국(上柱國)에 이르렀다. 유길(惟吉)의 아들 사량(思諒)은 18세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공부 시랑(工部侍郞)으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송나라에 다녀오고 1084년(선종 1) 동지충추원사로 지공거(知貢擧)를 겸했다.
1086년 (선종 3) 중추원사(中樞院使)를 거쳐 여러 관직에 올랐고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냈다. 유길의 둘째 아들인 사추(思諏)는 문종(文宗) 때 문과에 급제, 내시(內侍)가 되고 전중소감(殿中少監), 지상서호부사를 거쳐 서경부유수(西京副留守)를 역임하고 1094년 (현종즉위) 동지충추원사, 좌산기상시를 비롯한 여러 관직에 종사하다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승진하여 보정공신(輔正功臣)이 되었고, 예종(睿宗) 때 중서령(中書令)으로 치사(致仕)하였으며 뒤에 추성봉국공신(推誠奉國功臣)에대령군개국후(大寧郡開國侯)가 되었다.
 정승이 되어서는 대체(大體)를 가지기에 힘쓰고 감히 경솔하게 행동함이 없이 예법(禮法)을 지켰고, 그는 내외 관직을 역임하여 가는 곳마다 명성과 공적을 많이 남겼다.
 1115년(예종 10) 그가 죽으니 왕이 연등회에 나가 풍악을 보다가 부고를 듣고는 슬퍼하며 부의(賻儀)를 보냈다. 사제(思齊)의 아들 약( )은 1116년(예종 11) 지제고(知制誥)로서 정사(政事)를 돌보지 않고 대동강(大洞江)에서 연유(宴遊)만 즐기는 예종에게 간(諫)하여 중지케 하였으나, 후에 이 일로 무고를 받아 춘주 부사(春州府使)로 좌천되었다가 예부상서(禮部商書),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이르렀다. 사추(思諏)의 아들 원(源)은 고려 때 우복야(右僕射)를 지냈고, 관(灌)은 1129년(인종 7) 병부낭중(兵部郎中)으로 금(金)나라에 다녀와 1141년(인종 19)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使)가 되었고, 1145년(인종 23) 추밀원사(樞密院使), 판삼사사(判三司事), 상서우복야(尙書右僕야)를 거쳐 의종(毅宗) 초에 평장사(平章事)에 올랐다.  주(湊)는 1137년(인종 15) 좌산기상시(左散騎尙侍), 추밀원 부사(樞密院府事), 태자빈객(太子賓客), 병부 상서, 지추밀원사,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역임한 후 1140년(인종 18) 판형부사(判刑部事)로 있으며 김부식(金富軾) 등과 함께 시폐(時弊)의 시정책을 상소했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그후 평장사(平章事), 태자태부를 거쳐 1145년(인종 23)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올랐다.
 윤의(允儀)는 충(庶)의 5대손이고 약( )의 아들로 학문에 뛰어났고 문장에 능했으며, 1128년(인종 6) 문과에 급제, 1133년(인종 11) 전중내급사, 태학박사(太學博士)를 거쳐 우정언 지제고(右正言知制誥)가 되었고, 1136년(인종 14) 조제사(弔祭使)로 금나라에 다녀왔다.
그외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고 1162년(의종 16)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 平章事),판이부사(判吏部事)가 되었다. 그의 저서 상정고금예문(詳定古今禮文)은 고종 때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金屬活子本)으로 출판되었으나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윤의(允儀)의 손자이며 약( )의 증손 자(滋)는 강종(康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상주사록(尙州司錄)을 거쳐 학유(學諭)로 있을 때 이규보(李奎報)에게 문재(文才)가 인정되어 그의 추천으로 문한(文翰)을 맡았다.
 급전도감녹사(給田都監錄事)로 민첩 근면하게 일을 하여 집정사 최우(崔瑀)의 인정을 받았으며 고종(高宗) 때 정언(正言)을 거쳐 상주 목사(尙州牧使)가 되어 선정(善政)을 베풀고 전중소감, 보문각 대제가 되었다. 1256년(고종 43) 중서평장사(中書平章事)를 역임하고 1259년(고종 46)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로 치사(致仕)했다. 시문(時文)에 뛰어나 당대에 크게 문명(文名)을 떨쳤고 저서(著書)로는 [최문충공가집]·[보한집]·[삼도적] 등이 있다. 사추(思諏)의 손자 홍윤(洪胤)은 고려의 이름있는 정치가로 희종(熙宗)초에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를 지냈고, 1210년(희종 6) 전선(銓選)을 관장한 후 1212년(강종 1) 정당문학(政當文學)을 역임하고 고종 때에 평장사(平章事)로 치사(致仕)했다. 고려조에 공헌한 해주 최씨(海州崔氏) 일가를 더욱 빛낸 인물은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자(滋)의 셋째 아들로 출생한 유엄(有 )이다.
 그는 성품이 담박하고 겸손하여 명예를 탐하지 않았으며 오랫동안 벼슬을 하면서도 10년 동안이나 지위를 옮기지 않으니 당시의 여론은 오히려 이를 애석하게 여겼다.
 충렬왕이 그 명성을 일찍부터 들었다가 1274년에 즉위하자 감찰잡단(監察雜端)을 제수하였으며, 이로부터 4대(四代)의 왕조에 걸쳐 벼슬하여 국가의 원로가 되었다. 원나라에서 고려의 노비법을 개정하고자 할 때 이를 반대하여 중지시킨 공으로 공신에 책록되었고, 심양왕(瀋陽王)이 충숙왕(忠肅王)의 폐위를 책동하다 실패한 뒤 고려를 원나라의 내지(內地)로 편입시키도록 책동하자 85세의 노령으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연경(燕京)에 가서 이들의 음모를 분쇄하고 왔다.
 그외에 해주최씨(海主崔氏) 가문을 빛낸 후손들 중에서 춘명(椿命)과 황(滉)을 빼놓을 수 없다. 춘명(椿命)은 1231년(고종 18) 자주부사(慈州副使)로서 몽고군에 포위된 성(城)을 고수하며 용감하게 싸웠고 후에 일등공신에 책록되고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事)에 발탁되었으며, 황(滉)은 1579년(선조12) 함경도 암행어사로 나가 지방의 기한(饑寒) 구제대책 8조를 상소했으며 좌찬성(左贊成) 겸 세자이사(世子貳師)를 지냈고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조선시대에 뛰어난 인물은 세종 때 문신이며 학자로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된 만리(萬理)를 꼽을 수있다. 당시에 바른 말 잘 하기로 이름이 높았으며 1419년(세종 1) 생원으로 증광문과에 급제, 홍문관(弘文館)에 기용되어 집현전 박사(集賢殿博士)를 겸임했다.
 1437년(세종 19) 집현전 직제학을 거쳐 이듬해 부제학(副提學)에 승진,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하고 부제학(副提學)이 되어 세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1444년(세종 26) 훈민정음이 창제되자 6조목의 이유를 들어 이를 반대했으며, 환관(宦官)의 사모(紗帽) 착용이 고제(古制)에 어긋남을 지적하여 시정토록 하였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해주 최씨는 조선에 와서도 명문의 대(代)를 이어 경회(慶會)가 1567년(선조즉위) 진사(進士)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올라 영해 군수(寧海郡守) 등을 지내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의병을 규합하여 전라우도 의병장으로 금산(錦山), 무주(茂朱), 창원(昌原), 성주(星州) 등지에서 왜병을 격퇴하고 전공을 세워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승진한 후 진주성(晉州) 싸움에 참가,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등과 함께 밤낮 9일 동안 싸우다가 전사한 명장이며,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어 가문을 빛냈다.  

경창(慶昌)은 1568년 (선조 1) 증광문과에 급제하고 대동도찰방을 거쳐 정언(正言)이 되었고, 시(詩)와 글씨에 뛰어났으며 피리를 잘 불어 영암(靈巖) 해변에 살 때 외구(倭寇)를 만났으나 퉁소를 구슬피 불자 왜구들이 향수에 젖어 흩어져 갔으므로 위기를 면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문장과 학문에 능해 이 이(李珥), 송익필(宋翼弼) 등과 함께 8문장으로 일컬어졌고 당시(唐詩)에 뛰어나 백광훈(白光勳), 이 달(李 達)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불리웠다.
 규서(奎瑞)는 1680년(숙종 6)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지평(持平)을 시작으로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1699년(숙종 25) 대사헌, 대제학(大提學), 형조와 이조 판서를 지냈으며 1721년(경종 1) 소론(小論)의 영수(領袖)로서 우의정이 되었고 1723년(경종 3) 영의정에 올라 치사(致仕)하고 1728년(영조4) 이인좌(李麟佐)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서울로 올라와 고변(告變)하므로 난을 토평케 하여 왕으로부터 일사부정(一絲扶鼎)이라는 서찰을 받았으며 영조(英祖)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민족의 진정한 역군으로 일제에 항거하여 조국독립을 위하여 몸바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사람인 인(麟)은 어릴 때부터 두뇌가 명철(明哲)하여 1896년 19세로 함남감찰부 집사(執事)가 되었고 25세에 활빈당(活貧堂)과 일심회(一心會)에 가입했다.
 1919년 최남선(崔南善), 현상윤(玄相允) 등과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에 서명할 지도자 선출을 밀의하고 초안을 작성, 최남선으로 하여금 완성케 하였으며 후에 민족대표 33인과 함께 대한독립(大韓獨立)을 선언하였던 해주 최씨의 자랑스런 인물(人物)이다.

 

[영천최씨] 고려 중기의 공신 최한(崔漢)을 시조로 한다. 한은 전주최씨의 시조 균의 9대손으로, 전주최씨에서 분적한 분파이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조선 세종 때 서예가로 유명한 흥효(興孝)가 있다. 그는 홍문관 제학을 지냈으며 예서와 초서를 잘 썼다. 흥효의 후손에서 영천최씨는 12파로 갈린다. 고려 말기의 유명한 인물로는 발명가 무선(茂宣)이 있는데, 그는 원(元)나라의 화약 기술자로부터 기술을 배워 그 제조법을 익혔으며 조정에 건의, 화통도감(火 都監)을 설치케 하고 그 책임자가 되어 화포 ·화전 ·화통 등의 화기를 만들어 때마침 쳐들어 온 왜구의 선박 500여 척을 전멸시켰다. 1401년(태종 1) 조선의 화기 보유량은 화약 4근 4냥, 화기 200여 병(柄)이던 것을 그가 관장한 뒤 19년(세종 1)에는 화약 6,900여 근, 화기 1만 3500여 병, 화포발사군 1만여 명이라는 놀라운 숫자로 발전시켰다.

 

[곡강 최씨(曲江崔氏)]는 경주 최씨에서 분적(分籍)한 전주 최씨(全州崔氏) 시조(始祖) 최 균(崔 均)의 11세손 최 호(崔 湖)가 고려 때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을 지내고 삼중대광 문하시중(三重大匡門下侍中)으로 삼한벽상공신(三韓璧上功臣)에 녹선되어 곡강 부원군(曲江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始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곡강(曲江)으로 하였으나 그후 누대(累代)가 실전(失傳)되어 후손 여실(汝實)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어오고 있다. 인물로는 후손 기대(基大)가 조선조(朝鮮朝)에 진사(進士)를 지냈다.

 

[양천 최씨(陽川崔氏)]는 경주 최씨(慶州崔氏)에서 분적한 전주 최씨(全州崔氏) 시조 최순작(崔純爵)을 파조(派祖)로 하여, 고려 초에 봉선대부(奉善大夫), 밀직부사 (密直副使)를 지냈고 공을 세워 양천백(陽川伯)에 봉해진 최 원(崔 遠)을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양천(陽川)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그후 원(遠)의 아들 관(灌)이 고려 때 만호(萬戶)에 올랐고 운(澐)이 소윤(少尹)을 지냈으며 조선 때 부제학(副提學)을 지낸 숙정(淑貞)은 문과에 급제하고 중시(重視)에 올라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여 호당(湖堂)에 녹선되었고 예문관 부교리(藝文館副校理)를 거쳐 1470년(성종1) 승문원 교리(承文院校理)로서 춘추관 기주관(春秋 館記注官)을 겸하여 [세조실록(世祖實錄)], [예종실록(睿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했고 부제학(副提學)에 이르러 왕명(王命)으로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를 편찬했다. 숙정의 아우 숙경(淑卿)도 성종(成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부사(府使)를 역임했다.
 그 밖의 인물로 병마절도사(兵馬節度事)를 지낸 종호(終浩), 부사(府事)를 역임한 연(淵), 군수(郡守) 택(澤) 등이 있다.

 

[진산 최씨(珍山崔氏)]의 시조(始祖) 최 개(崔 漑)는 종한(宗漢)의 아들로 1526년(중종21)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고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를 거쳐 부사(府使)를 지냈다.
 그후 그의 후손(後孫)들이 그를 시조(始祖)로 삼고 본관(本貫)을 진산(珍山)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화순 최씨(和順崔氏)]는 최씨(崔氏)의 득성조(得姓祖)인 소벌도리(蘇伐都利)의 후손으로 고려 중엽 평장사(平章事)를 지냈고 오산(烏山:화순 별호) 군(郡)에 봉해진 최세기(崔世基)를 시조(始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화순(和順)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었다.
 그러나 상계(上系)가 실전되어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을 거쳐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후손 최 계(崔 桂)를 일세조로 하여 세계(世系)를 계승하고 있다. 가문의 인물을 보면 언(堰)의 아들 계신(繼臣)이 고려 때 봉상대부(奉常大夫)를 지냈으며 계신의 두 아들 중 영호(永浩)가 충렬왕(忠烈王) 때 보승산원(保勝散員)을 지냈고, 영유(永濡:충절공)는 1361년(공민왕10) 해주 목사(海州牧使)로서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으로 포위된 수양성(首陽城)을 끝까지 지키다가 적의공격으로 성(城)이 함락되자, 혈서(血書)를 남기고 귀중한 관인(官印)을 안고 깊은 못에 투신 자결했다.
 그 후 못가에 충절비(忠節碑)가 세워지고 못 이름을 투인담(投印潭)이라 했다.
영유의 아들 원지(元之)는 조선이 개국되자 금산(金山)의 절에 은거(隱居)했는데, 뒤에 절이 없어지고 마을이 생기니 하노리(賀老里)라 불렀다. 원지의 큰 아들 자해(自海)는 밀양 부사(密陽府使)를 지냈고, 자해의 아들 선복(善復)은 경주 부윤(慶州府尹)를 역임했다. 이 외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한 선문(善門)이 유명한데, 그는 일찍이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금릉(金陵)에서 학문에 전심하여 김종직(金宗直) 등의 존경을 받았다.
 그 후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端宗) 때 정권을 장악하자 좌찬성(左贊成)으로 기용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중홍(重洪)은 1495년(연산군1)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사관(史官)이 되었고, 1504년(연산군10)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예조 정랑(禮曹正郞)으로 삭직당했으나 1506년(중종1)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복직되어 형조 참의(形曹參議)를 지낸 후, 판결사, 병조 참의, 전주 부윤(全州府尹) 등을 거쳐 1524년(중종19) 형조 참판(刑曹參判)으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학자(學者) 흥림(興霖)은 당시 학문의 대가(大家)인 성제원(成悌元), 조 식(調 植) 등과 교유하며 보은(報恩)의 금적산(金積山)에 은거하여 성리학(性理學)을 연구했다.
 화순 최씨(和順崔氏)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 명망이 높았던 영경(永慶)은, 일찍이 조 식(曺 植)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여러 벼슬에 천거되었으나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가 1584년(선조17) 교정청 낭관(校正廳郎官)이 되어 [경서훈해(經書訓解)]의 교정(校正)에 참여한 후 낙향하여 학문에 전념했다.  1589년(선조22)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 때 그 배후자로 무고를 받아 투옥되어 국문(鞫問)을 받다가 옥사했다.  
 그는 당대의 저명한 성리학자로서 전정경의(專精敬義)를 학문의 태도로 삼았고, 학문이란 구설(口舌)과 문장(文章)에서 떠나 실행활에 적응시켜 실천해야 된다고 주장했으며 특히 기절(氣節)을 숭상했다. 조선 때 참판(參判)을 지낸 일(逸)은 음보(蔭補)로 벼슬에 올라 교리(校理)를 거쳐 1653년(효종4) 홍천 현감(洪川縣監)에 올랐고, 1660년(선종1) 헌납(獻納)으로 [효종실록(孝宗實錄)] 편찬에 참여했으며 장성부사(長城府使), 장령(掌令), 집의(執義)를 거쳐 뒤에 병조와 형조 참판(刑曹參判)을 역임하고 현감을 지낸 후, 주하(柱夏) 등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광주 최씨(廣州崔氏)]는 경주 최씨(慶州崔氏)에서 분적(分籍)한 계통(系統)으로 조선 때 장사랑(將仕郞)으로 훈도(訓導)를 역임하고 평안도 안주(平安道安州)에서 정착세거(定着世居)한 최득보(崔得寶)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그의 전세거지(前世居地)인 광주(廣州)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득보의 아들 덕강(德江)은 조선조(朝鮮朝)에서 통덕랑(通德郞)에 오르고 참의(參議)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손자 진산(進山)과 인달(仁達)은 각각 참의(參議)와 군수(郡守)를 지냈다. 그외 진산의 아들 해옥(海玉)이 병조 참의(兵曹參議)를 지냈으며 손자 한웅(漢雄)이 예조 참의(禮曹參議)를 지냈다.

 

[연풍 최씨(延豊崔氏)] 경주 최씨(慶州崔氏)에서 분적(分籍)한 것으로 전해지나 문헌이 실전(失傳)되어 상계(上系)는 상고(詳考)할 수 없다.
 시조(始祖) 최지강(崔至崗)은 고려 때 진사(進士)로 안화(安化:연풍 별호)에 세거(世居)하였으므로 후손들이 관향(貫鄕)을 연풍(延豊)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후손으로는 윤(潤), 응방(應邦), 여두가 각각 참봉(參奉)을 역임했으며, 의사(義士)로 명성을 날린 이룡(二龍)과 삼룡(三龍)은 응방의 아들이다. 그 외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지낸 계준(繼峻)과 효자 숙(淑)이 이름을 날렸다.

 

[청송 최씨(珍山崔氏)]의 시조(始祖)는 해주 최씨(海州崔氏) 시조(始祖) 최 온(崔 溫)의 13세손 최 경(崔 京)이다.
 세보(世譜)에 의하면 그는 조선조에서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지냈고, 삭주(朔州)에서 황해도 청송(靑松)으로 이거(移居) 하였는데, 후손들이 그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해주 최씨(海州崔氏)에서 분적(分籍)하여 청송(靑松)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을 대표하는 인물로 세걸(世傑)은 조선조에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추증되었고, 세걸의 아들 팽령(彭嶺)은 참의(參議)를 지냈으며, 손자 인방(仁邦)은 중추부사(中樞副使)를 역임하여 그의 네 아들과 함께 나라에 충성하였다.
 그 외 효자(孝子)로 유명한 덕항(德恒)#종집(宗 )이 가문을 빛낸 자랑스런 후손들이며, 응천(應天)은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여 가문을 더욱 유명하게 했다.

 

[황주 최씨(黃州崔氏)]는 소벌도리(蘇伐都利)의 후손으로 전주 최씨(全州崔氏)에서 분적(分籍)하였다고 하나 확증할 근거가 없다.
 황주 최씨(黃州崔氏)의 시조(始祖) 최남혁(崔南赫)은 1424년(세종6)에 출생하여 성종(成宗) 때 문과에 급제하고 황주 목사(黃州牧使)로 재임 중 억울한 누명을 쓰고 의주(義州)로 유배 당했다가 죽은 후에 누명이 벗겨져 죄를 사면함과 동시에 좌의정(左議政)으로 추증되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그를 시조로 하고 그의 재임지였던 황주(黃州)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가문의 인물로는 중식(重湜)이 1826년(순조26)에 지방과(地方科)에 급제하고 충신(忠臣)의 후손이라 하여 병조 좌랑(兵曹佐郞)에 임명되었다가 돈령도정(敦寧都正)에 이르렀다. 후손 의산(義山)은 고향인 의주(義州)에서 3.1운동을 주도하고 독립운동 자금조달과 동지 규합에 힘썼으며, 석순(碩淳)은 항일투사로 1919년 만주(滿洲)로 건너가 대한독립단에 가입하여 임시정부(臨時政府) 휘하의 육군참의부(陸軍參議府) 제2중대장, 참의장(參議長)을 지내면서 항일 무력항쟁을 벌였으며, 1925년 일본군(日本軍) 공격을 위한 작전계획 회의중 수비대의 기습을 받아 응전 끝에 전사했다.
 또한 군인(軍人)이며 외교관(外交官)으로 이름난 덕신(德新)은 1914년 평북 의주(平北義州)에서 출생하여 1946년 육사(陸士) 3기 특별반을 졸업하고 1949년 미국육군종합학교를 마친 후 주월공사, 외무부장관, 유엔총회 수석 대표, 서독대사 등을 역임하고 1967년 천도교 교령을 거쳐 1971년 종교 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나주 최씨(羅州崔氏)]는 동성동본(同姓同本)이면서도 계보(系譜)를 달리하는 두 계통이 있다. 첫째 계통은 탐진 최씨(耽津崔氏) 계파(系派)의 중조(中祖)로 조선 세종(世宗) 때 진의부위(進義副尉)에 올랐던 최정원(崔井元)을 시조(始祖)로 받드는 청양파(靑陽派)이며, 다른 한 계통은 조선 명종(明宗) 때 진사(進士)였던 최 택(崔 澤)을 시조로 하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른 최논금(崔論金)을 일세조(一世祖)로 하는 보령파(保寧派)이다그러나 [탐진최씨세보(耽津崔氏世譜)]에 의하면 최정원(崔井元)은 탐진 최씨 강진파(康津派)의 중조인 최준량(崔浚良) 계(系)에 합보(合譜)된 것으로 나타나 있고,[나주최씨세보(羅州崔氏世譜)]에는 고양파(高陽派) 정원(井元)의 손자 금남공(錦南公) 부(溥)가 나주(羅州)출신으로 성종(成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후 교리(校理)에 올라 [동국통감(東國通鑑)]과[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의 편찬에 참여 했고, 왕명(王命)으로 [표해록(漂海錄)]을 저술하여 문명(文名)을 떨쳤으므로 후손들이 충남 보령(忠南保寧)과 청양(靑陽)등지에 세거(世居)하면서 금남공(錦南公) 부(溥)의 출신지인 나주(羅州)를 본관(本官)으로 삼아 분적(分籍)하였다고 한다.

 역사상 두드러진 인물로는 인조(仁祖) 때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역임했던 용운(龍雲)과 효종조(孝宗朝)에 형조 참의(形曹參議)를 지낸 정순(廷洵)이 유명했으며, 숙종(肅宗) 때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역임했던 여익(汝翼)은 중추부사(中樞府事)에 오른 종(淙)의 손자 세전(世田:숙종 때 공조 참의를 지냄), 영조(英祖) 때의 군자감정(軍資監正) 태직(泰稙),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의현 (毅鉉) 등과 함께 이름을 떨쳤고, 고종(高宗) 때 호조 참의(戶曹參議)를 지낸 사권(事權)은 호조 참판 정달(正達)과 더불어 나주 최씨의 전통을 이었다.  

 

[영천 최씨(永川崔氏)] 시조(始祖) 최 한(崔 漢)은 경주 최씨(慶州崔氏)에서 분적(分籍)한 최 균(崔 均:완산 부원군 전주 최씨 일파)의 9세손 최 식(崔 寔)의 둘째 아들이다.
 한(漢)은 고려 때 예종(睿宗)과 명종(明宗) 양대에 걸쳐 벼슬을 하면서 공을 세워 연산(燃山:영천의 별호)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始祖)로 하고 관향(貫鄕)을 영천(永川)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역대 인물로는 시조 한(漢)의 아들 완(玩)이 문과에 역대 인물로는 시조 한(漢)의 아들 완(玩)이 문과에 장원하여 상찰사(上察使)를 지냈고 그의 동생 집은 좌정승(左政丞)을 지냈다.
 완玩)의 아들 상례(尙禮)는 절도사를, 증손 윤기(允琪)는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했다.
그 외 무선(茂宣)은 광흥창사(廣興倉使) 동순(東洵)의 아들로, 왜구가 창궐하자 화약제조법의 필요성을 느끼고 원나라 사람 이 원(李 元)에게 그 제조법을 배웠다. 1377년(우왕3) 화통도감(火 都監)을 설치하여 화약을 만들고 각종 화기(火器)를 제조하여 1380년(우왕6) 왜구가 대거 침입했을 때 부원수(副元帥)로서 진포(鎭浦:금강 하구)에서 화포, 화통 등을 처음으로 사용하여 왜선 500여 척을 전멸시켜 공신에 책록되고 영성군(永城君)에 봉해졌다. 1383년(우왕9) 남해의 관음포(觀音浦)로 침입한 왜구를 정 지(鄭地)와 함께 격파했고 1389년(창왕1) 화통도감이 철폐되자 집에서 [화약수련법(火藥修鍊法)] [화포법(火砲法)]을 저술하다가 조선이 개국되자 정헌대부·검교참찬문하부사 겸 판군기시사가 되었다.
 후에 의정부 우정승(議政府右政丞)에 추증되고 영성 부원군(永城府院君)에 추봉되었다.
 판군기시사(判軍器寺事)를 지낸 일(壹)의 아들 흥효(興孝)는 1411(태종11)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 교리(承文院校理)를 거쳐 1420년(세종2) 인령부 판관(仁寧府判官)을 지냈고 후에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을 지냈다. 글씨에 뛰어나 세종의 명으로[금자법화경(金字法華經)]을 사경(寫經)했다.  조선의 무신 해산(海山)은 무선(茂宣)의 아들로 아버지의 유명(遺命)에 따라 [화약수련법] [화포법]을 통해 그 비법을 전수받고 1400년(태종 즉위) 군기시(軍器寺)에 등용되어 주부(主簿)에 올랐다.
 1408년(태종8) 군기감승(軍器監丞) 및 군기소감(軍器少監)을 지냈고 1415년(태종15) 좌군절제사(左軍節制使)로 파저강(婆猪江:압록강 중류지대) 야인정벌 때 군기를 누설했다 하여 파직되었다가 복직되어 세종(世宗) 초에 대호군(大護軍)에 올라 1425년(세종7) 군기감사(軍器監事), 1431년(세종13)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 우참찬(右參贊)을 거쳐 1436년(세종18)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를 지냈다.
 그는 여러 관직에 재임 중 화차(火車)· 완구(碗口)· 발화(發火)·신포(信砲) 등 신화기(新火器)를 창제하여 화약과 화기의 발전에 공헌했다.
 의병장(義兵將) 문병(文炳)은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천장산(天丈山)에서 수천 명의 의병을 모집하고 대장(大將)이 되어 적의 침입을 격퇴했고 영천(永川)에서 적을 화공(火功)으로 섬멸하여 감목관(監牧官)을 역임했으며 후에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에 추증되었다.
 그 외 조선 때 학자(學者) 서림(瑞林)은 학문과 행의(行儀)가 훌륭하여 학행(學行)으로 참봉(參奉)에 기용되었으며, 인( )은 학문과 덕행이 당세(當世)에 고명(高明)하였다.  

 

[청주 최씨(淸州崔氏)]의 시조(始祖)는 소벌도리(蘇伐都利)의 후손으로 고려 때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중서령(中書令)을 거쳐 이부 시랑(吏部侍郞)을 지냈고, 서원후(西原侯)에 봉해진 최기우(崔奇遇)이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청주(淸州)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 때 병부 상서(兵部尙書)를 역임한 응청(應淸), 판문하사(判門下事)를 지낸 신우(信友), 조선조에서 좌찬성(左贊成)을 역임한 사근(思謹),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역임한 만선(萬善)등이 배출되어 명망높은 가문을 이루었다.

 

[흥해 최씨(興海崔氏)]는 경주 최씨와 동원(同源)으로, 전주 최씨 일파조(一派祖) 최 균(崔 均:최치원의 7세손)의 11세손인 최 호(崔 湖)가 고려조(高麗朝)에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에 오르고 곡강(曲江:흥해의 별호)부원군(府院君)에 봉(封)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始組)로 삼고 본관(本貫)을 흥해(興海)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나 시조 이하 중간 계대가 병화(兵火)로 실전(失傳)되어 소목(昭穆)을 상고(詳考)할 수 없으므로 그의 6세손으로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한 최 연(崔 淵)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계대(繼代)하고 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팔개(八凱)가 1592년(선조25) 임진왜란(任辰倭亂) 때 의병을 모집하여 부산진(釜山鎭) 전투에서 왜군(倭軍)과 격전(激戰)중에 전사하였고, 그의 동생 팔원(八元)은 1585년(선조18)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봉사(奉事)를 거쳐 박사(博士)에 재임중  임진왜란(任辰倭亂)을 당하여 형 팔개(八凱)와 함께 전장에서 장렬히 전사하여 흥해 최씨의 가문(家門)을 빛냈다.

 

[낭주최씨(朗州崔氏)]의 상계(上系)는 문헌이 실전(失傳)되어 상고(詳考)할 수 없으며 최흔(崔昕)이 낭주(朗州:지금의 영암)에 토착한 사족(士族)의 후예로 신라 말에 원보(元甫)를 역임하고 영암(靈岩)에 정착하여 가세(家勢)가 크게 번창(繁昌)했으므로 후손들이 흔(昕)을 시조(始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낭주(朗州)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흔의 아들 지몽(知夢)은 초명이 총진(聰進)으로 907년(신라 효공왕 11) 영암군 동구림리(東鳩林里)에서 출생했다. 어릴 때부터 성품이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널리 통달했으며 특히 천문(天文)과 복서(卜筮)에 정통하였다.
 나이 18세 때 태조(太祖)가 그 명성을 듣고 그를 불러 꿈을 점치게 했더니 "길조(吉兆)를 얻어 반드시 삼한(三韓)을 통일하여 다스릴 것이다."하여 태조가 기뻐하며 그 이름을 지몽(知夢)이라 고쳐 주고 금의(錦衣)를 내려주고 공봉(供奉)의 관직에 임명하였다.
태조(太祖) 때부터 60여 년 간 중신(重臣)으로 봉직(奉職)한 그가, 987년(성종 6) 3월에 졸(卒)하자 왕이 매우 슬퍼하여 국장(國葬)으로 장례를 치르고태자태부(太子太傅)를 증직함과 동시에 민휴(敏休)란 시호(諡號)를 주었으며, 후에 태사(太師)를 증직하여 경종(景宗)의 묘정(廟庭)에 배향하였다.
 그 후 후손 안우(安雨)가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봉열대부(奉列大夫)와 검교군기시소감(檢校軍器侍小監)을 거쳐 재상(宰相)에 올랐다. 그는 평소에 성품이 강직하고 성리지학(性理之學)에 밝았으며 정몽주(鄭夢 周), 이색(李穡) 등과 도의(道義)를 나누며 시(詩)를 주고 받았다.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영평(永平:현 전남 나주군 봉황면 만봉리) 도성산(道成山)으로 들어가 시냇가에 대(竹)를 심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忠節)을 기리면서 호(號)를 죽제(竹溪)라 칭하고 세상을 등진 채 종신(終身)하였다.
 안우의 아들 운(雲)은 조선에서 현감을 지냈으며, 운의 아들 네 명이 모두 벼슬에 올랐는데 장남 양( )이 지현(知縣)에, 차남 장은 현령(縣令)에 올랐고 셋째 상(湘)과 넷째 영(渶)은 계공랑(啓功郞)과 찰방(察訪)을 각각 역임했다.
그 외 후손 치호(致湖)가 문과에 급제하고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를 거쳐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에 올랐으며, 산두(山斗)는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하여 많은 명사(名士)를 배출시켰다

 

[영흥 최씨(永興崔氏)]의 시조(始祖) 최지미(崔之美)는 경주 최씨(慶州崔氏)의 시조인 최치원(崔致遠)의 후손으로 고려 때 벼슬을 지냈고 영흥백(永興伯)에 추증되었으며, 그의 손자 한기(閑奇)가 환조대왕(桓祖大王:태조 이성계의 아버지)의 빙부(聘父)가 되어 영흥백(永興伯)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경주 최씨에서 분적(分籍)하여 본관(本貫)을 영흥(永興)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가문의 대표적 인물은 지미의 아들 종태(終泰)가 고려 때 좌찬성(左贊成)을 지냈으며 종태의 아들 불타(佛 )는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했다.
한편 좌찬성(左贊成)을 지낸 근(斤:불타의 아들)의 아들 양수(良守)는 고려 때 판도판서(版圖判書)와 좌찬성(左贊成)을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으며, 양수의 아들 문경(文景)은 절제사(節制使)를 역임, 그의 아들 옥(沃)과 사의(思義) 형제는 교수(敎授)와 참봉(參奉)을 지냈다. 그외 조선에서 호조 참의(戶曹參議)를 역임한 응방(應芳)이 있으며, 상규(尙奎)는 벼슬이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이르렀고, 경운(景雲)은 오위장(五衛將)을 지냈다.

 

[동주 최씨(東州崔氏)]의 시조 (始祖) 최준옹(崔俊邕)은 득성시조 소벌도리(蘇伐都利)의 후손으로 고려 태조(太祖)를 도와 통합삼한공신(統合三韓功臣)으로 벼슬이 삼중대광(三重大匡), 태사(太師)에 이르렀다. 준옹(俊邕)의 증손인 석(奭)은 1051년(문종 5)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고려의 최고 중앙정치기관인 좌습유(左拾遺)를 시작으로 1075년(문종 29) 형부시랑(形部侍郞)이 되어 4월 요(堯)나라에 가서 천안절(天安節)을 축하한 뒤 돌아와 전중감(殿中監), 지어사대사(知御史臺史)가 되었고 그 후 여러 요직을 두루 역임한 후 1087년(선종 4) 감수국사(監修國史)에 이르렀다. 

최유선(崔惟善), 이정공(李靖恭) 등과 함께 당대의 문인으로 이름을 떨쳤다. 석(奭)은 나이 70세에 아들을 얻으니 그가 바로 당대의 문장가 유청(惟淸)이다 유청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학문을 좋아하여 경(經)과 사(史), 자(子), 집(集)에 이르기까지 널리 통달하였으며 글씨도 잘 썼다. 예종(睿宗)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학문이 넉넉하게 된 뒤라야 벼슬에 오르겠다"하며 두문불출하고 오직 글만 읽었다.
 주위에서 벼슬을 천거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곧 "학문이 아직 성취되지 않았습니다"하며 굳이 사양하였고 오랜 뒤에 한림원(翰林院)에 들어 갔으나 인종(仁宗) 초에 주위의 간계로 물러나 있다가 1132년(인종 10) 예부 원외랑(禮部員外郞)으로 진주사(陣奏使)가 되어 송(宋)나라에 다녀 왔다.
 그 후 금나라에도 다녀왔으며 경인난(庚寅亂) 및 계사(癸巳)의 난(亂)에 문신(文臣)들이 모두 해를 당하였으나 여러 장수들이 평소에 그의 덕망에 경복(敬服)하였으므로 친척들과 함께 모두 화를 면했다.
 왕이 즉위하자 숙덕(宿德)으로 다시 재상에 올랐고 그가 집필한 저서 [이한림 집주(李翰林集註)]와 [유문사실(柳文事實)]을 왕이 보고 칭찬하여 판목(版木)에 새겨 전하였다.
 1161년(의종 15) 중서시랑 평장사에 올랐고 1172년(명종 2) 수사공, 집현전 대학사, 판예부사로 치사(致仕)하였다.
 그는 독자로 태어났으나 슬하에 8남 2녀를 낳아 이로부터 가문이 번창하였다. 당( )은 유청(惟淸)의 넷째 아들로 글을 잘 짓고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역임하며 명성과 공적을 남겨 명망이 한 시대에 두터웠다.
 1197년(명종 27, 신종 원년) 신종(神宗)의 이름을 탁(晫)으로 지어 올렸고, 1199년(신종 2)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로 치사(致仕)하여 아우 선(詵)과 장자목(張自牧), 이준창(李俊昌), 백광신(白光臣), 현덕수(玄德守) 등과 더불어 기로회(耆老會)를 만들어 한가로이 즐기며 시주(詩酒)로 소일하니 그때 사람들이 지상신선(地上神仙)이라 하였다. 당의 동생 선(詵)은 문학으로써 세상에 이름을 날렸는데 욕심이 없이 깨끗하고 말이 적으며 선비에게 자기몸을 낮추어 어진이를 예(禮)로써 대우하니 왕은 참지정사(參知政事)에서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임명하였으나 얼마후 늙음으로 벼슬을 내놓고 물러났다.
선의 아들 종준(宗峻)과 종자도 당대에 뛰어난 인물이었다. 종준(宗峻)은 1201년(신종 4)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고종 초에 좌승선(左承宣)을 거쳐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이부 상서(吏部尙書) 등을 역임하고 뒤에 문하시중에 이르러 궤장을 하사받았으며, 특히 의학에 정통하여 [신집어의촬요방(新集御醫撮要方)]을 저술했다.
 종준의 동생 종자도 1225년(고종 12) 위위경(衛尉卿)으로 과거시험의 감독관을 거쳐 1236년(고종 23) 우복야(右僕射)에 이르렀다. 당( )의 손자 인(璘)은 성격이 호탕하여 술과 놀이를 좋아했으며 30세에 독서를 시작한 뒤 강종 때 급제하여 대간(臺諫)을 지내고 여러 차례 몽고에 사신으로 가서 외교적으로 공을 쌓았고 인의 아우 징(澄)은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징(澄)의 아들 유(濡)는 1090년(선종 7)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교감(校書校勘), 중서 사인(中書舍人)을 거쳐 1111년(예종 6) 시어사가 되었고 1128년(인종 6) 이부상서(吏部尙書)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금(金)나라에 다녀왔으며 1138년(인종 16) 문하시랑 평장사에 올랐다.
 종자의 아들 온( )은 유청(惟淸)의 증손으로 고종(高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내고 1258년(고종 45) 추밀원사(樞密院事)에 올라 권신 최 의(崔  )를 제거하려는 모의에 김 준(金 俊)등과 참여하였다.
한 때 흑산도(黑山島)로 유배되기도 했으나 장군 이주인(李柱仁)의 청으로 풀려나와 1260년(원종 1) 추밀원사에 복직하고 수사공 좌복야(守司空左僕射)를 거쳐 1262년(원종 3) 판공부사(判工部事)를 지낸 후 수태부 중서시랑 평장사로 치사(致仕)했다.

옹(雍)은 유청(惟淸)의 증손이며 정소(貞紹)의 아들로,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대관승(大官丞)을 거쳐 전리좌랑(典理佐郞)이 되었으며 충렬왕(忠烈王)이 태손(太孫) 때 그 스승이 되었고, 1280년(충렬왕 6) 정랑(正郞)으로서 경사 교수(經史敎授)를 겸임하다 여러 관직을 거쳐 1292년(충렬왕 13) 부지밀직사사, 문한학사(文翰學士)를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문신(文臣)들의 권세가 압도적인 비중으로 흘러온 시대에 동주 최씨(東州崔氏)의 대표적인 인물은 고려조의 명장이고 충신인 영(瑩)이다. 영은 유청(惟淸)의 현손(玄孫) 원직(元直)의 아들로 태어나 양광도(楊廣道) 도순문 사(都巡問使) 휘하에서 왜구를 여러번 토벌하여 공을 세우고, 1352년(공민왕 1) 조일신(趙日新)의 반란을 진압한 공으로 호군(護軍)에 임명되면서부터 벼슬에 오르게 되었다.

 그때부터 무예와 용기가 뛰어난 것이 소문이 나기 시작하여 대호군(大護軍)이 되어 원나라의 요청으로 류 탁(柳 濯) 등과 함께 중국의 고우(高郵), 사주(四州) 등지에서 장사성(張士誠)의 난군을 토평하고 돌아와 내정을 간섭하던 원나라 세력을 용감히 몰아내고 민족의 자주성을 되찾는데 큰 영향이 미치도록 하였다.
1358년(공민왕 7) 오예포(五乂浦)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시켰고, 1359년(공민왕 8)에는 중국의 홍건적 4만 명이 서경(西京)을 침범하자 서북면 병마사(西北面兵馬使) 이방실(李芳實) 등과 함께 홍건적을 격파하여 서울을 수복하고 그 공으로 일등도형벽상 공신(一等圖形壁上功臣)이 되어 전리판서(典理判書)의 벼슬을 받았다.
 그 외 수많은 국내외 침입과 반란이 있을 때마다 격퇴, 평정하여 고려의 시련를 극복하였다.
그는 성품이 굳세고 충성되었으며 전장에 임하여 적을 대하였을 때에도 그 정신과 의기가 안정되어 있었으며 화살과 포탄이 좌우로 날아와도 두려워 하는 빛이 없었다.

군사를 다루는 데도 엄격하여 군사가 싸움 마당에 한 발자국이라도 물러서면 당장에 군법을 시행한 까닭으로 크고 작은 싸움에서 한 번도 패한 일이 없었다.
 그의 나이 16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죽음에 임하여 "너는 꼭 황금을 보기를 돌 같이 하라" 하는 말을 경계하여 말했는데, 그는 아버지의 유언을 명심하여 기쁜 마음과 정성스러운 태도로 일하며 결코 재물을 탐하지 않아 의복과 음식은 검약(儉約)하고 소박하였으며 때로는 끼니가 떨어지는 일까지 있었다.
 비록 신분이 장상(將上)의 최고 지위에 있었고 오랫동안 병권(兵權)을 장악하고 있었으나 비굴한 행위를 하지 않아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그의 청렴렬백한 뜻에 감복하였다.
 옳지 못한 행위를 보면 통렬히 배척했으며 강인한 성품 탓으로 주위의 모함을 받아 한 때 관직이 삭탈되기도 하였고 억울하게 귀양가기도 했었다.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하여 개경(開京)으로 돌아와 왕위(王位)를 폐하고 정몽주(鄭夢周)등과 함께 충신들을 참형(斬刑)하니 5백년 고려 사직은 서서히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73세로 죽음에 임하여서도 얼굴빛이 조금도 변하지 않고 "내가 평생에 탐욕한 마음을 가졌다면 내 무덤위에 풀이 날 것이며 그렇지 않는다면 풀이 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과연 뒤에 그의 무덤 위에는 풀이 나지 않아 적분(赤墳)이라 하였고, 그가 죽는 날 개경(開京)을 비롯하여 전국 백성들은 슬퍼하며 통곡하였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수많은 충신들이 정의(正義)의 이상을 위하여 피와 눈물과 땀을 흘려 어려운 고비를 넘겨 왔으나 진정 우리의 가슴속에 살아있는 이는 많지 않다.

그의 빛나는 업적과 충절(忠節)은 우리 민족의 얼이요, 동주 최씨(東州崔氏) 후손들의 핏줄기 속에 용솟음칠 영원불멸의 수호신이 되었다.

 해방 후 우이동(牛耳洞)에 은거하며 역사논문(歷史論文) 집필에 전심하다가 친일반민족 행위자로 기소, 1949년 수감되었으나 병보석으로 나와 6.25때 해군전사 편찬위원회 촉탁을 지냈고 서울 시사 편찬위원회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저서에는 [백팔번뇌] [시조유취] [금강예찬] [조선역사] [고사통] [조선상식] [조선독립운동사] [단군론] [백두산 관참기]등 다수를 남겼으며, 박람강기(博覽强記)했고 신문학운동과 국학관계의 개척에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다.
 그의 동생 두선(斗善)은 서울중앙중학교 교장, 보전상무(普專常務)를 거쳐 1945년 경방사장(京紡社長)을 역임하였고, 1947년 동아일보사장(東亞日報社長)으로 언론계에 몸담았다가 대한적십자사 총재(1960-1972), 유엔총회 한국대표(1960-19961), 국무총리(1963-1964)를 비롯하여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1971년 한국장학재단 이사를 지냈다. 국가로부터 청조소성훈장(靑條素星勳章), 국민훈장무궁 화장(國民勳章無窮花章)을 수상했고 독일연방공화국 공로훈장도 받았다.

 

[밀양 최씨(密陽崔氏)]는 우리나라 최씨의 대종(大宗)인 경주 최씨(慶州崔氏)에서 분적(分籍)된 계통(系統)으로 알려졌으나 성관(姓貫) 연혁에 대해서는 미상(未詳)하다. [밀양최씨계해보(密陽崔氏癸亥譜)]에 의하면 밀양 최씨는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경주 최씨의 시조)의 후손인 화숙공(和淑公) 최현우의 15세손으로 기록된 익대(益大)가 조선 숙종(肅宗) 때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용양위부호군(龍 衛副護軍)을 지냈으며, 경종(景宗)이 즉위한 후 몸이 병약하고 후사(後嗣)가 없었으므로 왕세제(王世弟) 연잉군(延 君:후에 영조가 됨)을 책봉하고 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장하다가 소론(小論)으로부터 탄핵을 받았던 노론(老論)의 영수 김창집(金昌集:당시 영의정)이 화를 입었던 사건에 연루되어 각처(各處)에 은거(隱居)하였다가 경기도 수리산에 들어가 변관명(變貫名)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사실(事實)을 고증할 문헌이 없다.
 그 후 익대(益大)는 영조(英祖)가 즉위하자 사면(赦免)되었고, 그의 후손들이 전국에 산거(散居)하면서 3세손 경륜(景崙)이 한성성적(漢城成籍)에 본관(本貫)을 밀양(密陽)으로 기록한 연유로 해서 익대(益大)를 일세조(一世祖) 로 하고 밀양을 본관(本貫)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증직(贈職)된 경륜(景崙)의 아들 도신(道信)이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추증되었으며, 그의 손자 치갑(致甲)은 1841년(헌종 7)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용양위 부호군(龍 衛副護軍)을 거쳐 창덕궁위장(昌德宮衛將)을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완산 최씨(完山崔氏)]는 경주 최씨(慶州崔氏)에서 분적(分籍)한 완산군(完山君) 최순작(崔純爵)의 후손으로 상계(上系)가 실전(失傳)되어 정확한 계대(系代)는 알 수 없으나, 후손 최수강(崔秀岡)이 고려 말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落鄕)하였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중시조(中始祖)로 하고 완산(完山)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은 경(涇)이 아들 수지(水智)와 같이 조선 때 현감(縣監)을 역임했고 명우(命佑)는 벼슬이 부제학(副提學)에 이르렀다. 그 외 부호군(副護軍)을 지낸 정정(禎貞), 병확(秉 )이 있으며, 정우(正愚)는 학자(學者)로 명성을 떨쳤다.

 

[부안 최씨(扶安崔氏)]의 시조 최창일(崔昌一)은 문창후(文昌候) 최치원(崔致遠)의 후손으로 청주 최씨(淸州崔氏)에서 분적(分籍)되었다.
 그는 고려 말(高麗末)에 상호군(上護軍)을 역임하고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냈으며 조선이 개국되자 벼슬을 버리고 부안(扶安)으로 낙향(落鄕)하였다.
 그의 아들 도명(道明)은 세종 때 호조 좌랑(戶曹佐郞)으로 왕에게 직간(直諫)을 하다가 길주(吉州)의 명원(明原)으로 유배되었다.
 그리하여 그 곳에 정착하여 누대(累代)에 걸쳐 세거(世居)하였으므로 조상의 전세거지인 부안(扶安)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가문을 대표하는 인물로 도명의 아들 을제(乙濟)가 직장(直長)을 지냈으며, 판관(判官)을 지낸 을제(乙濟)의 동생 을수(乙壽)가 있다.
 조선 때 사직(司直)을 역임한 언인(彦仁)은 부안 최씨(扶安崔氏)를 빛냈다

 

[용강 최씨(龍岡崔氏)]의 시조(始祖) 최지무(崔枝茂)는 고려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상호군(上護軍)을 거쳐 판선공감사(判繕工監事)를 역임하면서 공을 세워 용강군(龍岡郡)에 봉해졌으며, 그의 손자 최개산(崔開傘)은 조선 세조(世祖)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감무(監務)를 거쳐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올라 왕에게 직간(直諫)을 하다가 북방으로 유배되어 그 곳에 정착하였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청주 최씨(淸州崔氏)에서 분적(分籍)하여 최지무(崔枝茂)를 시조(始祖)로하고 용강(龍岡)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계승하고 있다.
 그 후 개산(開傘)의 아들 경손(景遜)이 현감(縣監)을 지냈으며 그 외 판관(判官) 세량(世良)과 사정(司正)을 역임한 세휘(世輝)는 아버지 경손과 함께 가문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세량의 맏아들 응기(應紀)는 사직(司直)을 , 그의 동생 응택(應澤)은 부호군(副護軍)을 각각 역임하였다

 

[탐진최씨(耽津崔氏)]는 고려 때 상약원 직장(尙藥院直長)을 지낸 최 철(崔 哲)을 원조(遠祖)로 하고 고려 때 장작감(將作監)을 지낸 정(靖)의 아들 최사전(崔思全)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으나 사전의 아들 변(弁)과 열(烈) 이하의 기록은 누차의 전란으로 문헌이 실전(失傳)되어 각파(各派) 중시조(中始祖)들의 세거지를 따서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문헌에 의하면 사전(思全)은 경주 최씨(慶州崔氏)에서 분적(分籍)한 해주 최씨(海州崔氏)의 시조(始祖) 최 온(崔 溫)의 증손(曾孫)이다.
사전(思全)은 처음에 의술(醫術)로써 조정에 나갔으나 1126년(인종4) 이자겸(李資謙)이 궁궐을 범하고 함부로 권세를 부리자 왕과 협의하여 자겸의 심복 척준경(拓俊京)을 설복하여 이자겸을 제거한 공으로 공신(功臣)에 책록되어 병부 상서(兵部尙書)에 올랐다. 그후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으로 수태위(守太尉)·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으며, 만년에 스스로 은총이 넘친다 하여 치사(致仕)하기를 원했다. 그는 두 아들 변(弁)과 열(烈)을 두었는데, 변(弁)이 이부 상서(吏部尙書)에 올랐고 둘째 아들 열(烈)은 [효인(孝仁)]이란 칭호를 왕으로부터 받았다. 일찍이 사전(思全)은 두 아들에게 금 술병을 한 벌씩 주었는데 그가 죽은 후에 첩(妾)이 그 하나를 훔쳐내었다.
 변(弁)이 화가 나서 매를 치려고 하니 열(烈)이 말하기를 "이는 선군(先君)이 사랑하시던 사람이라 마땅히 가산(家産)을 기울여서라도 구제해야 옳겠거늘 하물며 이 물건이 문제가 되겠소. 제가 얻은 것이 또 있으니 청컨대 이것을 형님에게 드리리다."하였다. 왕이 듣고 가상히 여겨 "효자요 또 인인(仁人)이라고 할 만하다."하며 어필로 <효인(孝仁)>이라고 써 주었다고 한다.
 문헌에 나타난 각 파의 중시조(中始祖) 이래의 내력을 살펴보면 화성파(華城派)는 중조(中祖) 응규(應奎)가 고려 때 중서령(中書令)을 지냈고, 그의 아들 상(尙)은 1056년(문종10) 예부낭중(禮部郎中)으로 감찰어사(監察御使)를 거쳐 1065년(문종19) 예부상서(禮部尙書)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거란에 다녀와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지공거(知貢擧)가 되었다. 상(尙)의 아들 원습(原鈒)은 태복시정(太僕寺正)을 지냈고, 원길(原吉)은 중랑장(中郞將)에 올랐으며, 원습(原鈒)의 아들 용폐(龍陛)#용승(龍陞)#용승(龍陞)의 아들 숙륜(叔倫)이 당대에 뛰어났다.
 강진금천파(康津錦川派)의 중조(中祖) 준량(浚良)은 생원(生員)으로 우문관 대제학(右文館大提學)에 추증되었고, 아들 령(齡)이 예의 판서(禮儀判書)를 지냈으며, 령(齡)의 아들 직림(直霖)은 판도판서(版圖判書)로 오산군(鰲山君)에 봉해졌다.

 직림의 아들 봉(鳳)이 조선 때 병조 참판(兵曹參判)을 지냈으며 봉의 아들 만(滿)이 조선 세종(世宗) 때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역임했다.

만경파(萬頃派) 중조(中祖) 효로(孝老)의 현손(玄孫)이고 능참봉을 지낸 숙(淑)의 아들 학령(鶴齡)은 당대의 명신(名臣) 김인후(金麟厚)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1539년(중종34) 진사로 정시문과에 장원했으나 어사의 홍패(紅牌)에 틀린 글자가 있다고 받기를 거절하고 돌려 보낸 뒤 포의(布衣)로 고향으로 돌아가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오로지 학문으로 일생을 보냈다. 보성조내파(寶城兆內派) 중조(中祖) 총(聰)의 아들 표(彪)는 당대에 명성을 날린 학자 이 색(李 穡)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공양왕(恭讓王) 때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냈고 조선이 개국하자 벼슬에서 물러났으며, 그의 아들 귀령(龜靈)은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담양부사(潭陽府使)를 지냈고 세조(世祖)가 즉위하자 벼슬을 버리고 강호(江湖)에 숨어 살았다. 광주성서파(光州城西派) 중조(中祖) 윤덕(允德)은 고려 말 영도첨의(領都僉議)로 조선이 개국한 후 광산으로 귀양가서 살았으며, 손자 호(灝)가 중종 때 계공랑(啓功郞)에 이르렀고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한성판윤 겸 오위도총부 총관(五衛都摠府摠管)에 추증되었으며, 호의 손자 언웅(彦雄)은 첨지중추부사를 지냈다. 금남파(錦南派) 중조(中祖) 정원(井元)의 손자 부(溥)는 학자 김종직(金宗直) 문하에서 글을 배워 1482년(성종13) 진사로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하여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뒤 교리(校理)로 [동국통감(東國通鑑)] 및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뒤에 호당(湖堂)에 뽑혔다.

만경율리파(萬頃栗里派) 중조(中祖) 해(海)는 세조(世祖) 때 벽동군수(碧潼郡守)를 지냈으며, 아들 한춘(漢春)은 의영고직장(義盈庫直長)에 있었고 한춘의 증손 경란(景瀾)은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지내다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자 만경율리(萬頃栗里)에 은거(隱居)함으로 후손들이 문호를 열었다.
그 밖에 인물로는 채희귀한도(蔡姬歸漢圖)를 그린 조선 성종(成宗) 때의 화가 경(涇)이 소헌왕후(昭憲王后)와 세조·예종·덕종의 초상을 그린 공으로 성종(成宗)이 안구마(鞍具馬)를 하사하였으며 1484년 당상관(堂上官)에 올랐다. 사전의 후손 홍전(弘甸)은 문장에 능했고 천문(天文)·지리(地理)·역상(易象) 등에 밝았으며, 1679년(숙종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후 낭관(郎官)을 지냈다.
 중일(中一)은 1450년(세종32) 진사로 문과에 급제한 후 군자감 주부(軍資監主簿)를 역임하였고 부교리(副校理) 겸 독서당 응교(讀書堂應敎)·지평(持平)을 거쳐 사간(司諫)에 이르렀다.

 

[상주최씨(尙州崔氏)]k시조 최춘원(崔春元)은 경주최씨 시조 문창후 최지원의 17세손으로 1553년(조선 명종 8)에 출생하여 1591년(선조 24) 형 춘형과 함께 진시 시험에 합격하고 이어 1594년(선조 27)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1596년(선조 29) 통훈대부를 거쳐 자헌대부 승정원 좌승지에 이르렸다.
  그는 특히 학문을 좋아하고 문장에 능하여 성종이 상주군에 봉하였다.
  그후 간신배들이 날뛰므로 벼슬을 물러나 운주(雲州:현재 운산)로 낙항하여 살게 되어 후손들이 춘원을 시조로 하여 본관을 상주로 삼았다상주 최씨는 경주 최씨(慶州崔氏)의 시조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의 17세손인 최춘원(崔春元)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다.
 [상주최씨족보(尙州崔氏族譜)]에 의하면 그는 참봉(參奉) 윤세(允世)의 아들로 1553년(명종 8)에 태어나 1591년(선조 24)에 형 춘경(春景)과 함께 진사(進士)가 되었고 1594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이어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를 지내고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거쳐 홍문관(弘文?), 예문관(藝文?)의 제학(提學)에 제수되었으? 상주군(尙州郡)에 봉(封)하여졌다.
 그후 간신배의 모략에 참소되어 운산(雲山)으로 유배되었고, 그의 후손들이 봉군(封君)된 지명 상주(尙州)를 본관(本貫)으로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가문의 인물로는 춘원(春元)의 현손(玄孫) 수역(壽域)이 통정대부(通政大夫)로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증직(贈職)되었고, 그의 아들 명춘(明春)은 통정대부로 장례원 판결사(掌禮院判決事)에 증직되었다. 그외 훈도(訓導)를 역임한 여급(女?), 숙종(肅宗) 때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을 지낸 준방(俊傍), 수문장(守門將) 만장영萬丈), 현종조(顯宗朝)에 용양위 부호군(龍 衛副護軍)을 지낸 주국(柱國) 등이 상주 최씨를 더욱 빛냈다.

 

[연풍최씨(延豊崔氏)]시조 최지강(崔至崗)은 고려 때에 진사로 안화(연풍)에 대대로 살았으므로 후손들이 '경주최씨'에서 분관하여 연풍을 본관으로 하였다. 그러나 경주 최씨와의 계보는 고증이 없다.

 

[원주최씨(源州崔氏)] '경주최씨'에서 분적(分籍)된 계통으로 조상들이 강원도 원주에 토착하였고, 후손 최보은이 1434년(세종 16) 호용위사 대호군으로 임지인 함경도 명천에서 세거(世居)하였는데 후손들이 조상의 연고지 원주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경주 최씨(慶州崔氏)에서 분적(分籍) 된 계통인 원주 최씨(原州崔氏)는 최보은(崔寶隱)을 시조(始祖)로 한다. 보은은 조선 때 대호군(大護軍)으로 임지(任地)인 함경도 명천(咸鏡道明川)에서 세거(世居)하였는데, 후손들이 조상(祖上)의 연고지(緣故地)인 원주(原州)를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가문을 빛낸 인물을 보면 보은의 아들 적(迪)이 가선대부(嘉善大夫)로 검교한성부윤(檢校漢城府尹)을, 적의 아들 보인(甫仁)이 상호군(上護軍)을 역임하여 만호(萬戶)를 지낸 운잠(雲岑)#인건(仁健)#동환(東煥) 등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흥해, 곡강최씨(興海, 曲江崔氏)] 시조 최호(崔湖)는 최치원(경주최씨 시조)의 7세손 최균(均)의 11세손으로 그는 고려 때 삼중대광문하시중(三重大匡門下侍中), 삼한벽상공신 신호위상장군(三韓壁上功臣神虎衛上將軍)으로 곡강(曲江. 흥해의 다른이름)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경주최씨에서 분관하여 그를 1세조로 하고 본관을 흥해로 하여 대를 이어오고 있다.
·묘소는 경북 영일군 의창읍 송남동에 있다.

 

[우봉 최씨(牛峰崔氏)]는 경주최씨(慶州崔氏)에서 분적(分籍)하였으나 그 상계(上系)는 알 수 없고, 최치원(崔致遠)의 후손으로 전하는 최원호(崔元浩)가 고려 명종(明宗) 때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을 거쳐 우성공신(佑聖功臣)에 책록되었으며 영렬(英烈)이란 시호(諡號)를 하사받았다.
 그 후 그의 아들 충헌(忠獻)이 고려 중종(中宗)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내고 진강군 개국후(晋康郡開國候)에 봉해졌으며, 충헌의 아들 우(瑀)가 고려 고종(高宗) 때 강화천도(江華遷都)의 공으로 진향후(晋陽侯)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우봉(牛峰)에 세거(世居)하면서 최원호(崔元浩)를 시조(始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우봉으로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가문의 대표적 인물로는 충헌(忠獻)이 음보(蔭補)로 양온령(良 令)이 되어 1174년(명종4)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토벌하여 별초도령(別抄都令)에 올랐으며, 1196년(명종26) 동생 충수(忠粹)와 함께 이의민(李義旼) 일당을 숙청하고 정권을 장악한 후, 당시 누적된 폐정(弊政)의 개혁을 위한 봉사십조(封事十條)를 올려 왕의 측근자를 모두 추방하고 좌승선(左承宣)을 거쳐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가 되었으며, 이듬해 충성좌리공신(忠誠左理功臣)의 호(號)를 받았다. 

[용궁 최씨(龍宮崔氏)]의 시조(始祖)는 고려 때 평리부 밀직사사(評理府密直司使)를 지낸 최 현(崔 玄)이다. 그의 아들 안도(安道)는 전리상서(典理尙書)를 역임하였으며 손자 유(濡)는 군부판서(軍簿判書)로 1399년(충숙왕 복위8) 조적(曹 )의 난에 왕을 호종하여 성근익대 협찬보정 일등공신(誠勤翊戴協贊保定一等功臣)에 책록되고 충정왕(忠定王)이 즉위하자 취성군(鷲城君)에 봉해졌으며 공민왕(恭愍王) 때는 삼사사(三司使)로 용성(龍城:용궁의 별호) 부원군(府院君)에 진봉되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해주 최씨(海州崔氏)에서 분적(分籍)하여 본관(本貫)을 용궁(龍宮)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그외 조선 때 밀직사사(密直司使)를 역임한 성우(成雨)는 현(玄)의 증손이며 유(濡)의 아들이다.
 성우의 후손에서는 차남 민수(敏秀)의 증손 세담(世潭)이 훈도(訓導)를 역임하여 첨정(僉正)을 지낸 알( )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용궁 최씨(龍宮崔氏)는 남한에 총 195가구, 80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충주 최씨(忠州崔氏)]의 시조(始祖)는 최승(崔陞)으로, 846년(신라 문성왕8) 신라에 흉년이 들어 도처에서 도적들이 무리를 지어 퍼져 갈 때 당(唐)나라 무종(武宗)의 명을 받아 병마사(兵馬使)가 되어 이를 토평(討平) 하였고, 889년(진성여왕3)  원종(元宗)·애노(哀奴) 등이 사벌주(沙伐州)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평정(平定)하여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에 올랐다.
그후 승(陞)은 예성(蘂城)에 그대로 머물러 세거(世居)하였으므로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충주(忠州)로 하였으나 상계(上系)가 실전되어 승의 후손으로 호장(戶長)을 지낸 공의(公義)를 일세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공의(公義)의 손자 옥(沃)이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 벼슬길에 올라 1324년(충숙왕11)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으며, 특히 옥이 부정(副正)으로 강원도 명주군 주문진읍 장덕리에 재직중 1264년(고려 원종5)에 심었던 은행나무는 천연기념물 제 166호로 지정되었고, 천연기념물 제 97호로 지정된 밤나무는 지금도 해마다 굵은 밤이 열려 귀중하게 보존되고 있다.
 그의 아들 삼형제는 모두가 벼슬에 나가 고려 왕조에 공헌했는데, 장남 백청(伯淸)은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 문하시랑(門下侍郞)을 역임했고, 차남 중청(仲淸)은 판관(判官)을 지냈다. 삼남 우청(遇淸)은 인종(仁宗) 때 문과에 급제하고 진례현위(進禮縣尉)에 올랐으며 명종(明宗)이 즉위하기 전에 전첨(典籤)으로 있다가 명종 즉위 후 대간(臺諫)을 역임했으며, 1174년(명종4) 병마부사(兵馬副使)로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진압하여 공을 세웠고 1182년(명종12)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를 거쳐 좌복야(左僕射)에 이르렀다.
 원유(原儒)는 중청(仲淸)의 5세손으로 고려 말 유림(儒林)의 영수로서 당대의 명신(明臣) 정몽주(鄭夢周) 등과 교유했고 벼슬은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에 이르렀으며, 정몽주(鄭夢周)가 순절(殉節)하자 음독 자결했다. 원유(原儒)의 아들 염은 고려 충혜왕(忠惠王) 때 문과에 급제하여 검교정승(檢校政丞)이 되었고 ,세째 아들 순(洵)은 1396년(태조5) 문과에 급제한 후 성절사(聖節使)로 중국에 다녀와 여러 관직을 거쳐 직제학(直提學)이 되었으며 세자필선(世子弼善)으로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후 중군 총제(中軍摠制)와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했다. 우청(遇淸)의 손자 빈(濱)은 언양 현감(彦陽縣監)으로 있을 때 선정(善政)을 베풀어 언양 현민들이 선정비(善政碑)를 세웠으며, 빈(濱)의 현손(玄孫) 맹현(孟賢)은 여러 지방 관직을 거쳐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를 지냈는데 고을마다 선정(善政)을 베풀어 향민의 칭송을 받았다.
 순(洵)의 6세손 개국(盖國)은 1538년(중종33)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고 1547년(명종2)에 정언(正言)이 되었다가 지평(持平)을 거쳐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했다. 명선(明善)은 1555년(명종10)에 문과에 급제하여 지방부사(地方府使)를 거쳐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이르렀으며, 정호(挺豪)는 1603년(선조36)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1609년(광해군 1)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을 지냈으며 은총(恩寵)이 무비(無比)하여 벽옥적(碧玉笛)을 하사받았다. 그 외 인물로는 효자(孝子)로 이름난 혁(爀)이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으며 동지돈령(同知敦寧)을 지낸 규석(奎錫)이 유명하고, 학자(學者) 동봉(東鳳)은 후진양성에 전심하는 한편 문집(文集)을 남겨 문명(文名) 높은 가문을 빛냈다.  

[초계 최씨(草溪崔氏)]는 전주 최씨(全州崔氏)에서 분파(分派)되었고 문헌에 의하면 시조(始祖) 최용궁(崔龍宮)은 전주 최씨 일파의 시조 최 균(崔 均)의 4세손으로, 1296년(충렬왕22)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충익대보조공신(忠翼戴保祚功臣)으로 판사(判事)와 참찬(參贊)을 거쳐광록대부(光祿大夫)로 세자태부(世子太傅)에 이르렀으며, 팔계군(八溪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초계(草溪)로 하여 문호를 열었으나, 상계(上系)의 기록이 실전되어 그의 13세손 신재(新齋) 산두(山斗)를 중시조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산두(山斗)는 참봉(參奉)을 지낸 한영(漢榮)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용모와 기개(氣槪)가 뛰어났고 학문을 좋아하여 9세 때 까마귀가 그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봉양함을 보고 그 효성(孝誠)에 감동하여 영오시(詠烏詩)를 지었다.

1513년(중종8)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수찬(修撰)을 지내고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후 호당(湖堂)에 뽑혔으며, 사간원 헌납#지평(持平)을 거쳐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에 올랐고, 문장에 뛰어나 윤 구(尹 衢)·류성춘(柳成春)과 함께 호남(湖南)의 3걸로 알려졌다. 산두는 슬하에 교적에 오른 병길(丙吉)과 장령을 지낸 정길(丁吉) 형제가 있었으며, 후세에서는 규록(圭祿)의 아들 경모(璟模)가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을 역임하였고, 임진왜란 때 백의종군(白衣從軍)한 이( )는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었으며 후에 수문장(守門將)이 되어 명망높은 가문을 빛냈다.
이렇게 명문(名門)의 후손임을 자랑하는 초계(草溪) 최씨는 전국일가찾기운동을 전개하여 1971년 7월 20일 광주(光州)에서 대종회 총회(大宗會總會)를 개최하였고, 28세손 동련(棟連), 병오(炳吾)가 대표하여 전국을 순방하며 성의(誠意)에 찬 종친(宗親)들의 힘을 얻어 1976년 6월 25일 초계 최씨 대종회 지역대의원 총회를 열고 초계 최씨 대동보 편찬사업을 결의(決議)한 후 이를 강력히 추진하여 대동보 사업을 성공적으로 완성했으며, 또한 고종 때 훼철(毁撤)되었던 도원서원(道源書院)을 후손들이 중건(重建), 1977년 6월 29일에 위패 봉안식을 거행하였다.

[개성 최씨(開城崔氏)]의 시조(始祖) 최우달(崔佑達)은 원래 황주(黃州) 토산현(土山縣) 사람으로 신라조에 대상(大相)을 역임하였고, 그의 아들 응(凝)이 태조를 도와 고려개국에 공을 세워 여러 관직을 지내고 누대(累代)에 걸쳐 개성(開城)에 세거(世居)하며 호족(豪族)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우달(佑達)을 시조(始祖)로 하고 개성(開城)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우달의 아들 희개공(熙愷公) 응(凝)은 개성 최씨의 가문(家門)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인데, 그에 대한 일화가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의 어머니가 애기를 배었을 적에 그 집에 누런 오이 덩굴이 있었는데 갑자기 참외가 맺었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궁예(弓裔)에게 알렸다. 궁예가 점을 쳐보게 하니, "사내아이를 낳으면 나라에 이롭지 못할 것이니 아예 키우지 못하게 하십시오"하였다.

그 부모가 숨겨서 길렀는데, 그후 이미 장성하여서는 오경(五經)에 통달하고 글짓기를 잘하여 궁예 밑에서 한림(翰林)이 되어 매우 존경을 받았다.
 915년(신라 신덕왕 4) 궁예가 왕건(王建)을 불러들여 모반(謀叛)의 누명을 씌울 때 왕건이 변명을 하자 응은 일부러 붓을 떨어뜨리고 줍고자 뜰에 내려와서 왕건에게 굽히지 않으면 위태롭다고 귀띰해 주어 화를 면하게 하였다.
 이때부터 왕건과 가까워져, 고려가 개국하여 왕건이 즉위하자 원봉성사(元鳳省事)를 거쳐 광평 낭중(廣評郎中)으로 승진하고 이어 내봉경(內奉卿), 광평시랑을 역임하며 태조의 총애를 받았다.
 932년(태조 15)에 그가 35세로 죽으니 태조가 매우 슬퍼하며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증직했다. 이외 후손 천보(天寶)가 조선에서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역임했으며, 그의 증손 명창(命昌)은 1504년(연산군 1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정언(正言), 수찬(修撰)을 지내고, 1519년(중종 14) 예조 참판(禮曹參判)을 거쳐 황해도 관찰사에 이르렀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일찍이 이 이(李 珥)의 문하에서 글을 읽어 문장과 시에 능하였던 입( )은 1561년(명종 16)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고, 여러번 명나라 사신으로 가서 그곳 학자들로부터 명문장가(名文章家)라는 격찬을 받았으며 그의 글과 차천로(車天輅)의 시(詩), 한 호(韓 濩)의 글씨를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일컬었다.

 

[상원 최씨(祥原崔氏)]는 신라 대상(大相) 최우달(崔佑達)의 아들인 최응(崔凝)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응(凝)은 태조(太祖)를 도와 고려 건국에 공을 세워 벼슬이 내봉경(內奉卿)에 이르렀고, 태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뒤에 대광태자태부(大匡太子太傅)에 추증되었다. 그러나 그 후 보첩(譜牒)이 실전되어 후손 효동(孝動)을 일세조(一世祖)로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조선에서 훈련원주부(訓練院主簿)를 역임한 무철(武哲)을 시조(始祖)로 기록하고 있다. 상원 최씨(祥原崔氏)는 개성 최씨(開城崔氏)에서 분적(分籍)하여 상원(祥原)을 본관으로 하고 있다.
 가문을 대표하는 인물로 석명(錫明)과 상영(象永)을 들 수 있다. 석명(錫明)은 조선 후기의 무신(武臣)으로 개성(開城)에 살며 성동(城東)의 호정(虎亭)에서 제자들에게 궁술을 가르쳤다.
 특히 그는 활 쏘는 기술이 뛰어나 중국의 양유기(養由基)에 비유되었으며, 순조(純祖) 때 춘당대(春塘臺) 유엽사(柳葉射)의 어시(御試)에서 활쏘기에 뛰어나 수문장(守門將)에 이르렀다.


 상영(象永)은 1854년(철종 5) 교관(敎官)에 보직되어 임기를 마친 후 감찰에 전임되었고 그 후 인천항 경무관(仁川港警務官)을 지냈다.
 조선조에 도정(都正)을 지낸 상옥(象玉), 오위장(五衛將)을 지낸 창우(昌祐)는 도정(都正)을 지낸 상태(象泰)와 함께 상원 최씨(祥原崔氏) 가문을 명문으로 빛냈다.

 

[수성 최씨(隋城崔氏)]는 영규계(永奎系)와 거경계(居涇系)의 두 계통이 있는데, 영규계의 시조(始祖) 최영규(崔永奎)는 신라 경순왕(敬順王) 김 부(金 傅)의 후손으로 본래 성이 김씨(金氏)였다. 1261년(원종 2) 문과에 급제하고 남조 전서(南曹典書)에 있으면서 보문각 대경(寶文閣大卿)을 겸하고 문학으로 서경(西京)의 학도(學徒)들을 가르쳐 명망이 높았다.
 충렬왕(忠烈王) 때 수주(水州) 일대의 풍속이 퇴폐하고 이륜( 倫)을 지키지 않아 사람의 행동이 금수(禽獸)와 다름없음을 왕이 개탄하니, 그가 자청하여 호장(戶長)으로 부사(副使) 안 설(安 說)과 함께 나가서 효제(孝悌)로 백성을 다스리고 의리(義理)로 설득하여 일년이 못되어 윤강(倫綱)이 부흥하자 왕이 가상히 여겨 1302년 (충렬왕 28) 포상하고 수성백(隋城伯)에 봉(封)한 후 최씨(崔氏)로 사성(賜姓)하여 이 때부터 문호(門戶)를 열었다. 한편 거경계(居涇系)는 고려 때 서운관 부정(書雲觀副正)을 지낸 거경(居涇)을 중시조(中始祖)로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영규의 아들 흡(洽)은 충렬왕(忠烈王) 때 문과에 급제하여 공조 전서(工曹典書), 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뒤에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고, 그의 아들 원개(元凱)는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에 급제하여 봉상대부(奉常大夫)로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러 치사(致仕)하고 향리(鄕里)에서 후진 양성과 저서로 일생을 보냈으며, 그의 후대에서 안양공파(安襄公派), 가산공파(嘉山公派) 등 다섯 파로 갈라졌다.
 원개(元凱)의 손자 경(涇)은 조선이 개국되자 출사(出仕)하여 사정(司正)에 올랐으며, 죽은 후에 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功臣)에 책록되었고, 자헌대부(資憲大夫)로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경(涇)의 아들 유림(有臨)은 1450년(세종 32)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고성 현령(固城縣令)을 거쳐 의금부 진무(義禁府鎭撫)를 지냈고,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平定)한 공으로 적개삼등공신(敵愾三等功臣)에 책록되어 수성군(隋城君)에 봉해진 뒤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都 兵馬節度使)가 되었다.
 유림(有臨)의 아들 윤신(潤身)은 사마(司馬)로 있을 때 공로가 있어, 천거로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가 되었다가 치사(致仕)한 후 고향에서 후진을 양성했으며, 윤신의 손자 희효(希孝)는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지방 판관(判官)을 거쳐 예빈시 부정(禮賓寺副正) 등을 지냈고 1555년(명종 10) 동지사 서장관(冬至使書狀官)을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봉암공(鳳巖公) 원개(元凱)의 증손(曾孫) 유용(有容)은 무과에 급제하여 통훈대부(通訓大夫)로 가산 군수(嘉山郡守)를 역임한 후 통정대부(通政大夫)로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추증되었으며, 조선 때 감역(監役)을 지낸 윤종(潤宗)의 아들 언호(彦浩)는 안동 부사(安東府使)를 역임하였고 정현(廷顯)은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 겸 세자익찬(世子翊贊)을 거쳐 전라좌도 수군절제사(全羅左都水軍節制事)가 되어 당대에뛰어났다. 그 외 좌찬성(左贊成)을 지낸 보한(輔漢)이 있고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문과에 급제하여 판관을 역임한 충원(忠元)과 부윤을 지낸 정원(貞元)이 있으며, 욱(煜)은 지제교(知製敎)를 거쳐 고성 군수(固城郡守)와 청송(靑松), 밀양(密陽), 부사(府使)를 지냈다.
 형록(亨錄)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을 일으켜 서울에 침공한 왜적을 물리쳐 그 공으로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종부령(宗簿令) 문개(文凱)의 후손에서는 좌승지(左承旨)를 지낸 효건(孝騫)이 대표적이다. 효건은 1608년(선조 41)에 상고(尙古)의 아들로 태어나 1644년(인조 22) 별시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으나 성품이 강직하고 아부를 하지 않아 벼슬은 부사에 그쳤다. 시와 문장에 능하여 저서를 많이 남겼으며 [하산집(何山集)]이 유명하다. 거경계(居涇系)의 후손 희량(希亮)은 참봉(參奉)을 지낸 영(瀛)의 손자로 1594년(선조 27) 무과(武科)에 급제하였고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선전관(宣傳官)으로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서 여러번 공을 세웠으나 이순신이 노량 싸움에서 전사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604년(선조 37) 선무원종일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으로 책록되었고 1774년(영조 50)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을 지낸 창국(昌國)은 1750년(영조 26)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좌랑(佐郞)을 거쳐 능참봉(陵參奉)을 역임했으며, 규한(逵翰)은 1780년(정조 4) 등제한 후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사간원 정언,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역임하고 삭녕 군수(朔寧郡守)를 지내 수성 최씨 가문을 빛냈다.

 

참고 : http://www.genealogy.co.kr/전통족보문화사,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득성시조 (得姓 始祖)

최씨의고찰

최성의 원조 소벌도리(崔姓의 元祖 蘇伐都利)

우리 최씨의 득성(得姓)과 함게 원시조가 되는 신라 개국공신으로 양자 혁거세왕과 더불어 신라 천년사직을 이루며 오늘날 찬란한 문화와 화랑정신을 만대에 계승 발전시켰다.

년원(淵源)

진한의 소벌도리와 최씨(辰韓의蘇伐都利와崔氏)

최씨는 우리 겨래 가운데서도 가장 역사를 지닌 씨족의 하나로 역사상 숱한 명신 열사, 학자, 문인을 배출한 라조(羅朝) 이래의 전통 있는 명문으로 손꼽히는 삼한갑족(三韓甲族) 이다.우리 동방에서 최씨 내력을 알고자하면 먼저 소벌공부터 알아야 한다. 소벌공은 본명이소벌도리이니 그 당시 진한의 방언으로 지은 것이요, 후에 역사기록에서 소벌공이라 명칭 하였지만 소벌은 성씨가 안이요, 부르기 쉬운 약칭인 것이다 그 당시 소벌도리는 한갓 이름뿐인 것이다

 

그러나 지위를 보아서 후세인이 공(公)자를 붙혀 존칭한 것이요 당시 제도로 보아 이름자만 호칭한 것이다 소벌공은 지금으로부터 약 2천백여년 전의 사람으로 삼국유사에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듯이 기록이 있으나 사기(삼국사기 동국통감)등 정사에는 그러한 천강설(天降設)은없고, 다만 진한의 고허촌장 이라고 말하여 어디로부터 왔는지 생래(生來)는 불분명하므로 그를 연구함에는 정사(정사)를 따라 추구할 수밖에 없다고 조선의 유민사(遺民史)에서 진한의

 발자취를 더듬어보기로 한다. 소벌공은 본래 진한 사람으로 신라를 창건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니 삼국사기, 신라본기동국통감에서 본 그의 사기는 다음과 같다.

 

6촌장과 진한(六村長과辰韓)

기원전 57년경 고조선의 북부여 유민들이 동해빈의 여러 산골짜기에 흩어져 살면서 여섯촌락을 이르고 있어는 데. 첫째마을은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 둘째 마을은 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 셋째마을은 무산대수촌(茂山大樹村) 네째, 취산진지촌(취山珍支村 혹은 宇珍村)다섯째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여섯째 명활산고야촌(明活山高耶村)이라는 마을들이 있었다.

 

고조선의 유민이란 단군-기자의 조선임을 말함이요, 동해의 여러 산골짜기(東海濱山谷間)란지금의 경상부도와 강원도 일부와 경기도 일부, 충청도 북부 즉 괴산 이북인 충청북도 전역을 지칭하니 이것이 본래 진한의 위치가 대개 그렇게되어 있었던 까닭이다.

 

진한이란, 마한과 변한을 통하여 삼한이라 하였던 것이요, 그 삼환중 최초엔 제일 강하였으나 후에 점차 약해짐에 따라 마한이 제일 큰 나라가 되었으니 마한은 이미 한혜재(漢惠宰)2년(단기2142)부터, 진한과 병한 두 나라를 섭치(攝治)한 것으로 보면 진, 병 두 나라는 당초에는 통치자(盟主)가 있었으나 붕괴되어 다시 일으키지 못했든 것 같으며, 또 삼국유사에는 병한이 각기 열두 개의 소국이 있다 했는데 이 소국들 자체가 군소 집단으로서 국호를 가지고 생활

하여온 듯하다.

 

그러므로 6부의 촌장도 나라의 왕이 없고 백성들만이 각자 나름대로(放逸)살아 가무로 어려운 질서를 근심하게된 것으로도 족히 그때의 형태를 알 수 있으며, 이 삼한의 경계를 말하면 진한은 지금의 경기도 일부와 경상도 일부, 충청도 일부이며 병한은 경상남도 한 일부로 보는 것이

타당 할 것 같다, 이곳은 후에 수로왕이 금관국(加羅)을 세웠다.

 

소벌공과신라건국(蘇伐公과新羅建國)

위와 같이 삼한이 반도남부에 정립하고 있었으나, 진한은 명실공히 군주국가가 되지 못하고 백성들만이 마한의 침략을 받아왔기 때문에 그 백성들은 항상 국가건설을 계획하고 있던 터로서 마한의 양왕5년(단기2265년한무재(韓武宰) 원년)임자 어느날 6촌의 고허촌장 소벌공은 다른 촌장들을 소집하여 건국회의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소벌공은  그해 3월 삭일에 양산촌장 알평, 대수촌장 구례마, 진지촌장, 지백호,가리촌장기타, 고야촌 장 호진등 다섯 촌장과 더불어 알천안상에서 회의를 열도록소벌공이 제안하니 각 촌장들은 이에 모두 찬동하고 각기 자제들을 거느리고 참석하였다.

 

소벌공은 이 회의서 의장 격이 되어 말하기를 지금 우리들의 많은 민중이 기름진 좋은 땅에서  태평성대 하게 살면서도 우리를 다스릴 어른(君主)이 없는 까닭에 백성이 모두 제멋대로(放逸)하며 살고 있으니, 뭉치고 단합하는 힘을 갖지 못하는 형편이므로, 항상 남의(馬韓)나라의  부당한 간섭과 제어(制御)를 받게 되고, 또 인접한 변(弁韓)한도 종 종 침해하는 일이 자주  있을 뿐 아니라. 멀리 북으로부터 한(漢)의4군이 머리를 누르고 있어 언제나 그것들이 우리의

 진전에 크게 방해되는 바인즉 우리는 지금부터 좋은 군주를 얻어 뫼시고 국가정사를 새롭게  하면 이거야말로 자손만대에 백년대계를 이르게 될 것이니 이를 위해 온힘을 다함이 어떠하겠는가?

고 말하니 모든 촌장과 자제들은 이에 동의함은 물론, 크게 협력할 것을 결의하게 되었다.

 

소벌공은 이제 군주를 澤정하는 것만이 남았는데 어떤 군주를 간택하여 백성들의 축복을 받을까 !

 하는 생각에 잠긴 채 높은 언덕에 올라, 6촌의 아름 다음과 기름진 대지를 바라 볼적에 우연히도

이상한 조짐을 발견하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 발길을 그곳으로 옭기고 있었다.그것은 남쪽의 양산

 밑 蘿井(계림부근)옆 숲풀 사이로 마치 번개같은 서광이 번쩍거리며 그 속에서 한 백마가 구물

거리고 있는 것이 선명히 보인다.이상히 여긴 소벌공은 가까이 가서 자세히 살펴본 즉 말은 앞발을

 꿀어 절하는 모양으로 몇 번 굽히다가 긴-소리를 지르더니 하늘로 살아져버리고 그 자리에는 푸릇

 불긋한 큰 알(大卵) 한 개가 놓여 있는 게 아닌가!소벌공은 그 알을 얻어 깨어본 즉. 이것은 또

웬일인가! 알속에서는 뜻밖에도 동자하나가 나오는데 형태의용(形態儀容)이 대단히 단정하고

아름다음으로 일면 놀라 웟고 한편으로는 기이(奇異)함으로 소벌공은 서둘러 얼사 안고 곧 동천

(東泉寺=우물사)에 가서 목욕을 시키니 아이의 몸에는 광채가나고 그 주변의 새들이 날러와 너울

너울 춤을 추고 천지가 진동하며 일월이 청명해지는 조짐부터가 심상치 않으므로 공은 좋아서 집

으로 데리고와 귀중히 기르며 그때의 광경을 상징하여 혁거세(赫居世)라 하였다. 혁거세가 13살

되던 해 단기2277년 한선재오봉(漢宣宰五鳳)원년에 소벌공은 다시각 촌장들을 불러 회의를 열고

 혁거세의 자질이 비범함을 자세히 설명한 후 왕으로 추대할 것을 제의하니 제 촌장들은 이에 찬동

함으로 곧 위에 오르게 하고 국호를 서군벌이라 하니, 다시 서라벌, 신라의 일명으로 진한의 옛

땅에 한 신생국이 된 것이다.

 

신라는 장차 마 변 양국을 통일하여 당 당 한 동해의 대국이 될 기업을 닦고 천년사직의 융성한

 나라가 되었으니 이는 소벌공의 공적이요 각 촌장들의 보필로 혁거세와의 선정이 베풀어 졌음

을 뜻한다.그중에 서도 더욱 소벌공으로 말하면 혁거세가 탄생한 대란을 얻음이라든지, 여기서

나온 동자를 13년 간이나 수양한 관계라 든지 등을 고찰하여 혁거세는 즉 소벌공의 수양아들

격이니 어린왕을 보좌함에 있어서 실상은 섭정과 같이 국정에 진력했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신라의 시조 혁거세왕 19년에(三國遺事) 변 한이 나라을 받쳐 항복해왔고 국기는 더욱

확고해져가면서 동해의 나라 신라는 대국으로 발전해 간 것이다(참고 변한 합병시기는 이설이

있다 혁거세 19년 (서기399) 위군침입시 고구려군5만을 원군으로 임나와 가라를 항복케 했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6부에6성 사성 (6部에6姓 賜姓)

신라의 3대 유리왕은(신라9년2365) 구진한의 6부에 지명을 개칭하여 양산촌을 급량부(及梁部)로 고허촌을 사량부(沙梁部)대수촌을 잠량부(잠梁部)로 간진촌을 본피부(本皮部)로 가리촌을 한저부(漢저部)로 명활촌을 습비부(習比部)로 하는 동시에 그6부의 장(長) 에게 각각 성을 내렸으니 賜

사량부(고허촌)의 장 소벌공은 최(崔)씨의 성을 받았다. 그 외 양산촌,알평에게는 이(李)씨, 대수촌 구례마에계는 손(孫)씨 진지촌 지백호에게는정(鄭)씨 가리촌 기타에게는 배(裵)씨 명활촌 호진에게는 설(薛)씨 이렇게 하여 6부의 6성을 내린 것은 원래 진한의 6촌장이 신라국에 큰공을 세운 연

유로 사성(賜姓)이 되었으며 당시 민간으로서는 처음 성을 갖게 된 것이다

 

아동반도에서는 단군이래 일반인에게는 성씨가 없었던 것이다 다만 중국에서는 삼황과 오제(三皇五帝) 때 이미성이 있었다하여 대허벌 의씨가 풍(風)성, 염재신농씨가 강(姜)성, 황재헌원씨,(公孫)공손으로 삼황의 각성인 것이다.

 

또 오제로는 소호, 김천(金天)씨, 전욱 고양(高陽)씨 제여, 고신(高辛)씨, 제요국당(?唐)씨.가 모두

 공손이며 순재유우(有虞) 씨 요(姚)씨로 되어 있고 삼대이하로는 말할 것도 없이 사람마다 성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기(箕)씨 조선이라 하여 기자(箕子)로서 그 성이 기씨라 하되, 기자도 실은 기 때에

 봉한 자작(子爵)이었으므로 기자라 칭한 것이며, 신라의 소벌공 만 하더라도 소벌도리의 4자를

양분하여 머리의 2자, 즉 소벌에다 공자(公字)를 붙혀 소벌공이라 한 것이 마치 소벌씨 같이 보이

기도하나 사실 소벌도리는 하나의 이름인 것이지 소벌은 성이요 도리는 이름이었던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그러므로 유리왕 때 사성이야말로,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최초의 성씨요 역사상 오랜

 성씨라 하겠다.

 

양산재(楊山齋) 안내문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탐동

양산 아래 자리 잡고 있는 재각건물(齋閣建物)은 6부촌장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6부촌장은 신라가 건국되기 전 진한 땅에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 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

취산진지촌(취山珍支村). 무산대수촌(茂山大樹村).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 명활산고아촌(明活山高耶村).

의 여섯 촌을 나누어 다스리고 있었는데. 서기전 57년에 알찬 언덕에 모여 알에서 탄생한 박혁거세를 여섯

 촌장이 추대하여 신라의 첫 임근이 되게 하니 이 해가 바로 신라의 건국년(建國年)이 되었다.

 

그후 신라 제3대 유리왕이 6부 촌장들에게 신라건국 송로를 영원히 기리기 위해 6부의 이름을 고치고 각기

 성을 내리게 되니 바로 양산촌은 이씨(李氏). 고허촌은 최씨(崔氏). 대수촌은 손씨(孫氏). 진지촌은 정씨

(鄭氏). 가리촌은 배씨(裵氏). 고야촌은 설씨(薛氏).이다.

이로써 신라에 여섯 성씨(姓氏)가 탄생되었고 각기 시조 성씨가 되었다. 이사당은 1970년 이들 6촌장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 라고 쓰여 진 안내 간판이 세워져있다.

 

* 바로 옆에는 사적245호 인 나정 이 있다

  (박혁거세가 태어난 알 이 있던 곳.)


임하필기(林下筆記) 제12권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최영(崔瑩)의 분묘(墳墓)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 최영이 나라의 정사를 틀어잡고 위세를 중외(中外)에 떨쳤으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털끝 하나라도 취한 것이 없었다. 당시의 재추(宰樞)들이 바둑판 등을 벌이고 서로 불러서 다투어 진수성찬을 마련해서 대접하곤 하였는데, 공은 홀로 기장과 쌀을 섞어 밥을 짓고 거기에 잡다한 채소를 차려서 대접하였으나 손님들이 시장기를 느끼던 터라 이를 말끔히 먹어치웠다. 이에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이것 또한 군사를 부리는 계책이랍니다.” 하였다.
그런데 그는 매양 임견미(林堅味)와 염흥방(廉興邦)의 행위에 대하여 분개하곤 하였는데, 마침내 그 종족을 모조리 주멸(誅滅)해 버렸다. 나중에 사형을 당할 때 말하기를, “내가 평생에 악업(惡業)을 지은 것이 없으나, 다만 임견미와 염흥방을 주멸한 것이 지나친 처사였을 뿐이다. 만약 내가 어떤 탐욕의 마음을 가졌다면 나의 무덤에 풀이 날 것이요, 그렇지 않다면 풀이 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그의 무덤은 고양(高陽)에 있는데 지금껏 붉은 흙이 드러나서 단 한 줌의 풀도 없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이를 ‘붉은 무덤[紅墳]’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