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경인년 산행/2010.6.24. 철원 고석정

철원 (직탕폭포 고석정) 탐방

아베베1 2010. 6. 27. 14:59

 

동문선 제68권
 기(記)
고석정 기(孤石亭記)


석무외(釋無畏)

철원군(鐵員郡)에서 남쪽으로 만여 보를 가면 신선의 구역이 하나 있는데, 서로 전하기를, “고석정(孤石亭)이라.” 한다. 그 정자에는 큰 바위가 우뚝 솟아나 높이가 삼백 척 가량 되고 둘레는 10여 장(丈)쯤 된다. 바위를 타고 올라가면 구멍 하나가 있어서 기어 들어가면 집같이 생긴 층대가 있는데, 10명쯤 앉을 수 있다. 옆에 돌비가 세워져 있는데, 신라 진평왕(眞平王)이 놀러 와서 세운 비다. 구멍에서 나와 꼭대기에 오르면 판판하여 둥근 단(壇)과 같은데 거친 이끼가 끼고 푸른 솔이 둥그렇게 서서 마치 요를 펴고 푸른 일산을 펴놓은 듯하다. 또 큰 내가 동남쪽으로부터 흘러 언덕을 끼고 돌을 굴려 여러 풍류를 갖추어 놓은 것 같고, 바위 밑에서는 고인물이 못이 되어 가까이 가서 보면 벌벌 떨릴 만큼 두려워 마치 신기한 물건이 사는 것 같다. 그 물이 넘쳐 쏟아져서 서쪽으로 3십 리쯤 흘러가다가 서남쪽에서 부딪쳐 남쪽으로 흐르는데, 앞뒤에 모두 바위와 멧부리가 벽처럼 서 있고 단풍나무ㆍ남(楠)나무ㆍ소나무ㆍ상수리나무가 그 위에 있어서 그 신묘하고 맑고 시원하고 기이한 형상은 비록 글에 능하고 그림을 잘 그리는 자라도 아마 비슷하게 묘사하기 어려울 것이다. 내가 지난 무자년 가을에 산인 만행(萬行) 등과 찾아 왔었는데, 처음 볼 때는 정신이 상쾌하더니 마지막에 오르니 사려(思慮)마저 끊어져서 우두커니 앉아 있노라니, 모든 것이 잊혀져 해가 저무는 것도 깨닫지 못하였다. 이에 늦게서야 왔다는 탄식을 하고 다시 찾아오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이미 그 모양을 기록하고 또 시(詩)로써 표한다.


 

가정집 제19권
 율시(律詩)
충숙왕(忠肅王)이 철원(鐵原)에서 사냥할 적에 고석정(孤石亭)에 올라 절구 한 수를 남겼는데, 이때 안부(按部) 정공 자후(鄭公子厚)가 객관(客館)에 썼다. 그리고 뒤에 삼장법사(三藏法師) 조순암(趙順菴)도 그 운에 의거해서 응제(應製)하였다. 이에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없기에 삼가 절구 두 수를 지었다.


엎어진 앞 수레를 누가 제대로 경계할까 / 覆轍誰能後戒前
여기는 바로 태봉의 유적 옛날의 그 산천
/ 泰封遺跡舊山川
왕이시여 먼 사냥은 좋은 계책이 못 된다오 / 勸王遠狩非良策
이유는 하나 간신은 하늘을 겁내지 않으니까 / 只爲姦臣不畏天

산을 등진 관사 그 앞에 펼쳐진 그림 병풍 / 背山官舍畫屛前
반걸음 오르면 백리천이 또 내려다보인다오 / 跬步登臨百里川
술자리에서 다시 만난 우리 어진 태수님 / 置酒更逢賢太守
명절날의 멋진 유람 그야말로 가을 하늘 / 勝遊佳節正秋天


[주D-001]엎어진……산천 : 철원(鐵原)에 도읍을 정한 궁예(弓裔)의 태봉국(泰封國)이 망한 전철을 밟지 않도록 경계해야 할 것이라는 말이다. “앞에 가는 수레가 엎어졌는데도 뒤에 가는 수레가 경계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뒤에 다시 엎어지는 것이다.〔前車覆而後車不誡 是以後覆也〕”라는 말이 한(漢)나라 때 한영(韓嬰)이 지은 《한시외전(韓詩外傳)》 권519장에 나온다.
면암선생문집(勉菴先生文集) 제1권
 시(詩)
4월 3일에 여러 친구와 금강산(金剛山)을 향하여 떠남 임오년

제주의 남은 흥취 봉래산에 붙이니 / 瀛洲餘趣屬蓬山
기이한 구경은 우연히 만난 것이라네 / 奇觀徒從偶爾間
찬양할 문장력 없어 한스럽기만 / 却恨揄揚無大筆
모든 풍물을 등한히 보고 말았네 / 少多風物付虛閒


길에서 부름[途中口號]
좋은 벗은 다시 만나기 어렵고 / 好友知難再
명산 역시 한때 보는 것이지 / 名山亦一時
마음 깨끗하지 못할까 두렵지 / 祗嫌心帶累
머리 흰 것이 어찌 부끄러우랴 / 何愧鬢如絲
세상 생각에 눈물 흐르고 / 念世堪垂淚
나를 잊으니 슬픔 없어지네 / 忘形且塞悲
앞 길에 한없는 경치는 / 前頭無限景
곳곳마다 시를 새로 짓게 하네 / 隨到覔新詩


화적연(禾積淵)
신룡이 돌이 되어 깊은 못에 들어가니 / 神龍幻石走深淵
화적산이 높아 별천지를 이루었네 / 禾積輪囷別有天
창벽 아래로 조용히 걸어서 / 緩步經由蒼壁下
여울 앞에서 읊고 앉았네 / 朗吟坐久碧灘前
헛된 명망은 민생에 도움이 없고 / 虛名無補民生食
장한 유적은 나그네 옷깃이 연했네 / 壯蹟猶勞客袂連
적기에 비를 내려 주는 잠공은 / 賴爾潛功時作雨
만물을 즐겁게 자라게 하네 / 能令萬物各欣然


북관정(北寬亭)
훌훌 나는 지팡이 동쪽을 향하니 / 翩翩筇屐向東州
서쪽에 있는 임금 근심 간절하네 / 回首難寬望美愁
고도의 형세는 무수한 겁난을 겪었고 / 古都形勢經千劫
중요한 요새지로 몇 년이나 지났는가 / 重地關防閱幾秋
세 성씨가 전해 왔다고 들었는데 / 曾聞巨室傳三姓
좋은 명원에 우뚝 솟은 누각을 다시 보네 / 更看名園聳一樓
이곳을 먼저 점거한 주인이 / 却羨主翁先據了
세상 밖에 한가한 자취 부러워라 / 翛然物外任閒遊


창랑정(滄浪亭)
늙은 잣나무 삼삼히 사립문에 비치고 / 老栢森森綠暎扉
두세 촌락의 사람들 세상 소식 몰라 / 兩三村落世塵稀
백 년 옛 정자 산은 그대로 있어 / 百年古榭山無改
초여름 짙은 그늘로 나그네 찾아오네 / 四月濃陰客自歸
작은 길에는 물이 신발에 배고 / 蹊路間關水漸屐
솔 소리엔 바람이 옷을 날리네 / 岸松浙瀝風飄衣
바쁜 걸음 어찌 금강산 약속을 잊으랴 / 忙綠恐負蓬萊約
한가로이 옛 낚시터 찾을 겨를이 없었네 / 不暇閑尋舊釣磯


피금정(披襟亭)
옥녀봉 앞에 냇물이 가로질러 / 玉女峰前一水橫
푸른 들은 손바닥처럼 평평해 / 長提綠野掌如平
좋은 곳은 창랑정을 말했었는데 / 勝區但道滄浪好
금성에 이 정자 있음을 생각지 못했네 / 不意金城又此亭


장안사 동구(長安寺洞口)
단발령 지나니 걸음이 가벼워 / 斷髮嶺過步屧輕
장안사 입구에는 석양이 밝더라 / 長安洞口夕陽明
지방 사람들은 산수의 사람 좋아하며 / 居民不厭江山客
길 인도하는 소리 다투어 전하네 / 呼應爭傳路引聲


영원동(靈源洞)
일만 구릉 맑은 샘 길에 / 萬壑淸泉路
십 리 구름 속을 뚫고 왔네 / 行穿十里雲
특이하게 보이는 꽃도 많았고 / 襍花多異見
그윽한 새들 놀라는 소리 들었네 / 幽鳥駭初聞
벼슬한 사람이 과연 세상을 잊었는가 / 朝紳果忘世
돌 얼굴은 모여서 무리를 이루었네 / 石面簇成羣
기이한 구경 여기에 만족하니 / 奇觀於斯足
어찌 망군봉을 찾을 필요 있나 / 何須向望軍


영원암(靈源菴)의 현판 시를 차운함
벼랑은 깎아지른 듯 골짜기는 깊숙한데 / 蒼崖削立洞天幽
누가 노을을 보내 이곳을 감싸 주었는가 / 誰遣丹霞護別區
세상 밖에서 정을 말하니 반가운 사람 많고 / 論交物外多靑眼
좋은 지경에 와 보니 흰 머리가 부끄러워 / 寓迹靈源愧白頭
물을 따라가니 늦게 핀 꽃이 정말 좋고 / 沿流定好開花晩
벽을 지나며 조밀한 가지가 도리어 싫네 / 過壁還嫌著樹稠
하룻밤 선방 깨끗한 곳에 있으니 / 一席禪房高爽處
수없는 세상일 뜬구름 같네 / 百千世事等雲浮


헐성루(歇惺樓)에서 현판의 시를 차운함
구불구불 돌사다리는 공중에 걸렸는데 / 逶迤石棧掛晴空
철쭉꽃은 푸른 잎에 어울려 더욱 붉어라 / 躑躅相參綠葉紅
일만 이천 봉 끝이 없는 풍경에 / 萬二千峰無盡態
헐성루 아래 석양빛 가운데 있네 / 歇惺樓下夕陽中


만폭동(萬瀑洞)
골이 깊으니 완연 우물 속 하늘 / 洞深宛若井中天
만폭동 좋은 이름 세상에 전했구나 / 萬瀑嘉名出世傳
원화동 기이한 바위 바둑판이 그려지고 / 元化奇巖因畫局
진주담 맑은 물은 스스로 못이 되었네 / 眞珠活水自成淵
앞사람들이 얼마나 읊고 갔는가 / 品題幾度前人手
풍물은 아직도 예와 다름 없구나 / 風物猶依太古年
우습다 동쪽에서 온 천 리 나그네여 / 堪笑東來千里客
쇠잔한 오십 나이에 신선 구한다네 / 頹齡五十始求仙


보덕굴(普德窟)
서른 다섯 폭포 거슬러 돌아가니 / 三五瀑潭沿溯回
백 척의 구리 기둥 산에 의지했네 / 銅欞百尺倚山開
오르고 또 올라라 허공까지 / 躋攀寸寸憑虛地
날리는 옷소매는 학을 탄 것 같네 / 風袂輕如馭鶴來


금강수(金剛水)
금과도 바꾸지 않을 샘물 하나 / 一泉金不換
비우고 가서 채워 오는 사람들 / 虛往實歸人
경장음이란 말 믿을 만하고 / 信矣瓊漿飮
국미춘이란 것이 우습구나 / 彼哉麴米春
폐부만 어찌 맑게 하리오 / 豈徒淸肺腑
정신까지 상쾌하여지네 / 亦可爽精神
각자가 양대로 마시면 / 各自充其量
세상 물욕은 모두 없어지리 / 蕩然掃六塵


중향성(衆香城)
겹겹으로 솟은 돌은 하늘에 꼽혀 있는 듯 / 重重石勢揷天長
만 년을 지나도 변치 않은 옥 같은 눈빛 / 萬劫常含玉雪光
누가 알리 이 산속에 가장 좋은 경치는 / 須識一山中最景
마하연 북쪽에 중향성 둘린 것을 / 摩訶衍北繞城香


비로봉(毗盧峰)
금강산 제일봉 생각이야 오래했지만 / 準擬金剛最屹峯
속세 인연 여기 올 걸 생각조차 못했네 / 俗綠未料的源逢
사방으로 뻗친 가지 본근에 의지했고 / 蔓延枝葉依根本
둘러싼 잔 봉우리 주봉을 쳐다보네 / 羅立兒孫仰祖宗
북두칠성이 지척에서 굽어보는 듯 / 北斗七星臨咫尺
동쪽 바다 만 리가 가슴을 씻어 주네 / 東溟萬里蕩心胸
붉은 놀 푸른 잣나무 그늘진 곳에 / 丹霞翠栢交陰處
높은 아취 참으로 신선을 따르는 듯 / 逸趣眞如羽客從


안문현(鴈門峴)
돌다리 오르니 구름이 신에서 나오고 / 陟磴雲生屐
숲을 헤치니 이슬이 옷에 떨어진다 / 披林露滴衣
높고 낮은 산은 북으로 향했고 / 高低山北拱
멀고 가까운 물은 동으로 흐르네 / 遠近水東歸
풍광이 만족스러워 절로 좋아하여 / 自愛風光足
세상일 드물다고 마다하지 않네 / 莫嫌世事稀
손으로 하늘을 만질 만한 곳이라 / 摩來象緯地
자못 신선을 끼고 나는 것 같네 / 殆若挾仙飛


효운동(曉雲洞)
새벽 구름 사라진 곳에 길이 열리니 / 曉雲收處路微開
끊어진 골 폭포 소리 땅을 움직이네 / 絶壑長川動地來
옛날 떠난 구룡이 가까이 있는 듯하여 / 前去九龍知近在
한 걸음 두 걸음 저절로 빨라만지네 / 行行筇屐十分催


선담(船潭)
천연으로 배처럼 되고 우연이 아닐세 / 天造船形不偶然
예부터 얼마나 많은 사람 끌어 왔던가 / 古來能有幾人牽
폭포의 물 구슬 일만 섬 담을 곳 없어 / 瀑珠萬斛無容載
무단히 길가에 버려두었나 / 棄置尋常路一邊


해금강(海金剛)
한없는 금강산을 또 여기서 찾으리 / 不盡金剛這處尋
뱃노래 두어 곡이 번뇌를 씻어 주네 / 櫂歌數曲散煩襟
열흘간 산을 오르니 다리가 피곤한데 / 一旬勞攘登山脚
만 리에 바다 보는 마음 통쾌하구나 / 萬里通明觀海心
먼 길에 마음 아는 사람 없다더니 / 曾謂天涯知己少
우연히 만난 주인 인정 깊고 깊어 / 偶逢地主屬情深
석양 길에 술과 고기 푸짐하여 / 打魚沽酒斜陽路
천 리의 어버이 생각하니 슬퍼라 / 千里懷親慷慨吟


사선정(四仙亭)에서 현판 시를 차운함
바다에 들어가길 반평생 경영했는데 / 半世經營入海舟
냇물과 산은 구불구불 길은 길기도 하네 / 溪山百折路悠悠
사선정과 삼일포가 어디에 있는가 / 四仙三日知何處
포구 정자에 비친 달빛 가없는 가을이네 / 浦月亭雲不盡秋


만세루(萬歲樓)에서 매죽헌(梅竹軒) 시를 차운하여 중 응명(應溟)과 같이 지음
신계에 절 지은 지 몇 해나 되었던가 / 寺闢新溪閱幾霜
여기서 설법하는 도인은 소년이로세 / 道人說法屬年芳
기나긴 나그네 길엔 친구가 드물더니 / 爲客長程稀伴侶
그대 만난 오늘에는 동행이 좋았다네 / 對君一榻做班行
산은 하늘에 솟아 올라 떨어질 것만 같고 / 山聳雲霄危欲墮
눈 덮인 골에 있는 누각 서늘한 기운 생기네 / 樓當雪壑凛生凉
어여뻐라 고금으로 이곳에 오는 사람들 / 堪憐今古來過地
태반이나 고심하여 부처에 향을 피우네 / 太半心勞供佛香


응명(應溟)과 같이 보운암(普雲菴)에 오름
두세 나그네 석양을 따라오니 / 兩三客趂夕陽來
고상한 그대 모습에 눈이 열리네 / 淸雅如君眼忽開
한 방의 도서는 법계를 갈무리하고 / 一室圖書藏法界
천추의 의발은 영대에 의탁했네 / 千秋衣鉢託靈臺
신계의 어채와 사람은 예와 같은데 / 新溪魚菜人猶古
법당의 향등은 해가 몇 번 돌았을까 / 龍殿香燈歲幾回
참된 이치는 분명하여 둘이 없는 것이니 / 至理分明無二道
어찌 모든 일을 허무에만 붙이는가 / 胡將萬事付塵灰


보낸 운자에 의하여 다시 응명(應溟)에게 주다
높은 나무로 옮긴 새는 감상이 깊어 / 谷鳥遷喬興感多
아름다운 울음 소리 맑고 듣기 좋네 / 嚶其鳴矣轉淸和
팔만 장경을 누가 전해 주었던가 / 經藏八萬誰傳授
삼천 세계를 스스로 깨우쳐 노래하네 / 界大三千自寤歌
젊은 나이 학문을 의론하기 좋고 / 論學堪憐年政富
마음을 말하니 해가 저무는 줄 모르네 / 話心不覺日將斜
그러나 빨리 실지로 돌아오게 / 第冝實地回頭早
이생 다시 얻기란 쉽지 않다네 / 難再此生能幾何


만물초(萬物草)
낭떠러지 비탈길 갈수록 가파른데 / 懸崖仄足路經幽
돌아보니 꼭 하늘에 오른 것 같네 / 回首依然上玉樓
기이한 금수들은 형체가 같지 않고 / 奇獸珍禽無定體
신선과 부처는 그 목적이 같지 않네 / 羽仙金佛不齊頭
조물주가 많은 공을 들인지 알겠어라 / 乃知造物功多費
오는 사람들을 마음껏 놀게 하네 / 能使來人意盡遊
제일 사랑스럽다 맑은 석양 나절에 / 最愛塵淸斜日外
높고 높은 봉우리에 덮인 눈들이 / 崢嶸雪色亂峰稠


구룡동(九龍洞)
이름난 곳은 꼭 귀신이 아낀 것 같아 / 名區自若鬼神慳
두루 보니 유자휴ㆍ한퇴지 그 누구더냐 / 歷覽於今孰柳韓
쌍봉폭은 백 장의 흰 비단을 드리우고 / 百丈練垂雙鳳瀑
구룡탄은 일만 우레가 소리치네 / 萬車雷吼九龍灘
천연스런 형색은 보기 쉬우나 / 天然形色看常易
변화 많은 풍운은 그리기 어려워라 / 變態風雲畵亦難
다만 세속 사람 생각없이 올까 저어해 / 却恐塵人無慮到
해문 십리를 산들이 겹쳐 줄지어 막았네 / 海門十里列重巒


옥류동(玉流洞)
넓은 못에 새롭게 비가 내리니 / 潭濶新添雨
바람 없어도 제 스스로 차갑구나 / 無風也自寒
참으로 신선 세계에 앉은 듯 / 眞如仙界坐
다시 그림 속을 보는 듯하네 / 翻訝畵中看
기울어진 돌을 누가 먼저 오르는가 / 側石登誰捷
위태한 다리는 바라보기도 어려워라 / 危橋望亦難
우리나라에서 이곳이 깨끗하여 / 一邦斯潔淨
돌아보니 서울이 한탄스럽네 / 回首歎長安


비봉폭(飛鳳瀑)
봉황이 여산에 들어간 뒤 찾을 길 없는데 / 飛入廬山不可尋
개중에 서른 여섯 봉우리가 스스로 소리하네 / 箇中六六自然音
원래 고상한 생활 일반 새와는 달라 / 本來棲息殊凡鳥
항상 구름 밖 천 길 마음에 살고 있네 / 雲表展來千仞心


금란굴(金蘭窟)
금란굴에 와 보니 그림으로 그릴 수 없는데 / 行到金蘭畵莫容
굴 속에 붉은빛은 어떻게 된 일인지 / 胡爲窟有放光紅
십주 세계는 지역에 따라 달라지나 / 十洲世界隨形異
사철 풍연은 여기저기가 모두 같네 / 四序風烟滿地同
돌은 진편에 응하여 바다 밖으로 달리고 / 石矗秦鞭驅海外
산은 우부에 연하여 용문산을 뚫었구나 / 巒連禹斧鑿龍中
시속 사람은 자체가 굳음을 알지 못하고 / 時人不識堅頑保
다만 기세의 웅장한 것만 자랑하고 있네 / 指點虛誇氣勢雄


(韻)에 의하여 고저(高底) 이우(李友)에게 주다
비바람 사락사락 여관은 깊어 가는데 / 風雨蕭蕭一館深
밤중에 술을 대하니 마음이 화평해라 / 夜樽對酌太和襟
천 년의 바다를 찾는 사람은 예와 같고 / 千年濱海人猶古
사월이라 산 구경 나그네 멀리서 왔구나 / 四月看山客遠臨
물외에서 노래하니 참으로 방랑의 자취네만 / 物外嘯歌眞浪迹
일변에 있는 집과 나라 언제나 관심이 되네 / 日邊家國每關心
어찌 알까 꿈같이 잠깐 지나가는 이 땅에 / 那知暫宿蘧蘧地
수없이 좋은 시를 어찌 생각했으랴 / 滿軸瓊章遇賞音


원산 남산(元山南山)
생각이 있어 이른 아침에 왔건만 / 有心筇屐詰朝來
슬프다 난리 소식 온 땅에 가득하네 / 滿目腥塵足一哀
하늘은 사심이 없어 고르게 비를 내리는데 / 天自無私均雨露
사람은 무슨 일로 제 곳을 잃었는가 / 人何失所幻池臺
변방에 멀리 부는 바람 노래 세 곡조요 / 塞風千里歌三闋
포구에 달빛 깊은 밤엔 술이 두어 잔 / 浦月深更酒數杯
우리 강산이 이러한 수치를 당하니 / 大地江山羞至此
오늘날 누가 변방 지킬 인재일까 / 當今誰是禦邊才


표표연정(飄飄然亭)
현판을 만지면서 짐짓 지지한데 / 摩挲扁額故遲遲
봉옹이 돌아가던 때를 추억해 보네 / 回憶蓬翁羽化時
무궁한 앞길을 그대는 재촉지 말라 / 不盡前程君莫促
이렇게 좋은 집에 다시 오기 어려우리 / 團圓此閣更難期


가학루(駕鶴樓)
포로와 봉선이 지나간 누각에 / 圃老蓬仙過去樓
석양의 먼 나그네 짐짓 주춤거리네 / 斜陽遠客故遲留
성을 두른 산은 첩첩 높고 낮으며 / 高低疊嶂連城繞
지세를 안고 흐르는 물 길기도 하네 / 環抱長川護境流
학을 타고 속된 세상 잊고 싶고 / 駕鶴欲忘烟火世
사람을 생각하니 가을이 슬프구나 / 懷人自感水雲秋
말미 얻은 관리들은 무슨 마음으로 / 何心邊吏乘餘暇
나를 맞아 부질없이 누각에 쉬게 하나 / 邀我空堂恁地休


석왕사(釋王寺)
짧은 낭떠러지 겨우 문 하나 통하고 / 短崖如束劣通門
건너 마을 종소리 구름 밖에 들리네 / 雲外鍾聲隔一村
방초가 꽃에 섞이니 봄이 다하지 않고 / 芳草間花春不盡
무성한 솔숲이 해를 가려 낮인데도 어둡구나 / 亂松蔽日晝常昏
임금 은혜 입은 지 세 조정을 거쳤는데 / 恩綸偏被三朝眷
부처의 보좌는 만겁이 지나도 편안했네 / 寶座因安萬刧魂
백발의 한가한 중도 나라 근심하여 / 白髮閒僧亦憂國
때로는 불평한 의론에 손바닥을 치네 / 有時抵掌不平論


분수령(分水嶺)
조물주도 이곳에 이르러 깊이 생각하였나 / 化工到此揣摩深
일정한 방향에 조금도 변동하지 않았네 / 一定方維自不侵
동으로 나간 샘물이 두 경계를 이루고 / 東出泉源分二界
남을 향한 산맥은 중심을 표했어라 / 南奔山脉露中心
잠시 놀러와 강산의 맛을 다 알 수 있으랴 / 小遊豈盡江湖趣
좋은 붓으로 때로 오언 칠언 시를 쓰네 / 彩筆時揮五七吟
아쉬워라 살처럼 곧은 국경선 길에 / 堪惜關河如矢道
짐 실은 소와 말을 금하는 사람 없느뇨 / 馬牛駄載蕩邊禁


요동백(遼東伯廟)
큰 의리는 중국에 진동하였고 / 大義擎天動夏夷
영웅의 모습 산악 정기에서 났더라 / 稟精山嶽獨英姿
춘추필법 본받은 화양의 붓이 / 誰知褒袞華陽筆
긴 밤에 태양 같음을 누가 알리 / 劈破重陰閉九時


고석정(高石亭)
해산의 남은 흥취 다시 어디서 찾으리 / 海山餘趣更何求
동주의 고석정이 그윽한 별천지라네 / 高石東州別界幽
여기는 현포라 말할 수 있으니 / 只此堪誇涉玄圃
무단히 단구 찾으려 수고하랴 / 亦曾多事訪丹丘
시절이 어렵다고 가벼이 물러남은 옳지 않고 / 時艱不合思輕退
몸 건강하니 먼 여행이 가장 좋더라 / 身健偏宜賦壯遊
어버이는 늙어 석양이 가까워져 / 最是親堂西日迫
여울에 내리는 배처럼 돌아가고파 / 歸心爭駛下灘舟


순담(蓴潭)
녹야의 당년에 의미가 맑았건만 / 綠野當年意味淸
나그네 이르니 산새만 울고 있네 / 客來只有谷禽鳴
뜬 구름 흐르는 물 아득한 속에 / 浮雲流水迷茫地
순담을 캐는 마음 한이 없구나 / 采采潭蓴不盡情


삼부연(三釜淵)
선원을 두루 다닐제 배는 소용없네 / 踏遍仙源不假船
장관을 모두 구경함은 하늘이 주었지 / 窮途壯觀亦由天
구룡폭포 아래서는 나마저 잊었고 / 九龍瀑下形俱忘
삼부담에서는 더욱 흥겨웠어라 / 三釜潭中興又牽
벼랑에 오르니 발 붙이기 어렵고 / 攀去緣崖難付屐
풀밭에 앉으니 좋은 자리를 편 듯 / 坐來班草更成筵
문득 연로의 청고한 절의에 탄식하노라니 / 却歎淵老淸高節
시내 북쪽에 아직도 옛 샘이 있다네 / 溪北猶留舊飮泉


용화(龍華)
옛사람은 누구와 이곳을 열었던가 / 昔人破僻與誰謀
한 줄기 물 근원이 십 리에 깊숙하지 / 一派溪源十里幽
골에 연하는 가득하여 한가롭게 살려네 / 滿壑烟霞閑計活
봄날 화조를 감상하니 풍류가 예스럽지 / 賞春花鳥舊風流
부질없는 인생 장주의 꿈이 회상되고 / 浮緣多感莊周夢
세상일은 송옥의 가을이 더욱 슬프지 / 時事偏悲宋玉秋
떠도는 자취 산수의 흥취도 많았으니 / 浪迹曾誇仁智趣
즐거운 이때 험하다고 어찌 사양하리 / 何辭夷險盡情遊


양문 노중(梁文路中)
산수에 놀 언약이 이루어져서 / 幸遂登臨約
옛날 건넜던 다리 다시 찾았네 / 還尋舊渡橋
고향엔 화조도 가까이 있을텐데 / 故鄕花鳥近
선경은 해산에 멀리 있다네 / 仙境海山遙
손 잡고 먼 길 동행했더니 / 携手同千里
이별하는 때가 되니 슬프구나 / 分驂悵一朝
평소에 멀리 유람하는 뜻이 / 平生弧矢志
오늘에 매우 만족하여라 / 到此十分饒

[주D-001]경장(瓊漿) : 음료(飮料)로 아주 맛있는 것이라 한다. 《초사(楚辭)》 송옥(宋玉)의 초혼(招魂)에 “화려한 술잔 이미 베풀어졌는데 경장도 있네[華酌旣陳 有瓊漿些]” 하였다.
[주D-002]국미춘(麴米春) : 술 이름. 《주소사(酒小史)》에 ‘운안(雲安)의 국미주(麯米酒)’라 하였고, 두보(杜甫)의 시에, “이 술 한 잔을 마시면 곧 취한다.” 하였다.
[주D-003]진편(秦鞭) : 채찍으로 돌을 때려 옮겼다는 진 시황(秦始皇)의 고사. 진 시황이 석교(石橋)를 놓아 바다에 나가 해가 뜨는 것을 보려 했다. 그러자 신인(神人)이 돌을 굴려 바다를 메우는데, 돌이 빨리 구르지 않자 채찍으로 돌을 때리니 돌에서 피가 났다 한다.
[주D-004]우부(禹斧) : 우(禹)가 천하의 하천(河川)을 개척할 때 용문산(龍門山)을 도끼로 끊었다 하여 우부(禹斧) 또는 우착(禹鑿)이라 한다. 《淮南子》
[주D-005]봉옹(蓬翁) : 양사언(楊士彦)을 가리킨다. 그의 호가 봉래이다. 그는 회양 군수(淮陽郡守)로 있으면서 금강산을 자주 다녔다.
[주D-006]포로(圃老)와 봉선(蓬仙) : 포로는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를, 봉선은 양사언을 이름.
[주D-007]요동백(遼東伯) : 광해군 때 명 나라가 건주위(建州衛)를 칠 때 원병(援兵)으로 갔던 김응하(金應河)를 가리킨다. 그가 전사하자, 명 신종(明神宗)은 그에게 요동백을 추봉했다.
[주D-008]화양(華陽) : 송시열(宋時烈)을 뜻한다. 송시열이 말년에 청주(淸州)의 화양동에 은거했다.
[주D-009]현포(玄圃) : 곤륜산(崑崙山) 위에 있다는 신선(神仙)이 살고 있던 곳.
[주D-010]단구(丹丘) : 《초사(楚辭)》에 “단구는 신선들이 노는 곳으로 사람이 죽지 않는 고을이다.” 했다.
[주D-011]연로(淵老) : 김창흡(金昌翕)을 지칭한다. 그의 호가 삼연(三淵). 그는 삼부연(三釜淵)의 경치를 좋아하여 자신의 호를 삼연이라 했다.
[주D-012]장주(莊周)의 꿈 : 호접몽(胡蝶夢)과 같은 말.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 다녀 자신이나 세상일을 완전히 잊었다고 하였다. 《莊子 齊物論》
[주D-013]송옥(宋玉)의 가을 : 송옥(宋玉)은 전국(戰國) 때 초(楚) 나라 사람으로 굴원(屈原)의 제자. 사부(詞賦)에 능하여 비추부(悲秋賦)를 지었으므로 가을을 말할 때 흔히 송옥을 일컫는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7권
 강원도(江原道)
철원도호부(鐵原都護府)

동쪽으로는 김화현(金化縣) 경계까지 32리, 남쪽으로는 경기(京畿) 영평현(永平縣) 경계까지 43리, 서쪽으로는 같은 도(道)의 연천현(漣川縣) 경계까지 43리, 같은 도의 삭녕군(朔寧郡) 경계까지 29리, 북쪽으로는 평강현(平康縣) 경계까지 32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2백 21리이다.
【건치연혁】 본래는 고구려 철원군(鐵圓郡)이다 모을동비(毛乙冬非)라고도 한다. 신라의 경덕왕(景德王)이 철성군(鐵城郡)이라고 고쳤다. 뒤에 궁예(弓裔)가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의 옛 땅을 침략해 차지하고 송악군(松嶽郡)에서 여기로 와서 도읍을 정하고, 궁실을 지어 더할 수 없이 사치스럽게 하였으며, 나라 이름을 태봉(泰封)이라고 하였다. 고려 태조가 즉위하게 되어서는 수도를 송악으로 옮기고, 철원을 동주(東州)로 고쳤다. 성종 14년에는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가 목종(穆宗) 8년에 혁파하였다. 현종(顯宗) 9년에는 지주사(知州事)로 고쳤으며, 고종(高宗) 41년에는 현령으로 낮추었다가 뒤에 목으로 승격시켰다. 충선왕(忠宣王) 2년에 모든 목(牧)을 없앨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부(府)로 낮추었다. 본조에서는 태종(太宗) 13년에 통례에 따라 도호부(都護府)로 고쳤다. 세종(世宗) 16년에는 경기에서 본도에 예속시켰다.
【관원】 부사(府使)ㆍ교수(敎授) 각 1인.
【군명】 철원(鐵圓)ㆍ철성(鐵城)ㆍ동주(東州)ㆍ육창(陸昌)ㆍ창원(昌原).
【성씨】 본부(本府) 최(崔)ㆍ송(宋)ㆍ장(張)ㆍ김(金)ㆍ류(柳)ㆍ정(鄭)ㆍ형(邢)ㆍ신(辛)ㆍ고(高)ㆍ한(韓)ㆍ조(曹)ㆍ노(盧)ㆍ안(安)ㆍ이(李)ㆍ채(蔡)ㆍ허(許)ㆍ박(朴)ㆍ방(芳), 방(邦) 속성(續姓).
【산천】 고암산(高岩山) 부의 북쪽 40리에 있다. 궁예 때에 진산(鎭山)으로 하였다. 백악산(白嶽山) 부의 동북쪽 35리에 있다. 수정산(水精山) 부의 남쪽 15리에 있다. 남산(南山) 부의 남쪽 35리에 있다. 효성산(曉星山) 부의 서북쪽 30리에 있다. 보개산(寶盖山) 부의 남쪽 17리에 있다. 불견산(佛見山) 부의 서쪽 40리에 있다. 가을마현(加乙磨峴) 부의 서쪽 40리에 있다. 재송평(裁松坪) 부의 북쪽 45리에 있다. 대야잔평(大也盞坪) 부의 동쪽 10리에 있다. 옛날에는 고동주평(古東州坪)이라고 일컬었다. 누른 띠풀이 시야 끝까지 깔려 있다. 재송평과 함께 강무장(講武場)이 된다. 우리 세종이 일찍이 여기에서 사냥을 하였다. 체천(砌川) 부의 동쪽 20리에 있다. 근원이 회양부(淮陽府) 철령에서 나온다. 또 남쪽으로 흘러가서 경기 양주(楊州) 북쪽으로 들어가 대탄(大灘)이 된다. 양쪽 언덕에 모두 섬돌 같은 석벽(石壁)이 있으므로 체천이라고 이름 지은 것이다.
【토산】 자석(磁石)ㆍ옻[漆]ㆍ오미자(五味子)ㆍ인삼(人蔘)ㆍ송이[松蕈]ㆍ꿀[蜂蜜]ㆍ복령(茯苓)ㆍ지황(地黃)ㆍ산무애뱀[白花蛇]ㆍ쏘가리[錦鱗魚]ㆍ누치[訥魚].
【봉수】 소이산 봉수(所伊山烽燧) 부의 서쪽으로 8리에 있다. 동쪽으로 평강현(平康縣)의 토빙산(吐氷山)과 진촌산(珍村山)에 응하고, 남쪽으로 적골산(適骨山)에 응한다. 적골산 봉수(適骨山烽燧) 부의 서쪽으로 46리에 있다. 북쪽으로 소이산(所伊山)에 응하고, 남쪽으로 경기 영평현(永平縣) 미로곡(彌老谷)에 응한다.
【누정】 고석정(孤石亭) 부의 동남쪽으로 30리에 있다. 바윗돌이 우뚝이 서서 동쪽으로 못물을 굽어본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신라 진평왕(眞平王)과 고려 충숙왕(忠肅王)이 일찍이 이 정자에서 노닐었다고 한다. ○ 고려의 중 무외(無畏)의 기문에, “철원군의 남쪽으로 만여 보를 가면 고석정(孤石亭)이 있는데, 큰 바위가 우뚝 솟았으니 거의 3백 척이나 되고 둘레가 십여 길이나 된다. 바위를 타고서 올라가면 하나의 구멍이 있는데 기어 들어가면 방과 같다. 층대(層臺)에는 여남은 명이 앉을 만하다. 그 곁에 신라 진평왕이 남긴 비석이 있다. 다시 구멍에서 나와 꼭대기에 오르면 펀펀하여 둥근 단(壇)과 같다. 거친 이끼가 입혀져서 돗자리를 편 것 같고, 푸른 솔이 둘러서 일산을 펴 놓은 것 같다. 또 큰 내가 있는데 동남쪽으로부터 흘러온다. 벼랑에 부딪치고 돌을 굴리는 소리가 마치 여러 가지 악기(樂器)가 한꺼번에 연주되는 것 같다. 바위 아래에 이르러서는 움푹 패여서 못이 되었는데 굽어보면 두려워 다리가 떨려서 마치 그 속에 신물(神物)이 살고 있는 것 같다. 그 물이 서쪽으로 30리쯤 가서는 남쪽으로 흐른다. 앞뒤에는 다 바위산이 벽처럼 서 있고, 단풍나무와 남나무와 소나무와 싸리나무가 그 위에 섞여 나 있다. 맑고 서늘하고 기이하니 비록 문장을 잘 짓고 그림을 잘 그리는 자라도 비슷하게 표현하기 어려울 것이다. 나는 무자년 가을에 산인(山人) 만행(萬行) 등과 함께 가서 보고는 멍하니 무아(無我)의 경지에 들어 해가 지는 것도 느끼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늦게서야 놀러 온 것을 한탄하였다. 이미 그 형상을 기술하고, 또 시로 기록하노라니, ‘푸른 바위가 물 옆에 높다랗게 솟았는데, 양쪽 언덕에는 가을 산이 비단 병풍을 펼쳤네. 저녁 때의 솔바람 소리 맑아서 신선이 《황정경(黃庭經 도교(道敎) 경문의 이름)》 읽는 소리를 듣는 듯하네.” 하였다.
○ 김양경(金良鏡)의 시에, “태초에 누가 이 정자를 지었던가? 산등성 일만 길이 허공에 걸쳐 있네. 몸이 가벼워지니 홀연히 바람이 옷에서 나는 것을 깨닫고, 걸음이 편안하니 바야흐로 이끼가 신을 받쳐 주는 것을 알겠구나. 학 곁의 소나무는 늙어서 용의 수염같이 푸르고, 따오기 밖에 노을이 날리니 물고기 꼬리가 붉게 보인다. 철원(鐵原)은 기름지고 아름다운 좋은 땅인데, 옥루(玉樓)와 금전(金殿)이 다 가시밭이 되었구나. 고기 잡고 풀 베는 것을 가리키면서 옛과 지금에 느낌이 있어, 글귀를 찾아 읊조릴 제 오사모(烏紗帽)가 비스듬하네.” 하였다.
○ 이곡이 충숙왕의 시 뒤에 차운(次韻)한 시에, “누가 능히 전인(前人)의 잘못을 보고 후일을 경계하겠는가. 이곳은 태봉(泰封)의 유적인 옛 산천이라네. 임금께 권하여 멀리 거둥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건만, 다만 간신들이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라네.” 하였다.
북관정(北寬亭) 부의 북쪽에 있다. ○ 강회백(姜淮伯)의 시에, “그때 도탄에 빠져서 몇 고을이 곤란하였던고. 올라서 바라보노라니 옛일이 생각나 새로운 수심이 갑절이나 되네. 아로새긴 담장과 높은 집들의 번화함이 다 사라지니, 깨어진 주춧돌과 무너진 담에 가을이 쓸쓸하구나.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굽어보매 감개가 무량하고, 산과 물을 돌아보노라니 맑고 그윽하여라. 흑금원(黑金原 철원(鐵原))의 천년 땅에 벼와 기장 이삭이 늘어져, 멀리 노니는 사람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구나.” 하였다.
【학교】 향교 부의 남쪽 3리에 있다. 본래 고려 태조가 궁예에게 벼슬하고 있을 때에 살던 옛집이다. 담장의 남은 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
【역원】 용담역(龍潭驛) 부의 서쪽으로 10리에 있다. ○ 안축의 시에, “초가집에 유숙하노라니, 서리가 짙게 내려 기온이 차갑구나. 힘들게 왔기에 아픈 다리를 펴고, 단정히 앉아서 성근 수염을 비빈다. 집이 오래되어 먼지가 벽에 깃들었고, 창밖의 밝은 달은 처마에 걸렸네. 마음이 바쁘니 잠이 편치 않아, 홀연히 밤이 너무 긺을 깨닫노라.” 하였다. 풍전역(豐田驛) 부의 남쪽으로 30리에 있다. 통화원(通化院) 부의 동쪽으로 39리에 있다. 권화원(權化院) 부의 서쪽으로 35리에 있다.
【불우】 석대사(石臺寺) 보개산(寶盖山)에 있다. 당 나라 정원(貞元) 8년에 사냥꾼 이순석(李順石)이라는 자가 여기에서 돌부처를 보고 절을 세웠다고 한다. 고려 민지(閔漬)의 기(記)가 있다. 지장사(地藏寺) 보개산에 있다. 이색(李穡)의 중수기(重修記)가 있다. ○ 이색의 시에, “산에 노니는 맛이 사탕수수를 씹는 것 같아서, 점점 가경(佳境)으로 들어가는 것을 사랑한다. 구름을 바라보노라니 함께 무심해지고, 냇가를 거닐면서 홀로 그림자만을 짝한다. 종과 목어 소리에 숲과 골짜기는 비었는데, 전각(殿閣)에는 소나무와 삼나무가 차가워라. 매우 청전(靑纏)을 변별(辨別)하려고 바람 앞에 서서 다시 많이 반성하노라.” 하였다. 심원사(深原寺)ㆍ성주암(聖住菴)ㆍ지족암(知足菴)ㆍ용화사(龍華寺)ㆍ운은사(雲隱寺) 모두 보개산에 있다. 적석암(積石菴) 고암산(高岩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부의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부의 서쪽으로 2리에 있다. 여단(厲壇) 부의 북쪽에 있다.
【고적】 풍천원(楓川原) 궁예의 도읍지로 부의 북쪽 27리에 있다. 외성(外城)의 둘레는 1만 4천 4백 21척이고, 내성(內城)의 둘레는 1천 9백 5척으로, 모두 흙으로 쌓았다. 지금은 절반이 퇴락하였다. 궁전의 옛터가 뚜렷이 아직도 남아 있다. 고석성(孤石城) 고석정(孤石亭) 옆에 있는데 돌로 쌓았다. 둘레가 2천 8백 92척이다. 지금은 폐지되었다. 신제처(新堤處) 부의 남쪽으로 20리에 있다.
【인물】 고려 최준옹(崔俊邕) 태조(太祖)를 도와 공신(功臣)이 되었다. 최석(崔奭) 준옹의 5대손으로, 처음 이름은 석(錫)이다. 과거에 장원 급제하여 영광스럽고 중요한 벼슬을 역임하고, 태보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감수국사 상주국 판상서이례부사(太保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監修國史上柱國判尙書吏禮部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예숙(譽肅)이다. 최유청(崔惟淸) 최석의 아들로,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다. 학문을 좋아하여 예종조(睿宗朝)에 급제하였다. 벼슬이 여러 번 옮기어 좌사간(左司諫)에 이르렀을 때에 상주(尙州)의 수령으로 나갔으며, 지주사(知奏事)를 지내고 중서문하평장사에 임명되었다. 뒤에 집현전 태학사(集賢殿太學士)로서 판예부사(判禮部事)가 되어서 치사(致仕)하였다. 시호는 문숙(文淑)이다. 정중부(鄭仲夫)의 난에 문신(文臣)들은 모두 해를 입었으나, 여러 장수들이 평소에 최유청의 덕망에 감복하였으므로 군사들을 경계시켜 그의 집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기복(期服)ㆍ대공(大功)ㆍ소공(小功)의 복제(服制)가 있는 친척까지도 모두 화를 면하였다. 아들이 여덟 명이었는데, 네 명이 급제하여 해마다 관청에서 그의 어머니에게 양곡을 주었다. 최당(崔讜) 유청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글을 잘 지었다. 명종(明宗) 초에 정언(正言)이 되어 벼슬이 중서문하평장사에 이르렀다. 벼슬에서 물러나 한가로이 살면서 그의 집에 현판을 걸기를, ‘쌍명(雙明)’이라고 하였다. 그의 아우 최선(崔詵)과 태복경(太僕卿) 장자목(張自牧), 동궁시독학사(東宮侍讀學士) 고영중(高塋中), 비서성(秘書省) 백광신(白光臣), 사공(司空) 이준창(李俊昌), 상서(尙書) 현덕수(玄德秀), 수사공(守司空) 이세장(李世長), 대사성(大司成) 조통(趙通) 등과 함께 기로회(耆老會)를 만들어 이리저리 놀러 다니면서 스스로 즐기니, 당시 사람들이 지상의 신선이라 하고, 그의 모습을 그려 돌에 새겨서 후세에 전하였다. 시호는 정안(靖安)이다. 최선(崔詵) 최당의 아우이다. 문장과 학술로 세상에 알려졌으며, 마음이 담박하고 말수가 적었으며, 가문이 좋다고 하여 스스로 높은 체하지 않았다. 벼슬이 여러 번 옮겨서 참지정사(叅知政事)에 이르렀다. 신종조(神宗朝)에 나이가 많고 덕이 높다고 하여 태부문하시랑 동중서평장사 판이부사(太傅門下侍郞同中書平章事判吏部事)에 임용되었다가, 얼마 뒤에 나이를 이유로 치사하였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다. 희종(熙宗)의 묘정(廟庭)에 배향하였다. 최린(崔璘) 최당의 손자이고, 유청의 증손이다. 국량이 크고 깊어서 젊어서부터 작은 행실에는 구애받지 않고서 호협(豪俠)한 사람들과 술자리에 모여 놀더니, 나이 거의 3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분발하여 글을 읽었다. 강종조(康宗朝)에 급제하여 대간(臺諫)을 역임하고, 벼슬이 문하시랑평장사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최종준(崔宗峻) 최선의 아들이다. 신종조(神宗朝)에 장원 급제하였고, 고종조(高宗朝)에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다.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지 않고 이르기를, “최시중(崔侍中)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절조로 청렴하게 나라에 봉사하였는데, 어찌 상례(常例)에 따라 갑자기 벼슬을 그만두게 하겠는가.” 하고, 궤장(几杖)을 하사하였다. 최온(崔昷) 최선의 손자이다. 고종조(高宗朝)에 급제하여 벼슬이 태부 중서시랑평장사(太傅中書侍郞平章事)에 이르렀다. 치사하고 졸하였다. 최문본(崔文本) 최온의 아들이다. 충렬왕(忠烈王) 초기에 승선(承宣)에 임명되어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내고 졸하였다. 모습이 거대하며, 침착하고 무게가 있어서 대신(大臣)의 면목이 있었다. 일찍이 중국의 사신이 사람들에게 묻기를, “너희 나라에 이 사람 같은 자가 몇 사람이냐?” 하였다. 최평(崔坪) 최선의 손자이다. 고종조에 급제하였다. 벼슬이 여러 번 옮겨서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가 되었으나, 백부 종준의 친혐(親嫌)으로 인하여 입성(入省)하지 못하였다. 최옹(崔雍) 유청의 증손이다. 고종조에 급제하였다. 벼슬이 여러 번 옮겨서 전리좌랑(典理佐郞)이 되었다. 충렬왕이 태손(太孫)으로 있을 때부터 맞아다가 스승을 삼더니, 즉위하게 되어서는 부지밀직사사 한림학사(副知密直司事翰林學士)에 승진시켰는데 치사하고 졸하였다. 학생들을 모아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더니 그 문인으로서 공경(公卿)이 된 자가 매우 많았다. 최영(崔瑩) 최옹의 손자이다. 풍모가 걸출하며 힘이 남보다 뛰어났다. 처음에는 양광도 도순문사(楊廣道都巡問使)의 휘하에 예속되어 여러 번 왜적을 사로잡았으므로 무용(武勇)으로써 알려졌다. 홍건적의 난리 때에는 안우(安祐)ㆍ이방실(李芳實) 등과 함께 경도(京都)를 수복하여 공훈이 일등에 책록(冊錄)되었다. 김용(金鏞)을 죽이고, 덕흥군(德興君)을 내쳤으며, 하치(哈赤)를 토벌하고 왜적을 격파하였으며, 임견미(林堅味)ㆍ염흥방(廉興邦)을 죽인 것이 모두 최영의 힘이었다. 최영은 천성이 깨끗하여 상으로 내리는 전지와 노비를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그러나 대체(大體)에는 어두워서 여러 사람의 의론을 돌아보지 않고 계책을 결단하여 요(遼)를 치다가 천자(天子)에게 죄를 지으니, 문하부 낭사(門下部郞舍) 허응(許應) 등이 소를 올려 논죄를 청하여 드디어 최영을 참형하였다. 간대부(諫大夫) 윤소종(尹紹宗)이 논하기를, “최영의 공은 온 나라를 덮고, 죄는 천하에 가득하다.” 하니, 세상에서는 명언이라고 하였다. 본조에 이르러서 무민(武愍)이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효자】 고려 태성길(太成吉) 홍건적이 쳐들어왔을 때에, 태성길은 74세의 어머니를 업고 가서 그 난을 면할 수 있었다. 죽을 때까지 변함없이 효도로 봉양하였다. 조정에서 가상히 여겨 정려하였다.
【제영】 산은 옛 나라 천년의 한을 머금고 강회백의 시에, “산은 옛 나라 천년의 한을 머금고, 구름은 긴 공중 만리의 마음을 안았네. 예부터 흥하고 망하는 것이 다 까닭이 있으니, 원컨대 전인의 잘못을 보고 미래와 현재를 경계할지어다.” 하였다. 지세가 험준한 나라가 몰락된 뒤에 조준(趙浚)의 시에, “지세가 험준한 나라가 몰락한 뒤에, 반천년의 문물(文物)이 발흥하는 때로구나.” 하였다. 푸른 산은 그림같이 평야를 둘렀고 이맹균(李孟畇)의 시에, “푸른 산은 그림같이 평야를 둘렀고, 푸른 나무는 바람을 머금어 가을을 움직이네.” 하였다. 매미가 교목(喬木)에서 울어 초가을이 움직인다. 이원(李原)의 시에, “풀에 묻힌 옛 수도(首都)에 석양이 밝은데, 매미가 교목에서 울어 초가을이 움직인다.” 하였다. 예와 같이 어룡(魚龍)들은 적막한 가을일러라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나라가 무너져 산하가 한 고을이 되었구나. 태봉(泰封)의 남은 자취, 사람으로 하여금 수심하게 하네. 지금은 사슴들이 와서 노니는 곳, 예와 같이 어룡들은 적막한 가을일러라. 지는 해 엷은 연기는 하늘과 함께 멀고, 떨어진 꽃 나는 버들개지는 물과 같이 유유하네. 당시의 거울의 참언(讖言)은 참 임금께 돌아갔는데, 가소롭다 궁예왕은 제멋대로 놀기만 일삼았으니.” 하였다. 『신증』 관심각(觀心閣) 위에는 풀만 속절없이 우거지고 종실(宗室) 심원(深源)의 시에, “한 마리 용이 철원에서 날아 나오더니, 해하(垓下)의 미인(美人)이 가만히 시름이 맺혔네. 흥하고 망함은 몇 번이나 은 나라의 갑자(甲子)를 지났던가, 옳고 그른 것은 모두 진(晉) 나라의 춘추(春秋)에 붙이노라. 관심각 위에는 풀만 공연히 우거지고, 붓을 떨어뜨린 뜰 앞에는 구름이 절로 유유하구나. 사슴들은 궁예의 한을 모른 채 석양의 강가에서 한가로이 노니는구나.” 하였다. 가을이 깊으니 낙엽이 우물을 메우고 권건(權建)의 시에, “동주(東州) 성 아래에 풀이 우거졌구나, 한번 바라보니 쓸쓸한 광경 흥망성쇠를 느끼게 하네. 끝내 신광(神光)은 찾을 곳이 없는데, 당시의 기이한 참언을 누가 알았겠는가. 가을이 깊으니 낙엽은 우물을 메우고, 달빛이 검으니 놀란 고라니가 옛 옥지(玉墀)에 올라오네. 끝없이 이어지는 흥망에 하늘도 늙었으리. 강산이 이러하니 새 시나 읊으리라.” 하였다. 천년의 성루(城壘)에 잡초만 우거졌구나 성현(成俔)의 시에, “웅번(雄藩) 철원은 옛날 도읍이라, 나그네 와서 말없이 수심만 머금네. 패상(沛上)에 풍운(風雲)이 드날리던 날, 함양(咸陽)에는 연기와 불꽃이 참담하던 때였다. 두 나라의 흥망이 이제 모두 적막한데, 천년의 성루에 잡초만 우거졌구나. 궁예왕이 전인의 잘못을 거울삼지 않고, 왕도(王都)의 땅을 미록(麋鹿)에게 주어 노닐게 하였네.”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정종(正宗) 조에 회양진(淮陽鎭)을 이곳으로 옮겼다.
【방면】 동변면(東邊面) 처음은 5리, 끝은 10리다. 서변(西邊) 끝이 10리다. 송내(松內) 남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다. 관인(寬仁) 남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50리다. 오은동(於隱洞) 동북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30리다. 북면(北面) 처음은 15리, 끝은 45리다. 묘장(畝長) 서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30리다. 갈미(乫未) 처음은 20리, 끝은 50리다. 골파(坡) 서쪽으로 처음과 끝이 20리다. 만종(萬宗) 동쪽에 있다. 외서(外西) 서쪽에 있다. 백산(白山) 서쪽에 있다. 이상 세 면(面)은 지도에 실려 있다.
【성지】 태봉시도성(泰封時都城) 풍천(楓川)에 있는데 원래 내성(內城)의 둘레는 1천 9백 5척이고, 외성(外城)의 둘레는 2만 4천 4백 21척이며 가운데에 궁전의 옛터가 있다. 고석성(孤石城) 동남쪽으로 30리에 있는데, 둘레가 2천 8백 92척이다. 옆에는 고석정(孤石亭)이 있는데 진평왕(眞平王)과 충숙왕(忠肅王)이 일찍이 이 정에서 놀았으며 바위가 거의 3백 척이나 우뚝 솟았다. 둘레는 10여 장(丈)으로 위에는 한 개의 구멍[穴]이 있는데, 기어서 들어가면 마치 집과 같아 10여 명이 앉을 수 있다. 옆에는 신라 진평왕(眞平王) 비가 있고, 전후에는 바윗돌이 벽처럼 서 있고, 정자에 못의 물은 바위 아래에 이르러 못이 되는데 가까이 가 보면 무섭다.
【창고】 동창(東倉) 동남쪽으로 30리에 있다. 서창(西倉) 서남쪽으로 25리에 있다. 북창(北倉) 북쪽으로 15리에 있다.
【진도】 체천진(砌川津) 남쪽으로 40리에 있으며 영평(永平)과 통하는데, 겨울에는 다리를 놓고 여름에는 배로 건넌다.
【누정】 북관정(北寬亭)ㆍ진동루(鎭東樓)ㆍ가학루(駕鶴樓) 모두 읍내에 있다.

[주D-001]붓을 떨어뜨린 뜰 : 처음에 최응(崔凝)과 고려 태조 왕건(王建)은 함께 궁예에게 벼슬하였다. 하루는 궁예가 왕건에게, “경이 어젯밤에 사람을 모아 놓고 반역을 꾀한 것은 웬일인가?” 하니, 왕건이 웃으며 부인하였다. 궁예는 “경은 나를 속이지 마라. 나는 능히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기 때문에 안다.” 하였다. 그때 최응이 장주(掌奏)로서 옆에 있다가, 일부러 붓을 떨어뜨리고 그것을 집으러 가는 체하면서, 뜰에 내려가 왕건에게 시인하라고 귀띔하여 왕건으로 하여금 화를 면케 한 고사(故事)가 있다.

세종 2년 경자(1420,영락 18)
 3월1일 (기사)
두 임금이 고석정에서 사냥하여, 상왕이 노루를 맞히다

두 임금이 철원부의 고석정(高石亭)에서 사냥하여, 상왕이 친히 노루를 쏘아 맞혔다. 환관 한길문(韓吉文)을 보내어 노루를 대비와 공비(恭妃)의 두 전에 보내고, 의정부와 육조에 노루와 술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또 옛 동주(東洲) 벌에서 사냥하고, 저녁에 평강현 적산(積山)에서 머물렀다. 강원도 경력 이명보(李明保)가 내알하고 인하여 술과 과일을 바쳤다. 경기도 경력 서미성이 하직하고 돌아갔다. 상왕이 폐를 덜기 위하여, 지나가는 각도의 감사에게 보러 오지 말라 하였으므로, 경력을 보내어 호종케 한 것이었다. 이 날 잡은 것이 많았으므로, 경기·강원도의 감사와 경력 및 시종하는 여러 신하에게 나누어 주라고 명하였다.
【원전】 2 집 375 면
【분류】 *왕실-행행(行幸) / *왕실-사급(賜給)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세종 6년 갑진(1424,영락 22)
 10월3일 (갑진)
고석정 벌에서 사냥하고 대군 제군들이 입시아래 형님을 위로하다

철원(鐵原) 고석정(高石亭) 벌에서 사냥을 하고, 낮참에 거기서 술상도 차리고 풍악도 잡히면서 머무르게 되었는데, 궁중에 있던 대군(大君)·제군(諸君)들이 입시(入侍)하였다. 지신사(知申事) 곽존중(郭存中)·좌대언(左代言) 조종생(趙從生)·예조 참판(禮曹參判) 이명덕(李明德)을 불러 이르기를,
“삼년상이 지난 뒤 이번이 초행이라, 내일 경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오늘 우리 형님을 먼저 위로하고자 하니, 경들은 각기 술이나 따라 드리라.”
하고, 또 특히 병조 판서(兵曹判書) 조말생(趙末生)을 불러 이르기를,
“경은 지응사(支應使)로서 검찰(檢察)의 임무까지 겸하여 대사헌(大司憲)과 같으니 가까이할 수는 없는 것이나, 어찌 친하고 두터운 정을 없애버릴 수야 있으랴. 경도 술을 따르라.”
하였다. 저녁에는 영평(永平) 굴동(屈洞)에서 머물렀다. 영평 현감 민공(閔恭)이 조복을 갖추어 입고 마중나와 알현하였다.
【원전】 2 집 625 면
【분류】 *왕실-행행(行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