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최씨 시조공에 대한 기록/전주최씨의 유래2

고려국 대광 완산군 시 문진 최공 묘지명 병서 (高麗國大匡完山君謚文眞崔

아베베1 2010. 7. 1. 22:01

동문선 제126권
 묘지(墓誌)
고려국 대광 완산군 시 문진 최공 묘지명 병서 (高麗國大匡完山君謚文眞崔公墓誌銘) 幷序


이색(李穡)

완산(完山)최씨(崔氏)의 보계(譜系)에서 상고하여 볼 만한 이로 순작(純爵)이라는 이가 있는데, 벼슬이 검교 신호위 상장군(檢校神虎衛上將軍)에 이르렀다. 그가 숭(崇)을 낳았는데 중랑장이요, 중랑장이 남부(南敷)를 낳았는데, 벼슬은 통의대부 좌우위 대장군 지공부사(通議大夫左右衛大將軍知工部事)에 이르렀고, 공부(工部)가 전(佺)을 낳았는데, 좌우위 중랑장(左右衛中郞將)이요, 중랑장이 득평(得枰)을 낳았는데, 벼슬은 통헌대부 선부전서 상호군 치사(通憲大夫選部典書上護軍致仕)로, 청렴하고 정직하게 몸을 지켜 사람들이 공경하고 두려워하였으며, 충렬ㆍ충선ㆍ충숙 등 세 임금을 내리 섬겼는데, 그 중에서도 충선왕이 더욱 그를 나라의 그릇으로 알고 중히 여겼다. 충선왕은 비록 왕위를 전해 주었으나 나라의 정사에 반드시 참여하였기 때문에, 사대부의 승진과 파면이 충선왕에게서 오는 것이 많았는데, 득평이 대직(臺職)에 있으면 기강이 섰고, 형부(刑部)에 있으면 형벌이 맑았으며, 김해(金海)와 상주(尙州)의 수령으로 고을을 다스리자 백성들이 그 은혜를 잊지 못하였고, 두 번 전라도를 안찰하자 백성들은 그의 풍의(風儀)를 두려워하였고, 전토를 측량하여 세액을 조정할 때에는 재상(宰相)채홍철(蔡洪哲)을 도와서 전라도 각 주현(州縣)의 전토를 나누어 처리하였는데, 법을 해이하게 하지도 않고 백성들을 요란하게 하지도 아니하였으며, 75세의 수명을 누렸다. 선부가 봉익대부 지밀직사사 감찰대부 문한학사 승지 세자원빈 곽예(郭預)의 딸에게 장가들어 대덕(大德) 계묘년 4월 계유일에 공을 낳았는데, 공의 이름은 재(宰)요 자는 재지(宰之)이다. 지치(至治) 원년에 동대비원 녹사(東大悲院錄事)에 보직되었고, 태정(泰定) 갑자년에 내시(內侍)로 들어갔고, 4년에 산원(散員)에 제수되었으며, 다음해에 별장으로 전직되었다. 천력(天歷) 경오년에 순흥군(順興君) 안문개(安文凱)공과 심악군(深岳君) 이담(李湛)공이 같이 고시(考試)를 관장하였는데 공은 그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6년이 지난 뒤에 단양 부주부(丹陽府注簿)로 임명되었고, 또 4년 후에 비로소 중부령(中部令)에 제수되어 승봉랑(丞奉郞) 관계(官階)를 받았다. 얼마 안 되어 지서주사(知瑞州事)가 되었으나, 모친의 상중(喪中)이라 하여 부임하지 않았으니, 이는 복제를 마치려는 것이었다. 다음해에 충숙왕이 필요 없는 관원을 도태할 때에 공을 천거하는 자가 있으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본래 그 아비의 풍모와 법도가 있음을 알고 있으니, 이 사람을 가벼이 쓸 수는 없다.” 하고, 감찰지평(監察持平)에 제수하니 공은 사양하다 못하여 벼슬에 나갔으나, 공민왕(恭愍王)이 직위하자 그 관직에서 갈리었다. 고(高)씨의 난이 일어나자 무릇 임금이 설치한 것을 모두 개혁하려 하여, 도감을 설립하고 공을 판관으로 삼자, 공은 매우 즐거워하지 아니하여 병을 칭탁하고 나가지 아니하니, 상부(相府)에서 자못 독족 하고 또 협박도 하므로 공이 천천히 자리에 나아가서 그 판사(判事)의 재상에게 말하기를, “임금이 실로 덕을 잃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신하로서 임금의 아름답지 못한 점을 들추어내는 것이 공의 마음에는 편하던가. 임금의 악한 일이란 임금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요, 그 좌우에 있는 자들이 임금에게 아첨하여 그 악을 맞아 들여서 하도록 한 것인데, 먼저는 맞아들여 하도록 해놓고, 뒤에 다시 그 일을 들추는 것을 나는 실로 부끄러워한다.” 하니, 그 재상은 묵묵히 듣고만 있을 뿐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다. 충목왕(忠穆王)이 즉위하고 처음 정사에서 공에게 전법정랑을 제수하였고, 그 해 겨울에 지흥주(知興州)가 되어 나갔는데, 모든 백성에게 편의를 도모하는 일이라면 시행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전적(田籍)이 오래되고 해어져 있었으므로 공이 이것을 수정하여 구장본(舊藏本)과 서로 대질ㆍ교정하니 듣는 이들이 탄복하였다. 인정승(印政丞)이 정권을 잡게 되자, 그는 평소에 공을 꺼렸으므로 벼슬을 갈아버렸는데, 정해년에 정승 왕후(王煦)와 김영돈(金永暾)이 임금의 교지를 받들어 전민(田民)의 송사를 정리하게 되어, 공을 천거하여 판관으로 삼고 역마를 달려 보내어 급히 불렀다. 공이 이른즉 두 정승은 또 말하기를, “장흥부(長興府)는 지금 다스리기 어렵기로 이름난 곳이니, 최모가 아니면 안 된다.” 하고 다시 나가게 하였다. 공이 장차 임지로 부임하려 할 즈음에, 두 정승이 또 말하기를, “최모가 지난번 지평직에 있을 때에 위엄과 명망이 있었으니, 어찌 이런 사람을 풍헌(風憲)직에 머물어 재임하게 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그러나 그때 마침 공의 외씨(外氏)인 곽영준(郭迎俊)이 그 관아의 대부로 있었으므로, 법제상 서로 피하게 되어 전법 정랑(典法正郞)으로 전임되었다. 무자년에 경상도 안찰사가 되고, 1년 만에 두 번 옮겨 전객 부령(典客副令)ㆍ자섬 사사(資贍司使)가 되어, 안팎의 비용과 물품을 공급하는 일을 겸하여 다스려서, 그것에서 남는 것을 모두 백성에게 돌려주니, 전에 있던 폐단이 근절되었다. 기축년에 지양주(知襄州)가 되어 나갔더니, 나라에서 향(香)을 내려 주는 것을 받들고 온 사자(使者)가 존무사(存撫使)를 능욕하는 것을 보고 공이 말하기를, “이는 예가 아니다. 장차 나에게도 미칠 것이다.” 하고 즉시 벼슬을 버리고 돌아갔다. 집정하던 이가 기뻐하여 임금에게 아뢰어서 감찰장령(監察掌令)을 제수하니, 대관의 강기가 다시 떨쳤으나 1년 만에 파직하고 말았다. 신묘년에 현능(玄陵 공민왕)이 즉위하고 대신(臺臣)을 선임하자 다시 장령이 되었고, 다음 해에 개성 소윤(開城少尹)으로 옮겨 갔다가 사직하고 청주(淸州)로 돌아갔다. 이때에 조일신(趙日新)의 난이 일어났던 것이다. 갑오년에 다시 불러서 전법 총랑이 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판도(版圖)로 옮기고, 그 해 가을에는 복주 목사(福州牧使)로 나가서 민정을 살피고 약조를 지키더니, 공이 떠나던 날 백성들은 부모를 잃은 것처럼 마음 아파하였고, 그가 시설한 바를 지금까지도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 을미년 가을에 중현대부 감찰집의 직보문각(中顯大夫監察執義直寶文閣)으로 불렀는데, 그때 군사 선발을 토지에 의해 한 것은 그 법이 오랜 옛날부터 있었던 것인데, 공에게 명하여 도감사(都監使)로 삼았다. 지금까지의 법을 보면 한 사람이 전토를 받으면, 그 자손이 있으면 자손에게 전하고, 없으면 다른 사람이 대신 받게 되며 그 받은 자가 죄가 있어야만 그 전토를 회수하게 되어 있었다. 이렇게 하고 보니 사람마다 토지를 얻으려 하게 되어 번잡한 사건이 생기게 되는 것이었다. 공이 말하기를, “이것은 백성으로 하여금 재물을 서로 주고 빼앗도록 경쟁시키는 것이니, 이래서야 되겠는가.” 하고, 이에 마땅히 받을 사람 한 사람에게만 주고 그치도록 하니, 송사도 조금 간단하게 되었다. 병신년에 대중대부 상서우승(大中大夫尙書右丞)에 임명되고, 정유년에는 정의대부 판대부시사(正議大夫判大府寺事)에 승진되니, 이때 공의 나이 55세였으나 의지가 조금도 쇠하지 않고 더욱 직무에 근실하여, 한 달 사이에 창고에 곡식이 차게 되었다. 공민왕이 이르기를, “판대부(判大府)로서 그 직책을 다한 이는 최모 뿐이다.” 하였다. 기해년에 공주목(公州牧)으로 나가니, 그의 행정과 백성들의 사모함이 앞서 복주목(福州牧)에 있을 때와 같았다. 신축년에 상주 목사(尙州牧使)로 나갔는데, 그 해 겨울에 온 국가가 병란을 피하여 남쪽으로 옮겨 가고, 다음해 봄에 임금이 상주로 거둥하니, 모든 수요와 공급과 설비의 판출에 진력하면서도, 오직 털끝만치라도 백성을 상하게 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였으므로, 무엇을 요구하다가 얻지 못한 무리들은 이를 비방하기도 하였다. 3월에 봉익대부 전법판서(奉翊大夫典法判書)로서 본경(本京 개성)에 분사(分司)로 가게 되어 공이 하직하니, 공민왕이 인견하여 부드러운 말로 위로하고 당부하였다. 갑진년에 감찰대부 진현관제학 동지춘추관사에 임명되고, 그 해 겨울에 중대광 완산군(重大匡完山君)에 봉하였다. 다음해에 전리 판서로 옮기고, 또 다음해에 개성 윤(開城尹)으로 옮겼으며, 기유년에 새로운 관제(官制)가 시행됨으로써 영록대부(榮祿大夫)로 관제를 고쳐 받았다. 신해년에 안동(安東)의 수신(守臣)이 궐원이 되자 공민왕이 이르기를, “안동의 원은 내가 이미 그 적임을 얻었다.” 하고, 곧 비지(批旨)를 내리고는 위사(衛士)를 보내어 공의 부임을 독촉하였으니, 이는 공이 혹 사퇴하고 가지 않을까 하여 염려함이었다. 갑인년 봄에 나이 많음으로써 사퇴를 청하여 고향으로 돌아갔고, 그 해 가을 9월에 공민왕의 승하하니 공은 곡반(哭班)에 나가 곡하고 애통의 정을 다하였다. 금상(今上)이 밀직부사 상의(密直副使商議)에 임명하자 공은 굳이 사양하고 고향에 돌아가기를 청하니, 완산군(完山君)에 봉하고 계급을 대광계(大匡階)로 올렸다. 다음해 봄에 수레를 준비하도록 명하여 강릉(江陵)에 있는 밀직 최안소(崔安沼)를 가서 보고 돌아왔으니, 이는 대개 이 세상에서의 최후 결별을 하기 위함이었다. 9월에 경미한 병환이 생겼는데 여러 아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꿈을 꾸었는데 이인(異人)이 날더러 말하기를, ‘오년(午年)에 이르면 죽는다.’고 하더라 금년이 무오년(戊午年)이고, 또 병이 이와 같으니, 내 필연코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마침내 10월 기사일에 돌아가니 향년 76세였다. 12월 임인일에 그가 살던 집에서 동쪽에 있는 감방(坎方) 산기슭에 장사지냈는데, 이는 평일의 유명(遺命)을 따른 것이다. 아, 공은 가히 유속(流俗)을 벗어나고 사물에 달관한 분이라고 이를 만하다. 공은 두 번 결혼하였는데, 영산군부인(靈山郡夫人) 신(辛)씨는 봉익대부 판밀직사사 예문관제학 치사(奉翊大夫判密直司事藝文館提學致仕) 천(蕆)의 딸이요, 다음 무안군부인(務安郡夫人) 박(朴)씨는 군부 정랑(軍簿正郞) 윤류(允鏐)의 딸이다. 신씨는 2남을 낳았는데, 장남 사미(思美)는 봉익대부 예의판서(奉翊大夫禮儀判書)이며, 차남 덕성(德成)은 급제하여 중정대부 삼사좌윤(中正大夫三司左尹)이요, 박씨는 자녀 3명을 낳았는데, 아들 유경(有慶)은 중정대부 종부령 지전법사사(中正大夫宗簿令知典法司事)이며, 맏딸은 성근익대공신 광정대부 문하평리 상호군(誠勤翊戴功臣匡靖大夫門下評理上護軍) 우인열(禹仁烈)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선덕랑 선공시승(宣德郞繕工寺丞) 조영(趙寧)에게 시집갔다. 손자에 남녀 약간 명이 있으니 판서의 자녀가 5명인데, 장남 서(恕)는 호군(護軍)으로서 지금 전라도안렴사이고, 다음은 원(原)이니 중랑장이며, 그 다음은 각(慤)이니 별장이요, 딸은 예의 총랑(禮儀摠郞) 송인수(宋仁壽)에게 출가했고 다음은 아직 어리다. 좌윤(左尹)은 자녀 4명을 두었는데, 장남 복창(復昌)은 별장이고 다음 세창(世昌)도 별장이며, 다음 사창(仕昌)은 아직 벼슬하지 않았고 딸은 어리다. 종부령은 자녀 3명을 낳았는데, 장남 사위(士威)는 낭장(郞將)이고, 그 다음은 모두 어리며, 평리(評理)는 자녀 3명을 낳았는데, 아들 양선(良善)은 영명전직(英明殿直)이고 딸은 모두 어리며, 시승(寺丞)은 딸 하나를 낳았는데 아직 어리다. 좌윤 덕성(德成)은 나의 벗이다. 성격이 쾌활하여 술도 잘하고, 관직에 있으면 가는 곳마다 명성이 있었다. 그가 와서 명(銘)을 청하는 것이다. 명하기를,

오직 공은 곧았고 / 惟公之直
또 공은 맑았다 / 惟公之淸
오직 공은 덕이 있었으며 / 惟公之德
또 공은 이름이 높았다 / 惟公之名
그 이름과 그 덕은 / 惟名惟德
이 세상의 준칙이 될 것인데 / 惟世之則
어찌 크게 쓰여져 / 胡不大用
우리 왕국을 바로잡지 못하였던가 / 正我王國
이미 우리 임금을 도와 / 旣相我王
묘당에서 주선하였고 / 周旋廟堂
76세의 고령으로 / 年七十六
아직도 강강하였건만 / 尙爾康强
공은 결단코 물러났으니 / 公退則決
진실로 밝고 슬기로웠다 / 允矣明哲
아, 최공이여 / 嗚呼崔公
온 세상이 그 풍모를 흠모하리로다 / 世歆其風

하였다.

가정집 제2권
 기(記)
춘헌기(春軒記)


어떤 객이 춘헌(春軒)에 와서 춘(春)이라고 이름 붙인 뜻을 물어보았으나, 주인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객이 다시 앞으로 나앉으며 말하였다.
“우주 사이의 원기가 조화의 힘에 의해 퍼져서 땅에 있는 양(陽)의 기운이 위로 올라가 하늘과 막힘없이 통하게 되면, 만물의 생동하는 뜻이 발동할 뿐 아니라 사람의 마음도 덩달아 활짝 펴지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봄이 오면 온갖 꽃이 아름답게 피어나고 새들이 즐겁게 노래하니, 봄의 풍광은 사람의 기분을 마냥 들뜨게 하고 봄의 경치는 사람의 마음을 따스하게 감싸 주는 법이다. 그래서 봄 누대에 오른 듯도 하고 봄바람 속에 있었던 듯도 하다는 그 뜻을 취해서 이렇게 이름 붙인 것인가?”
주인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자 객이 또 말하였다.
“원(元)은 천지가 만물을 내는 근본이요, 춘은 천지가 만물을 내는 시절이요, 인(仁)은 천지가 만물을 내는 마음이니, 이름은 비록 다르다고 하더라도 그 이치는 매한가지이다. 그래서 노쇠하고 병든 자들이 봉양을 받을 수 있고 곤충과 초목이 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것도 모두 이러한 이치 때문이라는 그 뜻을 취해서 이렇게 이름 붙인 것인가?”
이에 주인이 말하기를,
“아니다. 굳이 그 이유를 대야 한다면 온화하기 때문이라고나 할까? 여름에는 장맛비가 지겹게 내리고 겨울에는 매서운 추위가 몰아치고 가을에는 썰렁해서 몸이 으스스 떨리니, 사람에게 맞는 것은 온화한 봄이 아니겠는가. 객이 말한 것이야 내가 어떻게 감히 감당하겠는가.”
하자, 객이 웃으면서 물러갔다.
내가 그때 자리에 있다가,
“그만한 덕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자처하지 않는 것은 오직 군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내가 알기에 주인은 흉금이 유연(悠然)해서 자기를 단속하고 남을 대할 적에 속에 쌓였다가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 화기(和氣) 아닌 것이 없으니, 대개 기수(沂水)에 가서 목욕하고 바람 쐬며 노래하는 부류에 속하는 사람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니 주인이 취한 뜻이 어찌 온화하다고 하는 정도로 그치겠는가. 그런데 객이 어찌하여 그런 것은 물어보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하고는, 마침내 붓을 잡고 이 내용을 벽에다 써 붙였다.
주인은 완산 최씨(完山崔氏)로, 문정공(文定公)의 후손이요 문간공(文簡公)의 아들이다. 박학강기(博學强記)한 데다가 특히 성리(性理)의 글에 조예가 깊어서, 동방의 문사들이 질의할 것이 있으면 모두 그를 찾아가서 묻곤 한다.


[주D-001]봄 누대에 …… 하고 : 《노자(老子)》 제 20 장에 “사람들 기분이 마냥 들떠서, 흡사 진수성찬을 먹은 듯도 하고 봄 누대에 오른 듯도 하네.〔衆人熙熙 如享太牢 如登春臺〕”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2]봄바람 …… 하다 : 주희의 《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 권4에 “주공섬(朱公掞)이 여주(汝州)에 가서 명도(明道) 선생을 만나 보고 돌아와서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한 달 동안이나 봄바람 속에 앉아 있었다.〔某在春風中坐了一月〕’라고 했다.”는 말이 실려 있다.
[주D-003]기수(沂水)에 …… 부류 : 공자의 제자 증점(曾點)이 “늦은 봄에 봄옷이 만들어지면 관을 쓴 벗 대여섯 명과 아이들 예닐곱 명을 데리고 기수에 가서 목욕을 하고 기우제 드리는 무우에서 바람을 쏘인 뒤에 노래하며 돌아오겠다.〔暮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고 자신의 뜻을 밝히자, 공자가 감탄하며 허여한 내용이 《논어》 선진(先進)에 나온다.
[주D-004]주인은 …… 아들이다 : 주인의 이름은 최문도(崔文度)이다.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문정공(文定公) 최보순(崔甫淳)의 5세손이요, 광양군(光陽君)에 봉해진 문간공(文簡公) 최성지(崔誠之)의 아들이다. 자는 희민(羲民)이고, 관직은 첨의 평리(僉議評理)에 이르렀다. 1345년(충목왕 1)에 죽었으며, 시호는 양경(良敬)이다. 아들의 이름은 사검(思儉)이다.

동문선 제100권
 전(傳)
최씨전(崔氏傳)


이색(李穡)

신사년 십운과(十韻科)에 합격한 최림(崔霖)은 아버지의 이름이 성고(成固)인데 낭장이요, 어머니는 장씨(蔣氏)인데 모관 아무개의 딸이다. 최림은 술을 좋아하며 시를 읊고 절간에 다니며 놀기를 좋아 하는데, 술을 받아 주지 않는 자라면 거기를 떠나버린다. 한계(寒溪)라는 중과 매우 뜻이 맞아서 친숙히 서로 쫓아다니므로 예법을 중히 여기는 사람들은 상당히 그를 비난하기도 하였으나, 워낙 재주가 높기 때문에 차츰 그를 대우하며 공경하였다. 계사년 가을 향시에서 내가 최씨와 함께 합격하게 되었는데, 중서당(中書堂)에서 회시를 보게 됐을 때에 최씨는 안질이 생겨서 글씨를 쓰기가 곤란하였다. 곧 탄식하기를, “내가 기왕에 합격된 것은 요행으로 된 것이다. 지금 나보다 재주가 높은 사람이 둘이나 있는데, 두 사람을 꺾어버리고 내가 과거에 오른다는 것은 나의 바라는 바가 아니었는데, 눈까지 이렇게 되는 것은 하늘의 뜻이다. 나는 과거를 포기하겠다.” 하고, 마침내 시험에 응시하지 않았다. 이미 본국에 돌아와서 병부원외랑으로 옮겨갔다가 병신년에 다음 해의 신정(新正)을 하례하는 표를 받들고, 서울에 왔다가 일을 모두 마치고 돌아가다가 요하(遼河)에 이르러 도둑을 만나서 사신ㆍ부사(副使) 및 삼절(三節)의 사람과 아전까지 모두 피해되었다. 아, 슬프다.
기주(蘄州)의 진중길(秦中吉)은 나의 아버지와 젊을 적부터 친하게 지냈던 분이다. 널리 배웠고 문장에 능하여 그에게서 공부한 사람으로서 높은 과거에 합격하고 훌륭한 벼슬을 지내는 사람이 많았는데, 진공(秦公)은 늙어서도 오히려 과거장에 나다니려 하였다. 나의 아버지가 정해년 공거(貢擧)의 고시관이 되었을 때, 진공은 말하기를, “내가 가정(稼亭)과 어릴 적부터 같이 공부하였으니, 비록 요행으로 합격이 된다 할지라도 남들은 반드시 가정이 나를 보아준 것이라 할 터이니, 나로 말미암아 이런 이름을 얻는다면 이것은 내가 가정에게 폐를 끼치는 것이지, 될 수 있는 일인가.” 하며, 마침내 응시하지 않았다. 벼슬이 5 품을 지냈으니 관료의 대열에 서게 됨이 확실하건만 물러가서 여러 학생들과 경전과 역사를 강론하기에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최씨는 그의 사위였다. 그의 문장은 또한 진씨로써 미칠 바가 아니었으나 벼슬에 달하지 못하고 불행히 죽었으니, 아, 최씨의 화인가. 진씨의 화인가. 진씨는 오래 살았고 최씨는 일찍 죽었지만 그 이름에 있어서는 최씨나 진씨가 모두 후세에 전하게 될 것이니, 이것으로나마 지하에서 행여 스스로 위로함이 있을 것이다.
최씨는 뜻이 크고 결단성 있게 말을 하였으니, 만일 그가 죽지 아니하여 그의 문장이 더욱 발전되었다면 마땅히 졸옹(拙翁)에게 양보하지 않았을 것이다. 벼슬에 있은 지 오래 되지 못하여 뜻을 나타내지 못하였고, 문장을 지은 것이 적어서 재주를 발전시키지 못하고, 그의 정기는 요하(遼河)의 하늘에 흩어졌으며, 그의 넋은 요하의 들판을 가리었으니, 마땅히 학(鶴)이 되어 화표(華表)를 말하며 돌아오리니, 1천 년이 지난 뒤에 최씨의 전기를 읽고 또 그의 음성을 들으리로다.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 나는 이것으로 그의 대강을 기록하여 최씨전(崔氏傳)을 지었다.


동문선 제124권
 묘지(墓誌)
추성 양절공신 중대광 광양군 최공 묘지명(推誠亮節功臣重大匡光陽君崔公墓誌銘) 병서(幷序)


이제현(李齊賢)

완산 최씨(完山崔氏)는 예부 낭중(禮部郞中) 균(鈞)이 서 동(東)으로 된 판본도 있다 적(西賊)의 난리 때 순절한 후부터 이름난 집안이 되었다. 그의 아들 보순(甫淳)은 고왕(高王)의 정승이며,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문정은 봉어(奉御) 윤칭(允偁)을 낳았고, 봉어는 학사(學士) 소(佋)를 낳았으며, 학사는 찬성사(贊成事) 비일(毗一)을 낳았다. 비일이 사재경(司宰卿) 신 홍성(辛洪成)의 딸에게 장가들어 공을 낳았다. 공은 이름을 다섯 번 바꾸었는데, 부(阜)ㆍ당(璫)ㆍ수(琇)ㆍ실(實)이요, 맨 나중 이름이 성지(誠之)이다, 자는 순부(純夫)이며 호는 송파(松坡)이다. 20세 전에 진사로서 지원(至元) 갑신년(충렬왕 원년) 과거에 급제하여 계림(鷄林)의 관기(管記)가 되었다가 사한(史翰)에 보직받았다. 춘관속(春官屬)으로 뽑혀 덕릉(德陵 충선왕)을 따라 원 나라에 조회하러 갔는데, 집정관들이 덕릉을 두려워하고 미워하여 백가지 꾀로 달래어 가도록 하니, 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궁하고 영달함은 하늘에 달린 것이니, 이해에 동요됨은 선비가 아니다.” 하였다. 대덕(大德) 말년에 황태제(皇太弟)를 부호하여 내란을 평정하고 무종황제(武宗皇帝)를 옹립하였는데, 공이 항상 좌우에 기거하면서 일을 도왔으나 사람들은 아는 자가 없었다. 조현총랑(朝顯摠郞)에서 여섯 번 전직하여 삼사좌사(三司左使)가 되니, 관품은 봉익(奉翊)이다. 얼마 후에 첨의평리 삼사사 첨의찬성사(僉議評理三司使僉議贊成事)로 영전되니, 관품은 중대광(重大匡)이요, 추성양절공신(推誠亮節功臣)의 호를 받고 광양군(光陽君)에 봉해졌다.
덕릉이 토번(吐藩)으로 가는데, 공의 아들 문도(文度)가 이 소문을 듣고 달려가 도중에서 만나 공과 함께 관서(關西)까지 따라가는 도중, 때마침 중 원명(圓明)이 배반하여 중남(中南)에서 군사(軍事)가 막아서 앞으로 더 갈 수 없었다. 일이 평정되어 농서(隴西)를 넘어 임조(臨洮)에 닿았는데, 험악한 지경은 단기(單騎)로 갈 수 없으므로 임조에서 반년을 머무르다가 돌아오게 되었다. 이때 본국 사람들이 패당을 지어 서로 소송하므로 조정에서 성(省)을 세워내지(內地)와 같이 할 것을 의논하였는데, 공과 전 재상(宰相) 김정미(金廷美)ㆍ이제현(李齊賢) 등이 글을 올려 이해(利害)를 진술하여 마침내 그 의논을 중지하게 하였다. 심부(瀋府)의 관원들이 또 국가의 잘잘못을 지목하여 장차 묘당(廟堂)에 말하려고 하는데, 공이 홀로 서명하지 않으니 나중에는 주모자들이 부중(府中)에서 함께 앉아 녹사(錄事)를 시켜 지필(紙筆)을 가져다가 서명하기를 청하였다. 공이 목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재상을 지냈는데, 여러 녹사들이 나를 협박하려고 하는가.” 하니, 여러 사람들은 기가 꺾여 그만 그치었다. 태정(泰定) 갑자년(충숙왕 17년)에 상서(上書)로 물러나기를 청하여 임금의 윤허를 얻었다. 광양군(光陽君)으로서 집에 있는데, 소리하는 기생을 두고 손님들을 청해다가 청담아소(淸談雅笑)로 세월을 보내고 세상일을 묻지 않았다. 지순(至順) 경오(충숙왕 17년)에 병이 들어 7일만인 계해일에 집에서 세상을 마쳤으니 나이 65세였다. 나라 관원이 상사(喪事)를 다스리고, 시호를 문간공(文簡公)이라 하였다. 공은 성품이 굳세고 곧아서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자획(字畫)이 해정(楷正)하고, 시는 순후하고 여유로워 즐길 만하였으며, 더욱 음양추보법(陰陽推步法)에 조예가 깊었다. 법관ㆍ선거(選擧)ㆍ천문ㆍ사원(詞苑)에 임명되기 또한 20년이었는데, 덕릉의 후한 대우는 종시 공보다 앞선 이가 없었다. 일찍이 과거를 보일 때 안진(安震) 등 33명을 뽑았는데, 그중에는 명사(名士)들이 많았다. 부인(夫人) 김씨는 찬성사 둔촌거사(贊成事鈍村居士) 훤(晅)의 딸로서 행실이 어질었는데, 공보다 3년 먼저 죽었다. 아들은 하나인데 전 상호군(上護軍) 문도(文度)이다. 글을 읽되 정주학(程朱學)을 좋아하였고, 선진(先進)들과 교제하였다. 딸은 하나인데 만호 밀직부사(萬戶密直副使) 권겸(權謙)에게 출가하였다.

명가의 후손으로 태어나 / 爲名家之嗣
그 임금을 얻어 그 뜻을 펴고 / 得其君而伸其志
예로써 벼슬에 나아가고 / 進以禮
의리로써 물러났도다 / 退以義
어진 아내가 공의 평생을 봉향하였고 / 有賢妻以養其生
착한 아들이 공의 죽음을 보내도다 / 有良子以送其死
지금 시대에서 구하면 / 求之今時
열에 한 둘이 못 되네 / 十無一二
아, 광양군이여 / 嗚呼光陽
유감이 없으리로다 / 可無憾矣


[주D-001]성(省)을 세워 : 우리 나라를 완전히 원(元) 나라 영토로 하고, 지방청인 성(省)을 두어 중국 본토와 같이 행정하게 하자는 의논이 그때에 있었다.
[주D-002]심부(瀋府)의 관원들 : 충선왕은 고려왕과 심양왕을 겸하였는데, 고려왕의 왕위는 충숙왕(忠肅王)에게 넘겨주고 심양왕의 왕위는 작은 아들 고(暠)에게 전해 주었으나, 심양왕이란 말뿐이요, 실제로 국토가 있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항상 그것 때문에 여러 가지 말썽을 일으켰다.
[주D-003]음양추보법(陰陽推步法) : 일월(日月)과 오성(五星)의 도수(度數)를 추산하여 책력을 만드는 것.


동문선 제18권
 칠언배율(七言排律)
이수(李需)의 교방(敎坊)의 동기(童妓) 시를 차운하며[次李需敎坊少娥詩韻]

최자(崔滋)

영공의 만수무강 영과 먹은 것 같으리 / 知公萬壽等靈瓜
가는 해를 창으로 멈춰서 무엇하리 / 白日何勞欲駐戈
동해의 상전도 오히려 이른 세월 / 東海桑田猶是早
남산의 소나무도 많은 나이 아니로세 / 南山松歲不爲多
금연에 밤새도록 붉은 밀초 더 태우고 / 錦筵連夜添紅蠟
수각 기나긴 봄에 푸른 아미를 두었구나 / 繡閤長春鎖翠蛾
동기들이 커질까 하늘이 두려워하사 / 天恐小娥將及壯
섣달에 윤달을 이어 나례를 연장하네 / 臘成餘閏却延儺
상부에 연꽃 피어 새 곡조를 전하고 / 蓮開相府傳新曲
창루에 버들 꺾는 묵은 노래 파하였네 / 柳折娼樓罷舊歌
제비 새끼 가벼운 허리가 새로 알까고 나온 듯 / 燕子腰輕初脫殼
어린 꾀꼬리 연한 혀로 둥우리를 떠나려는 듯 / 鶯雛舌軟欲離窠
몰라라, 옛날에도 이런 일 있었던가 / 不知古亦聞如此
묻노니, 금년에 나이가 몇 살이냐 / 更問年今定幾何
나직이 예상 거두어 그것도 무거운 듯 / 低斂霓裳還訝重
나직이 쓴 하모가 그래도 높은 양 / 淺攙霞㡌不勝峨
어린 정이 덕을 느껴 빨간 입술 드러났고 / 情猶感德丹恒露
눈도 역시 은을 알아 파란 채 안 흘기네 / 眼亦知恩綠不波
장대에선 용배 거울 아직 쓸 줄 모르고 / 粧閣未專龍背鏡
무연에선 봉두신이 오히려 끌리는 듯 / 舞筵猶困鳳頭靴
선저(왕족의 저택)의 산호수를 두 손에 받들고서 / 捧來璇邸珊瑚樹
금란전의 금수파로 아장아장 걸어오네 / 踏入金鑾錦繡坡
전에 없던 새 놀이로 좌중을 이어받으니 / 罕古新歡供幄座
이제부터 옛 음악은 궁녀들의 면목 잃었네 / 從今舊樂失宮娥
금복숭아 소반 위엔 봄빛이 얼근하고 / 金桃盤上春光醉
채색꽃 섬돌 위엔 햇빛도 취한 듯 / 綵蘂階頭日影酡
재치 있게 부르는 노래 목청에 물결 일고 / 巧奏伶詞喉欲浪
웃으며 부리는 재주에 두 볼에 진 보조개 / 笑呈仙戲臉將渦
징지당 사현금 소리 옥을 퉁기는 듯 / 鵾絃四撥驚摐玉
따당땅 쌍북채가 북을 놀리는 듯 / 羯鼓雙搥似弄梭
하늘 위 임의 은혜는 이슬 함빡 젖었고 / 天上皇恩霑露浥
인간의 국색들은 별처럼 총총하네 / 人間國色粲星羅
사람마다 시 지으려 붓을 다퉈 휘두르나 / 人人欲賦爭揮翰
운자들이 높고 험하니 어이하리 / 韻韻皆高最險跎
나도 억지로 화답하여 농우에게 붙여서 / 我亦强賡投隴右
시시한 말 가지고 청하에 달하였네 / 仍將狂語達淸河
다행히 지금 우리 강도 험한 것을 믿어서 / 幸今江國聊憑險
앉은 채 강린이 자주 강화 청하니 / 坐使强隣屢請和
동기들아 부디 박벌곡을 노래하고 / 要倩小娥歌薄伐
구슬픈 원망의 곡은 아예 노래 말거라 / 哀音怨曲莫吟哦

[주D-001]영과(靈瓜) : 먹으면 천만 년 장수한다는 외. 후한(後漢) 명제(明帝) 때 음황후(陰皇后)가 꿈에 영과를 먹었는데, 당시 돈황(燉煌)에서 이상한 외씨를 바치며 부로(父老)들이 이르되, “옛날에 도사(道士)가 봉래산(蓬萊山)에서 이 외를 얻었는데, 이름이 ‘공동(崆峒)의 영과’로, 백 겁(刧)에 한 번 열매를 맺는다 했사오며, 서왕모(西王母)가 이 땅에 물려주었나이다.” 하였다. 후(后)가 말하되, “외를 내가 먹었으니 만세를 살리로다.” 하니, 서왕모가 말하되, “주염산(朱炎山) 언덕에 갔다가 영과를 먹었는데 맛이 대단히 좋더군. 그게 오랜 일 같지 않게 기억되는데 벌써 7천 년이 되었어.” 하였다. 《拾遺紀》《漢武內傳》
[주D-002]농우(隴右) : 이씨(李氏)의 자칭 본관(本貫). 이 시 원작자 이수(李需)를 말한다.
[주D-003]청하(淸河) : 청하 최씨(崔氏)를 가리킨 것인데, 중국에서 청하 최씨가 명문(名門)이었다. 이 송시(頌詩)를 받을 이가 최우(崔瑀)이다.
[주D-004]박벌(薄伐) : 《시경》에, “오랑캐를 약간 쳐서[薄伐玁狁]”라는 귀절이 있는데, 주(周)의 선왕(宣王)이 오랑캐를 물리친 것을 칭송한 시이다. 여기는 원(元)과의 항전(抗戰)을 말한 것이다.
동문선 제67권
 기(記)
우대루기(又大樓記)

이규보(李奎報)

양지바른 곳에 있으면 기분이 느긋해지고, 그늘진 곳에 있으면 마음이 쓸쓸해지며, 높은 곳에 있으면 속이 시원하고 낮은 곳에 있으면 가슴이 답답하여진다. 이것은 사람이 하늘에서 타고난 본래부터 있는 공통된 마음이다. 노자(老子)는 말하기를, “비록 휼륭한 궁궐이 있더라도 담담한 심경으로 안식하며, 물욕에 얽매이지 않고 초연하게 있다.” 하였고, 《예기(禮記)》 월령(月令)편에는, “높고 밝은 곳의 대사(臺榭 정자 같은 높고 큰 집)에 살 만하다.” 한 것은 대개 이것을 말한 것이다.
비록 그러하지만 누각(樓閣)과 대사의 크고 작음이 있고, 화려함과 간소함이 있음은 또한 사람의 형세에 따라 각각 적당한 정도가 있다. 비록 지위가 같고 존귀함이 균등한 자에게 있어서라도 도리어 사람들의 촉망하는 바는 다르다. 세상 사람들의 마음에 크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을 크게 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옳다고 하지 않고, 모두 정도에 지나친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공(功)이 많고 덕(德)이 커서 명망(名望)이 모든 사람을 누르고, 온 나라 사람들이 다투어 우러러보는 위치에 있는 자에 이르러서는 비록 그 누대를 더할 수 없이 크게 하더라도,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사치스럽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좁다고 할 것이다. 이것이 이제 최승제(崔承制)공이 거대한 누각을 거실(居室)의 남쪽에 짓게 한 까닭이다.
누(樓) 위에는 손님 천 명이 앉을 수 있고, 아래는 수레 백 대를 나란히 놓을 만하다. 높이는 공중에 우뚝 솟아 새들의 날아다니는 길을 가로질러 끊었으며, 크기는 해와 달을 덮어 보이지 않게 하였다. 푸른 구슬같이 깨끗한 기둥을 옥신[玉舃]으로 발꿈치를 받들었으며, 양각(陽刻)한 말[馬]이 마룻대를 등에 짊어지고 머리를 치켜들며 높이 끌어당긴다. 나는 새와 달리는 짐승이 나무로 조각되어 그 자세(姿勢)를 나타내는 것은 건축이 생긴 이래로 아직까지 없었던 일이다. 선경(仙經)을 살펴보니 신선의 세계에 옥(玉)으로 지은 누각이 열두 채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세상에는 그것을 눈으로 본 사람이 없어서 그 집의 구조가 어떠하며 그 안에 어떤 기이한 광경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일찍이 이것을 한스럽게 여겨 왔는데 이 누(樓)를 보고 보니 아무리 하늘에 있는 옥루(玉樓)도 이보다 더 사치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동쪽에는 불상(佛像)을 안치한 방이 있다. 부처에게 공양(供養)하는 일을 할 때면 곧 중들을 맞아들이니, 그 수가 많게는 수백 명에 이르건만 방은 넓고 넓어서 남는 데가 있다. 누의 남쪽에는 격구장(擊毬場)을 설치하였는데, 넓기가 4백여 보(步)나 되며 숫돌처럼 평탄하다. 주위에 담을 둘러 쌓은 것이 수 리(數里)에 뻗친다. 공(公)이 일찍이 휴가(休暇)인 날에 손님들을 불러 호화스러운 연석을 벌이고 술을 마시다가, 기녀(妓女)들의 아름답고 고운 모습도 눈에 싫증이 나고, 풍악 소리의 고조(高調)된 음률도 듣기 싫게 되면, 진실로 그의 보는 것을 시원스럽게 하여 주고, 그의 심기(心氣)를 틔워줄 수 있는 것은 공을 치고 말을 달리는 유희만한 것이 없다.
여기에서 왕량(王良 춘추 시대의 말 잘 타던 사람)이나 조보(造父 주〈周〉 나라 목왕〈穆王〉 때 말을 잘 타던 사람)와 같이 말을 잘 타는 무리에게 명하여 날랜 말을 타게 한다. 빠르고 민첩하여 유성(流星)처럼 달아나고 번개처럼 견제(牽制)한다. 장차 동쪽으로 갈 듯하다가는 다시 서쪽으로 뛰고, 달릴 것처럼 하다가는 다시 머무른다. 사람들은 서로 손을 모으고 말들은 서로 말굽을 모은다. 뛰고 구르고 엎어지고 자빠지고 하면서 서로 공을 다투는 것이 비유하자면 뭇 용(龍)이 갈기를 떨치고, 발톱을 세워 큰 바다 속에서 한 개의 진주(眞珠)를 다투는 것과 같다.
아, 놀랄 만하다. 대체로 공[毬]을 치고 말을 달리는 일은 평탄한 광장(廣場)이나 넓은 평원(平原)이 아니면 하기 어려울 것같은 의심이 난다. 그런데 공(公)은 홀로 그렇게 하지 않고 담을 둘러 쌓고 장랑(長廊)을 둘러 지은 그 속에서 놀이를 하게 하니, 무슨 까닭인가. 무릇 넓은 평원이나 평탄한 광장에서는 비록 표목(標木)을 세우고 기둥을 세워서 그 한계선(限界線) 밖으로 나가지 말기를 요구하더라도 오히려 금지를 지키지 않고 벗어나 한계선을 넘는 자가 있다. 이것은 곧 땅을 간격(間隔)하지 않아서 마음이 단속되지 않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담과 회랑(廻廊) 안에 격구장을 만들어두고, 빙빙 돌고 이리저리 굴러다니면서도 그 경계선을 벗어나지 않는 것을 보는 것만 같지 못하다. 땅에 구속되어서 기술은 나아지고, 마음이 단속되면서 기교가 더 잘 나온다. 이것이 공(公)이 즐겨하는 바이다. 아, 누(樓)가 비록 맞기[邀]를 원하지 않더라도 온갖 경치가 이 누에 와서 나타냄이 저러하고, 공이 비록 받고자 하지 않더라도 누가 공에게 바침이 이와 같아서, 모든 훌륭하고 특출(特出)한 풍경이 모두 이 누에 모여든다. 나는 공의 측근에 있는 호사자(好事者)들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좋은 경치를 모아 공에게 청하여 현액(懸額)을 쓴다,

[주D-001]최승제(崔承制) : 고려 시대에 4대 동안 권력을 잡고 국정을 임의로 하던 최씨 중에, 제2대의 최우(崔瑀)를 말한다니, 이규보는 이 글을 지어서 최우에게 아첨하여 벼슬을 얻었다.
동문선 제81권
 기(記)
만덕산 백련사 중창 기(萬德山白蓮社重創記)

윤회(尹淮)

전라도 강진현(康津縣) 남쪽에 산이 있어 우람차게 일어나 맑게 빼어나고 우뚝하여 바다 기슭에 접하여 그쳤으니, 이름은 만덕산(萬德山)이요, 산의 남쪽에 사찰이 있어 통창하고 광활하여 한 바다를 굽어보니, 이름은 백련사(白蓮寺)다. 세상에 전하는 바에 의하면 신라시대에 창설되고 고려 원묘(圓妙)국사가 중수하였으며, 11대를 전하여 무외(無畏)국사에 이르도록 항상 법화도량(法華道場)이 되어 동방의 명찰이라 일컬었다. 왜적이 날뛰게 되자 바다를 의지하던 구석 땅은 모두 빈터가 되니, 사찰도 역시 시대의 성쇠(盛衰)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우리 조선에서 성신(聖神)이 계속 일어나서 해악(海岳)이 깨끗하고 편안하여 풍진(風塵)도 놀라게 하지 아니하니, 이에 천태영수(天台領袖) 도대선사(都大禪師) 호공(乎公)이 백련사에 구경갔다가 그 황폐한 것을 보고서 석장(錫杖)을 머물고 깊이 탄식하여 폐한 것을 일으키고 옛 모양을 회복하며, 임금을 장수하게 하고 나라를 복되게 할 서원(誓願)을 분발함과 동시에 그 도제(徒弟) 신심(信諶) 등에게 부탁하여 여러 선남 선녀에 시주를 권유하여 모든 계획을 차리게 하고, 또 신심을 보내어 효령대군(孝寧大君)에게 편지를 올려 대공덕주(大功德主)가 되어 주기를 청하니, 대군은 이에 흔연히 허락하고 이것저것 따지지도 않고 동의하여, 재정을 시주하고 기력을 내주니,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좇아서 멀다 아니하고 모여들었는데, 장흥부(長興府) 사람 전도관좌랑(前都官佐郞) 조수(曹隨)와 강진현 안일호장(安逸戶長) 강습(姜濕)이 가장 선두가 되었다. 경술년 가을에 시작하여 병진년 봄에 준공하였는데, 불전(佛殿)과 승사(僧舍)는 거의 태평시대의 옛 모습을 회복하였고, 설법하고 축복하는 것도 옛날에 비해서 오히려 나은 셈이다. 선사의 속성은 최씨이니 문헌공(文憲公)의 후손이요, 고죽(孤竹)의 상족(上族)이다. 어릴 적에 출가하여 계행이 남보다 뛰어나고 묘법(妙法)을 돈오(頓悟)하여 승려들의 존경을 받았다. 태종(太宗) 공정대왕(恭定大王)께서 일찍이 치악산(雉岳山) 각림사(覺林寺)를 지으시고 대회를 베풀어 낙성하는데, 선사의 명망을 듣고 불러서 그 자리를 주장하게 하였고, 또 장령산(長領山) 변한소경공(卞韓昭頃公) 묘소 곁에다 대자암(大慈庵)을 짓고 명하여 주지를 삼았었다. 지금의 상께서 즉위하시자 판천태종사(判天台宗事)로 부르시니, 선사는 세속에 남아 있다가 얼마 안 있어 문득 버리고 떠나서 산골에 숨었는데 그 고상한 품이 이와 같았다. 천성이 효도에 지극하여 그 어미를 섬기어 살아서는 봉양에 극진하였고, 죽어서는 장사에 제 힘을 다하여 다른 중들에 비할 바 아니었다. 두류산(頭流山)의 금대(金臺)와 안국(安國), 천관산(天冠山)의 수정(修淨)은 다 그가 새로 지은 것이요, 백련사는 그가 최후에 지은 것이다. 효령대군이 내가 선사와 친분이 있음을 알고 나로 하여금 시종을 간단히 기록하게 하므로, 감히 사양을 못하였다. 대군으로 말할 것 같으면 호(乎) 선사와 더불어 아래로 시주하는 데에 힘을 다하여 미래의 세복(世福)을 구하였으니, 함께 불토(佛土)에 올라 앉아 모든 쾌락을 받는 것은 장차 이로부터 비롯할 것이다.
동사강목 부록 상권 상
 고이(考異)사마광(司馬光)이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지을 때에 뭇 책을 참고하여 그 같고 다른 점을 평하고 취사에 뜻을 두어 《고이(考異)》 30권을 지었으니, 전실(典實)하여 법다운 것만 뽑았다. 이것이 역사를 쓰는 자의 절실한 법이 되기에 이제 그를 모방하여 《동사고이(東史考異)》를 짓는다.
낙랑(樂浪)을 습격하여 항복받다 고구려(高句麗) 대무신왕(大武神王) 15년(32)

《삼국사기》에,
“낙랑(樂浪)에 고각(鼓角)이 있어 적병(敵兵)이 이르면 저절로 울었다. 호동(好童)이 귀국하자 남몰래 최씨(崔氏 낙랑공주(樂浪公主))에게 사람을 보내 이르기를 ‘그대가 무고(武庫)에 들어가 고각을 부수어 없애면 내가 그대를 예로 맞이하겠다.’ 하니, 최녀(崔女)가 몰래 무고에 들어가 북의 피면(皮面)과 취각(吹角)의 주둥아리를 부순 후 호동에게 알렸다. 이리하여 호동이 부왕에게 권하여 낙랑을 엄습하니, 최리(崔理)는 고각이 울지 않으므로 방비하지 않고 있다가 패배하였다.”
하고, 또 그 주에
“혹은 말하기를 ‘여왕(麗王)이 낙랑을 멸하려고 청혼하여 자부(子婦)를 삼은 후 그 자부를 본국에 보내 병기(兵器)를 부수게 한 것이다.’ 한다.”
하였다. 윗말은 허황하여 취하지 않고 주설(註說)을 취한다.
 동사강목 제3상
신미년 신라 진흥왕 12년, 고구려 양원왕 7년, 백제 성왕 29년(북제 문선제 천보 2, 551)

춘정월 신라가 연호(年號)를 개국(開國)으로 고치었다.
○ 가야국 악사 우륵(于勒)이 신라에 망명하여 왔다.
처음에 가야왕 가실(嘉實)이 당(唐)의 악부(樂部)에 쟁(箏)이 있는 것을 보고 생각하기를, ‘여러 나라의 방언(方言)이 각각 다르니 성음(聲音)이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하고는, 이에 쟁(箏)을 모방하여 십이현금(十二絃琴)을 만드니, 이것은 12월을 상징한 율(律)이다. 이에 악사인 성열현(省熱縣)지금은 미상 사람 우륵(于勒)을 시켜 하가야(下伽倻)ㆍ상가야(上伽倻) 등 12곡(曲)을 만들어 가야금(伽倻琴)이라 이름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우륵(于勒)이 나라가 어지러워질 것이라 하여 악기를 가지고 신라로 들어갔다. 왕이 낭성(娘城)지금의 청주부(淸州府)이다 을 순회하다가 우륵과 그의 제자 이문(尼文)이 음악을 안다는 말을 듣고, 하림궁(河臨宮)에 머물면서 음악을 연주하게 하니, 두 사람이 각각 새 노래를 지어 연주하였다. 왕은 기뻐서 그들을 국원(國原)지금의 충주부(忠州府)이다 에 두고, 대내마인 법지(法知)ㆍ계고(階古)와, 대사(大舍)인 만덕(萬德) 등 세 사람에게 그들의 음악을 배우게 하였다.
우륵은 그 사람들의 재능에 맞추어 가르쳤는데, 계고에게는 거문고[琴]를, 법지에게는 노래를,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쳤다. 세 사람이 이미 12곡을 배우고 서로 말하기를,
“이 음악이 번거롭고 음란하니, 아악(雅樂)이 될 수 없다.”
하고 드디어 간추려서 다섯 곡조를 만들었다. 우륵이 처음에는 이 말을 듣고 노하였으나, 다섯 곡을 듣고서는 감탄하기를,
“즐거우면서도 음란한 데 흐르지 않고, 구성지면서도 슬픔에 치우치지 않으니 정악(正樂)이라 말할 수 있다.”
하였다.
수업을 마치고 이를 연주하니, 왕이 크게 기뻐하여 후한 상(賞)을 내렸다. 간신(諫臣)들이 아뢰기를,
“망한 가야의 음악은 취할 것이 못됩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가야왕은 음란하여 스스로 멸망한 것이지 음악과 무슨 관계 있는가? 성인(聖人)이 음악을 제정한 것은 인정에 맞게 만든 것이니 나라의 치란(治亂)이 음조(音調)에 연유된 것은 아니다.”
하고, 마침내 이를 시행하여 대악(大樂)으로 삼았는데, 하림(河臨)과 눈죽(嫰竹) 두 곡조가 있으며, 모두 1백 85곡이다.
【안】 공자가 이르기를,
“음악이라 음악이라 말하지만, 종(鐘)과 북[鼓]을 말한 것이겠는가?”
하였고, 맹자가 이르기를,
“지금의 음악은 옛날 음악과 같은 것이다.”
하였으며, 선유들이 이르기를,
“음악은 하나의 화(和)이다.”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화는 음악의 근본(根本)이요, 악기는 지엽(枝葉)이다. 예컨대, 정치가 이루어지고 백성들이 화평하면 파유(巴渝) 같은 시골의 것이라도 음악이 될 수 있고, 혹 정치가 문란하고 백성들이 조화되지 못하면, 함(咸 황제(黃帝)의 음악)ㆍ영(韺 제곡(帝嚳)의 음악)ㆍ소(韶 순(舜)의 음악)ㆍ호(頀 탕(湯)의 음악)라도, 마침내 백성들의 원망만 더해줄 뿐이니, 진흥왕(眞興王)의 말이 옳은 것이다. 그러나 진흥왕은 국가의 재물을 털어서 부처 받들기를 마지않았으니, 그의 정치는 알 만한 것이다.
다시 상고하건대, 악이라는 것은 천지의 화(和)한 기운이다. 사람은 천지의 기운을 받아서 태어났다.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을 물론하고 본연의 화(和)는 일찍이 그침이 없는 것이다. 대저 갓난아이가 기뻐하며 웃고, 동자(童子)들이 노래하고 읊조리는 것이 모두 악(樂)의 시초인 것이다. 국가[方隅]는 비록 다를지라도 음악은 같은 것이다. 하대(夏代)와 상대(商代)에 동이(東夷)가 악(樂)과 무(舞)를 바친 일이 있었다. 《주례(周禮)》에,
“동이(東夷)의 악(樂)은 주리(侏㒧)인데 양기(陽氣)가 통하는 곳에는 만물이 땅에서 생겨 자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였고, 《오경통의(五經通義)》에는,
“동이(東夷)의 악(樂)은 창[矛]을 잡고 춤을 춤으로써, 시양(時養)을 돕는다.”고 하였다. 이를 본다면 동이(東夷)에 악(樂)이 있은 지 이미 오래다. 기자(箕子)가 동(東)으로 올 때에 예악(禮樂)도 함께 왔을 것이니, 반드시 악률(樂律)도 말할 만한 것이 있었을 것이나 사서(史書)에 전하는 것이 없고, 그 백성들의 노래에도 황하(黃河)와 숭산(嵩山)의 곡(曲)이 있었는데 고증할 문헌이 없으니 애석한 일이다. 이 이후로는 중국 사서에 약간 의거할 만한 것이 있다. 《후한서(後漢書)》 고구려전(高句麗傳)에는,
“무제(武帝) 때에 고취(鼓吹)와 기인(伎人)을 하사하였으며, 그 풍속은 남녀가 떼를 지어 노래하고 춤추며 즐긴다.”
하였고, 《북사(北史)》에는,
“고구려의 악(樂)에는 오현금(五絃琴)ㆍ쟁(箏)필률(筆篥)횡취(橫吹)소고(簫鼓) 등이 있는데 갈[蘆]을 불어서 곡(曲)을 만들었다. 백제에는 고각(鼓角)ㆍ공후(箜篌)쟁우(箏竽)지적(篪笛) 등의 악(樂)과 투호(投壺)저포(樗蒲)농주(弄珠)악삭(握槊) 등의 놀이가 있다.”
하였고, 《삼국유사》에는,
“신라 사람들이 축국(蹴踘)으로 농주(弄珠)의 유희를 삼는다.”
하였고, 《남사(南史)》에는,
“고구려(高句麗)가 가무(歌舞)를 좋아하여 국중(國中)의 읍락(邑落)에서 남녀가 떼를 지어 밤마다 노래하고 즐긴다.”
하였다.
《두씨통전(杜氏通典)》과 《문헌통고(文獻通考)》에는,
“예ㆍ맥(濊貊)에서는 해마다 10월이 되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밤낮으로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데 이것을 무천(儛天)이라 하였다. 그 악(樂)은 대략 부여와 같으나, 다만 그 쓰임이 다를 뿐이다. 삼한(三韓)은 그 풍속이 귀신을 믿어서 해마다 5월이 되면 제사를 지내고, 주야로 술을 마시면서 비파를 타며 노래하고 춤추며 땅을 밟음으로 박자를 삼는다. 10월에 농사일을 마치고는 또 이와 같이 한다. 마한국(馬韓國)에서는 항상 5월에 파종(播種)을 마치면 곧 귀신에게 제사하고, 밤낮으로 모여서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수십인이 땅을 밟으면서 몸을 굽혔다가 젖혔다가 하고 손발로 가락을 맞추기를 마치 탁무(鐸舞)와 같이 한다. 농사가 끝나면 또 그와 같이 한다. 부여(扶餘)는 12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연일 크게 모여서 먹고 마시고 노래부르며 춤추는데, 이것을 영고(迎鼓)라 한다. 행인(行人)들도 늘 노래 부르기를 즐기어 노래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고구려의 악공(樂工)은 자주빛 비단 모자에 새깃으로 꾸미고, 큰 소매로 된 누른 옷을 입고 자줏빛 비단 띠를 매고, 통이 큰 바지를 입고 붉은 가죽신을 신고, 오색(五色) 실로 땋은 선을 두른다. 춤출 적에는 4인이 한 조인데, 상투를 뒤쪽에 짜고 붉은 물감을 이마에 바르고 금당(金鐺)으로 장식한다. 4인 중 2인은 누른 치마 저고리에 붉고 누른 바지를 입으며, 2인은 붉고 누른 치마 저고리에 바지를 입으며, 소매를 길게 하고 검은 가죽신을 신고 쌍쌍이 마주서서 춤을 춘다. 악기에는, 타는 거문고[彈箏] 하나, 퉁기는 거문고[搊箏] 하나, 봉황머리 모양의 공후[鳳首箜篌]와 눕혀 놓고 타는 공후[臥箜篌] 각각 하나, 세워 놓고 타는 공후[竪箜篌] 하나, 비파(琵琶) 하나를 쓰는데 뱀의 가죽으로 바탕[槽]을 만들되 두께가 한 치 남짓하고 비늘 모양의 껍데기[鱗甲]를 붙이며, 가래나무[楸]로 앞[面]을 만들고 상아(象牙)로 채[捍撥]를 만들며, 국왕의 형상을 그렸다.
또 호선무(胡旋舞)에는 춤을 추는 자가 둥근 공[毬] 위에 서서 공을 굴리기를 바람같이 빨리하며, 오현금(五絃琴) 하나, 의취적(義觜笛) 하나, 생(笙) 하나, 호로생(胡蘆笙) 하나, 횡적(橫笛) 하나, 소(簫) 하나, 소필률(小篳篥) 하나, 대필률(大篳篥) 하나, 도피필률(桃皮篳篥) 하나, 요고(腰鼓) 하나, 제고(齊鼓) 하나, 구두고(龜頭鼓) 하나, 철판구(鐵板具) 하나, 담고(擔鼓) 하나, 패(貝) 하나 등이 있다. 수(隋)와 당(唐)의 구부악(九部樂)에 고려기(高麗技)가 있었는데, 무후(武后) 때에도 25곡(曲)이 남아 있었으나 정원(貞元) 말엽에는 겨우 1곡(曲)만이 수집되었고, 의복도 또한 점차로 쇠퇴하여 그 본래의 모습을 잃었다. 괴뢰병월조(傀儡幷越調)와 이빈곡(夷賓曲)은 이적(李勣)이 고구려를 격파하고 바친 것이다. 송(宋) 건덕(乾德) 4년에는 진주(鎭州)에서 영관(伶官) 28인을 보냈는데, 고구려의 부악(部樂)을 잘 익혔으므로 의복(衣服)과 은대(銀帶)를 하사하고 본도(本道)로 돌려보낸 일이 있다.
백제악(百濟樂)은 송(宋) 초기에 수입된 것으로서 후위(後魏)의 태무(太武)가 북연(北燕)을 멸하고 얻었으나, 잘 갖추어지지 못하였다. 주(周)의 무제(武帝)가 제(齊)를 멸하자 고구려ㆍ백제 두 나라가 각각 악(樂)을 바치니, 주(周)인이 악부(樂部)에 편입하고, 국기(國伎)라 일컬었으며, 당(唐)이 백제를 멸하고는 그 악(樂)과 악공을 모두 가져왔는데, 중종(中宗) 때에 공인(工人)들이 도망하여 흩어졌다. 개원(開元) 연간에는 기왕(岐王) 범(範)이 태상경(太常卿)이 되어 다시 건의하여 이를 두었다. 그 악기에는 쟁(箏)ㆍ적(笛)ㆍ도피필률(桃皮篳篥)ㆍ공후(箜篌)가 있었고, 그 노래에는 반섭조(般涉調)가 들어 있었다. 이것은 설인귀(薛仁貴)가 백제를 쳐서 깨뜨리고 노획(鹵獲)하여 바친 것이다. 노래는 다섯 가지가 있고, 춤은 두 사람씩 추는데, 이들은 자색(紫色)으로 된 통이 큰 치마와 저고리를 입고 장보관(章甫冠)을 쓰고 가죽신을 신었다.”
하였다. 장보(章甫)는 상(商)나라의 관(冠)인데 동이(東夷)가 이를 썼으니, 그것이 상(商)의 유제(遺制)인 듯하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예(禮)가 없어지면 동이(東夷)에서 찾아라.”
하였으니, 옳은 말이다. 그 악기는 중국과 발해(渤海)를 모방한 것이 많고, 풍속은 세시(歲時) 마다 모여서 악(樂)을 즐기었는데, 먼저 노래와 춤에 익숙한 사람 몇을 시켜서 앞에 가게 하고, 사녀(士女)들이 이를 따라서 선창하면 따라 화답하면서 빙빙 도는데 이를, ‘답추(踏鎚)’라고 불렀다.
신라는 해마다 8월 15일이 되면 악(樂)을 베풀고 백관들로 하여금 활쏘기를 시켜 말[馬]과 베[布]를 상으로 주었다. 당(唐) 정관(貞觀) 연간에는 악(樂)을 잘하는 여자 둘씩을 바치었다. 송(宋)의 지도(至道) 원년에는 정주(定州)에서 보고하기를,
“신라(新羅)의 번 지키는 사람[設番人] 20명이 거란(契丹)으로부터 도망쳐 왔다.” 하므로 황제가 편전(便殿)에 나아가 만나보니, 모두 손에 큰 나팔을 들었는데 다섯 되[五升]들이 그릇만하였으며, 말하기를,
“거란(契丹)에서 11년간 머무르는 사이에 우리에게 나팔부는 것을 배운 자가 50명이나 됩니다.”
하였다. 제가 불어 보게 하니, 소리가 중탁(重濁)하고 억세어서 대략 각성(角聲)과 같았다. 그 곡을 물으니, 선우곡(單于曲)이라 하였다. 그들을 모두 군대에 편입시켰다. 동사(東史)로 말하면 고구려ㆍ백제의 것은 상고할 수 없고, 신라 악기는 대[竹]로 만든 것과, 줄[絃]로 만든 것이 각각 세 가지와, 박판대고(拍板大皷)가 있었다. 가무(歌舞)는 두 사람이 하였는데, 방주복두(放舟幞頭)에다 자주색 큰 소매, 통옷[公襴]과 붉은 가죽띠, 금칠을 한 요대(腰帶)와 검은 가죽신이었다. 삼현(三絃)은, 현금(玄琴)ㆍ가야금(伽倻琴)ㆍ비파(琵琶)이고, 삼죽(三竹)은 대함(大笒)ㆍ중함(中笒)ㆍ소함(小笒)인데, 함(笒)은 즉 피리[笛]이며 각각 곡조(曲調)가 있고, 향악(鄕樂)은 유리왕(儒理王) 때에 비롯되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악지(樂志)에,
회악(會樂) 신열악(辛熱樂)은 유리왕(儒理王) 때에 돌아악(突阿樂)은 탈해왕 때에, 기아악(技兒樂)은 파사왕(婆娑王) 때에, 사내악(思內樂)은 내해왕(奈解王) 때에 가무(笳舞)는 내물왕(奈勿王) 때에, 우식악(憂息樂)은 눌지왕(訥祗王) 때에 만들었고, 대악(碓樂)은 자비왕(慈悲王) 때에 백결(百結) 선생이, 우인(芋引)은 지증왕(智證王) 때에 천상욱개자(川上郁皆子)가 만들었다. 미지악(美知樂)은 법흥왕(法興王) 때에, 도송가(徒頌歌)는 진흥왕(眞興王) 때에 만들었고, 날현인(捺絃引)은 진평왕(眞平王) 때에 승(僧) 담수(淡水)가, 사내기물악(思內奇物樂)은 원랑도(原郞徒)가 만들었다. 내지(內知)는 일상군(日上郡)의 악(樂)이요, 백실(白實)은 곤량군(坤梁郡)의 악이요, 덕사내(德思內)는 하서군(河西郡)의 악이요, 석남사내도(石南思內道)는 동벌군(同伐郡)의 악이요, 사중(祀中)은 북외군(北偎郡)의 악이다. 모두 지방민들이 악을 즐겨서 만든 것이며 모두 18곡이다. 성기(聲器)의 수와 가무(歌舞)의 모양은 후세에 전해지지 않았고, 악공(樂工)을 척(尺)이라 하였는데 가척(歌尺)ㆍ무척(巫尺)이 이것이다.
하였고, 최치원(崔致遠)의 시(詩)에 향악잡영(鄕樂雜詠) 다섯 수(首)가 있는데, 금환(金丸)ㆍ월전(月顚)ㆍ대면(大面)ㆍ속독(束毒)ㆍ산예(猴猊)로 모두 잡희(雜戱)를 말한 것이다.

추9월 돌궐(突厥)이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돌궐(突厥)은 흉노(凶奴)의 별종(別種)이다. 연연(蠕蠕)이 쇠약하여지매 돌궐이 다시 북막(北漠)에서 일어나더니 이때에 이르러 고구려를 공격하여 왔다. 신성(新城)을 포위하였으나 이기지 못하매, 옮기어 백암성(白岩城)을 공격하였다. 고구려에서는 장군 고흘(高訖)을 보내어 군사 1만을 거느리고 항전케 하여 이를 이기고 4천여 급(級)을 사로잡았다.
○ 신라가 고구려를 침략하여 10성(城)을 취하였다.
신라 왕이 거칠부(居漆夫)와 구진비대(仇珍比臺) 등 여덟 장수에게 명하여 백제와 합병하여 고구려를 치니, 백제가 먼저 공격하여 격파하였는데, 거칠부 등이 이긴 기회를 타서 죽령(竹領) 밖과 고현(高峴) 안의 10군을 취하였다.
○ 신라가 처음 백좌강(百座講)과 팔관회(八關會)를 설치하였다.
거칠부 등이 고구려를 공격할 때에 중 혜량(惠亮)이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도좌(道左 길 가를 말한다)에서 보고, 드디어 함께 왕을 알현(謁見)하였다. 이에 왕이 이를 승통(僧統 중 가운데 가장 높은 지위)으로 삼았고, 비로소 백좌강회(百座講會)와 팔관법(八關法)을 설치하였다. 그 법은 매해 11월[仲冬]에 궁궐의 뜰에 중을 모아놓고, 윤등(輪燈)은 좌(座)에 걸고 향등(香燈)은 사방에 별여 걸며, 채붕(彩棚) 둘을 매어 달고는 온갖 놀이와 가무(歌舞)를 하면서 복을 빌었다. 팔관(八關)이라는 것은,
“첫째 살생하지 않고, 둘째 도둑질하지 않고, 셋째 음란하지 않고, 넷째 거짓말하지 않고, 다섯째 술을 마시지 않고, 여섯째 높고 큰 상에 앉지 않고, 일곱째 사치스러운 옷을 입지 않고, 여덟째 관람을 즐기지 않는다.”
는 것이다. 관(關)은 막는다는 뜻으로 여덟 가지 죄를 금하고 막아서 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최씨[崔溥]는 이르기를,
“이것은 일종의 고고(枯槁) 적멸(寂滅)의 계율이요, 진실로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일에 관계되는 것은 아니다.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자는 스스로 경계가 있는 것이다. 하늘을 공경하여 백성에게 시절(時節 농사 때)을 주는 것은 요(堯)의 경계요, 조심하고 조심하라, 하루에 만 가지 기미가 일어난다고 한 것은 순(舜)의 경계요, 색(色)에 빠지거나 사냥에 빠지거나 술을 즐기거나 집을 사치하게 꾸미는 것은 우(禹)가 자손에게 경계한 것이요, 삼풍 십건(三風十愆)은 탕(湯)이 지위에 있는 이를 경계한 것이요, 먼저 백성의 어려움을 알고 검소한 옷차림으로써 백성을 평안하게 하여 농사에 힘쓰게 하고, 놀고 사냥하기를 즐기지 말라고 한 것은 주(周)의 문왕(文王)ㆍ무왕(武王)이 후왕(後王)을 경계한 말이다. 이렇게 하여야 천명과 민심을 보전하여 나라가 오래도록 융성하는 것인데, 팔관회(八關會)의 회의는 황당무계함과 허수아비로 만든 죄 크다 할 수 있다.”
하였다.

[주D-001]12곡(曲) : 우륵(于勒)이 만든 곡(曲)인데, 다음과 같다. 하가라도(下加羅都)ㆍ상가라도(上加羅都)ㆍ보기(寶伎)ㆍ달기(達己)ㆍ사물(思勿)ㆍ물혜(勿慧)ㆍ하기물(下奇物)ㆍ사자기(帝子伎)ㆍ거열(居烈)ㆍ사팔혜(沙八兮)ㆍ이사(爾赦)ㆍ상기물(上奇物).
[주D-002]파유(巴渝) : 지방 이름인데, 파(巴)는 사천성(四川省) 파현(巴縣) 지방이고, 유(渝)는 호북성(湖北省) 유수(渝水)를 말한다. 《후한서》 남만전(南蠻傳)에는 “파유(巴渝)의 풍속이 노래와 춤을 좋아하였는데, 한 고조(漢高祖)가 이를 보고 ‘이것은 주 무왕(周武王)이 주(紂)를 칠 때의 노래다.’ 하고, 악인을 명하여 이를 익히니, 이것이 이른바 파유부(巴渝府)이다.” 하였다.
[주D-003]주리(侏㒧) : 서방(西方)의 악(樂)을 말한다. 원래 동서남북 사방에 대한 악(樂)이 있었는데, 동방은 말(靺), 남방은 임(任), 북방은 금(禁), 서방은 주리로 되어 있다. 《周禮 卷24 四夷之樂》
[주D-004]시양(時養) : 여름의 생성을 말하는 것으로 《주례》 사이지락(四夷之樂)에 동이(東夷)는 창을 가지고 봄[時生]을 돕고, 남이(南夷)는 활[弓]을 가지고 여름[時養]을, 서이(西夷)는 도끼[鉞]를 가지고 가을을, 북이(北夷)는 방패를 가지고 겨울[藏]을 돕는다고 하였다. 이로 보면 분명히 동이는 창[矛]을 가지고 봄을 도와야 하는데도 여름을 돕는다 라고 되어 있으니, 이것은 여름이 아니라 봄일 것이다.
[주D-005]쟁(箏) : 비파류(琵琶類)에 속하는 것으로서 당 이전에는 12현(絃)이었으나, 당 이후에는 1현이 더해져 13현이다.
[주D-006]필률(篳篥) : 젓대류[笛類]로 외부는 일곱 구멍, 내부는 한 구멍이다.
[주D-007]횡취(橫吹) : 젓대[笛]로서 서역으로부터 전래되었다.
[주D-008]소고(簫鼓) : 소(簫)는 소관(小管)을 배열하여 봉황(鳳凰)의 날개 모양으로 된 악기이다. 길이는 1척 2촌, 1척 4촌, 1척 5촌 등 세 가지이고, 관수(管數)는 13 혹은 16ㆍ17ㆍ21ㆍ23ㆍ24로서 일정하지 않다. 태고(太鼓)와 항상 같이 쓰이는 악기이다.
[주D-009]공후(箜篌) : 현악(絃樂)의 일종으로서 백제금(百濟琴)이라고도 한다. 이 공후(箜篌)에는 수공후(竪箜篌)ㆍ와공후(臥箜篌)ㆍ봉수공후(鳳首箜篌)가 있다. 수공후는 서구(西歐)의 하프와 비슷하고 와공후는 비파류이다. 《통전(通典)》에는 “그 모양은 비파와 같으며 굽었고 길고 현(絃)으로 되어 있으며, 가슴에 대고 두 손으로 탄다.” 하였다.
[주D-010]쟁우(箏竽) : 퉁소의 일종. 길이는 중국 척(尺)으로 7척 2촌, 36개의 혀[舌]가 있었으나, 후세에 와서는 9개로 줄었다. 《周禮 春官 笙師》
[주D-011]지적(篪笛) : 피리의 일종. 횡적(橫笛)의 하나. 대[竹]로 만들었는데, 긴 것은 1척 4촌, 짧은 것은 1척 2촌, 여덟 구멍 혹은 일곱 구멍으로 되어 있고, 위의 한 구멍으로 소리를 낸다. 《呂覽 仲憂》
[주D-012]투호(投壺) : 단지를 놓고 화살을 던져 넣는 놀이.
[주D-013]저포(樗蒲) : 백제 때 유희의 한 가지. 3백 60알을 3분해서 두 관(關)을 만들고, 사람이 알을 쥐고, 그 알 다섯 개만은 위가 검고 아래를 희게 해서 검은 것에 두 눈을 새기니, 이것이 독(犢)이고, 흰 것도 둘을 새기니 이를 치(雉)라 하고, 던져서 다 검은 것은 노(盧)가 된다. 그 채(采)가 16이요, 둘이 희고, 셋이 검은 것은 치(雉)니, 그 치가 14요, 둘이 검고 셋이 흰 것은 독(犢)이니, 그 채가 10이요, 다 흰 것은 백(白)이라 하니, 그 채가 8이다. 넷은 귀채(貴采)라 하고, 여섯은 잡채(雜采)라 한다.
[주D-014]농주(弄珠) : 쟁반에서 구슬돌리기.
[주D-015]악삭(握槊) : 일명 쌍륙(雙陸)이라 하는데, 장기류로서 판과 알이 있다.
[주D-016]의취적(義觜笛) : 혀가 있는 횡적(橫笛)이다. 고구려의 음악에는 탄쟁(彈箏)ㆍ추쟁(搊箏)ㆍ봉수(鳳首)ㆍ공후(箜篌)ㆍ비파(琵琶)ㆍ의취적(義觜笛) 등이 있는데, 이것은 횡적(橫笛)으로서 부리[觜]가 있으며, 이를 서량악(西凉樂)이라 한다. 《唐書 禮樂志 山裳考索》
[주D-017]생(笙) : 관악기의 한 가지. 형태는 우(竽)와 같은데 19관(管) 또는 13관이다. 옛날에는 관(管)을 박[瓠] 속에 나열해서 만들고, 적(笛)을 관(管) 끝에 끼웠는데 서서 옆으로 부는 악기이다. 《爾雅注疏 卷5 釋樂》
[주D-018]호로생(胡蘆笙) : 만이(蠻夷)가 부는 6관(管)의 악기이다.
[주D-019]횡적(橫笛) : 횡으로 부는 피리. 후한(後漢) 시대의 마융부(馬融賦)를 보면 염(剡) 위에 구멍이 다섯이 있는데, 한 구멍은 뒤까지 뚫려 있다. 지금의 척팔(尺八)과 같다. 이선위(李善爲)의 주(註)에는 일곱 구멍이 있고, 길이가 1자 3치라 하였으니, 이것이 지금의 횡적(橫笛)이다. 《夢溪筆談 樂律1》
[주D-020]요고(腰鼓) : 큰 것은 기와로 되어 있고, 작은 것은 나무로 되어 있는데, 모두 머리는 넓고 몸통이 가늘다. 《文獻通考 卷135 樂8》
[주D-021]제고(齊鼓) : 칠통(漆桶)과 같이 크고, 북 얼굴[鼓面]이 배꼽처럼 튀어나와서 마치 사향[麝]의 배꼽과 같으므로 제고(齊鼓)라고 한다. 《唐書 音樂志》
[주D-022]담고(擔鼓) : 항아리보다 좀 작은 것으로서 가죽을 씌워 칠한 것. 《文獻通考 卷136 樂9》
[주D-023]패(貝) : 큰 조개와 같은데, 약 2근(斤) 가량의 크기이다. 이것을 불어서 악을 맞춘 것으로서 남만(南蠻)에서 나온 악이라 한다. 《通典 卷144 樂四》
[주D-024]삼풍 십건(三風十愆) : 관직에 있는 자를 경계한 말. 삼풍(三風)은, 항상 춤추고 취하여 노래하는 것은 무풍(巫風), 재화와 색(色)에 빠지거나, 놀고 사냥을 즐기는 것은 음풍(淫風), 성언(聖言)을 업신여기고, 충직(忠直)하지 않고, 덕 있는 이를 멀리 하고, 사나운 자를 가까이 하는 것은 난풍(亂風)이다. 또한 이 세 가지 나쁜 풍습을 이루는 열 가지 내용이 십건(十愆)이다. 《書經 伊訓》
동사강목 제3상
임신년 신라 진평왕 34년, 고구려 영양왕 23년, 백제 무왕 13년(수 양제 대덕 8, 612)

춘정월 수의 군사가 길을 나누어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때에 사방의 병사들이 모두 탁군(涿郡)에 모였다. 수주가 합수령(合水令) 유질(庾質)에게 묻기를,
“고구려 무리들이 우리 일군(一軍)을 당하지 못할 것인데, 이제 이 많은 무리로 치니 이기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치면 이길 것입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친히 나가서 싸우다가 혹시 이기지 못한다면 위령(威靈)이 떨어질까 염려됩니다. 그러니 만일 거가(車駕)는 여기에 머물러 있고, 용감한 장수와 강한 군사를 시켜서 뜻하지 않는 사이에 나가서 공격하면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일의 기틀은 빠른 데 있으니 늦으면 공(功)이 없습니다.”
하였다. 제(帝)가 기뻐하지 않고 드디어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문책하기를,
“고구려가 작은 나라로서 우매하고 공손치 못하여 발해와 갈석(碣石) 사이에 집결하여 요(遼)와 예(濊)의 경계를 잠식(蠶食)하고, 망명자와 모반자들을 유인하여 변경에 살게 하며, 거란의 무리[黨]와 합하여 해술(海戌)을 죽이고, 말갈(靺鞨) 고장[服]을 가까이하여 요서(遼西)를 침략하고, 청구(靑丘)에서 조공을 하면 보물을 빼앗고, 사신의 수레가 가면 왕인(王人) 중국 사신을 가리킨 말 을 거절하여 임금 섬기는 마음이 없으니 어찌 신하된 예라고 하겠는가? 또한 법령이 가혹하고 부세가 과중하고 강신호족(强臣豪族)들이 국권을 나누어 쥐고 붕당이 풍속을 이루었으며, 뇌물이 성행한데다가 기근(饑饉)이 거듭되고 싸움이 그칠 사이가 없다. 짐이 이러한 실정을 살펴보고 억울한 사람을 구제해 주고 죄 있는 자를 문책하기 위하여 친히 육사(六師)를 거느리고 구벌(九伐)을 펴리라.”
하였다. 좌(左) 12군은 누방(鏤方)ㆍ장잠(長岑)ㆍ명해(溟海)ㆍ개마(蓋馬)ㆍ건안(建安)ㆍ남소(南蘇)ㆍ요동(遼東)ㆍ현도(玄菟)ㆍ부여(扶餘)ㆍ조선(朝鮮)ㆍ옥저(沃沮)ㆍ낙랑(樂浪) 등으로 나오고, 우(右) 12군은 점선(黏蟬)ㆍ함자(含資)ㆍ혼미(渾彌)ㆍ임둔(臨屯)ㆍ후성(候城)ㆍ제해(提奚)ㆍ답돈(踏頓)ㆍ숙신(肅愼)ㆍ갈석(碣石)ㆍ동이(東暆)ㆍ대방(帶方)ㆍ양평(襄平) 등으로 나와서 평양에 총집결하였다. 군사가 모두 1백 13만 3천 8백인데 2백 만이라 하고, 군량을 운반하는 자는 군사 수의 배가 되었다. 북을 치고 각(角) 부는 소리가 연이어 들리고, 기가 9백 60리에 뻗쳐 있었다.

3월 수군(隋軍)이 요수(遼水)에서 고구려병을 대패시키고, 나아가 요동을 포위하였다.
대군이 요수에 이르러 물가에 진을 치니, 고구려 군사는 요수를 막고 굳게 지키었다. 수인(隋人)들은 부량(浮梁 뗏목으로 만든 다리, 부교(浮橋)와 같다)으로 군사를 건너게 하였으나 부량이 언덕에 닿지 않았다. 고구려 병사들이 높은 곳에 올라가 이를 공격하니, 수군(隋軍)이 언덕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자가 많았는데 수의 용장 맥철장(麥鐵杖)ㆍ전사웅(錢士雄)ㆍ맹금차(孟金叉) 등이 모두 전사하였다. 수나라 사람들은 다시 다리를 연결하고 나아가 동쪽 언덕에서 크게 싸워 고구려 병사가 대패하니, 전사자가 만(萬)을 헤아렸다. 수군이 이긴 기세를 타고 진격하여 요동을 포위하니, 이곳은 곧 한(漢)의 양평성(襄平城)이다. 수주(隋主)가 위 문승(衛文昇)에게 명하여 요좌(遼左)의 백성을 위무, 조세와 부역을 10년간 면제해 주고, 여기에 군현을 설치하였다.

하 5월 백제에 홍수가 졌다.

6월 수주 광(廣)이 요동에 이르렀다.
그 전에 수주가 여러 장수에게 경계하기를,
“그대들은 진군(進軍)하되, 세 길로 나누어 가고 공격하게 되면 반드시 세 길은 서로 알아야 하며, 모든 군사가 진군하거나 정지하거나 모두 상부에 알려서 회보를 기다려 행하고 독단적으로 행동하지 말라.”
하였다. 이때에 고구려의 요동 수장(守將)이 여러 차례 출전하였으나 불리했으므로 성을 돌면서 굳게 지켰다. 수주가 여러 군사에게 명하여 공격하게 하고 칙령을 내려 이르기를,
“고구려가 만일 항복하면 마땅히 이를 무마하되, 군사를 풀어놓지 말라.”
하였다. 성(城)이 거의 함락됨에 성중 사람들이 항복함을 청하자 제장들이 달려가서 상부에 알리니, 회보(回報)가 올 무렵이면 성중(城中)이 방어태세를 갖추어서 수시로 나와 항전하는데, 이렇게 하기 두세 번이었으나 수주는 끝내 이를 알지 못하였다. 이때에 으르러 수주가 요동에 와서 고구려군의 형세를 두루 살펴보고 여러 장수들을 불러 질책하고는 성의 서쪽 몇 리 지점에 진을 쳤으나 고구려의 여러 성들은 굳게 지키며 항복하지 않았다.
○ 고구려가 수의 수군장(水軍將) 내호아(來護兒)를 평양성 아래에서 격파시켰다.
내호아가 강회(江淮) 수군(水軍)의 배[舳艫]를 거느리고 수백 리에 뻗쳐 바다를 건너 먼저 진군하여 패수(浿水)에 들어가니 평양과의 거리는 60리였다. 고구려군과 만나 진격하여 크게 무찌르고 정예군 4만을 선발하여 곧바로 성(城) 아래에 이르렀다. 고구려인들이 나곽(羅郭) 속 빈 절[寺]에 복병해 놓고 나가서 싸우다가 지는 척하고 도망하매 호아(護兒)가 성(城)에 들어가서 군사를 풀어 놓고 약탈케 하니, 다시 대오가 없어졌다. 이에 고구려의 매복했던 군사가 일어나서 양쪽에서 공격하여 수병을 대패시키었다. 호아는 겨우 목숨만 건졌고 사졸들은 살아 돌아간 자가 수천에 불과하였다. 고구려 군사들이 배 닿는 곳까지 추격했으나 호아의 부수(副師) 주법상(周法尙)이 군사를 정비하여 대기하고 있으므로 고구려 군사들이 곧 물러나니, 호아는 군사를 이끌고 해포(海浦)에 돌아가서 다시 주둔하였다.

추 7월 고구려 대신 을지문덕이 수의 우문술 등 9군 30만과 살수에서 격전하여 대패시키니, 수주 광이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수장(隋將) 우문술(宇文述)은 부여(扶餘) 길로 나오고, 우중문(于仲文)은 낙랑(樂浪) 길로 나오고, 형원항(荊元恒)은 요동(遼東)길로 나오고, 설세웅(薛世雄)은 옥저(沃沮) 길로 나오고, 신세웅(辛世雄)은 현도(玄菟) 길로 나오고, 장근(張瑾)은 양평(襄平) 길로 나오고, 조효재(趙孝才)는 갈석(碣石) 길로 나오고, 최홍승(崔弘昇)은 수성(遂成) 길로 나오고, 위문승(衛文昇)은 증지(增地)길로 나와서 모두 압록강(鴨綠江) 서쪽에 집결하였다. 우문술 등은 노하(瀘河)ㆍ회원(懷遠) 두 진(鎭)으로부터 군사를 발(發)하여 인마(人馬)에게 모두 1백 일분의 양식을 주고 또 무기와 의류ㆍ천막, 그 밖의 군수품을 나누어 주었으므로 사람마다 3석(石) 이상의 무게여서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명령을 내리되,
“군량[粟米]을 버리는 자는 참형(斬刑)에 처하리라.”
하니, 사졸들이 모두 천막 속에 구덩이를 파고 묻어 버렸으므로 겨우 중도에 가서 군량이 떨어지게 되었다. 고구려 대신 을지문덕 《자치통감고이(資治通鑑考異)》에는 ‘울지문덕(蔚支文德)’이라고 하였다 은 침착하고 지모(智謀)가 있는 데다 겸하여 글을 잘 하였다. 고구려 왕이 중문(仲文)의 진영에 보내어 짐짓 항복하는 척하고, 허실을 탐지하려 하던차 중문(仲文)이 먼저 수 양제의 밀지를 받았는데, ‘고구려 왕을 만나거나 문덕이 오면 반드시 사로잡아라’ 하였다. 중문이 이를 잡으려 할 때 수의 위무사(慰撫使) 유사룡(劉士龍)이 이를 굳이 제지하니 중문이 그 말을 듣고 문덕을 돌려보냈다. 이윽고 보낸 것을 뉘우쳐 사람을 시켜 속여 이르기를, ‘할 말이 있으니 다시 오라’ 하였으나, 문덕은 돌아보지도 않고 압록수(鴨綠水)를 건너 돌아왔다. 중문과 우문술 등은 문덕을 놓치고는 마음이 불안하였다. 우문술은 군량이 떨어져 돌아가려 하고, 중문은 정예군을 시켜 문덕을 추격하려 하니, 우문술이 굳이 막았다. 중문은 노하여,
“장군이 10만 군을 거느리고 적은 적군을 격파치 못하고 무슨 면목으로 황제를 보겠는가? 군사(軍事)를 결정하는 것은 한 사람의 의견에 좇아야 하는데 지금 사람마다 딴 마음을 가졌으니 어찌 적을 이기겠는가?”
하니 문술 등이 마지못하여 여러 장수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문덕을 추격하였다. 문덕은 문술의 군사가 굶주린 빛이 있음을 보았으므로 이를 피곤하게 하려고 싸울 때마다 곧 도망하니, 문술 등이 하루 동안에 일곱 번을 이기었다. 술 등은 이 빠른 승첩을 믿고 동으로 살수(薩水 지금의 청천강(淸川江))까지 건너와 평양성에서 근 30리 지점에 산을 의지하여 진영을 쳤다. 문덕이 중문에게 시를 보내어 말하기를,
신통한 계책은 천문을 다 알았고 / 神策究天文
묘한 계산은 지리를 통했도다 / 妙算窮地理
전쟁에 이겨 공이 높았으니 / 勝戰功旣高
족함을 알거든 그만 그침이 어떠한고 / 知足願云止
하였다. 중문이 답서하여 효유하였다. 문덕이 또 사신을 보내어 거짓 항복하는 척하면서 문술에게 말하기를,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면, 왕을 모시고 형재(行在)에 나아가 조회하리라.”
하니, 문술이, 군사들이 피곤하여 다시 싸울 수 없고 또한 평양성이 험하여 졸지에 함락할 수 없음을 알고 마침내 문덕의 속임수에 빠져 방진(方陣)을 만들어 물러갔다. 이때 문덕이 군사를 출동시켜 사면에서 습격하여, 싸우면서 쫓아가다가, 추 7월 살수에 이르러 수군이 반쯤 건넜을 때 고구려군이 수의 후군을 추격하니 신세웅(辛世雄)이 전사하고, 여러 군사들이 다 괴멸되어 수습할 수 없었다. 장사들은 도망쳐 1주야 만에 압록수에 이르니, 4백 50리 길을 간 셈이다. 장군 왕인공(王仁恭)이 후군이 되어 고구려군을 반격하여 물리쳤다. 고구려군이 백암산(白巖山)에서 설세웅(薛世雄)을 포위하니, 세웅이 분격하여 물리쳤다. 내호아(來護兒)는 문술 등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또한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고, 오직 위문승(衛文昇) 1군만이 온전하였다. 처음 구군(九軍)이 요(遼)에 이르렀을 때에는 30만 5천이었는데 돌아갈 때 요동성에 이른 것은 2천 7백 인이었다. 물자와 기계는 거만(巨萬)을 헤아렸는데 송두리째 탕진되매, 수주가 크게 노하여 우문술 등을 구속하였다가 계묘일에 이끌고 돌아갔다. 때에 백제는 또한 국경에서 군사를 정돈하고, 겉으로는 수(隋)를 돕는 척했으나 실은 두 마음[兩端]을 가지고 있었다. 수인들은 이 싸움에서 다만 요수 서쪽의 고구려의 무려라(武厲邏)를 빼앗고 요동군과 통정진(通定鎭)을 두었을 뿐이었다. 최씨는 말하였다.
“예부터 전쟁[兵家]의 승패는 군사의 다소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장군의 현명함에 있는 것이다. 부진(苻秦 전진(前秦)을 말함. 그 임금 부견(苻堅)의 성을 따서 말함)이 백만 군으로 진(晋)을 쳤을 때 사 현(謝玄)은 8만의 군사로도 도강해서 한 번 싸우매 진군(秦軍)이 감히 지탱[枝梧]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진(晋)의 군신들이 훌륭한 장수를 얻어서 임기응변하여 승리의 계책을 얻어서이다. 수씨(隋氏 양제(煬帝)를 가리킴)는 천하를 통일하여 그 군사 강함과 나라의 부성(富盛)함이 부진(苻秦)보다 몇 배나 되었으나, 양제가 천하의 군사를 출동하여 한 작은 나라를 정벌하는데 고금을 통해 보아도 군사를 이렇게 많이 동원한 예는 없었다. 고구려의 계책으로는 속수무책으로 항복을 애걸하기에 겨를이 없었을 것인데 을지문덕은 비록 몹시 혼란하고 어수선한 중에서도 조용히 주획(籌畫)하고 틈을 엿보아 힘껏 공격하기를, 마치 마른 나무를 꺾고 썩은 나무를 뽑아 버리듯이 함으로써 수(隋) 양제를 대파하고 돌아가게 하여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게 한 것이다. 대개 고구려의 땅은 한 모퉁이에 치우쳐 있는데다가 강좌(江左)ㆍ서릉(西陵)ㆍ거록(鉅鹿)ㆍ초성(譙城)ㆍ비수(淝水)와 같은 요새[形勝]가 없고, 사안(謝安)왕도(王導)와 같이 본래 양성했던 군사도 없었는데 한 평양의 고군(孤軍)으로 천하의 대병을 대적하여 마침내 전승(全勝)을 거두었으니, 사안과 견주어 보더라도 문덕이 오히려 장하다. 문무의 재능이 뛰어나고 지용이 겸전한 사람이 아니면 능히 이런 일을 할 수 있으랴! 이후로부터 비록 당 태종(唐太宗)의 신통한 무덕(武德)으로도 안시성(安市城) 싸움에서 뜻을 얻지 못하였고, 요(遼)ㆍ금(金)ㆍ몽고(蒙古)의 흉악한 무리들도 우리 나라에 와서 크게 해독을 끼치지 못했고, 금산(金山)ㆍ금시(金始)합란(哈丹)홍구(紅寇)의 군사가 모두 우리 나라에서 섬멸되었으니, 천하 후세에 우리 동방을 강국으로 여기어 감히 함부로 침범하지 못한 것은 문덕의 남긴 공적이 아니겠는가?”

[주D-001]육사(六師) : 군사의 단위로, 육군(六軍)을 말한다. 1군은 1만 2천 5백 인으로서 왕은 6군을 갖는다. 《周禮注疏 卷28 下官 司書》
[주D-002]구벌(九伐) : 주(周)가 제후국을 다스릴 때 썼던 법제로서 다음과 같다. 1. 약한 자를 업신여기고 작은 나라를 침략하면 국토의 일부를 삭탈[眚]하고, 2. 어진 사람을 해치고 백성을 해치면 정벌[伐]하고, 3. 국내에서 포학(暴虐)하고 국외(國外)를 업신여기면 임금을 갈아치우며[壇], 4. 토지가 묵고 백성이 흩어지면 흡수하고[削], 5. 나라의 강함을 믿고 복종하지 않으면 침략하고[侵], 6. 친족을 죽이면 그 죄를 다스리고[正], 7. 임금을 죽이면 그를 죽이고[殘], 8. 명령을 어기고 정사(政事)에 경솔하면 이웃과 교통을 끊게 하고[杜], 9. 국내외가 어지럽고 금수의 행동을 하면 멸망시킨다[滅]는 것이다. 《周禮注疏 29 大司馬》
[주D-003]사현(謝玄) : 동진(東晋)의 명신인 사안(謝安)의 조카인데, 자는 유도(幼度), 시호는 헌무(獻武). 전진(前秦)의 부견(苻堅)이 남하하여 진(晋)나라에 쳐들어 갈 때 사안의 지휘에 따라 8만의 군사로 백만 대군을 비수(淝水)에서 격파하여 용명을 떨쳤다. 《晋書 卷79》
[주D-004]사안(謝安) : 순제(順帝) 말에 양주(揚州)와 서주(徐州) 지방에 도적이 들끓었다. 적(賊)의 무리 서풍(徐風) 등이 동성현(東城縣)을 공격하자 사안이 종친을 끌고 쳐부숴 그 공으로 평경후(平卿侯)에 오르고, 읍(邑) 3천 호를 받았다. 《後漢書 卷68》
[주D-005]왕도(王導) : 진(晋)의 임기인(臨沂人). 남(覽)의 손자. 자는 무홍(茂弘), 시호는 문헌(文獻). 군모(軍謀)와 밀책(密策)을 잘 했다.
[주D-006]금산(金山)ㆍ금시(金始) : 거란(契丹)의 왕자 금시(金始)와 거란의 유종(遺種)인 금산(金山)은 1217년 몽고에 쫓기어 9만의 대군을 이끌고 고려의 서북계를 침입하여 서해도(西海道)로 침범해 왔다가 다음 해에 여진(女眞)에 들어간 나라이다.
[주D-007]합란(哈丹) : 원(元) 태종(太宗)의 제이자(第二子). 고려 충렬왕 16년에 합단(哈丹)병 수만(數萬)이 등주(登州)를 함락하여 17년에 고려와 원이 그를 연기(燕岐)에서 대파시켰다.
[주D-008]홍구(紅寇) : 원(元)의 말기 중국에서 일어난 도적이다. 1359년(공민왕 8년) 이방실(李芳實)ㆍ안우(安祐) 등이 홍적(紅賊)을 대파, 11년에는 정세운(鄭世雲)ㆍ안우(安祐) 등이 홍적을 대파하고 경성(京城)을 수복한 일이 있었다.
목은시고(牧隱詩藁) 제28권
 시(詩)
예천군(醴泉君)의 내외손이 모여서 술을 마시며 이름을 사촌회(四寸會)라고 하였는데, 해마다 두 사람씩 번갈아 가며 술과 음식을 마련하곤 하였다. 그런데 내가 근심과 병으로 지낸 십여 년 동안 이 모임도 거의 열리지를 않았는데, 이 오성(李鼇城)이 무너진 기강을 다시 세울 목적으로 삼월 초하룻날에 빈객을 많이 초청하고 크게 풍악을 연주하면서 예전보다 열 배나 더 성대하게 잔치를 마련하였다. 이에 다음 날에 시 한 수를 추록(追錄)하여 오성 좌하(座下)에 증정하면서 한번 웃어 보도록 하였다.

비단옷 무더기 속에 울려 퍼지는 관현악 / 羅綺叢中絃管聲
주인이 누구냐 하면 바로 이 오성이시라네 / 主人云是李鼇城
난리 끝에 이 모임을 누가 또다시 마련했노 / 亂餘此會誰重辦
병든 뒤에 상봉하니 이 몸도 살아날 것 같네 / 病後相逢我再生
광달하다고 일컬어지는 왕사의 풍류라면 / 王謝風流稱曠達
태평 시대 구가하는 최로의 벌열이라 할까 / 崔盧閥閱値升平
백발로 누차 춤 춘 것을 비웃질랑 말아 주오 / 白頭屢舞莫嘲笑
야반에 취해서 돌아가니 닭이 벌써 울었습디다 / 夜半醉歸雞已鳴

[주D-001]비단옷 무더기 : 수많은 기녀(妓女)들을 가리킨다. 기녀를 표현한 소식(蘇軾)의 시에 “소도가 봉우리 터뜨리니 봄을 못 이기는 듯, 비단옷 무더기 속에 단연코 으뜸일세.[小桃破萼未勝春 羅綺叢中第一人]”라는 구절이 나온다. 《蘇東坡詩集 卷13 答陳述古》
[주D-002]광달하다고 …… 풍류라면 : 왕사(王謝)는 세상의 구속을 받지 않고 자유스럽게 함께 어울려 노닐었던 진(晉)나라 왕희지(王羲之)와 사안(謝安)의 합칭으로, 목은 자신을 가리킨다.
[주D-003]태평 시대 …… 할까 : 최로(崔盧)는 위진(魏晉) 시대 때부터 당대(唐代)까지 장기간 조정에서 현달한 산동(山東)의 최씨(崔氏)와 노씨(盧氏) 집안의 합칭으로, 예천부원군(醴泉府院君) 권한공(權漢功)의 가문을 가리킨다. 목은은 권한공의 아들인 권중달(權仲達)의 사위이다.
성호사설 제16권
 인사문(人事門)
급량 잡단(及梁雜端)

우리나라 사람은 문헌이 부족한 관계로 상고하는 데에 그릇된 점이 많아 사기의 득실은 논할 것도 없고, 자기네 시조의 보록(譜錄)에까지도 그 착오를 면치 못하는 실정이다.
경주 이씨는 혁혁한 문벌인데도 지금 백사(白沙) 이상공(李相公)의 문집을 상고해 보면 매양, “우리의 시조는 사량부 대인(沙梁部大人)이라.”고 했으니, 사량은 곧 진한 육부(六部)의 하나이다.
신라 혁거세 9년에, 급량부(及梁部)에는 이씨의 성을, 사량부에는 최씨의 성을 하사했으니, 지금 경주 최씨는 곧 사량부의 후손이다. 그러므로 《삼국사기》에, “최치원은 사량부 사람이라.”고 했으니, 이씨의 선조는 곧 급량부인데 후세 사람들이 문리를 잘못 보아 그릇됨이 이에 이른 것은 무슨 일인가?
내가 또 근자에 남의 묘지명을 지어 주었는데, 그 선조는 고려 집단(執端) 모(某)라고 했다. 고려 관제(官制)에는 이런 벼슬이 없고, 다만 사헌부에 집의(執義)와 잡단(雜端)이 있었는데, 지금 제도에는 집의만 있고 잡단은 없으니, 지금의 지평(持平)이 곧 이 벼슬인 것이다. 내가 《고려사》 백관지(百官志)에 의거하여 이를 개정하였는데, 그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주D-001]육부(六部) : 옛날 씨족 중심으로 나뉜 행정 구역으로 사량부(沙梁部)ㆍ급량부(及梁部)ㆍ본피부(本彼部)ㆍ모량부(牟梁部)ㆍ한기부(漢祇部)ㆍ습비부(習比部)이다
약천집 제27권
 서(序)
완산 최씨 족보(完山崔氏族譜) 서문 을묘년(1675, 숙종 1)

지난해에 구만이 북관(北關)에 있을 때에 도사(都事) 최한경(崔漢卿) 씨가 편지를 보내오기를, “저의 9대조이신 평도공(平度公)의 묘소가 용인현(龍仁縣)에 있는데, 옛날에 글을 쓴 표석이 있었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부러지고 넘어져서 이제 다시 새 것으로 바꾸고자 합니다. 그대 또한 공의 외손이 되니, 마땅히 이 일을 도와주십시오.” 하였다. 구만은 늦게 태어나고 몽매하여 선대(先代)의 고사를 알지 못하였는데, 한경 씨가 최씨의 족보를 새로 편수했다는 말을 듣고서 청하여 살펴보았다. 구만의 고조인 승지공(承旨公)은 박씨(朴氏)의 사위가 되고, 박씨의 위 3대는 최씨(崔氏)의 사위가 되고, 최씨의 위 4대는 바로 평도공(平度公)이니, 구만에게 11대조가 된다.
아, 나의 몸은 이미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시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몸은 또 모두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시니, 거슬러 올라가 찾는다면 비록 연대가 더욱 멀고 계파가 더욱 많다 하더라도 모두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올라가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시는 분들이니, 내 성씨의 종통(宗統)이 아니라 하여 소홀히 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지금 마침내 대단치 않게 생각하고 잊고서 내가 이 몸을 소유하게 된 유래가 있음을 알지 못하였으니, 어찌 서글프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를 면할 수 있는 길은 보첩을 편수하는 것이다. 이제 한경 씨의 족보를 통하여 마침내 이 구만이 최씨의 외손이 됨을 알았으니, 만약 당대의 사대부 집안에서 모두 한경 씨가 족보를 편수한 것과 같이 한다면 비록 이 구만처럼 몽매한 자들이라 해도 씨족을 상고한 내용을 얻어들어서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위로 올라가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심을 알게 될 것이다. 이미 이것을 안다면 먼 선조를 추모하는 마음이 저절로 그치지 않을 것이요, 이미 먼 조상을 추모한다면 친척에게 돈독히 하려는 마음이 또 그치지 않을 것이니, 먼 선조를 추모하고 친척에게 돈독히 한다면 백성들의 마음이 비록 후덕해지지 않으려 하나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보첩을 편수하는 자가 또 나와 같은 성씨의 후손이 아니라 하여 버려서는 안 됨이 분명하다.
이제 최씨의 보첩은 외손들을 함께 기록하여 그 번거로움을 꺼리지 않았으니, 진실로 거룩한 덕의 아름다움이 외손에게까지 미침이 또한 이와 같아 다만 본손(本孫)들이 세상에 혁혁할 뿐만이 아님을 밝힌 것이다. 또 구만과 같은 무리로 하여금 백성들의 마음이 후덕해지는 데에 면려하도록 하고자 하였으니, 사람들에게 자신이 말미암아 태어나게 된 선조를 잊지 않기를 바람이 지극하다 할 것이다. 한경 씨가 보첩을 다 편수한 다음 나에게 한마디 말을 부탁하였다. 모든 원류(源流)에서 쌓은 덕의 깊고 멂과 기재한 범례의 요체에 있어서는 족보를 보는 자가 마땅히 스스로 알 것이니 여기에 감히 다시 말할 것이 없으며, 다만 구만이 마음속에 느낀 바를 이와 같이 쓰는 바이다.

[주D-001]최한경(崔漢卿) : 한경은 최후량(崔後亮)의 자이다. 호는 정수재(靜修齋)이고 본관은 전주(全州)로 이조 판서 최혜길(崔惠吉)의 아들인데 영의정 최명길(崔鳴吉)에게 입양(入養)되었으며, 아들 최석정(崔錫鼎)은 약천의 제자이다.
약천집 제27권
 서(序)
최한경(崔漢卿)의 청주 봉선계(淸州奉先契) 서문 갑자년(1684, 숙종 10)

정수재(靜修齋) 최공(崔公)이 하루는 나에게 이르기를, “저의 선친이신 문충공(文忠公)을 청주(淸州)의 북쪽 대율리(大栗里)에 장례하였는데, 먼 선조인 전서(典書) 부군 완산군(完山君)과 부군의 족조(族祖)인 좌윤 덕성(德成)과 동족(同族)인 판서 천건(天健)의 묘소가 모두 이곳에 있습니다. 세시(歲時)의 제향을 오직 선군에게만 올리고 4대 이상은 대수가 멀어서 미치지 못하니, 저는 실로 서글프게 여깁니다. 그리하여 가까운 지역에 사는 종씨들과 약속하고는 각각 쌀과 곡식 약간을 내어서 봄에 꿔 주었다가 가을에 거두어서 그 본전과 이자의 남는 것을 가지고 매년 맹동(孟冬)에 한 번 제사하는 비용으로 삼고 이것을 일러 ‘봉선계’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곡식을 꿔 주었다가 거두어들이는 것이 오래가지 못할까 염려하여 남는 곡식을 팔아서 묘소 아래의 전지(田地) 약간 묘(畝)를 샀습니다. 비록 인사(人事)의 변천이 무상하나 농토에서 나오는 소출은 무궁하니, 지금 이후로 비록 백 년, 천 년이 되더라도 매년 한 번 제사 지내는 비용이 계속 충당되지 못함을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이니, 이것이 제가 전지를 산 뜻입니다. 그대는 부디 저를 위하여 서문을 써서 후인들로 하여금 이것을 보아 삼가 지키고 실추하지 않게 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나는 공을 대면하여 감탄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형체를 서로 물려주고 기혈(氣血)을 서로 이어 가는 것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사람과 짐승이 다를 것이 없으나 사람이 유독 동물 중에 귀한 까닭은 자신의 몸이 어디로부터 나왔는가를 알아서 옛날 뿌리를 찾고 시조를 찾아서 오래되고 먼 선조를 소홀히 하여 잊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禮)는 사당에만 제사하고 무덤에는 제사 지내지 않으며 대부(大夫)의 제사는 3대에 그치는데, 지금 제사가 먼 선조의 묘소에까지 미쳐서 무궁한 계책을 세우는 것은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니겠는가.
아, 봉분의 높이가 4척이니, 이미 봉분하지 않는 것과는 달라서 묘소에 올라가 제사하는 예가 이로부터 생겨난 것이요, 매월 제물을 올리고 때로 제향하는 것을 비록 3대에 국한하였으나 기도하는 제사는 또한 이단(二壇)에까지 미쳤으니, 단에 모시는 이상의 선조는 애당초 추모하는 마음이 부족해서가 아니요, 형세가 미칠 수 없기 때문이다. 형세가 미치지 못하면 비록 성인(聖人)이라도 사람들에게 반드시 행하라고 강요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지금 마침내 묘소 아래에 전지를 장만하고 후세에 법을 남겨서 향화를 올리는 것을 백대에 끊어지지 않게 한다면 나는 성인이 다시 나온다 해도 반드시 백성들의 덕이 후한 데로 돌아감을 허락할 것이라고 믿는다.
이 일은 대략 주 문공(朱文公)의 《가례(家禮)》에 나와 있으나 세상에 행하는 자가 드물다. 그런데 이제 공이 그 남겨 준 뜻을 따라서 윤색하고 또 더 자세하게 하여 재물을 출납하는 규정과 제향을 올리는 법식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풍성하고 소략함이 법도에 맞고 의식과 예문이 실정에 걸맞아서 모두 후세에 폐해지지 않고 세상의 모범이 되게 하였다. 나는 공의 요청을 소중히 여기고 또 사람마다 이것을 듣고 흥행(興行)하며 서로 보고 좋은 풍습을 이루기를 바라면서 이에 말하노라.”

[주D-001]문충공(文忠公) : 최명길(崔鳴吉)의 시호이다. 최명길은 자가 자겸(子謙)이고 호가 지천(遲川)이며, 이항복(李恒福)과 신흠(申欽)에게 수학하고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주D-002]기도하는 …… 이단(二壇) : 《예기(禮記)》 제법(祭法)에 “대부는 삼묘ㆍ이단을 세우는데 …… 현고와 조고에게는 묘가 없고 기도할 일이 있으면 단을 만들어 제사 지내며 제사가 끝나면 단을 헐어 버린다.〔大夫立三廟二壇 …… 顯考祖考無廟 有禱焉 爲壇祭之 去壇爲鬼〕” 하였다.
익재난고 제7권
 비명(碑銘)
추성양절공신(推誠亮節功臣) 중대광(重大光) 광양군(光陽君) 최공(崔公) 묘지명 병서

완산 최씨(完山崔氏)는 예부 낭중(禮部郎中) 균(鈞)이 서적(西賊) 동적(東賊)으로 된 데도 있다. 난리에 순절(殉節)하면서부터 이름난 집안이 되었다. 그의 아들 보순(甫淳)은 고왕(高王)의 정승으로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문정이 봉어(奉御) 윤칭(允稱)을 낳았고, 윤칭이 학사(學士) 소(佋)를 낳았으며, 학사가 찬성사(贊成事) 비일(毗一)을 낳았는데, 사재경(司宰卿) 신홍성(辛洪成)의 딸에게 장가들어 공을 낳았다.
공은 다섯 차례나 이름을 바꾸어 부(阜)ㆍ당(璫)ㆍ수(琇)ㆍ실(實)이라 하였다가 맨 나중에 성지(誠之)라 하였는데, 자는 순부(純夫)이고 호는 송파(松坡)이다. 20세 안에 진사(進士)가 되고 지원(至元) 갑신년(1284, 충렬왕 10) 과거에 급제하여, 계림(雞林 경주)에서 관기(管記 문서관리)로 있다가 사한(史翰)으로 전보되었다. 춘궁(春宮) 관원으로 뽑혀 덕릉(德陵 충선왕)을 따라 원 나라에 조회하러 갔었는데, 집정(執政)들이 덕릉을 기피하고 미워하여 온갖 계책으로 가도록 유도하니, 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곤궁과 영달이 하늘에 달린 것이니, 이해(利害)에 동요됨은 선비가 아니다.’ 하였다.
대덕(大德) 말년에 황대제(皇大弟)를 협조하여 내란을 평정하고, 무종황제(武宗皇帝)를 옹립(擁立)하여, 공이 항상 좌우에 있으면서 일을 도왔으나 아무도 몰랐다. 조현총랑(朝顯摠郞)을 비롯 여섯 번 전직하여 삼사좌사(三司左使)가 되니 품계는 봉익대부(奉翊大夫)이고, 이어 첨의평리 삼사사 첨의찬성사(僉議評理三司使僉議贊成事)로 전임하니 품계는 중대광(重大匡)이며, 추성양절공신(推誠亮節功臣) 호를 받고 광양군(光陽君)으로 봉작되었다.
덕릉이 토번(吐蕃)으로 갈 때, 공의 아들 문도(文度)가 난(難)을 듣고 달려가다가 도중에서 공을 만나 함께 관서(關西)까지 뒤따라 가는데, 중 원명(圓明)의 배반으로 말미암아 중남(中南)에서 군사에게 막혀 전진하지 못하였다. 사태가 안정되어 농서(隴西)를 넘어 임조(臨洮)에 닿았는데, 귀역(鬼)의 지경을 단기(單騎)로 갈 수 없으므로, 임조에서 반년을 머무르다 돌아오게 되었었다.
이때 본국 사람들이 파당을 지어 서로 호소하므로, 원 나라 조정에서 내지(內地)처럼 성(省)을 세우기로 의논했었는데, 공이 전 재상(宰相) 김정미(金廷美)ㆍ이제현(李齊賢) 등과 글을 올려 이해(利害)를 진술하여, 마침내 그 의논을 중지하게 하였다. 심부(瀋府)의 관원들이 또 우리 국가의 잘잘못을 들어 장차 묘당(廟堂)에 말하려고 하는데, 공이 홀로 서명하지 않으려 하자, 맨 나중에는 주모자들이 함께 부중(府中)에 나와 녹사(錄事)를 시켜 지필(紙筆)을 가져다 서명을 받게 하므로, 공이 소리 높여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재상으로 있었는데 여러 녹사들이 나를 협박하려 드느냐?’ 하니 모두 기가 질렸었다.
태정(泰定) 갑자년에 물러가기 바라는 글을 올려 윤허(允許)를 받은 후로는 광양군으로 집에서 지내며, 노래하는 기녀(妓女)를 두고 손님들을 청하여 청담(淸談)과 아소(雅笑)만 일삼고 세상 일은 간섭하지 않았다. 지순(至順) 경오년에 병이 나 7일 만인 계해일(癸亥日)에 집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65세인데, 나라에서 유사(有司)를 보내어 상사를 보살피고 시호를 문간공(文簡公)이라 했다.
공은 성격이 강직하여 망령되이 말하지 않았고 글씨의 자획이 해정하였으며, 시(詩)가 온자(溫籍)하여 자미로왔고, 특히 음양추보법(陰陽推步法)에 조예가 있었다. 풍헌(風憲)ㆍ선거(選擧 과거)ㆍ성관(星官 천문)ㆍ사원(詞苑)을 또한 20년이나 맡아보아 덕릉의 후한 대우가, 종시 공보다 나은 사람이 없었다. 일찍이 춘장(春場 봄에 보는 과거)을 보일 때 안진(安震) 등 33명을 뽑았는데, 그 중에는 명사들이 많았다.
부인 김씨는 찬성사(贊成事) 둔촌거사(鈍村居士) 훤(暄)의 딸로 행신이 현숙했는데, 공보다 3년 앞서 죽었고, 아들은 전 상호군(上護軍) 문도(文度) 하나인데 정주학(程朱學) 서적을 읽기를 좋아하니, 선진들이 모두 종유(從遊)했다. 딸도 하나인데 만호 밀직부사(萬戶密直副使) 권겸(權謙)에게 출가했다. 아래와 같이 명한다.

명문 후손으로 태어나 임금 만나 뜻을 펴되, 예(禮)에 맞춰 벼슬하고 의리에 맞춰 물러났도다. 현숙한 아내 만나 일생 살고 착한 아들 두어 장사 치렀으니, 이 세상에 이런 사람 찾는다면, 열에 한둘도 못 되리. 아! 광양군이여, 유감 없으리로다.

[주D-001]심부(瀋府)의 …… 말하려고 : 이때 충선왕이 심양왕(瀋陽王)을 겸하고 있다가, 고려 왕위는 충숙왕에게 넘겨주고, 심양왕 왕위는 조카 고(暠)에게 전해 주었는데, 심양왕이란 말뿐, 실지로 영토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항시 여러 가지 말썽이 있었다.
 묘지명(墓誌銘)
봉직랑(奉直郞) 행 성현 찰방(行省峴察訪) 이공(李公)의 묘지명 병서(幷序)

경주 이씨(慶州李氏)는 대대로 성씨가 드러나서 산동(山東)의 최씨(崔氏)와 노씨(盧氏)에 비하기도 한다. 공의 휘는 홍각(弘慤)이고 자는 여성(汝誠)이다. 시조(始祖) 알평(謁平)은 신라의 시조를 보좌하여 원훈(元勳)이 되었다. 그 뒤에 자손들이 창성하여 고관대작이 끊이지 않고 나왔다.
증조부의 휘는 귀산(龜山)이고 조부의 휘는 한주(漢柱)인데, 모두 덕을 숨긴 채 벼슬살이를 하지 않았다. 고(考)의 휘는 을규(乙圭)인데 한 조각의 곤옥(崑玉)과 같아서 세상에 광채를 빛내어 지초계군사(知草溪郡事)를 지내었다. 비(妣)는 영인(令人) 용궁 전씨(龍宮全氏)로, 모관(某官) 아무개의 딸이다. 가정(嘉靖) 정유년(1537, 중종32) 3월 6일 모시(某時)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빼어난 자질이 있었으며, 글 읽기를 좋아하고 문장을 짓기를 좋아하여, 드디어 한때의 걸출한 인재가 되었다. 무진년(1568, 선조1)에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였고, 여러 차례 향천(鄕薦)에 뽑혔으며, 전례에 의거하여 남궁(南宮)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당시의 재상(宰相) 가운데 공의 재주를 아까워하는 사람이 있어서 공을 선발하여 집경전(集慶殿)에 재차 입직(入直)하게 하였으며, 경릉 참봉(敬陵參奉), 제용감 참봉(濟用監參奉)을 거쳤는데, 모두 직책을 잘 수행하였다는 것으로 이름이 드러나 봉사(奉事)로 승진하였다가 파직되었다. 집에서 지내면서는 안생(顔生)의 귀함을 몸소 실천하였고, 자공(子公)의 교제를 일체 끊어 벼슬길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에 대해서 전혀 마음을 쓰지 않았다. 말년에는 성현 찰방(省峴察訪)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다.
공은 만력(萬曆) 을사년(1605, 선조38) 10월 20일에 병으로 인해 집에서 졸하니 향년(享年) 69세였다. 부(府)의 치소(治所) 북쪽에 있는 황동(黃洞)의 언덕에 묏자리를 정하여 이해 12월 23일에 장사 지내었다.
공은 이천 서씨(利川徐氏)에게 장가들었는데, 모관 아무개의 딸이며, 좌명공신(佐命功臣) 서유(徐愈)의 후손이다. 1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시인(時仁)이고, 장녀는 서광윤(徐光胤)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정계도(鄭繼道)에게 시집갔고, 삼녀는 정극후(鄭克後)에게 시집갔다. 큰 손자는 해용(海容)이고, 손녀는 어리다.
공은 성품이 너그럽고 진솔하였으며, 자기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다른 사람과 담론할 적에는 사람을 감동시켜 싫증이 나지 않게 하였다. 나 호익이 젊었을 적에 공을 여사(旅舍)에서 뵈었는데, 한번 뵙고는 위대한 사람인 줄 알아보았다. 그 뒤 30년 만에 사시는 곳에서 재차 뵈었는데, 풍류와 아치는 조금도 쇠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4, 5년이 지나지도 않아서 부고가 이르니, 아, 슬프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銘)을 짓는다.

위로 근원 거슬러 올라가 보니 / 上泝靈源
아득하니 천칠백 년 전이로구나 / 千七百年
대대로 덕 쌓으며 기반 닦아서 / 積德之基
훌륭한 후손들이 번성하였네 / 瓜瓞綿綿
날 때부터 공은 자질 빼어났으니 / 公生也挺
하늘이 기다림이 있었던 거네 / 天或有䇓
만난 시대 공과는 맞지 않아서 / 時不我諧
솥으로다 수레를 고인 격이네 / 以鼎柱車
소매 짧아 구부정히 몸 구부렸고 / 短袖長彎
집 낮아서 머리 들면 천장 닿았네 / 矮屋打頭

동쪽에 외진 언덕 하나 있으니 / 獨有東岡
넓으면서 조용한 한 구역이네 / 寬閑一區
한 몸 누워 지내기에 적당하여서 / 不贏于躬
영원토록 아름다움 드리웠어라 / 以永垂休
높다라니 하나의 언덕이 있고 / 有高一原
그윽하니 하나의 무덤이 있네 / 有幽一塋
명 지어 그 속에다 파묻었으니 / 我銘以藏
공께서 편안하게 쉬는 곳이네 / 惟公所寧

[주D-001]산동(山東)의 최씨(崔氏)와 노씨(盧氏) : 명문대족(名門大族)을 말한다. 위(魏)나라 때부터 당(唐)나라 때까지 산동 지방의 명문으로 최씨와 노씨가 있어서 오랫동안 고관(高官)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舊唐書 卷61 竇威列傳》
[주D-002]영인(令人) : 조선 시대 외명부(外命婦)의 정4품과 종4품의 봉작(封爵)이다.
[주D-003]남궁(南宮) : 상서성(尙書省)의 별칭이다. 상서성이 열수(列宿)의 남궁에 속하므로 그렇게 칭하는 것이다. 또 예조(禮曹)를 칭하기도 한다.
[주D-004]안생(顔生)의 귀함 : 궁벽한 시골에서 가난하게 살면서도 즐겁게 지내는 것을 말한다. 안생은 안회(顔回)이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어질도다 안회(顔回)여, 한 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로 누추한 시골에 사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그 걱정을 견뎌내지 못하는데, 안회는 그 즐거움을 변치 않으니, 어질도다, 안회여.” 하였다. 《論語 雍也》
[주D-005]자공(子公)의 교제 : 상관에게 뇌물을 주어서 벼슬길에 나아가거나 승진시켜 달라고 청탁하는 것을 말한다. 자공은 한(漢)나라 사람 진탕(陳湯)의 자이다. 한나라 성제(成帝) 때 진탕이 당시에 권세를 잡고 있던 왕음(王音)과 알고 지냈는데, 지방관으로 있던 진함(陳咸)이란 자가 진탕을 통하여 왕음에게 뇌물을 주어 중앙 관서로 전출되기를 바랐다. 그 뒤에 마침내 뇌물로 인해 진함이 중앙 관서로 뽑혀 들어갔다. 《漢書 卷66 陳萬年傳》
[주D-006]소매 …… 닿았네 : 가난하게 지낸다는 뜻이다. 소식(蘇軾)의 〈희자유(戲子由)〉 시에, “완구 선생 큰 키는 공자와도 같은데, 완구의 학당은 나룻배같이 작네. 머리를 수그리고 서책을 읽다가, 기지개 한번 켜면 천장에 머리 닿네.[宛邱先生長如邱 宛邱學舍小如舟 常時低頭誦經史 忽然欠伸屋打頭]” 하였다.[주D-002]음양추보법(陰陽推步法) : 일월(日月)과 오성(五星)의 도수(度數)를 추산하여 책력을 만드는 것.

간본 아정유고 제3권
 전(傳)
혜소전(慧昭傳)

혜소의 성은 최씨(崔氏)이다. 그의 선조는 중국 사람이었는데 수(隋) 나라 군사가 요동(遼東)을 정벌할 때에 여맥(驪貊)에서 많이 전몰(戰沒)하니 이때 항복하여 거주하였으며 현재는 전주(全州) 금마군(金馬郡 지금의 익산군(益山郡)) 사람이다. 아버지는 창원(昌元)이며 어머니는 고씨(顧氏)이다. 고씨가 일찍이 낮잠을 자는데 꿈에 한 스님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나는 어머니의 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고는, 이어 유리(琉璃)로 된 병을 주었는데, 얼마 되지 않아 선사(禪師)를 임신하였다.
8세쯤 되어 소꿉장난을 할 때면 반드시 나뭇잎을 태워 향(香)으로 하고 꽃을 꺾어 공양(供養)하는 시늉을 하며 혹 서쪽을 향하여 무릎 꿇고 전혀 얼굴을 움직이지 않기도 하였다. 장성하자 부모를 봉양하는 뜻이 간절하였지만 집에는 1두(斗)의 곡식도 없었다. 이에 생선장수를 하여 부모에게 맛있는 음식을 충분히 봉양하였다.
정원(貞元 당 덕종(唐德宗)의 연호) 20년(804)에 뱃사공이 되어 당 나라에 가는 공사(貢使)를 따라 바다를 건너 창주(滄洲)에 이르러 신감대사(神鑑大師)를 뵈니, 대사가 기뻐하며,
"희롱으로 작별한 지 오래지 아니하였는데 다시 서로 만난 것을 기뻐한다."
하고는, 빨리 머리를 깎고 승복(僧服)을 입게 하고 심인(心印)과 계(契)를 주었다. 선사의 얼굴이 구리빛처럼 검으니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흑두타(黑豆陀)라 하였다.
원화(당 헌종(唐憲宗)의 연호) 5년(810)에 숭산(嵩山)의 소림사(少林寺) 유리단(琉璃壇)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으니 어머니의 꿈과 완연히 서로 합하였다. 드디어 종남산(終南山)에 들어가 잣을 먹으며 망심(妄心)을 그치고 진리를 관찰하여 도를 닦았다.
태화(太和 당 문종(唐文宗)의 연호) 4년(830)에 본국으로 돌아오니 흥덕대왕(興德大王)이 친필로 환영하기를,
"하늘에 닿는 자비(慈悲)와 위력(威力)으로 온 나라가 기쁘게 힘입을 것입니다. 과인(寡人)은 장차 동쪽 계림(鷄林 경주(慶州)의 이칭) 땅에 길상(吉祥)의 집을 만들리라."
하였다. 처음에 석장(錫杖)을 상주(尙州)의 노악산(露岳山) 장백사(長柏寺)에 멈추었는데, 방장(方丈)이 비록 넓으나 물정이 군색하였다. 이에 보행으로 강주(康州) 지리산(智異山)에 이르러 옛날 삼법화상(三法和尙)이 수행하던 화개곡(花開谷)의 절터에 절을 지었다.
개성(開成 당 문종(唐文宗)의 연호) 3년(838)에 민애대왕(愍哀大王)이 즉위하자 새서(璽書 왕의 친서(親書)를 말한다)를 내려 특별히 발원(發願)할 것을 청하니, 선사는,
"부지런히 선정(善政)을 베풀 뿐이니 무엇 때문에 발원을 하십니까?"
하였다. 사신(使臣)이 돌아가 이 말을 아뢰니, 왕은 부끄러워하고 깨달아 선사가 '색(色)과 공(空)이 모두 없어지고 정(定)과 혜(慧)가 원만(圓滿)하다.' 하여 호를 혜소(慧昭)라 하였는데, 조(照)자로 고친 것은 성조(聖祖)의 묘호(廟號 소성대왕(昭聖大王)을 가리킨 것)의 휘(諱)를 피하여 바꾼 것이다. 이어 대황룡사(大皇龍寺)에 적(籍)을 두게 하고 서울로 불러오게 하였으나 굳게 지키고 옮기지 아니하였다. 드디어 기이한 절경(絶境)을 골라 남령(南嶺)의 산기슭에다가 선려(禪廬)를 지었다.
대중(大中 당 선종(唐宣宗)의 연호) 4년(850) 1월에 문인에게 고하기를,
"만법(萬法)이 모두 공(空)이니 나는 장차 이 세상을 떠나 멀리 갈 것이다. 탑을 만들어 사리(舍利)를 넣어두거나 비를 세워 행적을 기록하지 말라."
하고, 세상을 떠나니 승랍이 77이었다. 이때 하늘에는 구름 한점 없었는데 바람과 천둥이 갑자기 일며 호랑이가 으르릉대고 울부짖었다. 얼마 뒤 붉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공중에서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가 났는데 회장(會葬)하는 사람들이 모두 들었다.
선사는 성품이 질박(質樸)함을 잃지 아니하고 말은 기변(機變)을 부리지 아니하며, 의복은 솜누더기를 따뜻이 여기고 음식은 겨나 보리싸라기를 먹었다. 언제나 왕이 사람을 시켜 역말을 타고 명을 전하여 멀리 법력(法力)을 기원하면, 선사는,
"왕의 토지에 살며 불일(佛日)을 받들고 있는 사람이면 누군들 호국(護國)하는 일념에 마음을 기울여 임금을 위하여 복을 쌓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무엇 때문에 굳이 마른 나무나 썩은 나무와 같은 저에게 임금님의 말씀을 멀리 보내십니까?"
하였다. 누가 호향(胡香)을 선물하는 사람이 있으면 기왓장에 잿불을 담아 환(丸)을 만들지 않은 채로 태우면서,
"나는 이것이 어떤 냄새인지 모르겠다. 마음만 경건히 할 뿐이다."
하였으며, 또 중국에서 나온 차를 선물하는 자가 있으면 돌솥에 섶을 태우며 가루를 만들지 않은 채로 끓여 마시면서,
"나는 이것이 어떤 맛인지 모르겠다. 창자를 적실 뿐이다."
하였는데, 진(眞)을 지키고 속(俗)을 싫어함이 모두 이런 정도였다.
본래 범패(梵唄)를 잘하여 음성이 금옥(金玉) 같았다. 독특한 곡조와 날아가는 듯한 소리가 상쾌하고 아름다우니,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어산(魚山)의 묘한 곡조를 익히는 자들이 다투어 '손으로 코를 가리듯' 본받았다.
선사가 열반(涅槃)하고 3년이 지난 뒤에 문인이 세월이 오래되면 유적이 없어질까 염려하여 법을 사모하는 제자들이 길이 썩지 않게 할 인연을 의논하니, 내공봉(內供奉) 일길간(一吉干) 양진방(楊晉方)과 숭문대랑(崇文臺郞) 정순일(鄭詢一)이 비석을 새길 것을 주청하였다. 헌강대왕(獻康大王)은 진감선사(眞鑑禪師)라 추시(追諡)하고 탑을 대공허(大空虛)라 이름하였으며 전각(篆刻)을 허락하였으나 거북등에 비석을 얹기 전에 왕이 승하(昇遐)하였다. 정강왕(定康王)이 즉위하여 선사가 있던 절 문이 복간(複澗)에 임하였다 하여 쌍계(雙溪)라는 제호(題號)를 주고, 최치원(崔致遠)에게 명하여 비명(碑銘)을 짓게 하였다.

[주D-001]수(隋) 나라……전몰(戰沒)하니 : 수 양제(隋煬帝)가 1백 13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정벌하러 왔다가 을지문덕(乙支文德) 장군에게 살수(薩水)에서 크게 패하였다.
[주D-002]흑두타(黑頭陀) : 옛날 도안법사(道安法師)는 얼굴이 검었으므로 칠도인(漆道人)이라 부르기도 하고 흑두타라 부르기도 하였다. 즉 선사는 도안법사와 같다는 뜻이다.
[주D-003]석장(錫杖)……멈추었는데 : 승려가 짚는 지팡이로 즉 장백사에 머물렀다는 뜻이다.
[주D-004]어산(魚山)의 묘한 곡조 : 구슬픈 염불 소리를 말한다. 삼국 때 조식(曹植)은 불경을 잘 외었는데 하루는 어산(魚山)에 유람하였다. 이때 공중에서 맑고 구슬픈 소리가 나기에 따라 했더니 염불 소리가 되었다 한다.
[주D-005]손으로 코를 가리듯 : 흉내 내는 것을 말한다. 진(晉) 나라 사안(謝安)은 콧병이 있어서 음성이 탁하였다. 선비들은 그가 읊는 소리를 좋아하여 손으로 코를 가리고 흉내냈다 한다.
청장관전서 제11권
 아정유고 3 - 시 3
시를 논한 절구(絶句)

최씨 셋 박씨 하나가 중국에서 과거했으니 / 三崔一朴貢科賓
신라 시대 선비로는 이 네 사람뿐일세 / 羅代詞林只四人
어쩔 수 없이 우리와 중국은 한계가 있어 / 無可奈何夷界夏
약간의 시구가 남아 있어도 뚜렷한 정신은 없구나 / 零星詩句沒精神
목은은 황소를 배우고 포은은 당을 배워 / 牧隱黃蘇圃隱唐
고려 때 대가로 굉장히 울렸구나 / 高麗家數韻洋洋
금ㆍ원ㆍ송을 융화한 사람은 누구냐 / 問誰融化金元宋
역로(櫟老)의 시에서 만장의 광채 나네 / 櫟老詩騰萬丈光
살았을 때에 한참 휘둘러댔으면 그만이지 / 滔滔漭漭秪生時
죽은 뒤에 쓸데없이 문집은 왜 만들었나 / 身後何煩禍棗梨
참으로 백운은 촌학구에 지나지 않는다 / 眞箇白雲村學究
죽룡과 초봉이 어찌 그리도 어리석었나 / 竹龍蕉鳳一何癡

[주D-001]최씨(崔氏)……하나 : 최씨 셋은 최치원(崔致遠)·최승우(崔承祐)·최언위(崔彦撝)를 말하며, 박씨(朴氏) 하나는 박인범(朴仁範)을 가리키니, 이들은 모두 당 나라에 유학하고 과거에 급제하였다.
[주D-002]목은(牧隱)은……배워 : 목은은 이색(李穡)을 가리키며, 황소(黃蘇)는 정견(黃庭堅)과 소 식(蘇軾)으로 송체(宋體)를 말한다. 포은(圃隱)은 정몽주(鄭夢周)의 호.
[주D-003]역로(櫟老) : 역Ș(櫟翁) 이제현(李齊賢)을 높여서 칭한 것.
[주D-004]백운(白雲) : 이규보(李奎報)의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