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일두 정여창 신도비문(펌)

문헌공(文獻公) 일두(一蠹) 정 선생(鄭先生)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

아베베1 2010. 7. 23. 13:11

동계집 제4권
 비명(碑銘)
문헌공(文獻公) 일두(一蠹) 정 선생(鄭先生)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


우리 동방(東方)은 은(殷)나라 태사(太師)가 교화를 베푼 뒤로 이적(夷狄)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성대하게 일었으나 아득한 수천 년 동안 참다운 선비가 드물었다. 고려 말기에는 정 문충공(鄭文忠公 정몽주(鄭夢周)) 한 사람뿐이었고, 우리 국조(國朝)에는 소문이 나서 알려진 분이 다섯 선생인데 선생이 그중의 한 분이다.
선생의 휘(諱)는 여창(汝昌), 자(字)는 백욱(伯勗)이며, 선대의 관향(貫鄕)은 하동(河東)인데, 뒤에 함양군(咸陽郡)으로 옮겨 가서 살았다. 휘 지의(之義)는 종부시 판사(宗簿寺判事)이고, 휘 복주(復周)는 전농시 판사(典農寺判事)이며, 휘 육을(六乙)은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에 추증되었는데, 이들이 선생의 증조(曾祖), 조부(祖父), 선고(先考) 3세(世)이다. 모친 최씨(崔氏)는 목사(牧使) 효손(孝孫)의 딸이다. 경태(景泰) 원년 경오년(1450, 세종32)에 선생을 낳으니, 태어나면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었다.
좌윤공이 의주 통판(義州通判)으로 있을 때에 선생은 어린 나이였다. 중국 사신 장영(張寧)이 한 번 보고 선생이 비상한 아이라는 것을 알고 명설(名說)과 함께 이름을 지어 주었다. 뒤에 좌윤이 함길도 우후(咸吉道虞候)가 되어 반란을 일으킨 장수 이시애(李施愛)를 막다가 죽자, 선생이 졸도했다가 다시 깨어나서 쌓인 시체 속에 들어가 부친의 유체(遺體)를 모시고 돌아와 장례를 치렀으니, 당시에 공의 나이가 17세였다.
삼년복(三年服)을 마치자, 상이 국가를 보위하다 목숨을 바친 좌윤의 공로를 가상하게 여겨 그 아들에게 관직을 명하니, 선생이 아비의 죽음으로 자식이 영화를 누리는 것은 차마 할 수 없다 하여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모부인(母夫人)을 봉양하여 맛있는 음식을 골고루 올려 드렸고 모부인의 하는 일이 의리에 그다지 해로운 것이 아니면 감히 어기지 않았으니, 모부인도 아들의 뜻을 알고 상심시키지 않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모부인은 지나친 거조가 없었고 아들도 무조건 순종하다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가 없었다.
계묘년(1483, 성종14)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는데, 모부인이 대과에 급제하는 것을 보고자 하므로 태학(太學)에 들어갔다. 깊은 밤마다 단좌(端坐)하였는데, 이에 반중(泮中)에서 선생에게 도학공부가 있음을 알고 더욱 존경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오자 모부인이 돌림병을 앓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문밖에서 안부를 묻기를 권하였으나 선생은 듣지 않고 곧장 방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 후에 모부인이 병으로 돌아가시자, 가슴을 치며 통곡하다 피를 토하고 거의 실성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상례(喪禮)를 치를 때에 풍속에서 꺼려하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습염(襲殮)과 빈전(殯奠)을 다 예에 맞게 하니, 사람들이 매우 위태롭게 여겼다. 그러나 돌림병이 스스로 사라지고 선생도 마침내 무사하였으니, 사람들은 효성(孝誠)이 하늘을 감동시켰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관찰사가 그의 행실에 관하여 듣고 군관(郡官)으로 하여금 장례(葬禮)에 필요한 도구를 지급하도록 하니, 선생이 백성들을 번거롭게 하여 원망이 어버이에게 미치게 한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도와주겠다는 자가 있었으나 모두 듣지 않고, 이에 좌윤공과 합장(合葬)하였다. 1년 동안 죽을 마시고 3년 동안 근심하면서 지팡이를 짚고 여막 밖으로 나오지 않았으며 하루 종일 단정히 앉아서 수질(首絰)과 요대(腰帶)를 벗지 않았다. 상례(祥禮)를 다 마친 뒤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두류산(頭流山)에 들어가서 허둥지둥하며 마치 무엇인가 찾아 헤매는 듯한 모습으로 지냈다. 사람들이 술과 고기를 권하면 문득 눈물을 흘리면서 먹으려 하지 않았다. 군수인 매계(梅溪) 조위(曺偉)가 몸소 와서 권유하며 말하기를, “선왕(先王)의 중제(中制)를 감히 지나치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자, 그제서야 감히 사양하지 않았다.
시정(寺正) 조효동(趙孝同)과 참의(參議) 윤긍(尹兢)이 상소하여 그의 학행(學行)을 천거하니, 성묘(成廟)가 가상하게 여기고 특별히 소격서 참봉(昭格署參奉)을 제수하였다. 그러나 선생이 진정(陳情)하는 상소를 올려 굳이 사양하니, 성묘가 그 상소의 끝에다 쓰기를, “그대의 행실을 듣고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행실은 가리울 수가 없는 법인데 지금 오히려 이와 같이 하니, 이것이 바로 그대의 장점이라 하겠다.” 하였다.
형제(兄弟)와 자매(姉妹)가 전토(田土)와 하인들을 분배할 때에 선생은 척박한 땅과 노약자를 가려서 차지하였으나, 그래도 오히려 마음에 만족스러워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다시 자기가 차지했던 것을 그들에게 주었다.
성묘(成廟) 경술년(1490)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藝文官檢閱)에 보임되었다가 시강원 설서(侍講院說書)로 옮겨서 올바른 도리로 보도(輔導)하였지만, 동궁(東宮)이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곧바로 외임(外任)으로 나가기를 요구하여 갑인년에 안음 현감(安陰縣監)으로 나갔다. 현이 평소에 피폐한 고을로 일컬어졌으므로 선생이 우선적으로 백성들의 고통을 찾아서 과조(科條)를 엄격하게 세우고 사소한 폐단까지 말끔히 제거하니, 백성들이 소생하게 되었다. 짧은 기간에 은택과 신뢰가 두루 미쳤으며, 관리와 백성이 서로 경계하여 감히 속이거나 저버리는 일이 없었다. 그런 여가에 고을의 자제들 중에 뛰어난 자들을 불러 모아서 친히 가르치니, 원근에서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이 와서 배웠다.
무오년(1498, 연산군4)의 사화(士禍)에 연좌되어 종성(鍾城)에서 7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였지만, 조금도 원망하거나 후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종성부가 뜰에 횃불 밝히는 일을 맡기자, 사신(使臣)이 관부(官府)에 들어 올 때마다 직접 횃불을 밝히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니, 선생이 환난(患難) 속에서 처신한 것이 이와 같았다. 육진(六鎭)은 오랑캐 지역과 가까워서 문풍(文風)이 없어진 지가 오래되었다. 선생이 더불어 말할 만한 자를 선발하여 열심히 가르쳤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진사 시험에 합격한 자가 있었다. 이것이 바로 지나는 곳마다 감화(感化)를 입는다는 오묘한 진리가 아니겠는가.
갑자년(1504, 연산군10) 여름 4월 1일에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55세였다. 상여를 함양(咸陽)으로 모시고 돌아와 승안동(昇安洞) 간좌곤향(艮坐坤向)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이해 가을에 사화(士禍)가 다시 일어났는데 그 상황에 대해서는 차마 말을 하지 못하겠다. 몇 년 지나지 않아 그 원통함이 남김없이 신원(伸冤)되었고 포증(褒贈)과 사전(祀典)이 갈수록 더욱 융성하였다. 고을의 유생(儒生)들이 서원(書院)을 건립하니, 남계서원(灆溪書院)으로 특별히 사액(賜額)하고 봄가을로 소뢰(小牢)를 써서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무진년(1508, 중종3) 이후부터 관학(館學)의 유생(儒生)이 문묘(文廟)에 배향하여 해마다 제사 지내기를 요청하였는데, 만력 경술년(1610, 광해군2) 가을에 비로소 윤허를 받았으며, 8월에는 그 집에다 사제(賜祭)하였으니, 그제서야 선생의 도학(道學)이 세상에 더욱 빛나게 되었다.
선생의 학문은 염락(溓洛)을 표준으로 삼고 글을 읽을 때에는 이치를 연구하는 것으로 우선하였으며, 마음 씀씀이는 속이지 않는 것을 위주로 하고 날마다 하는 공부는 성경(誠敬) 밖을 벗어나지 않았다. 심지어 정치를 하는 율령(律令)과 격례(格例)에도 최선을 다하여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고을을 다스렸던 데에서 찾아보면 그 단서를 확인할 수 있다. 한훤당(寒暄堂) 김 선생과 함께 점필재(佔畢齋) 김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뜻이 같고 도(道)가 합하여 서로 막역(莫逆)한 사이가 되었으며, 도를 논하고 학문을 강론할 때면 언제나 서로 수행하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하신 말씀이 세상에 조금도 전하지 않고 선생이 평소에 저술해 둔 글도 무오년의 사화에 소실되었으니, 어찌 후학(後學)들의 길고 긴 통한(痛恨)이 되지 않겠는가.
아, 저 소인배들이 설령 일시적으로 설쳐 댄다 하더라도 장구하게 지속되는 공론(公論)에서 본다면 또한 숨길 수가 없다. 따라서 열성(列聖)들이 포창하여 추대한 은전과 선비들이 크게 사모하는 마음이 바다처럼 깊고 북두성(北斗星)만큼이나 높아서 백세 후에 그 기풍(氣風)을 듣고 흥기하여 감발하는 것이 백이(伯夷)의 기풍을 듣고 탐욕스런 자가 청렴하게 되고 나약한 자가 강한 의지를 가지게 되는 것에 못지 않으니, 비록 선생으로 하여금 당시에 낭묘(廊廟)에 있게 하였더라도 그 영향이 무궁한 데까지 미쳤을 것이라는 것이 어찌 조금이라도 과도한 말이겠는가.
선생이 종실(宗室)인 도평군(桃平君) 말생(末生)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공정대왕(恭靖大王)의 손녀이다. 2남 4녀를 낳았으니, 장남은 희직(希稷)인데 직장(直長)을 지냈고, 차남은 희설(希卨)이다. 희직은 적처(嫡妻)에 후사가 없고 단지 서자(庶子) 여산(如山)만 두었으며, 희설은 당제(堂弟)인 희삼(希參)의 아들 언남(彦男)을 데려다 후사로 삼았다. 장녀는 부호군 최호문(崔浩文)에게 시집갔는데 아들은 언청(彦淸)이며, 사위 임호신(任虎臣)은 관찰사이다. 2녀는 생원 조효온(趙孝溫)에게 시집가서 아들 안수(安壽)를 낳았고, 3녀는 이현손(李賢孫)에게 시집가서 아들 승수(承壽)를 낳았다. 또 4녀는 설공순(薛公諄)에게 시집가서 아들 선(璿)을 낳았다. 언남(彦男)은 동지(同知)인데, 아들 대민(大民)을 낳으니 현감이다. 현감이 1남 1녀를 낳으니, 아들은 홍서(弘緖)인데 문과(文科)로 학정(學正)이 되었으며, 딸은 방원진(房元震)에게 시집갔는데 찰방이다. 학정의 초취(初娶)는 증 도승지 양사형(梁士衡)의 딸인데 2남 1녀를 낳았으니, 광한(光漢)은 생원이고, 광연(光淵)은 진사이다. 딸은 이교(李皦)에게 시집갔다. 후취(後娶)는 임진상(林眞㦂)의 딸로 1녀를 두었는데 곽문원(郭文院)에게 시집갔다. 여산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천수(天壽)와 계수(桂壽)이다. 천수의 아들은 원례(元禮)와 형례(亨禮)이고, 계수의 아들은 흥례(興禮)이다. 원례와 형례는 선생의 음덕으로 참봉에 제수되었다. 적서(嫡庶)의 증손 현손으로 남녀 약간 명이 있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오, 크신 상제님이 / 於皇上帝
동쪽에 치우친 우리나라가 / 悶玆東偏
갈수록 부박해지는 것을 근심하여 / 日趨澆漓
이에 큰 선비를 내리시니 / 迺降碩儒
영남의 한 고을이요 / 于嶺之隅
맑은 소리 옥 같은 자태로다 / 金聲玉姿
선생이 태어나심에 / 先生之生
포부가 가볍지 않았으니 / 抱負非輕
도(道)가 여기에 있지 아니한가 / 文不在玆
낙민을 거슬러 올라가 / 泝求洛閩
근원을 궁구하여 진리를 음미하고 / 窮源嚼眞
문사는 숭상하지 않았으며 / 不尙文辭
마음을 침잠하고 토론하여 / 潛心論討
실천하고 깊이 나아갔건만 / 實踐深造
요점은 속이지 않는데 있었다네 / 要在不欺
효와 제를 몸소 실천하고서 / 躬于孝悌
시와 예까지 통달하여 / 達以詩禮
성현처럼 되기를 희망하면서 / 聖賢是希
만년에 조정에 들어가서 / 晩武天庭
실행할 조짐이 충분하였으니 / 兆足以行
누가 그것을 막으랴 / 誰其泥之
작은 고을을 맡아 다스림에 / 鳴琴十室
덕화를 기월 사이에 이루었는데 / 化成期月
혜택은 이 정도에 이르고 말았네 / 施至於斯
하늘은 무슨 뜻으로 선생을 내시고서 / 天生何意
어찌하여 이렇게 인색한가 / 天嗇何以
세도를 위하여 슬퍼하노라 / 世道之悲
오로지 그 밝은 빛만이 / 惟其耿光
세상을 뜬 뒤에 더욱 빛나서 / 沒世彌彰
공묘에다 모셨다네 / 躋于孔祠
넘치는 물은 흘러서 양양하고 / 濫水洋洋
오르는 산은 높아서 푸르르니 / 昇山蒼蒼
마르지 않고 떨어지지 않으리 / 不渴不隳
선생의 크나큰 명성을 / 能令大名
산처럼 높고 물처럼 맑게 하였으니 / 山高水淸
이 비석에 있지 아니한가 / 不在斯碑


 7세손 부호군 최호문(崔浩文)에게 시집갔는데
 8세손  아들은 언청(彦淸)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