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경인년 산행/2010.8.23. 중랑천 양주 자전거

자전거 (방학동 의정부 양주 양주시청 불곡산 양주관아지 왕복)

아베베1 2010. 8. 24. 14:05

 올만에 자전거를 타고 중랑천을 따라서 도봉구청 노원교 의정부 양주교 양주시청 불곡산 양주 불곡산아래 양주관아지

왕복  약 50킬로 정도의 운동 양주향교 양주 관아지 별산대 놀이 공원 선조님의 역사를 찾아서 같으나

 비문을 확보 하지 못하고 돌아오니 아쉬운 부분 양주 문화원을 찾아서 가납리로 가는 도중 시간의 여유가 없어서 ...

 

 

  양주 향교 정문 1959년에 중수하였다는 기록 6.25 사변으로 소실   

   520여년을 수령을 자랑하는 느티나무 입구

 

    대성전 편액이보이고  

   대성전

 

   내려오는 길에 멋진 도봉의 운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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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주목의 역사적 기사


동쪽으로 포천현(抱川縣) 경계까지 25리이고, 또 같은 현 경계까지 22리가 되기도 하며, 가평현(加平縣) 경계까지는 29리이고, 광주부(廣州府) 경계까지 75리이다. 남쪽으로는 광주 경계까지 67리이고, 또는 82리가 되기도 한다. 서쪽으로는 고양군(高陽郡) 경계까지 40리이고, 파주(坡州) 경계까지는 33리이다. 북으로는 적성현(積城縣) 경계까지 22리이고, 마전군(麻田郡) 경계까지 58리이며, 연천현(漣川縣) 경계까지 74리인데, 서울과의 거리는 56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 매성군(買省郡)인데, 창화군(昌化郡)이라 하기도 한다. 신라 경덕왕이 내소(來蘇)라 고쳤다. 고려 초에는 승격하여서 견주(見州)라 하였고, 현종(顯宗) 9년에는 양주에 예속하였다. 본조 태조 3년에 도읍을 한양부(漢陽府)- 곧 옛 양주 -에 정한 다음, 부의 관아를 동촌(東村) 대동리(大洞里)에 옮기고, 강등하여 양주 지사(楊州知事)가 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다시 승격하여 부(府)로 만들었다. 6년에 또 부치(府治)를 견주 옛터에 옮기고, 그대로 양주라 불렀다. 태종 13년에 예에 따라 도호부로 고쳤다. 세조 12년에 승격하여서, 목으로 만들고 진(鎭)을 설치하였다.
【속현】 풍양현(豐壤縣) 주(州) 동쪽 50리 지점에 있다. 본래 고구려 골의노현(骨衣奴縣)이다. 신라에서 황양(荒壤)이라 고쳐서 한양군 속현으로 만들었고, 고려에서 풍덕(豐德)이라 고쳤다. 현종 9년에 양주에 예속시켰다가, 뒤에 포천에 예속시켰는데, 본조 세종 원년에 다시 본현에 내속하였다.
【진관】 주(州) 하나 파주. 군(郡) 하나 고양. 현 다섯 영평(永平)ㆍ포천ㆍ적성ㆍ교하(交河)ㆍ가평.
【관원】 목사ㆍ교수(敎授) 각 1인. 『신증』 연산 갑자년에 이 지역을 비워서 놀이하는 장소로 만들고, 나머지 지역은 분할하여서 이웃 고을에 예속시켰는데, 지금 임금 초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군명】 매성(買省)ㆍ창화(昌化)ㆍ내소(來蘇)ㆍ견주(見州).
【성씨】 견주 이ㆍ김ㆍ송ㆍ신(申)ㆍ백ㆍ윤ㆍ피(皮). 한양 한ㆍ조(趙)ㆍ민ㆍ신(申)ㆍ함(咸)ㆍ박ㆍ홍(洪)ㆍ부ㆍ최ㆍ정(鄭) 모두 來姓이다. 예(艾) 촌. 풍양 조(趙)ㆍ이ㆍ강(姜)ㆍ윤ㆍ유(劉). 사천 이ㆍ경(耿)ㆍ임(任)ㆍ송ㆍ허.
【형승】 세 영(嶺)이 하늘에 꽂힌 듯하다[三嶺揷天] 이색의 시에, “깍아지른 듯한 세 영이 푸른 하늘에 꽂힌 듯한데, 가파른 길이 얼어붙어 말이 못 가네.” 하였다.
【산천】 불곡산(佛谷山) 주 북쪽 3리 지점에 있는데 진산이다. 삼각산 주 남쪽 39리 지점에 있다. 한성부 조에 자세히 적었다. 도봉산(道峯山) 주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불암산(佛巖山) 주 남쪽 40리 지점에 있다. 아차산(峩嵯山) 주 남쪽 67리 지점에 있다. 수락산(水落山) 불암산 서북쪽에 있다. 주엽산(注葉山) 주 동쪽 35리 지점에 있다. 또 포천현 조에도 적었다. 천마산(天馬山) 주 동쪽 60리 지점에 있다. 천보산(天寶山) 주 동쪽 25리 지점에 있다. 포천현 조에도 적었다. 소요산(逍遙山) 주 북쪽 45리 지점에 있다. 묘적산(妙寂山) 주 동쪽 70리 지점에 있다. 왕방산(王方山) 북쪽 60리 지점에 있다. 또 포천현 조에 적었다. 고령산(高嶺山) 주 서쪽 30리 지점에 있다. 갈립산(葛立山) 주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 금대산(金臺山) 주 남쪽 75리 지점에 있다. 검암산(儉巖山) 주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홍복산(弘福山) 주 서남쪽 10리 지점에 있다. 소라산(所羅山) 주 북쪽 30리 지점에 있다. 차유령(車踰嶺) 주 동쪽 65리 지점에 있다. 벽석령(碧石嶺) 주 동쪽 22리 지점에 있다. 석문령(石門嶺) 주 동쪽 15리 지점에 있다. 효성현(曉星縣) 주 동쪽 30리 지점에 있는데, 고려 고종 때에 김산(金山) 군사가 풍양 효성현을 침범하자, 관군(官軍)이 산 바깥쪽에서 적의 배후를 공격하여, 노원역(盧原驛)까지 추격하였는데, 참수(斬首)한 것이 매우 많으니, 우마(牛馬)와 의량(衣糧)을 다 버리고 가버렸다. 전두령(田頭嶺) 주 동쪽 40리 지점에 있다. 추현(槌峴) 주 동쪽 70리 지점에 있다. 주을동(住乙洞) 주 남쪽 40리 지점에 있다. 녹양평(綠楊坪) 주 남쪽 15리 지점에 있다. 양진(楊津) 주 남쪽 67리 지점에 있다. 광진도(廣津渡)라 하기도 하는데 미진(迷津) 하류이다. 강원도 춘천부 소양강(昭陽江)과 충청도 충주 금탄(金灘)이 합쳐져서 이 나루로 되었다. 대탄(大灘) 주 북쪽 74리 지점에 있다. 물의 근원이 둘인데, 하나는 영평현 백운산에서 나오고, 하나는 강원도 철원부(鐵原府) 체천(砌川)에서 나와서 합류한다. 연천ㆍ영평을 지나 서남쪽 임진으로 들어간다. 풍양천(豐壤川) 풍양현 남쪽에 있다. 물 근원이 천마산에서 나와 동쪽으로 광진에 흘러든다. 백달천(白達川) 주 동쪽 85리 지점에 있다. 일곡천(一谷川) 주 서쪽 30리 지점에 있다. 물 근원이 홍복산에서 나오는데, 남으로 흘러 삼기강(三岐江)에 들어간다. 독포(禿浦) 주 동쪽 67리 지점에 있다. 노지(蘆池) 주 서쪽 10리 지점에 있다.
【토산】 사(絲)ㆍ삼ㆍ옥돌 옥돌은 갈립산에서 산출한다. 잣ㆍ송이ㆍ은어.
『신증』 녹반(綠礬) 주 서쪽 청송리(靑松里)에서 난다.
【봉수】 아차산 봉수(峨嵯山烽燧) 북쪽으로 대이산(大伊山)을 응하고, 서쪽으로 서울 목멱산(木覓山 서울 남산) 첫째 봉을 응한다. 대이산 봉수 주 동쪽 50리에 있다. 북쪽으로 포천현 잉읍재(仍邑岾)를 응하고, 남쪽으로 아차산을 응한다.
【궁전】 풍양궁(豐壤宮) 풍양현 동쪽에 있다. 연희궁(衍禧宮) 주 서쪽 59리 지점에 있다. 봉선전(奉先殿) 봉선사(奉先寺) 동쪽에 있다. 우리 세조의 초상을 봉안하였다.
【학교】 항교(鄕校) 주 동쪽 2리 지점에 있다.
【역원】 영서역(迎曙驛) 주 서쪽 60리 지점에 있다. 찰방(察訪)의 본도인데, 속역이 여섯이다. 벽제(碧蹄)ㆍ마산(馬山)ㆍ동파(東坡)ㆍ청교(靑郊)ㆍ준예(狻猊)ㆍ중련(中連)이다. ○ 찰방은 한 사람이다. 평구역(平丘驛) 주 동쪽 70리 지점에 있어, 본도의 속역 열 한곳을 찰방하는데, 녹양(綠揚)ㆍ안기(安奇)ㆍ양문(梁文)ㆍ봉안(奉安)ㆍ오빈(娛賓)ㆍ쌍수(雙樹)ㆍ전곡(田谷)ㆍ백동(白冬)ㆍ구곡(仇谷)ㆍ감천(甘泉)ㆍ연동(連洞) 등이다. 녹양역 주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 오세문(吳世文)의 시에, “꽃이 있어 마을 값이 중하고 버들 없어 역 이름 외롭다. 높은 나무엔 해 먼저 비치고, 마른 잎엔 바람 먼저 분다.” 하였다.
쌍수역 풍양현 남쪽 2리 지점에 있다. 광제원(廣濟院) 주 남쪽 35리 지점에 있다. 광인원(廣仁院) 주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상지원(相知院) 주 서쪽 45리 지점에 있다. 도공원(陶孔院) 주 동쪽 74리 지점에 있다. 덕해원(德海院) 도봉산 밑에 해촌(海村)이라는 언덕이 있고, 덕해(德海)라는 원이 있는데, 서울에서 30리 거리이다.
○ 서거정의 시에, “누구네 집 울타리에 가시 삽짝 닫혔네. 버들은 우거지고 꽃 폈는데, 빛나게 또 마을 하나, 날 저물어 절룩 나귀 갈 곳 몰라 하는데, 작은 다리 밑에 물 흐르고 달빛이 밝혀 주네.” 하였다.
○ “잔 들고 누(樓)에 올라 한번 웃으니, 수없는 푸른 산이 뾰족하게 무더기 이루었네. 돌아오고자 부질없이 십 년을 귀래시(歸來詩)만 지으니, 백발(白髮)은 다정하게 짐짓 재촉하는구나.” 하였다.
도제원(道濟院) 풍양현 남쪽 15리쯤에 있는데, 토원(兎院)이라 하기도 한다.
【불우】 회암사(檜巖寺) 천보산에 있다. 고려 때 서역(西域) 중 지공(指空)이 여기에 와서 말하기를, “산수 형세가 완연히 천축국(天竺國) 아란타(阿蘭陀) 절과 같다.” 하였다. 그 뒤에 중 나옹(懶翁)이 절을 세우기 시작하였으나 마치지 못하고 죽었고, 그 제자 각전(覺田) 등이 공역을 마쳤다. 집이 무릇 2백 62칸인데, 집과 상설(象設)이 굉장ㆍ미려하여 동방(東方)에서 첫째였고, 비록 중국에서도 많이 볼 수 없을 정도였는데, 목은(牧隱)이 기문을 지었다.
○ 고려 왕자 중 원경(圓鏡)의 글씨가 남루(南樓) 동서 벽과 객실(客室) 서편 다락에 남아 있다. 필중이 이르기를, “대정(大定 금국(金國) 세종의 연호) 갑오년에 서도(西都)가 반역하여 서북 방면 길이 막혔다. 그때 금국 사신이 오니, 춘천(春川)길을 따라서 인도하여 맞아 들였다. 금국 사신이 절에 들자 상설에 예배하고, 모여서 글씨를 보았다. 한 사람은, ‘귀한 분의 글씨이다.’ 하고, 한 사람은, ‘이것은 산인(山人)의 글씨이니, 나물과 죽순을 먹은 기운이 자못 남아 있다.’ 하였다. 중이 옆에 있다가 사실을 알리니, 두 사람이 모두 제 말이 맞았음을 기뻐하고 이에 시를 썼다. ‘왕자는 고량(膏粱) 기운이 반쯤 남았고, 중은 소윤의 흔적이 오히려 남았네. 미친 장지(張芝)와 취한 회소(懷素)는 온전한 골기가 없었다. 이 글씨는 당년에 중된 것이 문득 한이로구나.’ 하였다.” 한다.
○ 김수온(金守溫)이 지은 중창기(重創記)에, “우리나라 산수 경치가 천하에 이름이 났으며, 불사로서 그 사이에 있는 것이 또 몇 십 개인지 모르지만, 인사(仁祠) 제도의 극진한 것과 법왕(法王)ㆍ행화(行化)의 체제를 갖춘 것은 회암(檜巖)같은 것이 없다. 옛적 천력(天曆 원 나라 문종의 연호) 연간에 서천박가납제존자(西天博伽納提尊者)가 이 절터를 보고, ‘서천 아란타사 터와 꼭 같다.’ 하고, 또 ‘가섭불(迦葉佛) 때에 벌써 큰 도량이 되었다.’ 하였다. 이에 먹줄을 잡아 측량하여 그 자리를 정할 때에 오래 된 주추와 섬돌을 발견 하였다. 그리하여 당시에는 임시로 집을 덮어서 그 대개를 표시했을 뿐이었다. 얼마 뒤에 현릉왕사보제존자(玄陵王師普濟尊者)가 지공에게 삼산(三山)과 양수(兩水)에 대한 기(記)를 받고, 드디어 여기에 와서 살았다. 이에 크게 창건하고자 하여, 책임을 나누어 맡기고 바쁘게 불연(佛緣)을 모집하였다. 그러나 공역이 반도 못되어서 왕사도 또한 서거(逝去)하였다. 그의 제자 윤절간(倫絶澗) 등이 왕사의 이루지 못한 뜻을 생각하여, 그가 남긴 규모를 계승하여 공역을 마쳤다.” 하였다.
○ 목은 문정공이 기를 쓰기를, “보광전(普光殿) 5칸이 남으로 향했고, 전 뒤에는 설법전(說法殿)이 5칸이다. 또 그 뒤에는 사리전(舍利殿)이 1칸이고, 또 그 뒤에는 정청(正廳)이 3칸이다. 정청 동쪽과 서쪽에 방장(方丈)이 두 곳인데 각 3칸이다. 동쪽 방장 동편쪽에는 나한전(羅漢殿)이 3칸이고, 서쪽 방장 서편에는 대장정(大藏殿)이 3칸이다. 보광전 동쪽과 서쪽에서 좌우로 나뉘어, 여러 전이 우뚝하게 섰고, 여러 요사들이 높고 낮게 되었으며, 종루(鐘樓)ㆍ사문(沙門)과 부엌의 장소와 빈객(賓客)의 자리가 질서정연하다. 지붕이 연달아 뻗쳤고, 골마루가 덩굴처럼 돌아서 높고 낮고 아득한 것이 동서를 모르겠다. 무릇 집 지은 것이 2백 62칸이었다.” 하였다.
○ 이로부터 재간(才幹) 좋은 사람이 대마다 끊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혹 불전을 시작했으나 승료(僧寮)까지는 미처 못했고, 혹 종루는 보수했으나 객실에는 미치지 못하여, 동쪽을 수리하자 서쪽이 벌써 기울고, 남쪽을 고치면 북쪽이 또 상했다. 이는 절이 큰 까닭에 일이 거창했고, 일이 거창한 까닭에 사람이 능히 두루 짓고 다 잇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나라의 큰 총림이 거의 빈 집이 되었다.
○ 성화(成化 명(明) 나라 헌종(憲宗)의 연호) 임진년 봄에 대왕대비 전하께서 하성부원군(河城府院君) 정현조(鄭顯祖)에게 의지(懿旨)를 전해서 말씀하시기를, “내 한 부인으로서 조부의 여음(餘蔭)을 받들어 우리 세조대왕을 돕고, 성자 신손(聖子神孫)을 낳아 길렀다. 이것은 비록 황천(皇天)이 동방(東方)을 돌보신 것이나, 또한 오랜 세대로 덕을 닦은 것이 불법에 근본하였던 것이다. 예부터 자애로운 어미가 그 자손을 보호하고자 하고, 충신이 그 임금의 장수를 빌고자 하면, 오직 삼보(三寶 부처)에 귀의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회암은 동국에서 큰 가람(伽藍 절)이다. 세 화상(和尙)이 서로 이어서 개산(開山)하였는데, 세 개의 산과 두 가닥 물 사이라는 말이 지공(指空)에서 비롯하였으니, 실상 임금의 장수를 빌고 나라를 복되게 하는 곳이다. 내 들으니, 터 쌓은 것이 견고하지 못하고, 전사(殿舍)의 섬돌을 잡석(雜石)으로 쌓았기 때문에, 창건한 지 오래 되지 않아서 집이 벌써 퇴락하였다 한다. 지금 간각(間閣)의 제도는 옛날대로 하여 고치지 않고, 뜰에 박힌 것은 모두 다듬은 돌로써 바꾸고자 하는데, 공역(工役)을 계산하니 초창하는 것보다 두 배나 된다. 경(卿)도 또한 덕을 심은 인과(因果)가 있었으므로, 공주(公主)와 짝할 수 있었으니, 경은 힘을 다해서 나의 넓은 원심(願心)을 이루게 하라.” 하였다. 현조(顯祖)가 대답하기를, “세상에서 모두 중수(重修)하는 일이 새로 시작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합니다. 재물과 곡식 저축이 많다 하더라도, 진실로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성공할 수 없습니다. 지금 정양사(正陽寺) 주지(住持) 처안(處安)은 부지런하고 민첩하며, 일을 감당할 만한 재질로서, 그를 따를 자가 적습니다.” 하니, 의지(懿旨)로써 허락하였다. 드디어 처안(處安)을 회암사에로 이주(移住)시키고, 재물과 곡식 따위 비용은 내수사(內需司)에서 전적으로 맡아서 모자라는 대로 보급하여 쓰임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부원군도 또한 개인의 재산을 내어서 모자라는 것을 제공하였다. 처안이 승도(僧徒)와 속인(俗人)으로서 자원(自願)하는 자를 모집하고, 일한 것을 계산하여 품값을 주도록 아뢰었다. 날마다 만 여명을 사역 시켰으나 감독하지 않아도 저절로 힘껏 하였다. 그 해 월 일에 시작해서 거의 열 석 달을 지나 마쳤다. 전사(殿舍) 칸살은 다시 고친 것이 없고, 난간과 담의 넓고 좁음도 보태거나 줄인 것이 없어도 방문과 문 차면이 더욱 넓어졌고, 단청을 칠하여 더욱 현란하였다. 백여 년 퇴락한 옛 절이 일조에 새로운 보찰(寶刹)로 변하게 되었다.” 하였다.
○ 이색(李穡)의 시에, “노송나무 푸르고 돌 기세 완악 한데, 잎 사이 풍우로 공중 기후가 차다. 늙은 중 출정(出定)하여 성색(聲色)을 잊으니, 머리 위에 구슬 같이 세월이 달리는 구나.” 하였다.
○ 성임(成任)의 시에, “손에 익은 여장(藜杖) 짚고 절 찾아가니, 장송(長松)이 바위에 기대어 나지막하네. 산 이름을 중에게 묻지 않고, 문에 걸린 현판에서 큰 글자 본다. 만학(萬壑)에 구름 피니 숲이 더 깊고, 천년 일 아득한데 새 자주 운다. 삼사탑(三師塔)이 칡덩굴 넘어 있어 꼭대기에 오르려니, 마음 더욱 아득하다.” 하였다.
봉선사(奉先寺) 주엽산(注葉山) 광릉(光陵) 남쪽 둔덕에 있다.
○ 김수온(金守溫)이 지은 기문에, “봉선사(奉先寺)란 것은 우리 대왕대비 전하께서 세조 대왕을 위해서 창건한 것이다. 성화(成化) 기원(紀元) 4년에 우리 세조 대왕께서 승하하시니, 여러 신하가 양주(楊州) 땅에서 동쪽으로 30리 지점에 터를 가렸는데, 산은 주엽(注葉)이고 둔덕은 운악(雲岳)이다. 그해 12월에 세조 대왕의 현궁(玄宮)을 받들어 장사하니, 예(禮)대로 한 것이다.” 하였다. 대왕대비께서 의지(懿旨)를 내리기를, “우리 대행대왕께서 몸소 큰 변란을 만나, 백성이 크게 원망하는 것을 바로잡았으니, 성스러운 덕과 높은 공은 동방이 생긴 이래로 비교할 데가 없다. 국가가 불행하여 갑자기 뭇 신민을 버리시니, 아, 애통하다. 옛 제도를 상고하니, 선왕의 능침(陵寢)에는 반드시 정사(精舍)를 설치하였다. 지금 큰일을 마쳤으니, 경들은 절 지을 터를 살펴서 아뢰어라.” 하였다. 이에 임금께서 하성부원군(河城府院君) 신 정현조(鄭顯祖),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신 한명회(韓明澮), 능성부원군(陵城府院君) 신 구치관(具致寬) 등을 제조(提調)로 삼았다. 능실(陵室) 남쪽에 깊숙한 구역 하나가 있는데, 산이 감돌았고 물이 차서 절 터로서 알맞으므로, 신 현조 등이 아뢰어서 허락을 받았다.
○ 기축년 6월에 짓기 시작하여, 가을 9월에 마쳤다. 칸살을 계산하면 총 89칸이고, 검고 붉은 것을 발라서, 극히 선명하였다. 불전과 승료(僧寮)가 빛나고 넓으며, 방울과 목탁이 바람만 불면 절로 울렸다. 천석(薦席)과 상탑(床榻)이 곱고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으며, 빗장과 방망이 따위 도구와, 집기 따위도 넉넉하게 구비하여, 여러 사찰 중에 비교될 곳이 없었다. 전지(田地)와 노비ㆍ전곡(錢穀) 등 상주하기 위해 밑천으로 하는 숫자는, 영구히 부처와 중의 공양을 위한 것으로서 별도로 문부(文簿)가 있으므로, 여기에 언급(言及)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해 9월 7일에 세조를 위한 천도(薦度)를 크게 베풀어서 낙성(落成)하였다. 또 의지(懿旨)에 이르기를, “절을 지었으나 능침과는 둔덕이 서로 격했으니, 절 곁에다가 진전(眞殿)을 지어서 하늘에 계신 대행대왕의 혼령도 불법(佛法)에 귀의하게 하여, 저승에서 노니는 데에 이롭게 하라.” 하였다. 이에 절 동쪽에다가 영전(影殿)을 건립하고 숭은전(崇恩殿)이라 이름하였다. 참봉(參奉) 두 사람을 두어서 새벽과 저녁에 배알하게 하고, 초하루와 보름에는 반드시 헌관을 보내서 능실(陵室)과 같이 예배하였다. 이에 제조 신 정현조 등이 돌아와서 일이 완성됨을 아뢰니, 예종 대왕(睿宗大王)께서 ‘봉선사’라는 편액을 하사하였다.
○ 들으니, 예부터 왕자(王者)의 일어남이 후(后)의 덕에서 일어나지 않은 이가 없었다. 하(夏) 나라의 도산(塗山)과 주(周) 나라의 태사(太姒)의 사적은 경전에 나타났고, 그 일도 빛남이 있다. 우리 대왕대비 전하께서는 우리 세조를 보좌하였다. 잠저에서부터 보위에 오르기까지, 영특한 지략과 과단함으로써 성덕(聖德)에 이바지하였다. 집을 변화시키고, 국가로 만들어서, 큰 명(命)이 붙는 데가 있게 하였다. 사적(史籍)을 살펴도 성덕의 높음과 내조(內助)한 공이 백왕(百王)에서 우뚝하였다. 비록 도산이 하(夏) 나라를, 태사가 주(周) 나라를 도왔다 하더라도, 우리 대비 전하보다 낫지는 못하리라.
○ 들으니, 산 사람을 섬기는 데에 공경을 다한 자는 반드시 죽은 이를 섬기는 예를 다하고, 처세(處世)하는 가르침을 높이는 자는 반드시 출세(出世)하는 법을 온전히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충신과 효자가 임금과 어버이를 섬기는 데에, 능히 그 덕을 온전히 하는 도이다. 우리 대왕대비 전하께서 선왕(先王)을 위해 애통해하는 정성과, 추모하고 기도하는 뜻에 이미 정성과 공경을 다했다. 큰 가람을 묘역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창건했고, 삼보(三寶)의 가르침을 펼쳐서, 초승(超昇)하는 편제(便梯)를 일으켰다. 이것은 임금을 섬기고 어버이를 섬기는 데에 그 덕을 더욱 온전히 한 것이며, 여러 어진 덕을 겸비한 후비들과 나란히 할 수 있다. 또한 전대 제왕에도 드물게 있는 훌륭한 일이다.
○ 강희맹(姜希孟)이 지은 〈종명(鐘銘)〉에, “삼가 생각건대, 세조 승천 체도 열문 영무 대왕 전하(世祖承天體道烈文英武大王殿下)께서는 구오(九五)에 오르시고 금륜(金輪)에 임어(臨御)하시니, 신화(神化)가 미치는 곳에 가까운 데는 편히 여기고 먼 데서는 두려워하였으며, 백성과 만물이 모두 즐거워하였다. 그러나 14년이 되어 불행히도 숙연(宿緣)은 다하였고 명수(命數)는 피하기 어려우며, 뭇 신하들은 복이 없어 문득 승하하심을 당하였다. 지금 우리 주상 전하께서는 효성이 신명(神命)과 통하여, 우러러 호곡하심이 다함 없었다. 깊은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여, 세상이 끝나도록 영원히 사모하였다. 이에 광릉(光陵) 곁에다가 큰 절을 영건(營建)하여 ‘봉선사’라 이름하고, 유사에게 큰 종을 주조(鑄造)하도록 명하였다. 해당 관원이 왕의 뜻을 받들고 이에 부씨(鳧氏)를 상고하고, 금과 주석을 헤아려, 여섯 가지 재료를 형성하였다. 본[模範]이 이루어질 무렵에 신에게 명(銘)을 짓도록 명하시었다. 신이 가만히 생각하니, 종이라는 기물이 쇠로 된 것 중에서는 가장 크다. 그 소리가 용용(舂容)하여 먼 데는 놀라게 하고 가까운 데는 두렵게 하며, 그 묘함이 위로는 삼천(三天)까지 통하고 아래로는 육도(六塗)를 겸한다. 타왕(吒王)이 윤회(輪回)를 받고 꿈에도 종치기를 원했고, 제파(提婆)가 두번 울려서 크게 진교(眞敎)를 일으켰다. 인연 공덕(因緣功德)을 어찌 모두 말하랴. 지금 이 종으로써 육부(六府)를 깨우치니, 어찌 특히 도려(道侶)가 깊은 각성(覺醒)을 말하며, 아득한 무리가 고뇌(苦惱)를 그칠 뿐이리요. 반드시 아득한 현궁(玄宮)에도 통하여, 좌우에 들리면, 돈연(頓然)히 불지(佛智)를 더하여, 피안(彼岸)에 속히 오를 것이다. 하물며, 우리 세조대왕은 성한 덕과 높은 공이 만고에 빛나고, 우리 사왕 전하(嗣王殿下)의 근본에 보답하고 영원히 추모하는 정성이 천지와 함께 다함이 없음에랴. 이러한 바를 종정(鐘鼎)에 붙여서 영원히 전하지 아니할 수 없다. 삼가 절하며 머리 조아리고 명(銘)하기를, “능침 곁에다 보찰(寶刹) 지으니, 금벽(金碧)이 우뚝하게 솟아났구나. 법악(法樂)이 인간의 세계와 하늘에 울리니, 묘한 소리 유명(幽明)을 화하게 한다. 그 중에 커다란 방망이 있어, 고래가 투그리듯 소리가 높다. 연모로써 두드려서 울리기만 하면, 귀 있는 자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법은 제진(諸塵)을 떠나지 않고, 삼기(三紀)가 합친 다음 이루어진다. 듣는 것이 있어도 들림이 없고, 마땅히 실(實)을 듣는 본성이 있다. 능히 듣는 자, 어찌 옳으랴. 본래는 실상, 청정(淸淨)뿐이다. 청정하면 때와 더러움 없이 이것을 이름하여 대원경(大圓經)이라 한다. 사람마다 이 이치 갖추어져서, 한 번만 들어도 깨치게 된다. 위로 통함은 아가니(阿伽尼)에게, 옆으로 둘리는 건 항하사(恒河沙)까지 법이 다하면 끝없는 삶의 복리가 이루어진다. 열성(列聖)이 올라서 바로 보니, 모든 형체 있는 것이 삼매에 든다. 삼광(三光)의 돗수가 순리로 되고, 만 백성이 요사(夭死)와 역질이 없다. 진묵검(塵墨劍)이 지나도록 요도(瑤圖)와 함께 나라는 반석 같아 견고하리라. 산이 평지 되고 바다는 말라도, 공덕은 마침내 닳지 않으리라.” 하였다.

개경사(開慶寺) 옛날에는 현릉(顯陵) 동쪽에 있었는데, 능침과 가깝다하여 지금은 남곡(南谷)에 옮겼다. 중대암(中臺菴)ㆍ백운암(白雲庵)ㆍ소요사(逍遙寺), 소운암(小雲菴) 아울러 소요산에 있다. 고령사(高嶺寺) 고령산에 있다. 청룡사(靑龍寺)ㆍ망월사(望月寺)ㆍ회룡사(回龍寺)ㆍ원통사(圓通寺)ㆍ영국사(寧國寺) 아울러 도봉산에 있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어느 해에 산 밑 절을 지었나. 객이 와서 종일토록 맴돌고 있다. 창문 여니 구름이 처마를 헤쳐 들고, 베개 비기니 시냇소리 땅을 울려 들린다. 옛 탑은 층이 있어 공중에 부옇게 섰고, 동강난 비는 글자 없이 반쯤 퍼렇게 묻혔다. 늙어서 인간 일, 죄다 버리고 돌아가지 않기로 중과 의논한다.” 하였다.
은석사(恩石寺)ㆍ범굴사(梵窟寺) 아울러 기슭에 있다.
○ 서거정의 시에, “한 줄기 긴 강이 맑디맑구나. 강 위에 푸른 산은 백층이로세. 절은 허공에 있어 놀과 연했고, 깊은 바위틈을 가느라 덩굴 잡는다. 불전에 향 사르며 예배 드리고, 밝은 창 햇살 쬐는데 중과 말한다. 화겁(火劫)이 망망하매 진계(塵界)는 작다. 한낮에 승화(昇化)할 인연이 없구나.” 하였다.
묘적사(妙寂寺) 묘적산에 있다. 김수온(金守溫)의 기문이 있다.
○ 신종호(申從護)의 시에, “한가히 생대(生臺) 밑에 앉아 있으니, 임궁(琳宮)에 밤들어 적적하구나. 매화(梅花) 보고 시 지으니 격(格)이 여위고, 차 달이며 술 마시니 취기 가신다. 깊은 원(院)에 바둑 소리 급하고, 주렴(珠簾)에 촛불이 일렁거린다. 밤이 새면 서울로 떠나야 할 터, 돌아가야 할 길이 아득도하다.” 하였다.
불곡사(佛谷寺) 불곡산에 있다. 수락사(水落寺) 수락산에 있다.
○ 서거정의 시에, “수락산 속 수락사에 물 마르고, 돌 나와 이해 저문다. 황학(黃鶴)이 나는 옆에 하늘이 낮고, 검은 구름 끄는 데 빗발이 난다. 거년에 중 찾아 여기 왔더니, 구렁에 눈 쌓였고 달이 밝았다. 금년에도 중 찾아 여기에 오니, 바윗가에 봄 꽃이 피었다 진다. 거년에도 금년에도 내왕하던 길, 산천은 역역하게 예와 같아라. 이끼 낀 길 미끄러워 청려장 짚고, 샘물이 흐르는데 바람이 분다. 식후(食後)에 들리는 종소리 예전대로다. 벽 위에 시기(詩記) 있는데 먼지 덮였다. 홍수(紅袖) 고금(古今)이란 것, 어찌 구래공(寇萊公)뿐일까. 왕공(王公)의 호기(豪氣) 적음을 내 한번 웃노라. 스무 해 만에 처음으로 얻은 벽사롱(碧沙籠).” 하였다.
○ 앞사람의 서문에, “젊었을 때 여러 산사(山寺)에서 글을 읽었다. 수락산에 왕래한 것도 또한 두 번이며, 이 시를 우연히 벽 위에다가 적은 지도 지금 30여 년 전이다. 그저께 일암 전상인(一菴專上人)이 이 시를 베껴 와서 나에게 보이며, ‘장단 백태수(長湍白太守)가 외우는 것을 적었다.’ 하면서, 나에게 그릇된 글자를 바로잡아 주기를 요청하였다. 나는 시를 지어도 갑자기 짓고 문득 버려서 한두 마디의 말로 상자에 남겨 둔 것이 없다. 하물며 광망한 소년 적에 지은 것으로 유전(流傳)시킬 뜻이 없었으니 어찌 기록하였겠으며, 32년 전 일이 아득하게 꿈속 같아서 그때 지은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데, 또 어찌 그릇된 글자를 알 수 있으랴. 그러나 한번 읽어보니, 운자(韻字) 단 것과 글자 놓은 것에 불만스러운 곳이 있다. 반드시 나의 유치한 시절의 잘못이거나, 혹 외우는 자의 잘못이 아닐까. 우선 그냥 두었으나, 옛일을 생각하니 능히 느낌이 없을 수 없다. 드디어 근체시(近體詩) 여섯 수를 지어, 일암 법좌하(法座下)에 드렸다. 일암은 그때 불암사에 머물고 있었는데, 수락사와는 겨우 10여 리이다. 후일 일암과 함께 한번 놀게 된다면 나의 말을 마치겠다.” 하였다. 그 시(詩)에, “산중(山中) 옛절에 유람하던 일, 손꼽으니 지금 벌써 30년이다. 객과 함께 거닐면서 많은 시간을 중을 위해 머물렀다. 한가한 긴 날, 꽃이 짙고 대나무 빽빽하여 지역이 깊고, 나무 늙고 바위 돌아 작은 누(樓)를 안았다. 다시 한 번 스님과 가보고 싶다. 소년 적 지난 일이 유유하여라.” 하였다.
○ “유유한 지난 일은 소년 적일세. 취한 중에 필세(筆勢)가 용솟음쳤다. 판벽(板壁)에 내 쓴 것은 무심하였고, 화등(花藤)에 중 베낌은 다사(多事)도 하다. 붉은 소매 푸른 비단은 본분 아닌 것이 부끄럽고, 흰머리 누른 티끌 속에 늙음이 밉다. 다시 한 번 스님과 가보고 싶다. 높은 봉에 또 오르면 쾌함 있으리.” 하였다.
○ “다시 최고봉(最高峯)에 오르고 싶다. 정(井 별 이름)을 지나 참(參 별 이름) 만지면 가슴 시원하리. 한낮에 새 한 마리 머리로 날아 지나고, 푸른 산은 여러 용이 눈아래 노는 듯, 금은(金銀) 불찰(佛刹)은 3천 계(界)이고, 금수(錦繡) 강산은 백 두 겹이다. 다시 한 번 스님과 가보고 싶다. 해질 무렵 앉아서 차를 끓이며.” 하였다.
○ “저녁 해 떨어지고 차 끓는 소리, 청산은 거만한 듯 아랑곳없다. 굽어보니 구름은 평지에 일고, 쳐다보니 폭포는 반공(半空)에 난다. 꽃비는 누(樓)에 가득 옷이 다 젖고, 베갯머리 송도(松濤)는 뼈에 사무친다. 다시 한 번 스님과 가보고 싶다. 청련(靑蓮)과 결연(結緣)하여 여생 보내리.” 하였다.
○ “여생에 결연하기 첨 마음일세. 서글퍼라 연래에 눈 같은 머리. 원(願) 맺기가 옅지 않음 누가 알리. 산에 들면 안 깊을까 항상 염려라. 스님과 다시 한 번 가보고 싶다. 총림(叢林)과 가깝구나 불암 촌서(村墅)가.” 하였다.
○ “총림이 불암산 가까이 있고, 산 밑에는 내 집이 두어 칸 있다. 도잠(陶潛)의 세 가닥 길, 적막하여도 양로(楊老)의 한 구역 집 반환(盤桓)하노라. 나물 캐고 죽순 구워, 예삿일이고 국화 보내고 매화 맞았다 하여라. 다시 한 번 스님과 가보고 싶다. 저문 나이 내 신세가 함께 따르리.” 하였다.
불암사(佛巖寺) 불암산에 있다.
○ 앞사람의 시에, “우리 집 서쪽 영(嶺)에 절이 있는데, 여러 벗들과 손잡고 함께 놀았다. 달 숲에 송뢰(松瀨) 소리, 두릉(杜陵)이 묵었고[宿], 늙은 나무 굽은 바위 이백(李白)이 썼다. 객자(客子)가 안 오니 원숭이 서럽고, 노승(老僧)이 잠들려니 산새가 운다. 아득한 띠끌 세상 어느 곳인가. 흰 구름 땅에 가득, 길을 몰라라.” 하였다.
석천사(石泉寺) 수락산에 있다.
○ 앞 사람의 시에, “천불산(千佛山) 높푸르러 겹쳐졌는데, 발자국 미끄러워 칡을 잡는다. 구름이 노목을 덮어 매 집이 높고, 물이 샘에 흘러와 용이 숨었다. 손님은 시를 쓰려 석탑(石塔)을 쓸고, 스님은 예불(禮佛)하며 종을 울린다. 올라가 임해 보니 동남쪽이 죄다 보인다. 건곤(乾坤)을 굽어보니 가슴 시원해.” 하였다.
홍복사(弘福寺) 홍복산에 있다. 정토사(淨土寺) 주 서쪽 59리 지점 백련산(白蓮山)에 있으며, 의숙공주(懿淑公主)의 묘가 있다.
【사묘】 사직단 주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주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 여단 주 북쪽에 있다. 양진사(楊津祠) 광나루[廣津] 아래쪽에 있다. 용에게 제사하는 단이 있는데, 봄ㆍ가을에 나라에서 향축(香祝)을 내린다. 신라 때는 북독(北瀆)이라 하여 중사(中社)에 올렸는데, 지금은 소사(小社)에 기재되어 있다.
【능묘】 건원릉(健元陵) 본조 태조의 능이다. 주 남쪽 57리 지점인 검암산(儉巖山) 기슭에 있는데, 서울과는 20리쯤 되는 거리이다. ○ 권근(權近)이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에, “하늘이 덕 있는 이를 돌보아서 치운(治運)을 열어 주는 데에는, 반드시 상서(祥瑞)가 먼저 있어서, 천명(天命)에 부합(符合)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하우(夏禹)가 일어날 때에 하늘에서 현규(玄圭)를 주었고, 주(周) 나라 무왕(武王)이 왕으로 될 적에는 꿈과 점괘가 합치하는 상서가 있었다. 한당(漢唐) 이래로도 역대(歷代)로 일어날 때에 각각 부합하는 상서가 있었다. 이것은 지혜로써 구할 수 없고, 힘으로써 되는 것도 아니다. 반드시 성철(聖哲)한 자질과 신무한 덕을 소유하고서 큰 운수에 응하여 탄생하고, 요도(瑤圖)를 잡아서 발흥한 다음이라야 쇠퇴한 세상을 변화시켜 다스려지는 태평한 세상으로 돌리고, 큰 기업(基業)을 창건하여 통서(統緖)를 후세에 남기는 것이니, 모두 하늘에서 주는 것이고, 사람의 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 태조 강헌 지인 계운 성문 신무대왕(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이 용잠(龍潛)에 있을 때에, 나가면 장수이고, 들어오면 정승이 되었다. 수십 년 동안에 천명에 부합한 상서가 전후로 아울러 이르렀다. 정승이 되었을 때, 꿈에 신인(神人)이 금척(金尺)을 잡고 하늘에서 주면서, ‘시중(侍中) 경복흥(慶復興)은 청백하지만 늙었고, 도통(都統) 최영(崔瑩)은 강직하지만 조금 어리석다. 이것을 가지고 나라를 바룰 자는 공이 아니면 누구인가.’ 하였으니, 하우(夏禹)의 현규(玄圭)와 주무(周武)의 점괘와 합치하는 꿈을 꾼 것과 거의 되좇아 짝할 만하다. 장수로 되어서는 경술년에 올라(兀羅)를 공격하면서 군사가 압록강을 넘자, 자기(紫氣)가 공중에 가득했고, 경사년 운봉 전첩(雲峯戰捷)에는 군사가 장단을 나서자, 흰 무지개가 해를 꿰었다. 한 고조(漢高祖) 망탕(芒碭)의 운기(雲氣)와, 송(宋) 태조 진교(陳橋)의 일광(日光)과 또한 아름다움을 짝할 만하다. 무진년에 요(遼)를 공격하라는 최영의 핍박을 당했다. 밖으로는 감히 상국(上國) 경계를 침범하지 못할 형편이고, 안으로는 감히 폭군(暴君)의 영을 어길 수 없었다. 나아가기도 물러나기도 오직 딱하기만 하여 군사를 위화도(威化島)에 주둔하였다. 여러 날 장마가 졌으나, 물이 매우 붇지 않았는데, 의기로써 군사를 돌이켜 언덕에 오르니, 큰물이 때맞추어 와서 온 섬이 빠져 버렸다. 한 광무(漢光武)의 호타하(滹沱河) 얼음과 원 세조(元世祖)의 전당(錢塘) 조수가, 모두 그 미담(美談)을 독차지하지 못할 것이다. 구변도(九變圖)라는 국판[局]과 십팔자(十八子)라는 설(說)이 단군 때부터 벌써 있었던 것인데, 수천 년을 지난 지금에 징험된다. 또 이상한 중이 지리산(智異山) 바위 속에서 이상한 글을 얻어 바쳤는데, 그 말이 위에 말한 단군 때에 나왔다는 것과 서로 합치하였다. 이것은 또한 광무(光武)의 적복부(赤伏符)라는 것과 유사하다. 비기(祕記)가 비록 떳떳하지 못하다 하나, 또한 이치가 혹 있는 것이다. 예로부터 여러 번 징험되었으니, 하늘이 덕 있는 이를 돌봄이 참으로 증거 있는 것이다.
신이 삼가 선원(璿源 임금의 족보)을 상고하니, 이씨는 전주(全州)에서 이름난 씨족이었다. 신라 적에 사공(司空) 벼슬을 지낸 휘 한(翰)으로부터, 그 후 23대 황렬고 환왕(皇烈考桓王)까지 여러 대로 승적(承籍)한 아름다움을, 우리 태조께서 용잠하실 때에 선정(先正) 신 이색(李穡)이 지은 환왕 묘비에 갖추어 기재하였다. 그 뒤에 태조께서 대업을 창건하시고 대통을 드리우신 신기한 공과 거룩한 업적으로써 4대를 추존 할 때에, 문신 정총(鄭摠)이 지은 환왕 정릉(定陵)의 비에 모두 적었다. 신이 지금 명을 받들었으나 감히 작은 것을 아뢰지 못하고, 우선 큰 것만을 모아서 말한다.
사공(司空)이 신라 종성(宗姓)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6대를 지나 긍휴(競休)에게 와서 비로소 고려에 벼슬하였다. 13대를 지나 황고조 목왕(皇高祖穆王)에 이르러, 처음으로 원 나라에 벼슬하여 천부(千夫)의 장이 되었고, 4대로 거듭 벼슬을 이어 아름다움을 이루었다. 원 나라 운수가 쇠하여지므로, 황고 환왕이 들어와서 고려에 벼슬하였다.
공민왕(恭愍王) 때에 홍건적(紅巾賊)이 일어나서 중국의 도성(都城)을 침범하고, 요양(遼陽)과 심양(瀋陽)을 유린(蹂躙)하였으나, 천하에서 그 칼날을 감히 대적하지 못하였다. 지정(至正 원 순제의 연호) 신축년에 적이 왕경(王京)을 함락하므로, 공민왕이 서울을 버리고 군사를 보내어 회복시켰다. 우리 태조께서 앞장서서 싸움을 이기니, 위엄이 비로소 떨쳤다. 다음 해 임인년에 호인(胡人) 나하추[納哈出]를 쫓아버렸고, 또 다음 해 계묘년에는 거짓 임금 탑첩목(塔帖木)을 축출하였다. 날카로운 기세를 꺾고 적군을 물리쳐서, 향하는 곳마다 반드시 이기니, 이 때문에 공민왕의 믿고 의지함이 더욱 중하였다. 여러 번 장상(將相)이 되어 중외(中外)로 나들면서 도적을 제압해서 민생을 편하게 하여, 여러 번 특별한 공을 세웠다. 호령(號令)이 명백하고 신실하여, 추호도 백성에게 범하지 않았다. 세상을 구제하려는 활달한 도량과 살리기를 좋아하는 인후한 덕이 천성에서 나왔다. 묘당(廟堂)에서 계획하는 여가와 전진(戰陣)에서 창을 던져 두는 여가에, 명유(名儒)를 맞이하여 경사(經史)를 토론하여 열심하여 게으름이 없었다. 혹 밤중까지 자지 않고 더욱 진덕수(眞德秀)의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즐겨 보아서, 개연히 세도(世道)를 만회(挽回)할 뜻이 있었다. 용맹스런 계략은 세상을 뒤덮고, 영걸찬 예기는 무리에서 뛰어났으므로, 일시의 물망(物望)이 또한 주목(注目)하지 않는 자 없었다.
공민왕이 갑자기 죽자, 명령(螟蛉)이 왕위를 도절하고 권세 잡은 간신이 국정을 멋대로 하여, 정사를 어지럽히어 탐탁하고 살륙함이 끝이 없었다. 시중 최영은 이를 분하게 여겨, 주륙(誅戮)하면서 지나치게 참혹하게 하는데, 우리 태조의 힘을 입어 온전하게 살아난 자가 매우 많았다. 최영은 태조가 청충용렬(淸忠勇烈)하다 하여, 특히 천거하여 우시중(右侍中)으로 삼고, 이어 우군도통(右軍都統)의 절월(節越)을 주면서, 망령되이 군사를 움직여서 요(遼)를 공격하도록 핍박해서 보냈다. 이에 위화도(威化島) 행차가 있었는데,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대의(大義)를 가지고 군사를 돌렸다. 그리하여 홍무(洪武 명 태조 연호) 21년 무진 6월에 최영을 잡아 물리치고 명유 이색을 좌시중으로 삼아서, 서정(庶政)을 고쳐 새롭게 하여 일국을 편하게 하였다. 이때에 처음에는 탐포한 무리의 탁하고 어지러운 정사를 만났고, 다음에는 광패한 신하가 틈을 만들어 잡게 됨을 당하여, 나라가 아주 위태하고 화란을 측량할 수 없었다. 우리 태조의 전화위복하는 힘이 아니었더라면, 온 나라 민생이 거의 혼란되었을 것이다.
이색이 우리 태조에게 아뢰기를, ‘공이 지금 의거하여 군사를 돌리고 죄인을 쳐서 중국을 높였다. 노부(老夫 이색 자신)가 윗자리에 있어 이 국정(國政)을 같이 맡았으니, 공의 충성을 황제에게 모두 아뢰는 것이 나의 책임이다.’ 하고, 기일을 정하여 중국 서울에 갔다. 우리 태조는 여러 아들 중에서 가려, 지금 우리 주상 전하를 서장관(書狀官)에 충수하여, 이색을 따라 함께 조회하게 하였다. 고황제(高皇帝)께서는 충성을 깊이 아름답게 여겨서 후하게 예하여 보내었다. 기사년 가을에 황제의 교지(敎旨)를 받으니, 딴 성씨를 왕씨(王氏)의 뒤로 삼은 것을 책망한 것이었다. 태조는 여러 장수와 함께 왕씨의 종친 정창군(定昌君) 요(瑤)를 뽑아 세웠다. 마음껏 보좌하고 정사와 형벌을 명백히 하되, 사전(私田)을 혁파하여 억지로 빼앗은 것을 징계하고, 벼슬을 중히 하여 용렬하고 외람한 자를 도태하니, 인정이 서로 기뻐하여 잘 다스림을 바라는 마음이 흡족하였다 그러나, 공명이 높으니 시기함을 받아 참소가 서로 얽히는데, 정창은 일에 어두워, 도리어 참소에 의혹되었다. 우리 태조는 지위와 공명이 너무 가득한 것으로써 전문(箋文)을 올려 노퇴(老退)하기를 청했으나 해임되지 않았다. 마침 서쪽으로 갔다가 병에 걸려서 돌아왔는데, 모해하려는 자가 틈을 타서 화가 신변에 절박하였다. 우리 전하는 시기에 따라 변을 제어하여 뿌리를 잘라버리니, 지당(支黨)이 와해되고 정창은 정사에 어두워서 국세가 불안하였다.
그러므로 마침내 홍무 25년 임신 가을 7월 16일에 하늘이 전하를 도와서, 좌시중(左侍中) 배극렴(裵克廉), 우시중(右侍中) 조준(趙浚) 등 52명과 함께 의기를 주창하여 추대하게 하니, 신료와 부로가 모의하지 않아도 마음이 모두 같았다. 우리 태조께서 변을 듣고 놀라서 일어나 두세 번 굳이 사양하였다. 그러나 민심이 절박하여 할 수 없이 왕위에 올랐다. 당(堂)에 내리지 않고 나라를 변화시켰고, 나라를 바꾸어[易姓] 명을 받기가 구슬을 굴리는 것같이 쉬웠다. 하늘이 나라를 편안하게 하고, 덕 있는 이를 돕는 것이 아니면 어찌 이와 같으리요. 곧 지중추(知中樞) 조반(趙胖)을 보내어 천자에게 아뢰니, 황제께서 조서(詔書)를 내리기를, ‘삼한(三韓) 백성이 이미 이씨를 높여서 백성에게 병화(兵火)가 없고 각자 천명에 따르니, 상제(上帝)의 명이다.’ 하였다. 또 계속하여 칙서로서, ‘나라 이름을 무엇이라 고쳤느냐.’ 하여, 유성(流星)같이 급히 달려와서 보고하므로, 곧 예문관 학사(藝文館學士) 한상질(韓尙質)을 보내어, 나라 이름을 주청(奏請)하였다. 또 조서하기를, ‘조선(朝鮮)이라는 명칭이 아름다우니, 그 이름으로써 근본하여 계승하고, 하늘을 본떠서 백성을 기르며, 영원히 후사(後嗣)가 창성하게 하라.’ 하였다. 대개 우리 태조의 위정(威靜)이 본래 나타났으므로 천하에서 그 용맹에 복종하고, 충의가 이미 드러났으므로 천하에서 그 슬기를 높이고, 공덕이 높이 들리었으므로 간택함이 황제 마음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황명(皇命)을 청할 때를 당하여, 문득 유음(兪音)을 받았음이니, 어찌 우연한 일인가. 3년이 지난 갑술년 여름에 황제가 친아들을 조정에 보내도록 명하였다. 우리 태조께서는 우리 전하가 경서(經書)에 통하고 이치에도 밝으며, 일찍이 중국 조정에 조회하였다는 것으로써 곧 보내어 황명에 응하였다. 중국 서울에 가서 아룀이 성지(聖旨)에 합당하니, 후한 예로써 위로하여 보낸 것이었다.
그해 겨울 10월에 도읍을 한양에 정해서, 궁실을 건축하고 종묘를 건립하였다. 추존하여 황고조 목왕(穆王)과 황고조 비(妣) 효비 이씨(孝妃李氏)를 제1실에, 황증조 익왕(翼王)과 황증조 비 정비 최씨(貞妃崔氏)를 제2실에, 황조 도왕(度王)과 황조비 경비 박씨(敬妃朴氏)를 제3실에, 황고 환왕과 황비 의비 최씨(懿妃崔氏)를 제4실에 봉사(奉祀)하였다. 또 각 산릉(山陵)에는 능을 수호하는 민호(民戶)를 두고 때에 따라 제사하였다. 예악(禮樂)을 닦아 제사ㆍ절차를 삼가고, 장복(章服)을 제정하여 위의(威儀)를 분변하였다. 학자(學資)를 넉넉히 하여 학교를 일으키고, 녹봉을 증가하여 사대부를 권장하였다. 분쟁하는 소송을 분변하고, 수령(守令)의 출척(黜陟)을 신중히 하니, 폐단이 죄다 없어지고 모든 정사가 화창하였다. 제후(諸侯)의 법도는 삼가 사대(事大)하는 데에 정성스러웠고, 전함(戰艦)을 갖추어서 도적 막는 것을 엄하게 하였다. 황제가 하사하는 것이 해마다 오고, 왜국(倭國)에서 보배를 바쳤다. 해적(海賊)이 위엄을 두려워하여 잇따라 와서 항복하니, 사방이 안정하여 백성이 편하고 불자가 성하였다. 우리 태조의 높고 넓으신 성덕은 참으로 이른바 하늘이 주신 용맹과 지혜이며, 또 총명하시어 뛰어난 무위(武威)로써 적을 죽이지 아니하고, 헌걸차고 거룩하여 범상하지 아니하니 호걸스러운 임금이라 하겠다.
간신 정도전(鄭道傳)의 표문(表文)으로 인해 꾸지람을 당하고, 황제가 두 번이나 사신을 보내어 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병을 핑계하여 가지 않고 가만히 군사를 움직여서, 요(遼)를 공격하여 항명(抗命)하기를 꾀하였다. 무인년 가을 8월에 태조께서 편하지 못한 틈을 타서 여러 적자(嫡子)를 제거하고, 어린 서얼(庶孽)을 끼고서 자신의 뜻대로 하기를 도모하였다. 밤에 사제(私第)에 모였는데 화기(禍機)가 급박하였다. 우리 전하께서 기미를 밝혀 죽여 없애고, 상왕(上王)이 적장(嫡長)이므로, 세자(世子)로 봉하기를 청하여, 이륜(彝倫)을 바로잡으니, 종사(宗社)가 이에 안정되었다. 9월 정축일에 우리 태조께서는 병환이 낫지 않으시어 상왕(정종(定宗))에게 선위(禪位)하셨다. 상왕은 뒤를 이을 사자(嗣子)가 없고, 또 국가를 창건하고 사직을 안정시킨 것도 다 우리 전하의 공이라 하여, 우리 전하를 세자로 책봉하였다.
경진년 가을 7월 기사일에 책보(冊寶)를 받들어, 우리 태조에게 계운 신무 태상왕(啓運神武太上王)이라는 존호(尊號)를 올렸다. 겨울 11월 계유일에 상왕께서도 또한 병환이 계시어, 우리 전하에게 선위하시고 사신을 보내어 황명을 청하니, 지금 황제께서 즉위하고 고명(誥命)과 인장(印章)을 하사하셨다. 영락(永樂 명 성조의 연호) 원년 여름 4월에 도지휘(都指揮) 고득(高得)과 좌통정(左通政) 조거임(趙居任)을 보내 와서, 우리 전하를 국왕으로 봉하고 잇따라 한림 대조(翰林待詔) 왕연령(王延齡)과 행인(行人) 최영(崔榮)을 보내 와서, 전하에게는 용포(龍袍)와 면류관(冕旒冠) 따위 구장복(九章服)과 비단ㆍ깁ㆍ서적 등속을, 왕비에게는 관(冠)ㆍ포(袍)와 비단ㆍ깁 따위를, 우리 태조에게는 비단과 깁을 각각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이로부터 약재(藥材)ㆍ실ㆍ깁과 보배로운 물품을 하사하는 것이 해마다 아울러 와서, 중한 총권(寵眷)이 옛날에는 없었다.
영락 6년 무자 5월 24일 임신에 우리 태조께서 세상을 떠났으니 춘추가 74세였다. 왕위에 있은 것이 7년이고, 노년(老年)이어서 정사를 보지 않은 것이 11년이었다. 신민이 다 어버이처럼 임어(臨御)하여서 영원히 영양(榮養)을 누리도록 축원하였는데, 일조에 신선이 되어 활과 칼만 남기시니 애통하여라. 우리 전하께서 애모하심이 다함 없었다. 양암(諒闇)에서 예대로 다하며, 군신을 거느리고 책보를 받들어서 태조 지인 계운 성문 신무대왕(太祖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이라는 존호를 더 올렸다. 이해 9월 9일 갑인에 도성 동쪽 양주 검암산에 장사하였는데, 능 이름을 건원이라 하였다. 능 곁에다가 절을 설치하여 이름을 개경(開慶)이라 하고, 명복(冥福)을 빌었다. 초상 장사에 예를 성심껏 하여, 옛 예전(禮典)을 꼭 따랐다. 중국에 사신을 보내어 부고하니, 황제가 놀라 슬퍼하여 조회를 파하였다. 특히 예부 낭중(禮部郞中) 임관(林觀)을 보내어 대뢰(大牢)를 내리고, 글을 지어서 제사하였다. 그 대략에, ‘생각건대, 임금이 명달하고 착함을 좋아함은 천성에서 나왔다. 천도(天道)를 공경히 따랐고 의를 힘쓰며, 충성을 드리어 사대하는 데에 공손히 삼갔다. 한 지역 백성을 보호하고 부(富)하게 하였다. 우리 황고(皇考)께서 그의 충성을 깊이 아름답게 여겨서, 조선(朝鮮)이라는 국호(國號)를 특히 하사하였다. 임금의 현저한 공덕은 비록 옛 조선의 어진 임금이라도 이에 지나지 못할 것이다.’ 하고, 또 고명을 하사하여 시호를 ‘강헌(康獻)’이라 하였다. 또 전하에게 칙서하고 보물(寶物) 주는 것이 특히 후하고, 총권(寵眷)하는 예가 구비하여 유감이 없었다. 오직 우리 태조는 하늘을 두려워하는 정성으로 앞에서 터를 닦았고, 우리 전하의 부모의 뜻을 계승하는 효도는, 뒤에서 받들어서 성군(聖君)과 성군이 서로 이어 능히 천심(天心)에 화합하였다. 그러므로 정성이 신명에 통하고 복과 경사가 종사(宗社)에 이어지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처음에서 끝까지 크게 하늘과 사람, 상하(上下)의 도움을 얻은 것이 이와 같이 지극하니, 아, 성대(盛大)하시었다.
첫째 비(妃) 한씨(韓氏)는 안변(安邊)에서 여러 대를 살던 집안에서 나셨다. 증직(贈職) 영문하부사 안천부원군(領門下府事安川府院君) 휘 경(卿)의 딸인데 먼저 승하 하였다. 처음 시호는 절비(節妃)였는데, 뒤에 승인 순성 신의왕후(承仁順聖神懿王后)라는 시호를 더하였다. 6남 2녀를 탄생하였는데 상왕(上王)이 둘째이며, 우리 전하께서 다섯째이다. 맏이는 방우(芳雨)로서 진안군(鎭安君)인데 먼저 죽었다. 다음 셋째는 방의(芳毅)인데 익안대군(益安大君)이며 또한 먼저 죽었다. 다음 넷째는 방간(芳幹)인데 회안대군(懷安大君)이고, 다음 여섯째는 방연(芳衍)인데 과거에 올랐으나 벼슬하지 않았다. 딸로서 맏이 경신궁주(慶愼宮主)는 상당군(上黨君) 이저(李佇)에게 출가하였으니, 같은 이씨는 아니며, 다음 경선궁주(慶善宮主)는 청원군(靑原君) 심종(沈淙)에게 출가하였다.
다음 비 강씨(康氏)는 판삼사사(判三司事) 윤성(允成)의 딸이다. 현비(顯妃)로 책봉되었으며, 먼저 승하하여 시호를 신덕왕후(神德王后)라 하였다. 2남 1녀를 탄생하였다. 아들로서 맏이 방번(芳蕃)은 공순군(恭順君)으로 추증되었다. 다음 방석(芳碩)은 소도군(昭悼君)으로 추증되었다. 딸 경순궁주(慶順宮主)는 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에게 출가하였는데, 또한 같은 이씨는 아니며 모두 먼저 죽었다.
상왕의 배위(配位)는 김씨인데, 지금은 왕대비(王大妃)로 책봉되었고, 증직 문하시중(門下侍中) 천서(天瑞)의 딸이고 후사가 없다. 우리 중궁(中宮) 정비민씨(靜妃閔氏)는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시호 문도공(文度公)인 휘 제(霽)의 딸이다. 4남 4녀를 낳았는데, 맏이는 세자 제(禔)이고, 다음 우(祐)는 효령군(孝寧君)이며, 다음은 금상(今上) 충녕군(忠寧君)이요, 다음은 어리다. 맏딸 정순궁주(貞順宮主)는 청평군 이백강(李伯剛)에 출가하였다. 또한 같은 이씨는 아니다. 다음 경정궁주(慶貞宮主)는 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에게 출가하였고, 다음 경안궁주(慶安宮主)는 길천군(吉川君) 권규(權跬)에게 출가하였으며, 다음은 어리다. 진안군(鎭安君)은 찬성사(贊成事) 지연(池奫)의 딸에게 장가들어서 2남을 낳았는데, 맏이는 복근(福根)인데 봉녕군(奉寧君)이고, 다음은 덕근(德根)인데 원윤(元尹)이다. 익안군(益安君)은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최인두(崔仁㺶)의 딸에게 장가들어서 석근(石根)을 낳았는데 익평군(益平君)이다. 회안군(懷安君)은 문하찬성사 벼슬을 추증받은 민선(閔璿)의 딸에게 장가들어서 맹중(孟衆)을 낳았는데 의령군(義寧君)이다.
신이 역대로 천명(天命)받은 임금을 보니, 신령한 상서의 경사는 당시 사필(史筆)을 잡은 사람이 반드시 자세히 기록하고 특별히 쓴 것은 밝은 덕이 부합함을 밝히어 분에 넘게 나라를 얕보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간책에 빛나서 무궁하게 빛을 흘렸다. 지금 우리 조선이 일어날 때에는 천명을 받은 부험이 사방으로 모여들어 옛보다 빛났다.
이것은 비록 덕(德)에 인한 것이고, 경사할 것이 아니나, 하늘의 돌봄이 이 때문에 더욱 드러났다. 그리하여 마땅히 큰 덕이 천명을 받아, 이미 그 지위를 얻고 또 장수함이 마땅하다. 큰 기업이 우뚝하여 뽑히지 않으며, 큰 복이 내려서 다함이 없어 천지와 함께 장구하였던 것이다. 신은 못 쓸 재질(材質)로서 외람되이 사필을 잡았으니, 진실로 갖추어 기록하여 후세에 보이는 것이다. 하물며 이번에 외람되이 비명(碑銘)을 지으라는 명을 받았으니, 감히 뜻을 다하고 생각을 다해서, 성덕을 포장(鋪張)하여 밝은 빛을 드리우지 않으랴. 그러나 신 근(近)은 필력이 비졸하여 성대한 공덕을 발양하여 밝으신 성지(聖旨)에 보답하기가 부족하오나, 이것은 소라 껍질로써 강과 바다의 물을 측량하고, 붓끝으로 천지를 모사하려는 것과 같다. 어찌 능히 그 물가에나마 이를 것이며, 방불하게나마 엿볼 수 있겠는가. 삼가 보고 들은 공덕을 뽑아서 감히 손모아 절하고 머리 조아리며 명(銘)을 바친다. 명에 이르기를, 멀고 아득한 옛날에 양의(兩儀 천지)가 비로소 열렸다. 사람이 참여하여 셋으로 되었는데, 세워서 임금으로 삼았다. 이에 길게 하고 다스리게 하여 이에 덕 있는 이를 돌보았으니, 하늘이 직접 말한 것은 아니나 명수(命數)가 있었다. 우(禹)에게 현규(玄圭)를 주었고, 주(周)의 꿈은 점과 합치하였으니, 역대의 증거는 사책(史策)에서 볼 수 있다.
우리 조선은 처음부터 왕적(王跡)에 기초(基礎)가 있었다. 꿈에 신인(神人)이 금척(金尺)을 주었다. 자기(紫氣)가 공중에 가득했으며, 무지개가 햇빛에 엉겼었다. 상서가 잇달았으니, 하늘의 마음이 분명하였다. 고려 운수가 마치게 되어 전복(顚覆)을 스스로 취하였다. 임금은 어둡고 정승은 참혹하였다. 농삿달에 군사를 일으켜 대국과 틈을 얽었다. 나라가 이미 미약하여 위태하였다. 우리 군사가 의(義)로 돌리어 죄인을 이에 잡았다. 충성이 위에 알려지니, 황제 마음이 즐거웠었다. 윤음(綸音)을 잇달아 받아, 왕씨 종사를 다시 잇게 하였다. 도리어 혼약(昏弱)하여 천록(天祿)이 다 되었다. 역수(曆數)가 돌아가게 되므로, 여정(輿情)이 이에 박절하였다. 대업(大業)을 이루었으나, 저자 가게도 자리를 바꾸지 않았다. 고황(高皇)이 찬탄하여 말하기를, ‘너희가 나라를 두면서 백성에게 병화(兵禍)도 없이 천명을 순종했다.’ 하였다. 잇달아 국호를 내렸는데, 조선으로 복구(復舊)하게 하였다. 터를 살펴 도읍을 정하니, 한수(漢水) 북쪽이었다. 백범이 걸터앉고 용이 서린 듯, 왕기(王氣)가 쌓인 곳이었다. 궁실이 높직하고, 종묘가 날 듯하다. 공경히 조종(祖宗)에게 제사하고, 왕작(王爵)으로 높이었다. 인(仁)이 두터워 살리기를 좋아하니, 다스림이 성하며 화하기를 생각하였다. 온갖 제도가 갖추어지니, 만 가지 교화(敎化)가 흡족하였다. 신민(臣民)과 부로(父老)가 춤추고 노래하였다. “옛날에 우리가 전복되어 어육(魚肉)될 뻔하였는데, 지금은 우리 다 소생하여, 은택에 젖었도다. 밭갈고 우물 파서 부모를 섬기고 처자(妻子)를 기른다. 만년토록 수(壽)하시어 많은 복을 누리소서. 이에 정사에 싫증이 나서 맏이에게 전하였다. 맏이는 또 공 있는 분에게 사양하여 부자 형제 간에 계승하였도다. 밝고 밝은 우리 임금 기미를 밝히는 것이 촛불 같았다. 싸락눈이 엉기다가 햇볕만 보면 풀려지는 듯하였다. 화란(禍亂)을 두 번이나 평정하니, 그 경사가 더욱 도타왔다. 새 나라를 세우고, 사직을 단정한 것은 모두 우리 님의 공이었다. 대명을 사퇴하기 어렵고, 신기(神器)는 돌아가는 데가 있었다. 양궁(兩宮)을 받들어 공손함이 더욱 정성스러웠다. 효제(孝悌)가 신에 통하니, 황제의 돌보심이 더구나 우악(優渥)하였다. 총애하여 주는 것이 해마다 와서 산 같고 뫼 같았다. 사방이 편하고 먼 데나 가까운 데나 정숙(靜肅)하였다. 상(喪)을 만나 조심하며 애모(哀慕)하고 뛰며 굴렀다. 황제 듣고 놀라며 슬퍼하였다. 사신을 보내어 조곡(吊哭)하고, 대뢰(大牢)로 제사지냈다. 후한 부의(賻儀)와 칙서(勑書)로서 아름다운 시호를 포창(褒彰)하고, 휼전(恤典)을 갖추어 신칙하였다. 하늘에서 보우(保佑)하여 종시(終始) 변하지 않았다. 큰 복이 면면(綿綿)하여 자손이 천(千)이고 억(億)이어서 만년이 되도록 종사를 보전하리라. 높은 산이 날아가고 바닷 물은 말라도 종사는 길이길이 하늘과 함께 다함이 없다.” 하였다.
○ 변계량이 지은 비음기(碑陰記)에 “공손히 생각건대, 우리 태조는 지극한 덕과 많은 공으로써 대업을 처음 이룩하였다. 다스림에 날마다 부지런히 생각하다가, 이에 편하지 못함이 오래이므로, 선위(禪位)하고 오래 영양(榮養)을 누리기를 도모하였는데, 영락(永樂) 무자년 봄 정월에 또 편하지 못하였다. 우리 전하께서 지성으로 하늘에 빌고 수명(壽命)을 청하여 조금 나았다. 다섯 달을 지나 또 병이 발작하여 정침(正寢)에서 승하하였다. 양주 검암산(儉巖山)에다가 예장(禮葬)하였는데, 서울과는 20리쯤 되는 거리이다. 산 내맥(來脈)은 장백산(長白山)을 뿌리로 하여 2천여 리를 뻗쳐 내렸다. 철령(鐵嶺)에 와서 꺾어져 서쪽으로 다시 수백 리를 와서 우뚝한 것이 백운산(白雲山)이다. 또 남쪽으로 백여 리를 뻗어 와서, 북으로 모이면서 남으로 향하였으니 곧 검암산이다. 능(陵)은 계좌정향(癸坐丁向)이며, 능에서 바로 병방(丙方)인 4백 21척 지점에 비(碑)를 세워서, 우리 태조 공덕을 기록하였는데, 훌륭한 것을 기록하여 이미 상세하였다. 전하께서는 또 개국공신(開國功臣)의 성명을 비 뒷면에 새기고, 정사좌명 공신(定社佐命功臣)의 또한 시기에 응해, 계책을 정해서 우리 태조의 창업 수통(創業垂統)하신 사업을 넓힌 자들도 아울러 새겨서, 민멸(泯滅)하지 않게 함이 마땅하다 하고, 신 계량에게 기문하도록 명하였다. 신이 그윽히 생각하니, 하늘이 큰 덕 있는 이를 낳아서, 이 백성을 주장하는 데에는 반드시 팔다리같은 보필하는 신하가 전후(前後)에서 분주하여서, 앞에 개발하고 뒤에는 지킨, 다음이라야 큰 공업이 성취하고, 큰 사업이 영구하였다. 우리 태조께서 일어날 때에도 문무 대신이 천명을 밝게 알고 능히 좌우에서 계적(啓適)하였다. 무인년에 정사(定社)한 것과 경진년에 좌명(佐命)함 같은 것은, 또한 훌륭한 친척과 좋은 보필이 서로 더불어 보익(輔翼)하여, 그 공을 성취시켰고 큰 복을 영구하게 하였다. 이것은 마땅히 비석에다가 명을 새겨서 장래에 빛나게 할 것이며, 우리 전하께서 조상의 공업(功業)을 드날리고, 공신을 표창한 아름다움도 또한 아울러 전하여서, 영원토록 함이 마땅하다.” 하였다.

현릉(顯陵) 본조 문종(文宗)의 능인데, 건원릉 동쪽 언덕에 있다. 『신증』 지금 임금 8년에 현덕왕후(顯德王后)를 부장(祔葬)하였다. 광릉(光陵) 본조 세조(世祖)의 능이다. 정희왕후(貞熹王后)를 부장하였다. 고을 동쪽 41리 지점인 주엽산(注葉山) 직동(直洞)의 남쪽이다. 서울과는 60리쯤 되는 거리이다. 회묘(懷墓) 주 남쪽 57리 지점에 있다. 서울에서 10리 되는 거리이다. 유량묘(柳亮墓) 주 동쪽 80리 지점이다. 조운흘묘(趙云仡墓) 아차산에 있다. 남재묘(南在墓) 주 남쪽 40리 지점에 있다. 정갑손묘(鄭甲孫墓) 주 동쪽 44리 지점에 있다. 윤형묘(尹炯墓) 주 북쪽 5리 지점에 있다. 신숙주묘(申叔舟墓) 송산리(松山里)에 있다. 이직묘(李稷墓) 주 서쪽 40리 지점에 있다. 윤자운묘(尹子雲墓) 주 서쪽 내죽리(乃竹里)에 있다. 조말생묘(趙末生墓) 주 동쪽 50리 지점에 있다. 영응대군묘(永膺大君墓) 주 동쪽 47리 지점에 있다. 홍응묘(洪應墓) 주 동쪽 63리 지점에 있다. 『신증』 연산군묘(燕山君墓) 주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박원종묘(朴元宗墓) 주 동쪽 60리 지점에 있다. 성희안묘(成希顔墓) 주 서쪽 35리 지점에 있다. 송질묘(宋軼墓) 주 북쪽 30리 지점에 있다. 신용개묘(申用漑墓) 주 동쪽 40리 지점에 있다. 유순묘(柳洵墓) 주 동쪽 40리 지점에 있다. 남곤묘(南袞墓) 주 북쪽 30리 지점에 있다.
【고적】 사천폐현(沙川廢縣) 주 북쪽 30리 지점에 있다. 본래 고구려 내을매현(內乙買縣)인데, 내이미(內尒米)라 하기도 한다. 신라에서 사천(沙川)이라 고쳐서 견성군(堅城郡) 속현으로 만들었는데, 고려 현종(顯宗) 9년에 양주에 예속시켰고, 본조에서도 그대로 하였다. 대모산성(大母山城) 주 서쪽 5리 지점에 있는데 석축이다. 둘레는 9백 6척이고, 높이는 5척이다. 수철성(水鐵城) 주 북쪽 51리 지점에 있다. 둘레는 3백 57척이고, 높이는 14척이며 적성(積城)과 서로 마주 있다. 해촌처(海村處) 주 서쪽 35리 지점에 있다. 송산처(松山處) 주 동쪽 15리 지점에 있다.
【명환】 본조 권맹손(權孟孫) 부사(府使)가 되었다.
【인물】 고려 송저(宋詝) 견주(見州) 사람이며 젊어서부터 총명하였다. 과거에 올라 명종조(明宗朝)에 어사 중승이 되었다. 정중부(鄭仲夫)의 집 종이 법을 범했으므로 잡아다 다스렸는데, 그 때문에 파직되었으나 곧 우간의대부로 제수받았다. 서북 병마사(西北兵馬使)가 되어서는 무신(武臣)에게 미움을 받아, 거제 현령(巨濟縣令)으로 좌천되었다. 식견있는 자가 모두 말하기를, “저가 외방으로 나간 뒤에는 백성을 구제하고, 폐단을 개혁하자는 말이 틀림이 없었다.” 하였다. 뒤에 판예빈성사(判禮賓省事)로 치사(致仕)하였다. 조운흘(趙云仡) 풍양현(豐壤縣) 사람으로 공민왕 때에 과거에 올랐다. 벼슬이 여러 번 옮겨져서 전법 총랑(典法摠郞)으로서 사직하고, 상주(尙州) 노음산(露陰山) 밑에 살았다. 신우(辛禑) 때에 기용되어 좌간의대부로 제수되었고,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로 전보(轉補)되었다가, 또 물러나서 광주(廣州) 고원(古垣) 강마을에 살았다. 판교(板橋)ㆍ사평(沙平) 두 원(院)을 중수하고 원 주인이라 자칭하였다. 해어진 옷과 짚신으로 심부름꾼과 함께 노역(勞役)하니, 길가는 자들이 그가 지난날에 높은 관직에 있었다는 것을 몰랐다. 공양왕(恭讓王) 때에 계림 부윤(鷄林府尹)이 되었고, 본조에 들어와서는 강릉대도호부사(江陵大都護府使)가 되었으나, 곧 병으로써 사직하고 광주 별장에 돌아갔다. 또 검교 정당문학(檢校政堂文學)에 배명(拜命)되었다. 검교는 예에 따라 녹을 받는 것이나, 운흘은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사람됨이 뜻 세우기를 기고(奇古)히 하여, 기이하고 높아서 뇌락하고 거룩하였다. 마음 내키는 대로 바로 행동하며, 시세에 따르기를 즐기지 않았다. 죽을 무렵에 자신의 묘지(墓誌)를 지었는데, “조운흘은 본래 풍양 사람이다. 고려 태조의 신하였던 평장사(平章事) 조맹(趙孟)의 30대 손이고, 공민왕 때 흥안군(興安君) 이인복(李仁復)의 문하에 과거하여 서울과 지방 관직을 역임하였다. 다섯 주의 원을 겪었고, 다섯 도 관찰사를 지냈다. 비록 큰 성적(成績)은 없었으나, 또한 비루한 짓도 없었다. 나이 73세가 되어 광주 고원성(古垣城)에서 병들어 죽었고 후사(後嗣)는 없다. 일월(日月)을 주기(珠璣 폐역)으로 삼고, 맑은 바람 밝은 달을 제물로 삼아서, 옛 양주 아차산 남쪽 마가야(摩訶耶)에 장사하였다. 공자(孔子)의 행단(杏壇) 위에나, 석가(釋迦)의 쌍수(雙樹) 밑에인들 고금으로 성현이라고 어찌 홀로 있는 자가 있으리요. 아, 인생사(人生事) 이것으로 마쳤다.” 하였다.
본조 조익정(趙益貞) 과거에 올랐고 익대공신(翊戴功臣)에 참여하였다. 벼슬이 공조 참판에 이르렀고, 한평군(漢平君)으로 봉함을 받았다.
【효자】 본조 최효손(崔孝孫) 부모가 함께 죽자, 죽을 때까지 무덤을 지켰다. 성종(成宗) 21년에 이 일이 알려져서 정려(旌閭)하였다.
『신증』 윤금(閏今) 아버지가 밤에 범에게 물려 갔다. 윤금은 용기를 내어 범을 치고 아버지의 영장을 빼앗았다. 지금 임금 7년에 정려하였다.
【제영】 교원우족맥장추(郊原雨足麥將秋)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서울 산하(山河) 중에서 몇째 주인가. 들녘에 비 흡족하니 보리 익으려 한다. 못을 보면 능히 정사하는 것을 알 수 있고, 들에 가서 머리 식히며 다시 계획한다. 부임(赴任)하는 누가 백학(白鶴)을 탔나. 다정한 객 청루(靑樓)를 꿈꾼다. 지명은 같아도 풍류는 다른데, 시름 속에 공연히 꾀꼬리만 운다.” 하였다. 운간계견무릉원(雲間鷄犬武陵源) 이인로(李仁老)의 풍양현 시에, “봉우리 밑 인가(人家)는 양삭(陽朔) 경계와 같고, 구름 속에 개ㆍ닭 소리는 무릉도원인가. 사군(使君)이 노란 소 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보리 이삭 일렁이는 것을 보기 좋아한다.” 하였다. 산연화악중(山連華岳衆) 권우(權遇)의 시에, “나귀를 타니 야취(野趣)가 많아, 천천히 저녁 빛 속에 걷는다. 역로(驛路)에는 모래와 먼지가 어둡고, 고을 성에는 수목이 울창(鬱蒼)하다. 산은 화악과 연이어서 많고, 물은 한수에 들어가서 길다. 이곳이 뽕나무 뿌리에 알맞아서, 칠경 초당(草堂) 짓기로 기약한다.” 하였다. 운외종성욕석양(雲外鐘聲欲夕陽) 이원(李原)의 사천현(沙川縣) 시에, “시냇가 풀 빛 아침비와 연했고, 구름 밖 종소리는 해질 무렵이다. 길손이 여가 없음을 스스로 웃는다. 내 말만 공연히 병들게 한다.”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 군(郡)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영아】 수어중영(守禦中營) 인조조(仁祖朝)에 두었다. ○ 중영장(中營將)은 본목사(本牧使)가 겸하였다. ○ 속읍(屬邑)으로는 양주(楊州)ㆍ양근(楊根)ㆍ가평(加平)ㆍ포천(抱川)ㆍ영평(永平)ㆍ지평(砥平) 등이다.
【성지】 양진성(楊津城) 아차산(峩嵯山)의 동쪽 언덕 광진(廣津)의 위에 있으며 한강수에 접 해 있는데 광주(廣州) 평고성(坪古城)과 더불어 한강을 건너서 마주 있다.
○ 백제 시조(始祖) 14년에 위례성(慰禮城)에서 천도하여 한산(漢山)에 성을 쌓고 한강 서북을 한성민(漢城民)으로 나누었다. 《여지승람고적(輿地勝覽古蹟)》에 이르기를, “장한성(長漢城)은 한강의 윗쪽에 있는데 신라가 중진(重鎭)을 두었으나 후에 고구려가 점령하게 되었으니 신라 사람들이 군대를 일으켜 다시 찾았다 한다.”
대모성(大母城) 서쪽으로 50리에 있으며 둘레는 9백 6척이다. 수철성(水鐵城) 북쪽으로 50리에 있으며 둘레는 3백 5십 7척이고 적성(積城)과 수철성은 서로 맞은편에 있다. 중흥동고성(重興洞古城) 북한산성 안에 있으며 산영루(山映樓)의 좌우편에 유지(遺址)가 있다. 백제 개루왕(盖婁王) 5년에 북한산성을 쌓았다는 말은 옳지 않은 것이다. 고려 우왕(禑王) 14년에 최영(崔瑩)에게 명하여 한양의 중흥산성을 수리하게 한 것은 장차 왜적(倭敵)을 피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성의 둘레는 9천 5백 17척인데 지금은 북한산성 안에 들어간다.
○ 이 성은 백제 때에 시작하였으나 백제의 도성(都城)은 아니다.
아차산고성(峩嵯山古城) 산의 정상(頂上)에 유지(遺址)가 남아 있다. 풍양고성(豐壤古城) 고현(古縣)이 서쪽으로 1리이다. 검암산고루(儉巖山古壘) 산의 서쪽 봉우리 두 곳에 있으며, 선조(宣朝) 임진(壬辰)년에 의병장(義兵將) 고언백(高彦伯)이 쌓은 것이다.
【궁실】 풍양행궁(豐壤行宮) 풍양의 옛현 동쪽에 있으며 우리 태조(太祖)ㆍ태종(太宗)이 이곳에서 주필(駐蹕)하셨다. 지금도 유지가 있다. 영종(英宗) 31년 2월에 풍양 구기(舊基)에 각(閣)을 건축하고 태조대왕이 친히 글을 써서 비(碑)를 세웠으니 상왕(上王) 때의 구궐(舊闕)에 유지가 12자 남아 있다.
【진전】 봉선전(奉先殿) 광능(光陵) 국내(局內)에 있으며 세조(世祖) 어진(御眞)을 봉안하였는데 임진란 때에 강화로 옮겨 봉안하였다. 또다시 묘향산 보현사(普賢寺) 영변(寧邊)으로 옮겨 봉안하였다가 또다시 개성(開城)에 봉안하였다가 다시 경도(京都)의 영희전(永禧殿) 때문에 봉전을 폐했다.
【역참】 구곡역(仇谷驛) 동남쪽으로 90리에 있다.
【방면】 고주내(古州內) 동쪽으로 처음이 10리 마지막이 25리이다. 주내(州內) 곧 읍내(邑內)이다. 어등산(於等山) 동쪽으로 처음이 10리, 마지막이 30리이다. 별비곡(別非谷) 동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마지막이 50리이다. 진대(榛代) 동쪽으로 처음이 50리, 마지막이 70리이다. 진관(眞官) 동남쪽으로 처음이 40리, 마지막이 60리이다. 미곡(尾谷) 동남쪽으로 처음이 60리, 마지막이 80리이다. 상도(上道) 동남쪽으로 처음이 70리, 마지막이 백 리이다. 하도(下道) 동남쪽으로 처음이 80리, 마지막이 백 리이다. 둔야(屯夜) 처음이 15리, 마지막이 30리이다. 귀지(龜旨) 동남쪽으로 처음이 40리, 마지막이 60리이다. 망우리(忘憂里) 동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마지막이 60리이다. 해등(海等) 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마지막이 50리이다. 광석(廣石) 처음이 25리, 마지막이 50리이다. 천천(泉川) 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마지막이 20리이다. 현내(縣內) 동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마지막이 45리이다. 산내(山內) 동북쪽으로 처음이 50리, 마지막이 60리이다. 영근(嶺斤) 북쪽으로 처음이 60리, 마지막이 80리이다. 회암(檜巖) 동쪽으로 처음이 20리, 마지막이 30리이다. 접동(接洞) 동쪽으로 처음이 40리, 마지막이 50리이다. 건천(乾川) 동남쪽으로 처음이 40리, 마지막이 60리이다. 금촌(金村) 동남쪽으로 처음이 60리, 마지막이 70리이다. 시북곡(柴北谷) 동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마지막이 30리이다. 미음(美音) 동남쪽으로 처음이 50리, 마지막이 70리이다. 고양주(古陽州) 동남쪽으로 처음이 60리, 마지막이 80리이다. 노원(蘆原) 남쪽으로 처음이 40리, 마지막이 50리이다. 백석(白石)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마지막이 40리이다. 석적(石積) 서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마지막이 40리이다. 신혈(神穴) 서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마지막이 60리이다. 진답(陳畓) 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마지막이 40리이다. 이담(伊淡) 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마지막이 50리이다. 청송(靑松) 북쪽으로 처음이 50리, 마지막이 80리이다.
【진도】 미음진(美音津) 동남쪽으로 70리에 있으며 광주(廣州)와 통한다. 광진(廣津) 동남쪽으로 75리에 있다. 광주(廣州)에 보라. 대탄진(大灘津) 대탄강에 있으며 연천(漣川)과 통하는데 겨울에는 다리를 놓는다.
【목장】 전곶장(箭串場) 아차산(峩嵯山)의 서쪽에 있으며, 서쪽으로 경도(京都)까지의 거리가 15리이다. 국초(國初)에 설치했는데 명종(明宗) 10년에 사복제조(司僕提調) 상진건(尙震建)이 청설(請設)하여 석책(石柵)의 둘레가 30리이며 감목관(監牧官)이 있다. 수능(綏陵)을 옮겨 봉안하게 되니 목장을 철폐(撤廢)하였다.
【능침】 정능 남쪽 50리의 사아리(沙阿里)이니 경도(京都) 혜화문(惠化門) 밖이다. 태조(太祖)의 비(妃)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의 능인데 기신(忌辰)은 8월 13일이다. 처음에는 능이 도성 안의 황화방(皇華坊)에 있었으나 태종 9년에 이곳으로 옮기고 묘(墓)로 강등시켰는데 현종 10년에 다시 능으로 복귀하였다. ○ 영(令)ㆍ참봉(參奉)이 각 한 사람이다. 사능(思陵) 군장리(群場里)에 있으며 서울과의 거리는 45리이다. 단종(端宗) 비(妃) 정순왕후(定順王后) 송(宋)씨의 능인데 기일은 6월 4일 이다.
숙종 24년에 다시 능으로 회복하였다. ○ 영(令)ㆍ참봉 각 한 사람이다.
온릉(溫陵) 장흥면(長興面) 서쪽에 있으며 산수가 동(洞)을 둘렀으며 서울과의 거리는 50리이다. 중종비(中宗妃) 단경왕후(端敬王后) 신(愼)씨의 능인데 기일은 12월 7일이다. 영종 16년에 다시 능으로 회복하였다. ○ 영ㆍ참봉이 각 한 사람이다. 태능(泰陵) 노원면(蘆原面)에 있는데 중종비(中宗妃) 문정왕후(文定王后) 윤(尹)씨의 능으로 기일은 4월 7일이다. ○ 직장ㆍ참봉이 한 사람씩이다. 강릉(康陵) 태릉(泰陵) 동쪽 언덕에 있는데 명종(明宗) 대왕의 능이다. 기일은 6월 28일이다. 왕후 심(沈)씨도 합장하였으며 기일은 정월 2일이다. ○ 별검(別檢)ㆍ참봉이 한 사람씩이다. 목릉(穆陵) 건원릉(健元陵) 두 번째 언덕에 있는데 선조대왕 능이며, 기일은 2월 1일이다.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도 좌측 언덕에 합장하였으며 기일은 6월 27일이다. 인무왕후 김씨도 좌측 언덕에 합장하였는데 기일(忌日)은 6월 28일이다. ○ 별첨ㆍ참봉이 한 사람씩이다. 휘릉(徽陵) 건원릉 서쪽 언덕에 있으며 인조비 장열왕후(莊烈王后) 조(趙)씨의 능인데 기일은 8월 26일이다. ○ 별검ㆍ참봉이 한 사람씩이다. 숭릉(崇陵) 건원릉 서남쪽 다른 언덕에 있는데 현종대왕의 능이며 기일은 8월 16일이다. 명성(明聖) 왕후 김씨도 합장했는데 기일은 12월 5일이다. ○ 별검과 참봉이 한 사람씩이다. 의릉(懿陵) 천장산(天藏山)에 있으며 서울과의 거리는 15리이다. 경종(景宗) 대왕 능이며 기일은 8월 25일이다. 선의(宣懿) 왕후 어(魚)씨도 합장했는데 기일은 9월 29일이다. ○ 영과 참봉이 한 사람씩이다. 혜릉(惠陵) 숭릉의 좌측 언덕에 있으며 경종비(景宗妃) 단의왕후(端懿王后) 심씨의 능으로 기일은 2월 7일이다. ○ 영과 참봉이 한 사람씩이다. 원릉(元陵) 건원릉의 우측 언덕에 있는데 영종 대왕 능이며 기일은 3월 5일이다. 정순(貞純) 왕후 김씨도 합장했는데 기일은 정월 12일이다. ○ 별검과 참봉이 한 사람씩이다. 수릉(綏陵) 건원릉 좌측 언덕에 있으며 익종(翼宗) 대왕 능인데 처음에는 천장산(天藏山)에 장례했는데 헌종 병오년에 용마봉(龍馬峯)으로 옮겼다가 철종 을묘년에 이곳으로 옮겼으며, 기일은 5월 6일이다. ○ 영과 참봉이 한 사람씩이다. 경릉(景陵) 건원릉의 서쪽 언덕에 있으며 헌종대왕 능이니 기일은 6월 6일이다. 효현(孝顯) 왕후 김씨도 합장하였는데 기일은 8월 25일이다. ○ 영과 참봉이 한 사람씩이다. 순강원(順康園) 풍양(豐壤)에 있으며 인빈(仁嬪) 김씨의 원이니 기일은 10월 29일이다. ○ 수봉관(守奉官)이 두 사람이다. 소녕원(昭寧園) 고령산(高嶺山)에 있으며 숙빈(淑嬪)의 원이니 기일은 3월 9일이다. ○ 수봉관이 두 사람이다. 수길원(嫂吉園) 소녕원 국내(局內)에 있으며 정빈(靖嬪) 이씨의 원이니 기일은 11월 16일이다. ○ 소녕원 관이 겸해서 보살핀다. 휘경원(徽慶園) 달마동(達馬洞)에 있는데 처음에는 배봉(拜峯)에 장례했었으나 철종 계해년에 다시 이곳으로 옮겼다. 수빈(綏嬪) 박씨의 원이니 기일은 12월 26일이다. ○ 영과 참봉이 한 사람씩이다. 덕흥대원군 묘(德興大院君墓) 수락산(水落山)에 있으며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 정(鄭)씨도 합장했으니 곧 선조대왕 황고(皇考)ㆍ황비(皇妃)의 묘이다. 회묘(懷墓) 천장산(天藏山) 남쪽 지맥에 있으며 성종 폐비(成宗廢妃) 윤(尹)씨의 묘이니 연산주의 어머니이다. 연산주가 즉위 때에 회릉(懷陵)으로 올려 불렀으나 중종 원년에 묘로 강등했다. 연산주 묘(燕山主墓) 해등면(海等面)에 있는데 처음에는 강화에 장례했으나 중종 7년에 왕자의 예로써 해등촌(海等村)으로 옮겼다. 신씨 묘(愼氏墓) 회묘(懷墓)의 국내(局內)에 있으니 곧 연산주 폐비의 묘이다. 성묘(成墓) 군장리(群場里)에 있으며 선조 후궁 공빈(恭嬪) 김씨의 묘이니 광해주의 어머니이다. 광해 계축년에 성릉(成陵)이라 추호했으나 인조 원년에 묘로 강등하였다. 광해주 묘(光海主墓) 군장리에 있으니 인조 21년 제주(濟州)에서 옮겼다.
【사원】 도봉서원(道峯書院) 선조 계유년에 건축하여 같은 해에 사액을 내렸다. 영종 을미년에 어필로 액을 달았다. 조광조(趙光祖)ㆍ송시열(宋時烈) 모두 경도(京都) 문묘(文廟)에 보인다. 석실서원(石室書院) 효종 병신년에 건축하여 현종 계묘년에 사액하였다. 김상용(金尙容) 강화에 보인다. 김상헌(金尙憲) 경도 종묘에 보인다. 김수항(金壽恒) 자는 구지(久之)이고 호는 문곡(文谷)이니 상헌(尙憲)의 손자이다. 숙종 기사년에 화를 당했는데 벼슬은 영의정 전문형,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민정중(閔鼎重) 자는 대수(大受) 호는 노봉(老峯)이며 여흥(驪興) 사람이니, 숙종 임신년에 귀양가서 죽었다. 벼슬은 좌의정이었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이단상(李端相) 자는 유능(幼能) 호는 정관재(靜觀齋)요 연안(延安) 사람이다. 벼슬은 부제학에 이르고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 청절사(淸節祠) 숙종 병인년에 건축해서 신사년에 사액하였다. 김시습(金時習)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이니 강릉(江陵) 사람이다.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청간(淸簡)이다.
○ 정절사(旌節祠) 숙종 임진년 건축하고 정종 갑진년에 사액하였다. 남을진(南乙珍) 의령(宜寧)사람이며 벼슬은 고려 때 참지문하부사(參知門下府使)였고, 본조가 개국하자 감악산(紺岳山) 석굴에 들어가 숨어서 나오지 아니하니, 태조가 그의 거소를 찾아서 사천백(沙川伯)을 봉하였다. 조견(趙狷) 처음 이름은 윤(胤)이고 자는 거경(巨卿)인데, 평양 사람이다. 본조에서 여러 번 부르니 도망가서 이름을 견(狷)으로 바꾸었다. 호는 송산(松山)인데 본조에서 그의 공훈을 기록하여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에 봉했으나 굴하지 아니하였다. 시호는 평간(平簡)이다.
【고읍】 견주(見州) 동쪽으로 15리에 있는데 본래는 백제 매성군(買省郡)인데 마홀(馬忽)이라고도 한다. 신라 경덕왕(景德王) 16년에 내소군(來蘇郡)으로 고쳐서 두 개의 현을 관할하였다. 중성(重城), 파평(坡平)은 한주(漢州)에 예속되었다. 고려 정종(定宗) 2년에 다시 현주군(縣州郡)으로 하였는데 창화현(昌化縣)이라고도 한다. 현종(顯宗) 9년에 양주에 예속시키고 후에 감무를 두었는데 본조 태조 6년에 양주에서 치소(治所)를 이곳 현주로 옮겼다가 뒤에 지금의 치소로 옮겼다. ○ 고려 문종(文宗) 13년에 상서호부(尙書戶部)에서 아뢰기를 양주 경계안의 견주에 읍을 둔 지 백년이 되었으니 사(使)를 파견하여 민전(民田)을 균정(均定)해 줄 것을 다섯 번이나 조정에 요청하였다. ○ 지금 고주내(古州內)이다.
풍양(豐壤) 동남쪽으로 45리에 있는데 본래 백제 골의노(骨衣奴)이다. 노(奴)는 내(內)라고도 한다. 경덕왕(景德王) 16년에 황양(荒壤)으로 고쳐서 한양군(漢陽郡)으로 하여 현(縣)을 관할하였다. 고려 태조 23년에 풍양으로 고치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해서 후에 포주(抱州)로 하였다가 본조 세종 원년에 다시 풍양에 속하였다.


[주D-001]구오(九五) : 《주역》괘에 구(九)와 오(五)는 영위(陽位)이므로 임금에 비하였다.

 

 

시대
조선
연대
1891년(고종28년)
유형/재질
비문 / 돌
문화재지정
시도지정문화재 - 경기도 기념물 제62호
크기
높이 169cm, 너비 68cm, 두께 25cm
출토지
경기도 양평군 강하면 동오리 157번지
소재지
(한국)경기도박물관-경기도 용인시 기흥읍 상갈리 85
서체
해서(楷書)
찬자/서자/각자
  신석우(申錫愚) / 김홍집(金弘集) / 미상
 
 
1891( 28) () () , () () .
(, 1346~1433) , (), (). 20(1371) . 9(1409) , . 6(1424) . . 1981 62 .
, 1980 .
 
() , 1982,(),
(), 1981, 1

 

 

유관묘갈(柳祼墓碣)

 

위치 : 해제 :이 비는 1726년(영조 2년) 경기도 양주에 건립된 유관묘갈(柳祼墓碣)로 최방언(崔邦彦)이 비문을 지었고, 윤봉오(尹鳳五)가 글씨를 썼다. 유관(柳祼 : 1641~1693년)의 본관은 문화이고, 자는 장우(將于)이다. 이름인 관(祼)은 선조를 배향한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어버이를 위하여 힘써 학문에 종사하여 선비의 가업을 이으려 하였지만 과거에 오랫동안 합격하지 못하여 결국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만 힘을 쏟았다. 부모님의 나이 70세가 되었을 때 유관의 나이도 50세였는데, 초나라의 효자인 노래자(老萊子)처럼 옷을 예쁘게 차려입고 춤을 추면서 어린이 같이 재롱을 부릴 정도로 효성이 극진하였다. 1693년(숙종 19년)에 전염병에 걸려 부모보다 일찍 생을 마쳤다. 현재 탁본은 양주문화원에 소장되어 있으며, 탁본된 연대는 1980년대로 추정된다.

 

公諱祼字將于柳爲文化大姓高麗開國功臣車達其鼻祖也其後有諱」

公權政堂文學諱璥修文殿學士入 我朝領議政諱舅祩商議中樞諱」
原之俱以勳德爲世名臣再傳而至諱自湄以文科殿中御史官 端宗」

  時入首陽山以終其身後以子貴 贈賛成生子輊爲 成廟所究重苧」
佐理功位左賛成於公爲六代祖高祖諱榮曾祖諱重蕃皆不仕祖諱澍」

司直善文辭有氣節見於士友間時光海昏亂姦臣主讐母論公留率鄕」
人牨章呌閽言甚剴切論者多之寒水權公銘其墓考諱軒哲以司直公」

 命出爲族父諱航後同是中樞公後孫也數世有諱仁善監役與季氏大」
司諫智善有至行以孝友旌閭不育以大諫公第二子諱堞子之是生諱」

 繼緒寔公曾大父妣全州李氏縣監倬之女 定宗大王之後藝文館奉」
敎諱元卿之玄孫也公生於 崇禎辛巳十一月十五日生而端秀絻學」 

 語便知愛親敬長之道未齕奉先之誠出知隨長者周施如成人伯父參」
奉公奇愛之命名曰祼盖取其享先之義也文敎之學公不以愛巳而怠」

 於敬事之禮必早起盥櫛伺候於寢門之外七歲嘗謁姑母姑母愛之以」
衣材投諸懷中公不欲受而難於辭却出置床上而去人皆聞而異之及」

 長委禽於臥翁李公之門臥翁嚴重鮮許可一見期以遠到如張戩之於」
呂大防也公聰頴絶倫書過目輙成誦作文操筆立成同業者皆自以爲」

不及爲親力治愽士家業而戹於公車久不售公始知時命之不偶即謝」
塲屋而專意於志物之養奉二尊湏曳不去側油油翼翼未嘗或生於顏」
色甘毳之供溫淸之湏細大必親躬服其勞餘三十年如一日父母憂其衰晚欲以人代之公示其筋力之可甚而終不肯」
公嚴君與伯氏事母夫人誠孝䔍至兄弟愛敬亦非人所及則公之孝友不惟其天資之美抑亦家法之傳有自來也有一宗」
人無嗣欲以公弟禬請於公嚴君而子之公不忍分離泣諫而不可則至欲相擕而逃之每當去留之際必出涕疚懷至老又」
衰公有孀妹在遠歲必徃見見輙資恤一日公擕妹歸觀時値冽寒公憂之脫其襪以與其不恤巳而急同氣類如此妹臨歿」
泣語公曰倘使吾夫歸骨先山吾死且瞑目公廼極力營治千里護柩以歸其祖塋而仍與妹合窆爲置墓戶而守之又婚嫁」
其子女如巳出從弟袷尸祀本宗而家甚窮空不自存活隨事振業不計有無而深自晦匿唯恐人之或知而稱善也仲妹壻」
某感公推誠欵遇以藏于心及公卒操文而哭之曰昧公之義慢公之仁盖追悟心服之語也於丘墓事尤致其誠不問內外」
親盡與否雖有主者必躬自調書竭其心力於表碣及諸石役以至修治頹圯剏置墓田者甚多則離古之賢孝君子不過也」
伯父爲著堅城修墓錄以美之伯叔父母喪自初至終身任之至罄其資而不吝於弟妹群從眷愛甚摯其醮子遣女一視正」
事必稱情乃已推以及於族姻隣黨周貧振乏亦無所愛其力人皆稱頌無二口然公未嘗有自多之色父母享年皆至常珍」
公亦杖家之年以舞彩嬰戱宛一老萊子也生朝或令節必置酒而宴之諸親咸集長老畢至稱觴上壽極其歡樂歲以爲常」
凡有父母者無不艶慕之癸酉公病瘟請父母出避疾革口不能言手指寓所泣涕流漣遂不起乃五月十九日也公爲父母」
嘗卜壽藏於抱川大諫公墓下故是年九月十二日葬公于壽兆㫄若于步以地之不宜後二十三年乙未九月二十一日遷」
厝于楊州治北石積面丁向之原亦殿中公塋側也配李氏 世宗大王之後戶曹判書 贈領議政坡谷先生諱誠中之曾」
孫也父臥翁公諱命蓍官童蒙敎官學於觀雪許公而學識卓然爲一世之賢人尤菴宋先生亦嘗薦其才行於 孝廟延攬」
之日其公議可見也孺人嚴整峻潔頗有女士風臥翁公愛而稱之曰此兒若非女子子必將繩我前烈及歸公奉巾櫛惟謹」
無藝言無惰容移所以事父母者事舅姑舅姑曰善事我妯娌有事輒代勞老而不少懈奉烝嘗尤勤肅至於宗家有祀亦必」
早自齊潔凡洗滌烹餁之事無不以身親之待人無間親踈御下曲施恩意皆愛慕忻忻如也公歿二章尙在堂銜恤抑情惟」
以慰悅爲心視其飮食時其寒燠一如公在時而殆有加焉及其相繼不幸喪葬祭奠雖甚衰薾躬自當之無少餘憾戊寅夏」
子女患痘而憂悴甚以七月二十四日卒生後公二歲卒後公五歲其年十月六日鮮葬于公初塋之少東及公之移扞仍與」
公合封生四男三女男長夭次世茂次世華次世萬女長夭次適徐命春次適崔興柱世茂聚坡平尹商耆女五男長深五女」
長爲尹淨妻次爲李長郁妻四男三女皆夭世華娶宜寧南緯女一男夭後聚陽州許曼女五女三夭餘幼以從弟世臣第二」
子潜爲後徐命春早歿以兄子肯修爲後世萬取完山李珽女四女俱夭崔興柱生三男俱夭三女二夭餘幼深娶安東權頻」
女三男二夭四女三夭尹二男二女李一女公好學學於伯父早知有古人爲己之學及拜臥翁益聞一時儒先長者之論旣」
又聞尤翁學有淵源亟欲徃從之難於遠離親傍不果行間嘗於先生北竄之日乍候於路左而何之以償其心哉歿身以爲」
恨公之䔍志力學如此而不及一試於世又無年以終使人不得見其德業之所成就是可哀也嗚呼以公孝友之行仁厚之」
德固宜享有遐福而非惟不擭終養飮恨泉壤又從而芬華不及殤殄榮懷者抑何故歟噫公之子與孫皆世濟其美將大其」
門則天之所以報施者其在玆乎嗣子世茂有文行與余善狀其行來謁銘甚勤余旣以老且不文辭而請之愈堅余雖不及」
識公聞公之風而高仰則久矣今於筆硏之役義不可以終讓乃敢序其事而銘之銘曰 東安華胄孝友家聲 公乃承之」
克擅令名 志養若曾娛戱如嬰 致慤先廟殫心祖塋 春暉未報慟結㝠㝠 公有賢媲濬派閨英 左側愉愉一循範」
型 中罹疚㷀益薦其誠 天錫祚胤寔公典刑 于門容盖王槐蔭庭 莫謂躬嗇惟後必蠃 有如不信訂此刻銘」
保功將軍行 世子翊衛司衛率 尹鳳五書」

崇禎甲申後八十三年丙午九月 日 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兼五衛將崔邦彥撰」

 

유관묘갈

공의 이름은 관이요 자는 장우이다. 유씨는 본관이 문화로서 우리나라의 대성이다. 고려 개국공신 차달을 그 비조로 한다. 그 후에 공권이 있었는데 정당문학을 지냈으며, 경은 수문전 학사를 지냈다. 아조에 들어와서 영의정을 지낸 만수와 상의 중추를 지낸 원지는 훈덕을 갖추어 세상에서 명신이라 일컬었다. 두 세대를 지나 자미가 있었으니 문과에 급제하고 전중어사관을 지냈으며, 단종 때 수양산에 들어가 그 일생을 마쳤다. 후에 아들이 높은 벼슬을 하자 찬성으로 추증되었다. 아들 지를 낳았는데 성종께서 왕위에 오르는데 공이 있어 좌리공신으로 책훈되고 벼슬은 좌찬성에 올랐으니 이분이 공에게는 6대조가 된다. 고조할아버지의 이름은 영이며 증조할아버지의 이름은 중번인데 모두 벼슬을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이름은 주인데 사직을 지냈으며 문장을 잘 지었고 기개와 절조가 있어 친구들 사이에서 이름이 나 있었다. 광해조의 혼세를 만나 세상이 어지럽자 간신들이 어머니를 원수로 하는 논을 주장하니 공은 향인들을 거느리고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고 대궐문 앞에서 그 불가함을 외치니 그 뜻이 몹시 간절하여 논한 자가 많았다. 한수 권공께서 할아버지의 묘석에 묘갈을 쓰시었다. 아버지는 헌철인데, 사직공의 명으로써 족부인 항의 양자가 되어 그 후손을 이었다. 똑같이 중추공의 후손이다. 중추공의 몇 세대 후에 인선이 있어 감역을 지냈는데 동생인 대사간 지선과 더불어 효우에 극진한 행실이 있어 나라에서 이들을 정려하여 포상하였다. 후사가 없자 대간공의 둘째 아들 첩을 아들로 삼았다. 이분이 계서를 낳았으니 바로 공의 후사인 증대부이다. 어머니는 전주 이씨로 현감 탁의 딸이니 정조대왕의 후예로 예문관봉교를 지낸 원경의 현손이다.
공은 숭정 신사년(인조 19, 1641년) 11월 15일에 출생하였는데 태어날 때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수려하였으며 겨우 말을 배우면서부터 부모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도리를 알았다. 6, 7세 때에 벌써 선조를 받드는 정성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어른을 따라서 주선함이 마치 어른과 같았다. 큰아버지 참봉공은 공을 매우 사랑하였으며 이름을 지어 관이라고 하였는데 대개 선조를 배향한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학문을 배움에 미쳐서는 자기 몸과 같이 학문을 사랑하여 조금도 싫증을 내지 않았고 어버이를 섬기는 예에 있어서는 반드시 일찍 일어나서 세수하고 머리를 빗고는 사랑방 문밖에서 문안 인사를 드렸다. 7살 때에 고모를 찾아뵙고 문안을 드리니 고모는 공을 사랑하여 옷감을 품속에 넣어주었는데 받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사양하고 물리치기가 어려워서 상 위에 두고 나가버리니 사람들은 모두가 이를 듣고 이상하게 여겼다.
장성하여 와옹 이공의 가문에 장가들게 되었는데 와옹은 엄중하여서 사람들에게 마음을 주는 일이 드물었는데 공을 한 번 보고는 큰 인물이 될 것을 기대하였으니 마치 장전이 여대방에게 한 것과 같았다. 공은 총명하고 지혜로움이 남달리 뛰어났으며 지나가다가 글월을 보면 문득 외워 암송하였으며 글을 지음에 있어서는 붓을 잡고 선채로 문장을 완성하였으니 함께 수업하는 자들은 모두가 스스로 공에게는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어버이를 위하여 힘써 학문에 종사하여 선비의 가업을 이으려 하였지만 과거에 막힘이 있어 오랫동안 합격하지 못하니 공은 시대의 명을 제대로 만나지 못함을 알고 즉시 과거를 포기하고 오로지 지물지양에 뜻을 두었다.
부모를 섬김에는 잠시라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 항상 공경하여 정성을 다하였으며 한 번도 해이한 기색을 얼굴에 나타내 본 일이 없었다. 맛있는 음식으로 봉양하고 온정으로 대하고 크고 작은 일에는 반드시 몸소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30여 년을 한결같이 하게 되니 부모가 공의 몸이 상할까 근심하여 만년에는 다른 사람으로 대신하도록 하고자 하였으나 공은 그의 근력이 아직 건강함을 보이고는 끝내 그렇게 하지 않았다. 공의 아버지께서도 일찍이 맏형과 더불어 모부인을 섬김에 효성이 독실하고 지극하여 형제가 사랑하고 공경하였으니 역시 남들이 미치지 못하였다. 공의 효우는 오직 타고난 자질이 아름다웠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이와 같은 가법의 전함에서부터 온 것도 있었다. 친척 한 사람이 있었는데 후사가 없자 공의 동생 회를 공의 아버지에게 청하여 자식으로 삼고자 하였다. 공은 차마 동생과 떨어질 수 없어 울면서 간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동생은 갔으나 곧 도망해 오곤 하였다. 동생을 데려다 주고 떠날 때는 반드시 눈물을 흘렸다. 마음에 품은 오랜 병은 늙도록 쇠하지 않았다.
공에게는 과부가 된 누이가 있었는데 멀리 있어도 해마다 가서 만나보았으며 보고는 문득 온갖 사랑을 다 베풀었다. 하루는 공이 누이동생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올 때 추위를 만났는데 공은 누이가 걱정되어 자기의 버선을 벗어 주어 이를 신게 하였다. 자기를 돌보지 않고 누이를 더 중요하게 여겼음이 이와 같았다. 누이가 임종하면서 울며 공에게 말하기를 “만약 내 남편의 뼈가 묻힌 선산으로 돌아가게 해주면 나는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은 힘을 다하여 묘 자리를 만들고 천리나 먼 길을 관을 호위하면서 그의 선조 무덤으로 옮겨서 남편 무덤에 합장을 하고는 묘지기를 두고 묘를 지키게 하였다. 또 장가들고 시집가는 자녀들을 자기의 소생과 같이 하였다. 종제가 조상들의 협시 제사를 모시고 있었는데 가정이 몹시 궁핍하여 스스로는 도저히 살아갈 방편이 없었다. 이에 공께서 일마다 도와주어 이들의 생계를 일으키는데 있고 없고를 헤아리지 않고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그리고는 이 일을 깊이 스스로 감추었으니 이는 오직 남이 혹 알거나 한다면 잘한다고 칭찬할 것을 두려워해서였다. 둘째 누이의 남편이 공의 지극한 정성에 감동하여 항상 마음속으로 존경하였는데 공이 돌아가시자 제문을 짓고 통곡하며 말하기를 “아득하구나! 공의 의로움이여, 그윽하구나! 공의 어짐이여.”하였으니 이것은 대개 공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킨 바 있어 이를 흠모하여 한 말이다.
공께서는 조상의 묘소를 관리하는데 그 정성을 다하였고 내외
친진의 여부를 묻지 않았다. 비록 묘소를 주관하는 자가 있더라도 반드시 몸소 스스로 계획을 세워서 그 심력을 다하여 표갈 및 모든 석역에 정성을 쏟았으며 파손된 곳을 잘 수리하기도 하였으며 처음으로 묘전을 둔 것도 많았으니 옛날 현효 군자라 하더라도 이에서 더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큰아버지는『견성수묘록』을 저술하여 공의 행적을 칭찬하였다. 큰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처음부터 끝까지 몸소 상사를 맡아 행하였으며 그 재물이 다할 때까지 제배와 군종들에게 아끼지 않았으며 이들을 돌봐주고 사랑함이 매우 지극하였다. 그 아들을 장가들이고 딸을 시집보내는 일에도 한결같이 바른 일을 본받아서 반드시 형편에 맞게 하였다. 미루어 일가 친척과 향리 사람들에 미치어서는 가난한 자를 도아주고 궁핍한 자를 구휼함에 역시 그 힘을 아끼는 바가 없었으니 사람들 모두가 칭송함이 한결같았다. 그러나 공은 일찍이 스스로 잘했다는 기색을 나타낸 적이 한번도 없었다. 부모 나이 모두 70세에 이르자 공 역시 50의 나이인데도 옷을 예쁘게 차려입고 춤을 추면서 어린애 같이 재롱을 떠니 그 모양은 마치
노래자와 같았다. 부모의 생일이나 혹은 명절에는 반드시 술을 갖추어서 연회를 베풀었으니 모든 친척들이 찾아 모이고 향리의 노인들도 모두 이르러 술잔을 올리고 장수를 기원하니 그 환락은 절정에 달하였으며 해마다 이것을 상례로 하였다. 무릇 부모가 있는 자들은 이것을 부러워하거나 사모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계유년(숙종 19, 1693년)에 공은 전염병에 걸리자 부모님께 나아가 피할 것을 청했다. 병이 더욱 위독해져서 입으로는 능히 말할 수 없어서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눈물로 세월을 보내다가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으니 이때가 5월 19일이었다. 공은 부모를 위하여 일찍이 포천 대간공의 묘 아래에 묘자리를 보아 두었던 것이 있었는데 이런 연고로 이해 9월 12일에 공이 보아 두었던 부모의 묘자리에서 약간 떨어져 그 옆에다 장례를 모시었다. 그러나 묘소가 마땅하지 않아 23년 후인 을미년(숙종 41, 1715년) 9월 21일에 양주 북쪽 석적면 남남서쪽을 향한 언덕에 이장하였으니 바로 전중공의 묘소 옆이다.
부인은 이씨로 세종대왕의 후손이며 호조판서를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된 파곡선생 성중의 증손이며 아버지는 와옹공 명시로서 동몽 교관을 지냈느데 관운 허공에게 배워 학식이 매우 뛰어나 그 당시에 현인이라고 불리었고 우암 송선생도 역시 일찍이 그의 재행을 효종께 추천하였는데 모든 조정의 공론도 선생의 재행에 대하여 의견이 일치하였다. 부인은 엄정 결백하고 자못 여사의 풍이 있어서 와옹공이 사랑으로 칭찬하면서 말하기를 “이 아이가 만약 여자가 아니고 사내였더라면 나는 반드시 장차 우리 선열의 뒤를 잇게 하였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조상을 지극한 정성으로 받들었으며 오직 삼가하고 근신하였으며 천한 말을 한다든지 나태한 기색을 보이는 일이 없었다. 친정 부모를 섬기는 마음을 옮겨서 시부모를 극진히 모셨으니 시부모가 말씀하시기를 “우리 동서들도 잘 섬겨라” 하셨다. 일이 있으면 문득 수고로움을 대신하였으며 늙어서도 조금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제사를 받듦에 더욱 근면하고 신중하였으며 종가에 이르러 제사가 있으면 역시 반드시 일찍 스스로 목욕 제계하여 심신을 깨끗이 하였고 무릇 깨끗이 씻는 일, 음식을 익히는 일은 자신이 손수하지 않음이 없었다. 남을 대할 때는 친하고 소원한 격이 없었으며 아랫사람을 부릴 때는 정성을 다하여 은의를 베풀었으니 모두가 사랑하고 사모하여 기쁘게 따랐다.
공아 돌아가신지 2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살아있을 때를 생각하면서 슬픔을 억누르고 정을 가누지 못하였다. 오직 공을 생각하는 것으로써 마음의 위로를 구하였을 뿐이다. 음식을 먹을 때 그 차갑고 따뜻하게 하는 것도 한결같이 공이 살아계실 때와 같이 하였으며 조금도 더함이 없었다. 장사를 지내고 제사를 받듦에 있어서는 비록 몸은 쇠하여졌지만 몸소 스스로 맡아 하여 조금도 유감스러움이 없도록 하였다. 무인년(숙종 24, 1698년) 여름 자녀들이 천연두에 걸리자 근심하다가 심히 초췌해져서 마침내 7월 24일에 돌아가셨다. 공보다 2년 뒤에 태어나서 공보다 5년 뒤에 돌아가셨다. 그해 10월 6일에 공의 처음 무덤 조금 동쪽에 간소하게 장례를 모시었다가 공의 묘소를 옮길 때 함께 합봉하였다.
4남 3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일찍 죽고 차남은 세무, 3남은 세화, 4남은 세만이다. 장녀는 일찍 죽고 차녀는 서명축에게 출가하였으며 그 다음은 최흥주에게 출가하였다. 차남 세무는 파평 윤상기의 딸에게 장가들어 5남 5녀를 두었는데, 5남 중 장남은 심이고, 5녀 중 장녀는 윤정에게 출가하였으며 차녀는 이장욱에게 출가하였다. 나머지 4남 3녀는 모두 일찍 죽었다. 3남 세화는 의령 남위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두었으나 일찍 죽었고 두 번째 부인으로 양천 허만의 딸을 맞이하여 5녀를 두었으나 3녀는 일찍 죽고 나머지는 어리다. 종제 세신의 둘째 아들 잠을 양자로 하여 후사로 삼았다. 사위인 서명춘이 일찍 죽으니 형의 아들 긍수를 후손으로 삼았다. 4남 세만은 완산 이정의 딸에게 장가들어 4녀를 두었으나 모두 일찍 죽었다. 사위 최흥주는 3남을 낳았는데 모두 일찍 죽었고 또 3녀 중 2녀도 일찍 죽고 나머지는 어리다. 심은 안동 권빈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을 두었으나 2남이 일찍 죽었고 4녀를 두었는데 3녀가 일찍 죽었다. 윤은 2남 3녀, 이는 1녀를 낳았다.
공은 학문을 좋아하여 큰아버지로부터 일찍이 옛사람들에게 자기를 위하는 학문이 있다는 것을 배워 알았다. 와옹을 배알하고는 한 시대의 선유로서 이름난 유학자의 논을 들어 더욱 이치를 깨우쳤으며 우암의 학문이 연원이 있다는 것을 듣고 자주 가서 쫓으려고 하였으나 부모의 곁을 멀리 떠나기 어려워 결단하지 못하였다. 틈을 내어 일찍이 선생이 귀양가는 길에 잠깐 길 옆에서 만났는데 어찌 이것으로써 공의 마음이 흡족하였겠는가. 돌아가시니 참으로 한스럽도다. 공의 돈독한 뜻과 학문에 힘씀이 이와 같았는데도 세상에 한 번도 시험해 보지 못하였고 또 수명도 얼마 되지 않아 이 세상을 마치었다. 이런 연고로 세상 사람들에게 그 덕업이 성취된 바를 보이지 못하였으니 가히 애석하다 아니하겠는가.
오호라! 공의 효우의 행실과 인후의 덕은 진실로 영원한 복을 누릴 수 있었으나 벼슬에 나아가 복록을 구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끝까지 부모를 봉양하면서 마침내 이 세상을 떠났으니 한스럽도다. 화려함을 쫓지 않았고 검소하게 생활하면서 천리를 따랐는데 일찍 돌아가시어 영화를 보지 못한 것은 어떠한 연고인가? 슬프다! 공의 자손은 모두가 세상에서 그 아름다움을 이루고 장차 그 가문을 크게 빛낼 것이니 이것은 하늘의 보시가 이에 있는 것이 아닌가?
세무는 문행이 있어 나와 더불어 친하게 지내는데 그가 행장을 가지고 와서 명을 부탁함이 심히 간절하였다. 나는 이미 늙었고 또 문사도 보잘 것 없는데 청함이 더욱 간곡하니 내 비록 공을 잘 알지는 못하나 공의 행적은 이미 들어서 높이 우러러 사모해 온지 오래되었다. 지금 비문을 짖는 일에 있어 의리로 끝내 사양할 수만은 없기에 감히 그 일의 차례를 매기고 이에 명한다. 명에 이르기를,

동안의 화려한 후손 효우로서 가문의 명성을 빛내었구나. 공이 이를 이어받아 그 명성을 천하에 날리었도다.
뜻을 닦음은 증자와 같이 하였고 즐거워하고 재롱떠는 것은 어린애와 같이 하였다.
선묘에는 지극한 정성을, 조상의 무덤에는 마음을 다하였도다.
부모의 따뜻한 보호에 은혜를 갚지 못하고 그 큰 뜻 풀지 못했으니 원통하도다.
공에게 현숙한 아내 있어 빼어난 자질에 깊은 덕성 갖추었도다.
한편으로는 집안을 화목하게 다스리고 또 한편으로는 부인으로서 규범을 세웠도다.
공께서 병들어 신음하니 더욱 정성 다하여 받들었도다.
하늘은 그 후손들에게 복을 내리었으니 이는 공의 행적에 대한 하늘의 보답이로다.
자손이 번창하니 뜰에 가득하구나.
살아 생전에 뜻 펴지 못하였다 하여 돌아가신 후에도 그럴 것인가.
만약에 내 말을 믿을 수 없다면 이 새긴 명을 수정할 것이로다.

보공장군 행 세자익위사 위솔 윤봉오가 글을 쓰고,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겸 오위장 최방언이 글을 짓다.

숭정갑신후 83년(영조 2, 1726년) 병오년 9월 일.

 

 

문간공 유관신도비

우리 장헌대왕께서 총명하시고 하염이 있으신 성인으로 창업을 계승하여 뒤로 물려 줄 즈음에 예악을 일으키고 장정을 제청했으니, 의문제도가 찬연하여 논술할 만 하였다. 재상이었던 유공이 경술의 재질로 위로 임금님의 지식에 맞아 네 임금님을 섬겼고, 삼사로 퇴직하였으니 석주보다 더 멀어 개국 초부터 백성들이 지금까지 그 혜택을 입었다.
오! 풍성하도다! 공의 이름은 관이요, 자는 경부이다. 첫 이름은 관이요 자는 몽사이고, 호는 하정이었다. 문화유씨의 후손으로, 고려의 대승공 차달의 후예이다. 정당문학 문간공 공권이 6대조이시다. 증조 성비는 판례빈시사 문산군으로 시호는 성이다. 조부 식은 벼슬이 첨의 평리였고, 아버지 안택은 삼우판관으로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어머니 정숙부인은 동래정씨로 중추원부사 기문의 따님이시다. 지정 6년 병술 11월 임자일에 공이 낳으셨다.
홍무 기유년에 성균시에 합격하고, 신해년에 전시에 합격했다. 처음에는 비서교감에 제수되고, 임자년에 상서주부였고 계축년에 춘추검열이고, 갑인년에 예문공봉이고, 을묘년에 진덕박사요, 병진년에 예의랑으로 비어대를 내리셨다. 정사년에 판도좌랑이고, 술오년에 전빈판관으로 자금어대를 내리셨다. 경신년에 전의시승이고, 임술년에 전리정랑이었다. 전농부정, 지제교, 문과고시관으로 이조 등 33명을 선발했다. 신미년에 전농정 겸 경력사경력을 맡다. 임신년에 병사사인이었고, 계유년에 병조의랑, 세자우병선이었다. 갑술년에 중훈대부 사헌중승으로 원종공신의 훈공을 내리니 사양하는 사연을 올렸다. 병자년에 문과고시관으로 김익정 등 33명을 선취했다. 정축년에 통정대부로 성균관대사성 세자우보덕이었고, 무인년에 가선대부를 받아 형조전서 경연시강관이 되어 상소하여 상형의 도를 극간하니 임금께서 기꺼이 받아들이셨다. 기묘년에 이조전서, 집현전직학사, 중추원부사보문각학사로 동지경연사이었다. 경진년에 가정대부 강원도관찰사이고, 계미년에 계림부윤이었다. 을유년에 전라도관찰사에 출척사를 겸했다. 병술년에 자헌대부 예문관대제학 겸 판공안부사에 경연 춘추관사를 맡고, 세자좌부빈객이었다. 10월에 하정사로 중국에 가다. 정축년에 개성유후사유후이고, 임진년에 아내가 있으면서 첩을 두는 것을 징계하는 소를 올리니 임금이 기꺼이 수납하시다. 갑오년에 사헌부대사헌이 되고, 5월에 박은을 대신하여 노비변정도감제조가 되다. 병자년에 대사헌 아무개 등이 양우의 죄를 청했으나 임금께서 살피지 않고 모두 하급하도록 하였다. 임진년에 약제를 하사하시다. 대사헌 아무개가 편지를 올려 사양하다. 을미년 정헌대부로 의정부참찬이 되어 찬성 유정현과 치용 등의 죄를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1월에 숭정대부 검교의정부찬성 수문전대제학이었고 12월에 검교판좌군 도총제부사이었다.
무술년에 세자좌빈객이고, 기해년에 숭록대부 판중군도총제부사 예문관대제학이 되었다. 이 해에 공과 변계량 등에게 명하여 정도전이 지은 고려사를 고쳤다. 집현전에 공과 변계량으로 대제학을 삼아 임금께서 구언이 있으면 응지소를 썼다. 문과고시관으로 조상치 등 33인을 선발했다. 경자년의 벼슬은 전년과 같았다.
신축년에 임금께서 궤·장을 하사하시니 감사하는 글을 올렸다. 임인년에 퇴직을 바랬으나 윤허하지 않고. 약주와 찬을 하사하시고 대언 권맹손을 보내어 의온례를 하고 파했다.
계묘년에 고려사 수정범례로 변계량과 각기 상소함이 있다. 갑진년에 재상이 되니 임금께서 초구를 내리셨다. 을사년에 가뭄과 재해로 사직되기를 원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비답을 집현전부제학 권도에게 명하여 사제로 보내셨다. 병오년에 또 상소하여 퇴직을 원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정미년 가을 우의정에서 나이가 많아 퇴직하니 그 사택에 사과의 녹을 주게 하여 평생 계속토록 하였다. 경술년에 임금께서 술을 하사하였다.
임자년 7월 임금께 말씀드리되, “신이 나이 80세를 지났으나 밝은 세상을 볼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신의 아들 계문에게 직첩을 내려 주소서.”라고 하였더니, 이조에게 명하여 직첩을 주면서, “계문은 일을 맡기기에는 성실하지 못하나 이제 늙은 아비를 위하여 준다.”라고 하였다. 겨울에는 임금께서 공과 황희에게 각기 노루 한 마리씩을 주셨다. 계축년 5월 7일 기미에 작고하니 향년 88세였다.
그날 임금께서 경회루에 납시어 풍정연을 올리다가 부음을 듣고 즉시 애도를 표했다. 지신사 안숭선이 계청하되 오늘 잔치를 연 뒤에 또한 “예조에서 조회와 시가를 쉬는 장계가 아직 올리지 않았으며 날이 또한 어둡고 비가 오니 청컨대 내일 행하시지요.”라고 하였으나 따르지 않으셨다. 흰 옷과 흰 부채로 홍례문 밖에 납시어 백관을 거느리고 애도하시기를 의례대로 하셨다. 소찬을 올리고 금천교에 행차를 배설하여 제사를 내리고 친히 임하시어 슬픔을 다하시고 파했다. 시호를 문간이라 하고 청백리에 기록하였다. 양근 왕충리 신좌에 장례했으니 부인 안씨의 묘소 오른 편이다.
광릉군부인 안씨가 3남을 두니 맏이인 맹문은 예찬이고, 다음 중문은 호군이고, 다음 계문은 판서로 시호가 안숙이다. 다음 부인 풍천부인 이씨는 호조전서 송의 따님이시다. 1남을 두니 이문이다. 맹문이 5남 2녀를 두니, 첨은 판사, 참은 한림으로 부제학에 증직되고, 노는 요절했고 졸은 예판, 이는 전구령이다. 따님 맏이는 김중손, 다음은 김확의 아내이다. 중문은 1남 2녀를 두니, 기는 무과로 부사이고, 따님은 이효양, 박계금은 판사이다. 계문이 6남 3녀를 두니, 권은 병참, 보는 무과로 부사이고, 완은 감찰로 판서로 증직되고, 정은 부사, 제는 병사, 보는 감찰이다. 따님 이상로는 판관, 정수는 증직 참의이고, 조항은 목사이다. 이문은 3남을 두니, 녹은 생원, 섭은 사직, 심은 사인이다. 후손으로 현달한 이는 부제학 희도, 영의정 상운, 부제학 상재, 교리 봉서, 이상 공량, 찬성에 증직된 몽정이다. 유현으로는 반계 형원, 사교당 준이고, 무반으로 현달한 이는 부원수 문, 병판 염, 통제사 정익이다. 이 외에도 충·효·열문·음·무를 다 기록할 수가 없다.
보판을 보면, 공은 네 임금을 섬겼고, 지위가 공고에 이르렀다. 흥륭하는 시운을 도와 승평의 다스림을 이루었으니, 공렬의 뛰어남은 역사에 기록되어 지금까지 사람들의 이목에 비쳐지고 있다. 학문의 순수함과 절개의 뛰어남은 더욱 세상의 규범이 되니 비단 한 때의 사업이 칭찬될 뿐만 아니라 천고 유림의 종사가 되었다. 타고난 천품이 순수하고 도량이 넓어, 어려서부터 경학에 침잠하여 의리를 밝히니, 그 깊은 조예와 독실한 실천은 몸을 세워 국가에 봉사한 일들에 나타나 있다. 대저 배우기를 좋아하는 성실성은 늙도록 쇠하지 않고, 책 읽고 사색하기를 밤늦도록 쉬지 않았다. 평생토록 임금의 마음 일깨움을 첫째 의무라 여겨 경연에 드나들며 모시고 강의한 지 가장 오랬고 항시 ‘성·지’ 두 자로 간절히 권면하였다. 무악에 도읍을 세운다는 의론이 나왔을 때 역·순의 이치를 극언하여 감여가들에게 흔들림이 없게 하라 하여 임금께서 기꺼이 수납하여, 마침내 한양에 정도했으니, 배운 바 강령의 올바름을 미루어 알 수가 있다.
당시는 정치적인 과도기로 서교가 성행해서 상제가 문란하였다. 공이 대헌으로서 상소로 진정하니 대략 이러했다. 3년의 상기는 천하의 통례이다. 그러므로 대소의 신료나 서민이라 하더라도 그 제도를 마치도록 허락한 것이다. 요무에 관계되어 정자를 빼앗기는 자들이 있으니, 이제 살펴보면 직수나 어떤 관계에 없는 자가 성인의 제도를 불고하고 옛 버릇에 따라 겨우 백일만에 탈상한다. 혹은 흰 옷과 백립으로 대로를 활보하면서 부끄러워 할 줄을 모르니, 성인의 제도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실로 밝은 시대의 성전에 누가 된다. 풍속의 경박함을 염려하지 않을 수가 없으니 이제부터 만일 “상기를 마치지 않고, 멋대로 상복을 바꾸는 자는 법으로 통렬히 다스려 인륜을 돈후히 하소서.”라고 하니 임금께서 곧 허락하였다.
승도 오교양종을 소태하기를 청하는 소에는 대략, “삼가 생각건대, 성상께서 날마다 경연에 납시어 요순의 다스림과 공맹의 가르침으로 앞에서 강의하시나 불교를 배척하고 성도를 옹호하는 논의에는 미치지 못하시니 신으로서는 적이 의혹스럽습니다.”라고 하고 인하여 불교가 인륜을 어지럽히고 신라 고려에서의 높았던 신앙을 극언하고, 오교 양종을 파하여 곧 속가로 돌려보내어 각기 본업에 종사하게 하기를 원했다. 또 중외에 제멋대로 머리를 깎는 일이 없게 하여 10년동안 견지하여 확고부동하게 하면 세속에서 모두 허탄한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 연후에 성인의 도로 가르쳐 오래 싸인 미혹을 제거하면 사람들이 쉽게 따르고 교화도 쉽게 이행될 것이다. 효과가 전보다 몇 배 될 것이고 길이 후세에 남는 말이 있을 것이라 하였다.
또 상소하여 탄일재 행초례 행하는 것을 없애도록 청하였더니, 세종이 정부에 그 상소문을 보내어 논의하게 하였다. 재초와 반승의 실책을 곧 폐하게 하고, 상례와 장례의 제도는 한결같이 주문공가례를 준수하도록 하였으니, 사도를 물리치고 정도를 호위한 공이 이러하였다. 재상은 30년 하였지만 사방 어디에도 전광이 없고 사는 초가집이 비바람을 가리지 못했다. 장마가 한 달은 간 일이 있다. 손으로 우산을 잡고 앉아서 밤을 새웠다. 사람들이 어쩌다 담을 쌓으라고 권하면 이제 재상이 되어 급히 전날의 담장을 고치는 것이 옳은 일이냐 하였다. 임금께서 집에 울타리가 없다는 말을 듣고 선공감을 시켜 밤에 몰래 해서 식구들이 모르게 하라 하였다.
금륜사에서 국사를 감수할 때에는, 짚신과 대지팡이로 마을 어린이와 휘파람을 불며 흥인문 밖을 왕래하여 홀연히 속세를 벗어난 기상이 있으니, 사람들은 그가 재상인 줄도 몰랐다. 청고하고 세속에 벗어난 지조가 이러함이 있었다. 찬성을 사양하는 소에 비답하시되, “오직 경의 학문은 이미 정주의 학에 나아가 있고, 재주 또한 반고·사마를 쫓는다. 마음가짐은 충직에서 근본하고, 행동의 제제는 안화에 적합하니 실로 조정이 규범이 되고 선비의 종사라 하겠다.” 글을 배운 선비로서 성조에 기대되었음을 말할 수 있다.『해동명신록』에 이르기를 공이 공무를 마치고 돌아오면 때때로 농구를 가지고 채소밭을 가꾸면서도 수고로와 하지 않고, 가르침에도 게을리 하지 않으니 배우기 위해 모이는 자가 많았다. 사람이 혹 찾아와 뵈오면 머리로 인사할 뿐 성명을 묻지 않았다.
지봉유설에 이르기를, “하정 유정승은 곧 나의 외5대손이다. 공은 평소에 청백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흥인문 밖의 집터가 다행히 우리 집으로 전해져서, 선친께서 공의 옛집이라 하여 수리하였다. 어느 사람이 소박하고 누추함을 비웃으니 선친께서 이것도 우산보다는 사치스럽지 않는가!”라고 하시었다. 시를 지으시니 “하정의 기친 터 낙성가에 있으니 청백한 집 전하여 내게 이르렀네, 어떻게 이 우산 천만리를 덮어 천하를 다 가려 젖지 않게 하랴?”했으니 공의 청백하심이 이러했다.
대저 공은 이학의 올바름으로 전 세대의 잘못을 일소하여 우리나라 유술의 바른 길을 열었다. 청렴결백은 조정 재상들의 표준이 되어 온 세대의 모범과 경계가 되겠다. 사림들이 유성에 서원을 세우고 정계라 사액하여 제향한다. 오! 얼마나 어지셨던가. 공의 후손들이 장차 옥돌에 새기려 하나 석우에게 청하여 그 사적을 엮으라 하니 석우가 그럴만한 사람이 못된다 하여 사양했지만, 되지 않아서 마침내 이 글을 짓고 이어 명하노라.

오백년 왕업이 일어 창성한 세대 열었도다.
산천이 구름을 내어 이 시대를 맞추도다.
깊으신 학문과 맑고 순수하신 모습이로다.
그 쌓으신 덕 캐어보면 소문대로 시행하심이로다.
즐비한 한양의 도읍 신명이 터를 잡은 곳이로다.
좋은 말씀으로 도모되고 큰 바탕으로 다져졌다.
네 임금님 도우시어, 평화로운 치적 이루시다.
임금께서 말하되 나를 도움이여 네가 도와줌이라 하라.
아름답게 뛰어난 저 수여, 아름다운 몸가짐에 근원한다.
조정에서의 단정하심, 서서 밝히시는 규범이다.
예의 풍속 순박함은 이단을 물리침이다.
우산으로 지붕 삼을 사람마다 칭송하고, 헐어진 담장 관가에서 보수했네.
돌아와 집을 살피니 채소밭 비에 살찐다.
살아서 영화, 죽어서 슬픔, 임금님의 은혜와 예우도 모자람이 없었다.
은택이 흘러 널리 이로우나 백성들은 알지 못하네.
청문의 옛 집 바라보매 뒤얽히는 생각, 울창한 저 양주의 언덕 초동목수여 헐지마라.
모든 벼슬살이 이 비석에 풍부하다.

자헌대부 예조판서 홍문관제학 경연일강관 동양 신석우는 짓다.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좌의정 세자부 원임규장각직제학 경주 김홍집은 쓰다.
가의대부이조참판 겸 동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 의천 박용대는 전서하다.
숭정기원후 다섯 번째 신묘년(고종 28, 1891년) 2월 일 세움.

 

文簡公柳寬神道碑

朝鮮國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贈謚文簡柳公神道碑銘并序」
惟我 莊獻大王以聰明有臨之聖承剏垂可繼之運興禮樂定章程儀文制度粲然可述其相曰柳公公以經術才猷上結 主知歷事 四朝致位三事」
遠猶石畫粵自開 國之初民到于今受其賜嗚呼盛矣公諱寬字敬夫初諱觀字夢思夏亭其號系出文化高麗大丞公諱車達之後政堂文學文簡公諱」
公權其六世祖也曾祖諱成庇判禮賓寺事文山君謚忠誠祖諱湜致仕僉議評理考諱安澤三司判官 贈領議政妣 贈貞淑夫人東萊鄭氏中樞院事」
起文之女以至正六年丙戌十一月壬子生公洪武己酉中成均試辛亥中 殿試初授秘書校勘壬子尙書主簿癸丑春秋檢閱甲寅藝文供奉乙卯進德」
博士丙辰禮儀郎 賜緋魚袋丁巳版圖佐郎戊午典寶判官賜紫金魚袋庚申典儀寺丞壬戌典理正郎癸亥小府少尹乙丑興校副令丁卯知鳳州事」
己巳成均司藝寶文閣直提學庚午典農副正知製 敎文科考試官取李慥等三十三人辛未典農正兼經歷司經歷壬申內史舍人癸酉兵曹議郎 世」
子右弼善甲戌中訓大夫司憲中丞錄原從勳上謝箋丙子文科考試官取金益精等三十三人丁丑授通政大夫成均館大司成世子右輔德戊寅授嘉」
善大夫刑曹典書 經筵侍講官上䟽極諫恤刑之道 上嘉納之己卯授吏曹典書集賢殿直學士中樞院副使寶文閣學士同知 經筵事庚辰授嘉靖」
大夫江原道觀察使癸未授鷄林府尹乙酉拜全羅道觀察兼黜陟使丙戌資憲大夫藝文館大提學兼判恭安府事知 經筵春秋館事 世子左副賓客」
十月賀正使如 京師丁亥開城留後司留後壬辰有請懲有 妻娶妻䟽上嘉納之甲午授司憲府大司憲五月代朴訔爲奴婢卞正都監提調丙子大司」
憲某等請良佑之罪 上不覽皆令暇給壬辰 賜藥製于前大司憲某進箋以謝乙未正憲大夫拜議政府叅賛與賛成柳廷顯請致庸等罪不 允十一」
月崇政大夫檢校議政府賛成修文殿大提學十二月檢校判左軍都摠制府事戊戌 世子左賓客己亥崇祿大夫判中軍都摠制府事藝文館大提學是」
年 命公及卞季良等改修鄭道傳所撰高麗史置集賢殿以公及卞季良爲大提學上下 敎求言有應 旨䟽文科考試官取曺尙治等三十三人 庚」
子官並如前辛丑 上賜几杖有謝箋壬寅乞致仕不 允批答 賜藥酒饌遣代言權孟孫行宣醞禮而罷癸卯以高麗史修正凡例與卞季良等各有䟽」
甲辰入相 上賜貂裘乙巳因旱灾上箋辭職 上不允批答命集賢殿副提學權蹈賷 賜于其第丙午又上書乞致仕不 允丁未秋以右議政引年致」
仕命給第四科祿終其身庚戌 上賜酒壬子七月公上言臣年過八十見棄昭代之日不遠願還給臣之子季聞職牒上命吏曹還給職牒曰季聞任」
事不恪今爲其老父給之冬 上賜公及黃喜獐各一口癸丑五月七日己未卒享年八十八是日 上御慶會樓進豊呈宴訃 聞即擧哀知申事安崇善啓」
曰今日設宴之後且禮曹停朝市狀尙未上日昏而雨請於明日行之 上不從以白衣素繖扇御弘禮門外率百官擧哀如儀進素饌仍設次禁川橋 賜」
祭親臨盡哀而罷 贈謚文簡錄淸白吏葬于楊根王忠里辛坐原夫人安氏塋右也配廣陵郡夫人安氏生三男長孟聞禮叅次仲聞護軍次季聞判書謚」
安肅后配豊川夫人李氏戶曹典書悚之女生一男曰異聞孟聞生五男二女瞻判事翰林贈副提學睹早夭睟禮判眙典駒令女長金伯孫次金確仲」
聞生一男二女䁗武府使女李孝讓朴繼金判事季聞生六男三女睠兵叅䀯武府使睆監察 贈判書府使睇兵使眺監察女李尙老判官鄭濡 贈叅」
議趙頊牧使異聞生三男濂生員渫司直潘士人後孫最顯者副提學布渚領議政尙運副提學尙載校理鳳瑞貳相公亮贈賛成夢鼎儒賢則磻溪馨遠」
四矯堂浚以武顯者副元帥斐兵判聃統制使廷益忠孝烈文蔭武不可勝記見譜牒公歷事 四朝位至公孤佐興隆之運而致升平之治其功烈之巍赫」
書諸 國乘至今照人耳目至於學文之純至節操之卓偉尤足以爲世模範不但一時事業之可稱而柳爲千古儒林之宗師天資純粹器度弘毅自少沉」
潛經學講明義理 造詣之深踐履之篤可見於立身事君之際盖其好學之誠至老不衰講讀思索中夜不掇平生以格君心爲第一義出入經幄侍講最久」
而每以誠正二字懇懇勸勉至於武岳建都之議也極言逆順之理請勿爲堪輿家所撓 上嘉納之遂定都于漢陽其所學綱領之正已可推知矣其時去」
勝國不遠西敎盛行喪制紊亂以大憲陳䟽畧曰三年之喪天下之通喪也故大小臣僚勿論時散許終其制其有關係要務而奪情者己有著今竊見無」
職守無關係者不顧聖制習循故常僅滿百日而即吉或以白衣白笠奔走於朝路而不知愧非惟有乖於聖制實有累於明時之盛典風俗之薄不可不慮」
自今如有不待終制而自除衰絰者痛繩以法以厚人倫 上即許之其請汰僧徒五敎兩宗䟽畧曰慕惟 聖上日御 經筵每以堯舜之治孔孟之學講」
論於前而至於排釋氏衛聖道之議不之及臣窃有惑也因極言佛敎之亂倫羅麗之崇信而願罷五敎兩宗勒令還俗各歸本業又令中外無得私自剃髮」
持之十年確乎不變世俗皆知虗誕然後諭之以聖人之道以祛積久之惑人易從而敎易行功比傍前而亦有辭於永世又上䟽請除 誕日齋行醮禮則」
英廟下其䟽 命政府議之齋醮飯僧之失遂因停廢喪葬之制一遵朱文公家禮其闢邪衛道之功有如此者爲輔相三十年而四方無田庄所居荆茅不」
蔽風雨甞霖雨經月手持雨傘坐而終夜人或勸之築墻門則答曰今乃爲相遽改前日之垣屋可乎 上甞聞其家無藩籬 命繕工監夜半潛設把子不」
令知之其監修國史於金輪寺也以芒鞋竹杖挈村童嘯咏往來於興仁門外翛然有出塵之想人不知其爲宰相其淸高拔俗之操有如此者賛成辭䟽」
批答畧曰惟卿學旣造乎程朱才亦追於班馬持心本於忠直制行適於安和實爲朝廷之規範儒者之宗師其以學文之士見重於 聖朝此可言矣先正」
趙光祖甞於 筵中白 上曰人心本無二同一心無私若柳某是可又私謂人曰近世理學圃隱夏亭最正云以其門路之正見推於俊賢亦可知矣海東」
名臣錄曰公公退之暇有時持鋤巡菜圃不以爲勞敎誨不倦摳衣者坌集人或有來內謁頷之而已不問姓名焉芝峯類說曰夏亭柳政丞即余外五代祖」
也公素以淸白名世興仁門外家垈幸傳于吾家先君因公舊居而葺之客笑其朴陋先君輒曰此亦比雨傘則侈矣有詩曰夏亭遺址洛城隅淸白家傳」
也到吾安得傘周千萬里盡遮天下不沾濡公之淸白如此盖公之理學之正丁一掃前代之陋以啓吾東儒術之正路廉白則爲 國朝宰相之標準可以」
風勵百世矣士林建院儒城 賜額程溪以享之嗚呼何其賢也公之後孫將勤貞珉請錫愚紀其蹟錫愚辭非其人不獲遂撰其狀系之以銘曰」
五百興王誕啓昌期 山川出雲乃膺其時 邃淹之學淸粹之姿 究厥底蘊措諸聲施 翼翼漢都神明攸基 颺言獻圖奠鼎居師 弼亮 四世致」
理雍熙 王曰相予汝翼汝爲 懿彼壽俊憲其令儀 端委廟朝立經陳䂓 禮俗廼惇異敎斯麾 人誦屋傘官補園蘺 歸視其家畦蔬雨滋 存殉」
哀榮 恩禮罔虧 澤流利博民由不知 靑門古宅睠焉紆思 欝欝楊阡樵牧勿圮 凡百有位視此豊碑」
資憲大夫禮曹判書弘文館提學 經筵日講官東陽申錫愚撰」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 世子傳原任 奎章閣直提學慶州金弘集書」
嘉義大夫吏曹叅判兼同知 經筵春秋館成均館事凝川朴容大篆」
崇禎紀元後五辛卯二月 日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