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세 판관공 휘 희수 등/최 처사(崔處士의 묘지명 병서

최 처사(崔處士)의 묘지명 병서(幷序) (전주최씨 문성공 10세손 )효자 정려

아베베1 2010. 9. 18. 14:34

 전주최문 문성공 10세손 휘 안동판관 휘 희수 동생분이신 휘 득수  

포저집 제33권

 묘지명(墓誌銘) 10수(十首)
최 처사(崔處士)의 묘지명 병서(幷序)


우리가 옛날에 살던 집이 의동(義洞)에 있었으니, 그곳은 바로 도성 안의 동쪽 변두리였다. 같은 동네에 최씨(崔氏)가 살고 있었는데, 두 가문의 집들이 서로 나란히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두 집안의 자손들이 그 동네에서 가장 많이 모여 살고 있었기 때문에 두 집안의 어른이나 아이나 할 것 없이 같은 연배끼리 서로 어울리면서 아침저녁으로 항상 함께 지냈으니, 그 친한 관계가 마치 골육과 같았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두 집안의 사람들이 모두 이리저리 흩어지면서 집들이 모두 폐허로 변하고 말았다. 그래서 그 뒤에 서울에 와서 벼슬하는 사람이 있어도 모두 다른 동네에 우거(寓居)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런 가운데에서도 서로 만나게 되면 마치 멀리 사는 친척을 본 것처럼 반갑게 대하며 기뻐하곤 하였다.
처사(處士)는 나의 조고(祖考) 항렬에 해당되는 분이었다. 처사의 아들 3인 중에 백씨(伯氏)와 중씨(仲氏)는 나의 제부(諸父) 항렬이었지만, 막내인 응형(應亨)은 나보다 나이가 두 살 적었으므로 나와 함께 어린 시절 벗으로 지냈다.
처사가 임진왜란 때에 80여 세 되는 노모를 모시고 삭녕(朔寧)까지 갔다가 그곳에서 노모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임시로 산속에 초빈(草殯)을 하고는 밤낮으로 호곡(號哭)하며 그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때 적이 그곳에 이르자 처사가 혼백(魂帛) 상자를 등에 지고 숲 속으로 들어가서 숨었는데, 적이 그를 찾아내어 붙잡은 뒤에 그 상자를 보고는 기보(奇寶)가 들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서 처사를 해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막상 열어 보자 바로 혼백이 들어 있었으므로 적도 감동한 나머지 처사에게 활로(活路)를 알려 주고 떠나갔다. 그 이듬해 가을에 금천(衿川)의 선산에 반장(返葬)한 뒤에 묘소 옆에서 여묘(廬墓)하였는데, 삼년상을 마치도록 미음만 마시면서 하루도 그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때에 병화(兵禍)를 당한 뒤끝이라서 백성들이 기아(飢餓)에 시달리다 못해 도적이 되어 살육과 약탈을 자행하는 일이 줄을 이었으며 심지어는 서로 잡아먹는 일이 벌어지기까지 하였는데, 기전(畿甸)이 그중에서도 특히 심하였다. 그런데도 처사는 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홀로 산속에서 여묘를 하며 떠나지 않았는데, 처사가 애처롭게 곡읍(哭泣)하고 애훼(哀毁)하여 몸이 삭정이처럼 여위었으므로 이를 보는 자마다 모두 눈물을 흘렸다. 처사의 중자(仲子)인 응선(應善)이 날마다 땔나무를 등에 지고 성안으로 들어가서 얼마 안 되는 쌀을 얻어 가지고 돌아왔으므로 미음이라도 계속 먹을 수가 있었다.
아, 사람의 자식이라면 그 누가 부모가 없으리오마는 제대로 효도를 하는 자는 지극히 드물기만 하다. 이때에 처사에게도 아우가 있고 여러 조카들이 있었는데, 그들도 모두 선인(善人)이었지만 유독 처사만이 그렇게 하였다. 이를 통해서 처사의 효행이야말로 천성에서 우러나온 것이요, 노력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고 하겠다. 그래서 난리가 일어난 혼란한 와중에 생사를 기필할 수 없었는데도 바로 이처럼 독실하게 행하였던 것이니, 평소의 효성과 우애야 처사에게는 일상적인 행동으로서 말할 것도 없다고 하겠다.
그 뒤에 처사가 영암(靈巖)에 와서 살자 호남(湖南) 사람들이 감사(監司)에게 정장(呈狀)을 하니 상이 듣고서 상으로 관직을 내리라고 명하였고, 그 뒤에 양주(楊州)에 와서 살자 양주 사람들이 또 감사에게 정장을 하니 상이 듣고서 복호(復戶)를 명하였으며, 그 뒤에 용산(龍山)에 와서 살자 용산 사람들이 또 예조(禮曹)에 정장을 하였는데, 이 모든 일이 끝내는 예조에 의해서 폐각(廢閣)되고 말았다.
처사의 휘(諱)는 득수(得壽)요 자(字)는 덕수(德叟)이다. 병진년(1616, 광해군 8) 모월 모일에 모지(某地)에서 세상을 떠나, 그해 모월 모일에 양주(楊州) 금정리(金正里) 유좌묘향(酉坐卯向)의 언덕에 묻히니 향년 72세였다.
고(考) 휘 언청(彦淸)은 봉사(奉事)이고, 조부 휘 호문(浩文)은 모관(某官)이고, 증조 휘 지성(智成)은 현감이다. 그 선조는 전주(全州) 사람이다. 5세조 덕지(德之)는 세조(世祖) 때에 예문관 직제학으로 있다가 벼슬을 버리고 영암으로 돌아와서 생을 마쳤다. 조비(祖妣) 하동 정씨(河東鄭氏)는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고 우의정에 추증된 일두(一蠹) 선생 여창(汝昌)의 딸이다. 그러고 보면 처사의 선행도 실로 그 근본이 있다고 하겠다.
부인은 청송 심씨(靑松沈氏)이다. 장남은 응성(應聖)이고, 다음 응선(應善)은 웅천 현감(熊川縣監)이고, 다음 응형(應亨)은 현재 소촌 찰방(召村察訪)이다.
나의 기억에 의하면, 임진년 당시에 두 집안이 동시에 도성을 빠져나온 뒤에 우리 집안의 동문 밖 저택에서 묵고 나서 그다음 날 통곡하며 이별을 하였다. 그때 내가 동자(童子)의 몸으로 당(堂) 옆에 서서 울고 있자 처사가 나를 붙잡고서 슬픔을 억누르지 못하였다. 그 뒤 다행히 각자 죽지 않고 살아서 기유년(1609, 광해군 1)에 처사를 용산에서 뵐 수 있었는데, 이때 응형이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하였다.
처사는 평생토록 성신(誠信)으로 일관하였고 거짓이 없었는데, 그의 모습만 보아도 그가 순선(純善)의 소유자로서 털끝만큼도 사념(邪念)이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처사가 작고한 지 지금 20여 년이 되는 때에 응성(應聖) 장(丈)이 나에게 묘지명을 부탁하기에 내가 삼가 응낙하고 글을 짓게 되었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예로부터 지극한 행실의 소유자는 / 自古至行
이 세상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법 / 於世絶儔
참으로 그만둘 수 없기 때문이니 / 誠所不已
어찌 대가를 구하는 것이 있어서랴 / 豈有所求
이것이 자기네와 무슨 상관이 있으랴만 / 是何與己
사람들이 자연히 공경하고 흠모하나니 / 人自敬慕
이 역시 어찌 밖에서 빌려 온 것이리오 / 亦豈外假
천성적으로 똑같이 품부받았기 때문이라 / 性惟同賦
그런데 어찌하여 오늘날 사람들은 / 何今之人
유독 이와 반대로 행동한단 말인가 / 而獨反此
임금님이 정표(旌表)하라 명하셨건만 / 王命旌異
예조가 그만 소홀히 취급한 나머지 / 忽焉而已
우리 처사처럼 선한 분으로 하여금 / 乃使善人
끝내 초야에서 생을 마치게 하였도다 / 終死草野
공에게야 무슨 한스러움이 있으랴만 / 於公何恨
세상일이 참으로 개탄할 만하도다 / 可嗟世也
오직 하늘의 도는 이와 같지 않아서 / 唯天不然
보답을 결코 허투루 하지 않으리니 / 施報無虛
어디에서 그 증거를 볼 수 있을까 / 其所可期
바로 공의 후손들에게 있으리로다 / 其在後歟

浦渚先生集卷之三十三
 墓誌銘 十首
崔處士墓誌銘 幷序 a_085_587b


吾舊家在於義洞。卽城中東偏也。同洞有崔氏。兩家門墻相比。子姓於洞中爲最多而聚居。以是。兩家長幼以年輩相從。朝暮常相與處。其親如骨肉。經壬辰亂。兩族皆分散。家皆丘墟。雖其後有來仕於京者。皆寓居他洞。然得相見。輒懽然喜如親戚居遠者也。處士。吾祖考行也。有三子。伯仲。吾諸父行也。季應亨。少吾二歲。與吾爲童稚友也。處士於壬辰亂。老母年八十有幾。奉而行至朔寧病卒。權殯于山中。晝夜號哭不離側。賊至。負魂帛箱隱林間。賊搜得見其箱。以爲085_587c有奇寶。欲害之。及開。乃魂帛也。賊亦感動。指生路而去。至明年秋。返葬于衿川先麓。廬于墓惻。終三年餟粥。不一日離。是時兵禍之餘。人民飢餓。起爲盜賊。殺掠相望。至有相食者。畿甸尤爲甚。處士不爲懼。獨守廬山中不去。其哭泣之哀。柴毀之狀。見者皆垂淚。其仲子應善。日負薪至城中。得升米而歸。所以粥不絶也。嗚呼。人子誰無父母。能爲孝者至鮮。是時處士亦有弟及諸姪。皆善人也。然獨處士爲然。於此見其行實天性。非由勉也。當亂離搶攘。死生不可期。而篤行乃如是。平居孝友。皆常行不足道也。其後處士就食085_587d靈巖。湖南人以狀言于監司。上聞命賞職。其後居楊州。楊州人又言于監司。上聞復戶。其後居龍山。龍山人又呈于禮曹。皆爲禮曹所廢閣。處士諱得壽。字德叟。丙辰某月日。卒于某地。其年某月日。葬于楊州金正里酉坐卯向之原。享年七十二。考諱彥淸。奉事。祖諱浩文。某官。曾祖諱智成。縣監。其先全州人。五世祖德之。當世祖朝。以藝文直提學。棄官歸靈巖以終焉。祖妣河東鄭氏。從祀文廟。贈右議政一蠹先生汝昌之女也。其善實有本也。娶靑松沈氏。子長應聖。應善。熊川縣監。應亨。今爲召村察訪。記壬辰兩085_588a家同出城。宿吾家東門外宅。明日慟哭而別。余以童子立堂邊泣。處士持余。悲不自勝。幸各脫死。己酉歲。拜處士於龍山。是時應亨中司馬矣。處士平生。誠信無僞。見其貌。可知其純善無纖毫邪念也。處士卒今二紀矣。應聖丈屬余誌。敬諾而銘焉。銘曰。
自古至行。於世絶儔。誠所不已。豈有所求。是何與己。人自敬慕。亦豈外假。性惟同賦。何今之人。而獨反此。王命旌異。忽焉而已。乃使善人。終死草野。於公何恨。可嗟世也。唯天不然。施報無虛。其所可期。其在後歟。


 

 

 

 

포저 연보 제1권

연보(年譜)



황명(皇明) 신종황제(神宗皇帝) 만력(萬曆) 7년 본조(本朝) 선조(宣祖) 소경대왕(昭敬大王) 12년 기묘(1579)
〇 4월 7일 임오일(壬午日) - 인시(寅時) - 에 선생이 한경(漢京) 창선방(昌善坊) 자택에서 태어났다. - 선생을 임신하고 있을 때에 모부인(母夫人)은 꿈을 꾸면 언제나 선도(仙都)의 별계(別界), 즉 꽃이 만발했다는 뜻의 화란개(花爛開)라는 이름의 지역에서 노닐었으며, 또 가인(家人)이 흑룡(黑龍)이 방 안으로 날아드는 꿈을 꾸고서 선생이 태어났다고 한다.

8년 경진(1580) 선생 2세


9년 신사(1581) 선생 3세
〇 말을 하기도 전에 문자를 알아서 문자를 물어보면 손가락으로 그 문자를 가리켰으며, 항상 바둑알을 배열하여 건괘(乾卦)의 모양을 만들었다. 백구(伯舅)인 정랑(正郞) 윤호(尹皞)가 이 광경을 보고는 말하기를 “이 아이는 반드시 대유(大儒)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10년 임오(1582) 선생 4세


11년 계미(1583) 선생 5세
〇 글을 지을 줄 알았다. - 왕고(王考)인 찬성공(贊成公)이 일찍이 길을 떠날 적에 선생이 시구를 지어서 전송하였다. 〇 이웃집 노인이 옷을 벗어서 공터에 놔두고는 선생에게 지켜보라고 하였는데, 저물녘에 돌아와 보니 선생이 종일토록 지키면서 그곳을 떠나지 않았으므로 그 사람이 크게 경탄하며 기이하게 여겼다.

12년 갑신(1584) 선생 6세
〇 글을 읽으면서 문리(文理)가 날로 발전하였으며,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려도 모두가 기이하였으므로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13년 을유(1585) 선생 7세


14년 병술(1586) 선생 8세
〇 조중봉(趙重峯 : 조헌〈趙憲〉)이 상소하여 시배(時輩 : 동인〈東人〉)가 나라를 그르친 죄를 논하다가 배척당하였다. 선생이 이 말을 듣고는 분개해 마지않으며 소초(疏草)를 작성하여, 소인(小人)이 국정을 담당하여 직신(直臣)이 죄를 얻고 국가가 장차 망하게 된 정상을 극언하였다. 여러 장자(長者)들이 이 글을 보고는 매우 기이하게 여기는 한편으로 당시의 금기(禁忌)를 두려워한 나머지 그 소초를 빼앗아 감추면서 말하기를 “누가 이 글을 소아(小兒)가 지었다고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15년 정해(1587) 선생 9세
〇 지사(知事) 김계도(金繼燾)가 문장에 능하고 잘 가르친다는 말을 듣고는 선생이 찾아가서 배웠다.

16년 무자(1588) 선생 10세


17년 기축(1589) 선생 11세


18년 경인(1590) 선생 12세


19년 신묘(1591) 선생 13세


20년 임진(1592) 선생 14세
〇 왜란(倭亂)을 당하여 가인(家人)을 따라서 양주(楊州)와 연천(漣川) 등지로 피난을 다니다가, 가을에 광주(廣州)의 시골 농장으로 돌아왔다.

21년 계사(1593) 선생 15세
〇 공주(公州)에 가서 거주하면서 《서경(書經)》을 읽었는데, ‘기삼백(朞三百)’과 ‘선기옥형(璿璣玉衡)’의 주설(註說)을 모두 막힘없이 통달하자 노유(老儒)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또 《서경》의 홍범(洪範)을 모방해 글을 지어서 인륜(人倫)을 서술하고는 그 이름을 ‘이범(彛範)’이라고 하였다. 광주(廣州)로 돌아왔을 때에 월사(月沙) 이공 정귀(李公廷龜)가 수원(水原)에서 거상(居喪) 중이었으므로 선생이 찾아가서 배웠는데, 월사가 극구 칭찬하였다.

22년 갑오(1594) 선생 16세
〇 부인 현씨(玄氏)를 배필로 맞았다. - 군수 휘(諱) 덕량(德良)의 딸이다.

23년 을미(1595) 선생 17세
〇 선생의 외종조(外從祖)인 월정(月汀) 윤공 근수(尹公根壽)는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렸는데, 선생이 어렸을 때부터 매우 기특하게 여기며 사랑하였다. 선생이 공에게 가서 배운 뒤로 문사(文辭)가 대성(大成)하여 곧장 양한(兩漢) 이전의 문법(文法)을 본받았다. 이에 월정이 탄복하여 마지않으면서 자기도 따라가지 못하겠다고 매번 말하였다. 이때 심 유격(沈遊擊)이 일본의 장수들에게 보내는 것으로 상정해서 격문(檄文)을 지었는데, 보는 이마다 무릎을 치며 감탄하였다.

24년 병신(1596) 선생 18세
〇 별시(別試) 초시(初試)에 입격(入格)하였다. - 선생은 천부적으로 재질이 월등하였다. 언젠가 금보(琴譜)를 보고는 하루 만에 음률(音律)을 익혔다. 그 밖에 상수(象數)나 복서(卜筮) 같은 글도 한 번 보면 모두 해득하였고 한 번도 고심한 적이 없었다. 글에 대해서는 박람(博覽)하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또 선가(禪家)의 글을 보고는 좋아하여 오랫동안 널리 섭렵하였다. 당시에 왜란이 아직 평정되지 않았으므로 강개(慷慨)한 마음을 품고는 항상 제갈 무후(諸葛武侯 : 제갈량〈諸葛亮〉)의 사람됨을 사모하면서 병법(兵法)을 강구하고 책략(策略)을 논설하였다. 일찍이 곽재우(郭再祐)와 병사(兵事)를 논하였는데, 그가 크게 경복(驚服)하면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동방에 영웅이 없더니 지금에야 비로소 보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25년 정유(1597) 선생 19세


26년 무술(1598) 선생 20세
〇 지경도(持敬圖)를 찬술(撰述)하였다. - 선생이 학문에 대해서 고인(古人)이 논한 곳을 보다가 마음에 계합(契合)되는 바가 있었다. 이에 사서(四書)를 취하여 읽다 보니 활연(豁然)히 깨달아지는 점이 있었으므로, 마침내 좋아하는 다른 것들을 모두 버리고 성리(性理)의 학문에 잠심(潛心)하여 밤낮으로 각고면려(刻苦勉勵)하면서 오직 옛 성현을 법도로 삼았다. 선생이 문장의 학업을 그만두는 것에 대해서 월정(月汀)이 매우 애석하게 여긴 나머지 “어찌하여 앞으로 몇 년 동안만이라도 먼저 문장가가 되는 공부에 종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세간에 없는 문자를 볼 수 있게 하지 않는가.”라고 하면서 누차 권고하였으나 선생은 따르지 않았다. 지경도는 경(敬)을 강(綱)으로 삼고, 일내(一內) 제외(齊外)와 정양(靜養) 동찰(動察)을 목(目)으로 삼은 뒤에 경(敬)에 대해서 언급한 경전의 말들을 간추려 그 아래에 배열한 것인데, 아울러 이에 대한 설을 지어서 그 의미를 명확히 하였다. 또 성의설(誠意說)과 고설(苦說)과 안자호학론(顔子好學論) 등을 지었는데, 모두 문집에 보인다.

27년 기해(1599) 선생 21세


28년 경자(1600) 선생 22세


29년 신축(1601) 선생 23세


30년 임인(1602) 선생 24세
〇 별시(別試)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 선생은 학문에만 전념하였을 뿐 과거 급제에 필요한 글은 익힌 적이 없었다. 그러나 조부인 찬성공(贊成公)이 과거에 응시하라고 극력 권하여 부득이 시험장에 들어갔는데, 서책(書冊)은 지니지 않고 단지 지필(紙筆)만 손에 쥐고서 단번에 한 편의 글을 완성하였다. 그리하여 초시(初試)에서 제 2 명의 성적을 거두고는 전정(殿庭)에서 대책(對策)으로 등과(登科)하였는데, 이때 오봉(五峯) 이호민(李好閔)이 고관(考官)으로 있다가 칭탄(稱嘆)하기를 “참으로 세상을 경륜할 글이다.”라고 하였다.
〇 11월에 승문원(承文院)에 선발되어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에 보임되었다.

31년 계묘(1603) 선생 25세
〇 정자(正字)로 승진하였다.
〇 심학종방도(心學宗方圖)를 찬술하였다. - 선생이 애초에 《중용(中庸)》의 수장(首章)과 《논어(論語)》의 사물장(四勿章)을 용공(用功)의 요체로 생각하여 도표로 작성하고 적어 넣은 다음에 이것을 ‘성문심법지결(聖門心法旨訣)’이라고 명명하였다. 그러다 이때에 이르러 다시 도표를 작성하면서 심(心)을 강(綱)으로 삼고, 미발(未發) · 이발(已發)과 안에서 발동하여 정(情) · 의(意) · 사(思)가 되는 것과 밖으로 드러나 시(視) · 청(聽) · 언(言) · 동(動)이 되는 것을 목(目)으로 삼아 ‘심학종방도’라고 명명하고는 이에 대해서 찬(贊)을 붙였는데, 문집에 보인다.
〇 왕고(王考)인 찬성공(贊成公)의 상을 당하였다. - 선생이 마치 어버이 상을 당한 사람과 같이 복을 입었으며, 기신(忌辰) 때에도 종신토록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다.

32년 갑진(1604) 선생 26세
〇 저작(著作)으로 승진하였다. - 이때에 어떤 상신(相臣)이 권력을 장악하고 마음대로 일을 처리하며 매우 기세가 등등하였다. 그의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여 분관(分館)할 즈음에 그 일을 주관하던 승문원(承文院)의 동료가 극구 말하기를 “수상(首相)의 아들이 괴원(槐院)의 선발에 끼이지 못한대서야 말이 되겠는가.”라고 하였으나, 선생은 응하지 않고 끝내 권점(圈點)을 하지 않았다. 그 집에서 크게 성내면서 공갈(恐喝)을 많이 해댔으나 선생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33년 을사(1605) 선생 27세


34년 병오(1606) 선생 28세
〇 박사(博士)로 승진하였다. - 한음(漢陰) 이공 덕형(李公德馨)이 재상으로 있을 적에 일찍이 선생이 공적(公的)인 일로 찾아갔는데, 한음이 다정하게 대하면서 말하기를 “오래전부터 성명(盛名)을 들었으면서도 서로 만나 보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지금부터는 계속해서 상종(相從)하기를 바란다.”라고 하였으나, 선생은 한음의 신분이 재상이라는 이유로 다시 찾아가지 않았다. 선생은 벼슬길에 오른 이래로 성망(聲望)이 날이 갈수록 성대해졌지만, 담박한 자세로 자신의 신념을 지키면서 교유(交遊)하는 일을 단절하였다. 또 당시에 당로자(當路者)가 모두 권행(權倖)의 당(黨)이었기 때문에 선생은 참하(參下)의 관직에 몇 년 동안이나 머물러 있기만 할 뿐, 추천을 통해서 청환(淸宦)의 길에 들어설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시론(時論)이 억울하다고 칭하였다.

35년 정미(1607) 선생 29세
〇 겨울에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으로 승진하고 나서 바로 사헌부 감찰로 자리를 옮겼다.

36년 무신(1608) 선생 30세
〇 2월에 평안도 평사(平安道評事)에 임명되었다. - 이때 서로(西路)에 기근(饑饉)이 들었는데, 그중에서도 강변(江邊)이 더욱 심하였다. 감사(監司)가 선생에게 진휼(賑恤)하는 임무를 맡기자, 선생이 급히 달려가서 성의를 다해 구제하였다. 백성들이 그 덕분에 살아났으므로 모두 비를 세워서 선생의 덕을 칭송하였다.

37년 광해군(光海君)원년 기유(1609) 선생 31세
〇 홍문록(弘文錄)에 등록되었다. - 이때 이유홍(李惟弘)이 부제학으로 있으면서 추탄(楸灘) 오공 윤겸(吳公允謙)에게 묻기를 “본관(本館)이 홍문록을 새로 작성하려고 하는데, 국외자(局外者) 중에서 첫째가는 사람을 얻어서 참여시키려고 한다. 누가 좋겠는가?”라고 하자, 오공이 선생을 알려 주었다. 그러나 유홍이 그 말대로 쓰지를 못하다가 도당(都堂)에서 작성할 때에 와서야 선생이 등록되었다.
〇 10월에 시강원 사서(侍講院司書)에 임명되었다.
〇 11월에 추천을 통해서 병조 좌랑에 임명되었다. - 과제(課製)로 동해무조석론(東海無潮汐論)을 지었는데, 백사(白沙) 이공 항복(李公恒福)이 그 글을 보고는 감탄하며 말하기를 “세상에 어떻게 이런 견식(見識)과 문장이 있단 말인가.”라고 하면서 선생을 한번 만나 보고 싶어 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이공이 바야흐로 재상의 지위에 있는 것을 혐의스럽게 여겨 만나려고 하지 않았는데, 이에 연평(延平) 이공 귀(李公貴)가 말하기를 “어찌 두 현인이 같은 시대에 살면서 끝내 만나 볼 수가 없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백사는 뒤에 선생을 만나 보고는 크게 기뻐하면서 마음을 기울여 허여(許與)했다고 한다.

38년 경술(1610) 선생 32세


39년 신해(1611) 선생 33세
〇 지제교(知製敎)에 선발되고,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에 임명되었다. - 옥당(玉堂)에서 차자(箚子)를 올릴 때마다 선생의 지위가 가장 낮았는데도 차자를 작성하는 사본(寫本)을 모두 선생에게 위임하였는데, 여러 동료들이 탄복하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이첨(李爾瞻)이 처음 권력을 잡고 나서는 장차 선생을 전조(銓曹)의 낭관(郞官)으로 천거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말하였다. 당시에 이이첨이 부제학으로 있으면서 선생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하며 극진하게 성의를 보였지만, 선생은 그가 간인(奸人)이라는 것을 알고는 끝내 응대하지 않았다. 정인홍(鄭仁弘)이 상소하여 회재(晦齋 : 이언적〈李彦迪〉)와 퇴계(退溪 : 이황〈李滉〉) 양현(兩賢)을 공격하자, 선생이 동료와 함께 차자를 올려서 정인홍의 사특함을 배척하였다. 그러자 이이첨이 장관(長官)의 신분으로 이견(異見)을 제기하며 혼자 차자를 올려서 정인홍을 옹호하였다. 당시에 이이첨과 정인홍 두 간인이 권세를 마음대로 휘둘렀으므로 선생은 마침내 폄직(貶職)되고 말았다.
〇 8월에 경시관(京試官)으로 관서(關西)에 갔다. - 삼화현(三和縣)의 기녀(妓女) 중에 재모(才貌)로 이름을 드날리는 자가 있었다. 그녀가 방기(房妓)가 되어 10여 일 동안이나 선생의 방에 있었는데, 선생은 끝내 그녀를 가까이하지 않고는 돌아갈 즈음에 절구(絶句) 한 수를 지어 주었다. 그녀가 사람들에게 “마음속으로 경복(敬服)하여 종신토록 잊을 수가 없다.”라고 말했다 한다.
〇 10월에 고산 찰방(高山察訪)으로 좌천되었다. - 고산은 북관(北關)의 대로(大路)에 위치하였는데, 선생이 법대로 집행하면서 폐단을 제거하자 역로(驛路)가 크게 소생하였다.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 한공 준겸(韓公浚謙)이 이때 감사(監司)로 재직 중이었는데, 선생을 특별히 대우하며 관심을 기울여 마침내 지기(知己)가 되었다. 참의(參議) 이윤우(李潤雨)가 경성 판관(鏡城判官)의 신분으로 선생을 방문하여 며칠 동안 머물면서 대화를 나누고 돌아가서는 사람들에게 “내가 이번 여행에서 조모(趙某)를 만나 보지 못했다면 취생몽사(醉生夢死)할 뻔했다.”라고 말했다 한다.

40년 임자(1612) 선생 34세
〇 선생에게는 《탁마록(琢磨錄)》이라는 하나의 소책자(小冊子)가 있었다. 이것은 월(月)과 일(日)을 배열하여 적어 놓고는 날마다 읽고 외운 글과 행한 일들을 기록해 둔 것이다. 예를 들면 위풍(魏風)을 몇 번 읽었다든가 《근사록(近思錄)》을 어디에서 어디까지 몇 번 읽었다는 식으로 매일 날짜별로 기록한 것인데, 그 사이에 공무(公務)를 행하고 접응(接應)하는 일이 있어도 이 일을 그만둔 적이 없었다. 이 책자는 선생이 초원(草原)에 있을 때 작성한 것이다. 당시에 선생은 도학(道學)이 이미 높은 경지에 이르렀고 연치(年齒)도 이미 장년에 들어섰으며 게다가 역마(驛馬)를 관리하는 정사를 행하고 있었는데도, 각고면려(刻苦勉勵)하며 공부에 매진함에 흡사 어려서 배우는 사람들이 일과(日課)를 정해 놓고 독서하는 것과 같았다. 이 밖에 《공서일록(攻書日錄)》과 같은 차기(箚記)를 보더라도 모두 날짜별로 일과를 정해서 기록해 두고 있다. 선생은 매우 노쇠해진 뒤라 할지라도 종일토록 열심히 연구하며 한순간도 헛되이 보내지 않았으리니, 또한 이런 종류의 책자가 많았을 것이다.

41년 계축(1613) 선생 35세
〇 벼슬을 그만두고 광주(廣州)의 선영(先塋)으로 돌아왔다. - 이때 광해의 혼란한 정사가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가운데 이이첨(李爾瞻) 등이 국구(國舅)와 대군(大君)을 무함하여 죽이고 잇따라 폐모론(廢母論)을 꺼냈으므로, 선생이 마침내 벼슬에 대한 뜻을 끊어버렸다.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 이공 시백(李公時白)이 선생에게 처신(處身)의 도리를 묻자 선생이 답하기를 “선비가 어떻게 국모(國母)가 없는 나라에서 뜻을 행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이공이 말하기를 “나도 과거 공부를 그만두겠다.”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10여 년에 걸쳐 관직을 제수하는 명이 이어졌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경성(京城)에 있는 집도 팔아 버리고 남겨 두지 않았다.

42년 갑인(1614) 선생 36세


43년 을묘(1615) 선생 37세
〇 월정(月汀) 윤공(尹公)의 상을 당해 조문하였다. - 월정을 조문하기 위해 처음으로 경성에 한 번 들어갔다.

44년 병진(1616) 선생 38세
〇 병조 좌랑과 홍문관 수찬에 임명되었다. -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45년 정사(1617) 선생 39세
〇 또 잇따라 홍문관 수찬과 병조 정랑에 임명되었다. -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46년 무오(1618) 선생 40세
〇 평안 도사(平安都事)와 대동 찰방(大同察訪)에 제수되었다. -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〇 호서(湖西)의 신창현(新昌縣) 도고산(道高山) 아래에 우거(寓居)하였다. - 선생이 집안이 너무도 가난한 처지에 기전(圻甸)에서는 의탁할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경성과 거리가 가까운 것을 싫어한 나머지 가속(家屬)을 신창으로 내려 보내고, 자신은 어버이 곁에 머물면서 왕래하며 우거하였다. 신창에서 선생은 희암(希庵) 현덕승(玄德升) 및 감사(監司) 유영순(柳永詢)과 서로 왕래하였다. 희암은 문장을 잘하고 높은 절조를 지니고 있어서 선생이 소싯적부터 애모하며 소중히 여겼다. 그리고 유공 역시 장자(長者)의 풍도를 지니고 있었으나 처음에는 서로 면식(面識)이 없었는데, 유공이 항상 선생을 흠모해 오다가 어느 날 저녁에 술을 가지고 내방하여 유숙(留宿)하면서 담화를 나누고 시를 읊고 돌아간 뒤부터 함께 왕래하며 매우 즐겁게 지냈다.
〇 박잠야(朴潛冶) - 지계(知誡) - 및 권만회(權晩悔) - 득기(得己) - 와 글을 주고받으며 격물(格物)에 대한 설을 논하였다. - 박공과 권공이 격물에 대한 뜻을 강론하면서 양자 모두 선생에게 글을 보내 질문하자, 선생이 매우 상세하게 시비를 가려 변론하였는데 그 글이 문집에 보인다. 박공은 뜻이 독실하고 실천에 힘썼으므로 선생이 소싯적부터 벗으로 친하게 지냈다. 그리고 권공은 자신의 몸을 깨끗이 닦고 고난 속에서도 절조를 굳게 지키면서 당시에 벼슬하지 않고 남양(南陽)에 물러나 거하고 있었다. 그래서 선생이 서로 만나 보지는 못하였으나 바로 벗으로 허여하고 정신적인 우정을 나누었는데, 뒤에 권공이 세상을 떠났을 적에 선생이 그 상(喪)을 길에서 접하고는 글을 지어 제사 지냈다.

47년 기미(1619) 선생 41세


48년 경신(1620) 선생 42세
〇 도원수(都元帥)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 유천(柳川) 한공 준겸(韓公浚謙)이 원수가 된 뒤에 계청(啓請)하여 선생을 종사관으로 삼고는 선생에게 비장(裨將)을 파견하여 글을 전하면서 강력하게 요청하고, 또 조정에 계문(啓聞)하여 3년 동안이나 계속해서 선생을 다그치며 재촉하였으나, 선생은 세 차례에 걸쳐 글을 보내 극력 사양하면서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선생이 보낸 글 가운데에 “옛날 구양공(歐陽公)이 범 문정공(范文正公)의 요청을 사양하면서 ‘함께 물러날 수는 있어도 함께 나아갈 수는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내가 명공(明公)과 함께 동시에 물러나 초야에서 10년을 지냈고 보면 함께 물러났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함께 나아가지 않는다고 해도 좋지 않겠습니까.”라는 내용이 있었다. 이에 한공이 탄식하면서 “조촐하고 깨끗한 몸을 혼탁한 이 시대에 더럽히지 않으려 하고 있으니, 내가 어떻게 강요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당시에 적신(賊臣)이 잇따라 큰 옥사(獄事)를 일으켜서 자기들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죄를 억지로 조작하여 처형하였으므로, 친척과 지구(知舊)들이 모두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여 선생에게 한번 출사(出仕)하도록 많이 권하였으며 심지어는 이익으로 꼬드기는 사람도 있었으나, 선생은 끝까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희종황제(熹宗皇帝) 천계(天啓) 원년 신유(1621) 선생 43세
〇 조사(詔使) 제술관(製述官)으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 선생은 기미년(1619, 광해군 11) 이후로 해마다 옥당(玉堂)과 병조 정랑의 명을 받았다. 그러다가 이때에 와서 또 제술관으로 급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은 것이다. 당시에 명류(名流)로서 출사하지 않은 이가 5인이었으므로 이들을 일컬어 5열사(烈士)라고 하였다. 그런데 관직을 제수하며 부르는 일이 빈번하고 급했는데도 끝내 응하지 않은 이는 오직 선생 한 사람뿐이었다.

2년 임술(1622) 선생 44세
〇 《대학곤득(大學困得)》 등 제서(諸書)를 찬술(撰述)하였다. - 선생은 약관(弱冠)의 나이 때부터 이 학문에 전심(專心)하였다. 사서(四書)를 읽으며 터득한 것이 있을 때마다 적어서 모은 기록이 차츰 쌓여 한 책씩 이루어졌는데, 이를 여러 차례에 걸쳐 수정하고 보완하였다. 그러다가 이때에 이르러 《대학곤득》과 《중용곤득(中庸困得)》과 《논어천설(論語淺說)》과 《맹자천설(孟子淺說)》 등의 글이 모두 하나의 책으로 완성된 것이다. 여기에는 모두 서설(序說)이 붙어 있는데, 모두 문집에 수록되어 있다. 선생은 두문불출(杜門不出)하고 자신의 절조를 지키면서, 남들은 견딜 수 없는 기한(飢寒)과 곤고(困苦)한 생활을 하면서도 아무 걱정 없이 담박하게 지냈다. 그리고는 경전의 뜻을 깊이 탐색하여 그 의리를 드러내 밝혔는데, 세간의 어떤 일도 이러한 즐거움을 바꾸거나 그 마음을 동요시킬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원근(遠近)의 학자들이 모두 존경하고 신봉하는 가운데 온 세상 사람들이 마치 태산북두(泰山北斗)처럼 선생을 우러러 사모하였다. 그러니 당시의 비록 혼란한 조정에서도 그래도 선생을 경모(敬慕)할 줄을 알았는데, 수상(首相) 박승종(朴承宗)이 올린 차자(箚子)에도 “현재 초야에 있는 현인 가운데 모(某)는 꼼짝하지 않고 누워 있기만 할 뿐 일어나지 않고 있다.”라는 말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또 거의(擧義)한 제공(諸公)들 대부분이 선생의 지구(知舊)들이었으므로 모두 선생에게 통고하려고 하였으나, 연양(延陽) 이공 시백(李公時白)이 “초연히 세상 밖에서 노니는 사람에게 위험한 일로 폐를 끼칠 수는 없다.”라고 말해서 그만두었다고 한다.

3년 인조대왕(仁祖大王) 원년 계해(1623) 선생 45세
〇 3월에 이조 좌랑에 임명되었다. -13일에 인조대왕이 즉위하였고, 14일에 전랑(銓郞)을 임명하였다. 거의한 제공이 초정(初政)을 행하기에 앞서 “전조(銓曹)에는 당세의 첫째가는 자를 등용해야 한다.”라고 의논하고는 맨 먼저 선생을 그 자리에 배치하니, 19일에 입경(入京)하여 사은(謝恩)하였다. 이때 유신(維新)하는 초기를 당하여 공도(公道)를 크게 열어 혼조(昏朝)의 더러운 무리를 모조리 축출하고 이름과 행실이 있는 자들을 발탁하였으며 한 가지 선(善)이나 기예만 있어도 모두 거두어 녹용(錄用)하였는데, 그러한 일들 대부분이 선생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〇 반정(反正)하던 날에 광해(光海)에게 상변(上變)한 자가 있었으므로 거사가 하마터면 위태로워질 뻔하였다. 이에 반정한 뒤에 여러 사람들이 의논하여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선생이 말하기를 “이것은 걸(桀)의 개가 요(堯) 임금을 보고 짖어댄 격이니, 죽이면 안 된다.”라고 하니 그 자가 이 때문에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〇 또 윤대(輪對)하던 날에 상에게 아뢰기를 “전하의 성스러운 지혜로 말하면 누구보다도 뛰어나다고 하겠습니다만, 자질의 아름다움은 한계가 있는 반면에 학문의 유익함은 한계가 없는 것입니다. 한당(漢唐) 이하의 임금 가운데에는 자질이 아름다워서 치적을 이룬 자도 있습니다만, 삼대(三代)의 정치에 미칠 수 없었던 것은 제왕(帝王)의 학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삼대 이상의 정치로 자신의 목표를 삼으소서. 미천한 신 역시 감히 삼대 이하의 정치를 전하에게 기대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선생이 지우(知遇)를 받은 초기에 맨 먼저 자기 마음속으로 터득한 것을 바탕으로 상에게 큰 뜻을 품도록 권면하였는데, 상도 이를 가납(嘉納)하였다. 〇 송강(松江) 정공 철(鄭公澈)이 오래도록 죄적(罪籍)에 들어 있었다. 그러다가 이때에 이르러 그의 아들 종명(宗溟) 등이 신원(伸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이론(異論)을 제기하며 상의 뜻을 동요시키는 자가 있었다. 이에 선생이 그 억울함을 극력 진달하여 마침내 관작을 회복할 수 있게 하였다. 〇 폐세자(廢世子)가 위리(圍籬)를 뚫고 도망친 사건이 발각되자 조정에서 자진(自盡)하도록 하였다. 이에 영상(領相) 이공 원익(李公元翼)과 장령(掌令) 윤공 황(尹公煌)과 교리(校理) 이공 준(李公埈)이 불가하다고 반대하자 대간(臺諫)이 장차 공격하려고 하였는데, 선생이 공격하면 안 된다고 극력 말한 결과 마침내 그 논의가 중지되었다.
〇 재생선혜청(裁省宣惠廳)의 도청(都廳)을 겸하였다. - 이때 폐정(弊政)을 경장(更張)할 것을 의논하여 충청 · 전라 · 경상 · 강원의 4개 도에 대동법(大同法)을 설행하기로 하였다.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 이상 원익(李相元翼)이 이 일을 주도하면서 상에게 아뢰어 선생이 도청을 겸하여 그 일을 전담하게 하였다. 이에 선생이 밤낮으로 강구하며 정성을 다하여 계획을 세운 결과 법제(法制)가 이루어져서 바야흐로 시행하게 되었다. 그런데 방납(防納)을 하는 호강(豪强)하고 교활한 무리가 서로 근거 없는 말을 지어내어 동요시켰고, 당로자(當路者) 중에도 이 법을 좋아하지 않는 자가 있어서 근거 없는 의논을 빌미로 삼아 극력 저지하였다. 선생은 이 대동법이야말로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국가의 재정을 부유하게 하는 대정(大政)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입대(入對)하여 대동법을 시행해야 한다고 극력 진달하였으며, 또 상소하여 극언을 하였다. 그 상소의 대략에, “이 법도를 제정한 것은 백성에게 항산(恒産)이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맹자(孟子)가 말한 왕도 정치(王道政治)라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일 따름이니, 이른바 10분의 1의 세금을 걷는다는 것도 모두 곡물(穀物)을 가지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이재(理財)에 법도가 없어서 전세(田稅)는 가볍고 공물(貢物)은 무거운데도 곡물은 조금 징수하고 잡물(雜物)을 부과(賦課)하니, 그 때문에 온갖 병폐가 발생하여 상하(上下) 모두 곤욕을 치르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계책으로는 오직 그 법제(法制)를 바꾸어 상하의 위급한 상황을 구제해야 할 것인데, 지금 이 선혜청의 법제야말로 옛 제도에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결(田結)에서 거두는 것을 모두 미포(米布)로 하고, 중외(中外)의 수용(需用)도 이것을 가지고 분배해 주며, 또 남는 것은 저축해서 흉년이나 재해(災害)에 대비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징수하는 수량은 10분의 1의 세금보다도 가벼우니, 이는 실로 맹자가 말한 선왕(先王)의 정치와 은연중에 합치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상소 말미에 또 “법제가 갖추어졌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저절로 행해질 수는 없는 일이요, 천덕(天德)을 소유해야만 왕도(王道)를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에 따라 선과 악이 나뉘는 도리와, 세도(世道)의 치란(治亂)에 관한 기미(幾微)를 깊이 연구하소서. 그리하여 현인을 가까이하고 학문을 열심히 하도록 더욱 노력하면서, 날마다 유정유일(惟精惟一) · 극기복례(克己復禮) · 격물치지(格物致知) · 성의정심(誠意正心)의 공부에 매진하시어 그것으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으로 삼으신다면, 옛날 제왕의 성대한 치적을 다시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상이 답하기를 “이해관계를 상세히 설명하여 나의 의혹을 풀어 주었으니 내가 참으로 기쁘게 생각한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대동법이 마침내 폐지되지 않게 되었다.
〇 호당(湖堂)에 들어가 독서하는 인원에 선발되었다. - 이때 중국 장관(將官)의 자게(咨揭)가 몰려들자, 승문원(承文院)이 선생과 최공 명길(崔公鳴吉)과 장공 유(張公維)를 제술관(製述官)으로 삼아 문서를 전담하게 해 줄 것을 청하였다.
〇 9월에 승진하여 이조 정랑에 임명되었으며, 교서관 교리(校書館校理)와 혜민서 의학교수(惠民署醫學敎授)를 겸하였다. - 또 훈련도감 도청(訓鍊都監都廳)도 겸하였다.
〇 겨울에 왕명을 받들고 양호(兩湖) 지방에 내려갔다. - 대동법(大同法) 시행에 관한 일로 내려간 것이다. 가는 곳마다 부로(父老)들을 초치(招致)하여 대동법의 이해관계에 대해서 물어보며 이 법의 뜻을 선포하니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복명(復命)을 하고는 다시 상소하여 대동법 시행의 편리한 점을 극력 진달하였다.

4년 갑자(1624) 선생 46세
〇 2월에 공주(公州)로 호가(扈駕)하였다. - 이괄(李适)이 군대를 동원하여 관서(關西)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상이 도성을 나와 공주로 몽진(蒙塵)할 적에 선생이 호종(扈從)하였다. 한강(漢江)을 건널 때에 선생이 상신(相臣)에게 고하기를 “집이 길옆에 있으니 노친(老親)을 뵙고 가고 싶다.” 하고는, 마침내 집에 이르러 하직 인사를 하고 떠났다. 이때 아들 복양(復陽)이 아직 어렸는데, 그가 읽고 있는 책에 제목을 써 주면서 말하기를 “국가가 불행하게 되면 나는 응당 죽을 것이다. 인생에서 학문보다 귀한 것은 없으니, 비록 상란(喪亂)과 전패(顚沛) 중이라도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 너는 부디 힘쓰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적이 패하자 호가하여 도성으로 돌아왔다.
〇 3월에 승진하여 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에 임명되고, 다시 사인(舍人)으로 승진하였다. -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 이상(李相)이 천거한 것이다. 완평이 매양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조 사인(趙舍人)은 지금의 세상 사람이 아닌데, 옛사람들 중에서도 그 짝을 찾기가 힘들다. 경륜(經綸)의 인재는 조정에서 단지 이 한 사람밖에 없다.”라고 했다 한다.
〇 5월에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에 임명되었다. - 얼마 뒤에 사인(舍人)으로 복귀하였다.
〇 또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에 임명되었다.
〇 6월에 응교(應敎)에 임명되고 나서 전한(典翰)으로 승진하였으며, 다시 직제학(直提學)으로 승진하였다. - 경연(經筵)에서 《논어》를 진강(進講)할 적에 선생이 저술한 《대학곤득》과 《논어천설》을 바치면서 소를 올려, 학문을 하고 정치를 하는 대법(大法)을 논하였다. 그리고는 아뢰기를 “전하께서 참으로 성현의 학문을 자신의 임무로 삼으신다면 그 규모(規模)와 문로(門路)와 방법과 순서가 모두 두 책에 구비되어 있으니, 온축(蘊蓄)된 그 의리를 연구하여 나의 지식을 개발하고, 신심(身心)과 일용(日用) 사이에 살펴서 강론한 그 이치를 실천할 수 있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한다면 은현(隱見)과 표리(表裏) 모두가 명백하고 순수해져서 정령(政令)으로 시행하고 사업으로 드러내는 사이에 천지(天地)의 조화(造化)처럼 대공지정(大公至正)하지 않은 것이 없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니, 상이 가납하였다.
〇 체차(遞差)되어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제수되었다. - 정언(正言) 홍호(洪鎬)가 상소하여 박승종(朴承宗)이 광해(光海)를 위해서 죽은 만큼 적몰(籍沒)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하자, 양사(兩司)가 번갈아 그의 죄를 논하였다. 이에 선생이 상차(上箚)하여 홍호의 발언이 비록 망녕되더라도 언자(言者)에게 죄를 주어 언로(言路)를 막으면 안 된다고 말하였는데, 헌부(憲府)가 이를 논하여 체차된 것이다.
〇 9월에 사인(舍人)에 임명되었다.
〇 10월에 전한(典翰)에 임명되었다.
〇 12월에 직제학에 임명되었다. - 인조조(仁祖朝)에 이 직책을 맡은 이는 오직 선생 한 사람뿐이었다고 한다.
〇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승진하였다.

5년 을축(1625) 선생 47세
〇 정월에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전직(轉職)되었으며, 선혜청 부제조(宣惠廳副提調)를 겸하였다. -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할 적에 당초 전지(田地) 1결(結)당 미곡 16두(斗)씩 거두기로 정하였고, 경중(京中)과 외방(外方)의 수용(需用)이 모두 그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뒤에 단지 10두만 거두어 경중의 공물(貢物)의 비용으로 삼고, 외방의 수용은 우선 예전의 규례대로 따르기로 하였다. 그래서 공물의 방납(防納)에 따른 폐단은 없어졌다 하더라도, 탐관오리들이 불균등하게 처리하는 폐해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에 선생이 진계(陳啓)하여, 미곡 5두를 별도로 더 거두어 외방의 수용으로 삼도록 제도화할 것을 청하였다. 상이 이 제안을 의논하도록 내려 보냈으나,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있었으므로 그만 폐기되고 행해지지 못하였다. 〇 대동법의 설행은 당초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 이공(李公)에게서 나온 것으로 이미 경기 지방에 시행되었는데, 백성들이 이를 매우 편하게 여겼다. 선생이 오랫동안 향곡(鄕曲)에 있으면서 민간의 폐막(弊瘼)을 익히 보아 왔기 때문에, 지금 바야흐로 폐막을 개혁하고 민생을 구제할 방법으로는 이 법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단 이 일을 전담하게 되자 마음을 쏟아 헤아리고 절목(節目)을 강정(講定)하면서 지극히 상세하게 갖추어 놓았으므로 시행한 지 1년 만에 벌써 효과를 보게 되었다. 그런데 상신(相臣) 중에 이 대동법을 편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있어서 극력 저지하며 동요시키자, 완평도 당초의 의견을 견지하지 못하고 마침내는 폐지할 것을 상주(上奏)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선생이 또 상소하여 쟁론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완평이 선생의 소를 보고 탄식하기를 “우리 같은 사람들은 참으로 조 승지(趙承旨)의 죄인이다.”라고 하였다.
〇 2월에 형조 참의에 임명되었다.
〇 4월에 다시 우부승지에 임명되었다가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승진하였다. 유지(有旨)에 응하여 봉사(封事)를 올렸다. - 상이 재이(災異) 때문에 하교하여 구언(求言)하자 선생이 봉사를 올렸다. 맨 처음에 학문에 힘쓰고 선을 따라야 하는 도리를 말하고, 그 다음에 인재를 얻어서 정치를 행하는 방법을 말하고, 마지막에 폐막을 개혁하고 민생을 구제하는 방도를 말하였는데, 모두 수천 언에 이르렀다. 택당(澤堂) 이식(李植)이 정원(政院)에 있으면서 역시 소를 갖추어 올리려고 하다가 선생의 이 소를 보고는 말하기를 “이 소야말로 진정 세상을 경륜(經綸)하는 글이요, 시폐(時弊)를 구제하는 의논이다. 우리들의 소는 올릴 것도 없다.”라고 하였다. 이때 호패법(號牌法)을 설행하여 민간이 크게 동요하였으므로 선생이 소의 말미에 시행하면 안 된다고 말하였는데, 뒤에 결국 폐지되었다. 〇 선생이 입시(入侍)할 때마다 반드시 성인의 학문과 선왕(先王)의 정사를 가지고 상에게 권면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떻게 하면 조정이 화합하겠는가?”라고 하자, 선생이 대답하기를 “화합이라고 하는 것은 구차하게 동의하는 것을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조정의 일 처리가 한결같이 공도(公道)에서 나오게 되면 굳이 화합하려고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자연히 화합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〇 6월에 우승지로 승진하고, 또 좌승지로 승진하였다. -10월에 다시 우승지가 되었다가 체직되고, 12월에 다시 좌승지에 임명되었다. 선생이 오래도록 근밀(近密)한 자리에 있으면서 일마다 바르게 진언하였고, 교명(敎命)에 불가한 점이 있으면 번번이 봉환(封還)하였다. 백성 중에 억울한 일을 당한 자가 있으면 매번 선생의 말 머리 앞에서 호소하곤 하였는데, 그때마다 선생이 자세히 살펴보고는 상에게 아뢰어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 준 일이 많았다. 법률상 사형에 해당되지 않는 죄인에게 특별히 사율(死律)을 적용하자, 선생이 법을 고수하며 논주(論奏)하고는 형을 집행할 무렵에 뒤쫓아 달려가 막으니, 도성 사람들이 차탄(嗟歎)하였다.

6년 병인(1626) 선생 48세
〇 6월에 도승지로 승진하였다. - 선생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상이 답하기를 “그대의 청검(淸儉)과 재학(才學)으로 볼 때 참으로 이 직임에 합당하니 사직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이때에 국중(國中)의 승군(僧軍)을 동원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축조하였다. 이에 선생이 상소하여, 승려들의 환속(還俗)을 허락하고 군역(軍役)에 충정(充定)하지 못하게 하여 그들의 노고에 보답하고 그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도록 청하였다. 상이 이 건의를 조정에 내려 보냈으나 기각하고 시행하지 않았다.
〇 7월에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으로 승진하였다.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 이때에 서쪽 변방에 일이 많이 발생하였다. 이에 선생이 상소하여 사의(事宜)를 진달하였는데, 첫째는 재해를 입은 해변의 백성을 구제하는 것이요, 둘째는 요동(遼東) 백성을 구제하는 것이요, 셋째는 강변의 변란을 대비하는 계책이었다. 상이 이 건의를 비변사(備邊司)에 내려 보내 의논하게 하였으나 채용되지 않았다. 선생이 또 상소하여 아뢰기를 “지난번에 서쪽 변방에 대한 일을 진달드렸으나 채납(採納)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물론 매사에 자신의 의견이 옳다고 감히 말씀드리지는 못하겠습니다마는, 요동의 백성들을 이주(移住)시키는 하나의 계책만큼은 관계되는 바가 지극히 중하기에 감히 이렇게 다시 논하게 되었습니다. 임진년의 왜란 때에 중국 조정이 큰 은혜를 베푼 덕택에 국가가 재건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동방 사람들이 생육(生育)하며 장양(長養)하고 군신(君臣)과 부자(父子)가 각자 안정을 찾을 수 있게 된 것은 모두 신종황제(神宗皇帝)가 구제해 준 덕분이라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나라 사람들로서는 몸이 부서지고 뼈가 가루가 된다 할지라도 보답할 길이 없다고 할 것인데, 지금 장차 죽게 된 십만 명의 이 요동 백성들의 목숨을 살려 준다면 그 은혜에 만분의 일이나마 갚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요동 백성들로서도 죽을 위기에서 살아난 그 은혜에 감격하는 마음이 어떠하겠으며, 천하에서 이 소문을 들으면 의롭게 여김이 또 어떠하겠습니까. 지금 이 계책을 의아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내지(內地)가 피해를 입을까 염려해서입니다. 그러나 지난 임진년에 중국 조정에서 십만의 군대를 동원하고 수십만의 양식을 운송하여 만 리 멀리 정벌을 행하였으니, 당시에 그 피해가 어찌 크지 않았겠습니까. 지금 요동 백성들을 열읍(列邑)에 나누어 이주시키는 데 따른 피해를 따진다면 과연 얼마나 된다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이런 조그마한 피해를 꺼려서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단 말입니까.”라고 하니, 상이 이 일을 다시 의논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 계책은 즉시 시행되지 못하였는데, 요동 백성들은 그 사이에 이미 선생이 요량했던 대로 내지로 많이 유입(流入)하여 생업을 영위하였다.
〇 8월에 개성 유수(開城留守)에 임명되었다. - 선생이 집안이 빈한했기 때문에 어버이 봉양을 위해서 외방으로 나가기를 구한 것이다. 정사를 행함에 대체(大體)를 견지(堅持)하면서 오로지 인서(仁恕)를 위주로 하자 사람들이 스스로 감화되었다. 정세(征稅) 중에 과중한 것은 견감(蠲減)해 주고, 옥송(獄訟) 중에 억울하게 지체된 것은 소결(疏決)해 주고, 간사하고 교활하게 피해를 끼치는 자는 조금도 용서 없이 치죄(治罪)하고, 청탁을 하는 것은 모두 들어주지 않았다.

7년 정묘(1627) 선생 49세
〇 정월에 후금(後金)의 군대가 침입하였다. 그들이 물러가자 강도(江都)로 들어가서 문후(問候)하였다. - 적병이 양서(兩西) 지방을 유린하고 평산(平山)에 이르자 선생이 주선(舟船)을 수습하여 사녀(士女)들을 모두 해도(海島)로 옮겨 주니 백성들이 그 덕분에 목숨을 온전히 보전하였다. 그리고는 선생이 척후(斥候)를 널리 설치하여 적의 원근(遠近)과 허실(虛實)을 정탐하였으므로 체찰사(體察使) 장공 만(張公晩)이 그 정보를 얻어 활용할 수 있었다. 이때 대가(大駕)가 강도에 주재(駐在)하였으므로 적병이 물러간 뒤에 들어가 문후하고 돌아왔다.
〇 평산산성(平山山城)을 수축해서 경도(京都)의 울타리로 삼자고 상소하여 청하였다. - 선생이 아뢰기를 “적병이 물러갔다고 하더라도 화호(和好)를 믿기 어려우니, 비어(備禦)할 계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평산산성은 침입하는 길목에 위치한 요충(要衝)이요 또 형세로 볼 때 지킬 수가 있으니, 신에게 맡겨 주셨으면 합니다.”라고 하고, 수비할 방략(方略)을 강구하여 올렸다. 그러나 조정에서 그 계책을 활용하지 못하였다.
〇 12월에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에 임명되어 조정으로 돌아왔다.

의종황제(毅宗皇帝) 숭정(崇禎) 원년 무진(1628) 선생 50세
〇 정월에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에 임명되었다. - 이때 이인거(李仁居)와 유효립(柳孝立)이 서로 잇따라 모반(謀反)을 하다가 복주(伏誅)되었으므로 이들을 체포하고 고발한 자들의 공을 논하였다. 그런데 소무(昭武)와 영사(寧社)의 두 공신(功臣)을 책훈(策勳)할 적에 허위로 외람되게 하여 공정하지 못한 것이 많았으므로, 대간(臺諫)이 논하여 녹훈(錄勳)을 감정(勘定)한 것을 개정하도록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이에 선생이 차자(箚子)를 올려 아뢰니, 상이 이미 감정했다는 이유로 따르지 않았다. 당시에 이름 있는 재상으로서 허위로 원훈(元勳)이 된 자가 있었으므로, 선생이 또 차자를 올려 곧장 배척하며 극력 쟁집(爭執)하였다. 그 결과 마침내 감정한 것을 개정하게 되었는데, 시론(時論)이 이 일을 옳게 여겼다.
〇 별도로 하나의 사당을 세워서 예제(禰祭)를 받들게 하는 것은 예법에 어긋난다고 차자를 올려 논하였다. - 이에 앞서 원종(元宗)의 왕후를 계운궁(啓運宮)이라고 칭하였다. 그 상을 당했을 적에 선생이 이에 합당한 복의(服議)를 지어서 말하기를 “《의례(儀禮)》의 전(傳)에 나오는 ‘대종(大宗)의 중한 자리를 잇는 책임을 맡은 경우, 소종(小宗)에 대해서는 상복의 등급을 낮춰야 한다.〔持重於大宗者 降其小宗也〕’라는 조문(條文)을 따라야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차자를 올려 그 복의를 바치면서 아뢰기를 “예로부터 종묘의 대통(大統)을 이을 경우에는 본친(本親)에 대해서 존봉(尊奉)하는 도리를 감히 다하지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과도하게 높여서 받들 경우에는 종묘에 대해서 전념하지 못하는 잘못이 있게 되고, 본친에 대해서도 예법을 위배하는 잘못이 있게 되어 양쪽 모두에 효성을 바치는 도리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병조 참판 최명길(崔鳴吉)이 상소하여 별도로 하나의 사당을 세워서 예제(禰祭)를 받들게 할 것을 청하였으므로, 선생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이와 같이 할 경우에는 대종과 소종 그리고 소후(所後)와 본생(本生) 모두에 대해서 후사(後嗣)가 되는 셈이니, 이는 예경(禮經)을 위배하고 예법을 그르치는 것으로서 윤리를 크게 해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최공이 또 상소하여 쟁론하니, 선생이 다시 수천 언의 차자를 올려 변론하였다.
〇 3월에 차자를 올려 계운궁의 부제(祔祭)에 대해서 논하였다. - 초상(初喪) 때부터 상의 동생인 능원군(綾原君) 보(俌)를 상주(喪主)로 삼았다. 그리하여 우(虞) · 졸곡(卒哭) · 상(祥) · 담(禫)의 제사를 모두 능원군이 주관하였는데, 부제를 올릴 때에 와서는 상 자신이 주관하려고 하였다. 이에 선생이 동료와 함께 네 차례나 차자를 올려 그 불가함을 간쟁하였다.
〇 이조 참판에 임명되고 비변사 당상을 겸하였다. - 판서가 유고(有故) 중이었으므로 선생이 항상 독자적으로 정사를 행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인재의 임용을 모두 지극히 공정하게 하였으며, 특히 수령(守令)을 신중하게 가리려고 힘썼다. 비변사가 계청(啓請)하여 선생을 당상으로 삼고 유사(有司)의 임무를 살피게 하였는데, 이때부터 항상 이 직무를 겸대(兼帶)하게 되었다.

2년 기사(1629) 선생 51세
〇 4월에 사직하여 체차(遞差)된 뒤에 호군(護軍)이 되고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를 겸하였다.
〇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 체차되어 호군이 되었다.
〇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 또 질병으로 사직하여 체차되었다.
〇 5월에 부제학(副提學)에 임명되었다. - 병조 판서 이공 귀(李公貴)가 차자를 올려 붕당(朋黨)에 대해 논하면서 주자(朱子)가 유정(留正)에게 보낸 서한의 글을 인용하였는데, 상이 “주자의 말에도 폐단이 없을 수 없다.”라고 답하였다. 이에 선생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전하께서 선현이 말한 뜻이 어디에 있는지 제대로 탐구하지도 않으신 채 무턱대고 단안을 내려 폐단이 있다고 하시니, 이는 이치를 살피는 것이 소략할 뿐만이 아니라 성현을 경시하고 소홀히 여기는 잘못을 범하는 것입니다.”라고 하고, 아울러 주자가 그렇게 말한 본의를 매우 자세히 드러내 밝히니, 상이 답하기를 “경의 말이 옳다.”라고 하였다. 교리 나공 만갑(羅公萬甲)이 일찍이 사람들과 함께 용사(用事)하는 자의 잘못을 논하자, 우상(右相)인 김류(金瑬)가 노하여 상에게 아뢰면서 나만갑이 부박(浮薄)하니 제재하기를 청하였다. 상이 나만갑을 유배 보내라고 명하니, 이에 선생이 차자를 올려 언어 때문에 죄를 주는 것은 불가하다고 말하였고, 대제학(大提學)인 장공 유(張公維)도 상소하여 나만갑을 신구(伸救)하였다. 상이 노하여 장유를 좌천시켜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삼으니, 선생이 상소하여 선인(善人)을 배척하여 물리치는 것과 언로(言路)가 막혀 끊어지게 하는 것은 결코 국가의 복이 못 된다고 아뢰었으나 아무 회답이 없었다. 이에 선생이 사체(辭遞)하여 호군(護軍)이 되었다.
〇 8월에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임명되었다.
〇 9월에 병조 참판에 임명되었다. 특명으로 대사성도 아울러 겸하였다. - 대사성은 바로 실직(實職)으로서 겸대(兼帶)하는 예가 없었다. 그래서 선생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상이 온유한 말로 비답을 내려 허락하지 않았다. 이로부터 선생이 항상 대사성의 직책을 겸대하게 되었다. 선생이 글을 지어 관학(館學)의 유생들을 효유(曉諭)하였는데, 그 대략에 “대저 하늘과 땅의 빼어난 기운을 얻어서 사람이 되었으니, 그 본성이 선한 점에서는 요순(堯舜)과 다를 것이 없다. 그리고 요행히 서민(庶民)이 되지 않고 사대부(士大夫)의 족속이 되었으며, 또 다행히 다른 생업에 종사할 필요가 없이 글을 읽는 유사(儒士)가 되었다. 따라서 진정으로 희성(希聖)하고 희현(希賢)하는 뜻을 지닐 수만 있다면 모두 성인이 되고 현인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의 선비가 된 자들이 처음 서책을 손에 쥘 때부터 단지 과거에 급제하여 귀한 신분의 현달(顯達)한 사람이 되겠다는 마음만 품고 있을 뿐 성현의 학술이 있는 것은 다시 알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온 세상이 모두 그러한 형편이다. 이것이 바로 학문을 제대로 닦고 도덕을 제대로 행하는 선비가 세상에 다시 나타나지 않은 가운데 사풍(士風)이 날이 갈수록 퇴폐해지고 세도(世道)가 날이 갈수록 더욱 오염되는 이유이다. 삼경(三經)과 사서(四書)는 세상에서 과거 시험을 보는 자료로 삼아 온 지가 오래되었으므로 지금 모두 과거 공부를 하는 서책으로 간주하고 있다. 다만 송(宋)나라 선현(先賢)들의 글만이 과거 공부와 상관이 없는데, 그중에서도 《근사록》이라는 하나의 책으로 말하면 그 이치가 광대하게 모두 구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말이 명백하면서도 절실하고, 또 그 글이 간략해서 과정을 마치기가 용이하다. 따라서 이 하나의 책에 대해서 숙독하고 깊이 생각한다면 성현의 심사(心事)와 학문의 문로(門路)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하고 나서 사서(四書)와 시서(詩書) 등의 서책을 가져다 읽으면, 그 어의(語意)가 모두 마음속으로 자연히 이해가 되어 마치 부형(父兄)이 집안일을 일러 주는 것을 듣는 것처럼 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이에 대해서 그 의미를 터득하게 되면 세간의 다른 사업이나 득실(得失) · 영욕(榮辱) 따위는 모두 마음에 담아 둘 가치가 없어질 것이다. 대개 성현이 이른 지위야말로 우리 인간이 일생에 걸쳐 수행해야 할 사업인데, 그 문으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근사록》으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성상께서 나의 불초함을 알지 못하시고 이 임무를 맡기셨다. 내가 일단 이 직위에 있게 된 이상 어떻게 감히 성현의 사업을 가지고 제생(諸生)에게 기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내가 제생과 함께 이 《근사록》 한 책을 공부해 보려고 한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근사록》을 가지고 제생을 교수(敎授)하니, 그 풍도를 듣고 학문의 길로 들어서서 선(善)을 향해 흥기하는 자가 많이 나왔다. 선생이 또 차자를 올려 학정(學政)을 논하고, 이와 함께 가르침을 베푸는 절목(節目)을 하나하나 진달하여 올렸다.
〇 도승지로 옮겼다. - 이때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선생이 장차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니, 선생이 그를 머물러 있게 하기를 주청(奏請)하며 아뢰기를 “오늘날 숙덕(宿德)으로 그보다 뛰어난 사람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가 산림(山林)에 있다고 하더라도 응당 불러오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가 이미 올라왔는데 그의 거류(去留)를 방임하여 그가 있는지 없는지도 몰라서야 어찌 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〇 11월에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3년 경오(1630) 선생 52세
〇 2월에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 상이 종묘 원내(垣內)의 수목에 벼락이 떨어지자 하교(下敎)하여 구언(求言)하였다. 선생이 차자를 올려 중외(中外) 민생의 곤고(困苦)하고 수원(愁怨)한 정상을 극력 진달하면서, 포탈(逋脫)한 세금의 징수와 군병의 징집을 정지할 것과, 각 아문(衙門)에서 장사를 하여 소요를 일으키고 백성을 침해하는 일을 일절 금단(禁斷)할 것과, 경중(京中)의 상인이 바치는 물건도 모두 값을 따져서 가격대로 계산해 줄 것을 청하였다. 또 풍정(豐呈)의 큰 잔치를 설행(設行)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과, 능침(陵寢)에 반복해서 다섯 차례나 제향(祭享)을 올리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을 아뢰었다. 이에 상이 가납(嘉納)하고 대부분 그렇게 시행하였으나, 풍정만은 그대로 설행하였다. 사간(司諫) 윤공 황(尹公煌)이 풍정 때에 외간의 부녀자가 함부로 궁에 들어와서 난잡해진다고 논하면서 궁중의 금법(禁法)을 엄히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노하여 그를 체직시켰다. 이에 선생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궁중과 관련된 일은 사람들이 말하기 어려워하는 바이니, 언로(言路)가 마침내 막히고 아첨하는 풍조가 이루어질까 걱정됩니다.”라고 하였다. 풍정을 마치고 제도(諸道)의 기녀(妓女)를 해산하여 돌려보낼 즈음에 장악원(掌樂院)이 그들을 머물러 두어 풍악을 익히게 해 줄 것을 주청하였다. 이에 선생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중국을 어지럽히는 변란이 일어나서 황성(皇城)이 포위되기까지 하였으므로 아직도 계엄(戒嚴)이 해제되지 않고 있으니, 지금은 군신(君臣)이 모두 걱정하고 두려워하며 날을 보내야 할 때입니다. 안으로 경내(境內)의 일을 살펴보거나 밖으로 중국의 형세를 살펴보면 모두 통곡할 만한 일들뿐이요 즐거워할 만한 일은 볼 수가 없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오늘날의 급무는 여악(女樂)을 교습하는 데에 있지 않을 듯싶습니다.”라고 하니, 상이 마침내 해산하여 돌려보내라고 명하였다. 〇 4월에 피도(皮島)의 항장(降將) 유흥치(劉興治)가 그 도독(都督) 진계성(陳繼盛)을 살해하였다. 그 보고가 이르자 상이 묘당(廟堂)의 제신(諸臣)과 의논하여 토벌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 뒤에 듣건대 유흥치가 명(明)나라 조정에 진주(陳奏)하여 사기(事機)가 많이 달라졌다고 하였으므로 제신 대부분이 출병(出兵)을 철회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모두 들어주지 않았다. 이에 선생이 차자를 올려 출병을 철회해야 하는 이유를 분명히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지만 군대는 결국 출동하지 않았다. 〇 헌부(憲府)가 공천(公賤)과 사천(私賤)이 내수사(內需司)에 투속(投屬)하는 폐단을 논하자, 상이 노하여 질책하면서 이들을 불러들인 자의 성명을 지적해서 말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선생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민간인들끼리 노비를 쟁탈하는 것도 혐오스러운 일입니다. 더구나 내수사로 말하면 임금님 개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곳인데 만약 투속하는 노비들을 용인하여 받아들인 일이 있다고 한다면, 제사(諸司)에서 투속시키는 일을 어떻게 금지시킬 것이며, 서민들이 서로 쟁탈하는 일을 어떻게 금지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불러들인 사람들로 말하면 그 신분이 미천한 데다가 그 일을 극비로 진행했기 때문에 그들의 성명을 알아내기가 무척 어렵습니다만, 가령 원한을 품은 자들로 말하면 어디를 막론하고 있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만 힐문하면서 꺾어 버리셨으니,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궁중의 일이나 내수사의 일에 대해서는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 또한 나라 사람들에게 전하의 사심(私心)을 보여 주는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〇 이공 명준(李公命俊)이 상소하여, 김두남(金斗男)과 조기(趙琦) 등의 서녀(庶女)가 궁중에 들어온 일을 말하였다. 이에 선생이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궁중에서 사족(士族) 집안의 여자들을 들였습니다. 간택하라는 왕명이 아직 조정에 내려지지 않았으니, 그들이 사적(私的)인 길을 통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궁중에 스스로 들어올 수가 있었겠습니까. 군자는 기미를 미리 살펴서 점차 확대되지 않도록 걱정을 해야 하고, 마찬가지로 신하 역시 임금을 사랑하면서 그 기미가 보일 때 미리 막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여인을 총애하다 보면 사람의 마음이 미혹될 수 있다는 말성인이라도 광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을 상기하여 두렵게 여기시고, 머지않아서 되돌아오는 것을 법도로 삼으십시오. 그러면 사욕(私欲)을 극복하고 바른길로 되돌아오는 전하의 공이 옛날의 제왕에게 비교해 보아도 부끄러움이 없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아뢰기를 “화공(畫工)이 대궐 안에 들어와서 몇 달이 지나도록 나가지 않고 있습니다. 회화(繪畫)에 관한 일이 어찌 본래의 뜻을 잃게 되는 하나의 단서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 마음에 해를 끼치는 모든 기호(嗜好)를 일절 끊어 버리시어 본원(本源)의 바탕이 청명하고 순수해져 털끝만큼이라도 가리는 바가 없게 함으로써 온갖 교화가 이로부터 흘러나오게 해야만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묘당(廟堂)이 이공(李公)의 소와 관련하여 회계(回啓)하면서 여인들이 궁중에 들어오도록 주선한 자의 죄를 지적하여 아뢰자, 상이 노하여 언근(言根)을 캐내라고 명하고 또 빈어(嬪御)를 간택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선생이 또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어떤 일이든 노여움 때문에 촉발되는 경우는 반드시 그 바름을 잃게 마련입니다. 지금 언근을 캐내라고 분부하신 것이 어찌 그 바름을 얻은 것이겠습니까. 그동안 전하께서 빈어를 두지 않으셨으니, 이것은 전하의 거룩하신 덕 중에서도 가장 높은 경지를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 신하들이 아뢴 말 때문에 갑자기 이런 분부를 내리셨으니, 이 또한 노여움에 촉발되어 나온 것이 아닌가 걱정됩니다.”라고 하였다. 월사(月沙) 이공(李公 : 이정귀)이 옥당(玉堂)에서 올린 차자를 읽을 때마다 탄식하기를 “참으로 선유(先儒)의 격언이다.”라고 하였고, 상 역시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였다.
〇 12월에 다시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얼마 뒤에 이조 참판으로 자리를 옮겼다. - 선생이 무진년 가을부터 병환을 앓기 시작하여 3년이 지난 이때까지 병세가 엎치락뒤치락하면서 덜했다가 더했다가 하였다. 그래서 임명을 받을 때마다 번번이 병을 이유로 고사(固辭)하면서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4년 신미(1631) 선생 53세
〇 3월에 모친인 증(贈) 정경부인(貞敬夫人) 윤씨(尹氏)의 상을 당하였다. - 선생이 죽을 마시면서 소상(小祥)을 치르는 바람에 병이 심해지자 의정공(議政公)이 간절히 권하여 비로소 소식(疏食)을 들었으나 채소는 먹지 않았다. 담제(禫祭) 뒤에도 해를 마치도록 외침(外寢)에서 거하였다.

5년 임신(1632) 선생 54세


6년 계유(1633) 선생 55세
〇 5월에 상을 마쳤다.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사체(辭遞)하였다. - 다시 임명되었으나 또 사체하였다.
〇 7월에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 이때 명정전(明政殿)의 기둥과 창호(窓戶)에 벼락이 떨어지자, 상이 제신(諸臣)을 불러 구언(求言)하며 과오를 물었다. 선생이 차자를 올려 시사(時事)를 논하고는 아울러 뜻을 세우고 학문에 힘을 기울일 것을 진달하였다. 그리고 다시 차자를 올려 거듭 논하였는데, 그 내용이 더욱 절실하기 그지없었다. 상이 후하게 비답을 내려 가납하였다.
〇 10월에 자헌대부(資憲大夫) 예조 판서에 특별히 임명되었다. - 선생이 상소하여 극력 사양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은 재능과 덕망이 모두 넉넉하고 마음을 다하여 직무를 수행하고 있다. 그래서 발탁하여 이 직임을 제수하였으니 의당 사직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재차 소를 올렸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〇 명(明)나라의 반장(反將) 경중명(耿仲明)이 수군(水軍) 수천 명을 이끌고 심양(瀋陽 : 후금〈後金〉)에 투항하여 피도(皮島)를 침입할 계획을 꾸몄다. 선생이 비밀 계책을 진달하며 아뢰기를 “원수(元帥)로 하여금 피도의 명나라 장수와 은밀히 상의하여 서둘러 방비하게 함으로써 피도가 함락되지 않게 하소서.”라고 하였으나, 조정이 그 계책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였다. 〇 차자를 올려 과거에서 강경(講經)하는 제도를 변경하기를 청하였는데, 배강(背講)의 폐단을 극언하며 아뢰기를 “본래의 목적은 인재를 발탁하기 위함인데 거꾸로 인재가 없어지게 하고, 본래의 목적은 경술(經術)을 닦게 하기 위함인데 거꾸로 경술이 막히게 하고 있으니, 대소(大小)의 과거에 모두 강경을 하게 하되 모두 임강(臨講)을 하여 오로지 문의(文義)를 위주로 하게 하소서.”라고 하고, 또 아뢰기를 “후세의 글 중에서는 오직 《근사록》이 가장 순수하고 바르니, 경서 이외에 이 글을 또 시험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니, 상이 대신(大臣)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그런데 대신이 조종(祖宗)의 법제를 경솔히 변경할 수 없다고 반대하여 그 일이 끝내 행해지지 않았다. 〇 호남(湖南) 사람 이희웅(李喜熊)이 소싯적부터 지절(志節)을 지니고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나 현감으로 그쳤다. 그가 연로하여 집에 거하면서 상소하여 인재를 교육시키는 방도에 대해 논하였는데, 상이 그 일을 예조에 내렸다. 이에 선생이 상주하여 아뢰기를 “희웅의 의논을 보니 매우 식견이 있습니다. 그 뜻이 가상하니 표창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니, 상이 희웅에게 통정대부(通政大夫)를 가하도록 명하였다. 대신이 희웅의 건의대로 교양관(敎養官)을 설치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선생이 또 상주하여 아뢰기를 “희웅이 진달한 것은 정자(程子)가 교육에 대해서 논한 말을 토대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일이든지 절실한 것부터 해결하도록 노력해야 하고, 또 점진적으로 시행해야 마땅한 법입니다. 만약 직임(職任)만 설치해 놓고 적임자가 아닌 사람을 임명한다면 어떻게 실효를 거둘 수 있겠습니까. 지금 응당 경학에 밝고 절행(節行)이 있어서 사람들이 외경(畏敬)하는 자를 가려 뽑아 태학(太學)의 사유(師儒)로 삼은 뒤에, 날마다 제생(諸生)과 함께 경의(經義)를 강론하게 하면서 많은 세월 동안 공을 쌓게 한다면, 선비가 된 사람들이 점점 나아갈 방향을 알게 될 것이요, 풍속도 점차 변하게 될 것입니다. 외방(外方)의 산과 들 사이에도 반드시 옛사람을 사모하며 글을 읽고 집안에서 효도와 우애를 행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니, 각 도의 감사(監司)로 하여금 마음을 다해 찾아보고서 계문(啓聞)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는 송(宋)나라 때에 서원(書院)에서 교육을 주관한 자에게 베풀었던 고사대로 그에게 산장(山長)의 칭호를 수여한 뒤에 그 지역의 후생들을 가르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초야에서 선을 행하는 사람이 수록(收錄)되는 은혜를 받고서 부질없이 늙어 가지 않게 될 것이요, 후생(後生)의 소자(小子)들도 모두 학문과 품행이 사모할 만한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니, 선비의 풍조와 향토의 풍속이 점차로 변하면서 선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은 교육의 도가 완전히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따금씩 제생을 권면하며 독려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단지 과거 시험에 필요한 글공부일 뿐입니다. 이번에 시행하는 일은 그야말로 옛날의 교육을 실행할 수 있는 기회라고 하겠습니다.”라고 하니, 상이 의논해서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〇 이때 별과(別科)를 거행하면서 장차 경사(京師)에 모이게 하여 시험하려고 하였다. 이에 선생이 상주하여 아뢰기를 “경사와 외방으로 나누어 각각 300명씩 뽑는 것을 항식(恒式)으로 삼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라고 하니, 상이 따랐다. 〇 제릉(諸陵)을 수개(修改)하는 공사를 벌이게 되자, 선생이 상주하여 아뢰기를 “무릇 분묘(墳墓)에는 풀이 빽빽이 자라나서 비가 내려도 흙이 무너지지 않게 해야 하니, 사초(莎草)나 잡초(雜草)를 굳이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매번 능침(陵寢)을 경동(驚動)시키는 것도 미안한 일입니다.”라고 하니, 상이 그대로 따르고는 마침내 정제(定制)로 삼았다. 〇 이에 앞서 진주(晉州)에서는 임진왜란 때에 순절(殉節)한 신하인 김천일(金千鎰)과 황진(黃進)과 최경회(崔慶會) 등 3인만을 사당에서 제사 지냈다. 당시에 김해 부사(金海府使) 이종인(李宗仁)이 성이 함락될 때에 역전(力戰)하다가 싸울 무기도 모두 없어지자 두 왜적을 겨드랑이에 끼고 강으로 투신하여 죽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그의 아들인 득화(得華)가 부친의 충절(忠節)에 대해서 상언(上言)하였다. 이에 선생이 그 사실을 찾아보다가 안공 방준(安公邦俊)이 진주성 전투에 대해서 기록한 글을 얻고는 이를 위에 바치면서 아뢰기를 “이종인의 일은 장렬함에서 더욱 뚜렷이 드러나고, 또 고종후(高從厚)의 한 가문은 의리에 목숨을 바쳐 충효를 모두 온전히 하였습니다. 그러니 수양(睢陽)의 쌍묘(雙廟)에 남제운(南霽雲)을 함께 향사(享祀)하게 한 고사에 의거해서 이종인과 고종후 두 사람을 진주의 사당에 함께 향사하도록 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라고 하니, 상이 따랐다. 관서(關西) 지방 출신인 한우신(韓禹臣)이 과거에 급제한 뒤 벼슬길에서 현달하지 못하였으나 몸을 닦고 글을 읽으면서 집에서 생을 마쳤다. 선생이 본도(本道) 인사의 소에 의거하여 그의 행의(行義)에 대해서 표창하여 증직(贈職)을 가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7년 갑술(1634) 선생 56세
〇 8월에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를 겸하고, 또 동지성균관사를 겸하였다.
〇 9월에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 이때 원종대왕(元宗大王)을 추존(追尊)하는 일로 명(明)나라 조정에 주청하였는데, 명나라 조정에서 이를 허락하고는 책명(冊命)하고 봉증(封贈)하였다. 상이 원종대왕의 신위(神位)를 종묘로 들이는 의례를 의논하도록 명하니, 양사(兩司)와 옥당(玉堂)이 쟁집(爭執)하며 불가하다고 하였다. 이에 상이 대사헌 강석기(姜碩期)와 대사간 조정호(趙廷虎)와 부제학 김광현(金光炫) 등을 귀양 보내라고 명하였으므로, 선생이 매우 간절하게 논집(論執)하였으나 상이 들어주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이 체직되어 호군(護軍)이 되었다.
〇 10월에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 부제학은 종 2 품 이하를 의망(擬望)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이때 적임자를 찾기가 어려웠으므로 이조가 계청하여 선생을 그 자리에 있게 하였다.
〇 세자 우부빈객(世子右副賓客)을 겸하였다.
〇 11월에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 이때 충청 · 전라 · 경상 3개 도에 양전(量田)을 실시하였다. 선생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양전을 행하는 목적은 토지의 경계(經界)를 바르게 하기 위함이니, 왕정(王政)에서 응당 먼저 행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근년에 국가에 일이 많아 민역(民役)이 지극히 무거우니, 일단 양전을 실시한 뒤에는 반드시 공부(貢賦)를 상정(詳定)해서, 가령 전결(田結)의 수가 예전보다 갑절로 늘어난다 하더라도 공부로 받아들이는 것은 예전보다 많지 않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양전을 실시한 국가의 본의(本意)가 균역(均役)에 있는 것이지 이익을 취하려고 한 것이 아님을 백성들이 알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선생이 체직되었다.
〇 12월에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을 겸하였다. - 선생이 사장학(詞章學)을 익히지 않았다는 이유로 세 차례나 상소하여 극력 사직하니, 상이 해조(該曹)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였다. 이조가 사마광(司馬光)이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사직했을 때 허락하지 않았던 고사를 인용하고, 또 사장학을 익히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문장으로 선생과 견줄 만한 사람이 실로 드물다고 말하였으므로, 상이 마침내 허락하지 않았다.
〇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 얼마 지나지 않아 체직되었다.

8년 을해(1635) 선생 57세
〇 4월에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 얼마 지나지 않아 체직되어 대호군(大護軍)이 되었다.
〇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〇 5월에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6월에 체직되었다가 7월에 다시 임명되고, 8월에 체직되었다가 9월에 다시 임명되었다.
〇 차자를 올려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와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 두 신하의 도덕과 학문을 진달하였다. - 이때 관학(館學) 유생인 송시형(宋時瑩) 등이 상소하여 율곡(栗谷)과 우계(牛溪) 두 선생의 문묘(文廟) 종사(從祀)를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론(異論)을 제기하는 반대편 사람들이 상소하여 양현(兩賢)을 무함하고 헐뜯으면서 상이 오해하도록 현혹하자, 선생이 차자를 올려 양현의 덕행의 실상을 극력 진달하였다. 회보하지 않자 선생이 마침내 사직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선생이 다시 질병을 이유로 사체하여 호군(護軍)이 되었다.
〇 상소하여 동지성균관사의 면직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 관학(館學) 유생들이 양현의 종사를 청할 적에 수창(首倡)하며 이론을 제기한 자의 처벌을 논하니, 그 무리가 구축(驅逐)당했다고 칭하면서 동학(東學)으로 걸어가서는 무함하고 헐뜯는 소를 올리자, 관유가 또 동학에서 주도한 자를 삭적(削籍)하였다. 사관(四館)에서도 정거(停擧)하는 벌을 시행하니, 사관에서 이론을 주도한 자 역시 사관의 유생을 정거하였다. 이처럼 관유(館儒)가 상호 분란을 일으켜 태학(太學)이 마침내 텅 비게 되자, 지관사(知館事)인 최명길(崔鳴吉)이 사관의 유생을 모두 모이게 한 뒤에 시비를 분별하여 정거시키기도 하고 풀어 주기도 하였다. 이론을 제기한 자들에 대해서도 경중을 나누어 반성하게 한 뒤에 함께 과거에 응시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그런데 동학에서 수창한 채진후(蔡振後) 등 몇 사람이 처벌에서 풀려나지 못하자 그 무리인 권적(權蹟) 등이 다시 소를 올려 고자질하며 양현을 극구 비난하였다. 도승지 이민구(李敏求)가 은밀히 그 논을 주도하면서 본관(本館)으로 하여금 다시 의논하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최명길이 불가하다고 말하니, 상이 최명길의 체직을 명하였다. 이에 선생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최명길이 올린 본관의 계사(啓辭)를 보건대 시비를 분별하고 나서 또 관용을 베풀었으니 온당하게 처치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치세(治世)의 도리로 볼 때 어찌 선악과 시비를 도시 분별하지 않고서 모두 나아오게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상이 준엄한 내용으로 비답을 내렸다. 선생이 마침내 면직을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〇 선생이 예전에 앓던 병이 다시 발작하였다. 그래서 몇 년 동안 관직에 임명되어도 사체한 경우가 많았다.

9년 병자(1636) 선생 58세
〇 2월에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〇 공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 이때 선생의 부친인 의정공(議政公)이 선공감 첨정(繕工監僉正)에 임명되었는데, 공조에 속한 하급 관청이었기 때문에 선생이 사직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〇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임명되었다. - 이때 인열왕후(仁烈王后)의 상을 당하여 경조(京兆)에 일이 많은 탓으로 방시(坊市)의 정부(丁夫)에게 부과되는 부역이 매우 중하였다. 이에 선생이 균등하게 분획(分劃)하고 법도 있게 조발(調發)하여 일을 안정시켰으므로 백성들이 동요하지 않았다. 〇 4월에 체직되어 대호군(大護軍)이 되었다.
〇 5월에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 체직되어 호군(護軍)이 되었다.
〇 6월에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〇 봉사(封事)를 올려 변방의 수비를 공고히 하고 폐정(弊政)을 개혁할 방도를 진달하였다. - 이때 후금(後金)의 한(汗)이 명호(名號)를 참칭(僭稱)하였으므로 조정이 화친을 단절할 것을 의논하니, 상이 하교하여 크게 진작시킬 방도를 구하였다. 이에 선생이 봉사를 올려 아뢰기를 “저들이 이미 명호를 참람되게 일컫고 있고 보면 오늘날의 사세(事勢)는 예전과 완전히 달라졌다고 하겠습니다. 예전에는 이웃 나라와 교제하는 도리로써 서로 대하였으니, 이는 의리에 비추어 볼 때 크게 해가 되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오랑캐가 반드시 우리나라를 신하에 속하는 나라로 대할 것이니, 이는 비록 멸망을 당한다 하더라도 참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그들과의 우호 관계가 자연히 끊어질 수밖에 없고, 그러면 그들이 침략해 올 것이 분명한데, 침략해 왔을 때에 제대로 막아 내지 못한다면 멸망을 당하고 말 것이니, 그들을 막아 낼 대비책을 어찌 서둘러 마련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이와 관련해서 온당한 계책을 여덟 가지 조목으로 나누어 말씀드릴까 합니다. 첫째는 대중의 마음을 격동시키는 것이고, 둘째는 아랫사람의 의견을 위에 통하게 하는 것이고, 셋째는 무사(武士)들을 광범위하게 시취(試取)하는 것이고, 넷째는 장수가 될 인재를 가려 뽑는 것이고, 다섯째는 그 지방의 원주민을 등용하는 것이고, 여섯째는 성지(城池)를 견고하게 하는 것이고, 일곱째는 활의 제도를 간편하게 고치는 것이고, 여덟째는 인민을 교도(敎導)하는 것입니다. 국가의 개혁 방안과 관련하여 오늘날 크게 걱정스러운 것은 민생이 곤궁한 것과 군병이 쇠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당면한 급무(急務) 중에서 어찌 이 두 가지보다 더 큰 것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사습(士習)이 바르지 못하여 인재가 배출되지 않는 것으로 말하면 세도(世道) 중에서도 더욱 우려되는 점입니다.”라고 하고, 이어서 논하기를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여 백성의 부담을 공평하게 함으로써 민생을 구제하고, 징포(徵布)의 법을 변통하여 후하게 공급함으로써 군병을 기르고, 과거에서 강경(講經)하는 규정을 변경함으로써 경술(經術)이 막히지 않게 하고 인재가 없어지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니, 이렇게 한다면 백성이 안정되고 군병이 강해지고 사습이 바르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소가 올라오자 묘당(廟堂)에 내려 의논하게 하였으나, 모두 채용되지 않았다. 선생이 전후에 걸쳐 간절하게 올린 소의 내용이 모두 국가를 견고히 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는 방도 아닌 것이 없었건만, 두세 명의 대신(大臣) 모두가 국가를 경륜하는 원대한 계책이 없이 그저 머뭇거리며 세월만 허비할 뿐 남의 말을 듣지 않았다. 선생이 비록 지위가 높고 융숭한 대우를 받았다 하더라도 건의하는 계책이 행해지지 않는 데다가 질병이 또 오래도록 낫지 않으므로 물러가고자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때에 이르러 국가의 형세가 위급해진 것을 보고는 더욱 간절히 진달하며 논하였으나 시행되지 않았다.
〇 서쪽 변방의 직로(直路)에 위치한 중진(重鎭)을 수축하여 적이 돌진해 오지 못하게 막자고 청하였다. - 이때 화란(禍亂)이 장차 닥치려 하는데도 집정(執政)한 신하와 병사(兵事)를 주관하는 신하는 단지 미봉(彌縫)하면서 시간만 허비할 뿐 비어(備禦)의 계책을 세워 조치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는 오직 정묘년에 의주(義州)와 안주(安州)가 함락된 것을 징계하여 산성만을 많이 수축할 뿐이요, 요로(要路)에 위치한 여러 진(鎭)들은 모두 버려두고 지키지 않았다. 평양(平壤)의 사민(士民)들이 평양을 사수(死守)하기를 원하면서 누차 감사(監司)와 여러 사신들에게 정소(呈訴)하였는데도, 조정에서는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선생이 경연(經筵)에서 진언하기를 “적을 방어할 계책으로는 성을 지키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의주와 안주와 평양과 황주(黃州)와 평산(平山)은 모두 직로에 위치한 중요한 진입니다. 사민을 단결시켜 밤낮으로 수선(修繕)해 두었다가 만약 위급한 사태가 발생하면 청야(淸野)하고 성에 들어가서 한편으로는 적이 돌진해 오는 것을 막고 한편으로는 사민의 목숨을 보전해 살리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계책이니 서둘러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백마(白馬)와 자모(慈母)와 정방(正方) 등의 산성은 비록 험하고 견고하다 하더라도 대로(大路)와 멀리 떨어져 있는 만큼 창졸간에 백성들을 거두어들이기가 어렵습니다. 여러 진의 백성들이 먼저 어육(魚肉)을 당하여 직로가 텅 빈 상태가 된다면, 승승장구하는 적의 기세를 막아 낼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요해처(要害處)의 큰 진들을 모두 지키지 않고 있으니, 이것이 무슨 계책이란 말입니까.”라고 하였다. 또 정예 보병(步兵)을 뽑아 거듭 훈련시키며 정비하면 승리를 거둘 수 있다고 아뢰니, 상이 체부(體府)에 말하게 하였다. 체부가 회계(回啓)하면서 불가하다고 아뢰니, 선생이 또 입대(入對)하여 여러 대진(大鎭)을 지키지 않는 잘못을 극력 진달하면서 아뢰기를 “이는 스스로 자기의 울타리를 철거하고 문을 열어 두어 적을 끌어들이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체상(體相)인 김류(金瑬)가 좋아하지 않으면서 심지어는 기롱(譏弄)하는 말까지 하였는데, 결국 적이 침입하던 날에 마치 무인지경을 들어오듯 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의 치욕을 당하기에 이르렀으니, 이 모두가 선생의 말처럼 되고 말았다.
〇 8월에 다시 예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 명나라의 감군(監軍) 황손무(黃孫茂)가 조칙(詔勅)을 받들고 왔다. 접반사(接伴使) 이민구(李敏求)가 평안도에서 규례(規例)에 따라 조사(詔使)에게 주는 금침(衾枕)을 국왕이 특별히 보낸 것이라고 칭하고는 황해도에서는 규례에 따라 주는 금침을 주지 않은 뒤에 폐단을 없앴다고 스스로 자랑하면서 치계(馳啓)하여 보고하였다. 이에 선생이 아뢰기를 “이 일이 비록 사소한 것이라 하더라도 관계되는 바가 작지 않습니다. 사람을 대할 때에는 성신(誠信)을 위주로 해야 마땅한 법입니다. 범인에 대해서도 속이면 안 될 텐데, 하물며 왕인(王人)을 대하는 도리야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근년에 왕인이 우리나라에 와서 대부분 탐욕스럽게 요구하곤 하였는데, 그들이 무리하게 요구하는 것이야 도리에 입각해서 거절해도 되겠지만, 예로부터 규례에 따라 응당 행해야 할 일이라면 삼가 준수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관서(關西)에서 준비한 것은 규례에 따른 것이지 특별히 보낸 것이 아닌데 접반하는 신하가 말을 잘못한 것이라고 말해 주어야 할 것이요, 해서(海西)에서 준비한 것도 그에게 주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감군도 전하께서 속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는 반드시 마음속으로 복종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〇 관학(館學) 유생들이 또 상소하여 양현(兩賢)의 문묘(文廟) 종사(從祀)를 청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선생이 입대하여 존경할 만한 양현의 도덕에 대해서 극력 진달한 뒤에 또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이 말이 편당(偏黨)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의심하십니까? 신이 평생토록 사당(私黨)을 마음에 두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온 조정 신하들이 모두 알고 있는 바입니다.”라고 하니, 상이 마음속으로 깨닫고는 이르기를 “내가 그들의 도덕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단지 종사하는 사체(事體)가 중대한 만큼 감히 가볍게 허락하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완성(完城) 최명길(崔鳴吉)에게 글을 보내 화의(和議)의 잘못을 논하였다. - 완성이 차자를 올려 화의를 단절하는 잘못에 대해서 극언하고는 그 차자의 초본을 선생에게 보여 주었다. 이에 선생이 그에게 글을 보냈는데, 그 대략에 “차자의 내용 중에 경연광(景延廣)의 일을 인용하면서 운운(云云)하였고, 호씨(胡氏 : 호안국〈胡安國〉)의 말을 인용하면서 운운하였습니다. 경연광의 천박한 꾀가 화란(禍亂)이 일어나도록 도발하였으니 석진(石晉)이 멸망을 당한 것이 이로 말미암았다고 말할 수는 있겠습니다만, 주자(朱子)가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에서 오랑캐와의 화친을 끊은 것 때문에 그의 작위를 삭제했다고 말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상유한(桑維翰)은 오랑캐에게 신하가 되겠다고 청한 사람인데 주자가 그의 작위도 삭제하였으니, 주자의 뜻이 어찌 오랑캐의 신하가 되는 것을 옳게 여긴 것이겠습니까. 호씨의 전후에 걸친 논을 보아도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또 장승업(張承業)에 대해서 운운하였습니다만,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당(唐)나라를 위하였으니 그 지절(志節)이야말로 백대토록 존경심을 불러일으킬 만하다고 할 것입니다. 주자가 그를 아름답게 여긴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니, 어찌 그가 유수광(劉守光)을 축하하게 한 것을 아름답게 여긴 것이겠습니까. 호씨 부자(父子)와 주자는 평생토록 오랑캐와의 주화론(主和論)을 마음속으로 비통하게 여겼는데, 그 언론을 지금도 읽어 보노라면 늠름하기만 합니다. 그러니 지금 이런 식으로 논설을 한다면, 선현 역시 지하에서 마음이 편치 못할 듯합니다. 내가 일찍이 탑전(榻前)에서 아뢰기를 ‘전하께서 손권(孫權)이 작안(斫案)했던 마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삼고, 서쪽 변방의 장리(將吏)들이 즉묵(卽墨)에 있던 전단(田單)의 마음으로 자신들의 마음을 삼는다면, 반드시 막아 내지 못할 이치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비어(備禦)할 계책이 착실하게 행해지는 것을 보지 못하겠으니, 이것이 참으로 크게 걱정스러운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〇 12월에 적이 침입하였다. 미처 호가(扈駕)하지 못하고, 남양(南陽)에서 의병을 규합하였다. -13일에 변방의 경보(警報)가 이르렀다. 14일에 상이 강도(江都)로 들어갈 계책을 정하였다. 선생이 참판인 여공 이징(呂公爾徵)에게 묘사(廟社)의 신주(神主)를 모시고 가게 하고, 선생 자신은 호가하기로 하였다. 얼마 뒤에 들으니 신주를 미처 다 모시지 못했다고 하였으므로, 마침내 여공이 있는 곳까지 뒤쫓아 가서 직접 확인하였다. 그때 아들 진양(進陽)이 부친 의정공(議政公)을 모시고 가다가 길에서 서로 헤어진 것을 홀연히 보게 되었는데, 대가(大駕)가 남문(南門)까지 갔다가 계획을 바꾸어 남한산성으로 들어가게 된 것은 당시에 알지 못하였다. 선생이 급박하게 피난길을 떠나는 상황에서 노친의 행방을 알지 못하게 되자 어찌할 바를 모른 채 호읍(號泣)하며 밤새도록 분주히 돌아다녔는데, 노친의 소재를 알게 되었을 무렵에는 오랑캐의 기마병이 이미 그득해서 남한산성으로 가는 길이 끊어진 상태였다. 선생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당초에 묘사의 신주를 모시는 임무를 맡은 것도 아니고, 참판이 이미 안전한 지역으로 신주를 모시고 들어갔으니, 신주를 뒤따라가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여겨졌다. 그리하여 남양(南陽)에 이르러서 부사(府使) 윤계(尹棨)와 조사(朝士)로서 미처 호종(扈從)하지 못한 참의 심지원(沈之源)과 승지 김상(金尙)과 이정 시직(李正時稷)과 교리 윤명은(尹鳴殷) 등을 만나 의병을 불러 모을 것을 상의하고는 제도(諸道)에 격문을 보내 적진에 뛰어들 계획을 세웠는데, 분개하여 비통하게 흐느끼면서 어떤 때는 새벽이 되도록 눈물을 흘리곤 하였으므로 옆에서 보고 감동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10년 정축(1637) 선생 59세
〇 정월에 남양(南陽)에서 강도(江都)로 들어갔다. - 선생은 남양의 홍법사(洪法寺)에 있었고, 부사(府使) 윤계(尹棨)는 부에 머물러서 일을 처리하고 있었는데 적병이 졸지에 들이닥치는 바람에 윤계가 그들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하자, 사람들의 마음이 어지럽게 흩어져서 어떻게 일을 해 볼 수가 없었다. 이에 선생이 호서(湖西) 지방으로 가서 다시 의병을 모집하려고 하였으나, 들리는 말에 호서 지방도 이미 혼란스럽게 되었다고 하였으므로 강도에 들어갔는데, 얼마 뒤에 강도 역시 함락되고 말았다. 〇 강도가 함락될 적에 선생이 갑곶진(甲串津)의 파수(把守)하는 곳에 나가 있었다. 적병의 선박이 이미 강을 건너 적병이 장차 이를 즈음에도 선생은 언덕 위에 앉아서 꼼짝도 하지 않으면서 자제들이 피하기를 청해도 따르지 않았다. 이에 아들 몽양(夢陽)과 진양(進陽)이 선생을 부둥켜안고서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졌는데, 이때 마침 수행하던 무사(武士) 중에 여력(膂力)이 뛰어난 자가 작은 포구로 헤엄쳐 건너가서 언덕에 매어 있던 소주(小舟) 한 척을 끌고 와서는 선생을 겨드랑이에 끼고 배에 태웠다. 선생이 예복을 착용한 것을 적병이 바라보고는 귀인(貴人)이라는 것을 알아채고서 무기를 휘두르며 앞으로 달려왔으나, 급히 키를 돌려 해안을 떠나 탈출할 수 있었으니 대개 하늘이 도와준 행운이 있는 듯하였다. 〇 선생이 어려운 처지에서 빠져나온 뒤에 마침내 배를 타고 내려와 덕포(德浦)에 와서 큰 배를 구하였다. 이때 사녀(士女)들이 호곡(號哭)하며 우는 소리가 해안을 가득 메웠는데, 선생이 선인(船人)에게 배를 모두 동원하여 재량껏 태우도록 명하였으므로 그 덕분에 살아난 사람이 700여 인이나 되었다. 강도가 함락된 뒤에 나라의 일이 마침내 망극한 지경에 이르고 말았으므로, 선생이 비분강개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음식을 입에 대지 않은 것이 며칠이나 되었다.
〇 2월에 법리(法吏)에게 넘겨져 대질 신문을 마치고 파직되어 신창(新昌)으로 돌아왔다. - 상이 도성으로 돌아온 뒤에 대관(臺官)이 호종(扈從)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을 논하면서 법리에게 넘기도록 청하였다. 선생이 대질 신문에서 그 당시 일의 시말(始末)을 자세히 진술하니, 상이 단지 파직하라고만 명하였다. 선생이 즉시 물러 나와 신창의 전사(田舍)로 돌아왔다.

11년 무인(1638) 선생 60세
〇 대관(臺官)이 선생을 무함하며 탄핵하였다. - 유석(柳碩)과 이계(李烓) 등이 대관이 되어 청음(淸陰) 김공 상헌(金公尙憲)과 선생을 논하였는데, 심지어는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린 것〔忘君負國〕’으로 죄목을 삼기까지 하면서 모두 귀양 보낼 것을 청하였다. 문인이 상소하여 해명하려고 하였으나 선생이 제지하였다. 영상(領相) 최명길(崔鳴吉)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모(某)는 어려서부터 독서하여 경술(經術)과 행의(行誼) 면에서 옛사람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병자년에 급박하게 취한 행동은 당시의 불행한 상황에서 나온 것이었으니, 논하는 자들이 말하는 것은 또한 심하다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고, 병조 판서 이시백(李時白)도 상소하여 선생의 충효(忠孝)의 절조에 대해서 극력 진달하였다. 상도 본래 선생의 충성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유석 등이 한 달 넘게 논하며 아뢰었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 그 뒤에 선생이 강도(江都)에 있을 때 죽을 작정을 했던 정상에 대해서 연신(筵臣)이 자세히 진달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사람은 독서인(讀書人)이 아니냐. 나는 본래 그가 현인(賢人)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라고 하였다. 〇 연양(延陽) 이시백(李時白)이 선생의 누명을 해명하기 위해 올린 소가 부록(附錄)에 보인다.
〇 《서경천설(書經淺說)》 등 여러 책을 찬술(撰述)하였다. - 선생이 전야(田野)에 물러나 거하며 노친을 모시고서 한가롭고 편안하게 지냈다. 인사(人事)는 사절하고 오로지 경전(經傳)에 정력을 기울이면서 찬집(撰輯)하고 토론하는 일을 밤낮으로 그치지 않았다. 이때 초야의 사람들이 조정을 비난하는 의논을 하자, 선생이 듣고는 근심하며 탄식하기를 “오늘날의 일은 군신(君臣)이 그 책임을 똑같이 져야 마땅하다. 그러나 나라의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은 모두 신하들의 죄이니, 어찌 군부(君父)에게 허물을 돌려서야 되겠는가.”라고 하면서, 나라를 근심하고 걱정하는 마음을 잠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전모(典謨)를 담은 이 《서경》 한 책이야말로 만세토록 인주(人主)가 정치를 행하는 대법(大法)이라고 할 수 있다. 전후에 걸쳐 내가 상 앞에서 진달하였으나, 지금 보니 역시 미진한 점이 있는 것을 느끼겠다.”라고 하고는, 임금과 신하 사이에 서로 더불어 계고(戒告)하고 논설한 《서경》의 말들을 깊이 탐구하고 음미하여 이에 대한 설을 지었으니, 이것이 《서경천설》이다. 또 《주역(周易)》을 읽고서 괘상(卦象)을 총론하고는 그 이름을 《역상개략(易象槪略)》이라고 하였다. 또 《개혹천어(開惑淺語)》를 지어 사람이 선(善)을 지향하지 않으면 안 되는 도리를 밝히는 한편, 학문을 하는 방도에 대해서 반복하여 깨우침으로써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또 《논어》를 읽고서 말하기를 “이른바 ‘수사선도(守死善道)’라고 하는 말이야말로 더욱 오늘날에 힘써야 할 일이다.”라고 하고는 거처하는 서재에 독론재(讀論齋)라는 편액(扁額)을 내걸었다. 또 거실명(居室銘)을 지었는데, 그 대략에 “시간적으로는 과거와 현재가 없고, 공간적으로는 멀고 가까움이 없다. 양심을 지녔다고 말했고 보면 누구에겐들 이런 도리가 없겠는가. 이에 삼가 역량을 헤아리지도 않은 채 선현처럼 되겠다고 뜻을 세웠다. 마음속에는 천고의 심법(心法)이요, 거실 안에는 유가(儒家)의 서책이라. 이를 앙모하고 연찬하면서, 밥을 먹거나 다급할 때에도 행하리라. 오직 하늘을 받들어 섬길지니, 일찍 죽고 오래 사는 것에 어찌 의혹을 품으리오.〔時無古今 地無遐邇 旣曰秉彛 誰欠此理 乃竊不量 先民是企 方寸千古 一室洙泗 是仰是鑽 終食造次 惟天是事 夭壽何貳〕”라고 하였다. 대개 선생이 부지런히 학문에 정진하여 늙을수록 더욱 독실하기가 이와 같았다.

12년 기묘(1639) 선생 61세


13년 경진(1640) 선생 62세


14년 신사(1641) 선생 63세


15년 임오(1642) 선생 64세


16년 계미(1643) 선생 65세
〇 8월에 원손 보양관(元孫輔養官)에 임명되었다. 유지(有旨)를 내려 불렀으나 선생이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 이때 원손이 8세가 되었으므로 취학(就學)해야 했다. 조정에서 의논하여 보양관을 내도록 청하니, 이에 선생과 대제학 이식(李植)과 부제학 김육(金堉)과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을 임명하였다. 유지를 내려 부르니 선생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에게 가해진 죄명(罪名)으로 말하면 바로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렸다는 것입니다. 신하가 이런 죄명을 지니고 있다면 어느 곳에선들 용납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당시에 종묘의 신주(神主)를 따라서 먼저 나가게 되었던 것은 직책이 종축(宗祝)이었기 때문인데, 대가(大駕)가 떠나실 때의 시간과는 앞뒤로 한두 시각의 차이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런데 남문(南門)에서 그만 대가를 돌리시게 될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중도에서 노부(老父)와 길이 서로 엇갈리게 되었으므로 다급한 심정으로 찾아 나서다 보니, 하루 사이에 행재(行在)와 떨어져서 길이 막히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호종(扈從)하며 호위할 길이 없어졌으므로 신이 가슴 아프게 한탄하고 애를 태우기만 할 뿐 죽으려 해도 죽을 수가 없었는데, 이는 모두 당시의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평생토록 임금을 사랑했던 신의 정성이 거꾸로 임금을 저버렸다는 이름을 얻게 되었으니, 신이 이런 죄명을 일단 지니게 된 처지에서 장차 무슨 면목으로 다시 조정의 반열에 끼일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신의 부친의 나이가 지금 86세입니다. 신이 독자(獨子)라서 부친과 한 방에서 침식(寢食)을 같이하고 밤낮으로 옆에서 모시면서 음식과 기거를 모두 신이 보살펴 드리고 있으니, 하루아침에 그 곁을 떠나게 되면 노인의 마음이 몹시 상할 것은 필연적인 일입니다. 이 절박한 심정을 성상께서는 가련하게 여겨 주소서.”라고 하였다. 그러나 상이 허락하지 않고 재차 부르자 선생이 재차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그런데 이때 마침 원손이 청(淸)나라 심양(瀋陽)으로 떠나게 되었으므로, 선생이 즉시 상경(上京)한 뒤에 다시 상소하여 진정(陳情)하며 고향으로 돌아가 어버이를 봉양하게 해 줄 것을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경은 감정을 억누르고 함께 나랏일을 걱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선생이 또 상소하여 간절하게 속마음을 극력 진달하니, 상이 비로소 허락하고는 귤과 약물(藥物) 등을 하사하며 돌아가게 하였다.

17년 갑신(1644) 이해에 명(明)나라가 망하였다. 선생 66세
〇 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체(辭遞)하였다.

18년 을유(1645) 이 뒤에도 그대로 숭정(崇禎)의 기년(紀年)을 적용한다. 선생 67세
〇 예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 나아가지 않았다.
〇 가을에 상소하여 세자의 전학(典學)의 도에 대해서 진달하였다. - 이때 효묘(孝廟)가 새로 책명(冊命)을 받고 세자가 되었다. 이에 선생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세자가 이미 왕이 될 후계자의 지위에 오른 이상에는 옛날 성현의 학문을 강론해야 마땅할 것이니, 성현이 뜻을 둔 것으로 자신의 뜻을 삼고 성현이 행한 공부로 자신의 일을 삼아서 마음속의 뜻과 행하는 일이 한결같이 옛날의 제왕과 같이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유(先儒)가 말한 바 제일등(第一等)이 되는 길이라고 할 것이니, 절대로 제이등(第二等)이 되겠다는 마음을 품어서도 안 되고 제이등의 일로 자신의 일을 삼아서도 안 될 것입니다. 삼가 듣건대 세자의 천품이 순수하고 아름다운 데다 고명(高明)하고 활달(豁達)해서 보통 사람을 훨씬 뛰어넘기 때문에 타국에서도 심복을 받았다 하니, 이는 참으로 종사(宗社)와 생민(生民)의 복이라고 할 것입니다. 성현이 남겨 주신 가르침이 모두 방책(方冊) 안에 들어 있으니, 오직 그 안의 이치를 탐구하고 실천해야만 할 것인데, 그 차제(次第)를 말한다면 사서(四書)를 먼저 읽고 그다음에 오경(五經)을 읽어야 합니다. 세자는 총명한 자질이 뭇사람들보다 뛰어난 데다 춘추도 이미 성년(盛年)이 되었으니 천하의 서적에 대해서 필시 보지 않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만, 바라건대 우선 이들 서적에 대해서 머리를 숙이고 몸을 낮추어 노력하게 했으면 합니다. 그렇게 하면 곧장 성현의 바른길에 몸을 두고서 제이등의 인물로 떨어지지 않게 되어, 우리 동방에 뒷날 요순(堯舜)의 치세(治世)를 펼칠 기틀을 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춘방(春坊)의 관원을 엄선하되 직질(職秩)의 고하(高下)나 초야의 인사에 구애받지 말고 세자와 더불어 아침저녁으로 강구하고 연마하게 한다면 필시 보탬이 되는 일이 많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학문에 힘을 기울여서 덕으로 나아가는 공부를 동궁(東宮)에게만 권면할 것이 아니라 전하께서도 이 공부에 더 유념해 주셨으면 합니다. 전하께서 재위(在位)하신 날이 이미 오래되었으므로 용안(龍顔)도 벌써 옛날의 모습이 아닌데, 중년(中年)이 된 뒤에 스스로 분발하고 쇠약해진 중에 떨쳐 일어나는 것을 상식의 차원에서 말한다면 매우 어려운 일처럼 여겨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덕성은 닦지 않을 수가 없고 사업은 떨쳐 일으키지 않을 수가 없고 백성은 보호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한다면, 걱정되고 두려워지는 심정을 스스로 그만둘 수 없을 것이니, 이런 일을 하는 데에 어렵게 여길 것이 또 뭐가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상이 답하기를 “아름다운 말과 지극한 논에 대해서 내가 어찌 감히 마음에 새기고서 시행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원소(原疏)를 안에 두었다가 한 달여가 지나서야 내려 보냈는데 상소한 종이가 거의 너덜너덜해질 정도였으니, 이는 대개 상이 빈번하게 펼쳐 보았기 때문이다.

19년 병술(1646) 선생 68세
〇 상소하며 《대학곤득(大學困得)》을 바쳤다. - 소의 대략에 “신이 전에 왕세자의 강학(講學)에 관한 의견을 진달드린 바가 있습니다. 이 세상의 글 가운데 가장 정밀하고 가장 순수하고 가장 정대하고 가장 중요한 것을 꼽는다면 《서경》의 전(典)과 모(謨), 《시경(詩經)》의 아(雅)와 송(頌)을 제외하고는 사서(四書)만 한 것이 없으니, 이 사서야말로 만세토록 성인을 배우는 자들의 필수 과목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이 사서를 가지고 가르쳤으며, 또 그중에서도 그들 모두가 《대학(大學)》을 우선하였습니다. 이 글은 내외(內外)와 본말(本末)을 아울러 갖추었고, 공정(工程)과 절차가 분명히 드러나 있습니다. 따라서 이를 통해서 성현의 사업을 노력하여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모두 환히 볼 수 있으니, 삼가 바라건대 세자도 제일 먼저 이 《대학》부터 공부했으면 합니다.”라고 하였다. 또 “지난 갑자년 무렵에 어리석음을 무릅쓰고 위에 바쳤는데, 잘못된 부분이 상당히 많았기 때문에 지금 돌이켜 보면 부끄럽고 두렵기만 합니다. 그 뒤 10여 년 동안 궁벽한 산속에 숨어 지내면서 예전부터 해 오던 공부에 마음을 기울여 연구하며 다시 정리할 수가 있었는데, 이제는 경전의 취지에 그다지 크게 어긋나지는 않을 듯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라고 하니, 상이 돈후하게 비답을 내려 가납(嘉納)하고 구마(廐馬)를 하사하여 포상(褒賞)하였다.
〇 4월에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 상소하여 진정(陳情)하고 극력 사양하며 어버이를 끝까지 봉양하게 해 줄 것을 간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〇 부인 현씨(玄氏)의 상을 당하였다.
〇 5월에 부친 의정공(議政公)의 상을 당하였다. - 장례 전에는 오직 콩가루로 죽을 쑤어 마시고, 장례 후에는 오래도록 물에 만 밥을 들다가 자제들이 울며 간청하자 비로소 그쳤다. 최질(衰絰)을 벗지 않고 피눈물로 3년을 보내면서 노쇠했다고 하여 조금도 해이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20년 정해(1647) 선생 69세


21년 무자(1648) 선생 70세
〇 7월에 상복(喪服)을 벗었다.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에 임명되었다. - 특명을 내려 역마(驛馬)를 타고 올라오라고 하니,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서울에 들어와 사은(謝恩)하고는 나이를 이유로 치사(致仕)를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고 이르기를 “지금은 위급한 날이니 치사할 때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선생이 다시 소를 올렸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한 달 남짓 뒤에 또 거듭 소를 올려 간절히 진달하였으나 또 허락하지 않았다.
〇 9월에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 사체하였다.
〇 10월에 좌참찬에 임명되었다.
〇 11월에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 이때 간원(諫院)이 차자를 올려 숭정(崇禎)의 망국(亡國)을 예로 들며 경계할 것을 진달하니 상이 그 내용을 고치도록 하였는데, 헌부(憲府)가 논계하여 고칠 수 없다고 아뢰자 상이 체직시키라고 명하였다. 또 숭선군(崇善君)의 혼례(婚禮) 때에 상이 승지를 시켜 선온(宣醞)하게 하였는데, 이는 대군(大君)의 혼례 때에는 행할 수 없는 일이므로 예조가 감히 봉행(奉行)하지 못하고서 대신(大臣)에게 의논하기를 청하였다. 그런데 대신이 처음에는 역시 불가하다고 했다가, 상이 노하여 질책하자 곧바로 잘못을 자인하며 대죄(待罪)하였다. 이에 선생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간원의 차자는 자세히 살피지 못한 잘못이 있으니 이는 결코 충경(忠敬)의 도리가 못 된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전하께서 그 내용을 고치도록 분부하신 것은 실로 옛 은혜를 생각하며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지극한 심정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헌부가 논계한 것을 보니 상량(商量)하는 점에서 부족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이 때문에 죄를 준다면, 포용해야 하는 전하의 도리를 상하는 점이 있을 듯합니다. 그리고 국가에서 크고 작은 거조를 취할 때의 절목(節目)은 모두 규례(規例)가 있으니, 관원이 된 자로서는 예전부터 행해 온 규례를 지키면서 감히 실추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바로 그의 직분이라고 할 것입니다. 대군의 길례(吉禮) 때에 그동안 행해 오지 않던 일을 지금 행하려고 했기 때문에 정원(政院)과 예관(禮官)과 대신이 모두 전례(前例)가 없다고 답변드렸으니 이것이 잘못이라고는 할 수 없는데, 전하께서는 신하들의 뜻을 여지없이 꺾어 온당치 못하다고 여기시고 대신도 자기의 의견을 고수하지 못한 채 느닷없이 곧바로 잘못을 자인하고 말았으니, 이 또한 헌체(獻替)하는 도리가 못 될 듯싶습니다.”라고 하였다. 12월에 체직되어 좌참찬으로 복귀하였다.

22년 기축(1649) 선생 71세
〇 2월에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〇 3월에 예조 판서에 임명되고 세자 좌빈객(世子左賓客)을 겸하였다. 상소하며 《논어천설(論語淺說)》과 《맹자천설(孟子淺說)》을 바쳤다. - 소의 대략에 “공자와 맹자의 말과 일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는 것으로는 오직 《논어》와 《맹자(孟子)》 두 책이 있을 뿐입니다. 성인은 사람들 가운데 최고인 분이요, 이 두 책은 책들 가운데 최고이니, 사람이 선을 행하려고 한다면 다른 데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오직 이 두 책을 읽고 사색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음을 쓰고 일을 행할 때마다 한결같이 이 책의 내용을 법도로 삼아서 하는 일 모두가 성현이 제시한 준칙을 벗어나는 일이 없게 한다면, 바로 선인이 되고 성현이 될 것입니다. 세자의 서연(書筵)에서 바야흐로 이 책을 진강(進講)하고 있으니, 참으로 이 책에 대해서 모두 그 의미를 탐구하여 환히 밝혀서 통달하지 않는 곳이 없게 한다면 식견이 밝아지고 덕행이 진보함이 한량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상이 포답(褒答)을 하며 아다개(阿多介 : 표범 가죽으로 만든 요)를 특별히 하사하였다.
〇 4월에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 척리(戚里)의 신하가 법관(法官)이 되어 왕자(王子) 집안의 청탁을 받고 어떤 사람을 무함하여 죄에 빠뜨렸다. 그 사람이 장차 죽게 될 운명에 처했을 때 선생이 즉시 석방을 명하였다. 〇 이에 앞서 어떤 궁가(宮家)가 한강 가에 강정(江亭)을 세우면서 동호(東湖)에서 계체석(階砌石)을 대대적으로 캐냈다. 이에 선생이 아뢰기를 “동호는 국도(國都)의 문호(門戶)입니다. 그래서 도성을 세운 이래로 그곳의 돌을 가져다 쓴 적이 없습니다. 지금 그곳에서 돌을 캐내는 것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니, 엄하게 금단하소서.”라고 하니, 상이 따랐다.
〇 5월에 인조대왕(仁祖大王)이 승하(昇遐)하였다. 예조의 일을 겸관(兼管)하였다. - 선생이 여러 대신(大臣)들과 와내(臥內)로 들어가니, 응당 고명(顧命)의 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말하는 자가 있었다. 이에 대신이 선생에게 물었는데, 선생이 말하기를 “나라에 이미 세자가 계시고 상이 이미 승하하셨는데, 어떻게 소급하여 고명의 절차를 밟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자, 바로 그만두었다. 이때 결원이 된 예조 판서의 후임자를 아직 정하지 못하였으므로 대신이 선생을 겸직시키도록 청하였다. 상례(喪禮) 때에 초상(初喪)의 의절(儀節) 가운데 대부분은 선생이 의정(議定)한 것이었다. 선생이 동료와 계청하여, 대신과 육경(六卿)과 삼사(三司)의 장관으로 하여금 염빈(殮殯)할 때에 들어와 참여하도록 하니 따랐다.
〇 영부사(領府事) 김상헌(金尙憲)을 도성에 머물러 있게 하라고 계청하였다. - 이때 김공(金公)이 양주(楊州)에서 도성에 들어와 곡림(哭臨)하고는 장차 돌아가려고 하였다. 이에 선생이 아뢰기를 “김상헌은 바로 오늘날 세상의 대로(大老)인데, 오랫동안 교외에 있다가 국상(國喪) 소식을 듣고서 급히 들어왔습니다. 이제 막 성상께서 즉위하신 때를 당하여 숙덕(宿德)을 지닌 노성(老成)한 신하가 조정에 있게 하는 것이 마땅하니, 특별히 간곡하게 그를 머물도록 하여 현인을 공경하고 덕을 좋아하는 정성을 보이소서.” 하니 따랐다.
〇 상소하여 산릉(山陵)에 대한 일을 논하였다. - 이에 앞서 인열왕후(仁烈王后)를 장릉(長陵)에 장례 지낼 적에 술인(術人) 이간(李衎)이 주도하여 장지(葬地)를 정했는데, 그때에 장지가 좋지 않다는 말이 있었다. 그러다가 이때에 이르러 현궁(玄宮 : 제왕의 분묘)을 가리면서 같은 묘역으로 정하려고 하자, 선생이 상소하여 청하기를 “술사(術士)들을 널리 불러 모아 상세히 살펴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여 혹시라도 길하지 않은 점이 있으면 다른 곳으로 장지를 바꿔야 할 것이니, 이렇게 해야만 장례를 정중히 행하는 신자(臣子)의 도리에 유감이 없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아뢰기를 “신은 마음속으로 항상 그 자리를 의심해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대행대왕(大行大王)의 의관(衣冠)을 모시면서 또 그 자리를 쓰려고 하니, 위태롭고 두려워지는 심정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이와 같은데도 말씀을 드리지 않는다면, 이는 안으로 자신의 마음을 속이고 위로 군부(君父)를 기만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선왕(先王)의 체백(體魄)의 안부(安否)야말로 국가의 무궁한 이해와 직결되는 일인데도 모른 체하고서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큰 불충(不忠)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꼭 쓰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다시 한번 자세히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일 따름이니, 이렇게 해야만 신중히 처리하는 도리에 맞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소가 들어가자 상이 예조에 내려 다시 살펴보는 일을 의논하게 하였다. 그런데 어떤 대신이 풍수지리는 허탄(虛誕)한 것이라고 크게 말하면서 강력히 배척하였고, 평소에 선생을 좋아하지 않던 자들이 또 떼로 일어나 비방하였으므로 선생이 재소(再疏)하여 사체(辭遞)하였다.
〇 6월에 좌참찬(左參贊)에 임명되었다.
〇 7월에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 병으로 사직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고 내의(內醫)를 보내 병을 살펴보게 하는 한편 약물(藥物)을 하사하였다.
〇 8월에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우의정에 임명되었다. - 선생이 상소하여 간절히 사직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卿)의 재학(才學)과 덕행(德行)이 진실로 보필(輔弼)하는 직책에 합당하니, 속히 나와 도를 논함으로써 오늘날의 어려움을 구제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세 차례나 사직소를 올렸으나 허락을 받지 못했으므로 나와서 정사를 보았다.
〇 9월에 좌의정으로 승진하였다. 산릉 총호사(山陵摠護使)가 되었다. - 대행대왕의 영구(靈柩)를 모시고 발인하여 장릉(長陵)에 도착해서 그대로 머무르며 장례에 대한 일을 총호(摠護)하였다. 여러 관원들을 단속하고 격려하여 쓸데없는 비용을 절약하도록 힘쓰게 함으로써 민폐(民弊)를 제거하고는 마침내 등록(謄錄)을 만들어 길이 정해진 제도로 삼게 하였는데, 예전에 비해 비용을 절반이나 줄였는데도 일은 미진한 점이 하나도 없었다.
〇 졸곡(卒哭) 뒤에 차자를 올려 치도(治道)에 대해서 논하였다. - 차자의 말미에 아뢰기를 “이제 졸곡도 이미 지났으니, 정무(政務)에 마음을 두고 치도에 정신을 기울이셔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도에 대한 믿음이 혹 깊지 못하고, 뜻을 세운 것이 혹 굳건하지 못하여 혹시라도 성인의 정치를 목표로 삼지 않으실까 삼가 두려운 마음이 들기에, 감히 어리석은 생각을 모두 바쳐 이처럼 성인을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는 의견을 올리게 되었습니다.”라고 하니, 상이 가납하였다. 〇 경연(經筵)에서 바야흐로 《중용》을 진강(進講)하였으므로 선생이 또 상소하여 《중용곤득》과 《대학곤득》을 올렸는데, 그 소의 말미에 “삼가 원하옵건대 성상께서는 성의(誠意)에 대한 공부를 평생토록 종사할 중요한 일로 여기시고, 근본을 먼저 바르게 하여 좋은 정치를 행하는 방도로 삼으시는 동시에, 이 공부를 통해서 신하들의 선악(善惡)과 사정(邪正)을 분별하실 수 있도록 하소서. 군신(君臣) 상하가 성신(誠信)으로 일관하게 되면 속이고 기만하는 풍속을 변화시킬 수 있게 되어 삼대(三代)의 바른 정치를 이룰 수 있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니, 상이 가납하고 구마(廐馬)를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〇 이때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과 산림(山林)의 인사 몇 사람이 모두 소명(召命)을 받고 이르렀다. 이에 선생이 아뢰기를 “그들을 후하게 예우하고, 추위를 막을 물자도 내리소서.”라고 하니, 상이 따랐다.
〇 차자를 올려 인재를 교육하는 방도를 진달하고, 신민일(申敏一)과 조극선(趙克善) 등을 천거하였다. - 선생이 아뢰기를 “선비가 된 사람들이 과거 공부를 우선시한 나머지 경전을 공부하더라도 그 의의는 찾아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선비의 풍조가 이러하니 그중에서 훌륭한 인재가 배출되기를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을 다스리는 방도는 인재를 근본으로 삼아야 하는데, 교육하는 방도가 이처럼 지리멸렬하기만 합니다. 지금 새롭게 교화를 펼치는 때에 온갖 폐단을 개혁해야 마땅하겠습니다만, 인재를 교육하는 방도에 대해서는 더더욱 소홀히 하면 안 될 것입니다. 전임 부사(府使) 신민일은 소싯적부터 경학에 종사하며 힘을 기울여 온 지 이미 오래되었고 견해가 또 매우 정밀하니, 지금 조정 안에서 경학으로는 그에게 미칠 자가 있지 않습니다. 지금 대사성(大司成)의 자리가 비어 있으니, 이 사람을 그 직책에 제수하여 효과를 거두게 하면 어떨까 합니다. 또 온양 군수(溫陽郡守) 조극선은 경학에 밝으니 그도 사업(司業)에 임명해서 제생(諸生)으로 하여금 의심나는 곳을 질문하게 하고 학업에 대해 물어보게 하면 잘 가르쳐서 깨닫게 하는 이익이 필시 많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상이 따랐다. 선생이 또 차자를 올려 선(善)을 지향하는 이름난 인사 10여 인을 천거하니, 상이 답하기를 “현재(賢才)를 이처럼 많이 추천하니, 내 마음이 기쁘고 흐뭇하다. 그들을 모두 수용하게 해서 오직 선(善)을 보배로 삼아야 한다는 경의 뜻에 부응하겠다.”라고 하였다. 전임 장령(掌令) 이응시(李應蓍)가 인조조(仁祖朝)에 언사(言事) 때문에 북쪽 변방으로 유배당했는데, 선생이 그는 직절(直節)의 소유자라고 하면서 방환(放還)하여 수용할 것을 청하니, 상이 받아들였다.
〇 차자를 올려 뜻을 세우고 방법을 택하는 도리에 대해서 논하였다. - 이때 상이 바야흐로 사류(士類)를 예우하여 맞아들이고 좋은 정치를 행하기 위해 정신을 기울였다. 이에 선생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좋은 정치를 행하기 위한 도리로는 두 가지 요체가 있습니다. 하나는 뜻을 바르게 세우는 것이고, 하나는 자세히 살펴 방법을 택하는 것입니다. 임금이 마음을 다스리고 몸을 닦아 그 근본을 제대로 세우고, 일을 제어하고 법도를 세워서 백성을 제대로 보호하되, 뜻을 세울 때에 지극히 바르게 하고 방법을 택할 때에 지극히 자세하게 살필 수 있으면, 그 덕은 바로 삼대(三代) 제왕의 덕이 되고, 그 정치는 바로 삼대 제왕의 정치가 될 것입니다. 삼대와 같은 태평시대를 어찌 후세 사람이 이룰 수 없겠습니까. 그렇게 하기만 하면 또한 그와 같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선조(先朝) 때에 상소하고 차자를 올려 논한 심학(心學)과 대동법(大同法)과 병제(兵制)와 과거(科擧)의 강경(講經) 제도 등 네 가지 일을 한데 모아 하나의 책자로 만들어 올리면서 아뢰기를 “신이 아뢴 내용 중에서 한 가지는 임금이 진학(進學)하는 방도와 수덕(修德)하는 요체에 관한 것이고, 세 가지는 전역(田役)의 폐단과 군역(軍役)의 고통과 과거 제도 배강(背講)의 폐해에 관한 것입니다. 이 네 가지는 바로 신이 평생토록 마음을 다해 생각하고 헤아려서 변통해 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진실로 이 일들을 제대로 시행하기만 한다면 그동안 나라에 쌓여 왔던 폐단이 모두 제거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러한 폐단이 제거되면 지극한 정치가 펼쳐질 것이니, 이는 마치 병이 없어지면 몸이 편안해지는 것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라고 하니, 상이 제신(諸臣)에게 의논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행할 수 없다고 하여 그 일이 마침내 폐기되었으므로, 선생이 또 입대(入對)하여 극언하였으나 시행되지 않았다. 그 뒤에 대동법이 호서(湖西)에 시행되자 백성들이 대단히 편하게 여겼고 전역(田役)이 매우 가벼워졌으며, 토지 가격은 뛰어올랐으나 국가 재정은 또한 조금 여유가 있게 되었다. 〇 사비(私婢)가 궁가(宮家)에 투속(投屬)하고 궁노(宮奴)가 옛 주인을 도모하여 시해한 사건이 발생하자, 법부(法府)가 체포하여 치죄(治罪)하는 한편 궁노와 동모(同謀)한 자를 체포하려 하였으나 궁가에서 내주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대간(臺諫)이 그 감노(監奴)의 치죄를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그리고 판서 한흥일(韓興一)이 자급(資級)을 뛰어넘어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에 임명되었으므로 대간이 개정하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또 따르지 않았다. 이에 선생이 차자를 올려 궁가에서 그 노비를 내주려 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라고 아뢰고, 또 즉위 초기의 정사에서 외척(外戚)인 신하에게 은총을 내려 직질(職秩)을 가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고 아뢰니, 상이 답하기를 “아우를 잘 가르치지 못한 잘못이 있으니 내가 실로 부끄럽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한흥일에 대한 일도 뒤이어 개정하였다.
〇 12월에 말미를 청해 선비(先妣)를 천장(遷葬)하였다. - 윤 부인(尹夫人)을 공주(公州) 땅으로 천장하였는데, 본도(本道)에서 호상(護喪)하도록 하고 제전(祭奠)에 관한 물자를 지급하게 하였다. 〇 이에 앞서 수상(首相) 이공 경석(李公景奭)이 민호(民戶)를 열 집 혹은 다섯 집씩 편성하여 통(統)을 만드는 법을 행하자고 의논을 올렸다. 이에 선생이 아뢰기를 “오래도록 흩어져 있던 백성들을 갑자기 단속하기는 어려우니, 필시 소요 사태를 빚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니, 그 일을 중지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또 승려에게 포목을 거두는 영을 내려 이미 승려가 된 자에게는 세포(細布) 5필(疋)을 징수하고, 처음 승려가 되는 자에게는 25필을 납부해야만 도첩(度牒)을 주도록 하였으며, 마을이나 시장에 도첩이 없는 자는 모두 출입을 금지하는 등 사목(事目)이 매우 엄격하였으므로 승려들이 크게 동요하였다. 선생이 길을 가던 도중에 이 말을 듣고는 온당한 일이 아니라고 치계(馳啓)하니, 그 영을 취소하라고 명하였다. 또 수상이 소나무 벌채를 금하는 법을 거듭 밝히고 징속(徵贖)을 수괄(搜括)하여 군기(軍器)를 마련하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하였으므로 그렇게 하라는 영이 이미 하달되었는데, 선생이 장례를 마치고 돌아오다가 그 말을 듣고 불가하다고 아뢰니, 상이 따랐다. 이때 상이 좋은 정치를 펼치려고 단단히 마음을 잡고 있었는데, 수상이 정치를 행함은 단지 조종(祖宗)의 법전(法典)대로 거행해야 마땅하다고 하여 마침내 《대전(大典)》에 나오는 옛 법을 가려내어 차례로 거행하려고 하였으니, 예컨대 민호를 통(統)으로 편성하는 것과 승려에게 포목을 거두는 것과 소나무 벌채를 금지하고 포목을 징수하는 것 등은 모두 《대전》에 나오는 옛 법이었다. 그러나 선생의 생각은 일에는 시의(時宜)가 있고 또 점진적으로 행해야 마땅하니, 비록 법전에 기재되어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거꾸로 민폐를 끼친다면 졸지에 행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선생과 수상의 의논이 상당히 합치되지 않았다.

23년 효종대왕(孝宗大王)원년 경인(1650) 선생 72세
〇 5월에 차자를 올려 간원(諫院)이 추고(推考)를 청한 일을 논하였다. - 이에 앞서 조정이 자문(咨文)을 갖추어 상주(上奏)하면서, 일본의 정세가 우려할 만하니 성지(城池)와 군비(軍備)를 닦게 해 줄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는 사은사(謝恩使)인 이시방(李時昉)의 일행 편에 부쳐 보냈는데, 그 일을 수상(首相)이 실제로 주도하면서 비밀에 부쳤기 때문에 동료 관원들도 이 일에 참여하여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지난해 겨울에 책봉사(冊封使)가 왔을 적에 수상이 접대하는 찬품(饌品)이 너무 풍성하다고 염려하면서 이를 줄여 폐단을 없앨 목적으로 평안 감사 허적(許積)과 상의하니, 허적이 찬품을 모조리 줄였다. 이에 청나라 사신이 화를 내면서 도성에 들어왔는데, 또 관중(館中)에 투서(投書)하여 우리나라에 이의(異議)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한 자가 있어 청나라 내부에서 이미 우리나라를 의심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급기야 성지 수축을 청하는 국서(國書)를 보고는 그만 크게 의심한 나머지 우리나라 사신을 힐문하며 갖가지로 고통과 시달림을 받게 하더니, 사신을 다섯 번이나 파견하여 성지에 대한 일을 추궁하게 하였다. 당초에 국서는 경상 감사 이만(李曼)과 동래 부사(東萊府使) 노협(盧恊)이 일본의 사정을 아뢴 장계(狀啓)의 내용에 기초한 것이었는데, 급기야 청나라 사신이 이만과 노협을 힐문했을 때는 답변하는 말 가운데에 서로 어긋나는 부분이 많았다. 그래서 수상이 마침내 청나라 사람들의 문책을 받게 되자, 간원이 “공경(公卿)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이 모두 있었는데 수상 혼자 책임지게 하였으니 그 자리에 참석했던 사람들을 추고하소서.”라고 논하였다. 이에 선생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성지에 대한 일은 신이 실제로 참여하여 듣지 못했던 일입니다. 만약 당초에 참여하여 그 의논을 함께 했다면, 죽고 사는 일이라 할지라도 함께 의논한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돌리고서 자신만 면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당초에 참여하여 함께 의논하지도 않았는데 함께 의논했다고 스스로 말한다면, 이것은 사리에 지나친 일로서 바른 의리가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청나라 사람들이 성지를 수축하고 군대를 훈련시켜서 장차 무엇을 하려고 하느냐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를 의심해서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만약 여러 신하들이 모두 함께 의논했다고 말한다면, 그 의심을 더욱 부추기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함께 의논했다고 말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지만 간원이 지금 여러 신하들을 추고하기를 청하고 있으니, 신이 또 어떻게 혼자서만 편안할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은 잘못한 것이 없으니 마음을 편히 가지라.”라고 하였다. 그리고 간원도 아뢰기를 “신들이 당초에 참여하여 듣지 못했던 대신까지 포함해서 말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라고 하였다. 〇 청나라 사신이 힐문할 적에 수상을 이만 및 노협과 대질(對質)하게 하면서 매우 큰소리를 쳤으므로 좌중(座中)이 모두 겁에 질려 안색이 변하였다. 그러나 선생만은 의연히 논변(論辯)하면서 목소리나 기색이 전혀 동요하지 않았으므로 좌중이 모두 경외(敬畏)하였다. 원공 두표(元公斗杓)가 이때 비국(備局)의 당상(堂上)으로 들어와 참석하였는데, 매번 그때의 일을 말하면서 경복(敬服)해 마지않았다.
〇 차자를 올려 유계(兪棨)와 조석윤(趙錫胤) 등을 처벌하면 안 된다고 논하였다. 네 차례에 걸쳐 소를 올리고 치사(致仕)하여 쉬게 해 줄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 유공 계(兪公棨)가 교리의 신분으로 일찍이 논하기를 “선왕(先王)의 시호(諡號)를 인(仁) 자로 하는 것은 인종(仁宗)의 묘호(廟號)와 같으니, 거듭 사용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라고 하였고, 응교(應敎) 심대부(沈大孚)는 논하기를 “조(祖)라고 칭하는 것은 불가하다.”라고 하여, 모두 상의 뜻을 거슬렀다. 선생이 탑전(榻前)에서 아뢰기를 “유계는 재능과 학문이 쓸 만하니, 버려두는 것은 애석한 일입니다.”라고 하니, 상이 노하여 이르기를 “이 사람은 일찍이 선왕을 기롱하고 비방하였는데, 오래도록 처벌하지 않았으니 이는 나의 잘못이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극변(極邊)에 멀리 귀양 보내게 하고, 심대부는 중도(中道)에 부처(付處)하도록 명하였다. 선생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선왕의 인자하고 거룩한 덕에 대해서 인신(人臣)이 어떻게 감히 기롱하고 폄하할 수가 있겠습니까. 유계가 논한 것은 단지 인(仁) 자를 거듭 쓰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한 것일 따름입니다. 그 사람은 선(善)을 지향하며 학문에 힘쓰고 있고 또 그 재능이 실로 아깝기만 한데, 신이 망언(妄言)한 탓으로 이런 거조(擧措)를 취하시게끔 하였으니, 중한 벌을 받기를 청합니다.”라고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의 충성스럽고 신실한 정성이야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이번의 조치도 경의 말 때문에 나온 것이 아니니, 경은 안심하라.”라고 하였다. 대사헌 남선(南銑) 등이 유계 등을 귀양 보내면 안 된다고 논하니 상이 준엄하게 비답을 내렸고, 또 그들이 피혐(避嫌)하는 계사(啓辭)를 올리자 그들이 청한 대로 삭직(削職)시키라고 명하였다. 부제학 조석윤(趙錫胤)이 차자를 올려 거듭 논하였는데, 상이 소패(召牌)에 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직시켰다. 선생이 인혐(引嫌)하고 정고(呈告)하며 물러나게 해 줄 것을 청하니, 상이 재차 사관(史官)과 승지를 보내 돈유(敦諭)하였다. 선생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성상께서 비록 유계 등이 처벌받은 것은 신의 말 때문이 아니라고 분부하셨지만 신이 진언(進言)한 탓으로 이런 거조를 취하셨으니, 신이 어떻게 태연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고는, 그들이 선왕을 기롱하거나 폄하하려는 뜻이 없었다는 것을 계속 반복해서 해명하니, 상이 유공(兪公) 등을 석방하라고 명하면서도 조석윤과 남선 등은 아직 풀어 주지 않았다. 이에 선생이 또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남선 등은 유계에 대한 일을 논한 죄로 삭직을 당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유계 등의 죄를 이미 사면해 주셨고 보면, 유계 등의 일을 논한 자의 죄를 어떻게 유계 등보다 중하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조석윤은 단량(端良)하고 염정(恬靖)한 데다 문학의 재질을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날 조정의 신하들 중에서 그와 같은 자를 얻기가 실로 어려우니, 보통 신하로 그를 대우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당초에 어리석은 신이 망언한 탓으로 전하께서 이토록 노여워하시는 결과를 빚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신이 바야흐로 대죄(待罪)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하는 처지에서 다시 이 일을 말씀드린다는 것이 온당한 일은 아니겠습니다만, 신이 대신(大臣)의 신분으로 책임이 막대하기만 하니 어찌 한갓 형적(形跡)의 혐의만 생각한 채 침묵을 지키면서 구차하게 용납받으려고만 해서야 되겠습니까.”라고 하니, 남선과 조석윤 등도 마침내 다시 서용(敍用)되는 은혜를 입게 되었다. 선생이 상의 노여움이 일단 가시자 억지로 출사(出仕)하긴 하였으나, 건의를 해도 대부분 시행되지 않는 데다가 노쇠한 몸에 병이 겹치자 잇따라 네 차례나 상소하여 간절히 치사(致仕)를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〇 이때 오래도록 가뭄이 들었으므로 상이 몸소 사직(社稷)에서 기우제를 거행하려고 하였다. 예조가 음악을 써야 할지 여부에 대해서 대신에게 의논하기를 청하였는데, 선생과 영상(領相)인 이공 경여(李公敬輿)는 쓰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고, 원임(原任) 대신인 김공 상헌(金公尙憲)과 김공 육(金公堉)은 쓰는 것이 부당하다고 하였다. 선생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외신(外神)을 섬기는 것과 종묘의 신령을 섬기는 예법은 사체(事體)가 같지 않다.”라고 말하니, 상이 대신에게 다시 의논하도록 하라고 하였는데 결국에는 선생의 의견을 따랐다.
〇 차자를 올려 경연(經筵)에서 강학(講學)하는 요령에 대해 논하였다. - 상이 바야흐로 《서경》을 강독하고 있었는데, 무더위 속에서도 폐하지 않고 어떤 때는 하루에 세 번 강독을 하기도 하였다. 선생이 차자를 올려 학문의 도에 대해서 거듭 논한 다음에 또 아뢰기를 “옛날의 성인이 지극히 존귀한 자리에 올라서서 지극한 덕으로 지극한 정치를 행하였으니, 이제(二帝)와 삼왕(三王)이 바로 그분들입니다. 그런데 그 글이 완전히 구비되어 만세토록 학문의 대법(大法)이 되고 있으니, 만약 이것을 읽고 연구하여 정일(精一)의 법과 경계(儆戒)의 엄함과 지인(知人)의 밝음과 애민(愛民)의 자애로움 등에 대해서 모두 하나라도 본받지 않는 것이 없게 한다면, 그 덕이 어찌 옛날에 미치지 못할 것이며 그 정치가 어찌 옛날을 따라가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열심히 공력을 들인다 하더라도 그 요점을 얻지 못하면 공을 거두기가 어려우니, 절실한 공부를 해 보려고 한다면 사서(四書)만큼 긴요한 것은 없다고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아뢰기를 “전하께서 전후에 걸쳐 강독하신 것이 모두 성인의 글입니다마는, 만약 성인이 되겠다고 추구하는 뜻이 없을 경우에는 경연에서 진강(進講)하는 것도 관례적으로 일정한 숫자만 채우는 공허한 글에 지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만약 성인이 되겠다고 노력하지 않으신다면 필시 보통 수준의 임금 정도로 자처하게 될 것이요, 그리하여 천리(天理)를 반드시 회복하지 못하고 사욕(私欲)을 반드시 제거하지 못한 가운데 도덕은 날이 갈수록 허물어지고 정치는 하루가 다르게 추락하고 말 것이니, 나라를 다시 떨쳐 일으킬 희망이 없어지게 될 뿐만 아니라 혼란스러운 세상으로 전락하는 결과를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도덕이 높아지고 낮아지는 것과 정치가 오염되고 융성해지는 것은 오직 뜻을 세움이 높으냐 낮으냐에서 결판이 난다고 할 것입니다.”라고 하니, 후하게 비답을 내리며 가납(嘉納)하였다.
〇 7월에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 상이 내의(內醫)를 보내어 병을 살펴보게 하였다.
〇 8월에 병을 이유로 정고(呈告)하니, 돈유(敦諭)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 이때 이공 시백(李公時白)이 우상(右相)에 임명되었다. 선생과 이공은 사돈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법규로 볼 때 상피(相避)해야 할 입장이었는데, 그런 경우에는 직위가 아래인 사람을 체직(遞職)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에 선생이 재차 차자를 올려 고사(固辭)하며 아뢰기를 “우상을 이제 막 임명하였으니 곧바로 체직시킬 수는 없는 일입니다. 신은 오래도록 직위에 있었고 이미 심하게 노쇠하고 병들었습니다. 그래서 구구하게 바라는 것은 오직 물러나서 쉬는 것뿐인데, 지금이 바로 그때라고 하겠습니다.”라고 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우상도 상피해야 하는 법규를 제시하며 사면(辭免)을 청하였으나, 상이 역시 허락하지 않았다. 〇 우상이 진주사(陳奏使)로 임명되어 장차 북경(北京)으로 떠나게 되었다. 이에 선생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이시백(李時白)은 충신(忠信)하고 관후(寬厚)하며 청렴하고 신중하며 의리를 좋아하고 일을 주도면밀하게 생각하여 처리하니, 신하들 중에 그와 같은 사람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상께서 제대로 살피시어 그를 재상으로 뽑아 임명하셨으니, 그 누가 사람을 알아보는 성상의 밝은 안목을 우러러 경복하지 않겠으며, 재상에 적임자를 얻은 것을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평생토록 정성을 다 바쳐 관직을 수행한 데다가 또 여러 차례 어렵고 험난한 일을 겪으면서 정신과 육체를 너무도 심하게 소모하였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는 쇠하고 늙은 몸에 질병이 깊이 뿌리를 내렸으니, 만 리나 되는 여행길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니 신처럼 늙고 병든 사람은 당연히 한가한 곳으로 물러나 쉬게 하고, 나이가 젊어서 먼 여행길을 감당할 만한 사람을 다시 뽑아 이시백 대신 가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계책은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나, 상이 또 허락하지 않았다.
〇 차자를 갖추어 붕당(朋黨)에 대해서 논하고, 장응일(張應一)의 잘못된 상소 내용을 반박하였다. - 상이 조정 신하들이 편당(偏黨)을 짓는다고 의심하면서 누차 사색(辭色)에 드러내자, 마음이 비뚤어진 음흉한 무리가 그 틈을 엿보고는 붕당에 관한 말을 많이 하여 상을 현혹시키려 하였는데, 그중에서도 장령(掌令) 장응일이 투소(投疏)한 내용이 더욱 어긋났다. 이에 선생이 차자를 갖추어 한(漢) · 당(唐) · 송(宋) 이래로 이미 과거에 겪었던 자취를 극론(極論)하는 한편, 장응일의 잘못을 반박하여 아뢰기를 “그가 올린 말을 보면, ‘전하의 뜻이 유약하고 겁이 많으며 굳게 정해지지 못했기 때문에 일을 과단성 있게 처리하지 못하고 머뭇거린다.’라고 하였으며, 또 ‘말을 살피거나 일에 응할 때에 항상 애매모호하게 하는 잘못이 있으니 어떻게 현사(賢邪)와 시비(是非)를 분별하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며, 또 ‘전하의 결단력이 부족해서 일마다 시들시들해지고 흐리멍덩하게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그의 말뜻을 탐색해 보면 이는 바로 자기의 당을 어질고 옳은 사람으로 여기고, 다른 조정 신하들은 간사하고 그른 사람으로 여기는 것이며, 전하의 결단력이 부족하다는 등의 말은 바로 전하께서 결단을 내려 그런 사람들을 쫓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또 말하기를 ‘천하의 대로(大老)도 붕비(朋比)의 논의를 주도하고, 산림의 고사(高士)도 색목(色目) 속에 걸려 있다.’라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대로와 고사도 모두 간사해서 제거해야 할 대상이란 말입니까. 유약하고 겁이 많다면서 임금을 격동시키고, 업신여김을 당한다면서 임금을 격노하게 하고, 나라를 망칠 일이라면서 임금을 두렵게 하고 있으니, 그 교묘한 술책이 극에 달했다고 하겠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마는 그가 장차 어떻게 하려고 이런 꾀를 내고 있단 말입니까. 조정의 신하들이 붕당으로 나뉘는 것은 임금의 입장에서는 물론 매우 싫어하는 것이겠습니다만, 사람들이 서로 어울리는 것은 그들의 기질이 서로 같기 때문인데, 그들이 어울리고 어울리지 않는 것은 역시 이치로 보나 형세로 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임금이 신하를 부리는 도리로 볼 때에는 그들이 붕당을 짓는다고 미워할 것이 아니라 단지 그들이 선한지 악한지를 살펴서 진출시키거나 물러가게 하기만 하면 될 것입니다. 신은 예전부터 항상 소속된 당이 없다고 말해 왔습니다. 그러나 신에게 당이 없다고 말한 것은 이편저편을 따지지 않고 오직 선한 쪽을 편들겠다는 의미이지, 선악을 따지지 않고 모두 편들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신이 평소에 뜻을 세운 것은 항상 지공(至公)한 마음가짐을 지니려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옳고 그른 것을 가리려는 마음을 상실하는 데에는 이르지 않았으므로 옳고 그른 것을 가려야 할 때마다 분별하는 일을 면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런 측면에서 말한다면 신도 장응일이 말한 바 색목에 속한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만약 장응일의 계책이 행해진다면 조정의 신하들이 장차 일거에 텅 비게 될 것이니, 그 화란을 어떻게 예측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예로부터 군자가 붕당에 대해서 논한 설과 오늘날 조정 신하들의 사정에 대해서도 전하께서 혹시 깊이 살피지 못하신 점이 있지 않은가 염려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너무도 걱정되는 마음을 금할 수 없기에 그에 대한 개요를 진달드리게 되었으니, 성상께서는 유념해 주소서.”라고 하였다. 〇 선생이 또 차자를 갖추어 군역(軍役)을 변통하는 도리에 대해서 아뢰기를 “무릇 폐단을 구제하는 도리로 말하면 마치 의자(醫者)가 병을 치료할 때에 반드시 그 병의 뿌리가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찾아서 먼저 병마가 침노한 근본을 치료한 뒤에야 병을 없앨 수 있는 것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군역이 고통스러워져서 감당할 수 없게 된 이유는 군인의 숫자가 원래 적기 때문이니, 이러한 폐단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양인(良人)의 숫자가 불어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법을 보면 양인과 천인(賤人)이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으면 모두 천인이 되게 하고 있기 때문에 천인은 날로 불어나는 반면에 양인은 날로 줄어들고 있습니다. 지금 이후로 민간에서 태어나는 자들은 일체 어머니 쪽을 따르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아버지가 비록 천인이라 할지라도 그 어머니가 양인이면 자식도 양인이 되게 해야 할 것이니, 이렇게 하면 양인의 숫자가 조금씩 불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낳은 아들이 많이 있다 하더라도 한집안에서 군역에 종사하는 자가 3인이 있을 경우에는 나머지 아들들은 모두 군역을 정하지 말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승려가 된 자들도 진심으로 불교를 좋아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모두가 군역을 피하려고 한 것입니다. 지금 만약 미곡(米穀)을 바치고 환속하는 것을 허락해 주면서 그들에게 군역을 정하지 말도록 하면, 그들 모두가 분명히 기꺼이 이를 따를 것입니다. 그들에게 군역을 정하지 않더라도 그들은 자연히 농민이 될 것이니, 곡식을 생산하는 사람이 자연히 증가할 것이요, 또 민간의 곡식을 소모하는 폐해도 자연히 감소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장가를 들어 아들을 낳음으로써 인구가 자연히 불어날 것이니, 이것 역시 양인을 많이 길러 내는 하나의 방법이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아뢰기를 “예로부터 국가에서 군사들을 길러 주는 법이 있다는 말은 들었어도 군사들에게 마구 거두어들인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군사들에게 포목을 징수하게 되어 있는 것은 원래 우리나라 법제상의 잘못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속오군(束伍軍)의 법제는 양인과 천인을 뒤섞어 뽑아서 군대를 편성하는 제도입니다. 그러나 양인의 경우는 본역(本役)만으로도 이미 매우 고달픈 형편이고 천인의 경우는 자기 주인에 대한 부담을 지고 있어서 모두 한 몸에 두 개의 부담을 지고 있는데, 여기에 또 군복(軍服)과 군기(軍器)까지도 모두 스스로 마련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국가가 변란에 대처하고 환란을 막기 위해서는 오직 이 군사들을 의지해야 하는데, 그저 침해하는 고통만 안겨 주고 너그럽게 보살펴 주는 은혜는 조금도 베풀지 않고 있으니, 이렇게 하고서야 어떻게 그들이 윗사람을 가깝게 여기고 어른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이들에 대해서는 반드시 후하게 어루만져 주어 그들의 마음을 굳게 단결시킴으로써 위급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 의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아뢰기를 “군인에게서 징수하는 것을 감해 주고 나면 여러 군영(軍營)과 진보(鎭堡)에서 쓰는 비용이 반드시 부족해질 것이니 어디에선가 보충해서 지급해야 할 것이요, 속오군을 후하게 보살펴 주는 것도 모두 재정이 확보되어야만 가능할 것인데, 이에 대한 재원(財源)을 마련해 낼 길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를 위해서는 별도로 재원을 마련할 계책을 강구해야만 그 수요에 충당할 수가 있을 것인데, 당(唐)나라 때의 조용조(租庸調)의 법제를 참고할 만합니다. 그 법제는 몸이 있으면 용(庸)이 있게 한 것이니, 이는 육신을 지닌 자는 모두 부담을 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삼공(三公) 이하로부터 유생(儒生)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외방(外方)의 각 읍(邑)에 있는 품관(品官)의 서얼(庶孼)로서 부담을 지지 않는 자들을 대상으로 하여 그들 모두에게 포목 1필(匹)씩을 징수할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니, 이렇게 하면 징수하는 액수가 반드시 많아져서 충분히 수요에 충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혹자는 경상(卿相)에게까지 포목을 내도록 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의아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주역》에도 위를 덜어서 아래를 보태 주는 의리가 나와 있고, 정(鄭)나라 자피(子皮)가 기민(飢民)을 진휼(賑恤)할 적에도 공족(公族)과 귀경(貴卿) 이하에게 모두 곡식을 내놓게 하였습니다. 민인(民人)이 도탄(塗炭)에 빠져 있다면 경상 이하가 모두 구원해 주어야 마땅한데 어째서 안 된단 말입니까. 군제(軍制)를 변통해 보려고 한다면 이상이 그 대략적인 내용입니다.”라고 하였다. 〇 선생이 두 개의 차자를 갖추어 모두 상에게 올리려고 하였는데, 마침 그때 직위를 떠났기 때문에 올리지 못하였다.
〇 차자를 올려 유직(柳㮨)이 무함한 상소 내용을 반박하였다. - 관학(館學)의 유생이 상소하여 양현(兩賢 :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자 영남(嶺南)의 유생인 유직 등이 투소(投疏)하여 양현을 무함하고 헐뜯으니, 태학생(太學生)이 유직 등에게 부황(付黃)의 처벌을 가하고는 상소하여 그 일을 해명하였다. 상이 그 소를 물리치고 꾸짖자 제생(諸生)이 권당(捲堂)하고 물러가니, 상이 선생에게 제생이 다시 들어오도록 타이르라고 명하였다. 이에 선생이 동료 재상과 함께 연명(聯名)하여 차자를 올리면서 양현을 종사해야 한다고 논하였다. 또 차자를 올려 유직이 무함한 상소를 반박하며 아뢰기를 “신이 양현의 문하에 나아가서 직접 가르침을 받지는 못하였습니다마는 마음속 깊이 경복(敬服)하고 있음은 직접 교육을 받은 것과 다름이 없다고 할 것인데, 지금 간사한 자가 이렇게까지 극심하게 모욕을 가하고 있는 것을 보니 삼가 통분한 심정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와 함께 생각건대 사설(邪說)이 멋대로 횡행하게 그냥 놔둘 경우에는 듣는 이들을 현혹시키고 오도(誤導)한 결과 장차 한 세상 사람들을 미혹시키기에 이를 것이니, 왕자(王者)의 정치에서는 반드시 엄금해야 하리라고 여겨집니다.”라고 하였다. 또 차자를 올려 두 신하의 도덕(道德)에 대해 빠짐없이 진달하면서 아뢰기를 “전하께서 만약 유직이 기망(欺罔)한 말 때문에 두 신하에 대해서 의심하는 마음을 지니신다면, 이것이 어찌 전하께 기대하던 바이겠습니까. 아니면 혹시라도 비방하고 헐뜯은 자가 이미 있었기 때문에 이처럼 두 신하가 부족하다는 뜻을 보임으로써 둘 다 포용해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만약 그러하시다면 이는 신이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천하의 사리에는 원래 옳고 그른 구별이 있는 만큼, 오직 옳은 것을 옳다고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해야만 사리가 타당하게 될 것이요 마음이 정대하게 될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마음을 바로잡아 조정을 바르게 한다.〔正心以正朝廷〕’는 것입니다. 만약 분별하는 일이 없이 그저 양쪽 다 포용하려고 힘쓰기만 한다면, 이는 의도가 있는 사심(私心)에서 나온 것으로서 자연의 이치를 따르지 않는 것이 되어 옳고 그름과 굽고 곧음이 어지럽게 뒤섞이게 된 나머지 결국에는 굽은 자들이 왕성해지고 곧은 자들이 무시되고 말 것이니, 이는 바로 대란(大亂)을 초래하는 길이라고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〇 경상 감사 민응협(閔應協)이 공도회(公都會)를 설치하여 인재를 시취(試取)할 것을 청하였으며, 또 경상도의 유생들이 유직이 처벌받은 일 때문에 공도회에 응시하지 않는다고 계문(啓聞)하였다. 이에 영상(領相) 이공 경여(李公敬輿)는 관유(館儒)를 타일러서 유직에 대한 황첨(黃籤)의 처벌을 풀어 주게 함으로써 피차간의 마음을 평온하게 하여 경과(慶科 : 국가의 경사 때 보이는 임시 과거)에 다 같이 응시하게 하자고 청하려 하였고, 선생은 계사(啓辭)에서 사마상여(司馬相如)가 파촉(巴蜀)의 부로(父老)들을 깨우쳤던 고사를 인용하면서 영남 사자(士子)들의 부형(父兄)에게 유시(諭示)하여 그 자제들이 응시하도록 가르치게 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대교(待敎) 신혼(申混)이 상소하여 이를 비난하고 배척하는 한편 상은 강무(剛武)한 점이 부족하다고 말하며 심지어는 ‘서리가 내렸는데도 풀이 시들지 않았다.〔隕霜不殺草〕’라는 《춘추(春秋)》의 말을 인용하면서 죽이지 않는 것을 상의 정치의 잘못이라고까지 하였으므로 선생이 또 상소하여 그 망언을 반박하였다. 관유가 유직에 대한 황첨의 벌을 풀어 주지 않자 상이 준엄하게 분부하며 배척하니, 제생(諸生)이 며칠 동안 공관(空館)하였다. 이에 선생이 아뢰기를 “예로부터 공관을 하는 비정상적인 사태가 일어나면 반드시 근시(近侍)를 보내 잘 타일러서 들어오게 하였으므로, 이 일이 이미 세월이 흐르면서 하나의 규례(規例)처럼 되었습니다. 전하께서 망언(妄言)이라고 노여워하면서 하유(下諭)할 뜻이 없으시고, 유생들 역시 이 때문에 공관을 하는 사태가 오래도록 이어지게 된다면, 이는 너무나도 온당하지 못한 일입니다.”라고 하니, 상이 마침내 제생에게 유시하여 들어오게 하라고 명하였다. 함경도 유생이 올린 소에 대해서 상이 준엄하게 유지(有旨)를 내리면서 어떤 사람이 사주하여 유치(誘致)한 것이라고 하교하였으므로, 선생이 또 동료 재상과 함께 차자를 올려 상의 분부가 타당하지 않다고 아뢰었다. 〇 양현을 문묘에 종사해야 한다는 관학 유생들의 청은 을해년(1635, 인조 13)에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이때에 와서 다시 청하자 제도(諸道)의 유생들이 잇따라 소장을 올렸는데, 반대편 쪽에서도 다시 소란스럽게 이론(異論)을 제기하였다. 이에 상이 편파적인 의논이라고 귀결시키자, 선생이 잇따라 소차(疏箚)를 올려 그 시비를 분별하였는데 이 때문에 상의 뜻을 거스르게 되었다.
〇 11월에 사체(辭遞)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다. - 경상도 유생이 증광(增廣) 감시(監試)에서 유직에 대한 벌이 해제되지 않았으니 응시할 수 없다고 하면서, 이미 과거 시험장에 들어왔다가 시관(試官)에게 말하고는 시험을 포기하고 나갔다. 이에 선생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유직 등이 선현(先賢)을 무함하고 군부(君父)를 기망하였으니, 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음속으로 통분하면서 미워할 일입니다. 그런데 유생 등이 그만 스스로 과거를 포기하고는 마치 절개를 지키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으니, 이 어찌 크나큰 변고가 아니겠습니까. 그들이 과거 시험장에 떼 지어 몰려와서는 공공연히 시관에게 말을 하고 나갔고 보면, 그들이 벌인 일이야말로 집단으로 임금의 명령에 거역하려 한 것이요, 그들이 꾀한 계책이야말로 조정을 위협하고 견제하려고 한 것이니, 이것은 바로 이른바 ‘요군자무상(要君者無上)’에 해당된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영남의 사자(士子)들이 과거 시험을 보지 않은 것은 그들의 본심이 아닐 것이니, 이는 필시 위협하며 견제하는 자가 있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입니다. 감사 민응협은 이처럼 다사다난(多事多難)한 해를 당하여 오래도록 폐지된 공도회를 설행(設行)할 것을 유독 청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또 유생들이 공도회에 응시하지 않는다고 말을 하였으니, 그가 당초에 공도회의 설행을 청한 것도 본디 이러한 계책을 꾸미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응시자 명단과 시험장에 들어온 자들의 숫자를 계문(啓聞)하는 규정도 처음부터 없었고 보면, 이렇게 계문한 것 역시 매우 괴이한 일입니다. 한 도를 다스리는 방백의 의향이 이와 같았으니, 유생들이 어떻게 그대로 따르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따라서 지금의 계책으로는 우선 민응협을 파직한 뒤에 공정하고 의리를 아는 자로 바꿔 보내어 제생을 타이르게 함으로써 그 의혹을 해소시키고, 이와 함께 유직이 기망(欺罔)하고 오도(誤導)한 죄를 다스리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유생들도 스스로 과거에 응시할 수 있게 되어 일도(一道)가 아무 일도 없이 안정을 되찾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상이 답하기를 “차자의 내용을 보니 병통으로 지적받을 곳이 많다. 내가 매우 애석하게 여기는 바이다.”라고 하였다. 선생이 이에 차자를 올려 면직을 청하면서 아뢰기를 “유생들이 과거를 거부했다는 이 일이야말로 그보다 더 심한 기망은 없다고 할 것입니다. 실제로 그들이 과거를 거부하려는 마음이 있었다면, 무슨 이유로 양식을 싸들고 답안지 종이를 준비해 와서 과거 시험장으로 들어왔겠습니까. 이는 필시 이 모의를 주도한 사람이 일도의 유생들을 강제로 억압하여 모두 시험을 보지 못하게 해 놓고는, 제생이 일제히 분개하여 과거를 거부했다는 내용으로 장계를 올려 위로 전하를 기만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소란을 일으킨 약간의 무리가 그 사주를 받고는 선동하면서 답안지 작성을 하지 못하게 한 것일 따름인데, 이런 식으로 일을 꾸며 놓고는 허풍을 침으로써 전하로 하여금 일도의 인심이 이탈했다고 두렵게 여기시도록 하였으니, 계략을 꾸민 것이 너무도 흉악하다고 하겠습니다. 신은 항상 당파가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금 와서 이런 기망을 당하고 말았으니 어찌 통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의 상황에서는 신이 하나의 당파에 치우쳤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마는, 신의 입장에서는 예전에 당파가 없었을 때나 오늘날 어느 당파라고 할 때나 그 공심(公心)만은 변함이 없다고 할 것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전하께서는 조정(調停)하려는 뜻을 보이고 계시는데, 신의 입장에서는 이와 같이 치우친 것처럼 되고 말았으니 더 이상 쓰일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체면(遞免)을 명하는 은혜를 내려 주소서.”라고 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선생이 마침내 인혐(引嫌)하며 네 차례 소를 올려 물러가겠다고 정사(呈辭)하였는데, 여덟 번째 이르러서야 비로소 체직되었다.
〇 도성을 나와 광주(廣州) 구포(九浦)의 옛집으로 돌아왔다. - 선생이 재상의 직책에서 체면된 뒤에 향리로 돌아갈 결심을 하고서 소를 작성해 두었으나 아직 출발하지는 않았는데, 상이 이 소식을 듣고는 사관(史官)을 보내 머물러 있으라고 유시(諭示)하였다. 그런데 이때 마침 선생을 좋아하지 않는 자가 유직의 당인(黨人)을 사주하여 투소(投疏)해서 선생을 비난하게 하였는데, 상이 그 소에 답한 내용 중에 “한쪽에 치우쳐 정대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내가 이미 환히 알고 있다.〔偏係不正 予已洞鑑〕”라는 말이 있었으므로 선생이 그날로 즉시 도성을 나갔다. 우의정인 이공 시백(李公時白)을 비롯해서 원평군(原平君) 원두표(元斗杓)와 대사간 남노성(南老星)이 일제히 탑전(榻前)에서 진달하며 선생을 머물러 있게 하기를 계청(啓請)하니, 상이 이르기를 “부정(不正)이라는 글자는 불공(不公)이라는 글자의 잘못이다.”라고 하고는 즉시 사관을 보내 돈유(敦諭)하였다. 사관이 선생을 뒤쫓아 가서 도성 교외에 이르니, 선생이 회주(回奏)하기를 “원하옵건대 향리로 물러가서 여생을 보낼 수 있게 해 주셨으면 하는데, 이것이 바로 신의 본마음입니다. 그런데 지금 또 영남 사람들의 공격을 받고 있으니, 구구한 이 몸의 거류(去留)는 또한 염치와 관계된 바입니다. 그리하여 이미 길을 떠난 이상에는 성상의 유시를 받들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한강(漢江)을 건너 돌아갔으니, 이날이 11월 16일이었다.
〇 누차 소를 올려 치사(致仕)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 선생이 돌아온 뒤에 상소하기를 “예로부터 인신(人臣)이 도성을 떠날 적에 하직 인사를 드리지 못하고 떠나는 경우도 간혹 있었는데, 이는 대개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신이 일단 향리에 있게 된 이상에는 사리상 관직을 결코 그대로 지니고 있을 수가 없으니, 본직(本職)과 겸대(兼帶)한 종묘서(宗廟署) · 장악원(掌樂院) · 군자감(軍資監) 등 세 곳의 제조(提調)를 모두 면직시켜 주소서.”라고 하고는, 계속해서 여러 차례 소를 올려 치사를 청하였으나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이로부터 선생은 녹봉(祿俸)과 제사(諸司)에서 으레 바치는 것들을 모두 받지 않았다. 〇 선생이 양현(兩賢)의 도를 깊이 존숭하여 편파적이고 간사한 설을 배격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그리하여 전후에 걸쳐 진달하여 변론하면서 정성을 다해 모두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일단 뜻이 합치되지 않자 서슴없이 몸을 이끌고 물러났으니, 진퇴(進退)와 출처(出處)를 바르게 한 것은 오직 선생 한 사람뿐이었다.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이 선생이 향리로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는 매우 기뻐하면서 축하하는 글을 보내고 짚신을 선물로 증정하였다.

24년 신묘(1651) 선생 73세
〇 3월에 삭관(削官)의 명이 내렸다. - 이에 앞서 선생이 정부(政府)에 있을 적에 고상(故相)인 해창(海昌) 윤방(尹昉)의 집에서 선생에게 시장(諡狀)을 청하였다. 이는 대개 작고한 태학사(太學士) 이식(李植)이 과거에 지은 시장이 있긴 하였지만 시호(諡號)를 청하는 글에는 이미 죽은 사람의 성명을 기입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때 선생이 공무(公務)로 바빠서 틈을 낼 수가 없었으므로 그 글을 그대로 쓰도록 하면서 지은이로 선생의 이름을 기입하게 하였다. 그런데 시장의 내용 중에 강 서인(姜庶人)을 빈궁(嬪宮)으로 칭한 곳이 있었는데, 옥당(玉堂)과 태상(太常)과 이조와 예조를 거치는 과정에서도 모두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다. 상이 이를 보고는 매우 노하자, 선생이 소장을 올려 대죄(待罪)하면서 실상을 진달하였다. 그러나 상이 살펴보려 하지 않고 금부(禁府)에 조율(照律)하라고 명하니, 대간(臺諫)이 조율을 대신에게 시행할 수는 없다고 아뢰었다. 장령 심광수(沈光洙)라는 자가 또 투소(投疏)하여 선생이 사서(四書)를 주해(註解)한 것을 트집 잡아 선생을 비난하면서 상의 뜻에 영합(迎合)하였다. 이에 대사헌 조공 석윤(趙公錫胤)이 상소하여 심광수를 논척(論斥)하였으나, 상이 끝내 선생의 관작을 삭탈하라고 명하니 조야(朝野)가 모두 놀라며 탄식하였다.
〇 8월에 서용(敍用)되어 다시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다.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 12월에 역옥(逆獄)이 일어나자 국청(鞫廳)이 하유하여 선생을 부르도록 청하였다. 상이 즉시 올라오지 않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는 분부를 내리자 선생이 부득이 상경하여 상소하고 대죄하니, 상이 위로하는 뜻으로 하유하고는 국옥(鞫獄)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옥사가 마무리됨에 선생이 재차 소를 올려서 돌아가게 해 줄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자 마침내 하직 인사도 하지 않고 돌아왔다.

25년 임진(1652) 선생 74세
〇 여러 차례 상소하여 치사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 이때 상서(上書)하는 자들이 학덕이 높은 원로(元老)를 황야에 있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많이 말하였으므로 상이 선생을 누차 불렀지만 모두 극력 사양하였다. 〇 선생이 조정에서 물러난 뒤에는 쓸쓸히 퇴락한 집에서 마치 빈한한 선비처럼 처신하였다. 그리고는 오직 좌우에 경서(經書)만을 쌓아 두고 날마다 그 속에 침잠(沈潛)하여 깊은 뜻을 연구하면서 자신의 낙으로 삼았다. 또 거하는 곳에 호수와 산의 승경(勝景)이 있었으므로 남여(藍輿)를 타기도 하고 거룻배를 띄우기도 하면서 임야(林野)의 늙은이들과 소요하곤 하였는데, 만나는 자마다 선생이 정승을 지낸 사람인 줄을 알지 못하였다. 그리고 언젠가는 시를 지어서
라고 읊기도 하였다. 이처럼 적막하게 세상을 초월하여 홀로 서 있는 것 같은 생활을 하는 가운데에서도 세도(世道)와 생민(生民)에 대한 걱정은 하루도 가슴속에서 잊은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임금의 과오나 시정(時政)의 잘못을 들을 때마다 근심하는 기색을 띠면서 며칠 동안이나 침식(寢食)을 편히 하지 못하였다.

26년 계사(1653) 선생 75세
〇 상소하여 소명(召命)을 사양하였다. 그리고 누차 치사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 선생의 중자(仲子) 복양(復陽)이 수찬(修撰)의 신분으로 시강(侍講)할 적에 상이 그를 불러 앞으로 나아오게 한 뒤에 선생의 기거(起居)와 안부를 물으면서 이르기를 “대신(大臣)이 향곡(鄕曲)에 물러가 있으니 내 마음이 허전하기 그지없다. 서울에 올라와서 비록 늙고 병들어 직무를 수행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집에 누워서 또한 나랏일에 보탬을 줄 수 있을 것이니, 그대는 모쪼록 이러한 뜻으로 가서 유시(諭示)하고 기필코 모셔 오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복양이 돌아가서 상의 뜻을 고하니, 선생이 상소하여 사례하고 사양하였다. 그 뒤에 상이 또 특명으로 부르는 한편 다시 정원(政院)으로 하여금 별도로 유지(諭旨)를 지어 급히 부르게 하였으나, 모두 고사(固辭)하였다. 그리고는 누차 치사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조정에 잘못된 일이 있을 때마다 백강(白江 : 이경여〈李敬輿〉) 이공(李公)이 번번이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조상(趙相)이 국도(國都)를 떠난 뒤로 상에게 충간(忠諫)하는 말을 다시 들을 수 없으니, 나랏일을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27년 갑오(1654) 선생 76세
〇 선(善)을 행하여 재이(災異)에 잘 대응하는 도리를 상소하여 진달하고, 또 소명을 사양하였다. - 7월에 도성에 큰 수재(水災)가 발생하자, 상이 하교하여 구언(求言)하였다. 선생이 상소하여 송(宋)나라 선화(宣和) 연간의 큰 수재와 과거 병자년의 큰 수재를 인용하여 말하는 한편, “단지 선행에 힘쓸 따름이다.”라는 맹자의 말을 인용하여 참된 마음으로 힘껏 실행하여 붙들어 유지하고 떨쳐 일어나는 방도에 대해서 극력 진달하였다. 그리고 말미에 아뢰기를 “선을 행해야 한다는 설이야말로 경전에 나오는 진부(陳腐)한 말이라고 여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위태롭고 두려운 때를 당하여 이런 보통 이야기를 말씀드리는 것이야말로 현실에 절실하지 못한 오활한 의견으로 여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위로 천심(天心)에 응하고 아래로 인심(人心)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이 말보다 절실한 것은 없으니, 전하께서 반복해서 깊이 살펴보신다면 오활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고 아울러 현재(賢才)를 등용하는 방도에 대해서 진달하니, 상이 후하게 분부하며 답하였다. 그 뒤에 상이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내가 일찍이 조복양(趙復陽)으로 하여금 나의 뜻을 조상(趙相)에게 유고(諭告)하게 하였는데도 오지 않았다.”라고 하고, 또 이어서 하유하며 선생을 불렀다. 그러나 선생은 늙고 병들었다는 이유로 고사(固辭)하였는데, 그 뒤로는 끝내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28년 을미(1655) 선생 77세
〇 정월에 상소하여 《서경천설》을 바쳤다. - 소의 대략에 “우(虞) · 하(夏) · 은(殷) · 주(周) 등 사대(四代)의 성인이 덕을 논하고 정치를 논한 말씀이야말로 순수하게 의리를 밝힌 것으로서 만세(萬世)의 법도가 될 수 있습니다. 신이 침잠(沈潛)하여 연구를 하는 동안 혹 미흡하나마 하나의 소견이 있는 것처럼 여겨질 때면 그때마다 감히 그 소견을 기록해서 책으로 만들게 되었습니다. 비록 참람하기 그지없다 할지라도 정치를 행하는 법도에 꼭 보탬이 되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은혜에 감격하면서도 위로 보답해 드릴 길이 없기에 감히 이것을 가지고 봉헌하는 바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천재(天災)가 거듭 발생하여 상이 마음속으로 바야흐로 걱정하며 두려워하고 있었으므로 선생이 개발(開發)하여 비보(裨補)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서 이 책을 바쳤는데, 상이 포답(褒答)하며 구마(廐馬)를 하사하였다.
〇 3월 10일에 거하던 저택의 정침(正寢)에서 고종(考終)하였다. - 선생이 2월 25일에 병을 앓자 상이 내의(內醫)를 보내 병을 살펴보게 하였다. 부음(訃音)을 듣고는 3일 동안 철조(輟朝)하고 승지를 보내 조문을 하였으며 근시(近侍)를 보내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호조와 예조의 낭관(郞官)이 와서 상례에 관한 물품을 지급하였다. 왕세자도 궁관(宮官)을 보내어 조문하고 치제(致祭)하였다. 〇 선생이 소싯적에는 기운이 매우 허약했으나 만년에 와서는 점점 기운이 왕성해지면서 완전해졌다. 일찍이 이천(伊川) 선생이 “나는 생을 잊고 욕심을 따르는 것을 부끄러워한다.〔吾恥忘生徇慾〕”라고 한 말을 지언(至言)으로 여겼는데, 나이 일흔이 넘은 뒤에도 여전히 기운이 강하였으니 이는 이천의 고사처럼 행한 것이었다. 만년에는 거의 20여 년의 세월을 홀로 지냈는데 총명이 줄어들지 않아 등잔불 밑에서도 책을 볼 수 있었으므로 사람들 모두가 선생은 백세(百歲)의 수명을 누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느닷없이 병에 한번 걸려 역책(易簀)하고 말았다. 이에 중외(中外)의 사림(士林)이 모두 애도함은 물론이요 아래로 부녀자와 시정(市井)의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놀라 슬퍼하면서 마치 친척의 상을 당한 것처럼 비통해하였다.
〇 6월 계해일(癸亥日)에 충청도 대흥현(大興縣) 동화산(東華山) 손좌(巽坐) 건향(乾向)의 언덕에 장례 지냈다. - 관의 주도 하에 발인하고 예장(禮葬)하는 일을 의례(儀禮)에 맞게 하였다. 묘소는 선인(先人)인 의정공(議政公) 묘역의 북쪽 언덕이다. 현 부인(玄夫人)은 이전에 다른 곳에 장례 지냈다가 이때에 와서 이곳에 이부(移祔)하였다.

33년 경자(1660) 현종대왕(顯宗大王) 원년
〇 문효(文孝)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 태상(太常)이 시호를 의논하면서 문충(文忠)과 문효(文孝)와 문경(文敬)의 세 시호를 가지고 의망(擬望)하니, 문효로 하비(下批)하였다. 시법(諡法)에 도덕(道德) · 박문(博聞)을 문(文)이라고 하고, 자혜(慈惠) · 애친(愛親)을 효(孝)라고 한다.

34년 신축(1661)
〇 광주(廣州)의 제생(諸生)이 구포(九浦) 북쪽에 서원(書院)을 세웠다. - 10월 1일에 위판(位版)을 봉안하였다. 그 뒤에 광주 등 몇 고을의 유생 등이 상소하여 사액(賜額)의 명호(名號)를 청하였다. 그리고 동춘(同春 : 송준길〈宋浚吉〉) 송공(宋公)도 연석(筵席)에서 선생의 도덕과 학문이 향사(享祀)를 받기에 실로 합당하다고 아뢰었다. 그리하여 기유년(1669, 현종 10)에 이르러 명고(明皐)의 사액(賜額)을 명하고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〇 그 뒤에 호서(湖西)의 유생이 또 신창(新昌)의 옛 우거(寓居) 옆에 서원을 세웠고, 송도(松都)의 유생이 또 숭양서원(崧陽書院)에 배향(配享)하였으며, 함경도 유생이 망덕서원(望德書院)에 배향하였다.

39년 병오(1666)
〇 현묘(顯廟)가 온천으로 행행(行幸)하다가 선생의 분묘가 근처에 있다는 말을 듣고는 예관을 보내 치제하게 하였다.

45년 임자(1672)
〇 신창 도고산(道高山) 동쪽 기슭으로 이장(移葬)하였다.

63년 경오(1690, 숙종 16)
〇 2월에 또 대흥(大興) 고향 산의 을좌 신향(乙坐辛向)의 언덕으로 이장하였다. - 의정공(議政公)의 묘도 함께 옮겨 같은 언덕에 장례 지냈는데, 선생의 묘가 뒤편에 있다.


 

[주D-001]광주(廣州)의 시골 농장 : 현재의 경기도 화성군(華城郡) 매송면(梅松面) 야목리(野牧里)에 있었다.
[주D-002]심 유격(沈遊擊)이 …… 지었는데 : 심 유격은 임진왜란 때에 일본과의 화의(和議)를 주선하면서 명(明)나라의 사신 역할을 한 유격장군(遊擊將軍) 심유경(沈惟敬)을 말한다. 《포저집》 권15에 의심유격여일본제장서(擬沈遊擊與日本諸將書)가 수록되어 있다.
[주D-003]초원(草原) : 함경도 정평(定平)의 속역(屬驛)이다.
[주D-004]걸(桀)의 …… 격이니 : 한(漢)나라의 추양(鄒陽)이 감옥에 갇혀 스스로를 변호하면서, 누구든 각자 자기 주인을 위할 수밖에 없다는 뜻으로 “폭군 걸왕의 개로 하여금 성군인 요 임금을 향해 짖게 할 수도 있고, 도척의 식객으로 하여금 허유를 칼로 찌르게 할 수도 있다.〔桀之犬可使吠堯 跖之客可使刺由〕”라고 말한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漢書 卷51 鄒陽傳》
[주D-005]10분의 …… 것 : 《맹자(孟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하후씨는 50묘에 공법을 썼고 은나라 사람은 70묘에 조법을 썼고 주나라 사람은 100묘에 철법을 썼으니, 그 실제는 모두 10분의 1이다.〔夏后氏五十而貢 殷人七十而助 周人百畝而徹 其實皆十一也〕”라는 말이 있다.
[주D-006]소무(昭武)와 영사(寧社) : 1627년(인조 5)과 1628년에 각각 발생한 이인거(李仁居)와 유효립(柳孝立)의 모반 사건을 처리한 뒤에 내린 공신의 칭호이다.
[주D-007]대종(大宗)의 …… 한다 : 《의례(儀禮)》 상복(喪服) 부장기조(不杖朞條)에 “인후가 된 사람은 그 부모를 위해서 기년복(朞年服)으로 보답한다.〔爲人後者 爲其父母 報〕”라는 경문(經文)이 나오는데, 이를 해설한 전문(傳文)에 “대종(大宗)의 후계자가 된 사람은 어째서 자기 부친에 대하여 기년복을 입어야 하는가? 부친에 대한 참최복(斬衰服)을 두 번 입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째서 두 번 입을 수 없는 것인가? 대종의 중한 자리를 잇는 책임을 맡은 경우, 소종에 대해서는 상복의 등급을 낮춰야 하기 때문이다.〔何以期也 不貳斬也 何以不貳斬也 持重於大宗者 降其小宗也〕”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8]주자(朱子)가 …… 글 : 주희(朱熹)가 사대부의 붕당을 걱정한 승상 유정(留正)에게 글을 보내어 군자의 당을 적극 옹호한 내용을 말하는데, 《국역포저집》 2집 134쪽 주 23)에 상세히 나온다.
[주D-009]희성(希聖)하고 희현(希賢)하는 뜻 : 송유(宋儒) 주돈이(周敦頤)의 《통서(通書)》 지학(志學)에 “선비는 현인이 되기를 희구(希求)하고, 현인은 성인이 되기를 희구하고, 성인은 하늘처럼 되기를 희구한다.〔士希賢 賢希聖 聖希天〕”라는 말이 나온다.
[주D-010]여인을 …… 말 : 춘추 시대 진(晉)나라 대부(大夫) 숙향(叔向)의 모친이 “미모가 뛰어난 여인은 사람의 마음을 미혹시키기에 충분하니, 참으로 덕을 쌓고 의를 실천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반드시 재앙을 받게 마련이다.〔夫有尤物 足以移人 苟非德義 則必有禍〕”라고 아들을 충고한 고사가 있다. 《春秋左氏傳 昭公7年》
[주D-011]성인이라도 …… 말 : 《서경(書經)》 다방(多方)에 “성인이라도 제대로 생각하지 않으면 광인이 될 수 있고, 광인이라도 제대로 생각만 하면 성인이 될 수 있다.〔惟聖罔念作狂 惟狂克念作聖〕”라는 말이 나온다.
[주D-012]머지않아서 …… 것 : 《주역(周易)》 복괘(復卦) 초구(初九)에 “머지않아서 되돌아오니 후회하는 일이 없을 것이요, 크게 좋을 것이다.〔不遠復 无祗悔 元吉〕”라는 말이 나온다.
[주D-013]교양관(敎養官) : 지방에서 유생의 교육을 담당하는 관직이다.
[주D-014]산장(山長) : 송나라와 원(元)나라 때에 서원에서 강학(講學)하며 업무를 총괄하게 한 관직 이름이다.
[주D-015]수양(睢陽)의 …… 고사 : 쌍묘(雙廟)는 당(唐)나라 안녹산(安祿山)의 난 때에 수양을 사수(死守)하며 충의를 지켜 후세에 명성을 드리운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을 제사 지내는 사당이다. 남제운(南霽雲)은 장순과 함께 외롭게 수양을 지키면서 누차 출전하여 반군을 격퇴하다가, 양식이 고갈되자 포위망을 뚫고 하란진명(賀蘭進明)에게 달려가 구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자 다시 수양으로 돌아와 사수하다가, 성이 함락된 뒤에도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장순과 함께 장렬한 죽음을 맞았다.
[주D-016]동학(東學)으로 걸어가서는 : 《인조실록(仁祖實錄)》 13년 6월 6일 갑신(甲申) 조에 “그리고 성균관에서 동학으로 가는 직로가 원래 있는데도 그 길을 놔두고는 건복 차림으로 걸어서 궐문 밖으로 뚫고 지나감으로써 사람들의 이목을 놀라게 하였으니, 선비의 행실로서 비루하여 수치스럽기가 이보다 더 심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且從泮宮到東學 自有直路 捨之不由 巾服步行 穿過闕門之外 駭人瞻聽 士行之卑汚可羞 無甚於此者〕”라는 최명길(崔鳴吉)의 상소 내용이 실려 있다.
[주D-017]완성(完城) …… 논하였다 : 《포저집》 권16의 ‘최 완성 명길에게 올린 글〔答崔完城鳴吉書〕’ 참조.
[주D-018]손권(孫權)이 작안(斫案)했던 마음 : 작안은 탁자를 칼로 내리쳐서 둘로 쪼갠다는 말로, 확고하게 중대 결단을 내리는 것을 말한다. 오(吳)나라 손권이 조조(曹操)와의 결전을 앞두고 신하들의 의견이 일치되지 않자, 칼을 빼어 작안하면서 “감히 또다시 조조를 맞아들이자고 말하는 장리가 있으면 이 탁자와 같은 운명이 될 것이다.〔諸將吏敢復有言當迎曹者 如此案同〕”라고 말하고는, 유비(劉備)와 연합해서 조조의 대군을 격파한 고사가 전한다. 《三國志 卷47 吳主傳》
[주D-019]즉묵(卽墨)에 …… 마음 : 전단(田單)은 전국 시대 제 민왕(齊湣王) 때의 왕족이다. 연(燕)나라의 명장 악의(樂毅)가 제나라를 침입하여 국토의 대부분을 장악하였을 때, 즉묵에서 농성하여 결사항전하면서 반간계(反間計)를 써서 악의를 파면시키고, 1천여 마리의 소를 동원하여 공격하는 등 기발한 전술을 구사하여 대승을 거둔 뒤에 제나라 70여 성을 수복한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82 田單列傳》
[주D-020]수사선도(守死善道) : 《논어》 태백(泰伯)에 “독실하게 믿으면서도 학문을 좋아할 줄 알아야 하고, 죽음으로 지키면서도 도를 잘 행할 줄 알아야 한다.〔篤信好學 守死善道〕”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주D-021]선유(先儒)가 …… 길 : 《근사록(近思錄)》 2권 위학류(爲學類)에 “제일등은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고 자기는 제이등이나 되겠다고 말하지 말라. 이렇게 말한다면 이는 곧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 된다. 비록 인에 거하지 않고 의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 자와는 그 차이가 같지 않다 할지라도 자기 자신을 작게 여기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학문으로 말한다면 곧 도에 뜻을 두어야 할 것이요, 사람으로 말한다면 곧 성인에 뜻을 두어야 할 것이다.〔莫說道將第一等 讓與別人 且做第二等 才如此說 便是自棄 雖與不能居仁由義者差等不同 其自小一也 言學便以道爲志 言人便以聖爲志〕”라는 정이(程頤)의 말이 나온다.
[주D-022]헌체(獻替) : 헌가체부(獻可替否)의 준말로, 임금이 마땅히 행해야 할 일은 과감하게 건의하고 행하면 안 될 일은 그만두도록 간하는 대신의 도리를 말한다.
[주D-023]고명(顧命) : 임금이 죽기 전에 후사(後嗣) 등 국가의 대사를 대신에게 부탁하는 유언을 말한다.
[주D-024]대행대왕(大行大王) : 임금이 죽은 뒤에 아직 시호를 올리기 이전의 칭호로, 여기서는 인조를 가리킨다.
[주D-025]이응시(李應蓍)가 …… 유배당했는데 : 이응시는 1646년(인조 24)에 강빈(姜嬪)의 옥사와 관련하여 왕에게 여색을 멀리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고 이경여(李敬輿) · 홍무적(洪茂績) · 심노(沈)를 석방할 것을 요청했다가 강빈을 두호하는 무리를 구원하려 했다 하여 왕의 노여움을 사서 북쪽 변방으로 유배되었다. 《燃藜室記述 卷27》
[주D-026]외신(外神) : 천지와 산천의 신령을 말한다. 반면에 종묘 등에 모신 일가(一家)의 신령은 내신(內神)이라고 한다.
[주D-027]위를 …… 의리 : 《주역》 익괘(益卦) 단(彖)에 “위를 덜어서 아래를 보태 주니 백성들의 기쁨이 끝이 없고, 위에서 아래로 내려 주니 그 도가 크게 빛나도다.〔損上益下 民說無疆 自上下下 其道大光〕”라는 말이 나온다.
[주D-028]부황(付黃) : 성균관 유생들이 비행(非行)의 사실이 있는 자의 성명을 황지(黃紙)에 써서 북에 붙이고 거리를 행진하면서 그 비행을 알리던 것을 말하는데, 성균관에 비치된 유적(儒籍)에서 그 이름을 삭제하는 삭적(削籍)과 합칭하여 황부묵삭(黃付墨削)이라고도 하고 또 간단히 황묵(黃墨)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주D-029]권당(捲堂) : 성균관 유생들이 불만이 있을 때 일제히 수업을 거부하고 명륜당(明倫堂)을 빠져나와 동맹 휴학을 하던 일을 말하는데, 공관(空館)이라고도 한다.
[주D-030]마음을 …… 한다 : 전한(前漢)의 동중서(董仲舒)가 무제(武帝) 즉위 초에 올린 현량(賢良) 대책문(對策文) 가운데 “임금이 된 자는 자기 마음을 바로잡아 조정을 바르게 하고, 조정을 바로잡아 백관을 바르게 하고, 백관을 바로잡아 만백성을 바르게 하고, 만백성을 바로잡아 사방을 바르게 해야 한다. 사방이 바르게 되면, 멀고 가까운 곳 모두가 감히 한결같이 바른길로 나오지 않음이 없어서 사특한 기운이 그 사이에 범접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爲人君者 正心以正朝廷 正朝廷以正百官 正百官以正萬民 正萬民以正四方 四方正 遠近莫敢不壹於正 而亡有邪氣奸其間者〕”라는 내용이 나온다. 《漢書 卷56 董仲舒傳》
[주D-031]공도회(公都會) : 각 도(道)의 감사(監司) 및 개성(開城) · 강화(江華)의 유수(留守) 등이 관내의 유생을 대상으로 시행하는 소과(小科) 초시(初試)인데, 여기에 합격한 자에게는 다음 해의 소과 복시(覆試)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주D-032]황첨(黃籤) : 황색의 부전지(附箋紙)라는 뜻으로, 부황(付黃)의 처벌을 가리킨다. 성균관 유생들이 비행(非行)의 사실이 있는 자의 성명을 황지(黃紙)에 써서 북에 붙이고 거리를 행진하면서 그 비행을 알리던 것을 말하는데, 성균관에 비치된 유적(儒籍)에서 그 이름을 삭제하는 삭적(削籍)과 합칭하여 황부묵삭(黃付墨削)이라고도 하고 또 간단히 황묵(黃墨)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주D-033]사마상여(司馬相如)가 …… 고사 : 《근사록》 권9 치법류(治法類)에, 정이(程頤)가 종법(宗法) 제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옛날에는 자제가 부형을 따랐는데 지금은 부형이 자제를 따르는 격이 되고 말았으니, 이는 근본을 모르는 데에서 연유한 것이다. 한 고조가 패 땅을 항복시키고자 하였을 때, 단지 백서(帛書)를 패 땅의 부로들에게 주어서 그 부형들로 하여금 자제들을 거느리고 따르게 하였다. 또 사마상여가 파촉에 사신으로 갔을 때에도 글을 보내 그 부로들을 꾸짖었는데, 그런 뒤에야 자제들이 모두 부로의 명을 듣고서 따르게 되었다.〔古者子弟從父兄 今父兄從子弟 由不知本也 且如漢高祖欲下沛時 只是以帛書與沛父老 其父兄便能率子弟從之 又如相如使蜀 亦移書責父老 然後子弟皆聽其命而從之〕”라고 한 말이 나온다. 사마상여는 한 무제(漢武帝) 때의 사람이다.
[주D-034]서리가 …… 않았다 :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희공(僖公) 33년 조에 “서리가 내렸는데도 풀이 시들지 않고, 오얏과 매실이 열렸다. 이것을 기록한 이유는 무엇인가? 괴이한 변고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괴이한가? 시절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隕霜不殺草 李梅實 何以書 記異也 何異爾 不時也〕”라는 말이 나온다.
[주D-035]요군자무상(要君者無上) : 자기 의견을 받아들이도록 임금에게 강요하면서 임금은 안중에도 두지 않는 태도를 말한다. 《효경(孝經)》 제 11 장 오형(五刑)에 “임금을 위협하는 것은 윗사람을 무시하는 것이요, 성인을 비방하는 것은 법도를 무시하는 것이요, 효행을 비난하는 것은 어버이를 무시하는 것이니, 이는 큰 환란을 부르는 길이다.〔要君者無上 非聖人者無法 非孝者無親 此大亂之道也〕”라는 말이 나온다.
[주D-036]원량(元亮)과 …… 하겠는가 : 《포저집》 권1에 나오는 ‘야목정사에 제하다〔題野牧亭舍〕’라는 시이다. 원량은 진(晉)나라 도잠(陶潛)의 자(字)이다. 그리고 송(宋)나라 대복고(戴復古)가 후한(後漢)의 은사(隱士) 엄자릉(嚴子陵)의 고사를 소재로 읊은 시 조대(釣臺)에 “어떤 일에도 욕심 없이 오직 하나의 낚싯대뿐, 삼공의 자리도 이 강산과 바꿀 수 없고말고. 평소 광무제를 잘못 알고 지낸 탓에, 세상 가득 허명을 야기했을 뿐이라오.〔萬事無心一釣竿 三公不換此江山 平生誤識劉文叔 惹起虛名滿世間〕”라는 내용이 나온다. 《石屛詩集 卷6》
[주D-037]단지 …… 말 : 등 문공(滕文公)이 맹자에게 “제(齊)나라 사람이 설(薛) 땅에 성을 쌓으려고 한다. 내가 매우 두렵기만 한데,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라고 묻자, 맹자가 “임금이 그들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단지 선행에 힘쓸 따름입니다.〔君如彼何哉 强爲善而已矣〕”라고 대답한 말이 《맹자》 양혜왕 하(梁惠王下)에 나온다.
[주D-038]나는 …… 부끄러워한다 : 정이(程頤)가 태어날 때에는 몸이 약했는데 72세가 된 지금에 와서 근력을 비교해 보면 젊었을 때보다 줄어든 것이 없다고 하자, 제자인 사숙(思叔) 장역(張繹)이 양생(養生)을 잘해서 그런 것이냐고 물어보니, 정이가 말없이 있다가 위와 같이 대답한 내용이 《심경부주(心經附註)》 권1 징분질욕장(懲忿窒慾章)에 나온다.


 

선조 36년 계묘(1603,만력 31)
 3월14일 (경오)
영암의 문익주 등이 상소를 올려 최득수를 효자로 표창해 줄 것을 청하다

전라 감사 한준겸(韓浚謙)이 아뢰었다.
“영암(靈巖)에 사는 전 현감 문익주(文益周) 등 20여 인이 연명(連名)하여 와서 정소(呈訴)하기를 ‘군(郡)에 사는 사인(士人) 최득수(崔得壽)는 고(故) 명현(名賢) 최덕지(崔德之)의 6대손이다. 일찍이 의방(義方)을 알았고 성품 또한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른의 뜻을 받들어 어기지 않았고 형제간에 우애가 매우 돈독하였다. 지난 임진년 경성(京城)에서 적변을 만나자 나이 80인 노모를 모시고 삭녕(朔寧)으로 피란하였다. 노모가 병으로 죽자 산중에 임시로 묻어 두고 1년 동안 주야로 빈소 곁을 떠나지 않았는데 마침내 적봉(賊鋒)을 면하고 다음해 가을 금천(衿川)으로 돌아가 장사지낸 다음 3년을 죽만 마시면서 여묘 밖을 나가지 않았다. 계사년·갑오년에 기근이 너무 심하여 여사(廬舍) 옆에서 사람들이 다투어 서로 잡아 먹었지만 득수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의 애절한 통곡과 수척한 모습을 보는 자는 눈물을 흘렸다. 득수는 본군 사람으로 난 후에 와서 살았는데 그 성효(誠孝)의 돈독함을 보면 충분히 사람을 감동시킬 만하므로 순선(旬宣) 아래에 와서 진달하는 것이니 조정에 아뢰어 달라. 그리고 전쟁을 치른 뒤 의열(義烈)로 표창해 줄 사람을 드러내지 않은 것이 없는데 장려해 주는 은전을 입지 못하였으니, 인정이 모두 답답해 하는 것은 물론 장차 후인을 용동시킬 수 없다.’ 하였습니다.
득수가 과연 문익주 등이 진달한 것과 같다면 참으로 가상한 일입니다. 해조로 하여금 더욱더 순방(詢訪)하게 하여 우선 정표(旌表)하게 하소서. 그리고 나주(羅州) 생원 강위호(姜渭虎) 등 1백여 인이 와서 정소하를 ‘난 후 의병을 일으킨 사람 가운데 고경명(高敬命) 같은 이는 광주(光州)에 사당을 세워 주었고 조헌(趙憲) 같은 이는 금산(錦山)에 비석을 세워 주었는데, 김천일(金千鎰)만은 아직 표창해 주는 은전이 없어서 충신의 마을로 하여금 묻혀서 빛이 없게 만들어 수레타고 가는 사람이 경의를 표할 줄 모르고 걸어가는 사람도 존경할 줄 모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호남의 사론(士論)이 지금까지 답답해 하니 또한 조정에 알려서 충신의 공적을 표창해 주고 그 문려에 정표함으로써 후세에 권장되도록 해달라.’ 하였으니, 모두 해조로 하여금 시행하게 하소서.”
【원전】 24 집 457 면
【분류】 *정론(政論) / *인사(人事) / *군사(軍事) / *윤리(倫理)

[주D-001]순선(旬宣) : 관찰사를 가리킴.

 

 

 

(宣祖朝)崔得壽   국조인물록


字德叟全州人直提學德之五代孫壬辰奉母至朔寧母卒殯于山中晝夜號哭賊至

 


負魂箱隱林間賊搜得以爲有奇貨欲害之及開見乃魂箱也賊亦感動指生路而去

 

[주:人物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