全州崔氏
01崔純爵 上將軍
02崔崇 中郞將
03崔南敷 大將軍
04崔佺 郞將
05崔正臣 中郞將
06崔得枰 典書
07崔宰 典理;判書□
08崔有慶 文參贊;平度公;孝旌竹川
09崔士威 左尹
10崔肇 吏判
11崔善敏
06崔立枰
07崔阿 侍中
08崔龍生 按廉使
09崔田雨
10崔澤 販□(屬)郞
11崔斯泌
08崔育慶 吏判;節孝公
09崔士康 僉正
10崔承宗 僉正
11崔孝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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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崔善敏 正郞
02崔玉筍 府使
03崔潔 僉正
04崔斯立 郡守;孝旌
05崔德嶙 參議;孝旌
06崔墪 參奉;孝旌;生德峋;李翰女
07崔克認 鄭泌女;孝旌
08崔柱宇 趙塤女
09崔炡
10崔天祚
11崔宗五
12崔濬
09崔爀 尹相甲女
10崔昌祚 金棖女;戊申勳
11崔宗奭 趙係女
12崔孝天 柳時逢女
13崔鼎鉉
14崔漢鳳 李澤龜女
15崔萬休 洪世權女
08崔柱辰
09崔
07崔克諧 都事
08崔柱國 都事
09崔熩 縣監;生柱炅
10崔顯祚 虞候
11崔宗儒
08崔柱天 郡守
09崔炯 府使
10崔述祚
11崔宗萬
10崔必祚
11崔宗允
12崔孝曾
13崔秉鉉
10崔吉祚
09崔司成
10崔甲祚
11崔宗石
03崔濱 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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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崔玉浩 僉中
03崔沆 牧使
04崔彦英 生□(濱)
05崔德峋 郡府;生斯立;孝旌
06崔基 孝旌
07崔克忠
08崔柱昊 生克諧;孝旌
09崔熀
09崔燦 孝旌
10崔□(胤)祚
11崔宗一
12崔孝源
13崔台鉉
09崔炳
10崔興祚 府使
11崔宗進
06崔墍 奉事
07崔克寬
08崔柱厦 縣監
09崔烶
10崔恒祚
11崔宗大 縣監;生鳳祚
13崔輔鉉
14崔漢英
09崔烷 水使
10崔膺祚
08崔柱石
09崔
10崔鳳祚
11崔宗鼎
12崔孝達 府使
13崔宅鉉
14崔漢應
01崔斯泌
02崔子涇 縣監
03崔水智 縣監
04崔以淮 主夫
05崔致雲 參奉
06崔深 處士;李智遠女
07崔晛 副學;認府
08崔山輝 禮判;□□;金復女
09崔爾博 柳時亨女
10崔體乾 曹公樑女
11崔斗樞 尹以復女
12崔壽仁 進
13崔光岳 進;金履萬女
14崔鳳羽 進
15崔雲承 進
16崔宗植
17崔炳溫
14崔龍羽 李憲儒女
15崔雲昌
16崔廷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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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全崔]13崔光璧 參判
14崔陽羽 直長;洪和輔女
15崔雲錫 進
16崔東植
15崔雲翼
16崔華植
13崔光翊 進;李之彬女
14崔鶴羽 進
15崔雲應 進
16崔健植 生
14崔昇羽 金熙稷女
15崔雲璜
13崔光稷 進
14崔文羽 生光廸
15崔雲範
16崔觀植 生雲翼
13崔光廸 參奉
14崔命羽 進
15崔雲一
16崔忠植
15崔雲圭
16崔岡植 申允模女
12崔壽恭
13崔光玉 進;洪曙女;生壽仁
14崔明羽 進
15崔雲慶 進
16崔元植
17崔炳奎
18崔鳳基 進
19崔鍾錫 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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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崔章羽 李萬應女
15崔雲 生明羽;進
16崔植 進
17崔炳宇 生相甲
01崔孝恭 宣傳
02崔命孫
03崔嶪 別提
04崔秀俊 舍人;府使;晩谷;牛溪門人
05崔起南
06崔晩吉 正郞;趙珉女
07崔後寔 郡守
08崔錫弼 府使;李基稷女
09崔昌會 生;正字;韓配周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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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墓誌) | ||||
추성 양절공신 중대광 광양군 최공 묘지명(推誠亮節功臣重大匡光陽君崔公墓誌銘) 병서(幷序) |
이제현(李齊賢)
완산 최씨(完山崔氏)는 예부 낭중(禮部郞中) 균(鈞)이 서 동(東)으로 된 판본도 있다 적(西賊)의 난리 때 순절한 후부터 이름난 집안이 되었다. 그의 아들 보순(甫淳)은 고왕(高王)의 정승이며,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문정은 봉어(奉御) 윤칭(允偁)을 낳았고, 봉어는 학사(學士) 소(佋)를 낳았으며, 학사는 찬성사(贊成事) 비일(毗一)을 낳았다. 비일이 사재경(司宰卿) 신 홍성(辛洪成)의 딸에게 장가들어 공을 낳았다. 공은 이름을 다섯 번 바꾸었는데, 부(阜)ㆍ당(璫)ㆍ수(琇)ㆍ실(實)이요, 맨 나중 이름이 성지(誠之)이다, 자는 순부(純夫)이며 호는 송파(松坡)이다. 20세 전에 진사로서 지원(至元) 갑신년(충렬왕 원년) 과거에 급제하여 계림(鷄林)의 관기(管記)가 되었다가 사한(史翰)에 보직받았다. 춘관속(春官屬)으로 뽑혀 덕릉(德陵 충선왕)을 따라 원 나라에 조회하러 갔는데, 집정관들이 덕릉을 두려워하고 미워하여 백가지 꾀로 달래어 가도록 하니, 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궁하고 영달함은 하늘에 달린 것이니, 이해에 동요됨은 선비가 아니다.” 하였다. 대덕(大德) 말년에 황태제(皇太弟)를 부호하여 내란을 평정하고 무종황제(武宗皇帝)를 옹립하였는데, 공이 항상 좌우에 기거하면서 일을 도왔으나 사람들은 아는 자가 없었다. 조현총랑(朝顯摠郞)에서 여섯 번 전직하여 삼사좌사(三司左使)가 되니, 관품은 봉익(奉翊)이다. 얼마 후에 첨의평리 삼사사 첨의찬성사(僉議評理三司使僉議贊成事)로 영전되니, 관품은 중대광(重大匡)이요, 추성양절공신(推誠亮節功臣)의 호를 받고 광양군(光陽君)에 봉해졌다.
덕릉이 토번(吐藩)으로 가는데, 공의 아들 문도(文度)가 이 소문을 듣고 달려가 도중에서 만나 공과 함께 관서(關西)까지 따라가는 도중, 때마침 중 원명(圓明)이 배반하여 중남(中南)에서 군사(軍事)가 막아서 앞으로 더 갈 수 없었다. 일이 평정되어 농서(隴西)를 넘어 임조(臨洮)에 닿았는데, 험악한 지경은 단기(單騎)로 갈 수 없으므로 임조에서 반년을 머무르다가 돌아오게 되었다. 이때 본국 사람들이 패당을 지어 서로 소송하므로 조정에서 성(省)을 세워내지(內地)와 같이 할 것을 의논하였는데, 공과 전 재상(宰相) 김정미(金廷美)ㆍ이제현(李齊賢) 등이 글을 올려 이해(利害)를 진술하여 마침내 그 의논을 중지하게 하였다. 심부(瀋府)의 관원들이 또 국가의 잘잘못을 지목하여 장차 묘당(廟堂)에 말하려고 하는데, 공이 홀로 서명하지 않으니 나중에는 주모자들이 부중(府中)에서 함께 앉아 녹사(錄事)를 시켜 지필(紙筆)을 가져다가 서명하기를 청하였다. 공이 목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재상을 지냈는데, 여러 녹사들이 나를 협박하려고 하는가.” 하니, 여러 사람들은 기가 꺾여 그만 그치었다. 태정(泰定) 갑자년(충숙왕 17년)에 상서(上書)로 물러나기를 청하여 임금의 윤허를 얻었다. 광양군(光陽君)으로서 집에 있는데, 소리하는 기생을 두고 손님들을 청해다가 청담아소(淸談雅笑)로 세월을 보내고 세상일을 묻지 않았다. 지순(至順) 경오(충숙왕 17년)에 병이 들어 7일만인 계해일에 집에서 세상을 마쳤으니 나이 65세였다. 나라 관원이 상사(喪事)를 다스리고, 시호를 문간공(文簡公)이라 하였다. 공은 성품이 굳세고 곧아서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자획(字畫)이 해정(楷正)하고, 시는 순후하고 여유로워 즐길 만하였으며, 더욱 음양추보법(陰陽推步法)에 조예가 깊었다. 법관ㆍ선거(選擧)ㆍ천문ㆍ사원(詞苑)에 임명되기 또한 20년이었는데, 덕릉의 후한 대우는 종시 공보다 앞선 이가 없었다. 일찍이 과거를 보일 때 안진(安震) 등 33명을 뽑았는데, 그중에는 명사(名士)들이 많았다. 부인(夫人) 김씨는 찬성사 둔촌거사(贊成事鈍村居士) 훤(晅)의 딸로서 행실이 어질었는데, 공보다 3년 먼저 죽었다. 아들은 하나인데 전 상호군(上護軍) 문도(文度)이다. 글을 읽되 정주학(程朱學)을 좋아하였고, 선진(先進)들과 교제하였다. 딸은 하나인데 만호 밀직부사(萬戶密直副使) 권겸(權謙)에게 출가하였다.
명가의 후손으로 태어나 / 爲名家之嗣
그 임금을 얻어 그 뜻을 펴고 / 得其君而伸其志
예로써 벼슬에 나아가고 / 進以禮
의리로써 물러났도다 / 退以義
어진 아내가 공의 평생을 봉향하였고 / 有賢妻以養其生
착한 아들이 공의 죽음을 보내도다 / 有良子以送其死
지금 시대에서 구하면 / 求之今時
열에 한 둘이 못 되네 / 十無一二
아, 광양군이여 / 嗚呼光陽
유감이 없으리로다 / 可無憾矣
[주D-002]심부(瀋府)의 관원들 : 충선왕은 고려왕과 심양왕을 겸하였는데, 고려왕의 왕위는 충숙왕(忠肅王)에게 넘겨주고 심양왕의 왕위는 작은 아들 고(暠)에게 전해 주었으나, 심양왕이란 말뿐이요, 실제로 국토가 있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항상 그것 때문에 여러 가지 말썽을 일으켰다.
[주D-003]음양추보법(陰陽推步法) : 일월(日月)과 오성(五星)의 도수(度數)를 추산하여 책력을 만드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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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명(碑銘) | ||||
고려국 대광(大匡) 완산군(完山君) 시(諡) 문진(文眞) 최공(崔公)의 묘지명 병서(幷序) |
완산 최씨(完山崔氏)의 족보 중에서 상고할 만한 이로 순작(純爵)이라는 분이 있는데, 관직이 검교신호위 상장군(檢校神虎衛上將軍)에 이르렀다. 이분이 숭(崇)을 낳았으니 관직은 중랑장(中郞將)이요, 중랑장이 남부(南敷)를 낳았으니 관직이 통의대부(通議大夫) 좌우위대장군 지공부사(左右衛大將軍知工部事)에 이르렀다. 공부가 휘(諱) 전(佺)을 낳았으니 좌우위 보승 낭장(左右衛保勝郞將)이요, 낭장이 휘 정신(正臣)을 낳았으니 좌우위 중랑장(左右衛中郞將)이다. 중랑장이 휘 득평(得枰)을 낳았는데, 통헌대부(通憲大夫) 선부전서 상호군(選部典書上護軍)으로 치사(致仕)하였다.
선부(選部)는 청렴과 공정을 신조로 자신을 굳게 지켰으므로 사람들이 경외하며 어렵게 여겼다. 충렬(忠烈)ㆍ충선(忠宣)ㆍ충숙(忠肅)의 세 임금을 차례로 섬겼는데, 그중에서도 충선왕이 특히 재능을 인정하고 중히 여겼다. 당시에 충선왕이 비록 왕위를 넘겨주기는 하였지만 나라의 정사에는 반드시 참여하였기 때문에, 사대부에 대한 인사 행정이 충선왕의 손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선부가 대간(臺諫)을 맡으면 기강이 확립되었고, 형부(刑部)에 있으면 형벌이 공정하게 시행되었다. 김해(金海)와 상주(尙州)의 목민관으로 나갔을 때는 백성들이 그 은혜를 사모하였고, 전라도(全羅道)를 두 번 안찰(按察)하였을 때에는 백성들이 그 풍도를 두려워하였다. 양전(量田 토지 조사)을 행할 적에 재상(宰相) 채홍철(蔡洪哲)의 부관(副官)이 되어 전라도 주현(州縣)의 토지를 분담해서 처리하였는데, 법에 어긋나지 않게 하면서도 백성들이 동요되지 않게 하였다. 향년(享年)은 75세였다.
선부의 부인은 봉익대부(奉翊大夫) 지밀직사사 감찰대부 문한학사승지 세자원빈(知密直司事監察大夫文翰學士承旨世子元賓) 곽공(郭公) 휘 예(預)의 딸이다. 대덕(大德) 계묘년(1303, 충렬왕29) 4월 계유일에 공을 낳았다.
공의 이름은 재(宰)요, 자(字)는 재지(宰之)이다. 지치(至治) 원년(1321, 충숙왕8)에 동대비원 녹사(東大悲院錄事)에 보임(補任)되었다. 태정(泰定) 갑자년(1324, 충숙왕11)에 내시부(內侍府)로 들어갔다가 태정 4년에 산원(散員)에 제수되었으며, 그 이듬해에 별장(別將)으로 옮겼다. 천력(天曆) 경오년(1330, 충혜왕 즉위)에 순흥군(順興君) 안공 문개(安公文凱)와 심악군(深岳君) 이공 담(李公湛)이 공동으로 관장한 과거에서 공이 급제하였는데, 6년이 지난 뒤에 단양부 주부(丹陽府注簿)로 개임(改任)되었고, 또 4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중부령(中部令)에 제수되면서 승봉랑(承奉郞)의 품계를 받았다. 얼마 뒤에 지서주사(知瑞州事)가 되었으나 모친상을 당해 부임하지 않았으니, 이는 복제(服制)를 마치기 위함이었다. 이듬해에 충숙왕이 쓸모없는 관원들을 도태시켰다. 이때 어떤 사람이 공을 천거하니, 왕이 이르기를 “내가 원래 그의 부친을 알고 있다. 풍헌관(風憲官)으로는 이 사람을 당할 자가 없을 것이다.” 하고는 즉시 감찰 지평(監察持平)을 제수하였으므로 공이 부득이 취임하였다가, 영릉(永陵 충혜왕(忠惠王))이 복위하자 이에 체직(遞職)되었다.
그러다가 고씨(高氏)의 난이 일어남에 미쳐서는, 무릇 왕이 설치해 놓은 것들을 모조리 뜯어고치려 하면서 도감(都監)을 세우고는 공을 판관(判官)으로 임명하였는데, 공이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여 병을 칭탁하고 나가지 않았다. 이에 상부(相府)가 자못 독촉하면서 협박을 가해 오자, 공이 천천히 나가서 도감의 판사(判事)인 재상에게 말하기를 “왕이 물론 덕을 잃기는 하였다. 그러나 신하 된 입장에서 임금의 불미스러운 점을 들추어내는 것이 공의 마음에는 편안한가? 왕의 잘못은 왕에게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좌우에 있는 신하들이 영합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앞에서는 영합하다가 뒤에 가서 들추어내다니, 나는 이를 실로 부끄럽게 생각한다.” 하니, 그 재상이 입을 다문 채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명릉(明陵 충목왕(忠穆王))이 즉위한 뒤 처음 행한 정사(政事)에서 공에게 전법 정랑(典法正郞)을 제수하였다. 그해 겨울에 흥주(興州)를 다스리러 나가서, 백성을 편안하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거행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또 전적(田籍)이 오래되어 낡았으므로 공이 이를 개수(改修)하였는데, 소장되어 있던 구본(舊本)과 일일이 확인하여 대조하는 작업을 벌이자 듣는 이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인 정승(印政丞 인당(印璫))이 정권을 잡고 나서는 평소에 공을 꺼렸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교체시켰다.
정해년(1347, 충목왕3)에 정승인 왕공 후(王公煦)와 김공 영돈(金公永暾)이 성지(聖旨)를 받들고서 전민(田民)의 송사(訟事)를 정리할 적에, 공을 판관(判官)으로 천거하고는 역마(驛馬)를 치달려 불러오게 하였다. 그런데 공이 도착하자, 두 정승이 또 상의하기를 “장흥부(長興府)는 지금 다스리기 어려운 곳으로 유명하니, 최모(崔某)가 아니면 안 되겠다.” 하고는 다시 외방으로 나가게 하였다. 이에 공이 장차 부임하려고 하였는데, 두 정승이 또 상의하기를 “최모는 전에 지평(持平)으로 있을 적에 위엄과 명망을 떨쳤다. 그러니 이곳에 머물러 두어 재임(再任)시키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였다. 그러나 때마침 외씨(外氏)인 곽공 영준(郭公迎俊)이 대부(大夫)로 있었기 때문에 법제상 상피(相避)해야 했으므로 전법 정랑(典法正郞)으로 옮겨졌다.
무자년에 경상도 안찰사(慶尙道按察使)가 되었으며, 1년 중에 전객 부령(典客副令)과 자섬사사(資贍司使)로 자리를 두 번 옮겼다. 공이 빈객을 접대하는 일과 궁중의 수요(需要)를 충당하는 일을 함께 담당하면서 남는 물품이 있으면 모두 백성들에게 돌려주었으므로 그동안의 폐단이 근절되었다. 기축년에 양주(襄州)의 목민관으로 나갔다. 원(元)나라의 사자(使者)가 향(香)을 내려 주러 와서 존무사(存撫使)를 능욕하자, 공이 말하기를 “이런 무례한 일이 장차 나에게도 닥칠 것이다.” 하고는, 관직을 버리고 돌아왔다. 이에 집정(執政)하던 자가 기뻐하며 상에게 아뢰어 감찰 장령(監察掌令)을 제수하자 대간(臺諫)의 기강이 다시 떨쳐지게 되었는데, 1년 만에 파직되고 말았다.
신묘년(1351)에 현릉(玄陵)이 즉위하자, 대신(臺臣)에 뽑혀 다시 장령(掌令)이 되었다. 이듬해에 개성 소윤(開城少尹)으로 옮겨지자 사직하고 청주(淸州)로 돌아갔는데, 이때 조일신(趙日新)의 난이 일어났다. 갑오년(1354, 공민왕3)에 전법 총랑(典法摠郞)으로 부름을 받았다가 얼마 뒤에 판도사(版圖司)로 옮겨졌다. 그해 가을에 복주 목사(福州牧使)로 나가서 민정(民政)을 살피고 조약(條約)을 지켰다. 공이 떠나던 날에 사람들이 마치 부모를 잃은 것처럼 슬퍼하였으며, 그때 공이 설치해 놓은 것들을 지금까지도 준수하고 있다. 을미년 가을에 중현대부(中顯大夫) 감찰집의 직보문각(監察執義直寶文閣)으로 조정에 불러들였다.
군사를 뽑을 때 전지(田地)를 주는 것은 예전부터의 제도였는데, 공을 명하여 그 도감사(都監使)의 일을 맡아보게 하였다. 그런데 한 사람이 전지를 받을 경우, 그에게 자손이 있으면 자손이 전해 받고, 자손이 없으면 다른 사람이 대신 받았으며, 죄를 지어야만 그 전지를 환수하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마다 전지를 얻으려고 하다 보니 자연히 시끄럽게 분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이는 바로 백성들을 다투게 하면서 빼앗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격이니, 이대로 해서야 되겠는가.” 하고는, 전지를 받아야 할 당사자 한 사람에게만 주고 당대(當代)로 그치게 하자, 이에 관한 송사(訟事)도 차츰 줄어들게 되었다. 병신년에 대중대부(大中大夫) 상서 우승(尙書右丞)에 임명되었다. 정유년에 정의대부(正議大夫) 판대부시사(判大府寺事)로 승진하였다. 이때 공의 나이 55세였지만 뜻은 조금도 쇠하지 않아 더욱 직무에 충실한 결과 순월(旬月) 사이에 부고(府庫)가 가득 차게 되자, 현릉이 이르기를 “판대부의 직책을 극진하게 수행한 자는 최모뿐이다.” 하였다.
기해년(1359, 공민왕8)에 공주 목사(公州牧使)로 나가서 복주(福州)에 있을 때처럼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신축년에 또 외방으로 나가서 상주 목사(尙州牧使)가 되었다. 그해 겨울에 조정이 병란을 피해서 남쪽으로 옮겨 갔다가 이듬해 봄에 상주로 대가(大駕)가 거둥하였다. 이때 공이 있는 힘껏 접대를 하면서도 혹시 조금이라도 백성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였으므로, 무엇을 요구하다가 얻지 못한 자들로부터 차츰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해 3월에 봉익대부(奉翊大夫) 전법 판서(典法判書)로 본경(本京)에 가서 분사(分司)를 맡게 되었는데, 공이 하직 인사를 올리자 현릉이 인견(引見)하고는 따뜻한 말로 타이르며 위로하였다.
갑진년(1364, 공민왕13)에 감찰대부(監察大夫) 진현관제학 동지춘추관사(進賢館提學同知春秋館事)에 임명되었다. 그해 겨울에 중대광(重大匡) 완산군(完山君)에 봉해졌다. 이듬해에 전리 판서(典理判書)로 옮겼다가 이듬해에 또 개성 윤(開城尹)으로 옮겼다. 기유년(1369, 공민왕18)에 새로운 관제(官制)가 시행되자 영록대부(榮祿大夫)로 바뀌어졌다. 신해년에 안동(安東)의 수신(守臣) 자리가 비게 되자, 현릉이 이르기를 “안동을 지킬 적임자를 내가 이미 알고 있다.” 하고는, 비답(批答)을 내리면서 위사(衛士)를 보내 공의 출발을 재촉하였으니, 이는 공이 사퇴하고 취임하지 않을까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갑인년(1374, 공민왕23) 봄에 노쇠했다고 청하여 허락을 얻고 고향에 돌아왔다. 그해 9월에 현릉이 훙(薨)하자, 공이 곡(哭)하는 자리에 나아가서 애통한 심정을 극진히 하였다.
금상(今上 우왕(禑王))이 즉위하여 공을 밀직부사 상의(密直副使商議)에 임명하였으나, 공이 고사(固辭)하고 간청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공에게 완산군(完山君)이 봉해지고 대광(大匡)의 품계로 올랐다. 이듬해 봄에 수레를 몰게 하여 강릉(江陵)의 밀직(密直) 최안소(崔安沼)를 방문하고 돌아왔으니, 이는 그에게 영결(永訣)을 고하려 함이었다. 그해 9월에 가벼운 질환을 앓게 되자, 여러 자제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꿈을 꾸니 이인(異人)이 나타나서 오시(午時)에 이르면 죽을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런데 올해가 무오년이고 또 나의 병이 이와 같으니, 내가 필시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10월 기사일에 죽으니, 향년 76세였다. 12월 임인일에 살던 집의 동쪽 감좌(坎坐)의 산기슭에 장사 지냈으니, 이는 공의 유언에 따른 것이었다. 아, 그러고 보면 공이야말로 달관한 사람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공은 두 번 장가들었다. 영산군부인(靈山郡夫人) 신씨(辛氏)는 봉익대부(奉翊大夫) 판밀직사사 예문관제학(判密直司事藝文館提學)으로 치사(致仕)한 휘(諱) 천(蕆)의 딸이요, 무안군부인(務安郡夫人) 박씨(朴氏)는 군부 정랑(軍簿正郞) 휘 윤류(允鏐)의 딸이다. 신씨는 아들 둘을 낳았다. 장남 사미(思美)는 봉익대부 예의 판서(禮儀判書)이고, 다음 덕성(德成)은 급제(及第) 출신으로 중정대부(中正大夫) 삼사 좌윤(三司左尹)이다. 박씨는 자녀 셋을 낳았다. 아들 유경(有慶)은 중정대부 종부령 지전법사사(宗簿令知典法司事)이고, 딸은 성근익대공신(誠勤翊戴功臣) 광정대부(匡靖大夫) 문하평리 상호군(門下評理上護軍) 우인열(禹仁烈)에게 출가하였으며, 다음은 선덕랑(宣德郞) 선공시 승(繕工寺丞) 조령(趙寧)에게 출가하였다.
손자와 손녀가 약간 명 있다. 판서는 자녀 다섯을 두었다. 장남 서(恕)는 호군(護軍)을 거쳐 현재 전라도 안렴사(全羅道按廉使)이고, 다음 원(愿)은 중랑장(中郞將)이고, 다음 각(慤)은 별장(別將)이며, 장녀는 예의 총랑(禮儀摠郞) 송인수(宋仁壽)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어리다. 좌윤은 자녀 넷을 두었다. 장남 복창(復昌)은 별장이고, 다음 세창(世昌)은 별장이고, 다음 사창(仕昌)은 아직 벼슬하지 않았으며, 딸은 어리다. 종부(宗簿)는 자녀 셋을 두었다. 아들 사위(士威)는 낭장(郞將)이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평리는 자녀 셋을 두었다. 아들 양선(良善)은 영명전 직(英明殿直)이고, 딸은 모두 어리다. 시승(寺丞)은 딸 하나를 두었는데, 어리다.
좌윤은 나의 친구이다. 성격이 호탕하여 술을 마실 때마다 호기를 곧잘 부리는데,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 어디를 가나 그 일로 이름이 났다. 그가 와서 명(銘)을 청하기에 이렇게 글을 지었는데, 명은 다음과 같다.
공은 올곧았고 / 惟公之直
공은 맑았나니 / 惟公之淸
공의 덕성에 걸맞게 / 惟公之德
공의 이름 떨쳤다네 / 惟公之名
그 이름 그 덕이면 / 惟名惟德
세상의 모범이 되련마는 / 惟世之則
어찌하여 크게 쓰이는 몸이 되어 / 胡不大用
일찍이 우리 왕국 바로잡지 못했던가 / 正我王國
우리 왕을 일단 보좌하게 된 뒤로는 / 旣相我王
조정의 어려운 일 주선을 하였는데 / 周旋廟堂
일흔 하고 여섯의 나이가 되었어도 / 年七十六
건강하고 굳센 것은 여전하였다오 / 尙爾康強
물러날 때 보여 준 결단성이여 / 公退則決
이것이 바로 명철함이 아니리요 / 允矣明哲
아 우리 최공이시여 / 嗚呼崔公
세상에서 그 풍도 흠모하리라 / 世歆其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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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序) | ||||
완산 최씨 족보(完山崔氏族譜) 서문 을묘년(1675, 숙종 1) |
지난해에 구만이 북관(北關)에 있을 때에 도사(都事) 최한경(崔漢卿) 씨가 편지를 보내오기를, “저의 9대조이신 평도공(平度公)의 묘소가 용인현(龍仁縣)에 있는데, 옛날에 글을 쓴 표석이 있었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부러지고 넘어져서 이제 다시 새 것으로 바꾸고자 합니다. 그대 또한 공의 외손이 되니, 마땅히 이 일을 도와주십시오.” 하였다. 구만은 늦게 태어나고 몽매하여 선대(先代)의 고사를 알지 못하였는데, 한경 씨가 최씨의 족보를 새로 편수했다는 말을 듣고서 청하여 살펴보았다. 구만의 고조인 승지공(承旨公)은 박씨(朴氏)의 사위가 되고, 박씨의 위 3대는 최씨(崔氏)의 사위가 되고, 최씨의 위 4대는 바로 평도공(平度公)이니, 구만에게 11대조가 된다.
아, 나의 몸은 이미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시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몸은 또 모두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시니, 거슬러 올라가 찾는다면 비록 연대가 더욱 멀고 계파가 더욱 많다 하더라도 모두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올라가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시는 분들이니, 내 성씨의 종통(宗統)이 아니라 하여 소홀히 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지금 마침내 대단치 않게 생각하고 잊고서 내가 이 몸을 소유하게 된 유래가 있음을 알지 못하였으니, 어찌 서글프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를 면할 수 있는 길은 보첩을 편수하는 것이다. 이제 한경 씨의 족보를 통하여 마침내 이 구만이 최씨의 외손이 됨을 알았으니, 만약 당대의 사대부 집안에서 모두 한경 씨가 족보를 편수한 것과 같이 한다면 비록 이 구만처럼 몽매한 자들이라 해도 씨족을 상고한 내용을 얻어들어서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위로 올라가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심을 알게 될 것이다. 이미 이것을 안다면 먼 선조를 추모하는 마음이 저절로 그치지 않을 것이요, 이미 먼 조상을 추모한다면 친척에게 돈독히 하려는 마음이 또 그치지 않을 것이니, 먼 선조를 추모하고 친척에게 돈독히 한다면 백성들의 마음이 비록 후덕해지지 않으려 하나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보첩을 편수하는 자가 또 나와 같은 성씨의 후손이 아니라 하여 버려서는 안 됨이 분명하다.
이제 최씨의 보첩은 외손들을 함께 기록하여 그 번거로움을 꺼리지 않았으니, 진실로 거룩한 덕의 아름다움이 외손에게까지 미침이 또한 이와 같아 다만 본손(本孫)들이 세상에 혁혁할 뿐만이 아님을 밝힌 것이다. 또 구만과 같은 무리로 하여금 백성들의 마음이 후덕해지는 데에 면려하도록 하고자 하였으니, 사람들에게 자신이 말미암아 태어나게 된 선조를 잊지 않기를 바람이 지극하다 할 것이다. 한경 씨가 보첩을 다 편수한 다음 나에게 한마디 말을 부탁하였다. 모든 원류(源流)에서 쌓은 덕의 깊고 멂과 기재한 범례의 요체에 있어서는 족보를 보는 자가 마땅히 스스로 알 것이니 여기에 감히 다시 말할 것이 없으며, 다만 구만이 마음속에 느낀 바를 이와 같이 쓰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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序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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