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경인년 산행/2010.10.1. 광화문 광장

2010.10.1. 광화문 광장의 모습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

아베베1 2010. 10. 2. 01:32

   경복궁 남문인 광화문의 모습 최근 단장된 광화문의 모습은 경복궁 남문의 역할을 하는 문으로 원래의 위치에 복원된 모습이다

  교육차 같다가 간단하게 몇장을 담아 보았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총서 내용 .            

 

세종 장헌 영문 예무 인성 명효 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의 휘는 도(祹)요, 자는 원정(元正)이니, 태종 공정 대왕(太宗恭定大王)의 세째 아들이요, 어머니는 원경 왕후(元敬王后) 민씨(閔氏)이다. 태조(太祖) 6년 정축 4월 임진에 한양(漢陽) 준수방(俊秀坊) 잠저(潛邸)에서 탄생하였으니, 명나라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 홍무(洪武) 30년이다. 영명(英明) 강과(剛果)하고, 침의(沈毅) 중후(重厚)하며, 관유(寬柔) 인자(仁慈) 공검(恭儉)하고, 또 효도하고 우애함은 천성이 그러하였다. 태종 8년 무자 2월에 충녕군(忠寧君)으로 봉하였고, 우부대언(右副代言) 심온(沈溫)의 딸과 결혼하여, 그를 경숙 옹주(敬淑翁主)로 봉하였다. 13년 임진 5월에 충녕 대군(忠寧大君)으로 올려 봉하고, 18년 무술 6월 임오에 태종이 개성에 머무를 제, 문무 백관들이 세자 이제(李禔)가 잘못이 많다 하여, 글을 올려 폐하기를 청하매, 태종이 제의 맏아들로써 계승하게 하려 하였으나, 여러 신하가 모두 아뢰기를,
“전하께옵서 세자를 교양하심이 극진하셨건마는 오히려 이러하니, 이제 어린 손자를 세운다면 어찌 앞날의 무사할 것을 보장하오리까. 하물며 아버지를 폐하고 아들을 세움이 의리에 어떠하올지. 청컨대 그 중 어진이를 골라서 세우시기를 바라옵니다.”
하였다. 태종이 말하기를,
“그러면 경들이 마땅히 어진이를 가리어 아뢰라.”
하니, 여러 신하들이 함께 아뢰기를,
“아들이나 신하를 알기는 아버지나 임금과 같은 이가 없사오니, 가리는 것이 성심(聖心)에 달렸사옵니다.”
하였다. 태종이 말하기를,
“충녕 대군이 천성이 총민하고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아, 비록 몹시 춥고 더운 날씨라도 밤을 새워 글을 읽고, 또 정치에 대한 대체(大體)를 알아, 매양 국가에 큰 일이 생겼을 제는 의견을 내되, 모두 범상한 소견이 의외로 뛰어나며, 또 그 아들 중에 장차 크게 될 수 있는 자격을 지닌 자가 있으니, 내 이제 충녕으로써 세자를 삼고자 하노라.”
하였다. 여러 신하가 함께 아뢰기를,
“신들의 이른 바 어진이를 골라야 한다는 말씀도 역시 충녕 대군을 가리킨 것이옵니다.”
하였다. 의론이 이미 정해지매, 곧 그를 세워 왕세자를 삼고, 백관에게 명령을 내려 들어와 하례를 올리게 하였다. 그리고 장천군(長川君) 이종무(李從茂)를 보내어 종묘(宗廟)에 사유를 고하고 교서(敎書)를 중외(中外)에 내려 죄인을 석방케 하니, 그 글에 이르기를,
“세자를 세움에 있어서 어진이를 가림이란 고금에 커다란 의리이고, 죄가 있을 제는 의당 폐하여야 함은 국가의 마련된 법이다. 일은 한 가지에 얽매이지 않고 이치에 알맞게 할 따름이니, 내 일찍이 맏아들 제(禔)를 세워 세자를 삼았으나, 나이가 이미 장성하였으되 불행히 학문을 사랑하지 않고 음악과 여색에 마음이 쏠리었으매, 내 처음에는 그가 젊은 만큼 나이가 장성하면 아마 잘못을 뉘우치고 새로운 길을 찾으리라 바랐더니, 이제 나이가 스물이 넘도록 오히려 군소배와 사통하여 의롭지 않은 일을 방자히 저지르다가, 지난해 봄에 일이 발각되어, 죽음을 당한 자가 두어 사람이나 되었으매, 제(禔)가 그제서야 그 허물을 상세히 기록하여 종묘에 고하고 나에게 글을 올려 마치 스스로 뉘우치는 듯이 하더니, 얼마 아니 되어 또 간신 김한로(金漢老)의 음모에 빠져서 다시 전철을 밟게 되었다. 내 부자의 은정으로써 다만 한로를 쫓아내었으나, 제는 오히려 고치는 마음이 없을 뿐더러, 도리어 원망과 노염을 품고서 분연히 글을 올렸으되, 사연이 매우 패려하고 오만하여 전연 신자의 도리가 없었으므로, 이제 정부의 훈신들과 육조(六曹)·대간(臺諫)과 문무 백관이 함께 이름을 적어 글을 올렸으되, ‘세자의 행실을 보아서는 대통을 이어받아 종사를 주장하여 중대한 책임을 질 수 없겠사오니, 엎드려 바라건대, 위로는 태조께옵서 초창하시기에 어려웠음을 생각하시고, 또 종사 만대의 대계를 염려하시며, 아래로는 대소 신료의 바라는 바를 살피시와, 공의(公義)로써 영단을 내리시어, 세자를 폐하여 밖으로 추방하시고, 종실 중에 어진이를 골라 세자로 세워서 인심을 안정시켜 주시옵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충녕 대군이 영명(英明) 공검(恭儉)하고, 효우(孝友) 온인(溫仁)하며, 학문을 즐겨하여 게을리하지 않사오니, 진실로 세자의 망(望)에 합당합니다.’ 하므로, 내 부득이 제를 밖으로 추방하고 충녕 대군 이도(李祹)를 세워 왕세자를 삼게 되었으니, 아아, 옛사람의 말씀에 이르기를, ‘화나 복이 모두 제 자신이 부른 바 아님이 없다.’ 하였으니, 내 어찌 이에 털끝 만큼이라도 애증의 사심이 있으리오.”
하였다.
【원전】 2 집 259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왕실-국왕(國王) / *인사-임면(任免)



 

[주D-001]잠저(潛邸) : 왕위에 오르기 전에 거처하던 집.
[주D-002]망(望) : 후보.

 

  

갑신에 세자에게 궁(宮)을 주고 교지로 부인 경숙 옹주(敬淑翁主)를 경빈(敬嬪)으로 봉하였다. 병신에 태종이 정전(正殿)에 나와 세자를 책봉하니, 그 책문에 이르기를,
“세자를 세움은 인심에 관계되는 것이매, 실로 큰 전칙(典則)이 되는 것이다. 원량(元良)을 가리어 나라의 근본을 바로잡으려 할진댄, 오직 지공하여야 할 것이다. 이제 이 명(名)과 위(位)의 높음을 바르게 하여 책봉의 예식을 거행하노니, 너 충녕 대군 도는 관홍(寬弘)·장중(莊重)하고 효제(孝悌)·겸공(謙恭)하여, 사랑과 공경으로써 어버이를 섬기되, 아무 때에라도 조심조심하며, 총명한 자질에 배움을 즐겨하여, 날마다 부지런히 부지런히 하여, 나라 일을 부탁함에 합당하고, 신하와 백성이 우러러 소망을 둘새, 이러므로 너를 책봉하여 왕세자를 삼노라. 아아, 하늘이 밝은 덕을 돌보시고 귀신이 그 정성을 흠향하니, 제사를 맡아 계통을 잇되 늘 책임이 어렵고도 큼을 생각하여, 깊은 못에 다다른 듯이, 얇은 얼음을 밟는 듯이 하여야 길이 복록을 누리리라.”
하고, 경빈에게 책문을 내리기를,
“공의(公義)를 따라 원량(元良)을 세우니, 세자의 자리가 곧 정해졌고, 배필을 신중히 하여 종사를 받드니, 위호(位號)를 마땅히 높여야 할 것이다. 이에 아름다운 칭호로써 떳떳한 법전(法典)을 따르노니, 아아, 너 심씨(沈氏)는 곧고 아름다운 성품과 단정한 몸가짐으로 늘 공경함과 두려운 마음을 지녔고, 일찍이 근검한 덕이 현저하여 능히 부도(婦道)에 도타왔으니 한 집안 식구 됨에 합당한지라, 이에 좋은 날을 가리어 대례의 절차를 이에 갖출새, 이제 신하 아무를 보내어 경빈에 책봉하노니, 정숙하고 화기롭게 힘쓸지니 정성은 남편이 정치에 근면하기를 권고하고 돕기에 간절히 하여, 힘써 서로 받들 것이며, 자손이 번창하여, 상서로움이 더욱 클지어다.”
하고, 또 국내에 대사(大赦)하는 교서를 내리기를 ‘세자를 세워 근본을 확정함은 종묘를 받들고 인민의 마음을 안정시켜 일만 세대의 앞날을 위해 꾀함이었노라. 옛날 주 문왕(周文王)이 백읍고(伯邑考)를 두고서 무왕(武王)을 세웠음은 오직 그가 어질기 때문이었다. 모든 신하에게 자문하여 비로소 아들 도(祹)를 세워 왕세자를 삼고 이미 온 나라에 포고하였거니와, 전례(典禮)를 상고하건대, 마땅히 책봉을 행해야 할 것이매, 곧 영락(永樂) 16년 6월 17일에 책보(冊寶)를 주었으니, 이러한 거룩한 행사에 부쳐 마땅히 너그러운 은전을 선포할 것이다. 아아, 이미 원량(元良)을 세워 귀신이나 사람의 바람을 위로하게 되니, 비로소 티와 때를 씻었는지라, 한편으로 널리 용서하는 은택을 베푸노라.”
하였다. 임금이 글을 올려 사례하기를,
“조회에서 책봉하는 대명(大命)을 내리시어 세자를 세워 나라의 근본을 바로잡으실 제 그릇 신의 몸에 이르오니, 송구한 마음 진실로 간절하오며 더욱 감격하옴이 깊사옵나이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신 도(祹)는 식견이 천박하옵고 성품이 우매하와, 부모를 모심에 승순(承順)하는 도리를 알지 못하옵고, 경전(經傳)을 스승에게 받았으나, 깊고 오묘한 뜻을 밝게 연구하지 못하옵더니, 뜻밖에 거룩하신 은혜가 이 누추한 몸에 깊이 젖게 하옵시니, 대개 주상 전하께옵서는 장엄하옵시고 정대하옵시며 깊고 밝으시온데, 임금의 자리는 반드시 돌아갈 곳이 있고 민심은 미리 정한 바가 있다 생각하시와, 드디어 이 변변하지 못한 저로 하여금 높은 지위를 받게 하옵시니, 신은 삼가 마땅히 맡기신 책임이 가볍지 않음을 생각하여 길이 보전하기를 싫어하지 않으며, 지극히 간절하옵신 교훈을 받들어 영원히 잊지 않사옵기를 맹세하옵나이다.”
하였다. 7월 임자에 태종이 임금에게 명하여, 서울에 가서 종묘에 배알케 하였다. 태종이 일찍이 선위할 뜻이 있더니, 여섯 대언(代言)이 울며 아뢰기를,
“이는 저희 신하들이 바라는 바가 아니옵나이다.”
하니, 태종이 말하기를,
“이 뜻을 드러내지 말라.”
고 하였다. 정축에 태종이 개성으로부터 서울에 돌아와, 8월 초8일 을유에 경회루(慶會樓) 아래에 나아가, 지신사(知申事) 이명덕(李明德) 등을 불러 말하기를,
“내 왕위에 있은 지 이제 이미 19년이 되었는데, 밤낮으로 늘 송구스러운 마음에 감히 편안할 겨를이 없었다. 위로 하늘의 뜻을 보답하지 못하여 여러 차례 재변이 나타났으며, 또 묵은 병이 있어 요즈음 더욱 심하므로, 이제 이 자리를 세자에게 전위하고자 하노라.”
하니, 명덕 등이 그것은 될 수 없는 일이라고 힘써 아뢰었으나, 태종이 듣지 아니하고 보평전(報平殿)에 나아가서 내신으로 하여금 임금을 부르되, 두세 번 재촉하고는 상서사(尙瑞司)에 명하여 옥새를 드리게 하였다. 이에 정부·육조·공신·삼군 총제(三軍摠制)·여섯 대언 들이 문을 밀어 젖히고 들어와서, 하늘을 불러 통곡하며, 옥새를 함께 잡아당기어 드리지 못하게 하였다. 태종이 소리를 높혀 명덕에게 신칙하기를,
“임금의 명령이 있음에, 신하가 좇지 아니함이 도리에 옳으냐.”
하매, 명덕이 부득이 옥새를 바치었다. 임금이 그 부르는 뜻을 알지 못하고 급히 달려 나아가 뵈온즉, 태종이 곧 옥새를 주므로 임금이 엎드려 일어나지 아니하니, 태종이 임금의 소매를 잡아 일으키고 옥새를 주며 곧 안으로 들어갔다. 임금이 황급히 옥새를 상 위에 올려놓고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서 지성껏 사양하였고, 여러 신하들도 역시 통곡함을 그치지 않았다. 태종이 환관 최한(崔閑)을 시켜 신하들에게 하교 하기를,
“내 이미 국왕으로 더불어 서로 대해 앉았으니, 경 등은 다시 청하지 말라.”
하고 임금에게 명하여 옥새를 받아 궁에 머물게 하고, 따라서 붉은 양산을 주고 연화방(蓮花坊) 옛 세자의 전으로 옮겨가니, 백관이 뒤를 따라 전 뜰에 이르러 통곡하면서 전과 같이 하기를 청하고, 임금도 옥새를 받들고 친히 내정에 나아가 굳이 사양하여 밤중까지 이르렀다. 태종이 임금에게 이르기를,
“나의 뜻을 말한 것이 이미 두세 차례에 이르렀거늘, 어찌 나에게 효도할 것을 생각지 않고 이다지 요란하게 구느냐.”
하고, 손을 맞잡아 북두를 향하여 변하지 않을 뜻을 맹세하였다. 임금이 황송하여 명덕으로 하여금 옥새를 받들고 나가 경복궁(景福宮)으로 돌아가라고 하였다. 초9일 병술에 문무 백관이 다시 글을 올려 굳이 청하고, 성균관(成均館) 학생이 또 글을 올려 극진히 말하였으나, 태종이 모두 보지 않았다. 여러 신하가 임금 앞에 나아가 면대해서 진정하고자 청하였으나, 태종이 문을 닫고 들이지 아니하므로 여러 신하들이 통곡하니, 그 곡성이 궁정에 진동하였다. 태종이 최한(崔閑)을 시켜 여러 신하에게 하교하기를,
“내 이미 황천(皇天)과 종묘(宗廟)에 서고(誓告)하였으니, 고칠 수 없다.”
하고, 드디어 대언(代言) 등으로 하여금 경복궁으로 돌아가라고 하였다. 초10일 정해에 태종이 최한을 시켜 승여(乘輿)와 의장(儀仗)을 보내고, 또 시위 군사에게 명하여 임금을 맞이해 오도록 하였다. 임금이 오장(烏杖)과 청양산(靑陽傘)으로 나아가려 하였더니, 태종이 내신(內臣)을 시켜 그 거동을 보아 오게 하고 노하여 말하기를,
“내 명을 따르지 않으려거든 오지 말라.”
하였다. 임금이 부득이 주장(朱杖)에 홍양산(紅陽傘)으로 나아가 전(箋)을 올려 굳이 사양하기를,
“신은 성품과 자질이 어리석고 둔하며 학문이 아직 이루어지지 못하와 위정(爲政)의 방도에 대하여 어리둥절하여 깨달음이 없사온데, 외람되이 세자의 지위에 있으면서 아침 저녁으로 근심하고 걱정하여 오히려 그 자리에 합당치 못할까 두렵삽거늘, 어찌 오늘 맡겨 주신다는 하명(下命)이 있을 줄을 헤아렸겠습니까. 뜻밖의 일을 당하오매 정신이 아득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주상 전하께옵서는 춘추(春秋)가 왕성하시옵고, 성덕(聖德)이 바야흐로 융성하시온데, 갑자기 정사(政事)에 고달프다 하시고 종묘 사직의 막중한 책임을 어리석은 이 몸에 맡기려고 하시니, 어찌 오직 신자(臣子)의 마음이 더욱 두렵고 황송할 뿐이겠습니까. 진실로 두렵삽건대, 조종(祖宗)의 신령께서도 놀라실까 하옵니다.
또한 나라를 전하는 일은 참으로 국가의 큰 일이옵거늘, 갑자기 이렇게 하옵시면 내외의 신민들이 놀라지 않을 이 없사오며, 거듭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옵서 신을 세워 후사를 삼으실 적에도 오히려 감히 마음대로 하시지 못하고 천자(天子)에게 아뢰어 결정하옵셨거든, 하물며 군국(軍國)의 막중한 것을 마음대로 신에게 주실 수 있겠습니까. 신은 두렵사옵건대, 사대(事大)의 예에 또한 어긋남이 있을까 걱정이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어리석은 신의 지극한 사정을 살피시고 국가의 대계(大計)를 염려하시와, 종묘 사직과 신민(臣民)의 기대를 위로하여 주시옵소서.”
하였으나, 태종이 그래도 윤허하지 아니하므로, 여러 신하들이 또 궁궐 안뜰로 곧장 들어가 호곡하니, 그 소리가 어좌(御座)에까지 들렸다. 태종이 효령 대군 이보(李補)로 하여금 명을 전하여 말하기를,
“내가 다른 성(姓)에게 위를 전한다면, 경(卿)들의 청이 당연하지만, 내가 아들에게 위를 전하는데, 어찌하여 이와 같이 하느뇨.”
하고, 곧 익선관(翼善冠)을 친히 임금의 머리에 씌우고 드디어 임금으로 하여금 국왕의 의장을 갖추어 경복궁에 가서 즉위하게 하였다. 임금이 부득이 명을 받고 나와서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나이 어리고 어리석은 내가 국가의 대사를 감당하기 어려워 지성껏 사양하였으나, 마침내 윤허를 받지 못하였도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임금이 익선관을 머리에 쓰고 있음을 보고 모두 땅에 엎드리었다. 임금이 경복궁으로 가니, 태종이 최한에게 명하여 정부 대신들에게 하교하기를,
“주상이 아직 장년이 되기 전에는 군사(軍事)는 내가 친히 청단(聽斷)할 것이고, 또한 국가에 결단하기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정부·육조(六曹)로 하여금 함께 그 가부를 의논하게 할 것이며, 나도 또한 함께 의논하리라.”
고 하니, 박은(朴訔) 등이 대답하기를,
“임금께옵서 전위하려 하심을 신들은 편안히 쉬시려는 것으로 생각하였삽더니, 이제야 임금의 뜻을 알았나이다. 청컨대 교서를 내리시와 전위하시는 뜻을 밝히 타이르시어, 신민(臣民)의 심정을 편안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여, 곧 예조 판서 변계량(卞季良)에게 명하여 전위(傳位)하는 교서(敎書)를 짓게 하였다. 또 여러 대언에게 명하기를,
“병조(兵曹) 당상(堂上)은 모두 나에게 시종하고, 대언들은 주상전(主上殿)에 시종하라.”
하였다. 여러 대언들이 아뢰기를,
“신들은 반씩 나누어 시위하옵기를 청합니다.”
하니, 태종이 말하기를,
“자고로 승선(承宣)은 임금을 따르는 것이니, 따로이 행할 이치가 없다. 어서 가거라.”
하였다. 여러 대언이 또 아뢰기를,
“원컨대, 머물러 있어서 병조의 일을 맡아 보고자 하나이다.”
하였으나, 태종이 말하기를,
“비록 병조의 직무를 겸한 자라 하더라도, 승선을 어찌 나누어 소속하게 할 수 있겠느냐.”
하니, 여러 대언이 모두 배사(拜辭)하였다. 계량이 교서를 지어 나아가 뵈었더니, 태종이 말하기를,
“오늘날 일이 매우 급하게 되었으니, 어서 속히 교서를 반포하도록 하라.”
하여, 이에 여러 신하들이 조복(朝服)을 입고 반열(班列) 차서대로 전정(殿庭)에 늘어섰다. 곧 교서를 반포하기를,
“내가 덕이 없는 몸으로 태조의 크나큰 사업(事業)을 이어받아, 아침 저녁으로 근심하고 걱정하여 힘써 정신을 가다듬어 잘 다스리고자 도모하기를 이미 이에 18년이 되었다. 그러나 은택이 백성들에게 미치지 못하고 재변(災變)이 자주 일어났으며, 또한 몸에 오래 묵은 병이 있어 근일에 와서는 심하여지니, 청정(聽政)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세자(世子) 도(祹)는 영명하고 공손 검박하며, 너그럽고 어질어 대위(大位)에 오르기에 합당한지라, 이미 영락 16년 무술 8월 초8일에 대보(大寶)를 친히 주어, 세자로 하여금 나라의 기무(機務)를 오로지 맡아 하게 하고, 오직 군국(軍國)의 중대사만은 내가 친히 청단하기로 하였으니, 너희 중외(中外) 대소 신료(大小臣僚)들은 모두 나의 지극한 회포를 몸받아 한 마음으로 협력하고 도와서 유신(維新)의 경사를 맞이하도록 하라.”
하고, 또 여러 신하에게 명하여, 경복궁에 나아가 신왕의 즉위를 진하하게 하였다. 경시(庚時)에 종실과 문무 백관이 조복으로 경복궁 뜰에서 반열과 서차대로 늘어섰다. 임금이 원유관(遠遊冠)에 강사포(絳紗袍)로 근정전(勤政殿)에 나아오니, 여러 신하들이 전을 올려 하례를 올리고, 성균관 학생과 회회 노인(回回老人)과 승도들도 모두 참여하였다. 임금이 하례 받기를 마치고 상왕을 높이어 태상왕으로, 부왕(父王)은 상왕으로, 모후(母后)를 대비(大妃)로 하고, 경빈(敬嬪)을 봉하여 비(妃)로 삼았다.
처음에 상왕이 잠저(潛邸)에 있을 적에 원경 왕후(元敬王后)의 꿈에 태종이 임금을 안고 햇바퀴[日輪] 가운데 앉아 있어 보이더니, 얼마 안 있어 태종이 왕위에 올랐고, 이에 이르러 임금이 또 왕위를 계승하였다. 심온(沈溫)을 청천 부원군(靑川府院君)으로 삼고, 그 아내 안(安)씨를 삼한 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으로 삼고, 박신(朴信)을 의정부 찬성(議政府贊成)으로, 박습(朴習)을 병조 판서로, 조말생(趙末生)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원전】 2 집 259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왕실-국왕(國王) / *인사-임면(任免)



 

[주D-001]백읍고(伯邑考) : 문왕의 맏아들.
[주D-002]무왕(武王) : 문왕의 둘째 아들.
[주D-003]전례(典禮) : 《경국대전》의 예전(禮典).
[주D-004]임금 : 세종.
[주D-005]회회 노인(回回老人) : 아랍인.

 

 

 

 

태조 4년 을해(1395,홍무 28)
 10월7일 (정유)
판삼사사 정도전에게 새 궁궐 전각의 이름을 짓게 하다

판삼사사 정도전(鄭道傳)에게 분부하여 새 궁궐의 여러 전각의 이름을 짓게 하니, 정도전이 이름을 짓고 아울러 이름 지은 의의를 써서 올렸다. 새 궁궐을 경복궁(景福宮)이라 하고, 연침(燕寢)을 강녕전(康寧殿)이라 하고, 동쪽에 있는 소침(小寢)을 연생전(延生殿)이라 하고, 서쪽에 있는 소침(小寢)을 경성전(慶成殿)이라 하고, 연침(燕寢)의 남쪽을 사정전(思政殿)이라 하고, 또 그 남쪽을 근정전(勤政殿)이라 하고, 동루(東樓)를 융문루(隆文樓)라 하고, 서루(西樓)를 융무루(隆武樓)라 하고, 전문(殿門)을 근정문(勤政門)이라 하며, 남쪽에 있는 문[午門]을 정문(正門)이라 하였다.
경복궁에 대하여 말하였다.
“신이 살펴보건대, 궁궐이란 것은 임금이 정사하는 곳이요, 사방에서 우러러보는 곳입니다. 신민(臣民)들이 다 조성(造成)한 바이므로, 그 제도를 장엄하게 하여 존엄성을 보이게 하고, 그 명칭을 아름답게 하여 보고 감동되게 하여야 합니다. 한(漢)나라와 당(唐)나라 이래로 궁전의 이름을 혹 그대로 하기도 하고, 혹은 개혁하였으나, 그 존엄성을 보이고 감상을 일으키게 한 뜻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지 3년 만에 도읍을 한양에 정하여 먼저 종묘를 세우고, 다음에 궁궐을 경영하시더니, 다음 해 을미일에는 친히 곤룡포(袞龍袍)와 면류관(冕旒冠)을 쓰시고 선대의 왕과 왕후를 신묘(新廟)에서 제향을 올리며, 여러 신하들에게 새 궁궐에서 잔치를 베푸셨으니, 대개 신(神)의 혜택을 넓히시고 뒷사람에게 복록을 주심이옵니다. 술이 세 순배 되어서, 신 정도전에게 분부하시기를, ‘지금 도읍을 정하여 종묘에 제향을 올리고 새 궁궐의 낙성을 고하게 되매, 가상하게 여겨 군신(群臣)에게 여기에서 잔치를 베푸노니, 그대는 마땅히 궁전의 이름을 빨리 지어서 나라와 더불어 한없이 아름답게 하라.’ 하셨으므로, 신이 분부를 받자와 삼가 손을 모으고 머리를 조아려 《시경(詩經)》 주아(周雅)에 있는 ‘이미 술에 취하고 덕에 배부르니 군자는 영원토록 그대의 크나큰 복을 모시리라.’라는 시(詩)를 외우고, 새 궁궐을 경복궁이라고 이름짓기를 청하오니, 전하와 자손께서 만년 태평의 업(業)을 누리시옵고, 사방의 신민으로 하여금 길이 보고 느끼게 하옵니다. 그러나 《춘추(春秋)》에, ‘백성을 중히 여기고 건축을 삼가라.’ 했으니, 어찌 임금이 된 자로 하여금 백성만 괴롭혀 자봉(自奉)하라는 것이겠습니까? 넓은 방에서 한가히 거처할 때에는 빈한한 선비를 도울 생각을 하고, 전각에 서늘한 바람이 불게 되면 맑고 그늘진 것을 생각해 본 뒤에 거의 만백성의 봉양하는데 저버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꺼번에 말씀드립니다.
강녕전(康寧殿)에 대하여 말씀드리면, 〈《서경》〉 홍범 구주(洪範九疇)의 오복(五福) 중에 세째가 강녕(康寧)입니다. 대체로 임금이 마음을 바루고 덕을 닦아서 황극(皇極)을 세우게 되면, 능히 오복을 향유할 수 있으니, 강녕이란 것은 오복 중의 하나이며 그 중간을 들어서 그 남은 것을 다 차지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른바 마음을 바루고 덕을 닦는다는 것은 여러 사람들이 함께 보는 곳에 있는 것이며, 역시 애써야 되는 것입니다. 한가하고 편안하게 혼자 거처할 때에는 너무 안일(安逸)한 데에 지나쳐, 경계하는 마음이 번번이 게으른 데에 이를 것입니다. 마음이 바르지 못한 바가 있고 덕이 닦이지 못한 바가 있으면, 황극이 세워지지 않고 오복이 이지러질 것입니다. 옛날 위(衛)나라 무공(武公)이 스스로 경계한 시(詩)에, ‘네가 군자와 벗하는 것을 보니 너의 얼굴을 상냥하고 부드럽게 하고, 잘못이 있을까 삼가하는구나. 너의 방에 있는 것을 보니, 다른 사람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는구나.’ 했습니다. 무공의 경계하고 근신함이 이러하므로 90을 넘어 향수했으니, 그 황극을 세우고 오복을 누린 것의 밝은 징험이옵니다. 대체로 공부를 쌓는 것은 원래가 한가하고 아무도 없는 혼자 있는 데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무공의 시를 본받아 안일한 것을 경계하며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두어서 황극의 복을 누리시면, 성자신손(聖子神孫)이 계승되어 천만대를 전하리이다. 그래서 연침(燕寢)을 강녕전이라 했습니다.
연생전(延生殿)과 경성전(慶成殿)에 대하여 말씀드리면, 하늘과 땅은 만물(萬物)을 봄에 낳게 하여 가을에 결실하게 합니다. 성인이 만백성에게 인(仁)으로써 살리고 의(義)로써 만드시니, 성인은 하늘을 대신해서 만물을 다스리므로 그 정령(政令)을 시행하는 것이 한결같이 천지의 운행(運行)을 근본하므로, 동쪽의 소침(小寢)을 연생전(延生殿)이라 하고 서쪽 소침을 경성전(慶成殿)이라 하여, 전하께서 천지의 생성(生成)하는 것을 본받아서 그 정령을 밝히게 한 것입니다.
그 사정전(思政殿)에 대해서 말하면, 천하의 이치는 생각하면 얻을 수 있고 생각하지 아니하면 잃어버리는 법입니다. 대개 임금은 한 몸으로써 높은 자리에 계시오나, 만인(萬人)의 백성은 슬기롭고 어리석고 어질고 불초(不肖)함이 섞여 있고, 만사(萬事)의 번다함은 옳고 그르고 이롭고 해됨이 섞여 있어서, 백성의 임금이 된 이가 만일에 깊이 생각하고 세밀하게 살피지 않으면, 어찌 일의 마땅함과 부당함을 구처(區處)하겠으며, 사람의 착하고 착하지 못함을 알아서 등용할 수 있겠습니까? 예로부터 임금이 된 자로서 누가 높고 영화로운 것을 바라고 위태로운 것을 싫어하지 않겠습니까마는, 사람답지 않은 사람을 가까이 하고 좋지 못한 일을 꾀하여서 화패(禍敗)에 이르게 되는 것은, 진실로 생각하지 않는 것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시경(詩經)》에 말하기를, ‘어찌 너를 생각지 않으랴마는 집이 멀다.’ 하였는데, 공자(孔子)는 ‘생각함이 없는 것이다. 왜 멀다고 하리오.’ 하였고, 《서경(書經)》에 말하기를, ‘생각하면 슬기롭고 슬기로우면 성인이 된다.’ 했으니, 생각이란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그 쓰임이 지극한 것입니다. 이 전(殿)에서는 매일 아침 여기에서 정사를 보시고 만기(萬機)를 거듭 모아서 전하에게 모두 품달하면, 조칙(詔勅)을 내려 지휘하시매 더욱 생각하지 않을 수 없사오니, 신은 사정전(思政殿)이라 이름하옵기를 청합니다.
근정전(勤政殿)과 근정문(勤政門)에 대하여 말하오면,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다스려지고 부지런하지 못하면 폐하게 됨은 필연한 이치입니다. 작은 일도 그러하온데 하물며 정사와 같은 큰 일이겠습니까? 《서경》에 말하기를, ‘경계하면 걱정이 없고 법도를 잃지 않는다.’ 하였고, 또 ‘편안히 노는 자로 하여금 나라를 가지지 못하게 하라. 조심하고 두려워하면 하루이틀 사이에 일만 가지 기틀이 생긴다. 여러 관원들이 직책을 저버리지 말게 하라. 하늘의 일을 사람들이 대신하는 것이다.’ 하였으니, 순임금과 우임금의 부지런한 바이며, 또 말하기를, ‘아침부터 날이 기울어질 때까지 밥먹을 시간을 갖지 못해 만백성을 다 즐겁게 한다.’ 하였으니, 문왕(文王)의 부지런한 바입니다. 임금의 부지런하지 않을 수 없음이 이러하니, 편안히 쉬기를 오래 하면 교만하고 안일한 마음이 쉽게 생기게 됩니다. 또 아첨하고 아양떠는 사람이 있어서 이에 따라서 말하기를, ‘천하에서 나랏일로 자신의 정력을 소모하고 수명을 손상시킬 까닭이 없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이미 높은 자리에 있어서 어찌 혼자 비굴하게 노고를 하겠는가?’ 하며, 이에 혹은 여악(女樂)으로, 혹은 사냥으로, 혹은 노리갯감으로, 혹은 토목(土木)일 같은 것으로써 무릇 황음무도(荒淫無道)한 일을 말하지 않음이 없으니, 임금은 ‘이것이 나를 사랑함이 두텁다.’ 하여, 자연으로 태만해지고 거칠어지게 되는 것을 알지 못하게 되니, 한(漢)·당(唐)의 임금들이 예전 삼대(三代) 때만 못하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임금으로서 하루라도 부지런하지 않고 되겠습니까? 그러나, 임금의 부지런한 것만 알고 그 부지런할 바를 알지 못한다면, 그 부지런한 것이 너무 복잡하고 너무 세밀한 데에만 흘러서 볼 만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선유(先儒)들이 말하기를,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낮에는 어진 이를 찾아보고, 저녁에는 법령을 닦고, 밤에는 몸을 편안하게 한다.’는 것이 임금의 부지런한 것입니다. 또 말하기를, ‘어진 이를 구하는 데에 부지런하고 어진 이를 쓰는 데에 빨리 한다.’ 했으니, 신은 이로써 이름하기를 청하옵니다.
융문루(隆文樓)·융무루(隆武樓)에 대해서 말하오면, 문(文)으로써 다스림을 이루고 무(武)로써 난(亂)을 안정시킴이오니, 마치 사람의 두 팔이 있는 것과 같아서 하나라도 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대개 예악과 문물이 빛나서 볼 만하고, 군병과 무비가 정연하게 갖추어지며, 사람을 쓴 데에 이르러서는 문장 도덕의 선비와 과감 용맹한 무부(武夫)들이 경외(京外)에 퍼져 있게 한다면, 이는 모두가 문(文)을 높이고 무(武)를 높이게 한 것이며, 거의 전하께서 문무를 함께 써서 오래도록 다스림을 이룰 것입니다.
그 정문(正門)에 대해서 말하오면, 천자와 제후(諸侯)가 그 권세는 비록 다르다 하나, 그 남쪽을 향해 앉아서 정치하는 것은 모두 정(正)을 근본으로 함이니, 대체로 그 이치는 한가지입니다. 고전을 상고한다면 천자의 문(門)을 단문(端門)이라 하니, 단(端)이란 바르다[正]는 것입니다. 이제 오문(午門)을 정문(正門)이라 함은 명령과 정교(政敎)가 다 이 문으로부터 나가게 되니, 살펴보고 윤허하신 뒤에 나가게 되면, 참소하는 말이 돌지 못하고, 속여서 꾸미는 말이 의탁할 곳이 없을 것이며, 임금께 아뢰는 것과 명령을 받드는 것이 반드시 이 문으로 들어와 윤하하신 뒤에 들이시면, 사특한 일이 나올 수 없고 공로[功緖]를 상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을〉 닫아서 이상한 말과 기이하고 사특한 백성을 끊게 하시고, 열어서 사방의 어진 이를 오도록 하는 것이 정(正)의 큰 것입니다.”
【원전】 1 집 84 면
【분류】 *왕실-종사(宗社) / *역사-고사(故事)


 

 

태조 4년 을해(1395,홍무 28)

 9월29일 (경신)
대묘와 새 궁궐이 준공되다. 그 규모와 구성 및 배치 상황

이달에 대묘(大廟)와 새 궁궐이 준공되었다. 대묘(大廟)의 대실(大室)은 7간(間)이며 당(堂)은 같게 하고 실(室)은 따로 하였다. 안에 석실(石室) 5간을 만들고 좌우의 익랑(翼廊)은 각각 2간씩이며, 공신당(功臣堂)이 5간, 신문(神門)이 3간, 동문이 3간, 서문이 1간이었다. 빙둘러 담장을 쌓고 신주(神廚)가 7간, 향관청(享官廳)이 5간이고, 좌우 행랑이 각각 5간, 남쪽 행랑이 9간, 재궁(齋宮)이 5간이었다. 새 궁궐은 연침(燕寢)이 7간이다. 동·서 이방(東西耳房)이 각각 2간씩이며, 북쪽으로 뚫린 행랑이 7간, 북쪽 행랑이 25간이다. 동쪽 구석에 연달아 있는 것이 3간, 서쪽에 연달아 있는 누방(樓房)이 5간이고, 남쪽으로 뚫린 행랑이 5간, 동쪽의 소침(小寢)이 3간이다. 통하는 행랑 7간은 연침(燕寢)의 남쪽에 있는 행랑에 닿았고, 또 통하는 행랑 5간은 연침의 동쪽 행랑에 닿았으며, 서쪽 소침(小寢) 3간과 통하는 행랑 7간은 연침의 남쪽 통하는 행랑에 닿았다. 또 통하는 행랑 5간은 연침의 서쪽 행랑에 닿았고, 보평청(報平廳)이 5간, 정사를 보는 곳은 연침(燕寢)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에 이방(耳房)이 각각 1간씩이며, 남쪽으로 통하는 행랑이 7간, 동쪽으로 통하는 행랑이 15간이다. 처음 남쪽에서 통행하는 행랑 5간이 동쪽 행랑에 닿고, 서쪽으로 통하는 행랑 15간도 역시 남쪽 행랑 5간에서 서쪽 행랑에 닿고, 연침 북쪽 행랑 동쪽 구석에서 정전(正殿)에 그치고 북쪽 행랑의 동쪽 23간이 동쪽 행랑, 서루(西樓)에서 정전(正殿)까지 가는 북쪽 행랑 서쪽 20간이 서쪽 행랑이 되어, 이상이 내전(內殿)이다.
정전(正殿)은 5간으로 조회를 받는 곳으로 보평청의 남쪽에 있다. 상하층의 월대(越臺)가 있는데, 들어가는 깊이가 50척, 넓이가 1백 12척 5촌(寸), 동계(東階)·서계(西階)·북계(北階)의 넓이가 각각 15척이다. 윗층계[上層階]의 높이는 4척, 석교(石橋)가 5층[五級]인데 중계(中階)의 사면 넓이가 각각 15척, 아랫층계[下層階]의 높이는 4척, 석교가 5층이다. 북쪽 행랑 29간을 통하는 행랑은 북행랑에서 정전(正殿)의 북쪽에 닿았고, 수라간(水刺間) 4간과 동루(東樓) 3간은 상하층이 있다. 그 북쪽 행랑 19간은 정전의 북쪽 행랑 동쪽에 닿아서 내전의 동쪽 행랑과 연했으며, 그 남쪽 9간은 전문의 동각루(東角樓)에 닿았다. 서루(西樓) 3간도 상·하층이 있는데, 그 북쪽 행랑 19간은 정전의 북쪽 행랑 서쪽 구석에 닿아서 내전의 서쪽 행랑과 연하고, 그 남쪽 9간은 전문(殿門)의 서각루(西角樓) 전정(殿庭)에 닿았다. 넓이는 동서(東西)가 각각 80척, 남쪽이 1백 78척, 북쪽이 43척이며, 전문 3간은 전(殿)의 남쪽에 있고, 좌우 행랑 각각 11간과 동(東)·서각루(西角樓) 각각 2간과 오문(午門) 3간은 전문(殿門)의 남쪽에 있다. 동서의 행랑은 각각 17간씩이며, 수각(水閣)이 3간, 뜰 가운데에 석교(石橋)가 있으니 도랑물 흐르는 곳이다. 문(門)의 좌우의 행랑이 각각 17간씩이며, 동·서각루가 각각 2간씩이다. 동문을 일화문(日華門)이라 하고, 서문을 월화문(月華門)이라 한다.
그 밖에 주방(廚房)·등촉방(燈燭房)·인자방(引者房)·상의원(尙衣院)이며, 양전(兩殿)의 사옹방(司饔房)·상서사(尙書司)·승지방(承旨房)·내시 다방(內侍茶房)·경흥부(敬興府)·중추원(中樞院)·삼군부(三軍府)와 동·서루고(東西樓庫)가 무릇 3백 90여 간이다. 뒤에 궁성을 쌓고 동문은 건춘문(建春門)이라 하고, 서문은 영추문(迎秋門)이라 하며, 남문은 광화문(光化門)이라 했는데, 다락[樓] 3간이 상·하층이 있고, 다락 위에 종과 북을 달아서, 새벽과 저녁을 알리게 하고 중엄(中嚴)을 경계했으며, 문 남쪽 좌우에는 의정부(議政府)·삼군부(三軍府)·육조(六曹)·사헌부(司憲府) 등의 각사(各司) 공청이 벌여 있었다.
【원전】 1 집 83 면
【분류】 *왕실-종사(宗社) / *건설-건축(建築)

 

임하필기 제16권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나례(儺禮)


구나(驅儺)에 관한 일은 관상감(觀象監)이 이를 주관한다. 제석(除夕)에 악공(樂工) 한 사람이 창사(唱師)가 되어 붉은 옷에 가면(假面)을 쓰고, 방상시(方相氏) 4인이 황금빛 나는 네 개의 눈이 달린 가면에 곰 가죽을 쓰고, 지군(持軍) 5인이 붉은 옷에 화립(畫笠)을 쓰고, 판관(判官) 5인이 연두색 옷에 화립을 쓰고, 조왕신(竈王神) 4인이 청포(靑袍)에 목홀(木笏)을 들고, 초라니[小梅] 몇 사람이 여자 모습의 가면을 쓰고 대가 긴 깃발을 들고, 12신(神)이 각각 자신들의 가면을 쓰는데 예를 들어 자신(子神)은 쥐 모양의 가면을 쓰고 축신(丑神)은 소 모양의 가면을 쓰는 것이다. 또 악공 10여 인이 도열(桃茢 복숭아나무로 만든 지팡이와 갈대 이삭으로 만든 비)을 들고 이들을 따른다. 그리고 아이들 수십 명을 가려 뽑아서 이들에게 붉은 옷에 가면을 씌워서 아이 초라니[侲子]를 만들어서 의식이 끝날 무렵에 징을 울리며 역귀(疫鬼)를 몰아내도록 한다. 섣달의 대나(大儺)는 광화문(光化門)과 도성의 흥인문(興仁門), 숭례문(崇禮門), 돈의문(敦義門), 숙정문(肅靖門)에서 행하는데, 아이 초라니와 방상시의 복색(服色)과 주사(呪辭)는 고려(高麗)의 의식과 같다.
관상감 관원이 나자(儺者)를 거느리고 새벽에 근정문(勤政門) 밖에 나아가면 승지가 역귀를 쫓을 것을 계청한다. 그러면 내정(內庭)으로 들어가서 서로 창화(唱和)하며 사방에다 대고 부르짖기를 마친 뒤 북을 치고 떠들면서 광화문으로 나오는데, 매 대(隊)마다 횃불을 든다. 마침내 사문(四門)의 성곽 밖에 이르면, 봉상시(奉常寺)의 관원이 미리 수탉과 술을 준비하고 있다가 나자가 문을 나오려고 하면 문 가운데에 신석(神席)을 펴고 희생(犧牲)의 가슴을 벽고(疈辜)하여 찢어서 신석의 서쪽에 자리를 깔고 제사를 지낸 뒤, 끝나면 닭과 축문을 땅에 묻는다.
나식(羅湜)의 시에 이르기를,
나례의 북소리가 둥둥 이웃 마을까지 울리며 / 儺鼓鼕鼕動四閭
사방 동서로 쫓아내는 형세가 어지럽구나 / 東驅西逐勢紛如
해마다 너를 들으면 흰머리만 늘어날 뿐 / 年年聞汝徒添白
이 나라 귀신 하나라도 없앤 적이 있더냐 / 海內何曾一鬼除
하였다.

 


 

세종 24년 임술(1442,정통 7)
 5월8일 (정묘)
호조에서 우량을 측정하는 일에 관해 아뢰다

호조에서 아뢰기를,
“우량(雨量)을 측정(測定)하는 일에 대하여는 일찍이 벌써 명령을 받았사오나, 그러나, 아직 다하지 못한 곳이 있으므로 다시 갖추어 조목별로 열기(列記)합니다.
1. 서울에서는 쇠를 주조(鑄造)하여 기구(器具)를 만들어 명칭을 측우기(測雨器)라 하니, 길이가 1척(尺) 5촌(寸)이고 직경(直徑)이 7촌입니다. 주척(周尺)을 사용하여 서운관(書雲觀)에 대(臺)를 만들어 측우기를 대(臺) 위에 두고 매양 비가 온 후에는 본관(本觀)의 관원이 친히 비가 내린 상황을 보고는, 주척(周尺)으로써 물의 깊고 얕은 것을 측량하여 비가 내린 것과 비오고 갠 일시(日時)와 물 깊이의 척·촌·분(尺寸分)의 수(數)를 상세히 써서 뒤따라 즉시 계문(啓聞)하고 기록해 둘 것이며,
1. 외방(外方)에서는 쇠로써 주조(鑄造)한 측우기(測雨器)와 주척(周尺) 매 1건(件)을 각도(各道)에 보내어, 각 고을로 하여금 한결같이 상항(上項)의 측우기의 체제(體制)에 의거하여 혹은 자기(磁器)든지 혹은 와기(瓦器)든지 적당한 데에 따라 구워 만들고, 객사(客舍)의 뜰 가운데에 대(臺)를 만들어 측우기를 대(臺) 위에 두도록 하며, 주척(周尺)도 또한 상항(上項)의 체제(體制)에 의거하여 혹은 대나무로 하든지 혹은 나무로 하든지 미리 먼저 만들어 두었다가, 매양 비가 온 후에는 수령(守令)이 친히 비가 내린 상황을 살펴보고는 주척(周尺)으로써 물의 깊고 얕은 것을 측량(測量)하여 비가 내린 것과 비오고 갠 일시(日時)와 물 깊이의 척·촌·분(尺寸分)의 수(數)를 상세히 써서 뒤따라 계문(啓聞)하고 기록해 두어서, 후일의 참고에 전거(典據)로 삼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원전】 4 집 409 면
【분류】 *과학-천기(天氣)


  세종 20년 무오(1438,정통 3)
 1월7일 (임진)
흠경각이 완성되어 김돈에게 기문을 짓게 하다

흠경각(欽敬閣)이 완성되었다. 이는 대호군 장영실(蔣英實)이 건설한 것이나 그 규모와 제도의 묘함은 모두 임금이 마련한 것이며, 각은 경복궁 침전 곁에 있었다. 임금이 우승지 김돈(金墩)에게 명하여 기문을 짓게 하니, 이에 말하기를,
“상고하건대, 제왕이 정사를 하고 사업을 이루는 데에는 반드시 먼저 역수(曆數)를 밝혀서 세상에 절후를 알려 줘야 하는 것이니, 이 절후를 알려 주는 요결(要訣)은 천기를 보고 기후를 살피는 데에 있는 것이므로, 기형(璣衡)과 의표를 설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상고하고 징험하는 방법이 지극히 정밀하여 한 기구 한 형상만으로는 능히 바르게 할 수 없다. 우리 주상 전하께서 이 일을 맡은 자에게 명하여 모든 의기(儀器)를 제정하게 하였는데, 대소 간의(大小間儀)·혼의(渾儀)·혼상(渾象)·앙부일구(仰釜日晷)·일성정시(日星定時)·규표(圭表)·금루(禁漏) 같은 기구가 모두 지극히 정교하여 전일 제도보다 훨씬 뛰어나 오직 제도가 정밀하지 못하고, 또 모든 기구를 후원(後苑)에다 설치하였으므로 시간마다 점검하기가 어려울까 염려하여, 이에 천추전(千秋殿) 서쪽 뜰에다 한 간 집을 세웠도다.
풀[糊]먹인 종이로 일곱 자 높이의 산을 만들어 집 복판에 설치하고, 그 산 안에다 옥루기(玉漏機) 바퀴를 설치하여 물로써 쳐올리도록 하였다. 금으로 해를 만들었는데 그 크기는 탄자만 하고, 오색 구름이 둘러서 산허리 위를 지나도록 되었는데, 하루에 한 번씩 돌아서 낮에는 산 밖에 나타나고 밤에는 산 속에 들어가며, 비스듬한 형세가 천행에 준하였고, 극의 멀고 가까운 거리와 돋고 지는 분수가 각각 절기를 따라서 하늘의 해와 더불어 합치하도록 되어 있다. 해 밑에는 옥으로 만든 여자 인형 넷이 손에 금 목탁을 잡고 구름을 타고, 동·서·남·북 사방에 각각 서 있어 인·묘·진시 초정(初正)에는 동쪽에 섰는 여자 인형이 매양 목탁을 치며, 사·오·미시 초정에는 남쪽에 섰는 여자 인형이 목탁을 치고, 서쪽과 북쪽에도 모두 이렇게 한다. 밑에는 네 가지 귀형(鬼形)을 만들어서 각각 그 곁에 세웠는데 모두 산으로 향하여 섰으며, 인시가 되면 청룡신(靑龍神)이 북쪽으로 향하고, 묘시에는 동쪽으로 향하며, 진시에는 남쪽으로 향하고, 사시에는 돌아서 다시 서쪽으로 향하는 동시에 주작신(朱雀神)이 다시 동쪽으로 향하는데, 차례로 방위를 향하는 것은 청룡이 하는 것과 같으며, 딴 것도 모두 이와 같다.
산 남쪽 기슭에는 높은 축대(築臺)가 있어, 시간을 맡은 인형 하나가 붉은 비단옷 차림으로 산을 등지고 섰으며, 인형 무사 셋은 모두 갑옷 차림인데 하나는 종과 방망이를 잡고서 서쪽을 향해서 동쪽에 섰고, 하나는 북[鼓]과 부채를 잡고 동쪽을 향해 서쪽에서 약간 북쪽으로 가까운 곳에 섰고, 하나는 징[鉦]과 채쭉을 잡고 동쪽을 향해서 서쪽에서 약간 남쪽으로 가까운 곳에 서 있어서, 매양 시간이 되면 시간을 맡은 인형이 종 치는 인형을 돌아보고, 종 치는 인형도 또한 시간을 맡은 인형을 돌아보면서 종을 치게 되며, 매경(每更)마다 북과 부채를 잡은 인형이 북을 치고, 매점마다 징과 채를 잡은 인형은 징을 치는데, 서로 돌아보는 것은 종 치는 인형과 같으며, 경·점마다 북 치고 징 치는 수효는 모두 보통 시행하는 법과 같다.
또 산 밑 평지에는 열두 방위를 맡은 신들이 각각 제자리에 엎드려 있고, 열도 방위 신 뒤에는 각각 구멍이 있어 상시에는 닫혀 있다가 자시(子時)가 되면 쥐 모양으로 만든 신 뒤에 구멍이 저절로 열리면서 인형 옥녀(玉女)가 자시패를 가지고 나오며, 쥐 모양으로 만든 신은 그 앞에 일어선다. 자시가 다 가면 옥녀는 되돌아서 구멍에 들어가는 동시에 구멍이 저절로 닫혀지고 쥐 모양의 신도 제 위치에 도로 엎드린다. 축시가 되면 소 모양으로 만든 신 뒤의 구멍이 저절로 열리면서 옥녀가 또한 나오며, 소 모양의 신도 일어나게 되는데, 열두 시간이 모두 이렇게 되어 있다. 오방위(午方位) 앞에는 또 축대가 있고 축대 위에는 기울어진 그릇을 놓았고 그릇 북쪽에는 인형 관원이 있어, 금병(金甁)을 가지고 물을 따르는 형상인데 누수 남은 물을 이용하여 끊임없이 흐르며, 그릇이 비면 기울고 반쯤 차면 반듯해지며, 가득 차면 엎어져서 모두 옛말과 같이 되어 있다. 또 산 동쪽에는 봄 3개월 경치를 만들었고, 남쪽에는 여름 경치를 꾸몄으며, 가을과 겨울 경치도 또한 만들어져 있다. 《시경》 빈풍도(詩經豳風圖)에 의하여 인물·조수·초목 여러 가지 형용을 나무를 깎아 만들고, 절후에 맞추어 벌려 놓았는데 칠월 한 편의 일이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 집 이름을 흠경이라 한 것은 《서경》 요전(堯典)편에 ‘공경함을 하늘과 같이 하여, 백성에게 절후를 알려 준다[欽若昊天, 敬授人時]’는 데에서 따온 것이다.
대저 당우 시대로부터 측후(測候)하는 기구는 그 시대마다 각자 제도가 있었으나, 당·송 이후로 그 법이 점점 갖추어져서 당나라의 황도유의(黃道遊儀)·수운혼천(水運渾天)과 송나라의 부루표영(浮漏表影)·혼천의상(渾天儀象)과 원나라의 앙의(仰儀)·간의(簡儀) 같은 것은 모두 정묘하다고 일렀다. 그러나 대개는 한 가지씩으로 되었을 뿐이고 겸해서 상고하지는 못했으며, 운용하는 방법도 사람의 손을 빌린 것이 많았는데 지금 이 흠경각에는 하늘과 해의 돗수와 날빛과 누수 시각이며, 또는 사신(四神)·십이신(十二神)·고인(鼓人)·종인(鍾人)·사신(司辰)·옥녀(玉女) 등 여러 가지 기구를 차례대로 다 만들어서,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저절로 치고 저절로 운행하는 것이 마치 귀신이 시키는 듯하여 보는 사람마다 놀라고 이상하게 여겨서 그 연유를 측량하지 못하며, 위로는 하늘 돗수와 털끝만큼도 어긋남이 없으니 이를 만들은 계교가 참으로 기묘하다 하겠다. 또 누수의 남은 물을 이용하여 기울어지는 그릇을 만들어서 하늘 돗수의 차고 비는 이치를 보며, 산 사방에 빈풍도(豳風圖)를 벌려 놓아서 백성들의 농사하는 어려움을 볼 수 있게 하였으니, 이것은 또 앞 세대에는 없었던 아름다운 뜻이다. 임금께서 여기에 항상 접촉하고 생각을 깨우쳐서, 밤낮으로 근심하는 뜻을 곁들였으니, 어찌 다만 성탕(成湯)의 목욕반(沐浴盤)과 무왕의 호유명(戶牖銘)과 같을 뿐이리오. 그 하늘을 본받고 때를 좇음에 흠경하는 뜻이 지극하며 백성을 사랑하고 농사를 중하게 여기시니, 어질고 후한 덕이 마땅히 주나라와 같이 아름답게 되어 무궁토록 전해질 것이다. 흠경각이 완성되자 신에게 명하시어 그 사실을 기록하게 하심으로 삼가 그 줄거리를 적어서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바치나이다.”
하였다.
【원전】 4 집 123 면
【분류】 *과학-역법(曆法) / *건설-건축(建築)
세종 15년 계축(1433,선덕 8)
 6월9일 (경인)
정초·박연·김진 등이 새로 만든 혼천의를 올리다

정초·박연·김진(金鎭) 등이 새로 만든 혼천의(渾天儀)를 올렸다.
【원전】 3 집 482 면
【분류】 *과학-천기(天氣)
세종 15년 계축(1433,선덕 8)
 8월11일 (신묘)
정초·이천·정인지 등이 혼천의를 올리다

대제학 정초·지중추원사 이천(李蕆)·제학 정인지·응교 김빈(金鑌) 등이 혼천의(渾天儀)를 올리매, 임금이 그것을 곧 세자에게 명하여 이천과 더불어 그 제도를 질문하고 세자가 들어와 아뢰라고 하니, 세자가 간의대(簡儀臺)에 이르러 정초·이천·정인지·김빈 등으로 더불어 간의와 혼천의의 제도를 강문(講問)하고, 이에 김빈과 내시 최습(崔濕)에게 명하여 밤에 간의대에 숙직하면서 해와 달과 별들을 참고해 실험하여 그 잘되고 잘못된 점을 상고하게 하고, 인하여 빈에게 옷을 하사하니 밤에 숙직하기 때문이었다. 이로부터 임금과 세자가 매일 간의대에 이르러서 정초 등과 함께 그 제도를 의논해 정하였다.
【원전】 3 집 499 면
【분류】 *과학-천기(天氣) / *왕실-사급(賜給)
  세종 20년 무오(1438,정통 3)
 1월7일 (임진)
흠경각이 완성되어 김돈에게 기문을 짓게 하다

흠경각(欽敬閣)이 완성되었다. 이는 대호군 장영실(蔣英實)이 건설한 것이나 그 규모와 제도의 묘함은 모두 임금이 마련한 것이며, 각은 경복궁 침전 곁에 있었다. 임금이 우승지 김돈(金墩)에게 명하여 기문을 짓게 하니, 이에 말하기를,
“상고하건대, 제왕이 정사를 하고 사업을 이루는 데에는 반드시 먼저 역수(曆數)를 밝혀서 세상에 절후를 알려 줘야 하는 것이니, 이 절후를 알려 주는 요결(要訣)은 천기를 보고 기후를 살피는 데에 있는 것이므로, 기형(璣衡)과 의표를 설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상고하고 징험하는 방법이 지극히 정밀하여 한 기구 한 형상만으로는 능히 바르게 할 수 없다. 우리 주상 전하께서 이 일을 맡은 자에게 명하여 모든 의기(儀器)를 제정하게 하였는데, 대소 간의(大小間儀)·혼의(渾儀)·혼상(渾象)·앙부일구(仰釜日晷)·일성정시(日星定時)·규표(圭表)·금루(禁漏) 같은 기구가 모두 지극히 정교하여 전일 제도보다 훨씬 뛰어나 오직 제도가 정밀하지 못하고, 또 모든 기구를 후원(後苑)에다 설치하였으므로 시간마다 점검하기가 어려울까 염려하여, 이에 천추전(千秋殿) 서쪽 뜰에다 한 간 집을 세웠도다.
풀[糊]먹인 종이로 일곱 자 높이의 산을 만들어 집 복판에 설치하고, 그 산 안에다 옥루기(玉漏機) 바퀴를 설치하여 물로써 쳐올리도록 하였다. 금으로 해를 만들었는데 그 크기는 탄자만 하고, 오색 구름이 둘러서 산허리 위를 지나도록 되었는데, 하루에 한 번씩 돌아서 낮에는 산 밖에 나타나고 밤에는 산 속에 들어가며, 비스듬한 형세가 천행에 준하였고, 극의 멀고 가까운 거리와 돋고 지는 분수가 각각 절기를 따라서 하늘의 해와 더불어 합치하도록 되어 있다. 해 밑에는 옥으로 만든 여자 인형 넷이 손에 금 목탁을 잡고 구름을 타고, 동·서·남·북 사방에 각각 서 있어 인·묘·진시 초정(初正)에는 동쪽에 섰는 여자 인형이 매양 목탁을 치며, 사·오·미시 초정에는 남쪽에 섰는 여자 인형이 목탁을 치고, 서쪽과 북쪽에도 모두 이렇게 한다. 밑에는 네 가지 귀형(鬼形)을 만들어서 각각 그 곁에 세웠는데 모두 산으로 향하여 섰으며, 인시가 되면 청룡신(靑龍神)이 북쪽으로 향하고, 묘시에는 동쪽으로 향하며, 진시에는 남쪽으로 향하고, 사시에는 돌아서 다시 서쪽으로 향하는 동시에 주작신(朱雀神)이 다시 동쪽으로 향하는데, 차례로 방위를 향하는 것은 청룡이 하는 것과 같으며, 딴 것도 모두 이와 같다.
산 남쪽 기슭에는 높은 축대(築臺)가 있어, 시간을 맡은 인형 하나가 붉은 비단옷 차림으로 산을 등지고 섰으며, 인형 무사 셋은 모두 갑옷 차림인데 하나는 종과 방망이를 잡고서 서쪽을 향해서 동쪽에 섰고, 하나는 북[鼓]과 부채를 잡고 동쪽을 향해 서쪽에서 약간 북쪽으로 가까운 곳에 섰고, 하나는 징[鉦]과 채쭉을 잡고 동쪽을 향해서 서쪽에서 약간 남쪽으로 가까운 곳에 서 있어서, 매양 시간이 되면 시간을 맡은 인형이 종 치는 인형을 돌아보고, 종 치는 인형도 또한 시간을 맡은 인형을 돌아보면서 종을 치게 되며, 매경(每更)마다 북과 부채를 잡은 인형이 북을 치고, 매점마다 징과 채를 잡은 인형은 징을 치는데, 서로 돌아보는 것은 종 치는 인형과 같으며, 경·점마다 북 치고 징 치는 수효는 모두 보통 시행하는 법과 같다.
또 산 밑 평지에는 열두 방위를 맡은 신들이 각각 제자리에 엎드려 있고, 열도 방위 신 뒤에는 각각 구멍이 있어 상시에는 닫혀 있다가 자시(子時)가 되면 쥐 모양으로 만든 신 뒤에 구멍이 저절로 열리면서 인형 옥녀(玉女)가 자시패를 가지고 나오며, 쥐 모양으로 만든 신은 그 앞에 일어선다. 자시가 다 가면 옥녀는 되돌아서 구멍에 들어가는 동시에 구멍이 저절로 닫혀지고 쥐 모양의 신도 제 위치에 도로 엎드린다. 축시가 되면 소 모양으로 만든 신 뒤의 구멍이 저절로 열리면서 옥녀가 또한 나오며, 소 모양의 신도 일어나게 되는데, 열두 시간이 모두 이렇게 되어 있다. 오방위(午方位) 앞에는 또 축대가 있고 축대 위에는 기울어진 그릇을 놓았고 그릇 북쪽에는 인형 관원이 있어, 금병(金甁)을 가지고 물을 따르는 형상인데 누수 남은 물을 이용하여 끊임없이 흐르며, 그릇이 비면 기울고 반쯤 차면 반듯해지며, 가득 차면 엎어져서 모두 옛말과 같이 되어 있다. 또 산 동쪽에는 봄 3개월 경치를 만들었고, 남쪽에는 여름 경치를 꾸몄으며, 가을과 겨울 경치도 또한 만들어져 있다. 《시경》 빈풍도(詩經豳風圖)에 의하여 인물·조수·초목 여러 가지 형용을 나무를 깎아 만들고, 절후에 맞추어 벌려 놓았는데 칠월 한 편의 일이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 집 이름을 흠경이라 한 것은 《서경》 요전(堯典)편에 ‘공경함을 하늘과 같이 하여, 백성에게 절후를 알려 준다[欽若昊天, 敬授人時]’는 데에서 따온 것이다.
대저 당우 시대로부터 측후(測候)하는 기구는 그 시대마다 각자 제도가 있었으나, 당·송 이후로 그 법이 점점 갖추어져서 당나라의 황도유의(黃道遊儀)·수운혼천(水運渾天)과 송나라의 부루표영(浮漏表影)·혼천의상(渾天儀象)과 원나라의 앙의(仰儀)·간의(簡儀) 같은 것은 모두 정묘하다고 일렀다. 그러나 대개는 한 가지씩으로 되었을 뿐이고 겸해서 상고하지는 못했으며, 운용하는 방법도 사람의 손을 빌린 것이 많았는데 지금 이 흠경각에는 하늘과 해의 돗수와 날빛과 누수 시각이며, 또는 사신(四神)·십이신(十二神)·고인(鼓人)·종인(鍾人)·사신(司辰)·옥녀(玉女) 등 여러 가지 기구를 차례대로 다 만들어서,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저절로 치고 저절로 운행하는 것이 마치 귀신이 시키는 듯하여 보는 사람마다 놀라고 이상하게 여겨서 그 연유를 측량하지 못하며, 위로는 하늘 돗수와 털끝만큼도 어긋남이 없으니 이를 만들은 계교가 참으로 기묘하다 하겠다. 또 누수의 남은 물을 이용하여 기울어지는 그릇을 만들어서 하늘 돗수의 차고 비는 이치를 보며, 산 사방에 빈풍도(豳風圖)를 벌려 놓아서 백성들의 농사하는 어려움을 볼 수 있게 하였으니, 이것은 또 앞 세대에는 없었던 아름다운 뜻이다. 임금께서 여기에 항상 접촉하고 생각을 깨우쳐서, 밤낮으로 근심하는 뜻을 곁들였으니, 어찌 다만 성탕(成湯)의 목욕반(沐浴盤)과 무왕의 호유명(戶牖銘)과 같을 뿐이리오. 그 하늘을 본받고 때를 좇음에 흠경하는 뜻이 지극하며 백성을 사랑하고 농사를 중하게 여기시니, 어질고 후한 덕이 마땅히 주나라와 같이 아름답게 되어 무궁토록 전해질 것이다. 흠경각이 완성되자 신에게 명하시어 그 사실을 기록하게 하심으로 삼가 그 줄거리를 적어서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바치나이다.”
하였다.
【원전】 4 집 123 면
【분류】 *과학-역법(曆法) / *건설-건축(建築)
○ 김빈(金鑌)의 명(銘)과 그 서문에, “제왕의 정사는 때를 맞게 하고 날을 바르게 하는 것보다 중한 것이 없는데, 상고하고 실험할 것은 의상(儀象)과 구루(晷漏)에 있다. 이는 의상이 아니면 천지의 운행을 살필 수 없고, 구루가 아니면 낮과 밤의 한계를 잴 수가 없기 때문이며, 천년을 헤아림도 한 시각의 어긋나지 않는 데서 비롯하고, 모든 정무의 순조로운 것도 한 치의 세월도 허송하지 않는 데서 말미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대의 성왕(聖王)들이 하늘에 순응하여 정치를 하는 데에 모두 여기에 정성을 다하였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주상전하께서는 요(堯)의 공경히 따르던 것을 보존하며, 순(舜)의 선기(璿璣)와 옥형(玉衡)으로 살피던 것을 본받아서, 해당 관청에 명하여 의상(儀象)을 만들어 천문과 기상을 관측하는 데에 도움을 받고, 다시 누기(漏器)를 새로 만들어 구각(晷刻)을 바르게 하였다. 이에 궐내의 서쪽에 전각 세 채를 세우고 호군 신 장영실에게 명하여 사신(司辰)하는 나무 사람과 3신(神)과 12신을 만들어서, 계인(鷄人)의 직분을 대신하게 하였다. 동쪽 채 안에 자리 2층을 마련하고 3신을 윗층에 두고, 한 신 앞에는 종을 두어 그것을 쳐서 시(時)를 알리게 하고, 한 신 앞에는 북을 두어 그것을 쳐서 경(更)을 알리게 하며, 한 신 앞에는 징을 두어 그것을 쳐서 점(點)을 알리게 하였다. 12신은 각기 신패(辰牌)를 잡고 평륜(平輪)에 둘러서서 가운데 층 밑에 숨었다가 때에 따라 번갈아 올라온다. 가운데 채 안에는 항아리를 두고 기계를 장치하여 철환(鐵丸)으로 그 기계를 퉁기는데, 때가 이를 때마다 여러 신들은 곧 응한다. 의상(儀象)을 자세히 연구해 보면 하늘과 조금도 틀리지 않아서 참으로 귀신이 지키고 있는 것 같아서 보는 사람이 모두 놀라고 감탄하니, 진실로 우리 동방에서는 과거에 일찍이 없었던 훌륭한 제도이다. 그리하여 그 전각 이름을 ‘보루(報漏)’라 하고, 이제 신 김빈에게 명하여 글을 지어 후인들에게 보여 주라 하셨다. 신은 절하고 명(銘)을 지어 올립니다.” 하였다.
그 명에, ‘음과 양이 차례를 바꾸고 밤과 낮이 엇갈린다. 천도(天道)는 묵묵히 돌아가고 신공(神功)은 자취가 없도다. 천지(天地)의 도(道)를 도와서 이룩하여 해시계와 물시계를 만들었도다. 황제로부터 시작하여 시대마다 제도가 달랐도다. 오직 우리 동토(東土)에는 옛 제도가 소홀했는데 비로소 빛나는 법을 만들었으니, 우리 임금의 깊은 지혜였다. 먼저는 선기옥형(璿璣玉衡)을 만들고, 다음에 물시계를 만들었도다. 네 개의 파수호(播水壺)에 두 개의 수수호(受水壺)로다. 낮과 밤의 교대는 시간의 차이에서 비롯하나니, 이에 시초점을 치는 산가지를 세워서 이륙(二六)으로 나타내고, 목탁을 치고 혹은 꽹과리를 치는 것은 측후가 어긋날까 함이로다. 나무로 신(神)을 만들어 지키는 관리가 필요없네. 신을 두어 물시계를 맡기느라 높은 집을 지었도다. 동쪽 채에는 위와 아래로 자리를 설치했는데, 윗쪽에 세 신이 있어 종과 북과 징을 나누어 가졌나니, 닭을 대신해 소리를 치매 그 소리는 차례가 있다. 그 아래 열두 신은 제각기 신패(辰牌)를 갖고 평륜(平輪)의 면에 둘러섰다가 번갈아 올라와 때를 알린다. 그 기계의 움직임은 가운데 채에 징험하도다. 층층의 다락으로 칸막이를 하고, 항아리로 서로 이었도다. 구리로 두 개의 판자를 만들고 구멍을 뚫어, 화살을 끼우고 기계를 얹어서 철환을 받아 항아리 안에 쏟아 넣는다. 화살이 올라와 기계를 움직이면 철환이 떨어져 구르도다. 철환의 길은 가로로 비스듬히 신(神)의 밑에 있도다. 두 개의 갈림길이 넷으로 나뉘어져 마치 용도(甬道)와 같고, 통의 좌우에 잇대어 있어 쏟아지는 철환을 받도다. 통에는 기계와 구멍이 있어 동판의 수와 맞추었도다. 또 따로 큰 철환이 있어 통가에 벌여 있다가 번갈아 기계를 건드리니, 마치 빠른 번개와 같도다. 기계가 닿는 곳에 사신(司辰)이 그 직분을 다하도다. 귀신과도 같아 보는 사람들이 놀라고 감탄한다. 훌륭하여라. 이 큰 규모여! 천도(天道)에 순응하여 만드니 제도가 조화(造化)와 짝하여 조금도 어긋나지 않는도다. 이 한 치의 광음(光陰)을 생각하여 온갖 업적을 빛내도다. 버들가지를 꺾어 울타리를 만들어도 백성들 스스로 의혹하지 않는다. 이에 여기에 준정(準程)을 세우노니 밝게 보이어 끝이 없으리.”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