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령의 삼일독립운동사/의령의 삼일 독립운동사

경남 서부지방 (진주 의령 함안등 독립운동사) 스크랩

아베베1 2010. 10. 20. 21:01
제4장
경남 서부지방
제1절 진주군(晋州郡)[지금의 진양군(晋陽郡)]
1 진주읍(晋州邑)
진주읍은 군(郡)의 중앙에 위치하여 별명을 청주(靑州)·진산(晋山) 또는 진강(晋康)이라고도 한다.
낙동강(洛東江)의 지류 남강(南江)이 부성(府城)을 둘러싼 경승(景勝)의 땅이다.
3·1운동 당시 이곳은 경상남도의 수부(首府)로 인가(人家)가 조밀한 일성구(一盛區)로 장은 매달 음력 2일, 7일에 성내와 성외에서 교대로 섰다.
도내에서 가장 큰 장으로, 장날은 각처에서 1만 명 전후의 인파가 모여들었다.
3월 1일 서울에서의 독립만세의 의거 소식은 이곳 애국청년들의 마음을 더 한층 부풀게 하여 거사로의 준비는 일찍부터 이러한 애국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준비되어 갔다.
즉 이곳의 선진적인 애국청년 이강우(李康雨)·김재화(金在華)·권채근(權采根)·강달영(姜達永)·박진환(朴進煥)·박용근(朴龍根)·강상호(姜相鎬) 등은 비밀회합을 거듭하면서 진주에서도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할 것을 서로 맹약 결의하고 그 시일과 구체적인 거사 방법을 논의하였다.
이들은 먼저 3월 10일경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만들어 비밀리에 배부하면서 인근 각 면의 유지와 대중을 규합해 갔다. 전국의 독립운동이 치열해 가자 진주에서도 의거가 일어날 것을 예상한 이곳 군경은 더욱 삼엄한 경계를 펴 갔다.
드디어 의거의 기미를 알아채린 이들은 선수를 쳐 각 학교에 임시휴교를 명하고 일인 교사들로 하여금 학생들을 엄중 정탐토록 하였다.
그리고 타지방 학생들에게 여비를 주어 강제로 귀향시키는 비상조처까지 취하였다.
이러한 삼엄한 정세 변화 가운데 이강우(李康雨)를 비롯한 주동 애국청년들은 거사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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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8일[음력 2월 17일]로 정하고 일 군경의 눈을 피해 가면서 거사의 공작과 조직을 확대시켜 갔다.
그들은 사립광림학교(光林學校)의 악대원(樂隊員)으로 있다가 졸업한 천명옥(千命玉)·박성오(朴星午)·김영조(金永祚)·이영규(李永圭) 등 4인을 청하여 거사시 시위행렬의 선두에서 주악(奏樂)토록 부탁하고, 한편 교섭위원을 선정하여 기독교회 측에는 김영조(金永祚)가 담당하기로 하고, 각 사회단체는 김재화(金在華)·강달영(姜達永)·박지환(朴進煥) 등이 당당하여 교섭키로 하였다.
그리고 거사의 방법으로는 진주읍을 3개구로 나누어 거사 당일 오전 11시경의 교회의 종소리를 신호로 3개구에서 일제히 봉기하여 만세시위하기로 약정하였다.
제1구는 옥봉동(玉峰洞) 부근에 집합하고, 제2구는 재판소 부근, 그리고 제3구는 시장통 부근에 집합하기로 하였다.
3월 18일[음력 2월 17일]약정한 진주읍의 장날은 닥쳐왔다. 이날 각면 각동으로부터 수 많은 군중이 진주읍으로 운집해 들어왔다. 11시경 타종(打鐘) 책임을 맡은 김영조(金永祚)는 진주교회로 달려갔다.
그러나 뜻밖에도 교회의 종은 철거되고 없었다.
당황한 김영조는 이 사실을 대기하고 있는 3구에 고하고 비봉산정(飛鳳山頂)에서 나팔소리가 나면 거사하라고 약속을 변경하였다.
이날 오후 1시 이영규(李永圭)는 비봉산 위에서 힘차게 나팔을 불었다.
3개구에 모인 군중은 일제히 봉기하였다.
학생들은 감추어 둔 태극기를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제2구 즉 재판소 부근에는 수천의 군중과 학생이 모였다. 이에 이강우(李康雨)가 등단하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군중이 일제히 여기에 호응하니 독립만세의 함성은 천지를 진동케 하였다.
이어서 군중은 악대를 선두로 애국가를 제창하면서 시위로 들어가 성중을 일주하였다. 군중의 위보(威步)는 당당하고 기세는 충천하여 갔다. 일군 헌병과 경찰이 출동하여 시위행렬을 저지 해산시키려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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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이들은 소방대까지 동원하여 소방차로 더러운 물을 퍼붓고 곤봉으로 군중을 난타하였으나 군중은 시위를 계속 강행하였다.
오후 4시경 시위군중의 대열이 경상도청 앞에 이르렀을 때 군중은 약 3만 명으로 늘어났다. 일군 헌병과 경찰은 시위 군중 주동 인물 의복에 잉크를 뿌려 두었다. 이들은 석양(夕陽)에 이르러 검거하기 시작하여 관련자 약 3백 명을 검거하였다. 그러나 시위는 그대로 계속되어 야간에도 그치지 않았다. 시위 군중들은 각대(各隊)로 나누어 요소요소에 웅거하여 봉화를 오리고 독립만세의 함성은 그치지 않았다. 오후 7시에는 돌연히 ‘노동독립단’의 군중대열이 나타나 시위를 전개하고 2시간 뒤에는 다시 ‘걸인독립단(乞人獨立團)’이 나타나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들은 태극기를 들고 의분에 넘친 어조로,
“우리들이 유걸(流乞)하게 된 것은 왜노들이 우리의 생의 이권을 빼앗았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가 독립하지 못하면 우리는 물론 2천만 동포가 모두 구렁텅이에 빠진고 말 것이다.”
라고 외치면서 보다 완강한 항일의 기세를 북돋우었다.
다음날 3월 19일 진주읍내 동포들이 경영하는 상점은 모두 문을 닫고 철시하였다. 민중의 의분은 높아갔다.
오전 11시 읍내에서는 다시 약 7천 명[일군 기록 에는 약 5천 명]의 군중이 봉기하여 악대를 선두로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연호 고창하면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군중들은 도청과 경무부로 몰려 들려 하였다.
일 헌병이 총검으로 위협하고 또 시위 군중을 난타하여 부상자는 늘어갔다. 오후 3시 참다못해 청년들은 투석으로 맞섰다. 그러나 정세 불리하여 군중은 일시 후퇴하였다. 그러나 1만여 명의 군중은 또다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기생독립단(妓生獨立團)’의 일대가 태극기를 선두로 남강 변두리를 둘러 촉석루(矗石樓)를 향하여 시위하자 이경 수 10명이 달려 들어 칼을 빼어 이들을 치려하였다.
이때 한 기생이,
“우리가 죽어도 나라가 독립이 되면 한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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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외치면서 태연히 전진하자 일경들은 감히 손을 대지 못하였다.
이들이 과시한 기백은 의기(義妓) 논개(論介)의 애국정신 그대로였다.
이들이 기생들이 발휘한 애국 기백으로 기생 6명이 검거되었다.
오후 4시 30분 일 군경의 고압적(高壓的)인 탄압으로 후퇴한 군중은 각 소대로 나누어져 읍내 요소에 웅거하여 오후 11까지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이날 약 1백 명[일군 기록 64명]의 애국 군중이 검거되었는데, 이들은 대부분이 학생들이었다. 20일에도 시위는 계속되었다.
아침부터 모이기 시작한 수천 명[일군 기록에는 약 6백명]의 군중은 다시 악대를 선두로 애국가를 부르면서 진주 경찰서로 몰려갔다.
이때 일군 헌병대에서는 기마병을 출동시켜 시위행렬을 저기시키기 위해 온갖 힘을 기울이면서 소방대까지 동원시켰다. 이들은 총검을 휘두르면서 온갖 흉악한 만행을 다하였다. 군중은 시위 강행을 일단 보류하고 물러섰다.
21일에는 학생 강민호(姜玟鎬)·김경택(金景澤) 외 수명이 의거를 계획하다가 발각되어 검거되자 여기에 격분하여 학부형 등 가족이 일어났다.
즉 이날 오후 4시부터 수천 명[일군 기록에는 약 1천 명]이 일어나 만세 시위를 전개하다가 6, 7명이 검거되었다.
그칠 줄 모르고 일어나는 군중들의 완강한 저항에 대비하여 일군은 마산으로부터 일군 헌병과 보병을 이곳으로 이동시켜 군대를 대폭 증원하였다. 이러한 삼엄한 상황 속에서도 대규모의 의거가 추진 계획되어 갔다.
즉 진주군 금곡면의 면서기 김영재(金榮在)와 금산면(琴山面) 가방리(伽芳里) 이교륜(李敎倫)은 비밀 모의를 거듭하면서 대대적으로 군중을 규합하여 봉기하려고 하였다.
이들은,
“조선 총대장(朝鮮總大將) 박모(朴某)가 조선 13도를 조직하려고 하니 만민은 여기에 열복(悅服)하고 충절을 다하여 외적에게 모멸(侮蔑)당하지 말자.”
라는 내용의 ‘조선독립완문서(朝鮮獨立完文書)’를 수 10매 작성하여 22일에서 23일에 걸쳐 이를 진주읍내 법원지청 앞 전주 기타 요소에 붙이고, 한편으로는 주변 각 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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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구장에 ‘조선독립 협력의뢰서’를 송부하여 군중을 거느리고 진주읍 시위운동에 적극 참가하여 독립을 달성하자고 호소하였다.
이 결과 2사람은 검거되어 김영재(金榮在)는 1년형을, 이교륜(李敎倫)은 8개월 형을 받았다.
한편 이와 같이 앙양되어 가는 대중의 항일의식 가운데 4월 18일에는 다시 읍내에서 대대적인 항일 독립투쟁이 전개되었다.
즉 이날 오후 5시경 진주 법원지청에서 검거된 애국 인사들을 분감(分監)으로 압송하는 도중 이를 지켜보고 있던 약 3천 명[일군 기록에는 약 2천 명]의 애국 군중들이 의분을 참지 못한 끝에 들고 일어나 애국 인사들을 구출하려 하였다.
이때 이를 호송하던 일군 보병이 군중들에게 난사하여 대구인(大邱人) 이육식(李陸植)이 현장에서 쓰러져 순국하고 강목순은 중상을 입었다.
그 후 진주군(晋州郡) 나동면(奈洞面) 삼계리(三溪里)에 사는 박재룡(朴在龍)·박재수(朴在秀)는 사천군(泗川郡) 추동면(杻洞面) 길평리의 강대익(姜大翼)과 사천면 중선리(中宣里)의 김형권(金亨權) 및 함양군 병곡면(甁谷面) 도천리(道川里)의 권도용(權道溶)과 더불어 ‘경남유림대회(慶南儒林大會)’를 조직하여 상해 임시정부를 후원하려는 운동을 하다가 탄로되어 검거되는 사건도 일어났다.
즉 3·1의거의 함성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박재룡(朴在龍)은 4월 2일 함양군 지곡면(池谷面) 정치리(鼎峙里)에서 한문 교사 권도용(權道溶)을 만나 유림도 독립운동을 전개해야 한다는 것에 합의를 본 후 곧 그 준비를 착수하였다.
권도용은 ‘조선독립선언서’[민족 대표 33인의 것과는 별도] ‘조선독립충고문’·‘조선립가’·‘조선독립경포서(朝鮮獨立警布書)’·‘조선독립책선문(朝鮮獨立責善文)’을 만들었다.
박재룡(朴在龍)은 이를 가지고 음력 4월말 강대익을 찾아 상의하였다.
강대익은 적극 여기에 찬동하여 밀회를 거듭하면서 그 실천 방법을 의논하였다.
이들은 음력 5월 20일 진주읍 대안동 김봉란(金鳳蘭) 집 유일여관(唯一旅館)에서 모임을 가졌다. 강대익은 준비에 필요한 자금 10원을 박재룡(朴在龍)에게 제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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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사람은 음력 5월 30일 다시 만나 평소 강대익이 잘 아는 추동면(杻洞面) 면사무소 서기 김형권(金亨權)을 포섭하여 이로 하여금 면사무소 등사판을 빌어 내도록 하여 강대익 객실(客室)에서 ‘조선독립선언서’·‘조선독립충고서’·‘조선독립가’·‘조선독립경포서’·‘조선독립책선문’을 각각 20~30부 전후 합계 1천 5백매를 등사하여 운동을 전개하려는 찰나 정보가 누설되어 진주경찰서에 전원 검거되었다. 이들 주동 인물은 다음과 같다.
박재룡(朴在龍)·강대익(姜大翼)·김형권(金亨權)·권도용(權道溶)·박재수(朴在秀) 상술(上述)한 바와 같이 진주의 독립의거는 각계각층에서 애국 군중들이 총 궐기하여 완강한 항일 저항의 모법적인 투쟁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검거된 주동 인물 가운데 김재화(金在華)·권채근(權采根)·강달영(姜達永)·정준교(鄭準敎)·이강우(李康雨)·박진환(朴進煥)·박용근(朴龍根)·심두섭(沈斗燮)등은 2~3년형의 언도를 받고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다.
그리고 경남유림대회(慶南儒林大會)를 조직하려던 주동 인물 박재룡은 징역 2년을 언도 받고 강대익(姜大翼)·김형권(金亨權)·권도용(權道溶)은 징역 1년을 언도 받아 각각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다.1)
2 정촌(井村)면민들의 진주읍 합세
고종 인산(高宗因山)에 참예(參詣)하기 위해 상경하였던 산청군(山淸郡) 단성면(丹城面) 배양리(培養里)에 거주하는 이병홍(李柄洪)은 서울 3·1운동에 참가하고 독립선언서를 옷 속에 숨겨 고향으로 돌아왔다.
감격과 의분에 넘친 그는 곧 동지인 진주군 정촌면(井村面) 관봉리(官鳳里)에 사는 강재순(姜在淳)에게 서울의 의거 소식을 전하고 독립선언서를 전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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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등경찰관계 적록(高等警察關係摘錄)≫, 1936년 12월 경상북도 경찰부, pp.10~11. 변지섭,≪경남독립운동소사≫ (상) pp.24~28. 이용락, ≪3·1운동 실록(三一運動實錄)≫ pp.648~652. 박은식(朴殷植), 저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 제8장. 김정명, ≪조선독립운동≫ I. p.396, 404, 406, 408, 632, 633. 김영재(金榮在) 외 1인의 판결문, 1919년 5월 21일 대구복심법원. 박재수(朴在秀) 판결문, 1919년 10월 18일 대구복심법원. 박재룡(朴在龍) 외 3인의 판결문, 1919년 10월 18일 대구복심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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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의 소식을 듣고 또 독립선언서를 접한 그는 2천만 민족이 모두 독립을 전취(戰取)할 때가 왔다는 것을 깊이 느끼게 되었다.
그는 곧 각자(刻字)에 능숙한 이종언(李鍾彦)에게 부탁하여 ‘선언서’를 판각(板刻)하였다.
2사람은 판각한 목판으로 수백 매의 선언서를 박아 내어 직접 인근 동지들에게 비밀히 전함과 아울러 이반성면(二班城面)에 사는 김종락(金鍾洛)으로 하여금 각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의거를 설명하고 선언서를 전하도록 하였다.
이 무렵 진주 읍내의 동지들로부터 연락이 왔다.
강재순(姜在淳)은 강한순(姜瀚淳) [일명 백문(伯文)]·허현(許炫)·이종락(李鍾洛)과 더불어 모의를 거듭하면서 직접 인근 면으로 동지를 규합하고 또 진주읍내 동지들과 긴밀한 연락을 취해 갔다.
3월 18일 진주 읍내 의거와 때를 같이 하여 봉기한 정촌면(井村面) 5천여 명의 군중은 진주 읍내 의거에 합세하기 위해 사천(泗川) 일군 헌병대와 진주 일군 수비대의 경계선을 돌파하고 진주읍을 향하여 전진하였다.
의거 군중대열이 칠암리(七岩里)에 도달했을 때 이 정보를 입수하여 과수원 일대에 매복하고 있던 일 군경이 군중대열에 돌입하여 일대 격투가 벌어졌다.
선두에서 이들에 대항하여 활약하던 서기봉(徐奇峰)과 이준이(李俊伊) 2인은 일 헌병대의 총검에 복부를 찔리어 땅에 쓰러졌다.
힘이 장사인 강한순(姜瀚淳)은 큰 태극기를 단 장대를 한 손에 들고 한 손으로는 일 헌병들의 장검을 빼앗아 강물에 던지며 군중들을 지휘하여 전진해 갔다.
이때 진주읍의 군중들은 이 공경을 바라보고 만세를 성원하니 남강(南江)을 사이에 둔 양안(兩岸)의 군중들의 기세는 충천해 갔다.
일 헌병이 강한순(姜瀚淳)에게 달려들어 큰 태극기를 탈취하려고 하였으나 이들의 목덜미를 잡아 뿌리치는 바람에 감히 접근하지를 못하였다.
드디어 한 헌병이 포승으로 올개미를 마들어 던져 목을 조르는 바람에 이들에게 잡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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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들은 이를 탈환하려고 필사의 노력을 하였으나 이미 주위는 헌병들에 의해 차단이 되고 말았다.
군중은 더 이상 접근할 수 없었다. 강한순(姜瀚淳)은 진주 경찰서에서 혹독한 고문과 취조를 받고 재판소로 송치되는 도중에 포승을 절단하고 일경 2명을 발길로 차서 꺼꾸러뜨린 후 진주 비봉산에 올라 대한 독립만세를 부르고 행방을 감추었다.
이 후 그는 수년간 강원도 일대에서 유랑 피신하고 이종열(李鍾悅)은 이 때 검거되어 2년간 옥고를 치루었다.
유천문(劉千文)은 일경의 혹독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았고 강재순(姜在淳)은 도피 3년에 검거되어 월여(月餘)에 걸쳐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으나 시효가 넘어 석방되었다.2)
3 기타 지역
상술한 의거 이외 당시 진주군[지금의 진양현]내에서는 3월 22일 수곡면(水谷面) 창촌리(昌村里)에서, 3월 25일과 31일에는 문산면(文山面) 소문리(蘇文里)에서, 4월 8일에는 일반성면(一班城面) 창촌리(倉村里)에서 각각 독립 만세시위가 전개되었으나 오늘날 전하는 문헌이 없어 운동의 내용을 상세히 서술할 수 없다.3)
4 진주(晋州)농업학교 의거 모의
3·1운동의 거족적 항쟁과 이곳 진주읍 애국민중들의 끈기 있고 완강한 항일독립투쟁은 젊은 학생들의 의식을 더 한층 높혀 이들로 하여금 새로운 항일독립투쟁을 준비하게 하였다.
이곳 농업학교 2학년생 문위동(文渭東)·신영안(申英安)·김익조(金益祚) 등이 중심이 되어 거사의 모의를 거듭한 후 1920년 8월 30일, 31일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진주농업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학생들을 규합해 갔다.
이들의 거사계획은 8월 30일 오후 7시경에 진주 공원·농업학교 앞·재판소 앞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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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변지섭, ≪경남독립운동소사≫ (상) pp.29~30. 이용락, ≪3·1운동 실록(三一運動實錄)≫ pp.654~655.
3) 조선일군사령부, ≪조선소요사건상황(朝鮮騷擾事件狀況)≫ p. 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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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곳에 모여 일제히 태극기를 높이 들고 독립시위운동을 전개하려고 하였다.
이리하여 이들은 학교등사판을 이용하여 선언서 3백매를 인쇄하였다.
그리고 거사일을 연기하여 8월 31일에 단행하려고 하였다.
이에 앞서 8월 28일, 29일에는 기숙사에서 학생들이 숙직 교원 모르게 비밀 모임을 갖고 이를 협의한 후 제1, 제2 보통학교·광림학교·기독청년회·청년친목회 등 여러 곳에 통지를 하여 동지를 규합해 가던 중 이 비밀을 탐지한 진주경찰서에 의해 8월 30일 오후 11시에 준비물(태극기·선언서) 전부를 압수당하고 관련자 72명이 검거되었다.[이중 진주농업학교 학생은 50명].
주동 인물 문위동(文渭東)·신영안(申英安)·김익조(金益祚)는 재판 끝에 미결 2개월, 기결 1개년의 옥고를 진주형무소에서 치루게 되었다.
해방 후 이들은 모교로부터 소급(遡及) 졸업장을 받았다.4)
제2절 함안군(咸安郡)
1 함안읍(咸安邑)
함안읍은 마진(馬晋) 가도에서 10리 떨어져 있고 마산에서 서쪽 50리 지점에 위치해 있는 읍으로 3·1운동 당시 매달 음력 3일, 8일에 장이 섰다. 이곳 함안읍에도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3·1의거의 소식은 꼬리를 물고 들려 왔다.
이러한 때 함안면 봉선동에 사는 조한휘(趙漢輝)·한종순(韓鍾淳)·이찬영(李讚榮)[일명 두찬(斗讚)]·조병흠(趙丙欽)·박건병(朴建秉)[안신학교 교사, 서울사람]·강기수(姜琪秀)[금룡조합 서기]·한관렬(韓灌烈) 등은 고종 인산에 참예하기 위해 상경하였다가 그곳 서울에서 감격적인 민족 거사를 겪고 독립선언서를 비장하고 함안으로 돌아왔다.
함안읍 의거의 모의는 여기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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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동아일보≫, 1920년 9월 2일자. 이용락, ≪3·1운동 실록≫ pp.652~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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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한휘는 한관열·강기수(姜琪秀) 등 곧 이곳 유지 이희석(李喜錫)·한종순(韓鍾淳)·이찬영(李讚榮)과 만나 서울의 민족적 거사를 상세히 이야기하고 독립선언서를 이들에게 보이면서 함안 거사를 의논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함안읍 의거는 조한휘·이희석·한종순·이찬영 등이 주동이 되어 급속도로 무르익어 갔다.
이러한 때 이들의 배후 참모의 역할을 한 사람이 대산면(代山面)의 한학훈장(漢學訓長) 안지호(安知鎬)였다.
이들은 일본 군경과 밀정들의 눈을 피해 가면서 모의를 거듭하여 거사일을 3월 19일[음력 2월 18일]로 약정하고 준비를 서둘렀다.
특히 이때 한종헌(韓鐘憲)·조한국(趙漢國)[조한휘(趙漢輝)의 아우] 및 학생대표인 안신학교 김도권(金道權)은 태극기를 만드는 데 크게 협력하였다. 3월 18일 밤 이희석은 조한휘가 서울로부터 가져 온 독립선언서는 그 문장이 너무 길어 1장에 등사할 수 없으므로 이를 개작 축소(改作縮小)하여 1장으로 등사할 수 있도록 만들어 이를 많이 등사해 내었다. 이와 아울러 각지로 연락원을 밀파하여 규합된 동지들로 하여금 군중을 규합하여 거사일에 약정된 장소로 모이도록 하였다. 드디어 3월 19일[음력 2월 18일]함안읍 장날은 닥쳐왔다. 이른 아침부터 군중들은 속속 함안읍 장으로 모여 들었다.
주동 인물과 규합된 군중들은 약속대로 함안읍 봉성동에 있는 이찬영 소유 가옥 주변에서 이희석의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찬영(李讚榮)은 12시 정오 비봉산에 올라 고천제(告天祭)를 지낸 후 손을 높이 들어 군중들에게 모이라는 암시를 하였다.
주동 인물과 군중들은 이 암호 지시에 따라 일제히 봉선동에 모여 들었다.
이 순간 독립선언서와 태극기가 군중들에게 배부되었다. 이희선(李喜錫)은 하산(下山)하여 군중 앞에 나타나 민족의 염원을 절규하고 이어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다. 독립선언서 낭독이 끝난 후 주종 인물들의 선창에 따른 독립만세의 우렁찬 민족 함성은 노한 사자의 음성과 같이 창공으로 메아리쳐 갔다.
오후 2시 드디어 태극기를 높이 든 주동 인물을 선두로 약 3천 명의 군중이 만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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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면서 행진해 들어갔다
이때 당지 경찰이 총출동하였으나 의기충천하는 군중의 행진을 막을 수는 없었다.
군중은 드디어 함안경찰관 주재소롤 쇄도해 갔다.
이곳에서 군중은 독립만세를 소리높이 불렀다.
이때 이곳에서 경찰을 지휘하던 마산 경찰서장 북촌(北村淸澄)과 이곳 경찰들이 오만한 태도로 나오자 격분한 군중 약 1천여 명은 도끼와 곤봉·돌을 들고 주재소 내로 들어가 그곳 관문서(官文書)를 뒤집어엎고 건물을 파괴한 후 이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배부하면서 독립만세를 부르라고 하였다. 이들이 더욱 불손한 태도로 나오자 군중은 이들은 인치하여 반성의 주먹 세례를 가하였다.
그리고 서장에게는 ‘독립만세공명(獨立萬勢共鳴)’의 증명서를 쓰라고 요구하였다. 군중은 다시 군청으로 향하였다.
폐쇄해 놓은 문을 부수고 들어가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들은 군수 민인호(閔麟鎬)를 사로잡아 제복과 제모를 벗긴 후 같이 독립만세를 부르라고 하였다. 그리고 박노일(朴魯一)은 군수에게 반성의 주먹세례를 가하였다.
겁을 집어먹은 군수 민인호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주동 인물들은,
“네 생명은 보장할 터이니 만세를 부르라.”
고 하여 이를 앞세우고 시위를 하였다.
군중의 일대는 다시 평소 그들을 가장 괴롭히는 등기소롤 몰려가 이를 파괴하고 우편국·일인 소학교도 습격하였다.
이곳 주재소에서 마산 일군 수비대로 연락하던 전화는 처음 연락 후 두절되고 말았다.
조한국(趙漢國)과 강상중(姜相中)은 이들의 연락을 차단하기 위해 전선을 절단했기 때문이었다. 마산 일군 수비대에서도 이곳 주재소에 연락을 하였으나 되지 않았다.
이상사태가 돌발한 것을 깨달은 이들은 드디어 오후 5시 40분 마산 중포병대대 준하사관(准下士官) 이하 16명과 일경을 이곳에 급파하였다. 이들의 총검하에서도 군중시위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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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과 난투를 늦게까지 벌였으나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어찌하랴!
군중이 물러서자 일 군경은 주동 인물을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20일까지 계속된 주동 인물의 검거는 65명에 달하였다.
재판의 결과 43명이 6개월 내지 7년 형을 받아 옥고를 치루게 되었다.
주동 인물 이희석(李喜錫)과 한관렬은 적측과 내통하여 의거를 방해하고,
군수에게 반성의 주먹세례를 가한 박노일(朴魯一)은 종적을 감추어 형고(刑苦)를 면하였고, 조경식(趙璟植)·이재형(李在蘅)·조성규(趙聖奎)는 그곳을 떠나 다시 다음 날 군북면 의거에 참가하였다.
이 함안읍 의거는 일군 기록에도
본도에 있어서 악성의 소요로 그 정도도 또한 역시 전반을 통하여 가장 심하다.’라고 하였다. 경상남도 가운데서 당시 농민 대중의 저류를 이루어 오고 있던 완강한 농민들의 항일 저항정신을 모범적으로 잘 발휘하였던 것이다.1)
2 군북면(郡北面) 군북(郡北)시장
함안읍 의거에 참가했던 조상규(趙相奎)·조용효(趙鏞孝)·이재형(李在蘅)·조정래(趙正來)조성규(趙聖奎)·조경식(趙璟植)·조형규(趙炯奎) 등은 그곳을 빠져나와 3월 20일 있을 군북시장의 의거를 서둘렀다.
이들 주동 인물들은 이에 앞서 이미 태극기를 만들고 동지 들을 규합하여 이날에 있을 의거를 준비해 놓았던 것이다.
주동 인물들은 비밀연락을 통하여 군북 의거에 많은 군중이 호응하도록 호소하였다.
3월 20일 약정한 군북 장날은 닥쳐왔다. 전날의 함안읍 의거에 참가하고 또 소식을 전해들은 애국 군중들은 일전(一戰)을 각오하고 설레이는 마음으로 장군을 가장 하여 속속 군북 장터로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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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찬영(李讚榮)의 판결문, 1920년 1월 30일 대구복심법원. ≪고등경찰관계적록(高等警察關係摘錄)≫[1936년 12월 경상남도 경찰부] pp.7~8. ≪조선소요사건상황(朝鮮騷擾事件狀況)≫ 조선 일군 헌병대 사령부, p.106. 김정명, ≪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 I. p.398. 이용락, ≪3·1운동 실록(三一運動實錄)≫ pp.724~728. 한관렬(韓灌烈) 판결문, 1920년 8월 16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 당시의 운동 참가자 조형대(趙亨大)와의 대담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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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장날의 공기와는 달랐다.
이날 오전 9시 군북에서 가까운 군북면 덕대리(德垈里) 남단 동촌리(東村里) 사립신창학교(新昌學校) 교정에서 약 50명[일군 기록 약 30명]의 학생과 군중이 독립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군북 경찰 주재소에 파견되어 있던 마산 중포병대대 일군 16명과 경찰이 급거 이곳으로 출동하였다.
군북시장에 모인 애국 군중들의 긴장도 높아갔다. 정오를 지나 오후 1시가 되자 군중은 약 3천 명[일 군경 기록은 약 2천 명]으로 늘어났다.
이때 주동 인물들은 주재소 동편 군북교 동방(東方)에서 숨겨 온 큰 태극기를 세운 후적은 태극기를 높이 들고 대한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호응한 애국군중들의 독립만세의 함성은 노한 사자 울름소리같이 이곳 강산을 메아리쳐 갔다
드디어 사립신창학교 의거 진압에 동원되었던 일군 16명과 경관이 달려와 해산을 강요하였으나 군중은 응하지 않았다. 일군이 완강히 항의하는 애국청년 1사람을 밀어 제쳐 청년이 넘어져 손에 상처를 입었다.
상처를 입은 청년은 쏜살같이 일어나 일병의 모자를 내동댕이치고 이와 육박전을 벌였다.
분을 참지 못하던 한 애국청년은 일군을 지휘하던 특무조장의 옷을 움켜잡고 격투를 벌여 그의 상의(上衣)가 찢어져 버렸다.
군중의 위압에 눌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던 이들은 드디어 위협의 공포를 발사하였다.
위기를 면한 일 군경은 주재소로 철수하였다. 오후 5시 의분을 참지 못하는 군중들은 다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그 수는 약 5천 명[일 군경 기록에는 약 3천 5백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이들은 조수같이 다시 경찰주재소로 몰려갔다.
군중의 위압에 혼비백산한 일 군경은 공포를 발사하였다. 노한 군중은 여기에 투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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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하여 주재소 유리창은 산산 조각이 나고 벽은 여기저기 구멍이 뚫렸다. 드디어 일 군경은 군중에게 실탄을 퍼부었다.
선두에서 군중을 지휘하던 조용효(趙鏞孝)는 큰 태극기를 잡은 채적탄에 쓰러져 그 자리에서 숨졌다.
일 군경의 잔학행위에 격분한 조상규(趙相奎)는 일 군경에게 달려들어 이들을 때려눕혀, 후에 애국 군중들로부터 공중 대장(空中大將)의 별명을 얻었다.
이날 적측이 쏜 60발의 총탄에 쓰러진 순국자는 21명이었고, 부상자는 18명에 달하였다.
그 얼마나 큰 민족의 희생이었던가!
그러나 우리 측은 맨주먹으로 적병 13명을 때려눕혀 부상을 입히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때 피살된 순국자와 부상자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①순국자(21명)
조용효(趙鏞孝)·이원필(李元弼)·이재형(李在蘅)·조주규(趙周奎)·김우곤(金宇坤) 외 16명[16명은 성명 미상]
② 부상자(18명)
박상엽(朴尙燁)·송문호(宋文鎬)·조용대(趙鏞大)·박주범(朴注範) 외 14명[14명은 성명 미상]
이 의거로 검거된 주동 인물 조상규(趙相奎)·조석규(趙碩奎)·조경식(趙璟植)·조동규(趙銅奎)·조점시(趙點時)·조용국(趙鏞國)·이점시(李點時)노수정(盧秀貞)·조성규(趙聖奎)·이증출(李增出)·조정규(趙定奎)·조형규(趙炯奎) 등은 1년내지 3년 형의 언도를 받아 각각 옥고를 치루었다.
이 함안군 군북 의거는 실전을 방불케 하는 가장 완강한 농민들의 저항으로 저항민족의 빛나는 전통을 여지없이 과시한 민족사에 길이 남을 의거인 것이다. 이러한 군북 의거에 대하여 당시 조선일군사령관[宇野官太郞]은 1919년 9월 29일자로 일본 육군대신[田中義一]에게 ‘특별보고서’를 제출하고 있거니와, 참고상 여기에 이 ‘특별보고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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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글로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이 보고서에는 일 군경 비행을 숨기고 그들의 행동을 합리화시키려는 노력이 그대로 엿보이고 있다.
3월 20일 상오 9시경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덕대리(德垈里) 남단(南端) 동촌리(東村里) 신창사숙(新昌私塾) 정내(庭內)에 약 30명의 폭민(暴民)[애국 : 군중 역자 주]이 집합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함으로써 군북 경찰관 주재소에 파견한 진해만 증포병대대 태간(泰間) 특무조장(特務曹長) 이하 16명은 경찰관의 요구에 의해 출동하여 경찰관과 협력 이를 해산시켰다.
그러나 정오경 동 경찰관 주재소 동측 부근(東側附近)에 폭민(暴民)[애국 군중 : 역자 주]이 군집하여 오후 1시경에는 약 2천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경찰은 군대의 응원을 얻어 군중을 해산시키려 하였으나 군중은 이를 듣지 않았다.
이때 주기(酒氣)를 뛴 조선인이 심히 떠들므로 졸병에 망하여 이를 군중 가운데서 끌어내려고 밀었더니, 그 조선인은 주정(酒酊)으로 인해 넘어져 손가락 끝에 상처를 입자 분연히 일어나 그 졸병(卒兵)의 군모(軍帽)를 탈취하고 다시 격투하려고 하였다.
여기에 또 광폭한 한 조선인이 다시 태간(泰間) 특무조장(特務曹長)의 멱살을 잡고 폭언을 함으로 특문조장은 그 손을 뿌리치고 온화하게 물러가도록 여러 번 타일렀다.
이로 인하여 특무조장은 상의(上衣)가 약간 찢어졌다.
이와 같이 군중의 태도가 점점 광폭해 옴으로써 드디어 위협으로 4,5명의 병졸로 하여금 공포를 발사시켰더니 그 부근에 있는 자는 사산하였으나, 그것이 공포라는 것을 알자 재거(再擧)하여 오후 2시 지나서는 약 3천 5백 명의 군중이 주재소로 몰려 와 여기에 투석하여 유리창을 파괴하고 또 벽을 파괴하여 병졸을 상하게 하는 등 더욱 폭위(暴威)를 심하게 하였다.
따라서 재차 공포를 발사하였으나 이를 경모(輕侮)하고 더욱 폭행의 도(度)를 높여 폭민[애국 군중 : 역자 주]의 투석에 의해 부상하는 병졸이 생김으로써 부득이 실포 사격(實包射擊)을 개시하고 또 근접하여 폭행을 하는 자는 총검을 휘둘러 이들을 찔렀다.
그리하여 폭민[애국 군중 : 역자 주]은 군중 가운데서 쓰러지는 자를 보자 여기에 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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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산(四散)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소요에 있어서 조선인 부인 1명이 유탄에 맞아 사망하고 3명은 중상을 입었다.
사상자 중 부상자는 거의 도주하였으나 중상자(重傷者)3명, 사자(死者) 21명이 있으므로 중상자에게는 응급조치를 하고 사자(死者)는 검색 후 경찰서에서 처치하였다.
군대측은 대개 경상으로 그 수는 12명이었다.
또 그 후 조사의 결과 조선인(朝鮮人)의 사망자 남자 20, 여자 1, 부상자 남자 17, 여자 1, 일본인 사망자 1명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일본인은 유탄으로 인하여 사망한 것이라고 한다.”
이를 보아도 현지(現地) 일군이 얼마나 그들의 야만적 비행을 감추기 위해 저희들 변명에 급급하였는가를 알 수 있는 것이다.2)
3 칠원면(漆原面) 구성리(龜城里)[구 칠원읍]시장
전국적으로 번져 가고 있는 독립 의거의 소식과 아울러 3월 19일 함안읍 의거와 3월 20일의 군북 의거의 소식은 이 고장 애국인사들의 애국의 의분심을 더 한층 높여 독립 의거의 대열로 궐기케 하였다.
이곳 기독교 장로이며 우지인 손종일(孫鐘一)은 중앙으로부터 기독교계통을 통하여 의거의 연락을 받고 또 독립선언서도 입수하였다.
그는 이곳의 유지인 엄주신(嚴柱信)·박경천(朴擎天)·윤형규(尹兄珪) 등과 더불어 밀회를 거듭하면서 의거를 논의하였다.
이들은 거사일을 3월 24일 칠원읍 장날로 약정하고 태극기를 만드는 등 모든 준비를 서둘렀다.
3월 24일 칠원읍 장날은 닥쳐왔다.
오후 4시가 되자 장꾼은 약 7백~8백 명[일군 기록 약 6백 명]으로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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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김정명, ≪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 I. p399. 김정명, ≪조선독립운동≫(1분책)pp.106~107. ≪고등경찰관계적록≫ [ 1936년 12월 경상남도 경찰부] p.8. 변지섭, ≪경남독립운동소사≫(상) pp56~58. 이용락, ≪3·1운동 실록(三一運動實錄)≫ pp.728~730. ≪조선소요사건상황≫[조선일군헌병대사령부] pp.106~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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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주동 인물들은 시장 밖에 모여 독립만세를 고창한 후 태극기를 높이 흔들면서 시장을 향해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장에 모인 7백~8백 명의 군중은 일제히 여기에 호응하여 독립만세의 함성은 온통 천지를 진동케 하였다.
이리하여 군주들의 만세시위가 전개되자 놀란 일 군경은 급거 충동하였다.
이들은 총검으로 야만적인 탄압을 가하여 군중들은 후퇴하는 체 일단 물러섰다. 오후 9시 주동 인물을 비롯한 약 3백 명[일군 기록 약 2백 명]의 군중은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다시 주재소로 몰려가 검거된 주동 인물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주재소 경관 10명은 마산 일군 중포대의 응원을 얻어 군중에게 탄압을 가해와 군중은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제1차 의거에 이어 4월 3일에는 보다 더 큰 제2차 의거가 일어났다. 즉 손종일(孫鐘一)은 제1차 의거 후 엄주신(嚴柱信)·박경천(朴擎天)·윤형규(尹兄珪) 등과 더불어 제2차 의거를 의논하였다. 제1차 의거 후인 다음 장날은 군경의 경계가 심할 것이 예상되어 이들은 한 장날을 늦추어 4월 3일 장날을 제2차 의거일로 약정하였다.
주동 인물들은 비밀리에 원근으로 손을 뻗쳐 동지와 대중을 규합해 갔다.
엄주신·박경천·윤형규 3인은 태극기 준비를 책임 맡아 대형 태극기 1개와 많은 소형 태극기[판결문에는 30매]를 만들어 여기에 만반 준비를 갖추었다.
4월 3일 장꾼이 가장 많이 모여드는 시각인 오후 3시 손종일 등 주동 인물 8명은 준비한 태극기를 숨겨 장꾼이 운집한 시장 복판으로 뚫고 들어갔다.
엄주신은 재빨리 군중들에게 준비한 태극기를 나누어 준 후 손종일과 더불어 대형 태극기를 대나무에 달아 하늘 높이 세웠다.
이어 손종일이 ‘대한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만장(滿場)의 군중이 여기에 호응하여 태극기를 하늘높이 흔들면서 대한 독립만세를 고창 연호하였다.
급거 출동한 경찰이 일군의 응원을 얻어 총검을 휘두르며 달려드는 바람에 군중은 만세시위를 일시 멈추었다.
오후 5시 반 주동 인물들이 만세에 호응하여 약 7백~8백 명[판결문에는 약 6백 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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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은 또다시 봉기하였다.
주동 인물들이 든 큰 태극기를 앞세우고 시장을 누비면서 만세시위를 전개 후 칠원 경찰관 주재소로 몰려가 주재소 앞에서 대한 독립만세를 소리높이 외쳤다. 일 군경은 평화시위 군중에게 달려들어 주동 인물 2명을 구속 인치하였다.
격분한 군중들은 곤봉과 투석으로 이들과 맞섰다.
위압에 눌린 경찰은 드디어 마산경찰서와 마산 일군 중포병대대에 응원을 요청하여 이들이 출동공포를 발사하여 군중은 헤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의분을 금치 못하는 군중들의 항일정신은 높아만 갔다.
칠원 의거 벽두에 이곳 주동 인물인 손종일(孫鐘一)은,
“한일합병(韓日合倂)은 한민족(韓民族)의 본의 아닌 일본의 강탈이며, 세계의 전(全)약소국은 차제(此際)에 총궐기하여 자주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
라고 호소하면서 이곳 대중들의 항일독립정신을 높이고 이들을 항일의 진영으로 규합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와 같이 이곳 애국인사들과 대중들의 항일 독립의식이 고취앙양(鼓吹昻揚)되자 겁을 집어먹은 이곳 칠원 면장 김보한(金寶漢)은 자기 집에 일군 헌병을 숨겨 두어 가면서 대중의 궐기를 막으려 하였던 것이니, 그 얼마나 민족을 등진 가공할 만한 민족의 역적 행위였던가?
2차에 걸친 칠원 의거3)의 주동 인물로 검거된 손종일·엄주신(嚴柱信)·박순익(朴順益)·윤형규(尹兄珪)·정영보(鄭泳普)·황영환(黃英煥)·신영경(辛泳慶)·이원식(李元植)·주영호(周泳鎬)·신영수(辛英秀)·김상률(金相律)·박경천(朴擎天) 등은 각각 8개월 내지 1년형을 받아 대구와 마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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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변지섭, ≪경남독립운동소사≫ (상) 이용락, ≪3·1운동 실록≫ ]에는 철원읍의 제1차 의거를 4월 3일, 제2차 의거를 4월 8일 제3차 의거를 4월 13일로 하여 설명하고 있으나 일본 국경측 기록과 판결문을 보면 제1차 의거는 3월 24일, 제2차 의거는 4월 3일, 2차 밖에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다. 전자(前者)는 구비 전설을 토대로 기록한 것이고 후자는 그때그때의 보고를 토대로 한 것이므로 후자가 정확한 것으로 생각된다. ≪고등경찰관계 적록≫ pp.8~10. ≪조선소요사건상황≫ p.107 참조.
4) 엄주신(嚴柱信) 판결문 1919년 6월 10일 대구복심법원. 김정명, ≪조선독립운동≫I. p.506. ≪고등경찰관계 적록≫ pp. 8~10.≪조선소요사건사황≫ [조선일군헌병대사령부]p.107.변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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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칠서면(漆西面) 이룡리(二龍里)
3·1운동 후 전국 방방곡곡에서의 농민들의 봉기와 독립항쟁은 그들의 항일 저항의식과 투지를 더욱 높여 갔다.
이곳 칠서면 이용리에는 일찌기 시야(矢野吉之助)라는 일인이 들어 와 농사를 짓고 있었다.
3·1의거의 민족 함성이 전국적으로 높아가고 있던 3월 18일 이곳 칠서면 이용리에 사는 진영우(陳永祐)는 이곳 농민들을 규합하여 오후 6시 마을에서 동민들과 같이 대한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이어 만세시위를 전개하면서 일인 시야(矢野) 집으로 몰려가 그 뜰안에서 오후 9시까지 만세를 불러 이들을 위압하여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5)
5 대산면(代山面) 평림리(平林里)
3월 17일 이곳 대산면 평림리의 농민들이 마을에서 독립만세를 부른 후 시위를 전개하면서 그곳 면사무소로 몰려갔으나 경찰의 야만적 탄압으로 곧 해산되고 말았다.
이 의거는 함안군내에 있어서의 최초의 의거이기는 전하는 사료가 없어 그 내막을 알 길일 없는 것이다.6)
제3절 의령군(宜寧郡)
1 의령읍(宜寧邑)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나기 하루 전인 2월 28일 이곳 의령읍 동동(東洞)에 사는 구여순(具汝淳)에게 서울로부터 1장의 지급 전보가 날아왔다.
서울에서 유학하고 있는 누이동생 은득(銀得)이 급한 병으로 입원을 하였다는 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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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저 ≪경남독립운동사≫ (상)pp.58~59.이용락,≪3·1운동 실록(三一運動實錄)≫pp.730~731.
5) 경상남도 경찰부, ≪고등경찰관계적록≫, [1936년 12월, p.7.
6) 일군 헌병대사령부, ≪조선소요사건상황([朝鮮騷擾事件狀況)≫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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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여순(具汝淳)은 그의 이종 이화경(李華卿)을 대동하여 3월 2일 의령읍을 출발하여 3월 3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서울은 온통 만세시위가 벌어져 민족의 환희와 울분이 교차하는 극적인 분위기 가운데 민족의 만세 함성은 장안을 울리고 있었다.
은득(銀得)의 급전보는 우국지사인 오빠 구여순(具汝淳)을 서울 3·1운동에 참사시키기 위해 친 전보였다
평소 조국 독립에 몸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있던 구여순은 너무나 감격적인 순간이라 시위대열에 뛰어들어 한없이 만세를 불렀다.
3월 4일 구여순은 입수한 독립선언서를 이종화경에게 부탁하여 그의 양말 속에 감추어 3인이 함께 고향으로 돌아왔다.
의령읍 의거의 모의는 여기서 시작되었다.
구여순(具汝淳)은 의거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그의 이종 이화경과 상의하였다.
이화경은 그의 상점에 보관되어 있는 자루 4~5백 장을 팔아 운동자금에 충당하겠다고 자원하여 나섰다. 이와 같이 운동자금이 무난히 해결되자 구여순은 동지 규합에 나섰다.
구여순은 먼저 자기와 평소에 기상이 통하는 동지 정용식(鄭容軾)을 찾아갔다.
정용식은 강원도 사람으로 이곳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있었다. 정용식은 쾌히 승낙하였다.
이에 구여순은 다시 동향의 동지 최정학(崔正學)·이우식(李祐植)·김봉연(金琫淵) 등을 구합한 후 이들과 더불어 정용식 병원에서 의령읍의 거의 모의를 거듭해갔다.
이들은 의령읍 의거일을 3월 14일 의령읍 장날로 약정하였다. 이들은 각각 분담을 하여 비밀리에 태극기도 만들어 갔다.
다음은 의거일 군중들에게 나누어 줄 독립선언서의 인쇄 문제였다. 구여순·최정학 양인은 비밀리에 용덕면장(龍德面長) 강제형(姜齊馨)을 찾아가 의거 계획을 설명하고 독립선언서 인쇄 문제에 있어서 면 직원들의 협력을 요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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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장은 쾌히 승낙하였다.
3월 12일 구여순·최정학은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용덕면사무소로 가 이곳 면서기 전용선(田溶璿)·최병규(崔秉圭)를 만나 독립선언서의 인쇄를 부탁 하였다.
이때 이들 면서기는 이미 면장으로부터 내시(內示)를 받고 있었으므로, 기꺼이 여기에 응하여 면사무소의 등사판과 원지를 이용하여 독립선언서 수백 매를 인쇄해 내게 되었다.
한편 구여순·최정학 등 주동 인물들은 인근으로 더욱 손을 뻗어 동지를 규합하는 한편, 의령 공립보통학교 학생들에게도 의거일에 호응하도록 비밀 약속을 해 두었다.
이때 부산 일군헌병대에서는 의령에 의거의 징조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일 헌병 7명을 급파하였으나 단서를 잡지 못하고 철수하였다. 이 사실은 주동 인물들이 얼마나 은밀한 가운데 거사를 물 샐틈 없이 추진시켜 갔고 또 대중들이 이들에게 얼마나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던가를 역역히 알려 주고 있다.
3월 14일 약정한 의령읍 장날은 닥쳐왔다. 아침부터 모여든 군중으로 읍 내외의 장터는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주동 인물들도 준비물을 품에 품고 장터로 잠입하였다.
오후 1시 구여순은 임시 가설된 장 복판 단상에 올라.
“일제의 기반을 벗어나 조국의 독립을 쟁취할 때는 왔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말자.”
라고 군중에게 열띤 호소를 하고, 남인섭(南仁燮)도 나라 없는 백성들의 서러움을 눈물로 호소하였다.
이어서 군중들에게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누어 주었다.
이때 구여순을 비롯한 주동 인물들은 태극기를 높이 들고 일제히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여기에 호응한 군중들의 만세 함성은 그야말로 천지를 진동시켰다.
이때 의령공립보통학교 학생을 주심으로 하는 약 3백 명의 군중이 다시 호응해 왔다.
군중은 약 3천 명[이군 기록에는 약 2천 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시장을 누비고 읍내를 일주하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한 후 경찰서 앞에 이르러 만세를 부르고 산회하였다.
다음 날인 15일 군중들은 비밀 연락에 따라 의령향교(宜寧鄕校) 앞으로 다시 모인 군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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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천 5백 명[일군 기록 약 1천 명]에 이르렀다. 남종혁(南宗赫)은 군중들에게
“조국의 독립과 2천만의 자유를 위하여 최후의 일각까지 최후의 1인까지 싸워야 한다.”
라고 역설하였다.
이어 군중은 부슬비가 내리는 가운데 유유히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들은 경찰서와 군청 앞에 이르러 더욱 큰소리로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기세를 올렸다.
한편 이화경(李華卿)·이원경(李源卿)·최숙자(崔淑子) 등이 이끄는 여자 단체도 궐기하였다.
즉 이들은 국기를 휘날리며 보통학교로 가 여교사 강순이(姜順伊)에게 운동에 참가 할 것을 종용하였다. 강순이는 즉시 여기에 호응하여 여성 시위대열에 뛰어들었다.
이날 이들 여성 시위대열의 만세시위는 군중들의 의기를 더욱 북돋우어 주었다. 또 이날 의령군청 직원인 안의인(安義人)·정봉균(鄭奉均)은 민족적 의분을 금치 못한 나머지 의거가 일어나자 시위대열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15일 만세시위가 끝난 후 일 군경이 몇 명 주동 인물을 검거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군중들은 의분을 금치 못한 나머지 오후 4시 다시 모이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이들 약 7백 명의 군중은 다시 경찰서로 몰려가 검거된 한 애국자를 석방하라고 요구하였다.
이때 마산 일군 포병대대 7~8명이 급파되어 와 이들이 경찰과 협력하여 군중들을 총검으로 위압 해산시키고 다시 주동 인물 10명을 검거하였다.
이때의 사실을 기록한 일군기록 가운데,
‘검거자 중에는 굴지(屈指)의 자산가 또는 군·면 서기 등이 있다.’
라고 한 것을 보면 이때의 주요한 주동 인물이 대부분 검거된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또 이때 이들을 검거할 때 이곳 경찰서 형사 박해종(朴海鍾)은 전일부터 행렬을 미행하여 주동 인물을 표시해 두었다가 이날 일 군경에 앞장서서 이들 주동 인물을 검거하는 천추에 지우지 못할 민족의 연적행위를 저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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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읍의 만세시위는 15일에 3회 일어난 데 이어 16일에도 계속되었으나 다시 진주로부터 일군의 응원부대가 와 이들 총검의 탄압으로 시위는 더 전진 확대할 수 없었다.
이러한 가운데 주동 인물은 속속 검거되어 갔다.
검거 인원은 1백 여 명에 달하였으나 이 가운데 30명이 형을 언도 받아 옥고를 치루었다.
즉 구여순(具汝淳)·최정학(崔正學)·정호권(鄭澔權)은 3년을, 여찬엽(余燦燁)은 2년을, 강제형(姜齊馨)은 1년 반을, 여재병(余在炳)·박지묵(朴枝穆)·전용선(田溶璿)·최병규(崔秉圭)는 1년을, 이태수(李泰秀)·남호섭(南灝燮)·전태만(田泰滿)·이억근(李億根)·정용식(鄭容軾)·노오용(盧五容)·안무상(安武商)은 10개월을, 박시강(朴時江)·김용호(金鎔浩)·정봉균(鄭奉均)·박판개(朴判介)·심상렬(沈相烈)·윤영만(尹永萬)·여익환(余益煥)·윤도식(尹道植)·박삼진(朴三晋)은 6개월을, 남성희(南盛熙)·정원익(鄭轅益)은 4개월을, 이시현(李時玹)·전학기(田學基)는 태(苔) 60을, 강남기(姜南基)는 2년 집행유예를 언도 받아 각각 진주·대구·서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의령읍 의거 때 여성으로 활약한 이화경(李華卿)·강순이(姜順伊)·이원경(李源卿)·최숙자 등도 검거되었다.
이화경은 일단 방면되었다가 구여순과의 관련문제를 재조사한다는 소식을 듣고 종적을 감추었다가 부형(父兄)의 주선으로 무사히 되었다.
강순이는 학교에서 파면되었고 이원경·최숙자는 진주형무소에서 미결로 오래도록 갇혀 있다가 방면되었다.
[구여순(具汝淳)의 항일투쟁]
구여순(具汝淳)은 호(號)를 일정(一丁)이라 하였는데, 1896년 의령군 의령면 동동(東洞)에서 태어낫다.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고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와 동지 최정학·이우식(李祐植)[조선어학회사건으로 함흥 감옥에서 2년 4개월 옥고를 겪음]·김봉연(金琫淵)·정용식(鄭容軾)·강제형(姜齊馨)·전용선(田溶璿)·최병규(崔秉圭) 등을 규합하여 의령읍 의거를 주재하였으므로, 검거되어 3년형을 언도 받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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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 마포형무소에 투옥되었다.
1922년 형기를 마치고 상해로 망명하고 그 후 무력에 의한 항일투쟁 기도하여 의열단을 가입하였다.
1924년 의열단의 일인요인암살계획(日人要人暗殺計劃)이 탄로되자 평양에서 검거되어 주동 인물로 최고형인 4년을 언도 받아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1928년 형기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와 체류하던 중 김용호(金鎔浩)의 애국심에 감동하여 다시 반제국(反帝國) 지방단부(地方團部)를 조치하여 위원이 되었다.
이후 지방 부호들을 만나 군자금 모집에 힘쓰는 한편 진주 지수면(智水面) 구재서(具再書) [구인회(具仁會)부친] 등으로부터 일화(日貨) 5천원을 받아 김구(金九)선생에게 전달하기도 하였다.
그후 중국·북경·천진(天津) 등지에서 독립운동에 종사하다가 귀국하여 다시 지방 동지들과 더불어 ‘고려구국동맹회(高麗救國同盟會)’라는 비밀단체를 조직하여 활약 중 해방을 맞이하여 1946년 진주 자택에서 향년 5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유족으로는 아들 철근(哲根)이 있거니와 실로 그는 일생을 그대로 조국독립을 위해 몸 바쳐 싸워온 애국투사였다.1)
2 부림면(富林面) 신반리(新反里)
의령읍 의거를 준비할 때 주동 인물 최정학(崔正學)은 동지를 규합하기 위해 이곳 부림면 산반리까지 와 이곳 동지 정주성(鄭周成)에게 등사한 독립선언서를 전달하였다.
정주성은 곧 이곳 동지 최한규(崔翰圭)·장용환(張容煥)·황상환(喚想煥) 등을 초청하여 이곳 의거를 협의한 끝에 3월 15일 신반리 장날을 거사일로 약정하고 거서의 준비를 서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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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무상(安武商)·전용선(田溶璿)·최병규(崔秉圭)판결문, 1919년 8월 19일 대구복심법원. 김정명, ≪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 I .p.371, 376. ≪고등경찰관계적록(高等警察關係摘錄)≫ [1936년 12월 경상남도 경찰부] p.11. 이용락, ≪3·1운동 실록(三一運動實錄)≫ pp.683~687. 변지섭, ≪경남독립운동소사≫(상)p.48~51,114~117. ≪조선소요사건상황(朝鮮騷擾事件)≫ 조선 일군 헌병대사령부,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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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주동 인물들은 인근 각지고 비밀공작을 전개하여 많은 동지를 포섭하였고 또 비밀리에 태극기도 많이 만들었다. 3월 15일 정오 의령읍 제2차 의거와 때를 같이하여 봉기하기 위해 주동 인물들은 준비된 태극기를 품에 품고 신반리 장털로 잠입하였다.
정오(正午)가 되자 많은 군중이 모여들었다.
주동 인물들은 장 복판에서 재빨리 태극기를 군중에게 나누어 준 후 대한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모인 장꾼은 일제히 여기에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어서 군중들의 열광적인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당황한 경찰은 황급히 출동하여 총검을 휘두르면서 군중을 야만적으로 탄압하여 해산시킨 후 주동 인물을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검거된 주동인물 정주성·황상환·최한규·장요환은 10개월형을, 김용구(金容九)는 6개월형을, 최영렬(崔永烈)은 태(苔) 90을, 박재선(朴載善)·박우백(朴又伯)은 태(苔) 60을 언도 받았다.
권희환(權羲煥)은 부림면 세천리의 대표(代表)로 신반리 의거에 참가 활약하다가 동지들과 더불어 검거되어 의경 경찰서에서 수일간 취조를 받던 중 경찰 박삼석(朴三石)이 몰래 그를 도망시켰다.
이는 3년 전에 박삼석이 권희환 집에서 고용살이 할 때 박을 야학 공부를 시켜 준 은혜를 잊지 못한 까닭이었다.
그 후 권희환은 도주하여 창원군 북면의 달천사(達天寺)에서 삭발 승려가 되었다고 한다.
정곡면(正谷面) 중교리(中橋里) 이동호(李東浩)는 신반리 의거에 참가하였다가 검거되어 6개월 형을 받고 복역중 고문 여독으로 병 보석되어 출옥 후 곧 사망하였다.2)
3 지정면(芝正面) 봉곡리(鳳谷里)시장
이곳 지정면 두곡리(杜谷里)에 사는 정호권(鄭澔權)은 3월 14일 감격적인 의령읍 의거에 참가하여 부푼 가슴을 안고 마을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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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변지섭, ≪경남독립운동소사≫ (상) PP.51~52. 이용락, ≪3·1운동 실록(三一運動實錄)≫p.688~6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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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곧 이곳의 동지들을 규합하여 이곳 면에서도 의거를 단행할 것을 협의하였다. 이리하여 이들 주동 인물들은 4월 16일 봉곡리시장 장날을 거사일로 약정하였다. 이들은 너무나 바빴다.
원근으로 다니면서 비밀리에 대중을 규합하는 한편 밤을 새워가면서 숨어서 태극기를 만들었다.
약정한 4월 16일 정호권 등 주동 인물은 태극기를 품에 품고 봉곡리시장으로 잠입하였다.
오후 1시 약 3백 명[판결문에는 약 1백 50명]의 군중이 모여 들었다. 태극기를 군중에게 나누어 준 후 정호권은 군중 앞에 나타나,
“파리강화회의에서 조선의 독립은 승인될 것이니 우리는 힘을 합하여 독립만세를 힘차게 부르자!”
고 외쳤다.
벽촌의 장이라 군중은 3백 명 정도에 불과하였으나 군중들의 애국투지는 높아만 갔다. 드디어 정호권이 태극기를 높이 들고 ‘대한 독립만세’를 고창하자 군중은 일제히 여기에 호응하였다. 만세의 함성은 군중에 비하여 너무나 높았다.
이를 제지 해산시키기 위해 의령 경찰서 중교(中橋)경찰관 주재소 경찰보 권종수(權宗洙)가 달려왔다. 노한 군중들은,
“저놈을 죽이라!”
고 외치면서 달려들자 겁을 집어먹은 경찰 권종수는 이웃 주막으로 숨어버렸다.
군중들은 다시 이곳으로 몰려와 방에 숨어 있는 경찰 권종수에게 뭇매를 가한 후 입고 있는 경찰복을 찢어 버렸다.
이때 지정면 면장이 와 만류하는 바람에 경찰은 겨우 도망쳤다.
이날 군중들은 계속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하였으나 늦게 급보를 받고 달려 온 일경에 해산당하고 주동 인물도 검거되었다.
이 가운데 봉곡리 시장 의거를 주도한 주동 인물 정호권은 그 후에 검거되어 혹심한 고문을 받았고, 이어서 5월 8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으로부터 2년형을 언도 받아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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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복심법원에 공소를 제기하였다.
대구복심법원에서는 보다 형량(刑量)이 가중되어 6월 5일 결국 3년형을 언도 받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었다.3)
4 상정면(上井面) 덕교리(德橋里)[지금 화정면(華井面)]
3월 중순으로 접어들면서 독립을 요구하는 민족의 함성은 더욱 높아만 갔다.
즉 이곳과 가까운 의령읍[3월 14,15,16일],부림면(富林面) 신바리(新反里)[3월 15일], 지정면(芝正面) 봉곡리(鳳谷里)[3월 16일], 창녕군(昌寧郡) 남지리(南旨里)[3월 18], 진주읍 합천군(陜川郡) 삼가(三嘉)[3월 18일]에서 연달아 의거가 일어났다.
이곳 상정면(上井面) 덕교리(德橋里)에도 이러한 민족의 분에 넘친 감격적인 소식은 시시각각으로 들려 왔다.
이곳 덕교리 애국인사들도 이러한 소식들 가만히 듣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드디어 이곳 유지인 조균구(曺均九)·조두환(曺斗煥)·김구현(金九鉉)·조균수(曹均壽)·김응현(金應鉉)·박용주(朴龍周) 등은 각지 의거에 발맞추어 이 마을에서도 독립 의거에 기치를 높이 들어야 한다는데 의견을 모으고 모의를 거듭하면서 대소(大小)의 태극기를 만드는 등 준비를 서둘렀다.
3월 20일 밤 이들 주동 인물을 비롯한 약 30명의 애국 동민들은 준비된 태극기를 들고 덕교리 동구(洞口)에 모였다.
이들은 큰 태극기를 높이 세우고 주동 인물들의 선창에 따라 각자 가진 태극기를 들어 독립만세를 외친 후 태극기를 앞세우고 만세를 부르면서 상정면사무소로 몰려갔다. 면장 강재언(姜載彦)을 끌어내어 앞세우고 약 2시간에 걸쳐 이곳 면사무소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한 후 해산하였다.
그 후 이곳 주동 인물인 조균구(曺均九)·조두환(曺斗煥)·김구현(金九鉉)·조균수(曹均壽)·김응현(金應鉉)·박용주(朴龍周) 등은 경찰에 검거되어 6월 21일 부산지방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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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정호권(鄭澔權) 판결문) 1919년 6월 5일 대구복심법원. 조선 일군 헌병대 사령부, ≪조선소요사건상황(朝鮮騷擾事件狀況)≫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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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지청에서 각각 8개월 형을 받았다. 이 가운데 조균구(曺均九)·조두환(曺斗煥)·김구현(金九鉉) 등은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7월 1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 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이들 주동 인물들은 진주 또는 대구형무소에서 8개월의 옥고를 치루었다.
덕교리 의거는 순수한 농민들의 자주적 의식 아래 준비 단행된 것으로, 이를 통하여 우리는 당시 농민들의 항일저항의식이 앙양되어 가는 모습을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4)
상술(上述)한 이외 의령군내에서는 3월 17일 칠곡면에서 만세시위가 있었으나6)참고할 사료가 없다.
제4절 산청군(山淸郡)
1 산청읍(山淸邑)
산청군 읍내리에 거주하는 오명진(吾明鎭)은 동경 유학생으로, 3·1운동이 일어나자 조국독립을 위해 몸 바칠 것을 결심하고 귀국하여 ‘독립선언서’를 구두 창 밑에 숨겨 산청(山淸)으로 돌아왔다
오명진은 곧 이곳 애국유지 민영길(閔泳吉)·신영희(申永熙)·오원탁(吳元卓)·최오룡(崔五龍)·신창훈(愼昌勳)·신몽상(申夢相) 등을 만나 독립의거를 역설하였다.
3월 18일 오후 5시 이들은 산청군 산청면 새동(塞洞) 수계정(修稧亭)에서 비밀 회합을 갖고,
“독일과 같은 군국주의로서는 전쟁의 참화를 초래케 하는 것이므로 군국주의를 타파하고 불완전한 세계의 조직을 개조하여 정의인도(正義人道)에 기반한 새 세계를 조직하기 위해 미국 대통령 월슨이 14개조를 선언하여 파리강화회의에 제안하였던바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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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조균구(曺均九) 외 2인의 판결문, 1919년 7월 10일 대구복심법원.
5) 조선 일군 헌병대사령부, ≪조선소요사건상황(朝鮮騷擾事件狀況≫ p.106. 1936년 12월 경상남도 경찰부, ≪고등경찰관계 적록(高等警察關係摘錄)≫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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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국이 이를 승인하고 이 14개조가 골자(骨子)가 되어 국제 연합 문제가 일어나 세계를 개조하게 되어 있으므로 세계 각 민족을 정치상으로 해방하고 소위 민족 자결주의를 고창 한 것이므로 한민족도 이 민족 자결주의에 따라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
라는 결의를 한 후 서로가 독립운동에 생사를 같이 할 것을 맹세하여 결사대(決死隊)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이들 주동 인물들은 산청읍의 의거를 3월 22일 장날에 단행하기로 약정하고 그 준비를 서둘렀다.
신창훈(愼昌勳)과 신몽상(申夢相)은 산청면사무소의 등사판을 신영희(申永熙) 집으로 가져와 2일간의 작업 끝에 ‘독립선언서’·‘결의서’ 및 태극기 약 2천 매[일경 기록에는 1천 5백 매]를 등사 인쇄하였다.
이와 아울러 이들 주동 인물들은 각면 각리(各里)로 동지를 규합하면서 의거일에 동원할 군중을 포섭하였다.
한편 이들은 밀의 끝에 산청군수 홍승균(洪承均)을 포섭하여 이때의 의거를 보다 대대적인 전군(全郡)의 의거로 확대 발전시키기 위해 사전에 독립선언서 1매를 홍에게 전달하였다.
주동 인물들은 철두철미하게 친일 군수였던 홍승균을 너무 과신(過信)하였다.
홍(洪)은 이 사실을 곧 당지 일군헌병대에 고발하였다. 이에 따라 3월 21일 오전 1시 신영희(申永熙)집을 일군 헌병이 수색하여 독립선언서 1천 매가 압수되고 신여의를 비롯하여 민영길(閔永吉) 등 결사를 맹세한 주동 인물들은 전원(全員)이 일군헌병대에 검거되었다. 그러나 도도히 흐르는 군중들의 항일 독립의 거센 물결은 막을 수 없었다.
예정된 3월 22일[음력 2월 21일]산청읍 장날 각 면 각 동리로부터 군중들은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정오경 군중의 만세의 함성은 물결치는 태극기 아래에서 이강산을 메아리쳐 갔다.
드디어 군중의 만세시위가 시장을 누비면서 전개되는 가운데 당지 일군 헌병과 진주 일군 수비대 수10명이 출동하여 평화시위 군중에게 총탄을 퍼부었다.
시위군중은 해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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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금서면(今西面) 덕촌리(德村里)의 민치방(閔致方)은 큰 태극기를 들고 선두에서 군중을 지휘하다가 일병이 총검으로 겨드랑을 찔러 그 후 평생 동안 팔을 못 쓰는 불구자가 되었고, 금서면(今西面) 사평리(沙坪里)의 박모(朴某)는 일군의 군도(軍刀)에 맞아 바른쪽 귀와 팔을 절단 당하였다.
맨손의 평화시위 군중에게 가한 일군의 만행은 도처에서 이러하였던 것이니 어떻게 민중의 항일 저항의식이 높아가지 않으리오!
결사를 맹세하고 거사를 서두르던 주동 인물들은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형의 언도를 받은 후 다시 공소를 제기하여 대구복심에서 각각 6개월 내지 8개월 형을 언도 받아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산창읍 의거는 처음 선진적인 애국자들에 의해 대규모적으로 의거가 준비되어 가다가 이것이 좌절되자 이곳 농민들이 그들의 뜻을 이어 자주 적으로 일어나 이를 수행하였던 것이다.1)
2 신동면(新等面) 단계리(丹溪里)와 단성면(丹城面) 성내리(城內里)
3·1운동 당시 이곳 산청군 신등면 평지리에 사는 김영숙(金永淑)은 원근에서 추앙을 받고 있는 45세의 덕망이 높은 한학자로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이후 해내외의 지사들과 비밀 연락을 가지면서 조국 광복에 노력해 오고 있었다.
고종이 승하하자 그는 인접 구삼가군(舊三嘉郡) 구평리(龜坪里)에 사는 동지인 윤병모(尹炳謨)를 찾아 고종 인산에 자기의 장남 상준(相峻)과 윤병모의 장남 규현(圭鉉)을 서울에 파송할 것을 상의하여 이들 둘이 상경하게 되었다.
김상준과 윤규현은 상경하여 3월 1일 중앙 의거에 참가한 후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아들 상준으로부터 감격적인 서울 3·1의거의 소식을 듣고 또 독립선언서를 손에 든 김영숙(金永淑)은 기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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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36년 12월 경상남도 경찰부, ≪고등경찰관계 적록(高等警察關係摘錄) pp.21~22. 변지섭, [경남 독립운동소사≫ (상) pp.23~24. 이용락, ≪3·1운동 실록(3·1運動實錄)≫ pp.655~656. 조선 일군 헌병대 사령부, ≪조선소요사건상황(朝鮮騷擾事件狀況)≫ p.227. 이용락, ≪3·1운동 실록(三一運動實錄)≫ pp.655~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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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유림(儒林)에서는 파리 강화회의에 보낼 이른바 파리장서(巴里長書)의 연명운동을 일으키고 있는 중이었다.
김영숙은 세계의 이목을 고동케 하여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전 민족이 의거해야 된다고 하면서 파리장서의 연명운동을 일축하고 아들 상준과 더불어 의거를 서둘렀다. 김상준(金相峻)은 동지 김기갑(金基甲)·윤치현(尹致鉉) 등과 밀의하여 청소년을 총동원하기 위해 3월 18일 밤 부락에 통지하였다.
다음날 아침 그들은 이들 청소년들을 이끌고 신등면 단계리시장으로 가 이곳 군중과 합세하여 독립만세의 대대적인 시위를 전개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출발하려는 무렵 일 헌병이 달려와 이들 전원을 단계 일군헌병대로 압거(押去)하게 되었다. 끌려가는 이들이 독립만세를 고창하자 연도의 남녀노소가 또한 만세를 부르면서 이들을 뒤따랐다. 일군 헌병은 혼비백산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단계리 시장에 도착하자 일 헌병의 증원을 얻어 드디어 총검으로 군중을 난타하여 유혈의 참극이 벌어지는 가운데 5명을 검거하여 단계 일 헌병대에 구금하려 하였다.
이때 그들 동지 20여 명이 일제히 뛰어나와,
“우리는 생사를 같이 맹세한 동지이니 죽이려거든 같이 죽이고 방면하려거든 모두 방면하여라.”
고 고함을 지르면서 달려들었다. 일 헌병은 이들 일동을 1포승에 묶어 단계 일군헌병대로 압송한 후 김상준·김기갑·김동민(金棟玟)·윤치현(尹致鉉)·정현숙(鄭鉉淑) 등은 유치장에 구금하고 나머지는 인근 인가에 연금하였다.
김영숙(金永淑)·정태륜(鄭泰侖)·김상호(金相浩)·권숙린(權肅麟)·김선림(金善林)·김상문(金相文)을 비롯한 9명은 밀의한 끝에 3월 20일 단계리시장과 3월 21일 [음력 2월 20일] 단성면 성내리시장 장날에 재의거(再義擧)할 것을 약정한 후 그 준비를 서둘렀다.
먼저 이들은 정태륜(鄭泰侖)이 만든,
“이에 앞서 인산(因山) 때 독립의 설(設)이 기북간(畿北間)에 창기(唱起)된 후 우리와 같은 생각를 가진 자들은 발분대호(發憤大呼)하지 않는 자가 없고 동성상응(同聲相應)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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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으나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뒤떨어질까 두렵다.
대개 이는 아국(我國)의 의성(義聲)으로써 천하만국에 달하려고 하는 것이다.······”라는 내용으로 된 격문과 독립선언서 및 대한 독립만세라고 대서(大書)한 기를 만들어 3월 18일 야음을 틈타 분단 책임을 맡아 단게리·평지리(坪地里)·사정리(射亭里)·도산면 하정리(下丁里)단성면 단성 일 헌병분견대 부근 요소에 붙여 대중의 분기(憤起)를 촉구하였다.
이리하여 약정한 3월 20일 오후 2시 단계리시장에 모인 6백~7백 명의 군중과 더불어 만세를 전개한 후 이들 주동 인물들은 큰 태극기를 앞세우고 군중과 더불어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단성면 성내리시장으로 향하니 연도의 군중들이 참가하여 무려 수천 명에 달하였다. 정태륜(鄭泰侖)은 군중들에게,
“조선인이 모두 현시의 학정에 비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구한국정부(舊韓國政府)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독립만세를 부르는 것이니 우리는 다같이 끝까지 독립 만세시위를 그치지 말아야 한다.”
라고 비장한 각오를 호소하였다.
일 헌병오장(憲兵伍長) 대평(大平)이란 자는 이 같은 사태 진전에 놀라 급히 자전거로 일군 헌병대로 달려가 먼저 구금한 김상준 등 5명을 석방하고 김영숙·정태륜 등에게 요청하여 군중의 해산을 청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이를 수긍하지 않았다. 군중들은 단성읍 성 내외를 누비면서 밤이 깊도록 시위를 계속하였다.
이때 거창 일 헌병분견대원 20~30명과 진주 일군수비대 40~50명이 들연 출동하여 시위군중을 습격하고 닥치는 대로 검거하여 헌병 주재소 넓은 뜰에 계수(繫囚)하였다.
그날 밤을 지내고 다음 날은 단성면 성내리 장날로 이날 아침 거창 일 헌병 분견대장은 계수(繫囚)된 군중들에게,
“남의 유혹에 빠져 시위에 참가한 자는 손을 들라! 집으로 돌려보내겠다.”
고 하자 손을 드는 군중이 나왔다.
김상호(金相浩)는 분연히 일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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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적이 우리 나라에 강요하여 합방조약을 맺을 때 10년 후에 독립권을 반환한다 하더니 이 맹약을 위배하고 오히려 고종 황제를 독살하였으니 우리의 불공대천지원수(不共戴天之怨讐)라. 제군은 수적(讐敵)에게 애걸하니 그 어찌 그렇게도 비겁한가!” 라고 꾸짖고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이날은 장날이라 동서남북으로부터 많은 장꾼이 모여들었다.
오후 1시 약 1천여 명[일군 기록에는 약 8백 명]의군중이 모여들었다.
군중들은 태극기에 ‘독립만세’라고 대서특필한 기를 앞세우고 시위로 들어갔다.
일 헌병 오장이 지휘하는 15명의 일 헌병과 보조원은 군중 시위대열을 단성공립보통학교 앞 3거리에서 제지하려 하였으나 노한 군중은 일 헌병의 병기를 탈취한 후 돌을 들고 헌병 주재소로 몰려들었다. 일 헌병은 김영숙(金永淑)·정태륜(鄭泰侖) 등 주동 인물 6명을 구금하였다.
군중들은 그 곳에서 교섭위원을 뽑아 주동 인물 석방을 요구토록 하였다.
일 헌병은 군중이 해산하면 석방하겠다고 하고 교섭위원은 석방하면 해산하겠다고 맞서 다투는 가운데 애국군중은 더욱 모여들어 돌과 곤봉을 든 군중들과 일 헌병들과의 사이에는 일촉직발(一觸直發)의 위기가 감돌았다.
이때 야만적인 무력만을 능사로 알던 일 헌병들은 군중들에게 일제히 사격을 가하였다.
맨주먹의 군중들은 몸을 피하며 사산하기 시작하였다.
전용수(全龍壽)는 총탄에 맞아 피를 흘리면서도 만세를 부르다가 기진하여 객사 기둥을 안고 쓰러졌으며 정문수(鄭文秀)는 일 헌병 총대에 맞아 쓰러져 죽어 가면서 일제와 일 헌병을 꾸짖었다.
군중이 해산한 후에도 일 헌병들은 거리 요소요소를 점거하고 왕래하는 사람을 불문곡절하고 난타 국문(亂打鞠問)하니 밤이 멀었는데도 사람들의 그림자가 끊어지고 말았다.
이 의거에서 피살된 순국자와 부상자는 다음과 같다.
①순국자(殉國者)(11명)
정문수(鄭文秀)·주금(朱金)·정용수(鄭龍壽)·서윤홍(徐允洪)·강해수(姜海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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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주(李鐵柱)·김천석(金千錫)·주쇠이(朱釗伊)·김덕천(金德天)·박권세(朴權世)
② 부상자(負傷者) (7명)
강문체(姜文替)·정개이(鄭介伊)·송말준(宋末俊)·김선명(金善明)·박우개(朴又介)·이병덕(李炳悳)·이태좌(李台佐)
한편 이때의 애국 군중의 사상자 수를 일본 군경 기록에는 6~7명으로 기록해 놓고 있는 것은 그들의 죄악을 은폐하려는 더 한 층의 가증스러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곳 의거에서 형을 받은 사람은 24명에 달하거니와, 이들 가운데 김영숙(金永淑)·권숙린(權肅麟)·김상호(金相浩)·정태륜(鄭泰侖)·고학조(高學祚)·이진관(李鎭寬)이호남(李好男)·이병희(李炳熙)·최태림(崔泰林)·최보림(催普林)·이춘도(李春道)·정개이(鄭介伊)·김선명(金善明)·서기호(徐基鎬)·박우개(朴又介)·강성길(姜聖吉)·이병덕(李炳悳)·김우준(金又俊)·최덕인(催德仁)·박우준(朴又俊)·정현숙(鄭鉉淑) 등은 각각 6개월 내지 2년 6개월의 형을 언도 받아 진주 또는 대구형무소에 투옥되고, 김선림(金善林)·김상문(金相文)·권재국(권재국)은 태형 90을 받았다.

同來三百里 相守二旬餘
莫歎拘籠鳥 將爲放海魚
聊看成事日 豈無立身初
縋綣無限意 加飱保起居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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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정태륜(鄭泰侖)·김영숙(金永淑)·김상호(金相浩) 판결문 [1919년 5월 31일 대구복심법원. 변지섭, ≪경남독립운동소사≫ (상) pp17~22·이용락, ≪3·1운동 실록(三一運動實錄)≫pp.657~661. ≪고등경찰관계적록(高等警察關係摘錄)≫ 1936년 12월 경상남도 경찰부, p.22. 김정명, ≪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 I pp.406~407, 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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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온 3백리에 같이 살기 2순이어라
갇힌 것을 한탄말라. 곧 해어(海魚)같이 풀리리라.
문득 일이 이루어질 때는 어찌 출세하지 않겠는가?
정다운 마음 끝 없으니 더욱 몸조심 하소서.

3 기타 지역
상술한 의거 이외에 산청군내에 있어서는 4월 3일에 시천면(矢川面) 천평리(川坪里)·동리(東里),삼장면(三壯面) 대포리에서 각각 만세시위가 있었으나3)전하는 사료가 없다.
제5절 합천군(陜川郡)
1 삼가면(三嘉面) 삼가시장과 상백면(上栢面)
3·1운동 당시 서울에 있던 정현상(鄭鉉相)은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고향인 상백면으로 내려와 백형(伯兄)인 정현하(鄭鉉夏)에게 독립선언서를 전하고 상경하였다.
한편 이때 이곳 이기복(李起馥)도 이원영(李愿永)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구하여 왔다.
이리하여 쌍방이 서로 모르고 각기 극비리(極秘裡)에 면내의 유지를 규합하여 의거를 서둘렀다. 이때 쌍방으로부터 밀탁(密託)을 받은 사람이 정연표(鄭演彪)였다.
그는 곧 2사람에게 통고하여 운동을 일원화(一元化)시키기로 의논한 후 유지들을 모아 의거를 협의하였다.
이들이 협의하여 결정한 거사의 계획은,
첫째, 거사일을 3월 18일 삼가 장날로 하고, 둘째는 큰 태극기는 각동에 1씩, 손에 들 태극기는 각자가 마련 지참하고, 세째로 집합 장소는 읍으로 가는 중도의 지정된 장소로 한다는 것이었다.
_______________
3) 조선 일군 헌병대 사령부, ≪조선소요사건상황(朝鮮騷擾事件狀況)≫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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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한 3월 18일 삼가 장날은 닥쳐왔다. 지정된 장소에는 인파가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오전 11시 이들은 장꾼을 가장하여 삼가 시장으로 잠입해 들어갔다. 오후 5시 시장에는 3백~4백 명[일경 기록 2백 명]의 군중이 모여 들었다.
정 연표는 시장 전면 중앙 언덕 위에서 태극기를 높이 들고 ‘대한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모여든 군중은 숨겨 온 태극기를 일제히 높이 들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이들 군중들은 큰 태극기를 앞세우고 시장을 누비면서 독립시위를 전개한 후 이곳 경찰관 주재소를 포위하고 대한 독립만세를 연호 고창하자 겁을 집어먹은 경찰은 위압에 눌려 어찌할 줄을 몰랐다.
이때 합천경찰서 경찰들이 그곳 일본인 재향군인들을 대동하고 달려와 이곳 주재소 경찰들과 힘을 합하여 주동 인물 정연표 외 수 10명을 지목 검거하고 나머지 군중들을 강제로 해산시키니 때는 오후 8시였다.
이날 밤 경찰은 검거한 수10명을 개별적으로 취조한 후 주동 인물 6명을 구금하고 그 외는 방면하였다.
주동 인물 정연표는 취조 일인 경관에게,
“너희 나라는 2천 5백여 년의 역사국으로 4천여 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 나라 문화를 배워 갔거늘 어찌하여 그 은혜를 망각하고 침탐하느뇨! 너희들은 불공대천의 원수라, 우리는 조국을 위하여 의거함이니 죽음인들 무엇이 두렵겠는가?”
라고 크게 질책하고 입을 굳게 닫고 말을 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상백면민이 일치단결하여 삼가시장에서 거의한 5일 후인 3월 23일 그들은 다시 상백면내에서 거의하였다.
이곳에 사는 6순의 노인인 공사겸(孔士謙)은 정원규(鄭元圭)·진택현(陳宅賢)·오영근(吳永根)·정치규(鄭致圭) 등과 더불어 약 4천 명[도장관 기록에는 약 3천 명]군중들을 대동하여 상백면 사무소 부근 일대를 누비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여 크게 위세를 떨치자 이 의거에 참가했던 상백면 서기 최영기(崔永基)와 변용규(卞容圭)는 민족적 의분을 참지 못하여 상백면 사무소에 방화하여 사오과 문부를 전소시켜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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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이들 약 4천 명의 군중은 약 10리 떨어진 삼가읍 시장으로 몰려가면서 도중 2본의 전주를 파괴하여 통신을 차단하고 삼가읍 시장에서 가회면민과 더불어 크게 활약하였다. [3월 23일 각 면민에 의한 삼가 의거는 후술]
노인 공사겸은 이날 삼가읍 시장 의거에서 순국하였다.
이곳 의거의 주동 인물로 검거된 정연표[일명 방직(邦直)]는 1년 6개월 형을, 정각규는 6개월형을, 공민호(孔敏鎬)는 6개월 형을 받아 각각 서울 또는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다.1)
2 합천읍(陜川邑)
고종 인산에 참예하기 위해 상경한 이곳 강홍렬(姜弘烈)은 서울 3·1의거에 참가하고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온 후 이를 비밀리에 합천 전군(全郡)에 전달하였다.
이에 합천면의 유지 주경천(朱擎天)은 민족적인 의분을 참을 길이 없어 대양면 대목리 심재기(沈載祺)·심진환(沈瑨煥)·심재인(沈載仁) 등 12동지와 밀의를 거듭한 후 거사일을 3월 19일 함천읍 장날로 약정하고 모든 준비를 서둘렀다.
3월 19일 이들 주동 인물들은 준비된 태극기를 갖고 합천읍으로 잠입하였다.
오후 4시 장꾼이 가장 많이 모여 들었을 때 이들 주동 인물들은 장복판에서 태극기를 군중에게 나누어 주고 소리높이 대한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약 5백 명[일군 기록 3백 명]의 군중이 일제히 여기에 호응하였다. 의분에 넘친 군중의 함성은 고요한 이곳 합천읍의 거리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이어서 주동 인물을 선두로 태극기를 앞세운 군중 시위대열은 시장 거리를 누비면서 노한 사자와 같이 독립만세를 연호 고창하였다.
이때 당지 경찰들이 총출동하여 심재기 외 16명을 검거하고 남은 군중은 해산하였다.
다음 날인 3월 20일, 분을 참지 못한 대양면민은 약속한 장소인 마정 부락으로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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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변지섭 ≪경남독립운동소사≫(상) pp.40~42. 이용락, ≪3·1운동 실록≫ pp.674~675. ≪고등경찰관계 적록≫ 1936년 12월 경상남도 경찰부, p.24. 김정명, ≪조선독립운동≫ Ip396, 404 1919년 3월 23일 경상남도 장관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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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희집한 군중들이 합천 읍내로 몰려가려 할 때 심맹권(沈孟權)[또는 재현(載現)]은,
“우리가 종시일관 뜻을 같이 하여 의거로써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결사대를 조직하는 것이 제일 긴요한 일이니 자원자는 나오라!”
고 외쳤다.
여기에 응하여 손득룡(孫得龍)[또는 용이(龍伊)]·이용선(李龍善)·김영기(金永騏)·추용만(秋鏞滿)·이상우(李相宇)·배상룡(裵祥龍)외 5명이 자진해서 나왔다.
심맹권(沈孟權)을 비롯한 이들 12명은 곧 결사대를 조직한 후 소기의 목적 달성을 위해 죽음을 같이 할 것을 서로 엄숙히 서약하였다. 시위 군중이 결사대를 선두로 읍내 광장에 이르렀을 때 약속에 따라 각 면으로부터 참집한 군중이 기다리고 있어 이들과 합세하였다. 김영기(金永騏)는 군중을 향하여,
“나라 잃은 백성은 사람 아닌 닭과 개 같음”을 역설하고
“조국 독립을 위하여 최후의 1인, 최후의 1각까지 싸워야 한다.”
는 것을 눈물로써 호소하였다.
때는 오후 7시 약 4백~5백 명의 군중은 결사대를 선두로 높이 든 태극기를 뒤따라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읍내 거리를 시위한 후 이곳 경찰서로 몰려가 경찰서를 포위하고 소리높이 독립만세를 외쳤다. 서장 이하 경찰이 나와 해산을 종용했으나 군중들은 이를 일축하였다. 결사대원 김영기(金永騏)는 군중을 대표하여 19일 구금한 심재기 외 16명을 즉시 석방하라고 강력히 요구하였다.
서장은 군중이 먼저 해산하면 석방하겠다고 하면서 고자세로 군중을 위압하려 하였다. 격분한 군중은 만세를 고창하면서 더욱 닦아서 밀고 들어갔다. 드디어 경찰이 공포를 발사하였다.
그러나 군중은 후퇴하지 않았다.
결사대원 추용만(秋鏞滿)은 분함을 이기지 못한 끝에 태극기를 단 대나무 장대로 서장과 순사 5~6명의 머리를 후려갈기고 먼저 문책을 넘어 앞으로 돌진해 갔다. 군중들은 투석으로 이들과 맞서, 또 군중 가운데는 결사대원 추용만의 뒤를 따라 도끼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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낫을 들고 문책을 넘어 서(署)로 육박해 들어갔다. 이때 이들이 일제히 발포하여 김영기(金永騏) 등 4명이 즉사하고 11명이 부상을 입었다.
군주들이 몸을 피하여 해산하자 이들은 주동 인물을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피살된 순국자와 부상자는 다음과 같다.
① 순국자(殉國者) 4명
김영기(金永騏)·추용만(秋鏞滿)·김호수(金浩洙)[일명 호준(浩俊)]·강시만(姜時晩)
② 부상자(負傷者) 11명
이용선(李龍善)·손득룡(孫得龍)[또는 용이(龍伊)]·심재기(沈載祺)외 8명이고 의거의 주동인물로 검거된 심맹권(沈孟權)[또는 재현(載現)]·손득롱(孫得龍)·이용선(李龍善)·이용수(李龍守)·배상기(裵祥祺)·감상무(姜相武) 등은 각각 2년형을 언도 받고 주경천(朱擎天) 외 15명은 각각 1주일간의 구류처분을 받았다.2)
3 대병면(大幷面) 창리(倉里)
대병면 장단기(長湍里)에 사는 정태섭(鄭泰燮)은 서울로부터 독립선언서 5백매를 가져 와 이를 극비밀리에 합천군내 각 면에 배부하여 애국 민중들을 독립의거로 궐기케 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3월 초순 이곳 대병면에 사는 임상종(林尙鍾)도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감추어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임상종은 곧 지방 유지를 초청하여 독립선언서를 보이고 거사를 협의하였다.
이에 따라 권영두(權寧斗)·권중박(權重璞)·정시권(鄭時權)·유인수(柳仁秀)·권양희(權良熙)·송헌기(宋憲基) 등은 이에 공명하여 밀의를 거듭한 후 거사일을 3월 20일 창리 장날로 약정하고 준비를 서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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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용선(李龍善) 외 2인의 판결문, 1919년 6월 2일 대구복심법원. 변지섭, ≪경남독립운동소사≫(상) pp.35~37. 이용락, ≪3·1운동 실록≫ pp.668~670. ≪고등경찰관계적록≫ 1936년 12월 경상남도 경찰부 pp.24~25. 김정명, ≪조선독립운동≫ I. p.404, pp.406~407. ≪조선소요사건상황≫ 조선 일군 헌병대사령부,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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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역평리(嶧坪里)에서 선언서를 등사하고 대소의 태극기를 작성하는 한편 각 마을을 순방하면서 대중 동원을 위한 공작을 서둘렀다.
3월 20일 창리 장날은 닥쳐왔다. 주동 인물들의 비밀공작에 따라 다른 장날과는 달리 이날은 아침부터 많은 군중들이 장으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주동 인물들은 거사에 필요한 준비물을 몰래 감추어 장으로 잠입하였다.
오후 1시 장에 모인 군중은 약 4천 명[일군 기록 약 3천 명]으로 늘어났다.
권영두(權寧斗)는 군중들을 향하여 조국 독립의 새아침이 밝아 올 것이니 우리는 합심 궐기하여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선언서·태극기가 배부되고 큰 태극기를 높이 세운 가운데 주동 인물들의 선창에 따라 독립 만세의 우렁찬 함성이 폭발하였다. 군중들의 기세는 충천해 갔다.
이어 주동 인물을 선두로 만세시위로 들어갔다.
군중시위대는 시장을 누비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한 후 창리경찰관 주재소로 몰려 가 이를 포위하고 소내로 돌입해 들어갔다.
이때 선두로 들어가는 이병추(李秉樞)에게 일경이 총을 겨누었다. 이병추는 가슴을 풀어 헤치고 다가서면서,
“자! 쏴 봐라!”
고 외치면서 달려들자 순사 부장이 총을 발사했다.
총탄이 이병추의 귓가를 관통하여 유혈이 낭자하였다.
이를 목격한 군중은 노한 사자같이 소내로 밀어닥쳐 일인 경찰부장과 경찰을 반죽음의 실신상태로 때려 눕힌 후 주재소 건물 기구 전부를 파괴하고 문서류를 전부 소각해 버렸다.
분을 참지 못하는 군중은 다시 주재소로부터 100미터 떨어진 대병면사무소로 달려가 그곳 건물 기구를 파괴한 후 서류·부책 전부를 소각하였다.
이와 같이 농민 분노가 절정에 달해 가고 있었을 때 자동차로 달려 온 수10명의 일군이 총을 난사하면서 총검을 휘두르며 들이 닥쳤다. 이에 군중은 헤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군중이 헤어지는 틈을 타 이들은 닥치는 대로 군종을 검거하여 이날 54명이 검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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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가운데 권영두·임상종·권중박·송헌기·유인수는 각각 1년 6개월 내지 3년형을 언도 받아 진주와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주동 인물 가운데 정시권과 권양희는 이때 종적을 감추어 옥고를 면하였다.
이 대병면 창리 의거는 당시 농민들의 반일감정을 그대로 발휘한 큰 저항으로 이에 대하여 당시[1919년 6월]조선 일군 헌병대사령부 복도에도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고 있다.
‘특히 창리에 있어서의 소요[우리의 의거를 말함 : 필자 주]는 가장 난폭 낭자를 극하여 주재소를 파괴하고 서류 등을 소훼(燒毁)하여 본도 소요 중 함안·군북의 소요와 더불어 격렬 흉포한 소요이다.3)
4 초계면(草溪面) 초계리
이곳 초계면 초계리는 옛날 군(郡)이 있을 때 군 소재지였던 곳으로 지세가 3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근근히 동방평지로 교통이 열려 왕래하는 데 불편하다.
3·1운동 당시 초계시장은 매달 음역 5일, 10일에 열리고 있었다.
이곳 초계면에도 3·1운동의 감격적 소식은 끊임없이 들려왔다.
초계면 무릉리(武陵里)에 사는 유지 이원화(李源華)·전하선(全夏善)·성만영(成萬永)·김덕명(金德明) 등은 전국 의거에 발맞추어 이곳 초계면에서도 의거를 단행할 것을 모의하여 거사일을 3월 21일 초계리시장 장날로 약정하고 동지를 규합하면서 모든 준비를 서둘렀다.
즉 이들은 이날의 대중 동원의 공작과 아울러 독립선언서·태극기 등을 만들어 물샐 틈 없는 준비를 갖추어 갔다.
3월 21일 장날 이들 주동 인물들은 거의 준비물을 갖추어 가지고 시장으로 잠입하였다.
오후 1시가 되자 장꾼은 약4천 명[일 군경 기록에는 3천 명]으로 불어났다. 주동 인물 이원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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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919년 4월 7일 경상남도 장관 보고. 변지섭, ≪경남독립운동소사≫(상) pp.39~40. 이용락, ≪3·1운동 실록≫ pp.673~674. ≪고등경찰관계적록≫ 1936년 12월 경상남도 경찰부, p.25 김정명, ≪조선독립운동≫ I . pp.406~407. ≪조선소요사건상황≫ 조선 일군 헌병대사령부,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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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선·성만영·김덕명·구재범(具在範)·권국서(權國瑞) 등은 준비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재빨리 군중들에게 나누어 준 후 태극기를 높이 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선창하였다.
군중들은 일제히 여기에 호응하여 독립만세의 함상은 초계리 3면의 산을 진동케 하였다. 이어 주동 인물들을 선두로 하는 군중시위대는 시장을 누비면서 목이 터지도록 독립만세를 불렀다. 군중들의 사기(士氣)는 충천해 갔다.
한편 군중들은 탄압세력인 일군과의 연락을 염려하여 약 3백 명[일경 기록에는 약 2백 70여 명]의 청년 주동대원은 초계 우편소를 습격하여 곤봉 등으로 건물과 기물을 완전 파괴한 후 초계 주재소로 몰려갔다.
이들은 주재소를 포위하여 투석과 곤봉으로 유리창 등을 산산히 파괴하였다. 경찰이 위협의 공포를 발사하였으나 군중은 물러서려 하지 않고 더욱 격분하여 경찰 2명을 때려 눕혀 중상을 입혔다.
이러한 때 합천 경찰서로부터 일군 경찰의 응원병이 달려와 당지 경찰과 합세하여 총을 발사하면서 군중 속으로 뛰어들어 총검을 휘둘렀다. 이때 김장배(金長培) 외 1명은 적탄에 명중하여 현장에서 쓰러져 순국하고, 군중을 지휘하던 이원탁(李源鐸)은 다리에 총탄이 관통하여 절골되어 종신불구가 되었다.
그리고 권국서(權國瑞)는 돌진하는 일 헌병의 총검에 중자상(重刺傷)을 입었다.
이 외 애국 군중 가운데 8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 같은 일 군경들의 야만적인 총격으로 애국 군중은 오후 4시 일단 해산하였으나 군중들의 항일 저항의식은 보다 고조되어 가 재차 의거를 감행하려는 공기가 짙어갔다.


순국자(殉國者) 2명

김장배(金長培) 외 1인

부상자(負傷者) 10명

이원탁(李源鐸)·권국서(權國瑞) 외 8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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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 의거에서 검거된 주동 인물 이원화(李源華)·성만영(成萬永)·구재범(具在範)·김덕명(金德明)·정수조(鄭守祚)·정점시(鄭點是)·정판백(鄭判伯)·안주백(安周伯)·권국서(權國瑞)·이만용(李萬用)은 각각 1년 내지 3년의 형을 언도 받아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전하선(全夏善)과 변영관(卞榮瓘)은 처음부터 의거 모의에 참여하였으나 의거 후 종적을 감추어 옥고를 면하였다.
초계면 초계리 의거는 대병면 창리 의거와 더불어 농민대중들의 반일감정을 있는 대로 발휘한 것으로 당시[1919년 6월]조선 일군 헌병대사령부 보고에도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고 있다.
‘21일 초계면 초계리에 있어서의 소요도 전일 읍내 및 창리에 있어서의 본을 받아 악성을 띠고 주재소에 쇄도 포악하게 나와 주재소의 파괴 및 통신기관을 단절하고 폭행을 감행해 왔으나 응원대가 도착하여 발포 해산시켰다.4)
5 묘산면(妙山面)
묘산면 팔심리(八尋里)에는 윤(尹)씨들이 종족 부락(宗族部落)을 이루어 살고 있었다. 이곳 윤병석(尹炳奭)은 원근의 3·1운동의 소식을 전해 듣고 의분을 참지 못한 끝에 윤병은(尹炳殷)·윤병양(尹炳陽)등과 더불어 거사를 모의하여 주도(周到)한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각 면 동리 인사들을 규합하면서 거사의 준비를 서둘렀다. 3월 22일 약정한 거사일은 닥쳐왔다.
이날 도옥리(陶沃里) 부락민(部落民)도 합세하여 오전 11시 1백여 명[일경 기록 약 80명]이 모인 가운데 주동 인물들에 의해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이들의 선창에 따른 군중들의 독립만세의 함성은 이곳 산곡에 메아리쳐 갔다.
이어 이들은 묘산면 사무소로 몰려갔다. 이때 신원순(申元淳)·성경술(成敬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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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고등경찰관계적록≫ 1936년 12월 경상남도 경찰부,pp.25~26. 1919년 3월 21일, 22일. 경상남도 장관 보고. 이용락, ≪3·1운동실록≫ pp.679~680. 변지섭, ≪경남독립운동소사≫ pp.46~48.김정명, ≪조선독립운동≫ I. p.407. ≪조선소요사건상황≫ 조선 일군 헌병대 사령부,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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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군경과의 연락을 끊기 위해 연도의 전신주를 전달하였다.
면사무소 앞에 집합한 군중들은 ‘대한 독립만세’를 연호 고창하면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정보에 접한 합천읍 일군 헌병대와 이곳 주재소 경관들이 달려왔다. 이들은 맨주먹의 이들 평화 시위 군중들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시위대열을 해산되고 많은 사상자가 나오게 하였다. 이때 부상자는 얼마나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2명의 순국자는 다음과 같다.
순국자(殉國者) 2명
윤병하(尹炳夏)·윤병교(尹炳喬)
이곳 의거는 23일에도 일어나 위세를 떨쳤다.
한편 검거된 이곳 의거의 주동 인물 신원순(申元淳)은 2년형을, 윤병석(尹炳奭)은 1년 6개월 형을 받아 대구형무소에 투옥되고, 윤병은(尹炳殷)·윤병양(尹炳陽)은 각각 6개월 형을 받고 부산형무소에 투옥되었다.
특히 주동 인물 윤병석(尹炳奭)은 그들의 악독한 고문에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일경을 질책하기를,
“호표(虎豹)는 조아(爪牙)를 사랑하고, 공작(孔雀)은 꼬리를 사랑하고, 봉황(鳳凰)은 무늬를 사랑하며, 국가는 충의지인(忠義之人)을 사랑하거늘, 충의지인을 이와 같이 형욕(刑辱)하니 일본은 타일(他日)에 충의지인이 없어 패망할 날이 반드시 가까우리라. 내 너희들을 생각하니 가련하도다, 가련하도다!”
라고 하여 그들을 꾸짖었다.
장덕균(張德均)·한용홍(韓用鴻)·이우필(李禹弼) 3인은 1개월여의 고문으로 빈사상태가 되자 비로소 방면하였다.5)
6 가회(佳會)·상백(上栢)·삼가(三嘉) 면민의 삼가(三嘉) 의거
상술(上述)한 바와 같이 김상준(金相峻)과 윤규현(尹圭鉉)은 고종(高宗) 인산(因山)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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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변지섭, ≪조선독립운동소사≫(상) pp.37~39. ≪고등경찰관계적록≫ 1936년 12월 경상남도 경찰부, p.26. 이용락, ≪3·1운동 실록≫ pp.671~672. ≪조선소요사건상황≫ 조선 일군 헌병대사령부,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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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예(參詣)하기 위해 상경하였다가 서울 3·1운동에 참가하고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왔다.[제4절 산청군 2.신등면 단계 시장과 단성면 성내리 시장참조]
윤규현은 그로부터 민족적 거사를 이 고장에서도 단행하기 위해 동지를 규합해갔다.
그는 평소의 친구인 한필동(韓弼東)·허동규(許東奎)·한식동(韓湜東)·윤구현(尹求鉉)·윤승현(尹承鉉)·허장(許鏘) 등과 더불어 각면의 동지를 규합하여 면내 각 동리의 대중 동원의 공작을 서둘렀다. 각지의 의거로 일 군경의 감시가 더욱 삼엄해 가는 가운데 추진해야 하는 이러한 공작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러한 때 공작 교섭의 선두에 서서 눈부신 활약을 한 동지가 김홍석(金洪錫)·정현하(鄭鉉夏)·윤사언(尹士彦)이었다. 이리하여 이들 주동 인물들은 비밀리에 가회(佳會)·상백(上栢)·삼가면(三嘉面) 등 각면의 공작을 끝마치고 거사일인 3월 23일 각면의 동지들로 하여금 준비를 갖추어 삼가 시장으로 모이도록 하였다.
이날 전술한 바와 같이 쌍백면에서 약 4천 명의 군중이 봉기하여 그 곳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여 면사무소를 불태운 후 통신을 차단하기 위해 도중 전주 2본을 절단하면서 약 10리 되는 이곳 삼가시장으로 몰려왔다.
한편 가회 생비량면(生比良面) 등 연락을 받은 각지 군중들은 농악을 울리면서 속속 몰려와 희집한 군중은 1만 2, 3천 명에 달하였다.
삼가읍 각 관서와 그 외 요소요소에는 일 군경이 배치되어 있었으나, 군중은 위세 당당하게 모여들었다. 오후 3시 정금당(正衿堂) 앞 광장에서 주동 인물들에 의해 일본 규탄의 성토대회가 개최되었다.
김전의(金典醫)[이름 미상]·정방철(鄭邦哲)·김달희(金達熙)·임종봉(林鐘鳳) 등이 불을 뿜는 열변으로 일제의 침략상을 규탄하고 민족독립의 쟁취를 역설하였다.
한사람의 연설이 끝날 때마다 군중이 울리는 북과 징소리와 아울러 독립만세의 함성은 지축을 흔들었다. 마지막 연사인 임종봉은 정금당 높은 계단 위에 큰 태극기를 들고 나타나 나라 없는 노예의 서러움을 호소하였다. 이 때는 이미 일 헌병과 경찰들이 강연장을 포위하고 있었다.
임종봉의 민족혼을 깨우는 강연이 절정에 달했을 때 헌병은 이에게 충격을 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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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봉은 대퇴(大腿)에 총탄을 맞아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이를 본 군중들은 있던 분노가 일시에 폭발하였다. 군중들이 아우성을 치면서 일 군경에 달려들자 이들은 이곳 경찰주재소로 달아났다.
노한 군중들은 곤봉과 낫을 들고 경찰주재소와 우편소로 노도같이 몰려갔다.
일 군경은 일제히 이들에게 총격을 가하여 순식간에 애국 군중 13명이 현장에 쓰러져 즉사하고 30여 명이 부상으로 넘어졌다. 군중은 헤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때는 오후 5시 30분이었다.
유혈의 현장은 또한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제 만행의 폭로의 순간이요 의(義)에 강한 한국 민족의 피맺힌 서러움을 항거로서 세계에 알리는 비통의 순간이기도 하였다.
이때 이곳 주재소에 근무하던 주구 경찰 진창석(陳昌碩)·송경도(宋京道)가 이들 애국자들에게 가한 총격과 고문은 영원히 지우지 못할 오점으로 민족의 심판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곳 의거에서 순국자와 부상자는 다음과 같다.
① 순국자 13명
윤성(尹聖)[일명 소군(小君)]·배숙원(裵淑元)·권영규(權永奎)·이상현(李相賢)·박선칠(朴仙七)·공사겸(孔士謙)·이낙현(李洛鉉) 외(外) 6명
② 부상자 약 30명
김주익(金周益)·임종봉(林鍾鳳)[종신불구] 외 28명
한편 이곳 의거에서 검거된 주동 인물 가운데 김태현(金台鉉)은 3년형을 받고, 한동규(韓東奎)·윤규현(尹圭鉉)·허정모(許正模)·최용락(崔龍洛)·한필동(韓弼東)은 각각 8개월형을, 오영근(吳永根)·권중태(權重台)·진택현(陳宅賢)·정원규(鄭元圭)·정치옥(鄭致玉) 등도 6개월 이상의 형을 언도받아 이들은 모두 진주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이곳 의거에서 애국 군중의 희생이 상술한 바와 같이 피살 순국자 13명, 부상자 약 30명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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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하였는데도 불구하구 일 군경 보고서에는 사자(死者) 5명, 부상자 20명으로 줄여 그들의 만행을 은폐하고 있다.
이날 이곳 산가 의거에 대하여 당시[1919년 6월]조선 일군 헌병대사령부 보고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고 있다.
‘3월 2,3일 삼가면 금리 및 묘산면 소요[의거 : 필자 주] 가운데 특히 삼가면의 소요[의거 : 필자 주]는 악성으로 도중 백산[뒤에 상백면] 면사무소에 방화(放火)하고 상백[뒤에 상백면(上栢面)] 면사무소에 이르러 면장을 협박, 만세합창을 강요하고 전주를 넘어 뜨려 금리(錦里)에 쇄도주재소를 습격하였으므로 발포 해산시킴.’6)
7 야로면(冶爐面) 야로읍내(冶爐邑內) 시장
상술한 바와 같이 합천군내 곳곳에서 독립만세의 민족의 함성이 높아가고 또 일 군경의 만행으로 애국 군중의 희생이 늘어나자 이곳 야로면의 애국인사들도 그 의분을 참을 길이 없었다.
이곳 야로면 정태리(汀珆里)에 사는 박남권(朴湳權)은 면내 유지들과 모의를 거듭하면서 거사를 3월 28일 읍내 장날에 단행하기로 약정하고 필요한 모든 준비를 서둘렀다. 그는 많은 태극기와 아울러 그날 장복판에 높이 세울 ‘대한제국독립만세(大韓帝國獨立萬歲)’라고 대서특필한 기치도 만들었다.
이날 장꾼은 아침부터 속속 모여들었다. 박남권은 이날 자기 집 종이 제조장에서 일하는 문창성(文昌星)과 더불어 의거준비물을 가지고 읍내 시장으로 잠입하였다.
오후 3시 장꾼이 가장 많이 모여 들었다. 박남권은 준비해 온 태극기를 군중에게 나누어 준 후 문창성으로 하여금‘대한제국 독립만세’라고 쓴 기치를 장 복판에 높이 들게 한 후 ‘대한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장에 모인 군중들은 일제히 여기에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고창 연호하였다.
이어 군중시위에 들어가 시장을 누비면서 만세를 부를 때 당지 일 헌병이 출동하여 총검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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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919년 3월 23, 25일 경상남도 장관 보고. 김정명, ≪조선독립운동≫ I. p.420. 변지섭, ≪경남독립운동소사≫(상) pp.42~46. 이용락, ≪3·1운동실록≫ pp.676~678.≪고등경찰관계적록≫ 1936년 12월 경상남도 경찰부, p.24 ≪조선소요사건상황≫ 조선 일군 헌병대 사령부,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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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을 해산시키고 주동 인물 박남권·문창성을 검거하였다. 박남권·문창성은 혹독한 고문을 받은 후 5월 6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으로부터 각각 태형 90의 언도를 받았다.
이들은 여기에 불복하여 대구복심법원에공소를 제기하였으나 5월 28일 대구복심법원으로부터 박남권은 1년형을 언도 받아 대구형무소에 투옥되고 문창성은 태형 90을 언도 받았다.7)
8 해인사(海印寺)의 학생독립운동
3·1운동 당시 해인사는 대한 불교 30본산 중(本山中) 대본산(大本山)으로 대한 불교의 10분의 1이 넘는 교세를 자랑하고 있었다.
당시의 주지 이회광(李晦光)은 친일파로서 큰 세력을 누리고 있어 당시 해인사 경내에 설치된 해인보통학교 및 해인사 지방 학림 학생 3백 명과 승려들로부터 암암리에 반감을 사고 있었다. 이들은 기회만 오면 언제나 구국운동에 앞장설 것을 다짐하면서 실력을 양성하기 위해 학업에 힘썼다.
한편 일제는 해인사의 위험성을 감안하여 경철주재소를 이곳에 설치하고 경비전화까지 가설하였다.
그러나 3·1의거의 거센 물결은 이 깊은 산곡 해인사에까지 파급되지 않을 수 없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곳 해인사 학생들에게도 곧 중앙의 불교계 루우트를 통하여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었다.
서울에 유학중이던 도진호(都鎭浩)로부터 송복만(宋福晩)[또는 보우(奉瑀)]에게 김봉신(金奉信)으로부터 김봉률(金奉律)[또는 망태(望太)]에게, 김용기(金龍基)로부터 박근섭(朴根燮)에게, 최항형(崔恒亨)으로부터 최범술(崔凡述)에게 보내 온 여러 통의 독립선언서를 통하여 여러 학생들이 알게 되었다.
이 독립선언서를 보다 많이 인쇄하기 위해 학생 강재호(姜在鎬)·송복만(宋福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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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박남권(朴湳權)·문창성(文昌星) 판결문, 1919년 5월 28일 대구복심법원. 변지섭, ≪경남독립운동소사≫(상) p.37. 이용락, ≪3·1운동 실록≫ p.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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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은 삼엄한 감시망을 뚫고 2백여 리나 되는 대구를 밤낮으로 돌아다녀 3만여 매를 사 모았다.
이들은 해인사의 등사판과 학교 등사판을 훔쳐 내어 독립선언서 1만 매를 등사하였다 그리고 학생대표 30명은 뒷산 숲 속에서 비밀회합을 거듭하면서 독립운동 방안을 토의 결정하였다.
이리하여 이들은 지역별로 분담하여 3인씩의 대(隊)를 조직하고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가졌다.
각대는 맡은 지역에서 운동을 한 후 일정한 시간 일정한 장소에서 회합 보고하되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전체 내용은 모르도록 하였다.
그리고 각각 어느 지역을 맡아 떠났는지는 당시의 총책 이외는 알 수 없게 극비를 붙였다. 이때 행동한 활약은 다음과 같다.
강재호(姜在鎬)[또는 정호(正鎬)]·김봉률(金奉律)·기상섭(奇尙燮) 1대는 경주·양산·통도사·범어사·동래·부산·김해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이들은 경주 경찰서에 발각된 적이 있으나 요행히 ‘독립선언서’를 빼앗기지 않아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한편 송복만(宋福晩)·송복룡(宋福龍)·최범술(崔凡述) 1대는 합천·삼가·초계·의령·진주·사천·곤양(昆陽)·하동 일대를 맡아 지방의 동지 박운균(朴運均)·이석순(李石淳)·이승기(李昇基)·조우제(趙佑濟)·강달영(姜達永)·송지환(宋芝煥)·임응주(林應周) 등이 손을 잡고 크게 활약하였다.
또한 박달준(朴達俊)·박덕윤(朴德潤)·이덕진(李德進)·김장윤(金章允) 일대는 거창·안의(安義)·함양·산청·남원 등지를 맡아 가던 중 일 헌병대와 수비대에 검거되었다. 이때 이덕진(李德進)은 그들에게 고춧가루를 뿌리고 격투하여 그들의 무기를 빼앗아 도주하여 지방 유지와 손을 잡고 임무지에서 활동하였다.
상술한 3개 대는 일을 치룬 후 통영에서 만나게 되어 있었으나 보조가 맞지 않아 결국 통영에서의 회합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다른 지방에서 일어날 일로는 우경조(禹敬祚)·나경화(羅慶華) 등의 충남(忠南) 공주(公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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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대의 사찰을 중심으로 한 활약과 박윤성(朴允成) 등의 충북 법주사 일대의 활약, 김경환(金景煥) 등의 서산(瑞山)·상주(尙州) 일대의 활약, 김도운(金道運)·이봉정(李奉政)·남성엽(南成葉) 등의 김천·성주 일대의 활약, 남광옥(南光玉)·신경재(愼慶宰)·김명수(金明洙) 등의 거창 등지의 운동이었다.
또한 신철휴(申喆休)·신난휴(申蘭休)·이종직(李從直)[또는 병직(秉直)] 등의 고령(高靈)·현풍(玄風)·대구·등지의 운동이 있었는데, 이 가운데 신철휴는 뒤에 의열단에 가입하여 밀양 의거에 큰 역할을 하였다.
또 권청학(權淸學) 등은 달성·영천 등지에서, 박근섭(朴根燮)·박응천(朴應天)·신문수(申文守)·정봉윤(丁鳳允) 등은 쌍계사·화엄사·송광사·선암사 등을 중심으로 구례·강진(康津)·보성(寶城)·담양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이들은 대개 당시 삼엄한 경계 아래 서로가 기밀한 연락을 취하지 못하고 각기 활약하다가 대부분 검거되어 옥고를 치루었다.
그뒤 강재호·송복만·김봉률·손덕주·박덕윤·김장윤 등 10여 명은 만주로 건너가 김좌진(金佐鎭)·지청천(池靑天) 막하(幕下) 신흥군관학교(新興軍官學校)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후 독립군에 편성되어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그 가운데 김봉률·박덕윤·김장윤 등은 군자금 조달차 문경 금룡사(金龍寺)로 잠입하다가 주지의 배반으로 검거되어 2년형의 언도를 받아 옥로를 치루었다.
그 후 1931년 3월 불교 비밀결사 卍당이 조직되자 해인사 학생 출신 강재호·이용조·장도환·박근섭·최범술 등은 당원이 되어 김법린(金法麟)·허영호(許永鎬)·박윤진(朴允進)·박영희(朴暎熙) 등 18인과 같이 한용운(韓龍雲) 아래에서 활약하였다.
그러나 당시 해인사 주지였던 변설호(卞雪醐)의 밀고로 임환경(林幻鏡)·최범술(崔凡述)·오제봉(吳濟峰)·박인봉(朴印峰)·최동운(崔東雲)·김주성(金周成)·민동선(閔東宣) 등 30명이 검거되어 옥고를 치루었고, 이고경(李古鏡)은 옥사하였다.
그 뒤 최범술·김범부(金凡父)·김법린은 해인사·다솔사 등에서 강원생(講院生)에게 한글을 가르쳤고, 또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류 되어 홍원·함홍 등 감옥에서 옥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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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루었다.
상술한 일반적인 활동과 아울러 3·1운동 당시 해인사를 중심으로 직접적인 만세운동도 일으켰다.
즉 황해도 해주군 출신으로 당시 해인사 부속 지방하림 학생인 23세의 홍태현(洪泰賢)은 그곳 학생인 백서원(白聖元)·김경환(金景煥)·김성구(金聖九) 등과 더불어 해인사 내 지방학림 기숙사에서 의거의 모의를 하였다.
이들은 학생들이 연극을 구경하고 돌아오는 기회를 틈타 군중과 더불어 봉기하려고 기숙사에서 계획하였으나 이에 앞당겨 3월 31일 밤 11경에 봉기하였다.
이날 오전 11시경 해인사 홍하문(紅霞門) 밖에 약 2백 명[도 장관 보고문에는 약 1백 50명]의 학생들이 모여 먼저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어 시위를 전개한 후 이날 오후 1시 해인사 주재소로 몰려갔다가 이곳 경찰들이 총을 발사하여 일단 해산하였으나, 그날 밤 11시경 약 2백 명[판결문에는 약 1백 50명]의 군중이 다시 봉기하여 해인사 앞 도로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자 학생들은 이들과 합류하여 독립만세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곧 포악한 일경들에 의해 강제해산을 당하고 말았다. 홍태현(洪泰賢)은 다른 주동 인물과 같이 검거되어 6월 11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6개월 형을 언도 받았다. 그는 불복 고소를 제기하였으나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대구형무소에 투옥 되었다.8)
9 가야면(伽倻面) 매안리(梅岸里)
합천군내 각 청에서 군주들의 의분을 넘친 의거가 일어나게 되자 이곳 가야면 청현리에 사는 한갑개(韓甲開)는 동지 박노상(朴魯相)과 더불어 가야면 매안리에서 이곳 일대의 군중을 규합하여 의거하기로 모의한 후 거사일을 4월 3일로 약정하였다.
이들은 암암리에 군중을 규합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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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이용락, ≪3·1운동 실록≫ pp.680~683. ≪고등경찰관계 적록≫, 1936년 12월 경상남도 경찰부. p.26. 홍태현(洪泰賢) 판결문, 1919년 6월 28일 대구복심법원. 1919년 4월 7일 경상남도 장관 보고. 김경환(金景煥) 판결문, 1919년 9월 3일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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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3일 오후 5시 주동 인물 한갑개·박노상은 가야면 청현리 박내문(朴乃文) 집에서 도립기(獨立旗)등 대서특필한 기치를 만든 후,
“오늘 밤 동민은 매안리 들판에 집합하여 대한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한다.”
라는 내용의 회람장을 돌려 군중들을 모았다. 이 회람문을 본 권덕순(權德淳)등 수10명[판결문에는 10여 명]이 매안리 노상으로 달려왔다.
오후 9시 주동 인물들은 이곳에 ‘독립기’를 하늘높이 세운 후 대한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모인 군중들은 일제히 여기에 호응하여 독립만세의 함성은 이곳 어두운 산곡을 메아리쳐 갔다. 이들은 이어 독립 만세시위를 전개한 후 이날은 일단 해산하였다.
4월 4일 각 청의 군중들이 연락을 받아 밤에는 약 4백 명[일경 기록에는 약 3백 명]이 가야 산상에 모이게 되었다. 이들은 산상에서 독립만세를 소리높이 외친 후 면사무소로 몰려갔다.
이때 주재소 경찰들이 긴급 출동하여 이들에게 총격의 세례를 퍼부어 군중들은 부득이 헤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곳 가야면 매안리 의거의 주동 인물로 검거된 한갑개는 혹독한 고문을 받은 후 5월 27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으로부터 4개월을 언도 받고 불복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6월 30일 대구복심법원으로부터 공소가 기각되어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다.9)
10 기타 지역
상술한 의거의 합천군내에 있어서는 4월 7일 봉산면(鳳山面) 술곡리(述谷里)에 있어서도 만세운동이 있었으나 전하는 사료가 없어 상고할 길이 없다.10)
제6절 함양군(咸陽郡)
1 함양읍(咸陽邑)
이 곳 함양읍은 서남쪽은 산악에 둘러싸여 있고 동방 하류 연안 일대로 경지(耕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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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한갑개(韓甲開) 판결문, 1919년 6월 30일 대구복심법원. ≪고등경찰관계 적록≫ 1936년
12월 경남도 경찰부, p.26.
10) ≪조선소요사건상황≫ 조선 일군 헌병대사령부,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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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되어 있는 읍으로 이곳 장은 매월 2일, 7일에 열렸다.
3·1의거의 함성이 전국 방방곡곡으로부터 들려오고 있을 때 이곳 유지 정순길(鄭淳吉)·윤보현(尹普鉉)·정순귀(鄭淳貴)·노경식(盧璟植) 등 4인은 이곳 함양읍에서도 독립 만세의거를 일으켜야 한다는데 합의를 보았다.
이리하여 이들은 밀의를 거듭한 끝에 거사일을 3월 28일[음력 2월 27일] 함양읍 장날로 약정하고 동지 규합과 아울러 모든 의거준비를 서둘렀다.
이들은 만들어 둔 크고 작은 많은 태극기를 숨겨 가지고 3월 28일 일찌기 함양읍 시장으로 잠입하였다. 이날 아침부터 유달리 많은 장꾼이 모여들자 경찰은 삼엄한 경계망을 펴 이들을 감시하였다. 오후 3시 반 수천 명의 군중이 모여들자 주동 인물 정순길(鄭淳吉)·윤보현(尹普鉉)·정순귀(鄭淳貴)·노경식(盧璟植)은 준비해 온 큰 태극기를 장 복판에 세운 후 작은 태극기를 재빨리 군중에게 나누어 준 후 ‘대한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군중이 일제히 여기에 호응하여 만세를 고창할 때 다수의 일군 헌병이 총검을 들고 달려와 주동 인물 4명을 끌고 갔다.
오후 4시 격분한 군중 수천 명[도장관 보고에는 약 1천 5백 명]은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하였다.
이들은 주동 인물들이 갇혀 있는 일군 헌병분견대로 몰려가려 하였으나 일군 헌병들의 방해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오후 6시 30분까지 시위를 하다가 헤어졌다.
이때 이곳 병곡면 연덕리에 사는 김한익(金漢益)은 분함을 참지 못한 끝에 다음 장날 재차 의거를 단행하기로 결심하고 동지를 규합하면서 준비를 서둘렀다.
4월 2일[음력 3월 2일]아침 김한익은 자기 집에서 만든 큰 태극기를 숨겨 가지고 동지들과 같이 시장으로 잠입하였다.
정오경이 되자 약 3천 명[일경 기록 약 2천 5백 명]의 장꾼이 모여들었다. 김한익은 시장 중앙에 쌓여 놓은 소금가마니 위에 올라서서 한국이 독립국임을 선언한 후 태극기를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약 3천 명의 군중이 일제히 여기에 호응하니 그 함성은 천리를 진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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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군중들은 시장을 누비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일군 헌병이 군중을 지휘하던 김한익을 검거하자 군중은 노도(怒濤)와 같이 일군 헌병분견소로 몰려갔다. 군중은 이곳을 포악한 후 다시 만세를 소리높이 불렀다.
이때 군중대열에서 뛰쳐나온 하승현(河升鉉)은 일 헌병에게,
“검거한 우리 애국인사들을 즉각 석방하라!”
고 요구하였다.
이때 분통을 참지 못한 윤영하(尹榮夏)가 분견소 정물을 박차고 돌진하자 일군 헌병들은 일제히 총격을 가해 왔다. 하승현은 쓰러져 즉사(卽死)하고 윤영하도 그 자리에 쓰러졌다.
이 흉보(凶報)를 듣고 달려 온 하승현의 아버지 재연(在衍)과 숙부(叔父) 재익(在翼)은 원수를 향하여 맹호같이 육박해 갔다.
일 헌병은 다시 총포와 권총을 난사하여 하재익은 권총 3발을 맞고 쓰러졌으며, 하재연(河在衍) 또한 총포에 쓰러졌다.
부자(父子) 숙질(叔侄)이 피를 흘리고 쓰러진 그 모양을 바라볼 때 그 누구가 민족적 의분심을 느끼지 않으리오 !
그러나 그들의 총기 앞에 맨주먹의 애국 군중이 어찌 하리오 !
군중들은 아픈 가슴을 안고 헤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체포된 주동 인물 김한익은 5월 5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으로부터 10개월 형을 받고 공소한 결과, 7월 28일 대구복심법원으로부터 1년 6개월의 형을 언도 받아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다.
그리고 윤보현(尹普鉉)은 8개월 형을 받고 진주형무소에 투옥되고, 정순길(鄭淳吉)․정순귀(鄭淳貴)는 태형 90을 언도 받았다.
그리고 노경심(盧璟植)과 조주섭(趙柱燮)도 석방되고 정순귀는 미결 3개월 동안 갖은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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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한익(金漢益) 판결문 1919년 7월 28일 대구복심법원. 1919년 4월 7일 경상남도 장관 보고. ≪고등경찰관계적록≫ 1936년 12월 경상남도 경찰부 p.23. 변지섭,≪경남독립운동소사≫(상) pp.30~32. 이용락, ≪3·1운동실록≫ pp.722~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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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안의면(安義面) 안의읍(安義邑)
이곳 금천리(錦川里)에서 열리는 안이읍 시장에는 3·1운동 당시 맹월 음력 5일, 10일에 장이 섰다.
함양군 안의명에서의 독립의거도 전국 의거에 발맞우어 그 모의가 무르익어 갔다.
즉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 김병창(金病昌)·임채상(林采尙)·정순완(鄭淳完)·전재식(全裁植)·조제헌(趙濟憲) 등 애국인사들은 지곡면 보산리 급천서당(汲泉書堂)의 청년 학생 김채호(金采鎬)와 금천리 최석룡(崔碩龍) 등과 더불어 안의읍 시장에서의 의거를 밀의한 후 거사일을 3월 31일 안의읍 시장의 장날로 약정하고 모든 준비를 서둘렀다.
이에 앞서 수동면(水東面) 상백리(上栢里)에 사는 고재경(高哉景)·종재원(鄭在元)은 3월 25일 안의읍 시장의 의거를 꾀하여,
“3월 25일 안의 시장에서 대한 독립만세를 부를 터이니 찬성자는 집합하라”
는 삐라를 군중들의 눈에 잘 보이는 수동면 상백리(上栢里) 음식점 앞 길가 나무에 붙여 군중들의 관심을 모았으나 이날 의거는 단행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관계로 안의읍에 대한 일 군경의 경계는 더욱 삼엄해 갔다.
이러한 정세 아래서 김병창(金炳昌)·임채상(林采尙)·정순환(鄭淳完)·전재식(全裁植)·조제헌(趙濟憲)·김채호(金采鎬)·최석룡(崔碩龍) 등 주동 인물들은 비밀리에 동지를 규합하고 독립선언서와 대·소의 태극기를 만드는 등 3월 31일에 있을 안의읍 의거를 서둘렀다.
3월 31일 안의읍 장날, 주동 인물들은 의거의 준비물을 감추어 가지고 안의읍 시장으로 잠입하였다. 오후 1시 30분 주동 인물 김병창·임채상·정순원·전재식·조제헌 등 5인은 장 복판에서 감추어 둔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재빨리 군중들에게 나누어 주고 독립만세를 부르려는 찰나 주동 인물 김병창(金炳昌)·임채상(林采尙)·정순원(鄭淳元)·전재식(全裁植)·조제헌(趙濟憲) 등 5일이 경찰에 검거 구속되었다.
군중들의 의분은 높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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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 최석룡(최석룡)은 만들어 온 수 10본의 태극기를 군중들에게 나누어 준 후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라고 쓴 기치를 높이 들고 대한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장에 모인 약 1천 5백 명[일군 기록 약 1천 명]의 군중이 일제히 여기에 호응하였다. 드디어 이들은 시위에 들어갔다. 이들은 오후 7시까지 시장을 누비고 시위를 전개하면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또 주동 인물들의 석방도 요구하였다.
그러나 드디어 거창 일군수비대로부터 중대장 이하 20명이 급파되어 오자 군중들은 사산하고 주동 인물들은 검거되었다.
이들 주동 인물들은 갖은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이 가운데 최석룡(최석룡)은 5월 14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으로부터 6개월 형을 언도 받아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5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여 고등법원에서도 기각되어 서울형무소에 투옥되었다.2)
제7절 거창군(居昌郡)
1 가조면(伽祚面) 장기리(場基里)시장
이곳 가북면의 김병직(金秉直)과 가조면의 어명준(魚命俊)은 성격이 담대 강직한 애국인사로 일찍부터 의기가 상합하는 사이었다.
일본이 한국을 강점한 후 항상 울분을 금치 못하고 있다가 3·1운동이 일어나자 때를 만난 것을 기뻐하였다.
2사람은 전국 의거의 민족함성을 전해 듣고 더욱 뛰는 가슴을 억제할 수 없었다.
이들은 가조면에서도 민족의 의기를 높이 들 것을 의논하여 거사를 3월 20일[음력 2월 19일] 장기리시장 장날로 약정하고 거사의 준비를 서둘렀다.
그들은 극비밀리에 동지를 규합하면서의 거의 준비를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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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19년 4월 7일 경상남도 장관 보고, ≪고등경찰관계 적록≫ 1936년 12월 경상남도 경찰부, p.23. 고재경(高哉景) 판결문 1920년 2월 5일 대구복심법원. 최석룡(崔碩龍) 판결문 1919년 5월 30일 대구복심법원. 최석룡 판결문 1919년 7월 10일 고등법원. 김정명, ≪조선독립운동≫ I. p.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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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0일 장기리시장 장날 정오경이 되자 약 4백~5백 명(일군경 기록 약 3백명)의 장꾼이 모여 들었다. 2사람은 시장 중앙으로 잠입하여 태극기를 높이 들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군중들은 일제히 여기에 호응하여 만세를 불렀다.
이어 2사람을 선두로 독립시위로 들어가 2사람의 선창에 따라
“우리는 왜적의 속박에서 벗어나 오늘부터 자주국이요 자주민이다.”
라는 구호을 곳곳에서 외치면서 시위하였다.
장기리시장과 그 주변을 얼마 동안 시위한 후 김병직(金秉直)·어명준(魚命俊) 양인은 시위대열에서 빠져 나와 가북면에 있는 용산(龍山) 일군헌병분견소(日軍憲兵分遣所)로 달려갔다.
마침 일군 헌병들은 장기리 시장으로 출동 후라 이곳에 일군 헌병은 없었다. 2사람은 소내(所內)로 들어가 일 헌병의 문부를 모두 찢어 버리고 유리창과 기물을 모조리 파손한 후 의자에 앉아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주동 인물 5,6명을 묶어 밤늦게 돌아온 일 헌병과 보조원은 수라장이 된 광경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은 김병직과 어명준(魚命俊)을 보자 난투를 벌였다.
2사람은 처음 여유 있는 태도로 이들에 대항하였으나 총검을 가진 다수의 일군을 당해 낼 수 없어 반죽음의 상태가 되어 다음날 아침 거창 일군헌병대로 압송되었다.
이 소식은 곧 주병으로 알려져 애국 민중들의 의분심을 높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애국 유지들은 서로가 연락하여 가조면(加祚面) 석강리(石岡里) 정자(亭子) 나무 아래에 모여 비밀회의를 갖고 대책을 논의하였다. 이들은 다음 22일 거창읍 장날을 이용하여 거사하기로 결정하고 위원 6인을 선출하여 금일 중으로 책임을 맡아 가조(加祚)·가북면(加北面)을 비롯한 각처의 애국 군중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로 하였다.
선출된 6인의 위원 즉 오문현(吳文鉉)·신병희(愼炳憘)·어명우(魚命佑)·어명철(魚命喆)·이병홍(李秉洪)·김호(金濩) 등은 이날 밤을 새워가며 그들의 책임을 완수하였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도 이 정보가 누설되어 22일 아침 거창 일군헌병분대는 가조면 장기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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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가 주동 인물 김채환(金采煥)·김호(金濩)·오문현(吳文鉉)·어명철(魚命喆)·최영순(崔榮淳)을 끌고 가 이들은 취조하고 있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가조면·가북면의 농민 약 3천 명[일군 기록 약 2천 명)은 오후 2시 30분경 각자 곤봉을 가지고 독립만세라고 특필한 기치를 장기리(場基里) 만도정(晩嶋亭) 앞에 세운 후 이곳에 집합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어 이들은 취조중에 있는 주동 인물들을 구출한 후 행렬을 이루어 거창읍으로 향하였다.
시위행렬이 사포현(沙浦峴)에 이르렀을 때 이미 거창 일군헌병대와 용산 일 헌병분견대는 합세하여 군중들의 진로를 차단하고 총포로써 위협하면서 해산을 명하였다. 그러나 군중은 응하지 않았다.
드디어 이들의 횡포가 심해지자 군중들은 아우성을 치면서 일제히 일군 헌병들을 향하여 돌진하였다.
이때 포진하였던 일 헌병이 총격을 가하여 다수의 사상자를 내게 되었다. 군중이 사산한 후 현장은 사상자의 유혈로 피바다를 이루어 그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곳에서 피살되어 순국한 자는 다음과 같다.
① 순국자 4명
신문구(愼文九)·배이권(裵二權)·조이록(曺二祿)·이석종(李錫宗)
한편 이 의거에서 검거된 주동 인물 김병직(金秉直)·어명준(魚命俊)·김관묵(金寬黙)·어명철(魚命喆)·김익동(金翼東)·김호(金濩)·이병홍(李秉洪)·강두몽(姜杜蒙) 등은 각각 1년 내지 3년형을 받아 진주·부산 또는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이 외 오문현(吳文鉉)·어명우(魚命佑)·최영순(崔榮淳)·김채환(金采煥)은 피신하여 옥고를 면하였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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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등경찰관계 적록(高等警察關係摘錄)≫1936년 12월 경상남도 경찰부 pp.23~24. 변지섭, ≪경남독립운동소사≫ (상) p.32~35. 이용락, ≪3·1운동 실록≫ pp.690~692. ≪조선소요사건상황≫ 조선 일순 헌병대사령부,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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