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실 관련 금석문등 /영조대왕 행장

영조 대왕 행장(行狀 성(姓)은 이(李)이고 휘(諱)는 금(昑)이고 (펌)

아베베1 2010. 10. 27. 16:32

영조
 부록
영조 대왕 행장(行狀)①

행장(行狀)에 이르기를,
“영종 대왕(英宗大王)께서 승부(升祔)되신 뒤 일곱째 달 갑진(甲辰)에 사왕 전하(嗣王殿下)께서 신들을 앞으로 나오게 하여 하교하기를, ‘아! 우리 선왕의 성덕(盛德)·대업(大業)을 지금은 신민(臣民)이 알고 뒤에는 사책(史冊)에 실릴 것이므로 본디 행장에 기대할 것은 아니나, 바깥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궁중의 일을 나 불곡(不穀)이 말하지 않으면 대저 누가 널리 밝힐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나 불곡이 성왕의 공렬(功烈)을 깊이 사모하여 만기(萬幾)의 여가에 유사(遺事) 예순 여섯 가지를 모아 적었다. 아! 너희 태사(太史)인 신하들은 훈계(訓戒)·모유(謨猷)를 널리 찾아서 차례대로 찬술(撰述)하여 행장을 만들어 《실록(實錄)》 뒤에 붙이라.’ 하시매, 신(臣) 서명응(徐命膺)이 머리를 조아리고 대답하기를, ‘감히 명대로 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왕(王)의 성(姓)은 이(李)이고 휘(諱)는 금(昑)이고 자(字)는 광숙(光叔)이며 현종 대왕(顯宗大王)의 손자이고 숙종 대왕(肅宗大王)의 둘째 아드님이시다. 화경 숙빈(和敬淑嬪) 최씨(崔氏)가 숙종 20년 갑술(甲戌) 9월 13일 무인(戊寅)에 창덕궁(昌德宮)에서 왕을 낳았는데, 그 사흘 전에 홍광(紅光)이 동방에 뻗고 백기(白氣)가 그 위를 덮었었다. 이날 밤에 궁인(宮人)이 꿈에 흰 용(龍)이 보경당(寶慶堂)에 날아 들어가는 것을 보았는데, 보경당은 바로 왕께서 탄강(誕降)하신 실(室)이다. 왕께서는 나시면서 특이한 자질이 있고 오른 팔에 잇따라 용이 서린 듯한 무늬 아홉 개가 있었다. 겨우 걸음을 배웠을 때에 숙종께 나아가 뵈면 반드시 무릎을 모아 바르게 앉고 숙종께서 물러가라고 명하지 않으시면 하루 해가 다 가더라도 어려워하시는 빛이 없으므로, 숙빈이 왕께서 오래 꿇어앉았느라 발이 굽을세라 염려하여 넓은 버선을 만들어서 힘줄과 뼈를 펼 수 있게 하였다. 무릇 글씨와 그림 따위는 다 배우지 않고도 잘하시어 필묵(筆墨)을 가지고 노실 때마다 빼어난 풍채가 사람들의 눈을 감동시켰다. 숙종께서 그 천성(天成)을 아름답게 여겨 시를 지어서 총애하셨다. 6세에 연잉군(延礽君)으로 봉하고 9세에 군수(郡守) 서종제(徐宗悌)의 딸을 맞아 달성 군부인(達城郡夫人)으로 삼고 19세에 출합(出閤)하셨다. 숙종께서 헌명(軒名)을 양성(養性)이라 내리고 또 친히 화압(花押)하여 주셨다. 경자년에 숙종께서 승하하시고 경종(景宗)께서 즉위하셨는데 편찮으신 지 오래 되고 사속(嗣續)도 바랄 수 없으므로, 이듬해 정언(正言) 이정소(李廷熽)가 상소하여 조종(祖宗)의 고사(故事)를 인용하고 저위(儲位)를 미리 세워서 인심을 매어 두기를 청하니, 경종께서 대신(大臣)에게 명하여 의논하게 하셨다.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좌의정 이건명(李健命)·판부사(判府事) 조태채(趙泰采) 및 육경(六卿)과 양사(兩司)의 장관이 구대(求對)하여, 자성(慈聖)께 고하여 일찍 대계(大計)를 정하기를 청하였다. 경종께서 뭇 신하에게 명하여 합문(閤門) 밖에 물러가 기다리게 하였다가 조금 뒤에 다시 불러들여 자성의 수찰(手札)을 보이셨는데, 거기에 ‘효종 대왕(孝宗大王)의 혈맥(血脈)이며 선대왕(先大王)의 골육(骨肉)으로는 주상(主上)과 연잉군이 있을 뿐이니 어찌 다른 의논이 있겠는가?’ 하셨으므로, 신하들이 다 눈물을 흘리며 물러갔다. 드디어 왕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하고 군부인 서씨를 세제빈(世弟嬪)으로 책봉하였으나 왕께서 상소하여 사양하니, 경종께서 답하기를 ‘이미 입년(立年)이 지났어도 사속이 없고 또 기이한 병이 있으니, 나라의 일을 생각하면 베풀 만한 계책이 없다. 자성께 우러러 여쭈고 뭇사람의 뜻을 굽어 따라서 중대한 저위를 맡기니, 소심(小心)하게 삼가서 나라 사람의 희망에 부응하라.’ 하셨다. 그때 마침 적신(賊臣) 유봉휘(柳鳳輝)가 상소하기를, ‘전하께서 중곤(中壼)을 다시 맞으신 지 겨우 수년인데 약시중을 드시느라 근심하고 황망하시고 이어서 양암(諒闇)에 계셨으니, 사속은 논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이제 보력(寶曆)이 한창이시고 중곤의 연세가 겨우 성년을 지나셨으니, 앞으로 자손이 번창하는 경사는 전국에서 바라는 것입니다. 혹 양궁(兩宮)에 병환이 있어서 탄육(誕育)에 방해된다면 보호하는 곳에서 정성을 다하여 치료하는 일은 무엇이고 극진히 할 것인데, 즉위하신 원년에 이런 일을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처음에는 이 정소를 시켜 상소하여 청하게 해서 마치 시험하여 보는 듯하였고, 밤이 이미 깊었는데 등대(登對)하여 힘껏 청하되 들어가 여쭈기를 청하고 나서 바로 나와 선포하기를 청하여 문득 시키고 독촉하는 것과 같았으니, 신하의 예(禮)가 없다 할 수 있습니다. 무진년 전하께서 탄생하셨을 때에도 후사를 세우는 일이 급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신하들이 아직 수년을 기다려 볼 것을 말하였습니다.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이 이러해야 할 것인데 이제는 황급하고 경솔하니, 인심이 의혹하는 것이 오래 되어도 진정되지 않습니다. 바라건대 이제부터는 모든 행사에 대하여 신충(宸衷)에서 결단하여 위복(威福)이 아래로 옮겨지게 하지 마시고 이어서 대신 이하가 우롱하고 협박한 죄를 바루게 하여서 나라 사람에게 답하소서.’ 하였다.
경종께서 조정(朝廷)에 하교하기를, ‘일월(日月)처럼 밝으신 선대왕께서 내게 후사가 없는 것을 매우 염려하셨고 이제 내 병이 아들을 바랄 수 없으므로, 공경히 부탁을 받고서 밤낮으로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다. 일전에 대간(臺諫)이 상소한 것은 종사(宗社)를 위하여 국본(國本)을 정하는 일이므로 바로 선대왕의 성려(盛慮)와 내 뜻에 맞거니와, 자성께 우러러 여쭈어 이미 국본을 정하였으니 참으로 종사의 끝없는 복이다. 유봉휘가 상소하였는데, 이는 어떤 사람인가? 경들은 논하여 아뢰라.’ 하셨다. 대신과 삼사가 유봉휘를 국문(鞫問)하여 왕법(王法)을 바루게 하기를 청하니, 경종께서 윤허하셨으나 곧 고쳐서 멀리 귀양보내게 하셨으므로, 대신·재신(宰臣)·삼사·정원(政院)·종신(宗臣)·관학생(館學生)이 전에 청한 것을 고집하여 더욱 힘껏 청하였다.
이때 적신 조태구(趙泰耉)가 우의정으로서 근기(近畿)에 있었는데, 문득 차자를 올려 효묘(孝廟)께서 저위(儲位)를 이으실 때에 고(故) 상신(相臣) 이경여(李敬輿)가 상도(常道)를 지킨 논의를 인용하고 유봉휘는 충성하므로 때려 죽여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에 앞서 숙종께서 승하하셨을 때에 조문하러 온 칙사(勅使)가 황제의 분부가 있었으므로 세자(世子)와 아우와 자질(子姪)도 아울러 위문하고 싶다고 말하였으나 조정의 의논이 거절하고 따르지 않았다. 그런데 조태구가 상소하기를, ‘상국에서 행하는 것은 실례가 되는 것이고 배신(陪臣)이 그것을 받는 것은 혐의를 무릅쓰는 것이니, 왕자(王子)와 종신(宗臣)들이 어찌 감히 이 일을 편안하게 여길 수 있겠습니까?’ 하고 왕을 원망하여 꺼리는 것이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다시 차자를 올려 유봉휘를 구제하는데 힘을 남기지 않으므로, 삼사가 말소리를 같이하여 조태구의 죄를 논하고 우선 삭출(削黜)하기를 청하였다.
그래서 왕께서 다시 상소하여 굳이 사양하였으나 경종께서 위로하여 타이르시는 것이 아주 극진하였으므로, 왕께서 9월에 비로소 인정전(仁政殿)에서 책보(冊寶)를 받으셨는데 보추(步趨)·진지(進止)가 모두 규도(規度)에 맞았다. 주연(胄筵)을 열어 《소학(小學)》·《강목(綱目)》을 강독(講讀)하셨는데, 뜻이 어렵고 의심스러운 것에 대하여 문답하느라 밤을 새우고 낮에 이어도 싫증 내지 않으시고 말하기를, ‘궁료(宮僚)는 벗이다. 벗이 선행(善行)을 책망하려면 반드시 정지(情志)가 유통하고서야 그 말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하셨다. 일찍이 《심경(心經)》과 필묵(筆墨)을 겸설서(兼說書) 조현명(趙顯命)에게 내리시고 말하기를, ‘설서가 성심으로 개도(開導)하였으므로, 백금(伯禽)·양자(襄子)에 관한 말을 내가 잊지 않고, 효묘(孝廟)의 큰 뜻에 관한 말을 내가 잊지 않고, 궁위(宮闈)의 화기(和氣)에 관한 말을 내가 잊지 않고, 근습(近習)을 진중히 가리는 데에 관한 말을 내가 잊지 않고, 견우과당도(牽牛過堂圖)를 벽에 건 데에 관한 말을 내가 잊지 않았다. 대저 말하였어도 잊는다면 곧 말을 버린 것이다. 하치않은 물건으로도 잊지 않는 뜻을 보이고 《심경》으로 심학(心學)을 권한 데에 보답한다.’ 하셨다.
이때에 경묘(景廟)께서 병환이 더욱 심하셨는데, 만기(萬幾)를 수접(酬接)하시느라 심화(心火)가 올라도 깨닫지 못한다는 뜻을 여러 번 사륜(絲綸)에 보이셨으므로, 나라에 충성한 생각을 가진 자들은 왕께서 서무(庶務)에 참결(參決)하여 성로(聖勞)를 분담하기를 바랐고, 재신(宰臣) 이태좌(李台佐)가 조정에서 호조 판서(戶曹判書) 민진원(閔鎭遠)에게 이런 때에 대리(代理)하는 일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느냐고 말하였고, 사대부(士大夫)가 사사로이 서로 수작할 때에도 그 말이 한 입에서 나오듯이 같았다. 그러나 김일경(金一鏡)이라는 자는 사람됨이 흉악하고 도리에 어그러진 행실이 많고 이로운 것을 보면 부끄러움을 잊는 자인데, 이사상(李師尙)·윤취상(尹就商) 등 세상에서 배척받고 버려진 자와 깊이 서로 결탁하여 허여하고 환자(宦者) 박상검(朴尙儉)·문유도(文有道)와 궁인(宮人) 석렬(石烈)·필정(必貞)을 서로 통하여 궁중의 응원으로 삼았다. 그런데 왕께서 영명(英明)하시기 때문에 그 간사한 정상을 다 아실세라 염려하여 드디어 외정(外庭)에서 눈을 부릅뜨고 팔을 걷어붙이고서 무릇 대리를 말하는 자를 문득 반역으로 몰므로, 뭇 신하들이 두려워 움츠리고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이해 10월에 집의(執義) 조성복(趙聖復)이 상소하여 신하들을 인접(引接)하고 정령(政令)을 재결할 때에 세제(世弟)를 불러들여 옆에서 모시고 참여하여 듣고 일에 따라 익히기를 선조(先朝) 정유년의 고사(故事)와 마찬가지로 하기를 청하였다. 경종께서 그 말을 옳게 여기시고 드디어 하교하기를, ‘나는 10여 년 동안 기이한 병이 있거니와, 정유년에 청정(聽政)을 명하신 것은 선조에서 정섭(靜攝)하시기 위한 것이므로 내 몸을 돌볼 겨를이 없었는데, 등극하고부터는 증세가 더욱이 깊어졌다. 세제는 장년이고 영명하므로 청정하게 하면 국사를 맡긴 데가 있어서 내가 안심하고 조섭할 수 있을 것이니, 이제부터 모든 국사를 세제를 시켜 재단하게 하라.’ 하셨는데, 이날 밤에 적신 최석항(崔錫恒)이 입직(入直)한 승지(承旨)·옥당(玉堂)과 함께 구대하니, 성명(成命)을 거두셨다.
적신 한세량(韓世良)이 상소하여 조성복에게 형벌을 줄 것을 청하기를, ‘하늘에는 두 해가 없고 땅에는 두 임금이 없습니다. 세제를 시켜 임조(臨朝)하게 하기를 직접 청하지는 않았더라도 참여하여 듣는 것은 임조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신하로서 감히 남몰래 천위(天位)를 옮길 생각을 품었으니, 죄가 천지 사이에 용납될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도승지(都承旨) 홍계적(洪啓迪)이 한세량의 소(疏)는 지의(指意)가 흉패(凶悖)하다고 말하고 양사가 따라서 한세량을 절도(絶島)에 안치(安置)하기를 청하고 다시 잡아다 국문하여 엄히 묻기를 청하였다. 경종께서 시임(時任)·원임(原任)인 대신과 2품(品) 이상 및 삼사에 명하여 빈청(賓聽)에 와서 모이게 하고 하교하기를, ‘저위(儲位)를 일찍 정한 것은 본디 대리시키려 한 것인데 이미 자성께 여쭈었으니, 전에 하교한 대로 거행하라.’ 하셨다. 그래서 왕께서 네 번 상소하여 힘껏 사양하고 대신 이하가 예합(詣閤)하여 구대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였으므로,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전정(殿庭)에서 호소하여 대리하라는 명을 거두기를 청한 것이 모두 사흘이나 되었다. 경종께서 또 하교하기를, ‘내가 병이 있어도 수응(酬應)할 수 있다면 어찌 이렇게까지 하겠는가? 요즈음 심화가 하루에도 자주 일어나므로 좌우를 시켜 전례를 살펴서 거행하게 하는데, 좌우를 시키는 것이 옳은지, 세제를 시키는 것이 옳은지를 경들이 생각하여 우리 형제가 고통을 나누어 망하려는 나라를 지키게 하라.’ 하셨다. 영의정 김창집·좌의정 이건명·영부사(領府事) 이이명(李頤命)·판부사 조태채 등이 연명(聯名)으로 차자를 올리기를, ‘모든 국사를 모두 재단하라고 명하셨으니 이것은 국조(國朝)에 없던 일이므로 중외(中外)에서 놀랍게 여기고 의혹합니다. 신들이 만 번 주륙(誅戮)을 당하더라도 감히 받들 수 없습니다마는, 작은 일을 나누어 다스리는 것으로 말하면 정유년에 재정(裁定)한 것이 이미 있으니, 전하의 신하로서 어찌 감히 경거(輕遽)함에 구애되어 모두 어기겠습니까?’ 하였다.
그런데 차자(箚子)가 올라가니, 조태구가 시골에서 달려와 선인문(宣仁門)으로 들어가 구대(求對)하였으나, 정원(政院)에서, ‘대각(臺閣)에서 바야흐로 조태구의 죄를 논하므로 조태구는 구대하지 말아야 한다.’ 하여 물리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금 뒤에 사알(司謁)이 명을 전하여 조태구를 입시(入侍)하게 하고 다시 명을 전하여 정원·삼사(三司)를 입시하게 하고 다시 명을 전하여 시임·원임인 대신과 중신(重臣)·재신(宰臣)을 입시하게 하셨는데, 입시하니, 전후의 하교를 모두 거두어 거행하지 말게 하셨다. 물러가서 삼사에서 아뢰기를, ‘신하들을 인접(引接)할 때에는 정원을 거치는 것이 3백 년 동안 내려온 정규(定規)인데, 이제 조태구는 어느 길을 거쳐서 품지(稟旨)하였습니까? 이 길이 한 번 열리면 이 뒤에 북문(北門)의 변이 있더라도 막을 수 없을 것이니, 승전색 사알(承傳色司謁)을 잡아다 문초하여 엄히 핵사(覈査)하소서.’ 하니, 경종께서 윤허하셨다. 양사(兩司)에서 다시 조태구가 평소에 환시(宦寺)와 교통한 죄를 논하고 극변(極邊)에 멀리 귀양보내기를 청하였으나, 답하지 않으셨다.
12월에 적신(賊臣) 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이진유(李眞儒)·이명의(李明誼)·정해(鄭楷)·윤성시(尹聖時)·서종하(徐宗廈) 등 7인이 연명으로 상소하였는데, 거기에 ‘복합(伏閤)·정유(庭籲)가 사흘에 이르렀습니다. 기사년의 대신(大臣)은 한나절 정청(庭請)하였어도 오히려 정조(鄭造)·윤인(尹訒)·정인홍(鄭仁弘)과 같은 죄로 배척하였으니, 저들도 양기(梁冀)·석현(石顯)·왕망(王莽)·조조(曹操)와 같은 주벌(誅罰)을 면하기 워낙 어려울 것입니다. 바라건대 명지(明旨)를 내려 역적 조성복과 네 명의 흉적을 모두 법으로 결단하소서.’ 하고, 드디어 말을 맺기를, ‘자신에게 나라의 안위(安危)가 달려 있는 대신이 사력(死力)을 다하는데, 대각인 자가 감히 음기(陰機)라는 따위 말로 억지로 죄안(罪案)을 만드니 그 마음쓰는 것이 흉악하고도 참혹합니다.’ 하였는데, 조태구를 가리킨 것이다. 상소가 들어가니, 사대신(四大臣)이 대명(待命)하였고, 이날 밤에 승지·삼사·경재(卿宰)·장신(將臣)이 혹 파직(罷職)되기도 하고 출송(黜送)되기도 하였으며, 김일경이 이조 참판(吏曹參判)이 되고 박필몽·이진유·이명의 등이 삼사가 되고 윤취상이 훈련 대장(訓鍊大將)이 되었다. 얼마 안가서 박상검이 문유도·석렬·필정과 함께 왕께서 조현(朝見)하는 청휘문(淸暉門)을 닫아 막아서 왕을 모해하는 것이 더욱 급해졌으므로, 왕께서 밤에 궁료(宮僚)를 불러 출합(出閤)하고 사위(辭位)하려 하셨는데, 보덕(輔德) 김동필(金東弼)이 그 불가함을 힘껏 아뢰었다. 이튿날 대비(大妃)께서 빈청(賓廳)에 봉서(封書)를 내리기를, ‘저사(儲嗣)를 정한 것은 선왕의 유교(遺敎)를 받든 것이고 주상(主上)께서 친히 작호(爵號)를 쓰셨고 내가 또 대신에게 하교하였는데, 불행히 궁인(宮人)·환시(宦寺)가 양궁(兩宮)에서 결탁하였다. 전에 내가 주상과 함께 궁인을 불러 꾸짖어 일렀는데도 궁인이 감히 흉패(凶悖)를 부렸으니, 이는 반드시 당률(當律)이 있을 것이다. 경들도 우리 주상과 동궁을 보호하여 3백 년의 종사를 지키고 우리 선왕의 유교를 저버리지 말아야 한다.’ 하셨다. 그래서 대신과 2품 이상과 정원과 삼사가 구대(求對)하여 논하니, 박상검·문유도·석렬·필정이 모두 처형되었다.
무릇 왕께서 저위(儲位)에 계신 동안에 간흉(奸凶)이 안팎으로 결탁하였으므로 옛 임금들이 어려워하던 처지에 놓이셨으나, 왕께서는 낯빛과 말에 나타내지 않고 응대하는 데에 도리가 있어서 마침내 궁위(宮闈) 안에 화기가 애연(藹然)하게 하셨으므로, 사람들이 이 때문에 왕께 성덕(聖德)이 있는 줄 알았다. 임인년 9월에 왕께서 치학(齒學)하셨다.
갑진년 8월에 경종의 병환이 위독해졌다. 당초 이광좌(李光佐)가 약원 도제조(藥院都提調)이었을 때에 성후(聖候)가 오래 낫지 않고 있을 때에 이공윤(李公胤)이 의업(醫業)에 종사하여 나라 안에서 이름났기 때문에 드디어 이공윤에게 주부(主簿)를 제수하여 약원에 들어와 약을 의논하게 하였는데, 이종윤은 사람됨이 도리에 어그러지고 경망하여 계묘년 여름부터 날마다 준공제(峻攻劑)를 썼으나 조정에서는 이공윤이 선의(善醫)라 하여 의심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성후가 더욱 위독해졌어도 이광좌가 곧 의약청(議藥廳)을 설치하지 않았는데, 왕께서 관대(冠帶)를 벗지 않고 경종께서 약을 견디시는지 알려고 경종께서 한 술을 드시면 왕께서도 한 술을 드시고 두 술을 드시면 또한 두 술을 드셨으며 울면서 이공윤에게 말씀하기를, ‘참 원기가 날로 떨어지니 지금이 어찌 제 소견을 세울 때이겠는가? 급히 인삼과 부자(附子)로 양기를 회복해 드리라.’ 하였으나, 이광좌와 이공윤은 전의 소견을 고집하고 끝내 인삼과 부자를 많이 쓰지 않았다.
경종께서 훙서(薨逝)하시니 왕께서 애훼(哀毁)가 도를 지나셨고 뭇 신하가 사위(嗣位)를 청하여도 물리치고 따르지 않으시므로, 대신·삼사·정원·종친·문무 백관(文武百官)이 여러 번 아뢰었으나 윤허받지 못하였다. 왕대비(王大妃)께서 수찰(手札)로 권하시고서야 왕께서 비로소 면복(冕服)을 입고 인정문(仁政門)에 이르렀으나 오히려 슬피 울부짖고 자리에 오르지 않으시며, 개복(改卜) 때에 행례(行禮)하여 왕대비 김씨를 대왕 대비(大王大妃)로 높이고 왕비 어씨(魚氏)를 왕대비로 높이고 빈(嬪) 서씨(徐氏)를 왕비로 올렸다. 왕께서 책보(冊寶)를 받으시려 할 때에 환시·궁인 중에 아직 박상검·필정의 무리가 많아서 방자하게 헐뜯는 것이 부도(不道)하고 보록(寶盝)을 섬돌 모퉁이에 던지는 소리가 어좌(御座)까지 들렸으나, 왕께서 못 들은 체하셨다. 아침·저녁의 곡전(哭奠)에는 반드시 친히 임하셨는데, 일찍이 풍비(風痺)를 앓아 침을 맞으시므로 약원에서 침은 상측(喪測)을 꺼린다 하여 곡림(哭臨)을 중지하기를 청하였으나, 끝내 듣지 않으셨다. 여가에는 만기(萬幾)에 부지런하여 조금도 쉬지 않으시므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근로가 너무 지나친 것은 몸을 보호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기름진 땅의 백성이 재주가 없는 것은 안일하기 때문이고 메마른 땅의 백성이 모두 재주가 있는 것은 근로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삼대(三代)의 임금은 근로로 다스렸거니와, 안일로 다스렸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하셨다.
이에 앞서 숙종 말년부터 경종 4년에 이르는 동안은 다 편찮아서 경연(經筵)과 차대(次對)를 행하지 못하셨는데, 왕께서 공제(公除)하고 나서는 곧 강행(講行)하셨다. 선을 권하고 악을 간한 승지(承旨)에게 상주어 언로(言路)를 열고 호피(虎皮) 대신 바치는 면포(綿布)를 폐지하여 민력(民力)을 펴게 하며, 여염집을 함부로 차지하는 일을 매우 금하고 옥에 갇혀 지체되어 있는 자를 소방(疏放)하며, 경외(京外)의 관원을 구임(久任)하여 성적을 요구하시니, 한 가지 영(令)이 나올 때마다 사방에서 눈을 씻고 기대하였다. 마침 천둥의 이변이 있었으므로, 왕께서 친히 글을 지어 정원에 내려서 구언(求言)하는 교서(敎書)를 대신 짓게 하셨는데, 거기에 대략 말하기를, ‘자신을 닦기를 잘하지 못하였는가?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이는 것이 극진하지 못하였는가? 자신을 봉양하는 것이 지나치게 사치하였는가? 신하를 대우하는 것이 성실하지 못하였는가? 어진 사람이 초야에 있어도 쓰지 못한 일이 있는가? 곤궁한 백성이 원통한 마음을 품어도 아뢰지 못한 일이 있는가? 조정이 화평하지 못하여 천기(天氣)를 손상하였는가? 사의(私意)가 마구 유행하여 공의(公議)를 막았는가? 아! 너희 근밀(近密)은 나를 대신하여 교서를 지어 널리 직언(直言)을 구하라. 말이 지나쳐도 내가 죄주지 않을 것이다. 아! 백성의 고통이 바야흐로 급하고 당습(黨習)의 다툼이 날마다 있으니,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내 잠자리가 어찌 편안하겠는가? 조정의 신하는 곧은 사람을 쓰고 굽은 사람을 버리며 방백(方伯)인 신하는 출척(黜陟)을 오직 밝게 하여 네 직무를 삼가서 위로 하늘의 경고에 답하라.’ 하였다. 정원에서 대신 짓지 말고 내리신 사륜(絲綸)을 중외에 포고(布告)하기를 청하였다. 그런데 왕께서 말씀하기를, ‘글이 졸렬하니 다시 대신 지어야 하겠다.’ 하시매, 정원에서 다시 말하기를, ‘신들이 대신 지으면 반드시 왕언(王言)만 못할 것입니다.’ 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어려워하는 일을 다시 요구하는 것은 예(禮)로 부리는 도리가 아니니 그 말대로 하라.’ 하셨다.
12월에 경종 대왕을 의릉(懿陵)에 장사하였다. 처음 복릉(卜陵)할 때에 왕께서 반드시 대비께 여쭈어 윤허를 받아야 결정하셨다. 국내(局內)에 있는 모든 백성의 전택(田宅)은 유사(有司)에 신칙(申飭)하여 후한 값을 주고 물러가게 하여 원망이 없게 하셨다. 이때 경자년의 대상(大喪)을 겪은 지 얼마 안 되었어도 유사가 오히려 궁중의 고사(故事)를 몰라 거행하는 데에 헷갈렸는데, 왕께서 크고 작은 일들을 남김없이 고증하여 가르쳐 주어 반드시 성신(誠信)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어그러지지 않게 하셨다.
원년(元年) 을사(乙巳) 춘정월(春正月)에 왕께서 하교하여 농사를 권하되, 방백에게 신칙하여 농사 시기를 빼앗지 말게 하시고, 사폐(辭陛)하는 수령(守令)은 문득 소견(召見)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라고 경계하셨다. 또 하교하기를, ‘우리 나라는 좁아서 사람을 등용하는 것이 넓지 못한데, 구신(舊臣)을 죄다 물리쳤으므로 조정에서 벼슬하는 자가 예전만 못하니 내가 매우 한스럽다. 바야흐로 해가 바뀌었으므로 만물과 함께 봄을 같이해야 할 것이니, 귀양간 사람을 대신과 금오(金吾)로 하여금 경중을 참작하여 소석(疏釋)하게 하라.’ 하셨다. 당초 김일경(金一鏡) 등 역적들이 상소하여 연명으로 차자를 올린 사대신(四大臣)을 배척하여 양기(梁冀)·석현(石顯)·왕망(王莽)·조조(曹操)에 견주고 나서 스스로 양립(兩立)할 수 없는 형세임을 알고 일대(一隊)를 일망 타진하여 그 부리와 싹을 끊으려고 하였다. 그래서 시정(市井)의 무뢰한 사람 목호룡(睦虎龍)을 추기어 상변(上變)하게 하여 드디어 큰 옥사(獄事)를 일으켜 사대신과 그 족당(族黨)을 죄다 죽이고 친지(親知)를 연좌시켜 팔도에 두루 편배(編配)하고는 이어서 맹약(盟約)하고 반사(頒赦)하였다. 그 교문(敎文)은 김일경이 지은 것인데, 일을 인용하여 말을 만든 것이 모두 흉패(凶悖)를 극진히 하여 칠적(七賊)이 상소한 사연과 안팎이 되고 선왕을 무함하여 성궁(聖躬)에도 미쳤으므로 사람들이 다 근심하고 분개하였으나 김일경·박필몽(朴弼夢)의 기염을 두려워하여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전년 겨울에 정언(正言) 이의천(李倚天)이 상소하여 논하니, 왕께서 드디어 김일경·목호룡을 국문(鞫問)하여 처형하고 법대로 노적(孥籍)하였으며, 박필몽 등 육적(六賊)은 당초에 관직을 삭탈한 뒤에 모두 위리 안치(圍籬安置)하였으나, 무고 당한 사람들은 미처 소석하지 못하였으므로 이 명이 있었다. 얼마 안 되어 경상도의 사인(士人) 김인수(金麟壽) 등이 상소하여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을 도봉 서원(道峰書院)에 다시 향사(享祀)하고 또 선정신 권상하(權尙夏)의 관작(官爵)을 회복시키기를 청하였는데, 이 또한 김일경 등이 출향(黜享)하고 삭탈(削奪)한 것이었다. 왕께서 말씀하기를, ‘사문(斯文)의 시비는 유림(儒林)에 달려 있고 조정에 달려 있지 않으니, 해조(該曹)를 시켜 그 관작을 회복하도록 하라.’ 하셨다.
이달에 왕께서 의릉(懿陵)에 거둥하려 하셨는데, 날씨가 아직 매우 추우므로 약원(藥院)에서 따뜻해지기를 기다리기를 청하였다. 왕께서 말씀하기를,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우로(雨露)가 이미 땅을 적시고 군자가 이를 밟으면 반드시 경동(警動)하는 마음이 생긴다.」 하였는데, 더구나 인산(因山) 때에 따라가지 못한 나이겠는가?’ 하고 마침내 따르지 않고 알릉(謁陵)하고 돌아오셨다. 마침 국옥(鞫獄)이 있었는데, 유사가 압슬형(壓膝刑)을 시행하기를 청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예전에 한 문제(漢文帝)는 육형(肉刑)을 없애고 당 태종(唐太宗)은 명당도(明堂圖)를 보고 오장(五臟)이 등에 걸려 있다 하여 드디어 태배법(笞背法)을 없앴고 아조(我朝)의 세종(世宗)께서도 태배법을 없애셨는데, 더구나 오형(五刑)에 없는 압슬형이겠는가? 영구히 없애라.’ 하셨다.
3월에 우의정(右議政) 정호(鄭澔)가 사대신이 원통하게 죽은 정상을 말하니, 왕께서 명하여 복관(復官)하고 치제(致祭)하고 증시(贈諡)하게 하였다. 이만성(李晩成)·홍계적(洪啓迪)·김운택(金雲澤)·김민택(金民澤)·이홍술(李弘述)·조성복(趙聖復) 등도 모두 복관하게 하고 고(故) 찬선(贊善) 이희조(李喜朝)도 증시하게 하셨다. 일찍이 소대(召對) 때에 연신(筵臣)에게 말씀하기를, ‘완곡하게 간(諫)하고 넌지시 간하는 것은 본디 신하가 임금을 바로잡는 요체이나, 임금으로부터 말하면 신하가 바른 말로 간하지 못하게 하고 도리어 완곡하고 넌지시 하는 데에 구구하게 만든다면, 또한 매우 부끄럽지 않겠는가?’ 하셨다.
하4월(夏四月)에 은둔하여 있는 어진 사람을 뽑고 지사(志士)를 구하여 경연관(經筵官)을 채우라고 명하셨는데, 장차 불러들여 고문(顧問)에 갖추려 하신 것이다. 우의정(右議政) 민진원(閔鎭遠)이 왕께 아뢰기를, ‘궁인(宮人)을 반드시 내비(內婢)에서 뽑고 양가(良家)까지 해가 미치지 않은 것은 선조(先朝)의 덕정(德政)입니다. 이제 이따금 양가에 해가 미친다 하니, 과연 그렇습니까?’ 하자, 왕께서 놀라 말씀하기를, ‘이제 액정(掖庭)을 조금이라도 내보내려고 하는데, 당 태종의 방출(放出)을 본받지는 못하더라도 어찌 더 뽑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양가의 딸은 그 부모가 어렵게 겨우 기른 것인데, 하루아침에 깊은 궁중에 유폐(幽閉)하는 것은 인정(仁政)이 아니다.’ 하고, 당장 명하여 중관(中官)을 잡아다 문초하고 궁노(宮奴)를 결장(決杖)하여 정배(定配)하게 하셨다.
5월에 형조(刑曹)에서 제도(諸道)의 강도죄(强盜罪)를 핵사(覈査)하여 아뢰니, 왕께서 형관(刑官)에게 말씀하기를, ‘살리기를 좋아하고 죽이기를 싫어하는 것은 사람이 누구인들 이런 마음이 없겠는가? 기한(飢寒)에 몰리고 침어(侵漁)에 괴로워서 이 지경에 빠지는 것을 스스로 깨닫지 못한 것이니, 다 내 가르침이 백성에게 미치지 못하여 그런 것이다. 경들은 불쌍히 여기고 기뻐하지 말며 짐작하여 빨리 판결하여 옥에 오래 머물러 있지 않게 하라.’ 하셨다.
추7월(秋七月)에 크게 가무니, 왕께서 하교하여 구언(求言)하고 사직(社稷)에 친히 기도하여도 비가 내리지 않으므로 장차 북교(北郊)에서 다시 친히 기도하시려 하는데, 유사(有司)가 말하기를, ‘전례가 없으니 남교(南郊)로 개정하소서.’ 하였다. 왕께서 말씀하기를, ‘선조에서는 선농단(先農壇)에 특별히 제사하였는데, 또한 본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드디어 정성을 기울이고 정결을 다하여 북교에서 기도하셨다. 관제(祼祭)하고 나서 빽빽한 구름이 사방에서 모여 비가 죽죽 내려서 면복(冕服)이 죄다 젖었으나 왕께서 규(珪)를 잡고 더욱 공손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용의(容儀)를 잃지 않으시니, 제사에 참여한 자들이 모두 흠탄(欽歎)하였다.
8월에 충청도 도신(道臣)에게 명하여 고(故) 충신(忠臣) 홍익한(洪翼漢)·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 등의 묘석(墓石)을 세우게 하시고, 성조(聖祖)께서 일찍이 세 충신에게 전토(田土)를 내리셨으나 유사가 인순(因循)하여 오래 되어도 주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신칙(申飭)하여 죄다 주게 하셨다.
동11월(冬十一月)에 삼남(三南)에 기근이 들었는데, 왕께서 궁납미(宮納米)를 줄여서 진휼(賑恤)에 보태고 말씀하기를, ‘선조에서는 북관(北關)의 공은(貢銀)이 있었으므로 흔히 은으로 진휼에 보탰으나, 이제는 은이 베[布]로 바뀌었으므로 선조의 유의(遺意)를 본받으려 하여도 할 수 없다.’ 하셨다.
12월에 환장암(煥章庵)에 갈무리되어 있던 의종 황제(毅宗皇帝)의 어묵(御墨)을 바친 자가 있었는데, 왕께서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며 말씀하기를, ‘명나라가 재조(再造)하여 준 은혜는 영구히 잊을 수 없다. 그러나 세월이 점점 오래 되면 인심이 버릇되어 예사로 여기기 쉬우니, 우리 성조께서 대의(大義)를 천명하지 않으셨다면 동토(東土)의 백성이 어찌 존주(尊周)의 의리를 알겠는가?’ 하였다. 이어서 명하여 남한(南漢)에 있는 현절사(顯節祠)에 치제(致祭)하고 또 강도(江都)에 있는 충렬사(忠烈祠)에 제사하고, 또 통제영(統制營)에 있는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사당에 제사하고 또 화양동(華陽洞)에 있는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의 사당에 제사하게 하셨다. 곧 만동묘(萬東廟)에 사액(賜額)한 어묵(御墨)을 돌에 새기게 하고 그 아래에 친서(親序)하셨는데, 그것을 인쇄하여 문정공의 손자에게 내리고 석본(石本)을 내부(內府)에 갈무리해 두게 하셨다. 일찍이 야대(夜對) 때에 날씨가 매우 추우므로 승지(承旨)가 와내(臥內)에 유신(儒臣)을 불러들여 강독(講讀)하기를 청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인정은 그믐에 가까워지면 게을러지기 쉽거니와, 의관(衣冠)을 바르게 하면 정신을 떨쳐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하셨다.
2년 병오(丙午) 춘정월(春正月)에 상참(常參)과 경연(經筵)을 거행하면서 왕세자(王世子)에게 명하여 서연(書筵)을 열게 하셨다. 구례(舊例)로는 한추위와 한더위에는 양연(兩筵)을 멈추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왕께서 하교하기를, ‘대우(大禹)는 촌음(寸陰)을 아꼈으니 뭇사람은 분음(分陰)을 아껴야 할 것이다. 이제 정월이 이미 시작되었는데 어찌 날이 따뜻해지기를 기다리겠는가?’ 하셨다. 상신(上辛)에 사직(社稷)에서 친히 기곡(祈穀)하시고 해마다 상례(常例)로 삼으셨다.
2월에 왕께서 삼남(三南)의 황정(荒政) 때문에 하교하기를, ‘예전 선조(先朝) 때에 영동 감진 어사(嶺東監賑御史)가 기민도(飢民圖)를 올렸는데 바로 어제시(御製詩)가 있었다. 내가 일찍이 그 그림을 펴 보니 굶어 죽은 자와 쓰러진 자와 허둥지둥 죽을 마시는 자가 눈앞에 있는 듯하였는데, 이제 삼남의 백성도 어찌 이와 다르겠는가? 설진(設賑)한 고을의 백성은 한 해의 적곡(糴穀)을 감면하고 그 다음 가는 것은 반을 감면하라.’ 하셨다.
하4월(夏四月)에 종묘(宗廟)의 경종실(景宗室)을 더 세우는 일이 끝났는데, 종신(宗臣)이 상소하기를, ‘태조(太祖)께서 비로소 종묘를 세우셨는데 이제에 이르러서 중건(重建)한 것은 경사이니, 칭경(稱慶)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임금과 신하가 한마음으로 조종(祖宗)의 성헌(成憲)을 삼가 지켜서 깊은 인애(仁愛)와 두터운 은택이 백성의 피부와 골수에 스며 젖게 하는 것이 성대한 행사보다 훨씬 낫다. 어찌하여 칭경하겠는가?’ 하셨다.
추8월(秋八月)에 사간(司諫) 이병태(李秉泰)가 임금의 과실을 가리켜 아뢴 것이 매우 절실하고 정직하였는데, 왕께서 호피(虎皮)를 내려 장려하셨다.
9월에 명하여 고(故) 부제학(副提學) 권변(權忭)에게 증시(贈諡)하게 하셨다. 권변은 숙종 중년(中年)부터 영달하는 길에 대하여 생각을 끊었는데, 사대부들이 그 풍채를 존경하였으므로 이 명이 있었다.
동10월(冬十月)에 경종 대왕(景宗大王)과 단의 왕후(端懿王后)를 태묘(太廟)에 부제(祔祭)하였다. 예(禮)가 끝나고 왕께서 돌아와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진하(陳賀)를 받고 세 가지를 백관에게 칙유(飭諭)하셨는데, 첫째는 붕당(朋黨)을 징계하는 것이고 둘째는 사치를 경계하는 것이고 셋째는 술 마시기를 좋아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었다.
11월에 왕께서 문묘(文廟)에 참배하여 작헌(酌獻)하고 명륜당(明倫堂)에 나아가 친히 선비들을 책시(策試)하고 말씀하기를, ‘내가 나라를 다스릴 인재를 얻어 겉치레만 화려한 풍속을 없애고 문산(文山)의 정충(精忠)을 본받게 하려 하니 각각 실속을 힘써 내 뜻을 저버리지 말라.’ 하셨다.
【원전】 44 집 543 면
【분류】 *왕실-국왕(國王)


[주D-001]불곡(不穀) : 왕후(王侯)의 겸칭.
[주D-002]경자년 : 1720 숙종 46년.
[주D-003]입년(立年) : 30세.
[주D-004]양암(諒闇) : 임금이 여묘살이하는 것.
[주D-005]보력(寶曆) : 임금의 나이.
[주D-006]무진년 : 1688 숙종 14년.
[주D-007]신충(宸衷) : 임금의 뜻.
[주D-008]정유년 : 1717 숙종 43년.
[주D-009]복합(伏閤) :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 조신(朝臣) 또는 유생(儒生)들이 대궐문 밖에 이르러 상소(上疏)하고, 임금의 재가(裁可)가 날 때까지 엎드려 청하던 일.
[주D-010]기사년 : 1689 숙종 15년.
[주D-011]임인년 : 1722 경종 2년.
[주D-012]치학(齒學) : 세자가 국학에서 나이의 순서에 따라 예양(禮讓)하는 것. 여기에서는 입학하는 것을 뜻함.
[주D-013]갑진년 : 1724 경종 4년.
[주D-014]계묘년 : 1723 경종 3년.
[주D-015]근밀(近密) : 임금의 측근.
[주D-016]경자년 : 1720 숙종 46년.
[주D-017]문산(文山) : 문천상(文天祥)의 호.
영조 대왕 행장(行狀)②

3년 정미(丁未) 춘정월(春正月) 왕께서 친히 사직(社稷)에서 기곡(祈穀)하려 할 때에 하교하기를, ‘백성을 위하여 기곡하는데 감히 스스로 안일할 수 있겠는가?’ 하고는 재전(齋殿)까지 걸어가시는데, 승지들이 연(輦)을 타시기를 굳이 청하였으나 듣지 않으셨다. 고향에 돌아가 어버이를 뵈려는 유신(儒臣)이 어버이가 앓는다고 휴가를 청하였는데, 왕께서 말씀하기를, ‘참으로 앓는다면 인정이 워낙 그래야 마땅하겠으나, 병이 없는데 병이 있다고 하였다면 임금에게 고하는 것이 성실하지 않을 뿐더러 아들의 도리로서도 어떠하겠는가?’ 하고, 그 말을 여고(予告)로 고치라고 명하셨다.
3월에 경연(經筵)에 특진(特進)하는 무신(武臣)에게 명하여 각각 문의(文義)를 설명하게 하셨다. 이에 앞서 한 무신이 문의를 설명하였다가 승지의 찰추(察推)를 받았는데, 이때부터 특진하는 무신이 서로 경계하여 감히 말하지 못하므로 이 명이 있었다. 이때 은거하던 어진 선비로서 경연관(經筵官)에 뽑힌 자가 죽었는데, 연신(筵臣)이 증관(贈官)하기를 청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살았을 때에도 작록(爵祿)으로 매어 두지 않았는데, 죽은 뒤에 어찌하여 반드시 증관해야 하겠는가?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고 본도(本道)를 시켜 상장(喪葬)을 돕게 하라.’ 하셨다.
하5월(夏五月)에 좌의정(左議政) 홍치중(洪致中)이 경외(京外)의 전화(錢貨)가 다하였다 하여 돈을 주조(鑄造)하여 보태기를 청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돈을 주조하는 폐단은 돈이 귀한 것보다 훨씬 더하다.’ 하고 끝내 윤허하지 않으셨다.
4년 무신(戊申) 춘3월(春三月)에 영남(嶺南)의 역적 이인좌(李麟佐)·정희량(鄭希亮) 등이 모반하였는데, 왕사(王師)가 물리쳐 평정하였다. 이에 앞서 역적 김일경(金一鏡)·목호룡(睦虎龍)이 처형되고 박필몽(朴弼夢) 등 여러 역적이 죄다 위리 안치(圍籬安置)되었으므로, 그 무리가 스스로 역절(逆節)이 천지 사이에 용납되기 어려움을 헤아리고 박필몽의 종부제(從父弟) 박필현(朴弼顯)과 김일경의 아들 김영해(金寧海)와 목호룡의 형 목시룡(睦時龍) 등과, 김일경·박필몽의 심복인 심유현(沈維賢)이 기사년에 죄로 죽은 사람 민종도(閔宗道)·이의징(李義徵)의 아들·손자 및 실지(失志)하여 나라를 원망하는 자와 체결하고 흉언(凶言)을 터무니없이 떠벌리어 인심을 속여 현혹하였다. 그리고 이인좌·정희량을 추대하여 원수(元帥)로 삼고 이유익(李有翼)·이하(李河)를 모주(謀主)로 삼고 평안 병사(平安兵使) 이사성(李思晟)은 관서(關西)에서 앞장서 난을 일으키고 총융사(摠戎使) 김중기(金重器)·금군 별장(禁軍別將) 남태징(南泰徵)은 안에서 화응(和應)하기로 약속하고 이달 20일에 서울을 침범하여 밀풍군(密豊君) 이탄(李坦)을 추대하려고 뱀·지렁이처럼 모여 얽혀서 화를 빚은 지 자못 오래 되었으나 조정에서는 까마득히 몰랐다.
이때에 이르러 봉조하(奉朝賀) 최규서(崔奎瑞)가 용인(龍仁)에 물러가 사는 중에 이웃 사람 안박(安鑮)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적정(賊情)을 알고 급히 달려 들어와 고하고 수원 부사(水原府使) 송진명(宋眞明)이 이어서 또 상변(上變)한 사람을 형틀을 채워 압송하였다. 왕께서 곧 명하여 병조 판서(兵曹判書) 오명항(吳命恒)을 사도 도순무사(四道都巡撫使)로 삼고 박문수(朴文秀)·조현명(趙顯命)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아 보좌하여 경영(京營)의 군사를 거느리고 안성(安城)·죽산(竹山)을 따라 남으로 내려가 문죄(問罪)하게 하고, 이여적(李汝迪)·박동추(朴東樞)를 계원장(繼援將)으로 삼아 경영의 군사와 개성(開城)의 마군(馬軍)을 거느리고 도순무의 후원이 되게 하고, 장붕익(張鵬翼)을 진어 대장(鎭禦大將)으로 삼아 북한성(北漢城) 아래에 진쳐서 서우(西憂)를 막게 하였다가 곧 김중기를 갈음하여 총융사를 삼아 수원에 출진(出鎭)하게 하였다. 정찬술(鄭纘述)을 포도 대장(捕盜大將)으로 삼고 이정제(李廷濟)를 경기 감사(京畿監司)로 삼아 한강 동작진(銅雀津)을 방수(防守)하게 하고, 김동필(金東弼)을 경략사(經略使)로 삼아 개성부(開城府)와 남한(南漢)의 군사를 나누어 용인 등 여러 요로(要路)를 차단하게 하였다. 유척기(兪拓基)를 양주 목사 겸 동로 진어사(楊州牧使兼東路鎭禦使)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고암(鼓巖)에 나아가 지키게 하고, 김재로(金在魯)를 충추 목사 겸 호서 안무사(忠州牧使兼湖西按撫使)로 삼아 조령(鳥嶺) 등 요처를 제압하게 하였다. 권업(權)으로 권첨(權詹)을 갈음하여 충청 감사(忠淸監司)로 삼고 이광덕(李匡德)으로 정사효(鄭思孝)를 갈음하여 전라 감사(全羅監司)로 삼고 황해 감사(黃海監司) 김시혁(金始㷜)이 3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동선령(洞仙嶺)을 막아 지키게 하고, 병사(兵使) 원백규(元百揆)가 친기위(親騎衛) 3백 인을 거느리고 청석령(靑石嶺)을 막아 지키게 하였다가 이사성이 잡힌 뒤에 군사를 파환(罷還)하게 하였다. 박사수(朴師洙)를 영남 안무사(嶺南按撫使)로 삼아 안동(安東) 등 좌도(左道)를 돌아다니며 위유(慰諭)하고 소모(召募)하게 하고, 윤순(尹淳)을 감호 제군사(監護諸軍使)로 삼아 영애(嶺隘)를 살피고 군사를 나누어 방수하게 하고, 송인명(宋寅明)을 대사간 비국 제조(大司諫備局提調)로 삼아 금중(禁中)에 있으면서 일을 의논하게 하였다.
다 왕께서 뭇 방책을 수합하여 결단하고 기회를 타서 승리를 취하되 털 하나가 끼어들 틈이 없게 하셨으므로 나라 사람이 의지하여 편안하였다. 왕사(王師)가 미처 떠나기 전에 적이 밤에 충청 병영(忠淸兵營)에 들어가 병사(兵使) 이봉상(李鳳祥)을 죽였다. 그래서 영장(營將) 남연년(南延年)과 이봉상의 편비(褊裨) 홍임(洪霖)이 적을 욕하며 굽히지 않고 죽었는데, 왕께서 남연년을 사나운 바람에도 쏠리지 않는 굳센 풀이라고 칭찬하였다. 곧 명하여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증직(贈職)하고 그 여문(閭門)에 정표(旌表)하고 이봉상의 아들 이한필(李漢弼)과 남연년의 아들 남덕하(南德夏)를 기복(起復)하고 그 품계(品階)를 올려 종군(從軍)하여 원수를 갚게 하시니, 사람들이 다 떨쳐 일어나 힘쓰려고 생각하였다.
왕께서 일찍이 장전(帳殿)에 나아가 수인(囚人)을 국문(鞫問)하실 때에 좌우를 물리고 송인명(宋寅明)을 불러 비밀히 말씀하기를, ‘아까 수인이 이사성을 끌어댔을 때에 시위(侍衛)하던 선전관(宣傳官) 이사필(李思弼)이 황급히 나갔는데, 이 자는 이사성에게 무슨 관계가 되는 자인가?’ 하시매, 대답하기를, ‘종부제(從父弟)입니다.’ 하였다. 이날 저녁에 궐직(闕直)하였기 때문에 이사필을 잡아 가두고 이사성이 처형되기에 이르러 이사필을 군전(軍前)에 효시(梟示)하였다. 이사성은 평소에 재주가 있다고 일컬어졌으므로 조정에서 금오랑(金吾郞)을 보내어 잡게 하고 나서도 변이 있을세라 의심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관서의 수령(守令)이 이사성이 제집에 보낸 글을 올렸는데, 모두 잗달고 부녀(婦女)에 관한 말이었다. 왕께서 기뻐하며 ‘걱정 없다.’ 하셨는데, 말씀이 끝나기 전에 금오랑이 이사성을 잡아서 이르렀다. 무릇 왕께서 시기에 알맞게 헤아리시는 것이 흔히 이러하였으므로 군사(軍事)를 조치하는 데에 빠뜨리시는 것이 없었다. 왕사가 안성·죽산에 이르러 적을 만나 마른 나무를 꺾고 무너진 것을 당겨 쓰러뜨리듯이 한 번 북을 쳐 사기를 떨쳐서 죄다 섬멸하고 적의 괴수 이인좌 등을 함거(檻車)에 실어 서울로 보냈다. 경상 감사(慶尙監司) 황선(黃璿)이 격문(檄文)을 보내어 성주 목사(星州牧使) 이보혁(李普赫)을 우방장(右防將)으로 삼아 군사를 경계하여 합천군(陜川郡)에 들어가 적병을 엄습하여 공격하게 하여 참획(斬獲)이 매우 많았고, 선산 부사(善山府使) 박필건(朴弼健)을 좌방장(左防將)으로 삼고 곤양 군수(昆陽郡守) 우하형(禹夏亨)이 군사를 거느리고 박필건의 군사에 속하여 우지령(牛旨嶺)에 웅거하게 하여 적의 우두머리 정희량·이웅보(李熊輔)의 머리를 베었으므로, 여러 적이 멀리서 바라보고 절로 무너졌다.
그래서 흉역(凶逆)이 죄다 평정되니 드디어 명하여 파병(罷兵)하고 귀농(歸農)하게 하셨다. 오명항이 군사를 거느리고 돌아오니, 왕께서 남문루(南門樓)에 나아가 헌괵(獻馘)을 받고 차등을 두어 논공(論功)하였으니 운대(雲臺)에 초상을 그리고 철권(鐵券)을 내려 주었다. 이어서 시위(侍衛)하는 장사(將士)에게 하유(下諭)하기를, ‘너희들 중에 친속이 흉역이거나 오래 사귄 친구가 흉역인 자가 있더라도 그 모의를 몰랐으니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생각을 품지 말라. 내가 덕이 부족할지라도 어찌 면유(面諭)하고서 어기겠는가?’ 하시매, 장사가 모두 느껴 울었다. 이달 왕께서 세자와 함께 숙빈(淑嬪)의 묘(廟)에 참배하셨을 때에, 잠저(潛邸)에서 부리던 가까이 모신 구사(丘史)가 묘 안에서 잠시 뵙고 문안드리려 하였다. 그런데, 홍문관(弘文館)에서 상차(上箚)하기를 ‘예(禮)에 어그러지게 뵈는 것을 동궁(東宮)에게 보여서는 안되겠습니다.’ 하니, 왕께서 칭찬하고 곧 명하여 진문(陣門) 밖으로 몰아 내게 하셨다.
추9월(秋九月) 왕께서 정릉(靖陵)에 거둥하실 때에 길을 치느라 백성의 무덤을 무너뜨리는 것을 보고 왕께서 노하여 말씀하기를, ‘백성이 국법을 업신여기고 임금이 다니는 길가에 장사지내는 것은 죄이다. 그러나 백성의 무덤을 무너뜨리는 것이 어찌 임금의 정치이겠는가?’ 하고, 드디어 지방관(地方官)에게 벌을 내렸다. 이때 대풍(大豊)이 들었으므로 대왕 대비와 왕대비께 진연(進宴)하고 나이가 여든 이상인 조정의 신하와 나이가 아흔 이상인 서민에게 술·쌀과 어육(魚肉)을 차등을 두어 내리셨다.
동10월(冬十月)에 왕께서 장차 대향(大享)을 친히 행하려 하는데 마침 편찮으시고 날씨도 매우 추우므로 대신이 대행(代行)을 청하였다. 왕께서 말씀하기를, ‘예전에 명나라 인종 황제(仁宗皇帝)가 병을 견디고 친향(親享)하였는데 땀이 옷에 배고 병이 나았다 하니 또한 본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마침내 친향하셨다. 그런데 신관(晨祼)부터 망예(望瘞)까지 정성스러움과 공경스러움이 애연(藹然)하여 승강(昇降)하고 보추(步趨)하시는 것을 바라보면 신(神)과 같았다.
5년 기유(己酉) 춘정월(春正月)에 하교하여 농사를 권하고 수령(守令)에게 신칙(申飭)하여 백성에게 종자와 양식을 도와 주게 하셨는데, 해마다 상례(常例)로 삼았다. 왕께서 바야흐로 은거하여 있는 어진 선비를 부르려 하시는데, 한 간관(諫官)이 은례(恩禮)가 너무 지나침을 말하니, 왕께서 노하여 말씀하기를, ‘이것은 임금이 은거하여 있는 어진 선비를 경시하는 마음을 열어 주는 것이다.’ 하고 드디어 벌을 내렸다. 이때 왕께서 양역(良役)의 폐단을 바로잡는 일에 마음을 단단히 쓰셨는데, 일을 맡은 자가 경용(經用)을 채울 길이 없는 것을 괴로워하니, 왕께서 하교하기를, ‘신하들은 나에게 천박하지 않기를 바라는데, 내 정사는 오히려 느슨하다. 또 한 문제(漢文帝)가 전조(田租)의 반을 줄여 준 것이 전후에 잇달았던 것은 다름이 아니라 절약하였기 때문이다. 나라에 참으로 여유가 있다면 한 백성에게 두 필(匹)인들 어찌 감면하기 어렵겠는가? 궁전(宮田) 중에서 정제(定制) 이외에 면세된 것은 모두 세를 내게 하고 각 아문(衙門)·서원(書院)의 위전(位田)도 이와 같이 하라.’ 하셨다. 이윽고 정신(廷臣)에게 하유하기를, ‘옛말에 이르기를 「궁중에서 고계(高髻)를 좋아하면 사방에서는 높이가 한 자가 된다.」 하였으니, 본뜨는 선례가 있다. 예전에 우리 선조(宣祖)께서는 이불과 바지가 다 목면포(木綿布)이었으므로 궁중에서 아름다운 일로 전해 온다. 나는 본디 화사한 것을 좋아하지 않고 또 성조(聖祖)를 본받으므로 상방(尙方)을 시켜 흑포립(黑布笠)을 짓게 하였다. 대저 금주(金珠)·금수(錦繡)는 우리 나라의 재화가 아닌데 나라 풍속이 이처럼 좋아하니, 어찌 황금이 흙 값과 같게 할 수 있겠는가? 늙은 신하는 그만이겠으나, 나이 젊은 신하는 뒷날에 반드시 내 뜻이 조금 펴진 것을 볼 것이다.’ 하시매, 우의정(右議政) 이태좌(李台佐)가 말하기를, ‘공자(孔子)가 「천승(千乘)의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는 용도를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한다.」 한 것이 이러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 한 가지 선정(善政)을 행하고 내일 한 가지 선정을 행하면 비운(否運)을 태운(泰運)으로 돌리기가 어찌 어렵겠습니까? 다만 앞으로 나가는 데 날랜 자는 뒤로 물러나는 데도 빠르니, 이것도 성심(聖心)이 힘쓰셔야 할 것입니다.’ 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착하다. 내가 동궁에 있을 때에 궁료(宮僚)가 경계를 아뢰면 듣기 싫어한 적이 없거니와, 경의 말이 내 병통을 절실히 맞혔으니, 마음에 두고 잊지 않겠다.’ 하셨다.
3월에 조정에서 무신년의 난을 겪은 지 얼마 안되었으므로 모든 흉역(凶逆)의 근족(近族)을 직임에 거의(擧擬)하지 않으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진(晉)나라의 왕도(王導)는 왕돈(王敦)의 근족이 아니었는가? 이전에 죄인의 공초에 이름이 나온 자는 흑백을 가려 석방하라. 더구나 국법이 죄를 연좌하지 않는데도 여러 비슷한 죄목 속에 놓은 것은 왕정(王政)에 어그러지니, 이제부터 등용하라.’ 하셨다.
하4월(夏四月) 왕께서 친히 종묘의 하향(夏享)을 행하실 때에 재전(齋殿)에 들어가 하교하기를, ‘경외(京外)의 백성이 다 조종(祖宗)의 백성이나, 서울 백성은 경작하지 않고 양잠(養蠶)하지 않으므로 부모를 섬기고 처자를 기르는 데에는 다 공미(貢米)에 의지하고 있다. 그런데 유사(有司)인 자가 내가 임문(臨門)하고 주교(駐橋)하여 하유한 것을 본받지 않고 한갓 비용을 아끼려고 마음먹으니, 어찌 가까운 곳에서부터 먼 데에 미치는 도리이겠는가? 유사에 신칙하여 내가 태묘(太廟)에 들어가 느낌을 일으킨 것을 저버리지 말게 하고 또한 팔도(八道)·양도(兩都)로 하여금 첫봄에 하교한 것을 성실히 따르게 하라.’ 하셨다.
5월에 호조(戶曹)에서 북관(北關)에 은광(銀礦)을 설치하기를 청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당(唐)나라 어사(御史) 권만기(權萬紀)가 은을 캐기를 청하니 태종(太宗)이 「수백만 민(緡)을 많이 얻는 것이 어찌 한 어진 인재를 얻는 것만 하겠느냐?」고 하였으니, 제왕의 체모가 있다 하겠다. 그만두어서 예전에 당 태종만이 아름다움을 독차지하게 하지 말라.’ 하셨다.
추9월(秋九月) 탄일(誕日)에 유신(儒臣)이 《금감록(金鑑錄)》을 본떠 경계를 아뢰니, 왕께서 《근사록(近思錄)》을 내려서 상주셨다.
12월에 숙종(肅宗)의 묘(廟)를 받들어 세실(世室)에 들였는데, 시임(時任)·원임(原任)인 대신들의 청을 따른 것이다. 6년 경술(庚戌) 춘정월(春正月)에 왕께서 《동국통감(東國通鑑)》을 강독(講讀)하셨는데, 연신(筵臣)에게 말씀하기를, ‘공자가 《춘추(春秋)》를 짓되 반드시 천자(天子)를 높인 것은 임금은 임금의 도리를 다하고 신하는 신하의 도리를 다하는 의리를 바르게 하기 위한 것이다. 고려(高麗)는 일찍이 송(宋)을 신하로서 섬겼으니, 휘종(徽宗)·흠종(欽宗)의 이름을 국사(國史)에 직서(直書)한 것이 옳겠는가? 우리 나라는 효묘(孝廟)·성고(聖考)께서 존주(尊周)하신 이후로 한 모퉁이에 있는 청구(靑丘)만이 대명 일월(大明日月)을 보전하였으니, 너희들은 선조(先朝)의 대의(大義)를 잊지 말라.’ 하셨다. 이에 앞서 찬집청(纂輯廳)을 설치하고 대제학(大提學) 이덕수(李德壽)에게 명하여 《숙묘보감(肅廟寶鑑)》을 짓게 하셨는데, 이때에 이르러 올리니, 왕께서 여러 번 느껴 울며 계술(繼述)을 잘할 것을 스스로 힘쓰셨다.
2월 왕께서 장차 영릉(寧陵)에 거둥하시려 할 때에 여주(驪州)·이천(利川) 사이에 이따금 여기(癘氣)가 있었다. 그러나 뭇 신하가 여기를 말하면 임금의 마음을 편하게 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드디어 다른 일을 핑계하여 홍문관(弘文館)에서 차자를 올려 말리니, 왕께서 꾸짖기를, ‘너희들은 성현의 글을 읽었고 벼슬이 경악(經幄)에 있는데 부인네가 꺼리는 것으로 임금에게 권하니, 내가 부끄럽게 여긴다.’ 하셨다. 대신과 삼사(三司)와 2품(品) 이상이 서로 따라서 힘껏 다투었으나, 왕께서 끝내 듣지 않으시고, 지나는 길에서 경작하는 백성에게 신칙하여 다들 파식(播植)을 그치지 말게 하며 말씀하기를, ‘이 또한 경작을 시찰하는 뜻이다.’ 하셨다. 회란(回鑾) 때에 광주(廣州)에 이르러 서장대(西將臺)에 올라 성조(聖祖)의 지사(志事)를 느끼고 부앙(俯仰)하며 크게 탄식하셨다.
3월에 나홍언(羅弘彦)이 폐출(廢黜)된 종실(宗室) 이해(李垓)와 이기(李圻)를 추대하려고 꾀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해와 기는 경신년에 죄로 죽은 반역한 종실 이정(李楨)과 이남(李枏)의 종손(從孫)이고 기사년에 죄로 죽은 사람 민취도(閔就道)의 외손(外孫)이며, 나홍언은 무신년의 역적 나숭곤(羅崇坤)·나숭대(羅崇大)의 친속이고 역적 정사효(鄭思孝)의 우서(友壻)이다. 《삼강행실(三綱行實)》·《이륜행실(二倫行實)》 등 서적을 팔도에 반포하고 명하여 인쇄하여 널리 펴서 백성이 보고 느끼게 하라 하셨는데, 두 서적은 다 세종(世宗) 때에 지은 것이다. 이때 북관(北關)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어사(御史)를 보내어 진정(賑政)을 살피게 하고 또 독운 어사(督運御史)를 영남(嶺南)에 보내어 포항창(浦項倉)의 곡물을 도련포(都連浦)로 날라 바닷길로 가서 구제하게 하고 태복(太僕)의 목장 중에서 일굴 만한 땅은 백성에게 일구도록 허가하셨다. 그래서 북관의 백성이 한 사람도 버려져 야위지 않았다.
하5월(夏五月)에 왕께서 《숙묘보감》을 보다가 숭인전(崇仁殿)·무열사(武烈祠)에 치제(致祭)하였다는 글에 이르러 감탄하여 말씀하기를, ‘우리 동방이 오랑캐의 풍속을 면한 것은 기자(箕子)의 팔조(八條)가 있는 데에 힘입은 것인데, 보록(寶錄)이 아니면 잊을 뻔하였다.’ 하고, 드디어 예관(禮官)을 보내어 숭인전·무열사에 치제하게 하고 곧 명하여 악 무목(岳武穆)의 《정충록(精忠錄)》을 구입하여 바치게 하셨다. 이에 앞서 무신년의 역적 최필웅(崔必雄)이 망명하였다가 환관(宦官)에게 잡혀서 바쳐졌는데, 왕께서 환관에게 상주되 녹훈(錄勳)은 윤허하지 않으셨다. 이때에 이르러 연신(筵臣)이 말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중관(中官)을 책훈(策勳)하는 것은 그 버릇을 길게 할 수 없다.’ 하고, 끝내 윤허하지 않으셨다.
6월에 선의 왕후(宣懿王后) 어씨(魚氏)께서 훙서(薨逝)하시니, 왕께서 갑진년과 마찬가지로 거상(居喪)하셨다. 대왕 대비(大王大妃)께서 지나친 예(禮)라 하시고 대신(大臣)·중신(重臣)도 말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역대의 임금을 두루 보면 능히 계체(繼體)가 중하다는 것을 아는 자가 드물다. 내가 이렇게 하는 까닭은 후왕(後王)이 계체가 중하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하셨다.
7년 신해(辛亥) 춘3월(春三月)에 왕께서 《주례(周禮)》를 강독(講讀)하다가 사구(司寇)는 방금(邦禁)을 맡는다는 글에 이르러 말씀하기를, ‘금(禁)이라는 것은 미연에 막는 것이다. 이제 추조(秋曹)·경조(京兆)·백부(柏府)에서 수속(收贖)만을 힘쓰고 범하는 자가 많지 않을세라 염려하니, 방금을 설치한 것이 참으로 그런 것이겠는가? 신칙하라.’ 하셨다.
하5월(夏五月)에 가물었으므로 왕께서 남교(南郊)·북교(北郊)에서 두루 기도하매 문득 비가 내렸으나 줄기차지 않으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아! 또 흉년이 들겠으니 진휼(賑恤)할 방도를 의논하라.’ 하셨다. 대신이 돈을 주조하여 경비를 대충하고 그 곡물을 저축하였다가 진휼하기를 청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그렇지 않다. 곡물은 관가에 있지 않으면 백성에게 있는 것이다. 굶주린 뒤에 진휼하는 것이 어찌 미리 백성에게 흩어 주어 백성이 굶주리지 않게 하는 것만 하겠는가? 백성이 넉넉하면 임금이 누구와 함께 넉넉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이를 말하는 것일 것이다.’ 하시매, 신하들이 다 머리를 조아리고 칭선(稱善)하였다.
추8월(秋八月)에 장릉(長陵)을 교하(交河)에 옮겼다. 이에 앞서 옛 장릉에 뱀·살무사가 많다는 말이 있으므로 왕께서 대신에게 명하여 살펴보게 하였더니 과연 그러하므로 왕께서 드디어 옮기기로 뜻을 정하였다. 옮기는 날에 구릉(舊陵)에 거둥하셨다가 신릉(新陵)에 따라가 크고 작은 일들을 몸소 감독하시고, 일을 마치고 나서 하교하기를, ‘백성이 노고하였다. 백성의 부모가 되어 어찌 사냥이 아닌데 백성이 감히 노고를 말하라 할 수 있겠는가? 교하(交河)·파주(坡州)·양주(楊州)·고양(高陽) 네 고을 백성의 공세(貢稅)·조포(調布)는 반을 줄이고 우졸(郵卒)은 묘당(廟堂)을 시켜 은혜를 베풀게 하라.’ 하셨다. 당초 구릉의 송백(松柏)은 다 효묘(孝廟)께서 손수 심으신 것인데, 왕께서 그 종자를 가져다 손수 신릉에 부리고 말씀하기를, ‘내가 영릉(寧陵)의 손때를 느낀 것처럼 내 자손이 내 손때를 느끼게 하려는 것이다.’ 하셨다.
9월에 연신(筵臣)이 《오례의(五禮儀)》에 탄일(誕日)의 진하(陳賀)가 있는데 왕께서 탄일의 진하를 받지 않는 것은 지나치다고 말하니, 왕께서 탄식하며 말씀하기를, ‘정자(程子)가 「부모가 없는 사람은 생일에 슬픔이 훨씬 더할 것이라.」 하였다. 내가 세종 성조(世宗聖祖) 때와 같을 수 있다면 어찌 진하를 사양하겠는가? 동궁에 있을 때에는 사양하고 오늘날에는 받는 것이 옳겠는가?’ 하고, 끝내 따르지 않으셨다. 이에 앞서 경연관(經筵官) 양득중(梁得中)을 불러서 이르렀는데, 거지(擧止)가 촌스럽고 대답하는 것이 매우 데면데면하여 쓰기에 맞지 않으므로 연신(筵臣)이 다 웃었으나, 왕께서 후하게 예우하여 보내셨다. 이때에 이르러 연신이 다시 말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산야(山野)의 사람은 이러한 것을 괴이하게 여길 것 없다. 귀하게 여겨야 하고 소홀히 여겨서는 안된다. 소홀히 하면 아마 다른 사람들이 오려 하지 않을 것이다.’ 하셨으므로, 왕의 치세를 마칠 때까지 한번도 그 흉을 말하지 않았다. 동12월(冬十二月)에 삼복(三覆)을 행하였는데, 하교하기를, ‘당 태종(唐太宗)은 범상한 임금이지만 정관(貞觀) 동안에 옥이 비어 까치가 나무에 집을 지었는데, 과인(寡人)은 임어(臨御)한 지 7년이 되어도 덕행(德行)으로 교화를 베푼 것이 없어서 경외(京外)의 여수(慮囚)는 그 수가 열이 넘으니, 거의 덕화(德化)가 백성에게 미치지 못하여 그런 것이다. 아! 방백(方伯)은 나의 부덕(否德)을 말하지 말고 선화(宣化)를 삼가 힘쓰고 신유(申諭)를 공경히 하라.’ 하셨다.
8년 임자(壬子) 춘정월(春正月)에 명하여 숭령전(崇靈殿)·숭덕전(崇德殿)을 수리하고 근신(近臣)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전조(前朝) 왕씨(王氏)의 후손을 등용하게 하셨다. 숭령전은 단군(檀君)의 사당이고 숭덕전은 고려 왕의 사당이다. 이때 5도(道)에 큰 흉년이 들었으므로 왕께서 여러 번 묘당에 신칙하여 진휼을 의논하게 하셨으나 오래도록 좋은 계책을 얻지 못하니, 왕께서 꾸짖기를, ‘경들이 백성을 내 형제 자매라고 생각하고 모든 백성을 위한 정사를 늘 학문하는 선비처럼 의심 없는 것은 의심을 두고 의심 있는 것은 의심을 없앤다면 어찌 구제하지 못할 것이 있겠는가? 이제 이처럼 세월만 보내니, 슬픈 우리 백성만 아래에서 괴로움을 받는다.’ 하시매, 뭇 신하가 다 부끄러워하고 빌었다. 이때에 이르러 5도를 진휼하는데 유사(有司)가 죽을 만들어 서울 백성을 먹이려 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건량(乾糧)을 주어서 돌아가 처자와 같이하게 하라.’ 하셨다.
3월에 삼남(三南)에 신칙하여 길에 있는 굶어 죽은 주검을 관가에서 거두어 묻게 하셨다.
하4월(夏四月) 왕께서 차대(次對)를 행하셨을 때에 신하들이 진휼을 의논하면서 다투어 마지않음을 대간(臺諫)이 말하니, 왕께서 조용히 말씀하기를, ‘천지가 서로 통하고서야 만물이 이루어지고 상하가 서로 믿고서야 모든 일이 다스려진다. 진 시황(秦始皇)은 주(周)나라 말기의 무너지고 느슨해진 것을 징계함에 형법(刑法)으로 바로잡았으나 뭇 신하가 죽음을 면하는 데에도 여유가 없었으니, 어느 겨를에 서로 믿겠는가? 화기(和氣)가 없어 상하가 원망하고 어그러졌으므로 2세(二世)에 이르러 망하였다. 한 고조(漢高祖)는 진나라의 가혹한 법을 징계하여 너그럽고 간약한 것으로 구제하였기 때문에 조의(朝儀)가 엄하지 않아서 검(劍)으로 기둥을 치는 자까지 있었으니, 숙손통(叔孫通)이 예를 제정하게 되어서야 황제가 귀한 줄 비로소 알았다 하였다. 진(晉)·당(唐)부터 아조(我朝)까지는 다 문식(文飾)이 실질보다 나았거니와, 지금에 이르러서는 임금과 신하 사이가 거의 막혔으므로, 내가 여유 있는 것을 덜어서 모자라는 것을 채우려 하니, 이는 굽은 것을 바로잡다가 바른 데를 지나치는 폐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신(臺臣)이 차대에 같이 들어오는 것은 자리만 갖추려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규찰(糾察)을 겸하는 것이니, 이제부터 일에 따라 살펴서 드러내라.’ 하셨다.
5월에 변무 주청사(辨誣奏請使) 낙창군(洛昌君) 이탱(李樘) 등이 연경(燕京)에서 돌아와 새로 수찬한 《명사(明史)》를 바쳤다. 이에 앞서 국조(國朝)의 종계(宗系)에 관한 일과 태조(太祖)의 득국(得國)에 관한 일과 인조(仁祖)의 등극(登極)에 관한 일이 전문(傳聞)이 잘못되어 다 《대명회전(大明會典)》 등 서적에 잘못 적혔으므로 열조(列朝)에서 여러 번 사신을 보내어 거짓을 밝히게 하였으나 죄다 바로잡히지 못하였다. 왕 7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청나라에서 강희(康熙) 말년부터 왕홍서(王鴻緖)에게 명하여 《명사》의 열전(列傳)을 수찬하게 하였는데, 미처 일을 끝내지 못하고 왕홍서가 죽으매 장정옥(張廷玉)·서건학(徐乾學) 등을 시켜 천하의 학문 있는 선비를 모아 본기(本紀)와 여러 지(志)를 이어서 수찬하게 하여 30여 년이 걸려서 이때에 이르러 끝나간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왕께서 말씀하기를, ‘아! 이 기회를 넘기면 후회하더라도 어찌 미치겠는가? 빨리 이탱 등을 보내어 주청하게 하라.’ 하셨는데, 이탱 등이 돌아오기에 이르러서는 모든 거짓이 신사(新史)에서 죄다 밝혀졌다. 명하여 강화부(江華府)에 쌀 1천 석을 주어 조적(糶糴)하여 모곡(耗穀)을 취하여 천총(千摠)·파총(把摠) 이하의 사예(射藝)를 겨루고 상격(賞格)에 쓰는 비용으로 삼게 하셨다. 유수(留守) 윤유(尹游)의 청을 따른 것이다.
윤5월(閏五月)에 왕께서, 친히 ‘성묘를 높이고 사습을 바르게 하고 성실을 힘쓴다[尊聖廟 正士習 務誠實]’는 아홉 자를 쓰고 다시 윤음(綸音) 30줄을 만들어 근신(近臣)에게 명하여 태학(太學)의 유생(儒生)들에게 선유(宣諭)하고 또 선찬(宣饌)하게 하시니, 이튿날 태학의 유생들이 전문(箋文)을 올려 사례하였다. 드디어 명하여 대사성(大司成)을 구임(久任)시켜 성효(成效)를 책임지우셨다.
6월에 가물었으므로 왕께서 친히 사직(社稷)과 북교(北郊)에서 기도하셨으나 비가 내리지 않으니, 하교하기를, ‘해마다 잇달아 크게 가물어 백성이 장차 다 죽게 되었으니, 감선(減膳)만으로 어찌 자신을 책망하는 도리를 다할 수 있겠는가? 예전 진(晉)나라가 크게 가물었을 때에 현자(縣子)가 대답한 것이 재앙을 물리치는 요령을 얻게 되었거니와, 사흘 동안 천시(遷市)하라.’ 하셨다.
동10월(冬十月) 얇은 옷을 입은 상번(上番) 군사에게 동옷[襦衣]을 지어 주라고 유사(有司)에게 명하시고, 지나는 고을의 부호(富戶)가 나타나는 대로 들어가 있게 하여 거리에서 얼고 굶주리지 않게 하라고 신칙하였다.
11월에 경기·삼남(三南)·영동(嶺東) 백성에게 미조(米租) 4만 5천 석을 내리고 부역과 공물 반년분을 줄이고 적모곡(糴耗穀)을 죄다 감면하고, 하교하기를,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서 왕이 되면 이를 막을 수 없다고 맹자(孟子)가 말하였거니와, 지금의 백성은 우리 조종의 백성인데, 더구나 성고(聖考)께서 백성을 돌보신 성의(盛意)는 내가 평소에 보고 들은 것임에랴? 해마다 잇달아 기근이 들어 저축이 없으나, 백성이 죄다 죽으면 곡물이 억만 섬 있더라도 어디에 쓰겠는가?’ 하였다. 드디어 어사(御史)를 나누어 보내어 진정(賑政)을 살피고 선유(宣諭)하며 또 문무(文武)의 재능이 있는 자와 은거(隱居)하여 평소의 뜻을 지키는 선비를 찾게 하셨다.
【원전】 44 집 543 면
【분류】 *왕실-국왕(國王)


[주D-001]기사년 : 1689 숙종 15년.
[주D-002]정표(旌表) : 선행을 칭찬하여 여러사람에게 알리는 것.
[주D-003]기복(起復) : 기복 출사(起復出仕)의 준말로, 상중(喪中)에는 벼슬하지 않는 것이 관례(慣例)이나 국가의 필요에 따라 상제의 몸으로 벼슬자리에 나오게 하는 일.
[주D-004]운대(雲臺) : 후한(後漢) 명제(明帝)가 전세(前世)의 공신(功臣)을 추념하여 장수 28인의 초상을 그리게 한 대(臺)의 이름. 운각(雲閣).
[주D-005]철권(鐵券) : 공신(功臣)에게 나누어 주던 녹권(錄券). 겉에는 이력과 은상(恩賞)을 기록하고, 속에는 면죄(免罪)와 감록(減錄)의 수를 새겼는데, 글자를 속에 파서 넣었기 때문에 철권이라 함. 좌부(左符)는 공신(功臣)에게, 우부(右符)는 내부(內府)에 두었다가 감합(勘合)하였음.
[주D-006]망예(望瘞) : 제사를 끝마치고 축문과 폐백을 파묻을 때 헌관(獻官)과 집사(執事)가 이를 지켜보던 일을 말함.
[주D-007]위전(位田) : 관청의 경비(經費)나 제사의 비용(費用)을 충당하기 위하여 설치된 토지. 위토(位土).
[주D-008]고계(高髻) : 높은 상투.
[주D-009]경신년 : 1680 숙종 6년.
[주D-010]기사년 : 1689 숙종 15년.
[주D-011]무신년 : 1728 영조 4년.
[주D-012]우서(友壻) : 동서.
[주D-013]태복(太僕) : 사복시(司僕寺).
[주D-014]악 무목(岳武穆) : 무목은 악비(岳飛)의 시호(諡號).
[주D-015]갑진년 : 1724 경종 4년.
[주D-016]추조(秋曹) : 형조(刑曹).
[주D-017]경조(京兆) : 한성부(漢城府).
[주D-018]백부(柏府) : 사헌부(司憲府).
[주D-019]강희(康熙) : 청 성조(淸聖祖)의 연호.
 
 
영조 대왕 행장(行狀)③

9년 계축(癸丑) 춘정월(春正月)에 왕께서 하교하여 조정에 신칙(申飭)하여 정신을 모으고 재능 있는 자를 등용하고 옛날의 버릇을 버리고 본연의 공정을 넓혀서 해와 함께 모두 새로워지게 하셨다.
2월에 왕께서 시학(視學)하셨다. 당초에 문묘(文廟)에 작헌(酌獻)할 것을 명하셨는데, 우의정(右議政) 김흥경(金興慶)이 차자를 올리기를, ‘문묘에 작헌하면 으레 시사(試士)해야 하니 흉년에 행할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왕께서 답하기를, ‘한 고조(漢高祖)가 개창(開創)한 처음에 태뢰(太牢)로 선성(先聖)을 제사하였고, 우리 성조(聖祖)께서 용만(龍灣)에서 회란(回鑾)하여 땅을 쓸고 제단을 만들어 맨 먼저 선성을 제사하셨다. 이제 국가에 일이 많았고 또 삼년(三年)이 겨우 끝났는데 이 예(禮)를 버려둔 것은 8년이나 되었으니, 내 마음이 불만스럽지 않겠는가? 그러나 비용을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것은 선성이 가르친 것인데, 이제 선성의 가르침을 어기면서 선성을 뵐 수도 없고 시사하는 비용 때문에 선성을 뵙지 않을 수도 없으니, 한결같이 《오례의(五禮儀)》의 시학례(視學禮)에 따르되, 술을 바치고 찬선(饌膳)을 바치는 것을 그만두어 간략하게 예를 행하고, 작헌하고 시사하는 예는 오는 가을로 물리라.’ 하셨다. 왕께서 드디어 문묘에 이르러 친히 선성께 잔을 올리고 물러나 명륜당(明倫堂)에 나아가 《주례(周禮)》에 익숙한 조사(朝士)를 강서관(講書官)에 채우고 한 경서(經書)에 능통한 유생들과 함께 다 각각 진강(進講)하고 문의(文義)를 토론하게 하고 장의(掌議) 두 사람에게 《중용(中庸)》을 각각 한 부씩 내리셨다.
하4월(夏四月)에 왕께서 노심(勞心)하고 백성을 근심하여 감선(減膳)한 것이 오래 되었는데도 오래도록 회복하지 않으시므로 유사가 말하니, 왕께서 슬피 말씀하기를, ‘내가 좋은 음식을 대하면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여 좋은 음식을 굶주린 백성에게 두루 먹이고 싶으나 그럴 수 없는데, 더구나 문득 복선(復膳)을 의논할 수 있겠는가? 동지사(冬至使)가 가져온 문단(紋緞)을 죄다 진청(賑廳)에 내려 진자(賑資)에 보태라.’ 하셨다. 유사가 백관(百官)·군병(軍兵)의 녹(祿)을 줄이고 쌀 대신 조를 주기를 청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잇단 기근은 내가 덕이 없기 때문인데 차마 혼자 좋은 음식을 누릴 수 있겠는가?’ 하고 어공(御供)의 5분의 1을 줄이라고 명하시고, 연신(筵臣)을 돌아보고 말씀하기를, ‘이 백성은 조종께서 지성으로 사랑하고 돌보신 백성인데, 내가 조종께서 이 백성을 편안하게 하신 것을 본받지 못하니, 후세에서 나를 어떤 임금으로 여기겠는가?’ 하셨다. 그래서 일을 맡은 자도 감히 정성을 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5월에 왕께서 소대(召對)하여 연신에게 말씀하기를, ‘임금과 신하 사이는 벗 사이와 다르거니와, 벗 사이에도 선행을 요구하기 어려운데, 더구나 임금이겠는가? 부열(傅說)이 고종(高宗)에게 경계하기를, 「네 마음에 맞는 진언(進言)이 있거든 도리에 어그러지는 것이 아닌지 살펴보고 네 마음에 거슬리는 진언이 있거든 도리에 맞는 것이 아닌지 살펴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임금이 진언을 듣는 요령이다. 내가 신하들의 진언에 강개하고 격렬한 것이 있으면 마음에 거슬리는 것이 없지는 않으나, 일이 지난 뒤에 평온한 마음으로 생각하면 아닌게아니라 개연(慨然)히 유감스럽고 부끄러워진다.’ 하셨다.
또 일찍이 주강(晝講) 때에 문의(文義)에 따라 하교하기를, ‘예전에 제영(緹縈)이, 「죽은 자는 다시 살 수 없고 형(刑)을 받은 자는 다시 이어질 수 없다.」고 하였는데, 천년 뒤에도 그 말이 오히려 사람을 슬프고 상심되게 한다. 강학(講學)하는 도리는 옛일을 거울삼아 오늘의 일을 경계해야 하는 것인데, 토포영(討捕營)에서 도둑을 다스릴 때에 오로지 엄하고 혹독한 것을 숭상하여 이따금 옥석(玉石)을 가리지 않고 함께 불사르므로 접때 여러 번 경계하였으나 요즈음 다시 구습에 따라 잘못을 되밟으니, 아마 영장(營將)이 될 사람을 가리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서전(西銓)에 하유(下諭)하여 이제부터는 반드시 영장을 지낸 뒤에야 곤수(閫帥)에 의망(擬望)하게 하고 무릇 토포영에서 승복(承服)받은 무리는 경포청(京捕廳)에서 추조(秋曹)로 이송(移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순영(巡營)에 보내어 자세히 캐어 물어서 처결하게 하고 그대로 항령(恒令)으로 삼으라.’ 하셨다. 마침 국옥(鞫獄)이 있어서, 왕께서 친림(親臨)하여 죄수를 신문하셨는데, 안옥(按獄)하는 신하가 포청(捕廳)을 시켜 먼저 죄인을 신문하여 실정을 알아낸 뒤에 금오(金吾)에 올리게 하기를 청하니, 왕께서 처음에는 망설이셨는데, 안옥하는 신하가 굳이 청하니, 왕께서 마지못하여 따르셨다. 조금 뒤에 뉘우쳐 말씀하기를, ‘옥사(獄事)에는 체례(體例)가 있어 죄인은 추조에서 신문하여 금오에 올리는 것이 원칙인데, 이제 도둑을 다스리는 청(廳)이 도리어 역적을 다스리는 청이 되어 포청이 드디어 금오의 막부(幕府)가 되었으니, 이 길이 한번 열리면 앞으로 진신(搢紳)도 그 화를 면하기 어려울 줄 나는 안다. 빨리 전에 명한 것을 거두어 뒷날의 본보기로 삼으라.’ 하셨다.
6월에 왕께서 일로 말미암아 탁지(度支)에 이르기를, ‘절검(節儉)의 실체(實體)를 행하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다. 내가 대내(大內)에 있으면 옷은 모시로 하고 일산(日傘)은 명주로 하거니와, 동가(動駕)할 때에야 곤복(袞服)과 일산을 다 비단으로 하는데, 대개 동가할 때에는 본디 체모가 있기 때문이다. 아! 너희 유사(有司)는 이것을 잘 알아서 낭비를 막으라.’ 하셨다.
추7월(秋七月)에 왕께서 장차 친향(親享)하려 하시는데, 대신이 날씨가 덥다 하여 대행할 것을 청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조상을 섬기는데 어찌 때를 가릴 수 있겠는가? 다시 말하지 말라.’ 하셨다.
8월에 왕께서 하교하기를, ‘예전부터 형벌을 제정하는데에는 모두 그 법이 있으니, 법 외의 형벌은 혹 한때에 쾌한 것을 취할지라도 마침내 선왕께서 삼가고 불쌍히 여기신 뜻에 어그러진다. 내가 을사년에 이미 압슬형(壓膝刑)을 없앴고 임자년에 또 포청(捕廳)의 전주뢰형(剪周牢刑)을 없앴다. 이제는 낙형(烙刑)이 남았을 뿐이고 접때 친국(親鞫) 때에도 구습에 따라 썼으나, 육형(肉刑)·태배(笞背)는 오형(五刑)의 하나인데도 한제(漢帝)·당종(唐宗)이 오히려 없앴는데, 더구나 오형에도 없는 형벌이겠는가? 아! 금오는 영구히 낙형을 없애고 항령(恒令)으로 삼으라.’ 하셨다.
동10월(冬十月)에 명하여 동문 밖에 제단을 설치하여 신해년에 굶어 죽은 주검을 찾아 제사하게 하셨다. 소대(召對) 때에 선찬(宣饌)하고 명하여 부모가 있는 자는 가지고 돌아가 주게 하셨다. 그래서 신하들이 앞다투어 가져다 소매 안에 채웠는데, 부모가 없는 자는 빈손으로 물러가니, 왕께서 슬퍼 목메시고 신하들도 모두 느껴 울었다.
11월에 평안 감사(平安監司) 권이진(權以鎭)이 아뢰기를, ‘압록강을 파수(把守)하는 군졸은 겨울이면 철파(撤罷)하는 것이 고례(古例)입니다. 전 감사 송진명(宋眞明)이 성교(聖敎)를 받아 창설하였으나, 얼음 얼고 눈이 내릴 때에 입김으로 언 것을 녹이다가 사람이 상할세라 염려되니, 폐지하소서.’ 하자, 왕께서 말씀하기를, ‘겨울에 얼음이 얼면 바로 파수할 때이다. 그러나 그것이 고례가 아닌데 파수하는 군졸 중에 혹 얼어 죽는 자가 있으면 이는 스스로 내가 사람을 죽이는 길을 여는 것이니, 어찌 차마 할 수 있겠는가? 폐지하라.’ 하셨다. 이때 대신(大臣)과 종신(宗臣)이 체례(體例)를 다투어 서로 하리(下吏)를 가두었는데, 잘못이 대신에게 있으므로 왕께서 종신을 옳게 여기고 대신을 그르게 여기셨다. 그래서 대신이 정고(呈告)하고 벼슬을 갈아 주기를 바랐는데, 홍문관(弘文館)에서 차자를 올려 조정의 체모를 존중하는 방법에 어그러진다고 말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사람이 누구인들 허물이 없겠는가? 고치는 것이 귀하다. 내가 대신을 공경하는 도리를 잘못하였다.’ 하고 드디어 종신을 파면하고 대신을 돈면(敦勉)하며 다시 서로 공경하는 의리로 종친부(宗親府)와 조정에 경계하셨다. 곧 예관(禮官)을 도산 서원(陶山書院)에 보내어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을 치제(致祭)하고 명하여 도산 서원을 그려 바치게 하셨다.
12월에 왕께서 풍현증(風眩症)을 앓는데도 오히려 기무(機務)에 부지런하여 한밤이 되도록 주무시지 않으므로, 연신(筵臣)이 왕께 건강을 해치는 일을 절제하시기를 권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내가 보니 선조(先朝) 말년에 편찮으신 중에도 만기(萬機)를 수응(酬應)하시어 조금도 막힌 것이 없었다. 이것이 우리 가법(家法)이니 감히 스스로 안일할 수 있겠는가?’ 하시었다. 조금 뒤에 연신에게 말씀하기를, ‘처음에는 부지런하다가 나중에는 게으른 것이 임금들의 통환(通患)인데, 당명황(唐明皇)이 개원(開元)과 천보(天寶) 때에 판이하게 두 사람이 된 것이 그 중에서도 가장 심한 것이었다. 예전에 우리 세종(世宗) 때에 명하여 《명황계감(明皇戒鑑)》을 짓게 하신 것은 성의(聖意)에 까닭이 있다.’ 하고, 명하여 그 서적을 널리 구하여 바치게 하셨다. 소대(召對)하여 《육선공주의(陸宣公奏議)》를 강독(講讀)할 때에 왕께서 수심에 잠겨 말씀하기를, ‘예전에 고(故) 좌상(左相) 이집(李㙫)이 나에게 이 글을 강독하기를 권하고 고 상신(相臣) 홍치중(洪致中)·조문명(趙文命)도 말하였는데, 그 뜻은 대개 내 도량이 좁기 때문에 이 글을 빌려서 받아들이는 도량을 개발(開發)하려 한 것이다. 대저 여조겸(呂祖謙)은 한낱 학문하는 선비인데, 능히 《논어(論語)》로 말미암아 그 기질(氣質)을 변화하였다. 내가 이 글을 강독하고 도량을 넓히지 못한다면, 어찌 이 글을 저버리는 것일 뿐이겠는가? 또한 세 정승을 저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세 정승은 이미 죽어서 내가 이 글을 강독하는 것을 미처 보지 못하였으니, 상심되고 슬프다.’ 하셨다. 드디어 친히 30여 줄의 윤음(綸音)을 지어 정부(政府)에 명하여 구언(求言)하여 임금의 궐실(闕失)을 보완하고 유루(遺漏)를 수습하게 하셨다. 곧 여러 도에서 세말(歲末)에 효행이 뛰어난 선비를 천거하게 하고 서울에는 그렇게 시키지 않으셨으니 한 안팎의 도(道)가 아니기 때문이며, 경조(京兆)에 명하여 여러 도에서 한 것처럼 세말에 천거하게 하셨다. 이에 앞서 왕께서 연신에게 말씀하기를, ‘내가 신축년에 저위(儲位)를 잇고부터 개연(慨然)하여 거친 베옷을 입고 흰 베로 만든 관(冠)을 쓰고서 세도(世道)를 만회하려 하였으나, 근일 이래로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 삭감하는 것을 정사(政事)로 삼을 뿐이니, 그 유폐(流弊)가 장차 사신(史臣)이 나날이 기록할 것이 없게 만들고야 말 것이다. 어찌 내가 전일에 뜻을 세운 것이 잘못이겠는가? 대저 나라를 망치는 근본은 바로 사치이다. 그러나 사치를 없애고 검약을 숭상하는 것도 오직 임금이 어떻게 이끄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내가 아첨을 좋아하면서 뭇 신하를 시켜 충직하라고 한다면 행해질 수 없을 것이고, 내가 비단옷을 입으면서 뭇 신하를 시켜 무명옷을 입게 한다면 또한 행해질 수 없을 것이다. 그 근본을 바르게 하고 그 근원을 바르게 하여 힘을 헤아려 점점 나아가면 바랄 수 있을 것이다.’ 하셨다. 이때에 이르러 다시 하교하기를, ‘예전에는 달군 돌 위에서 기장을 굽고 돼지고기를 갈라서 먹었어도 귀신을 공경할 수 있었고, 짐승을 날로 먹고 그 피를 마셨어도 존비(尊卑)를 분변할 수 있었으며, 궁실(宮室)의 지붕을 띠로 이고 섬돌을 흙으로 만들었어도 백성을 다스리고 가르칠 수 있었는데, 삼대(三代) 이후로 인문(人文)이 번성하고 사치가 번성하였으나 오히려 근세와 같지는 않았다. 바야흐로 혼인할 나이가 지나도 혼인하지 못하는 것도 사치 때문이며 달이 지나도 장사(葬事)하지 못하는 것도 사치 때문이며 조상을 제사하되 예(禮)대로 하지 않는 것도 사치 때문이다. 대저 풀이 쏠리면 바람이 부는 것을 알고 그림자가 바르면 표준(表準)을 안다. 그러므로 필서(匹庶)는 조사(朝士)를 본뜨고 조사는 귀척(貴戚)을 본뜨고 귀척은 왕궁(王宮)을 근본 삼으니, 내가 어찌 감히 사치를 싫어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상방(尙方)의 직금방(織錦坊)을 이제부터 영구히 철폐하고 다시는 설치하기를 청하지 말라.’ 하셨다.
10년 갑인(甲寅) 춘정월(春正月)에 팔도의 감사(監司)와 양도(兩都)의 유수(留守)에게 명하여 널리 《농사집성(農事集成)》을 인쇄하여 고루 민간에 반포하여 세종 때에 백성을 이끌어 근본을 힘쓰게 하신 성의(盛意)를 알게 하도록 하셨다. 친히 기곡제(祈穀祭)를 행하시느라 이미 서계(誓戒)하였는데, 마침 국옥(鞫獄)이 있으므로 제사를 지내고 국문(鞫問)하라고 명하셨다. 홍문관(弘文館)에서 차자를 올려 국옥의 체례(體例)를 엄히 하는 방도에 어그러짐을 말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백성을 위하여 농사를 비는 것이 도리어 중대하지 않은가?’ 하고, 마침내 따르지 않으셨다. 제사를 지내고 이튿날에 명정문(明政門)에서 조참(朝參)을 행하고 이미 죽은 군민(軍民)의 정포(丁布)를 면제하고서야 비로소 친히 국문하셨다. 한 죄인이 죄가 없으므로 드디어 용서하여 놓아 주라고 명하셨는데 옥에서 나가서 죽으니, 왕께서 뉘우쳐 말씀하기를, ‘내가 죄 없는 자를 죽였다. 사관(史官)은 내 허물을 써서 후세의 임금이 거울삼아 경계하게 하라.’ 하셨다. 곧 비변사 제조(備邊司提調)를 각도의 구관 당상(勾管堂上)으로 나누어 차출하여 맡은 도 안의 풍흉(豊凶)과 폐단을 살피고 방백(方伯)과 미리 강구하여 일을 처리하게 하셨다. 왕께서 바야흐로 차대(次對)를 행하실 때에 까치가 와서 우사(右史)의 모석(毛席)을 쪼았는데, 왕께서 탄식하며 말씀하기를, ‘미물도 모석을 먹을 수 없다는 것을 알 것인데 오히려 쪼는 것은 굶주림에 몰렸기 때문이다. 불쌍한 우리 백성이 입을 것이 없고 먹을 것이 없어 길에서 쓰러지니, 저 미물과 다르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경조(京兆)와 제도(諸道)의 방백에게 신칙(申飭)하여 농사를 권하고 안정시키며 백성을 어지럽히는 정사(政事)를 없애고 환과 고독(鰥寡孤獨)과 폐질(廢疾)이 있는 자를 찾아서 돌보게 하셨다.
2월 왕께서 장차 의릉(懿陵)에 거둥하시려 할 때에 국옥(鞫獄)이 끝나지 않았으므로 뭇 신하가 거둥을 멈추기를 청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송 태조(宋太祖)는 와탑(臥榻) 곁에서 다른 사람이 코를 골며 졸았어도 가기를 꺼리지 않았다. 다행히 나는 바야흐로 한 나라에 군림하여 경들을 신하로 삼았으니, 어찌 꺼릴 것이 있겠는가?’ 하고 듣지 않으셨다.
3월에 친히 대보단(大報壇)에 제사하고 양 경리(楊經理)의 사당에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셨다.
하4월(夏四月)에 친히 약제(禴祭)를 행하셨다. 이 뒤로는 무릇 같은 일로서 여러 번 보이는 것은 다 쓰지 않는다.
5월에 왕께서 《이충정주의(李忠定奏議)》를 강독하고 곧 명하여 의군정(議軍政)·교차전(敎車戰) 두 차자(箚子)를 삼군문(三軍門)의 대장(大將)에게 반시(頒示)하게 하셨다. 곧 연신(筵臣)에게 하교하기를, ‘공평하되 밝지 못하면 어진 사람을 어리석게 여기고 어리석은 사람을 어질게 여길 것이고, 밝되 공평하지 못하면 어진 줄 알더라도 등용하지 못하고 어리석은 줄 알더라도 버리지 못할 것이니, 쓰고 버리는 분별이 또한 어렵지 않겠는가?’ 하셨다.
6월에 고(故) 참의(參議) 안방준(安邦俊)이 지은 《항의신편(抗義新編)》을 바친 자가 있었는데, 왕께서 조헌(趙憲)이 임진년에 창의(倡義)한 일을 보고 감탄하여 마지않고 조헌의 사당과 칠백 의총(七百義塚)에 사제(賜祭)하고 다시 양남(兩南)의 감영(監營)에 명하여 조헌이 손수 고증한 《조천록(朝天錄)》과 일기(日記) 등 서적을 인쇄하여 금산(錦山)·옥천(沃川) 두 서원(書院)에 나누어 내리게 하셨다.
추9월(秋九月) 왕께서 각도의 감사(監司)와 수령(守令)에게 신칙하여 신역(身役)을 도피한 백성을 불러다 안주시키고 막 돌아온 자는 조세를 줄이고 요역(徭役)을 면제하여 소생시킬 방도를 다하도록 힘쓰게 하셨는데, 《시경(詩經)》 보우편(鴇羽篇)을 강독하고서 감흥(感興)하셨기 때문이다.
11년 을묘(乙卯) 춘정월(春正月)에 진주 부사(陳奏副使) 박문수(朴文秀)가, 고(故) 병사(兵使) 양무공(襄武公) 정봉수(鄭鳳壽)가 정묘년에 적을 물리친 일을 말하고 또 명나라에서 내려 준 은패 표문(銀牌票文)을 바치니, 왕께서 한참 동안 감탄하고 정봉수를 치제(致祭)하고 그 후손을 등용하셨다.
하4월(夏四月)에 동지사(冬至使)가 가져온 문단(紋緞)을 경기영(京畿營)에 내려 곡물을 사서 저축하게 하셨다. 이에 앞서 임자년에 굶주린 백성을 진구(賑救)할 때에 경기의 곡물이 모자라서 고통받았으므로, 지난 여름 비가 내릴 때에 왕께서 말씀하기를, ‘인정은 비를 얻으면 해이해질 것이다. 이 풍년일 때에 미리 대비할 방도를 생각해야 한다.’ 하고, 드디어 경기에 명하여 곡물을 저축하게 하셨는데, 이때에 이르러 문단을 내려서 도우셨다.
5월에 함경 감사(咸鏡監司)가 범월(犯越)한 백성 50인의 죄를 논하였는데, 왕께서 어사(御史)를 보내어 안사(按査)하게 하셨다. 연석(筵席)에서 하교하기를, ‘처벌을 너그럽게 한 잘못에 빠질지언정 사납게 하는 잘못에 빠지지 말라.’ 하고, 이어서 명하여 쓸 만한 문사(文士)·무사(武士)를 찾고 또 북쪽 변방의 징사(徵士) 이재형(李載亨)을 찾아보고 만나보고 싶다는 뜻을 전하게 하셨다.
추8월(秋八月) 왕께서 처음에 희릉(禧陵)·효릉(孝陵)에 전알(展謁)하려 하셨는데, 이윽고 유사(有司)에게 말씀하기를, ‘밤에 평소처럼 선조(先朝)를 모시는 꿈을 꾸었다. 한 명제(漢明帝)가 원릉(園陵)에서 꿈을 꾸고 역(曆)을 살펴 달[月]을 점쳤으니 본받기 꼭 좋은 것이다.’ 하고, 드디어 명릉(明陵)에 거둥하셨다.
9월에 일식(日食)이 있었는데, 왕께서 친히 구식(救食)하셨다. 유신(儒臣)이 고사(故事)를 아뢰어 면계(勉戒)하니, 아름답게 여겨 받아들이셨다.
동12월(冬十二月)에 왕께서 사학(四學)의 집이 무너졌다는 말을 듣고 탄식하며 말씀하기를, ‘도성(都城) 안은 왕화(王化)의 근본인 곳인데, 학사(學舍)가 이러함을 이웃 나라에 들리게 할 수 없다. 봄이 되거든 수리하라.’ 하셨다. 일찍이 밤에 입직(入直)한 옥당(玉堂)에게 선찬(宣饌)하며 말씀하기를, ‘선조(先朝)에서 일찍이 추운 밤이면 옥당을 생각한다고 말씀하시고 어찬(御饌)을 거두어 내리셨다. 나는 밤에 찬선(饌膳)을 장만하지 않으므로 어주(御廚)에서 장만하여 내리니, 좌사(左史)·우사(右史)와 함께 먹고 마시도록 하라.’ 하셨다.
12년 병진(丙辰) 춘정월(春正月) 이미 죽은 서울 백성은 그 빚을 죄다 면제하고 공채(公債)의 기한은 15년으로 하며 사채(私債)의 기한은 20년으로 하셨는데, 대신(大臣)의 말을 따르신 것이다. 동래(東萊)의 선비들이 상소하기를, ‘임진년에 사절(死節)한 송상현(宋象賢)은 문사이고 정발(鄭撥)은 무사입니다. 한 사당에 같이 향사(享祀)할 수 없으니 나누소서.’ 하자, 왕께서 말씀하기를, ‘유응부(兪應孚)는 어찌 무사가 아니랴마는 육신사(六臣祠)에 같이 향사한다. 무사라 하여 그 절의(節義)를 낮출 수 없다.’ 하고 물리쳐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2월에 광릉(光陵)에 거둥하고 양주(楊州)의 민역(民役)을 1등(等) 감면하셨다. 전조(銓曹)에 신칙하여 고려왕의 후손을 등용하고 영유현(永柔縣)에 있는 악비(岳飛)의 사당에 비석을 세우게 하셨다. 곧 2품(品) 이상에게 명하여 각각 자목(字牧)을 감당할 자 두 사람을 천거하게 하셨다. 신축년·임인년에 흉년이 들었을 때에 영남(嶺南) 연해(沿海) 백성 중에 온 집안이 모두 죽은 경우에는 그 전조(田租)를 죄다 면제하셨다.
하5월(夏五月)에 무신년에 사절(死節)한 사람 남연년(南延年)·이술원(李述原)의 자손을 등용하셨다. 감사(監司)·수령(守令)에게 하교하기를, ‘흉년에 전련(顚連)한 자는 감사·수령이 진구(賑救)할 줄 아나, 풍년에 전련한 자는 다시 마음쓰지 않아서 길에서 굶어 죽도록 버려두니, 한 지아비라도 제 살 곳을 얻지 못하면 마치 저자에서 매맞는 듯하다는 것과 어찌 다르겠는가?’ 하셨다. 대신이, ‘편배(編配)되어 있는 중에 부모의 상을 당한 자를 고향에 돌아가 장사지내게 하는 것은 법에 그런 조문이 없다’고 말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임금은 효(孝)로 다스리는 법인데 어떻게 고향에 돌아가 장사지내게 하지 않겠는가? 돌아가 장사지내게 하라.’ 하셨다.
6월에 양녕(讓寧)·효령(孝寧) 두 대군(大君)의 묘(墓)에 사당을 세우고 그 아래에 위전(位田)을 주고 묘지기를 두고 그 호역(戶役)을 면제하셨다.
동10월(冬十月)에 수령으로서 장오(贓汚)를 범한 자는 종신토록 금고(禁錮)하고 추천해 준 사람도 논죄(論罪)케 하기를 항령(恒令)으로 삼았다.
13년 정사(丁巳) 춘정월(春正月)에 왕께서 다섯 가지 일을 묘당(廟堂)·방백(方伯)에게 신칙(申飭)하셨는데, 서로 삼가서 공경하기를 힘쓰고 자목(字牧)을 잘 가리고 법을 지켜 선량하기를 힘쓰고 농상(農桑)을 권장하고 제언(堤堰)을 수리하라는 것이었다.
2월 왕께서 연초부터 법강(法講)을 열고 토론함에 게을리하지 않으셨는데, 마침 옥당(玉堂)이 많이 채워지지 않아서 오래 개강(開講)하지 못하게 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위에서 게을리하더라도 아래에서 오히려 권면해야 할 것이다. 내가 만학(晩學)이기 때문에 봄날이 따뜻하고 점점 길어짐에 따라 전에 공부가 부족하였던 것을 채우려 하나, 옥서(玉署)의 문이 오래 잠겨 법연(法筵)을 열 기약이 없고 한가할 때에 고문(顧問)할 사람이 없으니, 옛 기록에서 찾더라도 이런 일이 있는가?’ 하고, 드디어 명하여 인원을 갖추게 하여 날마다 경서(經書)를 지니고 강독(講讀)하셨다.
3월에 왕께서 팔을 앓아 손이 마비되셨는데, 오히려 황단(皇壇)에 친향(親享)하려 하시므로 뭇 신하가 힘써 말리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황은(皇恩)을 숭보(崇報)하는 것은 오직 수척(數尺)의 숭단(崇壇)에 있을 뿐인데, 내가 어찌 감히 작은 병 때문에 예(禮)를 그만두겠는가? 내 병이 굽히고 펴는 데에 방해되어 규(珪)를 잡고 광(筐)을 받들 때에 실의(失儀)가 있을세라 두려우므로 한가할 때에 익혀서 대강 예대로 할 수 있으니, 다시 말하지 말라.’ 하셨다. 곧 정원(政院)에 명하여 육조(六曹)에 신칙하여 《대전(大典)》의 법을 수명(修明)하고 어기는 자는 찰추(察推)하게 하셨다. 경상 감사(慶尙監司) 민응수(閔應洙)가 상소하여 고(故) 참판(參判) 조위(曹偉)가 원통하게 죽은 일과 고 좌윤(左尹) 곽재우(郭再佑)의 훈업(勳業)과 고 군수(郡守) 조종도(趙宗道)가 무용(武勇)을 세운 일을 말하고 모두 사시(賜諡)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르고, 다시 공홍 감사(公洪監司)에게 명하여 정충신(鄭忠信)의 사당을 세우게 하고 그 후손을 등용하셨다.
하6월(夏六月)에 날씨가 매우 더운데, 왕께서 오히려 강학(講學)을 그만두지 않으시고 밤 4경(四更)이 되어서야 파하므로 대신이 정신을 너무 피로하게 하신다고 말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임금의 한마음은 만화(萬化)가 근본으로 삼는 것인데, 어찌 날이 덥다 하여 게을리 하겠는가? 조종조(祖宗朝)에서 반드시 그러지 않았을 것이므로 내가 승지(承旨)를 시켜 옛일을 살펴보니 한더위에도 개강(開講)하였거니와, 한추위에도 개강하였는지는 살펴보지 못하였으나 추위와 더위를 어찌 가리겠는가? 더구나 한 달에 여섯 번 차대(次對)하셨으니, 더욱이 조종께서 근정(勤政)하신 성의(盛意)를 알 수 있다.’ 하셨다. 이 뒤로 말년까지 왕께서 끝내 여섯 번의 차대를 한 번도 거르신 적이 없다.
추7월(秋七月)에 왕께서 사직(社稷)에서 기우(祈雨)하려 하셨으나 때마침 왕께서 편찮으시므로 연신(筵臣)이 정성에 달려 있고 예(禮)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성탕(成湯)은 정성이 모자라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상림(桑林)에서 희생을 대신하였는가?’ 하고, 마침내 친히 행하셨다. 돌아오다가 금오의 문앞에 이르러 승지에게 명하여 죄가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게 하셨다. 이틀 뒤에 다시 친히 태묘(太廟)에서 기우하실 때에 연(輦)을 타지 않고 일산을 펴지 않고서 묘문(廟門)에 이르니, 비가 내려 곤면(袞冕)이 다 젖었으나 밤새도록 공경히 제사하고 이튿날 환궁(還宮)하고 선전관(宣傳官)을 보내어 군병을 노문(勞問)하게 하셨다.
8월에 왕께서 건원릉(健元陵)에 거둥하고 현릉(顯陵)·목릉(穆陵)·휘릉(徽陵)·의릉(懿陵)·혜릉(惠陵)에 들러 전알(展謁)하고 재실(齋室)에서 경기 감사(京畿監司)와 수령(守令)을 소견(召見)한 다음 거가(車駕)가 돌아왔다. 이튿날 주강(晝講)을 행하고 군병에게 호궤(犒饋)하셨다.
9월에 명하여 공씨(孔氏)를 등용하게 하셨다. 처음에 왕께서 우리 나라에 사는 공씨가 선성(先聖)의 후손인 줄 모르셨는데, 이때에 이르러 연신(筵臣)이 말하기를, ‘선성의 53세손 공소(孔紹)가 원(元)나라에서 벼슬하여 한림 학사(翰林學士)로 있다가 고려 말기에 노국 장공주(魯國長公主)가 공민왕(恭愍王)에게 시집올 때에 공소가 배종(陪從)하여 와서 그대로 동토(東土)에 살았는데, 동토에 공씨가 있는 것은 여기서 비롯하였습니다.’ 하였으므로, 이 명이 있었다. 관학(館學)의 유생(儒生)을 고강(考講)하고 분수(分數)가 같은 자에게 전정(前庭)에서 제술(製述)을 시험하여 그 우열(優劣)을 겨루게 하셨는데, 승지(承旨)가 밤이 어두워 시권(試券)을 베낄 수 없다고 말하니, 왕께서 어좌(御座)의 촛불을 거두어 주셨다.
윤9월에 경기(京畿)·호서(湖西)·호남(湖南)의 재해를 입은 고을의 군보 미포(軍保米布)를 감면하셨다. 이때 육진(六鎭)에 기근이 들었는데, 특별히 노공미(奴貢米) 3천 석을 내리고 다시 영남(嶺南)의 저치미(儲置米) 2천 석을 더하고 어사를 보내어 진정(賑政)을 살피게 하여 마침내 유망(流亡)한 자가 한 사람도 없게 하셨다.
동10월(冬十月)에 왕께서 친향(親享)하고 나서 장악원 제조(掌樂院提調) 윤순(尹淳)에게 말씀하기를, ‘옛사람은 나라의 융쇠(隆衰)를 반드시 음악에서 점쳤다. 이제 묘악(廟樂)의 번잡하고 촉급(促急)한 것을 바로잡아야 한다.’ 하셨다. 승지를 보내어 죄가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게 하고 이 뒤로는 한추위와 한더위를 당하면 전례를 살펴서 품행(稟行)하라고 신칙하셨다.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과 삼사(三司)의 장관(長官)과 양국(兩局)의 대장(大將)과 팔도(八道)의 도신(道臣)과 양도(兩都)의 유수(留守)에게 명하여 각각 인재를 천거하게 하셨다.
11월에 금려(禁旅)는 병사 중에서 기예(技藝)를 시험하여 올리게 하고 항령(恒令)으로 삼으셨다. 이달에 왕께서 죄수를 살피고 연신(筵臣)에게 말씀하기를, ‘선조(先朝)께서는 어선(御膳)을 진공(進供)한 데에 산 꿩·닭·노루·토끼가 있으면 반드시 금원(禁苑)에 놓아 주셨고 나도 본떠서 행하는데, 대개 그 소리를 듣고 차마 그 고기를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금수도 그러한데, 더구나 사람이겠는가?’ 하셨다.
12월에 왕께서 대신에게 말씀하기를, ‘송(宋)나라의 이항(李沆)이 임금이 봉선(封禪)을 크게 벌이는 것을 염려하고 늘 홍수와 가뭄을 아뢰었으니, 참으로 대신의 체모를 얻었다. 내가 본디 학문이 없으나, 성인(聖人)과 광인(狂人)의 분별은 일념(一念)에 달려 있다는 것을 대강 들었고 또 세상 일을 겪은 것이 많으므로, 경들이 아뢰기를 기다리지 않고 늘 스스로 조심하며 밤마다 잠에서 깨면 오늘날 크게 벌이는 일이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하셨다. 연신(筵臣)이 정문(程文)의 폐단을 말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소식(蘇軾)은 어질다. 득실(得失)은 도외(度外)에 두고 임금의 덕이 나아지지 않는 것을 근심하였다. 그렇기는 하나 또한 위에 있는 자가 이끌기에 달려 있을 뿐이다.’ 하셨다.
14년 무오(戊午) 춘정월(春正月)에 관원을 보내어 고(故) 충신(忠臣) 김응하(金應河)에게 치제(致祭)하게 하셨는데, 순절(殉節)한 해이기 때문이다.
하5월(夏五月)에 안동(安東) 사람이 사사로이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의 사당을 훼손하였는데, 왕께서 말씀하기를, ‘문정(文正)의 대절(大節)은 백세(百世)에 빛나는 것인데 감히 사사로이 그 사당을 훼손할 수 있는가? 난민(亂民)이니, 맨 먼저 앞장선 자를 형배(刑配)하라.’ 하셨다.
추9월(秋九月)에 고려의 충신 길재(吉再)의 시호(諡號)를 내리고 이어서 치제(致祭)하라고 명하셨다. 이때 경상 감사(慶尙監司) 이기진(李箕鎭)이 말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내려 준 전토(田土)에 대나무를 심었으니 신하가 되지 않을 뜻은 확고하여 바꿀 수 없다. 죽은 자가 아는 것이 있다면 어찌 시호를 내린다 하여 영광스럽게 여기겠는가?’ 하매, 연신이 말하기를, ‘정몽주(鄭夢周)·박상충(朴尙衷)도 다 전조(前朝)의 충신인데 아조(我朝)에서 시호를 내렸습니다.’ 하니, 왕께서 윤허하고 명하여 세 사람의 후손을 등용하게 하셨다.
동10월(冬十月)에 왕께서 구준(丘濬)의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를 강독(講讀)하다가 명례악편(明禮樂篇)에 이르러 유신(儒臣)에게 말씀하기를, ‘아! 우리 세종조(世宗朝)에 하늘이 거서(秬黍)를 내리고 땅에서 경석(磬石)이 나와 드디어 명신(名臣)·석보(碩輔)와 함께 제작한 것이 빛나서 볼 만하였다. 이제 세상이 바뀌고 풍속이 변하였을지라도 어찌 음악이 없다 하겠는가? 도리어 성률(聲律)을 아는 자가 없으므로 음절(音節)을 번잡하고 촉급하게 하니, 조종(祖宗)의 옛것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다. 또, 여민락(與民樂)으로 말하면 예전에는 동궐(東闕)·서궐(西闕)을 왕래하고서야 일장(一章)이 끝난다 하였는데, 이제는 또한 그렇지 못하다. 아! 아깝다.’ 하고 한참 있다가 다시 말씀하기를, ‘우리 조정의 《오례의(五禮儀)》는 명나라의 《대명집례(大明集禮)》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조사(朝士)에는 익숙한 사람이 없으므로 무릇 대례(大禮)가 있으면 홍려리(鴻臚吏)에게 일임하여 전도되고 변란(變亂)되었다. 예(禮)도 이러한데, 음악을 어찌 논하겠는가?’ 하셨다. 조금 뒤에 방백(方伯)·수령(守令)이 남형(濫刑)하는 것을 금하셨다. 경기·삼남(三南)의 대동미(大同米)는 그 반을 각 고을에 두라고 명하고 말씀하기를, ‘예전에 유사(有司)인 신하가 전곡(錢穀)의 수를 임금에게 아뢰지 않은 것은 임금이 넉넉한 줄 알고서 도리어 즐기고 사치하는 마음을 일으킬까 염려하였기 때문이었다. 내가 늘 월말에 올리는 회요(會要)를 봄에 따라 이렇게 생각하였다. 어찌 저축이 풍부하여 한문제(漢文帝)를 본떠 천하(天下)의 전조(田租)를 죄다 줄여 줄 수 있으랴마는 지금의 저축이 전조를 줄여 주기에 마땅하지 못하더라도 옮겨 나르는 비용을 덜 수는 있을 것이다.’ 하셨다.
11월에 명하여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고(故) 참판(參判) 정온(鄭蘊)에게 다 후사(後嗣)를 세워 제사를 받들게 하고 고 부윤(府尹) 임경업(林慶業)과 명나라 제독(提督) 이여매(李如梅)의 후손을 등용하게 하셨다.
12월에 대신이 이천(伊川)·곡산(谷山)에 도둑이 많다 하여 무신 수령으로 바꾸기를 청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다스리기를 잘하고 못하는 것은 문신과 무신에 관계되지 않는다. 더구나 도둑도 본디 양민(良民)이니, 인의(仁義)로 점차 교화하여 용사(龍蛇)가 적자(赤子)로 변화하게 하는 것이 옳은데, 어찌 잡아서 장살(杖殺)하기를 힘쓸 수 있겠는가? 먼저 두 부(府)에 신칙해야 한다.’ 하셨다.
【원전】 44 집 543 면
【분류】 *왕실-국왕(國王)


[주D-001]용만(龍灣) : 의주(義州).
[주D-002]서전(西銓) : 병조(兵曹).
[주D-003]탁지(度支) : 호조(戶曹).
[주D-004]을사년 : 1725 영조 원년.
[주D-005]임자년 : 1732 영조 8년.
[주D-006]신해년 : 1731 영조 7년.
[주D-007]경조(京兆) : 한성부(漢城府).
[주D-008]신축년 : 1721 경종 원년.
[주D-009]약제(禴祭) : 종묘의 여름 제사.
[주D-010]임진년 : 1592 선조 25년.
[주D-011]정묘년 : 1627 인조 5년.
[주D-012]임자년 : 1732 영조 8년.
[주D-013]구식(救食) : 일식(日食)이 있을 때 해가 먹히는 것을 구원하는 의식. 흉변(凶變)으로 생각하여 임금이 천담복(淺淡服) 차림으로 월대(月臺) 위에서 각사의 당상관(堂上官)과 낭관(郞官)을 거느리고 해와 달이 다시 완전해질 때까지 기도하였으며, 좌우에 악기(樂器)를 벌려 놓으나 연주하지는 아니하였음.
[주D-014]자목(字牧) : 고을의 수령이 백성을 사랑으로 다스림.
[주D-015]신축년 : 1721 경종 원년.
[주D-016]임인년 : 1722 경종 2년.
[주D-017]무신년 : 1728 영조 4년.
[주D-018]법강(法講) : 경연(經筵).
[주D-019]옥서(玉署) : 홍문관(弘文館).
[주D-020]법연(法筵) : 경연.
[주D-021]광(筐) : 폐백을 담는 죽기(竹器).
[주D-022]정문(程文) : 과거를 보일 때 독권관(讀券官)이 채점을 하기 위하여 만들던 모범 답안지.
[주D-023]거서(秬黍) : 검은 기장.
영조 대왕 행장(行狀)④

15년 기미(己未) 춘정월(春正月)에 왕께서 적전(籍田)에서 친경(親耕)한 다음 방백(方伯)·수령(守令)에게 신칙하여 종자와 소를 백성에게 도와 주어 전야(田野)를 널리 개간하게 하셨다. 종척(宗戚)의 복례(僕隷)가 서울 백성을 침탈(侵奪)하는 것을 금하고 백성 중에 가난하여 혼가(婚嫁)하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유사(有司)가 돕게 하셨다.
하4월(夏四月)에 왕께서 구준(丘濬)의 《대학연의보》를 강독하다가 교사(郊祀) 때에 황제가 친히 희생을 살피고 백관(百官)을 서계(誓戒)하였다는 데에 이르러 감탄하며 말씀하기를, ‘사전(祀典)을 공경하는 것이 또한 이러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대신에게 의논하게 하셨다. 대신들이 다 수백년 동안 행하지 않던 예를 반드시 시작할 것 없겠다고 말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예(禮)에 없는 예는 워낙 시작할 수 없겠으나, 예(禮)에 있는 것을 어찌하여 행하지 않겠는가?’ 하고 드디어 본디 친향(親享)이 있을 때에는 희생을 살피고 서계하는 것도 다 친히 행하는 것으로 하도록 명하셨다. 대왕 대비(大王大妃)에게 진연(進宴)하고 나이가 일흔 이상인 조사(朝士)와 여든 이상인 서민(庶民)의 자손에게 관가에서 밑천을 주어 각각 그 어버이에게 잔치하게 하셨다.
5월에 중종(中宗)의 원비(元妃) 신씨(愼氏)에게 단경(端敬)이라 시호(諡號)를 추상(追上)하고 태묘(太廟)에 부제(祔祭)하셨다. 이에 앞서 숙종(肅宗) 때에 신규(申奎)가 상소하여 장릉(莊陵)의 위호(位號)를 회복하기를 청하고 또 신비(愼妃)의 위호를 회복하기를 청하였는데, 숙종께서 장릉의 위호만을 회복하고 신비의 일은 오히려 망설이시어 사당을 세우고 수호(守戶)를 두게 하셨다. 이해 봄에 왕께서 일에 따라 느낌을 일으켜 중관(中官)에게 명하여 사당을 지키게 하셨는데, 얼마 안가서 사인(士人) 김태남(金台南)이 상소하여 신비의 위호를 회복하기를 청하였다. 왕께서 말씀하기를, ‘군심(君心)의 추향(趨向)은 삼가지 않을 수 없다. 한 무제(漢武帝)가 이재(理財)를 좋아하면 이재하는 자가 나아가고, 변방을 개척하기를 좋아하면 변방을 개척하는 자가 나아갔다. 이제 김태남은 중관이 사당을 지키기 때문에 이 상소를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임금이 말을 채용하는 데에는 그 당부(當否)만을 볼 뿐이다.’ 하셨다. 드디어 백관(百官)이 함께 의논하라고 명하셨는데, 다들 김태남의 말이 옳다고 말하니, 그대로 따르셨다.
추8월(秋八月)에 왕께서 온릉(溫陵)에 거둥하셨는데, 단경 왕후(端敬王后)의 신릉(新陵)이다.
16년 경신(庚申) 춘3월(春三月)에 왕께서 명릉(明陵)에 거둥하여 숙종조(肅宗朝)에 대보단(大報壇)을 건치(建置)한 일을 추사(追思)하고 감개하셨다. 회란(回鑾)할 때에 선무사(宣武祠)에 이르러 부앙(俯仰)하며 눈물을 흘리며 관원에게 명하여 치제(致祭)하게 하고 친히 감황은시(感皇恩詩)를 지어 새겨서 벽에 걸게 하셨다.
하4월(夏四月)에 왕께서 《주역(周易)》을 강독(講讀)하다가 서합(噬嗑)의 대상(大象)에 이르러 탄식하며 말씀하기를, ‘임금의 강학(講學)은 장구(章句)를 자세히 파고 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대개 장차 몸소 행하려는 것이다. 성인(聖人)이 말하기를, 「예전 옥사(獄死)를 청리(聽理)하는 자는 살릴 방도를 찾았는데, 지금 옥사를 청리하는 자는 죽일 방도를 찾는다.」 하니, 이것이 어찌 만세(萬世)의 귀감(龜鑑)이 아니겠는가?’ 하고, 이어서 팔도에 신칙하여 모든 옥사를 상세히 살피고 삼가도록 힘쓰게 하셨다. 우의정(右議政) 유척기(兪拓基)가 《전록통고(典錄通考)》를 속찬(續纂)하기를 청하니, 왕께서 윤허하셨다. 또 하교하기를, ‘창업(創業)하고 중흥(中興)한 임금은 관대한 것을 숭상하므로 국조(國祚)가 길이 이어졌으나, 계체(繼體)하고 수성(守成)한 임금은 가혹하고 각박함에 힘썼으므로 자손이 빨리 망하였다는 것을 이 글을 편집하는 자가 몰라서는 안 된다.’ 하셨다. 얼마 안되어 왕께서 계장(啓狀)에 자자(刺字)라는 말이 있는 것을 보고 경녈(黥涅)이 지금도 아직 있는 것으로 의심하여 유척기에게 물으시매, 유척기가 대답하기를 ‘우리 나라는 《대명률(大明律)》을 따라 쓰는데, 《대명률》에 절도(竊盜)한 자는 자자한다 하였으므로 평의(評議)함에 있어서 그 글을 인용한 것이고, 실은 자자한 적이 없습니다.’ 하였다. 연신(筵臣)이 말하기를, ‘법조(法曹)에 아직도 경녈하는 제구가 있어 이따금 팔에 자자하나 낯에는 자자하지 않습니다.’ 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신체발부(身體髮膚)는 부모에게서 같이 받은 것이니 그 손상하는 것은 낯이나 팔이나 마찬가지이다. 한번 손상한 뒤에는 혹 스스로 새로워지더라도 어찌 여느 백성과 같아질 수 있겠는가? 경녈하는 제구를 빨리 불사르고 팔에 자자하는 법도 금하라. 율문(律文)에 견주어 인용하는 것은 공명(空名)이라 할지라도 장래 그 이름대로 할 자가 없을는지 어찌 알겠는가? 이 죄명을 없애어 말하지 말아야 한다.’ 하셨다.
5월에 대동미(大同米)·전조(田租)의 반을 줄였는데, 유사(有司)가 경용(經用)이 모자람을 말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임금과 신하가 초의(草衣)하고 초식(草食)하기로 마음먹으면 어찌 경용을 근심하겠는가?’ 하고, 드디어 명하여 아홉 곳의 영선(營繕)을 그만두게 하셨다.
6월에 효종 대왕(孝宗大王)의 시호(諡號)를 명의 정덕(明義正德)이라 가상(加上)하고 태묘(太廟)에서 친향(親享)하고 돌아와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백관의 진하(陳賀)를 받으셨다.
추7월(秋七月)에 뭇 신하가, ‘왕의 효제(孝悌)한 덕(德)과 무릇 당화(黨禍)를 없애고 역란(逆亂)을 소제하고 사전(祀典)을 닦고 백성을 어루만지신 일이 기록에서 찾아도 견줄 만한 것이 드물다’ 하여 여러 번 존호(尊號)를 청하였으나, 왕께서 굳이 사양하고 윤허하지 않으셨다. 대왕 대비(大王大妃)께서 받기를 권하시니, 왕께서 눈물을 흘리며 말씀하기를, ‘먼저 자성(慈聖)께 진호(進號)한 뒤에 삼가 분부를 받들겠습니다.’ 하시매, 대비께서 허락하셨다. 드디어 대비의 존호를 현익(顯翼)이라 올리고 왕의 존호를 지행 순덕 영모 의열(至行純德英謨毅烈)이라 올리고 왕비의 존호를 혜경(惠敬)이라 올렸다. 왕께서 인정전에서 책보(冊寶)를 받고 명정전(明政殿)에서 백관의 진하를 받으셨다. 이튿날 승지(承旨)에게 명하여 공시(貢市)의 민폐(民弊)를 묻게 하고 각도에 신칙하여 민폐를 물어서 아뢰게 하셨다.
8월에 왕께서 친히 문묘(文廟)에서 석채(釋菜)를 행하고 물러가 명륜당(明倫堂)에 나아가서 과시(科試)를 설행(設行)하여 선비를 뽑고 대사성(大司成)에게 명하여 한 달에 세 번 국자(國子)에 가서 유생들과 회찬(會饌)하고 학업을 권과(勸課)하게 하고, 《주례(周禮)》에 있는 주(州)에서 승학(陞學)하는 법을 본떠 식년(式年)마다 각도에서 각각 오경(五經)에 능통한 선비 한 사람을 천거하여 태학(太學)에 들여보내어 인재를 만들어 내게 하셨다.
9월에 왕께서 제릉(齊陵)·후릉(厚陵)에 거둥하시는 길에 파주(坡州)에 있는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의 묘(墓)를 지날 때에 왕께서 교자(轎子)를 멈추고 식(式)하여 경의를 나타내고 관원을 보내어 성혼과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의 묘에 치제(致祭)하게 하셨다. 능에 배알하고 나서 드디어 개성부(開城府)에 거둥하여 만월대(滿月臺)에 나아가 문과(文科)·무과(武科)를 설행하여 선비를 뽑고, 칙교(飭敎)하여 문사(文士)·무사(武士)로서 침체되어 있는 사람을 등용하셨다. 그 중에서 청현(淸顯)에 통하여 마땅한 자는 청현에 통하도록 하셨다. 성균관(成均館)에 이르러 알성례(謁聖禮)를 행하고 학사(學舍)를 두루 보고, 탄식하며 말씀하기를, ‘터가 아름답다. 전조(前朝)에서 불(佛)을 좋아하고 유(儒)를 좋아하지 않아서 망하기에 이르렀으니 아깝다.’ 하고, 드디어 친히 ‘존성도(尊聖道)’라 써서 새겨 명륜당에 걸게 하고 《삼경(三經)》·《사서(四書)》 각 1부(部)를 내려 존경각(尊經閣)에 두게 하셨다. 다시 하교하기를, ‘선조(先朝) 계유년에 고도(故都)에 거둥하셨을 때에 시학(視學)하려 하셨으나 못하고 다만 양조(兩朝)의 고사(故事)에 따라 면포(綿布)를 내리셨으니, 이제 또한 면포 1백 필(匹)을 내린다.’ 하셨다. 곧 선죽교(善竹橋)에 비(碑)를 세워 고려의 충신 정몽주(鄭夢周)의 절의(節義)를 기리고 또 부조현(不朝峴)에 비를 세워 새 조정에 나와 벼슬하지 않은 사람 자손의 충정(忠貞)을 장려하고, 사효자비(四孝子碑)를 지날 때에 승지(承旨)에게 명하여 김업(金嶪) 등의 자손이 있는지 없는지를 묻게 하시고, 드디어 회란(回鑾)하셨다.
동12월(冬十二月)에 은거하여 뜻을 지키는 선비에게 하유(下諭)하셨는데, 나와서 조정에 오게 하고 조정에 나오는 자는 다 역마(驛馬)를 타게 하셨다.
17년 신유(辛酉) 춘정월(春正月) 관동(關東)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어사(御史)를 보내어 진정(賑政)을 살피게 하고 기보병포(騎步兵布)를 면제하고 가장 심한 고을은 부역과 공물도 모두 면제하셨다. 이때 관북(關北)도 기근이 들었는데, 모든 관동·관북의 방물(方物)·물선(物膳)·삭선(朔膳)을 가을 곡물이 익을 때까지 죄다 면제하셨다.
2월에 전 부제학(副提學) 김진상(金鎭商)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삼았는데, 그 출처(出處)에 본말(本末)이 있고 말이 없이 절조를 지키는 것을 아름답게 여기신 것이다.
3월에 명하여 선비라 이름하는 자에게는 도둑을 다스리는 형벌을 시행하지 말게 하시고 항령(恒令)으로 삼았다. 처음에 전 참판(參判) 이춘제(李春躋)가 그 아들의 관례(冠禮)를 치를 때에 서제(庶弟) 이하제(李夏躋)를 시켜 성찬(盛饌)을 장만하는 일을 맡게 하고 공경(公卿)·위포(韋布)를 두루 청하여 잔치하였다. 그런데 잔치에 참여한 자가 많이 중독되어 죽게 되거나 죽지 않으면 또한 병들었으므로 뭇사람이 원망하여 격고(擊鼓)하고 이하제를 다스려 죽은 자와 함께 일세(一洗)하기를 청하니, 왕께서 불쌍히 여겨 윤허하셨다. 그래서 뭇 원망하는 사람들이 추관(秋官)의 상형(常刑)으로는 승복(承服)받을 수 없다 하므로, 포청(捕廳)에 보내어 도둑을 다스리는 형벌로 시행하여 아주 혹독하게 하였는데, 이하제가 마침내 포청에서 죽었다. 이때에 이르러 왕께서 관학(館學)의 유생(儒生)을 친히 시강(試講)하실 때에 명관(命官) 송인명(宋寅明)에게 말씀하기를, ‘이하제를 다스린 것은 효자(孝子)·자부(慈父)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전(傳)에는 「선비를 죽일 수는 있으나 욕보일 수는 없다.」 하였다. 이하제는 일찍이 강생(講生)으로서 이 뜰에 들어왔었는데, 도둑을 다스리는 율(律)로 다스렸다. 이 길이 한번 열려서 혹 뒷날의 본보기가 된다면 그 도도(滔滔)한 폐단이 어찌 내게서 비롯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셨는데, 대개 송인명의 아들도 잔치에서 죽었으므로 왕께서 언급하신 것이다. 곧 유사에 명하여 옥(獄)을 세척하여 그 불결한 것을 제거하게 하셨다.
하4월(夏四月)에 이조(吏曹)의 낭관(郞官)이 통청(通淸)을 관장하는 법을 없애고 한림(翰林)의 천거를 권점(圈點)으로 하는 것으로 고쳤다. 왕께서 당습(黨習)을 매우 미워하여 말씀하기를, ‘당습은 다 신진(新進)인 선비가 조급히 부귀를 다투고 서로 무함하는 데에서 말미암는다.’ 하고 명하여 두 가지 천거를 폐지하게 하셨다. 그런데 일찍이 한림이 된 자들이 상소하여 이이첨(李爾瞻)이 도당 회권(都堂會圈)을 행한 일을 인용하고 사관(史官)을 중히 여기는 방도가 아니라 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관원이 제 직무에 따라 아뢰는 것을 누가 불가하다 하겠는가? 그러나 내가 당습을 미워하므로 익히 생각하고 살펴서 처리하였는데, 소관(小官)이 감히 방해하는가?’ 하고 드디어 상소한 신하들을 죄다 파면하셨다.
5월에 《오례의(五禮儀)》에 실린 궁전(宮殿)·문·다리의 옛이름이 달리 불리므로 예를 행함에 불편하다 하여, 전 대제학(大提學) 이덕수(李德壽)에게 명하여 바로잡게 하고, 글이 완성된 다음에 영남 감영(嶺南監營)에 보내어 간행(刊行)하게 하셨다.
6월 관동(關東)에서 백토(白土)를 파내는 일을 멈추게 하고 이어서 사옹원(司饔院)에 명하여 가을에 굽는 일을 그만두게 하셨는데, 어사(御史)의 말을 따른 것이다.
추7월(秋七月)에 광달문(廣達門) 밖에 태학생(太學生)을 불러 찬선(饌膳)과 술을 내려 먹이고 승지(承旨)에게 명하여 선성(先聖)을 존경하고 근본을 힘쓰는 도리를 선유(宣諭)하게 하셨다. 이것은 숙묘(肅廟)의 고사(故事)를 따른 것이다.
18년 임술(壬戌) 춘정월(春正月)에 왕께서 당의(黨議)의 분쟁(分爭)이 서원(書院)에서 많이 일어난다 하여 각도의 50년 이래 새로 창설한 서원을 철훼하라고 명하셨다. 찬선(贊善) 박필주(朴弼周)가 상소하여 기자(箕子)·공자(孔子)·주자(朱子) 삼성(三聖)의 영당(影堂)을 철훼하지 말기를 청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초야(草野)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윤허하셨다.
3월에 왕께서 친히 ‘공평하고 편파하지 않은 것은 군자의 공심이고 편파하고 공평하지 않은 것은 소인의 사의이다.[周而不比乃君子之公心比而不周寔小人之私意]’라고 써서 태학(太學)에 내려서 돌에 새겨 반수교(泮水橋)에 세우게 하셨다.
하5월(夏五月)에 일식(日食)이 있었다. 왕께서 하루 전에 재계(齋戒)하고 구식(救食)하고서 항령(恒令)으로 삼으셨다. 이때 여역(癘疫)이 매우 치성하여 사망이 많았는데, 왕께서 양의사(兩醫司)에 명하여 나누어 맡아서 치료하게 하고 온 집안이 죽은 자는 관(官)에서 거두어 묻게 하셨다.
6월에 강화(江華)의 외성(外城)을 쌓았는데, 유수(留守) 김시혁(金始㷜)의 청을 따른 것이다.
추7월(秋七月)에 이연덕(李延德)을 겸 장악원 정(兼掌樂院正)으로 삼아 아악(雅樂)을 고정(考正)하게 하셨다. 국가가 난리를 겪은 뒤로 아악이 산일(散軼)되어 생소관금(笙簫管琴)이 다 갖추어지지 않았으므로 황단(皇壇)의 악기(樂器)는 대부분을 속악(俗樂)으로 대체하였다. 또한 궁헌(宮軒)의 제도를 갖출 수 없었으므로 왕께서 개탄하여 장악원 제조(掌樂院提調) 민응수(閔應洙)에게 명하여 연경(燕京)에서 네 가지 악기를 사 오게 하셨으나, 곡보(曲譜)를 탄취(彈吹)할 줄 아는 자가 없었는데, 어떤 자가 이연덕이 음악을 안다고 천거하였으므로 이 명이 있었다. 왕께서 또 세종조(世宗朝)의 보루각(報漏閣)을 회복하려고 이연덕에게 명하여 정교하게 생각할 줄 아는 사람 최천약(崔天若)과 함께 강구(講究)하게 하셨다.
8월에 어떤 사람이 평양(平壤) 땅속에서 옛 규(圭)를 얻어서 바치고 말하기를, ‘이것은 기자(箕子)의 규입니다.’ 하였으므로, 왕께서 연신(筵臣)에게 물었다. 연신이 대답하기를, ‘은(殷)나라는 검은 빛을 숭상하였으므로 기자의 규도 검었을 것인데, 이제 검지 않고 푸르니 아닐 것입니다.’ 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그렇다. 이것은 명(明)나라 고황제(高皇帝)가 우리 나라에 내려 준 것인데, 임진년의 서수(西狩) 때에 잃은 것일 것이다. 황단에 제사할 때에 이 규를 잡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는가?’ 하셨다.
9월에 경주(慶州)에 홍수가 나서 신라 헌덕 왕릉(憲德王陵)을 무너뜨렸는데, 왕께서 향축(香祝)을 보내고 도신(道臣)에게 명하여 수리하게 하셨다. 이에 앞서 영남(嶺南) 백성이 관북(關北)으로 곡물을 나르다가 바다 가운데에서 빠져 죽었다. 왕께서 말씀하기를, ‘관북 백성을 위하다가 영남 백성을 죽였으니, 인(仁)을 온전히 하기 어렵기가 이렇구나.’ 하고, 도신에게 명하여 제단을 설치하고 제사하게 하셨다.
동10월(冬十月)에 명하여 《병장도설(兵將圖說)》을 인쇄하여 중외(中外)에 널리 반포하게 하셨다.
11월에 왕께서 서울 선비가 태학(太學)에 들어가 거재(居齋)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을 민망히 여겨, 명하여 상재생(上齋生)의 액수 1백 인에 맞추어 늘리고 회찬(會饌) 하루를 1점(點)으로 하여 50점에 차면 반시(泮試)에 나아갈 수 있도록 하게 하셨다. 드디어 강제 절목(講製節目)을 만들어 태학에 명하여 준행(遵行)하게 하고, 이튿날 숭문당(崇文堂)에서 태학생을 소견하여 말씀하기를, ‘선조(先朝)에서 이 당을 세우고 숭문이라 이름 붙인 것은 문을 숭상하기 위한 것이고, 이제 이 당에서 너희들을 만나는 것도 문을 숭상하는 뜻이다.’ 하셨다.
19년 계해(癸亥) 춘정월(春正月) 초하루 아침에 왕께서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동조(東朝)께 진하(陳賀)하셨는데, 왕께서 즉위하신 뒤로 어머니로서 계신 지 20년이 되었기 때문이다. 3월에 명하여 《수교집록속편(受敎輯錄續編)》을 짓게 하셨다. 하교하기를, ‘이 뒤로 군무(軍務)가 아닌데 내가 혹 곤장(棍杖)을 쓰거든 후원(喉院)에서 집주(執奏)하라.’ 하셨다. 형조 참의(刑曹參議) 유복명(柳復明)이 상소하여 술을 금하기를 청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전에 술을 금하였으나 백성만 소요하게 하고 실효(實效)가 없었다. 내가 글을 만들어 경계하고 금령(禁令)을 만들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또 내가 도류안(徒流案)을 보니 술 때문에 충군(充軍)된 자가 많았는데, 이것은 형벌로 다스리는 것이다. 먼저 교화하지 않고 다만 법으로 다스리는 것을 쾌하게 여긴다면, 백성이 어떻게 편안히 살겠는가?’ 하고, 들어주지 않으셨다. 찬선(贊善) 박필주(朴弼周)를 불러 왕께서 말씀하기를, ‘대신(大臣)이 방금 만나기를 청하였으나, 구경(九經)의 차서에 어진이를 높이는 것이 대신을 공경하는 것 위에 있으므로 먼저 경을 소견(召見)하였다.’ 하고, 이어서 묻기를, ‘삼대(三代) 이후에 다시 삼대 같은 때가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시매, 박필주가 대답하기를, ‘행해지고 행해지지 않는 차이입니다.’ 하였다. 왕께서 말씀하기를, ‘어찌하여 행해지지 않는가?’ 하시매, 박필주가 대답하기를, ‘기품(氣稟)을 번거롭히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왕께서 말씀하기를, ‘제 선왕(齊宣王)은 맹자(孟子)를 대하여 재화(財貨)와 여색(女色)을 숨기지 않았는데, 내가 어찌 경에게 숨기겠는가? 나는 기쁨과 노여움이 나타나면 늘 중도를 잃는데, 스스로 병인 줄 알기는 하나 고치지 못한다.’ 하시매, 박필주가 대답하기를,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이렇게 하는 것이 병인 줄 알면 이렇게 하지 않는 것이 약이다.」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그것이 병인 줄 아셨으면 어찌하여 고치지 않으십니까?’ 하였다. 왕께서 말씀하기를, ‘알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행하기가 어려울 뿐이다.’ 하시매, 박필주가 말하기를, ‘성의가 모자라면 스스로 속이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말이 착하다. 내가 스스로 속인 지 이미 반생이 넘었거니와, 이제부터 뒤로는 스스로 속이지 않기를 힘쓰겠다.’ 하셨다. 박필주가 이어서 이재(李縡)·한원진(韓元震)은 여러 해 동안 배척하여 두지 말아야 할 것임을 아뢰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이는 내 잘못이다.’ 하고, 당장에 명하여 한원진은 삭출(削黜)하지 말고 이재는 정경(正卿)에 올리게 하셨다.
하4월(夏四月)에 왕께서 태묘(太廟)에서 향사(享祀)하고 회란(回鑾)하다가 인조(仁祖)의 구궁(舊宮)을 바라보고 즉위하신 때로부터 천시(天時)가 3주갑(周甲)이 되었음을 느끼고 드디어 들를 것을 명하셨는데, 갑작스러워서 군진(軍陣)이 대열을 이루지 못하고 장위(仗衛)가 많이 질서를 잃었다. 장령 윤식(尹植)이 간(諫)하기를, ‘태묘를 나올 때에 명하지 않고 도중에서 명하셨으니, 뭇 신하가 말릴 것을 억제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억제한다는 것은 본정(本情)이 아니다. 그러나 말은 옳으니, 내가 받아들이고 거절하지 않겠다.’ 하고, 드디어 윤식을 통정(通政)의 품계에 발탁하셨다. 곧 향사 때의 뭇 신하의 제복(祭服)이 제도에 맞지 않는다 하여 유사(有司)에 명하여 《대명회전(大明會典)》을 살펴서 바로잡게 하고 또 의주(儀註) 가운데에서 절문(節文)이 번잡한 것을 친히 바로잡아 유사에 내리셨다.
윤4월(閏四月)에 왕께서 문묘(文廟)에 작헌(酌獻)하고 명륜당(明倫堂)에서 시사(試士)하고 하련대(下輦臺)에서 대사례(大射禮)를 행하셨는데, 왕께서 3시(矢)를 맞추셨다. 성종(成宗)의 고사(故事)를 따른 것이다. 문형(文衡)에게 명하여 그 일을 적어 명륜당에 걸고 향관청(享官廳) 동쪽에 각(閣)을 세워 궁시(弓矢)·기복(器服)을 보관케 하셨다. 이튿날 태학생을 숭문당(崇文堂)에 불러 술을 내리고 음식을 차려 주셨는데, 음식은 모두 다섯 가지이고 술은 모두 세 번 돌렸다. 이에 앞서 왕께서 묘중(廟中)에서 일을 행할 때마다 음악의 장절(章節)을 묵묵히 셈하셨는데, 그 제1실(第一室)의 공덕(功德)을 나타내는 것을 혹 제5실에서 연주하기도 하고 제6실의 공덕을 나타내는 것을 혹 제9실에서 연주하기도 하므로 왕께서 매우 의심하셨다. 이때에 이르러 연신(筵臣)에게 물으셨으나 연신이 대답하지 못하므로 드디어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대신(大臣)에게 의논하게 하셨다. 영의정(領議政) 김재로(金在魯)가 대답하기를, ‘세종조(世宗朝)에서 음악을 제정할 때에 신관(晨祼)과 삼헌(三獻)의 악장(樂章)에서 각각 인입(引入)·인출(引出)을 덜고 아홉으로 절(節)을 만들고 그 여덟 장(章)에서 목조(穆祖)부터 태종(太宗)과 원경 왕후(元敬王后)까지의 공덕을 두루 서술한 뒤에 제9장에서 통틀어 서술하여 마치게 하였으니, 이것이 그 음악을 제정한 미지(微旨)이었습니다. 인조조(仁祖朝)에 이르러 뭇 신하가 묘악(廟樂)이 구성(九成)하는 뜻을 깨닫지 못하고 드디어 실마다 그 장을 하나로 하고 선묘(宣廟)의 악장을 추가하여 만들어서 그 아홉 장을 열 장으로 만들었고, 지금의 악사(樂師)가 또 그 이치를 몰라서 또한 한 장을 각각 한 실에서 연주하니, 이 때문에 공덕이 연주하는 실에 맞지 않습니다.’ 하였다. 왕께서 말씀하기를, ‘그렇다. 선조(宣祖)의 악장을 이제 없앨 수 없으니, 태종실(太宗室)의 현미장(顯美章)과 원경후실(元敬后室)의 정명장(貞明章)을 합하여 한 시(詩)를 만들어 구성의 수를 어기지 않게 하라. 또 오늘 바로잡은 시말(始末)을 의궤(儀軌)에 상세히 실어서 뒷날의 빙고(憑考)로 삼으라.’ 하셨다.
5월에 왕께서 사직(社稷)에 비오기를 빌었으나 비가 내리지 않으므로 다시 북교(北郊)에서 빌려 할 때에 근신(近臣)에게 말씀하기를, ‘비오기를 빌 때에는 연(輦)을 타지 않는 것이 고례(古例)인데, 일전에 원로 대신이 간절히 다투므로 애써 따랐으나, 이렇게 하고서 어찌 천신(天神)을 감동시킬 수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보여(步輿)로 북교에 이르니, 제사가 끝나고서 비가 내렸다. 왕께서 한참 동안 한데에 앉았다가 돌아오셨다.
추7월(秋七月)에 왕께서 일로 말미암아 하교하기를, ‘나라에서 착한 사람을 등용하면 그 이로움이 크다. 한(漢)나라 조정에 급암(汲黯)이 있을 때에는 회남(淮南)에서 감히 반란이 일어날 수 없었다.’ 하셨다.
9월에 뭇 신하가 동조(東朝)께 잔을 올려 수(壽)를 빌기를 청하였는데, 동조께서도 왕이 조정에서 뭇 신하에게 잔치를 베풀기를 바라시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삼가 분부를 받들겠습니다.’ 하셨다. 드디어 탄미절(誕彌節)에 뭇 신하에게 잔치를 베푸셨는데, 음악은 아악(雅樂)을 쓰고 술은 현주(玄酒)를 쓰고 음식은 그 가짓수를 줄였다.
동10월(冬十月)에 엄흥도(嚴興道)에게 하대부(下大夫)를 추증하고 관에서 제수(祭需)를 주게 하셨는데, 예관(禮官)의 말을 따른 것이다.
20년 갑자(甲子) 춘정월(春正月)에 《소학선정전훈의(小學宣政殿訓義)》를 찬집(纂輯)하였다. 왕께서 유신(儒臣)들에게 말씀하기를, ‘《소학》은 내가 평생 동안 존신(尊信)한 글이다. 내가 세종조(世宗朝)의 《사정전훈의(思政殿訓義)》를 본떠 음훈(音訓)의 사실(事實)과 선유(先儒)의 성명(姓名)·출처(出處)를 집해(集解) 아래에 나누어 풀이하여 보는 데에 편리하게 하고자 한다.’ 하셨다. 그래서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유신(儒臣)을 불러 친히 참증(參證)하시고 완성되고 나서는 찬성(贊成) 박필주(朴弼周)에게 보여 거듭 교정하게 하여 세상에 유행시키셨다.
하5월(夏五月)에 명하여 《속대전(續大典)》을 찬집(纂輯)하되 전가 사변율(全家徙邊律)을 없애게 하셨다. 이에 앞서 성종조(成宗朝)에서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찬수하였는데, 규모는 매우 바르나 조관(條貫)은 오히려 상세하지 못하므로 역대에서 증수(增修)하여 각각 한 서책을 만들었는데, 《전속록(前續錄)》·《후속록(後續錄)》·《전록통고(典錄通考)》·《수교집록(受敎輯錄)》 등의 서책이 있었으므로 문호(門戶)가 번거롭고 많아서 고거(考據)하기에 불편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왕께서 명하여 찬집청(纂輯廳)을 설치하고 아홉 당상(堂上)과 아홉 낭청(郞廳)을 차출하여 육전(六典)을 나누어 맡겨 번잡한 것을 삭제하여 간단하게 하고 날마다 전석(前席)에 인대(引對)하여 친히 감정(勘定)하셨는데, 전가 사변율에 이르러 탄식하여 말씀하기를, ‘범한 자는 죄가 있으나 처자는 무슨 죄인가?’ 하고, 드디어 명하여 없애게 하셨다.
추7월(秋七月)에 명하여 《속오례의(續五禮儀)》를 찬집하게 하셨다. 《오례의》도 성종조에서 이루어졌는데, 뒤에 손익(損益)한 것이 많으나 완성된 서책이 없었으므로 이때에 이르러 속찬(續纂)하게 하신 것이다.
9월에 왕께서 기사(耆社)에 들어가셨는데, 뭇 신하의 청을 따른 것이다. 왕께서 기사에 이르러 영수각(靈壽閣)에 참배하고 잠저(潛邸) 옛 동리의 나이 여든 이상인 부로(父老)를 소견(召見)하고 차등을 두어 미포(米布)를 내리셨다. 이튿날 기사의 신하들을 불러 선온(宣醞)하고 하교하기를, ‘선조(先朝) 기해년에 기사의 신하에게 잔치를 내리셨는데, 이제 다만 선온하는 것은 감히 동조(東朝)께 진연(進宴)하기보다 먼저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셨다.
동10월(冬十月)에 대왕 대비(大王大妃)께 진연하셨다. 왕께서 친히 사(詞)를 만들어 기쁨을 도우셨는데, 그 사에 ‘저 보각(寶閣)에 참배하고 궤장(几杖)을 받아 왔도다. 장락궁(長樂宮)에 기쁨을 받들어 예연(禮宴)을 크게 열었도다. 강릉(岡陵)에 송축(頌祝)하니 이것이 만세배(萬歲盃)로다.’ 하였다. 기쁨을 극진히 하고 파하여 물러나와 뭇 신하에게 말씀하기를, ‘어버이가 계시면 늙음을 말할 수 없으나, 영수각에서 받은 궤장을 동조의 좌우(座右)에 바치고 이 사를 노래하여 다만 색동옷을 입고 젖먹이 놀이를 하는 것을 갈음하였다.’ 하셨다.
【원전】 44 집 543 면
【분류】 *왕실-국왕(國王)


[주D-001]서합(噬嗑) : 《주역(周易)》에 나오는 괘(卦)의 하나로, “턱 가운데 물건이 있는 것을 서합(噬嗑)이라 한다.[頣中有物曰噬嗑]” 하였는데, 서로 물어 뜯는다는 뜻으로, 형옥 죄수(刑獄罪囚)의 상(像)임.
[주D-002]경녈(黥涅) : 살을 째고 먹물로 죄명을 써 넣는 형벌.
[주D-003]국자(國子) : 성균관(成均館).
[주D-004]식(式) : 수레 앞턱에 가로 댄 나무에 의지하여 경례함.
[주D-005]계유년 : 1693 숙종 19년.
[주D-006]위포(韋布) : 성균관 유생.
[주D-007]후원(喉院) : 승정원(承政院).
[주D-008]구경(九經) : 아홉 가지 정치에 중요한 일로서, 《중용(中庸)》에 보면 몸을 닦는 것[修身], 어진 이를 높이는 것[尊賢], 친족을 친히 하는 것[親親], 대신을 공경하는 것[敬大臣], 신하를 체찰하는 것[體群臣], 서민을 돌보는 것[子庶民], 모든 공장(工匠)들을 오게 하는 것[來百工], 먼 곳 사람들을 회유하는 것[柔遠人], 제후를 따르게 하는 것[懷諸侯]이라 하였음.
[주D-009]급암(汲黯) : 한대(漢代)의 간신(諫臣). 경제(景帝) 때에 태자 세마(太子洗馬)가 되고 무제(武帝) 때에 동해(東海)의 태수(太守)를 거쳐 구경(九卿)의 반열에 올랐음. 성정(性情)이 심히 엄격하여 직간(直諫)을 잘하여 무제(武帝)로부터 옛날의 사직(社稷)의 신하에 가깝다는 평을 들었음.
[주D-010]현주(玄酒) : 물.
[주D-011]기해년 : 1719 숙종 45년.
영조 대왕 행장(行狀)⑤

21년 을축(乙丑) 춘정월(春正月)에 관서 어사(關西御史)가 돌아와, 영변부(寧邊府)에 육상궁(毓祥宮)에서 절수(折受)한 것이 있는데, 자못 민폐가 된다는 것을 아뢰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은 다 일체(一體)인데, 더구나 선조에서 지성으로 사랑하고 돌보신 백성이겠는가? 폐지하라.’ 하셨다.
3월에 왕께서 대보단(大報壇)에 친향(親享)하려 하시는데, 뭇 신하가 말리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내가 더 노쇠하면 몸소 행하려 하여도 할 수 있겠는가?’ 하고, 마침내 친향하셨다. 명하여 만동사(萬東祠)를 수리하고 면세전(免稅田)을 주게 하셨다.
하6월(夏六月)에 관동(關東)의 공삼(貢蔘)을 줄이고 속전(續田)을 주어 민역(民役)에 보태게 하셨다.
추7월(秋七月)에 하교하기를, ‘우리 동방의 도학(道學)·문장(文章)은 고려 포은(圃隱)이 실로 창도하였으니,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도록 하라. 근년 송경(松京)에 거둥하였을 때에 부조현(不朝峴) 두문동(杜門洞)을 표창하여 주 무왕(周武王)이 상용(商容)의 여(閭)에 식(式)하고 비간(比干)의 묘(墓)를 봉(封)한 일을 본떴는데, 이제 듣건대, 두문동의 후손에 장사꾼이 많다 하니, 등용해야 하겠다.’ 하셨다. 동11월(冬十一月)에 동조(東朝)께 잔을 올려 수를 비셨다.
22년 병인(丙寅) 춘2월(春二月)에 왕께서 문학신(文學臣)을 불러 말씀하기를, ‘옛사람이 글을 읽어서 방심(放心)을 되찾은 데에는 뜻이 있다. 내가 스스로 《소학훈의(小學訓義)》를 찬수(纂修)하고 늘 평소에 세종께서 동방의 성인으로서 예악(禮樂)을 제작하신 것을 몸소 생각하나, 이제 내가 어찌 감히 바랄 수 있겠는가? 오직 평소에 보고 들은 것과 계술(繼述)하는 뜻을 대략 적어서 스스로 경성(警省)하고 또 후세의 자손에게 보일 뿐이다.’ 하셨다. 드디어 날마다 편전(便殿)에서 인대(引對)하여 내편(內編)·외편(外編)을 지으셨는데, 계음식(戒飮食)에 이르러 신하들에게 말씀하기를, ‘예전에 우리 선조(宣祖)께서 처음 대통(大統)을 이으셨을 때 궁인(宮人)이 도량을 시험하려고 음식을 짐짓 깨끗하지 않게 하였으나 성조(聖祖)께서 조금도 낯빛이나 말씀에 나타내지 않으시니 궁인이 황공하여 그만두었는데, 이제까지 궁중에서 아름다운 일로 전하여 온다. 내가 음식에 대하여 가린 적이 없는 것은 이어받은 바가 있기 때문이다.’ 하셨다. 서책이 완성되니 《자성편(自省編)》이라 이름짓고, 이어서 뭇 신하에게 경계하기를, ‘이제부터 언동(言動)이나 정령(政令)이 《자성편》에 어그러지는 것이 있거든 《자성편》에 따라서 경계를 아뢰라.’ 하셨다. 얼마 뒤에 왕께서 유신(儒臣)을 소접(召接)하시는 것이 자못 드물었는데, 유신이 《자성편》을 인용하여 경계하니, 왕께서 칭찬하고 표피(豹皮)를 내리셨다. 하4월(夏四月)에 왕께서 하교하기를, ‘땅에서 재물이 나는 것은 한정이 있는데 군국(軍國)의 수용(需用)은 절도가 없다. 한번 사신이 갈 때에 광은(礦銀) 10만을 써서 왕공(王公)·대부(大夫)·서필(庶匹)에게 쓰이는 능라(綾羅)를 채웠는데, 이제는 궁벽한 초야(草野)에서도 능라를 쓰므로 한 나라의 재력을 다하여 한때의 사치를 돕고 있다. 아! 한탄스러워 견딜 수 있겠는가? 대저 위에서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아래에서 반드시 그보다 심하게 하거니와, 이번 절사(節使)에서 비롯하여 위로는 곤의(袞衣)부터 아래로는 조의(朝衣)에 쓰이는 능라를 일체 엄금하되 군용(軍用)은 이 제한에 넣지 않는다. 어기는 자가 있으면 서장관(書狀官)은 직분을 다하지 못한 것으로 죄주겠다.’ 하셨다. 이날 밤에 승지(承旨)·옥당(玉堂)을 불러 말씀하기를, ‘내가 평소에 거친 베옷을 입고 흰 베로 만든 관을 쓰는 데에 뜻이 있어 궁중에서 먼저 하려 하였으나, 위로 자성(慈聖)을 받들기 때문에 감히 할 수 없었다. 이제 마침 느낌을 일으켜 자성께 평소의 뜻을 환히 아뢰니, 자성께서 기뻐하여 말씀하기를, 「검약(儉約)을 나타내신 것은 열조(列朝)의 성대한 일이다. 네가 뜻이 있으면 대저 무엇이 어려우랴? 화려한 것은 내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하셨다. 이제부터 궁중에서 상투를 높이지 않을 수 있고 소매를 넓히지 않을 수 있으며, 또 옷이 땅에 끌리지 않을 수 있다. 아! 중외(中外)의 신서(臣庶)는 모두 이 뜻을 몸받아 백성으로 하여금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듯이 되게 하라.’ 하셨다. 왕께서 다시 《육선공주의(陸宣公奏議)》 가운데에서 여섯 가지 말을 써서 좌우(座右)에 붙여 스스로 경계하셨는데, 남에게 이기기를 좋아하는 것[好勝人]과 잘못을 가르쳐 줌에 듣기를 부끄러워하는 것[恥聞過]과 변설에 능란 한 것[騁辯給]과 총명을 자랑하는 것[衒聰明]과 위엄을 돋우는 것[厲威嚴]과 강퍅을 함부로 부리는 것[恣剛愎]이었다. 신하들에게 명하여 우러러보게 하고 하교하기를, ‘내가 여섯 가지 병폐를 범하거든 경들이 경계해야 한다.’ 하셨다. 또 말씀하기를, ‘위징(魏徵)이 당 태종(唐太宗)에게 경계하기를, 「처음에는 간(諫)하는 자가 많았으나 이제는 간하는 자가 적다」 하였는데, 이것은 다름 아니라 듣기를 좋아하므로 간하는 자가 많았고 듣기를 좋아하지 않으므로 간하는 자가 적어졌다는 것이다.’ 하셨다.
추8월(秋八月)에 왕께서 유신(儒臣)을 불러 《시경(詩經)》 관저편(關雎篇)을 강독(講讀)하실 때에 유신에게 말씀하기를, ‘이(理)와 의(義)는 천하 만세(天下萬世)의 공물(公物)이다. 제자와 스승 사이라도 반드시 구차하게 같이할 것 없는데, 더구나 임금과 신하 사이에 어찌 구차하게 맞추는 것이 옳겠는가?’ 하셨다. 처음에 왕께서 관저편을 문왕(文王)이 지은 것이지 궁중 사람이 지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셨는데, 이때에 이르러 연신(筵臣)이 궁중 사람이 지은 것이라고 하였으므로 이 말씀이 있었다. 왕께서 벼 베기를 보려 하셨는데, 유사(有司)가 아뢰기를, ‘대저 친경(親耕) 뒤에는 적전(籍田)은 백성에게 맡겨서 경종(耕種)하는데, 구곡(九穀)을 심지 않았고 제물로 바친 적도 없습니다.’ 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신(神)을 속일 수 있는가? 이제부터 구곡을 심어서 제물을 채우라.’ 하셨다.
9월에 조태구(趙泰耉)·유봉휘(柳鳳輝)·최석항(崔錫恒)·정해(鄭楷)·권익관(權益寬) 등의 벼슬을 추탈(追奪)하였다. 처음에 왕께서 전 대사헌(大司憲) 박필주(朴弼周)를 불러다가 벼슬을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올리고 치도(治道)를 자문하셨는데, 박필주가 수차(袖箚)를 바쳐 우선 신축년·임인년의 역적들의 죄를 바르게 하기를 청하니, 왕께서 침음(沈吟)하다가 말씀하기를, ‘반드시 대신과 익히 의논하여 처리하겠다.’ 하셨다. 이때에 이르러 삼사(三司)에서 아뢰기를, ‘조태구는 전하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때부터 꺼리는 마음을 남몰래 품고 ‘모혐(冒嫌)’이라는 두 자를 만들어 냈습니다. 저위(儲位)가 이미 정해졌을 때에는 차자를 올려 역적 유봉휘를 구하되 충적(忠赤)이라고 칭찬하였고, 대리(代理)하라는 명이 있었을 때에는 대간(臺諫)의 말을 업신여기고 북문(北門)으로 불쑥 들어왔습니다. 목호룡(睦虎龍)이 상변(上變)하였을 때에는 예전에 양옥(梁獄)을 캐지 말게 한 일이 있다는 말을 감히 아뢰었고, 백망(白望)의 공초(供招)가 나왔을 때에는 죽게 된 가운데에서도 살길을 찾는다는 말을 핑계 삼았습니다. 그 전후의 흉언(凶言)은 한 번 굴러서 유봉휘의 상소가 되고 두 번 굴러서 김일경(金一鏡)의 교문(敎文)이 되고 세 번 굴러서 무신년에 역적들이 임금을 헐뜯고 욕하게 되었습니다. 조태구는 관작(官爵)을 추탈하소서.
신축년의 건저(建儲)는 우리 경종(景宗)께서 숙고(肅考)의 유의(遺意)를 몸받고 자성(慈聖)의 명명(明命)을 받들어 손수 써서 면대하여 주신 것이므로 처분이 광명(光明)한데도, 유봉휘는 바쁘고 갑작스러워 정밀하지 못하였으며 시켜서 독촉하였다 하였고, 종사(宗社)를 부탁한 데가 있어 팔역(八域)이 함께 기뻐하는데, 유봉휘는 인심이 의혹하여 오래 되어도 정해지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무인신례(無人臣禮)’라는 넉 자로 말하면 이는 한(漢)나라 어사(御史)가 폐립(廢立)을 탄핵한 말인데, 경묘(景廟)께서 마침내 사속(嗣續)이 없으실 것을 그만이 어찌 모르겠습니까마는, 자손의 번창을 바란다고 말하였으니, 이것이 병환을 숨겼다는 논의가 비롯된 까닭입니다. 유봉휘는 관작을 추탈하소서.’ 하였다.
또 논하기를, ‘이광좌(李光佐)가 무옥(誣獄)을 꾸며낸 것은 백망의 공초에서 죄다 드러났고, 역적 김일경이 교문(敎文)을 지은 뒤에 본병(本兵)에 발탁하여 의망(擬望)하여 마치 공로를 갚는 듯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잠(李潛)의 흉언을 역적 김일경이 무릉(茂陵)에 견주었는데, 이광좌가 답습하여 포증(褒贈)을 청하기까지 하였으며, 윤태징(尹泰徵)·이사성(李思晟) 등은 모두 이 광좌가 끌어들여 길러 낸 자인데, 무신년에 난을 일으킨 것도 다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최석항이 무옥을 주장한 것은 조태구와 흉심(凶心)을 같이한 것이고, 무옥이 이루어지고 나서는 반드시 역적 목호룡을 녹훈(錄勳)하기를 청하였으며, 또 청(淸)나라에 주문(奏聞)하고 위세를 빌려 위협하려 하였습니다. 박상검(朴尙儉)의 옥사를 늦추어 지레 죽게 만든 것으로 말하면 캐어 물을 길이 끊어지게 한 것이고, 대리를 전선(傳禪)에 견준 것은 말의 뜻이 흉참(凶慘)합니다. 조태억(趙泰億)이 지은 교문의 지의(指意)는 김일경과 서로 안팎이 되고, 정책 정책 국로(定策國老)이니 문생 천자(門生天子)이니 아뢴 것은 당(唐)나라 환관(宦官)이 어두운 임금을 옹립한 일을 인용한 것입니다. 또 김일경이 지은 교문에는 접혈(蹀血)이라느니 행배(行盃)라느니 하는 따위 말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시끄러이 퍼뜨리도록 버려두었습니다. 모두 관작을 추탈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르셨다. 이광좌와 조태억은 시율(施律)이 지나치게 많다 하여 따르지 않으셨 고, 정해·권익관은 헌부(憲府)에서 아룀에 따라 추탈하셨다.
명하여 생원(生員)·진사(進士)는 복두(幞頭)·난삼(襴衫) 차림으로 방방(放榜)하게 하고 드디어 정제(定制)로 삼으셨다. 이에 앞서 왕께서 중국 진사과(進士科)의 복두·난삼·대련화(戴蓮花)·문희연(聞喜宴) 등의 제도를 회복하셨으나 난삼은 그 복식을 몰랐다. 그런데 연신(筵臣)이 말하기를, ‘고(故) 이조 참판(吏曹參判) 김늑(金玏)이 명나라 신종(神宗) 때에 사명을 받들고 중국에 갔을 때 황제가 복두·난삼과 《대학연의(大學衍義)》 1부(部)를 내려 주자, 김늑이 돌아와서 복두와 난삼을 안동(安東)의 학사(學舍)에 보관하였는데, 《대학연의》에는 어보(御寶)와 진적(眞蹟)이 있다고 이제 병조 정랑(兵曹正郞) 권만(權萬)이 말합니다.’ 하였다. 왕께서 말씀하기를, ‘권만은 충정공(忠定公) 권벌(權橃)의 후손이 아닌가? 예전에 우리 중묘(中廟)께서 재추(宰樞)와 함께 경회루(慶會樓) 아래에서 상화연(賞花宴)을 하셨는데, 파하고 나서 내시(內侍)가 수진(袖珍) 《근사록(近思錄)》을 주워 중묘께 바치니, 중묘께서 하교하기를, ‘이것은 권벌의 수중물(袖中物)일 것이다.’ 하고, 명하여 돌려주게 하셨다. 이는 또한 천년에 한번 있을 만한 드문 성사(盛事)이다. 아! 정원(政院)은 영남 감영(嶺南監營)에 공문을 보내어 두 서책과 의관(衣冠)을 두 신하의 후손을 시켜 가지고 오게 하라.’ 하셨다. 이때에 이르러 권만과 김늑의 손자 김홍운(金弘運)이 가지고 왔는데, 이때 왕께서 편찮으셨으나 굳이 일어나 세수하고 빗질하고 옷을 입고 관을 쓰고 앉아 두 사람을 소견(召見)하고 말씀하기를, ‘유학(儒學)하는 선비를 대접할 때에는 한 고조(漢高祖)가 양다리를 뻗고 앉은 것을 본떠서는 안 되는데, 더구나 명나라의 옛 물건은 더욱이 존경해야 할 것임에랴?’ 하셨다. 드디어 명하여 《삼경(三經)》과 《근사록》·《대학연의》를 내리게 하고 유사(攸司)에 신칙하여 복두·난삼은 그 복식을 알아보고 김홍운에게 돌려주게 하셨다. 그래서 생원·진사의 의관은 죄다 명나라의 제도를 회복하였으나, 대련화·문희연은 의논이 같지 않아서 그만두었다.
동10월(冬十月)에 제주(濟州)에서 지실(枳實)을 바쳤는데, 왕께서 말씀하기를, ‘내가 듣건대, 관에서 탱자나무를 세어 백성에게 그 열매를 내라고 요구하므로 백성이 혹 나무를 흔들어 절로 말라 죽게 한다 하니, 어찌 딱하지 않은가? 제주로 돌려보내고 다시는 바치지 말게 하라.’ 하셨다. 11월에 왕께서 하교하기를, ‘친경(親耕)·관예(觀刈)는 다 사전(祀典)을 중하게 여기기 위한 것인데, 임금이 갈고 백성이 거두는 것과 백성이 농사짓고 임금이 베는 것은 다 불편하다. 기성(箕城)의 정전(井田)은 복고(復古)하기 어려우나, 이 기회에 왕성(王城) 동쪽의 적전(籍田)을 유제(遺制)를 본떠 정형(井形)으로 만들고 공전(公田)의 하나에서 거두어 제물(祭物)로 바치고 그 나머지 여덟 구역은 죄다 그 세(稅)를 면제하면, ‘우리 공전(公田)에 비가 내리고 드디어 우리 사전(私田)에도 미친다.’는 시(詩)가 천년 뒤에 다시 읊어질 수 있을 것이다. 태상(太常)을 시켜 절목(節目)을 강정(講定)하여 아뢰게 하라.’ 하셨다.
12월에 명하여 김종서(金宗瑞)·황보인(皇甫仁)·정분(鄭苯) 등의 벼슬을 회복하게 하셨는데, 숙묘(肅廟)께서 육신(六臣)의 벼슬을 회복시키신 일에 감동되셨기 때문이다.
23년 정묘(丁卯) 춘정월(春正月)에 대왕 대비(大王大妃)의 존호(尊號)를 강성(康聖)이라 올리고 왕께서 백관을 거느리고 전문(箋文)을 바치고 진하(陳賀)하셨는데, 대비의 주갑(周甲)이기 때문이다. 하교하기를, ‘태묘(太廟)에서 쓰는 비단은 무늬가 없는데 내 의장(儀仗)에는 오히려 무늬가 있으니, 어찌 불면(黻冕)을 아름답게 하는 뜻이겠는가? 홍양산(紅凉傘)은 무늬를 없애고 일산(日傘)은 명주로 하고 그 밖의 의장도 이를 본뜨라.’ 하셨다.
3월에 왕께서 연신(筵臣)에게 말씀하기를, ‘동조(東朝)께서 우연히 집상전(集祥殿)의 구장(舊藏)을 찾다가 한 옥대(玉帶)를 얻어 내게 주셨다. 곧 선묘(宣廟)께서 두르시던 것이고 숙묘 을해년에 이 띠를 두르시고 조참(朝參)을 행하셨는데, 이제 문득 얻었으니 기이하다.’ 하셨다. 이튿날 드디어 옛 옥대를 두르시고 선원전(璿源殿)에서 분향(焚香)하고 이해 가을에도 이 띠를 두르시고 근정전(勤政殿)에서 시사(試士)하셨다. 이달에 왕께서 금원(禁苑)의 관풍각(觀豊閣)에 나아가 벼심기를 보고 탄식하며 말씀하기를, ‘이것은 사람을 쓰는 것과 같다. 재주가 맡길 만하더라도 참설(讒說)로 이간하면 마른 땅에 벼를 심고 추수가 있기를 바라는 것과 같을 것이다. 이것은 간언(諫言)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 충직한 말이 있더라도 받아들여지지 못하면 노숙한 농부를 멀리하여 버려두고 자기 지혜대로 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이것은 학문하는 것과 같다. 강학(講學)하지 않는 것이 아닐지라도 때때로 사이가 끊어지면 논밭에 물 대기를 부지런히 하지 않고 열매 맺기를 바라는 것과 같을 것이다.’ 하셨다. 다시 하교하여 무격(巫覡)·음사(淫祀)를 금하고 말씀하기를, ‘태학(太學)에 예전에 이목(李穆)이 있었거니와, 내 이목(耳目)에도 이 목 같은 자가 있는가?’ 하고, 경조(京兆)·오부(五部)에 신칙하여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이는 무리는 법조(法曹)에 보내어 형벌을 주게 하셨다.
추7월(秋七月)에 왕께서 경연(經筵)에 나아가 신하들에게 말씀하기를, ‘내가 늘 당 현종(唐玄宗)처럼 초년과 만년이 아주 달라질세라 염려한다. 겨울에 피는 꽃이 늦도록 향기를 피우더라도 때때로 시들면 마침내 연꽃이 진흙에서 나와도 물들지 않는 것만 못할 것이다.’ 하셨다. 곧 일 때문에 말씀이 자못 불평하셨는데, 이윽고 뉘우치고 말씀하기를, ‘《자성편(自省編)》이 완성되었을 때에 내가 신하들에게 경계하여 이 편으로 규면(規勉)하게 하였고 당시에 교정(校正)한 자와 편차(編次)한 자도 지금 경연에 있는데 한 사람도 감히 간하는 자가 없으니, 이것은 본디 내가 스스로 반성할 것이다. 또한 어찌 서로 권면할 도리가 없겠는가? 모두 문비(問備)하라.’ 하셨다. 이에 앞서 국릉(國陵)으로 봉표(封標)한 땅에 매장하지 않은 것은 매장을 금하고 이미 매장한 것은 옮기되 사대부가 이미 매장한 것은 논하지 말라고 명하셨다. 이때에 이르러 승지(承旨)가 아뢰기를, ‘봉표한 곳이 여든인데 사대부가 범장(犯葬)한 곳이 이미 서른이나 됩니다. 국조(國祚)가 길어서 장차 몇백대가 될는지 모르니, 여든 곳도 오히려 적은데, 더구나 쉰 곳이겠습니까? 사대부가 범장한 것도 옮기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한 광무(漢光武)는 스스로 해를 넘길는지 어찌 알겠느냐고 하였으나 향국(享國)이 오래 이어졌고, 진 시황(秦始皇)은 반드시 만세토록 전하려 하였으나 2세(世)에서 드디어 망하였다. 국조가 길고 짧은 것은 오직 백성을 보전하기에 달려 있는 것이지, 어찌 명산(名山)이 많고 적은 것을 말하겠는가? 참으로 쉰 곳을 죄다 쓴다면 또한 이미 많거니와, 어찌 반드시 그 봉표를 넓혀서 해가 백골(白骨)에 미치게 해야 하겠는가?’ 하셨다. 이때 음동추(蔭同樞)인 자도 초헌(軺軒)을 탈 수 있었는데, 왕께서 말씀하기를, ‘번영(繁纓)은 작은 물건인데도 부자(夫子)가 아꼈거니와, 조정의 등위(等威)가 문란해서는 안 되니, 경조(京兆)의 아윤(亞尹)이나 동돈녕(同敦寧)을 지낸 자가 아니면 초헌을 타지 못하게 하고 항령(恒令)으로 삼으라.’ 하셨다.
8월에 음옥(淫獄)이 있었는데, 왕께서 하교하기를, ‘주남(周南)의 교화는 강한(江漢)에 미쳤고 선정(先正) 조광조(趙光祖)가 도헌(都憲)이었을 때에는 남녀가 길을 달리하였는데, 내가 임어(臨御)하여서는 교화하지 못하여 음풍(淫風)이 방자하게 행해지니, 이것은 다름 아니라 학교의 정사(政事)가 폐기되어 《소학(小學)》의 가르침이 해이하기 때문이다. 서울의 태학(太學)·사학(四學)과 외방(外方)의 향교(鄕校)·서원(書院)은 다 《소학》을 강습하는 것을 상규(常規)로 삼고 교관(敎官)이 동몽(童蒙)을 가르치고 수령(守令)이 백성을 가르칠 때에도 반드시 《소학》의 도리로 하라.’ 하셨다. 이때에 왕께서 춘추가 높으므로 지기(志氣)가 쇠퇴하고 정사가 게을러질세라 염려하여 더욱 분려(奮勵)하여 다스리시고, 또 뭇 신하가 성심(聖心)이 향하는 바에 따라 변경하는 데에 힘썼다. 하교하기를, ‘선유(先儒)는 한 문제(漢文帝)가 정삭(正朔)을 고치고 복색을 바꾸지 못한 것을 비평하였으나, 사람마다 전장(典章)을 가벼이 의논한다면 한 가지 일은 경장(更張)되고 온갖 폐단이 어지러이 일어날 것이다. 아! 조정의 신하들은 내가 분려하는 것은 다만 구장(舊章)을 수거(修擧)하려 할 뿐임을 알아야 한다.’ 하셨다.
9월에 예조(禮曹)의 낭관(郞官)을 보내어 고려의 왕릉(王陵)을 두루 살펴 무너진 것은 수리하고 범경(犯耕)하는 자는 법으로 다스리게 하셨다. 명하여 안평 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의 벼슬을 회복시키셨는데, 김종서(金宗瑞)·황보인(皇甫仁) 등의 전례와 같이 한 것이다. 이에 앞서 국법에 대왕(大王)의 적손(嫡孫)은 대(代)를 한정하지 않고 군역(軍役)에 충정(充定)하지 않게 하였으며, 지손(支孫)은 9대에 한하게 되어 있었는데, 경종(景宗) 임인년에 조정에서 그 댓수를 줄일 것을 의논하였다. 왕께서 즉위하시기에 이르러 명하여 한결같이 구전(舊典)을 따르게 하셨으나, 비변사(備邊司)에서 강정(講定)한 영식(令式)에 이르기를, ‘댓수를 한정하는 가운데 조금 사대부 모양이 있는 자는 군역에 충정하지 않는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왕께서 비로소 이를 듣고 탄식하며 말씀하기를, ‘지금 신하들이 현직(顯職)에 올라 조정에서 벼슬하면 그 선대의 적손도 수령(守令)인 자가 감히 군역에 충정하지 못하는데, 더구나 대왕의 적손을 어찌 사대부 모양이 있고 없는 것으로 취사(取捨)할 수 있겠는가? 매우 부당하다.’ 하고, 종부시(宗簿寺)를 시켜 외방(外方)에 관문(關文)을 보내어 신칙하게 하고 빨리 이 한 구(句)를 없애게 하셨다.
동10월(冬十月)에 왕께서 하교하기를, ‘《예기》에 형벌은 대부(大夫)에게까지 미치지 않는다 하였는데, 지금은 아침에 금달(禁闥)에서 시종(侍從)하다가 저녁에 영어(囹圄)에서 결장(決杖)당하니, 예(禮)로 부리는 도리가 어디에 있는가? 이제부터는 장오(贓汚)에 관계되는 것 밖에는 무릇 시종에 대한 평결을 의논할 때에 장률(杖律)은 속형(贖刑)으로 논하라.’ 하셨다.
24년 무진(戊辰) 춘정월(春正月)에 명하여 무신(武臣)을 전강(殿講)할 때에는 병서(兵書)로 하고 그 연한(年限)·강규(講規)는 모두 문신 전강의 예(例)대로 하고 항령(恒令)으로 삼게 하셨다.
2월에 숙종(肅宗)의 진용(眞容)을 다시 그려 왕께서 친히 영희전(永禧殿)에 모셨다. 돌아오다가 경희궁(慶熙宮)의 경현당(景賢堂)에 이르러 일을 감독하는 신하들을 불러 제사에 쓰고 난 음식을 내리고 헌가(軒架)를 연주하여 위로하였으며, 친히 사(辭)를 만들어 태강(太康)을 경계하고 신하들에게 명하여 화답(和答)하게 하시고 한밤에야 파하였다. 이튿날 입직(入直)한 유신(儒臣) 김상철(金尙喆)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아조(我朝)의 음악을 쓰는 절도는 조하(朝賀)·진연(進宴)이 아니면 궁정(宮庭)에서 거행한 적이 없습니다.’ 하니, 왕께서 손수 써서 비답(批答)을 내리고 말을 내려 장려하셨다.
하5월(夏五月)에 명하여 광화문(光化門)의 구종(舊鐘)에 각(閣)을 짓게 하셨는데, 세조(世祖)의 봉호(封號)가 있기 때문이다.
추8월(秋八月)에 왜(倭)가 바친 증주(繒紬)·채릉(彩綾) 7백여 필을 호조(戶曹)·삼군문(三軍門)·경기 감영(京畿監營)과 시전(市廛) 백성에게 나누어 내리셨다.
동11월(冬十一月)에 용비(冗費)를 줄이셨다.
25년 기사(己巳) 춘2월(春二月)에 명하여 《탁지정례(度支定例)》를 찬집(纂輯)하게 하셨다. 하4월(夏四月)에 명나라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와 의종 황제(毅宗皇帝)를 대보단(大報壇)에 아울러 향사(享祀)하였다. 이에 앞서 숙종(肅宗) 갑신년에 북원(北苑)에 제단을 쌓고 신종 황제(神宗皇帝)를 제사하여 임진년에 재조(再造)하여 준 은혜에 보답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왕께서 《명사(明史)》를 보시니, ‘숭정(崇禎) 병자년 정월에 의종 황제가, 우리 나라가 포위당하여 원조를 청하니 총병(摠兵) 진홍범(陳洪範)에게 명하여 각진(各鎭)의 주사(舟師)를 징발하여 구원하러 가게 하였다.
이해 3월에 산동 순무(山東巡撫) 안계조(顔繼祖)가 아뢰기를, 「조선이 이미 지키지 못하여 피도(皮島)·철산(鐵山)도 위태로우니 진홍범과 심세괴(沈世魁)가 있는 두 진(鎭)에 신칙하여 피도를 굳게 지키게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황제가 안계조에게 협력하여 바로잡도록 꾀하지 못하였다 하여 매우 꾸짖었다.’ 하였다. 왕께서 그래서 느껴 울고 말씀하기를, ‘정사(正史)가 선조(先朝) 갑신년에 나왔으면 의종 황제도 아울러 제사하였을 것은 틀림없다. 또 더구나 우리 동방의 봉전(封典)·국호(國號)는 다 고황제가 내려 준 것으로서 예우(禮遇)가 융숭함이 전대(前代)보다 훨씬 더함에 있어서랴?’ 세 황제를 아울러 제사하는 것은 우리 국가가 숭보(崇報)하는 예(禮)로도 마땅하다.’ 하고, 드디어 명하여 기한을 정하여 빨리 거행하게 하셨다. 왕께서 친히 향사(享祀)하셨는데, 바야흐로 울창(鬱鬯)을 부어 제사를 시작할 때에 흰 구름 한 줄기가 북쪽에서 일어나 굼틀굼틀 제단 위에 머무르고 바람이 솔솔 불어 영우(靈雨)를 가져다 조금 부리더니 제1위(第一位)에 작헌(酌獻)이 끝났을 때에 바람이 고요해지고 구름이 개어 달과 별이 밝고 빽빽해지니, 제사에 참여한 뭇 신하가 서로 함께 감탄하여 ‘감응(感應)이 빠르다.’ 하고, 처연(悽然)히 신주(神州)가 있다는 생각을 일으켰다. 제사를 마치고 나서 예관(禮官)을 보내어 선무사(宣武祠)·무열사(武烈祠)와 강도(江都)의 충렬사(忠烈祠)·남한(南漢)의 현절사(顯節祠)에 치제(致祭)하게 하셨다.
추7월(秋七月)에 좌의정(左議政) 조현명(趙顯命)이 이조 참의(吏曹參議)를 장망(長望)하여 차제(差除)하고 홍문록(弘文錄)한림 소시(翰林召試)와 같이 하여 서로 무함하는 폐단을 그치게 하기를 청하였다. 왕께서 말씀하기를, ‘이를테면 물을 막는데 동쪽에서 막으면 서쪽에서 터지는 것과 같을 것이니, 어찌 법을 고쳐서 바로잡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옥당(玉堂)은 임금이 강학(講學)할 때에 도움을 구하기 위한 것이니 소시할 수 없다.’ 하셨다.
8월에 왕께서 친정(親政)하실 때 양전(兩銓)에 신칙하여 공도(公道)를 넓히게 하고 탄식하며 말씀하기를, ‘정사(政事)와 학문은 다만 남을 위하고 자기를 위하는 구분에 달려 있을 뿐이다. 남을 위하면 공평하더라도 사사로울 것이고 오직 남만 구제하면 명예를 바란다는 혐의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끊임없이 있는 힘을 다하면 군자(君子)가 된다는 것이 이것이다.’ 하셨다.
9월에 신칙(申飭)하여 사대부의 혼취(婚娶)에는 반드시 친영(親迎)하고 국혼(國婚)에서 사혼(士婚)까지 다 동뢰탁(同牢卓)에 유밀과(油蜜果)를 금하게 하셨다.
12월에 왕께서 하교하여 학문을 권하기를, ‘학문의 도리는 변변치 못한 자를 어질게 할 수 있고 능하지 못한 자를 능하게 할 수 있는데, 세상에서 자포 자기(自暴自棄)하기를 좋아하여 거울을 어둠에 던지고 구슬을 모래에 던지니, 무슨 까닭인가? 아! 진신 대부(搢紳大夫)와 학교의 선비들은 스승이 없다 말고 네 학문에 부지런하라.’ 하셨다.
26년 경오(庚午) 춘정월(春正月)에 왕께서 풍속을 바루는 데에는 유(儒)를 숭상하는 일을 먼저 해야 한다 하여 관원을 보내어 고(故) 찬성(贊成) 정제두(鄭齊斗)·박필주(朴弼周)와 고 찬선(贊善) 김간(金榦)에게 치제(致祭)하게 하고 전 집의(執義) 민우수(閔遇洙)·박필부(朴弼傅)를 통정계(通政階)로 발탁하셨다. 이때 여역(癘疫)이 치성하여 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의 상번군(上番軍)이 많이 죽었는데, 왕께서 두 영문에 명하여 도와서 장사지내게 하고 그 과처(寡妻)·고아(孤兒)는 그 고을을 시켜 어루만져 돌보게 하셨다.
2월에 연경(燕京)에 사신 갔다가 돌아온 자가 송(宋)나라 승상(丞相) 문천상(文天祥)의 상(像)을 바쳤다. 왕께서 육진(六鎭)의 오국성(五國城)에 송제릉(宋帝陵)이 있다 하여 그 아래에 사당을 세워서 문천상·육수부(陸秀夫)를 아울러 향사(享祠)하고자 하여 대신(大臣)에게 물으셨으나, 대신이 불편하다 하니, 드디어 명하여 그 상을 와룡사(臥龍祠)에 배향(配享)하고 승지(承旨)를 보내어 치제하게 하셨다. 생원(生員)·진사(進士)를 물색하는 규례를 폐지하였다. 이에 앞서 생원·진사의 회시(會試)에서 탁명(坼名)할 때에는 고관(考官)들이 먼저 합격한 봉미(封彌)를 보고 그 중에서 문벌과 문망(文望)이 있는 자를 가려서 뽑아 장원(壯元)에 놓고 생원의 셋째와 진사의 여섯째는 세상에서 말하기를, ‘이 차서에 있는 자는 명이 없어 일찍 죽는다.’ 하므로 또 시골의 천한 선비를 가려서 채웠다. 이때에 이르러 왕께서 말씀하기를, ‘이것이 공(公)인가 사(私)인가? 과장(科場)을 엄하게 하는 도리가 이러해서는 안된다. 이제부터 영구히 폐지하고 범하는 자는 용정률(用情律)로 논하라.’ 하셨다.
추7월(秋七月)에 균역법(均役法)을 시행하였다. 처음에 숙종(肅宗)께서 양역(良役)의 폐단을 바로잡고자 여러번 뭇 신하에게 명하여 여러 가지로 의논하게 하셨으나, 호포(戶布)·결포(結布)·유포(游布)·정전(丁錢) 등 갖가지 의논을 서로 고집하여 마침내 시행하지 못하였다. 왕께서 즉위하시고서 양역청(良役廳)을 두고 당상(堂上) 두서너 사람을 가려서 맡겨 정신을 쏟아 강구하게 하셨으나 좋은 방책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곧 폐지하였다.
이해 4월에 왕께서 홍화문(弘化門)에 나아가 오부(五部)의 사서(士庶)를 불러 묻기를, ‘백성의 폐단 중에 양역의 폐단이 크니, 일찍 고치지 않으면 어떻게까지 될는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 성고(聖考)께서 반드시 바로잡으려 하셨으나 뭇 신하가 마침내 덕음(德音)을 받들지 못하였으니, 내가 매우 개탄하여 병을 견디고 임문(臨門)하였다. 유포(游布)·구전(口錢)은 그것이 행할 수 없는 것인 줄 알고 있거니와, 호포·결포는 어느 것이 편리하고 어느 것이 불편한가? 이 밖에도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이 있는가?’ 하셨는데, 사서(士庶)가 다 대답하기를, ‘호포가 편리합니다.’ 하고 결포가 편리하다고 한 자도 열 중에서 두셋 있었다. 왕께서 뭇 신하에게 물으셨는데, 호조 판서(戶曹判書) 박문수(朴文秀)가 대답하기를, ‘호포는 경비(經費)의 수를 감당할 수 없으니 호전(戶錢)이라야 합니다. 대호(大戶)는 1백 문(文)으로 하고 중호(中戶)는 50문으로 하고 소호(小戶)는 30문으로 하면 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왕께서 말씀하기를, ‘아! 잗단 것은 나라의 체모가 아니다.’ 하매, 박문수가 말하기를, ‘신은 쓸데없는 고을을 없애서 경비에 보태려 하였으나 전하께서 어렵게 여기시고 신하들도 어렵게 여기므로 그 차선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만둘 수 없다면 호포를 근본으로 세우고 모자라는 것은 어염(魚鹽)으로 채우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호포는 결포만 못합니다. 결포는 전조(田租)와 아울러 세(稅)를 내므로 관에서 거두기 쉽고 백성이 소요하지 않습니다.’ 하였으나, 왕께서는 오히려 결정하지 못하고 비국 당상(備局堂上)들에게 명하여 비변사(備邊司)에서 직숙(直宿)하면서 편의한 것을 강정(講定)하게 하셨으나 달이 지나도 좋은 방책을 얻지 못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좌의정(左議政) 조현명(趙顯命)이 홍계희(洪啓禧)가 세운 균역의 방책을 아뢰니, 왕께서 처음에는 어렵게 여기다가 마침내 그 말을 따라서 국중(國中)의 양역(良役) 1필(匹)을 죄다 면제하고 따로 균역청(均役廳)을 두어 어염·결전(結錢)·선무포(選武布) 등의 세를 전관(專管)하게 하였다. 또 저치 상정미(儲置常定米)와 외읍(外邑)의 은여결(隱餘結)을 보태어 경비를 채우고 균세사(均稅使)를 팔도에 보내어 어염세(魚鹽稅)를 바로잡고 은여결을 살펴 내게 하고 드디어 과조(科條)를 엄하게 세우고 신칙하여 이 뒤로는 변경(變更)을 함부로 의논하지 못하게 하셨다. 말년에 이르러 왕께서 사람들에게 말씀하기를, ‘균역의 논의를 창도한 자의 자손이 번창한 뒤에야 균역이 실효가 있다는 것을 믿게 될 것이다.’ 하셨다.
9월에 왕께서 문묘(文廟)에 거둥하여 작헌(酌獻)하고 시사(試士)하셨다. 곧 온양(溫陽)의 온천에 거둥하셨는데, 환후를 목욕하여 요양하기 위한 것이다. 지나는 길에 있는 유현(儒賢)·명상(名相)·충절인(忠節人)의 묘에 다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셨다. 도과(道科)를 설행(設行)하여 선비를 뽑고 호서(湖西) 백성의 조세를 감면하시고 드디어 회란(回鑾)하였다.
【원전】 44 집 543 면
【분류】 *왕실-국왕(國王)


[주D-001]포은(圃隱) : 정몽주(鄭夢周)의 호.
[주D-002]상용(商容) : 은(殷)나라 때 사람. 주왕(紂王)의 대부(大夫)로서 주왕에게 직간(直諫)하다가 폄출(貶黜)되었음.
[주D-003]비간(比干) : 은대(殷代)의 사람. 주왕(紂王)의 숙부(叔父)인데, 주왕의 악정(惡政)을 간하다가 피살되었음.
[주D-004]신축년 : 1721 경종 원년.
[주D-005]임인년 : 1722 경종 2년.
[주D-006]양옥(梁獄) : 양왕(梁王)의 옥사(獄事). 한(漢)나라 경제(景帝)가 제위(帝位)를 아우인 양왕(梁王)에게 전수(傳授)하겠다는 대화를 들은 대신들이 부자 상전(父子相傳)의 약조를 들어 반대하였는데, 이에 양왕이 사람을 시켜 원앙(袁盎) 등 여러 의신(議臣)들을 죽였음. 경제가 이에 전숙(田叔)에게 양왕의 죄안(罪案)을 조사하게 하였는데, 전숙이 말하기를, “양왕의 일은 묻지 마소서. 바른 대로 말하면 처단해야 되고, 처단하면 태후(太后)의 마음이 상할 것입니다.” 하니, 양왕의 신하 몇 사람에게만 죄를 돌려 처단하였음.
[주D-007]무신년 : 1728 영조 4년.
[주D-008]정책 국로(定策國老) : 당(唐)나라 때 경종(敬宗)부터 선종(宣宗)까지 그 폐립(廢立)을 환관들이 마음대로 행하고 국가의 원로로 자처하였으므로 정책 국로라 하였음.
[주D-009]문생 천자(門生天子) : 당나라 말기에 환관들이 정권을 전횡하여 천자 보기를 시관(試官)이 문생을 보듯이 하였으므로 문생 천자라 하였음.
[주D-010]접혈(蹀血) : 금정 접혈(禁庭蹀血)의 준말로, 대궐의 뜰에 유혈이 낭자하여 그것을 밟고 건널 정도였다는 뜻. 당(唐)나라 고조(高祖)가 정자 이건성(李建成)을 태자로 세웠는데, 이건성이 당나라 건국에 공이 많았던 아우 이세민(李世民)이 자기 자리를 넘볼까 염려하여 미리 제거하고자 하니, 이세민이 군사를 동원하여 현무문(玄武門)으로 들어가 이건성을 죽였음. 이때의 처참했던 상황을 《자치통감(資治通監)》에서 ‘접혈 금정’이란 말로 묘사했는데, 아우가 형을 잔인하게 죽이고 왕위를 차지했다는 뜻을 내포함.
[주D-011]행배(行盃) : 한(漢)나라 때 대장군 곽광(霍光)의 아내인 곽현(霍顯)이 태후(太后)로 하여금 술을 장만하게 하고는 이어 천자(天子)를 폐하려고 도모한 일을 말함.
[주D-012]수진(袖珍) : 소매 안에 넣어 다닐 수 있도록 작게 만든 책.
[주D-013]기성(箕城) : 평양(平壤).
[주D-014]태상(太常) : 봉상시(奉常寺).
[주D-015]불면(黻冕) : 슬갑(膝甲)과 갓. 모두 제복(祭服).
[주D-016]을해년 : 1695 숙종 21년.
[주D-017]번영(繁纓) : 제후(諸侯)의 마식(馬飾).
[주D-018]임인년 : 1722 경종 2년.
[주D-019]갑신년 : 1704 숙종 30년.
[주D-020]숭정(崇禎) : 명 의종(明毅宗)의 연호.
[주D-021]병자년 : 1636 인조 14년.
[주D-022]울창(鬱鬯) : 울금향(鬱金香)을 넣어 빚은 향기 나는 술로, 제사의 강신(降神)할 때 썼음. 울창주(鬱鬯酒).
[주D-023]장망(長望) : 관원(官員)을 추천(推薦)할 때에 다수(多數)의 후보자를 선정(選定)하는 것. 대개 3인의 후보자를 추천함.
[주D-024]홍문록(弘文錄) : 홍문관(弘文館)의 교리(校理)·수찬(修撰)을 임명하기 위한 1차 선거(選擧) 기록. 먼저 7품 이하의 홍문관원(弘文館員)이 뽑힐 만한 사람의 명단을 만들면 부제학(副提學) 이하 여러 사람이 모여 적합한 사람의 이름 위에 권점(圈點)을 찍는데, 이것을 기록하는 것을 홍문록이라고 함. 관록(館錄). 본관록(本館錄).
[주D-025]한림 소시(翰林召試) :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 후보자에 대한 특별 시험. 적임자를 선정하여 상주(上奏)하면, 왕명으로 불러 위원(委員)을 시켜 시(詩)·부(賦)·논(論)·책문(策問) 등 시험을 보여 합격한 자를 임용하는 것.
영조 대왕 행장(行狀)⑥

27년 신미(辛未) 춘2월(春二月) 대왕 대비(大王大妃)의 존호(尊號)를 정덕(貞德)이라 가상(加上)하였다. 왕께서 백관을 거느리고 진하(陳賀)하셨다. 각도의 방물(方物)을 멈추고 의장(儀仗)·연여(輦輿)를 새로 고치지 않았는데, 자교(慈敎)에 따른 것이다. 북관(北關)에 기근이 들었는데, 명하여 관동(關東)·영남(嶺南)의 곡물 3만 석을 전선(戰船)·병선(兵船)에 실어 바다로 북관에 날라 옮기고 어사(御史)를 보내어 진구(賑救)하게 하셨다.
3월에 왕께서 대보단(大報壇)에서 희생을 살피셨다. 이달 19일이 의종 황제(毅宗皇帝)가 순국(殉國)한 날이기 때문에 유사(有司)에 명하여 음악을 멈추게 하셨다. 왕께서 시임(時任)·원임(原任)인 대신(大臣)과 구경(九卿)을 거느리고 후원(後苑)의 영화당(映花堂) 앞에 이르러 북향하여 사배(四拜)하셨다. 이어서 예조(禮曹)에 명하여 고황제(高皇帝)·신종 황제(神宗皇帝)가 승하한 날에도 망배례(望拜禮)를 행하되 상례(常例)로 삼게 하셨다.
추9월(秋九月)에 수성 절목(守城節目)을 반포하였다.
28년 임신(壬申) 하5월(夏五月)에 대왕 대비(大王大妃)의 존호(尊號)를 수창(壽昌)이라 가상(加上)하고 왕의 존호를 장의 홍륜 광인 돈희(章義弘倫光仁敦禧)라 가상하고 왕비의 존호를 장신(莊愼)이라 가상하였는데, 왕께서 황단(皇壇)에서 신명에게 감통(感通)하신 덕(德)이 있기 때문이다.
6월에 명하여 편집청(編輯廳)을 설치하여 《상례보편(喪禮補編)》을 찬집(纂輯)하게 하셨는데, 짐작하여 손익(損益)한 것은 다 왕의 예단(睿斷)에서 나왔다.
추9월에 우리 주상 전하께서 탄강(誕降)하고 원손(元孫)으로 봉해지셨다.
동12월(冬十二月)에 공시 당상(貢市堂上) 세 사람을 두어 공시의 민폐를 바로잡게 하셨다. 29년 계유(癸酉) 춘정월(春正月)에 왕께서 적전(籍田)에서 친경(親耕)하셨는데, 경우(耕牛)는 반을 줄이고 종경(從耕)·선온(宣醞)·설과(設科) 등의 절차를 없애셨다. 하5월(夏五月)에 왕께서 북교(北郊)에서 기우(祈雨)하셨다. 초헌(初獻)하고 나서 소리가 나며 쓸쓸히 바람이 부는데 명하여 장막을 치우게 하고 비를 맞으며 서 계셨으므로 제사를 마칠 때에는 면불(冕黻)이 죄다 젖었다. 사흘 뒤에 비가 모자란다 하여 다시 선농단(先農壇)에서 친히 빌었는데, 비가 쏟아지고서야 그치셨다.
6월에 삼강(三江)에서 촘촘한 그물을 쓰는 것을 금하셨다. 왕께서 명하여 강민(江民)의 폐단을 바로잡게 하시자, 일을 맡은 자가 절목(節目)을 만들어 바쳤는데, 그 가운데에 촘촘한 그물이란 말이 있으므로 왕께서 말씀하기를, ‘촘촘한 그물로 죄다 잡는 것이 어찌 왕정(王政)이겠는가? 금하고 범하는 자는 도배(徒配)하라.’ 하셨다.
추8월(秋八月)에 소녕묘(昭寧墓)를 원(園)으로 개칭(改稱)하고 육상묘(毓祥廟)를 궁(宮)으로 개칭하고 수위관(守衛官)·수복(守僕)·수호군(守護軍)을 두고 제향(祭享)은 한결같이 궁원(宮園)의 규례대로 하게 하셨다. 숙빈(淑嬪)의 시호(諡號)를 화경(和敬)이라 추상(追上)하였는데, 숙빈이 봉작(封爵)된 지 주갑(周甲)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왕께서 종백(宗伯)에게 말씀하기를, ‘한(漢)·당(唐) 이래로 중국에서는 모두 낳은 어버이를 추숭(追崇)하였으나, 아조(我朝)는 가법(家法)이 엄하고 또 성고(聖考)의 하교가 있으므로 내 뜻이 추숭에 미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 한 가지 일만은 짐작하여 마땅한 것을 얻을 수 있겠으나, 외인(外人)이 헤아리지 못하면 반드시 아직도 여사(餘事)가 있다고 할 것이다.’ 하셨다.
9월에 하교하기를, ‘지금 악원(樂院)을 속칭하여 이원(梨園)이라 하나, 이원은 당 명황(唐明皇)이 이름 붙인 것이니, 어찌 법악(法樂)의 부(府)에 대하여 쓸 수 있겠는가? 금하라.’ 하셨다. 곧 명하여 강서원(講書院) 소장인 《능엄경(楞嚴經)》을 북한(北漢)의 중흥사(中興寺)에 옮겨 두게 하여 이단을 배척하는 뜻을 보이셨다.
동11월(冬十一月)에 혜국(惠局)에서 아뢰기를, ‘홍부미(紅腐米)를 오래 쌓아 두면 도리어 신미(新米)를 상하니, 값을 싸게 하여 경기 백성에게 팔아서 쓸모 없는 것을 쓸모 있게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착하다. 그러나 그것이 먹을 수 없는 것이라면, 어찌 백성을 속일 수 있겠는가? 내가 백성을 위하여 먼저 맛보아야 하겠으니, 홍부미를 빨리 가져오라.’ 하셨다.
12월에 숙종 대왕(肅宗大王)의 존호(尊號)를 유모 영운 홍인 준덕(裕謨永運洪仁峻德)이라 가상(加上)하고 인경 왕후(仁敬王后)의 존호를 선목(宣穆)이라 가상하고 인현 왕후(仁顯王后)의 존호를 숙성(淑聖)이라 가상하고 대왕 대비(大王大妃)의 존호를 영복(永福)이라 가상하였는데, 이듬해가 인현 왕후께서 다시 곤위(壼位)를 회복하신 해이고 또 왕께서 주갑(周甲)이 되시는 해이기 때문이다.
30년 갑술(甲戌) 춘정월(春正月) 초하루 아침에 뭇 신하가 성수(聖壽) 때문에 진하(陳賀)하기를 청하니, 왕께서 받아들이지 않고 드디어 태묘(太廟)·영수각(靈壽閣)·육상궁(毓祥宮)에 배알(拜謁)하셨다.
2월에 영남 이정사(嶺南釐正使)가 복명하니, 왕께서 조용히 백성의 고통을 묻고 풍토(風土)·속상(俗尙)에 언급하셨다. 이정사가 전복을 따는 자가 바가지를 차고 바다 밑으로 들어가는 정상을 대단히 아뢰니, 왕께서 섭이중(聶夷中)의 시(詩)를 외고 말씀하기를, ‘신고(辛苦)가 낟알보다 훨씬 심하니 차마 소반에 올리게 할 수 있겠는가?’ 하고, 당장 명하여 날전복의 공헌(貢獻)을 멈추게 하셨다.
31년 을해(乙亥) 춘정월(春正月) 상원일(上元日)에 왕께서 백관을 거느리고 동조(東朝)께 진하(陳賀)하셨는데, 이듬해에 동조의 수가 칠순이 되기 때문이다.
3월에 윤지(尹志)·이하징(李夏徵) 등이 처형되고 조태구(趙泰耉)·유봉휘(柳鳳輝)·이사상(李師尙)·윤취상(尹就商)과 김일경(金一鏡)의 소하(疏下)인 역적들에게 역률(逆律)을 추시(追施)하고 이광좌(李光佐)·최석항(崔錫恒)·조태억(趙泰億) 등의 벼슬을 추탈(追奪)하였는데, 윤지는 윤취상의 아들이다. 이에 앞서 을사년 국옥(鞫獄) 때에 윤취상은 고문당하다가 죽고 윤지는 나주(羅州)에 귀양갔는데 밤낮으로 나라를 원망하고 그 아들 윤광철(尹光哲)을 시켜 나주의 향리(鄕吏)와 서로 맺어 계를 만들고 무리를 모아 불궤(不軌)를 꾀하고 객관(客館)의 망화루(望華樓)에 글을 걸어서 인심을 어지럽혔는데, 감사(監司) 조운규(趙雲逵)가 알아내어 아뢰었다. 왕께서 윤지 등을 국문(鞫問)하여 옥사(獄事)에 관련된 역적들을 차등을 두어 처형하거나 귀양보내셨는데, 이 일은 《천의소감(闡義昭鑑)》에 실려 있다. 윤지의 상자 가운데에는 이하징이 나주 목사(羅州牧使)이었을 때에 왕복한 글이 많은데 주무(綢繆)하고 매우 비밀스러워 드디어 이하징을 국문하였다. 이하징은 신축년·임인년의 역적 이명의(李明誼)·이명언(李明彦)의 조카인데, 감히 김일경 등 일곱 역적의 소(疏)를 일컬어 신하의 절조가 있다 하였으므로, 조정의 신하가 모두 놀라고 분개하여 처형하기를 청하였다. 또 조태구·유봉휘 등이 역적들의 근저(根柢)라 하여 모두 추율(追律)을 시행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르셨다. 최석항은 병오년에 추탈(追奪)되었다가 그 뒤에 이 광좌가 입상(入相)함에 따라 복관(復官)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광좌·조태억과 함께 추탈되었다.
추8월(秋八月)에 명하여 편집청(編輯廳)을 설치하여 《천의소감》을 찬집하게 하셨는데, 역변(逆變)의 원류(源流)를 기록하기 위한 것이다.
32년 병자(丙子) 춘정월(春正月)에 대왕 대비(大王大妃)의 존호(尊號)를 융화(隆化)라 가상(加上)하고 왕의 존호를 체천 건극 성공 신화(體天建極聖功神化)라 가상하고 왕비의 존호를 강선(康宣)이라 가상하였다. 왕께서 명정전(明政殿)에서 기곡 서계(祈穀誓戒)를 행하셨다. 끝나고서 대신(大臣)·종백(宗伯)·태학생(太學生)을 불러 사륜(絲綸)을 내려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게 하셨다.
2월에 왕께서 문묘에 작헌(酌獻)하고 물러가 명륜당(明倫堂)에 나아가 친히 대학서(大學序)를 외우고 강서관(講書官)·태학생에게 명하여 차례로 《시전(詩傳)》·《중용(中庸)》을 강독(講讀)하게 하고 문의(文義)를 토론하고 윤음(綸音)을 내려 학문을 권하셨다. 승지(承旨)를 보내어 여조(麗朝)의 명현(明賢) 정몽주(鄭夢周)의 묘(墓)에 치제(致祭)하게 하셨는데, 동방 도학(道學)의 조종이기 때문이다.
하5월(夏五月)에 제도(諸道)에 신칙하여 농사를 권하셨다. 왕께서 친히 어원(御苑)에 나아가 관운(觀耘)하여 백성을 선도하셨다.
6월에 명하여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의 석담 서원(石潭書院)과 유거(幽居)를 그려서 바치게 하셨는데, 《성학집요(聖學輯要)》를 보고 유례없는 느낌을 일으키셨기 때문이다.
추7월(秋七月)에 왕께서 동조(東朝)의 칠순(七旬)이기 때문에 기사(耆社)의 신하를 불러 선찬(宣饌)하여 경사를 나타내고, 동조께서도 왕께서 63세라 하여 음식을 갖추어 내리셨다. 신하들이 취하여 돌아가고 나서 왕께서 동조에 이르러 모시고 이야기하여 동조의 마음을 기쁘게 하셨다. 물러나실 때에는 날이 이미 밝았는데 법복(法服)을 벗지 않고 바로 정당(正堂)에 나아가 유신(儒臣)을 불러 《중용(中庸)》을 강독(講讀)하셨다. 며칠 뒤에 기사의 신하와 나이 60 이상인 종친(宗親)과 문무 경재(文武卿宰)를 거느리고 동조께 진하(進賀)하셨다. 이윽고 또 사서(士庶)와 함께 경사를 같이하고자 하여 기로과(耆老科)를 설치하여 나이 60 이상인 유생(儒生)·무사(武士)를 시험하고 탁명(坼名)·창명(唱名)을 규례대로 하였다.
8월에 왕께서 다시 친히 백관을 거느리고 동조께 진하하셨는데, 동조의 탄미절(誕彌節)이기 때문이다.
33년 정축(丁丑) 춘정월(春正月)에 침체되어 있는 문무 당하관(文武堂下官)은 그 이름을 적어 첩(帖)을 만들어 바쳐서 등용에 갖추게 하셨다. 관원을 보내어 임진년에 전사하여 장(場)이 안변(安邊)에 있는 자를 치제(致祭)하게 하고 또 강화(江華)의 충렬사(忠烈祠)에 치제하게 하고 명하여 문충공(文忠公) 김상용(金尙容)의 사당을 부조(不祧)하게 하고 적장(嫡長)은 그 벼슬을 세습하게 하셨다. 이때 회양(淮陽)·금성(金城)의 굶주린 백성이 서울에 많이 흘러 들어왔는데, 왕께서 혜국(惠局)에 명하여 그 양식을 도와 주어 본적으로 돌아가게 하고 안집사(安集使)를 보내어 회양·금성의 백성을 안집하여 진구(賑救)하게 하고 회양·금성의 조세·부역·공물을 면제하셨다.
2월에 정성 왕후(貞聖王后) 서씨(徐氏)가 훙서(薨逝)하셨는데, 왕께서 명하여 상례(喪禮)를 간략하게 하고 공제(公除) 전부터 사서(士庶)의 장사(葬事)를 금하지 말게 하셨다.
3월에 두 진청(賑廳)을 설치하여 굶주린 백성 2만여 명을 나누어 진구(賑救)하였다. 이달에 인원 왕후(仁元王后)께서 훙서(薨逝)하셨다. 처음에 후(后)께서 편찮다가 곧 나으시니, 왕께서 매우 기뻐서 경하하고 제도(諸道)의 구포(舊逋)를 면제하고 친히 너그럽게 처결하여 사죄(死罪) 이하는 죄를 용서하셨다. 얼마 안가서 후께서 다시 위독하시니, 왕께서 관원을 보내어 산천에 빌게 하고, 곧 뜰에 내려가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하늘에 빌어 몸소 대신하기를 바라시니 슬픔이 좌우를 감동시켰다. 후께서 훙서하시니, 왕께서 사모하여 마지않아 그 당(堂)을 이름하여 영모(永慕)라 하셨다.
하4월(夏四月)에 어사(御史)를 보내어 단양(丹陽)·회인(懷仁)의 유민(流民)을 안집(安集)하여 저치미(儲置米)로 진구하게 하셨다.
5월에 가물었는데, 왕께서 자신을 책망하고 찬선(饌膳)을 줄이고 형장(刑杖)을 남용하는 것을 경계하고 관원을 보내어 산천에 비를 빌게 하시니, 하늘이 곧 비를 내렸다. 6월에 정성 왕후(貞聖王后)를 홍릉(弘陵)에 장사하였다. 국제(國制) 가운데 능침(陵寢)에는 사방에 큰 돌을 설치하게 되어 있는데, 승민(僧民)을 징발하여 나르므로 이따금 눌려 죽는 자가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왕께서 명하여 죄다 없애게 하셨는데, 이 일은 《상례보편(喪禮補編)》에 실려 있다.
추7월(秋七月)에 인원 왕후(仁元王后)를 명릉(明陵)에 장사하였는데, 크고 작은 일을 왕께서 몸소 살펴서 반드시 정성스럽고 미덥게 하여 능히 후(后)의 뜻을 따르셨다. 무릇 능전(陵殿)의 비용은 경자년보다 3분의 1을 줄이고 경기의 결전(結錢)과 북도(北道)의 전조(田租)도 3분의 1을 면제하였다.
8월에 왕께서 경연(經筵)에 나아가셨을 때에 명하여 고(故) 상신(相臣) 노수신(盧守愼)의 후손을 등용하게 하셨는데, 《숙야잠주해(夙夜箴註解)》를 강독하고 느낌을 일으키셨기 때문이다.
동10월(冬十月)에 전조(銓曹)에 신칙(申飭)하여 침체되어 있는 자를 낱낱이 적어 올리게 하셨다. 어사(御史)를 보내어 청안(淸安)의 유민(流民)을 안집(安集)하게 하고 탐라(眈羅)의 곡물을 날라다 진구(賑救)하게 하셨다.
11월에 관원을 보내어 성삼문(成三問) 등 육신(六臣)의 사당에 치제(致祭)하게 하셨다.
12월에 인종(仁宗)의 시책(諡冊)을 개수(改修)하여 인종실(仁宗室)에 봉안하였다. 무릇 시책과 보(寶)는 반드시 태묘(太廟)의 당실(當室) 옆에 봉안해야 하는데, 인종의 시책은 잃어서 전해지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장차 정성 왕후(貞聖王后)의 우주(虞主)를 묘정(廟庭)에 묻으려고 땅을 파다가 옥찰(玉札) 한 조각을 얻어 자세히 살펴보니 바로 인종의 시책이었다. 왕께서 매우 기이하게 여겨 친히 전문(全文)을 베껴서 옥에 새겨 합하여 완편(完篇)을 만들어 인종실에 보관케 하셨다. 명하여 당하관(堂下官)의 홍포(紅袍)를 청록(靑綠)으로 바꾸게 하셨는데, 《대전(大典)》에 따른 것이다.
34년 무인(戊寅) 춘정월(春正月)에 왕께서 장차 친히 사직(社稷)에 기곡(祈穀)하려 하시는데, 대신이 왕의 춘추가 높아서 근력을 써서 예(禮)를 행할 수 없다 하여 대행하기를 힘껏 청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하늘이 백성을 위하여 임금을 세우지, 어찌 임금을 위하여 백성을 냈겠는가?’ 하고, 마침내 친히 행하셨다.
3월에 왕께서 운관(雲觀)에 하교하기를, ‘산꼭대기에 태(胎)를 묻거나 한 고을에 한 태를 묻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이제 《실록(實錄)》을 살펴보건대, 광묘(光廟)와 여러 대군(大君)·왕자(王子)의 태가 묻힌 곳은 함께 한 산등성이에 있으니, 조종(祖宗)을 본받는 것은 여기에 말미암아야 한다. 이제부터 비롯하여 대(代)가 멀고 가까움에 불구하고 태를 한 산에 묻되 서로 거리가 두세 걸음을 넘지 말고 산등성이가 다할 때까지 하고 적자(嫡子)·중자(衆子)·원손(元孫)·군주(郡主)를 달리하지 말라.’ 하셨다.
추7월(秋七月)에 제도(諸道)에 명하여 명나라 사람의 후손을 적어 올리게 하고, 신칙하여 그들을 군역(軍役)에 잘못 충정(充定)한 수령(守令)에게는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을 시행하게 하셨다.
8월에 왕께서 명릉(明陵)에 거둥하고 회란(回鑾)하는 길에 가을장마가 벼를 손상한 것을 보고 탄식하며 말씀하기를, ‘이것은 내 허물이다.’ 하고, 열흘 동안 감선(減膳)하여 농민에게 사죄할 것을 명하셨다.
동12월(冬十二月)에 예조(禮曹)에 명하여 《황단봉실의(皇壇奉室儀)》를 짓게 하셨다.
35년 기묘(己卯) 춘3월(春三月)에 관서(關西)의 도신(道臣)에게 명하여 채권(債券)을 죄다 불사르고 강계(江界)에서 삼(蔘)을 사는 값을 늘리게 하셨다.
하5월(夏五月)에 인원 왕후(仁元王后)를 태묘(太廟)의 숙종실(肅宗室)에 부제(祔祭)하고 반사(頒赦)하셨다. 명하여 헌가(軒架)는 벌이되 연주하지 말게 하고 말씀하기를, ‘예전에 부자(夫子)가 자장(子張)·자하(子夏)를 다 이 때문에 군자(君子)라 허여하였고, 아조(我朝)에서는 결채 가요(結彩歌謠)를 성조(聖祖)께서 없애시고, 전후의 고취(鼓吹)를 성고(聖考)께서 벌이되 연주하지 않게 하셨는데, 감히 지나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이것도 예(禮)이다.’ 하셨다.
6월에 왕께서 봉작(封爵)되신 지 주갑(周甲)이 되기 때문에 정전(正殿)에 나아가 뭇 신하의 진하(陳賀)를 받으셨다. 오흥 부원군(鰲興府院君) 김한구(金漢耉)의 따님을 왕비로 책봉(冊封)하셨다.
추7월(秋七月)에 우리 주상 전하를 왕세손(王世孫)으로 책봉하셨다. 이달에 왕께서 태묘(太廟)에 전알(展謁)하고 황단(皇壇)에 전배(展拜)하셨다. 문묘(文廟)에 작헌(酌獻)하고 하교하기를, ‘한 고조(漢高祖)의 4백 년의 기업(基業)은 실로 태뢰(太牢)로 공자(孔子)를 제사한 데에 근본하였다. 그 예(禮)를 생략할 수 없다.’ 하였다. 이어서 사성(四聖)의 신위(神位)에도 모두 친헌(親獻)하고 계성사(啓聖祠)에 재배례(再拜禮)를 행할 것을 명하셨다.
8월에 왕께서 하교하기를, ‘임금은 법으로 아랫사람을 어거하는데, 뜻대로 가감한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편안히 지낼 수 있겠는가? 경자년 이전에는 결안(結案)을 기다리지 않고 처형한 자가 없었는데, 한번 행하고서는 드디어 관례로 삼아 심하면 혹 한번의 전지(傳旨)로 처형한다. 뒷날 임금이 되는 자가 혈기에 맡겨 답습하고 신하가 된 자가 당습(黨習)을 부려 답습한다면 그 유폐(流弊)는 스스로 내가 인도한 것이니,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절로 두려워진다. 이 뒤로는 결안을 기다리지 않은 것과 군문(軍門)에서 효시(梟示)하는 것과 전지로 처형하는 것과 역률(逆律)을 추시(追施)하는 것은 일체 영구히 없애고, 임금이 혹 어기는 것이 있거든 법을 집행하는 신하가 이 하교로 다투라. 그러지 않고 영합(迎合)하고 승순(承順)하면 이는 간사하고 구차하게 비위를 맞추는 무리일 것이니, 왕법(王法)이 분명하고 천망(天網)이 넓은데 어찌 감히 그 죄를 피할 수 있겠는가? 준수하면 흥하고 준수하지 않으면 망할 것이니, 아! 금오(金吾)·추조(秋曹)·양사(兩司)는 인쇄하여 관부에 두고 길이 후세에 전하라.’ 하셨다.
36년 경진(庚辰) 춘2월(春二月)에 준천(濬川)하였다. 내[川]는 백악(白岳)·인왕산(仁王山)·목멱산(木覓山)의 물을 합하여 도성(都城) 가운데를 둘러서 동으로, 오간수문(五間水門)을 나가 또 동으로 가 영제교(永濟橋) 동남에서 중량천(中梁川)과 만나 한강(漢江)으로 들어가는데, 《여지승람(輿地勝覽)》에 개천(開川)이라 한 것이 이것이다. 세종(世宗) 때에 이선로(李善老)가 더러운 물건을 투입하는 것을 금하여 명당(明堂)의 물을 맑히기를 청하고, 집현전 교리(集賢殿校理) 어효첨(魚孝瞻)이 상소하여 그 형세가 행할 수 없는 것이라 배척하였는데, 세종께서 어효첨을 옳게 여기고 이선로의 말을 채용하지 않으셨다. 역대에서 세종 때의 일을 존중하고 믿어서 드디어 바닥을 쳐서 소통시키는 일을 모두 거행하지 않은 것이 또한 3백여 년이 되므로 내[川]가 점점 막혀서 거의 둑과 높이가 같아져 장마 끝에는 이따금 넘치는 재앙이 있었다. 왕께서 경(耿)·박(亳)의 고사(故事)에 따라 여러 번 임문(臨門)하여 뭇 백성에게 물으셨는데, 모두가 쳐내는 것이 편리하다 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이것이 백성을 위한 것이기는 하나 어찌 백성의 힘을 괴롭힐 수 있겠는가?’ 하고, 수만 민(緡)을 내어 일꾼을 사서 쳐내게 하되 재촉하지 말도록 경계하였으나 몇 달 안 가서 공역이 끝났다. 그래서 준천사(濬川司)를 설치하고 병조 판서(兵曹判書)·한성 판윤(漢城判尹)과 삼군문(三軍門)의 대장(大將)으로 준천 당상(濬川堂上)을 겸하게 하고 도청 낭청(都廳郞廳) 각 1인을 두어 해마다 준천하는 것을 상규(常規)로 삼았다.
하5월(夏五月)에 왕께서 남단(南壇)에서 기우(祈雨)하고 회란(回鑾)하다가 태상(太常)에 이르러, 신실(神室)의 한 위판(位版)에 ‘대명동정관군(大明東征官軍)’이라 써 있는 것을 보고 드디어 명하여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손자 이태상(李泰祥)을 헌관(獻官)으로 삼고 명나라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의 손자 이훤(李萱)을 대축(大祝)으로 삼고 노량(露梁)에 제단을 설치하여 치제(致祭)하게 하고 이어서 위판을 선무사(宣武祠)에 배향(配享)하게 하셨다.
동12월(冬十二月)에 왕께서 대사성(大司成)에게 명하여 국자생(國子生)을 거느리고 입시(入侍)하게 하였다. 또 체직(替直)한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입시하게 하여 하교하기를, ‘임금과 스승의 책무를 내가 감히 그렇다 할 수 없다마는, 노년에 한 달에 세 번 《중용(中庸)》을 강독(講讀)하였으나 실효(實效)를 보지 못하였으므로, 경들 및 유생들과 함께 문난(問難)하여 내 천박한 학문을 보태고자 한다.’ 하셨다. 그래서 무릇 천인 성명(天人性命)부터 존양 성찰(存養省察)까지 유미(幽微)한 데를 출입하여 광대하고 충만하게 토론하셨는데, 그 말이 다 적을 만하다. 무릇 연석(筵席)에 있는 신하들이 자신이 회금점슬(回琴點瑟) 사이에 있는 듯이 황홀하여 간사한 마음이 일어날 수 없었다. 함께 일어서서 경례하고 말하기를, ‘인재를 만드는 데에는 강설(講說)이 중대하다는 것은 수사염락(洙泗濂洛)에서 보아 증험할 수 있습니다. 이번 거조(擧措)가 관감(觀感)을 감화시키는 것이 워낙 적지 않습니다마는, 정제(定制)가 없이 백성을 스스로 감화하게 하는 것은 요순(堯舜)이라도 할 수 없으니, 정제할 것을 감히 청합니다.’ 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착하다. 사유(師儒)의 장(長)이 국자생과 함께 한 달에 세 번 명륜당(明倫堂)에서 강회(講會)하되 장구(章句)만 이어 가지 말고 이의(理義)를 숭상하라.’ 하셨다.
37년 신사(辛巳) 동11월(冬十一月)에 명하여 연여(輦輿)에 금을 쓰던 것을 모두 구리로 바꾸게 하셨다. 12월에 하교하기를, ‘우리 동방의 예악(禮樂)·문물(文物)이 중국에 견주게 된 것은 다 기성(箕聖)이 끼친 은택이다. 특별히 중신(重臣)을 보내어 기성묘(箕聖墓)에 치제(致祭)하라.’ 하셨다. 곧 명하여 곤수(閫帥)에 대한 결장(決杖)도 시종(侍從)의 예(例)와 같이 속(贖)으로 논하게 하셨다.
38년 임오(壬午) 하4월(夏四月)에 경조(京兆)·오부(五部)에 신칙하여 어려서 부모를 잃고 다른 성(姓)을 가칭하여 성으로 삼은 자가 각각 스스로 고하게 하시어, 모두 60여 인이 죄다 제 성을 회복하였다.
동10월(冬十月)에 안집사(安集使)를 보내어 경기·삼남(三南)의 백성을 안집하게 하셨다. 남한(南漢)·북한(北漢)·강도(江都)의 어공미(御供米)를 폐지하였다.
39년 계미(癸未) 춘정월(春正月)에 왕께서 근정전(勤政殿) 옛터에 나아가 뭇 신하의 진하(陳賀)를 받으셨는데, 성수(聖壽)가 칠순(七旬)이기 때문이다. 곧 연화문(延和門)에서 조참(朝參)하고 육전(六典)에 따라 육관(六官)에 신칙하기를, ‘어떻게 사람을 등용하는가? 공도(公道)를 넓히고 사의(私意)를 없애야 한다. 어떻게 수령(守令)을 의망(擬望)하는가? 관직을 위하여 사람을 가려야 한다. 아! 이방 승지(吏房承旨)는 이조(吏曹)에 신칙하라. 호구(戶口)가 문란하니 바로잡아야 한다. 생민(生民)이 위험에 처하였으니 구제해야 한다. 국저(國儲)가 갈진(竭盡)하였으니 절약해야 한다. 아! 호방 승지(戶房承旨)는 호조(戶曹)에 신칙하라. 제사하여도 깨끗하지 않으면 신명을 감동시킬 수 없고 예(禮)를 행하여도 질서를 잃으면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 아! 예방 승지(禮房承旨)는 예조(禮曹)에 신칙하라. 융정(戎政)이 허술한 것은 책임이 사마(司馬)에 있고 무부(武夫)가 많이 침체되어 있는 것은 허물이 서전(西銓)에 있다. 아! 병방 승지(兵房承旨)는 병조(兵曹)에 신칙하라. 옥에 갇힌 자의 모습이 사람도 아니고 귀신도 아니니 천화(天和)를 손상하는 것이 많다. 문안(文案)을 상세히 살피면 대저 어찌 반드시 죽어야 할 자 중에서도 살릴 길을 찾을 수 없겠는가? 아! 형방 승지(刑房承旨)는 형조(刑曹)에 신칙하라. 공장(工匠)도 백성인데, 근심하고 조석(朝夕)도 보전하지 못한다. 수부(水部)는 한가한 관직이라 말고 제 직무를 닦으라. 아! 공방 승지(工房承旨)는 공조(工曹)에 신칙하라.’ 하셨다.
3월에 호남(湖南)의 도신(道臣)이 굶주린 백성 중에서 죽은 자가 4백 53명임을 아뢰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내 허물이다.’ 하고, 사흘 동안 감선(減膳)할 것을 명하셨다.
추8월(秋八月)에 하교하기를, ‘예전에 송 인종(宋仁宗)이 귀비(貴妃)의 수식(首飾)이 다 구슬임을 보고 머리에 가득히 흰 것이 어지럽다는 말을 하였는데, 귀비가 황공하여 구슬을 제거하니, 인종이 크게 기뻐하여 모란꽃을 잘라서 내렸다. 며칠 안가서 경사(京師)의 구슬 값이 천해졌으니, 위에서 행하면 아래에서 본뜨는 것이 대개 이처럼 빠르다. 그러나 나는 번상(蕃商)이 구슬을 사서 저자에 파는 것이 사치의 근본이라고 생각한다. 그 근본을 제거하지 않고 어찌 그 말단을 다스리겠는가?’ 하셨다. 그래서 명하여 왜관(倭館)에서 구슬을 사는 자는 잠상률(潛商律)로 논하게 하셨다.
40년 갑신(甲申) 춘정월(春正月)에 왕께서 인일제(人日製)를 설행(設行)하여 친히 선비들을 책시(策試)하셨는데, 대책(對策)한 것에 절직(切直)한 말이 없었다. 왕께서 하교하기를, ‘까마귀·소리개가 알을 깨면 봉황(鳳凰)이 오지 않는다. 이는 반드시 이현필(李顯弼)의 일 때문일 것이다. 내가 덕이 없기는 하나, 대강 듣건대 단주(丹朱)와 같지 말라는 말을 우(禹)가 경계하고 순(舜)이 받아들였고, 겉으로 인의(仁義)를 베푼다는 말을 급암(汲黯)이 말하고 한 무제(漢武帝)가 받아들였다 한다. 어찌 이현필 한 사람에게만 너그러이 용서하는 은전을 베풀지 않겠는가? 그 마음씀이 바르지 않으므로 대간(臺諫)이 청함에 따라 처분하였으나, 사기(士氣)가 꺾이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이제 늘그막에 이르러 어찌 후손에게 우족(優足)한 도리를 끼칠 것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이현필에게 직첩(職牒)을 도로 주고 서용(敍用)하라.’ 하셨다.
2월에 왕께서 종친(宗親)·문무관(文武官)으로 나이가 일흔 이상인 사람과 함께 대사례(大射禮)를 행하셨다. 이튿날 적전(籍田)에서 친경(親耕)하셨다.
3월에 왕께서 친히 대보단(大報壇)에 향사(享祀)하셨다. 제사를 마치고서 남은 정성이 그치지 않아서 제단 앞에 노복(露伏)하셨는데, 날이 밝기에 이르러 백기(白氣)가 황악(黃幄) 위에 퍼져 걸치니, 보는 자가 기이하게 여겼다.
하4월(夏四月)에 중외(中外)의 무복(巫卜)·잡술(雜術)을 금하였다.
5월에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를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였다.
동10월(冬十月)에 사대부에게 친영례(親迎禮)를 신칙하셨는데, 《시경》 제풍(齊風)을 강독하고 느낌을 일으키셨기 때문이다.
41년 을유(乙酉) 춘2월(春二月)에 왕께서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거느리고 남교(南郊)의 성경대(省耕臺)에 이르러 성경하고 경기 백성의 종량(種糧)을 도와 주셨다. 3월에 왕께서 친히 대보단(大報壇)에 향사하셨다. 철찬(撤饌)하고 나서 신하들에게 말씀하기를, ‘아헌(亞獻)하고서 기운이 더욱 맑아지는 것이 거의 신명의 도움 같았다.’ 하셨다.
하4월(夏四月)에 왕께서 친히 약제(禴祭)를 지내셨다.
추9월(秋九月)에 왕께서 명하여 고려 왕릉의 금표(禁標)에 관한 수교(受敎)를 인쇄하여 다섯 사고(史庫)에 나누어 보관하고 개성(開城)·강화(江華)·경기 감영(京畿監營)에 반포하여 백성의 경작·매장을 금하되 범하는 자는 지방관(地方官)도 아울러 죄를 처단하게 하셨다.
43년 정해(丁亥) 춘2월(春二月)에 왕께서 세손(世孫)과 함께 적전(籍田)에서 친경(親耕)하셨다. 하루 전에 선농(先農)에게 제사할 때 왕께서 초헌(初獻)하시고 세손이 아헌(亞獻)하셨으며, 이날 왕께서 다섯 번 쟁기를 미시고 세손께서 일곱 번 미셨다. 왕비께서도 빈어(嬪御)와 함께 경복궁(景福宮)의 채상단(採桑壇)에서 친잠(親蠶)하셨다.
3월에 전주(全州)에 불이 나서 2천 3백여 호를 연소(延燒)하였는데, 명하여 쌀 2천 3백여 석을 주고 결전(結錢) 1만 냥을 빌려 주게 하셨다.
하4월(夏四月)에 정부(政府)·후원(喉院)·팔도(八道)·양도(兩都)에 고치를 나누어 내리셨다.
동10월(冬十月)에 명하여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의 후손을 등용하게 하셨다.
45년 기축(己丑) 하5월(夏五月)에 왕께서 적전(籍田)에 거둥하여 관예(觀刈)하시고 회란(回鑾)하여 이튿날 국자생(國子生)을 불러 《숙야잠(夙夜箴)》을 외어 스스로 경계하셨다. 며칠 뒤에 친히 밀을 받으셨다. 경외(京外)에 신칙하여 두곡(斗斛)·권형(權衡)을 동일히 하게 하셨다.
46년 경인(庚寅) 춘정월(春正月)에 편집청(編輯廳)을 설치하여 《문헌비고(文獻備考)》를 편찬하게 하셨다. 국조(國朝)의 전장(典章)은 금궤(金櫃)에 담고 석실(石室)에 넣어 명산(名山)에 보관한 것이 있으나 이 밖에는 증거할 것이 없으므로 무릇 조종(祖宗)의 예악(禮樂)·문물(文物)은 노사(老師)·숙유(宿儒)도 혹 그 연혁(沿革)을 모르고 육관(六官)·서직(庶職)은 다 서리(胥吏)의 전설(傳說)에 의지하므로 뒹굴고 잘못되어 점점 그 옛것을 잃어 갔다. 그래서 왕께서 이 글을 편찬하도록 명하셨는데, 편목(篇目)은 모두 마단림(馬端臨)의 《문헌통고(文獻通考)》대로 하되 개괄(槪括)을 조금 더하였다. 이때부터 나라에 일이 있으면 의거하여 살피는 데에 이 글에 힘입은 것이 많았다.
하4월(夏四月)에 측우기(測雨器)를 나누어 내리셨다. 왕께서 세종(世宗) 때의 측우기의 제도를 얻어 탁지(度支)에 명하여 만들어서 두 대궐과 운관(雲觀)에 두고 또 양도(兩都)·팔도(八道)에 나누어 보내어 비가 내릴 때마다 치수를 보고하게 하셨는데, 《문헌비고》 상위고(象緯考)를 편찬함에 따라 이 명이 있었다.
6월에 주부군(州府郡)의 학교에 문묘(文廟)의 위차(位次)대로 육현(六賢)을 같이 배향(配享)하게 하셨는데, 학교고(學校考)를 편찬함에 따라 이 명이 있었다. 포청(捕廳)의 난장형(亂杖刑)을 영구히 없애게 하셨는데, 형고(刑考)를 편찬함에 따라 이 명이 있었다.
추7월(秋七月)에 왕께서 세손과 함께 홍문관(弘文館)에 거둥하여 강학(講學)하고 선찬(宣饌)하셨다.
47년 신묘(辛卯) 동10월(冬十月)에 전주(全州)에 조경묘(肇慶廟)를 세웠다. 처음에 일곱 도(道)의 선비 이득리(李得履) 등이 상소하여 국조(國朝)의 시조인 신라 사공(司空)의 사당을 세우기를 청하니, 왕께서 종백(宗伯)에게 명하여 대신(大臣)에게 의논하게 하셨는데, 의논이 같지 않았다. 다시 정신(廷臣)을 불러 물으셨는데, 정신이 다 대답하지 못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예(禮)는 인정에서 말미암거니와, 이제 조선은 사대부도 오히려 시조를 존경하여 그 예를 차리는데, 더구나 나라의 시조이겠는가? 고구려·신라도 다 시조묘(始祖廟)가 있거니와, 예에는 본디 풍속과 의리에 따라서 생기는 것이 있다.’ 하셨다. 그래서 유사(有司)를 보내어 전주의 경기전(慶基殿) 북쪽에 사당을 세우게 하고 세손에게 명하여 사판(祠版)을 쓰게 하고 선공(先公)이라 칭하였다. 자정전(資政殿)에 봉안하는 날 곤면(袞冕)을 갖추고서 전배(展拜)하고 대신·종백에게 명하여 의장(儀仗)을 갖추고서 사당에 이르러 봉안하게 하셨다. 호남(湖南) 열 한 고을의 결전(結錢)·선무포(選武布)와 구포(舊逋)를 감면하고 경기·호서(湖西)의 연(輦)이 지나는 고을도 이와 같이 하였다.
【원전】 44 집 543 면
【분류】 *왕실-국왕(國王)


[주D-001]을사년 : 1725 영조 원년.
[주D-002]신축년 : 1721 경종 원년.
[주D-003]임인년 : 1722 경종 2년.
[주D-004]병오년 : 1726 영조 2년.
[주D-005]장(場) : 제사하는 곳.
[주D-006]경자년 : 1720 경종 즉위년.
[주D-007]우주(虞主) : 궁중에서 우제(虞祭)를 지낼 때에 쓰는 뽕나무 신주(神主).
[주D-008]운관(雲觀) : 관상감(觀象監).
[주D-009]결채 가요(結彩歌謠) : 죽은 임금이나 왕비의 신주(神主)를 종묘(宗廟)로 모실 때 행하는 행사. 성균관(成均館)의 유생(儒生)·기생 등이 각각 색종이를 길 좌우에 화려하게 장식하고 가요를 올리며 돌아간 임금이나 왕비의 덕을 칭송함.
[주D-010]경자년 : 1720 숙종 46년.
[주D-011]고사(故事) : 경(耿)과 박(亳)은 은(殷)나라의 도읍으로, 은나라 제17대 왕 반경(盤庚)이 비가 많이 내려 경의 제방이 무너져 물이 넘치게 되자 박으로 도읍을 옮기었는데, 탕임금의 덕화를 따라 탕임금이 베풀었던 정치를 다시 베풀어 제후들이 사방에서 조회(朝會)하고 상도(商道)가 부흥되었다는 고사(故事).
[주D-012]인일제(人日製) : 인일인 음력 정월 초7일에 가절(佳節)이라고 하여 보이는 과거(科擧). 성균관(成均館) 유생이 주대상임.
[주D-013]단주(丹朱) : 요(堯)의 아들. 부질없이 놀기를 좋아하고 포학스런 행동을 하여 불초(不肖)했으므로, 제위(帝位)를 순(舜)에게 전한 고사(故事)에서 나온 말.
48년 임진(壬辰) 춘정월(春正月)에 왕께서 편전(便殿)에서 국자생을 소견하고 선찬(宣饌)하였다. 사민(四民)에게 차등을 두어 쌀을 내리고 경외(京外)의 백성 가운데 가난하여 혼인을 못하거나 매장을 못한 사람들은 관아에서 혼인 비용과 장례 비용을 주게 하셨다.
3월(三月)에 왕께서 명나라 사람의 후손과 선조 임진년에 사절(死節)한 사람의 후손을 거느리고 근정전(勤政殿) 옛터에 나아가 망배례(望拜禮)를 행하셨는데, 재조(再造)의 갑자(甲子)를 거듭 만났기 때문이다.
동10월(冬十月)에 현종 대왕(顯宗大王)의 존호(尊號)를 소휴 연경 돈덕 수성(昭休衍慶敦德綏成)이라 가상(加上)하고 명성 왕후(明聖王后) 김씨(金氏)의 존호를 희인(禧仁)이라 가상하였는데, 공덕(功德)이 세실(世室)에 들어가 마땅하기 때문이다. 곧 왕의 존호를 대성 광운 개태 기영(大成廣運開泰基永)이라 가상하고 정성 왕후(貞聖王后) 서씨(徐氏)의 존호를 공익(恭翼)이라 가상하고 왕비 김씨의 존호를 예순(睿順)이라 올렸는데, 뭇 신하가 청한 것이다.
49년 계사(癸巳) 춘정월(春正月)에 왕께서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니 세손이 백관을 거느리고 진하(陳賀)하였는데, 성수(聖壽)가 80이고 즉위하신 지 50년이 되기 때문이다. 신문고(申聞鼓)를 건명문(建明門)에 걸고 원통한 마음을 품은 백성이 북을 쳐서 아뢰게 하셨다. 사민(四民)에게 차등을 두어 쌀을 내리셨다.
2월에 양로연(養老宴)을 행하였는데, 세손이 청한 것이다.
하6월(夏六月)에 개천(開川)을 돌로 쌓았다. 이에 앞서 개천 바닥을 쳐 낼 때에 양 언덕이 장마에 무너져 개천을 막을 것을 염려하여 버드나무를 심어서 막았으나 그래도 아주 튼튼하지 못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왕께서 명하여 돌로 둑을 쌓게 하시니, 튼튼하고 정밀하여 엄연히 왕거(王居)의 체세(體勢)를 이루었다. 공역이 끝나고서 왕께서 세손과 함께 광통교(廣通橋)에 나아가셨는데, 세손을 돌아보고 말씀하기를, ‘뜻이 있는 자는 일이 마침내 이루어진다. 무릇 유위(有爲)하려면 먼저 뜻을 세워야 하니 이를 힘쓰라.’ 하셨다.
50년 갑오(甲午) 춘정월(春正月)에 왕께서 근정전(勤政殿) 터에 나아가 등준시(登俊試)를 행하셨는데, 국초(國初)의 고사(故事)를 행한 것이다. 3월에 왕께서 하교하기를, ‘우리 나라의 노비법(奴婢法)은 기성(箕聖)에게서 비롯하였으나, 기성은 이것을 설치하여 절도(竊盜)를 막았을 뿐이다. 어찌 대대로 자손이 길이 노비가 되게 하였겠는가? 또 더구나 공물·부역·조세의 법은 남자에게는 역(役)이 있으나 여자에게는 역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노비를 아울러 역을 매기니, 매우 부당하다. 이 뒤로는 비공(婢貢)은 공사(公私)를 막론하고 죄다 폐지하라. 그 경상(經常) 비용으로 가져다 주는 것은 비국(備局)·혜국(惠局)이 상의하여 아뢰라.’ 하셨다. 이에 앞서 31년에 왕께서 내사복시(內司僕寺)의 노비가 혼취(婚娶)하지 못하는 것을 불쌍히 여겨 그 명색을 죄다 폐지하려 하셨으나 경상 비용을 충당할 길이 없는 것을 걱정하여 다만 노공(奴貢)을 한 필 줄이고 비공을 반 필 줄이라고 명하셨는데, 이때에 이르러 공사 비공(公私婢貢)을 죄다 폐지하고 그 경상 비용은 적곡(糴穀)으로 대충하게 하셨다. 이달에 왕께서 옥당(玉堂)과 춘방(春坊)에 거둥하여 친히 《성학집요(聖學輯要)》를 강독(講讀)하셨는데, 세손이 시강(侍講)하였고 옥당과 춘방에 선찬(宣饌)하셨다.
하5월(夏五月)에 가물었는데, 관원을 보내어 기우(祈雨)하고 열 가지 일로 자책(自責)하고 구언(求言)하고 옥을 열어 죄수를 석방하시니, 하늘에서 비가 내렸다.
추7월(秋七月)에 왕께서 숭정전(崇政殿)에서 진하(陳賀)를 받고 그해 전조(田租)의 반을 감면하고 아홉 곳의 영선(營繕)을 철폐하고 공시(貢市) 백성이 바치는 것을 감면하고 나이 여든 이상인 사서(士庶)에게 한 자급(資級)을 올려 주셨다. 곧 세손과 함께 창의궁(彰義宮)에 거둥하여 기사(耆社)의 신하와 나이 여든 이상인 동민(洞民)에게 차등을 두어 비단을 내리셨다.
51년 을미(乙未) 하4월(夏四月)에 왕께서 조강(朝講)·조참(朝參)을 행하셨는데, 탄식하며 말씀하기를, ‘시사(視事)·강학(講學)은 임금의 직분이다. 그러므로 하루 이틀에 만 가지 일을 보살핀다 하였다. 내가 계사년 조강·조참의 일을 생각하면 억지로 일어나 연석(筵席)에 나아가도 강서(講書)할 때가 되면 이미 말소리를 이루지 못하였다. 이 일을 다시 하려 하더라도 어찌 될 수 있겠는가?’ 하셨다.
동10월(冬十月)에 왕께서 병환이 있어 편찮으셨다.
12월에 왕세손에게 명하여 기무(機務)를 대청(代聽)하게 하셨다. 이때 왕께서 앉아 있지 못하시고 앉으면 반드시 세손을 시켜 부축하게 하고 보아도 사물을 가리지 못하시므로 세손이 늘 옆에서 고하였다. 이 때문에 태의(太醫)가 밤낮으로 떠나지 않고 약원 제조(藥院提調)가 새벽에 들어와 세 번 탕제(湯劑)를 바치고 저녁이 되어야 돌아가는 것이 이미 여러 해 되었는데, 겨울이 되면 숨이 더욱 막히고 담(痰)이 오르내려 마지않았다. 일찍이 상참을 행할 것을 명하여 이미 갖추게 하였는데, 세손이 그만두기를 청하였다. 왕께서 말씀하기를, ‘이것은 내 잠꼬대 같은 말이나, 이미 명하였으니 그 말을 실행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드디어 좌우에게 명하여 부축하게 하고 나가시어 자리에 오르려 하시다가 기(氣)가 어지러워 대내(大內)로 돌아가셨는데, 세손에게 말씀하기를, ‘너에게 대청시키려 한 지 오래 되었다. 사전(祀典)을 대행해야 할 조짐이다.’ 하고, 또 이제부터 잠꼬대 같은 말은 네가 선포하지 말도록 하라고 경계하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하교하기를, ‘오늘 진하(陳賀) 때에는 백관이 집경당(集慶堂)에 들어와 예를 행하라.’ 하셨다. 이때 이미 밤 5고(五鼓)이었는데, 중관(中官)이 정원(政院)에 전하였다. 적신(賊臣) 홍인한(洪麟漢)이 좌의정(左議政)이었는데 반드시 임금의 분부를 선포하려 하므로, 세손께서 여러 번 사람을 보내어 홍인한에게 말하기를, ‘날이 밝아 담(痰)이 내리기를 기다려서 이 분부를 반포하여도 늦지 않을 것이다.’ 하셨으나, 홍인한이 끝내 듣지 않고 마침내 밤에 백관을 재촉하여 모이게 하였으므로 서울 사람들이 모두 놀라워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좌우가 이 일을 고하니, 왕께서 탄식하고 말씀하기를, ‘백성이 다들 나를 늙어서 정신이 어지러운 임금으로 여길 것이다.’ 하셨다. 그래서 세손에게 품신(稟申)하지 않았다 하여 중관을 죄주고 이어서 명하여 예를 행하고 백관을 파하여 보내게 하셨다. 이때부터 왕께서 더욱 대청시킬 뜻을 결정하여 세손의 손을 잡고 말씀하기를, ‘내가 너에게 선위(禪位)하려 하는데, 나는 자의(紫衣)를 입고 너에게 임하고 너는 홍의(紅衣)를 입고서 나를 섬기면 또한 즐겁지 않겠는가? 그러나 네 마음을 상하게 할세라 염려하여 차선을 생각하여 너에게 대청시키려 하는데, 대청하면 반드시 대조(大朝)께 여쭈어야 하므로 도리어 더욱 번거로울 것이니, 나는 대청에 따라 나라의 일을 너에게 죄다 맡기려 한다.’ 하셨다.
이때에 적신 정후겸(鄭厚謙)이 화완 옹주(和緩翁主)의 후사가 된 양자로서 그 어머니와 함께 용사(用事)하여 매우 세력을 부렸는데, 홍인한은 세손의 외척으로서 바라는 것이 적지 않았으나, 그러나 세손께서 늘 그 사람됨이 탐욕스럽고 포악하며 지식이 없는 것을 더럽게 여겨 낯빛이나 말씀을 너그럽게 하신 적이 없으므로 홍인한이 불만하고 원망하여, 드디어 정후겸 모자에게 붙어서 꾀하여 평안 감사(平安監司)가 되고 돌아와서는 또 후원을 받아서 입상(入相)하였다. 이 세 사람은 세손께서 영명(英明)하시어 뒷날 헤아릴 수 없는 죄를 받을까 두려워하여 홍지해(洪趾海)·윤양후(尹養厚) 등과 맺어 사우(死友)가 되어 밤낮으로 비어(蜚語)를 만들어 저위(儲位)를 위태롭게 하려고 꾀하고, 또 홍지해를 끌어들여 함께 힘을 합하려고 하였다. 왕께서 환후가 심한 때를 타서 여러 번 홍지해를 정승으로 천거하였으나, 왕께서 그때마다 답하지 않으시고 세손에게 말씀하기를, ‘좌상(左相)은 반드시 홍지해를 우의정(右議政)으로 삼고 윤태연(尹泰淵)을 훈련 대장(訓鍊大將)으로 삼아야 마음에 쾌할 것이다.’ 하고, 곧 또 말씀하기를, ‘세상에 어찌 정승이 청하는 일이 있겠는가?’ 하셨다. 홍인한이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윤양후 및 정후겸 모자와 함께 꾀하는 것이 더욱 급해졌고 세손의 궁료(宮僚)인 홍국영(洪國榮)이 목숨 걸고 지키고 떠나지 않으며 정민시(鄭民始)와 함께 늘 보좌하는 것을 꺼려서 여러 번 홍국영 등을 세손께 참소(讒訴)하여 그 세력을 고립시키려 하였으나, 세손께서 끝내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이때에 이르러 왕께서 시임(時任)·원임(原任)인 대신(大臣)을 불러 대청시킬 뜻을 이르셨는데, 홍인한이 앞장서서 옳지 않다고 말하였다. 왕께서 말씀하기를, ‘아조(我朝)에서 대청이 전후에 잇달아 있었던 것은 노고를 나누려는 것일 뿐이 아니라 저이(儲貳)가 나라의 일을 밝게 익히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노론(老論)·소론(少論)도 알아야 할 것이고 이판(吏判)·병판(兵判)도 알아야 할 것이다.’ 하셨는데, 홍인한이 분노를 낯빛에 나타내며 말하기를, ‘동궁(東宮)께서 이판·병판을 아실 것 없고 노론·소론을 아실 것 없고 또 나라의 일을 아실 것 없습니다.’ 하였다. 이때 왕께서 답답하여 스스로 떨치지 못하고 다만 한숨쉬고 문지방을 두드리며 말씀하기를, ‘경들은 물러가라.’ 하시매, 대신들이 물러가려 하였다. 그런데 왕께서 오히려 스스로 그만두지 못하여 다시 불러들여 말씀하기를, ‘내 병이 이렇거니와, 그 중에서도 담이 오르고 헛소리가 나는 것이 급한데 혹 한밤에 촌지(寸紙)를 내어 경들을 부르더라도 내가 영상(領相)·좌상(左相)이 어느 사람인지 가리지 못한다면 나라의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나 경들과 이 일을 논할 만하지 못하니, 차라리 내 심법(心法)을 동궁에게 전하겠다.’ 하고, 이어서 동궁에게 명하여 《자성편(自省編)》·《경세문답(警世問答)》을 강독하게 하셨다. 대신이 물러가니, 왕께서 또 문지방을 두드리며 말씀하기를, ‘대신이 이러하니 조정의 일이 될 수 없다. 종사(宗社)와 백성을 어찌하는가?’ 하셨다.
열흘 뒤에 왕께서 명하여 상참(常參)을 행하였는데, 세손에게 기대어 앉았다가 조금 뒤에 병환이 발작하여 도로 누우셨다. 대신을 불러 큰 소리로 명을 따르지 않는 것을 꾸짖고 승지(承旨)에게 명하여 대청하라는 분부를 써서 내리게 하셨는데, 홍인한이 몸으로 승지를 가려 왕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고는 또 말하기를, ‘신하로서 누가 감히 이 분부를 쓸 수 있겠습니까?’ 하니, 왕께서 노하여 꾸짖고 말씀하기를, ‘경들은 빨리 물러가라.’ 하셨다. 물러가니, 왕께서 정원(政院)에 하교하기를, ‘순감군(巡監軍)은 동궁에 들어가 점하(點下)하고 이비(吏批)·병비(兵批)는 여쭌 뒤에 동궁에 들어가 점하하라.’ 하셨다. 그래서 홍인한이 다시 대신들에 앞장서서 구대(求對)하여 성명(成命)을 거두시기를 청하니, 왕께서 경묘(景廟)께서 ‘좌우가 가하겠는가 세제(世弟)가 가하겠는가?’ 하신 비답(批答)을 외고 말씀하기를, ‘내가 근자에 눈이 어두워 정망(政望)에 낙점(落點)하지 못하므로 중관(中官)이 대신하여 부표(付標)하는데, 만일 중관이 내 명을 전도(顚倒)시키더라도 내가 어떻게 깨닫겠는가? 차라리 내 손자에게 맡기는 것이 당연하겠다.’ 하셨다. 영의정(領議政) 한익모(韓翼謨)가 말하기를, ‘성명(聖明)께서 위에 계시니 지금의 중관에게는 틀림없이 그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왕께서 다시 한숨쉬며 말씀하기를, ‘장차 내 손자에게 대내(大內)에서 대로(代勞)시키겠다.’ 하셨는데, 홍인한이 다시 말을 늦추어 ‘대내의 일은 신들이 알 바가 아닙니다.’ 하였다.
이날 저녁에 왕께서 중관에게 명하여 계보(啓寶)를 동궁에게 보내게 하셨는데, 세손께서 눈물을 흘리며 굳이 사양하기를, ‘계보가 어찌 조정의 신하와 나라 사람이 모르게 주고받는 것이겠습니까?’ 하였다. 왕께서 말씀하기를, ‘내 기운은 네가 아는 바이다. 저 대신과 다투기 어려우므로 이런 부득이한 일을 하는 것이니, 내가 너에게 내밀히 주더라도 후세에 어찌 그르게 여길 자가 있겠는가? 시상(時相)에게 죄가 있다고 말하는 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는 하나 내가 네 뜻을 밝히겠다.’ 하고, 드디어 승전색(承傳色)에게 명하여 정원에 전하기를, ‘충자(沖子)가 상소하면 두 자의 분부를 내리겠다.’ 하셨는데, 두 자는 ‘선위(禪位)’를 가리킨 것이다. 이 때문에 세손께서 감히 상소하지 못하셨으나, 성후(聖候)가 이때부터 더욱 심해지고 대청하는 일은 바야흐로 미결된 가운데에 있는데, 홍인한과 정후겸 모자가 안팎으로 방해하여 온갖 계책을 써서 종사의 위망(危亡)이 호흡(呼吸)하는 사이에 닥쳐 있었다. 그러므로 홍국영이 근심하고 분개하여 정민시와 함께 연명으로 상소하여 토죄(討罪)를 청하려 하였으나 세손께서 옳지 않게 여겨 힘써 말리셨다.
전 참판(參判) 서명선(徐命善)이 상소하기를, ‘생각하건대, 우리 성상께서 기무(機務)가 번거로운 것은 요양에 방해되므로 선조(先朝)의 고사(故事)에 따라 오늘의 하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난달 20일 입시(入侍)하였을 때에 좌의정 홍인한이 감히 말하기를, 「동궁께서 알 것 없습니다.」 하였으니, 대저 저군(儲君)이 할 수 없다면 어떤 사람을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까? 방자하고 무엄하기가 지극합니다. 상참(常參) 때에는 전 영상 한익모가 또 말하기를, 「좌우는 근심할 것이 못된다.」 하였으니, 대저 자신이 수상의 지위에 있으면서 내시에게 질언(質言)한 일이 옛 대신에게도 있었습니까? 홍인한이 「대내에서 하시는 일이므로 신은 쟁집(爭執)하지 않습니다.」라고 아뢴 것으로 말하면 놀랍고 해괴하기가 더욱 막심합니다. 이것이 국가의 대사를 위하여 어떠한 것이기에 궁위(宮衛) 안에서 비밀히 하고 심엄(深嚴)한 가운데에서 행하여 만백성이 알 수 없고 팔방에서 듣지 못하게 합니까? 전하의 오늘의 거조(擧措)는 밝고 바르며 뜻이 커서 천고에 뛰어난 것인데, 모두가 쳐다보는 직위에 있는 자가 겉치레로 여기고 오로지 미봉을 일삼으니, 어찌 마음 아프지 않겠습니까? 명명(明命)을 내려 대신의 죄를 빨리 바루게 하소서.’ 하였다. 소(疏)가 들어가니, 왕께서 서명선을 불러 온 몸이 혈성(血誠)으로 찼다고 칭찬하고 두 자급(資級)을 올리셨다. 이 일은 《명의록(明義錄)》에 실려 있다.
그래서 왕께서 세손에게 명하여 서정(庶政)을 대청(代聽)하게 하고 조참(朝參) 때에 법가(法駕)를 쓰고 의장(儀仗)에 수정장(水晶仗)·금부월(金斧鉞)을 설치하고 수하(受賀) 때에는 백관이 조복(朝服)으로 예를 행하고 헌가(軒架)를 아울러 연주하였다. 태묘(太廟)에 전배(展拜)할 때에는 전정(殿庭)에서부터 여(輿)를 타고 거가(車駕)가 성밖으로 나갈 때에는 훈련(訓鍊)·금위(禁衛)·어영(御營)의 군사가 수여(隨輿)하고 무릇 찬배(竄配) 이하는 여쭙지 않고 결단하게 하셨는데, 다 특교(特敎)이었다. 세손께서 세 번 상소하여 사양하셨는데, 왕께서 누누이 위유(慰諭)하셨다. 여드레가 지나서 고묘(告廟)하고 반사(頒赦)하였다. 왕께서 부축받아 경현당(景賢堂)에 이르러 세손과 함께 진하(陳賀)를 받으셨는데 매우 즐거워하셨다. 공시인(貢市人)의 요역(徭役)을 감면하고 사민(四民)에게 차등을 두어 쌀을 내리셨다.
얼마 안가서 적신(賊臣) 심상운(沈翔雲)이 소조(小朝)에 상서(上書)하여 진계(陳戒)를 명목 삼아 교묘히 계략을 펴서 궁료(宮僚)를 배척하였는데, 온실수(溫室樹)라는 말이 있었다. 서명선(徐命善)이 연석(筵席)에서 아뢴 말에 ‘궁료한테서 들으니 세손께서 세 가지를 알 것 없다는 말 때문에 상소하여 인의(引義)하려 하신다 합니다.’ 한 것이 있으므로 심상운이 궁위(宮衛)의 말과 글을 누설한 것으로 홍국영(洪國榮) 등의 죄를 만들어 일망 타진할 계책을 부리려 한 것이다. 심상운은 본디 심사순(沈師淳)의 후사로 들어간 양자인 심일진(沈一鎭)의 아들인데, 심사순은 또 심익창(沈益昌)의 손자로서 심정보(沈廷輔)의 후사로 들어간 자이다. 심익창은 일찍이 역환(逆宦) 박상검(朴尙儉)의 숙사(塾師)이었고 신축년·임인년에는 김일경(金一鏡)·윤취상(尹就商)과 밤낮으로 박상검의 집에 모여 궁금(宮禁)과 교통하는 일을 참여하여 들었는데, 박상검이 역모(逆謀)하다가 일이 발각되고 옥사(獄詞)가 심익창에게 관련되니, 여러 번 고문받고 석방되어 금고(禁錮)되어 있다가 죽었다. 심상운의 아우 심익운(沈翼雲)은 등제(登第)하였으나 심익창에 연좌되어 오래 등용되지 못하였다. 심상운이 이것을 근심하여 이미 죽은 아비 심일진을 심사순에게서 파양(罷養)하고 또 이미 죽은 할아비 심사순을 심정보에게서 파양하여 곧바로 심일진의 아비를 심정보에게 이으니, 무릇 두 세대가 두 번 그 아비를 바꾼 것이다. 그래서 청의(淸議)가 더욱 침뱉고 더럽게 여기니, 심상운이 드디어 정후겸에게 아부하여 곡진히 섬기고 삼갔다. 이때에 이르러 정후겸·홍인한(洪麟漢) 등이 그 일이 드러난 것을 보고 윤 양후와 함께 심상운을 불러다가 신축년·임인년의 유봉휘(柳鳳輝)와 같은 흉악한 마음을 부려 먼저 궁료의 죄안을 꾸며 큰 옥사(獄事)를 일으키려 하였는데, 세손께서 그 정상을 살펴 알고 탄식하며 말씀하기를, ‘일이 충역(忠逆)에 관계되니 흐릿하게 미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셨다. 판부사(判府事) 김양택(金陽澤)이 왕께 갖추어 아뢰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역적 놈의 손자가 감히 그럴 수 있는가?’ 하고, 명하여 고문하여 흑산도(黑山島)에 위리 안치(圍籬安置)시키셨다. 이윽고 명하여 심상운의 형제를 영구히 서민(庶民)으로 삼게 하셨다.
52년 병신(丙申) 춘정월(春正月)에 왕의 존호(尊號)를 요명 순철 건건 곤녕(堯明舜哲乾健坤寧)이라 가상(加上)하고 정성 왕후(貞聖王后) 서씨(徐氏)의 존호를 인휘(仁徽)라 가상하고 왕비 김씨(金氏)의 존호를 성철(聖哲)이라 가상하였다.
3월에 왕께서 병환이 위독하므로 세손께서 관원을 보내어 묘사(廟社)·산천에 두루 기도하게 하셨다. 곧 고명(顧命)하여 대보(大寶)를 왕세손에게 전하고 초닷샛날 묘시(卯時)에 왕께서 경희궁(慶熙宮)의 집경당(集慶堂)에서 승하하시니, 수는 여든셋이고 재위는 52년이다. 하인(下人)·노소(老少)가 궐하(闕下)에서 분주하여 울부짖으며 눈물을 흘리고, 조사(朝士)·부녀가 각각 그 집에서 곡(哭)하여 소리가 거리를 진동하고, 먼 시골에서도 상(喪)을 들은 날에 남녀 노소가 다 어린아이가 어버이를 사모하듯 하였다. 뭇 신하가 왕의 덕행(德行)과 공업(功業)을 의논하여 익문 선무 희경 현효(翼文宣武熙敬顯孝)라 시호(諡號)를 올리고 묘호(廟號)를 영종(英宗)이라 하였다.
이해 7월 27일에 원릉(元陵) 해좌(亥坐)인 언덕에 장사하니, 곧 건원릉(健元陵)의 서쪽 산등성이다. 이에 앞서 기해년 효종께서 승하하셨을 때에 대신(大臣) 정태화(鄭太和)·김수흥(金壽興) 등이 효종을 받들어 여기에 장사하였는데, 찬술(撰述)한 것이 다 장려(壯麗)하고 명수(明秀)하기가 건원릉과 같으나 도리어 더 낫다고 말하였다. 현종 계축년에 물이 병석(屛石)에서 스며 나옴으로써 이의(異議)가 있어서 구릉(舊陵)을 열었는데, 조화(調和)로움을 보고는 중신(重臣) 민정중(閔鼎重)이 몸소 구릉을 봉축(封築)할 때에 일을 돕는 자에게 경계하기를, ‘잘 닦으라. 뒤에 반드시 다시 국릉(國陵)이 될 것이다.’ 하였다. 경종의 대상(大喪)에 이르러서야 왕께서 경종을 여기에 모시기를 매우 바라셨으나, 김일경(金一鏡)이 이때 산릉 도감 당상(山陵都監堂上)이 되어 국조(國朝)에서는 옮긴 곳을 능으로 삼은 적이 없다고 극언(極言)하였으므로, 드디어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마침내 왕의 능이 되었으니, 아! 어찌 우연이겠는가?
왕께서는 영명(英明)하기가 뛰어나시어 모든 임금의 덕 중에서 큰 것을 얻으셨으니, 효(孝)·경(敬)·근(勤)·검(儉)·공(公)·서(恕)가 임금의 덕 중에서 큰 것이다. 왕께서는 어려서 인현 왕후(仁顯王后)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기셨다. 바야흐로 5세 때에 손수 금원(禁苑)의 온갖 꽃을 따서 술을 만들어 후(后)께 바치시니, 후께서 감탄하여 말씀하기를, ‘효제(孝悌)는 본디 타고나는 것이거니와, 어찌 그리 숙성한가?’ 하셨다. 숙묘(肅廟)께서 편찮으신 7년 동안에 좌우에서 돕고 구원하는 일을 왕께서 친히 하고 밤에 편안히 주무시지 못하시는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루 같으니, 숙묘께서 늘 말씀하기를, ‘기특한 아이다. 어찌 잠이 없는가?’ 하셨다. 인원 왕후(仁元王后)를 섬기신 것은 등극(登極)하고 기사(耆社)에 들어가신 뒤일지라도 늘 왕자(王子)이었을 때와 같으셨다. 나아가 뵐 때마다 공수(拱手)하고 질추(疾趨)하며, 시좌(侍坐)하면 허리를 굽히고 머리를 숙이며, 물음이 있으면 소매로 입을 가리고서 답하며, 물건을 갖추어 뜻을 기쁘게 하여 드리는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어기지 않으셨다. 국구(國舅)인 경은 부원군(慶恩府院君)의 집에도 매우 넉넉하게 물건을 보내어 후의 마음을 기쁘게 하되 또한 조정(朝政)에는 간여하지 않게 하시니, 인원 왕후께서 늘 말씀하기를, ‘누가 주상을 내 소생이 아니라고 생각하겠는가?’ 하셨다. 경묘(景廟)를 섬기신 것도 숙묘를 섬기신 것과 같고 선의 왕후(宣懿王后)를 섬기신 것도 인원 왕후를 섬기신 것과 같았으므로, 사람들이 형제 사이인지 수숙(嫂叔) 사이인지 알 수 없을 만하였다. 크고 작은 향사(享祀)에는 반드시 친히 나아가고 정성스러움과 공경스러움이 극진하여 신명이 양양(洋洋)히 위에 임하신 듯하셨다.
선원전(璿源殿)이 궁중에 있으므로 절제(節祭)·탄일제(誕日祭)·기일제(忌日祭)가 있으면 왕께서 으레 몸소 제물을 살피고 선부(膳婦)를 경계하여 정결을 극진히 하게 하셨다. 선조(先朝)에서 즐기시던 햇것이 있으면 반드시 먼저 전(殿)에 바치고서야 드셨는데, 찬선(饌膳)을 맡은 자가 일찍이 송이[松栮]를 바치자, 왕께서 말씀하기를, ‘전에 바쳤는가?’ 하시매, 대답하기를, ‘때가 아직 일러서 바치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아직 바치지 않고서 내가 먹게 하는 것은 내 정성스러움과 공경스러움이 모자라기 때문이니, 너를 어찌 꾸짖겠는가?’ 하고 물리치고 들지 않으셨다. 춘추가 매우 높아져서도 선왕(先王)·선후(先后)의 기일(忌日)을 당하면 소식(素食)하고 재거(齋居)하며 탕약(湯藥)까지도 드시지 않았다. 향사는 몸소 하지 못하더라도 제삿날에는 반드시 재계(齋戒)하여 마음을 바르게 하고 새벽까지 중정(中庭)에서 노복(露伏)하였다가 제사가 끝난 것을 듣고서야 그치셨다. 만년에 경희궁(慶熙宮)으로 옮겨 계셨는데, 궁의 북쪽에 있는 영취정(暎翠亭)이 육상궁(毓祥宮)과 아주 가까웠다. 왕께서 아침과 저녁마다 소여(小輿)를 타고 이르러 사당을 바라보고 노복하여 혼정 신성(昏定晨省)을 갈음하고 눈물을 흘리고 돌아오셨는데, 한추위와 한더위에도 그만두지 않으셨다. 일찍이 꿈에서 숙묘를 모셨는데, 숙묘께서 간지(簡紙)를 가져오라고 명하셨으나 미처 드리기 전에 깼으므로 이때부터 다시는 간지에 글을 쓰지 않으셨다. 춘추가 높고 병환이 깊어졌을 때에도 늘 《시경(詩經)》의 육아(蓼莪)·척호(陟岵)의 시(詩)를 외시고 외고 나면 목이 메어 눈물이 줄줄 흐르셨다. 그러므로 나라 사람이 다 왕께서 효성스러우시다 하였다. 왕께서는 일념으로 하늘을 공경하고 극진히 하지 않으신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종이에 ‘천(天)’ 자가 있으면 손으로 스스로 깨끗이 씻고 남이 밟고 무엄하게 하지 못하게 하셨다. 보통 대화 때에도 말이 하늘에 미치면 반드시 존경을 더하고 말씀하기를, ‘임금은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고 신하는 임금을 대신하여 일을 다스리니, 임금이 하늘을 공경하는 것은 신하가 임금을 공경하는 것과 같아야 한다.’ 하셨다.
재이(災異)를 당하면 정성을 다하여 경계하고 감선(減膳)하고 구언(求言)하고 자신을 반성하고 자책(自責)하셨다. 경인년 봄 객성(客星)이 나타났을 때에 왕께서 밤에 편집신(編輯臣)과 운관 사력(雲觀司曆)을 불러 재앙을 그치게 할 방책을 강구하고 저녁마다 월대(月臺)에서 측후(測候)하고 말씀하기를, ‘백성과 나라에 재앙을 옮기지 말기 바란다.’ 하셨다. 이렇게 사흘 동안 하시니 객성이 사라졌다. 혹 바람이 사납거나 비가 심하면 밤이라도 반드시 옷을 입고 관을 쓰고 앉으시며 때때로 혼자 말씀하기를, ‘내게 무슨 허물이 있어서 하늘의 경고가 이러한가?’ 하고, 잠을 못 이루고 근심하며 앉아서 아침까지 기다리셨다. 날이 가물어 비를 빌 때에는 대행시킨 적이 없고 친히 규(圭)를 잡아 정성이 반드시 감통되게 하려 하셨다. 그러므로 임자년 이후로는 거의 친히 비시지 않은 해가 없었고 비시면 으레 비를 내렸으므로 큰 풍년이 들었으니, 사책(史冊)에 이루 다 쓸 수 없다. 말년에 이르러서는 관원을 보내어 대행시키셨으나 또한 반드시 궐정(闕庭)에서 노복(露伏)하여 비가 내린 다음이라야 비로소 연침(燕寢)으로 돌아가셨고, 혹 비가 내리지 않으면 옷을 벗고 맹렬한 볕을 쬐며 말씀하기를, ‘어찌 내 몸을 태우지 않겠는가?’ 하셨다. 그러므로 나라 사람이 다 왕께서 공경스러우시다 하였다.
왕께서 즉위하신 처음에 이미 한추위와 한더위 때에 강일(講日)을 늘리고 낮에는 반드시 해질 때까지 계속하고 밤에는 문득 새벽 종이 울 때까지 계속하고 능행(陵幸)·친경(親耕)하신 뒤에도 피로하여 게을리하거나 그만두지 않으셨다. 바야흐로 춘추가 칠순이 되어서도 삼복(三伏) 날에 아침·낮·저녁 세 번의 강석(講席)을 열어 토론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으셨다. 요양하실 때에 이르러 눈이 어두워 글자를 가리지 못하셔도 친히 《소학》·《대학》을 외어 강독하고 한 달에 여섯 번 소대(召對)하여 신하를 만나고 국사(國事)를 재결하며 크고 작은 일을 버려 두지 않으셨다. 혹 묘모(廟謨)가 적으면 조용히 민간의 고통과 궁부(宮府)의 고사(故事)를 논하시어, 소대가 파하고 해가 이미 저물었는데도 시인(寺人)이 다시 당(堂)에 촛불을 붙이게 하셨다. 그리고 승지(承旨)가 장소(章疏)·계장(啓狀)을 가지고 들어오면 왕께 아뢰는 말을 듣고 판비(判批)를 불러 줌에 조금도 지체하지 않으셨으며, 물러갈 때에는 야루(夜漏)가 4고(四鼓)·5고를 알렸으므로 나라 사람이 다 왕께서 부지런하시다 하였다.
왕께서는 성품이 사치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온갖 완호(玩好)에 욕심이 없으셨다. 보위(寶位)에 오르셔서는 거친 베 옷을 입고 흰 베 관을 써서 풍속을 바꾸려 하셨다. 거처하시는 궁궐의 벗겨진 벽 칠과 이지러진 창영(窓楹)과 해진 보연(黼筵)·포석(鋪席)을 해가 지나도 고치지 않아서 유사(有司)가 수리하기를 청하여도 윤허하지 않으셨다. 집경당(集慶堂)에 연거(燕居)하시되 해진 병풍 두어 개로 안팎 청마루를 가려서 소박하고 좁기가 청수(淸修)한 선비의 집만도 거의 못하였다. 일찍이 선조(先朝)의 침전(寢殿) 옆에 초가 하나를 짓고 그 안에서 글을 읽고 고사(故事)를 추술(追述)하려 하셨으나 마침내 민력(民力)을 거듭 번거롭힌다 하여 그만두셨다. 입으시는 것 중에서 오직 곤면(袞冕)·법복(法服)은 제도를 살펴서 아름답게 하고 그 나머지 중의(中衣)·철릭[貼裏] 따위는 이따금 빨고 기워 입고 겨울에 매우 춥더라도 갖옷을 입으신 적이 없으므로, 왕을 모시는 뭇 신하도 감히 갖옷을 껴입지 못하였다. 밤에도 이부자리를 깔지 않고 때때로 목침을 베고 곤히 주무시면 궁인(宮人)이 왕의 몸에 한기(寒氣)가 닥칠세라 염려하여 작은 이불을 덮어 드렸다. 국법에는 내선부(內膳夫)가 하루에 다섯 번 왕의 찬선(饌膳)을 바치게 되어 있으나 왕께서는 하루에 세 번 찬선을 드시고 찬선도 배불리 드신 적이 없으므로 궁중에서 드디어 낮과 밤 두 번의 찬선을 폐지하였다. 그 밖에도 풍성하게 즐기는 것을 경계하고 줄이는 것을 힘쓰신 것이 흔히 이와 같았다. 그러므로 나라 사람이 왕께서 검소하시다고 하였다.
왕께서 일찍이 말씀하기를, ‘임금의 정사는 궁위(宮闈)에서 비롯해야 한다.’ 하고, 공사(公事)가 아니면 환관(宦官)·궁녀(宮女)와 말씀하신 적이 없었다. 고례(古例)로는 파조(罷朝) 뒤에 크고 작은 공사를 혹 환관을 시켜 와내(臥內)에서 읽어 아뢰게 하였으나, 왕께서 환관이 이 때문에 국사(國事)를 몰래 익혀 조정(朝政)에 간여할세라 염려하여 밤이 깊었더라도 반드시 승지를 불러서 읽어 아뢰게 하셨다. 일찍이 세손에게 말씀하기를, ‘예전에는 환관 10여 인도 오히려 많다고 여겼는데, 이제는 1백여 인이 넘는다. 많으면 제어하기 어렵다는 것을 너는 알라.’ 하셨다. 신하를 만나면 늘 진심을 옮기고 무릇 죄가 있으면 처음에는 견책(譴責)이 매우 엄하였더라도 서용(敍用)한 뒤에는 예전처럼 신임하여 쓰시어 마치 처음부터 그런 일이 없었던 것 같았다.
신축년·임인년의 화를 당하신 끝에 당론(黨論)이 살육(殺戮)의 근본이 되고 살육이 망국(亡國)의 근본이 된다는 것을 깊이 아시어 붕당을 없애고 세신(世臣)을 보전하는 것을 정치를 하는 요체로 삼았다. 바야흐로 동궁에 계실 때에 교리(校理) 조문명(趙文命)이 봉사(封事)하니, 경묘께서 삼당(三黨) 뒤에 탕평(蕩平)으로 폐단을 바로잡아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왕께서 그 말씀에 열복(悅服)하여 마음에 새기셨다. 등극하셔서는 맨 먼저 탕평론을 주장하는 두세 신하를 발탁하셨는데, 흠잡는 말이 좌우에서 갈마들었으나, 왕께서 끝내 굽히지 않고 신임하였으며 그 중에서 지론(持論)이 세찬 자가 있으면 으레 배척하여 쓰지 않으셨다. 늘 선묘(宣廟)의 어제시(御製詩)의 ‘신하들이 오늘 이후에도 어찌 다시 동인·서인을 계속하겠느냐?’는 구(句)를 외고 말씀하기를, ‘이것이 우리 가법(家法)이다. 누가 감히 방해하겠는가?’ 하셨다. 일찍이 인원 왕후의 상을 당하셨을 때에 왕께서 글을 만들어 세신을 보전하고 나라를 편안히 하는 계책을 극진히 말씀하고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효소전(孝昭殿)에 고하게 하고 말씀하기를, ‘내가 이렇게 하는 까닭은 멀리 주공(周公)이 금등(金縢)에 보관한 일을 본뜨고 가까이 조변(趙抃)이 분향하고 하늘에 고한 일을 본뜨기 위한 것이다.’ 하셨다. 이 때문에 물과 불처럼 서로 나뉘어 싸움이 잇달던 때일지라도 잔포(殘暴)한 자를 교화하고 형살(刑殺)을 없애며 50년 가까이 내려오다가, 임진년에 척당(戚黨)의 일이 일어나니 왕께서 김귀주(金龜柱)를 매우 엄하게 벌하셨다. 세손에게 말씀하기를, ‘조당(朝黨)도 오히려 세도(世道)의 근심거리가 되는데, 더구나 척당이겠는가? 금하지 않으면 앞으로 하늘에 사무치게 될 것이다. 나는 늙었으니 미처 보지 못하겠으나, 네게는 뒷날의 근심거리이다.’ 하셨다. 생각이 깊고 염려함이 깊기가 이러하셨다. 그러므로 나라 사람이 다 왕께서 공평하시다 하였다.
왕께서는 잠저(潛邸)에 오래 계시어 여염의 어려움과 백성의 괴로움과 위항(委巷)·황야(荒野)의 아주 작은 일도 모두 두루 아셨고, 저위(儲位)를 이어받게 되어서는 경전(經傳)을 널리 강구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라는 것을 환히 아셨다. 무릇 공민(貢民)·시민(市民)·경종민(耕種民)·판상민(販商民)·군보민(軍保民)에 대하여 그 굶주리고 배부르고 춥고 따뜻한 것을 모두 상세히 살피셨으므로 감면하는 정령(政令)이 내려지지 않은 해가 없었다. 혹 유사(有司)가 경비 때문에 어려워하면 왕께서 으레 ‘어찌 기부(肌膚)를 아끼랴?’ 하신 숙종의 말씀을 외고 분부를 내려 은혜를 베푸셨으므로, 즉위하신 50년 동안에 감면하신 것이 무려 수백만이었다. 처음에 북관(北關)의 백성 중에는 교제전(交濟錢) 때문에 처자를 팔고 목매어 죽은 자가 있었다. 마침 왕께서 어사를 보내어 안렴(按廉)하게 하셨는데, 백성이 길을 막고 울며 말하기를, ‘돌아가서 우리 임금께 아뢰어 적자(赤子)의 뜻이 부모께 전달되게 하여 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하였다. 어사가 그 말대로 돌아와 아뢰니, 왕께서 목이 메어 눈물을 흘리며 말씀하기를, ‘내가 일찍이 임금이 넓고 큰 집 안에서 고운 모전(毛氈)을 깔고 옥식(玉食)을 후하게 누리되 가난한 백성 집의 정상을 살피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였거니와, 어찌 우리 풍패지향(豊沛之鄕)에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였겠는가? 내가 폐단을 바로잡아 백성을 편안하게 하지 못한다면 참으로 고묘(高廟)에 들어갈 낯이 없을 것이다.’ 하고, 당장 명하여 감면하게 하셨다. 그 밖에 고할 데 없는 자가 왕께 호소하여 그 생명을 다할 수 있었던 것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병신년 봄에 왕의 환후가 더욱 위급하였다. 이때에 제주(濟州)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어사를 보내어 진구(賑救)하게 하셨으나, 왕께서 염려를 놓지 못하여 간절하게 이르는 꿈결의 말씀이 다 제주에 관한 일이었다. 그 백성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시는 것이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 듯하였다. 그러므로 나라 사람이 다 왕께서 어지시다 하였다.
왕께서 이미 이 여섯 가지 덕을 갖추고서 이것으로 정치의 근본을 세우는 상도(常道)를 삼아 성헌(成憲)을 살피고 유폐(流弊)를 고치고 서옥(庶獄)을 삼가고 국용(國用)을 넉넉하게 하셨으니, 또한 모두가 여섯 가지 덕을 상법(常法)으로 삼은 것이다. 이 때문에 춘추가 높을 때까지 보위를 누리시고 나라 안이 평안하며 신하는 대대로 그 녹(祿)을 누리고 백성은 그 이(利)를 즐겼다. 무릇 조야(朝野)에 늙은이가 태반이었는데 이 가운데 또한 1백 세를 넘은 자가 있었으니, 어찌 인사(人事)가 아래에서 닦여져 천운(天運)이 위에서 응한 것이 아니겠는가? 전(傳)에 이르기를, ‘대덕(大德)은 반드시 수(壽)를 얻고 반드시 위(位)를 얻고 반드시 녹(祿)을 얻는다.’ 하였는데, 왕께서 이에 가까우실 것이다.
왕께서는 두 아드님을 두셨는데, 효장 세자(孝章世子)는 좌의정(左議政) 조문명(趙文命)의 딸을 빈(嬪)으로 맞았는데 후사가 없고, 장헌 세자(莊獻世子)는 영의정(領議政) 홍봉한(洪鳳漢)의 딸을 빈으로 맞았는데 실로 우리 사왕 전하(嗣王殿下)를 낳으셨다. 갑신년에 명하여 우리 사왕 전하를 효장 세자의 후사로 삼았고, 왕께서 태묘(太廟)에 부제(祔祭)되실 때에 효장 세자를 진종 대왕(眞宗大王)이라 추존(追尊)하고 효순 현빈(孝純賢嬪)을 효순 왕후(孝純王后)라 추존하여 태묘에 동부(同祔)하였는데, 다 왕의 유명(遺命)에 따른 것이다.
이제 사왕 전하께서 신(臣)을 학문이 없다 하지 않으시고 유사(遺事)에 따라 정리하여 행장(行狀)을 만들라고 명하시니, 신은 황공하여 굴러 떨어질 듯하여 책임을 다할 방법을 모르겠으나, 혼자 가만히 듣건대, 제왕(帝王)의 대절(大節)은 오직 마땅한 사람에게 종사를 부탁하는 것일 뿐이라 한다. 그러므로 우사(虞史)가 요전(堯典)을 만들되 순(舜)에게 전위(傳位)한 일을 반복하여 상세히 말한 것이 한 편(篇) 중에 반이 되는데, 세상에서 우사를 일컬어 천고(千古)의 사신(史臣)의 근본으로 삼는 것이 이 때문이다. 신은 감히 경묘께서 왕에게 오로지 맡기고 왕께서 전하에게 오로지 맡기신 것을 한 편의 위아래에 실어서 요전의 단례(斷例)를 따라 들은 바를 존중한다.”
하였다. 대제학 서명응(徐命膺)이 지어 바쳤다.
【원전】 44 집 543 면
【분류】 *왕실-국왕(國王)


[주D-001]등준시(登俊試) : 조선조 세조(世祖) 때에 특별히 베푼 과거. 세조 12년(1466) 7월에 종친과 경재(卿宰) 이하의 문관(文官)으로서 자원하는 사람을 시험보게 하였는데, 이때 중추부 판사(中樞府判事) 김수온(金守溫) 등 12인을 선발하였으며, 그 뒤 9월에 무과 등준시(武科登俊試)에서 최적(崔適) 등 모두 51인을 선발하였음.
[주D-002]계사년 : 1773 영조 49년.
[주D-003]이비(吏批) : 이조(吏曹)에서 주청하여 임금의 비답(批答)을 받은 벼슬.
[주D-004]병비(兵批) : 병조(兵曹)에서 무관의 벼슬을 골라서 뽑는 일.
[주D-005]온실수(溫室樹) : 한(漢)나라 성제(成帝) 때의 명신(名臣)인 공광(孔光)은 경학(經學)에 더욱 밝았으며, 퇴청(退廳) 후 형제 처자들과의 사담에 조정의 일은 절대 말하지 않았음. 혹자가 장락궁(長樂宮) 안의 온실전(溫室殿)에 어떤 나무들이 있느냐는 물음에 잠잠하게 있다가 다른 화재로 돌려 대답하며, 궁중의 일을 외부에 누설하지 않았음.
[주D-006]신축년 : 1721 경종 원년.
[주D-007]임인년 : 1722 경종 2년.
[주D-008]기해년 : 1659 효종 10년.
[주D-009]계축년 : 1673 현종 14년.
[주D-010]경인년 : 1770 영조 46년.
[주D-011]임자년 : 1732 영조 8년.
[주D-012]임진년 : 1772 영조 48년.
[주D-013]병신년 : 1776 영조 52년.
[주D-014]갑신년 : 1764 영조 40년.
 
 
 

'조선왕실 관련 금석문등 > 영조대왕 행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英宗大王行狀   (0) 2010.0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