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경인년 산행/2010.10.28. 도봉산 오봉

2010.10.28. 도봉산 다락능선 -신선대

아베베1 2010. 10. 29. 11:17

 

 

 

 

 

 

 

 

 

 

 

 

 

 

도봉서원(道峯書院)에 묵으면서 세 절구를 읊다.


도봉산 단풍빛은 찬 숲에 은은한데 / 道峯霜色隱寒林
깊은 계곡 메아리는 얇은 그늘에서 나누나 / 深磵響空生薄陰
돌은 늙고 이끼 거칠며 사람 멀리 떠났으니 / 石老苔荒人去遠
줄 끊긴 거문고로 아양곡을 누가 화답하리오 / 峩洋誰和絶絃琴
조정에선 헛된 명성을 쓰려고 하지 않는데 / 朝廷未肯用虛名
야외엔 나란히 밭갈 만한 토지도 없어라 / 野外無田可耦耕
나가나 물러가나 발붙이기가 어려우니 / 進退卽今難着脚
서원에 머무는 늙은 서생이나 되길 바라네 / 乞爲留院老書生

산중에선 하룻밤 웃음소리가 화락한데 / 山中一夜笑聲和
산 밖엔 분분하게 꾸짖는 말이 많도다 / 山外紛紛誶語多
오늘날 우리 무리는 다행히 아무 일도 없어 / 今日吾儕幸無事
침류당 안에서 한 번 길이 노래를 하누나 / 枕流堂裏一長歌
성휘(聖徽)와 함께 자는데, 밤중에 그의 아들로 하여금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해동잡록 1 본조(本朝)
조광조(趙光祖)


○ 본관은 한양으로 자는 효직(孝直)이요, 호는 정암(靜菴)이다. 나면서부터 아름다운 자질을 가졌으며, 과거(科擧)의 학문을 즐겨하지 않았다. 한훤(寒暄 김굉필(金宏弼)) 선생이 학문에 연원(淵源)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가서 배워서 학문하는 큰 방도를 들었다. 을해년(중종(中宗) 10년)에 효도하고 청렴함으로써 천거되어 사지(司紙) 벼슬을 임명 받았고, 이 해 가을에 을과(乙科)에 급제하여, 4년 간에 특진하여 대사헌(大司憲)을 배명 받았다. 사문(斯文 유학)을 일으키고, 임금과 백성을 요순(堯舜)의 임금과 백성으로 만드는 것으로 자기의 임무를 삼았다. 신무문(神武門)의 변이 일어나자, 성균관과 사학의 학생들이 대궐을 지키고 호곡(號哭)한 자 천백(千百)에 달했으나, 결국은 능성(綾城 능주)으로 귀양을 갔다가 사사(賜死)되었다. 후에 특히 영의정에 증직되고 시호를 문정(文正)이라 하였다.
○ 선생은 《소학(小學)》을 독신하고 《근사록(近思錄)》을 존숭하면서 모든 경전(經傳)에서 그 정신을 발휘하였다. 〈행장(行狀)〉
○ 선생은 어머니 상(喪)을 당하여 여묘(盧墓)살이를 했는데 항상 반드시 묘를 대하여 앉았으며, 전곡(奠哭 음식을 차리고 곡하는 것)의 여가에는, 묘의 주위를 두루 살펴서 추우나 더우나 비가 오나 잠시도 그치지 않았다. 복을 마치고도 오히려 애절한 슬픔을 품고서 이에 묘 옆에다 터를 잡아 초당 두어 칸을 지어서 영구히 사모하기 위한 장소로 하고, 또 그 옆에 시냇물을 당겨들여 못을 만들고 섬돌을 구축하여, 연(蓮)과 잣나무를 심어놓고 항상 여기에 와서 놀았으니, 이는 평소 고아함을 즐기는 회포였다.
○ 조광조는 난(鸞)새가 앉아 있는 듯, 봉황새가 버티어 선 듯, 옥(玉)처럼 윤택하며, 금(金)처럼 정간하며, 아름다운 난초가 향기를 뿌리는 듯, 밝은 달이 빛을 내는 듯하였다.
○ 일찍이 천마산(天磨山)과 용문산(龍門山)에 들어가, 글을 읽고 익히는 여가에 오뚝히 앉아 해가 다하도록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지신명을 대하듯 경건히 하여 수양에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으니, 사람들의 미치지 못할 바였다.
○ 조정에 나아가면 하루 세 번씩 임금이 접견하고, 물러나오면 사람들이 다투어가며 존경하여 우러러보니 이것은 가위 상하(上下)가 어울려 기뻐하기 천재일우의 기회라 하겠다.
○ 선생은 앉으면 반드시 단정히 꿇어앉고, 손은 반드시 팔꿈치를 맞잡았으므로 입은 옷은 꼭 팔꿈치와 무릎 부분이 먼저 떨어졌다.
○ 첫째 불행은 급제(及第)하여 너무 빠르게 벼슬이 진급한 것이요, 둘째 불행은 벼슬을 물러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요, 셋째 불행은 귀양간 땅에서 최후를 마친 것이다.
○ 매양 임금과 대할 때는 반드시 마음을 정제하고, 생각을 숙연히 하여, 신명(神明)을 대한 것 같이 하며, 아는 것은 말하지 않는 것이 없고, 하는 말은 충직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 매일 닭이 울면, 세수하고 빗질하고 우러러 생각하여 반드시 몸소 체득함을 기하였으며, 한 번도 체득하지 못할 것이라고 스스로 한계(限界) 지은 적은 없었다.
○ 선생이 능성(綾城)에 귀양가 있을 때, 사약을 내리는 왕명이 이르자, 목욕하고 관대하여, 안색을 변치 아니하고 조용히 죽음에 나아가고 조금도 원망하고 허물하는 일이 없었다. 그는 말하기를, “임금을 사랑함이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같고, 나라를 근심함은 내 집을 근심함과 같았다.” 하고, 또 말하기를, “백일(白日)이 하토(下土)에 임하리니, 밝고 밝게 나의 붉은 마음을 비추리라.” 하였다. 동상
○ 선생이 왕명을 받아 〈계심잠(戒心箴)〉을 지어 바쳤으니, 이르기를, “하늘의 이치가 흐리고 어두우면, 기운도 또한 막히고, 사람의 도리가 무너지며 만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였다. 〈계심잠〉
○ 선생이 경연에서 아뢰기를, “사대부의 집에서 검약하게 하여 스스로 견지한다면 그 자손은 오래도록 패(敗)하지 않으나, 연락(宴樂)하며 스스로 방자하면, 집은 곧 기울고 가산은 탕멸하나니, 폐조(廢朝 연산군 시대) 말년에 사대부가 오락에 탐닉하고 사치에 쏠리게 되어 국가가 거의 위태하였는데, 지금의 유식한 자들도 역시 습속(習俗)을 따라서 검약한 것을 가리켜 쓸쓸하다고 하고, 놀고 잔치하는 것으로써 큰 기상이 있다고 하니, ‘한 말로 나라를 망친다.’는 말은, 바로 이를 이름입니다.” 하였다. 《유선록(儒先錄)》
○ 선생이 말하기를, “세간에는 말[馬]을 사랑하는 사람도 있고, 화초를 사랑하는 사람도 있고, 거위와 오리 기르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으나, 만일 마음이 외물로 내달리게 되면, 반드시 집착하기에 이르러 끝내 도(道)의 지경에 들어갈 수 없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소위, ‘물건을 완성하다가 뜻까지 상실하고 만다.’는 것이다.” 하였다.
○ 젊어서 김굉필(金宏弼)에게 사사(師事)를 하였고, 장성함에 이르러 스스로 깨닫고 분발하매 그 한때의 사람으로 그를 헐뜯고 비방하는 자가 퍽 많아서, 혹자는 화근(禍根)거리라고까지 하고, 친구들이 모두 관계를 끊고 사귀지 않았으나 선생의 입지(立志)는 심히 독실하여 조금도 흔들려 굴하지 않았다. 처음에 그의 학문으로 후진을 창도하니, 깨닫고 분발한 자가 많았다.
○ 선생이 지은 춘부(春賦 봄을 읊은 글)에 스스로 서문(序文)을 지어 이르기를, “봄이란 것은, 천리의 으뜸이다. 사시(四時)는 봄으로부터 시작되며, 사단(四端)은 인(仁)으로부터 발현되나니, 봄이 없으면 시절의 차례가 성립되지 못하고, 인(仁)이 없으면, 선심(善心)의 실마리가 이루어지지 못한다. 하늘은 욕심이 없어 봄이 행하여 사시가 이루어지고, 사람은 욕심이 있어 인(仁)을 상실하여 선심의 실마리를 확충시키지 못한다. 그러므로 마음속으로 스스로 슬퍼져서 부(賦)를 짓는다.” 하였다. 동상(同上)
○ 선생이 천마산(天磨山)과 성거산(聖居山)에 올라 한적한 곳에 이르면 천천히 걸으며 가만히 읊조리니, 소연(蕭然)히 진세(塵世)를 벗어난 듯한 감상이 있었다. 〈비서(碑序)〉
○ 급히 등용되어서 융화되어 통할 수 없었고, 일찍이 생을 마쳤으니 말을 세울 수 없었으나, 가르침을 베풀고 인도할 때에는 재질과 천품을 따라서 품평하여 알아보았으며, 그 기량과 식견을 취하였다.
○ 일찍이 천마산(天磨山)의 절에 우거할 때, 우뚝히 있는 모양은 소상(塑像) 같았으며, 괴로움을 겪고 담식(淡食)하기를 중들과 같이하였다.
○ 기묘년(중종(中宗) 14년)에 사화가 일어나서 선생과 제공(諸公)들이 금부(禁府)에 하옥되었고, 선생은 능성으로 귀양갔었는데, 담장[墻]을 짚고 북쪽을 바라보며, 임금을 생각하는 연연한 정을 폈었다.
○ 매양 진강(進講 임금께 나아가 강독하는 것) 전날 저녁에는 단정하게 앉아서 익히 읽기를 임금의 곁에 있는 것같이 하고, 새벽이 되면 나아가서, 숙연(肅然)히 대해 모시어서 반드시 감동하시기를 바랐었다.
○ 선생은 일찍이 치도(治道)에 대하여 개진(開陳)하였다. 성(性)과 정(情)ㆍ선(善)과 악(惡)ㆍ의(義)와 이(利)의 분변에서부터 천(天)과 인(人)ㆍ왕(王)과 패(覇)ㆍ옳음과 사특함의 구분에 이르기까지 기울여 내어 벌려놓지 않는 것이 없었는데, 날이 저물어도 권태를 몰랐다.
○ 몸을 살피며 사욕을 극복함을 우선으로 삼고, 경(敬)을 잡아지키며 정(靜)을 주로함을 힘쓸 것으로 삼아, 침잠하고 각고하며, 정밀히 생각하고 힘써 실천하였다.
○ 선생이 대사헌이 되어, 입대할 때마다 예(例)를 이끌어 의리(義理)를 깨우쳤는데 종횡으로 드나들어 한 가지 언사도 그 사이에 끼어들 수 없게 하여 비록 극히 추운 날이나 몹시 더운 여름이라도 해가 한낮이 될 때까지 그치지 아니하니, 말한 것은 허락하지 않은 일이 없었으나, 같이 모시고 있는 자는, 이것을 괴롭게 여겨서 모두 싫어하는 빛을 가졌었다. 《척언(摭言)》
“□□바치는 물건이 과다하므로 백성은 날로 곤핍하게 되나니, 경비 쓰는 것을 적당히 감한 후에라야 거의 백성이 편안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경연진설(經筵陳說)》
○ “옛일을 몸소 체득하여 어떤 일은 배울만하고, 어떤 일은 배우지 못할 것이라 하여 공력(功力)을 누적해감으로써 탐구하신다면 비록 한 번에 한 장을 강(講)한다 하여도 얻은 바가 많을 것이요, 그렇지 않는다면 비록 한번에 10장을 강한다 해도 다만 헛된 형식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였다.
○ 아버지가 아들을 알아주지 못한다면 아들이 근심을 면하지 못할 것이요, 임금이 신하를 잘 알지 못한다면, 신하가 충성을 다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니, 인금과 신하는 대개 아버지와 아들과 한가지인 것이다.
○ 뜻이 큰 사람은 비록 경륜의 대업(大業)을 못할지라도 큰일에 임하여 능히 그 지조를 잃지 않나니, 산을 오름에 비유한다면, 정상에 가기를 목표한 자는 비록 정상에까지 이르지는 못하여도 산 중턱까지는 오르게 되나, 산 중턱까지만 오르려 한 자는 산 밑을 떠나지 못해서 반드시 멈추게 되는 것입니다.
○ 임금된 이는 마땅히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을 가려내야 하는데, 소인을 가려내기란 지극히 어렵고, 군자를 가려내기란 쉬운 것 같으니, 먼저 그 알기 쉬운 것을 가려 쓰면 비록 소인이 있더라도 스스로 방자하지 못하옵니다.
○ 이원(利源 이익이 생기는 근원)이 한 번 열리면 그 해가 대단히 큽니다. 선비된 자 평시에는 그 지론이 비록 정직한 것 같으나, 일단 일이 있으면 손발이 황당하고 어지럽사오니, 이원은 곧 국가의 병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완전히 끊은 후에라야 오래도록 그 아름다움을 보존할 수가 있습니다.
○ 임금께 몸을 맡겨서 신하가 되었다면 마땅히 충성을 다하여 임금을 섬겨야 하며, 한 몸의 근심과 재앙은 헤아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착한 자는 항상 적고 착하지 못한 자는 항상 많으므로, 재앙과 근심을 헤아리지 아니할 수 없어, 만약 일단 일이 있으면 놀라고 의심하고 위축하지 않음이 없어서 임금 앞에 낯을 들고 극간(極諫)하는 자가 드물게 되는 것입니다.
○ 중인(中人 자질이 중급 정도인 사람) 이하는 선한 일을 하건 악한 일을 하건 간에 시대의 숭상하는 것을 따르나니, 위에 있는 사람들이 어찌 권려(勸勵)하는 도(道)를 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선비의 습성이 부정한 것을 밑에 있는 자에게 책임을 돌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 폐조(廢朝 연산군) 때에는 환관들이 선동하여 소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대신(大臣)들이 부정하고 음험하여 왕의 뜻만을 엿보고, 자기의 사사로운 원한을 마음대로 갚았으니, 성종조(成宗朝) 초년부터 양성한 선비들을 일망타진하고 하나도 남는 자가 없었습니다. 동상(同上)
○ 가정(嘉靖) 임오년(중종 17년)에 몹시 가물었다. 강령현(康翎縣)에서 세 사람이 같이 김을 매다가, 한 사람이 말하기를, “가뭄이 이같이 심하니, 틀림없이 흉년이 들 것이다. 듣자니, 재상(宰相) 조광조(趙光祖)는 청백하고 간결하여 각 도(道)ㆍ주(州)ㆍ군(郡)에는 절간(折簡 호출장)이 일체 없어져 이에 따라 마을에는 소리 치는 아전들이 없었는데 지금 들으니 귀양가서 죽었다 하니, 천재(天災)가 이로써 연유한 것 같다.” 하였다. 그 중 한 사람이 서울에 와서 고해 바치자, 말한 농부를 곧 잡아다 고문하여 결국 극형을 받았고, 한 사람은 같이 김을 매었으면서도 고해 바치지 않았다는 죄(罪)를 입었고, 고해 바친 자는 상을 받았다. 《 수언(粹言)》
○ 기묘년에 조정암(趙靜菴)과 여러 관원들이 귀양을 갔다. 황계옥(黃季沃)이란 자는 먼저 구제를 위한 소(疏)를 짓고는, 또 윤세정(尹世貞)과 이래(李來) 들과 연명하여 죄를 청하는 소를 올렸다. 정암은 마침내 이것으로써 화를 입게 되었다. 황계옥은 조정암을 구하는 소와 죄를 청하는 두 가지 소를 지어서 흉악한 짓을 행하였으니, 그 간특하고 사휼한 형상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패관잡기》
○ 기묘년 가을에 남곤(南袞)이 조광조와 같이 시관(試官)으로 있을 때, 성수종(成守琮)의 시권(試券)을 보고, 정암이 말하기를, “성수종 아니면 이와 같은 문사(文辭)를 능히 짓지 못하리라.” 하였는데, 과연 합격하였다. 화가 일어나자, 그 허물을 정암에게 돌려서 문리(文理)가 연결되지 않는 데 사정을 두어 시험에 뽑았다 하며 이름을 방목(榜目 합격한자 명부)에서 삭제하였다.
○ 기묘년 10월에 좌상(左相) 신용개(申用漑)가 죽었다. 왕이 예(禮)에 의하여 애도를 표하려 하니, 대신(大臣)들이 의논하여 난처하다고 하므로 거행하지 못하였다. 후에 조광조가 입대하여서 아뢰기를, “신이 듣기로는 유관(柳寬)이 죽었을 때 세종의 곡(哭)소리는 바깥까지 들렸다 하여 지금까지도 그 말을 듣는 이가 송동(竦動)하지 않는 이 없습니다. 전일에 하교하신 뜻이 심히 아름다웠으나, 대신들이 별전(別殿)에서나 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으니, 그 능히 임금의 좋은 점을 그대로 받들어 시행하지 못함이 심하였습니다. 세종(世宗) 때에 유관(柳寬)과 유정현(柳廷顯)의 죽음에 금천교(禁川橋) 밖에다 악차(幄次 천막)를 설치하고 애도를 표하였다 하나이다.” 하였다. 《잡기(雜記)》
○ 기묘년 10월에 대사헌 조광조 등이 합사(合司 사헌부ㆍ사간원ㆍ홍문관을 3사(司)라 하는데, 합사(合司)란 어떤 문제를 두고 이들이 합동하여 청함을 말함)하여 합문밖에 엎드려 병인반정(丙寅反正) 때에 공이 없으면서 외람되게 녹공(錄功)된 자가 많음을 논하고 외람된 자를 삭제하도록 청하였다. 부제학(副提學) 김구(金絿) 등도 합사하여 차자를 올리고, 대신과 6경(卿)이 또한 아뢰었으나 임금이 듣지 않으므로 양사(兩司 사간원(司諫院)과 사헌부(司憲府))에서 사직하기에 이르렀다.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매우 어렵다는 뜻으로써 타일렀으나, 조광조가 극력 임금이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을 말하니, 임금이 윤허하여 2, 3 등의 잘못 녹공된 자는 뽑아서 삭제하고, 4등은 모두 삭제하였다. 광조 등이 패하게 되자 전대로 환원되어 버렸다. 동상(同上)
○ 태학생(太學生) 박근원(朴謹元) 등이 상소하여, 조광조의 학술의 정대함과 선왕(先王)이 여러 소인에게 속은 것을 극론하고, 직첩(職牒)을 도로 주어 선비들의 나갈 길을 바르게 하여 주기를 청하였다. 인종도 매우 아름답게 여겨 장려하였고, 조정 신하 중에도 역시 말하는 자가 있었으나 신중을 기하려고 급하게 시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기다리는 바가 있었던 것이다. 6월 말에 인종이 위독하게 되자 대신에게 전교하기를, “광조(光祖) 등의 복직과 현량과(賢良科 조광조 등이 주장하여 시행한 특별 과거인데 광조가 죽게 되어서 삭제해 버렸다.)를 회복하는 일은 선왕 때의 일이므로 조용히 처리하려 했으나, 지금 나의 병세가 이러하니 조광조 등의 직첩 및 현량과를 복구시키시오.” 하였다. 동상(同上)
○ 조광조는 처음에 능성(綾城)으로 귀양가 있다가 얼마 안 가서 사사(賜死)되었다. 고례(故例)에 무릇 재상(宰相)에게 사사할 때에는 임금의 옥새가 찍힌 문서가 있지 않고, 다만 왕지(王旨)를 받들어서 시행하였으므로 금오랑(金吾郞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이 조광조가 귀양살이하는 곳에 이르러 왕의 교지를 전달하니, 공(公)은, “국가에서 대신(大臣)을 대접함이 이와 같이 허술하게 할 수 없는 것이며, 이 폐단은 장차 간사한 사람으로 하여금 미운 사람을 마음대로 죽이게 할 수 있을 것이라.” 하고, 한 마디 상소하려 했으나 결국 하지 못하고, 목욕하고 의관을 정제하고 뜰로 나와 무릎을 꿇고 왕의 옥체 안녕을 묻고, 다음에 3공 6경(三公六卿)의 성명을 물으니, 도사(都事) 유흡(柳潝)이 핍박하여 재촉하므로 공이 흐느껴 탄식하기를, “옛사람 중에는 조서(詔書)를 부둥켜 안고, 여관에 엎드려 통곡한 자도 있었다는데(후한 영제(靈帝) 때 범방(范滂)을 처형할 때 고사) 어찌 그리도 다른고?” 하고, 또 말하기를,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했으니 하늘에 있는 해가 나의 붉은 충성을 비춰 주리라.” 하고, 드디어 약을 마시고 이불을 쓰고 있었으나 죽지 않자 목졸라 죽였다. 《해동야언(海東野言)》
○ 선생은 성화(成化 명(明) 나라 헌종(憲宗)의 연호(年號)) 임인년(성종(成宗) 13년)에 출생하였다. 천품이 매우 특이하고, 어려서부터 강개(慷慨)히 큰 뜻이 있어 넓게 배우고 힘써 행하여 29세에 진사 시험에 장원으로 합격되었다. 중종 을해년에 이조 판서 안당(安瑭)이 아뢰기를 “조광조(趙光祖)는 경서에 밝고 행동이 의로우니 마땅히 발탁하여 쓰되 만약 자격이 구애된다면 예(例)로 참봉(參奉)에 조용(調用)할 것이온 바 그러면 사림(士林)을 권장함에 부족하오니, 청컨대, 6품(六品)의 관직을 제수하옵소서.” 하니, 임금이 이를 허락하고 곧 사지(司紙 조지서(造紙署)이 한 관원)를 제수하였다. 이해 가을에 알성별시(謁聖別試 대성전(大成殿) 공자(孔子) 묘(廟)에 임금이 참배하고 보이는 과거)에서 을과(乙科 제2등급) 제일(第一)로 합격하였다. 정언(正言)을 배명하게 되자 대간(臺諫 양사(兩司)의 총칭) 권민수(權敏手)와 이행(李荇) 등이 스스로 언로(言路)를 막는 실수를 탄핵하였고, 정축년에 수찬(修撰)ㆍ교리(校理)ㆍ응교(應敎)를 거쳐 전한(典翰)을 제배하니 사양하여 아뢰기를, “소신은 학문에 뜻을 두었사오나 그 힘을 실용하지 못하겠사오니, 바라건대, 궁벽한 고을이라도 허락하여 주신다면 백성을 다스리는 틈을 타서 학술에 힘을 쓰게 되면 백성을 다스리는 일과 학문을 다스리는 일이 둘 다 온전하게 될까 합니다. 소신은 완성되지 못한 사람으로 하루아침에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입사오니 어찌 가히 그 지위에 처하겠나이까.” 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무인년 정월에 부제학(副提學)으로 승진되고 다시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옮기었다. 우승지(右丞旨) 김정(金淨)이 아뢰기를, “조광조는 경연에 있어 보익(補益)함이 크고 많을 것입니다. 승지는 임금의 목과 혀의 지위인지라 진실로 마땅히 가려서 임명할 것이오며, 또한 입시하여 논난하기는 하오나 그 임무를 전담시킴만 같지 못할까 합니다.” 하니, 수일 후에 도로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매양 입대하여 어떤 날은 저물 때까지 이르렀으나, 임금은 다 허심탄회하게 경청하였다. 동상
○ 회령성(會寧城) 밑에 있는 야인(野人 여진족) 속고내(束古乃)가 몰래 먼 곳에 있는 야인들과 함께 갑산부(甲山府) 경계에 들어와 사람과 가축을 많이 노략해 갔으므로 남도 병사(南道兵使)가 비밀리 장계를 올렸다. 임금이 명하여 세 정승과 해당되는 조(曹)를 불러 이것을 의논하고 먼저 본도(本道)에 밀지(密旨)를 내리고 또 무기를 보내고, 이지방(李之芳)을 명하여 특별히 어의(御衣)와 활과 화살을 주며 그날로 떠나게 하고,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거둥하여 전송의 연회를 베풀었는데, 승지 김정국(金正國)이 아뢰기를, “부제학 조광조가 입대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곧 윤허하였다. 공이 나아가 아뢰기를, “이것은 곧 도적이 기미를 노려 속임수를 쓰는 모의와 같습니다. 당당한 대 조정으로써 한 일개 조그만 추한 오랑캐 때문에 도적의 모의를 행한다는 것을 신은 마음속으로 부끄러워합니다.” 하니, 임금이 중의를 물리치고 파견할 것을 철회해버렸다. 공이 3품의 관원으로서 능히 짧은 말로써 왕의 뜻을 움직여 조정대의(朝廷大議)를 바로잡으니, 사람들이 모두 눈을 흘겼다. 동상
○ 정덕(正德 명(明) 나라 무종(武宗) 연호(年號)) 무인년(중종(中宗) 13년)에 대간(臺諫)에서 소격서(昭格署 하늘과 땅과 별에게 제사를 지내는 도교(道敎)를 맡은 관서(官署))를 혁파할 것을 청하였고, 홍문관(弘文館) 역시 날마다 논하여 아뢰었으나, 다 윤허하지 않았다. 하루는 공이 손수 차자를 지어 동료에게 말하기를, “오늘 윤허를 얻지 못하면 가히 물러가지 못하오.” 하더니, 날이 저물자 대간(臺諫)은 다 물러나고, 옥당(玉堂 홍문관의 별칭)만이 그대로 아뢰어 새벽 닭이 울기까지 그치지 아니하니, 임금이 부득이 윤허하였다. 그때 승지들은 책상에 기대어 깊이 졸고 있었으며, 모두 괴로워하고 싫어하는 빛이었다.
○ 기묘년(중종(中宗) 14년) 5월에 공이 다시 대사헌이 되어 아뢰기를, “국가에서 폐했던 것을 다시 닦아 행하는 일은 선조(先朝)에서 다 결론하지 못한 바이오니, 다른 날 소인들이 만약 계승해서 하여야 한다는 말을 내세우고 중상한다면 선하 자가 위태롭습니다. 요사이 노산(魯山 단종(端宗))을 제사하고 소릉(昭陵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을 복구한 것은 모두 뜻있는 선비들이 행하고자 하되 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성세(聖世 중종 재위 당시를 가리킴)에 이르러 건의하여 행하게 되었고, 또 신씨(愼氏)를 왕후로 복위시키자는 의논에는 김정(金淨)과 박상(朴祥) 등이 상소하기에 이르렀으니, 이 역시 정론(正論)이었는데 그 당시 논의하는 자들은 대죄로 다스리고자 하였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모두 소인의 구실인 것이며 선비들의 화근이옵니다. 사람들이 사귀고 왕래하는 것은 몸을 닦고 남을 다스리며 임금을 섬기고 어버이를 섬기는 도(道)를 강론하기 위한 것이옵니다. 자고로 정직한 무리들이 세상에 성행하면 반드시 큰 화가 그 뒤를 따랐습니다. 지금 벗들 간에 종유하며 학문을 강론함에 어찌 그 사람이 없겠습니까. 항간에서는 큰 화가 반드시 조석간에 일어날 것이라고 하니, 이는 전날에 겪은 바가 깊어서입니다.” 하였다. 동상(同上)
○ 일찍이 주강(晝講 낮 시간에 하는 강)하는 자리에서 승지 박세희(朴世熹)가 아뢰기를, “조광조는 젊어서 김굉필(金宏弼)에게 사사하여 도학에 잠심하였사온데, 시속 사람들은 헐뜯어서 비방하며 혹자는 미쳤다 하고 혹자는 화근이라 하여 벗들이 절교를 하였습니다마는, 반정(反正) 초에 비로소 그 학문을 가지고 후생을 창도하였으니, 신(臣)과 같은 것이 개발됨도 다 이 사람에게서 연유된 것입니다.” 하였다. 동상
○ 대간이 정국공신(靖國功臣)의 남록(濫錄)된 자를 삭제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조정의 의논을 모아 보라고 명하였다. 남곤은 예조 판서로서 그 의논을 피하고자 배릉 헌관(拜陵獻官)을 요구하여 되었다. 그 후에 공(公)이 입시(入侍)하여 아뢰기를, “근자에 숭품 6경(崇品六卿 숭록(崇祿)ㆍ숭정(崇政)의 품계로 판서 지위에 있는 자)이 능헌관(陵獻官)이 되었으니, 그 사람은 반드시 일을 피하기를 꾀한 것입니다. 신하된 자로 이같이 자기 몸을 아낀다면 다른 것은 더 볼 것도 없는 것입니다.” 하였는데, 남곤도 함께 입시했다가 부끄럽고 황공하여 이내 물러갔다. 동상
○ 남곤과 심정(沈貞)이 청류(淸流) 선비들에게 용납되지 못하자 공(公)이 지우(知遇)를 받고 백성들로부터 칭송 받음을 이용하여 이것으로 구실을 삼아 공을 얽어 잡으려고 홍경주(洪景舟)로 하여금 비빈(妃嬪 홍 희빈(洪姬嬪)을 말함)을 통해, 인심이 모두 조씨(조광조를 말함)에게로 돌아간다고 하여 임금의 마음을 동요시키게 하고, 또 상도에 어긋나는 참문(讖文 길흉화복을 예고(豫告)하는 글)으로써 거짓으로 비원 꽃 나무 잎에 ‘주초위왕(走肖爲王)’ 넉 자를 써서, 이것으로 왕에게 공포심을 일으키게 하여 공을 죄의 두목이 되게 하였다. 다행히 재상 정광필(鄭光弼)이 울면서 옷깃을 잡은 데 힘입어 임금의 엄엄한 위엄이 조금 가시게 되었으나, 하옥되기에 이르러서는 향도(香徒)들이 궁성을 둘러 지키고, 성균관과 사학(四學)의 선비들이 대궐 뜰에 엎드려 통곡하니 이로 말미아마 임금의 의혹이 더욱 심하였다. 공술(供述)하기를, “선비가 세상에 태어나 믿는 바는 임금의 마음일 뿐이요, 조금도 딴 생각은 없다.” 하였다. 처음에는 사율(死律)에 처하려 하였으나, 이내 장형(杖刑)을 하여 능성(綾城)으로 귀양보냈다가 얼마 안 있어 적소에서 사사(賜死)하니, 곧 12월 20일로 나이는 38세였다. 이 날 흰 무지개가 해를 둘렀는데 동서로 각 두 겹, 남북으로 각 한 겹이었고, 남북에 둘러진 무지개 밖에 각각 두 줄기의 무지개가 있어 큰 띠를 늘어뜨린 것같이 하늘에 뻗쳐 있었다. 또 서남쪽에 별도로 한 줄기의 무지개가 있어 길이가 한 길[丈]이 넘었는데 모두 때가 지나서야 없어졌다. 이듬해에 용인(龍仁) 선영(先塋)의 묘역(墓域)에 장사하였으니, 유지(遺志)에 따른 것이다. 아들 정(定)은 나이 5세, 용(容)은 2세였는데 정은 일찍 죽고 용은 벼슬하여 문천(文川) 군수에 이르렀으나, 아들이 없어 종질(從姪)인 순남(舜男)으로 뒤를 이었다. 능성 사람들이 서원을 짓고 제사하니 죽수서원(竹樹書院)이라 사액(賜額)하고, 또 서적(書籍)을 하사하여 장려하였다. 양주 목사(楊州牧使) 남언경(南彦經)이 또 도봉산(道峯山) 밑에 서원을 지었고, 고향 사람이 또 용인(龍仁) 묘 밑에 서원을 지었다. 선조(宣祖) 2년에 태학생(太學生) 홍인헌(洪仁憲) 등이 상소하여 문묘(文廟 공자묘(孔子廟))에 배향할 것을 청하니, 양사(兩司) 및 영의정 이준경(李浚慶)이 서로 이어 계청하고, 옥당(玉堂)에서도 차자를 올려 대관(大官)과 좋은 시호(諡號)를 주자고 청하였다. 이에 영의정(領議政)을 추증하고 문정(文正)이라 시호하도록 명했다. 만력(萬曆 명(明) 나라 신종(神宗)의 연호(年號)) 신해년(광해군(光海君) 3년)에 문묘에 종사(從祀)하였다. 《기묘록》
○ 조 부자(趙夫子 조정암(趙靜菴)의 존칭)는 집에 있으면서 몸가짐이 옛사람에 부끄럽지 않았으니, 학문을 독실히 하였고 꿇어 앉음이 오랜 습관이 되었으며, 의관을 반드시 단정히 하여 아침부터 해저물 때까지와 땅거미가 질 때부터 삼경(三更)까지 오뚝히 앉아서 움직이지 않았으며, 맑은 새벽에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 빗곤 했는데, 비록 밤이 짧은 한여름에도 전혀 변함이 없었다. 그 학문을 추상해 보건대,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또한 멀지는 않았었다. 다만 베풀어 실행한 것이 갑작스럽게 불행한 데 이르렀으니, 그 당시의 일을 차마 말할 수 있으랴. 《홍치재일록(洪恥齋日錄)》


 

[주D-001]신무문(神武門)의 변 : 기묘(己卯)의 사건을 고발하는 자들이 보통 출입하는 정문을 피하여 경복궁의 뒷문인 신무문으로 들어가서 고발하였다.
[주D-002]신씨(愼氏) : 신씨는 중종의 첫번 아내였다. 그 신씨가 연산군 때의 정승으로 있던 신수근(愼守勤)의 딸이었는데 반정할 때에 신수근을 죽였으므로 반정을 주장한 사람들이 후일에 무슨 화가 있을까 겁내어 왕에게 억지로 청하여서 내어보냈었다.
[주D-003]‘주초위왕(走肖爲王)’ : 주초(走肖)는 조(趙)라는 글자를 나눈 것이니, 이 주초위왕 넉 자를 비원 나뭇잎에다 꿀로 써 놓아서 벌레가 꿀을 먹느라고 잎새를 긁어 놓게 하고 그 잎새를 따서 임금에게 바쳐서 조광조를 겁내게 한 것이다. 조광조는 이것으로 인하여 죽은 것이다.
[주D-001]줄 끊인 …… 화답하리오 : 지기지우(知己之友)가 없음을 탄식한 말이다. 옛날에 백아(伯牙)는 거문고를 잘 타고, 종자기(種子期)는 거문고 소리를 잘 알아들어서, 백아가 높은 산에 뜻을 두고 거문고를 탈 적에는, 종자기가 듣고 말하기를 “훌륭하도다, 험준하기가 태산 같구나[峩峩兮若泰山].” 하였고, 흐르는 물에 뜻을 두고 거문고를 탈 적에는, 종자기가 듣고 말하기를 “훌륭하도다, 광대히 흐르는 것이 강하와 같구나[洋洋兮若江河].”하여, 백아의 생각을 종자기가 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 종자기가 죽은 뒤에는 백아가 자기 거문고 소리를 알아줄 사람이 없다 하여 줄을 끊어버리고 다시 타지 않았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列子 湯問》
백사 이항복의 시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