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CI | G002+AKS-KHF_13CD5CC751C219U9999X0 |
자 | 청지(淸之) |
본관 | 전주(全州) |
거주지 | 임실(任實)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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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25일 (갑진) | |||||||||||||
공신(功臣)들의 명칭을 정하여 대대적으로 봉(封)했는데, 서울에서 의주까지 시종(始終) 거가(車駕)를 따른 사람들을 호성 공신(扈聖功臣)으로 하여 3등급으로 나누어 차등이 있게 명칭을 내렸고, 왜적을 친 제장(諸將)과 군사와 양곡을 주청(奏請)한 사신(使臣)들은 선무 공신(宣武功臣)으로 하여 3등급으로 나누어 차등이 있게 명칭을 내렸고, 이몽학(李夢鶴)을 토벌하여 평정한 사람은 청난 공신(淸難功臣)으로 하고 3등급으로 나누어 차등 있게 명칭을 내렸다. 호성 공신 1등은 이항복(李恒福)·정곤수(鄭崐壽)인데 충근정량갈성효절협력호성 공신(忠勤貞亮竭誠效節協力扈聖功臣)이라 하고, 2등은 신성군 이후(信城君李珝)·정원군 이부(定遠君李桴)·이원익(李元翼)·윤두수(尹斗壽)·심우승(沈友勝)·이호민(李好閔)·윤근수(尹根壽)·유성룡(柳成龍)·김응남(金應南)·이산보(李山甫)·유근(柳根)·이충원(李忠元)·홍진(洪進)·이곽(李)·유영경(柳永慶)·이유징(李幼澄)·박동량(朴東亮)·심대(沈岱)·박숭원(朴崇元)·정희번(鄭姬藩)·이광정(李光庭)·최흥원(崔興源)·심충겸(沈忠謙)·윤자신(尹自新)·한연(韓淵)·해풍군 이기(海豊君李耆)·순의군 이경온(順義君李景溫)·순령군 이경검(順寧君李景儉)·신잡(申磼)·안황(安滉)·구성(具宬)인데 충근정량효절협책호성 공신(忠勤貞亮効節協策扈聖功臣)이라 하고, 3등은 정탁(鄭琢)·이헌국(李憲國)·유희림(柳希霖)·이유중(李有中)·임발영(任發英)·기효복(奇孝福)·최응숙(崔應淑)·최빈(崔賓)·오정방(吳定邦)·이응순(李應順)·신수곤(愼壽崑)·송강(宋康)·고희(高曦)·강곤(姜綑)·내시(內侍) 김기문(金起文)·내시 최언준(崔彦俊)·내시 민희건(閔希蹇)·의관(醫官) 허준(許浚)·이연록(李延祿)·이마(理馬) 김응수(金應壽)·이마 오치운(吳致雲)·내시 김봉(金鳳)·내시 김양보(金良輔)·내시 안언봉(安彦鳳)·내시 박충경(朴忠敬)·내시 임우(林祐)·내시 김응창(金應昌)·내시 정한기(鄭漢璣)·내시 박춘성(朴春成)·내시 김예정(金禮楨)·내시 김수원(金秀源)·내시 신응서(申應瑞)·내시 신대용(辛大容)·내시 김새신(金璽信)·내시 조구수(趙龜壽)·의관(醫官) 이공기(李公沂)·내시 양자검(梁子儉)·내시 백응범(白應範)·내시 최윤영(崔潤榮)·내시 김준영(金俊榮)·내시 정대길(鄭大吉)·내시 김계한(金繼韓)·내시 박몽주(朴夢周)·이사공(李士恭)·유조생(柳肇生)·양순민(楊舜民)·경종지(慶宗智)·내수사 별좌(內需司別坐) 최세준(崔世俊)·사알(司謁) 홍택(洪澤)·이마 전용(全龍)·이마 이춘국(李春國)·이마 오연(吳連)·이마 이희령(李希齡)인데 충근정량호성 공신(忠勤貞亮扈聖功臣)이라 하여, 각각 작위(爵位)를 내리고 군(君)으로 봉했다. 모두 86인인데 내시(內侍)가 24명, 이마(理馬)가 6명, 의관이 2명이고, 별좌(別坐)와 사알(司謁)이 또 2명이다. 선무 공신(宣武功臣) 1등은 이순신(李舜臣)·권율(權慄)·원균(元均) 세 대장인데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 공신(效忠仗義迪毅協力宣武功臣)이라 하고, 2등은 신점(申點)·권응수(權應銖)·김시민(金時敏)·이정암(李廷馣)·이억기(李億祺)인데 효충장의협력선무 공신(效忠仗義協力宣武功臣)이라 하고, 3등은 정기원(鄭期遠)·권협(權悏)·유사원(柳思瑗)·고언백(高彦伯)·이광악(李光岳)·조경(趙儆)·권준(權俊)·이순신(李純信)·기효근(奇孝謹)·이운룡(李雲龍)인데 효충장의선무 공신(效忠仗義宣武功臣)이라 하였다. 각각 관작을 내리고 군(君)으로 봉했는데 모두 18인이다. 청난 공신(淸難功臣) 1등은 홍가신(洪可臣)인데 분충출기합모적의청난 공신(奮忠出氣合謀迪毅淸難功臣)이라 하고, 2등은 박명현(朴名賢)·최호(崔湖)인데 분충출기적의청난 공신(奮忠出氣迪毅淸難功臣)이라 하고, 3등은 신경행(辛景行)·임득의(林得義)인데 분충출기청난 공신(奮忠出氣淸難功臣)이라 하였다. 각각 관작을 내리고 군으로 봉했는데 모두 5인이다. 사신은 논한다. 국가가 임진년의 왜변을 만나 종사(宗社)가 전복되고 승여(乘輿)가 파천했으며 원릉(園陵)이 화를 입었고 생령들이 해독을 받았으니, 말하기에도 참혹한 일이다. 다행히 황은(皇恩)이 멀리 미침을 힘입어 팔도(八道)가 다시 새로와졌으니, 임금의 도리에 있어 논공 행상(論功行賞)하여 공로에 보답하는 특전을 그만둘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호종신(扈從臣)을 80여 명이나 녹훈(錄勳)하였고 그 가운데 중관(中官)이 24명이며 미천한 복례(僕隷)들이 또 20여 명이나 되였으니, 또한 외람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몽학(李夢鶴)의 난에 이르러서는 주군(州郡)에서 불러 모은 도적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 그것을 토평한 것이 어찌 공이 될 수 있는 일이겠는가. 단서철권(丹書鐵券)을 만든 것이 당초 어찌 이처럼 구차한 데에 쓰려고 한 것이겠는가. 아, 김응남(金應南)은 신묘년에 부경(赴京)하였을 적에 정신(廷臣)들의 의논을 극력 변론하여 실제 상황을 들어 주문(奏聞)함으로써 마침내 황상(皇上)이 감림(監臨)하게 하였으니, 그의 공이 진실로 크다. 그리고 신점(申點)은 중국에 있다가 국가가 병화(兵火)를 당했다는 말을 듣고서 7일 동안이나 먹지도 않고 울면서 구원병을 보내줄 것을 주청했으니, 중국군이 나오게 된 것은 과연 누구의 공이겠는가. 정곤수(鄭崐壽)는 구원병을 주청하고 군량을 주청한 공로가 있고, 이호민(李好閔)은 사명(辭命)을 전담한 공로가 있고, 이순신·원균·권율은 혈전(血戰)한 공이 있었다. 그리고 당시 삼공(三公)은 조금이나마 대책을 결단한 일이 있었으니 부득이하다면 이들 몇 사람만 녹훈했어야 했다. 【원전】 24 집 623 면 【분류】 *인사(人事) / *역사-사학(史學)
[주D-001]신묘년 : 1591 선조 24년.
[생원진사시] 명종(明宗) 1년 (1546) 병오(丙午)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三等) 7위[인적사항][이력사항]
[가족사항][부]성명 : 최몽량(崔夢良)
관직 : 충순위부사직(忠順衛副司直) 품계 : 어모장군(禦侮將軍) [부모구존] 영감하(永感下)[제] 최응한(崔應漢)[출전]CD-ROM 《사마방목(司馬榜目)》(韓國精神文化硏究院) 선조 180권, 37년(1604 갑진 / 명 만력(萬曆) 32년) 10월 29일(을해) 7번째기사
호성 공신의 교서를 반급할 때에 선독한 별교서 지난번 역이(逆夷)들이 난(亂)을 얽어내기 위해 감히 길을 빌자는 흉계를 부렸는데, 이런 고통을 부모에게 호소하는 것은 정리상 실로 당연한 것이다. 외적을 편들기 위해 황제를 저버리는 것은 죽어도 할 수 없는 일이거든, 평소 지성으로 사대(事大)하였으니 내가 어찌 감히 생각이나 할 수 있겠는가. 힘을 다해 주선(周旋)하기에 분주하여 신하들 또한 수고로왔다. 충정(忠貞)한 절개를 바쳐 말고삐를 잡고 치달리는 수고로움을 극진히 하였으니, 일은 같지 않지만 그 공로는 다를 바 없다. 교서(敎書)로 호칭을 내려 크게 맹약(盟約)하는 반열에서 고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에 이항복(李恒福)·정곤수(鄭崑壽)를 1등(等)에 책훈(策勳)하고, 모습을 그려 후세에 전하며, 관작과 품계를 세 자급(資級) 초천한다. 그의 부모와 처자도 세자급을 초천하되, 아들이 없으면 생질(甥姪)과 여서(女壻)를 두 자급 초천하라. 적장(嫡長)은 세습(世襲)케 하여 녹봉을 잃지 않게 할 것이며 대대로 영원히 사유(赦宥)를 받게 하라. 이에 반당(伴倘) 10인, 노비(奴婢) 13구, 구사(丘史) 7명, 전지(田地) 1백 50결, 은자(銀子) 10냥, 내구마(內廐馬) 1필을 하사한다.
신성군(信城君) 이후(李珝)·정원군(定遠君) 이부(李琈)·이원익(李元翼)·윤두수(尹斗壽)·심우승(沈友勝)·이호민(李好閔)·윤근수(尹根壽)·유성룡(柳成龍)·김응남(金應南)·이산보(李山甫)·유근(柳根)·이충원(李忠元)·홍진(洪進)·이곽(李)·유영경(柳永慶)·이유징(李幼澄)·박동량(朴東亮)·심대(沈岱)·박숭원(朴崇元)·정희번(鄭熙藩)·이광정(李光庭)·최흥원(崔興源)·심충겸(沈忠謙)·윤자신(尹自新)·한연(韓淵)·해풍군(海豊君) 이기(李耆)·순의군(順義君) 이경온(李景溫)·순녕군(順寧君) 이경검(李景儉)·신잡(申磼)·안황(安滉)·구성(具宬)은 2등에 책훈하고 모습을 그려 후세에 전하며, 관작과 품계를 두 자급 초천한다. 그들의 부모와 처자도 두자급을 초천하되, 아들이 없으면 생질과 여서를 한 자급 초천하라. 적장은 세습케 하여 그 녹봉을 잃지 않게 할 것이며, 대대로 영원히 사유(赦宥)를 받게 하라. 이에 반당 6인, 노비 9구, 구사 4명, 전지 80결, 은자 7냥, 내구마 1필을 하사한다.
정탁(鄭琢)·이헌국(李憲國)·유희림(柳希霖)·이유중(李有中)·임발영(任發英)·기효복(奇孝福)·최응숙(崔應淑)·최빈(崔賓)·여정방(呂定邦)·송강(宋康)·고희(高曦)·이응순(李應順)·절신정(節愼正) 수곤(壽崑)·강인(姜絪)·김기문(金起文)·최언준(崔彦悛)·민희건(閔希騫)·허준(許浚)·이연록(李延祿)·김응수(金應壽)·오치운(吳致雲)·김봉(金鳳)·김양보(金良輔)·안언봉(安彦鳳)·박충경(朴忠敬)·임우(林估)·김응창(金應昌)·정한기(鄭漢璣)·박춘성(朴春成)·김예정(金禮禎)·김수원(金秀源)·신응서(申應瑞)·신대용(辛大容)·김새신(金璽信)·조구수(趙龜壽)·이공기(李公沂)·양자검(梁子儉)·백응범(白應範)·최윤영(崔潤榮)·김준영(金俊榮)·정대길(鄭大吉)·김계한(金繼韓)·박몽주(朴夢周)·이사공(李士恭)·유조생(柳肇生)·양순민(楊舜民)·경종지(慶宗智)·최세준(崔世俊)·홍택(洪澤)·전용(全龍)·이춘국(李春國)·오연(吳連)·이희령(李希齡)은 3등에 책훈하고, 모습을 그려 후세에 전하며, 품계와 관작을 한 자급 초천한다. 그들의 부모와 처자도 한 자급 초천하되, 아들이 없으면 생질과 여서를 가계(加階)하라. 적장은 세습케 하여 녹봉을 잃지 않게 할 것이며, 대대로 영원히 사유를 받게 하라. 이에 반당 4인, 노비 7구, 구사 2명, 전지 60결, 은자 5냥, 내구마 1필을 하사한다.
공(功)의 등급이 1등에서 3등까지여서 고하(高下)가 다른 것을 면할 수 없고, 상(賞)의 은수(恩數)가 많기도 하고 작기도 하여 경중의 차이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어떻게 감히 그 공을 잊을 수 있겠는가. 애오라지 가상히 여기는 마음을 표하는 바이다. 아, 황상께서 재조(再造)하여 준 은총은 진실로 전고에 없던 것이니 군신(君臣)을 일체로 여긴 성은(聖恩)이 후세에까지 전해가기를 바란다. 가서 신명(新命)을 받아 모두 열복하는 지극한 마음을 품으라. 때문에 교시(敎示)하노니 잘 알 것으로 여긴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24책 687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인사(人事) / *농업(農業) / *가족(家族) / *신분(身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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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25일 (갑진) | |||||||||||||||||||||
공신을 대대적으로 봉하였다. 서울서부터 의주(義州)까지 시종 어가(御駕)를 모신 사람을 호성 공신(扈聖功臣)으로 삼고, 왜적을 정벌한 제장(諸將)들과 군량을 주청하러 간 사신들을 선무 공신(宣武功臣)으로 삼고,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토벌한 자를 청난 공신(淸難功臣)으로 삼아, 모두 3등급으로 나누고 차등 있게 봉호(封號)를 내렸다.
호성 공신 1등에는 이항복·정곤수(鄭崐壽), 2등에 신성군 이우(信城君李珝)·정원군 이부(定遠君李琈)【이 분이 원종 대왕(元宗大王)이다.】·이원익(李元翼)·윤두수(尹斗壽)·심우승(沈友勝)·이호민(李好閔)·윤근수(尹根壽)·유성룡·김응남(金應南)·이산보(李山甫)·유근(柳根)·이충원(李忠元)·홍진(洪進)·이괵(李)·유영경(柳永慶)·이유징(李幼澄)·박동량(朴東亮)·심대(沈岱)·박숭원(朴崇元)·정희번(鄭姬藩)·이광정(李光庭)·최흥원(崔興源)·심충겸(沈忠謙)·윤자신(尹自新)·한연(韓淵)·해풍군 이기(海豊君李耆)·순의군 이경온(順義君李景溫)·순령군 이경검(順寧君李景儉)·신잡(申磼)·안황(安滉)·구성(具宬), 3등에 정탁(鄭琢)·이헌국(李憲國)·유희림(柳希霖)·이유중(李有中)·임발영(任發英)·기효복(奇孝福)·최응숙(崔應淑)·최빈(崔賓)·여정방(呂定邦)·이응순(李應順)·절신정 이수곤(節愼正李壽崐)·송강(宋康)·고희(高曦)·강인(姜絪)·김기문(金起文)·최언순(崔彦恂)·민희건(閔希鶱)·허준(許浚)·이연록(李延祿)·김응수(金應壽)·오치운(吳致雲)·김봉(金鳳)·김양보(金良輔)·안언봉(安彦鳳)·박충경(朴忠敬)·임우(林祐)·김응창(金應昌), 정한기(鄭漢璣)·박춘성(朴春成)·김예정(金禮禎)·김수원(金秀源)·신응서(申應瑞)·신대용(辛大容)·김새신(金璽信)·조귀수(趙龜壽)·이공기(李公沂)·양자검(梁子儉)·백응범(白應範)·최윤영(崔潤榮)·김준영(金俊榮)·정대길(鄭大吉)·김계한(金繼韓)·박몽주(朴夢周)·이사공(李士恭)·유조생(柳肇生)·양순민(楊舜民)·경종지(慶宗智)·최세준(崔世俊)·홍택(洪澤)·이춘국(李春國)·전용(全龍)·이희령(李希齡)·오연(吳連) 등 총 86인이요, 내시(內侍) 24인, 마의(馬醫) 6인, 의관(醫官) 2인, 별좌 사알(別坐司謁) 2인이다. 선무 공신은 1등에 이순신·권율·원균, 2등에 신점(申點)·권응수·김시민·이정암·이억기, 3등에 정기원(鄭期遠)·권협(權悏)·유충원(柳忠瑗)·고언백(高彦伯)·이광악(李光岳)·조경(趙儆)·권준(權俊)·이순신(李純信)·기효근(奇孝謹)·이운룡(李雲龍) 등 총 18인이다. 청난 공신은 1등에 홍가신(洪可臣), 2등에 박명현(朴名賢)·최호(崔湖), 3등에 신경행(辛景行)·임득의(林得義) 등 모두 5인이다.【호성 공신(扈聖功臣) 1등은 충근정량갈성효절협책(忠勤貞亮竭誠効節協策)의 호를 내리고, 2등은 갈성 2자를 줄이고, 3등은 또 효절협책의 4자를 줄였다. 선무 공신(宣武功臣) 1등은 효충장의적의협력(効忠仗義迪毅協力)의 호를 내리고, 2등은 적의 2자를 줄이고, 3등은 또 협력 2자를 줄였다. 청난 공신(淸難功臣) 1등은 분충출기합모적의(奮忠出氣合謀迪毅)의 호를 내리고, 2등은 합모 2자를 줄이고, 3등은 또 적의 2자를 줄였다.】 【원전】 25 집 694 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6월 1일(기축) 이때에 임진강의 방어가 무너져서 사태가 점점 급박하여서 상이 묘당에 명하여 거취를 의론케 하였다. 인성부원군 정철(鄭澈)이 먼저 말하기를, “이는 서울을 사수하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니, 한 대장에게 명하여 지키게 하고 대가를 받들고 나가야 합니다.” 하였다. 심충겸(沈忠謙)ㆍ이덕형(李德馨)이 또 그 말에 동조하니 여러 의론이 다 옳게 여겼다. 유독 윤두수(尹斗壽)ㆍ이유징(李幼澄)ㆍ박동량(朴東亮) 등이 말하기를,“이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의 강토는 남북이 수천 리에 불과합니다. 북도로 가면 너무 좁아서 갈 만한 곳이 없고, 압록강을 건너가면 한 번 건너간 뒤에는 다시 어찌해 볼 수가 없습니다. 비록 조석은 구차하게나마 살 수 있다 하더라도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평양은 사면이 매우 험하여 적을 방어하기 쉬울 뿐더러 군사가 만을 넘고 성중의 장사도 수천을 헤아리고, 양식이 또한 많습니다. 이곳을 한 발자국이라도 떠나게 되면 국사는 결단이 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국사를 이미 경들에게 맡겼으니, 잘들 하시오.” 하였다. 이날 저녁에 이빈(李薲)이 오니, 상이 이르기를,“이 성 이외에는 갈 만한 곳이 없으니 다시 다른 의론을 내지 마오.” 하였다.○ 상이 여러 신하에게 타이르기를, “내가 먼저 앞길을 향하여 갈 것이니, 세자는 이 성을 지켜야 한다. 내 부로(父老)들에게 친히 유시하여 그들로 하여금 세자와 함께 이 성을 지키게 하겠다.” 하고, 드디어 대동관(大同館)의 문으로 납시어 유시하였다. 선유관(宣諭官) 심희수(沈喜壽)의 말이 너무도 슬프고 비장하여 성안의 부로와 상하 수종관(隨從官)들이 모두 목놓아 울었다.○ 윤두수는 이미 천조에 군대를 요청하였으므로 모든 접제(接濟)의 방책을 먼저 강구하지 않을 수 없어서, 심희수를 접대사(接待使)로 삼아 먼저 의주로 보내고, 또 홍종록(洪宗籙)ㆍ홍세공(洪世恭)ㆍ심우승(沈友勝)을 삼로(三路)의 조도사(調度使)로 삼아 군량을 나누어 관장하게 하였다. ○ 이조 좌랑 허성(許筬)은 스스로 말하기를, “군병을 모집하러 강원도로 가겠습니다.” 하여, 그를 보냈다.○ 2일 도원수 김명원ㆍ순찰사 한응인이 군관 5ㆍ6천 명만을 인솔하여 왔고, 이성임(李聖任)과 이천(李薦)은 도주하였다. 상이 김명원을 소대(召對)하여 이르기를, “오늘날 이 지경이 된 것을 다시 어찌하겠소?” 하니, 김명원이 아뢰기를,“여러 번 패한 장수로 죽음을 면한 것으로 만족하옵니다. 그러나 성패(成敗)는 하늘에 달려 있사오니, 신에게는 죽음만이 있을 뿐이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장수다운 말이로다.” 하였다. 조정에서는 임진강을 지키지 못한 것은 다 한응인의 죄라 하고, 드디어 강동의 여러 곳을 방어하게 하여 그로 하여금 몸 바쳐 공을 세우게 하였다.○ 상이 여러 신하에게 유시하기를, “중전이 이 성에 그대로 있어서는 안 되니, 갈 곳을 의론하여 아뢰라.” 하니, 모두 아뢰기를,“상께서 거취를 정한 뒤에 이 일을 의론함이 옳겠습니다.” 하였다.○ 이일(李鎰)이 도(道)에 있으면서 아뢰기를, “신이 군사 3천을 이끌고 행재소(行在所)로 가겠습니다. 부디 조정에서는 평양을 굳게 지키고 다른 계교를 내지 말기를 바라옵니다. 신은 마땅히 힘과 목숨을 다하여 죽음을 바치려 합니다.” 하였다. 이때에 여러 의론이 이러니저러니 하여 거취를 정하지 못하다가 이 장계를 보고 상하가 모두 사수할 생각이 있었다. 임금이 유홍(兪泓)에게 명하여 평양을 지키게 하니 유홍이 어쩔 줄 몰라 하였고, 이성중(李誠中)을 천거하여 부관으로 삼았다. 그는 일을 처리하는 것이 술에 취한 자 같았다.○ 상이 여러 신하에게 명하여 거취를 의론하게 하였는데, 윤두수가 아뢰기를, “온 성안 사람들이 다 말하기를, ‘대가를 모시고 이 성을 사수하려 하는데, 대가가 만일 성을 나가면 일시에 모두 흩어져 갈 것이다.’ 합니다. 인심이 이와 같사오니, 만일 협력하여 지키면 적을 막을 수 있을 것이옵니다. 더구나 사세로 말하오면 이 성 이외에 어느 곳이 피할 만한 곳인지 어느 곳이 견고한 지를 알지 못하겠나이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경의 말은 대단히 답답도 하오.” 하였다.○ 상이 또 여러 신하와 거취를 의론할 적에 상의 얼굴빛이 처참하고 말씨가 대단히 비장하니, 신료들이 감히 우러러 보지 못하였다. 정철이 나와 윤두수에게 말하기를, “좌상의 말씀이 좋기는 합니다만, 임금의 안색을 뵙지 못하였소? 신하된 자로 어찌 차마 만류하여, 억지로 성을 지키고자 하겠습니까.” 하니, 윤두수는 소리를 높여 말하기를,“공은 어찌하여 나라를 그르칠 말을 하오. 만일 일찍 서울을 고수할 계획을 세웠던들 어찌 오늘에 이르렀겠소. 공이 이 성을 지키고 싶지 않다면 대가를 받들고 혼자 여기를 떠나는 것이 옳겠소.” 하였다. 이에 정철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이덕형ㆍ심충겸이 조정에서 말하기를, “오늘날의 형세를 보건대, 대가가 반드시 머물러 이 성을 지키기를 달게 여기시지 않을 것이니, 만일 하루아침에 대가가 움직이게 된다면 머무를 곳을 미리 강구하여 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국토가 이미 좁아져 함경도 한 도만이 있을 뿐입니다. 함흥부에는 군사가 많고 양식이 풍족하여 방어할 만합니다.” 하니, 여러 사람이 동의하였다. 윤두수가 말하기를,“함흥의 형세로는 절반도 이 곳만 못하오. 가령 적이 밀려오면 그 뒤에 다시 옮길 만한 곳이 있겠소? 또 적이 북도라고 안 갈 것 같소? 공 등은 어찌하여 함흥이 견고하다고만 하여 이 같은 장구하지 못한 계획만을 내오.” 하니, 여러 사람이 말하기를,“이것을 임금을 모신 자리에서 정하는 것이 옳으니, 마땅히 면대를 청하여 가부를 아룀이 좋겠소.” 하였다. 상이 이들을 불러서 이 문제를 물으니, 모두 아뢰기를,“함흥은 성이 험하고 양식이 넉넉하고 또 북도의 토병(土兵)을 소집하여 그들과 협력하여 지키면 평양과 같이 위태롭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마침 성을 나가려든 참이었는데, 이 주장을 듣고 매우 그럴듯하게 여겼다. 윤두수가 아뢰기를,“상께서 이미 이 성을 지키고자 않으신다면 물러가 머무를 곳은 세 곳이 있습니다. 첫째 급히 영변(寧邊)으로 가 기계를 수선하고 강변의 토병을 소집하여 지키다가 일이 급하면 바로 의주로 향하여 중국 조정에 나아가 왜적이 침입했다는 말을 분명히 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둘째는 멀리 강계(江界)로 향하여 여러 고을의 군사를 모아 성문을 굳게 닫고 견고히 지키면 한두 달은 지탱할 수 있습니다. 일이 급하게 되면 강계의 하류가 바로 압록강이므로 배를 타고 내려가면 바로 상국(上國)의 관전보(寬奠堡)이니, 이것이 차선책입니다. 셋째는 함흥의 형세는 신이 두루 알고 있는데 성은 크되 낮고 사방이 험하지 않으니, 토병을 부르려고 하면 북쪽 오랑캐가 반드시 빈틈을 타 침입할 것이요, 남도로 향하고자 하면 도로가 매우 험하여 올라가 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적이 그 뒤를 밟아오게 되면 반드시 포위되어 곤욕을 당할 것이오니, 이곳에는 결코 가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여러 사람은, 북도는 길이 험하고 궁벽하여 적이 반드시 가지 않을 것이라 하여, 오히려 함흥이 갈 만한 곳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드디어 함흥으로 가기로 결정하였다. 상이 또 김명원(金命元)을 명하여 먼저 양덕(陽德) 등지로 가서 길을 살펴보게 하였다. 다음 날 또 이희득(李希得)을 보내어 순찰사라 칭하여 북도로 가게 하고, 또 유홍(兪泓)을 명하여 행장을 꾸려 중전을 시위하고 먼저 북도로 향하게 하였다. 윤두수는 나와서 말하기를,“이일(李鎰)은 노련한 장수니, 반드시 소견이 있을 것이오. 그를 기다려서 마땅히 북도로 가는 것을 결정하는 것이 좋겠소.” 하였다. 이날 낮에 이일이 당도하니, 만조 관료들이 모두 이일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빙 둘러 싸고 앉았다. 윤두수가 묻기를,“평양을 포기하는 것에 대해 공의 의견은 어떠하오? 어떤 사람은 함경도로 가는 것이 좋겠다 말하는데, 이것 또한 어떠하오?” 하니, 이일이 대답하기를,“이 적을 당해낼 수 없습니다. 평양은 떠나야 합니다. 함흥은 평양성처럼 맨 먼저 적의 공격을 받는 곳이 아니니 갈 만합니다.” 하였다. 신충겸이 그의 등을 어루만지며,“참 장수입니다.” 하고, 이덕형도 기뻐하며 말하기를,“이일답다.” 하니, 윤두수가 말하기를,“실성한 사람이어서 말할 것이 못된다.” 하였다.○ 6일 우의정 유홍과 좌찬성 최황(崔滉) 등이 중전을 시위하여 평양을 출발, 함흥으로 향했다. ○ 그때 적이 임진강(臨津江)에 이른 지 열흘이 되었는데도 조정에서는 아직도 초탐(哨探)을 하지 못했다. 그제서야 비로소 용사 김진(金珍)ㆍ임욱경(任旭景) 등 열두 사람을 모집하여 보냈다. 그래서 적을 황주(黃州)에서 만나 머리 둘을 베어가지고 돌아 왔다. ○ 상이 성 위를 순시하고는 부로를 불러 성을 고수하겠다는 뜻을 알리니, 모두 울며 말하기를, “주상께서 만일 머무르신다면 모두 이 성을 사수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좌상 윤두수에게 김명원 이하를 인솔하고 머물러 평양성을 지키라고 명하였다. 상이 세자에게 평양을 지키게 하고자 하니, 윤두수ㆍ김명원 등이 인심이 대가의 동향을 보고서 그들의 거취를 결정하려 하는데, 대가가 나가면 비록 세자가 이곳을 지키더라도 무익한 일이라 생각하고 아뢰기를, “신 등이 힘을 다하여 여기를 지킬 것이오니, 세자께서 꼭 머무를 필요는 없습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그리고 중화(中和) 등지의 군대를 평양에 계속 들어가라고 명하였다.○ 7일 아침에 부제학 심충겸이 삼사를 인솔하고 청대하여 아뢰기를, “신 등의 생각으로는 이곳은 서울에다 비길 곳이 아니오니, 사수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건대 이곳 이외에는 이 성과 같이 견고한 데도 없으니, 반드시 떠나서는 안 된다고 여겨집니다.” 하였다. 대체로 적의 형세가 약간 완화된 까닭이다. 낮에 중화군(中和郡)에 사는 사람이 와서 적이 이미 본군에 이르렀다고 하니, 심충겸이 또 삼사를 인솔하고 입대하여 아뢰기를,“적이 이미 가까이 왔으니, 대가가 머물러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였다.○ 이조 정랑 이유징(李幼澄)이 청대하여 평양을 버리고 떠나가서는 안 된다고 극력 간하니, 상이 이르기를, “네 말이 옳기는 하나 나는 이 성을 벗어나서 형세 돌아가는 것을 보려는 것이다.” 하였다.○ 8일 적이 대동강 가에 이르렀다. 상은 적이 이미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떠날 차비를 하라고 명했다. ○ 요동 순안어사가 진장(鎭將) 한 사람을 보내니, 상이 대동관에서 접견하고 당초의 사정을 상세히 말했다. 진장이 연광정(練光亭)에 올라가 적의 기병이 횡행하는 것을 바라보고 말하기를, “이는 참으로 왜다.” 하고, 드디어 머물지 않고 돌아갔다. 조정에서는, 천조에서 만일 힐문하는 일이 있다면, 응대할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된다 생각하고 윤근수(尹根壽)를 보냈다.○ 이날 밤, 적이 포로를 시켜 편지를 보내 왔다. 그 사연에, “한음(漢陰) 이 선생을 만나기를 원한다.” 하였다. 이는 이덕형(李德馨)을 가리킨 것이다. 조정이 논의하기를,“이덕형이 그들과 말을 나눈 뒤에도 일이 만일 순조롭지 못하면 용사(勇士)를 시켜 조신(調信)을 쳐 죽이는 것이 낫다.” 하니, 윤두수가 말하기를,“나라의 형세가 비록 이 같으나 어찌 도적이 하는 짓을 본받겠는가. 다만 만나볼 따름이다.” 하고, 어떤 이는 말하기를,“적을 만난 뒤에 만일 차마 듣지 못할 말이 있다면 욕을 받음이 더욱 클 것이니 보내지 않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이덕형이 말하기를,“그들을 만나면 혹 군사를 완화시킬 수 있을지 모르니 만나 보겠습니다.” 하니, 조정에서도 만일의 희망을 걸고 드디어 그를 보냈다.○ 9일 이덕형이 강 위에 이르니, 적장(賊將) 평조신(平調信)ㆍ현소(玄蘇)ㆍ세준(世俊) 등이 와 있었다. 양편이 각각 배를 타고 강 가운데에서 만나 술을 나누며 이야기했다. 이덕형이 말하기를, “오늘날 군사를 거동함은 무슨 명분에서요?” 하니, 현소가 대답하기를,“귀국과 서로 통하고자 하나, 동래(東萊)로부터 서울에까지 모두 말을 전할 수가 없어서 드디어 전전하여 여기까지 이르렀소.” 하였다. 이덕형이 말하기를,“이제 피차간 서로 통한 셈인데, 어찌하여 군사를 후퇴시키지 아니하오? 옛날의 제후는 군사를 벌이고 맹약한 뒤에는 모두 군사를 후퇴시켰으니, 이제 군사를 물리침이 옳겠소. 천천히 의론할 것이 있소.” 하니, 적이 말하기를,“이제는 다만 전진이 있을 뿐이요, 한 발자국도 물러갈 수 없소.” 하였다. 마침내 자리를 파하고 돌아올 적에 용사 박성경(朴成景) 등이 곁에 있다가 일이 아무 성과가 없음을 알고 그를 죽이려 하니, 이덕형이 눈짓하여 말렸다.○ 이보다 앞서 승지 민여경(閔汝慶)ㆍ노직(盧稷) 등은 임진강의 방어가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병을 칭탁하고 나오지 않다가, 이때에야 국사가 이미 잘못 되 가는 것을 보고 맨 먼저 성을 나갔다. 이것을 본받아 도망가려는 사대부들이 많았다. ○ 10일 대가가 출발하려 할 때 궁인이 이보다 먼저 나간 자가 많았으므로 성중의 인민이 도끼와 막대기를 가지고 길목을 지키다가 마구 두들겨 대니, 판윤 홍여순(洪汝諄)이 부상을 입어 말에서 떨어졌다. 부로와 남녀가 궁문 밖을 메우고 통곡하며 부르짖기를, “우리들이 성을 나가지 않은 것은 대가를 믿고 사수하고자 함이었소. 적이 문 밖에 이르자 갑자기 우리들을 버리고 가려 하니, 이것은 우리를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오. 차라리 임금의 손에 죽을지언정 적에게 죽기를 원하지 아니하오.” 하고, 궁문을 파괴하고 여러 재상을 쫓아내려 하였다. 병조 좌랑 박동량(朴東亮)이 사세가 급박함을 보고 들어가 승지에게 말하기를,“백성의 심정이 이와 같아 사세를 예측할 수 없소. 오늘의 행차를 정지하여 백성을 위로하고 안심시킨 뒤에야 떠나갈 수 있습니다.” 하니, 승지 등이 이 뜻을 아뢰어 드디어 행차를 정지케 하였다. 승지가 나와서 백성에게 말하기를,“오늘의 행차를 정지하였으니 너희들은 물러가도 된다.” 하였으나, 여러 사람은 이것을 믿지 아니하고 오히려 떠들며 난리를 일으키려 하였다. 이유징이 드디어 ‘정행(停行)’ 두 글자를 판대기에 커다랗게 써서 사람을 시켜 지붕 위에 올라가 이것을 두루 보이게 하니, 그제야 차츰차츰 흩어져 갔다.○ 11일 대가가 평양을 출발하였다. 좌상 윤두수, 도원수 김명원, 순찰사 이원익, 감사 송언신, 병사 이윤덕, 교리 김신원(金信元), 이조 좌랑 이호민(李好閔) 등이 대가를 보통문(普通門)에서 전송하며 하직하였다. 대가가 순안(順安)을 거쳐 저녁에 숙천(肅川)에 이르렀다. 많은 관원이 의논드리기를, “이제 국사가 급박해졌으니, 대가가 북도로 가는 것도 기필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다면 중전께서만 어찌 홀로 북도에 머물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영변(寧邊)으로 가서 형세를 살펴 거취를 결정하는 것이 옳을 줄 아옵니다.” 하니, 상이 이 말을 따랐다.○ 조정에서 또 말하기를, “천조(天朝)에 청병하는 일보다 중요한 것이 없는데, 어찌 단지 역관만을 보내서 구원해 주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하여, 드디어 대사헌 이덕형을 보내되, 청원사(請援使)라 칭하여 급히 요동으로 가게 하였다.○ 또 홍여순을 파견하여 양덕(陽德) 등지를 순찰하면서 북에서 서쪽으로 향하는 길을 방비하게 하였다. ○ 12일 대가가 안주(安州)의 운암원(雲巖院)에 이르니, 인민이 모두 도망가서 음식을 올리지 못했다. 이양원이 패하여 안변에 이르러서, 종사관 김정목(金廷睦)을 보내어 말로 진달하기를, “이혼(李渾)이 회양(淮陽)의 적을 다 죽였다.” 하였다. 대체로 길가에 떠도는 말을 들은 것이다. 상이 이것을 친히 묻고자 하여 사관을 불러 입시하게 하니, 주서 임취정(任就正)ㆍ박정현(朴鼎賢)과 한림 김선여(金善餘)ㆍ조존세(趙存世) 등은 벌써 흩어져 갔다. 이로부터 여러 시종관이 모두 뒤로 처지고 대기를 따르는 자는 십여 인에 지나지 않았고, 그들도 모두 제마음대로 행동하여 앞서기도 하고 뒤떨어지기도 하였고, 시위하는 자는 얼마 되지 아니하였다.○ 저녁에 안주에 이르러, 임금은 길에서 돌아오는 군사를 보고 물어보았더니, 모두 흩어져 도망가는 자였다. 드디어 지평 이경기(李慶祺)를 자산(慈山) 등지로 달려가 도망하는 군사를 불러 모아 전선으로 나가도록 명하였다. ○ 13일 대가가 영변(寧邊)에 이르니, 성안의 사람과 가축이 모두 벌써 흩어져 도망갔다. 판관 황기(黃沂)도 외촌(外村)에서 처음으로 이곳에 왔다. 상하가 모두 밥을 먹지 못했다. 이날 밤에 한응인이 치계하기를, “적이 이미 강동(江東)의 외탄(外灘)을 건너와서 단지 여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군진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드디어 여러 신하를 불러 이르기를,“오늘날의 형세는 이미 어찌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나와 세자가 함께 한 곳으로 가게 되면 더욱 가망이 없을 것이니, 나누어 가는 것만 못할 것이다. 다만 오늘 향할 곳을 어디로 정할 것인가?” 하니, 승지 이국(李)이 아뢰기를,“상국(上國)은 부모의 나라입니다. 이제 마땅히 의주로 가시어 천조에 나아가 호소해야 합니다. 그래도 일이 만일 불리하게 되면 임금과 신하가 마땅히 함께 압록강에서 죽어 대의(大義)를 천하에 드러내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고, 유성룡ㆍ이항복 역시 아뢰기를,“이 말이 대단히 옳으니 의주로 가시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내가 만일 요동으로 건너가게 되면 여러 신하들은 나를 따라갈 자가 있는가?” 하니, 이항복ㆍ이국이 울며 아뢰기를,“신들이 수행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최흥원(崔興源)ㆍ이헌국(李憲國)ㆍ이성중(李誠中)을 돌아보며 이르기를,“경들은 다 늙었으니, 세자를 따라 가야 하오.” 하고, 또 한준에게 이르기를,“경도 부모가 있으니, 세자를 따르는 것이 옳겠소.” 하니, 여러 신하가 모두 울고, 임금도 눈물을 흘렸다.○ 14일 운산 군수(雲山郡守) 성대업(成大業), 익위(翊衛) 유희담(柳希聃)을 보내어 중전과 세자빈을 맞이하여 오게 하였다. 유홍(兪泓) 등이 중전을 호종하여 덕천(德川)에 이르러 누차 급히 함흥으로 향할 것을 주청(奏請)하여 날마다 재촉하는 말이 있었다. 중전이 분부하기를, “당초에는 비록 함흥으로 가라는 명이 있었으나, 지금 대가의 거취를 아직도 확실히 알지 못하오. 한번 이 재를 넘어간 뒤에 창졸간에 일이 있게 되면 반드시 낭패(狼狽)할 것이오.” 하고, 5일을 머물렀다. 이 때문에 성대업 등이 쫓아가서 만나게 되었다.○ 이 때에 대가와 세자가 길을 나누어 가려 하였는데, 시위하는 관원으로서 친히 임금의 명을 받은 자 이외에는 모두 가는 곳을 알지 못하였다. 영의정 최흥원이 드디어 성명을 열서(列書)하여 아뢰니, 상이 드디어 낙점(落點)하였다. 상이 요동으로 건너가게 되면 사람들이 싫어서 피할 것이고, 더구나 늙고 병든 무리는 따라갈 수가 없기 때문에 병 없고 멀리 갈 만한 자를 선택하여 대가를 따르게 하였다. 지평 이정신(李廷臣)은 그가 대가를 따르게 되었다는 것을 듣고 사양하지 아니하였다. 상이 또 한준이 현재 호조 판서로 있기 때문에 잠시도 떨어져 있을 수가 없다 하여 드디어 수행하도록 명하니, 한준이 낙상하였다고 칭탁하고 성을 나갔다. ○ 상이 또 세자에게 이르기를, “국사가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시 희망이 없구나. 우리 부자가 함께 한 곳으로 갔다가 일이 만일 갑작스럽게 되면 뒤에는 아무 일도 못하게 된다. 이제 나는 상국에 가서 호소할 것이니, 세자는 종묘와 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급히 강계 등지로 가서 나라를 회복하기를 도모하라.” 하였다. 이어 서로 마주 보고 울었다.○ 15일 상이 종묘 사직의 신주에 하직하고 통곡하니, 세자도 통곡하였다. 상이 세자의 관속에게 이르기를, “국가의 일은 세자의 신상에 달려 있으니, 너희들은 각기 마음과 힘을 다하여 잘 보좌하여 다시 나라를 일으킬 것을 도모하라.” 하였다. 대가가 출발하려 할 적에 세자도 양궁(兩宮)에 하직하니, 종관(從官)이 각각 목놓아 울고, 말을 끄는 하인들도 눈물을 흘려 옷깃을 적시지 않는 자가 없었다.○ 대가가 박천(博川)에 이르니, 경내에 사는 백성들이 전과 다름 없이 곳곳에서 김을 매고 있었다. 상이 말을 멈추고 이르기를, “여러 고을이 다 비었는데, 너희들은 어찌하여 피란가지 않았느냐?” 하니, 모두 대답하기를,“군수께서 평양에 계시면서 사람을 보내 효유하여 말하기를, ‘사세가 불리하면 나도 피란하겠다. 내가 피란한 뒤에도 오히려 나갈 수 있으리니, 우선 힘을 다하여 농사를 지으라.’ 하였기 때문에, 안심하고 피란하지 아니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백성이 모이고 흩어지는 것은 윗사람이 시키기에 달린 것이니, 이는 처사가 마땅한 것이 아니겠느냐.” 하였다.○ 낮에 박천군에 이르니, 평양에서 온 사람이 말하기를, “어제 윤두수ㆍ김명원이 장사 4백여 인을 얻어 밤에 강을 건너 적의 병영을 돌파하여들어가 적을 많이 죽였습니다. 다만 새벽녘에 싸움을 돋워 일진일퇴하면서 정신없이 싸우고 있을 적에 날이 이미 밝았고, 적의 대군이 밀려들어와서 우리 군대는 질서없이 배를 타고 건너는데 적이 추격하여 왔습니다. 그래서 장사 임욱경(任旭景) ㆍ민여호(閔汝虎) 등이 대동강변에 이르러서 적 한 놈을 거꾸로 잡고 좌우로 마구 휘두르니, 적은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습니다. 격살한 적이 10여 명이나 되었는데, 끝내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도원수는 연광정 위에서 이것을 목격하고 통탄하면서 대대적으로 밤을 무릅쓰고 강을 건너가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지평 이경기가 와서 아뢰기를, “어지러운 군대가 흩어져 도망가는데 막을 만한 힘이 없어서 부득이 돌아왔습니다.” 하였다. 사간 유영경(柳永慶)이 이경기에게 말하기를,“이처럼 매우 어려운 시기를 당하여 군병을 모집하는 일보다 더 중한 것이 없는데, 명을 받은 지 이틀 만에 그냥 빈손으로 돌아와 하는 말이‘나는 할 수 없다.’하니, 어찌 어린애 장난과 같이 여겨서야 되겠소. 빨리 그곳으로 가서 다시 모집하도록 도모하시오.” 하니, 이경기는 어쩔 수 없이 다시 갔지만 이 일로 인하여 돌아오지 아니하였다.○ 중전이 덕천에서 밤을 틈타서 왔다. 우의정 유홍은 백관이 길을 나누어 간다는 말을 듣고나서 아뢰기를, “신은 이미 늙어서 요동으로 건너갈 수는 없으니, 세자를 따라 가기 원합니다. 나라가 회복된 뒤에 마땅히 대가를 맞이하여 돌아오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 말을 따랐다.○ 저녁에 이원익이 이호민을 보내와 말하기를, “어제 저녁에 적이 청은탄(靑銀灘) 등지에서 군사를 나누어 보내 강을 건너는 시늉을 하면서 시험하니, 여울을 지키던 장수 김억추(金億秋)ㆍ허숙(許淑)ㆍ이윤덕(李潤德) 등이 일시에 도망가서 흩어지고 상하에 진을 벌였던 군사도 따라서 흩어지게 되어, 적이 마침내 평양에 들어왔습니다.” 하였다. 임금은 드디어 길 떠날 차비를 하도록 하였다. 중전은 덕천으로부터 박천에 이르니, 산을 넘고 냇물을 건너 하루에 간 것이 거의 1백 60리가 되어도 아직 가마에서 내리지 못하였다. 또 평양의 보고를 듣고 고을 안이 크게 흔들려 식사도 못하고 갔다.○ 이때에 위장(衛將) 이관(李瓘)ㆍ성수익(成壽益) 등이 서로 잇달아 흩어져가니, 대가를 호종한 사람은 오직 내시 5ㆍ6명 뿐이었다. 박천군 내에서 5리쯤은 수목이 울창하고 빽빽하였는데 하늘에선 또 비가 내렸다. 일행은 겨우 40ㆍ50인 밖에 되지 아니하여서 인심은 매우 두려워하여 마치 보전하지 못할 것같이 여기니, 임진강을 떠나던 저녁보다도 더 심했다. ○ 이때에 세자는 보덕(輔德) 조정(趙挺)을 보내어 상에게 문안드렸다. 조정이 돌아갈 때에, 상이 손수 쓴 글을 세자에게 보내어 이르기를, “내가 살아서 이미 망국(亡國)의 임금이 되었으니, 죽어서는 장차 다른 지역의 귀신이 될 것이다. 부자가 서로 떨어져 다시 만나 볼 날이 없게 되었으니, 오직 세자는 나라를 다시 일으켜 위로는 조종의 영전을 위로하고 아래로는 부모를 돌아오게 하기 바란다. 종이를 대하니 눈물이 흘러내려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다.” 하였다. 이때 세자는 개평역(開平驛)에 머물고 있었는데, 조정은 바로 서울로 향한 채 이것을 전하지 않았다.○ 상이 삼경에 박천을 출발하여 이른 아침에 가산(嘉山)에 당도했다. ○ 16일 대가가 가산에 이르니, 적의 소리가 점점 급박하여 종관이 모두 흩어져 달아나고 남는 자가 거의 없었다. 상이 자문(咨文)을 요동으로 보내어 내부(內附 복종해서 따름)하기를 청하였다. 대가가 정주(定州)에 도착했다. ○ 또 사람을 보내어 적의 형세를 초탐해 오게 하였다. 김명원이 안주에 있으면서 치계하기를, “신 등이 이곳에서 수시로 적의 형세를 살펴 계속 말을 달려 보고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드디어 정주에 머물렀다.○ 또 안황(安滉) 등을 보내어 신성(信城)ㆍ정원(定遠) 두 왕자를 영변군에서 모시고 돌아오게 하였다. ○ 대가가 평양에 도착한 뒤로 잇따라 적의 정세를 요동에 보고하였다. 이로부터 자문과 게시(揭示)가 잇따랐으나 회답하는 체제를 아는 자가 없으므로 상은 종관에게 명하여 이것을 쓰게 하니, 형식을 이루지 못한 부분도 있었다. ○ 17일 인성부원군 정철(鄭澈)ㆍ풍원부원군(豐原府院君) 유성룡이 대사간 정곤수(鄭崑壽)를 거느리고 상에게, 세자에게 감국(監國)의 임무를 주게 할 것을 청하려고 드디어 입대(入對)하였다. 상이 묻기를, “경 등은 무슨 할 말이 있소?” 하니, 정철ㆍ유성룡 등이 단지 말하기를,“국사가 이와 같이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떻게 하옵니까?” 하고, 드디어 물러나왔다. 어떤 사람은 세자가 이미 감국의 임무를 받았으니, 정철 등의 뜻은 상에게 왕위를 물려줄 것을 청하려 한 것이었기에 차마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18일 대가가 정주를 출발하여 곽산(郭山)으로 향하였다. 상이 유성룡을 불러 이르기를, “오늘의 행차는 오로지 내부(內附)를 위함이니, 경이 먼저 가는 것이 좋겠소. 만일 천조에서 온 사신을 만나게 되면 먼저 적의 실정을 말하고서 내가 요동으로 건너가려 한다는 뜻을 말하오.” 하였다.○ 대가가 곽산에 이르러, 요동 순안사가 부총병 조승훈(祖承訓), 참장 곽몽징(郭夢徵), 유격 사유(史儒)를 보내어 3천 기를 영솔하고 운흥관(雲興館)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상이 가서 그를 만나 보았다. 상이 낱낱이 우리 나라의 전후 사정을 말하자, 시종들도 상의 앞에 줄지어 엎드려서 각각의 소견을 말하니, 말들이 대단히 시끄러웠다. 참장 곽몽징이 말하기를, “귀국의 군신이 한 곳에서 떠들어대는 것이 마치 모여서 송사하는 것과 같으니, 너무도 무례합니다.” 하니, 상이 여러 신하에게 모두 나가라고 명하였다. 총병 이하가 평양이 함락된 것을 알고 돌아갔다.○ 좌의정 윤두수가 나중에 와서 아뢰기를, “신이 사수하지 못하여 오늘날이 있게 되었으니, 군률을 받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나라의 형세가 이미 글렀는데, 어찌 경의 죄만이겠소.” 하였다. 상이 선천군(宣川郡)에 이르렀다. 저녁에 순안어서(巡安御史)가 또 지휘관 장(張)씨란 사람을 시켜 자문을 보내왔는데, 그 가운데, 너희 나라에서 반역을 도모한다[爾國謀爲不軌]라는 등의 용어가 있었고, 또 말하기를,“8도의 관찰사는 어찌하여 적에 대해 한 마디의 말도 없으며, 8도의 군현에서는 어찌하여 한 사람도 대의를 제창하는 일이 없소? 어느 날에 그 도가 함락되고, 어느 날에 그 고을이 함락되고, 아무는 절개에 죽고 아무는 적에게 붙었고, 적의 장수는 몇 사람이고, 군사의 숫자는 몇 만 명인지, 순서에 따라 하나하나 계산하여 들려주되, 모두 기록해서 보고하시오. 천조(天朝)에는 개산대포(開山大砲)와 대장군포(大將軍砲)와 신화표창(神火鏢鎗)이 있고, 용맹한 장수와 정련된 병정이 안개처럼 널리고 구름처럼 달리니, 왜병이 백만 명이라 하더라도 따질 것이 못되오. 더구나 문무 지략(文武智略)의 선비들이 간사한 꾀를 뚫어지게 볼 수 있어, 미연에 흉악한 싹을 꺾어 버릴 수 있으니, 비록 소진(蘇秦)ㆍ장의(張儀)ㆍ상앙(商鞅)ㆍ범수(范睢)의 무리가 다시 세상에 태어난다 하더라도 어찌 천조의 얕고 깊음을 엿볼 수 있겠소.” 하였다. 상이 자문을 보고 송구해 하면서 이르기를,“이는 아마도 우리 나라가 적과 공모하지 않았는가 의심하여,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두렵게 하는 말로 우리 나라의 대답을 시험하려는 것이오.” 하고, 드디어 지휘에게 이르기를,“이 자문에 대하여는 마땅히 곧 뒤따라 배신(陪臣)에게 맡겨 보내겠소.” 하였다. 지휘가 물러나와 역관에게 말하기를,“나는 바로 황천사(黃天使)의 수행원이다. 순안어사께서는 내가 일찍이 국왕의 얼굴을 보았다 하여 나로 하여금 그 진위를 와 보게 하였을 뿐이다. 자문 가운데의 말은 다만 가설(假設)하여 말한 것이니, 너희 나라에서는 두려워하지 말라.” 하였다.○ 이때에 대가의 행색이 여느 때와는 달리 대단히 총총하니, 길 가의 인민이 이것을 보고 왜적이 뒤에서 조만간에 추격해 올 것으로 여겼다. 대가가 지나간 뒤로 양민이 물결처럼 흩어져 산골짜기를 메웠다. 그 중에 호적이 없는 천민들은 혼란을 틈타 무리를 불러 모아 관가의 곡식을 약탈해 갔는데, 영변과 곽산이 더욱 심했다. 선천 군수 이형(李瀅)이 조정에 알리기를, “선천군에서만도 또한 백여 명이 모여 내일 대가가 출발한 뒤를 기다려 영변의 백성들이 한 짓을 본받으려 하옵니다. 늙은 선비로서는 제재하지 못하겠사오니 이에 대한 조치를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조정에서는 드디어 무신으로 대치하여 방화 약탈에 대한 걱정을 면할 수 있었다.○ 19일 대가가 거련관(車輦館)에 머물렀는데, 지나가는 곳마다 인민과 가옥이 예전 그대로 있어 박천군과 다르지 않았고 음식 이바지도 매우 풍성하게 하니, 상이 간소히 하고 사치하게 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 20일 대가가 용천군에 당도하였다. 윤두수가 아뢰기를, “오늘의 행차는 오로지 천조에 나아가 호소하기 위함이옵니다. 이 때문에 길을 빨리 달려 이미 그곳에 이르렀습니다. 다만 갑자기 의주에 당도하게 되면 인심이 크게 놀라서 수습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더구나 이제 적의 형세가 매우 완화되었으니, 먼저 의주 등의 관원으로 하여금 흩어진 병정을 모으게 하여 바로 요동으로 건너가지 않는다는 뜻으로 회유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믿는 바가 있게 한 뒤에 다시 2ㆍ3일을 보고 나서 천천히 나아간다면 원근이 실망하는 지경에 이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 말을 따랐다.○ 평양이 함락된 후, 송언신ㆍ이윤덕이 모두 희천(熙川) 등처로 가서는 오래도록 돌아오지 아니하였다. 김명원은 이원익ㆍ이빈을 인솔하고 정주에 주둔하니, 단지 군관(軍官) 수십 여인 뿐만 있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 드디어 이원익에게 압록강변으로 가서 토병을 모집하게 하고, 이빈에게 산군(山郡)으로 가서 군사를 징발하게 했다. 김명원은 혼자서 빈 성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 21일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원균(元均)이 거제 앞 바다에서 대첩(大捷)했다는 보고가 왔다. 상이 사자에게 영남의 사세를 물으니, 대답하여 아뢰기를, “감사 김수(金睟)는 현재 함안 등지에 있어, 소식을 알지 못하옵니다. 대적(大賊)은 다만 직로(直路)를 따라 행군한 까닭에 여러 고을에서 병란을 입은 것은 겨우 도로변일 뿐입니다. 좌우도(左右道)가 두 지역으로 나누어져서 호령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피차가 어떻게 행동하였는지 전혀 듣지 못하였습니다. 단지 병사 김성일(金誠一)의 얘기만을 들었는데, 그는 군관 몇 십명을 인솔하고 졸지에 적을 만나자, 모두들 흩어져 달아나려 하는데 김성일이 말에서 내려 의자에 걸터앉아 길을 막고 있었다고 합니다. 적이 그의 당돌함을 보고 복병이 있는가 의심하여 머뭇거리고 나오지 못하다가 한참 후에야 군사를 이끌고 갔다 하옵니다. 경기에 당도하니, 여러 고을의 백성들이 모두 생각하기를, ‘오늘의 도적은 왜놈이 아니라, 바로 나라를 배반한 무리들이다. 나라를 배반한 무리들은 양민을 죽이지 않는다.’ 하고, 드디어 이들을 피해 나가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다 도살되었으며 나중에야 그들이 왜적임을 알고 비로소 차츰차츰 피란갔다 하옵니다.” 하였다.○ 조정에서는 여러 고을의 관가 곡식이 다 노략질을 당하고 있어서, 만일 수습하지 않는다면 천병이 나오는 날 반드시 공급할 것이 없으리라 생각하여, 드디어 장령 정희번(鄭熙藩)을 철산(鐵山)으로, 정언 이광정(李光庭)을 용천창(龍川倉)으로 보내어 조사해 보게 하였다. 또 대군이 한번 흩어진 뒤로 산골짜기로 도망가서 오래도록 나타나지 아니하므로 마침내 사간 유영경(柳永慶)을 강계(江界)ㆍ위원(謂原)ㆍ이산(理山) 등의 군으로, 집의 정광적(鄭光績)을 벽동(碧潼)ㆍ창성(昌城) 등의 부(府)로 보내어, 그들로 하여금 급히 군대를 소집하여 김명원이 있는 곳으로 보내게 하였다. ○ 23일 대가가 용만관(龍灣館)에 당도하여, 목사가 거처하던 곳에 행궁(行宮)을 정하고 거처하였다. 이때 성중의 백성은 모두 흩어졌고, 닭ㆍ개 등이 한 마리도 없었고, 새도 날지 아니하여 황량한 산의 폐사(廢寺)와 같았다. 종관(從官) 수십 인이 행궁 근처 인가에 나누어 투숙하였다. 거의가 처량하고 궁핍하여 단지 한두 노복만을 데리고 있었다. 이성중(李誠中) 부자는 단지 종 하나를 데리고 있었는데, 때로는 끼니를 걸러서 남에게 의지하여 날을 보냈다. ○ 24일 비망기를 내려 이르기를, “당초 서울을 떠나던 날, 백관으로 나를 따라 나온 사람은 다 삶을 잊어버렸다. 평양을 떠나 의주로 향할 적에는 인심이 놀라 이산되어 도피하고 흩어지지 않는 자가 없었는데도, 모두 부모를 떠나고 선영을 버리고는 의주의 멀고 거친 곳에까지 나를 따라와 끝까지 게으름이 없으니, 모두 충신이다. 서울로부터 의주에까지 온 사람들은 별도로 성명을 적어서 아뢰도록 하라. 내가 마땅히 간직해서 후일에 볼 자료로 삼겠다. 대가를 호종하여 여기에 도착한 사람에 있어서는 그 공이 어찌 상하의 구별이 있겠는가. 백관의 벼슬을 각각 한 품질씩 올리겠다.” 하니, 대사간 정곤수(鄭崑壽), 지평 신경진(辛慶晉)이 아뢰기를,“인신(人臣)으로서 대가를 따라 어려움을 피하지 않는 것은 바로 그 직책이옵니다. 품질을 올려 주라는 명을 거두시기 바라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경 등의 말이 참으로 옳지만 인정상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소. 자신의 생사를 헤아리지 않고 극히 곤궁할 때에 상종하였으니, 비록 높은 품질과 아름다운 벼슬이라도 무엇이 아깝겠소. 다시 말하지 마오.” 하였다. 이것을 여러 날 논란하였으나 따르지 아니하였다.별록 : 서울부터 의주까지 온 사람을 종시호종(終始扈從)이라 하여 전교하니,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 유성룡(柳成龍)ㆍ우의정 윤두수(尹斗壽)ㆍ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윤근수(尹根壽)ㆍ전 병조판서 김응남(金應南)ㆍ병조판서 이항복(李恒福)ㆍ판윤 박숭원(朴崇元)ㆍ공조 참판 이충원(李忠元)ㆍ이조판서 이산보(李山甫)ㆍ도승지 유근(柳根)ㆍ부제학 이국(李)ㆍ서천군(西川君) 정곤수(鄭崑壽)ㆍ좌승지 홍진(洪進)ㆍ사예(司藝)ㆍ심우승(沈友勝)ㆍ장령 정희번(鄭熙藩)ㆍ병조좌랑 박동량(朴東亮)ㆍ정언 이광정(李光庭)ㆍ평안 병사(平安兵使) 신잡(申磼) 집의 구성(具宬)ㆍ도정(都正) 안황(安滉)ㆍ응교 이유징(李幼澄), 무신으로는 호조좌랑 한연(韓淵)ㆍ군수 기경복(奇景福)ㆍ도사 여정방(呂定邦)ㆍ판관 최응숙(崔應淑) 등 모두 24인이었다.
六月 初一日己丑。時臨津失守。聲息漸急。上命廟堂議去就。寅城府院君鄭澈首曰。此非京城死守之比。可令一大將守之。奉駕而出可也。沈忠謙李德馨又從而和其說。衆議皆以爲然。獨尹斗壽李幼澄朴東亮曰。此不可。我國封疆。南北不過數千里。欲往北道。則窮無可往之地。欲渡鴨綠。則一渡之後。無復可爲。雖或偸生朝夕。亦何益哉。平壤四面絶險。易以防守。軍士過萬。城中壯士。不下數千。粮食且多。離此一步。國事決矣。上曰。國事已付卿。好爲也。是夕李薲至。上問曰。此城之外。無可往之地。不可更生他議也。○上諭群臣曰。予當先向前路。世子可守此城。予當親諭父老。使之與世子共守之。遂出御大同館門諭之。宣諭官沈喜壽。言語悲切。極其愴然。一城父老上下從官。莫不失聲哭。○尹斗壽旣已請兵於天朝。凡接濟之策。不可不先爲講究。遂以沈喜壽。爲接待使。先往義州。又以洪宗籙洪世恭沈友勝。爲三路調度使。分管粮餉。○吏曹佐郞許筬自言。願往江原道。召募軍兵。遂遣之。○初二日都元帥金命元。巡察使韓應寅。只率軍官五六千來。李聖任李薦逃。上召對命元謂曰。今日夫復奈何。命元曰。屢敗之將。免誅足矣。然成敗天也。臣則有死而已。上曰。將帥之言也。朝廷以臨津失守。皆應寅之罪。遂使防守江東諸處。使之立功自效。○上諭群臣曰。中殿不可仍在此城。議去向以啓。皆曰。自上去就定。然後方可議此事也。○李鎰在道啓曰。臣率軍三千。前往行在。但願朝廷堅守平壤。勿生他計。臣當竭力畢命。以效一死。時群議洶洶。去留莫定。及觀此啓。上下頗有死守之心。上命兪泓。留守平壤。泓擧止失措。擧李誠中爲副。處事如中酒者。○上命群臣議去就。尹斗壽曰。一城之人皆曰。願與大駕。死守此城。大駕若出。則當一時皆潰云。人心如此。若能協守。足以抵敵。況以事勢言之。此城之外。不知何地可避。何地爲固也。上曰。卿之言。大沓沓也。○上又與群臣議去就。時上顏色慘沮。語甚悲切。臣僚不敢仰視。鄭澈出謂尹斗壽曰。左相之言。好則好矣。獨不見天顏乎。爲臣子者。安忍挽留。强欲守城乎。斗壽厲聲曰。公何爲誤國之言也。若使京城早有固守之計。豈至於今日乎。公不欲守此城。奉駕獨去之可也。澈無以應。○李德馨沈忠謙。言於朝曰。觀今日之勢。大駕必不肯留守此城。若一朝動駕。住箚之地。不可不預加講定。今封疆已蹙。只有咸鏡一道而已。咸興爲府兵多粮廣。足以拒守。衆曰然。斗壽曰。咸興形勢。半不及此。脫使賊迫。厥後更有可去之地乎。且此賊不往北道乎。公等何以咸興爲固。而爲此不長之計乎。衆以爲。此不可自外廷定之。當請對陳可否。上召問之。皆曰。咸興城險粮足。且召北道土兵協守之。則大不如此城之危。上方欲出城。及聞是說。頗然之。斗壽曰。自上旣不欲守此城。則退住之處。自有三件。急往寧邊。繕修器械。召集江邊土兵以守之。事急則卽向義州。赴訴天朝。以明仍賊入寇之說。上也。遠向江界。集諸郡之兵。嬰城固守。則可支一二月。事急則江界下流卽鴨綠江也。乘船以下。乃上國寬奠堡。二也。咸興形勢。臣所備諳。城大而低。四面無險。欲召土兵。則北虜必乘虛入寇。欲向南道。則道路險絶。未易登過。賊踵其後。必成圍困。此則決不可行也。衆以北道路險而僻。賊必不往。猶以咸興爲往。計遂定。上又命金義元。先往陽德等處。探視道路。翌日又遣李希得。稱巡察使。往北道。又命兪泓。治行侍衛中殿。先向北道。尹斗壽出謂曰。李鎰宿將也。必有所見。待其來。當決北道之行。是午鎰至。滿朝官僚咸仰鎰口發何言。環擁而坐。斗壽問曰。平壤棄守。公意如何。或言咸鏡可往。亦如何。鎰曰。此賊不可當。平壤可以去也。咸興非此城最先受敵之比。可以往也。沈忠謙拊其背曰。眞將帥也。李德馨亦喜曰。所以李鎰也。斗壽曰。失性不足言。○初六日。右議政兪泓。左贊成崔滉等。侍衛中殿。發平壤向咸興。○時賊到臨津十日。朝廷猶不爲哨探。始募得勇士金珍任旭景等十二人送之。遇賊於黃州。斬二級而還。○上巡視城上。召父老。諭以固守之意。咸泣曰。主上若留。則皆當死守。○上命左相尹斗壽。率金命元以下。留守平壤。上欲使世子守平壤。斗壽命元等以爲。人心視大駕爲去就。大駕旣出。雖世子守此。無益也。仍啓曰。臣等當極力守之。世子不必留也。上允之。命中和等軍。疊入于平壤。○初七日朝。副提學沈忠謙。率三司請對。言臣等之意。此非京城之比。不當死守。更思之。此外無如此城之固者。必以爲不可去也。蓋賊勢稍緩故也。及午。中和郡人來。賊已到本郡。沈忠謙又率三司入對。言賊勢已迫。大駕不可留也。○吏曹正郞李幼澄請對。極諫不可去之意。上曰。爾言則是。第予則切欲出城以觀變也。○初八日賊到大同江邊。上聞賊已到。遂命治行。○遼東巡按御史。遣鎭將一人來。上接見于大同館。歷言當初事情。鎭將登練光亭。望見賊騎橫馳曰。是固倭也。遂不留而還。朝廷以爲。天朝若有詰問之事。則不可無應對之人。遂以尹根壽遣之。○是夜賊使被擄人致書曰。願見漢陰李先生。指德馨也。廷議以爲。德馨接話之後。事若不順。不如使勇士擊殺調信等也。斗壽以爲。國勢雖如此。豈可效盜賊之智乎。只可見之而已。或以爲。見賊之後。若有不忍聞之說。受辱尤大。不如不送。德馨曰。見之則或有緩師之理。請見之。朝廷亦有萬一之望。遂遣之。○初九日李德馨到江上。賊將平調信玄蘇世俊等至。各乘船會於中流。酌酒話。德馨曰。今日之擧。何名也。玄蘇曰。欲與貴國相通。則自東萊至京城。皆不得傳語。遂輾轉至此耳。德馨曰。今旣與通彼此矣。盍退師乎。古之諸侯。陳師載盟皆退舍。今可退師。徐有所議也。賊曰。今本但知進。不知退一步也。遂罷還。勇士朴成景等在傍知事不成。欲殺之。德馨目止之。○先是。承旨閔汝慶盧稷等。聞臨津失守皆稱病不仕。至是見國事已去。首先出城。士大夫效此。多欲逃去者。○初十日駕將發。宮人多先出去者。城中人民持斧杖。要諸路。亂擊之。判尹洪汝諄被傷墜馬。父老男女。塡塞宮門之外。痛哭呼曰。我等之不出。欲恃大駕爲之死守也。賊已到門外。遽欲棄我等去。是殺我也。寧死於上。不願死於賊。遂欲毀破宮門。逐散諸宰。兵曹佐郞朴東亮見事急。入謂承旨曰。民情如此。事將不測。今日停行以慰安。然後方可行也。承旨等啓之。遂停行。承旨出謂曰。今日停行。爾等可退去。衆不之信。猶喧聒欲亂。李幼澄遂大書停行二字於板。使人登屋上遍示之。始稍稍散去。○十一日大駕發平壤。左相尹斗壽,都元帥金命元,巡察使李元翼,監司宋言愼,兵使李潤德,校理金信元,吏曹佐郞李好閔等。送之普通門而辭。歷順安夕到肅川。多官議曰。今者國事已急。大駕北道之行。亦不可必。若是則中殿豈可獨留北道乎。不如退回于寧邊。觀勢去就。可也。上從之。○朝廷又以請兵天朝。事莫重焉。豈可只送譯官而望其救乎。遂遣大司憲李德馨。稱請援使。急往遼東。○又遣洪汝諄。巡察陽德等處。以防自北向西之路。○十二日駕到安州雲巖院。人民逃散。遂闕膳。李陽元敗到安邊。遣從事官金廷睦口達。李渾盡殲淮陽之賊。蓋聞道路之言也。上欲親問之。召史官入侍。則注書任就正朴鼎賢翰林金善餘趙存世已散去。自此諸從官皆落後。從駕者不滿十餘。而亦皆任意。或先或後。侍衛者蓋無多。○夕到安州。上見道上軍士還。問之則皆逃散者也。遂命持平李慶祺。馳往慈山等處。招集逃軍。赴軍前。○十三日駕到寧邊。城中人畜俱已散去。判官黃沂亦自外村始來。上下皆闕飯。是夜韓應寅馳啓曰。賊已渡江東外灘。只隔一灘。相與對陣。上遂召群臣謂曰。今日之勢。已無可爲。然予與世子。同往一處。則更無可望。不如分往。但今日所向何定。承旨李曰。上國父母之邦也。今當往義州。赴訴天朝。事若不利。君臣當同死鴨綠江。聲大義於天下可也。柳成龍李恒福亦曰。此言大是。請往義州。上曰。予若渡遼。諸臣有能從我者乎。李恒福李泣對曰。臣等願從行。上顧謂崔興源李憲國李誠中曰。卿皆老矣。可從世子。又謂韓準曰。卿有父母。亦可從世子。群臣皆泣。上亦垂涕。○十四日遣雲山郡守成大業翊衛柳希聃。迎中殿及世子嬪以來。兪泓等扈中殿到德川。累奏請急向咸興。日有促迫之言。中殿敎曰。當初雖有咸興之命。今大駕去就。尙未的知。一踰此嶺之後。事有倉卒。必致狼狽。遂留五日。以此大業等追及之。○時大駕世子將分行。而侍衛之官。親承上命者外。皆不知所向。領議政崔興源遂列書姓名以啓。上遂落點。蓋上以渡遼。則人所厭避。而又非老病輩所能從。擇令無病可遠行者從駕。持平李廷臣聞其當從駕遂不辭。上又以韓準方判戶曹。不可暫離。遂命從行。準托以落傷出城去。○上又謂世子曰。國事已至此。更無望矣。吾父子同往一處。事若倉卒。後無可爲之事。今予當赴訴上國。世子奉廟社主。急往江界等處。以圖恢復。可也。因相對哭。○十五日上辭廟社主痛哭。世子亦痛哭。上謂世子官屬曰。國家之事。付在世子身上。爾等盡乃心力。好爲輔佐。以圖再造。駕將發。世子辭兩宮。從官各失聲。牽馬僕隷。莫不泣下沾襟。○駕到博川。境內居民。如舊處處耘鋤。上駐馬問曰。列郡皆空。爾等何以不移避耶。皆曰。郡守在平壤。送人諭諸民曰。事若難。我當避。我避之後。猶可出去。姑盡力作農。以此安心不避矣。上曰。民之聚散。由上所使。此非處置得宜者乎。○午到博川郡。自平壤來者曰。昨日尹斗壽金命元。得壯士四百餘人。夜渡江斫賊營。所殺賊極多。但以將曉擧事。進退酣戰之際。天色已明。賊軍大至。我軍乘船亂渡。賊追及之。壯士任旭景閔汝虎等。至大同江邊。倒執一賊。左右亂揮。賊不敢近。所擊殺十餘。竟溺死。都元帥在練光亭上。目見之。痛惜之。恨其不大擧。冒夜渡江云。○持平李慶祺來言。亂軍潰去。無力可禁。不得已還來。司諫柳永慶曰。當此孔棘之日。召集軍兵。事非不重。而受命二日。旋卽空手而還。曰我不能也。豈可如兒戱乎。速往其處。再圖收集。慶祺不得已再往。因不還。○中殿自德川。乘暮而至。右議政兪泓聞百官分行。遂啓曰。臣已老矣。不得渡遼。請從世子。恢復之後。當迎駕而回。上從之。○夕李元翼遣李好閔來言。昨夕賊於靑銀灘等處。分遣其衆。以試欲渡之形。守灘將金億秋許淑李潤德等。一時逃潰。上下列陣之軍。亦從而潰。賊遂入平壤矣。上遂令治行。中殿自德川到博川。踰山越澗。一日所行。幾一百六十里。而未下轎。又聞箕城之報。郡中大擾。遂闕膳而行。○時衛將李瓘成壽益等。相繼散去。扈駕者。惟內宦五六而已。博川郡內五里。樹木茂密。天又雨。一行僅四五十人。人心危懼。若不能保。甚於臨津之夕。○時世子遣輔德趙挺。問安于上。挺之還。上手書致世子曰。予生旣爲亡國之君。死將爲異域之鬼。父子相離。更無可見之日。惟望世子再造舊物。上慰祖宗之靈。下迎父母之還。臨楮涕下。不知所言。時世子方駐開平驛。趙挺卽向京畿不之傳○上三更發博川。平明到嘉山。十六日駕到嘉山。賊聲漸急。從官散去。殆無餘者。上遣咨遼東。遂請內附。大駕到定州。○又遣人哨探賊形止而來。金命元在安州。馳啓曰。臣等在此時。賊形續當馳報。上遂留定州。○又遣安滉等。取信城定遠兩王子寧邊郡以回。○駕到平壤之後。連報賊情于遼東。自此咨揭絡繹。而回答體觀。無得知者。上遂命從官寫之。有不成形者。○十七日寅城府院君鄭澈豐原府院君柳成龍。率大司諫鄭崑壽。欲請上授世子監國之任。遂入對。上問曰。卿等有何所言。澈成龍等只言。國事如此。已無可爲。奈何奈何。遂退出。或曰。世子已受監國之任。澈等之意。欲上傳位。囁嚅不能發也。○十八日駕發定州向郭山。上召謂柳成龍曰。今日之行。專爲內附也。卿可先行。如遇天朝人之來。必先道賊情。後言渡遼之意。○駕到郭山。聞遼東巡按。遣副摠兵祖承訓參將郭夢徵遊擊史儒。領三千騎。到雲興館。上遂往見之。上歷言我國前後事情。從官等列伏上前。俱言所見。語極喧鬧。參將郭夢徵曰。貴國君臣。一處鬨亂。有同聚訟。殆無禮也。上命諸臣皆出。總兵以下。知平壤已失守。遂還。○左相尹斗壽追至啓曰。臣不能死守。致有今日。願受軍律。上曰。國勢已去。豈卿之罪。上到宣川郡。夕巡按御史又遣指揮張姓者。來咨中。有爾國謀爲不軌等語。又曰。八道觀察使。何無一言之及於賊。八道郡縣。何無一人之倡大義。何日陷其道。何日陷其州。某人死於節。某人附於賊。賊將幾人。軍數幾萬。逐一計聞。俱錄以報。天朝自有開山砲。大將軍砲。神火鏢鎗。猛將精兵。霧列雲馳。倭兵百萬。不足數也。況文武智略之士。足以灼見奸謀。逆折凶萌。雖有蘇張鞅睢之徒。復生於世安得以窺天朝之淺深乎。上覽咨竦然曰。此蓋疑我國與賊同謀。而爲此恐動之言。以試我國之對也。遂謂指揮曰。此咨當隨後委遣陪臣也。指揮出謂譯官曰。我乃黃天使參隨也。巡按以我曾見國王面目。使之來見眞僞耳。咨中所言。特假設之辭。爾國其勿恐懼也。○時大駕行色殊甚悤率。一路人民。見之以爲。倭賊在後。朝夕當追及。駕經之後。良民奔波。塡咽山峽。若其無籍之輩。乘擾攘之隙。嘯聚徒衆。掠出官穀。寧邊郭山殆甚。宣川郡守李瀅。言于朝曰。郡中亦有百餘屯集。待明日駕發之後。將效寧邊民所爲。非老儒所制。乞賜處置。朝廷遂代以武臣。得免焚燒劫掠之患○十九日駕次車輦館。所經之地。人民室屋。案堵如舊。無異博川郡。支供豐厚。上命簡之。勿使侈汰。○二十日次龍川郡。尹斗壽啓曰。今日之行。專爲赴訴天朝。以此兼程疾馳。已到于此。但遽到義州。人心大駭。將無以收拾。況今賊勢頗緩。先使義州等官。收集散兵。諭以不卽渡遼之意。使有所恃。然後更觀二三日後。緩緩征進。則遠近不至失望矣。上從之。○平壤失守之後。宋言愼李潤德。俱向煕川等處。久不還。金命元率李元翼李薲住定州。只有軍官數十餘人。不知所爲。遂令李元翼。往江邊收土兵。李薲往山郡徵兵。命元獨守空城而已。○二十一日慶尙右水使元均。巨濟前洋大捷報至。上問使者。以嶺南之事。對曰。監司金睟。方在咸安等處。不知聲聞。大賊只由直路而行。故列郡被兵。纔是當路之地。左右道分爲二境。號令不通。彼此所爲。邈不相聞。但聞兵使金誠一。率軍官數三十。猝遇賊。衆欲散走。誠一遂下馬踞胡床。攔路而坐。賊見其唐突。疑其有伏。盤桓不進。久乃引去云。到京畿。聞列郡人民皆以爲今日之賊。非倭也。乃叛國叛國不殺良民。遂多不出避之。以此盡屠殺。旣知其倭賊。後始稍稍引避去。○朝廷以列郡官穀。盡被搶掠。若不收檢。天兵出來之日。必無以供給。遂遣掌令鄭煕藩于鐵山。正言李光庭于龍川倉査驗。又以大軍一散之後。遁入山谷。久不就視。遂遣司諫柳永慶于江界渭原理山等郡。執義鄭光績于碧潼昌城等府。急令號召。遣赴金命元處。○二十三日。大駕到龍灣館。以牧使所居爲行宮。遂居之。時城中人民皆散。鷄犬亦皆空。鳥雀不飛。有似荒山廢寺。從官數十人。分投行宮近處人家。率皆荒涼困迫只有一二奴僕。李誠中父子二人。只有一奴。有時闕飯。依人度日。○二十四日。備忘記曰。當初去京城之日。百官從予而出者。皆忘生也。及其去平壤向義州。人心駭散。莫不逃避潰裂。而俱能離父母棄墳墓。從予于義州荒絶之地。終始無怠。皆忠臣也。自京城至義州人等。別具姓名以啓。予當留以爲後日之觀。至於扈駕到此。其功豈有上下之別乎。百官各陞一秩。大司諫鄭崑壽持平辛慶晉啓曰。人臣從駕。不避艱難。乃其職也。請收陞秩之命。上曰卿等之言固是。然人情豈如是乎。不計身之死生。相從於涸轍爛鼎之中。雖高秩美爵。安足惜乎。勿更言。論之數日。不從。 別錄自京城至義州者謂之終始扈從傳敎也豐原府院君柳成龍右議政尹斗壽海平府院君尹根壽前兵曹判書金應南兵曹判書李恒福判尹朴崇元工曹參判李忠元吏曹判書李山甫都承旨柳根副提學李西川君鄭崑壽左承旨洪進司藝沈友勝掌令鄭煕藩兵曹佐郞朴東亮正言李光庭平安兵使申磼執義具宬都正安滉應敎李幼澄武臣戶曹佐郞韓淵郡守奇景福都事呂定邦判官崔應淑凡二十四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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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25일 (갑진) | ||||
공신을 대대적으로 봉하였다. 서울서부터 의주(義州)까지 시종 어가(御駕)를 모신 사람을 호성 공신(扈聖功臣)으로 삼고, 왜적을 정벌한 제장(諸將)들과 군량을 주청하러 간 사신들을 선무 공신(宣武功臣)으로 삼고,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토벌한 자를 청난 공신(淸難功臣)으로 삼아, 모두 3등급으로 나누고 차등 있게 봉호(封號)를 내렸다.
호성 공신 1등에는 이항복·정곤수(鄭崐壽), 2등에 신성군 이우(信城君李珝)·정원군 이부(定遠君李琈)【이 분이 원종 대왕(元宗大王)이다.】·이원익(李元翼)·윤두수(尹斗壽)·심우승(沈友勝)·이호민(李好閔)·윤근수(尹根壽)·유성룡·김응남(金應南)·이산보(李山甫)·유근(柳根)·이충원(李忠元)·홍진(洪進)·이괵(李)·유영경(柳永慶)·이유징(李幼澄)·박동량(朴東亮)·심대(沈岱)·박숭원(朴崇元)·정희번(鄭姬藩)·이광정(李光庭)·최흥원(崔興源)·심충겸(沈忠謙)·윤자신(尹自新)·한연(韓淵)·해풍군 이기(海豊君李耆)·순의군 이경온(順義君李景溫)·순령군 이경검(順寧君李景儉)·신잡(申磼)·안황(安滉)·구성(具宬), 3등에 정탁(鄭琢)·이헌국(李憲國)·유희림(柳希霖)·이유중(李有中)·임발영(任發英)·기효복(奇孝福)·최응숙(崔應淑)·최빈(崔賓)·여정방(呂定邦)·이응순(李應順)·절신정 이수곤(節愼正李壽崐)·송강(宋康)·고희(高曦)·강인(姜絪)·김기문(金起文)·최언순(崔彦恂)·민희건(閔希鶱)·허준(許浚)·이연록(李延祿)·김응수(金應壽)·오치운(吳致雲)·김봉(金鳳)·김양보(金良輔)·안언봉(安彦鳳)·박충경(朴忠敬)·임우(林祐)·김응창(金應昌), 정한기(鄭漢璣)·박춘성(朴春成)·김예정(金禮禎)·김수원(金秀源)·신응서(申應瑞)·신대용(辛大容)·김새신(金璽信)·조귀수(趙龜壽)·이공기(李公沂)·양자검(梁子儉)·백응범(白應範)·최윤영(崔潤榮)·김준영(金俊榮)·정대길(鄭大吉)·김계한(金繼韓)·박몽주(朴夢周)·이사공(李士恭)·유조생(柳肇生)·양순민(楊舜民)·경종지(慶宗智)·최세준(崔世俊)·홍택(洪澤)·이춘국(李春國)·전용(全龍)·이희령(李希齡)·오연(吳連) 등 총 86인이요, 내시(內侍) 24인, 마의(馬醫) 6인, 의관(醫官) 2인, 별좌 사알(別坐司謁) 2인이다. 선무 공신은 1등에 이순신·권율·원균, 2등에 신점(申點)·권응수·김시민·이정암·이억기, 3등에 정기원(鄭期遠)·권협(權悏)·유충원(柳忠瑗)·고언백(高彦伯)·이광악(李光岳)·조경(趙儆)·권준(權俊)·이순신(李純信)·기효근(奇孝謹)·이운룡(李雲龍) 등 총 18인이다. 청난 공신은 1등에 홍가신(洪可臣), 2등에 박명현(朴名賢)·최호(崔湖), 3등에 신경행(辛景行)·임득의(林得義) 등 모두 5인이다.【호성 공신(扈聖功臣) 1등은 충근정량갈성효절협책(忠勤貞亮竭誠効節協策)의 호를 내리고, 2등은 갈성 2자를 줄이고, 3등은 또 효절협책의 4자를 줄였다. 선무 공신(宣武功臣) 1등은 효충장의적의협력(効忠仗義迪毅協力)의 호를 내리고, 2등은 적의 2자를 줄이고, 3등은 또 협력 2자를 줄였다. 청난 공신(淸難功臣) 1등은 분충출기합모적의(奮忠出氣合謀迪毅)의 호를 내리고, 2등은 합모 2자를 줄이고, 3등은 또 적의 2자를 줄였다.】 【원전】 25 집 694 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甲辰/大封功臣。 以自京城至義州, 終始隨駕者爲扈聖功臣, 以征倭諸將及兵糧奏請使臣爲宣武功臣, 以討平李夢鶴爲淸難功臣, 皆分三等, 錫號有差。 其扈聖一等: 李恒福、鄭崐壽, 二等: 信城君珝、定遠君諱琈、【是爲元宗大王】李元翼、尹斗壽、沈友勝、李好閔、尹根壽、柳成龍、金應南、李山甫、柳根、李忠元、洪進、李、柳永慶、李幼澄、朴東亮、沈岱、朴崇元、鄭姬藩、李光庭、崔興源、沈忠謙、尹自新、韓淵、海豊君耆、順義君景溫、順寧君景儉、申磼、安滉、具宬, 三等: 鄭琢、李憲國、柳希霖、李有中、任發英、奇孝福、崔應淑、崔賓、呂定邦、李應順、節愼正、壽崐、宋康、高曦、姜絪、金起文、崔彦恂、閔希騫、許浚、李延祿、金應壽、吳致雲、金鳳、金良輔、安彦鳳、朴忠敬、林祐、金應昌、鄭漢璣、朴春成、金禮禎、金秀源、申應瑞、辛大容、金璽信、趙龜壽、李公沂、梁子儉、白應範、崔潤榮、金俊榮、鄭大吉、金繼韓、朴夢周、李士恭、柳肇生、楊舜民、慶宗智、崔世俊、洪澤、李春國、全龍、李希齡、吳連, 凡八十六人。 內侍二十四人, 馬醫六人, 醫官二人, 別坐司謁二人。 宣武一等: 李舜臣、權慄、元均, 二等: 申點、權應銖、金時敏、李廷馣、李億祺, 三等: 鄭期遠、權悏、柳忠瑗、高彦伯、李光岳、趙儆、權俊、李純信、奇孝謹、李雲龍, 凡十八人。 淸難一等: 洪可臣, 二等: 朴名賢、崔湖, 三等: 辛景行、林得義, 凡五人。【扈聖一等賜忠勤貞亮竭誠効節協策之號, 二等減竭誠二字, 三等又減効節協策四字。 宣武一等賜効忠仗義迪毅協力之號, 二等減迪毅二字, 三等又減協力二字。 淸難一等賜奮忠出氣合謀迪毅之號, 二等減合謀二字, 三等又減迪毅二字。】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25책 694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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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29일 (을해) | ||||
호성 공신(扈聖功臣)의 교서를 반급할 적의 별교서(別敎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대들의 공로를 버릴 수 없음은 세상 사람들을 면려시키기 위한 당연한 일이요, 공이 있으면 반드시 상을 주는 일은 가장 우선하는 정사이다. 지난번 역이(逆夷)들이 난(亂)을 얽어내기 위해 감히 길을 빌자는 흉계를 부렸는데, 이런 고통을 부모에게 호소하는 것은 정리상 실로 당연한 것이다. 외적을 편들기 위해 황제를 저버리는 것은 죽어도 할 수 없는 일이거든, 평소 지성으로 사대(事大)하였으니 내가 어찌 감히 생각이나 할 수 있겠는가. 힘을 다해 주선(周旋)하기에 분주하여 신하들 또한 수고로왔다. 충정(忠貞)한 절개를 바쳐 말고삐를 잡고 치달리는 수고로움을 극진히 하였으니, 일은 같지 않지만 그 공로는 다를 바 없다. 교서(敎書)로 호칭을 내려 크게 맹약(盟約)하는 반열에서 고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에 이항복(李恒福)·정곤수(鄭崑壽)를 1등(等)에 책훈(策勳)하고, 모습을 그려 후세에 전하며, 관작과 품계를 세 자급(資級) 초천한다. 그의 부모와 처자도 세자급을 초천하되, 아들이 없으면 생질(甥姪)과 여서(女壻)를 두 자급 초천하라. 적장(嫡長)은 세습(世襲)케 하여 녹봉을 잃지 않게 할 것이며 대대로 영원히 사유(赦宥)를 받게 하라. 이에 반당(伴倘) 10인, 노비(奴婢) 13구, 구사(丘史) 7명, 전지(田地) 1백 50결, 은자(銀子) 10냥, 내구마(內廐馬) 1필을 하사한다. 신성군 이익(信城君李珝)·정원군 이부(定遠君李琈)·이원익(李元翼)·윤두수(尹斗壽)·심우승(沈友勝)·이호민(李好閔)·윤근수(尹根壽)·유성룡(柳成龍)·김응남(金應南)·이산보(李山甫)·유근(柳根)·이충원(李忠元)·홍진(洪進)·이곽(李)·유영경(柳永慶)·이유징(李幼澄)·박동량(朴東亮)·심대(沈岱)·박숭원(朴崇元)·정희번(鄭熙藩)·이광정(李光庭)·최흥원(崔興源)·심충겸(沈忠謙)·윤자신(尹自新)·한연(韓淵)·해풍군 이기(海豊君李耆)·순의군 이경온(順義君李景溫)·순녕군 이경검(順寧君李景儉)·신잡(申磼)·안황(安滉)·구성(具宬)은 2등에 책훈하고 모습을 그려 후세에 전하며, 관작과 품계를 두 자급 초천한다. 그들의 부모와 처자도 두자급을 초천하되, 아들이 없으면 생질과 여서를 한 자급 초천하라. 적장은 세습케 하여 그 녹봉을 잃지 않게 할 것이며, 대대로 영원히 사유(赦宥)를 받게 하라. 이에 반당 6인, 노비 9구, 구사 4명, 전지 80결, 은자 7냥, 내구마 1필을 하사한다. 정탁(鄭琢)·이헌국(李憲國)·유희림(柳希霖)·이유중(李有中)·임발영(任發英)·기효복(奇孝福)·최응숙(崔應淑)·최빈(崔賓)·여정방(呂定邦)·송강(宋康)·고희(高曦)·이응순(李應順)·절신정 수곤(節愼正壽崑)·강인(姜絪)·김기문(金起文)·최언준(崔彦悛)·민희건(閔希騫)·허준(許浚)·이연록(李延祿)·김응수(金應壽)·오치운(吳致雲)·김봉(金鳳)·김양보(金良輔)·안언봉(安彦鳳)·박충경(朴忠敬)·임우(林估)·김응창(金應昌)·정한기(鄭漢璣)·박춘성(朴春成)·김예정(金禮禎)·김수원(金秀源)·신응서(申應瑞)·신대용(辛大容)·김새신(金璽信)·조구수(趙龜壽)·이공기(李公沂)·양자검(梁子儉)·백응범(白應範)·최윤영(崔潤榮)·김준영(金俊榮)·정대길(鄭大吉)·김계한(金繼韓)·박몽주(朴夢周)·이사공(李士恭)·유조생(柳肇生)·양순민(楊舜民)·경종지(慶宗智)·최세준(崔世俊)·홍택(洪澤)·전용(全龍)·이춘국(李春國)·오연(吳連)·이희령(李希齡)은 3등에 책훈하고, 모습을 그려 후세에 전하며, 품계와 관작을 한 자급 초천한다. 그들의 부모와 처자도 한 자급 초천하되, 아들이 없으면 생질과 여서를 가계(加階)하라. 적장은 세습케 하여 녹봉을 잃지 않게 할 것이며, 대대로 영원히 사유를 받게 하라. 이에 반당 4인, 노비 7구, 구사 2명, 전지 60결, 은자 5냥, 내구마 1필을 하사한다. 공(功)의 등급이 1등에서 3등까지여서 고하(高下)가 다른 것을 면할 수 없고, 상(賞)의 은수(恩數)가 많기도 하고 작기도 하여 경중의 차이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어떻게 감히 그 공을 잊을 수 있겠는가. 애오라지 가상히 여기는 마음을 표하는 바이다. 아, 황상께서 재조(再造)하여 준 은총은 진실로 전고에 없던 것이니 군신(君臣)을 일체로 여긴 성은(聖恩)이 후세에까지 전해가기를 바란다. 가서 신명(新命)을 받아 모두 열복하는 지극한 마음을 품으라. 때문에 교시(敎示)하노니 잘 알 것으로 여긴다.” 【원전】 24 집 687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인사(人事) / *농업(農業) / *가족(家族) / *신분(身分)
○扈聖功臣敎書頒給時, 別敎書
王若曰: “無棄爾勞, 礪世之當務; 有功必賞, 爲政之所先。 永言構亂之逆夷, 敢肆假途之兇計。 極痛呼父, 於情固然。 以賊遺君, 雖死不可。 顧平昔至誠事大, 予何敢云念奔走? 竭力周旋, 臣亦勞止。 乃至効忠貞之節, 以致盡羈紲之勤。 雖事不同, 厥功則一。 宜敷渙汗之號, 誕告盤血之班。 肆策勳李恒福、鄭崑壽爲一等, 圖形垂後, 超三階爵, 其父母妻子, 亦超三階, 無子則甥姪女壻超二階, 嫡長世襲, 不失其祿, 宥及永世。 仍賜伴倘十人、奴婢十三口、丘史七名、田一百五十結、銀子十兩、內廐馬一疋。 信城君珝、定遠君琈、李元翼、尹斗壽、沈友勝、李好閔、尹根壽、柳成龍、金應南、李山甫、柳根、李忠元、洪進、李、柳永慶、李幼澄、朴東亮、沈岱、朴崇元、鄭熙藩、李光庭、崔興源、沈忠謙、尹自新、韓淵、海豐君耆、順義君景溫、順寧君景儉、申磼、安滉、具宬爲二等, 圖形垂後, 超二階爵, 其父母妻子, 亦超二階, 無子則甥姪女壻, 超一階, 嫡長世襲, 不失其祿, 宥及永世。 仍賜伴倘六人、奴婢九口、丘史四名、田八十結、銀子七兩、內廐馬一疋。 鄭琢、李憲國、柳希霖、李有中、任發英、奇孝福、崔應淑、崔賓、呂定邦、宋康、高曦、李應順、節愼正壽崑、姜絪、金起文、崔彦俊、閔希騫、許浚、李延祿、金應壽、吳致雲、金鳳、金良輔、安彦鳳、朴忠敬、林佑、金應昌、鄭漢璣、朴春成、金禮楨、金秀源、申應瑞、辛大容、金璽信、趙龜壽、李公沂、梁子儉、白應範、崔潤榮、金俊榮、鄭大吉、金繼韓、朴夢周、李士恭、柳肇生、楊舜民、慶宗智、崔世俊、洪澤、全龍、李春國、吳連、李希齡爲三等, 圖形垂後, 超一階爵, 其父母妻子, 亦超一階, 無子則甥姪女壻加階, 嫡長世襲, 不失其祿, 宥及永世。 仍賜伴倘四人、奴婢七口、丘史二名、田六十結、銀子五兩、內廐馬一匹。 功之等級, 一而三, 未免高下之異; 賞之恩數, 多若寡, 抑有輕重之差? 何敢忘之? 聊表嘉乃。 於戲! 皇上再造之天寵, 固是無前; 君臣一體之聖恩, 庶幾垂後。 往膺新命, 咸服至懷。 故玆敎示, 想宜知悉。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24책 687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인사(人事) / *농업(農業) / *가족(家族) / *신분(身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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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일록 2(壬辰日錄二) 선조 25년, 만력 20년 6월 5일에 시작하였는데, 대체로 한 달간의 기록임. |
6월
1일(기축) 이때에 임진강의 방어가 무너져서 사태가 점점 급박하여서 상이 묘당에 명하여 거취를 의론케 하였다. 인성부원군 정철(鄭澈)이 먼저 말하기를,
“이는 서울을 사수하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니, 한 대장에게 명하여 지키게 하고 대가를 받들고 나가야 합니다.”
하였다. 심충겸(沈忠謙)ㆍ이덕형(李德馨)이 또 그 말에 동조하니 여러 의론이 다 옳게 여겼다. 유독 윤두수(尹斗壽)ㆍ이유징(李幼澄)ㆍ박동량(朴東亮) 등이 말하기를,“이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의 강토는 남북이 수천 리에 불과합니다. 북도로 가면 너무 좁아서 갈 만한 곳이 없고, 압록강을 건너가면 한 번 건너간 뒤에는 다시 어찌해 볼 수가 없습니다. 비록 조석은 구차하게나마 살 수 있다 하더라도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평양은 사면이 매우 험하여 적을 방어하기 쉬울 뿐더러 군사가 만을 넘고 성중의 장사도 수천을 헤아리고, 양식이 또한 많습니다. 이곳을 한 발자국이라도 떠나게 되면 국사는 결단이 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국사를 이미 경들에게 맡겼으니, 잘들 하시오.”
하였다. 이날 저녁에 이빈(李薲)이 오니, 상이 이르기를,“이 성 이외에는 갈 만한 곳이 없으니 다시 다른 의론을 내지 마오.”
하였다.○ 상이 여러 신하에게 타이르기를,
“내가 먼저 앞길을 향하여 갈 것이니, 세자는 이 성을 지켜야 한다. 내 부로(父老)들에게 친히 유시하여 그들로 하여금 세자와 함께 이 성을 지키게 하겠다.”
하고, 드디어 대동관(大同館)의 문으로 납시어 유시하였다. 선유관(宣諭官) 심희수(沈喜壽)의 말이 너무도 슬프고 비장하여 성안의 부로와 상하 수종관(隨從官)들이 모두 목놓아 울었다.○ 윤두수는 이미 천조에 군대를 요청하였으므로 모든 접제(接濟)의 방책을 먼저 강구하지 않을 수 없어서, 심희수를 접대사(接待使)로 삼아 먼저 의주로 보내고, 또 홍종록(洪宗籙)ㆍ홍세공(洪世恭)ㆍ심우승(沈友勝)을 삼로(三路)의 조도사(調度使)로 삼아 군량을 나누어 관장하게 하였다.
○ 이조 좌랑 허성(許筬)은 스스로 말하기를,
“군병을 모집하러 강원도로 가겠습니다.”
하여, 그를 보냈다.○ 2일 도원수 김명원ㆍ순찰사 한응인이 군관 5ㆍ6천 명만을 인솔하여 왔고, 이성임(李聖任)과 이천(李薦)은 도주하였다. 상이 김명원을 소대(召對)하여 이르기를,
“오늘날 이 지경이 된 것을 다시 어찌하겠소?”
하니, 김명원이 아뢰기를,“여러 번 패한 장수로 죽음을 면한 것으로 만족하옵니다. 그러나 성패(成敗)는 하늘에 달려 있사오니, 신에게는 죽음만이 있을 뿐이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장수다운 말이로다.”
하였다. 조정에서는 임진강을 지키지 못한 것은 다 한응인의 죄라 하고, 드디어 강동의 여러 곳을 방어하게 하여 그로 하여금 몸 바쳐 공을 세우게 하였다.○ 상이 여러 신하에게 유시하기를,
“중전이 이 성에 그대로 있어서는 안 되니, 갈 곳을 의론하여 아뢰라.”
하니, 모두 아뢰기를,“상께서 거취를 정한 뒤에 이 일을 의론함이 옳겠습니다.”
하였다.○ 이일(李鎰)이 도(道)에 있으면서 아뢰기를,
“신이 군사 3천을 이끌고 행재소(行在所)로 가겠습니다. 부디 조정에서는 평양을 굳게 지키고 다른 계교를 내지 말기를 바라옵니다. 신은 마땅히 힘과 목숨을 다하여 죽음을 바치려 합니다.”
하였다. 이때에 여러 의론이 이러니저러니 하여 거취를 정하지 못하다가 이 장계를 보고 상하가 모두 사수할 생각이 있었다. 임금이 유홍(兪泓)에게 명하여 평양을 지키게 하니 유홍이 어쩔 줄 몰라 하였고, 이성중(李誠中)을 천거하여 부관으로 삼았다. 그는 일을 처리하는 것이 술에 취한 자 같았다.○ 상이 여러 신하에게 명하여 거취를 의론하게 하였는데, 윤두수가 아뢰기를,
“온 성안 사람들이 다 말하기를, ‘대가를 모시고 이 성을 사수하려 하는데, 대가가 만일 성을 나가면 일시에 모두 흩어져 갈 것이다.’ 합니다. 인심이 이와 같사오니, 만일 협력하여 지키면 적을 막을 수 있을 것이옵니다. 더구나 사세로 말하오면 이 성 이외에 어느 곳이 피할 만한 곳인지 어느 곳이 견고한 지를 알지 못하겠나이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경의 말은 대단히 답답도 하오.”
하였다.○ 상이 또 여러 신하와 거취를 의론할 적에 상의 얼굴빛이 처참하고 말씨가 대단히 비장하니, 신료들이 감히 우러러 보지 못하였다. 정철이 나와 윤두수에게 말하기를,
“좌상의 말씀이 좋기는 합니다만, 임금의 안색을 뵙지 못하였소? 신하된 자로 어찌 차마 만류하여, 억지로 성을 지키고자 하겠습니까.”
하니, 윤두수는 소리를 높여 말하기를,“공은 어찌하여 나라를 그르칠 말을 하오. 만일 일찍 서울을 고수할 계획을 세웠던들 어찌 오늘에 이르렀겠소. 공이 이 성을 지키고 싶지 않다면 대가를 받들고 혼자 여기를 떠나는 것이 옳겠소.”
하였다. 이에 정철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이덕형ㆍ심충겸이 조정에서 말하기를,
“오늘날의 형세를 보건대, 대가가 반드시 머물러 이 성을 지키기를 달게 여기시지 않을 것이니, 만일 하루아침에 대가가 움직이게 된다면 머무를 곳을 미리 강구하여 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국토가 이미 좁아져 함경도 한 도만이 있을 뿐입니다. 함흥부에는 군사가 많고 양식이 풍족하여 방어할 만합니다.”
하니, 여러 사람이 동의하였다. 윤두수가 말하기를,“함흥의 형세로는 절반도 이 곳만 못하오. 가령 적이 밀려오면 그 뒤에 다시 옮길 만한 곳이 있겠소? 또 적이 북도라고 안 갈 것 같소? 공 등은 어찌하여 함흥이 견고하다고만 하여 이 같은 장구하지 못한 계획만을 내오.”
하니, 여러 사람이 말하기를,“이것을 임금을 모신 자리에서 정하는 것이 옳으니, 마땅히 면대를 청하여 가부를 아룀이 좋겠소.”
하였다. 상이 이들을 불러서 이 문제를 물으니, 모두 아뢰기를,“함흥은 성이 험하고 양식이 넉넉하고 또 북도의 토병(土兵)을 소집하여 그들과 협력하여 지키면 평양과 같이 위태롭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마침 성을 나가려든 참이었는데, 이 주장을 듣고 매우 그럴듯하게 여겼다. 윤두수가 아뢰기를,“상께서 이미 이 성을 지키고자 않으신다면 물러가 머무를 곳은 세 곳이 있습니다. 첫째 급히 영변(寧邊)으로 가 기계를 수선하고 강변의 토병을 소집하여 지키다가 일이 급하면 바로 의주로 향하여 중국 조정에 나아가 왜적이 침입했다는 말을 분명히 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둘째는 멀리 강계(江界)로 향하여 여러 고을의 군사를 모아 성문을 굳게 닫고 견고히 지키면 한두 달은 지탱할 수 있습니다. 일이 급하게 되면 강계의 하류가 바로 압록강이므로 배를 타고 내려가면 바로 상국(上國)의 관전보(寬奠堡)이니, 이것이 차선책입니다. 셋째는 함흥의 형세는 신이 두루 알고 있는데 성은 크되 낮고 사방이 험하지 않으니, 토병을 부르려고 하면 북쪽 오랑캐가 반드시 빈틈을 타 침입할 것이요, 남도로 향하고자 하면 도로가 매우 험하여 올라가 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적이 그 뒤를 밟아오게 되면 반드시 포위되어 곤욕을 당할 것이오니, 이곳에는 결코 가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여러 사람은, 북도는 길이 험하고 궁벽하여 적이 반드시 가지 않을 것이라 하여, 오히려 함흥이 갈 만한 곳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드디어 함흥으로 가기로 결정하였다. 상이 또 김명원(金命元)을 명하여 먼저 양덕(陽德) 등지로 가서 길을 살펴보게 하였다. 다음 날 또 이희득(李希得)을 보내어 순찰사라 칭하여 북도로 가게 하고, 또 유홍(兪泓)을 명하여 행장을 꾸려 중전을 시위하고 먼저 북도로 향하게 하였다. 윤두수는 나와서 말하기를,“이일(李鎰)은 노련한 장수니, 반드시 소견이 있을 것이오. 그를 기다려서 마땅히 북도로 가는 것을 결정하는 것이 좋겠소.”
하였다. 이날 낮에 이일이 당도하니, 만조 관료들이 모두 이일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빙 둘러 싸고 앉았다. 윤두수가 묻기를,“평양을 포기하는 것에 대해 공의 의견은 어떠하오? 어떤 사람은 함경도로 가는 것이 좋겠다 말하는데, 이것 또한 어떠하오?”
하니, 이일이 대답하기를,“이 적을 당해낼 수 없습니다. 평양은 떠나야 합니다. 함흥은 평양성처럼 맨 먼저 적의 공격을 받는 곳이 아니니 갈 만합니다.”
하였다. 신충겸이 그의 등을 어루만지며,“참 장수입니다.”
하고, 이덕형도 기뻐하며 말하기를,“이일답다.”
하니, 윤두수가 말하기를,“실성한 사람이어서 말할 것이 못된다.”
하였다.○ 6일 우의정 유홍과 좌찬성 최황(崔滉) 등이 중전을 시위하여 평양을 출발, 함흥으로 향했다.
○ 그때 적이 임진강(臨津江)에 이른 지 열흘이 되었는데도 조정에서는 아직도 초탐(哨探)을 하지 못했다. 그제서야 비로소 용사 김진(金珍)ㆍ임욱경(任旭景) 등 열두 사람을 모집하여 보냈다. 그래서 적을 황주(黃州)에서 만나 머리 둘을 베어가지고 돌아 왔다.
○ 상이 성 위를 순시하고는 부로를 불러 성을 고수하겠다는 뜻을 알리니, 모두 울며 말하기를,
“주상께서 만일 머무르신다면 모두 이 성을 사수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좌상 윤두수에게 김명원 이하를 인솔하고 머물러 평양성을 지키라고 명하였다. 상이 세자에게 평양을 지키게 하고자 하니, 윤두수ㆍ김명원 등이 인심이 대가의 동향을 보고서 그들의 거취를 결정하려 하는데, 대가가 나가면 비록 세자가 이곳을 지키더라도 무익한 일이라 생각하고 아뢰기를,
“신 등이 힘을 다하여 여기를 지킬 것이오니, 세자께서 꼭 머무를 필요는 없습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그리고 중화(中和) 등지의 군대를 평양에 계속 들어가라고 명하였다.○ 7일 아침에 부제학 심충겸이 삼사를 인솔하고 청대하여 아뢰기를,
“신 등의 생각으로는 이곳은 서울에다 비길 곳이 아니오니, 사수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건대 이곳 이외에는 이 성과 같이 견고한 데도 없으니, 반드시 떠나서는 안 된다고 여겨집니다.”
하였다. 대체로 적의 형세가 약간 완화된 까닭이다. 낮에 중화군(中和郡)에 사는 사람이 와서 적이 이미 본군에 이르렀다고 하니, 심충겸이 또 삼사를 인솔하고 입대하여 아뢰기를,“적이 이미 가까이 왔으니, 대가가 머물러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였다.○ 이조 정랑 이유징(李幼澄)이 청대하여 평양을 버리고 떠나가서는 안 된다고 극력 간하니, 상이 이르기를,
“네 말이 옳기는 하나 나는 이 성을 벗어나서 형세 돌아가는 것을 보려는 것이다.”
하였다.○ 8일 적이 대동강 가에 이르렀다. 상은 적이 이미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떠날 차비를 하라고 명했다.
○ 요동 순안어사가 진장(鎭將) 한 사람을 보내니, 상이 대동관에서 접견하고 당초의 사정을 상세히 말했다. 진장이 연광정(練光亭)에 올라가 적의 기병이 횡행하는 것을 바라보고 말하기를,
“이는 참으로 왜다.”
하고, 드디어 머물지 않고 돌아갔다. 조정에서는, 천조에서 만일 힐문하는 일이 있다면, 응대할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된다 생각하고 윤근수(尹根壽)를 보냈다.○ 이날 밤, 적이 포로를 시켜 편지를 보내 왔다. 그 사연에,
“한음(漢陰) 이 선생을 만나기를 원한다.”
하였다. 이는 이덕형(李德馨)을 가리킨 것이다. 조정이 논의하기를,“이덕형이 그들과 말을 나눈 뒤에도 일이 만일 순조롭지 못하면 용사(勇士)를 시켜 조신(調信)을 쳐 죽이는 것이 낫다.”
하니, 윤두수가 말하기를,“나라의 형세가 비록 이 같으나 어찌 도적이 하는 짓을 본받겠는가. 다만 만나볼 따름이다.”
하고, 어떤 이는 말하기를,“적을 만난 뒤에 만일 차마 듣지 못할 말이 있다면 욕을 받음이 더욱 클 것이니 보내지 않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이덕형이 말하기를,“그들을 만나면 혹 군사를 완화시킬 수 있을지 모르니 만나 보겠습니다.”
하니, 조정에서도 만일의 희망을 걸고 드디어 그를 보냈다.○ 9일 이덕형이 강 위에 이르니, 적장(賊將) 평조신(平調信)ㆍ현소(玄蘇)ㆍ세준(世俊) 등이 와 있었다. 양편이 각각 배를 타고 강 가운데에서 만나 술을 나누며 이야기했다. 이덕형이 말하기를,
“오늘날 군사를 거동함은 무슨 명분에서요?”
하니, 현소가 대답하기를,“귀국과 서로 통하고자 하나, 동래(東萊)로부터 서울에까지 모두 말을 전할 수가 없어서 드디어 전전하여 여기까지 이르렀소.”
하였다. 이덕형이 말하기를,“이제 피차간 서로 통한 셈인데, 어찌하여 군사를 후퇴시키지 아니하오? 옛날의 제후는 군사를 벌이고 맹약한 뒤에는 모두 군사를 후퇴시켰으니, 이제 군사를 물리침이 옳겠소. 천천히 의론할 것이 있소.”
하니, 적이 말하기를,“이제는 다만 전진이 있을 뿐이요, 한 발자국도 물러갈 수 없소.”
하였다. 마침내 자리를 파하고 돌아올 적에 용사 박성경(朴成景) 등이 곁에 있다가 일이 아무 성과가 없음을 알고 그를 죽이려 하니, 이덕형이 눈짓하여 말렸다.○ 이보다 앞서 승지 민여경(閔汝慶)ㆍ노직(盧稷) 등은 임진강의 방어가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병을 칭탁하고 나오지 않다가, 이때에야 국사가 이미 잘못 되 가는 것을 보고 맨 먼저 성을 나갔다. 이것을 본받아 도망가려는 사대부들이 많았다.
○ 10일 대가가 출발하려 할 때 궁인이 이보다 먼저 나간 자가 많았으므로 성중의 인민이 도끼와 막대기를 가지고 길목을 지키다가 마구 두들겨 대니, 판윤 홍여순(洪汝諄)이 부상을 입어 말에서 떨어졌다. 부로와 남녀가 궁문 밖을 메우고 통곡하며 부르짖기를,
“우리들이 성을 나가지 않은 것은 대가를 믿고 사수하고자 함이었소. 적이 문 밖에 이르자 갑자기 우리들을 버리고 가려 하니, 이것은 우리를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오. 차라리 임금의 손에 죽을지언정 적에게 죽기를 원하지 아니하오.”
하고, 궁문을 파괴하고 여러 재상을 쫓아내려 하였다. 병조 좌랑 박동량(朴東亮)이 사세가 급박함을 보고 들어가 승지에게 말하기를,“백성의 심정이 이와 같아 사세를 예측할 수 없소. 오늘의 행차를 정지하여 백성을 위로하고 안심시킨 뒤에야 떠나갈 수 있습니다.”
하니, 승지 등이 이 뜻을 아뢰어 드디어 행차를 정지케 하였다. 승지가 나와서 백성에게 말하기를,“오늘의 행차를 정지하였으니 너희들은 물러가도 된다.”
하였으나, 여러 사람은 이것을 믿지 아니하고 오히려 떠들며 난리를 일으키려 하였다. 이유징이 드디어 ‘정행(停行)’ 두 글자를 판대기에 커다랗게 써서 사람을 시켜 지붕 위에 올라가 이것을 두루 보이게 하니, 그제야 차츰차츰 흩어져 갔다.○ 11일 대가가 평양을 출발하였다. 좌상 윤두수, 도원수 김명원, 순찰사 이원익, 감사 송언신, 병사 이윤덕, 교리 김신원(金信元), 이조 좌랑 이호민(李好閔) 등이 대가를 보통문(普通門)에서 전송하며 하직하였다. 대가가 순안(順安)을 거쳐 저녁에 숙천(肅川)에 이르렀다. 많은 관원이 의논드리기를,
“이제 국사가 급박해졌으니, 대가가 북도로 가는 것도 기필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다면 중전께서만 어찌 홀로 북도에 머물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영변(寧邊)으로 가서 형세를 살펴 거취를 결정하는 것이 옳을 줄 아옵니다.”
하니, 상이 이 말을 따랐다.○ 조정에서 또 말하기를,
“천조(天朝)에 청병하는 일보다 중요한 것이 없는데, 어찌 단지 역관만을 보내서 구원해 주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하여, 드디어 대사헌 이덕형을 보내되, 청원사(請援使)라 칭하여 급히 요동으로 가게 하였다.○ 또 홍여순을 파견하여 양덕(陽德) 등지를 순찰하면서 북에서 서쪽으로 향하는 길을 방비하게 하였다.
○ 12일 대가가 안주(安州)의 운암원(雲巖院)에 이르니, 인민이 모두 도망가서 음식을 올리지 못했다. 이양원이 패하여 안변에 이르러서, 종사관 김정목(金廷睦)을 보내어 말로 진달하기를,
“이혼(李渾)이 회양(淮陽)의 적을 다 죽였다.”
하였다. 대체로 길가에 떠도는 말을 들은 것이다. 상이 이것을 친히 묻고자 하여 사관을 불러 입시하게 하니, 주서 임취정(任就正)ㆍ박정현(朴鼎賢)과 한림 김선여(金善餘)ㆍ조존세(趙存世) 등은 벌써 흩어져 갔다. 이로부터 여러 시종관이 모두 뒤로 처지고 대기를 따르는 자는 십여 인에 지나지 않았고, 그들도 모두 제마음대로 행동하여 앞서기도 하고 뒤떨어지기도 하였고, 시위하는 자는 얼마 되지 아니하였다.○ 저녁에 안주에 이르러, 임금은 길에서 돌아오는 군사를 보고 물어보았더니, 모두 흩어져 도망가는 자였다. 드디어 지평 이경기(李慶祺)를 자산(慈山) 등지로 달려가 도망하는 군사를 불러 모아 전선으로 나가도록 명하였다.
○ 13일 대가가 영변(寧邊)에 이르니, 성안의 사람과 가축이 모두 벌써 흩어져 도망갔다. 판관 황기(黃沂)도 외촌(外村)에서 처음으로 이곳에 왔다. 상하가 모두 밥을 먹지 못했다. 이날 밤에 한응인이 치계하기를,
“적이 이미 강동(江東)의 외탄(外灘)을 건너와서 단지 여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군진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드디어 여러 신하를 불러 이르기를,“오늘날의 형세는 이미 어찌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나와 세자가 함께 한 곳으로 가게 되면 더욱 가망이 없을 것이니, 나누어 가는 것만 못할 것이다. 다만 오늘 향할 곳을 어디로 정할 것인가?”
하니, 승지 이국(李)이 아뢰기를,“상국(上國)은 부모의 나라입니다. 이제 마땅히 의주로 가시어 천조에 나아가 호소해야 합니다. 그래도 일이 만일 불리하게 되면 임금과 신하가 마땅히 함께 압록강에서 죽어 대의(大義)를 천하에 드러내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고, 유성룡ㆍ이항복 역시 아뢰기를,“이 말이 대단히 옳으니 의주로 가시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내가 만일 요동으로 건너가게 되면 여러 신하들은 나를 따라갈 자가 있는가?”
하니, 이항복ㆍ이국이 울며 아뢰기를,“신들이 수행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최흥원(崔興源)ㆍ이헌국(李憲國)ㆍ이성중(李誠中)을 돌아보며 이르기를,“경들은 다 늙었으니, 세자를 따라 가야 하오.”
하고, 또 한준에게 이르기를,“경도 부모가 있으니, 세자를 따르는 것이 옳겠소.”
하니, 여러 신하가 모두 울고, 임금도 눈물을 흘렸다.○ 14일 운산 군수(雲山郡守) 성대업(成大業), 익위(翊衛) 유희담(柳希聃)을 보내어 중전과 세자빈을 맞이하여 오게 하였다. 유홍(兪泓) 등이 중전을 호종하여 덕천(德川)에 이르러 누차 급히 함흥으로 향할 것을 주청(奏請)하여 날마다 재촉하는 말이 있었다. 중전이 분부하기를,
“당초에는 비록 함흥으로 가라는 명이 있었으나, 지금 대가의 거취를 아직도 확실히 알지 못하오. 한번 이 재를 넘어간 뒤에 창졸간에 일이 있게 되면 반드시 낭패(狼狽)할 것이오.”
하고, 5일을 머물렀다. 이 때문에 성대업 등이 쫓아가서 만나게 되었다.○ 이 때에 대가와 세자가 길을 나누어 가려 하였는데, 시위하는 관원으로서 친히 임금의 명을 받은 자 이외에는 모두 가는 곳을 알지 못하였다. 영의정 최흥원이 드디어 성명을 열서(列書)하여 아뢰니, 상이 드디어 낙점(落點)하였다. 상이 요동으로 건너가게 되면 사람들이 싫어서 피할 것이고, 더구나 늙고 병든 무리는 따라갈 수가 없기 때문에 병 없고 멀리 갈 만한 자를 선택하여 대가를 따르게 하였다. 지평 이정신(李廷臣)은 그가 대가를 따르게 되었다는 것을 듣고 사양하지 아니하였다. 상이 또 한준이 현재 호조 판서로 있기 때문에 잠시도 떨어져 있을 수가 없다 하여 드디어 수행하도록 명하니, 한준이 낙상하였다고 칭탁하고 성을 나갔다.
○ 상이 또 세자에게 이르기를,
“국사가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시 희망이 없구나. 우리 부자가 함께 한 곳으로 갔다가 일이 만일 갑작스럽게 되면 뒤에는 아무 일도 못하게 된다. 이제 나는 상국에 가서 호소할 것이니, 세자는 종묘와 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급히 강계 등지로 가서 나라를 회복하기를 도모하라.”
하였다. 이어 서로 마주 보고 울었다.○ 15일 상이 종묘 사직의 신주에 하직하고 통곡하니, 세자도 통곡하였다. 상이 세자의 관속에게 이르기를,
“국가의 일은 세자의 신상에 달려 있으니, 너희들은 각기 마음과 힘을 다하여 잘 보좌하여 다시 나라를 일으킬 것을 도모하라.”
하였다. 대가가 출발하려 할 적에 세자도 양궁(兩宮)에 하직하니, 종관(從官)이 각각 목놓아 울고, 말을 끄는 하인들도 눈물을 흘려 옷깃을 적시지 않는 자가 없었다.○ 대가가 박천(博川)에 이르니, 경내에 사는 백성들이 전과 다름 없이 곳곳에서 김을 매고 있었다. 상이 말을 멈추고 이르기를,
“여러 고을이 다 비었는데, 너희들은 어찌하여 피란가지 않았느냐?”
하니, 모두 대답하기를,“군수께서 평양에 계시면서 사람을 보내 효유하여 말하기를, ‘사세가 불리하면 나도 피란하겠다. 내가 피란한 뒤에도 오히려 나갈 수 있으리니, 우선 힘을 다하여 농사를 지으라.’ 하였기 때문에, 안심하고 피란하지 아니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백성이 모이고 흩어지는 것은 윗사람이 시키기에 달린 것이니, 이는 처사가 마땅한 것이 아니겠느냐.”
하였다.○ 낮에 박천군에 이르니, 평양에서 온 사람이 말하기를,
“어제 윤두수ㆍ김명원이 장사 4백여 인을 얻어 밤에 강을 건너 적의 병영을 돌파하여들어가 적을 많이 죽였습니다. 다만 새벽녘에 싸움을 돋워 일진일퇴하면서 정신없이 싸우고 있을 적에 날이 이미 밝았고, 적의 대군이 밀려들어와서 우리 군대는 질서없이 배를 타고 건너는데 적이 추격하여 왔습니다. 그래서 장사 임욱경(任旭景) ㆍ민여호(閔汝虎) 등이 대동강변에 이르러서 적 한 놈을 거꾸로 잡고 좌우로 마구 휘두르니, 적은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습니다. 격살한 적이 10여 명이나 되었는데, 끝내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도원수는 연광정 위에서 이것을 목격하고 통탄하면서 대대적으로 밤을 무릅쓰고 강을 건너가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지평 이경기가 와서 아뢰기를,
“어지러운 군대가 흩어져 도망가는데 막을 만한 힘이 없어서 부득이 돌아왔습니다.”
하였다. 사간 유영경(柳永慶)이 이경기에게 말하기를,“이처럼 매우 어려운 시기를 당하여 군병을 모집하는 일보다 더 중한 것이 없는데, 명을 받은 지 이틀 만에 그냥 빈손으로 돌아와 하는 말이‘나는 할 수 없다.’하니, 어찌 어린애 장난과 같이 여겨서야 되겠소. 빨리 그곳으로 가서 다시 모집하도록 도모하시오.”
하니, 이경기는 어쩔 수 없이 다시 갔지만 이 일로 인하여 돌아오지 아니하였다.○ 중전이 덕천에서 밤을 틈타서 왔다. 우의정 유홍은 백관이 길을 나누어 간다는 말을 듣고나서 아뢰기를,
“신은 이미 늙어서 요동으로 건너갈 수는 없으니, 세자를 따라 가기 원합니다. 나라가 회복된 뒤에 마땅히 대가를 맞이하여 돌아오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 말을 따랐다.○ 저녁에 이원익이 이호민을 보내와 말하기를,
“어제 저녁에 적이 청은탄(靑銀灘) 등지에서 군사를 나누어 보내 강을 건너는 시늉을 하면서 시험하니, 여울을 지키던 장수 김억추(金億秋)ㆍ허숙(許淑)ㆍ이윤덕(李潤德) 등이 일시에 도망가서 흩어지고 상하에 진을 벌였던 군사도 따라서 흩어지게 되어, 적이 마침내 평양에 들어왔습니다.”
하였다. 임금은 드디어 길 떠날 차비를 하도록 하였다. 중전은 덕천으로부터 박천에 이르니, 산을 넘고 냇물을 건너 하루에 간 것이 거의 1백 60리가 되어도 아직 가마에서 내리지 못하였다. 또 평양의 보고를 듣고 고을 안이 크게 흔들려 식사도 못하고 갔다.○ 이때에 위장(衛將) 이관(李瓘)ㆍ성수익(成壽益) 등이 서로 잇달아 흩어져가니, 대가를 호종한 사람은 오직 내시 5ㆍ6명 뿐이었다. 박천군 내에서 5리쯤은 수목이 울창하고 빽빽하였는데 하늘에선 또 비가 내렸다. 일행은 겨우 40ㆍ50인 밖에 되지 아니하여서 인심은 매우 두려워하여 마치 보전하지 못할 것같이 여기니, 임진강을 떠나던 저녁보다도 더 심했다.
○ 이때에 세자는 보덕(輔德) 조정(趙挺)을 보내어 상에게 문안드렸다. 조정이 돌아갈 때에, 상이 손수 쓴 글을 세자에게 보내어 이르기를,
“내가 살아서 이미 망국(亡國)의 임금이 되었으니, 죽어서는 장차 다른 지역의 귀신이 될 것이다. 부자가 서로 떨어져 다시 만나 볼 날이 없게 되었으니, 오직 세자는 나라를 다시 일으켜 위로는 조종의 영전을 위로하고 아래로는 부모를 돌아오게 하기 바란다. 종이를 대하니 눈물이 흘러내려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다.”
하였다. 이때 세자는 개평역(開平驛)에 머물고 있었는데, 조정은 바로 서울로 향한 채 이것을 전하지 않았다.○ 상이 삼경에 박천을 출발하여 이른 아침에 가산(嘉山)에 당도했다.
○ 16일 대가가 가산에 이르니, 적의 소리가 점점 급박하여 종관이 모두 흩어져 달아나고 남는 자가 거의 없었다. 상이 자문(咨文)을 요동으로 보내어 내부(內附 복종해서 따름)하기를 청하였다. 대가가 정주(定州)에 도착했다.
○ 또 사람을 보내어 적의 형세를 초탐해 오게 하였다. 김명원이 안주에 있으면서 치계하기를,
“신 등이 이곳에서 수시로 적의 형세를 살펴 계속 말을 달려 보고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드디어 정주에 머물렀다.○ 또 안황(安滉) 등을 보내어 신성(信城)ㆍ정원(定遠) 두 왕자를 영변군에서 모시고 돌아오게 하였다.
○ 대가가 평양에 도착한 뒤로 잇따라 적의 정세를 요동에 보고하였다. 이로부터 자문과 게시(揭示)가 잇따랐으나 회답하는 체제를 아는 자가 없으므로 상은 종관에게 명하여 이것을 쓰게 하니, 형식을 이루지 못한 부분도 있었다.
○ 17일 인성부원군 정철(鄭澈)ㆍ풍원부원군(豐原府院君) 유성룡이 대사간 정곤수(鄭崑壽)를 거느리고 상에게, 세자에게 감국(監國)의 임무를 주게 할 것을 청하려고 드디어 입대(入對)하였다. 상이 묻기를,
“경 등은 무슨 할 말이 있소?”
하니, 정철ㆍ유성룡 등이 단지 말하기를,“국사가 이와 같이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떻게 하옵니까?”
하고, 드디어 물러나왔다. 어떤 사람은 세자가 이미 감국의 임무를 받았으니, 정철 등의 뜻은 상에게 왕위를 물려줄 것을 청하려 한 것이었기에 차마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18일 대가가 정주를 출발하여 곽산(郭山)으로 향하였다. 상이 유성룡을 불러 이르기를,
“오늘의 행차는 오로지 내부(內附)를 위함이니, 경이 먼저 가는 것이 좋겠소. 만일 천조에서 온 사신을 만나게 되면 먼저 적의 실정을 말하고서 내가 요동으로 건너가려 한다는 뜻을 말하오.”
하였다.○ 대가가 곽산에 이르러, 요동 순안사가 부총병 조승훈(祖承訓), 참장 곽몽징(郭夢徵), 유격 사유(史儒)를 보내어 3천 기를 영솔하고 운흥관(雲興館)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상이 가서 그를 만나 보았다. 상이 낱낱이 우리 나라의 전후 사정을 말하자, 시종들도 상의 앞에 줄지어 엎드려서 각각의 소견을 말하니, 말들이 대단히 시끄러웠다. 참장 곽몽징이 말하기를,
“귀국의 군신이 한 곳에서 떠들어대는 것이 마치 모여서 송사하는 것과 같으니, 너무도 무례합니다.”
하니, 상이 여러 신하에게 모두 나가라고 명하였다. 총병 이하가 평양이 함락된 것을 알고 돌아갔다.○ 좌의정 윤두수가 나중에 와서 아뢰기를,
“신이 사수하지 못하여 오늘날이 있게 되었으니, 군률을 받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나라의 형세가 이미 글렀는데, 어찌 경의 죄만이겠소.”
하였다. 상이 선천군(宣川郡)에 이르렀다. 저녁에 순안어서(巡安御史)가 또 지휘관 장(張)씨란 사람을 시켜 자문을 보내왔는데, 그 가운데, 너희 나라에서 반역을 도모한다[爾國謀爲不軌]라는 등의 용어가 있었고, 또 말하기를,“8도의 관찰사는 어찌하여 적에 대해 한 마디의 말도 없으며, 8도의 군현에서는 어찌하여 한 사람도 대의를 제창하는 일이 없소? 어느 날에 그 도가 함락되고, 어느 날에 그 고을이 함락되고, 아무는 절개에 죽고 아무는 적에게 붙었고, 적의 장수는 몇 사람이고, 군사의 숫자는 몇 만 명인지, 순서에 따라 하나하나 계산하여 들려주되, 모두 기록해서 보고하시오. 천조(天朝)에는 개산대포(開山大砲)와 대장군포(大將軍砲)와 신화표창(神火鏢鎗)이 있고, 용맹한 장수와 정련된 병정이 안개처럼 널리고 구름처럼 달리니, 왜병이 백만 명이라 하더라도 따질 것이 못되오. 더구나 문무 지략(文武智略)의 선비들이 간사한 꾀를 뚫어지게 볼 수 있어, 미연에 흉악한 싹을 꺾어 버릴 수 있으니, 비록 소진(蘇秦)ㆍ장의(張儀)ㆍ상앙(商鞅)ㆍ범수(范睢)의 무리가 다시 세상에 태어난다 하더라도 어찌 천조의 얕고 깊음을 엿볼 수 있겠소.”
하였다. 상이 자문을 보고 송구해 하면서 이르기를,“이는 아마도 우리 나라가 적과 공모하지 않았는가 의심하여,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두렵게 하는 말로 우리 나라의 대답을 시험하려는 것이오.”
하고, 드디어 지휘에게 이르기를,“이 자문에 대하여는 마땅히 곧 뒤따라 배신(陪臣)에게 맡겨 보내겠소.”
하였다. 지휘가 물러나와 역관에게 말하기를,“나는 바로 황천사(黃天使)의 수행원이다. 순안어사께서는 내가 일찍이 국왕의 얼굴을 보았다 하여 나로 하여금 그 진위를 와 보게 하였을 뿐이다. 자문 가운데의 말은 다만 가설(假設)하여 말한 것이니, 너희 나라에서는 두려워하지 말라.”
하였다.○ 이때에 대가의 행색이 여느 때와는 달리 대단히 총총하니, 길 가의 인민이 이것을 보고 왜적이 뒤에서 조만간에 추격해 올 것으로 여겼다. 대가가 지나간 뒤로 양민이 물결처럼 흩어져 산골짜기를 메웠다. 그 중에 호적이 없는 천민들은 혼란을 틈타 무리를 불러 모아 관가의 곡식을 약탈해 갔는데, 영변과 곽산이 더욱 심했다. 선천 군수 이형(李瀅)이 조정에 알리기를,
“선천군에서만도 또한 백여 명이 모여 내일 대가가 출발한 뒤를 기다려 영변의 백성들이 한 짓을 본받으려 하옵니다. 늙은 선비로서는 제재하지 못하겠사오니 이에 대한 조치를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조정에서는 드디어 무신으로 대치하여 방화 약탈에 대한 걱정을 면할 수 있었다.○ 19일 대가가 거련관(車輦館)에 머물렀는데, 지나가는 곳마다 인민과 가옥이 예전 그대로 있어 박천군과 다르지 않았고 음식 이바지도 매우 풍성하게 하니, 상이 간소히 하고 사치하게 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 20일 대가가 용천군에 당도하였다. 윤두수가 아뢰기를,
“오늘의 행차는 오로지 천조에 나아가 호소하기 위함이옵니다. 이 때문에 길을 빨리 달려 이미 그곳에 이르렀습니다. 다만 갑자기 의주에 당도하게 되면 인심이 크게 놀라서 수습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더구나 이제 적의 형세가 매우 완화되었으니, 먼저 의주 등의 관원으로 하여금 흩어진 병정을 모으게 하여 바로 요동으로 건너가지 않는다는 뜻으로 회유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믿는 바가 있게 한 뒤에 다시 2ㆍ3일을 보고 나서 천천히 나아간다면 원근이 실망하는 지경에 이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 말을 따랐다.○ 평양이 함락된 후, 송언신ㆍ이윤덕이 모두 희천(熙川) 등처로 가서는 오래도록 돌아오지 아니하였다. 김명원은 이원익ㆍ이빈을 인솔하고 정주에 주둔하니, 단지 군관(軍官) 수십 여인 뿐만 있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 드디어 이원익에게 압록강변으로 가서 토병을 모집하게 하고, 이빈에게 산군(山郡)으로 가서 군사를 징발하게 했다. 김명원은 혼자서 빈 성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 21일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원균(元均)이 거제 앞 바다에서 대첩(大捷)했다는 보고가 왔다. 상이 사자에게 영남의 사세를 물으니, 대답하여 아뢰기를,
“감사 김수(金睟)는 현재 함안 등지에 있어, 소식을 알지 못하옵니다. 대적(大賊)은 다만 직로(直路)를 따라 행군한 까닭에 여러 고을에서 병란을 입은 것은 겨우 도로변일 뿐입니다. 좌우도(左右道)가 두 지역으로 나누어져서 호령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피차가 어떻게 행동하였는지 전혀 듣지 못하였습니다. 단지 병사 김성일(金誠一)의 얘기만을 들었는데, 그는 군관 몇 십명을 인솔하고 졸지에 적을 만나자, 모두들 흩어져 달아나려 하는데 김성일이 말에서 내려 의자에 걸터앉아 길을 막고 있었다고 합니다. 적이 그의 당돌함을 보고 복병이 있는가 의심하여 머뭇거리고 나오지 못하다가 한참 후에야 군사를 이끌고 갔다 하옵니다. 경기에 당도하니, 여러 고을의 백성들이 모두 생각하기를, ‘오늘의 도적은 왜놈이 아니라, 바로 나라를 배반한 무리들이다. 나라를 배반한 무리들은 양민을 죽이지 않는다.’ 하고, 드디어 이들을 피해 나가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다 도살되었으며 나중에야 그들이 왜적임을 알고 비로소 차츰차츰 피란갔다 하옵니다.”
하였다.○ 조정에서는 여러 고을의 관가 곡식이 다 노략질을 당하고 있어서, 만일 수습하지 않는다면 천병이 나오는 날 반드시 공급할 것이 없으리라 생각하여, 드디어 장령 정희번(鄭熙藩)을 철산(鐵山)으로, 정언 이광정(李光庭)을 용천창(龍川倉)으로 보내어 조사해 보게 하였다. 또 대군이 한번 흩어진 뒤로 산골짜기로 도망가서 오래도록 나타나지 아니하므로 마침내 사간 유영경(柳永慶)을 강계(江界)ㆍ위원(謂原)ㆍ이산(理山) 등의 군으로, 집의 정광적(鄭光績)을 벽동(碧潼)ㆍ창성(昌城) 등의 부(府)로 보내어, 그들로 하여금 급히 군대를 소집하여 김명원이 있는 곳으로 보내게 하였다.
○ 23일 대가가 용만관(龍灣館)에 당도하여, 목사가 거처하던 곳에 행궁(行宮)을 정하고 거처하였다. 이때 성중의 백성은 모두 흩어졌고, 닭ㆍ개 등이 한 마리도 없었고, 새도 날지 아니하여 황량한 산의 폐사(廢寺)와 같았다. 종관(從官) 수십 인이 행궁 근처 인가에 나누어 투숙하였다. 거의가 처량하고 궁핍하여 단지 한두 노복만을 데리고 있었다. 이성중(李誠中) 부자는 단지 종 하나를 데리고 있었는데, 때로는 끼니를 걸러서 남에게 의지하여 날을 보냈다.
○ 24일 비망기를 내려 이르기를,
“당초 서울을 떠나던 날, 백관으로 나를 따라 나온 사람은 다 삶을 잊어버렸다. 평양을 떠나 의주로 향할 적에는 인심이 놀라 이산되어 도피하고 흩어지지 않는 자가 없었는데도, 모두 부모를 떠나고 선영을 버리고는 의주의 멀고 거친 곳에까지 나를 따라와 끝까지 게으름이 없으니, 모두 충신이다. 서울로부터 의주에까지 온 사람들은 별도로 성명을 적어서 아뢰도록 하라. 내가 마땅히 간직해서 후일에 볼 자료로 삼겠다. 대가를 호종하여 여기에 도착한 사람에 있어서는 그 공이 어찌 상하의 구별이 있겠는가. 백관의 벼슬을 각각 한 품질씩 올리겠다.”
하니, 대사간 정곤수(鄭崑壽), 지평 신경진(辛慶晉)이 아뢰기를,“인신(人臣)으로서 대가를 따라 어려움을 피하지 않는 것은 바로 그 직책이옵니다. 품질을 올려 주라는 명을 거두시기 바라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경 등의 말이 참으로 옳지만 인정상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소. 자신의 생사를 헤아리지 않고 극히 곤궁할 때에 상종하였으니, 비록 높은 품질과 아름다운 벼슬이라도 무엇이 아깝겠소. 다시 말하지 마오.”
하였다. 이것을 여러 날 논란하였으나 따르지 아니하였다.별록 : 서울부터 의주까지 온 사람을 종시호종(終始扈從)이라 하여 전교하니,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 유성룡(柳成龍)ㆍ우의정 윤두수(尹斗壽)ㆍ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윤근수(尹根壽)ㆍ전 병조판서 김응남(金應南)ㆍ병조판서 이항복(李恒福)ㆍ판윤 박숭원(朴崇元)ㆍ공조 참판 이충원(李忠元)ㆍ이조판서 이산보(李山甫)ㆍ도승지 유근(柳根)ㆍ부제학 이국(李)ㆍ서천군(西川君) 정곤수(鄭崑壽)ㆍ좌승지 홍진(洪進)ㆍ사예(司藝)ㆍ심우승(沈友勝)ㆍ장령 정희번(鄭熙藩)ㆍ병조좌랑 박동량(朴東亮)ㆍ정언 이광정(李光庭)ㆍ평안 병사(平安兵使) 신잡(申磼) 집의 구성(具宬)ㆍ도정(都正) 안황(安滉)ㆍ응교 이유징(李幼澄), 무신으로는 호조좌랑 한연(韓淵)ㆍ군수 기경복(奇景福)ㆍ도사 여정방(呂定邦)ㆍ판관 최응숙(崔應淑) 등 모두 24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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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靖公事實 | ||||
龍蛇扈從錄 |
03-01 萬曆己丑。倭酋平秀吉遣玄蘇。請通信。上令廷臣議。多便通信。李韓興山甫獨不可。尹海原斗壽言宜奏聞天朝然後可遣。上竟從之。- 牛山記事曰。西厓主論。遂遣通信使。 - 逮壬辰寇至。天朝不疑我國。發兵應援。以先前奏聞故也。時尹公斥在外。上謂宰臣曰。尹某才智可任。今安在耶。亟命召。赴行在。遂拜議政。委任甚重。盖不忘前議云。《芝峯類說》
03-02 通信使黃允吉還日本。- 通信正使黃允吉。副使金誠一。 書狀官許筬。從事官車天輅。其還也。玄蘇平調信偕來。- 書啓極悖慢。書啓到日。上於夕講。令入侍諸臣見之。判書尹斗壽首進曰。事當具奏天朝。仍陳我國通信本末可也。上頷之。與尹某意合。以爲彼此利害不暇論。而以小事大。大義所在。豈可不爲之奏聞乎。朝廷不得已具奏。《寄齋雜記 辛卯史草》
03-05 宣祖朝當倭酋之耽耽西伺也。朝廷莫覺。其時泛使之回。亦莫覺。其欲直犯上國者。著於書契中。而猶不欲奏聞。獨尹公斗壽請據事具奏曰。臣之於君。直當如此。他不暇論。旁引經義確甚。上竟從之。以復我朝三百年宗社。初則斥擯於論議。中不容朝。後拜相。西巡之日。垂紳正笏。立於百僚上。儼然人仰而恃之也。能獻可替否於殿陛之下。毅然君倚以爲重。能宰物平施休休有容。綽然於進退之間。能寵不加榮。辱不加挫。恢然於休戚之際。此功此志。非管樂以下人所能覰知也。雖知者。豈料末年事業如是卓然乎。士有合不合。假令早位巖廊。則安知可以弭壬辰之難。而亂作之後。始得公弭之。信乎其繫遭逢也哉。《續自警編》
03-06 先生曰。辛卯玄蘇來。奏聞當否。朝議各立。蓋海原主當奏之論。西厓主不當奏之論。其時朝講。海原一隊。西厓一隊。爭辨不決。日中乃罷云。對曰。懲毖錄。奏聞倭情事。朝議以爲不當奏。自家獨啓以奏。卒得天朝之力云矣。先生曰。海平嘗言西厓記壬辰事不平。凡諸善畫。悉歸之己。以自掠美。甚不是云矣。《石室語錄》
03-08 辛卯十月。傳曰。洪原定配罪人尹斗壽放釋。蓋春初議奏聞時。上從斗壽議。及金應南 - 朝野僉載云陳奏使 - 回陳許儀後等密報倭情事。- 中朝人許儀後被擄日本。潛遣所親米均旺。投書上國邊帥。告以倭將入寇。朝鮮爲先鋒云云。 - 上嘉尹某先見。特命放還。臺啓請勿放。上命移配延安。《癸甲錄》
03-09 十一月。上命放釋尹斗壽。時中朝以倭情奏聞。降勑褒諭。上以當初此議尹斗壽實主之故也。兩司啓請。尹斗壽罪重。不可放釋。逾月不已。始許量移中道。臺論停。移海州。- 韓應寅曰。特命量移海州。 - 《壬辰記》
03-10 壬辰四月十三日。倭首平秀吉遣將平秀嘉平行長政成淸正等大擧入寇。陷釜山東萊。連陷諸郡。十七日報至。中外大震。上以尹斗壽可用於一隅。命放還。臺諫累啓不可放。上不從。《寄齋雜記 壬辰日錄》
03-11 上思尹斗壽言。卽命放釋。以馹召之。再三問其來。及至復原封而超遷其職。尹公斗壽壇宇俊偉。氣量洪大。登第以後。歷敡中外。出入近侍。人皆以公輔目之。辛卯李山海等陰使洪汝諄。譸張熒惑。網打士林。竄逐縉紳之徒。尹公斗壽遂配北道。上以尹斗壽有才可大用。有是命。《再造藩邦志》
03-12 四月二十九日。海原自海州入京。翌日上西行。乃以散秩陪從。《牛山記事》《朝野僉載》
03-13 五月一日。上召謂海原君尹斗壽曰。卿有大才。可救國家急。故特命放還。死生相救。勿負予意。仍解賜所佩靑織囊 - 駕至東坡驛。崔有源引入帳殿。解賜佩刀。 - 曰。無物可表情也。斗壽泣謝而出。《壬辰日錄》
03-15 夕次開城府。衆志崩潰。一夜四五驚。軍民蹂躪。無以鎭之。上以尹斗壽爲御營大將。號令統攝。以護御營。人心始鎭安。《再造藩邦志》
03-16 二日。臺論李山海罪。遂罷職。以柳成龍爲領議政。崔興源爲左議政。尹斗壽爲右議政。旋以小紙書遞成龍代斗壽六字而下。於是崔爲領相尹爲左兪泓爲右而委任。斗壽大小之事皆咨焉。《再造藩邦志》
03-17 駕到松都。民人塞道叩馬曰。當此亂時。如尹斗壽鄭澈者。不爲政丞。何以治其亂乎。上不得已以梧陰爲右相。松江爲左相。《寄齋雜記 日錄外編》
03-18 李完城憲國戇直不諱。宣廟優容之。當壬辰西狩至開城。策免李山海柳成龍兩相。公以諫長入侍。上方擇相。以宰相座目指問曰。鄭琢何如。對曰。雖淸愼。無濟世才。可謂束之高閣者也。又問崔滉何如。對曰。剛介則有之。性褊不可任大事。又以兪泓黃廷彧爲問。俱對以不合。上乃擧興源尹梧陰兩公名。對以爲當。遂登庸焉。人以爲難。《東史補遺》
03-19 尹海原自謫所入來。旋拜右揆。掌機務。海平以文學司接伴唐官之任。《東溪雜錄》
03-20 尹公拜相卽日。首請上御南門。宣諭父老。遣近侍于都城。開諭人民。甄用舊都人才。以收人心。下罪已敎于八道。以謝士民。遣使下三道 - 忠全慶- 。 召募義兵。以激士心。於是上御南門樓。撫諭父老。令各陳所懷。下罪已書于八道。遣使各道。召集義兵。《朝野僉載》
03-21 上到於京。欲徵兵兩南。沈公望岱忼慨自請往。上慰遣之。出語梧陰曰。公今相矣。其能布公心去私情乎。曰。子言善。《日錄外編》
03-22 禮判鄭昌衍以爲。廟主所載馬。多至五十餘疋。今當倉卒。無力可運。不如預先奉安於凈潔之地。以簡一行。衆皆當待新相出仕後議之。上卽命治行。昌衍猝聞駕發。未及議于大臣。卽爲安厝於穆淸殿右。《壬辰日錄》
03-23 四日。駕次寶山驛。尹斗壽問廟社主至否。則禮官已於倉皇中瘞于穆淸殿。斗壽聞之愕然。啓遣禮曹參議李廷立。宗廟提調尹自新。奉出追及。旣而賊入開城。掘發無不至。微此一著。則後日之悔尙忍說哉。《朝野僉載》
03-24 駕到寶山日。宗室海豊君耆等。執尹相手。痛哭曰。公以國之大臣。有司棄廟社主。而何不覺也。古今寧有無廟社之國乎。尹公曰。有司不遍議。經行奉安。雖非吾所與。烏可謂無罪。微公言。國不國矣。遂遣禮官陪來。十日追至平壤。《壬辰日錄》
03-26 車駕入平壤。爲久駐計。朝廷乃以知事韓應寅爲諸道都巡察使。領平安道精兵三千。屯臨津。將行尹公言於衆曰。斯人狀貌有福。必能辦事矣。《再造藩邦志》
03-27 權監司徵啓言。麻田郡守朴致弘。初雖棄官。今爲其父分戶曹判書朴忠侃從事官在戎行。請贖白衣之律。張皇說話以救。海原見而嚬曰。大賊臨境。弧軍始聚。身爲畿伯。無一事可措。而獨汲汲於此。致弘免罪。果涉於畿伯乎。此公顚倒若此。必失性也。余曰。可謂從容不迫。非顚倒也。海原曰。此子欲救權乎。余曰。若非從容。啓本詳悉。何能至此乎。滿座皆笑曰。大好大好。《日錄外篇》
03-28 朝議請遣大臣。經紀浿南。咸欲以尹海原往。兵判金應南耳語李恒福曰。尹相離此。則大事瓦解。無人鎭之。李然之。遂以他相啓請。上從之。《再造藩邦志》
03-29 尹海原方以妻喪。退在私室。文牒塡委。諸相不能辦決。遣郞請尹公。日昃。乃詣賓廳。裁決如流。一晷便空。李誠中歎曰。乃今知人之才智。相去有如是者。他相徒仰尹相一人之口而已。《再造藩邦志》
03-30 梧陰作相之後。頗以時事擔當。崔兪二公拱手而已。一日梧陰聞妻喪。不出備局。諸宰聚首終日。不得了一事。公著 - 李誠中字 - 曰。今日始知政丞之不可無也。如羣雛失其長。論議而無所折衷焉。或曰。領右獨非相乎。公著掉頭曰。論議則可。折衷非所能也。《日錄外編》
03-31 十二日。下備忘記。諭以章䟽勿稱睿聖。且勿用尊號。以示自貶之擧。李誠中曰。此盛擧也。爲臣子者。不可不承順。以成其美。尹海原曰。今日之變。無非臣子之罪。而乃勸君上。先自貶損。豈合於義。遂對以不可貶損之義。衆議是之。《壬辰日錄》
03-32 李恒福李德馨 - 漢陰前以宣慰使。往東萊。要會倭將于忠州。而路梗不見。至龍仁而回。 - 見尹海原斗壽於私室。相議恢復之策。德馨曰。國事至此。所恃者民心。民心一㪚。難可收拾。若行靈武之事。稍可以回天意結民心也。尹公正色曰。公何出此言耶。今之國事。異於唐時。玄宗自天寶以後。壞亂極矣。內有嬖寵。外有權奸。積失人心。肅宗久在儲位。頗得民望。故一朝傳位。天人皆順。而猶貽後世之議。况今主上聖明。儲君年少。民心向背。亦不可知。一着有誤。不可收拾。公無爲此言也。德馨默然而止。《再造藩邦志》
03-33 禮曹參判李德馨承命往見倭將。及復命。言于朝堂曰。諸道人心怨叛。有犯上語。若無大段擧措。慰答衆情。則恐有朝夕不測之變。尹公變色不答。徐曰。國家雖極危難。人皆可發此臣子不敢道之言耶。德馨悚惧而退。尹公絶不以此語人。雖一家子弟。不得聞之。月汀撰公行狀。但曰有一宰。不言其名。盖爲德馨地也。《朝野僉載》
03-35 十九日。大司諫李恒福曰。今日之賊。非我國所能獨敵。請求救天朝。尹海原斗壽以爲我軍方守臨津。足以防禦。又遣人于三道。兵必大至。北道兵亦不久當集。大軍厚集。自當有爲。况天朝救兵未可期。而上國兵一入我境。難處之憂。萬倍於此。豈可輕擧請兵之事。恒福遂退。《壬辰日錄》
03-36 李恒福力言乞援天朝。尹海原斗壽曰。我軍方守臨津。又召三南兵。北路兵亦不久當集。自有可爲。雖請援天朝。假令來救。當出遼廣兵馬。遼廣兵胡㺚類也。必見橫暴。今只有平安一路乾淨。復爲漢兵侵擾公私。則必赤地乃已。此策甚迂。李德馨議。與恒福合。共力爭。始聽許。論啓。上從之。《朝野僉載》
03-37 義州牧使黃璡馳言。寬典捴兵欲率兵渡江。親探事情。答以倭賊雖迫弊境。兵力足當云。則捴兵笑而去。上大駴。欲拿問失對。別差一宰臣送之。梧陰不得已以柳晦夫 - 根 - 應選。而柳意又與梧陰合。不欲請兵矣。《日錄外編》
03-39 康陵參奉李貴五月到行在。疏啓力請親征之擧。上答曰。備局招李貴議計。時左相尹公斗壽坐賓廳。切責曰。此何等時。而欲爲親征乎。答曰。來此宰臣束手無策。與其坐而待亡。曷若親征。又請遣體察使。而爲尹相所沮。至於怒叱曰。國雖危亡。亦有朝廷體面。爾敢廷辱大臣乎。答曰。今日亡國。非李貴。乃公輩。而又惡聞吾言。更欲亡箕城乎。《老辣瀡辭》
03-40 駐蹕龍灣時。李延平貴以前參奉陳疏。下廟堂。李公往廟堂。躬請回啓。梧陰曰。一隅龍灣。國勢雖倉皇。如汝小官。何敢來坐廟堂乎。令推出之。李公顚倒出曰。宰相如此可喜。《家庭遺聞》
03-41 公扈駕到關西時。上供失時。人有饋壺酒乹雞於公者。公不卽進獻。乃自嘗酒殽。到食頃後遂進供。人有責其不敬者。公曰。不然。當此亂離播遷之時。得此饋物。若或有毒。則將若之何。是以先嘗自驗。而後進之。人皆服其深量。《美行錄》
03-42 二十九日。臨津敗報至。時朝廷慮賊入北道者。或由陽德繞出背後。遂以洪汝諄爲巡察使。陽德防守。汝諄請便宜從事。取兵使李潤德所領軍一半。出大同驛馬。以備戰用。尹相斗壽曰。汝諄之如是。不過欲不去也。遂請勿令行。《壬辰日錄》
03-43 六月一日。時臨津失守。聲息漸急。上命議去就。鄭澈首曰。此非京城死守之比。令一大將守之。奉駕而出可也。沈忠謙李德馨從而和之。獨尹海原斗壽李幼澄朴東亮曰。此大不可。我國封疆。南北不過數千里。欲往北道。則窮無可去之地。欲渡鴨江。則一渡後無復可爲。雖偸生朝夕。亦何益哉。平壤䧺富一大鎭。四面絶險。易以防守。軍士精勇過萬。城中壯士數千。粮食亦多。離此一步。國事決矣。上召問之。尹海原斗壽力主前說。且曰。國事至此。急請救於遼東。且待元帥諸將之還。以圖死守。上曰。國事已付卿。好爲也。《壬辰日錄》
03-44 上諭羣臣曰。予當先向前路。世子可守此城。尹斗壽曰。旣請兵天朝。接濟之策。不可不先爲講究。遂以沈喜壽爲接待使。往義州。以洪宗祿洪世恭沈友勝爲三路調度使。分管糧餉。《壬辰日錄》
03-45 上命兪泓留守平壤。泓倉皇不知所爲。急召其子大建曰。我將留此。奈何。大建請以李誠中爲副。誠中仰天曰。人生斯世。旣逢此亂。又爲兪泓之副。寧不辱乎。梧陰使余 - 寄齋 - 特持衆言。謂止叔 - 兪泓 - 曰。此處旣有監兵使。又別有巡察使。此足矣。扈從甚少。不必更置副。兪大怒曰。使我死乎。陷之死地。又欲奪副。是殺我也。及還報。梧陰笑曰。杞城何怒。必大建怒矣。更告之。兪顧大建曰。國事不可與子弟論。然爾意若何。大建以爲難許。兪卽曰。死不可從。明日余以公事往。兪曰。子又爲公著來乎。余曰。爲公事也。且左相代公之任。公何爲在此。兪欣然曰。海原亦置副乎。曰否。兪曰。此公懲我乎。《壬辰日錄》《日錄外編》
03-46 杞城作相。仍兼都體察使。將治行。余持公事往見。則木工役於庭。將以造馬轎。許功彦 - 筬 - 李澄源 - 幼澄 - 執筆列左右。將以草檄也。杞城亦自構思。余歸語尹海平。海原在傍笑曰。此叟迂闊不可用。《日錄外編》
03-47 二日。上又命議去就。尹斗壽曰。一城之人。皆願奉大駕死守此城。大駕若出。當一時皆潰云。人心如此。若能協守。足以抵敵。且以事勢言之。此城外不知何地可避爲固也。上曰。卿言太沓沓也。時玉色慘沮。語言悲切。臣僚不敢仰視。鄭澈出謂尹公斗壽曰。左相言好則好矣。獨不瞻天顔乎。爲臣子者。安忍挽留。强欲守城。尹公斗壽厲聲曰。公何發此誤國言耶。若使京城早有固守之計。豈至今日乎。公不欲守此城。則獨去可也。澈無以應。《壬辰日錄》
03-48 車駕駐平壤。松江鄭澈西厓柳成龍梧陰尹斗壽共議國事。柳尹共主守城之論。松江力言出避之宜。梧陰詠文山詩曰。我欲借劒斬佞臣。松江大怒。奮袂而起。《懲毖錄》
03-49 五日。沈忠謙李德馨曰。今大駕不肯留此城。若一朝動駕。住箚之地。可以預定。而封疆已蹙。只有咸鏡一道。咸興城堅。且多蓄積。足以拒守。衆皆曰。然。尹相斗壽曰。咸興形勢。半不及此。脫使賊迫其處。厥後更有可去地乎。且此賊獨不往北道乎。公等何以咸興爲固。而爲此不長之計。衆以爲此不可自外廷定。請對陳稟可否。上召問。諸臣皆曰。咸興城險糧足。且召北道土兵協守。則大勝於此城之危。上頗然之。尹斗壽曰。旣不欲守此城。則退駐處有三件。急往寧邊。繕修城池器械。召集江邊土兵。以守之。事危則。卽向義州。赴訴天朝。以明引賊入寇之說。上也。不然遠向江界。集諸郡兵。嬰城固守。則可支一二月。事急則。江界下流。卽鴨綠江。乘船以下。乃上國寬奠堡。若此則猶有可依之地。二也。至於北方人心獰甚。咸興形勢。臣所備諳。城大而低。四面無險。欲召六鎭兵。以守之。則北虜必乘虛入寇。鏡城以北。非我有也。欲向南道。則峰巒峻險。未易登過。賊踵其後。城必圍困。此決不可行也。衆猶以北路險僻。賊必不往。以咸興爲可往。柳成龍李元翼李恒福李幼澄朴東亮等。與尹公議同。厥後賊酋追上行。而慮乘輿或北行。淸正入關北搶掠。兩王子又陷賊中。上之卒不幸咸興者。尹公之力也。尹公斗壽出曰。李鎰宿將。必有所見。待其來。當決北道之行。是午。李鎰至。滿朝環坐。皆仰鎰口。尹公斗壽問曰。平壤棄守。公意如何。或言咸興可往。亦如何。鎰曰。此賊不可當。平壤可以去也。咸興非此城最先受敵之比。可以往也。忠謙曰。眞將帥言也。德馨曰。所以爲李鎰也。尹公斗壽曰。失性。不足言。《壬辰日錄》
03-50 犬灘軍潰。李鎰率兵向平壤。在道先上城守之策。頗有條理。及赴朝。乃言當避駕咸興。平壤不可守。上下失望。梧陰問曰。公何言城守之策。鎰良久曰。從事官所自爲。鎰不知也。曰。何着名也。鎰俛首無以應。梧陰語人曰。此公失性。《壬辰日錄》
03-51 方平壤對壘之日。上意欲命將守之。不欲駐蹕。問于諸臣。或對以賊勢鴟張。事變難測。似非車駕久駐之所。上問梧陰以棄守之策。梧陰對以不可去。數十悉如初。上不悅。及至寧邊。諸臣多言北方城池壯高。士馬精强。駐蹕之所。無如北方。或言江界道路絶險。四塞爲固。可往。梧陰獨執往義州之策。卒回國步。皆其力也。《東史補遺》
03-52 時李恒福擢爲兵判。密猷軍機。咸萃一身。殫盡心力。知無不爲。與尹斗壽表裡酬應。上下賴焉。先是。告急使至北京。遼左煽言朝鮮與倭同叛。佯爲假王。導倭以來。中朝乃遣鎭撫崔世臣林世祿等。托以探審賊情。馳至平壤。願與國王相會。其實欲知眞假也。尹公戱謂恒福曰。此乃令公客。令公可往接待。恒福與柳成龍往迎中路。《再造藩邦志》
03-53 初六日。中殿發向咸興。上命左議政尹斗壽。率都元帥金命元巡察使李元翼以下。留守平壤。又欲使世子守之。斗壽等以爲人心視大駕爲去就。大駕旣出。雖世子守此。無益也。仍啓曰。臣等當極力守之。世子不必留也。上允之。《壬辰日錄》
03-56 賊兵到鳳山。尹相斗壽使李鎰率江原道軍數十人。益以他軍。鎰坐含毬門點兵不卽行。尹公斗壽催之。鎰始行。《再造藩邦志》
03-57 十一日。大駕發平壤向寧邊。左議政尹斗壽都元帥金命元巡察使李元翼監司宋言愼兵使李潤德校理金信元吏郞李好閔等。送至普通而辭。《壬辰日錄》
03-58 駕發之日。海原送至普通門而還。余自城內追出。海原於馬上執手。泣謂曰。今日之事。臣子之罪。奈何奈何。第觀上意尙未定去向。寧邊江界俱非平壤可守之比。而若以咸興言之。則不可同日語。朝中若欲請幸咸興。則公可出死力以爭之。俺於北議。極言於上前。上心頗回。公可易以爲力也。《日錄外編》
03-59 十二日。賊攻平壤城急。尹斗壽等在練光亭。宋言愼守大同門樓。李潤德守浮碧樓以上江灘。慈山郡守尹裕後等守長慶門。城中軍民合三四千。分配城堞。而部伍不明。散掛衣冠於乙密臺近處松間。名曰疑兵。隔江望。賊兵不多。排作一字陣。李元翼以下往守江灘。柳成龍恐城難守。托以接待天兵。馳去城外。賊又分駐江上。作十餘屯。累日不得渡。警備頗怠。金命元乃抄精兵。使高彦伯等潛船渡綾羅島。殺賊甚多。及賊衆悉至。我軍退還。不得船。餘軍從王城灘亂流而還。賊始知水淺。日暮賊衆乃濟。《再造藩邦志》
03-60 十五日。賊兵潛渡王城灘。大至。留守大臣知事已去。夜開西門。遂使城中老少先出。繼令軍器沉風月樓池中。從事官金信元請暫住安岳處。召號民兵。有所指畫。尹斗壽泣曰。承命留守。旣不能保。又不從駕。落在海曲。召號殘兵。亦復何爲。只作棄義失身狼狽之人。由普通門出。至順安。賊不追躡。乃及行在于宣川。待罪請受軍律。上敎以勿待罪。《朝野僉載》
03-62 十九日。上宿于車輩館。左議政尹斗壽追至。啓曰。臣不能死守平壤。致有今日。願受軍律。上曰。國勢已去。卿何發此言。勿爲待罪。《壬辰史草》
03-63 二十日。上次龍川郡。尹斗壽啓曰。今日之行。專爲赴愬天朝。而今則賊勢似緩。先使義州府官。諭以不爲渡遼之意。使民心少定。然後徐徐進駐何如。處處愚民。謂大駕便卽渡遼。所在潰散。將無以收拾。故敢啓。答曰。依啓。《壬辰史草》
03-65 當初赴遼之擧。未知出於何處。臣民驚駭。赴愬無地。其爲悶迫。有甚於遭亂之初。遑遑不定。所以然者。今雖倭賊迫近。而下三道皆爲完全。江原咸鏡。亦不被兵亂。許多臣民。付之何處。而强爲匹夫之行乎。且上國之許待與否。亦不可料。一行之際。妃嬪亦不得落後。則遼人率多無識。爭相看覰。服色旣殊。語音頓異。笑侮無禮。其何以揮止。雖得達遼。土風飮食。其何以堪處。思之至此。不覺流涕。赴遼之擧。臣等決不可更議。且唐兵雖多數出來。不可無我國嚮導之軍。此軍聚集亦急。本州土兵幾二千名。今雖潰散。若以科擧召集。正所謂一朝之事也。兵曹明日欲爲試射。自上姑留於此。更聞賊勢。若事急難留。則由水上以行到碧潼。留箇日。又向江界。觀勢進退爲便。《遺集》
03-66 穆淸殿之回祿。廟社主之得免火災。大駕之不幸北道不赴中原。皆公力也。《日錄外編》
03-67 駕駐義州。設文武科。以慰邊情。文愼幾恥居孫山之第。深恨春官之不公選。疏斥尹相。上曰。汝以一介書生。廷辱大臣乎。尹相猶惜其才建白。愼幾素稱關西名儒。試才後誅之未晩。上卽命呼韻。愼幾應聲輒對。上奇之。卽赦罪除職。《龍川邑誌》
03-68 七月。上諭羣臣曰。今日事。只有請救天朝而已。一路糧餉。不可不措置。尹斗壽仍啓曰。戶曹判書韓準承命不來。當遞職。而在此之人。職秩不稱。請上親裁。遂擢李誠中爲之。《壬辰日錄》
03-69 大駕方到龍彎。朝廷所咨議者。只是請兵一事。一日梧陰與諸宰會坐。召謂譯官韓潤輔曰。爾欲陞堂上乎。韓俛首不敢而已。遂啓陞堂上。盖梧陰之意。爲此聳動之擧。以勸譯官之心。一以風遠近之望。而左右竊笑其擅弄朝權有若已物然。《日錄外篇》
03-70 上曰。柳成龍受命有日久。不起行何也。尹斗壽啓曰。成龍病不能卽行。臣旣無功於平壤。苟免刑辟。請代其行。上曰。卿不必行。成龍翌日起行。時成龍病不過暑熱所傷。而遲留不發。人疑其避事。《壬辰日錄》
03-72 伏見楊總兵答沈喜壽之言。不勝驚駭。此必祖總兵不意一見史游撃之死。意欲還到。爲此不近之言。恐動楊爺也。自古貝錦之說。莫不無形而做出。何可恃我之直而不爲之諄諄辨明也。臣忝在大臣之列。請與洪秀彦。共往楊總兵陣前。相與辨明。期吐我邦之情。亦使沈喜壽。徑造祖總兵所駐處。致其情懇。又辨此間曲折宜當。亦恐軍士畏敵思歸。造此不近之言。以惑祖爺視聽。而致此紛紛也。《遺集》
03-73 九月。尹斗壽入對曰。光州牧使權慄。有氣骨有度量。將帥才。全羅監司非此人不可。遂以慄爲巡察使。《壬辰日錄》
03-75 宜寧郭再祐聚衆穿紅衣。號義兵。朝廷擢折衝助防將。時監司金睟處事躁刻。積失人心。再祐移檄列罪。將殺之。又上疏請斬睟。上大疑之。密問于備局曰。此人欲擅殺道主。非賊而何。不除之。恐有悔也。尹斗壽以爲。觀其所爲。一狂童也。至於將兵斬賊。能保鄕曲。東西赴敵。不避險難。自以爲義氣所激。而實不知自陷大辟也。干戈搶攘之日。豈可人人盡責以禮法乎。上遂不報。《壬辰日錄》
03-76 時倡義使金千鎰等久在江華。未有所措。杖義將禹性傳等尤寥寥無聞。上召性傳等領兵渡江。直至平安道。而性傳病不能行。上怒曰。性傳擁兵自衛。觀望不赴。千鎰安坐談笑。何益于國家。尹斗壽曰。千鎰起兵倡義。使八方人心。洽然大回。今秪以勢孤。不能乘可爲之機耳。至於性傳。素有重病。人所共知。豈有觀望之理。《壬辰日錄》
03-77 十一月- 一作十月癸丑 - 前參判成渾赴行朝。陞拜右參贊。時相尹斗壽啓曰。善人天地之紀。請加褒陞。故有是命。《朝野僉載》
03-78 善人。天地之紀。雖在平時。所當汲汲籲俊。共圖國事。況於天地閉而大亂之時乎。同知成渾。久在山林。充養有方。學爲儒林之表。才爲濟世之具。不比頃者大言賭世之輩。有識之人。皆望一起。今者。徒步杖策。遠膺東宮召命云。其於輔導鶴禁。必有所益。如此急難。亦有訏謨裨切時務者。其何幸如之。除拜從品。歲月已久。朝家優待老成之禮。恐有所未盡。行朝大臣。通于臣等。將此意啓達云。此實是朝廷公議。惶恐敢啓。《遺集》
03-79 千里遠路。親自投疏。誠意可嘉。言可用採之。言不可施置之。其人才氣。令該曹聞見。隨材除職事。已爲啓達矣。宗室中。原川君徽漢陰都正俔。頃日皆上疏章。言多可採。當國家危亡之際。惓惓效忠。人多稱之。此兩人皆以試藝發身。識見非他宗室之比。別施賞典。則收拾人心。未必無補。宗室自募從軍者。時未有顯功。皆爲重賞。爲其璿派所分。其意亦好。況此兩員。士論歸多。臣聞之。不敢容默。敢啓。《遺集》
03-83 同知柳永吉啓曰。體察使鄭澈迷罔機務。主勢孤弱。公論不行。仍又斥左相尹斗壽非擔當恢復之人。云云。《松江年譜》
03-85 梧陰之守平壤也。紀律甚亂。公嚴棍箕伯。一府盡慴。天將召大臣曰。明日當犒軍。燒酒三百甕。備置於官門。公言下卽諾。時已黃昏。夜深天將遣人探視。一府寂然。公則牢睡。及平明以紅水調濁酒。列甕三百盛之。我國將卒。皆乘牝馬而出仰。天兵乘馬見牝馬。皆奔突相鬨。於是甕破酒迸。酒臭狼藉。天將驚歎曰。朝鮮大臣局量如此。國其不亡乎。《美行錄》
03-86 梧陰與衆論。人有所壓。不能紛挐。一日上令諸宰議事。左右各言所見。自以爲是。必欲行其說。上亦以衆說不一難之。尹曰。古人獻言而已。其所施用。已不預焉。不然何謂屈羣策。上曰。誠然。衆遂黙然。《日錄外篇》
03-87 子常謂余曰。近觀梧公所爲事。不過一無謀之人。余曰。旣無謀。私情又多。子常曰。然。《日錄外篇》
03-88 尹海平在義州。晝與遼人相接。夜與郞官議事。或至雞鳴不已。率皆無實之事。人皆苦之。梧陰笑曰。哀哉。子固年八十。亦不知人之苦樂也。滿座絶倒。《日錄外篇》
03-89 余謂公著曰。寅城於軍重事。不得措一辭。反出梧陰下。大異於前所聞矣。公著曰。獨於東西之說。言論風生。可謂爲邊而生者也。《日錄外篇》
03-90 澄源謂余曰。寅城淸疏。而累於東西。西厓周詳。而綱於事情。梧陰品好。而過於私情。皆非適用。然使西厓講定規矩制度。則大勝於梧陰矣。《日錄外篇》
03-91 公著嘗曰。梧陰於事多私。且不能無心於東西。獨不喜逢迎上意。是可取也。《日錄外篇》
03-92 澄源嘗與子常爭論邊事。頗不屈。子常作色曰。近來紀綱渙散。郎廳至欲與堂上相爭。殊爲可駭。余曰。事或不可。則君之過失。亦且爭之。况當搶攘之日。袖手傍觀。則於堂郞體貌得矣。失宜之擧。終無可正之道。梧陰曰。此言誠是。《日錄外篇》
03-93 子常於諸宰論事之際。知其不可而緘默不言。余曰。當此時。身爲兵判。臨事無是非。豈所望於公者耶。子常笑曰。大小事梧陰旣主張。我之所料。未必勝於彼。而或至掣肘。則是不如默默也。終不改其度。《日錄外篇》
03-94 澄源以司諫。一日承對言。一二年來。宮禁不嚴。朝著不靖。至有指斥金公諒姊妹之說。况去邠之後。無一番罪已之敎。其何以慰人心。上終不答。公著亦入侍。出門言曰。今日以幼澄之故。諸宰不出一言而罷。良可笑也。梧陰曰。勝吾輩千言。《日錄外篇》
03-95 中朝式年科題。擬朝鮮國王姓諱謝復國表。其登壯頭表。有潛師擊賊頗賴尹某之孤忠之句。以此觀之。先君子之功。中朝人亦能知之。至發於科場之文。况我國之人。其可以不知乎。《陶齋隨筆》
03-96 癸巳正月。平壤旣復。巡邊使李鎰屯兵城外。夜賊遁去而不覺。李提督如松咎其不能警守。使賊遁去。朝廷遣左議政尹斗壽。至平壤問鎰罪。將行軍法。良久釋之。《朝野僉載》
03-97 時李提督由開城退軍。向平壤。欲旋師。朝廷遣左議政尹斗壽。請勿退兵。提督終不聽。尹公苦辭請東。淚隨言發。提督爲之動色。遂有泣閣老之稱。《再造藩邦志》
03-98 朝廷聞天朝將講和。會大臣臺閣議當否。左右皆曰。以計羈縻。姑緩師。無害於理。惟尹斗壽李恒福以爲決不可和。承旨李好閔亦曰。萬世之讎。不可許和。遂遣史臣。移咨於經畧提督。爭其不可許和之意。兩衙皆不聽。《再造藩邦志》
03-99 五月。遣左議政尹斗壽于嶺南。提總三道衆務。以督其違慢。《再造藩邦志》
03-100 癸巳秋。上在海州。下傳位東宮之敎。大臣尹斗壽等防啓。啓辭曰。實出羣情之外。云云。《荷潭破寂錄》
03-101 梧陰扈駕到海州。一日早朝。上召諸臣。閤門外宣饍盛。梧陰與松江仰達曰。倉皇中盛饌何而設耶。上良久敎曰。去夜卽仁嬪母祭。畧具盃盤。欲使卿等一嘗矣。梧陰對曰。宗廟久廢祭。仁嬪乃祭其母乎。遂不食。《美行錄》
03-102 十月天兵太半回去。京師亦頗修葺。尹斗壽李恒福等力請回鑾。於是車駕自海州還京師。《再造藩邦志》
03-103 梧陰亂後入京有詩曰。山河幾灑新亭淚。胡馬還驚紫塞塵。獨使至尊憂社稷。諸君曾作太平人。盖壬辰以前。東人當國誤政。故云。《家庭遺聞》
03-104 癸巳十一月。遣世子。總率諸宰臣。前往于全慶地方。整理諸軍。左議政尹斗壽隨往。後兼體察使。《朝野僉載》
03-105 甲午六月。劉綎承命班師。王世子自公州遣左議政尹斗壽于南原。請留。八月。斗壽還朝。乞改扈從錄勳之命。啓辭曰。臣於漏盡之境。尙冒夜行。貪戀聖恩。久未決然。而豚犬等輩。皆列顯要。盛滿至此。天禍不遠。人議可知。臣於前日。屢被重論。勢所必至。何敢有一毫怨尤之心乎。今有扈從諸臣錄勳之命。臣名亦在其中。不勝惶駭之至。臣於爾時。忝在大臣。未嘗出一謀晝一策。責愈重而罪愈大也。何敢與諸臣。同受策命乎。內顧於心。實增愧懼。伏望速賜鐫改。以安愚分。棲息都下。少見中興德業之盛。不勝懇祈之至。- 因病未果上。 - 《遺集》
03-106 甲辰七月。錄忠勤貞亮竭誠效節協策扈從。- 後改扈聖 - 功臣李恒福等八十六人。以壬辰執靮之功也。《朝野僉載》
03-107 光海壬子。以分朝從行諸臣。錄竭忠盡誠同德贊謨佐軍衛聖功臣崔興源等八十人。仁祖癸亥追削之。
忠勤貞亮竭誠效節協策扈聖功臣
萬曆壬辰。倭賊迫京。大駕西幸義州。群臣跋涉扈從。請兵上國。終致回鑾之慶。癸巳還都。以鄭崑壽久病不卽勘勳。至甲辰始錄。《國朝典故》
一等 二員
鰲城府院君 李恒福 - 子常。白沙。丙辰生。庚辰科。都承旨。隨駕。松京拜西銓。平壤拜西銓。亟請乞授計。領相。文忠。
西川府院君 鄭崑壽 - 汝安。柏谷。戊戌生。丙子文壯。壬寅卒。追封。請兵天朝。得五萬七千兵來。贊成。贈領相。忠翼。
二等 三十一員
定遠君 元宗國諱 - 隨駕。至平壤先詣寧邊。旋赴義州行在。
信城君 王子 珝 - 隨駕。
完平府院君 李元翼 - 公勵。梧里。丁未生。己巳科。箕伯。策應軍務。處事得宜。領相。文忠。
海原府院君 尹斗壽 - 子仰。梧陰。癸巳生。戊午科。追封。左相。隨駕。松京大拜。領相。文靖。
靑溪君 沈友勝 - 士進。晩沙。辛亥生。庚辰科。戶曹正郞。隨駕。西川書狀官。戶參。贈領相。
延陵府院君 李好閔 - 孝彦。五峯。癸丑生。乙酉科。吏曹佐郞。隨駕。咨奏皆出公手。文僖。
海平府院君 尹根壽 - 子固。月汀。丁酉生。戊午科。隨駕。贊成。贈領相。文貞。
豊原府院君 柳成龍 - 而見。西厓。壬寅生。丙寅科。左相。隨駕。領相。文忠。
原城府院君 金應南 - 重叔。丙午生。戊辰科。追封。兵判。隨駕。
韓興君 李山甫 - 仲擧。鳴谷。己亥生。己巳科。追封。吏判。隨駕。贈領相。忠簡。
晉原府院君 柳根 - 晦夫。西坰。己酉生。壬申科。前承旨。隨駕。贊成。贈領相。文靖。
完陽府院君 李忠元 - 元甫。駱叟。乙丑壯。承旨。隨駕。戶判。
唐興府院君 洪進 - 希古。訒齋。辛丑生。庚午科。前僉知。隨駕。吏判。贈領相。端敏。
漢川君 李 - 汝震。辛亥生。癸未科。追封。
全陽府院君 柳永慶 - 善餘。春湖。庚戌生。壬申科。領相。
完興君 李幼澄 - 澄源。誠中子。壬戌生。癸未科。追封。兵曹正郞。隨駕。牧使。贈吏判。貞敏。
錦溪君 朴東亮 - 子龍。鳳溪。己巳生。庚寅科。兵曹佐郞。隨駕。贈領相。忠翼。
靑原君 沈岱 - 公望。西墩。丙午生。壬申科。追封。舍人。隨駕。以畿伯駐兵朔寧。爲倭所襲卒。畿伯。贈領相。忠壯。
密川君 朴崇元 - 尙初。壬辰生。甲子科。壬辰卒。追封。左尹。隨駕。判尹都承旨。贈贊成。
溫城君 鄭姬藩 - 子翰。庚午科。掌令。隨駕。承旨。
延原府院君 李光庭 - 德輝。海臯。庚寅科。翰林。隨駕。
寧平府院君 崔興源 - 復初。己丑生。己巳科。領相。隨駕。忠貞。
靑林君 沈忠謙 - 公直。四養堂。乙巳生。壬申科。追封。副提學。隨駕。兵判。贈贊成。忠翼。
龍原府院君 尹自新 - 敬修。己丑生。壬戌科。追封。僉知。隨駕。戶判。贈領相。
淸溪君 韓淵 - 武科。追封。宣傳官。隨駕。終始不離。上曰。予臣惟有一韓。
海豊君 宗室 耆 - 宗臣。隨駕。
順義君 宗室 景溫 - 海豊子。宗臣。隨駕。
順寧君 宗室 景儉 - 順義弟。宗臣。隨駕。
平川府院君 申磼 - 伯峻。甲申科。承旨。隨駕。兵判。
廣陽君 安滉 - 宣廟妹壻。追封。隨駕。
綾海君 具宬 - 元裕。草塘。戊午生。乙酉科。兵曹佐郞。隨駕。贈領相。忠肅。
三等 五十三員
西原府院君 鄭琢 - 子精。藥圃。丙戌生。戊午科。贊成。隨駕。左相。貞簡。
完城府院君 李憲國 - 欽哉。柳谷。乙酉生。辛亥科。追封。大諫。隨駕。左相。
文陽君 柳希霖 - 景說。庚辰生。辛酉科。僉知。隨駕。禮參。
德原君 李有中 - 時可。甲辰生。丙子科。掌令。隨駕。吏參。
汭陽君 任發英 - 隨駕。
高興君 奇孝福 - 隨駕。
和城君 崔應淑 - 武。隨駕。
海陵君 崔賓 - 武。隨駕。
咸原君 呂定邦 - 武。隨駕。
原陽君 宋康 - 武。隨駕。
瀛城君 高曦 - 武。隨駕。
益興君 李應順 - 武。水使。隨駕。
節愼君 宗室 壽崑 - 追封。宗臣。隨駕。忠孝。
晉昌君 姜絪 - 隨駕。
眞城君 金起文 - 宦官。隨駕。
月城君 崔彦恂 - 宦官。隨駕。
驪原君 閔希騫 - 宦官。隨駕。
陽平君 許浚 - 醫官。隨駕。贈輔國崇祿。
廣溪君 李延祿 - 隨駕。
益城君 金應壽 - 馬醫。隨駕。
碧城君 吳致雲 - 牽馬衛。隨駕。終始執鞚不離。
寧城君 金鳳 - 宦官。隨駕。
陟州君 金良輔 - 宦官。隨駕。
武陽君 安彦鳳 - 宦官。隨駕。
鰲原君 朴忠敬 - 宦官。隨駕。
蔚陵君 林祐 - 宦官。隨駕。
開城君 金應昌 - 宦官。隨駕。
淸河君 鄭漢璣 - 宦官。隨駕。
密山君 朴春成 - 宦官。隨駕。
花川君 金禮禎 - 宦官。隨駕。
伽城君 金秀源 - 宦官。隨駕。
唐城君 申應瑞 - 宦官。隨駕。
奈城君 辛大容 - 宦官。隨駕。
樂城君 金璽信 - 宦官。隨駕。
花城君 趙龜壽 - 宦官。隨駕。
韓溪君 李公沂 - 醫官。隨駕。
瀛海君 梁子儉 - 宦官。隨駕。
漢南君 白應範 - 宦官。隨駕。
鰲山君 崔潤榮 - 宦官。隨駕。
盆城君 金俊英 - 宦官。隨駕。
鳳陽君 鄭大吉 - 宦官。隨駕。
延陽君 金繼韓 - 宦官。隨駕。
豊巖君 朴夢周 - 宦官。隨駕。
慶陽君 李士恭 - 仲敬。守門將。隨駕。都摠管。
完原君 柳肇生 - 武。隨駕。
洪陵君 楊舜民 - 內禁衛。隨駕。
浪城君 慶宗智
雞林君 崔世俊 - 司謁。隨駕。
唐溪君 洪澤 - 隨駕。
石陵君 全龍 - 牽馬衛。隨駕。與吳碧城終始不離。
海愼君 李希齡 - 隨駕。
石城君 吳連 - 扶餘正兵。隨駕。
喬林君 李春國 - 隨駕。
萬曆三十三年乙巳四月十六日書
敎贈忠勤貞亮效節協策扈聖功臣故領議政海原府院君尹斗壽書 洪瑞鳳製
王若曰。急病攘夷。臣子之大節。嘉勳應德。國家之彝章。永保在鄙之艱。式懋賞從之典。惟卿性成忠孝。志任經綸。國器之稱。已闡韋布之日。人表之望。夙著郞僚之時。肆膺昭考之知。以遺寡躬之輔。幹我機務。綱擧目張。殿我藩屛。威慴仁愛。惟其智酬變而彌裕。是以用遇物而咸周。卞正璿源。允藉專對之力。功藏金櫃。用彰丕視之儀。當柏府長持憲之辰。値桑酋肆犯上之語。盈庭之論。衆口莫適所從。借箸之忠。卿言正合孤意。明大義於一奏。承盛褒於十行。粤至壬辰之去邠。先思元老之起廢。張浚入衛。却喜小舟之來。陸贄生還。不用千金之募。爰立相於搶攘之際。乃督戎於敗衂之餘。意氣慨慷。精神鼓動。兵務軍政之叢集。疏決靡遺。遠猷嘉謨之畢陳。擔當不避。誠旣見於板蕩。利自別於錯盤。曁平壤對壘而不支。劇襄野迷路而莫適。衆爭獻北遷之議。深阻可依。卿獨斷西入之謀。父母孔邇。亟贊帝庭敷奏之本。終轉天兵迅掃之機。漢業重昌。實賴雲臺之效績。唐家再造。幸見蜀道之回鑾。式至今休。克恢前烈。雖天眷佑之不忒。惟爾弘濟者居多。而勳勞方記於旂常。奈英靈已騰於箕尾。慨泉原之莫作。深深喬木之思。視幽明而不殊。庸申泰山之誓。載峻號於功府。仍增賦於爰田。肆策勳爲扈聖功臣二等。圖形垂後。超二階爵。其父母妻子。亦超二階。嫡長世襲。不失其祿。宥及永世。無子甥姪女壻超一階。仍賜伴倘六名。奴婢九口。丘史田八十結。銀子三十兩。表裡一段。內廐馬一匹。至可領也。於戲。哀榮禮隆。在予君臣而無憾。忠義世繼。宜爾子孫之承休。咨爾英魂。歆玆寵渥。故玆敎示。想宜知悉。
竭忠盡誠同德贊謨佐運衛聖功臣
宣祖壬辰西幸時。光海以世子分朝。至寧邊。決渡遼之策。光海爲世子。付以廟社主。遂分大小朝。-及嗣位。錄其從行諸臣及廟社陪行之功。壬子賜鐵券。號曰衛聖功臣。仁朝改玉後。卽削。《國朝典攷》 ○壬辰駕到興義驛。宗室壽崑禮胤誠胤聖胤等。以廟社主。不當埋安。將請對奉還。與順義君景溫議不合。相鬨。大臣尹斗壽白上。遣禮官陪來。光海壬子錄勳。癸亥削錄。大臣李元翼建議。四宗室及趙公瑾。只去勳名。還給賜牌田民。《故事撮要》
一等 十員
寧平府院君 崔興源 - 領議政。陪從寧邊。扈聖。
海原府院君 尹斗壽 - 扈聖。
西原府院君 鄭琢 - 贊成。陪從伊川。扈聖。
鰲城府院君 李恒福 - 陪從。扈聖。
海豊君 宗室 耆 - 扈聖。
龍原府院君 尹自新 - 宗廟提調。奉廟社來。扈聖。
靑林君 沈忠謙 - 扈聖。
順義君 宗室 景溫 - 扈聖。
順寧君 宗室 景儉 - 扈聖。
文陽府院君 柳自新 - 光海妃父。判尹。
二等 十七員
完城府院君 李憲國 - 扈聖。
文陽君 柳希霖 - 扈聖。
德原君 李有中 - 扈聖。
汭陽君 任發英 - 扈聖。
節愼君 宗室 壽崑 - 宗臣。陪從伊川。扈聖。
晉昌君 姜絪 - 扈聖。
完昌君 李覮 - 士瑩。辛酉生。癸未科。癸亥凶死。戶判。
杞城府院君 兪泓 - 止叔。陪從成川。
淸川君 韓準 - 公則。南崗。壬寅生。丙寅科。戶判。平難。
檜原府院君 黃愼 - 思叔。秋浦。壬戌生。戊子壯。戶判。贈左相。文敏。
淸風君 金權 - 而中。拙灘。己酉生。庚辰科。戶參。贈領相。忠簡。
三等 五十三員
文原君 柳希聃 - 柳自新二子。僉樞府使。
瀛海君 梁子儉 - 扈聖。
鰲山君 崔潤榮 - 扈聖。
鳳陽君 鄭大吉 - 扈聖。
豊巖君 朴夢周 - 扈聖。
敎贈竭忠盡誠德贊謨佐運衛聖功臣故領議政海原府院君尹斗壽書金尙憲製
王若曰。文叔旣歿。衛君敍恤國之勤。安平已亡。漢帝加定策之賞。誠以圖勞不替於今昔。顯忠罔間於明幽。宜推異典。庸賁重壤。惟卿稟精間氣。爲國宗臣。蓋自策名委質之時。已有捐軀報主之志。由其養於內者確乎不拔。所以施諸外而蔚然可觀。肆先王灼見之明。擬他日大用之地。風塵之警。忽起於南陲。播越之行。乃極於西塞。遂思良於臨亂之際。爰作相於起廢之初。得李勉於奉天。朝廷始重。見夷吾於江左。風采一新。首陳哭秦之忠言。力陳渡遼之非計。致王師再救之力。續國命幾絶之危。竟收旋乾轉坤之功。重參礪山帶河之列。逮小子撫軍於湖路。以太傅贊畫於胄筵。自念涼德之資。曷副專勑之旨。凡有動靜。悉與周旋。出則在前。嘉訓常資於藥石。行所無事。疑謀若決乎江河。予任卿而運籌決策。卿體予而殫忠竭節。恐不效於付託。誠匪懈於夙宵。賴其盡瘁於始終。免夫獲戾于上下。歸神功於玄宰。固靡有爭。翼聖算而中興。與稱斯慶。然時勢有難行者。顧予心曷嘗忘焉。慨盛典未褒於殊勳。嗟精爽遽返於列宿。九原已矣。一涕泫然。肆策勳一等云云。於戲。用汝作舟楫。而亦用汝作鹽梅。與卿共患難。而不與卿共安樂。尙福祿之未艾。遺子孫於無窮。冀歆寵靈。庶進冥祐。故玆敎示。想宜知悉。
03-02 通信使黃允吉還日本。- 通信正使黃允吉。副使金誠一。 書狀官許筬。從事官車天輅。其還也。玄蘇平調信偕來。- 書啓極悖慢。書啓到日。上於夕講。令入侍諸臣見之。判書尹斗壽首進曰。事當具奏天朝。仍陳我國通信本末可也。上頷之。與尹某意合。以爲彼此利害不暇論。而以小事大。大義所在。豈可不爲之奏聞乎。朝廷不得已具奏。《寄齋雜記 辛卯史草》
秀吉報書曰。日本國關白奉書朝鮮國王殿下。雁書薰讀。叙卷再三。從余之請。見差三使。幸甚。吾國六十餘州。比年分離。亂國綱廢世禮。而不聽朝政。故余不勝感激。三四年之間。伐叛臣討逆徒。及異域遠島。悉歸掌握矣。夫人生一世。誰保長生。古來不滿百年。焉能鬱鬱久居此乎。不屑國家之遠山河之隔。欲一超大明國。方乎其時。貴國重隣之義。以黨于吾國。則彌可修隣盟。
03-03 辛卯四月朝講。大司憲尹斗壽入侍。講畢。將退。上曰。書啓事甚秘。欲與大臣及備邊諸宰密議。都憲有計慮。亦可毋退。兵曹判書黃廷彧曰。尹某計慮深長。朝臣罕倫。可預議。仍命參議倭情奏聞當否。大臣以下皆難之。尹斗壽曰。事係上國。機關甚重。殿下至誠事大。天日在上。豈可隱諱。臣意當卽奏聞。仍陳我國通信本末爲是矣。廷彧曰。計無出此。某言是矣。領相李山海曰。兩言雖好。恐皇上罪我私通倭奴。不如諱之。左相柳成龍曰。凡事不思而行。恐未免踈漏。領相言是也。斗壽且曰。凡事宜據實直行。事之利害。本不足計。君臣大義。不容不實奏。君臣父子之間。何事不達。事必須直陳無諱。可無後日之責。他不暇計。因傍引經義。爭之甚確。上曰。卿言是矣。兵判如尹公斗壽議。餘如山海議。未決而罷。後日更議。上斷以奏聞爲是。大臣不敢貮。- 賀節使金應南之行。具奏倭情。《壬辰記》我朝臣事大國。凡幾代矣。島夷敢生犯上之計。慢辭若此。則便是犯上之賊。所當急急咨禀。而金睟等終始持難何也。〔副學金睟承柳成龍旨意。經席盛陳陳奏天朝實爲未安之由。〕至如柳成龍之明敏練達。猶未覺悟。良可惜也。若無尹黃朴諸公之力持必爭。又非上心之堅定。大事幾誤。寧不懼哉。此事實爲重復根抵。覽者詳之。《壬辰記》
03-04 五月晝講。上謂副提學金睟曰。福建近於日本。商賈又通。安知日本送我之書契不達於天朝乎。天朝責我以日本與爾國入寇。而何不奏云。則雖欲免引賊犯上之言。得乎。前日都憲之言。亦如此。奏聞不可已也。《朝野僉載》03-05 宣祖朝當倭酋之耽耽西伺也。朝廷莫覺。其時泛使之回。亦莫覺。其欲直犯上國者。著於書契中。而猶不欲奏聞。獨尹公斗壽請據事具奏曰。臣之於君。直當如此。他不暇論。旁引經義確甚。上竟從之。以復我朝三百年宗社。初則斥擯於論議。中不容朝。後拜相。西巡之日。垂紳正笏。立於百僚上。儼然人仰而恃之也。能獻可替否於殿陛之下。毅然君倚以爲重。能宰物平施休休有容。綽然於進退之間。能寵不加榮。辱不加挫。恢然於休戚之際。此功此志。非管樂以下人所能覰知也。雖知者。豈料末年事業如是卓然乎。士有合不合。假令早位巖廊。則安知可以弭壬辰之難。而亂作之後。始得公弭之。信乎其繫遭逢也哉。《續自警編》
03-06 先生曰。辛卯玄蘇來。奏聞當否。朝議各立。蓋海原主當奏之論。西厓主不當奏之論。其時朝講。海原一隊。西厓一隊。爭辨不決。日中乃罷云。對曰。懲毖錄。奏聞倭情事。朝議以爲不當奏。自家獨啓以奏。卒得天朝之力云矣。先生曰。海平嘗言西厓記壬辰事不平。凡諸善畫。悉歸之己。以自掠美。甚不是云矣。《石室語錄》
西厓記壬辰事名曰懲毖錄。又雜記兵亂時事。一言一事無非誇矜。其所存可窺也。且當秀吉慢書之至。西厓與李山海欲爲欺隱天朝。梧陰力請奏聞。芝川亦極言之。此世所共知也。而乃以爲己欲奏之。朝議不一。余嘗疑其掠美。後見寄齋雜記辛卯史草云。倭書初到。柳以爲決不可奏。尹黃諸公言不可不奏。朴公東賢又以奏聞爲當。便成黨論。東人主勿奏之議。西人持奏聞之論。互相詆斥。此乃錦溪珥筆出入時所睹記者。豈非可信之公案乎。上從尹公議。終以奏聞。見奬於天朝。出兵來援。若論重恢之功。此當爲首。故西厓公然攬取。欲以厚誣後人。誠可痛也。《陶山餘贅錄》
03-07 金海龍嘗言。梧陰相公以倭情直奏天朝之後。柳相成龍甚猜疑。而梧陰有弘量。能容柳相。故柳終不敢加害。卒成中興之業。其次李舜臣爲統制使。賂媚柳相。保其位。立大功。其量不可當也。《家庭遺聞》03-08 辛卯十月。傳曰。洪原定配罪人尹斗壽放釋。蓋春初議奏聞時。上從斗壽議。及金應南 - 朝野僉載云陳奏使 - 回陳許儀後等密報倭情事。- 中朝人許儀後被擄日本。潛遣所親米均旺。投書上國邊帥。告以倭將入寇。朝鮮爲先鋒云云。 - 上嘉尹某先見。特命放還。臺啓請勿放。上命移配延安。《癸甲錄》
03-09 十一月。上命放釋尹斗壽。時中朝以倭情奏聞。降勑褒諭。上以當初此議尹斗壽實主之故也。兩司啓請。尹斗壽罪重。不可放釋。逾月不已。始許量移中道。臺論停。移海州。- 韓應寅曰。特命量移海州。 - 《壬辰記》
03-10 壬辰四月十三日。倭首平秀吉遣將平秀嘉平行長政成淸正等大擧入寇。陷釜山東萊。連陷諸郡。十七日報至。中外大震。上以尹斗壽可用於一隅。命放還。臺諫累啓不可放。上不從。《寄齋雜記 壬辰日錄》
03-11 上思尹斗壽言。卽命放釋。以馹召之。再三問其來。及至復原封而超遷其職。尹公斗壽壇宇俊偉。氣量洪大。登第以後。歷敡中外。出入近侍。人皆以公輔目之。辛卯李山海等陰使洪汝諄。譸張熒惑。網打士林。竄逐縉紳之徒。尹公斗壽遂配北道。上以尹斗壽有才可大用。有是命。《再造藩邦志》
03-12 四月二十九日。海原自海州入京。翌日上西行。乃以散秩陪從。《牛山記事》《朝野僉載》
03-13 五月一日。上召謂海原君尹斗壽曰。卿有大才。可救國家急。故特命放還。死生相救。勿負予意。仍解賜所佩靑織囊 - 駕至東坡驛。崔有源引入帳殿。解賜佩刀。 - 曰。無物可表情也。斗壽泣謝而出。《壬辰日錄》
牛山記事。四月晦日上至東坡館。引見賜囊云云。
03-14 五月初一日曉。上召諭都承旨李恒福及領相李山海左相柳成龍曰。事已至此。予將何往。又問尹斗壽安在。素有計慮。願見之。恒福出召斗壽。卽進前上。慰諭再三曰。今後卿兄弟勿離左右。以輔予。乃解賜佩囊曰。所以表予意也。卿才智可救國家急。且問計將安出。恒福曰。可以駐駕義州。若勢窮力屈。便可赴愬天朝矣。斗壽曰。國何可輕棄之。棄國圖存。古未有也。北道士馬精强。咸興鏡城皆天險足恃。今可踰嶺北幸。上曰。承旨言如何。柳成龍曰。不可。大駕離東土一步地。朝鮮便非我有。上曰。內附本予意。柳成龍又言不可。因與恒福論難者十數。而不肯合。上時右恒福而左成龍。李山海但俯伏涕泣而已。盖海原與柳相恐人心離散。則難可復合。故以爲內附之論不可遽發。恒福以爲賊勢冲突。不可抵當。必須西籲天朝。乃可濟事。其意牴牾不相入。《再造藩邦志》03-15 夕次開城府。衆志崩潰。一夜四五驚。軍民蹂躪。無以鎭之。上以尹斗壽爲御營大將。號令統攝。以護御營。人心始鎭安。《再造藩邦志》
03-16 二日。臺論李山海罪。遂罷職。以柳成龍爲領議政。崔興源爲左議政。尹斗壽爲右議政。旋以小紙書遞成龍代斗壽六字而下。於是崔爲領相尹爲左兪泓爲右而委任。斗壽大小之事皆咨焉。《再造藩邦志》
03-17 駕到松都。民人塞道叩馬曰。當此亂時。如尹斗壽鄭澈者。不爲政丞。何以治其亂乎。上不得已以梧陰爲右相。松江爲左相。《寄齋雜記 日錄外編》
03-18 李完城憲國戇直不諱。宣廟優容之。當壬辰西狩至開城。策免李山海柳成龍兩相。公以諫長入侍。上方擇相。以宰相座目指問曰。鄭琢何如。對曰。雖淸愼。無濟世才。可謂束之高閣者也。又問崔滉何如。對曰。剛介則有之。性褊不可任大事。又以兪泓黃廷彧爲問。俱對以不合。上乃擧興源尹梧陰兩公名。對以爲當。遂登庸焉。人以爲難。《東史補遺》
03-19 尹海原自謫所入來。旋拜右揆。掌機務。海平以文學司接伴唐官之任。《東溪雜錄》
03-20 尹公拜相卽日。首請上御南門。宣諭父老。遣近侍于都城。開諭人民。甄用舊都人才。以收人心。下罪已敎于八道。以謝士民。遣使下三道 - 忠全慶- 。 召募義兵。以激士心。於是上御南門樓。撫諭父老。令各陳所懷。下罪已書于八道。遣使各道。召集義兵。《朝野僉載》
03-21 上到於京。欲徵兵兩南。沈公望岱忼慨自請往。上慰遣之。出語梧陰曰。公今相矣。其能布公心去私情乎。曰。子言善。《日錄外編》
03-22 禮判鄭昌衍以爲。廟主所載馬。多至五十餘疋。今當倉卒。無力可運。不如預先奉安於凈潔之地。以簡一行。衆皆當待新相出仕後議之。上卽命治行。昌衍猝聞駕發。未及議于大臣。卽爲安厝於穆淸殿右。《壬辰日錄》
03-23 四日。駕次寶山驛。尹斗壽問廟社主至否。則禮官已於倉皇中瘞于穆淸殿。斗壽聞之愕然。啓遣禮曹參議李廷立。宗廟提調尹自新。奉出追及。旣而賊入開城。掘發無不至。微此一著。則後日之悔尙忍說哉。《朝野僉載》
03-24 駕到寶山日。宗室海豊君耆等。執尹相手。痛哭曰。公以國之大臣。有司棄廟社主。而何不覺也。古今寧有無廟社之國乎。尹公曰。有司不遍議。經行奉安。雖非吾所與。烏可謂無罪。微公言。國不國矣。遂遣禮官陪來。十日追至平壤。《壬辰日錄》
上發開城。行色遑遽。到寶山。海豊君言于梧陰曰。世豈有無宗廟之國。公何不知耶。梧陰愕然曰。某日乃吾作相日。我作相而國亡也。仍歔欷涕下。《日錄外編》
03-25 五月七日。大駕入平壤。御上衙。命左議政尹斗壽。率都元帥金命元巡察使李元翼等守城。《續平壤志》03-26 車駕入平壤。爲久駐計。朝廷乃以知事韓應寅爲諸道都巡察使。領平安道精兵三千。屯臨津。將行尹公言於衆曰。斯人狀貌有福。必能辦事矣。《再造藩邦志》
03-27 權監司徵啓言。麻田郡守朴致弘。初雖棄官。今爲其父分戶曹判書朴忠侃從事官在戎行。請贖白衣之律。張皇說話以救。海原見而嚬曰。大賊臨境。弧軍始聚。身爲畿伯。無一事可措。而獨汲汲於此。致弘免罪。果涉於畿伯乎。此公顚倒若此。必失性也。余曰。可謂從容不迫。非顚倒也。海原曰。此子欲救權乎。余曰。若非從容。啓本詳悉。何能至此乎。滿座皆笑曰。大好大好。《日錄外篇》
03-28 朝議請遣大臣。經紀浿南。咸欲以尹海原往。兵判金應南耳語李恒福曰。尹相離此。則大事瓦解。無人鎭之。李然之。遂以他相啓請。上從之。《再造藩邦志》
03-29 尹海原方以妻喪。退在私室。文牒塡委。諸相不能辦決。遣郞請尹公。日昃。乃詣賓廳。裁決如流。一晷便空。李誠中歎曰。乃今知人之才智。相去有如是者。他相徒仰尹相一人之口而已。《再造藩邦志》
03-30 梧陰作相之後。頗以時事擔當。崔兪二公拱手而已。一日梧陰聞妻喪。不出備局。諸宰聚首終日。不得了一事。公著 - 李誠中字 - 曰。今日始知政丞之不可無也。如羣雛失其長。論議而無所折衷焉。或曰。領右獨非相乎。公著掉頭曰。論議則可。折衷非所能也。《日錄外編》
03-31 十二日。下備忘記。諭以章䟽勿稱睿聖。且勿用尊號。以示自貶之擧。李誠中曰。此盛擧也。爲臣子者。不可不承順。以成其美。尹海原曰。今日之變。無非臣子之罪。而乃勸君上。先自貶損。豈合於義。遂對以不可貶損之義。衆議是之。《壬辰日錄》
03-32 李恒福李德馨 - 漢陰前以宣慰使。往東萊。要會倭將于忠州。而路梗不見。至龍仁而回。 - 見尹海原斗壽於私室。相議恢復之策。德馨曰。國事至此。所恃者民心。民心一㪚。難可收拾。若行靈武之事。稍可以回天意結民心也。尹公正色曰。公何出此言耶。今之國事。異於唐時。玄宗自天寶以後。壞亂極矣。內有嬖寵。外有權奸。積失人心。肅宗久在儲位。頗得民望。故一朝傳位。天人皆順。而猶貽後世之議。况今主上聖明。儲君年少。民心向背。亦不可知。一着有誤。不可收拾。公無爲此言也。德馨默然而止。《再造藩邦志》
03-33 禮曹參判李德馨承命往見倭將。及復命。言于朝堂曰。諸道人心怨叛。有犯上語。若無大段擧措。慰答衆情。則恐有朝夕不測之變。尹公變色不答。徐曰。國家雖極危難。人皆可發此臣子不敢道之言耶。德馨悚惧而退。尹公絶不以此語人。雖一家子弟。不得聞之。月汀撰公行狀。但曰有一宰。不言其名。盖爲德馨地也。《朝野僉載》
壬辰日錄言。尹某瞻目不答。德馨茫然自失。面赭而退。
明甫 - 李德馨字 - 極言民心皆叛。事無可爲。仍陳可以慰人心者。似指去位罪己等事。梧陰不答。遂不得發其說。《日錄外編》
03-34 李白沙曾孫龜川世弼 - 世弼經行參判贈領相 - 曰。嘗聞家庭之言。漢陰自龍仁追至平壤。與白沙同宿。盛言當行靈武事。白沙責曰。君久不還。倭人封王之說。日播行朝。今發此論。獨不畏死乎。漢陰曰。苟利於國。雖死何避。達夜爭難。及明朝言于尹相。尹相瞪目熟視。還閉目不答。漢陰瑟縮而退。以白沙神交。終夜力爭而不能得者。尹公一熟視而沮退。大臣憚壓之威。當如是矣。况其言一與酬酢。則漢陰之禍不可言。故只瞪目閉目而消融之。倉卒慮事之敏。陰護之德。可謂兩得之云。《朝野僉載》03-35 十九日。大司諫李恒福曰。今日之賊。非我國所能獨敵。請求救天朝。尹海原斗壽以爲我軍方守臨津。足以防禦。又遣人于三道。兵必大至。北道兵亦不久當集。大軍厚集。自當有爲。况天朝救兵未可期。而上國兵一入我境。難處之憂。萬倍於此。豈可輕擧請兵之事。恒福遂退。《壬辰日錄》
03-36 李恒福力言乞援天朝。尹海原斗壽曰。我軍方守臨津。又召三南兵。北路兵亦不久當集。自有可爲。雖請援天朝。假令來救。當出遼廣兵馬。遼廣兵胡㺚類也。必見橫暴。今只有平安一路乾淨。復爲漢兵侵擾公私。則必赤地乃已。此策甚迂。李德馨議。與恒福合。共力爭。始聽許。論啓。上從之。《朝野僉載》
03-37 義州牧使黃璡馳言。寬典捴兵欲率兵渡江。親探事情。答以倭賊雖迫弊境。兵力足當云。則捴兵笑而去。上大駴。欲拿問失對。別差一宰臣送之。梧陰不得已以柳晦夫 - 根 - 應選。而柳意又與梧陰合。不欲請兵矣。《日錄外編》
李白沙集曰余言具奏天朝。請兵來援。連二日爭之。後與李明甫。極陳利害。諸公稍稍相同。大臣曰。試具由啓稟。仍命余曰。公可具草。余卽成草記以入。
03-38 梧陰不欲請兵。旣遣晦夫之後。國事漸急。明甫大言曰。當急請兵於天朝。梧陰遂快從之。反有若自初主張者然。《日錄外編》03-39 康陵參奉李貴五月到行在。疏啓力請親征之擧。上答曰。備局招李貴議計。時左相尹公斗壽坐賓廳。切責曰。此何等時。而欲爲親征乎。答曰。來此宰臣束手無策。與其坐而待亡。曷若親征。又請遣體察使。而爲尹相所沮。至於怒叱曰。國雖危亡。亦有朝廷體面。爾敢廷辱大臣乎。答曰。今日亡國。非李貴。乃公輩。而又惡聞吾言。更欲亡箕城乎。《老辣瀡辭》
03-40 駐蹕龍灣時。李延平貴以前參奉陳疏。下廟堂。李公往廟堂。躬請回啓。梧陰曰。一隅龍灣。國勢雖倉皇。如汝小官。何敢來坐廟堂乎。令推出之。李公顚倒出曰。宰相如此可喜。《家庭遺聞》
03-41 公扈駕到關西時。上供失時。人有饋壺酒乹雞於公者。公不卽進獻。乃自嘗酒殽。到食頃後遂進供。人有責其不敬者。公曰。不然。當此亂離播遷之時。得此饋物。若或有毒。則將若之何。是以先嘗自驗。而後進之。人皆服其深量。《美行錄》
03-42 二十九日。臨津敗報至。時朝廷慮賊入北道者。或由陽德繞出背後。遂以洪汝諄爲巡察使。陽德防守。汝諄請便宜從事。取兵使李潤德所領軍一半。出大同驛馬。以備戰用。尹相斗壽曰。汝諄之如是。不過欲不去也。遂請勿令行。《壬辰日錄》
03-43 六月一日。時臨津失守。聲息漸急。上命議去就。鄭澈首曰。此非京城死守之比。令一大將守之。奉駕而出可也。沈忠謙李德馨從而和之。獨尹海原斗壽李幼澄朴東亮曰。此大不可。我國封疆。南北不過數千里。欲往北道。則窮無可去之地。欲渡鴨江。則一渡後無復可爲。雖偸生朝夕。亦何益哉。平壤䧺富一大鎭。四面絶險。易以防守。軍士精勇過萬。城中壯士數千。粮食亦多。離此一步。國事決矣。上召問之。尹海原斗壽力主前說。且曰。國事至此。急請救於遼東。且待元帥諸將之還。以圖死守。上曰。國事已付卿。好爲也。《壬辰日錄》
03-44 上諭羣臣曰。予當先向前路。世子可守此城。尹斗壽曰。旣請兵天朝。接濟之策。不可不先爲講究。遂以沈喜壽爲接待使。往義州。以洪宗祿洪世恭沈友勝爲三路調度使。分管糧餉。《壬辰日錄》
03-45 上命兪泓留守平壤。泓倉皇不知所爲。急召其子大建曰。我將留此。奈何。大建請以李誠中爲副。誠中仰天曰。人生斯世。旣逢此亂。又爲兪泓之副。寧不辱乎。梧陰使余 - 寄齋 - 特持衆言。謂止叔 - 兪泓 - 曰。此處旣有監兵使。又別有巡察使。此足矣。扈從甚少。不必更置副。兪大怒曰。使我死乎。陷之死地。又欲奪副。是殺我也。及還報。梧陰笑曰。杞城何怒。必大建怒矣。更告之。兪顧大建曰。國事不可與子弟論。然爾意若何。大建以爲難許。兪卽曰。死不可從。明日余以公事往。兪曰。子又爲公著來乎。余曰。爲公事也。且左相代公之任。公何爲在此。兪欣然曰。海原亦置副乎。曰否。兪曰。此公懲我乎。《壬辰日錄》《日錄外編》
03-46 杞城作相。仍兼都體察使。將治行。余持公事往見。則木工役於庭。將以造馬轎。許功彦 - 筬 - 李澄源 - 幼澄 - 執筆列左右。將以草檄也。杞城亦自構思。余歸語尹海平。海原在傍笑曰。此叟迂闊不可用。《日錄外編》
03-47 二日。上又命議去就。尹斗壽曰。一城之人。皆願奉大駕死守此城。大駕若出。當一時皆潰云。人心如此。若能協守。足以抵敵。且以事勢言之。此城外不知何地可避爲固也。上曰。卿言太沓沓也。時玉色慘沮。語言悲切。臣僚不敢仰視。鄭澈出謂尹公斗壽曰。左相言好則好矣。獨不瞻天顔乎。爲臣子者。安忍挽留。强欲守城。尹公斗壽厲聲曰。公何發此誤國言耶。若使京城早有固守之計。豈至今日乎。公不欲守此城。則獨去可也。澈無以應。《壬辰日錄》
03-48 車駕駐平壤。松江鄭澈西厓柳成龍梧陰尹斗壽共議國事。柳尹共主守城之論。松江力言出避之宜。梧陰詠文山詩曰。我欲借劒斬佞臣。松江大怒。奮袂而起。《懲毖錄》
03-49 五日。沈忠謙李德馨曰。今大駕不肯留此城。若一朝動駕。住箚之地。可以預定。而封疆已蹙。只有咸鏡一道。咸興城堅。且多蓄積。足以拒守。衆皆曰。然。尹相斗壽曰。咸興形勢。半不及此。脫使賊迫其處。厥後更有可去地乎。且此賊獨不往北道乎。公等何以咸興爲固。而爲此不長之計。衆以爲此不可自外廷定。請對陳稟可否。上召問。諸臣皆曰。咸興城險糧足。且召北道土兵協守。則大勝於此城之危。上頗然之。尹斗壽曰。旣不欲守此城。則退駐處有三件。急往寧邊。繕修城池器械。召集江邊土兵。以守之。事危則。卽向義州。赴訴天朝。以明引賊入寇之說。上也。不然遠向江界。集諸郡兵。嬰城固守。則可支一二月。事急則。江界下流。卽鴨綠江。乘船以下。乃上國寬奠堡。若此則猶有可依之地。二也。至於北方人心獰甚。咸興形勢。臣所備諳。城大而低。四面無險。欲召六鎭兵。以守之。則北虜必乘虛入寇。鏡城以北。非我有也。欲向南道。則峰巒峻險。未易登過。賊踵其後。城必圍困。此決不可行也。衆猶以北路險僻。賊必不往。以咸興爲可往。柳成龍李元翼李恒福李幼澄朴東亮等。與尹公議同。厥後賊酋追上行。而慮乘輿或北行。淸正入關北搶掠。兩王子又陷賊中。上之卒不幸咸興者。尹公之力也。尹公斗壽出曰。李鎰宿將。必有所見。待其來。當決北道之行。是午。李鎰至。滿朝環坐。皆仰鎰口。尹公斗壽問曰。平壤棄守。公意如何。或言咸興可往。亦如何。鎰曰。此賊不可當。平壤可以去也。咸興非此城最先受敵之比。可以往也。忠謙曰。眞將帥言也。德馨曰。所以爲李鎰也。尹公斗壽曰。失性。不足言。《壬辰日錄》
03-50 犬灘軍潰。李鎰率兵向平壤。在道先上城守之策。頗有條理。及赴朝。乃言當避駕咸興。平壤不可守。上下失望。梧陰問曰。公何言城守之策。鎰良久曰。從事官所自爲。鎰不知也。曰。何着名也。鎰俛首無以應。梧陰語人曰。此公失性。《壬辰日錄》
03-51 方平壤對壘之日。上意欲命將守之。不欲駐蹕。問于諸臣。或對以賊勢鴟張。事變難測。似非車駕久駐之所。上問梧陰以棄守之策。梧陰對以不可去。數十悉如初。上不悅。及至寧邊。諸臣多言北方城池壯高。士馬精强。駐蹕之所。無如北方。或言江界道路絶險。四塞爲固。可往。梧陰獨執往義州之策。卒回國步。皆其力也。《東史補遺》
03-52 時李恒福擢爲兵判。密猷軍機。咸萃一身。殫盡心力。知無不爲。與尹斗壽表裡酬應。上下賴焉。先是。告急使至北京。遼左煽言朝鮮與倭同叛。佯爲假王。導倭以來。中朝乃遣鎭撫崔世臣林世祿等。托以探審賊情。馳至平壤。願與國王相會。其實欲知眞假也。尹公戱謂恒福曰。此乃令公客。令公可往接待。恒福與柳成龍往迎中路。《再造藩邦志》
03-53 初六日。中殿發向咸興。上命左議政尹斗壽。率都元帥金命元巡察使李元翼以下。留守平壤。又欲使世子守之。斗壽等以爲人心視大駕爲去就。大駕旣出。雖世子守此。無益也。仍啓曰。臣等當極力守之。世子不必留也。上允之。《壬辰日錄》
時賊勢益大。避出之計益決。尹海原斗壽李幼澄等以爲不守此城。國事不可爲。請固守。爭之不得。《再造藩邦志》
03-54 八日。賊到大同江邊。是夜。賊致書。願見漢陰李先生。廷議以爲接話之際。事若不順。可使勇士擊殺調信等也。尹相斗壽以爲國勢雖如此。豈可效盜賊之智。只可見之而已。或以爲見之若有不忍聞之說。受辱尤大。不如不送。德馨曰。見則或有緩師之理。請見之。遂遣之。《壬辰日錄》倭書至。尹斗壽不欲開見。柳成龍曰。開見何妨。斗壽開見。乃抵李德馨書也。《再造藩邦志》
03-55 八日。賊犯大同江。李鎰素有威名。雖奔敗而至。聞者皆喜。尹斗壽急令鎰領兵拒守大同下流淺灘處。《續平壤志》《朝野僉載》03-56 賊兵到鳳山。尹相斗壽使李鎰率江原道軍數十人。益以他軍。鎰坐含毬門點兵不卽行。尹公斗壽催之。鎰始行。《再造藩邦志》
03-57 十一日。大駕發平壤向寧邊。左議政尹斗壽都元帥金命元巡察使李元翼監司宋言愼兵使李潤德校理金信元吏郞李好閔等。送至普通而辭。《壬辰日錄》
03-58 駕發之日。海原送至普通門而還。余自城內追出。海原於馬上執手。泣謂曰。今日之事。臣子之罪。奈何奈何。第觀上意尙未定去向。寧邊江界俱非平壤可守之比。而若以咸興言之。則不可同日語。朝中若欲請幸咸興。則公可出死力以爭之。俺於北議。極言於上前。上心頗回。公可易以爲力也。《日錄外編》
03-59 十二日。賊攻平壤城急。尹斗壽等在練光亭。宋言愼守大同門樓。李潤德守浮碧樓以上江灘。慈山郡守尹裕後等守長慶門。城中軍民合三四千。分配城堞。而部伍不明。散掛衣冠於乙密臺近處松間。名曰疑兵。隔江望。賊兵不多。排作一字陣。李元翼以下往守江灘。柳成龍恐城難守。托以接待天兵。馳去城外。賊又分駐江上。作十餘屯。累日不得渡。警備頗怠。金命元乃抄精兵。使高彦伯等潛船渡綾羅島。殺賊甚多。及賊衆悉至。我軍退還。不得船。餘軍從王城灘亂流而還。賊始知水淺。日暮賊衆乃濟。《再造藩邦志》
03-60 十五日。賊兵潛渡王城灘。大至。留守大臣知事已去。夜開西門。遂使城中老少先出。繼令軍器沉風月樓池中。從事官金信元請暫住安岳處。召號民兵。有所指畫。尹斗壽泣曰。承命留守。旣不能保。又不從駕。落在海曲。召號殘兵。亦復何爲。只作棄義失身狼狽之人。由普通門出。至順安。賊不追躡。乃及行在于宣川。待罪請受軍律。上敎以勿待罪。《朝野僉載》
尹斗壽從事官金信元謂尹公斗壽曰。乘船向安岳。身可無事。尹公斗壽笑曰。我大臣也。公可自去。况義不可乎。《壬辰史草》
03-61 金信元從尹斗壽。留平壤。及城不守。懇邀尹公斗壽偕往安岳。以圖後效。尹公斗壽笑曰。我從大駕。安岳雖好。非所往也。信元遂獨往。起兵二千餘人。以應官軍。《壬辰日錄》03-62 十九日。上宿于車輩館。左議政尹斗壽追至。啓曰。臣不能死守平壤。致有今日。願受軍律。上曰。國勢已去。卿何發此言。勿爲待罪。《壬辰史草》
03-63 二十日。上次龍川郡。尹斗壽啓曰。今日之行。專爲赴愬天朝。而今則賊勢似緩。先使義州府官。諭以不爲渡遼之意。使民心少定。然後徐徐進駐何如。處處愚民。謂大駕便卽渡遼。所在潰散。將無以收拾。故敢啓。答曰。依啓。《壬辰史草》
尹某啓曰。今日之行。專爲赴愬天朝。以此兼程疾馳。已到于此。但遽到義州。人心尤駭。將無以收拾。况今賊勢稍緩。先使義州等官。收集散民。諭以不卽渡遼之意。使有所恃。然後更觀二三日後緩緩進往。則遠近不至失望矣。上從之。遣使義州。曉諭以駐駕本州。不卽渡遼之意。以安軍民。《壬辰日錄》
03-64 時渡江之議已決。左議政尹斗壽極力爭之。一日啓辭者三。請對者再。且曰。宗社臣民擧將誰托。而輕爲此匹夫之行乎。上不聽。乃移咨于寬典堡。願率宮嬪內附。《再造藩邦志》03-65 當初赴遼之擧。未知出於何處。臣民驚駭。赴愬無地。其爲悶迫。有甚於遭亂之初。遑遑不定。所以然者。今雖倭賊迫近。而下三道皆爲完全。江原咸鏡。亦不被兵亂。許多臣民。付之何處。而强爲匹夫之行乎。且上國之許待與否。亦不可料。一行之際。妃嬪亦不得落後。則遼人率多無識。爭相看覰。服色旣殊。語音頓異。笑侮無禮。其何以揮止。雖得達遼。土風飮食。其何以堪處。思之至此。不覺流涕。赴遼之擧。臣等決不可更議。且唐兵雖多數出來。不可無我國嚮導之軍。此軍聚集亦急。本州土兵幾二千名。今雖潰散。若以科擧召集。正所謂一朝之事也。兵曹明日欲爲試射。自上姑留於此。更聞賊勢。若事急難留。則由水上以行到碧潼。留箇日。又向江界。觀勢進退爲便。《遺集》
03-66 穆淸殿之回祿。廟社主之得免火災。大駕之不幸北道不赴中原。皆公力也。《日錄外編》
03-67 駕駐義州。設文武科。以慰邊情。文愼幾恥居孫山之第。深恨春官之不公選。疏斥尹相。上曰。汝以一介書生。廷辱大臣乎。尹相猶惜其才建白。愼幾素稱關西名儒。試才後誅之未晩。上卽命呼韻。愼幾應聲輒對。上奇之。卽赦罪除職。《龍川邑誌》
03-68 七月。上諭羣臣曰。今日事。只有請救天朝而已。一路糧餉。不可不措置。尹斗壽仍啓曰。戶曹判書韓準承命不來。當遞職。而在此之人。職秩不稱。請上親裁。遂擢李誠中爲之。《壬辰日錄》
03-69 大駕方到龍彎。朝廷所咨議者。只是請兵一事。一日梧陰與諸宰會坐。召謂譯官韓潤輔曰。爾欲陞堂上乎。韓俛首不敢而已。遂啓陞堂上。盖梧陰之意。爲此聳動之擧。以勸譯官之心。一以風遠近之望。而左右竊笑其擅弄朝權有若已物然。《日錄外篇》
03-70 上曰。柳成龍受命有日久。不起行何也。尹斗壽啓曰。成龍病不能卽行。臣旣無功於平壤。苟免刑辟。請代其行。上曰。卿不必行。成龍翌日起行。時成龍病不過暑熱所傷。而遲留不發。人疑其避事。《壬辰日錄》
日錄外篇曰。梧陰留守箕都之命。西厓受迎接天將之命。而西厓遷延不發。後駕而行。及到龍灣。上命西厓。先往定州等處。收拾軍粮。亦緣病久未發。上屢促之。梧陰曰。柳某有病。不能登道。請代往云云。然後西厓始行。人以此疑之。
03-71 祖總兵之敗還。恐獲罪。揭報撫按鎭三衙門。謂方攻城垂克之際。朝鮮一營。投倭助戰。是以見敗。廣寧鎭守摠兵官掛印。將軍楊紹勳領兵到九連城。親探虛實。上遣尹斗壽。極陳無理之狀。摠兵答曰。撫按兩御史亦知其誣。况俺親聞事情。豈不釋疑。可放心。尹公斗壽仍言。小邦兵力已盡。朝夕就滅。小邦旣亡之後。必將爲天朝東顧之憂。提兵勦滅。存已絶之屬國。紓宵旴之殷憂。唯將軍事也。不然。小邦君臣未久爲鴨江之鬼。恐不得再見天日。泣不已。祖總兵曰。天朝事體。動必萬全。已令多官會議。或有限鴨水防守。不可遠救外國之論。俺等亦具一本。時無下落。貴國亦當敦勑邊臣。十分截住。勿使疏虞。以待朝廷處置。貴國自此益堅事上之節。終始不貳。則聖皇在上。自當降鑑。勿慮也。《壬辰日錄》03-72 伏見楊總兵答沈喜壽之言。不勝驚駭。此必祖總兵不意一見史游撃之死。意欲還到。爲此不近之言。恐動楊爺也。自古貝錦之說。莫不無形而做出。何可恃我之直而不爲之諄諄辨明也。臣忝在大臣之列。請與洪秀彦。共往楊總兵陣前。相與辨明。期吐我邦之情。亦使沈喜壽。徑造祖總兵所駐處。致其情懇。又辨此間曲折宜當。亦恐軍士畏敵思歸。造此不近之言。以惑祖爺視聽。而致此紛紛也。《遺集》
03-73 九月。尹斗壽入對曰。光州牧使權慄。有氣骨有度量。將帥才。全羅監司非此人不可。遂以慄爲巡察使。《壬辰日錄》
全羅監司李洸領兵陣錦江。聞訛言罷陣。時光州牧使權慄陣板峙。見諸軍退。令其軍無動。大言責洸。洸謝罪。與慄等下全州。謀再擧。長城王子師傅鄭雲龍。光州進士朴宗挺生員柳思敬等。抏疏陳李洸逗遛不臣狀。令武人朴希壽遣。達于行朝。時相尹海原。乃宗挺妻從兄也。宗挺移書海原曰。本道監司若自行朝除送。則旬月間未易出來。道內守令中。惟權慄有膽畧。此外無出其右云。《牛山記事》
03-74 九月。上引見兩湖體察使鄭澈。送之曰。卿好去。成功則國家之幸。澈曰。伏願渡江之言。非但勿出口。亦永絶於心也。上顧尹斗壽曰。此言如何。斗壽曰。一渡江。則恢復之望永絶矣。《松江年譜》03-75 宜寧郭再祐聚衆穿紅衣。號義兵。朝廷擢折衝助防將。時監司金睟處事躁刻。積失人心。再祐移檄列罪。將殺之。又上疏請斬睟。上大疑之。密問于備局曰。此人欲擅殺道主。非賊而何。不除之。恐有悔也。尹斗壽以爲。觀其所爲。一狂童也。至於將兵斬賊。能保鄕曲。東西赴敵。不避險難。自以爲義氣所激。而實不知自陷大辟也。干戈搶攘之日。豈可人人盡責以禮法乎。上遂不報。《壬辰日錄》
03-76 時倡義使金千鎰等久在江華。未有所措。杖義將禹性傳等尤寥寥無聞。上召性傳等領兵渡江。直至平安道。而性傳病不能行。上怒曰。性傳擁兵自衛。觀望不赴。千鎰安坐談笑。何益于國家。尹斗壽曰。千鎰起兵倡義。使八方人心。洽然大回。今秪以勢孤。不能乘可爲之機耳。至於性傳。素有重病。人所共知。豈有觀望之理。《壬辰日錄》
03-77 十一月- 一作十月癸丑 - 前參判成渾赴行朝。陞拜右參贊。時相尹斗壽啓曰。善人天地之紀。請加褒陞。故有是命。《朝野僉載》
03-78 善人。天地之紀。雖在平時。所當汲汲籲俊。共圖國事。況於天地閉而大亂之時乎。同知成渾。久在山林。充養有方。學爲儒林之表。才爲濟世之具。不比頃者大言賭世之輩。有識之人。皆望一起。今者。徒步杖策。遠膺東宮召命云。其於輔導鶴禁。必有所益。如此急難。亦有訏謨裨切時務者。其何幸如之。除拜從品。歲月已久。朝家優待老成之禮。恐有所未盡。行朝大臣。通于臣等。將此意啓達云。此實是朝廷公議。惶恐敢啓。《遺集》
03-79 千里遠路。親自投疏。誠意可嘉。言可用採之。言不可施置之。其人才氣。令該曹聞見。隨材除職事。已爲啓達矣。宗室中。原川君徽漢陰都正俔。頃日皆上疏章。言多可採。當國家危亡之際。惓惓效忠。人多稱之。此兩人皆以試藝發身。識見非他宗室之比。別施賞典。則收拾人心。未必無補。宗室自募從軍者。時未有顯功。皆爲重賞。爲其璿派所分。其意亦好。況此兩員。士論歸多。臣聞之。不敢容默。敢啓。《遺集》
原川治經爲試藝科。壯元二場。壬辰。累重崎嶇。東宮撫軍伊川。麻鞋上謁。上在義州。時舊典散失。朝儀草草。朝廷以公達鍊故事。差爲司饔院提調。召詣行在。講迎詔儀。因再䟽時務。朝議多公之爲。加中義。《李白沙集碣文》
03-80 尹斗壽啓曰。善人天地之紀。古之人君爲治之道。不過曰尊賢而親親。况今日播越之際。舍是道。何以哉。成渾道德學問。一代所矜式。今者艱關赴朝。豈無慰待尊敬之事。請陞資憲。使人人有所聳動。至於原川君徽漢陰都正俔。俱以宗室。博學多聞。居家孝友。各進一資。以示尊賢親親之意。允爲利益。上皆允之。《壬辰日錄》成渾從世子于成川。右相兪泓以書與左相尹斗壽言。渾賢者。當增秩。盖兪泓在成川而尹公斗壽在行在故也。尹公斗壽啓請。上無可否。吏曹直擬參贊。望點出。遂爲資憲。《西厓雜錄》
03-81 初上之渡臨津也。意成渾從駕。而渾不知駕發。未及從。李忠元在開城請召。而上不從。盖不滿其不從也。尹斗壽之意。優待賢者。何惜一資。遂啓陞之。不知尊賢之道。只在致敬盡禮。又不可驅駕人主。强爲情外之擧。而將朝家爵賞大柄。提與人人。有若己物。人譏其無識。《壬辰日錄》壬辰冬。牛溪自海西來赴行朝。翌日。梧陰請加一資。遂陞資憲。余與子常語及此事。子常曰。曾愚人所不爲。梧陰可謂失性。《日錄外編》
壬寅。執義李效元掌令朴震元姜弘立持平宋錫慶等。請削奪故參贊成渾官爵。啓曰。成渾以宰列之臣。昔在壬辰。非徒聞變不赴。駕過其居之時。亦不出覲。其黨奸後君之罪。至此而無所逃矣。當時大臣。乃以善人天地之紀。啓請陞秩。云云。再啓曰。天討不加。而反以善人天地之紀。啓請陞秩。當時大臣無君護黨之罪。極爲痛惋。云云。《朝野僉載》
03-82 十二月。上於天兵過江日。歷見三總兵 - 李如松李如栢張世爵 - 而還。將官從行者四十餘員。上皆欲歷見。都承旨柳根以爲。許多將官。豈能盡見。只見大將足矣。尹斗壽屢言其不可不見。上以爲氣力不足。不能從。諸將官皆怒。而都督亦訝之。《壬辰日錄》03-83 同知柳永吉啓曰。體察使鄭澈迷罔機務。主勢孤弱。公論不行。仍又斥左相尹斗壽非擔當恢復之人。云云。《松江年譜》
大司諫李海壽獻納金廷睦大司憲李德馨執義李好閔掌令李時彦持平柳夢寅合啓。請罷永吉妄斥大臣之罪。《松江年譜》
03-84 隨蹕到龍灣。卒有迎接天將。事期在明日。夜招府尹令曰。今吾所服太儉。不可見華人。上下衣袴。必用綿紬。凡諸戎裝。皆取華侈。不及雞鳴前。當有責矣。府尹唯唯而退。月汀在傍告曰。被服朴素。不害爲昭儉。期限迫促。必無以備待。此敎無或未安乎。梧陰笑而字呼曰。固哉。子固也。天朝之人。方以爲我國貧弊。不能重恢。今者出接。名曰國相。而外着只是舊布笠垢綿衣。則豈不自信所料重加寒心有所前却也哉。且此州雄饒。雖當喪亂。豈患一副戎裝數件衣服之難辦也。月汀始釋然稱服。《美行錄》03-85 梧陰之守平壤也。紀律甚亂。公嚴棍箕伯。一府盡慴。天將召大臣曰。明日當犒軍。燒酒三百甕。備置於官門。公言下卽諾。時已黃昏。夜深天將遣人探視。一府寂然。公則牢睡。及平明以紅水調濁酒。列甕三百盛之。我國將卒。皆乘牝馬而出仰。天兵乘馬見牝馬。皆奔突相鬨。於是甕破酒迸。酒臭狼藉。天將驚歎曰。朝鮮大臣局量如此。國其不亡乎。《美行錄》
03-86 梧陰與衆論。人有所壓。不能紛挐。一日上令諸宰議事。左右各言所見。自以爲是。必欲行其說。上亦以衆說不一難之。尹曰。古人獻言而已。其所施用。已不預焉。不然何謂屈羣策。上曰。誠然。衆遂黙然。《日錄外篇》
03-87 子常謂余曰。近觀梧公所爲事。不過一無謀之人。余曰。旣無謀。私情又多。子常曰。然。《日錄外篇》
03-88 尹海平在義州。晝與遼人相接。夜與郞官議事。或至雞鳴不已。率皆無實之事。人皆苦之。梧陰笑曰。哀哉。子固年八十。亦不知人之苦樂也。滿座絶倒。《日錄外篇》
03-89 余謂公著曰。寅城於軍重事。不得措一辭。反出梧陰下。大異於前所聞矣。公著曰。獨於東西之說。言論風生。可謂爲邊而生者也。《日錄外篇》
03-90 澄源謂余曰。寅城淸疏。而累於東西。西厓周詳。而綱於事情。梧陰品好。而過於私情。皆非適用。然使西厓講定規矩制度。則大勝於梧陰矣。《日錄外篇》
03-91 公著嘗曰。梧陰於事多私。且不能無心於東西。獨不喜逢迎上意。是可取也。《日錄外篇》
03-92 澄源嘗與子常爭論邊事。頗不屈。子常作色曰。近來紀綱渙散。郎廳至欲與堂上相爭。殊爲可駭。余曰。事或不可。則君之過失。亦且爭之。况當搶攘之日。袖手傍觀。則於堂郞體貌得矣。失宜之擧。終無可正之道。梧陰曰。此言誠是。《日錄外篇》
03-93 子常於諸宰論事之際。知其不可而緘默不言。余曰。當此時。身爲兵判。臨事無是非。豈所望於公者耶。子常笑曰。大小事梧陰旣主張。我之所料。未必勝於彼。而或至掣肘。則是不如默默也。終不改其度。《日錄外篇》
03-94 澄源以司諫。一日承對言。一二年來。宮禁不嚴。朝著不靖。至有指斥金公諒姊妹之說。况去邠之後。無一番罪已之敎。其何以慰人心。上終不答。公著亦入侍。出門言曰。今日以幼澄之故。諸宰不出一言而罷。良可笑也。梧陰曰。勝吾輩千言。《日錄外篇》
03-95 中朝式年科題。擬朝鮮國王姓諱謝復國表。其登壯頭表。有潛師擊賊頗賴尹某之孤忠之句。以此觀之。先君子之功。中朝人亦能知之。至發於科場之文。况我國之人。其可以不知乎。《陶齋隨筆》
03-96 癸巳正月。平壤旣復。巡邊使李鎰屯兵城外。夜賊遁去而不覺。李提督如松咎其不能警守。使賊遁去。朝廷遣左議政尹斗壽。至平壤問鎰罪。將行軍法。良久釋之。《朝野僉載》
03-97 時李提督由開城退軍。向平壤。欲旋師。朝廷遣左議政尹斗壽。請勿退兵。提督終不聽。尹公苦辭請東。淚隨言發。提督爲之動色。遂有泣閣老之稱。《再造藩邦志》
03-98 朝廷聞天朝將講和。會大臣臺閣議當否。左右皆曰。以計羈縻。姑緩師。無害於理。惟尹斗壽李恒福以爲決不可和。承旨李好閔亦曰。萬世之讎。不可許和。遂遣史臣。移咨於經畧提督。爭其不可許和之意。兩衙皆不聽。《再造藩邦志》
03-99 五月。遣左議政尹斗壽于嶺南。提總三道衆務。以督其違慢。《再造藩邦志》
03-100 癸巳秋。上在海州。下傳位東宮之敎。大臣尹斗壽等防啓。啓辭曰。實出羣情之外。云云。《荷潭破寂錄》
03-101 梧陰扈駕到海州。一日早朝。上召諸臣。閤門外宣饍盛。梧陰與松江仰達曰。倉皇中盛饌何而設耶。上良久敎曰。去夜卽仁嬪母祭。畧具盃盤。欲使卿等一嘗矣。梧陰對曰。宗廟久廢祭。仁嬪乃祭其母乎。遂不食。《美行錄》
03-102 十月天兵太半回去。京師亦頗修葺。尹斗壽李恒福等力請回鑾。於是車駕自海州還京師。《再造藩邦志》
03-103 梧陰亂後入京有詩曰。山河幾灑新亭淚。胡馬還驚紫塞塵。獨使至尊憂社稷。諸君曾作太平人。盖壬辰以前。東人當國誤政。故云。《家庭遺聞》
03-104 癸巳十一月。遣世子。總率諸宰臣。前往于全慶地方。整理諸軍。左議政尹斗壽隨往。後兼體察使。《朝野僉載》
03-105 甲午六月。劉綎承命班師。王世子自公州遣左議政尹斗壽于南原。請留。八月。斗壽還朝。乞改扈從錄勳之命。啓辭曰。臣於漏盡之境。尙冒夜行。貪戀聖恩。久未決然。而豚犬等輩。皆列顯要。盛滿至此。天禍不遠。人議可知。臣於前日。屢被重論。勢所必至。何敢有一毫怨尤之心乎。今有扈從諸臣錄勳之命。臣名亦在其中。不勝惶駭之至。臣於爾時。忝在大臣。未嘗出一謀晝一策。責愈重而罪愈大也。何敢與諸臣。同受策命乎。內顧於心。實增愧懼。伏望速賜鐫改。以安愚分。棲息都下。少見中興德業之盛。不勝懇祈之至。- 因病未果上。 - 《遺集》
03-106 甲辰七月。錄忠勤貞亮竭誠效節協策扈從。- 後改扈聖 - 功臣李恒福等八十六人。以壬辰執靮之功也。《朝野僉載》
03-107 光海壬子。以分朝從行諸臣。錄竭忠盡誠同德贊謨佐軍衛聖功臣崔興源等八十人。仁祖癸亥追削之。
忠勤貞亮竭誠效節協策扈聖功臣
萬曆壬辰。倭賊迫京。大駕西幸義州。群臣跋涉扈從。請兵上國。終致回鑾之慶。癸巳還都。以鄭崑壽久病不卽勘勳。至甲辰始錄。《國朝典故》
一等 二員
鰲城府院君 李恒福 - 子常。白沙。丙辰生。庚辰科。都承旨。隨駕。松京拜西銓。平壤拜西銓。亟請乞授計。領相。文忠。
西川府院君 鄭崑壽 - 汝安。柏谷。戊戌生。丙子文壯。壬寅卒。追封。請兵天朝。得五萬七千兵來。贊成。贈領相。忠翼。
二等 三十一員
定遠君 元宗國諱 - 隨駕。至平壤先詣寧邊。旋赴義州行在。
信城君 王子 珝 - 隨駕。
完平府院君 李元翼 - 公勵。梧里。丁未生。己巳科。箕伯。策應軍務。處事得宜。領相。文忠。
海原府院君 尹斗壽 - 子仰。梧陰。癸巳生。戊午科。追封。左相。隨駕。松京大拜。領相。文靖。
靑溪君 沈友勝 - 士進。晩沙。辛亥生。庚辰科。戶曹正郞。隨駕。西川書狀官。戶參。贈領相。
延陵府院君 李好閔 - 孝彦。五峯。癸丑生。乙酉科。吏曹佐郞。隨駕。咨奏皆出公手。文僖。
海平府院君 尹根壽 - 子固。月汀。丁酉生。戊午科。隨駕。贊成。贈領相。文貞。
豊原府院君 柳成龍 - 而見。西厓。壬寅生。丙寅科。左相。隨駕。領相。文忠。
原城府院君 金應南 - 重叔。丙午生。戊辰科。追封。兵判。隨駕。
韓興君 李山甫 - 仲擧。鳴谷。己亥生。己巳科。追封。吏判。隨駕。贈領相。忠簡。
晉原府院君 柳根 - 晦夫。西坰。己酉生。壬申科。前承旨。隨駕。贊成。贈領相。文靖。
完陽府院君 李忠元 - 元甫。駱叟。乙丑壯。承旨。隨駕。戶判。
唐興府院君 洪進 - 希古。訒齋。辛丑生。庚午科。前僉知。隨駕。吏判。贈領相。端敏。
漢川君 李 - 汝震。辛亥生。癸未科。追封。
全陽府院君 柳永慶 - 善餘。春湖。庚戌生。壬申科。領相。
完興君 李幼澄 - 澄源。誠中子。壬戌生。癸未科。追封。兵曹正郞。隨駕。牧使。贈吏判。貞敏。
錦溪君 朴東亮 - 子龍。鳳溪。己巳生。庚寅科。兵曹佐郞。隨駕。贈領相。忠翼。
靑原君 沈岱 - 公望。西墩。丙午生。壬申科。追封。舍人。隨駕。以畿伯駐兵朔寧。爲倭所襲卒。畿伯。贈領相。忠壯。
密川君 朴崇元 - 尙初。壬辰生。甲子科。壬辰卒。追封。左尹。隨駕。判尹都承旨。贈贊成。
溫城君 鄭姬藩 - 子翰。庚午科。掌令。隨駕。承旨。
延原府院君 李光庭 - 德輝。海臯。庚寅科。翰林。隨駕。
寧平府院君 崔興源 - 復初。己丑生。己巳科。領相。隨駕。忠貞。
靑林君 沈忠謙 - 公直。四養堂。乙巳生。壬申科。追封。副提學。隨駕。兵判。贈贊成。忠翼。
龍原府院君 尹自新 - 敬修。己丑生。壬戌科。追封。僉知。隨駕。戶判。贈領相。
淸溪君 韓淵 - 武科。追封。宣傳官。隨駕。終始不離。上曰。予臣惟有一韓。
海豊君 宗室 耆 - 宗臣。隨駕。
順義君 宗室 景溫 - 海豊子。宗臣。隨駕。
順寧君 宗室 景儉 - 順義弟。宗臣。隨駕。
平川府院君 申磼 - 伯峻。甲申科。承旨。隨駕。兵判。
廣陽君 安滉 - 宣廟妹壻。追封。隨駕。
綾海君 具宬 - 元裕。草塘。戊午生。乙酉科。兵曹佐郞。隨駕。贈領相。忠肅。
三等 五十三員
西原府院君 鄭琢 - 子精。藥圃。丙戌生。戊午科。贊成。隨駕。左相。貞簡。
完城府院君 李憲國 - 欽哉。柳谷。乙酉生。辛亥科。追封。大諫。隨駕。左相。
文陽君 柳希霖 - 景說。庚辰生。辛酉科。僉知。隨駕。禮參。
德原君 李有中 - 時可。甲辰生。丙子科。掌令。隨駕。吏參。
汭陽君 任發英 - 隨駕。
高興君 奇孝福 - 隨駕。
和城君 崔應淑 - 武。隨駕。
海陵君 崔賓 - 武。隨駕。
咸原君 呂定邦 - 武。隨駕。
原陽君 宋康 - 武。隨駕。
瀛城君 高曦 - 武。隨駕。
益興君 李應順 - 武。水使。隨駕。
節愼君 宗室 壽崑 - 追封。宗臣。隨駕。忠孝。
晉昌君 姜絪 - 隨駕。
眞城君 金起文 - 宦官。隨駕。
月城君 崔彦恂 - 宦官。隨駕。
驪原君 閔希騫 - 宦官。隨駕。
陽平君 許浚 - 醫官。隨駕。贈輔國崇祿。
廣溪君 李延祿 - 隨駕。
益城君 金應壽 - 馬醫。隨駕。
碧城君 吳致雲 - 牽馬衛。隨駕。終始執鞚不離。
寧城君 金鳳 - 宦官。隨駕。
陟州君 金良輔 - 宦官。隨駕。
武陽君 安彦鳳 - 宦官。隨駕。
鰲原君 朴忠敬 - 宦官。隨駕。
蔚陵君 林祐 - 宦官。隨駕。
開城君 金應昌 - 宦官。隨駕。
淸河君 鄭漢璣 - 宦官。隨駕。
密山君 朴春成 - 宦官。隨駕。
花川君 金禮禎 - 宦官。隨駕。
伽城君 金秀源 - 宦官。隨駕。
唐城君 申應瑞 - 宦官。隨駕。
奈城君 辛大容 - 宦官。隨駕。
樂城君 金璽信 - 宦官。隨駕。
花城君 趙龜壽 - 宦官。隨駕。
韓溪君 李公沂 - 醫官。隨駕。
瀛海君 梁子儉 - 宦官。隨駕。
漢南君 白應範 - 宦官。隨駕。
鰲山君 崔潤榮 - 宦官。隨駕。
盆城君 金俊英 - 宦官。隨駕。
鳳陽君 鄭大吉 - 宦官。隨駕。
延陽君 金繼韓 - 宦官。隨駕。
豊巖君 朴夢周 - 宦官。隨駕。
慶陽君 李士恭 - 仲敬。守門將。隨駕。都摠管。
完原君 柳肇生 - 武。隨駕。
洪陵君 楊舜民 - 內禁衛。隨駕。
浪城君 慶宗智
雞林君 崔世俊 - 司謁。隨駕。
唐溪君 洪澤 - 隨駕。
石陵君 全龍 - 牽馬衛。隨駕。與吳碧城終始不離。
海愼君 李希齡 - 隨駕。
石城君 吳連 - 扶餘正兵。隨駕。
喬林君 李春國 - 隨駕。
萬曆三十三年乙巳四月十六日書
敎贈忠勤貞亮效節協策扈聖功臣故領議政海原府院君尹斗壽書 洪瑞鳳製
王若曰。急病攘夷。臣子之大節。嘉勳應德。國家之彝章。永保在鄙之艱。式懋賞從之典。惟卿性成忠孝。志任經綸。國器之稱。已闡韋布之日。人表之望。夙著郞僚之時。肆膺昭考之知。以遺寡躬之輔。幹我機務。綱擧目張。殿我藩屛。威慴仁愛。惟其智酬變而彌裕。是以用遇物而咸周。卞正璿源。允藉專對之力。功藏金櫃。用彰丕視之儀。當柏府長持憲之辰。値桑酋肆犯上之語。盈庭之論。衆口莫適所從。借箸之忠。卿言正合孤意。明大義於一奏。承盛褒於十行。粤至壬辰之去邠。先思元老之起廢。張浚入衛。却喜小舟之來。陸贄生還。不用千金之募。爰立相於搶攘之際。乃督戎於敗衂之餘。意氣慨慷。精神鼓動。兵務軍政之叢集。疏決靡遺。遠猷嘉謨之畢陳。擔當不避。誠旣見於板蕩。利自別於錯盤。曁平壤對壘而不支。劇襄野迷路而莫適。衆爭獻北遷之議。深阻可依。卿獨斷西入之謀。父母孔邇。亟贊帝庭敷奏之本。終轉天兵迅掃之機。漢業重昌。實賴雲臺之效績。唐家再造。幸見蜀道之回鑾。式至今休。克恢前烈。雖天眷佑之不忒。惟爾弘濟者居多。而勳勞方記於旂常。奈英靈已騰於箕尾。慨泉原之莫作。深深喬木之思。視幽明而不殊。庸申泰山之誓。載峻號於功府。仍增賦於爰田。肆策勳爲扈聖功臣二等。圖形垂後。超二階爵。其父母妻子。亦超二階。嫡長世襲。不失其祿。宥及永世。無子甥姪女壻超一階。仍賜伴倘六名。奴婢九口。丘史田八十結。銀子三十兩。表裡一段。內廐馬一匹。至可領也。於戲。哀榮禮隆。在予君臣而無憾。忠義世繼。宜爾子孫之承休。咨爾英魂。歆玆寵渥。故玆敎示。想宜知悉。
竭忠盡誠同德贊謨佐運衛聖功臣
宣祖壬辰西幸時。光海以世子分朝。至寧邊。決渡遼之策。光海爲世子。付以廟社主。遂分大小朝。-及嗣位。錄其從行諸臣及廟社陪行之功。壬子賜鐵券。號曰衛聖功臣。仁朝改玉後。卽削。《國朝典攷》 ○壬辰駕到興義驛。宗室壽崑禮胤誠胤聖胤等。以廟社主。不當埋安。將請對奉還。與順義君景溫議不合。相鬨。大臣尹斗壽白上。遣禮官陪來。光海壬子錄勳。癸亥削錄。大臣李元翼建議。四宗室及趙公瑾。只去勳名。還給賜牌田民。《故事撮要》
一等 十員
寧平府院君 崔興源 - 領議政。陪從寧邊。扈聖。
海原府院君 尹斗壽 - 扈聖。
西原府院君 鄭琢 - 贊成。陪從伊川。扈聖。
鰲城府院君 李恒福 - 陪從。扈聖。
海豊君 宗室 耆 - 扈聖。
龍原府院君 尹自新 - 宗廟提調。奉廟社來。扈聖。
靑林君 沈忠謙 - 扈聖。
順義君 宗室 景溫 - 扈聖。
順寧君 宗室 景儉 - 扈聖。
文陽府院君 柳自新 - 光海妃父。判尹。
二等 十七員
完城府院君 李憲國 - 扈聖。
文陽君 柳希霖 - 扈聖。
德原君 李有中 - 扈聖。
汭陽君 任發英 - 扈聖。
節愼君 宗室 壽崑 - 宗臣。陪從伊川。扈聖。
晉昌君 姜絪 - 扈聖。
完昌君 李覮 - 士瑩。辛酉生。癸未科。癸亥凶死。戶判。
杞城府院君 兪泓 - 止叔。陪從成川。
淸川君 韓準 - 公則。南崗。壬寅生。丙寅科。戶判。平難。
君 宗室 禮胤
君 宗室 誠胤
君 宗室 彦
漢興君 趙公瑾 - 梳翁。社稷署參奉。奉廟社主來。鄭昌衍 - 景眞。水竹。壬子生。己卯科。左相。
文昌府院君 柳希奮 - 亨伯。柳自新三子。甲子生。丁酉科。癸亥凶削。兵判。檜原府院君 黃愼 - 思叔。秋浦。壬戌生。戊子壯。戶判。贈左相。文敏。
淸風君 金權 - 而中。拙灘。己酉生。庚辰科。戶參。贈領相。忠簡。
三等 五十三員
李純仁 - 伯生。孤潭。癸巳生。癸酉科。承旨。
文安君 柳挺立 - 武。希霖從父侄。宗室 黿
宗室 聖胤
宗室 孝忠
陽昌君 許潛 - 寒泉。丁未卒。追封。奉還廟社主。陪從分朝。知事。贈贊成。柳祖訒
姜璿 - 宗廟直長。奉廟主行。
尹健
金信元 - 守伯。癸丑生。癸未科。改名履元。兵判。
李應寅
柳淇
寧安君 崔山立 - 興源子。文原君 柳希聃 - 柳自新二子。僉樞府使。
兪大建 - 仲植。兪泓子。辛亥生。丙午科。大司諫。
張逈 - 署令。
閔思權 - 景紹。戊子生。司僕寺副正。贈領相。補祚。驪城府院君。
朴宗男
柳夢寅 - 應文。於于堂。己未生。己丑壯。吏參。贈吏判。義貞。
朴晉 - 贈贊成。毅烈。
吳百齡 - 德耈。庚申生。甲午科。
豊寧君 趙應祿 - 景綏。竹溪。戊戌生。己卯科。兵曹佐郞。陪廟社主于分朝。贈禮判。任禮臣 - 翊衛。
漢昌君 趙國弼 - 柳自新壻。韓守謙
金琢
李尙毅 - 而遠。少陵。庚申生。丙戌科。贊成。贈領相。翼獻。
鄭希立
張瀏
申熟
韓溪君 李公沂 - 扈聖。瀛海君 梁子儉 - 扈聖。
鰲山君 崔潤榮 - 扈聖。
鳳陽君 鄭大吉 - 扈聖。
豊巖君 朴夢周 - 扈聖。
朴奉琳
金彦海
李應華
尹鳴殷
李彦慶
金漢傑
鄭禮男
韓應祿
金許龍
金元男
金有亨 - 叔嘉。鶴松。丙寅生。乙巳科。
金應龍
金忠男
許昕 - 景晦。癸卯生。癸未科。都差使。扈奉廟社主。
許任 - 武。
申應祿
曺興立
韓天斗
敎贈竭忠盡誠德贊謨佐運衛聖功臣故領議政海原府院君尹斗壽書金尙憲製
王若曰。文叔旣歿。衛君敍恤國之勤。安平已亡。漢帝加定策之賞。誠以圖勞不替於今昔。顯忠罔間於明幽。宜推異典。庸賁重壤。惟卿稟精間氣。爲國宗臣。蓋自策名委質之時。已有捐軀報主之志。由其養於內者確乎不拔。所以施諸外而蔚然可觀。肆先王灼見之明。擬他日大用之地。風塵之警。忽起於南陲。播越之行。乃極於西塞。遂思良於臨亂之際。爰作相於起廢之初。得李勉於奉天。朝廷始重。見夷吾於江左。風采一新。首陳哭秦之忠言。力陳渡遼之非計。致王師再救之力。續國命幾絶之危。竟收旋乾轉坤之功。重參礪山帶河之列。逮小子撫軍於湖路。以太傅贊畫於胄筵。自念涼德之資。曷副專勑之旨。凡有動靜。悉與周旋。出則在前。嘉訓常資於藥石。行所無事。疑謀若決乎江河。予任卿而運籌決策。卿體予而殫忠竭節。恐不效於付託。誠匪懈於夙宵。賴其盡瘁於始終。免夫獲戾于上下。歸神功於玄宰。固靡有爭。翼聖算而中興。與稱斯慶。然時勢有難行者。顧予心曷嘗忘焉。慨盛典未褒於殊勳。嗟精爽遽返於列宿。九原已矣。一涕泫然。肆策勳一等云云。於戲。用汝作舟楫。而亦用汝作鹽梅。與卿共患難。而不與卿共安樂。尙福祿之未艾。遺子孫於無窮。冀歆寵靈。庶進冥祐。故玆敎示。想宜知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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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25일 (갑진) | ||||||||||||||||||||||||||||||||||||||||||||||
공신(功臣)들의 명칭을 정하여 대대적으로 봉(封)했는데, 서울에서 의주까지 시종(始終) 거가(車駕)를 따른 사람들을 호성 공신(扈聖功臣)으로 하여 3등급으로 나누어 차등이 있게 명칭을 내렸고, 왜적을 친 제장(諸將)과 군사와 양곡을 주청(奏請)한 사신(使臣)들은 선무 공신(宣武功臣)으로 하여 3등급으로 나누어 차등이 있게 명칭을 내렸고, 이몽학(李夢鶴)을 토벌하여 평정한 사람은 청난 공신(淸難功臣)으로 하고 3등급으로 나누어 차등 있게 명칭을 내렸다. 호성 공신 1등은 이항복(李恒福)·정곤수(鄭崐壽)인데 충근정량갈성효절협력호성 공신(忠勤貞亮竭誠效節協力扈聖功臣)이라 하고, 2등은 신성군 이후(信城君李珝)·정원군 이부(定遠君李桴)·이원익(李元翼)·윤두수(尹斗壽)·심우승(沈友勝)·이호민(李好閔)·윤근수(尹根壽)·유성룡(柳成龍)·김응남(金應南)·이산보(李山甫)·유근(柳根)·이충원(李忠元)·홍진(洪進)·이곽(李)·유영경(柳永慶)·이유징(李幼澄)·박동량(朴東亮)·심대(沈岱)·박숭원(朴崇元)·정희번(鄭姬藩)·이광정(李光庭)·최흥원(崔興源)·심충겸(沈忠謙)·윤자신(尹自新)·한연(韓淵)·해풍군 이기(海豊君李耆)·순의군 이경온(順義君李景溫)·순령군 이경검(順寧君李景儉)·신잡(申磼)·안황(安滉)·구성(具宬)인데 충근정량효절협책호성 공신(忠勤貞亮効節協策扈聖功臣)이라 하고, 3등은 정탁(鄭琢)·이헌국(李憲國)·유희림(柳希霖)·이유중(李有中)·임발영(任發英)·기효복(奇孝福)·최응숙(崔應淑)·최빈(崔賓)·오정방(吳定邦)·이응순(李應順)·신수곤(愼壽崑)·송강(宋康)·고희(高曦)·강곤(姜綑)·내시(內侍) 김기문(金起文)·내시 최언준(崔彦俊)·내시 민희건(閔希蹇)·의관(醫官) 허준(許浚)·이연록(李延祿)·이마(理馬) 김응수(金應壽)·이마 오치운(吳致雲)·내시 김봉(金鳳)·내시 김양보(金良輔)·내시 안언봉(安彦鳳)·내시 박충경(朴忠敬)·내시 임우(林祐)·내시 김응창(金應昌)·내시 정한기(鄭漢璣)·내시 박춘성(朴春成)·내시 김예정(金禮楨)·내시 김수원(金秀源)·내시 신응서(申應瑞)·내시 신대용(辛大容)·내시 김새신(金璽信)·내시 조구수(趙龜壽)·의관(醫官) 이공기(李公沂)·내시 양자검(梁子儉)·내시 백응범(白應範)·내시 최윤영(崔潤榮)·내시 김준영(金俊榮)·내시 정대길(鄭大吉)·내시 김계한(金繼韓)·내시 박몽주(朴夢周)·이사공(李士恭)·유조생(柳肇生)·양순민(楊舜民)·경종지(慶宗智)·내수사 별좌(內需司別坐) 최세준(崔世俊)·사알(司謁) 홍택(洪澤)·이마 전용(全龍)·이마 이춘국(李春國)·이마 오연(吳連)·이마 이희령(李希齡)인데 충근정량호성 공신(忠勤貞亮扈聖功臣)이라 하여, 각각 작위(爵位)를 내리고 군(君)으로 봉했다. 모두 86인인데 내시(內侍)가 24명, 이마(理馬)가 6명, 의관이 2명이고, 별좌(別坐)와 사알(司謁)이 또 2명이다. 선무 공신(宣武功臣) 1등은 이순신(李舜臣)·권율(權慄)·원균(元均) 세 대장인데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 공신(效忠仗義迪毅協力宣武功臣)이라 하고, 2등은 신점(申點)·권응수(權應銖)·김시민(金時敏)·이정암(李廷馣)·이억기(李億祺)인데 효충장의협력선무 공신(效忠仗義協力宣武功臣)이라 하고, 3등은 정기원(鄭期遠)·권협(權悏)·유사원(柳思瑗)·고언백(高彦伯)·이광악(李光岳)·조경(趙儆)·권준(權俊)·이순신(李純信)·기효근(奇孝謹)·이운룡(李雲龍)인데 효충장의선무 공신(效忠仗義宣武功臣)이라 하였다. 각각 관작을 내리고 군(君)으로 봉했는데 모두 18인이다. 청난 공신(淸難功臣) 1등은 홍가신(洪可臣)인데 분충출기합모적의청난 공신(奮忠出氣合謀迪毅淸難功臣)이라 하고, 2등은 박명현(朴名賢)·최호(崔湖)인데 분충출기적의청난 공신(奮忠出氣迪毅淸難功臣)이라 하고, 3등은 신경행(辛景行)·임득의(林得義)인데 분충출기청난 공신(奮忠出氣淸難功臣)이라 하였다. 각각 관작을 내리고 군으로 봉했는데 모두 5인이다. 사신은 논한다. 국가가 임진년의 왜변을 만나 종사(宗社)가 전복되고 승여(乘輿)가 파천했으며 원릉(園陵)이 화를 입었고 생령들이 해독을 받았으니, 말하기에도 참혹한 일이다. 다행히 황은(皇恩)이 멀리 미침을 힘입어 팔도(八道)가 다시 새로와졌으니, 임금의 도리에 있어 논공 행상(論功行賞)하여 공로에 보답하는 특전을 그만둘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호종신(扈從臣)을 80여 명이나 녹훈(錄勳)하였고 그 가운데 중관(中官)이 24명이며 미천한 복례(僕隷)들이 또 20여 명이나 되였으니, 또한 외람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몽학(李夢鶴)의 난에 이르러서는 주군(州郡)에서 불러 모은 도적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 그것을 토평한 것이 어찌 공이 될 수 있는 일이겠는가. 단서철권(丹書鐵券)을 만든 것이 당초 어찌 이처럼 구차한 데에 쓰려고 한 것이겠는가. 아, 김응남(金應南)은 신묘년에 부경(赴京)하였을 적에 정신(廷臣)들의 의논을 극력 변론하여 실제 상황을 들어 주문(奏聞)함으로써 마침내 황상(皇上)이 감림(監臨)하게 하였으니, 그의 공이 진실로 크다. 그리고 신점(申點)은 중국에 있다가 국가가 병화(兵火)를 당했다는 말을 듣고서 7일 동안이나 먹지도 않고 울면서 구원병을 보내줄 것을 주청했으니, 중국군이 나오게 된 것은 과연 누구의 공이겠는가. 정곤수(鄭崐壽)는 구원병을 주청하고 군량을 주청한 공로가 있고, 이호민(李好閔)은 사명(辭命)을 전담한 공로가 있고, 이순신·원균·권율은 혈전(血戰)한 공이 있었다. 그리고 당시 삼공(三公)은 조금이나마 대책을 결단한 일이 있었으니 부득이하다면 이들 몇 사람만 녹훈했어야 했다. 【원전】 24 집 623 면 【분류】 *인사(人事) / *역사-사학(史學) [주D-001]신묘년 : 1591 선조 2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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