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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 원년(1010), 송 대중상부 3년ㆍ거란 통화 28년 (도봉사의 의피난)

아베베1 2010. 12. 7. 16:57

고려사절요 제3권
 현종 원문대왕(顯宗元文大王)
경술 원년(1010), 송 대중상부 3년ㆍ거란 통화 28년


○ 봄 윤 2월에 연등회(燃燈會)를 부활시켰다. 나라의 풍속에, 왕궁과 국도에서 시골까지 1월 15일부터 이틀 밤 연등회를 베풀었는데, 성종 때부터 폐지하고 베풀지 않았으므로 이때에 이를 부활시켰다.
○ 여름 4월에 왕이 친히 태묘(太廟)에 제사지내었다.
○ 서숭(徐崧) 등 8명과 명경(明經) 3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지공거(知貢擧) 손몽주(孫夢周)가 아뢰어 시(詩)ㆍ부(賦)를 시험하고 시무책(時務策)은 시험하지 않았다.
○ 5월에 상서좌사낭중(尙書左司郞中) 하공진(河拱辰)과 화주방어낭중(和州防禦郞中) 유종(柳宗)을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에 귀양보내었다. 이보다 먼저 공신이 일찍이 동서 양계(東西兩界)에 종사하였는데, 함부로 군사를 내어 동여진(東女眞)의 부락에 침입하였다가 패하니, 유종이 이 소식을 듣고 여진을 깊이 원망하였다. 때마침 여진 사람 95명이 고려에 와서 조회하려고 화주관(和州館)에 이르니 유종이 이를 다 죽였다. 그 때문에 이들을 모두 귀양보내었다. 여진이 또한 거란에 호소하니 거란주가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고려의 강조(康兆)가 임금 송(誦)을 시해하고 순(詢)을 임금으로 세웠으니 대역이다. 마땅히 군사를 일으켜서 죄를 물어야 하겠다." 하였다.
○ 가을 7월에 거란이 급사중(給事中) 양병(梁炳)과 대장군(大將軍) 야율윤(耶律允)을 보내와서 전왕(목종(穆宗))에 대한 일을 물었다.
○ 덕주(德州)에 성을 쌓았다.
○ 8월에 내사시랑(內史侍郞) 진적(陣頔)과 상서우승(尙書右丞) 윤여(尹餘)를 거란에 보내었다.
○ 승니(僧尼)가 술을 빚어 담그는 것을 금지하였다.
○ 9월에 좌사원외랑(左司員外郞) 김연보(金延保)를 거란에 보내어 추계 문후(秋季問候)를 하고 좌사낭중(左司郞中) 왕좌섬(王佐暹)과 장작승(將作丞) 백일승(白日昇)을 거란의 동경(東京 요양(遼陽))에 보내어 우호를 닦았다.
○ 겨울 10월 초하루 병오일에 이부상서 참지정사(吏部尙書參知政事) 강조(康兆)를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로, 이부시랑(吏部侍郞) 이현운(李鉉雲)과 병부시랑(兵部侍郞) 장연우(張延祐)를 부사(副使)로, 검교상서 우복야 상장군(檢校尙書右僕射上將軍) 안소광(安紹光)을 행영도병마사(行營都兵馬使)로, 어사중승(御史中丞) 노정(盧頲)을 부사(副使)로, 소부감(少府監) 최현민(崔賢敏)을 좌군병마사로, 형부시랑 이방(李昉)을 우군병마사로, 예빈경(禮賓卿) 박충숙(朴忠淑)을 중군병마사로, 형부상서 최사위(崔士威)를 통군사(統軍使)로 삼아 군사 30만 명을 거느리고 통주(通州 평북 선천군(宣川郡))에 주둔하여 거란에 대비하게 하였다.
○ 계축일에 거란이 급사중(給事中) 고정(高正)과 합문인진사(閤門引進使) 한기(韓杞)를 보내와서 군사를 일으키겠다고 알리었다. 참지정사 이예균(李禮鈞)과 우복야 왕동영(王同穎)을 거란에 보내어 화친을 청하였다.
○ 11월에 기거랑(起居郞) 강주재(姜周載)를 거란에 보내어 동지를 하례하였다.
○ 거란주가 장군 소응(蕭凝)을 보내와서 친정(親征)함을 알리었다.
○ 팔관회를 부활시키고 왕이 위봉루(威鳳樓)에 거둥하여 풍악을 관람하였다. 예전에 성종이 팔관회 시행에 따르는 잡기가 정도(正道)에 어긋나는 데다가 번거롭고 요란스럽다 하여 이를 모두 폐지하고, 다만 그날 왕이 법왕사(法王寺)에 행차하여 향불을 피우고 구정(毬庭)으로 돌아와서 문무관의 조하(朝賀)만 받았다. 이것을 폐지한 지가 거의 30년이나 되었는데, 이때에 와서 정당문학 최항(崔沆)이 청하여 이를 부활시켰다.
○ 신묘일에 거란주가 친히 보병과 기병 40만 명을 거느리고 의군 천병(義軍天兵)이라 칭하고 압록강을 건너와서 흥화진(興化鎭 평북 의주군(義州郡))을 포위하니, 순검사(巡檢使) 형부낭중 양규(楊規)가 진사(鎭使) 호부낭중 정성(鄭成)ㆍ부사(副使) 장작주부(將作注簿) 이수화(李守和)ㆍ판관(判官) 늠희령(廩犧令) 장호(張顥)와 함께 농성하여 굳게 지켰다.
○ 임진일에 최사위 등이 군사를 나누어 귀주(龜州 평북 귀성군(龜城郡)) 북쪽 뉴돈(恧頓)ㆍ탕정(湯井)ㆍ서성(曙星)의 세 길로 나가서 거란과 싸우다가 패전하였다.
○ 거란주가 통주성 밖에서 벼를 거두던 남녀를 잡아서 각기 비단옷을 주고 종이로 봉한 화살 하나씩을 주며, 군사 3백여 명을 거느리고 그들을 압령하여 홍화진에 보내어 항복을 권유하게 하였다. 그 봉한 화살에 글이 있었는데, 그 글에, “짐은, 전왕 송(誦 목종(穆宗))이 우리 조정에 복종하여 섬긴 지가 오래되었는데 지금 역신 강조가 임금을 시해하고 어린 임금을 세웠으므로 친히 정병을 거느리고 이미 국경에 다다랐으니, 너희들이 강조를 사로잡아 어가 앞에 보내면 곧 군사를 돌이킬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바로 개경으로 들어가서 너의 처자들을 죽일 것이다." 하였다.
계사일에 또 칙서를 화살에 매어 성문에 쏘아 꽂혔는데, 그 칙서에, “흥화진의 성주와 군인ㆍ백성들에게 신칙하노라. 짐은, 전왕 송이 그 조업(祖業)을 계승하여 나의 번신(藩臣)이 되어 우리 국경을 지키다가 갑자기 간흉에게 살해되었으므로 정병을 거느리고 와서 죄인을 토벌하는 것이다. 간흉에게 위협당하여 따른 자는 모두 사면해 줄 것이다. 하물며 너희들은 전왕이 어루만져준 은혜를 받았고, 역대 역순(逆順)의 유래를 알고 있으니, 마땅히 짐의 마음을 알아서 후회를 끼침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이 날에 이수화 등이 표문을 올렸는데, 그 표문에,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사는 자는 마땅히 간흉을 제거해야 될 것이요, 아버지를 섬기고 임금을 섬기는 자는 모름지기 절조를 굳게 지켜야 하니, 만약 이 이치를 어긴다면 반드시 그 앙화를 받을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민정을 굽어살피어 마음을 돌리소서. 크게 하늘의 그물을 열어 주시면서 하필 조작(鳥雀)이 먼저 품안에 들어오기를 구하십니까. 병거를 돌리셔야 우리 용사들의 복종을 얻으실 것입니다." 하였다.
갑오일에 거란주가 비단옷과 은그릇 등의 물품을 진장(鎭將)에게 차등 있게 내려주고 이어서 칙서에, “올린 표문은 자세히 살폈다. 짐이 오성(五聖)을 계승하여 만방을 다스림에 있어 충량에게는 반드시 정포(旌褒)하고 흉역은 모름지기 주벌하였다. 강조는 그 옛 임금을 죽이고 저 어린 임금을 끼고 점점 방자하게 간악한 짓을 하여 위세를 부렸다. 그러므로 친히 주벌을 행하여 특히 형명을 바루고자 하였다. 바야흐로 전군(全軍)을 거느리고 근경(近境)에 다다라서 특별히 윤음을 내렸으니, 이는 대개 회유하는 뜻을 보인 것인데, 문득 아뢴 글을 보건대 항복한다는 말은 없으니 진술이 성심에서 나오지 않았으며 수식된 문장은 겉으로만 공순할 뿐이다. 더구나 너희들은 일찍이 조정에 벼슬하였으니 반드시 역(逆)과 순(順)을 알 것인데, 어찌 역당에게 협조하여 전왕의 원수를 갚으려고 생각지 않느냐. 마땅히 안위를 돌아보고 미리 화복을 분별하라." 하였다.
을미일에 이수화가 또 회답하는 표문을 보냈다. 그 표문에, “신들이 어제 조서를 받들고 문득 마음속의 말을 진술하니, 죄수를 보고 우는 은혜를 내리시고 그물을 풀어주는 인자함을 베푸소서. 송죽처럼 눈과 서리를 견뎌내 백성의 마음을 더 편안하게 하겠으며 분골쇄신하여 길이 천년 만에 나타나는 성인을 받들겠습니다." 하였다. 거란주가 표문을 보고는 그들이 항복하지 않을 줄 알고 정유일에 포위를 풀었다. 다시 칙서에, “너희들은 백성을 위안하고 기다리라. 20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인주(麟州 평북 의주군(義州郡)) 남쪽 무로대(無老代 평북 의주군)에 주둔하고, 20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진군하여 통주에 이르겠다." 하고는 거란주가 군사를 동산(銅山) 아래로 옮겼다.
○ 기해일에 강조가 군사를 이끌고 통주성 남쪽으로 나와서 군사를 세 부대로 나누어 물을 사이에 두고 진을 쳤다. 한 부대는 통주 서쪽에 진을 쳐서 세 곳의 물[三水]이 모이는 곳에 웅거했는데 강조는 그 속에 있고, 또 한 부대는 근처의 산에, 나머지 한 부대는 성에 붙여서 진을 쳤다. 강조는 검차(劍車)로써 진을 배치하여 거란의 군사가 들어오면 검차가 포위하여 공격하니 부서지지 않는 것이 없었다. 거란의 군사가 여러 번 물러가니 강조는 드디어 적을 깔보는 마음이 생겨 다른 사람과 바둑을 두고 있었다. 거란의 야율분노(耶律盆奴)가 상온(詳穩) 야율적로(耶律敵魯)를 거느리고 삼수채(三水砦)를 격파하자 진주(鎭主)가 거란 군사가 이르렀다고 보고하였으나, 강조는 믿지 않고서 말하기를, “입 안의 음식과 같아서 적으면 씹기가 불편하니 마땅히 많이 들어오도록 하라." 하였다. 두 번째 급함을 보고하기를, “거란 군사가 이미 많이 들어왔습니다." 하니, 강조가 놀라 일어나면서, “정말이냐?" 하는데 정신이 황홀한 중에 목종이 보이며 뒤에 서서 꾸짖기를, “네 놈은 끝장이 났다. 천벌을 어찌 도피할 수 있겠느냐." 하는 듯하였다. 강조가 즉시 투구를 벗고 무릎을 꿇으면서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하는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거란 군사가 벌써 이르러 강조를 결박하였다. 이현운(李鉉雲), 도관원외랑(都官員外郞) 노진(盧戩), 감찰어사(監察御史) 노이(盧顗)ㆍ양경(楊景)ㆍ이성좌(李成佐) 등은 모두 잡혔고, 노정(盧頲), 사재승(司宰丞) 서숭(徐崧), 주부(注簿) 노제(盧濟)는 모두 죽었다. 거란 군사가 강조를 모전(毛氈)으로 싸서 수레에 싣고 가버리니 우리 군사가 크게 어지러워졌다. 거란 군사는 이긴 기세를 타서 수십 리를 추격하여 머리를 3만여 급이나 베었고 내버려진 군량과 무기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거란주가 강조의 결박을 풀어주고 묻기를, “네가 나의 신하가 되겠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나는 고려 사람인데 어찌 다시 너의 신하가 되겠느냐." 하였다. 두 번 물었으나 처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또 살을 찢으면서 물었으나 대답은 역시 처음과 같았다. 거란주가 이현운에게 그와 같이 물으니 대답하기를, “두 눈으로 이미 새 일월을 보았는데 한마음을 가지고 어찌 옛 산천을 생각하겠습니까.[兩眼已瞻新日月一心何憶舊山川]" 하였다. 강조가 노하여 현운을 발길로 차면서 말하기를, “너도 고려 사람인데 어찌 이런 말을 할 수 있느냐." 하였다. 이때에 거란 군사가 휘몰아 전진하니 좌우기군장군(左右奇軍將軍) 김훈(金訓)ㆍ김계부(金繼夫)ㆍ이원(李元)ㆍ신녕한(申寧漢)이 완항령(緩項嶺)에서 군사를 매복하고 있다가 모두 짧은 무기를 가지고 갑자기 나와서 패배시키니 거란 군사가 조금 물러갔다.
○ 거란이 강조의 서신을 거짓 꾸며서 흥화진으로 보내어 항복하기를 권유하니, 양규(楊規)가 말하기를, “나는 왕명을 받고 왔다. 강조의 명령을 받을 것이 아니다." 하고 항복하지 않았다. 또 노진(盧戩)과 그 합문사(閤門使) 마수(馬壽)를 시켜 격서를 가지고 통주에 이르러 항복하기를 권유하니, 성 안의 사람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중랑장(中郞將) 최질(崔質)과 홍숙(洪淑)이 소매를 떨치며 일어나서 노진과 마수를 체포하고 이어 방어사(防禦使) 이원귀(李元龜)ㆍ부사(副使) 최탁(崔卓)ㆍ대장군(大將軍) 채온겸(蔡溫謙)ㆍ판관(判官) 시거운(柴巨雲)과 더불어 성문을 닫고 굳게 지키니 여러 사람의 마음이 그제야 통일이 되었다.
○ 12월 경술일에 거란 군사가 곽주(郭州 평북 정주군(定州郡) 곽산면(郭山面))에 침입하니 방어사 호부원외랑 조성유(趙成裕)는 밤에 도망하고 우습유 승리인(乘里仁), 대장군 대회덕(大懷德), 신녕한(申寧漢), 공부낭중 이용지(李用之), 예부낭중 간영언(簡英彦)은 모두 죽었다. 성이 드디어 함락되니 거란은 군사 6천여 명을 남겨두어 성을 지키게 하였다.
임자일에 거란 군사가 청수강(淸水江 청천강)에 이르니 안북도호부사(安北都護府使) 공부시랑 박섬(朴暹)이 성을 버리고 도망하여 고을 백성이 모두 무너졌다.
○ 이전에 왕이 거란 군사가 이른다는 소식을 듣고 중랑장 지채문(智蔡文)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화주(和州 함남 영흥군(永興郡))를 지켜 동북방을 방비하게 하였다. 강조가 패하자, 채문에게 명하여 군사를 옮겨 서경을 구원하게 하니, 채문이 즉시 군용사(軍容使) 시어사(侍御史) 최창(崔昌)과 더불어 나아가 강덕진(剛德鎭 평남 함천군(咸川郡))에 머물렀다.
○ 계축일에 거란 군사가 서경에 이르러 중흥사(中興寺)의 탑을 불살랐다.
○ 갑인일에 숙주(肅州 평남 평원군(平原郡))가 무너졌다. 이날 노이(盧顗)가 향도(鄕導)가 되어 거란 사람 유경(劉經)과 더불어 격서를 가지고 서경에 이르러 항복하기를 권유하니, 부유수(副留守) 원종석(元宗奭)은 부하 관속 최위(崔緯)ㆍ함질(咸質)ㆍ양택(楊澤)ㆍ문안(文晏) 등과 이미 항복할 표문을 만들었다. 채문 등이 이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서경에 이르니 성문이 닫혀 있었다. 최창이 소리질러 분대어사(分臺御史) 조자기(曹子奇)를 불러 말하기를, “우리들은 임금의 명령을 받들고 걸음을 배로 늘려 왔는데 성문을 닫고 들이지 아니함은 무슨 이유이냐?" 하니, 자기(子奇)가 노이와 유경이 항복하기를 권유한 사실을 자세히 알리고 드디어 성문을 여니 채문이 들어가서 고궁의 남쪽 행랑에 주둔하였다. 최창이 원종석에게 노이 등을 구류하고 성을 굳게 지킬 것을 떠보았는데 종석이 따르지 않자, 최창이 은밀히 채문과 모의하여 군사를 성 북쪽에 보내어 노이 등이 돌아가는 것을 기다려 습격하여 죽이고 표문을 빼앗아 불살랐다. 이때 성 안 사람의 마음이 일치하지 않으므로 채문이 나가서 성 남쪽에 주둔하니 따라간 자는 대장군 정충절(鄭忠節)뿐이었다. 조금 후에 동북계도순검사 탁사정(卓思政)이 군사를 거느리고 이르러 드디어 함께 군사를 합쳐서 다시 성에 들어갔다. 왕은 삼군(三軍)이 패전하고 주ㆍ군이 모두 함락되었으므로 표문을 올려 조회하기를 청하니, 거란주가 이를 허락하였다. 드디어 거란 군사가 우리나라에서 포로를 사로잡거나 노략질함을 금지하고, 마보우(馬保佑)를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왕팔(王八)을 부유수(副留守)로 삼고는 을름(乙凜)을 보내어 기병 1천 명을 거느리고 보우 등을 호송하게 하였다.
을묘일에 거란주가 또 한기(韓杞)를 시켜 돌기(突騎) 2백 명을 거느리고 서경 성 북문에 이르러 외치기를, “황제가 어제 유경ㆍ노이 등을 보내어 조서를 가지고 와서 효유하였는데 어찌하여 지금까지 전연 소식이 없느냐. 만약 명령을 거역하지 않는다면 유수와 관료들은 와서 나의 지시를 받으라." 하였다. 탁사정이 한기의 말을 듣고 채문과 모의하여 휘하의 정인(鄭仁) 등을 시켜 날랜 기병을 거느리고 갑자기 나가서 한기 등 백여 명을 쳐서 죽이고 나머지는 모두 사로잡아 한 사람도 돌아간 자가 없었다. 사정이 채문을 선봉으로 삼아 나가서 을름과 싸우게 했더니 을름과 보우가 패하여 달아났다. 이에 성안의 인심이 조금 안정되었으므로 사정은 성으로 들어오고 채문과 이원(李元)은 나가서 자혜사(慈惠寺)에 진을 쳤다. 거란주가 다시 을름을 보내어 공격하니 나졸(邏卒)이 보고하기를, “적병이 안정역(安定驛 평북 평원군(平原郡))에 와서 진을 쳤는데 그 형세가 매우 강성하다." 하였다. 채문이 사정에게 빨리 알리고 병진일에 드디어 사정ㆍ중 법언(法言)과 함께 군사 9천 명을 거느리고 임원역(林原驛 평남 대동군(大同郡))에서 적군을 맞아 쳐서 머리 3천여 급(級)을 베고 법언은 전사하였다. 그 이튿날 채문이 다시 나가서 싸우니 거란 군사가 패하여 달아났다. 이에 성 안의 장수와 군사들이 성에 올라 이를 바라보고는 앞다투어 나가 추격하여 마탄(馬灘)에 이르자, 거란이 군사를 되돌려 쳐부수고 마침내는 성을 포위하였으며 거란주는 성 서쪽 절에 머물렀다. 사정은 두려워지자 장군 대도수(大道秀)를 속여 말하기를, “그대는 동문으로 나는 서문으로 나와 앞뒤에서 공격하면 이기지 못할 것이 없다." 하고 드디어 휘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밤에 도망하였다. 도수는 대동문(大東門)을 나와서야 비로소 속임을 당한 줄 알았으나 또한 힘으로 적을 당해낼 수도 없었으므로, 드디어 관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거란에게 항복하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 무너지고 성 안에서는 흉흉하고 두려워하였다.
기미일에 통군녹사 조원(趙元)과 애수진장(隘守鎭將) 강민첨(姜民瞻), 낭장(郞將) 홍협(洪叶)ㆍ방휴(方休)가 어찌할 줄을 모르다가 이내 함께 신사(神祠)에 빌고 점을 쳐서 길조를 얻었다. 이에 여럿이 조원을 추대하여 병마사로 삼고, 흩어진 군사를 거두어 성문을 닫고 굳게 지키었다.
○ 경신일에 양규(楊規)가 흥화진(興化鎭)에서 군사 7백여 명을 거느리고 통주에 이르러 군사 1천 명을 수합하여, 신유일에 곽주에 들어가서 거란의 주둔 군사를 쳐서 모두 베어 죽이고 성 안의 남녀 7천여 명을 통주로 옮겼다. 이날에 거란주가 서경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자, 포위를 풀고 동쪽으로 갔다.
○ 계해일에 서경의 신사(神祠)에서 회오리바람이 갑자기 일어나니 거란의 군사와 말이 모두 넘어졌다.
○ 귀양보냈던 하공진(河拱辰)과 유종(柳宗)을 소환하여 관작을 회복시켰다.
○ 신미일에 지채문(智蔡文)이 도망해 서울로 돌아와서, 임신일에 서경에서 패전한 사실을 아뢰니 여러 신하들이 항복하기를 의논하는데 강감찬만은 아뢰기를, “오늘날의 일은 죄가 강조(康兆)에게 있으니 걱정할 것이 아닙니다. 다만 적은 수의 군사로 많은 군사를 대적할 수 없으니 마땅히 그 예봉을 피하여 천천히 흥복(興復)을 도모해야 합니다." 하고는 마침내 왕에게 남쪽으로 가기를 권하였다. 채문이 청하기를, “신이 비록 노둔하고 겁쟁이이지마는, 원컨대 좌우에서 견마의 힘을 다하겠습니다."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어제 이원(李元)과 최창(崔昌)이 도망해 돌아와서 스스로 호종하기를 청하였는데, 지금은 다시 보이지 않으니 신하된 도리가 과연 이러할 수 있느냐. 그런데 지금 경은 이미 밖에서 노고했는데 또 나를 호종하고자 하니 그대의 충성을 깊이 가상하게 여긴다." 하고 이내 주식(酒食)과 은으로 장식한 말안장과 고삐를 내려 주었다. 이 밤에 왕이 후비(后妃)와 이부시랑 채충순(蔡忠順) 등과 금군(禁軍) 50여 명과 함께 서울을 나왔다.
계유일에 적성현(積城縣 경기 연천(漣川)) 단조역(丹棗驛)에 이르니 무졸(武卒) 견영(堅英)이 역인(驛人)과 함께 활시위를 당겨 행궁을 범하려 하므로 채문이 말을 달려 이를 쏘았다. 적의 무리가 도망하여 무너졌다가 다시 서남쪽 산에서 갑자기 나와서 길을 막았는데, 채문이 또 쏘아 이를 물리쳤다. 포시(晡時 오후 4시경)에 왕이 창화현(昌化縣 경기 양주(楊州))에 이르니 아전[吏]이 아뢰기를, “왕께서는 나의 이름과 얼굴을 아시겠습니까." 하였으나 왕은 일부러 듣지 못한 척하였다. 그러자 아전이 노하여 장차 난리를 일으키려고 사람을 시켜 외치기를, “하공진이 군사를 거느리고 온다." 하였다. 채문이 말하기를, “무슨 이유로 오느냐?" 하니 아전은, “채충순과 김응인(金應仁)을 사로잡기 위한 것이다." 하자, 응인과 시랑 이정충(李正忠), 낭장 국근(國近) 등이 모두 도망하였다. 밤에 적이 또 이르자 시종하는 신하ㆍ환관ㆍ궁녀들이 모두 도망하여 숨고, 현덕(玄德)ㆍ대명(大明) 두 왕후와 시녀 두 사람ㆍ승지 양협(良叶)ㆍ충필(忠弼) 등만이 왕을 모시었다. 채문이 나갔다 들어왔다 하면서 그때 그때의 시기(時機)에 따라 변고에 대처하니 적이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새벽이 되자 채문이 두 왕후에게 먼저 북문으로 탈출하여 나가기를 청하고, 손수 임금의 말을 몰고 사잇길로 가서 도봉사(道峯寺)로 들어가니 적은 이를 알지 못하였고 충순이 뒤따라 왔다. 채문이 아뢰기를, “지난 밤의 적은 공진(拱辰)이 아닌 듯하니 신이 가서 뒤를 밟아보겠습니다." 하였다. 왕은 그가 도망할까 두려워하여 허락하지 않으니 채문이 아뢰기를, “신이 만약 주상을 배반하여 행동이 말과 어긋난다면 하늘이 반드시 신을 죽일 것입니다." 하니, 왕이 그제야 허락하였다. 곧 창화현으로 가다가 길에서 국근을 만났는데 국근이 말하기를, “나의 의복과 행장을 모두 적에게 빼앗겼다." 하였는데, 채문이 말하기를, “네가 신하가 되어 충성하지 못했으니 목숨을 붙이고 산 것만도 다행이다." 하였다. 때마침 하공진과 유종(柳宗)이 행재(行在)로 달려가고 있었는데 채문이 길에서 그들을 만나 적이 침입한 변고를 자세히 말하고 또 그들에게 힐문하니 과연 공진이 한 짓은 아니었다. 공진은 도중에 중군판관(中軍判官) 고영기(高英起)가 패전하여 남쪽으로 달아남을 보고 그를 데리고 함께 왔다. 이때 공진이 거느린 군사가 20여 명이나 되므로 채문이 마침내 그 군사로 창화현을 포위하여 적이 도적질해간 말 15필과 안장 10부(部)를 찾아내 왕께 돌아가려 하였는데, 채문이 공진등에게 말하기를, “내가 여러분과 함께 나아가면 왕께서 반드시 놀라실 것이니 여러분은 조금 뒤에 오기를 바란다." 하고는 마침내 혼자 갔다. 충필(忠弼)이 절문에 있다가 이를 바라보고 들어가서, “지장군(智將軍)이 왔습니다." 하고 아뢰니, 왕이 기뻐하며 문밖에 나와서 그를 맞이하였다. 채문이 아뢰기를, “신들이 적이 빼앗아간 장물(臟物)을 찾았는데 실상 공진(拱辰)이 한 짓은 아니오며, 또 공진과 함께 왔습니다." 하였다. 왕이 공진과 유종(柳宗)을 불러 위로하였다.
○ 갑술일에 왕이 양주(楊州)에 머무르니 하공진이 아뢰기를, “거란이 본디 역적(강조(康兆))를 토벌한다는 것을 명분으로 삼았는데 이제 이미 강조를 잡아갔으니, 만약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한다면 그들이 반드시 군사를 돌이킬 것입니다." 하였다. 왕이 점을 쳐서 길한 괘를 얻으니 드디어 공진과 고영기(高英起)를 보내어 표문(表文)을 받들고 거란의 진영으로 가게 하였다. 창화현에 이르러 표문을 낭장(郞將) 장민(張旻)과 별장(別將) 정열(丁悅)에게 주어 먼저 군문 앞에 가서 고하기를, “국왕이 와서 뵙기를 진실로 원하나 다만 군대의 위엄을 두려워하고 또 내란으로 인하여 강(임진강) 남쪽으로 피난하였기 때문에 배신(陪臣) 공진 등을 보내어 사유를 진술하게 하였습니다. 공진 등이 또한 두려워서 감히 앞으로 나아오지 못하니 빨리 군사를 거두소서." 하였다. 장민 등이 다다르기 전에 거란 군사의 선봉이 벌써 창화현에 이르렀다. 공진 등이 앞의 뜻을 자세히 진술하니 거란 군사가 묻기를, “국왕은 어디 있느냐?" 하므로 대답하기를, “지금 강 남쪽을 향하여 가셨으니 계신 곳을 알 수 없다." 하였다. 또 길이 먼가 가까운가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강 남쪽이 너무 멀어서 몇 만리나 되는지 알 수 없다." 하니, 뒤쫓던 거란의 군사가 그제야 돌아갔다.


 

[주D-001]죄수를 보고 우는 : 우 임금이 길을 가다가 죄수를 보고는 타고 있던 수레에서 내려서 울었다 한다.
[주D-002]그물을 풀어주는 : 탕 임금이 그물을 벌려놓고 빌기를, “하늘에서 내려오고 땅에서 나오는 놈은 다 내 그물에 걸려라." 하였다. 탕이 그 그물의 3면을 풀어 놓으면서 빌기를, “왼편으로 갈 놈은 왼편으로 가고, 오른편으로 가려거던 오른편으로 가며, 명령을 듣지 않을 자는 그물에 걸려라." 하였다.

 

 

고종 37년 경자(1900, 광무 4)
  6월15일 (을유, 양력 7월 11일)
 함녕전에서 산릉을 간심한 도감의 당상 이하를 소견할 때 비서원 승 김덕한 등이 입시하여 간심한 결과에 대해 논의하였다
○ 3경(三更).
상이 함녕전(咸寧殿)에 나아갔다. 산릉을 간심한 도감의 당상 이하가 입시하였다. 이때 입시한 비서원 승 김덕한, 비서원 낭 정규년ㆍ박제황, 산릉도감 제조(山陵都監提調) 이도재(李道宰), 궁내부 대신서리 윤정구(尹定求), 학부 대신 김규홍(金奎弘), 장례원 소경 심상황(沈相璜), 학부 기사 이병헌(李秉憲)이 차례로 나와 엎드리고, 상지관(相地官) 홍종혁(洪鍾爀), 오택영(吳擇泳), 제갈형(諸葛炯), 박인근(朴寅根), 이종설(李鍾卨), 오성근(吳聖根), 최석영(崔錫永), 정해준(鄭海準)이 차례로 나와 기둥 밖에 엎드렸다.
상이 이르기를,
“사관은 좌우로 나누어 앉으라.”
하였다. 이어 도감 당상 이하에게 앞으로 나오라고 명하니, 이도재 등이 앞으로 나왔다. 상이 이르기를,
“여러 신하들이 가서 본 곳들 중 어느 곳이 가장 낫던가?”
하니, 김규홍이 아뢰기를,
“신은 본디 풍수지리(風水地理)에 어두워 감히 우러러 아뢰지 못하겠습니다만, 여러 지사(地師)가 대령하였으니 하문하시면 자세히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여러 지사는 순서대로 입시하여 각기 소견을 아뢰라.”
하니, 이병헌이 아뢰기를,
“소신이 이번 간심하러 갈 때에 방외(方外) 상지관을 거느리고 여러 곳을 자세히 간심하였습니다만, 소신이 본래 학식이 없고 산에 대한 안목이 넓지 못한 데다 더구나 지극히 중차대한 일이니 어찌 감히 논의하여 주달하겠습니까. 너무나 황송합니다. 여러 지사가 대령하였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차례로 나와 아뢰라.”
하였다. 홍종혁이 아뢰기를,
“이번에 간심한 곳들 가운데 금곡(金谷)이 용맥(龍脈)과 혈(穴)이 모두 좋았습니다. 그러나 용요(龍腰)가 낮고 수색(水色)이 멀리 보이고 혈의 면(面)이 평평하여 얕게 구덩이를 이루었으니, 크게 쓰기에는 온당치 못한 곳입니다. 군장리(軍藏里)는 용맥과 혈은 모두 왕성하게 살아 있는데, 혈당(穴堂)에 물이 비스듬히 쏟아지고 용세(龍勢)는 웅강(雄强)한 형세가 없는 것이 조금 흠입니다. 차유현(車踰峴)은 용맥이 웅장하게 뻗어 있고 혈이 두툼하게 형성되어 있으며 사(砂)수(水)는 관쇄(關鎖)가 잘 되어 있으므로 별다른 흠이 없으나, 다만 국세(局勢)가 협착합니다. 분수원(分水院)은 용맥과 혈, 사(砂), 수(水), 배포(排布)가 크게 쓰일 곳이 될 만합니다. 문봉리(文峯里)는 용맥과 혈은 훌륭하나 기맥(氣脈)이 평탄하고 유장(悠長)하며 낮고 약해서, 크게 쓰일 곳은 아닙니다. 원당리(元堂里)는 용맥과 혈이 모두 허하고 실속이 없으니 본디 고려할 곳이 아닙니다. 이외에는 다시 우러러 아뢸 말씀이 없습니다.”
하고, 오택영이 아뢰기를,
“금곡은 천마산(天摩山)으로부터 용맥의 기(氣)가 묶인 것이 협곡을 건너가고 또 입묘봉(立妙峯)의 중심에서 맥(脈)이 뻗어 나와 봉우리로 솟아 용맥이 세 마디를 이룬 다음 평평한 언덕의 용맥이 되었다가 목처럼 가늘게 잘록한 모양으로 혈을 이루었고 양쪽의 사가 혈을 호위합니다. 그러니 수색이 멀리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산의 골육(骨肉)을 왕성하게 하는 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멀리 보이는 수색이 과연 많이 보이지 않는가?”
하자, 오택영이 아뢰기를,
“산을 왕성하게 하는 원수(源水)가 혈을 호위하며 혈당(穴堂)을 지나가니, 이것은 만궁(彎弓)한 물이고 멀리 보이는 물이 아닙니다. 군장리는 묘적산(妙積山)의 가운데 허리 부분에서 뻗어 나온 용맥이 거듭하여 구불구불 감돌아 왕자맥(王字脈)이 있고 맥 아래 또 세 봉우리로 솟았다가 도로 조산(祖山)을 향하며 혈을 이루는데, 국세가 주밀(周密)하고 용호(龍虎)가 겹으로 안고 있으며 주작(朱雀)이 날아올라 춤추는 형국이니, 필시 영원히 창성할 땅일 것입니다. 차유현은 묘적봉으로부터 왼쪽으로 용맥이 꿈틀거리듯 뻗어 나와 혈을 이루었는데 국세가 주밀하고 혈형(穴形)이 풍후(豐厚)하며 수구(水口)나성(羅星)이 있으니 길격(吉格)이라 하겠지만, 안산(案山)이 특히 높으니 필시 곡요사주격(曲腰事主格)일 것입니다. 원당리는 뻗어 온 용맥이 삼각산(三角山)의 중간 허리 부분에서 세 마디를 이루며 봉우리로 솟아 혈을 만들었는데 혈형이 미미하고 얕으니, 금지옥엽이 들어갈 만한 땅이라고들 하나 청룡(靑龍)이 낮고 잔약하며 야색(野色)이 멀리 보이고 백호(白虎)가 물을 따라 가로질러 가는 형국이므로, 자손이 고향을 떠나게 되는 탄식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분수원은 용맥이 비록 멀리서 뻗어 와 봉우리가 솟지 않았지만 청수(淸秀)하니 형국을 이룬 것이 매우 좋습니다. 혈이 바르게 뻗어 있고 풍후하나, 안산이 가까이에 마주 서 있고 밖으로 조응(照應)하는 조산(祖山)이 없습니다. 이외에는 다시 아뢸 말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을 택하여 아뢰라. 본 바대로 차례로 주달하라.”
하자, 제갈형이 아뢰기를,
“이번 첫 번째 간심을 위해 여러 곳을 두루 관찰하여 보니 크게 쓰일 곳은 단지 다섯 곳뿐이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다섯 곳은 다 좋다고 하던가?”
하자, 제갈형이 아뢰기를,
“금곡은 을좌(乙坐)이고 혈의 언저리가 둥글고 실하며 우각(牛角)이 옆에서 돕고 있으니 상지(上地)라 할 만한데, 다만 혈이 얕은 것이 불만스럽습니다. 군장리는 임좌(壬坐)이고 삼태산(三台山)이 주산(主山)이 되고 혈당(穴堂)이 풍후하고 용호가 중첩해 있으며 삼장(三帳)이 구비되어 있으니 상지라 할 만합니다. 차유현은 임좌이고 개장(開帳)이 선명하고 혈의 언저리가 실하고 둥글며 혈을 중심으로 한 사방의 용맥이 완전하니, 군자가 자리잡을 곳으로서 상등(上等)이라 할 만합니다. 화접동(花蝶洞)은 술좌(戌坐)이고 소조산(少祖山)이 특히 높으며 뻗어 온 용맥이 거미줄 같고 평지에서 혈을 이루었는데, 높이 솟아 기복(起伏)을 이루었고 용맥은 살아 있고 혈은 분명하니 상지라고 할 만합니다. 이외에는 주목할 곳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상지관은 차례로 아뢰라.”
하였다. 박인근이 아뢰기를,
“이번 각처를 간심하니 화접동은 용맥의 기운이 특이하고 자기(紫氣)가 혈을 이루었고 사(砂)와 물이 격에 맞으므로 크게 쓰일 곳으로 적합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매화락지형(梅花落地形)은 혈이 한두 곳이 아니라고 하던데 과연 그런가?”
하자, 박인근이 아뢰기를,
“지사의 말이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장리는 웅장한 산에서 용맥이 뻗어 나왔는가?”
하니, 박인근이 아뢰기를,
“군장리는 용맥이 왕방(旺方)에서 뻗어 나와 생왕방(生旺方)으로 이어져 혈을 맺었고 금수(金水) 방향으로 개장하였는데, 장(帳) 가운데 귀인이 단정히 있고 긴 유형(乳形)의 혈을 이루었으며 수법(水法)이 격에 맞으니 크게 쓰일 땅이라고 할 만합니다. 금곡은 용맥이 천마산(天馬山)에서 중첩해서 개장하며 뻗어 나왔는데, 얕은 와형(窩形)의 혈을 이루었고 안팎의 사세(砂勢)가 주밀하고 수법이 격에 맞으니 크게 쓰일 곳이라고 할 만합니다. 분수원은 뻗어 온 용맥이 마디마다 송영(送迎)을 하고 중첩해서 개장하며 귀성(貴星)이 특별히 높고 긴 유형의 혈을 이루었으며 명당(明堂)이 평평하고 바르며 사와 수가 격에 맞으니 크게 쓰일 땅일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가장 우수한 것을 택하여 재차 간심하라.”
하였다. 김규홍이 아뢰기를,
“재차 간심할 때 총호사가 없어서는 안 되는데 현재 신병이 있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총호사의 병세가 조금 낫기를 기다려 며칠 뒤에 재차 간심하라.”
하였다. 이어 전교하기를,
“청계산(淸溪山)도 거론할 곳이 있다.”
하니, 이도재가 아뢰기를,
“지사의 말도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여러 지사는 차례로 아뢰라.”
하니, 이종설이 아뢰기를,
“금곡은 천마산(天馬山)에서 뻗어 온 용맥이 마디마다 기복을 이루고 다시 목처럼 가늘게 잘록한 모양이 되었다가 혈을 이루었습니다. 혈이 화심(花心)과 같아 소국(小局)이라고들 하나 화심으로 국(局)을 이루었기 때문에 국이 작은 것입니다. 군장리는 묘적산에서 뻗어 나온 용맥이 세 봉우리로 기복을 이루고 혈을 이루었는데 혈형이 풍후하고 용호가 긴밀히 끼고 있으며 안산이 바로 마주 대하고 있고 조산(朝山)이 공읍(拱揖)하고 있으니 상지(上地)라 할 만합니다. 차유현은 묘적산 왼쪽 귀에서 뻗어 나온 용맥이 중심에서 벗어나 있고, 혈형이 풍후하며 수구(水口)에 나성(羅星)이 있습니다. 그러나 국세가 좁고 안산이 특히 높으니 큰 흠인 듯합니다. 화접동은 불암산(佛巖山) 아래 한 줄기 미미한 용맥이 혈을 이룬 곳에 이르러 중간에서 끊어져 형체가 없는데, 기두(起頭)가 높이 솟았고 혈형이 정밀합니다. 그러나 물이 사방(巳方)으로 흘러들어 가니, 이것이 작은 흠이 됩니다. 더는 아뢸 말씀이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건지산(乾芝山)은 그림으로 보면 매우 높은 듯한데 조경단(肇慶壇)에 비하면 높은 것이 아닌 듯하다.”
하니, 김규홍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오성근이 아뢰기를,
“이번 간심한 여러 곳 가운데 분수원, 차유현, 군장리, 금곡 등 네 곳은 용맥과 혈, 사(砂), 수(水)가 모두 격에 맞으니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가장 길한 땅으로 보입니다. 그 나머지는 의법(倚法)에 따라 쓸 곳입니다. 이외에는 다시 아뢸 말씀이 없습니다.”
하였고, 최석영이 아뢰기를,
“군장리의 용맥과 혈은 단정하고 두툼합니다. 그러나 연운(年運)이 어떨지 모를 것 같고, 금곡은 용맥과 혈이 살아 있고 분명하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나 그 혈장(穴場)이 낮고 짧은 것이 작은 흠이 될 듯합니다. 차유현은 높은 곳에서 용맥이 시작하여 금수 방향으로 넓게 개장하였는데, 지룡(枝龍)이 주맥이 되었고 순미(純美)하게 혈이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정중(正中)하게 결국(結局)하지 않은 것이 거슬립니다. 청제산(靑帝山)은 하늘 높이 솟구친 목성(木星)으로 물을 에워싸고 있고 우뚝 서 있으며 용세(龍勢)가 웅장하고 혈형(穴形)이 분명하니 상지라고 할 만합니다. 그러나 내당(內堂)의 물이 곧게 흐르니, 이것이 큰 흠입니다. 현달산(見達山)은 용맥과 혈이 특이하고 단정하여 자체가 하나의 형국(形局)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현무(玄武)가 곧바로 곧게 내려가니, 이것이 작은 흠입니다. 문봉리(文峯里), 이는 기이(奇異)한 형국인데, 세상에서 칭하기를 ‘보검(寶劍)이 궤 속에서 나오는 형상[寶劒出匣形]’이라고 합니다. 용맥과 혈이 분명하지만, 백호(白虎)에 각(角)이 뾰족하고 긴 사(砂)가 있고 청룡(靑龍)에 부분적으로 격에 맞지 않은 외사(外砂)가 있으니 큰 흠인 듯합니다. 분수원은 용세가 기묘하고 멀리서 뻗어 왔으며 혈형은 두툼하고 단정합니다. 그리고 내외의 명당이 길격(吉格)에 들어맞습니다. 그러나 다만 조응하는 외안산(外案山)이 없는 것이 아쉽습니다. 원당리는 도봉산(道峯山)과 망월산(望月山)에서 용맥이 뻗어 나와 중첩하여 개장하였고 용맥과 혈이 살아 있고 분명합니다. 그러나 용신(龍身)이 파괴되어 생기가 점차 쇠하니 큰 흠인 듯합니다. 이외에는 다시 삼가 아뢸 말씀이 없습니다.”
하였고, 정해준이 아뢰기를,
“이번 간심한 여러 곳 가운데 화접동은 용호(龍虎)가 기절(奇絶)하고 특히 빼어나며 장중(帳中)에서 맥이 뻗어 나와 평지대와돌형(平地大臥突形)을 만들었고 혈형이 두툼하고 용세가 웅장하며 명당이 광활합니다. 신의 얕은 견해로는 제일가는 대지(大地)로 보입니다. 금곡은 용세가 웅장하고 맥이 평평한 산등성이로 이어졌으며 용맥의 마디마다 기복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혈형이 짧고 좁아 압도하는 모양이 없으며 명당이 좁아 손이 주인보다 나은 상이니, 크게 쓰기에는 맞지 않은 듯합니다. 군장리는 용호가 중첩해 있고 마디마디가 생왕하는 형국이고 혈형이 두툼하며 내외의 명당이 과연 수법(水法)에 부합되니 크게 쓰일 땅이라고 할 만합니다. 차유현은 골짜기 가운데에 큰 형세의 용맥이 있고 오이 덩굴처럼 혈을 이룬 관계로 기(氣)가 전일하지 못하니, 크게 쓰일 땅으로는 적합하지 못한 듯합니다. 분수원은 용호가 중첩해 있고 용맥의 마디마디가 영송을 하여 마치 비룡(飛龍)이 구름 위에 오르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혈당이 살아 있고 분명하며 주산(主山)과 안산(案山)이 다정하게 마주하고 있고 산들의 기운이 호대(浩大)하니 크게 쓰일 땅이 될 만합니다. 원당리는 용호가 길격에 해당한다 하나 혈이 열려 있고 얕은 와형(窩形)이니, 이것이 작은 흠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원당리의 윤총(尹塚)은 누구의 무덤인가?”
하자, 윤정구가 아뢰기를,
“윤관(尹瓘)의 무덤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윤관이라면 북관(北關)에서 공로가 있었던 그 사람인가?”
하니, 윤정구가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책이 다섯 수레[書有五車矣]’라는 말이 있는데, 풍수지리 서적도 다섯 수레라고 할 만하다. 이 서적들은 청(淸) 나라에서 온 것인가, 우리나라에도 있는 것인가?”
하니, 김규홍이 아뢰기를,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온 것도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주자(朱子)의 주의(奏議)에도 능을 천봉(遷奉)하는 논(論)이 있다.”
하니, 김규홍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사관에게 자리로 돌아가라고 명하였다. 이어 물러가라고 명하니, 신하들이 차례로 물러 나왔다.

[주D-001]혈(穴) : 신의 정기(精氣)가 응결하는 곳을 말한다. 이곳에 시신을 묻는다.
[주D-002]사(砂) : 혈(穴)을 중심으로 하여 전후 좌우에 나열된 산, 물, 암석, 지형(地形), 건물, 수목(樹木) 등 모든 환경 조건을 말한다.
[주D-003]수(水) : 강(江), 바다, 호수, 못, 시내, 도랑을 포함한 모든 물을 일컫는다. 뿐만 아니라 실제 물이 고이지 않은 낮은 지대와 흐르지 않는 내, 개울, 도랑도 수라 한다.
[주D-004]조산(祖山) : 혈(穴)의 처음 근원이 되는 태조산(太祖山)에서 혈이 있는 산인 주산(主山)에 이르는 사이에 태조산 다음으로 높고 큰 산이 소조산(少祖山)이고, 그 다음으로 높고 큰 산이 종산(宗山)이고 주산 뒤에 그보다 높이 솟은 산이 부모산(父母山)이고, 이 부모산 뒤에 그보다 높이 솟은 산이 조산이다.
[주D-005]용호(龍虎) : 청룡(靑龍)과 백호(白虎)를 말한다. 사신(四神) 가운데 동쪽을 맡은 신은 청룡이고, 서쪽을 맡은 신은 백호이고, 남쪽을 맡은 신은 주작(朱雀)이고, 북쪽을 맡은 신은 현무(玄武)이다. 여기서 유래하여 혈(穴)을 기준으로 하여 동쪽에 있는 용맥을 청룡이라 하고, 서쪽에 있는 용맥을 백호라 하고, 남쪽에 있는 용맥을 주작이라 하고, 북쪽에 있는 용맥을 현무라 한다. 용호는 이 가운데 청룡과 백호를 말하는 것인데, 혈의 뒤를 북쪽, 앞을 남쪽으로 하는 법을 따르면 왼쪽이 동쪽이 되고 오른쪽이 서쪽이 되므로,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라 한다.
[주D-006]수구(水口) : 혈(穴)을 중심으로 하여 사방의 물을 한 곳으로 모아 빠져나가게 하는 고장지(庫藏地)를 말한다. 고장지는 진(辰), 술(戌), 축(丑), 미(未)를 말하는데, 이것으로 혈의 사대국(四大局)이 결정된다. 곧 고장지가 진일 경우는 수국(水局), 술일 경우는 화국(火局), 축일 경우는 금국(金局), 미일 경우는 목국(木局)이다.
[주D-007]나성(羅星) : 나성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반듯하고 둥그스름한 큰 암석이 수구를 막는 것을 말하고, 또 하나는 주위의 먼 산들이 성(城)같이 둘러싸고 있는 것을 말한다.
[주D-008]안산(案山) : 혈(穴) 앞쪽에 솟아 있는 산을 말한다.
[주D-009]우각(牛角) : 혈(穴) 바로 뒤나 가까운 옆에 송아지 뿔 모양으로 솟은 것이 있으면 이를 우각사(牛角砂)라 하여 매우 좋은 사(砂)로 본다. 그 가운데 진혈(眞穴)이 있다는 증거다.
[주D-010]개장(開帳) : 조산(祖山)으로부터 용맥(龍脈)이 뻗어 나가는 모습으로, 양쪽으로 팔뚝을 활짝 벌려 안을 것 같은 모양을 이룬 것을 말한다. 그 가운데로 중심맥이 출맥(出脈)하게 되는데, 이를 천심(穿心)이라고 한다.
[주D-011]소조산(少祖山) : 혈(穴)의 처음 근원이 되는 산인 태조산(太祖山)에서 혈이 있는 주산(主山)에 이르는 사이에 태조산 다음으로 높고 큰 산이 소조산이다.
[주D-012]기복(起伏) : 용맥(龍脈)이 위로 솟은 것을 기(起)라고 하고, 아래로 엎드려 있는 것을 복(伏)이라고 한다.
[주D-013]송영(送迎) : 산의 정기(精氣)를 다음 산으로 보내고 다음 산은 이를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주D-014]조산(朝山) : 안산(案山) 너머로 멀리 높게 솟은 산들을 말한다.
[주D-015]의법(倚法) : 작혈법(作穴法)의 하나이다. 혈(穴)이 있는 자리에서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약간 당겨 붙이는 방법을 말한다.
[주D-016]현무(玄武) : 사신(四神) 가운데 동쪽을 맡은 신은 청룡(靑龍)이고, 서쪽을 맡은 신은 백호(白虎)이고, 남쪽을 맡은 신은 주작(朱雀)이고, 북쪽을 맡은 신은 현무(玄武)이다.
[주D-017]외안산(外案山) : 안산(案山)이 중첩되어 있는 경우에 혈에서 가까운 산을 내안산(內案山)이라 하고, 이 내안산의 뒤에 있는 산을 외안산(外案山)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