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경인년 산행/2010.12.12. 남한산성 (금지샘)

2010.12.12. 남한산성 산행 (금지샘산악회) ( 글 스크랩)

아베베1 2010. 12. 13. 13:40

 남한산성 산행 금지샘 산악회 (송년산행)

 마천역 서문 지화문 으로 간단하게 산행후  장지동 예식장 참석후  망년회 참석   

 南漢山城 은 역사적으로 많은 의미를 가져준 산성이고 역사적인 유적이다

  백제등 삼국시대부터  전략적 요충지로서 쟁탈전이 심하였고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인조대왕시 청나라의 침입으로  결사항전을 하였으나  보급로 차단으로 인조의 

  삼전도의 굴욕을 안겨준  치욕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끝까지 항전하자는 파와 청에 굴복하여  다른길을 택하자는 주화파가 등장하는 시기 (삼학사 홍익환, 윤집, 오달재 청나라에 끌려가 최후를 맞이하고 )....

  재경 금지샘 산악회의 남한산성 탐방은 즐거움과 화기 애애한 산행과 뒷풀이도 즐거웠던  시간 이었다 .

  산행 참석인원 23명

  산행시간 11:00- 13:30 (약 2시간 30분 소요)    

 

 

 

 

 

 

 

 ☞ 좌익문 우익문을 보니 궤산정기의 내용 상기의 문루는 이곳에서 본따온것이 아닌가 생각되는 부분...

 

태화전 동각과 서각에 좌익문(左翼門)ㆍ우익문(右翼門)이 있다. 좌익문 밖에 문연각(文淵閣)이 있고 우익문 밖에는 무연각(武淵閣)이 있다. 문연각의 오른쪽을 따라 높은 담이 둘러 있고, 담의 동쪽 모퉁이에 문 하나가 있으며, 여기를 지나면 경운문(景運門)이다. 협화문(協和門) 밖에는 무영각(武英閣)이 있고 희화문(煕和門) 밖에는 문화각(文華閣)이 있는데, 희화문과 동화문이 서로 마주치고 협화문과 서화문이 서로 마주친다.

 

 

 

 

 

 

 

 

 

 

 

선조 36년 계묘(1603,만력 31)
 2월18일 (을사)
남한산성의 형세에 대해 이기빈으로 하여금 도형을 그려오게 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남한산성의 형세에 대해서 본사(本司)에도 익히 살펴본 사람이 있습니다. 둘러싸인 가운데에 완연히 한 도읍(都邑)이 이루어졌는데, 서북쪽에는 높은 봉우리가 있고 동서쪽은 확 트여 시냇물과 논이 있으며 꼬불꼬불한 산굽이가 몹시 깊어 바깥에서 굽어보거나 엿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옛날에 백제(百濟)가 이곳을 국도로 삼은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였던 것입니다. 만약 이곳에다 성을 쌓은 다음 한결같이 독성(禿城)에서처럼 군사를 조련하여 안으로는 경도(京都)의 보장(保障)이 되고 바깥으로는 제진(諸鎭)을 공제(控制)하게 한다면 참으로 장구한 계책이 될 것으로, 성려(聖慮)가 미치신 바가 실로 뛰어나신 것입니다.
신들이 심가 헤아려 보건대, 이 성은 형세가 매우 좋습니다. 그러나 부근의 각읍이 모두 잔파된 곳이어서 인력(人力)이 부족한 탓으로 규획(規劃)하려 해도 형세상 매우 어렵습니다. 독성의 경우는, 수원부(水原府)가 사람과 물산(物産)이 많아 광주(廣州)에 비할 바가 아니고 또 성자(城子)가 광활하지 않으므로 많은 인력으로 수선하고 설진(設鎭)하여 모양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지금 이 남한산성의 경우는 독성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본주의 목사를 엄밀히 선택하여 차송(差送)한다 하더라도 무슨 힘에 의지하여 쉽사리 성을 완성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조정에 정해진 계책이 있어 사람을 가려 뽑아 그에게 위임할 경우에는 먼저 승도(僧徒)를 모집하거나 혹 창고를 지어 곡식을 저장해 두거나 인호(人戶)를 모집해 들여 부역을 면제해 안집(安集)시켜 점차 터전을 이루게 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시기를 헤아리고 힘을 요량하여 모처(某處)의 군사를 주어 성지(城池)를 수선하고 누노(樓櫓)를 지어 서울 가까운 곳의 한 거진(巨鎭)으로 삼는다면 참으로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 나라는 정해진 의논이 없어 장구한 성과가 있기를 책임지우지 못하는 것이 염려됩니다. 본사의 당상(堂上) 이기빈(李箕賓)으로 하여금 화수(畫手)를 대동하고 가서 간심(看審)하고 나서 도형을 그려오게 한 다음 다시 의논해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사신은 논한다. 듣건대 맹가(孟軻)가 ‘포루(布縷)의 정(征)도 있고 속미(粟米)의 정도 있고 역역(力役)의 정도 있는데, 그 가운데에서 두 가지를 시행하면 백성들이 유망(流亡)하고 세 가지를 다 쓰면 나라가 망한다.’고 하였다. 지금은 백성들이 병들었고 정역(征役)이 몹시 많은데 백성들을 쉬게 하여 나라의 근본을 굳게 하는 것은 지금이 바로 적당한 때이다. 그런데 인화(人和)가 바로 굳건한 성(城)이라는 것은 모르고 지리(地利)의 험고한 것만을 믿으려고 하니, 금성탕지(金城湯池)가 있다 하더라도 백성들이 원망하고 있는 데에야 모슨 소용이 있겠는가.
【원전】 24 집 449 면
【분류】 *과학-지학(地學) / *정론-정론(政論) / *군사-군정(軍政) / *역사-사학(史學)


광해군 10년 무오(1618,만력 46)
 6월19일 (병자)
비변사에서 요해처에 각도의 병사를 나누어 들여보내 지키게 하는 일로 아뢰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 비망기로〉 각도의 병사를 나누어 들여보내 지키게 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강도(江都)야말로 보장(保障)으로 삼을 지역이고 남한 산성(南漢山城)과 파주 산성(坡州山城) 등도 꼭 지켜야 할 곳이니 군사를 나누어 들여보내 지키도록 하신 성상의 분부가 참으로 지당하다고 하겠습니다. 다만 삼각 산성(三角山城)의 경우는 그 형세가 어떠한지 공역(功役)은 얼마나 들지 모르는 상황인 만큼 반드시 일을 아는 사람을 파견하여 성터를 살펴보고 그 지형을 그려오게 해서 과연 지킬 만한 곳인지를 안 다음에야 어느 지역 어느 고을의 병사를 어느 곳에 나누어 지키게 할 것인지를 상의해 조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수원(水原)의 독성(禿城)과 파주(坡州)의 임진(臨津)도 꼭 지켜야 할 곳에 포함시켜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요해처로서 파수해야 할 곳이 무려 5, 6곳이나 되는 셈인데, 군병과 기계를 나누어 보내는 것도 지극히 어려울 뿐만 아니라 군량을 조달하는 문제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대책이 없으니 정말 염려스럽습니다. 곡식을 어떻게든 확보하는 것이 오늘날의 급무인데 따로 규정을 만들어 다방면으로 곡식을 모집한다면 약간의 도움이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상 무신에게 임무를 나누어 부여하는 일 역시 성상의 분부대로 따라야 할 것이니, 광주 목사(廣州牧使)를 우선 가려 보내도록 하소서. 〈 그런데 양주(楊州)의 경우는 간심(看審)하기를 기다리고 나서 처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원전】 33 집 108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군사-군정(軍政) / *군사-관방(關防) / *군사-병참(兵站) / *재정-잡세(雜稅) / *인사-임면(任免)

인조 18년 경진(1640,숭정 13)
 4월8일 (기미)
심기원을 남한 산성 수어사로 삼다

청원군(靑原君) 심기원(沈器遠)을 남한 산성 수어사(南漢山城守禦使)로 삼았다.
【원전】 35 집 86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군사(軍事)

인조 23년 을유(1645,순치 2)
 12월11일 (기축)
이규로를 지평으로 삼고 특명으로 정제룡을 곤양 군수로 삼았다

이규로(李奎老)를 지평으로 삼고, 특명으로 정제룡(鄭霽龍)을 곤양 군수(昆陽郡守)로 삼았다. 제룡은 무인이다. 상소를 올려 경상도의 폐단과 고충을 진술하고, 또 칠곡 산성(漆谷山城)의 형세는 남한 산성(南漢山城)보다 백 배나 좋고 진주(晋州) 역시 영남의 승지이니, 미리 방어의 기구를 갖추어 두었다가 뒷날 위급할 때에 지킬 계책을 삼기를 청하였다. 그러자 상이 너그러이 답하고 가상하다고 칭찬해 주었으며, 얼마 뒤에 이조에 하교하여 그의 나이를 묻더니 이미 60세였는데도 특명으로 수령을 제수하니, 사람들이 모두 놀라워하였다.
【원전】 35 집 253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정론-정론(政論) / *군사-관방(關防)

인조
 부록
인조 대왕 행장(行狀)③

어진이를 높이는 뜻이 그 생사에 관계 없이 차이가 없으셨다. 즉위하신 처음에 장현광(張顯光)·김장생(金長生)·박지계(朴知誡) 등을 모두 곧 역마로 불러서 쌍가마를 타고 오게 하여 혹 따로 사업(司業) 벼슬을 두어 제수하기도 하고 발탁하여 헌부(憲府)의 벼슬에 두기도 하고 또 강학청(講學廳)을 열어 세자를 가르치게 하셨다. 그들이 이르렀을 때에는 공경을 다하여 맞이하고 녹봉(祿俸) 이외에 늠인(廩人)이 곡식을 대어 주었고, 그들이 물러갔을 때에는 장리(長吏)를 시켜 세시(歲時)에 안부를 묻게 하셨다. 초야에 있는 인사에 대해서 조금도 버려져 있게 하지 않으시니, 김집(金集)·송준길(宋浚吉)·송시열(宋時烈)·최온(崔蘊) 등이 다 뽑혀 쓰였고 임하(林下)에서 일어나 경재(卿宰)까지 된 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죽으면 조문(弔問)하고 그 부물(賻物)을 보낼 뿐만 아니라 관가에서 그 장구(葬具)를 마련해 주고 그 자손과 문생(門生)을 찾아서 임용하게 하셨다.
대신을 공경하는 데에는 예모를 갖추셨다. 접대하는 말은 반드시 공손하게 하셨고 일이 있으면 반드시 자문하셨으며 좋은 말이 있으면 반드시 따르셨다. 그들이 죽었을 때에는 부물과 수의를 특별히 주셨다.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이 늙어서 걷지 못하게 되니 궤장(几杖)을 내리고 술을 내려 잔치하게 하였으며 견여(肩輿)를 타게 하고 또 소환(小宦)을 시켜 부축하여 전(殿)에 오르게 하시니, 이원익이 은사(恩私)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그가 물러가 금천(衿川)에서 노년을 보낼 때에는 왕이 자주 근시를 보내어 안부를 묻게 하셨다. 이귀(李貴)의 말이 대신을 범하였는데, 왕이 듣고 하교하기를 ‘대신은 임금 한 사람 아래에 있어 지위가 백관과는 아주 다르고 조정에서 예로 대우하는 것은 임금을 공경하기 때문인데, 이귀는 뭇사람이 모인 가운데에서 상신(相臣)을 욕하여 조금도 꺼리지 않았다 하니, 일이 매우 놀라울 뿐만 아니라 또한 이 버릇을 연장되게 할 수도 없다. 이 일을 방치한다면 어찌 내가 공신(功臣)을 끝내 보전하려는 도리이겠는가. 임금을 가벼이 여기고 조정을 업신여긴 데에는 나라에 법이 있으니, 내가 감히 사사로이 할 수 없다. 이 뜻을 양사에 말하여 공론에 따라 죄주게 하라.’ 하시니, 이귀가 이 때문에 파직되었다.
뭇 신하를 친근히 하는 데에는 병든 자가 있으면 반드시 의관을 보내어 묻게 하고 내약(內藥)을 보내셨다. 을해년에 왕이 목릉(穆陵)에 가서 제사할 때에 대사헌 김상헌(金尙憲)이 따라가다가 갑자기 병이 나서 뒤떨어졌는데 왕이 듣고 어의(御醫)를 머물려 두어 구완하게 하였으며 길에서 사자(使者) 몇 명을 보내어 병문하게 하고 또 일행 가운데에 있는 족속을 물어 곧 역마를 타고 달려가 보게 하셨다. 늙은 어버이가 있는 자에게는 진기한 과일과 옷감을 내리고, 봉양하기 위하여 고을살이를 청하는 자는 다 바라는 대로 되게 하셨다. 이경여(李敬輿)가 늙은 어머니를 위하여 외직에 보임되기를 바랐는데 왕이 그가 경악(經幄)을 떠나는 것을 바라지 않으므로 쌀과 콩을 주게 하고, 박장원(朴長遠)이 월과(月課) 때에 반포오시(反哺烏詩)를 지었는데, 왕이 보고 가엾게 여기면서 그에게 편모(偏母)가 있으나 봉양할 수 없음을 알고 먹을 것을 주셨다. 성묘하는 자에게는 제수를 내리고 한겨울에는 때때로 추위를 막을 제구를 내리고, 경비가 부족할 때를 당하더라도 그 가난을 염려하여 봉록을 늘리고, 직분 안의 일이라도 조금 공로가 있으면 반드시 물건을 보내어 보답하셨다.
훈신(勳臣)를 대우하는 데에는 은수(恩數)가 특별히 융숭하고 총애하여 내리는 물건이 문득 많았다. 을축년에 정사 공신(靖社功臣)·진무 공신(振武功臣)을 거느리고 친히 회맹제(會盟祭)를 거행하고 잔치를 내려 은수를 더하셨는데, 진무는 장만(張晩) 등이 역적 이괄(李适)을 평정한 훈호(勳號)이다. 수찰(手札)로 특별히 하교하기를 ‘경들이 아니면 윤기가 없어지고 종사가 엎어졌을 것이니, 경들의 공은 고금에 없던 것인데, 회맹례(會盟禮)는 지냈으나 갚을 길이 없다. 경들과 함께 어려움을 구제하여 고락을 같이하기를 바라니, 임금과 신하 사이에 각각 그 도리를 다하여 능히 사욕을 버리고 지극히 다스려지도록 꾀하고, 어려운 처지에 있던 때를 잊지 말라 각자 역량을 다하면서 조그마한 힘도 아끼지 말라.’ 하셨다. 병술년에 또 영사(寧社)·영국(寧國)의 신구 공신등과 회맹하셨다. 정사 원훈과 그 아들을 때때로 금중(禁中)에 불러들여 술과 고기로 대접하여 집안 사람끼리 대하는 예처럼 서로 수작하셨다. 세자에게 친후(親厚)를 길이 보전하라고 경계하기까지 하셨으나 혹 법을 범하면 또한 훈귀(勳貴)라 하더라도 조금도 용서하지 않으셨다.
왕이 붕당의 화가 반드시 나라를 망칠 것이라 하여 번번이 연중(筵中)에서 뭇 신하에게 경계하여 ‘병화나 홍수·가뭄의 재앙도 당론보다 더하지 않다.’ 하셨다. 일찍이 영의정 김류에게 이르기를 ‘근일 백관이 직무를 게을리하고 기강이 해이한 것은 참으로 사욕을 따르고 붕당을 감싸는 탓에서 말미암았고, 무너진 기강을 진작하기를 바라려면 대신과 도헌(都憲)이 마땅한 사람이어야 한다. 이 일은 상법(常法)으로 다스릴 수 없으니, 이 뒤로 붕당을 감싸는 일이 있으면 심한 자는 참형에 처하고 결코 용서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하고, 또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선왕께서 의주에 계실 때에 시 한 수를 지으셨는데 시의 뜻은 대개 조정의 붕당을 경계한 것이다. 신하로서 그 시를 보면 조금 징계될 것인데 폐습이 날로 심해지니, 참으로 슬프다.’ 하셨다. 왕이 이처럼 매우 억제하셨으므로 반정 뒤에는 사람들이 감히 함부로 하지 못하였다.
깨끗한 몸가짐이 있는 신하에게는 문득 칭찬하고 숭장(崇奬)하셨다. 이직언(李直彦)은 나이 많고 평소에 절조가 있다 하여 우찬성에 승배(陞拜)하고, 이원익(李元翼)은 벼슬이 재상에 올라도 초가에서 곤궁하게 산다 하여 경기에 명하여 기와집을 지어 주게 하고 베이불과 흰요를 내리고, 무신(武臣) 최진립(崔震立)은 간약(簡約)하다 하여 공조 참판에 탁배(擢拜)하고, 성하종(成夏宗)도 청렴하고 신중하여 여러 번 벼슬을 옮겨 북 병사(北兵使)가 되었다.
노인을 우대하는 법은 상례(常例)보다 훨씬 더하여 세수(歲首)에는 늙은 신하를 문안하고 또 옷감을 보내셨다. 경오년에 하교하기를 ‘노인을 공경하고 어진이를 존중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이다. 옛 임금은 혹 친히 나아가 잔치하여 위로하기도 하고 벼슬을 내리고 비단을 내리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다 높이는 뜻이다. 지금 내가 덕이 없어 위로 천심(天心)에 부응하지 못하므로 7, 8년 동안 병화와 기근이 거의 없는 해가 없으니, 기로(耆老)를 생각하면 절로 부끄럽고 두려워진다. 지금 경비가 아주 없어 잔치하여 위로하는 일은 워낙 쉽게 의논할 수 없으나 벼슬을 내리는 은전은 거행하는 것이 참으로 마땅하니, 해조로 하여금 노인작(老人爵)을 제수하여 노인을 우대하는 지극한 뜻을 보이라. 늙은 과부에게도 등급을 나누어 물건을 내리도록 명하여 고루 은전을 입게 하라.’ 하셨다. 그래서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세상에 드문 은혜를 입었고, 이 뒤에 나이 많아서 벼슬을 더한 자가 매우 많았다.
홍서봉(洪瑞鳳) 등 여러 재신이 회연(會宴)하여 그 늙은 어머니를 축수할 때에 왕이 한 사람 앞에 풀솜 두 근씩을 내리고, 또 하교하기를 ‘경들은 다 늙은 어버이가 있어서 영양(榮養)을 극진히 하니 내 마음이 감동된다.’ 하셨다. 선을 베푸는 인자함이 흔히 이러하셨다. 충효를 포숭(褒崇)하되 찾아서 정표(旌表)하고, 나라의 일에 죽은 자는 부모 처자를 다 무양(撫養)하고 그 집에 다달이 늠료(廩料)를 주고 그 고아를 벼슬시키셨다. 김응하(金應河)의 집에는 여러 번 은 3백 냥을 내리고, 또 김준(金浚)의 일가가 안주(安州)에서 죽어 삼강(三綱)이 구비하였다 하여 그 아들 김진성(金振聲)에게 6품 벼슬을 초수하셨다. 항오(行伍) 중에서 전사한 자에게는 관직을 추증하고, 군정(軍丁)에게는 복호(復戶)하셨다. 왕이 문무(文武)를 병용하는 것이 장구한 도리이므로 무사를 대우하는 것이 박해서는 안 된다 하여, 조종 때에 후하게 보살펴 준 규례로 깨우쳐서 재국(才局)과 원식(遠識)이 있는 통정(通政) 이상인 자는 육경(六卿)과 승지(承旨)에 주의(注擬)하고 통훈(通訓) 이하인 자는 시정(寺正)·낭료(郞僚)에 차의(差擬)하게 하셨다. 또 한가한 때에는 친림하여 시열(試閱)하고 능한 자를 상주셨다. 장수를 대우하는 도리는 흔히 고례(古禮)를 본뜨셨다. 계해년에 도원수 장만(張晩)이 출정할 때에 왕이 서교(西郊)에 거둥하여 친히 상방검(尙方劍)을 주어 명을 따르지 않는 제장(諸將)을 베게 하시고, 그 뒤 김자점(金自點)이 원수(元帥)가 되었을 때에도 검을 내리셨다.
날씨가 추우면 번번이 변방의 장사(將士)를 염려하여 그 괴로운 정상을 자세히 적어 조서를 내리셨는데, 그 글의 대략에 ‘먼 곳 외로운 성에서 적개(敵愾)의 뜻이 절실하더라도 고향 집을 떠나 어찌 돌아가고 싶은 생각을 금할 수 있겠는가.’ 하고 차등을 두어 명주를 내리기도 하고 방한구를 내리기도 하고 군졸에게는 옷과 가죽을 주셨다. 무진년 겨울 추위가 심할 때에 수찰(手札)로 하교하기를 ‘어공(御供)에 관계되는 모든 물건을 혹 하교에 따르거나 소차에 따라 거의 다 줄였으나 아직 줄이지 않은 것은 담비 갖옷이다. 해조는 반드시 추위를 막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서 폐지하기를 감히 청하지 않았겠지만 서방 백성이 얼어 죽는 때에 내 몸에 가벼운 갖옷을 입는 것은 마음에 매우 불안하니, 올해에는 진상하지 말고 그 대가인 무명을 양서에 내려보내어 헐벗은 백성에게 나누어 주라.’ 하셨다. 정묘년 변란 때에 철산(鐵山) 사람 정봉수(鄭鳳壽)가 용골 산성(龍骨山城)을 지켜 적을 물리쳤는데, 왕이 소견하여 상방금단(尙方錦段)과 내구마를 내리시고 초천(超遷)하여 전라 병사(全羅兵使)까지 삼으니, 사람들이 다 권려하는 것을 알았다.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의 일에 근로하시는 것은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다. 재변을 당하면 반드시 이것은 내 죄라 하고 반드시 과실을 죄다 아뢰고 원옥(冤獄)을 심리하게 하셨다. 간원이 가뭄 때문에 친히 비를 비시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임금이 두렵게 여겨 몸을 움추리고 덕을 닦지 못하고 재앙을 만나면 빌 줄만 아는 것은 말세의 일인데, 그대들이 내 잘못을 책망하지 않고 나에게 빌기를 권하니, 근본을 버리고 말단을 취한 것이다. 인사가 아래에서 바로잡히면 천기가 어찌 위에서 불순하겠는가. 인사를 닦지 않으면 하늘이 그것에 반응을 보이는 것인데, 내가 즉위하고부터 재앙을 내리는 꾸중이 매우 심하니, 밤낮으로 근심되고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그대들은 말단의 일을 생각하지 말고 각각 곧은 말을 아뢰어 위로 내 잘못을 책망하고 아래로 백성의 억울한 일을 풀어 주라.’ 하셨다.
왕은 재앙을 당한 임금은 여러 가지 좋은 음식을 아울러 먹지 않는 것이라 하여 사옹원의 어전(漁箭)도 설치하는 것을 윤허하시지 않았으며, 정전(正殿)을 피하고 찬선(饌膳)을 줄이는 것을 말단의 일로 여겼지만 감히 행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비는 것을 말단의 일로 여겼지만 또한 감히 친히 빌지 않은 적이 없으셨는데, 반드시 응답이 있었다. 일찍이 사직단에서 빌 때에 바야흐로 제사하려는데 비가 내리므로 유사(有司)가 장막을 설치하기를 청하였으나 듣지 않고 또 우산을 받쳤으나 물리치시어 어의(御衣)가 죄다 젖었다. 만년에는 병환이 나서 거행하지 못하셨다. 일찍이 비가 내리지 않는 것을 답답히 여겨 큰 베옷을 입고 앉아 뭇 신하를 불러 각각 극진히 말하게 하고 자책이 매우 간절하셨는데, 파하자 비가 크게 내렸다.
자기를 죄책하고 충직한 말을 구하는 하교가 전후에 누누이 있었는데, 그 대략에 ‘하늘과 사람은 같은 이치이므로 나타나고 은미한 것에 차이가 없으니 복을 주고 화를 주는 응답이 어찌 감동되는 것이 있어서가 아니겠는가. 재앙을 그치게 하는 도리를 닦으려면 곧은 말을 구해야 할 것이다. 모든 내 과실과 좌우의 충사(忠邪)와 정령(政令)의 선악과 민생의 이병(利病)을 숨기지 말고 모두 말하라. 말한 것이 채용할 만하면 내가 상줄 것이고 혹 맞지 않더라도 죄주지 않을 것이니, 너희 중외의 대소 신하는 각각 소견을 실봉(實封)하여 조목조목 올리라.’ 하셨고, 또 이르기를 ‘일처리를 잘못해서 덕이 이지러졌는가. 죄 없는 자가 뜻밖에 죄에 걸려 지극한 원통이 풀리지 않았는가. 용사(用捨)를 제대로 못하여 인재가 답답해 하고 있는가. 형상(刑賞)이 미덥지 않아서 사람에게 권장되고 징계되는 것이 없는가. 부역이 고르지 않아서 서민이 원망하는가. 언로(言路)가 막혀서 아랫사람의 뜻이 통하지 않는가. 제사가 깨끗하지 않아서 온갖 신명이 흠향하지 않는가. 호강하고 교활한 자가 흉독을 부려서 마을이 시름하고 한탄하는가. 참소하는 자가 뜻을 얻고 사사로이 청탁하는 자가 극성을 부리는가. 안팎이 엄하지 않아서 뇌물이 행해지는가.’ 하시어 말씀이 매우 간절하였다.
병자년에 가뭄과 홍수가 잇따르니, 하교하기를 ‘한 가지가 지극히 많거나 지극히 없는 것은 홍범(洪範)에서 근심한 바이며 오래 비가 내리거나 오래 가무는 것은 잘못한 결과로 초래된 것이니, 이 가운데서 하나만 있어도 백성이 편히 살지 못하는데 더구나 아울러 있고 아울러 지극한 것이겠는가. 내가 외람되게 큰 통서(統緖)를 이어받음에 덕은 사람을 감동시킬 만하지 못하고 재주는 일을 알 만하지 못하며 공검(恭儉)은 표준이 되지 못하고 상벌은 권징(勸懲)이 되지 못하여 병란과 수한(水旱)으로 백성에게 해를 끼칠 뿐이니, 사람들이 말하지 않더라도 어찌 부끄럽고 두렵지 않겠는가. 올해에는 가물은 끝에 수재가 매우 혹독하니, 이것은 재변 가운데에서도 가장 절박한 것이다. 슬픈 우리 백성에게 죽음이 닥쳤는데 이런 때에 임금은 먹는 것으로 백성을 괴롭힐 수 없고 또한 방책 없이 가만히 있을 수 없으니, 각도의 물선(物膳)을 모두 연한을 정하여 바치지 말고 공상(供上)하는 종이도 마찬가지로 시행하고, 재해를 입은 곳은 진휼하는 정사를 각별히 의논하여 품처(稟處)하라.’ 하셨다.
번번이 흉년이나 병란의 화를 당하면 반드시 밀린 조세를 감면하고 그 부역을 줄이고 모든 삭선(朔膳)과 절일(節日)에 바치는 것과 조석으로 바치는 것과 내외사(內外司)에서 향온(香醞)을 빚는 일을 모두 절감하되 3년에서 4년에 이르는 것이 항상 많으므로 어주(御廚)에 여유의 찬선(饌膳)이 없었다. 태복(太僕)의 어마(御馬)까지도 말하는 것을 채택하여 그 수를 줄여서 재변을 경계하는 뜻을 보이셨다. 정해년에 또 가뭄과 홍수의 재앙이 있었는데, 호부(戶部)의 미곡 5만 석을 덜어서 백성의 공부(貢賦)를 갈음하게 하셨다. 백성이 굶주리면 혹 창고의 곡식을 내거나 다른 곳의 곡식을 옮기고 또 진휼청을 설치하여 죽을 쑤어 먹이되 착한 재신(宰臣)과 낭서(郞署)를 가려서 그 일을 맡게 하고, 외방에도 경중과 마찬가지로 아울러 신칙하셨으므로 길에 굶어 죽는 자가 없었다.
여역(癘疫)이 있으면 의국(醫局)을 시켜 약을 지어 구완하게 하고, 또 유사를 시켜 여사(廬舍)를 지어 거처하게 하고 관가에서 그 죽반(粥飯) 거리를 주게 하셨다. 난리를 겪은 뒤에 우역(牛疫)이 매우 치성하여 거의 다 죽었는데, 여러 목장에서 기르던 것을 몰아서 여러 고을로 흩어 보냈으므로 소가 크게 번식하여 백성이 밭갈이에 괴롭지 않았다. 혹 대신과 비국의 신하를 부르거나 근신(近臣)을 불러 과실을 듣기를 바라셨다. 일찍이 김류에게 이르기를 ‘원훈(元勳)은 국가와 고락을 같이하는 사람인데 입시(入侍)한 때에도 내 잘못을 말하지 않는 것이 옳은 일인가.’ 하고 그 뒤에 또 대신에게 이르기를 ‘재앙을 그치게 하는 방법은 임금이 잘못을 고치는 것밖에 없고 또 인재를 얻기에 달려 있다. 이 두 가지에 지나지 않을 뿐인데, 잘못이 있으면 대관(臺官)이 말해야 할 것이고 어진 사람을 천거하는 책임은 대신이 담당해야 할 것이다.’ 하셨다.
왕은 늘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고 먹는 것은 백성이 하늘처럼 여기는 것이라 생각하여 백성의 고통을 내 몸이 다친 듯이 여기고 백성을 때에 맞추어 부리셨다. 산릉(山陵)의 일과 칙사의 수용(需用)일지라도 민간에서 장만하도록 요구하지 말게 하고 각사(各司)에 저축한 쌀과 베를 가져다가 쓰게 하고 또 내부(內府)의 물건으로 그 비용을 돕게 하셨다. 전전(殿前)에 빈 땅을 개간하여 벼와 콩을 조금 심어서 풍흉(豊凶)을 점쳤는데, 중관(中官)이 물주려 하니, 그만두라고 명하고 이르기를 ‘우로(雨露)가 생성(生成)하는 것을 보고자 한다.’ 하셨다. 또 벽에 엎어진 배를 그려 두고 늘 보아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뜻을 붙이셨다. 혹 이익을 말하는 자가 있으면 하교하기를 ‘이익을 중시하고 백성을 경시하는 것은 내가 숭상하는 바가 아니다. 이해로 말하더라도 백성이 보존되는 것이 곧 나라의 큰 이익이다.’ 하셨다. 또 백성의 고락은 수령에 달려 있고 수령의 출척은 감사에 달려 있으며 곤수·변장도 다 군졸의 고락에 관계된다 하여 양전(兩銓)에 엄히 신칙하여 반드시 신중히 간택하게 하셨다.
글로 하유하기를 ‘임금의 정사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요체는 요역을 가볍게 하고 관리를 가려 쓰는 것에 지나지 않는데, 감식(鑑識)이 미치지 못하여 국가에 일이 많고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서 백성이 혜택을 입지 못하니, 수한풍상(水旱風霜)을 당할 때마다 더욱이 절로 무안하고 꺼림하다. 내가 성취를 바라는 것은 경상(卿相)이고 함께 다스리는 것은 방백(方伯)·곤수와 수령·변장인데 능히 그 직분을 다하는 자가 매우 드무니, 내가 한탄한다. 이제부터 수령은 어린아이를 보호하듯이 백성을 사랑하여 온 경내가 편안하여 원망이 없게 하고 성실로 자신을 단속하고 정성으로 공무에 봉사하며, 변장은 군무에 마음을 다하여 군졸을 돌보고 스스로 포기하지도 말고 스스로 한계짓지도 말아서 내가 군사와 백성을 돌보는 지극한 뜻에 부응하라. 청덕(淸德)이 있으면 내가 한(漢)나라의 상(賞)을 써서 발탁하여 공경(公卿)에 제배할 것이고, 혹 탐학하면 내가 제(齊)나라의 형벌을 시행하여 정확(鼎鑊)에 넣을 것이다. 각도의 감사· 병사를 시켜 특별히 신칙하여 실효를 요구하고 도리를 어기면서 명예를 바라는 것을 잘 다스리는 것으로 여기지 말로 군사를 침학하면서 군기를 갖추는 것을 직분을 다하는 것으로 여기지 말게 하라.’ 하셨다.
사조(辭朝)할 때에는 고하를 막론하고 친히 보고 권면하고, 수령이 비면 혹 근신을 섞어 차출하기도 하고 혹 재신(宰臣)을 시켜 특별히 벼슬을 옮기게 하기도 하셨다. 가장 잘 다스린 자는 차서를 뛰어넘어 발탁하고 탐오한 자는 엄중히 다스렸으며 피폐한 직무를 다시 잘 일으킨 감사는 혹 계속 맡게 하거나 다시 제수하기도 하고 곤수도 그렇게 하셨으며 변장까지 다 상주고 벌주셨다. 또 자주 암행 어사를 보내어 그들의 재능을 살피게 하셨다. 이 때문에 감사·수령과 곤수·변장 중에 청간(淸簡)·선정(善政)으로 일컬어지는 자가 많았다.
간(諫)하는 자의 말이 곧으면 혹 술을 주거나 말을 내리거나 마장(馬裝)을 내리거나 표피(豹皮)를 내리고 이따금 발탁하여 써서 언로(言路)를 열고, 충직한 것을 알면 매우 기휘(忌諱)에 저촉되거나 견주어 말한 것이 도리에 어긋나더라도 너그러이 용서하여 죄주지 않으셨다. 정온(鄭蘊)을 대사간에 특제(特除)한 것은 그가 곧은 것을 아름답게 여겼기 때문인데, 연신(筵臣)이 아뢰기를 ‘정온이 강직하기는 하나, 전하를 접때에 견주었습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예전에는 「폐하는 걸주(桀紂)보다 심하다.」는 말을 한 사람도 있다. 또한 무엇이 해롭겠는가.’ 하셨다. 이명준(李命俊)이 살아서는 간장(諫長)에 특배되고 죽어서는 장수(葬需)를 하사받았으니 또한 강직했기 때문이다. 최현(崔睍)이 역옥 때에 체포되었는데 국청이 형신하기를 청하니, 왕이 이르기를 ‘지난해 야대(夜對)에서 그 때 마침 처치가 미진한 일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입시한 관원으로서 힘껏 다투어 마지않는 것을 내가 자못 괴로워하였으나 그 뒤에 생각하니 참으로 나를 사랑한 자였다. 지금 죄를 받았지만 처음 먹은 마음을 져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고 곧 석방하도록 명하셨다. 대개 최현은 이인거(李仁居)의 반역을 모르고 처사(處士)가 큰소리한 것이라고 망령되게 말한 일 때문에 죄받았다. 그 말이 충직하면 한때에 취할 뿐이 아니라 또한 능히 오래 되어도 알아 주시는 것이 이러하였다.
왕은 인명(仁明)하고 예지(睿智)하신 것이 백왕(百王)보다 뛰어나셨다. 팔도·백사(百司)의 문부(文簿)는 세밀히 분석하여 곡진하게 사리에 맞게 하셨고 대소신민의 추감(推勘)은 매우 미세하더라도 어두워 밝히지 못하는 것이 없으셨다. 형옥(刑獄)에 대해서는 더욱이 삼가고 돌보도록 힘써 계복(啓覆)에 친림하여 평번(平反)한 것이 많고 한추위와 한더위에는 염려를 훨씬 더하셨다. 역옥이 일어나면 문득 이르기를 ‘백성이 원망하여 반역하는 것은 내가 어질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고, 반역한 정상이 뚜렷하더라도 협박 때문에 따른 자는 다스리지 않으셨다. 왕이 스스로 심리하시면 억울한 생각을 품는 자가 하나도 없었고, 옥사를 국문하는 형장(刑杖)을 가볍게 하여 그 분수(分數)를 줄이고, 모든 사죄(死罪)에 대해서는 애매하면 이미 승복한 자라도 문득 용서하고, 갑자년의 억울한 자도 다 뒤미처 죄를 씻어 주셨다. 이 때문에 역변(逆變)이 여러 번 일어났으나 사람들이 뜻밖에 걸리는 것을 근심하지 않았다.
계유년에 한인급(韓仁及) 등을 보내어 장자(長子) 휘(諱)를 세자로 봉하기를 청하고 아울러 추봉(追封)을 사례하게 하였는데, 갑술년에 황제가 태감(太監) 노유령(盧維寧)을 보내어 세자의 고칙(誥勅)과 채단(綵段)을 가져와 칙서를 내렸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왕은 대대로 동번(東藩)을 지켜오며 예를 지키고 의를 따랐으므로 공순한 전통을 반드시 능히 이어받을 것인데 봉강(封疆)에 일이 많으니 빨리 주무(綢繆)해야 할 것이다. 이에 지금 이미 세자를 세웠으니, 이 가르침을 명시하여 전례를 따르고 변하지 말아서 국가를 보전하게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을해년 12월 9일에 왕비가 승하하셨다. 왕비는 정정(貞靜)하고 인명(仁明)한 덕이 있고 왕을 모시되 풍간(諷諫)하신 것이 많았다. 장릉(長陵) 유향(酉向)의 언덕에 장사하였는데 파주(坡州) 북쪽에 있고, 그 사적은 본릉(本陵)의 지문(誌文)에 자세하다.
왕은 천품이 영의(英毅)하나 늘 스스로 겸손하셨다. 병자년 여름에 하교하기를 ‘국가의 치란 상태는 임금의 덕에 달려 있다. 작은 말 한마디라도 흥망이 달라지고 깊숙한 곳에 혼자 있더라도 삼가지 않으면 나타나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이 두려움 때문에 감히 태만하고 안일하지 않았으나, 본성이 어리석고 학력이 없어서 말을 듣고 눈동자를 보아도 어진 사람인지 간사한 자인지 모르겠고 일에 임하여 헤아려도 시비를 가리지 못한다. 게다가 기로(耆老)가 많이 죽어 경외(敬畏)가 점점 느슨해져서 치령(治令)을 내는 근원이 바른 것을 얻지 못하니, 인심이 흩어지고 국가가 망하려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다. 상을 당한 뒤에 오래도록 경연을 멈추었는데, 이것은 죽음을 슬퍼하고 어진이를 생각하는 데에서 나오기는 하였으나, 지금 와서 생각하면 이 또한 잘못이다. 이제 하늘의 꾸중이 갈수록 더욱 심해져서 귀에 대고 말하고 면전에서 가르치는 것과 같을 뿐이 아니니, 내가 매우 두렵다. 이제부터 허물을 고치고 착한 사람이 되어 위로 하늘의 꾸중에 보답하고 아래로 백성의 마음을 위로하려 하니, 나의 신하들은 내가 허물을 고치려는 것을 받아들여 더불어 큰일을 할 수 없다 하지 말고 또한 각각 그 마음을 새롭게 하여 구습을 일변하고 성실을 다하도록 힘써서 함께 구제할 것을 기약해야 할 것이다. 삼사는 허물을 바루고 잘못을 바로잡아 위아래에 과실이 없게 하고, 이조는 사욕이 없고 편파가 없이 오직 어진 사람을 임용하고, 호조는 용도를 절약하고 피폐를 염려하여 백성의 힘을 손상하지 말고, 예조는 학업을 권장하여 교화를 밝히고, 병조는 인재를 장려하고 뽑아 써서 장수가 모자라지 않게 하고, 형조는 형벌을 삼가고 안타깝게 여겨 억울한 일이 없게 하고, 공조는 쇠퇴한 것을 닦아 일으켜 전일과 같지 않게 하라. 모든 관사도 마음을 다하여 그 직무를 폐기하는 일이 없게 하라. 조정이 한번 바루어지면 사방이 동화되는 보람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아, 그대들의 할아버지와 그대들의 아버지가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받았으니, 막중한 분의(分義)를 생각해서 해야 할 직무를 다하여 치평(治平)을 가져오고 교화를 일으키면, 그대들의 조상에게 어찌 영광이 있지 않겠는가. 능히 지극한 정성을 다하면 이것을 해내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니, 각각 힘쓰라. 옛말에 「어지러운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는 엄중한 법을 쓴다.」 하였으니, 귀근(貴近)에 대해서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임금 노릇도 어렵고 신하 노릇도 쉽지 않다.」 하였으니, 위아래가 각각 조심하고 힘써서 위태로운 것을 바꾸어 편안하게 하면 또한 아름답지 않겠는가.’ 하셨다.
또 하교하기를 ‘정치의 요체는 인재를 얻는 데에 있고 치평을 가져오는 일에는 어진이를 구하는 것이 급한데, 나는 인재가 세상에 모자라지 않으나 어진이를 오게 하는 방도가 넓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어진 사람이 문지기나 야경꾼이 되고 은둔하는 사람은 더 깊이 숨지 못할까 염려한다면, 치평을 가져오려 하더라도 어찌 될 수 있겠는가. 지금의 방도로서는 유능한 자를 널리 구하여 천공(天工)을 대행하게 하는 것이 최선이다. 이를테면 몸가짐이 바르고 덕행이 있는 자와, 의리에 잠심(潛心)하여 학술이 있는 자와, 용맹과 지혜가 남보다 나아 적을 제압할 수 있는 자와, 기절(氣節)이 도탑고 굳어 직간(直諫)할 수 있는 자와, 강포하여 선한 일을 막는 자를 두려워하지 않고 봉공(奉公)에 굳세고 과감한 자와, 세상일에 통달하여 처사가 명민(明敏)한 자는 다 크게 쓸 사람이니, 직위에 있는 문·무관(文武官)을 시켜 각각 아는 사람을 천거하게 하고, 또 각도의 감사를 시켜 찾아서 아뢰어 어진이를 버려두는 한탄이 없게 하라. 또 남을 알기는 매우 어려우나 스스로를 아는 것은 밝으니, 재능과 지혜가 뛰어나서 세상을 구제하고 적을 막을 수 있는 자는 각각 스스로를 천거하여 내가 기량에 따라 쓰도록 만들라. 아, 옛사람 중에도 자신을 천거한 자가 있거니와, 국가를 다스려 편안하게 한다면 찾으러 오기를 기다리지 않더라도 무엇이 해롭겠는가.’ 하셨다.
또 하교하셨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사람이 세상에 나서 오래 살아 죽지 않는 자가 없으니 아녀자의 손에서 죽어 초목과 함께 썩는 것보다 의리를 따라 앞으로 나아가 장부의 뜻을 이루는 것이 낫다.’ 하셨다. 대개 정묘년에 금인(金人)이 깊이 들어왔을 때에 왕이 강도(江都)에 들어가 묘당의 계책을 써서 적이 화평을 청함에 따라 허락하셨는데, 계유년에 이르러 우리에게 폐물을 늘리라고 협박하고 군사를 원조하라고 꾀었다. 큰 의리가 달려 있어서 다른 것을 고려할 겨를이 없으므로 맹약을 어겼다고 꾸짖어 절교를 알렸더니, 병자년 봄에 다시 사자를 보내어 왔다. 뭇사람의 의논이 준열히 일어나 사자를 베어 죽이기를 앞다투어 청하였는데 사자가 몰래 듣고 놀라 달아났다. 사기(事機)가 이미 변하자 왕언(王言)이 여러 번 내려졌는데 뜻은 더욱 격렬하였다. 12월에 적병이 갑작스레 이르렀으므로 왕이 강도로 향하려다가 일이 급해져서 방향을 돌려 남한 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가셨는데 적이 군사를 더하여 에워싸니 왕이 친히 성을 순행하며 삼군(三軍)을 위로해 주셨다.
하루는 날씨가 춥고 눈이 내리는데 왕이 행궁(行宮) 뜰에 나와 기도하셨다. 향을 피우고 네 번 절한 다음 거적을 깔고 빌기를 ‘고립된 이 성에 들어와 믿는 것은 하늘인데 이처럼 눈이 내려 장차 얼어 죽을 형세이니, 내 한 몸은 아까울 것도 못 되나 백관(百官)·만민(萬民)이 하늘에 무슨 죄가 있습니까. 조금 개게 하여 우리 군사와 백성을 살리소서.’ 하고는 땅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저녁이 되어도 그치지 않으셨다. 빗물이 어의에 스미므로 근시가 일어나기를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고 대신이 다시 청하여도 따르지 않다가 옷자락을 끌고 울며 청한지 한참 만에야 비로소 일어나 네 번 절하고 물러나시는데 눈물이 턱으로 흘러내리니, 장사(將士)가 듣고 모두 느껴 울었다. 왕이 쓰던 취구(毳具)·모금(毛衾)을 내어 성 위의 군사들에게 조각조각 나누어 주고 호종(扈從)한 신하들이 앞다투어 의금(衣衾)을 보내니, 군사들이 추위를 잊었다. 적이 화해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으시니, 밤을 타서 성을 세 번 쳐왔으나 세 번 모두 격퇴하였으므로 사기가 더욱 떨쳤다.
그러나 40여 일 동안 포위되어 성 안에 양식이 떨어지고 강도의 패보(敗報)가 또 이르렀으므로, 김류·최명길(崔鳴吉) 등이 왕에게 아뢰기를 ‘피폐(皮幣)·주옥(珠玉)을 바치는 일은 탕왕(湯王)·문왕(文王)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하고 성에서 나가기를 굳이 청하고 세자도 스스로 가서 인질이 되겠다고 청하니, 왕이 종사(宗社)와 백성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며 따르셨다. 정축년 정월 29일에 적영(敵營)으로부터 서울로 돌아오시니, 묘모(廟貌)가 퇴폐하지 않고 유민(遺民)이 온전히 돌아왔다. 곧 강도에서 군율(軍律)을 어긴 장수를 주벌하고, 상신(相臣) 김상용(金尙容) 등의 충성을 표창하고, 홍익한(洪翼漢)·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 등의 죽음을 가엾이 여겨 그 집을 돌보고, 전사한 군졸의 한데에 드러난 해골을 묻고 근신을 보내어 제단을 쌓아 제사하고, 이역(異域)에 잡혀간 사녀(士女)를 불쌍히 여겨 금을 내어 속(贖)하니, 민정(民情)이 크게 위안되었다.
【원전】 35 집 351 면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왕실-의식(儀式) / *역사-편사(編史) / *어문학-문학(文學)


[주D-001]늠인(廩人) : 곡식을 맡은 관원.
[주D-002]을해년 : 1635 인조 13년.
[주D-003]을축년 : 1625 인조 3년.
[주D-004]병술년 : 1645 인조 24년.
[주D-005]도헌(都憲) : 대사헌.
[주D-006]경오년 : 1630 인조 8년.
[주D-007]계해년 : 1623 인조 1년.
[주D-008]무진년 : 1628 인조 6년.
[주D-009]정묘년 : 1627 인조 5년.
[주D-010]병자년 : 1636 인조 14년.
[주D-011]홍범(洪範) : 《서경(書經)》의 편명(篇名).
[주D-012]정해년 : 1647 인조 25년.
[주D-013]정확(鼎鑊) : 삶아 죽이는 형벌에 쓰는 솥.
[주D-014]갑자년 : 1624 인조 2년.
[주D-015]계유년 : 1633 인조 11년.
[주D-016]휘(諱) : 왕().
[주D-017]갑술년 : 1634 인조 12년.
[주D-018]을해년 : 1635 인조 13년.
[주D-019]병자년 : 1636 인조 14년.
[주D-020]정묘년 : 1627 인조 5년.
[주D-021]계유년 : 1633 인조 11년.
[주D-022]병자년 : 1636 인조 14년.
[주D-023]정축년 : 1637. 인조 15년.
인조
 부록
인조 대왕 행장(行狀)④

왕은 반정한 뒤로 사대(事大)에 매우 근신하셨다. 바닷길이 험난하여도 조빙(朝聘)이 정성스러웠으며, 희종 황제(憙宗皇帝)의 휘음(諱音)을 듣고는 뭇 신하를 거느리고 애림(哀臨)하여 상복을 입고, 홍방(洪霶)을 보내어 진위(陳慰)하고 진향(進香)하게 하였으며 한여직(韓汝溭) 등을 보내어 새 황제의 등극을 축하하게 하셨다. 정묘년에 기미한 뒤에 권첩(權怗) 등을 보내어 연유를 갖추어 진주(陳奏)하니, 예부(禮部)의 회자(回咨)에 ‘성지(聖旨)를 받드니 「왕이 병화를 입은 정상을 아뢴 것을 보고 짐의 마음이 매우 슬프다. 오랑캐와 통문(通門)하며 왕래하고 임시방편으로 군사를 파산한 것은 왕의 본의가 아니며 군신의 대의로 말하면 해와 별처럼 밝으니 왕의 충성은 짐이 환히 아는 바이다. 왕은 와신상담에 더욱 힘쓰고 엄히 방비하라.」 하셨습니다.’ 하였다. 유흥치(劉興治)가 가도(椵島)에서 반역하여 흠차 총병(欽差摠兵) 진계성(陳繼盛)을 공격하여 죽였을 때에 왕이 이서(李曙)·정충신(鄭忠信) 등을 보내어 그 죄를 성토하니 유흥치가 달아나 해도(海島)로 들어갔는데, 중국 장수들이 듣고 의롭게 여겼다.
관내(關內)가 병화를 입었다는 말을 듣고 정두원(鄭斗源)을 보내어 표문(表文)을 가져가서 진위(陳慰)하게 하고 또 병기(兵器)를 바쳤으며, 이어서 고용후(高用厚)를 보내어 기보(畿輔)를 신속히 소탕한 것을 축하하게 하셨다. 경중명(耿仲明)·공유덕(孔有德) 등이 무리를 다 데리고 심양(瀋陽)으로 투항해 들어갔을 때에 군사를 일으켜 중국 군사와 협력하여 토벌하여 패주시켰다. 요동(遼東)의 사인(士人) 전세작(全世爵) 등 18인이 난리를 피하여 와서 의탁하였을 때에 가엾게 여겨 입히고 먹이니, 전세작 등이 죽음을 맹세하고 감사하였다. 표류하여 온 한인(漢人)은 모두 후하게 도와서 보냈는데 이런 일이 전후에 매우 많았다. 포위된 성 안에 있을 때에도 절일(節日)을 당하면 망궐례를 거행하되 마치 지척에서 대하듯이 하셨다. 환도한 뒤에 경연에서 《시전》을 강독하다가 ‘화락한 군자는 천자의 나라를 진수(鎭守)하리로다.’ 한 데서 이르러, 왕이 크게 탄식하고 줄줄 눈물을 흘리니, 좌우가 모두 슬퍼하였다. 한 범선(帆船)에 의지하여 순풍을 타고 가서 충성을 펴려 하였는데 마침내 이루지 못하였으나, 만 굽이 물이 반드시 동으로 향해 가는 마음은 신명에게 질정할 만하셨다.
교린(交隣)에는 반드시 믿음을 중요하게 여기셨다. 유구국(琉球國)의 임자정(林子政) 등 8인이 표류하여 우리 변방에 이르렀는데 위무하여 보냈더니, 중산왕의 세자 상풍(尙豊)이 우리 부경 사행(赴京使行) 편에 자문(咨文)과 예폐(禮幣)를 전해 보내어 사례하였다. 일본 관백(關白) 수충(秀忠)이 가광(家光)에게 전위(傳位)하고 사자를 보내어 내빙(來聘)하여 세호(世好)를 닦기를 청하였으므로, 정립(鄭岦) 등을 보내어 회답하고 잡혀갔던 1백 40여 인을 쇄환하였다. 대마 도추(對馬島酋)가 중 현방(玄方)을 보내어 공무목(公貿木)을 줄이지 말기를 청하고, 또 평성행(平成行) 등을 보내어 도중(島中)의 재물이 없음을 고하고 해마다 보내 주는 물건을 당겨 내어 주기를 청하였는데, 왕이 약조를 어기는 것이라 하여 윤허하지 않고 특별히 물건을 내려주셨다. 가광이 그 할아버지를 위하여 복을 비느라 큰 절을 세워 일광사(日光寺)라 이름하고 신필(宸筆)을 얻어 나라 안에 뽐내려 하였다. 왕은 천품이 작은 기예에 능한 것이 많아 널리 통달하지 않는 것이 없고 필법이 매우 기특하였으나 숨기고 나타내지 않으셨는데, 대신이 먼 데 사람의 희망을 어겨서는 안 된다고 아뢰니, 종실 중에서 뛰어난 사람을 시켜 쓰게 하여 내려주셨다. 대개 작은 기예를 전해 보이고 싶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무인년에 조씨(趙氏)를 계비(繼妃)로 들이시니, 영돈녕부사 한원 부원군(漢原府院君) 조창원(趙昌遠)의 따님이다. 소현 세자(昭顯世子)가 정축년에 심양(瀋陽)에 가서 연경(燕京)으로 옮겨 들어갔다가 을유년 봄에 돌아와 곧 병이 위독하여 서거하고 그 맏아들도 병들었으므로 시사(時事)에 근심이 많았다. 왕에게 봉림 대군(鳳林大君)과 인평 대군 이요(麟坪大君李㴭) 두 아들이 있었는데, 봉림 대군은 인효(仁孝)하고 활달하며 나이도 위이었다. 왕이 나라에 연장한 대군이 있는 것은 사직의 복이라 하여 대신들과 경대부에게 물어 계책을 정하셨는데, 그때 봉림 대군이 막 북경에서 돌아왔다. 그래서 봉림 대군 휘(諱)를 세자로 삼으니, 여정이 일치하였다.
처음에 세자가 눈물을 흘리며 감히 감당할 수 없다고 두 번 사퇴하는 글을 올리니, 왕이 두 번 수비(手批)를 내려 답하셨는데, 처음에는 ‘너는 총명하고 효우(孝友)하며 그릇이 작지 않으므로 특별히 형이 죽으면 아우가 이어받는 예(禮)를 쓰니, 너는 사양하지 말고 효제(孝悌)의 도리를 더욱 닦고 형의 아들을 네가 낳은 아들처럼 여기라.’ 하고 두 번째에는 ‘내 뜻이 먼저 정해지고 계책을 물었는데 다들 너를 어질게 여기니 너는 굳이 사양하지 말고 도심(道心)을 공경히 지키라.’ 하셨다. 그 뒤에 왕이 조용히 세자에게 이르기를 ‘접때 네 글에 답하여 도심을 공경히 지키라 하였는데, 네 능히 그 뜻을 아느냐. 이것은 상고(上古)에 서로 전한 심법(心法)이다. 「인심은 위태하고 도심은 희미하니 정순하고 전일해야 참으로 그 중도를 지킬 수 있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는 이 열여섯 자는 몸을 닦고 나라를 다스리는 큰 요체를 담고 있으니, 너는 정순하고 전일한 도리를 강구하고 중도를 지키는 도리를 힘써 행하라.’ 하시니, 세자가 일어나 머리를 조아리고 공경히 명을 받았다. 이것은 삼대(三代) 이후에 듣지 못한 일이거니와, 위로 요(堯)·순(舜)·우(禹)가 서로 전수한 심법을 이을 수 있으니, 아, 아름답다.
왕이 늘 이르기를 ‘은(殷)나라는 하(夏)나라에서 거울삼고 당(唐)나라는 수(隋)나라에서 거울삼았거니와, 지금 거울삼을 바는 어찌 혼조(昏朝)에 있지 않겠는가. 위아래가 서로 힘써 아첨하던 일을 본뜨지 말도록 하라.’ 하셨다. 또 세자에게 이르기를 ‘접때 밖에서는 외척과 권간(權奸), 안에서는 내시와 궁첩들이 뇌물을 자행하고 서로 의탁하여, 처음에는 사사로이 바쳐 먹여주고 나중에는 두터운 정을 맺어 형벌을 벗어나고 벼슬을 꾀하여 하고 싶은 대로 하였는데, 이는 다 탐욕이 끝이 없는 어둡고 약한 광해의 성품 때문으로, 마침내 필부가 되려 하여도 될 수 없었다. 내가 이것을 두려워하여 그 기미를 힘껏 막으니, 정사에 임하고 일을 처치하는 데에 다시는 얽매이고 끌리는 것이 없었고 심신(心神)도 편안함을 깨달았다. 이것은 네가 오늘날 친히 보는 것이거니와, 뒷날에도 이러해야 할 것이다.’ 하시니, 세자가 일어나 공경히 들었다. 왕이 또 일본은 죽이기를 좋아하고 은혜가 적으므로 명령이 관백의 입에서 한번 나오면 감히 그 그른 것을 바로잡지 못하고 따라서 종용하니 이것은 패망하는 길이라 하여, 세자에게 이르기를 ‘우(禹)는 훌륭한 말에 대하여 배사하고 문왕(文王)은 천한 사람의 말에서도 채택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재주가 미치지 못하거나 덕이 모자라서 그런 것이겠는가. 전부터 일본의 전세(傳世)는 두 세대에 지나지 않았는데, 대개 창업한 자는 자못 그것이 어렵고 큰일임을 알기 때문에 겨우 자신 때에는 면하였으나 그 자손에 이르러서는 도리로 다스리지 않고 악한 일만을 더하여 중기(重器)가 근심스러운 줄 모르고 방탕한 대로 버려두었기 때문이다. 곧 망한 것은 참으로 이 때문이니,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하셨으니, 대개 풍자하여 깨우치신 것이다.
병술년에 폐빈(廢嬪) 강서인(姜庶人)이 대역(大逆)으로 죽었다. 강은 심양(瀋陽)에 있을 때부터 소행에 부도한 짓이 많고 몰래 역위(易位)를 꾀하였으며, 대궐에 돌아온 뒤에는 더욱 패악(悖惡)을 부려 흉한 것을 묻어 저주하고 요사를 부려 독을 두는 등 못하는 짓이 없다가 반역의 정상이 드러나서 폐출(廢出)되어 사사(賜死)당했는데, 하교하기를 ‘오늘날의 일은 윤리를 밝혀 근심을 막는 데에 있다. 혹 죄가 의심스럽기만 한 것이라면 어찌 차마 단연히 법을 행하여 아이들이 날마다 울며 의지할 데가 없게 하겠는가. 옛말에 「작은 것을 참지 못하면 대모(大謀)를 어지럽히게 되고 법이 한번 흔들리면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게 된다.」 하였으니, 이것은 참으로 어쩔 수 없는 데에서 나온 것이고 참소를 믿고 죽이기를 좋아하여 그런 것이 아니다. 그 죄는 무겁더라도 은례(恩禮)를 전혀 없앨 수 없으니, 예장(禮葬)하게 하고 3년 동안의 제물도 적당히 주게 하라.’ 하셨다. 왕법을 시행하되 천의(天意)가 또한 애연(藹然)하셨다.
이때 왕이 창경궁(昌慶宮)에 계셨는데 어침(御寢)·금정(禁庭)이 하나도 마르고 깨끗한 곳이 없으므로 조정의 신하들이 영안위(永安尉)의 집에 임시로 계시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근방의 민가가 많이 침점(侵占)당한다 하여 허락하지 않으셨다. 인경궁(仁慶宮)의 재목을 헐어서 창덕궁(昌德宮)의 옛터에 옮겨 짓기를 청하였는데, 공역에 드는 물건을 다 각사(各司)에서 취하여 두어 달 만에 낙성하니 원망하는 백성이 없었다. 정해년에 창덕궁에 이어(移御)하셨다. 기축년에 왕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원손(元孫) 휘(諱) 모(某)를 왕세손으로 책봉하셨다. 왕세손은 옥질(玉質)이 침착하고 신중하며 예용(禮容)이 점잖고 우아하므로 모든 신하가 서로 축하하였다.
왕은 전신을 기울여 밤낮으로 정사에 힘쓰셨다. 병환이 없을 때에는 문서를 출납하는 일을 밤이 되어도 쉬지 않으므로 은대(銀臺)의 금직(禁直)하는 신하가 감히 자지 못하였다. 왕의 병환은 임신년 상중에 계실 때에 시작되어 피로하고 염려하는 가운데에 손상이 쌓여 17년 동안 낫지 않고 더하다 덜하다 하셨다. 무자년 겨울 이후 6∼7개월 동안 자못 좋아지시어 때때로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고 천재(天災)가 번갈아 일어나는 것을 근심하고 시사(時事)가 어렵고 위태한 것을 염려하여 임금의 과실을 듣기를 바라시는 것이 처음에 비하여 게으르지 않았다. 4월에 또 인견하여 민사(民事)·병기(兵機)와 서환(西患)·남우(南憂)에 대하여 묻지 않으신 것이 없었을 때에 성지(城池)와 군사를 말한 자가 있었는데, 왕이 이르기를 ‘적을 막는 도리는 성과 군사에 달려 있지 않고 장수에 달려 있으니, 내 소견으로는 장수를 논하는 일을 먼저 해야 하겠다.’ 하시고, 강도(江都)의 목장을 백성이 경작하도록 허가하고 수륙(水陸)의 방비책에 대한 천어(天語)가 정녕하셨다. 며칠 안 되어 조금 더 나아지다 갑자기 위독해졌는데 내국(內局)이 시약청(侍藥廳)을 설치하기를 청하였으나, 폐단이 있으므로 설치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이해 5월 8일 병인에 창덕궁의 정침(正寢)에서 승하하셨는데, 임종 때에 대신과 근신이 모두 입시한 것은 마지막을 바르게 하는 예이다. 춘추는 55세이고 재위는 27년이었다. 이해 9월 20일에 왕비의 능 오른쪽에 장사하였는데, 왕의 명에 따른 것이다. 왕비의 장사 때에 모든 석역(石役)을 되도록 간략하게 힘쓰고 곡장(曲墻)·상설(象設)과 정자각(丁字閣)을 다 가운데에 두어 한 편으로 치우치지 않게 하였는데, 뒷날에 백성의 힘이 거듭 괴로울 것을 염려한 것이다.
왕은 성품이 공손하고 검소하셨다. 늘 사치를 경계하고 성색(聲色)·진완(珍玩)을 즐기는 일을 마음이나 눈에 두신 적이 없으며, 하교하기를 ‘사치는 말세의 폐습이다. 이것이 어찌 세상을 다스리는 데에 숭상할 것이겠는가. 생각건대, 우리 조종께서 몸소 절검(節儉)을 행하여 위에서 모범을 보여 이끄시어 뭇 신하가 감화되어 돈박(敦朴)한 풍습이 수백 년 동안 유행하였는데, 근래 국운이 불행하여 혼조(昏朝)의 임금과 신하가 조종의 좋은 법과 아름다운 뜻을 저버리고 사치를 다투어 숭상하니 의복·음식과 거마·궁실이 모두 사치해졌다. 염치가 이 때문에 없어지고 백성이 이 때문에 몹시 괴로움을 당하고 있으니 어찌 마음 아프지 않겠는가. 내가 외람되게 큰 통서(統緖)를 이어받아 밤낮으로 공경하고 두려워하며 먼저 이 버릇을 없애려고 생각하나, 오염된 지 이미 오래 되어 갑자기 고치기 어렵다. 그러나 예전부터 백성을 바꾸어서 다스린 일은 없거니와, 위에서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아래에서는 반드시 더 심하게 좋아하는 법이니, 오늘날 변화하지 않는 것이 어찌 모범이 되어 이끄는 도리가 미진하여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고요히 생각건대 스스로 뉘우치고 책망할 뿐이다. 모든 우리 종실과 공경 대부는 다 내 뜻을 본받아 혼인·빈객의 수요와 거마·의복의 제도에 대하여 검약을 힘쓰라. 폐습을 크게 고치면 어찌 보치(補治)하는 한 방도가 아니겠는가. 옛사람이 사치의 해독은 물불보다 심하다 하였거니와, 이 한 가지 말만 음미하여도 경계할 줄 알 것이니, 공경하라. 이것을 깊이 징계삼으라.’ 하셨다. 신하들을 대하면 번번이 사치한 버릇의 해독을 말하고 궁중에서 입는 것은 오로지 소박한 것을 숭상하고 법복(法服)이 아니면 무늬 있는 비단을 입지 않고 여름철에는 베옷을 입되 또한 고운 것을 취하지 않으셨다. 이 때에 이르러 염(斂)에 쓰인 것은 명주옷이 많았는데, 다 평소에 지어 둔 것이다.
승하하신 날에 대궐에 달려와 곡하는 서울 안의 인사가 길을 메웠는데 모두 부모를 잃은 듯하였고, 원근의 외방에서 와서 곡하는 사대부가 잇따랐고 먼 지방 벽촌의 어리석은 백성까지도 놀라 통곡하였다. 아, 왕은 뛰어난 자질로서 삼대(三代)를 만회할 뜻이 있었으므로 말에 나타나고 명령에 베푸는 것이 다 경전 가운데에서 나왔으니, 아름다운 말과 아름다운 법을 사적에 이루 다 쓸 수 없다. 거의 풍속이 바뀌어 변화하는 지경에 이를 수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많은 재해를 입은데다 질병까지 겹쳐서 정치가 하고자 하신 대로 되지 못하니 슬피 한탄하셨다. 그러나 윤리가 다시 밝아지고 종사가 다시 편안해졌으니 중흥(中興)의 위열(偉烈)은 조종보다 빛나고 성덕(盛德)과 지행(至行)은 후세에 길이 일컬어질 것이다. 백성을 인애하는 정사는 만년에 이르러 더욱 부지런했고 폐단을 없앨 뜻은 떨치지 않을 때에 더욱 도타웠으며 어진이를 가려서 국본(國本)을 정하고 도리를 중시하여 심법을 전수하신 것으로 말하면, 심원하신 그 지려(智慮)와 고명하신 학문은 또한 말세의 임금이 비슷하게라도 따를 수 없을 것이다. 아, 착하시다. 아, 애통하다.”
【원전】 35 집 351 면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왕실-의식(儀式) / *역사-편사(編史) / *어문학-문학(文學)


[주D-001]무인년 : 1638 인조 16년.
[주D-002]정축년 : 1637 인조 15년.
[주D-003]을유년 : 1645 인조 23년.
[주D-004]휘(諱) : 호(淏).
[주D-005]병술년 : 1646 인조 24년.
[주D-006]정해년 : 1647 인조 25년.
[주D-007]기축년 : 1649 인조 27년.
[주D-008]모(某) : 원(棩).
[주D-009]은대(銀臺) : 승정원(承政院).
[주D-010]임신년 : 1632 인조 10년.
[주D-011]무자년 : 1648 인조 26년.
[주D-012]내국(內局) : 내의원(內醫院).



 

 

선조 36년 계묘(1603,만력 31)

 2월27일 (갑인)
이기빈이 남한산성의 형세를 살피고 돌아와 이를 보고하다

행 부호군(行副護軍) 이기빈(李箕賓)이 아뢰기를,
“신이 남한산성에 가서 형세를 살펴보니 진세(陣勢)가 곧아 천험의 요새였습니다. 서북쪽에 봉우리가 있고 동남쪽은 확 트였는데 시내와 우물이 있고 또 논도 있었습니다. 성안에는 산기슭이 서로 가로막고 있었으며 성 바깥쪽에는 한두 봉우리가 서로 마주하고 있었으나 굽어보거나 엿볼 수가 없었습니다. 북문(北門)에서 동쪽으로 수구(水口)에 이르기까지와 서쪽으로 남문에 이르기까지의 지세가 성 가운데에서 가장 험하였는데, 그 사이에는 포루(砲樓)를 설치할 만한 곳도 있었습니다. 수구(水口)와 남문(南門)서부터는 산세가 낮고 약해 반드시 적을 받는 곳이 될 것이므로 성을 높이 쌓고 해자를 깊이 파고 많은 화기(火器)를 설치하는 것이 좋을 듯 하였습니다.
대개 형세를 논한다면 도문(都門)의 보장(保障)으로는 제일이라고 할 수 있으나 그 공역(功役)으로 말한다면 주위가 몹시 넓고 산길이 가파라서 얼마나 많은 인력으로 몇 년이나 수선해야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신의 우견에는 반드시 많은 사람의 공력(功力) 을 들인 후에야 완전히 수리할 수 있을 듯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비변사에 이 도형(圖形) 1건을 내려 산세를 분명하게 그려 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원전】 24 집 450 면
【분류】 *군사-관방(關防) / *과학-지학(地學)


 

 

 

계곡선생집 제8권

 기(記) 19수(首)
남한성기(南漢城記)


남한산성은 경성(京城) 동남쪽 40리(里) 지점 한수(漢水)의 북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광주(廣州)의 옛날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5리(里)가 약간 더 되는 거리에 있다.
이곳은 본디 백제(百濟)의 옛 도읍지였다. 지지(地志)를 상고해 보건대, 백제 온조왕(溫祚王) 13년에 위례성(慰禮城)에서 이곳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그 뒤 12세(世) 380여 년이 지난 근초고왕(近肖古王) 26년에 이르러 다시 남평양(南平壤)으로 도읍을 옮겼으니, 남평양이 바로 지금의 경도(京都)이다.
그런데 근초고왕이 도읍을 옮긴 때로부터 백제ㆍ신라(新羅) 그리고 고려조(高麗朝)가 끝나는 1천여 년 동안 이 산성이 어떻게 변모해 왔는지에 대해서는 다시 상고할 길이 없다.
그 뒤 아조(我朝)에서 천명(天命)을 받으면서부터는 태평 정치가 크게 이루어져 병혁(兵革)을 쓸 일이 없었기 때문에 이 견고한 산성 역시 볼 일이 없는 것처럼 여겨져 왔던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을 겪고 난 이후로 원대한 계책을 생각하는 인사들이 이 산성에 깊은 관심을 쏟아 왔는데, 정작 당국자(當國者)들은 이에 대해 제대로 건백(建白)하지도 않았으니, 어쩌면 의지할 바가 따로 있다고 생각해서 그랬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금상(今上)께서 즉위하신 이듬해에 역괄(逆适 이괄(李适)을 말함)의 변란이 일어나면서 국가에 많은 근심이 있게 되자, 기보(畿輔) 근처에 보장(保障)이 되는 지역이 있어야 마땅하다는 의논들을 많이 하게 되었는데, 이에 수상(首相) 이원익(李元翼)과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가 건의하여 이 산성의 수리를 청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처음에 청원군(靑原君) 심기원(沈器遠)에게 그 일을 관장하도록 명하였는데, 그가 놀고 먹는 인원들을 공사에 투입하려고 하면서 도첩(度帖)을 이용해 승도(僧徒)들을 포섭하다가 곧이어 상사(喪事)를 당해 그만두고 말았다.
이에 총융사(摠戎使)인 완풍부원군(完豐府院君) 이서(李曙)가 그 임무를 대신 맡고는 바로 명승(名僧)인 각성(覺性)과 응성(應聖) 등을 널리 불러들여 각자 그 승도들을 총섭(摠攝)하게 한 뒤 지역별로 나눠 공사를 분담케 하였는데, 이때 목사(牧使) 문희성(文希聖)과 별장(別將) 이일원(李一元)과 비장(裨將) 이광춘(李光春) 등이 실제로 감독하는 일을 맡았다.
산성의 사방 주위로 기지(基址)가 완연한 곳은 대개 온조왕이 옛날에 쌓았던 곳이다. 바로 이를 기초로 그 위에 증축하면서 평탄하고 험난한 지형을 참작하여 고저(高低)의 높이를 맞추어 나갔는데, 갑자년(1624, 인조 2) 9월에 공사를 시작해서 병인년(1626, 인조 4) 7월에 완공을 고하였다.
산성은 둘레의 총 길이가 약간 장척(丈尺)이요, 여장(女墻)이 1700첩(堞)이며, 4문(門)을 설치한 외에 갑절이나 되는 암문(暗門)이 시설되었고, 그 속에 가람(伽藍) 일곱 곳이 새로 건립되었는가 하면 관해(館廨)와 창유(倉庾) 등도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
대저 남한산은 가운데가 평평한 반면 밖으로 높이 솟아오르는 등 그 에워싼 형세가 치밀하기 그지없는 가운데 웅혼한 자태를 보여 주고 있는데, 산성은 바로 산 정상의 능선들로 이어져 높은 지세에 웅거하면서 평평한 지대를 포용하고 있다. 또한 성 안에 늘 샘솟는 곳이 매우 많아 겨울이건 여름이건 마르는 날이 없는데, 계곡을 흘러내리는 물들은 대간(大澗)으로 합쳐져 동쪽 수문(水門)을 통해 빠져 나간다.
문의 바깥으로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계곡들이 곳곳에 서려 있고 양의 창자처럼 꼬불꼬불한 길이 몇 십리를 두고 이어져 있다. 산세(山勢)는 사방이 온통 깎아지른 듯하여 어떻게 부여잡고 올라갈 길이 없는데, 오직 동남쪽 모퉁이 산기슭만은 약간 경사져 있을 뿐이라서 포루(砲樓) 세 곳을 설치해 놓았다. 이와 함께 건방(乾方 북서쪽)에 있는 작은 봉우리에서 성 안을 내려다 볼 수가 있었으므로 누대(樓臺)를 하나 세운 다음 용도(甬道)를 쌓아 성과 연결시켰다. 그러고는 마침내 주치(州治)를 이곳으로 옮겨 인력과 물자를 비축함으로써 은연중에 하나의 웅진(雄鎭)이 형성되게 하였다.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왕공(王公)이 요새지를 설치하여 그 나라를 지킨다.’ 하였고, 《춘추좌전(春秋左傳)》을 보면 거(莒) 나라가 외진 것을 믿고 성곽을 수선하지 않은 것에 대해 군자가 큰 죄라고 하였다. 그런데 낭와(囊瓦)가 영(郢) 땅에 축성을 하자 심윤수(沈尹戍)가 그지없이 절실하게 비난을 하였으니, 그 이유는 무엇이었던가. 본말(本末)이 아울러 이루어지면 성곽으로 백성들을 물론 보호할 수 있겠지만 백성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할 경우에는 성곽이 있어도 아무 보탬이 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성상께서 중흥(中興)의 운세를 맞이하여 인륜을 다시 바로잡으신 뒤 화난(禍難)을 경계하여 충직한 신하들에게 임무를 맡기시면서 사전 대비책에 깊은 관심을 보여 이 산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하게 하시었다. 그리하여 천 년 동안 가시덤불에 묻혀 있던 폐허의 땅이 일약 면목을 일신하면서 마침내 경도(京都)를 방어하는 요새지가 되게 하였으니, 이는 진정 기수(氣數)가 암암리에 응하고 천인(天人)이 합발(合發)한 일대 기회로서, ‘요새지를 설치해 나라를 지킨다.[設險守國]’는 《주역》의 뜻과도 합치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지금 이후로 안으로는 낭묘(廊廟)에서 보필하는 신하들로부터 밖으로는 봉강(封疆)을 지키는 장수에 이르기까지 마음을 합하고 지려(智慮)를 다하여 공동으로 좋은 계책을 시행함으로써 인화(人和)와 지리(地利)의 유익함이 서로 조화되게끔 해야 할 것이니, 그렇게 되면 이 성이야말로 묵적(墨翟)의 기구를 빌리지 않고서도 금성탕지(金城湯池)의 위력을 영원히 과시하게 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한갓 험준한 산세(山勢)나 견고한 성루(城樓)만은 믿고서 ‘누가 감히 나에게 덤벼들까.’ 한다면 정말 졸렬한 짓이라 하겠다. 그러나 국가에서 이 성을 수축하여 원대한 계책을 삼으려 했던 그 본의로 볼 때 어찌 그렇게 되기야 하겠는가. 감히 이런 내용으로 군자들에게 고하는 바인데, 그동안 공사를 주관하며 공로를 세운 제인(諸人)에 대해서는 아래에 별도로 기록하였다.


 

[주D-001]왕공(王公)이 …… 지킨다 : 《주역(周易)》 감괘(坎卦) 단사(彖辭)에 나오는 말이다.
[주D-002]거(莒) 나라가 …… 하였다 : 《춘추좌전(春秋左傳)》 성공(成公) 9년에 “외진 것을 믿고 대비하지 않음은 죄 중에서도 큰 죄요, 뜻밖의 사태를 미리 대비함은 대단히 훌륭한 일이다. 거 나라가 외진 것을 믿고 성곽을 수선하지 않은 나머지 12일 사이에 초 나라가 세 도시를 함락시켰다. 그러니 방비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는 군자의 말이 소개되어 있다.
[주D-003]낭와(囊瓦)가 …… 하였으니 : 《춘추좌전(春秋左傳)》 정공(定公) 4년에 나오는 내용이다. 낭와는 초 나라 장왕(莊王)의 아들이고, 심윤수는 장왕의 증손이다.
[주D-004]묵적(墨翟)의 기구 : 기막힌 수성(守城)의 기계를 말한다. 초(楚) 나라가 송(宋) 나라를 공격하려 하자 묵적이 초 나라에 가서 군사(軍師)인 공수반(公輸般)과 공수(功守)의 기술을 겨뤘는데 끝내는 공격 위주의 공수반이 수비 위주의 묵적을 이길 수 없었던 고사에서 유래한다. 《墨子 公輸》

 

 

계곡선생집 제7권
 서(序) 16수(首)
고 우의정 풍계 김공이 직접 지은 묘지명 뒤에 씀[故右議政楓溪金公自撰墓銘後敍]

숭정(崇禎) 10년(1637, 인조 15) 정월 임술일, 청병(淸兵)이 강도(江都 강화(江華))를 함락시키던 날, 고상(故相) 풍계(楓溪) 김공(金公)이 죽었다. 군대가 물러가고 나서 자제들이 공의 유체(遺體)를 샅샅이 찾았으나 끝내 얻지를 못하였다. 이에 공이 남긴 의복을 받들어 관(棺) 속에 염(斂)한 다음 이해 모월(某月) 모일(某日)에 양주(楊州)의 선영(先塋) 모향(某向)의 언덕에 장시지내었다.
공은 만년(晚年)에 접어들었을 때 일찍이 자신의 묘지명(墓誌銘)을 손수 지어 놓고 자제들에게 위촉하기를,
“내가 죽으면 다른 사람에게 글을 지어 달라고 구걸하지 마라. 이것만 광중(壙中)에 집어넣으면 충분할 것이다.”
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자제들이 그 묘지명을 상자 속에서 찾아 내었는데, 이를 본 자들이 모두 말하기를,
“훌륭하다.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다. 절제된 표현 속에 핵심적인 내용이 모두 담겨 있으니 더 이상 덧붙일 것이 없다. 그러나 공이 미처 언급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만은 또한 기록해 두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다.”
하였다.
공은 어려서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호임) 성 선생(成先生) 문하에서 수업을 받았다. 그러고는 약관(弱冠)의 나이를 갓 넘겼을 때 태학(太學 성균관)에 올라 장보(章甫 유생)들로부터 크게 추중(推重)을 받았다. 그리하여 기축 역변(己丑逆變 정여립(鄭汝立)의 난을 말함)이 일어났을 때에는 제생(諸生)이 상의 뜻을 받들어 상소하면서 공을 장수(章首 소두(疏頭))로 추대하기까지 하였다.
벼슬길에 들어서고 나서는 청화직(淸華職)을 두루 역임하였다. 선묘조(宣廟朝) 때 간원(諫垣 사간원)의 최고 책임자가 되었을 적에는 입대(入對)해서 궁금(宮禁)이 엄숙하지 못한 점에 대해서 극언(極言)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상이 목소리를 돋우어 힐문하기를,
“지금 지적한 것은 어떤 일을 말하는가?”
하니, 공이 답변드리기를,
“외간에서 모두 말하기를 ‘누구는 앞으로 어떤 관직을 차지할 것이다.’고 하기도 하고 또 ‘누구는 죄를 졌지만 석방될 것이다.’고도 하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면 모두 그 말대로 되고 있습니다. 신이 말씀드린 것은 바로 이런 일입니다.”
하였는데, 이때 상신(相臣) 심희수(沈喜壽)가 앞으로 나아가 아뢰기를,
“김모(金某)가 이런 말까지 할 수 있으니, 정말 ‘봉명조양(鳳鳴朝陽)’이라고 말해도 좋겠습니다.”
하자, 상이 노여움을 풀면서 부드러운 내용으로 답해 주었다.
그러나 다음해 봄이 되면서 정주 목사(定州牧使)로 나가게 되었는데 임기를 채우고 돌아온 뒤에도 잇따라 상주(尙州)와 안변(安邊)으로 나가는 등 거의 6~7년 동안 조정에 처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명(銘)에서 이른바 ‘역린(逆鱗)을 건드린 한마디 말로 세 고을에서 비단옷을 만들게[製錦] 되었다.’고 한 것이 이것이다. 공은 이런 가운데에서도 고을을 다스리면서 특별한 치적을 세워 세 고을에 재임시 모두 표리(表裏)를 하사받았으며, 특히 정주(定州)의 경우는 백성들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워 공을 사모하는 마음을 나타내기까지 하였다.
계축년(1613, 광해군 5)에 대옥(大獄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려 했다는 구실로 대북(大北)이 소북(小北)을 제거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는 공이 현헌(玄軒 신흠(申欽)의 호임) 신공(申公), 추포(秋浦 황신(黃愼)의 호임) 황공(黃公),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의 호임) 이공(李公) 등 10여 인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광해(光海) 역시 공에게 다른 뜻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곧바로 석방하였다.
광해가 장차 대비(大妃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출(廢出)시키려 하자 간신(奸臣)이 백관들을 협박하여 정청(庭請)하게 하였는데, 이에 따르지 않을 경우 어떤 화(禍)를 받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공은 끝까지 한 번도 참여하지 않았다. 이에 양사(兩司)가 계청(啓請)하여 멀리 유배 보내자고 하였는데, 때마침 광해 자신이 덮어둘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 일을 중지시켰다. 이런 가운데 공은 연거푸 부친상과 모친상을 당하여 유랑(流浪) 낙백(落魄)하며 고달프기 그지없는 처지에 빠졌으니, 이것이 바로 명(銘)에서 이른바 ‘시비(是非)를 아랑곳하지 않고 함부로 남의 뒤를 따를 뜻이 없어[志不詭隨] 황야(荒野)로 몸을 숨기게 되었다.’고 한 것이다.
그러다가 금상(今上)이 즉위함에 미쳐 공이 선조(先朝) 때부터 중망(重望)을 받아 온 인물이라 하여 크게 등용되는 은총을 입게 되었다. 그 뒤 황조(皇朝)에서 봉전(封典)을 내려 주었을 때에는 공이 왕명을 받들고서 책사(冊使)를 영접하였고, 정묘년 변란 때에는 유도대장(留都大將)의 임무를 수행하였는데, 모두 훌륭하게 책임을 완수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양전(兩銓 이조와 병조)의 장관(將官) 직책을 차례로 맡고 나서 임신년(1632, 인조 10) 봄에 비로소 정승의 지위에 올랐는데 1년 남짓 되었을 때 병으로 사직하였고 갑술년(1634, 인조 12)에 다시 중서(中書 의정(議政))에 들어갔다가 이듬해에 사직하여 체차(遞差)되었다. 그러나 공이 비록 그 자리를 떠나긴 하였어도 나라에 큰 논의가 있게 될 때마다 번번이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할 말을 다할 뿐 시의(時議)가 비난한다고 하여 굽혀 본 적이 끝내 없었다.
병자년(1636, 인조 14) 12월에 청병(淸兵)이 졸지에 들이닥치자 상이 장차 강도(江都)로 행행(幸行)하려 하면서 늙고 병든 재신(宰臣)에게 종묘사직의 신주(神主)를 모시고 먼저 가도록 명하였다. 이에 공이 명을 받들고 강도로 가게 되었는데, 얼마 안 되어 적병이 경성으로 몰려오는 바람에 강도로 가는 길이 끊어지자 상이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행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남한산성 역시 40여 일 동안 포위되어 안팎의 연락이 단절된 가운데 이곳에 도착하는 원병(援兵)마다 번번이 패하여 무너지곤 하였다.
그런데 강도 또한 수비가 매우 허술하였으므로 공이 매우 걱정하면서 여러 차례나 일을 담당한 자에게 계책을 일러 주곤 하였으나 그 말대로 시행되지를 못하였다. 이때 사람들이 화를 피할 계책을 미리 강구해 두는 것이 좋겠다고 공에게 권하기도 하였으나, 공은 단호하게 말하기를,
“주상께서 지금 포위되어 안위(安危)를 알 수가 없는 상황인데, 종묘사직의 신주와 빈궁(嬪宮)ㆍ원손(元孫)이 모두 여기에 있으니, 나만 혼자 어떻게 모면할 계책을 세울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러고 나서 며칠 뒤에 적군이 병거(兵車)를 소주(小舟)에 싣고는 곧장 갑곶진(甲串津)으로 짓쳐 들어오자 사람들이 놀라 동요하였다. 이에 적군의 배들이 빈 틈을 타고 쏜살같이 배를 저어 서쪽 해안 언덕에 배를 대었는데, 수군(水軍) 육군(陸軍) 할 것 없이 우리 군대가 모두 붕괴되는 상황에서 적군이 잇따라 대규모로 진출하여 얼마 안 되는 사이에 선봉 부대가 성 아래에까지 육박하였다.
이에 공이 사태가 어찌 할 수 없게 된 것을 알고서 집안사람들과 영결(永訣)을 한 뒤 입고 있던 의복을 벗어 주고는 마침내 남쪽 성곽의 문루(門樓)에 올라갔다. 그러고는 화약더미를 앞에다 쌓아 놓고 좌우를 손짓하여 그 자리를 피하게 하였는데, 혹 그곳을 떠난 사람도 있고 가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공이 이윽고 화약더미에 불을 붙이자 삽시간에 불기둥이 하늘로 솟구치면서 누옥(樓屋)까지 모두 말려 올라갔는데 미처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던 사람들 모두가 공과 죽음을 함께 하였다. 이날이 정월 22일로써 공의 나이 77세 때의 일이었다.
공은 선천적으로 강방(㓻方)하고 단확(端確)한 자질을 타고났다. 그리하여 일단 뜻이 정해지고 나면 비록 분육(賁育 진 무왕(秦武王) 때의 역사(力士)인 맹분(孟賁)과 하육(夏育)임)이라 하더라도 그의 의지를 바꾸게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공의 청렴결백한 몸가짐이야말로 타인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으로서 평소에 한번도 산업(産業)에 대해서 물어본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50년 동안 조정에 있으면서 삼공(三公)의 지위까지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쌀독이 몇 번이나 비기 일쑤여서 그때마다 집사람이 꾸어다가 생활을 꾸려 나가곤 하였다.
의복 역시 문채(文綵)가 없었음은 물론 식사할 때에도 고기 반찬을 한 가지 이상 놓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제사 음식까지도 모두 생활 정도에 따라 적당히 차려놓도록 하면서 이를 자손들에게 준행(遵行)하게끔 하였다.
공은 소싯적부터 글씨를 잘 썼는데 특히 전주체(篆籀體 소전(小篆)ㆍ대전(大篆)의 글씨체)는 그 경지가 정묘(精妙)하기만 하였다. 그래서 국가의 대전례(大典禮) 때 쓰인 전문(篆文)이나 공사(公私) 간의 비액(碑額)을 보면 공의 손에서 나온 것이 많기도 한데, 정작 공 자신은 이를 그다지 탐탁하게 여기지를 않았다. 그리고 일단 노경(老境)에 접어들어서는 공에게 요구해 오는 경우가 있어도 번번이 안질(眼疾)을 이유로 사양하곤 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더더욱 공의 필적을 얻는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하였다.
공은 교유(交游) 면에서도 매우 활발한 면모를 보였는데, 가장 친하게 지내던 5~6공(公)의 벗으로 말하면 모두 세상에서 제일류(第一流)의 인물로 일컬어지던 분들로서 왕왕 문장(文章)과 덕업(德業)으로 경상(卿相)의 지위에까지 오르곤 하였었다. 그러나 말년에 이르러 절조를 우뚝 수립하여 죽은 뒤에까지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게 된 측면에서 본다면 당연히 공보다 앞설 수는 없으리라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렇긴 하지만 세도(世道)의 입장에서 말을 한다면 어찌 불행한 일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아, 슬픈 일이다.
부인(夫人)인 증 정경부인(贈貞敬夫人)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모관(某官) 모(某)의 따님으로서 공보다 43년 앞서서 세상을 하직하였다. 아들이 세 사람 있었는데, 장남 광형(光炯)은 일찍 죽었고 둘째 광환(光煥)은 춘천 부사(春川府使)이고 셋째 광현(光炫)은 문과(文科) 출신으로 호조 참판이다. 한편 장녀는 사어(司禦) 남호학(南好學)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판서 장유에게 출가하였고 그 다음은 군수 이이성(李以省)에게 출가하였다. 측실 소생인 아들 광소(光熽)는 진무공신(振武功臣)으로 포천 현감(抱川縣監)이고, 그 밖에 딸이 네 명 있다.
광형의 아들 수창(壽昌)은 사복시 주부이고, 광환의 아들 수홍(壽弘)은 진사이고, 광현의 아들 수인(壽仁)은 상원 현감(祥原縣監)이고, 그 밖에 모모(某某)는 어리고 딸이 다섯이다.
남호학은 1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 노성(老星)은 병조 좌랑이고, 장유는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 이름은 선징(善澂)이고, 이이성은 4녀를 두었고, 광소는 1남 4녀를 두었다. 이 밖에 내외 증손으로 손자와 손녀 약간 명이 있다.

[주C-001]풍계 : 계곡의 장인인 김상용(金尙容)의 호이다.
[주D-001]봉명조양(鳳鳴朝陽) : 태평 시대의 상서로운 조짐을 의미한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권아(卷阿)에 “저 높은 산봉우리 봉황이 울고, 동쪽 산등성이 오동나무 서 있구나.[鳳凰鳴矣 于彼高岡 梧桐生兮 于彼朝陽]”이라고 하였는데, 봉황은 태평 시대에만 출현하고, 또 봉황이 깃들이는 오동나무 역시 산등성이에는 나지 않는데 태평 시대에만 그곳에 나온다고 한다. 따라서 본문의 뜻은 선조와 같은 훌륭한 임금에 의해 태평 시대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극언하는 신하도 나올 수가 있다는 말이다.
[주D-002]역린(逆鱗)을 …… 되었다 : 임금의 노여움을 촉발시킨 나머지 고을 수령으로 전전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임금의 상징인 용(龍)의 턱 아래에 거꾸로 솟은 비늘 하나가 있는데 이것을 건드리면 용이 화를 내어 사람을 죽인다는 이야기가 있다. 《韓非子 說難》 비단옷을 만든다는 말은 고을을 다스린다는 의미로서 《춘추좌전(春秋左傳)》 양공(襄公) 31년 조(條)에 “그대에게 아름다운 비단이 있으면 초보자에게 옷을 만들도록 하지는 않을 것이다. 큰 관직이나 큰 고을은 백성의 몸을 감싸 주는 것인데 초보자에게 다스리게 한단 말인가. 그 비중으로 말하면 아름다운 비단보다도 더하지 않겠는가.”라고 한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廣州 淸太宗功德碑

(裏面)

大淸皇帝功德碑(篆 題)
大淸皇帝功德碑
大淸崇德元年冬十有二月」
寬溫仁聖皇帝以壞和自我始赫然怒以武臨之直擣而東莫敢有抗者時我寡君棲于南漢凜凜若履春氷而待白日者殆五旬東南諸道兵相繼崩潰西北帥逗撓峽內不能進一步城中食且盡當此之時以大兵薄城如霜風之卷秋籜」爐火之燎鴻毛而」
皇帝以不殺爲武惟 布德是先乃  降勅諭之曰來朕全爾否屠之有若英馬諸大將承 皇命相屬於道於是我寡君集文武諸臣謂曰予托和好于大邦十年于兹矣由予惛惑自速 天討萬姓魚肉罪在予一人」
皇帝猶不忍屠戮之 諭之如此予曷敢不欽承以上全我宗社下保我生靈乎大臣協贊之遂從數十騎詣軍前請罪」
皇帝乃 優之以禮 拊之以恩一見而 推心腹 錫賚之恩遍及從臣禮罷卽還我寡君于都城立召兵之南下者振旅而西 撫民勸農遠近之雉鳥散者咸復厥居詎非大幸歟小邦之獲罪 上國久矣己未之役都元帥姜弘立助兵明朝兵敗被擒」 太祖武皇帝只留弘立等數人餘悉放囘 恩莫大焉而小邦迷不知悟丁卯歲今」  皇帝命將東征本國君臣避入海島遣使請成」
皇帝允之視爲兄弟國疆土復完弘立亦還矣自兹以往 禮遇不替冠盖交跡不幸浮議扇動搆成亂梯小邦申飭邊臣言涉不遜而其文爲▨臣所得」 皇帝猶寬貸之不卽加兵乃先 降明旨諭以師期丁寧反覆不翅若提耳面命而終未免焉則小邦羣臣之罪益無所逃矣」
皇帝旣以大兵圍南漢而又 命偏師先陷江都宮嬪王子曁卿士家小俱被俘獲」
皇帝戒諸將不得擾害 命從官及內侍看護旣而 大霈恩典小邦君臣及其被獲眷屬復歸於舊霜雪變爲陽春枯旱轉爲時雨區宇旣亡而復存宗社己絶而還續環東土數千里咸囿於 生成之澤此實古昔簡策所稀觀也」
於戱盛哉漢水上流三田渡之南卽」  皇帝駐蹕之所也壇場在焉我寡君爰命水部就壇所增而高大之又伐石以碑之埀諸永久以彰夫」
皇帝之功之德直與造化而同流也豈特我小邦世世而永賴抑亦 大朝之仁聲武誼無遠不服者未始不基于兹也顧摹天地之大畵日月之明不足以彷彿其萬一謹載其大略銘曰」 天降霜露載肅載育惟 帝則之竝布 威德」
皇帝東征十萬其師殷殷轟轟如虎如豼西蕃窮髮曁夫北落執殳前驅厥靈赫赫」
皇帝孔仁誕降恩言十行昭囘旣嚴且溫始迷不知自貽伊感 帝有明命如寐之覺我后祇服相率而歸匪惟怛  威惟德之依」
皇帝嘉之澤洽禮優載色載笑爰束戈矛何以 錫之駿馬輕裘都人士女乃歌乃謳我后言旋」
皇帝之賜」  皇帝班師活我赤子哀我蕩析勸我穡事金甌依舊翠壇維新枯骨再肉塞荄復春有石巍然大江之頭萬載三韓」
皇帝之休

嘉善大夫禮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臣呂爾徴奉 敎篆 資憲大夫漢城府判尹臣吳竣奉 敎書
資憲大夫吏曹判書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成均館事臣李景奭奉 敎撰
崇德四年十二月初八日立
(高十三尺幅四尺六寸(左)蒙文(右)滿文(裏面) 漢文字經七分(楷書)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

대청(大淸) 숭덕(崇德) 원년(元年) 겨울 12월에 관온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께서 우리가 먼저 화약(和約)을 깬 까닭에 처음으로 진노(震怒)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오셨다. 곧바로 동쪽으로 공격하여 오니 아무도 감히 항거하지 못하였다. 이때에 우리 임금은 남한산성(南漢山城)에 거처하고 있었는데, 두려워하기를 마치 봄날에 얼음을 밟고 햇빛을 기다리는 듯이 하였다. 거의 50일이 지나자 동남쪽 여러 지방의 군사들은 서로 연달아 무너지고, 서북쪽의 장수들은 골짜기에 머무른 채 한걸음도 나오지 못하니, 성 안의 양식도 거의 떨어지게 되었다. 이때를 당하여 많은 병사들이 성을 공격하기를 마치 서리 바람이 가을 풀을 말듯하고 화롯불에 깃털을 태우듯이 하였으나, 황제는 사람을 죽이지 않는 것을 무예(武藝)의 근본으로 삼고 또 덕을 펼치는 것을 우선으로 하셔서 항복하라는 칙령으로 달래어 말하기를 “항복하여 내게 오면 너희가 모두 온전할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도륙(屠戮)할 것이다.”하였다.
영마(英馬) 와 같은 여러 대장들이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서로 길을 오가니 이에 우리 임금이 문무(文武)의 여러 신하들을 모아놓고 말하기를 “내가 큰 나라에 의탁하여 화친을 맺은지 10여 년이 되었는데, 나의 어리석고 미혹(迷惑)됨으로 말미암아 윗나라 군대의 토벌을 자초(自招)하여 만백성이 도륙을 당하게 되었으니 죄는 나 한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황제께서는 오히려 차마 이들을 도륙하지 못하시고 이와 같이 타이르시니 내 어찌 감히 그 말을 받들어 위로는 우리의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보전하고 아래로는 우리 백성들을 보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니 대신들도 모두 찬성하였다.
드디어 수십 기(騎)를 이끌고 군영 앞으로 나아가 죄를 청하였다. 황제가 예로서 대접하고 은혜로 어루만지며, 한번 보고는 심복(心腹)으로 인정하여 재물을 하사하는 은혜가 따라온 신하들에게까지 두루 미쳤다. 곧 우리 임금을 도성으로 돌려보내고 남쪽으로 내려가는 군대를 불러들여 서쪽으로 물러났다. 백성들을 위로하여 농사에 힘쓰게 하고, 원근(遠近)에 도망친 백성들을 모두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오게 하시니, 커다란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 작은 나라가 상국(上國)에 죄를 얻은 지 오래되었다. 기미(己未; 1619, 광해군 12)년의 군역(軍役)에 도원수(都元帥) 강홍립(姜弘立)이 군대를 이끌고 명나라를 돕다가 패하여 사로잡혔을 때에, 태조무황제(太祖武皇帝)께서는 홍립을 비롯한 몇 명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돌려 보내주었으니 그 은혜가 막대(莫大)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작은 나라가 미혹되어 깨닫지 못하니, 정묘년(인조 5, 1627년)에 지금의 황제가 장군들에게 명하여 동쪽으로 우리나라를 정벌하게 하였는데, 임금과 신하가 섬으로 피난하고는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니 황제께서는 이를 허락하고 형제의 나라로 간주하니, 강토를 온전히 보전할 수 있었고 강홍립(姜弘立)장군도 돌아오게 되었던 것이다.
그 이후로 예우가 한결같고 관리들이 서로 오갔는데, 불행하게도 뜬소문이 생겨나 퍼져 나가면서 작은 나라가 어지러워지니, 거듭 변방의 신하를 바로잡고자 하였으나 언어가 불손하고 또 그 글이 ~ 결 ~ 신(~ 결 ~ 臣)에게 들어가게 되었다. 그래도 황제께서는 오히려 너그럽게 대하시어 곧바로 군대를 내보내지 않고, 먼저 조서(詔書)를 보내어 군대를 보낼 시기로써 거듭 깨우치기를 마치 귀를 잡고 끌어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듯 하였다. 그러나 끝내 그 말을 듣지 않았으니 작은 나라의 여러 신하들의 죄가 더욱 무거워졌던 것이다.
황제께서 이미 대병(大兵)으로 남한산성(南漢山城)을 포위하고는, 또 한 무리의 군대에게 명하여 강화도(江華島)를 함락시켜 궁빈(宮嬪)과 왕자(王子) 및 여러 신하들의 가족들을 모두 포로로 붙잡았는데, 황제께서 여러 장수들에게 명하여 해를 입히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시종하는 관리와 내시들로 하여금 간호(看護)하게 하셨다. 이윽고 크게 은전(恩典)을 베풀어 작은 나라의 임금과 신하 및 그 사로잡혔던 권속(眷屬)들이 모두 옛 장소로 돌아가게 되니, 서리와 눈이 변하여 봄 햇볕이 되고 가뭄이 단비가 된 듯, 나라가 거의 망했다가 다시 살아나고 종사(宗社)가 거의 끊어졌다가 도로 이어지게 되었다. 모든 동쪽의 땅 수천리가 모두 살려주는 은택(恩澤)을 입었으니 이는 실로 예로부터 드물게 보는 일이라 하겠다. 아아, 훌륭하도다.
한강의 상류 삼전도(三田渡)의 남쪽은 황제께서 머무시던 곳으로 제단이 있다. 우리 임금이 수부(水部=工曹)에 명하여 단을 더 쌓아 높고 크게 만들고 또 돌을 잘라서 비를 세우게 하였다. 황제의 공덕이 천지의 조화와 같이 흘러갈 것임을 후세에 길이 현창(顯彰)함이니, 어찌 우리 작은 나라만이 대대로 힘을 입을 뿐이겠는가? 또한 큰 나라의 인자한 성문(聲門)과 올바른 무위(武威)에 멀리서도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음이 모두 여기에 근본하는 것이다. 커다란 천지(天地)를 베껴내고 밝은 일월(日月)을 그리자니 그 만분의 일도 비슷하게 하기에 부족하나, 삼가 그 대략을 기록하는 바이다. 명(銘)에 이르기를

하늘이 서리와 이슬을 내려 죽이고 기르는데,
오직 황제께서 이를 본받아 위엄과 덕을 함께 펴시네.
황제께서 동쪽으로 정벌하심에 그 군사는 10만이요,
은은한 수레소리 호랑이 같고 표범과 같네.
서쪽 변방의 터럭하나 없는 벌판과 북쪽 부락의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창 들고 앞서 진격하니 그 위세 혁혁(赫赫)하도다.
황제께서 크게 인자하심으로 은혜로운 말씀 내리시니,
10 줄의 밝은 회답 엄하고도 따뜻하였네.
처음에는 미혹되어 알지 못하고 스스로 근심을 끼쳤지만,
황제의 밝은 명령이 있어 비로소 깨달았네.
우리 임금 이에 복종하고 함께 이끌고 귀복(歸復)하니,
단지 위세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 덕에 의지함일세.
황제께서 이를 가납(嘉納)하시어 은택(恩澤)과 예우(禮遇)가 넉넉하니,
얼굴빛을 고치고 웃으며 병장기를 거두었네.
무엇을 주셨던고, 준마(駿馬)와 가벼운 갓옷,
도회의 남녀들이 노래하고 칭송하네.
우리 임금이 서울로 돌아가신 것은 황제의 선물이요,
황제께서 군대를 돌이키니 백성들이 살아났네.
유랑하고 헤어진 이들 불쌍히 여겨 농사에 힘쓰게 하시고,
금구(金甌) 의 제도 옛날과 같고 비취빛 제단은 더욱 새로우니
마른 뼈에 다시 살이 붙고 언 풀뿌리에 봄이 돌아온 듯하네.
커다란 강가에 솟은 비 우뚝하니,
만년토록 삼한(三韓)은 황제의 덕을 이어가리.

가선대부(嘉善大夫) 예조참판(禮曹參判) 겸 동지의금부사(兼 同知義禁府事) 신(臣) 여이징(呂爾徴)
이 왕명을 받들어 전액(篆額)을 씀.
자헌대부(資憲大夫)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신(臣) 오준(吳竣)
이 왕명을 받들어 씀.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 겸 홍문관대제학(兼 弘文館大提學)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 신(臣)이경석(李景奭) 이 왕명을 받들어 지음.
숭덕(崇德) 4년(인조 17, 1639년) 12월 초 8일에 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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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스크랩 서울시60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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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7년 인조15년 병자호란 발발 45일만에 국왕 인조는 항복을 결정하고 그동안 항전을 해 왔던 남한산성을 나와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식을 거행했다. 국왕은 곤룡포 대신 평민이 입는 남색옷을 입고 세자를 비롯한 대신들과 함께 청태종의 수항단(受降壇)이 마련되어 있는 잠실나루 부근 삼전도에 도착, 어가에서 내려 2만명의 적병이 도열하고 있는 사이를 걸어 황제를 향하여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이른바 삼배구고두례(三拜九敲頭禮)라는 치욕적인 항복례를 실시하였다. 청은 지난 1636년 12월6일 청태종의 지휘 아래 용골대와 마부태를 선봉장으로 해서 12만군으로 압록강을 건너 침공해왔다. 그들은 진격로 주변의 성들을 공격하지 않고 곧바로 한성으로 직행했다. 조정은 종묘의 신위와 빈궁, 왕자들만 먼저 강화도록 떠나게 하고 14일에는 국왕도 몽진을 결정했으나 이미 홍제원이 점령당해 강화로 가는 길이 차단당했다. 이에 남한산성으로 몽진, 장기항전에 돌입했었다. 당시 남한산성의 방어 능력은 병사 1만 2천에 식량은 약 두 달치에 불과한 1만 4천 3백여 섬으로 적의 12만 대군과 싸우기는 역부족이었다. 적군은 남한산성을 직접 공격하지 않고 보급로를 차단하는 고사작전을 택했다. 남한산성에 혹한으로 동사자가 늘어가자 국왕은 옷가지와 양피이불을 하사했고 뒤이어 백관들도 이불과 심지어 말안장 등속까지 거둬 성채와 군병들에게 나워주었으나 동사하는 병사들과 백성의 수는 늘어갔다. 설상가상으로 음식조차 모자라 하루를 버티기 어려운 상황으로 진행되어 갔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김상헌 중심의 척화파와 최명길 중심의 주화파 사이에 논쟁이 끊어지지 않았으나 강화가 함락됐고 세자가 인질로 잡혔다는 소식이 전해오자 대세는 주화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리고 결국은 1637년에 3배 9고두례를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한 항복례로 한 번 절 할 때마다 세 번 머리를 땅바닥에 부딪치는 것을 세 번 해야 한다는 것을 일컫는다. 단 이 때 반드시 머리 부딪치는 소리가 크게 나야 한다. 청태종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다시 할 것을 요구해 인조는 사실상 수십번 머리를 부딪쳤고 이에 인조의 이마는 피투성이가 되었다.
다음백과사전의 내용중 발췌
 

 
동계집 속집 제3권
 부록(附錄)
용천정사(龍泉精舍)에 쓴 시 [윤이현(尹彝鉉)]

윤이현(尹彝鉉)

이곳에서 어찌 눈물이 줄줄 흐르지 않으랴 / 此地如何不潸然
산도 찡그리고 물도 오열하며 전현을 생각하네 / 山嚬水咽憶前賢
사무치는 애통함은 남한산성이 함락될 때이고 / 一天至慟南城在
천 년의 아름다운 이름은 북두처럼 걸려 있네 / 千載英名北斗懸
오래지 않아 병자년이 되돌아옴을 볼 것이니 / 未久將看回鼠甲
용천정사에 모신 선생을 위로할 말이 없구나 / 無辭可以慰龍泉
향인들이여 중양절 제사를 빠뜨리지 말지어다 / 鄕人勿替重陽祭
축문을 적을 때는 국화 이슬로 전해야 하리라 / 寫祝猶應菊露傳

 
 
동계집 부록 제2권
만시(挽詩) [조임도(趙任道)]

조임도(趙任道)

계축년에서 정축년까지 / 癸丑至丁丑
그 사이 이십오 년 동안 / 二十五年間
충성스런 말과 곧은 절개는 / 忠言與直節
시종일관 매양 한가지였다오 / 始終如一般
위대하도다 동계공이여 / 偉哉桐溪公
덕유산 정기를 타고났나니 / 稟精德裕山
덕유산의 천만 봉우리마다 / 德裕千萬疊
아름다운 기운 빽빽이 서렸구나 / 佳氣鬱而盤
이 산이 청숙한 기운을 잉태하여 / 玆山孕淸淑
세상에 이름난 분 끊이지 않았네 / 名世者班班
처음에는 갈천옹이 태어나서 / 爰初葛川翁
예의로써 큰 법도를 삼았더니 / 禮義爲大閑
정려가 내려 효우를 드러냈고 / 旌閭彰孝友
높은 관작으로 의관을 빛냈네 / 茂爵表衣冠
문생 중에 역양공이 있으니 / 門生曰嶧陽
덕을 숨긴 골짜기의 난초였다네 / 潛德谷中蘭
오강과 준헌처럼 연원이 있어 / 梧岡及準軒
학문 계통이 밝고도 단정했다오 / 統緖明且端
공은 부사의 가르침을 받아 / 公承父師訓
일찍이 인귀관을 통과했네 / 早透人鬼關
가정에서는 행실이 고상했고 / 家庭制行高
충직한 말은 임금을 범했으니 / 忠犯人主顔
위태로운 조정과 혼란한 시대에 / 危朝昏亂際
한 손으로 미친 물결을 막았다오 / 隻手障狂瀾
외로운 남한산성 비바람 속에서 / 孤城風雨中
의로운 담력은 혹한도 능멸하니 / 義膽凌高寒
고상한 절조에 오랑캐도 감동했고 / 英風洒夷夏
곧은 명성에 삼한이 고무되었네 / 直聲聳三韓
우리나라에 대장부가 몇이던가 / 吾東幾箇男
공만이 그 어려움을 지켜 냈구나 / 公獨守其難
수양함이 깊은 분이 아니라면 / 倘非所養深
어찌 환란에 태연히 처했으리 / 曷能居之安
평소에 수양한 경의의 공부 / 平生敬義功
한 생각이 단주처럼 밝았도다 / 一念炳如丹
더구나 구중설을 지어내어서 / 況有求中說
후생들이 보도록 남겨 줌에랴 / 留與後死觀
금원산은 산빛을 바꾸지 않고 / 猿山不改色
모리는 향기가 끊기지 않으리 / 某里香未刋
어찌하면 태사씨의 붓을 얻어 / 安得太史筆
크게 써서 완우를 격동시키며 / 大書激愚頑
천추 백세 뒤의 사람일지라도 / 千秋百世下
모두 의분이 끓어오르게 할까 / 竪髮摧心肝

[주D-001]갈천옹(葛川翁) : 갈천은 훈(林薰)의 호이다.
[주D-002]역양공(嶧陽公) : 역양은 동계의 부친 정유명(鄭惟明)의 호이다.
[주D-003]오강(梧岡)과 준헌(準軒) : 오강과 준헌은 도맥(道脈)의 계통이 분명한 사람인 듯하나 자세하지 않다.
[주D-004]일찍이 인귀관(人鬼關)을 통과했네 : 참된 도리를 알아서 실천궁행(實踐躬行)했다는 말이다. 인귀관은 《대학》의 성의(誠意)를 이르는 말로, 성의의 관문을 통과하면 사람이 되고 통과하지 못하면 귀신을 면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계산기정 제5권
 부록(附錄)
성궐(城闕)


무릇 성 쌓은 제도는, 모두 벽돌을 양쪽으로 쌓아 올리고 그 속을 회와 돌로 메우며, 타첩(垜堞) 사이는 10여 보 정도 되고 높이는 3장(丈) 이상이 된다. 또 성의 제도는 모두 네모 반듯하고 둥글지 않으며, 아래는 넓고 위가 차차 좁아진다.

북경성은 둘레가 43리, 남쪽 가의 중성(重城)은 둘레가 28리다. 통주성(通州城)은 둘레가 9리이고 서쪽에 중성이 있다. 계주성(薊州城)ㆍ영평부성(永平府城)은 둘레가 모두 8, 9리이고 나성(羅城 성의 외곽)이 없으며, 금주성(錦州城)은 둘레가 8리이고 동쪽에 나성이 있다. 영원주(寧遠州)에는 내성ㆍ외성이 있는데, 내성은 둘레가 8리이고 외성은 허물어졌다. 산해관성(山海關城)은 둘레가 7리쯤 되고 동ㆍ서의 나성이 있다. 심양(瀋陽)은 내ㆍ외성이 있는데, 외성은 토성(土城)이고 내성은 둘레가 8리이다. 중우소(中右所)ㆍ중후소ㆍ전둔위(前屯衛)ㆍ중전소(中前所)ㆍ대릉하보(大凌河堡) 등의 성은 둘레가 모두 금주위성과 비슷하고, 요양성(遼陽城)은 둘레가 거의 10리나 되고, 봉성은 둘레가 거의 7리나 되는데, 모두 나성이 없다. 북경과 산해관의 성이 가장 웅장하다. 무령(撫寧)ㆍ옥전(玉田)ㆍ풍윤(豐潤)ㆍ삼하(三河) 및 여러 역보(驛堡)에도 모두 성이 있으나 흔히 퇴폐해졌다. 성이 있으면 성안에는 흔히 십자가루(十字街樓)가 있는데, 혹은 2첨(簷) 혹은 3첨으로 단청이 찬란하게 공중에 우뚝하게 솟아 있다.

연경(燕京)은 순천부(順天府)에 있다. 명(明) 영락(永樂) 초에 남경으로부터 도읍을 옮겨 북경이라 했고, 18년에 묘사(廟社)ㆍ교사단(郊祀壇)의 담을 완성했다. 궁전(宮殿)과 문궐(門闕)은 다 남경의 것을 모방하였으되 웅장 화려하고 높고 넓기는 그보다 훌륭했으며, 지금 청인들은 일체 옛 제도를 따랐다.

성은 무릇 9문이다. 남은 정양(正陽)이니 원(元) 나라의 여정(麗正)이고, 동은 숭문(崇文)이니 원 나라의 문명(文明)이다. 남의 서는 선무(宣武)이니 원 나라의 승순(承順)이고, 동은 조양(朝陽)이고 안쪽 편액[內扁]은 제화(齊華)이며, 동의 북쪽은 동직(東直)이다. 서의 남쪽은 부성(阜城)이고 안쪽 편액은 평칙(平則)이며, 서의 북쪽은 서직(西直)이니 원 나라의 창의(彰義)이다. 북의 동쪽은 안정(安定)이고, 북의 서쪽은 덕승(德勝)이다.

성 남쪽에다 또 중성(重城)을 쌓아 동쪽에서 서쪽으로 안아 돌고, 남북은 짧고 동서는 길다. 성의 둘레는 20리, 담장을 두른 길이가 3225장(丈)이다. 교사단이 그 안에 있고 또한 7문이 있다. 남은 영정(永定), 남의 동쪽은 강찰(㩖擦)이고 안쪽 편액은 좌안(左安)이다. 남의 서쪽은 초교(草橋)이고 안쪽 편액은 우안(右安)이다. 동은 광거(廣渠)이고 안쪽 편액은 사와(沙窩)이다. 서는 광녕(廣寧)이고 안쪽 편액은 창의(彰義)이다. 동북은 동편(東便), 서북은 서편(西便)이다.

도성을 통틀어 황도(皇都)라 하고, 궁성(宮城)을 황성 또는 자금성(紫禁城)이라고도 한다.

성의 제도는, 바깥에는 비예(睥睨 성 위의 담)를 설치하고 안에는 여장(女墻 성 위의 작은 담으로 적을 망보는 것)으로 막았으며, 양쪽 사이에 역시 벽돌을 깔아 평평하게 고르고 그 위에 성랑(城廊 성 위에 세운 다락집)을 두었다. 비예에서 여장까지는 20보는 됨직하고 높이는 무릇 6, 7장이다.

성은 평지에서 시작하였으나 안에 의탁한 것이 없고, 성안에는 성을 의지하여 흙을 쌓아 마치 섬돌의 층계처럼 점차 높이 올라갔는데 높은 곳은 성과 가지런하고, 그 아래에 문을 만들어 오르내리고 여닫는데 그 제도가 극히 엄밀하다.

궁성(宮城)은 도성의 반을 차지하고, 둘레는 18리, 높이는 5장 남짓하다. 성은 담 쌓는 제도와 같으나 내성ㆍ외성 모두 붉은 칠을 하고 누런 기와로 덮었으니, 자금성으로 명명된 것이 이 때문이다. 4문이 있으니, 남은 대청(大淸), 동은 동안(東安), 서는 서안(西安), 북은 지안(地安)이다. 대청문은 정양문(正陽門)과 마주 섰는데 그 사이가 겨우 200보이고, 그 안에 천안문(天安門)이 있으니 또한 궁성 남문에 소속된다. 동안문ㆍ서안문 안에 여염집과 가게가 즐비하게 잇닿아 있다.

궁성 안에 또 내궁성(內宮城)이 있는데 둘레가 6리다. 성 쌓은 것은 도성의 제도와 같으나 오직 타첩(垜堞)만 설치했고, 요철(凹凸 오목함과 볼록함)이 극히 가지런하다. 성 밖에는 낭각(廊閣)이 둘러 있고, 그 밖에는 호수로 둘러 있는데 너비가 30보는 됨직하다. 성의 네 귀퉁이에는 모두 채루(彩樓)가 있는데 높이는 100척쯤 됨직하고, 규모가 극히 기이하고 아름답다. 천안문 안으로는 단문(端門)이 그다음이고 오문(午門)이 또 그다음이다. 오문은 곧 내궁성의 정남문이니, 동은 동화(東華), 서는 서화(西華), 북은 신무(神武)이다. 오문을 지나면 태화문(太和門)이 있다.

성 문루에 옹성(瓮城)이 있고, 좌우에 또 초루(譙樓)를 마주 세워 봉함이 매우 엄밀하니, 아마 그 안에 전쟁 도구를 간직한 듯하다. 또 성 위에는 10여 보마다 돌무더기가 있으니 또한 뜻밖의 일에 대비한 것이다.

성의 제도는, 바깥에는 타첩(垜堞)을 설치하고 안에는 여원(女垣)으로 막았으며 양쪽 사이는 20보가 되는데 모두 모난 벽돌을 깔았다. 그리고 수문(水門) 위로 해서 구멍을 뚫어 바닥까지 가게 했는데, 길이는 5척 남짓하고 너비는 겨우 2촌쯤 된다. 그리고 성 위의 빗물이 빠지게 하고 구멍 바닥에 수문을 만들어 안팎을 막고 있으며, 이 아래는 곧 도랑이다.

여원 안에는 5, 60보마다 초소[廊] 하나를 두고, 초소에는 각기 갑군(甲軍)을 두어 돌려 가며 수직하니, 총 수만 인이다. 온돌방과 솥ㆍ두레박 등이 갖추어졌으니, 번 드는 자가 거기서 침식하며 왕래의 수고가 없게 한 것이다.

정양문 문루는 4층이고, 조양문 문루는 3층인데, 모두 옹성이 있다. 그 위에 역시 층루(層樓)를 세웠으며, 사방에 난간을 설치하지 않고 벽돌을 처마와 가지런하게 쌓았다. 구멍 난 벽돌로 집을 설치했는데 총 30여 호이니, 내루(內樓)를 가리기 위한 것으로서 이것을 적루(敵樓)라 한다. 이 이외의 여러 문에는 모두 적루가 없다. 정양문 서ㆍ남ㆍ북에 각기 문 하나씩이 있는데, 그 남문은 늘 굳게 잠가 두고 황제가 거둥할 때에만 연다.

지안문(地安門)의 북쪽에 또 북상문(北上門)이 있어 지안문과 마주 섰고, 그 밖은 곧 경산(景山)이다. 경산은 외궁성의 중앙에 있다. 대개 외성은 남북은 길고 동서는 짧으며, 남북은 정양ㆍ안정(安定)의 중앙에 걸쳐 있다. 부(部)ㆍ원(院)의 여러 아문(衙門) 및 인가와 시장 가게는 모두 성의 동서에 있다. 듣건대 한인(漢人)으로 벼슬하는 자는 모두 도성 밖에 산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반드시 다 그렇지 않을 것이지만, 9문 안에 궁궐ㆍ관부(官府)가 반 이상을 차지하고 시장 가게가 또 반을 차지하고 있으니, 그렇다면 벼슬살이하는 군민의 집은 많지 않을 듯하다. 궁전ㆍ문궐은 모두 황유리로 이어 번질번질하다. 문과 전(殿)의 편액은 모두 만주 문자로 옆에 번역하였고, 성문의 편액도 이와 같다. 궁성 안에는 다 모난 벽돌을 깔고, 정로(正路)에는 돌을 땅에서 한 자 남짓 높이로 쌓았다. 그 배포 설치는 진실로 장려(壯麗)하였다. 태화전부터 무릇 다섯 중문이니, 태화문ㆍ오문ㆍ단문ㆍ천안문ㆍ태청문(太淸門)이다. 태청문 밖 수백 보 지점에 성문이 있으니 곧 정양문이다. 태화전에서 정양문까지는 먹줄 놓은 듯 똑바르고, 홍예문(虹霓門 무지개같이 반 원형이 된 문)도 다 굉걸하고 깊숙하여 지나가노라면 마치 굴속으로 들어가는 듯하였다.

태화전은 태화문 안에 있으니 곧 예전 황극전(皇極殿)이다. 영락 황제(永樂皇帝)가 도읍을 옮긴 초기에는 봉천전(奉天殿)이라 이름 했다가, 가정(嘉靖) 때에 와서 황극전으로 고쳐 불렀고, 지금에 와서 태화전이라 일컬으니, 원조(元朝 설날)에 하례 받는 곳이다. 앞 기둥은 12칸, 옥폐(玉陛)는 9급, 돌난간은 3중인데, 모두 용의 몸뚱이를 조각하여 섬돌 구석으로부터 굼실굼실 나오는 듯하며, 그 머리는 곧 용머리[螭頭]이다. 양쪽 옆에 각각 거북 받침[龜趺]을 학이 서 있는 형상으로 세웠으되 모두 검은 구리로 주조하였으며, 전문 앞에는 옥으로 만든 사자를 마주 세워 놓았다. 중화전(中和殿)이 그 뒤에 있고 보화전이 또 그 뒤에 있다. 여기를 지나면 곧 건청궁(乾淸宮)이고, 건청궁 뒤에 곤녕궁(坤寧宮)이 있으니 이는 내전(內殿)이다.

태화전의 좌우 낭각(廊閣)은 즉 13성(省) 및 외국의 방물(方物)을 저장하는 곳인데 모두 난간을 빙 둘러 쳤다. 낭각의 중앙으로 다니는데, 동서에 각각 2층 낭각이 있으니 동은 체인(軆仁)이고, 서는 홍의(弘義)라 한다.

전 앞의 월대(月臺)는 수백 칸이니, 이는 친왕(親王)ㆍ각로(閣老)가 홀로[獨班] 조하(朝賀)하는 곳이다. 뜰에 두 줄로 청동(靑銅)의 품석(品石)을 세워 놓았는데, 이는 만주인, 한인(漢人) 천관(千官) 및 외국 공사(貢使)가 품계에 따라 고두배궤(叩頭拜跪)하는 곳이다. 월대 앞에, 왼쪽에는 일영대(日影臺)를 세워 놓고 오른쪽에는 석향로를 두었는데, 향로와 일영대의 높이가 각각 2장 남짓하고, 또 청동로(靑銅爐) 16개를 놓아두었는데, 황제가 나오면 침향(沈香)을 그 안에 피운다고 한다.

태화전 동각과 서각에 좌익문(左翼門)ㆍ우익문(右翼門)이 있다. 좌익문 밖에 문연각(文淵閣)이 있고 우익문 밖에는 무연각(武淵閣)이 있다. 문연각의 오른쪽을 따라 높은 담이 둘러 있고, 담의 동쪽 모퉁이에 문 하나가 있으며, 여기를 지나면 경운문(景運門)이다. 협화문(協和門) 밖에는 무영각(武英閣)이 있고 희화문(煕和門) 밖에는 문화각(文華閣)이 있는데, 희화문과 동화문이 서로 마주치고 협화문과 서화문이 서로 마주친다.

태화전 밖에 좌우 익문(翼門)이 있으니 서는 정도문(貞度門)이고 동은 소덕문(昭德門)이라 한다. 태화전과 중화전 두 전 사이에도 좌문과 우문이 있으니, 동은 중좌(中左), 서는 중우(中右)라 한다. 보화전 양쪽에도 문이 있으니, 동은 후좌(後左), 서는 우후(右後)라 한다. 건청궁 동쪽에 봉선전(奉先殿)이 있고, 그 두 건물 사이에 육경궁(毓慶宮)이 있으니 곧 가경 황제(嘉慶皇帝)의 잠저(潛邸)다. 봉선전 동쪽에 황극전이 있다.

대개 건청궁ㆍ봉선전ㆍ황극전 세 전이 동쪽에서 비스듬히 일자(一字)로 연달았고, 봉선전ㆍ황극전의 사이에 낭각(廊閣)이 있어 그 양쪽 사이를 막고 있으며, 한가운데 서쪽으로 향한 문 하나의 편액은 ‘석경(錫慶)’인데 경운문(慶運門)과 멀리 마주 보고 있고, 여기를 지나면 황극전이다. 전 앞에는 채장(彩墻)으로 둘러 싸고, 가운데 세 문을 설치하였으니, 황극문ㆍ황극좌문ㆍ황극우문이다.

영수궁(靈壽宮)이 봉선전 뒤에 있다. 건륭 황제(乾隆皇帝)가 전위(傳位)한 뒤에 때때로 임어하던 곳이고, 수방재(漱芳齋)가 그 서쪽에 있다.

봉선전의 남쪽 100여 보쯤에 한 채의 채정(彩亭)이 있으니 전정(箭亭)이다. 또 남쪽은 곧 문화각(文華閣)과 서로 거리가 겨우 7, 80보이고, 좌익문(左翼門)은 겨우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으며, 서남쪽으로 30보 남짓 떨어진 거리에 문연각이 그 밖에 있으니, 곧 태화전의 동쪽이다.

문화각의 남쪽에 담이 둘러 있고 문이 있으니, 문화문이다. 문화문 수십 보를 못미쳐 와서 북쪽으로 돌다리[石橋] 셋이 있는데 모두 난간으로 둘렀고, 그 제도는 천안문 밖 호수 위의 돌다리와 같다. 돌다리의 북쪽에 문이 있으니 전성문(前星門)이다. 문안에 청와전(靑瓦殿)이 있으니 이것이 청궁(靑宮)이다. 중정전(中政殿)은 태화전 서북에 있고, 보명원각루(普明圓覺樓)가 그 곁에 있으며, 우화각(雨花閣)이 또 그 뒤에 있다. 여기를 지나 서쪽으로 가면 자광각(紫光閣)이 있으니 곧 외궁성(外宮城) 서북 모퉁이다. 자광각은 무릇 2층이다. 전의 섬돌에는 백옥으로 난간을 만들었다. 《일통지(一統志)》를 상고하면, ‘명 무종(明武宗) 때 평대(平臺)로 하였다가, 뒤에 대를 폐지하고 자광각으로 고쳐 만들었고, 청(淸)은 그대로 자광각으로 하였다. 무사(武士)의 사격을 시험하고, 공신의 화상을 그려 걸고, 외번(外藩)을 잔치하는 곳이다.’ 하였다.

태청문 안 좌 월랑(月廊)과 우 월랑(月廊)은 각 100여 칸이고 천안문(天安門)의 월랑은 각 22칸씩이며, 좌우에 각각 문 하나씩이 있으니, 동조(東朝)와 서조(西朝)다. 단문(端門) 월랑은 각 40여 칸인데, 또한 두 협문(夾門)이 있으니, 협화(協和)와 희화(煕和)이다. 오문의 월랑 또한 각 40여 칸씩이고, 태화문의 월랑은 각 100여 칸씩이며, 양쪽에 좌익과 우익이 있다. 보화와 건청 두 전의 사이에 동문과 서문이 있는데 멀리서 서로 마주 보고 섰으니, 동은 경운(景運)이며 서는 융종(隆宗)이다. 단문 밖에 태사(太社), 태묘(太廟)가 두 거리에 있으니 즉 좌묘(左廟), 우사(右社)의 소재지이다. 태청문만 1층 3문이고, 천안문도 2층 3문, 단문도 2층이고 5문이다. 오문은 3층 9문이니 이것이 오봉루(五鳳樓)이고, 그 아래 5홍예문(虹霓門)이 있다. 홍문의 좌우 담장이 꼬부라져 남쪽으로 나갔는데 각각 60여 보이고, 그 꼬부라진 곳에 각각 3층 채루(彩樓)가 있다. 그 최하층은 원각(圓閣)이고, 제2층에는 8각(閣)을 세웠는데 사방 방은 크고 네 귀는 작으며 누르고 푸른 단청이 영롱하다. 최상의 한 각 위에는 금정(金頂)으로 덮었는데 그 빛이 찬란하다. 이것이 곧 풍마동(風磨銅)이니, 바람을 맞아 더욱 광채가 나므로 이름 붙여진 것이다. 문밖에 석대(石臺)를 마주 설치하였는데 그 높이는 한 길 남짓하니, 일영(日影)을 관측하는 곳이다.

천안문 안팎에 각각 돌기둥 한 쌍이 있는데, 높이는 5장(丈) 남짓하고 크기는 한 아름 반이니, 이것이 경천주(擎天柱)이다. 구름과 용을 새겼는데, 비늘이 꿈틀거리며 날아오르는 것 같다. 문은 무릇 다섯이고, 거기서 또 동서쪽에 암문(暗門)이 하나 있다. 문 앞의 길에 돌다리를 많이 만들고 난간을 둘렀는데, 대개 다리는 문의 수와 같다. 다리 아래의 물에 배를 띄우며 통주강(通州江)에 닿을 수 있다 한다.

천안문의 옛 이름은 승천문(承天門)이었다. 갑신년(1644, 인조 22)에 이자성(李自成)이 승천문에 들어와서 편액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내가 천(天) 자를 쏘아 천하 얻을 것을 점치겠다.’ 하고, 그것을 쏘았는데, 곧 천자 아래를 맞혔다. 그래서 깜짝 놀라 얼굴빛이 달라지니, 그의 정승 우금성(牛金星)이 말하기를, ‘천자 아래 맞힌 것은 곧 천하를 나누어 가질 상입니다.’ 하자, 자성은 활을 던져 버리고 기뻐하였다.

여러 전정(殿庭)의 남쪽 끝에 다 큰 구리솥을 마주 놓아두었는데, 크기는 100여 곡(斛)이 들 만하다. 백전(白氈)으로 덮고 소금물을 담아 불을 끌 때의 일에 대비하였는데, 무려 수십 개나 된다.


[주D-001]월대(月臺) : 궁전 앞에 있는 섬돌을 말한다.
[주D-002]친왕(親王) : 황제 종실로 봉왕(封王)된 사람을 말한다. 청대(淸代)에는 화석친왕(和碩親王)의 약칭을 또한 친왕으로 불렀는데, 종실 중의 봉작된 자로서는 최고등이었다.

 

인조 5년 정묘(1627,천계 7)
 9월24일 (정해)
우찬성 이귀가 안주성과 황주성 수축을 중지할 것과 청의 공격에 대한 방어책을 건의하다

우찬성 이귀(李貴)가 차자를 올리기를,
“험한 곳을 의거하여 백성을 보호하고 군사를 양성하여 적을 물리치는 일이 오늘날에 있어 제일의 급무입니다. 이러한 일은 하지 않고 무고한 패잔병을 시켜 식량과 병기와 지킬 병사도 없는 외로운 성을 쌓아 세차게 밀려오는 적을 막으려 하니, 이를 ‘어려운 시기에 쓸모없는 일만 한다.’는 것입니다. 조정이 적을 막고 근본을 튼튼히 하는 계책에 대해서는 모두 백성들의 힘이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핑계로 채택하여 시행하지 않으면서, 유독 안주성(安州城)과 황주성(黃州城)에 대해서는 물력이 얼마나 드는가를 헤아려 보지도 않고서 금년내에 완성하도록 독촉하고 있으니, 신은 참으로 걱정스럽습니다.
도군(逃軍)이란 장수는 물러서지 않고 적진으로 나아가는데 군졸이 먼저 장수를 버리고 도망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궤졸(潰卒)이란 장수가 먼저 도망치고 나서 군졸도 따라서 무너져 버린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수가 먼저 도망치면 장수만을 죄주고 궤졸은 문책하지 않는 것이 군법에 있어 당연한 일입니다. 평양과 황주의 경우 장수가 먼저 도망쳤으니 궤졸에게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급히 안주성과 황주성의 부역을 중지시켜 한편으로는 인심을 수습하고 한편으로는 인명을 구제하소서.
금일 강화하는 것은 종묘와 사직을 위해서일 뿐만이 아니라 생민을 보호하기 위해서 한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몇 년 동안 기한을 정해 두고서 백성들이 잘 살 수 있도록 하는 일을 급선무로 삼아 부역을 모두 감해 주어 양서(兩西)를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런 뒤에야 그곳에서 살던 자들은 안정할 수가 있고 피난갔던 자들도 즐거이 옛터로 돌아올 것은 물론 몇 년 안 되어 안전한 지방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백성을 보호하는 것은 근본이고 성을 쌓는 것은 말단인 것입니다. 이제 온 도의 힘을 합하여 오로지 안주성만을 지킨다 하더라도 병량과 병기는 절대로 전일만 못할 것입니다. 병량과 병기가 갖추어지지 않는다면 아무리 높은 성을 쌓는다 하더라도 성패에는 아무런 도움이 없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남한 산성(南漢山城)은 굳게 지킬 수 있다 하더라도 기전(畿甸)에 있는 성들은 어떻게 지킬 수가 없습니다. 가령 적이 여러 곳의 백성들을 멋대로 죽인다면 남한 산성을 보존하기가 곤란할 뿐만 아니라 강도(江都)도 보존하기가 곤란합니다. 그러나 남한 산성은 벌써 수축이 끝났으니 비워둘 수가 없습니다. 광주 목사(廣州牧使)를 수어장(守禦將)으로 삼고 그 고을 병민들을 다 주어 이 성을 보호하고 지키게 하여야 합니다. 만일 한 고을의 병력으로 감당할 수가 없다면 난을 당하였을 경우에는 경상도 병사가 거느리고 있는 병졸들을 떼서 주는 한편, 병사를 수성 대장으로 삼아 험한 곳을 의거하여 굳게 지키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강도를 응원하는 계책을 삼는다면 오히려 강탄(江灘)을 쓸모없이 지키는 것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들이 갖고 있는 아홉 가지의 장점과 우리의 아홉 가지 단점을 비교해 보면 결코 저들과 대적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이 여러 가지로 생각한 결과 첫째 험한 곳을 의거하고 들판의 곡식을 치우는 것, 둘째 말 위에서 삼혈총(三穴銃)을 사용하는 것, 셋째 도끼 등을 들고 밤에 습격하는 것 등의 세 가지 계책을 얻었을 뿐입니다. 이를 군무를 잘 아는 노장들에게 물어보니 모두 이 세 가지의 계책이 아니면 능히 적을 막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신은 굳게 믿고 조목별로 올렸었는데, 비변사에서 ‘험한 곳을 의거하는 일은 백성들의 힘이 미치지 못하고, 삼혈총은 화력이 세지 못하여 거리가 조금만 멀어도 갑옷을 뚫을 수 없고, 우리 나라 말들은 훈련이 되지 않아 쉽게 놀라 달아나려고 하므로 사용하기 어렵다.’고 회계(回啓)하였다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병법을 모르고 그저 남의 말만 막으려고 애쓰는 자들입니다.
조종조에서 진관 체제(鎭管體制)를 설치할 때에 어찌 무반들로만 수령을 삼았겠습니까. 문관과 음관으로 차정한다 하더라도 각 고을에 중군 대장(中軍代將)이 있으니 이 중군 대장을 무인으로 차정한다면 병졸을 이끌고 전장에 나아갈 때에는 각도의 병사가 통솔하고 싸우러 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병졸들을 정선하지 못한 것, 병기를 정비하지 못한 것, 군량을 넉넉히 잇대지 못한 것, 훈련을 잘 시키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모두 수령을 문책해야 합니다. 그래서 수령이 무반이 아니더라도 군기(軍機)를 그르친 것에 대한 책임이 다 자신에 달려있기 때문에 간혹 국사에는 소홀히 하는 자일지라도 군무의 일에 대해서는 있는 힘을 다하여 군율을 면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행주 산성(幸州山城)은 권율(權慄)이 목책을 쳐서 능히 왜구들을 막아 승리했던 곳입니다. 고양 군수(高陽郡守)를 수어장을 삼아 본 고을의 병민들을 이끌고 방어하게 하소서. 물론 한 고을 백성들의 힘으로는 절대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만, 만일 급한 일이 생기면 강을 지키는 삼남(三南)의 병사를 나누어주고 장수를 정해서 이 성에 더 들여보내어 강도(江都)를 응원하는 계책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아무런 곤란한 일이 없을 것인데, 도리어 ‘서서히 사세를 살펴가면서 다시 의논하여 시행하겠다.’ 하실 수 있습니까. 신이 변경의 일에 대하여 조목별로 진달한 것이 한두 차례가 아닌데 하나도 시행되고 있지 않으니, 민망스럽고 답답하기 그지없습니다.”
하니, 상이 비변사로 하여금 의논해서 처리하라고 하였다.
【원전】 34 집 227 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군사-군정(軍政)

현종 2년 신축(1661,순치 18)
 1월27일 (정축)
칙사를 맞이하는 것 등에 대해 의논하다

상이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흥정당에서 인견하였다. 우상 원두표가 아뢰기를,
“칙사의 행차가 매우 급박하여 입경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상께서 교외에 나가 맞이하실 일이 매우 걱정입니다.”
하고, 태화가 아뢰기를,
“일정을 헤아려 보면 내일은 벽제(碧蹄)에 당도할 것이니 신이 달려가서 상이 병환과 꺼리는 일 때문에 나와 맞이하지 못한다는 뜻을 힘껏 저들에게 말해야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저 사람들도 내가 병이 있는 줄 알 것이니, 만약 ‘안질이 매우 심하여 문밖 출입을 하지 못하여, 신료들을 접견하지도 못한다.’고 하면 저들이 혹 수긍할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말이 너무 지나치면 저들이 필시 꾸며댄다고 의심할지도 모르니, 모름지기 잘 설득하라.”
하였다. 교리 이민서(李敏叙)가 아뢰기를,
“혜성의 출현은 실로 시기가 지나서 나타나는 것이 아닌데 이런 일이 있으니 앞으로 매우 염려가 됩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재변에 대해 이미 응한 것이 있었다고 여기지 마시고 더욱 두려워하고 삼가소서.”
하였다. 심지원이 나이가 많고 기운이 쇠하여 정신이 소진되었음을 힘껏 진달하고 해직을 청하니, 상이 편안히 있으면서 도를 논하라고 하유하였다. 홍명하 역시 남한산성 수어장(守禦將)의 직임을 사직하고 대신들에게 물어 다른 사람으로 제수할 것을 청하니, 상이 대신들의 의견은 어떤지를 물었다. 정태화와 원두표가 다같이
“위에서 위임한 것이 실로 헛되이 제수한 것이 아닌데 새로 막 임명하고서 어찌 가벼이 바꿀 수 있습니까?”
하니, 상이 다시는 고사하지 말라고 타일렀다. 상이 승지 이익한(李翊漢)에게 하유하기를,
“날씨가 점차 따뜻해지니 판중추와 우참찬이 올라오도록 내 대신 도타이 타이르는 말로 글을 지어 들이라.”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물러나 나오려는데 태화가 다시 아뢰기를,
“신이 앞서 가서 교외에서 맞이할 수 없다는 뜻을 객사(客使)에게 말하려고 하였더니 여러 사람의 의견 중에 ‘고관이 먼저 청했다가 허락받지 못하면 뒤에 다시 청하기가 어려울 염려가 있으니, 우선 재신(宰臣)이 가서 청하고 허락받지 못하면 대신이 뒤이어 다시 청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는데, 이 말 역시 일리가 있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그렇다면 호판이 나가야 하고 소신 역시 따라 갔다가 허적이 허락받으면 곧바로 돌아오고 허락을 받지 못하거든 그대로 나아가 다시 청해야 하니, 신이 허적과 잇달아 나가겠습니다.”
하자, 상이 그리하라고 하였다.
【원전】 36 집 291 면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왕실-행행(行幸) / *외교-야(野) / *과학-천기(天氣)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경세유표 제2권
 추관 형조(秋官刑曹) 제5
형관지속(刑官之屬)

형조(刑曹) : 판서 경 1인, 참판 중대부 1인, 참의 하대부 1인, 정랑 상사 2인, 좌랑 중사 4인.
서리 20인, 조례 40인.

생각건대, 형조에는 서리와 조례의 정원이 본디 많았는데, 이번에 여러 관청에 분립(分立)되어 각각 체모를 갖추어야 하는 까닭으로 그 정원에서 줄인 것이 있다.

의금부(義禁府) : 판사(判事) 고경(孤卿) 1인, 지사(知事) 경 2인, 동지사(同知事) 중대부 2인, 경력(經歷) 상사 2인, 도사 중사 4인. 부도사 하사 4인.
서리 18인, 조례 60인.

생각건대, 의금부란 주관(周官)의 사사(士師)이다. 의금부는 옥사(獄事)를 다스리는 관아이고 순찰하는 책임은 본디 없었는데, 지금 풍속에 금오(金吾)라 하는 것은 그릇된 것이다(앞에 보임).

사헌부(司憲府) : 대사헌(大司憲) 중대부 1인, 장헌(掌憲) 상사 2인, 지평(持平) 중사 2인.
서리 10인, 조례 20인.
암행어사(暗行御史) 12인.

생각건대, 《주례》 추관에, “포헌직(布憲職)이 나라의 형금(刑禁)을 맡아서 사방 방국(邦國) 및 도비(都鄙)를 다스려서 사해(四海)에 통했다.” 하였으니 우리나라 사헌(司憲)의 관부(官府)와 같다. 그러므로 사헌부를 추관에다 붙였다.
생각건대, 지금 사헌부는 실상 간쟁하는 책임도 겸했는바, 직장조(職掌條)에 나열함이 마땅하다.
생각건대, 암행어사란 한 나라의 수의직지(繡衣直指)로서, 이른바 외방(外方)으로 나가서 간활한 자를 치고 큰 옥사를 다스리던 자이며(옥사를 다스리는 것을 지금은 按覈御史라 이른다), 한 나라의 시어사(侍御史)는 곧 지금의 사헌부인데, 암행어사란 비록 항상 있는 관직은 아니나 헌부 관직에 두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된다. 그 직함은 통덕랑 사헌부장헌 흠차 패서성 암행어사(通德郞司憲府掌憲欽差浿西省暗行御史)라 하여, 반드시 열두 자리로 한 것은 열두 성에 갈라서 나가기 때문이다.

감찰원(監察院) : 도어사(都御史) 중대부 1인, 감찰어사(監察御史) 상사 4인, 중사 8인.
서리 12인, 조례 36인

생각건대, 원제에 감찰 13명이 비록 사헌부에 예속되어 있으나, 사헌부는 대간(臺諫)이 있는 관청이요, 감찰은 미관(微官)이므로 서로 통섭(統攝)되지 않으니, 벌써부터 구별했어야 할 것이다. 나는 별도로 한 원(院)을 만들고(옛 제도에는 시어사와 감찰어사가 본래부터 구별되어 있다), 한 자리 줄여서 열두 자리를 만들어, 매양 두 사람이 6조의 일과 그 조에 소속된 기관을 감찰하며, 매양 두 사람이 6부의 일을 감찰하며, 매양 한 사람이 12성의 일을 맡아서 감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릇 법을 굽히거나 뇌물을 받거나 옥송(獄訟)을 부당히 처리한 것과, 재물을 탐내어 법 아닌 짓을 한 것과, 유약하여 일을 감당하지 못하는 자에 대해 감찰이 조사해서 탄핵한다면 서울과 지방이 반드시 숙연해질 것이다.
이미 한 기관을 창설해서 전적으로 이런 일을 관장하도록 했은즉 무릇 억울한 일이 있는 자는 반드시 본원에 달려와서 호소할 것이니, 그것을 능히 살피지 못할까는 걱정할 것이 없다. 도어사(都御史) 한 자리는 대사헌이 예겸하고 상사 네 사람이 이조ㆍ병조ㆍ동중부(東中部)ㆍ서중부(西中部)와 경기ㆍ사천성ㆍ열동성ㆍ송해성을 관장하며, 중사 여덟 사람이 호조ㆍ예조ㆍ공조와 동쪽 양부, 서쪽 양부와 남쪽 네 성, 북쪽 네 성을 관장하도록 함이 또한 타당하겠다.

금제사(禁制司) : 제조 중대부 1인, 도정(都正) 하대부 1인, 안찰(按察) 상사 1인, 중사 2인.
서리 6인, 조례 10인.

살피건대, 원전에, “형조(刑曹)에 장금사(掌禁司)가 있어, 금령(禁令)을 관장한다.” 하였고, 《주례》 추관에, “금포씨(禁暴氏)는 서민 중에 난폭하여 힘을 믿고 억지를 쓰는 자와, 거짓을 꾸며서 금령을 범한 자, 말을 만들어 미덥지 못한 짓을 하는 자는 고발해 죄를 준다.” 하였고, 또 “무릇 나라에는 많은 백성이 모였으니 그 금령을 범한 자를 죽여서 조리돌리고, 모든 해례(奚隸)가 모여서 출입하는 것이니, 사목(司牧)이 그 범법한 자를 죽였다.” 하였으니, 이 또한 지극히 중요한 관직이다.
내 생각에는 옛적에 선왕이 제도를 세울 때에는 궁실ㆍ의복ㆍ음식ㆍ기구에도 모두 법도와 등급이 있었고 품급(品級)이 엄숙하여 감히 그 경계를 넘지 못하였는데, 지금에는 하례(下隷) 같은 천한 자도 재물이 있으면 경대부가 쓰는 물품을 구해다 쓰되 금하지 않는다. 상하에 분별이 없고 귀천에 등급이 없어 질서가 문란해서 법도가 전연 없다. 이른바 형조와 헌부에서 금란(禁亂)한다는 것도 천만 사람 중에 운수 나쁜 사람을 잡아다가 가끔 따질 뿐이다. 먼저 법의 조문을 밝혀서 백성이 피할 바를 알게 하지 않고, 뒤에는 잇따라 규찰만 하고 끝내 고치도록 하지 않으니, 백성을 어찌 징계할 수 있으며, 어찌 법이 설 수가 있겠는가? 내 생각에는 하나의 기관을 별도로 세워서 사치하고 참람한 것을 금지하되, 조관(朝官)이 범한 것은 헌부에 보고하고, 서민이 범한 것은 형조에 보고하여 율에 의해 엄하게 징계함을 그만둘 수 없다고 본다.
중대부 한 자리는 대사헌이 예겸하고, 하대부 한 자리는 형조 참의가 예겸하며, 안찰 네 자리는 옥당이 하는데, 이는 새로 증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헌부에 집의(執議) 한 자리와 감찰원에 감찰 한 자리를 줄였으니, 이것으로 그 직을 충수하면 증가된 것은 두 자리이다.
생각건대, 한성부(漢城府)에도 또한 금란의 명목이 있는데 지금부터는 정지시켜서, 영(令)이 여러 길로 나오지 않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다.

장리서(掌理署) : 제조 하대부 2인, 주부 중사 2인, 참봉 하사 2인.
서리 4인, 조례 6인.

장리서란 전옥서(典獄署)이다. 전옥과 포도(捕盜)는 명칭이 전아(典雅)하지 못하여 사람들이 모두 더럽게 여기므로 고쳤다.
생각건대, 원편에 “전옥 제조는 형방승지(刑房承旨)가 한다.”고 되어 있는데, 내 생각에는 형조참의도 마땅히 겸무해야 한다고 본다.

토포영(討捕營) : 제조 경 1인, 대사(大使) 중대부 2인, 종사관 중사 2인, 하사 4인, 군관(軍官) 서하사 8인, 조포 군관(助捕軍官) 60인.
서리 8인, 조례 8인.

토포영이란 포도청(捕盜廳)이다.
생각건대, 《주례》 추관에, “사려(司厲)는 도적이 사용한 기물과 재물을 몰수하는 것을 관장하는데, 그 물건의 종류ㆍ수량ㆍ가격을 표시해서 사병(司兵)에 넘기며 도적은 종을 삼아서 남자는 죄례(罪隷)로 보내고 여자는 용고(舂稿)로 보낸다.” 했고, 또 추관에, “장수(掌囚)의 직은 도적을 간수(看守)하는 것인데, 무릇 죄수로서 상죄(上罪)는 양손을 겹쳐서 수갑하고 착고(著錮)하며, 중죄도 수갑하고 착고하며, 하죄는 착고만 했다. 왕의 동족으로서 범법한 자는 양 손을 겹쳐서 수갑하고, 작위가 있는 자는 착고하여 단죄하기를 기다렸다.” 했는데, 포도는 추관 소속이다. 제조로서 경 1 명은 형조 판서가 예겸하며, 대사 두 자리는 좌우 청(廳) 대장이고 종사 여섯 자리는 자우에 각 세 자리인바, 나머지도 모두 이와 같이 하여 좌우로 가르는 것이다.

순경사(巡警司) : 제조 경 1인, 부호군 60인, 사오랑(司寤郞) 중사 6인, 순작랑(巡綽郞) 하사 60인.
서리 4인, 조례 8인.

순경사란 순장청(巡將廳)이다.
생각건대, 《주례》 추관에, “사오씨(司寤氏)가 밤 시간을 맡아서, 별(星)로써 시간을 분간하고, 야사(夜士)에게 알려서 야금(夜禁)을 하여 새벽길 가는 자를 막고, 밤길 가는 자와 밤에 놀이하는 자를 금단했다.” 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본다면 순청은 본시 추관 소속이었으므로 지금 그대로 했다.
제조 경 한 자리는 형조 판서가 예겸하며, 부호군의 예순 자리는 문대부(文大夫)가 20명이고 무대부(武大夫)가 20명이며, 잡기(雜歧) 3품관이 20명으로 그 셋을 합친 것이다. 모두 3위(衛)ㆍ호군(護軍) 중에서 나이 젊은 자를 선발하는데, 병조에서 초계(抄啓)해서 형조에 회부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문대부는 상순(上旬)에, 무대부는 중순에, 잡기호군은 하순에 각각 순행한다. 좌우 순청(巡廳)에 각 한 사람이 근무하는 것인즉, 무릇 순경사 호군이 된 자는 한 달에 오직 하룻밤만 순행할 뿐이다.
사오랑이 여섯 자리인 것은 병조 좌랑 세 사람과 형조 좌랑 세 사람을 합한 것으로, 좌우 청에 가르면 세 사람씩에 불과하다(上佐郞은 순행하지 않는다). 그 세 사람이 상순ㆍ중순ㆍ하순을 갈라 맡아, 매양 밤이 깊은 다음에 미복(微服)으로 순행하면서 순경사의 부지런함과 게으름을 살피고, 또 불시의 사고를 살피는데, 지금의 병조 낭관이 감군(監軍)하는 법과 같게 한다.
순작랑 60명은 무겸 선령관(武兼宣令官)이 20명이고, 의장국 낭관이 20명이며, 삼위의 정령관(正領官)이 20명이다. 또한 병조에서 달마다 초계하고, 형조에 회부해서 좌우 순청에 배정하는 것은 부호군을 선정하는 법과 같다.

노고원(路鼓院) : 제조 중대부 1인, 판관(判官) 중사 2인, 봉사 하사 2인.
서리 2인, 조례 4인.

노고원이란 당ㆍ송 때의 등문고원(登聞鼓院)이다.
살피건대, 《주례》에 “태복(太僕)이 노고(路鼓)를 정전(正殿) 문 밖에 세우고 그 일을 관장하는데, 원통한 사정을 알리는 자를 기다리다가, 북소리를 들으면 속히 어복(御僕)에게 아뢴다.” 했다. 그리고 송 문제(宋文帝) 원가(元嘉) 원년(424)에 위주(魏主) 태무제(太武帝)가 조서하여 대궐 왼쪽에 등문고(登聞鼓)를 달아서, 원통한 일이 있는 사람이 임금에게 알리도록 하였고, 당나라 대력(大曆) 14년(779)에는 천하에 조서하여 원통한 일이 있는 자는 등문고를 치도록 했다. 송나라 경덕(景德) 4년(1007)에는 조서하여, 고사(鼓司)를 고쳐 등문고원으로 만들고, 만백성의 사정을 아뢰도록 했는데, 소식(蘇軾)의 판등문고원(判登聞鼓院)과 정이천(程伊川)의 겸판등문고원(兼判登聞鼓院)이라는 것이 모두 이 관직이었다.
명나라 때도 역시 송나라 예에 따랐는데, 우리나라도 태종(太宗) 4년(1404)에 신문고(申聞鼓)를 설치해서 아랫사람의 원통한 사정이 통하도록 했다. 그러나 고원(鼓院)이 없고 또 북이 대궐 안에 있어서 혼금(閽禁)이 지극히 엄했다. 그러므로 오직 서울 진신(搢紳) 집 사람이 임시로 조복을 입고 들어가서 치게 된다. 먼 지방 천한 백성들이야 그 북을 한 번 만져볼 길도 없는데, 하물며 감히 치는 것이겠는가?
내 생각에는 단봉문(丹鳳門)이 편전(便殿)에서 가장 가까우니, 단봉문 밖에다 집 하나를 사고 높은 다락을 세워서 노고원(路鼓院)을 만들고, 무릇 원통한 일이 있는 자는 서장(書狀)을 품고 원에 와서 다락에 올라 북을 치면서 서장을 원랑(院郞)에게 주면 원랑은 비록 죄인과 악인의 패려하고 망령된 말이라도 각하시키는 일이 없이 그 서장을 바삐 정원(政院)에 보내서 조정의 조치를 듣도록 하는 것이 참으로 변경하지 못할 좋은 법이 될 것으로 여겨진다.
《육자(鬻子)》에 이르기를, “우(禹) 임금은 쇠북ㆍ북ㆍ경쇠ㆍ목탁ㆍ소고(鞀鼓)를 설치해서 사방 선비를 기다렸다.”고 하였고, 《서경》에는, “요(堯) 임금이 감간고(敢諫鼓)를 설치했다.”고 했는데, 이것도 마땅히 고원에서 관장할 성격이다. 그러므로 당나라와 송나라 제도의 고원은 오직 원통한 일을 아뢸 뿐만 아니라, 또한 진간(進諫)할 사람을 오도록 하고, 간의대부(諫議大夫)에게 이 고원을 관장해서 장주(章奏)를 접수하며, 아래로 기방이술(奇方異術)에 이르기까지 직접 진술할 수 있도록 했으니, 모두 사방 총명(聰明)이 널리 통하도록 한 것이다. 다만 원통할 만한 사정이 없고 말도 채택할 만한 것이 없는 자는 조정에서 처벌하여, 만민에게 감히 실없는 말로써 임금을 속이고, 법관을 무함하지 못하도록 함이 좋겠다.
제조 두 자리는 도승지가 예겸하고 판관 두 자리는 증원한다.

예빈시(禮賓寺) : 제조 경 1인, 도정 하대부 1인, 주사(主事) 중사 2인, 참봉 하사 2인.
서리 6인, 조례 10인.
전대묘 영(前代廟令) 중사 10인.

생각건대, 예빈시란 주관의 사의(司儀)ㆍ장객(掌客)인데, 사의ㆍ장객이 추관에 속한 까닭에 지금도 그대로 했다(원전에는 예조 소속이었다). 또 원편에, “제조는 호조 판서가 예겸한다.”고 했으나, 이제는 형조 판서가 예겸하도록 하였다. 원편에 본래 도정이 있는데, 근래에 줄였으나 매양 빈객을 접대할 때를 당하면 반드시 분호조(分戶曹)를 차임해서 그 일을 맡기니, 도정을 줄이지 않은 것만 같지 못한바 그냥두는 것이 좋을 듯하다.
살피건대, 2왕(二王)의 후손을 주나라에서 빈례(賓禮)로 대우하였으니 지금 신라ㆍ고려 등 전대의 제사도 또한 예빈시에서 주관하여 통솔하도록 했다.
평양 기자묘 영(箕子廟令)의 직함은, 통덕랑 예빈시 원외랑 분차기자묘영(通德郞禮賓寺員外郞分差箕子廟令)이라 하며, 다른 곳도 모두 이와 같이 한다.
기자묘 영 두 자리는 평양 사람으로 삼고, 신라 박(朴)ㆍ석(昔)ㆍ김(金) 세 조상을 합쳐서 한 묘로 만들고 그 묘의 영 두 자리는 영남하도(嶺南下道) 사람으로 삼는다. 변진가라국(弁辰迦羅國) 태조묘(太祖廟)의 영 두 자리는 황강(潢江) 서남쪽 사람으로 삼고, 고구려 태조 주몽(朱蒙) 묘의 영 두 자리는 패수(浿水) 서쪽이나 청천강(淸川江) 서쪽 사람으로 삼았다. 백제 태조 온조왕(溫祚王) 묘의 영 두 자리는 경기와 열수(洌水) 남쪽 및 사천(泗川) 서쪽 사람으로 삼고, 고려 태조묘의 영 두 자리는 송도(松都) 사람으로 삼았다. 아울러 벼슬에서 물러나 한가하게 있는 자로 임시 차임하며 전보하는 법은 없다.
생각건대, 변진은 김해 수로왕(金海首露王)의 나라인바(彊域考에 자세히 기록했다), 그의 묘는 김해에다 두는 것이 마땅하다. 백제 온조왕의 도읍은 지금의 광주(廣州) 고읍(古邑)인데, 지금 사람들이 직산(稷山)을 온조왕이 도읍했던 곳이라 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또 남한산성은 일장성(日長城)으로 온조왕과는 관계가 없으니, 온조왕의 묘는 광주 고읍에다 설치함이 마땅하다.

행인사(行人司) : 정사(正使) 공 1인, 부사(副使) 경 1인, 서장관(書狀官) 상사 1인.
제조 경 1인, 주부 예(藝) 중사 2인, 통관(通官) 3품 이하 30인, 황력재자관(皇曆䝴咨官) 중사 1인.
서리 2인, 조례 6인.
일본 통신사(日本通信使) 정사 하대부 1인, 부사 상사 1인, 서장관 중사 1인.

생각건대, 동지(冬至)에 중국 가는 사신이 비록 항상 있는 관직은 아니나, 앞서 간 사신은 4월에 돌아오는데 새로 가는 사신은 6월이면 또 출발하니 그 사이는 겨우 한 달이다. 또 별사(別使)가 가끔 출발하는 일이 있으니 또한 항상 있는 관직이라 할 수 있다. 매양 행장(行裝) 차릴 때를 당하면 별도로 마을의 집을 빌려서 그 일을 다스리니, 이를 건량청(乾粮廳)이라 한다. 그 문부(文簿)를 주장하는 자를 건량판사(乾糧判事)라 하는데 사행(使行)이 출발하고 나면 없애는 것이나, 해마다 다시 설치하니 체모의 구차스러움이 이와 같을 수 없다.
또 사명(使命)을 받들게 된 신하는 외읍(外邑)에다 편지를 보내 개가죽[狗皮]ㆍ해삼(海蔘)ㆍ다리미[熨刀]ㆍ가위[交刀] 따위의 자질구레한 물품을 요구하지 않은 적이 없고, 이것을 팔아서 행탁(行橐)에 보탠다. 당당한 천승(千乘) 나라의 사명을 받들고 국경을 나서는 사신이라 하면서 이에 걸인 행세를 하며 부끄러워할 줄을 모른다. 내 생각에는 경성 안 종루 근처나 광통교 가에다 별도로 관서를 설립하여 명칭을 행인사라 하고, 그 제조는 형조 판서가 예겸하고 주부 두 자리는 사역원(司譯院) 중사가 하는 것이 마땅하며, 매년 정월[孟春]에 외읍에다 관문(關文)을 띄워서 연례(年例)로 납부하던 것을 징수하는데, 대전(代錢) 또는 토산물을 받아서 창고에 저장했다가, 새 사신이 출발하기를 기다려서, 그 잡비에 제공하도록 하면 여러 모로 조금은 발라질 것이라고 생각된다.
생각건대, 《주례》 추관에, “대행인(大行人)의 직책은 천자의 나라에서 제후의 빈객을 접대하는 것이고 제후가 천자에게 행인을 보내는 것은 아니다.” 했으나, 행인이 기관으로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나는 행인사를 일부러 형조에다 붙였다. 또 일본과 통신할 때에도, 그 사행(使行)을 본사(本司)에서 마련하는 것이 마땅하리라고 본다.

수원사(綏遠司) : 제조 중대부 1인, 도정 하대부 1인, 안찰(按察) 중사 6인, 주사 중사 2인.
서리 4인, 조례 8인.

생각건대, 먼 지역 사람을 편하게 하는 것은 왕자의 큰 정사이다. 우리나라는 지역이 편소하여 북쪽은 2천여 리에 불과하고 남쪽은 1천 리에 불과하다. 그런데 북쪽은 모두 대륙과 연속된 지역이어서, 폐사군(廢四郡) 너머에는 왕의 덕화(德化)가 일찍이 이르지 못했다. 오직 서남쪽 바다 여러 섬이, 그 중 큰 것은 둘레가 100리나 되고 작은 것도 40~50리가 된다. 별이나 바둑알처럼 많은데다 작고 큰 것이 서로 끼여 있어 수효가 대략 1천여 개인데 이것이 나라의 바깥 울타리이다. 그런데 개벽 이래로 조정에서 일찍이 사신을 보내 이 강토를 다스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연해 고을끼리 각자 자력으로 서로 부리고 붙여서 강한 자는 많이 차지하고 약한 자는 적게 얻었다.
한 무더기 푸른 산이 분명히 이 고을 앞에 있는데 그 소속된 고을을 물으면 수백 리 밖의 아주 먼 고을에서 이를 관할하고 있다고 한다. 또 명목은 고을에 예속되었으나 실상은 다른 곳에 매여서, 혹 궁방(宮房)이 절수(折受)해갔고, 혹은 군문(軍門)에 획급(劃給) 되었으며, 혹은 고을 토호(土豪)에게 공(貢)을 실어가고, 혹은 관리와 계(契)를 만들기도 한다. 진ㆍ보(鎭堡)가 있는 곳은 수영(水營)에 매였고, 별장(別將)이 있는 곳은 경영(京營)에 매였는데, 간사한 짓이 사방에서 나와 제멋대로 백성에게 토색질을 한다. 이리하여 비록 고을에 가서 호소하고자 해도 풍파가 험해서 가자면 열흘이나 걸리고, 또는 아전들이 막아서 삼문(三門)이 지척이건만 통하기 어렵다.
그런 까닭으로 모든 해도(海島) 백성들은 비록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 있어도 부굴(負屈)을 달게 여기며 관청 출입은 맹세코 하지 않는다. 모든 어장이나 염전이 한 번 세안(稅案)에 들었으면 비록 창상(滄桑)이 여러 차례 변하여도 면할 수 없고, 책맹(舴艋 : 작은 배)의 배라도 한 번 세안에 들었다 하면, 비록 주인이 여러번 바뀌어도 빠지지 못한다. 무릇 싸우다가 사람을 죽였더라도 예사로 사화(私和)하며, 타국의 배도 태반이나 숨기고 있다가 흉년이 들면 처자를 이끌고 일본에 들어가, 거짓 표류한 사람이라고 일컬어서 목숨을 부지하고, 도둑이 이르면 병기와 양식을 가지고 먼저 험한 곳을 차지해서 제멋대로 병진(兵陳)을 만들어 조정 명령을 거부하기도 한다. 이는 대개 신라ㆍ고려 때부터 있었으니 그 유래가 오래다. 내가 오랫동안 바닷가에 있었으므로 그 실정을 익히 알게 되었다.
내 생각에는 별도로 한 관청을 세워서 온 나라 섬을 관장하고 그 명칭을 수원사(綏遠司)라 하여 그 판적(版籍)을 맡고 부세를 고르게 하며, 침어(侵漁)를 금단하고 질고(疾苦)를 제거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법을 세우는 초기에는 감찰어사를 분견(分遣)하되 규정을 만들어주고 여러 섬을 순행하면서 강계(彊界)를 바루고 호구를 기록하며 폐막(弊瘼)을 물은 다음, 돌아와 모여서 법제를 편저(編著)하여 여러 섬에 반포하고 그 법에 따르도록 한다. 또 3~4년마다 본사 낭관(本司郞官)을 보내 여러 섬을 암행하면서 간활한 짓을 살피며, 또 섬 백성에게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 있는 것은 바로 본사에 호소하도록 하여, 여러 섬 백성에게 의지할 곳이 있도록 함은 참으로 먼 곳 백성을 편하게 하는 큰 정사이다.
어떤 사람은 나라의 재력이 빈약한데 무엇으로 관직을 증설하겠느냐고 하지만, 내 생각에는 섬은 우리나라의 그윽한 수풀이니 진실로 경영만 잘하면 장차 이름도 없는 물건이 물이 솟아나듯, 산이 일어나듯 하여 수원사는 장차 호조와 같게 될 참인데, 낭관 두어 사람이 어찌 능히 다 먹을 수 있겠는가? 내가 일찍이 나주 섬에 사는 백성을 만나서 그 고통스러운 일을 물은즉, 열두 섬에서 해마다 읍 주인에게 증여하는 곡식이 6천여 섬이고, 돈ㆍ솜ㆍ생선ㆍ건어물 따위 여러 가지 물건이 또 이와 같은 액수인데, 곧 나주 한 곳 소교(小校)가 먹는 것이라 한다. 지금 여러 도(道) 수령의 1년 동안 월름(月廩)이 비록 큰 읍이라도 1천 석이 못되는데 여수원사(綏遠司)러 고을 소교들이 먹는 것은 이와 같으니, 나라에 어찌 법이 있다 하겠는가? 다만 이 6천 석을 수원사에다 붙이더라도 풍족한 관청이 되기에 족할 것이다.
생각건대, 수원사를 이미 세웠다면, 제주와 폐사군 및 만하 6진(滿河六鎭)의 일도 또한 관장함이 마땅한바 이것은 직장편(職掌篇)에 자세히 적었다.
생각건대 제조(提調) 한 자리는 형조 참판이 예겸하고 도정(都正) 한 자리는 부제학이 예겸해서 그 권세를 중하게 하는 것이다. 안찰랑(按察郞) 여섯 자리는 경기ㆍ사천ㆍ완남ㆍ무남ㆍ황서ㆍ영남 여러 감찰에게 예겸하도록 하며, 오직 주부(主簿) 두 자리만 신규로 증설하는 것이다.

사역원(司譯院) : 제조 공 1인ㆍ상대부 1인ㆍ중대부 1인, 부정예(副正藝) 상사 1인, 판관(判官) 중사 2인, 봉사(奉事) 하사 4인.
한학교수(漢學敎授) 중사 4인, 훈도(訓導) 하사 4인, 몽학훈도(蒙學訓導) 하사 2인, 만학훈도(滿學訓導) 하사 2인, 왜학훈도(倭學訓導) 하사 2인.
서리 4인, 조례 4인.

생각건대 《주례》 추관에, “상서(象胥)의 직은 만이(蠻夷)ㆍ민맥(閩貉)ㆍ융적(戎狄)의 나라들을 맡아서 왕의 말을 전하고 타일러서 화친하며, 때에 따라 빈객이 들어오면 예에 맞추어서 말을 전한다. 무릇 나고 들며 보내고 맞이하는 예절을 갖추고 폐백(幣帛)과 언사(言辭)로써 접대한다.” 했다. 역관(譯官)은 곧 상서인 까닭으로 형조에 붙였다(원전에는 예조 소속으로 되어 있다).

장서원(掌胥院) : 제조 경 1인, 도정 하대부 1인, 첨정(僉正) 상사 1인, 안찰(按察) 중사 2인.
서리 2인, 조례 10인.

살피건대, 원전의 형조에 원악향리조(元惡鄕吏條)라는 것이 있는데, 그 조목에서 말한, 수령을 농락하여 권세를 제멋대로 하고 민폐를 꾸미는 자, 은밀하게 뇌물을 받고 부역을 고르게 하지 않는 자, 부세를 징수할 즈음에 부당한 재물을 거두어서 함부로 사용한 자, 양민을 마구 차지해서 숨겨놓고 부리는 자, 전장(田庄)을 많이 차지하여 백성을 부려서 경종(耕種)하는 자, 마을에 횡행하면서 백성을 침해하고 사리를 영위하는 자, 존귀한 세도 집에 아부하여 본역(本役)을 모피(謀避)한 자, 부역을 피해서 도망친 자를 촌락에 숨겨준 자, 관가의 위세에 기대어 백성을 침해한 자, 양가 여자 및 관비를 첩으로 만든 자 등은 누구든지 신고하는 것을 허가하며, 사헌부에서 죄를 따져서 벌을 주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도형(徒刑)에 해당하는 자는 영구히 본도(本道) 작은 역(驛)에 역리(驛吏)로 붙이고, 유형(流刑)에 해당하는 자는 영구히 타도(他道) 작은 역에 역리로 붙인다. 그리고 고을 수령이 그들의 범죄를 알면서도 검거해서 조사하지 않은 자는 제서(制書)를 어긴 율로써 논죄(論罪)한다고 했다. 법이 잘 만들어지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법이 있어도 시행하지 않으면 법이 없는 것과 같다.
조종조(祖宗朝)에서 민생을 위해 깊이 염려한 것이 이와 같건만 지금은 이를 제쳐두고 시행하지 않으니 또한 어찌하겠는가? 내가 오래도록 민간에 있으면서 향리들의 하는 일을 익히 보았다. 그 나라를 병들게 하고 백성을 해롭게 하는 짓이 이루 형언할 수 없다. 그리하여 《향리론(鄕吏論)》 열 편을 지어서 그 폐단을 갖추어 말했거니와 진실로 이때라도 교정하지 않으면 앞으로 닥쳐올 화란(禍難)은 반드시 말하기도 어렵게 될 것이다. 나라가 다 망하고 백성이 다 죽은 다음이라야 그만둘 것이니, 내가 감히 실정에 지나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별도로 한 관청을 세워서 전적으로 열두 성(省) 향리를 관장하도록 함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 정원을 정하고, 그 조례를 반포하며, 그 한계를 엄하게 해서, 한 가지라도 위반하는 것이 있으면 곧 본원(本院)에서 거론하여 따지게 한다. 이렇게 한다면 거의 그 처음 발하는 불꽃을 없애고, 그 흘러가는 물살을 돌이킬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 방법 가운데 한 가지는, 전지(田地)와 백성의 수효를 요량해서 그 정원을 차등 있게 하는데, 비록 큰 읍이라도 30명을 넘지 않도록 하는 것이요, 한 가지는 향리는 세습하지 못하며 현손(玄孫) 대에 이른 다음이라야 이에 구애됨이 없게 하는 것이요, 한 가지는 향리는 한 가족이 전적으로 하지 못하도록 해서 친형제끼리 함께 될 수 없으며 8촌 안에는 세 사람을 넘지 않도록 하는 것이요, 한 가지는 이방(吏房)ㆍ창리(倉吏)ㆍ도서원(都書員)ㆍ균역리(均役吏)ㆍ대동리(大同吏) 등 무릇 돈과 곡식을 출납하는 권한이 있는 임무는 이웃 고을 아전이 와서 하도록 하여 지금 영리(營吏)와 같게 하는 것이요, 한 가지는 이방의 임무도 또한 매년 바꾸어서 모름지기 열두 해를 지난 다음이라야 이에 재임(再任)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해마다 첫봄에 아무아무가 소임으로 된 것을 모두 판에다 적어서 본원에 보고하며, 갈거나 바꾸는 일이 있을 때에도 사유를 갖추어서 급보하도록 하는데, 본원에서 차첩(差帖)을 작성ㆍ발급하며, 본원 차첩이 없는 자는 행공(行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또 어사가 각도에 갈라 나갈 때에는 반드시 본원에서 그 성, 여러 고을의 이안(吏案)을 받아서 간다. 그리하여 혹 법제에 어김이 있는 자는 어사가 밝혀서 다스린다. 수십 년을 이와 같이 하면, 그 기세가 조금 쇠해지고 간활한 짓도 조금은 그칠 것이다. 만약 한결같이 맡겨두어, 쥐나 개 같은 좀도둑으로만 여기고 금제함이 없으면 나라가 망하는 근본도 반드시 여기에 있지 않는 것이 없다. 아울러 《향리론》에 자세히 말했기에 지금 다시 기술하지 않는다.
도정은 일찍이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자로, 낭관은 아울러 옥당으로 삼는데, 반드시 청백하고 강직한 자라야 이 관직에 있을 수 있다. 만약 그런 사람이 아니면 나태가 여전하여 긴하지 않은 관아를 하나 더 보탤 뿐이다.
생각건대, 저리(邸吏)의 폐단이 향리보다 심한바, 내가 어릴 때에 보니, 이른바 경주인(京主人)ㆍ영주인(營主人)이라는 것은 모두 천한 종 하급 졸개들로서 허리를 굽히고 달리면서 사역(使役)을 받드는데, 대개 그때는 늠료(廩料)가 빈약하고 권력이 성하지 못했으므로 비천한 자가 맡았던 것이다. 수십 년 이래로 세상 물정이 크게 변하고 조정 기강이 날로 무너져서 경주인 자리를 매매하는 값이 혹 8천 냥이나 되며, 영주인 자리를 매매하는 값은 혹 1만 냥에 이르기도 한다. 대개 그 역가(役價)가 날로 증가되어 남는 이익이 매우 많으므로 값이 전보다 100배나 되었다. 값이 100배인즉 이익이 100배라는 것을 알 수 있고, 그 이익이 100배인즉 백성을 벗겨낸 물건이 100배라는 것도 알 수 있다.
이리하여 경저(京邸)와 영저(營邸)에는 모두 포악하고 간사한 자가 차지하고 있다. 재물이 매우 풍부하고 권력이 더욱 강해지니 백성을 벗겨내는 것도 더욱 심한바, 백성의 큰 병통으로는 이보다 더한 것이 없다. 그렇게 되는 까닭이 넷인데, 첫째, 조정 귀신(貴臣)이 저리 자리를 사기 때문이고, 둘째, 수령이 뇌물을 받기 때문이며, 셋째, 감사가 법을 어기는 일이 많기 때문이고, 넷째, 수령이 염문(廉問)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수십 년 이래로 문무 귀신이 남몰래 저리 자리를 사들여 청지기에게 맡기고 앉아서 그 이익을 거두어들인다.
이리하여 진짜 저리는 당(堂) 위에 앉았는데 가짜 저리가 뜰 아래 엎드려서 무릇 고소하는 일이 있으면 극진하게 따르지 않는 것이 없다. 이것이 경주인의 권세가 날로 더하고 달로 성해지는 까닭이다. 또 모든 저리는 수령의 집에 뇌물을 보내고 역가를 증액하도록 요청하는데, 뇌물이 다섯이면 역가도 다섯이 보태어지고, 뇌물이 열이면 역가도 열이 보태어진다. 수령은 한때 뇌물을 먹는 것뿐이지만 저리는 무궁한 이를 누리니, 이것이 경주인의 이가 날로 보태어지고 달로 성해지는 까닭이다.
수십 년 이래로 한 도를 안무(按撫)하는 신하가 망령되게 스스로 존대하게 여겨서 감영(監營)에 소용되는 여러 가지 물품을 모두 공물로 만들었다. 여러 읍 주인을 공인(貢人)으로 만들어서 책임지고 제공하게 하면서 이른바 본값은 열에 하나도 갚지 않는다. 이리하여 저리의 소원이면 극진하게 따르지 않는 것이 없어, 그들의 한없는 욕심을 채워주고 제 허물을 속죄한다. 이른바 역가미(役價米)진상가미(進上價米)에 보태어지는 것은 있어도 줄어드는 것은 없고 아무런 제한이 없다. 심한 것은 곤전(坤殿)이 새로 임어(臨御)하고 자전(慈殿)이 위로 올라가면 새 곤전[新殿] 진상이 증가하는 것은 있어도 옛전[舊殿] 진상이 줄지는 않는다.
어사가 적발해도 가고 나면 감사가 다시 그대로 하여 백성의 말이 물끓듯 하여도 바로잡아지지 않으니, 이것이 영주인의 이익이 날로 보태어지고 달로 성해지는 까닭이다. 또 무릇 감사가 수령들의 선함과 악함을 염탐할 때는 모두 영속(營屬)을 이용하는데, 이들은 모두 영주인의 인아족당(姻婭族黨)이다. 그러므로 두루 같이 화응(和應)하여 한덩어리로 뭉친다. 그 수령이 저리에게 이로우면 아 대부(阿大夫)의 칭찬이 날로 치솟고, 저리에게 방해되면 즉묵 대부(卽墨大夫)의 나무람이 날로 성해지는데, 저리가 흘겨보면 백에 하나도 온전한 사람이 없다. 수령은 그렇게 되는 줄 알기 때문에 두려워서 벌벌 떨며, 그들이 원하는 대로 따를 뿐이니 이것이 영주인의 권세가 날로 더하고 달로 성해지는 까닭이다. 양호(養戶)하고 방결(防結)해서 나라 곡식을 번롱(翻弄)하는 자가 향리보다 더 심한 사람은 없으니, 지금 고치지 않으면 끝내 후회가 있을 것이다. 내 생각에는 서울과 지방 저리도 또한 장서원에서 주관하여 그 법제를 바로잡고, 그 횡포를 금단하는 일은 그만둘 수 없다는 것이다.

장례원(掌隸院) : 제조 하대부 1인, 사의(司議) 상사 1인, 사평(司評) 중사 2인.
서리 2인, 조례 8인.

생각건대, 장례원은 본시 요직인데, 근래에 혁파하여 형조에 합병시켰다. 그러나 노예는 나라의 큰 정사이니, 별도로 한 관청을 만들어서 그 일을 전적으로 관장하도록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시노비(寺奴婢)ㆍ역노비(驛奴婢)ㆍ관노비(官奴婢)ㆍ사노비(私奴婢)에 대해서, 모든 법금(法禁)을 정리하고 쟁송을 판결함이 마땅하다. 제조는 형조 참의가 예겸한다.
살피건대, 《주례》에, 사례(司隸)는 원래 추관(秋官) 소속으로서 죄례(罪隷)ㆍ만례(蠻隸)ㆍ민례(閩隸)ㆍ이례(夷隸)ㆍ낙례(貉隸)가 예속되었는데, 원전에 장례원을 추조(秋曹)에 붙였던 것은 근거한 데가 있었다.
생각건대, 나라 제도에 중들은 예조에 예속되었는바, 이것은 신라ㆍ고려 시대부터 내려온 법이나, 중들은 이상한 풍속에 익숙하니 장례원에서 관장함이 마땅하겠다.

양형사(量衡司) : 제조 공(公) 1인과 경 2인, 도정 하대부 1인, 첨정 상사 2인, 안찰랑(按察郞) 12인, 주사(主事) 중사 2인.
서리 2인, 조례 12인.

생각건대, 율(律)ㆍ도(度)ㆍ양(量)ㆍ형(衡)을 한결같게 하는 것은 왕자의 대법(大法)이다. 순 임금은 선기옥형(璿璣玉衡)을 살펴서 정사를 가지런하게 하고 사방에 나가서 순행(巡行)할 때에 율ㆍ도ㆍ양ㆍ형을 한결같게 하는 것을 첫째 용무로 삼았다. 주 무왕(周武王)은 건국 초기에 제일 큰 정사가 “저울질을 조심하여, 법도를 살피는 것이다.”라고 했고, 명당위(明堂位)에서 주공(周公)이 섭정하던 초기의 제일 큰 정사를 기록하되, “예악(禮樂)을 마련하고 도량(度量)을 반포하였다.”고 했으며, 월령(月令)에는, “춘분(春分)과 추분(秋分)에 도와 양을 동일하게, 형(衡)과 석(石)을 고르게, 두(斗)와 통(筒)을 모나게, 권(權)과 개(槪)를 바르게 한다.”고 했다.
《관자(管子)》 칠법(七法)에는, “척ㆍ촌ㆍ형ㆍ석ㆍ두ㆍ곡(斛)ㆍ각(角)ㆍ양을 법이라.” 했고, 《오월춘추(吳越春秋)》에는, “우 임금이 권ㆍ형을 조절하고 두ㆍ곡을 평균하게 하는 것으로써 법도를 했다.” 하였다. 황ㆍ왕ㆍ제ㆍ패(皇王帝覇)가 비록 정당하고 간휼(奸譎)함은 같지 아니하나 다 여기에 힘을 쏟았는바, 나라의 큰 정사가 이것을 넘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도ㆍ양ㆍ형의 무법(無法)이 우리나라보다 심한 데가 없다. 한 성(城) 안이라도 저자마다 같지 않고, 한 고을 안에도 마을마다 같지 않으며, 한 마을 안에도 집마다 같지 않고, 한 집안에서도 거두고 내는 것이 같지 않아서, 그 전래되는 폐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아전들은 이것을 인연해서 간사한 짓을 부리고, 장사치는 의심하고 현혹되어 물자를 유통시키지 못하니, 묘당(廟堂)에 있는 신하는 시가(時價)를 들었으나 사방 실정을 알 수가 없고, 일을 맡은 신하는 수입을 요량해서 지출할 수가 없으며, 감수(監守)하는 신하는 문부(文簿)를 상고해서 실수(實數)를 책임지울 수 없다.
내가 일찍이 보니, 솜(棉絮) 1부대가 동쪽 집 저울로는 4근이었고 서쪽 집의 저울로는 12근이 되더니, 저자에 팔려고 한즉 32근이나 되었으며, 관청에 들어가니 무려 48근이나 되었다. 그런데 직조하는 집에 주니 도로 10근이라 하는 바, 천하에 알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일이었다. 내 생각에는 전적으로 한 관청을 세워서 이 일을 관장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무릇 6부와 12성의 도ㆍ양ㆍ형이 털끝만큼이라도 어긋남이 있거나 저울눈에 어김이 있는 것은 극률(極律)을 써서, 그 사람은 죽이고 그 재물은 몰수하며, 그 관원을 처벌하고 그 법령을 선포하여 온 나라 백성에게 모두 이보다 더 엄중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도록 하여야 한다. 그런 다음이라야 병제를 논할 수가 있으며 경용(經用)을 정할 수가 있을 것이다.
본사에서 해마다 저울과 자 1천 200개씩을 만들어서 12성에다 반포하면 12성에서는 해마다 저울과 자 1만 개를 만들어서 본사에 실어오고, 또 해마다 저울과 자 수만 개를 만들어서 민간에 주는데 모두 그 값을 받는다. 본사에서 또 12만 개를 6부 갈라주어서 민간 소용으로 제공, 서울과 외방 제도를 서로 비교하여 말ㆍ섬 및 평두목[槪]을 서로 같게 한다. 6부에 소용되는 것은 본사에서 만들고, 여러 성에 소용되는 것은 여러 성에서 만들되 모두 백성에게서 값을 받는다. 오직 그 사기하는 것만 때에 따라 살피는데, 모든 저울과 자ㆍ말에는 모두 도장[印章]과 표지(標識)가 있으며, 혹 개인이 만든 것은 사전(私錢)을 만든 것과 율을 똑같이 적용한다. 이렇게 하면 도ㆍ양ㆍ형 법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생각건대, 도ㆍ양ㆍ형은 형금(刑禁)의 첫째이므로 형조에 붙였다.
안찰랑(按察郞) 12자리는 감찰이 예겸한다.

권계사(券契司) : 제조 중대부 1인, 주부 중사 2인.
서리 2인, 조례 8인.

생각건대, 《주례》에, 질제(質劑)와 권계(券契)를 모두 유사(有司)가 관장했는바, 그 속임수를 금하고 쟁송을 그치게 하기 위함이다. 지금 중국법은 무릇 매매하는 일이 있으면 홍계(紅契)를 요구하는데, 홍계란 인권(印券)이다. 우리나라는 모든 궁실ㆍ전원(田園)ㆍ노비에 대해서는 모두 개인 스스로 문서와 말을 만들 뿐, 일찍이 법사(法司)의 관유(關由)를 받는 일이 없다. 그러다가 사기가 탄로나고 쟁송이 일어난 다음이라야 비로소 법사에 통하는데, 법사인들 무엇으로써 그 사실을 알 수 있겠는가? 지금 마땅히 철(鐵)로 작은 판을 만들어 오직 연월일(年月日) 두어 글자 및 권계사 제준(券契司題準) 등의 글자를 쓰고, 매매하는 사람의 성명 및 물건의 명목 등을 써넣을 공간을 남겨놓는다.
그리고 그 위아래에는 용(龍)의 머리 구름(雲) 따위를 머리털같이 가늘게 새겨서 위조하지 못하도록 한 다음 단단한 종이에다 박아내어, 매양 매매하는 일이 있거나 혹 자녀에게 분급(分給)할 일이 있으면 모두 본사에 와서 문권(文券)을 청구하며, 관에서는 글자를 써넣고 도장을 찍어서 발급하는 한편, 별도 문권에다 기록해서 본사에 비치할 것이며 그 물건 값의 100분의 1을 관에다 바치도록 할 것이고, 해마다 문권 수만 장을 여러 성에 갈라주어서 서울과 지방이 모두 같게 하였다가 무릇 송사하는 자가 있으면 먼저 그 권계를 상고하여 만약 관에서 발급한 문권이 아니면 곧 접수[聽理]하지 않고 그 재물은 관에서 몰수한다.
이것 또한 왕자가 만민을 제어하는 대권(大權)이다. 방채(放債)ㆍ세대(稅貸)ㆍ전당(典當) 같은 것도 또한 문권을 받도록 하나 별도 문적에는 기록하지 않으며, 기구 같은 작은 물건으로서 값이 50냥 미만인 것은 사적인 문권으로 하는 것을 허가하나 궁실ㆍ전원ㆍ노비 따위는 비록 적더라도 허가하지 말 것이다.
제조 1자리는 형조판서가 예겸한다.
생각건대, 질제와 권계는 본시 지관(地官) 소속이었으나 법금(法禁)과 관계되는 것이므로 지금은 형조에 붙였다.

진관사(津關司) : 제조 하대부 1인, 사관승(司關丞) 하사 3인, 사도승(司渡丞) 하사 4인.
서리 2인, 조례 2인.

생각건대, 《주례》에, 사관이라는 관직이 있는데 물화의 출입을 맡아서 벌금을 관장하며 부세 징수에 간여했다. 무릇 관문을 통하여 나오지 않은 물화는 몰수하고 화주는 처벌했다. 이것은 《맹자》에 말한 “기찰(譏察)만 하고 부세는 징수하지 않았다.”라는 것과는 같지 않다. 예전에는 이런 법이 있었는데 다만 문왕(文王)이 시행하지 않았을 뿐이다. 당나라와 송나라의 제도는 관문과 나루터의 기금(譏禁)을 형부(刑部)에서 관장했다. 우리나라 제도에도 삼전도(三田渡)ㆍ한강도(漢江渡)ㆍ노량도(露梁渡)ㆍ양화도(楊花渡)에 도승(渡丞)이 있었는데, 지금은 별장(別將)이라 부르며 오직 관문이 설치된 곳은 없다. 내 생각에는 모화령(慕華嶺)은 서도(西道) 길목의 큰 관(關)이고, 망우령(忘憂嶺)은 영동(嶺東) 길 방면의 큰 관이며, 수유령(水踰嶺)은 영북(嶺北) 길목의 큰 관이니, 이곳에는 아울러 관방(關防)을 관장하는 관원을 두어서 기금(譏禁)하도록 함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큰 물화(物貨)가 출입할 때에는 1천분의 1세를 거두어서 공서 수용(公署需用)에 보충하며, 이들 관원이 모이는 관서를 형조 곁에 설치하여 3관(關)과 4도(渡) 관원이 때에 따라 회의, 평상시에는 수직(守直)하는 관원이 없고, 오직 서리와 조례만 머물러 있어서 전령(傳令)에 대비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금물(禁物)이 은밀하게 나가는 것도 또한 살핀다.
제조는 형조 참의가 예겸한다.

직금서(職金署) : 제조 하대부 1인, 주부 중사 2인.
서리 2인, 조례 4인.

살피건대, 《주례》 추관에, “직금관(職金官)이 있어, 사(士)의 금벌(金罰)과 화벌(貨罰) 받는 일을 관장해서 사병(司兵)에 바쳤다.” 하였으니, 금벌과 화벌은 지금의 속전(贖錢)과 같다.
지금 제도는 속전을 모두 형조에서 징수하는데 체모를 존엄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부터 속전은 모두 직금서가 주관해서 형조에 바치며 오직 징수한 속전의 10분의 1을 떼어서 공서의 수용을 돕도록 하여야 되겠다.
생각건대, 적몰(籍沒)한 죄인의 가산을 호조에 바치는 것은 사리에 타당하지 못하다. 내 생각에 지금부터는 적몰한 재물을 직금서가 받아서 그 전토(田土)는 통례원(通禮院)ㆍ육보서(六保署)ㆍ예빈시(禮賓寺) 같은 가난한 아문에 갈라주어서 공용에 보충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노비는 장례원에 붙이고, 금ㆍ은ㆍ동철(金銀銅鐵)로 된 기구는 직금서에 붙이며 잡화(雜貨)는 모두 본사(本司)에서 발매해서 또한 가난한 기관에 갈라주는 것도 마땅하다는 것이다. 다만 옥사(獄事)에 억울함이 있어 혹 후일에라도 신설(伸雪)하게 되면 적몰한 것을 본집에 돌려줌이 마땅하다. 그러므로 그 몰수한 재물을 기록한 문부는 본사에 두어서 후일에 대조하게 되는 경우에 대비하여야 된다.
살피건대, 탐장(貪贓)을 징계하는 법으로는 몰수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 금부에서 그 장물(臟物)을 계산하고 직금서에 내어 맡겨서 독려 징수하도록 하여, 가난한 기관에 주거나 혹 사병시(司兵寺)에 붙여서 군기를 제조하는 것도 또한 옛 법이다.

장역서(掌域署) : 제조 경 1인, 판관 상사 1인, 주부 중사 2인.
서리 2인, 조례 6인.

생각건대, 장역서란 주관(周官)의 묘 대부(墓大夫)이다. 묘 대부가 나라 안 무덤 지역을 관장하여 도본(圖本)을 만들고 백성으로 하여금 씨족장(氏族葬)을 하도록 하며, 금령을 맡아서 그 위(位)를 바루고 그 도수(度數)를 관장하여 모두 사지역(私地域)이 있도록 했고, 묘지를 다루는 모든 옥송(獄訟)을 판결한다고 하였는데, 본디 춘관(春官) 소속이었으나 지금은 묘지에 관한 옥송이 자주 일어나기 때문에 형조에 붙였다. 제조는 형조 판서가 예겸한다.
생각건대, 주공(周公)이 마련한 족장의 제도는 《예경(禮經)》에 기재되어서 이와 같이 분명한데, 곽박(郭璞) 이래로 풍수설(風水說)이 날로 새롭고 달로 성해져 묘역(墓域)을 널리 차지하고 길운(吉運)을 오로지 하고자 한다. 무릇 묘역 수백 보 안은 다른 사람이 와서 장사하는 것을 금하는데 혹 압맥(壓脈)이라 하며 또는 대충(對衝)이라 일컬어서, 두들겨 싸우며 파헤치기도 하여 옥송이 자주 일어난다. 내 생각에는 지금부터 족장(族葬)의 제도를 거듭 밝히고 풍수를 혹신(惑信)하는 자는 본서에서 잡아다가 징계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12성에 묘지 관계의 송사에 억울하게 진 것은 바로 본서에 호소하도록 함도 또한 풍속을 바로잡고 옥송을 그치게 함에 한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생각건대 호전(戶典)에 “판목(板木) 장사는 반드시 귀후서(歸厚署) 공문[帖文]을 받는데, 공사간 관재(棺材)로 경강에 닿은 것은 귀후서에서 10분의 1을 수세(收稅)하고, 수장(修粧)하여도 관재(棺材)에 합당하지 못한 송판(松板)은 본조(本曹)에서 10분의 1을 수세한다.” 했는데, 이제부터는 귀후서에 관한 법을 장역서에 옮겨서 국내의 관곽(棺槨) 재목은 모두 본서에서 급부(給付)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다. 다만 옛 법이 소략(疎略)하여 간사한 속임수가 날로 불어나니 조례를 정리해서 백성에게 금령을 범할 수 없게 한 다음이라야 이에 실효가 있을 것이다. 본디 귀후서에서 예장(禮葬)하는 것을 주관했으나 이것은 애영서(哀榮署)에서 주관할 것이다.

율학서(律學署) : 제조 경 1인, 교수 중사 2인, 훈도(訓導) 하사 2인, 검율(檢律) 하사 2인.
생도(生徒) 40인, 증액생도(增額生徒) 40인.

생각건대, 근세 사대부는 율서(律書)를 전혀 읽지 않는데 관직에 있으면서 법을 범하는 것이 여기에 많이 연유된다. 내 생각에는 매양 대정(大政)을 할 때에는 먼저 형조부터 율서를 시강(試講)하고, 능히 강한 자가 수령이 되도록 허가하면 거의 도움이 있다는 것이다.

[주D-001]용고(舂槀) : 용인(舂人)과 고인(槀人)의 준말. 《주례》 지관에, 용인은 제향(祭享)ㆍ빈객(貧客)ㆍ연향(燕饗) 따위에 소용되는 쌀을 관장하고, 고인은 외조(外朝)에 직숙(直宿)하는 자의 음식과, 기로(耆老)ㆍ고아(孤兒)와 왕궁을 숙위하는 경ㆍ대부의 자제의 식물(食物)과 제사에 쓸 개[犬]의 먹이를 관장한다 하였음.
[주D-002]진신(搢紳) : 벼슬한 사람을 일컫는 말.
[주D-003]편전(便殿) : 임금이 평상시에 거처하는 집.
[주D-004]《육자(鬻子)》 : 주(周)나라 때 육웅(鬻熊)이라는 사람이 지은 책 이름.
[주D-005]분호조(分戶曹) : 나라에 중대한 일이 있을 때에 임시로 설치해서 호조의 일을 분담하던 관청.
[주D-006]2왕(二王) : 우(禹) 임금과 탕(湯) 임금을 말함.
[주D-007]천승(千乘) 나라 : 승(乘)은 병거(兵車)를 말하는 것. 제후의 나라는 병거 천 양(輛)을 제작하고 유지할 수 있다는 것.
[주D-008]폐사군(廢四郡) : 두만강ㆍ압록강 건너편의 여진족이 침입하는 것을 방비하기 위해서, 조선 세종 때에 최윤덕(崔潤德)을 시켜서 설치했던 여연(閭延)ㆍ자성(慈城)ㆍ무창(茂昌)ㆍ우예(虞芮) 네 고을을 단종 때에 폐지했으므로 폐사군이라 함.
[주D-009]절수(折受) : 임금으로부터 땅이나 결세(結稅)를 자기 몫으로 잘라 받는 것.
[주D-010]획급(劃給) : 몫으로 떼어서 주는 것.
[주D-011]삼문(三門) : 대궐이나 관아 앞에 있는 문으로서 정문(正門)ㆍ동협문(東夾門)ㆍ서협문(西夾門) 세 문으로 된 것.
[주D-012]창상(滄桑) :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과 같음.
[주D-013]만하 6진(滿河六鎭) : 조선 시대 세종 때에 김종서(金宗瑞)에게 두만강 가에 여섯 진을 설치하도록 시켰는데, 그 6진은 경원ㆍ경흥ㆍ부령ㆍ온성ㆍ종성ㆍ회령이다.
[주D-014]도형(徒刑) : 1~3년 복역하는 형벌.
[주D-015]유형(流刑) : 절도(絶島)나 원지(遠地)에 귀양보내는 형벌.
[주D-016]염문(廉問) : 어떤 사실을 남몰래 조사하는 것.
[주D-017]공인(貢人) : 관청에 물품을 공급하고 값을 받아가는 사람.
[주D-018]역가미(役價米) : 경저리(京邸吏)와 영저리(營邸吏)가 역가조(役價條)로 백성에게서 받아내는 쌀.
[주D-019]진상가미(進上價米) : 진상하는 물품 값으로 백성에게서 받아내는 쌀.
[주D-020]저리에게 방해되면 ……날로 성해지는데 : 이 말은 전국 시대(戰國時代) 제 위왕(齊威王)이 즉묵 대부(卽墨大夫)를 불러서 “그대를 헐뜯는 말이 매일 나에게 들려오므로 사람을 시켜 알아보니 실상은 치민을 잘했다. 아 대부(阿大夫)에 대해서는 기리는 말이 자주 들리므로 알아보니, 나의 좌우 사람에게 뇌물을 먹였던 것이고, 치민은 실상 좋지 못했다.” 하고 아 대부와 뇌물 먹은 자를 삶아 죽였다는 고사.
[주D-021]양호(養戶) : 부유한 자가 가난한 자의 조세를 대납하여 공역(公役)을 면하고 그 대신 제 집에서 종처럼 부리는 일.
[주D-022]선기옥형(璿璣玉衡) : 옛날에 천문을 관측하던 기계. 혼천의(渾天儀)라 하기도 함.
[주D-023]명당위(明堂位) : 《예기》의 한 편명.
[주D-024]질제(質劑) : 계약문서. 문서 중에 긴 것은 질, 짧은 것은 제라고 함(《주례》 天官 小宰註).
[주D-025]속전(贖錢) : 죄를 지은 자에게 처벌받는 대신 바치게 하던 돈.
[주D-026]곽박(郭璞) : 진(晋)나라 사람. 곽공(郭公)에게서 청낭서(靑囊書)라는 비서(秘書)를 받은 다음부터 오행(五行)ㆍ천문(天文)ㆍ복서(卜筮)를 환하게 알게 되었다고 함.
[주D-027]풍수설(風水說) :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에 기초해서 집터ㆍ무덤 같은 것의 방위와 지형의 좋고 나쁨을 분간하는 학설.
[주D-028]압맥(壓脈) : 길(吉)한 기세가 뻗쳐오는 산맥을 다른 것이 가로질러서, 그 기세를 눌러버리는 것.
[주D-029]대충(對衝) : 묘 터의 지형과 바위에 따라서 어떤 방위에는 다른 묘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곳.
[주D-030]대정(大政) : 해마다 12월에 시행하던 인사 행정. 전국적으로 실시하여 그 규모가 컸으므로 대정이라 함.


   다음백과 사전의 내용을 발췌


 

병자호란 (丙子胡亂)은 1636년 12월부터 1637년 1월 사이에 벌어진 전쟁으로, 청나라 홍타이지조선에 제2차로 침입함으로써 발발하였다. 병자호란은 조선 역사상 가장 큰 패배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데, 몽골에 대한 항쟁이 40여 년간 지속되었고, 임진왜란에서는 7년간의 싸움 끝에 왜군을 격퇴한 데 반하여, 병자호란은 불과 두 달 만에 조선의 굴복으로 끝나고 말았다. 병자년에 시작하여 이듬해인 정축년에 끝났으므로 병정노란(丙丁虜亂)이라고도 한다.

 

배경

여진족은 그들이 세운 금나라가 몽골의 침략을 받아 멸망한 후 만주 일대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통일된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던 이들은 명나라와 조선 모두에 대하여 이중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던 중 여진의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규합, 16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여진을 통일하기에 이르렀다. 그에 비해 명나라의 국력은 날로 쇠약해져 갔는데, 잦은 군대 동원과 이에 따른 경제적 손실은 명나라의 몰락에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누르하치가 명나라에 대하여 전쟁을 선포하고 공격해 수세에 몰리자 명나라는 조선에게 소총수 7000명을 준비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자 누르하치는 군대를 파견하지 말 것을 조선 정부에 강력히 요구했다. 당시 조선 정부는 광해군과 그의 즉위를 도운 대북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조선이 국내 수비에 치중하는 것이 후방 수비라는 차원에서 유익하다며 명나라의 요구에 미온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원군을 파병해 도운 일을 감안하면 원병을 파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광해군은 명나라에 원군을 보내되 싸움이 시작될 경우 항복해 조선의 파병이 부득이 했음을 설명하도록 하여 화평을 성립시켰다.


정묘호란 후 양국 관계

정묘호란 이후 후금은 조선에 대하여 여러 요구를 하였다. 이 요구에는 식량지원과 명나라 정벌에 사용할 병선의 제공 등이 포함되었다. 그리고 1632년(인조 10) 조선에 “형제지맹”을 “군신지의”로 바꾸기를 요구했는데, 이것은 조선을 신하의 나라로 삼으려는 굴욕적 요구였다. 후금의 무리한 요구와 강압적 정책으로 조선 내에서는 척화론이 대두했고, 후금과의 관계는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한편 후금의 홍타이지는 내몽골을 평정한 뒤 한(han, 汗 : 만주의 왕호)의 칭호를 버리고 황제의 존호(尊號)를 사용하기 위하여 1636년(인조 14) 음력 2월에 잉굴다이(Inggūldai, 龍骨大, 英俄爾岱, 英固爾岱), 마푸타(Mafuta, 馬福大) 등을 보내어 여러 버일러(beile, 貝勒 : 만주·몽골의 부족장)들이 홍타이지에게 올린 존호의 글을 보이면서 조선 정부도 이같이 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척화론의 주장에 따라 인조는 청나라 사신을 접견하지도 않고 국서도 받지 않았다. 물론 조정에서는 최명길 같은 주화론자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세는 척화선전(斥和宣戰)의 기운으로 기울어졌으며, 드디어 8도에 선전교서를 내리어 방비를 굳게 하고 적의를 보였다.

그해 음력 4월 황제의 칭호와 더불어 국호를 청(淸), 연호를 숭덕이라 고친 홍타이지(청 태종)는 조선의 이러한 도전적 태도에 대하여 조선 원정군을 조직하여 침략 준비를 서둘렀다.

 

 

과정

1636년 만주족, 몽골족, 한인(漢人)으로 조직된 12만 8000명의 대군을 친히 거느리고 청 태종은 드디어 그해 음력 12월 2일 심양(瀋陽)을 출발, 9일 압록강을 건너 침입하였다. 이때 의주부윤(義州府尹) 임경업백마산성을 굳게 방비하고 있었으나 적은 이 길을 피하여 수도로 직행하여 진격하였고, 청의 기병은 우수한 기동력으로 출발한 지 10여 일 만에 수도를 위협했다.

조선 정부에서는 바로 그 전일에야 비로소 청군 내습(來襲)의 소식을 접하고, 급히 회의를 한 후 주화론자인 이조판서 최명길 등을 적진에 보내어 시간을 얻는 한편, 두 왕자(王子 : 봉림대군·인평대군)를 비롯한 비빈종실(妃嬪宗室)과 남녀 귀족을 우선 강화도로 피난가게 하고 세자와 문무백관(百官)을 친히 거느리고 뒤를 따르려 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길이 막혔기 때문에 길을 변경하여 소현세자와 정신(廷臣)을 동반하고 부득이 남한산성으로 피하였다.

남한산성에서 인조는 급사(急使)를 명나라에 보내어 원군을 청하고 또 격문을 8도에 발하였다. 그러나 16일에는 이미 청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하였고, 이듬해인 1637년(인조 15년) 정월에는 청 태종이 도착하여 북한강 강가에 진을 치고 전군을 지휘하였다.

산성은 완전히 고립상태에 빠지고, 성내의 군사 1만 2000 명, 식량 1만 4000여 섬으로 50여 일 간의 보급이 가능할 뿐이었다.

포위된 지 45일에 식량 결핍과 추위로 말미암아 성내의 장병은 거의 기력을 잃었고 강화 협상도 사신으로 보냈던 박난영이 살해당하면서 실패하였다. 삼남에서 올라오던 원군은 도중에서 모두 청군에게 격파되었다. 이에 성안에서는 화전(和戰) 양론의 대결이 거듭되었다.   한편 청군은 경비가 허술한 틈을 타 강화도를 공격하자 수비대장 김상용이 자살하고 소현세자봉림대군이 포로로 잡혔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척화파 김상헌 등의 주장이 꺾이고, 주화파 최명길 등의 주장이 채택되어 마침내 성문을 열고 항복하기로 하였다.

 
삼전도에서 항복하는 인조, 삼전도비

 

음력 1월 10일 이후 최명길 등이 여러 차례 청군과 화평교섭을 진행하였는데, 청 태종의 요구는 조선왕이 친히 성문 밖에 나와 항복하고, 양국의 관계를 악화시킨 주모자 2~3명을 인도하면 화의에 응하겠다는 것이었다.

왕은 처음 이를 주저하였으나 강화 함락의 소식에 접하자 부득이 음력 1월 30일 성문을 열고 왕세자와 함께 삼전도(송파)에 설치한 수항단(受降壇)에서 청 태종에게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 세번 무릎꿇고 아홉번 절하는 것)의 항례(降禮)를 하여, 근세 조선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행동을 해야 했다.

 

 

결과

 
삼전도비(1639년, 인조 17년)

항례 때 맺은 화약(和約)은 다음과 같다.

  1. 조선은 청에 대하여 신하의 예(禮)를 행할 것.
  2. 조선은 명나라의 연호를 폐지하고, 명나라와 교통을 끊고, 명나라에서 받은 고명·책인을 헌납할 것.
  3. 조선은 왕의 장자(長者)와 제2자, 그리고 대신의 자녀를 인질로 보낼 것.
  4. 청나라가 명나라를 정벌할 때는 기일을 어기지 않고 원군을 파견할 것.
  5. 내외 여러 신하와 혼인을 맺고 사호(私好 : 사사로운 친분)를 굳게 할 것.
  6. 성곽의 증축·수리는 사전에 허락을 얻을 것.
  7. 황금 100냥, 백은 1,000냥을 비롯한 20여 종의 물품을 세폐(歲幣)로 바칠 것.
  8. 성절·정삭·동지·경조의 사신은 명나라 구례(舊例)를 따를 것.
  9. 가도(假島)를 공격할 때는 병선(兵船) 50척을 보낼 것.
  10. 포도(逋逃)를 숨기지 말 것.
  11. 일본과의 무역을 허락할 것.

1637년 2월 2일 청 태조는 먼저 청으로 출발하였고, 2월 8일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예친와 도르곤을 따라 심양으로 떠났다.[1] 백성들은 몽고군에 포로가 된 자들을 제외하고도 심양 인간시장에서 60만 이상이 거래되었다고 한다.[1]

이리하여 소현세자봉림대군의 두 왕자 부부가 인질로 가고, 척화파의 강경론자인 홍익한·윤집·오달제3학사는 잡혀가 참형을 당하고, 김상헌도 뒤에 잡혀가서 오랫동안 옥중 생활을 하였다. 이들을 비롯하여 많은 대신의 자녀와 관리들 그리고 여인들이 청나라의 사신 잉굴다이에게 붙잡혀갔는데 그 수는 197명에 이르렀다.

한양의 경우 종로광통교 일대의 집은 모두 파괴되었고 많은 도시들이 약탈과 방화로 아수라장이 되어 임진왜란 후 회복하는 노력을 물거품이 되게 하였다.   그 후 이 원한을 씻고자 사사로이 북벌(北伐)을 계획하는 자도 있었으니, 임경업 등이 명나라와 연락하여 청나라를 치려다 실패한 일 등이 그것이다.

 

[편집] 영향

자신들에게 조공을 하던 오랑캐에게 반대로, 조공관계를 맺는 속국이 된 사실에 조선인들은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이후 이러한 영향으로 북벌론이 제기되었으며 《박씨전》, 《임경업전》과 같은 문학 작품이 쓰였다. 청나라는 19세기부터 서구 열강의 함포에 압도되어 강제 개항되기 시작하면서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서서히 잃어갔다.  그러나 전쟁에 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독립적인 국가와 국경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이는 이후 백두산정계비로 국경을 명확히한 것 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편집] 북벌 운동

이 부분의 본문은 효종의 북벌입니다.

두 차례의 호란으로 큰 피해를 입은 조선은 정부나 백성 모두가 청나라에 대한 적대 감정과 복수심에 불탔다. 이에 청나라를 쳐서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북벌론이 일어났다. 특히, 청나라에 인질로 억류되었던 효종은 심양에서 겪은 인질로서의 고초와 굴욕을 분히 여겨 북벌을 나라의 가장 중요한 정책 목표로 삼았다. 효종은 송시열, 이완 등과 함께 남한산성북한산성을 수축하고 군대의 양성에 힘을 기울였으나, 북벌을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이는, 청나라가 한족의 반발을 누르면서 중국에 대한 지배를 확고히 하고,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으로서는 강대국으로 부상한 청나라와의 관계 개선이 불가피하였고, 이에 따라 경제적 문화적 교류도 빈번해졌다. 18세기 후반에는 청나라의 발달한 문화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었다.

이 무렵, 러시아가 침략해오자 청나라는 이를 물리치기 위해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이에 조선은 두 차례에 걸쳐 조총 부대를 출병시켜 큰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나선정벌).

 

상기의 냐용에서 알수 있듯이 참으로 아픈 역사를 간직한 조선이었다 

수차례 가본곳이지만 새로운 많은 사실을 느낄수 있었다는 부분에 대하여  더욱 많이 배우고 연구하고  .....  

국조보감 제70권
 정조조 2
3년(기해, 1779)


○ 1월. 하교하기를,
“처음으로 대간의 자리에 들어와서 하루에 17번을 아뢰었는데, 말이 모두 강개(慷慨)하고 절실하였으며 임금의 덕과 정사의 현안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내가 매우 가상히 여긴다. 곧은 사람을 장려하고 간언을 이르게 하는 도리로 보아 포상하는 은전이 있어야 하겠다. 정언 유맹양(柳孟養)에게 특별히 녹비를 하사하라.”
하였다.
○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에게 치제(致祭)하였다.
○ 2월. 승지를 보내어 단군묘(檀君廟)와 기자묘(箕子廟)에 치제하였다.
○ 3월. 내각(內閣)의 신하들에게 명하여 영종대왕의 어제(御製)를 편집, 교정해서 열성의 어제에 붙여 간행하게 하였다.
○ 4월. 하교하기를,
“내 어찌 ‘강신(降神)한 이후로는 보고 싶지가 않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축문을 읽고 제사를 지내는 때에 분주히 주선하는 반열에 있는 자들이 비스듬히 서고 기대거나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켜는 등 개탄스러운 일이 없지 않았다. 종묘의 친향 제문은 6구(句)로, 영녕전(永寧殿)의 섭향 제문은 4구로 지어 들이라.”
하였다.
○ 명하기를,
“친국(親鞫) 및 정국(庭鞫) 때에 비가 오거나 날씨가 너무 더울 경우에는 초둔(草芚)으로 집을 만들어서 숨을 차리고 기운을 가라앉혀 실정을 다 털어놓고 말하게 하라. 이것을 법식으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 5월. 상이 영우원(永祐園)의 기신(忌辰) 때마다 10일간 재계하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이달 13일부터 21일까지는 시사(視事)를 여쭙지 말라고 명하였다.
○ 7월. 영릉(寧陵)에 행행하였는데, 성조(聖祖)께서 승하하신 해인 때문이었다. 광나루[廣津]에 이르러 용주(龍舟)에 오르고 나서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임금은 배와 같고 백성은 물과 같다. 내가 지금 배를 타고 백성들을 대하고 보니 더욱 두려운 마음이 든다. 옛날에 성조께서 주수도(舟水圖)를 만들고 사신(詞臣)으로 하여금 명(銘)을 짓게 하신 것은 이러한 뜻이었다.”
하였다. 남한산성에 머물면서 예관을 보내어 온조왕묘(溫祚王廟)와 현절사(顯節祠)에 치제하고, 또 험천(險川)ㆍ북문(北門)ㆍ쌍령(雙嶺) 등 전사(戰死)한 여러 곳에 사제(賜祭)하였다.
○ 8월. 환궁하는 길에 이천(利川)에 머물면서 광주(廣州), 이천, 여주(驪州)의 부로(父老)에게 윤음을 내려 하유하고, 대가가 지나는 주변 고을의 1년치 조세를 감면하였다. 부사직 김양행(金亮行)을 불러 보고 하교하기를,
“경은 산림(山林)의 숙덕(宿德)으로 크나큰 명망을 받고 있는데, 지금 능을 배알하는 행차가 경이 거처하는 곳을 지나게 되었다.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나를 저버리지 않고 얼른 마음을 돌려 등대(登對)하였으니, 기다리던 끝에 실로 기뻐 어쩔 줄 모르겠다.”
하였다. 남한산성의 시소(試所)에서 과거를 설행하여 대가가 지나간 여러 고을 유생에게 급제를 내렸다.
○ 경기 유생이 상소하여 청한 것을 인하여 여주에 있는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의 사당에 ‘대로(大老)’라는 편액을 하사하고, 어제(御製)ㆍ어필(御筆)로 된 비(碑)를 뜰에 세웠다. 후에 상이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청심루(淸心樓) 위에서 선정(先正)의 시를 보았는데, ‘앉았자니 달이 지고 능의 송백 어두워져 어느 곳에 꿇어앉아 아뢸 줄 모르겠네[坐久月沈陵栢暗 不知何處跪敶辭]’라는 구절이 있었다. 선정의 마음을 상상할 수 있었으므로 나도 모르게 슬픈 감회가 일었다. ‘대로’라는 두 글자는, 옛날에 ‘천하대로(天下大老)’라는 글이 있었다. 연전에 선정의 문집 속에 들어가지 못한 구절을 수집하여 《대로유고(大老遺稿)》라고 제목을 붙였으니, 대개 이 뜻을 취한 것이었다.”
하였다.
○ 10월. 하교하기를,
“후세로 오면서 아부하는 것이 습속이 되어 재이(災異)에 속하는 일들을 지방관이 조정에 보고하지 않으므로 마음속으로 항상 개탄스럽게 여겼다. 그런데 심도 유수(沁都留守)의 장계에서는 우레와 번개의 이변을 때가 아니라고 하여 이렇게 보고하였으니, 매우 가상한 일이다. 정원은 이런 뜻으로 여러 도에 신칙하여 재이에 관계되는 일들을 반드시 숨기지 말게 하라.”
하였다.
○ 11월.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삼복(三覆)을 행하였다.
○ 호서(湖西) 6개 고을의 조운(漕運)을 수운 판관(水運判官)이 담당하도록 한 규정을 혁파하고, 좌도(左道) 수령을 차원(差員)으로 정하여 봉납을 감독하고 조운을 담당하게 하였다. 이것은 호조 판서 김화진(金華鎭)의 말을 따른 것이다.


 

인조
 부록
인조 대왕 행장(行狀)①

행장은 다음과 같다.
“국왕의 성은 이씨(李氏)이며, 휘(諱)는 모(某)이고 자(字)는 모(某)이니, 원종 공량왕(元宗恭良王)의 큰아들이며 선조 소경왕(宣祖昭敬王)의 손자이시다. 어머니 인헌 왕후(仁獻王后) 구씨(具氏)는 능안 부원군(綾安府院君) 구사맹(具思孟)의 따님인데, 만력(萬曆) 을미년 11월 7일에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왕을 낳으셨다. 이때 왜구가 침략했기 때문에 모든 궁가(宮家)가 다 해주에 따라갔던 것이다.
탄생하시기 전에 일자(日者)가 점치기를 ‘모일에 탄생할 것인데 귀하기가 말할 수 없다.’ 하였는데, 그날 탄생할 때에 문득 붉은 빛이 비치고 기이한 향기가 방 안에 가득하였다. 이날 저녁에 인헌왕후의 어머니 평산 부부인(平山府夫人) 신씨(申氏)가 옆에서 졸다가 붉은 용(龍)이 왕후 곁에 있고, 또 어떤 사람이 병풍에 두 줄로 여덟 자를 쓰는 것을 꿈꾸었는데, 두 자는 흐릿하여 기억하지 못하나 귀자 희득천년(貴子喜得千年)이라 하였다. 부부인이 기뻐서 깨니 이미 탄생하셨다.
모습이 범상하지 않고 오른 넓적다리에 무수한 사마귀가 있었는데, 이듬해 봄에 선조(宣祖)께서 보고 기이하게 여겨 이르기를 ‘이것은 한 고조(漢高祖)와 같은 상(相)이니 누설하지 말라.’ 하셨다. 겨우 2, 3세가 지나자 곧 궁중에서 길러졌는데, 장난을 좋아하지 않고 우스갯말이 적으셨다. 이 때문에 사랑이 날로 융성해져 왕자들도 비교되지 못하였고 의인 대비(懿仁大妃)께서 더욱 사랑하고 귀중히 여기셨다. 그 휘와 소자(小字)는 다 선조께서 지어 주신 것인데, 소자를 모(某)라 한 것을 광해(光海)가 듣고 언짢아서 말하기를 ‘어찌 이름지을 만한 뜻이 없어서 반드시 이것으로 이름지어야 하겠는가.’ 하였다. 5, 6세 때부터 선조께서 친히 가르치며 번거롭게 여기지 않으셨는데 문의(文義)가 날로 트이니 선조께서 더욱 기특하게 여기셨다. 만기(萬機)를 보살피시는 가운데에 간단(間斷)이 있을까봐 염려하여 외가인 능해군(綾海君) 구성(具宬)에게 배우게 하셨는데, 스스로 글읽기를 힘쓰고 내외척 사이에서 귀한 체한 적이 없으셨다. 정미년에 능양 도정(綾陽都正)으로 진계(進階)하고 이윽고 군(君)으로 봉해졌는데, 다 재능과 공로 때문이고 의친(懿親) 때문이 아니었다. 비(妃) 한씨(韓氏)는 영돈녕부사 서평 부원군(西平府院君) 한준겸(韓浚謙)의 따님인데, 선조께서 일찍이 왕자 부인(王子夫人)으로 뽑으셨다가 그대로 다시 왕을 위하여 배필로 간택하셨으니, 대개 또한 특별히 총애하셨기 때문이다.
광해 때에 원종(元宗)께서 덕업(德業)과 위망(位望) 때문에 매우 시기와 의심을 받으셨고, 왕의 두 아우 중 막내인 능창군 이전(綾昌君李佺)이 뜻밖에 화를 당하여 죽어 화가 또한 헤아릴 수 없었으므로, 원종께서 늘 두려워 조심하다가 얼마 후에 몸져 누우셨다. 왕이 손가락을 찔러 피를 바쳤으나 지극한 정성도 보람이 없이 비통한 일을 당하시니, 밖으로는 두려움에 몰리고 안으로는 안정하지 못하여 곡벽(哭擗)이 예절에 지나치고 언 땅바닥 위에 거처하며 음식물을 드시지 않은 것이 여러 날이었으며 외제(外除)하게 되어서는 유모(孺慕)가 더욱 간절하셨다.
광해의 혼란이 더욱 심해져서 정사(政事)가 뇌물로 이루어지고 끊임없이 거두어들이며 토목 일이 해마다 잇따르고 그치지 않아 도감이라 칭하는 것이 열둘이고 민가를 헌 것이 수천 채였다. 모후(母后)를 유폐하고 골육을 도살하며 큰 옥사를 꾸미니 억울하게 죽는 자가 날로 쌓였다. 음란하고 포악한 행위가 이루 셀 수 없으며 척리(戚里)가 권세를 구하고 간흉(奸兇)이 권세를 마음대로 부리므로 모든 백성이 물이나 불 속에 있듯이 근심하였다. 왕이 아직 임금이 되기 전에 때를 기다리고 한가히 있으면서 깊이 근심하였다. 윤기(倫紀)가 무너진 것을 아파하고 종사(宗社)가 엎어지려는 것을 괴로워하여 어지러운 것을 다스려 반정(反正)하는 것을 자기 임무로 여기셨다.
마침 친근한 친족 중에 호걸이 많았는데, 이를테면 평성 부원군(平城府院君) 신경진, 능성 부원군(綾城府院君) 구굉(具宏), 청운군(靑雲君) 심명세(沈命世), 능천 부원군(綾川府院君) 구인후(具仁垕)가 함께 보필하고, 영의정 김류, 연평 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 영의정 김자점(金自點), 영의정 최명길(崔鳴吉), 완풍 부원군(完豊府院君) 이서(李曙), 영의정 홍서봉(洪瑞鳳), 우의정 장유(張維) 등이 꾀하지 않고도 말을 같이하여 힘을 다하여 협찬하니, 충분(忠憤)이 함께 격렬하여 내외에서 급히 응하여 몰려오고 문무의 선비들이 의리를 떨쳐 일어나고 풍문을 들은 자가 구름처럼 모였다. 드디어 함께 왕을 추대하여 창의문(彰義門)으로부터 들어가니 삼군(三軍)이 경모(景慕)하여 따르고 오묘(五廟)가 거듭 빛나니, 곧 천계(天啓) 계해년 3월 12일이었다.
왕이 인정전(仁政殿) 앞에서 걸어 나가 서궁(西宮)으로 가려는데 뭇 신하가 연(輦)을 타기를 청하였으나 듣지 않고 말을 타고 가서 궁문(宮門)에 이르러 걸어 들어가셨다. 이때 대비(大妃) 김씨(金氏)를 서궁에 유폐하고 그 문을 막은 지 11년이 되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 비로소 열었다. 왕이 침전(寢殿)을 바라보고 두 번 절하고 곡하니 뭇 신하도 다 곡하였다. 대비께서 명하여 들어오게 하고 선조(宣祖)의 허위(虛位)를 설치하니, 왕이 또 두 번 절하고 곡하였으며 시신(侍臣)도 곡하였다. 왕이 대비를 뵙고 또 곡하니, 대비께서 말리며 이르기를 ‘이처럼 큰 경사에 어찌하여 곡하는가.’ 하셨다. 대비께서 명하여 왕에게 국보(國寶)를 전해 주게 하였는데 왕이 재덕(才德)이 없다고 사양하니, 대비께서 이르기를 ‘왕실의 지친(至親)이고 신민이 사랑하여 추대하였으니 덕이 아니고 무엇인가. 사군(嗣君)은 이제부터 성주(聖主)가 될 것이니 종사의 복이다.’ 하셨다. 대비께서 이미 별당(別堂)을 청소하게 하였는데, 선조께서 정사를 돌보시던 곳이다. 왕이 절하고 나가 별당에서 즉위하고 팔도에 대사(大赦)를 내리셨다. 대비께서 교서(敎書)를 내렸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왕은 총명하고 인효(仁孝)하며 비상한 모습이 있으므로 선조께서 특별히 사랑하셨다. 이름지으신 뜻에 미지(微旨)가 있었고 빙궤(憑几)하실 즈음에 손을 잡고 탄식하셨으니 촉망이 손자들 중에서 특이하셨다…….’ 하였다.
그리하여 폐희(嬖姬) 김상궁(金尙宮)을 죽이고 적신(賊臣) 이이첨(李爾瞻)·한찬남(韓纘男)·정조(鄭造)·윤인(尹訒)·이위경(李偉卿)과 총환(寵宦) 조귀수(趙龜壽) 등을 저자에서 환형(轘刑)하고, 학정(虐政)을 도운 박엽(朴燁)은 감사로 평양(平壤)에 있고 지당(支黨) 정준(鄭遵)은 부윤(府尹)으로 의주(義州)에 있었으므로 모두 그 곳에서 효시하고, 무신년 이후 억지로 꾸민 옥사에 관련된 사람들을 모두 탕척하고, 모든 영건(營建)·조도(調度)에서 남보다 혹독하게 한 무리의 거짓 훈록과 척완(戚畹)·권귀(權貴)의 전장(田庄)에 대한 감세(減稅), 복호(復戶)하는 따위 일을 모두 곧 혁파하고, 내수사(內需司)·대군가(大君家)에 빼앗긴 전민(田民)을 죄다 돌려주고, 폐단을 지은 내노(內奴) 두 사람을 참형하여 돌려 보이고, 가난한 백성의 해묵은 포흠(逋欠)을 모두 면제하게 하였다.
왕이 친정하여 맨 먼저 이원익(李元翼)을 영의정으로 삼아서 황야(荒野)로부터 들어오게 하고, 정온(鄭蘊)을 사간으로 삼아서 제주(濟州)의 적소(謫所)로부터 소환하고, 윤방·신흠(申欽)·오윤겸(吳允謙)·이정귀(李廷龜) 같은 선조(宣祖) 때의 기구(耆舊)인 신하와 그밖에 말 때문에 죄받은 자를 차례로 등용하니, 현능(賢能)과 홍석(鴻碩)이 조정에 벌여 있게 되었다. 이때 도성(都城)의 사녀(士女)와 시전(市廛)의 부로(父老)가 마치 다시 살아난 듯이 기뻐서 용동(聳動)하고 팔도의 백성이 술을 따라 서로 축하하며 말하기를 ‘성주가 나셨으니 우리들은 살았다.’ 하였다. 배신(陪臣) 이경전(李慶全)을 보내어 대비의 주문(奏文)을 가지고 경사(京師)에 가서 봉전(封典)을 청하였는데, 을축년에 황제가 태감(太監) 왕민정(王敏政)·호양보(胡良輔)를 보내어 조칙을 가져와서 왕과 왕비의 고명(誥命)·면복(冕服)을 내리니, 왕이 곧 배신 박정현(朴鼎賢) 등을 보내어 표문(表文)을 올리고 진사(陳謝)하였다.
왕은 대비와 모비를 섬기는 데에 정성과 공경을 다하고 용모를 유순하게 하고 낯빛을 유쾌하게 하여 조금도 게을리하신 적이 없었다. 갑자년에 대비를 높여 명열 대왕 대비(明烈大王大妃)라 하고 경덕궁(慶德宮)에서 진하(陳賀)하고 풍정(豊呈)을 올리고 아울러 모비를 받들어 상수(上壽)하였다. 병인년 봄 모비께서 앓아 누우셨을 때에 왕이 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바치고 금중(禁中)에서 목욕하고 친히 기도하셨다. 상을 당하여 삼년상을 행하려 하셨는데 예관·대간이 대통(大統)의 의리로 힘껏 다투었으므로 장기(杖朞)를 행하였으나 실은 심상(心喪)의 제도를 지키셨다.
일곱 달 뒤에 대신이 백관을 거느리고 권제(權制)를 따르기를 청하니, 왕이 이르기를 ‘내가 엄친을 일찍 잃고 편모만을 의지하였는데 영양(榮養)한 지 오래지 않아 자당이 문득 비었으니 내 심사를 생각하면 어찌 끝이 있겠는가. 한 나라의 모든 것으로 봉양할 수 있게 되었는데 부모가 다 계시지 않으니 동쪽을 바라보고 서쪽을 돌아보며 통곡할 뿐이다. 초상 때부터 예제(禮制)를 따르고 지극한 정을 억누른 것은 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종사(宗社)를 위하고 자전(慈殿)을 위하고 신민(臣民)을 위한 것이었다. 이제 원(園)의 흙이 아직 마르지 않았고 내 몸에 병이 없는데 어찌 권제를 따를 수 있겠는가. 요즈음 이 일 때문에 비통이 매우 심하다. 이 일은 해로운 것은 있고 이로운 것은 없다 하겠으니, 경들이 내 몸을 보전하고 싶으면 이런 계청을 빨리 멈추어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하라.’ 하셨다.
기년(期年)이 되자 백관이 전정(殿庭)에 모여 다시 계청하니, 왕이 이르기를 ‘상일(祥日)이 겨우 지났는데 경들이 또 이 말을 내니 내가 매우 놀랍다. 내가 변변치 못하기는 하나 결코 그럴 수 없으니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아서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하라.’ 하셨는데, 잇따라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양사가 합계하기를 ‘담제(禫祭)를 지낸 뒤에 입으실 복색은 대신의 의논에 따라서 행하소서.’ 하니, 왕이 심상의 예는 본디 명문(明文)이 있다고 분부하셨다. 담제를 지낸 뒤 망제(望祭) 때에 혼궁(魂宮)에 가서 애림(哀臨)하려 하시므로, 정원이 아뢰기를 ‘무릇 상을 당하여 담제를 지내면 곡이 없습니다.’ 하고 모두 세 번 아뢰었으나, 왕이 이르기를 ‘이는 대상(大祥)을 지낸 뒤에 담제를 지낸 것과 다르다.’ 하고 마침내 곡례(哭禮)를 거행하셨다.
신미년 봄에 대비의 병이 위독하자 왕이 산천에 기도하고 억울한 옥사를 심리하셨는데, 회복된 뒤에 대비가 대신과 재신들에게 분부하기를 ‘주상이 밤낮으로 잘 구완해주신 덕분에 중병이 나을 수 있었다.’ 하였다. 임신년 여름에 대비의 병이 다시 위독하자 왕께서 병구완하시느라 잠시도 떠나지 않으셨고 정성을 다하여 약은 반드시 친히 맛보셨고 묘사와 산천에 두루 기도하셨다. 승하하시게 되어 인경궁(仁慶宮)으로부터 경덕궁(慶德宮)으로 받들어 옮길 때에 대신과 예관(禮官)이 소여(小輿)를 타시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예에 어긋난다 하여 그대로 걸어서 따라가셨다. 27일이 지나기 전에는 대간을 임명하는 일이 아니면 절대로 명령과 교계(敎戒)를 하지 않으셨으며, 여러 날이 지난 뒤에 재신과 삼사가 상선(常膳)을 회복하시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여전히 거절하며 이르기를 ‘경들은 모두 사리를 아는 어진 사람으로서 예에 어긋난 이런 말을 하니 경들의 이 말에는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다. 평소의 효성이 경들에게 믿음받지 못한 것을 스스로 한탄한다.’ 하셨다.
대비의 성품이 엄급(嚴急)하셨으나 왕이 뜻을 굽히고 안색을 살펴 받들어 조금도 어기는 일이 없으셨다. 대비께서 계축년의 화를 당하고는 죽을 들고 상중(喪中)의 음식을 드셨는데 이미 복위(復位)한 뒤에도 소선(素膳)을 드시다가 왕과 중궁(中宮)이 울며 간하는 것이 매우 간절한 뒤에야 고기를 드셨다. 왕의 정성이 귀신을 감동시킬 만하였으므로 대비전의 궁인 가운데에 말을 교묘하게 하는 자가 있기는 하였으나 감히 이간하지 못하였다. 대비께서 승하하신 뒤에 공주(公主)와 영안위(永安尉) 홍주원(洪柱元)은 총애를 입은 것이 오히려 두터웠다.
왕이 모비를 잃은 뒤에, 부왕(父王)의 의관(衣冠)을 장사지낸 것이 폐조 때이므로 장지를 잘 선택하지 못한 것을 뒤미처 생각하여 분부하기를 ‘높은 산으로 형세가 급하고 단절된 산기슭으로 싸안은 것이 없으니 다시 영장(營葬)해야 한다.’ 하시어, 양주(楊州)로부터 김포(金浦)의 오향(午向)인 언덕으로 옮겨 모시고 모비를 부장(祔葬)하니, 곧 장릉(章陵)이다. 승정(崇禎) 임신년 여름에 부왕을 추존하여 원종 대왕(元宗大王)이라 하고 모비를 인헌 왕후(仁獻王后)라 하였다. 배신(陪臣) 홍보(洪靌)·이안눌(李安訥) 등을 경사(京師)에 보내어 추봉을 청하니, 황제가 칙서를 내려 고명(誥命)을 하사하고 공량(恭良)이라는 시호를 하사하였는데, 그 칙서에 이르기를 ‘생각건대, 그대는 대대로 동번(東蕃)을 지켜 왔거니와 그대의 아버지 휘(諱)는 습작(襲爵)받지 못하고 일찍 죽었는데 이제 추봉을 주청하니 효사(孝思)를 알 만하다. 특별히 해부의 의논을 윤허하여 그대의 아버지 휘를 추봉하여 조선 국왕으로 삼고 어머니 구씨(具氏)를 조선 국왕비로 삼아 고명을 내리고 시호를 주니, 그대는 이 영총(榮寵)을 입어 번복(蕃服)을 빛내고 오히려 성절(誠節)을 더욱 굳혀 전의 아름다움을 변하지 말라.’고 하였다.
왕이 일찍이 《서전》을 읽다가 ‘조상을 받들되 효도를 생각하소서.’ 한 데와 ‘먼 것을 보되 밝게 할 것을 생각하고 덕 있는 것을 듣되 밝게 할 것을 생각하소서.’ 한 데에 이르러 반복하여 문난(問難)하셨는데, 강관(講官)이 ‘보고 듣는 것이 밝기는 가장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밝게 보고 밝게 듣기는 어렵더라도, 효도는 온갖 행실의 근원이니 효도를 잘할 수 있어야 온갖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전부터 총명한 임금이 없지는 않았으나 효도를 다하지 못하였으므로 다스리는 것도 융성하지 못하였다.’ 하셨다. 대개 왕의 효성은 타고나신 것이었고 그 학문을 강구하고 사리를 밝히는 깊이도 이러하셨다.
광해가 폐위되고 나서도 그 대우는 끝내 바꾸지 않았다. 이에 앞서 대비의 아버지 연흥 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이 혼조에서 거짓으로 꾸민 옥사에 죽고 모부인(母夫人)이 절도(絶島)에 유배되고 어린 왕자 영창 대군 이의(永昌大君李㼁)를 품안에서 빼앗아 죽여서 동기 세 사람이 다 혹독한 화를 입었다. 이때에 이르러 대비께서 광해는 종사의 죄인이고 국가의 원수라 하여 《춘추(春秋)》의 의리를 밝혀 처형해야 한다고 엄한 분부를 여러 번 내리셨으나, 매우 무도하기는 하나 군림(君臨)하였던 사람을 처치해서는 안 된다고 하며 왕이 부드러운 말로 간절히 간하고 반복 비유하여 밝히시니, 대비의 뜻이 조금 풀렸다.
광해가 서울에 있을 때에는 별당 하나를 가려서 있게 하고 지공이 정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사옹원을 시켜 특별히 지공하되 때에 따라 계속 바치게 하고, 또 승지에게 경계하기를 ‘오늘날의 조정은 다 그를 섬기던 사람이니 마음을 다하도록 더욱 경계해야 한다.’ 하셨다. 그가 나가서 안치되었을 때에는 왕이 폐비(廢妃)와 행희(幸姬)를 따라가게 하였으나 대비께서 윤허하지 않으셨는데, 왕이 마음에 차마 못할 바가 있어서 또 힘껏 청하여 같이 갈 수 있게 하였으며, 주선(廚膳)·일용(日用)을 특별히 명하여 넉넉히 갖추게 하고 추울 때와 더울 때의 옷을 계절에 따라 계속 보내고 중사(中使)를 자주 보내어 빠진 것을 물러 계속 보내주었다. 광해와 폐비가 마침내 천수를 다하니 모두 예장을 해주었고 폐동궁(廢東宮)과 폐빈(廢嬪)을 대우할 때도 모두 은례(恩禮)가 있었다. 광해와 폐동궁에게 다 서녀(庶女)가 있었는데 어렸을 때는 늠료(廩料)를 주어 기르고 자라서는 출가시켰는데 그 자장(資裝)을 갖추어 주고 노비와 전지를 많이 주었다.
인성군 이공(仁城君李珙)은 혼조에서 수의(收議)할 때에 말한 것이 매우 도리에 어긋났고, 이괄(李适)이 반역하였을 때에 역적들이 끌어댄 말이 매우 흉악하였으므로 대간의 논핵이 준열하게 일어났으나, 왕이 폐조 때의 일에 깊이 징계되어 매우 자책하여 물리쳤다. 삼사와 2품 이상이 합사하여 귀양보내기를 청하고 한 해가 지나도 그치지 않았는데, 을축년에야 비로소 윤허하시어 간성(杆城)에 내보내어 안치하였다. 왕이 보고 싶지만 볼 수 없으므로 그 아들 이길(李佶)을 불러 공론에 몰린 사정을 갖추 말하고 눈물을 흘리시니, 궁인들이 모두 느껴 울었다. 또 수찰(手札)로 정원에 분부하여 강원 감사에게 일러 공해(公廨)에 거처하게 하고 잘 대우하게 하도록 하셨다. 얼마 후에 서울로 돌아오라고 명하셨는데, 무진년 유효립(柳孝立) 등의 역옥(逆獄) 때에 역적들이 또 공을 우두머리로 끌어대어 공이 광해와 교통했고 자전의 분부라 사칭하여 흉악한 자들을 꾀었다고 사람들이 같은 말을 하니, 모든 관원과 모든 종실이 다 나아가 죽이기를 청하였다. 대비께서 분부를 사칭하였다는 말을 듣고 또 매우 진노하여 엄한 분부를 잇따라 내려 반드시 처형하려 하시니, 왕이 감히 어기지 못하여 자살하게 하였으나 슬피 생각하여 마지않고 얼마 후에 그의 관작을 회복하고 여러 아들에게도 아울러 벼슬을 주어 특별히 돌보셨다.
인흥군 이영(人興君李瑛)이 상중(喪中)에 있을 때에 왕이 국가가 왕자를 대우하는 도리는 외신(外臣)과 같게 할 수 없다 하여 그대로 품록(品祿)을 내리셨고, 임오년 봄에 기근이 심하였는데 임해군(林海君)·순화군(順和君)·인성군(仁城君) 세 왕자부인에게 모두 급료를 주라고 명하여 정식(定式)으로 삼았다. 정축년 난리를 겪은 뒤에 잡혀갔던 부마와 종실의 자녀를 모두 공가(公價)로 속(贖)하셨다. 친척의 부고를 들으면 편찮으신 중이라도 반드시 여러 날 동안 행소(行素)하셨다. 인헌 대비의 아우인 종모(從母)가 있었는데 왕이 정성으로 섬기셨다. 능창 대군(綾昌大君)의 억울한 죽음을 애통해 하여 지사(地師)를 시켜 묘지를 잡게 하여 이장하고 문사에 능한 조신(朝臣)에게 명하여 만장(輓章)을 짓게 하여 애도하셨다. 아우 능원 대군 이보(綾原大君李俌)가 난리를 겪고 집이 없었는데 이현궁(梨峴宮)을 내려서 살게 하셨다. 그 돈독하고 화목하며 우애하시는 것은 천성에서 그러하셨다.
용의(容儀)가 단정하고 엄숙하며 행동이 법도에 맞으셨다. 제사 때에는 매우 깨끗하도록 힘쓰고 한밤에 일어나 새벽까지 근엄하게 서 계셨다. 한가한 동안에도 고요이 앉아 조용히 생각하셨고 가법이 매우 엄하므로 자손이 가까이 모셔도 감히 다가가지 못하였다.
【원전】 35 집 351 면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왕실-의식(儀式) / *역사-편사(編史) / *어문학-문학(文學)


[주D-001]모(某) : 종(倧).
[주D-002]모(某) : 화백(和伯).
[주D-003]을미년 : 1595 선조 28년.
[주D-004]모(某) : 천윤(天胤).
[주D-005]정미년 : 1607 선조 40년.
[주D-006]곡벽(哭擗) : 곡읍 벽용(哭泣擗踊). 소리내어 울며 가슴을 치고 발을 구름. 어버이를 잃어 애통해 하는 예절. 《효경(孝經)》 상친(喪親).
[주D-007]외제(外除) : 외면으로만 상복을 벗음. 속으로는 아직 슬픔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뜻. 부모의 상에 상기를 마치면 외제한다. 《예기(禮記)》 잡기 하(雜記下).
[주D-008]유모(孺慕) : 어린아이가 어버이를 따르듯이 몹시 사모함.
[주D-009]계해년 : 1623 인조 1년.
[주D-010]무신년 : 광해군 즉위년 1608.
[주D-011]을축년 : 1625 인조 3년.
[주D-012]갑자년 : 1624 인조 2년.
[주D-013]병인년 : 1626 인조 4년.
[주D-014]신미년 : 1631 인조 9년.
[주D-015]임신년 : 1632 인조 10년.
[주D-016]계축년 : 1613 광해군 5년.
[주D-017]임신년 : 1632 인조 10년.
[주D-018]휘(諱) : 부(捊).
[주D-019]을축년 : 1625 인조 3년.
[주D-020]무진년 : 1628 인조 6년.
[주D-021]임오년 : 1642 인조 20.
[주D-022]정축년 : 1637 인조 15년.

 

인조
 부록
인조 대왕 행장(行狀)②

잠저(潛邸) 때부터 뜻을 도타이하여 학문에 힘쓰되 경전(經傳)에 가장 뜻을 기울이셨다. 즉위하신 이래로 날마다 경연을 열어 유신(儒臣)을 가까이하고 토론하면 권태를 잊고 깊고 자세한 뜻을 철저히 문난하시는 것이 매우 뜻밖이므로 평소에 노숙한 사유(師儒)라는 자도 모두 탄복하였다. 밤에도 자주 사대(賜對)하여 고금의 치란(治亂)과 백성의 고락을 검토하지 않는 것이 없고 강독이 끝나면 술을 내리고 한밤에 파하시니, 조야에서 전해 말하기를 ‘태평한 옛일을 오늘날에 다시 본다.’ 하였다. 복더위가 한창 심할 때에 약방(藥房)이 경연을 잠시 멈추기를 청하면, 왕이 이르기를 ‘학문의 도리는 촌음(寸陰)을 아껴야 하는 것이니 덥다 하여 문득 멈출 수 없다.’ 하고, 윤허하시지 않았다. 혹 사고가 있어 경연을 멈추면 편전(便殿)에서 소대(召對)하고 혹 한재(旱災) 때문에 정전(正殿)을 피하면 전무(殿廡) 아래에서 경연을 여셨다.
일찍이 《서전》을 읽다가 ‘어진이에게 맡기되 딴 마음을 두지 말고 간사한 자를 물리치되 망설이지 마소서.’ 한 데에 이르러 이르기를 ‘이것은 어렵다. 크게 간사한 자는 충성한 듯하고 으레 재주가 있으므로 임금이 혹 깊이 살피지 못하면 도리어 그에게 속아서 마침내 물리치지 못하는 것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하셨다. 일찍이 인심(人心) 도심(道心)에 관한 설(說)을 강독할 때에 왕이 이르기를 ‘의리를 모르는 사람은 사욕을 공도(公道)로 여기니 이것이 도심이 없는 것이다. 모든 일은 공과 사에 달려 있으니, 한 사람이 하더라도 공변되면 옳고 사사로우면 그르다. 먼저 정일(精一)한 공부를 닦으면 살필 수 있을 것이다.’ 하셨다.
장유(張維)와 기(幾) 자를 논할 때에 왕이 이르기를 ‘기미에는 두 가지가 있어서 공과 사를 분간하기가 매우 어려우므로 혹 식견이 밝지 못하여 시비를 모르는 자도 있고 혹 시비를 알아도 사욕에 가리워 살피지 못하는 자가 있으니, 지극히 공정하고 지극히 밝지 않으면 기미를 살필 수 없을 것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두려운 것은 백성이라는 것은 지극한 말인데 후세에서 그 뜻을 모르고 혹 깔보아 마침내 나라를 망치기까지 하였으니 아깝다.’ 하셨다. ‘의(義)로 일을 바로잡고 예(禮)로 몸을 바로잡는다.’ 한 데를 강독하기에 이르러 왕이 이르기를 ‘이 말은 가장 절실하니, 오늘날 군신 상하(君臣上下)가 마음에 간직해야 할 것이다.’ 하셨다. 익직편(益稷篇)을 강독하기에 이르러 왕이 이르기를 ‘순(舜)은 임금이 되고 우(禹)는 신하가 되었으나 임금과 신하 사이에 오히려 이처럼 서로 경계하였다. 대저 글을 읽는 것은 입으로만 읽는 것이 아니니, 잘 읽는 자는 반드시 이 뜻을 먼저 본받아야 할 것이다.’ 하셨다.
태갑 하편(太甲下篇)을 강독할 때에 왕이 이르기를 ‘앞에서는 덕이 없으면 어지러워진다 하고 뒤에서는 한 사람이 매우 어질면 만방(萬邦)이 바르게 된다 하였는데, 내가 이것을 읽으면 못 견디게 부끄럽다. 이제 이름 있는 사대부가 다 조정에 모였으나 치평(治平)의 조짐이 없고 난망(亂亡)의 조짐이 있으니, 이는 내가 덕이 없기 때문이다.’ 하셨다. 소대(召對)하여 고종 융일편(高宗肜日篇)을 강독하다가 ‘먼저 임금을 바루어야 한다.’ 한 데에 이르러 왕이 강관에게 이르기를 ‘너희들도 내 그른 마음을 바루도록 하라.’ 하고, 또 이르기를 ‘나무는 승묵(繩墨)을 따르면 곧아지고 임금은 간언을 다르면 거룩해지니, 내가 간언을 잘 따르지 못하더라도 경들은 내가 간언을 따를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말고 각각 마음을 다하라.’ 하셨다.
《중용》을 강독할 때에 강관이 아뢰기를 ‘이른바 몰아서 함정 가운데에 넣는다는 것은 환(患)을 피할 줄 모르는 것을 가리킨 것이고 스스로 함정 가운데에 들어가게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또한 스스로 함정 가운데에 들어가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지난 일로 말하면 이이첨(李爾瞻)에게 편든 사람은 후환을 분명히 알면서 오히려 차마 그것을 하였으니, 바로 이른바 몰아서 넣는데 피할 줄 모른 것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천하·국가는 균일하게 할 수 있으나 중용은 잘할 수 없다 하는데 이 말은 의심스럽다. 균일하다는 것은 치평의 뜻이니, 중용의 도리가 아니면 어찌 치평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당 태종(唐太宗)의 일을 보면 이해가 간다. 태종의 치평은 삼대(三代)에 가깝다 하겠으나 그 처신을 생각하면 덕 없는 것을 부끄러워할 바가 크게 있으니, 중용은 잘 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이 뜻이다.’ 하였다.
교사(郊社)의 뜻을 논의하면서 이르기를 《중용》 한 편(篇)은 성(誠) 자를 추연(推演)하여 지은 것이다. 그 정성을 다하여 교사(郊社)·체상(禘嘗)의 예(禮)를 밝힌다면, 나라의 큰일은 제사에 있으므로 그 나머지 나라를 다스리는 모든 일은 이에 따라서 조치할 뿐이다.’ 하셨다. 왕이 정경세(鄭經世)에게 이르기를 ‘예전부터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인재를 이대(異代)에서 빌려오지 않아도 일세(一世)의 인재를 잘 수용하면 일세의 치평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용사(用捨)할 즈음에 사정(邪正)을 가리지 못하면 나라의 위망(危亡)이 여기에 관계될 것이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소인이 하는 짓은 반드시 임금의 마음에 맞추어 아첨하고 뜻에 따르되 무슨 짓이든 다 하므로 가까이하기 쉽고 멀리하기 어려우니, 군자는 정직하게 혼자 행하고 일에 따라 바로잡으며 뜻에 맞추어 아첨하는 짓을 하지 않으므로 가까이하기 어렵고 멀리하기 쉽다. 임금에게 사욕이 없다면 어찌 소인을 가까이하고 정직한 자를 미워하겠는가.’ 하시니, 정경세가 대답하기를 ‘성감(聖鑑)이 이토록 밝으시니 종사의 행복입니다.’ 하였다.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독할 때에 그 글에 맨 먼저 군신(君臣)을 거론하였는데, 왕이 이르기를 ‘부자가 있고 나서야 군신이 있는 것이다마는, 치란(治亂)의 도리로 말하면 군신이 근본이다. 임금은 신하의 강(綱)이 되니 그 책임이 이처럼 중대한데 후세에 다스려진 때는 적고 어지러운 때가 많은 것은 그 임금이 도리를 다하지 못하여 강이 될 수 없어서 그런 것이다.’ 하시니, 연신(筵臣)이 아뢰기를 ‘이것이 어찌 오로지 임금에게 달려 있겠습니까. 신하들이 그 도리를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이 주(註)에 임금이 바르면 신하가 바르다고 말한 것은 지극히 훌륭하다 하겠다.’ 하셨다.
왕이 경연에서 묻기를 ‘참설을 물리치는 것과 여색을 멀리하는 것은 어느 것이 어려운가?’ 하시니, 정경세가 대답하기를 ‘참설의 해독이 더욱 큽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여알(女謁)에는 어찌 참설이 없겠는가.’ 하셨다. 왕이 묻기를 ‘삼대(三代) 이후에 사람을 알아보고 임용을 잘한 임금은 누구인가?’ 하시니, 장유(張維)가 대답하기를 ‘한 고제(漢高帝)가 으뜸일 것입니다.’ 하고, 김상헌(金尙憲)이 아뢰기를 ‘고제는 사람을 알아보았으나 믿는 것은 도탑지 못하였습니다마는 소열제(昭烈帝)는 공명(孔明)이 어질다는 것을 알고 전적으로 맡겼습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소열제는 공명의 명성을 듣고 평소에 일을 같이하려 하였으므로 그처럼 전적으로 위임하였던 것이며 고제는 망명한 군졸 가운데에서 발탁하여 썼으니, 이것은 후세에서 미칠 수 없는 것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어진 신하가 어느 세대인들 없으리오마는, 그때의 임금이 알지 못하고 쓰지 못하는 것이 걱정일 뿐이다. 금세에도 어찌 어진 자가 없으리오마는, 옛사람은 그 임금을 요순과 같게 하지 못하면 마치 저자에서 매맞듯이 부끄러워하며 스스로 인책하였으나 지금은 이러한 사람이 드물다.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는 인재를 얻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당 현종(唐玄宗)으로 말하면 개원(開元) 초기에는 현능(賢能)을 써서 나라가 다스려졌으나 천보(天寶) 말기에는 간녕(奸佞)을 써서 나라가 어지러워졌다. 이제는 현능이 뭇 직위에 벌여 있는데도 다스리는 데에 보람을 보지 못하니, 이것은 괴이하다.’ 하셨다. 상세히 묻고 밝게 가리며 겸손하게 받아들이시는 것이 대저 이러하였는데 이루 기록할 수 없다.
정경세가 부제학이었을 때에 진강하여 《논어》 일부를 끝내니, 왕이 그 부지런하고 정성스러운 것을 아름답게 여겨 특별히 한 계자(階資)를 올려 주었으며 정헌 대부(正憲大夫)가 되어도 논사(論思)의 직임에 떠나지 않게 하였으니 전후 모두 5년이었다. 동궁(東宮)은 사(師)·부(傅)·이사(貳師)를 위하여 거애(擧哀)하는 것이 예(禮)이나 빈객(賓客)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정경세가 빈객으로서 죽었을 때에 예조는 예대로 하기를 바랐으나 왕은 마음을 다하여 가르친 은혜가 있다 하여 특별히 거애하게 하였다. 「성학도(聖學圖)」·「황극도(皇極圖)」 및 무일편(無逸篇)을 유신(儒臣)을 시켜 써서 병풍을 만들어 가까이 두셨다. 학문을 좋아하고 유신을 우대하시는 것이 또한 이러하였다.
문학의 재능이 있는 유신을 뽑아 사가 독서(賜暇讀書)시켜 특별히 도탑게 총애하고 젊은 문신도 각각 전경(專經)하게 하여 전강(殿講)하셨다. 때때로 태학(太學)에 거둥하여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고 문재(文才)·무재(武才)를 시취(試取)하고 대사성(大司成)에게 경계하여 선비들에게 학문을 권면하게 하셨다. 사유(師儒)를 뽑아 사학(四學)의 교도(敎導)를 나누어 맡게 하고 하교하기를 ‘《맹자》에 어려서 배우고 장성하여 행하고자 한다 하였다. 국가가 학교를 설치하고 사람마다 자제를 가르치는 것이 어찌 그냥 하는 것이겠는가. 우리 나라의 법교(法敎)가 매우 상세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세도가 점점 쇠퇴하여 행실이 없거나 변변치 못한 자가 많고 충신하거나 온후한 자가 적으니, 이것은 참으로 임금과 부형들의 수치이다. 성균관과 사학을 설치하여 인재를 기르는 것은 치평을 이룰 이기(利器)를 얻으려 힘쓰는 것인데, 행실이 없는 무리가 그 사이에 낀다면 국가가 미리 기르는 본의에 어긋나고 또한 동렬(同列)을 물들여 더럽힐 염려도 없지 않을 것이니, 이제부터 오륜의 가르침에 따르지 않는 자는 장관(長官)을 시켜 영구히 성균관·사학에서 내쳐서 풍속을 격려하게 하라.’ 하셨다.
김덕함(金德諴)이 대사성이었을 때에 유생들이 가르침에 따르지 않은 일이 있었는데, 왕이 근시(近侍)를 보내어 술을 내려 벌주고 이르기를 ‘선비에게는 군(君)·사(師)·부(父)를 위해서 죽어야 할 의무가 있으니 스승과 제자의 분의(分義)가 중대한데, 더구나 나라에서 사표(師表)로 정한 자이겠는가. 김덕함은 혼조에서 절개를 세우고 경전에 마음을 두었으니, 당세에서 찾아도 그만한 사람이 많지 않다. 유생들이 옛 규범을 본받지 않고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으니 잘못이 없다 할 수 없다. 지금 어온(御醞)으로 그대들을 벌하니 공경하라.’ 하시니, 유생들이 감동하여 기뻐하였다.
드디어 《삼경(三經)》 및 그 언해(諺解)와 《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 등의 서적을 양계(兩界)에 나누어 보내고 문관인 수령도 많이 차출하여 보냈으니 양계의 문교가 쇠퇴하였기 때문이었는데, 양계는 이 때문에 문과(文科)에 오르는 자가 잇따랐다. 오륜가(五倫歌)를 번역하여 인쇄해서 중외에 펴게 하고 《삼강행실(三綱行實)》도 아울러 간행하게 하셨다. 또 인재를 기르고 풍속을 변하게 하는 데에는 《소학(小學)》보다 나은 것이 없다 하여 교서관(校書館)에 명하여 인쇄하여 바치게 하여 뭇 신하들에게 나누어 내리고 예조에 권면하여 동몽(童蒙)을 가르치고 잘 읽는 자를 뽑아서 생원시·진사시의 초시를 보게 하고 팔도의 감사에게 하유하여 두루 권장하게 하시니, 궁벽한 시골에도 글을 읽는 풍습이 조금 있게 되었다. 또 나라를 유지하는 방법은 명분에 있으므로 무릇 아버지의 일에 대하여 아들에게, 주인의 일에 대하여 종에게, 지아비의 일에 대하여 아내에게, 형의 일에 대하여 아우에게 물을 일이 있더라도 그들을 증인으로 삼을 수 없다 하여 경외에 널리 고하여 묻지 말게 하셨다.
【원전】 35 집 351 면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왕실-의식(儀式) / *역사-편사(編史) / *어문학-문학(文學)


[주D-001]여알(女謁) : 여관(女官)의 청탁.

인조
 부록
인조 대왕 행장(行狀)③

어진이를 높이는 뜻이 그 생사에 관계 없이 차이가 없으셨다. 즉위하신 처음에 장현광(張顯光)·김장생(金長生)·박지계(朴知誡) 등을 모두 곧 역마로 불러서 쌍가마를 타고 오게 하여 혹 따로 사업(司業) 벼슬을 두어 제수하기도 하고 발탁하여 헌부(憲府)의 벼슬에 두기도 하고 또 강학청(講學廳)을 열어 세자를 가르치게 하셨다. 그들이 이르렀을 때에는 공경을 다하여 맞이하고 녹봉(祿俸) 이외에 늠인(廩人)이 곡식을 대어 주었고, 그들이 물러갔을 때에는 장리(長吏)를 시켜 세시(歲時)에 안부를 묻게 하셨다. 초야에 있는 인사에 대해서 조금도 버려져 있게 하지 않으시니, 김집(金集)·송준길(宋浚吉)·송시열(宋時烈)·최온(崔蘊) 등이 다 뽑혀 쓰였고 임하(林下)에서 일어나 경재(卿宰)까지 된 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죽으면 조문(弔問)하고 그 부물(賻物)을 보낼 뿐만 아니라 관가에서 그 장구(葬具)를 마련해 주고 그 자손과 문생(門生)을 찾아서 임용하게 하셨다.
대신을 공경하는 데에는 예모를 갖추셨다. 접대하는 말은 반드시 공손하게 하셨고 일이 있으면 반드시 자문하셨으며 좋은 말이 있으면 반드시 따르셨다. 그들이 죽었을 때에는 부물과 수의를 특별히 주셨다.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이 늙어서 걷지 못하게 되니 궤장(几杖)을 내리고 술을 내려 잔치하게 하였으며 견여(肩輿)를 타게 하고 또 소환(小宦)을 시켜 부축하여 전(殿)에 오르게 하시니, 이원익이 은사(恩私)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그가 물러가 금천(衿川)에서 노년을 보낼 때에는 왕이 자주 근시를 보내어 안부를 묻게 하셨다. 이귀(李貴)의 말이 대신을 범하였는데, 왕이 듣고 하교하기를 ‘대신은 임금 한 사람 아래에 있어 지위가 백관과는 아주 다르고 조정에서 예로 대우하는 것은 임금을 공경하기 때문인데, 이귀는 뭇사람이 모인 가운데에서 상신(相臣)을 욕하여 조금도 꺼리지 않았다 하니, 일이 매우 놀라울 뿐만 아니라 또한 이 버릇을 연장되게 할 수도 없다. 이 일을 방치한다면 어찌 내가 공신(功臣)을 끝내 보전하려는 도리이겠는가. 임금을 가벼이 여기고 조정을 업신여긴 데에는 나라에 법이 있으니, 내가 감히 사사로이 할 수 없다. 이 뜻을 양사에 말하여 공론에 따라 죄주게 하라.’ 하시니, 이귀가 이 때문에 파직되었다.
뭇 신하를 친근히 하는 데에는 병든 자가 있으면 반드시 의관을 보내어 묻게 하고 내약(內藥)을 보내셨다. 을해년에 왕이 목릉(穆陵)에 가서 제사할 때에 대사헌 김상헌(金尙憲)이 따라가다가 갑자기 병이 나서 뒤떨어졌는데 왕이 듣고 어의(御醫)를 머물려 두어 구완하게 하였으며 길에서 사자(使者) 몇 명을 보내어 병문하게 하고 또 일행 가운데에 있는 족속을 물어 곧 역마를 타고 달려가 보게 하셨다. 늙은 어버이가 있는 자에게는 진기한 과일과 옷감을 내리고, 봉양하기 위하여 고을살이를 청하는 자는 다 바라는 대로 되게 하셨다. 이경여(李敬輿)가 늙은 어머니를 위하여 외직에 보임되기를 바랐는데 왕이 그가 경악(經幄)을 떠나는 것을 바라지 않으므로 쌀과 콩을 주게 하고, 박장원(朴長遠)이 월과(月課) 때에 반포오시(反哺烏詩)를 지었는데, 왕이 보고 가엾게 여기면서 그에게 편모(偏母)가 있으나 봉양할 수 없음을 알고 먹을 것을 주셨다. 성묘하는 자에게는 제수를 내리고 한겨울에는 때때로 추위를 막을 제구를 내리고, 경비가 부족할 때를 당하더라도 그 가난을 염려하여 봉록을 늘리고, 직분 안의 일이라도 조금 공로가 있으면 반드시 물건을 보내어 보답하셨다.
훈신(勳臣)를 대우하는 데에는 은수(恩數)가 특별히 융숭하고 총애하여 내리는 물건이 문득 많았다. 을축년에 정사 공신(靖社功臣)·진무 공신(振武功臣)을 거느리고 친히 회맹제(會盟祭)를 거행하고 잔치를 내려 은수를 더하셨는데, 진무는 장만(張晩) 등이 역적 이괄(李适)을 평정한 훈호(勳號)이다. 수찰(手札)로 특별히 하교하기를 ‘경들이 아니면 윤기가 없어지고 종사가 엎어졌을 것이니, 경들의 공은 고금에 없던 것인데, 회맹례(會盟禮)는 지냈으나 갚을 길이 없다. 경들과 함께 어려움을 구제하여 고락을 같이하기를 바라니, 임금과 신하 사이에 각각 그 도리를 다하여 능히 사욕을 버리고 지극히 다스려지도록 꾀하고, 어려운 처지에 있던 때를 잊지 말라 각자 역량을 다하면서 조그마한 힘도 아끼지 말라.’ 하셨다. 병술년에 또 영사(寧社)·영국(寧國)의 신구 공신등과 회맹하셨다. 정사 원훈과 그 아들을 때때로 금중(禁中)에 불러들여 술과 고기로 대접하여 집안 사람끼리 대하는 예처럼 서로 수작하셨다. 세자에게 친후(親厚)를 길이 보전하라고 경계하기까지 하셨으나 혹 법을 범하면 또한 훈귀(勳貴)라 하더라도 조금도 용서하지 않으셨다.
왕이 붕당의 화가 반드시 나라를 망칠 것이라 하여 번번이 연중(筵中)에서 뭇 신하에게 경계하여 ‘병화나 홍수·가뭄의 재앙도 당론보다 더하지 않다.’ 하셨다. 일찍이 영의정 김류에게 이르기를 ‘근일 백관이 직무를 게을리하고 기강이 해이한 것은 참으로 사욕을 따르고 붕당을 감싸는 탓에서 말미암았고, 무너진 기강을 진작하기를 바라려면 대신과 도헌(都憲)이 마땅한 사람이어야 한다. 이 일은 상법(常法)으로 다스릴 수 없으니, 이 뒤로 붕당을 감싸는 일이 있으면 심한 자는 참형에 처하고 결코 용서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하고, 또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선왕께서 의주에 계실 때에 시 한 수를 지으셨는데 시의 뜻은 대개 조정의 붕당을 경계한 것이다. 신하로서 그 시를 보면 조금 징계될 것인데 폐습이 날로 심해지니, 참으로 슬프다.’ 하셨다. 왕이 이처럼 매우 억제하셨으므로 반정 뒤에는 사람들이 감히 함부로 하지 못하였다.
깨끗한 몸가짐이 있는 신하에게는 문득 칭찬하고 숭장(崇奬)하셨다. 이직언(李直彦)은 나이 많고 평소에 절조가 있다 하여 우찬성에 승배(陞拜)하고, 이원익(李元翼)은 벼슬이 재상에 올라도 초가에서 곤궁하게 산다 하여 경기에 명하여 기와집을 지어 주게 하고 베이불과 흰요를 내리고, 무신(武臣) 최진립(崔震立)은 간약(簡約)하다 하여 공조 참판에 탁배(擢拜)하고, 성하종(成夏宗)도 청렴하고 신중하여 여러 번 벼슬을 옮겨 북 병사(北兵使)가 되었다.
노인을 우대하는 법은 상례(常例)보다 훨씬 더하여 세수(歲首)에는 늙은 신하를 문안하고 또 옷감을 보내셨다. 경오년에 하교하기를 ‘노인을 공경하고 어진이를 존중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이다. 옛 임금은 혹 친히 나아가 잔치하여 위로하기도 하고 벼슬을 내리고 비단을 내리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다 높이는 뜻이다. 지금 내가 덕이 없어 위로 천심(天心)에 부응하지 못하므로 7, 8년 동안 병화와 기근이 거의 없는 해가 없으니, 기로(耆老)를 생각하면 절로 부끄럽고 두려워진다. 지금 경비가 아주 없어 잔치하여 위로하는 일은 워낙 쉽게 의논할 수 없으나 벼슬을 내리는 은전은 거행하는 것이 참으로 마땅하니, 해조로 하여금 노인작(老人爵)을 제수하여 노인을 우대하는 지극한 뜻을 보이라. 늙은 과부에게도 등급을 나누어 물건을 내리도록 명하여 고루 은전을 입게 하라.’ 하셨다. 그래서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세상에 드문 은혜를 입었고, 이 뒤에 나이 많아서 벼슬을 더한 자가 매우 많았다.
홍서봉(洪瑞鳳) 등 여러 재신이 회연(會宴)하여 그 늙은 어머니를 축수할 때에 왕이 한 사람 앞에 풀솜 두 근씩을 내리고, 또 하교하기를 ‘경들은 다 늙은 어버이가 있어서 영양(榮養)을 극진히 하니 내 마음이 감동된다.’ 하셨다. 선을 베푸는 인자함이 흔히 이러하셨다. 충효를 포숭(褒崇)하되 찾아서 정표(旌表)하고, 나라의 일에 죽은 자는 부모 처자를 다 무양(撫養)하고 그 집에 다달이 늠료(廩料)를 주고 그 고아를 벼슬시키셨다. 김응하(金應河)의 집에는 여러 번 은 3백 냥을 내리고, 또 김준(金浚)의 일가가 안주(安州)에서 죽어 삼강(三綱)이 구비하였다 하여 그 아들 김진성(金振聲)에게 6품 벼슬을 초수하셨다. 항오(行伍) 중에서 전사한 자에게는 관직을 추증하고, 군정(軍丁)에게는 복호(復戶)하셨다. 왕이 문무(文武)를 병용하는 것이 장구한 도리이므로 무사를 대우하는 것이 박해서는 안 된다 하여, 조종 때에 후하게 보살펴 준 규례로 깨우쳐서 재국(才局)과 원식(遠識)이 있는 통정(通政) 이상인 자는 육경(六卿)과 승지(承旨)에 주의(注擬)하고 통훈(通訓) 이하인 자는 시정(寺正)·낭료(郞僚)에 차의(差擬)하게 하셨다. 또 한가한 때에는 친림하여 시열(試閱)하고 능한 자를 상주셨다. 장수를 대우하는 도리는 흔히 고례(古禮)를 본뜨셨다. 계해년에 도원수 장만(張晩)이 출정할 때에 왕이 서교(西郊)에 거둥하여 친히 상방검(尙方劍)을 주어 명을 따르지 않는 제장(諸將)을 베게 하시고, 그 뒤 김자점(金自點)이 원수(元帥)가 되었을 때에도 검을 내리셨다.
날씨가 추우면 번번이 변방의 장사(將士)를 염려하여 그 괴로운 정상을 자세히 적어 조서를 내리셨는데, 그 글의 대략에 ‘먼 곳 외로운 성에서 적개(敵愾)의 뜻이 절실하더라도 고향 집을 떠나 어찌 돌아가고 싶은 생각을 금할 수 있겠는가.’ 하고 차등을 두어 명주를 내리기도 하고 방한구를 내리기도 하고 군졸에게는 옷과 가죽을 주셨다. 무진년 겨울 추위가 심할 때에 수찰(手札)로 하교하기를 ‘어공(御供)에 관계되는 모든 물건을 혹 하교에 따르거나 소차에 따라 거의 다 줄였으나 아직 줄이지 않은 것은 담비 갖옷이다. 해조는 반드시 추위를 막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서 폐지하기를 감히 청하지 않았겠지만 서방 백성이 얼어 죽는 때에 내 몸에 가벼운 갖옷을 입는 것은 마음에 매우 불안하니, 올해에는 진상하지 말고 그 대가인 무명을 양서에 내려보내어 헐벗은 백성에게 나누어 주라.’ 하셨다. 정묘년 변란 때에 철산(鐵山) 사람 정봉수(鄭鳳壽)가 용골 산성(龍骨山城)을 지켜 적을 물리쳤는데, 왕이 소견하여 상방금단(尙方錦段)과 내구마를 내리시고 초천(超遷)하여 전라 병사(全羅兵使)까지 삼으니, 사람들이 다 권려하는 것을 알았다.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의 일에 근로하시는 것은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다. 재변을 당하면 반드시 이것은 내 죄라 하고 반드시 과실을 죄다 아뢰고 원옥(冤獄)을 심리하게 하셨다. 간원이 가뭄 때문에 친히 비를 비시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임금이 두렵게 여겨 몸을 움추리고 덕을 닦지 못하고 재앙을 만나면 빌 줄만 아는 것은 말세의 일인데, 그대들이 내 잘못을 책망하지 않고 나에게 빌기를 권하니, 근본을 버리고 말단을 취한 것이다. 인사가 아래에서 바로잡히면 천기가 어찌 위에서 불순하겠는가. 인사를 닦지 않으면 하늘이 그것에 반응을 보이는 것인데, 내가 즉위하고부터 재앙을 내리는 꾸중이 매우 심하니, 밤낮으로 근심되고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그대들은 말단의 일을 생각하지 말고 각각 곧은 말을 아뢰어 위로 내 잘못을 책망하고 아래로 백성의 억울한 일을 풀어 주라.’ 하셨다.
왕은 재앙을 당한 임금은 여러 가지 좋은 음식을 아울러 먹지 않는 것이라 하여 사옹원의 어전(漁箭)도 설치하는 것을 윤허하시지 않았으며, 정전(正殿)을 피하고 찬선(饌膳)을 줄이는 것을 말단의 일로 여겼지만 감히 행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비는 것을 말단의 일로 여겼지만 또한 감히 친히 빌지 않은 적이 없으셨는데, 반드시 응답이 있었다. 일찍이 사직단에서 빌 때에 바야흐로 제사하려는데 비가 내리므로 유사(有司)가 장막을 설치하기를 청하였으나 듣지 않고 또 우산을 받쳤으나 물리치시어 어의(御衣)가 죄다 젖었다. 만년에는 병환이 나서 거행하지 못하셨다. 일찍이 비가 내리지 않는 것을 답답히 여겨 큰 베옷을 입고 앉아 뭇 신하를 불러 각각 극진히 말하게 하고 자책이 매우 간절하셨는데, 파하자 비가 크게 내렸다.
자기를 죄책하고 충직한 말을 구하는 하교가 전후에 누누이 있었는데, 그 대략에 ‘하늘과 사람은 같은 이치이므로 나타나고 은미한 것에 차이가 없으니 복을 주고 화를 주는 응답이 어찌 감동되는 것이 있어서가 아니겠는가. 재앙을 그치게 하는 도리를 닦으려면 곧은 말을 구해야 할 것이다. 모든 내 과실과 좌우의 충사(忠邪)와 정령(政令)의 선악과 민생의 이병(利病)을 숨기지 말고 모두 말하라. 말한 것이 채용할 만하면 내가 상줄 것이고 혹 맞지 않더라도 죄주지 않을 것이니, 너희 중외의 대소 신하는 각각 소견을 실봉(實封)하여 조목조목 올리라.’ 하셨고, 또 이르기를 ‘일처리를 잘못해서 덕이 이지러졌는가. 죄 없는 자가 뜻밖에 죄에 걸려 지극한 원통이 풀리지 않았는가. 용사(用捨)를 제대로 못하여 인재가 답답해 하고 있는가. 형상(刑賞)이 미덥지 않아서 사람에게 권장되고 징계되는 것이 없는가. 부역이 고르지 않아서 서민이 원망하는가. 언로(言路)가 막혀서 아랫사람의 뜻이 통하지 않는가. 제사가 깨끗하지 않아서 온갖 신명이 흠향하지 않는가. 호강하고 교활한 자가 흉독을 부려서 마을이 시름하고 한탄하는가. 참소하는 자가 뜻을 얻고 사사로이 청탁하는 자가 극성을 부리는가. 안팎이 엄하지 않아서 뇌물이 행해지는가.’ 하시어 말씀이 매우 간절하였다.
병자년에 가뭄과 홍수가 잇따르니, 하교하기를 ‘한 가지가 지극히 많거나 지극히 없는 것은 홍범(洪範)에서 근심한 바이며 오래 비가 내리거나 오래 가무는 것은 잘못한 결과로 초래된 것이니, 이 가운데서 하나만 있어도 백성이 편히 살지 못하는데 더구나 아울러 있고 아울러 지극한 것이겠는가. 내가 외람되게 큰 통서(統緖)를 이어받음에 덕은 사람을 감동시킬 만하지 못하고 재주는 일을 알 만하지 못하며 공검(恭儉)은 표준이 되지 못하고 상벌은 권징(勸懲)이 되지 못하여 병란과 수한(水旱)으로 백성에게 해를 끼칠 뿐이니, 사람들이 말하지 않더라도 어찌 부끄럽고 두렵지 않겠는가. 올해에는 가물은 끝에 수재가 매우 혹독하니, 이것은 재변 가운데에서도 가장 절박한 것이다. 슬픈 우리 백성에게 죽음이 닥쳤는데 이런 때에 임금은 먹는 것으로 백성을 괴롭힐 수 없고 또한 방책 없이 가만히 있을 수 없으니, 각도의 물선(物膳)을 모두 연한을 정하여 바치지 말고 공상(供上)하는 종이도 마찬가지로 시행하고, 재해를 입은 곳은 진휼하는 정사를 각별히 의논하여 품처(稟處)하라.’ 하셨다.
번번이 흉년이나 병란의 화를 당하면 반드시 밀린 조세를 감면하고 그 부역을 줄이고 모든 삭선(朔膳)과 절일(節日)에 바치는 것과 조석으로 바치는 것과 내외사(內外司)에서 향온(香醞)을 빚는 일을 모두 절감하되 3년에서 4년에 이르는 것이 항상 많으므로 어주(御廚)에 여유의 찬선(饌膳)이 없었다. 태복(太僕)의 어마(御馬)까지도 말하는 것을 채택하여 그 수를 줄여서 재변을 경계하는 뜻을 보이셨다. 정해년에 또 가뭄과 홍수의 재앙이 있었는데, 호부(戶部)의 미곡 5만 석을 덜어서 백성의 공부(貢賦)를 갈음하게 하셨다. 백성이 굶주리면 혹 창고의 곡식을 내거나 다른 곳의 곡식을 옮기고 또 진휼청을 설치하여 죽을 쑤어 먹이되 착한 재신(宰臣)과 낭서(郞署)를 가려서 그 일을 맡게 하고, 외방에도 경중과 마찬가지로 아울러 신칙하셨으므로 길에 굶어 죽는 자가 없었다.
여역(癘疫)이 있으면 의국(醫局)을 시켜 약을 지어 구완하게 하고, 또 유사를 시켜 여사(廬舍)를 지어 거처하게 하고 관가에서 그 죽반(粥飯) 거리를 주게 하셨다. 난리를 겪은 뒤에 우역(牛疫)이 매우 치성하여 거의 다 죽었는데, 여러 목장에서 기르던 것을 몰아서 여러 고을로 흩어 보냈으므로 소가 크게 번식하여 백성이 밭갈이에 괴롭지 않았다. 혹 대신과 비국의 신하를 부르거나 근신(近臣)을 불러 과실을 듣기를 바라셨다. 일찍이 김류에게 이르기를 ‘원훈(元勳)은 국가와 고락을 같이하는 사람인데 입시(入侍)한 때에도 내 잘못을 말하지 않는 것이 옳은 일인가.’ 하고 그 뒤에 또 대신에게 이르기를 ‘재앙을 그치게 하는 방법은 임금이 잘못을 고치는 것밖에 없고 또 인재를 얻기에 달려 있다. 이 두 가지에 지나지 않을 뿐인데, 잘못이 있으면 대관(臺官)이 말해야 할 것이고 어진 사람을 천거하는 책임은 대신이 담당해야 할 것이다.’ 하셨다.
왕은 늘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고 먹는 것은 백성이 하늘처럼 여기는 것이라 생각하여 백성의 고통을 내 몸이 다친 듯이 여기고 백성을 때에 맞추어 부리셨다. 산릉(山陵)의 일과 칙사의 수용(需用)일지라도 민간에서 장만하도록 요구하지 말게 하고 각사(各司)에 저축한 쌀과 베를 가져다가 쓰게 하고 또 내부(內府)의 물건으로 그 비용을 돕게 하셨다. 전전(殿前)에 빈 땅을 개간하여 벼와 콩을 조금 심어서 풍흉(豊凶)을 점쳤는데, 중관(中官)이 물주려 하니, 그만두라고 명하고 이르기를 ‘우로(雨露)가 생성(生成)하는 것을 보고자 한다.’ 하셨다. 또 벽에 엎어진 배를 그려 두고 늘 보아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뜻을 붙이셨다. 혹 이익을 말하는 자가 있으면 하교하기를 ‘이익을 중시하고 백성을 경시하는 것은 내가 숭상하는 바가 아니다. 이해로 말하더라도 백성이 보존되는 것이 곧 나라의 큰 이익이다.’ 하셨다. 또 백성의 고락은 수령에 달려 있고 수령의 출척은 감사에 달려 있으며 곤수·변장도 다 군졸의 고락에 관계된다 하여 양전(兩銓)에 엄히 신칙하여 반드시 신중히 간택하게 하셨다.
글로 하유하기를 ‘임금의 정사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요체는 요역을 가볍게 하고 관리를 가려 쓰는 것에 지나지 않는데, 감식(鑑識)이 미치지 못하여 국가에 일이 많고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서 백성이 혜택을 입지 못하니, 수한풍상(水旱風霜)을 당할 때마다 더욱이 절로 무안하고 꺼림하다. 내가 성취를 바라는 것은 경상(卿相)이고 함께 다스리는 것은 방백(方伯)·곤수와 수령·변장인데 능히 그 직분을 다하는 자가 매우 드무니, 내가 한탄한다. 이제부터 수령은 어린아이를 보호하듯이 백성을 사랑하여 온 경내가 편안하여 원망이 없게 하고 성실로 자신을 단속하고 정성으로 공무에 봉사하며, 변장은 군무에 마음을 다하여 군졸을 돌보고 스스로 포기하지도 말고 스스로 한계짓지도 말아서 내가 군사와 백성을 돌보는 지극한 뜻에 부응하라. 청덕(淸德)이 있으면 내가 한(漢)나라의 상(賞)을 써서 발탁하여 공경(公卿)에 제배할 것이고, 혹 탐학하면 내가 제(齊)나라의 형벌을 시행하여 정확(鼎鑊)에 넣을 것이다. 각도의 감사· 병사를 시켜 특별히 신칙하여 실효를 요구하고 도리를 어기면서 명예를 바라는 것을 잘 다스리는 것으로 여기지 말로 군사를 침학하면서 군기를 갖추는 것을 직분을 다하는 것으로 여기지 말게 하라.’ 하셨다.
사조(辭朝)할 때에는 고하를 막론하고 친히 보고 권면하고, 수령이 비면 혹 근신을 섞어 차출하기도 하고 혹 재신(宰臣)을 시켜 특별히 벼슬을 옮기게 하기도 하셨다. 가장 잘 다스린 자는 차서를 뛰어넘어 발탁하고 탐오한 자는 엄중히 다스렸으며 피폐한 직무를 다시 잘 일으킨 감사는 혹 계속 맡게 하거나 다시 제수하기도 하고 곤수도 그렇게 하셨으며 변장까지 다 상주고 벌주셨다. 또 자주 암행 어사를 보내어 그들의 재능을 살피게 하셨다. 이 때문에 감사·수령과 곤수·변장 중에 청간(淸簡)·선정(善政)으로 일컬어지는 자가 많았다.
간(諫)하는 자의 말이 곧으면 혹 술을 주거나 말을 내리거나 마장(馬裝)을 내리거나 표피(豹皮)를 내리고 이따금 발탁하여 써서 언로(言路)를 열고, 충직한 것을 알면 매우 기휘(忌諱)에 저촉되거나 견주어 말한 것이 도리에 어긋나더라도 너그러이 용서하여 죄주지 않으셨다. 정온(鄭蘊)을 대사간에 특제(特除)한 것은 그가 곧은 것을 아름답게 여겼기 때문인데, 연신(筵臣)이 아뢰기를 ‘정온이 강직하기는 하나, 전하를 접때에 견주었습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예전에는 「폐하는 걸주(桀紂)보다 심하다.」는 말을 한 사람도 있다. 또한 무엇이 해롭겠는가.’ 하셨다. 이명준(李命俊)이 살아서는 간장(諫長)에 특배되고 죽어서는 장수(葬需)를 하사받았으니 또한 강직했기 때문이다. 최현(崔睍)이 역옥 때에 체포되었는데 국청이 형신하기를 청하니, 왕이 이르기를 ‘지난해 야대(夜對)에서 그 때 마침 처치가 미진한 일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입시한 관원으로서 힘껏 다투어 마지않는 것을 내가 자못 괴로워하였으나 그 뒤에 생각하니 참으로 나를 사랑한 자였다. 지금 죄를 받았지만 처음 먹은 마음을 져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고 곧 석방하도록 명하셨다. 대개 최현은 이인거(李仁居)의 반역을 모르고 처사(處士)가 큰소리한 것이라고 망령되게 말한 일 때문에 죄받았다. 그 말이 충직하면 한때에 취할 뿐이 아니라 또한 능히 오래 되어도 알아 주시는 것이 이러하였다.
왕은 인명(仁明)하고 예지(睿智)하신 것이 백왕(百王)보다 뛰어나셨다. 팔도·백사(百司)의 문부(文簿)는 세밀히 분석하여 곡진하게 사리에 맞게 하셨고 대소신민의 추감(推勘)은 매우 미세하더라도 어두워 밝히지 못하는 것이 없으셨다. 형옥(刑獄)에 대해서는 더욱이 삼가고 돌보도록 힘써 계복(啓覆)에 친림하여 평번(平反)한 것이 많고 한추위와 한더위에는 염려를 훨씬 더하셨다. 역옥이 일어나면 문득 이르기를 ‘백성이 원망하여 반역하는 것은 내가 어질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고, 반역한 정상이 뚜렷하더라도 협박 때문에 따른 자는 다스리지 않으셨다. 왕이 스스로 심리하시면 억울한 생각을 품는 자가 하나도 없었고, 옥사를 국문하는 형장(刑杖)을 가볍게 하여 그 분수(分數)를 줄이고, 모든 사죄(死罪)에 대해서는 애매하면 이미 승복한 자라도 문득 용서하고, 갑자년의 억울한 자도 다 뒤미처 죄를 씻어 주셨다. 이 때문에 역변(逆變)이 여러 번 일어났으나 사람들이 뜻밖에 걸리는 것을 근심하지 않았다.
계유년에 한인급(韓仁及) 등을 보내어 장자(長子) 휘(諱)를 세자로 봉하기를 청하고 아울러 추봉(追封)을 사례하게 하였는데, 갑술년에 황제가 태감(太監) 노유령(盧維寧)을 보내어 세자의 고칙(誥勅)과 채단(綵段)을 가져와 칙서를 내렸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왕은 대대로 동번(東藩)을 지켜오며 예를 지키고 의를 따랐으므로 공순한 전통을 반드시 능히 이어받을 것인데 봉강(封疆)에 일이 많으니 빨리 주무(綢繆)해야 할 것이다. 이에 지금 이미 세자를 세웠으니, 이 가르침을 명시하여 전례를 따르고 변하지 말아서 국가를 보전하게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을해년 12월 9일에 왕비가 승하하셨다. 왕비는 정정(貞靜)하고 인명(仁明)한 덕이 있고 왕을 모시되 풍간(諷諫)하신 것이 많았다. 장릉(長陵) 유향(酉向)의 언덕에 장사하였는데 파주(坡州) 북쪽에 있고, 그 사적은 본릉(本陵)의 지문(誌文)에 자세하다.
왕은 천품이 영의(英毅)하나 늘 스스로 겸손하셨다. 병자년 여름에 하교하기를 ‘국가의 치란 상태는 임금의 덕에 달려 있다. 작은 말 한마디라도 흥망이 달라지고 깊숙한 곳에 혼자 있더라도 삼가지 않으면 나타나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이 두려움 때문에 감히 태만하고 안일하지 않았으나, 본성이 어리석고 학력이 없어서 말을 듣고 눈동자를 보아도 어진 사람인지 간사한 자인지 모르겠고 일에 임하여 헤아려도 시비를 가리지 못한다. 게다가 기로(耆老)가 많이 죽어 경외(敬畏)가 점점 느슨해져서 치령(治令)을 내는 근원이 바른 것을 얻지 못하니, 인심이 흩어지고 국가가 망하려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다. 상을 당한 뒤에 오래도록 경연을 멈추었는데, 이것은 죽음을 슬퍼하고 어진이를 생각하는 데에서 나오기는 하였으나, 지금 와서 생각하면 이 또한 잘못이다. 이제 하늘의 꾸중이 갈수록 더욱 심해져서 귀에 대고 말하고 면전에서 가르치는 것과 같을 뿐이 아니니, 내가 매우 두렵다. 이제부터 허물을 고치고 착한 사람이 되어 위로 하늘의 꾸중에 보답하고 아래로 백성의 마음을 위로하려 하니, 나의 신하들은 내가 허물을 고치려는 것을 받아들여 더불어 큰일을 할 수 없다 하지 말고 또한 각각 그 마음을 새롭게 하여 구습을 일변하고 성실을 다하도록 힘써서 함께 구제할 것을 기약해야 할 것이다. 삼사는 허물을 바루고 잘못을 바로잡아 위아래에 과실이 없게 하고, 이조는 사욕이 없고 편파가 없이 오직 어진 사람을 임용하고, 호조는 용도를 절약하고 피폐를 염려하여 백성의 힘을 손상하지 말고, 예조는 학업을 권장하여 교화를 밝히고, 병조는 인재를 장려하고 뽑아 써서 장수가 모자라지 않게 하고, 형조는 형벌을 삼가고 안타깝게 여겨 억울한 일이 없게 하고, 공조는 쇠퇴한 것을 닦아 일으켜 전일과 같지 않게 하라. 모든 관사도 마음을 다하여 그 직무를 폐기하는 일이 없게 하라. 조정이 한번 바루어지면 사방이 동화되는 보람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아, 그대들의 할아버지와 그대들의 아버지가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받았으니, 막중한 분의(分義)를 생각해서 해야 할 직무를 다하여 치평(治平)을 가져오고 교화를 일으키면, 그대들의 조상에게 어찌 영광이 있지 않겠는가. 능히 지극한 정성을 다하면 이것을 해내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니, 각각 힘쓰라. 옛말에 「어지러운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는 엄중한 법을 쓴다.」 하였으니, 귀근(貴近)에 대해서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임금 노릇도 어렵고 신하 노릇도 쉽지 않다.」 하였으니, 위아래가 각각 조심하고 힘써서 위태로운 것을 바꾸어 편안하게 하면 또한 아름답지 않겠는가.’ 하셨다.
또 하교하기를 ‘정치의 요체는 인재를 얻는 데에 있고 치평을 가져오는 일에는 어진이를 구하는 것이 급한데, 나는 인재가 세상에 모자라지 않으나 어진이를 오게 하는 방도가 넓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어진 사람이 문지기나 야경꾼이 되고 은둔하는 사람은 더 깊이 숨지 못할까 염려한다면, 치평을 가져오려 하더라도 어찌 될 수 있겠는가. 지금의 방도로서는 유능한 자를 널리 구하여 천공(天工)을 대행하게 하는 것이 최선이다. 이를테면 몸가짐이 바르고 덕행이 있는 자와, 의리에 잠심(潛心)하여 학술이 있는 자와, 용맹과 지혜가 남보다 나아 적을 제압할 수 있는 자와, 기절(氣節)이 도탑고 굳어 직간(直諫)할 수 있는 자와, 강포하여 선한 일을 막는 자를 두려워하지 않고 봉공(奉公)에 굳세고 과감한 자와, 세상일에 통달하여 처사가 명민(明敏)한 자는 다 크게 쓸 사람이니, 직위에 있는 문·무관(文武官)을 시켜 각각 아는 사람을 천거하게 하고, 또 각도의 감사를 시켜 찾아서 아뢰어 어진이를 버려두는 한탄이 없게 하라. 또 남을 알기는 매우 어려우나 스스로를 아는 것은 밝으니, 재능과 지혜가 뛰어나서 세상을 구제하고 적을 막을 수 있는 자는 각각 스스로를 천거하여 내가 기량에 따라 쓰도록 만들라. 아, 옛사람 중에도 자신을 천거한 자가 있거니와, 국가를 다스려 편안하게 한다면 찾으러 오기를 기다리지 않더라도 무엇이 해롭겠는가.’ 하셨다.
또 하교하셨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사람이 세상에 나서 오래 살아 죽지 않는 자가 없으니 아녀자의 손에서 죽어 초목과 함께 썩는 것보다 의리를 따라 앞으로 나아가 장부의 뜻을 이루는 것이 낫다.’ 하셨다. 대개 정묘년에 금인(金人)이 깊이 들어왔을 때에 왕이 강도(江都)에 들어가 묘당의 계책을 써서 적이 화평을 청함에 따라 허락하셨는데, 계유년에 이르러 우리에게 폐물을 늘리라고 협박하고 군사를 원조하라고 꾀었다. 큰 의리가 달려 있어서 다른 것을 고려할 겨를이 없으므로 맹약을 어겼다고 꾸짖어 절교를 알렸더니, 병자년 봄에 다시 사자를 보내어 왔다. 뭇사람의 의논이 준열히 일어나 사자를 베어 죽이기를 앞다투어 청하였는데 사자가 몰래 듣고 놀라 달아났다. 사기(事機)가 이미 변하자 왕언(王言)이 여러 번 내려졌는데 뜻은 더욱 격렬하였다. 12월에 적병이 갑작스레 이르렀으므로 왕이 강도로 향하려다가 일이 급해져서 방향을 돌려 남한 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가셨는데 적이 군사를 더하여 에워싸니 왕이 친히 성을 순행하며 삼군(三軍)을 위로해 주셨다.
하루는 날씨가 춥고 눈이 내리는데 왕이 행궁(行宮) 뜰에 나와 기도하셨다. 향을 피우고 네 번 절한 다음 거적을 깔고 빌기를 ‘고립된 이 성에 들어와 믿는 것은 하늘인데 이처럼 눈이 내려 장차 얼어 죽을 형세이니, 내 한 몸은 아까울 것도 못 되나 백관(百官)·만민(萬民)이 하늘에 무슨 죄가 있습니까. 조금 개게 하여 우리 군사와 백성을 살리소서.’ 하고는 땅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저녁이 되어도 그치지 않으셨다. 빗물이 어의에 스미므로 근시가 일어나기를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고 대신이 다시 청하여도 따르지 않다가 옷자락을 끌고 울며 청한지 한참 만에야 비로소 일어나 네 번 절하고 물러나시는데 눈물이 턱으로 흘러내리니, 장사(將士)가 듣고 모두 느껴 울었다. 왕이 쓰던 취구(毳具)·모금(毛衾)을 내어 성 위의 군사들에게 조각조각 나누어 주고 호종(扈從)한 신하들이 앞다투어 의금(衣衾)을 보내니, 군사들이 추위를 잊었다. 적이 화해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으시니, 밤을 타서 성을 세 번 쳐왔으나 세 번 모두 격퇴하였으므로 사기가 더욱 떨쳤다.
그러나 40여 일 동안 포위되어 성 안에 양식이 떨어지고 강도의 패보(敗報)가 또 이르렀으므로, 김류·최명길(崔鳴吉) 등이 왕에게 아뢰기를 ‘피폐(皮幣)·주옥(珠玉)을 바치는 일은 탕왕(湯王)·문왕(文王)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하고 성에서 나가기를 굳이 청하고 세자도 스스로 가서 인질이 되겠다고 청하니, 왕이 종사(宗社)와 백성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며 따르셨다. 정축년 정월 29일에 적영(敵營)으로부터 서울로 돌아오시니, 묘모(廟貌)가 퇴폐하지 않고 유민(遺民)이 온전히 돌아왔다. 곧 강도에서 군율(軍律)을 어긴 장수를 주벌하고, 상신(相臣) 김상용(金尙容) 등의 충성을 표창하고, 홍익한(洪翼漢)·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 등의 죽음을 가엾이 여겨 그 집을 돌보고, 전사한 군졸의 한데에 드러난 해골을 묻고 근신을 보내어 제단을 쌓아 제사하고, 이역(異域)에 잡혀간 사녀(士女)를 불쌍히 여겨 금을 내어 속(贖)하니, 민정(民情)이 크게 위안되었다.
【원전】 35 집 351 면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왕실-의식(儀式) / *역사-편사(編史) / *어문학-문학(文學)


[주D-001]늠인(廩人) : 곡식을 맡은 관원.
[주D-002]을해년 : 1635 인조 13년.
[주D-003]을축년 : 1625 인조 3년.
[주D-004]병술년 : 1645 인조 24년.
[주D-005]도헌(都憲) : 대사헌.
[주D-006]경오년 : 1630 인조 8년.
[주D-007]계해년 : 1623 인조 1년.
[주D-008]무진년 : 1628 인조 6년.
[주D-009]정묘년 : 1627 인조 5년.
[주D-010]병자년 : 1636 인조 14년.
[주D-011]홍범(洪範) : 《서경(書經)》의 편명(篇名).
[주D-012]정해년 : 1647 인조 25년.
[주D-013]정확(鼎鑊) : 삶아 죽이는 형벌에 쓰는 솥.
[주D-014]갑자년 : 1624 인조 2년.
[주D-015]계유년 : 1633 인조 11년.
[주D-016]휘(諱) : 왕().
[주D-017]갑술년 : 1634 인조 12년.
[주D-018]을해년 : 1635 인조 13년.
[주D-019]병자년 : 1636 인조 14년.
[주D-020]정묘년 : 1627 인조 5년.
[주D-021]계유년 : 1633 인조 11년.
[주D-022]병자년 : 1636 인조 14년.
[주D-023]정축년 : 1637. 인조 15년.

인조

 

인조
 부록
인조 대왕 행장(行狀)④

왕은 반정한 뒤로 사대(事大)에 매우 근신하셨다. 바닷길이 험난하여도 조빙(朝聘)이 정성스러웠으며, 희종 황제(憙宗皇帝)의 휘음(諱音)을 듣고는 뭇 신하를 거느리고 애림(哀臨)하여 상복을 입고, 홍방(洪霶)을 보내어 진위(陳慰)하고 진향(進香)하게 하였으며 한여직(韓汝溭) 등을 보내어 새 황제의 등극을 축하하게 하셨다. 정묘년에 기미한 뒤에 권첩(權怗) 등을 보내어 연유를 갖추어 진주(陳奏)하니, 예부(禮部)의 회자(回咨)에 ‘성지(聖旨)를 받드니 「왕이 병화를 입은 정상을 아뢴 것을 보고 짐의 마음이 매우 슬프다. 오랑캐와 통문(通門)하며 왕래하고 임시방편으로 군사를 파산한 것은 왕의 본의가 아니며 군신의 대의로 말하면 해와 별처럼 밝으니 왕의 충성은 짐이 환히 아는 바이다. 왕은 와신상담에 더욱 힘쓰고 엄히 방비하라.」 하셨습니다.’ 하였다. 유흥치(劉興治)가 가도(椵島)에서 반역하여 흠차 총병(欽差摠兵) 진계성(陳繼盛)을 공격하여 죽였을 때에 왕이 이서(李曙)·정충신(鄭忠信) 등을 보내어 그 죄를 성토하니 유흥치가 달아나 해도(海島)로 들어갔는데, 중국 장수들이 듣고 의롭게 여겼다.
관내(關內)가 병화를 입었다는 말을 듣고 정두원(鄭斗源)을 보내어 표문(表文)을 가져가서 진위(陳慰)하게 하고 또 병기(兵器)를 바쳤으며, 이어서 고용후(高用厚)를 보내어 기보(畿輔)를 신속히 소탕한 것을 축하하게 하셨다. 경중명(耿仲明)·공유덕(孔有德) 등이 무리를 다 데리고 심양(瀋陽)으로 투항해 들어갔을 때에 군사를 일으켜 중국 군사와 협력하여 토벌하여 패주시켰다. 요동(遼東)의 사인(士人) 전세작(全世爵) 등 18인이 난리를 피하여 와서 의탁하였을 때에 가엾게 여겨 입히고 먹이니, 전세작 등이 죽음을 맹세하고 감사하였다. 표류하여 온 한인(漢人)은 모두 후하게 도와서 보냈는데 이런 일이 전후에 매우 많았다. 포위된 성 안에 있을 때에도 절일(節日)을 당하면 망궐례를 거행하되 마치 지척에서 대하듯이 하셨다. 환도한 뒤에 경연에서 《시전》을 강독하다가 ‘화락한 군자는 천자의 나라를 진수(鎭守)하리로다.’ 한 데서 이르러, 왕이 크게 탄식하고 줄줄 눈물을 흘리니, 좌우가 모두 슬퍼하였다. 한 범선(帆船)에 의지하여 순풍을 타고 가서 충성을 펴려 하였는데 마침내 이루지 못하였으나, 만 굽이 물이 반드시 동으로 향해 가는 마음은 신명에게 질정할 만하셨다.
교린(交隣)에는 반드시 믿음을 중요하게 여기셨다. 유구국(琉球國)의 임자정(林子政) 등 8인이 표류하여 우리 변방에 이르렀는데 위무하여 보냈더니, 중산왕의 세자 상풍(尙豊)이 우리 부경 사행(赴京使行) 편에 자문(咨文)과 예폐(禮幣)를 전해 보내어 사례하였다. 일본 관백(關白) 수충(秀忠)이 가광(家光)에게 전위(傳位)하고 사자를 보내어 내빙(來聘)하여 세호(世好)를 닦기를 청하였으므로, 정립(鄭岦) 등을 보내어 회답하고 잡혀갔던 1백 40여 인을 쇄환하였다. 대마 도추(對馬島酋)가 중 현방(玄方)을 보내어 공무목(公貿木)을 줄이지 말기를 청하고, 또 평성행(平成行) 등을 보내어 도중(島中)의 재물이 없음을 고하고 해마다 보내 주는 물건을 당겨 내어 주기를 청하였는데, 왕이 약조를 어기는 것이라 하여 윤허하지 않고 특별히 물건을 내려주셨다. 가광이 그 할아버지를 위하여 복을 비느라 큰 절을 세워 일광사(日光寺)라 이름하고 신필(宸筆)을 얻어 나라 안에 뽐내려 하였다. 왕은 천품이 작은 기예에 능한 것이 많아 널리 통달하지 않는 것이 없고 필법이 매우 기특하였으나 숨기고 나타내지 않으셨는데, 대신이 먼 데 사람의 희망을 어겨서는 안 된다고 아뢰니, 종실 중에서 뛰어난 사람을 시켜 쓰게 하여 내려주셨다. 대개 작은 기예를 전해 보이고 싶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무인년에 조씨(趙氏)를 계비(繼妃)로 들이시니, 영돈녕부사 한원 부원군(漢原府院君) 조창원(趙昌遠)의 따님이다. 소현 세자(昭顯世子)가 정축년에 심양(瀋陽)에 가서 연경(燕京)으로 옮겨 들어갔다가 을유년 봄에 돌아와 곧 병이 위독하여 서거하고 그 맏아들도 병들었으므로 시사(時事)에 근심이 많았다. 왕에게 봉림 대군(鳳林大君)과 인평 대군 이요(麟坪大君李㴭) 두 아들이 있었는데, 봉림 대군은 인효(仁孝)하고 활달하며 나이도 위이었다. 왕이 나라에 연장한 대군이 있는 것은 사직의 복이라 하여 대신들과 경대부에게 물어 계책을 정하셨는데, 그때 봉림 대군이 막 북경에서 돌아왔다. 그래서 봉림 대군 휘(諱)를 세자로 삼으니, 여정이 일치하였다.
처음에 세자가 눈물을 흘리며 감히 감당할 수 없다고 두 번 사퇴하는 글을 올리니, 왕이 두 번 수비(手批)를 내려 답하셨는데, 처음에는 ‘너는 총명하고 효우(孝友)하며 그릇이 작지 않으므로 특별히 형이 죽으면 아우가 이어받는 예(禮)를 쓰니, 너는 사양하지 말고 효제(孝悌)의 도리를 더욱 닦고 형의 아들을 네가 낳은 아들처럼 여기라.’ 하고 두 번째에는 ‘내 뜻이 먼저 정해지고 계책을 물었는데 다들 너를 어질게 여기니 너는 굳이 사양하지 말고 도심(道心)을 공경히 지키라.’ 하셨다. 그 뒤에 왕이 조용히 세자에게 이르기를 ‘접때 네 글에 답하여 도심을 공경히 지키라 하였는데, 네 능히 그 뜻을 아느냐. 이것은 상고(上古)에 서로 전한 심법(心法)이다. 「인심은 위태하고 도심은 희미하니 정순하고 전일해야 참으로 그 중도를 지킬 수 있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는 이 열여섯 자는 몸을 닦고 나라를 다스리는 큰 요체를 담고 있으니, 너는 정순하고 전일한 도리를 강구하고 중도를 지키는 도리를 힘써 행하라.’ 하시니, 세자가 일어나 머리를 조아리고 공경히 명을 받았다. 이것은 삼대(三代) 이후에 듣지 못한 일이거니와, 위로 요(堯)·순(舜)·우(禹)가 서로 전수한 심법을 이을 수 있으니, 아, 아름답다.
왕이 늘 이르기를 ‘은(殷)나라는 하(夏)나라에서 거울삼고 당(唐)나라는 수(隋)나라에서 거울삼았거니와, 지금 거울삼을 바는 어찌 혼조(昏朝)에 있지 않겠는가. 위아래가 서로 힘써 아첨하던 일을 본뜨지 말도록 하라.’ 하셨다. 또 세자에게 이르기를 ‘접때 밖에서는 외척과 권간(權奸), 안에서는 내시와 궁첩들이 뇌물을 자행하고 서로 의탁하여, 처음에는 사사로이 바쳐 먹여주고 나중에는 두터운 정을 맺어 형벌을 벗어나고 벼슬을 꾀하여 하고 싶은 대로 하였는데, 이는 다 탐욕이 끝이 없는 어둡고 약한 광해의 성품 때문으로, 마침내 필부가 되려 하여도 될 수 없었다. 내가 이것을 두려워하여 그 기미를 힘껏 막으니, 정사에 임하고 일을 처치하는 데에 다시는 얽매이고 끌리는 것이 없었고 심신(心神)도 편안함을 깨달았다. 이것은 네가 오늘날 친히 보는 것이거니와, 뒷날에도 이러해야 할 것이다.’ 하시니, 세자가 일어나 공경히 들었다. 왕이 또 일본은 죽이기를 좋아하고 은혜가 적으므로 명령이 관백의 입에서 한번 나오면 감히 그 그른 것을 바로잡지 못하고 따라서 종용하니 이것은 패망하는 길이라 하여, 세자에게 이르기를 ‘우(禹)는 훌륭한 말에 대하여 배사하고 문왕(文王)은 천한 사람의 말에서도 채택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재주가 미치지 못하거나 덕이 모자라서 그런 것이겠는가. 전부터 일본의 전세(傳世)는 두 세대에 지나지 않았는데, 대개 창업한 자는 자못 그것이 어렵고 큰일임을 알기 때문에 겨우 자신 때에는 면하였으나 그 자손에 이르러서는 도리로 다스리지 않고 악한 일만을 더하여 중기(重器)가 근심스러운 줄 모르고 방탕한 대로 버려두었기 때문이다. 곧 망한 것은 참으로 이 때문이니,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하셨으니, 대개 풍자하여 깨우치신 것이다.
병술년에 폐빈(廢嬪) 강서인(姜庶人)이 대역(大逆)으로 죽었다. 강은 심양(瀋陽)에 있을 때부터 소행에 부도한 짓이 많고 몰래 역위(易位)를 꾀하였으며, 대궐에 돌아온 뒤에는 더욱 패악(悖惡)을 부려 흉한 것을 묻어 저주하고 요사를 부려 독을 두는 등 못하는 짓이 없다가 반역의 정상이 드러나서 폐출(廢出)되어 사사(賜死)당했는데, 하교하기를 ‘오늘날의 일은 윤리를 밝혀 근심을 막는 데에 있다. 혹 죄가 의심스럽기만 한 것이라면 어찌 차마 단연히 법을 행하여 아이들이 날마다 울며 의지할 데가 없게 하겠는가. 옛말에 「작은 것을 참지 못하면 대모(大謀)를 어지럽히게 되고 법이 한번 흔들리면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게 된다.」 하였으니, 이것은 참으로 어쩔 수 없는 데에서 나온 것이고 참소를 믿고 죽이기를 좋아하여 그런 것이 아니다. 그 죄는 무겁더라도 은례(恩禮)를 전혀 없앨 수 없으니, 예장(禮葬)하게 하고 3년 동안의 제물도 적당히 주게 하라.’ 하셨다. 왕법을 시행하되 천의(天意)가 또한 애연(藹然)하셨다.
이때 왕이 창경궁(昌慶宮)에 계셨는데 어침(御寢)·금정(禁庭)이 하나도 마르고 깨끗한 곳이 없으므로 조정의 신하들이 영안위(永安尉)의 집에 임시로 계시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근방의 민가가 많이 침점(侵占)당한다 하여 허락하지 않으셨다. 인경궁(仁慶宮)의 재목을 헐어서 창덕궁(昌德宮)의 옛터에 옮겨 짓기를 청하였는데, 공역에 드는 물건을 다 각사(各司)에서 취하여 두어 달 만에 낙성하니 원망하는 백성이 없었다. 정해년에 창덕궁에 이어(移御)하셨다. 기축년에 왕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원손(元孫) 휘(諱) 모(某)를 왕세손으로 책봉하셨다. 왕세손은 옥질(玉質)이 침착하고 신중하며 예용(禮容)이 점잖고 우아하므로 모든 신하가 서로 축하하였다.
왕은 전신을 기울여 밤낮으로 정사에 힘쓰셨다. 병환이 없을 때에는 문서를 출납하는 일을 밤이 되어도 쉬지 않으므로 은대(銀臺)의 금직(禁直)하는 신하가 감히 자지 못하였다. 왕의 병환은 임신년 상중에 계실 때에 시작되어 피로하고 염려하는 가운데에 손상이 쌓여 17년 동안 낫지 않고 더하다 덜하다 하셨다. 무자년 겨울 이후 6∼7개월 동안 자못 좋아지시어 때때로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고 천재(天災)가 번갈아 일어나는 것을 근심하고 시사(時事)가 어렵고 위태한 것을 염려하여 임금의 과실을 듣기를 바라시는 것이 처음에 비하여 게으르지 않았다. 4월에 또 인견하여 민사(民事)·병기(兵機)와 서환(西患)·남우(南憂)에 대하여 묻지 않으신 것이 없었을 때에 성지(城池)와 군사를 말한 자가 있었는데, 왕이 이르기를 ‘적을 막는 도리는 성과 군사에 달려 있지 않고 장수에 달려 있으니, 내 소견으로는 장수를 논하는 일을 먼저 해야 하겠다.’ 하시고, 강도(江都)의 목장을 백성이 경작하도록 허가하고 수륙(水陸)의 방비책에 대한 천어(天語)가 정녕하셨다. 며칠 안 되어 조금 더 나아지다 갑자기 위독해졌는데 내국(內局)이 시약청(侍藥廳)을 설치하기를 청하였으나, 폐단이 있으므로 설치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이해 5월 8일 병인에 창덕궁의 정침(正寢)에서 승하하셨는데, 임종 때에 대신과 근신이 모두 입시한 것은 마지막을 바르게 하는 예이다. 춘추는 55세이고 재위는 27년이었다. 이해 9월 20일에 왕비의 능 오른쪽에 장사하였는데, 왕의 명에 따른 것이다. 왕비의 장사 때에 모든 석역(石役)을 되도록 간략하게 힘쓰고 곡장(曲墻)·상설(象設)과 정자각(丁字閣)을 다 가운데에 두어 한 편으로 치우치지 않게 하였는데, 뒷날에 백성의 힘이 거듭 괴로울 것을 염려한 것이다.
왕은 성품이 공손하고 검소하셨다. 늘 사치를 경계하고 성색(聲色)·진완(珍玩)을 즐기는 일을 마음이나 눈에 두신 적이 없으며, 하교하기를 ‘사치는 말세의 폐습이다. 이것이 어찌 세상을 다스리는 데에 숭상할 것이겠는가. 생각건대, 우리 조종께서 몸소 절검(節儉)을 행하여 위에서 모범을 보여 이끄시어 뭇 신하가 감화되어 돈박(敦朴)한 풍습이 수백 년 동안 유행하였는데, 근래 국운이 불행하여 혼조(昏朝)의 임금과 신하가 조종의 좋은 법과 아름다운 뜻을 저버리고 사치를 다투어 숭상하니 의복·음식과 거마·궁실이 모두 사치해졌다. 염치가 이 때문에 없어지고 백성이 이 때문에 몹시 괴로움을 당하고 있으니 어찌 마음 아프지 않겠는가. 내가 외람되게 큰 통서(統緖)를 이어받아 밤낮으로 공경하고 두려워하며 먼저 이 버릇을 없애려고 생각하나, 오염된 지 이미 오래 되어 갑자기 고치기 어렵다. 그러나 예전부터 백성을 바꾸어서 다스린 일은 없거니와, 위에서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아래에서는 반드시 더 심하게 좋아하는 법이니, 오늘날 변화하지 않는 것이 어찌 모범이 되어 이끄는 도리가 미진하여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고요히 생각건대 스스로 뉘우치고 책망할 뿐이다. 모든 우리 종실과 공경 대부는 다 내 뜻을 본받아 혼인·빈객의 수요와 거마·의복의 제도에 대하여 검약을 힘쓰라. 폐습을 크게 고치면 어찌 보치(補治)하는 한 방도가 아니겠는가. 옛사람이 사치의 해독은 물불보다 심하다 하였거니와, 이 한 가지 말만 음미하여도 경계할 줄 알 것이니, 공경하라. 이것을 깊이 징계삼으라.’ 하셨다. 신하들을 대하면 번번이 사치한 버릇의 해독을 말하고 궁중에서 입는 것은 오로지 소박한 것을 숭상하고 법복(法服)이 아니면 무늬 있는 비단을 입지 않고 여름철에는 베옷을 입되 또한 고운 것을 취하지 않으셨다. 이 때에 이르러 염(斂)에 쓰인 것은 명주옷이 많았는데, 다 평소에 지어 둔 것이다.
승하하신 날에 대궐에 달려와 곡하는 서울 안의 인사가 길을 메웠는데 모두 부모를 잃은 듯하였고, 원근의 외방에서 와서 곡하는 사대부가 잇따랐고 먼 지방 벽촌의 어리석은 백성까지도 놀라 통곡하였다. 아, 왕은 뛰어난 자질로서 삼대(三代)를 만회할 뜻이 있었으므로 말에 나타나고 명령에 베푸는 것이 다 경전 가운데에서 나왔으니, 아름다운 말과 아름다운 법을 사적에 이루 다 쓸 수 없다. 거의 풍속이 바뀌어 변화하는 지경에 이를 수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많은 재해를 입은데다 질병까지 겹쳐서 정치가 하고자 하신 대로 되지 못하니 슬피 한탄하셨다. 그러나 윤리가 다시 밝아지고 종사가 다시 편안해졌으니 중흥(中興)의 위열(偉烈)은 조종보다 빛나고 성덕(盛德)과 지행(至行)은 후세에 길이 일컬어질 것이다. 백성을 인애하는 정사는 만년에 이르러 더욱 부지런했고 폐단을 없앨 뜻은 떨치지 않을 때에 더욱 도타웠으며 어진이를 가려서 국본(國本)을 정하고 도리를 중시하여 심법을 전수하신 것으로 말하면, 심원하신 그 지려(智慮)와 고명하신 학문은 또한 말세의 임금이 비슷하게라도 따를 수 없을 것이다. 아, 착하시다. 아, 애통하다.”
【원전】 35 집 351 면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왕실-의식(儀式) / *역사-편사(編史) / *어문학-문학(文學)


[주D-001]무인년 : 1638 인조 16년.
[주D-002]정축년 : 1637 인조 15년.
[주D-003]을유년 : 1645 인조 23년.
[주D-004]휘(諱) : 호(淏).
[주D-005]병술년 : 1646 인조 24년.
[주D-006]정해년 : 1647 인조 25년.
[주D-007]기축년 : 1649 인조 27년.
[주D-008]모(某) : 원(棩).
[주D-009]은대(銀臺) : 승정원(承政院).
[주D-010]임신년 : 1632 인조 10년.
[주D-011]무자년 : 1648 인조 26년.
[주D-012]내국(內局) : 내의원(內醫院).

 부록
인조 대왕 행장(行狀)④

왕은 반정한 뒤로 사대(事大)에 매우 근신하셨다. 바닷길이 험난하여도 조빙(朝聘)이 정성스러웠으며, 희종 황제(憙宗皇帝)의 휘음(諱音)을 듣고는 뭇 신하를 거느리고 애림(哀臨)하여 상복을 입고, 홍방(洪霶)을 보내어 진위(陳慰)하고 진향(進香)하게 하였으며 한여직(韓汝溭) 등을 보내어 새 황제의 등극을 축하하게 하셨다. 정묘년에 기미한 뒤에 권첩(權怗) 등을 보내어 연유를 갖추어 진주(陳奏)하니, 예부(禮部)의 회자(回咨)에 ‘성지(聖旨)를 받드니 「왕이 병화를 입은 정상을 아뢴 것을 보고 짐의 마음이 매우 슬프다. 오랑캐와 통문(通門)하며 왕래하고 임시방편으로 군사를 파산한 것은 왕의 본의가 아니며 군신의 대의로 말하면 해와 별처럼 밝으니 왕의 충성은 짐이 환히 아는 바이다. 왕은 와신상담에 더욱 힘쓰고 엄히 방비하라.」 하셨습니다.’ 하였다. 유흥치(劉興治)가 가도(椵島)에서 반역하여 흠차 총병(欽差摠兵) 진계성(陳繼盛)을 공격하여 죽였을 때에 왕이 이서(李曙)·정충신(鄭忠信) 등을 보내어 그 죄를 성토하니 유흥치가 달아나 해도(海島)로 들어갔는데, 중국 장수들이 듣고 의롭게 여겼다.
관내(關內)가 병화를 입었다는 말을 듣고 정두원(鄭斗源)을 보내어 표문(表文)을 가져가서 진위(陳慰)하게 하고 또 병기(兵器)를 바쳤으며, 이어서 고용후(高用厚)를 보내어 기보(畿輔)를 신속히 소탕한 것을 축하하게 하셨다. 경중명(耿仲明)·공유덕(孔有德) 등이 무리를 다 데리고 심양(瀋陽)으로 투항해 들어갔을 때에 군사를 일으켜 중국 군사와 협력하여 토벌하여 패주시켰다. 요동(遼東)의 사인(士人) 전세작(全世爵) 등 18인이 난리를 피하여 와서 의탁하였을 때에 가엾게 여겨 입히고 먹이니, 전세작 등이 죽음을 맹세하고 감사하였다. 표류하여 온 한인(漢人)은 모두 후하게 도와서 보냈는데 이런 일이 전후에 매우 많았다. 포위된 성 안에 있을 때에도 절일(節日)을 당하면 망궐례를 거행하되 마치 지척에서 대하듯이 하셨다. 환도한 뒤에 경연에서 《시전》을 강독하다가 ‘화락한 군자는 천자의 나라를 진수(鎭守)하리로다.’ 한 데서 이르러, 왕이 크게 탄식하고 줄줄 눈물을 흘리니, 좌우가 모두 슬퍼하였다. 한 범선(帆船)에 의지하여 순풍을 타고 가서 충성을 펴려 하였는데 마침내 이루지 못하였으나, 만 굽이 물이 반드시 동으로 향해 가는 마음은 신명에게 질정할 만하셨다.
교린(交隣)에는 반드시 믿음을 중요하게 여기셨다. 유구국(琉球國)의 임자정(林子政) 등 8인이 표류하여 우리 변방에 이르렀는데 위무하여 보냈더니, 중산왕의 세자 상풍(尙豊)이 우리 부경 사행(赴京使行) 편에 자문(咨文)과 예폐(禮幣)를 전해 보내어 사례하였다. 일본 관백(關白) 수충(秀忠)이 가광(家光)에게 전위(傳位)하고 사자를 보내어 내빙(來聘)하여 세호(世好)를 닦기를 청하였으므로, 정립(鄭岦) 등을 보내어 회답하고 잡혀갔던 1백 40여 인을 쇄환하였다. 대마 도추(對馬島酋)가 중 현방(玄方)을 보내어 공무목(公貿木)을 줄이지 말기를 청하고, 또 평성행(平成行) 등을 보내어 도중(島中)의 재물이 없음을 고하고 해마다 보내 주는 물건을 당겨 내어 주기를 청하였는데, 왕이 약조를 어기는 것이라 하여 윤허하지 않고 특별히 물건을 내려주셨다. 가광이 그 할아버지를 위하여 복을 비느라 큰 절을 세워 일광사(日光寺)라 이름하고 신필(宸筆)을 얻어 나라 안에 뽐내려 하였다. 왕은 천품이 작은 기예에 능한 것이 많아 널리 통달하지 않는 것이 없고 필법이 매우 기특하였으나 숨기고 나타내지 않으셨는데, 대신이 먼 데 사람의 희망을 어겨서는 안 된다고 아뢰니, 종실 중에서 뛰어난 사람을 시켜 쓰게 하여 내려주셨다. 대개 작은 기예를 전해 보이고 싶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무인년에 조씨(趙氏)를 계비(繼妃)로 들이시니, 영돈녕부사 한원 부원군(漢原府院君) 조창원(趙昌遠)의 따님이다. 소현 세자(昭顯世子)가 정축년에 심양(瀋陽)에 가서 연경(燕京)으로 옮겨 들어갔다가 을유년 봄에 돌아와 곧 병이 위독하여 서거하고 그 맏아들도 병들었으므로 시사(時事)에 근심이 많았다. 왕에게 봉림 대군(鳳林大君)과 인평 대군 이요(麟坪大君李㴭) 두 아들이 있었는데, 봉림 대군은 인효(仁孝)하고 활달하며 나이도 위이었다. 왕이 나라에 연장한 대군이 있는 것은 사직의 복이라 하여 대신들과 경대부에게 물어 계책을 정하셨는데, 그때 봉림 대군이 막 북경에서 돌아왔다. 그래서 봉림 대군 휘(諱)를 세자로 삼으니, 여정이 일치하였다.
처음에 세자가 눈물을 흘리며 감히 감당할 수 없다고 두 번 사퇴하는 글을 올리니, 왕이 두 번 수비(手批)를 내려 답하셨는데, 처음에는 ‘너는 총명하고 효우(孝友)하며 그릇이 작지 않으므로 특별히 형이 죽으면 아우가 이어받는 예(禮)를 쓰니, 너는 사양하지 말고 효제(孝悌)의 도리를 더욱 닦고 형의 아들을 네가 낳은 아들처럼 여기라.’ 하고 두 번째에는 ‘내 뜻이 먼저 정해지고 계책을 물었는데 다들 너를 어질게 여기니 너는 굳이 사양하지 말고 도심(道心)을 공경히 지키라.’ 하셨다. 그 뒤에 왕이 조용히 세자에게 이르기를 ‘접때 네 글에 답하여 도심을 공경히 지키라 하였는데, 네 능히 그 뜻을 아느냐. 이것은 상고(上古)에 서로 전한 심법(心法)이다. 「인심은 위태하고 도심은 희미하니 정순하고 전일해야 참으로 그 중도를 지킬 수 있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는 이 열여섯 자는 몸을 닦고 나라를 다스리는 큰 요체를 담고 있으니, 너는 정순하고 전일한 도리를 강구하고 중도를 지키는 도리를 힘써 행하라.’ 하시니, 세자가 일어나 머리를 조아리고 공경히 명을 받았다. 이것은 삼대(三代) 이후에 듣지 못한 일이거니와, 위로 요(堯)·순(舜)·우(禹)가 서로 전수한 심법을 이을 수 있으니, 아, 아름답다.
왕이 늘 이르기를 ‘은(殷)나라는 하(夏)나라에서 거울삼고 당(唐)나라는 수(隋)나라에서 거울삼았거니와, 지금 거울삼을 바는 어찌 혼조(昏朝)에 있지 않겠는가. 위아래가 서로 힘써 아첨하던 일을 본뜨지 말도록 하라.’ 하셨다. 또 세자에게 이르기를 ‘접때 밖에서는 외척과 권간(權奸), 안에서는 내시와 궁첩들이 뇌물을 자행하고 서로 의탁하여, 처음에는 사사로이 바쳐 먹여주고 나중에는 두터운 정을 맺어 형벌을 벗어나고 벼슬을 꾀하여 하고 싶은 대로 하였는데, 이는 다 탐욕이 끝이 없는 어둡고 약한 광해의 성품 때문으로, 마침내 필부가 되려 하여도 될 수 없었다. 내가 이것을 두려워하여 그 기미를 힘껏 막으니, 정사에 임하고 일을 처치하는 데에 다시는 얽매이고 끌리는 것이 없었고 심신(心神)도 편안함을 깨달았다. 이것은 네가 오늘날 친히 보는 것이거니와, 뒷날에도 이러해야 할 것이다.’ 하시니, 세자가 일어나 공경히 들었다. 왕이 또 일본은 죽이기를 좋아하고 은혜가 적으므로 명령이 관백의 입에서 한번 나오면 감히 그 그른 것을 바로잡지 못하고 따라서 종용하니 이것은 패망하는 길이라 하여, 세자에게 이르기를 ‘우(禹)는 훌륭한 말에 대하여 배사하고 문왕(文王)은 천한 사람의 말에서도 채택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재주가 미치지 못하거나 덕이 모자라서 그런 것이겠는가. 전부터 일본의 전세(傳世)는 두 세대에 지나지 않았는데, 대개 창업한 자는 자못 그것이 어렵고 큰일임을 알기 때문에 겨우 자신 때에는 면하였으나 그 자손에 이르러서는 도리로 다스리지 않고 악한 일만을 더하여 중기(重器)가 근심스러운 줄 모르고 방탕한 대로 버려두었기 때문이다. 곧 망한 것은 참으로 이 때문이니,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하셨으니, 대개 풍자하여 깨우치신 것이다.
병술년에 폐빈(廢嬪) 강서인(姜庶人)이 대역(大逆)으로 죽었다. 강은 심양(瀋陽)에 있을 때부터 소행에 부도한 짓이 많고 몰래 역위(易位)를 꾀하였으며, 대궐에 돌아온 뒤에는 더욱 패악(悖惡)을 부려 흉한 것을 묻어 저주하고 요사를 부려 독을 두는 등 못하는 짓이 없다가 반역의 정상이 드러나서 폐출(廢出)되어 사사(賜死)당했는데, 하교하기를 ‘오늘날의 일은 윤리를 밝혀 근심을 막는 데에 있다. 혹 죄가 의심스럽기만 한 것이라면 어찌 차마 단연히 법을 행하여 아이들이 날마다 울며 의지할 데가 없게 하겠는가. 옛말에 「작은 것을 참지 못하면 대모(大謀)를 어지럽히게 되고 법이 한번 흔들리면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게 된다.」 하였으니, 이것은 참으로 어쩔 수 없는 데에서 나온 것이고 참소를 믿고 죽이기를 좋아하여 그런 것이 아니다. 그 죄는 무겁더라도 은례(恩禮)를 전혀 없앨 수 없으니, 예장(禮葬)하게 하고 3년 동안의 제물도 적당히 주게 하라.’ 하셨다. 왕법을 시행하되 천의(天意)가 또한 애연(藹然)하셨다.
이때 왕이 창경궁(昌慶宮)에 계셨는데 어침(御寢)·금정(禁庭)이 하나도 마르고 깨끗한 곳이 없으므로 조정의 신하들이 영안위(永安尉)의 집에 임시로 계시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근방의 민가가 많이 침점(侵占)당한다 하여 허락하지 않으셨다. 인경궁(仁慶宮)의 재목을 헐어서 창덕궁(昌德宮)의 옛터에 옮겨 짓기를 청하였는데, 공역에 드는 물건을 다 각사(各司)에서 취하여 두어 달 만에 낙성하니 원망하는 백성이 없었다. 정해년에 창덕궁에 이어(移御)하셨다. 기축년에 왕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원손(元孫) 휘(諱) 모(某)를 왕세손으로 책봉하셨다. 왕세손은 옥질(玉質)이 침착하고 신중하며 예용(禮容)이 점잖고 우아하므로 모든 신하가 서로 축하하였다.
왕은 전신을 기울여 밤낮으로 정사에 힘쓰셨다. 병환이 없을 때에는 문서를 출납하는 일을 밤이 되어도 쉬지 않으므로 은대(銀臺)의 금직(禁直)하는 신하가 감히 자지 못하였다. 왕의 병환은 임신년 상중에 계실 때에 시작되어 피로하고 염려하는 가운데에 손상이 쌓여 17년 동안 낫지 않고 더하다 덜하다 하셨다. 무자년 겨울 이후 6∼7개월 동안 자못 좋아지시어 때때로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고 천재(天災)가 번갈아 일어나는 것을 근심하고 시사(時事)가 어렵고 위태한 것을 염려하여 임금의 과실을 듣기를 바라시는 것이 처음에 비하여 게으르지 않았다. 4월에 또 인견하여 민사(民事)·병기(兵機)와 서환(西患)·남우(南憂)에 대하여 묻지 않으신 것이 없었을 때에 성지(城池)와 군사를 말한 자가 있었는데, 왕이 이르기를 ‘적을 막는 도리는 성과 군사에 달려 있지 않고 장수에 달려 있으니, 내 소견으로는 장수를 논하는 일을 먼저 해야 하겠다.’ 하시고, 강도(江都)의 목장을 백성이 경작하도록 허가하고 수륙(水陸)의 방비책에 대한 천어(天語)가 정녕하셨다. 며칠 안 되어 조금 더 나아지다 갑자기 위독해졌는데 내국(內局)이 시약청(侍藥廳)을 설치하기를 청하였으나, 폐단이 있으므로 설치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이해 5월 8일 병인에 창덕궁의 정침(正寢)에서 승하하셨는데, 임종 때에 대신과 근신이 모두 입시한 것은 마지막을 바르게 하는 예이다. 춘추는 55세이고 재위는 27년이었다. 이해 9월 20일에 왕비의 능 오른쪽에 장사하였는데, 왕의 명에 따른 것이다. 왕비의 장사 때에 모든 석역(石役)을 되도록 간략하게 힘쓰고 곡장(曲墻)·상설(象設)과 정자각(丁字閣)을 다 가운데에 두어 한 편으로 치우치지 않게 하였는데, 뒷날에 백성의 힘이 거듭 괴로울 것을 염려한 것이다.
왕은 성품이 공손하고 검소하셨다. 늘 사치를 경계하고 성색(聲色)·진완(珍玩)을 즐기는 일을 마음이나 눈에 두신 적이 없으며, 하교하기를 ‘사치는 말세의 폐습이다. 이것이 어찌 세상을 다스리는 데에 숭상할 것이겠는가. 생각건대, 우리 조종께서 몸소 절검(節儉)을 행하여 위에서 모범을 보여 이끄시어 뭇 신하가 감화되어 돈박(敦朴)한 풍습이 수백 년 동안 유행하였는데, 근래 국운이 불행하여 혼조(昏朝)의 임금과 신하가 조종의 좋은 법과 아름다운 뜻을 저버리고 사치를 다투어 숭상하니 의복·음식과 거마·궁실이 모두 사치해졌다. 염치가 이 때문에 없어지고 백성이 이 때문에 몹시 괴로움을 당하고 있으니 어찌 마음 아프지 않겠는가. 내가 외람되게 큰 통서(統緖)를 이어받아 밤낮으로 공경하고 두려워하며 먼저 이 버릇을 없애려고 생각하나, 오염된 지 이미 오래 되어 갑자기 고치기 어렵다. 그러나 예전부터 백성을 바꾸어서 다스린 일은 없거니와, 위에서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아래에서는 반드시 더 심하게 좋아하는 법이니, 오늘날 변화하지 않는 것이 어찌 모범이 되어 이끄는 도리가 미진하여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고요히 생각건대 스스로 뉘우치고 책망할 뿐이다. 모든 우리 종실과 공경 대부는 다 내 뜻을 본받아 혼인·빈객의 수요와 거마·의복의 제도에 대하여 검약을 힘쓰라. 폐습을 크게 고치면 어찌 보치(補治)하는 한 방도가 아니겠는가. 옛사람이 사치의 해독은 물불보다 심하다 하였거니와, 이 한 가지 말만 음미하여도 경계할 줄 알 것이니, 공경하라. 이것을 깊이 징계삼으라.’ 하셨다. 신하들을 대하면 번번이 사치한 버릇의 해독을 말하고 궁중에서 입는 것은 오로지 소박한 것을 숭상하고 법복(法服)이 아니면 무늬 있는 비단을 입지 않고 여름철에는 베옷을 입되 또한 고운 것을 취하지 않으셨다. 이 때에 이르러 염(斂)에 쓰인 것은 명주옷이 많았는데, 다 평소에 지어 둔 것이다.
승하하신 날에 대궐에 달려와 곡하는 서울 안의 인사가 길을 메웠는데 모두 부모를 잃은 듯하였고, 원근의 외방에서 와서 곡하는 사대부가 잇따랐고 먼 지방 벽촌의 어리석은 백성까지도 놀라 통곡하였다. 아, 왕은 뛰어난 자질로서 삼대(三代)를 만회할 뜻이 있었으므로 말에 나타나고 명령에 베푸는 것이 다 경전 가운데에서 나왔으니, 아름다운 말과 아름다운 법을 사적에 이루 다 쓸 수 없다. 거의 풍속이 바뀌어 변화하는 지경에 이를 수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많은 재해를 입은데다 질병까지 겹쳐서 정치가 하고자 하신 대로 되지 못하니 슬피 한탄하셨다. 그러나 윤리가 다시 밝아지고 종사가 다시 편안해졌으니 중흥(中興)의 위열(偉烈)은 조종보다 빛나고 성덕(盛德)과 지행(至行)은 후세에 길이 일컬어질 것이다. 백성을 인애하는 정사는 만년에 이르러 더욱 부지런했고 폐단을 없앨 뜻은 떨치지 않을 때에 더욱 도타웠으며 어진이를 가려서 국본(國本)을 정하고 도리를 중시하여 심법을 전수하신 것으로 말하면, 심원하신 그 지려(智慮)와 고명하신 학문은 또한 말세의 임금이 비슷하게라도 따를 수 없을 것이다. 아, 착하시다. 아, 애통하다.”
【원전】 35 집 351 면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왕실-의식(儀式) / *역사-편사(編史) / *어문학-문학(文學)


[주D-001]무인년 : 1638 인조 16년.
[주D-002]정축년 : 1637 인조 15년.
[주D-003]을유년 : 1645 인조 23년.
[주D-004]휘(諱) : 호(淏).
[주D-005]병술년 : 1646 인조 24년.
[주D-006]정해년 : 1647 인조 25년.
[주D-007]기축년 : 1649 인조 27년.
[주D-008]모(某) : 원(棩).
[주D-009]은대(銀臺) : 승정원(承政院).
[주D-010]임신년 : 1632 인조 10년.
[주D-011]무자년 : 1648 인조 26년.
[주D-012]내국(內局) : 내의원(內醫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