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신묘년 산행 /2011.1. 8. 춘천 삼악산 산행

2011.1.8. 춘천 삼악산 종주산행 산행

아베베1 2011. 1. 10. 11:18

 

 

 

 

 

 

 

 

 

 

 

 

 

 

 

 

 

 

   

   
   
 백호전서 제34권
 잡저(雜著)
풍악록(楓岳錄)


임자년 윤7월 24일(정유) 맑음. 아침에 배와 대추 등 과일을 사당에다 차려놓고 풍악(楓岳)에 다녀오겠다는 뜻을 고하였다. 그리고 나서 출발하여 통제(統制) 외삼촌 댁에 도착하였다. 내가 가지고 가는 것이라곤 《주역》 두 권과 일기책 한 권뿐이고, 그 나머지 일행들의 필요한 여행 도구는 모두 외삼촌이 챙기셨다. 부평 사는 외삼촌도 오셔서 나더러 멀리 가 너무 오래 있지 말라고 타일렀다. 통제 외삼촌과 함께 출발하여 동소문 밖에 나가 누원(樓院)에서 말에 꼴을 먹이면서 지나가는 중 덕명(德明)이라는 자를 만났다. 그 중은 일찍이 풍악산 구경을 했던 자로서 우리에게 대충 풍악의 뛰어난 경치를 말해주었다. 늦게야 양주읍(楊州邑)에 도착하여 외삼촌은 양주 목사를 찾아가고 나는 민가에 부쳐 있었는데, 양주 목사 이원정(李元禎)이 찾아와서 간단한 술자리를 마련해 주었고 유군 여거(柳君汝居)-이름은 광선(光善)임- 가 따라왔다. 유군은 원래 모르는 사이였는데 외삼촌을 통해 와 좌중에서 서로 인사를 나눈 사이이다. 그 민가에 벼룩이 많아 잠자리를 고을 서당(序堂)으로 옮겼는데 고을 주수의 아들인 정자(正字) 담명(聃命)이 찾아왔고 주좌(州佐)인 우(禹)와 한(韓) 두 사람도 왔다. 날씨가 매우 더웠다.

25일(무술) 맑음. 양주 목사 부자(父子)가 또 왔다. 아침에 출발하여 무성(蕪城) 고개를 넘어 감악산(紺嶽山)을 바라보고 가면서 유군(柳君)과 함께 홍복(弘福)ㆍ고령(高靈)ㆍ도봉(道峯)ㆍ불암(佛巖) 등지를 가리키기도 했다. 입암(笠巖) 율정(栗亭) 아래서 말에 꼴을 먹인 후 일행과는 일단 갈라섰다. 나는 송형 석우 계신(宋兄錫祐季愼)이 살던 곳을 묻고 송군 욱(宋君澳)의 초당에 들렀더니 매화나무 대나무는 옛 그대로이고 벽에는 내가 몇 해 전에 써 준 기문(記文)과 허장 미수(許丈眉叟)가 쓴 기(記)가 걸려 있어 읽어보니 지난날의 회포가 일어 눈물이 글썽했다. 송군 제(宋君濟) 부자를 다 조문하고 일행을 뒤쫓아 간파령(干波嶺) 아래서 만났다. 차근연(差斤淵)을 건너서는 유군과 서로 다른 길로 갈라서 가다가 저물어 신릉(新陵)정극가(鄭克家) 산장에 당도하여서는 함께 잤는데, 자해(紫蟹)에 홍주(紅酒)를 마시며 서로 흔쾌하게 보냈다.

26일(기해) 맑음. 정극가와 출발은 함께 했으나 길이 달랐다. 나는 진수동(眞樹洞)으로 이 참봉 언무 경윤(李參奉彦茂景允)을 찾아가서 그의 세 아들 태양(泰陽)ㆍ태징(泰徵)ㆍ태륭(泰隆)과 윤생 세필(尹生世弼)을 만나 보았다. 윤생은 이 참봉의 이모 아들로 우리 남원(南原) 윤씨라고 하였다. 이생 태양이 나를 따라왔다. 군영동(群英洞)에 이르러 허미수(許眉叟) 어른을 뵈었는데 일행들은 먼저 와 있었고, 미수 어른을 배알하는 자리에서 허생 함(許生)ㆍ송생 직(宋生溭)ㆍ정생 태악(鄭生泰岳)을 만났다. 미수 어른은 서실로 나가고 그들과 함께 은행나무 그늘 아래 앉아 있었는데 초가집에 온갖 화초가 그윽한 정취를 풍겼다. 미수 어른이 두류산(頭流山)ㆍ오대산(五臺山)ㆍ태백산(太白山) 등의 기록과 정허암전(鄭虛菴傳)ㆍ답자대부상서(答子代父喪書)를 꺼내 보여 주기에 나는 일찍이 지은 선계설(禪繼說)로 수답하였다.
또 짐 꾸러미에서 술과 과일을 내놓아 몇 순배 대작한 후 섬돌 위에 있는 일월석(日月石)을 구경하였다. 옛날에 석경(石鏡)이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 것으로 해와 달 그림자가 석면에 훤히 비쳤으며 미수 어른이 손수 그 세 글자를 조각했다고 한다. 얘기 도중 길을 떠나는 정표로 글을 지어달라고 청했더니 쾌히 허락하고 또 전서(篆書)로 광풍제월(光風霽月) 낙천안토(樂天安土) 수명안분(受命安分) 이렇게 열두 자를 써 주어 유군과 나눴는데 유군은 수명(受命) 이하 네 글자를 차지했다. 늦어서야 하직하고 출발했는데 외삼촌과 유군은, 오늘은 산 속의 신선늙은이를 만나 봤으니 헛걸음은 되지 않았다고 하였다. 징파도(澄波渡)를 건너 옥계역(玉溪驛)에서 잤는데 밤늦게까지 얘기를 나누었다.

27일(경자) 맑음. 아침을 먹고 출발하였다. 시냇가에서 말에 꼴을 먹이다가 길을 지나가고 있던 덕능(德能)이라는 산사람을 만났다. 풍악에 가면 서로 얘기할 만한 산인(山人)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유점암(楡岾菴)에 있는 나백(懶伯)과 장안암(長安菴) 곁에 사는 취양(就陽)이 있다고 대답했다. 식사를 끝내고 철원(鐵原) 고을을 향해 가다가 용담 고개 위에 올랐더니 동북으로 산이 확 트여 몇백 리가 훤히 바라다보였다. 길 가는 사람에게 물었더니 거기가 평강(平康) 지경이라고 하였다. 한낮에 철원 읍내에 들렀더니 주수 권공 순창(權公順昌)이 사람을 보내 안부를 묻고, 저녁에는 찾아와 간단한 술자리를 베풀어 주었는데 송이버섯ㆍ팥배ㆍ머루ㆍ다래 등 산중 별미를 두루 맛볼 수 있었다. 아침에 함께 북관정(北寬亭)에 오르기로 약속하고, 얘기 도중 권공과는 권수부(權秀夫) 얘기가 나와서 살아서 있고 죽어서 없고를 생각할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이어 앞길이 험난할 것이라는 쪽으로 말이 갔는데 이때 권공 말이, 앞길이 비록 험난하다 하더라도 노장(老將)이 일을 맡으면 실패는 없을 것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우리 외삼촌을 두고 한 말이었다. 그리하여 외삼촌 말씀이,
“이번 길에는 내가 사양하지 않고 용사를 할 것이니 우리 일행 모두도 내가 통솔하면서 좌지우지 할 것이네.”
하여, 서로 한바탕 웃었다.

28일(신축) 맑음. 아침에 주수가 와서 함께 북관정에 오르는데 펑퍼짐한 넓은 평야가 백 리 멀리 뻗쳐 있고, 서쪽에 우뚝 솟아 있는 것은 금학산(琴鶴山)인데 그것이 벋어 가서 보개산(寶蓋山)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들 가운데 서너 개 옹기종기 언덕이 있는데 그것은 보개산이 벋어나온 종적이라고 하였다. 간단히 술 한 잔 나누고 작별했는데, 그때 마침 시원한 바람이 잠시 스치고 지나가는데 높은 산 가파른 절벽 위에는 이미 가을빛이 역력하였다. 정자가 큰 평야를 내려다보고 있어 동으로는 궁예(弓裔)의 유허가 보이고 서북으로는 보개산ㆍ숭암산(嵩岩山) 등을 바라볼 수 있어 사람으로 하여금 높은 데 오르면 시상이 떠오른다는 생각을 갖게 하였으나 그때는 시구를 완성하지 못하였다. 이 시는 그 뒤에 쓴 것이다.

내 봉래산 구경의 꿈을 안고 / 我夢蓬萊好
가다가 북관정에 올라 보니 / 行行登北觀
중간에 산들이 확 트이고 / 萬山忽中闢
감돌아 물이 흐르는 곳 / 一水何縈灣
저리 광활한 곳 궁예의 옛터인가 / 曠蕩弓王宅
우뚝 솟아 있는 보개산이로세 / 穹隆寶蓋山
비옥한 들판도 천만 주나 되어 / 沃野千萬疇
함곡관 같은 천연의 요새로세 / 天府猶函關
영웅 호걸도 각기 한때인지라 / 雄豪亦一時
옛터엔 쓰러진 담만 남아있네 / 故墟惟頹垣
흥망이 몇 번이나 되풀이 되었을까 / 興亡機翻覆
국가 치란도 마찬가지라네 / 治忽迭相看
내가 왔을 때는 칠월이라서 / 我來屬流火
구름 사이론 기러기떼 날고 / 鴻鴈翔雲間
숲속에는 시원한 바람 일어 / 涼風起林木
고원에는 벌써 가을 기운인데 / 秋氣屯高原
삶과 죽음에 옛 감회가 깊고 / 存沒感舊懷
주인의 정은 끈끈도 하네 / 主人情惓懃
이별의 자리에 한 독 술이언만 / 離亭一樽酒
앞길은 얼마나 멀고 멀까 / 前路嗟漫漫
노장이 기율을 잃지 않아도 / 老將不失律
작별 앞두고 말에 파도가 이네 / 別語生濤瀾
석 잔 술로 말에 올라 떠나니 / 三杯上馬去
바람에 옷소매가 펄럭이네 / 征袂風翩翩

경재소(京在所)에서 말에 꼴을 먹이고 황 감사(黃監司) 정사에서 밥을 먹고 숨을 돌리는데, 푸르른 절벽 사이로 한 줄기 시내가 흐르고 있어 계산(溪山)의 정취가 물씬하였다. 우리를 맞으러 소년이 왔기에 성명을 물었더니 황응운(黃應運)으로 고 감사 경중(敬中)의 현손(玄孫)이며 수재(秀才) 석(錫)의 아들이라고 한다. 자기 선대의 유첩(遺帖)을 꺼내 보이는데 거기에 우리 선인(先人)이 황 감사를 전송하면서 읊으신 시 두 수가 적혀 있어 받들어 읽고는 슬픈 감회를 느꼈다. 황 수재를 시켜 그 시를 등사해 오게 하고 드디어 금화(金化)를 향해 출발하여 오다가 시냇가에서 쉬고는 금화 고을을 지나는데 앞길에서 바라보니 아름드리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고 그 앞에 비각(碑閣)이 하나 있는데 거기가 바로 홍 감사가 순의(殉義)한 곳이라고 하였다. 말에서 내려 읽어 보니, 평안도 순찰사 홍명구 충렬비(平安道巡察使洪命耈忠烈碑)라고 씌어 있었다.
내가 몇 해 전에 이를 두고 쓴 시가 있기에 유군에게 외워 보였는데 시제는 애부여(哀夫如)로, 부여(夫如)는 금화현의 별호이다. 시는 이렇다.

화의가 성립된 후 일이 크게 잘못 되어 / 和議之後事大謬
외로운 십제성이 위기일발 이었다네 / 十濟孤城危一髮
구름 같은 남쪽 군대 북도 한 번 못 울리고 / 南師雲屯鼓不揚
북군들은 도망가고 숨기에 정신없어 / 北師鳥竄旗先奪
우리 공이 소매 털고 눈물로 일어났다가 / 我公投袂涕淚起
애석하게 힘이 다해 중도에 죽었다네 / 嗚呼力屈中道死
일사보국 그 마음을 한평생 다졌기에 / 平生一死許報國
싸움터에서 시체되는 것 두려울 바 아니지만 / 橫屍軍前非所惴
단칼에 교졸의 목 베버리지 않았다가 / 恨不用釼斬驕卒
천하사를 그르친 것 그것이 한이라네 / 倉卒失計天下事
홍 감사ㆍ유 병사는 / 洪監司柳兵使
어찌하여 적군의 본거지로 쳐들어가 / 胡不提兵走遼碣
단숨에 천지를 바꿔놓지 않았던가 / 一擧可以旋天地
하늘이 우릴 돕지 않고 서생은 옹졸해서 / 天不佑我書生拙
투구 벗어 투항하고 안장 밑에서 살아남은 자도 있고 / 脫兜被髮鞍底活
고관 차림으로 들창 아래서 죽어간 자도 있었는데 / 披紫肘金牖下沒
그대 송산에서 밤중에 일어난 창황한 일 보지 않았던가 / 君不見松山半夜事蒼黃
십만 명 관군이 일시에 멸망하고 말았네 / 十萬官軍隨火滅

역리(驛吏)의 집에서 잤는데 그의 성명을 물었더니 진우운(秦遇雲)이라고 했다. 이날 극가(克家)가 얘기 도중 정군평(鄭君平)의 시 세 수를 외웠는데 좋았다. 나도 구경 나와서 옛 것을 찾고 싶은 감회가 있었기 때문에 그 시를 여기에다 적어 보았다.

이 나라에도 성인이 나셨는데 / 有聖生殊域
때는 방훈과 동시대였다네 / 于時並放勳
동천에 돋는 해 맞이하고 / 扶桑賓白日
박달나무는 청운을 꿰뚫는 듯 / 檀木上靑雲
이땅에 제후를 처음으로 세워 놓았으나 / 天地侯初建
산하는 아직 혼돈상태였다네 / 山河氣未分
무진년부터 천 년을 사셨으니 / 戊辰千歲壽
우리 임금 위해 축수하고 싶네 / 吾欲祝吾君
- 이상은 단군(檀君)이다 -

상 나라 서울에 제비는 돌아가고 / 亳社歸玄鳥
황하 배안에 백어가 나타나자 / 河舟見白魚
여덟 가지 법 조목 챙겨 가지고 / 還將八條敎
동쪽의 나라에 와 살았는데 / 來作九夷居
해외라서 주의 영향 받지 않고 / 海外無周粟
낙서 전수는 하늘의 뜻이었네 / 天中有洛書
지금은 몰락해 버린 옛 터에 / 故宮今已沒
은허인양 벼와 기장만 우거져 있네 / 禾黍似殷墟
- 이상은 기자(箕子)이다. -

웅장한 왕검성 도읍지에 / 王儉都雄壯
천손의 일 까마득하기만 하네 / 天孫事寂寥
흰구름 속에 말만 보이지 / 白雲空見馬
바다에 다리 소식 들을 길 없어 / 蒼海不聞橋
황홀하게도 신선이 되었으리니 / 怳惚神仙化
처량한 세대 멀기만 하여라 / 凄涼世代遙
그래도 문무정이 남아 있어 / 獨留文武井
전조의 것임을 알 수 있다네 / 猶得認前朝
- 이상은 동명왕(東明王)이다. -

29일(임인) 맑음. 역리들이 술과 과일을 가져와 대접하였다. 아침에 출발하여 직목역리(直木驛里)에서 말에게 꼴을 주고 외삼촌을 대신해서 회양 군수에게 편지를 써 역졸을 주면서 전하라고 했다. 중치(中峙)를 지나니 금화(金化)와 금성(金城)의 분계점이라는 돈대가 있었는데, 거기서부터 서쪽으로는 지세가 구불구불하면서 동쪽으로 높아지고, 동쪽으로는 지세가 점점 낮아져서 물이 모두 동으로 흐르고 있었다. 재를 넘어 10여 리를 더 가 큰 시냇가에 이르자 사람들 수십 명이 모여 물건을 교역하고 있었는데 이곳은 금성 장터이고 시내 이름은 남대천(南大川)이라고 했다. 시내를 끼고는 느릅나무ㆍ버드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고 짙어가는 가을빛 속에 나무 사이사이로 인가가 은은히 보였으며 마을은 널찍하고 확 트인데다 전답들도 잘 정돈되어 있었다. 그리고 인마(人馬)들도 오고가고 하였다.
말에서 내려 다릿 가에서 쉬고 있노라니 옷차림이 남루하고 얼굴도 깡마른 늙은 아전 하나가 앞에 와서 절을 하였다. 성명을 물었더니 지응룡(池應龍)이라고 하는데 함께 얘기해 보니 문자도 꽤 알고 또 말하는 것이 조리가 있었다. 그래서 글을 얼마나 읽었느냐고 물었더니, 소년 시절 사서(四書)와 이경(二經)을 읽고 이백(李白)ㆍ두보(杜甫)ㆍ한유(韓愈) 등 여러 문장가의 시를 일만여 수나 외웠으나, 과거에는 응했다가 합격을 못했다고 하였다. 그래서 지은 시가 있으면 외워보라고 했더니 그는,

하얀 이슬 갈바람 계절은 가을인데 / 白露西風八月秋
눈 같은 갈대꽃이 강주에 가득하네 / 蘆花如雪滿江洲
지사라면 누구나 감개가 많을 때인 것을 / 從知志士常多感
어찌하여 그때에 송옥만이 슬펐으랴 / 不獨當年宋玉愁

했고, 또 금강산에 가 놀면서 지은 것이라고 외우는데,

흰구름 가에 있는 영롱한 사찰 하나 / 玲瓏金刹白雲邊
누각 밑 숲 사이로 오솔길 하나 났네 / 踏閣攀林一徑穿
동문에는 용이 나와 언제나 비 뿌리고 / 龍出洞門常作雨
소나무에 학의 둥지 몇 해 됐는지 모른다네 / 鶴巢松樹不知年
전상에 중은 서서 밥때라고 종 울리고 / 僧從殿上鳴鍾飯
산중에 온 나그네는 자리 빌려 졸고 있네 / 客至山中借榻眠
밤들어도 이상하게 꿈 이루지 못하는 것은 / 恠底夜來難得夢
들창 밖 우는 샘을 갈바람이 맴돌아서라네 / 秋風窓外繞鳴泉

하였다. 그의 세계(世系)를 물었더니 고려 말기 지윤(池奫)의 후예라고 하였다. 지윤이 베임을 당하자 그 자손들은 아전으로 전락되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지윤이 문리(文吏)였기에 그 기류(氣類)가 서로 유전된 것 아니겠는가. 그 사람은 비록 늙고 쓸쓸해 보였지만 그 시는 읊을 만했으니 그 골몰한 꼴이 가련했다. 시내를 따라 내려오다가 금성 읍내에 있는 역리 김서립(金瑞立)의 집에서 잤다. 외삼촌이 주수에게 보낸 쪽지는 문지기에게 거절을 당하였다.

8월 1일(계묘) 맑음. 아침에 출발하여 창도역(昌道驛)에서 말에 꼴을 먹였다. 역관(驛館)의 벽위에 시 두 수가 걸려 있었는데 하나는 민 이상 제인(閔貳相齊仁)이 가정(嘉靖) 기해년에 읊은 것을 그의 원손인 민정중 대수(閔鼎重大受)가 각자하여 달아 놓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경술년에 어느 과객이 쓴 것으로 그의 성명은 씌어 있지 않으나 다 읊을 만했다. 민제인의 시는,

사랑하고 먹여 주고 누가 그와 같으리오 / 寵恩榮養孰如之
종남산 돌아보니 그리운 님 생각 나네 / 回首終南尙戀思
북쪽 변방엔 찬구름 멀리멀리 가 버렸고 / 北塞寒雲歸去遠
동문엔 어제 진 해 언제 다시 뜬다던가 / 東門落日出來遲
들국화도 다 지도록 가을은 깊어가고 / 花殘野菊秋將老
우정을 산이 둘러 두 갈래로 길이 났네 / 山遶郵亭路自岐
도끼 짚고 강을 건너 노를 쳐부숴야지 / 杖鉞渡江聊擊楫
한평생 먹은 마음 저버릴 수 있다던가 / 一生安肯負心期

하였고, 과객의 시는 이렇다.

험난하고 어려운 일 맛볼 만큼 보았건만 / 艱難險阻備嘗之
객관에 찾아드니 위로해 줄 사람 없네 / 客館無人慰所思
지는 해에 외로운 구름 동으로 멀리 가고 / 落日孤雲東去遠
갈바람에 북으로 가는 수령 행차 더디어라 / 秋風五馬北歸遲
차라리 두보처럼 집 생각을 할지언정 / 寧同杜子瞻家室
양주 같이 기로에서 울고 있진 않으려네 / 不學楊公泣路岐
나라 은혜 입은 이몸 무엇으로 보답하리 / 身被國恩何以報
교화 책임 다해볼까 마음 기약 했었는데 / 承流盡責是心期

나도 길을 가면서 다음과 같이 절구 한 수를 읊어 두 군(君)들로 하여금 화답하도록 하였다.

헝클어진 세상사 가닥이 안 풀리어 / 世事如絲不可理
갈바람에 높은 산에나 올라볼까 생각이라네 / 秋風欲上望高峰
공자님 뒤를 따라 바다에서 떼를 탈까 / 倘從魯叟浮滄海
신선이 되어가서 적송자를 불러볼까 / 更擬飆輪喚赤松

이에 두 군이 다 화답을 하였다. 저녁이 되기 전에 하지성(夏遲城) 민가에서 묵기로 했는데, 집주인 성명은 이천봉(李天鳳)이었다. 그날 길가에서 풀 꽃 등을 꺾어 여러 일행들과 함께 그 꽃과 풀의 성미를 분석해보고, 혹은 마부에게 물어 보기도 하였다. 그 중에는 쑥 종류가 제일 많았고 또 이름이 있는 것들도 일곱 종류나 되는데, 그 지방 이름으로는 백양쑥ㆍ물쑥ㆍ참쑥ㆍ사자발쑥ㆍ다복쑥ㆍ제비쑥ㆍ벌쑥이었다. 혹자의 말로는, 백양쑥은 떨기로 나는 쑥으로 바로 옛날에 시초[蓍]라고 한 것이고 중국 사람이 만든 본초(本草)와는 맞지 않다고 했는데 과연 그런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芝峰類說)》에는, 가을이 되어 자색꽃이 피는 것이 그것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아마 산국화 종류가 아닌가 싶었다. 이어 여러 사람들 말이, 천하에 쓸모 없는 물건은 없다고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물론이다. 타고난 재목 그대로만 이용한다면 천하에 버릴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으로서 착하지 못한 자도 역시 써먹을 곳이 있을까?”
했더니, 모두 하는 말이,
“천하에 제일 못쓸 것이 착하지 못한 사람인데 그것을 어디에다 써먹을 것인가.”
하였다. 그리하여 내가 말하기를,
“천하에 제일 쓸모 없는 것은 중간치인 것이다. 냉하지도 않고 화끈하지도 않고 아무 하는 일 없이 세월만 보내면서 취할 만한 좋은 점도 없고 그렇다고 꼬집어 말할 만한 악도 없는 그런 사람 말이다. 차라리 아주 불선한 사람은 그런 대로 써먹을 곳이 있는 것이다.”
했더니, 모두 이상하다는 듯이 그게 무슨 말이냐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걸(桀)과 주(紂)가 지극히 불선했기에 탕(湯)과 무왕(武王)이 그들을 정벌하자, 하늘이 도와주고 백성들이 돌아오고 하여 천하를 통일해서 자손 만대에 전하였고, 항적(項籍)과 왕망(王莽)은 나쁜 중에도 더 나빠 한 고조(漢高祖)와 광무제(光武帝)가 각각 그들을 죽임으로써 천하를 진동시켰고 그 여풍이 백세를 두고 영향을 주어 한 나라 4백 년 사직이 유지될 수 있었으니, 그게 쓸모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뿐 아니라 전쟁과 병사 통솔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이니 한 사람을 죽였는데 삼군(三軍)이 떨고 적국이 항복해 오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옛날 영웅이나 패주(伯主)들이 사업을 경륜하면서 천하를 차지하는 데 밑천이 될 수 있는 그러한 사람을 얻지 못할까 염려했던 것이며 나도 그래서 쓸모가 있다고 한 것이다.”
했더니, 모두들 하는 말이,
“궤변은 궤변이지만 그래도 일리는 있어 사람 마음을 유쾌하게 해 주었다.”
하고서, 서로 한바탕 크게 웃었다.
또 길에서 행인 한 사람을 만났는데 자기 말이, 산삼을 캐는 사람이라고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그 사람 동행했으면 좋겠습니다. 데리고 가다가 삼지구엽초(三枝九葉草)와 같은 영약이라도 캐면 그 역시 좋은 길동무 아니겠습니까.”
했더니, 외삼촌 말씀이,
“보아하니 그 사람 용렬해서 아무런 쓸모가 없겠다.”
하였다. 내가 다시 말하기를,
“용렬한 사람이기 때문에 쓸 만하다고 한 것이지요. 그가 만약 준수하고 영리하다면 우리에게 쓰일 사람이 아니겠지요. 옛날 허노재(許魯齋) 말이, ‘말은 상등 말을 타고, 소는 중등 소를 부리고, 사람은 하등 사람을 써야 한다. 말은 준마라야 탈 만하고 소는 유순해야 다룰 수 있고 사람은 못나야 부려먹기가 쉬운 것이다. 만약 그가 지혜 있고 약은 사람이면 나에게 쓰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내가 그의 이용물이 되는 것이다.’ 했었고, 또 사마군실(司馬君實)에게는 종이 하나 있었는데, 와서 일한 지가 오래 되어 사마공의 지위가 비록 참정(參政)에까지 이르렀지만 그때까지도 군실 수재(君實秀才)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소자첨(蘇子瞻)이 왔는데, 그 종은 그때도 똑같이 그리 말하였으므로, 자첨이 그에게 타이르기를, ‘상공(相公)이 지금 이미 참정이 되었으니 대참상공(大參相公)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하여 그 종이 그 후부터서는 자첨이 가르쳐 준 그대로 부르자 공이 깜짝 놀라, ‘누가 너더러 말을 그렇게 하라고 하더냐?’ 하자, ‘지난번 소 학사(蘇學士)가 그리 하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하였다. 공이 탄식하며 하는 말이, 좋은 종을 자첨이 버려 놓았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게 모두 사람은 하등 사람을 써야 한다는 증험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또 한번 서로 웃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이 두 이야기가 모두 폐단이 없지는 않다. 왜냐하면 나쁜 사람을 쓸 만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그를 측은히 여기고 도와 주려고 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고, 용렬한 자를 부릴 만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자기 개인만 알고 이기심이 강하여 남을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을 못 주는 사람인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패자(伯者)나 하는 짓이지 인인군자(仁人君子)의 마음은 아니라는 것을 몰라서는 안 될 일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사리를 아는 자와 할 말이지 간웅(姦雄)에게는 할 말도 아닌 것이다. 말을 하고 나니 이런 생각이 다시 드는 것이다.

2일(갑진) 맑음. 아침에 출발하여 야음불천(也音不川)을 건너고 또 관음천(觀音遷)을 거쳐 보리진(菩提津)을 건너고 통구원(通溝院)을 지나 길가 민가에서 말에 꼴을 먹였는데, 주인 성명은 전기천(全起天)으로 우리에게 벌꿀과 과일을 대접하고 서울에서 서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드디어 단발령(斷髮嶺)을 오르는데 산 이름은 갈리치(葛离峙)이고 샛길이 험준하여 말을 타기도 하고 걷기도 하여 영상에 올랐더니 회정(檜亭)이 있었다. 섬돌에 앉아 쉬면서 풍악산을 바라보았더니 풍악의 여러 모습이 모두 눈 앞에 역력히 전개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절구 한 수를 지어서,

도성문을 동으로 나와 여드레를 소비하며 / 東出都門八日行
금성을 지나치니 여기가 회양일레 / 金城踏盡是淮陽
마니령 마루에서 구름 헤치고 앉아 보니 / 摩尼嶺上披雲坐
일만이천 봉우리가 차례로 맞아 주네 / 萬二千峯次第迎

라고 읊고, 유군으로 하여금 화답하도록 하였다. 이 날은 신원(新院)에서 잤는데 집주인의 성명은 김세익(金世翊)이었고 서울에 오면 찾으라고 약속하였다.

3일(을사) 맑음. 신원의 물을 건너고 철이현(鐵伊峴)을 넘어 만폭동(萬瀑洞) 입구에 와서는 마부들을 시켜 시냇가에서 묵석(墨石)을 주워오게 하였다. 시내를 가로질러 이리저리 건넌 다음 길가 소나무 숲 아래서 휴식을 취하고는 한 동구에 이르니 소나무 노송나무가 줄을 이룬 사이로 해송도 드문드문 끼어 있어 산이 비로소 기특하게 보였고 수석(水石)도 더 맑아 보여 동천(洞天)의 정취가 물씬 풍겼다. 우천도(牛川渡)라는 시내를 건너 말에서 내려 걷다가 시냇물에 발을 씻고 송단사(松壇寺)에서 조금 쉬고 있노라니 승려 대여섯 명이 나와 맞아 주었다. 그들과 함께 절로 들어갔더니 문간에 우뚝한 누각 하나가 구름 닿게 지어져 있는데 앞에 마주 보이는 장경봉(長景峯)은 천 길이나 깎아지른 듯이 서 있고 그 곁에 줄지어 있는 몇 봉우리도 모두 낭떠러지를 이루고 있으면서 기괴웅장하여 이미 인간에서 보던 바가 아니었다. 절 이름은 장안사(長安寺)인데 그 절에 사는 중에게 물었더니, 원(元) 나라 순제(順帝)의 비 기씨(奇氏)의 원찰(願刹)로서 마룻대 들보 등 목재가 굉장하고 단청이 휘황찬란하기가 이 산 속에서 으뜸이라고 하였다. 그날은 절 문간 앞에서 산책하고 거닐었는데 수석이 너무 아름다웠다. 말라 죽은 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중의 말로는 계수나무라고 했다. 노송나무 몸통에 잣나무 껍질이었는데 가지와 잎이 다 떨어지고 없었다. 뒤따르던 승려 몇 사람이 젊은 중을 시켜 절간 앞에서 해송자(海松子)를 따 오라고 하더니 거기에다 꿀을 타서 새참으로 내왔는데 역시 산중의 별미였고 또 석지(石芝)를 아침저녁 상에 올렸는데 그 산에서 나는 것이라고 하였다.

4일(병오) 맑음. 장안사를 출발하여 정양사(正陽寺)로 가려는데 그 곳 승려가 남여(藍輿)를 준비해 놓고 대기하고 있었다. 바위골짜기의 맑은 물, 살짝 물들여진 단풍잎을 걸음마다 앉아서 구경할 만하였다. 걷기도 하다가 남여로 타다가 했지만 다리가 건너질러진 길이나 돌무더기 비탈길은 사람이 나란히 갈 수가 없었다. 명연(鳴淵)에 이르러 조금 쉬었는데 물이 몇 길이나 깊어 보였지만 맑아서 바닥이 훤히 보이고 곤이(鯤鮞) 같은 잔 물고기들이 그 속에서 노닐고 있었는데, 승려 말에 의하면 여기가 만폭동(萬瀑洞) 입구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못 속에는 그래도 잔 물고기가 있지만 여기서부터 그 이상은 물고기가 올라갈 수가 없다고 했다.
한 곳에 다다르니 두 바위가 우뚝 솟아 완연히 문을 이루고 있고 절벽 전면에는 세 불상이 새겨져 있었는데 나옹(懶翁)이 남긴 작품이라고 하였다. 그 앞에는 백화암(白華菴)이라고 하는 고색창연한 사찰이 있었으나 사는 중은 없고 부도(浮圖) 다섯 종류와 비 네 개가 서 있었다. 부도는 청허 휴정(淸虛休靜), 제월 경헌(霽月敬軒), 취진 의영(就進義瑩), 편양 언기(鞭羊彦機), 허백 명조(虛白明照), 풍담 의심(楓潭義諶)의 것으로, 경헌ㆍ의영ㆍ언기는 다 서산대사 청허의 제자이고, 명조ㆍ동산은 송월 응상(松月應祥)의 제자이며, 의심은 편양의 제자라고 하였다. 그리고 비는 월사 의정(月沙議政)ㆍ백주 천장(白洲天章)ㆍ이단상 유능(李端相幼能)ㆍ백헌 의정(白軒議政)이 지은 것이고 쓰기는 의창군 이광(義昌君李珖)ㆍ동양위 신익성(東陽尉申翊聖)ㆍ판서(判書) 오준(吳竣)ㆍ낭선군 이우(朗善君李俁)가 쓴 것으로, 큰 비에 훌륭한 각자가 산문을 훤히 비추고 있었다. 조금 머무르면서 그것을 다 읽고 나서 또 표훈사(表訓寺)로 갔는데 역시 규모가 큰 절이었다. 불당은 남쪽을 향하였고 부처는 동쪽을 향하고 있었는데 이 절 승려 말에 의하면 이곳 지형이 가는 배 형국이어서 부처가 앉아서 키를 잡고 있는 것처럼 앉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재앙이 있다는 것이다. 옛날에 부처가 남향을 하고 앉았다가 만력(萬曆) 을사년에 홍수로 절이 무너졌었기 때문에 지금 다시 옛 모양대로 자리바꿈을 한 것이라고 했는데, 그 말이 궤변은 궤변이지만 역시 풍수가의 설이 아니겠는가.
조금 쉬었다가 정양사를 향해 가는데 산길이 더욱 가팔라서 걷다 쉬고 걷다 쉬고 해야 했다. 장안사에서 표훈사까지 오는 동안 남여를 버리고 걷기를 여러 번 하면서 회암(晦菴)의 ‘남악운(南岳韻)’에 차운을 해 보았다.

종들이 피로할까봐서 수레 내려 걸어가니 / 爲憫人疲舍輿行
그 마음 생기는 것 그게 영명 아니던가 / 此心生處是靈明
그 원두야 옛 현자가 이미 한 말이지만 / 昔賢已自原頭說
천하가 태평해야 이 마음도 태평이지 / 天下平時此心平

더위잡고 기어서 오르노라면 마치 계단을 걸러서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급기야 한 높은 등성이에 오르니, 천일대(天一臺)라고도 하고 또 천을대(天乙臺)라고도 하는 곳이었다. 산의 중턱에 위치하고 있어 사방이 확 트이고 바라보면 놀라울 정도인데, 정양사 승려 대여섯 명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늙은 선승 보원(普願)이라는 자도 와서 맞아 주었는데 낙건(絡巾)에 가사 차림으로 얼굴이 깨끗하고 정신과 기운이 맑아 보여 산중의 중에 대해 호감을 가짐직하였다. 그와 함께 솔뿌리 위에 앉아 사방을 두루 돌아보며 가리키고 묻고 했는데, 능호(凌灝)ㆍ영랑(永郎)ㆍ비로(毗盧)ㆍ중향(衆香)ㆍ향로(香爐)ㆍ혈망(穴網)ㆍ망고(望高)ㆍ백마(白馬)ㆍ장경(長景)ㆍ시왕(十王) 등의 봉우리들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오니, 옛사람이 이른바 ‘일천 바위가 수려함을 시새우고 일만 골짜기 물이 다투어 흐른다’고 했던 말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생각되었다.
그 중에서 비로봉이 가장 높고 중향봉은 더욱 기절했으며 혈망봉은 험준해 보이고 망고봉은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 것이 마치 저희들끼리 영웅을 겨루는 듯했고, 백마봉ㆍ장경봉은 멀리 보이는 것이 마치 병풍을 줄세워놓고 휘장을 쳐놓은 듯했으며, 영랑봉ㆍ향로봉ㆍ능호봉은 마치 서로 읍을 하고 있는 모습들이었다. 그리고 시왕봉과 그 이하 관음(觀音)ㆍ미륵(彌勒)ㆍ문수(文殊) 등의 봉우리들은 모두 불가(佛家)의 이름을 붙여 놓았고 또 마치 부처들이 줄지어 서고 나란히 앉아서 경을 읽고 도를 얘기하는 것 같기도 했다. 게다가 일만 골짜기에서 샘이 울고 거기에 솔바람 소리까지 섞여 있어 마치 비바람이 불어 오고 밑에서 뇌성벽력이 이는 것 같기도 했다. 승려들 말로는, 이 산 옛 기록에 일만 이천은 담무갈(曇無竭)이 머물던 곳이라고 했는데, 담무갈은 부처 이름이라고 하였다. 내 생각에는 담무갈이란 인도말인 듯한데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다. 그 승려 얘기는 비루하고 허탄한 말이었다. 아마도 옛분들은 이 산의 일만 봉우리 일천 봉우리가 모두 산신령들이 살고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던 것같다.
이 날 따라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불어 오고 이슬기운이 차고 맑아 붉게 물들여진 모든 덩굴과 단풍잎으로 가을 기운이 산 속에 가득하였다. 게다가 또 푸르른 소나무 잣나무가 붉은색 사이에 섞여 있어 더욱 사랑스러웠다. 내가 여러 중더러 말하기를, 가을이 아직 무르익지 않았는데 우리가 너무 일찍 구경 온 것이 아니냐고 하자 보원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대체로 무슨 물건이든지 구경을 하려면 한창이기 전에 해야지 한창인 때 하게 되면 때가 이미 지나쳐서 바로 사그라지기 시작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막 무르익으려고 하는 이때 여유 있는 운치로 구경하는 것이 좋지요.”
하기에 내가 이르기를,
“노사(老師)의 말씀을 들으니 물건 보는 법을 잘 아시는 분이라고 하겠소. 옛사람 말에도, 꽃은 낙화되어 흩어질 때 보고 싶지 않고, 술은 곤드레 만드레 취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는데, 역시 노사를 두고 한 말이구려.”
하였다. 그리고 이어 두 군에게 말하기를,
“천지만물 모든 이치가 최고조에 달하는 것은 좋지 않은 것이네. 세상에서 부귀와 번화와 성색(聲色)을 누리고 있는 자들은 더구나 이 이치를 몰라서는 안 되네. 내가 언젠가 읊은 시 한 수가 있는데 그대들은 이 시를 기억해 주기 바란다.”
했더니, 극가(克家)가 그 시를 소기(小記)에다 적었다. 그리고 유군은 말하기를,
“이 시는 아마도 그대가 뜻을 이루었을 때 지은 시가 아니겠는가.”
하였다. 시는 이렇다.

말 타고 느릿느릿 가다가 말다가 / 騎馬悠悠行不行
돌다리 남쪽 가에 동자 하나 청수하네 / 石橋南畔小童淸
봄구경을 그대는 어디에서 하려는가 / 問君何處尋春好
꽃이 아직 피기 전에 풀싹이 돋으려 한다네 / 花未開時草欲生

충암 김선생 원충(冲菴金先生元冲)이 중에게 준 비로봉시가 우연히 생각나 두 군에게 읊어주었다.

해 지는 비로봉 정상 / 落日毗盧頂
동해 바다 하늘 멀리 아득하네 / 東溟渺遠天
불 일구어 바위 틈에서 자고 / 碧嵒敲火宿
소매 맞잡고 속세를 내려가네 / 連袂下蒼煙

그리고 내가 말하기를,
“이 시야말로 고금의 시인들 작품 중에 절작이다. 이 시는 우리나라에만 없는 정도가 아닌데 애석하게도 우리나라 사람들 가운데 이 시를 알아보는 자가 없어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지 못했던 것이다.”
하니, 두 군들도 동감이었다. 그리하여 서로 읊고 또 읊고 했더니, 사람으로 하여금 표연히 산 정상을 버리고 동해로 가고픈 생각이 들게 했다.
회옹(晦翁)의 ‘남악운(南岳韻)’에 차운하여,

구월이라 서리 내리고 하늘 가득 바람인데 / 九秋霜露滿天風
천을대 앞에 와서 가슴 한번 활짝 열었네 / 天乙臺前一盪胸
시 읊으며 돌아간 곳 어디에서 찾아볼까 / 詠歸何處尋行迹
곧바로 봉래산 최상봉에 올라야지 / 直到蓬萊最上峯

하니, 다른 여러 사람이 화답을 하였다. 동루(東樓)에 가서 벽에 걸려있는 여러 사람들의 시를 보았다. 여러 사람들의 작품이 있었으나 그 중에서 기재(企齋)ㆍ호음(湖陰)ㆍ용주(龍洲)ㆍ청음(淸陰)ㆍ이천장(李天章)ㆍ김도원(金道源)ㆍ신백윤(申伯潤)의 시들이 읊을 만했고 거기에서도 기재ㆍ호음의 것이 최고여서 후인으로 그를 따를 자가 없었다. 세도와 인재의 부침(浮沈)을 여기에서도 볼 수 있었다.
그날 밤은 정양사에서 잤는데 보원과 얘기하다가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밤에 일어나 별을 보고 방향을 알아보았더니 망고봉(望高峰)이 정동쪽이고 능호봉(凌灝峰)은 북에 있어 이 절 위치가 남을 향해 오위(午位)로 되어있고 동으로 아침 햇살을 받기 때문에 절 이름을 그렇게 지었던 모양이다. 용주의 시에 맹학창(盲壑彰) 이 세 글자가 있었는데 아무리 보아도 누구도 그 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혹자는 초서를 쓰면서 잘못 쓴 것이라고 하였고, 혹자는 벽자라고 하기도 하면서 서로 한바탕 웃었다.

5일(정미) 맑음. 중을 시켜 나옹(懶翁)의 안주(眼珠)ㆍ갈포(葛布)ㆍ가려(珈黎)ㆍ철발(鐵鉢)ㆍ마노(瑪瑙)ㆍ주미(麈尾) 등을 내오라고 하여 보았더니, 안주 하나는 색이 파랗고 작은 팥만한데 불가에서 말하는 사리(舍利)라는 것으로, 그것을 유리그릇에 담고 금으로 봉합한 다음 비단으로 겹겹이 싸 놓았는데 그 곳 중들이 아주 보물로 지킨다는 것이다. 내가 듣기에는 나옹은 제자가 많아 대중을 현혹시킨다 하여 국법으로 베임을 당한 자여서 그 슬기가 별것이 아니었는데, 지금 중들은 그가 성불(成佛)하였다고 하면서 저렇게 존경하고 있으니, 무슨 까닭일까 싶어 그들에게 물어 보았더니, 그 중들 역시 그 사건 전말에 관해서는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사람 몸에서 구슬이 나온다는 것은 원래 없는 데서 나오는 것이 있다는 것으로 이치로 보아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나로서는 늘 의문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고금을 막론하고 승려 세계에서는 그 말을 절대 믿고 서로 전수하면서 높이 받들고 있기 때문에 도저히 깰 수가 없어 나로서도 끝까지 따질 수가 없었다.
팔각전(八角殿)의 석불(石佛)을 보았다. 그 벽에 해묵은 그림이 있었는데 오도자(吳道子)가 그린 것이라고 하지만 오도자가 조선에 왔었다고는 들은 바 없으니 그 역시 허탄한 소리인 것이다. 이 날 극가(克家)가 그 절의 대들보에다 이름을 썼다. 그리고 이 날 동쪽 누대를 두 번 올랐는데 누대 이름은 헐성(歇惺)이었다. 시가 있는데 기재(企齋)의 시는,

기이한 봉 일만하고 그리고 또 이천인데 / 一萬奇峯又二千
바다구름 다 걷히자 아름다운 옥이로세 / 海雲飛盡玉嬋姸
젊어서는 병만 앓다 이제는 늙었으니 / 少時多病今成老
백년 두고 이 명산 이름만 듣고 만 격이네 / 孤負名山此百年

하였고, 호음(湖陰)의 시는,

일만 이천 봉우리를 대강 짚고 돌아오니 / 萬二千峯領略歸
쓸쓸한 낙엽이 옷 위에 지네그려 / 蕭蕭黃葉打征衣
비 내리는 정양사 향불 피우는 밤에 / 正陽寒雨燒香夜
사십평생 잘못 산 걸 거백옥이 알았다네 / 籧瑗方知四十非

했으며, 청음의 시는,

밤 지새워 내리는 처마끝 비소리에 / 琳琅簷雨夜連明
산중의 폭포 소리 누워서 듣는다네 / 臥聽山中萬瀑聲
참모습이 나오도록 봉우리들 씻어 놓아 / 洗出玉峯眞面目
날 개이자 시인의 눈에 뜨이는 게 그것이네 / 却留詩眼看新晴

하였다. 식사를 마치고는 중 한 명을 데리고 혼자 천을대에 올라가서 이곳 저곳을 바라보면서 산봉우리와 골짜기를 가리키며 알아보았는데, 그 중의 송라협(松蘿峽)은 신라(新羅)의 왕자가 있던 곳이고, 능호봉(凌灝峯)방광대(放光臺)는 고려 태조 왕건이 부처에게 절하던 곳이란다. 아, 왕자의 한 일은 장해서 한(漢)의 북지왕(北地王)과 그 열렬함을 겨룰 만하고, 고려 태조의 그 굉장한 규모나 후한 덕은 송(宋) 태조와 어깨를 겨눌 만도 했는데, 어쩌자고 이교(異敎)에 정신이 팔려 허탄한 말과 옳지 못한 유적을 후대에까지 남겨놓았는지.
그 곳 산과 구릉의 형세를 대략 한 폭의 그림으로 그려 두었는데 후일 뛰어난 그림 솜씨를 만나게 되면 이 승경을 다시 그리게 하려고 해서이다. 또 시를 읊기를,

아득히 먼 송라협이요 / 邈邈松蘿峽
높고 높은 능호대여라 / 迢迢凌灝臺
휘파람 크게 한 번 부니 / 悠然發大嘯
만폭에서 천둥이 이네 / 萬瀑隱風雷

하였고, 또 읊기를,

구구한 영욕 놓고 놀랠 것이 뭐라던가 / 寵辱區區不足驚
구월에 중향성을 날아서 올라왔다네 / 九秋飛上衆香城
머리 풀고 곧바로 동해로 가 떼를 탈까 / 直將被髮桴東海
봉을 타고 하늘 높이 올라도 보고싶네 / 且欲驂鸞襲太淸

하였다. 보원이 하는 말이, 금년 봄부터 큰 새가 어디에서 왔는지 몰라도 산 속에 날아다니고 있는데 생김새는 야학(野鶴) 모양이고 목이 길고 꼬리는 검고 다리는 적색이고 몸은 껑충한데, 사람들이 보고 싶다고 말하면 반드시 제 몸을 돌려가며 보여주고 소리는 학의 소리를 내는데 아마 선학(仙鶴)인 것으로 지금도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고 있지만 이 산 속 어딘가에 틀림없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내가 생각하기에, 학은 우는 소리가 길고 맑아서 하늘에까지 들린다는 것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시경》에서도, ‘학이 구고에서 우니 그 소리 하늘에까지 들리네’ 했고, 옛날 기록에도 역시 ‘난새와 봉황은 함께 무리 짓고 반드시 지대를 골라서 날며 때가 돼야 울기 때문에 그래서 선금(仙禽)이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그 새는 난봉(鸞鳳) 같은 벗도 없고 사광(師曠)의 거문고 가락도, 상악(相岳)의 북소리도 없는데 왔으며, 또 우는 소리가 여운도 없고 높지도 길지도 않아 저 혼자 그런 체하는 것이지, 사실은 학 같아도 학이 아니면서 선금 축에 끼어보려고 하는 것이리라. 진짜가 아니면서 이름이라도 빌려보려고 함은 모든 물건이 다 그 모양인데 왜 새라고 그렇지 않겠는가.
언젠가 치사헌(致思軒) 이원(李黿)이 쓴 《금강록(金剛錄)》을 보았더니, 거기에 이르기를, “바위 틈에다 둥지를 틀고 사는 새가 있었는데 대개 평범한 들새였다. 그런데 중들이 학으로 잘못 알고 저를 학이라고 불러주니, 그 새가 반드시 둥지에서 나와서 제가 학이 아니라는 사실도 모르고 사람들에게 춤을 추어보였다.” 한 곳이 있었는데, 지금 그 새도 저 자신을 학으로 자처하고 있고 사람들도 학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그도 깃털을 뽐내면서 사람들에게 과시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쩌면 그렇게 이름만 내고 스스로 감출 줄은 모른다는 것인가. 어쩌면 산새 들새들도 진세의 속된 인간들과 똑같은 생각이란 말인가. 지금 이 일이 치사헌이 써 놓은 것과 아주 비슷하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그리고 학이라는 것도 신령한 새여서 나타나지 않고 있는 지가 지금 천 년이나 되었는데 비슷하면서 진짜는 아닌 것이 하필 오늘에 나타났으니 그것은 또 무슨 까닭일까. 내 그 모든 것을 듣고 묵묵히 앉아 마음속으로 탄식을 했었다. 유군이 회암의 ‘여산운(廬山韻)’을 내놓으면서 나더러 화답하라고 하기에 심심풀이 삼아 읊어 보았다.

삼한의 삼신산 중에 / 三韓三神山
금강산이 제일 걸출하다네 / 金剛最爲傑
둘레 오백 리를 깔고 앉아 / 盤根五百里
세상과는 인연을 끊고 / 邈然與世絶
불가의 소굴되어 있는데 / 仙曇所窟宅
구름 속 나무는 보였다 말다하네 / 雲樹何明滅
내가 왔을 때 맑은 가을이어서 / 我來屬秋晴
빽빽이 줄서 있는 묏부리들 / 嶽峀正森列
기대 졸며 맑은 기운 들이키고 / 憑睡挹淸灝
지팡이 짚고는 높은 곳도 가소롭다네 / 杖策凌嵽嵲
구경은 이제부터 시작이라 / 勝遊自此始
내 두루 다 밟고야 말리 / 吾將窮跡轍

유군의 시는,

금강은 천하 절경이요 / 金剛天下勝
부자는 당대 영걸인데 / 夫子一代傑
명산이 고사와 만났으니 / 名山配高士
양절이라 해야 하지 않겠는가 / 豈不稱兩絶
인과 지에 보탬 되려고 놀지만 / 遊爲資仁智
불자들 민망하기도 하지 / 志在憫寂滅
기마 꼬리에 붙어 온 이 존재야 / 賤子忻附驥
어떻게 나란히 서서 구경하겠습니까 / 陪賞豈行列
승경 읊은 공의 시를 보니 / 見公記勝詩
높기가 옥봉과도 같네요 / 高幷玉峰嵲
신선 사는 곳 구경 다하려고 / 丹丘興靡窮
그리로 가는 수레에 다시 기름칠했다네 / 復膏仙洲轍

하였다. 또 헐성루(歇惺樓) 시에도 차운했는데,

봉래산 일만 이천 봉우리가 / 蓬萊一萬二千峰
푸른 하늘 높이 솟아 태산과 마주섰네 / 高出靑天揖岱宗
옥 같은 봉우리들 우뚝하게 솟아 있고 / 玉巘竦奇形矗矗
장중을 자랑하는 은빛 같은 봉도 있어 / 銀巒鬪壯勢重重
바위 끝 고목에는 둥지 틀어 학이 살고 / 危巖古樹巢仙鶴
폭포 밑 깊은 못엔 독룡이 살고 있다네 / 怒瀑深湫毒龍
제일 좋긴 정양사에 가을비 개고 난 뒤 / 最是正陽秋霽後
소나무가 경쇠처럼 울어대는 소리라네 / 數聲淸磬發深松

라고 지어, 둘 다 써서 나에게 주었다.
내가 보원에게 이르기를,
“유가에는 지행(知行)이라는 것이 있고, 불가에는 정혜(定慧)라는 것이 있는데 혜가 정을 낳는 것입니까, 정이 혜를 낳는 것입니까?”
했더니, 그는,
“아마 정이 혜를 낳는 것이지요?”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우선 정혜의 이치를 모른다면 어떻게 정을 지킬 수 있을 것이며, 또 마음을 지키는 정력(定力)이 없고서야 마음의 진각(眞覺)이 또 어디에서 나오겠습니까.”
하니, 보원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정이 당연히 혜를 낳는 것이지만 혜도 정을 낳을 수 있는 것이지요.”
하기에, 내가 이르기를,
“유가에도 그러한 법이 있고 그에 관한 학설이 구구한데, 스님은 정말 말씀을 잘 했습니다. 다만 유가에는 모든 이치가 다 갖추어져 있으므로 그 이치를 알려고 하는 것은 장차 그대로 실행하기 위해서인데 불가에서는 공명(空明) 그것만을 지키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했더니, 그도 그렇다고 대답하고서 이어 우리 유가의 도통(道統) 연원에 대하여 묻기에 내가 대략 대답해 주었다. 그리고 내가 또 불가의 의발(衣鉢) 전수 관계를 물었더니, 그도 대답해 주었는데 그의 말은 달마(達摩)를 종(宗)으로 삼고 있었다. 내가 말하기를,
“달마는 벽을 향해 앉아 수도만 하다가 결국 남이 준 독약을 먹고 죽고 말았는데 도를 통했다는 자도 그럴 수 있습니까?”
했더니, 그의 대답이,
“달마는 각박한 세상 인심 그게 싫어서 일부러 입적한 분이니 그의 몸은 서방정토로 들어간 것입니다.”
하기에, 내가 웃으면서,
“부도씨(浮屠氏)들은 원래 환설(幻說)을 많이 하니까요.”
하고 이어, 불가에는 선(禪)과 교(敎) 두 파가 있는데 대사는 어느 쪽이냐고 물었더니, 그의 대답이,
“경교(經敎)를 대강 듣고 염불이나 일삼고 있지 심학(心學)에 관한 공부는 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그와 이틀 밤을 함께 지냈는데 언제나 밤중이면 미타(彌陀) 소리가 들려왔다.
금강산(金剛山)이 높고 가파르고 수려하기 동방에서는 으뜸인데, 그 산맥은 장백산(長白山)에서 시작되어 검산(劍山)에서 높이 치솟고 철령(鐵嶺)을 가로질러 추지(楸池)에서 기복을 이루고 이어 여기에서 서려 이루어진 것이다.
툭 튀어난 봉우리가 능호봉(凌灝峯)인데 그 봉은 흙과 돌이 섞여 있고 돌무더기 산이 죽죽 뻗어가다가 펄쩍 뛰어올라 영랑재[永郞岾]가 되고 또 갑자기 높이 솟아 비로봉(毗盧峯)이 되었는데 바위 전체가 솟아 봉우리가 되었기 때문에 곧바로 하늘까지 치솟아 높고 거대하기로는 이와 맞먹을 봉우리가 없다. 비로봉에서 형세가 한풀 꺾여 내려오면서 험준하게 첩첩으로 싸인 것이 중향성(衆香城)인데 푸르른 바위 절벽이 둘러서서 성을 이루고 하얀 바위들을 바라보면 그 빛이 마치 분을 발라놓은 것 같다. 그리고 바위 사이로는 노송ㆍ잣ㆍ해송(海松)ㆍ만향(蔓香) 나무들이 하나의 무늬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 연달아 일출봉(日出峯)ㆍ월출봉(月出峯)이 솟아 있고, 그 아래 가로로 줄서 있는 것이 백운대(白雲臺)ㆍ금강대ㆍ대향로(大香爐)ㆍ소향로(小香爐)이고, 그 시냇물은 만폭동(萬瀑洞)인데 백천동(百川洞)의 물과 만나서 남으로 흘러 회한(淮漢)의 상류가 된다. 그리고 또 서쪽으로 가서 망고봉(望高峯)이 되었는데 그 높이는 비로봉 다음 가고, 또 그 다음으로 백마(白馬)ㆍ현등(玄登) 등의 봉우리가 있는데 마치 서쪽을 향하여 엎드리려는 듯하다. 또 남으로 바닷가까지 나가서 들을 끼고 달려간 놈은 천후(天吼)ㆍ설악(雪嶽)ㆍ한계(寒溪)가 되었고, 서남으로 간 놈은 오대산이고, 곧바로 남으로 달려간 놈은 영(嶺)의 좌우 그리고 호(湖)의 서남쪽 줄기가 되고 있다.
비로봉 서쪽은 내산(內山)이라고 하는데, 바위가 우뚝우뚝 서있고 바람은 서풍을 받고 햇볕은 석양 햇볕을 받기 때문에 나무들이 그리 자라지 못하고 있다. 비로봉 동쪽은 바위 사이로 흙이 꽤 많고 아침 해가 비치는데다 바다가 가까이 있어 그 기운까지 받기 때문에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서 해를 가리고 구름 위까지 치솟아 있는데 그 쪽은 외산(外山)이라고 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동쪽으로 뻗은 가지는 백 리도 다 못가 동해에 이르러 끝나고, 서쪽으로 뻗은 가지는 회수(淮水) 서쪽을 끼고 바다까지 다 못 가서 양강(楊江)과 만나 거기에서 끝나는데 천 리 절반 정도로서 가깝고, 북으로 뻗은 가지는 높은 산이 첩첩이고, 둥그렇게 서려 한 골짜기를 형성하고 있는데 그것이 구룡연(九龍淵)이다. 만폭동은 바위낭떠러지가 수려하고 수석도 맑아 지팡이 짚고 신발 신고도 건널 만하기 때문에 구경 온 사람들이 왕래하고 있으나, 구룡연은 어두컴컴하고 그 깊이를 헤아릴 수도 없으며 용과 새짐승들이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낮에도 풍정(風霆)이 일고 괴물이 나타나고 하여 인적이 미칠 수 없는 곳이다.
내 늙고 병들어 짧은 지팡이에 동자 관자 거느리고 비로봉 정상에 올라가서 운무(雲霧)를 딛고 비바람 맞으며 굽이굽이 모든 산천 다 구경하고 동서남북을 향해 내 영혼을 마음껏 드러내 보이지 못한 것이 한이고, 또 높은 봉우리 가파른 벼랑을 타고 넘어 구룡연 깊은 못가에 가서 괴물들이 사는 굴들을 훑어보고 험준하고 으슥하고 기기괴괴한 곳까지 다 구경함으로써 나의 이 가슴속에 쌓인 우울하고 답답한 회포를 다 털어버리지 못하는 것이 한이다. 내가 벌써 이렇게 늙었단 말인가. 이율곡 숙헌(李栗谷叔獻)선생이 소년 시절 무슨 일로 인하여 집을 떠나 이 산에 들어왔다고 하는데, 중들에게 물어보았으나 그 일에 대하여 들어서 알고있는 자가 없었다. 그 중들이야 물론 무식한 것들이지만 지금 1백 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그 유향(遺響)이 아득할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밤에 보원과 얘기를 하는데 보원이, 정지상(鄭知常)은 어떤 인물이냐고 묻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고려 때 문사(文士)이고 그의 시가 깨끗하고 민첩하여 당인(唐人)의 기풍이 있었으나 요망한 중 묘청(妙淸)에게 현혹되어 나랏일을 그르치고 말았으니 보잘것 없는 사람이지요.”
했더니 또, 김부식(金富軾)은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다. 내 말이, 문장력이 있어 삼국사(三國史)를 썼고 장군이 되어 묘청의 난을 토평하기도 했다고 했더니, 그가 말하기를,
“내가 듣기에는 부식이 정지상과 명예 다툼을 했는데 번번이 이기지 못하자, 이어 지상을 모함해서 죽였다가 뒤에 결국 지상의 영혼에게 되죽음을 당했다고 합디다. 그게 무슨 좋은 사람이겠소.”
하면서, 부식이 죽은 일을 얘기했는데, 마치 두영(竇嬰)과 전분(田蚡) 사이에 있었던 일처럼 말하니 얘기가 매우 해괴하였다. 나는 전에 들은 바 없는 얘기이기에 여기에 써 두었다가 언젠가 누구에게 물어보기로 하겠다. 보원의 말에 의하면 김부식이 언젠가 시관(試官)으로 원(院)에 들어가 원의 문에다 시를 쓰기를,

촛불이 다하자 날은 새려고 하고 / 燭盡天將曉
시가 이루어지니 구절이 향기롭네 / 詩成句已香
뜰 가득히 사람들 시끌시끌한데 / 滿庭人擾擾
장원을 할 자는 뉘라던가 / 誰是壯元郞

했는데, 지상이 그 시를 보더니 즉석에서 붓을 들고 삼경(三更)ㆍ팔각(八角)ㆍ낙월(落月)ㆍ부지(不知) 이 여덟 자를 써서 다섯 자씩 된 위에다가 각기 얹어 놓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부식이 자기 재주로는 그를 따르지 못할 것을 알고 드디어 모함을 하게 된 것이라고 운운하였다.

6일(무신) 맑음. 유점사(楡岾寺)를 가기 위하여 나서면서 시를 읊어 보원상인(普願上人)과 작별하였는데 충암(冲菴)의 ‘풍악증승운(楓岳贈僧韻)’을 차운하여,

금강산에 가을이 드니 / 秋入金剛洞
구름 걷히자 하늘은 쪽빛이로세 / 雲收蔚藍天
그대 만나 사흘 밤을 얘기하고 / 逢君三宿話
돌아가려니 소매에 창연이 이네 / 歸袂惹蒼煙

라고 읊고, 극가로 하여금 써 주게 했다. 드디어 견여(肩輿)를 타고 나와 만폭동을 향하였다. 표훈사를 다시 지나 서쪽으로 석문(石門)을 들어가는데 겨우 견여 하나가 빠져 나갈 정도이고 그것이 금강굴(金剛窟)이라고 하였다. 몇십보를 더 가니 왼편에는 오현(五賢), 바른편에는 학대(鶴臺)가 있고 두 시내가 마주치는 곳에 석봉(石峯)이 하나 솟아 있는데 그 이름은 향로(香爐)이고 거기가 바로 만폭동이다. 붉은 낭떠러지 푸른 절벽하며 돌은 희고 물은 맑았다. 집채만한 바위 하나가 시내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구경왔던 사람으로 그 바위에다 이름을 써 놓은 자들이 천 명이나 될 정도로 혹은 아주 새겨놓기도 했고 혹은 먹물로 써 놓기도 하였다. 시냇가에 또 널찍한 큰 바위가 있었고 거기에 양사언(楊士彦)이 쓴 ‘봉래풍악 원화동천(蓬萊楓岳元化洞天)’이라는 여덟 글자가 바위 면에 새겨져 있었는데, 글자 모양이 날아 움직이는 듯하여 볼 만했다. 그 곳 중에게, 여기에 학소암(鶴巢巖)이 있다는데 왜 학소암이냐고 물었더니, 그의 대답이, 옛날에는 학이 여기에다 둥지를 틀고 살았으나 세월이 오래 되어 바위가 이지러지자 둥지도 기울어져 학은 날아가 버리고 다시는 오지 않는다고 하였다. 정극가가 그 바위에다 이름을 쓰기에 나도 그 바위에다 용문석(龍門石)이라고 썼다. 그랬더니 두 군들이 그 뜻을 묻기에 내가 말하기를,
“세상에서 말하기를 풍악에 와서 노는 자면 이름을 선적(仙籍)에 올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데, 자고 이래로 과연 상계(上界)로 뽑혀 올라간 자가 있었다고는 들은 바 없고, 다만 성명을 고기비늘 모양으로 그 밑에다 다닥다닥 써 놓은 것이 마치 용이 되기 위하여 용문(龍門)에 모여든 물고기들이 수도 없이 많지만 이마에 점찍고 꼬리 불태우고 용이 되어 올라 가기란 그리 쉽지 않은 것과 똑같아서 내 그 뜻으로 쓴 것이라네.”
하였다. 글씨를 쓰고 나서 시내를 따라 걸어가 보니 잎이 지고 단풍이 물들고 하늘이 시원한 것이 바야흐로 구월 같았다.
한 곳에 갔더니 맑은 물줄기가 옥을 뿜어대는데 감돌아 흐르기도 하고 그냥 내리쏟아지기도 했으며 하얀 바위가 펑퍼짐하여 그냥 앉거나 걸터앉을 만했는데 이름이 진주담(珍珠潭)이라고 했다. 내가,
“왜 진주담이라고 했을까?”
했더니, 유군이 말하기를,
“샘물이 펑퍼짐한 바위 위로 흘러 바위에 웅덩이가 생기고 그 웅덩이 가운데 마치 진주조개가 진주를 머금고 있는 것처럼 함괴(涵瑰)가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겠지.”
하여, 내가,
“그렇구나. 그럴싸한 생각이다.”
라고 하였다. 또 조금 올라가니, 청룡담(靑龍潭)ㆍ구담(龜潭)ㆍ선담(仙潭)ㆍ화룡담(火龍潭)이라는 것들이 있는데, 물이 더 맑고 돌도 더 깨끗하고 굼틀굼틀 흘러내리는 폭포도 완연히 무지개가 구름을 가로지른 듯, 피륙이 공중에 뻗쳐 있는 듯했고 둘러싸인 산들의 푸르른 나무와 잎들이 맑은 운치를 더해주고 있어 사람들 모두가, 참으로 이곳이야말로 선계(仙界)이고 천하의 장관이라고 아우성이었다. 비록 곡림(曲林) 파곶(葩串)의 백석이나 송도(松都)의 박연폭포(朴淵瀑布)라도 여기에 비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서로 갓끈을 씻으며 즐겼다.
내가 절구 한 수를 읊기를,

콸콸콸 쏟아지는 만폭동 / 虩虩萬瀑洞
밤낮없이 울려 퍼지는 물소리 / 奔流轟晝夜
용이 성나 일어나서 / 直恐龍怒作
천하를 비에 잠기게 할까 두렵네 / 雷雨盈天下

하여, 극가를 시켜 바위에다 쓰라고 했더니, 극가도 다음과 같이 한 수 읊어 바위에 썼다.

만옥봉 앞에는 벽옥이 흐르고 / 萬玉峯前碧玉流
흰구름에 단풍나무 동천이 그윽하네 / 白雲紅樹洞天幽
시 쓰려고 수시로 돌에 앉아 쉬기도 하고 / 題詩坐石時時歇
좋은 경치 찾아다니며 여기저기 머문다네 / 杖策探奇處處留
술독에는 술이 다해 취할 수가 없네그려 / 酒盡窪尊難一醉
신선이 봉래로 간 지는 몇천 년이 되었을까 / 仙歸蓬海機千秋
산신령은 늦게 온 것 이상하게 여기지마오 / 山靈莫怪尋眞晩
꿈 속에는 벌써부터 비로봉에서 놀았다오 / 慣向毗盧夢裏遊

벽하담(碧霞潭)에 이르러 한 곳을 바라보니 가파른 낭떠러지 아래 비각(飛閣) 하나가 은은히 보이고 구리기둥 하나가 그 밑을 떠받치고 있었다. 그리하여 유군과 함께 그 비탈을 더위잡고 올랐는데, 그때 외삼촌께서는 늙어 다리힘이 없으니 견여를 타야겠다고 하셨고, 극가는 바위에 시를 쓰느라 함께 따라오지 못했다. 그 곳에 갔더니, 암자 하나가 있었는데 보덕굴(普德窟)이라고 편액만 달려 있고 중은 없었다. 벽에는 기(記)가 걸려 있었는데 조계선종(曹溪禪宗) 연(衍)이 쓴 것으로 글씨도 새가 날으는 듯 살아 있었고 내용 역시 문원(文苑)의 기운과 맛이 있어 읽을 만했다. 높다란 누대 굽은 난간에서 1천 길이나 되는 밑을 내려다보면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이 오싹하게 할 것 같아 나는 그 실내에만 들어가고 난간 쪽은 밟지 않았다. 이유는, 높은 데 오르지 말고 위태로운 데 가지 말라는 성인의 교훈이 생각나서였고 또 우물 내려다보는 데 관한 팽조(彭祖)의 경계에도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비탈길을 타고 다시 내려와 벽하담 남쪽으로 나와서 돌을 밟고 건너와 화룡담 바위 위에 앉아서 쉬었다. 거기서부터 위쪽으로는 물도 얕고 산도 갈수록 좁아 명승처는 거기에서 거의 끝났다. 드디어 견여가 앞서서 갔는데 잔도나 비탈길이 위험하여 걸어서 내려온 곳이 절반이나 되었다. 길 따라 오면서는 중들을 시켜 도로파초(都盧巴草)를 뜯게 하고 혹 직접 캐기도 했는데 이 풀은 이 산 높은 곳에서만 나는 풀로서 잎은 성근 솔잎 같고 뿌리는 가느다란 천궁뿌리 같으며 향기 역시 천궁 비슷한데 좀 특이한 향초이다. 올 때 허미수에게서 듣고 여기 와서는 중들에게 물어 캐게 된 것인데 중들도 그것을 간혹 부처 앞에다 쓰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이 산중에 만향(蔓香)이 있는데 그것이 잣나무이긴 해도 가지가 덩굴로 자라고 바위 틈에 잘 나는데 그다지 크지 않아 잣나무로서 다른 종류이다. 비로봉 둘레는 온통 이 물건이 널려 있으니 중향(衆香)이라는 이름은 아마도 이것을 이르는 말이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해송과 노송나무ㆍ잣나무 그리고 적목(赤木)이 섞여 있는 가운데 단풍나무가 가장 많아 풍악(楓岳)이라는 산 이름 역시도 그래서 붙여진 것이 아니겠는가. 적목이라는 것은 몸통은 노송나무에 잎은 잣나무 잎이고 씨는 산호(珊瑚)처럼 생겼는데 어째서 적목인지는 알 수가 없다.
이 날 지난 곳은 금강대(金剛臺)ㆍ백운대(白雲臺)ㆍ만회동(萬檜洞) 등이었으나 다 그냥 지나치기만 하였고, 사자암(獅子菴)에 왔더니 큰 바위가 사자 모양으로 생겼는데 암자만 있지 중은 없었다. 들어가서 보고 한 곳에 이르니 석조탑이 해를 가리고 있고 바위 사이에다는 장육상(丈六像)을 조각해 놓았는데 이는 나옹(懶翁)의 작품이라고 한다. 아, 불도들이 허황한 짓들을 하여 이 명산의 맑은 운치를 모두 더렵혀 놓았으니 가탄스러운 일이다. 묘길상(妙吉祥) 옛터를 지나 마하연(摩訶衍)에 이르니 옛스러운 사찰이 깨끗하고 소나무ㆍ노송나무가 숲을 이루었으며 지세가 편평하면서 아늑하고 바위 비탈은 조금 멀리 떨어져 있었다. 중이 하나 혼자 살고 있으면서 생식을 하고 수좌(首座)라고 불렀는데 수좌라는 명칭은 그 무리들 중에서 참선하는 자를 이르는 말이다. 말을 시켜 보았더니 역시 배운 것은 없었다. 내가, 이렇게 산 속에 있으면 귀신이나 도깨비 같은 것이 무섭지 않느냐고 했더니 그가 말하기를,
“만약 그런 마음이 있다면 어떻게 여기에서 있겠습니까.”
했다. 아름다운 여인을 보아도 동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하면서 산중에 아름다운 여색이 있다면 그게 바로 귀신이요 도깨비가 아니겠느냐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만약 귀신이나 도깨비가 아니라면 네 마음이 동하지 않음을 어떻게 알겠느냐.”
하고서, 이어 말하기를,
“인간의 대욕망으로 가장 억제하기 어려운 것이 음식과 남녀 관계인데 색욕은 그래도 억제할 수가 있으나 가장 참기 어려운 게 식욕인 것이다. 내가 옛날 들은 얘기지만 토당(土塘) 오 상공(吳相公)이 언젠가 이 산 구경을 왔는데 어느 한 궁벽한 곳 작은 절에를 갔더니 나이 젊은 화상(和尙) 하나가 살고 있으면서 사람이 오는 것을 보면 피했다. 그를 불러 무엇을 먹느냐고 물었더니 뜰에 있는 송백을 가리키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얼굴빛이 청백한 것이 오랫동안 그것을 먹고 공이 많이 쌓인 자더라는 것이다. 그와 얘기하면서 꿩고기를 꺼내 숯불에다 구워 먹고 다른 절로 내려와서 자는데 밤중쯤 되어 누가 다급하게 문을 두드리기에 물어 보았더니, 바로 아침에 만났던 그 중이었고, 찾아온 까닭을 물었더니, 아침에 본 꿩구이 좀 먹는 것이 소원이라고만 말하더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공은 그가 그 식욕을 억제할 수가 없어서 온 것을 알고 일행 중의 사람을 불러 그 고기를 내주게 하고 실컷 먹으라고 했더니, 그 중이 다 먹고 나서 얼굴이 붉어지며 고개를 숙이고 말하기를, ‘소승이 여러 해 곡식을 끊고 저 자신 공력이 깊다고 생각했었는데 아까 공의 행리 속에 있는 고기 반찬 냄새를 맡고는 식욕이 갑자기 동해 아무리 억제하려고 해도 안 되고 발광이 나서 이렇게 와 이 짓거리를 했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하더라는 것이다. 공이 웃으면서 하는 말이, ‘그게 식화(食火)라는 것으로 사람이면 다 있는 것인데 그를 금하기가 어디 그리 쉬운가.’ 했더니 그 중이 사례를 하고 갔다고 하였다. 식욕과 색욕은 다 천성(天性)인데 불가에서는 그것을 금기하고 있으니 그게 어디 인간으로서 자연스러운 일이겠는가. 수좌가 하는 일은 우리가 할 일은 못 될 것 같다.”
하고서 서로 웃고 말았는데, 그 중도 대꾸가 없었다. 보기에 그의 사람 됨됨이가 자기들 도(道)에서 무엇인가 들은 것이 있어서가 아니고 다만 하기 어려운 일을 하는 것이 고상한 것으로만 생각한 것인데, 우리 유자(儒者)들로서 군자의 대도(大道)는 듣지 못하고 은미한 일이나 캐고 괴이한 짓이나 하여 후세에 무엇인가 남겨 보려고 하는 자들과 무엇이 다르랴. 역시 우리들로서도 경계해야 할 바인 것이다.
나무 한 그루가 절 앞에 서 있었는데 노송나무 몸통에 소나무 잎이고 씨 역시 솔씨와 같았으며 잎은 푸르른 것이 겨울을 나도 끄떡없는데, 장안사에서 보았던 계수나무였다. 하지만 냄새를 맡아보아도 향기가 없고 맛을 보아도 맵지 않으며 꼭 측백(側栢) 비슷한데, 혹시 《이아(爾雅)》에서 말한, 소나무 잎에 잣나무 몸통을 한 전나무라고 하는 것은 아닌지? 점심을 거기에서 먹고 출발하려고 할 때 나 혼자서 뒤 산등성이에 올라 오래도록 거닐면서 읊조리고 감상하였다.
마하연(摩訶衍)은 인도 말인데 여기서는 대승(大乘)을 말한 것으로 이 산에서 가장 좋은 곳을 말하며 그 곳에 있으면 성도(成道)를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 곳을 출발하여 내수재[內水岾] 등성이에 이르니 해는 이미 기울었고 외삼촌과 극가는 먼저 와서 재 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중들 오륙십 명이 와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유점사(楡岾寺) 중들이 우리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여부(輿夫)를 교체하기 위하여 온 것이었다. 거기에 와서 돌아다보니 푸르른 묏부리들이 아득히 멀리 보이고 비로봉은 우뚝 서 있어 두고 가기에는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잠시 쉬었다가 그 재에서 출발했는데 중들 말에 의하면 내수재를 안문재[鴈門岾]라고도 한다는 것이다. 거기서부터 그 아래로는 소나무ㆍ노송나무가 빽빽히 들어서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견여를 타고 이십여 리를 오는 동안 금강산 동쪽 기슭에 기이한 바위 가파른 봉우리들이 나무끝 사이로 보였다 안 보였다 하였고 길은 평탄했으나 혹 걸어야 할 곳도 있었다. 그리고 시내를 따라 가노라면 수석이 맑고 아름다운 곳도 있었다. 한 곳에 다다르니 쉬어갈 만한 몇 칸짜리 판옥(板屋)이 있었는데, 하산할 때 점심 먹는 곳이라고 중이 말하였다. 내산(內山)에는 사찰은 많아도 중들의 생활이 모두 빈곤하여 견여를 메는 중들도 각 사찰에서 모아온 것이었으나, 여기 와서는 모두가 유점사 중들인데 메는 솜씨들이 잽싸고 빨라 마치 준마(駿馬)가 낯익은 길을 달리듯 하였다. 그리하여 잠깐 사이 이미 숨 한 번 돌릴 곳까지 왔는데, 동을 바라보니 큰 바위봉우리 하나가 가파르고 빼어난 것이 마치 내산의 면목과 같았고 이름은 만경대(萬景臺)라고 하였다.
해가 이미 저물어 유점사에까지 가서 자려면 구경할 틈이 없었다. 잠시 쉬었다가 또 한 곳에 이르러 낭떠러지를 따라가는데 무서워서 감히 바로 걷지 못하고 겨우겨우 건넜다. 또 치마바위[裳巖]라는 한 시내를 건넜는데, 이는 모양이 그리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대적암(大寂菴)을 지나 7, 8리쯤 가니, 중들 몇 십 명이 와서 인사를 하였다. 다섯 개의 부도(浮圖)와 비 셋이 서 있었는데, 부도는 서산 휴정(西山休靜)ㆍ동산 응상(東山應祥)ㆍ춘파 쌍언(春坡雙彦)ㆍ기암 법견(奇嵒法堅) 그리고 보운(普雲)의 것이고, 비갈은 동산 것은 정두경(鄭斗卿), 춘파 것은 김좌명(金佐明), 기암 것은 이관해(李觀海)가 쓴 것이었다. 잠시 쉬었다가 절로 들어가 운취당(雲翠堂)에서 쉬었는데 중이 다과를 들고 나와 접대했다. 그 절의 수승(首僧) 이름은 혜식(慧識)이고 삼보(三寶) 이름으로는 임관(任寬)이었다. 고성(高城)의 원 조카가 구경 왔다가 뵙기를 요청하였다. 그의 이름을 물었더니 만(晩)이라고 하면서 자기 서제(庶弟)인 천립(賤立)이라는 자와 고 제주 목사우량(宇亮)의 아들과 함께 왔다고 하였다. 밤중에 비가 조금 내렸다.

7일(기유) 아침에 비가 조금 오다가 금방 개었다. 절간을 두루 살펴보았더니 웅장하고 사치스럽기가 장안사보다 더하여 마치 귀신이 지은 솜씨 같았는데, 중의 말에 의하면 갑인년에 완전히 불타 없어진 것을 광해군 때 중전(中殿)의 원당으로 다시 지은 것이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아, 만약 부처를 섬겨 복을 얻게 된다면 절을 이렇게도 잘 지은 복력(福力)은 흉한 재앙을 충분히 소멸시킬 수가 있었을 것인데 결국 면치 못하고 말았으니 어찌된 일인가. 더구나 백성의 고혈(膏血)을 짜내 자기 일신의 행복을 축원하는 일이 어찌 흥왕(興王)으로서 할 일이겠느냐.”
하였다. 중이, -성화 6년(成化六年) 이 네 글자가 있는 본도 있음- 우리 성종 대왕이 사찰 전지에 대해 조세를 면제해 준 사패(賜牌) 및 원(元) 나라 태정(泰定) 2년 원 나라 황제의 호지고천축수성지(護持告天祝壽聖旨)ㆍ성유(省諭)ㆍ위이관(逶迤觀)ㆍ오탁정(烏啄井)ㆍ오불전(汙佛殿)ㆍ노춘당(盧偆堂) 및 세조 어실(御室)에 관한 것들을 꺼내 보였는데 그 중의 말이 이상야릇하여 더 캐물을 것이 없었다. 거기에서 나와 산영루(山映樓)에 올라 보니 역시 잘 지어진 집이었는데, 바위를 깎아 만든 홍문(虹門)으로 누대 아래의 물이 흐르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백헌(白軒)ㆍ북정(北汀)ㆍ박일성(朴日省)ㆍ최유연(崔有淵)ㆍ이지익(李之翼)이 남긴 시와 여러 구경 왔던 이들이 이름을 써 놓은 것들이 있었다. 그 절의 기적(紀蹟)을 보았더니, 절이 창건된 것은 한(漢)의 평제(平帝) 원시(元始) 2년인데, 신라 탈해왕(脫解王) 1년에 부처 57구(驅)가 돌로 만든 배에 실려 월지국[月氏]에서 바다를 건너 이곳에 왔는데 이른바 노춘(盧偆)이라는 자가 그 당시 고성(高城) 유수로서 그 곳에다 그 절을 지은 것이라고 하였다. 만약 그렇다면 불교가 우리나라에 온 것이 중국보다 먼저이겠으나 그러나 거기에서 말한 원시 2년이 신라 탈해왕 1년도 아닐 뿐만 아니라 돌배를 타고 월지국에서 바다 건너 왔다는 말이 너무 허탄하고 가소로워 믿을 것이 못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절이 사실은 금강산 동쪽 기슭 중앙에 위치하여 남쪽을 향하고 있으며 모든 산이 거기를 중심하여 둘러 있고 일백 시냇물도 그 곳을 중심으로 감돌아 흐르는데 그 속에 자리잡고 있는 들이 만마(萬馬)를 수용할 만큼 크고 넓고 또 해를 가리고 구름 높이 치솟은 빽빽한 나무들이 수도 없이 서 있는데 모두가 해송이 아니면 토삼(土杉)ㆍ적목들이다. 그리고 전우(殿宇)의 굉장하고 화려함, 문정(門庭)의 넓고 확 트임 또는 각 암자 자리 기타 시설물 그 밖의 기용(器用) 따위가 충분히 왕공(王公)과 맞먹을 정도이고, 금벽(金碧)의 장식이나 심지어 놀이개 도구 하나까지도 모두 최고의 사치를 다하고 있었다. 아, 불교는 무엇을 어떻게 했기에 이 정도로 혹세(惑世)를 하고 있고, 우리는 무엇을 잘못하여 이교(異敎)가 저렇게까지 판을 치고 있게 했단 말인가. 고인들이 천하 명산은 중들이 많이 차지하고 있다고 하더니, 참 서글픈 일이다.
조금 늦게 백련암(白蓮菴)에 있는 중 천오(天悟)라는 자가 왔는데 나이는 80이고 자기 말로 응상(應祥)의 도제(徒弟)이며 치언(雉彦)과는 동문이고 사명당 송운 유정(四溟堂松雲惟政)을 사숙(私淑)하고 있다고 하였다. 얘기를 나눠 보니 국내에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던지 산과 물의 원위(源委)를 많이 알고 있었다. 그 곳에 있는 중 계필(戒必)이란 자도 천오와 함께 종유하는 자인데 그와도 함께 얘기했다. 그리고 또 그의 말이, 금강산은 내산(內山)이 등이고 외산(外山)이 얼굴이며 장백산에서 발원하여 황룡(黃龍)에서 푹 솟고 추지(楸池)에서는 잠복했다가 힘차게 달려와서 여기에 와 이렇게 뭉치고는 다시 동해 쪽으로 가 머리를 수그리고 천후(天吼)ㆍ설악(雪岳)이 되었고 한 줄기는 서쪽으로 가 대산(臺山)이 되었으며, 또 한 줄기는 남쪽으로 달려가 태백(太白)ㆍ소백(小白)이 되고 유두(流頭)에서 마무리를 했다고 했는데, 그의 말이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같았다. 내가 말하기를,
“풍악산이 내산은 모두 바위뿐이어서 깎아지른 듯이 험준하기만 하고 풍후(豐厚)한 맛이 없는 데 반해 외산은 높으면서도 흙이 많이 있고 동해를 내리보고 있어 서로 자웅(雌雄)을 이루고 있는데 노사(老師)의 말씀이 대체로 맞는 말 같소이다.”
하고, 이어 만폭동에서 용문석(龍門石)이라고 썼다는 얘기를 했더니, 천오가 다 듣고는 두 손을 마주잡으면서 하는 말이,
“선생께서는 사물을 잘 묘사해 내는 분이라 할 수 있으니 산중의 고사(故事)가 되기에 충분하겠습니다. 이 노승(老僧)이 잘 기억해 두었다가 뒤에 오는 이들에게 전수하겠습니다.”
하였다. 그리고 천오가 비백(飛白)을 잘 쓴다기에 몇 폭 부탁했더니, 일필휘지로 쓰는데 붓놀림이 민첩하고 빨라 이러한 서예에 노련한 자로 보였으며, 역시 애호할 만하였다. 그리하여 당인(唐人)의 시, 충암의 비로봉시, 차운하여 보원(普願)에게 준 나의 시 등을 써서 여러 사람이 나누어 가졌다. 식후에는 극가 등 몇 사람과 앞 시내로 자석(磁石)를 캐러 갔었으나 캐지 못했다. 그때만 해도 산 속 물이 차가운데 중들이 물 속에 들어서서 돌을 굴리면서 모래 이는 것을 보고는 그만두고 그 곳 중에게 청하여 자석을 얻었다. 그리고 그날 양양 태수(襄陽太守) 이구 대옥(李球大玉)이 사람을 보내 편지와 시를 부쳐 오면서 식량과 반찬 그리고 술에 안주까지 보내 왔다. 그의 시는 이러했다.

선구에서 지내는 그 자미가 어떠한가 / 仙區行色問如何
오르는 곳곳마다 흥미가 진진하리 / 處處登臨發興多
어느 때나 영랑호를 읊조리며 지나련가 / 吟過永郞湖幾日
명사에서 피리 불며 기다릴까 싶네마는 / 笙歌吾欲候鳴沙

이날 밤새도록 비가 내렸다.

8일(경술) 아침 안개가 비로 변하여 온종일 멎지 않았다. 천오가 가겠다기에 작별 인사로 절구 한 수를 써 주었다.

동화를 마음 두고 삼 년을 다녔더니 / 三載東華志未平
흰구름 가을빛이 중향성에 가득하네 / 白雲秋色衆香城
산영루 앞에 와서 자기까지 하고 보니 / 更投山映樓前宿
불탑에 연기 녹고 야기가 그리 맑네 / 佛榻煙消夜氣淸

이렇게 써 주었더니, 천오가 감사의 뜻을 표하면서 하는 말이,
“노승은 죽을 날이 머지 않아 뒤에 다시 만날 기회가 없겠지만 이 시면 충분히 죽기 전의 면목(面目)이 되겠습니다.”
했는데, 그는 문자(文字)도 알고 얘기도 잘하고 비교적 올바른 정신이 있는 자였다. 대옥(大玉)이 보낸 심부름꾼이 돌아가는 편에 그의 시에 차운한 시를 보냈다.

내 자미가 어떠냐고 그대가 물었는데 / 君問吾行事若何
구월이라 가을빛이 안문에 짙다네 / 九秋風色雁門多
이번 길엔 기어코 호선의 뒤를 따라 / 此行且追湖仙躅
모래밭에 비치도록 예상을 보내려네 / 須遣霓裳映晩沙

유군 역시 절구 두 수를 지어 그는 그대로 보냈다.
이 날은 대적암(大寂菴)으로 가서 나백(懶伯)에게 물어 만경대(萬景臺)를 오르려고 했고, 또 절운(切雲)ㆍ은선(隱仙) 등의 대에도 올라 십이폭(十二瀑)을 구경하고 그리고 외산(外山)도 한번 살펴보려고 했었는데 비 때문에 그리 못하였으니 역시 안타까운 일이다.

9일(신해) 아침 비가 늦게 개었다. 출발하려 하면서 오자시(五字詩)를 지어 천오 대사에게 부쳐 주도록 계승(戒僧)에게 주었다.

구름 속에 사는 글 잘하는 중 / 雲間碧眼字
붓 휘두르자 벌레와 새가 꿈틀거리고 / 筆下生虫鳥
산수에 관한 얘기까지 잘해 / 況復談山水
나로 하여금 속세를 잊게 했네 / 令我俗緣了

운취당(雲翠堂)을 출발하여 산영루(山映樓)를 거쳐 명월교(明月橋)ㆍ백운교(白雲橋)ㆍ월운교(月雲橋)를 건너서 동으로 가노라니, 푸른 절벽의 단풍잎들이 좌우를 비추고 있고 비가 갠 뒤라서 맑은 바람 밝은 태양이 우리로 하여금 청명(淸明)한 기운을 더 느끼게 했다. 그리고 시냇가 수석(水石)들이 하나같이 신선 세계여서 도중에 절구 한 수를 읊어 두 군들로 하여금 화답하도록 했다.

비 지난 가을 산에 시원한 바람 불고 / 一雨秋山送晩凉
동천의 운물들 아침 햇살 받아 곱네 / 洞天雲物媚朝陽
절벽의 단풍나무 무지개다리 속이어니 / 丹崖錦樹虹橋裏
나더러 신선이란들 안 될 것이 뭐겠는가 / 呼我爲仙亦不妨

한 잿마루에 올랐더니 구현(狗峴)이라고 했다. 중의 말에 의하면 처음 유점사 터를 잡을 때 개가 앞을 인도하여 여기까지 왔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란다. 재에서 잠시 쉬었다가 다시 떠나 백천교(百川橋)를 건너는데 돌다리가 몇십 보 되는 골짜기를 가로질러 있고, 돌을 깎아 난간을 만들어 두었으니 흐르는 물 위를 가로질러 있으며, 수석이 기절하기 이를 데 없고 푸른 소나무가 길 옆으로 죽 있어 사람으로 하여금 눈을 다시 닦고 보게 하였다. 견여에서 내려 걸어서 건넌 뒤 소나무와 바위에 걸터 앉아 한참 있다가 떠났다. 거기에서는 또 견여를 타고 얼마쯤 가 외삼촌이 있는 곳까지 갔더니 내산(內山)에서 보내온 산외(山外)의 종과 말이 기다리고 있었다. 거기서 잠시 쉬면서 행장을 챙기고 누룽지를 꺼내 요기를 했는데, 견여를 메던 중들은 거기에서 모두 물러가고 이후로는 말을 타고 갔다. 절에서 여기까지는 20리(里)쯤 되었으며, 중들 몇이 뒤를 따랐는데 읍리(邑里)로 가는 자들이라고 했다.
산외에서 온 노복과 말들은 장안사(長安寺) 북쪽으로 산기슭을 따라 오다가 추지령(楸池嶺)을 넘고 통천(洞川)ㆍ고성(高城)ㆍ삼일포(三日浦)를 거쳐 산 아래까지 왔는데 거의 3백 리 길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중의 말을 들으면 장안사에서 남쪽으로 나와 건봉(乾鳳)의 앞재를 거쳐 여기까지 오려면 이 길보다 꽤 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산이 자리잡고 있는 둘레는 5, 6백 리쯤 되는 것으로 옛날에, 8백 리라고 한 말은 허탄한 말인 것이다.
이 재는 금강산 동쪽 기슭의 한 가지로서 유점사에서 오자면 하나의 작은 재에 불과하지만, 이 재에서 동으로는 산마루가 그렇게 험준하고 구불구불 구절양장이어서 동해가 내려다보인다. 내가 중에게, 이 재 이름이 좋지 않아 내가 지금 망양령(望洋嶺)이라고 고쳤으니 뒤에 사람들이 오거든 그렇게 말하라고 했더니 중이 그리 하겠노라고 하였다. 그 재에서 내려가니 나뭇잎이 아직 단풍 들지 않아 마치 여름 같았다. 경구(京口)에서 말에게 꼴을 먹였는데, 여기가 유점사 중들 물방아 찧는 곳이라고 하며 물방아가 수십 군데 있었다. 재가 가파르고 길이 험해서 말이 갈 수가 없기 때문에, 거기에서 방아를 찧어가지고 지고 산으로 간다는 것이다. 고성 남강(南江)에 이르자 고성 주수의 조카 만(晩)이 원통(圓通)에서 뒤쫓아왔다. 그리하여 함께 남강을 건너 읍내 민가에서 여장을 풀었는데 주수가 사람을 시켜 고기반찬 등을 보내왔다. 이는 외삼촌이 오셨기 때문인데 자기는 병이 있어 와 보지 못한다고 심부름 온 자가 말하였다.

10일(임자) 맑음. 길을 떠나 외삼촌은 주수를 찾아보러 가시고 나와 두 군은 성 안으로 들어가 진동루(鎭東樓)에 올라 구경하였다. 또 해산정(海山亭)에 올랐더니 벽 위에 전인(前人)의 시판(詩板)이 많이 걸려 있었고, 그 중에서 동명(東溟) 김세렴(金世濂)이 지은 절구 한 수가 가장 운치가 있어 읊을 만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파도가 오밤중에 서광을 뿜어내더니 / 午夜溟波噴瑞光
여섯 용이 해를 들어 부상에 떠올리네 / 六龍擎日上扶桑
상서로운 구름들이 수도 없이 떠 있으니 / 彤雲紫蓋紛無數
뜬구름아 널랑은 태양 가까이 가지 말렴 / 莫遣浮雲近太陽

하였다. 정자가 동해를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으면서 서쪽으로는 금강산을 바라보고 있고 또 남강이 앞을 가로질러 흐르는데다 바다 입구에는 포구산(浦口山)ㆍ석범산(石帆山)ㆍ칠성석(七星石) 등이 줄지어 눈 안에 들어오고 있어 참으로 경치가 좋았는데 정자 이름을 해산(海山)이라고 한 것도 아마 그래서 붙여진 것이 아닌가 싶었다. 다만 읍(邑)이라고 해야 민가가 열 집도 채 안 되고 성도 망루도 다 무너진 상태여서 읍의 꼴이 아닌 것이 흠이었다. 주수가 외삼촌을 통해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 그 정자로 찾아와서 서로 인사를 나눈 다음 얘기 몇 마디를 끝내고 바로 일어나 삼일포(三日浦)로 향하였다. 주수가 미리 사공을 시켜 포구에다 배를 대어 놓게 하고 또 홍생(洪生)도 동행하게 하여 함께 배를 타고 사선(四仙)이 썼다고 하는 바위 사이의 단서(丹書)를 보았더니 글자 획이 모두 흐려져서 알아볼 수가 없고 판독할 수 있는 것은 ‘남석행(南石行)’ 이 세 글자뿐이었다. 용린석(龍麟石)을 구경하고 배를 그 바위 아래에서 돌려 사선정(四仙亭)에 올랐더니 홍귀달(洪貴達)ㆍ이관해(李觀海) 등 여러 사람이 읊은 시가 있어 읽어 보았다. 주수가 소주 몇 잔을 보내온 것이 있어 홍생과 대작하고 나서, 내가 시 한 수를 지어 읊어 주면서 그대로 주수에게 전해달라고 하였다.

고성 고을 태수가 어떤 인물이라던가 / 高城太守是何人
선왕조 때 바른말로 잘 간하던 신하였다네 / 曾在先朝諫諍臣
지금도 성상께선 나라 걱정에 애태우시니 / 聖主卽今臨食嘆
국가 치안 묘책을 돌아가서 아뢰구려 / 治安九策要歸陳

다시 호구(湖口)와 남강을 건너 간성(杆城)으로 향하며 또 시를 지었다.

열흘을 구경해도 흥은 아직 가시지 않아 / 十日金剛興未闌
구정의 가을빛을 다시 한 번 돌아본다네 / 九井秋色更回看
사선암은 있건마는 신선들은 간 곳 없고 / 四仙嵒畔幽蹤遠
포구의 연파 속 배 안에 내가 있네 / 浦口煙波倚木蘭

이 날 해산정에서 이관해의 절구 몇 수를 읽어보고 그것을 베끼고 또 차운까지 해보려 하였으나 때마침 주수가 왔기 때문에 미처 못하고 말았으니 한스러운 일이다. 지나고 나서 생각을 더듬어 보았으나 기억에 떠오르지 않는다. 바다를 따라 남으로 내려가다가 중도에 길을 잃고 되돌아왔는데, 한 호수를 지나다 보니 물은 굽이쳐 흐르고 바위는 기이한데 바다 어구에 임해 있어 뛰어난 경치가 삼일포에 못지 않았다. 들에 있는 동자에게 그 호수 이름을 물었더니 감호(鑑湖)라고 하였다. 거기를 구경하고 세상에 알린 자가 아직 없었기 때문에 이름이 전해지지 않고 그렇게 묻혀 있는 것이니 이 역시 서글픈 일이었다. 말을 멈추고 눈여겨보았지만 사람으로 하여금 자꾸 돌아다보게 만들었다. 조금 가다가 길가에서 말에게 꼴을 주고 현종석(懸鍾石)ㆍ석주(石舟) 등을 구경하면서 바위 위에 앉아 파도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그 석주니 현종석이니 하는 것들은 바로 유점사 사적에 기록되어 있는, ‘금불(金佛)이 서역국에서 올 때 석주를 타고 왔고 또 종을 이 바위에 매달았다’고 한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민간에 서로 전해 오고 있고 또 그 부근 마을 백성들은 그것을 다 사실로 여기고 있다. 대강역(大康驛)에서 잤는데 오늘 온 길은 25리쯤 되었다.

11일(계축) 맑음. 아침에 출발하여 운근역(雲根驛) 역리(驛吏) 집에서 말에 꼴을 주었다. 그 사람의 성명은 박성보(朴聖輔)였고 막걸리와 소금에 절인 전복을 내와 마시고 취하였다. 이 날은 일행 모두가 죽포역(竹浦驛) 역리 집에서 잤는데 그 집에서는 배를 내왔다. 이 날은 70리쯤 걸었으며 해변을 따라 걸었는데 이 날 따라 북풍이 세차게 불었기 때문에 바다에 파도치는 소리가 뇌성벽력 같았다. 바닷가 사람들 말에 의하면 바람 따라 물결이 용솟음치는 것을 일러 해악(海惡)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언제나 동풍ㆍ북풍이 불면 파도가 서로 마주치고 남풍ㆍ서풍이 불면 바람이 아무리 거세도 파도가 별로 일지 않는다고 한다. 내가 두 군들에게 묻기를,
“사해(四海)의 물이 끝도 없이 넘쳐 흘러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모르는데 과연 어디가 높고 어디가 낮을까?”
했더니, 극가가 하는 말이,
“듣기에 북극(北極)은 높고 남극(南極)은 낮다 하니 사해의 물 모두가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것이 아닐까?”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모든 시냇물은 동으로 흐른다고 들었는데 그런데 동해에는 밀물과 썰물이 없고, 감(坎)은 북방이어서 물이 모두 그리로 가야 할 것이니, 그렇다면 사해의 물은 모두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것일 것이다. 한구암 명길(韓久菴鳴吉)도, 남해와 북해는 밀물 썰물이 있고 동해 서해에는 없는데 그것은 마치 사람이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하여 나도 구암의 그 말이 사실인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만약 그의 말대로라면 남해는 목구멍과 같아서 기운이 들고 나는 곳이라 치더라도 북해는 미려(尾閭)와 같아서 밀물 썰물이 당연히 없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리고 지금 바람의 동정과 바닷물의 간만으로 미루어 봐도 북해는 가장 아래 있어 밀물 썰물이 없어야 하는 것이 이치로 보아 더욱 미더운 말인 것이다. 왜냐하면 기운이 잠겨 있으면 조수는 없고 바람이 역풍을 일으키면 파도가 일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극은 높고 남극은 낮다는 것은 천체의 은현(隱見)을 두고 한 말이지 지세(地勢)의 높낮음을 말한 것은 아닌 것이다.”
했더니, 극가의 대답이,
“그대 논리는 궤변이지 어디 그럴 이치가 있겠는가.”
하였다.
그날 또 명사(鳴沙)를 밟고 지나가기도 했다. 서해의 해변은 모두가 뻘이어서 질컥질컥 빠지지만, 동해는 모두 하얀 모래 위에 맑은 파도뿐이니, 그 하얀 모래 위를 말을 몰고 가노라면 말발굽 사이에서 사각사각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이는 마치 눈을 밟는 소리 같기도 하며 또 혹은 새들이 서로 조잘대는 소리 같이 들릴 때도 있다. 그래서 이른바 명사(鳴沙)라고 하는 것이다. 게다가 또 해당화가 길 옆으로 숲을 이루고 있는데 씨가 이미 여문 것도 있고 꽃이 아직 피어 있는 것도 있었다. 옛사람이 이른바, ‘명사십리해당홍(鳴沙十里海棠紅)’이라고 한 것이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인 것이다. 나도 시 한 수를 읊었다.

기구한 곳 다 지나고 이제 앞이 트이는가 / 歷盡崎嶇望始通
바다 위의 풍경들이 그야말로 창창하네 / 海天雲物正蒼蒼
인간에는 좋은 곳이 없다고 말을 말게 / 人間莫道無佳境
집집마다 벼와 기장 그 향기가 좋을씨고 / 千室稻粱滿地香

두 군들에게 들려 줬더니, 유군이 내 시에 화답하고 나서 또 두보(杜甫)의 기행시(紀行詩)를 외우고는 나에게 함께 차운할 것을 요구하였다. 내가 읊기를,

늙은 내가 구경 한번 해 보려고 / 吾衰事遠遊
힘에 부치는 것도 마다 않고 / 不辭筋力苦
늘 수석 그윽한 곳을 찾아 / 每探水石幽
예스런 곳이면 금방 앉곤 했네 / 頻坐嵒菴古
가고 또 가고 바닷가를 왔더니 / 行行出海邑
구름인지 물인지 서로 뒤엉켜 있고 / 雲水相呑吐
천둥소리가 땅속에서 나고 / 轟地中雷
반공중에선 세찬 비가 내리네 / 滃濛半天雨
산을 의지해 살고 있는 백성들 / 居民傍山多
셀 정도의 어부들 집이었네 / 蜑戶復可數
구이에 가 살고 싶다던 그 말씀 / 緬想居夷歎
옛 성인도 가늠이 있어 그랬겠지 / 先聖豈無取

기하(圻下)에서 영서(嶺西)를 거치는 동안 가을이 비록 풍년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두 자 빠짐- 경치가 좋아 추흥(秋興)이 꽤 있었다. 산으로 들어온 이후로는 들판의 경치며 농사 일이 모두 딴 세상 일로 생각되었는데 어제 경구(京口)에 와서야 비로소 곡식이 심어져 있는 전답을 보았다. 그런데 바닷가로는 옥토는 없고 빈 땅이 많았으며 마을이나 살고 있는 백성들이 사뭇 쓸쓸하게만 느껴졌다. 게다가 또 과수원이나 풍성한 숲도 없어서 새와 짐승들이 깃들 곳도 없었고 가을 농사 역시 영서 지방만 못하였다. 이곳 백성들은 모두가 게을러서 농사에 주력하지 않으며 가끔 고기잡고 해초 캐는 것을 생업으로 삼고 있는 단호(蜑戶)가 있기는 하였으나 지난 해에 흉년이 크게 들어 죽은 자가 거의 절반이었다고 하여 듣기에 슬펐다.

12일(갑인) 맑음. 주인의 집이 바다 부근에 위치해 있어 해돋는 광경을 볼 수 있었으므로 여러 벗들과 시간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때마침 구름이 살짝 가렸다. 주인 말에 의하면, 언제나 해돋이 구경을 하려고 하면 구름과 안개가 늘 가려 버려 확실히 볼 수 있는 청명한 날은 드물다고 한다. 그 곳을 일찍 출발하여 간성(杆城)의 북천교(北川橋)를 건너고 읍성(邑城)을 지나 소나무숲 속으로 10여 리를 가니 중간에 둘레가 3리쯤 되어 보이는 호수 하나가 있었다. 남쪽에는 묏부리가 못 속까지 들어와 있고 고색창연한 바위에 모래알들은 하얀데 게다가 푸른 소나무가 울창하고 못 안에는 순채잎이 가득하여 그야말로 ‘천리호 순채국에다 된장만 풀지 않은 격’이었는데, 이른바 선유담(仙遊潭)이라는 곳이었다. 서로 말을 달려 올라가서 한참을 감탄하며 보다가 내가 일행들에게 말하기를,
“우리들 행색이 너무 맑아 흥을 도와 줄 만한 물건 하나 없으니 이곳 경치가 좋기는 하지만 무작정 오래 있을 수는 없겠네.”
하고, 드디어 길을 떠났다. 길가에 기러기들이 떼지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마부 한 사람을 시켜 총을 쏴 보라고 했으나 맞추지 못해 서로 한바탕 웃었다. 30여 리를 와 한 곳에 다다르니 붉은 기둥으로 된 높은 누각이 바다를 향하여 있고 어촌(漁村)이 저자를 이루고 있었는데 구름과 물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말에서 내려 난간에 올라 보니 마음까지 시원하였고, 옛날에 이른바 청간정(淸澗亭)이라는 곳이었다. 청간이라는 명칭은 역(驛)의 이름을 따라 붙여졌던 것인데 지금은 창해정(滄海亭)이라고 이르고 있다. 일행 모두가 하는 말이,
“우리가 지금까지 구경을 다녀 보았지만 이렇게 경치 좋은 곳은 일찍이 보지를 못했다. 참으로 한평생 제일 좋은 구경이요 천하의 장관이라고 하겠다.”
하고, 드디어 그 곳에서 유숙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 곳 벽 위에는 여러 사람들의 시가 걸려 있었는데, 노소재(盧蘇齋)ㆍ차식(車軾)ㆍ최간이(崔簡易)의 시 두 수를 차운하였다.

부상에는 아침에 해가 뜨고 / 扶桑朝出日
밤이면 창해에 바람 이네 / 滄海夜生風
속세 일들 누워 생각하니 / 臥想塵間事
허공의 한 점 구름일레라 / 如雲點太空

또 차운하기를,

저 멀리서 돛단배는 둘씩둘씩 오고 있고 / 天外風帆來兩兩
구름가 물새들은 쌍쌍으로 날아가네 / 雲邊水鳥去雙雙
창망한 예 오른 뜻 다 풀 길이 없어 / 蒼茫不盡登臨意
한밤중 창해루의 들창을 밀친다네 / 滄海樓中夜拓窓

했는데, 이 시는 차군(車君)의 작품을 다소 새로운 의미로 화답해 보았을 뿐이다. 노소재의 본운(本韻)은 이러했다.

하늘은 동해에 뜬 달을 아끼는가 / 天靳東溟月
한 밤중 바람에 시름을 못 이기네 / 人愁夜半風
선사가 아직 닿을 시간이 못 되어 / 仙槎應未泊
휘파람 불며 푸른 하늘 생각한다네 / 孤嘯想靑空

소재 아버지가 간성 원이 되어 왔을 때 소재가 따라왔다가 이 정자에 올라 이 시를 누대 기둥에다 써 놓고 그 곁에다, 군자(郡子) 노수신(盧守愼)이라고 써 놓은 것을 후인들이 현판을 만들어 걸었다고 하는데, 소년 시절의 작품이지만 이미 소[牛]를 삼킬 만한 기개가 있었다. 그리고 최간이의 시는 이렇다.

이 마음이 저 바다와 더 크기를 겨루다가 / 此心與海堪爭大
하늘 땅이 승락 안 해 쌍벽 이루고 말았다네 / 未許乾坤只作雙
끝까지 장애물이 없을 수는 없겠기에 / 終始不能無物障
연하 한 점 없는 곳에 들창문을 달았다네 / 煙霞盡處着軒窓

간이가 일찍이 이 고을 원을 지냈기 때문에 이 시를 쓴 것인데, 시가 매우 힘이 있기는 하지만 어딘가 억지로 다듬은 흔적이 남아 있다. 그리고 차식의 시는,

성긴 비에 갈매기는 둘씩둘씩 날아가고 / 疏雨白鷗飛兩兩
석양의 고깃배들 쌍쌍으로 떠 있네 / 夕陽漁艇汎雙雙
동천에 해가 돋는 그 모습 보기 위해 / 擬看晹谷金烏出
화각의 동쪽 머리에 창을 달지 않았다네 / 畫閣東頭不設窓

라고 읊었는데, 붓 끝이 생동감이 있고 퍽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러나 속담으로 전해오고 있는, ‘양양백구비소우(兩兩白鷗飛疏雨)’라는 것이 바로 이 시의 선창이 아니겠는가.
차식(車軾)은 송도(松都) 사람으로 아들 둘을 두었는데 그들이 운로(雲輅)와 천로(天輅)이다. 늙은 소명윤(蘇明允)이라면 식(軾)과 철(轍) 두 아들을 두었던 것 역시 당연한 일일 것이다.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의 시는,

푸른 바다에 붉은 무리 해는 이미 한나절인데 / 碧海暈紅窺日半
이끼 푸르고 바위 흰 것 갈매기와 연파로세 / 蒼苔嵒白煙鷗雙
금은대 위에 앉아 휘파람 한 소리에 / 金銀臺上發孤嘯
드넓은 천지가 팔방으로 활짝 열리네 / 天地浩然開八窓

했는데, 이 시 역시 의사가 소통하고 보는 이를 깨우쳐 주는 점이 있어 그런 대로 좋았다. 그리고 또 벽 위에 걸려 있던 박 승지 길응(朴承旨吉應)의 시 두 수도 생각과 운치가 매우 좋았었는데, 미처 화답을 못했던 것이 한이고 지금은 기억할 수도 없다.
그날 만경대(萬景臺)에 올랐더니 소나무와 바위가 대를 형성하고 바다를 내리보고 있었고 그 좌우에는 1백 호(戶)나 되어 보이는 어민들이 살고 있었으며 배는 끊임없이 오가고 숱한 갈매기들이 날아들고 있었다. 한참을 구경하다가 저녁 식사를 마치고는 또 달빛어린 포구에 배를 띄우고 섬바위 위에 앉아 어부에게 뱃노래를 시켜놓고 듣고 있는데 그 가사가 모두 바람 걱정 물 걱정하는 내용들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고기잡는 장소를 물었더니 그가 말하기를,
“앞바다에 가면 물마루[水脊]가 있는데 어부가 만약 바람을 타고 그 곳을 벗어나면 거기서부터서는 무변대해여서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다. 혹시 배를 댈 만한 섬이 있더라도 거기에는 갈대가 하늘을 찌르고 물새들이 떼를 지어 새끼를 치고 있고, 사람을 보면 제 새끼 잡아갈까봐서 뭇놈이 모여들어 쪼아대는 바람에 사람이 살아 돌아올 수가 없다. 또 식량과 물이 동나서 죽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뱃사람들은 그 곳을 저승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고기잡이배가 아침에 나갔으면 반드시 저녁에 돌아와야지 만약 그날 돌아오지 않는 날이면 식구들이 죽은 것으로 생각하게 되며, 또 그렇게 죽어간 자들이 늘 있어 뱃사람으로서 정작 늙어 죽은 자는 오히려 적은 편입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그대들이 왜 그것을 생업으로 삼고 있는가?”
했더니, 그가 대답하기를,
“바닷가에 사는 백성들은 먹고 사는 길이 이것뿐인데다 관가(官家)로부터의 요구에 책임을 지고 응해야 하기 때문에 비록 죽음이 앞에 닥쳐올 것을 알고서도 별수없이 해야만 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였다.
이 날 어부가 새로 따온 전복과 대구(大口)를 우리에게 제공해 주었다. 전복은 회치고 대구는 삶고, 또 막걸리까지 사다가 흥풀이를 하였다. 달놀이를 마치고 정사(亭舍)로 돌아와 자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쓰고 두 군으로 하여금 화답하게 하였다.

아침 햇살에 먼지 한 점 없더니 / 旭日氛埃滅
갈바람에 큰 파도 일어 / 秋風大海波
태산에라도 오르는 기분으로 / 還將登岱興
달 아래 뗏목에 올랐었지 / 更上月邊槎

양양(襄陽) 주수가 관인(官人)을 시켜 우리 일행을 탐문하였다.

13일(을묘) 새벽에 일어나 일출 광경을 보았더니 구름이 가리고 있었으나 구름과 해가 서로 부딪치는 바람에 황금빛이 내리쏘이고 구름 속에서 번개가 번쩍이고 있는 것 같아 보기에 매우 좋았다. 길 중간에 언덕이 하나 보였는데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고 대의 크기는 모두 화살 감이었으며 바다 속의 섬들도 모두 푸르른 대숲으로 되어 있었다. 노포(蘆浦)에 와서는 호수가 터져 건널 수가 없어서 뱃사람으로 하여금 바다의 배를 끌어다가 건너게 했었다. 내가 보기에 동해에 있는 배들은 통나무를 파서 만든 것으로 위는 좁고 아래는 넓은 것이 마치 말구유 모양이고 몸통도 매우 적은데 그래야 배가 파도를 잘 탄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날은 큰 배 한 척을 보았는데 모양이 서해(西海)에서 부리는 배 같았고 모래 위에 정지해 있었다. 그 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물어 보았더니 그들 말이, 동해에는 그렇게 생긴 배가 없고 지난 큰 흉년 때 영남(嶺南) 백성들이 살 길이 없자, 그 배로 고기 잡고 해초라도 캐기 위해 파도를 무릅쓰고 동해로 들어왔던 것인데, 그들은 동해에서 고기잡이를 하여 생활을 꾸려가자는 속셈이었으며, 파도에도 역시 별 걱정이 없었다고 하였다. 내 그들 말을 듣고 생각해 보았을 때 동해의 작은 배들은 그것이 거민들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들 쓰기에 편리하게 만든 것이지만 저 큰 파도는 큰 배가 아니고서는 건널 수가 없는 것이다. 국가가 동해에는 파도가 거세지 않다 하여 관(官)의 힘으로 큰 배를 부리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동해에는 큰 배가 필요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지금 지난 흉년 때 들어왔다는 저 배를 놓고 보더라도 동해ㆍ서해를 배로 통행할 수 있음을 알지 않겠는가.
그날은 또 염막(鹽幕)을 지나다가 소금 굽는 법을 들어가서 보았는데 바닷물을 달여서 소금을 만드는 것이 우선 서해와 다르고 소금 맛도 너무 써서 음식을 만들면 달고 맛있는 서해 소금보다 훨씬 못하다는 것이다. 서해안의 소금 만드는 법을 동해안에서도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은 또 따뜻한 날씨에 동남풍이 불어 바닷물이 잔잔했는데 가끔 고래가 나와 노는 모습이 보였다. 큰 새처럼 생긴 몸집이 새까맣고 물을 뿜어대면 눈발 같았으며 소리는 소울음소리 같았다. 어부들의 말에 의하면 바닷고기로는 고래보다 더 큰 것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또 황수차(黃水差)라고 하는 고기가 있는데 서로 만나기만 하면 반드시 고래가 죽는다는 것이다. 그 황수차는 꼭 떼를 지어 다니다가 만약 고래를 만나게 되면 수컷 하나가 지휘자로 뒤에 딱 버티고 서서 그 무리들로 하여금 번갈아서 나가게 하여 꼭 죽여 놓고야 만다는 것이다. 만물이 다 종류별로 서로 제어를 하고 또 싸우는 기술까지 갖고 있다니 그 역시 자연의 섭리가 아니겠는가. 그로부터 20여 리를 더 가 건봉(乾鳳) 하류를 건너 낙산(洛山)을 바라보고 달리다가 산등성이로 올라 얼마를 더 가서 절 문간에 들어서니 중들이 견여를 메고 나와 맞이했다. 견여를 물리치고 걸어서 이화정(梨花亭)에 올라 앉아 있었다. 정자는 절 문간 밖에 있었는데, 그 절의 문정(門庭)이나 헌각(軒閣)이 웅장하여 바로 하나의 큰 아문(衙門)이었다. 절은 설악산을 등진 채 동해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지세가 편평하며 넓고 건물도 탁 틔어 넓었다. 당(堂)에 올라 보니, 금벽(金碧) 장식이나 용마루 등의 높이는 비록 장안사ㆍ유점사 등만 못해도 대문과 담의 꾸밈새나 전망이 좋기는 그 두 절이 따라오지 못할 정도였다.
양양 태수 이대옥(李大玉)이 온다는 시간에 대오지 못하고 한참을 기다린 뒤에 왔기 때문에 우리들이 옛날 산당(山堂)에서 있었던 일처럼 중들로 하여금 북을 울리게 하여 그가 시간에 대어 오지 못한 것을 장난삼아 책하고는 서로 인사를 나누고 앉아 있는데 대옥이 술과 안주를 차려가지고 와 함께 마시며 즐겼다. 얘기 도중 극가가 말하기를,
“고성 태수(高城太守)는 이 좋은 풍경 속에 앉아 있으면서, 천리 멀리 구경 나온 서울의 사우(士友)들을 만났는데도 서로 위로하는 술 한잔도 없으니 그 어디 풍류 있는 태수라고 하겠습니까. 사람은 존경할 만한 사람이지만 그 일은 배울 일이 아닙니다.”
하자, 외삼촌이 말씀하기를,
“고성 태수는 천성이 원래 깔끔해서 애당초 그 생각을 않은 것뿐이지 정의가 박해서 그런 것은 아니라네.”
하였다. 내가 뒤이어 말하기를,
자신이 깔끔하기 때문에 남을 대우하는 것도 냉냉하게 하는 것이 물론 잘못된 일은 아닙니다. 더구나 주식(酒食)에 빠져 그칠 줄 모르는 자에 비한다면 훨씬 더 고상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술을 마실 줄 아는 사람이라야 술 속의 취미도 알아서 사람을 운치 있게 대우하는 것이지, 마시지 못하는 사람이야 마치 기와조각을 물고 있는 것처럼 그의 마음이 언제나 편안하고 차분할 때가 없는 것인데 남이 무슨 취미를 가지고 있는지 어떻게 알 것이며, 또 그런 자와 어떻게 호산(湖山)의 승경을 논할 만하겠습니까.”
했는데, 그때 좌중에 술을 마시는 이가 없었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서로 한바탕 웃고 나서 다시 한잔씩 들고는 밤이 깊어 파하고 함께 선당(禪堂)에서 잤다.
내가 시 한 수를 읊어 대옥에게 주니 대옥도 화답하였다.

삼천 길 설악산에 뭉게뭉게 구름인데 / 雲垂雪嶽三千丈
구만 길 동해에선 둥그렇게 달이 솟네 / 月湧東溟九萬尋
이화정 위의 오늘 가진 이 모임에 / 今日梨花亭上會
한 가락 아양곡은 고인의 마음이어라 / 峩洋一曲故人心

이상은 내 시인데, 그날 따라 하늘이 비가 내릴 듯 설악산 절반을 구름이 가리고 있었고 달이 중천에 오르자 비로소 빛이 있었다. 또 좌중에는 현금(玄琴)을 가지고 있는 자가 있었기 때문에 시에서 이를 언급한 것이다. 대옥의 화답시는,

신선을 보자하고 높은 누대 올랐건만 / 獨上高臺望仙子
아득하다 봉래섬 어디메서 찾는단말가 / 蓬島微茫何處尋
거문고에 실어보는 아양곡 한 가락에 / 惟有峩洋琴一曲
두 사람 마주 앉아 우정을 다짐하네 / 兩人相對百年心

했고, 또 읊기를,

동쪽 바다 저멀리 이화정이 있거니 / 梨花亭逈海東傍
술을 들고 오르자 유흥이 절로 난다 / 杯酒登臨引興長
누가 그리 말했던가 낙양의 탐승객이 / 誰道洛陽探勝客
한때는 수운향을 너무 좋아했노라고 / 一時靑眼水雲鄕

하고서 나에게 화답을 구했으나 나는 술에 취해 자느라고 화답하지 못하였고 유군만이 화답하였다.
그날 밤 내 잠자리에는 기생들이 곁에 있었다. 내가 좌중의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꽃과 버들은 봄빛과는 잘 어울리는 것이어서 풍류로는 그만이지만 그러나 초 나라 군대가 한왕(漢王)을 겹겹으로 에워싸는 날이면 빠져 나올 길이 없을 것 같은데 이 일을 어쩌지?”
했더니, 대옥이 웃으면서 하는 말이,
“이기고 지고는 내 하기에 달린 것인데 가까이하면 어떤가.”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한 나라 군대가 사면에서 모두 초가를 부르다가 그들이 요란스럽게 장막 아래까지 다가오면 그때는 포위망을 뚫고 남쪽으로 가려 해도 안 될 것이니 내 아예 자리를 걷어가지고 피하고 싶네.”
했더니, 모두들 웃으면서, 싸움을 해 보지도 않고 미리 도망치는 것은 속이 부족한 탓이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것은 제군들이 안 보았을 뿐이지 병법(兵法)에 있는 말일세. 싸움을 잘하는 사람은 아예 패배하지 않을 위치를 택하는 법이야.”
하고, 드디어 그 자리를 떴더니 유군 하는 말이,
“그대야말로 성문을 굳게 닫고 철저히 지키는 자로구먼.”
하였다. 외삼촌이 하신 말씀이,
“내가 자리를 바꿔 그 자리에 있어야 하겠다.”
하시기에, 내가 말하기를,
“외삼촌께서는 노장이어서 모든 일에 익숙하시기 때문에 패배가 없을 것입니다.”
하고서 서로 농을 하며 한바탕 웃었다. 이어 외삼촌이 말씀하기를,
“옛날 개서막(開西幕)에 부임해 있을 때 명 나라 사신 뇌유령(雷有寧)이 바다를 통해 나오기로 되어 있었는데, 기일이 오래 지나도 오지 않아 원접사(遠接使) 이하 여러 명승들이 모두 모여 20여 일간이나 머무르고 있었지. 그때 원접사는 김신국(金藎國)이었고, 구봉서(具鳳瑞)ㆍ정태화(鄭太和)가 종사관(從事官)이었는데 감사(監司) 장신(張紳), 병사(兵使) 유림(柳琳)이 좌음(佐飮)을 위해 남북의 기생들을 모아 놓았기 때문에 한 사람당 각기 20여 명의 예쁜 여인들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너도나도 못하는 짓이 없이 별짓을 다했는데, 그 중에는 처음에는 돌아본 체도 아니하고 가까이 오지도 못하게 했다가도 결국에는 별수없이 한통속이 된 사람도 있다. 그때 조경(趙絅)이 문례관(問禮官)으로 함께 있었는데 그가 평소 청고(淸苦)하다는 이름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여러 공들이 그의 지조를 시험해 보려고 그 중에서 예쁜 여인을 골라 조공을 꼭 품안에다 넣도록 당부를 했는데, 조공은 처음부터 난색 하나 보이지 않고 그와 함께 기거하며 날마다 앞에다 두고 부리는 등 모든 행동을 함께 하면서도 끝까지 지킬 것을 지켰기에, 우리는 거기에서 그 늙은이의 지조를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했다. 그 말 끝에 일행 모두가 말하기를,
“그 늙은이를 혹 경멸하고 헐뜯는 자도 있지만 어쨌든 보통 사람에 비해 훨씬 단계가 높은 분이지요.”
하였다.

14일(병진) 새벽에 빈일료(賓日寮)에 나가 일출광경을 보려고 했는데 그날따라 하늘에 비가 올 징후가 있어 붉은 노을이 남북을 통해 하늘에 질펀하였고 만경창파 같은 구름물결이 끝도 없이 하늘을 띄워 보내고 해를 목욕시킬 듯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이 하늘 밖에 나가 놀게 만들었다. 조금 후 하늘은 금방 변하여 새벽빛이 다시 짙고 하늘끝도 희미했다. 태양은 비록 뜬구름에 가려 있었지만 구름이 변화하는 태도라든지 별스럽게 자꾸 바뀌는 모양은 보기에 이채로웠다. 그날은 기일(忌日)이었기에 혼자 빈일료에 앉아서 재계하였다. 늙은 중 비경(秘瓊)이라는 자를 불러 함께 얘기하다가 최간이(崔簡易)가 읊었다는 운(韻)자를 들었는데 운자만 있고 시는 없었다. 그 운자에 차운하여 써 주고, 또 벽상에 걸려 있는 홍녹문(洪鹿門)ㆍ정동명(鄭東溟) 운에도 차운하였다.

동해의 동쪽에는 낙산사가 있거니 / 洛寺寺臨東海東
부상에서 해가 뜨면 온 하늘이 붉어지네 / 扶桑出日滿天紅
절간의 이른 새벽 향 피우고 앉았으니 / 上方淸曉燒香坐
상서로운 구름 속에 떠 있는 듯하여라 / 身在祥雲紫氣中

위의 시는 간이의 운에 차운한 것이고,

설악산 동해 바다 그 사이 낙가정에서 / 雪嶽東溟洛伽亭
붉은 해가 푸른 하늘로 오르는걸 내 보았네 / 直窺紅日上靑冥
해산이 다한 곳에 이름난 고장 있어 / 海山窮處名區在
육경에 뛰어난 호걸스런 사람 같애 / 却似人豪出六經

위의 시는 동명의 운에 차운한 것인데, 다른 사람들도 함께 차운하였다.

우주 개벽 어느 때에 됐다던가 / 宇宙幾時闢
이 절은 신라 시대에 지었다네 / 禪宮羅代開
새는 구름 저 멀리로 사라지고 / 鳥向雲邊滅
돛단배 저 하늘 밖에서 오네 / 颿從天外來
바람 일자 파도는 태양을 흔들고 / 風生波盪日
가을 짙어 객은 누대에 오르네 / 秋晩客登臺
바닷가 삼천 리를 다 돌아보고나니 / 遵海三千里
이 정자가 참으로 장쾌하여라 / 玆亭實快哉

또 한 수는,

위치는 산수 좋은 곳 차지했고 / 地占山河勝
들창은 바다 쪽으로 향해 있네 / 窓臨溟海開
하늘 밖에서 흰구름 일고 / 白雲天外起
붉은 해가 밤중만 온다네 / 紅日夜中來
바람은 금선굴 흔들어대고 / 風撼金仙窟
파도는 의상대를 절구질하네 / 波舂義相臺
구이에 가 살고픈 뜻이야 있었다만 / 居夷夙有意
날 따를 자가 누구란 말가 / 從我其誰哉

했는데, 여러 사람이 다 함께 차운하였다. 정동명의 원운(元韻)은, ‘임지로 가는 유열경(柳悅卿)을 보내며’인데,

일만 그루 배나무꽃 바닷가 정자 / 萬樹梨花海上亭
낙산이 바닷가라 바다가 끝이 없네 / 洛山邊海海冥冥
문정에 송사 없고 종일토록 한가하리니 / 訟庭竟日閒無事
부상의 대제경이나 챙겨서 읽게그려 / 須讀扶桑大帝經

하였고, 홍녹문의 원운은, ‘낙산사에서 노두(老杜)의 운으로’인데,

이곳이 용왕의 집자린데 / 地卽龍王宅
어느 해에 절이 섰다던가 / 何年梵宇開
하늘은 푸른 바다에 떠 가고 / 天浮靑海去
산은 백두산에서 왔다네 / 山自白頭來
가을 풍경을 실컷 보기도 하고 / 縱目觀秋色
석대에 올라 쉬기도 했네 / 扶笻倚石臺
여기에 올라 세월의 무상함을 어루만지노라니 / 登臨撫今古
생각키는 이런 일 저런 일 끝이 없어라 / 俯仰恩悠哉

했으며, 손홍우 희(孫洪宇煕)는 차운하기를,

창파가 아득하여 끝이 없구나 / 滄波杳無際
천지는 언제쯤 개벽되었다지 / 天地幾時開
옛절엔 가을빛이 다해가는데 / 古寺秋光盡
모래밭으로 물새들이 오는고야 / 明沙海鳥來
시 읊조리며 옛일 더듬어도 보고 / 吟詩憶舊迹
먼 곳 바라보며 누대에 앉기도 하지 / 騁眺坐寒臺
황학이 한번 날아가더니 / 黃鶴一飛去
흰구름마저 왜 그리도 먼지 / 白雲何遠哉

하였다. 그리고 그날 비경이 최간이의 시 두 수를 가지고 왔었는데 그 하나는,

누대하면 해 뜨는 바다 장관이라 들었더니 / 樓觀海日昔聞奇
달로 치면 중추가절 햇수로는 일년이라 / 月得中秋一歲期
이 날이요 이때에 장마비를 만났으니 / 此日此時逢久雨
하늘이 날 영동에서 시 쓰라고 잡아 두었네 / 天公停我嶺東詩

라고 읊었으니, 이 시는 낙산(洛山)을 읊은 것이고, 또 십칠조(十七朝)라는 시는 이렇다.

높고 높은 저 하늘 달이 진 후 동쪽에서 / 玉宇迢迢落月東
갑자기 만경창파가 붉게 붉게 끓더니만 / 滄波萬頃忽翻紅
굼틀굼틀 괴물들은 모두 다 어디가고 / 蜿蜿百怪皆如畫
곱디고운 안개 속에 황금바퀴가 튀어 나오네 / 擎出金輪彩霧中

이상의 시들은 최공(崔公)이 간성 유수로 있을 때 판각해서 달아 두었던 것으로 언젠가 화재로 그 현판은 다 불타 없어지고 말았는데, 어느 선비 집에 남아 있던 이 시를 비경이 나에게 보여 주기 위해 베껴 온 것이다. 그리고 또 정수몽(鄭守夢)이 유수로 있으면서 비경에게 준 사운시(四韻詩)도 읊기에 그럴 만하여 역시 베끼게 하였다. 그리고 내가 좌중에다 말하기를,
“선배들은 별것 아닌 이 시 한 수까지도 그렇게 관심들을 가졌었는데 어찌해서 지금 후배들은 그에 대한 반응이 그렇게도 없는지 모르겠어.”
하였다. 정수몽의 시는 기억이 나지 않아서 적을 수가 없으니, 일행들에게 다시 물어 보아야겠다. 그 중의 시축에는 요즘 여러 사람들 시도 있었지만 그것들은 다 그렇고 그런 내용들이었다.

15일(정사) 흐림. 가랑비가 싸늘하게 뿌리다가 멎었다. 기신(忌辰)이라 좌재(坐齋)하면서 《주역》을 읽었고 부리(府吏)를 시켜 일록(日錄)을 베끼게 하였다. 또 어제 유군을 통해 눌승(訥僧)에게서 얻은 향언지로가(鄕言指路歌)는 퇴계(退溪)가 지은 것이라고 하는데, 아무튼 그 내용을 볼 때 학문에 조예가 없이는 지을 수 없는 내용이기에 역시 후일 아이들의 영가(詠歌) 자료로 삼기 위해 베껴 두게 하였다.
영덕 현령(盈德縣令) 심철(沈轍)이 지나다가 절에 들러 여러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었는데 그는 고 판서(判書) 집(諿)의 손자이고, 사간(司諫) 동구(東龜)의 아들이라고 했다. 그날 또 두 군을 통해 김 장군 응하(金將軍應河)의 애사(哀詞) 두 편을 들었는데, 둘 다 읊을 만했다. 그러나 지금은 기억할 수가 없어서 추후 기록하기로 하겠다. 말이 난 김에 명(明) 나라 희종(熹宗)이 김응하를 포증(褒贈)한 일에 관해 말을 해야겠기에 내가 두 군들에게, 당시 명 나라에서 포증할 때 천자로부터 조서(詔書)가 있었는데 그 조서를 보았느냐고 물었더니 그들은 보았다고 하면서, 그것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명문이 아니냐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건 그렇지 않다. 나도 그 조서를 읽어 보았지만 누가 초안한 것인지 알 수도 없거니와 천자가 자칭 과인(寡人)이라고 하면서 심지어 김군(金君)을 수양(睢陽)의 장순(張巡), 승상(丞相) 문천상(文天祥)에게 비유하여 말하기를, ‘장순(張巡)ㆍ허원(許遠)이 죽지 않았더라면 당(唐) 나라 왕실에 신하가 없는 폭이고, 문천상이 죽지 않았더라면 송(宋) 나라 왕실에 신하가 없는 폭이며, 장군이 죽지 않았던들 과인의 나라에 신하 없는 폭이 되었을 것이다.’ 했는데, 그 말뜻이 전도되고 사체(事體)를 모르는 정도가 심하였다. 또 문장의 표현 방법까지 서툴고 껄끄러워 마치 고문(古文)을 흉내내 보고자 하였으나 문장을 이루지 못한 것 같아 남의 웃음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천자 나라에서 외국 신하를 포증하려면 조서를 만들 때도 반드시 한 시대를 대표할 만한 사람으로 하여금 쓰게 해야 할 것인데, 지어 놓은 글이 그 모양인 것을 보면 나라가 망해 가고 있었다는 것을 알 만하지 않은가.”
하였다.
내 언젠가 또 숭정(崇禎) 연간에 황 감군(黃監軍)이 나왔을 때 그가 읊었다는 시를 보았는데, 내용이 말도 못하게 거칠고 추하고 졸렬한데도 그 자신은 그것마저도 모르는지라 장계곡(張谿谷)이 그의 작품을 써 놓고 비웃었다는 것이다. 듣기에 그 황은 진사(進士) 출신으로 조정에 오른 이후 우리나라를 왕래할 정도였으니 역시 한때 쟁쟁한 인물이었을 것인데도 그 모양이니 인재가 쇠할 대로 쇠해 세상이 오래 못 가리라는 징조인 것이다. 문장(文章)이라는 것이 비록 별것은 아니로대 한 시대의 성쇠가 거기에도 그렇게 반영되는 것이다. 아, 후세 사람들이 지금을 보면 지금 사람들이 옛날을 보는 것보다 오히려 더 못할런지 어떻게 알겠는가.

16일(무오) 새벽에 일어나 들창을 밀치고 일출 광경을 보았다. 그날 따라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고 바다도 활짝 개어 동쪽이 밝기도 전에 서광(瑞光)이 만 길이나 치솟고 있었고 뭇별들은 이미 드문드문해져 함께 빛을 겨룰 만한 것이 없었다. 처음에는 하늘가에 갑자기 구름 같은 것이 띄엄띄엄 생기면서 가릴 듯이 하더니 막상 붉은 기운이 점점 무르익자 그것들은 녹은 듯이 없어지고 다만 금물결이 만 리나 뻗어 하늘과 물이 서로 밀고 당기는 것과 같은 것만 보였다. 그것은 화륜(火輪)을 달구느라고 홍로(洪爐)가 너무 뜨거워 바다 전체가 끓고 있는 것과 같기도 했고, 또 어찌보면 태양 궤도가 잠겼다 떴다 하면서 뛰어도 뛰어도 오르기 어려워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잠시 후 태양이 불끈 솟자 위아래에서는 서로 받들고 좌우에는 상서로운 구름 자색 서기가 무수히 깔려 있어 마치 그것들을 타고 올라온 것 같기도 했다. 이에 해는 둥실둥실 떠오르고 그 빛은 아래로 내리쪼여 바다는 바다대로 깊고 넓게만 보이고 하늘은 하늘대로 높고 크게만 보였으며, 상하 사방이 똑같이 밝아지고 삼라만상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실로 천지간의 일대 장관이었다. 날마다 기다렸지만 그때마다 뜬구름이 가리더니 오늘에야 비로소 장쾌하게 볼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밝음 속에도 어딘가 일말의 그 무엇이 살짝 가리운 빛을 띠고 있는 듯이 보이기도 했는데, 그것은 아마 겸손해야 하고 밝음을 숨겨야 하는 천지 조화를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뜻이 아닐런지 나로서는 감히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이어 생각하면 모든 물건의 이치가 각기 종류별로 움직이고 형상에 의해 동화되고 있는데 그것을 달리 비유하면 마치 군자가 나오려고 하면 반드시 소인이 나타나 이간질을 하기 때문에 그래서 좋은 세상은 항상 드물고 어지러운 세상이 언제나 많은 것과도 같다고 하겠다. 그러나 군자가 참으로 당당한 위치를 확보하고 그리하여 세상이 치평을 향해 치닫게 되면 저 소인이라는 것들은 풀이 죽어 자취를 감추거나 아니면 과거를 청산하고 이 쪽으로 심복해 오기에도 겨를이 없을 것이다. 우리 쪽에 병통이 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우리의 말을 따르고 받들면서 우리 쪽의 쓰임이 될 것이다. 문제는 군자 자신이 자기를 소명하고 순수하고 밝은 덕을 길러 음(陰)을 저 땅 밑에서부터 철저히 배제하고 자기 스스로 높고 밝은 위치로 부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문제는 또 세상을 맡아 다스리는 자의 책임이기도 한 것이다. 양웅(揚雄)의 《태현경(太玄經)》에 이르기를,
“태양은 날고 음은 매달려 있으면 만물이 화락하리라.”
했는데, 그를 해설한 자의 말에 의하면, 태양은 군자를 말하고, 매달려 있다는 것은 녹아 없어짐을 뜻하며, 음은 소인을 말한 것이라고 하였다. 군자의 기가 성하면 뭇 음은 저절로 없어진다는 뜻으로 바로 오늘에 필요한 점괘인 것이다.
이 날도 기신이어서 재계하면서 앉아 있었다. 밤에 비는 개고 달은 기망(旣望)이어서 바다에 뜨는 달을 또 구경하려고 했었는데, 생각지 않게 17일이 진짜 보름이어서 그런지 해가 서산에 채 지기도 전에 달이 이미 동천에 솟아 있었고, 막 눈을 들고 보려고 했을 때는 이미 달이 벌써 구름 끝에 나와 있었다. 저녁이 되어 중 몇 사람과 함께 걸어서 이화정(梨花亭)에 나갔더니 중천에 솟은 달이 바야흐로 빛을 발휘하기 시작하여 그 빛은 바다 밑까지 비치고 있었으며 만경창파는 은물결로 변하여 위아래가 모두 마치 벽유리(碧琉璃)와도 같았다. 이윽고 바람이 해면을 스치자 파도가 넘실대고 달은 그 속을 출몰하니, 마치 삼켰다 뱉았다 당겼다 놓았다 하는 것 같았고, 또 잠시 후 하늘을 보았더니 높고높은 푸른 하늘에는 외로운 달만이 천천히 옮겨 가고 있었다. 고인이 이른바, ‘사방에 구름 걷히고 은하마저 없는 하늘[纖雲四卷天無河] 일년 중에 오늘 밤 달이 제일 밝네그려[一年明月今宵多]’ 했던 것이 바로 오늘을 두고 한 말인 듯했다. 눈부시게 빛나는 아름다운 광채는 비록 일출을 볼 때만큼 장엄하지는 못했으나, 그러나 그 맑고 밝고 깨끗한 자태로 태양을 대신해서 비치고 있다는 점에서는 역시 천하의 훌륭한 구경거리였다. 천지 음양의 이치가 서로 양보라도 하듯이 하나가 차면 하나는 비는 것으로, 옛분들이 말했던, ‘백옥반(白玉盤)ㆍ요대경(瑤臺鏡)’ 같은 말로는 지금 이 광경을 비교 표현하기에 부족한 바가 있는 것이다. 중 비경 등이, 오늘 밤 달빛은 일년 중 보기 드문 달빛이라고 한 말에 대해 나도 동감을 하였다. 이미 일출 광경을 보았고 지금 또 중추(中秋)의 밝은 달까지 보았으니 이만하면 이번 걸음은 헛걸음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삼촌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나서 두 군들을 불러내어 같이 구경하다가 바람이 나무를 흔들어대고 밤 기운이 너무 시원해서 요사(寮舍)로 들어가 《주역》 계사(繫辭)를 종편까지 읽었다. 향을 가져와 피우게 했더니 중이 침향(沈香)이라고 하는 것을 가져왔기에, 내가 웃으면서 이르기를,
“그대들은 이름만 취택하고 실물은 취택하지 않는게로군. 중국에서 말하는 침향이라는 것은 바로 나무 이름인데 남국(南國)에서 나는 나무야. 지금 그대들이 물 속의 썩은 나무를 가져다가 부처 앞에다 피우면서 그것을 아주 향기로운 것으로 알고 있으니 사람들이 그렇게 이름에 현혹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하고, 다시 흑단(黑檀)을 가져와 피우게 하였다. 흑단은 시속 말로는 노가자(盧柯子)라고 하는 것으로 그 향기가 매우 맑았다. 또 중향성(衆香城)에서 얻어 왔다는 도로파(都盧芭)도 피워 보았는데 그것은 향기가 천궁 비슷하면서 역시 정신을 상쾌하게 해 주었다.
내 이어 생각해 보니, 광풍제월(光風霽月)은 주무숙(周茂叔)의 가슴 속을 상징하는 말이고, 서일상운(瑞日祥雲)은 정백순(程伯淳)의 가슴 속을 상징하는 말이며, 태산교악(泰山喬岳)과 해활천고(海闊天高)는 또 주회옹(朱晦翁)의 기상을 그린 것인데, 내 사실 이번 걸음에 그러한 것들을 다 직접 보고 정신적으로 느껴 보았고, 일만 겹의 봉래산과 동해의 구름 물결 그리고 해돋이 때의 눈부신 광채와 휘영청 밝은 가을 달도 내 모두 살펴보고 희롱해 보았다. 게다가 또 하늘까지도 우리에게 기회를 제공하여 비, 바람, 구름, 먼지 등으로 훼방을 놓지 않으셨던 것이다. 그리고 가령 안문(鴈門)의 가을비, 죽포(竹浦)의 거센 파도, 낙산(洛山)의 찬이슬 같은 것은 풍백(風伯)ㆍ우사(雨師)가 앞장서서 우리를 위해 마련해 준 작품들로서 누군가가 우리를 음으로 양으로 도와 주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가 이번의 이 기회를 단순히 구경만 했다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무엇인가 마음속으로 생각하여 터득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요산요수 그리고 호연지기라는 것과도 상통할 수 있을 것이고 또 천 년 전의 고인들을 만나 본 것과도 같을 것이다.
해돋이 구경에 관해서는 나중에 시를 지어 그 일을 적어 둔다.

바다를 바라보며 해 뜨는 곳 살핀 뜻은 / 看看海色候扶桑
떠가는 저 구름이 하늘을 더럽힐까였는데 / 常恐浮雲穢太淸
눈부신 해가 갑자기 나타나서 / 忽覩爀曦懸陰處
천 길이나 뻗는 광선 천지사방 다 비추네 / 千丈毫光六合明

그리고 낙산중추월(洛山中秋月)을 두고는 노소재(盧蘇齋)의 ‘청간정(淸澗亭)’ 운자로 읊었는데,

바다의 달빛 가을 들어 더 밝고 / 海月當秋白
거센 파도는 밤바람에 일어라 / 鵬濤入夜風
절 방에 외로이 누워 있노라니 / 禪窓孤臥處
뭇 생각이 싹 가시네그려 / 萬慮落眞空

하고, 또 읊기를,

티없는 것 중추의 달빛이요 / 霽色中秋月
파도소리 큰 바다 바람이어라 / 波聲大海風
그 소리 그 빛깔 말고도 / 須知聲色外
텅빈 하늘이 또 있다네 / 更有寂寥空

하였다.
아침에는 심군 철(沈君轍)이 왔다가 갔고, 저녁에는 간성 군수 윤세장(尹世章)이 동해신(東海神) 제사의 예차관(預差官)으로 와서 이 절을 지나다가 여러 사람들과 서로 만나고 또 나를 와서 보았는데, 윤(尹)은 바로 윤 상공 해원(尹相公海原)의 증손이요 윤 판서 이지(履之)의 손자라고 했다. 대옥 역시 동해신 제사 일로 저녁에 떠나면서 내일 다시 오겠다고 했는데, 감사(監司)와 도사(都事)가 부(府)에 온다는 말을 듣고 하직을 고하고 떠난 것이다.
낮에 그 곳의 중 몇 사람과 함께 의상대(義相臺)에 올라 관음굴(觀音窟)을 바라보았더니 작은 집 하나가 파도에 의해 무너져 있었다. 대(臺) 위에 앉아 잠시 물결을 구경하고 돌아왔다. 정(鄭)군과 유(柳)군이 내게로 와 함께 잤다. 그날 사눌(思訥)이라는 중이 영남 태백산에서 와 그 절을 위해 예불(禮佛)을 하고 있었다. 그 중은 방에서 혼자 거처하며 밤 5경이면 일어나서 불전에 향을 올리는데, 낮에도 자지 않고 밥도 하루 한 끼만을 먹으면서 언제나 시간 맞추어 염불을 했다. 내가 데리고 얘기해 보니 그는 선정(禪定)의 설을 듣고 거기에 종사하고 있는 자였다. 내가 묻기를,
“노선(老禪)께서 마음 공부를 하신 지가 오래인 모양인데 지금 부동심(不動心)의 경지에까지 갔습니까?”
하자, 그는 그렇다고 하면서 아무리 어지럽고 화사한 성색(聲色)을 듣고 보아도 그것을 안 보았을 때와 똑같이 마음에 아무런 느낌이 없다고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성색에 대한 생각은 그래도 제어하기가 쉽지만 마음에는 유주상(流注想)이라는 것이 있어 바로 온갖 잡념이 때없이 왕래하는데, 노선께서는 마음 공부를 하여 그러한 것들도 다 제거가 되었습니까?”
하니 그는,
“공부 초기에는 가장 제어하기 어려운 것이 그것이었는데 지금은 온전히 없어졌지요.”
하였다. 공부를 몇 년이나 했느냐고 물었더니, 이미 수십 년이 지났다고 하였고, 마음에 잡념 하나 일어나지 않고 혼자 훤한 것을 느낄 때가 있느냐고 했더니, 그가 이르기를,
“그게 바로 이른바 비치지 않고 있는 거울 같고 파도가 일지 않고 있는 물 같다는 것 아닙니까.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마음이란 불과 같다고 하는데 불은 다른 물건에 의지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혹은 풀에 붙거나 혹은 나무에 붙거나 또 혹은 다른 물건에 붙어야지 만약 그 물건들이 없다면 그 불도 없는 것입니다. 마음도 그와 같아서 비록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감정 발동은 없을지라도 잠깐 사이에 얼핏 스치는 생각이 없지는 않은 것인데 그 역시 마음이 동한 것입니다. 노선이 말씀하신 이른바, 거울이 비치지 않고 물이 파도치지 않고 있는 것이라고 한 것을 무엇으로 증험할 수 있습니까?”
했더니, 그가 이르기를,
“그것은 너무 극단적인 논리라서 이 노승(老僧)으로서도 잘 알아차릴 수가 없네요.”
하였다. 그리하여 내가 말하기를,
“돌아가서 다시 생각해 보시오. 전인들 화두(話頭)에 얽매이지도 말고 문자(文字)를 가지고 참조 고증할 것도 없고 다만 내 마음에 얻어진 것을 내 입으로 말할 수 있을 때 그때 다시 와서 내게 말하시오.”
했더니, 그 중이 그러겠다고 하고 떠나갔는데, 밤이 되어 간찰 하나를 부쳐왔다. 거기에 이르기를,
“마음의 허령(虛靈)이라는 것은 아무런 생각도 염려도 없고 형체도 소리도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무엇인가를 지각하는 마음은 있는 것이외다.”
하고, 또 시가 있었는데,

휘영청 밝은 달은 언제나 그 빛이요 / 明明白月千秋色
옹기종기 푸른 산은 만고의 모습이어라 / 點點靑山萬古容
그나 내나 유별나게 다른 것이 뭐 있으리 / 伊我別無奇特事
불전에 분향하며 종이나 치는게지 / 焚香佛前打鳴鍾

했으며, 또 말하기를,
“마음에 모든 생각이 완전히 사라질 때가 물론 있기는 있으나 다만 그것은 순간이고 지속하기란 매우 어렵다.”
했기에, 내가 이르기를,
“그대 본 것이 매우 정밀하고 말도 다 좋은 말이오. 나도 시로 답하고 싶은 생각이 있으나 지금 기좌(忌坐)중이어서 내일로 미루어야겠소.”
했는데, 그 중은 그길로 물러갔다.

17일(기미) 맑음. 나도 재계가 끝났고 대옥도 제소(祭所)에서 돌아왔다. 나더러 동해신묘비문(東海神廟碑文)을 지으라고 하고 서로 손을 잡고 작별을 고했는데, 그날 모두 한번 실컷 즐기고 싶었으나 마침 관사(官事)가 바빠 부득이 서둘러 돌아가야 했기에 간성 군수 윤군이 행리 속에서 꺼내 온 술과 안주로 몇 순배 돌리고 각기 파했다. 중 사눌이 나를 보러 왔기에 내가 시로 답하였다.

휘황한 해와 달은 언제 봐도 그 빛이요 / 輝煌日月千秋色
높고 넓은 산과 바다 만국이 일반이지 / 嵬蕩山河萬國容
만약에 모든 것이 고요해야 된다면야 / 若道寂然爲究意
불전에서 종인들 어찌하여 치단말가 / 佛前那用打鳴鍾

중 사눌은 하직을 고하고 떠났고, 정극가는 강릉(江陵)을 다녀오기 위해 뒤에 머물렀다. 우리 일행이 서로 헤어지려 할 때 중들이 나와 전송하였는데, 모두 작별하기 아쉬워하는 빛을 보였다. 동구 밖을 나와 설악산을 바라보며 15리 남짓 가서 신흥사(神興寺)에 들렀더니 중들이 견여를 가지고 동구 밖까지 환영을 나왔다. 그 절은 설악산 북쪽 기슭에 있는 절로 동쪽을 향해 앉아 있었는데 전각(殿閣)이나 헌루(軒樓)가 역시 규모가 큰 사찰 중의 하나였고, 여기에서 바라다보이는 설악산과 천후산(天吼山)의 깎아지른 봉우리와 가파른 산세는 마치 풍악(楓岳)과 기걸함을 겨루기라도 하는 듯했다.
여기에 있는 육행(六行)과 쌍언(雙彦)이라는 중은 다 얘기 상대가 될 만하여 서울에서 서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는 외삼촌을 모시고 유군과 함께 견여로 5, 6리쯤 가 앞 시내의 수석(水石)을 구경하고 돌아왔다. 그날 대옥이 심부름꾼 한 사람에게 술과 안주를 보내왔기에 편지로 감사의 뜻을 전하고, 또 극가에게 부탁하여 금강산에서 얻었던 소마장(疏麻杖) 하나를 허미수(許眉叟)에게 가져다 드리도록 했는데 그 지팡이는 바로 금강산중이 말하는 산마(山麻)라는 것으로 색은 청록색이고 재질은 옹골지며 매끈하고 가벼워 지팡이 감으로 좋았다. 그런데 그것을 산마라고 하지만 초사(楚辭)에 이른바, ‘소마(疏麻)를 꺾음이여, 백옥같은 꽃이로다’라고 한 그것이 아닌가 싶어 드디어 소마로 명명한 것이다. 그리고 극가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부쳤다.

땡땡한 녹색 옥장을 / 鍧鍧綠玉杖
저 금강대에서 다듬었지 / 斲彼金剛臺
그대 통해 노인께 드렸지만 / 憑君奉老子
돌아올 때 풍뢰 조심하게나 / 歸路愼風雷

유군도 대옥에게 편지를 써 보냈는데 극가가 시와 함께 이름을 그 밑에다 적었으나 그 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 날 밤 최간이(崔簡易)의 낙산시 운자로 절구 한 수를 읊어 유군에게 주었다.

동쪽 태산 남쪽 형산 천하의 명산이라 / 東岱南衡海內奇
공자도 주자도 그 마음 같았으리 / 仲尼元晦共心期
그 뉘라서 알았으랴 천 년 후에 이 땅에서 / 誰知千載東溟外
그 풍경 구경하고 짧은 시를 읊을 줄을 / 無限雲波屬短詩

이렇게 쓰고서 내 말이,
“이 시는 표현을 더 다듬어야 할 곳이 있는 것 같아 손질을 좀 해 달라는 것이네.”
하였다.

18일(경신) 맑음. 아침에 출발하여 뒷 고개를 넘어 외삼촌을 따라가다가 유군과 뒤떨어져 계조굴(繼祖窟)에 들어갔다. 바위에 나무를 걸쳐 처마를 만들어서 지은 절인데 지키는 중은 없었다. 앞에는 깎아지른 바위 하나가 서 있는데 그 이름이 용바위[龍巖]이고 아래는 활모양으로 된 바위 하나가 반석을 이고 있었다. 그 크기가 집채만 했는데 중 하나가 흔들어도 흔들흔들하여 이른바 흔들바위[動石]라는 것이다. 천후산 중간에 위치하여 남으로는 설악산과 마주하고 동으로는 큰 바다에 임해 있어 역시 한번 구경할 만한 곳이었다. 그러나 이 날은 바다가 침침해서 멀리 볼 수는 없었다.
그 절 벽상에 기(記)가 하나 걸려 있었는데 그 기를 보니,
“이 굴은 의상(義相)이 수도하던 곳이다. 동으로 부상(扶桑)을 바라보면 망망한 큰 바다에 해와 달이 떴다 잠겼다 하고, 남으로 설악을 바라보면 일천 겹 옥 같은 봉우리가 눈안에 죽 들어온다. 안개 낀 동정호(洞庭湖)의 물결이 제아무리 장관이라 해도 일천 겹 옥 같은 봉우리가 있다고는 들어보지 못했고, 여산(廬山)이 비록 도인(道人)들이 앞다투어 찾는 곳이라지만 역시 만경창파는 없는데, 여기는 그 모두를 다 겸하고 있는 것이다.”
하여, 승경을 기록한 것이었다. 그러나 자리가 비좁고 암자 모양도 왜소하여 경치 좋은 곳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중들 말에 의하면 몇 해 전에는 수계(守戒)하는 중이 하나 있었는데 어느 포악한 자에 의해 죽었다는 것이다. 이는 장주(莊周)가 이른바, ‘안으로는 수련을 쌓아도 겉은 표범이 먹는다’는 것으로서 이학(異學)의 무리들은 인간과 유리되고 세상과 동떨어진 일 하기를 좋아하면서 그것을 고상한 것으로 여기고 있으므로, 그러한 일을 당해 마땅한 것이다.
그 굴 뒤로는 지상에서 몇 천 길 높이로 석부용(石芙蓉)이 치솟아 있는데 서쪽에서 달려온 것으로서 기기교교한 형상의 봉우리가 40여 개나 되었다. 어떤 것은 검극(劍戟) 같고, 어떤 것은 규벽(圭壁) 같고, 어떤 것은 종정(鍾鼎) 같고, 어떤 것은 기고(旗鼓) 같고, 어떤 것은 불꽃이 튀는 모양이고, 어떤 것은 용솟음치는 파도와도 같아 모양이 제각기 형형색색이고, 중간의 한 봉우리는 구멍이 나 있어 마치 풍악의 혈망봉(穴網峯)처럼 생겼는데, 중의 말에 의하면 그 산을 소금강(小金剛)이라 부른다고 한다. 그리고 언제나 비바람이 있으려면 미리 울기 때문에 천후(天吼)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계조(繼祖)라고 한 것도 아마 이 산의 조산(祖山)이 풍악을 닮았다는 뜻 아니겠는가.
견여를 타고 산에서 내려와 미시령(彌時嶺) 재 아래 계시는 외삼촌 뒤를 좇아왔다. 재에 와서 재 아래 있는 여러 고을들을 내려다보며 내가 유군에게 이르기를,
“영동(嶺東) 한 구역을 옛날에는 창해군(滄海郡)이라고 불렀다. 장자방(張子房)이 이르기를, ‘동으로 가 창해국 임금을 뵙고 거기에서 역사(力士)를 만나 진시황에게 철퇴를 던지게 됐다.’고 했다 하니, 아마도 그가 여기까지 왔던 것이 아니겠는가?”
했었다. 또 견여를 타고 재를 넘어오는데 재가 높고 험해 걸음마다 마치 사다리와 같은 가파른 바위가 거의 30리나 뻗쳐 있었다. 난천(煖泉) 가에 와서 말을 쉬게 했는데, 이른바 난천이란 겨울에도 얼지 않아 길 가는 사람들이 눈에 막히고 해가 저물면 반드시 거기에서 자고 갔다는 것이다. 연도에는 꽤 아름다운 수석들이 있었으나 이미 풍악과 낙가(洛伽)의 승경을 구경한 우리들 눈에는 별로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큰 바다나 높은 산을 구경한 자에게는 어지간한 산과 물이 산과 물로 보이지 않는 것처럼 성인(聖人)의 문에서 노는 자에겐 도술(道術)로 인정받기 어려울 것이 당연한 일이다.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재 위에 군데군데 옛 성터가 있다고 하는데, 이른바 고장성(古長城)인 것으로 금강산ㆍ설악산 정상에도 그러한 곳들이 더러 있었다. 우리나라 삼국(三國) 시절에 피란 나온 이들이 그렇게 만들어 놓고 모여 있으면서 서로 버티던 곳이 아니겠는가. 우리나라가 3백여 년 태평을 유지하는 동안 성 단속을 하지 않았다가 중간의 왜놈 난리에 백성들이 의지할 곳이 없어 이리저리 도망만 치다가 결국 문드러지고 말았다. 지금도 병진(兵塵)이 일어나지 않은 지 한 세기가 다 되어가고 있으니, 태평 뒤에는 비운이 반드시 오는 법이어서 염려가 안 될 수 없다.
도중에 천후산 흔들바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부(賦)를 지었다.

천후산 앞에 큰 바위 하나 어디에서 떨어져 계조암(繼祖菴) 가에 있을까. 한 명이 흔들어도 흔들리지만 옮기려면 천 명 가지고도 안 될 바위. 어찌보면 우(禹)가 구독(九瀆)을 뚫고, 구주(九州)를 개척하고, 구택(九澤)을 쌓고, 사경(四逕)의 물길을 낸 다음, 구주의 쇠붙이를 모아 만들어놓은 솥 같기도 하고, 또 진시황(秦始皇)이 이주(二周)를 삼키고 육왕(六王)을 죽이고 사해(四海)를 통일하고 오랑캐까지 제어한 다음, 천하 병기를 모두 녹여 주조한 종(鍾)과 같기도 하다. 그러나 솥이라고 해도 상제(上帝)께 술 한 잔 올릴 수도 없고, 종이라고 해도 꽝꽝 울지도 못한다. 기껏 중들만 이곳을 이용하여 절로 꾸며 두고, 구경꾼들만 그를 두고 별소리 다 만들어내고 있을 뿐이다.
월출산(月出山) 꼭대기에 바위 아홉 개가 있었는데 중화 도사(中華道士)가 서에서 와서 그 중 여덟 개를 쳐 없애버렸다고 들었지만, 나도 두보(杜甫)가 말했듯이 맹사(猛士)의 힘을 빌려 그를 들어다가 저 하늘 밖에다 던져버림으로써 사특한 말 편벽한 행동이 판치지 못하게 하고 싶다. 하지만 한편 천주(天柱)가 부러지고 지유(地維)가 찢어지고 귀신들이 울부짖고 미워하면서 갱혈(坑穴) 속에 가만히 있지 못할까 봐서 머뭇거리며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가슴을 어루만지며 탄식만 한다. 장자방을 데리고 창해군(滄海君)을 찾아가서 역사(力士)를 만나 300근 철퇴를 옷소매에 넣고 있다가 그를 저격하여 혼비백산하게 만들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구나. 아, 신력(神力)이 없으니 어찌할 것인가.

그날은 남교역(嵐校驛)에서 잤는데 마을 앞에서 한계산(寒溪山)을 바라보니 그다지 멀지 않고 또 그 골이 깊고 수석도 기괴하다고 들었으나 가는 길목이 아니고 또 우회해야 하기 때문에 가보지 못했다. 주인의 성명은 함응규(咸應奎)라는 자였는데 우리에게 꿀차를 대접하였다. 또 문자를 꽤 알고 있었으며 점도 칠 줄 알았다. 내가 집을 떠나온 지 오래 되었기 때문에 집 안부가 어떻겠느냐고 물었더니, 아무 걱정 없다고 하면서 옥녀상봉(玉女相逢)의 점괘가 나왔다고 하였다.

19일(신유) 아침에 짙은 안개가 끼었다. 안개를 무릅쓰고 일찍 출발하여 인제(麟蹄) 원통역(圓通驛)에 와서 말에게 꼴을 먹였다. 주인 성명은 박윤생(朴潤生)인데 꿀차를 대접했고, 역리(驛吏)들은 술과 과일을 대접했다. 춘천(春川)의 청원(淸源)을 보려고 홍천(洪川) 가는 큰길을 좌로 하고 굽은 시내를 건너 한 골짜기에 들어갔다가 과거보기 위해 떼지어 걸어가고 있는 선비들을 길에서 만나 말에서 내려 서로 읍을 했는데 그렇게 하기를 두 차례나 했다. 시내 하나를 열여섯 차례나 건너 산골의 민가를 찾아 잤는데 아주 궁벽한 곳이었다. 주인의 말이, 자기 나이는 70이고 아들이 셋, 딸이 넷인데 금년 봄에 굶고 병들어 모두 죽었으며 집안간에 죽은 자들이 30명도 더 되는데 아직 땅에다 묻지도 못했다고 한다. 그 땅을 버리고 떠돌이로 나서고 싶어도 자기 자신은 그 고을의 토착민이고 아들이 또 어궁졸(御宮卒)이어서 쉽사리 옮겨가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의 사정이 불쌍했고 산골짜기의 백성들 생활상이 그렇게도 맵고 고통스러워 장초지탄(萇楚之歎)이 없지 않았다. 슬픈 일이었다. 땅은 인제 땅이었고 마을 이름은 가음여리(加陰餘里)였다.

20일(임술) 맑음. 일찍 출발하여 광치(廣峙)를 넘는데, 재가 매우 가파르고 길이 전부 돌 뿐이어서 사람이나 말이나 힘들고 괴롭기가 미시령에 버금갔다. 원화촌(遠花村)윤동지(尹同知) 옛집에서 조반을 먹었는데 윤생 천민(尹生天民)이라는 자가 술과 과일을 가져와서 대접했다. 재를 넘고 골짜기를 벗어나니 들판이 매우 넓고 민가 수십 호가 여기 저기 살고 있었으며 지붕은 모두 기와로 덮었는데 그 모두가 선비들 집이라고 했다.
윤생의 말에 의하면 윤동지라는 자는 이름은 수(洙)이고 관향은 파평(坡平)인데 그의 증조부가 처음으로 그 곳에 들어와 농사에 주력하여 재산을 이루었고 그 고장에 삼(蔘)이 생산되는데 한 근 한 냥이 아니라 캐면 섬으로 캐기 때문에 가세가 매우 요족하고 곡식도 1만 석을 쌓아 두었다가 병자년 난리에 싸우러 가는 북로군(北路軍)이 모두 그 곳을 지나게 되어 그 군대들 먹을 것을 전부 그가 대었고, 그리하여 국가에서는 그에게 가선(嘉善)의 품계를 내렸다고 하였다. 난리로 인하여 세상이 그렇게 어지러울 때 자기 사재를 털어 국가의 다급함을 돕는다는 것은 복식(卜式)과 같은 사람인데, 국가에서 그에게 보답하는 것이라고는 고작해야 영직(影職)이나 공함(空啣)뿐이니 그래 가지고서야 어떻게 충성을 권장하고 공로에 보답할 것인가. 더구나 그 사람으로 말하면 자기 자력으로 치부하여 그 고을에서 우뚝하게 솟았고 또 자기의 힘이 많은 백성들에게 미치게 하였으니 그만하면 재질로나 힘으로나 기릴 만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우리나라에서 사람 쓰는 것은 꼭 쓰일 사람이 쓰이는 것도 아니고 쓰였다고 해서 꼭 쓸 사람도 아니어서 그 역시 국가를 부강하게 만드는 방법이 아닌 것이다.
그날 수인천(水仁遷)을 지났는데 매우 위험한 길이 거의 10여 리나 되었다. 수인역 마을에서 잤는데 그 곳은 양구(楊口) 땅으로 그날은 70여 리를 온 셈이다. 내가 역리 한 사람과 얘기해 보았는데 내가 말하기를,
“이 고장은 지대가 궁벽하고 산이 깊어 산삼이 날법하다.”
했더니, 그 역리 말이,
“이 고장에 물론 산삼이 나지요. 그러나 근년 들어 유랑민들이 산에 들어가 나무를 베고 밭을 일구는 바람에 산택(山澤)이 모두 몰골이 말이 아니고 또 남아난 재목도 없어 옛날과는 딴판입니다.”
하였다. 이렇게 서로 주고 받다가 내가 말하기를,
“내가 산중을 다녀 보니까 금강산도 내산 외산 할 것 없이 모두 황무지 개간한답시고 아무리 높은 데도 다 올라가고 아무리 깊은 곳도 다 들어가 초목도 자라지 못하여 새짐승도 붙어 살 곳이 없었다. 그리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살아서는 고기 못 먹고 가죽 옷 입지 못하는 것은 물론 집도 잘 지을 수 없고, 생활의 변화를 도모할 수도 없고, 의약(醫藥)도 제대로 쓸 수 없으며, 죽어서는 널마저도 쓸 수 없게 만들고 있어, 그로 인한 재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 뿐 아니라 그 곳에 살고 있는 자들은 부역(賦役)과 형벌을 피해다니며 국가로 하여금 저들을 기속하지 못하게 하는데, 일단 무슨 경급(警急)이라도 있으면 서로 모여 도둑으로 변해버리고 마니, 참으로 국가의 간민(姦民)인 것이다. 고을 수령들이 그 피해를 모르는 것이 아니면서도 그들이 원적(元籍)에 들어 있지 않기 때문에, 조세 이외의 수입을 노려 그들을 사민(私民)으로 삼아 그들 요구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다. 그 폐단이 자꾸 번지고 있는 원인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숲을 모두 태우거나 베어 내어 토석(土石)이 전부 드러나 있기 때문에 장마라도 한번 지는 날이면 모두 무너져 흘러내려 산은 산대로 깎이고 시내와 평원은 막히고 메워져서 옛날에는 숲이 울창하던 산과 물이 깊던 못들이 전부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새와 짐승은 다 도망가고 물고기도 자라도 자리를 옮겨 근세 이후로 토지는 더욱 척박해지고 백성들은 더욱 가난에 찌들리며 산이 무너지고 시내가 말라 비구름도 일지 않고 수재 한재가 되풀이되고 있는데, 그 모두가 사람들이 살피지 않아서 그렇지 다 원인이 있어 그리 된 것이다. 그대도 그것을 알고 있겠지.”
하였다. 유군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지금 그것을 금하려면 무슨 방법을 써야 할 것인가?”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지금이라도 만약 호구(戶口) 정책을 엄하게 하여 떠돌이의 길만 막는다면 옛날처럼 위 아래로 풋나무 새짐승까지도 다 제 삶을 즐기는 정책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지만 그를 다 설명하자면 말이 기네.”
했더니, 역리가 절을 하면서 하는 말이,
“상객(上客)의 말씀이 옳습니다. 꼭 할 말을 하신 것입니다. 지금 산에 들어가 경작하는 자들은 참으로 국가로 보아 간교한 백성들이고 그로 인한 피해는 산골 백성들이 더 입고 있습니다.”
하였다.

21일(계해) 아침날씨가 음산하더니 이어 가랑비가 내렸다. 조반 후 출발하여 부창현(富昌峴)을 넘어 부창역 마을에서 말에게 꼴을 주었다. 가랑비 때문에 늦게 출발하여 기락이천(祈樂伊遷)을 지났는데, 기락이는 방언으로 기어서 나온다는 말로서, 그 천의 길이 너무 좁고 또 바위 구멍이 있어서 누구나 그 곳을 가는 자는 반드시 기어서 나와야 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천전(泉田)의 길가 큰 시내 위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날은 하루 내내 산골 험한 길만을 걸었는데, 여기에 이르자 산들이 확 트이고 그 가운데 큰 평야가 펼쳐 있었으며 강물이 굽이치고 돌아가 가슴이 탁 트이는 것을 느꼈다.
북쪽을 바라보니 높다란 산이 하나 있고 그 아래 민가 수십 호가 있었으며 뒤에는 소나무숲이 울창하고 느릅나무가 사이로 간간이 보이는데 유군의 말로는 강릉 부사(江陵府使) 이후(李煦)가 살고 있는 곳이라고 하였다. 시냇가에 작은 저자가 하나 있었는데 이생 후평(李生后平)이 집에 있는가 물었더니, 지금 양양(襄陽)을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20여 리를 가면서 북으로는 청평산(淸平山)을 바라보고 남으로는 소양정(昭陽亭)을 가리키며 오다가 배로 앞 강을 건너 소양정에서 잠시 쉬었다. 그 곳 벽위에는 여러 사람들이 남긴 시가 걸려 있었는데, 그 중에서 월봉(月峯)ㆍ청음(淸陰)ㆍ백헌(白軒) 그리고 유창(兪㻛)의 것을 보고 드디어 춘천(春川) 읍내로 들어와 유군 종의 집에다 여장을 풀고 주수에게 소식을 전했더니, 주수는 병이 있어 나오지 못하고 비장(裨將) 신완(申椀)을 보내 왔다. 그리고 조금 뒤에 주수의 형 이생 석(李生錫)이 왔고, 또 최남(崔男)의 아들 상인(喪人)인 이억(爾嶷)도 왔으며, 이생을 통해 서울에 있는 집안 소식도 대강 들었다. 유군이 이르기를,
“듣기에 청평산에 이자현(李資玄)의 식암 영지(息菴影池)가 있다는데 식암은 자현이 홀로 앉았던 곳으로 동사(東史)에 이른바, ‘둥글둥글하기가 곡란(鵠卵)과 같다.’고 한 것이 그것이고, 영지는 식암 아래 있는 겨우 반묘(半畝)밖에 되지 않는 작은 못으로, 해 뜨는 아침, 달 돋는 밤이면 식암의 풍경과 사람의 동정까지도 모두 그 못 속에 비친다고 한다. 그리고 자현이 죽었을 때 불가의 법대로 화장을 하여 불에 탄 그 뼈를 아직까지 그 곳 중이 간직하고 있는데 빛이 푸르른 청옥(靑玉)과 같다. 그리고 용마루에는 또 김열경(金悅卿) 친필이 있다. 그래서 신상촌(申象村)의 송인시(送人詩)에, ‘이자현 유골은 풍류가 대단하고[李資玄骨風流遠], 김열경 글씨는 유일의 자취로세[金悅卿書逸躅存]’라고 하였으니, 그 모두가 다 값진 고적들이 아니겠는가.”
하기에, 내가 이르기를,
“이자현으로 말하면 능히 세리(勢利)의 길에 초연하여 몸을 운수(雲水)에 의탁하고 거기에서 일생을 마쳤던 것이다. 퇴계(退溪)는 그를 위해 억울함을 밝혀 주고 그 사실을 영탄(咏嘆)했으며, 열경(悅卿)은 국가 위난을 평정한 세상에서 임금을 섬기지 않았던 뜻을 높이 샀는데, 사실은 동방(東方)의 백이(伯夷)인 것으로, 그의 청고한 풍도와 모범을 남긴 행위는 백세의 스승이 되기에 족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번 길에 그 유적지를 찾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다만 내가 탄 말이 걸음이 더디고 바탕이 둔해서 외삼촌을 따라가야겠기에 마음대로 못하겠네.”
하고, 서로 말이 나쁘다고만 탓했다. 내가 웃으면서, 재상상진(尙震)의 소에 관한 얘기를 들어 보았느냐고 물었다. 유군이 못 들었다기에 내가 얘기하기를,
“상진공이 언젠가 들을 지나는데 어느 늙은 농부가 쟁기로 밭을 갈면서 쟁기 하나에다 소 두 마리를 메워가지고 아주 힘들게 밭갈이를 하고 있더라네. 상진공이 한참 구경하다가 이어 말하기를, ‘농사일을 참 잘하시는구려, 그런데 그 소 두 마리 중에도 우열(優劣)이 있습니까?’ 했더니 그 농부가 대답을 하지 않더라는 거야. 그래서 상진공이 농부 앞으로 다가갔더니 그 늙은이가 이 쪽으로 와서 귀에다 대고 말하기를, ‘공이 물은 대로 두 소 중에 한 마리는 힘이 세고 옹골찬데 한 마리는 힘도 약하고 미련한데다 늙기까지 했지요.’ 하더라는 거야. 상진공이 말하기를, ‘그렇습니까. 그런데 처음에는 대답을 않고 지금 와서 귀에다 대고 말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니, 그 늙은이 말이, ‘소는 큰 짐승이어서 사람 말을 알아듣고 또 부끄러워할 줄도 알지요. 내가 그 힘의 덕을 보고 그 놈을 부려먹으면서 그 놈 부족한 점을 꼬집어 그 놈의 마음을 상하게 해주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거라오.’ 하더라는 거야. 상진공은 그 말끝에 크게 반성을 하고 그때부터는 한평생 남의 과실 말하기를 부끄럽게 여겨 장점만 말하고 단점은 말하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장후(長厚)한 군자가 됐다는 거야. 지금 우리들이 그 말들 힘으로 천리 길을 두루 돌면서 온갖 험난한 곳을 다 지나 여기까지 왔으니 그 말이 병들었거나 둔함을 그렇게 헐뜯을 일이 아닌데, 더구나 그들이 듣는 데서 그래서야 되겠는가. 사람도 꾸짖고 욕설을 하면 풀이 죽고 치켜세우면 흥을 내는 법인데, 저 말들이 오늘은 뽐내면서 달릴 기운이 더욱 없겠네. 그것은 우리가 대우를 잘못한 소치가 아니겠는가.”
했더니, 외삼촌이 말씀하기를,
“참으로 소나 말이 사람이 하는 말을 알아듣나 보다.”
하여, 서로 한바탕 웃었다.

22일(갑자) 맑음. 아침에 이생 석이 왔고, 최이억도 왔다. 조반을 먹고 출발하여 유군과 함께 봉의루(鳳儀樓)에 올라가 보았다. 그 고을 뒷산이 날아가는 봉의 형국이기 때문에 산 이름이 봉산이고 누대 역시 그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고을이 모양은 매우 그럴싸했으나 거민이 100호도 안 되는데다 성지(城池)도 목석(木石)도 없어 국가를 지킬 요충지는 못 되었다. 만약 삼악산(三岳山)에다 관(關)을 설치하여 그 삼면을 막고 지킨다면 이 나라의 한 보장(保障)이 될 법했다. 우리들이 봉의루에 올라 있음을 주수가 듣고 술과 배를 가지고 와 행장에 챙겨주었다. 외삼촌을 뒤좇아 신연(新淵) 나룻가에 와서 만나고 신완(申椀)과도 서로 만났으며 만호(萬戶) 반예적(潘禮積)이라는 자도 만나 동행하게 되었다. 석파령(席破嶺)을 넘었는데 산 이름은 삼악(三岳)이었다. 재가 매우 높아 길은 평평했어도 길가로는 깎아지른 절벽이라 말에서 내려 걸었다. 재 너머 서쪽은 전부 산 아니면 깊은 골짜기뿐이고, 그 재에서 군(郡)까지의 거리는 20여 리였다. 거기에서 또 20리를 더 가 안보역(安保驛)에 다다르니 청풍부부인(淸風府夫人) 묘가 있었고, 그 아래 있는 재사(齋舍)가 매우 조용하여 거기에서 잤다. 저녁에는 나와 강가를 거닐었다.
이 날은 춘천(春川)을 떠났다. 이는 대개 청평산에 들어가 진락옹(眞樂翁)과 매월당(梅月堂)의 유적을 찾아 보려고 했던 것인데 계획대로 되지 않아 시 한 수를 읊어 유군에게 화답을 청했다.

춘주가 수려하기로 이름난 고을인데 / 春州素號水雲鄕
더구나 청평학사 별장까지 있음이랴. / 况有淸平學士莊
청연에 물이 고여 둥실둥실 배 떠있고 / 水積靑淵舟泛泛
구름 덮인 화악에는 바위 빛이 푸르다네 / 雲霾華岳石蒼蒼
희이자 뼈 푸르다니 신선 상징 분명하지 / 希夷骨碧仙蹤杳
매월당이 남긴 글씨 그 체취가 풍긴다네 / 梅月書留道韻長
서운하게 식암 영지 바라만 보단말가 / 惆悵菴池空入望
그들이 남긴 향기 누가 가서 맡으라고 / 澗蘅誰復嗅遺香

춘천(春川)과 잿마루와의 거리는 멀지 않은데, 물이 급류에다 여울이 얕다. 주(州)의 북쪽에 청연(靑淵)이라는 곳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수심이 배를 띄울 만한데 여기는 바로 소양강(昭陽江) 상류이다. 그 강이 양구(楊口)의 강과 합류하여 신연도(新淵渡)를 이루고 평야 가운데로 굽이굽이 흘러 파강(巴江)의 형국을 이루고 있다. 경운(慶雲)의 북치(北峙) 서쪽에는 백운산(白雲山)이 있는데 일명 화악산(華岳山)이라고도 한다. 가파른 바위 산이 구름 높이 솟아 있어 영서(嶺西)에서는 화악만큼 높은 산이 없다고 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경운은 청평의 원래 이름이다. 유군의 화답시는 이러하다.

진락공 그 명성이 이 고을에 자자한데 / 眞樂公名表此鄕
더구나 청평하면 그 있던 곳 아니던가 / 淸平況是故時莊
예스러운 못과 누대 지원처럼 경개 좋고 / 祗園勝槪池臺古
보지의 가을 풍경 나무들이 푸르러라 / 寶池秋容樹木蒼
치솟은 바위산과 겨룰 만한 높은 절의 / 淸節漫爭山骨聳
고상한 풍류는 장강유수 그것이라네 / 高風直與水流長
선구를 지척에 두고 계획이 틀려서 / 仙區咫尺違心賞
선생께 판향 하나 피워 올리지 못한다오 / 未薦先生一瓣香

23일(을축) 새벽에 안개가 잔뜩 끼었다. 일찍 출발하여 가평(加平) 길을 거쳐 초연대(超然臺)를 지나면서도 안개 때문에 올라가 구경하지 못하였다. 가평읍 아래 와서 조반을 먹고, 아현(芽峴) 남쪽에 와서 말에게 꼴을 먹였다. 청평(淸平) 언덕을 지나 굴운역(屈雲驛) 마을에서 잤는데 그 마을 북쪽에 있는 언덕의 형세가 매우 좋아 보여 올라가서 종을 시켜 치표(置標)를 해 두게 하였다. 그 주산(主山)의 이름을 물었더니 청취전(靑翠田)이라고 했는데, 그 산이 백운산에서 남쪽으로 뻗어 운등산(云登山)이 되고 거기에서 또 동으로 달려가다가 회강(淮江)을 만나 거기에서 멎었는데 곱게 감싸고 있는 것이 마치 누군가의 장례를 받아들이고 싶은 듯이 보였다.

24일(병인) 흐렸다. 일찍 출발하여 천괘산(天掛山)을 향하여 가다가 마치현(摩蚩峴)을 넘어 그 고개 서쪽에서 조반을 먹고 여러 사람 무덤들을 가리키고 물어가면서 길을 가는데 시내 곁 단풍잎들이 마치 붉은 비단 같았다. 대개 평천(平川)의 가을 빛이 이제 와서야 비로소 무르익고 있었다. 풍양(豐壤)에 당도하여 왕숙천(王宿川)을 건너고 퇴가원(退駕院)을 지나 오릉(五陵) 밖에서 쉬노라니 백악(白岳)과 남산(南山)이 보이기 시작했다. 들은 넓고 시내는 편평하여 새삼스러운 감회가 있기에 율시 한 수를 읊었다.

만 겹이나 푸르른 봉래산을 꿈에 보고 / 夢入蓬萊翠萬重
구름 따라 동쪽 땅을 한 바퀴 다 돌았네 / 一笻東盡白雲求
아침이면 넓은 바다 부상의 해를 보고 / 朝看滄海扶桑日
밤에는 비로봉 가을 나무에 의지했다네 / 夜將毗盧碧樹秋
자장처럼 호탕하게 놀자는 뜻 아니었고 / 不因子長疏宕擧
나그네 모진 시름 달래려고도 아니었네 / 非關楚客慍惀愁
돌아와서 동산에 다시 올라 바라보니 / 歸來更上東山望
끝도 없는 연파가 한강 섬에 자욱하네 / 無限煙波江漢洲

늦게야 성안에 들어와 동소문(東小門) 안에서 외삼촌과 작별하고 집에 돌아와 사당에 무사히 돌아왔음을 고하였다.
풍악(楓岳)의 경치가 삼한(三韓)에서 으뜸이요 천하에 소문이 나 있어 내 늘 사영운(謝靈運)처럼 나막신을 장만하여 사마자장(司馬子長)같이 한번 마음껏 구경을 해보려고 벼르기는 했으나, 세상일도 뜻대로 되지 않고 병마에도 시달리다 보니 속절없는 풍진 세월에 흰머리가 이미 머리에 가득해갔다. 임자년 7월 내가 동성(東城)에 부쳐 있으면서 마침 유동(楡洞) 사시는 통제사 외삼촌과의 자리에서 옛 친구 정극가를 뜻밖에 만나 담소하던 차에 산수(山水) 구경 얘기가 나왔다. 외삼촌 말씀이,
“내가 진작부터 관동(關東) 구경의 뜻이 있었으나 몸이 무부(武夫)라서 미처 못했었는데 지금 마침 집에 있게 되었으니 구경갈 때는 바로 이때다. 극가도 같이 갈 생각이 있는가?”
하자, 극가가 대답하기를,
“그렇잖아도 지금 그 계획을 세우고 있는 중인데 안 가다니요.”
하였다. 외삼촌은 또 나더러도,
“너도 이번 걸음에 불가불 동행을 해야겠다.”
하시기에, 나 역시,
“가구말구요. 그것이 저의 평소 원이었는데요.”
하고, 드디어 중도에서 서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그리하여 그 해 윤월(閏月) 정유일에 침석정(枮石亭)에서 내가 외삼촌과 만나 동소문을 출발했는데 유군 여거(柳君汝居)라는 자가 그 소식을 듣고 뒤좇아 왔다. 연산(漣山)에 가 미수(眉叟)에게 문안하고 석록(石鹿)에서 극가를 데리고 그로부터 9일 만에 풍악의 장안사에 도착하였다. 이틀 밤을 정양사에서 자고 천을대(天乙臺)를 구경하고 마하연(摩訶衍)으로 옮겼다가 안문(鴈門)으로 나와 남천(南川)을 끼고 동으로 갔었다. 유점사에서 사흘을 묵으면서 산영루(山暎樓)를 산책하고 만경대(萬景臺)를 바라보았으며 맑은 가을의 운물(雲物) 등 온갖 경치를 두루 감상하였다.
내 늙고 병들어 비록 비로봉 절정에 올라 깊은 구룡연을 내려다보면서 아주 높고 으슥하고 험한 곳까지 샅샅이 다 보지는 못했으나, 그래도 풍악산 겹겹이 쌓인 구름 속의 산빛이나 늦가을 풍경에 관하여는 그런대로 볼만큼 보았다. 그리고 나서 고성(高城)을 경유 해산정(海山亭)에 오르고, 삼일포(三日浦)를 거쳐 청간정(淸澗亭)에서 거닐었으며, 선유담(仙遊潭)ㆍ영랑호(永郞湖)에서 쉬기도 하였다. 또 양양의 낙산사(洛山寺)에서 묵으면서 동해를 바라보며 부상에 떠오르는 해를 구경하기도 하고 중추에 바다에 뜬 달도 완상했다. 그리고 다시 신흥사(神興寺)에 들러 설악산을 바라보고 천후산을 답사했으며, 또 춘천에 들러 회강(淮江)을 건너고 몽□(夢□)에 올라 우수(牛首 춘천의 옛이름) 평야를 굽어보고 경운산(慶雲山)ㆍ화악산(華岳山)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돌아왔다. 비록 사방을 두루 돌아보고 싶은 뜻을 다 이루지는 못했으나 그래도 평생의 소원을 다소는 풀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번 길에 들른 고을이 15개 주에 달하고, 길은 1천여 리 길이었으며, 왕복에 한 달이 걸렸다. 돌아다니는 동안 작은 일기책에다 날씨와 그날그날 가고 구경한 곳을 적어 옛분들 유행록(遊行錄)에 대신하였고, 또 동정부(東征賦) 한 편을 써서 거기에 나의 영귀(詠歸)의 뜻을 대강 펴 보았다.
임자년 9월 일 침석정(枮石亭)에서 쓰다.


 

[주D-001]상 나라……돌아가고 : 상(商) 나라가 망한 것을 뜻함. 고신씨(高辛氏)의 비(妃) 간적(簡狄)이 아들을 얻기 위해 기도를 올렸을 때 제비가 떨어뜨리고 간 알을 먹고 설(契)을 낳았다. 그 후손인 탕(湯)이 천하를 두었으므로 제비는 상 나라의 상징조가 된 것임.《詩經 商頌玄鳥》
[주D-002]황하……나타나자 : 무왕(武王)이 주(紂)를 정벌하기 위해 배를 타고 황하를 건너는데, 백어(白魚)가 배안으로 뛰어들어왔다. 무왕은 이를 은(殷)을 쳐서 이길 징조라고 생각하고 정벌에 임하였음. 《史記 周紀》
[주D-003]바다에 다리 : 고주몽(高朱蒙)이 형제와 사이가 좋지 않아 졸본부여(卒本扶餘)로 가기 위하여 물을 건너려 하자, 자라와 물고기떼들이 모여 다리를 놓아 주었다고 함. 《東史槪略》
[주D-004]장초지탄(萇楚之歎) : 사나운 정사를 원망하는 것. 정사가 번거롭고 조세가 무거워 백성들이 고통을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차라리 초목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사는 것이 낫겠다는 탄식을 이름. 《詩經 檜風》
[주D-005]복식(卜式) : 한(漢) 나라 때 사람. 양을 쳐서 부자가 된 후 자진해서 많은 사재를 내놓아 무제(武帝)의 변방 경영을 돕고 빈민 구제도 했다가 그 공로로 중랑장(中郞將)에서 어사대부(御史大夫)까지 되었음. 《漢書 卷58》
[주D-006]지원(祗園) : 지수급고독원(祗樹給孤獨園)의 약칭. 즉 그 정원 안에 있는 수목(樹木)은 지타태자(祗陀太子)의 소유이고 그 정원은 급고독의 소유라는 뜻으로 급고독이 그 정원을 지타태자에게서 구입하여 거기에다 정사(精舍)를 짓고 부처를 청하여 거기에서 살면서 설법을 하도록 하였다고 함. 
[주D-007]보지(寶池) :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팔공덕(八功德)의 물. 그 물을 마시면 모든 선근(善根)이 잘 자란다고 함. 《觀無量壽經》

 

신동국여지성람의 기록 (이행)

 【성지】 봉의산고성(鳳儀山古城) 둘레가 2천 4백 63척이다. 삼악산고성(三岳山古城) 돌로 쌓은 옛터가 있다. 우두평고성(斗頭坪古城) 북쪽으로 13리에 있는데, 맥국(貊國) 때에는 성(城)이라 지칭하였다. 신라 문무왕 13년에 수약주(首若州)에 주양성(走壤城)을 쌓았다 질암성(迭巖城)이라고도 하였다.


楸灘先生集卷之一
 詩○七言絶句
三嶽山城 a_064_100d


絶頂淸秋倚石臺。漢城西望五雲開。可憐山下昭陽水。流到沙平幾日廻。老親住在沙平南村。故寓懷也。
동문선 제67권
 기(記)
혁상인 능파정기(赫上人凌波亭記)

이규보(李奎報)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권호(權豪)와 귀인(貴人)이 정자를 짓고 구경하며 즐기는 일이 있어도 사람들은 간혹 비난하는 이가 있는데, 하물며 중으로서 이런 일에 힘쓰는 것은 겉치레를 뽐내고 지나치게 사치하여 도(道)에 어긋나는 게 아니겠는가?”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사람의 심정이 모두 청련불계(靑蓮佛界)나 백옥선대(白玉仙臺)에 가기를 원하는 것은 다른 까닭이 있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 그 땅이 맑고 깨끗하여 더러움이 없기 때문이다. 무릇 땅이 맑고 깨끗하면 마음도 또한 그러한 것이니, 마음이 맑고 깨끗하면서 탐욕스럽고 악을 행하며 심한 번뇌에 휩쓸리는 일은 없다. 이렇게 볼 때 비록 인간 세상에 있더라도 진실로 땅의 맑고 깨끗한 것을 얻어서 그의 마음과 생각을 씻을 수만 있다면, 이것도 또한 부처의 세계이며 신선의 누대(樓臺)인 것이니 어찌 그것을 부러워하겠는가.” 이것으로 인하여 습성(習性)이 이루어진다면 부처나 신선의 경계(境界)를 밟는 일도 점차 가까워질 것이다.
삼악산인(三岳山人) 종혁(宗赫)이라는 사람은 본래 조계종(曹溪宗)의 운치(韻致) 있는 인사(人士)이다. 일찍이 세상 밖에서 방랑하며 뜬구름같은 그의 행각(行脚)이 오래 계속되더니, 지난 정우 모년(貞祐某年)에 우연히 수춘군(壽春郡) 덕흥(德興)이라는 곳에서 옛 사원(寺院)을 얻게 되었는데, 그곳의 산수가 좋다고 그대로 거기에 머물러 있었다. 집이 기울어지고 쓰러진 것은 모두 고치고, 담이 무너진 것도 또한 새로 쌓아서 옛날의 체제보다 더욱 넓게 하였다. 그리하여 여러 중들이 모여와서 살 곳을 넓혀 놓았다. 그런 뒤에 생각하기를, “손님들이 들렀다가 가는 일이 있을 때 나는 그들에게 처소를 제공하여 접대하는 예(禮)를 지키지 않을 수 없다. 비록 그러하나 부처를 모신 집안에다가 그들의 호방(豪放)한 심정과 방자한 몸가짐으로 놀고 구경하며, 잔치하고 즐기는 곳을 둘 수는 없다.” 하였다.
절터 곁에 있는 땅에는 물이 파랗게 고여 잔잔한 물결이 이는 웅덩이가 있었는데, 그 밑바닥에 주추를 박고 그위에 걸쳐 정자를 짓고 띠[茅]로 지붕을 덮었다.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가벼운 작은 배나, 그림을 장식한 놀잇배가 맑은 물위에 떠 있는 것같다. 그위에서 즐기는 잔치라도 있을 때면 앉아 있는 손들이 굽어봤다 올려다봤다 굽혔다 폈다 하고 한번 찡그리고 한번 웃어대는 모습이, 술잔ㆍ술상ㆍ안석ㆍ돗자리ㆍ술단지ㆍ술병ㆍ바둑ㆍ장기의 모든 그림자와 함께 수면(水面)에 쏟아져 있어서, 마치 밝은 거울 속에 비친 인물(人物)과 집기(什器)가 나열된 것이, 비치는 것을 보는 것같다. 만약 봄 물결이 질펀하고 맑아서 햇빛의 광채를 머금는 때가 되면 수백 마리나 되는 물고기가 헤엄치며 떼를 지어 논다. 내려다보면 분명하게 보여서 셀 수도 있다. 또 서늘한 8ㆍ9월의 가을철이 되면 나뭇잎은 반쯤 떨어지고 서리는 내리고 물은 맑은데, 단풍이 언덕을 덮은 채 거꾸로 물결 위에 비치니, 찬란하기가 마치 비단을 강물에 씻는 것같다. 이런 것들이 다 물위에 있는 이 정자(亭子)를 명승(名勝)이 되게 하는 까닭이다.
대략 이렇거니와, 퍽 기이한 곳은 다시 이름붙여 말할 수가 없다. 보는 자가 마음속에서 스스로 알 수 있을 뿐이다. 만약 남에게 전(傳)하여 자랑하려면, 입이 눈을 따라갈 수 없을 것이다. 화가가 그 대체를 형상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 붉고 푸른 색채를 실물과 같이 할 수는 없다. 아, 이러한 것으로써 손님을 대접하는 것을 그 누가 중이 정자에서 노닐고 구경하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생각한다 말인가. 중국에서 온 사신(使臣)으로부터 길가는 나그네에 이르기까지 동으로 가는 자나 서쪽으로 가는 자들이 모두 이곳에 와서 유람하지 않는 이가 없다. 그들이 바야흐로 여기에서 자유롭고 여유있게 노닐 때면, 마음이 푸른 난(鸞)새를 멍애하며 흰 학(鶴)을 타고 앉아서 우주의 바깥에서 떠도는 것같을 것이다. 백옥선대(白玉仙臺)가 무엇이 그리 대단하다고 말할 것이 있겠는가. 유람하는 자도 오히려 그러하거든 우리의 늙은 선사처럼, 항상 편안히 앉아서 깨끗한 경치에 만족하고 있는 자는 상상하건대, 이미 극락 세계와 더불어 이웃이 되었을 것이다. 어찌 불도(佛道)에 어긋난다고 말할 것인가.
혁공(赫公)이 평소에 글을 좋아하더니, 나의 벗 한홍부(韓鴻傅)를 통해 나에게 기문을 써줄 것을 부탁하여 정자를 장식하여 뒷세상에 전하고 싶다고 하였다. 내가 승낙하지 아니함이 무릇 2년이나 되었다. 한군(韓君)이 섭섭한 기색을 보여 대충 그 한두 가지를 적고, 이어 그 현액(懸額)에 정자의 이름을 써서 능파정(凌波亭)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정자가 물위에 우뚝 솟았다는 뜻이다. 아, 나도 또한 늙었구나. 훗날 마땅히 갓을 읍(揖)하여 높이 바치고 물러나오면, 복건(幅巾 은사가 쓰는 두건)과 명아주 지팡이 차림으로 그속에 가서 노닐면서 바람과 달의 주인이 되어 한 편의 시(詩)와 한 번의 읊조림에 무궁한 경치를 다 쏟아넣고, 나는 오늘 못다 한 회포를 보충할 것이다. 호수와 산속에 영혼이 있거든 잠깐 기다려다오.
다산시문집 제22권
 잡평(雜評)
산행일기(汕行日記)

가경(嘉慶) 경진년(1820, 순조 20) 봄에 3월 24일 선백씨(先伯氏)가 학순(學淳)을 데리고 춘주(春州)에 가서 며느리를 맞아올 때에 작은 배를 꾸며 협중(峽中)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때 나도 따라가서 소양정(昭陽亭)에 올라 청평산(淸平山) 폭포를 보고 절구시(絶句詩) 25수, 화두시(和杜詩) 12수, 잡체시(雜體詩) 10수를 지었다. 그후 4년이 지나 계미년(1823, 순조 23) 여름에 4월 15일 학연(學淵)이 대림(大林)을 데리고 춘주에 가서 며느리를 맞아올 때에 역시 작은 배를 꾸며 협중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때 내가 또 따라갔으니, 마음은 한계(漢溪)와 곡운(谷雲)에 있었다. 특별히 큼직한 고기잡이배를 구하여 마치 집처럼 꾸미고 그 문미(門楣)에다가 ‘산수록재(山水綠齋)’라는 편액을 걸었으니 이것은 내가 썼다. 그리고 좌우 기둥에는, 한쪽에는 ‘장지화가 초삽에 노닌 취미[張志和苕霅之趣]’라고 쓰고 한쪽에는 ‘예원진이 호묘에 노닌 정취[倪元鎭湖泖之情]’라고 썼으니 이는 승지(承旨) 신작(申綽)의 예서(隸書)이다. 또 학연의 배에 쓰기를 ‘유어황효녹효지간(游於黃驍綠驍之間 황효와 녹효 사이에서 노닌다는 뜻임)’ 이라 하고, 그 기둥에는 ‘부가범택(浮家汎宅 물에 뜬 집이라는 뜻임)ㆍ수숙풍찬(水宿風餐 물위에서 자고 바람을 먹는다는 뜻)’ 이라 썼는데, 천막과 침구, 그리고 필기구, 서적에서부터 약탕관과 다관(茶罐), 밥솥 국솥 등 갖추지 않은 것이 없었다. 속으로는 화공 한 사람을 대동, 단연(丹鉛)과 담채(澹采)를 들려 수행시키면서 물이 다하고 구름이 일어나는 곳이라든가, 버들 그늘이 깊고 꽃이 활짝 핀 마을에 이를 때마다 배를 멈추고 그 좋은 경치를 가려 제목을 붙이고 그리게 하고 싶었으니, 그것은 이를테면 ‘사라담에서 수종사를 바라보다.[沙羅潭望水鐘寺]’라든가 ‘고랑도에서 용문산을 관망하다. [皐狼渡望龍門山]’ 등으로서 모두 그려둘 만한 절경이었다. 선비 방 우도(方禹度)란 자가 산수화에 능하여 3ㆍ4중첩의 깊고 얕은 경지를 잘 그렸다. 학연이 몸소 찾아가 데려왔는데, 온 지 며칠 안 되어 한질(寒疾)이 생겨 대동할 수 없게 되어 유감천만이었다. 그 후 주위에 방 선비와 절친한 자가 있어 말하기를,
“그가 묵은 지 며칠이나 되며 그가 먹은 쌀은 몇 되나 되는가?"
고 묻기에 대답하기를,
“3일 동안 머물렀는데 끼니마다 반 되를 먹었다.”
고 하였더니, 그 사람은,
“어허! 그 사람 가게도 되었군. 그는 한 끼에 두 되씩 먹어 하루 세끼 여섯 되의 밥을 먹는데 날마다 6분의 1을 먹었으니 어찌 병이 나지 않겠는가. 그가 가게 된 것이 바로 그 때문이다.”
하였다.
○ 약암(約菴) 이여홍(李汝弘)이 소식을 듣고 따라가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면서 죽산(竹山)으로부터 1백 20리를 달려와 같이 가기로 약속하였고, 서울 사는 소년 한만식(韓晩植)ㆍ우정룡(禹正龍)ㆍ오상완(吳尙琬)이 듣고 역시 따라가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면서 와서 배에 태워주기를 애원하였다. 내가 ‘배는 작고 짐이 무거워 탈 수 없다.’고 하자, 소년들이 모두 서운해하므로 마지못해 허락하였다.

4월 15일 갑인. 맑음. 일찍 일어나 발선(發船)하여 남자주(藍子洲)에 배를 대놓고 노와 닻줄을 손질한 다음, 공달담(孔達潭)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황공탄(惶恐灘)에 올라 호후판(虎吼阪)에서 잤다. 호후판은 단 세 집이 사는 마을인데, 두집은 서로 상투를 잡고 치고 받으며 싸워서 그 고함소리가 호랑이 우는 소리와 같았고, 한 집만이 문을 닫고 있어서 그 집을 빌어 유숙하는데, 마침 주인 노파가 산에 올라 화전에 불을 놓㋤가 나무 그루터기에 발꿈치를 찔려 밤새도록 그 고통을 부르짖으므로 창문을 사이에 두고 자는 자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 세상이 대개 이처럼 고경(苦境)이다.
○ 우생(禹生)이 몇 리를 가다가 멀미를 하여 뭍에 내려달라고 애원하였다. 내려 놓고서 도로 집으로 돌아가라고 권고하였으나 말을 듣지 않고 연안을 따라 좇아오니 이것 역시 고심(苦心)이었다.
경진년 봄에 황공탄에 올라 시를 지었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생략함 [節]
이 물은 곧 폭포수의 유니 / 玆是瀑布類
여울이라곤 이를 수 없네 / 不可湍瀨論
고요한 하늘에 질풍이 일어나니 / 靜天生疾飇
서늘한 바람에 봄 더위를 잊네 / 瀟瀟忘春暄

또 다음과 같다.
간신히 험준한 곳을 지나니 / 艱崎度絶險
다시 정연한 천지가 나오네 / 復得整乾坤
누른 꾀꼬리 녹음으로 날아드니 / 黃黧赴綠陰
아름다운 경치가 성황을 이루네 / 蔥然時景繁
지금 보는 경치도 이와 같으므로 다시 시를 짓지 않았다.

○ 절구시(絶句詩)는 다음과 같다.
청평의 마을 경치 강을 향해 열렸으니 / 淸平村色對江開
나직한 버들 흰모래 언덕 안고 돌았네 / 短柳晴沙抱岸廻
물이 다하여 근원 끊긴 곳에 이르니 / 直到水窮源斷處
푸른 산이 문득 한 척의 배 토했네 / 靑山忽吐一船來

○ 경진년에는 시(詩)로 행로(行路)를 기록하여 갈 때의 길은 상세히 기록하고 회로(回路)의 기록은 소략히 하였는데, 금년에는 특별히 물길을 기록하는 터이라, 갈 때의 길은 대략 기록하고 회로의 기록은 상세히 하였다. 이것은 피차를 서로 구비하려는 것이요, 또 수원을 따라 탐구하여 수경가(水經家)의 보주(補註)를 돕고자 하는 목적에서였다.
이 약암(李約菴)의 시는 다음과 같다.
작은 배 가벼이 흔들려 베 포장이 열리니 / 舴艋輕搖布幔開
뱃머리에 걸린 편액 또한 기이하네 / 船楣揭額亦奇哉
녹효의 물이 우수산으로 통하였기에 / 綠驍之水通牛首
그 수원을 탐구하기 위해 여기에 왔네 / 秪爲窮源有此來

16일. 늦게 개었다. 학연(學淵)이 병이 났기 때문에 늦게 출발하여 자잠포(紫岑浦)에서 조반을 먹고 복정포(福亭浦)에서 점심을 먹었다. 밤에는 안반촌(安盤村)에서 잤는데, 자던 집이 몹시 정결하였고 주인 노파도 괴로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 자잠(紫岑) 위에 송의항(松漪港)이 있는데 암석이 몹시 기괴하였다. 경진년 봄에 배턱에 배를 대놓고 그 암석 사이에 끼어 앉아 형제가 함께 밥을 먹었는데, 그 생각이 역력히 떠올라 마치 어제 있었던 일 같았다. 이로 인해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떠나지 못하고 한참동안 있었다.

○ 경진년 봄에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동쪽으로 열린 협구 재갈풀린 입 같은데 / 峽口東呀似解箝
자잠의 모난 석각 구름 위에 솟았네 / 紫岑芒角入雲尖
신비한 십리 물길 꽃 띄워 흘러가니 / 靈源十里流花水
그 물결 한 자나 높아졌음을 알겠네 / 解使烟波一尺添

○ 또 다음과 같다.
송의마을 북쪽 석벽 높기도 높아 / 松漪村北石崔崔
하늘이 만든 금성 물을 등졌네 / 天作金城背水隈
마늘봉은 보루 쌓기에 좋다지만 / 可但蒜峯宜築堡
넓은 호수 동쪽 뫼 참으로 기묘하네 / 太湖艮嶽儘詼瓌

오장곡(鄔莊谷)서부터 산세가 수려한데, 녹효(綠驍)의 물이 이곳으로 들어온다. 입천(笠川) 또한 아름답다.

○ 경진년 봄에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오른쪽으로 홍천을 지나 입천에 와 닿아 / 右過洪川次笠川
유가만 아래 잠시 배를 멈추었네 / 柳家灣下乍停船
석양의 한 조각 외로운 노을은 / 夕陽一片孤霞影
먼 산봉우리에 걸쳐 타는 듯하네 / 斜曳遙峯熂爐煙

○ 또 입천도시(笠川渡詩)는 다음과 같다.
녹효수는 산수로 달리는데 / 綠驍赴汕水
두 언덕이 우뚝 마주섰네 / 對立雙斷岸
가느다란 물줄기 조용히 흘러 지나니 / 細流靜相過
강한에 비교하기엔 너무도 부족하네 / 未足方江漢
우리집 문앞의 물과 비교해 보아도 / 眂我門前水
반의 반밖에 되지 않네 / 且爲半之半
생락함[節]
푸른 봉우리 저녁 아지랑이 걷히니 / 夕靄澹靑㟽
남은 노을 다시 엉겨 찬란하누나 / 餘霞復靡漫
배 멈추고 고기떼 굽어보니 / 亭舟頫魚隊
온갖 잠념 씻은 듯 없어지네 / 百慮淨蕭散

이 약암(李約菴)이 자잠(紫岑)을 지나면서 지은 시(詩)는 다음과 같다.
자잠 남쪽 기슭 오솔길 비꼈는데 / 紫崿南頭細徑斜
설암 옛터에 연하가 잠겨 있네 / 雪菴遺址鎖煙霞
복소궁 무너지고 여강은 차가운데 / 北蘇宮廢驪江冷
도원의 흐르는 물 꽃은 이미 져버렸네 / 流水挑源已落花

17일. 짙은 안개가 끼었다. 일찍 출발하여 안개를 뚫고 석지산(石芝山)을 지나 곡갈탄(曲葛灘)에 올랐다. 언덕 위에서 말 모는 소리가 나기에 사실을 물어본 결과 윤종대(尹鍾岱)의 마부였다. 윤 종대가 앞서 약속하고도 떠날때 미처 당도하지 못하였는데, 배를 좇아 앞질러서 마당촌(麻當村)에 이르러 쉬며 기다리고 있으니 기쁜 일이었다. 작탄(鵲灘)에서 조반을 먹고 마당촌에서 점심을 먹은 다음, 윤질(尹姪)을 싣고 현등협(懸燈峽)을 거쳐 신연(新淵)에 이르니 해가 벌써 너웃너웃 넘어가고 있었다. 사공이 죽전촌(竹田村)에서 자자고 청하였으나 듣지 않고 배를 재촉하여 황혼(黃昏)에 소양정(昭陽亭) 밑에 정박하였다.

○ 경진년 봄에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일산만한 하늘 협구 따라 열렸는데 / 一蓋天從峽口開
가릉의 풍물 또한 아름다워라 / 嘉陵風氣赤佳哉
둘러선 석지산 푸르기도 한데 / 石芝山色逶迤綠
풍악소리 때때로 군수 찾아오네 / 絲竹時時郡守來

○ 또 다음과 같다.
남이점 밑 방아올은 방언에 도서(島嶼)를 점(苫)이라 한다.《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 보인다. / 南怡苫下方阿兀
한자로 쓰자면 구곡이라 하네 / 譯以文之臼谷云
온조왕 회군한 곳 아! 바로 이 땅이다 / 溫祚回軍噫此地
함박눈 날리던 그 정경 머리에 떠오르네
/ 一天大雪想紛紛

○ 또 다음과 같다.
검정 돌 바둑처럼 널린 정족탄에 / 䃜石棊鋪鼎足灘
한 척의 작은 배로 푸른 물결 뚫고 나왔네 / 一梭穿出綠漪瀾
황효 어부 길에서 만나 / 黃驍漁子行相遇
또 다시 고기를 사 저녁 반찬 부탁하네 / 又買銀鱗付夕餐

○ 또 다음과 같다.
난산 한 지역 상기도 천황인데 / 蘭山一面尙天荒
공중에 달린 각도 십리나 기네 / 閣道飛空十里長
작뢰 동쪽에서 고개 돌려보니 / 鵲瀨東頭重回首
경기의 산빛 아득하누나 / 京畿山色已迷茫

○ 삼악시(三嶽詩)는 다음과 같다
높기도 할사 석파령은 / 崔崔席破嶺
삼악산의 지맥일세 / 是蓋三嶽餘
곱고 묘한 봉우리 없기는 하나 / 雖無娟妙峯
방어엔 자못 허술하지 않네 / 捍禦頗不踈
어이하여 왕조와 최리는 / 王調與崔理
부질없는 죽음당하였나 / 浪作釜中魚
한 나라 태수 공연히 바다를 건넜지 / 漢吏空越海
답답한 이 땅 어디에 살건가 / 鬱鬱安能居
막막한 저 청류관에 / 漠漠淸流關
초목이 비로소 눈이 트네 / 草木嫩初舒
생략함[節]

○ 그 현등협시(懸燈峽詩) 주(注)에 ‘현등(懸燈)은 등달(燈達)이니 방언에 현(懸 달현)을 달(達)이라 하고, 등달(燈達)은 배달(背達)이니 방언에 배(背 등배)를 등(燈)이라 한다.’ 하였다. 또 《여지승람(輿地勝覽)》에 ‘난산(蘭山)은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배달현(背達縣)이다.’ 하였고, 현등협(懸燈峽)이 곧 삼악(三嶽)의 동쪽에 위치하였으니, 난산(蘭山)의 옛 고을은 삼악 남쪽에 있어야 한다. 시는 다음과 같다.
현등은 옛날의 난산이라 / 懸燈古蘭山
그 절벽 초토를 이고 있네 / 絶壁戴焦土
두 언덕 서로 마주치려 하니 / 兩厓欲相撞
묶인 듯 좁은 골짜기 언제나 어둡네 / 束峽昏萬古
사람의 어깨도 걸릴까 걱정하여 / 直愁礙人肩
실오리 강물이 길을 통했네 / 江流通一縷
높이 달린 잎새는 하늘 바람을 흔들고 / 高葉搖天風
달리는 여울물은 지주를 흔드네 / 崩湍掀地柱
옹기종기 산봉우리 해를 가리우니 / 攢峯蝕太陽
맑은 낮에도 흙비가 날리네 / 淸晝騰霾雨

○ 석문시(石門詩)는 다음과 같다.
천지가 갑자기 환하게 밝아지니 / 二儀忽昭廓
들빛은 어찌 그리도 장한가 / 野色噫何壯
숨쉬기도 두렵던 긴장 이윽고 풀리나 / 悚息俄縱弛
산란하여 다시 향할 곳을 모르겠네 / 散朗疑所向
좁기는 하지만 옛날에는 나라이니 / 蕞爾曾亦國
하늘이 만든 별다른 지세일세 / 天作有殊狀
생략함[節]
삼한과 한 나라 바둑을 다투어 / 韓漢競弈棋
아침저녁 분분히 득실을 자주했네 / 蚤莫紛得喪
간교한 지모 염착도 / 廉鑡逞智詐
끝내 낙랑의 임금 되지 못했네 / 樂浪竟不王

○ 신연도시(新淵渡詩)는 다음과 같다.
사랑스런 이 선원수 / 愛此仙源水
그 근원 장안교에서 나오네 / 本出長安橋
일찍부터 명산 보기를 원했건만 / 夙昔名山願
늙도록 뜻을 이루지 못했네 / 到老意蕭蕭
생략함[節]

○ 소양도시(昭陽渡詩)는 다음과 같다
우마 도두에 서 있는데 / 牛馬立渡頭
사수 또한 무량히 흐르네 / 沙水復平安
그 경치 도읍에 가까와 / 氣色近都邑
넓은 들 거침이 없네 / 曠莽無險難
강물이 둘러 누대가 통창하고 / 江繞朱樓鬯
산이 멀어 들이 넓네 / 山遠平蕪寬
넘실거리는 배 춤추듯 유연컨만 / 便娟有柔態
추악한 그 모습 광란에 부끄럽네 / 麤惡羞狂瀾
생략함[節]

18일. 소양정(昭陽亭) 밑에 머물렀는데, 날이 새기 전에 조금씩 비가 내리더니 아침나절에도 계속 흐려 음산하다가 저녁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개었다. 약암(約菴)과 연(淵), 그리고 운질(尹姪)ㆍ한(韓)ㆍ우(禹)ㆍ오(吳) 제생이 모두 소양정에 올랐는데, 이 경지(李景祉) 광수(光壽)의 자이다. 가 정 중군(鄭中軍)과 현 파총(玄把摠)을 이끌고 주연을 열어 그 음악소리가 요란하였다.
나는 꼼짝않고 누워 참석하지 않고 이르기를,
“소양정이 이제 예음정(曀陰亭)이 되었으니 오를 수 없다.”
고 하였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호민(李好敏) 또한 함흥(咸興)ㆍ영흥(永興)의 제릉(諸陵)를 봉심(奉審)하고 돌아오다가 춘천을 거쳐 홍천으로 가면서 저녁에 소양정에서 쉬게 되었는데, 그 나팔소리와 기치의 위의가 자못 성대하였다.
나 혼자 술집에 앉아 있는데 늙은 향갑(鄕甲 풍헌(風憲)) 한 사람이 찾아왔다. 그에게 전 도호(都護) 승지(承旨) 이인보(李寅溥)이다. 가 왜 그리 빨리 돌아갔느냐고 물었더니 그의 말이,
“이제 춘주(春州)는 망했습니다. 비록 선정을 베푸는 이가 있다 하더라도 어찌할 수 없는 터이라 결국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창고가 다 비었기 때문에 갇히는 아전이 10여 명씩이나 되는데, 그 집을 적몰하려 해도 물건이 없고 그 일가를 찾아 물리려 해도 사람이 없습니다. 관장이 이를 장차 어찌하겠습니까. 또 군액(軍額)이 모두 빔으로써 향갑(鄕甲) 곧 풍헌(風憲)이다. 에게 독촉하여 전포(錢布)를 바치게 하는데, 한번 향갑을 지내면 패가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요한 백성으로서 향갑의 인망이 있는 자는 모두 도망쳐 없어지고 남아 있는 것은 오직 패랭이에 빗을 꽂은 미천한 사람뿐이니 관장이 이를 장차 어찌하겠습니까. 또 화전세(火田稅)를 전에는 부(府)에서 받아들였는데 지금은 훈국(訓局)의 관리가 나와 거둬들여 그 횡렴(橫斂)이 한정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산판이 드디어 묵게 되니 관장이 이를 장차 어찌하겠습니까. 또 분원(分院)에 백토(白土)를 실어가는 그 배의 선가가 6백 냥인데 모두 이포(吏逋 아전들이 사사로이 이용하여 축냄)를 이루어 해마다 부과를 궐함으로써 사옹원(司饔院)의 책망을 받게 됩니다. 관장이 이를 장차 어찌하겠습니까. 또 본 부(府)에는 아전이 본래 80여 명이나 되는데 근실한 자는 다 도망치고, 지금 30여 명이 부에 있을 뿐인데 모두 기아의 마귀가 되어 돈을 보나 곡식을 보나 모조리 삼켜 버립니다. 관장이 이를 장차 어찌하겠습니까. 지름 비록 공(龔)ㆍ황(黃)이 부임한다 하더라도 역시 벼슬을 버리고 돌아갈 것입니다.”
라고 한다. 내가 생각건대, 춘천은 우리나라의 성도(成都)이다. 공명(孔明)은 촉(蜀) 땅을 점거하고 회복을 도모하였으며, 명황(明皇)은 촉땅으로 파천하여 위기를 모면하였다. 춘천 역시 국가에서 필히 보호해야 할 땅인데 지금 이와 같이 패망하였으니 아!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다시 불러들여 안정시키자면 6~7년 동안이 아니고는 안 될 것인데, 지금 또한 아침에 제수하면 저녁에 옮기게 되었으니, 아! 이를 장차 어찌할 것인가.

19일. 정자 아래에 머물렀는데 일기가 쾌청하였다. 약암(約菴)과 한(韓)ㆍ우(禹)ㆍ오(吳) 세 사람은 청평산(淸平山)에 들어가 폭포를 보고 저녁때 돌아왔으며, 연아(淵兒)는 샘밭[泉田]에 가서 참봉(參奉) 이목(李楘)과 여러 이씨(李氏)를 방문하였다. 그리고 윤 유청(尹唯靑)에게 대림(大林)을 데리고 도정촌(陶井村) 최씨(崔氏) 집으로 가게 하여 저녁때 연아(淵兒)와 그곳에서 희합하여 납징례(納徵禮)를 행하게 하였다. 나만이 홀로 머물러 있었는데 이 경지(李景祉)가 같이 있어 주었다. 내가 약암(約菴)에게,
“기락각(幾落閣)은 포복천(匍匐遷)인데 농암(農巖)은 이를 부복천(扶服遷)이라 하였다. 부복(扶服)은 곧 포복(匍匐)이다. 잔도(棧道)가 매우 위태하여 사람들이 모두 기어서 지나가는데, 그것을 방언으로 바꾸어 해석하면 기(幾)는 포복(匍匐)이요, 낙이(落伊)는 출(出)이니 기어서 나가는 것[匍匐而出]을 이름이다. 중간에 석굴이 있는데 옛날에는 길이 이 석굴을 통하였기 때문에 기어서 나갔던 것이다. 나는 ‘곧 추락할 것 같다.[幾乎墮落]’고 해서 기락각(幾落閣)이라고 썼다. 옛날에 절도사(節度使) 이격(李格)은 소를 타고 이곳을 지나갔는데 그대도 소를 타고 지나갈 수 있겠는가?"
하니, 약암의 대답이,
“아니다. 나는 감히 그리할 수 없다.”
고 하였다.

○ 경진년 봄에 지은 기락각시(幾落閣詩)는 다음과 같다.
깊은 협중에 해가 뜨니 / 絶峽破積陰
새벽 노을 강에 비쳐 붉네 / 晨霞照江赤
내려다보니 깊은 못이요 / 高臨不測淵
올려다보니 구를 듯한 바위일세 / 仰蒙將落石
서울에서 보면 이것이 북문이라 / 名都此北門
엄히 잠긴 빗장 철벽과 같네 / 嚴扃鎖鐵壁
가벼운 배 공연히 버려두고 / 輕舟漫自棄
짚신을 신고 산객을 따라가네 / 躡屩隨山客
넋이 떨려 감히 나아가지 못하는데 / 魄慄不敢前
새로운 진흙에 호랑이 자국이 있네 / 新泥印虎跡
수석은 본래 청한한 것이건만 / 水石本閒事
그 누구의 핍박한 바 되었던고 / 顧爲誰所迫
본성이 좋은 것을 어떻게 억제하랴 / 性好那可節
고라니 떼 저 늪속을 즐기네 / 麋麈悅林澤
훌륭하다 이자현이여 / 賢哉李資玄
깊은 산 이곳에 자적했네 / 深山自此適

○ 청평사(淸平寺)에서 자면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생략함[節]
청평거사 진락공은 / 淸平居士眞樂公
꽃다운 이름 사책에 빛나네 / 史冊流徽光煜煜
생략함[節]
초도가 얼음산임을 이에 알았고 / 懸知椒塗氷作山
소장 안 바람이 촛불 끌 것을 미리 보았네 / 逆覩蕭牆風滅燭
칠귀수 풀어 던지고 삼베옷 걸쳤으며 / 解七貴綬穿麻衣
오후청을 싫다 하고 나물국을 먹었네 / 吐五侯鯖茹香蓛
궁중에선 까마귀가 떡을 쫀다 들었건만 / 已聞宮裏烏啄餠
어찌하여 산중에서 죽만 끊이고 있단 말가 / 何如山中缹作粥
생략함[節]
조그만 티는 백옥을 가리우지 못하고 / 微瑕未足掩白珩
흙 속의 벌레는 황곡에 비교하기 어렵네 / 壤蟲要難比黃鵠
이자현(李資玄)이 탐하고 인색한 흠이 있었기 때문에 퇴계(退溪) 이 선생(李先生)의 시에 이르기를 "조그마한 흠을 가지고 백옥을 가리우지 말라,[莫把微疵掩白珩]"고 하였다.

○ 관폭시(觀瀑詩)는 다음과 같다.
일백 번 변하여 고이고 흐르는 형세 / 百變渟流勢
그 근원은 한 줄기 샘이었네 / 由來一道泉
달릴 때야 누가 그를 잡으랴 / 走時誰迫汝
머무를 때엔 문득 소연해지네 / 留處忽蕭然
서글픈 낙화는 함께 가지만 / 怊悵花俱往
웅장한 돌은 옮기지 못하네 / 雄豪石不遷
알랴 이 산을 벗어나는 그날 / 須知出山日
넓게 퍼져 평천을 이루리 / 浩淼作平川

또 다음과 같다.
날카로움은 산을 뚫고 들어가려 하고 / 銳欲穿山入
요란함은 나무 흔들어 시원하네 / 喧能撼樹涼

○ 청평동구(淸平洞口)를 나오면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소 타고 돌길 십리를 돌아 / 石逕騎牛十里廻
묵은 등나무 헤치자 동천이 열리네 / 壽藤披豁洞天開
맑은 강 저 일렁이는 물은 / 澄江一面漣漪水
청평산 폭포를 이루어 왔네 / 曾作淸平瀑布來

약암(約菴)의 관폭시(觀瀑詩)는 다음과 같다.
한 가닥 폭포수 몇 봉우리나 압도했나 / 一道飛泉倒幾峯
긴 바람 소리 성긴 송림 울리네 / 長風送韻入踈松
싸늘해진 의복 산비인가 놀라고 / 衣巾颯爽驚山雨
온갖 소리 울려나 청평사 종 화답한다. / 律呂琮錚和寺鍾
허리엔 흐르는 비단 묶은 듯 비껴 흩어지고 / 腰束流紈斜欲迸
입술엔 옥액을 머금은 듯 내려 찧네 / 脣含玉液下仍舂
당시의 진락공이 응당 이것 인연하였으리 / 當時眞樂應緣此
한 굽이 맑은 물에 만첩청산일세 / 一曲澄泓翠萬重

20일. 맑음. 약암(約菴) 등과 함께 소양정(昭陽亭)에 올라 여러 사람들의 시를 써서 건 다음, 정자 아래에 배를 띄우고 맑은 물 위를 소요하였는데, 현생(玄生)이 좋은 술 한 병을 보내왔다.
○ 해가 질 무렵에 복마(僕馬)가 비로소 도정(陶井)으로부터 돌아왔다. 드디어 약암 등 여러 사람과 함께 곡운(谷雲)으로 떠나는데, 한(韓)ㆍ우(禹)ㆍ오(吳) 제생은 피곤하여 따를 수 없었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다.

매월당(梅月堂) 김 시습(金時習)의 시는 다음과 같다.
새가 나는 밖에는 하늘이 다하고 / 鳥外天將盡
읊조리는 자리엔 감탄이 그치지 않네 / 吟邊恨不休
산은 대개 북쪽을 좇아 돌고 / 山多從北轉
강물은 스스로 서쪽을 향해 흐르네 / 江自向西流
기러기는 평원한 모래톱에 내리고 / 鴈下沙汀遠
배는 그윽한 옛 언덕으로 돌아오네 / 舟回古岸幽
어느 때 세상만사 모두 잊어버리고 / 何時抛世網
흥겨운 마음으로 이곳에 다시 노닐꼬 / 乘興此重遊

○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시는 다음과 같다
삼월 소양강 강 위에 선 누각 / 三月昭陽江上樓
누각 앞 풍경 노닐기에 좋아 / 樓前形勝最堪游
땅 트이고 하늘 높으니 등각에 비길 만하고 / 地逈天高擬滕閣
물 맑고 모래 희니 기주와도 같네 / 渚淸沙百似夔州
살구꽃 지고 복사꽃 시들어 / 杏花已落桃花老
왕손 돌아오지 않아라 방초의 시름일레 / 王孫未歸芳草愁
술 깨어 기대어서 휘파람 길게 불제 / 酒醒倚柱發長嘯
서산에 지는 해가 우두에 비치네 / 西山落日射牛頭

○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의 호)의 시는 다음과 같다.
산사에서 돌아올 땐 마음이 섭섭터니 / 山寺歸來意悵然
누각 앞에 이르자 눈이 환히 열리네 / 眼明還是此樓前
난간엔 언제나 햇살이 비껴 들고 / 闌干今古橫斜日
돛대는 이리저리 강물을 따라가네 / 舟楫東西閱逝川
맥국의 가을빛 벼가 들에 가득하고 / 貊國秋容禾滿野
우촌의 저녁 나무에 연기 나네 / 牛村晩景樹生煙
맑은 강에 명작의 마땅함을 알았으나 / 澄江最覺宜佳句
어찌하면 소사처럼 고운 시구 읊을꼬 / 安得詩如小謝姸

○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의 호)의 시는 다음과 같다.
소양강 위에 높다란 누각 하나 / 昭陽江上有高樓
우리 조부 오셔서 노닐 만하다 하셨네 / 吾祖來臨曰可游
금대의 요지라 한남 땅에는 없고 / 襟帶將無漢南地
아름다운 풍경 패서를 압도하네 / 風流欲倒浿西州
노는 고기 즐거우니 발과 기둥 흔들리고 / 簾楹搖蕩游魚樂
지나는 기러기 수심은 아득한 모래톱일세 / 沙渚微茫過鴈愁
북쪽 바라보니 아득히 여운 이는데 / 北望迢迢生遠韻
푸른 아지랑이 경운(궁성) 머리에 떴네 / 靑嵐浮出慶雲頭

○ 동주(東州) 이민구(李敏求)의 시는 다음과 같다.
강 서리고 산 열려 정주가 나타나니 / 江盤峽坼見汀洲
평야는 아득한데 천지는 가을일세 / 平埜茫茫天地秋
높은 누각 낮은 산록에 걸터앉고 / 忽得危樓跨短麓
우뚝한 언덕 긴 강물을 굽어보네 / 高臨絶岸俯長流
뜰앞 가는 물 언제 멈춘 적 있던가 / 堦前浙水何曾住
난간 밖의 뭇산들 뜨고자 하네 / 檻外群山盡欲浮
날 저문 타향이라 올라 관망하며 한하건만 / 落日殊方登眺恨
갈대 물가 목욕하는 해오라긴 수심을 모르네 / 蒹葭浴鷺不知愁

○ 유재(游齋) 이현석(李玄錫)의 시는 다음과 같다.
별계의 풍경이 십주와 같은데 / 別界風煙近十洲
뱃길과 들빛 모두 가을철에 마땅하네 / 船洄野望摠宜秋
산은 맥국을 둘러 하늘을 찌를 듯 솟고 / 山圍貊國攙天聳
물은 금강에서 발원하여 바다를 향해 흐르네 / 水自金剛學海流
햇빛 띤 찬 까마귀 아스라이 애처롭고 / 帶日寒鴉憐影遠
난간 앞 지나는 가벼운 익주(鷁舟) 마름과 함께 떠 있네 / 過欄輕鷁等萍浮
거문고와 술 겨를 많아 강만이 고요하니 / 琴尊多暇江蠻靜
읊조리는 흥취 유연하여 수심 따위 관계없네 / 吟興悠然不管愁

○ 도암(陶菴) 이재(李縡)의 시는 다음과 같다.
정월에 소양정 위를 지나게 되었나니 / 正月昭陽亭上行
석옹이 떠난 후 감히 함부로 논평하네 / 石翁之後敢容評
멀리 연기 성긴 마을 사람 하나 가는데 / 遙村煙闊一人去
지는 해 찬 모래에 쌍학이 우네 / 落日沙寒雙鶴鳴
산의 눈 강의 얼음 한층 더 청절하고 / 山雪江氷更淸絶
하늘 높고 땅 멀어 분명함을 알겠네 / 天高地逈覺分明
말하지 말게나 이른봄보다야 늦은 봄이 좋다고 / 休言春晩勝春早
담담한 곳에서 진미가 나는 법이라네 / 眞味方從淡處生

○ 상국(相國) 조재호(趙載浩)의 시는 다음과 같다.
모래빛 솔안개 둘이 서로 배회하는 데 / 沙光松翠兩徘徊
원세 열린 곳 정자 하나 우뚝하네 / 亭在其間遠勢開
들은 맥국의 옛터 둘러 손바닥처럼 드러나고 / 野繞貊墟如掌出
강물은 인협을 따라 옷깃처럼 돌아드네 / 江從麟峽似襟回
가을들엔 마을 소 외로이 점쳐 있고 / 秋蕪孤點村牛細
해 저문 물가엔 기러기떼 울음소리 슬프네 / 晩渚群號客鴈哀
가무의 즐거운 연회 머무를 수 없으니 / 歌管初筵淹不得
그림 난간 비낀 해가 돌아가길 재촉하네 / 畵欄斜日故相催

○ 경진년 봄에 내가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어부가 수원을 찾아 동천으로 들어가니 / 漁子尋源入洞天
붉은 누각이 만정봉 앞에 날아드네 / 朱樓飛出幔亭前
궁ㆍ유의 할거는 혼연히 흔적이 없어졌고 / 弓劉割據渾無跡
한ㆍ맥의 싸움은 끝내 가련하게 되었네 / 韓貊交爭竟可憐
우수산 옛밭엔 봄풀이 아스라하고 / 牛首古田春草遠
인제 흐르는 물엔 낙화가 어여쁘네 / 麟蹄流水落花姸
사롱과 수불 어떻게 이어갈꼬 / 紗籠袖拂嗟何補
물가 버드나무 석양에 홀로 배를 푸네 / 汀柳斜陽獨解船
조위(曹魏) 정시(正始) 연간에 낙랑 태수(樂浪太守) 유무(劉茂)와 대방 태수(帶方太守) 궁준(弓遵)이 바다를 건너와 점령, 북쪽으로 고구려에 대항하고 남쪽으로 진한(辰韓)을 공격하여 진한을 빼앗아 입국하였는데, 이때 낙랑의 근거지가 실제 춘천에 있었다.

○ 약암(約菴)의 시는 다음과 같다.
그림 같은 강산에 높은 누각이 있어 / 江山如畵有高樓
맥국 옛터에 먼곳 손이 노니네 / 貊國遺墟客遠游
옛날 온조가 회군하던 곳 그 어디든고 / 溫祚回軍昔何地
팽오가 공격해 온 곳이 바로 이 고을일세 / 彭吳穿峽卽斯州
겹관문 싸안으니 험난함을 알겠고 / 重關拱抱方知險
비옥한 들 넓으니 걱정 잊을 수 있네 / 沃野平寬可滌愁
이 절승한 곳에 올라 굽어보니 / 最是登臨奇絶處
석양의 마을 연기 우두에 일어나네 / 村煙落日起牛頭

맥국에 대한 변증[貊辨]은 다음과 같다.
춘천(春川)은 맥국(貊國)이 아니다. 맥(貊)이라는 글자가 이(夷)ㆍ적(狄)ㆍ융(戎)ㆍ만(蠻)과 같이 정동(正東)을 이(夷), 정북을 적(狄), 동북을 맥(貊), 동남을 민(閩)이라 한다. 《주례(周禮)》에 보인다. 세상에 이국(夷國)도 없고 적국(狄國)도 없는데 어찌 유독 맥국(貊國)이 있겠는가. 맥에는 많은 종류가 있어 예맥(濊貊)ㆍ양맥(兩貊)ㆍ소수맥(小水貊)ㆍ구려맥(句麗貊)의 각각 같지 않은 것이, 마치 조이(鳥夷)ㆍ내이(萊夷), 적적(赤狄)ㆍ백적(白狄)과 같은 것이라 맥은 나라로 이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중국의 동북쪽에 있는데, 춘천은 중국의 정동에 있으니 더욱 맥이라 이름하기에 불가한 것이다. 그런데 특별히 맥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 한(漢)ㆍ위(魏)의 즈음에 낙랑(樂浪)이 남하(南下)하여 춘천으로 옮긴 후, 혹은 한(漢)의 관리가 파견되어 지키기도 하고 혹은 토추(土酋)가 빼앗아 점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낙랑의 근본은 평양(平壤)에 있었고 평양은 끝내 구려(句麗)에게 패망하였는데, 그 구려의 종족이 본래 맥과 더불어 혼합되었기 때문에 백제(百濟)ㆍ남한(南韓) 사람들이 다같이 낙랑을 가리켜 맥인이라 불렀으니, 그 근본은 평양으로부터 왔고 평양이 당시 구려맥(句麗貊)이 되었기 때문이다. 가탐(賈耽)의 《군국지(郡國志)》와 김부식(金富軾)의 백제사(百濟史)에서 그 그릇된 점을 분별해 밝히지 않고 낙랑으로 맥인을 만들어 놓았는데, 지금까지 그 그릇된 점을 그대로 답습하여 벗어날 줄 모른다. 맹자(孟子)의 말에 ‘맥에는 오곡(五穀)이 나지 못하고 오직 기장만이 난다.’고 하였는데 춘천이 그러한가? 《한서(漢書)》 조조전(鼂錯傳)에는 이르기를 ‘호맥(胡貊)의 땅에는 나무껍질이 세 치나 되고 얼음 두께가 6척이나 된다.’고 하였는데 춘천이 그런한가? 강릉(江陵)이 예(濊)가 아닌 이유가 또한 이와 같다. 예인(濊人)은 남하하여 가섭원(迦葉原)으로 옮겼는데, 가섭원은 하서량(河西良)이다. 그러므로 강릉은 예가 아니다.

○ 경진년 봄에 지은 우수주시(牛首州詩)는 다음과 같다.
생략함[절(節)]
아아, 이 낙랑성을 / 嗟玆樂浪城
그릇 전하여 맥향이라 부르네 / 冒名云貊鄕
나무 껍질은 한 치도 되지 않고 / 木皮不能寸
밭마다엔 오곡이 무성하네 / 五穀連阡長
따뜻한 지기(地氣)에 발육이 빨라서 / 地暄發生早
초여름에 벌써 나뭇잎 짙푸르네 / 首夏葉已蒼
뻐꾹새 소리 나무마다 요란하고 / 鳴鳩樹樹喧
꾀꼬리는 아름답게 노래를 부르네 / 黃鳥弄柔簧
남한이 옛날에 순무한 적이 있고 / 南韓昔巡撫
한사가 건너던 내 지금은 흔적 없네 / 漢使川無梁
돌에 새긴 것이 오랫동안 매몰되어 / 勒石久埋沒
여운 끝내 없어지고 말았네 우두산(牛頭山)에 팽(彭)ㆍ오(吳)와 통래한 비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 薰聲竟微茫
이는 대개 춘천이 맥국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 것이다.

나는 양이(兩李)와 함께 10리 거리에 있는 수운담(水雲潭)을 지난 다음 5리를 더 가서 보통점(普通店)에 이르렀는데, 학연(學淵)과 윤유청(尹唯靑)이 도정(陶井)으로부터 와서 만났다. 서북쪽의 여러 산세를 바라보니 울창하게 두루 얽혀 있고, 그 푸른 아지랑이 산 그림자에다가 향풍을 일으키는 옷자락은 표표히 진세(塵世)를 벗어난 기분이었다. 강을 낀 등로(磴路)를 보통천(普通遷)이라 부르는데 그리 험하지는 않았다. 10리를 가서 문암서원(文巖書院)에 이르러 유숙하였는데, 서원은 깊은 산중에 있어 평생에 서울 양반을 보지 못하는 터라 자못 분주히 접대하며 존경하는 기색이 있었다. 두 재실에 불을 넣어 온돌이 몹시 따스하였다.
○ 퇴계(退溪) 이 선생(李先生)을 주벽으로 모셨는데, 선생의 외가가 춘천에 있어 어렸을 때 노닐던 유적이 있어서다. 좌측에는 지퇴당(知退堂) 이공(李公) 휘는 정형(廷馨)이다. 을 배향하였으니 만년에 춘천에 퇴거(退居)하였기 때문이요, 우측에는 용주(龍洲) 조공(趙公) 경(絅) 을 배향하였으니 명환(名宦)으로 문화의 유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튿날 아침에 연(淵)이 경지(景祉)ㆍ유청(唯靑)과 함께 예알(禮謁)하였다.

21일. 일찍 출발하였는데, 날씨가 흐려 비가 오려 하다가 늦게야 개었다. 서원에서 한 굽이를 돌아 침목령(梣木嶺) 무파래고개(巫巴來古介) 을 넘자 바로 침목천(梣木遷)을 만났는데, 까마득하게 강물이 내려다보이는 것이 마치 기락각(幾落閣)과 같이 위태로웠다. 특별히 예조 판서(禮曹判書)가 새로 지나감으로써 편편하게 길을 잘 닦아 발을 붙일 수 있었다. 10리를 행하여 인람역(仁嵐驛)을 지난 다음 한 굽이를 돌아 강물 서쪽 산너머를 보니 황량한 정자가 하나 있었다. 이는 곧 절도사(節度使) 이천로(李天老)의 별장(別莊)으로서 지암정자(芝巖亭子)라고 하는 것이다. 5리를 더 가서 모진도(牟津渡)에 도착, 나루를 건너니 이곳이 원당점(員塘店)이다. 북쪽으로 산마루를 바라보니 그 위에 조그마한 촌락이 잇는데, 이는 곧 이경중(李敬仲) 익(益) 의 묘촌(墓村)이다. 3리를 걸어 마령(馬嶺)을 넘었는데, 몹시 험준하였다. 역시 예조 판서의 덕택으로 다행스럽게도 말이 지치지 않았다. 5리를 걸어 서오촌(鉏鋙村)에 이르렀는데, 그 동쪽은 곧 이 병사(李兵使) 형제의 전장(田莊)이다. 서북쪽으로부터 산을 돌아나오는 물이 있는데, 바로 곡운(谷雲)의 하류이다. 여기서 낭천(狼川)의 큰길을 버리고 소로로 들었는데, 몇 리 사이가 험난하더니 한 모퉁이의 산을 돌아나오자 다시 평탄해졌다. 7리를 걸어 이곡촌(梨谷村)을 지났는데 마을 형태가 몹시 밝아 보이고 유명한 배나무 1백여 주가 있었다. 5리를 더 걸어 사외창(史外倉)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었다.
○ 이날 관에서 양식을 방출하였는데 수십여 명의 산중 백성들이 모였다. 창고의 곡식이 많이 축나 허위로 양식을 방출하고 그 결점을 미봉하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 여기서부터는 모두가 처음 보는 지역이다. 비로소 새로 시(詩)를 지었다.

문암서원(文巖書院)에서 자면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깊은 산 장수하는 곳 / 嶽麓藏修地
맑은 강물이 앞을 감돈다 / 滄江繞案回
재실은 함께 공부할 만한데 / 齋堪書共讀
선비들은 술 때문에 자주 찾아오네 / 儒以注頻來
풀은 우거져 돌층계를 덮었고 / 碧草深堦石
붉은 격자창은 재 속에 숨었네 / 紅欞隱竈灰
무슨 연유로 산중 스승이 되었는고 / 何由作山長
은둔하여 영재를 기르기 위해서네 / 遯跡育英才

○ 침목령(梣木嶺)을 넘으면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고갯길 빙빙 돌아가도 되돌아오는 듯 / 嶺路盤紆往似廻
산머리 벌린 암혈 부는 바람 맞이하네 / 上頭呀穴受風來
대마디 같은 층층 여울 만날 때마다 걱정인데 / 愁臨竹節層層瀨
요란한 물소리 금강산 만폭일레 / 猶作金山萬瀑豗

○ 지암정(芝巖亭)을 지나면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푸른 시냇가에 지암정자 세웠으니 / 芝巖亭子碧溪潯
남전에 감춘 자취 만년 계책 깊었네 / 屛跡藍田晩計深
지금도 말한다네 청평산 아랫길에 / 尙說淸平山下路
황소 타고 옛 송림 지나간 일
/ 黃牛叱過古松林

○ 모진도(牟津渡)에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모진도 어구가 바로 원당인데 / 牟津渡口是員塘
사공은 삿대를 버티고 손님맞이에 분주하네 / 小豎撑篙接客忙
바라보니 인가는 산마루에 붙여 있어 / 試看人煙依絶巘
풍경이 옛날 본 봉명방과 흡사하네 / 風謠恰似鳳鳴坊 전에 곡산(谷山)의 봉명방(鳳鳴坊)을 보았는데, 백성들의 마을이 모두 산마루에 있었다.

○ 저찰촌(鉏札村)을 지나면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험악한 암석이 문득 열리니 / 矗石喦磝忽打開
진흙 논배미가 시내를 끼고 돌았네 / 塗泥萬㽝來溪回
이랴이랴, 소모는 소리 봄물을 갈아대니 / 鳴犁札札耕春水
산봉우리 향하여 화전불 놓으러 가지 않네 / 不向峯頭放火來

○ 이곡(梨谷)을 지나면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이운 곡구에 작은 내 흐르고 / 梨雲谷口小溪長
입 속에서 녹는 특산 배나무 두어 줄 / 絶品含消立數行
길가 찔레꽃 눈앞에 가득한데 / 一路蒺藜花滿眼
가는 바람 술통 스쳐 주향을 풍기네 / 細風吹撲酒槽香

○ 창촌(倉村)에서 잠깐 쉬면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작은 창고 쇠잔한 마을 기색이 처량한데 / 小廥殘村氣色涼
모를 심는 시절이라 으레 양식 분배하네 / 挿秧時節例頒糧
하늘에 가득한 소산기 뒤 능히 알리오 / 彌天蕭氣誰能辨
도호당 안에서는 도지개춤 흥겹네 / 都護堂中舞檠長
《열하일기(熱河日記)》에 "소산현(蕭山縣)의 아전들이 글장난을 잘하고 법문을 잘 농간질 하였는데, 왕 곡정(王鵠摀)은 모기령(毛奇齡)이 소산기가 있다고 하였다.”고 하였다.

오각(午刻 12시경)이 되어서야 출발하였는데, 나는 늙은 암소를 타고 약암(約菴)은 조그마한 가마를 타고 연(淵)은 나귀를 타고 경지(景祉)와 유청(唯靑)은 모두 말을 탔다. 화우령(畵牛嶺)을 넘어 하나의 냇물을 건넜는데 바로 곡운(谷雲)의 하류이다. 또 산령(蒜嶺)을 넘어 제 1곡(第一曲)인 방화계(傍花溪)에서 잠시 쉬고 곧바로 달려 곡운서원(谷雲書院)에 이르렀다. 여기서 방향을 바꾸어 사내창(史內倉)에 가서 잤다.
○ 화우령을 넘으면서 서쪽을 바라보니, 뭇 산봉우리가 군집하고 연기와 아지랑이 낀 산빛이 짙게 푸르른데 벌써 곡운 외부(外府)가 보인다. 몇 리를 더 가서 십감촌(十甘村) 마을 앞에 이르니, 절벽 위에 낙락장송이 나열해 섰고, 굽이치는 냇물을 내려다보니 맑은 물빛이 눈부시었다. 또 하나의 산모퉁이를 돌아 서쪽 산기슭을 보니 층암절벽이 깎아 세운 듯하고 폭포가 흘러내렸는데 마치 소낙비가 오는 때 같이 자못 볼 만한 경관이었다. 또 하나의 산모퉁이를 돌아 산령을 만났는데, 영세(嶺勢)가 몹시 험준하고 산봉우리가 마치 꽃잎처럼 생겨 상봉(上峰)이 되었다. 그 이름은 과연 헛된 것이 아니었다. 그 산마루에 오르니 곡운구곡(谷雲九曲)이 눈앞에 삼열(森列)하였다. 좌우의 산세는 마치 견아(犬牙)처럼 짜여들고 옷깃처럼 교접하여 그 주밀한 형세가 빈틈이 없었다. 과연 하늘이 만든 명구(名區)로서 특별한 하나의 고안을 완성한 것이라 우연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 산봉(蒜峯)은 곧 곡운의 외관(外關)이다. 이 영을 넘자 물은 한층 더 맑고 돌은 한층 더 희고 산은 한층 더 높고 초목은 한층 더 울창하다. 고개 아래에 내려와 얼마 안 가서 문득 비스듬히 누운 커다란 반석이 보이는데 거기에 비류(飛流)하는 물결이 허옇게 거품을 일으키고 있었다. 물어보니 바로 제1곡의 방화계(傍花溪)였다. 흔연히 말에서 내려 가까이 보니 기기 괴괴한 형태를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쳐다보니 해는 이미 산봉우리에 걸려 있고 호랑이와 곰이 울어댔다. 오래 머무를 수 없어 드디어 모두 말에 올랐다. 명일에 구곡(九曲)을 자세히 보기로 의논하고 청류격단(淸流激湍)을 지날 때마다 문득 말을 달려 지나게 하였으니, 이는 혹시라도 절경에 이끌려 날이 어두울 때까지 지체될까 염려되어서였다. 들길이 몹시 험악하였다. 때로는 나무로 잔도를 만들어 평탄하다가도 조금 가면 다시 또 험악하곤 하였다. 2ㆍ3곡 이상으로부터는 험한 돌길이 점점 평탄해지고 산세도 점차 낮아졌으며, 5ㆍ6곡 이상에 이르러서는 산줄기가 끝나고 뽕밭과 삼[麻]밭들이 있었다. 다시 1곡을 돌아 서원(書院)에 이르렀는데 서원의 형색이 몹시 쓸쓸하였다. 또 다시 돌아 창촌(倉村)을 향하여 명월계(明月溪)를 건너서 우편으로 꺾어 드니, 이른바 융의연(隆義淵)ㆍ첩석대(疊石臺)가 있었는데 모두 길가에 있어 아름다운 경관도 없었거니와 또한 날이 어두워지므로 말을 달려 지나쳐 버렸다.

○ 화우령을 넘으면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숲과 풀 어우러져 분별할 수 없는데 / 疊綠稠靑漭不分
막대머리 한 고개에 또 구름 비껴있네 / 杖頭一嶺又橫雲
문득 도흥경을 생각케 하니 / 令人却憶陶弘景
금롱보다 풍초를 좋아한 줄 알겠네
/ 豐草金籠識所欣

○ 산령을 넘으면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한 겹산에 어울려 또 한겹산 달리는 ‘속안으로 외람되이 간산함을 미워하여 [生憎俗眼猥 着山]’라 하였다 / 一重山合一重山
하늘이 선계를 위해 철관을 튼튼히 했네 / 天爲仙區壯鐵關
정신차려 이곳을 지나가긴 하지만 / 只以銳心過此去
어떻게 돌아갈지 까마득하네 / 不知何計得回還

○ 동구(洞口)로 들어가면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산으로 접어들면서 굽이굽이 맑으니 / 自入山來曲曲淸
무어라 부를 수 없거니와 모두 이름이 없네 / 不勝名矣盡無名
속진에 막힌 심장 깨끗이 씻기우고 / 塵脾俗肺澄淘了
또다시 꾀꼬리 소리에 귀를 깨치고 / 又聽黃黧砭耳聲

○ 또 다음과 같다.
바람고개 몸을 솟구쳐 지나가니 / 風磴㩳身度
높은 봉우리는 이마 눌러 비껴 있네 / 危峯壓頂斜
시냇가엔 곰이 꺾은 나무 비껴 있고 / 溪橫熊折木
길가엔 사슴이 씹던 꽃잎 떨어졌네 / 徑落鹿銜花
고달픈 땅이지만 맑은 정신나고 / 苦境生淸想
천작의 경관에 자주 차탄을 발하네 / 天工發絫嗟
이래로 광달한 선비 / 由來曠達士
늙어 죽도록 집 생각 아니하네 / 終老不懷家

○ 약암의 시는 다음과 같다.
돌길이 강 서쪽에 비꼈는데 비록 구곡(九曲)이라곤 하지만 길이 한쪽 가로나 있어 한번도 냇물을 건너지 않는다. / 磴路橫斜著水西
녹음 속의 꾀꼬리 맘놓고 울어대네 / 綠陰幽鳥盡情啼
옆 사람이 웃으며 곰 지난 곳 가리키니 / 傍人笑指能熊過跡
꺾인 나뭇가지 시내에 쳐박혀 있네 / 折木杈枒倒碧溪

○ 또 다음과 같다.
마늘봉 뒤에 곡운이 열렸는데 / 蒜峯以後谷雲開
구곡의 선경 거쳐 왔네 / 九曲仙莊領略來
보건대 조물주가 그 기교를 다해 / 試着化工勞意匠
수석을 갈아 신기한 작품을 만들었네 / 磨礱水石有神裁

22일. 약간 흐렸다가 오정이 지나서야 개었다. 일찍 출발하여 서원에 도착하여 여러분들의 화상을 본 다음 차례로 구곡을 보았다. 제1곡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고 저녁 때 두 고개를 넘어 외창(外倉)으로 돌아와 잤다.
○ 서원은 사액(賜額)되지 않은 곳으로, 곡운(谷雲) 김공(金公) 휘는 수증(壽增)이다. 이 주벽으로, 삼연(三淵 김창흡의 호) 김공(金公)이 좌배(左配), 명탄(明灘 성규헌(成揆憲)의 호) 성공(成公)이 우배로 앉았다. 또 그 왼편 재실에 두 분의 화상를 봉안하였는데 곡운과 삼연 두 분의 진영(眞影)이며, 오른편 재실에 또 두 본의 화상을 봉안하였는데 곧 제갈 무후(諸葛武侯)와 매월당(梅月堂) 김공(金公)의 진영이다. 또 궤속에 두 분의 화상을 간직하였는데 우암(尤菴 송시열의 호) 송 문정공(宋文正公)과 곡운(谷雲) 의 아들 성천공(成川公)의 진영이다. 서루(書樓)에 또 공자(孔子)의 화상을 간직하였는데, 동지(東紙 한지)에 먹으로 그린 것으로서 마치 어린아이들의 붓장난 같아 머리를 말[斗]보다 크게 그렸으니 이는 곧 하목해구(河目海口)를 형상한 것이나, 당장 없애 버려야지 그대로 둘 것이 못되었다. 그 나머지의 모든 화상은 약암(約菴)의 예알(禮謁)로 인해 같이 따라 들어가 상세히 보았는데,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은 머리는 깎고 수염만 있으며 쓴 것은 조그마한 삿갓으로서 겨우 이마를 가릴 정도였고 갓끈은 염주(念珠) 같았다. 곡운은 우아하고 후중한 체구에 사모를 쓰고
검은 도포를 입어 조정 대신의 기상이 있었다. 우암(尤菴)은 74세 때의 진영(眞影)으로서 수발(鬚髮)이 모두 희고 아랫입술은 선명하게 붉었으며 치아가 없으므로 턱은 짧았고 눈빛은 광채가 나서 1천 명을 제압할 만한 기상이 있었다. 삼연은 청화정숙(淸和整肅)하며 복건에 검은 띠를 띠고 있어 산림 처사(山林處士)의 기상이 있었다. 제갈 무후(諸葛武侯)는 삼각 수염에 이마는 뾰족하고 빰은 활등같이 그려 마치 불화(佛畫)의 명부상(冥府像) 과 같았다. 이것은 당장 없애 버려야지 그대로 둘 것이 못된다. 이곳에 와룡담(臥龍潭)이 있다 해서 무후의 진영을 걸어 놓았으나 아무런 의의도 없다. 이는 모두가 비천한 습속으로서 과감히 없애야 한다.

서원 안에 곡운 화첩(谷雲畵帖)이 있는데 9곡의 천석(泉石)을 그린 것으로서 그린 이는 조세걸 (曺世傑)이었고, 제어(題語)는 곡운이 지었다. 무이도가(武夷櫂歌)의 운(韻)을 곡운이 제창하고 여러 자질(子姪)들이 각각 1곡씩 읊은 것인데 모두가 그의 수필(手筆)이다.

○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절경이라 성령 수양 알맞은데 / 絶境端宜養性靈
만년의 심적은 맑은 풍월 즐길 뿐이네 / 暮年心跡喜雙淸
백운산 동쪽 화산 북쪽이라 / 白雲東畔華山北
굽이굽이 시내소리 귀에 가득 들려오네 임신년 봄에 운옹(雲翁) / 曲曲溪流滿耳聲

○ 일곡이라, 좁은 동천 배도 용납하기 어려운데 / 一曲難容入洞船
복사꽃 피고지는 운천이 막혀 있네 / 桃花開落隔雲川
숲 깊고 길 끊겨 찾아오는 이 드문데 / 林深路絶來人少
어느 곳 선가에 개 짖고 연기이나 / 何處仙家有吠煙
운옹(雲翁)○ 1곡은 방화계(傍花溪)인데 서오촌(鉏鋙村)으로부터 서쪽으로 돌아 오리곡(梧里谷)을 지나 하나의 시내를 건너는데, 이것이 곧 곡운동구(谷雲洞口)이다 산현(蒜峴)을 넘으면 산수가 두루 돌고 수석이 맑고 장엄하니 이것을 방화계라 한다.

○ 이곡이라, 우뚝한 산 옥봉을 이뤘는데 / 二曲峻嶒玉作峯
흰 구름 누른 잎 가을 경치 이루었네 / 白雲黃葉映秋容
돌다리 가노라니 신선집이 가까워라 / 行行石棧仙居近
알랴 소란한 진세 천만중 막혔음을 / 已覺塵喧隔萬重
아들 창국(昌國)○ 2곡은 청옥협(靑玉峽)으로서 화계(花溪)로부터 5리를 지나 하나의 산을 돌면 석잔(石棧)이 옆으로 비껴 있어 좌측으로 위험한 시내를 내려다보게 되고 우측으로 층층이 높이 솟은 봉우리를 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청옥협이다.

○ 삼곡이라, 신선 자취는 밤배가 아득한데 / 三曲仙蹤杳夜船
빈 누대에 송월만이 스스로 천년일레 / 空臺松月自千年
청한한 정취 초연히 깨쳤나니 / 超然會得淸寒趣
흰 돌 나는 여울 너무도 아름답네 / 素石飛湍絶可憐
종자(從子) 창집(昌集) ○ 3곡운 신녀협(神女峽)인데, 옥협(玉峽)을 지나 약간 벌어지는 듯 이 시냇물을 따라가면 여기에 이르게 된다, 옛날 이름은 기정(妓亭)이다. 그래서 내가 신녀협(神女峽)이라고 하였다. 물위에 매월당(梅月堂)의 유적이 있다.

○ 사곡이라. 푸른 바위 의지해 내를 내려볼제 / 四曲川觀倚翠巖
가까이 솔 그림자 삼삼히 떨어지네 / 近人松影落毿毿
분류하는 물거품 그칠 때가 없어 / 奔潨濺沫無時歇
언제나 구름기운 못 위에 넘실대네 / 雲氣尋常漲一潭
종자(從子) 창협(昌協) ○ 4곡은 백운담(白雲潭)인데, 여협(女峽)으로부터 작은 시내를 건너 한 언덕을 돌아서 시내를 따라가면 여기에 이르게 된다.

○ 오곡이라, 시내 소리 깊은 밤에 더 좋아 / 五曲溪聲宜夜深
패옥처럼 쟁쟁하여 먼 숲을 울리네 / 鏘然玉佩響遙林
송문을 벗어나니 서리 언덕 고요한데 / 松門步出霜厓靜
둥근달 외로운 거문고 세상 밖의 심경일세 / 圓月孤琴世外心
종자(從子) 창흡(昌翕) ○ 5곡은 명옥뢰(鳴玉瀨)로서 운담(雲潭) 수백 보 위에 있다. 산밑에 두어 집 가복(家僕)이 살고 있다.

○ 육곡이라, 그윽한 집 푸른 물굽이 베개 삼아 / 六曲幽居枕綠灣
일천 자 깊은 못 그림자 솔문을 비치네 / 深潭千尺映松關
잠긴 용 풍운의 일 관여하지 않고 / 潛龍不管風雲事
깊은 물속에 오래 누워 스스로 한가롭네 / 長臥波心自在閒
아들 창직(昌直) ○ 6곡은 와룡담(臥龍潭)인데 명옥뢰(鳴玉瀨)와 서로 접해 있다. 버들숲가에 물이 쌓여 맑고 깊다. 서쪽으로 농수정(籠水亭)을 바라보면 은연히 송림(松林) 사이에 비친다.

○ 칠곡이라, 평평한 못 얕은 여울 연했는데 / 七曲平潭連淺灘
맑게 이는 잔물결 달을 향해 볼만하네 / 淸連堪向月中看
산도 비어 고요한 밤 지나는 사람없고 / 山空夜靜無人度
소나무 그림자만이 물속에 들어 차갑네 / 唯有長松倒影寒
종자(從子) 창업(昌業) ○ 7곡은 명월계(明月溪)인데 영당(影堂) 앞에 있다.

○ 팔곡이라, 맑은 못 넓게도 열렸건만 / 八谷淸淵漠漠開
이따금 구름 그림자 홀로 오르내리네 / 時將雲影獨沿洄
참 근원 지척이라 맑고 밝음 유별나니 / 眞源咫尺澄明別
오가는 피라미떼 앉아서도 보이누나 / 座見儵魚自往來
종자(從子) 창즙(昌緝) ○ 8곡은 융의연(隆義淵)인데, 영당(影堂) 서쪽에 있다.

○ 구곡이라, 암벽이 층층한데 / 九曲層巖更嶄然
겹벽이 대를 이뤄 맑은 내에 비치네 / 臺成重壁映淸川
흐르는 여울물 솔바람과 급하니 / 飛湍暮與松風急
그 울림소리 동천에 가득 요란하네 / 靈籟嘈嘈滿洞天
외손(外孫) 홍 유인(洪有人) ○ 9곡은 첩석대(疊石臺)이다. 또 서쪽으로 돌아가게 되면 좌우에 암석이 기괴하고 물이 그 사이로 쏟아져 내린다. 조금 올라가면 조그마한 탑이 있고, 그 가에 길이 있으니 백운령(白雲嶺)으로 향하게 된다.

○ 또 농수정(籠水亭)에 써 이르기를,
“청람산(靑嵐山) 한 가닥이 구불구불하게 뻗어내려 지세가 평탄하고 물은 만궁형(彎弓形)으로 돌았는데, 우리 집이 그 사이에 있어 화악산(華嶽山)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시냇가에 붙여 농수정(籠水亭)을 지었는데 동쪽으로 와룡담(臥龍潭)을 바라보게 된다.”
하였다.
○ 농암(農巖)이 부지암기(不知菴記)를 지어 이르기를,
“농수정(籠水亭)으로부터 남쪽으로 4~5리를 가 화악산(華嶽山) 깊은 골짜기 속에 들어가서 나무를 베어내고 언덕을 평평하게 하여 그곳에 초막을 짓고 사니, 산수가 첩첩하여 사람들이 사는 곳과는 더욱 멀다. 이것을 일러 부지암이라 한다.”
하였다.
○ 또 삼일정기(三一亭記)에는 이르기를,
“정자가 곡운(谷雲)의 화음동(華陰洞)에 있으니 우리 백부께서 지으신 것이다. 어찌하여 삼일정이라 이름하였는가? 기둥은 셋이고 대들보가 하나였기 때문이다.”
하였다.
○ 원노(院奴)가 말하기를,
“화음동(華陰洞)에 복희팔괘(伏羲八卦)와 문왕팔괘(文王八卦)를 새긴 돌이 있다.”
고 하니, 이것이 바로 삼일정에 있다. 바빠서 가 볼 수 없으니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열수(洌水) 정약용(丁若鏞)은 다음과 같이 기(記)를 쓴다.
첩석대(疊石臺)는 원(院)의 서쪽 1리가 되는 곳에 있다. 물속에 3~4개의 선돌이 있어 그 크기가 마치 비석만큼씩이나 한데, 두어 겹의 횡문(橫紋)이 있고 위에는 사람이 앉을 수가 없다. 좌우는 편편한 밭과 큰길로서 그늘을 이룰 만한 수목이 없으니, 이곳은 아마도 은사(隱士)를 수용하지 못할 것 같다.
○ 융의연(隆義淵)은 그 하류 수백 보 위치에 있다. 위에는 화전(火田)이 있고 곁에는 보리밭이 둘려 있어 기괴한 암석도 없고 그늘을 이룰 만한 수목도 없다. 다만 시냇물이 흐르다가 정체한 곳일 뿐인데, 무엇 때문에 구곡(九曲)에 끼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 명월계(明月溪)는 원촌(院村) 앞에 있다. 우마견시(牛馬犬豕)의 오염과 티끌의 잡된 것의 그 어지러움과 더러움을 형언할 수 없으며, 대교(大橋)가 걸쳐 있음으로써 수석이 오염되어 있으니, 이곳 역시 구곡에 넣기에는 불가한 곳이다.
○ 대개 와룡담(臥龍潭) 이상으로부터는 산세가 비속하고 물의 흐름이 또한 세차지 못하다. 그리고 뽕밭, 삼[麻]밭, 느릅나무, 버들 등의 그늘과 빽빽한 밭 도랑과 가옥들은 이미 인간의 속물이다. 다만 당시 정자가 여기에 있었고 이 노인이 늘 멀리 노닐 수 없어 보통 여기에 발걸음을 많이 했기 때문에 이상의 3곡이 외람되이 9곡의 수를 채우게 된 것이다. 주자(朱子)의 무의도가(武夷櫂歌)도 7곡(七曲)ㆍ8곡(八曲)에 이르러서는 아름다운 경치가 없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7곡의 벽탄창병(碧灘蒼屛)과 8곡의 고루기암(鼓樓寄巖)이 오히려 취할 만한 것이 있었고, 9곡에 이르러서는 상마우로(桑麻雨露)의 별다른 인간 세계가 있다고 하였다. 이 사례로 미루어 보면 의당 와룡담(臥龍潭) 으로 제9곡을 삼아 평천(平川)의 입시(入始)로 여길 것이요, 그 정자나 마을 이상은 아마도 다시 취하는 것이 마땅치 않을 것 같다.

또 다음과 같이 기(記)를 쓴다.
○ 와룡담(臥龍潭)은 정자 터[亭墟]의 남쪽에 있는데, 언덕 아래 석벽(石壁)과 창병(蒼屛)이 없다. 그 주위는 1백 보에 불과하고 그 깊이 또한 물밑이 검도록 깊어 두려움을 느끼게 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역시 아름답기는 하다.
○ 명옥뢰(鳴玉瀨)는 곧 모여 있던 담수(潭水)가 쏟아져 내리는 곳이다. 반석이 넓게 깔리고 놀치는 물결이 구렁으로 달림으로써 옥설(玉雪)이 함께 일어나고 풍뢰(風雷)가 서로 부딪혀 진동한다. 여울물로서는 극히 아름다운 경관이다.
○ 백운담(白雲潭)은 마땅히 9곡 중 제1의 기관(奇觀)이 되어야 한다. 반석이 넓게 깔려 1천여 명이 앉을 수 있고 돌빛은 순전한 청색에 아주 깨끗하다. 구렁으로 쏟아져 흐르는 물이 기괴하고 웅덩이에서 솟아 넘치는 기운이 언제나 흰 구름 같다. 북쪽 암벽 석면에 ‘백운담(白雲潭)’ 세 자를 새겼는데 초서로 되어 있다. 그리고 또 귀인(貴人)들의 이름을 새긴 것이 많다.
○ 벽의만(碧漪灣)이란 내가 지은 이름이다. 백운담 아래 1리 되는 곳에 있는데, 두 언덕의 장송(長松)들은 암벽을 의지해 섰고 맑고 긴 물줄기에 넓은 녹색 수면을 이루었다. 아래 화계(花溪)로부터 위로 용담(龍潭)에 이르기까지 이처럼 평평한 물이 없으니 이 또한 조물주의 기교라, 꼭 비류 급단(飛流急湍)이라야 선택에 드는 것이 아니다. 여기는 고기잡이도 할 수 있고 배도 띄울 수 있는 곳이라 조그마한 배 한 척을 마련해 두고 풍월(風月)을 맞아 즐기기에 알맞다. 만약 9곡에서 이것이 없었다면 기변(奇變)을 이루지 못하였을 것이다.
○ 신녀협(神女峽)은 벽의만(碧漪灣) 동쪽 한 화살 사정거리에 있어 상ㆍ하 두 웅덩이를 이루었는데, 위에 있는 웅덩이는 명옥뢰(鳴玉瀨)와 견줄 만하고 아래 있는 웅덩이는 너무나 기괴하여 형언할 수 없다. 양쪽의 언덕이 깎아지른 벽립(壁立)의 협곡이 아닌데도 협(峽)이라고 이른 것은, 대개 그 웅덩이의 형체가 마치 두 언덕으로서 협(峽)을 이룬 것 같기 때문이다. 우레소리가 나고 눈처럼 흰 물결이 용솟음치며 돌 색깔 또한 빛나 반들반들하다. 과연 절묘한 구경거리이다.
○ 청옥담(靑玉潭) 담(潭)은 본래는 협(峽)으로 썼다. 또 신녀협 밑에 있어 맑은 못의 검푸른 그 물빛이 마치 청옥과 같으며, 북쪽 언덕의 넓다란 반석이 노닐 만하다. 그 물이 깊기로는 의당 9곡 중에 첫째가 될 것이며, 또한 배를 띄울 만하다.
○ 망단기(望斷碕)는 내가 선택한 곳이다. 청옥담 밑으로 산모퉁이 하나를 돌면 바람을 일으키는 여울과 눈처럼 허옇게 일어나는 물이 있어 참으로 즐길 만하며, 넓다란 반석이 펑퍼짐하게 깔려 수백 명이 앉을 만하다. 그 위에 또 벽력암(霹靂巖)이 있는데, 높고 기이하여 과연 놀라운 경관이다. 이곳은 본명이 망단기(望斷碕)인데, 등로(磴路)가 여기에 이르러 더욱 험하여 앞으로 나아갈 길이 끊어져 있음을 이른 말이다. 내가 약암(約菴) 등 여러 사람과 이곳에서 발을 씻었다.
○ 설벽와(雪壁渦)는 내가 지은 이름이다. 망단기를 따라 동쪽으로 가다가 한 모퉁이의 산을 돌면 바람을 일으키는 급류가 허연 물거품을 이루어 놀랍고도 즐길 만하다. 북쪽 언덕에 병풍처럼 두른 석벽이 옥설(玉雪)처럼 희고 석함(石陷)은 마치 절구통과 같아 설구와(雪臼渦)라 이름할 수도 있고 또 설벽와(雪壁渦)라 이름할 수도 있다. 또 그 밑으로 한 굽이를 돌면 여울물이 허연 물방울을 튀기면서 흘러 아끼며 즐길 만하다. 또 평평히 흐르는 물속에는 거북처럼 생긴 돌이 있어 남쪽으로 머리를 두고 북쪽으로 꼬리를 두었으며, 물가에 흰 반석이 넓게 깔려 있어 1백여 명이 앉을 수 있다. 내가 또 그것을 이름하여 영귀연(靈龜淵)이라 하였다.
○ 방화계(傍化溪)는 영귀연 아래 3~4 굽이를 지나 있다. 이는 곧 이를테면 악곡(樂曲)을 끝맺는 마지막 연주처인데, 저쪽으로부터 오는 사람은 악곡의 처음을 삼을 것이다. 북쪽 언덕에 큰 반석이 넓게 깔려 수백 명이 앉을 만하고, 그 아래층에 또 하나의 큰 반석이 있어 색깔은 희고 수백 명이 앉을 만하다. 남쪽 언덕은 허옇게 보이는데 모두가 풍림석벽(風林石壁)으로서 시냇물은 그 돌 위에서부터 흘러내려 절벽으로 달린다. 그러므로 천둥소리가 일어나고 허연 물이 용솟음쳐 공포를 느끼고 탄성을 발하게 하니, 이곳은 곧 백운담과 백중(伯仲)이 된다. 그 위는 맑은 못을 이루어 몹시 깊고 또 하나의 와폭(臥瀑)이 천둥소리를 내면서 이 못으로 달리며, 그 위에 또 하나의 급한 여울이 쏟아져 흐른다. 이는 바로 3곡이 합쳐 1곡이 된 것이다.

이날 절승한 경관을 당할 때마다 반드시 말에서 내려 물가에 앉아서 혹은 술을 부어 서로 권하기도 하고 혹은 담배를 서로 권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양치질도 하고 발도 씻으면서 오르내렸으니, 이는 대개 특별히 선택한 세 곳으로 7ㆍ8ㆍ9곡의 탈락을 보충하려는 생각에서였다. 방화계(傍花溪) 위에 도착한 후 의논하여 개정하기를 ‘1곡은 망화계(網花溪), 이 땅이 마치 도원동구(桃源洞口)와 같기 때문에 방(傍)을 고쳐 망(網)으로 하였다. 2곡은 설벽와(雪壁渦), 새로 첨가한 것이다. 3곡은 망단기(望斷碕), 혹은 2곡을 영귀연(靈龜淵), 3곡을 설벽와(雪壁渦)라 하고 망단기는 취하지 않았다. 4곡은 청옥담(靑玉潭), 협(峽)을 고쳐 담(潭)으로 하였는데, 본래는 제 2곡이다. 5곡은 신녀회(神女匯), 협(峽)을 고쳐 회(匯)로 하였는데, 본래는 제 3곡이다. 6곡은 벽의만(碧漪灣) 새로 첨가하였다. 7곡은 백운담(白雲潭), 본래는 제 4곡이다. 8곡은 명옥뢰(鳴玉瀨), 본래는 제 5곡이다. 9곡은 와룡담(臥龍潭), 본래는 제 6곡이다. 이라고 하였으니, 이제야 명실 상부하다 하겠다.
대개 방화계 위로부터 청옥협에 이르기까지 6~7리 사이는 굽이마다 기절(奇絶)한데도 모두 빼놓고 하나도 취하지 않았다. 그리고 백운담(白雲潭) 상은 소나 먹일 곳에 불과한데도 3ㆍ4ㆍ5ㆍ6곡이 속속 잇닿았으며, 7ㆍ8ㆍ9곡에 이르러서는 외람되이 화려한 선택에 끼게 된 것이다. 그러고 보니 마치 재덕을 갖추지 못한 귀척근신(貴戚近臣)이 함부로 공경(公卿)의 자리를 차지하고 초야에 묻혀 있는 자는 훌륭한 포부를 품고도 늙어죽도록 버림을 받는 것과 같아 결코 순리가 아니다. 그리하여 삼가 고쳐보기를 이와 같이 하였는데, 비록 경솔한 처사로서 두렵기는 하나 공의(公議)에 있어서는 또한 용서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 요약해 말하면, 곡운(谷雲)은 사방이 막힌 지역으로서 중간에 기름진 들이 열려 오곡이 잘 익는데 주위는 수십 리가 된다. 춘천(春川)으로부터 오는 길이 이처럼 험준하기로, 영평(永平) 길을 물어보니 그 험준한 것이 배나 더하다고 한다. 참으로 은자(隱者)가 거처할 곳이요 또 난세에 생명을 보전할 곳이다.

이날 의논하기를 ‘내창(內倉)과 외창(外倉)의 거리가 비록 30리 밖에 되지 않지만 절험(絶險)한 두 고개를 넘고 9곡의 기절한 경치를 보자면 하루를 소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고, 드디어 새옹 하나를 빌리고 쌀 한 전대를 싼 다음, 노복들이 먹을 밥과 말 먹일 콩을 모두 준비해 가지고 계류(溪流)를 따라 내려가다가 제 1곡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이때 마침 고기를 낚는 자가 있어 그에게 고기 한 꿰미를 사서 놀다가 저녁때가 되어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날은 기절한 경관을 탐색하고 응접하기에 겨를이 없어 시는 한 수도 짓지 못하였다.

23일. 맑음. 일찍 출발하여 서오촌(鉏鋙村)을 지나 문암서원(文巖書院)에서 점심을 먹고, 배를 타고 수운담(水雲潭)에 와서 다시 말을 타고 소양정(昭陽亭)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 마령(馬嶺)을 넘어 인람역(仁嵐驛) 앞에 이르니 몸이 피곤하고 뼈대가 쑤시었다. 멀리 바라보니 강중에 조그마한 배 세 척이 떠내려오고 있었다. 말 위에서 서로 돌아보고 이르기를,
“우리의 본의는 배를 타고 서오천(鉏鋙川)에 이르러 낭천(狼川) 근원을 엿보려 하였는데, 여울이 험악하여 오르기 어렵기 때문에 끝내 말을 타고 가게 된 것이다. 지금 저 배를 타고 낭천물에 뜨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는가?"
하고, 말을 빨리 달려 침목천(梣木遷)을 넘어 문암서원(文巖書院)에 이르러 종자(從者)로 하여금 배를 끌어대게 하였는데, 이른 다음에 보니 바로 가노(家奴) 용운(龍雲)의 배였다. 드디어 소아탄(小兒灘)에서 배에 올라 보통천(普通遷)을 지나는데 약간의 빗방울이 후둑후둑 떨어졌다. 빙빙 도는 파문은 수면에 퍼져나가고 연운(煙雲)이 아득하게 끼어 그 청원(淸遠) 경치는 자못 정신을 맑게 하였다. 물 서쪽에 큰 마을이 있으니 이는 곧 서하(西下) 최씨(崔氏)들이 사는 곳이다. 동쪽으로 수운담(水雲潭)에 정박하니, 이곳은 수륙(水陸) 상인들이 모여 드는 지역으로 들어가 보니 좋은 술과 아름답게 단장한 계집이 마치 충주(忠州)의 목계(木溪)와 같았다.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어 곧바로 말을 타고 정하(亭下)에 이르니 마치 집에 돌아온 기분이었다. 대림(大林)이 그 유모(乳母)와 함께 와서 만났다.

24일. 짙은 안개가 끼었다Ⰰ 진시(辰時)가 되어서야 비로소 걷혔다. 소양정 밑에서 배를 타고 마당포(麻當浦)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저녁에는 금허(金墟)에서 잤다.
○ 소양정 아래에서 출발하여 맑은 못 한 굽이를 돌아 병벽탄(洴澼灘)으로 내려왔다. 올라올 때에는 10여 명이 배를 끌어 올리던 곳을 순식간에 지난 것이다. 또 맑고 깊은 물 한 굽이를 지나 노고탄(老姑灘)으로 내려왔는데, 그 북쪽이 곧 서하평(西下平)이다. 또 몇 리의 맑고 깊은 물길로 곡장탄(曲匠灘)에 내려왔는데, 흰모래가 눈부시게 빛나고 그 동쪽에 죽전촌(竹田村) 40여 호가 있었다. 또 한 굽이를 돌아 아올탄(阿兀灘) 병탄(幷灘)이라 부르기도 한다. 으로 내려왔는데, 이는 바로 소양수(昭陽水)와 모진수(牟津水)가 서로 합류하는 곳으로서 지금까지 10리를 내려온 것이다.
○ 두 물이 합하여 담수(潭水)는 매우 깊다. 또 한 굽이를 떠내려가니 여기가 곧 신연도(新淵渡)이다. 새로 오는 부사(府使) 김희화(金熙華)가 오늘 부임하는데 이미 배에서 내려 가버렸다. 여기서부터 물결이 세차기는 하나 여울을 이루기까지는 못하였다. 또 한 굽이를 돌아 아자탄(啞者灘)에 내려오는데 쏜살처럼 지나가는데도 꽤 먼 거리였다. 삼악(三嶽)이 가까이 닥쳐옴에 뭇 산봉우리들이 언뜻언뜻 지나가 진정 상쾌하였다. 또 한 굽이를 떠서 내려가니 여기가 바로 우수탄(右手灘)이다. 배가 석문(石門) 밑을 지날 때 암벽을 쳐다보니 그 기괴하게 높이 선 것이 마치 사람을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또 한 굽이를 돌아 교탄(橋灘)으로 내려가니 여기가 바로 칠암촌(漆巖村) 앞으로서, 여기까지는 또 10리를 온 것이다.
○ 호로탄(葫蘆灘) 쇠오항(衰吾項)ㆍ학암탄(鶴巖灘)으로 내려가니 물길이 굽이쳐 북쪽에서 가다가 서쪽으로 꺾어져 현등협(懸燈峽)으로 내려가는데 그 길이는 10여 리나 되었고, 협(峽)이 다하자 동부(洞府)가 깊숙하여 미원(迷源)과 같고 골짜기 물들이 흘러 들어오니 바로 춘천의 남부이다. 또 서쪽으로 한번 돌아 종당촌(宗塘村)을 지나서 차석탄(磋石灘)으로 내려갔는데, 윗여울은 극히 얕았고 아랫여울은 자못 험악하였다. 정족탄(鼎足灘)으로 내려갔는데 검은 돌이 바둑돌처럼 널려 있고 물길은 그리 급하지 않았다. 마당촌(麻當村)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는데, 마을 북쪽에 골짜기가 있으니 이는 곧 석파령(席破嶺)으로 넘어가는 길이다. 여기까지는 또 20리를 온 것이다.

또 한 굽이를 떠내려와 안보(安保)의 큰 마을을 지나니, 물 서쪽에 있다. 김청성(金淸城) 집안의 선묘(先墓)가 있었다. 양쪽 언덕에는 송림(松林)이 울창하고 강물은 매우 얕아 나무꾼들이 도보로 건너다녔다. 또 10여 리를 내려가니 물 서쪽에 두 마을이 시냇물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위는 춘천(春川)에 속한 줄길(茁吉)이고, 아래는 가평(加平)에 속한 줄길(茁吉)인데, 글자로 풀이하면 줄(茁)은 방(錺)이 된다. 《문헌비고(文獻備考)》에 방천(錺遷)이라 하였다. 이곳이 경기(京畿)와 강원(江原)의 경계이다. 등로(磴路)가 몹시 길어 물 서쪽에 있다. 10여 리를 뻗쳤으니 이것이 이른바 초연대천(超然臺遷)이다. 등로의 초입에 작탄(鵲灘)이 있고 등로가 끝나는 곳에 곡갈탄(曲葛灘)이 있는데, 돌이 험하고 여울이 거세어 물결이 집채 같이 높았다. 우측으로 가평의 물을 지나니 그 동쪽은 석지산(石芝山)이다. 석지산에 이르기 전에 동쪽으로 벌어진 골짜기가 있어 그 속이 몹시 깊으니, 이를 장자곡(莊子谷)이라 하여 아직도 사람이 그 깊은 곳에 살고 있다. 또 한 굽이를 돌아 안반탄(安盤灘)으로 떠내려가니 그 동쪽은 바로 남이점(南怡苫)이다. 또 한 굽이를 돌아 염창탄(鹽倉灘)으로 내려가니, 그 아래 두 곳의 조그마한 여울이 있는데 모두 이름이 없다. 또 몇 리를 떠서 수원탄(戍原灘)으로 내려가니 그 동쪽이 바로 구곡(臼谷)이다. 방아올(方阿兀) 또 산 한 모퉁이를 돌아 금허촌(金墟村)에 이르러 잤다. 마당으로부터 금허(金墟)까지 30리이다. 이곳은 판서 이희갑(李羲甲)의 묘촌(墓村)이다.
○ 이날은 수로(水路)로 1백 20여 리를 행하였다.
곡갈탄을 내려가면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사공이 재촉하여 뱃머리를 돌리니 / 篙師催轉尾
여울물은 재촉하여 뱃머리를 흔들어대네 / 湍水戰風檣
돌 위의 달리는 물 따르기 어려운데 / 奔石狂難趁
나는 봉우리 아득히 숨네 / 飛峯杳已藏
익숙한 사공 솜씨 경탄을 하고 / 斡旋驚手熟
안전하게 떠가는 몸 기뻐하네 / 平泛喜身康
내리뻗은 저 지산빛 / 迤邐芝山色
석양빛 띠어 고웁네 / 娟娟帶夕陽

○ 또 대련(對聯) 한 귀는 다음과 같다.
외로운 나무 몸을 돌려 멀리 나그네 피하고 / 獨樹轉身遙避客
어여쁜 봉우리 목을 빼어 배를 엿보네 / 娟峯擢頸俯窺船
말이 각박한 것 같아서 이어 짓지 않았다.

○ 또 강촌(江村)에 자면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물에서 자는 것 일정한 곳이 없어 / 水宿無常處
배 매는 곳 바로 집이 되네 / 維舟卽有家
보리밭 사이 묵은 길로 들어가니 / 麥中荒徑入
느릅나무 아래 낮은 삽짝문 비꼈네 / 楡下短扉斜
개 짖는데 부엌에는 불이 빤하고 / 犬吠廚明火
누에 오르니 대자리엔 모래가 있네 / 蠶登簟有沙
무슨 이유로 속세를 떠나 / 何由去俗累
이처럼 생애를 보낼꼬 / 如是度生涯

25일. 맑음. 일찍 출발하여 10여 굽이를 지나 송의(松漪)의 반석에서 조반을 먹고, 굴운(窟雲)의 응암(鷹巖)에서 점심을 먹었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 부암(鳧巖) 아래 정박하였다.
금허(金墟)로부터 한 굽이 돌아 율현탄(栗峴灘)으로 내려가 유곡촌(柳谷村) 물 서쪽에 있다. 을 지났으니 여기는 장씨(張氏)들이 사는 마을이다. 복정곡(福亭谷)을 지나다가 그물질하는 어부를 보았는데 이들은 모두 귀족들이었다.
또 광탄(廣灘)ㆍ호로탄(葫盧灘) 쇠오항(衰吾項)으로 내려가니 약간의 여울이 졌다. 또 한 굽이를 내려가니 이곳은 정족탄(鼎足灘)으로서 물속에는 검은 돌이 개의 이빨처럼 박히었다. 또 한 굽이를 떠서 입천곡(笠川谷)을 지나니 녹효(綠驍)의 물이 흘러 들어간다. 그 밑은 바로 오장곡(鄔莊谷) 양근(楊根)의 북계이다. 으로서 유씨(柳氏)들이 살고 있다. 또 한 굽이를 돌아 배뢰탄(㾦癗灘) 두두래(斗斗來) 으로 내려가니 여울이 험하고도 길었다. 또 한 굽이를 떠서 엄인촌(閹人村) 물 서쪽에 있다. 을 거쳐 송의항(松漪港)에 배를 대고 반석 위에서 밥을 먹었다. 이상은 소양정(昭陽亭) 이하 24개의 여울이다.
○ 식사가 끝나자 뱃줄을 풀어 흑앵탄(黑櫻灘)《지지(地志》에는 화피탄(樺皮灘)이라 하였다. 으로 내려가니 물줄기는 만곡(彎曲)을 이루었고 물살이 몹시 거세었다. 자잠촌(紫岑村) 물 동쪽에 있다. 을 지나 병벽탄(洴澼灘) 발래탄(㗶唻灘)으로 내려가니 상ㆍ하 두 굽이가 있었다. 동쪽 물가 모래자갈밭 속에서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금을 채취해 일고 있었다. 주관자는 이씨(李氏)이다. 또 맑은 물길 몇 리를 내려가 호후판(虎吼阪) 물 서쪽에 있다.
을 지나고 고제탄(高梯灘)으로 내려가니 약간의 여울이 졌다. 이곳은 몇 리의 맑은 못을 이루었는데 그 서쪽이 고제천(高梯遷)이다. 사덕다리(沙德多里) 맑은 못이 끝나자 황공탄(惶恐灘)에 당도하였는데 배를 타고 지나기에는 위험스러웠다. 우측으로 청평(淸平) 물을 지나는데 마을 경치가 아름다웠다. 4~5인이 모래 속에서 금을 채취하고 있었다. 또 한 굽이를 내려 우분촌(牛墳村) 물 동쪽에 있다. 을 지나고, 또 한 굽이를 내려 원우천(遠于遷)을 거쳐 설곡촌(楔谷村) 물 동쪽에 있다. 을 지났는데, 이곳에는 노씨(盧氏)들이 산다. 또 약간 내려가 대동촌(大洞村)이 있으니 여기에는 남씨(南氏)들이 산다. 또 한 굽이를 돌아 장탄(長灘)으로 내려가 대성촌(大星村) 물 서쪽에 있다.ㆍ화랑촌(花郞村)을 지나는데, 밤나무숲이 몇 리에 뻗쳐 있다.
○ 또 한 굽이를 돌아 곡갈탄(曲葛灘)으로 내려가는데 물속에 숨은 바위가 많고 뱃길을 분별할 수 없어 사공이 몹시 두려워했다. 굴운역(窟雲驛) 양주(楊州)의 땅 자기막(瓷器幕)물 동쪽에 있다. 을 지났는데 이곳에는 이씨(李氏)들이 산다. 이덕사(李德師)의 일족이다. 응암(鷹巖) 또한 기이하여 볼 만하였다. 식사가 끝나자 출발하여 또 한 굽이를 돌아 검동촌(黔東村)물 서쪽에 있다. 을 거쳐서 남일원(南一園)에 이르고 마석뢰(磨石瀨)로 내려가는데 물살이 약간 거세었다. 수입촌(水入村) 무두리(蕪豆犂) 을 지나는데 마침 두 사람이 물가에 앉아 피리를 불고 거문고를 뜯고 있었다. 불러서 배에 같이 싣고 몇 리를 물 따라 내려가니 자못 적적한 심회를 달랠 만하였다. 신당촌(神堂村) 물 서쪽에 있다. 을 지나니 이곳은 바로 경성(京城)으로 통하는 대로(大路)이다. 공곡천(孔谷遷)을 지나 어시탄(魚腮灘)으로 내려가니 그 동쪽은 화죽곡(花竹谷)으로서 밤나무숲이 자못 길게 뻗쳐 있었다. 수죽곡(壽竹谷)을 지나 괘탄(卦灘)ㆍ유정탄(楡亭灘)으로 내려가 석담(石潭)물 동쪽에 있다ㆍ고랑촌(臯狼村)물 서쪽에 있다. 을 지나 십개탄(十開灘)상ㆍ하 두 굽이가 있다.ㆍ목탄(木灘)ㆍ대천탄(大千灘)으로 내려가서 초라담(鈔鑼潭)에 배를 대고 드디어 암하(巖下)에서 저녁을 먹은 다음 집으로 들어갔다.
○ 이날 수로로 1백 20리를 행하였다.
○ 송의(松漪) 이하가 또 12탄이다. 소양정 이하의 것을 모두 합치면 36탄이다. 그 이름을 상세히 기술하여 수로(水路)의 상고에 대비하였다.

금허(金墟)에서 새벽에 출발하면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밤 공기에 강물도 자라나서 / 夜氣江能養
거울 같이 맑은 물 잔잔하네 / 油然鏡面平
고요히 산빛을 머금어 푸르고 / 靜涵山色綠
멀리 새벽빛을 맞아 밝네 / 遠迓曙光明
엷은 안개 처음 피어올라 곱고 / 薄霧憐初起
가벼운 노 소리남이 애석하네 / 輕橈惜有聲
어떻게 지나가랴 저 동구 밖을 / 那堪洞天外
바람이 일어나 물살이 거세지네 / 風起怒濤生

26일 맑음. 전날 저녁에 약암(約菴)은 한(韓)ㆍ우(禹)ㆍ오(吳) 제생과 함께 배를 타고 서울로 가기 위하여 두미(斗尾)에 나아가 잤는데, 협구(峽口)에서 바람을 만나 일찍 출발하였다.

28일 맑음. 산수심원기(汕水尋源記)를 수정하여 이틀 만에 마쳤다.

5월 1일. 산행일기(汕行日記)를 수정하여 4일 만에 마쳤는데 김종(金碂)이 도왔다.

4일. 약간 흐렸다. 곡운구곡시(谷雲九曲詩)를 추화(追和)하였는데, 무이도가(武夷櫂歌)의 운(韻)을 차운하였다.

시는 다음과 같다.
티끌 세상 아무데도 심령 기를 것 없어 / 塵塗無物養心靈
유벽한 이곳에 맑은 수석 간직했네 / 僻處天藏水石淸
온갖 생각 얽힌 어지러운 곳에서 와 / 須從百慮交喧地
운산 폭포 소리에 깨우치네 / 醒記雲山瀑布聲

○ 망화계시(網花溪詩)는 다음과 같다.
일곡이라, 시냇가에 배를 매지 마라 / 一曲溪頭菓繁船
망화 비로소 달리는 내로 나가려 하네 / 網花纔肯放奔川
뉘 알리 백첩의 영원 안에 / 誰知百疊靈源內
푸른 산 기슭 곳곳에 연기가 날 줄을 / 靑起山根處處煙

○ 설벽와시(雪壁渦詩)는 다음과 같다.
이곡이라, 하늘을 나는 듯 아련한 산봉우리 / 二曲天飛縹緲峯
날아내리는 여울 위아래 다투어 단장하네 / 風湍上下競修容
구슬 병풍 옥벼랑 신선이 노닐던 곳 / 瑤屛玉壁仙游處
구름다리 건너놓아 한 겹이 막혔다네 / 已道雲梯隔一重

○ 망단기시(望斷碕詩)는 다음과 같다.
삼곡이라, 구당협은 배 물리치려 하는데 / 三曲瞿唐欲退船
봉산과 약수 도리어 아득해지네 / 蓬山弱水轉茫然
꼭대기길 바라보며 몇 사람이나 포기했나 / 幾人望斷碕頭路
머리 긁적이며 주저하는 모습 가련하기만 하네 / 搔首踟蹰也可憐

○ 청옥담시(靑玉潭詩)는 다음과 같다.
사곡이라, 맑은 물결 흰 바위 잠기는데 / 四曲澄泓浸雲巖
매달린 담쟁이잎이 간들간들 드리웠네 / 垂蘿高葉裊
여울물은 댓결같이 급히 흐름 기운 삼고 / 湍如竹節抽爲氣
돌은 연꽃 같이 빙 둘러 못 이루었네 / 石似蓮花拱作潭

○ 신녀회시(神女滙詩)는 다음과 같다.
오곡이라, 봄산은 깊고 또 깊은데 / 五曲春山深復深
냉랭한 패옥소리 빈 숲을 울리네 / 冷冷環佩響空林
이로부터 정수의 소원 이루리니 / 自從立得貞修願
인간의 온전치 못한 마음 백번이나 씻어주리 / 百洗人間未了心
이는 본래 기정(妓亭)인데 김공(金公)이 정녀협(貞女峽)이라 고쳤다.

○ 벽의만시(碧漪灣詩)는 다음과 같다.
육곡이라, 잔잔한 물결 굽이굽이 푸르른데 / 六曲平漪翠一灣
혼연한 그 강빛 가시 삽짝을 비치네 / 渾如江色映柴關
나는 여울 급한 폭포 그 무엇 때문인가 / 飛湍急瀑誠何事
징홍의 자재함에 미치지 못해서라네 / 不及澄泓自在閒

○ 백운담시(白雲潭詩)는 다음과 같다.
칠곡이라, 맑은 물 쏟아져 여울 되니 / 七曲琳琅瀉作灘
구름 피듯 눈 끓듯 사람의 눈을 끄네 / 崩雲沸雪要人看
신선 속인 관계없이 / 仙凡雅俗何須問
이곳에선 찬 기운 뼈에 사무치네 / 只是當時徹骨寒

○ 명옥뢰시(鳴玉瀨詩)는 다음과 같다.
팔곡이라, 반석이 비스듬히 깔렸는데 / 八曲盤陀側面開
옥을 굴리듯 맑은 물소리 변함없네 / 琮琤玉溜故潔洄
자연의 묘한 음악 지금 이와 같으니 / 勻天妙樂今如此
험한 길을 거쳐온 것 한스럽지 않네 / 不恨從前度險來

○ 와룡담시(臥龍潭詩)는 다음과 같다.
구곡이라, 신령한 소 물이 맑은데 / 九曲靈湫水湛然
상마 우거진 옛 마을 맑은 시내 끼었네 / 桑麻墟里帶晴川
늙은 용 인간에게 비 내릴 것 안 살피고 / 老龍不省人間雨
곡식 기를 시절에 깊은 잠만 자고 있네 / 春睡猶濃養麥天

[주D-001]화두시(和杜詩) : 두시(杜詩)를 차운한 것. 두보(杜甫)가 촉(蜀) 땅으로 들어갈 때 고시(古詩) 12수를 지었는데, 저자는 우리나라 춘천(春川)의 산수가 바로 성도(成都)와 같다고 여겨 두보의 〈입촉(入蜀)〉 고시(古詩)의 운을 차운하였다.
[주D-002]장지화가 …… 취미 : 장지화는 당(唐) 나라 금화(金華) 사람으로, 만년에 강호(江湖)에 살면서 자칭 연파조도(煙波釣徒)라고 하면서, 배[舟]를 타고 초ㆍ삽 사이를 왕래하며 자유롭게 지냈다.《唐書 卷196》
[주D-003]예원진이 …… 정취 : 예원진(원진은 예찬〈倪瓚〉의 자)은 원(元) 나라 무석(無錫) 사람으로 시(詩)에 능하고 산수화를 잘 그렸다. 만년에 청한각(淸閑閣)과 운림당(雲林堂)을 짓고 편주(扁舟)로 호ㆍ묘를 왕래하면서 한가롭게 지냈다.《明史 卷298》
[주D-004]마늘봉은 …… 좋다지만 :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말에 민보(民堡)의 땅은 마늘봉[蒜峯]보다 더 좋을 수 없다고 하였다.
[주D-005]유가만(柳家灣) : 고흥 유씨(高興柳氏)들이 세거(世居)함으로써 이루어진 소지명.
[주D-006]북소궁(北蘇宮) : 고려 공민왕이 축조한 것으로, 신계현(新溪縣) 동쪽 70리에 있다.
[주D-007]온조왕 …… 떠오르네 : 온조왕(溫祚王)이 18년 겨울 11월에 낙랑(樂浪)의 우두 산성(牛頭山城)을 치기 위해 구곡(臼谷)을 지나다가 대설(大雪)을 만나 회군(回軍)하였다.《三國史記》
[주D-008]왕조(王調)ㆍ최리(崔理) : 이들은 모두 한 광무(漢光武) 때 낙랑(樂浪)의 토추(土酋)였는데, 왕조는 태수(太守) 왕준(王遵)에게 피살되고, 최리는 구려(句麗)의 침략을 당하여 딸을 죽이고 항복하였다.《三國史記》
[주D-009]태수(太守) : 한(漢) 나라에서 파견된 왕준(王遵)을 가리킨다.
[주D-010]간교한 …… 염착(廉鑡) : 염사착(廉斯鑡)이라 하기도 한다. 왕망(王莽) 당시 염사착이 진한(辰韓)의 우거수(右渠帥)가 되어 낙랑의 토지와 미인을 탐하여 무리를 거느리고 침입하였다가 투항하였다. 당시 춘천은 한리(韓吏)가 와서 점거하였기 때문에 투항한 것이다.《魏略》
[주D-011]분원(分院) : 사옹원(司饔院)의 제작소. 관영(官營) 자기제조(磁器製造)를 맡아보던 곳으로 경기도 광주(廣州)에 설치하였다. 뒤에 분주원(分廚院)으로 개칭하였다.
[주D-012]공(龔)ㆍ황(黃) : 공수(龔遂)와 황패(黃霸)를 가리킨다. 이들은 모두 한(漢) 나라 때 순리(順吏)로서 치민리(治民吏)의 대표적 인물이다.
[주D-013]성도(成都) : 중국 사천성(四川省)에 있는 분지(盆地). 삼국(三國) 때 촉한(蜀漢)의 도읍지이다.
[주D-014]납징례(納徵禮) : 혼례 육례(婚禮六禮) 중 한 가지. 성혼(成婚)의 증표로 예물을 드리는 예.
[주D-015]이자현(李資玄) : 고려조의 문신ㆍ학자. 자는 진정(眞精). 호는 식암(息菴) 또는 청평 거사(淸平居士). 문과에 급제하고 대악서승(大樂署丞)에 있다가 사직하고 춘천 청평산(淸平山)에 들어가 문수원(文殊院)을 짓고 선학(禪學)을 연구했다. 시호는 진락(眞樂)이며 저서는 《선기어록(禪機語錄)》 남유시(南游詩) 등이 있다.
[주D-016]초도(椒塗)가 …… 알았고 : 초도(椒塗)는 곧 후비(后妃)를 가리키는 말이며, 얼음산은 믿을 수 없는 일을 비유한 것이다. 당시 이의(李顗)의 자매 3인은 문종(文宗)의 비(妃), 이호(李顥)의 딸은 선종(宣宗)의 비, 이자겸(李資謙)의 딸은 예종(睿宗)의 비가 되었는데, 이자현은 곧 이의의 아들이다. 이자현은 곧 이와 같은 척당의 혐의를 피하기 위해 입산수도(入山修道)한 것이다.《高麗史》
[주D-017]소장(蕭牆) …… 보았네 : 소장은 담장, 즉 집안을 이르는 말로서 당시 이자겸(李資謙)이 수금되고 그 지당(支黨)을 체포하자 임금은 화가 소장 안에서 일어났다고 하였다.《高麗史》
[주D-018]칠귀수(七貴綏) : 칠족은 외척을 포함한 귀족으로 한(漢) 나라에서 여(呂)ㆍ곽(霍)ㆍ상관(上官)ㆍ왕(王)ㆍ조(趙)ㆍ정(丁)ㆍ부(傅)를 쳤다. 수는 인수, 즉 고위의 벼슬자리를 가리킨다.
[주D-019]오후청(五侯鯖) : 오후는 공(公)ㆍ후(侯)ㆍ백(伯)ㆍ자(子)ㆍ남(男). 곧 오후가 먹는 진귀한 음식을 말한다.
[주D-020]궁중에선 …… 들었건만 : 당시 이자겸(李資謙)이 독병(毒餠)을 임금에게 먹여 시해하려 하였는데, 임금이 그 떡을 까마귀에게 시험하여 그 까마귀가 죽었던 사실이 있다.《高麗史》
[주D-021]등각(滕閣) : 중국 강서성(江西省)에 있는 등왕각(滕王閣)을 말한다. 등왕(滕王) 이원영(李元嬰)이 세우고 왕발(王勃)이 서(序)를 썼다.
[주D-022]기주(夔州) : 중국 강서성(江西省)에 있는 운양(雲陽)ㆍ무산(巫山) 등의 지역으로 경관이 절승한 곳이다.
[주D-023]우두(牛頭) : 춘천 서북쪽에 위치한 산 이름.
[주D-024]소사(小謝) : 송(宋) 나라 사영운(謝靈運)의 족제(族弟) 사혜련(謝惠連)을 가리킨다. 이들은 모두 당대 문장가였는데, 시(詩)에는 사혜련이 보다 능하였다고 한다.
[주D-025]조부 …… 하셨네 : 조부는 김상헌(金尙憲)을 가리킨다. 청음(淸陰) 김상헌의 〈소양정(昭陽亭)〉 시에, ‘누전에 보이는 풍경 가장 노닐만 하네.[樓前形勝最堪游]’라고 하였다. 청음은 삼연(三淵)에게 증조부가 된다.
[주D-026]금대의 …… 없고 : 험한 산세는 옷깃[襟]처럼 감싸고 강물은 띠[帶]처럼 둘린 요충지로서 한수(漢水) 남쪽에는 그런 지역이 없다는 뜻이다.
[주D-027]패서 : 평안도(平安道)를 가리킨다. 산수가 수려하기로 팔도에서 손꼽힌다.
[주D-028]십주(十洲) : 선인(仙人)이 산다고 하는 10개의 주. 곧 조주(祖洲)ㆍ영주(瀛洲)ㆍ현주(玄洲)ㆍ염주(炎洲)ㆍ장주(長洲)ㆍ원주(元洲)ㆍ유주(流洲)ㆍ생주(生洲)ㆍ봉린주(鳳麟洲)ㆍ취굴주(聚窟洲)를 말한다.
[주D-029]사롱과 수불 : 좋은 시로 대우받음을 말한다.《청상잡기(靑箱雜記)》에, “위야(魏野)가 구래공(寇萊公)과 함께 산사(山寺)에서 노닐며 시를 지었다. 후일 다시 함께 그곳에 가니 관직이 높은 구래공의 시는 벽사(碧紗)로 감싸 놓았는데 위야의 시는 그대로 두어 먼지가 가득하였다. 동행한 기녀가 소매로 먼지를 털어내자 위야는 ‘때때로 붉은 소매 털어 줌이 있다면,[但得時將紅袖拂] 벽사로 감싼 것 그보다도 낫겠네.[也應勝似碧紗籠]’라는 시를 지었다.” 하였다.
[주D-030]온조가 회군 : 앞의 주 204) 참조.
[주D-031]팽오(彭吳) : 팽오는 복성(複姓). 팽오가(彭吳賈)가 협중을 공격하여 조선(朝鮮)을 멸하고 창해군(滄海郡)을 설치하였다고 한다.《史記 平準書》
[주D-032]지금도 …… 일 : 청평산은 고려조의 문신 이자현(李資玄)이 은거한 곳으로서 그때의 일을 아직도 말함을 이름.
[주D-033]소산기 : 중국의 소산현(蕭山縣) 아전들이 농간질을 잘하므로 부정한 짓을 하는 아전들을 가리켜 소산기가 있다고 하였다.
[주D-034]도홍경(陶弘景)을 …… 알겠네 : 양(梁) 나라의 도홍경이 무제(武帝)의 부름을 받자, 소 두 마리를 그리되 한 마리는 풍성한 풀밭에 방목하는 형태로 그리고, 한 마리는 재갈을 물리고 머리를 얽어 사람에게 끌려가는 형태로 그려 무제에게 바쳐 출산(出山)하지 않을 뜻을 보였다. 화우령(畫牛嶺)이기에 인용한 고사.《梁書 卷51》
[주D-035]하목해구(河目海口) : 눈은 하수처럼 길고 입은 바다처럼 깊은 것으로, 공자(孔子)의 눈과 입이 이와 같았다고 한다.
[주D-036]목계(木溪) : 남한강 상류 충주읍(忠州邑) 서쪽 30리 지점에 위치한 나루터의 지명.
[주D-037]구당협(瞿唐峽) : 협곡의 이름. 중국 사천성(四川省)에 있는 절협(絶峽)으로서 두 언덕이 모두 현절하게 높아 이곳을 강관(江關)으로 삼았는데, 이곳 망단기(望斷碕)를 여기에 비유한 것이다.
[주D-038]봉산(蓬山)과 약수(弱水) : 모두 중국에 있는 산수로 구당협(瞿唐峽)과 연관되어 있다. 이곳 망단기의 주위 산수를 여기에 비유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