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별 족보 서문, 가전 등/청풍김씨 족보서문

청풍 김씨 족보(淸風金氏族譜)의 서문(스크랩)

아베베1 2011. 1. 22. 08:35

잠곡유고 제9권
 서(序)
청풍 김씨 족보(淸風金氏族譜)의 서문


사람치고 그 누가 일족(一族)이 없겠으며, 일족에게는 반드시 족보(族譜)가 있는 법이다. 일족이면서 족보가 없다면 사람들이 친한 이를 친히 대하는 의리를 알지 못하여 화목하게 도타이 지내는 마음이 생겨날 수가 없다. 이것이 우리 족보가 만들어진 이유이다.
우리 김씨는 신라(新羅)에서 나왔는데, 신라 시대에는 신라의 지역에 산재해 있었으니, 경주(慶州), 안동(安東), 상주(尙州), 강릉(江陵)의 김씨는 모두 같은 성씨이다. 그러나 윗세대에는 족보가 없어서 분파(分派)를 상세히 알 수가 없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우리 집안은 불행하게도 여러 차례 화란을 겪었으며, 또 병란(兵亂)을 만나 보첩(譜牒)을 잃어버렸다. 이에 비록 아주 가까운 친족이라도 서로 이름자를 알지 못하기에, 내가 항상 한스럽게 여겼다.
그래서 같은 성씨의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그의 지파(支派)를 물어 보고 그의 가보(家譜)를 보여 주기를 요구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수십 년 만에 겨우 완질(完帙)을 이룰 수가 있었다. 그런데 마침 중국으로 조회가는 사신의 행차가 있기에, 드디어 초고(草稿)를 싸들고 가 관소(館所)에 몇 달 동안 머물러 있으면서 한 질을 깨끗하게 베끼었다. 비록 상세히 다 갖추어 기록하지는 못하였지만, 역시 이 뒤로의 종족에 대해서는 알 수가 있을 것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동성(同姓)이야 참으로 족보에 올려야 하겠지만, 이성(異姓)에 이르러서는 어찌하여 상세히 기록한단 말인가?”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그것이 무슨 말이냐. 사람이 처음 태어날 적에는 단지 한 사람의 몸이었는데 점차 나뉘어져서 천만 인이 되었다. 처음부터 본다면 모두가 같은 배에서 태어난 것이다. 이 때문에 아들의 아들은 동성(同姓)의 손자가 되고, 딸의 아들은 이성(異姓)의 손자가 되는 것이다. 사람이 딸의 아들을 사랑하는 것과 아들의 아들을 사랑하는 것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비록 내외(內外)의 나뉘어짐이 있기는 하지만, 천속(天屬)의 은혜는 참으로 그 사이에 조금도 같고 다름이 없는 것이다. 선조(先祖)로부터 보면 지금의 이성 친족은 모두 선조가 같이 사랑하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내가 어찌 나의 자손만 유독 사랑하고 선조가 같이 사랑하던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친한 데로부터 소원한 데에 미치고, 가까운 데로부터 먼 데에 미치는 법이다. 비록 복(服)이 다하고 정(情)이 다하였다고는 하지만, 나의 선조의 자손이기는 매한가지다. 그런데 어찌 길 가는 사람을 보듯 하여 그의 출신에 대해서 까마득히 몰라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소명윤(蘇明允 명윤은 소순(蘇洵)의 자임)이 “우리의 족보를 보는 자는 효제(孝悌)의 마음이 샘솟듯이 솟아날 것이다.” 하였는데, 아, 좋은 말이로다. 나 역시 이에 대해 느껴지는 바가 있으니, 우리 족보에 이름이 들어 있는 사람들이 족보를 보고서 돈목(敦睦)한 마음이 생겨나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숭정(崇禎) 10년 정축(1637, 인조 15) 인일(人日)에 후손(後孫) 절충 장군(折衝將軍) 행 용양위부호군 지제교(行龍驤衛副護軍知製敎) 동지성절천추사(冬至聖節千秋使) 김육(金堉)은 황성(皇城)의 옥하관(玉河館)에서 삼가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