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지리 서원 전고 /지리고 백제

지리고(地理考) 8 백제(百濟) (스크랩)

아베베1 2011. 1. 29. 22:25

해동역사 속집 제8권
 지리고(地理考) 8
백제(百濟)



강역총론(疆域總論)
○ 백제는 본디 마한(馬韓)의 속국(屬國)으로, 시조인 온조(溫祚)가 한(漢)나라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기원전 18)에 한수(漢水) 북쪽에 나라를 세웠다.
《후한서(後漢書)》 한열전(韓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한(韓)에는 세 종족이 있다. 모두 78개 국이며, 백제는 그 가운데 한나라이다.
《주서(周書)》 백제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제의 선조는 대개 마한의 속국(屬國)이었다. 부여(夫餘)의 별종(別種) 가운데 구태(仇台)란 자가 처음에 대방(帶方)에 나라를 세웠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비류(沸流)와 온조 -두 사람은 바로 구태(仇台)의 아들이다.- 가 남쪽으로 와서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 -바로 삼각산(三角山)이다.- 에 올라가 살 만한 땅을 찾아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기를 원하자, 열 명의 신하가 간하기를, “이곳 하남(河南) 땅은 북쪽으로 한수(漢水)를 띠고 동쪽으로 고악(高嶽)에 의지하였으며, 남쪽으로 옥택(沃澤)을 바라보고 서쪽으로 대해(大海)를 격하였으니,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그러나 비류는 듣지 않고 미추홀(彌鄒忽) -지금의 인천(仁川)이다.- 로 돌아갔다. 그러자 온조는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을 정하였는데, 이때는 한나라 성제 홍가 3년이었다. -원주(原註)에 이르기를, “비류와 온조가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두 강을 건넜다.” 하였다.- ○ 8년(기원전 11)에 말갈(靺鞨)이 와서 위례성을 포위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온조가 고구려로부터 남쪽으로 가 패수 -대동강- 와 대수 -임진강- 두 강을 건너서 부아악에 올라가 살 만한 땅을 찾아보았으며, 13년(기원전 6)에 이르러서야 한수 남쪽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런즉 온조가 처음 도읍한 위례성은 마땅히 부아악의 남쪽, 한수의 북쪽에 있어야 하는바, 지금의 우리 한양(漢陽)이 바로 그 지역이다. 이곳은 본디 대방의 남쪽 경계 지역이므로 ‘처음에 대방에 나라를 세웠다.’고 한 것이다.
또 살펴보건대, 온조가 처음 부아악에 이르렀을 때 비류가 바닷가에 도읍하려고 하자 열 명의 신하가 하남에 도읍하기를 권하였다고 하는 것은, 사신(史臣)이 전후에 걸쳐서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건설한 일을 총체적으로 말한 것이지, 온조 1년에 곧바로 하남에 도읍하였다는 말은 아니다.
○ 그 뒤 14년(기원전 5)에 한수 남쪽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지금의 광주(廣州)가 바로 그 지역이다. 이 당시 사방 경계는, 북쪽으로 곡산(谷山)에서 남쪽으로 공주(公州)까지이고, 동쪽으로 춘천(春川)에서 서쪽으로 바다까지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온조왕 13년(기원전 6) -한나라 애제(哀帝) 1년- 5월에 왕이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우리나라의 동쪽에는 낙랑(樂浪)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서 영토를 침입해 와 형세가 편안하지 않으니 반드시 국도(國都)를 옮겨야 하겠다. 내가 어제 나아가 한수의 남쪽을 순시하면서 살펴보니 땅이 기름졌는바, 그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7월에 한산(漢山) 아래에 책(柵)을 세우고 하북위례성의 민호(民戶)를 옮겼다. 8월에 마한(馬韓)에 사신을 보내어 도읍을 옮긴 사실을 고하고 마침내 강역을 획정하였는데, 북쪽으로는 패하(浿河)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웅천(熊川)까지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이르고 동쪽으로는 주양(走壤)까지였다. ○ 14년 1월에 도읍을 옮겼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한산(漢山)은 지금의 광주이다. 온조가 낙랑과 말갈의 침입을 피하여 한수 남쪽으로 도읍을 옮겼으니, 이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도읍을 옮긴 것이 분명하다. 대개 위례(慰禮)라는 명칭은 한수 북쪽에 있을 때 비롯되었는데, 한수 남쪽으로 도읍을 옮기고서도 또 옛 칭호를 그대로 썼는바, 이것이 이른바 하남위례성이다. 우리나라 역사서에서는 직산(稷山)이 온조가 처음 도읍한 위례라고 하는데, 이것은 틀린 것이다. 직산은 부아악과의 거리가 200리나 되는데 어찌 능히 살 만한 곳인가를 살펴볼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북쪽의 적들을 피하려고 하면서 남쪽에서 북쪽으로 도읍을 옮긴다는 것은, 반드시 그럴 리가 없는 것이다.
또 살펴보건대, 동쪽에 낙랑이 있다고 한 것은, 평양의 낙랑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낙랑 남부도위(樂浪南部都尉)의 치소(治所)였던 소명현(昭明縣)을 가리키는 듯하다. 소명현은 지금의 춘천부(春川府)인바, -이에 대한 내용은 사군낙랑조(四郡樂浪條)에 나온다.- 과연 백제의 동쪽에 있었던 것이다. 말갈은 바로 불내예(不耐濊)의 족속이다. 웅천은 지금의 공주이고, 주양은 바로 춘천이다. 패수는 지금의 대동강 별원(別源)으로 곡산(谷山)의 경계 안에 있는 능성강(能成江)이라고 하는 강이다. 백제의 북쪽 경계가 매번 수곡(水谷) -신계(新溪)-, 십곡(十谷) -곡산(谷山)-, 장새(獐塞) -수안(遂安)- 등의 현에 그치는바, 패수가 능성강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당시에 낙랑에는 이미 중국에서 임명한 관원이 없었으므로 패수 남쪽 지역을 온조가 차지하여 할거하였던 것이다.
○ 후한(後漢) 이래로 한수 북쪽 지역이 다시 중국에 속하여 대방군(帶方郡)에 예속되었으며, 한나라와 위(魏)나라가 교체할 즈음에는 백제의 북쪽은 대방군과 접경을 이루고 있었다. -이에 대한 내용은 대방군조(帶方郡條)에 나온다.
○ 서진(西晉) 말기에는 백제가 북쪽으로 대방군의 지역을 병합하여 비로소 고구려와 국경을 접하였으며, 또 마한의 여러 나라를 병합하여 서쪽과 남쪽으로는 바다에 닿고 동쪽으로는 신라와 이웃하였다.
《문헌통고(文獻通考)》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제는 진(晉)나라 이후로 여러 나라를 병탄하여 마한의 옛 땅을 차지하였다.
《주서》 백제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제는, 동쪽 끝은 신라와 닿았고 북쪽은 고구려와 접하였으며, 서쪽과 남쪽은 모두 바다로 막혀 있다. 동서 간의 거리는 450리이고, 남북 간의 거리는 900여 리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진나라 건흥(建興) 연간에는 백제가 북쪽으로 대방군을 병탄하여 -이에 대한 내용은 대방군조(帶方郡條)에 나온다.- 북쪽 경계가 곡산, 신계 등지까지 이르러서 고구려와 경계를 접하였다. 이 당시에는 또 마한의 여러 나라를 병합하여 남쪽으로는 바닷가에 닿았는바, 대개 지금의 저탄(豬灘) 남쪽의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가 모두 백제의 관할지였던 것이다.
《송서(宋書)》 백제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제국은 본디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遼東)의 동쪽 1000여 리 되는 곳에 있었다. 그 뒤에 고구려가 요동을 침략하여 차지하였고, 백제가 요서(遼西)를 침략하여 차지하였다. 백제가 다스리는 곳을 진평군(晉平郡), 진평현(晉平縣)이라고 한다.
《양서(梁書)》 백제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제는 본디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에 있었는데, 진(晉)나라 때 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침략해 차지하였으며, 백제 역시 요서와 진평(晉平) 두 군의 지역을 차지하고는 스스로 백제군(百濟郡)을 설치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문헌통고》에도 이 조항을 인용하였는데, 자주(自注)에 이르기를, “요서와 진평은 당나라 때 유성(柳城)과 북평(北平) 사이에 있었다.”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만리나 되는 바다를 건너가 요서 지역의 몇 개 군을 차지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송서》에서 말한 것은 분명하게 잘못된 것이며, 《양서》 및 《문헌통고》의 기록은 한갓 《송서》의 기사만을 답습한 것인바, 따져 볼만한 것이 못 된다.
○ 진(晉)나라 간문제(簡文帝) 1년(371)에는 백제가 광주(廣州)에서 지금의 한양(漢陽)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이 당시에는 북쪽 경계가 신계(新溪) 등지에 이르렀다.
《삼국사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제본기에 이르기를, “근초고왕(近肖古王) 26년(371) -진나라 간문제 1년- 에 고구려가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오자 왕이 듣고는 패하(浿河) 강변에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급히 치니, 고구려 군사들이 패배하였다. 겨울에 왕이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고구려 왕이 전사하자, 왕이 군사를 이끌고 퇴각하였다. 도성을 한산(漢山)으로 옮겼다.” 하였다. ○ 지리지에 이르기를, “백제의 도읍인 위례성은 389년을 거친 뒤 근초고왕 때 이르러 고구려의 남평양을 공격해 취하고는 한성(漢城)으로 옮겨 도읍하였다.” 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소수림왕(小獸林王) 5년(375) -진나라 효무제(孝武帝) 3년- 에 백제의 수곡성(水谷城)을 공격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진사왕(辰斯王) 2년(386) -효무제 11년- 에 관방(關防)을 설치하였는데, 청목령(靑木嶺)에서 시작하여 북쪽으로는 팔곤성(八坤城), 서쪽으로는 바다에까지 이르렀다. ○ 아신왕(阿莘王) 4년(395) -효무제 20년- 에 왕이 고구려를 정벌하였는데, 한수를 건너가 청목령 아래에 주둔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한성은 지금의 우리나라 한양이다.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 지리지에 “본디 고구려의 남평양(南平壤)을 이른다.”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한성 등지는 온조왕 이전에는 낙랑에 속하였으며, 온조왕 이후로는 백제에 속하였다. 간혹 대방군에 예속되기는 하였으나 잃었다가도 곧바로 수복하였는데, 어느 겨를에 고구려의 지역이 될 수 있었겠는가. 수곡성은 지금의 신계현(新溪縣)이다. 청목령은 분명히 한수의 북쪽에 있었을 텐데, 송악(松嶽)에 예전에는 청목(靑木)이라는 칭호가 있었는바, -이에 대한 내용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고경문(古鏡文)에 나온다.- 혹 이것을 이른 것은 아니겠는가?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이 당시에 백제의 북쪽 경계를 대략 알 수가 있다.
○ 송(宋)나라 원휘(元徽) 연간에는 백제가 고구려에게 격파되어 한양에서 공주(公州)로 도읍을 옮겼다. 이 당시에 한수 북쪽의 지역은 대부분이 고구려에게 함락당하였다.
《후위서(後魏書)》 백제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제국은 북쪽으로 고구려까지의 거리가 1000여 리로, 소해(小海)의 남쪽에 있다. 그곳 백성들은 토착민들이며, 지역이 대부분 낮고 습하여 모두 산에 산다. 연흥(延興) 2년(472)에 백제 왕 여경(餘慶)이 비로소 사신을 파견하여 표문(表文)을 올렸다.
《양서》 백제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제는 고구려에게 격파되어 여러 해 동안 쇠미해져서 남한(南韓) 지역으로 옮겨 가 살았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개로왕(蓋鹵王) 21년(475) -송나라 창오왕(蒼梧王) 원휘(元徽) 3년- 에 고구려가 한성(漢城)을 포위하여 성이 격파되고 왕이 전사하였다. 10월에 문주왕(文周王)이 웅진(熊津)으로 도읍을 옮겼다. ○ 동성왕(東城王) 4년(482) -남제(南齊) 고조(高祖) 4년- 에 말갈이 습격하여 한산성(漢山城) -지금의 광주이다.- 을 격파하고 300여 호(戶)를 포로로 잡아가지고 돌아갔다. ○ 21년(499) -제왕(齊王) 보권(寶卷) 1년- 여름에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렸다. 고구려로 도망쳐 들어간 한산(漢山)의 백성들이 2000명이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웅진은 바로 공주이고, 소해(小海)는 바로 당진(唐津) 앞바다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고구려 강역총론조에 나온다.- 공주는 당진의 남쪽에 있으므로 소해의 남쪽에 있다고 한 것이다. 이 당시에 한성이 비록 고구려에게 함락당하였으나, 지금의 광주는 오히려 백제의 관할지였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강역은 일찍이 한수 남쪽의 지역을 한 발자국도 넘어오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 지리지에서는 지금의 수원(水原) 등 10개 고을을 본디 고구려의 지역이라고 하였으니, 아주 잘못된 것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신라조(新羅條)에 상세하게 나온다.
○ 양(梁)나라 무제(武帝) 때에는 백제의 북쪽 경계가 철령(鐵嶺), 서흥(瑞興) 등지까지 이르렀다.
《양서》 백제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보통(普通) 2년(521) -백제 무령왕(武寧王) 21년- 에 백제 왕 여륭(餘隆)이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 여러 차례 고구려를 격파했다고 하면서 비로소 통호(通好)하였다. 백제가 다시 강국이 되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무령왕 7년(507) -양나라 무제 6년- 에 장령성(長嶺城) -바로 철령이다.- 을 쌓아 말갈(靺鞨)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 성왕(聖王) 7년(529) -양나라 무제 28년- 에 고구려가 북쪽 변방의 혈성(穴城)을 공격하자, 좌평(佐平) 연모(燕謨)에게 명하여 오곡(五谷) -지금의 서흥부(瑞興府)이다.- 의 들판에서 막아 싸우게 하였다.
○ 양나라 무제 37년(538)에 백제가 공주에서 부여현(扶餘縣)으로 도읍을 옮겼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성왕 16년 봄에 사비(泗沘) -일명 소부리(所夫里)라고 한다.- 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南扶餘) -지금의 부여현이다.- 라고 하였다.
○ 양나라 원제(元帝) 2년(553)에 한수 북쪽 지역이 신라에게 함락되었다. 이에 백제의 사방 경계는 북쪽으로는 한강에 닿았고 동쪽으로는 신라와 이웃하였고, 서쪽과 남쪽으로는 바다에 닿았으며, 지역을 5부(部)로 나누었다.
《양서》 백제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제에서는 읍을 담로(檐魯)라고 하는데, 이는 중국의 군현(郡縣)이란 말과 같은 말이다. 백제에는 22개의 담로가 있는데, 모두 왕의 자제(子弟)와 종족(宗族)이 나누어 차지하였다.
《수서(隋書)》 백제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제국은 기내(畿內)를 5부(部)로 나누었으며, 부에는 5항(巷)이 있어 사인(士人)들이 산다. 5방(方)에는 각각 방령(方領) 1인이 있으며, 방좌(方佐)가 그를 보좌한다. 방(方)에는 10개의 군(郡)이 있으며, 군에는 장(將)이 있다. ○ 백제국의 서쪽과 남쪽에 있는 섬 가운데 사람이 사는 섬은 열다섯 곳이며, 모두 성읍(城邑)이 있다. -《괄지지(括地志)》에 이르기를, “백제국의 서쪽과 남쪽 바다에는 15개의 큰 섬이 있는데, 모두 읍(邑)을 두어 사람이 살고 있으며, 백제에 속하였다.” 하였다. ○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의 전라도 바다에 있는 여러 섬을 말한다.
《구당서(舊唐書)》 백제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제국은 일찍이 마한의 옛 지역이었으며, 경사(京師)에서 동쪽으로 6200리 되는 곳에 있는데, 대해(大海)의 북쪽, 소해(小海)의 남쪽에 처해 있다. 동쪽과 북쪽으로는 신라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바다를 건너서 월주(越州)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바다를 건너서 왜국(倭國)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바다를 건너서 고구려에 이른다. ○ 외방에는 6대방(帶方)을 두었는데, 방마다 10개의 군을 관할한다. ○ 백제국은 예전에는 5부(部)로 나누었는데, 통할하는 군이 37개, 성이 200개, 호구가 76만 호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6대방은, 6주(州)를 두고서 주마다 모두 대방(帶方)이라고 칭하였던 것 같다.
《신당서(新唐書)》 백제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제는 경사(京師)에서 곧장 동쪽으로 6000리 되는 곳의 바닷가 남쪽에 위치하였다. 서쪽은 월주, 남쪽은 왜국, 북쪽은 고구려와 경계를 접하였는데, 모두 바다를 건너야만 갈 수가 있다. 백제의 동쪽은 신라이다.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옛 백제국은 지금 조선의 전라도이다.
《문헌비고(文獻備考)》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제는 동쪽으로는 신라까지이고 서쪽과 남쪽은 큰 바다로 막혔으며, 북쪽으로는 바다와 강에 닿아 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백제는 나라를 세운 이래로 한수 북쪽의 지역을 차지하고 있다가 양나라 원제(元帝) 2년에 이르러서 지금의 한양, 이천(利川) 등지가 신라에 편입되었다. -이에 대한 내용은 신라 북계조(新羅北界條)에 나온다.- 이 뒤로부터는 백제의 북쪽 경계는 한수 남쪽에 그쳤다. 명(明)나라 사신인 기순(祈順)의 시에 이르기를, “백제의 지형은 한수까지 닿았다.[百濟地形臨水盡]” 하였고, 동월(董越)의 《조선부(朝鮮賦)》 주(注)에, “백제국의 국경은 양화도(楊花渡)의 남쪽에 있다.” 하였는데, 이는 모두 한수를 가리킨 것이다. 양화도는 지금의 한수 양화진(楊花津)이다.
○ 당나라 현경(顯慶) 5년(660)에 백제를 멸망시키고 그 지역에 5도독부(都督府)를 설치하였으며, 얼마 뒤에 폐지하였다. 그 뒤에는 그 지역이 모두 신라에 병합되었다.
《신당서》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현경 5년에 백제를 평정하고는 그 지역에 웅진(熊津), 마한(馬韓), 동명(東明), 금련(金連), 덕안(德安) 등 5도독부를 설치하였다. -《당서(唐書)》 백제열전에 이르기를, “5도독부를 두고는 각자 주군(州郡)을 통할하게 하였다.” 하였다.- 아울러서 대방주(帶方州)를 두었다가 인덕(麟德 당 고종(唐高宗)의 연호) 이후로는 폐하였다.
《자치통감(資治通鑑)》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당나라에서는 대방주를 백제의 경내에 설치하였는데, 옛 지명을 따라서 주의 이름을 삼은 것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웅진은 지금의 공주이다. 마한은 바로 마한의 옛 도읍지인 익산군(益山郡)이다. 동명은 바로 백제의 옛 도읍지인 부여현으로, 백제가 동명왕(東明王)의 후손이므로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덕안은 바로 《주서》에서 이른 바 득안성(得安城)으로, 지금의 은진현(恩津縣)이다. -이에 대한 설은 아래의 득안성조(得安城條)에 나온다.- 금련은 상고할 수가 없다. 당나라에서 5도독부를 두고서 군사를 남겨 두어 진수(鎭守)하였으며, 그 뒤에는 당나라 군사가 철수해 돌아가고 신라가 그 지역을 차지해 웅주(熊州), 전주(全州), 무주(武州) 세 주를 설치하였다.

성읍(城邑)
고마성(固麻城)ㆍ거발성(居拔城) -혹은 구발성(俱拔城)이라고도 한다.
《양서》 백제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치소(治所)를 고마(固麻)라고 한다.
《수서》 백제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제는 그 도읍을 거발성(居拔城)이라고 한다.
《북사(北史)》 백제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제의 도읍지는 구발성(俱拔城)이며, 또한 고마성(固麻城)이라고도 한다.
《구당서》 백제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제의 왕이 사는 곳에는 동서(東西)의 두 성이 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 공주의 웅진을 세속에서는 ‘고음아진(古音兒津)’이라고 칭하는데, ‘고음아’는 우리나라 말의 ‘곰[熊]’이다. 고마(固麻)는 고음아의 음이 바뀐 것으로, 곰성[熊城]을 말한다. 백제는 유송(劉宋) 시대 이후로 공주에 도읍하였으며, 소량(蕭梁) 때에는 또 부여현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런즉 《양서》에서 이른 바 ‘고마’란 것은 처음 공주에 도읍하였을 때의 칭호이고, 《수서》에서 이른 바 ‘거발(居拔)’이란 것은 부여현으로 도읍을 옮긴 뒤의 칭호이다. 이것이 이른바 동서에 두 성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구발(俱拔)’은 바로 ‘거발’의 음이 바뀐 것이다. 《북사》에서, 구발은 고마의 다른 이름이라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 고사성(古沙城)ㆍ득안성(得安城)ㆍ구지하성(久知下城)ㆍ도선성(刀先城)ㆍ웅진성(熊津城)
《주서》 백제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제의 치소는 고마성(固麻城)이고, 그 이외에 다시 5방(方)이 있는데, 중방(中方)은 고사성(古沙城), 동방은 득안성(得安城), 남방은 구지하성(久知下城), 서방은 도선성(刀先城), 북방은 웅진성(熊津城)이라고 한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구발성은 전주(全州)의 남쪽에 있다. 《북사》를 보면, “백제는 구발성에 도읍하였으며, 역시 고마성이라고도 한다. 그 외에 다시 5방이 있는데, 중방은 고사성, 동방은 득안성, 남방은 구지하성, 서방은 도선성, 북방은 웅진성이라고 하는 것이 이것이다. 당나라 현경 5년(660)에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평정하고는 유인원(劉仁願)을 머무르게 하여 백제의 부성(府城)을 진수(鎭守)하게 하였는데, 바로 구발성이다.” 하였다. ○ 웅진성은 전주의 서북쪽에 있다. 바로 웅진강 입구에 있는데, 백제의 험요처(險要處)이다. 당나라 현경 5년에 소정방이 백제를 토벌할 적에 성산(成山)에서 바다를 건너왔는데, 백제가 웅진강의 어귀를 지키고 있자, 소정방이 이를 쳐서 격파하였다. 그러고는 곧장 백제의 도성으로 달려가 함락시켰다. 그런 다음 웅진도독부를 설치하여 그 지역을 진수하였다. 용삭(龍朔) 1년(661)에 백제가 다시 반란을 일으켜 부성(府城)을 포위하자, 유인궤(劉仁軌)에게 조서를 내려 달려가서 구원하게 하였다. 유인궤가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며 싸우면서 전진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모두 함락시켰다. 그러자 백제에서는 웅진강 어귀 양쪽에 목책을 세웠는데, 유인궤가 이를 쳐서 격파하여 부성의 포위가 드디어 풀렸다. 유인궤가 이로 인하여 그곳에 주둔해 있으면서 진수하였다. 얼마 뒤에는 다시 웅진 동쪽에서 백제의 나머지 군사를 격파해 다시금 백제를 평정하였다. 혹자는 지금의 한강(漢江) 어귀가 바로 옛날에 부성을 두었던 곳이라고도 한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고사성이 중방(中方)의 성이 되는바, 마땅히 부여에서 가까운 지역에 있을 것이다. 혹자는 지금의 고부현(古阜縣) -본디 백제의 고사부리군(古沙夫里郡)이었다.- 을 이에 해당시키기도 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고부는 바닷가에 치우쳐 있는바, 중방의 성이라고는 할 수가 없다. 득안성은, 이적(李勣)이 올린 서장(書狀)에 “득안현은 본디 덕근지(德近支)이다.” 한 것을 근거로 하여 보면, 덕근지는 지금의 은진현(恩津縣)이다. 웅진성은 바로 공주로, 고마(固麻)와 서로 멀지 않은 곳이다. 《대청일통지》에서 지금의 한강 입구라고 한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구지하성 및 도선성은 모두 상고할 수가 없다.
또 살펴보건대,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이르기를, “제명(齊明) 6년(660) -당나라 현경 5년- 에 백제가 와서 고하기를, ‘금년에 신라가 당나라 사람들을 끌어들여 우리나라를 전복시켰습니다. 이에 서부(西部)의 은솔(恩率) 귀실복신(鬼室福信)은 발분(發憤)하여 임야기산(任射岐山)에 웅거하고, 달솔(達率) 여자진(餘自進)은 중부(中部)의 구마노리성(久麻怒利城)에 웅거하여 각각 한 곳을 경영하면서 흩어진 군졸들을 끌어 모았습니다.’ 하였다.” 하였다. 대개 임야기산은 바로 임존산(任存山)이고, 구마노리성은 생각건대 구지하성의 음이 바뀐 것인 듯하다.
부(附)
《자치통감》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당나라 용삭(龍朔) 1년(661)에 백제의 남은 무리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조서를 내려 신라의 군사를 출동시켰다. 이에 신라의 왕이 장수 김흠(金欽)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가게 하였다. 김흠이 고사(古泗) -고사는 지명으로 백제의 국내에 있다.- 에 이르렀을 때 복신이 요격하여 격파하니, 김흠이 갈령도(葛嶺道)를 통하여 도망쳐 돌아갔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사주성(泗州城)은 경주(慶州)의 서쪽에 있는데, 혹자는 바로 고사성(古泗城)이라고도 한다. 당나라 용삭 1년에 백제가 다시 반란을 일으켜 유인원과 서로 대치하자, 조서를 내려 신라의 군사를 출동시켰다. 신라의 장수 김흠이 군사를 거느리고 고사에 이르러 백제에게 요격당하여 패하자 갈령(葛嶺)을 통하여 도망쳐 돌아갔다. 지금 사주(泗州)에서 가까운 곳에 갈령도가 있다고 한다. 명나라 만력(萬曆) 연간에 왜적들이 사주에 웅거해 있으면서 중로(中路)라고 하였는데, 북쪽으로는 진강(晉江)에 의지하고 남쪽으로는 대해(大海)와 통하여 동쪽과 서쪽을 성원(聲援)하였다. 대수(大帥) 동일원(董一元)이 이를 함락시켰다가 얼마 뒤에 다시 패하여 돌아왔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보면, “태종왕(太宗王) 8년(661) -용삭 1년- 에 백제의 잔적(殘賊)들이 와서 사비(泗沘) -부여현- 를 공격하자, 왕이 이찬(伊湌) 품일(品日) 등에게 명하여 가서 구원하게 하였다. 신라의 대군이 고사비성(古沙比城) 밖에 와서 주둔하였다가 두량윤성(豆良尹城)으로 진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고, 백제군과 싸워 패하였다.” 하였다. 이것을 근거로 하여 보면, 고사(古泗)는 바로 고사비성이며, 고사비성은 바로 고사성(古沙城)인 듯하다. 《대청일통지》에서 경상도의 사천현(泗川縣)을 고사라고 한 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주류성(周留城)가림성(加林城)
《자치통감》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당나라 용삭 1년(661)이다. 당초에 소정방이 이미 백제를 평정하고는 유인원(劉仁願)으로 하여금 백제의 부성(府城) -삼가 살펴보건대, 부성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거하면 바로 공주이다.- 에 머물러 있으면서 진수하게 하였다. 백제의 옛 장수 복신(福信)이 백성들을 끌어 모아 주류성을 점거하였다. 이에 조칙을 내려서 유인궤(劉仁軌)를 다시 기용해 유인원을 구원하게 하였는데, 유인궤가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며 싸우면서 전진하여 향하는 곳마다 모두 함락시켰다. 여러 장수들이 가림성이 수륙(水陸)의 요충(要衝)이니 먼저 이곳을 공격하자고 하였는데, 유인궤가 말하기를, “가림성은 험하고 견고하여 급히 공격하면 사졸이 상하게 되고 느슨히 공격하면 날짜만 허비하게 될 것이다. 주류성은 백제의 근거지이니 의당 이곳을 먼저 공격해야 한다.” 하였다. 이에 웅진에서 백강(白江)으로 들어가 육군과 만나 함께 주류성으로 진격하였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주류성은 전주의 서쪽에 있다. 또 서북쪽에는 가림성이 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가림성은 지금의 임천군(林川郡)이다. 주류성은 《당서》에 근거하면 마땅히 금강에서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한다. 《일본서기》를 보면, “천지천황(天智天皇) 1년(662) -당나라 용삭 2년- 3월에 당나라와 신라 군사가 고구려(高句麗) -바로 백제의 오기(誤記)이다.- 를 침범해 오자 고구려가 일본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장군을 파견하여 소류성(疏留城)에 웅거하게 하였다. 2년(663) 8월에 신라는 복신(福信)이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먼저 주유성(州柔城)을 탈취하기로 모의하였다.” 하였는데, 대개 소류(疏留)나 주유(州柔)는 모두 주류(周留)의 음이 바뀐 것이다.
임존성(任存城)
《구당서》 백제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제의 승(僧) 도침(道琛)과 옛 장수 복신이 백성들을 이끌고 주류성을 점거한 채 반란을 일으켰다. 대방주 자사(帶方州刺史) 유인궤가 신라의 군사를 출동시켜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며 싸우면서 전진하였다. 그러자 도침 등이 웅진강 어귀 양쪽에 목책을 세우고 관군(官軍)을 막았다. 유인궤와 신라의 군사가 합세하여 공격하자 도침 등이 물러나 임존성을 지켰다. -삼가 살펴보건대, 임존성은 지금의 대흥군(大興郡)에 있다.
《자치통감》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임존성은 백제의 서부(西部) 임존산에 있다. -《통감고이(通鑑考異)》에 이르기를, “실록(實錄)에는 혹 임효성(任孝城)으로 되어 있는데, 어느 쪽이 옳은지는 모르겠다. 지금은 자주 나오는 쪽을 따른다.” 하였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임존성은 전주의 서쪽에 있는데, 옛날에 백제에서 설치한 성이다. 당나라 용삭 1년(661)에 백제의 남은 무리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유인궤가 이들을 웅진강 입구에서 격파하였다. 그러자 그 무리들이 백제 부성(府城)의 포위를 풀고는 임존성으로 물러나 지켰다. 임존성은 백제의 서부에 있다. 임존산을 의지해 있으므로 임존성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3년(663)에 유인궤가 군사를 보내어 임존성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진현성(眞峴城)지라성(支羅城)윤성(尹城)ㆍ대산현(大山縣)ㆍ사정책(沙井柵)
《구당서》 백제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용삭 2년(662)에 유인궤 등이 웅진의 동쪽에서 복신의 나머지 군사를 크게 격파하고 지라성(支羅城) 및 윤성(尹城), 대산(大山), 사정(沙井) 등의 성책을 함락시켰는데, 죽이고 노획한 것이 매우 많았다. 이어 군사를 나누어 그곳을 지키게 하였다. 복신 등은 진현성이 강을 끼고 있고 험준하며 또 요충지라고 여겨 군사를 보태어 지켰다. 유인궤가 신라의 군사를 이끌고 밤을 틈타 성첩(城堞)에 기어 올라가 그 성을 점거해 드디어 신라와의 향도(餉道)가 뚫렸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진현성은 전주의 북쪽에 있다. 《당서》를 보면, 지라성, 진현성 등 여러 성이 모두 웅진의 동쪽에 있다. ○ 정읍진(井邑鎭)은 전주의 동북쪽에 있다. 혹자는 이곳이 바로 백제의 옛 사정채(沙井砦)라고 한다. 명나라 만력(萬曆) 연간에 왜(倭)의 소서행장(小西行長)이 왕경(王京)을 침범하였다가 정읍으로 물러나 주둔하였는데, 왕경에서의 거리가 600여 리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김부식의 《삼국사기》 지리지를 보면, 진현성이 정현(貞峴)으로 되어 있는데, 지금의 진잠현(鎭岑縣)이다. 대산현(大山縣)은 지금의 홍산현(鴻山縣)이다. 윤성(尹城)은 이적(李勣)이 상주한 서장에 의거하면, “윤성현(尹城縣)은 본디 열기(悅己)이다.” 하였는바, 열기는 지금의 정산현(定山縣)이다. 지라성은 상고할 수가 없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지리지에 “지라는 혹 주류(周留)라고 한다.”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사정책(沙井柵) 역시 상세하지가 않다. 《대청일통지》에서 정읍현이라고 한 것은 맞지 않는다.
○ 풍달군(風達郡)
《신당서》 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흑치상지(黑齒常之)는 백제의 서부(西部) 사람이다. 백제의 달솔(達率)이면서 풍달군장(風達郡將)을 겸하였는데, 이는 당나라의 자사(刺史)와 같은 직책이라고 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풍달군에 대해서는 상고할 수가 없다.

부(附) 미상(未詳)의 성읍(城邑)
○ 서하(西河)
《송서》 백제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원가(元嘉) 27년(450)에 백제 왕이 글을 올려 사사로이 대사(臺使) 풍야부(馮野夫)를 서하 태수(西河太守)로 삼은 것을 추인(追認)해 주고, 표문(表文)을 올려 《역림(易林)》과 식점(式占), 요노(腰弩)를 보내 주기를 요구하였다.
○ 광양(廣陽)ㆍ조선(朝鮮)ㆍ대방(帶方)ㆍ광릉(廣陵)ㆍ청하(淸河)
《남제서(南齊書)》 백제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모태(牟太)가 또 표문을 올려서 말하기를, “신이 파견한 행 광양 태수(行廣陽太守) 고달(高達), 행 조선 태수(行朝鮮太守) 양무(楊茂), 행 선위장군(行宣威將軍) 회매(會邁) 등 3인에 대해서 특별히 굽어 살피시어 정식으로 관작을 제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고달은 이제 가행 용양장군(假行假行龍驤將軍) 대방태수(帶方太守)라 하였습니다. 양무는 이제 가행 건위장군(假行建威將軍) 광릉태수(廣陵太守)라 하였습니다. 회매는 이제 가행 광무장군(廣武將軍) 청하태수(淸河太守)라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조서를 내려서 인가하였다.
○ 낙랑(樂浪)ㆍ성양(城陽)
《송서》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건무(建武) 2년(495)에 모태가 사신을 파견해 표문을 올리기를, “신이 파견한 행 낙랑 태수(行樂浪太守) 모유(慕遺), 행 성양 태수(行城陽太守) 왕무(王茂), 행 조선 태수(行朝鮮太守) 장색(張塞)은 지금 신의 사신으로 가는 임무를 맡아 험한 파도를 무릅쓰고 바다를 건너가 그 지성을 다하고 있는바, 실로 그들의 관작을 올려 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서하(西河) 이하의 여러 군은 단지 《송서》와 《남제서》에만 보이며, 다른 책에서는 증명할 길이 없다. 그리고 그 명호(名號)도 이때에 임시로 빌린 것인 듯하므로 아울러 아래에 부록으로 첨부하였다.


 

[주D-001]78개 국 : 마한 54국, 진한(辰韓) 12국, 변진(弁辰) 12국을 합하여 78개 국이다.
[주D-002]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 : 이병도(李丙燾)는 하남위례성의 위치에 대해서 지금의 광주(廣州) 춘궁리(春宮里)와 남한산성 일대의 지역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백제가 처음 도읍한 곳은 하남위례성이 아니라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이며, 그 위치는 서울 세검동(洗劍洞) 일대의 골짜기라고 비정(比定)하였다.《국역삼국사기 352쪽 주》
[주D-003]패수(浿水)와 대수(帶水) : 이병도는 “패수와 대수는 시대에 따라 이동이 있는바, 여기에서 패수는 예성강(禮成江)을 가리키고 대수는 임진강(臨津江)을 가리킨다.” 하였다.《국역삼국사기 355쪽 주》
[주D-004]우리나라의 …… 있어서 : 이병도는 이 부분의 글은 방위가 뒤바뀐 것으로, ‘북쪽에는 낙랑이 있고 동쪽에는 말갈이 있다.’고 고쳐야 한다고 하였다.《국역삼국사기 357쪽 주》
[주D-005]7월에 …… 옮겼다 : 이병도는 이에 대해, “하남위례성으로 천도한 연대가 온조왕 13년(기원전 6)이라고 믿을 수는 없으며, 옮긴 이유로 보면 비류왕(比流王) 초년에 옮긴 것으로 생각된다.” 하였다.《국역삼국사기 357쪽 주》
[주D-006]패하(浿河) : 원문에는 ‘浿海’로 되어 있는데, 《삼국사기》 권23에 의거하여 ‘浿河’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이병도는 이곳에서의 패하는 지금의 예성강이라고 하였다.《국역삼국사기 356쪽》
[주D-007]웅천(熊川) : 이병도는 지금의 안성천(安城川)이라고 하였다.《국역삼국사기 356쪽》
[주D-008]주양(走壤) : 이병도는 지금의 춘천(春川)이라고 하였다.《국역삼국사기 356쪽》
[주D-009]한산(漢山) : 이병도는, “여기에서의 한산은 글자 그대로 지금의 남한산(南漢山)을 가리키는 것으로, 평지역(平地域)인 춘궁리(春宮里)의 한성에서 연접해 있는 산성(山城)으로 옮긴 것이다. 후래의 사서(史書)에서 북한산(北漢山)으로 인식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였다.《국역삼국사기 375쪽 주》
[주D-010]수곡성(水谷城) : 지금의 황해도 신계(新溪)이다.
[주D-011]청목령(靑木嶺) : 이병도는 개성(開城) 부근에 있던 고개라고 하였다.《국역삼국사기 376쪽》
[주D-012]아신왕(阿莘王) : 원문에는 ‘阿幸王’으로 되어 있는데, 《삼국사기》 권25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3]여륭(餘隆) : 무령왕(武寧王)의 이름이다. 무령왕의 이름이 《삼국사기》에는 ‘사마(斯摩)’로 되어 있고, 《일본서기(日本書記)》에는 ‘사마(斯麻)’로 되어 있으며, 공주(公州) 무령왕릉(武寧王陵)에서 출토된 지석(誌石)에도 ‘사마(斯麻)’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해 이병도는 “중국과의 외교 문서에 사용하기 위한 중국식 왕명인지 모르겠다.” 하였다.《국역삼국사기 403쪽 주》
[주D-014]담로(檐魯) : 이병도는 이에 대해 “담로는 ‘담로(擔魯)’로, 대읍성(大邑城)을 말하는 백제어(百濟語)인 ‘다라’의 음을 베껴 쓴 것이다.” 하였다.《국역삼국사기 405쪽 주》
[주D-015]5방(方) : 백제에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도내(都內)의 5부(部)와 지방의 5방(方) 제도가 있었다. 지방에 있었던 5방의 위치에 대하여 이병도는 “동방 득안성(得安城)은 지금의 충청남도 은진(恩津) 부근이고, 서방 도선성(刀先城)은 미상(未詳)이고, 남방 구지하성(久知下城)은 지금의 전라남도 장성(長城)이고, 북방 웅진성(熊津城)은 지금의 공주(公州)이고, 중방 고사성(古沙城)은 지금의 전라북도 옥구(沃溝)이다.” 하였다.《국역삼국사기 563쪽 주》
[주D-016]5도독부(都督府) :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백제 땅에 설치한 통치 기구인데, 웅진도독부가 나머지 4도독부를 통할하였으며, 몇 년 뒤 모두 없어지고 그 지역은 신라로 귀속되었다.
[주D-017]고마성(固麻城) : 고마(固麻)는 ‘고마’의 차음(借音)으로, 웅진(熊津) 즉 ‘고마나루’를 가리키는바, 지금의 공주(公州)이다.
[주D-018]부성(府城) : 당나라에서 설치한 도독부가 있던 곳으로, 백제의 수도였던 사비성을 가리킨다.
[주D-019]성산(成山) : 산동반도(山東半島)의 동쪽 끝에 있는 산동성 영성현(榮成縣)이다. 성산(城山)으로 표기된 곳도 있다.
[주D-020]귀실복신(鬼室福信) : 복신(福信)을 가리킨다. 복신은 의자왕의 종제(從弟)로, 백제가 멸망하자 일본에 가 있던 왕자 풍(豐)을 영립하여 백제의 부흥을 꾀하였으나 내분이 일어나 풍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주D-021]임존산(任存山) : 임존산은 임존성(任存城)으로, 지금의 충청남도 예산군(禮山郡) 봉수산(鳳守山)에 있던 백제의 성이다. 한산(韓山)의 주류성(周留城)과 함께 백제 부흥 운동의 중심지였으나, 그 운동이 실패한 뒤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임성군(任城郡)이 되었다.
[주D-022]고사(古泗) : 지금의 고부(古阜)이다.
[주D-023]고사비성(古沙比城) : 이병도는 지금의 임피(臨陂)라고 하였다.《국역삼국사기 88쪽》
[주D-024]두량윤성(豆良尹城) : 이병도는 지금의 금산군(錦山郡) 부리면(富利面)이라고 하였다. 두량이(豆良伊)로 표기한다.《국역삼국사기 88쪽》
[주D-025]주류성(周留城) : 지금의 충청남도 한산(韓山) 지방에 있던 백제의 성으로, 지라성(支羅城)이라고도 한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금강(錦江) 하류의 한산 부근에 있는 건지산성(乾至山城)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복신(福信)과 도침(道琛) 등이 중심이 된 백제 부흥 운동의 근거지로, 661년에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을 물리치고 한때 전세가 유리하기도 하였으나, 내부의 알력으로 전력이 약화되어 663년에 수륙 양면으로 공격하는 연합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주D-026]가림성(加林城) : 지금의 충청남도 임천(林川)의 성흥산성(聖興山城)이다.
[주D-027]임존성(任存城) : 예산군(禮山郡) 봉수산(鳳守山)에 있던 백제의 성이다. 한산(韓山)의 주류성(周留城)과 함께 백제 부흥 운동의 중심지였으나, 그 운동이 실패한 뒤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임성군(任城郡)이 되었다.
[주D-028]진현성(眞峴城) : 진현(眞峴)은 지금의 진잠(鎭岑)인데, 이곳은 강을 끼고 있는 험고한 곳이 아니다. 이에 대해 이병도는, “진잠에는 강을 임한 험고한 곳이 없으므로 이는 잘못인 것 같다. 이것은 옛 이름이 내사지성(內斯只城)인 유성산성(儒城山城)으로 정정하여야 할 것이다. 유성산성은 강을 임한 험고한 곳이다.” 하였다.《국역삼국사기 431쪽 주》
[주D-029]지라성(支羅城) : 지금의 충남 대덕군 진잠(鎭岑)이다. 또는 주류성(周留城)의 별칭이라는 설도 있다.
[주D-030]윤성(尹城) : 지라성 부근에 있는 성이다.
[주D-031]사사로이 …… 주고 : 원문에는 ‘私假臺使馮夫西河太守’로 되어 있는데, 《송서》 권97에 의거하여 ‘私假臺使馮野夫西河太守’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여기에서의 가(假) 자는 중국 왕조에서 임명한 것이 아님을 뜻한다. 당시에 백제는 가행(假行)의 형식을 빌어 관원을 임명한 다음에 중국으로부터 추인(追認)을 받은 뒤 정식으로 임명하였다.
[주D-032]역림(易林)과 식점(式占) : 《역림》은 한(漢)나라 초연수(焦延壽)가 지은 책으로 총 16권인데, 길흉을 점치는 법을 기술하였다. 식점은 육임(六壬), 태을(太乙), 뇌공(雷公) 등 세 종류의 점치는 법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