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령군 마을의 유래 /의령군 정암마을

경남 의령군 의령읍 정암 마을의 유래 (스크랩)

아베베1 2011. 1. 29. 22:44

 

의령의 관문이자 함안과의 경계를 짓는 남강(南江:정강(鼎江))이 길게 흐르고 있으며 강 한복판에는 솥뚜껑(토박이말로는 소두방때까리)모양의 바위가 있다. 이 바위는 반쯤이 물위에 드러나 있는데 물밑에는 솥다리처럼 세 개의 큰 기둥이 받치고 있어서 솥바구(솥바위)인데 한자로 정암이다.

 

이곳의 지명은 이 솥바구(솥바위)에서 유래되었고 강 이쪽도 정암(의령 정암)이고 건너쪽도 정암(함안 정암 또는 아랫정암)이다. 유장하게 굽이쳐 흐르는 강물과 1935년 일제강점기에 가설한 정암교(정암철교)가 있고 산언덕위에는 정암루(鼎巖樓)가 있다. 지금 정암루가 있는 곳은 옛날에 취원루(聚遠樓)가 있던 곳인데 조선 중종때의 영의정을 지낸 용재(容齋) 이행(李荇)선생이 귀양살이할 때 이곳에 집을 지어 우거했다. 지금의 정암루는 1935년 정암교 가설과 함께 의령의 풍류가들이 유흥을 목적으로 지었던 것인데 6.25전란에 소실되었다. 그 뒤 1953년에 지방 유지들이 다시 재건한 것이다. 그 뒤 1972년 의병탑이 건립되고 충익사(忠翼祠)를 비롯하여 의병(義兵)유적지 정화사업이 추진되면서 이 누각을 정암진 승첩과 연관을 시키고 있지만 사실은 무관하다. 다리가 놓이기 전에는 남강의 수십 개 나루 중에서도 이곳 정암나리(鼎巖津 또는 鼎津) 가장 큰나리(나루의 토박이말)였고 경남의 중서부지역으로 연결되는 요지라서 사람의 내왕이 많았으며 아래 웃나루터에는 민물횟집과 주막이 즐비했던 곳이다. 1592년 4월 22일 임란왜침을 당하여 나라 안에서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왜구와 격전을 벌여서 큰 전과를 올린 곳이 바로 이곳이니 정진승첩(鼎津勝捷)이다.

 

한 길가에는 1958년 군민의 성금으로 세운 충익공 홍의장군전적기념비(忠翼公紅衣將軍戰蹟紀念碑)가 서 있다. 정암루가 있는 바로 아랫쪽 덤밑에는 「유송간의대부여공제단비(有宋諫議大夫余公祭壇碑)」를 모신 꽃집이 있는데 이는 의령여(余)씨의 시조공제단비다. 옛날 강변제방이 없을 때는 장마가 들었다하면 온 동네가 물에 잠겼고 배를 타야 읍내로 들어올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조금만 비가와도 물에 잠긴다해서 뻘굼티논(약30마지기)으로 지금 동네서쪽에 재실이 있다. 정미소 있는 곳은 연(蓮)이 자생하던 큰 늪이라 연밭이니 연늪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또 가을부터 겨우내 오리떼가 몰려와서 살았던 오리굼티라 하였다. 동네 서쪽에는 의령여(余)씨 종실인대부정(大夫亭)과 강씨문중의 재실인 정강재(鼎岡齋)는 새 도로개설 때문에 조금 위쪽으로 이건 했고 그 자리에는 지금으로부터 390년 전에 만든 기로계(耆老契)의 열한분 어른을 소개한 유촉비(遺 碑)가서 있다. 옛 정강재 뒷산 꼭대기는 군자감정 강우황(姜遇璜)공의 묘소가 있다. 그리고 백야마을 못 미쳐서는 임진의병장의 한 분으로 정암진 전투에서 순절한 죽헌(竹軒) 이운장(李雲長)공의 사적비가 서 있는 등 이곳은 의병의 전승지로서 유서 깊은 곳이다. 최근에 와서는 정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세개가 되었다. 예로부터 정강의 아름다운 풍경을 노래한 글이 많고 정암뱃사공 노래도 있다. 정암에 사공아 뱃머리 돌려라/ 우리님 오시는데 길마중 갈거나/ 너이가 날같이 사랑을 준다면/ 까시밭이 천리라도 맨발로 갈꺼나/간다 못간다 얼매나 울었던지/정기장 마당이 한강수 되노라/(이하 생략함) 황덕유현감의 글에는 조화옹이 산뼈를 다듬어서 솥발처럼 물가운데 서있는 묘한 바위로다(化翁治山骨鼎鼎水中岩).

 

어변갑(魚邊甲)공은 봄나절 정암강물은 푸른 비단을 펴 놓은 듯 하구나(春水鼎巖 黃練碧)라 읊었고 한동안 이곳에 머물렀던 용재선생의 글에는 천년명승은 길게 흐르는데 정암의 가을물빛 밝아서 구경함직하고 자굴산 봄빛은 아득하게 떠 있는 듯하다(千年名勝定長流鼎津秋水明 堪玩門  春光遠欲浮)고 했다. 그리고 이곳에는 무제(기우제)를 올리고 용왕을 먹이는 곳이 있었다는데 지금 정암루 바로 밑 너럭바위인 것 같고 제를 올릴때면 반드시 솥바위에 왼새끼 금줄을 둘렀다고 하며 얼마전가지도 동신제를 올리기도 했다고 한다. 이 동네에는 처음 김해 김(金)씨가 자리 잡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28가구로 이(李)씨와 비슷하고 박(朴)씨가 23가구, 최(崔)씨가 20가구, 송(宋)씨가 17가구, 정(鄭)씨, 황(黃)씨가 각 6가구씩이고 진(陳)씨가 서너집으로 총 135가구가 살고 있다. 6.25전란으로 다리가 내려앉아 한동안 사람과 자동차를 실어나르던 큰배가 무시로 내왕하던 큰나루터였는데 요즘와서는 배도 없어졌고 남강댐 때문에 강물도 줄어서 옛정취를 느낄 수 없게 돼 버렸다.

 

자료 출처 : 마을의 유래 의령군청  

 

정사룡

공은 휘가 사룡(士龍), 자가 운경(雲卿), 성이 정씨(鄭氏)이며, 호음(湖陰)은 그의 별호이다. 지금도 호음의 옛집이 의춘현(宜春縣) 정호(鼎湖) 가에 있다. 세조 때 명신 동래군(東萊君) 정난종(鄭蘭宗)의 손자요, 창원 도호(昌原都護) 정광보(鄭光輔)의 아들이며, 중종 때 정승 정광필(鄭光弼)의 종자(從子)이다. 홍치(弘治) 7년 갑인(1494, 성종25)에 출생하여 16세에 상사(上舍)에 오르고 19세에 박사과(博士科)에 뽑혔으며, 이어 문과(文科)에 장원하여 높은 벼슬로 네 왕조(중종ㆍ인종ㆍ명종ㆍ선조)를 섬기다가 선조 6년 계유(1573)에 이르러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세상을 마치니, 나이는 80세이다. 분묘는 양주(楊州)에 있다.

 

 

해동역사 제69권
 인물고(人物考) 3 본조(本朝)
정사룡(鄭士龍)


정사룡은 자가 운경(雲卿)이고, 정진인(鼎津人)이다. 내자시 정(內資寺正)을 거쳐서 형조 판서로 옮겨졌다가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역임하고 호조 판서가 되었다가 다시 이조 판서를 지냈으며, 품계가 자헌대부(資憲大夫)이다. 《호음초당집(湖陰草堂集)》이 있다. 《명시종》
○ 운경 정사룡은 가정(嘉靖) 연간에 다섯 차례나 관반에 충임되어 도의로써 교제하고 예의로써 접하여 여러 사람의 칭찬을 받았다. 수지(守之) 당고(唐皐)가 준 시에 이르기를, “정자는 시의 재주 뛰어나거니, 그 어찌 자고 아래 있을 것인가.[鄭子有詩才 豈在鷓鴣下]” 하였다. 또 운강(雲岡) 공용경(龔用卿)은 “차분하고 담박하여 화려하고 아름다운 말을 구사하지 않아 당나라 시인의 유의(遺意)가 있다.” 하였다. 일찍이 십완당(十玩堂)을 정진(鼎津)에다가 지었는데, 십완이란 대나무, 매화, 소나무, 국화, 시냇물, 돌 및 종이, 벼루, 붓, 먹 10가지를 뜻한다. 수지(守之) 및 급사중(給事中) 극홍(克弘) 사도(史道)가 모두 그를 위하여 시를 읊었다.
화정(華亭) 행인(行人) 장승헌(張承憲)이 사신으로 갔을 적에 국왕이 그의 시를 간행해서 《황화집(皇華集)》에 넣게 하고는 운경을 시켜서 서문을 짓게 하였는데, 그 서문에 이르기를, “옛날의 시인들은 대부분이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서 시를 지어 일찍이 무익한 말은 하지 않았다.” 하였으니, 이 역시 시인의 뜻을 얻은 것이다. 그의 시구에 ‘즐기는 곳이라고 말하지 말라, 뒤바뀌어 송별하는 자리 되리라.[不謂交地 翻成送別亭]’ 하였는바, 운치가 충분히 있다. 《정지거시화》


 

[주D-001]품계가 자헌대부(資憲大夫)이다 : 원문에는 ‘堦資憲大夫’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階資憲大夫’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2]자고(鷓鴣) : 당(唐)나라의 시인 정곡(鄭谷)을 가리킨다. 정곡이 자고시(鷓鴣詩)로 이름을 날렸으므로, 이렇게 부른다. 여기서는 정사룡과 정곡의 성이 같으므로 끌어다가 쓴 것이다.
[주D-003] : 원문에는 ‘觀’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계곡만필 제2권
 [만필(漫筆)]
[주문연의 고사[主文硯故事]]


대제학(大提學)에게는 주문연(主文硯)이라는 벼루가 주어졌는데, 교체될 때에는 마치 선가(禪家)의 의발(衣鉢)처럼 후임자에게 전해 주곤 하였다.
어숙권(魚叔權 중종 때의 학자)의 《패관잡기(稗官雜記)》에 의하면, 옥당(玉堂)에 오래전부터 큰 돌벼루가 있었는데, 항상 장서각(藏書閣)에 보관해 두고 있다가, 대제학이 옥당에 들어와서 학사(學士)들의 과작(課作)을 점수 매길 때면 늘 그것을 꺼내다가 썼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남지정 곤(南止亭袞)이 대제학이 되자, 옥당에 소장되어 있는 것과 같은 큰 벼루 하나를 별도로 만들어 자기 집에다 두고는, 문형(文衡 대제학의 별칭)을 그만둘 때 이용재 행(李容齋荇)에게 전해 주었는데, 그 뒤 몇몇 공(公)을 거치는 동안에도 그 벼루는 용재의 집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그 뒤 정호음(鄭湖陰 호음은 정사룡(鄭士龍)의 호임)이 대제학이 되었을 때, 용재는 이미 죽은 뒤였으나 그 부인은 아직도 건재(健在)하였는데, 벼루를 호음에게 보내면서 “이것은 용재의 뜻이다.”라고 하였다 한다. 그리고 이 뒤로부터는 그 벼루가 문단을 주관하는 자에게 으레껏 전해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임진년 병란(兵亂)을 겪고 나서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의 호임) 이공(李公)이 그 벼루를 다시 구입하였고, 그 뒤로 이이첨(李爾瞻)에게까지 전해 내려왔는데, 이이첨이 패몰(敗沒)하면서 그 벼루도 없어지고 말았으므로, 사람들이 개탄하기를, “이 벼루가 1백여 년 동안이나 유전(流傳)되다가 추악한 이이첨의 손을 한 번 거치면서 마침내 보전되지 못하였으니, 이는 실로 사문(斯文)의 일대 액운(厄運)이라 하겠다.” 하였다. 이에 현헌(玄軒 신흠(申欽)의 호임) 신공(申公)이 일단 문형(文衡)을 맡게 되자, 안동(安東)의 마간석(馬肝石)을 가져다가 예전 모양과 같은 벼루를 다시 만들었는데, 이렇게 해서 현헌을 거쳐 그 벼루가 북저(北渚 김류(金瑬)의 호임) 김공(金公)에게 전해지게 되었다.
옥당에서는 예로부터 문형이 교체되면서 벼루를 전해 줄 때면 언제나 시편(詩篇)을 주고받곤 하였으므로, 이것이 마침내는 문원(文苑)의 아름다운 고사가 되었다. 그런데 숭정(崇禎) 무진년(1628, 인조 6)에 북저가 문형을 그만두었을 때, 내가 후진(後進)으로서 차서(次序)를 뛰어넘어 그의 후임자가 되었는데, 북저가 나에게 벼루를 직접 전해 주려 하지 않고 옥당에 보내자 옥당 관리가 나에게 와서 그 벼루를 바치는 사태가 일어났으므로, 이를 듣는 자들이 꽤나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내가 견책을 받고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나가고 나자, 정우복 경세(鄭愚伏經世)가 나 대신 문형을 맡았는데, 이듬해에 내가 조정에 돌아오고 보니 우복이 병을 이유로 사면하여 체직(遞職)된 상태였으므로, 내가 다시 신미년 여름에 그를 대신하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에 우복이 이미 남쪽으로 내려가 있었기 때문에, 전후에 걸쳐 모두 벼루를 전해 주며 시를 주고 받는 고사를 거행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계유년(1633, 인조 11)에 나의 병이 심해졌으므로 문형을 사직하여 윤허를 받았는데, 이때 완성(完城 완성부원군 최명길(崔鳴吉)) 최공(崔公)이 나를 대신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장차 벼루를 그에게 보낼 즈음에, 내가 병든 몸을 무릅쓰고 율시(律詩) 한 수를 구점(口占)하여 보내 주었는데, 그 시에,

불문(佛門)에선 가풍(家風)을 의발로 전하는데 / 空門衣鉢有宗風
벼루 전하는 문원(文苑)의 일 자못 흡사하외다 / 藝苑相傳事頗同
묘한 솜씨 은빛 불률 각자 잡고서 / 妙手各拈銀不律
글의 마음 석허중에 애오라지 부친다오 / 文心聊託石虛中
선배 보기 부끄러운 두 번째 맹주(盟主) 노릇 / 齊盟再主慙前輩
명장(名匠)께선 졸렬한 나를 옆에서 비웃었겠지요 / 巧匠傍觀笑拙工
앞으로 우리 문단 광채 더욱 발하리라 / 從此騷壇倍精彩
삭막한 북방 군대 총사령관 임했으니 / 朔方旗鼓得元戎

라고 하였다. 그런데 완성이 화답한 시는 난리 통에 그만 잃어버리고 말았으니 애석하기 그지없다.


 

[주D-001]불률(不律) : 필(筆)의 별칭이다.
[주D-002]석허중(石虛中) : 벼루의 별칭. 거묵(居默) 혹은 묵후(默侯)라고도 한다.

 

임하필기 제30권
 춘명일사(春明逸史)
조선의 시파(詩派)


조선의 시인은 서거정(徐居正)으로부터 시작되는데, 뒤에는 김종직(金宗直), 김시습(金時習), 성간(成侃), 이주(李胄), 박은(朴誾), 이행(李荇), 신광한(申光漢), 정사룡(鄭士龍), 기준(奇遵), 박상(朴祥), 임억령(林億齡), 임형수(林亨秀), 박순(朴淳), 노수신(盧守愼), 황정욱(黃廷彧), 고경명(高敬命), 최경창(崔慶昌), 백광훈(白光勳), 이달(李達), 차천로(車天輅), 이안눌(李安訥), 권필(權韠), 최립(崔岦), 임제(林悌), 김종직(金宗直), 임전(任錪), 이춘영(李春英), 이수광(李睟光), 허봉(許篈), 이춘원(李春元), 이식(李植), 이민구(李敏求), 정두경(鄭斗卿)이 있다.


임하필기 제30권
 춘명일사(春明逸史)
우리나라 사람이 중국 기록에 실린 일


우리나라 사람으로 중국에 들어가 혹은 공훈과 사업으로써 천추(千秋)에 이름났거나 혹은 문장과 서화로써 당대에 예명(藝名)을 드날린 자들이 상하 수천 년에 걸쳐 이루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러나 여기에는 가장 드러난 자들을 기록하여 참고할 수 있도록 한다.
대련(大連)과 소련(少連)이 효행으로써 공자(孔子)에게 칭찬을 받은 것은 《예기(禮記)》에 실려 있으니, 이는 말할 필요도 없다. 조원리(曺元理)는 《서경잡기(西京雜記)》에 보이고, 을지문덕(乙支文德)은 《수서(隋書)》에 실려 있으며, 개소문(蓋蘇文)ㆍ고선지(高仙芝)ㆍ흑치상지(黑齒常之)는 《신당서(新唐書)》에 실려 있다. 왕모중(王毛仲)ㆍ이정기(李正己)ㆍ왕사례(王思禮)ㆍ이회광(李懷光)ㆍ대문예(大門藝)는 《구당서(舊唐書)》에 실려 있다. 김생(金生)은 《화한삼재도(和漢三才圖)》에 보이고, 김사란(金思蘭)ㆍ김면(金沔)ㆍ김사신(金士信)ㆍ이다조(李多祚)는 《책부원귀(冊府元龜)》에 실려 있으며, 김충의(金忠義)는 《역대서화기(歷代書畫記)》에 실려 있다. 장보고(張保皐)와 정년(鄭年)은 《문원영화(文苑英華)》에 실려 있고, 김가기(金可記)는 《태평광기(太平廣記)》에 실려 있으며, 최치원(崔致遠)은 《광여기(廣輿記)》에 실려 있고, 왕거인(王巨仁)은 《전당시(全唐詩)》에 보인다. 한신일(韓申一)은 《청이록(淸異錄)》에 보이고, 박인량(朴寅亮)은 《민수연담(澠水燕談)》에 보이며, 이자겸(李資謙)과 김부식(金富軾)은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보인다. 금(金)나라의 시조인 함보(函普)는 《금사(金史)》에 실려 있고, 정가신(鄭可臣)ㆍ이제현(李齊賢)ㆍ이공수(李公遂)는 《일하구문(日下舊聞)》에 보이고, 김도(金濤)는 《엄주별집(弇州別集)》에 보인다. 홍관(洪灌)ㆍ이인로(李仁老)ㆍ김방경(金方慶)ㆍ곽예(郭預)ㆍ김훤(金暄)ㆍ이영(李穎)ㆍ이암(李嵒)ㆍ성석린(成石磷)ㆍ윤언민(尹彦旼)ㆍ이영(李寧)ㆍ이숭인(李崇仁)은 《패문재서화보(珮文齋書畫譜)》에 보이고, 서거정(徐居正)ㆍ정추(鄭樞)ㆍ남곤(南袞)ㆍ이덕형(李德馨)은 《열조시집(列朝詩集)》에 보이며, 설손(偰遜)ㆍ정몽주(鄭夢周)ㆍ이색(李穡)ㆍ김구용(金九容)ㆍ조운흘(趙云仡)ㆍ권근(權近)ㆍ정도전(鄭道傳)ㆍ신숙주(申叔舟)ㆍ권남(權擥)ㆍ박원형(朴元亨)ㆍ허종(許琮)ㆍ성현(成俔)ㆍ이행(李荇)ㆍ노공필(盧公弼)ㆍ정사룡(鄭士龍)ㆍ소세양(蘇世讓)ㆍ김안로(金安老)ㆍ허흡(許洽)ㆍ신광한(申光漢)ㆍ이희보(李希輔)ㆍ윤인경(尹仁鏡)ㆍ임백령(林百齡)ㆍ서경덕(徐敬德)ㆍ홍섬(洪暹)ㆍ신응시(辛應時)ㆍ이극감(李克堪)ㆍ고경명(高敬命)ㆍ유근(柳根)ㆍ최전(崔澱)ㆍ허봉(許篈)은 《명시종(明詩綜)》에 보인다. 김안국(金安國)ㆍ심언광(沈彦光)ㆍ이이(李珥)는 《정지거시화(靜志居詩話)》에 보이고, 박충원(朴忠元)ㆍ어숙권(魚叔權)ㆍ이후백(李後白)ㆍ기대승(奇大升)ㆍ이산해(李山海)는 《허문목집(許文穆集)》에 보이며, 윤근수(尹根壽)는 《태평청화(太平淸話)》에 보인다. 이원익(李元翼)ㆍ원균(元均)ㆍ이항복(李恒福)ㆍ유성룡(柳成龍)ㆍ권율(權慄)ㆍ이복남(李福男)ㆍ이순신(李舜臣)ㆍ김응하(金應河)ㆍ김상헌(金尙憲)은 《비어고(備禦考)》에 실려 있다.


 

 

택당선생 속집 제1권
 시(詩)
다섯 분의 평사(評事)에 대한 노래 병인(幷引)


공무(公務)를 행하는 여가에 전임자(前任者)의 인명록(人名錄)을 우연히 들춰 보다가, 나의 누추한 소견으로 추려 본 결과 명망 있는 몇 분의 공(公)이 기억 속에 떠올랐는데, 그 당시에도 조정 안에서 불우하게 보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는, 근세(近世)에 시로 이름을 날린 다섯 분을 차례로 뽑아, 평소의 한두 가지 일화를 소재로 하여 읊어 보았다. 그 밖에도 여기에 조금 해당시킬 수 있는 이로는, 홍공 귀달(洪公貴達)과 송공 상현(宋公象賢)을 들 수가 있는데, 이분들은 모두 문단(文壇)에서 이름을 날렸고 또 성취한 것이 크기 때문에 감히 이 속에다 끌어 넣지를 못하였으며, 기타 훈공(勳功)을 세워 저명하게 된 이들도 일단 여기에서 제외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유독 우리 동악(東岳) 숙부로 말하면, 지행(志行)이나 재력(才力) 면에서 몇 분의 공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출중하고, 또 바야흐로 강사(强仕)의 연세로서 세상의 중히 여김을 받아 쓰임이 되려 하고 있으니 앞으로 얼마나 더 발전하실지 알 수 없는 점이 있으나, 그 문학과 사장(詞章)의 실력을 가지고도 일찌감치 한 시대에 받아들여지지 못하고서 일단 변방의 군막(軍幕)으로 내침을 당했고 보면, 공의 아량(雅量)에 비추어 볼 때 이 속에 들어가게 된 것을 흔쾌히 허락해 주실 줄로 믿는 바이다. 뒷날 다시 빛나는 업적을 세워 훈명(勳名)과 절의(節義)를 당장에 전하실 수 있게 된다면, 산왕(山王)의 예에 따르는 것이 물론 당연하다고 하겠는데, 외람스럽게 이야기하는 이의 말을 들어 보면, 그렇게 될 경우 빠진 자리를 중용(仲容)으로 대신 채워 넣을 수도 있겠다고 하니, 이쯤 되면 또 기막힌 일이 될 수도 있겠다. 하하하.

첨정(僉正) 박공 난(朴公蘭) 공이 누차 과거(科擧)에 응시했으나 급제(及第)하질 못했는데, 호음(湖陰)이 그 문장을 기걸(奇傑)차게 여겨 인정하고서 벼슬을 시켜 주었는데도, 제대로 어울리질 못한 나머지 한산(閑散)한 관직에서 실의(失意)의 나날을 보내었다. 그리고는 호음을 볼 때마다 불평을 늘어놓기를 “영공(令公)께서 나를 속이는 바람에 내가 이렇게 오래도록 고생을 하고 있다.”고 했다 한다. 문집이 집안에 보관되어 있다.
박 첨정은 소싯적부터 괴팍스러웠는데 / 朴正少奇僻
글 역시 사람됨을 따라가나 봐 / 爲文類其人
만년에 호음 노인 다행히 만나 / 晚遇湖陰老
새로 선보인 멋진 시구 읊어지게 되었어라 / 見誦佳句新
급제의 기쁨 끝내 못 본 청삼의 신세 / 靑衫困一第
백발이 다 되도록 천신의 탄식을 발하면서 / 白首歎千薪

영대의 한밤중 실의에 잠겨 떠돌더니 / 棲遲靈臺夜
막다른 변방 요새 활짝 핀 봄빛이었어라 / 曠蕩窮塞春

재주가 뛰어나면 어울리기 어려운 법 / 高才信寡合
누구에게 그 울분을 토로할 수 있었을꼬 / 憤惋誰與陳

송천(松川) 양공 응정(梁公應鼎) 공은 스스로 문자(文字)에는 자신이 없고 단지 강궁(强弓)을 쥐고 오랑캐를 쏘아 맞출 줄은 안다고 하여, 한림(翰林)의 직책에 있다가 군막(軍幕)의 종사관(從事官)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 뒤에도 몸단속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당하여 조정 안에 거하지 못하고 온성 부사(穩城府使)로 나갔다.
양공은 저명한 부친의 자제로서 / 梁公名父子
오토처럼 포효하며 골에 바람을 일으켰지 / 風壑嘯於菟

그런데 오색필을 그만 던져 버리고서 / 欲投五色筆
활 잡고 서쪽 오랑캐 쏘아 잡으러 나갔다네 / 彎弓西射胡
어슬렁거리던 금마객이요 / 逶迤金馬客
거칠 것 없었던 고양도로세 / 落魄高陽徒
때를 만났더라면 힘을 발휘하셨을 분 / 時來展志力
건방지게 까부는 범부가 아니었더라오 / 跅弛非凡夫
일휘출수(一麾出守) 본래 소원 이루셨으니 / 一麾諒素願
높은 자리 따위야 어찌 안중(眼中)에 있었으리 / 高位焉足圖

고죽(孤竹) 최공 경창(崔公慶昌) 공의 시 중에 “한밤중에 황유의 잎 모두 다 날려갔네.[一夜黃楡葉盡飛]”라는 구절과 “아득해라 모래 벌판 지는 해 시름겨워.[陰磧茫茫落日愁]”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모두 북정(北征) 당시에 지은 것들이다. 공은 성색(聲色)을 경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벼슬길에서 낭패를 당하더니, 그나마도 또 일찍 죽는 비운(悲運)을 맞게 되었다. 최립 선생(崔岦先生)이 공의 시에 대해서 발문(跋文)을 쓰면서 말하기를 “그 출중한 재질이나 풍류(風流)로 말하건대, 백창경(白彰卿)은 비교도 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최백(崔白)이라고 잘못 병칭(幷稱)하고 있는데, 이 두 사람은 결코 같은 차원에서 논할 수가 없다고 하겠다.” 하였는데, 이는 진정으로 공을 알아보고서 한 말인 듯싶다.
가을날 황유의 잎 바람에 날려가고 / 黃楡葉飛秋
음산한 모래 벌판 해 지는 저녁이면 / 陰磧日沈夕
창을 비껴 들고 새로운 시 쏟아 내는 / 每懷孤竹子
우리 고죽자가 항상 떠올랐다오 / 橫槊吐新作
마음 편치 못했던 장사의 울분 / 壯士氣不平
성색에 붙잡힐 몸 아니었는데 / 聲色非可縛
어찌 옥당(玉堂)에 설 자리가 없어서 / 豈無玉署班
끝내 금하객이 되고야 말았는가 / 終作金河客
다행히 간이의 한마디 평을 얻어 / 賴有簡易評
교도의 멍에를 벗어났구려 / 免被郊島扼

백호(白湖) 임공 제(林公悌) 공은 병법(兵法)을 좋아하여 보검(寶劍)을 허리에 차고 준마(駿馬)에 올라타고서 하루에 수백 리씩을 치달리곤 하였으며, 북도 평사(北道評事)에서 서도 평사(西道評事)로 바뀌어 부임할 적에는 어사(御史)의 의장대(儀仗隊)를 고의로 범하여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공은 《수성지(愁城志)》를 지어 평소의 뜻을 드러내 보였는데, 공과 관련된 기위(奇偉)한 일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석 자의 칼 허리에 찬 우리 임랑은 / 林郞三尺劍
세상에 보기 드문 기걸찬 웅걸(雄傑) / 詭然希世雄
그동안 손오 병법 몰두하더니 / 向來孫吳法
시구에서 그 묘리(妙理)를 터득했구려 / 得妙詩句中
우연히 장군의 말 얻어 타고는 / 偶騎將軍馬
무서운 어사의 말 피하지도 않으신 분 / 不避御史驄
애석해라 산하를 집어삼킨 그 기개여 / 惜哉湖海氣
바람에 날리는 쑥대처럼 떨어져 꺾이다니 / 摧落隨孤蓬
그대여 공이 지은 출새곡을 한번 보소 / 君看出塞曲
무지개 가로 비껴 현란한 빛 뿌리리니 / 耿耿吐晴虹

동악(東岳) 이공(李公) 최근에 숙부(叔父)의 서한을 받았는데, 거기에 “거취(去就)가 낭패스럽기만 하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 살펴보건대, 《북새록(北塞錄)》 중에서도 구진(九鎭)의 작품이야말로 최고의 경지를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봉소에서 날아온 하나의 봉함 편지 / 鳳沼一封書
용사에서 지으신 구진의 작품 / 龍沙九鎭作
총애와 치욕이 달라졌다 뉘 말하랴 / 誰言寵辱殊
홀로 고인(古人)의 마음 다잡고 계시는 걸 / 古心獨自挹
애오라지 울리나니 금석(金石)의 악기 소리 / 金鍾聊擊撞
옥검이 언제 무디어진 걸 본 적이 있소 / 玉劍詎昏澁
뒷세상에 꽃다운 명성 전해지고 남을 텐데 / 榮名信來世
머리 굽혀 높은 관직 주울 필요 뭐 있으랴 / 好爵嫌俛拾
공은 결코 혜완의 부류가 아니건만 / 公非嵇阮流
나 때문에 걸려들어 함께 언급되시누나 / 坐我相連及


 

[주D-001]강사(强仕)의 연세 : 40세를 말한다. 《예기(禮記)》 곡례 상(曲禮上)에, “사십왈강이사(四十曰强而仕)”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마흔 살쯤 되면 지기(志氣)가 굳건하게 확립되어 이해(利害)나 화복(禍福)에 흔들림이 없게 되니 이제 벼슬해도 된다는 뜻이다.
[주D-002]산왕(山王)의 …… 것 :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을 오평사영(五評事詠)에서 제외시키는 것을 말한다. 산왕은 죽림칠현(竹林七賢)에 속하는 진(晉) 나라 산도(山濤)와 왕융(王戎)을 가리키는데, 남조 송(宋)의 안연지(顔延之)가 ‘오군영(五君詠)’을 지을 때에 이 두 사람은 귀하게 현달(顯達)하였다고 하여 포함시키지 않은 고사가 전한다. 《宋書 卷73 顔延之列傳》
[주D-003]중용(仲容) : 죽림칠현인 완적(阮籍)의 조카 완함(阮咸)의 자(字)로, 동악의 조카인 택당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다.
[주D-004]호음(湖陰) : 정사룡(鄭士龍)의 호이다.
[주D-005]급제(及第)의 …… 발하면서 : 문과에 급제하지 못한 말단 관직의 신분으로, 다른 후배들이 자꾸만 승진하는 것을 보고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였다는 말이다. 청삼(靑衫)은 보통 서생(書生)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청색 옷을 입었던 문관 8품과 9품의 관직을 가리킨다. 천신(千薪)은 옛날 장작더미 위로 천 개의 새로운 장작이 쌓였다는 적천신(積千薪)의 준말로, 한(漢) 나라 급암(汲黯)이 자기보다 높은 지위에 후배들이 올라가는 것을 보고 이 비유를 들어 한 무제(漢武帝)에게 불평을 늘어놓았던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120 汲黯列傳》 참고로 소식(蘇軾)의 시에 “청삼이여 말단 관직 싫어하질랑 마오, 백발의 이 몸 위에도 장작이 천 층 쌓였으니.[靑衫莫厭百僚底 白髮上有千薪積]”라는 표현이 있다. 《蘇東坡詩集 卷30 送程六表弟》
[주D-006]영대(靈臺)의 …… 봄빛이었어라 : 따분한 서울의 관직을 떠나 변방의 평사(評事)로 오면서부터 오히려 자유분방한 생활을 즐겼다는 말이다. 동한(東漢)의 제오힐(第五頡)이 낙양(洛陽)에 기거할 집이 없어 영대(靈臺)에서 기숙(寄宿)하면서 며칠 동안이나 불을 때지 못한 채 실의에 잠겼던 고사가 있다. 《後漢書 卷41 第五倫列傳 附 第五頡》
[주D-007]양공(梁公)은 …… 일으켰지 : 양응정은 교리(校理) 양팽손(梁彭孫)의 아들로, 소싯적부터 두각을 나타내 생원시(生員試)에 장원 급제하고 식년 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는 등 문명(文名)을 일찍이 떨쳤다는 말이다. 오토(於菟)는 호랑이의 별칭인데, 송(宋) 나라 육유(陸游)의 ‘후우탄(後寓嘆)’이라는 시에 “천 년 동안 동해 바다 메우려는 정위새요, 소를 잡아먹으려는 사흘 된 범이로다.[千年精衛心平海 三日於菟氣食牛]”라는 구절이 있다.
[주D-008]오색필(五色筆) : 뛰어난 문재(文才)를 뜻하는 표현이다. 남조 양(梁)의 문학가 강엄(江淹)이 만년에 곽박(郭璞)에게 오색필을 돌려 주는 꿈을 꾸고 나서부터 문재(文才)가 감퇴하기 시작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南史 卷59 江淹列傳》
[주D-009]금마객(金馬客) : 금마는 금마 옥당(金馬玉堂)의 준말로, 금마객은 한림(翰林)의 직책을 가리키는 말이다.
[주D-010]고양도(高陽徒) : 고양주도(高陽酒徒)의 준말로, 예의 범절이나 격식 따위에 구애받지 않는 호방한 인물을 가리킨다.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역이기(酈食其)의 면회 요청을 받고서 사람을 시켜 사절하게 하자, 역이기가 “나는 고양 출신의 술꾼이지, 유학의 글이나 떠받드는 꽉 막힌 사람이 아니다.[吾高陽酒徒 非儒人也]”라고 하고는 끝내 뜻을 관철했던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97 酈生列傳》
[주D-011]일휘출수(一麾出守) : 지방관, 즉 온성 부사(穩城府使)로 나가게 된 것을 말한다. 남조 송(宋) 안연지(顔延之)의 ‘오군영(五君詠)’ 가운데 완시평(阮始平)을 읊은 대목에 “몇 번 추천받아도 벼슬자리 못 얻다가, 손 한 번 내저음에 수령으로 나갔도다.[屢薦不入官 一麾乃出守]”라는 표현이 있다.
[주D-012]황유(黃楡) : 누렇게 변한 느릅나무라는 뜻으로, 이 나무가 많은 북쪽 변방의 요새지를 가리킨다.
[주D-013]북정(北征) : 고죽이 선조 1년(1568) 30세 때에 문과(文科)에 급제한 뒤 북평사(北評事)로 나간 것을 가리킨다.
[주D-014]백창경(白彰卿) : 창경은 백광훈(白光勳)의 자(字)이다. 고죽이 창경과 함께 일찍이 양응정(梁應鼎)의 문하에서 공부한 적이 있었으며, 모두 당시(唐詩)에 뛰어나 이달(李達)과 더불어 삼당 시인(三唐詩人)으로 불려지기도 하였다.
[주D-015]마음 …… 울분 : 두보(杜甫)의 시에 “장사들은 피눈물로 서로들 쳐다보고, 충신은 울분에 마음 편치 못했어라.[壯士血相視 忠臣氣不平]”라는 구절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16 八哀詩 贈左僕射鄭國公嚴公武》
[주D-016]끝내 …… 말았는가 : 고죽이 종성 부사(鍾城府使)로 특별 제수를 받았다가 참소로 인해 상경하던 도중 객관(客館)에서 죽었던 것을 가리킨다. 금하(金河)는 대흑하(大黑河)라는 강물 이름으로 북변(北邊)의 둔수(屯戍) 지역을 뜻한다.
[주D-017]교도(郊島)의 멍에 : 고죽과 창경이 세상에 의해 같은 부류의 인물로 잘못 일컬어지고 있었던 것을 가리킨다. 교도(郊島)는 당대(唐代)의 시인인 맹교(孟郊)와 가도(賈島)를 병칭한 말로, 그들의 시풍(詩風)이 비슷하여 교도로 일컬어졌는데, 소동파(蘇東坡)에 의해 ‘교한도수(郊寒島瘦)’라는 평을 얻기도 하였다.
[주D-018]무서운 …… 분 : 동한(東漢)의 환전(桓典)이 시어사(侍御史)가 되어 권귀(權貴)를 가차없이 처벌하였으므로, 그가 총마(驄馬)를 타고 거리에 나가면 사람들이 모두 무서워하면서 “꼭꼭 숨어라, 총마 어사 나가신다.”고 말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37 桓榮列傳 附 桓典》
[주D-019]무지개 …… 뿌리리니 : 그 시가 비분강개(悲憤慷慨)하는 뜻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는 말이다. 전국 시대의 협사(俠士) 형가(荊軻)가 연(燕) 나라 태자 단(丹)의 의기에 감동되어 진시황(秦始皇)을 죽이기 위해 비분강개한 어조로 역수 한풍(易水寒風)의 시를 읊고 자객(刺客)으로 떠날 때, 하늘도 감동하여 흰 무지개가 해 주위에 가로 비껴 걸려 있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83 鄒陽列傳 註》
[주D-020]봉소(鳳沼) : 중서성(中書省)을 가리키는 봉황지(鳳凰池)와 같은 말로, 조정을 가리킨다.
[주D-021]용사(龍沙) : 황막(荒漠)한 북변(北邊)의 요새지를 말한다.
[주D-022]애오라지 …… 악기 소리 : 동악의 출중한 문재(文才)를 비유한 말이다. 진(晉) 나라 손작(孫綽)이 ‘천태부(天台賦)’를 짓고 나서 그 시를 땅에 던지면 금석의 악기 소리가 울릴 것이라고 자부한 고사가 있다. 《世說新語 文學》 참고로 한퇴지(韓退之)의 시에 “문장을 가지고 혼자서 즐기나니, 날마다 울리는 금석의 악기 소리.[文章自娛戱 金石日擊撞]”라는 구절이 있다. 《韓昌黎集 卷5 病中贈張十八》
[주D-023]옥검(玉劍) : 옥돌도 마치 진흙처럼 자른다는 곤오검(錕鋘劍)으로, 걸출한 재능을 가리키는 말이다.
[주D-024]혜완(嵇阮) : 죽림칠현(竹林七賢)이었던 삼국 시대 위(魏) 나라의 혜강(嵇康)과 완적(阮籍)을 병칭한 말이다. 참고로 두보(杜甫)가 정건(鄭虔)을 생각하며 지은 시에 “당신은 진정 혜완의 부류, 그나마 또다시 세상의 혹평을 받았구려.[夫子嵇阮流 更被時俗惡]”라는 구절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7 有懷台州鄭十八司戶》


긴 무지개 [정사룡(鄭士龍)]
둥그런 무지개가 맑은 물 위 걸렸는데 / 垂虹屈曲跨淸波
물풀의 향기 속을 도란대며 지나가니 / 藻荇香中笑語過
흡사하긴 삼백 척 길고 긴 송강에서 / 恰似松江三百尺
배를 대고 채릉가를 듣는 것 같네 / 檥船聞唱採菱歌

《상동》


답답함을 풀다 [정사룡]
뜻 내키어 책을 편 채 앉아 있다가 / 隨意攤書坐
외로이 읊조리며 석양빛 보네 / 孤吟對晩暉
강바람에 배 돛은 잔뜩 부풀고 / 岸風帆腹飽
강가 비에 갈대 싹은 오동통하네 / 洲雨荻芽肥
울 뚫어져 강 풍경 훤히 보이고 / 籬缺通江色
발 내려져 제비 날 때 걸리적대네 / 簾垂礙燕飛
누가 알리 봄나물 뜯는 계절에 / 誰知采蘭節
병중에 봄옷으로 갈아입는 걸 / 和病試春衣

《지북우담》


시구[句] [정사룡]
즐기는 곳이라고 말하지 말라 / 不謂交
뒤바뀌어 송별하는 정자 되리라 / 飜成送別亭

《정지거시화(靜志居詩話)》

 慕齋先生集卷之一
 
李擇之所作宜寧聚遠樓韻 a_020_016d


南州紫氣認靑牛。戲墨新題在一樓。百里湖山增變態。幾時談笑共淹留。天涯明月年年好。海上閑雲日日浮。不用虛名添白髮。欲從關尹訪丹丘。


默齋先生文集卷之四
 七言絶句
鼎津 a_019_258b


籊籊淇邊竹數竿。倩工描寫固非難。元龍一夜思江海。更覺鷗盟亦未寒。


국조보감 제31권
 선조조 8
25년(임진, 1592)


○ 2월. 대장(大將) 신립(申砬)과 이일(李鎰)을 파견하여 각 도의 병기 시설을 순시하도록 하였다. 이일은 양호(兩湖 호서(湖西)와 호남(湖南)임)로 가고, 신립은 경기(京畿)와 해서(海西)로 갔다가 한 달 뒤에 돌아왔다.
○ 4월. 14일 왜적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침략해 와서 부산진(釜山鎭)을 함락시켰는데 첨사(僉使) 정발(鄭撥)이 전사하고, 이어 동래부(東萊府)가 함락되면서 부사 송상현(宋象賢)도 전사하였다. 평수길(平秀吉)이 우리나라가 그들에게 명 나라를 공경하는 길을 빌려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마침내 여러 섬의 군사 20만을 징발하여 직접 거느리고 일기도(一歧島)까지 이르러 평수가(平秀家) 등 36명의 장수에게 나누어 거느리게 하고, 대마도주 평의지(平義智)와 평조신(平調信)ㆍ행장(行長)ㆍ현소(玄蘇)를 향도로 삼아 4~5만 척의 배로 바다를 뒤덮고 와 이달 13일 새벽 안개를 틈타 바다를 건너왔다.
부산 첨사 정발은 전선(戰船)에다 구멍을 뚫어 가라앉히게 하고 군사와 백성들을 모두 거느리고 성가퀴를 지켰다. 이튿날 새벽에 적이 성을 백겹으로 에워싸고 서쪽 성 밖의 높은 곳에 올라가 포(砲)를 비오듯 쏘아대었다. 정발이 서문(西門)을 지키면서 한참 동안 대항하여 싸웠는데, 적의 무리가 화살에 맞아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그러다가 정발이 화살이 다 떨어져 적의 탄환에 맞아 전사하자 성이 마침내 함락되었다.
동래 부사 송상현은 지역 안의 주민과 군사 그리고 이웃 고을의 군사를 불러 모두 데리고 성에 들어가 나누어 지켰다. 병사 이각(李珏)도 병영(兵營)에서 달려왔으나 조금 지나서 부산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핑계대기를 “나는 대장이니 외부에 있으면서 협공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즉시 나가서 소산역(蘇山驛)에 진을 쳤으므로 즉시 포위를 당하였다. 상현이 성의 남문에 올라가 전투를 독려했으나 반나절 만에 성이 함락되었다. 상현은 갑옷 위에 조복(朝服)을 입고 의자에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적이 마침내 모여들어 생포하려고 하자 상현이 발로 걷어차면서 항거하다가 마침내 해를 입었다.
성이 장차 함락되려고 할 때에 상현은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손수 부채에다 “달무리 끼고 포위당한 외로운 성에 대진의 구원병은 오지를 않네. 군신의 의리는 중하고 부자의 은혜는 가볍게 되었어라.[孤城月暈 大鎭不救 君臣義重 父子恩輕]”고 써서 집안 종에게 주어 그의 아비 복흥(復興)에게 돌아가 보고하게 하였다. 죽은 뒤에 평조신이 보고서 탄식하며 시체를 관(棺)에 넣어 성밖에 묻어주고 푯말[標]을 세워 식별하게 하였다.
갑오년(1594, 선조 27)에 병사(兵使) 김응서(金應瑞)가 울산(蔚山)에서 청정(淸正)을 만났을 때 청정이 그가 의롭게 죽은 상황을 갖추어 말하고, 또 집안 사람이 시체를 거두어 반장(返葬)하도록 허락하는 한편 경내를 벗어날 때까지 호위하여 주었다. 그 뒤 이조 참판에 추증하고 그의 아들 중 한 사람에게는 벼슬을 내리도록 명하였다. 서인(庶人)인 신여로(申汝櫓)가 상현을 따랐었는데 상현이 돌려보냈었다. 그러나 그는 도중에서 부산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난리를 당하여 은혜를 저버릴 수 없다.” 하고 도로 성으로 들어가 함께 죽었다고 한다.
○ 적에 대한 보고가 이르자 대신과 비변사가 빈청(賓廳)에 모여, 이일(李鎰)을 순변사(巡邊使)로 삼아 중로(中路)에 내려보내고, 성응길(成應吉)을 좌방어사로 삼아 좌도(左道)에 내려보내고, 조경(趙儆)을 우방어사로 삼아 서로(西路)에 내려보내고, 유극량(劉克良)을 조방장으로 삼아 죽령(竹嶺)을 지키게 하고, 변기(邊璣)를 조방장으로 삼아 조령(鳥嶺)을 지키게 하고, 전 강계 부사(江界府使) 변응성(邊應星)을 기복(起復)시켜 경주 부윤으로 삼자고 청하였다. 그러나 모두 현재 소유한 병력이 없어 단지 스스로 군관(軍官)을 뽑아 대동하도록 하였다. 이로부터 함락되고 패배하였다는 보고가 잇따라 이르니 도성의 인심이 크게 흔들렸다. 당시 사방에서 군사를 징발하였으나 아직 이르지 않으므로 이일이 장기(壯騎)와 군관 60여 인을 대동하고 길을 떠나 4천여 명의 군사를 수습하고 길을 재촉하여 달려갔다.
대간이, 대신(大臣)을 체찰사(體察使)로 삼아 여러 장수들을 단속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청하였다. 이산해(李山海)가 유성룡(柳成龍)을 보낼 것을 청하니 따랐고, 김응남을 부사(副使)로 삼았다. 성룡이 신립(申砬)에게 계책을 물으니, 신립이 말하기를,
“이일이 열세한 군사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내려갔으나 후속 병력이 없다. 체찰사가 내려간다 하더라도 전투하는 장수가 아니니 무장(武將)을 급히 먼저 보내 이일을 지원하도록 하여야 한다.”
하였다. 이에 성룡이 김응남과 뵙기를 청하여 신립을 먼저 보내기를 청하자, 상이 신립을 불러 하문하니 신립도 사양하지 않으므로 마침내 도순변사(都巡邊使)로 삼았다. 신립이 떠나려 할 때에 상이 불러 보고 보검(寶劍)을 내리면서 이르기를,
“이일 이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모두 참(斬)하라.”
하였다. 당시에 상이 김여물(金汝岉)의 재능과 용맹을 아까워하여 방어해야 할 긴요한 곳에 정배(定配)시켜 공을 세워 보답하도록 명하였다. - 이에 앞서 김여물이 의주 목사로 있으면서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었다. - 여물이 출옥(出獄)하자 성룡이 불러 계책을 의논해 보고 크게 기특하게 여겼다. 성룡이 아뢰기를,
“신이 이번에 여물을 처음 보고 병사(兵事)를 의논해 보니, 무용(武勇)과 재략(才略)이 남보다 뛰어날 뿐만이 아닙니다. 막중(幕中)에 두고 계책을 세우는데 자문하도록 하였으면 합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신립이 또 청하기를,
“신이 일찍이 서로(西路)의 진영을 맡았을 적에 여물을 알았는데 재능과 용맹뿐만이 아니라 충의(忠義)의 인사였습니다. 신에게 소속시켜 먼저 가게 했으면 합니다.”
하니, 상이 또 따랐다. 신립이 거느린 무리는 도성의 무사(武士)ㆍ재관(材官)과 외사(外司)의 서류(庶流)ㆍ한량인(閑良人)으로 활을 잘 쏘는 자 수십 명이었다. 조정의 관원으로 하여금 각기 전마(戰馬) 한 필씩을 내어 돕도록 하였다. 이들이 인근 고을을 순행하며 군사를 수합 하였는데 겨우 80명이었다.
○ 왜적이 상주(尙州)에 침입했는데, 이일의 군대가 패배하여 돌아왔다.
종사관(從事官)인 홍문관 교리 박지(朴篪)ㆍ윤섬(尹暹), 방어사 종사관인 병조 좌랑 이경류(李慶流), 판관 권길(權吉)이 모두 죽었다. 이일이 문경에 이르러 장계를 올려 대죄(待罪)하고, 다시 조령을 넘어 신립의 군진으로 향하였다.
○ 적병이 충주(忠州)에 침입하였는데 신립이 패하여 전사하였다. 처음에 신립이 군사를 단월역(丹月驛)에 주둔시키고 몇 사람만 데리고 조령에 달려가서 형세를 살펴보았다.
김여물이 말하기를,
“저들은 수가 많고 우리는 적으니 그 예봉과 직접 맞부딪칠 수는 없습니다. 이곳의 험준한 요새를 지키면서 방어하는 것이 적합합니다.”
하고, 또 높은 언덕을 점거하여 역습으로 공격하자고 하였으나 신립이 모두 따르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이 지역은 기마병(騎馬兵)을 활용할 수 없으니 들판에서 한바탕 싸우는 것이 적합하다.”
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장계를 올려 이일을 용서하여 종군(從軍)하게 해서 공로를 세우도록 청하고 드디어 군사를 인솔하여 도로 충주성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여물은 틀림없이 패할 것을 알고 종을 보내어 아들 김류(金瑬)에게 편지를 부치기를,
“삼도(三道)의 군사를 징집하였으나 한 사람도 오지 않았다. 남아(男兒)가 나라를 위하여 죽는 것은 진실로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나라의 수치를 씻지 못하고 웅대한 뜻이 재가 되고 마니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할 뿐이다.”
하였다. 신립이 군사를 인솔하여 탄금대(彈琴臺)에 - 충주 읍내에서 5리쯤 떨어진 곳에 있다. - 나가 주둔하여 배수진을 쳤는데, 이 달 27일에 적이 이미 조령을 넘어 단월역에 이르렀다.
이튿날 새벽에 적병이 길을 나누어 대진(大陣)은 곧바로 충주성으로 들어가고, 좌군(左軍)은 달천(達川) 강변을 따라 내려오고, 우군(右軍)은 산을 따라 동쪽으로 가서 상류를 따라 강을 건넜는데 병기가 햇빛에 번쩍이고 포성이 천지를 진동시켰다. 신립의 군사가 크게 패하였으며, 적이 벌써 사면으로 포위하므로 사람들이 다투어 물에 빠져 흘러가는 시체가 강을 덮을 정도였다.
신립이 여물과 말을 달리면서 활을 쏘아 적 수십 명을 죽인 뒤에 모두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이일은 사잇길을 따라 산으로 들어갔다가 왜적 두세 명을 만나 한 명을 쏘아 죽여 수급(首級)을 가지고 강을 건너서 치계(馳啓)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에서 처음으로 신립이 패하여 죽은 것을 알았는데, 병조에서는 마침내 이일의 죄를 용서하였다.
○ 이조 판서 이원익(李元翼)을 평안도 도순찰사(都巡察使)로, 최흥원(崔興源)을 황해ㆍ경기도 도순찰사로 삼아 모두 당일에 떠나도록 하였는데, 이는 장차 상이 서쪽으로 떠날 것을 의논할 때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원익은 일찍이 안주 목사(安州牧使)를 지냈고 흥원은 황해 감사를 지냈는데, 모두 은혜를 베푸는 정치를 하여 민심이 귀의하였기 때문에 그들을 먼저 보내 어루만져 달램으로써 순행(巡幸)에 대비하려는 것이었다.
○ 이 달 29일 저녁에 상이 충주에서 패전한 보고를 듣고 동상(東廂)에 나아가 서쪽으로 떠날 계획을 의결하였다. 대신들이 아뢰기를,
“일의 형세가 여기에 이르렀으니 잠시 상께서 평양으로 가셔서 명 나라에 군사를 청해 회복을 도모해야 합니다.”
하였다. 장령 권협(權悏)이 뵙기를 청하여 경성(京城)을 지킬 것을 청했는데, 유성룡이 아뢰기를,
“권협의 말이 무척 충성스럽기는 하나 일의 형세가 어쩔 수 없습니다.”
하고, 이어 왕자를 여러 도에 나누어 보내 근왕병(勤王兵)을 불러 모아 회복을 도모하게 하고 세자는 어가를 따라가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 이달 그믐에 상이 서쪽으로 떠났다. 상이 일단 서쪽으로 의논을 결정하자 대궐 안의 하리와 노복들이 떠들다가 물러가더니 조금 뒤에는 위사(衛士)들도 모두 흩어졌으며, 시각을 알리는 북소리도 끊어졌다. 밤이 깊어서야 이일(李鎰)의 장계가 비로소 도착하였는데, 적이 금명간에 도성에 이를 것이 분명하다고 하였다. 장계가 들어온 뒤 얼마쯤 있다가 상이 돈의문(敦義門)을 나가 서쪽으로 떠났는데, 사관(祠官)으로 하여금 종묘와 사직의 신주판[主版]을 받들고 앞서게 하고 세자가 그 뒤를 따랐으며 어가가 나간 뒤 왕자 신성군 후(信城君珝)와 정원군 부(定遠君琈)가 따랐다. 상은 융복(戎服)으로 말을 타고 왕비(王妃)는 걸어서 인화문(仁和門)을 나왔는데, 수십 명의 시녀가 따랐다. 도승지 이항복이 촛불을 잡고 앞을 인도하니 왕비가 성명을 물어서 알고 위로하며 권면하였다.
○ 5월. 평명(平明)에 어가가 모래재[沙峴]를 넘었다. 이날 많은 비가 내렸는데 경기 감사 권징(權徵)이 뒤따라 와서 입고 있던 우의(雨衣)를 바쳤다. 일행이 비를 맞으며 벽제역(碧蹄驛)에 이르러 윤두수(尹斗壽)를 불러 차고 있던 칼을 풀어 그에게 주면서 이르기를,
“경(卿)의 형제는 나를 떠나지 말라.”
하였다.
상이 동파관(東坡館)을 출발하였다. 이날 아침에 상이 대신 이산해와 유성룡을 불러 이르기를,
“이모(李某)야 유모(柳某)야! 일이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내가 어디로 가야 하겠는가? 꺼리거나 숨기지 말고 속에 있는 생각을 털어놓고 말하라.”
하고, 또 윤두수를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하여 그에게 하문하니, 여러 신하들이 엎드려 눈물을 흘리면서 얼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상이 이항복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승지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어가를 의주(義州)에 머물게 했다가 만약 형세와 힘이 궁하여 팔도가 모두 함락된다면 바로 명 나라에 가서 호소할 수 있습니다.”
하자, 두수가 아뢰기를,
“북도(北道)는 군사와 말이 날래고 굳세며 함흥(咸興)과 경성(鏡城)은 모두 천연적인 요새로 믿을 만하니 재를 넘어 북쪽으로 가는 것이 좋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승지의 말이 어떠한가?”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안 됩니다. 어가가 우리 국토 밖으로 한 걸음만 떠나면 조선은 우리 땅이 되지 않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국으로 가는 것이 본래 나의 뜻이다.”
하니, 성룡이 안 된다고 하였다. 항복이 아뢰기를,
“신이 말한 것은 곧장 압록강을 건너자는 것이 아니라 극단의 경우를 두고 한 말입니다.”
하고, 성룡과 반복하여 논쟁하였는데, 성룡이 말하기를,
“지금 관동과 관북 제도(諸道)가 그대로 있고 호남에서 충의로운 인사들이 곧 벌떼처럼 일어날 텐데 어떻게 이런 일을 갑자기 논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산해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성룡이 물러나와 항복을 책망하며 말하기를,
“어떻게 경솔히 나라를 버리자는 의논을 내놓는가. 자네가 비록 길가에서 임금을 따라 죽더라도 궁녀나 내시의 충성밖에 되지 못할 것이다. 이 말이 한번 퍼지면 인심이 와해(瓦解)될 것이니 누가 수습할 수 있겠는가.”
하니. 항복이 사과하였다.
상이 개성 남문루(南門樓)에 나아가 백성들을 모아 타이르고 유지를 내려 각각 마음에 품은 바를 진술하도록 하였다. 부로(父老)들이 앞으로 나와 정 정승(鄭政丞)을 부르기를 바란다고 말하였는데, 정철(鄭澈)을 가리킨 것이었다. 상이 알았다 하고 즉시 정철을 석방하도록 명하면서 전지를 내리기를,
“경(卿)의 충효 대절을 알고 있으니 속히 행재소(行在所)로 오라.”
하였다. 이로부터 기축년(1589, 선조 22)ㆍ신묘년(1591, 선조 24)에 처벌받은 사람들이 모두 석방되어 돌아와 서용(敍用)되었다.
○ 이달 3일에 왜적이 도성에 침입하자 유도대장 이양원(李陽元),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이 도망갔다. 당초 적은 동래(東萊)에서 세 길로 나누어 진격하였다. 한 길은 중도(中道)로 양산(梁山)ㆍ밀양(密陽)ㆍ청도(淸道)ㆍ대구(大丘)ㆍ인동(仁同)ㆍ선산(善山)을 경유하여 상주(尙州)에 이르러 이일(李鎰)의 군사를 패배시켰고, 한 길은 좌도(左道)로 장기(長鬐)ㆍ기장(機張)을 거쳐 좌병영(左兵營)인 울산(蔚山), 경주(慶州)ㆍ영천(永川)ㆍ신령(新寧)ㆍ의흥(義興)ㆍ군위(軍威)ㆍ비안(比安)을 함락하고 용궁(龍宮)의 하풍진(河豐津)을 건너 문경(聞慶)으로 진출해서 중로의 군사와 합류한 다음 조령(鳥嶺)을 넘어 충주(忠州)로 침입하였다. 이들은 다시 충주에서 두 갈래의 길로 나뉘었는데, 하나는 여주(驪州)로 가서 강을 건너 양근(楊根)을 경유하여 용진(龍津)을 건너 경성의 동로(東路)로 진출하였고, 하나는 죽산(竹山)과 용인(龍仁) 쪽으로 나아가 한강(漢江)에 이르렀다. 또 한 길은 김해(金海)를 경유하여 우도(右道)로 진출, 성주(星州) 무계현(茂溪縣)을 따라 강을 건너 지례(知禮)ㆍ금산(金山)을 거쳐 추풍령(秋風嶺)을 넘어서 충청도 영동현(永同縣)으로 진출, 청주(淸州)로 침입하였다가 방향을 바꾸어 경기로 향했다.
왜적의 정기(旌旗)와 검극(劍戟)은 천 리에 끊이지 않고 포성(砲聲)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그들은 10리나 50~60리마다 험한 곳을 점령하여 진영을 설치하고 밤이면 횃불로 서로 응하였다. 적이 한강 남쪽에 이르자 도원수 김명원이 군사 1천여 명을 이끌고 제천정(濟川亭)에 주둔하였는데 적이 쏜 포환(砲丸)이 정자 위에 어지러이 떨어지자, 명원은 감히 적에게 항거하지 못하고 군기(軍器)를 모두 강에다 넣어버린 뒤에 행재소로 후퇴하여 도망하였는데, 적이 마침내 강을 건넜다.
○ 도원수 김명원에게 임진(臨津)을 지키도록 명하였다. 명원이 임진에 이르러 장계를 올려 적의 상황을 말하니, 상이 김명원에게 군사가 없었다는 것을 참작해서 그가 후퇴한 죄를 묻지 않고 다시 경기와 해서(海西)의 군사를 징발하여 임진을 지키도록 명한 것이다. 남병사(南兵使) 신할(申硈)이 막 체직(遞職)되어 돌아왔으므로 수어사(守禦使)로 삼아 함께 임진을 지키면서 서쪽으로 오는 길을 막도록 명하였는데, 유극량(劉克良)도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예속되었다.
○ 상이 자신의 잘못을 책망하는 교서를 팔도에 내리고 사신을 보내어 의병(義兵)을 불러 모으게 하였다. 상이 개성에 머문 지 이틀 만에 서로(西路)로 출발하여 금교역(金郊驛)에 머물렀다. 이날 적이 이미 도성에 침입하여 서쪽으로 향한다는 말을 듣고 상이 다급하여 재촉해서 떠났다. 당시 종묘 사직의 위패를 개성의 목청전(穆淸殿)에 봉안(奉安)했다가 그대로 묻게 하였는데, 상이 보산참(寶山站)에 이르렀을 때 윤두수가 그 사실을 듣고 속히 예조 참의를 보내어 받들고 오도록 청하였다.
○ 상이 평양(平壤)에 이르렀다. 호종한 신하들에게 직질(職秩)을 차등 있게 올리도록 명하고, 또 하교하였다.
“이조 참판 이항복은 마음이 곧고 신의가 있으며 물외(物外)에 초연한 인물이니, 위급한 상황에서는 더욱 크게 기용하는 것이 타당하다. 어떻게 자급(資級) 때문에 구애받을 수 있겠는가. 판서에 궐원이 생기면 발탁해서 보임하거나 다른 중책을 맡기는 것도 좋을 것이다. 경들은 나의 뜻을 알라.”
○ 신각(申恪)은 처음에 부원수로서 김명원(金命元)을 따라 한강에서 방어했었는데, 명원의 군사가 패하자 이양원(李陽元)을 따라 양주(楊州)에 와서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하였다. 마침 응원하러 온 함경 병사(咸鏡兵使) 이혼(李渾)을 만나 군사를 합쳐 진을 결성했는데, 여염(閭閻)에 흩어져 약탈하는 왜병을 양주의 개재[蟹嶺]에서 요격(邀擊)하여 패배시키고 70급(級)을 참수하였다. 왜적이 우리나라를 침범한 뒤로 처음 이런 승전이 있었으므로 원근에서 듣고 의기가 고무되었다. 그런데 이양원은 당시 산골짜기에 있었으므로 상황의 보고가 끊겼고, 김명원은 신각이 양원을 따른다고 핑계대고 도망쳤다는 것으로 장계를 올려 처벌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유홍(兪泓)이 그대로 믿고서 선전관을 보내어 현장에서 베도록 청하였다. 선전관이 떠나고 난 뒤에 승리했다는 보고가 이르렀으므로 상이 뒤따라 선전관을 보내어 중지하도록 하였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 적이 처음 도성에 침입했을 때 궁궐은 모두 타버리고 종묘만 남아 있었으므로 왜의 대장 평수가(平秀家)가 그곳에 거처하였는데, 밤중에 괴이한 일이 많고 따르던 졸개 중에 갑자기 죽는 자도 생겼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는 조선 종묘에 신령(神靈)이 있다.”고 하자, 평수가가 두려워하여 마침내 종묘를 태워버리고 남방(南坊)에 -바로 남별궁(南別宮)이다.- 이거(移居)하였다.
○ 성절사(聖節使) 유몽정(柳夢鼎)이 먼저 떠났다. 몽정이 성절사로 임명되어 미처 출발하기도 전에 상이 서쪽으로 떠났으므로 몽정은 단지 표문(表文)과 자문(咨文)을 가지고 역관(譯官) 등과 - 방물(方物)은 봉하지 못했다. - 어가를 따라 평양에 이르렀다. 대신들은 고급사신(告急使臣)을 보내야 한다며 성절사는 보내지 말자고 청하였다. 그런데 마침 한응인(韓應寅)이 연경(燕京)에서 돌아와 아뢰기를,
“성절사를 보내지 않으면 명 나라에서 틀림없이 의심할 것입니다.”
하였으므로 이에 다시 의논하여 보냈다. 상이 몽정을 직접 대하여 유시하기를,
“연경에 이르거든 그대가 먼저 중국으로 들어가겠다는 의사를 말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몽정이 아뢰기를,
“중국에서는 우리나라가 적을 친하게 대한다고 의심하는데 만약 원조를 청하지 않고 들어가겠다고 먼저 청한다면 의혹만 더 불러일으킬 듯싶습니다. 모름지기 왜변(倭變)이 일어난 까닭을 낱낱이 열거하여 요동의 진에 자문(咨文)을 보내어 구원해 줄 것을 청한 다음에 들어가겠다는 말을 해야 합니다.”
하자, 상이 그렇게 여기고 자문을 갖추어 보냈다.
○ 한응인(韓應寅)을 제도순찰사(諸道巡察使)로 삼아 임진(壬辰)에 나아가 주둔하게 하였다. 적이 도성에 들어와서 며칠 동안 군사를 휴식시켰는데, 도로에 와전되기를 “왜인들이 멀리서 오느라 발이 부르트고 피곤해 쓰러져 있으니 몽둥이를 가지고도 격퇴할 수 있다.” 하였다. 행조(行朝)에서 이 말을 듣고 믿은 나머지 김명원(金命元)이 한강을 지키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기고 있었으므로 명원을 재촉하여 임진을 건너 나아가 싸워 도성을 회복하도록 하였으나 명원이 감히 하지 못하였다.
때마침 한응인이 주청사(奏請使)로 연경에서 돌아왔고 서계(西界)의 토병(土兵) 1천여 명도 도착했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오랑캐들을 상대해 본 정예병(精銳兵)이었으므로 마침내 응인을 장수로 삼아 거느리고 임진에 나아가 주둔하면서 기회를 보아 진격하도록 하고, 또 명원의 통제를 받지 말도록 하였다. 그러자 응인은 전혀 의심하지 않고 파주(坡州)를 지나면서 명원을 만나지 않고 임진(臨津)의 입구에 달려가 진격할 것을 재촉하였다.
○ 신할(申硈) 등이 임진강을 건너 왜적을 공격하다가 크게 패하여 죽자 도원수 김명원과 제도순찰사 한응인 등이 임진을 버리고 달아났다.
당초 명원이 여러 장수들을 배치하여 신할ㆍ유극량(劉克良)ㆍ이빈(李薲)ㆍ이천(李薦)ㆍ변기(邊璣) 등에게 임진의 모든 여울을 지키도록 하였으므로 방비가 점차 완비되었다. 그래서 적병이 남쪽 언덕에 도착하여 서로 버틴 지 8~9일이 지나도록 건너지 못하였다. 하루는 적이 여막을 불태우고 퇴각하여 도망하는 모양을 보이며 아군을 유인하였다. 신할은 적이 실제로 퇴각하여 도망하는 줄로만 알고 강을 건너 추격하려고 하였다. 유극량은 나이가 많고 군사에 노련하였으므로 경솔하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고 극력 말하자, 신할이 그를 참하려고 하니 극량이 말하기를 “내가 소싯적부터 종군(從軍)하였는데 어찌 죽음을 피할 마음이 있겠는가. 그렇게 말한 까닭은 국사(國事)를 그르칠까 싶어서이다.” 하고, 분개해서 나가 그의 소속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건너가서 적을 만나 순라하는 기병 몇 명을 참하였다.
신할의 군사가 모두 건넜는데 적은 먼저 산 뒤에 군사를 매복시키고는 산을 의지하여 진을 정돈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신할이 진에 나아가 핍박하니, 적이 일시에 모두 일어나 총과 칼로 접전을 벌이자 여러 군사가 마침내 허물어졌다. 극량이 신할을 부르며 진을 거두어 퇴각하려고 하였으나 신할이 응하지 않고 끝내 죽었다. 극량이 말에서 내려 땅에 앉아 말하기를 “여기가 내가 죽을 곳이다.” 하고 활을 당기어 적을 쏘다가 화살이 떨어지자 죽었다. 군사들이 달아나 강 언덕에 이르렀는데 적이 뒤따르면서 시살하였다. 혹 목을 빼어 칼을 받는 자도 있었으며 나머지는 모두 스스로 강물에 몸을 던졌다. 여울을 지키던 여러 군사들이 모두 흩어졌으며 명원과 응인은 물러나 행재소로 나아갔다. 마침내 적이 강을 건너 서쪽으로 향하였다.
○ 전라 수군절도사 이순신(李舜臣)이 경상도에 구원하러 가서 거제(巨濟) 앞바다에서 왜병을 크게 격파하였다. 왜병들이 바다를 건너오자 경상 우수사 원균(元均)은 대적할 수 없는 형세임을 알고 전함(戰艦)과 전구(戰具)를 모두 물에 침몰시키고 수군 1만여 명을 해산시키고 나서 혼자 옥포 만호(玉浦萬戶) 이운룡(李雲龍), 영등포 만호(永登浦萬戶) 우치적(禹致績)과 남해현(南海縣) 앞에 머물면서 육지를 찾아 적을 피하려고 하였다. 운룡이 항거하여 말하기를 “사또가 나라의 중책을 맡았으니 의리상 관할 경내에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 이곳은 바로 양호(兩湖)의 요해처로서 이곳을 잃게 되면 양호가 위태롭다. 지금 우리 군사가 흩어지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모을 수 있으며 호남의 수군도 와서 구원하도록 청할 수 있다.” 하니. 원균이 그 계책을 따라 율포 만호(栗浦萬戶) 이영남(李英男)을 보내 순신에게 가서 청하게 하였다.
이때 이순신은 여러 포(浦)의 수군을 앞바다에 모으고 적이 이르면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영남의 말을 듣고 여러 장수들은 대부분 말하기를 “우리가 우리 지역을 지키기에도 부족한데 어느 겨를에 다른 도에 가겠는가.” 하였다. 그런데 녹도 만호(鹿島萬戶) 정운(鄭運)과 군관 송희립(宋希立)만은 강개하여 눈물을 흘리며 이순신에게 진격하기를 권하여 말하기를
“적을 토벌하는데는 우리 도(道)와 남의 도가 따로 없다. 적의 예봉을 먼저 꺾어 놓으면 본도도 보전할 수 있다.”
하니, 순신이 크게 기뻐하였다.
언양 현감(彦陽縣監) 어영담(魚永潭)이 수로(水路)의 향도가 되기를 자청하여 앞장서서 마침내 거제 앞바다에서 원균과 만났다. 원균이 운룡과 치적을 선봉으로 삼고 옥포에 이르렀는데, 왜선 30척을 만나 진격하여 크게 깨뜨리니 남은 적은 육지로 올라가 도망하였다. 이에 그들의 배를 모두 불태우고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노량진(鷺梁津)에서 싸워 적선 13척을 불태우니 적이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 이 전투에서 순신은 왼쪽 어깨에 탄환을 맞았는데도 종일 전투를 독려하다가 전투가 끝나고서야 비로소 사람을 시켜 칼끝으로 탄환을 파내게 하니 군중(軍中)에서는 그때에야 그 사실을 알았다.
이에 앞서 순신은 전투 장비를 크게 정비하면서 자의로 거북선을 만들었다. 이 제도는 배 위에 판목을 깔아 거북등처럼 만들고 그 위에는 우리 군사가 겨우 통행할 수 있을 만큼 십자(十字)로 좁은 길을 내고 나머지는 모두 칼ㆍ송곳 같은 것을 줄지어 꽂았다. 그리고 앞은 용의 머리를 만들어 입은 대포 구멍으로 활용하였으며 뒤에는 거북의 꼬리를 만들어 꼬리 밑에 총 구멍을 설치하였다. 좌우에도 총 구멍이 각각 여섯 개가 있었으며, 군사는 모두 그 밑에 숨어 있도록 하였다. 사면으로 포를 쏠 수 있게 하였고 전후 좌우로 이동하는 것이 나는 것처럼 빨랐다. 싸울 때에는 거적이나 풀로 덮어 송곳과 칼날이 드러나지 않게 하였는데, 적이 뛰어오르면 송곳과 칼에 찔리게 되고 덮쳐 포위하면 화총(火銃)을 일제히 쏘았다. 그리하여 적선 속을 횡행(橫行)하는데도 아군은 손상을 입지 않은 채 가는 곳마다 바람에 쏠리듯 적선을 격파하였으므로 언제나 승리하였다. 조정에서는 순신의 승리 보고를 보고 상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로 올려 주었다.
○ 비변사가 요동(遼東)에 자문을 보내어 구원을 청하도록 청하였다. 당시 상하가 근심하고 두려워하며 계책을 결정하지 못했었는데, 이항복이 혼자서 극력 아뢰기를,
“지금 팔도가 무너져 수습해서 온전하기를 도모할 희망이 없습니다. 제갈공명(諸葛孔明)의 지혜로도 선주(先主) 유비(劉備)가 몸을 의탁하여 용무(用武)할 곳이 없음을 보고 손권(孫權)에게 구원을 청하여 마침내 적벽(赤壁)의 승리를 이루게 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다시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 명 나라에 갖추어 아뢰어 구원병을 청하는 것보다 더 좋은 계책이 없습니다.”
하였다. 그러나 묘당(廟堂)의 의논은 모두 그렇게 여기지 않으면서 대체로 말하기를,
“명 나라에서는 틀림없이 기꺼이 와서 구원하지 않을 것이며 가령 와서 구원한다 하더라도 요ㆍ광(遼廣 요동(遼東)과 광녕(廣寧))의 병마를 출동시킬 터인데 요ㆍ광의 군사는 호달(胡達)의 종류로서 반드시 횡포를 부릴 것입니다. 지금은 평안도만이 안정되었다 하겠는데 다시 중국 군사가 공사간에 침탈한다면 필시 거덜이 나고야 말 것이니, 이 계책은 너무나 오활합니다.”
하였다. 이때 마침 이덕형이 뒤따라 왔는데 항복과 의견이 같았으므로 마침내 함께 조당(朝堂)에서 극력 논쟁하니. 비로소 그 말을 따라 논계(論啓)하였다. 이에 상이 그대로 따라 즉시 사람을 보내 요동에 자문을 보내어 급박함을 알리고 군사를 청하였다.
○ 전라도 순찰사 이광이 절도사(節度使) 최원(崔遠)으로 하여금 본도를 지키도록 하고 자신은 4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임천(林川) 길을 경유해서 진격하였다. 방어사(防禦使) 곽영(郭嶸)은 2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여산(礪山)의 길을 경유하여 금강(錦江)을 건넜다. 경상 순찰사 김수(金睟)는 수하 군사 수백을 거느리고, 충청 순찰사 윤국형(尹國馨)은 수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모였다. 이에 세 장수가 날을 정하여 진격할 것을 약속하였는데, 10만 군사라고 호칭하였다.
○ 박진(朴晉)을 경상 병마절도사로 삼았다. 박진이 병사(兵使)가 되어 남은 군사를 수습하고 여러 장수를 나누어 보내 진격도 하고 후퇴도 하며 공격하자 형세가 조금 떨쳤는데 행조(行朝)에 승리의 보고가 잇따라 이르렀다. 그러자 상이 매우 중하게 여기며 이르기를
“나는 박진이 적을 가볍게 여긴 나머지 죽을까 두려웠다. 그래서 일찍이 박진을 불러다 서도(西道)로 가게 해서 부원수로 삼아 평양을 도모하려고 했었는데 조정의 의존이 불편하게 여겨 그만 두었었다.”
하였다.
○ 조방장 원호(元豪)가 여강(驪江)에 주둔한 적을 공격하여 섬멸시켰다. 원호는 강원도 조방장으로 여강의 벽사(甓寺)에 주둔하여 나루를 건너지 못하도록 차단하였다. 그런데 강원 감사 유영길(柳永吉)이 급히 원호를 불러 본도에 돌아가게 되었는데, 원호가 떠나자 적이 비로소 강을 건너 북상하였다. 얼마 있다가 원호가 다시 와서 고을의 군사들을 불러 모으고 적이 구미포(龜尾浦)에 주둔한 것을 보고서 새벽을 틈타 습격하여 50여 급(級)을 베니 나머지는 도망하였다. 이로부터 적이 여주의 길에는 들어가지 못하였다.
○ 6월. 삼도(三道)의 군사가 용인(龍仁)에서 패하여 이광 등이 본도로 돌아갔다.
○ 이순신(李舜臣)이 잇따라 왜병을 패배시켰다. 순신이 본영에서 사량(蛇梁)으로 나아가 진을 쳤는데 당포(唐浦)에서 적선을 만났다. 적장이 큰 군함을 타고 층루(層樓)에 앉아 전투를 독려하였는데, 순신이 휘하 병력을 진격시켜 통전(筒箭)으로 집중 사격하게 하니 층루 위의 왜장이 먼저 화살에 맞아 물에 떨어졌는데, 마침내 엄습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얼마 있다가 전라 우수사 이억기(李億祺)가 휘하의 수군을 모두 데리고 와서 회동하여 마침내 함께 당항포(唐項浦)에 이르러 왜선을 만나 크게 싸웠다. 이때 또 선루(船樓)위의 적장을 쏘아 죽여 그의 수급(首級)을 취했으며, 왜선 30척을 밀어붙여 격파하니 적이 대패하여 육지로 올라 도망하였다. 또 영등포(永登浦)에서 싸워 모든 배를 나포하여 섬멸시키니 이로부터 수군의 명성이 크게 떨쳤다. 승리를 아뢰자, 상으로 순신을 자헌대부(資憲大夫)의 품계로 올려 주었다.
○ 왜장 평행장(平行長) 등이 해서(海西)의 여러 고을을 거쳐 대동강(大同江)의 남쪽 언덕에 침범하였다. 이때 이일(李鎰)이 관동(關東)의 길로 걸어서 이르렀다. 이일은 본래 명장으로 일컬어졌으므로 비록 적에게 패하여 도망하기는 하였지만 사람들이 모두 그가 온 것을 기뻐하였다. 그가 올 때 탐지한 정보에 적이 이미 봉산(鳳山)을 불태웠다고 하였으므로, 비변사가 급히 이일에게 영을 내려 대동강 하류를 지키도록 하였다. 이일이 막 도착하였을 때 적병 수백 명이 벌써 남쪽 언덕에 도착해 있었으므로 이일이 무사(武士) 10여 명으로 하여금 강 가운데 있는 조그마한 섬으로 들어가게 해서 강궁(强弓)을 쏘게 하자 적이 퇴각하였다.
○ 상이 평양을 떠나고 싶었으나 어디로 갈 것인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조정의 신하들이 대부분 관북으로 들어가는 것이 편리하다고 하니, 상이 따랐다. 왕비와 왕자가 먼저 떠나고 상은 평양을 떠나 영변부로 향하였다. 윤두수ㆍ김명원ㆍ이원익을 남겨 두어 평양을 지키게 하고, 대산 최흥원(崔興源)ㆍ유홍(兪泓)ㆍ정철 등은 유성룡을 수행하여 중국의 관원을 접대하기 위해 그냥 평양에 머물러 있었다. 상이 숙천(肅川)에 머물면서 이덕형을 청원사(請援使)로 삼아 요동에 거서 급박함을 알리도록 하였다. 당시 이항복과 이덕형이 야대(夜對)하여 상에게 영변에 진주(進駐)하기를 청하고, 그들이 직접 요동에 가서 구원병을 청하겠다고 하면서 서로들 다투며 가기를 자청하였다. 이에 부제학 심충겸(沈忠謙)이 “항복은 현재 병조의 직책을 맡고 있으니 파견할 수 없다.”고 하자, 마침내 덕형을 파견하였다.
○ 윤두수 등이 장수를 보내어 밤에 왜군의 진영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불리하여 퇴각하였다. 왜병이 마침내 대동강을 건넜다.
윤두수 등이 지킬 수 없음을 알고 먼저 성 안의 노약자와 부녀자를 내보내고, 적이 성에 가까이 오자 병기(兵器)를 강물에 가라앉힌 뒤 군사를 인솔하여 몰래 빠져 나왔는데, 더러는 배를 타고 강서(江西)로 내려갔다.
왜장이 마침내 평양을 점거하였다.
○ 왜장 청정(淸正)이 관북(關北)에 침입하였는데, 함경 감사 유영립(柳永立)이 사로잡히고 병사 이혼(李渾)이 적민(賊民)에게 살해당하였다. 당초에 청정과 행장(行長) 등이 함께 임진강을 건너 상의 행차를 추격하면서 어가가 혹시라도 방향을 바꾸어 관북으로 갈 것을 염려하여 길을 나눠 군사를 진격시키기로 약속하였다. 청정은 용맹이 적군 가운데 으뜸이었으며 그가 거느리는 군사도 더욱 날래고 사나웠다. 곡산(谷山) 지역에서 노리현(老里峴)을 넘어 철령(鐵嶺)의 길로 나왔는데, 철령에 지키는 군사가 없었으므로 그대로 치달려 들어갔다.
감사 유영립은 산골짜기로 들어갔는데 토병들이 적병을 인도하여 습격해서 사로잡았다. 병사 이혼은 도망하여 갑산(甲山)으로 들어갔는데 배반한 백성들이 추격해 오자 밭 사이의 토굴(土窟)에 숨었으나 마침내 그들과 싸우다 죽었다. 그리고 갑산 사람들은 부사의 목을 베고 투항하였다.
임해ㆍ순화 두 왕자는 적병이 바로 뒤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북쪽을 향해 질주하여 마천령(摩天嶺)을 넘어갔다.
○ 상이 북도로 떠날 것을 의논하자, 이항복이 다시 대신들과 극력 논쟁하기를, “의주(義州)로 진주(進駐)해야만 중국 군사와 접할 수 있고, 불행하게 될 경우 중국으로 건너가서 서서히 국토를 회복해도 실계(失計)가 아니다.” 했는데, 심충겸(沈忠謙) 역시 그 의견에 따랐다. 그날 저녁에 뵙기를 청하여 항복이 극구 말하기를,
“북관(北關)은 단지 한 가닥 길만 있으니 궁하게 될 경우 오랑캐 지역 외에는 갈 만한 곳이 없으니 의주로 진주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의 뜻도 본래 중국으로 가려고 하였으니, 경의 말을 따르겠다. 다만 중전(中殿)이 이미 멀리 갔는데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하였다. 이에 여러 신하들이 빨리 따라가서 돌아오게 하기를 청하니, 운산 군수(雲山郡守) 성대업(成大業)을 보내어 달려가게 하였다. 그런데 중전의 일행도 적이 이미 북도에 침범하였다는 소문을 들었으므로 감히 나아가지 못하고 돌아와 마침내 상을 박천(博川)에서 만났다. 상이 영변부에 머물렀을 때 요동의 진에서 또 임세록(林世祿)을 보내 자문(咨文)에 답하면서 구원병 보낼 것을 허락하였다.
○ 세자에게 종묘 사직을 받들고 분조(分朝)하도록 명하였다.
상이 이날 박천에 머물렀다. 이튿날 걸음을 재촉하여 밤 오경에 가산(嘉山)에 도착하였다. 이날 밤에 비가 내리고 길은 어두운데 한 자루의 횃불도 없었으며 따르는 신하도 정철 등 20명이 채 되지 않았다. 이항복과 박동량(朴東亮)이 병조의 관원을 앞장세워 길을 인도하게 했는데, 숱한 어려움을 겪었다.
○ 도성에서 의주(義州)에 이르기까지 환관(宦官) 수십 명과 어의(御醫) 허준(許浚), 액정원(掖庭員) 4~5인, 사복원(司僕員) 3인이 처음부터 끝까지 곁을 떠나지 않았다. 뒷날 모두 녹공(錄功)하였는데, 끝내 직무는 맡기지 아니하였다.
○ 상이 정주(定州)에 머물렀다. 사자(使者)를 의주에 보내어, 어가가 본주(本州)에 머물고 곧바로 요동으로 건너가지 않는다는 것을 효유하여 군민(軍民)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게 하고 응교 심희수(沈喜壽)를 보내어 행궁(行宮)을 수리하게 하였다. 그리고 잇따라 차관(差官)을 보내 자문(咨文)으로 요동의 진에 알리도록 하고, 이덕형에게 위급하고 박절한 상황을 극력 진달하도록 유시하였다.
○ 세자가 영변부(寧邊府)로 나아가 머물렀다. 상이 분조(分朝)한다는 뜻으로 안팎에 하교하였다.
그리고 호종하는 관사를 무군사(撫軍司)라 하고 편의(便宜)대로 일을 처리하도록 명하였다.
○ 요동의 유격 사유(史游), 참장 곽몽징(郭夢徵)이 군사 1천 명을 거느리고 선천의 임반관(林畔館)에 도착하였다. 상이 예복(禮服)을 갖추고 나아가 보고 재배(再拜)하며 사례하기를,
“한 나라의 존망이 대인(大人)에게 달려 있으니 오직 지휘해 주시기를 기다립니다.”
하니, 사유 등이 말하기를,
“우리들로서는 평양을 구할 수 없으니 앞으로 조 총병(祖摠兵)이 오면 서로 모여 일을 의논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즉시 군사를 거느리고 의주(義州)에 주둔하였다.
○ 상이 선천(宣川)에 머물렀다. 요동 순안어사(遼東巡按御史) 이시얼(李時孽)이 지휘(指揮) 송국신(宋國臣)을 보내어 우리나라에 자문을 보냈는데 자문 내용에,
“그대 나라에서 불궤(不軌)를 도모했다.”
하고, 또,
“팔도의 관찰사는 어찌하여 한마디의 말도 없는가. 팔도의 군ㆍ현에서는 어찌하여 한 사람 도 대의(大義)를 주창하는 사람이 없는가. 어느 날에 어느 진(鎭)이 함락되고 어느 날에 어느 주(州)가 함락되었는가. 누가 절의를 지키다가 죽었고 누가 적에게 빌붙었는가. 적장(賊將)은 몇 명이며 군사는 몇 만 명인가. 적장자(嫡長子)를 후계로 세우는 것은 중국과 이적(夷狄)을 따질 것 없이 공통으로 행하는 의리인데, 귀국의 장자는 어디 갔기에 둘째 아들로 세자를 삼았는가. 하나하나 조목별로 갖추어 기록하여 보고하라. 천조(天朝)에는 개산대포(開山大砲)ㆍ대장군포(大將軍砲)ㆍ산화표창(神火標槍)이 있다. 그리고 날랜 장수와 정예병이 무척 많으니 급히 달려가면 왜병이 백만이라도 따질 것이 못 된다. 더구나 지혜 있고 용감한 문무(文武)의 인사들이 있어 간사한 모의를 환히 알고 음흉한 싹을 꺾어버릴 것이니 비록 소진(蘇秦)ㆍ장의(張儀)ㆍ상앙(商鞅)ㆍ범수(范睢)의 무리가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어떻게 천조의 계획을 엿볼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상이 차관(差官)을 대하고 자문을 본 뒤 송연(竦然)하여 이르기를,
“이는 대체로 우리나라가 왜적과 공모했는가 의심하여 이렇게 위협적인 말을 한 것이다.”
하고, 지휘에게 말하기를,
“마땅히 여기의 신하를 파견하여 회보(回報)하겠소.”
하였다. 지휘가 나가서 역관(譯官)에게 말하기를,
“순안어사(巡按御史)가 일찍이 내가 황 천사(黃天使)를 따라 나와 직접 국왕(國王)을 뵌 일이 있었기 때문에 나를 시켜 이번에 와서 정말인지 아닌지를 알아보게 한 것이다. 자문에 말한 것은 모두 가정해서 한 말이니 두려워 말라.”
하였다.
○ 상이 의주에 이르렀다. - 이달 22일이었다. - 목사의 아사(衙舍)를 행궁(行宮)으로 삼았다.
○ 주청사(奏請使) 지돈령부사 정곤수(鄭崐壽)를 파견하여 대병이 와서 구원할 것을 청하였다. 상이 보낼 적에 면유(面諭)하기를,
“국가의 존망이 이 한번의 거사에 달려 있으니 경은 힘쓰라.”
하였다.
○ 제도(諸道)에서 의병(義兵)이 일어났다. 당시 삼도(三道)의 수신(帥臣)이 모두 인심을 잃은 데다가 군사와 식량을 징발하자 사람들이 모두 밉게 보아 적을 만나기만 하면 모두 달아났다. 그러다가 도내(道內)의 거족(巨族)과 명인(名人)이 유생(儒生) 등과 함께 조정의 명을 받들어 창의(倡義)하여 일어나자 듣는 사람들이 격동하여 원근에서 응모하였다. 크게 성취하지는 못했으나 인심과 국가의 명맥이 그들 덕분에 유지되었다. 호남(湖南)의 고경명(高敬命)ㆍ김천일(金千鎰), 영남(嶺南)의 곽재우(郭再祐)ㆍ정인홍(鄭仁弘), 호서(湖西)의 조헌(趙憲)이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켰다.
○ 현풍인(玄風人) 곽재우(郭再祐)는 본래 유생으로 일찍 과거 공부를 그만두었고 무용(武勇)이 있었지만 스스로 감추었으며 집안도 제법 부유하였다. 왜적이 바다를 건넜다는 소식을 듣고 가산을 모두 흩어 재질이 있는 무사와 교결하였다. 그리고는 “겁탈하는 도적들은 과감하고 사납기가 보통 사람들과 다르다.”고 하여, 그 무사들을 찾아 화복(禍福)으로 그들을 달래어 먼저 수십 명을 얻었는데 점점 모인 군사가 1천여 명에 이르렀다. 적이 우도(右道)로 침입하였다. 왜장 안국사(安國司)란 자가 호남으로 향한다고 소문을 퍼뜨렸는데 재우가 강변을 왕래하면서 동서로 무찌르자 적병이 죽은 자가 많았다. 항상 붉은 옷을 입고 스스로 홍의장군(紅衣將軍)이라 일컬었는데, 적진을 드나들면서 나는 듯이 치고 달리어 적이 탄환과 화살을 일제히 쏘아댔지만 맞출 수가 없었다. 충의롭고 곧으며 과감하였으므로 군사들의 인심을 얻어 사람들이 자진하여 전투에 참여하자 임기응변에 능하였으므로 다치거나 꺾이는 군사가 없었다. 이미 의령(宜寧) 등 두어 고을을 수복하고 군사를 정진강(鼎津江) 오른쪽에 주둔시키니 하도(下道)가 편안히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으며 의로운 소문이 크게 드러났다.
○ 전 부사 고경명(高敬命)은 광주(光州)에 살다가 적이 도성에 침입하였다는 사실을 듣고, 학유(學諭) 유팽로(柳彭老)와 함께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할 것을 도모하고 글을 지어 도내(道內)의 백성들에게 효유하기를,
“지난번 본도의 근왕병(勤王兵)이 금강(錦江)에서 돌아오던 날에 첫 번째로 패배했고 여러 군에서 군사를 초유(招諭)하던 때에 두 번째로 패하였다. 이는 대체로 수비 방법이 어긋나고 기율이 전혀 없으며 유언비어가 비등하여 군사들의 마음이 놀라고 의심했기 때문이다. 지금 흩어지고 도망한 나머지를 수습한다 하더라도 사기는 꺾였고 정예는 없어졌으니 어떻게 응급책을 세워 늦게나마 성과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항상 생각건대 승여(乘輿)가 피난을 떠났는데도 관수(官守)는 오래도록 달려가 문안드리는 일을 폐하였고, 종사(宗社)가 모두 타버렸는데도 왕사(王師)로서 평정시킬 시기는 아직도 지체되고 있다. 이에 대해 말을 하자니 통분함이 가슴속에 사무친다.
우리 본도는 본래부터 군사와 말이 날래고 굳세다고 일컬어져 왔다. 성조(聖祖 조선 태조를 가르킴)께서 황산(黃山)에서 왜구를 크게 무찔러 삼한(三韓)을 다시 일으킨 공로가 있으며, 선조(先朝 고려를 가리킴)의 낭주(朗州) 전투에서는 한 척의 배도 되돌아가지 못했다는 노래가 있는데, 지금까지도 빛나게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비춰지고 있으니 그때에 용맹을 뽐내며 적의 성벽에 먼저 오른 자는 이 도의 사람이 아니었던가. 더구나 근년 이래로 유도(儒道)가 크게 일어나 사람들이 모두 학문에 뜻을 가다듬었으니 임금 섬기는 대의(大義)를 그 누가 강독하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유독 오늘날에 이르러 의로운 소문이 사라져버리고 두려워한 나머지 스스로 무너져버린 채 기력(氣力)을 내어 적과 교전하는 자는 한 사람도 없이 서로들 제 몸만 보전하고 처자를 보호할 계획만 하면서 혹시 뒤질세라 머리를 움켜쥐고 쥐처럼 도망하고 있다. 이는 본도의 사람으로서 국가의 은혜를 깊이 저버리는 것이 될 뿐만 아니라 또한 선조를 욕되게 하는 것이다.
지금은 적의 형세가 크게 꺾이고 왕의 영위(靈威)가 날로 확장되니 이야말로 대장부가 공명을 세울 기회이고 군부(君父)의 은혜에 보답할 때이다. 경명은 장구(章句)나 외는 오활한 선비로서 병법에는 문외한인데 이렇게 단(壇)에 올라 망령되이 대장으로 추대되니 이미 흩어진 사졸의 마음을 수습하지 못하여 여러 동지에게 수치거리가 될까 두렵다. 그러나 오직 마땅히 피를 뿌리고 진군한다면 조금이나마 임금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을 것 같기에 금월 11일 군사를 일으키기로 하였다. 우리 도내의 모든 사람들은 아비는 그 자식을 깨우치고 형은 그 동생을 도와 의병을 규합하여 함께 일어나자. 원컨대 속히 결정하여 착한 일을 따르고 미혹된 나머지 스스로를 그르치지 말라.”
하였다. 경명은 연로(年老)한 문관이었으나 많은 사람들이 맹주(盟主)로 추대하자 개연히 사양하지 않았다. 이에 선비와 서민이 많이 응모하여 군사 6천여 명을 얻었다. 그리고 또 격문을 여러 도에 전하였는데 문사(文辭)가 격렬하고 절실하였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외며 전하였다.
○ 전 장령 정인홍(鄭仁弘)이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였다. 인홍은 평소 시골의 선비와 주민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이었다. 좌랑 김면(金沔), 전 현감 박성(朴惺), 유생 곽준(郭浚)ㆍ곽율(郭)등과 함께 향병(鄕兵)을 모집했는데, 전 첨사 손인갑(孫仁甲)을 얻어 중군(中軍)을 삼았다. 인갑은 무용(武勇)이 뛰어났는데 군진(軍陣)을 달리하면서도 인홍의 명령을 받았다. 인갑이 먼저 무계(茂溪)에 주둔한 적을 공격하여 패배시키고 군량을 태우고 돌아왔다.
○ 중국 조정에서 호군(犒軍 군사들에게 음식을 주어 위로함)할 비용으로 은(銀) 2만 냥을 내렸다. 당시 요동 사람이 유언비어를 퍼뜨리면서 전하기를 “조선이 왜국과 함께 반역하여 거짓으로 가짜 왕을 삼아 인도하여 온다.” 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먼저 임세록(林世祿)등을 파견하여 평양에 와서 탐지하게 한 것이다. 그러다가 상이 평양을 떠남에 미쳐 연달아 요진(遼鎭)에 자문을 보내 비빈(妃嬪)ㆍ자녀ㆍ배신(陪臣)을 이끌고 중국으로 가기를 청하니, 요동 순무어사 학걸(郝杰)이 주본(奏本)을 올리기를,
“총병 동양정(佟養正)이 품보(稟報)를 받았습니다. 조선이 대국(大國)이라고 일컬으면서 대대로 동번국(東藩國) 노릇을 하여 왔는데 한번 왜적의 침입을 받자 소식만 듣고서 도망쳤습니다. 혹시라도 그 나라가 사직을 보전하지 못하고 갑자기 달려올 경우, 수신(守臣)의 입장에서 거절하자니 그들이 의지할 곳이 없게 되어 속국의 신뢰하는 마음을 잃게 될 것이고, 받아들이자니 사체가 가볍지 않아 신하로서 마음대로 처리할 수가 없습니다. 왜노(倭奴)들은 간사한 꾀가 비상하여 중국 사람도 앞잡이 노릇을 하는 자가 많습니다. 만약 간사한 생각을 품고 마구 들어온다면 해를 끼치는 것이 보통이 아닐 텐데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습니까?”
하였다. 병부 상서 석성(石星)이 복제(覆題)하기를,
“해진(該鎭)에서 사람을 차출하여 조선으로 보내서 조정의 지극한 뜻을 선유(宣諭)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조선이 도망해 오면 나라를 회복할 기약이 없게 되어 왜적이 마침내 조선을 점거하게 될 것이고, 굳게 지키면 구원병도 기대할 수 있어 왜적이 자연 패하여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점을 알도록 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들 지역의 요해처에서 머물며 천병(天兵)의 구원을 기다리게 하소서. 그리고 본국에 유시하여 배신(陪臣)들을 많이 파견하여 근왕병(勤王兵)을 불러 모아 옛 강토를 회복할 계책을 삼아 패몰(敗沒)하지 않도록 하고 만일 해국(該國)이 위급해서 도망해 오기를 청한다면 전적으로 거절하기는 어려우니 마땅히 칙령(勅令)을 내려 받아들이되 인원이 1백 명을 초과하지 않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황지(皇旨)를 받드니, 황지에,
“왜적이 조선을 함몰(陷沒)시켜 국왕이 도피하였으니, 짐(朕)은 매우 측은하게 여긴다. 구원병을 일단 파견하고 사람을 차견하여 그 나라 대신들에게 선유(宣諭)하되, 충성을 다하여 나라를 수호하고 각처의 병마(兵馬)를 속히 결집하여 성지(城池)를 굳게 지키며 요해처에 웅거하여 힘껏 회복을 도모하도록 하라. 어떻게 앉아서 망하는 것을 볼 수 있겠는가?”
하였다. 성지(聖旨)가 특별히 내렸는데도 요진(遼鎭)에서는 여전히 의심이 풀리지 않아 송국신(宋國臣)을 보내 국왕의 진위(眞僞)를 실제로 알아보게 하였다. 국신이 돌아가 확실히 진짜 임금이고 가짜 임금이 아니라고 보고하자 요진에서 비로소 믿게 되었다.
중국 조정의 의논 역시 구구했는데 석성(石星)은 구원하기로 결심하였다. 우리나라의 사신 신점(申點)이 당시 회동관(會同館)에 있었는데, 석성이 뜰로 불러서 요동에서 변고를 보고한 문서를 꺼내어 보여주자 신점이 그 자리에서 통곡을 하며 아침 저녁으로 찾아가 병부(兵部)에 정문(呈文)하여 먼저 구원병을 보내줄 것을 청하였다. 유몽정(柳夢鼎)도 그 뒤를 이어 도착했는데 통곡을 하며 병부에 호소하여 구원병을 속히 보내줄 것을 청하였다. 석성이 그 뜻에 감동하여 모두에게 답서를 보내 위로하면서 그들을 신포서(申包胥)에 비유하였다.
석성의 뜻이 더욱 굳어져 병부가 주청하여 지휘(指揮) 황응양(黃應暘)을 보내 살펴보도록 하니 상이 용만관(龍灣館)에서 맞이하여 보았다. 응양이 왜의 서신을 요구하여 증험하려 하자, 이항복이 지난 신묘년(1591, 선조 24)에 통신사(通信史)가 가지고 온 왜의 서신을 미리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것을 꺼내어 보였다. 그 중에는 이미 자문(咨文)과 주문(奏文)으로 보냈던 내용도 들어 있었는데, 황응양이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조선이 상국(上國)을 대신하여 침략을 당하였는데도 의로운 소문은 드러나지 않고 도리어 나쁜 이름만 뒤집어 썼으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하고는, 드디어 돌아가 병부에 보고하니, 석성이 크게 기뻐하여 조선을 구원하는 의논이 결정되었다.
○ 경상도를 나누어 좌우 감사를 두었다.
이는 대체로 영남의 지역이 넓은 데다가 적이 중로(中路)를 따라 진영을 연결하여 좌우도가 서로 소통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 호남 의병장 김천일(金千鎰)이 군사를 거느리고 북상하였다. 삼도(三道)의 군사가 무너진 뒤로부터 경기 안이 완전히 살륙과 노략질을 당했는데, 적에게 빌붙어 도성에 들어간 자도 많았다. 천일이 의병 수천 명을 규합하니, 상이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에 임명하는 동시에 창의사(倡義使)라는 칭호를 내렸다. 천일의 군사가 수원(水原)에 이르러 독산고성(禿山古城)에 웅거하여 적에게 빌붙은 간민(奸民)을 찾아내어 목을 베니, 돌아와 따르는 경기의 사민(士民)이 많았다.
○ 7월. 전라 절제사 권율(權慄)이 군사를 보내어 왜적을 웅치(熊峙)에서 물리쳤는데 김제 군수 정담(鄭湛)이 전사하였다. 왜병이 또 이치(梨峙)를 침범하니 동복 현감 황진(黃進)이 패배시켰다.
이때 적이 금산(錦山)에서 웅치를 넘어 전주(全州) 지경으로 침입하려고 했는데, 나주 판관 이복남(李福男)이 황박(黃璞)ㆍ정담 등과 요해지에 웅거하여 적을 맞아 공격하였으므로 감사 이광(李洸)이 군사를 보내어 싸움을 돕게 하였다. 왜적의 선봉(先鋒) 수천 명이 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며 정면으로 돌진해 왔는데, 복남 등이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 활로 쏘아 죽인 것이 헤아릴 수 없었으며 적이 패하여 물러갔다.
이튿날 새벽에 적이 병력을 총동원하여 산골짜기에 가득하였고 총포 소리가 우레처럼 났다. 복남 등이 최후까지 힘을 다하여 한바탕 싸웠으나 결국 당해내지 못하고 퇴각하였으며, 황박의 군사도 패하여 복남의 진으로 들어갔다. 정담은 처음부터 힘을 다해 싸웠는데 붉은 기 아래 백마(白馬)를 타고 있는 적장을 쏘아 죽이니 적이 와해되어 물러갔다. 조금 뒤에 나주(羅州) 군사가 퇴각하자, 정담이 고군(孤軍)으로 포위당했는데 부하 장수가 정담에게 후퇴시키기를 권하니 정담이 말하기를 “차라리 적병 한 놈을 더 죽이고 죽고 말지 차마 내 몸을 위해 도망하여 적으로 하여금 기세를 부리게 할 수는 없다.” 하고 꼿꼿이 서서 동요하지 않고 활을 쏘아 빠짐없이 적을 맞혔다. 이윽고 적병이 사방으로 포위하자 군사들이 모두 흩어져 버리고 정담 혼자서 힘이 다하여 전사하였다. 종사관 이봉(李葑)도 전사하였다. 복남이 퇴각하여 재 아래 안진원(安鎭院)에 진을 쳤는데, 적이 방비가 있음을 알고 감히 재를 넘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정담은 임금이 도성을 떠나 피난했다는 사실을 듣고부터 눈물을 흘리고 분격해 하며 반드시 죽음으로 국가의 은혜를 보답하겠다고 맹세하였다. 군사를 일으키던 날에는 희생(犧牲)을 잡아 사사(社詞)에 제사를 지내고 맹세를 고한 뒤 떠났는데, 고을 사람들이 그의 충의(忠義)에 감복하였다. 뒷날 조정에 아뢰어 관직을 추증하고 정문(旌門)을 세웠다.
왜장(倭將)이 또 대군(大君)을 출동시켜 이치(梨峙)를 침범하자 권율이 황진을 독려하여 동복현의 군사를 거느리고 편비(偏裨 부장(副將)) 위대기(魏大奇)ㆍ공시억(孔時億) 등과 함께 재를 점거하여 크게 싸웠다. 적이 낭떠러지를 타고 기어오르자 황진이 나무를 의지하여 총탄을 막으며 활을 쏘았는데 쏘는 대로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종일토록 교전하여 적병을 대파하였는데, 시체가 쌓이고 피가 흘러 초목(草木)까지 피비린내가 났다. 이날 황진이 탄환에 맞아 조금 사기가 저하되자 권율이 장사들을 독려하여 계속하게 하였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다. 왜적들이 조선의 3대 전투를 일컬을 때에 이치(梨峙)의 전투를 첫째로 쳤다. 이복남ㆍ 황진은 이 전투로 이름이 드러났다. 왜적이 웅치(熊峙)의 전진(戰陣)에서 죽은 시체를 모아 길 가에 묻어 몇 개의 큰 무덤을 만들고서 그 위에 “조선의 충간의담을 위로한다.[吊朝鮮國忠肝義膽]”라고 썼다.
○ 전주(全州)의 경기전(慶基殿)에 봉안하였던 태조(太祖)의 수용(睟容)을, 당시 전주가 위급해지자 참봉(參奉) 홍여율(洪汝栗)이 어용을 받들고 적병을 피하여 해로(海路)를 경유해서 의주(義州)에 도달하니, 상이 행궁(行宮)에서 곡하며 제사지내고 묘향산(妙香山)의 절에 봉안하였다. 그리고 여율에게 상으로 6품의 직책을 주라고 명하였다.
○ 의병장 김준민(金俊民)이 왜병을 무계현(茂溪縣)에서 물리쳤으며, 곽재우(郭再祐)가 또 왜병을 현풍(玄風)과 창녕(昌寧) 사이에서 잇따라 물리치니 적이 주둔지에서 철수하여 도망하였다. 이로부터 우도(右道)의 적로(賊路)가 단절되어 적병이 대구(大丘)의 중로(中路)로 왕래하였다.
○ 이순신(李舜臣)이 왜병을 고성(固城) 견내량(見乃梁)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이때에 왜적이 수군을 크게 출동시켜 호남(湖南)으로 향하자 순신이 이억기(李億祺)와 함께 각기 거느린 군사를 재촉하여 나가다가 견내량에서 적을 만나게 되었는데, 적선이 바다를 뒤덮어 오고 있었다. 원균(元均)이 앞서의 승리에 자신하여 곧장 대적하여 격파하려 하자 순신이 말하기를 “이곳은 항구가 좁고 얕아 작전할 수가 없으니 넓은 바다로 유인해 내어 격파해야 한다.” 하였다. 그러나 원균이 듣지 않자, 순신이 말하기를 “공이 병법(兵法)을 이처럼 모른단 말인가.” 하고 여러 장수들에게 영(令)을 내려 거짓 패하여 물러나는 척하니, 적이 과연 기세를 몰아 추격하였다. 이에 한산도(閑山島) 앞바다에 이르러 군사를 돌려 급히 전투를 개시하니 포염(砲焰)이 바다를 뒤덮었고 적선 70여 척을 남김없이 격파하니 피비린내가 바다에 진동하였다. 또 안골포(安骨浦)에서 그들의 구원병을 역습하여 패배시키니 적이 해안으로 올라 도망하였는데 적의 배 40척을 불태웠다. 왜진(倭陣)에서 전해진 말에 의하면 “조선의 한산도 전투에서 죽은 왜병이 9천 명이다.”라고 하였다, 이 일을 아뢰자 순신에게 정헌대부(正憲大夫)의 품계를 상으로 내리고 글을 내려 칭찬하였다.
○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등에게 명하여 순안현(順安縣)에 주둔하면서 적을 막도록 하였다. 적이 처음 평양(平壤)에 들어올 때 군사가 대략 6~7천 명 정도였는데, 난민(亂民)을 초유(招誘)하고 군사를 만들어 성을 지키게 하면서 다시 나와 서로(西路)를 묻지 않았다. 이는 대체로 여러 곳에 분리 주둔하여 거느린 군사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 군대에게 공격당할까 두려워해서였다. 이로 말미암아 김명원이 이원익과 흩어진 군졸 및 강변의 토병(土兵)을 불러모아 다시 군용(軍容)을 갖추고서 한응인(韓應寅)과 함께 순안현으로 나아가 주둔하여 부산원(斧山院)의 현계(峴界)를 방수(防守)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부터 순안현 이상의 여러 고을에 이민(吏民)이 되돌아와 모였다.
○ 요진(遼鎭)에서 총병(摠兵) 조승훈(祖承訓), 참장(參將) 곽몽징(郭夢徵), 유격(遊擊) 사유(史儒)ㆍ왕수신(王守臣)ㆍ대조변(戴朝弁) 등을 파견하여 기마병 3천 명을 거느리고 평양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한 채 사유와 대조변은 탄환에 맞아 죽었고 승훈은 퇴각하여 요동(遼東)으로 되돌아갔다. 그런데 승훈이 요진(遼鎭)에 가서 무고하기를 “한창 전투할 때에 조선 군사 일진(一陣)이 적진에 투항(投降)하였기 때문에 전투가 불리하였다.”고 하였으므로 상이 사신을 파견하여 분변해서 의혹을 풀게 하였다.
○ 승통(僧統)을 설치하여 승군(僧軍)을 모집하였다. 행조(行朝)에서 묘향산(妙香山)의 옛 승관(僧官) 휴정(休靜)을 불러 그로 하여금 중을 모집하여 군사를 만들도록 하였다. 휴정이 여러 절에서 불러 모아 수천여 명을 얻었는데 그의 제자 의엄(義嚴)을 총섭(摠攝)으로 삼아 그들을 거느리게 하고 원수(元帥)에게 예속시켜 성원(聲援)하게 하였다. 그리고 또 격문(檄文)을 보내어 제자인 관동(關東)의 유정(惟政)과 호남(湖南)의 처영(處英)을 장수로 삼아 각기 본도에서 군사를 일으키게 하여 수천 명을 얻었다. 유정은 담력과 지혜가 있어 여러 번 왜진(倭陣)에 사자로 갔는데 왜인들이 신복(信服)하였다. 승군(僧軍)은 제대로 접전(接戰)은 하지 못했으나 경비를 잘하고 역사를 부지런히 하며 먼저 무너져 흩어지지 않았으므로 여러 도에서 그들의 힘을 입었다.
○ 왜장 청정(淸正)이 북계(北界)로 침입하니 회령(會寧)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 두 왕자(王子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와 여러 재신(宰臣)을 잡아 적을 맞아 항복하였다. 이로써 함경 남도와 북도가 모두 적에게 함락되었다.
○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이 금산(錦山)의 적을 토벌하다가 패하여 전사하였다.
경명이 모집한 병사 6~7천 명을 단속해서 북상하여 여산(礪山)에 주둔하였는데 왜적이 호남 지역을 침입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휘하 장사들이 본도를 염려하여 먼저 도내의 적을 토벌한 뒤에 북쪽으로 정벌할 것을 다투어 청하자 경명이 여러 사람의 의논을 따라 군사를 진산(珍山)으로 옮겼는데 당시 왜적은 금산으로 퇴각하여 진을 두터이 치고 견고하게 하고 있었다. 경명이 방어사 곽영(郭嶸)과 함께 재를 넘어 험한 곳으로 들어가 곧장 금산성 밖에 육박하였는데 곽영이 먼저 날랜 장사 수백 명을 보내어 적을 시험하다가 적에게 패하여 물러나자 경명이 북을 울리며 전투를 독려하여 도로 적병을 성 밖에서 위축시키고 성 안에서는 화포를 쏘아 적이 주둔하던 관사(館舍)를 불태우니 적이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
이튿날 동틀녘에 다시 방어사와 같이 성 밖으로 군사를 진격시켜 관군은 북문을 공격하고 경명은 서문을 공격하였다. 그런데 적이 관군의 진이 약한 것을 알고 군사를 총동원하여 나와 급히 공격하니, 관군이 크게 패배하였다. 경명은 군사들에게 명령을 내려 일제히 활을 당기고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의병이 급히 부르짖기를 “방어사의 군사가 패하였다.”고 하자 대오가 무너져 흩어졌다. 경명이 말에서 떨어졌는데 말이 달아나 버리니 종사관 안영(安瑛)이 자기가 타고 있던 말을 주어 타게 하고 도보로 따라갔다. 종사관 학유(學諭) 유팽로(柳彭老)는 말이 건장해서 먼저 나가다가 그의 종에게 묻기를 “대장은 모면하였는가?” 하니, 아직 못 나왔다고 하자, 팽로가 급히 말을 채찍질하여 어지러운 군사들 속으로 되돌아 들어갔다. 이에 경명이 돌아보며 말하기를 “나는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그대는 말을 달려 빠져나가라.” 하였다. 팽로가 말하기를 “어떻게 차마 대장을 버리고 살기를 구하겠는가.” 하고 드디어 안영과 함께 경명을 보호하다가 적진에서 함께 전사하고 경명의 차자(次子) 인후(因厚)도 달려가 싸우다가 진중에서 전사하였다.
경명은 문학(文學)에 종사하여 무예를 익히지 않았으며 나이 또한 노쇠하였다. 이때에 맨 먼저 의병을 일으켰는데 충의심만으로 많은 군사들을 격려하여 위험한 곳으로 깊이 들어가 솔선하여 적과 맞서다가 전사한 것이다. 공은 성취하지 못했어도 의로운 소문이 사람을 감동시켜 계속 의병을 일으킨 자가 많았으며, 나라 사람들이 그의 충렬(忠烈)을 칭송하면서 오래도록 잊지 않았다. 처음에 상이, 경명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문을 듣고 공조참의 겸 초토사에 제수하도록 명하고, 글을 내려 칭찬하고 위로하였다. 공조 좌랑 양산숙(梁山璹)이 행재소에서 남쪽으로 돌아올 적에 상이 직접 유시하기를 “돌아가 고경명과 김천일(金千鎰)에게 말하라. 그대들이 빨리 수복하여 나로 하여금 그대들의 얼굴을 조만간 볼 수 있게 하기를 바란다고 하라.” 하였다. 그러니 관작 제수의 명이 이르지도 않아서 경명이 패하여 전사하였는데 예조 판서에 추증하였다. 그 뒤에 광주(光州)에 사우(祠宇)를 세우고 포충사(褒忠祠)라고 편액을 하사하였다.
○ 서인(庶人) 홍계남(洪季南)이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하였다. 계남은 양성현(陽城縣) 사람으로 충의위(忠義衛) 홍언수(洪彦秀)의 첩의 아들이다. 담력과 용맹이 있고 말타고 활쏘는 데에 능하여 금군(禁軍)에 소속되어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들어갔었는데, 왜인들이 그가 말타고 활쏘는 것을 구경하였으므로 그의 이름을 기억하였다. 그러자 계남이 왜진(倭陣)으로 달려들어가 그 아비의 시체를 거두어 돌아왔는데, 왜인들이 계남인 줄 알고 감히 서로 대항하지 못하였다. 계남이 아비의 군사를 거두고 높은 산꼭대기에 보루를 쌓고 양천(陽川)ㆍ안산(安山) 두어 고을의 지역을 굽어보며 군사를 주둔시키고 적의 헛점을 틈타 동서로 습격하여 많이 참살(斬殺)하였다. 그래서 적이 감히 그 지역에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경기 지역과 호서의 여러 고을이 그의 힘을 입었다. 특별히 수원판관 겸 조방장에 제수하였다.
○ 고언백(高彦伯)을 양주 목사(楊州牧使)로 삼았다. 언백은 교동(喬桐) 사람으로서 향리(鄕吏)로 무과에 올라 종군하며 모반한 호인(胡人)을 공격하여 명성이 있었다. 도원수를 따라 장령(將領)이 되어서는 적의 수급(首級)을 벤 공이 있었는데 양주(楊州)로 돌아가 군사를 모아 적군을 치겠다고 자청하니, 상이 특별히 당상관의 자급을 주어 양주 목사에 임명하고 능침(陵寢)을 보호하도록 하였다. 언백이 고향으로 돌아와 장사(壯士)를 모집하여 산꼭대기의 험한 곳에 모여 웅거하면서 가끔 나가 흩어진 적군을 습격하였다. 적이 많은 군사를 풀어 수색하였으나 언백이 기회를 엿보아 가며 잘 피하고 숨었으므로 적이 마침내 해치지 못하였다. 언백은 항상 여러 능(陵)에 군사를 잠복시켰다가 수시로 적을 쏘아 죽이곤 하였다. 적이 태릉(泰陵)을 침범한 일이 있었는데 언백이 그들을 쫓아 버렸으므로 여러 능이 온전하게 되었다. 상이 그의 공로에 상을 주고 여러 번 자급을 올려 주어 장려하였다.
○ 고경명 휘하의 사자(士子)들이 흩어진 군사 8백 명을 불러모아 화순(和順) 사람인 전 부사 최경회를 추대하여 장군으로 삼고 골(鶻) 자로 표신(標信)을 삼았다. 절의를 지키다 죽은 유팽로(柳彭老)등을 높이고 본보기로 삼아 많은 사람들을 권면하니 도내의 사민(士民)들이 많이 추종하였다.
○ 8월.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이 순찰사 이원익(李元翼)과 순변사 이빈(李薲)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으로 진군하여 공격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당시 이원익 등은 순안(順安)에 주둔하여 천여 명의 군사를 불러 모았는데 정예군사가 제법 많았다. 방어사 김응서(金應瑞), 별장 박명현(朴命賢) 등은 용강(龍岡)ㆍ삼화(三和)ㆍ증산(甑山)ㆍ강서(江西) 등 바닷가 여러 고을의 군사 만여 명을 거느리고 20여 둔(屯)에 배치하고 평양의 서쪽을 압박하며 때로 영세한 적을 소탕하면서 성 밖까지 이르렀으나 적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별장 김억추(金億秋)는 수군을 거느리고 대동강(大洞江) 입구에 웅거하였고, 중화(中和)의 별장 임중량(林仲樑)은 2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보루를 쌓아 주둔하며 지켰다.
행조(行朝)에서는 평양의 적세(賊勢)가 쇠약해져 우리 군사가 충분히 진격하여 취할 수 있고 또 중국 군사를 기다릴 수만은 없다고 여겨 영(令)을 내려 진격하기를 재촉하였다. 이에 삼로(三路)의 군사가 함께 나가 정탐하는 적을 만나 두어 명을 쏘아 죽였는데, 얼마 안 되어 적병이 크게 이르자 관군이 놀라 강가에서 흩어져 도망하였다. 이에 용병(勇兵)이 많은 피해를 입었는데, 세 번 싸워 모두 불리하였으므로 물러나 본소(本所)에 주둔하였다.
○ 황제가 호군(犒軍)하는 비용으로 은(銀) 2만 냥을 내리고 군사를 출동시켜 구원하도록 명하였다.
조승훈(祖承訓)이 이미 패배하자 행재소에서 크게 두려워하여 요진(遼鎭)에 사신을 보내어 군사를 파견해서 구원해 주기를 계속 청하니, 병부(兵部)에서 주청하여 성지(聖旨)를 받들었는데, 그 성지에 “조선은 본래 정성을 다 바친 우리의 속국이다. 도적의 난을 당하고 있는데 어찌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요동 진무관(遼東鎭撫官) 은 즉시 정병(精兵) 2지(枝)를 보내어 구원하도록 하고 은(銀) 2만 냥을 그 나라에 보내 호군(犒軍)하게 하고 대홍저사(大紅紵絲) 두 벌을 국왕에게 내려 위로하라.” 하였다.
이에 유격(遊擊) 장기공(張奇功)을 파견하여 은을 풀어 꼴과 양식을 사들인 뒤 의주(義州)로 운반해서 군향(軍餉)으로 사용하게 하고, 참장(參將) 낙상지(駱尙志)를 파견하여 남병(南兵)을 거느리고 북안(北岸)에 주둔하게 하였는데, 대군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낙상지는 용력이 있어 천 근(斤)을 들었으므로 낙천근(駱千斤)이라 불리웠는데 매우 위명을 떨치었다.
○ 의병장 조헌(趙憲)이 청주성(淸州城)을 회복하였다.
조헌이 처음에 수십 명의 유생(儒生)과 뜻을 모아 의병을 일으킨 뒤 1천 6백 명을 모집하였다. 공주 목사 허욱(許頊)이 의승(義僧) 영규(靈圭)를 얻어 그로 하여금 승군(僧軍)을 거느리고 조헌을 돕게 하니, 조헌이 군사를 합쳐 곧장 청주 서문에 육박하였다. 적이 나와서 싸우다가 패하여 도로 들어가니, 조헌이 군사를 지휘하여 성에 올라갔는데, 갑자기 서북쪽에서부터 소나기가 쏟아져 내려 천지가 캄캄해지고 사졸들이 추워서 떨자 조헌이 탄식하기를 “옛 사람이 성공하고 실패하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다고 말했는데 정말 그런 것인가?” 하고 맞은편 산봉으로 진(陣)을 퇴각시켜 성 안을 내려다 보았다.
이날 밤 적이 화톳불을 피우고 기(旗)를 세워 군사가 있는 것처럼 위장하고 진영을 비우고 달아났다.
○ 진주 판관(晉州判官) 김시민(金時敏)이 사천 현감(泗川縣監) 정득열(鄭得悅) 등과 군사를 합하여 사천ㆍ고성(固城)ㆍ진해(鎭海)의 적을 무찌르니 적병이 점점 철수하여 도망하였으므로 김시민이 연로(沿路)의 여러 고을을 수복하였다.
○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등이 유생 곽현(郭玄)ㆍ양산숙(梁山璹)을 보내어 바닷길을 따라 관서(關西)에 들어가 행조(行朝)에 일을 아뢰었다. 양산숙이 또 상소하여 계책을 올리니, 상이 자주 불러서 위로하고 공조 좌랑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이호민(李好閔)으로 하여금 교서(敎書) 2통(通)을 짓게 하여 양산숙에게 부쳐 보냈다. 하나는 호남에 유시하는 것이었는데, 그 대략에,
“이광(李洸)의 군사가 용인(龍仁)에서 패배하였다는 말을 듣고부터 다시 남쪽을 바라보며 구원을 기대하는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들으니 고경명과 김천일 등이 의병 수천 명을 규합하여 절도사 최원(崔遠)과 함께 수원(水原)으로 진주(進駐)했다 한다. 부덕(不德)한 내가 어떻게 이토록까지 사람들이 사력을 다하게 할 수 있었겠는가. 이제 양산숙 등을 보내어 돌아가서 알리게 하니 그대들은 나의 괴로운 뜻을 헤아리도록 하라.
내가 비록 인애(仁愛)가 백성들에게 미치지 못하고 정치에 실수한 것이 많았다 하더라도 본래의 마음은 언제나 백성을 사랑하고 어여삐 여기는 것으로 뜻을 삼지 않은 적이 없었다. 다만 살피건대 근래 변방에 흔단이 많고 군정(軍政)이 피폐하고 해이해졌으므로 중외에 신칙하여 엄중하게 방비를 더하도록 하였는데, 성을 높이 쌓을수록 국가의 형세는 날마다 낮아지고 못을 깊게 팔수록 백성의 원망이 더욱 깊어지는 것은 정말 헤아리지 못하였다. 게다가 궁중이 엄밀하지 못하여 백성들의 조그마한 이익까지도 거둬들이고 형옥(刑獄)이 중도를 상실하여 원통한 기운이 화기를 손상케 하였으며, 왕자(王子)가 이익을 독점하여 소민(小民)들이 생업을 잃게 하였으니, 백성들이 나를 허물하는 것은 당연하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이제 유사(有司)로 하여금 모두 혁파하여 돌려주게 하였다. 무릇 이러한 유(類)를 내가 어찌 모두 알고 있었던 것이겠는가. 그러나 내가 몰랐던 것도 나의 잘못이다. 여기까지 생각하다 보면 후회스럽다마는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대 사민(士民)들은 내가 잘못을 뉘우치고 새롭게 다스리려는 것을 허락하기 바란다.”
하고, 또 이르기를,
“용만(龍灣)의 한 모퉁이에서 천운이 어렵게 되었고 지운(地運)이 이미 다 되었으니 내 어디로 간단 말인가? 인정이 극도로 곤궁해지면 회복하기를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서늘한 가을 기운이 조금 움직이는데 변방은 벌써 추워진다. 저 장강(長江)을 보니 역시 동쪽으로 흐르는데, 돌아가려는 한 생각이 흐르는 강물처럼 왕성하다.”
하고, 또 이르기를,
“하늘이 이성(李晟 당 덕종(唐德宗) 때의 인물)을 탄생시키니 성궐(城闕)을 회복할 기약이 있었고, 날마다 장소(張所 송 고종(宋高宗) 때의 인물)를 기다리니 원릉(園陵)에 흠이 없음을 아뢰었다. 가뭄에 비를 바라듯 하는 마음에 속히 부응하여 나의 어려운 고생살이를 면하게 하라.”
하였다. 하나는 영남의 사민(士民)에게 유시하는 것이었는데 호남에 보내는 것과 같았다. 끝 부분에 이르기를,
“지난번에 듣건대, 우감사(右監司) 김수(金睟)는 용인에서 패하여 퇴각하였고 좌감사 김성일(金誠一)은 진주(晉州)에서 용사를 모집한다 하였다. 좌병사 이각(李珏)이 참수(斬首)당했으므로 박진(朴晉)이 충용하다 하여 그를 대신하게 하였으며, 우병사 조대곤(曺大坤)은 늙고 쇠약하므로 양사준(梁士俊)으로 대신하게 하고, 변응성(邊應星)을 좌도 수사로 삼았는데, 모두 각기 본도로 돌아가 힘써 주선하여 경영하는지 모르겠다. 좌도의 영해(寧海) 일대와 우도의 진주 등 약간의 고을이 아직 보존되고 있으니, 이것은 그래도 1성(成 사방 10리의 땅)이나 1려(旅 5백 명의 단위)보다는 나은 것이 아니겠는가. 본도의 백성들은 성실하고 후덕하여 본래 충성스럽고 의로운 인사가 많았다. 그대들이 진정 서로 분발하고 면려한다면 틀림없이 회복시키는 근본이 되지 않는다고 못할 것이다.
듣건대, 정인홍(鄭仁弘)ㆍ김면(金沔)ㆍ박성(朴惺)ㆍ곽율(郭)ㆍ조종도(趙宗道)ㆍ곽재우(郭再祐) 등이 의병을 일으켜 많은 무리를 규합했다 하니, 본도의 충성과 의리는 오늘날에 있어서도 오히려 없어지지 않았다 하겠다. 더구나 곽재우는 비상한 작전으로 적을 더욱 많이 죽였는데도 그 공로를 스스로 진달하지 않고 있으니 내가 더욱 기특하게 여기는 바로 그의 명성을 늦게 들은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그리고 호남에도 전 부사 고경명(高敬命)ㆍ김천일(金千鎰)이 의병 수천 명을 규합하여 본도 절도사 최원(崔遠) 등과 수원(水原)으로 진군하여 주둔하면서 바야흐로 경기(京畿)를 회복하려고 도모하면서 그의 무리인 양산숙 등으로 하여금 수륙(水陸)의 험한 길을 달려와 행재(行在)에 아뢰게 하였다. 내가 아뢴 내용을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한편으로는 위로가 되고 한편으로는 슬픈 마음이 들었다. 양산숙 등이 돌아가는데 이 글을 부쳐서 그로 하여금 상세히 전하게 하였으니, 내가 알리는 뜻을 잘 헤아리라.
요즈음 맑은 가을철에 태백(太白)이 바야흐로 높아 군사의 위용이 갖추어진 곳에 살기(殺氣)마저 따르니, 충성과 의리가 향하는 곳에 어떤 적인들 무찌르지 못하겠는가. 그대들은 마땅히 요해처를 제어하여 구적(寇賊)들을 초멸하도록 하라. 그리고 또한 연도에 복병을 설치하고 좌우에서 협공하여 적이 마음대로 말을 달릴 수 없게 하라. 그리하여 한 지방을 안정시켜 노약자들을 불러 모은 연후에 힘을 합하여 도성을 수복하고 와서 승여(乘輿)를 영접하도록 하라. 그리하면 그대들은 살아서는 아름다운 이름을 누리게 될 것이며, 혜택이 자손들에게 전해질 것이니 위대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에 정인홍을 제용감 정으로, 김면을 합천 군수(陜川郡守)로, 박성을 공조 좌랑으로, 곽재우를 유곡 찰방(幽谷察訪)에 임명하여 표창하고 면려한다.”
하였다.
교서(敎書)가 길이 막혀 몇 개월 만에야 도착하였는데 사민(士民)들이 임금의 교서 내용을 듣고 감격하여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
○ 판관 김시민(金時敏)을 발탁하여 진주 목사(晉州牧使)로 삼았다. 김시민이 진주의 주민을 안정시키면서 출전(出戰)하여 누차 승첩을 거뒀으므로 금산(金山) 이하에 머물며 주둔하던 적이 모두 도망하였다. 이에 김시민이 도로 진주에 주둔하면서 굳게 지킬 계책을 세웠다.
○ 별장 권응수(權應銖)가 영천(永川)의 적을 격파하고 그 성을 회복하였다.
안동 이하에 주둔한 적이 모두 철수하여 상주(尙州)로 향하였으므로 경상좌도의 수십 고을이 안전하게 되었다.
권응수는 용맹스러운 장수로 과감히 싸우는 것을 여러 장수들이 따르지 못하였다. 이 일이 알려지자, 상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로 올려 방어사를 삼았다.
○ 의병장 조헌과 의승(義僧) 영규가 금산(錦山)의 적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전사하였다.
조헌은 외로운 군사를 이끌고 홀로 진군하여 곧장 금산의 적을 공격하려 하였다. 이에 전라 감사 권율(權慄)과 충청 감사 허욱(許頊)이 모두 만류하면서 동시에 군사를 크게 일으킬 것을 청하고 기일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또 기일이 연기되자 조헌은 그들이 머뭇거리는 것을 분하게 여긴 나머지 7백여 명만을 이끌고 재를 넘으려 하였다. 영규가 간곡한 말로 만류하기를 “반드시 관군이 뒤에서 지원을 해 주어야만 들어갈 수 있다.” 하였으나, 조헌은 울면서 말하기를 “군부(君父)가 어디에 계신가. 군주가 치욕을 당하면 신하는 목숨을 버려야 하니, 그때가 바로 지금이다. 성패와 이해 관계를 어떻게 돌아볼 수 있겠는가.” 하고 북을 치며 행군하였다. 영규도 “조공(趙公)을 혼자 죽게 할 수는 없다.” 하고, 이에 거느린 승려 수백 명과 진(陣)을 합하여 함께 떠나면서 문첩(文牒)을 계속 보내 관군이 이어 진군하도록 재촉하였다.
조헌의 군사가 곧장 금산성 밖 10리 되는 곳에 이르러 진을 치고 관군을 기다리는데, 적이 후속부대가 없다는 것을 알고는 군사를 잠복시켜 후면을 끊은 뒤 군사를 총동원하여 나와 싸웠다. 조헌이 영(令)을 내리기를 “오늘은 한번 죽음이 있을 뿐이니 하나의 의(義) 자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라.” 하니, 군사들이 모두 응락하였다. 한참 동안 힘을 다하여 싸웠는데 적이 세 번 진격했다가 세 번 패하였다. 그러나 조헌의 군사는 이미 화살이 다 떨어진 상태였다. 조헌은 장막 가운데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었는데, 좌우에서 빠져나가기를 청하자, 조헌이 말하기를 “대장부가 죽었으면 죽었지 구차스럽게 살 수는 없다.”하고, 북을 울리며 더욱 급하게 전투를 독려하였다. 군사들은 맨 주먹으로 육박전을 벌였는데, 한 사람도 자리를 떠나는 자가 없이 모두 조헌과 함께 전사하였으며, 영규도 전사하였다. 적의 무리는 죽은 자가 더 많아 시체를 운반하여 성으로 들어가면서 우는 소리가 연이어졌다.
이튿날 동생 조범(趙範)이 몰래 전쟁터에 들어가서 시체를 거두었는데, 조헌은 깃발 아래에서 죽었고 장수와 군사들이 모두 곁에 빙둘러 죽어 있었다. 4일 만에 빈(殯)하였는데 낯빛이 살았을 적과 같았으며 눈을 부릅뜨고 수염이 움직여 사람들은 그가 죽은 지 이미 오래되었음을 깨닫지 못하였다. 적이 퇴각한 뒤에 제자들이 가서 7백 명의 시체를 거두어 무덤 하나를 만들고 칠백의사총(七百義士塚)이라고 표시하였다. 조헌의 아들 완기(完基)는 신체가 장대하고 성품과 도량 역시 뛰어났다. 군사가 패하게 되자 일부러 관복(冠服)을 화려하게 입었으니 그의 아버지를 대신하여 죽고자 한 것이다. 이에 적이 그를 주장(主將)으로 오인하고 그 시체를 찢었다.
함께 전사한 자로 드러난 자는 다음과 같다. 참봉 이광륜(李光輪)은 효성스럽고 우애와 절개가 있었다. 처음에 향병(鄕兵) 수백 명을 모집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계획에 참여하였다. 봉사 임정식(任廷式)은 성품이 질박하고 곧았으며 무재(武才)가 있었는데, 척후(斥候)로 진(陣)밖에 있다가 조헌의 위급함을 보고 말에 채찍질하며 돌격하여 전사하였다. 사인(士人) 이려(李礪)는 이탁(李鐸)의 손자로 학문과 덕행이 있었고, 사인 김절(金節)은 맨 먼저 군사를 모집하여 전투에 참여하면서 역전(力戰)하였다. 만호 변계온(邊繼溫), 현감 양응춘(楊應春), 봉사 곽자방(郭自防), 무인(武人) 김헌(金獻)ㆍ김인남(金仁男)ㆍ이양립(李養立)ㆍ정원복(鄭元福)ㆍ강인서(姜仁恕)ㆍ박봉서(朴鳳瑞)ㆍ김희철(金希哲)ㆍ이인현(李仁賢)ㆍ황삼양(黃三讓)ㆍ박춘년(朴春年)ㆍ한기(韓琦)ㆍ박찬(朴贊)은 모두 편비(褊裨)로 혈전을 벌이다 전사하였다. 사인(士人) 박사진(朴士振)ㆍ김선복(金善復)ㆍ복응길(卜應吉)ㆍ신경일(申慶一)ㆍ서응시(徐應時)ㆍ윤여익(尹汝翼)ㆍ김성원(金聲遠)ㆍ박혼(朴渾)ㆍ조경남(趙敬男)ㆍ고명원(高明遠)ㆍ강몽조(姜夢祖)는 모두 문인(門人)으로 종군하다가 전사하였다. 일이 알려지자 조헌에게는 이조 참판이 추증되고 그의 아들 완도(完堵)를 녹용(錄用)하였으며 그 집에 월름(月廩)을 지급하였다. 이광륜은 사헌부 집의에 추증되었다.
○ 해남 현감(海南縣監) 변응정(邊應井)이 처음에 조헌과 함께 금산(錦山)을 공격할 것을 약속하였는데, 이윽고 관군과 함께 모두 기일을 늦추었다. 조헌이 패하여 전사하였다는 말을 듣고 탄식하기를 “어찌하여 의병장과 약속을 하고서 위배하여 함께 죽지 못했단 말인가.” 하고 즉시 군사를 이끌고 단독으로 진군하여 성 아래에 이르러 격투(格鬪)하다가 전사하였다.
○ 금산(錦山)에 주둔했던 적이 밤에 도망하였다. 적이 비록 조헌 등의 군사를 패배시키기는 하였지만 죽거나 다친 군사가 매우 많았고 관군이 잇따라 이르러 피폐한 때를 이용하여 공격할까 의심하고서 무주(茂朱)와 옥천(沃川)에 주둔했던 군사들을 거두어 군영을 태워버리고 밤에 도망하였다. 그리하여 호남이 다시 완전하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조헌 등의 공이 장수양(張睢陽 당 나라의 장순(張巡))에 비교할 만하다고 하였다.
○ 이때 이순신(李舜臣)은 수군을 거느리고 서해(西海)의 입구에 웅거하였으며, 김성일(金誠一) 등은 진주(晉州)의 관요(關要)를 지키고 있었다. 적이 금산(錦山)의 길을 경유하여 호남에 침입했으나 여러 번 좌절당하였으므로 도로 종래의 길로 퇴각하여 돌아가니 호서 또한 함락되는 것을 면하였다. 국가가 이 두 도를 의지하여 군수 물자를 공급할 수 있었으니, 한때의 장사들이 방수(防守)한 공이 또한 많았다고 하겠다.
○ 9월. 중국 조정에서 왜의 진영에 사자로 보낸 유격(遊擊) 심유경(沈惟敬)이 돌아왔다. 당초 조승훈(組承訓)이 패하고 나자 적이 더욱 교만해져 우리 군대에 글을 보내어 장차 서쪽으로 올라가겠다고 큰소리치므로 행조(行朝)에서 두려워하였다. 심유경은 본래 절강성(浙江省) 사람으로 평소 왜국의 실정에 익숙하였으므로 병부 상서 석성(石星)이 유격이란 칭호를 붙여 주면서 그로 하여금 적의 사정을 정탐하게 하였다. 순안(順安)에 이르러 먼저 한 사람의 가정(家丁)을 왜군의 진영에 보내어 황제의 칙지로 책망하기를 “조선이 일본에 무엇을 잘못했기에 일본이 어찌 마음대로 군사를 일으켰는가?” 하니, 행장(行長)이 글을 보고는 직접 만나 일을 의논하자고 회보하였다. 심유경이 즉시 3~4명을 거느리고 가니, 행장 등이 군사를 매우 엄하게 진열하고 성 북쪽의 산 위로 나와서 만났다. 행장이 구봉(求封)과 통공(通貢)에 대한 일을 말하자, 심유경이 행장 등에게 말하기를,
“이곳은 바로 중국 조정의 지방이니 그대들은 물러나 주둔하면서 중국 조정의 다음 명령을 기다려야 한다.”
하니, 행장이 지도(地圖)를 보이면서 말하기를,
“이곳은 분명히 조선 지역이다.”
하였다. 심유경이 말하기를,
“평상시에 여기서 조서(詔書)를 영접하는 까닭에 많은 궁실(宮室)들이 있다. 비록 여기가 조선 지역이라 하더라도 바로 중국의 지경이니 여기에 머물 수는 없다.”
하니, 행장이 다시 회보할 때까지 기다릴 것을 청하고 물러갔다. 심유경이 갔다가 돌아오는 기간을 50일로 정한 뒤, 그동안에는 왜군의 무리가 평양의 서북쪽 10리 밖을 나오지 못하고 조선의 군사도 10리 안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는 나무를 세워 금표(禁標)를 하고 돌아왔다.
○ 전 사성(司成) 우성전(禹性傳)이 의병을 일으켜 의(義)자로 군호(軍號)를 삼았는데, 경기 안의 사민(士民) 중 따르는 자가 많아 군사가 수천 명이나 되었다. 얼마 있다가 강화(江華)로 들어가 김천일(金千鎰)과 군사를 연합하였다.
○ 중국 황제가 행인사 행인(行人司行人) 설번(薛藩)을 파견하여 조칙을 내리고 위로하며 유시하기를,
“그대 나라는 대대로 동번(東藩)을 지키며 평소 공손히 순종하였고, 의관 문물(衣冠文物)이 성해 살기 좋은 곳이라고 불려졌다. 그런데 요즈음 듣건대 왜노가 창궐하여 대거 침입해서 왕성(王城)을 함락시키고 평양을 점거하여 생민들은 도탄에 빠져 원근이 소란하며 국왕은 서쪽의 바닷가로 피신하여 초야에 있다고 하니, 그렇게 결딴난 모습을 생각하면 짐(朕)의 마음이 서글퍼진다. 엊그제 급박함을 고하는 소식을 받고 이미 변신(邊臣)에게 조칙을 내려 군사를 일으켜 구원하도록 하였다. 이제 또 행인(行人)을 차송하여 그대 국왕에게 알리는 것이니 마땅히 그대 조종(祖宗)이 대대로 전한 기업을 생각하도록 하라. 어떻게 차마 하루아침에 가벼이 버리겠는가. 급히 치욕을 씻고 흉적을 제거해야 할 것이니 힘써 바로잡고 회복할 것을 도모하라. 그리고 다시 그대 나라의 문무 신민에게 잇따라 유시하여 각기 군주에게 보답하는 마음을 견고히 하고 원수를 갚는 의리를 크게 분발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짐이 지금 문무 대신(大臣) 2원(員)에게 명하여 요양(遼陽)의 정병(精兵) 10만 명을 통솔하고 가서 도와 적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기필코 그대 나라의 병마(兵馬)와 함께 전후에서 협공하여 흉적을 모조리 죽여 하나도 남기지 말도록 해야 할 것이다. 짐이 하늘의 명명(明命)을 받아 화이(華夷)의 군주가 되어 지금 만국이 모두 편안하고 사해가 안정되어 있는데 어리석은 소추(小醜 왜적을 가리킴)가 감히 횡행하므로 다시 동남변해(東南邊海)의 여러 진(鎭)에 조칙을 내리고 아울러 유구(琉球)ㆍ섬라(暹羅) 등의 나라에 선유(宣諭)하여 군사 10만 명을 모집해서 동쪽으로 일본(日本)을 정벌하여 경예(鯨鯢 악인을 가리킴)를 주살하고 사해를 안정시키게 하였다. 그렇게 되면 작위(爵位)를 주고 포상하는 성대한 전례를 짐이 어찌 아끼겠는가.
대체로 선세(先世)의 강토를 회복하는 것은 곧 대효(大孝)이며 군부(君父)의 환난에 급히 달려가는 것은 곧 지극한 충성이다. 그대 나라의 군신들은 평소 예의를 알고 있으니 틀림없이 짐의 마음을 잘 체득할 것이다. 옛날의 문물을 회복시켜 국왕으로 하여금 개가를 올리며 도성으로 돌아가 종묘와 사직을 굳건히 지키며 번병(藩屛)의 임무를 길이 보전하게 하라. 그리하여 먼 곳을 보살피고 작은 나라를 사랑하는 짐의 뜻을 위로하게 될 것이다. 부디 신중히 할지어다. 그러므로 유시하노라.”
하였다.
○ 박진(朴晉)이 경주를 수복하였다. 박진이 안강현(安康縣)에 주둔하다가 밤에 몰래 군사를 다시 진격시켜 성 밖에서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성 안으로 발사하여 진 안에 떨어뜨렸다. 적이 그 제도를 몰랐으므로 다투어 구경하면서 서로 밀고 당기며 만져 보는 중에 조금 있다가 포(砲)가 그 속에서 터지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쇳조각이 별처럼 부서져 나갔다. 이에 맞아 즉사한 자가 20여 명이었는데, 온 진중이 놀라고 두려워하면서 신비스럽게 여기다가 이튿날 드디어 성을 버리고 서생포(西生浦)로 도망하였다. 박진이 드디어 경주에 들어가 남은 곡식 만여 석을 얻었다. 일이 알려지자, 가선대부로 승진시켰다. - 비격진천뢰의 제도는 옛날에 없었는데, 화포장(火砲匠) 이장손(李長孫)이 처음으로 만들었다. 진천뢰(震天雷)를 대완포구(大碗砲口)로 발사하면 5~6백 보를 날아가 떨어지는데, 얼마 있다가 화약이 안에서 폭발하므로 진을 함락시키는 데는 가장 좋은 무기였으나 그 뒤에는 활용하는 사람이 없었다. -
○ 황제의 조칙을 팔방(八方)에 선포하고 관군과 의병에게 힘을 합하여 적을 토벌하도록 유시하였다. 또 적의 계략에 빠졌던 사민(士民)들을 용서하여 귀순해서 스스로 충성을 다하도록 하고 공을 세운 자는 상을 주게 하였다.
○ 적을 토벌한 자에 대해 포상하는 규정을 중외에 반포하였다.
○ 여러 도의 감사에게 명하여 궐원인 지방관에 대해서는 모두 적임자를 가려 임시로 지키게 하고 계문하여 정식으로 임명하도록 하였다.
○ 전라 순찰사 권율이 군사를 거느리고 도성으로 향하였다. 권율이 한번 호령을 새롭게 하자 호남의 인심이 조금 안정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군사 2만 명을 징발하여 북쪽으로 올라왔다.
○ 왜적이 연안성(延安城)을 공격하니, 초토사 이정암(李廷馣)이 그들을 격퇴시켰다. 적장 갑비수(甲斐守)ㆍ풍신장정(豐臣長政) 등은 연안성을 굳게 지키고 떠나지 않는다 하여 해주(海州)ㆍ평산(平山)의 여러 주현(州縣)에 주둔하고 있는 군사를 모두 징발하여 대거 침입해 왔다.
이에 성 안에서는 모두 기가 질려 말하기를 “초토사는 성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 아니니 이 예봉(銳鋒)을 피하여 뒷날에 거사를 도모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하니, 이정암이 울면서 달래기를 “내가 경악(經幄)에 있던 늙은 신하로 말고삐를 잡고 행재를 수행하지 못했다. 이제 왕세자의 초토하라는 명을 받았고 보면 빨리 한 성의 수비라도 맡아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마땅하니, 어떻게 차마 구차하게 살겠는가. 그리고 주민을 이끌어 성으로 들어오게 하였다가 적이 왔다고 해서 버리는 짓을 내가 어찌 차마 하겠는가.” 하고, 명령을 내리기를 “함께 죽고 싶지 않은 자는 마음대로 빠져 나가라.” 하였다. 그리고는 노복을 시켜 섶을 쌓고 횃불을 가지고 기다리게 하면서 경계시키기를 “적이 만약 성에 오르거든 나는 여기에 앉아 있을 것이니 너는 즉시 태워서 적의 손에 내가 더럽게 죽지 않도록 하라.” 하고, 의견을 달리하는 인사는 타일러서 보내니 종사관 우준민(禹俊民)이 나가서 군중에게 거듭 약속을 밝히고 마음과 힘을 합하기로 맹세하자 군중이 감동하고 분격해서 일제히 외치기를 “대장이 죽기로 결단하는 판에 우리들이 어찌 살기를 도모하랴.” 하였다.
적이 드디어 성을 포위하였다. 한 장수가 흰 기를 등에 지고 백마를 타고는 성을 돌며 두루 살피던 중에 기가 갑자기 바람에 넘어졌다. 무사 장응기(張應祺)가 그것을 보고 화살 한 대를 쏘아 가슴을 꿰뚫어 죽였다. 이정암이 좌우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것은 적이 패할 징조이다.” 하였다. 적이 밤낮으로 공격하며 수천 개의 조총(鳥銃)으로 일제히 사격하니 연기가 자욱하고 탄환이 비오듯 하였다, 그러나 이정암은 태연자약한 모습으로 성가퀴를 지키는 자에게 명하여 경솔히 활을 쏘지 말고 적이 성에 기어 오르거든 반드시 쏘아 죽이도록 하였다. 그리고 문짝ㆍ다락 등을 뜯어 방패(防牌)로 삼고 쌓아둔 풀을 묶어 횃불을 만들고 가마솥을 벌여 두고 물을 끓이면서 늙은이ㆍ어린이ㆍ부녀자 할 것 없이 모두 그 일에 달려들도록 하였다.
적이 시초를 참호에 채우고 올라오면 횃불을 던져 태우고, 적이 긴 사다리로 성에 오르거나 판자를 지고 성을 훼손시키면 나무와 돌로 부수고 끓는 물을 퍼붓게 하니 죽지 않는 자가 없었다. 적이 남산에다 높은 다락을 세워 판자 벽에 구멍을 내고 내려다보며 총을 쏘니, 성 안에서도 이에 대응하여 흙담을 쌓아 막았다. 적이 밤 안개를 틈타 몰래 서쪽 성으로 기어 오르는 것을 성가퀴를 지키는 군사가 횃불로 에워싸 40여 명을 태워 죽였다. 포위당한 지 4일 동안 밤낮으로 크게 싸웠는데 적도 탄환이 떨어져 소리만 지를 뿐이었다. 성 안에서는 또한 승리한 기세를 틈타 환호하며 쇠북을 치자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다. 적이 이에 시체를 모아 불을 지르고 퇴각하니, 즉시 군사를 출동시켜 추격하여 수급을 베고 노획한 것이 매우 많았다.
이정암이 승리의 보고를 하면서 단지 어느 날에 성이 포위당하고 어느 날에 풀고 떠났다고만 하였을 뿐 다른 말이 없었다. 조정에서 모두 말하기를 “전쟁에 이기는 것도 쉽지 않지만 공을 자랑하지 않는 것은 더욱 어렵다.” 하고 상으로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를 더하고, 함께 지킨 장사로 공이 있는 장응기ㆍ조종남(趙宗男)ㆍ조서룡(趙瑞龍)ㆍ봉요신(奉堯臣) 등에게는 차등 있게 관직으로 포상하였다.
○ 함경북도 평사 정문부(鄭文孚)가 군사를 일으켜 경성(鏡城)을 수복하였다.
당시 북계(北界)의 수장(守將)들이 모두 토인(土人)에게 잡혀 왜장에게 넘겨졌는데, 도망하여 나온 자는 10명에 1~2명도 안 되었다. 평사 정문부는 교생(校生)들에게 글을 가르쳤기 때문에 변란이 일어난 뒤에 제자 몇 사람이 비호하여 빠져나올 수 있었다. 교생들과 식견이 있는 무사들이 정문부가 있는 곳을 알고 모두 그에게 찾아가 정문부를 추대하여 의병장으로 삼고 토병과 장사 수백 명을 모았는데, 경성 사람인 전 만호 강문우(姜文佑)가 선두에서 거느리고 즉시 부(府)의 성에 이르렀다.
이때 국세필(鞠世弼)이 예백(禮伯)이라고 일컬으며 병사(兵使)의 인(印)을 가지고 일을 보면서 태연히 부(府)를 다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군사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성문을 닫고 성에 올라가 항거하였다. 이에 강문우 등이 화복(禍福)을 들어 위협하니 국세필이 대적하지 못할 것을 알고는 성문을 열어 맞아들이고 병사의 인을 반납하였다. 정문부가 명령을 내리기를 “대소의 병민(兵民)이 예전에 범한 죄는 문책하지 말라.” 하고, 그대로 국세필에게 그전처럼 군사를 거느리게 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남북의 주보(州堡)에 격문을 전하여 병사 3천 명을 합하고 그 중에서 날래고 용맹스런 기마병을 뽑아 선봉으로 삼았다. 길주(吉州)의 왜적이 이 소식을 듣고 군사 백여 명을 보내어 성 서쪽에 와서 탐지하게 하였는데, 강문우 등이 성문을 열고 나가 공격하여 수십 명의 머리를 베니 남은 적들이 도망갔다.
○ 10월. 부산 등지에 주둔했던 적이 군사를 합쳐 대대적으로 진주(晉州)를 포위하였다. 목사 김시민이 적병을 크게 격파하여 진주가 포위에서 풀렸다. 당초 왜장이 군사 수만 명을 모두 동원하여 진주성을 포위하였는데 성 안의 군사는 3천여 명이었다. 김시민이 여러 성첩을 나누어 지키게 하면서 조용히 기다리도록 하니 성 안이 고요하였다. 적이 기치(旗幟)와 개삽(蓋翣)을 많이 설치하고 금으로 꾸민 가면에 의복을 이상하게 차려 입어 햇빛에 번쩍이고 바람에 펄럭이니 온갖 형상이 눈이 부시고 정신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왜장 6명이 진(陣)을 나누어 전투를 독려하였는데 총수(銃手) 수천 명이 항상 산 위에서 성 안을 향해 일제히 쏘아대니 그 형세가 번개가 치고 우박이 내리는 듯하였으며, 부르짖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켰다. 그러나 김시민은 군사들로 하여금 움직이지 말고 적들의 소리가 약해지기를 기다려 즉시 포(砲)를 쏘고 북을 울리며 응전하게 하였다.
적이 대나무와 소나무 가지를 많이 베어 엮어서 막이를 만들고 흙으로 그 속을 채워 우리 군사가 모르게 하고 대나무 사다리 수천 개를 만들었는데 한 칸 너비쯤 되는 것으로 그 위에 망석(網席)을 덮어 많은 군사가 동시에 일제히 올라갈 수 있게 만들었으며, 3층의 산대(山臺)를 만들어 성첩을 내려다보게 하였다. 김시민은 화구(火具)를 미리 준비하고 화약(火藥)을 종이에 싸서 다발로 묶은 풀 속에 넣어두고 성 위에는 대포(大砲) 및 대석(大石)을 나누어 설치하게 하였으며, 여장(女墻) 안에는 가마솥을 비치하고 물을 끓여 대기하도록 하였다.
적이 공격할 장비를 모두 갖추고 사면으로 육박하자, 성 안에서 현자총(玄字銃)을 쏘아 산대의 적을 맞춰 떨어뜨리고, 화약과 풀로 송장(松障)을 태웠으며, 대포로 대나무로 엮은 긴 사다리를 부수고, 끓인 물을 퍼붓기도 하고 큰 돌을 던지기도 하여 여러 가지의 공격용 장비를 격파하였다. 9월 10일 밤중에 적병이 거짓 물러가는 체하다가 몰래 되돌아와 적의 대장이 직접 전투를 독려하였다. 여러 왜적이 모두 방패로 가리고 머리를 감싸고 처음에는 동문(東門)을 공격하였는데, 앞에서 한꺼번에 올라가게 하고 뒤에서는 천 개의 총으로 일제히 사격하여 성 위에 사람이 설 수 없게 하였다. 그러나 김시민은 무리를 지휘하여 활과 쇠뇌와 포를 쏘고 돌을 굴려 내리니, 적병이 오는 족족 죽어 넘어져 쓰러진 시체가 삼대처럼 즐비하게 모두 다 패하였다.
바야흐로 전투가 무르익을 무렵 또 하나의 대진(大陣)이 동문의 경우처럼 갑자기 북성(北城)을 공격하였다. 이에 만호 최덕량(崔德良) 등이 죽기를 무릅쓰고 대항해 싸우며 일사불란하게 막아 내었는데, 동녘이 밝아오자 조금 뜸해졌다. 성안의 나무와 돌, 기와, 띠풀 등이 거의 없어졌으며 김시민도 탄환에 맞아 누워 있었다. 이때 곤양 군수(昆陽郡守) 이광악(李光岳)이 왜장을 쏘아 죽이니 한낮이 되어서야 적진이 비로소 퇴각하며 시체를 태우고 포위를 풀고 흩어졌다. 성이 포위당한 10여 일 동안 4~5차례 큰 전투를 벌이면서 안팎에서 힘껏 싸웠으므로 적이 먼저 도망하였다.
○ 복수(復讐)할 사람을 불러 모아 군사를 일으켰다. 처음에 고경명(高敬命)이 패한 뒤 그의 아들 전 현령 고종후(高從厚)가 상복을 입고 종군하여 부친의 남은 병사를 거두어 별군(別軍)을 만들었다. 이때에 이르러 체찰사 정철(鄭澈)이 조정의 뜻을 선포하며 권유하자 홍계남(洪季男)이 맨 먼저 여러 도에 편지를 보내니, 조헌의 아들 조완도(趙完堵) 등이 호응하였다. 또 고종후로 하여금 사노(寺奴)를 뽑아 군사를 삼도록 하였다.
○ 유격(遊擊) 갈봉하(葛逢夏)가 마병(馬兵) 2천 명을 거느리고 사대수(査大受)와 함께 행조를 호위하며 오랫동안 의주(義州)에 머물렀다.
○ 북도 평사(北道評事) 정문부(鄭文孚)가 길주(吉州)에서 적병(賊兵)을 크게 패배시키고 성을 포위하였다.
정문부가 백성을 안집(安集)시켜 안정이 되자 군사들의 마음이 모두 적을 공격하여 충성을 바치고자 하였다. 이에 출동할 날짜를 가려 출발하려 할 즈음에 장사들이 일제히 요청하기를 “앞으로 왜적을 토벌하려 하는데 국가에 반역한 적이 아직도 진중(陣中)에 있으니 먼저 토벌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국세필(鞠世弼) 등 13명을 잡아 목을 베어 여러 사람들에게 조리돌리고 말하기를 “당초에 앞장선 사람은 이 무리들뿐이며 이 밖에는 참여한 자가 없으니 부인(府人)은 의심하지 말라.” 하니, 많은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였는데, 이것은 정문부의 본래의 계획이었다.
그리고 다시 육진에 격문을 보내어 맨 먼저 반란에 앞장선 자를 처벌하게 하니, 회령(會寧)의 유생 신세준(申世俊)이 군사를 일으켜 국경인(鞠景仁)의 목을 베었으며, 남은 진도 모두 수복되고 반민(叛民)들은 주벌되기도 하고 도망하기도 하였다. 정문부가 군사를 고참역(古站驛)으로 진출시키고 군사를 보내어 명천(明川)의 반적(叛賊) 정말수(鄭末守)를 주벌하고 성울 수복하였다. 그러자 길주의 적이 마침내 사방으로 나와 분탕질을 쳤는데, 일지군(一枝軍)은 명천의 해창(海倉)을 노략질하였다. 정문부가 군사를 길주의 남촌(南村)에 진출시켜 돌아가는 길에서 요격하여 적병을 크게 깨뜨리고 6백 명의 수급을 베었다. 적의 한 부대가 마천령(摩天嶺) 아래 영동관 책성(嶺東館柵城)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임명촌(臨溟村)을 불태우고 노략질하므로, 정문부가 군사를 돌려 공격하였다. 쌍포(雙浦)에서 전투하였는데 적병이 패주하였으므로 60명의 수급을 베었다. 이로부터 두 곳에 주둔한 적이 모두 굳게 지키고 나오지 않으므로 정문부가 군사를 나누어 포위하였다.
○ 11월. 정곤수(鄭崑壽)가 북경에서 돌아왔다. 중국 조정이 대병(大兵)을 출동시켜 구원할 것을 허락하고 먼저 은(銀) 3천 냥을 내려 주었다. 정곤수가 처음에 연경에 도착하여 주문(奏文)을 올리자 황제가 즉시 병부(兵部)에 내려 복의(覆議)하게 하였다. 정곤수가 병부에 글을 올려 거듭 간곡하고 절박하게 청원하고, 또 상서(尙書) 석성(石星)에게 나아가 통곡하며 애절하게 호소하는데 슬픔을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니 석성도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당시 중국 조정에서도 이의(異議)가 분분하여 어떤 이는 말하기를 “중국 지역만 방어하면 되지 병마(兵馬)를 많이 징발하여 중국을 먼저 피폐하게 할 필요는 없다.”고 하였지만, 석성만은 군사를 내자는 의논을 극력 주장하며 복제(覆題)하여 격동시키는 한편 자신이 동쪽의 정벌에 나서겠다고 주청하였다. 황제가 즉시 윤허하여 병부 시랑(兵部侍郞) 송응창(宋應昌)을 경략(經略)으로 삼아 먼저 2만의 군사를 출발시키고 곧 이어 대군(大軍)을 조발하고 장수를 정하여 잇따라 파견하게 하였다. 그리고 마가은(馬價銀) - 마가은은 바로 중국 조정의 변방 오랑캐 방어용 자금이다. -3천 냥을 내려 궁각(弓角)과 화약을 사서 보냈다. 정곤수가 무더운 때에 갔다가 추위를 무릅쓰고 돌아왔는데, 길에서 머물지 않고 주청하여 성사시켰으므로 상이 가상히 여기고 기뻐하며 후하게 위로하였다.
○ 호남의 사민(士民)이 의곡(義穀)을 모아 해로(海路)를 따라 의주(義州)에 수송하였다.
○ 군공청(軍功廳)을 설치하여 군공을 조사하여 감정하게 하였다.
○ 전 동지사(同知事) 성혼(成渾)이 행재에 이르자 우참찬으로 승진 임명하였는데 대신의 의논을 따른 것이었다. 성혼이 아뢰기를,
“신이 국란 초기에 대궐에 달려가려 하였으니 조정에서 바야흐로 당인(黨人)의 지목이 있어 감히 스스로 반행(班行)에 나아가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승여가 임진강을 건너는 때를 당해서는 일이 갑작스러웠고 집이 15리 밖에 있어 미처 듣지 못했기 때문에 달려와 문안하지 못하였으니, 신하로서의 도리를 전혀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동궁(東宮)이 하교하여 이정형(李廷馨)의 군중(軍中)에 나아가 군사(軍事)를 함께 맡도록 명하였습니다. 신이 병으로 폐인이 되었으니 어떻게 말을 몰아 달리는 것을 감당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부축을 받고 군대 있는 곳에 이르러 감히 죽기를 사양하지 못했습니다. 이어 동궁이 불러서 분조(分朝)로 달려갔는데, 머무른 지 열흘 만에 대조(大朝)로 들어가기를 청했습니다. 그리하여 지난달 말에 성천(成川)을 출발했는데, 겨울철 극심한 추위로 신은 몸이 점점 쇠약해져 한질(寒疾)이 다시 도져 도로에서 지체하느라 뒤처져 늦어진 바람에 평소의 마음을 스스로 아뢸 길이 없었으니 황공하고 두려워 죽어도 죄가 남는다 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갖은 고생을 하며 여기에 도착하였으니 참으로 가상하며 기쁘다. 국가가 장차 경(卿)을 의지하여 회복될 것이니 대죄(待罪)하지 말라.”
하였다. 성혼이 또 새로 승진된 직명(職名)을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재삼 사양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 문소전(文昭殿)의 위판(位版)을 처음에 전내(殿內)에 묻었는데, 김천일(金千鎰)이 사람을 모집하여 성에 들어가 몰래 가져오게 해서 강화(江華)에 봉안(奉安)하였다. 이때 응모한 사람에게도 상을 주도록 명하였다.
○ 12월. 전라 순찰사 권율(權慄)이 수원의 독성(禿城)으로 군사를 진출시켰다. 권율이 직산(稷山)에 이르자 체찰사 정철이 경솔하게 진격하지 말도록 경계하므로 권율이 그대로 군사를 머물게 하면서 보고하였다. 조정이 전지를 내려 정철을 책망하고 권율을 재촉하여 도성으로 진출하여 도모하도록 청하였다. 권율이 지난날 평야의 전투에서 군사가 패한 것을 징계하여 독성으로 진출하여 머물렀다. 상이 차고 있던 칼을 풀어 달려가 내려주게 하면서 “여러 장수들 중에 명을 따르지 않는 자가 있거든 이 칼로 처단하라.”고 하였다. 도성의 적이 진을 나누어 군사를 출동시켜 왕래하면서 도전(挑戰)하였으나 권율은 성곽을 튼튼히 지키고 응하지 않으니 적이 군영을 태우고 퇴각하였다. 권율이 가끔 날랜 군사를 출동시켜 낙후한 적을 습격하자 기내(畿內)에 주둔했던 적이 모두 도성으로 들어갔다. 이로부터 서로(西路)에 행인이 다닐 수 있게 되어 여러 의병들이 차례로 경기 지역에 진출하여 주둔하면서 중국 군사를 기다렸다.
황제가 대병(大兵)을 파견하여 와서 구원하게 하였다.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이 먼저 압록강을 건넜다. 황제가 우리의 주청을 허락하고 병부 시랑(兵部侍郞) 송응창(宋應昌)을 경략군문(經略軍門)으로, 도독동지(都督同知) 이여송(李如松)을 제독군무(提督軍務)로 삼았다. 그리고 부총병(副摠兵) 양원(楊元)을 좌협대장(左協大將)으로 삼아 부총병 왕유익(王有翼), 부총병 왕유정(王維禎), 참장(參將) 이여매(李如梅), 참장 이여오(李如梧), 참장 양소선(楊紹先), 선봉 부총병 사대수(査大受), 부총병 손수렴(孫守廉), 참장 이영(李寧), 유격 갈봉하(葛逢夏) 등을 모두 양원이 통솔하게 하였다. 총병 이여백(李如栢)을 중협대장(中協大將)으로 삼아 부총병 임자강(任自强), 참장 이방춘(李芳春), 유격 고책(高策), 유격 전세정(錢世禎), 유격 척금(戚金), 유격 주홍모(周弘謨), 유격 방시휘(方時輝), 유격 고승(高昇), 유격 왕동(王洞) 등을 모두 이여백이 통솔하게 하였다. 부총병 장세작(張世爵)을 우협대장(右協大將)으로 삼아 부총병 조승훈(祖承訓), 부총병 오유충(吳惟忠), 부총병 왕필적(王必迪), 참장 조지목(趙之牧), 참장 장응충(張應忠), 참장 낙상지(駱尙志), 참장 진방철(陳邦哲), 유격 곡수(谷燧), 유격 양심(梁心) 등을 모두 장세작이 통솔하게 하였다. 참장 방시춘(方時春)을 중군 비어(中軍備禦)로, 한종공(韓宗功)을 기고관(旗鼓官)으로, 병부 원외랑(兵部員外郞) 유황상(劉黃裳), 병부 주사(兵部主事) 원황(袁黃)을 찬획(贊畫)으로, 호부 주사(戶部主事) 애유신(艾維新)을 독향(督餉)으로 삼았다. 군사는 도합 4만 3천여 명이었으며 잇따라 나온 자가 8천 명이었다. 이때 평양에 주둔한 적은 1만 수천 명 정도였는데, 우리 백성들까지 군사로 삼아 군세(軍勢)를 펼쳤다. 경략이 세 갑절의 군사로 공격할 계획을 하였다.


[주D-001]신포서(申包胥)에 비유 : 오(吳) 나라가 초(楚) 나라를 침략하자 초 나라 신하 신포서가 진(秦) 나라에 구원병을 청하러 가 뜰에서 7일 동안 울었더니 진 나라에서 그의 충성심에 감동되어 출병했던 고사. 《史記 卷66 伍子胥列傳》

기재사초 하(寄齋史草下)
임진일록 4(壬辰日錄四) 선조 25년, 만력 20년 9월에 시작하여 12월까지 씀 대체로 4개월 간의 기록.



9월

밀양 부사 박진(朴晉)은 왜란 초기에 전공(戰功)이 있어, 마침내 승직하여 좌병사(左兵使)가 되었다. 그는 군사를 이끌고 영천(永川)에 나가 공격하다가 적에게 습격을 받아, 겨우 죽음을 면했다.
○ 그 뒤에 신녕(新寧) 사람 권응수(權應銖)가 병정 천여 명을 모집하여 병정마다 한 묶음의 섶을 가지고 밤을 이용하여 영천을 공격하였다. 병정들이 바람을 따라 불을 놓으니, 적이 크게 궁지에 몰려, 불길을 무릅쓰고 포위를 뚫고 나가려고 하는 것을 아군이 어지러이 쏘아대니, 적이 나갈 수 없었다. 수천의 적이 다 불에 타 죽고 남은 자도 혹 벼랑에서 떨어져 물에 빠져 죽으니, 그 수효를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었다. 시체썩는 냄새가 길을 덮어 사람들이 가까이 가지 못했다. 이 일로 권응수를 절충장군 조방장(助防將)으로 발탁했다.
○ 지휘(指揮) 황응양(黃應暘)이 와서 말하기를,
“나는 비로 석 노야(石老爺 중국의 병부 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을 높인 말)가 보낸 사람이오. 직접 적의 진영으로 들어가 적의 형세를 살펴야 하니 반드시 한 분의 대신과 동행해야겠소.”
하였다. 상이 친히 용만관(龍灣館)에서 만나 보니, 황응양이 말하기를,
“귀국은 비록 작으나 평소 부강하다 일러 왔는데, 하루 아침에 파천(播遷)하여 여기에 온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우리 조정에서 어떤 사람은 구원해야 한다 하고, 어떤 사람은 구원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데, 귀국의 형세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석 노야가 저에게 말하기를, ‘네가 곧장 친히 적의 진영에 가서 염탐해 보면 조선의 형세도 알 것이다.’ 하였는데, 내가 온 것은 실은 이것 때문입니다.”
하니, 상이 통곡하며 이르기를,
“연전에 일본이 사람을 보내 함께 상국을 침범하자고 하므로 대의를 들어서 거절하였고, 그 뒤 또 와서 우리에게 길을 빌려주면 요동으로 들어가겠다고 하므로 또 그것을 거절하였소. 그리고는 곧 전후의 왜적 형세를 갖추어 천조에 주달하였소. 이제 왜적이 우리 민생을 도살하고 우리 종묘를 불태우니, 원한이 골수에 사무쳐 결코 의리상 한 하늘 아래서 같이 살 수 없소. 그런데도 어찌 차마 원수를 잊고 원한을 풀고 그놈들과 함께 상국을 침범하는 계책을 세우겠소. 소방(小邦)의 군신이 도망하여 여기에 온 것은 다만 그간의 곡절을 분명히 알려 평소 사대(事大)의 정성을 밝히고자 하였을 뿐이오. 이 미미한 정성을 아직 사뢰지도 못하고서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을 듣게 되니, 마땅히 압록강에 몸을 던져 죽어서 이 마음을 나타내겠소.”
하고, 상하가 다 목놓아 통곡하였다. 황 지휘는 상의 손을 잡고 가슴을 어루만지며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제 말씀하신 것을 들으니, 이것은 바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성실한 말씀입니다. 천조에서 만일 구원하지 아니한다면 충의(忠義)로운 동한(東漢)의 나라를 원통하게도 기회를 잃게 됨을 면치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꼭 적의 진영에 가 보지 않더라도 조선의 사정은 이미 잘 알았습니다.”
하고, 그날로 돌아갔다. 그 뒤에 우리 사신이 병부로 찾아가니, 병부 관리가 말하기를,
“황응양이 당신 나라에서 돌아온 뒤로 날마다 병부에 와서 석 노야를 만나 뵙고서, 석 노야가 나갈 적에는 멍에채를 붙잡고 통곡하며, 극력 구원해야 하는 정상을 말하여, 석 노야도 눈물을 흘렸소. 출병하자는 의론은 비록 석 노야가 처음부터 주장하였다 하더라도 또한 황 지휘의 힘이 적지 않습니다.”
하였다.
○ 조정에서 말하기를,
“이광이 4월에 기병하여 공주에 이르러 대가가 서울을 나갔다는 말을 듣고, 이유 없이 군사를 파하여 가버리고, 얼마 안 되어 용인(龍仁)에서 군사를 파하고 또 전주(全州)를 버리고 자신을 온전히 하려는 계책으로 삼으려 하였습니다. 이것은 크게 신하의 의리를 잃은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를 잡아다 죄주라 명하였다.
○ 윤두수가 입대(入對)하여 아뢰기를,
“광주 목사 권율(權慄)은 기골(氣骨)과 도량이 있어, 참으로 장수감이옵니다. 전라 감사로는 이 사람이 적격이옵니다.”
하니, 마침내 권율로서 순찰사를 삼았다.
○ 전 판서 김응남(金應南)으로 정주(定州) 수성장(守城將)을 삼고, 겸하여 배가 왕래하는 길을 관리하게 하였다. 처음에 김응남이 어머니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상소하여 전장에 나가 복수하겠다고 하였는데, 나중에 비로소 어머니가 생존한 것을 알았다. 조정에서는 드디어 정주를 중도(中道)의 거진(巨鎭)이라 하여 김응남에게 성과 기계를 수선하고 겸하여 관서(關西)의 뱃길을 살피게 하였다. 대체로 천조의 출병이 아직도 기약이 없으니 적의 형세가 만일 급박하면 바다로 항해하여 호남으로 향할 계책이었다.
○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이조 좌랑 허성(許筬)은 처음 소모(召募)의 명을 받았으나, 한 명의 군사도 모집하지 못하고 한 가지 일도 한 적이 없으면서 이제 와서 거만하게 복명(復命)하니, 어찌 신하로서 명을 받아 직책을 다했다 하겠나이까. 직을 파하여 그 죄를 응징하시기를 청하옵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 세자가 이천(伊川)에 있으면서, 강원 감사 유영길(柳永吉)이 적을 피해 영동에 가 있어서 영접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마침내 강신(姜紳)을 기복(起復)하여 그와 대체하고 명을 조정에 청하니, 조정에서도 이를 따랐다. 처음 조정에서는 사대부의 처자가 산골짜기로 피난하여 굶어 죽은 자가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강원도가 가장 심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진휼(賑恤)하여 목숨을 잃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유시를 내렸다. 이에 유영길이 불가하다고 고집하여 말하기를,
“사람마다 만족하게 해 주자면 한이 없소. 관가의 곡식을 가지고 사사로이 은혜를 베푸는 것은 나로서는 하지 못하겠소.”
하니, 이성중이 대답하기를,
“급암(汲黯)은 조령(詔令)을 고치면서까지 창고를 열었는데, 유영길은 전지(傳旨)를 위배하여 곡식을 나누어 주는 것을 막으니, 저 급암은 진실로 무슨 마음이며, 이 유영길은 진실로 무슨 마음인가.”
하였다. 경상 우병사 조대곤(曺大坤)이 왜란 초에, 늙고 겁이 많아 먼저 도망갔다. 함안 군수(咸安郡守) 유업인(柳業仁)은 전공이 있어 승진되어 병사(兵使)가 되었다. 그는 얼마 안 있어 진주가 포위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구하러 가다가 적을 길에서 만나 싸우다 패하여 죽었다. 이 때에 많은 적이 적이 진주를 포위하니, 목사 이경(李璥)은 병으로 죽고, 판관 김시민(金時敏)과 곤양 군수(昆陽郡守) 이원악(李元岳) 등은 밤낮으로 고전하였다. 그들은 군대를 나누어 여섯 진영으로 만들어 번갈아 나가면서 주야를 쉬지 않았다. 성안에서는 총포와 시석(矢石)으로 갖은 수단을 다하여 7일 동안을 막으며 지켰다. 적은 사상자가 많자 마침내 도망쳤다. 조정에서는 김시민을 승임시켜 병사 겸 진주목사로 삼았는데, 오래지 않아 병으로 죽었다. 처음 김면(金沔)이 의병을 일으킬 적에 먼저 집 하인 7백여 명을 이끌고 창의하니, 원근 사람이 다투어 호응하였다. 김면은 성주(星州)ㆍ초계(草溪)ㆍ합천(陜川)의 사이를 왕래하면서 적을 무수히 베니, 백성들이 의지하여 편안히 살았다. 마침내 김면을 발탁하여 병사로 삼았다.
곽재우(郭再祐)는 의령(宜寧) 사람으로 승지 곽규(郭﨣)의 아들이다. 일찍이 글을 업으로 하였는데, 적이 의령 근처로 온다는 말을 듣고 마을 사람들을 모아 그들을 회유하기를,
“적이 이미 육박해 왔으니, 우리의 부모 처자가 적에게 붙잡히게 될 것이오. 우리 마을에서 젊은 나이로 싸울 만한 자가 수백 명이 됩니다. 만일 마음을 같이하여 정진(鼎津)을 근거지로 삼아 지키면 마을을 보전할 수 있을 것인데, 어찌 속수무책으로 죽음을 기다리겠소.”
하니, 여러 사람이 호응하였다. 드디어 군대를 나룻가 언덕 위에다 매복케 하였다. 또 호각 부는 자를 많이 구해서 붉은 옷을 입혀서 산 꼭대기로 올라가게 하였다. 그리고는 이들을 사면에 벌여 두고, 적이 이르면 사면에서 일제히 호각 소리를 내고 언덕 뒤의 복병은 또 마구 쏘기로 했다. 적은 이것을 보고 놀라 흩어졌다. 드디어 적의 목 백여 급을 베었고, 이 때문에 적은 감히 다시 가까이 오지 못했다. 조정에서는 드디어 곽재우를 절충장군 조방장으로 발탁하였다. 이 때에 8도에서 의병이 함께 일어났는데 모두 관군의 절제를 받지 아니하였고, 그 행동을 마음대로 하여 관가의 창고를 공공연히 부수고 곡식을 꺼냈다. 전쟁에 이기면 큰 상을 받고 전쟁에 패하더라도 견책이 거의 없자, 관군으로 죄있는 자는 대부분 그 의병 속으로 들어갔다. 김면이 혼자 말하기를,
“우리는 의로써 일을 일으켰으니, 관군의 절제를 받아야 마땅하다. 약탈하지 말고 오직 의로 돌아갈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의병의 의의가 어디 있겠는가.”
하였다. 그가 일찍이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곽재우는 본래 유식한 사람이 아니니, 그가 행한 일은 깊이 책망할 것이 못된다. 정인홍(鄭仁弘)은 현자(賢者)라 일컬어 왔는데도 이와 같은 행동을 하니, 부끄러움이 없겠는가.”
하였다.
처음에 감사 김수(金睟)는 처사가 조급하고 각박하여 인심을 잃었다. 변란이 일어나자 제대로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전라도 경계로 피하여 갔으므로 지방 사람들의 나무람을 많이 받았다. 곽재우가 이미 뜻을 얻은 뒤에 법도를 따르지 아니함이 많아서, 김수는 그것을 바로잡고자 하였다. 곽재우는 대노하여 드디어 격문을 돌려 그의 죄를 불충 불효라고 나열하여 죽이려 하자, 김면이 극력 이것을 말렸다. 조정에서 드디어 김성일(金誠一)을 감사로 삼고, 김수를 소환하였다. 곽재우는 또 상소하여 김수를 목베도록 청하였다. 상이 이것을 크게 의심하여 비밀히 비변사에 묻기를,
“이 사람이 한 도의 주인을 마음대로 죽이고자 하니, 역적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를 제거하지 아니하면 후회가 있을까 두렵다.”
하니, 윤두수가 아뢰기를,
“그의 행동를 보니, 일개 미친 아이에 불과합니다. 군사를 거느리고 적을 무찔러 마을을 잘 보전하고 동서로 달려가 구원하여 험난을 피하지 아니 한다고 스스로 의사(義士)라 자처합니다. 오늘날 상소함에 있어서도 그는 역시 의기의 격동이라는 것만 생각하고 스스로 큰 죄에 빠진 줄을 알지 못하였지만 전쟁이 어지러운 때에 어찌 사람마다 다 예법으로써 책할 수 있겠나이까.”
하였다. 상이 드디어 답하지 않았다.
○ 애당초 대가가 평양을 출발하지 않았을 적에 함경 감사 유영립(柳永立)이 일처리를 잘못한다 하여 윤탁연(尹卓然)으로 바꾸었는데, 윤탁연이 적에게 핍박되어 삼수(三水) 별해보(別害堡) 산중으로 들어갔다. 남북도의 반란민이 크게 일어나서, 강원도로부터 경흥에 이르기까지 5리마다 표목 하나씩을 세워 글을 써 놓기를,
“이덕형은 왕이 되고, 김성일은 대장이 되었다.”
하였다. 이 때문에 인심이 흉흉하여 모든 백성들이 말하기를,
“항복하면 반드시 죽지 않는다.”
하였다. 그리하여 북도 병사(北道兵使) 한극함(韓克緘), 회령 부사(會寧府使) 이영(李瑛), 온성 부사(穩城府使) 이수(李銖), 경성 판관(鏡城判官) 이홍업(李弘業) 등을 포박하여 적에게 항복하였다. 병조 좌랑 서성(徐渻)은 잡혔다가 적에게 뇌물을 주고 도망하였고, 회령 판관 이염(李琰)은 변을 듣고는 스스로 문루(門樓)에 목매었는데, 그 매달린 줄을 끊은 자가 있어서 마침내 성에서 줄을 타고 도망하였다. 그 나머지 사람은 죽음을 면한 자가 없었다.
종성 부사(鍾城府使) 정현룡(鄭見龍)이 표(表)를 써서 적을 맞이하여 항복하고자 하면서 심지어, ‘나를 사랑하면 임금이고 나를 학대하면 원수다. 누구를 부린들 신하가 아니며,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겠는가.’라는 문구까지 있었다. 판관 임순(林恂)과 함께 그 글을 내던지고 도망가려고 했다.
반란민 국경인(鞠景仁)이 북병사라 자칭하며 군사를 영솔하고 적을 인도하여 호지(胡地)로 들어갔다. 그러나 삼일계(三日界)를 넘어서 여러 호인(胡人)에게 유인되어 크게 패하고 돌아왔다. 적군이 돌아와 길주(吉州)에 의거하였다. 이에 평사(評事) 정문부(鄭文孚)는 산골로 도망가, 6ㆍ7명의 수령과 협의하여 기병하고자 하였지만, 어느 사람은 호응하고 어느 사람은 호응하지 아니하여 관망하기로 하였다. 이 때 마침 조정에서 한 방문(榜文)을 보내왔는데, 8도의 의병과 관군이 곳곳에서 적을 치고, 천병(天兵) 10만이 조만간 평양에 도착할 것인데, 반은 설한령(薛罕嶺)을 넘었다는 말이 있어, 백성들이 이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정문부 등은 드디어 명천(明川)과 길주(吉州)의 지경에서 군사를 일으키니, 군사가 천여 명에 달했다. 부대를 편성하여 매우 엄하게 단속하였다. 반란민도 와서 따르는 자가 많았으므로 정문부는 이들을 후하게 대우하자, 사람들이 모두 기꺼이 따랐다. 단천 군수(端川郡守) 강찬(姜璨)이 기병하여 성세(聲勢)를 돋우어 서로 응원하였다. 정문부는 정현룡을 불러 대장으로 삼고 군사를 전진시켜 적을 무찔러 연달아 적을 베었다. 조정에서는 정문부를 절충장군으로 삼고 평사를 겸하게 하였다. 강찬을 판교(判校)로 진급시키고, 갑산 부사(甲山府使) 성윤문(成允文)으로 북병사를 삼고, 이성 현감(利城縣監) 최호(崔胡)로 남병사를 삼았다.
○ 동지사 민준(閔濬), 서장관 이상신(李尙信) 등이 조정을 하직하니, 잣[海松子]과 화연(畫硯)ㆍ붓ㆍ먹 두세 종류로 방물(方物)에 충당했다.


10월

병조 정랑 이홍로(李弘老)가 함경도에서 오니, 대간이 논하기를,
“이홍로는 한 가지도 제대로 된 행실이 없는 사람으로 이산해(李山海)에게서 발신(發身)하여 그 앞잡이가 되고, 김공량(金公諒)과 교제하여 그의 종이 되어서 행한 음사(陰邪)하고 귀역(鬼蜮)같은 작태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가 변란 후에는 거취를 제 마음대로 하여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었으니, 그 직을 삭탈하기 청하옵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김응남을 불러 부제학으로 삼고, 임국로(任國老)로 대신하게 하였다.
○ 대간이 또 논하기를,
“병조 정랑 임몽정(任蒙正)은 당초부터 시종신으로 대가를 따라 도성을 문을 나갔습니다. 그러나 임몽정은 혼자 먼저 도망갔으니, 직을 파하여 신하의 의리가 없는 죄를 징계하시기를 청하옵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 유격(遊擊) 심유경(沈惟敬)이 우리 나라에 왔다. 심유경은 절강(浙江) 사람인데, 조선이 왜적의 침략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일개 포의(布衣)로 병부 상서 석성(石星)에게 청하여, 친히 적의 진영으로 들어가 계책을 써서 지원하면서 혹은 군대를 쓰고 혹은 얽어매되 자신이 맡겠다고 자원하니 상서는 이것을 허락하였던 것이다. 이 때에 그가 용만관에 도착하니, 임금이 친히 가서 그를 만났다. 심유경이 말하기를,
“제가 적의 진영으로 직접 들어가 극력 황상(皇上)의 천위(天威)를 말해서 그들을 제 소굴로 돌아가게 하겠습니다. 만약 추장이 어리석게 고집하여 물러가지 아니하면 대군을 일으켜 그들을 토벌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천위는 비록 혁혁할지라도 저 왜적들은 하나의 유별난 독종인데, 어찌 근거없는 말만을 듣고 손을 거두고 물러가겠소.”
하니, 심유경은 말하기를,
“천조(天朝)의 사체(事體)는 심상의 것과는 다릅니다. 다만 보십시오. 제가 마땅히 계교로써 그들의 손발을 옭아매어 마침내는 위엄이 두려워 돌아가게 할 것이오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였다. 다음 날 새벽에 출발하여 3일 밤을 순안(順安)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는 먼저 그의 가정(家丁 제집에서 일부리는 남자. 상일군) 심가왕(沈嘉旺) 등 두 사람을 적의 진영으로 곧장 들어가세 하여 소서행장(小西行長)을 효유하여, 명일에 서로 만나자고 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그는 가정 6명만을 대동하고 곧장 평양성으로 나갔다. 적의 괴수 소서행장은 칠성문(七星門) 밖에다 장막을 치고 음식을 마련하여 놓고 심유경이 오는 것을 보자 길 왼쪽으로 나와 영접하면서 경의를 극진하게 하였다. 그리고 갈 때에도 올 때와 같이 하였다. 단 그들이 말을 주고 받을 적에 우리 나라 사람이 따라가지 않았기 때문에 들을 길이 없었다. 그들은 사시(巳時)부터 미시(未時)까지 대화를 나누고서야 돌아왔다. 적의 괴수는 부산원(釜山院)에서 10리 못 미치는 곳에다 나무 하나를 세워서 경계로 삼았다. 심유경이 나와 김명원에게 말하기를,
“적이 내 분부를 받아 표목을 세워 경계를 긋고 50일 동안 서로 노략질을 않기로 하였다. 귀국에서도 이같이 함이 옳겠소. 군사를 거두고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시오.”
하였다. 이 때에 적의 군세는 성대하여 우리 나라 수천 리에 걸쳐서 한 사람도 적과 싸우는 자가 없었는데, 심유경이 단기(單騎)로 적진에 들어갔고 또 그들이 흉악한 마음을 감춘 채 머리 숙이고 고분고분 명령을 듣게 하였다. 그리하여 연도(沿道)의 선비와 백성들이 곳곳에서 말머리를 모아, 천 사람 백 사람씩 떼를 지어 모두 말하기를,
“오늘에야 우리는 살았다. 노야(老爺)는 끝까지 은혜를 베풀기 바란다.”
하였다. 촌 백성들이 물결처럼 몰려와 어떻게 생긴 남자가 이와 같은 일을 해냈는가 하여 앞을 다투어 바라 보았다. 심유경이 의주에 다투어 돌아오니, 상이 이르기를,
“8도의 여러 장수들이 마침 군사를 합하여 결전하고자 합니다. 오늘의 기회를 잃어버리고, 시일을 끌다가 한겨울이 닥치면 군사의 마음이 놀라 흩어져 수습하기 어렵게 될까 염려되오.”
하니, 심유경이 웃으며 말하기를,
“제가 적을 옭아 놓은 것은 귀국이 이 적을 토멸할 수 없음을 염려해서 입니다. 만일 스스로 강토를 편안하게 할 수 있었다면 제가 어찌하여 꼭 적의 진중을 출입했겠으며, 천조에서도 어찌하여 동쪽을 돌아보는 근심이 있었겠습니까.”
하고, 그 날로 강을 건너 갔다.
○ 조정에서는 연이어 윤근수ㆍ한응인을 요동으로 보내 구원병을 청하고, 이어서 의주가 고립하여 위험에 처한 실정을 말하였다. 이에 순찰사는 바로 참장(參將) 낙상지(駱尙志) 더러 군사를 이끌고 의주에 들어가 지키도록 하였다. 낙상지는 용력이 뛰어나서 사람들이 낙 천근장(駱千斤將)이라고 불렀다. 일찍이 우리 나라 사람 12명이 대장의 쇠화살 1좌(座)를 운반하려다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마침내 그는 그것을 왼쪽 겨드랑에 끼고서 한 다발의 섶나무를 드는 듯이 하여 5리쯤 되는 곳에 운반해다 놓고도 조금도 피로해 하지 않았다.
○ 어떤 자가 상소하기를,
“전하께서 이미 인심을 많이 잃으시어 오늘의 화가 있게 된 것인데, 어찌하여 세자에게 보위를 전하지 아니하옵나이까. 온 나라 사람들에게 진작 조금이라도 기쁨과 위안이 있게 하였다면 왜적을 평정하였을지도 모릅니다.”
하였다. 또 남이순(南以順)이라는 사람이 상소하여, 전적으로 상을 공격하고 이어 이산해 등의 목을 베라고 청했다. 그가 또 말하기를,
“세자는 한 나라의 저부(儲副 다음 대를 이을 임금)이온데, 어찌하여 갈라져 다른 곳에 계십니까. 빨리 한 곳에 같이 머무시기를 청합니다.”
하였는데, 비록 보위를 전하라고 분명히 말하지는 않았으나, 그 뜻이 은연중 나타났다. 이 모두에 대해 상이 대답하지 아니하였다. 어느 날 여러 신하에게 유시하기를,
“나는 종묘와 사직에 죄를 얻어 파천하여 여기까지 왔고, 전쟁을 겪은 나머지 또 정신을 잃어 온갖 병이 몸에 얽히었으니, 경 등은 나를 애처롭고 가련하게 여겨 빨리 나 같은 죄인을 물러나게 하고 세자를 보필하기 바라오.”
하니, 여러 신하가 아뢰기를,
“오늘의 일은 모두가 신자의 죄이옵니다. 변란이 나서 이미 전하 자신이 감당하게 되었으니 더욱 만회할 것을 도모하시어 조종의 신령을 위로해야 하고, 한갓 구구하게 겸손의 뜻을 가지시와 그대로 물러나서 스스로 옛날 난을 만나 왕위를 전하던 임금에 비하하여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소관(小官)도 상소하여 3일 만에야 비로소 윤허를 받았다.


11월

전라도 관찰사 권율이 군사를 일으키고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여 진영을 수원에 두었다. 이 때에 김천일 등은 오랫동안 강화에 있으면서 하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고, 우성전(禹性傳) 등은 더욱 감감 무소식이었다. 상이 우성전 등을 불러 군사를 이끌고 강을 건너 곧장 평안도로 가서 김명원과 군사를 합치라고 하였으나, 우성전은 병으로 가지 못했다. 이에 상이 노하여 이르기를,
“우성전은 군사를 끼고 자기를 호위하여 관망하면서 전장에 나가지 아니하고, 김천일 등은 편안히 앉아서 헛된 수작만 하고 있으니 국가에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하니, 윤두수가 아뢰기를,
“김천일은 비록 하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으나 그가 여러 도를 제창하여 의병을 일으키고 마침내 8도의 인심을 흡족하게 크게 돌려 놓았사오며, 지금은 다만 군대의 세력이 고단(孤單)해서 적절한 기회를 타지 못하였을 뿐입니다. 우성전은 그가 비록 오지 아니했더라도 장수를 대신 보낼 수 있었사온데, 계교가 여기에 미치지 못하였으니, 죄가 없다 할 수는 없사오나 본래부터 중병이 있었음은 사람들이 모두 아는 일입니다. 어찌 관망만 할 리가 있겠나이까.”
하였다.
이 때 권율은 홀로 고군(孤軍)으로 적의 길을 곧바로 찌르고 대적의 사이에다 진영을 편히 잡으니, 상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위로하였다.
○ 경기 감사 심대(沈岱)는 명을 받자 곧장 삭녕군(朔寧郡)에 이르러 군병을 소집하고, 또 사람을 서울에 보내어 화복의 이치를 들어 효유하게 했다. 서울 백성들이 오래도록 대가가 머무른 곳을 알지 못하다가 이 말을 듣고서야 기뻐하기도 하고 울기도 하였다. 그리고 일시에 모두 군기(軍器)를 가져다가 심대에게 바쳤는데, 연일 뒤를 이은 것이 천백으로 헤아릴 정도였다. 심대가 이끈 몇 천의 병사가 기계를 수습하여 양주 목사 고언백(高彦伯)과 약속하고 서울을 수복할 계책을 세웠다. 적이 이것을 엿보고는 드디어 군사를 일으켜 길을 나누어서 습격하였다. 삭녕 군수 장지성(張志誠)이 군대를 이끌고 길에 매복하였는데, 심대는 이것을 믿고서 대비하지 않은 채 상하가 모두 날이 환히 밝도록 잠을 잤다. 장지성이 적을 보고 도망하니, 적이 드디어 군영을 포위하고는 불을 질렀다. 심대는 일어나지 않고 있다가 적에게 살해를 당했다.
○ 윤두수가 아뢰기를,
“옛날 임금의 치도는 어진 이를 높이고 친한 이를 친히 여기는 데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오늘날 파천의 즈음에 있어 이런 도를 버린다면 무엇으로 치도를 삼겠습니까. 성혼(成渾)은 도덕과 학문이 일대의 표본으로 지금 조정에 나왔으나, 대접하고 존경하는 일이 없사오니, 청컨대 자헌(資憲)으로 품계를 올려 사람들이 분발하고 흠모하게 하소서. 원천군 휘(原川君徽)와 한음 도정 현(漢陰都正俔)도 모두 종실로서 박학다문(博學多聞)하여 효도하고 우애하오니, 각각 한 자급(資級)을 올리시어 어진 이를 높이고 친한 이를 친히 여기는 뜻을 보이시면 진실로 이익이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것을 모두 윤허하였다.
처음에 상이 임진강을 건널 때에 성혼이 대가를 수종하리라 생각했었는데, 마침 성혼이 대가가 출발할 줄을 미리 알지 못하여 호종하지 못했다. 이충원(李忠元)이 개성에서 성혼을 불러 보시라고 청하자, 상이 따르지 아니하니, 대체로 그가 호종하지 않은 것을 불만히 여겼기 때문이다. 윤두수는 어진 이를 우대함에 있어 어찌 한 자급을 아끼겠는가라고 생각하고, 드디어 아뢰어 승임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진이를 높이는 도리가 다만 경의와 예도를 다하는 데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다. 더구나 임금을 몰아 세워 억지로 마음에 없는 일을 강요해서는 안 되거늘 조정의 작록과 포상을 가지고 사람에게 주기를 마치 자기 물건같이 하니, 사람들이 그의 무식함을 기롱하였다. 성혼이 시사(時事)를 논하는 10조(條)의 차자를 올리기를,
“임금의 덕을 진수(進修)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으시고 언로(言路)를 널리 열어 놓는 것을 급선무로 삼으십시오.”
하였다. 또 아뢰기를,
“나라를 그르치는 자에게 엄하게 벌주시고, 아첨하는 자들이 날뛰는 길을 막으소서.”
하니, 상이 비답하기를,
“시국을 근심하여 차자로 진술하니, 진실로 가상하다.”
하였다. 우대하는 비답이 아니었다. 이 때 구성(具宬)이 개성에서부터 연이어 부름을 받게 되어 출입이 무상하였는데, 의주에 이르러서도 오히려 그치지 아니하였다. 성혼이 이것을 듣고 말하기를,
“국가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본래 옆길과 구부러진 길로 가서 음사(陰私)가 성대히 행해지는 데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런데도 이제 또 이런 일이 있으니, 이러고서야 어떻게 앞사람을 책할 것인가.”
하고는, 드디어 차자를 올려 나라를 그르치고 아첨하는 일을 열거하였던 것이다.
○ 이홍로가 상소하기를,
“오늘날 조정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조정이 서울을 떠난 그 한 가지 일을 가지고 죄를 이산해에게 돌려 나라를 그르친 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만약 오늘날 조정에 있는 신하들에게 왜란 초기의 일을 처리케 하였다면 그들이 과연 까맣게 밀려오는 적의 형세를 막고 서울을 떠나는 거둥이 있지 않게 하였겠습니까. 만일 그 형세를 막지 못했을 경우에 우리 임금에게 예측할 수 없는 위험한 곳에 계셔도 관계없다는 말입니까. 심지어 임금을 막다른 곳에 모셔 두고서 느긋하게 좌담이나 하면서 옛날의 원한을 보복하는 것을 일삼으며, 염치없는 무리들은 분주하게 전하의 좌우에 출입하면서 세력을 키우기만 힘쓰고 국가가 조석에 멸망할 형세에 있다는 것을 조금도 마음에 두지 않는다면 전후로 나라를 그르친 적이 되는 데 있어 어느 쪽이 더 심하옵니까.”
하였고, 또 아뢰기를,
“전하께서 실덕(失德)하신 일이 없사옵고 조종께서 경사를 쌓으셨는데도 이처럼 변란이 발생한 것은 운수(運數)가 그렇게 만든 데 불과하옵니다.”
하였고, 또 아뢰기를,
“신은 국사가 날로 위태로워지는 것을 보고 임금 사랑하는 마음을 참지 못하여 전하를 모시고 함께 천명(天命)의 거취를 기다리고자 하옵니다. 그러나 조정에 있는 사람들이 신이 행궁(行宮) 아래 가까이 있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오니, 신의 몸이 너무도 위태로워서 물러가서 죽는 날을 기다릴 수 밖에 없사옵니다. 떠남에 임하니 눈물이 흘러 무슨 말을 올려야 하올지 알지 못하겠나이다.”
하였다. 이 때 윤근수ㆍ구사맹ㆍ홍여순ㆍ유영립ㆍ이홍로 등이 어두운 밤에 서로 모였는데 반드시 자기네들을 엿보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라 하여, 김응남ㆍ이덕형마저 내쫓으려 하였다. 성혼ㆍ윤두수ㆍ이해수(李海壽)가 말하기를,
“부득이한 경우에는 그 중 심한 자만을 제거해야 하겠지만, 김응남ㆍ이덕형은 죄를 줄 만한 명목이 아직 없소.”
하였다. 이홍로는 죄를 면하지 못할 줄을 알고 마침내 이순(李諄)의 무리와 의논하여 목숨을 걸고 상소하였다. 그래서 이성중이 공청(公廳)에 있다가 소리 높여 말하기를,
“군신과 상하가 멀리 떨어진 변방에 모이게 된 것은 누구의 소치오? 그런데도 도리어 우리들을 가리켜 나라를 망친 역적이라 하오? 상소 가운데의 말은 아첨하는 작태가 아님이 없소. 우리는 평일에 임금의 녹을 먹고 높은 자리에 있었어도 여러 음사(陰邪)한 사람을 쓸어 버리자고 한 마디도 건의하지 못하고서 필경 이런 욕을 받게 되니, 모두 우리의 허물일 뿐 누구를 탓하리오.”
하였다.
○ 상이 성혼을 불러서 이르기를,
“경이 왔다는 말을 듣고도 마침 병이 있어 곧장 만날 수 없었음을 내 실로 부끄럽게 여기오.”
하니, 성혼이 아뢰기를,
“제가 4월에 길가는 사람이, 대가가 오늘을 출발하실 것이다라고 전하는 말을 잘못 듣고, 길 가에 나가서 기다렸습니다. 이 같이 3일을 하고서 신은 대가가 반드시 출발하지 않으실 것으로 생각하고 사처로 돌아왔습니다. 그믐 날에는 밤부터 큰 비가 와서 시냇물이 불어 넘실거렸습니다. 이 때 어찌 대가가 이미 임진강을 건너 개성으로 향할 것을 알았겠나이까. 신이 이미 길가에서 하직을 여쭈지 못하옵고, 또 감히 명령 없이 함부로 나올 수도 없어 모진 생명이 산골짜기로 굴러 다니다가 세자의 영지(令旨 왕세자의 명령서)를 받들어 성천(成川)를 받들어 성천(成川)에 이르게 되었으니, 도의상 와 뵈옵지 않을 수 없었나이다. 상감마마 아래에서 얼굴을 들고 다시 덕음(德音)을 접하게 되오니, 신하의 분수나 의리로 헤아리오면 참으로 만 번 죽어 마땅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라를 잘못 지켜서 오늘날과 같은 곤경을 받게 했으니, 경을 보기가 부끄럽소.”
하니, 성혼이 아뢰기를,
“누군들 허물이 없겠습니까마는 허물을 짓고도 능히 고치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더욱 심지(心志)를 격려하시어 힘써 덕업(德業)을 닦으시고 폐습을 경장(更張)하시어 다시 유신(惟新)을 도모하시면 인애(仁愛)로운 하늘이 마땅히 복을 누리게 할 것이옵니다. 그리고 난을 평정하고 예전으로 돌아오게 하는 일은 내게 있는 도리를 다하는 것 뿐입니다. 참으로 군신 상하가 마음과 힘을 합하여 밤낮으로 부지런히 하여 안이 이미 닦아지면 바깥은 물리칠 수 있사옵니다.”
하였다. 승지 이국(李)이 아뢰기를,
“성혼이 말한 군신 상하가 마음과 힘을 합하라는 말은 매우 좋습니다. 성혼이 여기에 있으므로 신이 함부로 말을 못하옵니다만, 근일에 조신(朝臣) 사이에 자못 배척하고 알력하는 버릇이 있고 실로 화합하는 기색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오늘날 여기에 있는 자는 다만 한쪽 편의 사람뿐이니, 다시 어떠한 별다른 색당(色黨)이 있어 알력하는 버릇이 있는 지는 모르겠소.”
하니, 이국이 아뢰기를,
“비록 한두 사람이 그 사이에 끼인 적은 없지 아니하오나 모두 한직에 있는 벼슬아치들이온데,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오히려 이 습성이 남아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신이 말하였던 것이옵니다.”
하였다. 성혼이 아뢰기를,
“이국의 말은 신도 이 의논에 참여하여 그 사실을 아는 것으로 의심하여 신의 진언을 지적하여 증거로 삼는 것이옵니다. 알력하는 일에 대해 신은 무슨 일을 가리키는지 모르겠고, 또한 신이 모르는 사실이옵니다. 다만 한두 사람의 형편없는 무리가 분과 원망을 품고 시기를 타서 들고 일어나 저해(沮害)하고 요란한 행위를 도모하고자 한다 하오니, 부득이 별도로 아뢰겠습니다.”
하니, 이국이 아뢰기를,
“이 정도로 하고 논의를 그치면 좋겠사오나, 신은 조정의 기색으로 보아 반드시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였다. 이국은 평소에 성혼을 가볍게 여겼고, 또 그가 윤근수 등과 논의하였는가 의심하여 그의 말을 인용하여 증명하였으며, 말은 비록 이와 같으나 반드시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다. 대체로 이국은 김응남과 지극한 교분이 있어, 항상 김응남까지 내쫓고자 하는 것을 분히 여겨 마침내 임금 앞에서 극력 이것을 말하였던 것이다. 실지로 성혼의 뜻을 알지 못한 것이다.


12월

상이 여러 신하를 불러 입대(入對)케 하니, 사간 이유징(李幼澄)이 나와 아뢰기를,
“근래 1ㆍ2년 전부터 궁궐이 엄하지 않고, 조정의 신하들이 편안하지 않으며, 뇌물이 성행하고 배척하고 모함함이 풍조를 이루었습니다. 왕자로 말하오면 백성의 토지와 노복을 빼앗고, 궁궐로 말하오면 벼슬과 옥사(獄事)를 팔며, 이익을 꾀하고 요행을 노려 인심을 동요시키니, 원망하는 말이 길에 가득 차 있습니다. 소인들이 정사를 어지럽혀 선비들에게 화를 입히니, 어질고 불초함을 논할 것 없이 오직 의론이 자기와 같으냐 다르냐만 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초방(椒房)의 천한 자라도 그 누이에게 세력을 의탁하여 조정의 시비까지도 참여하여 들을 수 있게 되었으니, 상하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붕괴된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큰 도적이 연이어 들어오자 배반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북도의 변란 같은 것은 전에 들어보지 못하였던 것이옵니다. 전하께서 변을 만나신 이래 한 마디도 스스로 허물을 인책함이 없이 다만 깊은 방에 앉아 오직 안일함을 일삼으시고 여러 신하를 드물게 접견하심이 평일보다 더 심하옵니다. 이런 형세라면 신은 나라의 형세가 결국 망하지 않을까 염려되옵니다.”
하니, 상이 머리를 숙이고 대답하지 않았다. 여러 신하들이 임금의 얼굴을 우러러 보니 푸르락 붉으락 하여서, 모두 송구하여 한 마디 말도 하지 못하고서 물러나왔다.
○ 유영립이 함경도에서 오니, 상이 불러 이르기를,
“경도 잡혔었다 하니, 사실이오?”
하니, 유영립이 아뢰기를,
“신이 산속에 피란하고 있었는데 토민(土民)이 적을 인도하여 와서 마침내 잡혔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떻게 벗어 나왔는가?”
하니, 유영립이 아뢰기를,
“적이 비록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오나 그 마음을 위불(違拂)하지 아니하면 그도 또한 사람인데, 어찌 꼭 죽이겠나이까.”
하였다. 한림 이춘영(李春英)이 물러나와 유영립에게 말하기를,
“임금을 모신 자리에서 위불(違拂)이란 두 글자를 사용함은 좋지 못한 말이 아니오?”
하였다. 대간에서도 실절(失節)한 것을 들어 따졌다.
○ 동지(同知) 유영길이 장계하기를,
“정철이 남중(南中 경기도 이남의 땅)에 있을 때 주색에 빠져 국사를 돌보지 아니하였고, 윤두수가 한 일은 끝내 그 결실이 없어서 주상의 형세를 날로 외롭게 하고, 국사는 날로 급하게 되어 가므로 신은 감히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불러서 그에게 묻기를,
“경의 이 장계에는 무슨 의견이 있어서인가?”
하니, 유영길이 민망하여 아무 말 없이 얼마 있다가 대답하기를,
“단지 소문을 들었을 뿐이옵고, 별다른 의견은 없습니다.”
하고, 물러나왔다. 정철은 가는 곳마다 술에 빠져서 세월을 보내고 맡은 바의 임무는 두서를 이루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크게 인망을 잃었었다. 유영길의 말은 비록 기회를 타서 공격하려는 계책에서 나왔으나, 그의 행실과 일 처리가 실제로 이 말을 나오게 한 것이다. 윤두수는 조정에서 나가 10리쯤 떨어져 있는 곳에 있었는데, 임금이 자주 그를 불렀다. 윤두수가 아뢰기를,
“신은 본래 보잘 것 없고 또 재주나 식견도 없으면서 외람되이 임금의 말고삐를 잡는 반열에 있으면서 비록 밤낮으로 생각하고 있으나 지상공론(紙上空論)에 불과할 따름이었습니다. 결실이 없다는 말은 바로 오늘의 일에 들어 맞았습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말 고삐를 잡고 따른다 하였으니, 신의 죄가 많습니다. 이것을 신이 알고 있사온데, 임금께서 어찌 알지 못하겠나이까.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빨리 견책을 내려 주시옵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국사의 존망이 경의 몸에 달려 있는데 어찌 남의 말로 인해 혐의할 것이야 있겠소. 빨리 나와 일을 보오.”
하였다.
○ 정곤수가 북경에서 치계하기를,
“신이 북경에 들어온 것은 마침 영하(寧夏)의 도적을 평정한 날이었습니다. 석 상서(石尙書)가 담당하여 힘을 다해서 천관(千官)을 모아 다시 의론한 끝에 병부 시랑 송응창(宋應昌)을 경략(經略)으로 삼고, 도독(都督) 이여송(李如松)을 제독(提督)으로 삼아 대병을 조발하여, 날을 가려 나가 치게 되었습니다. 이 제독(李提督)은 영하에서 돌아온 지 며칠이 되지 않았는데 또 동정(東征)의 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남북의 군사가 지금 연이어 떠나고 있습니다. 경략은 병부 원외(兵部員外) 유황상(劉黃裳), 주사(主事) 원황(袁黃)으로서 찬획(贊畫 임시 보좌관 격)을 삼기를 청하였습니다. 제독은 먼저 출발하고, 경략은 다음에 떠나 12월에 평양에 도착한다 하옵니다.”
하였다. 이 때 심유경(沈惟敬)과 약속한 50일의 기한이 장차 다하니, 행장(行長)이 매양 사람을 시켜 유격이 돌아오는 기한을 심가왕(沈嘉旺) 등에게 물어 왔으나, 확실한 대답을 못하겠다고 회시(回示)했다. 이원익은 중국의 대군이 오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거짓으로 심유겸의 패문(牌文)을 조작하여 사람을 시켜 순안(順安)에 가지고 가니, 심가왕도 거짓임을 알지 못하고 급하게 말 위에서 행장에게 보였다. 행장이 기뻐서 말하기를,
“만일 이 패(牌)가 없었더라면 대사를 반드시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당초에는 4ㆍ5일 안에 한 번 무찌를 것을 결의하였었다.”
하였다.
양사(兩司)가 합동으로 논하기를,
“홍여순ㆍ송언신ㆍ이홍로가 이산해ㆍ김공량과 교분을 맺어 그들의 심복이 되어 조정을 어지럽히고 사림에게 화를 미치게 하며, 인심을 이반시키고 나라를 망하게 만든 것은 이 사람들이 아첨하고 악행을 함께 하였기 때문입니다. 멀리 귀양 보내도록 명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보건대, 이 사람들은 일찍이 정철(鄭澈)의 간사함을 탄핵했을 뿐이오.”
하였다. 이 일을 논한 지 사흘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윤허하였다. 다음 날 상이 이르기를,
“근일에 정신이 너무 감퇴되어 말을 함에 착오가 많소. 어제 양사에 내린 비답은 이 사람들이 정철을 간신이라 하였을 뿐이다[此人等頗以鄭澈爲奸而已也]라고 하여야 했소.”
하였다.
○ 상이 여러 신하를 불러 입대하게 하니, 정언 황극중(黃克中)이 나와 아뢰기를,
“오늘의 일은 진실로 종전에 궁궐이 엄하지 않아 아첨이 성행하고, 인심을 잃어서 가는 곳마다 원망과 배반이 있고, 상하가 서로 의심하여 정의가 통하지 않고, 겉만 기쁘게 하는 것으로 풍조를 이루어 언로(言路)가 오래 막히게 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이런 위급한 때를 당하여 모든 것을 혁신하는[改絃易轍] 거조가 있다는 것을 듣지 못하겠사오니, 이러고서야 어찌 감히 회복을 바라겠나이까.”
하니, 최황(崔滉)이 손을 휘저어 말리고 말하기를,
“이 때는 적을 토벌하는 일이 급한데, 이 같은 말은 아무 관계가 없소.”
하였다. 구성(具宬)이 아뢰기를,
“인심이 원망하여 배반하고, 상하가 서로 의심하게 된다면 국사는 가망이 없습니다. 왜적을 토벌하는 계책으로는 이것이 첫 번째인데도 최황은 관계없다고 말하니, 이것은 면전에서 군상(君上)을 업신여기는 말입니다.”
하니, 최황이 크게 노하여 다시 아뢰고자 하자, 상이 말리고 이르기를,
“서로 따지지 마오.”
하였다. 드디어 파해 나왔다.
22일 유격 전세정(錢世禎)이 남병(南兵) 3천을 거느리고 강을 건너오니, 군마와 병기가 매우 정연하였다. 다음 날 군사를 남문 밖에서 사열하였는데 앉고 일어나고 치고 찌르며 종횡과 기정(奇正)으로 천변만화(千變萬化)하니, 사람마다 이것을 보고 비로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겼다.
24일 흠차제독 계요 보정 산동 등처 방해어왜군무 좌군도독부 도독 동지(欽差提督薊遼保定山東等處防海禦倭軍務佐軍都督府都督同知) 이여송(李如松)과 중협 총병관(中協摠兵官) 양원(楊元)과 좌협 총병관(左協摠兵官) 이여백(李如栢)과 우협 총병관(右協摠兵官) 장세작(張世爵) 등이 대군을 이끌고 강을 건너 왔다. 상이 친히 의주관(義州館) 길에서 맞이하였다. 제독은 홍금포(紅錦袍)를 입고, 홍명교(紅明轎)를 타고 왔는데, 상을 용만관에서 회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과인이 나라를 잘못 지킨 죄로 황상께 심려를 끼쳐 드리고 여러 대인이 멀리까지 정벌에 종사하게 하였으니, 비록 심복신장(心腹腎腸)을 쪼갠다 하더라도 어찌 천지와 같은 한없는 은혜를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제독이 웃으며 말하기를,
“황상의 천위(天威)는 국군(國君)의 큰 복으로, 왜적은 스스로 궤멸하게 될 것이니, 무슨 감사할 것까지 있겠나이까.”
하였다. 제독은 키가 크고 예절에 익숙하며, 풍채가 뛰어나고 언어가 유창하였다. 상에게는 경의를 다하기를 지극히 공손하게 하였다.
○ 상이 이 날에 세 총병을 두루 만나보고 돌아왔다. 장관(將官)으로 따라온 자는 총병 이평호(李平胡), 부총병 조승훈(祖承訓)ㆍ고책(高策)ㆍ이방춘(李芳春), 참장 장기공(張奇功)ㆍ방시춘(方時春)ㆍ방시휘(方時輝)ㆍ이영(李寧)ㆍ곽몽징(郭夢徵)ㆍ사대수(査大受), 유격 곡수(谷燧)ㆍ갈봉(葛逢)ㆍ하왕문(夏王問)ㆍ오유충(吳惟忠)ㆍ척금(戚金)ㆍ한종공(韓宗功)ㆍ이여매(李如梅)ㆍ양소선(楊紹先)ㆍ누대수(樓大受)ㆍ이문성(李文成) 등 40여 원(員)이었다. 상이 모두 만나보고자 하니, 도승지 유근이 아뢰기를,
“허다한 장관을 어찌 모두 만나볼 수 있으시겠습니까. 다만 대장만 만나보아도 충분합니다.”
하였다. 윤두수는 여러 번 그들을 만나보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상은 기력이 몹시 피로할 것 같아서 이 말을 따르지 않았는데, 여러 장수들은 모두 노하였고 제독도 의아하게 여겼다. 임금이 늦게서야 그 말을 듣고 그들을 만나보고자 하였으나, 이튿날 새벽에 제독이 떠나서 만나보지 못하고 말았다.
○ 강을 건너는 날 흰 무지개가 해를 꿰었고, 해에는 오른쪽 고리가 있었다. 제독이 여러 장관을 불러 이것을 보게 하고는 매우 기뻐하였다.
26일 제독의 대군이 성 밖으로 지나가면서 호령이 엄숙하여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도 감히 다치게 하지 않았다.
30일 정주에 이르러 사대수는 초병(哨兵) 1천 명을 거느리고 먼저 떠났다.


 

[주D-001]초방(椒房) : 후비(后妃)의 궁전을 지칭함. 여기서는 선조의 후궁(後宮) 숙원 김씨(淑媛金氏)를 지적한 것임.
[주D-002]말 고삐를 잡고 따른다 : 임금을 위하여 천역(賤役)에 종사하는 것. 따라다니는 자의 겸사.

 

난중잡록 1(亂中雜錄一)
임진년 상만력 20년, 선조 25년(1592년)


왜인 귤광련(橘光連)이 의(義)를 위해 죽다. 귤광련은 일명 강광(康光)이라고도 하는데, 일본 대마도(對馬島)의 작은 두목[小酋]이다. 경인년(1590, 선조 23) 이전에도 누차 왜의 사신이 되어 우리나라에 내빙(來聘)하였는데, 우리 조정에서는 후한 상과 높은 작위로 특별히 회유하였다. 경인년에 이르러, 그가 현소(玄蘇) 등과 함께 정탐하러 왔을 때, 귤광련이 은밀히 우리 조정에 고하여, “일본의 사람들은 변덕스럽고 간사하기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여러 해 동안 모략을 쌓은 끝에 상국(上國 명 나라를 말함)을 침범할 계획을 결정하였으니, 지금 온 두목들을 죽여서 큰 화를 막도록 하십시오.” 하였는데도, 우리나라에서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이번에는 수길(秀吉)이 귤광련이 우리나라를 자세히 안다고 해서 그로 하여금 의지(義智) 등과 함께 선봉을 갈라 맡아 가지고 날짜를 정해 바다를 건너가게 하였지만, 귤광련이 그 명령을 거부하고 말하기를, “이번 출병(出兵)은 무슨 명목에서인가. 조선으로 말하면 일본의 좋은 이웃이다. 2백 년 동안 조금도 틈이 없이 우호 관계를 유지하며 최대한의 성심을 다해 왔는데, 어찌하여 맹약을 어기고 군사를 일으켜 상국의 땅을 범하려고 한단 말인가. 하물며 나는 상국의 후한 은혜를 받았으니 죽을 것을 산 것도 뼈에 살을 붙여 준 것도 모두 그 은덕이 아닌 게 없다. 내 비록 보잘것없는 존재이지만 그래도 사람의 마음만은 지니고 있다. 머리 위에 하늘의 해를 이고 있으면서 어떻게 차마 은덕을 잊고 감히 조선을 짓밟고 지나가겠는가. 한 번 죽기는 마찬가지다. 군사를 몰고 바다를 건너가는 짓은 결코 하지 않겠다.” 하다. 의지가 이 말을 수길에게 전하여 알리자, 수길이 대노하여 곧 귤광련을 잡아다 목 베어 대중에게 보이게 하고 또 구족(九族)을 멸하게 했다. 귤광련의 한 아들은 요행히 상인으로 먼 섬에 나가서 머물러 있었는데, 이 변고를 들어 알게 되자 곧 행장을 버리고 성명을 바꾸고는 도망가 숨어서 생명을 보전할 수 있었다. 그 후 만력 34년 병오년(1606, 선조 39) 일본 국왕 원가강(源家康)이 평성(平姓)을 다 없애고, 서신을 써서 사신을 보내고는 다시 통신하기를 청해 왔다. 예조(禮曹)에서는 무과첨지(武科僉知) 전계신(全繼信)과 역관(譯官) 박희근(朴希根)을 회답사(回答使)로 하여 일본에 보냈다. 이들이 대마도에 당도하여 귤광련의 아들을 만나 보기를 원했더니, 성이 귤과 다른 한 왜인이 와서 그 이유를 캐는 것이었다. 전계신 등이 그가 귤광련의 아들임을 알아채고 백방으로 그를 위로하면서 극진한 은의를 베풀었다. 귤광련의 아들은 눈물을 흘리며 전에 있었던 일을 다 말했다. 회답사가 돌아와서 경상 감사에게 자세히 보고하였고, 감사 유영순(柳永詢)이 이 일을 조정에 갖추어 상주(上奏)하니, 조정에서 의론한 끝에 귤광련의 사당을 부산(釜山)에 건립했다. 그 후 신해년(1611, 광해군 3)에 유상(柳相)이 나한테 이 일을 자세히 전해 주기에, 내가 기특하게 여겨 그 일을 기록하고 이어 시를 짓기를,
천부의 양성이란 구해서 오는 것이 아니련만 / 秉彝良性非求至
난에 임해서는 어찌하여 신의 적단 말고 / 臨亂胡爲少信義
의관 갖춘 사람마저 나라 저버리고 부끄러움 모릅디다만 / 衣冠負國尙不恥
이적 땅의 사람으로 이럴 수 있었고야 / 夷狄之人乃如此
하였다.

여름 4월. 왜적 평수길(平秀吉)이 그의 장수 평수가(平秀家) 등 36명의 두목들을 보내어 상세한 것은 강항(姜沆)의 장계(狀啓)에 있다.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나라에 침입해 들어오다. 평행장(平行長)이 평의지(平義智)ㆍ평조신(平調信) 등과 함께 선봉이 되어 병선 4만여 척과 군사 1백만으로 바다를 덮고 와서는, 13일 새벽 안개가 자욱한 기회를 타서 곧장 부산(釜山)으로 쳐들어 왔다. 그때 첨사(僉使) 정발(鄭撥)은 절영도(絶影島)로 사냥을 나가 있었다. 처음에는 조공(朝貢) 오는 왜인이라고만 생각하고 걱정거리로 여기지도 않았는데, 잠시 후 병선이 무수히 몰려오는 것을 보고야 급히 돌아와 성으로 들어갔다. 성문이 겨우 닫히자 왜적들은 이미 상륙하여 성을 백 겹으로 포위하였으며, 얼마 안 가서 성은 함락되었고 정발은 죽었다. 왜적의 변란이 심히 다급해서 조야(朝野)가 창황하였다. 정 발은 나라를 위해 순절했으나 은명(恩命)을 받지는 못했었는데, 그 후 만력 31년 계묘년(1603, 선조 36)에 정발의 처 임씨(任氏)가 글을 올려 억울함을 호소하기를, “발은 고립된 성을 지키면서 힘을 다해 싸우다 죽었는데도, 어떤 사람은 정발이 성을 버리고 달아나 버렸다고 하니, 지하의 억울한 혼이 눈을 감지 못합니다. 이 억울함을 풀어 주시고 특별히 포상을 내려주시기를 청원합니다.” 하였다. 이에 임금이 본도 순찰사(巡察使)에게 명하여 정발이 전사한 곡절을 탐문해서 아뢰라 하니, 순찰사 이시발(李時發)이 좌수사(左水師) 이영(李英)에게 이첩하였고, 이영이 회보하기를, “그때 토병(土兵) 가은산(加隱山) 등 3명은 탈출할 수가 있어서 죽지 않았는데, 이들이 모두 말하기를, ‘첨사가 사냥을 나갔다가 왜선이 무수함을 보자 급히 부산진에 돌아와서 성 밖의 주민과 군인 등을 독촉하여 빠짐없이 성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는 사람을 시켜 왜관(倭館)에 머물러 있는 왜인을 가보게 했는데, 단지 네 명이 있을 뿐이어서 곧 잡아 가두게 하였습니다. 또 전선(戰船)ㆍ방패선(防牌船)ㆍ중선(中船) 등 도합 세 척을 모두 배 바닥에 구멍을 뚫어 물에 가라앉게 한 뒤에, 첨사는 남문의 성루(城樓)에서 밤을 지냈습니다. 그 이튿날 날이 샐 무렵에 왜적이 성 뒷산을 둘러싸고 진을 치자 첨사는 군중(軍中)에 영을 내려 동요하지 않도록 조심하게 하고는, 마침내 서문으로 옮겨가 수비했습니다. 그런데 왜적이 일시에 함께 진격해 와 높은 곳을 점령하고 고함을 치면서 탄환을 비오듯이 쏘아대는데, 쏘는 탄환치고 맞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첨사는 탄환에 맞아 죽었고 첨사의 첩도 스스로 목 베어 죽었으니, 성은 마침내 함락되었습니다. 가은산 등은 쌓인 시체 속에 숨어 있었는데, 오후에 왜적이 군중에 영을 내려 남은 백성들을 죽이지 말라 하여 다 배 위에 잡혀 있다가 17일에 석방되어 돌아왔습니다. 운운.’ 하였습니다.” 하다. 순찰사가 그 회보에 의하여 자세히 아뢰다.
14일. 왜적이 동래(東萊)를 함락하였는데 부사(府使) 문과(文科) 출신의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평화시의 예에 따라 파견되었다. 송상현(宋象賢)은 죽고, 좌위장(左衛將)인 울산 군수(蔚山郡守) 이언성(李彦誠) 등은 군사를 거느리고 왜적에게 항복하다. 하루 전에 송상현은 왜적이 대거 침입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인접 고을 군사를 불러다 동래성을 지켰다. 이리하여 좌병사(左兵使) 이각(李珏)이 동래성에 달려 들어왔는데, 부산이 이미 함락됐다는 소식을 듣자, “나는 절제장(節制將)이니 본영(本營)을 지켜야지 여기에 있을 게 아니다.”라고 핑계하고, 성을 나가려 했다. 이때 송상현이 큰 소리로 외쳐 말하기를, “고립된 성이 함락되려고 하는데, 주장(主將)이 구원해 주러 왔다가 어찌 차마 버리고 간단 말이오.” 하였으나, 이각은 듣지 않은 채 아병(牙兵) 20명만을 남겨 놓고 가 버렸다. 이날 날샐 무렵 적병이 대거 진격해 와서는 우선 허수아비를 만들어 붉은 옷에 푸른 건을 씌우는 한편, 등에는 붉은 기를 지우고 허리에는 긴 칼을 채워서 그것을 긴 장대 끝에 꽂아 담 사이에 늘어 놓자, 성 안의 사람들이 크게 놀라 도망치며 울부짖었으며, 왜적은 칼을 휘두르면서 마구 성 안으로 쳐들어 왔다. 조방장(助防將) 홍윤관(洪允寬), 중위장(中衛將)인 양산 군수(梁山郡守) 조영규(趙英珪), 대장(代將) 송봉수(宋鳳壽), 교수(敎授) 노개방(盧盖邦) 등이 모두 이 싸움에 죽었다. 송상현은 남문 성루에 올라 갑옷 위에 단령(團領)을 입고 관대를 띠고는 교의에 앉아 있었다. 왜적은 그가 부사임을 알고 생포하려 하였으나, 송상현이 가죽신 신은 발로 두 차례나 차고 왜적을 꾸짖기를, “이웃 나라의 도리가 과연 이러한 것이냐. 우리는 너희를 저버리지 않았는데 너희는 왜 이런 짓을 하기에까지 이른단 말이냐.” 하니, 왜적이 몹시 성내면서 그를 잡아 끌고 목 베려 할 즈음에도 그의 안색은 변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부사가 남문의 성루에 있을 때 왜적이 칼을 휘두르며 돌입하자 부사는 그를 쏘아 죽였으며, 뭇 왜적이 난입하자 부사는 장검으로 두 왜적을 쳐죽이고 죽었다.” 하는데,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그의 첩은 북도의 기생이었는데 역시 굴복하지 않아 왜적이 송상현과 함께 죽였다. 양첩(良妾) 이소사(李召史)는 자녀를 데리고 일본에 잡혀 갔다가 그 후 갑오년(1594, 선조 27)에 평행장(平行長)이 경상 우병사 김응서(金應瑞)와 화평을 의논할 때 석방되어 돌아왔다. 왜적은 그들을 의리 있는 사람이라 여기고는, 두 사람의 시체를 거두어 성 동문 밖에 묻고 나무패를 세워 표적을 해주었다. 부사가 조용히 죽음을 당할 그때 관노(官奴) 급창(及唱)이 소리쳐 울며 달려 들어가 손으로 부사의 옷자락을 잡고 기꺼이 그와 함께 죽으니, 왜적이 더욱 기이하게 여겼다. 애초에 부사가 경내의 대소 부녀들을 모아 모두 성 안에 들어와 있게 하였는데, 성이 함락되자 왜적들이 그들을 모두 문루 위로 몰아 오르게 하고, 기생과 악공에게 풍악을 잡히고 술자리를 벌여 모여 신나게 놀았으며, 창고를 다 털어서 준비했던 배에 싣고 저희 나라로 돌려보내다. 포위를 당하기 전에 송상현은 북쪽을 향해 재배하고 부채에, “외로운 성에 달무리[暈] 서매, 크디큰 진영(鎭營)을 구해 내지 못하누나. 군신의 의리는 무겁고, 부자의 은혜는 가볍다.”라고 손수 써서 그것을 집 종에게 주어 그의 부모한테 가서 알리도록 하다. 그 후 왜적들도 포로된 자에게 말하기를, “너희 나라의 충신은 오직 동래부사 한 사람뿐이다.” 하다. 부채면의 16자(字)는 안 상산(顔常山)의 “신(臣)은 무상(無狀)하니, 죽는 것이 마땅합니다.” 한 말과 문신국(文信國)의, “인(仁)을 이룩하고 의(義)를 취한다.” 한 찬(贊)과 더불어 전후로 같은 정신이다. 글을 읽고 비감(悲感)에 젖어 모르는 결에 눈물을 흘렸으니, 천고에 걸쳐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린 역적들의 마음을 격동시키기에 족하리라. 그때 본도의 감사(監司) 김 수(金睟)가 진주(晉州)에 있었는데, 부산의 급보가 졸지에 도착하자 마침내 좌우 도(道)의 군사들을 독촉 징발해서 계속 구원하러 나가게 하다.
15일. 김수가 진주로부터 달려 반성(班城) 진주의 속현 까지 갔는데, 거기에서 부산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곧 장계를 갖추어 급히 보내고 군대를 정비해 가지고는 함안(咸安)을 거쳐 칠원(漆原)에 이르렀다. 본도의《순영록(巡營錄)》에 나온다. 그때 본도의 우병사 신길(申硈)은 이미 갈리어 조대곤(曹大坤)이 그와 교체되었으나, 조정에서는 조대곤이 노쇠하다는 이유를 들어 그를 경질하고 김성일(金誠一)로 대신하였다.
○ 이일(李鎰)을 순변사(巡邊使)로, 변기(邊璣)와 조경(趙儆)을 경상 좌우 방어사로, 성응길(成應吉)ㆍ양사준(梁士俊)ㆍ박종남(朴宗男)ㆍ변응성(邊應星)을 경상 중좌우 조방장(慶尙中左右助防)으로, 곽영(郭嶸)을 전라 방어사로, 이유의(李由義)ㆍ김종례(金宗禮)ㆍ이지시(李之時)를 전라 중좌우 조방장으로, 이옥(李沃)을 충청 방어사로 하다.
16일. 왜적의 군사가 길을 나누어 전진했는데, 중도(中道)로 오는 왜적이 양산(梁山)을 지나면서 그곳을 깡그리 불태워 버렸다. 김수는 영산(靈山)에 이르러 왜적이 이미 양산을 통과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 밀양(密陽)으로 달려갔는데, 적병이 대거 이르자 바로 영산(靈山)으로 후퇴하였다가 밤중에 초계(草溪)를 건너 전라 감사에게 이첩하였는데, “구원을 계속해 달라는 부산ㆍ동래ㆍ양산이 이미 함락되었고 적이 또 밀양(密陽)에까지 범했는데, 그 병세(兵勢)를 보니 사세가 버티어 나가기 어려워 또 함락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의 일은 정말 말할 수도 없는 형편이고 이 일을 생각하니 정말 가슴이 아픕니다. 이는 개인의 화가 아니고 나라의 일이니, 귀도(貴道)의 군사 3, 4천 명과 도의 군관 3, 4명을 보내 주시오.” 하다. 이 통첩이 도달하자 호남은 겁에 질려 들끓고 다들 적을 피할 마음만을 지니고 있었다.
○ 경상 좌병사 이각(李珏)이 후퇴하여 소산(蘇山) 동래의 속역(屬驛)이다. 에 머물렀다. 이각은 이날 병영으로 달려 돌아가서는 싸우고 지키고 하는 대비에는 뜻이 없었고, 수석 진무(鎭撫)를 독촉해서 사람과 말을 내어 자기 첩과 면포(綿布) 천여 필을 운반해 옮겨 놓으라고 시키다. 진무가 어려운 기색을 보이자 이각이 대노하여 당장에 그를 목 베다. 본도《순영록》에 나온다.
○ 경상 좌수사 박홍(朴泓)은 왜적이 도달했다는 소식을 듣고 양식과 기계를 불태우고는 도망쳐 버리다. 본도《순영록》에 나온다.
17일. 좌우의 왜적이 여러 고을에 가득 찼고 길을 나누어 진격하다. 한 대열은 언양(彦陽)에 함빡 몰려 들었다가 이어 경주(慶州)를 범했고, 중도(中道)로 오는 왜적은 곧장 밀양 가는 길로 해서 바로 들어 갔다. 부사 박진(朴晉)은 양산에서 후퇴하여 돌아와 황산(黃山)의 높은 잔교(棧橋)가 강에 임해 있는 그곳에서 적의 길을 막았다. 적장은 은색 가마를 타고 은색 우산을 펴고서 줄기차게 휘몰아 바싹 뒤쫓았다. 박진은 힘을 내어 싸워 여러 급(級)의 목을 베었고, 박진의 군관 이대수(李大樹)와 김효우(金孝友) 역시 연달아 여러 왜적을 쏘아 죽이고 자신도 탄환에 맞아 죽었다. 그러나 왜적이 이미 재[嶺]를 넘어 그의 귀로를 끊어 앞뒤로 적을 맞이하자 박진이 본부(本府)로 달려 돌아와 창고를 불사르고 성을 나섰는데, 왜적은 이미 성 밖에 가득 차 있었다. 박진은 단기(單騎)로 충돌하여 포위를 허물고 왜적의 목 2급(級)을 벤 다음 달아나니, 이로 말미암아 원근의 사람들은 곧 박진의 이름을 알게 되다.《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18일. 왜적의 배 2백여 척이 부산에서 이동하여 김해(金海)를 함락시키자 부사 서예원(徐禮元)은 성을 버리고 달아나다. 애초에 중위장(中衛將)인 초계군수 이유검(李惟儉)이 서문을 지키고 서예원은 남문을 지키면서 종일 접전했는데, 밤중에 이유검이 야경(夜警)이라 사칭하여 문지기를 찍어 죽이라 하고는 먼저 도망했고 서예원 역시 이유검을 추격한다고 청탁하고는 서문으로 해서 달아나, 김해성이 마침내 함락된 것이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19일. 적병이 밀양에서부터 또 영산(靈山)ㆍ청도(淸道) 등지를 범해 깡그리 불태워 없앴는데, 그 기세가 바람에 불길 같고 진동하는 우레 같아 지나가는 곳이 다 초토(焦土)가 되었다. 김수는 합천(陜川)에 머물러 있으면서 또 전라도에 이첩하였는데, “경상감사가 전달하는 일입니다. 흉악한 왜적이 어제 밀양에서 성을 함락시킨 다음 또 영산에 침범하고 곧장 성주(星州) 길로 향했는데, 이어 대구 길로 올라갈지의 여부는 미리 알 수 없습니다. 현풍(玄風)ㆍ창녕(昌寧) 등지의 공사(公私) 집들은 다 비어 있고, 본도의 각 병영에서는 모두 우관(右關) 운봉현(雲峯縣)에 달려가 보고했습니다.” 하다.
20일. 경상 우병사 김성일(金誠一)이 병영으로 갔다. 애초 김성일이 어명을 받고 잽싼 걸음으로 달려 내려가 의령(宜寧)에 당도하고는, 정진(鼎津)을 거쳐 병영에 직접 가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때 적병이 강의 우안(右岸)에 가득 모여 들자, 김성일의 휘하 장병들이 서로 말하기를, “이 길은 왜적의 소굴에 가장 가까우니 진주로 해서 함안(咸安)에 도달하느니만 못하다. 그렇다면 왜적과도 좀 멀리 떨어지게 되지만, 만약 그렇지 않으면 주장은 군령이 엄하여 곧장 전진하고 두려워하지 않으니, 이 길은 위험하다.” 하고는, “정진에는 배가 없습니다.” 하고 김성일을 속이고 다시 그의 아들 김혁(金湙)에게, “강물이 불고 배가 없으니 진주 길로 가는 것이 편리합니다.” 하고, 힘들여 간하도록 당부했다. 김성일이 군관 김옥(金玉)을 시켜 가보게 했는데, 김옥이 돌아와서는, “배가 없어서 건널 수 없으니 진주 길로 빨리 가야 하겠습니다.” 하고 속여 보고했다. 그때 전 목사(牧使) 오운(吳澐)이 촌락의 집에 있다가 새 장수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가서 배례하고, “영감이 오셔서 군민의 기운이 배가했습니다만 왜 정진으로 바로 건너지 않으시고 진주로 해서 돌아 가시려고 합니까.” 하니, 김성일이 깜짝 놀라면서 말하기를, “나는 이 길을 와 본 일이 없소만, 틀림없이 휘하 장병들이 왜적을 두려워하여 나를 속인 것이오.” 하다. 그리고는 직접 가서 보니 큰 배가 강 언덕에 대어 있었다. 김성일이 대노하여 김옥ㆍ김혁 등을 잡아들여 형을 집행하게 했는데, 김옥이 큰 소리로, “김옥의 죄는 마땅히 참형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공이 전쟁에 임하실 때 한 번 목숨을 바쳐 속죄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하고 외치니, 김성일이 말하기를, “네가 속죄를 요구하였으니 앞으로 왜적을 만나거든 반드시 먼저 나서서 싸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전의 죄까지 다스리어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 하고는, 곧 군사들을 재촉하여 강을 건너 해망원(海望原)에 이르렀다. 전 병사 조대곤(曹大坤)이 이미 이곳에 후퇴하고 있었는데, 김성일을 보자 깜짝 놀라 읍하면서 맞이하고 그에게 직인과 부절을 넘겨 주고는 곧 하직하고 가려 하니, 이에 김성일이 그를 준렬하게 책하여 말하기를, “장군은 곤수(閫帥 병사나 수사를 일컬음) 신분으로 군사를 가지고도 진격하지 않고 우두커니 앉아서 김해(金海)를 함락당했으니, 그 죄는 마땅히 형을 받아야 하오. 더구나 세신(世臣)으로 나라의 후한 은혜를 받았으니, 이 극렬한 변란에 임해서 의리상 도망쳐서는 안 되오.” 하자, 조대곤이 부끄러워하는 기색을 띠면서 두 손으로 얼굴을 움켜쥐었다. 얼마 안 있다가 척후병이 와서 왜적의 선봉이 이미 도착했다고 알리자, 조대곤은 겁에 질려 어쩔 줄을 모르면서 김성일에게 말에 올라 타자고 재촉하는 것이었다. 김성일이 그를 꾸짖어 저지시킨 다음 군사들에게 망동하지 말라고 영을 내리고, 용맹한 군사를 골라 좌우의 복병을 잠복시키고 왜적을 기다렸다. 두 왜적이 흰 말을 타고 새깃으로 만든 옷[羽衣]과 금 갑옷에, 사방에 귀와 눈이 있어 빙글빙글 도는 게 답차(踏車)의 모양과도 같은 금가면(金假面)을 착용하고는 칼을 휘두르면서 말을 달려 앞으로 다가오자 장병들이 겁내어 떨었다. 그러나 김성일은 조대곤과 편안히 걸상에 마주 앉아 있었는데 왜적은 그가 꼼짝하지 않는 것을 이상히 여겨 감히 가까이 다가오지 못했고, 부채를 휘두르면서 걸어오는 왜적 수십 명이 그 뒤에 있었다. 김성일이 군관 20여 명을 시켜 앞에 가 그들을 쏘게 하고 또 용맹한 군사를 골라 돌격하게 했으나, 다들 서로 돌아보며 먼저 나가라고 미루는 것이었다. 김성일은 특히 김옥을 불러서 말하기를, “네 기왕에 먼저 나서서 공을 세우겠다고 하여 놓고 지금에 와서 회피할 수 있겠느냐.” 하니, 김옥이 곧 앞장 서서 말에 올라 수 리 밖에까지 쫓아가서 그 금가면의 말탄 왜적을 쏘아 거꾸러뜨리고는, 이긴 기세를 타고 추격하여 금안장[金鞍]ㆍ준마(駿馬)ㆍ보검(寶劍) 등을 빼앗아 가지고 돌아왔다. 이 전투는 병졸이 1천 명도 되지 않고 병기도 쓸어낸 듯이 없었건만, 적의 날카로운 칼날을 좌절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군의 사기가 약간 진작되매, 곧 군관 원사립(元士立)과 이숭인(李崇仁)을 시켜 괵수(䤋首)를 바치고 장계(狀啓)를 올리게 했다. 그리고 나서야 보졸들을 앞에 가게 하고 김성일은 맨 뒤에서 고삐를 조여잡고 천천히 갔다. 이날 밤 김성일이 함안으로 진을 옮기고, 내상(內廂)을 수습하려고 하였는데 자기를 체포하라는 어명이 내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충성스런 분기에 격동되어 사졸들이 목숨을 내놓고 죽기를 무릅쓰면서 힘을 내어 싸워 강한 왜적이 부지하지 못했는데 당시의 장병들은 왜 이것을 거울 삼지 않았는가.
○ 김수가 합천에서 지례(知禮) 쪽으로 도망쳤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21일. 우도(右道)의 왜적은 영산(靈山)을 거쳐 창녕(昌寧)ㆍ현풍(玄風) 등지를 지나서 깡그리 태워 없앴고, 중도(中道)의 왜적은 청도(淸道)로부터 경산(慶山)과 대구(大丘)를 지나가 홍수가 밀어닥치듯 산과 들을 메웠으니, 이때부터 강 좌우의 길이 막혀 버렸으며 좌도(左道)의 왜적은 울산(蔚山) 좌병영(左兵營) 등지를 향해 전진했다. 이각(李珏)은 서산(西山)으로 나가서 진을 쳤는데, 그때 열세 읍의 군사들이 모두 도착하여 성에 들어갔다. 안동 판관(安東判官) 윤안성(尹安性)이 동문을 지키고 있었는데, 이각이 성을 비우고 나가서 진을 치려고 하자 윤 안성이 말하기를, “어찌 성을 버리고 나가서 진을 칠 수 있단 말입니까.” 하니 이각이 대답하기를, “공은 우후(虞候) 등 여러 수령(守令)과 성을 지키면 되오. 공이 가지고 있는 석전군(石戰軍)을 나에게 예속시켜 주기를 바라오. 나는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나가 서산에 진을 치고 왜적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안팎에서 협공하겠소.” 하다. 마침내 이각이 서문으로 해서 성을 나가더니 윤안성 등을 돌아보고 태화강(太和江)을 가리키면서, “너희들은 왜적의 선봉이 이미 저곳에 꽉 차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 하고는, 곧 서산으로 향해 달려 가니, 윤안성이 흥분하여 꾸짖으며 칼을 잡고 그를 노렸다. 우후(虞候) 원응두(元應斗) 역시 도망칠 생각을 갖자, 윤안성이 성을 내며 힐책하기를, “주장이 까닭없이 성을 나갔으니 그 죄는 마땅히 참형을 받아야 한다. 그나마 너희들을 남겨두고 성을 지키게 했는데, 너희들까지 또 도망가려는 거냐.” 하니, 원응두가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적병의 또 한 패가 언양(彦陽)으로부터 사잇길로 해서 전진하여 경주를 함락시켰다. 그때 부윤(府尹) 윤인함(尹仁涵)은 포망장(捕亡將)으로 서천(西川)에 있었고, 판관(判官) 박의장(朴毅長), 장기 현감(長鬐縣監) 이수일(李守一) 등은 성 안에 있었다. 왜적의 기병(騎兵) 한 명이 동문 밖에까지 달려와서 패문(牌文)을 꽂아 놓고 갔다. 그것을 가져다 보니, “도주(島主)가 군사를 거느리고 왔으니, 판관은 속히 성을 나와 명령을 듣도록 하라.” 하고 씌여 있으매, 박의장 등은 성을 비우고 도망가 버렸다. 용궁 현감(龍宮縣監) 우복룡(禹伏龍)은 계원장(繼援將)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모양(牟陽)까지 달려가고 있었고 하양(河陽)의 대장(代將) 역시 군사 5백여 명을 거느리고 경주로 가고 있었는데, 하양은 본래 방어사의 소속이었으므로, 병사가 하양 대장으로 하여금 물러가 방어사의 지휘를 받게 하다. 우복룡이 막 길가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가 하양의 군사들이 후퇴하여 돌아가는 것을 보자, 그들이 왜적의 선봉이 된 게 아닌가 하고 의심하여 불러다 물어보게 하다. 대장이 사실대로 대답하였으나, 우복룡은 몰래 자기 군중(軍中)에 호령하여, “이들은 왜적의 앞잡이가 아니면 틀림없이 도망하는 군사들이다.” 하고는 자기 군사들을 시켜 하양의 군사들을 포위해 잡아다가 점검을 가장하고 깡그리 죽여버리니, 흘린 피가 개울을 이루다. 하양 한 고을의 군민이 이로 인하여 탕진돼 버리다. 우복룡은 곧 토적(土賊)을 잡아 목베었다고 방어사에게 사후 보고를 내다. 《경상도 순영록》에 나온다. 흉악한 왜적에게는 의기를 떨치지 못한 채 도리어 무고한 군사들에게 독수(毒手)를 옮겨 쓰고도 전혀 후회하지 않고 보고를 작성하여 공(功)을 요구했으니, 그런 못된 꼴이 있을 수가 있겠는가.
22일. 김성일(金誠一)이 체포 명령에 응하여 길을 떠나다. 앞서 김성일이 일본에서 돌아와 어탑(御榻) 앞에서, “일본은 반드시 군사를 출동시키지 않을 것이니 근심할 일이 없을 것을 보증합니다.” 하고 아뢴 적이 있었는데, 왜적의 변란이 일어나자 임금이 전번에 아뢴 말의 책임을 추궁하여 이 명령을 내린 것이다. 김성일이 체포 명령이 도달하리라는 소식은 들었지만 길이 막혀서 아직 당도하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임금의 말씀이 아직 내리지 않았고 큰 적은 앞에 닥쳐 있는데, 병사로서 어떻게 진(鎭)을 쉽사리 버릴 수 있겠습니까.” 하였으나, 김성일은, “군명(君命)을 오래 지체시켜서는 안 된다.” 하고 곧 길을 떠난 것이다. 이날 우후(虞候)와 이협(李俠)이 군기(軍器)를 못물[池水] 속에 가라앉히고 창고를 태우고서 도망갔으며, 창원 부사(昌原府使) 장의국(張義國) 역시 성을 버리고 달아나다. 김성일이 가는 도중에 김수(金晬)가 나와 만나보고 그의 피체(被逮)를 위로하니, 김성일은 말이나 안색에 전연 나타내지 않고 다만,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원컨대 영공(令公)께서는 힘써 왜적을 토벌해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시오.” 하였다. 영리(營吏)들이 서로 말하기를, “체포된 것은 근심하지 않고, 나랏일만 걱정하고 있으니 참으로 충신이다.” 하다. 조대곤(曹大坤)이 용서를 받아 다시 병사가 되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왜적이 좌병영을 함락시키니, 이각(李珏)과 원응두(元應斗)는 이미 먼저 도망가 버렸고, 열세 읍의 군사들은 다 무너지다. 이각은 무예(武藝)가 뛰어났는데, 본직(本職 즉 좌병사)을 제수하자 그는 포를 쏠 때 탄환(彈丸) 대신 탄환 만한 10여 두(斗)의 해마석(海磨石)을 가지고 시험했는데 소리와 힘이 모두 격렬하니, 사람들이 그를 중진으로 여기게 되다. 그러나 한정없이 탐욕을 부렸고 천성은 또 겁이 많아 왜적이 지경을 침범해 왔다는 소리를 듣기만 하면 허둥지둥 어쩔줄을 몰랐으며, 동래(東萊)가 함락되자 몸을 빼어 달아났고, 병영이 포위되었을 때도 성을 비우고 먼저 도망가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당시 장수들은 겁이 많은데다 또 탐욕스러웠다. 자기 몸을 청렴하게 갖고 군사를 사랑하며 적을 막아 나라에 보답하는 자는 거의 없었으니, 이들은 실로 한(漢) 나라의 공명(孔明)이거나 송(宋) 나라 붕거(鵬擧)의 죄인들이다. 이각의 겁은 적을 보기도 전에 드러났고 이각의 탐욕은 국가가 어수선할 때에 나타났으니, 비단 옛 훌륭한 장수에 대한 죄인일 뿐 아니라 실로 당시 장병들의 죄인이기도 한 것이다.
○ 유학(幼學) 곽재우(郭再祐)가 군사를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다. 곽재우는 경상도 의령(宜寧) 사람이다. 처음에 그는 여러 성이 연달아 함락되고 여러 진(鎭)의 주장들과 방백ㆍ수령들이 모두 깊은 산으로 피하여 감히 교전하지 못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무섭게 나무라며 말하기를, “성스러운 조정에서 2백여 년 동안이나 신하들을 길러 왔건만, 갑자기 위급한 사태가 일어나자 모두 자신을 보전할 계책이나 찾고 임금의 난경(難境)은 돌보지 않으니, 지금 만약 초야에 묻힌 몸이라 하여 일어나지 않는다면 전국 3백 주(州)를 통틀어 남자란 하나도 없는 결과가 될 것이다. 어찌 만고의 수치가 아니겠느냐.” 이리하여 자기 가산을 전부 뿌려 흩어진 군졸들을 모으고, 자기가 입은 옷을 벗어선 전사(戰士)에게 입히고, 처자의 옷을 벗겨서는 전사들의 처자에게 입혔으며, 또 충의로써 군사들을 격려하였다. 이때부터 모집된 전사들 중에 심대승(沈大承)ㆍ권란(權鸞)ㆍ장문장(張文章)ㆍ박필(朴弼) 등 10여 인은 다 용감하고 활 잘 쏘는 사람들로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곽재우와 함께 죽기를 원하였다. 이날 서로 같이 의병을 일으킬 것을 약정하고 수하의 용사 50여 명을 시켜 의령(宜寧)ㆍ초계(草溪)에 있는 창고의 곡식을 풀어 내고, 또 기강(岐江)에 거둬들인 배의 조세미(租稅米)를 가져다가 모집한 군사들을 먹이니, 사람들의 말이 자자하여 어떤 사람은 그가 발광한다고 생각하였고, 어떤 사람은 그가 도적질을 한다고 생각하였다. 합천 군수(陜川郡守) 전현룡(田見龍)도 그를 토적(土賊)이라고 순찰사(巡察使)에게 보고하여 군졸들이 다 흩어져 버렸었는데, 그때 마침 초유사(招諭使)가 내려와 그의 이름을 듣고는 그를 불러다 만나 보고야 의병을 일으키라고 격려하니, 이리하여 군졸들이 되돌아왔다. 이에 곽재우는 더욱 힘을 내어 왜적을 토벌하였다. 적이 많고 적은 것을 묻지 않고 곧장 앞으로 나아가고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한 사람으로 열 명을 당해내었다. 그가 싸울 때는 반드시 붉은 생초[紅綃]에 안을 댄 옷을 착용하고 당상관(堂上官)의 입식(笠飾 융복(戎服)의 갓에 갖추던 장식을 말함)을 갖춘 갓을 쓰고,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자호(自號)하고 말을 달려 적진을 빼앗곤 했는데, 그가 내왕하는 동작이란 잽싸게 출몰하는 것이어서 왜적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그런 후에 그는 말을 빙그르 돌리고 북을 치면서 천천히 가는 것을 군사를 움직이는 절차로 삼으니, 왜적들은 그의 군사가 많은지 적은지를 몰라서 감히 바싹 다가오지 못하였다. 그는 진을 친 곳으로부터 왜적이 있는 곳에까지 이르는 길의 2, 3식경(食頃)의 거리마다 잇달아 척후소를 두어 이상(異狀)의 유무를 은밀하게 보고하도록 마련하였으니, 왜적이 1백 리 밖에 도착해도 진 안에서 그를 먼저 알고 미리 준비하고 있는지라 언제나 편하고 힘이 들지 않았으며 언제나 조용하고 시끄럽지 않았다. 만약 왜적이 많이 오면 그들이 바라보이는 산에다 사람들을 시켜 손잡이 하나에 가지가 다섯씩 달린 횃불을 밤새도록 들고서 무서운 함성을 올리며 서로 호응하게 하여 천병 만마(千兵萬馬)가 있는 것같이 하였으니, 왜적들은 바라보다가 곧 달아나 버렸다. 또 정예한 군인을 골라서 요새지에 잠복시키고는 사람이 없는 것같이 잠자코 있다가 왜적이 오면 곧 쏘아 죽이게도 하였으니, 왜적 역시 그를 ‘홍의장군’이라 하고 감히 상륙하여 불사르고 노략질을 하지 못하였다. 곽재우는 또 군사들을 단속하여 말하기를, “요(要)는 왜적을 죽여야 하는 것뿐이다. 목을 베어다 공(功)을 요구해서 무엇하겠느냐. 만약 후일 공의 대가(代價)를 받기 위해서 왜적을 토벌한다면 그것은 성심에서 우러나 하는 일이 아니다.” 하니, 여러 사람들이 모두 그 말을 좇아 끝내 수급(首級)을 바치는 일이 없었다. 순찰사의 진에 있던 무사 김경로(金景老)ㆍ김경납(金景納) 등이 곽재우를 모함하자, 곽재우 역시 김수(金睟)가 하는 짓에 분개하여 격문을 돌려 그의 죄를 성토하고 그를 토벌하려 하였지만, 김수가 곽재우를 모반죄로 몰아서 장계를 올리는 바람에 곽재우는 헤아릴 수 없는 죄에 빠져들게 되었는데, 초유사가 양편을 조정해 준 덕으로 마침내 무사하였다. 또 초유사가 삼가(三嘉)의 군사를 곽재우에게 주니, 곽재우는 두 고을의 군사를 거느리고서 윤탁(尹鐸)을 대장(代將)으로, 박사제(朴思齊)를 도총(都摠)으로, 허자대(許子大)를 군기제조(軍器製造) 책임자로, 정연(鄭演)을 독역사(督役使)로, 권란(權鸞)을 돌격장(突擊將)으로, 이운장(李雲長)을 수병장(收兵將)으로, 심대승(沈大承)과 배맹신(裵孟伸)을 선봉장(先鋒將)으로, 허언심(許彦深)을 군 급량(給糧) 책임자로, 강언룡(姜彦龍)을 무기 수리(武器修理) 책임자로 하였다. 초유사는 또 전 목사 오운(吳澐)을 소모관(召募官)으로 하여 그 수(즉 모집한 군사들의 수효)를 파악하는 일까지 겸임시키고, 성세(聲勢)를 이루어 곽재우를 돕게 하였다. 시골의 넉넉한 집에서는 쌀을 내고 소를 잡아 매일 돌려가며 군사들을 먹이니, 군의 성세가 크게 떨쳤다. 강의 아래 위에 있는 10여 개 소의 얕은 여울목마다 모두 척후를 잠복시켜, 왕래하는 사람들을 바라보아 서로 응원하니 왜적이 감히 물을 건너 오지 못하였고, 여러 고을 백성들은 평화시와 다름없이 농사를 지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초야에서 일어나 충의(忠義) 두 글자를 받들고 수륙에서 승리를 거두어 왜적 1백 급(級)을 쏘고 베고 하여 죽였다.
○ 한성 판윤(漢城判尹) 신립(申砬)을 도순변사(都巡邊使)로 하고, 전 목사 김여물(金汝岉)을 종사(從事)로 하여 대군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내려가게 하였는데, 신립이 출동할 때엔 위의가 엄숙하여 사람들이 감히 우러러보지 못하다. 우리나라의 장수는 비록 이름은 훌륭하지만 위엄과 용맹 하나뿐이다. 다른 나라에서 온 적들이 어찌 너를 살려 주겠는가. 아깝다! 어떻게 이 왜적을 제압할 건가.
23일. 중도(中道)로 오는 대부대의 왜적은 인동(仁同)을 불태워 버리고, 우도(右道)의 왜적은 현풍(玄風)으로 해서 길을 나누어 낙동강(洛東江)을 건너서는 성주(星州)를 불태워 버리니, 성주 판관(星州判官) 고현(高晛)은 도망쳐 달아났고, 목사 이덕렬(李德悅)이 겨우 몸만 살아 남아서 끝까지 고을을 지키다. 토적(土賊)이 성 안에 들어와 점거하고 있으면서 목사를 가칭(假稱)하고 우매한 백성들을 꾀어 모으자, 궁박해진 백성들은 의지할 데가 없어 토적에게 항복하고 부동하는 자들도 많다. 좌도(左道) 왜적의 한 떼는 경주(慶州)로부터 진격하여 영천(永川)을 함락시켰는데 군수 김윤국(金潤國)은 도망쳐 달아났고, 김해(金海)에 머물러 있던 왜적도 이날 진격하여 창원(昌原)을 함락시켜 병영을 모두 불태워 없애고, 이어 칠원(漆原)으로 진격하여 함락시키다. 또 좌도 왜적의 한 떼는 장기(長鬐)로 향해 진격해 왔는데, 현감 이수일(李守一)이 경주로부터 후퇴하여 돌아와서 장기성 밖에 진을 쳤으나, 적병이 사방에서 진격해 와서 이수일은 곧 후퇴하고 말았다. 영천에 머물러 있던 왜적은 신령(新寧)으로 진격하여 함락시키고 이어 안동(安東)으로 향했는데, 부사 정희적(鄭熙績)은 도망쳐 달아났고, 좌방어(左防禦) 성응길(成應吉)과 조방장(助防將) 박종남(朴宗男)은 의흥(義興)에 머물러 있으면서 움츠리고 물러난 채 나아가지 못하였다. 이때 김수(金睟)는 지례(知禮)에 머물러 있으면서 다만 도순찰사의 지휘만 받고 있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24일. 중도(中道)의 대부대 왜적은 인동(仁同)으로 해서 낙동강을 건넌 다음 선산(善山)으로 진격하여 함락시켰고, 신령에 머물러 있던 왜적은 의흥으로 옮겨 함락시키니 현감 노경복(盧景福)은 도망쳐 달아나다. 그때 김수가 박진(朴晉)과 배설(裵楔)에게 선산에 가서 왜적을 정탐하라 했는데, 도중에 죽패(竹牌)를 차고 있는 7명을 만났다. 그런데 그들은 박진 등이 왜적의 무리인가 의심하여, 말 앞에서 살려달라고 애걸하면서 꿇어앉아 왜의 글을 바치는 것이었다. 위쪽에는 크게 영(令) 자 한 자를 썼고, 그 아래에는 잔 글씨로, “군현의 백성들은 속히 옛집으로 돌아가 남자는 모를 심고 보리를 거두며, 여자는 누에를 치고 실을 뽑아 각각 자기 집 일에 힘쓰라. 만약 우리 군사가 법을 범하면 반드시 처벌한다. 천정(天正) 20년 월 일 습유시중(拾遺侍中) 평의지(平義智).” 라고 씌어 있고, 그 아래엔 이름까지 적혀 있다. 박진 등이 그들을 포박해 오다가, 졸지에 왜적을 만나자 버리고 달아났다. 그때 영남 사람으로 왜적에 항복하여 패(牌)를 받은 자가 부지기수라고 한다.
○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이 상주(尙州)에 이르렀는데 척후(斥候)에 밝지 못한지라, 왜적이 이미 선산을 지났다고 고하는 자가 있었는데도 이일은 그가 군중(群衆)을 현혹시킨다고 노하여 그를 목베어 죽인 다음 군중(軍中)에 돌려 보이니, 왜적이 이미 다가왔음을 듣고서도 감히 먼저 고하는 자가 없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어리석은 자라도 천 가지를 생각하면 반드시 한 가지는 아는 게 있기 마련인데, 가소롭다, 차라리 한 가지도 아는 게 없을 망정 척후로 정탐을 하는 것은 병가(兵家)의 요략이요, 사술(詐術)과 궤모(詭謀)는 명장(名將)도 사양하지 않는 것이건만, 정도(正道)만 지켜 패배를 기다린다는 일은 옛날에도 있었단 말을 못 들었다.
25일. 대부대의 왜적이 선산으로부터 상주로 진격하여 함락시키매, 이일(李鎰)이 대패하여 달아났는데, 이날 새벽 안개가 자욱할 무렵 포성이 들려 오자 왜적의 선봉이 이미 죽현(竹峴)에 당도했음을 바로 알아채고 이일이 성 밖 북천(北川)에 나가 진을 치다. 왜적은 혹 칼을 번쩍이고 껑충거리며 들어오기도 하고 쥐새끼같이 엎드려 무릎으로 기어서 전진하기도 하여 순식간에 들판을 덮어버렸다. 아군이 저절로 붕괴되어 북천을 꽉 메우게 되매 왜적이 돌격하는 기병으로 짓밟게 하니 시체 쌓인 것이 산더미 같다. 종사관 박지(朴篪), 이일의 종사관이다. 이경류(李慶流), 변 기(邊璣)의 종사관이다. 윤섬(尹暹)과 판관 권길(權吉) 등은 다 살해되었고, 이일은 겨우 몸만 빠져나와 달려 충주(忠州)로 돌아오다. 박지는 김수의 사위다. 그때 나이는 22세, 홍문관 교리로 조정에 있었는데 이일이 어명을 받았을 때 김수는 막 경상 감사가 되었었다. 박지가 자기 군중에 있으면 김수도 반드시 마음과 힘을 기울여 주리라 생각하여 자기의 종사관으로 해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였고, 임금이 그대로 윤허했었는데 이때에 와서 죽은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박지는 왜적의 손에 죽은 것이 아니고 산골짜기로 피해 들어가 있다가 함양(咸陽) 사람 인언룡(印彦龍)을 만나서, “나는 18세에 장원 급제하여 나라의 은혜를 받았건만 지금 전쟁이 불리해졌으니 무슨 면목으로 다시 용안(龍顔)을 뵙겠나.” 하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한다.
26일. 흉악한 왜적이 상주(尙州)로부터 함창(咸昌)과 문경(聞慶)을 연달아 함락시키다. 문경 현감 신길원(申吉元)은 변란 초기부터 관청의 문을 떠나지 않았다. 이날도 막 대문 앞에 앉아서 관의 창고를 부수어 흩뜨린 토적(土賊)을 처형하고 있었는데, 왜적이 갑자기 방비가 허술한 문으로 해서 들어왔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 흩어졌고, 신길원은 홀로 말을 타고 산 기슭으로 피해 들어갔다. 왜적이 쫓아가서 그를 항복시키려고 하였으나 신길원이 호되게 꾸짖고 굽히지 않자 왜적이 그의 사지를 절단한 후에 죽였는데, 그는 죽을 때까지도 꾸짖는 소리가 입에서 끊어지지 않았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그의 한 줄기 충절을 만고에 누군들 맞설 수 있으랴. 문경(聞慶) 전후로 오직 수양성(睢陽城)에서 순절한 장순(張巡)이 있을 뿐이다.
○ 좌도 왜적의 한 떼가 군위(軍威)를 불태워버리고 연달아 비안(庇安)을 함락시키니 현감 김인갑(金仁甲)이 도망쳐 달아났고, 한 떼는 장기(長鬐)로부터 영일(迎日)과 감포(甘浦)를 불태우고 약탈하다. 안동 판관 윤안성(尹安性)이 단기(單騎)로 부(府)에 돌아왔는데 부사가 도망쳤음을 알고서, 서쪽으로 풍기(豐基)에 가니 군수 윤극임(尹克任) 역시 성을 버리고 도망가다.
○ 김수(金睟)가 지례(知禮)로부터 거창(居昌)에 돌아와 초계 군수(草溪郡守) 이유검(李惟儉)을 목베다.
○ 신립(申砬)이 용인(龍仁)을 지나다가 왜적의 기세가 창궐한다는 소식을 듣고 밀계(密啓)를 올려, “왜적의 기세가 무척 성해서 정말 막아내기 어렵습니다. 오늘날 사세가 답답하고 절박하기가 그지없습니다. 운운.” 하니, 도성에서는 신립을 간성(干城)같이 믿고 있었는데 답답하고 절박하다고 한 밀계의 소식을 듣고, 사민(士民)들이 들끓고 두려워하여 밤낮으로 도망쳐 흩어지다.
○ 신립이 달려 충주(忠州)를 지나서는 조령(鳥嶺)을 막아 적의 길을 끊으려고 하였으나 길이 험하고 막힌 데가 많아서 말타고 활쏘기가 불편하겠기로 후퇴하여 충주로 돌아오고 있었는데 도중에 이일(李鎰)을 만났다. 신립이 왜적의 정세가 어떤가를 물으니, 이일이 대답하기를, “이 적은 경오년(1570, 선조 3)과 을묘년의 그것과는 견줄 게 아니며, 경오년의 왜적은 겨우 웅천(熊川) 두어 고을을 함락시키고는 패하여 돌아갔고, 을묘년의 왜적은 달량(達梁)을 함락시켜 병사(兵使) 원적(元迪)을 죽이고는 잇달아 강진(康津) 등의 고을을 함락하여 영암(靈巖)에까지 왔다가 패하여 돌아갔다. 또 북쪽 오랑캐같이 쉽사리 제압되지도 않습니다. 이제 험준한 데를 점거하여 적의 길을 끊지 못하였으니 만약 넓은 들판에서 교전한다면 당해낼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차라리 후퇴하여 서울이나 지키십시오.” 하니, 신립이 성을 내어 말하기를, “너는 패군(敗軍)한 데다 또 군졸들을 경동(驚動)시키니 군법으로는 목베어야 마땅하다마는, 왜적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공을 세워서 속죄하여라.” 하고, 마침내 달천(㺚川)충주의 땅이다. 에 주둔하다.
27일. 전라 방어사 곽영(郭嶸)과 조방장(助防長) 이지시(李之詩)가 군사 5천을 거느리고 남원(南原) 운봉(雲峯)으로부터 함양(咸陽)으로 향하여 영남을 구원하러 가다.
○ 흉악한 왜적이 조령을 넘어 달천으로 달려 들어오니 신립은 패전하여 죽었다. 당초 적병은 두 재[嶺]의 넘기 어려움을 두려워하고 있었는데, 그곳에 당도하자 산길은 고요하고 사람의 발자취도 전연 없는지라 마침내 크게 기뻐하여 날뛰면서 곧장 충주를 범했다. 한편 신립은 여러 도의 정병(精兵)과 무관 2천 명, 종족(宗族) 1백여 명, 내시위(內侍衛)의 군졸 등 도합 6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조령으로부터 다시 충주로 후퇴하였는데, 종사 김여물(金汝岉)이 이일(李鎰)의 말에 따라 산길을 굳게 지키자고 요청하였으나, 신립은 듣지 않고, “바다를 건너온 왜적은 빨리 걷지 못한다.” 하고는, 마침내 달천을 등지고 탄금대(彈琴臺)에 진을 쳤던 것이다. 그런데 얼마 후 척후장(斥候將) 김효원(金孝元)ㆍ안민(安敏) 등이 달려와서, “왜적의 선봉이 이미 다가왔습니다.” 하고 고하자, 신립은 그들이 군중을 놀라게 한 일에 노하여 당장 그 두 사람을 목 베고 이어 영을 내려 진의 대오를 바꾸게 하였다. 그러나 적병이 이미 아군의 뒤로 나와 천 겹으로 포위하자 장병들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모두 달천의 물로 뛰어들었다. 왜적이 풀을 쳐내듯 칼을 휘둘러 마구 찍어대니 흘린 피가 들판에 가득 찼고 물에 뜬 시체가 강을 메웠으며, 신립과 김여물도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정병은 충주와 상주 두 전투에서 다 섬멸되었다고 한다.
○ 경상 우병사 조대곤(曹大坤)이 후퇴하여 회산서원(晦山書院)에 숨다. 때마침 창원(昌原)에 잔류하고 있던 왜적 40여 기(騎)가 피란하는 사람들을 추격하면서 강물을 거슬러 건너와 의령(宜寧)의 신반(新反)을 약탈하고 마침내 빈틈을 타 성으로 들어가서는 관아와 성문을 불사르니, 조대곤이 마침 삼가(三嘉)에 있다가 대부대의 왜적이 닥쳐온 줄로만 생각하고 군기와 북을 버리고 숨었던 것이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비안(庇安)의 왜적이 예천(醴泉)의 다인현(多仁縣)으로 나가 주둔하고 중도(中道)의 대부대 왜적이 인하여 충주를 함락시키니, 목사 이종장(李宗長)은 도망쳐 달아나다. 그때 충주 등지의 사람들은 신립의 대군만을 믿고 집에 있다가 변란을 당한 것인데 뜻밖에 신립의 군대가 패하였다. 적병이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죽이고 약탈하고 하는 참상이란 더욱 말할 수 없다. 왜적이 우리나라에 말을 전해오기를, “정탁(鄭琢)과 이덕형(李德馨)을 내보내라. 운운.” 하다.
28일. 성주(星州)의 왜적이 개령(開寧)과 금산(金山)을 연달아 함락시키다. 우도의 방어사 조경(趙儆)과 그의 종사 이수광(李睟光)이 군사들을 거두어 가지고 추풍(秋風) 금산의 역 이름이다. 을 막아 적의 길을 끊었으나 군사들이 무너져 달아나다.
○ 경상 좌도의 조방장(助防將) 박종남(朴宗男)이 의성(義城)으로부터 사잇길로 해서 안동(安東)의 풍산(豐山)으로 후퇴하고는 창고를 깡그리 불사르고 가버리다. 왜적은 다인(多仁)에서 하풍진(河豐津)을 건너 함용(咸龍) 땅으로 전진하여 당교(唐橋)에다 진을 치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경상 감사의 영리(營吏)인 이(李)란 사람이 전라감사에게 고목(告目)을 보내며 말하기를, “지금 도착한 소식통에 의하면 왜적들이 옷 안에 갑옷을 입었는지의 여부는 모르겠으나, 옷 밖에는 모두 갑옷을 입지 않고 병기인즉 단지 철환(鐵丸)을 쏘고 칼을 쓸 뿐입니다. 다른 재주는 없으나 다만 철환을 쏘지 않는 사람은 없고, 그 쏘는 것이 빗발치듯 하여 그 때문에 그들을 제압하기가 어렵습니다. 여러 고을의 군기고 외에 관사 같은 것은 태우지 않고, 읍내와 길가에서는 큰 집과 좋은 마을만을 골라서 불을 지릅니다. 중도(中道)의 왜적은 그 수를 이루 헤아릴 수도 없는 정도라서 그들은 동래(東萊)ㆍ양산(梁山)ㆍ밀양(密陽)ㆍ청도(淸道)ㆍ경산(慶山)ㆍ대구(大丘)ㆍ인동(仁同) 및 선산(善山)을 거쳐 오며 다 태워 버렸습니다. 적들이 상주(尙州)에 이르렀을 때 순변사(巡邊使)가 그들과 접전하였지만 적군은 많고 아군은 적어 패배당했습니다. 왜적의 무리는 상주와 함창(咸昌)도 태우고 이미 조령(鳥嶺)에 이르렀고 불일간 조령을 넘어갈 기세까지 있다고 합니다만, 넘었는지 안 넘었는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우도의 왜적은 겨우 4, 5백 명으로 김해(金海)ㆍ창원(昌原)으로 해서 우병영을 불태웠는데, 이곳에 이르렀을 때 우병사가 그들과 접전했으나 이기지 못했습니다. 왜적은 함안(咸安)ㆍ칠원(漆原)ㆍ영산(靈山)ㆍ창녕(昌寧)ㆍ현풍(玄風)을 거쳐 오면서 모두 불태웠고, 거기서부터 둘 내지 세 대열로 나누어 편성했는데 한 대열은 2백여 명으로 지금 성주(星州)에 도달해서 막 그곳의 여러 마을을 수색하고 있고, 또 한 대열의 1백 5, 60명은 의령(宜寧)ㆍ삼가(三嘉)ㆍ합천(陜川)을 거쳐 고령(高靈)의 뒤로 향했는데 역시 그 후에 간 곳은 모르겠습니다. 또 흩어진 왜적 □3명은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겠으나, 몰래 금산(金山)에 도착하자 우도의 방어사가 접전했는데 아군이 무너져 달아난 후 간 곳은 역시 모르겠습니다. 우도의 왜적이 어느 길로 해서 올라갈 계획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좌도의 경조(慶州) 길로 해서 가는 왜적이 올라갈지의 여부에 관해서도 한 번 변이 일어난 후로는 여러 고을이 텅 비고 도로는 끊기고 막히고 하여, 한 장의 소식도 받아 보지 못했습니다. 한편 왜선 20척이 부산포(釜山浦)를 떠나 이미 거제도(巨濟島)에 도달했는데, 우수사와 전라 좌수사가 지금 그를 공격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 왜적이 가는 곳마다 젊은 남자는 모두 목 베고, 늙은이와 어린이 및 여인은 죽이지 않으나 예쁜 여자와 여염집에서 훔친 물건은 소와 말에 실려서 길에 연달아 있습니다. 싣고 가는 소와 말은 모두 우리나라 사람들을 시켜 끌고 가게 하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을 사로잡아다가 자기 무리로 삼은 것이 태반이나 됩니다. 이 밖에 소소한 행동을 낱낱이 들어서 말하기 어렵기에 대강 써 보냅니다. 운운.” 하다.
○ 우도의 왜적이 호서(湖西)로 들어가 황간(黃澗)ㆍ청산(靑山) 등의 고을을 불태우다. 이 길의 왜적은 그 수효가 사실 적어서 양호(兩湖)의 군사로 넉넉히 막아낼 수 있었는데, 장병들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멀리서 왜적을 바라보고는 먼저 무너졌다. 비록 적군은 정예하고 아군은 둔하다고 하나, 사실은 장병들이 마음을 다하지 않은 데서 그렇게 된 것이다. 아깝다, 양호의 허다한 고을에 한 사람의 의사(義士)도 없었던가.
○ 적병이 충주(忠州)로부터 곧장 경기로 향하다. 임금은 신립(申砬)이 패전하여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다음, 이어 적병이 이미 경기에 다가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드디어 서쪽으로 명 나라에 긴급한 사정을 고하기로 계획을 정하고 우선 이원익(李元翼)과 최흥원(崔興元)을 보내어 평안도ㆍ황해도를 순찰하게 하고, 또 대신에게 명해서 광해군(光海君)을 세자로 책립하여 군사와 국무의 중대한 일을 감무(監撫)하도록 하게 하였다. 대신 유홍(兪泓)이 울며 간하기를, “종묘와 사직이 여기에 있고 신민들이 여기에 있는데, 전하께서 어디로 가십니까. 가벼이 움직여서 사람들의 마음을 놀라 흔들리게 하셔서는 안됩니다.” 하였다. 임금이 곤룡포로 눈물을 닦으면서 긴 한숨을 내쉬고 나서, “내가 어디로 가겠소.” 하고는, 백성들의 협력을 얻기 위해 곧 성을 등지고 한바탕 싸워 볼 계획하에 애통한 교서를 내렸다. 판서 김명원(金命元)을 도원수(都元帥)로 하여 경기의 남은 장정을 있는 대로 거느리고 한강 가에 진을 치게 하고, 병조와 비변사(備邊司)에게는 성을 지키는 기구를 독려해 마련하도록 하였다. 열흘 가까이 되자 백성들이 모두 무너지고 아무도 말을 듣지 않는지라, 급히 명령을 내려 성문을 엄격히 지키고 사람이건 물건이건 출입을 허락하지 말라 하였다. 그러나 성 안의 사람들은 귀천 남녀 할 것 없이 밤낮으로 성에 줄을 걸고 내려가 다 달아났으며, 어떤 사람은 자기의 권속이 뿔뿔이 헤어질까 두려워한 나머지 줄로 서로를 엮어 도망치기도 하였다. 서울 안의 불량한 무리들은 작당하여 고운 여인과 재물을 찾아다니다가 보기만 하면 곧 약탈하고 하였는데, 상대가 고관이라 해도 분별함이 없었다. 그리하여 피해자들이 길에 가득했고 부자(父子)와 부부가 서로 잃어버린 채 도망쳐갔다. 임금은 인심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적을 피하기로 결심하였다. 아깝다! 2백 년 동안 휴양한 끝에 어찌하여 인심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는가. 하늘과 땅에 부끄러움을 느낄 뿐 아니라 또한 흉악한 왜적의 무리에게까지도 부끄럽다.
29일. 전라감사 이광(李洸)이 여러 고을로 하여금 근왕병(勤王兵)을 징발하게 한 것이 10여만 명이 되었고, 경상 감사 김수(金睟) 역시 타고 남은 병력을 수습하여 양호(兩湖)의 군사와 함께 가고자 거창(居昌)에서 함양(咸陽)으로 가다. 그때 영남 60여 고을은 깡그리 함락되었고, 오직 우도의 6, 7읍만이 겨우 병화를 모면했으나 군졸들은 이미 흩어져 없었다.
30일. 거가(車駕)가 서행(西幸)하다. 이보다 수일 앞서, 서울 안이 싹 비어 버렸고 대소의 신료(臣寮)ㆍ근시(近侍)ㆍ위졸(衛卒)들이 일시에 흩어져 가 버리니, 임금은 가슴 아프게 울면서, “2백 년이나 길러온 그 속에 충신과 의사(義士) 없음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구나!” 하고는, 밤중에 중전과 함께 여러 궁인(宮人)들을 거느리고 종묘와 사직의 신주를 받들고서 서울을 떠나서 아침에 벽제(碧蹄)에 이르렀다. 도중에 비를 만나 곤룡포는 다 젖었고, 동네가 텅 비어 팔진미(八珍味) 식사도 궐한 채 장단(長湍)으로 달려갔으나, 부사는 이미 도망했고 사방을 둘러 보았으나 사람이라곤 없어 일행이 모두 굶주린 채 잠시 쉬고는 곧 개성부(開城府)로 향하다. 이때에 편히 살며 침식(寢食)하는 백성들은 어찌하여 충의심을 일으키어 왜적을 토벌하지 않고 이날 같은 전례없는 비통을 남겼단 말이냐!
○ 전라 방어사 곽영(郭嶸)이 군사를 거느리고 금산(金山) 땅에 이르자 본도 우방어사 조경(趙儆) 등이 와 합세하여 금천역(金泉驛)에 이르러 왜적 5급(級)을 베었다. 이어 군(郡) 내에 잔류한 왜적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군사를 전진 포위하여 잡아 30여 급을 목 베었으며 아군의 피해는 50여 명이었다. 곽영이 곧 전라도에 돌아와서 막 접전할 때 한 왜적이 긴 칼을 가지고 마구 들어와 조경을 치려 하였는데, 조경이 맨손으로 그 왜적을 껴안고 오랫동안 버티고 있을 무렵 군관 정기룡(鄭起龍)이 돌진하여 그 왜적을 베니 조경이 살아날 수 있었다.
○ 전라 조방장(助防將) 이유의(李由義)가 군사 2천 명을 거느리고 충청도로 향했다가 곧 전라도로 돌아가다. 애초에 선전관이 서울에서 본진(本陣 즉 전라도에 있는 이유의의 진을 말함)에 와서 교지를 전하기를, “군사 2천 명을 거느리고 충주(忠州)로 달려가서 신립(申砬)의 지휘를 받아라.” 하였다. 이유의가 어명을 받고 연산(連山)까지 갔었지만 신립이 이미 패하여 왜적이 경기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자, 군사를 끌고 돌아간 것이다.
○ 왜적이 우리나라 장병이 잘 무너짐을 알자, 소수의 군사로 깊이 들어가는 위험성에 대한 의구심도 갖지 않아 혹은 10여 명, 혹은 5, 6명으로 패를 지어 마구 돌아다니며 도적질을 하다.
5월 1일. 흉악한 왜적이 경기도에 가득 들어와 한강 이남이 연기와 화염으로 하늘이 자욱하고 포성이 땅을 뒤흔드니 용인(龍仁)ㆍ수원(水原)ㆍ광주(廣州) 등지가 깡그리 불타버리다.
○ 남원 부사(南原府使) 윤안성(尹安性)이 경내(京內)의 민심이 흉흉하고 두려워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곧 개유첩(開諭帖)을 내리기를, “듣자니, 민간인들이 변란의 소문을 듣고 소요를 일으키며 다들 다른 데로 피해갈 계획을 하고 있다 하나, 호남과 영남 사이에 높은 산과 큰 개울이 있으니 졸지에 닥쳐올 근심은 전연 없다. 더구나 지금 경상 우수사가 왜적을 많이 잡아 승세(勝勢)가 크게 떨치고 있으니, 각기 마음을 놓고 생업에 안정하여 서로 경동(驚動)하지 말고 함께 농사일에나 힘써라.” 하다. 남원은 호남과 영남 사이에 있고 내가 본부, 즉 남원에 있었기 때문에 호남ㆍ영남 및 본부의 일을 기록하는 것이 퍽 상세한 것이다.
2일. 적병이 대거 진격하여 한강변[漢濱]ㆍ광나루[廣津]ㆍ마전(麻田)ㆍ사평(沙平)ㆍ동작(銅雀) 등처에서 일시에 떼[桴]를 타고 마구 건너왔는데, 강을 수비하던 군사들이 모두 흩어졌다. 배리(陪吏)가 원수(元帥)의 교의(轎椅) 밑에 엎드려서 고하기를, “적병이 강을 건너왔는데 군졸들이 다 흩어졌으니 어찌하면 좋습니까?” 하고 재삼 고하여도 전연 대꾸가 없기에 쳐다보았더니, 원수는 이미 간 데 없고 다만 빈 상(床)만 있을 뿐이었다. 왜적이 강을 건너와서는 대단히 기뻐하면서, “고려국엔 사람이 없다 해도 좋다. 험한 고개[嶺]에도 군사가 없고, 긴 강도 수비하지 않는다. 만약에 한 사나이라도 막았던들 우리는 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였는데, 군사를 전진시켜 동ㆍ남대문 밖에 이르자 성 안이 고요하고 전연 사람의 형적이 없는지라, 왜적이 의심하여 밖에 머무른 채 들어오지 못하다. 이것은 선봉으로 온 왜적이었고 대부대의 왜적이 가득 몰려오기까지는 4, 5일의 거리가 된다.
○ 거가(車駕)가 송도(松都)에 이르자 잠시 멈추고 김명원(金命元)에게 명해서 임진강(臨津江)을 차단하게 하고 정철(鄭澈)과 윤두수(尹斗壽)을 방면하여 좌ㆍ우의정을 시켰으며, 동인과 서인의 싸움으로 벌을 받았던 것이다. 교지를 내려 호남과 영남의 군사를 소집하다. 교지는 아래 14일 조에 있다.
3일. 왜적이 장안성(長安城) 안으로 들어오다. 하루 전날, 왜적이 성문 밖에서 머무르고 있을 때 성 안의 반도(叛徒)들이 나와서 맞이하면서, “나라는 비었고 임금이 없으며, 성은 버려져 지키지 않는다.” 하자, 왜적이 그제서야 성 안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이에 앞서 경상도 양산(梁山)의 관노(官奴) 황응정(黃應禎)이 포로가 되었는데, 왜적이 글을 써서 보여주기를, “너의 나라는 방어는 해서 무엇할 거냐. 불과 20일이면 틀림없이 서울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보니 과연 그 말대로였다. 왜적들이 지나가는 여러 고을에는 모두 두목[酋]을 남겨두어 원[宰]이라 칭하고, 우매한 백성들을 꾀어 모아서는 창고의 곡식을 풀어주었으며 겸하여 명패(名牌)를 만들어서 그들이 항복하여 내부(來府)하였음을 표시하게 하니, 이 때문에 백성들이 많이 고식적으로 따랐던 것이다. 부산(釜山)으로부터 서울과 개성(開城)에 이르는 세 길의 상하 30리마다 진(陣) 하나씩을 설치해서, 깊이 들어가다가 길이 막히게 될 우려에 대비하였다. 서울에 입성한 후에는 먼저 궁궐과 종묘를 불태우고 연달아 공사(公私)의 가옥을 태우며, 숨겨 둔 재물을 뒤져내어 매일같이 본토(즉 일본)에 보내고, 군사들을 휴식시켜 관서(關西)와 북쪽 길로 향할 계획을 세우다.
○ 경상 좌병사 이각(李珏)과 좌수사 박홍(朴泓)이 각각 우후(虞候)들을 거느리고 방어사 성응길(成應吉), 조방장(助防將) 박종남(朴宗男)ㆍ변응성(邊應星), 안동 판관(安東判官) 윤안성(尹安性), 풍기 군수(豐基郡守) 윤극임(尹克任), 예천 군수(醴泉郡守) 변양우(邊良祐) 등과 근왕(勤王)을 핑계 삼아 영남을 버리고 죽령(竹嶺)을 넘어갔는데, 그 후 원수(元帥)가 임진강에서 이각을 목 베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칠포만호(漆浦萬戶) 문관도(文貫道)는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순행(巡幸)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서쪽을 향해 재배하고 퍽 오랫동안 통곡하였는데, 호남과 영남에서는 그를 의리있다고 여기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전라 감사 이광(李洸)이 전 부사 고경명(高敬命)에게 보낸 서한에, “대가가 서쪽으로 순행하고 서울은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나라의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통곡하고 또 통곡할 일입니다. 오늘 할 일이 있다면, 오직 애통하고 절박한 취지로 격문을 띄워가지고 사방의 충의있는 동지를 불러 유시하여 지체없이 군사를 일으킴으로써 하늘에 사무치는 통분을 씻기나 바라야겠습니다만, 격문의 말이 만약 간절하지 않으면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킬 길이 없으니 격문을 거칠고 엉성하게 지어서는 안 됩니다. 격문을 지으셔서 속히 보여주기를 감히 바랍니다. 오장이 찢어지는 것만 같아 어찌할 바를 모르고 한갓 북쪽을 바라보고 통곡할 따름입니다. 또 이 뜻을 사중(士重)김천일(金千鎰)의 자(字)이다. 등의 제공(諸公)에게 알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다.
○ 고경명이 이광에게 보낸 답서에, “나라의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오직 매일같이 북쪽을 바라보고 통곡할 따름입니다. 방금 온갖 생각으로 어지러이 속태우고 있는 가운데 귀하의 글월을 지금 받았습니다만, 끝까지 다 펴 읽기도 전에 눈물이 마구 쏟아지는군요. 저 경명은 쇠병(衰病)으로 여생을 밭[田] 사이에 묻고 침상에 누워 있으면서, 위로는 행장(行裝)을 갖추고 급히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가서 문안드리지 못하고 또 막부(幕府)로 가서 군사 계획을 곁에서 돕지도 못하니, 근심과 부끄러움에 몸 둘 곳을 모르며, 한 번 죽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따름입니다. 말씀하신 격문은 제가 비록 오랫동안 글 짓는 일에서 손을 떼었지만, 의리상 감히 피하지 못하겠기에 삼가 이에 지어 보내 드립니다. 생각하건대 말의 조리가 엉성하여, 귀하께서 말씀하신 충의지사(忠義之士)를 창도하여 거병(擧兵)하게 하라는 취지를 선양할 길이 없음이 한스럽습니다. 다만 저 경명이 월초(月初)부터 이 고을 동부에 있는 집으로 옮겨와 있는데, 지금 귀하의 글월을 보니, 3일에 낸 것인데 6일에야 군졸이 빈 집에다 전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오래 늦어지기에 이르렀습니다. 늦어서 일에 맞춰 쓰이지 못할까 무척 근심하고 있습니다. 구구한 제 심정을 망령되이 진술할 것이 있어 별지(別紙)에 기록했습니다. 간절히 바라거니와, 귀하는 못난 이 사람이라 해서 진심으로 드리는 말씀을 버리지 마시고, 많은 사람들을 모아 충의의 뜻을 넓히시어 과연 나라를 위해 큰 공을 세우게 하십시오. 김사중(金士重)이 마침 편지를 보내왔기에 귀하의 뜻을 갖추어 전하였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운운. 나머지는 마음이 어지러워 이만 줄입니다.” 하고, 또 별지에, “오늘의 할 일 중엔 군대를 길러서 근왕(勤王)하는 것이 첫째 가는 충의입니다. 그리고 또 사람들의 마음을 굳게 단결시키는 것을 급선무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횡포한 왜적의 침범은 물론 그 소요스러움을 견딜 수 없기는 합니다만, 그러나 끝없이 군사를 불러 모은다면 백성들은 더욱 그들의 생업에 안정할 수 없습니다. 옛사람도 이르기를, ‘군사는 정예하기에 힘쓰지, 많기에 힘쓰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만약 잘만 쓴다면 지금 있는 군사로도 넉넉히 승리를 거둘 것이고, 만약 잘 쓰지 못한다면 아무리 많은들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다만 나라의 근본이 날로 흔들리고 나라의 일이 날로 빗나갈 뿐입니다. 대가가 서쪽으로 순행하셨는데, 기성(箕城 평양을 두고 한 말임)이 피폐하여, 백관과 유사(有司)의 수요를 공급해 줄 길이 없을 뿐 아니라 대관들의 식사 공급까지도 한심스럽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군산(君山)이 세미(稅米)를 바치러 강에까지 갔다가 돌아왔고, 법성(法聖)의 창고도 양곡을 실은 배가 아직 떠나지 않고 있다고 하는데,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지금 많은 상을 내걸고 조졸(漕卒)을 후하게 모집하고 서해로 배를 몰아서 대동강의 나루에 도달하게 해서, 가령 그 반만이라도 행재소(行在所)까지 보낼 수 있다면 비단 군대와 국가의 수요가 그 덕으로 충족될 뿐 아니라 사방의 인심까지도 역시 그것이 힘이 되어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왜적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와서 천 리를 전진하며 전투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그들로 하여금 외람되이 서울을 점거하게 하여 육로가 이미 막혔다고는 하지만, 서쪽의 바닷길들은 그래도 아직 막히지 않았으니 이번에 계획하는 일에 있어서는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평상시의 사례처럼 못난 말석의 용렬한 장수 따위나 억지로 시켜서 가지고 가게 한다면 의외의 변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니, 충성스럽고 용감한 사람으로 배질에 능통한 자를 뽑아가지고 정예한 군졸을 정해 주어 일면으로는 싸우고 일면으론 나아가는 계획을 행하게 한다면 군량이 무사히 도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행도(行都) 군사들의 사기 역시 조금은 진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바야흐로 민심이 소란하여 군사 모으기가 쉽지 않으니, 서둘러 조치해서 조졸(漕卒)만을 시켜서 전례대로 가지고 가게 하는 것도 혹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만약 열흘 정도나 지연되는 경우 저들 왜적이 약탈해 갈 생각을 내지 않으리라는 것도 모를 일입니다. 오늘날 조정의 호령이 군중에 이르지 않고 사방의 소식이 행도에 도달하지 않으니, 이야말로 통곡하며 눈물을 흘릴 일입니다. 만약 중한 값으로 보자기[鮑作]를 후히 모집해서 고기잡이를 하는 척하고 납서(蠟書)를 전달하게 하여 무사히 갔다 오면 관자(官資)에 보직(補職)해 주거나 혹은 미포(米布)를 넉넉하게 주는 두 가지 중에서 그가 원하는 대로 허락해 주고, 또 그 처자를 관□에 데려다 놓고 그가 돌아올 동안을 기한으로 매일 보통 지급하는 양보다 배가 되는 주식(酒食)을 지급해 주어, 밖으로 구휼하고 양육해 주는 은혜를 보이면서 안으로는 붙들어 두는 계획을 시행해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서 사방의 여러 장수들이 힘을 합해 근왕(勤王)하게 되면, 요는 수륙으로 동시에 진격해야 하는 것이니 대군은 곧장 탄탄한 길로 해서 진격하고 기병(奇兵)은 간간이 바닷길로 나아가, 왜적들로 하여금 앞뒤로 적(敵)을 맡게 하여 빠른 우레에 귀를 가릴 사이가 없듯 공격한다면 이는 또한 병가(兵家)에서 쓰는 기정(奇正)의 방법이기도 한 것입니다.” 하다. 《정기록(正氣錄)》에 나온다.
○ 전라도 도순찰사를 시켜 도내의 부로(父老)와 군민(軍民)들에게 유시하다. 아! 조그마한 왜적들이 독하기론 벌과 전갈이 모인 듯하고, 천성은 뱀을 타고났도다. 그들은 음흉하게도 중국을 어지럽힐 마음을 품고는, 마구 날뛰는 침략 행위를 감행하여 성을 수십여 군데나 함락시키고 장병을 몇 천만 명이나 도륙하였건만, 겁쟁이인 수비 담당의 신하들은 그 소문을 듣자 쥐같이 도망쳐 버렸고 우매하고 놀란 백성들은 그 모습을 바라보자 굽이치며 달아났다. 영남의 산천은 깡그리 승냥이와 범 같은 왜적의 굴혈이 되었고, 호서의 초목은 반이나 개나 양같이 천한 왜적의 비린내로 물들었다. 석륵(石勒)의 도적들이 곧장 신주(神州)로 향하듯 쳐들어왔으니 종묘 사직의 수치가 한이 없고, 말갈(靺鞨 원문은 몰갈(沒喝))의 군대가 강가에 머무르려 하듯 한강에 임했으니 조정의 근심 또한 한정이 없다. 이 일을 생각하면 차라리 잠이 들어 깨어나지 않았으면 한다. 밤낮으로 애통한 조서(詔書)가 내리고 산과 강에 기도하는 정성을 드리게 되었으니, 온 땅끝까지의 피를 지닌 우리 모든 사람이 마음을 썩히며 팔를 걷고 나서야 할 일인 것이다. 누군들 주먹에 힘을 주고 창을 휘두르지 않겠는가.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린 법, 비록 서로 돕는 힘을 잃었다지만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하는 것이니 마땅히 근왕(勤王)하는 충성을 다할 것이다. 우리가 차마 원수와 더불어 같이할 수 없는 하늘을 이고 살 것인가. 전례 없는 치욕을 씻기 바라는 바이다. 관운장(關雲長)ㆍ장비(張飛)와 같은 맹장들이 범처럼 무섭고, 매가 공격하듯이 날랜 용사들은 숲과 같이 많다. 조사아(祖士雅)가 중원(中原)을 평정하겠다고 맹세할 젠 간담이 말[斗]같이 컸고, 장숙야(張叔夜)가 들어가 경락(京洛)을 구원하였을 땐 눈물이 은하수를 매단 것 같았다. 범을 그리고 용을 그린 기[虎旌 龍旌]로 장막 위에서 제비 둥우리를 쓸어버리듯 하고, 사모(蛇矛)와 월극(月戟)으로 솥 속에서 노는 물고기를 잡듯 하길 기대한다. 너희들 호남은 본래 예의의 지방으로 일컬어져 왔거니와 실로 인재가 많은 고장이다. 모두 질풍(疾風) 앞의 억센 풀[勁草]같이 굳은 절개를 나타내고 함께 변란기의 충신이 되어 다오. 그리고 우리 왕실이 2백 년 동안 길러 준 은덕을 생각하고, 너희들 억만 인의 강개에 찬 뜻을 한결같이 하여라. 윗사람을 친애하고 그를 위해선 죽어도 좋다는 각오를 하며, 대의(大義)를 무기로 앞장서서는 장수를 목 베고 깃발을 뽑아 적의 수레바퀴 한 짝까지도 돌아가지 못하게만 한다면, 그것이 어찌 일대(一代)에 공이 높았던 충갑(冲甲) 성은 원(元)이다. 고려 때 사람인데, 필부로 의병을 일으켜 근왕(勤王)하여 큰 난리를 평정하다. 아니면 후손에까지 은택을 미치게 했던 차달(車達)성은 유(柳)이다. 고려 때의 문화(文化) 사람이다. 난에 임하여 양곡이 모자라자, 차달이 수레를 가지고 개인의 양곡을 운반해다 군에 보급해 주었다. 난이 평정된 후, 차달이라고 이름을 내리고 녹훈(錄勳)하다. 만 못하다 하겠는가. 몸을 국가에 바치도록 권면하여 절조를 지키고 죽을 힘을 다하기를 기약할 것이요, 왜적 때문에 군부(君父)를 버리지 말고 힘을 다하고 목숨 버릴 것을 맹세하라. 격문이 도달하거든, 각각 충의로써 권면하여 장부들을 이끌고 밤낮을 가리지 말고 달려오라.” 하다. 이광(李洸)은 애초에 왜적이 서울 등지에까지 범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반역한 군사들의 유언비어가 아닌가 하고 의심했었다. 방백의 신분으로는 살아나기가 어려울 것으로 생각하고, 즉시 교서(敎書)ㆍ인신(印信)ㆍ절월(節鉞) 및 관대(冠帶)를 전주(全州)의 진전(眞殿)에 모아 두고는 고부(古阜)의 자기 본가로 피해 가다. 대중의 여론이 시끄럽게 일어나 그를 허물하자 그가 하는 수 없이 다시 군대를 맡아 보게 된 것이다. 이번에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로 향할 때 왜적의 소식이 희미하매, 본국의 역적이 왜적과 함께 서울로 올라간 것이 아닌가 하고 말하는 사람도 퍽 많다.
○ 이광이 영남의 장병들에게 아래와 같이 격문을 내다.
우리 국가는 13대에 걸쳐 태만한 일도 없었고 황음(荒淫)한 일도 없어서 도덕을 잃지 않았고, 2백 년 동안 가는 사람 좇지도 오는 사람 막지도 않아서 전쟁을 일삼지 않았으며, 조심스러이 강토를 지키며 세심하게 준비를 해왔다. 근자에 추한 오랑캐[醜虞 왜인을 말함]가 성의를 표해 오기로 성군(聖君)의 포용있는 도량을 약간 보여주었고 조정은 그들을 회유할 셈으로 그들의 말을 경솔하게 신용하였더니, 오랑캐의 마음이란 흉악하기 짝이 없어 마침내 의리를 배반한 음모를 구사하여 독사가 물듯이 악독한 마음을 앞다투어 내고 벌과 전갈 같은 독을 함부로 쏘아 우리 장병을 살해한 것이 만이나 천 이상이었고, 우리 성을 함몰시킨 것도 어찌 수십으로 헤아릴 정도이겠는가. 안진경(顔眞卿)의, “본 적이 없다.” 한 말과 양만석(楊萬石)의, “어찌 그리 많으냐.” 한 말은 이를 두고 한 말이요, 유총(劉聰)이 곧장 신주(神州)로 향하자 진실(晉室)의 위태로움이 다급하여지고, 말갈[沒喝]이 하상(河上)에 들어오자 송조(宋朝)의 치욕이 말할 수 없이 되었던 그 일에나 견줄 수 있겠나. 왜적의 죄는 이미 하늘까지 치닫아 귀신의 음주(陰誅)가 이미 의정(議定)된지라, 그들은 패하여 반드시 그 피를 땅에 칠하리니 우리 군사의 현륙(顯戮)을 가해야 할 것이다. 이제 충의를 무기로 삼는 삼군(三軍)으로 배성의 일전[背城之一戰]을 결행하려는 터에 누가 동창의 계교[東窓之計]를 내세우고, 서촉(西蜀)으로의 피란을 서둘러 권했단 말이냐. 깃발이 보일락 말락 봉천(奉天)으로 향하는 금 가마는 서리와 이슬에 젖었고, 처량하게 봉상(鳳翔)에 머무는 옥 수레에는 바람과 먼지가 날린다. 강(江) 위에 정정당당하던 우리 군사들은 물결처럼 달아나고 새같이 흩어졌으며, 서울 안의 높고 낮은 집들은 연기에 싸이고 구름 속에 잠겼다. 부고(府庫)의 정책은 소연(蕭然)하고 곳집에 저축해 둔 곡식은 몽땅 없어졌다. 이 일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나, 시대의 형편인지라 어찌 하리오. 조사아(祖士雅)가 중원을 평정하겠다고 맹세한 일에서 그 의분을 상상할 수 있거니와 장숙야(張叔夜)가 서울에 들어가 방위하였음은 충의심을 쏟은 것이다. 평탄하건 험악하건 언제든지 함께 힘을 다해 목숨을 바치기를 꾀해야 할 일이건만 위태롭고 모욕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차마 함께 하늘을 이고 구차하게 안일을 구하겠는가. 나 이광(李洸)은 재질이 예악의 고장에 노닐 사람이 못 되지만, 잘못 시서(詩書)의 장수로 임명을 받아, 두 차례나 방면(方面)의 지휘권을 장악하게 되매, 늘 나라만이 있을 뿐이라는 충성심을 품어 왔었다. 이에 이성(李晟 당 나라 때 충용을 겸비한 인물)의 충성을 다해서 정전(鄭畋 당 나라 말년 황소(黃巢)의 난을 수습한 인물)의 격문을 전한다. 심히 애통하고 심히 급히 급하니, 어찌 허수하게 하며 느긋하게 할 일이겠는가. 설경선(薛景仙)은 나룻길로 해서 먼저 공물(貢物)을 상납한 후 의병을 일으켰고, 한세충(韓世忠 송(宋)의 명장(名將))은 바닷길로 해서 행영(行營)으로 가 경기 지방을 회복하고자 바람에 날리는 깃발로 치는 호령에 산악 같은 위엄으로 강남을 번개같이 떠나서는 한강 북안을 무섭게 바라본다. 장군이 비오듯 눈물을 흘리며 우니, 누군들 주먹을 불끈 쥐고 적장의 기를 뽑으려 하지 않겠는가. 병졸은 노숙(露宿)을 하면서 모두 쓸개를 핥듯 복수를 다짐하고 손바닥에 침을 뱉어 적을 쳐부수길 원하고 있다. 만약 선수를 잡는 기회를 잃는다면 뒷수습을 잘하려는 계획은 크게 어긋날 것이다. 공(公)들은 다 임금의 고굉(股肱)이 될 좋은 자질을 가진 몸으로 모두 번진(藩鎭)에 처하고 있고, 함께 문화를 숭상하는 시대에 나서 어찌 나랏일에 이바지하는 정성을 떨치지 않으리오. 임금의 능에 경건히 참배하여 조종의 수치를 시원하게 씻고, 거가(車駕)를 공손히 맞아 부로(父老)들의 소망을 크게 위로하라. 불을 지펴 털을 사르듯 하기를 기약할 것이며, 태산을 들어 새알을 짓누르듯 할 것을 맹세하라. 아울러 천지에 빌어 청룡도(靑龍刀)로 의지(義智)의 머리를 자르고, 함께 산천에 맹세하여 적토마(赤兎馬)로 현소(玄蘇)의 피를 밟아라. 만약 머뭇거리다가 날짜가 늦어져 의병 징발에 기회를 놓친다면 천지의 신(神)에게 부끄럽고, 백 대를 두고 죄를 짓게 될 것이니, 그러고야 무슨 면목으로 다시 천지의 사이에 서겠는가. 아! 서관(西關) 하늘 끝으로 파천하시매, 북극성도 제자릴 옮겼도다. 가슴을 쳐도 그 슬픔 한이 없고, 분연히 날아가려 한들 길이 없다. 우리 호남ㆍ호서와 영동ㆍ영북의 모두는 멀고 가깝고를 물을 것 없이 계속 비휴(豼貅)같은 군사들을 일제히 몰고 가서 저곳 이곳에서 속속 앞뒤로 곧장 두들겨 대어, 천지에 가득찬 요망한 기운을 거두어 버리고 확청(廓淸)의 공을 이룩하게 하라. 왜적 때문에 임금을 버리지 말고 충의심을 떨치고 나아가 왜적 토벌하기를 기할 것이며, 자신을 희생하여 나라에 보답할 것이지 달아나서 목숨을 살려 치욕을 당하는 일 따위는 없기를 바란다.
○ 거가가 송도(松都)를 떠나 해서(海西)를 향하였는데, 관서(關西)의 노상에서 겪은 곤고(困苦)를 신민으로서 차마 들을 수가 없다.
하루는 산골짜기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밤새도록 식사를 올리지 못해 촌 여인이 울면서 조밥을 드렸다. 임금이 그것을 드시고 이르기를, “이 맛은 팔진미보다 낫다. 조의 귀중함이 이와 같구나, 이와 같아.” 하였다. 또 하루는 비가 심해 갈 수가 없어서 길가 촌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임금은 방앗간[杵室]에 들고, 신하들 거가를 호종한 자가 10여 명이었다.은 빗속에 엎드려 종일 굶주렸다. 비통하다. 우리 소중화(小中華)는 동이(東夷)와 북적(北狄) 사이에 끼어 있으니, 변란의 반발이 어느 대엔들 없었으랴. 그러나 함락의 비참과 파천의 치욕이 어찌 이러한 극단에까지 이른 적이 있었겠는가. 애석하다. 농사일을 장려하여 우리를 먹여준 군부(君父)가 여러 차례 궐선(闕膳)하기까지 하는 비참한 지경을 당했고, 세심하게 백성을 다스린 임금이 마침내 궂은 비에 괴로움을 당했으니, 이 적이야말로 만세를 두고도 잊을 수 없거든, 이 몸 한 번 죽는 것이 무엇이 아까우랴. 신민된 자로서 비록 서쪽으로 퇴각하는 데에 달려가서 목숨을 바치지는 못하였더라도, 마땅히 동해에 몸을 던져 목숨을 버렸어야 할 것이다.
4일. 영남 초유사 김 성일(金誠一)이 남원(南原)에 도착하다. 김성일이 애초에 체포한다는 어명에 따라 직산(稷山)까지 갔으나 사면을 받고 도로 초유사의 책임을 받게 되었는데, 그때야 비로소 조정이 서쪽으로 옮겼음을 알고 통곡하면서 돌아오다. 호남과 호서의 길이 막혔기 때문에 충청도의 내로(內路)로 해서 내려오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이광(李洸)이 근왕병(勤王兵)을 거느리고 공주(公州)에 이르러서 왜적이 서울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자, 징을 울려 군대를 퇴각시키니 육군(六軍)이 무너져 돌아오다. 그때 곽영(郭嶸)은 조방장 이지시(李之詩), 종사관 이용순(李用諄) 등을 거느리고 금산(金山)으로부터 돌아와 전주(全州)에 주둔하였다.
○ 곽재우(郭再祐)가 의령(宜寧)ㆍ삼가(三嘉)ㆍ합천(陜川) 등 여러 고을을 수복하니, 우도의 왜적들 중에는 소문을 듣고 철거한 자들이 퍽 많았다. 곽재우가 정진(鼎津)에 진을 치고 낙동강 연변의 왜적을 추적해서 잡았다.
5일. 영남 초유사 김성일은 함양(咸陽)으로 향하고, 본도 도순찰사 김수(金睟)는 함양에서 출발하여 운봉(雲峯)으로 가는데, 도중에 초유사를 만났다. 초유사가 말하기를, “지방을 맡은 신하라면 마땅히 맡은 지방을 사수할 일이지, 무엇 때문에 이곳에 왔단 말이오. 온 도를 다 잃으면서도 구하지 못한 주제에 단기(單騎)로 멀리 와봤자 무슨 구제할 길이 있겠소. 원컨대, 영공(令公)은 속히 돌아가시오.” 하매, 김수가 함양으로 돌아갔다가 이어 안음(安陰)으로 갔다. 김성일이 함양에 도달하니, 군수 이각(李覺)이 홀로 빈 관아에 앉아 있는데 다만 늙은 아전 수 명이 있을 뿐이었다. 김성일이 군수를 독려하여 고을 사람들을 불러 모으게 하자, 함안의 전 현감 조종도(趙宗道)와 전 직장(直長) 이노(李魯) 등이 다 모여들었다. 김성일이 그 자리에서 격문을 아래와 같이 기초하다.
초유사는 도내의 수령, 변장(邊將), 문ㆍ무 출신의 부로(父老) 자제와 한량(閑良), 군민(軍民) 등에게 유시(諭示)하노라. 국운이 중도에 비색하여, 섬 오랑캐가 외람되이 발동하여 나라 땅에서 마구 날뛰고 동서로 충돌하면서 웅장한 성과 큰 진(鎭)도 아랑곳없이 함락시켜 버리고, 10일이라는 짧은 시간에 이미 관령(關嶺)을 넘고 곧장 서울로 쳐들어갔다. 그리하여 임금은 파천하고 온 나라 사람이 도망쳐 달아나니, 이 동방의 나라가 생긴 이래로 오랑캐 화(禍)의 참혹하기가 오늘날과 같은 적은 없었다. 여러 병사(兵使)들은 국가의 간성(干城)인데 어떤 자는 풍문만을 듣고도 무너져 달아나고 어떤 자는 겁을 집어 먹고 움츠리기만 하며, 또 수령은 한 고을의 군장(君長)이건만 모두 처자를 이사시키고 무기고를 태워 버려서는, 한 사람도 의를 지켜 굽히지 않고 충성심을 발휘하여 먼저 나서서 왜적을 치는 자가 없으니, 슬프다. 우리 군사와 백성이 또 무엇을 믿고, 흩어져 달아나지 않겠는가. 미친 파도가 마구 몰려오듯 하여 막아낼 수가 없으매, 성마다 창을 멘 병졸이 없고 읍마다 목숨을 내놓고 싸우는 신하가 없다. 그리하여 왜적이 가는 곳마다 무인지경에 들어가듯 하여 마침내 영남 한 도를 왜적의 굴혈로 만들었고, 흙더미가 무너지고 기왓장이 부서지듯 하여 아침 저녁 동안도 지켜내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대체 무슨 변고인가. 그러나 이것이 어찌 한갓 변장과 수령의 허물뿐이겠는가. 군사와 백성도 그 책임을 회피할 수 없는 것이다. 옛날에 큰 변란을 당하고도 나라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윗사람은 목숨을 내놓고 싸울 뜻을 지녔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위해 죽겠다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왜적이 오기도 전에 군사와 백성이 앞장서서 달아나 산림 속에 잠복하고는 구차스럽게 살아남을 계획이나 함으로써 백성이 없는 수령과 군사 없는 장수를 만들었으니, 앞으로 누구와 함께 적을 방어하겠는가.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추(鄒) 나라와 노(魯) 나라가 싸울 때 유사(有司)로서 죽은 자는 30여 명이나 되었지만 백성은 그들을 위해 죽은 자가 없었으니, 이는 노약(老弱)한 백성들이 구렁에 빠져 죽어도 유사들이 그들의 고난을 구제하여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지금 도망쳐 무너지기만 하는 이 변은 맹자(孟子)가 말한, 「너한테서 나온 것이 너한테로 돌아가는 것이다.」한 그것이 아니냐.’ 하지만, 아! 그것이 무슨 말인가. 최근 몇 년 동안 부세(賦稅)가 중했고 부역이 많아서 백성은 과연 명령을 견뎌내지 못했다. 그러나 성지(城池)의 방비 기구(器具)는 모두 불의의 변에도 대비할 만큼 보전되어 있었으니, 지금 와서 볼 때 성스러운 임금이 백성을 편안하게 해 주려던 생각이 원대했던 것이다. 그것이 어찌 백성을 학대해서 자신의 이(利)나 꾀한 것이었겠는가. 하물며 추 나라와 노 나라의 싸움이 비록 승부는 있었으나, 같은 중국(中國)이었기 때문에 백성에게는 별 이해(利害)가 없다. 그러나 이 이[齒]에 물들인 무리는 우리 땅에 들어오자, 곧 차지하자는 생각을 가지고 부녀자들을 사로잡아 처첩으로 삼고 장정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도륙하였으며, 마을을 습격하여 깡그리 불태웠고 공사(公私)의 소장품(所藏品)을 다 그자들의 소유로 하여, 그 해독이 사방에 두루하였고 피가 천리에 흘렀으니 백성들의 화(禍)는 차마 말할 수도 없다. 지금이야말로 정말 지사(志士)가 창을 베고 잠을 자야 할 때이며, 충신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할 때인 것이다. 그러나 67주(州) 가운데 여지껏 충의를 부르짖으며 팔을 걷고 나서는 사람이라곤 없었고, 오히려 도망쳐 살아나는 데 있어서 혹시 남보다 뒤지지 않을까 하는 일이나 또는 입산(入山)하는 일에 있어서 좀더 깊이 들어가지 못한 것만을 염려하니, 어찌 이루 개탄할 수 있겠는가. 설사 산으로 들어가 왜적을 피해서 끝내 자기 몸과 집안을 보전할 수 있다 하더라도 열사(烈士)는 그리하는 것을 수치로 여기거든, 하물며 보전할 도리가 만무한 경우에 있어서랴. 본관은 이 점을 철저하게 구명해서 군사와 백성의 잘못된 생각을 깨우쳐 주리라. 이 왜적은 서울을 범하는 데 마음이 급하여 군사를 지체하지 않고 가기 때문에 그 피해가 모든 고을에 두루 미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왜적이 뜻을 이룬 후, 그 흉악한 무리들이 국내에 충만하게 되면 산골짜기가 과연 죽음을 피하는 곳이 되겠는가. 이를테면 홍수의 흐름이 하늘에 치닿고 무서운 불길이 들판을 태우듯 할 터인데, 아! 우리 억만의 생령(生靈)이 또 어느 곳에 몸을 둘 것인가. 산골짜기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시간이 감에 따라 양식이 떨어져 다들 깊은 산 속의 시체가 될 것이고, 나온다 해도 부모 처자는 그자들의 포로가 되는 곤욕을 당할 것이다. 의관을 갖춘 사족(士族)들은 그자들의 어육(魚肉)이 되어서, 항복하면 영원히 효경(梟獍)의 족속이 될 것이고 항복하지 않으면 모두 칼 맞아 죽은 귀신이 될 것이니, 이런 일이야 어찌 지혜로운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일이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단지 이해(利害)와 사생(死生)만을 가지고 말한 것일 뿐이다. 아! 군신 간의 대의(大義)는 하늘의 법도요 땅의 도리니, 이른바 백성의 떳떳한 양성(良性)인 것이다. 무릇 이 땅에서 혈기가 있고 곡식을 먹는 우리들로서, 임금이 몽진(蒙塵)하고 종묘 사직이 전복되려 하며 만백성이 어육으로 문드러지듯 하는 것을 우두커니 보기만 하고 조금도 근심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하늘의 법도와 땅의 도리에는 어찌 되겠는가. 더구나 부모가 왜적의 칼을 맞고 골육이 서로 보전되지 못하여 개인적인 가문의 화(禍) 역시 참혹할 것이니, 자제 된 자가 머리를 움켜쥐고 쥐같이 달아나기나 하고 만 번이라도 죽을 힘을 내어 부모 보전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사람의 자식 된 도리에는 어찌 되겠는가. 다만 영남은 본래부터 인재가 많은 고장으로 1천 년의 신라, 5백 년의 고려, 그리고 우리 조정의 2백 년 동안 충신과 효자의 뛰어난 명성과 의열(義烈)이 청사(靑史)에 빛나고 절조와 의리의 아름다운 습속이 동방에서 첫째가는 것은 사람들이 다 함께 알고 있는 바이다. 근자의 일을 가지고 말한다 해도, 퇴계(退溪)ㆍ남명(南溟 조식(曹植)의 호) 두 선생이 한 시대에 같이 나서 도학(道學)을 제창하여 사람의 마음을 맑히고 사람의 기강(紀綱)을 바로잡는 일을 자기의 책임으로 하자, 선비들도 그 감화에 점점 물들어 사숙(私淑)하는 자들이 많아졌다. 또 평소엔 허다한 성현의 책들을 읽어 그 얼마나 자신만만한 사람들이었더냐. 그런데 하루아침에 변란을 당하자 오직 살 길이나 탐내고 죽음을 회피하는 일만을 서둘러, 임금을 버리고 어버이를 뒤로 돌리는 죄악에 스스로 빠져 버리니 구차스러이 세상에 산다 한들 어떻게 머리로 하늘을 이고 살고, 지하에 죽어 가서도 또한 어떻게 우리 선대(先代)의 현자(賢者)들을 뵈올 것인가. 의관을 차리고 예악을 숭상하던 몸을 욕되게 할 수 있겠으며, 머리를 깎고 몸에 무늬 놓는 습속을 따를 수 있겠는가. 2백 년 동안 지켜온 종묘 사직을 차마 왜적의 손에 넘겨줄 수 있겠으며, 수천 리의 산천을 차마 왜적의 굴혈로 둘 수 있겠는가. 중화(中華)가 변하여 이적(夷狄)이 되고, 사람이 짐승이 되는 그런 일을 참을 수 있으며 또 할 수 있겠는가. 적의 머리를 베어 바치는 것을 으뜸가는 공로로 삼는 진(秦) 나라도 처음에는 순전한 이적(夷狄)은 아니었건만, 노중련(魯仲連)은 오히려 바다에 몸을 던져 죽는 것을 달갑게 여겼다. 풀로 엮은 옷을 입고 꿈틀거리는 섬 오랑캐가 얼마나 추잡한 종자인데, 그자들이 우리 땅을 훔쳐 차지하고 우리 백성들을 죽이고 욕보이는 대로 내버려만 두고, 그자들을 몰아내고 목 베어 죽일 방법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사람들이 말하기를, “저자들은 용맹스러운데 우리는 겁이 많고, 저자들은 예리한데 우리는 둔하니 비록 군사를 일으켜도 성사할 수 없다.” 하니, 아! 그렇게도 생각하지 못한단 말이냐. 옛날의 충신과 열사는 성패로 인하여 뜻을 바꾸지 않았고 강약 때문에 지기(志氣)가 꺾이지 않아, 의리상 마땅히 해야 할 것이라면 비록 백 번 싸워서 백 번 패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빈 주먹을 버티며 흰 칼날을 무릅쓰고 끝까지 싸워 만 번 죽어도 뉘우치지 않았다. 하물며 이 왜적은 비록 강하다고는 하나 고군(孤軍)으로 깊이 들어왔으니 바로 병법의 금기(禁忌)를 범한 것이다. 어떻게 제대로 돌아갈 수 있겠는가. 우리 군사들이 비록 겁이 많다고는 하나, 용맹하거나 겁많은 것이 어찌 고정된 것이겠는가. 충의에 격동되면 약한 것을 강하게 만들 수도 있고, 적은 수효로 많은 수효를 대적하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니, 단지 마음을 한 번 돌리는 데 달렸을 뿐이다. 지금 보건대, 도망치거나 무너진 졸병들이 산골짜기에 가득 깔려 있는데, 이들도 처음에는 비록 몸을 도망쳐서 살기를 바랐다가도 마침내 한 번 죽는 것을 면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면 모두 스스로 분발하여 나라를 위해 힘을 다 바치려고 생각할 것이나, 다만 솔선하여 부르짖는 사람이 아직 없었을 뿐이다. 이러한 때에 있어서 만약 한 사람의 의사(義士)만이라도 분발하고 일어나 한 번 외치기만 한다면 원근의 장정들이 구름같이 모이고 메아리같이 호응해 올 것은 가만히 앉아서도 획책할 수 있는 일이다. 성상(聖上)께서 이미 애통한 교서(敎書)를 내렸으며, 또 이 소신(小臣)을 못난이로 여기지 않고 초유(招諭)하는 책임까지 맡기셨다. 당(唐) 나라 때의 씩씩한 무부와 표한(剽悍)한 병졸도 흥원(興元 당 덕종(唐德宗)의 제2 연호, 서기784)년에 덕종이 이회광(李懷光)의 반란 때 내린 조서에 울었거늘, 하물며 추로(鄒魯)의 공자와 맹자의 교훈을 받드는 우리 군사들이 어찌 주먹을 불끈 쥐고 의분에 차 임금의 위급을 구하기 위해 나가지 않겠는가. 진실로 원하건대, 이 격문이 도달하는 날에 수령은 온 고을의 사람들에게 똑똑하게 알려주고, 변장(邊將)은 장병들을 격려하여야 할 것이다. 문무(文武)의 조관(朝官)과 부로(父老)ㆍ유생(儒生) 등은 각각 서로 정해서 일러주어 동지들을 불러 모아서 의열(義烈)로 격려하여 혹은 마을을 보호하여 스스로 지키고, 혹은 군사를 끌고 전투를 도와야 할 것이다. 부유한 백성은 차달(車達)의 곡식을 운반해다가 군사들의 식량을 보급해 주고, 용맹한 군사는 충갑(冲甲)의 무기를 휘두르면서 왜적을 죽이도록 하라. 집집마다 사람마다 각자 전투에 임하기 위해 일시에 다 일어나면 아군의 성세가 크게 떨치고 사기가 백 배 되어 호미자루 창자루도 예리한 무기가 될 것이니, 아무리 왜적의 긴 창과 큰 칼인들 또 무엇이 무서울 게 있겠는가. 일이 성공하면 나라의 치욕을 씻는 데 만전을 기할 것이요, 성공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의리 있는 귀신이 될 기회를 잃지 않을 것이니 제군들은 힘쓸지어다. 본관은 한 부유(腐儒)인지라 비록 군사에 관한 것은 배우지 못했지만 군신 간의 대의는 그래도 대강 들었다. 한 도가 다 결딴이 난 후에 임명을 받아, 초(楚) 나라를 보존시킬 마음은 간절하면서 아직 포서(包胥)의 충성을 바치지 못하였고, 사당[廟]에 곡하고 군사를 일으킴은 장순(張巡)의 의열(義烈)을 사모한 것일 뿐이니 오히려 의사들의 힘에 의뢰하여 해[日]를 취(取)하는 공을 이루기 바라고 있다. 조정의 포상 제도가 뒤에 있으니, 다들 잘 알지어다. 애초에 김성일이 문사(文士)를 시켜 격문을 기초하게 하였으나 마음에 들지 않아서 자기가 지었는데, 말이 감격에서 우러나 붓을 먹물에 적실 사이도 없이 단숨에 써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김륵(金玏)을 안집사(安集使)로 삼아 전지(傳旨)를 내리기를, “지금 영남의 부(府)ㆍ진(鎭)이 연이어 왜적에게 함락된 것은 한 도의 병력이 적어서가 아니다. 다만 변란이 창졸간에 일어났기 때문에 각 읍의 군민(軍民)들이 소문만 듣고도 무너져 달아나서 와해(瓦解)되기에 이른 것이니, 그들의 본의야 어찌 항복해서 왜적에게 부동(附同)하려고 한 것이었겠느냐. 만약 식견이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똑똑하게 효유(曉諭)하고 충의로써 그들을 격려하여, 그들로 하여금 동지들을 규합하며 또 자제와 노복을 거느리고 관군(官軍)에 협력하여 결사적으로 싸우게 한다면, 지금이라도 구제할 길이 있는 것이다. 고려 시대에 원충갑(元冲甲)은 한낱 필부로서 의병을 일으켜 큰 적을 꺾어 물리쳤으니 그것이 한 가지 좋은 전례다. 행상호군(行上護軍) 김륵을 본도에 내보내어 그로 하여금 원근의 백성들을 두루 효유하고 충의로운 군사들을 격려하고 권면하여 목숨을 바쳐 근왕(勤王)하게 하노라.” 하다. 김륵은 경상도 영천(榮川) 사람이니, 그는 사잇길로 해서 영남에 도달할 수 있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모병통문(募兵通文)하다. 처음에 경상도 함안(咸安) 출신의 문신인 전 현감 조종도(趙宗道)와 전 직장(直長) 이노(李魯) 등이 서울에서 변란의 소식을 듣고는, 곧 본도에 달려 돌아왔다. 조종도가 이노에게 말하기를, “우린 고향 땅에 들어가면 의병을 일으켜야 합니다. 만일 성사하지 못한다면 동지들과 물에 빠져 죽을 망정 의리상 왜적에게 욕을 당할 수는 없습니다.” 하더니, 이번에 여러 읍에 통문(通文)을 내었다. 다음 글은 의병을 모집하는 글이다. 임금의 고통을 급한 일로 여겨서 이적(夷狄)의 화(禍)를 물리치는 것은 충의(忠義) 중에서도 급선무요, 국가의 위기에 관하여 도모하여서 생사(生死)의 근심을 잊음은 정절(貞節) 중에서도 큰 것이다. 만물 중에서 가장 영묘(靈妙)하여 사람이 되고, 다같은 백성 중에서 뛰어나 선비가 된다. 왜 영묘하다 하는가? 사람은 군신과 부자의 윤리를 알기 때문이다. 왜 뛰어나다고 하는가? 선비는 의(義)와 이(利)의 향배(向背)를 분별할 줄 알기 때문이다. 이 땅에 나는 것을 먹고 살았으면 모두 신하이지, 어찌 많은 녹을 먹은 자만이 죽어야 하겠는가. 요량없는 비여(匪茹 자신을 요량하지 않는다는 뜻)로 적이 태원(太原)까지 왔던 일은 옛날에 어쩌다 있었던 일이라 하겠거니와, 곧장 서울에 침범하기론 이번의 일이 가장 극심하다. 임금은 파천하여 어디서 바람과 이슬에 시달리고 계신지 막연하고, 종묘 사직이 진동하여 놀랐으니 신령이 어디에 의지해서 오르내리시는지 슬프구나. 쥐같이 달아나고 새같이 숨어 거의가 다 임익(林翼)같이 창[戈]을 버렸고, 애첩을 죽이고 말을 잡아 먹어 장순(張巡)같이 결사적으로 지킨 사람이 있다 함은 들어보질 못했다. 이것이 어찌 신하로서 차마 할 수 있는 일이냐. 이는 실로 사람의 도리에 견디어 내기 어려운 일이다. 2백 년 동안이나 길러온 보람이 어디에 있는가. 60주(州)의 충의가 쓸은 듯이 없어졌다. 광야에 울어도 돌아갈 곳이 없고, 백일하에 고개를 들자니 낯이 없도다. 부모가 병이 들었는데 어찌 운명에만 맡겨 약을 쓰지 않으리오. 대세가 이미 기울어졌어도 혹 하늘에 힘입어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죽는 것이 비록 싫지만 천지에 그물이 쳐 있으니 도망갈 길 없고, 살 길을 설사 구차하게 얻고 싶어도 개 돼지 틈에서야 차마 살 수 있겠는가. 죽는 것이 같을 바엔 차라리 의에 죽을 것이다. 감히 살기를 바라는가. 인(仁)에 생명을 버려라. 나라를 배반하고 원수를 섬기면 편안할 수 있겠으며, 까까머리 되고 이[齒]에 물들이는 것을 견딜 수 있겠는가. 관군은 도망쳐 형벌을 겁내고 나오지 않으니, 의병이 힘차게 움직여 충의심을 떨치고 앞다투어 와주기를 바란다. 하물며 주상(主上)께서 서쪽으로 행차하시던 날에 애통하고 간절한 교서를 내리고, 따로 목숨을 바치는 신하를 골라서 특히 초유사로 보내셨다. 윤음(綸音)이 내리자 듣는 사람치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고, 성유(星諭 초유사의 격문(檄文))가 이르는 곳마다 그를 본 사람들은 응당 목숨 바칠 생각을 했을 것이다. 진실로 바라거니와, 여러 군자들은 글을 읽어 평소 모두 나라에 보답할 뜻을 품고 있었을 것이니, 위급한 이때에 임하여 의당 임금을 위해 죽는 절개를 세워야 할 것이다. 각기 부형들을 권면하고 자제들을 격려하며, 이웃 마을 사람들을 불러 일으키며 노복들을 격려하여 거느리되, 혹은 활과 화살을 혹은 칼을 차고서 단결하여 부대를 편성하고 세차게 용기를 고무하여 이 초유에 부응하고 나라의 치욕을 씻도록 하라. 그렇게 한다면 이 어찌 나라만의 다행한 일이리오. 각 개인에 있어서도 문 앞의 원수를 없애는 일인 것이다. 한편 군대를 탈영하여 피해 숨은 자들까지도 모두 스스로 나타나 모일 것인즉, 그들에 있어서도 비단 전날의 죄가 다 용서될 뿐더러 회복된 후의 포상도 기대할 수 있는 일인 것이다. 다시 바라는 바는, 그들을 십분 타일러서 역(逆)과 순(順)에 화복이 매었음을 알게 해 줄 수만 있다면, 천만 다행한 일인가 한다. 정말 이렇게만 한다면 살아서는 씩씩한 사나이가 될 것이고 죽어서도 빛나는 혼이 될 것이며, 장사지낼 땐 포신(鮑信)의 형상을 새기게 될 것이고 능(陵)에는 방덕(龐德)의 형상을 그리게 될 것이니, 연약하게 살기보다는 차라리 강개하게 죽는 것이 어떠한가. 만약 의병의 근왕(勤王)으로 말미암아 하늘 길이 다시 맑아짐을 볼 수 있게 된다면, 의병으로 나섰다고 해서 반드시 다 죽는 것도 아닌 데다가, 장차 함께 중흥(中興)의 즐거움을 누리게 되는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마땅히 각각 힘쓸지어다. 아! 하늘의 이치와 백성의 양성(良性)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니, 사람의 기강(紀綱)인들 어찌 영원히 떨어지겠는가. 이 한 장의 통고문을 보면 반드시 천 번이나 기절하며 통곡하게 될 것이다. 조종도 등이 쓰다. 그 후 정유년(1597, 선조 30)에 조종도는 황석산성(黃石山城)에서 절개를 지키고 죽었으니, 그가, “차라리 의에 죽어야 한다.” 한 처음의 말을 저버리지 않았음을 넉넉히 알 수 있다.
○ 경상도 연해의 왜적이 거제도(巨濟島)로 향하니 원균(元均)은 우후(虞侯)한테 군영을 지키게 하고는 배천사(白川寺)까지 달려갔는데, 우리나라 어선을 보자 왜적의 배인 줄로 생각하고 창황히 달아나 노량(露梁)으로 물러났다. 우후가 그 소식을 듣고 나가길 독촉하니 온 성 안의 늙은이와 어린이들이 어지러이 길을 꽉 메웠다. 그러자 우후는 다함께 피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활을 당겨 마구 쏘아대자, 임신한 두 여인이 한 화살에 맞았는가 하면 그 밖에도 무고하게 죽은 자가 퍽 많았고, 온 섬의 장병들이 모두 소문만을 듣고도 흩어져 버렸다. 남해 현령(南海縣令) 기효근(奇孝謹)은 창고를 불사르고 달아났는데, 왜적은 아직 남해 땅을 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왜적의 장수 평청정(平淸正)ㆍ평행장(平行長) 등이 서울에서부터 길을 나누어 출발하다. 애초엔 왜적의 괴수 수길(秀吉)이 군사를 8부(部)로 나누었는데, 1부의 무리가 거의 10여만 명에 달했고 총대장(總大將)은 각각 4,5 명으로 해서 우리나라 8도를 나누어 맡기로 하였다. 그런데 북방은 군사의 비결에 꺼리는 곳이었기 때문에 그들 장수 가운데서도 가장 용맹스럽고 사나운 자를 택하여 함경도로 보냈던 바 평청정이 그를 맡은 것이었다. 이때에 와서 수길 등은 서울에 머물러 주둔한 채 남별궁(南別宮)에 들어가 있었고 평청정 등은 서울에서 동쪽 길을 잡아 강원도를 지나 함경도로 향했는데, 이들이 지나 가는 곳은 적지(赤地)가 되어 천 리를 가도 사람 사는 연기가 나지 않았다. 평행장ㆍ평의지(平義智) 등은 서울에서 서쪽 길을 잡아 해서(海西)로 향했는데, 도원수(都元帥) 김명원(金命元)이 신길(申硈)을 중군(中軍)의 장군으로 삼고 이빈(李薲)과 이천(李薦)을 좌우의 장군으로 삼아 임진(臨津)에서 방어하다.
14일. 전라 감사 이광(李洸)이 또 근왕병 도합 10여 만을 동원하여 전주(全州)에 주둔하였는데 군량을 수송하는 자가 갑절로 늘어나다.
○ 군사를 징발하는 교지가 있었다. 당초에 조정이 송도(松都)에 머무르고 있을 때 호남과 영남에 교지를 내렸으나, 길이 막혀 전달되지 못하다가 이제와서야 본도에 도착한 것이다. 그 내용의 대략은, “왜적이 경기(京畿)에 가득 밀려 들어와 형편상 부득이 송도에 주차(駐箚)하면서 사방에 명령을 내려 왜적 토벌의 계획을 하게 하는 터이다. 경(卿)은 경상 우도에 은밀히 내통하여 경내(境內)의 군사를 총동원해 가지고 올라와 구원하도록 하라.” 하였다. 내린 교지는, 반 조각의 막종이에 잘게 써서 겨우 글자 모양을 이룬 것으로 시골집의 사사로운 편지 조각과도 같았으니, 백성으로서 그것을 본 사람 치고 눈물을 뿌리지 않은 이가 없었다. 이광이 그를 영남에 전송했다. 김수(金睟)가 안음(安陰)으로부터 함양(咸陽)에 가서, 방어사 조경(趙儆), 종사관 이수광(李睟光), 조방장 양사준(梁士俊) 등을 거느리고 함양으로부터 남원(南原)으로 향하니 그때 전라병사 최원(崔遠)이 군사를 거느리고 남원에 와서 진을 쳤다.
18일. 김수(金睟)가 남원(南原)으로부터 전주(全州)에 갔는데, 이광(李洸)이 이곳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김수를 패군(敗軍)한 장수라 하여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니 김수 일행의 병마는 점점 도망쳐 흩어졌고 장병들은 각자 말을 끌고 가버렸다. 이윽고 김수도 이 광을 만나 약속하고 출발하다.
○ 순창(淳昌)과 옥광(玉果)의 군사들이 먼 곳에 가서 싸우는 것을 싫어한 끝에, 도리어 흉악한 음모를 꾸며 형대원(邢大元)과 조인(趙仁)을 맹주(盟主)로 추대하고는 노령(蘆嶺)을 근거지로 난동을 일으키다. 이윽고 본군(本郡)으로 군사를 돌이키고 향사당(鄕射堂)과 형옥(刑獄)을 불태우매, 군수 김예국(金禮國)이 단신으로 탈출하여 이광에게 달려가서 고하였다. 이광은 병사(兵使)에게 군령을 전달하여 군사를 전진시켜 토벌해서 잡으라 했는데, 그때 마침 담양 부사(潭陽府使) 이경린(李景麟)이 군사를 거느리고 전주로 가다가 반란을 일으킨 백성들한테 추격을 당하여 담양의 군사도 무너져 버리다.
19일. 이광이(李洸)이 전주(全州)로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길을 나누어 서울로 향하다. 군사 5만여 명은 이광이 통솔하였는데 전주 부윤과 나주 목사(羅州牧使) 등 수령 20여 명을 거느리고 익산(益山)으로 해서 충청도에 있는 내포(內浦)를 지나면서 진군하고, 군사 4만 8천여 명은 방어사 곽영(郭嶸)이 통솔하였는데 조방장 이지시(李之詩)와 김종례(金宗禮) 및 남원 부사(南原府使) 등 20여 명을 거느리고 여산(礪山)을 거쳐 충청도의 대로(大路)로 해서 진군하여서, 모두 진위(振威)에서 만나기로 약속하다. 김수(金睟)도 이광을 따라 내포로 향하다.
○ 본도 군량 수송의 수량은 감사의 분부에 따라 각 관아에서 인부 두 사람에 한 바리, 품관(品官)은 8명에 한 바리, 교생(校生)은 8명에 한 바리씩으로 한 것들과 공(功)을 세우려고 자진해서 군량 수송에 응모한 짐바리, 그리고 각 지방 관아의 수령과 여러 장병들의 개인적인 짐바리 등, 이루 헤아릴수 없이 많아 길에 잇달아 있다.
20일. 남원(南原)ㆍ구례(求禮)ㆍ순천(順天)의 군사 8천여 명이 전주(全州)에 와서 참전하다가 일시에 흩어져 마구 찌르는 창에 죽은 자들이 퍽 많았다. 이광(李洸)의 군관 옥경조(玉景祚) 등이 칼을 뽑아 후퇴하는 자들을 베어 죽이자, 무너져 가던 군사들이 옥경조를 에워싸고 전주까지 와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남원 부사 윤안성(尹安性)은 판관 노종령(盧從岭)에게 영(令)을 전하여, 흩어진 군사들을 타일러 모아 보내라고 했고, 구례 현감 조사겸(趙士謙) 등은 직접 본읍에 돌아가 군사들을 불러 모은 다음, 달려 돌아가서는 은진(恩津)까지 이르렀다. 전주ㆍ광주(光州)ㆍ나주(羅州)의 군사가 용안(龍安)에 도달해서 역시 일시에 흩어지자 수령 등이 길에서 불러 모아 봤지만, 무너진 군사들을 한데 모을 수는 없었다. 이광 역시 길에서 머뭇거리곤 하여 전진하기를 꺼리는 기색이 많았다.
○ 병사(兵使) 최원(崔遠)이 남원(南原)으로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순창(淳昌)으로 향했는데, 반란을 일으킨 군졸을 토벌하려는 것이다. 그는 우선 남원 판관 노종령을 시켜 달려가 실정을 탐지케 했는데, 김예국(金禮國)이 이미 조인(趙仁) 등을 잡아서 죽여 버렸는지라, 나머지는 다 불문에 부쳤다.
○ 김성일(金城一)이 함양(咸陽)으로부터 산음(山陰)에 도착하니, 현감 김낙(金洛)이 김성일에게 환아정(換鵝亭)에 사관(舍館)을 정해 주고 다반상[茶盤]을 대단스럽게 차려드렸다. 그러나 김성일이 변색을 하고 김낙을 불러 책망하기를, “이 같은 성찬은 신하로서 오늘날 차마 먹을 수 없는 것이다. 먹는다 해도 목구멍에 넘길 수 없다.” 하니, 김낙이 부끄러워하며 사죄하고 물러갔다. 산음현 사람 오장(吳長), 의령(宜寧) 사람 이지(李旨), 단성(丹城) 사람 김경근(金景謹) 등이 모두 칼을 집고 김성일을 찾아뵈니, 김성일이 오장 등에게 말하기를, “제군이 은근하게 찾아왔으니 반드시 기이한 계획이 있을 것이다.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자.” 하였다. 김경근이 말하기를, “김수(金睟)를 목 베지 않으면 대의를 펴고 나라를 회복하는 공을 이룩할 수 없습니다.” 하니, 김성일이 웃으면서, “부질없는 소릴. 일을 성사시키지는 못한다.” 하였다. 김낙이 군사를 모았는데 8백여 명에 달하였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흉악한 왜적이 진해(鎭海)ㆍ고성(固城) 등지를 불태워 재물을 없애버리니, 본도 우수사 원 균(元均)이 퇴각하여 남해(南海)의 노량(露梁)에 진을 치고 전라도의 수군에 구원을 청하다. 적병이 진주(晉州)로 향한다고 떠들썩하자, 목사 이경(李璥)과 판관 김시민(金時敏)은 지리산에 숨어 피하였다. 김성일이 이 소식을 듣고, 본주(本州 즉 진주)에 달려가니, 경내(境內)는 싹 비어 있었다. 판관은 김성일이 진주에 온다는 말을 듣고 나와서 기다렸으나, 이경은 병을 칭탁하고 나오지 않았다. 김성일이 명령을 전하여 나오라 했는데, 이경은 등창이 발작하여 죽었다. 김성일이 김시민에게 영을 내려, 수천 명의 군사를 정돈하여 가지고 부대를 나누어 성을 지키게 하는 한편, 전 군수 김대명(金大鳴)을 소모관(召募官)으로, 손승선(孫承善)을 수성유사(守城有司)로, 허국주(許國柱)와 정유경(鄭惟敬)을 복병장(伏兵將)으로, 하천서(河天瑞)를 군량 책임자로, 강기룡(姜起龍)을 병기 책임자로 하였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적병이 고성으로부터 사천(泗川)에 와 머무르면서 진주를 범하려 하자, 김성일이 군관 중에서 용맹하고 건장한 자 10여 명을 시켜 강을 건너가 쳐서 쫓으니 왜적이 곧 퇴각하였다. 다시 군사를 나누어 사천의 성 밑까지 진격해 들어가서는 그들의 나무하고 물 긷는 길을 끊어버리자, 왜적은 퇴각하여 고성으로 돌아갔다. 또 전 군수 김대명(金大鳴)을 도소모관(都召募官)으로 하여 생원(生員) 한계(韓誡)ㆍ정승훈(鄭承勳)과 함께 군사 6백여 명을 모집하여 고성의 의병장 최강(崔堈) 등과 합병(合兵)해 가지고 혹은 유인하기도 하고 혹은 매복했다가 야습하게 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왜적의 무리가 무너져 웅천(熊川)ㆍ김해(金海) 등지로 향하였다. 김대명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창원(昌原)의 마산포(馬山浦)로 들어가서 진을 쳤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각 도 사림(士林)들의 의병을 일으키는 격문이 빈번하게 나돌다. 이때부터 국가의 명맥에 활발한 기세를 얼마간 떨치게 되었다.
○ 경기 감사 권징(權澄)의 통서(通書)에, “평의지(平義智)가 조선에 온 것은 실은 모반한 백성들이 군사를 청한 데서였다. 그런데 수길(秀吉)에게 군공(軍功)을 보고할 때 모반한 백성들이 번번이 억눌리고 깎여 내리게 되자 분한 마음을 품게 되어 평의지를 쳐 죽이고 이때의 거짓 소문이 대부분 이러한 따위다. 모반한 백성들과 왜적이 두 군으로 나뉘었으니, 오래 가지 않아서 틀림없이 자연 무너져 흩어질 것이라 한다. 우리나라 한 대장이 겨우 1백여 명을 거느리고 모화관(慕華館)에서 왜적과 교전하여 꽤 많은 자들을 목베고 사로잡았는가 하면, 왜적은 북쪽으로 퇴각하여 신문(新門)으로 해서 들어가는데 먼저 들어가려고 다투다가 서로 죽인 것이 또한 많았다고 한다. 또 왜적의 장수 한 사람이 임진강을 건너려 하자, 김명원(金命元)이 강의 요지를 지키고 있어 많은 자들이 편전(片箭)에 맞아 왜적들이 건널 수 없었고, 왜적이 배 두 척을 구하여 그 군사들을 가득 실었는데 강 복판에서 뒤집혀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하였다.
○ 서울에 머무르고 있는 대부대의 왜적이 하루는 사람을 죽여서 시위하라는 영을 내리자, 동대문으로부터 남대문에 이르기까지 반식경에 쓰러진 시체가 길에 가득 차고, 왜적에게 항복하고 부동(附同)한 백성이 채 도망가지 못한지라, 피바다와 살더미의 참상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루가 지나서야 중지시켜 다시 살육을 엄금하고 각 문에다 방을 내걸기를, “남자는 농사에 힘써 자기 생업에 안정하고, 여인은 누에고치 길쌈을 일삼아라.” 하고, 또 강원도와 경기도에 글로 고시하기를, “대왕(大王)은 이미 도망갔고 중국도 지금 일본에 예속되었으므로 사자[使价]를 보내 각 도를 다스리려 하니, 나라의 선비들 및 촌 백성들이 일본에 복종하기를 전대(前代)에 복종한 것 같이 함에 어찌 이론(異論)이 없겠는가? 그러나 지금 군현(郡縣)의 관창(官倉)에 있는 미곡ㆍ옥백(玉帛)ㆍ사마(絲麻) 등은 흩어 없애지 말아야 한다. 또 모(某) 목사[牧主]ㆍ모(某) 현감이며, 백성 남녀들도 역시 아무데나 가지말고 사자를 섬기기를 바란다. 이 점 유의하라. 천정(天正 당시의 일본 연호) 임진년 월 일, 풍신수가(豐臣秀家)ㆍ행정(行貞)ㆍ길성(吉城) 등이 양도(兩道)의 이(吏)ㆍ호(戶)ㆍ예(禮)ㆍ형(刑)ㆍ공(工)의 백(伯 즉 그 관계 책임자를 말함) 등에게 부치노라.” 하였다. 흉악하고 해괴한 말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만 대를 두고도 잊을 수 없는 일이다.
○ 삼도(三道)의 해군 함대[舟師]가 가덕도(加德島) 앞바다까지 왜적을 추격하여 크게 이기다. 이에 앞서 경상 우수사 원균(元均)은 왜적들이 여러 성을 연달아 함락시켰다는 소식을 듣고 해군 함대를 이끌고 가덕도로 향했는데, 왜적의 배가 바다를 덮고 있는 것을 보자 마침내 퇴각하여 돌아오고, 여러 장수들도 점점 흩어져 가버렸다. 원균은 아군의 전함을 다 침몰시키고는 육지에 올라가서 왜적을 피하려 하였으나, 옥포만호(玉浦萬戶) 이운룡(李雲龍)이 안 된다고 하여 마침내 중지하였다. 원균이 이운룡 등의 몇 척의 배와 함께 노량(露梁)에 퇴각해 있는데 적병이 뒤따라 좇아오자, 이운룡이 전라도의 해군에 구원을 청하고자 곧 작은 배 하나를 타고 달려갔다. 그런데 당시 전라 좌수사 이순신(李舜臣)과 우수사 이억기(李億祺)가 해군 함대를 거느리고 좌수영(左水營) 앞바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척후병(斥候兵)이 외쳐 보고하기를, 작은 배 한 척이 와두해(瓦頭海)로부터 달려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급히 척후선을 시켜 물어본즉, “경상도 옥포만호 이 모요. 적병이 가득히 몰려와 여러 진(鎭)이 와해됐소. 우수사 원 모가 힘으로 지탱하지 못해 퇴각하여 노량을 지키고 있는데, 흉악한 왜적이 뒤쫓아 와서 이미 사천(泗川)과 남해(南海) 바다에 가득 차 있소. 전라도의 함대가 그 선봉을 격파하여 주기 바라오. 그렇지 않으면 영남의 바다는 끝장이 나고 화가 호남으로 닥쳐올 날이 멀지 않을 것이오. 장군께서는 이 점을 숙고하시오.” 하였다. 이순신 등이 그 말을 듣고는 다들 놀라서 서로 돌아보는 것이었다. 광양 현감(光陽縣監) 어영담(魚泳湛)이 그때 여러 장수 중의 한 사람으로 진중에 있었는데, 여러 장수들이 서로 미루고 칭탁하는 것을 보자 팔뚝을 걷어올리고 크게 소리치기를, “영남은 왕의 땅이 아닌가. 이 왜놈은 나라의 적이 아닌가. 영남 바다의 여러 진이 이미 다 함몰되고 단지 몇 척의 배만이 우리 경내에 와서 정박해 있으며 저 사나운 왜적이 요량없이[匪茹] 이미 그 뒤에 와 있다는데, 우리가 한 도의 완전한 군대를 가지고 여기서 관망이나 하면서 구원을 청하는 말을 듣고도 걱정 않고, 왜적이 온 것을 보고도 마음이 태연한 채 앉아서 영남 바다의 군사를 오늘 다 없어지게 만든다면, 내일의 일을 어떻게 처리하겠는가. 남의 위급한 것을 구해주지 않고 우두커니 앉아서 왜적을 기다린다면 겁 많고 나약한 게 아니오. 장군께서 헤아려 하시오.” 하니, 여러 장수들은 이 말을 듣고 모두 그를 질시하였지만, 이순신은 대답하지 않고 생각에 잠겨 밤을 지냈다. 이튿날 새벽, 이순신이 장병들을 모아 놓고 어영담을 불러다 말하기를, “광양 현감은 영남을 구원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는데, 나도 생각해 보니 역시 이치가 있는 말이다. 그러나 영남 바다에서의 왜적 토벌은 반드시 노량에서 끝나는 것은 아닐텐데, 깊고 먼 물길을 시험해 본 사람이 없으니 이 점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하니, 어영담이 말하기를, “그것은 내가 맡겠소이다. 나를 선봉으로 삼아 주기 바랍니다.” 하자, 이순신이 기뻐하면서, “광양의 말에 따라 분부하겠다.” 하고, 곧 장군기를 세우고 소라를 불며 대포를 터뜨리고서 어영담을 선봉으로, 방답귀선장(防踏龜船將) 신여량(申汝良)을 척후로, 순천 부사(順天府使) 권준(權俊)과 가리포 첨사(加里浦僉使) 구사직(具思稷) 등을 중위(中衛)의 좌ㆍ우장으로 하고는 이억기(李億祺)의 군함과 합세하여 노량으로 향발(向發)하여 원균과 만나기로 했다. 먼저 떠난 배가 광주(光州)의 바다에 이르자, 왜적의 배 5, 6척이 노를 바삐 저어 퇴각했다. 아군이 이들을 쫓아가자 그 배들에 탔던 왜적은 육지로 올라가서 달아났다. 아군이 그 배들을 다 부숴버리니 아군의 군졸들은 기운이 났다. 날이 저물어 배를 돌려왔다. 이튿날 새벽, 또 영남 바다로 향하여 견내량(見乃梁)에 도착하였는데, 적선들이 바다를 덮고 와서 척후장 신여량은 이미 왜적에게 포위되어 있으면서 부채를 흔들어 뒷 군사들에게 물러가라고 신호했다. 이순신은 바다가 좁은 것을 보고 느릿느릿 퇴각하여 여러 배들이 차례로 나왔고, 이 억기는 이미 주도(柱島) 밖으로 달아나 있었다. 방답첨사(防踏僉使) 이순신(李純信)이 큰 소리로, “사또는 왜 우리 두 배의 장수만을 버리고 갑니까?” 외쳤으나, 이순신(李舜臣)은 대답하지 않았다. 적병은 아군이 후퇴하는 것을 보자 급히 노를 저어 쫓아왔다. 한산도(閑山島) 큰 바다에 이르렀을 때, 이순신은 소라와 나팔[角]을 불게 하여 일시에 기를 흔들고 함성을 지르며 배를 돌려 왜적과 맞붙어 싸웠다. 이억기도 노를 재촉하여 뒤따라 와서, 허다한 배들이 다 천지현전(天地玄箭 화살 가운데 천ㆍ지ㆍ현의 세 종류가 있음)을 발사하여 총소리가 바다를 뒤흔들고 연기와 불길이 하늘에 가득 찼다. 접전한 지 얼마 안 되어 적선은 다 침몰되고 왜적은 불에 타고 물에 빠지고 하여 죽은 자가 부지기수였으며, 목을 벤 것만도 1백여 급이나 되었다. 그 이튿날, 어영담이 계속 선도(先導)가 되어 진해(鎭海) 바다를 거쳐 거제(巨濟)에 이르렀다. 당항포(唐項浦)ㆍ진도(珍島)의 배와 남도포(南桃浦)의 배가 앞서 가다가 왜적의 복병선(伏兵船) 2척을 만나 접전했는데, 왜적이 패배하고 육지로 내려 달아나자 그 배들을 불태워 버렸고, 이어 왜적의 배 25척을 만나 접전했다. 이달 5일, 삼도(三道)의 여러 배들이 합동으로 공격하여 왜적의 함대를 쳐 없애고 술시(戌時 지금의 하오 8~11시 동안의 시간을 말함)에 가서야 끝냈다. 6일, 경상 우수영의 전함이 전라도 보성(寶城)의 배와 합동으로 왜적의 큰 배 2척을 공격하여 불태워 없앴다. 그 이튿날, 왜적의 배들이 율포(栗浦)에서 떠나 일본으로 향하는 것을 삼도의 해군이 가덕도 앞바다까지 쫓아 갔는데, 적병은 우리 배들이 돌진하는 것을 보자 배를 돌려 우리 배들을 맞아 싸웠다. 소라 소리가 한 번 울리자 총통(銃筒)을 일제히 발사하였고 화살과 돌이 뒤섞여 쏟아지며, 섭불[薪火]을 요란하게 던지니 함성이 바다를 진동시키고 연기와 불길은 하늘에 가득 찼다. 왜적의 배가 부서진 것이 1백여 척이고, 불에 타고 물에 빠지고 하여 죽은 자가 무수하였으며, 수백 급의 목을 거두었다. 그 가운데 큰 배가 한 척 있었는데, 층루(層樓)가 마련되어 있고 그 높이는 3, 4장(丈) 가량에 10여 명을 앉힐 수 있었으며, 밖에는 붉은 깁 휘장이 드리워져 있고 안에는 금은으로 장식된 병자(屛子)가 있어 생김새가 퍽 견고하여 쳐부수기 어렵게 만들어진 것으로, 이는 바로 왜적의 주장(主將)이 탔던 배였다. 그 배 안에서 금색의 둥근 부채 한 자루를 얻었는데, 한쪽 면의 중앙엔 ‘6월 8일에 수길이 서명함[六月八日秀吉着署]’이라고 씌어 있었으며, 그 오른편에는 ‘우시 축전수(羽柴筑前守)’의 5자가, 왼편에는 ‘타정류류수전(鼉井流流守殿)’의 6자가 씌어 있었다. 이것은 아마도 수길이 축전수에게 표신으로 준 물건일 것이고, 그 배에서 목 베인 왜장(倭將)은 바로 축전수였을 것이다. 원균의 배들은 비록 그 수효는 적었지만 돌격을 잘했다. 이순신의 배 형상은 거북이 같았으며 위에 지붕 판자를 덮어 씌우고 두루 쇠못을 박았는데, 그것이 뾰족하고 날카로워 범접하기 어려웠고 또 퍽 견고하고 빨라서 전투에 나가기 편리했다. 거기다 어영담의 귀신 같은 지도(指導)를 얻어 전후의 전공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군영에 돌아와 장계를 올려 전후의 전승을 알렸다. 어영담은 경상도 함안(咸安) 사람으로 대담한 군략이 세상에 뛰어나고 유달리 강개하였으며, 과거하기 전에 이미 여도(呂島)의 만호가 되었고 급제 후에는 영남 바다 여러 진의 막하에 있었다. 그리하여 바다의 얕고 깊음과 도서(島嶼)의 험하고 수월함이며, 나무하고 물 긷는 편의와 주둔할 장소 등을 빠짐없이 다 가슴속에 그려 두었기 때문에, 해군 함대가 전후에 걸쳐 영남 바다를 드나들며 수색하거나 토벌할 때면 집안 뜰을 밟고 다니듯이 하여 한 번도 궁박하고 급한 경우를 당하지 않았던 것이다. 대체로 해군 함대의 전공은 어영담이 가장 높았는데도 단지 당상관에 올랐을 뿐, 선무훈(宣武勳)에는 참여하지 못하여 남쪽 사람들은 다들 애석히 여겼다.
○ 경기도 수원(水原)에 주둔한 왜적이 글로 고시하기를, “지난 20일 일본에서 사람을 서울로 보내 이 친구를 보내게 했다. 저 일본 사람이 길에서 조선 사람이 머리를 채취하는 것을 물은즉 그 이튿날 목을 벤 사람을 내놓고 그 수효를 세었다. 이것은 악한 사람이 한 짓이다. 또 조선 사람에게 기식(寄食)하던 5명을 사로잡았는데 그 가운데 4명에게는 사형을 집행했고 남은 한 사람은 명 나라를 다루는 계략에 통해서 사형을 집행하지 않고 지나가게 해준 것이다. 이 자가 양성부(陽城府)에 있는 거처로 돌아가는 것을 물어서 양성의 촌 백성이 그를 집에 돌려보내 주었다. 풍신행정(豐臣行貞)이 서울에서 수원으로 보내졌는데 그가 수원에 체류하는 동안 장군 수종(秀宗)이 지령서를 주어 이르기를, ‘백성 남녀는 집으로 돌아가게 할 것. 수원군을 예로 취하고 단속하라.’ [去二十日日本差人至京城使托差越斯友朋彼日本人於道問朝鮮採首則明日出人數右惡人打果又生擒寄食五人中四人行死罪一人者此通爲明計差過也此者問在陽城府居歸云陽城村氓爲歸家豐臣行貞從京城差越水原滯留之間將軍秀宗任旨書百姓男女令歸宅者水原郡禮取可束] 하였다.” 하다. 글 뜻이 알아보기 힘들어 재록할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것 역시 왜란 중에 일어난 한 가지 일이기 때문에 써둔다.
○ 서울에 머물러 있는 왜적이 선릉(宣陵)ㆍ정릉(靖陵) 두 능을 파내다. 선릉은 성종(成宗)과 정현왕후(貞顯王后)의 능이고 정릉은 중종(中宗)의 능이다. 진실로 이 왜적은 만세를 두고 잊어서는 안 되겠다.
○ 왜적의 장수 평행장(平行長)과 의홍(義弘) 등이 임진강을 건너고 신힐(申硈)이 이 싸움에 죽었으며, 김명원(金命元)ㆍ이빈(李薲) 등이 패하여 관서(關西)로 달아났다. 애초에 의지(義智) 등이 10여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임진강에 쇄도해서는 강에 방비가 있음을 알자 산골짜기에 군사들을 숨겨 두고 매일같이 약하게만 보였다. 신힐(申硈)은 왜적의 무리들을 엉성하게만 보고서 군사를 거느리고 강을 건너니, 잠복했던 왜적들이 사방에서 일어나 함성을 지르면서 닥쳐 오는 소리가 하늘에 치닿는 듯하고 그 형세가 바람에 불길 같아서, 손쓸 사이도 없이 혹은 칼에 맞아 죽고 혹은 물에 몸을 던지고 하여 한 사람도 빠져 나가질 못했다. 신 힐 역시 강물에 빠져 죽고 강을 수비하던 군사들도 일시에 놀라 흩어져 버렸다. 전 수사(水使) 유극량(劉克良)은 원수별장(元帥別將)으로 군에 있었는데, 그는 왜적의 모략을 염탐해 알았으므로 신힐에게 건너가지 말기를 청했지만 신힐은 그를 늙은 겁쟁이라고 나무라며 몰아세우고는 강을 건넜던 것이다. 마구 찍어댈 때에도 유극량은 조금도 자기 부서를 떠나지 않고 힘을 다해 싸우다 죽었다. 원수 종사관 홍봉상(洪鳳翔)도 원수에게 관광(觀光)의 일을 고하기 위해 강을 건넜는데 왜적이 마구 몰아댈 때 역시 물에 빠져 죽었다. 애석하다. 홍 종사는 양을 따라 범떼 속으로 들어갔으니 사람들은 쓸데없는 죽음을 당했다고 나무라지마는 소문만 듣고 달아나는 것보다는 나았다.
○ 피난하는 사람들은 각기 가깝고 편리한 대로 피난했다. 영남의 좌도 사람들은 산으로 들어 간 외에는 다 영동(嶺東)으로 들어가고 우도 사람들은 전라도로 넘어 들어갔으며, 호서 사람들 역시 그렇게 하고 경기 사람들은 다 강화(江華)ㆍ아산(牙山) 등지로 들어가다. 계사년(1593, 선조 26)에 왜적이 물러간 후 고향에서 살아갈 길이 없자 있던 곳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는데, 계사년과 갑오년(1594, 선조 27)에 사람이 서로 잡아먹는 변고를 빚게 됐다.
○ 김해ㆍ동래(東萊) 등지의 사람들은 다 왜적에 붙어서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며 여인을 더럽히고 하였는데 왜적보다 심하였다. 김해의 경우에 도요저(都要渚) 마을은 낙동강 연변의 큰 고장인데, 왜란 초기부터 왜적에 붙어서 도적질을 하고 혹은 지난날의 원수를 갚기도 했다. 한 서원(書員)은 일본에 들어가서 전세(田稅)를 마련하느라고 혹 뱀을 잡아다가 그 세미(稅米)에 충당하기도 했으니, 왜인이 천성으로 뱀 먹기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창원(昌原)의 왜적은 전라 감사를 자칭했고, 향리(鄕吏) 현호준(玄虎俊)은 전라 감사의 배리(倍吏)라 자칭하여 선문(先文 관리 출장의 도착일을 미리 알리는 공문)을 발송하기도 하다. 본도의《순영록》에 나온다.
○ 경상도를 나누어 좌ㆍ우 순찰(巡察)을 두었는데, 이성임(李聖任)을 좌순찰로 했다. 당시 적병이 경상 좌우도에 가득 차 있어서 호령이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어명이 내린 것이다.
○ 초유사(招諭使)가 다음과 같은 통유문(通諭文)을 내다.
해적이 도량(跳梁)하여 우리 성지(城池)를 공격하여 함락하고 우리 생령(生靈)을 도륙하였으며, 동서로 충돌하면서 무인지경을 들어오듯 하였으나, 67읍 중에서 한 사람도 충의를 제창하여 군사를 일으켜서 나라의 치욕을 씻은 자가 없었고 우두커니 앉아서 온 고장[道]을 왜적의 손에 넘어가게 하였습니다. 종묘 사직은 깃술[綴旒]보다 위태롭게 되었고 정기(正氣)라곤 쓸은 듯이 없어져 국토[山河]엔 수치만이 안겨 있으니, 무릇 혈기를 가진 자라면 누군들 통분히 여기지 않겠습니까. 본관은 어명을 받들고 이 땅에 와서 눈물을 뿌리고 주먹을 불끈 쥐면서, 이 왜적과 한 하늘을 함께 이고 살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여러 읍이 무너져 달아난 끝에 병력은 이미 꺾여진 터인지라 빈 주먹을 뻗고 흰 칼날을 무릅쓰면서 홀로 서서 분개하는 것입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귀하는 여염에서 분발하고 일어나 의병을 불러모아 가지고 강중(江中)에서 왜적의 배를 섬멸하여 의병의 명성을 한 고장에 날려 사람마다 기운을 돋구었다 하니, 선대부(先大夫)께서 훌륭한 자손을 두었다고 하시겠습니다. 그 뜻을 끝까지 관철하기에 힘쓰고 의병을 더욱 확장하여 역내(域內)에서 돼지 같은 왜적들을 죽이고 백성들을 도탄 속에서 구출하여, 위로는 임금의 원수를 갚고 아래로는 충효의 가문을 빛낸다면 또한 통쾌하지 않겠습니까. 본관이 비록 노둔하고 졸렬하기는 하나 충의가 천성에 뿌리박고 있으니, 한 번 죽어 나라에 보답하는 일에 있어서는 감히 남에게 뒤지지 않습니다. 동지를 규합하여 의열(義烈)로써 그들을 격려한 다음 족하(足下)들과 더불어 좌우로 제휴하여 함께 하늘을 받치고 태양을 맑히는 공을 이룩하기 원하고 있습니다만 귀하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살아서는 충의로운 선비가 되고, 죽어서는 충의로운 귀신이 되는 일이니 귀하께서는 노력하십시오. 의령(宜寧)의 곽 의사(郭義士)께 내림.
○ 평의지가 송도를 함락하고 다시 해서의 여러 고을을 함락해서 깡그리 불타 없어지다.
○ 조정이 서경(西京 평양)에 이르러 행차를 멈추고[駐蹕] 광해군(光海君)을 세자로 책봉한다는 교서를 팔도에 반포하다.
조종이 창업해 놓은 기업(基業)에 자리잡고 편안하게 지내느라 위험이 닥쳐올 일을 잊고 있다가 이미 전쟁의 핍박에 직면해 버린 이때 원량(元良)을 왕세자로 하고 신민들의 기대에 부응하노라. 왕위가 비록 불안하긴 하지만 난시(亂時)라 하여 어찌 경사를 잊겠는가. 이에 파천길을 옮겨야 하는 날에 즈음하여 널리 고유(告諭)하는 글을 선포하노라. 못난 이 몸이 명철하지 못하여 국가의 다난한 때를 만났다. 25년 동안 조심하고 두려워하면서 스스로 내 마음을 다하려 하였으나, 억만의 생령이 나를 떠나 버리니 앞으로 닥쳐올 백성의 원망을 어찌하리오. 다행히 이번에 인지(麟趾 세자를 가리킴)의 노래를 널리 폄은 실로 조종의 가호(加護) 있으심에 힘입은 것이로다. 백성을 무육(撫育)하는 방법에는 비록 부끄러움이 있지마는 왕세자를 세우는 것은 마땅히 일찍 해야 되는 줄로 생각하노라. 책봉의 예(禮)는 근엄하게 해야 한다는 한신(漢臣)의 장주(章奏)가 한갓 잦았거니와 날짜를 오래 늦추면 범진(范鎭)의 머리털이 허옇게 돼버린다. 다만 이 야만 오랑캐의 외침(外侵)이 마침 국내(國內)가 어지러운 틈을 타고 빚어져, 수도를 침범하고는 사방으로 파급되어 여러 성의 장벽이 일제히 무너졌다. 재앙이 내 신변에까지 다가와 칠묘(七廟)의 의관(衣冠)이 옮겨졌으니 나라의 운명은 다급하고 인심은 두려워하기만 한다. 내 어찌 양위(讓位)를 부질없이 고집하겠는가. 이때야말로 세자를 정하는[定本] 일을 서둘러야 할 시기인 것이다. 둘째 아들 광해군 혼(琿)은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고 명철하며, 학문은 정밀하고 민첩하며, 어질고 효성스러움이 일찍부터 드러나 오랜 동안 억조 백성들의 촉망을 받아 왔고, 그들은 또 그의 덕을 구가(謳歌)하면서 그에게 귀의(歸依)하기를 생각하여 왔으니, 그는 선왕의 왕위를 계승할 만하다. 이에 그를 세자로 진봉(進封)하고 인하여 그로 하여금 군사를 위로하고 나라를 감독하게 하노라. 이 일이 비록 창졸간에 거행되는 것이기는 하나 그 계획은 사실 전에 정해진 것이니 모든 백관(百官)들은 내가 우연히 그렇게 했다고 말하지 말라. 나라의 근본이란 본래 급작스러이 처리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번에 평양에 와서야 비로소 중외(中外)에 반포하게 되었다만, 전에 서울에서 이미 모든 백관의 축하까지 받았던 것이다. 온 나라 안[關中]에 소해(小海)의 은택이 미쳐 있고 길에서는 전성(前星)의 광휘(光輝)가 바라보인다. 황천(皇天)도 우리 조종을 보우하는데 사직(社稷)인들 어찌 한쪽 구석 땅에서 편안하겠는가. 적의 혼이 이미 가 버리자 한강의 바람과 물결이 맑아지기 시작하였고, 관군이 분발하려 마음먹자 우리 진터가 확청(廓淸)되어 간다. 용루(龍樓)에 문침(問寢)하는 예절이 갖추어질 것이고, 학금(鶴禁)은 구도(舊都)의 위의를 회복할 것이다. 아! 신민은 내가 고하는 뜻을 살펴 알아서 태자를 위해 죽음을 바치고 나 한 사람의 수치를 남기지 않게 하기를 원하노라. 성심으로 널리 고하니, 너희들은 다 나와서 들어 보아라. 아! 큰 강을 건너는 데 그 나루터조차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는 것과도 같구나. 어려움을 구출하기 위해 원자(元子 즉 왕세자)를 공경스러이 보호하라. 현명한 계승자를 택하여 세움으로써 사람들의 기대에 따른 것이다. 후일의 승평(昇平)은 실로 오늘의 이 일에 말미 암는 것이다.
○ 경상도 영천(永川) 사람 진사(進士) 정세아(鄭世雅), 신녕(新寧) 사람 봉사(奉事) 권 응수(權應銖), 하양(河陽) 사람 봉사 신해(申海), 고성(固城) 사람 봉사 최강(崔堈)이 다 군사를 모집해서 왜적을 토벌하다. 정세아가 그때 나이 67세였다. 왜적이 막 본성(本城)을 점령하고 있었는데, 정세아가 좌수(座首) 유몽서(柳夢瑞), 생원(生員) 조희익(曹希謚) 등과 더불어 흩어진 군사들을 불러 모아 가지고 왜적을 잡아 목 벤 것이 무척 많았다. 그 후 성을 회복하고 큰 승리를 거둔 것은 다 정세아 등이 먼저 나서서 일한 힘이었다. 권응수는 애초에 수영(水營)의 군관으로 자제와 노복을 거느리고 상도(上道)의 토적(土賊)을 목 베어 죽이기도 하였고, 요로에다 군사를 잠복시켜 흩어져 다니는 왜적들을 목 베어 죽이기도 하였으며, 장정들을 모집하여 혹은 요격(邀擊)하고 혹은 추격하곤 하여 일찍이 두려워하고 피한 적이 없었고, 누차 습격도 당했으나 말[馬]이 씩씩하였기 때문에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초유사가 그를 의병대장으로 하였던 것이다. 최강은 젊어서부터 글을 해득했고 늦게야 무과에 급제하였다. 담(膽)이 커서 무인이 승진 청탁 따위를 하는 짓을 수치스럽게 여겼고, 한편 성질이 강직해서 자기 뜻을 굽혀서 남에게 따르질 못했다. 이때에 와서 군사를 일으켰는데 군사는 비록 적었으나 그들한테서 인심을 얻었으며 전투에 당해서는 자신이 앞장서서 싸워 정기룡(鄭起龍)ㆍ안신갑(安信甲)과 함께 명성을 나란히 하였는데, 많은 사람을 통솔하는 재주에 있어선 이들보다도 나았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운봉 현감(雲峯縣監)이 다음과 같이 치보(馳報)하다.
이번 5월 24일 자시에 도부(到付 문서가 도착한 것)한, 5월 23일 진주(晉州)에서 성첩(成貼 책임자가 문서에 서명하여 그 문서의 효력을 발생하게 하는 것)한 경상 초유사의 비밀 전통(傳通 차례로 서로 전하는 통문)에 말하기를, “당일 창원(昌原)에 사는 황봉찬(黃奉贊)의 종 침향(沉香)이 본 부사(府使)에 현납(現納)한, 퇴로한 호장[戶長] 황중명(黃仲明)이 5월 22일에 성첩하여 고목(告目)한 속에, ‘본부(本府)에 머물러 진수(鎭守)하고 있는 왜인은 2백여 명이나마, 늘 동리에 왜적이 혹 백여 명이 떼를 지어 횡행하고 미포(米布)와 잡물(雜物)을 깡그리 가지고 갈 뿐 아니라, 이달 22일 김해에서 온 왜적의 말에 의하면 당일 부(府)에 들어와 9백여 명을 받아들여 사용하며, 전라감사ㆍ어사ㆍ도사ㆍ찰방 네 행차의 칭호로 그 도에 나갔다 오고 또 부중(府中)에 머물러 있기도 하며, 함안(咸安)ㆍ의령(宜寧)ㆍ삼가(三嘉)ㆍ단성(丹城)ㆍ산음(山陰)ㆍ함양(咸陽)ㆍ운봉(雲峯)ㆍ남원(南原)ㆍ임실(任實)ㆍ전주(全州)에 선문(先文 출발하기 전 먼저 도착 일자를 알리는 글)을 내어 그곳을 향해 갈 것을 차례로 전통하였고, 동 행차의 배리(陪里) 현호준(玄虎俊), 마두(馬頭) 이녹상(李祿祥)이 당일 배행(陪行)할 것을 예정하고 계획하였다가 어제 비가 내려 오늘 떠나는 것이라고 하며, 다른 왜적은 혹은 웅천(熊川)의 길로 해서 혹은 김해의 길로 해서 혹은 백여 명 혹은 50여 인이 잇달아 부에 들어가고 혹은 서울로 올라간다.’ 고 고목이 되어 있으니 참고할 것이며, 왜적의 선성(先聲)은 믿을 수 없다고는 하나 우리나라 노리(老吏)가 방금 왜적 가운데서 왜적이 하는 바를 본 것이 이러하니, 이 고목과 같다면 왜적이 전주로 향해 가는 계획은 거짓이 아닌 것 같은데, 호남의 장병들은 쓸은 듯이 내지(內地)에 근왕하러 갔으니 극히 우려된다. 차례로 전통하여 방비하고 조치하여 날마다 새로이 변란에 대비하되, 본도의 순찰사와 좌우 수사가 있는 곳에 모두 치보하여 앞의 일을 전통할 것이다. 이것 역시 함안의 가장(假將) 이향(李享)이 진고(進告)한 것인데, 왜적으로 전라 감사를 칭호하는 자가 이미 함안ㆍ의령ㆍ정진(鼎津)에 도달하였다고 하였으므로 황중명의 고목이 과연 거짓이 아니니 참고하여 시행할 것이다. 이상 순찰사에 보고함.
○ 세자에게 다음과 같이 하교하다.
큰 물을 건너는 데 나루터 없어 바야흐로 배와 노로 건널 바를 계획하고, 넘어진 나무에 싹이 돋은 것 같아서 오직 나랏일을 부탁하는 데 마땅한 사람 얻은 것을 다행하게 여겨, 이에 군사와 군정의 권한을 맡겨 부흥의 대업을 이룩하기 바란다. 돌아보건대 나는 덕이 엷은 몸으로 외람되이 나라의 큰 기틀을 지켜, 음우(陰雨)가 내리기에 앞서 뽕나무 껍질을 거두는 데 경계함이 있어서 매양 깊은 밤중에 썩은 새끼줄로 말을 모는 것같이 조심하였으니 어찌 백성의 병폐를 소홀하게 하였겠는가. 그러나 어찌 생각하였으리오. 바다 섬의 추악한 오랑캐가 사람과 짐승이 본성을 달리함을 생각지 않고, 처음에는 상국(上國 명(明) 나라)에 유감을 품고 하늘을 향해 활을 당겨 쏘려 하다가 끝내는 우리나라에 앙화를 전가하여 감히 사람을 씹는 입을 움직여서, 모든 백성들을 거의 남김없이 유린하고 서울에까지 급히 충돌해 온 것이다. 칠묘(七廟)가 불타 소진되었으니 폐허가 된 데 개탄함을 견디지 못하겠고 삼궁(三宮)이 별같이 사방으로 흩어져 파천하는 어려움을 함께 하였으니, 이미 사람과 귀신의 분노가 극도에 다다랐고 섶에 누워 쓸개를 핥으면서라도 그 원수를 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은 비록 나라의 운이 불행해서라고는 하지마는, 진실로 내가 덕이 적고 어리석어 그렇게 된 것이로다. 윤대(輪臺)에서 과오를 뉘우침이 이미 심하나 백성들은 그 덕을 알지 못하고, 봉천(奉天)에서 자기를 허물함이 한갓 간절하나 말이 사람을 감동시키지 못하여, ‘어디로 돌아갈 건가’ 하는 원한은 바야흐로 깊고 깊은 물에 임하는 것 같은 두려움은 점차로 극심해지니, 제사를 주관하여 신주를 받들 중대한 자 아니면 나라를 일으키고자 하는 기대에 부응할 수 없음을 생각하노라. 세자 혼(琿 광해군)은 훤칠하고 숙성하며 그의 인효(仁孝)는 본래부터 알려져 뭇 아래 사람들이 아껴 추대하니 넉넉히 중흥의 운을 족히 찬할 수 있는지라, 사방의 사람들이 그를 구가(謳歌)하여 다들 이르기를, “우리 임금의 아들이시로다.” 한다. 왕위를 물려줄 계획은 오래 전에 결정하였고, 군국의 대권을 총수(總帥)하는 명령을 의논할 수 있도다. 이에 혼으로 하여금 임시로 국사를 섭리하게 하노니, 무릇 관작을 제배(除拜)하고 상벌을 시행하는 등의 일을 편의에 따라 스스로 결단하게 하노라. 아! 영무(靈武)의 의기(義旗)를 돌려와 이 나라의 건곤(乾坤)이 다시 열리는 것을 보게 되기를 바라거니와, 미앙궁(未央宮)의 수주(壽酒)를 놓고 부자가 다시 만나 기뻐할 때가 속히 오기를 목놓아 기다리노라. 나라 사람들은 각각 세자를 돕고 추대하는 마음을 격려하여 함께 평화를 가져오는 일을 이룩하라. 너희들 정부는 중외에 뚜렷이 일러주어 다들 이 일을 들어서 알게 하라. 그 때문으로 이에 교시하노니 마땅히 잘 알리라 생각하노라.
○ 남원 부사(南原府使) 윤안성(尹安性)이 은진(恩津)에 도달하여 본부(本府)의 선비들에게 글을 보내어 이르다.
부관(府官)이 의병을 일으키기를 위하여서로다. 현풍(玄風)에 사는 선비[士子] 곽재우(郭再祐)본래는 현풍 사람인데 지금 의령(宜寧) 처의 고향에 산다 가 왜적에게 완전히 함락된 땅에서 단지 촌락의 군사를 거느리고 재차 적병을 구축(驅逐)하여 왜적의 배가 다시는 낙동강을 건너지 못하게 하였는 바 그 의로운 명성과 높은 절조를 듣기만 하여도 모르는 결에 탄복하여 멀리서 배례(拜禮)하였다. 본도는 아름다운 풍속의 일컬어지는 것이 여러 도의 으뜸이로되 아직도 의병을 일으키는 사람이 없으므로 극히 수치스러웠는데, 듣자하니 김능성(金綾城)익복(益福)이 그때 본현을 맡고 있었다. 이 뜻을 같이 한 사람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왕업(王業)을 회복하려 한다 하는바 이로서도 족히 이곳에 인물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일 의관 자제(衣冠子弟)들의 집에 통문(通文)하고 의논하여 나라가 2백 년 동안 휴양해 준 은혜를 생각하고 한 도의 전체가 충의를 느끼는 이름을 이룩하게 된다면, 영광이 한 몸에 가해지고 은택이 만 대에 미치며, 청사에 새겨진 공명(功名)이 사람들의 보고 듣는 가운데 밝게 빛날 것이니, 급속히 거행해서 신민으로서의 도리를 다할 것이다.
○ 대군(大軍)이 서울에 다다른 뒤에 호남의 각 관아에서 남은 장정 및 품관(品官)ㆍ교생(校生)ㆍ팔결(八結)ㆍ연호(煙戶) 등의 군사들을 다 모아서 성의 방어에 대비시키다.
○ 경기도의 문신(文臣) 우성전(禹聖傳)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다.
○ 병마절도사가 통지하는 사연으로 순찰사에게 도부(到付)한 관내(關內)에, 지금 도착한 충청 감사의 관내에 전하기를, “행재소의 도로가 갑자기 막혀 소식이 통하지 않으므로 사람을 모집해서 계본(啓本)을 가지고 상경케 하였더니, 당일로 동인(同人)이 비변사(備邊司)에 가지고 관내에 하교하신 것이 있었소. 5월 9일의 강원 감사의 글에, ‘전문(傳聞)하건대, 성에 들어온 왜적은 발이 붓고 기운이 빠져 밤에는 흩어져서 곤히 잠을 잡니다. 운운.’ 하거늘, 죽기를 무릅쓰고 싸울 군사 50명을 상을 내걸고 모집하여 하늘에 고하고 함께 맹세케 하여 어두운 틈을 타서 왜적을 마구 찍어 죽이려고 8일에 성 안으로 들여보내려 했더니, 5월 8일 도검찰사(都檢察使) 이양원(李陽元)의 서장(書狀)에, ‘군관 유정언(柳廷彦)을 시켜 성 밑에 잠입하여 왜적의 기세를 엿보게 했더니, 왜적의 기세가 급히 쇠해서 낮에는 오로지 약탈을 일삼고 밤에는 흩어져서 곤히 잠자느라 우리들이 왕래하는 것도 모른다 하며, 신의 서울집 종이 왜적 가운데서 빠져 나와 말하기를, 신의 집 역시 왜적에게 약탈당했는데 왜적의 형상을 보니, 단지 단검(短劍)을 가졌을 뿐이라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포로된 자들이 반이나 섞여서 흩어져 나가 도적질을 하고, 어떤 사람이든 총이나 활을 쏘면 검을 풀고 목숨 살려 주기를 요구합니다.’ 하기에, 그 기세가 곤궁한 것이 두려워할게 못 될 듯하여 곧 50명의 군사들과 더불어 많은 상을 걸고 결속하고서 10일을 기해 성에 들어가 왜적들을 마구 찍어 죽이기로 하였더니, 5월 10일의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의 서장에, ‘왜적의 무리들은 욕기(慾氣)가 방자스러워 꺼리는 것이 없는데, 적은 수로 출몰하여 약탈하던 무리 또한 우리나라 사람에게 많이 피살되니, 우리나라 사람 중에 왜적을 보면 다들 쏘아 죽이려고 했던 자들입니다. 당초에 우리나라는 헛된 소식에 두려워 동요하여 겁내지 않는 자가 없었고, 어리석은 백성 중에는 혹 애걸하여 구차스럽게 살아날 계획을 하는 자가 생기고는 했는데, 왜적이 서울을 점거하게 되자 온갖 하는 짓들 치고 해괴하지 않은 게 없어 무릇 혈기가 있는 자는 다 그 해독을 입기에 이르렀고, 우리나라 사람으로 왜적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자들 역시 흩어져 가버렸습니다. 그 시끄럽게 외치고 드나들던 자들 치고 기운이 빠지고 발이 붇지 않은 이가 없어 호통치던 기세는 없어지고 목숨을 내놓은 도둑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전날에 두려워하던 자들은 분격하고, 살아나기를 꾀하던 자는 원망하고 성내어 다들 왜적을 무찌를 것을 생각하여서 제창으로 보복하기를 생각하는데, 서울에서 왜적에 굽혔던 무리들 역시 왜적들을 저격할 계획을 합니다.’ 하였고, 5월 10일 검찰사의 글에, ‘왜적 가운데 포로가 되었던 사람 정인(鄭仁) 등 3인을 잡았는데 그 모두가 말하기를, 「왜적으로 철환(鐵丸)을 가진 자는 4, 5인 중에 겨우 한 사람이고, 한 사람이 가진 철환의 수효는 15, 16알에 불과하다. 왜적 가운데 우리나라 사람으로 앞잡이 노릇을 하던 자가 5분의 1이 남아 있고, 여러 왜적이 동리에 갈라져 있으면서 평상시같이 숙면하면서 전혀 의심을 품지 않아서 아침에 세수를 하고서야 비로소 칼을 찬다. 장수는 대낮이 되어야 일어나고 혹은 10명씩 혹은 20명씩 모여 있으면서 별로 진을 치거나 변고에 대비하자는 생각이 없다.」하였습니다. 대개 왜적의 무리들이 재물을 얻고난 후에 소와 말을 많이 약탈해서 한강으로 보내는 걸 보니, 군사를 퇴각시킬 생각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였소. 이상의 갖가지 서장은 계하한 것이니, 이에 앞서 우리나라 인민들이 왜적의 소식을 잘못 듣고 서로 겁을 내어 싸우지도 않고서 스스로 무너졌으니 모든 것이 다 극히 통분스러운 일이오. 지금 왜적의 기세가 이러하니 무릇 의기(義氣)가 있는 자는 분발하고 일어나서 왜적을 무찌르고 왜적을 잡아야 할 것이오. 각 도의 각 관원에게 급속하게 알려 주도록 하시오. 운운.” 하다.
○ 전 봉교(奉敎) 정경세(鄭經世)경상도 상주(尙州) 사람이다. 가 초유사(招諭使)에게 다음과 같은 계(啓)를 바치다.
작고 추한 것들이 중국을 어지럽히는 해독을 쌓아 수치스럽고 욕됨이 이미 종묘에까지 미쳤습니다. 한낱 필부이기는 하나 목숨을 바치겠다는 마음을 지니고 계획을 감히 사신께 고하고자, 계시는 천막을 바라보며 눈물을 뿌리고 울면서 글월에 부쳐 성심을 피력하는 터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국가가 아름다운 덕을 전해온 것은 실로 고대의 상(商) 나라와 주(周) 나라에 그 성대함을 비길 것입니다. 신령하고 성스러운 임금이 왕위를 계승해 내려온 13대 동안 위대하게 드러나고 위대하게 왕업을 계승하여 물품이 풍부하고 백성은 편안하였습니다. 2백 년 동안 모든 것이 풍부하여 군의 기록은 병란에 익숙하지 않았고 (즉 전쟁이 없었다는 말임) 백성들의 생업은 단지 농경과 양잠을 알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리오. 숨겨진 섬의 흉악한 괴수[凶酋]가 감히 나라를 무시하는 교활한 계교를 마구 부려 자기 임금을 죽이고 나라를 빼앗아 악을 쌓은 것이 이미 궁(窮)과 한(寒)보다 심하였고, 그 군대를 몰아다가 우리 언덕에 버티고 있으니 불공함이 훈육(獯鬻)밀(密) 같은 점이 있습니다. 그 군사를 일으키는 데 핑계로 잡을 만한 말이 없음을 부끄러워하여,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으로 우리나라를 책하였습니다. 연교(燕郊)에서 말을 키우겠다고 소리쳐 말하니, 묵특[冒頓]의 서신이 지나치게 교만한 것이요, 덕진(德鎭)으로 교질(交質)해야 한다고 말하니 포악한 진(秦)의 공갈이 무궁한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다 그 끝없는 흉악함에 성내니 하늘의 뜻이 어찌 역적을 돕는 데에 용납하겠습니까. 무릇 군대란 의리로 보아 곧지 못하여 굽으면 기운이 쇠하기 마련이고 소나기는 아침 내 계속하지는 못하는 것으로, 우리 임금께서 진노하여 왜적을 징벌하도록 명령하였으니 태산이 어찌 알을 짓눌러 깨는 일을 힘들다 하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어찌된 국운입니까. 위태로운 때를 당해서 사람의 모의가 좋지 못하여 융성한 때를 빼앗았으니 외적을 막는 성을 구축하였으나 그것이 나라에 무슨 조그마한 이익인들 있겠으며, 거기다 가르치지 않은 백성을 모아다가 그들이 반드시 흩어져 버려 도저히 버텨내지 못할 땅을 준다는 것은 본래 삼척동자조차도 부끄러워하는 일입니다. 조정의 계획이 그 마땅함을 잃은 것이 이미 그러했거니와 변방을 지키는 신하가 군율(軍律)을 범함이 어찌 그다지도 심합니까. 병사(兵使)가 군영의 군사를 옹유하고 있으면서도 머물러 꺽이어 지척에서 부산(釜山)을 구해내지 못했습니다. 방백(方伯)은 왜적의 창끝을 피해서 교령(嶠嶺)에 머뭇거리며 호남ㆍ호서 경계에 있고, 그 아래로 주목(州牧)ㆍ부사(府使)에서 군수ㆍ현감에 이르기까지 칼날을 맞대고 창끝을 겨루어 본 일도 없이 아기(牙旗 상아로 만들어졌다는 대장의 기)는 들판 가운데에 끌리고는 하였으니, 이들은 평소 부절(符節)을 차고 성군의 은덕을 생각하고 살다가 위급한 때에 와서 그것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사마의 법[司馬之法 군법(軍法)]이 만약 시행된다면 이런 사람들의 고기를 먹게 될 것입니다.(즉 사형을 가해 주살될 것이라는 말) 이러한 자들의 무책임한 소행 때문에, 마침내 새나 다닐 험준한 요새지가 지켜지지 않아 영남의 생령(生靈)들이 도륙되어 썩어 문드러지게 하였고, 임금이 몽진하니 빈교(邠郊)의 행색이 참담했습니다. 피비린내와 연기가 종묘의 악기를 그을리고 물들였으며, 원한에 찬 귀신들은 가시나무 덤불 속에서 소리쳐 울고 있습니다. 말을 하면 다만 마음 아픈 것을 더할 뿐, 고래로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우리들은 태평세대에 살아남은 좁은 골목길의 지친 백성들로 밭을 갈고 우물을 파서 사는 것도 임금님의 인자하신 은혜가 아닌 것이 없으니, 사방이 흔연히 성군의 교지를 받아 풀 속에 엎드리고 물구렁에서 자며 구차하게 살아남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어찌 생각하였으리오. 난리를 만나게 되어 집이 부서진 것은 잠시 버려둔다 하더라도 나라가 당한 치욕을 어디서 씻을 수 있겠습니까. 병법(兵法)을 모르면 참된 선비가 아닙니다. 설사 건곤을 변하게 할 웅대한 군략이 없다고 하더라도 오직 하늘에서 내려준 진정한 마음은 누구나 다 같이 가지고 있는 것이니, 누구인들 충군 애국하는 본성이 없기야 하겠습니까. 이에 원수와 같이 하늘을 이고 사는 분함이 절박하여 마침내 창을 베고 잠을 잘 각오로 왜적과 싸울 모의를 하여 동지들을 모아 작전 계획을 하고, 흩어져 도망간 군졸을 불러 거두어 요해지를 택해서 복병을 설치해 왜적을 요격하여 흉악한 무리를 쳐 없애기로 한 것입니다. 다만 이 목사나 수령들이 피해서 달아난 끝이라 바로 민심이 극도로 흩어져 있으니, 군기(軍旗)와 군고(軍鼓)를 주관할 자가 없어 군중에 지휘할 사람이 없고 기율을 엄하게 하기 어려워 전진에 임해서 군사들이 달아나 버릴 우려가 있으므로, 세울 만한 좋은 계책이 없는 것이 아닌데도 막대한 근심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외람되이 생각하건대, 우리 주(州)의 지형은 사실 우리나라의 하늘이 내려 준 부고(府庫)입니다. 예의(禮義)가 행해지고 민간의 습속이 돈독하고 후한 것은 신라 1천 년의 여풍이 있음이요, 창고가 차 있고 호구는 많은 것은 진한(辰韓) 70주의 중심되는 요지(要地)인 것입니다. 크게 집중되는 여러 진(鎭)을 모을 수 있고 긴 강의 상류를 둘러 있으니, 하북(河北) 지역이 비록 흩어지고 수복되지 못했다고는 하나, 어찌 한 사람의 의사(義士)가 없겠습니까. 진실로 수양(睢陽)을 포기하고 지키지 아니한다면, 이는 1천 리 되는 강회(江淮)의 땅을 없애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좋은 계략을 헤아려 보건대, 이 성을 굳게 지키는 것 이상이 없습니다. 진실로 좋은 장수를 택해서 진무(鎭撫)케 하고 그로 하여금 의로운 외침을 피력하여 주선합니다. 정병을 골라서 낙동강[洛水]의 나루터를 지켜서 바닷길로 수송해 돌아가는 뱃길을 끊고, 곁 군(郡)에 격문을 내어 용추(龍湫)의 좁은 목을 거점으로 버티게 하여 고개를 넘어 도망해 돌아가는 관문을 막습니다. 가까이는 낙동강 좌안의 여러 주와 연락하고 멀리는 호남의 큰 군영과 호응해서 성세를 합해 멀리 몰고 간다면 군사들의 기세는 절로 배가할 것이요, 충의를 내걸고 곧장 전진한다면 그때에는 뭇 백성들의 마음이 다 돌아올 것입니다. 비록 바다를 건너가서 수길(秀吉)의 머리를 구하지는 못한다 하여도, 어찌 한강에 나아가 인의의 칼로 무도한 왜적의 고기를 저미는 것이 또한 어렵겠습니까. 엎드려 생각건대, 영공(令公)께서는 충신(忠信)이 만맥(蠻貊)의 땅에서도 행해지고 인의(仁義)는 성현으로부터 배운 바입니다. 악비(岳飛)가 갓 금패(金牌)를 받자 3군이 우레같이 통곡하였고, 장준(張浚)이 다시 황하가에 부임해 오자 백성들은 이마에 손을 얹고 좋아하였습니다. 영공의 마음 속은 귀신도 알아 증명하고, 군기[旋旗]는 부로(父老)들의 바람[望]이 매여 있습니다. 돌이켜 생각하건대, 우리 무리가 발돋움하여 기다리는 것은 다른 고장에 비한다면 피나는 정성에서 우러난 것입니다. 1백 년 동안을 두고 이룩해 놓은 문물이 남김없이 없어진 것을 가슴 아프게 여긴다면 대의(大義)를 창도하여 분발하기를 생각하고, 한때 의로운 기운을 의탁할 곳이 없음을 염려하면 외로운 군사를 거느리고, 어디로 돌아갈지를 모르겠습니다. 유명한 장수를 바라나 만나기가 어렵고, 조그만 마음을 안고서 스스로 안타까워 하고 있습니다. 지성이면 사람이 움직이지 않는 예가 없는 것이니 영공의 계극(啓戟 고관을 전도(前導)하는 붉은 칠을 한 창으로, 여기서는 초유사 자신을 두고 한 말임)이 어찌 내임(來臨)하는 것을 꺼리겠으며, 뜻을 지닌 자는 일이 반드시 이룩되는 것이니 비린내 나는 것들을 신속히 쓸어버릴 수 있을까 하나이다. 부디 광야에서 외뿔소도 아닌데 헤매고 있는 우리들을 가련하게 여겨, 저 들판의 당신의 얼룩말을 돌려 우리가 있는 곳으로 빨리 와 주소서. 아! 무릇 이 바다에 둘러싸인 땅 안에 살아있는 백성이면 누구인들 이씨(李氏)이 적자(赤子)가 아니겠습니까. 해바라기 같은 한 조각의 정성스러운 충심은 나라의 녹을 먹거나 먹지 않거나에 따라서 얕고 깊은 차이가 생기는 것이 아니요, 7척의 초개 같은 몸으로 왜적을 제거하느냐 하지 못하느냐를 보고서 사생을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죽백(竹帛 역사)에 이름을 남기느냐를 따질 것 없이, 다만 창과 칼 사이에 목숨을 바쳐야만 할 것입니다. 동해가 바로 눈앞에 있으니 일이 이룩되지 않으면 그때에 가서 그곳에 빠져버려도 늦지 않을 것이고, 북극성이 실로 머리 위에 임해 있으니 의(義)는 마땅히 취해야 하고 사는 것은 구차하게 굴지 않을 것입니다. 사뢸 말씀은 대략 이상과 같으니 나머지 말은 이만 줄입니다. 영공의 안색을 받들게 될 때를 기다리며 마음속을 삼가 진술합니다.
24일. 이광(李洸)의 군대가 온양(溫陽)에 머물다. 충청 순찰사 윤선각(尹先覺)이 방어사 이옥(李沃), 병사 신익(申益)과 더불어 먼저 이미 이곳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있다가, 이때에 와서 두 남도 순찰사와 같이 한때에 서울로 향하였다. 곽영(郭嶸)은 군대를 거느리고 공주(公州)를 지나 천안(天安)으로 향하였다.
26일. 대군이 다 진위평(振威坪)에 모이니 무릇 13만이다. 깃발이 해를 가리고 군량을 운반하는 대열이 1백여 리에 늘어섰다. 경호(京湖)의 피난민이 양떼를 몰고 가는 위세를 잘못 믿고 혹간 돌아와 모이는 자들도 있다.
○ 경상 우수사 원균(元均)이 또 전라도의 해군[舟師]에게 영남 바다에서 적을 토벌해 주기를 청하다. 6월의 좌수영 영리(營吏)의 고목(告目)에 보인다.
○ 전 장령(掌令) 정인홍(鄭仁弘)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다. 정인홍은 경상도 합천(陜川) 사람이다. 처음에 관군이 무너져 흩어지고 왜적이 멀리 몰아가 곧장 서울을 향하였으므로 대가가 서북으로 몽진하자, 정인홍이 전 좌랑(佐郞) 김면(金沔)ㆍ박성(朴惺)ㆍ곽추(郭趨) 및 그 제자들과 함께 의거를 모의하고 여러 읍의 사민에게 통문을 냈는데, 들은 자치고 분발하기를 생각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제자인 하혼(河渾)ㆍ조응인(曹應仁)ㆍ문경호(文景虎)ㆍ권양(權瀁) 등 막료들로 유사를 갈라 정해서 그들로 하여금 병사를 모으게 하고, 또 박이장(朴而章)과 문홍도(文弘道)에게 군량을 모아 마련하는 임무를 맡기고, 첨사 손인갑(孫仁甲)을 중위장(中衛將)으로 삼아 모집한 군대를 맡겼다. 손인갑이 초계(草溪)의 사막(沙幕)에서 전사하니, 현령 김준민(金浚民)으로 대신하게 했다가 오래지 않아 교체시켰다. 그후 전투에 임해서 장수를 정해 매복하고 습격하고 하는 것이 하나 둘로 계산할 수 없었다. 개산(開山)의 습격ㆍ언안(彦安)의 전승, 성현(星峴)과 정야(井野)의 포위, 단계(丹溪)와 가전(檟田)의 성공(成功) 같은 것들은 그 가운데서도 두드러진 것이다. 그러나 정인홍은 전승을 보고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대부분 보고하지 않아 군공(軍功)은 남의 맨끝에 있었으나 사실인즉 영남에서 의병을 일으킨 가운데에서는 정인홍이 첫째였다. 김수(金睟)는 삼가(三嘉)ㆍ초계(草溪)ㆍ성주(星州) 및 고령(高靈)의 군대를 그에게 맡겼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왜적이 전라 감사를 칭호하여 의령(宜寧)의 정진(鼎津)으로 몰려 닥쳐오니, 곽재우(郭再祐)가 의병(疑兵)을 설치해서 그를 물리치다.
○ 전라 좌우도의 선비들이 의병(義兵)을 일으킬 것을 제창하다. 좌도는 전 부사인 첨지 고 경명(高敬命)을 대장에 모셨고, 학유(學諭) 유팽로(柳彭老)와 학관(學官) 양대박(梁大樸)을 종사(從事)로 하고, 정랑(正郞) 이대윤(李大胤)과 정자(正字) 최상중(崔尙重)ㆍ양사형(楊士衡)ㆍ양희적(楊希廸) 등을 모량유사(募糧有司)로 삼았다. 우도는 전 부사인 김천일(金千鎰)을 대장으로 모셨다. 고경명은 광주(光州) 사람으로 전에 동래사(東萊府使)를 지냈고, 김천일은 나주(羅州) 사람으로 전에 수원사(水原府使)를 지냈다. 애초에 유팽로가 서울이 함락되어 거가가 서북으로 봉진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주야로 외쳐 울며 편안히 침식을 하지 못하고, 동지 양대박 및 양희적과 더불어 고경명을 찾아 가서 지방의 병사를 서둘러 일으켜 북으로 향해 근왕(勤王)할 것을 모의하니, 고경명은 그들이 먼저 생각해 낸 것을 기뻐하며 흔연히 그들을 따랐다. 즉일로 여러 읍에 격문을 돌려 추성(秋城)에 모이도록 불러 날을 정하고 깃발을 세웠다. 본도에서 의병을 제창한 것은 유팽로 등이 첫째였으므로, 호남에 삼창의(三倡義)라는 말이 생겼다.
○ 경상도 고령(高靈)의 선비 김응성(金應聖)이 1 천여 명의 군사를 모아 정인홍(鄭仁弘)에 예속하고, 정예한 군사를 골라서 전투에 참가하다. 무계(茂溪)의 싸움, 안언(安彦)의 승리, 성주(星州)에서 성(城) 태운 일 및 사대(沙代)ㆍ가천(伽川)의 전역(戰役)을 모두 도왔다. 또 낙동강의 왜적을 공격하여 온 배를 포획하니, 많게는 5, 6척에 이르렀다. 정인홍은 초유사에게 보고한 바, 소모관(召募官)의 막하에서 왜적을 목 벤 것 역시 30여 급에 이르렀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경상좌도는 감사(監使)와 병사(兵使)ㆍ수사(水使)가 없어 명령이 오랫동안 폐해졌고, 도로가 막혀 여러 읍의 일을 들어 알 수 없었다. 영덕 현감(盈德縣監) 안진(安璡)이 우순찰사에 치보(馳報)하여 이르기를, “좌도의 여러 읍은 다 왜적의 굴혈이 되었고, 오직 영해 부사(寧海府使) 한 효순(韓孝純), 용궁 현감(龍宮縣監) 우복룡(禹伏龍) 및 예안 현감(禮安縣監) 신지제(申之悌)가 각각 외로운 성을 지키고 있습니다. 운운.” 하였다. 세 고을이 성을 각각 지킬 수 있는 것은 세 읍이 왜적에게서 떨어져 있는 거리가 좀 멀기 때문이지, 죽기를 무릅쓰고 수비하며 버티고 싸우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경상도 전 목사 김홍민(金弘敏)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다. 애초에 평의지(平義智)가 충주(忠州)에서 이덕형(李德馨)을 만나기를 청하였는데, 조정에서는 염려하면서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 후 6월에 평의지가 대동강 변에 도달하여 또 이덕형을 만나고자 하니, 앞장서서 성을 나가 강 가운데 배를 띄우고 만나 보고서 물러 나왔다.
6월 1일. 절충장군 행부호군 지제교(折衝將軍行副護軍知製敎) 고경명(高敬命)이 도내 여러 고을의 선비와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치고(馳告)하다.
이번에 본도의 근왕군(勤王軍)이 금강(錦江)에서 퇴각하던 날 한 차례 무너지고 다시 여러 군(郡)에서 초유(招諭)할 때에 무너진 것은, 대개 단속하는 방법이 어긋나 기율이 없으므로 와전되는 말이 자주 일어나서 여러 병사들의 마음이 놀라고 의심스러워 한 데서 연유한 것이다. 지금 비록 흩어져 없어진 나머지의 병사들을 수습하여도 사기가 꺾여 정예한 기운이 없어졌으니, 어떻게 긴급한 소용에 응하여 후일의 효력을 책할 수 있겠는가. 매번 생각하건대 승여(乘輿 임금이 타는 수레)가 파천했는데 관직 있는 자들이 달려가 문안드리는 일이 오래도록 없었고, 종묘 사직이 재가 되어 버렸는데 왕사(王師 왕의 군사)가 숙청하는 일은 아직도 멀었으니 이런 일에 언급하게 되면 아픔이 마음속까지 사무친다. 생각하면 우리 본도는 본래부터 병사와 말이 정예하고 강력하다고 일컬어져 왔다. ‘성조(聖祖 태조)께서 황산(荒山)에서 승리를 거두신 것은 우리 삼한(三韓)을 다시 이룩하신 공이 있고, 선대(先代 고려)가 낭산(朗山)영암(靈巖) 에서 전투할 때는 한 조각의 돛도 돌아가지 못했다.’ 는 노래가 있어 지금까지 혁혁하게 사람들의 이목에 빛나고 있는데, 그때 용기를 떨쳐 먼저 나서서 장수을 목 베고 적기(敵旗)를 뽑아온 자는 이 도의 사람이 아니었던가. 하물며 근년부터 유도(儒道)가 크게 일어나 사람들이 모두 뜻을 세워 학문을 하게 되었으니, 임금을 섬기는 대의(大義)를 그 누구인들 강론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유독 오늘날에 이르러서 의로운 소리는 없어지고 겁내어 혼란해져 스스로 무너져서 여지껏 한 사람도 기운을 내어 왜적과 창끝을 마주치고 싸우기를 생각하는 자는 없고, 앞다투어 자기 몸과 처자를 보전할 계책을 꾸며 머리를 끌어안고 쥐같이 달아나는 것만 혹시나 남에 뒤질까 두려워하니, 이것은 본도의 사람들이 나라의 은혜를 깊이 저버리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자기 조상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지금인즉 왜적의 기세가 크게 꺾이었고 우리 임금의 위령(威靈)이 날로 뻗어나게 되었으니, 이는 바로 대장부가 공을 세울 기회이고 임금에게 보답할 때인 것이다. 나 고경명은 경전(經典)의 장구(章句)나 따지는 우활한 선비로 학문은 병법에 어두우나 장수를 뽑는 이 자리를 위촉받아 망령되이 대장에 추대되었으니, 이미 흐트러진 사병들 마음을 수습하지 못해 나를 추대한 두세 명 동지들의 수치가 될까 두려워하는 터이다. 다만 신하의 의리로는 마땅히 국난에 죽어야 하는 것이고, 겸해서 군대는 의리상 곧은 것을 세다고 여기니 그 수효의 많고 적은 것에 달려 있지 않다. 오직 담을 크게 갖고 눈물을 뿌리며 전투를 하여 사병들의 앞장이 되기를 생각하여, 임금의 은혜에 약간이나마 보답하기를 바랄 뿐이다. 이달 11일이 군사를 결집하는 기일이다. 무릇 우리 도내의 사람들은 아비가 아들에게 일러 주고 형이 아우에게 권면하여 의로운 군대를 규합해서 함께 일어나, 용맹스럽게 결단을 내려 선(善)에 따를 것을 바라나니 미혹되어 자신을 그르치지 말게 하라.
3일. 삼 도(三道)의 군대가 수원(水原)에 머무르다. 이광(李洸)이 독성(禿城)에 진을 쳤다. 본부의 왜적은 대군이 갑자기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이틀 전에 이미 도망쳐 용인(龍仁)의 왜적과 합세하였다.
○ 좌의병(左義兵)의 진중의 회문(回文)은 다음과 같다.
의병은 오는 11일에 떠난다. 여러 장비는 다 구비되었으나 군량만은 나올 데가 없다. 대장이 이미 모은 여러 사람의 의론으로는 가까운 곳의 각 고을에서 편의에 따라 빌릴 수 있는 것이나, 무릇 토지에서 생산된 식량으로 남아 쌓은 것이 있는 자는 모두 임의대로 양을 정하여 군사들의 식사에 댈 물자를 도와야 할 것이니, 이것이 우리들의 소망이다. 얻은 군량은 그 반이 수송 비용으로 돌아가는 것이니, 사람과 말이 천 리를 가는 비용 같은 것이 다 그것에서 나가기 때문이다. 만약 정병(精兵)이나 군마(軍馬)나 짐 싣는 말 중에 자기가 소유하는 것에 따라 내놓아서 도와주면 심히 다행이겠다. 부전운량장(赴戰運糧將) 진사 박천정(朴天挺), 유학 양희적(楊希廸), 재향운량장(在鄕運糧將) 정랑 이대윤(李大胤), 정자 최상중(崔尙重) 등.
○ 적병이 해서로부터 돌려서 관서로 향하니 거가를 호종하는 여러 신하들이 흩어진 병사들을 거두어 모아 기성(箕城 즉 평양)을 수비하고 김억추(金億秋) 등을 대동강에 매복시켜 방어하게 하다.
○ 전 좌랑 김면(金沔)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다. 김면은 경상도 고령(高靈) 사람이다. 처음에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파천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 달려가 대가를 따라 가려고 했으나, 정인홍(鄭仁弘)이 김면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기를 원해서 김면은 고령에서 병사를 모았던 것이다. 김면은 왜적이 강줄기를 따라서 졸지에 고령현의 경내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이를 막았다. 김면은 고령 같은 쇠미한 고을로는 왜적을 막아내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드디어 거창(居昌)으로 달려갔는데, 거창의 선비들이 이미 적인(跡人) 속칭 산척(山尺)이라 한다. 약간을 모았으므로 그것을 김면에게 소속시켰다. 김면은 곧 여러 군사를 뽑아내게 하여 곽준(郭䞭)ㆍ문위(文緯)ㆍ윤경남(尹景男)ㆍ박정번(朴廷璠) 및 유중룡(柳中龍)을 참모와 장서기(掌書記 문서 맡는 사람)로 삼고 박성(朴惺)에게 군량을 모으도록 하였다. 4, 5일 사이에 병사 2천여 명을 모아서 2백여 명을 나누어 보내어 현 북부의 우현(牛峴)ㆍ상암(箱巖)ㆍ목통(木通)ㆍ마령(馬嶺) 등 여러 곳을 수비하게 하고, 대군을 영솔하여 고령으로 나가서 진을 쳤다. 왜적의 배가 강류(江流)를 따라 내려 온다는 소식을 듣고 병사를 독려하여 이를 요격하니, 마침내 성한 배 2척을 노획하고 왜적을 목 벤 것이 80여 급이나 되었다. 이 전투는 실은 박정완(朴廷琬)이 한 것으로 자세한 것은 아래 박정완전에 보인다. 그 노획한 배에 실려있는 물건들은 다 내탕(內帑)의 진귀한 보물이었다. 그중에서 금종이로 꾸민 장지[障子] 한 벌을 얻었는데 광묘(光廟 즉 세조, 휘는 유(瑈))의 어휘(御諱)가 쓰여 있었고, 제복(祭服) 두 벌과 붉은 신[赤舃 임금의 예복에 신는 신을 말함] 두 켤레가 있으므로 초유사에게 보내었다. 지례(知禮)의 적장이 우현을 넘으려고 할 때에 복병장 이형(李亨)이 전사하였다. 김면은 거창이 진주(晉州) 이상 일대 지역의 두뇌같이 중요한 지역이라 거창이 지켜지지 않으면 10여 읍 역시 지켜내기 어렵다고 여겨, 마침내 장수를 정해서 고령을 지키게 하고 스스로 거창의 군사를 거느리고 지례의 왜적을 막았다. 전 부사 서예원(徐禮元)을 중위장(中衛將)으로, 만호(萬戶) 황응남(黃應男)을 부장으로 삼았다. 지례에 웅거해 있던 왜적을 습격하여 종들을 대대적으로 많이 잡았는데, 배설(裵楔)이 명령에 따르지 않아서 다 섬멸하지 못하고 나머지 무리들은 밤중에 도망쳤다. 또 정인홍과 약속하고 성주(星州)의 왜적을 공격하여 양군이 합세해서 포위하였다. 왜적이 개령(開寧)으로부터 와서 지원하자, 배설을 시켜 그 길을 차단하게 하였으나 배설이 가지 않았다. 그러므로 여러 군사들이 왜적의 구원병을 보자 크게 무너졌다. 김면이 마침내 거창으로 돌아왔다가 지례로 옮겨가서 진을 치고 복병을 나누어 보내 금산(金山)의 왜적을 저지하여 거창으로 충돌해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감사가 함양(咸陽)ㆍ안음(安陰)ㆍ산음(山陰)의 군사를 김면에게 예속시켰다. 왜적의 기세가 한창 왕성하여 전투로 쉬는 날이 없자, 감사가 진주 목사 김시민(金時敏)을 시켜 김면을 위해 조방(助防)해 주게 하였다. 하루는 왜적이 또 수없이 밀려와 사랑암(沙郞巖) 지례의 땅이다. 을 지나가자 김면이 말을 달려 검을 휘두르며 김시민에게 이르기를, “국가에서 높은 벼슬자리로 공을 대우한 것은 요컨대 오늘에 쓰기 위한 것이오. 죽음이 있을 따름이지 퇴각해서는 안 되오.” 하니, 김시민이 마침내 말을 돌려서 달려 들어가 계속하여 두 명의 왜적을 쏘아 잡았다. 여러 군사들이 크게 외치며 왜적을 무너뜨리자, 왜적이 그제서야 퇴각하였다. 이때부터 금산과 개령의 왜적들이 뒤이어 약탈을 계속하여 9월부터 12월까지 전투를 하지 않은 날이 없어 장병들이 갑옷을 벗은 일이 없었으니, 혹은 밤중에 찍어 들어오고 혹은 유인해 내어 큰 전투가 10여 차례였고 꺾어 물리친 적이 30여 번이었다. 그 후 합도의병 도대장(合道義兵都大將)으로 승임(陞任)되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김면과 정인홍 두 장수가 곽재우에 이어서 일어나 강회(江淮) 즉 낙동강 일대를 막아 나머지 읍들을 보전하였으니, 만약 그들의 전공을 논한다면 물론 작은 것이 아니다. 다만 한스럽기는 김면이, 박정완(朴廷琬)이 왜적의 배를 노획하고 80여 급을 목 벤 공을 억눌러 나타내 주지 않았고, 손인갑(孫仁甲)이 사원동(蛇院洞)에서 복병을 쓴 작전을 도와 주지 않고 도리어 그가 여러 사람의 모의를 어기고 패군했다는 죄로 몰아넣었으니, 진실로 공(功)을 시기하여 모함한 흔적이 있음을 면할 수 없을까 하는 것이다.
5일. 이광(李洸)이 선봉장 백광언(白光彦)을 시켜 용인(龍仁)에서 왜적을 탐지하게 하다. 왜적이 현의 북쪽인 북두문(北斗文)이라는 작은 산에 진을 쳤는데, 진은 미약하고 군사는 쇠잔하여 그 기세가 외롭고 약한 것 같았다. 백광언이 돌아와 보고하기를, “이것은 영세한 왜적이니, 급히 공격하고 때를 놓치지 마십시오.” 하였다. 광주 목사(光州牧使) 권 율(權慄)이 방어사의 중위장으로 군중(軍中)에 있었는데, 이광에게 강력히 말하기를, “서울이 멀지 않고 큰 왜적이 앞을 막고 있는데, 작은 적과 다투어 교전해서 군사의 위세를 꺽어서는 안 됩니다.” 하였으나, 이광은 그 말을 듣지 않고 곧 조방장 이지시(李之時) 및 선봉인 수령 등을 백광언에게 주어 전투를 독촉하였다. 백광언 등은 적이 눈앞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육박해 들어가 도전했는데, 묘시부터 사시에 이르기까지 적병이 잠복하고 나오지 않자, 오시에 이르러 아군이 해이해졌다. 이때 왜적이 풀 속에 엎드려 무릎으로 전진해 와 검을 휘두르며 일제히 일어나 아군 가운데로 쳐들어오니, 왼쪽에서 목 베고 오른쪽에서 찍어대고 하여 아군의 전사자가 부지기수였다. 이지시ㆍ백광언, 고부 군수(古阜郡守) 이윤인(李允仁), 함열 현감(咸悅縣監) 정연(鄭淵) 등이 모두 이 전투에서 피살되어 대군의 기세가 꺾였다. 이날 교지가 서해로부터 용인의 진중에 도달하여 경상좌우순찰사와 좌감사 이성임(李聖任)을 도로 합하게 하니, 길이 막혀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6일. 삼도(三道)의 군대가 용인에서 무너지다. 이날 아침 이광(李洸) 등이 점차로 군사를 전진시켜 광교산(廣敎山)에 진을 치고 군에 영을 내려 조반을 먹게 하였는데, 밥 짓는 연기가 일어나자마자 왜적의 기병이 돌격해 왔다. 먼저 왜적 다섯이 왔는데, 금 가면을 쓰고 흰 말을 탔으며 흰 기를 가지고 검을 휘두르며 곧장 전진해 온 것이다. 충청 병사 신익(申益)은 선봉으로 앞에 있다가 왜적의 위세를 바라보기만 하고 먼저 무너져버려 10만의 장병이 일시에 다 흩어졌는데, 왜적이 기병 수 명으로 10여 리나 쫓아가다가 가버렸다. 이광 등 여러 장수들이 교서(敎書)ㆍ인신(印信)ㆍ절월(節鉞)ㆍ기휘(旗麾)와 군기(軍器)ㆍ군량 등 배수(倍數)로 수송해 온 물건들을 다 버려두었는데, 왜적이 횃불 하나로 그것들을 태워버렸다. 이때 서울에 머물러 있던 왜적의 장수 20여 명이 각각 은 가마를 타고 호위병을 대단스럽게 벌여 세우고서 모두 붉은 옷을 입고 모자를 썼으며, 부녀자들은 말을 타고 쌍을지어 나와 길을 가득히 채우고 앞으로 가는 것을 연일 계속하고 멈추지 않았다. 아군은 서울의 왜적이 우리 대군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퇴각해 간다고 생각했다. 그 후 왜적에게 포로로 잡혔던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서울의 왜적은 나와서 광주(廣州)에 군사를 잠복시켰다가 아군이 양천(陽川)의 북쪽 포구에 도달하기를 기다려 남쪽으로부터 엄습하여 한강으로 몰아부치려고 하였는데 아군이 피해 달아났다는 소식을 듣고 그만두었다.” 하였다. 우리 대군이 무너져 돌아갈 때에 전일 경기와 양호 지방의 피난에서 돌아와 모였던 사람이 많이 짓밟혀 다치고 노약자들이 질겁을 해 달아났으며 곡성이 우레같이 울려났다.
○ 전라도 의병장 행부호군 고경명(高敬命)이 여러 도의 수재(守宰) 및 사민(士民)과 군인 등에게 다음과 같은 격문을 급히 보냈다.
근자에 국운이 중도에 비색한 때문으로 섬 오랑캐가 밖에서 짖어대어, 처음에는 역적 양(亮)이 맹약을 어긴 일을 본받아 하더니 마침내는 오랑캐 오(吳) 나라가 중국을 먹어 들어오던 짓을 자행해서, 우리가 경계하고 있지 않은 틈을 타 허한 데를 짓이겨대고 멀리 몰고 들어와 ‘하늘을 속일 수 있다’고 여기며 마음대로 곧장 올라왔다. 장수의 절월(節鉞)을 가진 자는 기로(岐路)에서 서성대고 한 군(郡)의 인신(印信)을 찬 자는 수풀 깊은 속으로 도망가서 왜적을 군친(君親)에게로 돌려버렸다. 이것을 참을 수 있는가. 지존(至尊)으로 하여금 사직을 근심하게 하고서 네 마음이 편안한가? 어찌 생각하였으랴, 1백 년이나 휴양해 온 백성 가운데 어찌 의기 있는 사나이가 하나도 없으랴. 고군(孤軍)으로 깊이 들어간 것은 여진(女眞)이 본래 병법을 몰랐던 것이요, 중행(中行)을 매질하지 않은 것은 대한(大漢)이 본래 책략이 없었던 것이다. 장강(長江)이 급작스레 그 천연의 요해지를 잃어버려서 흉악한 칼날이 이미 신경(神京)에 육박한 것이니, 남조(南朝)에 인물이 없었다는 조롱은 진실로 가슴 아프거니와, 북군(北軍)이 날아서 건너왔다는 말은 불행하게도 근사하구나. 이제 우리 성상(聖上)께서는 태왕(太王)이 빈(邠) 땅을 떠나던 마음으로 명황(明皇)이 촉(蜀) 땅으로 갔던 일을 하셨으니 이는 대체로 역시 종묘사직을 위한 지극한 계획에서 나온 것이다. 이에 사방의 지방관이 잠시 애쓰는 것은 기탄하지 않거니와 공락(鞏洛)의 놀란 먼지 속에 임금의 안색에 자주 깊은 진념이 나타났고, 민아(岷峨)의 위험한 잔도(棧道)로 푸른 일산[翠華]이 긴 노정을 멀리 갔다.
하늘이 낸 이성(李晟)이 적을 숙청한 것은 바로 원로(元老)에 힘입었고, 조서를 초한 육지(陸贄)의 애통한 말은 또 성조(聖朝)에서 내렸다. 무릇 혈기를 가지고 생명을 지닌 자라면 그 누가 분개하고 죽으려 들지 않겠는가. 어찌하랴! 사람의 모의가 좋지 않아 국보(國步)의 간난(艱難)이 잦았도다. 봉천(奉天)의 거가(車駕)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상주(相州)의 군대가 이미 무너졌으며, 준동하는 저 벌이나 전갈 같은 무리[蜂蠆之醜]에게 고래나 상어 같은 힘으로 목을 베는 것이 아직도 늦어지고 있다. 그러나 성문에 임시로 쉬고 날아도는 것이 어찌 장막의 제비와 다르겠으며, 외람되이 기보(畿輔)에 버티고 있으니 그 날뛰는 것이 울 안의 원숭이와도 같다. 비록 하늘의 군사가 소탕해버릴 때가 있기는 하겠으나 역시 그 흉악한 무리가 뛰어 달아나기는 기대하기 어렵다. 나 고경명은 단심과 만년의 절개를 가지고 머리가 희어지도록 썩은 선비[腐儒]로 살아왔으나, 밤중의 닭소리를 듣고는 국가의 다난함을 견디지 못하여 중류(中流)에 뜬 배의 노를 치면서 스스로 외로운 충성을 허락하였노라. 한갓 개나 말이 주인을 그리는 정성을 품고 모기나 등에[虻]가 산을 지려 드는 것같이 턱없는 힘을 헤아리지 않고, 이에 의병을 규합하여 곧장 서울로 지향하고자 옷소매를 떨치고 단에 올라 눈물을 뿌리며 여럿과 맹세했다. 곰을 치고 표범을 끌어대는 군사들이 우레같이 세차고 바람같이 날며, 수레를 뛰어넘고 관문을 건너뛰는 무리가 구름같이 합치고 비같이 모였으니, 이는 대개 핍박한 후에 응하여 억지로 나가게 한 것이 아니고 오직 신하로서 충의에 찬 마음이 다 함께 지극한 본성에서 우러난 것이니, 존망의 위기에 임하여 감히 미미한 몸을 아끼겠는가. 군사는 의로써 이름 지었으니 본래 벼슬[職守]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군대는 곧은 것으로 말미암아 씩씩해지는 것이지 취약한가 견고한가를 따지는 것은 아니어서, 대소의 군대들이 모의하지 않고도 뜻을 같이하였고, 원근의 장정들이 소식을 듣고서 다 함께 분발했다. 아아! 우리 여러 군[列郡]의 수재(守宰)들과 여러 길[諸路]의 사민(士民)들의 충성이 어찌 임금을 잊었겠는가. 의리상 마땅히 나라를 위해 죽어야 할 것이다. 혹은 병기(兵器)와 의장(儀仗)으로 도와 주고 혹은 양식으로 구제해 주며, 혹은 말을 달려 군사의 행렬 앞을 가고 혹은 쟁기를 놓고 밭에서 분기하여 힘이 미칠 만한 것을 헤아려 오직 의로운 데로 돌아가 임금을 고난으로부터 막아낼 수 있다면, 나는 그대들과 함께 일어나기를 원하는 것이다. 멀리서 생각하건대, 행궁(行宮)은 서쪽 땅에 멀리 있으나 묘당(廟堂)의 대계(大計)가 장차 정해지리니, 왕업(王業)이 어찌 한쪽에 치우쳐 안정할 것이랴! 잘 패[敗宮]하면 망하지 않나니 복덕(福德)이 바야흐로 오(吳) 나라 분야에 임했고, 깊은 근심으로 열어 주니 노래하고 읊조리는 데 더욱 한가(漢家)를 생각하게 된다. 호걸스럽고 준일한 인물이 시세를 바로잡을 제 신정(新亭)에서 마주보고 우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고, 부로(父老)들이 임금을 기다리니 곧 구도(舊都)에 임금이 돌아오는 것을 보리라. 생각하건대 마땅히 힘을 내서 앞서 나가야 할 것이므로 이상 마음속을 털어놓고 고하노라. 《정기록(正氣錄)》에 나온다.
○ 전라도 의병장 행부호군 고경명이 삼가 제주절제사 양공(楊公) 그때 양대수(楊大樹)가 본주의 목사였다. 의 휘하에 치고(馳告)하나이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섬 오랑캐가 침략을 자행하여 임금께서 몽진하였는데, 지존으로 하여금 홀로 근심하게 해 놓고 처자를 보호할 계책만 먼저 생각하여 왼발을 들여다보고 먼저 응하니 그 누가 사직을 지키는 마음을 가졌겠소. 흥원(興元)의 거가는 돌아오지 않았는데 상주(相州)의 군대는 이미 무너져서, 이수(伊水)와 낙수(洛水)의 적을 빨리 소탕하여도 아직 회복할 기약은 멀었고, 군량은 버려져 도리어 원수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다행히 하늘의 뜻이 끊어지지 않았으면 그래도 국사를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 고경명이 이에 의로운 깃발을 들고 요사한 무리를 숙청하러 나서자 소식을 듣고 그림자같이 모여들었는데 대부분 형초(荊楚)의 기특한 인재들이고, 예리한 무기를 들고 먼저 나서는 중에는 또한 연조(燕趙)의 검객도 들어 있습니다. 다만 한스럽기는, 보졸의 발[足]이 될 것이 없어 말을 채찍질하여 양(良)을 찌를 것을 바라기 어려운 것입니다. 멀리 생각건대, 바다 동쪽의 탐라(耽羅) 땅은 중국의 기북(冀北)과 다름이 없어서 골짜기를 뛰어넘어 다니며 사냥을 할 뿐만 아니라 전투 행진에 따라다녀 또한 목숨을 의탁할 만하다 하니, 만약 그곳에서 나는 말을 바닷배에 가득 실어 보내 주신다면 우리 군대의 위용이 크게 드러나는 것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귀관께서는 임금의 은혜를 깊이 받아 해역(海域)을 전제(專制)하고 계시니 글로써 호소하면 응당 한 곳의 여론을 일으킬 것이며, 팔뚝을 걷어올리고 외치면 어찌 10실(室)의 마을에 충신(忠信)한 사람이 없기야 하겠습니까. 만약 장사 중에 나가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또 그러한 인간의 상정을 막지 말기를 바랍니다. 《정기록(正氣錄)》에 나온다. 고종후(高從厚)가 대신 지은 것이다.
○ 전라도 의병대장 장하사(張下士), 전 현령 고종후(高從厚)ㆍ권지성균관학유(權知成均館學諭) 유팽로(柳彭老) 등이 충청ㆍ경기ㆍ황해ㆍ평안 4도의 여러 읍의 수재 및 향교(鄕校)ㆍ당장(堂長)ㆍ유사에게 다음과 같이 삼가 재배(再拜)하고 통문(通文)하다.
외람되게 생각하건대, 섬 오랑캐가 불공함으로 임금께서 멀리 파천하고 7묘(七廟)가 재가 되어버렸으며 만백성이 도탄에 빠졌으니, 이는 진실로 고금에 있어 본 일이 없던 변고이고, 충신(忠臣)과 의사(義士)가 몸을 버려 나라에 보답할 때입니다. 그러나 방진(方鎭)의 중신(重臣)들은 관망하면서 머뭇거려, 군사를 징집하는 교지가 한두 차례 내린 것이 아닌데도 한 사람도 머리를 북으로 향하고 적과 싸워서 죽은 자가 없습니다. 오늘날의 사대부는 조정을 저버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외람되이 생각하건대, 호남은 본래 군사가 정예한 것으로 일컬어져 왔었는데, 근왕군이 겨우 금강(錦江)에 도달하자 도성이 함락되고 거짓말이 멀리 퍼졌으며 주장(主將)은 여러 사람의 의론을 널리 물어 볼 겨를도 없이 급히 진을 파하라는 영을 내려 10 만의 무리가 까닭 없이 그냥 돌아가버리고 온 도의 민심이 흉흉하여 흡사 미친 듯한 물결이 마구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 두 번째의 군사 모집에 가서는 하천한 백성과 지극히 우매한 자들이 그 명령에 따르지 않으니 컴컴한 방안의 근심은 차마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사직의 복과 조종의 위령에 힘입어, 무너져 달아났던 병졸들이 매일같이 모여 와 군의 성세가 크게 진작되어 혹시나 궁금(宮禁)을 숙청하여 거가를 맞이할까 바랐더니, 사람의 모의가 좋지 못하였고 하늘이 내리는 앙화가 가시지 않아서 적은 수의 적이 겨우 나타나자 대군이 또 무너지고 군량을 버려 도리어 원수 왜적의 도움이 되었으니, 아아! 우리 역대 성군께서 수백 년 동안 함양한 나머지에 어찌 적개심에 찬 신하가 한 사람도 없습니까! 공론이 아래에 있는 것을 옛사람이 이미 불길하다고 하였으나, 황폐한 풀섶에서 의병을 창도하는 것은 역시 계략상 부득이했음을 알 것입니다. 군부(君父)가 환난 가운데 놓여져 있는데 그 밖의 일을 돌아볼 겨를이 있겠습니까. 거듭 생각하건대, 영남과 양호는 진실로 우리 동쪽 나라의 근저(根柢)입니다. 그런데 영남인즉 의병이 일어나기는 하였으나 중간이 왜적의 굴혈에 막혀 있어서, 곧장 서울에 올라가 근왕(勤王)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호서 1천 리의 땅엔들 어찌 의기 있는 사나이가 없었겠습니까마는, 왜적들이 죽이고 빼앗는 여세에 겁을 집어먹고 역시 자신을 구해낼 겨를조차 없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오늘날 중외에서 믿는 것은 호남 한 도에 있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 막부(幕府 대장 있는 곳)에서 만 번 죽고서라도 기어이 관철해 낼 계획을 세우고 한 지방의 여러 사람을 격려한 결과, 민심은 왕실을 생각하고 열사들이 운집하여 보병과 기병의 수효가 이미 5만 2천에 이르러 바야흐로 북쪽으로의 길을 멀리 몰고 들어가 요사한 왜적의 무리를 소탕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1천 리의 길에 양곡을 운반하는 일은 사사로운 힘으로는 해내기 어렵습니다. 만약 의를 좋아하는 여러 군자들이 힘을 합해서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면 비상한 큰 공이 어찌 한 사람의 손에서 다 나올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이 나라의 땅 치고 임금의 땅 아닌 곳이 없습니다. 양호(兩湖)의 군사는 이 나라를 부흥시키기에 충분합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제공께서는 함께 나라를 위해 따라 죽을 뜻으로 분발하고노적가리를 가리켜 내주던 의기를 다해서 각기 미곡을 내어 군의 식량을 도와 주신다면, 능히 양주(揚朱)와 묵적(墨翟)을 막겠다고 말하는 자 역시 성인(聖人)의 무리일 것입니다. 또 생각하건대, 산골짜기가 험준하고 평탄한 것과 도로가 우회하고 곧고 한 것은 그 고장의 군사가 가리켜 인도하지 않는다면 역시 창졸간에 당하는 곤란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니 그 고장의 사람을 모집해서 우리 군의 기세를 돋구게 해 주신다면, 비단 종묘 사직의 깊은 수치를 한바탕 씻어버릴 수 있게 될 뿐 아니라 부자 형제로 창이나 화살에 죽은 이들 역시 황천 속에서 눈을 감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일은 비록 어리석은 백성이라 할지라도 다 마음 아파하고 걱정하겠거늘, 하물며 여러 고을의 수재(守宰)들은 다 나라의 은혜를 받았는데 어찌 차마 근왕군의 곤란[秦瘠]을 좌시하겠습니까. 반드시 옷소매를 떨치고 일어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남의 밥을 먹으면 남의 일을 위해 죽는다.” 했거니와, 만약 소식을 듣고 강개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오는 자가 있다면, 원하건대 소반의 피를 입에 찍어 바르고 함께 왕의 일에 종사하겠거니와 혹 한 끼 양식과 자재를 군 앞에 수송해 주어도 역시 한 가지 도움이 될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해서와 관서는 비록 도로가 통하지 않는다고는 하지마는 각각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모집해서 사잇길로 해서 나와 차례로 전해서 일각도 지체하지 않는다면 원근에서 그 소문을 듣고 혹 그것을 믿고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 통문이 도착한 날 여러 고을 향교의 당장과 유사는 각각 한 통씩 베껴서 경내의 선비들에게 전해 그들로 하여금 모르는 사람이 없게 해야 할 것입니다. 《정기록》에 나온다.
○ 고경명과 김천일(金千鎰), 양산숙(梁山璹)과 곽현(郭玄)을 시켜 출사표(出師表)를 받들고 서해로 해서 행조(行朝)로 보내다. 그때 적병이 5, 6도(道)에 가득 차 있었고 경기와 황해가 더욱 심했기 때문에 서쪽으로 가는 길이 끊겼었는데 이때에 와서 비로소 수로가 통하게 되었다.
○ 각처의 왜적이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 항복하고 붙좇는 자들을 나누어 여러 분탕된 고을의 수령으로 정하여 온 경내의 일을 맡아 다스리게 하니, 박무금(朴茂金)이 김해(金海)를, 중[僧] 찬희(贊熙)가 밀양(密陽)을 맡은 따위가 그것이다. 찬희는 성에 들어와 군민(軍民)을 꼬여 모으다가 박진(朴晉)이 몰래 잡아서 죽였고, 박무금은 그 후 도망쳐 나와 용서를 받았다.
○ 왜적이 창녕(昌寧)ㆍ현풍(玄風)으로부터 금산(金山)에 이르는 한 줄기의 큰 길을 닦고 위아래에 가득 차 있었다. 그 중간에 위치한 성주(星州)는 창고는 가득 차고 백성은 많아 왜적이 큰 군사를 주둔시키고 있는데, 현풍에서 좀 멀어서 무계(茂溪) 나루가 두 지점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요해지이므로, 왜적이 나루 서쪽 산 위에 주둔하여 수륙의 길을 통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강의 좌우편 도로가 막혀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다니지 못하였다. 정인홍(鄭仁弘)이 손인갑(孫仁甲)에게 말하기를, “무계의 왜적이 현풍과 성주 사이에 끼어서 왕래하면서 서로 도와 주고 있으니 반드시 이 왜적을 먼저 제거해서 강길을 끊어 놓은 후에야 성주를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손인갑이 옳다 여겼다. 마침내 정인홍을 군의 주장으로 추대하고 지난달 27일에 군사 행동을 시작했다. 초계(草溪)에서 위급을 고해 와 달려가니 왜적의 기병 백여 기가 마을의 집을 태우고 약탈하다가 군사가 온 것을 보고 강길로 향해 달아나므로 추적하였으나 따라가지 못하였다. 29일에 고령(高靈)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거창(居昌)의 군사를 불러 약속하기를, “함께 무계를 공격하자.” 하고 요구하였으나 김면(金沔)이 병장기가 완비되지 못해 5, 6일이 늦어질지 모른다 하니, 정인홍이, “군사는 많은데 양식이 적으니 날짜를 끌어서는 안 된다.” 하고, 군사를 전진시키기로 결의하였다. 손인갑이 먼저 가서 무계의 형세를 살피겠다고 요청하여 정인홍이 허락하니, 손인갑이 곧 두어 사람을 데리고 밀탐하고 돌아와 드디어 세 길로 진군할 계획을 결정하였다.
고령 영병장(高靈領兵將) 김응성(金應成), 성주 기군장(星州起軍將) 이승(李承) 등이 와서 모였다. 이달 4일 밤을 타서 진군하였는데, 군사들이 전투에 익숙하지 않아 여러 사람이 마음속으로 의심하고 두려워하다. 좌돌격(左突擊) 조응형(曹應亨)이 군사를 거느리고 재를 넘어가자 군졸들이 헛되이 놀라 스스로 무너졌다. 대장(大將)이 지휘하는 한 진(陣)만은 움직이지 않아서 그로 말미암아 약간 안정되어 도로 모였으나, 밤중에 쳐서 소굴을 불태우려는 계획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5일. 여명에 정인홍(鄭仁弘)이 우선봉 한여택(韓汝澤)ㆍ좌선봉 하종해(河宗海)를 시켜 군사를 끌고 오른쪽 재로 해서 곧장 무계역(茂溪驛)에 이르게 하고, 고령 대장(高靈代將) 정상례(鄭尙禮)를 시켜 왼쪽 재의 대로로 해서 진군하게 하였다. 또 전 군수 이언성(李彦誠)과 성정국(成定國)으로 하여금 성주의 군사를 거느리고 안언역(安彦驛)의 길에 매복하여 성주(星州)에서 후원해 오는 왜적을 끊게 하고, 정언충(鄭彦忠)을 시켜 노다촌(老多村)에 매복케 하여 강을 내려가는 왜적을 끊게 하였으며, 정인홍은 손인갑(孫仁甲)과 더불어 중위군을 거느리고 곧장 왜적의 군막을 짓이겨 대었다. 왜적이 약탈한 재보(財寶)를 무계의 역사(驛舍)에 가뜩 쌓고 횃불 하나로 태워버리고 소와 말을 빼앗았다. 한여택과 하종해가 몸을 솟구치고 나서서 역전(力戰)했는데, 왜적의 장수가 큰 기를 세우고 나와서 싸우다가 아군이 많고 정예한 것을 보고는 막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여러 군사들이 승전한 기세를 타고 사면으로 육박해 들어가 싸워서 그 양곡을 저장한 외막(外幕)을 불태우고 전진하고 후퇴하며 일제히 활을 쏘니, 왜적의 기세가 매우 군색해져서 자리ㆍ거적ㆍ땔나무 등으로 가리면서 자위(自衛)했는데 죽은 자가 퍽 많았다. 처음 철환(鐵丸)을 쏜 인시부터 사시에 이르자 포성은 끊어지고 곡성만이 났다. 아군이 다가가 불을 질러 태워버리려 했는데, 나머지 왜적이 달아나 강으로 들어가 배를 강물 복판에 끌고 들어갔다. 이때에 의외에도 구원하러 온 왜적 수백 명이 현풍(玄風)으로부터 갑자기 나루터 가로 왔다. 그때가 거사할 시초라 활과 화살이 넉넉하지 못했고 아군은 새벽에 진군해서 군사들이 다들 배부르게 먹지 못하고 힘을 다해 싸워 지쳐 빠져버렸는데, 갑자기 생생한 기운을 가진 적의 공격을 받았고 거기에 화살 또한 이미 다한지라 감히 무리한 전투를 하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막(幕) 안에 있던 왜적은 6, 7명이 쫓아왔을 뿐인데 5리도 못 오고 돌아가버렸다. 수일 후에 합천(陜川)의 군사가 피난하였다. 포로가 되었던 사람을 잡았는데, 공술하기를, “막 안의 왜적은 1백 40여 명이었는데 죽은 자가 반이 넘고 나머지는 다 화살에 다쳐 한 떼의 왜적이 거의 다 이 전투에서 소탕되었으나, 불을 지르지 못하고 퇴각하여서 이로 말미암아 왜적이 군사를 증가시키고 주둔하는 군막을 더욱 넓히고 있습니다.” 하였다. 손인갑이 가리현(加利縣)으로부터 돌아와 고령에다 진을 치고, 정인홍은 하혼(河渾)ㆍ권양(權瀁)ㆍ이승(李承)ㆍ김응성(金應成) 등과 더불어 산 위와 가운데 길로 해서 돌아와 가림(檟林)에다 진을 쳤다가 곧 매촌(梅村)에 진을 합치고 싸운 공을 치보(馳報)하였다. 그때에 김면(金沔)이 거창(居昌)의 군사를 거느리고 비로소 와서 무계의 습격을 단독으로 거사한 것을 자못 불쾌하게 생각하였다. 그때 군졸들은 군법에 익숙하지 못해서 싸움터에서 각각 자기 집으로 돌아가 오래도록 돌아 오지 않고 단지 수백 명만이 뒤따르고 있었다. 손인갑이 이것을 근심하여, “군졸이 모이지 않으니 선생은 가르쳐 주시오.” 하자, 마침내 격문을 돌려 그들을 불러 모았는데 수일 동안에 다 모였다. 흩어져버렸던 끝이라서 사람들의 마음이 확고하지 못했기 때문에, 처벌을 감행하지 못하고 다만 잘 타이르고 엄하게 경계할 따름이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왜적의 배 18척이 쌍산역(雙山驛) 현풍 북쪽 15리에 있다. 으로부터 올라와 정승 안국사(政丞安國寺)의 행차라 자칭하고 가야산(伽倻山)을 탐승하려고 했는데, 이 자가 바로 전날 전라 감사를 칭하고 창원(昌原)에서 선문(先文)을 띄웠던 자이다. 정진(鼎津)에 이르러 곽재우(郭再祐)에 의해 퇴각당하고 영산(靈山)ㆍ창녕(昌寧)으로 해서 기강(岐江)을 건너려 할 때 전라 감사라 칭하고 호남으로 향하면서 또 선문을 보내 맞이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초계(草溪)ㆍ의령(宜寧) 등지의 사민들은 두려워서 혹은 산으로 도망하여 나오지 않기도 하고, 우매한 자는 혹 환영하는 말을 하기도 하였다. 곽재우는 또 왜적 앞에까지 달려가서 도망한 사민(士民)을 끌어내어 의리로 타이르고 창고를 풀어 군사를 먹이며 병졸을 엄격하게 다루어 방비를 갖추었다. 왜적이 곽의 병졸이 부오(部伍)가 엄정(嚴整)함을 보고 두려워하며 말하기를, “이는 틀림없이 정진의 홍의장군이니 도저히 건너갈 수 없다.” 하고 퇴각하여 쌍산(雙山)으로 해서 성주(星州)로 향하였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안국사(安國寺)는 강항(姜沆)의 계문(啓文) 가운데 보인다.
○ 박진(朴晉)을 경상 좌병사로 삼다. 그때 박진은 김수(金睟)의 근왕군을 따라 온양(溫陽)까지 갔다가 명령을 받고 도로 내려와 본도에 도달했는데, 사천(泗川)ㆍ하동(河東)ㆍ곤양(昆陽) 및 진주(晉州)의 왜적의 기세가 막 성하기 때문에 낙동강을 건너지 못하였다. 김성일(金誠一)이 우도에서 글을 보내 이르기를, “장군께서는 포상하는 어명을 받들어 병권을 장악하고 변경에 임해 위엄 있는 명성이 이미 드러나 온 도가 간성(干城)같이 믿고 있는데, 다만 왼쪽 길이 막히고 끊어져 위무(威武)를 나타낼 길이 없습니다. 지금 진주가 적병의 공격을 받게 되어 정세가 심히 위급한데 본관의 수하에 비록 천으로 헤아리는 군사가 있기는 하지마는 저 같은 백발 서생은 군무에 익숙하지 않으니 어찌 일을 성사시킬 수 있겠습니까. 장군께서 만약 단기(單騎)로라도 이곳에 오신다면 의병을 다 장군의 휘하에 드리고자 합니다. 생각건대, 좌우의 병사가 안팎으로 호응하여 사천(泗川)의 소수 왜적을 토벌하여 큰 진(鎭)인 진주를 보전해서 내지(內地)를 지키게 되는 것은 장군께서 발을 한 번 드는 데 달려 있으니, 좌ㆍ우도의 책임이 다르다는 말로 사양하지 마시고 종전에 결심하였듯이 자신을 잊고 나라를 위해 따라 죽겠다던 뜻을 실현하도록 하십시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15일. 적병이 평양을 함락시키고 조정은 의주(義州)로 향하다. 몇 일 전에 적병이 대동강에 다가들자 그곳을 수비하던 군사들이 다 무너졌다. 11일에 거가가 숙천(肅川)으로 가서 이덕형(李德馨)을 보내 요동(遼東)에 가서 위급함을 고하고 구원을 청하게 하였다. 중전(中殿)은 강계(江界)로,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은 함경도로 각각 나누어 보내고, 세자에게 명해 종묘 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강원도로 가게 하였다. 거가가 정주(定州)에 이르러 기성(箕城)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요동에 치자(馳咨)하여 내부(內附)하기를 청하고 이어 의주(義州)에 도달했는데 시종하는 관원으로 따라간 자가 단지 수십 명에 불과하였다. 그때 중국 지방에서는, “조선이 왜를 향도한다.”는 헛말까지 나와 수도에까지 전해져서 병부(兵部)에서 차관(差官) 황응향(黃應陽) 등을 보내와 실정을 살펴보게 하였다. 임금이 그들을 용만관(龍灣館) 의주의 객사이다. 에서 접견하였는데, 담화하는 동안에 황응양이 왜적의 중[僧]인 현소(玄蘇) 등이 평양에서 본국의 예조에 보낸 글을 보고는 가슴을 두들기고 눈물을 쏟으면서 말하기를, “중국을 위해 대신 병화를 당하면서도 의롭다는 명성은 드러나지 않고 도리어 이 악명을 받으니 천하에 어찌 이런 억울한 일이 있겠는가.” 하였다. 그래서 황응양이 사정을 퍽 자세하게 회보하여 명 나라 병부에서 강력히 상주(上奏)하여 구원해 주기를 청하였다. 그때 사은사(謝恩使) 신점(申點)이 중국의 수도에서 곡소(哭訴)하고 병ㆍ예부 각 아문(衙門)에서 계속 상주하여 위급을 고하자, 중국 조정에서 부총병(副摠兵) 조승훈(祖承訓), 유격장(遊擊將) 사유(史儒) 등으로 하여금 요동병 3천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가게 하였다. 고사(考事)에 나온다.
○ 종실(宗室) 호성감(湖城監)을 양호(兩湖)로 파견하여 의병을 징집시키다. 호성감은 양호 땅에 도달하여 충의로운 내노(內奴)를 내놓아 군사로 하고 자진하여 근왕군에 나오는 자도 역시 허락하였다.
○ 좌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이 전주(全州)로 나아가 진을 치고 의병을 불러 모았으며, 이어 본도의 여러 고을에 글을 보내 이르다.
대장이 급히 구원을 요청하기 위한 것이다. 국가의 일이 이러한 극단에 이르렀으니 오늘의 소망은 오직 의병을 일으키는 데 있는데, 불러 모인 수효는 수백에 불과하다. 비록 강개(慷慨)에 찬 뜻이 당당하여 범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성세가 떨치지 않으니, 관군이 조력하는 것이 아니면 만전지계가 아닌 것 같다. 조전군(助戰軍)은 다소를 불구하고 단지 정예한 것을 택하고 전일 낙오한 사람을 극력 불러모아 충의로써 타일러 주야를 불문하고 급히 구원하러 보낼 것이다.
○ 전라 감사 이광(李洸)이 김수(金睟)와 더불어 전주로 도망해 돌아오다. 김수는 곧 함양(咸陽)으로 향하여 이어 거창에 도달하니, 그때 김성일(金誠一) 역시 본현에 머물러 있었다.
○ 성주(星州)에 주둔하고 있는 왜적이 사방의 문에 봉명국(奉命國)이라고 써 붙이다.
○ 적장 청정(淸正)이 강원도를 지나 철령(鐵嶺)으로 쇄도하였는데, 철령 이전에는 한 사람도 남지 않았다. 함경 체찰사 김귀영(金貴榮)과 감사 유영립(柳永立)이 남병사(南兵使) 이 영(李榮)과 북병사 한극함(韓克諴)을 거느리고 도내의 기력이 왕성하거나 약한 남정(男丁) 5만여 명을 다 모아 가지고 철령을 지켰다. 선봉의 왜적이 연일 교전하다가 패하고 물러나자, 청정이 대군을 이끌고 뒤따라 도달해서 당장에 선봉장을 목 베고서는 영을 내리기를, “한 번 북이 울리면 개미같이 달라 붙어라. 감히 뒤지는 자는 죽는다.” 하고는 곧 자신이 말에서 내려 검을 휘두르며 독전하니, 적병은 죽음을 무릅쓰고 앞을 다투어 나서서 그 기세가 바람에 타오르는 불과 울려나는 우레 같았다. 아군이 크게 무너지고 김귀영 등은 겨우 몸만 빠져나와 육진(六鎭)으로 향해 달아났다. 청정이 철령에서 이기고 함경도로 들어와 불태워 없애고 도둑질을 하는데, 그 죽이고 노략질하는 것의 참혹함이 다른 도의 몇 갑절이나 되었다.
○ 전라 병사 최원(崔遠)이 군사 2만여 명을 동원하여 본도 우의병장 김천일(金千鎰)의 군사 2천과 함께 근왕군으로 서울로 향하다.
○ 도원수(都元帥)가 팔도에 전한 격문은 다음과 같다.
군대를 일으키는 데 있어서는 곧아야 씩씩해진다. 바야흐로 왜적을 토벌하는 계획을 넓히고 의가 병들기 전에 서둘러야 하니, 감히 근왕하는 일을 늦추겠는가. 무릇 우리 동지들은 각기 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 생각건대, 우리 국가는 신성한 임금이 계승하여 거듭 밝아 태평세월이 계속되어 누누이 백성들에게 인정(仁政)의 은택이 젖어 있고, 음우(陰雨 위험한 일)에 앞서 선처하여서 수천 리 땅에 옥촉(玉燭 계절 따른 기후)이 고루 조정되어 2백 년 동안 금사발[金甌 국가의 계승된 왕실]에 흠이 없었으므로 장차 안으로는 태평하고 밖으로는 안정되기를 기대하였더니, 도리어 문관은 안일에 흐르고 무장은 장난으로 여기게 되었다. 준동하는 저 바다섬의 간악한 오랑캐는 사실 천지간의 추악한 종자로, 처음에는 중국에 감정을 품고서 하늘을 쏘는 활을 당기려고 하다가 끝내는 우리나라에 앙화를 전가시키고 감히 사람을 씹는 부리를 놀렸다. 요(堯) 임금을 보고 짖는 개가 진(秦) 나라에 사람이 없다고 하는 격으로, 저녁 봉화가 겨우 한궁(漢宮)에 도달하였는데 요사한 독기는 이미 상령(商嶺)을 둘러쌌다. 장강(長江 양자강)의 험한 요새를 잃어버렸으니 진실로 군대의 율법이 엄하지 않은 때문이었고, 임금이 몽진하였으니 조정의 계획이 길하지 않았음을 넉넉히 볼 수 있다. 종묘와 사직이 재로 타버리고 조정과 저자가 변천하였으며, 심한 독이 여염에 두루 미쳤고 더러운 소문이 원근에 뚜렷이 드러났다. 귀신과 사람의 분노가 이미 극도에 도달하였으니, 군부(君父)의 원수를 잊을 수 있겠는가. 더욱 가슴 아픈 것은, 여러 성이 흙같이 무너지는데 오직 성문을 열고 맞이해 절할 줄만 알고 뭇 장수들은 담이 떨어졌으니 누가 용기를 내어 먼저 나설 수 있겠는가. 우리가 고수하겠다는 마음을 잃어버리고 저들이 멀리 몰고 들어오는 위세를 도와 주었으니, 주여숙(柱厲叔)이 이것을 보았다면 어찌 예전에 알던 사람을 기다릴 것인가. 만일 안진경(顔眞卿)이 다시 살아난다면 마땅히 무슨 꼴을 할 것인가. 하물며 지금 저 왜적들은 미쳐 날뛰고 교만하고 게을러져 있으며 들떠 붙어 살고 외로이 매달려 있다. 힘은 이미 싸우고 공격하는 데 지쳐버렸으니 그 기세는 반드시 오래 가기 어려울 것이고, 욕망은 오직 약탈에만 있으니 뜻도 또한 알 수 있는 것이다. 한실(漢室)을 생각하는 이들은 앞다투어 노래를 바치고 적에게 붙었던 자도 또한 대부분 헤어졌으니, 이미 죽을 길에 놓인 도적이 되어버려 구차하게 살아날 꾀도 지니지 못하게 되었음에랴. 세성(歲星 5성의 하나, 목성(木星))이 기(箕 별자리 이름)의 분야를 지키니 복덕(福德)이 내릴 징조가 있음을 알겠고, 큰 하늘이 송(宋)을 도우니 어찌 나라를 회복하는 데 기약이 없으랴. 지금 나는 외람되이 추곡(推轂 대장에 임명하는 의식)하는 은혜를 받들고 흉적을 제거하는 책임을 전적으로 위임 받아 여러 도의 도순찰사를 겸임하여 군사 3천을 거느리고 이달 10일에 행재소를 배사(拜辭)하고 곧장 서울로 향했다. 서울에서 수레를 뛰어 넘던 날랜 사람들은 태반이 장교로 편입되었고, 관서의 장수를 넘어뜨리던 인재가 다 부오에 예속되어 있어 3군의 사기가 점차 진작되고 만민의 마음이 약간 소생했다. 이는 진실로 한 나라의 신자(臣子)가 마음을 합하고 힘을 다해 몸을 잊고 순국할 때인 것이다. 생각건대, 각 도의 관찰사와 절도사들은 혹은 지방의 전권을 장악하고 혹은 병권을 위임 받아 한 도에서 많은 군대를 가지고 있으니, 어찌 막고 보호하는 정성을 잊을 것인가. 서방(西方)에 미인(美人)을 바라볼 때에 드는 생각이 눈물을 뿌리는 아픔에 간절할 것이다. 의당 범이나 사자 같은 군대를 거느리고 뱀이나 돼지 같은 무리를 함께 쓸어내야 할 것이다. 수미(首尾)로 협공하여 번갈아 기각(掎角 두 편에서 서로 잡아당겨 협공으로 포획함)의 태세를 이루고 동서로 함께 진격하여 입술과 이와 같이 지원한다면, 구멍에 든 개미가 된 격이니 도망칠 수 있겠는가. 솥 안에 든 물고기가 된 형편이니 뭉글어뜨릴 것이다. 아래 옷을 찢어 발을 싸매고서라도 어찌 천리길의 수고를 꺼릴 것인가. 머리를 풀어 헤친 채 갓을 매어 쓰고서라도 한 집안을 구하는 데에 서둘러야 할 것이다. 각기 세상에 보기 드문 은혜를 갚고 힘써 비상한 공훈을 세울 것이니, 힘쓸지어다. 시기를 놓치지 말도록 하라. 때는 두 번 얻기 어려우니. 운운.
그때 김명원(金命元)이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흩어진 군사들을 거두어 순안(順安)에서 왜적을 막고 있었다.
○ 요동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가 왜적의 변란에 관한 것으로 준분수도(準分守道)의 자문(咨文)에, “순무(巡撫)가 당보(搪報)를 우연히 본 바에 의하면, 왜왕 관백(關白)은 이미 그 나라 사람에게 사살되었다. 그래서 이 글을 전하는 것으로, 본사는 조선 국왕이 수고스러운 대로 왜의 인심이 흩어진 기회를 이용하여 관원들을 독려하고 통솔해서 힘써 회복을 꾀하도록 바란다. 모름지기 이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하니, 자문을 예조에 내리기를, “수길은 유구(琉球) 사람에게 사살되어서 이것은 다 소문이다. 평양에서 기병 전투를 할 때 행장(行長)ㆍ의지(義智)ㆍ조신(凋信)이 장수가 되었다. 운운.” 하였다.
○ 좌수영 영리(左水營營吏)의 고목(告目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보내는 편지)에,
“수사(水使)는 지난 5월 29일 영을 떠나 곧장 남해(南海) 경내의 노량(露梁)으로 가서 경상 우수사와 만났습니다. 같은 날 사천(泗川) 선창(船滄)의 왜인 4백여 명이 산에 올라 진을 치고 흰 기치(旗幟)를 세웠고, 누각 같은 적선이 13척이었는데 종일 접전하여 그 배들을 다 격파하였습니다. 화살에 맞고 죽은 왜적이 부지기수였고, 1급(級)을 목 베었습니다. 이달 2일에 당포(唐浦) 선창의 왜인 3백여 명이 포구에 들어와 분탕질하고 험준한 곳에 기대서 포를 쏘는데 왜선 9척의 크기가 판자집 같았습니다. 그중 한 척의 큰 배에는 층루(層樓)가 우뚝 솟아 있는데 그 층루 위에는 왜장이 굳게 앉아 움직이지 않고 있다가 화살에 맞아 추락하매 그를 목 베었고, 또 9급을 목 베고 그 배들을 깡그리 격파하였으며, 화살을 맞아 죽은 자들 역시 많았습니다. 5일에는 고성(固城)의 당항포(唐項浦)에 왜의 큰 배가 다수 숨어서 정박하고 있으므로 곧장 그곳으로 향하였고 본도 우수사가 뒤이어 구원하려 달려와서 그와 함께 같이 그 포구로 갔는데, 왜의 큰 배 12척, 작은 배 22척이 바다에 분산되어 정박하고 있었습니다. 한 척의 큰 배에는 층루가 우뚝 솟아 있고 그 누 위에는 왜장이 굳게 앉아 움직이지 않고 있다가 화살에 맞아 추락하매 또 그 자를 목 베었습니다. 그 배에서 얻은 분군(分軍)한 서류 7축(軸)에 기재된 왜인의 수효는 5천여 명인데 각각 자기 이름 밑에 피로 물들인 서명이 있으니, 틀림없이 삽혈동맹(歃血同盟)일 것입니다. 그 배를 다 격파하고 43급을 목 베었습니다. 8일에는 거제 땅 율포(栗浦) 앞 바다에서 왜의 큰 배 6척을 추격 나포하고 또 37급을 목 베었으니 도합 89급을 목 베었습니다. 본도 우수사와 경상 우수사가 합해서 2백여 급을 목 베었고, 가덕(加德)ㆍ천성(天城)ㆍ몰운대(沒雲臺) 등지를 연 이틀 동안 샅샅이 뒤졌으나 전혀 왜적의 종적이 없었습니다. 10일에 영에 돌아왔을 때에야 겨우 아뢰었습니다. ” 하였다.
17일. 손인갑(孫仁甲)이 사원동(蛇院洞)성주(星州) 남쪽 20리에 있다. 에 복병을 매설했다가 불리하여 퇴각하고, 박응성(朴應星)이 용사(勇士) 장호(張浩)와 같이 적군에 달려가 죽다. 처음에 성주(星州)와 현풍(玄風)의 왜적이 강줄기를 따라 연달아 널리 목책(木柵)을 시설해서 짐바리를 운반하다 떠내려보냈다. 그러자 손인갑이 말하기를, “사원동ㆍ안언(安彦) 등지에 복병을 매설하면 되겠다.” 하고, 마침내 사군(射軍) 수백을 골라서 저녁을 이용해 떠났다. 김면(金沔)에게 지원군을 청했으나 김면 휘하의 장병들이 대부분 가려 하지 않자, 김면이 사람을 시켜 복병 작전을 그만두게 하였다. 그러나 손인갑이 듣지 않고 사동(蛇洞) 길에다 복병을 매설하였다. 이날 왜적 3백여 명이 성주에서부터 짐을 운반하다 흘러 내려 왔는데, 손인갑이 약정하기를, “주장이 포 쏘기를 기다려서 발사하라.” 하였다. 유격장 박응성이 약정을 어기고 돌출했는데 왜적의 무리가 많고 정예해서 아군이 패배하였다. 박응성 등은 힘을 내어 싸우다 죽었다. 박응성은 맨 먼저 응모하여 용감하게 힘내어 싸웠고 늘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적을 경시하다가 죽으니 전군이 그를 아까워 하였다. 이 거사에 있어서 손인갑은 매복할 곳은 많은데 사군(射軍)이 적어서 김면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김면이 구원해 주지 않아 일을 그르치게 되었으므로 자못 불만스런 생각을 갖게 되었다.
19일. 김면(金沔)이 군사를 거느리고 거창(居昌)으로 돌아가다. 그때 초유사 김성일(金誠一)이 거창에 있었는데, 금산(金山)과 지례(知禮)에 있던 왜적의 기세가 창궐하여 장차 거창으로 마구 들어올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합천(陜川)과 고령(高靈)의 군대에게 영을 내려 우마현(牛馬峴)을 막으러 오게 하였다.
손인갑이 그 영을 듣고 곧 행장을 차리자, 정인홍이 말하기를, “금산의 왜적이 급하기는 하나 무계(茂溪)의 왜적 역시 소홀히 다뤄서는 안 된다. 지금 만약 군사를 철수하여 그곳으로 옮겨 간다면 고령과 합천은 장차 왜적의 소굴이 되는 것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가서 김공의 거동을 탐지해 보는 것만 못하다. 그가 만약 군사를 끌고 돌아오면 우리는 움직여서는 안 된다.” 하였다. 그때 초유사의 전령을 가진 자가 금산의 진에서 나와 그것을 김면에게 내보이자, 김면이 답서를 쓰기를, “거창 현감(居昌縣監)이 문서로 운운한 것은 손인갑이 여러 사람의 의론을 어기고 복병을 매설했다가 패전하여 왜적이 반드시 충돌해 올 것이므로 사세가 돌아가기 어렵소.” 하니, 손인갑이 대노하여 이르기를, “이것은 나를 죽이고 싶어하는 것이다. 군사를 가지고 있으면서 구원해 주지 않고 나한테 허물을 돌리니 이것이 과연 군자의 생각인가. 그가 가지 않는 바에는 나는 불가불 초유사의 명령에 따라야 하겠다.” 하고, 곧 군사를 이끌고 권빈역(勸賓驛)까지 가서 말에 먹이를 먹이는데 그때 김면이 군사를 거느리고 그곳을 달려 지나므로 손인갑이 더욱 그를 의심하였다. 그때 마침 초유사의 전령이 또 와서 영을 내리기를 오지 말라고 하여, 손인갑은 마침내 돌아와 버리고 정인홍이 혼자서 김성일을 가 만나보고 돌아왔다. 김면은 거창으로 간 후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정인홍ㆍ김면 두 사람의 군사가 두 갈래로 갈라져, 김면은 거창을 진수(鎭守)해서 우마현(牛馬峴)을 방어하고 정인홍은 고령을 진수해서 성주와 무계의 왜적을 방어하였다. 전치원(全致遠)과 이대기(李大期)는 초계(草溪)에 진을 치고 곽재우(郭再祐)는 의령(宜寧)에 진을 쳐 강우(江右) 일대가 그 덕분으로 보전되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낙동강에서 왜적의 배가 위에서부터 흘러 내려오다가 두 척은 침몰하고 한 척은 노를 풀어 놓고 내려갔는데, 곽재우가 배를 고스란히 나포하여 27급을 목 베었다. 그 배에 실려있는 것은 다 궁중의 보물들이었는데, 태조가 착용했던 목화[靴]도 들어 있었다. 곧 그 보물들을 초유사에게 보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성주의 주부(主簿) 배설(裵楔)이 본 주의 가장(假將)이 되어 군사 수백 명을 모아 복병을 매설하여 왜적의 통로를 차단하고 목 벤 수효가 퍽 많아 포상되어 합천 군수로 승진하였다. 그의 부친 전 군수 배덕문(裵德文) 역시 왜적에 붙좇은 중[僧] 찬희(贊熙)를 잡아 목 베어 상으로 판사(判事)의 직을 받았다. 그때 찬희는 성주의 왜적에 붙좇아 들어가서 판관(判官)이라 가칭하고 창고를 풀어 백성들을 꾀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곽재우가 왜적 안국사(安國寺)와 정진(鼎津)으로부터 강을 격해서 서로 맞서 있으므로, 왜적이 강을 건너오지 못하고 강줄기를 따라 올라갔다. 곽재우 역시 서로 바라보며 좇아 올라가 성주 안언 역로(安彦驛路)에 이르러 정병을 거느리고 가만히 나가서 교전했으나, 적은 많고 아군은 적어 겨우 몇 급의 목만을 얻어가지고 퇴각하였다.
○ 곽재우는 김수(金睟)가 도(道)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대단히 슬퍼하여 말하기를, “처음에 왜적이 왔을 때는 조금도 방어할 계획이 없었고 근왕하기에 이르러서는 나라를 위해 죽어야 한다는 의리를 몰랐으니, 우리 도에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여 감히 얼굴을 들고 다시 온 것이구나. 나는 군사를 옮겨 먼저 그를 쳐야 하겠다.” 하였는데, 김성일이 준책해서 그만두고 마침내 김수에게 아래와 같이 격문을 보냈다.
가슴 아프다. 우리 온 도를 무너져 흩어지게 만들었고 우리 서울을 함락하게 하였으며, 우리 성상을 파천하게 만들고 우리 온 나라 백성들의 간과 골을 땅바닥에 으깨지게 만든 것은 다 네가 한 것이다. 너의 죄악이 천지에 가득 찼는데도 네가 스스로 모른다면 이것은 우매한 인간이다. 네가 과연 우매한 인간인가. 너는 우매한 인간이 아니라, 재앙과 변란을 양성(釀成)하여 이 같은 극단에까지 이르게 하였으니, 온 천하의 토끼털[필(筆)]을 다 모지라지게 해도 네 죄를 다 써내기에는 부족하고, 온 천하의 대[竹 옛날에는 대를 엮어 종이를 대신하였음]를 다 없앤다 해도 네 악을 다 써내기에는 부족하다. 사람들은 모두들, 기한을 정해서 성을 쌓게 해서 백성들을 학대한 것이 혹심했던 것을 너의 죄라고 하고, 군사를 절제(節制)하는 데 방법이 없어서 왜적으로 하여금 마구 들어오게 한 것을 너의 죄라고 하는데, 이것은 모르는 사람들의 말이다. 내지(內地)에 성을 쌓는 것은 비록 인심을 잃었다고는 하나 마음은 적을 방어하는 데 있었은즉 그것은 네 죄가 아니다. 군사를 절제하는 데 전도(顚倒)한 것은 비록 군사의 기밀을 패하게 하였다고는 하나 재주가 병란을 대응하는 데 모자라서 그랬은즉 역시 너의 죄는 아니다. 이런 것들을 가지고 너를 죄 준다면 어떻게 네 마음을 굴복시키겠느냐. 그러나 네 죄가 하나 있으니, 왜적을 환영한 일이다. 왜적을 환영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너는 온 도의 정병과 용사 5, 6백 명을 뽑아 인솔하고서 동래(東萊)가 함락되자 먼저 밀양(密陽)으로 달아났고, 밀양이 패하게 되자 또 가야(伽倻)로 도망쳤으며, 왜적이 상주(尙州)를 지나가자 거창(居昌)으로 물러나 숨었다. 한 번도 장병을 권면해 일으켜 그들로 하여금 왜적을 치도록 한 적이 없어 마침내 왜적으로 하여금 무인지경에 들어가는 것같이 하여, 종내는 열흘 안에 수도가 함락되게 하였다. 자기 몸 붙일 곳이 없음을 스스로 알고 근왕을 칭탁하고 도망쳐 운봉(雲峯)을 넘어 갔으니, 사람을 속일 수 있겠느냐. 하늘을 속일 수 있겠느냐. 네 죄의 둘째가 있으니, 패전을 기뻐하는 것이다. 패전을 기뻐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늙은 겁장이 조대곤(曹大坤)은 본래 책망할 게 못 된다. 그러나 한 도의 원수(元帥)로 김해(金海)의 함락을 구해내지 못한데다가 왜적을 보기도 전에 먼저 있던 곳[主鎭]을 버리고 정진(鼎津)으로 퇴각해서 진을 쳤고, 정진은 왜적이 있는 곳에서 몇 백 리나 떨어져 있었는데 헛되이 놀라 무너져 회산서원(晦山書院)으로 도망쳐 들어가 마침내 여러 진(陣)과 각 읍들이 풍문만을 듣고 무너져 도망치게 만들었은즉, 조대곤의 죄는 주살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도 너는 그 자를 목 베어 내걸어 사람들의 마음을 경각시키지 않았으니, 너는 과연 성(城)을 버리고 패전한 군율을 모르는가. 네 죄의 셋째가 있으니, 나라의 은혜를 잊은 것이다. 은혜를 잊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듣건대, 네 조상은 10대의 주불(朱紱)이요 7대의 은장(銀章)이라고 하니, 녹도 후했고 은총 또한 융숭하였다. 그러니 의리상 마땅히 나라와 휴척(休戚 기쁨과 슬픔)을 같이하고 사생을 함께해야 할 것이다. 만약 충의의 기운을 분발하고 강개한 마음을 발동하여 자신이 사졸에 앞서 죽겠다는 마음을 가졌다면, 무릇 우리 영남의 2 백여 년을 두고 배양해 온 사람들이 어찌 몸을 잊고 죽음을 무릅써서 나라의 치욕을 씻어버리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너는 군부(君父)의 파천을 기뻐하고 수도의 함락을 달갑게 여겼으니, 너는 과연 군부의 곤란을 서둘러 구해낼 줄 모르는 자인가. 네 죄의 넷째가 있으니, 불효다. 불효란 무엇을 말하는가? 듣건대, 네 아비는 비록 불행하게 일찍 세상을 떠났으나 참으로 강개하고 충의로운 선비이었다. 만약 네 아비로 하여금 지금의 변란을 당하게 했다면, 반드시 의병을 권장하여 나라의 원수를 갚았을 것이다. 땅속에 들어간 영령이 생각건대, 반드시 어두운 가운데에서 너의 한 짓을 가슴 아파하고 너의 불궤(不軌)함을 분해하며, “임금을 무시하고 어버이를 잊은 일이 내 자식한테서 나올 줄이야 어찌 생각했으랴.” 하고 말할 것이다. 네 죄의 다섯째가 있으니, 세상을 속인 것이다. 세상을 속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네가 조정에 출사할 때 조정에서는 강과경직(剛果耿直)하다고 지목하였고, 영남에 절(節)을 갖고 내려왔을 때 영남에서는 너를 총명재예(聰明才藝)하다고 일컬었다. 강과 경직하고 총명 재예한 사람이 정말로 절충(折衝)하고 어모(禦侮)할 마음이 있었다면 험준한 곳에 거점을 두고 견고하게 진지를 지켜서 멀리 몰고 들어오는 적을 막는 것이 고리를 굴리는 것[轉環]같이 쉬웠을 터이다. 그런데 너는 수수방관(袖手傍觀)하면서 한 가지 계책도 획책하지 않고 한 가지 모의도 시행하는 일이 없이 왜적이 도륙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은즉, 전일의 강과와 재예는 좋은 작위를 낚으려는 것이었으나 오늘의 우매한듯 겁내는듯 하는 것은 무엇을 하고자 하는 것이냐. 네 죄의 여섯째가 있으니, 무치(無恥)한 것이다. 무치란 무엇을 말하는가? 너는 영남을 왜적에게 버려 두고 운봉을 넘어 전라도로 들어가서 근왕군에 몸을 기탁했다가, 근왕군이 용인(龍仁)에 도달했을 때 왜적 6명을 보고는 군량을 버리고 군기(軍器)를 내던지고 금관자(金貫子)를 잃어버리고 달아났다고 한다. 이것은 미리 금관자를 버리고 군사 중에 섞여 왜적으로 하여금 알아보지 못하게 한 것이다. 구차하게나마 살아 보자는 마음은 평소에 정해졌던 것이고, 구차하게 살아나는 꾀는 못하는 짓이 없었던 것이다. 네 죄의 일곱째가 있으니, 남의 성공을 꺼리는 것이다. 성공을 꺼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네가 도내에 있으면서 네가 왜적을 토벌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군사들의 마음이 저상해서, 앞장서서 적에게 나가는 자가 없게 되었다. 다행히 초유사가 충성심을 격발하고 의기(義氣)를 고무하여 사방에서 의병이 일어나게 만들어 동지들이 목숨을 내놓게 된 덕분으로 사람들의 마음이 좀 가라앉고 성세가 자연 커져서 지역 내의 왜적을 깨끗이 쓸어버리고 거가를 받들어 돌아오는 날을 가리키고 기다릴 수 있게 되었었다. 그런데 너는 부끄러움을 잊고 치욕을 참고서 얼굴을 들고 다시 와서 호령을 하고 지휘권을 발동해서 의병들로 하여금 흩어져 버리려는 마음을 갖게 하고 초유사로 하여금 다 이룩하게 된 공을 망치게 만들었은즉, 전의 악은 이미 지나가 버렸다 하더라도 지금의 죄는 용서할 수 없다. 아아! 북쪽 하늘은 멀고 도로는 막혀서 왕법(王法)이 시행되지 않아 네 목이 아직도 온전한 것이다. 너의 가짜 기운과 떠도는 혼이 비록 천지 사이에서 보고 숨쉬고 있다고는 하지만, 너는 사실 머리 없는 시체다. 네가 만약 신하의 분수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네 군관을 시켜 네 머리를 베어 버리도록 하여 천하와 후세에 사과하라.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내가 네 머리를 베어서 귀신과 사람의 분을 풀도록 할 것이다. 너는 알아 두라.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당초에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켰을 때 군사의 위세가 날로 성해 가고 왜적을 죽인 것이 퍽 많았다. 우병사 조대곤이 그의 성공을 꺼려 계사(啓辭) 안에 의심하는 말을 써 넣었고 감사 김수(金睟) 역시 계문 안에 불측한 말을 꾸며 넣었다. 이에 이르러 곽재우 역시 앞의 격문에 든 김수의 죄목을 들어 상소하였다.
경상도 의령(宜寧)의 유학(幼學) 신 곽재우는 진실로 황공한 마음으로 머리를 조아리고 삼가 백 차례 큰절을 하고 주상전하께 말씀을 드리나이다. 엎드려 듣건대, 수도가 함락되고 거가 파천했다 하니, 북쪽을 바라보며 가슴이 미어지고 통곡을 억제하지 못하나이다. 왜적이 오자 씩씩한 사나이와 건장한 장수가 누구나 다 빠짐없이 소문만 듣고 무너져 달아난 것은 무기가 견고하고 예리하지 않아서가 아니고 성지(城池)가 높고 깊지 않아서가 아니며, 단지 사람들의 마음이 흩어져서 흙같이 무너지는 탈이 있었기 때문이었나이다. 대저 사람들의 마음을 흩어지게 한 자는 바로 김수입니다. 김수는 두 차례에 걸쳐 이 도의 감사를 지냈는데 정치를 하는 것이 맹호보다 더 포학하여 성군의 은택이 막혀서 내려오지 않아 흙같이 무너질 형세가 이미 일이 생기기 전에 나타났습니다. 왜적이 오기에 이르러서는 자신이 먼저 퇴각해 숨어버리고 온 도의 수장(守將)으로 하여금 한 번도 무기를 맞대고 싸우지 않고 성문을 열고 큰 적을 맞아 들여 혹시나 뒤떨어질까 두려워하게 만든 것이 마치 저 왜적이 우리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을 기뻐하는 것 같았으니, 김수의 죄는 비록 머리털을 잡아쥐고서 주살한다 해도 사람들의 마음을 가라앉히기에 부족합니다. 그래서 신이 김수에게 격문을 보내 이르기를, “가슴 아프다. 운운. 너는 알아 두라.” 하였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혹 도주(道主)의 과오를 말한 것을 잘못한 짓이라고도 합니다. 평상시 무사한 날에 있어서는 물론 자기 도주를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마는, 이같이 위급하여 존망이 우려되는 때에 만약 다들 잠자코 있다면 그것은 단지 도주가 있는 것만 알고 전하가 계신 것은 모르는 것입니다. 경상도 전체의 모든 사람이 전하의 신하라면 어찌 김수의 죄를 용인하고 이 나라가 망해가는 때에 전하를 저버리겠습니까. 송(宋) 나라의 고종(高宗)이 호전(胡銓)의 상소를 들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천하 후세의 원한거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만약 전하께서 꼴 베고 나무하는 자의 말이라도 채납하여 주신다면 중흥의 공은 곧 이룩할 수 있게 될 것이니, 종묘 사직이 매우 다행할 것이고 신민들이 심히 다행할 것입니다. 신은 진실로 노둔(駑鈍)하여 강호(江湖)에 자취를 감추고 있었으나 이제 왜적의 변을 당해 종료 사직이 위태로우니, 스스로 조상 3대에 조정에서 벼슬 한 일을 생각할 때 신비한 모의와 계략은 비록 자방(子房 한 고조를 도운 군략가인 장량(張良))에 미치지 못하나 복수하겠다는 마음은 신이 정녕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 번 죽을 각오로 4월 22일에 의병을 모집하고 일어나서 왜적을 막아 왔던 것으로, 다행히 전하의 위령(威靈)에 힘입어 오늘에까지 이르렀습니다. 힘을 다해서 죽은 후에야 그만둘 것을 마음으로 맹서하거니와 이 하찮은 신의 심정은 전연 딴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니니, 엎드려 원하옵건대 신의 광기와 참람함을 용서하시고 신의 어리석은 충정을 살피소서.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의령의 의병장 곽재우가 온 도의 의병 여러 군자에게 널리 고한다. 김수는 나라를 망하게 한 큰 역적이다. 《춘추(春秋)》의 대의를 가지고 논하자면 사람이면 누구나 다 그를 주살할 수 있다. 따지는 사람은, 혹 도주(道主)의 과오조차도 말할 수 없는 노릇인데 하물며 그 목을 베겠다고 말하는 것이야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할 것이나, 이것은 단지 도주가 있다는 것만 알았지 임금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왜적을 영접하여 서울에 들여놓고 임금으로 하여금 파천하게 한 자를 도주라고 해서 되겠는가. 수수 방관하며 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기뻐하는 자를 신하라고 해서 되겠는가. 온 도의 사람들이 다 김수의 신하가 된다면 김수의 죄를 말하거나 김수의 머리를 베어서는 안 되겠지만, 온 도의 사람이 주상 전하의 신하 아닌 자가 없다면 나라를 망하게 한 역적을 사람들이 다 죽일 수 있고 패망을 기뻐하는 간악한 인간을 다들 목 벨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말하는 사람은 혹 김수를 목 베는 것이 일의 체통에 어울리지 않는다고도 한다. 나라의 원수를 갚고 나라의 역적을 치면 그것이 이른바 일의 체통이다. 김수가 일의 체통을 멸실한 지 오래되니 일의 체통이 어울리고 안 어울리는 것은 본래 따져서는 안 될 것이나, 먼저 간악한 인간을 목 베어 군대를 돌아가게 하라는 조서가 없게 만든 연후에 거가를 받들어 돌아와 중흥의 공을 세운다면 그것은 일의 체통에 크게 어울린다. 엎드려 원하건대, 의병으로 나선 여러 군자들은 격문을 자세히 보고 군사들을 거느리고 김수가 있는 곳에 모여 그 목을 베어 행재소에 바치라. 그렇게 하면 공(功)이 수길(秀吉)의 목을 바치는 것보다 갑절이 될 것이니 의사들은 이 점을 알아두라. 혹시 수령들이 나라가 망할 것과 임금에 대한 대의(大義)를 생각하지 않고 도적 김수에 부회(傅會)하여 그 고을 사람들로 하여금 의거를 못하게 한다면 김수와 함께 같이 주살할 것이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그때 김 수는 거창으로부터 산음(山陰)으로 옮겨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홀연히 위의 격문을 보게 되어 분하고 놀라움을 견디지 못했다. 김경근(金景謹)이 또 치고(馳告)하기를, “곽재우가 영공(令公)을 해치려고 대군을 거느리고 오니 속히 피해야 하오,” 하여, 김수가 그날로 밤중에 함양으로 달려가 군수를 시켜 성을 지키고 계엄을 펴고 봉화(烽火)를 늘어놓고 기다리게 하고, 또 막하의 장수와 보좌관들에게 말하기를, “곽재우가 오면 응전하여 이를 방어하고 두려워하지 말라.” 하고, 이어 군관 김경눌(金景訥)을 시켜 곽재우에게 격문을 전하게 하였는데 그 격문에 이르기를,
역적 곽재우에게 격문을 보낸다. 곽재우야, 너는 네가 역적임을 아느냐. 의병을 일으킨다고 가탁(假托)하여 불궤(不軌)한 짓을 음모하다가 흉악한 모략이 실패하고 탄로가 나서 억만 년 후에까지 그 추악한 냄새를 남긴 자가 동탁(董卓)의 역적질이 아니었느냐. 옛 기록에 이르기를, “형벌은 대부에게는 올라가지 않는다.” 하였고, 또, “대부를 독단적으로 죽이지 말라.” 하였은즉, 서열이 높고 지위가 높은 사람은 비록 죽어야 할 법을 범했다 하더라도 그에게 임금의 생살지권(生殺之權)을 함부로 가하지 않는 것은 중신(重臣)을 대우하는 도리인 것이다. 본도의 순찰사는 일찍이 육경(六卿)을 지내고 두 차례나 옥절(玉節)을 잡았으며, 하물며 한 도의 도순찰사의 직책을 받았음에랴. 설사 순찰사가 직접 큰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임금으로부터 그 죄를 물어야 하지 조정에서도 처치할 것이 아닌데 하물며 본도의 사람이 그 어찌 법으로 처치할 수 있겠는가. 너 역적이 난리의 틈을 타서 사람들을 불러모아 죄를 나열하여 격문을 전한 것은 의거를 가탁하여 불궤한 짓을 음모하다가 흉악한 모략이 깨져서 탄로날 때를 위해 미리 자기를 보전하기 위한 계략이었음에 불과하다. 지금 왜적의 기세가 굳세고 거침없어 이미 수도를 함락시키고 거가가 파천하였으며 종묘사직이 폐허가 되었으니 조금이라도 강개한 뜻을 가진 자라면 비록 녹을 먹는 사람이 아니라 할지라도 마땅히 창을 베고 자며 적개심으로 나라의 치욕을 씻어야 할 것이어늘 하물며 본도와 같이 병화를 면한 고을 사람들이겠는가. 낙동강 동쪽은 몇 번이나 함락되었는지조차 알지 못하여 근처의 주현(州縣)이 단지 7, 8군데가 남았을 뿐이다. 소수의 왜적이 모여서 주둔하고 있는데 지금 고성ㆍ성주ㆍ금산(金山)에 버티고 있으며, 또 금산(錦山)을 함락시키고 장차 거창을 함락시키려 하고 있으니, 나머지 7, 8개 읍도 마치 죽어가는 사람이 기식(氣息)이 엄엄(奄奄)하여 약이 넘어가지 않고 호흡이 불통하고 혈색이 단지 입술에만 남아 있어 살 길은 10분의 1밖에 없는 것과도 같다. 너 역적의 마음이 만약에 의기에 격동되어 나왔다면 마땅히 순찰사ㆍ초유사와 김송암(金松庵 김면)ㆍ정내암(鄭箂嵒 정인홍) 두 선생과 힘을 다해 왜적을 토벌하느라 여가가 없을 것인데, 오직 반역할 마음만으로 먼저 한 도의 대장을 제거하려고 죄를 늘어놓고 격문을 전해 그로 하여금 정벌하는 책모에 전심하지 못하게 하여, 남아 있는 7, 8개의 읍이 장차 승냥이와 범 같은 왜적이 횡행하는 데 직면하여 자매와 처첩이 깡그리 사로잡혀 가고 부자 형제가 다 어육이 되어 비참하게 도륙되었으니 부모 처자가 있는 자들이 어찌 네 몸뚱아리를 난도질하고 네 살을 씹으려 들지 않겠느냐. 너 역적이 감히 이런 짓을 하는 것은 전후로 낭패(狼狽)하여 진퇴유곡으로 어찌할 수 없어서 그렇게 한 것이다. 왜냐하면, 너 역적이 처음 군사를 일으켰을 때 네 마음속에 작정하기로는, 국가가 공허할 때에 무뢰한 무리들을 많이 모아서 개인적인 은혜로 이들을 묶어 심복을 만들어 작은 왜적을 약탈하여 군의 성세를 크게 떨쳐 불행히 일이 가라앉으면 일대(一代)의 원훈(元勳)이 될 기회를 잃지 않을 것이고, 만약 요행히 나라가 망하면 또 새 왕조를 창립하는 대공을 이룩하게 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화심(禍心)을 품고 의병을 가탁하여 초계(草溪)의 관곡(官穀)을 점취하고 진주(晉州)의 전세(田稅)를 탈취하는 등 공공연히 도적질을 자행했다. 네 도당 정대성(鄭大成)이 주살될 때, 순찰사가 역적인 네가 장수를 무시하는 마음이 있음을 의심하고 막하에 자세히 캐어 물었었는데, 만약 안세희(安世熙)ㆍ김경눌(金景訥) 두 사람이 네가 역적이 아님을 힘써 진술하지 않았더라면 너의 머리와 발은 벌써 각각 따로 떨어졌을 것이고, 너 역적의 혼 역시 동탁과 지하에서 뉘우치고 있게 되었을 것이다. 왜란이 일어나기 전에는 순찰사는 한 도의 방백에 불과했고, 방백이 거느린 것은 5, 6인에 불과하여서, 절제(節制 지휘권)가 병사와 수사에까지 미치지 못했다. 왜란이 일어나 버린 후에 부산과 동래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진주로부터 밀양으로 달려갔고, 밀양ㆍ청도(淸道) 등 5, 6개 지방이 2, 3일 내에 연달아 함락되어 왜적이 성주를 범하게 되자 고령으로 달려갔으며, 왜적이 금산(金山)으로 향하자 달려서 지례(知禮)로 향했다. 도중에 성주 가천리(伽川里)를 지나 마을 가에 말을 멈추고 유생 등 4, 5인을 초치하여 의병을 일으킬 뜻을 타일러 주고서는 가야로 들어가지 않고 곧장 지례까지 갔는데, 그때에 비로소 도순찰사(都巡察使)의 임명을 받았으나 거느린 것이 역시 막하의 사람에 불과했을 따름이다. 도주한 패군 이유검(李惟儉)을 초치하여 목 베어 장대에 내걸고 죄를 청했고, 김해의 조대곤이 백의종군하는 것을 구원해 주지 않았으나 조대곤은 금산에서 독전(督戰)하여 수백 급을 목 베었고, 여러 읍에 장수를 정해서 포로와 수급을 많이 올리게 하였으니, 이것들은 다 순찰사의 절제가 탁월했음에 연유한 것이다. 이제 왜적이 이미 고개를 넘어갔고 서울이 이미 함락되어 버리자 군사를 거느리고 근왕하겠다는 뜻을 행재소에 치계(馳啓)하고 겨우 1천여 명을 거느리고 운봉(雲峯)까지 갔는데, 이어 초유사가 전라 순찰사가 공주로부터 돌아 내려오고 전주에서는 아직 군사를 조달하지 못했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또 초유사의 강력한 만류에 따라 돌아와 안음(安陰)에 머물렀다. 급히 와서 구원하라는 교지를 보자마자 눈물을 흘리고 마음에 맹서하여 홀로 1백 명을 거느리고 수원까지 나가서 머물렀는데, 도중에서 소수의 왜적들을 만났으나 목 베어 죽인 것이 퍽 많아 왜적은 퇴각해 가 버렸다. 그 이튿날에 이르러 왜적의 무리가 진으로 돌격해 왔는데 양호의 순찰사들은 다 이미 달아나 버렸고 본도의 순찰사 막하의 장병은 이미 전투에 나가게 했으므로 단지 수삼 명이 남아 있을 뿐이었으나, 조금도 겁을 내지 않고 차고 있던 검을 뽑아서 퇴각하는 장수를 목 베이려고까지 하며 혼자서 후퇴하는 군대의 뒤를 따라가 우리 군대를 손상 없이 온전히 돌려왔으니 이런 것들이 충분(忠憤)의 분발이 아니겠느냐. 너 역적이 비록 살해하려고 가슴속의 흉악한 모략을 실제로 자행하기는 하나, 조정의 명령이 아직 팔방에 행해지고 대장의 명령 역시 한 도에 행해지고 있다. 한 도와 팔방의 사람들이 다 고개를 숙여 너 역적의 수하에 복종하고 순찰사가 해를 입는 것을 내버려 두겠는가. 극성스러운 왜적이 충돌해 오던 초기에 큰 진(鎭)을 연속하여 함락시키고 분탕하고 도륙하였으므로 태평시대의 백성들이 소문만 듣고 무너져 흩어졌으니 장수된 자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수풀을 찍듯[樧] 무인지경에 들어가듯 곧장 찌르고 유린해 들어와 도성에 마구 들어왔으니 이것은 순찰사가 절제하지 못한 소치는 아니다. 너 역적이 비록 ‘죄를 씌우려면 어찌 말 없는 것을 근심하랴’ 하여 감히 흉악 처참한 일을 하고 이미 막하의 사람들에게 격문을 전해 자객(刺客)의 일을 하도록 위협하였으나, 순찰사는 미치광이의 말로 버려 두고 일소에 부쳤을 따름이다. 너 역적은 또 순찰사에게 격문을 냈는데 거기에 지적한 말을 보니 다 거짓되고 사실이 없으나, 그 가운데 충의기절(忠義氣節)로 순찰사의 선인(先人)에 허락한 것이 있으니 이것은 천리(天理)가 민멸(民滅)하지 않은 곳이라 이를 수 있다. 옛부터 지금까지 충의기절을 지닌 사람은 이러한 때에 의를 제창하고 근왕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하는 바가 한결같이 정대하고 거짓 없는 도리에서 나오기 때문에 남이 이간하지 못하고 행하는 일이 청천백일(靑天白日)과 같다. 송조(宋朝)의 여러 충성스러운 신하에 비길 인물은 당대의 김ㆍ정 두 선생이다. 너 역적은 본래 볼 만한 행실이 없었으면서도 의병을 칭탁하여 불궤(不軌)한 짓을 몰래 꾸몄고, 도당과 우익(羽翼)은 다 음험 무상하고 흉악 무도한 사람들인즉 지금이 흉악하고 참혹한 말은 너 역적만이 한 짓이 아니다. 네가 반역한 상황을 순찰사가 행조(行朝)에 치계하였고, 곰과 범 같은 장수와, 산을 뽑아낼 인재가 다 순찰사의 막하에서 서로 다투어 너를 잡아오겠다고 자청하고, 가슴 아파하지 않는 이가 없어 격문을 내어 여러 장수들을 불러 원문(轅門)에 묶어 오게 하여 불궤한 너를 효시(梟示)하자 한다. 네가 지금 와서 항복하면 멸족하는 화를 면할 수 있으니 길흉 화복 사이에서 너 역적 도당은 각각 거취를 살펴라. 또 너 역적이 평소에 행한 패역 무도한 정상은 말할 수는 있겠으나 말하면 추악해지니 잠시 내버려두고 거론하지 않는다. 잘 알아 두어라.
○ 경상도 순찰사 막하의 김경로(金敬老) 등이 곽 의사의 진중에 격문을 내어 다음과 같이 이르다.
곽재우의 도당에게 격문을 전한다. 무릇 천하의 일 중에 그 기미가 드러나지 않은 것은 지혜로운 자라도 혹 모르지마는, 기미가 이미 드러난 것은 비록 지극히 우매하다 하더라도 모르는 자가 없다. 이제 곽재우의 평소의 패악한 행실과, 기회를 이용하여 흉악한 짓을 자행하는 정상은 명백하여 보기 쉬우니 지혜로운 자를 기다린 연후에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도내의 사람들이 혹 다 알지 못해서 같이 도당에 들어가 함께 무도한 지경에 빠졌으니 남 몰래 제군을 아깝게 생각하는 터이다. 잠시 그중에서 여럿이 다 아는 것을 들어서 말할 터이니 제공(諸公)은 자세히 듣고 그 정상을 알아서 거취를 정하고 향배를 결정하라. 곽재우는 본래 탐욕스럽고 포악한 사람으로 부모의 세도를 믿어 오로지 할경(割耕 남의 밭을 침범해서 자기 농사를 짓는 일)을 일삼고 남의 소와 말을 빼앗으며, 그가 사귀는 것은 다 흉악한 이지(李旨) 같은 도배(徒輩)들인즉 그 마음이 바르지 않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문덕수(文德粹)가 토주(土主)를 모략하여 죽이고 방백을 질책해 욕하며 병사를 고소한 것은 다 곽재우가 도와 주지 않은 것이 없은즉 그 마음의 음흉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왜적의 변란이 생긴 뒤 의병에 가탁하여 무뢰한 무리를 꾀어 모아서 먼저 초계의 창고를 파괴하고 군량ㆍ청밀(淸蜜) 및 군기(軍器)ㆍ잡물을 전부 훔쳐 갔으며, 또 의령현 창고의 곡식을 약탈하고 또 진주의 전세(田稅) 4백여 석을 개인 창고에 옮겨 넣고서, 인근의 무뢰한 무리들에게 나누어 주어서 은혜를 베푸는 거리로 삼았다. 그리하여 왜적을 쫓아내기 전에 흉계를 꾸며 표면으로는 왜적을 치는 것으로 보이고 속으로는 신하 노릇 하지 않을 모략을 간직하고 있었다. 먼저 방백을 제거하려고 군현(郡縣)에 격문을 전하고 읍재(邑宰)를 모략을 써서 죽여 위아래의 인민들을 공갈하고 말하기를, “방백은 백성을 독촉하여 성을 쌓느라고 생령(生靈)을 못살게 굴었고 방어를 하지 않아 왜적으로 하여금 마구 들어오게 만들었으니, 그 죄가 크다. 이 기회를 이용해서 모해할 것이다.” 하니 멍청하고 우매한 백성들과 강(講)에 낙방한 유생(儒生)들은 날로 흉악하고 패란한 술수 속에 빠져 들어감을 모르고 충의의 고장으로 하여금 난폭한 곳으로 변하게 만들어 장차 온 도를 옥석이 함께 타게[俱焚] 하려고 하니, 천년 후에까지 악명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어찌 제공이 깊이 부끄러워 하는 바가 아니겠는가. 또 곽재우가 애당초 거병한 것이 진정한 의거였던가. 만약 그것이 의거였다면 왜적이 막 성할 때에 직면하여서는 자기의 사적인 유감을 버리고 왜적 토벌에 전심하여 생령을 편안해지도록 구제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한 것에는 힘쓰지 않고 개인의 원한을 보복하고 윗사람을 무시하는 계략을 행했으니, 이 점으로 해서 곽재우의 마음 먹음을 사람들이 다 의심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제공이 유독 그를 의심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또 이노(李魯)가 마음 쓰는 것은 천고에 찾아볼 수 없이 악한데 곽재우는 그의 재물을 탐내 그의 딸을 데려다 첩을 삼았으니, 곽재우의 마음 쓰는 것이 실로 개돼지 같아서 조금이라도 식견이 있는 자라면 멀리서 바라보고는 되돌아 가 버리고 더럽혀질까 겁낼 터인데, 제공은 다 그에게 부동하여 오직 그 명령에만 복종하니 제공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설사 곽재우가 흉계를 실행할 수 있어서 우리 읍재를 죽이고 우리 방백을 해치며 마침내는 불궤한 짓을 꾸미는 날에 이르게 된다면, 제공은 그래 어떻게 처신하겠는가. 곽재우가 하는 일에 따라서 스스로 난동 반역의 죄에 빠지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곽재우가 하는 일에 따르지 않고 충신 열사가 되겠는가. 시비 이해와 길흉 화복은 오늘 하는 일에 판연하게 가름되는 것이다. 바라건대, 제공은 일찍이 반역과 충순의 이치를 분별하여 먼저 곽재우의 머리를 베어서 원문(轅門)에 가지고 와 바치면 모든 백성이 그 사기(士氣)를 기뻐할 것이고, 국가에서는 그 충의를 가상히 여겨서 꽃다운 이름을 영원토록 남기고 작록을 무궁토록 누릴 것이니 어찌 아름답고 좋지 않겠는가. 의를 사모하는 무리들이 그 모함하는 말을 가슴 아파하여 감히 그 거짓됨을 신변하여 이르기를, “초계와 의령에서 양곡을 취한 것 등의 일은 이미 초유사의 계사에 상세하므로 잠시 내버려 두고 변론하지 않겠거니와, 진주의 전세(田稅)에 관한 일인즉 평시 본주의 세미는 남강(南江)으로부터 배가 기강(岐江)으로 해서 가는데 이때에 와서는 배가 기강에 이르자 적병이 돌연히 닥쳐 와서 격군(格軍 : 뱃군 즉 선박의 승무원)이 배를 버리고 흩어져 쌀 실은 배만 빈 강에 홀로 떠 있은 것이 10여 일 되었다. 그러므로 도둑에게 줄 우려가 있어 의사가 거두어서 군량으로 한 것이다. 그러므로 앞에 이른바 기강에 버려진 배의 세미라 한 것이 이것이다. 그런데 이런 인간들이 죄를 씌우려고 정당한 물건을 탈취했다고 하였으니 통탄할 일이다.
○ 삼가(三嘉)의 진사 윤언례(尹彦禮), 학유(學諭) 박사제(朴思齊) 등이 위의 격문을 보고는 곧 여러 읍에 통문(通文)을 내어 김경로 등이 의사를 모함한 죄를 폭로하여 다음과 같이 이르다.
요사이 순찰사의 군관배가 곽 의사에게 보낸 글 두 가지를 보니 하나는 “역적 곽재우에게 격문을 보낸다.” 하였고, 하나는 “곽재우의 도당에게 격문을 보낸다.” 하였다. 의사가 과연 역적이고 도당을 가진 자인가. 그 가운데 말한 것은 다 부회하고 날조한 말들로 단지 자기네들의 음흉하고 사특하며 정의를 해치는 마음을 드러내기에 족할 뿐이지, 곽 의사의 병폐를 만들어 내기에는 부족하다. 충의를 가리켜 역적이라 하니 그것은 진회(秦檜)의 흉악하고 교활한 묵은 술수다. 진회 하나로도 악비의 군대를 돌림으로 분을 풀기에 족했거늘, 하물며 여러 진회가 순찰사의 막하에 모였음에랴. 의병에 앞장서 일한 이가 어찌 그 때문에 한심해지지 않겠는가. 곽 의사가 여러 군대가 달아나고 무너질 때를 당해서 백 번 죽어도 돌아보지 않는 계책을 결행하여 충의가 과격하고 절실하며 이름이 올바르고 말이 순리함은 사람들이 이목이 있는 이상 췌언할 필요가 없거니와, 강회(江淮)를 차단하여 군현의 울타리 구실을 하였는데, 아! 충성이 곽 같고 의기가 곽 같은데도 역시 역적의 이름을 면치 못하니, 그 자들이 의사를 해치는 것은 바로 의병을 해치는 것으로 그 자들의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다. 의사가 근자에 낸 격문에는 사실 경솔하게 움직인 점이 있기는 하지마는 그래도 충의에 분격한 지나친 행동에 불과한 것이니, 하필 그것을 깊이 허물해서 무엇하랴. 저 군관배는 한갓 왜적을 환영한 순찰사가 있는 것만 알았지 왜적을 토벌하는 의사가 있는 것은 모르고 곽에게 격문을 전해서 사적인 유감을 마음대로 부리려고 한다. 그 사적인 유감이라는 것은 이러하다. 김경눌(金景訥)과 이노(李魯)는 사이가 나빠진 지가 오래되어 여러 해 동안 이노를 모함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그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다가 마침 이 변을 만나 자기 가슴속의 흉계를 실행하게 된 것을 기뻐하고 있던 차에 의사의 격문(檄文)을 보고는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곽의 첩은 이의 딸이니 이노를 죽일 구실은 여기에 있을 게다.” 하고, 이노를 뒤에서 사주한 괴수로 만들고 곽을 사주당한 사람으로 만든 것이다. 김경눌 역시 사람이니 어찌 곽공이 의사이고 충신임을 모르기야 하랴마는, 자기 원수를 갚으려고 의사를 가리켜 역적이라고 한 것이다. 이 뜻을 임금[宸聽]께 앙달(仰達)하고 싶으나 북쪽 하늘은 아득히 멀어 소리내어 외쳐도 도달하지 않는다. 엎드려 원하건대, 여러 곳의 의병소(義兵所)에서 각각 통문을 내어 의사의 명백한 마음으로 하여금 참소하고 모함하는 자에게 희생되지 않게 한다면 천만 다행한 일이다. 아! 올바른 도리를 지닌 타고난 본성은 사람이면 다 가지고 있고 역순(逆順)과 시비는 본래 공론(公論)이 있는데도 감히 대악 무도한 이름을 충신 의사의 위에 덮어 씌우려고 하니 어찌 가슴 아프지 않은가. 맹자가 이르기를, “정의를 해치는 자를 도적[賊]이라 한다[賊義者謂之賊].” 하였는데, 대의(大義)를 제창한 자를 역적이라고 하겠는가. 무죄한 자를 무고한 자를 역적이라고 하겠는가? 제군은 이 점을 깊이 살피라. 《경상순영록》에 나온다.
○ 김경근(金景謹)이 거창에 갔는데 김성일(金誠一)이 막 자고 있었다. 김경근이 말씀드리기를, “곽재우가 순찰사를 살해하려고 합니다. 저 김경근이 이미 고하여 피하게 하였사오니 영공(令公)께서도 선처하셔야 합니다.” 하였다. 김성일이 병을 핑계하여 면회를 거절하고 사람을 시켜 말하기를, “네가 산음(山陰)에서 나를 만났을 때 팔뚝을 걷어 올리고 큰 소리로 말하기를, ‘김수(金睟)를 목 베지 않으면 천지에 대의를 펼 길이 없다.’ 하였고, 곽재우는 어리석은 사내이니 너희들이 부탁한 게 아닌지 어떻게 알겠느냐?” 하고 전하니, 김경근은 부끄럽고 겁이 나서 물러갔다. 김수는 격문을 전해 곽재우를 크게 꺾어 놓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무척 두려워하는 마음이 들어 비밀리에 김성일에게 내통하여 곽재우를 타이르게 하였다. 김성일 역시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김수를 원망하는 것이 매우 심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 그로 말미암아 불의의 변고를 초래하게 될까 두려워져 곧 곽재우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냈다.
의병장은 왜적의 변란이 일어난 시초부터 재산을 탕진해서 맨 먼저 의병을 일으키고 분발하여 자신은 돌보지 않고 한결같이 나라를 위해 왜적을 토벌하는 것만으로 마음을 먹고 살아왔으니 비록 옛날의 열사라 한들 어찌 그보다 더했겠습니까. 본관이 임지에 도착하자 곧 글을 보내 초청하였던 바 의병장은 늙고 졸렬한 본관을 함께 할 자가 못 된다고 생각하지 않고 단성(丹城)으로 와서 만나 주었고, 한 번 읍하는 사이에 자신을 잊고 나라를 위해 죽을 뜻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 후 고립 무원한 군사를 이끌고 낙동강 가를 횡행하여 먼저 나서서 왜적을 토벌하여 전후로 목을 베인 것이 퍽 많아, 왜적이 말을 몰고 전진하여 마구 들어오지 못해 그 일대의 여러 성들이 지금에 이르기까지 보존되었고, 뛰어난 명성이 사방으로 빨리 퍼져 듣는 사람 치고 감동하여 귀를 기울이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원근에서 호응해 와서 왜적을 토벌해 버릴 공훈을 손꼽아 기대하였으니, 의병장의 영웅적인 풍도와 의열은 비단 한 대에 떨치고 빛날 뿐 아니라 또한 죽백(竹帛)에 기록되어도 부끄러움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홀지(忽地)에 의병장이 순찰사의 영문(營門)에 격문을 보내 감히 패만(悖慢)한 말을 마구 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방백이 어떠한 관직이고 의병장이 어떠한 인물인데 감히 그러한 일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방백이 비록 실제로 죄가 있다고 하더라도 본래 조정이 있어 처치할 것이고 도민이 손을 쓸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의사는 충의의 가문에서 태어나 왜적을 토벌하는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이 이룩되려고 하는데, 스스로 함정에 빠져 일족을 멸망시킬 곳으로 빠져 들어가리라고 어찌 생각했겠습니까. 당(唐) 나라의 반역한 병졸이 주장(主將)을 쫓아 내고서 □ 패란을 초래한 것이 무릇 몇 사람이었습니까. 전복한 수레의 전철을 그대로 밟으려고 하는 것입니까. 미혹했다가 되돌아 온다는 경계는 태역(大易)에서 교훈한 바이거니와 앙화를 바꿔 복으로 만드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이 취하는 것이니, 나의 충고를 따른다면 순조로워 복이 많아질 것이고 따르지 않으면 거슬러서 해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 기미는 사이에 머리털도 안 들어갈 정도로 미묘하니 의병장은 이 점을 생각하십시오.
○ 김해에 주둔해 있는 왜적 1천여 명이 고성(固城)으로 옮겨 들어가다. 왜장이 은가마를 타고 감사를 자칭하고 진주를 범하려 하여 진주성 내의 장병이 본도 여러 진(鎭)에 구원을 청하였다. 곽재우 역시 군사를 거느리고 구원하러 달려갔는데 도중에 초유사의 글을 보고는 말을 세우고 답서를 다음과 같이 썼다.
곽재우는 진실로 황공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삼가 초유사 합하(閤下)께 글을 올리나이다. 지금 타이르시는 글을 보고 극도로 감격하여 눈물을 떨구었습니다. 간곡하신 가르치심과 친절하신 타이르심은 다 저 곽재우로 하여금 장래 닥쳐올 앙화를 모면하고 막대한 공을 이룩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어찌 합하의 지극한 인애로우심으로 저 곽재우를 자식같이 보신 데서 그렇게 하신 것일 뿐이겠습니까. 또한 나라를 위한 마음이 지성에서 발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왜적을 토벌하는 데 자기 몸을 잊게 하시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기는 하나 내리신 말씀은 억양이 너무 지나쳐 그것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뻐하고 두려워하게 할 것이나, 저 곽재우는 그 때문에 기뻐하지도 않고 또 그 때문에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아! 합하가 순찰사를 위하여 꾀하시는 것은 충성스러우십니다. 다만 두렵기는 순찰사가 합하를 위해 꾀하는 것은 그렇지 못하리라는 것입니다. 순찰사 역시 사람입니다. 어찌 자기 죄를 자기가 모르기야 하겠습니까. 순찰사가 말하는 것은 합하께서 고치게 만들 수 있으십니다. 순찰사가 하는 일은 합하께서 고치게 만들 수 있으십니다. 그러나 순찰사의 마음을 합하께서 고치실 수 있으시겠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비록 합하의 지성(至誠)과 후덕으로도 끝내 순찰사의 마음을 고치시지 못하신다면, 저 곽재우가 두려운 것은 합하를 모함하는 말이 반드시 순찰사의 입에서 나올 것이라는 점입니다. 합하께서는 저 곽재우가 반드시 헤아릴 수 없는 처지에 빠질 것을 근심하였으나 저 곽 재우는 합하께서도 끝내는 그렇게 되는 것을 면치 못하실까 두려워합니다. 합하께서 저를 아끼시는 마음으로도 저를 비륜(非倫)하고 불궤(不軌)하다고 의심하시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에 있어서야 어떻겠습니까. 하물며 순찰사에 있어서야 어떻겠습니까. 하물며 저 곽재우와 공을 다투는 자에 있어서야 어떻겠습니까. 저 곽재우가 자신을 죽이고 일족을 멸망시키는 앙화가 반드시 닥쳐오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그만두지 않는 것은, 천성에서 우러나 졸지에 고칠 수 없고 울분에 찬 마음을 급히 돌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합하는 임금이 보내신 분인즉 합하의 가르치심은 곧 왕의 말씀과 같으니, 어찌 감히 한낱 자기의 소견을 고집하고 합하의 가르치심을 어기겠습니까. 진주에서 긴급을 고해 와 군사를 거느리고 개금원(介金院)에 왔습니다. 군무가 복잡하여 만의 하나도 사뢰지 못하고 줄입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김수가 의병장 김면(金沔)에게 글을 보내 곽재우를 진정시켜 달라고 하니, 김면 역시 곽재우가 분에 못 견뎌 하는 마음을 알고 있어 의외의 환난이 생길까 두려워하여 곧 곽재우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내다.
막부(幕府)의 이름을 듣고 늘 흠앙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더운 날씨에 거느리신 군사들에게 도움이 있고 지휘가 만안하시길 바랍니다. 저 김면은 일개의 썩은 선비로 애써 군에 있으니 어찌 도움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한갓 스스로 두려워하고 염려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다만 사람의 책모가 좋지 않아서 왜적이 고개를 넘어가게 놓아주어 수도를 지키지 못해 어가[大駕]가 몽진(蒙塵)하기에까지 이르렀은즉 그 책임은 돌아갈 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귀하께서는 조정의 명령이 아닌데도 백면서생으로 의병을 일으키셨습니다. 근심할 것은 의기(義氣)가 부족한 데 있지 않고 오직 처사가 마땅함을 잃을까 두려워할 뿐입니다. 지금 행재(行在)가 멀리 떨어져 있어 주청이 통하지 않으니, 우리 민간에서 거사한 사람들은 의뢰할 데가 없어 부득이 왕이 임명한 사람한테서 명령을 받은 연후에야 이름이 바르고 말이 순조로워 왜적을 공격할 수 있게 되고 근왕(勤王)할 수 있게 되며, 체통에 질서가 있게 되고 일을 해가는 데 조리가 있게 됩니다. 만약 일을 그르친 사람을 죄를 주어야 한다고 운운(云云)하는 바가 있다면, 의기가 당당한 점은 있지마는 순리로 공을 이룩하는 방법에는 아마도 미진한 바가 있을 것입니다. 어떠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귀하께서 충성심을 떨쳐 한바탕 외치심에 천백 명이 그림자같이 따라 나서서 물에서 공격하고 뭍에서 전투하여 흉악한 왜적이 도망쳐 흩어졌으니, 낙동강 우안(右岸) 일대를 안도하고 근심없이 지내게 만든 것은 실로 의사의 공입니다. 이른바 강회(江淮)를 차단하여 그 기세를 막은 것은, 지금에도 역시 그 사람이 있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흠모하여 마지않게 합니다. 오직 원컨대 귀하께서 다행히 하찮은 말이라고 버리지 마시고 일에 임해서는 반드시 그것의 순리를 생각하셔서 그 이미 자란 것은 누루시고 그 지극하지 못한 것은 증진시키셔서 의를 모아 멀리 뻗어나가게 하여 결함이 없게 하신다면, 일대에 솟구쳐 나오고 만고에 빛나게 되실 것에 어찌 다름이 있겠습니까. 마침 곽시리(郭是理)가 돌아가는 편을 인해서 구구하나마 사모하는 마음을 대략 적었습니다. 이만 줄이며 삼가 글월을 올립니다. 면배(沔拜).
○ 김수가 다음과 같이 치계하다.
소신(小臣)이 위로 성명(聖明)의 명철하심을 믿고 망령되이 생각하기를, 방비하는 제구를 만약 충분히 조치해 둘 수 있다면 왜적이 충돌해 오는 환난에 대해 막아낼 보탬이 거의 있으리라고 여겨, 임지에 도착한 초기에 방어하는 한 가지 일을 조금도 소홀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내지에 성을 구축하는 데 교생(校生)들을 일시에 많이 징발해다 쓴 것이 신이 원한을 모은 근원이었으니, 사람들의 말을 돌아보지 않고 일을 이룩할 수 있기를 기원하였던 것입니다. 그때 우병사 신할(申硈)이 마침 신과 뜻이 맞아 비록 날쌘 군사에게 지나치게 엄히 한 폐단이 있기는 하나, 그가 나랏일에 마음을 다한 정성은 실로 가상한 것이어서 그와 더불어 일을 같이 하여 무릇 군무에 관련된 일은 다 함께 의논하여 처치하였던 것이 □□□ 물정을 격하게 한 것입니다. 문덕수(文德粹)의 상서(上書)는 온 도의 사람들이 대부분 이성(異姓)의 삼촌질(三寸姪) 전 직장(前直長) 이노(李魯)의 조종이었다고 생각하여, 또 신이 전에 장계(狀啓)에서 약간 그 뜻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므로 이노가 소신을 해치려고 하는 생각을 어찌 잠시라도 잊었겠습니까. 국운이 불행하여 왜적의 기세가 창궐하였으니 이 지경에 이르러서는 신의 죄가 죽어야 마땅하겠으나, 이 기회를 이용하여 백방으로 날조하고 모함하는 일은 더욱 못하는 짓이 없을 만큼 성해졌습니다. 그리고 그의 딸을 첩으로 삼아 사위가 된 의령에 사는 곽재우는 시초에 의병을 일으켰을 때 곽월(郭越)의 아들이라 자칭하고 무뢰한 3백여 명을 거느리고 앞장서서 수종하게 하였으며, 나장(羅將 고을의 장교)들을 엄연히 대동하고 초계(草溪)의 남쪽 대로로부터 행군하여 관청에 돌입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먼저 지키는 자와 관가 사람을 묶고 관의 창고를 쳐부수었으며, 쌀과 밀가루 및 기름ㆍ꿀ㆍ찹쌀가루[眞末] 등 잡물까지 전부 훔쳤습니다. 또 사창(司倉)의 창고 문을 부수고 군량과 곡물을 깡그리 훑어내서 자기의 도당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 고을의 삼공형(三公兄) 등이 문서[文狀]로 보고해 왔으나 신이 생각하기는, 곽월은 세족(世族)인데 세족의 아들이 어찌 도적질을 감행하는 일이 있겠는가. 틀림없이 무뢰한 육지의 도적들이 곽월의 아들을 가칭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다시 듣고 보아서 보고하라 하여 역시 회송한 뒤에 병사 조대곤(曹大坤)이 이미 치계하였고 신 역시 공형의 문서만을 낱낱이 들어 계달(啓達)하였습니다. 오래지 않아 또 듣건대, 의령의 신반현(新反縣)의 창곡(倉穀)을 초계에서 한 것같이 훔쳐 가졌고, 진주의 전세선(田稅船) 4척을 공공연하게 약탈해서 개인 창고에 옮겨 넣어가지고 근방의 못된 도배들에게 나눠 주어 은혜를 갚을 밑천으로 삼았습니다. 곽재우가 정말로 국가의 위급한 난국을 위해 의병을 이끌고 왜적을 공격하려는데 군량이 없었다면 마땅히 수령에게 고하거나 혹은 신이 있는 곳에 보고하여 법에 따라 받아 내다가 먹여야 했을 터인데, 그렇게 하지 않고서 겁탈을 자행하여 극악한 왜적이 하는 짓과 같은 점이 있으므로 신은 그가 패역(悖逆)스러운 마음을 가졌음을 뚜렷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왜적을 토벌하는 데 급했고 또 그가 마음을 고치고 선에 따르게 되기를 바라 각 관원에 통유(通諭)하여 그로 하여금 와서 나타나게 하고 서서히 그 끝장을 보고서 다시 치계할 요량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곽재우가 병사(兵使)의 체포령을 신이 시킨 것이라고 잘못 듣고는 흉악하고 참혹한 말을 공공연히 초유사 김성일(金誠一)이 있는 곳에서 발설하였고, 신이 보낸 영리(營吏)를 죽이려고까지 하였는데 김성일이 극력 말려서 해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 미신(微臣)의 구구한 생각은 그를 진정시키는 데 있으므로 불쾌한 감정을 안색이나 언사에 나타내지 않고 도리어 그를 위해 장계를 올려 그의 군공을 보고하여 그를 가장(嘉獎)하시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분노와 원한이 가시지 않아 시험에 떨어진 유생들을 꼬여내어 도당을 매일같이 많이 모아 이름을 위병이라고 칭해서, 겉으로는 왜적을 토벌하는 흔적을 나타내고 속으로는 불측한 계략을 품고 있으니, 모르는 사람은 의병이라고 생각하지마는 아는 사람은 그가 틀림없이 예측하기 어려운 환난을 빛어낼 것이라고 근심하여, 자제들에게 엄명을 내려 그들 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한 사람까지도 있었고 무도한 말을 지껄이는 것을 들은 사람도 많습니다. 신이 일찍 처치해 버리지 않은 것은 사세에 난처한 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에 와서는 먼저 소신 막하의 장병들에게 격문을 보내어 자객의 짓을 하게 강요하였고, 또 신의 죄를 늘어놓아 여러 읍에 통문을 내어 군사를 일으켜 난동을 꾸미라고 권고하였는데, 수령 중에 고을 사람을 그것에 따르지 못하게 하는 자가 있다면 수령까지도 함께 죽이겠다는 뜻도 역시 그 통문 중에 언급하였습니다. 또 소신이 있는 곳에 격문을 보내왔는데 그 흉악한 말은 입으로 말할 수 없으나, 기한을 굳게 작정하여서 성을 구축하는 데 백성들을 못살게 학대하고 절제(節制)에 방법을 어겨 왜적이 마구 들어오게 만들었다는 것이 그가 내세운 신의 죄입니다. 성을 구축한 일은 신이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적이 마구 들어오게 만든 것은 과연 신의 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태평 시절 백 년에 사람들이 전쟁을 알지 못하니, 군졸들이 소문만 듣고 무너져 달아나고, 변방의 장수들은 죽기가 아까워 퇴각한 것이 어찌 다 신의 절제가 올바른 방법을 어겼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겠습니까. 변란이 발생한 후 각 항의 절제의 득실(得失)은 다 어람(御覽)을 거쳤거니와, 한 도의 정병 용사 5, 6백 명을 뽑아서 거느리고 다니면서 동래가 함락되는데 먼저 밀양으로 달아나고 밀양이 함락되는데 또 가야로 도망갔으며, 왜적이 상주를 지나자 거창으로 퇴각해 숨었고 한 번 장병을 권면해 일으켜 그들로 하여금 왜적을 공격하게 하지 않았으므로 그 자신이 몸둘 곳을 몰라 근왕을 칭탁하여 도망쳐 운봉을 넘어갔다고 지적하면서 신의 죄라고 합니다. 당초 신은 순찰사의 임무를 겸하고 있지 않아 원래 거느리고 다니는 군관이 없었습니다. 계청하여 8인을 보탠 가운데 홍윤관(洪允寬)과 김경로(金敬老)는 조방장을 겸했기 때문에 이미 좌ㆍ우도로 각각 파견하였고 이응성(李應星)은 변란이 생기기 전에 당포(唐浦)의 조전장(助戰將)으로 보냈으며, 강만남(姜晩男)과 장처문(張處文)은 변란이 생긴 후에 즉시 동래 등지로 파견하여 그로 하여금 구원하는 일을 맡게 하였고 김해 부사 서예원(徐禮元)이 있는 곳에 전령하여 정병 각 30명씩을 뽑아서 주도록 하였으니, 그것은 신의 수하에는 본래 군사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 구전(口傳)으로 군관 6인과 안세희(安世熙) 등을 특명으로 치송(馳送)한 것을 추가한 것과 도내의 가솔군관(假率軍官) 약간 명 및 가덕 첨사(加德僉使) 최몽성(崔夢聖)ㆍ양산 군수(梁山郡守) 변몽룡(邊夢龍) 등을 다 합해도 단지 50인에도 차지 않았으니, 이른바 5, 6백명의 정병을 거느리고 다닌다고 한 것은 거짓으로 모함하는 것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지난 4월 15일 아침 신이 진주에서 왜적이 경내를 범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 갖추어 치계하고 오후에 출동하였는데, 도중에서 부산과 동래 두 진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밤낮없이 길을 재촉하여 16일 저녁에 밀양까지 달려갔으니, 이는 동래의 함락을 듣고 서둘러서 밀양으로 달려 들어간 것이지 동래로부터 퇴각해 달아난 것이 아닙니다. 거기서 성을 지키고서 변란을 기다리려고 하였으나, 본부(本府)의 성이 빗물에 태반이 무너졌는데 채 수축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본부의 군사는 부사 박진(朴晉)이 능사창군(能事槍軍) 세 부대와 아울러 남은 군사 전부를 거느리고 동래ㆍ양산 등지를 구원하러 달려갔고, 성을 지키는 나머지의 사람은 노약자 겨우 백여 명뿐이었습니다. 인근에 있던 청도ㆍ영산(靈山)ㆍ창녕(昌寧)의 군사들 역시 가야 할 곳으로 가버렸으므로, 합세하여 함께 지킬 도리가 전연 없었습니다. 신이 만약 그 성에서 포위된다면 동서로 책응할 수 있는 길이 없어지기 때문에, 왜적이 본부의 작원(鵲院)을 범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퇴각하여 영산을 지켰고 밀양을 구해내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또 초계로 퇴각하였으며, 왜적이 또 김해를 함락시키고 초계의 길로 향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합천으로 옮겨가서 주둔하였고 왜적이 성주를 범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고령으로 달려갔으며, 왜적이 금산(金山)으로 향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지례로 달려갔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가까이에 있으면서 책응하기 위한 계획이었으며, 각처에 무너져 흩어진 졸병 겨우 4백여 명을 얻어 방어사 조경(趙儆)과 조방장 양사준(梁士俊)에게 나눠주어 그들로 하여금 달려가 금산을 구원하게 하였습니다. 조경ㆍ양사준 등이 한 차례 금산에서 접전한 후부터 군졸들이 다 흩어져 이때부터 비록 각 관원을 독려하여 수령으로 하여금 흩어진 군졸을 수습하여 거느리고 오게 하였으나, 도망간 군졸들이 죄책을 받을까 겁을 내어 깊은 산에 들어가 있으면서 오직 자기가 있는 곳이 깊지 않을까 두려워할 뿐이었습니다. 다시 생원ㆍ진사 및 유식한 품관(品官)을 시켜 흩어진 군졸을 소집하게 하였으나 생원ㆍ진사 역시 깊은 산으로 들어가 버려 급작스레 군졸을 모을 길이 없어졌고 방어사는 이미 군졸이 없는 장수가 되어 버렸습니다. 왜적이 지례의 땅을 범하자 비로소 거창으로 왔는데 그때 왜적이 이미 의령ㆍ삼가(三嘉) 등지를 범했으므로 거창은 사실상 왜적이 침범한 복판에 있는 땅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곳에 주둔하고 있는 것은 위아래로 책응하기 위한 계책에서였고, 변란이 발생한 후에 가야까지는 가보지도 않았습니다. 도망했던 군졸 중에는 신이 직접 전투에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자진해서 신이 있는 곳에 나타나는 자가 많았으나, 그들을 혹은 병사에게 보내고 혹은 방어사에게 보내고 하였더니 곧 도망가 버렸고 또 그렇게 나눠서 보냈기 때문에 역시 신이 있는 곳에도 자진해서 나타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병사ㆍ방어사 등은 단지 군관만을 거느리고 있었으나, 신은 그래도 힘을 내어 싸우지 않는다고 누차 글을 보내서 신칙(申飭)하고 군관을 잡아다가 엄하게 교훈을 하였습니다. 곽영(郭嶸)ㆍ이지시(李之詩) 등이 호남에서 정병을 거느리고 지례에 와서 2일 동안 주둔하고 있었는데, 조경 등이 한군데 같이 있으면서 곧 전투하러 나가지 않았으므로 신이 그 소식을 듣고 분개하여 신의 군관인 손인갑(孫仁甲)ㆍ강만남(姜晩男)ㆍ장처문(張處文) 등에게 전령을 발급하여 양사준(梁士俊) 등을 형벌 집행차 그곳으로 보내니, 곽영 등이 금산으로 달려가 왜적 20여 급을 목베었습니다. 이른바 밀양이 패전하자 또 가야로 도망갔고 왜적이 상주를 지나자 거창으로 퇴각하여 숨어버리고 한 번도 장병을 권면하여 왜적을 공격하게 한 일이 없다고 한 것이 또 거짓으로 모함한 데 가깝지 않겠습니까. 왜적이 영로(嶺路)를 넘었는데 충청도의 여러 장병 역시 패해 왜적이 곧장 서울로 들어갈 앙화가 조석으로 박두하였으니, 이 일을 생각하면 울음 소리와 눈물이 다같이 나와 다른 일의 계획을 생각할 경황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타고남은 것들을 수습하여 호남 감사 이광(李洸)과 합세하여 근왕할 뜻으로 절차에 따라 장계로 올리고 군사 1천 3백여 명을 거느리고 전라도 운봉까지 갔습니다. 김성일(金誠一)을 통하여 비로소 어가가 서쪽으로 행행(行幸)하시어 서울이 이미 비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이광 역시 전주로 군사를 철수해 버리고 정병을 더 뽑느라고 아직 출동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고군(孤軍)을 거느리고 혼자 가기에는 사세가 퍽 어렵고, 김성일이 강력하게 권하기를 군대를 돌리고 흩어진 군졸을 불러 모아 주부(州府)에 웅거하고 있는 왜적을 토멸하여 군현(郡縣)을 수복하고 의병을 규합하여 다시 근왕하는 군대를 일으키도록 하라고 하였는데, 군량이 단지 20일분뿐이어서 도중에 낭패할 근심이 생길까 두려워 잠시 본도를 돌아왔으니, 도망쳐 넘어가지 않은 것이 분명한데 도리어 근왕을 칭탁한 것으로 신의 죄를 삼는 것입니다. 신이 군사를 거느리고 근왕한 것은 급히 서둘러 경내의 왜적을 소탕하고 구원하러 오라 하신 □ 교지를 삼가 따른 것인데, 왜적에게 영남을 버려 두고 운봉을 넘어 전라도에 들어가 근왕을 칭탁하였다고 죄를 삼는 것은 또한 사실과 다르지 않습니까. 부끄러움을 잊고 치욕을 참으며 얼굴을 들고 다시 와서 호령을 내고 지휘권을 발동하여 의병으로 하여금 풀어져 흩어지려는 마음을 가지게 하고 초유사로 하여금 이룩되어가는 공을 무너뜨리게 하였다는 것으로 신의 죄를 삼았습니다. 대저 정인홍(鄭仁弘)ㆍ김면(金沔) 등이 의병을 일으킬 모의를 할 때에는 열 가지 책략을 조목조목 진술해서 신과 왕복하며 상의하였고, 군량ㆍ군기(軍器)의 준비와 문서류의 처리는 다 신에게 문의해서 시행하였습니다. 합천의 의병장 손인갑은 바로 신이 정해서 보낸 사람이니, 그 처사의 온건함은 진실로 곽재우의 황당함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신이 본도로 돌아온 후 온갖 대소사를 일일이 문서로 보고하였고 다른 곳의 의병 역시 다들 그렇게 하였으니, 만약 의병이 일호(一毫)라도 흩어져 버리려는 마음이 있었다면 그들이 그렇게 하려 들었겠습니까. 의병들의 일은 다 초유사 김성일과 의논해서 처치하였고 조금도 독자적으로 막은 일은 없었으며, 두 사람 사이(즉 김수와 김성일 사이를 말함)에 장병이 오가는 말은 믿거나 의심하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친절하게 만나서 약속하기까지 하였으니, 이른바 이룩되려 하는 공을 깨뜨렸다고 한 것 역시 거짓입니다. 하물며 현존하는 여러 장수들을 통솔하고 의병을 규합하여 군현을 수복해서 곤경에 빠진 나라를 구하라는 성지(聖旨)가 간절하셨으니, 이른바 의병이라는 것을 신이 어찌 호령하고 지휘할 수 없겠나이까. 그런데 저렇게 운운(云云)하니 그 마음은 알기 어렵지 않습니다. 가령 그가 전해지는 말로 인하여 오해해서 무지하게 망령되이 굴었다 하더라도 반역한 백성이 된 결과를 면치 못하고 그가 왜적을 토벌한 공이 끝내 그 죄를 보상하기 어렵거늘, 하물며 이노(李魯)ㆍ문덕수(文德粹) 등이 다 한 집안에서 연결된 사람으로 세 사람의 유감이 위세를 빙자하고 있습니다. 이노는 매일 곽재우 곁에 있으면서 모해를 가르치고 꾀느라 있는 힘을 다하고 흉계를 실행하기를 바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초유사 김성일이 이러한 해괴한 소식을 듣고는 누차 글을 보내서 화복(禍福)을 진술하여 극력 타일러 진정하기를 바랐고, 김면ㆍ정인홍 및 다른 의병 역시 다들 그를 책하였습니다. 그가 혹시 그의 악한 마음을 뉘우치는 수가 있고 또 종내 진정한다면 그것이 신의 본뜻이니, 그가 정말로 얼굴을 고쳐서 깨닫는다면 신이 어찌 감히 그를 처음같이 대우해서 그의 공을 완성하게 해주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앙화의 기틀이 이미 발동하였으니, 신의 생사는 아마도 열흘 안에 결정될까 염려하나이다. 신의 죄는 본래 조정에서 처치할 것이 있을 터인데 이렇게 진달하는 것은 스스로 변명하는 데 가까우니, 온당하지 못한 줄은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거짓으로 모함하는 정상을 죽기 전에 내내 생각하여 다 진술하면 지하에서 눈을 감을 수 있게 될까 합니다. 초유사 김성일에게 자초지종을 통문하여 그로 하여금 선처토록 하겠습니다만, 이미 변고를 당하고서도 다시 얼굴을 억지로 들고 그대로 머무르며 온 도에 호령할 수 없으니 속히 처치하여서 한 지방을 진정시키도록 하소서.
○ 초유사 김성일이 곽재우가 충열(忠烈)한 인물인데 모함을 당하는 것을 가슴 아파하여 그의 무죄함을 밝혀서 다음과 같이 치계하다.
의령 사람 곽재우가 군사를 일으켜 왜적을 토벌한 일은 이미 누차 계달하였습니다. 지금 의외의 변이 생각지 못한 데서 나와 적절히 처리할 길을 몰라 극히 근심하고 있나이다. 곽재우는 바로 고 통정대부 곽월(郭越)의 아들이고 남명(南溟) 조식(曺植)의 손녀 사위입니다. 중간에 무예를 배우다가 버리고 글을 읽었는데 그 사람됨이 질박하고 문채가 없으며, 부모 상중에 슬픔을 다해 이웃에서는 다들 그를 효자라고 불렀습니다. 왜적의 변란이 발생한 초기에 병사와 수사가 뒤이어 달아나고 왜적이 밀양을 범하게 되자, 감사 김수는 지휘하는 장수가 포위된 성 안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영산으로 퇴각해 돌아왔다가 곧 초계로 향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곽재우가 분연히 말하기를, “병사와 수사가 달아났는데도 형벌을 가하지 않고, 지금은 또 왜적이 좌도에 나왔는데 초계로 퇴각해 달아났으니, 감사 역시 목 베어야 한다.” 하고는, 검을 짚고 길에서 만나 죽이려 하기에 동향 사람들이 강력하게 말려 그만두었습니다. 그 후 우병사 조대곤(曹大坤) 및 방어사ㆍ조방장ㆍ수령 등이 하나같이 다 소문만 듣고 무너져 달아나 열흘지간에 왜적이 서울의 궁궐을 범하자, 곽재우는 팔뚝을 걷어올리며 강개하여 말하기를, “이 무리들이 왜적을 보호해서 서울에 들어가게 하여 임금에게 화를 끼쳤으니 다 목 베어야 한다.” 하면서 많은 사람이 있는 넓은 자리에서 늘 큰 소리로 그렇게 말하다가, 하루아침에 집안의 재물을 풀어서 장병들을 모집하였습니다. 그의 첩이 말하기를, “왜 쓸데없는 죽음을 할 계획을 합니까.” 하였는데, 곽재우가 크게 노하여 검을 뽑아 목 베이려 하였고, 처자의 의복을 전사(戰士)의 처자들에게 풀어 주었습니다. 이로 인해 가산을 탕진하여 굶주림을 면치 못하게 되자, 자기 처자를 매부인 허언심(許彦深)에게 맡기고, 모집한 장병들을 거느리고 왜적을 치겠다고 소리쳐 말했습니다. 고을 사람들이 이 소리를 듣고 다들 곽재우가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의령과 초계 두 읍이 패전하여 관아가 비어 있고 의령의 관고(官庫)는 이미 분탕되었으므로 곽재우의 군사는 가지고 있는 양곡이 없어서 초계 및 신반현(新反縣)의 관고에 있던 양곡을 풀어서 군사들을 먹였는데, 합천 군수 전현룡(田見龍)이 곽재우를 도적으로 몰아 병사에게 보고하였고 병사는 명을 내려 그를 체포하게 하였습니다. 곽재우의 군대에 응모했던 자들은 이 소식을 듣고 다들 흩어져 가 버릴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신이 갓 임지에 도착해서 즉시로 글을 보내서 불렀더니 곽재우 군대의 사기가 다시 진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계속 왜적을 쳤는데, 왜적이 많고 적음을 막론하고 곽재우는 반드시 먼저 나서서 달려가 돌격하기 때문에 그가 거느린 전사들은 용기가 백배하여 일당백(一當百)의 구실을 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곽재우는 전투할 때면 반드시 홍초첩리(紅綃帖裡)를 착용하고 당상관의 갓[堂上笠飾]을 갖추고는 홍의 천강장군(紅衣天降將軍)이라 자호하고, 말을 달려 적진을 스치며 오가는 것이 섬광같이 빨라서 왜적이 비록 일제히 철환(鐵丸)을 쏘아도 맞추지 못합니다. 혹은 말 위에서 북을 치며 천천히 가서 군사를 행진시키는 절도로 삼기도 하고, 혹은 사람을 시켜 피리를 불고 호드기를 불게 하여 겁내지 않는 것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혹은 산 숲 속에 의병(疑兵)을 많이 만들어 놓고 호각을 불고 시끄럽게 북을 치기도 하고, 혹은 곳곳에 복병을 매설해서 사람이 없는 것같이 조용하게 있다가 왜적이 오면 곧 쏘아 죽이기도 합니다. 혹은 왜적의 배를 몰아 강 언덕에까지 가서 추격해 쏘기도 하고 하여 전투를 하지 않는 날이 없고, 전투를 하면 반드시 승리를 거두는데, 왜적의 수급(首級)을 베인 수효가 여러 장수들 중에서 가장 많고 왜적을 쏘아 죽인 것은 부지기수입니다. 왜적들은 그를 ‘홍의장군’ 이라 하고 감히 상륙하여 도적질을 하지 못하니, 의령ㆍ삼가 두 읍의 인민들은 다 생업에 안정하고 농사에 힘써 오곡의 풍성함이 평화시와 다름이 없습니다. 도내의 남은 백성들이 지금까지 보존된 것에는 곽재우의 공이 많습니다. 곽재우는 갑작스레 삼도의 군대가 수원에서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미친 사람같이 위험하고 망령된 말을 무수히 발설하였고, 순찰사가 글을 보내 그를 칭찬하고 장계를 올려 그의 공을 아뢰었어도 여전히 마음을 돌리지 않아 사람들 중에는 혹 그렇게 하면 앙화를 입게 될 것이라고 그를 경계하기도 하였으나, 곽재우는 반드시 검을 거머잡고 성을 내고는 하였습니다. 지금 곽재우는 갑작스레 두 차례나 순찰사의 영문(營門)에 격문을 보내 죄를 차례로 늘어놓고 토죄하겠다고 떠들어대며, 또 여러 읍의 의병장들에게 통문을 내어 토죄할 뜻을 말하였습니다. 신은 그 소식을 듣고 경악하여 모르는 결에 눈이 휘둥그래져 자리에서 떨어졌습니다. 순찰사가 신에게 공문을 보내서 의령의 관원을 시켜 곽재우를 잡아 가두라 하였으나, 신이 가만히 생각하기로는, 곽재우가 실제로 반역할 마음이 있다면 그가 한창 정병을 장악하고 있으니 한 역사(力士)에게 잡힐 상대가 아니고, 만약 반역할 마음이 없다면 글 한 장으로 족히 깨닫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곧 곽재우에게 친서를 내어 여러 가지로 비유를 들어 일깨워 주었고 김면 역시 글을 보내 경계하였던 바, 곽재우는 타이르는 말에 마음을 바꿔 순종하였고, 진주가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군사를 이끌고 달려가 구원하고자 이미 떠나갔다고 합니다. 곽재우가 일개 도민(道民)으로 도주(道主)를 범하려 하고 심지어 도주의 죄를 성토하여 격문을 보내고 하였으니, 비록 나라를 위해 분노하다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는 하지마는 형적이 난동을 부리는 백성이 된 바에는 곧 토죄해야 의당합니다. 그러나 곽재우는 온 나라가 함몰된 후에 고군(孤軍)으로 용기를 떨쳐 왜적을 격파해내어 도내의 남은 백성들이 그를 간성(干城)으로 의지하고 있는데, 지금 난언(亂言) 때문에 곧 주륙(誅戮)을 가한다면, 남은 성을 보존하고 왜적을 방어할 계책이 없어져 군사와 백성들은 그의 죄를 알지 못한 채 일시에 무너져 흩어질 것입니다. 신이 사태를 임시로나마 진정시킬 계획으로 재삼 경계하여 곽재우가 이미 순종하였는데 도순찰사에게 죄를 죄었으니 아마도 서로 용납하기 어려워 다른 변고를 야기시킬까 염려됩니다. 신이 듣기에는 을묘년 왜변 때 전라 감사 김주(金澍)가 영암군(靈嵒郡)으로부터 다른 읍으로 달아났던 바, 전 수원 부사 윤기(尹箕)가 그때 유생의 신분으로 포위된 성 안에서 검을 뽑아 그를 목 베려고 하였는데 김주는 성내지 않고 담소로 대처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논자(論者)는 지금까지 윤기의 용기를 칭찬하고, 김주가 능히 용납하였던 것을 장하게 여긴다고 합니다. 이제 곽재우의 일은 비록 심히 광기를 띠고 망령되기는 하나 그의 마음은 사실 다른 생각은 없습니다. 감사 역시 김주가 대처한 것같이 하면 조용하고 아무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김수(金晬)에게 글을 보내 그로 하여금 선처하게 한다면 근심할 만한 변고는 생겨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김수가 곽재우를 반란한 역적으로 장계를 올려 아뢰었고 또 다른 사람이 사주하였다고 말하였으니, 과연 그렇게 죄를 씌운다면 비단 그가 그런 죄목에 불복할 뿐 아니라 온 도의 민심을 아마도 수습하기 어려울 것 같아 극히 가슴 아픕니다. 그가 충의로 분발한 정상과 용기를 떨쳐 왜적을 토벌한 공은 온 도에 널리 알려져 아동과 주졸(走卒)까지도 다 곽 장군을 칭송합니다. 또 듣건대 곽재우는 군사를 잘 쓰고 장수의 재질이 있다고 하니, 만약 광기 띠고 망령된 자에 대한 주벌을 좀 늦춘다면 반드시 좋은 성과가 있을 것입니다. 신이 불행하게도 임명을 받은 후에 두 번이나 이러한 변고를 당했습니다. 신이 4월 중에 호남으로 길을 잡아 운봉현에 도달했었는데 호남 사람이 순찰사 이광이 근왕하는 데 늑장을 부린다고 그를 토죄(討罪)하려 한다고 어떤 사람이 신에게 몰래 말해 왔습니다. 신은 대의(大義)를 가지고 의사를 꺾어 말리고, 곧 이광에게 통지하여 대비하게 하고자 김수에게 의논했더니 김수가 말하기를, “그 사람은 근왕하는 것이 느리다고 해서 토죄하려고 하는 것이니, 의사라고 할 수 있소. 만약 그 사람을 죽인다면 온 도의 민심이 더욱 격해질 것이니 이광이 있는 곳에 통지해서는 안 되오.” 하여, 신은 그의 말에 따라 그만두었습니다. 지금 곽재우의 일이 바로 이와 유사합니다. 김수가 만약 호남의 의(義)에 대처하던 태도로 곽재우에게 대처한다면 난처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신 및 김면이 곽재우를 경계한 글과 그의 답서를 함께 베껴서 올려 보냅니다. 이 계사(啓辭)에서 넉넉히 공의 충후하고 깨끗한 마음을 알 수 있다.
○ 흉악한 왜적이 지례(知禮)에서부터 호남을 범하다. 적인(狄人) 5, 6명이 청학장군(靑鶴將軍)ㆍ백학장군(白鶴將軍)을 자칭하고 매복하여 왜적들을 사살하니 왜적이 좀 물러났다. 《경상순영록》에 나온다. 조금 있다가 대부대의 왜적이 무주현(茂朱縣)으로 마구 들어와 불태워 버리고 도적질을 하였다. 그때 본도 방어사 곽영(郭嶸)은 금산(錦山)에 진을 치고 조방장 이유의(李由儀)는 팔량(八良)에 진을 쳤으며, 이계정(李繼鄭)은 육십현(六十峴)에 진을 치고, 장의현(張義賢)은 부항(釜項)에 진을 쳤으며, 김종례(金宗禮)는 동을거지(冬乙巨旨)에 진을 쳐서 수비하며 왜적의 변란을 대기하였다. 적병이 또 옥천(沃川)으로부터 금산으로 향하자 방어사도 군(郡)의 성 안으로 퇴각해 들어가서 감사에게 구원을 청하니, 이광(李洸)이 군사 8백을 내어 장수를 정해서 금산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23일. 성주(星州)의 왜적 7백여 명이 양정(羊亭)으로 나와 진을 치고 가야산을 탐색하려 하였고, 또 한 떼는 지례(知禮)로부터 무주(茂朱)로 향하면서 순영(順英) 등 마을을 분탕질하다. 순영은 무주의 역 이름이다. 또 고성(固城)의 왜적 1천여 명이 고성의 성 밖에 나와서 주둔하였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서북을 잠식해 들어가는 왜적이 지나온 여러 도에 연속하여 진지를 마련해서 후면을 공격 당하는 데 대비하다.
○ 적병이 금산(錦山)으로 들어가다. 곽영(郭嶸)과 김종례(金宗禮)는 퇴각하여 고산(高山)에 숨었다. 왜적이 무주와 금산을 나누어서 점거하고 용담(龍潭)ㆍ진안(鎭安) 등지를 분탕질하였다. 어떤 사람이 왜적 속에서 나와 말하기를, “이 왜적은 바로 전날 창원(昌原)에서 전라 감사를 자칭하여 선문(先文)을 낸 자이다. 처음에는 이들이 곧장 전주(全州)로 향하려 하였으나 홍의장군에게 저지당하자, 우회해서 성주와 지례를 경유하여 이곳에 온 것이다. 운운.” 하였다. 본도 여러 읍에서 남은 장정을 찾아 모아가지고 길을 나누어 방어했는데, 왜적이 금산으로 막 들어오자 그때의 군수 권종(權悰)이 병으로 죽었다.
○ 이 광(李洸)은 전주에서 본주(本州) 사람 문관(文官) 이정란(李廷鸞)을 주의 수성장(守城將)으로 하여 이웃 읍의 군사를 모아 계엄을 펴고 왜적의 변란에 대비하게 하였고, 또 남원(南原)에 전령하여 군사를 모아 성을 지키게 하였다. 그때 본부(本府)의 선비들이 흩어진 군졸을 모집하여 향병(鄕兵)이라 칭하고 전 목사 정염(丁焰)을 장수로 추대하였다.
○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이 전주로부터 여산(礪山)으로 향발하여 비밀리 장병들과 의논하기를, “금산과 무주의 왜적이 이미 용진(龍鎭)으로 향했으니 이것은 틀림없이 전주와 남원에 뜻이 있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대군이 본진(本鎭)을 다 떠나가야 할 것이니 노약자만을 남겨서 수비시킬 것이다. 우리 군대가 진산(珍山)으로부터 그 자들이 생각하지 않은 곳으로 나가 나머지 무리들을 다 죽여버리고 뒤쫓아 추격하면, 그 왜적들은 전진해도 거점을 얻지 못하고 후퇴해도 돌아갈 곳이 없어 중도에서 낭패하여 스스로 황산(荒山)의 패전을 초래할 것이다.” 하고, 군사를 이끌고 은진(恩津)의 연산(連山)을 향해서 떠났다. 같은 진의 군량색(軍糧色)을 고목(告目 천한 사람이 높은 이에게 올리는 글)하기를, “가지고 있는 군량은 여산군(礪山郡)에서 수납(輸納)하겠나이다.” 하였다. 색리(色吏)는 남원의 색리이고 군량은 남원의 군량이다. 대체로 의병을 돕는 일은 각 읍이 다 그러했다. 대장의 행차가 22일 전주를 떠나 23일 여산에 머물렀다. 당일 도부(到付)한 금산의 전통(傳通)에, 옥천(沃川)의 양산현(陽山縣)을 분탕질한 왜적이 본군을 지향해 와 진을 치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24일 동군(同郡)의 전통에는, 10리 거리에 진을 칠 것이라 했고, 서울의 왜적은 신립(申砬)과 윤두수(尹斗壽)가 각각 좌우 대장이 되어 1천여 명을 잡았다는 것이었으며, 여산군수가 구전(口傳)한 내용은 의병이 은진ㆍ연산ㆍ금산으로 지양한 것과 우의병장 김천일(金千鎰)의 행차와 병사(兵使)가 일시에 직산(稷山)으로부터 진위(振威)로 향한 것이었다.
○ 조방장 이유의(李由義)가 남원 판관 노종령(盧從岭) 등을 거느리고 팔량(八良)으로부터 금산의 송현(松峴)으로 진을 옮겨서, 왜적이 남쪽으로 부딪쳐 내려올 우려에 대비하였다.
○ 합천 의병장 손인갑(孫仁甲)은 초계(草溪)의 마진(馬津)에서 큰 전투를 하여 강 연안의 왜적을 깡그리 죽이고, 손인갑은 물에 빠져 죽었다. 이에 앞서 손인갑은 강 연안의 왜적이 물을 따라 내려간다는 초계에서의 치보(馳報)를 듣고, 손인갑이 밤중에 군사를 전진시켰으나 초계의 의병이 이미 강 연안의 왜적을 토멸해 버렸으므로 드디어 군사를 끌고 돌아왔다. 그런데 안장을 채 내려 놓기도 전에 초계의 보고가 오기를, 강 연안의 왜적이 또 많이 닥쳐왔다고 하였다. 손인갑은 시간을 다퉈 달려갔고 또 정인홍에게 보고하였다. 정인홍은 여명에 길을 떠났다. 왜적의 배 12척이 약탈한 물건을 무겁게 싣고 초계를 지나가는데 초계와 고령의 군대는 고립되고 약해 감히 잡지 못해서 손인갑이 그들과 합세하여 왜적과 크게 싸워 깡그리 섬멸하였다. 떠가는 배가 강을 덮었는데 그중 배 한 척이 노를 급히 저으며 도망갔으나 모래 여울의 물이 얕아서 급히 배질할 수 없었다. 손인갑은 승전한 기세를 타고 물에 들어가서 추격했는데 모래턱이 부드러워 사람과 말이 함께 물에 빠졌다. 여러 군사들이 미처 건져내지 못했으므로, 온 전진(戰津)의 군사들이 참담하고 사기가 저상하여 수급(首級)을 벨 생각도 없어지고 크게 통곡하며 돌아왔다. 대체로 이때에는 군사들이 전투에 익숙하지 않아서 주장(主將)이 몸소 사병에 앞서 나가지 않으면 적에게 나가려 들지 않았다. 그래서 손인갑은 전투할 때마다 먼저 자신이 적의 칼날과 맞섰기에, 한 좋은 장수를 잃기에까지 이르른 것이다. 사병들 치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고, 촌락 사람들이 그 소식을 듣고 역시 모두 슬프게 울었다. 정인홍은 김준민(金俊民)을 감사에 □계청하여 손인갑이 거느리던 군대의 가장(假將)으로 삼았다. 김준민은 처음에 거제(巨濟)의 현령으로 있었는데 왜적의 변란이 갓 일어나자 성지(城池)를 수선해 가지고 사수할 계획을 세웠다. 김수(金晬)가 근왕을 칭탁하여 군관을 데리고 다니다가 용인(龍仁)에서 무너져 돌아온 후에도 여전히 감사의 휘하에 있었는데, 이때에 와서 정인홍이 권양(權瀁)을 보내 김준민으로 손인갑이 맡았던 자리를 대신 맡도록 해달라고 청해 김수가 허락하고 그를 보냈다. 용감할 수 있고 겁낼 수 있고 하는 것은 병가(兵家)의 기략(奇略)이다. 물에 들어가서 죽은 것은 혹 황하수를 맨몸으로 건너려는 아둔한 짓이라는 나무람을 받을지는 모르지만 목숨을 탐내어 나라를 잊는 도배와 비한다면 이 손인갑은 살기를 잊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인물인 것이다. 슬프도다.
○ 금산(錦山)ㆍ무주(茂朱)에 있는 왜적의 기세가 매우 거세어서 내지(內地)로 쳐들어오므로 백성들이 공포심에 싸여 있었다. 이때에 정염(丁焰)이 남원(南原)의 향병장(鄕兵將)이 되어 남정(南亭)에 머물고 있었는데 부사 윤안성(尹安性)이 정염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나의 추물(醜物 첩(妾)을 말한 것임)이 일가집 사람으로 언어를 좀 알아 들을 만한데, 오늘 아침에 전주(全州)에 윤씨의 첩은 전주 기생이다. 와서 왜적의 동향과 그 밖의 소식을 전하였다. 그 내용에, 방어사(防禦使)와 조방장(助防將)이 금산(錦山)의 왜적과 마주치게 되었는데, 관군(官軍)은 적의 떼가 얼마 되지 않는 것을 보고 덮쳐 공격하려 하였다. 이윽고 왜의 복병이 한꺼번에 일어났는데 관군은 수가 많지 않아서 감히 싸워 보지도 못하고 고산(高山)으로 후퇴하여 전주 감사(全州監司)에게 구원을 청하자, 8백 명을 뽑아 보냈다 하니, 길가에서 패해 무너졌다는 것은 이를 두고 이른 말이다. 서울에 있는 적은 크게 패하여 서울 안에는 남은 적이 없기 때문에 병사(兵使)가 군사를 돌이켜 방금 고산으로 향하는 중이라 하고 후군(後軍)인 의병도 역시 고산으로 향한다 하며, 왜적이 옥천(沃川) 경계에 주둔하고 감히 금산(錦山) 지대를 들어오지 못한다 하니 이것으로써 적의 수효가 얼마 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원컨대 각 진영에 선포하여 적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지 말도록 하라. 신립(申砬)ㆍ윤두수(尹斗壽) 제군이 적의 무리를 모조리 무찔렀다고 하니 하느님이 우리 종묘 사직을 도와 주려는 것이라 매우 기쁘다.
○ 전라도 의병장 행 부호군(行副護軍) 고경명(高敬命)이 본도 도순찰사(都巡察使) 절하(節下 순찰사를 말한 것)에 다음과 같이 격문을 발송하다.
섬 오랑캐가 난리를 일으켜 임금의 행차가 멀리 순행길을 떠나시니 중외(中外)에서 믿는 것은 오직 호남(湖南)밖에 없는데, 겨우 군사를 일으키라는 어명(御命)을 받들자 갑자기 근왕(勤王)하는 군대를 해산하라고 하니 절하의 마음 속에는 반드시 어떤 계획이 있어서 그렇겠지만 절하의 실지 행동에 있어서는 납득될 만한 것이 없지 않습니까. 조정의 명령은 비록 막혀 끊어졌다 하더라도 한 도내의 물의도 역시 두려운 것이외다. 지난번 용인(龍仁)에서 무너진 것은 실로 선봉장이 패전한 때문이었으나 절하가 주장(主將)이 되어 있는 이상 그 책임을 모면하기 어려울 것이니, 절하는 오늘의 입장에 있어 어떻게 계획하시렵니까? 행여 지나간 실패를 잘 수습하여 주상전하의 남쪽에 대한 근심을 덜어드림으로써 기왕의 허물이 씻겨지고 새로운 업적이 역사에 찬란하게 된다면, 비단 성조(聖朝)에서 난리를 다스리고 정상으로 돌려놓는 기초일 뿐만 아니라 절하에 있어서도 역시 화가 복이 되는 날일 것이외다. 본도 의병이 당초 북도로 향해서 난리를 평정시키고 전하의 행차를 모셔 오려고 했었는데, 길에서 들으니 윤 정승[尹左相]이 서ㆍ북의 정병을 거느리고 서울에 머물러 있는 적을 토벌한다 한즉, 북방의 일은 염려가 없음이 거의 보증됩니다. 그러나 호서(湖西)의 적이 금산(錦山)으로 들어오는데, 방어할 군사가 아직도 용계(龍溪)에 주둔하고 한 사람도 다짐하며 앞서 나오는 자가 없으니, 절하가 이 시기에 있어 진정 병력을 널리 모집하여 형세를 크게 벌리지 않으시면 가엾은 우리 호남 한 지방 백성들은 모두 적의 칼날에 목숨을 빼앗기고 말 것이외다. 그렇게 되면 절하는 위로 국가를 회복하지 못하고 아래로 강회(江淮)를 보장(保障)하지 못하고 있다가, 하루아침에 적이 다 쓰러지고 전하께서 돌아오시어 교서(敎書) 한 장을 내려 사방에 포고한다면, 비단 호남 사람들만 천지간에 용납되지 못할 뿐 아니요 절하 역시 무엇으로써 충성을 바치고 허물을 보상하겠습니까. 절하가 혹 저 왜적이 워낙 사나워서 맞붙어 싸우기 어렵다고 군사를 나누어 험한 곳을 지켜 쳐들어오는 적을 막고 때로 기병(奇兵)을 내어 그 날카로운 기세를 꺾어 버리면, 적의 성집이 경망하고 조급한지라 지구전은 계속하지 못할 것이니 열흘이 넘지 않아서 큰 공을 이룰 수 있는 것이외다. 다 같이 왕의 신하가 되어 나랏일을 함께 하는지라, 피차의 사이가 있을 수 없고 형세를 서로 의지하는 처지니, 각자 소견을 자세히 참작해야 할 것인즉 부디 계획을 잘하여 후회를 끼침이 없기 바랍니다. 《정기록(正氣錄)》에 나온다. 고종후(高從厚)가 지었다.
임진년 6월 일 만력(萬曆 명(明) 나라 신종(神宗)의 연호) 20년 전라도 의병대장 행 부호군 고경명(高敬命)은 해남(海南)ㆍ강진(康津) 두 고을의 사군(使君)으로 있는 의병장 휘하에 다음과 같은 격문을 보냈다.
나 고경명은 전일 추성(秋城 담양(潭陽))에서 의거(義擧)하던 당시에 가슴속의 끓는 피를 편지 한 장에 쏟아서 각 읍 수령에게 두루 고하여 함께 어려운 고비를 극복해 나가자고 호소했으나, 정성이 사람을 감동하지 못해서 아무리 외쳐도 반응이 없으니 초야의 인생이 다만 빈주먹만 두들길 뿐이어서 무기와 군량의 뒷받침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던 참이었습니다. 이윽고 들은즉 격문을 받아 보고서 정병을 내어 응원해 준 사람은 호남 50주(州) 중에 유독 두 고을의 원님이 있어, 그 소문이 미치는 곳마다 사기가 백배나 더함과 동시에 정의의 군사를 기다려서 적의 무리를 쓸어버리려 했던 것이외다. 그런데 뜻밖에 병사(兵使)가 격문을 띄워 부르고 있으니 앞으로의 거취가 자유스럽지 못할까 깊이 염려됩니다. 지금 금산의 왜적이 청진(淸鎭)의 왜적과 형세가 서로 연접되어 나아가고 물러가는 것이 자유로우므로, 한 부대는 이미 용담(龍潭)을 함락시키고 또 한 부대는 무주(茂朱)를 함락시켜 세 군데 소굴을 만들고서 완산(完山 전주(全州))을 침범하기로 계획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완산 고을은 비단 호남 지방의 근본이 될 뿐만 아니라 진전(眞殿)을 모신 곳으로서 실로 우리 성조(聖朝)의 발상지이므로, 나 고경명은 의기(義旗)를 그쪽으로 돌이켜 적의 칼날을 방어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본즉 저 왜적이 본래 잔꾀가 비상한데다 진산(珍山)의 병력은 극히 약하니, 만약 적으로 하여금 진산ㆍ연산(連山) 같은 험하고 좁은 곳을 넘어서서 은진(恩津)ㆍ여산(礪山) 같은 평탄한 길로 돌진하게 한다면 어찌 다만 호남만 앞뒤로 공격을 받을 뿐이겠습니까. 금강(錦江)의 군사마저 장차 동요가 될 것이외다. 그래서 호서(湖西)가 불통되고 적의 세력이 치성하면 호남의 군량을 어떻게 수원(水原)에 수송할 것이며, 이때 본도 병사 최원(崔遠)ㆍ의병장 김천일(金千鎰)이 군사를 거느리고 수원에 주둔하였다. 조정의 소식을 어떻게 사방에 전달하겠습니까. 이에 군사를 옮겨 진산으로 들어가서 금산(錦山)에 있는 적의 후방을 공격하여 용담ㆍ무주의 적으로 하여금 뒤를 돌아보는 염려를 버리지 못하게 하고, 서서히 두 고을 군사를 기다려서 곧장 적의 굴혈을 엄습하여 흉악한 무리들로 하여금 나아가나 물러가나 근거가 없게 만들어 놓으면, 국가를 보전하는 상책이 될 뿐만 아니라 이 역시 완산부(完山府)를 구원하는 하나의 좋은 계책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공들이 지금 만약 예전 상도만을 고수하고 변통할 줄을 모른다면 나 고경명 역시 군사는 외롭고 힘은 적어서 선뜻 움직이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호남의 적도 쉽게 전제(剪除)할 수 없고 수원의 아군이 혹시라도 또 시일만 허송하게 될 것입니다. 병사가 거느린 군사는 모두 호남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만약 적의 무리가 오늘에 아무 지대를 통과하고 내일에 아무 현(縣)에 침입한다는 소문을 듣는다면, 식량은 공급되지 않고 군의 정세는 흉흉할 것이니, 이야말로 목전에 닥친 위급이라 비록 지혜있는 자가 아니라도 짐작하고 남음이 있을 것이외다. 그렇다면 두 원님이 합세해서 금산의 적을 치는 것은 다만 호남을 보장하는 계책이 될 뿐만 아니라, 또한 병사를 위하여 서로 응원하는 꾀도 될 것입니다. 옛 사람의 말에, “장수가 밖에 있어서는 경우에 따라 임금의 명령도 받지 않을 수 있다.” 하였으니, 이는 일의 기미에 임하여 융통성이 있는 것을 귀하게 여김이요, 마치 교주고슬(膠柱鼓瑟 변통할 줄 모른다는 뜻)하듯이 외곬으로 나가는 것을 취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 병사가 멀리 천리 밖에 있어 이 도리를 알지 못하고 지극히 위급한 처지에 빠졌으니, 어찌 가까운 데 있는 적을 버리고 후회를 남겨서야 되겠습니까. 사사로운 생각으로는, 두 원님이 위로 수원의 기한에도 미치지 못하고 아래로 금산의 약속도 돌아보지 않는다면 뒷날의 공론이, “적의 칼날을 도피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하지 않겠습니까. 원컨대 스스로 계획을 잘해서 남의 비난을 듣지 말도록 하시오. 《정기록(正氣錄)》에 나온다. 고종후(高從厚)가 지었다.
○ 재상(宰相)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올리다.
양산(梁山)ㆍ밀양(密陽)이 연달아 함락된 뒤로 적의 군사가 승세를 타서 이미 거침없이 몰고 갈 기세가 있다는 것을 듣고, 식자 계급에서는 적들이 우리의 허점을 찔러 곧장 올라갈 것을 근심하여 간담이 써늘하지 않은 자가 없습니다. 순찰사(巡察使)가 나주(羅州)에 있을 적에 사람들이 모두 하루빨리 군사를 이끌고 서울로 들어가서 응원해 줄 것을 바랐고 광주 목사(光州牧使) 정윤우(丁允祐) 역시 순찰사를 보러 가서 빨리 근왕(勤王) 길에 나가야 한다는 것을 역설했으나, 순찰사가 막연히 들으며 염려하지 아니하니 정 공이 민망히 여기며 그저 물러 나오고 온 도내 사람들은 한갓 두 주먹만 움켜쥐며 통분해할 따름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징병하라는 교지가 내리자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모르고 온 도내 군사를 모두 일으켜 일제히 여산(礪山)으로 치닫게 하였는데, 집합 일자는 너무 촉박하고 겸하여 장맛비가 열흘에 걸쳐 내렸습니다. 그러자 각 읍의 수령들은 기약에 뒤졌다는 꾸지람들을 받을까 두려워서 길에서 마구 몰아쳐 밤낮 없이 달리는지라 군사들은 배고픔과 목마름이 자심하여 스스로 길가에서 목을 매어 죽는 자까지도 있었으니, 그 괴로운 형상이 이처럼 심했습니다. 그러나 감히 원망하고 배반하지 않는 것은 모두 근왕(勤王)의 일이 시급하여 정의로써 군사를 일으킨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순찰사가 공주(公州)에 당도하여, 서울이 지켜지지 못하고 임금께서 서도(西道)로 떠나셨다는 소식을 듣고는, 곧 한 군관(軍官)을 시켜서 손에 전령패(傳令牌)를 가지고 말을 달려와 외치게 하기를, “진을 파하라. 진을 파하라.” 하니, 모든 군사가 아연하지 않는 자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두 수령이 공주로 달려가서 순찰사를 보고 진을 파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말했으나, 순찰사가 듣지 않았습니다. 이에 모든 군사가 한꺼번에 모두 흩어져 함부로 욕하고 길에 가득히 들어차서 모두 하는 말이, “순찰사는 근왕에 전력할 뜻이 없으면서 다만 우리들만 괴롭힌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로부터 군중들이 모두 짜증을 내며 비로소 해산할 생각이 나자 마치 물이 내리 쏟아지듯 하여 억제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 후 두 번째 군사를 징집하게 되자 여러 고을의 군사 중에 도중에서 무너져 흩어진 자가 서로 잇달았으며, 비록 더러 불러서 집합시키기도 했으나 막 집합시켜 놓으면 바로 무너져 그렇게 하기를 두 번 세 번 가도 그치지 않았습니다. 광주로 말하면 박광옥(朴光玉) 군과 더불어 흩어져 도망간 군사를 분주히 개유(開諭)하고 수습해서 천자(賤子)인 고종후(高從厚)와 고인후(高因厚)로 하여금 나누어 거느리고 수원(水原)의 전소(戰所)에 가서 광주 목사에게 교부(交付)하게 하였습니다. 이때에 순찰사는 도중에서 머뭇거리며 모든 군사를 돌려 진위(振威)에 당도하여 4, 5일 동안 유숙하노라니 사람은 모두 비를 맞고 서 있었습니다. 용인(龍仁) 싸움에 이르러 왜적의 군사는 수도 적고 형세도 궁해서 산마루 험한 곳에 진을 치고 울을 막아 스스로 방위하고 있는데, 충청도 순찰사ㆍ절도사의 병력과 전라도 순찰사ㆍ방어사의 병력이 수효가 십만으로 헤일 만하니 그런 조그마한 무리쯤이야 족히 깃발 한 번 휘두르면 박멸할 수 있었을 것이어늘, 불행히도 백광언(白光彦) 등 여러 사람들이 적을 경솔히 여겨 먼저 올라가다가 한꺼번에 진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대부대가 아직 건전한 이상 승리를 거두는 것이 어렵지 않았는데, 갑자기 3명의 왜적이 앞장서서 곧장 전진하는 것을 보고서 충청 절도(忠淸節度)의 군사가 먼저 무너지고 여러 진이 계속 무너져 화약ㆍ총통(銃筒)ㆍ전마(戰馬)를 모두 적에게 버려두었습니다. 나 고경명이 몸소 전사(戰士) 4, 5명을 만나본 바 매우 자상히 말하는데 마치 약속이나 한 것같이 모두 동일하며, 장성 현감(長城縣監) 백수종(白守宗)이 하는 말도 역시 전사들과 서로 같았으니, 고금 천하에 싸우다 패한 자가 퍽 많지만 이와 같이 통분하고 애석한 일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순찰사는 겨우 몸만 빠져 나와서 충청도 내포(內浦)를 경유하여 임피(臨陂)에 당도하자 곧 도내 열읍에 공문을 띄워 정병을 징발하여 바닷길로 임진(臨津)에 도달하려고 하니,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소란하여 선뜻 명령에 응하지 아니하니 비록 억압하여 몰아댄다 해도 마침내는 반드시 전과 같이 분산될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순찰사가 지금 태인(泰仁)에 있으면서 의논할 일이 있다고 칭탁하고 격문(檄文)을 띄워 좌수사(左水使) 이순신(李舜臣)과 무주(茂朱)의 조방장(助防將) 이계정(李繼鄭)을 불러 모두 태인에 모이게 하였는데, 태인은 좌수영(左水營)과의 거리나 무주와의 길이 모두 너무 머니, 오늘날 적병이 국내에 밀어닥쳐 변란이 숨 한 번 쉴 만큼 짧은 시간에 달려 있는데 순찰사가 의논한다는 일이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나 고경명이 이때 전주에 있으면서 이계정이 달려 가는 것을 보고 또 각관(各官)에서 전달한 보고를 얻어 본즉, 왜적이 무주의 속현(屬縣)에 들어와 민가를 불태웠고 적의 배 두 척이 또 순천(順天)에 침범하여 온 경내가 계엄 속에 들었으니, 대개 왜적이 우리나라 사람을 이용하여 간첩으로 삼기 때문에 빈틈을 타서 몰래 들어온 것입니다. 순찰사의 전후 처사를 더듬어 보면, 실로 그 의도가 무엇을 하려고 함인지 알 수 없습니다. 지금 도사(都事) 최철견(崔鐵堅)ㆍ부윤(府尹) 권수(權燧)를 만나본즉, 이때 최철견은 전라 도사가 되었고, 권수는 전주 부윤이 되었다. 역시 순찰사의 의도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고 말하니 괴이한 일이요, 통분할 일입니다. 당초 병사(兵使) 최공(崔公)이 의병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기쁨을 얼굴에 나타내며, 도울 수 있는 일이면 힘을 다했습니다. 그때 순찰사가 다른 지방으로 나가 있었기 때문에 병사는 순찰사에게 공문을 보내 각 고을의 남은 무기를 의병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청하였습니다. 그래서 의병을 일으킨 후로 약간의 무기를 지나는 여러 고을에서 얻었으나 대개는 묵고 헐어서 쓰지 못할 물건들이며 그나마 수효도 많지 않아서 일행 중에 군관(軍官)까지도 다 갖지 못했는데, 하물며 싸우는 마당에 쓸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 듣자니 순찰사가 용인에서 패전한 후부터는 매양 본도의 인심이 고약하다고 트집을 잡으며 오직 도망친 군사들에게만 허물을 돌리어 뒷날 자신을 합리화할 계책을 하고 있다가, 마침내 의병이 한 번 일어나서 모집에 응하는 자가 구름같이 모이는 것을 보고서 순찰사가 마음이 몹시 달갑지 않아서, “군고(軍庫)를 함부로 열었다.” 하고 명목을 잡는데 까지 이르고 있으니, 참으로 괴이한 일이요 두려운 일입니다. 무릇 수령 가운데 의거에 따르기를 원하는 이도 역시 많으나 순찰사에게 간섭을 받아[掣肘] 끝내 의병 노릇을 할 수 없게 되고 수령들도 또한 순찰사의 행동을 본받은 자가 있어 다방면으로 저해하여 의거에 참여하려는 사람들의 마음을 좌절시켜서 심지어 의병 모집에 응한 자의 처자를 잡아다 가두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래도 다시 종군을 하고 떠나려고 하지 않으니 진실로 슬픈 일입니다. 요즘에 각 도의 근왕군(勤王軍)은 한 번도 왜적과 더불어 싸운 일이 없이 양경(兩京)을 잿더미로 만들었으며, 마침내는 적이 무서워서 임금을 버리는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취화(翠華 임금의 수례)가 길을 떠나 멀리 함경도[咸關]로 순행하고 계시니 구구히 기대할 바는 오직 의병을 한 번 일으키는 데 있거늘, 순찰사의 뜻이 이와 같고 조정은 천리 밖에 떨어져 있어 대궐 문앞에 나아가 호소할 길이 없은즉, 원한을 품고 스스로 불칙한 죄망에 걸려 죽을까 심히 두렵습니다. 믿는 바는 먼 데나 가까운 데나 모두 소문을 듣고 호응하여 힘세고 날랜 자들이 발이 부르트도록 쉬지 않고 모여들고 있으니, 오직 벌판에 나아가 눈물을 뿌리며 이 심정을 밝힐 것을 생각할 따름입니다.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가 죽는 것은 고금의 정론이니, 성공하고 못할 것은 계산할 바가 아닙니다. 오직 바라건대 상공(相公)은 비생(鄙生)의 일편단심을 통찰하시어 곡단(曲端)과 같이 원통하게 죽지 않도록 하여 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태헌(苔軒)의 수초(手草)로 《정기록(正氣錄)》에 나온다.
○ 전주 전 만호(萬戶) 황박(黃璞)이 자원한 군사 2백여 명을 모아 웅현(熊峴)에 복병을 설치하니, 웅현은 바로 전주와 진안(鎭安)의 경계이다. 이때에 이광(李洸)이 나주 판관(羅州判官) 이복남(李福男)과 김제 군수(金堤郡守) 정감(鄭湛) 등을 복병장으로 삼아 웅현을 파수하게 했는데 황박이 가서 조력한 것이다.
○ 경상 초유사(慶尙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이 전 현풍 군수(玄風郡守) 엄홍(嚴泓)을 본군의 병장으로 삼고, 곽찬(郭趲)을 소모관(召募官)으로 삼았다. 이때에 현풍 등지의 유수한 집안들은 모두 낙동강(洛東江)을 건너 가야산(伽倻山)이나 덕유산(德裕山) 등지로 들어갔는데, 김성일이 영지(令旨)를 전달하여 엄홍 등을 불러 본임(本任)으로 정하고, 또 격문을 띄워 이민(吏民)을 다음과 같이 타일렀다.
나라의 운수가 극히 비색하여 칠치(漆齒 왜적을 이름)가 몰아 들어오니 임금은 파천(播遷) 길을 떠나시고 종묘 사직은 먼지를 무릅쓰게 되었다. 슬프다! 사람이면 다 양심이 있는 법이니, 무릇 이 땅에 살며 밥을 먹는 자는 누구나 의리와 충성을 다하여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자 하지 않겠는가. 생각건대 영남(嶺南)은 본시 추로(鄒魯 문명의 나라를 이름)의 고장이라 일컬어져 왔거니와 현풍 한 고을은 더욱이 선비의 집단지가 되어 있으니, 그 사이에 절의를 위해 죽은 이를 어찌 이루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지금 적이 성중을 점령하고 사방으로 나와 불을 지르고 있으니 그 해를 입는 자는 부모가 아니면 곧 처자다. 위로 군부(君父)의 원수와는 한 하늘 밑에 함께 살 수 없는 것이요, 아래로 형제의 원수와는 더불어 하루도 같이 할 수 없는 것이니, 나는 알건대, 산중에 엎드려 있는 자는 창을 베고 자며 와신상담(臥薪嘗膽)하는 뜻이 일찍이 잠시도 마음에 잊혀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아직 한 사람도 의병을 일으켜 분개하며 적을 토벌한다는 자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워낙 극성스러운 적의 무리가 가득 몰려들어 우리 백성이 싸워 볼 만한 여지가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충의의 선비는 죽고 사는 것으로 지조를 바꾸지 않고, 용맹 있는 사람은 강하고 약한 것으로 기운이 꺾이지 않는 법이니, 원컨대 긴밀히 서로 연락하여 의병을 일으켜서 그 힘이 능히 적을 막을 수 있다면, 고을에 있으면서 충갑(冲甲)의 군사처럼 떨쳐도 좋고, 형세가 능히 자립할 수 없거들랑 군사를 이끌고 병사의 진영으로 가도 좋다. 혹시 당면한 직책을 버릴 수 없다고 여긴다면 강을 건너 의거에 참여해도 무엇이 불가할 것 있겠느냐. 지난 번에 합천(陜川)과 의령(宜寧)에서 정인홍(鄭仁弘)의 경우와 고령(高靈)에서 좌랑(佐郞) 김면(金沔)의 경우에 충성을 떨치고 의기를 다하여 한 번 외치자 각 고을이 호응하였고, 요즘 와서는 군사의 성세가 크게 떨치니 나라를 회복할 가망이 거의 확실하다. 본군의 백성들이 왜놈의 위력에 겁내지 말고 더욱 의열(義烈)의 기운을 가다듬어 한결같이 임금의 원수를 갚겠다는 생각을 가진다면, 충의로운 분기가 격동하여 용기가 백 배나 솟을 것이니 저 왜적이 어찌 감히 우리를 당적하겠는가. 하물며 지금 왜적이 얼마 안 되는 군사를 끌고 깊이 들어와서 그 흉악한 기운이 이미 개성(開城)의 청석(靑石)에서 꺾이었고 서경(西京 평양)의 대동강에 침몰되었으며, 철령(鐵嶺)을 넘어 또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에게 빼앗기고 명(明) 나라 병사 5만 명이 이미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조(祖)ㆍ곽(郭)ㆍ왕(王) 세 대장이 각기 정병 여러 만 명을 거느리고 길을 나누어 달려와 응원하며, 해군 10만 명이 산동성(山東省)으로부터 곧장 왜놈의 소굴을 공격하고 있으니 우리 세력은 저절로 확장되고 적은 망할 날이 머지 않은즉 이야말로 뜻있는 선비가 옷소매를 떨치며 공을 세울 절호의 시기다. 만약 시일을 끌다가 앉아서 기회를 잃는다면 화란을 안정시킬 수 없을 뿐 아니라, 장차 군신(君臣) 간의 대륜(大倫)에 비추어 죄를 얻게 될 것이니 그렇다면 무슨 면목으로 천지간에 서겠는가. 다만 무식한 서민은 임금을 섬기는 의를 모를 수도 있은즉 그들에게는 오직 상과 벌로 권하고 징계할 수 있으니, 그들은 조정에서 내린 방목을 보지 못했는가. 공천(公賤)이나 사천(私賤)을 막론하고 적의 목 하나나 둘을 베어 바친 자에겐 육품(六品)의 관직을 주고 목 셋을 바친 자에겐 통정(通政 삼품)을 주고, 왜의 장수를 베어 바친 자에겐 가선(嘉善 종이품(從二品))을 주어 공을 기록한다 하였다. 무부(武夫)와 용사가 급히 의병에 참여하여 날랜 기운으로 전쟁에 임한다면, 높게는 통후(通侯)의 인(印)을 받을 수 있고 낮아도 공신의 반열에 서게 되어 영화가 한 세상에 빛나고 덕택이 후손에게까지 미칠 것이니, 또한 아름답지 않겠는가. 만약 혹시 계책이 이에 미치지 못하고 여전히 숲 속에만 숨어 있다면, 비록 왜놈의 칼날은 벗어날지 모르나 깊은 산중에서 굶어 죽는 신세를 면하겠는냐. 가령 만에 하나로 목숨을 유지한다 해도 하루아침에 난리가 평정되면 국가에는 엄연한 형벌이 있으니 비단 제 자신만 목이 달아날 뿐 아니라 그 처자된 사람까지도 사형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몸소 싸워 큰 공을 이루고 중한 상을 받는 것에 비하면 이해(利害)와 화복(禍福)이 어떠하겠느냐. 살아서는 열사(烈士)가 되고 죽어서는 충혼이 될 것이니 너희들은 부디 힘쓸지어다. 비안(庇安) 등 여러 읍에 모두 이 격문을 띄웠다.
○ 중외(中外)의 대소 신민에게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리다.
왕은 아래와 같이 말한다.
내가 이치를 살피는 것이 밝지 못하여 정가가 그 요령을 잃었고, 어진 덕도 실지로 있지 아니하여 은택이 아래로 미치지 못했으며, 토목(土木)의 공사는 연이어 거듭 백성의 힘을 곤하게 했고, 궁중(宮中)을 엄밀히 단속하지 못하여 조그마한 이끗으로 백성을 죄망에 몰아넣었다. 심지어 바깥 지방의 산택(山澤)까지도 세력가에게 점령을 당하여 뭇 백성들의 원망이 자자한데, 나는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었다. 오직 변방의 근심만 생각하여 성을 쌓고 못을 파며 군사를 훈련하고 무기를 수선하여 기어이 민생을 보호해서 적의 칼날을 면하게 하려는 것이었는데, 이로 인하여 백성의 원망은 더욱 쌓이고 이로 인해서 인심은 더욱 이반되어, 적의 군사가 경내에 가까이 오자 형세를 바라보고 먼저 무너지니 백성을 보호하자는 설비가 마침내 도적에게 필요한 물자가 되고 말았다. 말이 이에 미치니, 스스로 용납할 길이 없구나. 나는 생각건대, 영남은 실로 인재의 부고로서 부로들은 충성과 효도를 가르치고 자제들은 시서(詩書)를 익혀서, 저 옛날 김유신(金庾信)은 강개(慷慨)한 결심으로 난리를 평정하고 김춘추(金春秋)는 앞장서서 적진에 달려 들었는데, 이 모두 본 지방 인물들이니 도내 80여 고을에 어찌 충의의 선비가 없겠느냐. 그런데 오직 너희 사서(士庶)는 네 아비와 네 할아비가 국가의 후한 은혜에 젖었는데 하루아침에 난리를 당하자 이내 나를 버리고자 하니, 나는 너희들을 허물하지 않으나 너희가 차마 나를 버린단 말이냐. 윤대(輪臺)에서 내린 한제(漢帝)의 한 장 조서(詔書)는 바로 평시에 지난 일을 후회한 것 뿐인데도 한 나라 백성이 오히려 감격했거늘, 하물며 지금 난리 중에 성상(聖上)께서 애통하심이 이에 이르고 허물을 자책하심이 이에 이르렀음에랴. 이는 실로 초목ㆍ곤충도 모두 감동할 일인데, 더구나 양심을 지니고 윤리를 아는 우리 사람임에랴. 더구나 의리를 알고 충성을 품은 선비들임에랴. 진실로 마땅히 전장에서 목숨을 던져 적개심을 다해야 할 터인데, 한 사람도 북면(北面)하고 근왕(勤王)하여 임금을 위급한 시기에 구출하는 자가 없어 임금으로 하여금 오래도록 용만(龍灣) 천리 밖에 머무르게 하니, 원통도 하다.
○ 명(明) 나라 장수 조승훈(祖承訓)ㆍ사유(史儒)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의주(義州)에 당도하다.
○ 경상도 고령(高靈) 선비 박정완(朴廷琬)이 장사 4백여 명을 모집하여 강 기슭에 복병을 설치하고, 사재를 기울여 군량을 구입하여 활과 화살을 준비하여 창녕(昌寧)ㆍ현풍(玄風)ㆍ성주(星州)에 왕래하며 충돌하는 적들을 많이 잡았다. 그리고 또 배를 수선하고 수장(水杖)을 설치하여 강을 타고 내려 오는 적을 막았다. 김면(金沔)이 무계(茂溪)에서 승첩한 것은 실로 박정완의 힘이 컸는데 공을 나누는 데는 참여하지 못했으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히 여긴다. 《경상 순영록(慶尙巡營錄)》에 나온다.
○ 경상도 초계(草溪)의 전치원(全致遠)ㆍ이대기(李大期)ㆍ전우(全雨) 등이 군사를 모집해 일으켜 정인홍(鄭仁弘)에게 소속되어 무계 및 낙동강에 왕래하는 적을 토벌하는 데 협조하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가을 7월 2일. 적병이 용담(龍潭)으로부터 장수(長水)로 향하자 조방장(助防將) 이유의(李由義) 등은 군사를 버리고 도망가다. 남원 판관(南原判官) 노종령(盧從岭)이 본부로 달려가서, “적의 부대가 이미 장수를 지나갔으니 곧 두 관아(官衙)의 권속을 남산 밖 산동촌(山洞村)으로 보내어 대피시키고 묘봉사(妙峯寺)로 들어가라.” 외치고, 노종령도 단신으로 도망쳐서 이날 밤에 원천촌(原川村)으로 들어가 잤다. 내 집에 유숙하였다. 이튿날 산동(山洞)으로 가본즉 수성원군(守城元軍)ㆍ팔결연호군(八結煙戶軍) 및 향병(鄕兵)은 모두 다 흩어져 달아나고 부사(府使) 윤안성(尹安性) 만이 홀로 부 남쪽 술산(述山)에 남아서 변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은 적병이 오지 않았다.
이유의의 분산된 군사는 모두 중도에 떠도는 자들이라, 성중에 함부로 들어와 창고의 곡식과 군기를 마구 가져가니 교방(敎坊)ㆍ관청이 일시에 탕진되고, 경내 사람들도 역시 성중에 들어와 그 나머지 물건을 훔쳐냈다. 윤안성은 적이 오지 않는 것을 알고 또 난병(亂兵)이 들어와 노략질하는 것이 심하다는 것을 듣자, 말을 돌이켜 달려 들어와 그중 심한 자를 목 베고 임춘루(臨春樓)에 주둔했다. 동문루의 이름이다. 부사는 바로 나의 아버지와 한 마을에 살던 옛친구 분이시라, 때마침 내가 난리를 피해서 용추동(龍湫洞)에 있다가 그 연유를 듣고 달려가 뵈니 부사가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민간을 방문해서 도로 집합하게 하라는 뜻으로 각 방(坊)에 첩지를 내려라. 운운” 하였다.
3일. 적이 들어온다는 소문이 떠도는데 관부의 물건을 옮겨 둘 방법이 없으니, 마침내 왜적의 소득이 될 바에야 백성에게 나누어 주는 것도 무방하다고 여겨 심히 금지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사창(司倉)ㆍ관청 각처의 잡물이 전부 탕진되어 조석의 지공(支供)조차 나올 데가 없었다. 형편이 부득이 하여 팔결군(八結軍)은 따로 지출을 하는데 명분 없는 징수는 역시 심히 미안하므로 각 방(坊)에 관청 물건을 가져간 사람들을 잘 개유하여, “자진해서 다시 바치면 원래 도덕질해 간 것이 아니니 죄를 따질 까닭이 만무하며, 많은 수효를 바친 사람에게는 그 수효 중 삼분의 일을 상으로 줄 터이니 급히 실행하라.” 하였다.
○ 전날 김면(金沔)ㆍ곽재우(郭再祐) 양군(兩軍)에서 노획한 왜놈 장물 가운데 궁중의 물건이 많이 들어 있으므로 김 성일(金誠一)은 남원 고을이 적과 거리가 멀다 여겨 보내어 보관하게 했는데, 3일 난병이 도적질해 가서 전부 없어졌다.
4일. 전 도사(都事)는 조헌(趙憲)이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기로 나서다. 조헌은 충청도 옥천(沃川) 사람인데 처음에 귀양가 있던 곳으로부터 임금의 은혜를 입어 본현(本縣) 마을 집에 와 있으면서 낮에는 농사 짓고 밤에는 글 읽는 것으로 생업을 삼았다. 이윽고 서울이 무너지고 임금께서 서도로 파천했다는 소식을 듣자, 통곡하고 분주히 의병을 모집하여 이날에 공주(公州)에서 깃발을 들었는데 모집에 응한 자가 천여 명이었다. 손수 격문을 초하여 삼도(三道)에 전달했다. 그 격문은 다음과 같다.
하늘과 땅의 큰 덕은 생(生)이니 만물이 각기 제 자리를 얻게 할 것을 생각하라. 귀신과 사람이 미워하는 것은 적(賊)이니 원수를 같이 쳐서 그 고을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자. 모두들 보고 들으면, 거의 분개하고 미워하리라. 저 침략해 오는 왜적을 보면 버릇없는 묘민(苗民)보다 심하구나. 사람 죽이기를 풀 베듯이 하여 원한이 온 나라에 가득찼고, 군장(君長)을 시해하기를 여우와 토끼 사냥하듯 하니 죄가 하늘에 사무쳤다. 저 한착(寒浞 은(殷) 나라의 역적)처럼 스스로 넘어질 줄을 모르고, 역량(逆亮 금(金) 나라 임금)이 멀리 치러 갔던 것을 본떴다. 달콤한 말과 간사한 꾀로 처음에는 이익을 제공하여 사람을 속이더니, 자취를 감추고 군사를 숨기어 마침내 바다를 넘어 땅을 차지하려 드는구나. 태평한 지 오래라, 비록 막아낼 만한 군사가 없다지만 유린해서 깊이 들어오니 이처럼 번질 것은 생각지 않았다. 조령(鳥嶺)이 마침내 무너지니 한강(漢江)에서 무기가 번뜩이는 것이 원통하고, 용여(龍輿 임금의 수레)가 멀리 순행하니 변방에서 북두별 바라보는 것이 슬프도다. 어찌 생각했으랴! 수백 고을에 끝내 한 명의 남아가 없을 줄이야. 남의 자식을 고아로 만들고 남의 아내를 과부로 만들어도 오히려 화기[和光]를 손상하여 재앙을 이룬다 하거늘, 백성의 집안을 도륙하고 백성의 살림을 불태우면 어찌 악이 차서 죄를 부르지 않을까 보냐. 서민의 원한은 날로 쌓이고 의사의 기운은 달로 더하다. 하물며 남의 나라의 죄 짓고 도망간 사람들을 수용하는 것이 탐욕 많은 금수(禽獸)보다 심함에랴. 사람의 꼴을 지녔으면 양심이 있을텐데 측은하고 수치스러운 생각이 전혀 없으니, 하늘의 명령을 받들면 반드시 천벌을 봉행(奉行)하게 되는 것이다. 어찌 힘세고 강포한 자를 무서워하랴. 전쟁을 잘하는 자는 최상의 형(刑)을 받는 것이니, 전에는 백기(白起 진(秦) 나라 장수)가 사형을 받았다. 죽이길 좋아하는 자는 대벽(大辟 목 베어 죽이는 형)을 범하는 것이니, 뒤에는 황소(黃巢 당(唐) 나라 역적)가 패해 처단되었다. 그러므로 문명인이나 야만인이나 모두 이 왜적을 떳떳이 죽일 것을 생각한다 들었고, 또한 반드시 산천 귀신이 이미 추악한 무리를 음주(陰誅)하기로 의논했으리라. 그런데 우리 군사를 이끌어 가는 규율을 생각하면, 대개 《주역(周易)》에 나타난장인(丈人)의 원길(元吉)이 아니다. 누가 황금으로 띠를 두르고 백마(白麻 사장령)의 소중한 선고를 받았는가. 영호(嶺湖)를 돌고 돌면서 군부(君父)의 근심과 급함도 모르고 경기 근처에 머뭇거리면서 단단한 오랑캐를 앉아서 불러들이며, 삼도(三道)를 끼고 있으면서 앞서 출전한 자를 구원하지 않고 한 번 패함으로 인해 영영 뒤에 일어날 기회조차 잃었으니, 그 도적을 기른 큰 죄상을 따진다면 어찌 분곤(分閫 임금의 특명을 받은 대장)의 대권을 맡을 수 있으랴.
묘당(廟堂 조정)은 격리되어 머나먼데, 적진은 빙 둘러서 첩첩하구나. 군사의 기세는 누차 꺾이어 한탄만 하고 민생이 다시 소생할 길은 끊어졌으니, 만약 그대로 내버려두면 반드시 미란(糜爛 죽이 풀어진 것같이 썩어 문드러짐)되고 말 것이다. 장차 기자(箕子)가 끼친 풍화로 하여금 영원히 야만의 지역이 되게 한단 말이냐. 하늘이 이 나라를 도와서 아직도 호남 한 지역이 온전하니, 백성이 주도(周道 조국)를 생각하매 어찌 초호(楚戶)의 세 집이 없을쏜가. 우격(羽檄 징병하는 격문)이 강을 지나는 것을 조목조목 보니, 과연 한 마디 말이 중함을 알겠다. 고 동래(高東萊)는 적을 잘 추적하고 김 수원(金水原)은 군사를 잘 쓰며, 곽 장군(郭將軍)은 영남(嶺南)에서 군사를 이끌어 용감한 기운이 있고 김 진사[上舍]는 바다 고을에서 격문을 날려 열렬한 위엄을 지녔다. 이 분들은 모두 세상을 바로잡을 영재들이라 반드시 사람을 움직일 묘법이 있을 것이니, 머지 않아 비후(豼貅) 같은 용감한 군사가 왕성하게 모여서 개나 쥐 같은 오랑캐를 없앨 것이다. 하물며 호서(湖西)의 선비들 풍습은 진실로 등군(鄧君)의 본뜻에 갑절은 되어 앞다투어 적개심을 품고 있으니 어찌 역사에 남길 공이 없을쏘냐. 청컨대 한 번의 수고를 꺼리지 말고 세 번 이기는 공을 이루도록 기약하세. 의당 뜻이 같으면 서로 호응할 것이니, 응당 온 나라가 멀리 합세하리라. 인헌(仁憲)의 기특한 꾀를 쓰니 단정코 손녕(孫寧)의 낯가죽을 벗기게 될 것이고, 무목(武穆)의 묘한 계산을 생각하니 모름지기 올출(兀朮)이 수염 깎는 꼴을 볼 것이다. 뜻이 해이하지 않으면 귀신이 감동하고 사람이 따르는 것이요, 일을 이루고자 하면 하늘이 돕고 땅이 보호하나니, 어찌 무도한 도적으로 하여금 밝은 나라에 오랫동안 불법을 범하게 할까보냐. 원충갑(元冲甲)이 한 번 북을 울리고 용맹을 떨치자 합단(哈丹)을 계악(鷄嶽)에서 무찌르고 금(金) 원후(元侯)가 한 번 활을 쏘아 적을 죽이자 몽고병(蒙古兵)을 황민(黃岷)에서 물리쳤으니, 이들은 선비와 승려로서 무력이 있는 명장이 아니지만 한 번 생각을 잘함으로써 천추에 꽃다운 이름을 남겼느니라. 이 나라 강산을 돌아보면 실로 인재의 부고(府庫)이다. 전조(前朝) 말엽에 해적이 여러 번 침략했으나 선배들의 힘을 입어 물리쳤고, 을묘년 여름에 갑자기 변방의 난리가 일어났으나 호걸들이 나서서 평정했다. 이제 백 년 동안이나 백성을 잘 길러냈는데, 어찌 만갑(萬甲 만군(萬軍))을 가슴속에 감춘 이가 없으랴. 혹은 백 보 밖에서 쏘아 버들잎도 뚫고 혹은 큰 산에 들어가 맨손으로 범을 잡으니, 문무(文武)를 차별해 보는 것은 정책의 그릇됨이 한탄스럽다. 생각건대 국가를 제 몸같이 여겨 신하된 도리를 다하는 자를 보기 어렵구나. 환란을 당하면 어찌 뒷 조심을 경솔히 하랴. 옛일을 거울 삼는 자는 마땅히 사전에 방비해야 한다. 진실로 천지를 돌려놓을 만한 계략이 있다면 어찌 황하(黃河)가 띠 되고 태산이 숫돌 되도록 영원하자는 맹서를 아끼겠는냐. 삼도의 힘을 합하여 위급을 해결하는 것이 오직 이때요, 일생의 재주를 다하여 어려운 고비를 극복하는 것이 바로 이날이다. 뜻을 같이한 우리 여러 선비는 이 얻기 어려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용감한 무인들과 결속하여 위급한 국맥(國脈)을 이어 나가도록 하자꾸나. 우리의 활을 당기고 우리의 화살을 먹여서 먼저 아지발도(阿止拔都)의 목구멍을 쏘고 그대의 창을 들고 그대의 방패를 나란히 하여 괴자(拐子)의 발을 연이어 찍는다면 적은 저절로 놀라 달아나기에 겨를이 없을 것이며 백성은 응당 도로 모일 가망이 있을 것이다. 밭을 매는 자는 늦은 곡식을 가꾸게 되고 나무 베는 자는 불에 탄 집을 수리하며, 호남과 영남의 한 길을 시원스레 터서 장사꾼들이 사방에 영원히 통할 것이다. 당 나라 현종(玄宗)을 파촉(巴蜀)에서 모셔 왔듯이 우리 성주를 모셔 오면 당연히 애통히 여기는 조서가 내릴 것이고, 순(舜) 임금이 조정의 사목(四目)을 밝혔듯이 우리 이목을 밝혀 약석(藥石) 같은 말을 모아들이면, 옛날의 폐단이 절로 제거되고 좋은 세상의 은택이 미쳐올 것이니, 한 번 싸움에 힘을 다해야만 후손에게 복을 끼치리라.
5일. 적병이 진안(鎭安)으로부터 전주(全州)로 향하니 이광(李洸)이 이정란(李廷鸞)을 시켜 본부의 각종 군사를 거느리고 성을 지키게 하였다. 자신은 각 읍 군졸을 거느리고 만경대(萬頃臺) 산성으로 나가 진을 치고, 영남으로 공문을 발송하여 이르기를, “금산(錦山)의 왜적이 이미 무주(茂朱)ㆍ용담(龍潭)ㆍ진안 등지를 점령하고 또 전주에 침범하여 혹은 감사(監司)ㆍ안무사(安撫使)의 명령이라 칭탁하고 오로지 군사의 모집을 일삼으니, 놈들이 지나가는 열읍에는 우매한 백성들이 앞다투어 서로 따라붙는데 금산ㆍ용담이 더욱 심하다.” 하였다. ‘공문을 발송하여’ 이하는《경상 순영록(慶尙巡營錄)》에 나온다.
○ 경상 좌병사 박진(朴晉)이 고령(高靈)으로부터 밤에 낙동강(洛東江)을 건너 먼저 공문을 발송해 이르기를, “상사(上使)에 관한 것이다. 병사가 감사의 근왕(勤王)하는 군사를 따라 온양(溫陽)에 당도하여, 명을 받고 도로 내려와 각 읍의 군병(軍兵)을 완전히 정돈하여 적을 토벌하고자 당일에 안동(安東) 등지로 떠나는 중이다. 여러 군사와 빠졌던 장정을 수색해 내서 요로에 복병을 설치하여 국가의 치욕을 씻을 것이며, 각종 군량과 잡색 군사는 주장이 인솔하고 아병(牙兵)ㆍ업무(業武)ㆍ무재(武才)ㆍ전마(戰馬)ㆍ쇄마(刷馬)ㆍ수군ㆍ육군은 따로 정하여 상사에게 문서를 작성해 올려서 전령을 기다리도록 하며, 적들이 왕래하는 것을 잇달아 빨리 알리되 함락당한 각 읍에 대해서는 당초 접전한 상황과 함락당한 절차를 장계에 일일이 따져서 보고해야 한다. 용궁(龍宮)ㆍ예천(醴泉)의 적이 깃발을 올리고 물러가기를 서두르고 있으니 각 읍 수령들은 군졸을 집합하고 복병을 설치해 요격해서 큰 원수를 갚도록 할 것이다. 운운.” 하다. 박진이 샛길로 밀양(密陽)ㆍ풍각(豐角)에 당도하여 흩어진 백성을 불러들이는데, 박진이 전에 본군 부사를 지냈기 때문에 종군을 자원하는 자가 5백여 명이었다. 언양 현감(彦陽縣監) 김옥(金玉)과 봉사(奉事) 김대허(金大虛) 등 20여 명을 거느리고 가서 안동을 점령할 양으로 신녕(新寧)에 도착하였는데 안동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 신녕 의병장인 봉사 권응수(權應銖)를 조전장(助戰將)으로 삼아 청송(靑松)ㆍ안덕(安德)으로 전향하여 진보(眞寶)에 당도했다. 안동 사람 진사(進士) 신경립(辛敬立)이 찾아와 안동 지세와 적이 주둔한 형상을 자세히 진술하면서, “적병이 만 명이 채 못 되니 오히려 쳐부술 수 있습니다.” 하였는데, 박진이 말하기를, “내 앞에 거느린 군사가 겨우 8백 명밖에 되지 않고 그나마도 모두 하도(下道)의 군사들이라 본부(本府) 도로가 멀고 가까움과 굽고 곧은 상황을 알지 못하니, 반드시 가까운 지역 사람을 더 모집하여 본부 사람을 길잡이로 삼은 연후라야 진격할 수 있소. 그러니 경솔히 행동할 일이 아니오.” 하였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경상도 비안(庇安)에 주둔한 적이 방을 써서 붙이기를, “당도자(當途者) 일본국 재상(宰相)이 어명(御命)을 받든 것은 세상을 교화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 목적이니, 군내(郡內)의 사람이 산중이나 혹은 해외로 피난간 자는 집으로 돌아와 전과 같이 편안히 살라. 일본 사람으로 당인(唐人)의 처자를 빼앗은 자는 포박해서 죽이고 있으니, 농업에 종사하는 자는 부지런히 밭을 갈고 물을 대고 풀을 제거하여 가을 수확을 기다리라. 조선(朝鮮)에서 만약 무기를 가지고서 우리 군사의 왕래를 방해한다면 모조리 잡아서 형벌할 것이며, 만약 도망한 백성이 하소연할 일이 있으면 기록해서 개령(開寧) 우리 장군의 진으로 아뢰라. 이상 조목에 대하여 혹시 의심할지 모르나 하느님이 밝게 내려다보니 절대 어기지 않을 것이다. 천정(天正) 20년 7월 일. 안예 재상(安藝宰相) 대리 완호원차 삼보원충(完戶元次三寶元忠).” 하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적의 장수는 휘원유로(輝元留老)이니, 개령ㆍ비안(庇安)의 적은 필시 휘원의 부하일 것이다. 그 사연을 보니 흉악하고 간사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6일. 이광이 막하 군사를 시켜 노종령(盧從岭)을 잡아다 곤장을 때려 사실 무근인 일에 놀라게 한 죄를 다스리다.
○ 경상도 삼가(三嘉)의 학유(學諭) 박사제(朴思齊) 형제가 군사를 모집하여 9백여 명을 얻었고, 봉사(奉事) 노흠(盧欽), 유생(儒生) 권양(權瀁)과 단성(丹城) 사람 권세춘(權世春)ㆍ권제(權濟) 등이 또한 의병을 일으키니, 김성일(金誠一)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당일로 장계를 올려 함안(咸安) 사람 이정(李瀞)을 소모관(召募官)으로 삼았다. 이때 군수 유숭인(柳崇仁)이 성을 버리고 달아났는데 이날에야 임소로 돌아와서 일을 함께 했다. 이정은 군사 천여 명을 모집하여 군수에게 소속시켜 진해(鎭海)ㆍ창원(昌原)에서 충돌하는 적을 대항하였는데, 매번 싸움에 이기면 선뜻 공을 군수에게 돌리고 자신은 참여하지 않았다. 박사제(朴思齊)는 봉사 윤탁(尹鐸)을 대리 장수로 삼아 그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곽재우(郭再祐)에게 부속시켜 영산(靈山)ㆍ창녕(昌寧)을 왕래하는 적을 방어하였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고경명(高敬命)이 연산(連山)에 머물러 진을 치고 방어사(防禦使) 곽영(郭嶸)에게 영(令)을 전달하여 금산(錦山)에 남아 뒤처진 적을 치자고 약속했는데, 이광이 군관을 시켜 고경명에게 군사를 돌이켜 함께 지키기를 청하였다. 고경명이 허락하지 아니하고 연산에서 떠나 진산(珍山)으로 전진하면서 정예부대를 뽑아서 길을 나누어 정탐하게 했다. 이광이 곽영에게 영을 전달하여, “달려오라.” 했는데, 곽영이 듣지 아니하고 의병을 따라 금산으로 향하였다.
○ 경상도 금산(金山) 소모관인 박사(博士) 여대로(呂大老)가 군사를 모집하여 적을 토벌하면서 권응성(權應星)을 임시 장수로 삼았는데, 김면(金沔)의 지례(知禮)ㆍ금산 싸움에 권응성이 협조해 공격한 공이 있었다. 그 후 권응성은 적에게 습격을 당하여 힘껏 싸우다 죽었다. 《경상순영록》에 나온다.
○ 경상도 창녕(昌寧)의 생원 신방즙(辛邦楫), 충의위(忠義衛) 성천희(成天禧), 정자(正字) 성안의(成安義), 유학(幼學) 곽찬(郭趲) 등이 군사 7백여 명을 모아 복병을 설치하고 적을 쳐서 서로 계속 적의 귀를 베어 바쳤다. 보인(保人) 조열(曹悅)과 성천희 등은 천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창녕을 포위하여 종일토록 교전하는데, 적 한 놈이 백마(白馬)를 타고 자칭 고을 원님이라 하므로 마침내 그 놈을 쏘아 당장 죽게 하였다. 그런 지 3일 후에 적은 울을 불태우고 도망갔다. 전 의령 목사(宜寧牧使) 소모관 오운(吳澐)이 한 고을을 개유(開諭)하여 군사 2천여 명을 얻었다. 《경상순영록》에 나온다.
8일. 적이 웅현(熊峴)을 넘으니 복병장(伏兵將) 김제 군수(金堤郡守) 정담(鄭湛)이 싸우다 죽다. 처음에 도복병장인 나주 판관(羅州判官) 이복남(李福男)이 중봉(中峯)에 진을 치고 황박(黃璞)이 그 위에서 지키며 정담은 그 아래서 지키는데. 이광(李洸)이 장병을 더 보내어 군의 위세를 도왔다. 이날 동이 틀 무렵에 거의 수천 명에 달하는 왜적의 선봉 부대가 모두 기(旗)를 등에 꽂고 칼을 휘두르며 곧장 우리 진 앞으로 들어오는데 고함 소리가 하늘에 잇닿고 쏘는 탄환이 비오듯 하였다. 이복남 등이 결사적으로 먼저 나와 활을 쏘아 낱낱이 명중시키며 군사들이 모두 죽음을 걸고 싸우니 적병이 점점 퇴각하였다. 아침 해가 동으로 올라와, 뒤의 적이 산과 골짜기를 덮으며 크게 몰려오는데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었다. 산중턱을 육박하여 여러 부대로 나누어 들어와 싸우는데 흰 칼날이 어울려 번쩍이고 나는 탄환이 우박 쏟듯 하였다. 뒤를 이어 응원하는 적이 얼마 안 있다가 또 와서 합세하여 치열한 싸움을 벌이니, 형세가 바람 앞에 불과 같았다. 황박은 화살도 떨어지고 힘도 다 되어 무너져 나주 진중으로 들어갔다. 적병이 승세를 타고 충돌하여 고갯마루로 오르니 나주의 진 역시 무너졌다. 정담이 말하기를, “차라리 적 한 놈이라도 더 죽이고 죽을지언정, 한 걸음도 후퇴하여 살 수는 없다.” 하고, 용감히 적과 더불어 육박전을 벌이다 죽었다. 이복남 등은 싸우면서 후퇴하여 안덕원(安德院)에 전주 동쪽 10리 길에 있다. 군사를 주둔하였다. 그 후 만력(萬歷) 23년 을미년(1595, 선조 28)에 김제군의 유생(儒生) 조성립(趙誠立) 등이 정담의 덕과 의를 사모한 나머지 그 공적이 드러나지 못한 것을 애석히 여겨 김찬(金瓚)에게 신원장(申寃狀)을 올렸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조성립 등이 검찰사(檢察使) 상공(相公) 합하(閤下)에 글월을 올립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착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포상하고 공이 있으면 반드시 상을 주는 것은 국가의 권면하는 법전입니다. 작고한 군수 정담은 사람됨이 충직하고 강개하며, 난리가 한창 심할 적에 본군 원으로 오게 되자 충성심을 분발하여 적을 토벌하였으며 용맹 있는 장정들을 뽑아들여 소 치고 술 걸러 배부르게 먹이니 병사들이 감격하여 그 밑에서 일하기를 원했습니다. 공산(公山)으로부터 진을 파하던 날에 공산은 곧 공주(公州)이니, 이광(李洸)이 처음 근왕(勤王)한 곳이다. 전 현감 어득준(魚得濬)과 더불어 울며 말하기를, “경성이 이미 함락되었는데 근왕하는 군사를 일으키지 않으니 주장(主將)의 뜻을 알 수 없다. 장차 의병을 이끌고 멀리 전하의 행차를 따를 생각을 하면서, 육지를 거쳐 좇으려고 하는가. 경기의 왜적이 그득히 퍼져서 바다를 건너 고을로 진군하고 있으니, 연해(沿海)가 아니면 본래 배가 없는데 어떻게 우리 전하께서 계신 데까지 이를 것인가.” 하였습니다. 매양 밥상을 대하면 문득 송구하게 여겨 달게 먹지 않으면서 장좌(將佐)들을 돌아보고 하는 말이, “나물 한 가닥 쌀 한 톨이 모두 주상께서 주신 것이다. 지금 우리 주상께서 서도(西道)로 파천하시어 기갈(飢渴)이 매우 심하실텐데 나는 너희들과 더불어 차마 이 밥을 먹고 있으니 이 어찌 신하로서 감히 마음에 편안할 일이겠느냐.” 하였습니다. 또 일찍이 본군 선비들에게 이르기를, “나는 아무 해에 과거에 올라 아무 해에 아무 벼슬이 되었다가 지금 또 급이 올라서 이 고을에 오게 되었으니 임금의 은혜를 이미 후히 입었다. 하물며 아들 하나가 있어 집안 일을 맡길 만하니 목숨을 바쳐 나라에 보답한들 무슨 유감이 있겠느냐. 나의 뜻은 결정되었으니 그대들은 내가 하는 것을 보라.” 하고, 인하여 목이 마르도록 눈물을 흘렸습니다. 또 일찍이 조방장(助防將) 백광언(白光彦)에게 왕래하여 합심해서 적을 토벌하기로 하였으므로, 온 도내가 이 사실을 듣고 모두 국사(國士)의 기풍이 있는 사람이라고 느껴서 용감한 자들이 마음을 의지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가 복병장이 되어 웅현(熊峴)에 방어하러 갈 적에는 주효를 조촐하게 장만하여 고사를 지내고 떠났으며, 그곳에 가서 보고는 험준한 데를 가려서 나무를 베어 울을 막고 군사들과 더불어 맹서하기를, “절대 싸워야 하며 후퇴란 있을 수 없다.” 하였습니다. 적병 만여 명이 고개로 올라오자 군수가 활쏘는 군사를 독려하여 거느리고 진 앞에 서서 활을 쏘는데, 하나도 적중하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적의 무리가 쓰러져 여러 번 퇴각하였습니다. 적의 괴수 한 놈이 백마를 타고 붉은 기를 꽂고 그 무리를 독려하여 곧장 진 앞으로 다가오자, 군수가 다시 두어 걸음을 앞으로 나가 화살을 뽑아 활에 먹이며 여러 장령들에게 이르기를, “나는 이 화살로 반드시 저 괴수놈을 떨어뜨릴 것이다.” 했는데, 과연 그 화살에 맞아 넘어지므로 모두가 탄복하였습니다. 혹자가 나가서 그 적의 귀를 베어 오려고 하자 군수가 꾸짖고 말리며 말하기를, “네가 내 진중에 있는데 어찌하여 공을 탐내느냐.” 하고, 중지시켰습니다. 적이 군수의 진은 마침내 침범하지 못할 것을 알고 나주 진의 허술한 곳으로부터 돌격해 들어오니 그 진의 장병이 모두 흩어졌습니다. 비장(裨將) 한 사람이 바삐 와서 말하기를, “저쪽 진이 이미 무너져 적의 선봉이 충돌해 들어오니 조금 후퇴하여 형세를 관망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자, 군수는 눈을 부릅뜨고 크게 꾸짖으며 종사관 이봉(李葑) 및 보좌관 몇 명과 더불어 굳건히 서서 움직이지 아니하고 주먹을 불끈 쥐며 말하기를, “차라리 적 한 놈을 더 죽이고 죽을지언정 차마 이 몸을 끌고 달아나서 적으로 하여금 길게 몰아치게 할 수는 없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더욱 세차게 활을 쏘니 뒤미처 오는 적이 일시에 사방을 포위하여 마침내 힘이 다해 죽었습니다. 아! 슬픈 일입니다. 본군 사람들이 가서 군수의 시체를 찾는데, 쌓인 시체 속에서 옷섶에 성명이 적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정확한 것을 알게 되었으니 그 싸우다 죽을 뜻은 평소부터 정해졌던 것입니다. 살아 돌아온 각 읍 장병들이 오며 가며 서로 말하기를, “아무 고을 군수는 적을 토벌할 적에 활을 쏘면 반드시 맞히고 맞히면 반드시 꿰뚫었다. 그가 단독으로 죽인 것이 수백 명이며 또 그가 죽인 적의 장수는 가장 괴걸한 자인데, 그 적이 바로 전라 감사라 자칭하던 자다. 적은 글월을 만들어 제사하며 통곡하고 돌아갔다. 흉악한 왜적이 마침내 전주에 충돌하지 못한 것도 모두 정담의 힘이니 어찌 난리가 평정된 이날에 힘을 모아 사당을 세워 풍패(豐沛 전주)를 보존한 공을 보답하지 않아서야 되겠느냐.” 하며, 경내에 초빈을 하고 초하루ㆍ보름과 세시(歲時)에 곡하고 제를 지내니 본군 사람들이 의를 사모하는 것은 이에 그칠 따름입니다. 지금 흉적이 물러갔으니 죽은 이의 충렬을 위로하고 장래의 용사를 격려하는 것이 국가에 있어 어찌 조금인들 소홀히 할 수 있는 일입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합하는 조정에 장계하여 이 사적이 없어지지 않게 하여 주소서.
9일. 적병이 양양역(襄陽驛)으로 전진하여 여염집에 불을 질러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가득했다. 이튿날 적의 떼가 거침없이 날뛰어 완산성(完山城) 밖에서 진을 치고 드나들며 도적질을 하니, 이광(李洸)이 금구(金溝)로 도망해 가서 만경대(萬頃臺) 군사들이 일시에 무너져 흩어졌다. 적이 우리 군사가 분주하는 것을 보고 자기의 뒤를 습격할까 의심하여 그날 밤으로 금산(錦山)ㆍ무주(茂朱)로 돌아갔다. 하늘이 우리나라를 도와 전주가 다행히 보전되었으니, 산성이 무너진 것이 도리어 유리하게 되었다. 한창 적병이 성 아래에서 충돌할 적에 경기전 주관(慶基殿主官) 오씨(吳氏)가 어영(御影)을 받들고 옥구(沃溝)로 달아나 뱃길로 서해 바다를 거쳐 임금이 계신 행재소(行在所)에 도달하니, 주상 전하께서 울며 절을 드리시고 친히 제사하신 후 예조(禮曹)에 명령하여 영변(寧邊)에 고이 모시게 하셨다. 그 후 만력 42년 갑인년(1614) 광해군(光海君) 7년 가을 9월 18일에 다시 전주에 모셨다.
○ 경상도 영산(靈山)에 사는 공휘겸(孔撝謙)이란 자가 난리 초반에 적에게 붙어 함께 서울에 와서 자기 집에 편지를 보내기를, “내가 당연히 경주 부윤(慶州府尹)이 될 것이요, 낮아도 밀양 부사(密陽府使) 벼슬은 차지할 것이다.” 하고, 또 주상전하께 범하는 말이 있으므로 곽재우(郭再祐)가 듣고 몹시 분개하였다. 하루는 공휘겸이 제 집에 돌아오는 것을 곽재우가 포박해 다 죽이니 사람들이 모두 쾌하게 여겼다. 이때에 거세고 사나운 남의 집 종들이 많이 주인을 죽이고 횡포를 부려 혹은 칼질을 하며 혹은 간음을 하므로, 곽재우가 들을 적마다 즉시 잡아 죽였다. 《경상 순영록》에 보인다.
○ 지례(知禮)의 적이 거창(居昌)을 범하는데 적의 장수가 은가마를 타고 큰 기 세 개를 세우고 고함을 치며 들어오자, 김면(金沔)이 힘껏 싸워 후퇴시키다. 《경상 순영록》에 보인다.
○ 상주(尙州) 사람 진사(進士) 김각(金覺), 교서관 정자(正字) 이준(李埈)이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는데 그 격문은 다음과 같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임금께서는 서쪽으로 파천하시어 돌아오지 못하시고 세상은 몹시 어지러우니, 적개심을 분발할 책임은 신하된 도리상 당연히 져야 한다. 묻노니, 밤낮으로 와신상담하는 나머지에 가슴속에 계획하는 여러 가지 일이 족히 흉한 적의 심장을 쳐부술 수 있겠는가. 지금 여러분이 다스리고 있는 두어 고을만은 적의 부대가 이미 물러갔으나 그 밖에는 아직도 가득 차 있으니, 국가에 보답하는 의거와 울타리를 굳건히 할 계책을 마련하는 것이 타는 불길을 잡는 것보다 급한데 같은 배에 풍파를 만났으니 어찌 구원을 늦출 수 있겠는가. 함께 협조하고 성의를 다하여 각기 부족한 힘을 합쳐서 방휼(蚌鷸)의 형세를 좌절시킴이 오직 이때이다. 나 이준은 하늘에다 활을 쏘는[射天] 흉적을 없앨 마음이 분발하여 취일(取日 몽진한 임금을 도로 모셔옴)의 공을 이루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일찍이 동지 2, 3사람과 더불어 흩어진 군사 약간 명을 모집하여 서울에 침범한[侵鎬] 적을 무찔러 서쪽으로 파천하신[踰梁] 군색함을 위로해 드릴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불행히 본주가 난리를 겪은 나머지 농작물을 수확하지 못하고 무기창고도 불에 타 없어졌으니, 군량은 반쪽의 콩도 저장된 것이 없고 무기는 한 개의 화살촉도 남은 것이 없어서, 저 옛날 제(齊) 나라 군사가 밥을 배부르게 먹었던 것처럼 먹이기는 어렵고 주(周) 나라 군사가 창을 겨누고 섰듯이 무기를 대주지 못하고 있다. 우레처럼 공격하고 번개처럼 달리는 날랜 군사는 모두 다 빈 보따리뿐이요 구정(九鼎)을 들 수 있고 적의 깃발을 빼앗을 만한 힘센 무리는 태반이 빈 주먹이라, 적을 토벌할 뜻은 있으나 무력을 써볼 수 있는 바탕이 없어 실로 오늘날의 큰 근심이 되는 것이외다. 생각건대, 제공(諸公)들이 다스리는 고을은 난리를 겪은 것이 본 고을같이 심하지는 아니하니 만약 한계를 구별하지 않고 적을 토벌하는 준비에 힘을 같이해 주신다면, 저 허세를 부려 날뛰는 놈들쯤은 바로 한 바다에 거꾸러져 사라져가는 잿더미와 같은 격이니 한 도내의 많은 병력으로 어찌 고슴도치처럼 웅크리고 개미처럼 모여서 그 독을 부리는 것을 걱정하리까. 엎드려 바라건대, 각기 역량이 미치는 대로 혹은 한 바리의 곡식이나 혹은 부스러기 쇠붙이라도 모아서 보내주시면, 제공에게 힘 되는 것은 극히 미세하지만 군수에 소용되는 것은 매우 긴요할 것입니다. 군사는 먹을 양식이 있어 싸 가지고 가는 데 근심이 없고 무기는 마음껏 쓸 수 있어 만족을 느끼게 될 것이니, 이렇게 되면 적은 부뚜막에 걸린 솥 속의 고기라 문드러지게 삶아낼 것이요 우리는 진흙 속과 이슬 속에서 헤매는 부끄러움을 쾌히 씻을 것입니다. 힘을 다하여 서로 구원해주신 공이 중흥하는 즈음에 힘입은 바 클 것입니다. 이에 무기와 군량을 조달하는 책임자 두 사람을 보내어 편지를 올려 속마음을 피력하는 것입니다. 만약 월(越) 나라와 진(秦) 나라가 서로 형편을 상관하지 않듯이 여기고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형세를 무시한다면, 기대했던 본의가 심히 아닐 것이며, 협력하여 일을 같이 하자는 청원을 또 어느 곳에 구하리까. 《경상 순영록》에 보인다.
○ 금산(錦山)에 진을 친 왜적이 다음과 같은 글월을 고시하다.
대일본(大日本) 대왕은 정치의 도를 조선에 베풀어 백성들을 구휼하려 하는데 무슨 까닭으로 바다와 육지의 길을 막아 도리어 원수를 사는가. 이른바 당랑(蟷蜋 사마귀)이 수레바퀴를 항거하고 비부(蚍蜉 하루살이)가 큰 나무를 흔든다는 말이 바로 이것인가. 이로 인해 깊은 여항(閭巷)을 찾아 들어가서 기병ㆍ보병이 깃발을 드날리고 칼날을 비껴 드니, 성문은 소실되고 집집마다 포성이 진동하였다. 역당들을 모조리 잡아 목을 잘라 죽이려고 했으나 죄과의 많고 적음을 구별하기 어렵고, 또 그 부모 처자가 가엾기 때문에 특별히 용서하여 굶주림을 구원해서 생명을 보존하게 했다. 비록 이같이 했으나 싸우려 달겨드는 자는 살해할 것이다. 지난번 무관으로 들[野]에 있었던 사람이 전일의 잘못을 뉘우치고 옛집으로 돌아가서 해를 따라 풍속이 변하기를 바란다면 정리하여 편히 살 수 있을 것이다. 일본 황제가 조선 황제와 더불어 반드시 회합을 갖게 될 것이니 너희들은 어찌 알지 못하느냐. 아무쪼록 이 말을 산중의 무관에게 알리어 활과 칼을 버리고 와서 항복한다면 무슨 죄를 당하겠느냐. 만약 이 뜻을 위반하는 일이 있으면 거듭 이 땅에 주둔하여 수백 명의 병관(兵官)을 거느리고 다시 살륙을 가할 것이다. 장협(長鋏) 오장대왕(吾將大王)이 거듭 안무하여 옛 조정에서 이 나라 천자를 위하니, 또한 천행(天幸)의 은혜가 내리기를. 이만 줄인다. 천정(天正) 20년 부상(扶桑) 신 안국사(安國寺). 이것을 보면 과연 전라 감사라고 칭호한 자이다.
또 투서(投書)를 얻어 보니, ‘야운(野雲)’이라 했다. 고경명(高敬命)이 해석하기를, “넓은 들에 희미한 구름 끊어지고, 빈 산에 조각달이 비끼었구나.” 하였다.
○ 이광이 광주 목사(光州牧使) 권율(權慄)을 남원(南原)의 수성장(守城將)으로 임명하였는데, 권율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남원을 지키면서 도내 각 읍에 공문을 띄워 이광이 근왕(勤王)하는 데 오지 않은 죄상을 들어 공격하기로 하였다.
○ 합천(陜川)의 의병대장 정인홍(鄭仁弘)이 가장(假將) 김준민(金俊民)과 더불어 군사 2천 8백여 명을 거느리고 안언(安彦)의 적을 공격하여 다 섬멸했다. 이때 김준민은 처음 와서 재주를 시험해 본 바 없었고, 성주(星州) 가리현(加利縣) 이홍우(李弘宇)의 군사는 이부산(伊傅山)에 있었으며, 고령(高靈)ㆍ합천의 군사는 가천(伽川) 성주 서면의 마을 이름이다. 에 있고 문여(文勵)의 군사도 역시 성주에 있어 모두 정인홍의 지휘를 받았다. 정인홍이 군중(軍中)에 명령하기를, “반드시 대부대의 적을 만난 연후에야 나가 싸우되, 무릇 우리 장병은 앞서 나가 적을 공격하여 끝까지 추격해서 많이 죽이는 것을 으뜸가는 공으로 삼는다. 적을 쏘아 죽이는 것이 그 다음이요, 공을 요청하기 위해 적의 머리를 베어 오는 것이 최하이다.” 하였다. 이날 밤에 성주 대교천(大橋川) 위에 머물러 진을 치고 새벽을 기다리는데, 큰 비가 갑자기 쏟아져서 도저히 싸울 수 없으므로 부득이 회군하여 고령 마을 집으로 돌아왔다. 정인홍이 말하기를, “종묘 사직은 빈 터가 되고 적의 세력은 날로 더해가고 있다. 우리들이 이곳에서 의병을 일으킨 것은 본시 힘을 다해 한 번 결전하여 적개심을 분발하기로 한 것인데, 사세가 지연되어 앉아서 시일만 허비했으며 하느님이 돕지 아니하여 오늘도 또 이러하니 이는 실로 내가 국가를 위하는 정성이 박약한 소치이다. 이를 장차 어찌하랴.” 하며, 목이 메어 눈물만 흘리고 말을 못하였다. 김준민이 옆자리에 있다가 감격한 얼굴로 일어나 절하며 말하기를, “오늘의 일은 어쩔 도리 없으나 내일 만약 비가 갠다면 마땅히 마음과 힘을 다하여 죽으나 사나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하였다. 즉시 전령하여 다시 약속을 정하고 밤중에 군사를 내서 사원동(蛇院洞) 안언(安彦) 길 옆에 진을 치고서 군사를 6, 7개소에 매복시키되, 서로 한두 마장 거리를 떨어지게 하였다. 정인홍은 중위(中衛)를 인솔하여 높은 언덕에 진을 치고서 굽어보며 지휘하여 싸움을 독려하였다. 이튿날 적이 무계(茂溪)로부터 떠나서 성주로 향하는데 4백여 명이 왕래하는 적이 날마다 이러하였다. 소ㆍ말 백여 바리에 짐을 싣고 많은 깃발을 벌여 두어 마장에 연이어 뻗쳤다. 그중 혹은 금은의 가면(假面)을 쓰고 금은의 갑옷과 투구를 하였으며, 혹은 닭의 깃으로 만든 옷을 입고 포를 쏘며 칼을 휘두르니 사람마다 간담이 서늘했다. 이윽고 합천의 좌선봉 한 부대가 대응해 포를 쏘며 돌연히 일어나자, 적들이 행군하지 않고 길 왼편에 집결하여 고갯마루를 차단하여 실은 짐들을 중간에 두고 칼 쓰고 총 쏘는 군사를 앞뒤로 배열하였다. 김준민ㆍ정방준(鄭邦俊)이 활 쏘는 군사 천여 명을 거느리고 말을 달려 산을 내려가 일시에 발사하자, 적도 역시 고함을 치며 칼을 휘두르고 나왔다. 맨 앞에 선 왜의 한 장수가 청흑색을 지닌 큰 준마를 탔는데, 말 위에서 닭의 털로 만든 옷을 입고 금으로 된 가면을 썼으며 붉은 자루로 된 큰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칼 쓰는 군사 수백이 그 뒤를 따라서 크게 외치며 돌격해 오니, 우리 군사는 일시에 놀라 퇴각하였다. 청흑색 말이 워낙 빨라서 날듯이 산으로 올라오자, 우리 군사들이 함께 쇠뇌를 쏘아서 그 말의 뒷다리를 맞혔다. 말이 곧 놀라 뛰어 오르는 바람에 왜장이 우리 진 앞에 떨어지자, 곧 그 말을 빼앗고 그 장수를 베니, 남은 적은 화살을 맞아 다리를 끌고 후퇴해 달아났다. 고령 군사는 남쪽에서 기세를 타고 들어오고, 성주 군사는 북쪽에서 기세를 타고 들어왔다. 김준민ㆍ정방준 등은 결사적으로 혼전을 벌이고 복병은 사방에서 일어나, 고함 소리가 골짜기를 진동하며 좌우의 산상에서는 화살이 비오듯 했다. 적은 포위망을 헤치고 달아날 양으로 포수ㆍ검수(劍手)로써 뒤를 막게 하고 성현(星峴)을 향해 달아났는데, 정인홍이 산상에서 깃발을 휘두르며 싸움을 독려하여 적 한 놈도 빠져 달아나지 못하게 하라고 하였다. 적은 군수품과 깃발들을 모두 버리고 달아났다. 가천 군사가 또 불의에 돌격해 나오니 적은 대항해 싸울 생각조차 못하였다. 여러 군대가 20여 리를 추격하며 죽였으므로, 죽은 시체가 서로 이어지고 흐르는 피가 들판에 가득했다. 남은 적은 화살을 맞은 채 성현을 넘어 들어갔는데, 성현은 성주 읍과 가까운 곳이라 우리 진은 드디어 군사를 정돈해 돌아왔다. 이 싸움에 적의 한 진을 쾌히 무찔러서 여러 군이 활기를 띠었다. 다만 장령이 적의 목을 베어 오는 것을 귀히 여기지 않았으므로 머리 수효는 많지 않고, 빼앗은 것으로는 짐 싣는 말이 백 50여 필, 해와 달이 그려진 큰 기 3개, 그리고 철환(鐵丸)과 화약 등속이 매우 많았다. 빼앗은 준마는 이마 사이에 육각(肉角)이 있어 길이가 한 치 남짓하며 잘 달려 날아가는 것 같아서, 김준민은 매양 그 말을 타고 싸움에 나가 군 앞에 기세를 올렸다. 가장 큰 칼은 버들 판자에 도금한 것이었다. 오래지 않아서 김준민이 또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노다촌(老多村)을 육박하니 바로 무계(茂溪) 진 밖이었다. 적이 문을 굳게 닫고 나오지 않았는데, 돌과 나무토막으로 막은 울이 심히 견고하여 쳐부술 수 없으므로 곧 기세만 올리고 되돌아왔다. 얼마 안 되어 무계의 적은 철거하여 성주의 적과 합하고, 현풍(玄風)의 적은 철거하여 대구(大丘)의 적과 합했다. 《경상 순영록》에 보인다.
○ 곽재우(郭再祐)가 경상 우도 열개의 읍을 수복하니 적병이 모두 좌도로 달아났다. 처음에 현풍ㆍ창녕(昌寧)ㆍ영산(靈山)에 주둔한 적이 매우 성하여 구름과 잇닿을 만큼 진을 높이 치고 오르내리는 길을 만들어 성주와 상통하고 있었다. 그러나 곽재우는 본래 신기한 꾀가 많은지라, 정예 부대 수백 명을 뽑아서 현풍으로 끌고나가 혹은 산상에서 군사를 보고 혹은 성 밖에서 말을 달려 백 가지로 싸움을 거니, 적이 시종 감히 나오지 못했다. 곽재우가 또 한 자루에 다섯 가지가 난 횃불을 만들어 밤중에 고갯마루에 올라 일시에 불을 붙여 들어 불빛이 적진에 비치게 하고,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포를 쏘고 고함을 치며 여럿이 서로 응하여 말하기를, “하늘에서 내려온 홍의장군(紅衣將軍)이 여기 있으니 내일 접전하게 되면 반드시 다 죽이고 말 것이다. 너희들은 후회하지 말라.” 하고, 곧 불을 꺼버리고 몰래 물러났다. 그리고 밝은 새벽에 보니 현풍의 적이 간밤에 이미 도망가 버렸다. 이 거사는 마침 무계의 싸움과 같은 때였기 때문에 적은 더욱 공포심이 생겨서 도망간 것이다. 그 후 5일 만에 창녕의 왜적이 역시 소문을 듣고 철거했는데, 오직 영산의 적이 군사가 많고 강함을 믿고서 오래도록 옮기려 하지 아니하였다. 곽재우가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에게 고하여, 삼가(三嘉)ㆍ의령(宜寧)ㆍ합천(陜川) 등의 군사를 내게 하여, 합천ㆍ삼가의 군사는 윤탁(尹鐸)이 영솔해서 후원을 하게 하고, 의령의 군사는 곽재우가 거느리고 적진과 마주 보는 봉 위에 들어가 진을 쳤다. 3진으로 나누어 곽재우가 중앙에 있었으므로 적의 선봉부대 기병 백여 명이 말을 달려 돌격하여 곧장 중앙으로 범하는데, 곽재우는 조금도 놀라지 아니하고 적의 전봉(前鋒)으로 갑옷 입은 자를 쏘았으며 5, 6명을 연달아 넘어뜨렸다. 적의 탄환이 비오듯 하는데도 곽재우는 태연자약하였다. 군사들이 자기 몸으로 곽재우를 가리며 결사적으로 어울려 싸워 화살과 돌을 마구 던지니, 적의 선봉 말 수십 필이 넘어져 죽고 적도 매우 많이 죽었다. 남은 적이 잠깐 후퇴하자 성 안에 있는 적이 격전하는 것을 바라보고 한꺼번에 나란히 나오니, 윤탁의 군사가 무너져 흩어지므로 적은 승세를 타서 육박했다. 곽재우는 형세가 서로 대적하지 못하게 되어 한편 싸우며 한편 후퇴해서 산으로 올라가 적을 회피하니 적도 역시 감히 끝까지 추격하지 못하였다. 저물녘에 흩어진 군사를 모아보니 하나도 사상을 당한 자 없었다. 곽재우가 윤탁이 구원하지 아니하고 먼저 도망간 죄를 책하여 장차 형에 처하려 하였는데, 윤탁이 다음에 공을 세워 형을 보상하기를 자원하므로 마침내 다시 약속하기를, “명일에 나가 싸워 불리하거든 또 명일에 나가 싸우고 그래도 불리하면 3, 4일을 한하여 기어코 반드시 이기도록 하라. 운운.” 하였다. 이튿날 새벽녘에 곽재우가 군사를 거느리고 다시 들어가 고개 위에 진을 치고 사람을 보내서 정탐하였다. 성문이 활짝 열리고 밥 짓는 연기도 전혀 나지 아니하여 아무런 동정이 없으므로 그들이 무슨 계획이 있는가 의심했는데, 밝은 아침에 사람을 시켜 살펴보니 적은 밤중에 군막을 불태우고 이미 도망하여 까마귀 까치만 성첩에 날고 있을 뿐이었다. 이로부터 창녕 한 길은 적병이 단절되고, 오직 중간 길로 밀양(密陽)ㆍ대구에서 인동(仁同)ㆍ선산(善山)에 이르기까지가 적이 왕래하는 길목이 되었다. 《경상 순영록》에 보인다.
○ 전지(傳旨)로 인하여 군공(軍功)에 내리는 상의 격식을 알게 된 뒤로부터 혹은 굶주린 백성이나 도망갔다 돌아온 사람들의 머리를 베어 적의 머리라 속여 바치고 관작과 상을 요구하는 일이 있었는데, 군공으로 출신(出身)한 자는 흔히 이런 수법에서 나왔다. 경상도 의흥현(義興縣)에서 굶주린 백성 두 사람의 머리를 베어 터럭을 깎아버리고 머리를 바친 자가 있다 하므로 순찰사가 본군 원을 시켜 조사해 보게 하였다. 곧 수령으로서 공을 요청한 자의 행위인 듯한데 확실치 못해서 마침내 덮어 두고 묻지 않았다. 의성현(義城縣)에서 왜놈의 머리를 베어 바치고 출신한 현령인 정희현(鄭希賢)이 관가에 잔치를 베풀어서 축하하니 조정의 한 벼슬아치가 시를 지어 조롱하기를,
주린 백성 머리 위에 계화가 둥실 떴고 / 飢民頭上桂花浮
붉은 첩지 가운데 원망의 피 흘렀구려 / 紅紙群中怨血流
원님의 잔치자리 술이 응당 있을텐데 / 太守慶筵知有酒
어찌 남은 술 나누어 우는 귀신 위로하지 않는가 / 盍分殘瀝慰啾啾
하였다. 《경상 순영록》에 보인다.
○ 경상도 예안(禮安) 고을 선비들이 의병을 일으키는데 진사(進士) 이숙량(李叔樑)이 격문을 지어 열읍을 효유하다. 《경상 순영록》에 보인다.
○ 안집사(安集使) 김늑(金玏)이 영천(榮川)에서 훈련봉사(訓鍊奉事) 권희순(權希舜)을 의성(義城) 수성장으로, 박사(博士) 황서(黃曙)를 풍기(豐基) 수성장으로, 전 현감 이유(李愈)를 예천(醴泉) 수성장으로, 유학 박연(朴淵)을 의흥(義興) 수성장으로 삼아서 한 고을 군무를 각자 담당하게 하였으니 대개 열읍 수령들이 모두 도망간 때문이다. 이유가 안동(安東)의 생원인 김익(金翌), 진사(進士) 김윤사(金允思), 정로위(定虜衛) 안숙(安淑) 등과 더불어 각각 마을 안의 장정들을 모집하여 다인(多仁)의 적을 방어하였다. 다인은 예천의 속현이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안집사 김늑이 안동에 당도하니 선비와 벼슬아치들 50여 명이 찾아왔다. 그래서 전 도사(都事) 안제(安霽), 전 검열(檢閱) 김용(金涌)을 수성장으로, 출신(出身) 권전(權詮)을 영병장(領兵將)으로 삼았다. 인하여 각 읍에 영을 전달하여 도피한 수령들은 관아에 돌아와 일을 보게 하였다. 이때에 적의 군사가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수령들이 제 마음대로 도망갔는데, 유독 예안 현감 신지제(申之悌)만은 관문에 군사를 모으고 말에 재갈을 물리고서 변란을 대비하며 토적(土賊)을 잡아 죽이고 창고를 굳건히 지켰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경상도 안동의 생원 임흘(任屹)이 열읍에 격문을 보내어 충의로써 개유(開諭)하여 군사를 모집하고 양식을 모아서 함께 나라의 적을 토벌하였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경상도 김해(金海)에 진을 친 적의 배 5백여 척이 제포(薺浦)로 옮겨 정박하였다. 창녕(昌寧)ㆍ영산(靈山)의 적이 강가에 나와서 진을 치고는 혹은 의령(宜寧) 원이라 칭하고 혹은 초계(草溪) 원이라 칭하고서 장차 두 고을로 향하려 하는데 곽재우(郭再祐)가 의병(疑兵)을 설치하여 물리쳤다. 《경상 순영록》에 보인다. 이는 직전에 아직 수복하지 못했을 때의 일인 듯하다.
○ 대가(大駕)는 의주(義州)로 행차하시고 학가(鶴駕 세자의 행계(行啓))는 이천(伊川)으로 이주(移駐)했다. 이는 충청 감사가 전하는 통문도 있거니와 영남 순영(巡營) 마도(馬徒) 강만택(姜萬澤)이 행조(行朝)로부터 와서 말한 것이다. 《경상 순영록》에 보인다.
○ 적의 장수 청정(淸正) 등이 북도 20여 고을을 모두 함락시켜 천 리의 주위에 농작물이 하나도 없으니, 봄철의 제비가 집 지을 곳이 없어 숲 속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놈들은 그래도 두만강까지 밀고 나가서 야인(野人)의 마을 6, 7부락을 불태워 없애고 돌아갔다.
10일. 전라좌도 의병대장 고경명(高敬命)이 금산(錦山)에서 적을 토벌하다 패하여 전사하다. 하루 앞서 방어사(防禦使) 곽영(郭嶸)과 군사를 합하여 좌ㆍ우익을 만들어 금산 성문 밖 10리 지점에 나가 진을 쳤다. 고경명이 먼저 날랜 기병 수백 명을 발동하여 들락날락하며 적을 쏘아대는데, 군관 김정욱(金廷昱)이 말에서 낙상하여 후퇴해 달아나자 적의 군사가 그 기회를 타서 육박하므로 우리 군사가 차츰 퇴각했다.
석양 무렵에 이르러 적병이 성 안으로 들어가므로 고경명이 재주 부리는 사람 30여 명을 시켜 성 밑으로 토성(土城) 들어가게 하고, 성 밖의 관사와 민가를 모두 불태웠다. 또 진천뢰(震天雷 대포(大砲))를 쏘아 성 안의 창고를 불태우니, 적에게 사로잡혀 간 부녀자들이 물을 길어다 불을 껐다. 해가 저물자, 각기 군사를 거두어 진을 치고 지켰다.
이튿날 동틀 무렵에 관군ㆍ의병 여러 진이 적의 처소로 진격하였다. 고경명은 추촌(楸村) 앞산에 웅거하여 진지를 정하고 곽영은 사직당(社稷堂) 뒷산에 머물러 결진하여, 관군은 북문에서 싸우고 의병은 동문에서 싸웠다. 적의 무리가 마침내 진지를 비우고 나와 고함치는 소리가 하늘에 연이어지니, 형세가 바람 앞에 불길과 같았다. 먼저 관군에게 덤벼드니, 선봉장 영암군수(靈嵒郡守) 김성헌(金成憲)이 말을 달려 먼저 달아났다. 적이 인하여 광주(光州)ㆍ흥덕(興德) 등의 진을 육박하니, 곽영이 관망하다 도망해 달아났다. 의병의 진도 따라서 무너지고, 고경명 및 그 아들로 문신인 고인후(高因厚)와 종사관 유팽로(柳彭老), 장서기(掌書記)인 유학 안영(安瑛) 등이 다 죽었다. 고경명의 큰 아들 전 현령 고종후(高從厚)는 무너져 흩어질 적에 아버지와 아우가 죽은 것을 알지 못하고 무너지는 군사 속에 끼어 나왔기 때문에 죽지 않았다.
○ 그 후 고종후가 이적(李適)에게 답장을 냈는데 다음과 같다.
섬 오랑캐가 난리를 꾸며 임금께서 멀리 파천해 계시니 한 집안의 삼 부자가 함께 벼슬에 오른 이상, 재주는 비록 천박하나 차마 앉아서 국가가 전복되는 것을 볼 수 없어 도내 인사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킨 것입니다. 저 고종후는 죽은 아우와 더불어 먼저 본주의 무너진 군사들을 개유시켜 거느리고 가서 수원(水原)의 진에 부속시키고, 장차 평양으로 향하려 하다가 길이 막혀 돌아왔습니다. 죽은 아우는 와서 담양[秋城]에서 의병을 일으키는 날에 참여했고, 저 고종후는 여산(礪山) 중로에서 병이 들어 고생하다가 와서 태인현(泰仁縣)을 거쳐 폐한 금구현(金溝縣)에 당도하여 인원을 모집하는 한편, 바닷길로 격문을 제주도에 전하여 사슴 쫓는 빠른 말을 보내 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죽은 아우는 선친(先親)을 모시고 전주[完山]로 향하여 남원 일대의 군사와 회합하고 저 고종후는 김제(金堤)ㆍ임피(臨陂) 등 고을을 경유하여 군사를 모집하고 군량을 수합해서 여산에 모이기로 기약했습니다. 죽은 아우는 또 전주로부터 휘하(麾下) 용사를 거느리고 진안(鎭安)ㆍ무주(茂朱) 등지에 복병하여 영남에서 침범하는 적의 군사를 막았고, 선친은 여전히 전주에 머물러 변을 대기하였던 것입니다. 얼마 안 되어 무주에 침범했던 적병이 도로 영남으로 향한 연후에야 비로소 군사를 정돈하여 북으로 올라갈 계획을 하고 삼 부자가 여산(礪山)에 모여 호서(湖西)ㆍ경기(京畿)ㆍ해서(海西)에 격문을 띄워 평안도에 전달되게 하고서 길을 떠나 은진(恩津)에서 유숙하고 장차 이산(尼山)으로 향하려 하는데, 황간(黃澗)ㆍ영동(永同)의 적이 금산(錦山)을 넘어왔다는 말을 듣자 휘하 군사들이 모두 돌아가서 본도를 구원하려 하였습니다. 상의한 끝에 연산(連山)으로 나가 주둔하여 험하고 굳건한 지대를 점령함으로써 양호(兩湖)의 군사와 양식을 바탕 삼아 서서히 적의 형세를 관찰하여 남으로 내려가든지 북으로 올라가든지 하자 하고, 마침내 연산으로 향하여 두 길을 보려고 했습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전주부의 형세가 날로 급하므로 부득이 군사를 옮겨 진산군(珍山郡)으로 들어갔다가, 진산에서 금산으로 들어가서 방어사와 군사를 합하여 좌우익을 만들어, 의병이 종일토록 고전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적에게 밀려 10여 리를 후퇴해 달아났다가 도로 적병을 토성(土城)에서 제압하여 성 밖의 객사(客舍)를 불태우고 진천뢰(震天雷)를 써서 성 안의 창고를 연소시키니, 적에게 사로잡혀 간 부녀자들이 힘을 합해 물을 길어다 불을 껐습니다. 관군이 만약 힘을 합하여 격전했다면 싸움이 하루도 다 걸리지 않았을텐데, 관군이 힘을 쓰지 아니하고 또 해가 저물자 싸움을 중지하니 방어사가 진산 군수를 보내 내일의 일을 의논하였습니다. 저 고종후가 부친께 말씀드리기를, “오늘은 우리 군사가 이득을 보았으니 이 이긴 기세를 타서 군사를 온전히 하여 회군했다가 형세를 보아 다시 와서 들락날락하며 적을 곤란하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 적과 대치하여 이 밤을 묵는다면 밤중에 적이 쳐 들어올 염려가 있습니다.” 하였더니, 부친께서 말씀하시길, “너는 부자의 정으로써 내가 죽을까 두려워하는 모양이나, 나는 국가를 위하는 일인데 한 번 죽은들 무엇이 유감되랴.” 하시므로, 저 고종후가 감히 더 말씀드리지 못하고 물러났으며, 방어사는 이날 저녁에 여러 장수들 중에서 힘껏 싸우지 아니한 자를 치죄하였습니다. 적들은 이날 밤에 의병의 진영을 침범하기로 모의하고 있었는데 복병해 있던 우리 장교가 듣자니, 사람이 물 건너는 소리가 나므로 한 졸병을 보내 밭 가운데서 기다려 보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먼저 와서 밭 가운데 잠복해 있던 왜적이 이를 보고서 자기들의 계획이 의병에게 발각되었다고 여겨 마침내 후퇴해 달아났습니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 진격하였는데, 적의 떼가 갑자기 자기 진을 비우고 몰려와 우리 방어진(防禦陣)의 여러 장수에게 덤벼드니, 영암 군수(靈嵒郡守) 김성헌(金成憲)이 대번에 말을 채찍질하여 달아나서 한 번도 맞서지 못하고, 광주(光州)ㆍ흥덕(興德) 두 진도 모두 포위를 당하자 방어진은 바라만보고 무너졌습니다. 의병의 큰 진은 방어진과 서로 바라보며 마주 진치고 있었으므로 이미 그들이 후퇴해 달아난 것을 알고, 오히려 단독으로 적을 당할 계획을 하고 있었습니다. 싸움에 나간 의병이 관군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드디어 퇴각해 달아나 중군진으로 들어와서 진중이 소란했으나, 아직도 든든히 마음을 갖고 대기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한 사람이 뒤에 와서 방어진을 바라보고 문득 놀라며 외치기를, “방어가 퇴각해 달아났다.” 하자, 의병의 진이 드디어 무너져 흡사 거센 물결이 가로지르는 듯하여 다시 억제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의병의 진이 무너지지 않았을 때 선친은 맨 가운데 계셨고 저 고종후는 한쪽 가에 있었으며, 죽은 아우는 독전소(督戰所)로부터 와서 한쪽 가에 있었는데, 무너질 때 저 고종후의 말이 가시덤불에 걸려 넘어져서 말을 다시 굴레 지어 가노라니 여러 군은 이미 멀어져서 그 뒤를 따라 달려갔습니다. 그래서 부자 형제를 서로 잃고 홀로 구차히 살아서 오히려 말하고 밥먹으니 천지에 죄를 진 몸이라, 날로 신의 꾸지람을 기다릴 따름입니다. 선친이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말타기가 익숙하지 못하니 불행히 싸우다 패하면 오직 죽는 것밖에 없다. 우리들이 성공하고 못하는 것에 국가의 안위가 매여 있으니 어찌 한 몸의 화와 복에 그칠 따름이랴.” 하셨습니다. 군사가 무너지던 날 말에서 떨어져서 말이 빨리 달아나니 모시고 가던 유생(儒生) 안영(安瑛)은 작고한 판서(判書) 이후백(李後白)의 외손인데 말에서 내려 자기의 말을 바치고 걸어서 따라가다가 안영도 역시 적의 손에 죽었습니다. 종사관(從事官) 유팽로(柳彭老)가 건장한 말을 타고 먼저 나와서 그 종에게 묻기를, “대장이 포위망을 벗어났느냐?” 하니, 종이 답하기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하였습니다. 유팽로가 즉시 고삐를 돌려 말을 채찍질하여 선친을 난군(亂軍) 속에서 시종하니, 선친이 돌아보고 말씀하시기를, “나는 반드시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인데 그대는 어찌하여 먼저 나가지 않는가.” 하자, 유군이 대답하기를, “내 어찌 대장을 버리고 구차히 살려 하겠습니까?” 하고, 여러 번 말해도 선뜻 가지 아니하고 종시 보호했던 것입니다. 아! 통분하외다. 불초한 몸이 능히 전장에서 죽지 못하고 유독 두 열사로 하여금 선친과 같은 날에 죽게 하였으니 천지간에 한 죄인이라, 통곡밖에 무슨 말을 하리까. 아우는 뒤에 떨어져서 이미 무너진 군사를 정돈하려 하다가 진에서 죽었고, 군사들은 모두 먼저 달아나서 다행히 함께 죽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의병과 승군(僧軍)의 조력을 얻어 시체를 수습해 왔으며 선친도 변을 당한 즉시 몰래 산중에 매장했다가 역시 의병과 승군의 주선을 입어 입관(入棺)해 와서 두 상(喪)은 이미 고이 장사지냈으니 불초는 비록 죽어도 유감은 없습니다. 병든 몸이 항상 하루도 보전 못 할까 염려했었는데, 변란이 생긴 후에는 죽음을 기약하고 4월 이후로는 노상 말 위에 있었으며 비를 무릅쓰고 들판에서 잔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며, 끝내 의병을 수행하다가 이 대고(大故 선친의 상(喪)을 말함)를 만나니 친구들이 모두 장사를 치루기 전에 죽지나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완악한 목숨이 조금 연장되어 무사히 장사를 치렀습니다. 이와 같이 구차히 산 것은 병든 어머님과 어린 아우를 위하려는 생각이요, 또 죽은 아우의 4남 1녀를 길러 그들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다만 병의 뿌리가 깊이 박혀 한 번 발작하면 비록 편작(扁鵲 중국 전국 시대의 명의(名醫))이라도 역시 손을 들 수밖에 없습니다. 호남의 의병이 두 번째 일어난 것은 대개 선친이 남긴 서업(緖業 사업)으로 인한 것이며, 용감한 군사와 건장한 말은 바로 선친이 제주도에 격문을 보내어 불러온 것입니다. 저 고종후가 그 군사를 따르려고 하니, 친구들이 모두 말하기를, “슬픔을 머금고 병든 몸을 부지하라. 반드시 죽어서 유익할 것이 없다.” 하며, 또 생각해 보니 이 몸이 한 번 죽으면 아버지의 친상(親喪)과 아우의 시체를 수습하는 일이 아우나 조카로는 외롭고 약하여 해내기가 어려우므로 참고 기다렸습니다. 장사를 지낸 다음날 영위(靈位)에 곡하고 떠나 의병의 도청(都廳)으로 가서 여러 친우와 일을 같이 하여 선친의 소원을 조금이나마 풀어 드릴 생각이며, 죽고 사는 것은 하늘의 처분에 맡길 뿐입니다. 어버이 원수를 갚지 못하고 나라의 수치를 씻지 못하면 살아서 무엇하리까. 다만 한 번 분명하게 죽는 것이 원입니다. 운운. 부자 형제가 함께 전진(戰陣)에 있다가 패전을 당하여 서로 잃고 홀로 구차히 목숨을 유지하여 지금까지 천지의 사이에 숨을 쉬고 있으니 신명이 용서하지 못할 바라, 오직 한 번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지금 보내주신 편지를 받들어, 어머니를 모시고 적을 피하여 온 집안이 평안하심을 알았습니다. 저 고종후는 처자에 힘입어 보전하고 있으나 한결같이 비감할 따름입니다. 쇠한 병으로 본시 편한 날이 없었는데 또 이 대고(大故)를 만나니 비록 조금이나마 완악한 목숨을 연장하여 어머니와 아우를 보전하고 또 죽은 아우의 고아들을 기르고 싶으나, 기력이 끝내 지탱하지 못할 것을 스스로 두려워합니다. 부자간의 슬픔이란 남에게 말할 수 없거니와, 죽은 아우는 본시 활 쏘고 말 달리는 기술이 없었는데 한갓 구구한 충의로써 옷소매를 털고 일어나서 노상 건장한 군사를 거느리고 홀로 진의 전면을 담당하며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그는 노상 말하기를, “오늘날 일은 비록 제 몸을 희생하고 가족을 함몰시킬지라도 오히려 후회할 것이 없다.” 하여, 친한 이들은 대개 다 들었습니다. 그는 군사가 무너지자 뒤에 남아 목숨을 바쳤는데 무상한 이 몸은 홀로 몸뚱이를 보전하였으니, 못[池] 가에 봄 풀이 나면 혜련(惠連)의 꿈을 누가 꾸며 비바람 치는 한 밤중에 옛 언약을 어디서 찾으리오.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간장이 무너지나 그 영특한 모습은 눈앞에 완연합니다. 곧장 저승으로 따라 가고 싶으면서도 오히려 말하고 밥 먹으니 무슨 사람이라 하리까.
또 별지(別紙)에,
우리 온 집안이 무예(武藝)를 배우지 않은 것은 여러 사람들이 다 아는 바입니다. 오직 구구한 충의로써 인심을 격동해 일으키려는 것이었는데, 죽은 아우는 본래 의기에 찬 남아라 죽음을 결심하였습니다. 일찍이 적병이 조령(鳥嶺)을 넘은 뒤로 의병을 불러일으키고자 하여 형제가 함께 격문을 지었는데 그 대략에, “조령은 평탄한 길과 다름이 없고 한강(漢江)은 넓이가 허리띠 하나 만하니, 이때를 당하여 국가의 안위는 비록 대신에게 달렸지만 이처럼 방심해서 되겠는가. 모두 싸움터에 나가서 죽어야지.” 하였고, 또 이르기를, “2백 년을 이 땅에서 옷 입고 밥 먹은 것은 모두 여러 선왕이 생성(生成)해주신 은덕인데, 수천 리 예의(禮義)의 나라에 어찌 남자다운 사람 하나가 없단 말인가.” 하였으며, 그 끝 구절은 죽은 아우가 단독으로 지은 것인데 이르기를, “저놈들이 몰려들면 노중련(魯仲連)처럼 동해(東海)에 빠져 죽을 수밖에 없다. 오늘날에 있어서는 전단(田單)이 제(齊) 나라를 도로 찾듯 하는 일을 바랄 뿐일세.” 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보면 역시 그 마음가짐을 징험해 알 수 있습니다. 격문이 완성되었으나 여러 친구들은 응종하지 아니하며 말하기를, “본도 관군이 아직 온전하니 나라를 위해 싸우는 데는 군사가 모자랄 염려가 없으며, 서로 좋아하지 않는 자가 혹시 군사 일으킨 것을 가지고서 모함한다면 어찌하랴.” 하고, 우리 온 가족도 역시 이르기를, “격문을 띄웠으나 호응하지 않으면 유익은 없고 도리어 해가 있을 것이다.” 하여, 마침내 일을 중지하였습니다. 이광(李洸)이 금강(錦江)에서 군사를 후퇴한 뒤로 인심이 흉흉하여 장차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나주(羅州)의 김천일(金千鎰) 영공(令公)이 편지를 보내 다짐하며, 격문을 돌려 그 군사를 혁파한 연유를 들어 죄를 성토한 다음에 의병을 일으키려 한다 하였습니다. 저 고종후의 일가가 답보(答報)하기를, 순찰사가 나랏일에 성실하지 못한 것은 진실로 죄가 있다 하겠으나 이와 같이 처리한다면 사체에 어긋날 염려가 있으며, 더구나 순찰이 방금 다시 거사하는 마당에 있어 도내 선비들이 말을 모아 성토한다면 순찰이 도내를 호령할 수 없게 되는 동시에 군(軍)과 민간이 복종하지 않을 염려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김천일은 이광과 사돈 간이 되므로 절실히 권하여 순찰사로 하여금 최후의 효과를 거두도록 선도하여 과연 순찰사가 군사를 일으켰는데, 각 읍 백성들이 모두 말하기를, “금강(錦江)에서 아무 까닭 없이 진을 파하고서 지금 무엇하자고 다시 군사를 일으켜 백성을 괴롭히려 하는가.” 하며, 곳곳마다 흩어져 도망가 있었습니다. 국가에 대한 근심이 실로 이루 다 말할 수 없으므로 각 읍 관리와 선비들이 함께 설유하여 간신히 떠나 보냈으나, 도중에서 계속 없어져 산중으로 들어가기만 하였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의병을 일으킬 계획으로 한편으로는 민심을 진정시키고 한편으로는 대군을 계속 원조하려 하였습니다. 삼도(三道)의 군사가 용인(龍仁)에서 무너지고 의병은 격문을 돌려 북으로 올라가면서 근거지인 전주를 구원하려 하다가 금산에서 실패하였으니, 비록 공은 세우지 못했지만 당시에 만약 의병이 없었던들 호남 지방이 어육(魚肉)의 화를 입게 되었을 것은 왜놈이 들어왔기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김천일 영공이 함께 의병을 일으키기로 약속했으나 그 군사는 다만 나주(羅州) 한 고을에서만 징발하였기 때문에 먼저 출발하게 된 것이요, 가친은 몸소 다니며 여러 고을의 군사를 수합했기 때문에 맨 뒤에 출발하였습니다. 가친이 일찍이 편지에 이르기를, “적이 어찌 하루인들 호남을 잊으랴. 대개 반드시 근왕(勤王)하는 의병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기다리는 모양이다.” 하였습니다. 김 영공은 이미 북쪽으로 향하여 지금 강화(江華)로 들어갔고, 선친은 군사를 호서(湖西)에 머무르게 했던 초기에 본도에서 경보가 있어 조정에까지 멀리 가지 못하고 땅속에서 한을 품게 되었으니 아! 원통합니다. 선친께서 일찍이 가족에게 말씀하시기를, “금년에 천문[天象]을 본즉 장성(將星)이 좋지 아니하니 장수에게 반드시 이롭지 못한 일이 있으리라.” 하였으니, 그러고 보면 가친은 의병을 일으킬 때부터 이미 반드시 죽을 것을 각오하셨던 것입니다. 지난 해 7월에 선대에서 손수 심은, 집 앞의 큰 나무 두 그루가 바람에 뽑혔고, 금년 5월에 본 고을 객사(客舍) 향소문(鄕所門) 앞에 선 수백 년 된 고목이 또 바람에 뽑혀 향소문을 눌러서 문이 부서지고 담이 무너졌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괴이히 여겼습니다. 그러나 어찌 알았겠습니까. 본 고을에서 의병을 먼저 일으켜서 내 한 집만 유독 그 화를 받을 것을. 아! 원통합니다. 이광이 두 번째 군사를 일으킬 적에 격문을 우리 집에 부탁하므로 우리 형제가 합작해서 글월을 이루어 보냈는데 도착하기 전에 다른 사람의 격문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집에서는 다만 그가 과오를 인증하고 죄를 보상하여 국가에 충성을 다하기만 원했는데, 그가 도리어 의병에게 감정을 품고 선친이 국사에 몸바친 뒤에 장계를 올리면서 사실과 틀리게 했으며, 함께 죽은 여러 사람의 사적도 또한 자세히 기록하지 아니한 채 조정에 올렸으니, 조정에서 어찌 이 경위를 다 알 수 있으리까. 아! 원통합니다. 또 생각하건대, “태조(太祖)께서 대업을 창건하신 것은 실로 하느님의 뜻을 받드신 것이다. 압록강(鴨綠江)에서 군사를 돌이켜 대의가 천하에 빛났고 황산(荒山)에서 왜적을 무찔러 공덕이 강역을 덮었으니, 신령은 끝내 반드시 힘입을진대 은택을 어찌 잊을쏜가.”라는 이 글월은, 그 당시 격문 가운데 든 것인데 사람들에게 두루 알리고자 하여 아울러 기록해 올립니다. 이상은 모두《정기록》에 나온다.
○ 그 후 3년 만에 동궁(東宮)에서 치제(致祭)하였는데, 그 제문은 다음과 같다.
만력 22년 갑오년(1594, 선조 27) 정월 20일 기해(己亥) 왕세자(王世子)는 삼가 신하 익위사 부솔(翊衛司副率) 이희간(李希幹)을 보내어 증직 판서(判書) 고 공(高公)의 영에 제사를 드립니다. 대략(大略) 취해 읊은 3천 수의 시는 몇몇 곳에 벽사롱(碧紗籠) 있던 예전에 지은 것이요, 편의한 방략(方略) 12조목은 2번이나 고향에 남긴 사랑이로다. 국가의 다난한 때를 당하여 충의를 외치며 전장에 나섰구려. 옷소매를 걷고 일어서니 무부(武夫)들도 입이 닫히고 기가 눌리며, 당상에 올라 맹서하니 3군이 팔목을 내밀며 죽음을 결단했지요. 군중은 공을 맹주로 추대했고 사람들은 공의 의거를 흠모했소. 조정에서 군사를 훈련한 지 30년에 적을 토벌하는 것은 도리어 서생(書生)에게서 나왔고, 국가가 선비를 기른 지 2백 년에 충성을 바친 것을 다행히 이번에야 보았도다. 어찌하여 장성(長城)이 갑자기 무너졌는가. 마침내 일목(一木)이 지탱하기 어려웠구려. 혈전(血戰)을 벌여 천금의 몸을 범의 입에 몰아넣었고, 남아란 죽을 자리에 죽는거라, 7척의 몸을 홍모(鴻毛)보다 가벼이 여겼소. 큰 공을 중도에서 포기하고 장한 뜻을 품은 채 순절하다니, 일의 성패는 운명이니 다시 말해 무엇하리. 하늘이 착한 사람을 보답한다는 것을 누가 과연 측량하리까. 한 집안에서 나랏일에 죽은 자가 세 분이라, 1개월 사이에 화를 받은 것이 가장 혹심했소. 죽어도 썩지 않아서 영령의 상기도 남아 있으리니, 혼이여! 알거든 다 흠양하시라. 《정기록》에 나온다.
○ 그 후 윤근수(尹根壽)가 다음과 같이 서(敍)를 지었다.
아! 이 책은 임진왜란의 초기에 참의(參議) 고 공이 호남에서 의병을 일으킬 적에 쓴 격문과 통문(通文) 및 왕복한 편지 등을 모아 만든 것이다. 글이 참의의 수필이 아니면 임피(臨陂) 형제의 수필로서, 한 집안 충의의 사연이 모조리 들어 있어 열렬한 기백이 말 밖에 넘치니, 아! 공경할 만한지고. 사라지는 강상(綱常)이 이에 힘입어 보존되었으며 직언(直言)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 실천에 옮겼으니, 이야말로 신하가 국난에 임하여 절개를 다하는 행동을 권장한 것이 자못 무궁하다 하겠다. 아! 공이 그 아들과 함께 국가를 위해 싸우다 죽은 것은 실로 변성양(卞成陽 변호(卞壺))과 같은데, 문장으로 말하자면 변성양은 전하는 것이 없이 장원 급제한 몸으로 적의 손에 순절하였다. 공은 또 문신국(文信國 문천상(文天祥))과 같은데, 문신국의 두 아들은 다만 길 가에서 병들어 죽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또 공의 두 아들이 전후로 순절한 것에 비할 것이 아니니, 공의 한 집에서 이루어진 것이 어찌 보기 드물만큼 우뚝 뛰어났다고 이르지 않겠는가. 승명각(承明閣 옥당(玉堂))에 있을 적에는 사가(賜暇)를 받아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고, 노란 인끈을 띠고 큰 고을 맡아서는 청렴 결백으로 소문이 났으며, 가마귀 떼 같은 군사로 날래고 강한 적과 항거하여서는 다만 대의로써 격려했노라. 성공하고 실패하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는지라 뜻과 같이 되지 않았으니, 몸을 던져 순절하여 마침내 충절로써 나타났네. 공이야말로 한 세상의 전인(全人)이 아니겠는가. 세상에서 날마다 문인(文人)더러 실용성이 적다고 헐뜯는 자가 많으나, 이를 보면 어찌 잘못된 생각이었다고 뉘우치지 않겠는가. 옛날 나일봉(羅一峯)이 문문산(文文山)의 첩(帖)에 발(跋)을 쓰면서 스스로 이르기를, “글자 하나에 눈물 한 방울이라.” 하였는데, 이 기록을 읽는 자는 글자 글자마다 울움이 터질 것이니 글자 하나에 눈물 한 방울 정도가 아니다. 을미년(1595, 선조 28)에 내가 영남(嶺南)을 다녀오다 봉성(鳳城)에 머물렀는데, 공의 아들 유후씨(由厚氏)가 나를 공의 지기지우(知己之友)라 하여 객관(客館)으로 찾아와 보고 이 책을 보이면서 책 이름을 지어 달라고 청하므로 나는《정기록(正氣錄)》이라 쓰고 아울러 서문의 청탁마저 허락했다. 그러나 이내 이루지 못하고 여러 해를 지나는 동안에 유후씨도 역시 세상을 떠났으니 슬픈 일이다. 지금 그 아우 용후씨(用厚氏)가 또 예전의 청을 거듭하는데 내 어찌 감히 죽은 이에게 허락했던 것을 이제 와서 그만두겠는가. 더구나 이로 인해 감개 무량한 바 있으니, 《정절집(靖節集 도잠(陶潛))》ㆍ《문산집(文山集 문천상(文天祥))》 등을 간행하게 한 것이 특명에서 나왔으며 바로 병란 직전의 일인즉, 성상의 깊으신 생각으로 오늘날이 있을 것을 짐작하시고 미리 절의를 배양하기 위해 생각한 것같이 되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뜻과 서로 합치된 것이 아니고 무엇이라 하겠는가. 이 《정기록》이 세상의 교화에 관계되는 것이 실로 《문산집》 등과 더불어 나란할 것이니, 어찌 한 집안에만 수장하는 데 그쳐서야 되겠는가. 난리가 평정되고 의논이 문사(文事)에 미친다면 신하를 위해 충성을 권하는 것이 이 책보다 앞설 것이 없으니, 판각해서 세상에 반포하기를 나는 공수(拱手)하고 기다리는 바이다. 만력 기해년(1599, 선조 32) 10월 □일 수충공성 익모수기 광국공신 보국숭록대부 해평부원군 겸지 경연사(輸忠貢誠翼謨修紀光國功臣輔國崇祿大夫海平府院君兼知經筵事) 윤근수(尹根壽)는 서(敍)함. 《정기록》에 나온다.
○ 비문(碑文)은 유명 조선국 증 숭록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판의금부사 지경연 춘추관 성균관사 행 통정대부 공조참의 지제교 겸 초토사 고공 신도비명(有明朝鮮國贈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判義禁府事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行通政大夫工曹參議知製敎兼招討使高公神道碑銘)이라 하다. 만력 임진년(1592, 선조 25)에 나라에 왜난(倭難)이 있자 참의 고공이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 온 절개를 나타냈다. 이윽고 십여 년이 지났으나 신도비문이 아직 이루어지지 못했는데, 하루는 공의 자제 용후(用厚)가 나를 찾아보고 청하기를, “선친이 공의 형제와 종유한 바 있으니 선친이 나랏일에 몸을 바친 전말은 공께서 분명히 아는 바이므로, 감히 공의 비문 한 장을 얻어서 이 사적을 묻히지 않게 하는 것이 원입니다.” 하고, 또 그 자당의 명을 말하였다. 아! 공의 사적을 이야기하면 눈물이 나며 슬픔이 그지없으니, 내 비록 글은 잘 못할망정 어찌 감히 사양하겠는가. 왜적이 크게 몰려와 침범할 즈음에 공은 광주(光州) 향리에 있었다. 우리 군사가 싸울 적마다 무너져 조령(鳥嶺)의 요새를 잃어버리게 되었는데 호남 순찰사가 왕실(王室)을 호위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공은 홀로 아들 고종후(高從厚)ㆍ고인후(高因厚)와 더불어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했다. 이윽고 또 임금께서 서도로 파천하시고 도성(都城)도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공은 밤낮으로 목을 놓아 통곡하였다. 순찰사가 근왕병(勤王兵)을 영솔하고 금강(錦江)에 당도하자 서울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 허둥지둥 진을 파하여 온 도내 인심이 흉흉하였다. 공이 순찰사에게 편지를 보내어 뒤에라도 잘하도록 책망했는데 말이 진지하고 절실했으나 반성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공은 국가가 기울어 가는 것을 통분하게 여기고, 나주 사람 전 부사 김천일(金千鎰)과 함께 흥복(興復)할 것을 계획하며 편지 왕래가 많았다. 공은 맨 먼저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심하고 5월 무자일에 담양부(潭陽府)에서 모임을 가졌는데 옥과(玉果) 사람 학유(學諭) 유팽로(柳彭老) 등이 공을 추대하여 맹주(盟主)로 삼으니, 공은 본시 군사면에 익숙하지 못하지만 개연히 장단(將壇)에 오르며 늙고 병든 것으로써 사양하지 않았다. 그리고 도내에 격문을 발송하여, 모집에 응한 자가 날마다 모여 들었다. 6월 기해일에 공이 담양부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나섰다. 이때 삼도(三道)의 군사가 용인(龍仁)에서 무너져 호서(湖西)ㆍ호남이 더욱 흔들렸는데 유독 공을 의지하여 자중했다. 공은 전주로부터 군사를 정돈하여 북으로 올라가 여산(礪山)에 당도하자 손수 격문을 초하여 여러 도에 고하여 관서(關西)로 도달하게 했다. 공이 장차 이산(尼山)으로 향하려 하는데, 적이 황간(黃澗)으로부터 금산(錦山)으로 넘어올 때 군수가 패전하여 죽었으므로 적의 형세가 더욱 성하다는 소식을 듣자, 부하 군사들이 앞다투어 돌아가 본도를 구원하고자 하였고 공도 역시 그렇게 여겼다. 7월 경신일에 공이 마침내 군사를 진산(珍山)으로 옮겨 금산의 적을 치려 하는데, 날랜 군사로 모집에 응한 자가 갈수록 많아서 군(軍)의 기세가 더욱 떨쳤다. 병인일에 드디어 장병들에게 부서를 정하여 금산으로 들어가서 방어사 곽영(郭嶸)과 더불어 좌ㆍ우익이 되었다. 공이 먼저 정병 수백 기(騎)를 보내어 곧장 적의 소굴로 내닫게 하였는데, 그들이 적에게 눌려 후퇴하게 되었다. 공이 북을 울려 싸움을 독려하니, 군사들이 모두 죽음을 걸고 싸워 도로 적병을 토성(土城)에서 제압했다. 성 밖의 관사(館舍)를 불태우고 또 대포를 쏘아 성 안을 연소시키자 기세가 올랐다. 적이 죽음을 무릅쓰고 돌격해 나오므로 의병이 사면으로 포위 공격하니 적은 사상자가 많아서 감히 더 나오지 못했다. 마침 날이 저물고 관군이 또 싸움에 조력하고자 아니하였으며, 토성이 두텁고 완전하여 졸기에 무너뜨릴 수 없으므로, 마침내 퇴군하여 진으로 돌아왔다. 이날 저녁에 방어사가 사람을 보내어 명일에 협력하여 싸울 것을 약속하니, 공의 맏아들 고종후가 공에게 말하기를, “오늘 우리 군사가 이득을 보았으니 이 승리의 기세를 가지고 군사를 온전히 하여 돌아갔다가 기회를 살펴 다시 나와 적을 곤란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며, 적과 대치하여 들에서 잔다면 혹시 야습(夜襲)을 당할까 염려됩니다.” 하자, 공이 말하기를, “너는 부자의 정으로써 나 죽는 것을 두려워하느냐. 나는 나라를 위해 한 번 죽는 것이 직분이다.” 하다. 이날 밤에 적이 과연 침범하기를 모의하고 몰래 나와 복병을 설치하려 하다가 순라군(巡羅軍)에게 발각되었다. 이튿날 정묘일에 공이 방어사와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진격하는데, 공은 적과 5리쯤 떨어져서 진을 머물러 방어의 진과 마주 보게 되었다. 공이 8백여 명의 기병을 보내어 싸움을 걸어 미처 어울리지 못했는데, 적이 자기네 진지를 비우고 몰려 나와 먼저 관군에게 범하니 방어사 관하 장수 김성헌(金成憲)이 말을 채찍질하여 먼저 도망갔다. 적이 광주(光州)ㆍ흥덕(興德) 두 진을 덮치니 방어의 진이 그 바람에 따라 무너지므로 공은 단독으로 담당할 계획을 하고 군사로 하여금 모두 자신만만하게 가지고 대기하게 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갑자기 외치기를, “방어의 진이 무너졌다.” 하니, 의병의 진도 따라서 무너졌다. 공은 진작부터 하는 말이, “나는 말타기가 익숙하지 못하니 불행히 싸움에 패하면 오직 한 번 죽음이 있을 뿐이다.”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좌우에서 공더러 말을 타고 뛰라고 청하자, 공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구차히 죽음을 모면하려 하겠는가.” 하였다. 공의 부하가 공을 부축하여 말에 올려 앉혔는데, 공은 이내 말에서 떨어지고 말은 빠져 달아나므로 공의 부하 유생(儒生) 안영(安瑛)이 말에서 내려 공을 태우고 자기는 도보로 시종했다. 공의 종사관(從事官) 유팽로(柳彭老)가 탄 말은 몹시 날래서 먼저 나오게 되어 그 마부에게 묻기를, “대장이 벗어났느냐?” 하자, 마부가 벗어나지 못했다고 대답하였다. 유팽로가 문득 말을 몰고 도로 난병(亂兵) 속으로 들어가 공을 모시니, 공이 돌아보고 말하기를, “나는 반드시 면하지 못할 것이니 너는 빨리 벗어나라.” 하니, 유팽로가 대답하기를, “제가 어찌 차마 대장님을 버리고 살 길을 찾겠습니까.” 하였다. 적의 칼날이 마침내 공에게 미쳐 공이 결국 죽고 유팽로는 제 몸으로 공을 막다가 다 함께 죽었으며, 안영도 죽었다. 공의 둘째 아들 고인후(高因厚)가 무사(武士)를 거느리고 앞 줄에서 화살과 돌 속을 출입하다가 군사가 무너지자 말에서 내려 그 부하들을 정제하고 진에서 전사했다. 근처 고을 백성들은 공이 패했다는 말을 듣자 노소간에 모두 짐을 짊어지고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 “우리들은 이제 다 죽었다.” 하며, 곡성이 들판에 진동하였다. 진은 무너졌으나 군사들이 공의 생사를 모르고 차츰 와 모였는데, 마침내 공이 전사했다는 사실을 알고 모두 울부짖으며 해산했다. 남도 백성들은 알건 모르건 간에 다 서로 조문하며 원통하게 여겼다. 공이 백발 늙은 서생으로 국가가 어지러운 때를 당하여 정의를 부르짖고 일어서서 호남 의병의 선창이 되자, 비록 어리석고 조급한 군졸이나 산중에 도피한 자들이 모두 소문을 듣고 다투어 모여들어 한 달 이내에 의병의 수효가 수천 명에 달했으니, 대개 공의 의기가 지성에서 우러나서 남을 감동시킬 만했기 때문이다. 공이 임진년(1592, 선조 25) 봄에 천문(天文)을 쳐다보고 집안 사람에게 말하기를, “금년에 장성(將星)이 좋지 않으니 장수에게 반드시 불리한 점이 있을 것이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공은 진실로 생사의 이치에 밝음과 동시에 의거하는 날부터 벌써 목숨을 던질 것을 결정했던 것이다. 마침내 금산에 있는 왜적을 토벌하게 되자 사위 박숙(朴橚)에게 편지를 주어 집안일을 부탁하였으니, 공이 처사한 것을 보면 대개 본래부터 마음을 결정했던 모양이다. 왜적이 금산에 웅거해 있을 적에 병권을 장악한 문신ㆍ무신의 장수들이 이리 갈까 저리 갈까 방황하고 있는데, 유독 공은 일의 성패를 헤아리지 아니하고 친히 범의 소굴로 들어가서 적과 더불어 혈전(血戰)을 벌여 몸을 나라에 바쳐 순절했다. 비록 승첩을 올려 공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공이 순절한 후로 공이 전장에 나가 죽는 것을 보고서 적을 공격하는 자가 계속해 일어났기 때문에, 적이 비록 여러 번 이겼으나 사상자가 역시 반을 넘었으며 군사를 거두어 가지고 밤에 도망했은즉 국가에서 호남을 보유하여 뒷날 국토를 회복하는 근거지가 된 것에 대하여 그 공이 어디로 돌아가겠는가. 공의 체백(體魄)이 몰래 금산 산중에 묻혔었는데, 적의 군사가 가로막고 있어 바로 곧 거두어 묻지 못하고 8월 모일에야 그 아들 고종후(高從厚) 등이 의병ㆍ승병(僧兵)을 청하여 공의 시체를 발굴해 내서 무릇 40여 일만에 비로소 염습했다. 성상께서 용만(龍灣)에 계시던 날에 공이 의병을 일으켜 온다는 말을 들으시고 기뻐하는 빛이 얼굴에 가득하여 공에게 공조참의 겸 초토사(工曹參議兼招討使)를 제수하고 글월을 내려 위로했는데 그 글월에, “열읍(列邑)을 지휘하여 모든 것을 조달해서 도성을 회복하게 하라.” 하신 말이 있었다. 이때에 공조 좌랑(工曹佐郞) 양산숙(梁山璹)이 행재소(行在所)로부터 남으로 돌아오게 되자, 성상께서 면대하여 타이르시기를, “돌아가거든 고경명(高敬命)ㆍ김천일(金千鎰)에게 말하라. 그대들이 하루빨리 강토를 회복해서 나로 하여금 그대들의 얼굴을 볼 날이 있게 하라.” 하였는데, 벼슬이 전달되기 전에 공은 이미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이 사실이 보고되자 성상께서는 매우 슬퍼하시고 관작을 위에 있다. 추증하도록 명령했으며, 뒤에 다시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의 증직을 내렸다. 공이 순절하자 순찰사는 예전 혐의로써 심지어, “어두운 밤에 군사를 몰고 가다가 군사가 무너져 죽었다.” 하며, 공을 모함하여 장계를 올렸는데 그 이후 이정엄(李廷馣)이 순찰이 되어 공을 표창하여 나랏일에 죽었다는 장계를 올렸다. 그 글에, “고 모는 맨 먼저 의병을 일으켜 근왕(勤王)에 나섰으며 몸소 적의 진지에 들어가 적과 혈전을 벌이다가 불행히 패하여 부자가 함께 죽었다.” 하여, 비로소 그 실상을 파악했다고 한다. 을미년(1595, 선조 28) 여름에 유사(有司)를 명하여 정문(旌門)을 세우게 했고, 신축년(1601, 선조 34) 가을에 문생 전 현감 박지효(朴之孝) 등의 상소로 인하여 특명으로 광주에다 사우(祠宇)를 건립하게 하여 액호(額號)를 포충사(褒忠祠)라 내리고 관원을 보내어 치제하고 이어 봄가을로 제향을 받들어 대대로 끊어지지 말게 하라고 했으니, 아! 이로써 군신 간의 의를 볼 수 있다. 공의 휘(諱)는 경명이요, 자(字)는 이순(而順)이며, 파계는 제주(濟州)에서 나왔는데, 그 선세에서 장흥(長興)으로 관향(貫鄕)을 받아 장흥 고씨가 되었다. 가정(嘉靖) 계사년(1533, 중종 28) 11월 30일 무진일에 태어났으며, 아들 6형제를 두었다. 맏아들은 고종후인데 정축년(1577, 선조 10)에 무과(武科)에 급제했으며 상차(喪次)로부터 군사를 일으켜 아비의 원수를 갚기로 맹서하고 영(嶺) 밖에서 전전(轉戰)하여 싸우다가 진주성(晉州城)이 함락되자 강에 빠져 죽었다. 그 후에 도승지(都承旨)의 증직을 내렸다. 그리고 그 다음은 곧 고인후이니 기축년(1589, 선조 22)에 문과에 급제했으며 공을 따라 함께 진중에서 죽어 예조 참의(禮曹參議)의 증직을 내렸다. 운운. 윤근수(尹根壽)는 찬(撰)함.
○ 그 후 또 치제하였는데 그 제문은 다음과 같다.
만력 31년 계묘 8월 모일에 국왕(國王)은 신하 호조 정랑(戶曹正郞) 조엽(趙曄)을 보내 판서 고경명의 영(靈)에 제사한다. 영은 성화(聲華)가 일찍부터 드러나고 재주와 학식이 다 우수하며, 문필은 천 사람보다 뛰어나고 가슴속에 수만 군사가 들었었네. 선(先) 조정에 뽑히어 무오년(1558, 명종 13)에 문과 했다. 여러 번 장솔(張率)의 벼슬에 옲겼고, 중간에 이르러 침체되어 안진경(顔眞卿)의 얼굴을 보지 못했도다. 하루아침에 왜적이 침입하자 여러 고을이 파도처럼 휩쓸려서 곽주영(郭州營) 안에 성유(成裕)처럼 모두 밤에 도망을 치니 수양성(睢陽城) 안에 장순(張巡)마냥 사수할 자 누구던가. 유독 의기를 분발하여 군사를 모아서 목숨을 바쳐 나라에 보답하려고 맹서했네. 성지(城池)나 무기가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으니, 어느 누가 몰아치는 오랑캐를 막아내리오. 먼 데나 가까운 데나 크나 작으나 모두 호응하니, 실로 의열(義烈)을 먼저 외친 때문이로다. 외로운 충성을 스스로 허락하는데 한 번 죽는 것이 어찌 어려우랴. 정의의 군사란 강한지라, 순(順)과 역(逆)이 이미 구별되었다. 곧은 편은 언제나 씩씩한 법이라, 많고 적은 것으로 어찌 따지리오. 피를 마시고 단에 오르며, 주먹을 들고 칼날을 무릅썼네. 싸움을 잘못한 탓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과연 알기 어려운 법이라오. 죽을 곳을 얻었으니 글 읽는 선비더러 담력 없다 이르지 마오. 충효(忠孝)의 대절(大節)은 부자(父子) 세 사람일세. 매양 묘소를 수축할 겨를이 없어 한이더니, 이제 영을 모실 곳이 있음을 기쁘게 여기네. 사당 모양이 매우 엄숙하니 족히 절개 굳은 장부의 기풍을 상상할 만하고, 향화(香火)가 해마다 끊어짐이 없으니 한 고을 선생으로 제사하는 정도가 아니외다. 이는 조정에서 거행한 것이 아니라, 바로 선비들의 주선에서 나왔구려. 절개를 천추(千秋)에 표시하고자 하니 사당이 어찌 편액(扁額)이 없을쏜가. 포충(褒忠)이란 두 글자를 내리니 실상과 이름이 서로 알맞네. 시골 마을이 찬란하여 빛이 나니 어찌 조청헌(趙淸獻 조림(趙林))의 이표(里表)에 비할 뿐이랴. 길손이 손으로 가리키며 눈물을 떨어뜨리니 반드시 현산(峴山)의 귀부(龜趺 양고(羊祜)의 비석돌)만이 아니로세. 제사를 드리기 위해 조관(朝官)을 보내는데 관작을 추가(追加)함에 있어 판서(判書)가 오히려 부족하오. 천운이라 어찌하리, 정충(精忠)은 구천에서 다시 보기 어려우리니, 혼이여! 돌아와서 박한 제물이나마 한 잔 술에 흠양하시라. 모두《정기록》에 나온다.
○ 경기도 수원 충의위(忠義衛) 홍언수(洪彦秀)가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였다. 홍언수가 미천한 몸에서 낳은 아들이 있으니, 이름은 홍계남(洪季男)으로 용맹과 힘이 무리중에서 뛰어났다. 경인년(1590, 선조 23)에 통신사(通信使)의 군관이 되어 황진(黃進)과 더불어 일본을 다녀왔기로 그놈들의 강약을 자세히 알고 있었는데, 이에 이르러 아비의 군사를 따라 적을 쳐서 여러 번 싸워 승첩을 올렸다. 전후로 적의 귀를 베어 온 것이 백여 개에 달했으므로, 인근에 진을 친 적들이 위축되어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 곧 군공(軍功)을 들어 본부(本府)의 판관을 제수했다.
○ 충청도 전 찰방(察訪) 박춘무(朴春茂)가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였다.
○ 전라도(全羅道) 전 보성 현감(寶城縣監) 임계영(任啓英)ㆍ박광전(朴光前) 등이 능성 현령(綾城縣令) 김익복(金益福) 등과 더불어 삼가 두 번 절하며 열읍 여러 벗님에게 돌리는 글월은 다음과 같다.
아! 국가가 믿고서 걱정이 없었던 것은 아래 삼도(三道)가 건재하기 때문이었는데, 경상ㆍ충청은 이미 무너져 적의 소굴이 되었고 오직 호남만이 겨우 한 모퉁이를 보전해서 군량의 수송과 군사의 징발이 모두 이 한 도만을 의지하고 있으니, 국가를 부흥할 기틀이 실로 이에 있다. 그런데 이제 서울이 급박하다 하여 순찰(巡察)은 정병을 거느리고 바닷길로 올라갈 계획을 하고 있고, 병사(兵使)는 수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이미 금강(錦江)을 넘었으며, 두 의병장의 진 역시 각기 근왕(勤王)을 위하여 이미 본도를 떠났다. 열읍의 장사(將士)들도 장차 나가기로 결정되어 남은 군사가 몇이 없으므로 적이 들어오는 중요한 길목에 방비가 극히 허술하고 호서(湖西)의 적이 이미 본도 경계선을 범했으니, 석권(席卷)의 형세가 장차 이루어질 터인데 극복할 희망은 무엇을 믿겠는가. 국가의 일이 너무도 위태하니 진실로 통곡할 일인 동시에 이야말로 의사(義士)가 분발할 때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적이 성 밑에 당도할 때, 우리 장정들을 무찔러 죽일 것은 뻔한 일이다. 슬프다! 우리 민생이 몸 둘 곳이 어디며 실가(室家)는 어느 곳에 둔단 말이냐. 영남에서 이미 이렇게 당한 것은 귀로도 들었고 눈으로도 보았으니, 산중으로 도망가 숨을 수도 없고 구차히 목숨을 보전하여 살길도 없어서 결국 죽고 말 것이다. 기왕 죽을진대 어찌 나라를 위해 죽지 않겠는가. 하물며 만에 하나라도 중요한 길을 막아 지켜서 적의 세력을 저지시킨다면 사지(死地)에서 살아나는 것도 이 기회요, 부끄럼을 씻고 나라를 회복하는 것도 이 때인 것이다. 대체로 우리 도내에는 반드시 누락된 장정과 흩어져서 도망간 군사가 있을 것인즉, 만약 식견있는 선비들이 서로 함께 불러 들여 권면하고 격려해서 힘을 모아 일어나 스스로 한 군단을 편성하고 적의 향하는 바를 감시하여 굳건히 요충지대를 지킨다면 위로 관군의 성원이 될 것이요, 아래로 한 지방의 생명을 안보할 것이다. 이 시기에 미처 일을 도모하기는 영남 사람 만한 이가 없는데 영남 사람은 적을 만난 처음에 한 마음으로 단결하여 막아 내려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망치는 것만 일을 삼았다. 이는 비록 허둥지둥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데서 나온 까닭이었으나, 오늘날 생각하면 반드시 후회가 있을 것이다. 나중에 적의 세력이 팽창하여 가옥들이 불에 타고 처자들이 능욕을 당하고서야 의사가 분연히 일어나서 많은 수효의 적들을 목 베거나 사로잡았으니, 비록 사람의 마음을 비교적 강인하게 하였다고 하겠으나 역시 이미 늦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제군들은 모두 이와 같은 일을 징계 삼아 나태한 습성을 버리고 남보다 먼저 출발하여 기약한 날짜에 뒤지지 않도록 하라. 우리들은 본시 활 쏘고 말 달리는 재주가 없고 병법도 알지 못하니 지휘하여 적을 물리치는 데 있어서는 너무도 생소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남보다 먼저 창의한 것은 한편으로 의사의 뜻을 격려하고 한편으로 용사의 기운을 분발하자는 바이니, 인간의 양심이 일찍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반드시 흥기하는 바 있을 것이다. 이 격문이 도착하는 날에 곧 뜻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온 고을을 효유하여 군인들을 기록해 가지고 이달 20일 보성(寶城) 관문으로 와 모이도록 하라. 한번 기회를 놓치면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임금이 욕을 당해도 구원할 줄 모른다면 어찌 사람이라 하리오. 모두 전말을 생각하여 창의할 것이니, 여러분은 도모하시라.
○ 송제민(宋濟民)의 격문은 다음과 같다.
삼가 나 송제민(宋濟民)이 지난달 23일에 의병장을 따라 수원산성(水原山城)에 당도하여 5일 동안 머물렀는데, 서울에 있는 적이 아직 치성하고 청주(淸州)ㆍ진천(振川) 등지의 유동하는 적이 역시 날뛰는데 외로운 군사로 깊이 들어가면 군량을 수송하지 못할 염려가 있었으므로, 온 진중이 모두 비생(鄙生)을 추천하여 충청도로 가서 의병을 모집하여 길을 막고 있는 적을 소탕하고, 구원 오는 군사를 통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와서 충청도의 사우(士友)들과 더불어 의병을 모집한 바 20일 사이에 정병 2천여 명을 얻어서 공론에 따라 전 도사(都事) 조헌(趙憲)을 추대하여 좌의대장(左義大將)을 삼아 황간(黃澗)ㆍ영동(永同) 이하의 적을 방어하게 하고, 전 찰방(察訪) 박춘무(朴春茂)를 우의대장(右義大將)으로 삼아 금강(錦江) 이상의 적을 방어하게 하려던 것이었는데, 일을 미처 마치기도 전에 갑자기 금산(錦山)의 패보(敗報)를 들었으니 시운인가, 천명인가, 그렇지 않으면 인사(人事)를 제대로 극진히 하지 않은 탓인가. 말을 돌이켜 남쪽으로 돌아와 의병이 흩어지기 전에 다시 또 소집해 볼 계획이었는데, 은진(恩津)에 당도하자 비로소 대군이 흩어져 어찌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아! 사람이 누군들 죽음이 없으리오만 죽을 자리를 얻어 죽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섬 오랑캐가 한창 극성을 부리던 날을 당하여 강병과 용장들도 역시 모두 관망하지 않으면 달아나서 구차스레 목숨을 유지하는데, 고제봉(高霽峰)은 유아(儒雅)한 문관으로서 본시 군사면에 대한 일을 알지 못했으나 하루아침에 군중의 추대를 받아 문득 장단(將壇)에 올라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임금에게 보답했다. 그 아들은 아비를 따라 죽어서 충성과 효도가 아울러 한 집안에 났으니 죽어도 영화가 남아서 열렬한 빛이 있는지라, 사람마다 한 번 죽음은 있는데 고제봉은 유독 그 도리를 다하고 그 자리를 얻었으니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다만 깊이 애통할 일은 임금님께서 서도를 순행하시고, 종묘와 사직이 잿더미가 되었으며, 조선 7도가 모두 흉한 왜적에게 유린을 당했는데 오직 호남 한 도만이 아직까지 다행히 보전되었으니 국가를 회복할 기본이 실로 이곳에 있거늘, 장수는 태만하고 군사는 교만하여 걸핏하면 무너져 흩어지고 마는 것이다. 대개 창의한 후부터 인심이 비로소 진정되어 모두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번 싸워 패하자 의기가 꺾여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빠져 도리어 나태한 장수와 교만한 군사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아! 저 완악하고 패역한 군졸들이 공(功)을 좋아하고 이욕을 탐내어 유익하면 나가고 해로우면 피하는 것은 본시 그들의 제 몸을 꾀하는 상투 수단이라, 무엇을 책하며 무엇을 나무라겠는가마는, 일찍이 호남은 예의의 지방으로 선왕이 휴양(休養)해 주신 은혜에 젖은 지가 수백여 년인데 평시에 선비라 자칭하여 인의(仁義)를 자랑하는 자들도 이미 공명만 탐내어 피하기를 꾀하며, 수천의 굳센 졸병들도 일시에 무너져 흩어져서 한 사람도 장수의 죽음을 막아낸 자가 없으니 이 어찌 무식한 무리들의 웃음거리만이랴. 실로 흉한 오랑캐에게 부끄럼이 될 것이다. 아! 피를 입에 바르고 장수에게 다짐하던 추성(秋城 담양)의 부정(府庭)이 저기 있고, 마음으로 천지 신명에게 맹서하여 밝은 해가 내리비침이 저러하니 모르겠도다. 장차 무슨 면목으로 천지간에 용납을 받을 것인가. 아! 인의가 마음에 박힌 것은 실로 하늘에서 받은 바라 다른 사람이나 나나 마찬가지이니 진실로 피차의 다름이 없지만, 물욕에 팔리어 그 본심을 상실한 자가 간혹 있으니 사람의 형상을 하고 짐승의 마음을 지닌 자도 역시 있을 것인 즉, 충성과 효도를 어찌 사람들 모두에게 책할 수 있으랴. 그러나 이 왜적을 토벌하는 일은 역시 불충하고 불효하는 자들도 함께 원하는 바이니, 어찌 충신이나 의사의 사사로운 원수일 뿐이겠는가. 이미 당한 바를 들어 말하면 남의 처자 자매를 잡아다가 열 놈이 다투어 간음하여 죽게 하는 일이 잇달아 일어나고, 부형을 찔러 죽이고 아이들을 삶아 죽이며, 동네 인가를 불태우고 재물을 약탈하며, 남의 소와 말을 몰아가고 남의 노복을 부려먹으며, 좋은 전답을 탈취하고 남의 선산을 헐어 버리어 궁흉 극악(窮兇極惡)이 천지에 가득 차니 무고한 백성들이 난을 피해 도망가다 길가에 넘어지고 구렁창에 빠져 죽어 그 수효가 몇천만 명인지 헤아릴 수 없는 정도다. 요즘 7도(道)가 탕진되고 또 5고을이 함락되었는데, 그 5고을은 실로 호남의 함곡관(函谷關) 같은 존재로 사방이 막혀서 산을 의지해 험하고 굳건하니 이쪽에서는 공격하기 어려운 점이 있고, 저 왜적놈들은 팔을 내뻗는 편리함이 있다. 이 형세를 따지면 이미 쉽고 어려운 차이가 있으며, 우리 군사는 이제 막 꺾이어 사기가 □저상되고 적은 이미 승세를 탔으니 왜의 세력은 저절로 확장될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 웅현(熊峴)의 혈전(血戰)에 힘입어 적의 기세가 조금 꺾였고 전주가 방비 태세를 갖추고 있으므로, 놈들이 힘을 요량하여 스스로 물러가니 형세가 몰아 쫓아낼 가망이 있다. 호서(湖西)의 의병이 은진(恩津)ㆍ연산(連山)ㆍ진안(鎭安)ㆍ옥구(沃溝)를 옹위하여 수비하는 품이 질서가 있고, 대장 조헌(趙憲), 참장(參將) 이천준(李天駿)이 시대에 부응하는 인물로서 천심을 측정하고 시국을 관찰하여 적을 요량해서 승리를 결정하여 옛사람에게 못지 않다. 형세상 놈들이 서쪽으로나 북쪽으로 달아나지는 못할 것이며 반드시 무주(茂朱)를 경유하여 동으로 영남을 향해 도망갈 것이나, 김(金)ㆍ곽(郭) 두 장수가 군사를 쓰는 것이 귀신과 같아서 적의 간담을 서늘케 할 것이니 반드시 영(嶺)을 넘어서지 않으려 들 것이며, 중국 군사 5만 명이 우리 근왕(勤王)의 군사와 함께 천지를 뒤흔들며 북으로부터 남으로 내려오면 송도(松都)ㆍ한양(漢陽)에 있는 적의 도망병과 충청도에 있는 적의 남은 부대가 내리 밀려서 돌아갈 길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반드시 금산(錦山)의 적과 합세하여 서ㆍ남으로 충돌하되 궁지에 빠진 신세라 죽음을 걸고 달려들 것이니, 후퇴하기 좋아하는 장수로 무너지기 잘하는 군사를 몰아친다면 어찌 반드시 지탱할 것을 보장하랴. 이것이 실로 호남 부로(父老)와 사민(士民)들의 막대한 근심거리인 것이다. 아! 옛사람은 천하의 백성을 나의 동포로 삼았는데 하물며 우리 본도 선비들은 조상 때부터 이 땅에서 태어나고 이 땅에서 살았으니 선인들의 혼백이 깃들여 있는 곳이요, 부모 처자가 편안히 살던 곳이요, 형제 자손들이 생식(生息)한 곳이요, 이웃 친구들과 교유하던 곳이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변을 만나 오랑캐 놈들의 신첩(臣妾)과 노복(奴僕)이 된다면 이 이상의 욕됨이 있겠는가. 한 번 죽는 것이 오히려 영광일 것이다. 더구나 흉한 참변이 계속되어 골육과 친척이 함께 적의 손에 도륙됨에 있어서랴 기왕 죽을 바에야 오히려 적과 싸워서 죽는 것이 낫지 않은가. 이제 만약 한 번 싸움을 피하고 반드시 살 길을 찾고자 할진대 그 살 길을 마침내 얻지 못한다면 오늘날 같은 참화가 있을 뿐이요, 그렇지 않고 한 번 싸움을 결심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꼭 죽을 이치도 없는 것이며 결국 참혹한 화를 면하고 길이 무궁한 복을 받을 것이니, 이는 모두 절박하여 결코 그만둘 수 없는 거사이다. 어찌 반드시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정성이 우러난 연후에만 그러하겠는가. 아! 배를 함께 타다 물에 빠지면 서로 건져주는 것은 호(胡)와 월(越)도 한 마음이라 했는데, 무릇 한 도(道) 안에서 함께 사는 우리로서는 실로 배를 같이 탄 형세로서 서로 물에 빠질 염려가 조석에 임박했으니, 비록 호ㆍ월의 사람이라도 부득불 마음과 힘을 일치하여 어려움을 면해야 하겠거늘 하물며 산천의 기품(氣稟)이 서로 흡사하고 학문의 취향도 서로 같아서 실로 형제의 의(義)가 있은즉 옛사람이 이른바 막연한 동포라는 말 따위에 그칠 바가 아니다. 무릇 우리 도내 각읍 부로(父老)들은 아비가 그 자식을 권장하고 형이 그 아우를 권면하여 지조와 절개를 가다듬고 다시 의병을 일으켜 흉한 칼날을 막아서, 위로 임금의 원수를 갚고 사람과 귀신의 분을 씻으며 아래로 부모를 봉양하고 처자를 보전하여 길이 그 가업을 편안히 하면 천만다행일 것이다.
○ 호성감(湖城監)이 양호(兩湖)에서 군사를 수합하여 2천여 명을 얻어 아산(牙山)을 경유하여 서해(西海)로 배를 타고 행재소(行在所)로 향하여 근왕(勤王)의 길을 떠나다.
○ 광주 목사(光州牧使) 권율(權慄)이 남원으로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진안으로 향하다가, 순찰사가 다시 나누어준 군사를 진산(珍山) 이현(梨峴)으로 전진시켜 동복 현감(同福縣監) 황진(黃進) 등과 더불어 험한 곳에 웅거하여 복병을 설치하다.
○ 곽영(郭嶸)이 금산(錦山)에서 무너져 전주에 도착하였는데, 영(營)에 머물고 있는 영리(營吏)의 고목(告目)이 있어 그대로 전주에 머물게 하다. 그 종사관(從事官) 한 사람 이용순(李用諄) 이 한산(韓山)에서 집안에 우환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머물러서 아직 영에 돌아오지 않았다. 금산에 돌아와 모인 적이 사방으로 흩어져 불을 놓고 수색하여 약탈과 살육을 자행하여 전보다 배나 참혹했다. 20일에 진산(珍山) 관사를 불태우고 다시 금산으로 들어와 혹은 옥천(沃川)으로 물자를 실어내며, 무주(茂朱)의 적도 역시 물자를 지례(知禮)로 실어내어 모두 후퇴해 도망갈 계획을 하는 것 같다고 동현(同縣)의 현감 장 별장(張別將)과 어 복병장(魚伏兵將) 등이 보고해 왔다. 진산(珍山)과 동원(東院)은 조방장(助防將) 이계정(李繼鄭), 나주 판관(羅州判官) 이복남(李福男), 동복 현감(同福縣監) 황진(黃進), 무안 현감(務安縣監)ㆍ해남 현감(海南縣監) 등이, 이현(梨峴)은 강진 현감(康津縣監)이, 저고리(苧古里)는 영광 군수(靈光郡守)가, 추현(杻峴)은 고산 현감(高山縣監)이, 송치(松峙)는 부안 현감(扶安縣監)이, 함평(咸平)은 무장 현감(茂長縣監)이, 조림원(照臨院)은 남평 현감(南平縣監)이, 순찰사 군관 전몽성(全夢星), 별장(別將) 남응길(南應吉)은 장수(長水)로부터 무주(茂朱) 지경을, 순창(淳昌)은 보성 군수(寶城郡守)ㆍ장수 현감이, 탄전(炭田)ㆍ죽치(竹峙) 등지는, 임실현감(任實縣監)ㆍ진안 현감(鎭安縣監) 등이 방어하되 형세를 보아 진격하라는 명령도 역시 전달하여 발송했다. 그리고 임피 현령(臨陂縣令)에게 군사 8백 명을 거느리고 황화정(皇華亭)에서 결진(結陣)하여 성원할 것을 어제 전령(傳令)하여 발송했다. 명(明) 나라 군사가 7일에 평양(平壤)을 포위하니 적의 떼가 이미 도망하여 서울의 적과 함께 모두 노량(露梁)을 건너고 청계산(靑溪山)에서 진위(振威)까지 잇대어 결진하여 아산(牙山)으로 향했다고 한다. 교동(喬桐) 공생(貢生) 고언백(高彦伯)이 밤에 평양에 들어가 적을 놀라게 하여 적의 무리 2백여 명이 저희들끼리 서로 쳐 죽이고 이로 인해 후퇴해 도망갔으므로 곧 그 사람을 등용하여 양주 목사(楊州牧使)로 삼았다고 한다. 경상 우수사(慶尙右水使)의 군관 이충(李冲)이 행재소(行在所)로부터 도총도사(都摠都事)의 직을 제수 받아 옥과(玉果)를 지나가면서 말하기를, “주상께서는 용천(龍川)으로 옮기시고 동궁(東宮)의 행차는 이미 강계(江界)에 도착했으며, 온갖 관원은 나누어 정해지고 두 곳의 비빈(妃嬪)은 다만 칠가(七駕)가 시종하고 있으며, 임해(臨海)는 이미 북도로 파천했다. 대개 인심이 조금 안정되었으며 주상께서도 안녕하시다. 명 나라 군사 3만 명이 이미 용천(龍川)에 도착했으며, 뒤이어 구원병도 와서 강변에 진을 치고 있다. 요동 윤(遼東尹) 이성량(李成樑)요동 자사(遼東刺史)인데 아들 이여송(李如松)ㆍ이여남(李如楠)ㆍ이여백(李如栢)ㆍ이여매(李如梅)ㆍ이여판(李如板)ㆍ이여회(李如檜)ㆍ이여오(李如梧) 8형제를 두어 세상에서 8장군이라 칭한다. 의 후임으로 조승훈(祖承訓)이 대장이 되고 왕(王)ㆍ양(楊)ㆍ곽(郭)ㆍ사(史) 등 여러 장수가 그 부관이 되어,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게 된다는 생각으로 급급히 싸움을 서두르니 그 성의가 지극하다 하겠다. 지난번 대동강 싸움에 적의 진중에서는 평의지(平義智)가 대장이 되고 행장(行長)ㆍ현소(玄蘇)ㆍ평수장(平秀長)이 부장이 되어 삼위(三衛)로 나누어 군사를 거느렸는데, 한 위(衛)의 수효가 많을 적에는 3천여 명에까지 달했다. 그래서 부중(府中)에 머무른 여러 장수들이 여러모로 계획을 세워 일제히 만여 개의 화살을 쏘아 한 위의 적을 모조리 죽였다. 우리 군사가 굳건히 지키고 적이 이미 기운이 꺾였는데, 뜻밖에 간사한 술책을 내어 밤에 얕은 여울물을 건너 어둠을 타서 내려 몰아치니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여 평양을 함락당했다. 적이 주둔하던 날에 관서(關西) 용사 두어 사람이 밤에 적의 진중으로 들어가 4장수 중에 가장 나이 젊은 자 한 놈을 쏘아 죽였는데 실로 이 놈은 의지(義智)였다. 그래서 남은 적은 해서(海西)로 도망해 내려가고 서울에 머물던 적도 그 수가 역시 얼마 되지 않으니, 국토를 회복할 것이 손꼽아 기대된다. 평양 윤(平壤尹) 송언신(宋言愼) 이 싸움에 진 책임으로써 교체되었다.
○ 금산의 적 수천여 명이 진산(珍山)에 들어와 불을 지르고 약탈하니 이현(梨峴)의 복병장(伏兵將)인 광주 목사(光州牧使) 권율(權慄), 동복 현감 황진 등이 군사를 독려하여 막아 싸웠다. 황진이 탄환에 맞아 조금 퇴각하는 바람에 적병이 진채(陣寨)로 뛰어드니 우리 군사들이 놀라 무저지는지라, 권율이 칼을 뽑아들고 후퇴하는 아군을 베며 죽음을 무릅쓰고 먼저 오르고 황진도 역시 상처를 움켜쥐고 다시 싸워 우리 군사 한 명이 백 명의 적을 당하지 않는 자가 없으니 적병이 크게 패하여 기계를 다 버리고 달아났는데 30여 명을 베었다.
○ 곽영(郭嶸)이 광주 판관ㆍ보성 군수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와 무주의 적을 탐색하고, 조방장(助防將) 이계정(李繼鄭)은 금산에 들어와 적을 탐색하다가 모두 무너져 도망갔다. 이때에 본도 장병이 여러 번 적의 두 소굴을 공격했으나 한 번도 승첩을 거두지 못하고 매양 무너지고 마니 이 어찌 반드시 저 왜적이 용감하고 날래서만이겠는가. 아! 어찌 남자다운 사람 하나가 없단 말이냐.
○ 영남 초유사(招諭使)의 공문 내에, “금월 23일 창원 부사(昌原府使)가 보고해 온 것을 보면 금월 19일에 성중에서 항시 머물러 있는 왜적과 계병부(桂兵部) 도합 33명이 성 안에 사는 잡인(雜人) 10명을 불시에 잡아다가 물건을 짊어지게 하고 기관(記官) 박춘정(朴春丁)과 함께 김해(金海)ㆍ해양(海洋)의 선척(船隻)을 간망(看望)하러 나갔다 돌아왔다고 하며, 항상 머물러 있는 왜적도 역시 본토로 돌아갈 생각이 있다고 했다. 지금 김해에 나갔다 온 사람을 만나서 적의 거취를 물은즉 김해ㆍ해양 각처의 적선이 즐비하고 좌우 산기슭에는 가설된 집들이 잇대어 있으며, 김해ㆍ밀양(密陽)에 교통하는 사람들과는 소를 치고 술을 빚어 서로 함께 마시고 씹어서 이웃 마을 사람과 같이 지냈다. 이렇게 지나는 10여 일 사이에 왜적 6명이 서울로부터 내려와서 귀에 대고 말을 전해주자, 뭇 왜적이 일시에 통곡하며 두 고을을 교통하는 사람을 남녀도 가려내지 않고 모조리 베어 죽여 2백여 명에 달했으며, 각처의 가설된 집들도 수효대로 불을 놓았고 강에 가득하던 배는 하룻밤 사이에 다 내려갔으니 군사를 거두어 도망갈 계획을 하는 것 같다. 귀도(貴道)의 금산ㆍ무주에 있는 왜적은 어느 곳으로 향하는지 통지해 달라.” 하다. 이상은 전라도에 보낸 공문이다.
○ 좌의병(左義兵) 진중의 사자(士子)들이 흩어진 군사 8백여 명을 소집하여 전 화순 부사(和順府事) 최경회(崔慶會)를 추대하여 맹주(盟主)로 삼고 금월 26일 광주에서 기고(旗鼓)를 세웠는데, 골(鶻) 자로 장표(章標)를 만들었다. 우도(右道)로부터 군사를 모아 남원으로 향하면서 우의병(右義兵)이라 일컬었다. 거사하던 날에 여러 군(軍)에 다음과 같이 통시(通示)하였다.
한 사람을 상 줌으로써 천만 사람을 권하는 것이다. 지금 의병의 패전에 유학(幼學) 안 영(安瑛)은 그 주장이 탄 말이 놀라는 것을 보고서 자기가 탄 말을 주장에게 주어 대신 타게 하고 도보로 포복(匍匐)하다가 달갑게 죽음을 당했으며, 학유(學諭) 유팽로(柳彭老)는 왜적의 칼날이 어지럽게 번쩍일 때 노복들이 모두 달려나가 적의 칼날을 피하라고 간청하자, 성내어 거절하며 말하기를, “내가 만약 달아난다면 주장을 어느 곳에 두겠느냐.”하고, 그 주장의 노복이 다 흩어져서 말이 전진할 수 없음을 보자 자기 종을 명하여 주장을 보호해서 나가게 함과 동시에 자신이 뒤를 따라 적을 막다가 갑자기 칼에 맞아 죽었다. 아! 인심이 극도로 어지러운 이즈음을 당하여 임금을 배반하고 나라를 잊어버리며 목숨을 탐내어 구차히 살아가는 것이 곳곳마다 다 그러하고, 윗사람에게 친히 하며 어른을 위해 죽는 일은 전혀 들을 수 없는데, 이 두 사람은 이익을 꾀하거나 공을 계산하는 마음이 없어서 마침내 목숨을 버리고 의(義)를 취하여 분연히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으니 만약 급급히 그 절의(節義)를 드러내어 한때의 이목(耳目)을 솟구치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꺾여진 사기를 일으켜 세우며 무너진 강상(綱常)을 붙잡을 수 있으랴. 일이 시급하지 않은 것 같지만 관계되는 바가 지극히 중하니, 바라건대 각 읍 향교(鄕校)ㆍ향소(鄕所)에 각각 부물(賻物)을 거두어 되는 대로 사람을 시켜 그 집에 조문하고, 의거(義擧)한 뒤에 그 해골을 거두어 제사를 드리고 말미를 갖추어 위에 아뢰어 정문을 세워 의기를 고무시키도록 하라.
○ 호남ㆍ영남 수군이 견내량(見乃梁)에 거제(巨濟)ㆍ고성(固城)의 경계이다. 모여 왜적의 큰 배 10척, 중ㆍ소선 70여척을 발견하고 접전하였다. 우리 군사가 두 번째 총통(銃筒)을 쏘았으나 전혀 깨어질 형세가 없으므로, 한산도(閑山島) 큰 바다로 퇴진하여 다시 삼도의 여러 선박과 더불어 약속하고 북채를 두들기며 한꺼번에 나가 거의 다 무찔렀다. 적선 10척이 포위망을 벗어나 달아나니 진도 군수(珍島郡守) 선거이(宣居怡)가 쫓아갔으나 따르지 못했다. 10일 적선 70여 척이 안골포(安骨浦) 선창에 결진하고 있으므로 삼도의 여러 전선 백여 척이 돌진하여 접전을 벌였으나 다 깨뜨리지는 못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전 현감 임계영(任啓英)이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다. 임계영은 전라도 보성(寶城) 사람으로, 처음에 본도 관군과 의병이 함께 근왕(勤王) 길에 나가고 온 도내가 공허하게 되자 흉한 왜적이 틈을 타서 경내에 쳐 들어오니 충돌당할 근심이 조석에 박두하여 내지(內地)의 위태로움이 그릇을 기울여 물을 쏟는 것보다 더하므로, 임계영은 동지 여러 사람과 더불어 격문을 띄워 군사를 모집해서 방어할 계획을 했다. 그래서 본군에서 출발하여 낙안(樂安)ㆍ순천(順天)을 경유하여 남원으로 향해 다니면서 군사를 수합하여 천여 명을 얻어 좌의병(左義兵)이라 칭하고, 호(虎) 자로 장표(章標)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범을 그려 만들었다가 나중에 호 자의 인(印)을 만들었다.
○ 김천일(金千鎰)ㆍ최원(崔遠)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수원(水原)으로부터 인천(仁川)으로 향하면서 본도에다 구원병을 요청하니, 이광(李洸)이 조방장 이유의(李由義)와 진도군수 선거이(宣居怡)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가 구원하게 하다.
○ 영남의 왜적이 몰려 전일에 해인사(海印寺)에서 밥을 빌어먹던 막실(莫失)ㆍ막돌[莫石]을 호남으로 보내어 형세를 엿보게 하다. 초유사의 비밀이다.
○ 경기도 과천 현감(果川縣監)이 전달한 통문 내용에, “적병 한 부대가 개성부(開城府) 청석동(靑石洞)에 진을 치고 있다가 우리 군사에 패하였고, 신립(申砬)이 충주(忠州)에서 패전한 뒤로 왜놈의 의복을 바꾸어 입고 몰래 도성으로 들어와 적 2백여 명을 마구 베었으며, 도원수 윤두수(尹斗壽)의 소속 군사가 또 적 1천여 명을 베어서 서울에 있는 적이 후퇴해 달아났다.” 하다.
○ 영남 초유사(嶺南招諭使)의 공문 내에, “본도 우도(右道) 여러 의병 2만여 기(騎)가 날마다 적을 공격하여 고령(高靈) 이하는 이미 회복되었으며, 서울에서 내려오는 적이 진퇴를 마음대로 못하고 나왔다 도로 들어가는 형편이니, 산중에 피란간 사람들에게 급히 이 기별을 전해서 사람마다 분연히 일어나 적을 치게 할 것이다.” 하다. 《경상 순영록》에 보인다.
○ 도순찰사(都巡察使)가 소식을 알리기 위하여 당일로 병사에게 도부(到付)된 첨지를 보면, “지금 도착한 어지(御旨) 내에, ‘요동(遼東)에서 크게 정병 5만 명을 풀어서 강변에 머물러 성원을 하게 하고, 광녕총병관(廣寧總兵官) 양원(楊元)이 귀순한 오랑캐 5천 명을 친히 거느리고 앞서 와 요격할 태세를 갖추고 있으며, 조 총병(祖總兵)ㆍ곽 유격(郭遊擊)ㆍ왕 유격(王遊擊) 세 대장이 각기 수천의 병마(兵馬)를 거느리고 이미 압록강을 건넜고, 사 유격(史遊擊)은 정예부대 1천 5백 명을 거느리고 선봉이 되었다. 어제 저녁 의주 목사(義州牧使)가 등초해 보낸 관전보(寬奠堡) 표첩(票帖) 내에 중국에서 산동도(山東道) 수군 10만으로 하여금 수로를 경유하여 곧장 왜적의 소혈(巢穴)을 두들길 모양이라 했으니, 경(卿)은 아무쪼록 연해 각 읍에 이 연유를 적어 관문이나 길거리에 방(榜)을 걸어 두루 알리라.’ 하셨다. 어지가 협정에 의거하여 이러하기에, 중국의 구원병이 이미 압록강을 건너와서 군의 형세가 크게 떨쳤으니 왜적을 무찔러 없애고 국토를 회복할 날을 손꼽아 기약한다. 이 역시 민간에 알려 모두 듣게 하라.” 하다. 이상 공문은 각읍에 보낸 것임.
○ 왜적이 평양에 들어온 뒤로 매일 나가 도적질을 하되 부산(斧山) 밖을 벗어나지 않고 돌아오며 마치 무엇이 두려워서 감히 못하는 것이 있는 듯이 보이니 예언[讖記]의 말도 다 거짓은 아닌 듯싶다. 부산(斧山)은 부의 서쪽 30리에 있다. 이때에 참언(讖言)에, “왜적 난리 7년에 부산으로부터 부산까지 오고, 왜놈 난리 10년에는 압록으로부터 압록까지 온다.” 하였다.


 

[주D-001]안 상산(顔常山) : 당 현종(唐玄宗) 때의 충신 안고경(顔杲卿)이니, 원문의 안 상산(顔常山)은 안 평원(顔平原)의 잘못인 듯하다. 안평원 열전(列傳)에 ‘신무상죄당사(臣無狀罪當死)’라는 말이 있다.
[주D-002]문 신국(文信國) : 남송(南宋) 말년의 충신인 문천상(文天祥)이니, 위왕(衛王) 때 신국공(信國公)을 봉했다.
[주D-003]내상(內廂) : 여기서는 안쪽 지방[內地] 즉, 함안ㆍ창원ㆍ이령 등지를 말한 듯하다.
[주D-004]한(漢) 나라의 …… 나라 붕거 : 중국 삼국 시대 촉한(蜀漢)의 승상인 제갈공명(諸葛孔明)과 남송 말년의 명장 악비(岳飛)이니, 붕거(鵬擧)는 악비의 자(字)이다. 이 두 사람은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주D-005]장순(張巡) : 당(唐) 나라 때의 사람이다.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키자 기병(起兵)하여 안녹산을 토벌했는데, 허원(許遠)과 수양을 지키고 있다가 수양성이 함락되매 안녹산을 역적이라 꾸짖고 피살되었다.
[주D-006]납서(蠟書) : 편지를 납덩이 속에 넣어서 물이 새어들지 않게 한 것이다. 《송사(宋史)》
[주D-007]석륵(石勒) : 진(晉) 나라 때 중국을 침범하여 후조(後趙)를 세운 갈인(羯人 : 중국의 변경 민족)이다.
[주D-008]조사아(祖士雅) : 진 나라 때의 명장 조적(祖逖)의 자(字)이다. 조적이 진 원제(晉元帝) 때 군사를 통솔하여 북벌하기를 자청하자, 원제는 그를 분위장군(奮威將軍)으로 하였다. 그가 북벌군을 거느리고 장강을 건너갈 때 노를 치며 맹서하기를, “중원을 깨끗하게 하지 못하고 다시 건너게 된다면, 이 강물에 빠져 죽겠다.” 하였던 바, 조적은 마침내 석륵을 격파하여 황하 이남의 땅을 회복하였다.
[주D-009]장숙야(張叔夜) : 송 나라 때의 사람으로 금(金) 나라 군대와 싸워 용맹을 떨쳤다. 《송사(宋史)》
[주D-010]사모(蛇矛)와 월극(月戟) : 사모는 창의 한 종류로 전장에 쓰는 무기이니, 장팔사모(丈八蛇矛)라고도 한다. 월극도 창의 일종으로, 날이 초생달같이 굽어 그리 칭한 것이다.
[주D-011]안진경(顔眞卿) : 당 나라 때 사람으로 그가 평원 태수(平原太守)로 있을 때 안녹산의 반란이 일어났는데, 진경이 군사를 일으켜 안녹산을 토벌하자 북방의 여러 군에서는 그를 맹주로 추대하여 하북초토사(河北招討使)로 하였다.
[주D-012]유총(劉聰) : 진(晉) 나라 때 흉노의 황제로,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진 나라를 침략하였다.
[주D-013]동창의 계교 : 송(宋) 나라 진회(秦檜)가 부인 왕씨와 동창에서 귤(橘)을 희롱하면서 악비(岳飛)를 죽이려는 계획을 하였다.
[주D-014]서촉(西蜀)으로의 피란 : 당 현종(唐玄宗)이 서촉으로 피란하였으므로, 선조의 거가가 서행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주D-015]봉천(奉天)으로 향하는 …… 먼지가 날린다 : 당 덕종(唐德宗) 부자가 금(金)의 군사에게 잡혀 봉상현 봉천으로 끌려간 고사가 있는 바, 선조의 파천을 형용한 말이다.
[주D-016]이에 물들인 무리 : 왜적들은 이빨에 칠을 하였으므로 칠치(漆齒)라 부른다.
[주D-017]포서(包胥)의 충성 : 춘추 시대 초 나라의 대부 신포서(申包胥)가 초 나라의 보전을 위해 힘을 다한 바 있다. 《춘추(春秋)》정공(定公) 4년
[주D-018]포신(鮑信) : 중국 후한 말년의 절개가 있던 인물로, 황건적(黃巾賊)과 접전하다 죽었다. 《후한서(後漢書)》
[주D-019]방덕(龐德) : 중국 삼국 시대 위(魏) 나라 사람으로, 변경 민족인 저강(氐姜)의 침공을 격파하였다.
[주D-020]범진(范鎭)의 머리털이 허옇게 돼버린다 : 범진은 북송(北宋) 때의 명신이다. 인종(仁宗)이 재위 35년에 후사가 없으매, 범진이 종실의 근속(近屬) 중에서 현량한 자를 골라 황제의 지위를 계승시킬 준비를 하라고 건의하였으나, 집정자의 저지로 실현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범진은 굽히지 않고, 인종에게 여러 차례 되풀이하면서 우니, 인종도 울면서 말하기를, “짐은 경의 충성을 아오. 경의 말이 옳소. 하지만 다시 2, 3년을 기다려야 할 것이오.” 하였다. 범진이 장주를 10여 차례 바치고 1백여 일 동안 어명을 기다린 끝에 수염과 머리가 희어지자, 조정에서 그 뜻을 빼앗을 수 없음을 알았다. 《송사(宋史)》권 337
[주D-021]소해(小海) : 세자를 가리킨다. 《산해경(山海經)》에 “원고(元臯) 위에서 남으로 유해(幼海)를 바라본다.”는 말이 있으니, 유해는 소해(小海)이다. 그러므로 천자(天子)는 대해(大海)에 비하고, 태자(太子)는 소해에 비한 것이다.
[주D-022]전성(前星) : 세자를 가리킨다. 진(晉) 나라 천문지(天文志)에, “심(心)이란 별이 있는데, 중간 별[中星]은 천자(天子)를, 앞 별[前星]은 태자(太子)를, 뒷 별[後星]은 서자(庶子)를 가리킨다.” 하였다.
[주D-023]용루(龍樓) : 한(漢) 나라 성제기(成帝紀)에 있는 말로, 성제가 태자(太子)로 있을 때 계궁(桂宮)에 거처하였는데 임금이 태자를 불러 용루문(龍樓門)으로 나오게 했었다.
[주D-024]학금(鶴禁) : 한 나라 궁궐소(宮闕疏)에 있는 말로, 학궁(鶴宮)은 태자(太子)가 거처하는 궁인데 어느 사람이라도 드나드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학금(鶴禁)이라 하였다.
[주D-025]칠묘(七廟) : 중국의 고제(古制)에 의하면, 천자가 칠묘를 두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서울에 있는 종묘를 그렇게 말한 것이다. 《예기(禮記)》〈王制〉
[주D-026]윤대(輪臺)에서 과오를 뉘우침 : 윤대는 중국 신강성 서남쪽에 있는 지명으로 한 나라 무제(武帝)가 중앙아시아(당시에는 서역(西域)이라 했다)를 정벌하여 군사가 그곳까지 가 있었으나, 무제가 병으로 죽을 때에 윤대에 군사 보낸 것을 후회하는 조서를 내렸다.
[주D-027]봉천(奉天)에서 자기를 허물함 : 봉천은 당 나라 때 섬서성(陝西省)에 있던 현이다. 덕종(德宗)이 주자(朱泚)의 반역을 피하여 그곳으로 파천하였는데, 그곳에서 과거를 뉘우치고 자기의 잘못을 고백하는 조서(詔書)를 내리니 그것을 죄기조(罪己詔)라 한다.
[주D-028]영무(靈武)의 의기(義旗) : 당 나라 때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 현종(顯宗)은 촉(蜀)으로 파천했는데, 그의 아들 숙종(肅宗)이 영무(靈武)에서 즉위하고 안녹산을 물리쳐 당 나라를 수복했다. 그 고사를 가지고 세자 혼(琿 즉 후의 광해군)에게 왜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광복시킬 것을 기대하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주D-029]미앙궁(未央宮)의 수주(壽酒) : 미앙궁(未央宮)은 중국 한(漢) 나라 때 지금의 섬서성 장안현 서북의 장안의 고성(故城) 안에 세웠던 궁전 이름. 새해를 축복하는 뜻으로 마시는 술. 미앙궁의 수주는 서울의 궁전을 회복하기를 고대하는 선조의 마음을 나타낸 말.
[주D-030]중국 : 하(夏)를 옮긴 말이다. 여기서는 글의 서두로 감개를 나타내는 대목에 쓰인 것이므로 반드시 중국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주D-031]궁(窮)과 한(寒) : 궁과 한은 모두 중국 고대 하 나라 시대의 역적으로 궁은 유궁후예(有宮后羿)의 약한 것이니, 그는 하 나라를 역적질하였고 한은 한착(寒浞)이니 후궁유예의 아들로 역적질한 아비를 죽이고 그 아비의 자리를 빼앗았던 역적이다.
[주D-032]훈육(獯鬻) : 중국 고대의 변경 족속인 흉노(匈奴)의 별칭으로, 중국을 자주 침범하여 포악한 짓을 자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D-033]밀(密) : 주 문왕(周文王) 때의 조그마한 나라이다. “밀인이 불공하여 감히 큰 나라를 거역하였다[密人不恭, 敢距大邦].” 하였다. 《시경(詩經)》〈대아(大雅)〉
[주D-034]연교(燕郊)에서 말을 키우겠다 : 연교는 중국 북방의 수도(首都)가 있는 곳의 교외로, 그곳에 말을 치겠다는 것은 중국을 점령하겠다는 말이다.
[주D-035]덕진(德鎭)으로 교질(交質)해야 한다 : 덕진은 주민에게 은덕을 베푸는 산이니, 덕진으로 교질하겠다고 하는 것은 중국의 명산을 내놓으라는 말이 된다.
[주D-036]조정의 계획 : 원문에는 묘(廟) 밑에 한 글자가 탈락되어 있다. 여기서는 묘산(廟算)으로 보고 ‘조정의 계획’으로 옮겼다.
[주D-037]교령(嶠嶺)에 머뭇거리며 : 원문에 교영(喬英)이라 한 말은 ‘교만하게 굴며’라고 해석이 되는데, 나는 교(嶠)와 영(嶺)의 오서라 보므로 모두 영남이라는 뜻이 된다. 그러므로 ‘준순교영(逡巡喬英)’을 영남에서 머뭇거리고 있다는 것으로 번역하였다.
[주D-038]빈교(邠郊) : 빈(邠)은 옛날 주 문왕의 조부인 태왕(太王)이 있던 도읍이었는데, 적(狄)의 침략으로 그곳에서 쫓겨나 기산(岐山)으로 옮겼다 한다.
[주D-039]하북(河北) 지역이 비록 흩어지고 :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 황하 이북이 모두 안녹산에게 항복하였다는 말이다.
[주D-040]수양(睢陽) : 지금의 하남성 상구현(商丘縣) 남부에 있던 지명으로, 당 나라 때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키자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이 그곳을 굳게 지켜 장강(長江)과 회하(淮河) 일대의 땅을 막아 안녹산 군이 침입해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주D-041]악비(岳飛)가 갓 …… 우레같이 통곡하였고 : 악비는 중국 남송 초기의 명장이다. 여러 차례의 무공으로 태위소보(太尉少保)에까지 올라 하남북제로초토사(河南北諸路招討使)가 되어 금군(金軍)을 대파하고 수일 내로 황하를 건너가 실지(失地)를 광복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조정에서 실권을 잡고 있던 진회(秦檜)는 금과의 화의(和議)를 주장하여 하루에 12번 금자패(金字牌)를 내려 악비를 소환했다. 삼군이 통곡한 것은 그때의 일이다. 그 후 진회는 만사설(萬俟卨) 등을 시켜 악비를 탄핵해서 체포 투옥하여 처형하여, 39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주D-042]장준(張浚) : 남송 초기 주전파의 거물이다. 송 나라 고종(高宗) 때 천섬경서제로선무사(川陝京西諸路宣撫使)로 금을 제어하고 있다가 주화파인 진회에게 몰려 영주(永州)로 좌천되었다. 효종(孝宗) 때에 가서 추밀사(樞密使)를 제수받고 강회(江淮)의 군사를 도독(都督)하였으니, 주전파로 널리 민간의 환영을 받았다.
[주D-043]해바라기 : 해바라기는 해를 항상 처다본다 하여, 충신이 항상 임금을 향하는 데 비유한다.
[주D-044]동해가 바로 …… 않을 것이고 : 옛날 전국 시대 말기에 진(秦) 나라가 강성하여서 여러 나라를 침략하자 진 나라를 황제로 존칭하고 종주국을 삼자는 의논이 생겼는데 이때 노중련(魯仲連)이라는 선비가, “나는 차라리 동해를 밟고 죽을지언정 진 나라같이 악독한 나라를 황제국으로 섬길 수 없다.” 하고 반대하여 이루어지지 않았다.
[주D-045]의병(疑兵) : 군사가 많은 것처럼 거짓으로 꾸미는 것, 또 그렇게 꾸민 군사를 말한다.
[주D-046]역적 양(亮)이 …… 어긴 일 : 북송 때에 여진족(女眞族)이 금(金) 나라를 건국하고 송(宋) 나라를 침략하여 송 나라가 강남으로 쫓겨 갔으므로 이때부터 남송이라 한다. 남송에서는 금 나라에게 신하가 되겠다는 서약을 올리고 겨우 두 나라의 평화를 유지하였는데 금 나라에서 황족인 완안량(完顔亮)이 임금을 죽이고 자기가 황제가 되었으므로 역적인 양이라 하여 역량(逆亮)이라고 부른다. 그 완안량은 남송과 평화의 약조를 깨뜨리고 남송을 침략하다 남송의 반격을 받아 대패하고 자신까지 부하 군대의 손에 살해되었다.
[주D-047]중행(中行)을 매질하지 않은 것은 : 중행률(中行律)은 원래 한(漢) 나라 사람인데, 흉노족(匈奴族)에 항복하여 흉노의 참모가 되어서 도리어 한 나라를 괴롭혔다.
[주D-048]장강(長江)이 급작스리 …… 날아서 건너왔다 : 중국이 남북조로 갈렸을 때, 양자강(揚子江)을 하늘이 만들어 준 참호[天塹]라 하여 그 강을 건너오려거든 날아서 건너오라 하였으나 그 장강을 건너게 하였다면 남조에는 사람이 없다고 할 것이라는 말이다.
[주D-049]태왕(太王)이 빈(邠) …… 떠나던 마음 : 주(周) 나라의 조상 태왕은 빈(邠 : 豳)에 살았는데 융적(戎狄)의 침입을 받았다. 나라 사람들은 융적과 싸우려고 했으나 태왕은 전쟁에 군사들이 죽는 것을 측은하게 여겨 기산(岐山) 밑으로 옮겨가 살았는데 빈에 살던 사람들이 다 그를 따라와 살았다. 태왕은 그때에 가서 비로소 주라는 국호를 정하고 융적의 습속을 물리치고 성곽과 궁실을 세워 나라를 경영했다. 아들 문왕(文王) 대에 주는 크게 팽창하고 손자 무왕(武王)의 대에 이르러서는 중국 전체를 차지하게 되었다. 태왕은 무왕이 추존한 칭호이고 그 이전에는 고공단보(古公亶父)로 불리웠다.
[주D-050]명황(明皇)이 촉(蜀) …… 갔던 일 : 당 나라 때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켜 장안이 위태로워지자 현종(玄宗)은 몽진하여 촉으로 파천했다.
[주D-051]공락(鞏洛) : 공현(鞏縣)은 지금의 중국 하남성 영양현(榮陽縣) 서부의 낙수(洛水) 동안(東岸)에 있었는데, 안녹산 반란 때에 당 나라 군사가 이곳에서 패했으므로 황제가 서울을 버리고 달아났다.
[주D-052]민아(岷峨)의 위험한 …… 멀리 갔다 : 당 현종이 촉으로 들어갈 때 그러한 험준한 길을 가야 했다. 민아(岷峨)는 촉 땅의 산으로 민은 민산(岷山), 아는 아미산(峨嵋山)이다. 취화(翠華)는 임금이 탄 수례의 장식이니, 그것을 타고 가는 임금을 말하는 뜻으로 쓰인다.
[주D-053]이성(李晟) : 당 나라 때의 사람으로 덕종(德宗) 때 주자(朱泚)의 반란을 평정하여 수도를 수복하였고, 황제가 봉천(奉天)에 포위되어 있을 때 그 포위를 풀어 황제를 구출했다.
[주D-054]육지(陸贄) : 당 덕종의 신하로 덕종이 봉천에 포위되어 있을 때 측근에서 시종하였다. 임금이 매일 백으로 헤아릴 만큼 많은 조서를 내리는데 붓을 휘둘러 그것을 써내리기를 생각이 샘솟듯하여 다 사정을 곡진하게 나타내고 그때 그때의 필요에 잘 맞춰 나갔다고 한다.
[주D-055]상주(相州) : 중국 하남성 안양현(安陽縣)에 있었는데, 당 나라에 안녹산의 난이 일어났을 때 구절도(九節度)의 군대가 반란군에 의해 궤멸되었다.
[주D-056]장막의 제비 : 장막을 버티고 있는 나무에 제비가 집을 짓고도 그 천막이 곧 없어질 것을 모르고 찍찍거린다는 것으로 대단하지 않아 소탕해 버리는 것이 문제가 없다는 말이다.
[주D-057]밤중의 닭소리 : 밤중에 닭이 우는 것은 난리가 날 징조라 한다.
[주D-058]중류(中流)에 뜬 …… 노를 치면서 : 중국에 여러 호족(胡族)이 침략하여 서진(西晉)이 멸망하고 황족 한 사람이 강남으로 쫓겨가서 동진(東晉)을 건국하였는데, 그때에 조적(祖逖)이라는 사람이 군사를 거느리고 양자강을 건너서 호족을 정벌하러 떠날 적에 양자강 중류에서 배의 노를 치면서, “만일 저 오랑캐를 쳐서 평정하지 못한다면 저 강물과 같이 다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고 맹서하였으나 그는 중간에 병으로 죽고 말았다.
[주D-059]복덕(福德)이 바야흐로 …… 분야에 임했고 : 하늘의 복덕성(福德星)이 비치는 땅을 침략하면 침략하는 나라가 도리어 패한다고 한다.
[주D-060]노래하고 읊조리는 …… 생각하게 된다 : 한(漢) 나라가 중간에 왕망(王莽)에게 역적질을 당한 때가 있었는데 왕망이 정치를 하도 포악하게 하여서 백성들은 노래하는 데도 한 나라 옛적을 생각하였다 한다.
[주D-061]신정(新亭) : 중국 강소성 남경시 남쪽에 있었던 정자로, 동진 때 시세가 혼란하여 명사들이 이곳에 모여 서로 보고 개탄하였다 한다.
[주D-062]흥원(興元) : 흥원은 당 나라 서울 서북쪽에 있는 땅으로 당 나라 희종(僖宗)이 황소(黃巢)의 반란군을 피하여 그곳으로 파천하였었다.
[주D-063]형초(荊楚)의 기특한 인재들 : 옛날 중국 초 나라에는 뛰어나게 용맹한 인물들이 많이 났다는 것을 취해서 쓴 말임.
[주D-064]연조(燕趙)의 검객 : 옛날 중국 연ㆍ조 지방에서는 검술에 비상한 인물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D-065]말을 채찍질하여 …… 찌를 것 : 관우(關羽)가 조조(曺操)에게 있을 때에 원소(袁紹)의 대장 안량(顔良)이 대군을 거느리고 조조를 공격해 왔으므로 조조도 군대를 내어서 응전하게 되었다. 양군이 대진하면서 안량은 수백 명의 부장들에게 옹위되어 진두에 나섰는데 그때에 관우는 조조에게 적토마(赤兎馬)라는 좋은 말을 선사 받았다. 그래서 관우는 그 말을 몰고 달려가서 안량의 진으로 들어가 안량을 단번에 찔러 죽였다. 그것은 그 좋은 말의 힘이 많았던 것이다.
[주D-066]기북(冀北) : 기북은 중국의 북경 근처로 예전부터 좋은 말의 산지로 유명하였다.
[주D-067]노적가리를 가리켜 내주던 의기 : 중국 삼국 시대에, 오(吳) 나라 주유(周瑜)가 수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노숙(魯肅)의 집에 들러 군량을 달라고 청했다. 노숙의 집에는 양곡 노적가리가 둘이 있었는데 각각 3천 곡(斛)씩이 들어 있었다. 노숙이 그 중의 하나를 가리켜 그것을 주유에게 주었다는 고사이다.
[주D-068]양주(揚朱)와 묵적(墨翟) : 유가에서는 극단적인 개인주의자 양주의 사상이나 극단적인 박애주의자 묵적의 사상을 이단으로 극력 배척한다. 양주와 묵적을 배척하는 자는 곧 선비를 의미하는 말이다.
[주D-069]곤란 : 중국의 진(秦) 나라는 서북에 위치하여 있고 월(越) 나라는 동남에 위치하여 있으므로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래서 ‘월 나라 사람이 진 나라 사람이 수척한 곤란을 보고도 모른 체한다’는 말이 있다.
[주D-070]봉명국(奉命國 : 천명을 받든 나라라는 뜻으로 침략을 정당화하려는 입장에서 일본을 그렇게 나타낸 것이라 생각된다.
[주D-071]주여숙(柱厲叔)이 이것을 …… 기다릴 것인가 : 춘추 시대의 사람으로, 거(莒)의 오공(敖公) 밑에서 벼슬을 살다가 그 재능이 알려지지 않아 벼슬을 버리고 바닷가에서 살면서 극도의 빈곤에 쪼들렸다. 오공이 변란을 당하자 그는 벗들과 하직하고 오공에게 가서 목숨을 바치겠다고 나섰다. 주여숙의 이러한 행동은 후세의 임금 중에 인물을 못 알아 보는 자를 부끄럽게 하는 동시에, 임금의 은총을 받고도 임금의 급난에 자신만을 보전하려 드는 신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여씨춘추(呂氏春秋)》
[주D-072]안진경(顔眞卿)이 다시 …… 할 것인가 : 당 나라 안녹산의 반란 때에 하북 17군(郡)이 모두 붕괴하여 안녹산에게 항복하였는데 오직 평원 태수(平原太守) 안진경만이 성을 지켰으므로, 현종이 “짐은 안진경이 어떻게 생겼는지[作何狀] 모르나 참 장한 사람이다.” 하였다.
[주D-073]세성(歲星)이 기(箕)의 …… 기약이 없으랴 : 이 글에서 한실과 송은 다 중국의 한족이니 변경의 침략적인 족속과 비교해서 나타낸 말이다. 즉 여기서는 곧 조선의 왕실 내지 조선을 말한 것이다. 세성이 기의 분야를 지켜서 복덕이 내릴 징조가 있다고 한 것은, 기를 조선의 분야로 보고서 한 말로 고래의 점성술(占星術)에 기대서 그렇게 말한 것이다.
[주D-074]서방(西方)에 미인 : 미인은 임금을 나타낸 말이다. 《시경(詩經)》〈패풍(邶風)〉
[주D-075]순무(巡撫)가 당보(搪報)를 …… 되었다. 운운. : 이것은 명 나라 때의 자문인데, 형식이 특이하고 원문 전후에 약간의 혼란이 있어 모호한 부분이 없지 않다. 자(咨)는 동등한 기관 사이에 쓰는 공문 형식이다. 원문의‘須至’의 ‘至’는 ‘知’의 와오일 것이고, ‘吉’자 위에는‘秀’자가 오탈했을 것이고, ‘凋信’의 ‘凋’자는 ‘調’의 와오일 것이다.
[주D-076]10대의 주불(朱紱)이요 7대의 은장(銀章)이라 : 주불은 붉은 색의 치마 같은 무릎 덮개로, 고관 대작이 수레에 탈 때 사용하였다. 은장은 은으로 만든 인장으로 고제(古制)에 의하면 2천 석의 녹을 타는 벼슬을 하면 그 관인을 은으로 만들고 ‘모관지장(某官之章)’이라 새겼다 한다.
[주D-077]금관자(金貫子) : 금으로 만든 관자이다. 관자는 망건에 달아 망건 줄을 꿰는 작은 고리로, 금관자는 종2품의 벼슬하는 사람이라야 붙였다.
[주D-078]호전(胡鈿) : 호전은 주화파의 괴수 진회(秦檜)를 목 베고 금에 항전(抗戰)할 것을 상소했다. 곽재우는 호전이 진회를 목 베라고 주장한 것이 정당한 것같이 자기가 김수를 목 베자고 하는 것도 정당하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주D-079]동탁(董卓) : 중국 동한(東漢) 말년의 사람으로, 전공(戰功)이 있어 영제(靈帝) 때 전장군(前將軍)이 되었고 병주목(幷州牧)의 벼슬을 얻었다. 영제가 죽자 하진(何進)의 부름에 호응하여 군사를 이끌고 수도에 들어가 환관을 죽이고 그 일이 평정되자 자기가 상국(相國)이 되어 소제(少帝)를 폐하고 하태후(何太后)를 시해(弑害)하고 헌제(獻帝)를 세웠다. 음란하고 흉폭하여 그 해독이 조야에 퍼져 원소(袁紹) 등이 군사를 일으켜 그를 토벌하였는데, 동탁은 헌제를 끼고 장안으로 천도하여 자기가 태사(太師)가 되어 가지고 제위를 찬탈할 생각을 품었다. 왕윤(王允)이 역사(力士) 여포(呂布)를 꾀어 동탁을 자살(刺殺)시키고 그 족속을 멸했다.
[주D-080]형벌은 대부에게는 올라가지 않는다 : 본래 대부 이상에는 형벌을 적용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고, 대부 이상이면 형벌을 받을 행동을 하지 않으므로 형벌을 적용할 필요가 없고 또 형벌을 받을 만한 죄를 대부가 범했다면 형벌을 받기 전에 자결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입장에서 하는 말이다. 이 글에서는 그런 뜻으로 쓴 것은 아니고 곽재우를 공격하기 위한 근거의 하나로 그 말을 내세운 것이라 하겠다. 《예기(禮記)》〈곡례(曲禮)〉
[주D-081]옥절(玉節)을 잡았으며 : 지방 장관이 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주D-082]강회(江淮)를 차단하여 …… 구실을 하였는데 : 낙동강 연안을 지켜 그 일대를 안온하게 만든 것을 말한다.
[주D-083]정의를 해치는 자를 도적이라 한다 : 《맹자(孟子)》 에 나오는 말을 인용한 것이나 약간 혼동을 일으키고 있다. 원문에는 ‘적인자 위지적(賊仁者謂之賊)’이 아니라, ‘적의자 위지잔(賊義者謂之殘)’이라 하였다.
[주D-084]근왕(勤王) : 왕실에 힘을 다한다는 말이다. 《춘추(春秋)》에, 호언(狐偃)이 진후(晉侯)에게 말하기를, “제후(諸侯)를 구하려면 근왕하는 것밖에 없다.” 하였으므로, 후세에 의병을 일으켜 왕실을 구원하는 것을 근왕이라 하였다.
[주D-085]간섭을 받아 : 사람을 시켜 일을 하게 하고 뒤에서 방해한다는 말이다. 복자천(宓子賤)이 선보(單父) 고을의 원님이 되자 글씨 잘 쓰는 사람을 청하여 글씨를 쓰라 하고 뒤에서 팔목을 끌어당기며 글씨가 잘 되지 않으면 성내니, 글씨 쓰는 자가 돌아 가서 노(魯) 나라 임금께 고했다. 노 나라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복자천이 내가 자기 일을 간섭할까 두려워서 한 짓이다.” 하였다. 《설원(說苑)》
[주D-086]곡단(曲端) : 송(宋) 나라 사람으로 금인(金人)과 싸워 공이 있었는데, 뒤에 다른 사람의 참소를 만나 옥중에서 죽었다.
[주D-087]한착(寒浞)처럼 스스로 넘어질 줄 : 한착은 하대(夏代)의 사람으로 유궁후예(有窮后羿)가 제위를 빼앗아 하 나라 대신 유궁씨(有窮氏)로 일컬을 때 그의 재상이 되었다가 후일 예(羿)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후에 소강(小康)에게 멸망되었다.
[주D-088]장인(丈人)의 원길(元吉) : 《주역》의 지수사(地水師) 괘에 보인다.
[주D-089]초호(楚戶)의 세 집 : 초(楚) 나라 남공(南公)이 예언하기를, “초 나라 3집만 남아도 진(秦) 나라를 멸할 수 있다.” 하였다.
[주D-090]혜련(惠連) : 혜련이 10살 때 이미 글을 잘 지으니 그 형 사영운(謝靈運)이 매양 혜련을 대하면 좋은 글구가 저절로 나왔다. 영운이 일찍이 영가(永嘉) 서당(西堂)에서 시를 사색하다 못이루었는데 꿈에 문득 혜련을 보고, “못 가에 봄 풀이 돋아난다 [池塘生春草].” 하는 글귀를 얻었다 한다. 《남사(南史》〈사혜련전(謝惠連傳)〉

난중잡록 3(亂中雜錄三)
갑오년 만력 22년, 선조 27년(1594년)


1월 1일 새벽에 붉은 기운 일자(一字)와 같은 것이 하늘 남북으로 뻗치고, 정오에 이르러서는 약간의 눈과 비가 왔다. 이날 명 나라 장수 유격(遊擊) 곡수(谷遂)가 경상도로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남원에 도착하였다.
2일 곡수가 서울로 향하고 유격장군(遊擊將軍) 호(胡) 이름은 모름 가 군사를 거느리고 경상도로부터 남원에 도착하였다가, 다음날 서울로 향하여 모두 요동으로 돌아갔다.
○ 선전관(宣傳官)을 보내어 김덕령에게 선유(宣諭)하고, 또 충용(忠勇)장군이란 호를 주었다. 장군 김덕령을 위로하는 교지(敎旨)의 글은 아래와 같다.
왕은 이렇게 이르노라. 아! 내가 생각하건대, 예로부터 위태로울 때에는 반드시 충성을 품고 의를 지키는 선비가 나와서 세상에 쓰임이 되어 분주하게 힘을 써서 공업을 세워 혹시 이로 인하여 위태로움을 돌려서 편안하게 만들 수 있었다. 이는 한갓 충의의 마음이 그만둘 수 없는 타고난 천성에서 나왔을 뿐만 아니라 또한 국가 조종(祖宗)의 덕택이 사람을 감동시킴이 깊었던 것이다. 지금 왜적이 날뛰어 해가 지나도록 물러가지 않아서 위로는 종묘 사직을 지키지 못하여 궁궐이 잿더미가 되었고, 아래로는 백성들이 죽어 해골이 들[野]에 찼으니, 무릇 강토 안에 있는 이로 누가 부모 형제의 원수로서 마음이 아파서 이 적과는 함께 살지 않겠다고 맹세하지 않겠는가마는, 아직 한 사람도 팔을 걷어부치고 의를 일으켜서 나라의 원수를 분히 여겨 앞장서서 세상에 드문 공적을 이루는 이가 없었다. 이 때문에 나는 밤낮 개탄하여 자리에 바로 앉지 못하고 팔을 어루만진 지가 오래였더니, 이에 본도의 순찰사 이정암(李廷馣)의 장계(狀啓)로 인하여 네가 유문(儒門)에서 발신하여 순국할 정성이 있어 군중(軍中)에 발을 부치어 적을 토벌하는 뜻을 바치기를 원하여 원수부(元帥府)에 명령을 받들어 시골에서 군사를 모아 적진을 바라보고는 노하여 눈가가 찢어지며 한 자의 칼을 짚고는 말 위에 뛰어 타매 소문이 미치는 곳에 용기가 백배 난다 한다. 옛말에, “뜻이 있는 자는 일이 마침내 이루어진다.” 하였으니, 이는 어찌 절로 나오는 충의의 마음을 분발하고 조종의 길러준 덕택에 감동되어 세상에 쓰임이 되어 힘을 내는 자가 아닌가. 공업의 성취를 기대할 수 있겠도다. 나는 너의 뜻을 깊이 가상히 여기고 또 진중(陣中)의 군사들로 너와 힘을 같이 하여 국난에 달려오는 자도 역시 충의의 선비 아닌 이가 없음을 생각하여 특별히 충용(忠勇)이란 군호(軍號)를 주며, 근신(近臣)을 보내어 가서 너의 군사를 보게 하고, 인하여 위무하여 너의 나라 위해 충성 바치는 뜻을 표창하노니, 너는 마땅히 공경히 훈계하는 명령을 받아서 군사의 마음을 격려하고, 창과 갑옷을 정돈하여 별처럼 달리고 번개처럼 가서 원수의 지휘를 받아서 추한 종류를 섬멸하여, 기특한 공을 세운다면 벼슬과 상(賞)은 내가 너에게 아까지 않을 것이며, 너희 부하들도 그 공로에 따라서 벼슬과 상을 함께 받으리니, 너는 힘쓸지어다. 나의 명령에 어김이 없으라. 이렇게 교시하노니, 뜻함을 응당 알 것이다.
○ 충청도 홍산(鴻山)에 사는 송유진(宋儒眞)이 반역을 꾀하여 밀서(密書)를 전주에 보내기를, “임금의 죄악은 고쳐지지 않고 조정의 당쟁은 풀리지 않았다. 부역이 번거롭고 중하여 민생이 불안하다. 목야(牧野)에서 매처럼 드날리니 비록 백이숙제(伯夷叔齊)에게 부끄럼은 있으나 백성을 불쌍히 여기고 죄인에 벌주니 실로 탕무(湯武)에 빛이 되리로다. 운운.” 하였다. 어느 사람이 고변(告變)하면서 의병장 이산겸(李山謙)이 반역한다고 고하매 이산겸이 전주 무군사(撫軍司)에 변명하러 갔다가 잡혀 죽었다. 역적의 변이 어느 시대에 없으리오마는 그러나 임금과 신하의 분의는 지극히 분명하여 하늘은 높고 땅은 낮음과 같아서 문란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적신(賊臣) 동탁(董卓)도 한(漢)을 붙든다고 핑계하였고, 난신(亂臣) 장방창(張邦昌)도 통곡하며 스스로 변명하였으니, 이들은 모두 난적의 괴수이면서도 난적이란 이름을 얻기는 싫어한 것이다. 지금 이 역적 송유진은 국가가 침략을 받는 기회를 타서 흉악하고 패역(悖逆)한 글을 지어 위로는 임금을 욕하고 아래로는 어리석은 백성을 꾀어서 명분(名分)이 거의 문란할 뻔하고 강상(綱常)이 거의 무너질 뻔하여 난리 중에 병든 백성들로 하여금 마침내 옥과 돌이 함께 타는 화를 면치 못하게 하였으니 통분하기 그지없다.
○ 충용장군(忠勇將軍) 김덕령(金德齡)이 전주에 가서 동궁을 뵈었다. 동궁이 친히 북정(北亭)에 나와서 그 용력(勇力)을 시험하게 하자 김덕령이 투구 쓰고 갑옷 입고 말을 달려 곧 담양으로 돌아갔다.
○ 전 회덕 현감(懷德縣監) 박광전(朴光前)은 왕세자 저하에게 백 번 절하며 말씀을 올립니다. 국운이 중간에 불행하여 흉한 적이 날뛰어 삼경(三京)이 함몰되고 승여(乘輿)가 서쪽으로 파천하였으니 이것은 실로 천고에 다시 없던 변이었습니다. 다행히 황제의 은혜가 하늘과 같아 거룩한 위엄을 움직이니, 더러운 티끌이 잠깐 쉬어 한 구석에 물러가 둔쳤으니, 이것은 또한 천고에 다시 없던 경사입니다. 지금엔 승여가 환도(還都)하고 학가(鶴駕)가 남으로 내려오시어 우리의 군사 위력을 드날리고 우리 민심을 진정시켜 남은 백성들이 한관 위의(漢官威儀)를 다시 보게 되니, 무릇 혈기를 가진 자로서 누가 우리 임금의 아들이다라고 칭송하며 추대하지 않겠습니까? 인심이 분별하기를 생각하고 장수와 군사가 기운을 더하여 전복되려던 형세는 이미 돌려져서 회복될 터전이 장차 이루어졌으니, 모든 사람의 기뻐함을 어찌 이루 다 말하겠습니까? 신(臣)이 일찍이 시독(侍讀 왕자에게 글을 가르치는 관직)이 되어 특별히 은총을 입었으니 비록 말직에 있었으나 정은 심상치 않았습니다. 당초에 변이 일어날 때에는 길이 막혔고, 흉한 적이 이미 물러간 뒤에는 항상 병에 걸려 남궁(南宮)에 섶을 안으려는 원[抱薪之願]을 이루지 못하고 속절없이 두릉(杜陵)이 시사(時事)를 감상(感傷)하는 눈물만 흘렸다가, 마침 오늘날을 당하여 비로소 와서 호소하니, 더디고 늦은 죄는 만 번 죽어도 용서받기 어렵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시사가 예기하기 어려워지니 지혜 있는 선비도 계책이 없고, 흉한 칼날 지나는 곳에 용사도 손을 묶은 듯하여 성패(成敗)가 호흡(呼吸)하는 사이에 매였고 존망(存亡)이 순식(瞬息)간에 결정날 상황입니다. 말이 여기에 미치니, 진실로 한심합니다. 항간에서 사람들이 사사로이 의론하기를, “적병이 좌도에서 철퇴하여 우도로 옮겨서 모두 거제로 들어갔으니, 그 마음이 언제나 호남에 있는 것인데, 명 나라 군사와 우리나라 여러 장수는 모두 팔거(八莒)ㆍ정암나루[鼎津] 등 상류(上流)에 웅거하였으니, 적진과의 거리가 하룻 길도 안 됩니다. 만약 적병이 진해(鎭海)ㆍ고성(固城)을 경유하여 바로 섬진(蟾津)으로 향한다면 의령에 있는 군사는 이미 족히 믿을 것도 못 되고, 섬진 위아래 60리의 진은 모두 피로하고 굶주린 군사라, 흉한 적의 기침 소리만 들어도 벌써 간 곳을 모르고, 팔거ㆍ정암나루의 구원도 벌써 미치지 못할 것이니, 전일에 진주의 함락이 족히 밝은 증거가 된다. 구례에서 분탕하던 적이 철수하여 저의 진(鎭)으로 돌아간 것은 하늘의 도움이요 인력은 아니다. 명 나라 군사에게 청하고 원수에게 명을 내려 병력을 나누어 진주ㆍ순천 등지에 진을 치고 방비하면 섬진의 군사가 급할 때에 구원병을 얻어서 진주의 실패를 면하여 호남도 무사히 보전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이 말이 또한 이치가 있는 듯합니다마는 다만 장막 속에서 숫대를 놀리는 것곤외(閫外)의 절제는 그 정밀한 것이 어찌 항간의 의론보다 못하겠습니까? 이것은 반드시 그러한 이유가 있을 것이니, 신이 항간의 의론을 가지고 감히 결단코 좇아야 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선 조정의 의론에 부쳐 보아 가부를 시험할 것입니다. 민심을 두고 말하면 그것은 국맥(國脈)이 관계되는 바이라, 전에 평일에 있어 고을의 수령과 변방의 장수들이 침노하면 약탈하여 이익은 아래로 돌아가고 원망은 위로 돌아갔으니, 증자(曾子)가 이른바 민심이 흩어진 지 오래되었다는 것입니다. 근년 경인(庚寅)에 일본에 잡혀갔다가 돌아온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 나라에는 귀천(貴賤)도 없고 요역(徭役)도 없고 집집마다 곡식이 쌓여서 쓰기를 수화(水火)처럼 흔히 한다.” 하니, 변방 백성들이 이 말을 듣고 심히 부러워하였는데 임진의 변이 마침 그때에 일어나자 뭇 사람이 수군거림에 차마 듣지 못할 바가 있었습니다. 그 뒤에 적의 칼날이 미쳐 죽이고 불지르고 처자를 빼앗자 백성들의 마음이 비로소 원망하고 비로소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있게 되었으니, 이는 실로 우리나라의 다행입니다. 가령 저 적이 변방 백성을 선무(宣撫)하고 안위(安慰)하여 사탕발림을 하였더라면 민심이 어떻게 되었을지를 장차 헤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변이 난 뒤에 세민(細民)들이 호소할 곳이 없고 탐관들이 한이 없는 욕심을 방자히 하니, 말하자면 길어집니다. 아! 기왕의 인심은 이미 흩어졌거니와 장래의 인심을 수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방금의 일이 군사를 뽑는 것, 군량을 운반하는 것, 무릇 군무에 관한 일은 비록 심히 고통스러우나 생도살인(生道殺人)로 사세가 부득이하지마는, 긴하지 않은 공물(貢物)이나 명목 없는 납세에 대해서는 면제할 만한 것은 면제하여 이 백성들로 하여금 국가가 부득이한 중에 또 부득이한 은혜를 베푼다는 것을 알게 하면, 백성이란 것은 지극히 어리석으면서도 지극히 밝은 것이니 어찌 감동되어 돌아올 리가 없겠습니까? 오늘의 민생은 저 물에 뜬 풀과 같아서 조금도 생기가 없고, 오늘의 민심은 썩은 새끼로 말을 제어함과 같아서 심히 두려우니 백성을 몰아서 도적에게 보내 주는 것이 누구의 허물이겠습니까? 전하께서 남으로 오시어 만백성이 우러러 쳐다보아 일분(一分)의 은혜라도 받기를 원하오니, 마땅히 자주자주 글을 내려 수령들을 타이르고 변방 장수를 신칙하여 남을 해쳐 저를 이롭게 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며, 부로(父老)들을 불러 모아 어루만지고 구휼할 뜻을 표시하고 때로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항간에 드나들면서 백성의 고통을 물어서, 만약 여전히 변하지 않는 자가 있을 때에는 중하게 책하면 민생이 안정되어 민심을 이제로부터 수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 계란 때문에 대장의 재목을 버리는 것은 사람을 쓰는 도량이 아니며, 백성의 기름과 피를 짜내는 것이 어찌 국가를 수호하는 도리이겠습니까? 민심을 수합함이 정히 오늘의 급선무입니다. 물고기는 물에 의지하고 나무는 흙에 의지하고 사람은 먹는 데에 의지함이 그 이치는 일반입니다. 물고기가 물이 없으면 목마르고 나무가 흙이 없으면 마르고 사람은 먹을 것이 없으면 죽는 것인데, 먹는 것은 전답에서 나오니 전답을 다루지 못하면 먹을 것이 어디로부터 나오겠습니까? 거년에 흉년이 들어 모든 곡식의 수확이 전보다 반이나 줄어들었는데, 요역(徭役)의 무거움은 전보다 10배나 되어 해를 넘기기 전에 집이 벌써 텅텅 비었습니다. 지금 보는 바에 의하건대, 집에 조석의 먹을 것이 부족한 자가 반이 넘는데, 영남에 양식 운반하는 값과 주사격군(舟師格軍)의 양식이 매월에 쌀이 7ㆍ8석이나 되어 그것을 내고 나면 목숨 살아날 겨를이 없으므로 도망하고 유리(流離)하는 자가 서로 잇달아서 촌락이 비게 되고, 안고 붙들고 가는 이가 길에 잇달았고 굶어 죽은 시체가 길에 서로 베고 있어 참혹함이 차마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조금 잘 사는 집도 사사로이 저축한 것이 적발되어 관청에 보조하느라고 다 떨어지고, 전년 관곡(官穀)을 받은 것이 겨우 3분의 1이 되어 공사(公私)가 함께 곤궁하니, 식구는 어찌하며 군량과 종자벼[種租]는 어찌하리요. 이것으로써 말하면 적이 이르기 전에 나라의 백성이 먼저 뽑혀진 것이니, 오늘의 사세를 가생(賈生)으로 하여금 보게 하였더라면 어찌 통곡만 할 뿐이겠습니까? 백성이 농사 지을 절후는 이미 닥쳤는데, 혹은 종군하여 방비하러 멀리 가고 혹은 군사되기를 기피해 도망하고 혹은 일족(一族)을 피하여 돌아오지 못하여, 전답이 있는 자는 경작할 계책이 없고 전답이 없는 자도 소작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니, 이 형편으로는 좋은 전답이 장차 다 쑥대밭이 될 것입니다. 적이 만약 충돌하여 짓밟아 버린다면 그만이거니와 만약 피차에 버티어 해를 거듭한다면, 살아 남은 백성이 무엇으로 먹으며 방어하는 군사들은 무엇으로 군량을 하며, 백성이 어찌 백성이 되며 나라가 어찌 나라가 되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밭 갈아 먹고 우물 파서 마시는 것은 비록 스스로 생활하는 방법이나, 농사철을 어기지 않게 하는 것은 실로 왕도(王道)의 시초이니 마땅히 권농사자(勸農使者)를 따로 두어 유민(流民)을 불러 모아, 건장한 젊은이로서 군사에 뽑혀야 할 사람 외에 나머지 노약자(老弱者)나 뿌리 없는 부호(浮戶)는 위무(慰撫)하고 보존하여 안심하고 농사를 짓도록 하고, 관(官)에서 종자벼를 주어 전답의 다소에 따라 고루 나누고 혹은 부자집 곡식을 모집하여 부족한 이를 보충해 주고, 또 아전들이 뇌물 받거나 침노하는 폐해를 금지하여 갈고 심고 매는 데 때를 놓치지 않게 하면 이것이 현명한 선후책(善後策)입니다. 방금 군사 뽑는 사자와 곡식 모집하는 사자가 잇달았으면서 권농하는 일에는 주장하는 자가 없어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망종(芒種)의 절후가 4월 중순에 있는데 만약 4ㆍ50일 헛되이 보내면 벌써 어찌할 도리가 없게 될 것입니다. 수령이 백성의 일에 마음을 쓰는 이가 몇 사람이나 되는지, 혹은 주사(舟師)에 가고 혹은 지상전에 달려가고 혹은 조정에 심부름으로 출입하게 되니, 비록 백성의 일에 마음을 다하려는 이가 있어도 역시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마땅히 각 읍에서 각기 충후(忠厚)하고 부지런하고 일 잘 보는 한 사람씩을 선택하여 그 일을 맡게 하고, 또 권농사자가 돌아다니면서 감독하여 인력이 넉넉하지 못한 자나 종자벼가 부족한 자는 각별히 조처하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주면 오늘날의 우활(迂闊)한 듯한 계책이 마침내 후일의 훌륭한 계책이 될 것입니다. 아! 왜적이 득실득실하여 날뛰는 이때를 당하여 위에 아뢰올 다른 계책은 있지 못하고 이에 인심을 수합하여 권농하여 농사짓게 할 일로써 말씀을 올리니, 오활하고 절실하지 못하다는 기롱을 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50리밖에 못 되는 등(縢) 나라가 대국인 제(齊)와 초(楚)의 사이에 끼어 있었는데, 비록 맹자(孟子)의 재주로서도 계책을 낼 수가 없어, “이 계책은 나의 미칠 바가 아니다.” 하였고, 또, “힘껏 착한 일을 할 뿐이다.” 하였으니, 어리석은 신의 소견은 이와 같은 데 불과하며, 방어하고 공격하는 계책과 군량을 운반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각기 맡은 사람이 있으니, 이것은 칠실(漆室)의 걱정할 바가 되지 못합니다. 또 한 가지 아뢰올 말씀이 있으니 지난 임진년 변이 나던 처음에 전라 순찰사(全羅巡察使 이광)의 군사가 용인에서 궤멸하고, 절도사(節度使 최원)의 군사는 근왕(勤王)하러 멀리 가서 도내에는 비어서 지킬 사람이 없고, 고경명(高敬命)ㆍ조헌(趙憲)이 서로 계속하여 패하였으므로 신이 전 현감 임계영(任啓英)ㆍ진사 문위세(文緯世) 등과 더불어 의론하기를, “만약 불행하여 적에게 포로가 된다면 살아도 죽는 것보다 못하니 기왕 죽을 바에는 차라리 의(義)에 죽자.” 하고, 이에 버마재비가 앞발로 수레바퀴에 항거함과 같은 무모한 계책으로 향병(鄕兵)을 일으켰는데, 보성(寶城)은 실로 처음 일어난 땅이 되고 장흥ㆍ남원ㆍ옥과ㆍ곡성 등 몇 고을이 서로 호응하여, 임진년 6월부터 지금까지 20개월 동안에 선비들의 집에는 재물이 이미 다되어 현재 있는 수량은 겨우 한 달 밖에 지탱할 수 없으니, 양식 없는 군사는 머지 않아 스스로 무너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행재소(行在所)에 보고되었으므로 저이들 마음대로 스스로 해산할 수 없으니 실로 낭패입니다. 군사와 양식을 익호장군(翼虎將軍)에게 맡겨 합치는 것이 옳을까 합니다. 만약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좌의병(左義兵)이 계원(繼援)하는 것은 다섯 고을에 불과하고, 계의병(繼義兵)이 계원하는 것은 1도가 힘을 같이 하는데 계의병은 이미 파하였으니, 그 보성ㆍ장성에서 계원하는 자는 좌의병에 속하기를 허락하여 보리가 익기 전의 군량을 보충하게 하면 스스로 붕괴되는 군사를 구제할 수 있습니다. 청컨대, 무군사(撫軍司)에 명하여 의론해 처리하게 하십시오.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6일 충용장군 김덕령이 선문(先文)하기를, “길을 떠나 담양ㆍ순창ㆍ남원ㆍ운봉ㆍ함양ㆍ산음ㆍ단성ㆍ삼가ㆍ의령ㆍ함안ㆍ창원ㆍ김해ㆍ동래ㆍ부산ㆍ동해ㆍ대마도를 거쳐 일본 대판으로 향한다.” 하고, 또 영남에 다음과 같이 격문을 보내었다.
충용익호장군 김덕령은 공경히 영남 각 고을 여러 군자(君子)에게 고합니다. 아! 하늘은 앙화를 내린 것을 뉘우칠 때가 있고 나라는 항상 막히는 운수는 없는 것입니다. 정의(正義)를 잡으면 비록 위태했다가도 마침내 붙들어지고, 거꾸로 범하면 비록 강하더라도 반드시 멸하는 것은 이치가 원래 그러하고 사세가 그러한 것입니다. 이러므로 비상(淝上)의 적은 군사가 부견(苻堅)의 많은 군사를 꺾었고, 독부(督府)의 수군(水軍)이 능히 역량(逆亮)의 군사를 꺾었으니, 사실이 역사에 적혀 있고 때는 고금이 없습니다. 군사를 끌고 와서 두 번 해를 지나서 흉한 불길이 더욱 치성하여 언덕을 태우는 불과 같아 당당한 국세가 포개 놓은 알처럼 위태롭고 급박하여 백성들이 벌벌 떨어 왜옷을 입을 욕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사람의 성냄이 이미 극도에 달했으니, 귀신의 벌이 장차 내릴 것입니다. 저는 일개의 철없고 어리석은 이로서 궁벽한 시골에서 생장하여 뜻은 글 읽는 데 있었고 업은 활 쏘고 말 달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중간에 잘못 헛된 이름을 얻어서 장군의 막부(幕府)에 종사하다가 모친이 이미 늙었고 형이 또 전사하여 봉양할 사람이 없자 차마 멀리 떠날 수 없어 잠깐 군중에 있다가 도로 하직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위로 국치(國恥)를 생각하며 몇 번이나 밤중에 칼을 어루만졌으며 때로는 형의 원수를 분하게 여겨 매양 눈물이 밥을 적시었습니다. 가문에 화가 그치지 않아 모친이 이제 돌아가셨습니다. 가정에서 할 일을 대강 마치었으니, 몸을 나라에 바쳐야겠습니다. 종군(終軍)의 청함을 본받고자 하나 중엄(仲淹)의 상서(上書)를 아직 바치지 못했습니다. 마침 담양부사가 본도 순찰에게 잘못 천거하여 대의(大義)로 타이르고 나의 상복(喪服)을 중지시켜 나로 하여금 백 번 싸운 나머지의 군사를 수합하여 무딘 칼로라도 한번 베게 하였습니다. 스스로 돌아보고 생각건대, 몸에는 닭 묶을 힘도 없고 용맹은 재빨리 수레에 올라타기에 부끄럽습니다. 사람은 보잘것없는데 책임은 중하니 엎어질까 걱정입니다. 어찌하여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문득 초야(草野)의 천한 몸에게 맡겨진 것입니까? 실끝 털끝만큼도 갚지 못했는데 은총(恩寵)이 먼저 내렸습니다. 아! 군부(君父)께서 이미 난을 구하라고 맡기시는데 신자(臣子)가 감히 몸 바침을 사양하오리까? 나는 듣자오니, 의(義)를 배반하고 살기를 탐하면 용사도 겁쟁이가 되고, 충성을 분발하여 몸을 잊으면 나약한 자도 용감하게 된다 하니,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위해 죽겠다는 대의는 용맹이 될 수 있고, 죄 있는 자를 치고 역적을 멸하겠다는 정의는 족히 기개가 될 수 있습니다. 어찌 구구한 혈기(血氣)의 용맹으로 이 적을 처치하겠습니까? 이러므로 나의 둔한 자질을 스스로 채찍질하여 심부름하기를 허락하고 먼 데 가까운 데 격문을 돌려 날랜 이를 불러 모으니, 용처럼 날아오르고 범처럼 뛰는 무리와 장수를 베고 기(旗)를 꺾을 무리들이 모두 양식을 싸 가지고 멀리 따르기를 원하여 끓는 물과 불에 뛰어들기를 사양하지 않고, 팔을 뽐내고 통분함을 품어 전일에 세 번 패한 것을 부끄러워하고 손에 침을 뱉고 기운을 더하여 장래에 아홉 번 칠 것을 계책하니, 곧 죽을 저 종자를 날을 받아 놓고 소탕할 것입니다. 이에 이달 22일로 기약을 정하고 좋은 날을 가려 깃발이 동쪽으로 가리키매 중황(中黃)이 좌우에 벌였으며 오앵(烏櫻 용사(勇士)를 말함)이 앞뒤에 나갑니다. 철기(鐵騎)는 바람처럼 달리고 긴 창은 번개처럼 나가서 군사는 정예하고 기계는 날래며 의리가 바르니 기운이 장해집니다. 이것으로 적을 대적하면 누가 감히 우리를 당하리요. 병법(兵法)에 이르기를, “적을 알고 우리를 알면 백 번 싸워 백 번 이긴다.” 하였는데, 적들은 천리에 건너와서 객지에서 수년 지내는 동안에 기후가 다르고 수토(水土)로 병이 나서 날랜 기운은 이미 평양에서 떨어졌고 간담은 또 행주(幸州)에서 깨졌습니다. 전일에 정병이라 일컬었으나 지금은 말세(末勢)가 되었으며 또 하졸들이 많이 포로가 되었습니다. 협박으로 따라온 무리들이 어찌 부모 처자 생각이 없으리요. 집 떨어진 지 이미 오래여서 시름 탄식이 바야흐로 깊을 것입니다. 하상(河上)의 변이 장차 곧 날 것이니, 솥 가운데 물고기가 어찌 오래 가리요. 때가 무르익었으니 섬멸하기를 어찌 늦추랴. 아! 적이 온 뒤에 참혹한 화를 호남이 홀로 면하였고, 7도는 다 화를 입었는데 그중에서도 영남이 화를 받음이 다른 도보다 또 심하였으니, 문무사부(文武士夫)와 노약남녀(老弱男女)로 죄 없이 죽은 이를 어찌 헤일 수 있으리요. 아비가 죽어 자식이 고아가 되고 남편이 죽어 아내가 과부가 되고, 그 집을 불지르고 고향을 떠나서 초가집 기와집의 잿더미가 눈앞에 가득하여 낙동강의 동쪽 진양(晉陽)의 남쪽에는 인가의 연기가 끊어졌고, 춥고 배고픔이 극도에 달하여 사람이 서로 잡아먹고 굶어 죽은 시체가 길에 서로 베고 누워 원통한 울음소리는 위로 하늘에 사무쳐서 천 사람 백 사람의 원망함이 차마 말할 수도 없으니, 이것으로 본다면 여위고 약한 아이와 여자도 몽둥이를 들려서 적을 쳐야 할 것인데 젊고 건장한 사내가 어찌 칼날을 거두고 편안히 앉았으랴. 이는 정히 충의의 선비가 목숨을 바칠 날이며 호걸들이 수치를 씻을 기회라, 각기 공(公)과 사(私)의 원수를 생각하여 함께 고래[鯨鯢]를 잡아 죽일 것이어늘 하물며 장차 철수할 날이 멀지 않은 적들이 무시(無時)로 발악할 것이니, 이때에 미처 빨리 소탕하지 아니하면 전일의 화가 다시 조석에 있으리니 비록 뉘우치려 한들 이미 늦을 것입니다. 시기는 잃어서는 안되고 일은 두 번 시작하기 어려우니, 힘씁시다. 선비 백성들이여! 귀도(貴道)는 본시 절의를 숭상하였으니, 지금 이 적을 치는 일에는 사부(士夫)들이 반드시 응모(應募)하는 이가 있을 것입니다. 각 고을에서 충후(忠厚)하고 부지런하고 일 잘보는 사람을 선택하여 다소를 따라 각기 유사(有司)를 정하여 혹 용사를 불러 모으고 혹 말꼴[馬蒭]을 쌓아 놓고 혹 늙고 약하고 전장에 나가지 못한 자를 모집하여 군량을 운반하게 할 것입니다. 여러 군자는 각기 노력하여 잘 조처하고 계획해 주기를 원합니다.
22일 김덕령이 담양으로부터 군사를 이끌고 순창에 이르고 이튿날에 남원에 도착하여 광한루(廣寒樓)에 유진(留鎭)하여 날마다 군사를 교련하니 구경하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남원 유학(幼學) 최담령(崔聃齡)으로 별장을 삼았다. 최담령이 일찍부터 장군이란 헛 명칭이 있었다.
○ 도원수가 호남 역당(逆黨)에서 보내는 격문은 아래와 같다.
대개 들으니 국가의 위급한 때에 목숨을 바치는 것을 ‘순(順)’이라 하고 때를 틈타서 요행을 바라는 것을 ‘역(逆)’이라 한다. 순한 자는 하늘이 돕는 바요, 역한 자는 신(神)이 죽이는 바이다. 이치는 해ㆍ별보다 밝고 일은 도깨비에게 가리울 수 없는 것이다. 아! 너희들도 천성의 양심을 다 같이 가졌는데 어찌 앞에는 순하다가 뒤에는 역하는고, 하물며 솥에 물고기가 끓는 물에 든 것 같고 불난 집 들보에 노는 제비와 같다. 이런 장난을 하는 것은 전란 3년에 백성이 농사지어 편히 사는 즐거움을 잃었고, 국토는 개ㆍ돼지의 굴이 되어 부모가 어린애를 보호하기 어렵고, 손발이 스스로 심복(心腹)과 떨어져서 잠깐 흙탕물 속에서 장난하여 하늘 그물[天網]에서 빠져나가려 한 것이니, 정상이 불쌍한 일이지 마음이 어찌 그러하겠느냐. 지금은 흉악한 적이 이미 거북처럼 움츠러들고 국세는 날로 용이 날치듯 한다. 너희들을 잠깐 불문(不問)에 부친 것은 마음 돌릴 길을 허락한 것이요, 아직 두고 보는 것은 실로 개전할 시기를 기다린 것인데, 아직도 조가(朝歌)의 습성이 있어 광릉(廣陵)의 길을 막고 있다. 이것은 장강(張綱)을 만나지 못한 것이라 하필 우허(虞詡)를 기다리랴. 우리는 조종(祖宗) 2백 년의 은택을 입었다가 국가 천만세의 변을 당하였다. 몸에 겹갑옷을 입었으니, 주(周) 나라 백성이 창을 든 듯하고, 손에는 긴 칼을 두르니, 한(漢) 나라 군대가 창을 든 것과 겨룰 만하다. 옛 것을 고치고 새롭게 되는 이날을 당하여 어찌 옥과 돌이 함께 불타는 화가 있으랴. 항복 받는 막(幕)을 설치하여 바른 데로 돌아오는 사람을 기다리고 개과천선하는 문을 열어 골짜기에서 나오는 무리들을 받는다. 산과 숲은 원래 나쁜 것을 감춰주는 것이며 내와 못이 어찌 더러움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랴. 하물며 네 마음도 다름 아니라 잠시나마 목숨을 더 부지하려 함이리다. 이해를 설득시키노니 너희들은 귀를 기울여라. 일찍이 순과 역의 이치를 알아 빨리 충의의 본성으로 돌아오라. 너의 구렁이 구멍을 버리고 나의 군문(軍門)으로 와서 전에 없던 국치(國恥)를 함께 씻어 세상에 드문 공을 세운다면 산하대려(山河帶礪)의 맹세가 너희들의 거짓 약속과 비교해 어떠하며 금장옥부(金章玉符 높은 관직은 금장을 달고 옥부를 찬다)의 영광이 너희들의 거짓 벼슬과 비교해 어떠하겠느냐? 화를 돌려 복이 되고 위태로움을 버리고 편안한 데로 나아오는 것이니, 이것은 최상책이다. 찼던 칼을 풀어서 소를 사고 잡았던 활을 놓고 호미를 메어 너의 옛집에 돌아와 너의 옛 생업을 편히 하여 발해(渤海)의 땅이 안정되고, 영천(頴川)의 지방을 소요되지 않게 하면 황건(黃巾) 청독(靑犢 한 나라 말기에 반란을 일으킨 도적의 명칭)이 다 성인의 백성이 되고 죽게 되었던 넋이 마침내 태평의 영화를 누리리니, 이것은 다음가는 계책이다. 혹시 그릇된 생각을 고집하고 죄를 겁내어 항복하지 아니하여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아 더욱 많은 사람의 미움을 사고 산돼지나 긴 배암처럼 함부로 잡아먹는 독을 피우면 이것은 옛사람의 이른바. “천하의 사람이 다 드러나게 죽이려고 할 뿐 아니라, 또한 땅속에 있는 귀신도 이미 남몰래 베려고 의논하였을 것이다.” 함이다. 나는 마땅히 곰 같은 군사를 거느리고 범ㆍ표범 같은 장사를 몰아서 생포할 것을 잠깐 늦추고 먼저 죄를 문책할 것이다. 태산이 새알을 누르는 것과 같으니, 누군들 살아남을 종자가 있으리요. 불이 언덕을 태우는 것 같아서 쓸 수가 없으리라. 비록 황소(黃巢)와 흑달(黑闥 당 태종(唐太宗)에게 잡혀 죽은 도적)의 죽음을 면하려 한들 되겠느냐? 이것은 계책이 없다고 할 것이니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아! 지금 이 적변(賊變)은 옛적에는 없던 것이라, 위로는 종묘 사직의 통분함이요 아래로는 가정의 참혹함이라. 너희들 중에는 어찌 부형이 칼날에 죽고 처자가 더러운 욕을 당하고 집안의 세업을 탕진하고 백년을 살아온 터가 잿더미로 바뀐 자가 없느냐? 생각이 이에 미치매 나도 모르게 이가 갈린다. 너희들은 왜 동지를 모아서 공사(公私)의 분을 씻지 아니하고, 도리어 걸의 개가 요를 보고 짖고[桀犬吠堯] 나는 나비가 등불에 덤비어 자식으로서는 부형의 원수를 잊고 신하로서는 임금의 은혜를 배반하면서도 오히려 하늘을 쳐다볼 얼굴이 있고 땅을 밟을 발이 있느냐? 나의 격문을 보고는 응당 눈물을 흘리는 이가 있을 것이다. 마땅히 속히 앞날의 버릇을 고칠지어다. 어찌 좋은 계책을 도모하지 않는고. 하물며 시기는 잃어서는 안 되고 기회는 두 번 오기 어려운 것이다. 너희들이 만약 나의 격문을 보면 머지 않아 마음을 돌릴 것이니, 너의 백골에 살을 부쳐주고 너의 죽은 것을 살려주는 것이니, 하늘에 대해서는 순(順)이 되고 사람으로서는 반역이 되지 않는 것이다. 만일 관망(觀望)하여 이리저리 끈다면 사람들이 모두 너희들의 몸을 해치려 하고 너희들의 살을 먹으려 할 것이니, 너희들의 까마귀처럼 어울리고 개미처럼 모인 형세가 어찌 능히 천벌을 면하겠느냐. 옛적에 대연(戴淵)이 육기(陸機)에게 항복하여 마침내 명장(名將)이 되었고, 서선(徐宣)이 한(漢) 나라에 항복하여 마침내 봉(封)함을 받았다. 이에 단거(單車)로 타이름을 잠깐 멈추고 먼저 한 종이의 글을 통지하노니, 어찌 너희들의 전일 죄악을 생각하랴. 후회가 없도록 하라. 종사관(從事官) 전적(典籍) 안희(安喜)가 지었다.
○ 이빈ㆍ선거이가 갈리고 이일(李鎰)로서 순변사를 삼고 이시언(李時言)으로 전라 병사를 삼았다. 이일이 경성으로부터 바로 의령으로 내려와서 주둔하였다.
○ 충청도 역적 송유진(宋儒眞)이 처형되었으므로 중외 대소 신료 기로 군민 한량인(中外大小臣僚耆老軍民閑良人) 등에게 다음과 같이 특사(特赦)하는 글을 내리다.
왕은 이르노라. 흉한 역적이 음모를 하여 이미 베이는 형벌은 거행하였으나 과실로 된 죄는 특사(特赦)하여 이어 흐뭇한 은혜를 베푸노라. 상벌을 분명히 하는 데 포고함을 어찌 늦추랴. 나는 덕이 천박한 이로서 과분하게도 큰 업을 이어받았다. 운수가 불행한 때를 당하여 종묘 사직이 수모를 겪고 전란이 오래가니 백성들을 걱정케 하였다. 휘파람으로 모인 무리들이 감히 흉악한 계획을 할 줄이야 어찌 뜻하였으랴. 역적 송유진 등이 국가가 위급한 때를 틈타서 반역의 미친 글을 지어 왕래하는 사람을 꾀고 소문을 떠벌리자, 소민(小民)들이 그 정상(情狀)을 알지 못하고 모든 곳에 그의 도당이 있다 하여 전마(戰馬)와 무기를 거두어 관군(官軍)에 가탁(假托)하고, 저장하였던 사재(私財)를 빼앗아 군량을 삼고 장차 내응(內應)하는 무리들을 얻어 큰 화가 거의 경성에 미칠 뻔하였다. 그들의 모집하는 통문을 보니, 실로 천지에 통한 죄악이었다. 다행히 신(神)과 사람의 도움을 힘입어 사전에 고발이 있어 도둑 개나 쥐처럼 날뛰던 것들이 하늘 그물에서 벗어나기 어려웠고 풀뿌리처럼 얽힌 것들이 모두 법의 처단을 받았다. 이미 이달 25일에 역적 괴수 송유진 및 오원종(吳元宗)ㆍ김천수(金千壽)ㆍ유춘복(柳春福)ㆍ김언상(金彦祥)ㆍ송만복(宋萬福)ㆍ이추(李秋)ㆍ김영(金永) 등은 모두 능지처형(陵遲處形)하고 재산을 몰수하고 친척을 법대로 연좌(連坐)시키고, 잡아서 고발한 사람 홍우(洪瑀)ㆍ홍각(洪慤)은 모두 당상(堂上)의 자급(資級)을 주고 나머지 사람에게는 등급에 따라 상을 주었다. 이달 25일 새벽 이전에 범한 죄인으로 국가의 반역자나 자손이 조부모 부모를 구타하였거나, 처와 첩이 남편을 죽이려 한 것이나 종이 주인을 죽이려 한 것이나, 고의로 살인한 자나 독약을 쓰거나 푸닥거리를 한 자로 국가와 강상(綱常)에 관계되거나, 뇌물을 먹은 자나 강도 절도를 제외하고 잡범(雜犯)으로 사형ㆍ도형[徒]ㆍ유형[流]ㆍ부처(付處)ㆍ안치(安置)ㆍ충군(充軍)에 해당되는 자는 이미 발각되었거나 발각되지 않았거나 이미 결정되었거나 결정되지 않았거나 이미 배소에 이르렀거나 이르지 않았거나 다 특사한다. 감히 특사하기 전의 죄를 가지고 서로 고발하는 자는 고발한 그 죄대로 도로 처벌하고 벼슬에 있는 이는 각기 한 계급을 올리고 계급이 이미 극도로 높아서 더 올릴 수 없는 자는 친족에게 대신 준다. 아! 처단이 매우 엄하여 뭇 사람의 분노가 쾌히 씻어졌다. 마땅히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 중외(中外)에서 이 소식을 듣는 사람들에게 힘을 내도록 해야 할 것이다. 다만 생각건대, 우리 조종(祖宗)의 길러 놓은 백성이 난리와 굶주림으로 구렁에서 구르다 죽을 처지에 임박하였으므로 조그마한 역적의 헛말에 속은 것이라, 옥과 돌이 함께 탈 것을 염려하여, 협박에 따라간 무리들을 용서하여 혜택을 널리 입히려고 한다. 부역을 감하고 면제하여 시름하고 괴로워하는 마음을 조금 위로하고 흩어져 도망한 사람들을 불러 모아 보존하는 방법을 힘쓰려 한다. 각기 지극한 뜻을 알아서 깊은 걱정을 풀어 주길 바란다. 충심(衷心)에서 나온 이 포고를 잘 헤아려 아래에까지 인자한 은혜가 미치기 바란다. 화와 복은 자기 하기에 달렸으니, 벼슬하는 영광을 누리고 반복하는 무리들도 모두 새 사람이 되어 어깨를 쉬는 즐거움을 함께 하기 바란다. 이에 교시하노니, 잘 알리라 생각한다.
○ 동궁이 전주에 머물고 또 윤두수를 성주에 보내어 유독부(兪督府)를 보고 돌아왔다. 이때에 권율이 역시 성주에 있었다. 좌의병장 임계영이 부장(副將) 최억남(崔億男)과 더불어 남은 군사를 수습하여 하동에 들어가 지키면서 때때로 날랜 군사를 내어 고성ㆍ거제 등지에 매복하여 나무하고 풀 베는 적을 잡았다.
2월 2일 누른 안개가 사방에 막혀 하늘 해를 보지 못한 지가 거의 5ㆍ6일인데 호남ㆍ영남이 더욱 심하고 한 달이나 연달아 큰비가 와서 물이 났다.
11일 동궁이 전주로부터 공주로 향하였다.
○ 김덕령이 남원으로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영남으로 향하여 함양에 이르러 군사를 머물러 두고 가서 원수(元帥)를 보고 돌아와서 진주로 가서 주둔하였다.
27일 순변사 이일(李鎰)이 영남으로부터 남원에 도착하였다가 곧 순천으로 가서 주둔하였다.
○ 경상 좌변사가, “이달 20일 후에 왜적이 본토로부터 무수히 나와 구병(舊兵)과 교대하였습니다.” 하고, 원수에게 왜적의 실정을 보고하였다.
○ 청정(淸正)의 군사 수천 명이 또 경주로 향하므로 본도 좌병사 고언백(高彦伯) 등이 막았다.
3월 3일 도독(都督) 유정(劉綎)이 성주(星州) 팔거(八莒)로부터 군사를 옮겨 전라도로 향하여 9일에 남원에 도착하여 성중에 주둔하였는데 군사는 5천여 명이었다. 접반사 김찬(金纘)이 따랐다.
20일 청정이 소왜(小倭) 임소지(林小智)를 안음(安陰)으로 보내어 독부(督府) 유정을 보기를 청하므로 유정이 남원으로부터 안음에 가서 보고 돌아왔다. 여러 장수들이 임지를 죽이기를 청하니 유정이 말하기를, “대장이라면 용서 없이 죽이겠지마는 작은 장수는 죽여도 이익이 없다.” 하였다.
○ 배신(陪臣) 허욱(許頊)을 중국에 보내어 곡식을 내어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기를 청하였다. 고사(攷事)에서 나왔다.
4월 민간에서 곤궁하여 큰 소 값이 쌀 3두(斗)에 불과하고 세목(細木)값이 수승(數升)에 차지 않고, 의복과 기물은 팔리지도 않고 사람이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러 여자와 고아는 출입을 못하고, 굶어 죽은 시체가 길에 깔렸는데, 굶주린 백성들이 다투어 그 고기를 먹고 죽은 사람의 뼈를 발라서 즙을 내어 삼켰는데 사람의 고기를 먹은 자는 발길을 돌리기 전에 모두 죽었다. 슬프도다! 처음에는 왜적의 분탕질을 당하고 나중에는 탐관오리가 긁어 먹고 겸하여 흉년이 들고 부역은 중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다.
○ 중외(中外)에 애통교서(哀痛敎書)를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다.
왕은 이렇듯 이르노라. 무릇 우리 중외 인민은 나의 애통한 말을 들으라. 덕이 없는 내가 백성의 부모가 되어 오랜 동안의 편안함에 마음을 놓고 이미 잘 다스려진 줄 알고, 백성이 아래에서 원망하여도 내가 듣지 못하고 하늘이 위에서 성내어도 내가 알지 못하여, 점차로 화란(禍亂)이 일어난 지 3년이 되었으니 내가 이제 와서 후회한들 어찌 돌리리. 아! 흉한 칼날이 지나는 곳에 백골이 산과 같아 천리가 텅비어 인가의 연기가 끊어졌으니 칼날 아래 죽은 불쌍한 우리 백성이 몇 만인이며 유리(流離)하는 사람이 눈앞에 가득 찼으나 구휼할 방책이 없어 구덩이에 자빠지고 개울에 엎어져 서로 깔고 베개하였으니 굶어서 죽은 불쌍한 우리 백성이 몇 만인가? 살아 있는 자도 찔리고 상한 남은 목숨이 굶주리지 않은 이가 없어 쓸은 듯한 땅에 맨몸으로 서서 살아갈 수가 없는데도 토색질과 학대함은 평일보다 배나 되고, 재물은 더욱 다 되었는데 납세는 번거롭고, 힘은 점점 다해가는데 부역은 점점 중하니 불쌍한 우리 백성이 어찌 조정에서 부득이 한 것임을 생각할 겨를이 있으리요. 아! 사내아이를 가지고 곡식과 바꾼다는 것을 옛말로만 들었는데 오늘날에 있어서는 사람들이 스스로 자식을 버리니 어찌하여 백성이 도적이 되지 않겠는가? 풀뿌리로 연명한다는 것을 옛말로만 들었는데 오늘에 있어서는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으니 어찌하여 백성이 도적이 되지 않겠는가? 모두 나의 은택이 내려가지 아니하고 나의 어루만짐이 잘못되어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이런 지경에 이르게 한 것이다. 말이 이에 미치니 하늘을 이고 땅을 밟을 면목이 없다. 내가 깊이 불쌍히 여기니, 아픔이 내 몸에 있는 것 같구나. 아마도 나의 명을 받든 사신이 혹은 교만하고 횡포하거나 나의 지방을 지키는 수령들이 토색하는 것이 있어서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관원을 잘못 쓴 것도 역시 나의 죄이다. 백성은 나를 허물함이 마땅하니, 내가 어찌 사양하랴. 아! 우리 생민(生民)은 모두 나의 적자(赤子)이니, 내가 비록 임금답지 못하나 어찌 차마 앉아서 보고 안정시킬 방책을 생각하지 아니하랴. 각 도의 민력(民力)이 이미 다 되었으니 일에 따라 진상(進上 지방의 특산물을 궁중에 바치는 것)을 감면하고, 군사의 곤궁하기가 이미 극도에 달하였으니 과번(過番)한 자는 영원히 그 가포(價布)를 면제하겠으며, 지방의 수령이 이 어려운 때를 당하여 탐욕과 혹독함이 더욱 심하니 아울러 적발하면 낱낱이 엄중히 다스리겠으며, 군량과 쇄마(刷馬)의 일은 모두 색리(色吏)에 맡겼더니 원망이 길에 가득하였으니 재량해 변통하여 균일하게 하기를 힘쓰겠으며, 군사를 정예(精銳)하기를 힘써야 하고 많기를 힘쓸 필요가 없으니 뽑혀 온 군사 중에서 정예하지 못한 자는 모두 태거(汰去)하고 침노하여 소요스런 폐단이 없도록 하겠으며, 공(功)에 대하여 상을 주는 것은 마땅히 때를 넘기지 않아야 할 것인데도 문서가 날로 쌓여 고사(考査)하기가 더디어 공을 세운 사람으로 하여금 조정의 상을 받지 못하게 되니, 모두 있는 곳에서 스스로 말하면 감사가 즉시 보고하여 상이 지체됨이 없도록 하겠노라. 백성의 곤궁함이 이때와 같음이 없어서 이미 거꾸로 매달린 듯한 원망이 극에 달하였으니 어찌 제거해야 할 폐단이 없겠느냐? 방금 십분 강구하여 백성에게 편리하도록 힘쓰겠다. 아! 무릇 우리 중외(中外)의 백성들은 나의 지나간 허물을 용서하고 내가 장래에 새로워질 것을 허락하여 지금은 우선 참고 견디어 다른 날 태평할 때에 각기 생업을 편안히 하면 즐겁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이에 교시하노니 잘 알리라 생각한다.
○ 초야(草野)의 보잘것없는 신하가 엎드려 애통(哀痛)의 교서(敎書)를 보고 깊이 성상(聖上)의 인자하신 은혜에 감동되고, 소민(小民)들의 곤궁하고 박절함을 크게 분하게 여겨 이 한 목숨 돌보지 않고 감히 다음과 같이 진술합니다.
8도 가운데 호남이 겨우 목에 숨이 붙었는데 백성이 곤궁하기는 이 도가 더욱 심하여 굶어 죽은 송장이 들에 쌓였으며,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고 사방이 황폐하여 쑥대가 들을 덮었고 불쌍한 남은 백성들이 거의 다 죽게 되었다. 우리 성상께서 들으시고 불쌍히 여기시어 곧 위의 교서를 각도에 반포하시어, 첫째로 안정시키고 위무하기 위하여 우선 진상(進上)을 감하고 가포(價布 진상 물품에 대가(代價)로 내는 포목)를 면제하여 백성의 힘을 펴주려 하여 당신을 박하게 봉양(奉養)함을 관계하지 않고, 군량 운반을 잘 살피고 쇄마(刷馬)의 증발을 균일하게 하여 백성의 괴로움을 쉬게 해주어, 간악한 관리의 폐단을 누르고 군사를 뽑느라고 침노하며 소요스런 폐단을 막고, 공 있는 사람이 상 받을 길을 열었다. 방백(方伯)은 마땅히 국가와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여야 할 자들이니, 애써서 글을 돌려서 백성의 잡역(雜役)을 덜게 하고 농사를 권장하고 혹은 도사(都事)를 혹은 차원(差員)을 보내어 민간에 드나들면서 백성의 고통스러운 바를 묻게 하여 임금의 말씀을 따르고 임금의 뜻을 받들어야 하거늘 수령들은 우리 임금의 신하가 아니란 말인가? 지극한 임금의 은혜를 받지 않았단 말인가? 임금의 뜻을 받들지 아니하고 백성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교서(敎書)를 보고는 소매 속에 넣고 발표하지 아니하고, 창고에 곡식을 쌓는 것은 군량에 대비함이라 칭하고, 도사나 차원이 온다는 것을 들으면 군량을 핑계대고, 부정을 적발하는 일과 진상을 감하는 것과 가포를 면제하는 것에 대해서는 백성의 귀를 막고 구태를 그대로 지니고, 군량의 조달과 쇄마의 증발에도 교서는 들은 체도 않고 전보다 배나 남용하고, 군사는 정예함을 위주로 하여 태거하라는 명령에 대해서는 더욱 교서를 다행으로 알아 이에 의거하여 더욱 조종하여 부자는 정예하지 못한 군사로 돌리고 가난한 백성은 정병(精兵)으로 돌린다. 더구나 공을 상주는 은전은 직책 가진 자의 뜻밖의 일이다. 친근한 이 가운데서 드러내는 일을 마지 않아 사람들의 말에 상관도 없이 제 마음대로 보고하여 상세한 증거가 없는 자도 문득 높은 계급에 올랐고, 구휼(救恤)하라는 명령은 수령들이 긴요치 않게 여기는 바여서 관청의 창고에 저장한 곡식을 제 것으로 만들고, 반 섬의 벼와 두어 말의 콩으로 구휼한다는 이름만 내고 밤낮으로 애써서 계획하는 것이 가족의 풍족한 생활과 권문(權門)에 붙을 길과 금은과 비단을 사들이기에 욕심이 한이 없고, 창고의 곡식을 다 소비하고 거의 없어지면 도리어 민간에 흩어져 있다고 허위 문서를 꾸며서 추수 때가 되면 백성이 갚지 않아 결손되었다 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하되, 혹시 진위(眞僞)를 분석하다가 도리어 곤장을 맞아 죽는 이도 있으므로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고, 묵묵히 납입하여도 끝이 나지 못하였다. 만약 뒷날 병신년에 체찰(體察) 이원익(李元翼)이 감면해 주는 어진 정사가 아니었더라면 곡식은 보지도 못한 불쌍한 우리 백성들이 반드시 모두 곡식을 먹은 자에 손이 죽었을 것이니, 위태롭고도 위태로웠다! 슬프다! 이때에 전염병이 겸하여 치성하여 굶주린 백성이 더욱 죽었으니, 국운과 인명의 불행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 권율이 중 총섭(摠攝) 유정(惟政)에게 청정(淸正)을 서생포(西生浦)울산의 포명(浦名) 에 가서 만나보고 화호(和好)로써 타이르도록 하였는데, 청정이 말하기를, “3도를 베어 일본에 속하게 하면 군사를 파하고 귀국하겠다. 운운.” 하였다.
○ 배신(陪臣) 윤근수(尹根壽)를 북경에 보내어 세자(世子)를 책봉(冊封)해 줄 것을 청하였더니, 예부 상서(禮部尙書) 범겸(范謙) 등이 답하기를, “조선이 난리를 만나서 세자를 세워서 천하 인심을 붙잡아 둘 데가 있게 하기를 청하니, 자기의 종묘 사직을 위하는 계책으로서는 옳지 않음이 아니나, 혹 1도를 전적으로 맡겨서 약간의 권한을 주어 한결같이 절제사의 권한이 나누이지 않게 하였다가 나라가 안정이 되어 과연 난을 평정시킨 기이한 공이 있다면 새로 조처할 것을 의론하여도 무방하고, 책봉을 가벼이 할 수 없다는 등의 황제의 명령을 받들었으니 너희들의 이러한 말은 가벼이 허락할 수 없다.” 하였다. 고사(攷事)에서 나왔다.
○ 김덕령이 진주에 주둔하여 그 군사를 사역하여 둔전(屯田)을 크게 설치하였다. 또 원수가 전주 출신을 전속시키라는 조정의 명령으로 각 도의 의병을 파하고 모두 충용군에 속하게 하니, 전라 감사가 공문을 보내기를, “조정에서 이미 각 도의 의병을 파하고 본도의 좌우병도 또한 파하였으니, 그 나머지 의병 등도 그대로 두어 폐습(獘習)을 기를 수가 없다. 적개의병장(敵愾義兵將 변사정(邊士貞))은 나이 70이 된 늙고 병든 사람으로 수년 전장에서 그 공이 많았으니, 남원 교룡산성 수어장(守禦將)으로 정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가 지키게 하라.” 하였다. 이때에 처영(處英)이 이미 성 수축하는 역사(役事)를 마치었다.
5월 연달아 비가 왔다. 10일부터 11일까지 큰비가 와서 물이 넘쳐서 인가가 떠내려 간 것이 몹시 많았고, 26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비가 그쳤다.
○ 이때에 학가(鶴駕)가 공주에 머물렀다.
27일 전라 병사 이시언(李時言)이 산음(山陰)으로부터 남원(南原)에 이르러 다음날 전주로 향하여 그 뒤에 영남으로 도로 들어갔다.
○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 것이 이에 이르러 더욱 심하여 골육(骨肉 부자형제(父子兄弟))이 분리되어 길가는 사람 보듯 하였다. 내가 마침 성중(城中)에 이르렀을 때에 명 나라 병사 한 사람이 취하고 배가 불러 지나가다가 길 가운데서 구토를 하자, 굶주린 백성 천백 명이 일시에 달려가서 머리를 모아 주워 먹는데 약한 자는 달려들지 못하고 물러서서 눈물만 흘리는 것을 목격하였다. 독부(督府) 유정(劉綎)이 굶어 죽은 송장이 길에 쌓인 것을 보고 참혹히 여겨 진소(賑所)를 동문 밖에 설치하니, 굶주린 백성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천백 명의 무리가 거기에 힘입어 조금 연명하다가 그 뒤에 모두 그 옆에서 죽었다.
○ 각 도 곳곳에서 도적이 일어나서 천만 명씩 떼를 지은 것이 몹시 많았다. 남원 사람 김희(金希)ㆍ이복(李福)ㆍ강대수(姜大水) 등이 동촌(東村) 추동(楸洞) 깊은 골에 당을 모아 우도(右道)의 도적 고파(高波) 등과 서로 호응하여 대낮에 횡행하여 드나들며 도적질을 하여 무산(毋山) 북촌의 인민과 연결하여 저들에게 따르지 않는 자나 길가는 자나 촌사람이 관청에 가는 자나 거리에서 머리를 모아 의논하는 자는 가만히 그 도당을 보내어 묶어서 진중으로 끌고 가서 모두 죽였다. 백성들이 겁내어 거리에서 서로 눈짓하고, 길이 막히어 사람들이 통행하지 못하고 군사가 날로 성하나 관이 능히 금하지 못하니, 진안(鎭安)ㆍ장수(長水)ㆍ운봉(雲峯)ㆍ남원(南原)의 지경에 길가는 사람이 끊어졌다. 이때에 양맥(兩麥)이 성숙하였는데 큰 도적에게 붙지 않은 자가 함부로 도적질을 하여 밭을 지키는 사람들이 많이 살해를 당하였다.
○ 종성(鍾城) 지경 역수부 야인(易水部野人)과 깊은 곳에 있는 모든 종낙(種落)들이 끌고 침입하여 사람과 가축을 약탈하고, 또 영건보(永建堡)를 포위하므로 9월에 병사(兵使) 정현룡(鄭見龍)으로 하여금 군사 2천 명을 거느리고 본적(本賊) 석채(石寨)를 쳐서 함락시켜 머리 3백 급(級)을 베었다. 고사에서 나왔다.
6월 3일 새벽에 지진이 있어 오시(午時)에 천지가 진동하고 큰비가 오고 다음날 또 천둥이 치고 큰비가 왔다. 원수 권율이 영남으로부터 남원에 도착하였다가 다음날 구례로 향하여 영남으로 돌아가 산음(山陰)에 주둔하였다.
○ 전일에는 민간이 비록 군색하였으나 혹 곡식을 저장한 사람이 있었으므로 소ㆍ말ㆍ잡물을 팔고 바꿀 곳이 있었고 또 관곡(官穀)을 내어 놓아 여러 곳에서 팔기도 하더니, 지금은 공사(公私)가 함께 고갈되어 시장에 한되의 쌀도 없었다. 이때에 소ㆍ말이 있는 자가 명 나라 병사에게 파니, 하루에 소 1백 마리를 도살하고 사경(四境)에 소ㆍ말ㆍ닭ㆍ개도 역시 다 없어졌다.
○ 전주 부윤 홍세공(洪世恭)으로 본도 순찰사를 삼고, 이정암(李廷馣)은 도로 전주 부윤이 되고, 김경서(金慶瑞)는 경상 우병사가 되었다.
○ 김희(金希) 등이 여러 번 거창ㆍ안음ㆍ함양 지방에서 도적질하므로 본도 우병사 김응서(金應瑞)가 원수의 명령을 받아 수색하여 잡게 하였더니, 군사가 무너져 퇴각하였다. 권율이 또 상주 목사 정기룡(鄭起龍)으로 독포대장(督捕大將)을 삼아서 김희를 토벌하였다. 이때에 영남 사람 임걸년(林傑年)이 또한 도당을 모아 지리산 반야봉에 주둔하고 출몰하며 도적질을 하였다.
7일 천둥이 치고 큰비가 왔다.
○ 경상 우병사가 원수에게 보고하기를, “언양군(彦陽郡)에서 온 보고에 적중(賊中)에서 도망쳐 온 사람이 말하기를, ‘새 왜놈이 본토로부터 나온 것이 전일의 3배나 되는데 세 길로 나누어 대명(大明)에 범하기를 목표로 하여 한 대는 제주로부터 서해ㆍ의주로 향하고, 한 대는 진주ㆍ남원을 경유하고 한 대는 선산ㆍ상주를 지나 전과 같이 경성으로 올라와서 모두 의주(義州)에 모이기로 약속하였다.’ 하오니, 내지(內地)의 방비를 날로 새롭게 조치할 일로 명령함이 어떠하옵니까?” 하였다.
○ 이때에 3도 수사가 여러 장수를 인솔하고 모두 한산도 통영(統營)의 휘하(麾下)에 유진(留鎭)하였다.
14일 순찰사 홍세공이 전주로부터 남원에 도착하여 그대로 머물렀다.
○ 승지 이덕열(李德悅)을 남원으로 보내어 독부(督府)에 문안하게 하였다. 25일에 이덕열이 남원에 도착하여 김찬ㆍ홍세공과 유정을 모시고 연회를 베풀고 다음날에 승지는 경성으로 돌아가고 감사는 전주로 돌아갔다.
○ 영남 여러 둔(屯)의 왜적들이 오랫동안 수자리[戍]에 노역하는 것을 싫어하여 우리나라에 항복하여 붙는 자가 많이 있었는데 김응서(金應瑞)가 항복받은 것이 거의 1백여 명이 되었다. 그 괴수는 김향의(金向義)인데 그 무리들과 더불어 전공을 많이 세워 벼슬이 통정(通政) 가선(嘉善)에 이르렀다. 그 뒤 30년간에 항왜(降倭)들이 밀양 지방에 모여 살아 농사와 길쌈에 힘쓰고 자손을 길렀는데, 그 마을 이름이 항왜진(降倭鎭)이다. 항복한 왜구로서 우리 나라에 공이 없는 자는 서북 지방에 놓아 살렸다가 뒤에 다 베어 죽였다.
○ 유정(劉綎)이 군사를 철수하라는 황제의 조서(詔書)를 받고 길을 출발하기로 하였다.
7월 13일 두 무지개가 해를 꿰었다. 이때에 동궁이 공주(公州)에 있으면서 좌의정 윤두수(尹斗壽)를 남원에 보내어 독부(督府)에게 더 머물러 주기를 청하게 하였다. 22일 윤두수는 임실로부터 남원에 도착하고 권율이 또한 산음으로부터 와서 독부를 모시고 연회를 베풀고 더 머물러서 백성을 살려주기를 청하고, 지방의 인민들이 또한 뜰에 들어가 울며, “천병이 한번 돌아가면 적이 반드시 충돌할 것이니, 원컨대 조금 더 군사를 머물러 두어 인명을 구해 살리시오.” 하니, 유정이 조서를 내어 보이며 머물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27일 윤두수는 공주로 돌아가고 다음날 권율은 산음으로 돌아갔다. 순변사 이일(李鎰)이 순천으로부터 남원을 지나 영남으로 향하였다.
유 독부 유진 대방비(劉督府留鎭帶防碑)를 다음과 같이 세웠다.
만력 임진(萬曆壬辰)에 왜놈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왔으므로 황제가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치게 하였다. 대군이 이르자 평양에서 위엄을 보이고는 드디어 군사의 경계를 늦추고 타일러서 스스로 퇴각하게 하여 삼도(三都)가 차례로 수복되었다. 적이 이미 퇴각하여서는 해안에 머물러 둔치고 여러 번 화친하기를 청하므로, 이에 조정에서 의론하여 여기에 와 머몰러서 진정시키고 복종시킬 만한 한 사람을 선택하여 일을 완성하게 하였는데, 독부 유공이 실로 이 소임을 맡아서 오랫동안 영남에 있어 적이 두려워하고 복종하는 바가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여기에 진(陣)을 옮겼는데 한군(漢軍)을 단속하여 도로에서 약탈하지 말며, 또 백성들이 사는 곳을 침노하지 못하게 하고, 또 굶은 백성을 구휼하기 위하여 군량을 절약하고 금을 덜어내어 황제의 덕택을 만리 밖에 퍼지게 하니, 어진 사람이 이익을 줌이 넓도다. 황명(皇明)의 위엄과 덕이 사해(四海)에 끼쳐져 장수된 이가 싸움 잘하는 것만으로 공(功)을 삼지 않으니, 이것이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아니하고 우리 동방을 안정시켜 준 것이 천지의 조화가 자취가 없는 것과 같았으니, 누가 능히 형용하여 표시하리요. 지방 사람들이 서로 모여 태수(太守)에게 고하기를, “우리들이 난리를 모르고 두려울 것이 없어 편안히 살아 생업을 즐긴 것이 그 누구의 힘입니까? 청컨대 돌에다 새겨 일이분(一二分)의 공적이라도 기록하도록 하소서.” 하므로, 태수가 허락하고 그 비용을 주었다. 드디어 그 대략을 추려서 글을 짓노라. 왜적이 우리를 침노하매, 황제가 명하여 토벌하셨네. 실로 깊이 생각해 주심이니, 신과 보[申甫]가 여기 오셨네. 적을 바닷가로 몰아내니, 감히 어기지 못하였네. 끝내 무력을 쓸 것이 아니므로 이에 군사 돌릴 것을 명령하셨네. 여기 남아 머무는 범 같은 신하는 산에 있는 위엄이로다. 용맹하고 지혜로우며 인애(仁愛)를 지니었네. 온화한 안색으로 안과 밖을 일체로 보셨네. 거하는 자는 가정에서 편안하고 떠돌아 다니는 자는 죽음을 늦추었네. 이렇게 장수 노릇하면 어디로 간들 성공하지 못하랴. 적이 간 것은 누구의 힘이며 적이 오면 누구를 믿을까? 천자께서 밝고 성스러워 우리에게 높은 성(聖)을 빌려 주셨네. 공(公)이여! 돌아가심을 빨리 하지 말고 은혜를 끝까지 베푸소서. 통정대부 전 목사 정염(丁焰) 지음. 글 가운데 처음에는 낙상지(駱尙之)ㆍ송대빈(宋大빈贇) 두 장수가 대방(帶方)에 주둔하였다는 말이 있었으나, 송대빈은 남원에 있으면서 군사를 단속하지 아니하여 관아(官衙)를 침노하여 소요가 일게 하였으므로 고(故) 부사(府使) 조의(趙誼)가 두 장수의 공을 기록하지 말게 하였다. 송대빈은 비록 그러하였으나 낙상지는 원통한 것이다.
○ 남원 동촌의 적은 병정을 나누어 사방으로 나가 양남(兩南) 산군(山郡)을 약탈했다.
8월 2일 도독 유정이 군사를 거느리고 경성으로 향하였는데 접반사 김찬(金瓚)이 따랐다. 중군(中軍)이 다만 1천여 군사를 거느리고 남원부에 머물렀다. 처음에 명 나라 병사가 각기 우리 여자들에게 장가들어 호남ㆍ영남에서 살림을 차리고 살다가 이번에 철수할 때 모두 따라갔는데 산해관(山海關)에 가서 들어오지 못하게 하므로 방자(房子)들과 짝을 맞추어 살았다. 전후에 이와 같은 것이 거의 수만에 이르렀다. 그 뒤 만력 36년 기해(己亥)에 모두 찾아왔다. 독부(督府)가 본시 아들이 없었는데 대구에 주둔할 때에 선산 사노(私奴)를 얻어 살았다. 이번 돌아갈 때에 데리고 갔는데 유상공(劉相公)을 핑계하고 기찰(譏察)에서 벗어났다. 사천(泗川)에 이르러 아들을 낳았는데 정실(正室)이 받아 길렀다. 뒤에 무술년 봄에 동정(東征)할 때에 그 여인을 데리고 왔는데 은 수백 냥을 본주인에게 속납(贖納)하였다.
○ 조의(趙誼)가 파면되고 충청 조방장(助防將) 이복남(李福男)으로 남원 부사 겸 본도 조방장으로 삼았다.
12일 독부중군이 남은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로 향하였다가 모두 명 나라로 돌아가고, 다만 파발(擺撥) 말을 달려 소식을 통하는 군사의 명칭이다. 만 설치하였는데 30리마다 5명을 두어 북경에서 부산진까지 통하는데 길은 호남을 경유하였다. 본국에서도 역시 이와 같이 파발을 설치하였다.
13일 감사 홍세공(洪世恭)이 전주로부터 남원에 도착하여 근읍(近邑)에 비밀 공문을 띄워 군대를 보내어 내적(內賊)을 잡게 하였다.
18일 홍세공(洪世恭)이 순시하여 운봉(雲峯)에 이르렀다가 20일에 구례로 향하였다.
○ 천조(天朝) 절강 영파부(浙江寧波府) 파총(把摠) 장(張) 이름은 잊었다. 이 수병(水兵)의 길을 탐색하여 살피는데 파총이 서해로부터 전라 좌수영에 대어 남원에 와서 머물다가 경성을 경유하여 명 나라로 돌아갔다.
○ 독포대장(督捕大將) 정기룡(鄭起龍)이 이복(李福)을 잡아 죽이니, 남은 도당이 김희(金希)에게 합쳤다.
9월 학가(鶴駕)가 서울로 돌아갔다. 조정에서 체찰사 윤두수(尹斗壽)를 보내어 김덕령(金德齡)에게 적을 치기를 독촉하였다. 윤두수가 경성으로부터 남원에 와서 머물면서, 부하 도별장(都別將) 선거이(宣居怡)와 종사관 두 사람을 시켜 수행하는 군사와 내지(內地)의 유방군(留防軍) 수천 명을 거느리고 구례로부터 고성으로 들어가고, 또 도원수ㆍ통제사ㆍ충용장에게 명령을 전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고성에 모여서 거제의 적을 치게 하니, 권율이 산음으로부터 사천에 와서 여러 장수를 독촉하여 들여보내는데, 이순신(李舜臣)이 전선 50여 채를 거느리고 한산도로부터 나와서 영접하였다. 바다에 내려올 때에 곽재우(郭再祐)가 김덕령에게 말하기를, “지금 들으니, 이번 걸음을 장군이 원수에게 자청하여 된 것이라 하니 그런 일이 있었소?” 하니, 김덕령은, “아니요.” 하였다. 곽재우가, “장군이 바다를 건너 적을 멸할 자신이 있소?” 하니, 김덕령이, “아니요.” 하였다. 곽재우가, “국가에서 믿고 일을 시작하는 것도 장군을 믿는 것이요, 군사들이 믿고 적에게로 달려가는 것도 장군을 믿는 것인데, 지금 장군의 말이 이와 같으니, 국가에서 누구를 믿고 일을 하며 군사들이 누구를 믿고 적에게로 달려가리요. 우리들은 모두 오늘날 쓸 만한 재주가 못 되고, 오늘의 일은 일개 장군의 명령을 따른 연후에라야 거의 희망이 있는 것이니, 원컨대 장군은 한 마디 말로 결단하여 여러 사람의 의심을 풀어 주시오.” 하였다. 김덕령은, “나도 역시 이번 일의 자초지종을 알지 못하오. 굴에 들어 있는 적을 어찌 치겠소?” 하였다. 곽재우는 길이 한숨을 쉬며 “아! 일을 알겠소. 오늘의 일은 장군의 용맹을 시험하자는 것이요. 장군의 이름이 왜적에게 크게 알려져 있기 때문에 기운 빠진 적들이 해안으로 퇴각하고 겁내어 움츠려 움직이지 못하는 것인데 혹시 지금 가벼이 전진했다가 약함을 보인다면 뒷날을 도모하는 계책이 아니오.” 하고, 곧 급히 원수에게 보고하기를, “왜적이 험한 데 웅거하여 도저히 어찌할 방책이 없는데 가벼이 나아갔다가는 또 장군의 위엄을 손상할 것이니, 오늘의 일은 실로 낭패입니다. 물러나 몸을 보전하면서 때를 기다리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하며 하루에 세 번 소식을 알렸으나, 원수가 듣지 않으므로 모든 장수들이 부득이하여 배에 올라 왜영으로 향해 전진하니, 적의 대진(大陣)에서 깃발을 두르며 성에 올라 기다렸다. 선거이가 김덕령에게 이르기를, “장군의 용맹을 이날에 보일 만하오.” 하였다. 김덕령이 두 손으로 충용익호장군의 기를 뱃머리에 세우고 음악을 베풀고 북을 치고 소리지르며 전진하였다. 배가 서로 가까워지자 철환이 비오듯 쏟아져서 겹쳐서 뚫지 않음이 없게 되자, 김덕령이 어찌할 도리가 없어 배를 끌어 퇴각하고 여러 장수들이 모두 본영으로 돌아왔다. 이러므로 장군이 더욱 여러 사람의 기대를 잃었고, 더욱 좌상(左相)에게 잘못 보여 마침내 목숨을 잃기에 이르렀다.
○ 곽재우로 진주 목사를 삼았다.
10월 내적(內賊) 김희(金希)가 진안ㆍ전주의 지경에 주둔하였는데 전주 판관이 군사를 내어 토벌하다가 군사가 무너져 돌아왔다.
9일 윤두수가 남원에 머무는데 권율이 영남으로부터 와서 보았다.
11일 홍세공이 남원에 도착하였다.
13일 좌상이 경성으로 돌아가고, 권율은 영남으로 돌아가고, 홍세공은 곡성으로 향하였다.
○ 권율이 전라병사 이시언(李時言)을 본도에 보내어 내적을 잡게 하니 23일 이시언이 영남으로부터 남원에 왔다가 곧 전주로 향하였다.
○ 내적 고파(高波)가 그 도당 8명을 거느리고 몰래 남원 남산 밖 이교점(梨橋店)에 이르렀으므로 점인(店人) 본부에 와서 고하였다. 판관 김유(金騮)가 군사 4백여 명을 내어 길을 나누어 전진하여 새벽에 몰래 포위하니, 적병이 조금도 동요하지 아니하고 조용히 밥을 지어 먹고는 활에다 화살을 매겨 돌출하여 관병(官兵)을 쏘아대니 관병이 무너져 도망하고 적은 산위로 도망하였다. 판관은 군사를 거두어 퇴각해 돌아오는데 고파는 숙성령(宿星嶺)에 달려 이르러 길목에 매복하였다가 김유가 지나가기를 기다려 일시에 돌발하매 우리 군사는 맞아 싸울 생각도 못하고 앞으로 달아나고 뒤로 퇴각하였다. 고파는 승세를 타서 추격하여 원주원(原州院) 밑에 이르러 김유의 말 안장을 쏘아 맞히니, 김유는 겨우 몸만 빠져나와 달아나 성중에 들어왔는데, 말 10여 필을 잃고 상한 군졸도 역시 많았다.
○ 이해에 목화(木花)가 흉년이 들어 거의 절종이 되었다.
○ 권율이 김덕령으로 제관(祭官)을 삼아 진주 전망(戰亡) 장사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 제문은 다음과 같다.
“아! 슬프도다. 하늘을 보니 아득하고 땅을 굽어보매 답답하구나. 한 조각 땅의 전장은 만고에 의로운 구역이로다. 눈물을 닦으며 잔을 올리고 성의를 다해 진술하네. 전쟁의 변이 어느 시대인들 없으리요마는, 슬프다! 우리 동방에 어찌 이런 날이 있는고. 흉한 칼날 이르는 곳에 전부가 건국(巾幗)이었네. 금성탕지(金城湯池)가 견고하지 못하여 함곡관(函谷關)이 닫히지 못했네. 하물며 이 진주에 적병 백만이 합세하였음에랴. 칼을 던지며 갑옷을 끌고 지킬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우리 장사들은 국가의 은혜에 보답하기를 생각하여 소리를 같이 하고 기운을 같이 한 이가 5백 명뿐이 아니었네. 죽기로 결단하고 날로 많은 적과 싸웠네. 사람은 순원(巡遠)이요, 성은 수양(睢陽)이었네. 산천이 기색이 동하고 해와 달이 빛을 잃었네. 아! 슬프도다. 용과 봉이 힘이 다 되었으니 이 적들을 어찌하랴. 밖에 개미 새끼 만한 구원병도 끊어졌으니 사방으로 돌아보매 하란(賀蘭)이로다. 양번(襄樊)을 구원할 이 없으며 누가 한단(邯鄲)의 포위를 풀어주랴. 독한 불길이 문득 솟구치매 밝은 날이 이미 어두웠네. 다시 무슨 말 하랴. 옥과 돌이 함께 탔네. 저 긴 강을 보니 노중련(魯仲連)의 동해로다. 신하되고 자식되었다가 무슨 죄 무슨 액운인고. 아! 슬프도다. 옛적에 신안(新安)이 있고 또 장평(長平)이 있었네, 백기(白起)는 속여서 섬멸했고 항우(項羽)는 포학하게 무찔렀네. 비록 애통하고 불쌍하다 하나 다 같은 언덕의 흙이라도 어찌 충의가 모인 이 성과 같으랴. 산처럼 높이 쌓인 전골(戰骨)이 모두 순국(殉國)함이로세. 비참하게 바람 서리 맞았고, 처량하게 별과 달이 비추네. 살아서 이미 열렬(烈烈)하였거니, 죽어서 어찌 귀신이 되랴. 만약 돌아와 묻힌다면 어느 곳이 선영인고. 아! 슬프도다. 여러 날을 싸우니, 북소리 쇠하고 기운 다 되었네. 성은 비록 함락되었으나 적도 역시 넋이 빠졌네. 길이 몰던 기세 꺾이어 국토에 결함 없었네. 수양(睢陽)과 더불어 앞뒤에 공이 한가지로다. 조정에서 제사를 내리니, 죽음을 위로할 뿐이 아니로다. 종정(鍾鼎)과 죽백(竹帛)에 공훈(功勳)이 부끄럼 없으리. 김덕령은 재주는 국사(國士)가 아닌데 외람되이 장수의 직책 맡았네. 군사를 모아 감격하여 이 한 굽이에 주둔했네. 분하여 일어나 앉아 칼로 땅을 찍고 길이 탄식하네. 오히려 충혼(忠魂)들을 저버렸으니 장부되기 부끄럽네. 박한 제수를 갖추어 감히 임하시길 바라오. 속절없이 영웅으로 하여금 원통한 눈물 흐르게 하도다. 아! 슬프도다. 백골을 만들었을지라도 그 영(靈)을 없애지 못하였으리. 응당 여귀(厲鬼)가 되고, 혹은 음병(陰兵 귀병(鬼兵))이 되고, 혹은 아래로 쇠나 돌이 되고, 혹은 위로 뇌성 벼락이 되어 능히 가만히 도와서 더러운 소굴을 소탕하고서야 혼령이 돌아와서 비로소 그 눈을 감으리. 아! 슬프도다. 진산(晉山)은 높고 높으며, 남강수는 출렁이네. 길고 긴 이 원한은 산이 높고 물이 길도다. 엎드려 바라건대, 흠향(歆饗)하옵소서. 안희(安喜) 지음
○ 왜놈 통역 요시라(要時羅)는 행장의 부하인데 경상 우병사의 진(鎭)에 나들면서 성의를 바치며 우리나라 사람 되기를 원하므로 우병사 김응서(金應瑞)가 특별히 후대하고 원수에게 보고하여 포상(褒賞)을 후히 주었다. 이러므로 무상(無常)으로 왕래하는데 저쪽에 돌아갈 적에는 아롱진 옷을 입고 여기 올 적에는 우리 의관을 착용하며 왜중(倭中)의 소식을 일일이 전해 주었다.
○ 이순신의 장계(狀啓)에 의하여 한산도에서 과거를 보여서 무신(武臣) 1백 명을 뽑아서 주사급제(舟師及第)라 칭하였다. 전주 급제ㆍ합천 급제ㆍ영유(永柔) 급제 등의 칭호와 같은 것이다.
○ 김덕령이 연달아 범 두 마리를 때려 잡아서 왜놈의 병영에 자랑하여 팔았다.
○ 순창(淳昌)ㆍ태인(泰仁)의 회문산(回文山) 안에 있는 도적이 그 수가 몹시 많아서 남원 동촌의 도적과 더불어 왕래하여 서로 연락하면서 대낮에 횡행하고 나들며 도적질을 하는데 근지의 관군(官軍)이 여러 번 패하였다.
11월 왜장 평행장(平行長)ㆍ의지(義智) 등이 요시라를 경상 우병사의 진으로 보내어 기일을 정하여 함안(咸安)에서 서로 만나 화친을 의론하자 하므로 김응서(金應瑞)가 원수에게 보고하자 권율이 조정에 급히 아뢰어 김응서로 하여금 가서 왜적의 실정을 탐지하게 하였다.
21일 김응서가 정예한 군사 1백여 명을 뽑아서 거느리고 먼저 함안 지곡현(地谷峴)에 이르니, 행장이 사람을 시켜 문안하더니 조금 있다가 현소(玄蘇)ㆍ죽계(竹溪)ㆍ조신(調信) 등이 군사 1백여 명을 거느리고 먼저 와서 먼 곳에서 말을 내려 걸어서 정청(正廳)에 들어와 서로 읍(揖)하고 초상(超床)에 앉았다. 현소 등이 먼저 말하기를, “성화(聲華)를 오랫동안 사모하여 매양 한 번 뵈옵고자 하였는데 오늘 외람되이 뵈옵게 되니, 지극히 황공함을 이기지 못하옵니다.” 하였다. 병사가 답하기를, “대인(大人)들이 전일에 우리나라에 내조(來朝)하였을 때에는 나는 마침 북도의 임지(任地)에 있어서 한 번도 보지 못했는데 지금 다행히 서로 만나니 매우 감사합니다.” 하였다. 현소 등이 답하기를, “오늘날 여기 온 것은 대명(大明)이 우리의 조공(朝貢)하기를 허락한 일을 의론하고자 한 것이니 사또께서는 성사할 도리를 가르쳐 주시면 어떠하겠습니까?” 하였다. 병사가 답하기를, “대명에서 조공을 허락하는 일은 나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행장ㆍ의지가 와서 참석한 뒤에 일을 의론함이 가합니다.” 하니, 그들은 “말씀이 옳습니다.” 하고, 침묵하고 한참 동안 앉아 있었다. 병사는, “당신들이 모두가 당관(唐冠)을 썼으니 마음도 당체(唐體)입니까?” 하니, 답하기를, “어찌 마음에 없이 당례(唐禮)를 본받겠습니까? 사또 앞에 와 뵈오려고 이렇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진시(辰時)에 행장ㆍ의지가 군사 3천여 명을 거느리고 앞에서 인도하는 창검이나 조총을 든 사람, 짐꾼이 거의 3백여 명이 길에 가득하게 이르러 장막 50보 밖에서 말에서 내려 대포를 세 번 쏜 뒤에 행장ㆍ의지가 일시에 칼을 풀고 걸어서 정청에 들어와서 서로 읍하고 초상(超床)에 앉았다. 3천 왜병이 일제히 연포(連炮)를 쏘고 일시에 고함을 치니 뭇 왜인들은 숨어 엎드려 고요하였다. 행장이 말하기를, “사또께서 추위를 무릅쓰고 먼저 이르렀으니 황송하옵고 황송합니다.” 하였다. 병사는 답하기를, “이름을 들은 지 이미 오래인데 지금 다행히 서로 보게 되니, 실로 우연함이 아닙니다.” 하니, 손을 모아 답례하고 말하기를, “오늘 아침은 매우 추워 상(床)에 앉기가 좋지 않으니 평좌(平坐)하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병사가 그 말을 따라서 평좌하니, 현소ㆍ죽계ㆍ조신은 꿇어앉고 행장은 간혹 위좌(危坐)하고 의지는 옴[疥瘡]이 올랐으므로 앉기가 불편하여 다리를 세우고 기우뚱하게 앉았다. 여러 왜추(倭酋)는 모두 두려운 마음이 있어 말도 잘 하지 못하였다. 행장이 말하기를, “오늘 어려운 위험을 헤아리지 않고 와서 사또를 뵈옵는 것은 우리의 소회를 진술하고자 함이니 터놓고 말씀해 주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병사가 답하기를, “나는 별로 털어놓고 말할 일이 없고 다만 대인의 말을 들어 그 가하고 불가함을 채택하여 원수부(元帥府)에 보고할 뿐입니다.” 하니, 행장ㆍ의지ㆍ현소ㆍ죽계ㆍ조신과 왜통역 요시라 외에는 좌우의 사람을 물리치고 병사의 앞에 머리를 모으고 말하기를, “일본이 천조(天朝)에 대하여 조공을 허락해 줄 것을 청한 지 3년이 되도록 결정을 얻지 못하여 멀리 타국에 와서 장수와 군사가 모두 고국을 그리워하여 하루를 보내기가 삼추(三秋)와 같습니다. 전일에 심유경(沈惟敬)이 천조에 왕래하여 이미 조공과 봉왕(封王)할 것을 허락하여 천사(天使)가 장차 나올 즈음에 조선과 유 총병(劉總兵)이 아뢰어 중지시켰다니 이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였다. 병사는 답하기를, “나는 아직 듣지 못하였습니다. 어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 말이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하였다. 행장이 말하기를, “대명 석노야(石老爺) 이름은 성(星)인데 이때에 병부 상서(兵部尙書)로 있었다. 가 요동에 있는 대인과 편지로 소식을 통하기 때문에 알았습니다. 원컨대, 조선에서 천조에 아뢰어 힘을 도와주면 세 나라가 화평해져 남은 백성이 편안히 살고 우리들도 귀국할 것이니 좋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병사가 답하기를, “우리나라에는 지금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조선과 일본은 한 하늘 밑에 함께 살 수 없는 원수인데, 더구나 천조에서 일본에 조공을 허락하는 일을 도울 수 있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일본이 군사를 일으켜 나온 것은 본시 조선을 공격하려는 뜻이 아니라 대명에 대하여 조공을 트고 화친을 청하려 하는 뜻인데, 조선의 장수들이 군사로 대항하므로 부득이 서로 싸워서 해를 끼친 것입니다. 이러한 곡절은 평화롭던 전일에 현소ㆍ조신ㆍ의지 등이 예조 판서 및 선위사(宣慰使)이던 이덕형(李德馨)ㆍ오억령(吳億齡)ㆍ심희수(沈喜壽)와 부산 첨사(僉使) 이의(李艤)ㆍ통신사(通信使) 여러분 앞에 이 뜻을 극력 진술하였는데도 귀국의 장수나 정승들이 다 신청(信聽)하지 아니하고 병기도 갖추지 않아 이렇게 패하였으니, 우리들도 역시 탄식하고 한하는 바입니다. 일본이 장차 조선에 의탁하여 대명에 아뢸 일로 군사가 건너오는 날에 문서를 부산 남문 밖에 걸었는데, 부산 첨사가 보지 않고 응전하여 우리 일본 군사를 죽이므로 부득이하여 그 성을 함락시켰고, 동래에 이르러 또 문서를 보여도 또한 답하지 아니하고 한갓 무기만 허비하여 일본 군사를 마구 쏘므로 또한 부득이하여 성을 함락시켰더니, 동래 부사가 갑옷 위에다 홍단령(紅團領)에 사모(紗帽)를 쓰고 손을 모아 교의(交椅)에 앉아 일본 군사가 칼을 휘두르며 돌입하여도 조금도 요동함이 없이 목을 베려 하는데도 조금도 안색을 바꾸지 않고 한 번도 눈을 들지 아니하고 입을 다물고 말이 없으므로 무지한 왜병이 머리를 베어 나에게 바쳤습니다. 나는 동래 태수에게 전부터 은혜를 입었으므로 곧 염습(歛襲)하여 동문 밖에 묻고 기둥을 세웠으니, 이것은 요시라가 자세히 압니다. 만약 유족이 있어 해골을 찾는다면 가리켜 드릴 생각입니다. 그의 첩은 여종 네 사람ㆍ 남종 두 사람을 거느렸는데 더러운 욕을 보이지 않고 대마도로 들여보내었더니 관백(關白)께서 말씀하시기를, ‘재상의 첩을 데려오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하여, 도로 동래로 보내어 조선에 넘겨주려 하였으나 그때에는 조선 사람이 하나도 출입하지 않으므로 통지할 수가 없어 그대로 부산에 두었다가 금년 3월에 관백이 도로 데려 왔습니다. 이 여인은 나이 30여 세인데 아들이 있다 합니다.” 하였다. 병사가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관계하였는가?” 하니, 답하기를, “재상의 고물(故物)이라 하여 더럽혀 욕보이지 아니하고 그 노비(奴婢)를 시켜 보호하고 있으면서 다행히 만약 화친이 되면 내보낼 생각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동래성이 함락할 때에 울산 군수로 이름은 모르나 수염 많은 자가 일본 군사에게 잡혀서 항복을 빌며 살려 달라 하므로 내가 일본이 요구하는 일과 조선의 화복(禍福)을 말한 서한(書翰)을 주어 내보냈는데, 그 사람도 역시 조정에 전하지 않아서 이 지경이 되었으니, 후회 막급입니다. 그 사람이 살았는지요? 이것은 우리가 조선을 괜히 해치려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3국이 화친할 일을 지시함이 어떠합니까?” 하였다. 병사가 말하기를, “일본이 천조로 향하려고 길을 빌려 달라 하였는데 우리나라는 대명 섬기기를 자식이 아버지 섬기듯 하므로 일이 되지 않은 것이니, 강화(講和)가 더딘 것도 우리나라의 허물은 아닙니다. 조선과 일본이 전처럼 좋게 사귀는 것도 오히려 어렵거늘 하물며 천조에서 조공을 허락하는 일이겠습니까. 제가 듣기로는, 대명이 왕을 봉하는 것과 조공을 허락하지 않는 것도 다 일본의 허물입니다. 심유경이 두 번째 강화를 약속하자 일본 군사가 해안으로 물러왔으니 이것은 하늘을 두려워하고 대국을 섬기는 뜻이요, 또 전날 이웃 나라 사귀던 의리를 잊지 않은 것이니, 두 대인이 사리를 살펴 잘 처치하는 것에 깊이 감복합니다. 이미 천조와 더불어 동래에서 강화를 약속한 뒤에 우리 진주를 함락시키고 우리 농민의 벼를 짓밟고 우리 남녀를 죽였습니다. 이러므로 우리나라가 두 대인의 강화하자는 말을 믿지 아니하여 비록 군사가 피곤하고 양식이 다 되어 스스로 세력이 약한 줄 알면서도 조정에 있는 신하들과 들에 있는 백성들이 다 죽은 뒤에야 말려고 합니다. 내가 전일에 좌도(左道)에 있을 때에 동래 사람에게서 세 대인이 우리나라에 성의를 표시한 일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특별히 이홍발(李弘發)을 보내어 뜻을 알아보았습니다. 예로부터 전쟁하는 데는 사자(使者)가 그 중간에 왕래한다 하였습니다. 이러므로 천병이 역시 두 대인과 청정에 서로 연락한 것이며, 지금 우리나라 조관(朝官)도 역시 다른 까닭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개 좌도에 있는 이는 혹 청정과 서한(書翰)으로 연락을 통하고 우도에 있는 이는 혹 두 대인과 통하는 것입니다. 나도 두 대인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적지 않으므로 좌도에 있을 때에 웅천(熊川)으로 사자를 보내었고, 지금 또 편의를 취하여 우도로 자리를 옮겼으니, 두 대인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실로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전일에 유 독부(劉督府)와 더불어 함께 팔거(八莒)에 있을 때에 청정에게 여러 번 서한을 보내고 청정의 사자를 통하여 들으니,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하는 것은 모두 두 대인 때문이요, 또 왕자를 돌려보내는 것은 모두 청정의 공이라 하므로 우리 나라의 알지 못하는 사람은 다 청정을 고맙게 생각하여 말을 통하려 합니다. 대인들이 우리나라에 대명을 통하는 길이 있는 줄을 알았고, 또 관백이 우리나라를 칠 수 있는 줄 아는 것도 대인 등이 말한 것으로 관백이 군사를 발동시켰다 하는데, 이것도 또한 청정의 말입니다. 청정이 또 유 독부에게 말하기를, “행장은 관백을 속이고 심유경은 황제를 속였는데 행장이 관백에게,‘천자가 마땅히 공주(公主)를 관백의 아들에게 시집보낼 것이다.’ 하고, 심유경은 황제를 속이기를, ‘행장이 이미 모두 철병하고 다만 1ㆍ2진(陣)만이 부산에 머물면서 명 나라에서 왕으로 봉해 주고 조공을 허락하는 명령이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다.’ 하였는데 지금까지 웅거하여 물러가지 않고 있으니, 대인이 만일 바다를 건너 가지 않으면 천자도 또한 왕으로 봉해주고 조공을 허락할 리가 만무합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다만 화친만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두 대인이 반드시 관백에게 죄를 얻을 것입니다.” 하니, 청정의 이 말이 어떠합니까? 우리가 종묘 사직의 원수를 잊고 두 나라 백성을 생각하여 이와 같이 목숨을 내놓고 왔습니다. 만일 일본 군사가 바다를 건너가지 아니하여 천자께서 왕을 봉해주고 조공 허락하는 것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나라는 마땅히 대명의 명령을 따라야 할 것이니, 이렇게 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지난 7월에 천자께서 일본 군사가 바다를 건너가지 않는다 하여 절강 영파부(浙江寧波府) 장파총(張把摠)으로 하여금 배를 타고 수전(水戰)할 길을 살펴 보았으며 명년 4월에는 민(閩)ㆍ광(廣)ㆍ호(湖)ㆍ절(浙)ㆍ천진(天津) 등지의 수군을 거느리고 올 것인데, 다만 우리나라가 양식이 다 되었고 천조에서 배로 운반하는 남경(南京) 곡식이 아마도 4월 전에는 미처 오지 못할 것이니, 다행히 그때가 되기 전에 혹 담(潭) 나는 의심컨대 지금 왜영에 가 있는 담 도사(潭都司)인 듯 하다 으로 하여금 손노야(孫老爺)이름은 헌(憲)인데 지금 병부시랑(兵部侍郞)으로 동정군무(東征軍務)를 경략(經略)하는 분이다.의 군문(軍門)에 글을 보내어 다시 화친을 청함이 어떠하겠습니까? 대마(對馬)ㆍ일기(一岐) 등 섬은 우리나라와 서로 가까우므로 풍속과 언어가 아주 다르지 않습니다. 듣자하니 전쟁이 났을 때에 우리나라의 난을 피한 사람들이 대마도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살고 다른 섬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죽었다 하며, 우리나라 사람도 역시 그리하여 비록 한창 싸울 때에 있어서도 대마도 사람인 줄 알면 죽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으로부터 비록 천백 년 뒤에라도 일본 사람들은 두 대인이 군사를 철수하여 사람들을 살렸다고 할 것이며, 조선서도 역시 우리들이 교섭하여 나라를 편안케 하였다고 말할 것입니다. 내가 일찍이 두 대인이 우리나라에 성심을 다한 일을 우리 전하(殿下)께 아뢰었으니, 이 뒤에는 비록 비밀리 말할 일이 있더라도 다만 나에게만 통하고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가합니다. 세 대인은 모름지기 마음으로 깊이 알아 두시오.” 하였다. 행장이 답하기를, “진주를 함락시킨 일은 관백의 명령인데 전진만 있고 퇴각은 없다 하므로 사세가 부득이하여 나아가 공격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을 비워서 백성을 살리라고 내가 심 유격(沈遊擊)을 통하여 미리 알렸는데도 조선이 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것은 내가 공순하지 못한 죄가 아니요, 조선을 정벌하는 일도 역시 내가 주장한 일이 아닙니다. 일본 여러 장수들이 관백 앞에서 의론하여 정한 일인데 청정이 나를 헐뜯어서 무함하여 말했으니 극히 통분합니다. 또 황녀(皇女)에게 구혼(求婚)한 일도 역시 나의 입에서 나온 것은 아닙니다. 대명은 천하의 대국이요 일본은 바다 귀퉁이의 작은 나라인데 어찌 감히 천조에 대하여 혼인하는 일을 구하겠습니까? 관백이 비록 허무하여 설사 이런 마음이 있어 대명에게 말을 전하더라도 대명에서 딸이 없다고 답하면 어찌하겠습니까? 중간에서 나쁜 마음을 가진 사람의 지어낸 말인 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청정이 본시 나와는 매우 좋지 않은 사이이니, 반드시 이 사람의 말일 것입니다. 듣자하니 전일에 조선 승장(僧將 유정(惟政))이 청정의 진중에 갔을 때에 청정이 혼인을 요구하고 땅을 베어 달라는 말로 명 나라를 공갈하였다 하니, 그 문서가 있습니까? 비록 서명한 문서는 없더라도 예조(禮曹)에서 이 일을 가지고 문서를 만들어 나에게 보내주면 곧 관백에게 보낼 터이니 청정으로 하여금 죄를 받게 하고 군사를 철수하여 돌아가도록 할 것입니다. 대[竹]를 베고 뽕나무를 베어 경계를 나누고 공갈하였다는 문서를 찾아 보내시오. 두 왕자를 호송한 공으로 청정이 스스로 생색을 낸다 하니 그렇습니까? 청정이 장차 죽이려고 하는 것을 내가 극력으로 관백에게 여쭙기를, 왕자의 있고 없는 것이 승패(勝敗)에 관계가 없는 것이니 속히 조선 전하에게 돌려 보내는 것이 옳다 하였더니 관백(關白)이 그렇게 여기었으며, 명나라 사신 이 명 나라 사신이 누군지는 자세히 모르겠다. 은 한 때에 내가 해상에서 친히 모시고 김해에 이르러 호송하였으니, 나의 공 있고 없는 것은 모두 두 왕자와 황 승지(黃承旨)황혁(黃赫) ㆍ이 병사(李兵使)이영(李榮)이다. 이들은 계사년에 살아서 돌아왔다. 의 심중에 있습니다. 조선의 종묘 사직을 헐고 부순 것은 우리들도 역시 부끄러워합니다. 그때에 서울을 지키던 왜장이 군사를 단속하지 아니하여 무덤을 팠다는 말을 듣게 되었으니, 더욱 황송하고 부끄럽습니다. 명 나라가 수군을 발동하여 일본 군사를 소탕하겠다 하니 이것은 잘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비록 다 죽더라도 관백이 반드시 분노하여 대군을 발동하여 해마다 조선을 공격하면 조선은 두 나라 사이에 있어 절로 다 될 형세가 있을 것이니 큰 걱정이 아닙니까? 조선이 힘써서 봉공(封貢 조공을 허락하고 왕을 봉하는 것)의 일을 아뢰어 군사를 풀어 환국하게 한다면 일본은 조선의 은덕을 알 것이요, 조선은 일본이 분노를 풀었다 할 것이니 어찌 좋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병사가 답하기를, “조선에서 들은 말로는 일본이 강화(講和)한 뒤에 거년 11월에 경주 땅에서 왜적이 충돌하여 천병을 많이 죽였는데도 심 유격이 황제를 속이기를, ‘일본 군사가 다 철수하고 다만 행장ㆍ의지만이 부산에 남아 있어서 봉공을 허락할 시기만을 기다린다.’ 하여, 황제는 일본이 공순한 것을 기뻐하여 곧 봉공을 허락하였다가 천사(天使)가 장차 나올 즈음에, 또 일본 군사가 한 진(陣)도 바다를 건너간 것이 없고 조선의 지경에 머물러 있으면서 40여 진이 주둔하여 천병을 많이 죽이기까지 하였다는 것을 듣고는 황제께서 크게 노하시어 곧 봉공의 명령을 회수하였다 합니다.” 하였다. 행장은 말하기를, “어찌하면 성사가 되겠습니까?” 하자, 병사가 말하기를, “우리 나라의 일도 오히려 상세히 알지 못하는데 천조의 큰 일을 어찌 말하겠습니까? 그러나 나의 생각으로서는 세 대인이 의론해서 모든 진의 군사가 다 건너가고 다만 1ㆍ2진만 남아 항복하겠다고 청하는 글을 올린다면 성사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일본 군사로 매우 악한 자는 청정의 임랑(林浪)ㆍ두모포(豆毛浦)ㆍ양산(梁山)ㆍ구법곡(九法谷)ㆍ거제(巨濟)의 진이니, 이 진의 사람들은 악한 자끼리 서로 어울려 자주 백성을 노략질합니다. 이러므로 조선의 장수들이 통분하여 죽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성사하는 도리는 여러 장수가 마음을 맞추고 힘을 같이한 연후에야 일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내가 듣기로 청정과 대인 두 사이에 어긋나는 일이 많이 있다 하니 청정이 있고는 대인의 바라는 일이 마침내 이루어지지 못할 것입니다. 청정과 모든 진을 다 들여보내고 대인들만 남아 있어 도모한다면 거의 성사가 될 것입니다.” 하였다. 행장이 말하기를, “내가 청정을 극히 나쁘게 생각하여 죄주려 하나 죽일 만한 일이 없으니, 분(憤)대로 할 수 없어 극히 절통(切痛)합니다. 조선 전하께서 청정의 죄를 가지고 나에게 글을 내려주시면 어느 진이나 들여보내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병사가 말하기를, “대인의 말이 이와 같으니, 연유를 갖추어 원수부에 급히 보고하여 원수가 전하께 아뢰면 전하께서 힘껏 하실 것입니다.” 하였다. 행장이 말하기를, “1ㆍ2진만 남아서는 외롭고 약할 듯합니다. 타국에 군사가 나왔는데 어찌 뜻밖의 염려가 없으리요. 좌우도에 별처럼 벌여 결진하고 있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일본 군사의 양식을 싣고 나올 때에 바람이 순하지 못하면 배 닿을 곳을 정할 수 없으므로 거제 서생포(西生浦)로 한계를 삼고 있습니다.” 하였다. 병사가 말하기를, “약속을 정한 뒤에 일본 배가 비록 표류되어 전라도에 도착하더라도 잡아 죽이지 아니하고 대인의 진으로 반드시 보내줄 것이니, 의심하거나 염려하지 말고 여러 진을 들여보내면 명 나라에서 일본의 뜻을 알고 허락하는 명령이 곧 내릴 것입니다.” 하였다. 행장이 말하기를, “나도 또한 장차 생각하여 급히 관백에 아뢰려고 하니, 조선이 일본 봉공의 일을 명 나라에 아뢰어 주면 그 은덕은 천추(千秋)에 어찌 잊으리요. 성사한 뒤에는 나를 신하로 삼더라도 나는 싫어하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병사가 말하기를, “원수를 봉공하여 주라고 아뢰는 것은 결코 시행할 수 없는 일이나 대인들이 전일의 잘못을 진술하여 항서(降書)를 만들어 나에게 와 원수부에 보내주면 그대로 급히 전하께 아뢰어 대명에 아뢰게 하면 혹시 될 수도 있을 것이오. 이 밖에는 별로 다른 묘한 계책이 없으니 대인들이 상의하여 급속히 선처하시오.” 하였다. 행장이 답하기를, “우리들의 항서(降書)를 명 나라에 바치는 것은 비록 죽을지라도 그대로 좇겠으니 항복하는 조건을 사또께서 초고를 만들어 주심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였다, 병사가 말하기를, “당신의 항복하는 글을 어찌 내가 초고를 만들겠습니까? 당신들이 상의하여 편의하도록 함이 옳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그말대로 하겠습니다.” 하였다. 병사가 말하기를, “만일 왕으로 봉한다면 명나라의 정삭(正朔)을 쓰겠습니까? 일본의 정삭을 그대로 쓰겠습니까?” 하니, 행장은, “어찌 명 나라에게 봉함을 받고서 명 나라의 정삭을 쓰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해가 저물어 일일이 말하지 못하고 병사가 원수부의 공문과 타이르는 조목과 재상(宰相)의 자제로 포로가 된 사람의 성명과 어느 날 어느 날에 적병이 나와서 분탕질했는지의 기록을 내보였더니 현소(玄蘇)가 혼잣말 하기를, “재상의 자제로서 포로가 되어 여기에 있는 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찾아서 내보내겠으며, 일본에 들어가 있는 자도 역시 찾아 보내겠으나 죽은 자는 할 수 없고, 일본 사람이 몰래 산막(山幕)에 출입하여 해를 끼치는 것은 우리들이 몰랐던 일로 통분하기 막심하니, 이로부터는 엄하게 단속하여 그 폐단을 막아서 귀국의 남은 백성으로 하여금 옛터로 돌아와 안정을 찾아 농사에 힘쓰도록 하겠습니다. 항복하는 일은 우리들이 원하지 않는 것이 아니나 비록 천조에 항복한다 하더라도 조선은 어찌하려는 것입니까? 일본 관백이 더욱 분노하여 대병을 들어서 해마다 침범하면 그 걱정을 어찌 감당하렵니까? 이와 같이 도리에 당치 않은 일로 권유하는 것은 미안한 것 같습니다. 원수가 항복하기를 권유하였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이다. 3국이 강화하여 각기 그 나라를 지켜서 국가를 억만 년 동안 편안케 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하였다. 이 중간에는 빠진 말이 많다. 병사는 진으로 돌아오고 여러 왜추들은 소굴로 돌아가는데 읍하고 작별할 때에 세 왜졸이 대포 세 발의 소리를 따라서 일제히 연포(連炮)를 놓고 일시에 고함치며 엎드렸다. 여러 왜추가 걸어 나가서 처음 내렸던 곳에서 말에 오르니 뭇 왜인들이 높은 소리로 서로 응하고 일시에 일어서서 앞에서 인도하고 뒤에서 옹위하여 차례로 갔다. 그 뒤 만력(萬曆) 39년 신해(辛亥 1611, 광해군 3)에 김응서(金應瑞)는 세 소인에 들게 되어 전라 병사로서 파면을 당하였다가 43년 을묘(乙卯 1615, 광해군 7)에 용서하는 은혜를 받아 함경도 북병사에 임명되었다.세 소인은 심유경ㆍ김응서ㆍ요시라이다.
○ 명 나라에서 낙타 10여 마리로 물건을 실어 내보냈는데 높이는 한 길이 넘고 길이는 3ㆍ4파(把)요, 모양은 염소와 같은데 뿔은 없고, 발은 소와 같은데 털이 많고, 등의 살안장[肉鞍] 앞뒤에 혹이 났고, 한 번에 소금 세 말을 먹는데 혹의 강하고 약한 것은 염분의 많고 적음과 관련이 있다. 짐을 실을 때에는 엎드려서 기다리고, 다닐 때에는 말을 달려야 따라갈 수 있고, 쌀 여섯 섬의 무게를 싣고 영남ㆍ호남으로 내왕한다. 또 삼생(三牲) 소(牛)ㆍ양(羊)ㆍ돼지 1만여 마리를 보내어 우리나라의 가축의 종자로 삼도록 하였는데 몸뚱이는 우리 나라의 것과 같고 성질이 자못 순하고 느리어 사람이 시키는 대로 잘 따랐다.
12월 권율(權慄)이 성주(星州)로부터 순찰하여 충청도에 이르렀다가 전라도로 내려와서 전주를 경유하여 남원에 이르러 비밀리 근처의 고을로 하여금 내적(內賊)을 잡게 하였다.
5일 남원 판관 김유(金騮)가 원수의 명령을 받아 운봉 현감 남간(南侃)과 더불어 경계에 모여 추동(楸洞)의 적을 잡기를 의논하였는데 해가 오정이 되도록 두 관원은 헤어지지 않았다. 김희(金希)ㆍ강대수(姜大水) 등이 고파(高波)와 더불어 합세하여 도당 1백 50여 명을 거느리고 번암(番嵒) 남원부 동서쪽 10리에 있다. 으로부터 갑자기 무산(毋山) 서하도(西下道) 마연촌(磨硯村)현(縣) 북쪽 5리에 있다. 에 이르러 도적질을 하여 소ㆍ말ㆍ재물을 모두 찾아서 약탈하고 나이 젊은 부녀를 잡아 묶어서 앞세워 몰고 갔는데, 봉사(奉事) 허여형(許汝衡)의 아내도 역시 잡혀간 가운데 들었다. 남간이 듣고 본현으로 달려 돌아와서 비밀리 독포장(督捕將) 정기룡(鄭起龍)에게 통지하였다. 정기룡이 방금 함양에 있다가 곧 군사 3백여 명을 거느리고 달려서 정동치(井東峙)운봉현 동북쪽 40리 함양 지경에 있다. 에 이르러 남간과 상의하여 가만히 정탐하여 보니, 적당(賊黨)이 방금 율곡(栗谷) 운봉 북쪽 50리에 있다. 에 모여서 술자리를 크게 벌여서 연일 마시고 놀았다. 부근의 관원과 본 고을 경내의 사람과 남간이 거느린 군사 수백 명도 반은 김희의 앞잡이들이라 말을 믿을 수 없고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아니하였다. 오직 허씨ㆍ장씨 집의 아내를 구출하는 것이 급하므로 적의 뒤를 밟아 알아내어 달려와 보고하였다. 정기룡ㆍ남간이 밤에 포위하니, 적들이 알고도 더욱 노래하고 춤을 추며 출전할 뜻이 없는 것같이 하다가 날이 밝을 때에 일시에 고함을 지르며 요란히 쏘며 포위를 뚫어 관군(官軍)이 무너져 퇴각하자, 적들이 천천히 나가서 안음(安陰) 길로 향하였다. 이듬해 정월에 고파가 장성(長城)에서 패하여 죽고 장녀(張女) 등이 돌아왔다. 임걸년(林傑年)이 지리산의 여러 절을 다 무찌르니 중들과 인민이 피해를 입음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고 향로봉(香爐峯)에 주둔했다가 운봉 군사에게 밤에 습격을 당하여 패하여 달아났다.
12일 흰 무지개가 해를 꿰었다.
○ 명 나라 유격장군(遊擊將軍) 진운홍(陳雲鴻)이 효유(曉諭)하는 조칙(詔勅)을 받들고 경성에 이르렀고 인하여 충청도ㆍ전라도로 내려갔다.
○ 교사(敎士)를 각 도의 감사에게 나누어 보내 조련군(操鍊軍) 세 패를 교습(敎習)시키게 하였다.
○ 전라 감사 홍세공이 변사정(邊士貞)을 곤장을 때려 파면시키고 본부[南原府] 판관 김유(金騮)에게 교룡산성(蛟龍山城)을 지키는 일을 겸해 맡게 하였다.
○ 순안어사(巡按御使)를 여러 도에 파견하여 기병(騎兵), 보병(步兵), 내시(內寺), 노비(奴婢)의 신역(身役)으로 작미(作米)하는 법을 설정하여 무과 출신(武科出身)은 쌀 한 섬을 납입하여 신역(身役)을 면하게 하였다.
○ 회문산(回文山) 내적(內賊)이 대낮에 임실(任實)에서 약탈하므로 본현의 수령이 군사를 풀어 잡게 하였다. 여러 번 싸워서 모두 패하여 적이 도장(都將) 등을 죽이고 약탈하여 소굴(巢窟)로 돌아가면서 말하기를, “남원 판관도 능히 우리를 당해내지 못하는데 너희 조그마한 고을이 감히 우리를 어쩌려 한단 말이냐?” 하였다. 감사가 듣고 남원ㆍ곡성ㆍ옥과ㆍ순창ㆍ임실ㆍ전주ㆍ금구(金溝)ㆍ태인(泰仁) 등의 수령으로 하여금 협력하여 문산의 도적을 잡게 하였다. 여러 고을 원이 각기 군사 수백 명을 거느리고 회문산을 수색 토벌하여 산을 불태우고 나무를 베고 사면으로 포위하여 공격하니, 적당들이 버티지 못하고 흩어져 정읍ㆍ장성의 길로 향하였다. 금구ㆍ태인ㆍ순창 세 고을 원이 군사를 거느리고 추격하여 장성에 이르니, 적이 또 싸우다가 크게 패하여 흩어져 옛 소굴로 돌아갔다. 세 고을 군사가 추격을 그치지 않으니 적들이 궁지에 몰려 3일 동안을 물러가 산꼭대기에 있다 보니, 굶주리고 목말라 감히 대항하지 못하였다. 관군(官軍)이 밤에 사닥다리를 타고 올라가 1백여 명을 베어 죽이니, 회문산 길에 사람의 발자취가 비로소 왕래하였다.
27일 유격장군 진운홍이 서울로부터 남원에 도착하고 낙수비(駱守陴) 섭참장(葉參將)모두 이름은 잊었다. 이 또한 전주로부터 남원에 도착하였다. 다음날 진운홍이 사영루(四泳樓) 동헌(東軒) 위에 있다. 에서 시(詩)를 짓기를,
사명(使命)을 받들고 부산에 가서 왜적에게 타일러 소굴로 돌아가게 하였다. 이때가 만력(萬曆) 갑오년(1594, 선조 27) 12월 28일인데 남원 행차를 멈추면서 낮잠을 자다가 꾀꼬리와 까치가 시끄럽게 지저귀는 것을 듣고 대(臺)에 올라서는 눈[雪]을 보았다. 느낌이 있어 적다.
경남(京南)에 해[歲]는 저물었는데 손은 돌아가지 못하니 / 歲暮京南客未回
여기서 대에 오르매 슬픔을 어찌 견디랴 / 那堪惆悵此登臺
온 산에 눈이 쌓였으매 푸른빛 아득한데 / 萬山雪積迷蒼翠
천리의 좋은 경치 쑥대밭에 가리워졌네 / 千里煙嵐蔽草萊
한낮 뜰 앞에는 꾀꼬리가 꿈을 깨우고 / 日午庭前鶯夢擾
겨울 바람 누(樓) 밖에는 까치가 홰나무에서 지저귀네 / 朔風樓外鵲喧槐
천애(天涯)에서 사방으로 돌아보니 끝없는 생각 / 天涯四顧無窮思
나라를 걱정하니 큰 재주 못됨이 부끄럽네 / 憂國空慙廊廟才
하였다. 또,
입춘(立春)날 느낌이 있어 적다. 이날이 입춘이다.
지난해 오늘에 서울 길손 되었는데 / 去年今日客京華
오늘 새봄에 또 집을 떠났네 / 今日新春又離家
반평생에 먼 길을 다녀 파리함만 남았으니 / 嬴得朱顔途路遠
느끼고 상심하여 스스로 슬피 탄식하네 / 令人傷感自嗟呀
하였다. 또,
벼슬길에 돌아다닌 지 30년 / 仕路驅馳三十年
괴로움 겪노라고 편안할 수 없었네 / 歷來勞苦未容安
금년 겨울 또 선유(宣諭)하는 사명 받았으니 / 今冬又奉傳宣命
만리 먼 곳에서 눈[雪]을 베고 자네 / 萬里遐荒枕雪眠
황명(皇明) 신기비병좌영 겸관삼영 유격장군사 도지휘사(神機備兵坐營兼管三營遊擊將軍事都指揮使) 무림(武林 진운홍의 고향) 준루(遵樓 진운홍의 호) 진운홍.
하였다. 이튿날에 광한루에 나가 연회하였다.


 

[주D-001]목야(牧野)에서 …… 있으나 : 주(周) 나라가 상(商) 나라를 팔 때에 강태공(姜太公)이 장수가 되어 목야(牧野)의 싸움에서 매처럼 드날렸다. 처음 출병할 때에 백이 숙제가 무왕(武王)의 말[馬]을 잡고 말리기를, “신하로서 임금을 쳐서는 안 된다.” 하였다.
[주D-002]탕무(湯武)에 …… 되리로다 : 무왕(武王)이 상(商)을 치면서 상 나라 임금 주(紂)의 죄악을 성토하면서, “내가 주(紂)를 쳐서 백성을 건지는 것은 탕(湯)에게 빛이 있으리라.” 하였다.
[주D-003]적신(賊臣) …… 핑계하였고 : 한(漢) 나라 동탁이 뒤에는 적신이 되었으나 처음에는 한나라 조정을 어지럽게 하는 환관(宦官)을 죽인다는 명분으로 양주(凉州)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왔다.
[주D-004]난신(亂臣) …… 변명하였으니 : 금(金) 나라가 송(宋) 나라를 쳐서 이긴 뒤에 임금을 잡아가고 송 나라 신하 장방창(張邦昌)으로 임금을 삼았더니 뒤에 장방창이 다시 송 나라로 돌아왔다.
[주D-005]우리 …… 아들이다 : 우(禹)가 죽으면서 신하인 백익(伯益)에게 위(位)를 전하였으나 백성들은 우(禹)의 아들 계(啓)에게로 따르면서, “우리 임금의 아들이다.” 하였다.
[주D-006]남궁(南宮)에 …… 안으려는 원[抱薪之願] : 한(漢) 나라 광무제(光武帝)가 임금이 되기 전에 왕랑(王郞)에게 패하여 도망하다가 중도에 비를 만나 남궁현(南宮縣)에서 길 옆 빈 집에 들어갔는데 풍이(馮異)가 섶[薪]을 안고 와서 등우(鄧禹)가 불을 피웠다.
[주D-007]두릉(杜陵)이 …… 흘렸다가 : 당 나라 안녹산(安祿山)의 난리에 두보(杜甫)가 시사를 탄식하여 눈물을 흘리는 시를 지었다. 두릉(杜陵)은 두보가 살던 곳이다.
[주D-008]장막 …… 놀리는 것 : 한(漢) 나라 장량(張良)이 한 고조(漢高祖)를 보좌하여 장막 속에 숫대를 놀려 천리 밖에 승전할 계책을 결정하였다.
[주D-009]곤외(閫外)의 절제 : 곤(閫)은 성문인데 옛날에 임금이 장수를 출정하러 보낼 때에, “곤(閫) 안은 내가 다스릴 것이요, 곤 밖은 장군이 절제하라.” 하였다.
[주D-010]경인(庚寅)에 : 명종(明宗) 경인년에 왜적이 전라도에 침입한 일이 있었다.
[주D-011]생도살인(生道殺人) : 맹자가, “백성을 살리려는 도리로 백성을 죽이면 비록 죽어도 원망하지 아니한다.” 하였다. 그것은 예를 들면 외적이 침입하였을 때에 국가를 수호하고 인민을 건지기 위하여 백성을 목숨 바치는 전장으로 보내면 백성이 원망하지 아니한다는 뜻이다.
[주D-012]계란 …… 버리는 것 : 위(衛) 나라 장수 구변(苟變)이 백성의 계란 두 개를 먹었다 하여 임금이 그를 파면시켰는데, 자사(子思)가, “계란 두 개 때문에 국가의 간성(干城)이 되는 장수의 재목을 버린다는 것은 이웃 나라에 소문낼 수 없는 일이다.” 하였다.
[주D-013]오늘의 …… 뿐이겠습니까? : 한(漢) 나라 가의(賈誼)가 문제(文帝)에게 상소하여, “지금의 사세를 보면 통곡할 만한 것이 한 가지요, 눈물을 흘릴 것이 두 가지요, 긴 한숨 쉴 것이 여섯 가지입니다.” 하였다.
[주D-014]일족(一族)을 피하여 : 당시의 법령에 병역(兵役)이나 부역이나 납세를 이행하지 못하거나 도피하면 그 일가되는 사람에게 대신 부담시켰다.
[주D-015]칠실(漆室)의 걱정할 바 : 노(魯) 나라 칠실(漆室)이란 고을에 한 처녀가 걱정하기를, “우리 나라 임금이 늙었고 태자가 어리니 만약 국란이 있으면 임금이나 백성이 모두 욕을 당할 것이니 여자들이 어디로 피할꼬.” 하였다.
[주D-016]역량(逆亮)의 …… 꺾었으니 : 금(金) 나라 임금 양(亮)이 대군을 거느리고 송 나라를 치다가 송 나라 군사에게 패하고 중도에 신하에게 시해(弑害)되었다. 양(亮)이 그 임금을 죽인 것 때문에 역량(逆亮)이라 하였다.
[주D-017]중엄(仲淹)의 상서(上書) : 수(隋) 나라 왕중엄(王仲淹: 왕 통(王通)의 자)이 문제(文帝)에게 태평책(太平策)을 올렸다.
[주D-018]세 번 패한 것 : 노(魯) 나라 조말(曹沫)이 제(齊) 나라와 싸워서 세 번 패하였다.
[주D-019]아홉 번 칠 것 : 《주례(周禮)》에 아홉 가지의 정벌(征伐)을 말하였는데 약한 나라를 침략하는 자를 정벌하고 백성을 해치는 자를 정벌하는 등이다.
[주D-020]말세(末勢) : 옛말에, “강한 쇠뇌[弩]의 말세(末勢)는 노 나라 비단[魯縞: 가장 얇은 비단]을 뚫지 못한다.” 하였다.
[주D-021]하상(河上)의 변 : 춘추 시대 정(鄭) 나라에서 하상(河上)에 군사를 여러 해 머물게 하였더니 군사들이 원망하였다.
[주D-022]흙탕물 …… 장난 : 한(漢) 나라 때에 발해군(渤海郡)에서 도적의 떼가 일어났으므로 공수를 태수(太守)로 보내어 진정시키게 하니, 공수는 아뢰기를, “백성들이 곤궁한데 관리가 돌보아 주지 않으므로 적자(赤子)들이 몰래 흙탕물 개울[潢池] 속에서 장난친 것입니다.” 하였다.
[주D-023]하늘 그물[天網] : 노자(老子)에서 나온 말로, 여기서는 우선 곤경을 벗어나려는 것으로 말하였다.
[주D-024]장강(張綱) : 한 나라 때에 광릉(廣陵)에 도적이 일어났는데 장강이 태수로 되어 가서 항복을 받았다.
[주D-025]우허(虞詡) : 한 나라 때에 조가(朝歌)에 도적이 일어나 수천 명이 떼를 지어 관리를 쳐죽여 수년 동안 평정되지 않았는데, 우허가 조가장(朝歌長)이 되어 가서 계책을 써서 평정하였다.
[주D-026]산하대려(山河帶礪)의 맹세 : 한 고조(漢高祖)가 공신(功臣)들과 맹세하기를, “황하(黃河)가 말라 띠[帶] 만큼 좁아지고, 태산이 닳아 숫돌[礪] 만큼 되도록 길이 자손에게까지 봉국(封國)을 전하자.” 하였다.
[주D-027]찼던 …… 사고 : 공수(龔遂)가 발해 태수로 도적을 평정할 적에, 큰 칼을 찬 자를 보고는, “너는 그것을 팔아 소를 사라.” 하고, 작은 칼을 찬 자를 보고는, “너는 그것을 팔아 송아지를 사라.” 하였다.
[주D-028]영천(頴川) …… 하면 : 한(漢) 나라 때에 영천에 도적이 많았는데, 조광한(趙廣漢)이 태수(太守)로 가서 평정하였다.
[주D-029]천하의 …… 것이다 :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 가운데 있는 말이다.
[주D-030]걸의 …… 짖고[桀犬吠堯] : 걸(桀)은 지극히 악한 자요, 요(堯)는 지극한 성인이다. 그러나 걸의 개가 요를 보고 짖는 것은 제 주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는 다만 악한 자를 따라 성인을 몰라보고 함부로 짖는다는 뜻으로 인용하였다.
[주D-031]대연(戴淵)이 …… 되었고 : 진(晉) 나라 때에 대연(戴淵)은 처음에 도적의 괴수로서 육기의 행장을 약탈하였는데, 육기는 그가 범상한 사람이 아닌 것을 보고 타일러 감화시켰다.
[주D-032]단거(單車)로 타이름 : 광릉 태수 장강(張綱)이 도적의 괴수 장영(張嬰)의 진중에 군사도 데리지 않고 단거(單車)로 들어가서 타일러서 항복 받았다.
[주D-033]휘파람 : 도적의 떼가 밤에 몰래 모일 때에 서로 휘파람을 불어 암호로 하여 모여든다.
[주D-034]애통교서(哀痛敎書) : 국난이 위급할 때를 당하여 임금이 자기의 죄를 뉘우쳐서 애통한 말로 국민에게 호소하는 교서(敎書)이다.
[주D-035]유 독부 유진 대방비(劉督府留鎭帶方碑) : 남원을 대방이라고도 한다. 도독 유정이 대방에 주둔(駐屯)한 것을 기념하는 비다.
[주D-036]신과 보[申甫] : 주 선왕(周宣王) 때에 신백(申伯)과 중산보(仲山甫)가 장상(將相)으로서 공이 있었다.
[주D-037]범 같은 …… 위엄 : 범과 표범이 산에 있으면 그 위엄이 뻗쳐 나물도 캐지 못한다는 속담이 있다.
[주D-038]안과 …… 보셨네 : 자기 나라 중국과 밖에 있는 조선을 말한 것이다.
[주D-039]건국(巾幗) : 부인의 의복으로, 사내가 못나서 부인처럼 되었다는 경멸의 말이다. 한(漢) 나라 제갈량이 위(魏)의 장수 사마의(司馬懿)와 대진하였을 때에 제갈량이 싸움을 청하여도 사마의가 나오지 아니하므로 그에게 건국을 보내어 모욕한 일이 있다.
[주D-040]금성탕지(金城湯池) : 쇠로 성을 만들고 끓는 물로 참호를 만든 것과 같은 견고한 성이란 말이다.
[주D-041]함곡관(函谷關) : 진(秦) 나라 함곡관이 있는데 관문(關門)이 천연적으로 견고하고 험준하여 함곡관을 닫으면 외적이 침범하지 못한다.
[주D-042]5백 명 : 제(齊) 나라 전횡(田橫)의 밑에 5백 명이 있었는데 전횡이 자살한 날에 그들은 모두 한꺼번에 자결하였다.
[주D-043]하란(賀蘭) : 장순ㆍ허원이 수양을 지킬 때에 남제운(南霽雲)을 하란(賀蘭)에게 보내어 구원병을 청하였으나 하란은 듣지 아니하였다.
[주D-044]한단(邯鄲)의 포위 : 전국 시대에 진(秦) 나라 군사가 조(趙)의 수도 한단(邯鄲)을 오랫동안 포위하였는데 위(魏)의 신릉군(信陵君)이 구원병으로 진 나라 군사를 쫓았다.
[주D-045]노중련(魯仲連)의 동해로다 : 한단이 포위되었을 때에 위(魏)의 신원연(新垣衍)이 조(趙) 나라와 의론하여 진왕(秦王)을 제(帝)로 추대하여 강화(講和)하자고 하였는데 노중련(魯仲連)이 반대하여 “만일 진 나라를 제(帝)로 추대한다면 나는 동해에 빠져 죽을지언정 그 백성이 되지 않겠노라.” 하였다.
[주D-046]신안(新安) : 항우(項羽)가 신안에서 진 나라의 항복한 군사 20명을 무찔러 죽였다.
[주D-047]장평(長平) : 진(秦) 나라 장수 백기(白起)가 장평에서 조 나라 항복한 군사 40만 명을 무찔러 죽였다.
[주D-048]종정(鍾鼎)과 죽백(竹帛) : 국가에 큰 공을 이루면 종과 솥에다 새겨서 후세에 전한다. 죽백(竹帛)은 역사책을 말한 것인데 고대에 종이가 생기기 전에 죽간(竹簡)과 비단에 글을 써서 전하였다.
[주D-049]여귀(厲鬼) : 장순(張巡)이 수양성을 지키다가 함락되어 적에게 죽으면서, “나는 죽어서 여귀가 되어 적을 죽이겠다.” 하였다.
[주D-050]만일 …… 쓰겠습니까 : 남의 속국(屬國)이 되면 대국의 역서(曆書)를 받아서 썼다.

군정편 4
 관방(關防)
경상도(慶尙道)


【경주(慶州)】 읍성. 석축(石築) 둘레 4,075척. 영로 : 치술령(鵄述嶺) 남쪽 통로. 성령(筬嶺)ㆍ건대암(件代巖)ㆍ추령(楸嶺)ㆍ팔조령(八助嶺) 모두 동쪽 통로. 시령(柿嶺) 장기(長鬐)와의 경계. 사라현(舍羅峴). 북쪽 통로. 【울산(蔚山)】 병영성(兵營城) 석축. 둘레 9,316척. 태종(太宗) 8년 무자(1408년)에 우도(右道)의 창원부(昌原府) 합포내상(合浦內廂)에 합쳤다가, 세종 8년 병오(1426년)에 좌도의 병영을 다시 설립하여 판경주부사(判慶州府事)를 겸임케 하였다. 선조 27년 갑오(1594년)에 따로 병영을 본부내상(本府內廂)에 설치하였다. 시루성[甑城] 일명 도산성(島山城)이라고도 한다. 왜적이 여기에 성을 쌓았는데 모양이 시루와 같다 하여 시루성[甑城]이라 하였다. 바깥 시루성[外甑城]. 서생진(西生鎭)에 있으며, 역시 왜적이 쌓은 것임. 영로 : 율현(栗峴). 서쪽 통로. 【양산(梁山)】 읍성 석축. 둘레 3,710척. 성황산성(城隍山城). 석축. 둘레 4,368척. 영로 : 황산천(黃山遷). 역로. 【영천(永川)】 영로 : 유현(柳峴). 동쪽 통로. 【흥해(興海)】 읍성. 석축. 둘레 1,493척. 【청하(淸河)】 읍성. 석축. 둘레 1,353척. 【영일(迎日)】 읍성. 석축. 둘레 2,940척. 영로 : 사현(沙峴). 동쪽 통로. 【장기(長鬐)】 읍성. 석축. 둘레 2,980척. 영로 : 시령(柿嶺) 남쪽 통로. 【언양(彦陽)】 읍성. 석축 둘레. 3,064척. 영로 : 가슬현(嘉瑟峴). 서쪽 통로. 【동래(東萊)】 읍성 석축. 둘레 17,291척. 영종(英宗) 7년 신해(1731년)에 그 옛터를 개척하여 좀 넓혔다. 수영성(水營城) 석축. 둘레 9,190척. 인조 13년 을해(1635년)에 감만이포(戡蠻夷浦)에 설치했다가 효종 3년 임진(1652년)에 다시 옛터에 옮겨 설치하였음. 금정산성(金井山城) 석축. 둘레 69,570척. 영종 20년 갑자(1744년)에 이를 폐지했다가 금상 ‘순조’ 8년 무진(1808년)에 고쳐 쌓았다. 다대포성(多大浦城) 석축. 둘레 1,806척. 두모포성(豆毛浦城). 석성(石城). 둘레 1,250척. 영로 : 기비현(其比峴) 서쪽 통로. 사배야현(沙背也峴)ㆍ안령(鞍嶺). 모두 북쪽 통로. 【안동(安東)】 읍성. 석축. 둘레 2,947척. 영로 : 두모포(豆毛浦) 북쪽 통로. 이이현(耳而峴)ㆍ모현(茅峴) 모두 동쪽 통로. 구령(龜嶺)ㆍ석현(石峴)ㆍ고암현(古巖峴). 모두 남쪽 통로. 【순흥(順興)】 영로 : 죽령(竹嶺) 서쪽 통로. 마아령(馬兒嶺). 영춘(永春) 통로. 【영해(寧海)】 읍성. 석축. 둘레 1,278척. 영로 : 서읍령(西邑嶺) 영양(英陽) 통로. 오현(烏峴) 서북쪽 통로. 남면현(南眠峴) 영덕(盈德)과의 경계[界] 송현(松峴). 남쪽 통로. 【청송(靑松)】 영로 : 도현(刀峴) 영천(永川)과의 경계. 삼자현(三者峴). 남쪽 통로. 유현(柳峴) 경주와의 경계. 지현(枝峴). 안동과의 경계. 【예천(醴泉)】 영로 : 호항령(狐項嶺) 북쪽 통로. 귀모현(歸毛峴). 풍기와의 경계. 【영천(榮川)】 영로 : 백령(白嶺) 남쪽 통로. 병령(竝嶺). 동쪽 통로. 【풍기(豐基)】 등강성(登降城). 전설엔 고려 태조가 남정(南征)할 때 여기서 머문 지 7일 만에 백제의 항복 문서가 도착하여 이렇게 명칭을 붙였다고 한다. 영로 : 여현(礪峴)한령(汗嶺) 모두 남쪽 통로. 골리현(骨里峴). 서쪽 통로. 【의성(義城)】 영로 : 백장령(百丈嶺) 서남쪽 통로. 발지현(發只峴) 남쪽 통로. 계란현(鷄卵峴). 북쪽 통로. 【영덕(盈德)】 읍성. 석축. 둘레 2,397척. 영로 : 임물현(林勿峴) 북쪽 통로. 죽현(竹峴). 청송(靑松) 통로. 【예안(禮安)】 영로 : 장갈현(長葛峴). 동쪽 통로. 【용궁(龍宮)】 영로 : 대현(大峴) 동북쪽 통로. 【대구(大丘)】 읍성. 석축. 둘레 2,124보. 영로 : 팔조령(八助嶺). 청도(淸道)와의 경계[界]. 【밀양(密陽)】 읍성. 석축. 둘레 4,677척. 영로 : 나현(羅峴) 서쪽 통로. 영현(鈴峴) 서남쪽 통로. 천화령(穿火嶺). 언양(彦陽)과의 경계. 【청도(淸道)】 읍성 석축. 둘레 1,570보. 선조 20년 정해(1587년)에 왜구가 침입할 듯한 징조가 보이자 조정에서는 명령하여 동화(東華)에서부터 직로(直路) 이웃 주군(州郡)에 성지(城池)를 수리토록 하였으며 성이 없는 읍은 모두 새로 성을 쌓도록 하였다. 23년 경인(1590년)부터 착공하여 2년만에 준공하였다. 폐성(吠城). 고려 태조가 동정하여 군 경내에 들어왔을 때 산적들이 모여서 이 성은 점거하고 항복하지 아니하였다. 태조가 봉성사(奉聖寺)의 중 보양(寶壤)에게 계책을 물었더니 보양이 말하기를, “개[犬]란 짐승은 밤을 지키지 낮은 지키지 아니하며, 앞은 지키나 그 뒤는 잊어 버리는 것이니 낮에 그 북쪽을 공격하소서.” 하였다. 태조(太祖)가 그 말대로 하자, 적은 과연 패하였다. 영로 : 갑을령(甲乙嶺) 서쪽 통로. 성현(省峴). 경산(慶山)과의 경계. 【경산(慶山)】 읍성 석축. 둘레 1,200척. 우곡성(亏谷城) 신라 시대에 3개의 성을 합쳐서 압량군(押梁郡)을 만들었는데, 3국을 통일한 뒤에 다시 3개 성을 만들었다. 【인동(仁同)】 천생산성(天生山城). 4면에 석벽이 깎아질러져 있어서 마치 성이 천연으로 된 것 같으므로 천생산성이라고 불렀다. 신라 시조왕(始祖王)이 처음 성을 쌓았으며 임진란 때 곽재우(郭再祐)가 왜구를 크게 무찌르고 노획한 병기ㆍ조총ㆍ창ㆍ화살ㆍ진천뢰ㆍ이름 모를 물건들이 지금까지 성중에 남아 있다. 선조 34년 신축(1601년)에 곽재우가 찰리사(察理使)로 있을 때, 아뢰어 외성을 쌓았다. 둘레 3,612척. 영로 : 월암현(月巖峴). 성주와의 경계. 【현풍(玄風)】 영로 : 대치(大峙). 창령(昌寧)과의 경계. 【의흥(義興)】 영로 : 병비현(並非峴) 선산과의 경계. 지사현(智士峴) 칠곡(漆谷)과의 경계. 토을현(吐乙峴). 남쪽 통로. 【영산(靈山)】 영로 : 건현(件峴)ㆍ이물현(尼勿峴). 모두 밀양 통로. 【창녕(昌寧)】 영로 : 마현(馬峴). 북쪽 통로. 【칠곡(漆谷)】 읍성의 내성(內城) 석축. 둘레 4,700보. 인조(仁祖) 18년 경진(1640년)에 쌓았음. 외성(外城) 석축. 둘레 3,754보. 숙종 27년 신사(1701년)에 쌓았음. 중성(中城). 석축(石築). 둘레 602보. 영종 17년 신유(1741년)에 쌓았다. 영로 : 소야현(所也峴) 인동(仁同) 통로. 정현(鼎峴) 대구 통로. 【상주(尙州)】 읍성. 석축. 둘레 3,883척. 영로 : 왜유현(倭踰峴)ㆍ죽현(竹峴) 모두 남쪽 통로. 대조현(大鳥峴)ㆍ송현(松峴). 모두 북쪽 통로. 【금산(金山)】 영로 : 좌현(左峴) 선산과의 경계. 석현(石峴) 지례(知禮)와의 경계. 전현(箭峴) 성주와의 경계. 추풍령(秋風嶺) 황간과의 경계. 괘방령(掛榜嶺). 서쪽 통로. 【지례(知禮)】 영로 : 우마현(牛馬峴) 거창(居昌)과의 경계. 부항현(釜項峴) 성주와의 경계. 병현(餅峴). 동쪽 통로. 【함창(咸昌)】 성주읍성(星州邑城) 석축. 둘레 6,052척. 독용산성(禿用山城). 석축. 둘레 4,581보. 영로 : 적현(赤峴)ㆍ화령(花嶺) 모두 서쪽 통로. 성현(星峴) 남쪽 통로. 물한령(勿閑嶺) 고령과의 경계. 월암현(月巖峴) 인동(仁同) 통로. 부상현(扶桑峴) 개령(開寧) 통로. 대야현(大也峴). 북쪽 통로. 【선산(善山)】 읍성. 석축. 둘레 1,448척. 금오산성(金烏山城) 석축. 둘레 7,644척이며, 성이 없는 절벽이 661보. 외성(外城). 둘레 4,135척. 영로 : 갈현(加乙峴) 동쪽 통로. 열현(余乙峴). 동북쪽 통로. 【문경(聞慶)】 조령성(鳥嶺城) 숙종 34년 무자(1708년)에 돌로 쌓았음. 남북 18리, 둘레 18,509보. 성이 3개소에 있는데, 하나는 새재[鳥嶺]의 꼭대기에 있어서 충청도[湖]와 경상도[嶺]를 가름하였고, 하나는 응암(鷹巖)의 북쪽에 있는데, 이는 충원(忠元)의 옛성을 고쳐 쌓은 것으로 중성(中城)이라 부르며, 하나는 초곡(草谷)에 있는데, 여기엔 군량 창고가 있다. 이 3개의 성에 모두 홍예문(虹霓門)이 있어서 큰 길[大路]로 통하는데 산 꼭대기의 것은 조령관(鳥嶺關), 중성(中城)은 조동문(鳥東門), 초곡성은 주흘관(主屹關)이라 한다. 고부성(姑夫城) 고모성(姑母城)과 마주보며, 지금도 석축이 있다. 고모성(姑母城). 석축. 둘레 990척. 영로 : 조령ㆍ이화현(伊火峴)ㆍ고모령(古毛嶺) 모두 서쪽 통로. 계립령(鷄立嶺) 북쪽 통로. 관갑천(串岬遷). 남쪽 통로. 【진주(晉州)】 병영성(兵營城)의 내성(內城) 둘레 1,930척. 외성(外城) 둘레 10,330척. 선조 36년 계묘(1603년)에 영을 본주의 촉석산성(矗石山城)으로 옮겼다. 방어산성산(防禦山城山) 동쪽에 있으며, 위에는 석성(石城)이 서쪽엔 장군대(將軍臺)가, 아래에는 마제현(馬蹄峴)이 북쪽에는 장군의 철상(鐵像)이 있다. 전설에 태종 3년 계미(1403년)에 왜구가 이 성에 올라가 울타리[柵]를 세우고 스스로를 보전했다고 한다. 동량성(東梁城) 석축. 둘레 1,182척. 지금은 첨사진(僉使鎭)이 있음. 삼천진성(三千鎭城). 석축. 둘레 2,050척. 권관(權管)을 고성(固城)에 이속(移屬)했다. 영로 : 동현(東峴) 함창과의 경계. 마치(馬峙) 북쪽 통로. 사현(沙峴). 남쪽 통로. 【합천(陜川)】 영로 : 질현(知乙峴) 동쪽 통로. 두리현(頭里峴) 서북쪽 통로. 아현(阿峴) 삼가(三嘉)와의 경계. 마현(馬峴). 북쪽 통로. 【함양(咸陽)】 읍성 영종 5년 기유(1729년)에 돌로 쌓았다. 둘레 735척. 고읍성(古邑城). 토축. 둘레 735척. 옛적에 왜구에게 점령[所奠]된 적이 있으며, 지금의 읍성으로 옮겼다. 영로 : 팔량치(八良峙) 서북쪽 통로 도현(桃峴). 동쪽 통로. 【곤양(昆陽)】 읍성. 석축. 둘레 3,765척. 영로 : 열두고개[十二峙] 동쪽 통로. 율치(栗峙). 남쪽 통로. 【남해(南海)】 읍성 석축. 둘레 2,876척. 세조(世祖) 5년 기묘(1459년)에 쌓았다. 평산포성(平山浦城) 석축. 둘레 1,558척. 성고개보(城古介堡) 석축. 둘레 760척 미조항성(彌助項城) 중종 17년 임오(1522년)에 진을 설치하였다. 석축. 둘레 2,146척. 우고개성(牛古介城) 석축. 둘레 913척. 곡포성(曲浦城). 석축. 둘레 920척. 중종 17년 임오(1522년)에 우고개성을 폐지하고 이곳에 옮겼다. 영로 : 성현(城峴). 남쪽 통로. 【거창(居昌)】 성산성(城山城) 석축. 둘레 3리(里). 건흥산성(乾興山城) 석축. 둘레 3리. 영로 : 도마현(都馬峴) 무주(茂朱)와의 경계. 적현(赤峴) 성주(星州)와의 경계. 우마현(牛馬峴). 북쪽 통로. 【사천(泗川)】 읍성. 석축. 둘레 5,015척. 영로 : 울도치(鬱道峙)ㆍ부용치(芙蓉峙). 모두 동남쪽 통로. 【삼가(三嘉)】 읍성. 석축. 둘레 3,259척. 영로 : 삼대치(三大峙) 단성(丹城)과의 경계. 도두치(都頭峙) 의령(宜寧)과의 경계. 아두치(阿豆峙). 합천과의 경계. 【의령(宜寧)】 읍성. 석축. 둘레 2,570척. 선조 22년 기축(1589년)에 쌓았다. 영로 : 장치(長峙) 남쪽 통로. 대현(大峴) 서쪽 통로. 월라현(月羅峴). 동쪽 통로. 【하동(河東)】 영로 : 장령(長嶺)ㆍ황령(黃嶺)ㆍ우치(牛峙) 모두 동쪽 통로. 해치(蟹峙). 동남쪽 통로. 【산청(山淸)】 영로 : 본통치(本通峙) 함양과의 경계. 고천령(古川嶺) 거창과의 경계. 밀점치(密占峙) 삼가(三嘉)와의 경계. 척지치(尺旨峙) 단성과의 경계. 백야치(白也峙). 동쪽 통로. 【안의(安義)】 영로 : 육십치(六十峙). 장수(長水)와의 경계. 【단성(丹城)】 영로 : 시치(失峙) 남쪽 통로. 신치(新峙). 서쪽 통로. 【김해(金海)】 읍성. 석축. 둘레 4,683척. 영로 : 율현(栗峴)ㆍ노현(露峴) 모두 서쪽 통로. 나전치(羅田峙)ㆍ마현(馬峴). 모두 북쪽 통로. 【창원(昌原)】 읍성 석축. 둘레 2,004척. 영로 : 안민령(安民嶺) 동남쪽 통로. 신풍현(新豐峴) 동쪽 통로. 제굴현(諸屈峴) 서쪽 통로. 남정현(南井峴). 남쪽 통로. 【함안(咸安)】 읍성. 석축. 둘레 7,003척. 영로 : 일이현(一伊峴) 동쪽 통로. 미산령(眉山嶺), 어령(於嶺) 칠원(漆原)과의 경계. 대현(大峴). 진해와의 경계. 【거제(巨濟)】 우수령성(右水嶺城) 석축. 둘레 2,620척. 선조 37년 갑진(1604년)에 고성현(固城縣) 두룡포(頭龍浦)에 옮기고, 이어서 가배만호(加背萬戶)를 두었다. 옥포성(玉浦城) 석축. 둘레 1,074척. 지세포(知世浦). 석축. 둘레 1,605척. 일본에 가는 사람은 반드시 여기서 바람이 자기를 기다려서 뱃길을 떠난다. 【고성(固城)】 읍성 석축. 둘레 3,524척. 통영성(統營城) 석축. 둘레 11,730척. 해방(海防)조(條)에 상세히 나타나[詳見] 있다. 솔비포성(所乙非浦城). 석축. 둘레 825척. 영로 : 성치(城峙) 사천(泗川)과의 경계. 감치(甘峙) 서쪽 통로. 대치(大峙). 동남쪽 통로. 【칠원(漆原)】 읍성. 석축. 둘레 1,595척. 영로 : 어령치(於嶺峙), 적현(赤峴) 창원과의 경계. 율전치(栗田峙). 진해와의 경계. 【진해(鎭海)】 읍성. 석축. 둘레 446척. 영로 : 대현(大峴). 북쪽 통로. 【웅천(熊川)】 읍성 석축. 둘레 3,514척. 제포성(薺甫城) 석축. 둘레 4,313척. 안골포성(安骨浦城). 석축. 둘레 1,714척. 영로 : 송현(松峴) 서쪽 통로. 율천현(栗川峴). 동쪽 통로.
〈유성룡 소론(柳成龍所論)〉 유성룡은 말하기를, “부산으로부터 북쪽으로 직로(直路)에 밀양부(密陽府)가 있고, 동해변(東海邊)으로 비스듬히 울산군과 절도영(節度營)이 있고, 서쪽으로 비스듬히는 김해부(金海府)인데, 이 세 길은 모두 요충지로서 꼭 지켜야 되는 곳이다. 이 3개소의 방비만 튼튼하다면, 적이 설령 다른 길로 흩어져 나오더라도 견고한 성이 뒤에 있고, 많은 군병이 앞에 있어 견제하기 때문에 함부로 내지를 침범하지 못한다[不敢輕犯內地]. ○ 의령현(宜寧縣)에 낙동강의 하류가 있는데 그 한 가닥이 위로 진주와 단성(丹城)으로 뻗치었는데 이름을 거름강[歧江]이라고 한다. 거기서 15리쯤 되는 상류에 정진(鼎津)이 있는데, 가장 요해가 되는 곳이다. 곽재우(郭再祐)가 이 강에서 지키어 적을 물리쳤다. 경상도ㆍ전라도ㆍ충청도의 경계에는 구례(求禮)의 두치진(頭恥津)ㆍ함양(咸陽)의 팔량현(八良峴)ㆍ안음(安陰)의 육십현(六十峴)ㆍ지례(知禮)의 우두현(牛頭峴)ㆍ김산(金山)의 추풍령(秋風嶺)ㆍ문경(聞慶)의 새재[鳥嶺]ㆍ선산(善山)의 낙동강(洛東江)ㆍ풍기(豐基)의 죽령(竹嶺) 등이 산천의 험조(險阻)로서 가장 중요한 곳이어서 점거하여 지킬 만하지만, 만일 사람이 수비할 줄 모른다면 좁은 길이 다른 곳[境]으로 통하여 옆으로 나간 것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 바다 가운데 있는 여러 섬으로 천성(天城)ㆍ가덕(加德)ㆍ거제(巨濟) 등이 모두 작은 군에 해당하는 땅이며, 김해와 웅천과의 거리는 뱃 길로 겨우 20리 정도인데, 전라도와의 경계도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바라보인다. 또한 과거에 바다에 연한 일대에서 내륙에 걸쳐[以及內地] 산성을 많이 쌓았으므로 여기저기에 요충을 점령하여 산과 물의 요해지를 질러 막았지만[控扼], 오랜 태평한 시대를 지나는 동안에 모두 폐지하고 수리하지 않아서 위급한 경우에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되었다. 대구의 산성이나 인동(仁同)의 천생산성(天生山城) 같은 따위가 그 일례다. 이 밖에 의령(宜寧)의 정진(鼎津)ㆍ삼가(三嘉)의 산성ㆍ합천(陜川)의 야로산성(冶爐山城)ㆍ성주(星州)의 가야산성(伽倻山城) 등은 모두 천연적인 험한 요새에 속하므로 순차적으로 수리하여 군량을 저장하고 군병을 주둔하여 튼튼히 지키고 움직이지 말며, 들[野]을 말끔히 비우고 적을 기다리면 앞에는 약탈할 물건이 없고 뒤로는 꺼리는 것이 있을 터이니, 국가를 보위(保衛)하고 폭도를 방어하는 데에 실로 편리할 것이다.” 하였다.
〈이경여 소론(李敬輿所論)〉 이경여(李敬輿)는 말하기를, “문경의 북쪽, 새재의 동쪽에 산성이 하나 있으니 이름을 어류(御留)라고 한다. 어느 시대의 일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떤 이는 고려 태조[麗祖]행차를 쉬던 곳[住駕之所]이라고 한다. 그 안의 넓이는 남한산성의 10분의 9만큼 되지마는 지세가 험하고 튼튼하기로는 남한산성이 비교가 안 된다. 동쪽과 남쪽은 만 길이나 되는 절벽이 있어서 새짐승이라도 넘어올 수 없고, 북쪽은 동쪽이나 남쪽에 비하여 약간 낮지만 역시 사람의 힘으로는 통할 수가 없으니 성첩(城堞)을 조금만 만들더라도 안심할 수 있다. 그 서쪽에도 통행할 수 있는 길을 있지마는, 남한산성의 가장 험한 곳과 비교하여도 역시 몇 배 이상 힘들 뿐 아니라, 성을 쌓을 곳이 5ㆍ600파(把)에 불과하고, 크고 작은 돌들이 흙더미처럼 쌓여 있으니, 마음대로 가져다가 튼튼히 쌓는다면 공사도 매우 간단할 것이며, 꼭 높이 쌓지 않더라도 이미 자연적인 지세가 침범하기 어렵다. 성 안에는 우물ㆍ샘ㆍ개천ㆍ시내가 수없이 흘러나오며, 수목이 울창하게 들어서서 얼마든지 쓰고도 남을 것이니, 천 칸의 큰 건물도 지을 수 있으며, 수개 년 간의 땔나무도 준비될 수 있어 천연적인 험지로 실로 동남에서 제일가는 곳이다. 가운데는 4ㆍ50,000 군병을 수용할 수 있으며, 또한 1ㆍ20,000호를 들여앉힐 수 있다. 조금만 수축하여 가옥을 건축하고 군량과 말먹이를 쌓아둔[峙置]다면 아마 영구히 함락되지 않을 터가 될 것이며, 백만의 군병이 사방에서 들어밀더라도 성 안의 사람들은 마음 놓고 살 수 있을 것이니, 만전(萬全)을 기할 땅이란 여기를 두고는 다른 데는 없을 것이다. 이곳은 동쪽으론 태백(太白)ㆍ소백(小白)과 연(連)하였고, 북쪽은 월악(月嶽)과 통하며, 서쪽은 화산(華山)과 닿고, 따라서 내려가면 속리산(俗離山)을 향하여 바로 덕유산(德裕山)ㆍ지리산(智異山)과 연결되어 바다까지 가게 된다. 또한 북쪽에는 4군(四郡)이 있어 그대로 강원도로 통하며, 충청도는 오른쪽에 놓여 있고, 안동(安東)ㆍ풍기(豐基)ㆍ영주(榮州)는 그 왼쪽에 있으며, 낙동강은 그 남쪽으로 뻗어나갔고, 한강의 상류는 그 후면에서 흘러 나간다. 높은 언덕, 긴 재에는 구름이 덮이어 햇빛을 가리고, 험한 산길이 서로 연결되어 어디로든지 통하지 않는 곳이 없다. 견제하는 세력은 마치 목을 조르고 덜미를 잡는 것 같다. 산골짜기는 멀리 뻗치고 험한 절벽은 간 곳마다 가로걸려 100리 안쪽에서는 아무 데도 발붙일 곳이 없으니, 제 아무리 천하의 군사를 가지고라도 포위할 도리가 없다. 성 북쪽의 월악과 그 동쪽의 작성(鵲城)ㆍ순흥(順興)과 그 서쪽의 조령ㆍ희양성(曦陽城)과 그 남쪽의 고모(姑母)ㆍ토천(兎遷)은 어떤 것은 험하디 험한 산성이고, 어떤 것은 잔도(棧道)의 첩첩 관문(關門)이어서 약간의 병력만 배치 주둔시켜 성원(聲援)이 서로 연락되면 호령이 통할 수 있을 터이니, 충청ㆍ전라ㆍ경상 3도와 동북의 경기까지도 제어될 것이며, 산길이 사방으로 통하여 명맥이 막히는 곳이 없으니 산길로 식량을 운반하면 식량도 결핍되지 않을 것이고, 혹 서북쪽에서 사태가 돌발하면 대가(大駕)가 머무를 수가 있고, 남방에서 경보가 있을 적에는 방어진지로 될 수 있는 곳이다.” 하였다.


 

[주D-001]곽재우(郭再祐) : 1552년(명종 7)~1617년(광해군 9). 자는 계수(季綏), 호는 망우당(忘憂堂), 본관은 현풍(玄風). 무예에 뛰어났으며, 의령(宜寧)에서 의병을 일으켜 천강 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불리워졌으며 용맹을 떨쳤다. 정유재란 때 경상좌도방어사에 승진 화왕산성(火旺山城)을 방어한 뒤 수차에 걸쳐 경상도 병마절도사ㆍ수군통제사 등의 벼슬을 하였음.
[주D-002]권관(權管) : 각 수영(水營)이나 진(鎭)에 두었던 종 9품 벼슬.
[주D-003]이경여(李敬輿) : 1585년(선조 18)~1657년(효종 8). 자는 직부(直夫), 호는 백강(白江) 또는 봉암(鳳巖), 본관은 전주(全州). 부수찬ㆍ교리를 거쳐 좌승지ㆍ전라도 관찰사를 역임. 병자호란 때 왕을 따라 남한산성에 호종했다. 청나라 연호 사용을 반대하다가 심양에 억류되었고, 귀국하여 우의정ㆍ영의정에 올랐다. 시문에 능하고 글씨에도 뛰어났다. ‘이경여(李敬輿)’의 ‘敬輿’가 어느 본엔 그의 호인 ‘白江’으로 되어 있음.
[주D1-001]석축(石築) : ‘석축(石築)’의 ‘築’이 어느 본에는 ‘城’으로 되어 있음.
[주D1-002]팔조령(八助嶺) : ‘팔조령(八助嶺)’의 ‘八’이 몇몇 본에는 ‘入’으로 되어 있음.
[주D1-003]가슬현(嘉瑟峴) : ‘가슬현(嘉瑟峴)’의 ‘峴’이 어느 본엔 ‘峙’로 되어 있음.
[주D1-004]석성(石城) : ‘석성(石城)’의 ‘城’이 다른 본들엔 ‘築’으로 되어 있음.
[주D1-005]두모포(豆毛浦) : ‘두모포(豆毛浦)’의 ‘浦’가 다른 본에는 ‘峴’으로 되어 있음.
[주D1-006]남면현(南眠峴) : ‘남면현(南眠峴)’의 ‘眠’이 어느 본에는 ‘面’으로 되어 있음.
[주D1-007]경계[界] : ‘경계[界]’가 어느 본엔 ‘路’로 되어 있음.
[주D1-008]여현(礪峴) : ‘여현(礪峴)’의 ‘礪’가 원본엔 ‘峴’으로 되어 있는데, 다른 본들에 의거하여 고쳤음.
[주D1-009]한령(汗嶺) : ‘한령(汗嶺)’이 어느 본엔 ‘汙峴’으로 되어 있음.
[주D1-010]골리현(骨里峴) : ‘골리현(骨里峴)’의 ‘峴’이 어느 본엔 ‘峙’로 되어 있음.
[주D1-011]경계[界] : ‘경계[界]’가 어느 본에는 ‘路’로 되어 있음.
[주D1-012]4,677 : ‘4,677’이 원본의 다른 본들에는 ‘4,675’로 되어 있음.
[주D1-013]보양(寶壤) : ‘보양(寶壤)’의 ‘壤’이 원본엔 ‘穰’으로 되어 있는데, 다른 본들에 의거하여 고쳤음.
[주D1-014]태조(太祖) : ‘태조(太祖)’의 ‘祖’가 원본에는 ‘宗’으로 되어 있는데, 다른 본들에 의거하여 고쳤음.
[주D1-015]이물현(尼勿峴) : ‘이물현(尼勿峴)’의 ‘尼’가 어느 본엔 ‘泥’로 되어 있음.
[주D1-016]석축(石築) : ‘석축(石築)’의 ‘築’이 어느 본엔 ‘城’으로 되어 있음.
[주D1-017]화령(花嶺) : ‘화령(花嶺)’의 ‘嶺’이 어느 본엔 ‘峴’으로 되어 있음.
[주D1-018]충청도[湖] : ‘충청도[湖]’가 어떤 본엔 ‘胡’로 되어 있음.
[주D1-019]관갑천(串岬遷) : ‘관갑천(串岬遷)’의 ‘岬’이 어느 본엔 ‘鴨’으로, 어느 본엔 ‘甲’으로 되어 있음.
[주D1-020]촉석산성(矗石山城) : ‘촉석산성(矗石山城)’의 ‘矗’이 원본엔 ‘疊’으로 되어 있는데, 다른 본들에 의거하여 고쳤음.
[주D1-021]장군대(將軍臺) : ‘장군대(將軍臺)’의 ‘臺’가 원본엔 ‘堂’으로 되었는데, 《증보문헌비고》에 의거하여 고쳤음.
[주D1-022]동현(東峴) : ‘동현(東峴)’의 ‘峴’이 어느 본엔 ‘城’으로 되어 있음.
[주D1-023]사현(沙峴) : ‘사현(沙峴)’의 ‘峴’이 어느 본엔 ‘峙’로 되어 있음.
[주D1-024]점령[所奠] : ‘점령된[所奠]’의 ‘奠’이 어느 본엔 ‘典’으로 되어 있고 《증보문헌비고》엔 ‘焚’으로 되어 있음.
[주D1-025]세조(世祖) : ‘세조(世祖)’의 ‘祖’가 몇몇 본들에는 ‘宗’으로 되어 있음.
[주D1-026]2,146 : ‘2,146척’이 어느 본엔 ‘7,146척’으로 되어 있음.
[주D1-027]무주(茂朱) : ‘무주(茂朱)’의 ‘朱’가 원본 및 몇몇 본들엔 ‘州’로 되어 있는데, 다른 본에 의거하여 고쳤음.
[주D1-028]우치(牛峙) : ‘우치(牛峙)’의 ‘峙’가 어느 본엔 ‘嶺’으로 되어 있음.
[주D1-029]상세히 나타나[詳見] : ‘상세히 나타나 있다[詳見]’의 ‘詳’이 원본엔 ‘佯’으로 되어 있는데, 다른 본에 의거하여 고쳤음.
[주D1-030]적현(赤峴) : ‘적현(赤峴)’의 ‘峴’이 다른 본들에는 ‘峙’로 되어 있음.
[주D1-031]동쪽 통로 : ‘동쪽 통로[東路]’가 어느 본엔 없음.
[주D1-032]밀양부(密陽府) : ‘밀양부(密陽府)’가 어느 본엔 ‘密陽’으로 되어 있음.
[주D1-033]함부로 내지를 침범하지 못한다[不敢輕犯內地] : ‘함부로 내지를 침범하지 못한다[不敢輕犯內地]’의 ‘地’ 다음에 어느 본엔 ‘矣’가 있음.
[주D1-034]육십현(六十峴) : ‘육십현(六十峴)’의 ‘峴’이 어느 본엔 ‘峙’로 되어 있음.
[주D1-035]곳[境] : ‘곳[境]’이 어느 본엔 ‘徑’으로 되어 있음.
[주D1-036]가덕(加德) : ‘가덕(加德)’의 ‘德’이 어느 본엔 ‘悳’으로 되어 있음.
[주D1-037]내륙에 걸쳐[以及內地] : ‘내륙에 결쳐[以及內地]’의 ‘及’ 다음에 어느 본엔 ‘於’가 있음.
[주D1-038]질러 막았지만[控扼] : ‘질러 막았지만[控扼]’의 ‘扼’이 어느 본엔 ‘阨’으로 되어 있음.
[주D1-039]고려 태조[麗祖] : ‘고려 태조[麗祖]’가 원본에는 ‘麗朝’로 되었는데, 다른 본들에 의거하여 고쳤음.
[주D1-040]행차를 쉬던 곳[住駕之所] : ‘행차를 쉬던 곳[住駕之所]’의 ‘住’가 어느 본엔 ‘駐’로 되어 있음.
[주D1-041]성첩(城堞) : ‘성첩(城堞)’의 ‘堞’이 어느 본엔 ‘牒’으로 되어 있음.
[주D1-042]성첩(城堞) : ‘성첩(城堞)’의 ‘堞’이 어느 본엔 ‘牒’으로 되어 있음.

 

백사집 제1권
 시(詩)
오랫동안 남중(南中)에 떨어져 있다 보니, 낙상(洛上)의 친구들이 날로 생각나는 것을 깨닫겠다. 우연히 공사를 인하여 일찍이 서울에 이르렀을 적에는 효언(孝彦)이 날마다 나를 내방하였고, 도중에 은진(恩津)을 들렀을 적에는 수지(受之)가 관접(館接)을 매우 정성스럽게 해주었다. 그래서 돌아와 의춘(宜春)에 누워서 이공(二公)의 뜻을 느끼어 생각하니, 실로 천애(天涯)의 골육이나 다름이 없었다. 오월 십칠일 밤의 꿈에는 이공과 더불어 서로 평상시처럼 해학을 하였으니, 어찌 느낀 바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꿈을 깨어 그 일을 생각하고 인하여 율시 두 수를 지어 기록하는 바이다.


백옥당 안에서 집무하는 선비요 / 白玉堂中士
황룡새 가에 사는 사람이로다 / 黃龍塞上人
나의 시름겨운 얼굴은 노쇠했는데 / 愁容余潦倒
그대의 명환은 청신하기만 하네 / 名宦子淸新
빛난 것은 시사를 바로잡는 책략이요 / 燀赫匡時略
외로운 나는 나라를 떠난 몸이로다 / 零丁去國身
남은 논의를 접할 길이 없었는데 / 無由接餘論
오히려 꿈 속에 친하기를 허여하였네 / 猶許夢相親

지난번 왕부현에 이르러 보니 / 伊昔王鳧縣
공당에는 신선이 앉아 있었네 / 公堂坐羽人
그대에게 들르니 시름이 사라져 가고 / 經過愁欲破
훌륭한 접대에 뜻이 더욱 새로웠네 / 館穀意彌新
다만 수시로 꿈이나 꿀 뿐이요 / 只得時成夢
어떻게 한 번 몸이 갈 수 있으랴 / 何由一致身
마치 정진의 잉어를 만난 것 같아 / 如逢鼎津
옛정의 친밀함을 묻고 싶구려 / 欲問舊情親


 

[주D-001]왕부현(王鳧縣) : 지방의 현(縣)을 비유한 말이다. 후한(後漢) 때 선인(仙人)왕교(王喬)가 섭현(葉縣) 영(令)으로 있으면서 거기(車騎)도 없이 삭망(朔望) 때마다 조정에 나오므로, 그를 이상하게 여겨 엿보게 한 결과, 그가 올 무렵에 쌍부(雙鳧)가 동남쪽에서 날아오므로 그물을 쳐서 이를 잡아 놓고 보니, 신 한 짝이 들어 있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83》
[주D-002]정진(鼎津)의 잉어 : 서신(書信)을 뜻한다. 《고악부(古樂府)》 음마장성굴행(飮馬長城窟行)에 “손님이 먼 데서 찾아와, 나에게 잉어 두 마리를 주었네. 아이 불러 잉어를 삶게 했더니, 뱃속에서 편지가 나왔네[客從遠方來 遺我雙鯉魚 呼童烹鯉魚 中有尺素書].” 한 데서 온 말이다.

서애선생문집 제6권
 서장(書狀)
오 유격(吳遊擊)의 글을 봉(封)하여 올리고 겸하여 적을 방어하는 상황을 보고하는 서장


어제 오 유격(吳遊擊 오유충(吳惟忠))이 상주에서 신에게 글을 보내 요새를 설치하여 적을 방어하는 일에 대하여 언급하였습니다. 신은 전번에 충주에 가던 도중 분호조 판서(分戶曹判書) 김명원(金命元)이 명장 몇 사람을 도와 장차 새재 등에 요새를 설치하는 일의 적당 여부를 답사하러 왔다는 말을 잠깐 들었으나 무슨 일인지 잘 몰랐습니다. 지금 오 유격의 글을 보니 또한 이 일에 대해 “가부간의 처리는 당연히 조정에서 내려야 한다.” 하였기에 그 글을 동봉하여 삼가 올립니다. 한편으로는 도원수 및 좌우도(左右道)의 순찰사에게 공문을 보내, 각처의 요충지를 조사하여 오 유격에게 회답하게 조치하였습니다. 그러나 요새를 설치하여 적을 방어하는 일은 본디 오늘의 급선무이지만, 적의 세력이 흩어져 지난해와 같다면, 깊은 산 궁벽한 골짜기마다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을 터이니, 한두 곳의 요새로는 막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설치하고자 해도 현재 백성의 힘으로는 감당하지 못할 것이니, 앞으로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흉측한 적은 동래와 부산을 소굴로 삼고 울산ㆍ기장ㆍ김해ㆍ창원으로 수미(首尾)를 삼으며, 양산ㆍ밀양을 중심부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군사가 저쪽을 구원하면 이쪽을 치고 서쪽을 막으면 동쪽으로 불쑥 나와 기회를 타서 빈 곳으로만 출몰하여, 우리를 분주하게 여가가 없게 하여 지치고 주려서 절로 곤궁이 극도에 이르게 합니다. 적은 앉아서 그 틈을 이용하여 삼켜 버릴 계책을 이루려 하니, 그들의 흉측한 음모는 우연이 아닙니다.
신의 어리석은 견해로 오늘의 형편을 자세히 헤아리건대, 아무리 많은 요새를 다른 곳에 설치하더라도 영남이 지탱되지 못하면 강원도와 호남ㆍ호서가 차례로 병란을 당하여 국사는 그르칠 것입니다.
대개 적이 매우 꺼리고 두려워하는 것은 명 나라 군사뿐입니다. 지금 만약 유 총병을 대구와 청도의 경계에 진출케 해서, 경주 및 그 중간에서 안으로 침입한 적을 좌우로 살피며 막고, 또 참장 낙상지를 고성과 사천의 경계에 진출시켜 서쪽으로 침범할 길을 차단하소서. 그리고 삼도의 수군으로 바다와 육지에서 합세하여 위풍당당하게 하고, 바닷길을 따라 순천에서부터 호남의 곡식을 운반하여 군량을 대되, 바람을 이용하면 하루 사이에 도착할 수 있어 육지로 운반하는 힘을 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곽재우, 박진 등을 정진(鼎津)으로 나아가게 하여 기구를 설치하고 굳게 지켜서 적선이 건너지 못하게 막고, 세 곳 군사를 연이어 싸우면서 또 지키게 하면, 적은 세력이 절로 움츠리어 멋대로 날뛰지 못합니다. 이렇게 하면 적이 노략질을 한다 해도 소득이 없고, 큰길이나 뱃길로 운반하던 양식도 오래 버틸 수 없으니, 국사가 만에 하나라도 거의 이루어질 가망이 있습니다.
무릇, 군사상 일은 신이 감히 함부로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형세를 먼저 얻는 데에 있으니, 형세의 득실에 따라 승부가 결정됩니다. 만약 형세를 얻지 못하고 무턱대고 승부를 겨룬다거나 두서 없이 싸움만 일삼는 것은 적에게 사로잡히기 알맞을 따름입니다.
지난날 적병이 서울에 웅거하였을 때에, 권율과 이빈이 군사를 합쳐 중간에서 파주를 굳게 지키니 적이 곧바로 내려가지 못했고, 고언백 등의 방어군은 왼쪽을 맡아 동편 길목의 적을 쳤습니다. 또한 박유인, 윤선정, 이산휘 등의 군사는 오가면서 서편 길목에 복병을 배치하여 오른쪽을 맡아 서쪽으로 나오는 적을 무찌르고, 또 정걸(丁傑) 등 수군은 용산을 따라 남쪽 길목에서 적을 견제하였습니다. 비록 군량은 모자라고 병졸은 지쳐서 견고한 성 밑까지 나아가 대결하지는 못했지만, 그 형세는 벌써 우리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2월 이후로는 여러 장수들은 베어 죽인 것이 더욱 많았고, 적들은 양쪽 성 밖에 나와 감히 풀을 베지 못하여 굶어 죽은 말은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마침내 뒤로 물러났던 것입니다. 만약 형세가 저들에게 유리하여 요동시키지 못할 기세가 있었다면, 그때 명군이 평양으로 되돌아간 뒤에 교활한 적들이 우리를 아껴서 스스로 물러갔겠습니까.
지금의 형세가 그때와 매우 비슷한데, 큰 근심거리는 도내의 군량은 벌써 바닥이 났고, 각 역참의 곡식을 옮긴다는 것은 거북 등에서 털을 긁는 것 같아서 이어나갈 계책이 없습니다. 그리고, 기후가 벌써 추워졌는데 병사들이 입은 여름옷은 다 해어져 더러 맨살이 많이 드러났습니다. 지금 들으니 장수 이하 모두 고향 생각이 간절하다 하니, 말리기도 어렵지만 비록 혹시 말을 듣고 남아 있다 해도 제대로 해 주지 못하니, 어쩔 계책이 없습니다.
이로 인해 어리석은 신은 당황하여 어찌할 줄 모르겠습니다. 신의 병은 이미 고질이 되어 정신이 더욱 혼미합니다. 이전에도 나랏일을 그릇되게 헤아렸고 지금도 좁은 소견을 무릅쓰고 늘어놓아 앞뒤가 어긋난 점이 많으나, 생각나는 일을 여쭙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직 바라건대, 조정에서는 좋은 계책을 속히 시행하시어 위태로운 형세를 구하소서.


 

[주D-001]분호조 판서(分戶曹判書) : 분조(分曹) 즉 분정부(分政府)의 호조 판서이다. 임진왜란 중 왕과 정부가 의주로 피란 가는 도중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광해군(光海君)에게 일부의 대신들로써 6조(六曹)의 관원을 따로 임명, 조직하여 전수(戰守)ㆍ민정(民政)의 일을 시행하게 하였다.

 

서애선생문집 제6권
 서장(書狀)
도내(道內)의 군민(軍民)에 대한 일을 처리한 뒤 올라오라는 유지(有旨)를 받들고 올린 서장


신이 삼가 본도(本道)의 형편을 살피건대 좌ㆍ우도 모두가 급하오나, 당장 우도의 형편이 더욱 위급합니다. 대개 명군이 울산을 공격할 때 우도 병사 정기룡(鄭起龍) 이하 모두가 좌도로 동원되었고 우도는 비었습니다. 적은 그 틈을 타서 멋대로 공략하였습니다. 성주로부터 초계(草溪)ㆍ합천ㆍ의령ㆍ산음ㆍ삼가ㆍ진주ㆍ단성ㆍ하동ㆍ곤양ㆍ사천ㆍ고성ㆍ진해ㆍ함안ㆍ칠원ㆍ창원 등의 고을은 모두 지키지 못한 곳으로, 적병이 드나들며 불태우고 백성을 살해하는 행위가 날마다 더욱 심해갑니다.
명군이 경주로 물러난 뒤로 신은 곧 도원수와 상의하여 정기룡을 급히 우도로 돌려보내 나머지 군사를 수습해서 적을 방어할 계책을 세우도록 하였습니다. 그후 도원수가 또 한명련(韓明璉)을 보내 합세하게 하였으나, 지금도 군사를 모아 적을 막지 못하고 있습니다. 순찰사 이용순(李用淳)도 명군의 접대 관계로 오래 좌도에 있으므로 우도에는 감사가 없는지 이미 오래입니다.
민심은 흩어지고 사족과 세가들은 모두 행장을 꾸려 북으로 피란을 계획하며, 서민들도 산골짜기로 도망하여 동원에 응하지 아니합니다. 봄철이 차차 깊어 가는 지금은 농사를 바로 시작하여야 할 터인데, 씨 뿌릴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몇 달만 지나면 적이 오지 않더라도 남은 백성은 모두가 지쳐 쓰러질 것이니, 몹시 한심합니다. 그리고, 명군이 내왕하는 길목에는 말[馬] 손질과 접대하는 역사에 시달려 군읍이 쓸쓸하여 날마다 어지러워지니, 신 같은 어리석음으로는 계책을 마련할 줄 모르겠습니다.
대개 오늘의 상황은 전과 다릅니다. 전번에는 적이 비록 국경가에 있었다 해도 거점이 울산ㆍ동래ㆍ김해의 몇 고을뿐이었는데, 지금은 울산ㆍ서생포(西生浦)로부터 앞뒤가 수백 리에 뻗쳐 곧장 전라도의 순천과 광양 경계까지 이르렀습니다.
왜적은 바다와 육지의 험한 곳을 이용하여 소굴을 만들고, 사로잡힌 우리 백성들을 많이 모아 세력을 확장합니다. 요즈음 각 진 정탐꾼의 보고에 의하면, 울산에 있는 적의 소굴에서는 바야흐로 밤낮없이 성채를 증축하고 있습니다. 양산도 마찬가지이며, 진주ㆍ사천ㆍ창원ㆍ고성 사이에도 이어 성을 쌓는 모양입니다. 거창, 함양, 삼가, 단성 등에서는 날마다 분탕질이 심해 간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 흉측한 음모가 반드시 누에가 뽕잎 먹듯이 하려는 계책에 있습니다. 만약 울산에서 다시 나아가면 경주요, 진주에서 한 걸음 더 가면 곧 의령ㆍ합천이니, 그 기세가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이는 신의 구구한 어리석은 생각에도 한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개 우도의 적은 많이 나와 공격한다 해도 10명이나 100명으로 무리지을 뿐인데, 더러는 우리나라의 간악한 백성이 뒤섞여 드나듭니다. 만약 우리에게 좀 훌륭한 장수와 정예한 병졸이 있다면 몰아낼 수 있겠는데, 아직 손을 못 대고 있습니다. 지금 마땅히 충청 병사 이시언(李時言)에게 정예한 병사를 선발하여 거느리고 급히 우도로 가서 정기룡, 김응서(金應瑞) 등과 합세하여 진주와 사천에 모인 적을 몰아내게 하소서. 만약 진주와 사천에 적이 없어지면 아군은 마땅히 기강(歧江)과 정진(鼎津)을 한계로 지키게 합니다. 그러면 안쪽 백성들이 이를 굳게 믿고 모여 편히 농사를 짓게 하여서 더 나아가 취할 길을 도모하소서.
좌ㆍ우도에는 비록 병사가 있지만 그 중간이 넓어 기맥이 통하지 못하니, 별도로 한 장수를 대구에 두어 군사를 주둔하고 훈련시켜 좌ㆍ우도의 세력을 서로 연결해야 한다는 사실은 신이 일찍이 아뢰었습니다. 다만 장수를 두되 신중을 기해 곽재우와 김응서 두 사람 중에서 선택해서 맡기는 것이 타당하오니, 조정에서는 빨리 헤아려 처리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포로가 된 우리나라 사람들이 적 가운데 말려들어 빠져나오지 못하여 그들의 복역이 되기도 하고 더러는 간첩이 되어 여러 가지로 악행을 저지르니, 몹시 분통이 터집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와 같이 된 까닭을 생각해 봅니다. 그들이 한번 적중에 들어가면 적은 반드시 머리를 깎고 변복을 시켜 왜인의 모습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그런데 각군의 우리 복병들은 전공만을 탐하여 진위를 가리지 않고 만나기만 하면 죽여 버립니다. 때문에 그들 중에 아무리 고향을 생각하고 돌아오려는 자가 있어도 목숨이 두려워 감히 나오지 못하니, 적에 붙을 마음은 더욱 굳어지고 점점 귀순할 길은 막힙니다. 오직 이와 같으므로, 적의 무리는 날마다 불어나고 우리의 세력은 날로 줄어듭니다. 진실로 불러 위무할 방법을 마련하여 전원이 다 돌아오게 한다면 적들도 달리 간악한 계책을 베풀 데가 없습니다.
신은 처음 내려올 때부터 바로 이러한 뜻을 각진에 공문을 보내 알렸습니다. 지금 진주 목사 이현(李玹)의 보고에 의하면, 향교의 유생 하경남(河慶男)이 본 고을에서 사로잡혀간 사람 222명을 유인해 냈고, 좌방어사 권응수(權應銖)의 진중에서도 21명을 유인하였으며, 우도 병사 정기룡의 진중에서는 고성ㆍ진주의 남녀 102명을 유인한 명단을 만들어 알려 왔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가 생활의 터전을 잃고 떠도는 무리들로 나오긴 했으나 의지해 살아갈 길이 없으면 장차 뿔뿔이 흩어져 뒹굴게 될 것이고, 또한 다시 뛰어 들어갈 우려도 없지 않습니다. 나오지 못한 자는 이를 보고 경계하여 도망쳐 나오려다가 도리어 중지할 것입니다. 그러니 양식을 맡은 관원 이영도(李詠道)ㆍ성안의(成安義) 같은 사람에게 맡겨 조처하게 하되, 적의 소굴에서 약간 먼 윗도[上道]로 옮기고, 편리하고 좋은 토지로 비어 있는 곳을 가려 농사 지을 양식과 종자와 소를 주어 안심하고 살게 하며, 기한을 정하여 요역을 면제하여 흩어지지 않게 하소서. 그러면 적중에 남은 자들도 소문을 듣고 권하여 서로 연달아 와서 투항하고 적에게 붙은 무리는 저절로 고립됩니다.
또 적들이 우리 강토에 머무른 지가 벌써 7년이나 되고, 들락거리며 노략질을 할 때면 모두 우리나라 사람으로 분장을 하여 모양을 분간할 수 없으니, 이것도 당연히 조치하소서. 만약 고을 안의 정남(丁男)에게 모두 요패(腰牌)를 차게 하되 안쪽에는 성명과 용모를 새기고 겉에는 주소와 관직을 찍어 표시하여 일제히 차게 하면, 간첩을 분간할 수 있고, 또 이리저리 옮겨감을 금지할 수 있으니, 역시 오늘에 해야 할 계책입니다.
이상 몇 가지 구구한 신의 얕은 계책을 본도의 순찰사 및 도원수에게 글을 보내 알려 주고 나서 병든 몸을 끌고 올라가겠사오니, 조정에서는 다시 거취를 헤아려 시행하소서.


 

[주D-001]요패(腰牌) : 군졸이나 조례(皁隷)들이 차던 나무로 된 패로, 엄금(嚴禁)이라고 새겼다.


서애선생문집 제9권
 서(書)
유격(遊擊) 오유충(吳惟忠)에게 답하는 글 계사년(1593, 선조26) 8월


보내 주신 첩자(帖子)를 삼가 받게 되고 게다가 외람되이 칭찬까지 하시니, 감격한 나머지 부끄러워 등에 땀이 뱄습니다.
제가 일찍이 이 나라의 대부 반열에 있으면서 나라와 백성을 걱정한 사실이 있었다면 국사가 이런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노야께서는 이러한 저에게 무엇을 취할 점이 있다고 분에 넘치는 칭찬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너무나 감당키 어렵습니다.
보내 주신 글에, 왜노(倭奴)가 교활하고 간사한 데다가 길을 익숙하게 알고 있으니 제방을 치밀하게 해야 하며 요충 지대에 험한 설비를 하라는 등의 말씀은 참으로 적을 요량하고 환란을 막는 좋은 책략이며 우리나라를 위한 매우 원대한 계획이라 하겠습니다.
제가 그 글을 절반도 읽기 전에 너무 감격하여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는 것은 무엇 때문이었겠습니까. 당신께서는 평양 싸움 때부터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용기를 떨쳐 선봉이 되어 수복의 공을 이루었으니, 큰 공적이 탁월하였습니다. 지금도 군사를 이끌고 만리에 원정하시어서 남방을 진무하고 흉악한 칼날을 가로막아 남은 백성을 보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비바람을 마시고 이슬에 잠자면서 겨울과 여름철을 보내니, 인정으로는 고달픈 일입니다. 그런데도 더욱 원대한 도모를 넓히고 길이 걱정 없는 계획을 세우기 위하여 위중함을 굽혀 어리석고 비천한 저에게 물으시니, 이것은 예부터 대인군자의 성덕이온바 오늘날 직접 뵙게 되니 심히 다행입니다. 이것이 제가 경앙하고 탄복하여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린 까닭입니다.
생각건대, 일본은 멀리 바다 가운데에 있어서 처음에 부락이 분산되어 통솔되지 못해 비록 간간이 나와서 도적질을 하더라도 큰 걱정거리는 안 되었는데, 풍신수길(豊臣秀吉)이 간사한 꾀로 그 임금을 죽이고 위엄으로 백성을 몰아 마음을 쓰고 생각을 쌓은 지가 무려 10년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분에 맞지도 않는 뜻을 펴려고 먼저 우리나라부터 침범했는데, 우리나라가 만일 불행하게도 끝내 지탱하지 못하면 왜놈들은 반드시 산과 바다의 험한 것과 수륙의 형세를 이용해서 서쪽으로 향하여 천하의 화가 커질 것입니다.
지금은 천자의 위엄이 떨치니 왜놈들이 거짓으로 항복하는 체하며 화친을 요구하니, 이것은 전쟁을 늦추고 머뭇거리면서 이쪽 군사를 고달픔에 지쳐 쇠약해지게 하며, 그동안 동래와 부산에 소굴을 마련하여 그 기반을 굳히고 식량을 운반해서 쌓아 놓은 뒤에 뿔뿔이 돌아다니며 노략질하고 벼곡식을 베어가서 밀고 나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음흉한 꾀와 간사한 계략으로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우리 틈을 엿보는 것은 참으로 노야의 말씀과 같습니다.
무릇 병가에서는 형세를 얻는 것을 중하게 여기니, 형세를 얻게 되면 아무리 적은 병력이라도 많은 군사를 대적할 수 있습니다. 부산은 사면으로 요새지와 접해 있는데, 제가 일찍이 몸소 답사해 보지 못하여 도로의 돌고 지름과 산천의 막히고 깊음을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벌써 좌우도 순찰사 및 원수 등 관원에게 공문을 보내, 급히 지리를 자세히 알고 경험 있는 사람을 나누어 보내 답사하고 명백하게 지도를 그려 하나하나씩 첩(帖)을 만들어 보내고, 의심나는 곳은 다시 조사하여 틀림이 없는 뒤에 휘하에 올리기로 하였습니다.
그 밖에 우선 전해 들은 바로 대략 말씀드립니다. 부산 이북으로 곧장 가면 밀양부가 있고, 동해를 따라가면 울산군과 절도사의 진영이 있고, 서쪽으로 가면 김해부가 있습니다. 이 세 길은 모두 요충지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지역입니다. 세 곳이 견고하면 적이 비록 다른 길로 흩어져 나온다 하더라도 굳은 성이 뒤에 있고 많은 병력이 앞에 있어 견제되고 두려워하여 감히 내지를 가벼이 침범하지 못합니다.
몇 해 전, 장수다운 장수가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할 줄을 알지 못하고, 부산과 동래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바로 서로 도망가고 흩어져 적이 마음대로 횡행하여 아무리 고산ㆍ대천ㆍ백이(百二)의 험한 곳이 있어도 모두 버리고 지키지 못하였으니, 무엇을 더 말하겠습니까.
지금 울산의 병영과 밀양은 이미 우리 땅이 되었으니, 곧 성과 해자를 수선하고 군사를 주둔시켜 지키게 하며 식량을 모으고 기계를 정비해서 굳게 지킬 계획인데 힘이 미치지 못하고, 김해는 아직도 적의 소굴이 되었으니 더 거론할 바 없습니다. 그 밖에 의령현에는 낙동강 하류가 있어서 한 줄기는 진주의 단성(丹城)에 이르는데, 이름을 기강(歧江)이라고 합니다. 그 위로 15리에 있는 정진(鼎津)은 가장 좋은 요새로서 연전에 의병장 곽재우가 고을 백성을 모아서 강에 임하여 지키니 적병이 여러 번 강변까지 침범하였으나 건너오지 못하니, 의령ㆍ초계(草溪)ㆍ합천의 경내만은 보전함을 얻어 농사를 짓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올여름에 모든 장수들은 함안에서 적을 보고 물러서기만 하고 정진같이 험한 곳에서 군대로써 지킬 줄을 몰랐기 때문에, 왜적들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 삼가와 단성에 횡행하면서 구원병의 길을 끊었으므로 진주를 구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사람의 꾀가 잘못된 소치입니다.
그 밖에 어느 현(縣)이나 주(州)에도 웅거할 만한 험한 곳은 있습니다만 낱낱이 들어서 말할 수 없고, 다만 임기응변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경상ㆍ전라ㆍ충청의 경계에는 구례의 두치진(頭恥津), 함양의 팔량현(八良峴), 안음의 육십현(六十峴), 지례(知禮)의 우두현(牛頭峴), 금산의 추풍령, 문경의 조령, 상주ㆍ선산의 낙동강, 풍기의 죽령이 가장 산천이 험한 곳으로 지킬 만한 곳입니다. 그러나 만일 사람들이 방비할 줄을 알지 못한다면 오솔길과 다른 길로 나오는 것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동해 일변에는 경상좌도로부터 강원도, 강원도로부터 함경도에 이르기까지 모두 바다가 곁에 있지만, 남해에는 섬이 많고 동해에는 섬이 없으며, 또 물결이 드세어 배가 다니기에 불리하기 때문에, 전부터 적병이 비록 경내에 침범한 때가 없진 않았으나 자주 있지는 않았습니다.
대체로 왜적들은 동남풍을 이용하여 배를 타고 와서 노략질하기 때문에 경상도와 전라도 두 곳이 가장 적병의 침범이 많은 곳입니다. 연전에 적이 경상도를 함락시키고 배를 이용하여 자주 전라도를 침범하였으나, 본도의 수군절도사인 이순신은 수군으로 거제 바다 가운데에서 맞아 싸워 적선 수백 척을 불사르니, 적이 마침내 해안에 올라오지 못하였습니다. 전라도의 경내를 지금까지 보전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저는 본디 옹졸한 서생으로서 군사 일을 감히 함부로 말할 수 없으나 얕은 소견으로 삼가 생각해 보니, 대개 적을 방비하는 일은 비유컨대 사람이 불을 끄는 것과 같아서 불꽃이 너무 사방으로 번지지 않게 한 뒤에야 사람이 힘을 쓸 수 있습니다. 지금 적병이 실로 명 나라 군사의 남은 위엄을 두려워하여 부산의 한 모퉁이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만일 대군이 대구 등지에 주둔해서 동쪽 변방과 직로로 침범하는 형세를 막고, 또 참장 낙상지 외 모든 군대와도 연락하여 의령과 고성의 경계에 주둔시켜서 서쪽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으며, 우리나라 수군 장수 이순신 등과 약속해서 군함을 거느리고 거제 바다에서 가로막게 해서 삼로가 합세하여 적병을 견제하면, 적은 앞뒤가 모두 겁이 나서 감히 가볍게 움직이지 못할 것이며, 혹 나가서 머뭇거리다가 도망갈지도 모릅니다. 이와 같이 한 뒤에 우리나라가 비로소 천자의 위엄을 빌려 흩어진 백성을 불러들이고 부서진 데를 수선해서 곡식을 저축하고 병기를 연마해서 바닷가에 군영을 설치하여 전의 잘못을 깊이 거울삼아 죽음으로써 굳게 지키면, 국사는 거의 만분의 하나라도 구제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적이 기력을 길러서 명군이 철수하여 돌아가기를 노렸다가 경상도를 삼키고 나서 북으로 강원도에 진출하고 서쪽으로는 전라도를 범하고 서북으로 충청도를 범할 것입니다. 이미 나오는 길목이 많아지면 모두 방비하기가 어렵습니다. 아무리 백 군데 험지가 있다 한들 군사는 분산되고 힘은 약해져서 방비하기에 지치고, 왜적은 한곳에 머무르면서 장기 계획으로 우리를 제어할 것이니, 천자께서 우리나라를 구원하려 하신 근심이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구구한 생각은 실로 천박하지만 오로지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며, 또한 노야께서 저에게 물으신 성의에 감동하여 감히 이렇게 적고 보니 너무 지루한 듯하여 염려됩니다. 지도가 완성되기를 기다려 다시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병이 심하여 혼미해 말이 순서가 없으니, 삼가 가엽게 여겨 살펴서 채택하소서.


[주D-001]백이(百二) : 산천이 험고하여 두 사람이면 백 사람을 당해 내는 요새를 일컫는다. 《史記 卷8 高祖本紀》

 

성소부부고 제5권
 문부(文部) 2 ○ 서(序)
적암유고 서(適菴遺藁序)


조신(曺伸)은 매계(梅溪 매계는 조위(曺偉)의 호)의 서제(庶弟)인데, 한 해에 낳았으나 달과 날이 위(偉)보다 뒤이다.
형ㆍ아우가 나란히 문장이 있어 모두 선릉(宣陵 성종(成宗)을 가리킴)의 알아줌과 아낌을 입었다.
조위(曺偉)는 10년 안에 품계를 뛰어넘어 소사도(小司徒)에 이르렀으나 조신(曺伸)은 출신이 미천하여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하고 처음에 사알(司謁)이 되어 합문(閤門)에 공봉하였다.
선릉이 무시로 불러 보고 때로 험운(險韻)을 불러 시험하면 문득 써서 바쳤는데 말과 뜻이 모두 아름다워 제나 옷과 비단의 내림을 받았다.
그리고 일본에 다녀온 일로 인하여 군직(軍職)에 붙여졌고 뒤에는 내시교관(內侍敎官)이 되었다. 얼마 있다가 대군(大君)의 사부(師傅)가 되었고 육전(六典)이 반포되자 비로소 내의원(內醫院)으로 벼슬하게 되었다. 또 북경에 다녀온 일로 하여 역원(譯院)이 되고 많은 공로로 3품에 이르렀으니, 대개 문학 외에도 여러 가지를 아울러 통하였다.
중묘(中廟 중종(中宗)을 가리킴)가 어렸을 때 일찍이 감반(甘盤)의 구교(舊交)가 있었으므로 대위(大位)에 나아가자 불러서 내의 정(內醫正)을 삼아 찬집청(纂集廳)에 출사하게 하고 특별히 당상(堂上)의 품계를 더했는데, 간신(諫臣)의 말로 인하여 그 명을 거두었다.
나이 75세에 금산(金山)의 집에서 죽었다.
내가 조신의 《백년록(百年錄)》을 보니, 그 행적이 대개 이와 같았다.
선정(宣靖 성종과 중종을 가리킴) 두 임금의 때를 당하여 문화가 크게 번성하니 관각(館閣)의 여러 노선생(老先生) 중에 거공(鉅公)으로 일컬을 자가 매우 많았으나 모두가 조신을 으뜸이라 여겼다. 남지정(南止亭 지정은 남곤(南袞)의 호)ㆍ박읍취(朴挹翠 읍취는 박은(朴誾)의 호)ㆍ이문민(李文愍)ㆍ김이숙(金頤叔 이숙은 김안로(金安老)의 자)ㆍ김문경(金文敬 문경은 김안국(金安國)의 호)ㆍ이호숙(李浩叔)ㆍ김문정(金文貞) 등 제인(諸人)이 모두 질문 변석하여 신에게 절충하였으니, 그 추존하여 숭상함을 알 만하다.
호음(湖陰)은 굴강(倔强)하여 허여하는 사람이 적었는데 그의 정진(鼎津) 별장에는 조신의 시와 용재(容齋)ㆍ눌재(訥齋), 이 세 사람의 작품만을 마루에 걸어 놓았으니, 여기에서도 알 수 있다.
나는 조여익(曺汝益)으로부터 그의 시 2권을 얻었는데, 3권은 유실되고 남아 있는 것이 이것뿐이었다.
읽어 보니 굳세고 절실하며 간명하고 무게 있음은 대개 황(黃)ㆍ진(陳)으로부터 나왔으나 살짝 무르익었고, 태허(太虛)와 비하면 혼융(渾融)은 그보다 더하였고, 모자라는 것은 격(格)이요 향(響)이요 조(藻)이다. 그 또한 우리나라의 명가(名家)이다.
우리나라에서 서출(庶出)로 세상에 이름을 낸 자는 어무적(魚無迹)ㆍ이효측(李孝則)ㆍ어숙권(魚叔權)ㆍ권응인(權應仁)ㆍ이달(李達)ㆍ양대박(梁大樸)이 가장 드러났고 조신은 더욱 이 세상에 쓰이어 조사(詔使 중국사신을 가리킴)가 오면 반드시 필찰(筆札)을 주관하였었다.
한때 제공(諸公)들의 받들어 숭상함이 이와 같았는데 그 시가 이에 그쳤으니, 지금에야 더욱 오막시잠(吾藐市潛)을 쉽게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겠다.


[주D-001]감반(甘盤)의 구교(舊交) : 어린 시절의 스승을 말함. 은 고종(殷高宗)이 어려서 감반에게서 글을 배웠으므로 유래된 말이다.《書經 說命下》
[주D-002]황(黃)ㆍ진(陳) : 황은 송(宋) 나라 때의 시인(詩人) 황정견(黃庭堅)이다. 자(字)는 노직(魯直)이고 호는 산곡(山谷)이다. 진은 북송(北宋)의 시인 진사도(陳師道)이다. 자는 이도(履道)이고 호는 후산거사(後山居士)이다.

송계만록(松溪漫錄)
송계만록 상(松溪漫錄 上)


권응인(權應仁) 찬

○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선생은 문장으로 이름났다. 남지정(南止亭 곤〈袞)의 호)이 언제나 일컫기를, ‘읍취헌(挹翠軒 박은(朴誾)의 호)의 시, 탁영의 문장’이라 하였다.
그의 문집은 세상에 성행하고 있으나 시는 드물게 전한다. 삼가현(三嘉縣) 관수루(觀水樓)의 한 율시(律詩)는 다음과 같다.
한 가닥 시내 낀 마을에 흰 연기 오르는데 / 一縷溪村生白煙
지는 해에 염소들 앞을 다퉈 내려오네 / 羔羊下佸謾爭先
높은 누에 항아리 술 동서의 나그네요 / 高樓樽酒東西客
십 리의 농촌 남북으로 뻗어 있네 / 十里桑麻南北阡
소리 있는 시구 적어 노니는 이 옹졸하나 / 句乏有聲遊子拙
일 없어 술 마시니 사또는 어질구나 / 杯斟無使君賢
난간에 기대어 다시 황혼이 지기 기다려 / 倚欄更待黃昏後
물을 보며 달이 하늘 복판에 이른 것 보네 / 觀水仍看月到天
시와 문이 어느 것이 나은지 보는 이는 자세히 살피라.
○ 옛날, 검률(檢律) 함자예(咸子乂)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촉석루(矗石樓)에 쓴 시는 다음과 같다.
산은 둘러 있고 물은 절로 흐르는데 / 山自盤環水自流
몇몇 해에 이 강머리에 성쇠가 있었는고 / 幾年興廢此江頭
일찍이 놀던 곳에 방황하며 다시 아끼노니 / 彷徨更惜曾遊處
전에는 봄바람 불더니 이제는 가을이네 / 昨是春風今是秋
벽에 달아두어 널리 사람들의 말에 올랐다. 제삼구(第三句)는 특히나 기력이 없는데, 모두 절창(絶唱)이라 일컬음은 웬일인가? 천한 사람으로서 이만한 시를 지었으므로 대단하게 여긴 것이나 아닌가 한다.
○ 옛날 한 부인의 ‘부여회고시(扶餘懷古詩)’는 다음과 같다.
백마대 빈 지 몇 해가 지났는고 / 白馬臺空經幾歲
낙화암은 선채로 많은 세월 지났네 / 落花巖立過多時
청산이 만약 침묵하지 않았다면 / 靑山若不曾緘黙
천고의 흥망을 물어서 알 수 있으련만 / 千古興亡問可知
어떤 사람은 어우동(於宇同)이 지은 것이라 한다. 음부(淫婦)이면서 이와 같이 시에 능하니, 이른바 재주는 있고 행실이 없는 사람이란 바로 이것이다.
○ 옛날 두세 선비가 기생들을 데리고 산사(山寺)에 모여 놀았다. 술이 얼근하여 취해 누웠는데 옆에는 거문고가 벽에 기대어 있었다. 어떤 중이 밖으로부터 왔는데, 얼굴은 얼룩지고 검었으며 옷은 남루하였다. 그가 몰래 거문고 바닥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고니 줄 튀김쇠로 높은 집을 흔드니 / 鵾絃鐵撥撼高堂
섬섬옥수의 요조한 아가씨라 / 玉指纖纖窈窕娘
무협에 우는 원숭이 애절한 눈물 짓고 / 巫峽啼猿哀涙濕
소상에 돌아가는 기러기 원망 소리 길구나 / 瀟湘歸雁怨聲長
얼음 깊은 창해엔 용의 읊음 웅장하고 / 凍深滄海龍吟壯
성긴 소나무에 맑음이 사무치니 학의 꿈 서늘하다 / 淸徹疏松鶴夢涼
곡이 다하니 삼성은 비끼고 달 또한 떨어지니 / 曲罷參橫仍月落
뜰 가득한 산색이 새벽에 창창하네 / 滿庭山色曉蒼蒼
그리고는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이, ‘정허암(鄭虛菴 희량(希良)의 호)이 아니면 이렇게 지을 수 없다.’ 하였다.
○ 정승 정 문익공(鄭文翼公 광필(光弼)의 시호)이 김해로 귀양갈 때에 도중에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비방이 산처럼 쌓였어도 마침내 용서받으니 / 積謗如山竟見原
이승에 천은을 보답할 길 없어라 / 此生無計答天恩
높은 재 열 번 넘는데 두 줄기 눈물이요 / 十登峻嶺雙垂涙
긴 강 세 번 건너니 홀로 애를 끊는구나 / 三渡長江獨斷魂
막막한 먼 산은 구름이 먹을 푼 듯 / 漠漠遠山雲潑黑
망망한 벌판 비는 물동이를 거꾸로 쏟는 듯 / 茫茫大野雨飜盆
저녁에 바다에 닿은 동성 밖에 투숙하니 / 暮投臨海東城外
초가집은 쓸쓸한데 대나무 문이로세 / 茅屋蕭蕭竹作門
덕 있는 사람은 반드시 말도 잘한다는 것이 정말이다. 그의 손자 임당 상공(林塘相公)이 시법(詩法)을 이어 전하니, 정말 두심언(杜審言)에게 두보(杜甫)가 있는 격이다. 문익공(文翼公)의 이름은 정광필이요, 임당(林塘)의 이름은 정유길(鄭惟吉)이다.
○ 진천(晉川 진천은 봉호(封號)) 강혼(姜渾)이 성주(星州) 기생 은대선(銀臺仙)에게 깊이 정이 들어 절구(絶句) 삼장(三章)을 지어주었는데, 그 제이장에,
고야산 선인 옥설같은 이 흰 살결 / 姑射仙姿玉雪肌
새벽 창 금 거울에 나비 눈썹 그리누나 / 曉窓金鏡畫蛾眉
아침 술 반쯤 취해 얼굴이 붉어지니 / 卯酒半酣紅入面
동풍에 검은 귀밑머리 흐트러지네 / 東風吹鬢綠參差
하였다. 내가 그 기생을 보았을 때는 나이 이미 80이 넘었는데, 스스로 말하기를,
“검은 귀밑머리 흐트러지던 것이 이제는 흰 귀밑머리 흐트러지는 것[白參差]이 되었습니다.”
하고, 눈물을 주루룩 흘렸다.
○ 강 진천(姜晉川)의 동래(東萊) 정변루시(靜邊樓詩)에,
대마도 푸른 산은 외기러기 밖이요 / 對馬靑山孤雁外
부상의 붉은 해는 오색 구름 끝이로다 / 扶桑紅日霱雲端
하였다. 좋기는 좋지만 어찌 ‘성주에서 비에 막히다[星州阻雨]’라는 시에서,
붉은 제비는 번갈아 나는데 바람은 버들에 스치고 / 紫燕交飛風拂柳
푸른 개구리 어지러이 우는데 비는 산에 젖었더라 / 靑蛙亂叫雨渾山
라고 한, 그림같은 시만 하겠는가?
○ 어무적(魚無迹)공의, ‘길 주서 고리(吉注書故里)’에 쓴 율시의 함련(頷聯)에,
수양산 고사리는 은 나라의 남은 풀이요 / 首陽薇蕨殷遺草
율리의 전원은 진 나라의 옛터네 / 栗里田園晉故墟
라고 하였다. 고사(故事)를 쓴 것이 매우 타당하여 고금에 뛰어났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 연구(聯句)는 본래 길(吉) 선생이 지은 것인데 어무적이 풀어 만든 것이다.”
하는데, 상하의 구법(句法)을 살펴보면 한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이 아닌 듯하니, 이 말이 아마 그럴 듯하다. 다만, 선생의 문집 가운데 과연 이 연구가 있는지 모르겠다.
○ 안동(安東)에 청렴 결백한 선비 이효칙(李孝則)이 있었는데, 어무적과 함께 조령(鳥嶺)을 넘었다. 이효칙이 한 절구를 지었다.
추풍에 누른 잎은 우수수 떨어지는데 / 秋風黃葉落紛紛
주흘산 높이 솟아 반은 구름 속에 묻혔네 / 主屹山高半沒雲
이십사교 흐느껴 우는 물을 / 二十四橋鳴咽水
한 해 세 번 나그네 길에서 듣네 / 一年三度客中聞
어무적이 그만 붓을 놓고 말았다.
○ 적암(適菴) 조신(曺伸)이 황폐한 절에 들어가 율시 한 수를 지었다. 그 경련(頸聯)에,
길에는 올 가을 낙엽 덮였고 / 逕覆今秋葉
부엌에는 전일 불 때던 나무 남았네 / 厨餘去日樵
하였는데, 구법(句法)이 기기 절묘하여 사람들이 서로 전하며 읊었다. 그러나 적암이 스스로 자기 작품을 뽑은 것에는 이 시를 기록하지 않았으니, 젊어서 지어 만족스럽지 않아서 버린 것이나 아니겠는가?
○ 이 정승(李政丞) 용재(容齋 행(荇)의 호) 선생의 ‘제갈 무후를 읊다[詠諸葛武侯]’라는 시에,
사생을 나라에 허하여 힘을 다했는데 / 死生許國無遺力
성패로 사람을 논하는 것은 어린애지 / 成敗論人是小兒
하였다. 의논이 공정하고 글도 또한 새롭다. 중국 사신[天使] 당고(唐皐)의 시에 차운(次韻)하기를,
아득한 삼산은 솥을 엎은 것으로 보이고 / 縹緲三山看覆鼎
굽이친 한 띠의 물은 투금강에 닿았어라 / 逶迤一帶接投金
하였다. 복정은 삼각산(三角山)의 별명이요, 양화(楊花) 나루를 투금강이라 하기도 한다. 대구가 아주 잘 들어맞는다. 이 일련(一聯)은 소퇴휴(蘇退休) 상공(相公)이 지은 것이다. 소퇴휴가 말하였다. 《황화집(皇華集)》을 얻어 본 것이 기억나는데, 대(帶) 자는 수(水) 자였다. 대(帶) 자는 아마 전하는 사람들이 잘못 전한 것일 게다. 용재(容齋)의 이름은 이행(李荇)이요, 퇴휴의 이름은 소세양(蘇世讓)이다.
○ 김모재(金慕齋) 상공(相公)이 성주(星州) 기생 의침향(倚沉香)에게 준시에,
예쁘고 추한 것도 인연도 말하지 말자 / 不論姸醜不論緣
오래 거처하니 자연 사람 마음 끄는구나 / 處久令人意自牽
하였으니, 인정에 절실하다. 모재(慕齋)의 이름은 김안국(金安國)이다
○ 안분당(安分堂) 이희보(李希輔) 선생이 일찍이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젊었을 때 어잠부(魚潛夫)와 교유하였다. 그의 시에,
봄꿈은 진 나라 이세보다 어지럽고 / 春夢亂於秦二世
실없는 근심은 노 나라 삼가처럼 강하다 / 閑愁强似魯三家
하였는데, 이는 새로운 말로써 고금의 시인들이 이르지 않은 것이다.”
하였다. 잠부(潛夫)란 무적(無迹)의 자(字)이다. 한수(閑愁)는 다른 책에는 추회(秋懷)라 한 데가 있다.
○ 기재(企齋) 신 상공(申相公)이, ‘동지(同知) 장언양(張彦陽)이 연경(燕京)에 가는 것을 보내다’라는 시에,
오늘에 주 나라를 관광하는 오 나라 계찰이요 / 今日觀周吳季札
전에 오랑캐에게 화친하던 한 나라 장건이라 / 舊時和虜漢張騫
하니, 만좌(滿座)가 다시 붓을 대지 못하였다. 조송강(趙松岡)이 말한 것이다. 기재(企齋)의 이름은 신광한(申光漢)이요, 송강(松岡)의 이름은 조사수(趙士秀)이며, 기재의 조카이다.
○ 호음(湖陰) 정 상공(鄭相公)이 의령(宜寧)의 정진(鼎津) 언덕에 작은 집을 짓고, 그 벽에 용재(容齋)ㆍ눌재(訥齋)ㆍ적암(適菴)의 세 수만을 걸어두었으니, 이 세 분이 호음이 존경하는 분임을 알 수 있다. 용재의 시 한 연(聯)에,
강호에 고기가 즐거움을 얻었으며 / 江湖魚得計
종고는 새가 좋아하지 않는다 / 鐘鼓鳥非情
하였는데, 호음이 항상 이 구를 칭찬하였다. 호음의 이름은 정사룡(鄭士龍)이다.
○ 안분(安分)이 의주(義州)의 취승정(聚勝亭) 시를 차운한 시에,
한 물은 흘러 환괘가 되었고 / 一水流成渙
세 산은 끊어져서 곤괘를 지었구나 / 三山斷作坤
라고 한 구는 정말 진기한 말인데, 아래 구가 더욱 기묘하다.
○ 조사(詔使) 공운강(龔雲岡)이 올 때, 호음(湖陰)이 원접사(遠接使)로, 안분당(安分堂)이 선위사(宣慰使)로 갔는데, 안분당이 중국 사신의 시에 차운(次韻)하기를,
일하에 떨친 이름 두성의 남북이요 / 日下高名斗南北
천애에 이별주는 옥동서 잔이로다 / 天涯別酒玉東西
하니, 중국 사신이 말하기를,
“이 시가 지극히 아름다우니 우리가 당연히 우대(優待)를 하여 그 시에 보답하겠다.”
하고, 안분당이 들어가 뵐 적마다 반드시 의자에서 내려와서 답하니, 안분당이 이것으로 스스로 뽐내었다. 내가 호음에게 말하니, 답하기를,
“이것은 스스로 지은 것이 아니고 실은 내 손에서 나왔다.”
하였다. 황산곡(黃山谷) 시에,
가인은 두성의 남북이요 / 佳人斗南北
미주는 옥동서로다 / 美酒玉東西
하였다. 이 시는 단지 그 시의 두서너 자를 고친 것인데, 이것을 감탄하고 칭찬하는 것은 막막(漠漠) 음음(陰陰)의 등류인 것이다. 공선(龔仙)이 어찌 황산곡의 시를 보지 못하였던가?
○ 서사가(徐四佳)가 조사(詔使) 기순(祈順)의 시에 차운하여,
금암은 날이 따스하여 버드나무 새로 피고 / 金巖日暖初楊柳
검수는 봄이 차서 두견 아직 멀었네 / 劍水春寒未杜鵑
하였는데, 유촌(柳村) 황여헌(黃汝獻) 공이 감탄해 마지않았다.
내가 호음에게 물으니, 곧 말하기를,
“나는 그것이 아름다운 줄 모르겠다. 말에 병폐가 있다.”
하였다. 한 사람은 칭찬하고 한 사람은 낮게 평가하니, 두 사람의 뜻이 같지 않다. 물러나 생각하니, 이 한 연구는 오로지 원(元) 나라 사람의 시어(詩語)를 쓴 것인데, 저것은 두 땅이 서로 떨어져 있어서 초(初)ㆍ미(未) 두 자가 합당하다. 그러나 금암과 검수 사이는 아침에 떠나 저녁에 닿을 수 있는 곳이니, 어찌 날이 따스하다느니 봄이 차다느니 하는 그런 차이가 있겠는가? 이것이 이른바 말에 병폐가 있는 것이니, 마땅히 호음의 말을 옳다 해야 할 것이다. 사가(四佳)의 이름은 서거정(徐居正)이다.
○ 퇴휴(退休) 소 상공이 의주 취승정(聚勝亭)의 휘(暉) 자 운을 차운하면서,
맑은 강 비단 같다는 사현휘요 / 澄江如練謝玄暉
라는 구를 지어놓고 짝을 맞추지 못하고, 어숙권(魚叔權) 공에게 맞추도록 부탁하였다. 어숙권이 맞추기를,
초생달 낫을 간다는 한 이부라 / 新月磨鎌韓吏部
라 하였다. 내 생각으로는 마(磨)가 사(似)만큼 온전하지 못한 것같다.
○ 호음(湖陰)이 원접사로 갔을 때, 김백순(金伯醇)이 의주 목사(義州牧使)였다. 호음이 소관(所串)의 관(館)에 이르러 시를 지어 보내었다.
누가 문무 다 갖춘 이 적다 하는고 / 誰云文武雙全少
창 비낀 오늘날에 다시 시를 짓는다 / 橫槊如今更賦詩
뱃속에 웅도 있으매 절제사를 맡았고 / 腹有雄圖專節制
손에는 어려운 일 없으매 사업을 시행하네 / 手無難事達施爲
나그네 떠나고 누에 오르는 저녁이요 / 賓筵客散登樓夕
밤 장막 남은 등잔 이별도 아까워라 / 夜帳殘燈念別時
옥문관에 지체한 것 예부터 있는 일이니 / 留滯玉關從古事
명년에 남보다 먼저 봉황지에 들 것이오 / 明年先賀鳳凰池
이것은 문집에 빠진 것이다. 내가 우연히 그 원고를 얻었다.
○ 미전(薇田) 왕학(王鶴)이 기자묘(箕子廟)를 참배하고 시를 지었다. 호음(湖陰)이 사(師) 자 운을 짓기에 군색하여 며칠을 두고 다듬었는데, 지을수록 난삽하여 종사관(從事官)에게 부탁하자, 정랑(正郞) 이홍남(李洪男)이 즉석에서 써내려갔다.
삼인이 비록 행적은 다르지만 / 三仁雖異迹
백세에 오히려 같이 스승으로 삼는다 / 百世尙同師
하였다. 호음의 재주로도 때로는 간혹 막히는 수가 있으니, 하물며 그보다 못한 사람이랴?
○ 관찰사 홍춘경(洪春卿)의 ‘백마강’ 시는 다음과 같다.
나라 망하니 산과 물이 옛날과 다른데 / 國破山河異昔時
홀로 강달이 남아 몇 번이나 차고 기울었다 / 獨留江月幾盈虧
낙화암 위의 꽃은 아직도 남았으니 / 落花巖上花猶在
비바람 그 당시에 다 불어 떨어뜨리지 못하였나 / 風雨當年不盡吹
이 사문 강남(李斯文江男)의 시는,
고국에 올라 보니 마침 달이 오를 때라 / 故國登臨月上時
백제의 왕업이 여기 이루고 망했네 / 濟王家業此成虧
용 죽고 꽃 떨어진 천 년의 원한은 / 龍亡花落千年恨
동풍에 부는 한 피리에 부쳤네 / 分付東風一笛吹
이 두 시는 당시 사람들이 서로들 우열(優劣)을 논하였다. 내 생각으로는 아래 시 첫째 구가 너무 싱거운 것같다. 동(東) 자를 혹은 서(西) 자라 하기도 한다.
○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이 꿈에 시 한 연구(聯句)를 얻었다.
바람은 마른 잎 나부끼어 강 언덕에 지고 / 風飄枯葉江干墮
구름은 먼 산 안고 바다 위에 솟아난다 / 雲抱遙岑海上生
그후에 관동(關東) 관찰사가 되어 삼척(三陟) 죽서루(竹西樓)에 올라보니, 보이는 것이 과연 이전의 꿈과 맞았다. 사람의 일이란 미리 정해지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 송강(松岡) 조사수(趙士秀)가 제주(濟州) 목사로 나갔을 때, 임석천(林石川)이 그에게 시를 지어 보냈다.
일찍 남악에 올라 바라보니 / 嘗登南岳望
외로운 섬 바다 가운데 있네 / 孤島海中央
뱃길은 서쪽으로 절강에 통하고 / 舟楫西通浙
말들은 천상의 방성에 응했구나 / 驊騮上應房
관원으로 오는 것이 귀양과 무엇이 다르랴 / 爲官何異謫
이번 이별이 가장 상심되네 / 此別最堪傷
진신(搢紳)들이 모두 그 시를 고인(古人) 기상이 있다 하였다. 석천(石川)은 해남(海南) 사람이니 남악(南岳)은 분명 그 현의 산일 것이다.
○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병신년(1536, 중종 31)에, 호음(湖陰)이 등왕각(滕王各閣) 배율(排律) 20운(韻)을 지어 정시(庭試)에서 장원으로 합격하여 가선(嘉善)의 품계(品階)에 올랐다. 전편(全篇)이 웅장하고 기특 건실하여 정말 걸작이었다. 단 노두(老杜 두보(杜甫))의 ‘청강(淸江)ㆍ백석(白石)ㆍ죽색(竹色)ㆍ송성(松聲)’의 말들을 사용하였는데 노두의,
청강 백석은 마음 상하게 아름답고 / 淸江白石傷心麗
연한 꽃술 짙은 꽃 눈에 가득 아롱지네 / 嫩蕊穠花滿目斑
옛 담장은 아직도 대 빛 / 古墻猶竹色
빈 각은 스스로 소나무 소리 / 虛閣自松聲
라 한 것은, 등왕정(滕王亭)을 읊은 것이지, 등왕각을 읊은 것은 아니다. 등왕각은 홍주(洪州)에 있고, 등왕정은 낭주(閬州)에 있는데, 공(公)은 정을 두고 읊은 것을 등왕각에다 끌어썼으니, 잘못이다. 당시 보락당(保樂堂) 김 정승(金政丞 안로(安老))이 고시한 것인데, 과연 모르고 한 것인가? 알면서 이것을 밝히지 못한 것인가?
○ 이회재(李晦齋) 선생의 경산현(慶山縣) 동헌(東軒) 시에,
우는 뻐꾹새는 가지 위에 일곱이요 / 鳴鳩枝上七
나는 제비 비 속에 쌍쌍이라 / 飛燕雨中雙
하였는데, 짝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그 외에도 볼 만한 것이 매우 많다. 공은 시학(詩學)을 오로지 하지 않았으나 성정(性情)에서 자연히 우러나오는 것이 이러하였으니, 품성(稟性)이 고명하면 애쓰지 않아도 이런 시구를 얻을 수 있음을 알겠다. 회재(晦齋)의 이름은 이언적(李彦迪)이다.
○ 재상 최연(崔演)의 문장은 호건(豪健)하여 필한(筆翰)이 물 흐르는 것같다. 인종(仁宗)의 만시(挽詩)는 이러하다.
삼년상을 짧게 한 한 나라를 마음으로 낮추보고 / 三年短制心嫌漢
오월을 여막에 거처함은 예법이 등 나라보다 낫네 / 五月居廬禮過滕
전고(典故)를 쓴 것이 매우 적당하다. 임 사문 형수(林斯文亨秀)가 인종의 만장을 짓기를,
오늘의 눈물을 차마 가지고서 / 忍將今日淚
작년 옷을 거듭 적시랴 / 重濕去年衣
하였다. 중종(中宗)이 승하하고 1년이 되지 않아 인종(仁宗)이 승하하였으니, 말은 간략하나 뜻은 극진하였다.
○ 임 사문(林斯文 임형수(林亨秀)를 말함)이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하는 한 연구(聯句)를 얻었는데, 그뒤에 황산곡(黃山谷)의 시집을 보니 거기에,
세상에 어찌 천리마가 없겠는가 / 世上豈無千里馬
사람 가운데 구방 고를 얻기 어렵도다 / 人中難得九方皐
라는 글귀가 있었다. ‘세상’이라 한 것은 나의 ‘천하’보다 못하고, 그의 ‘사람 가운데[人中]’라 한 것은 나의 ‘인간(人間)’보다 낫다.”
하였다. 생각으로는 황산곡의 이 말은 고금에 뛰어났으며, 그후로 어찌 여기에 겨룰 사람이 있겠는가? 그렇지 않고 우연히 합치되었다면 그는 천 년 뒤에 황산곡과 겨룬다 할 수 있다.
○ 유촌(柳村)이 일찍이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지난번에 서울에 들어와 신기재(申企齋)에게, ‘근래에 누구의 가작(佳作)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답하기를, ‘임공 형수(林公亨秀)가 탐라(耽羅)에 목사로 나가,
산은 왕자국에 서려 있고 / 山蟠王子國
물결은 노인성을 차도다 / 波蹴老人星
라는 글귀를 얻었는데, 이것이 가장 아름답다.’ 하였소.”
하였다. 내가 호음에게 질문하였더니, 곧 말하기를,
“나는 그것이 좋은 줄 모르겠다.”
하였다.
○ 중국 사신 왕(王)씨가 올 때, 호음(湖陰)이 원접사(遠接使)로 가고, 홍재상(洪宰相) 인재(忍齋)공이 역시 원접사로 갔다. 환관(宦官) 천사도 함께 용만(龍灣)에 있었다. 호음이 홍 재상에게 주는 시의 셋째 연구에,
진지를 겨루어 기운 저상되니 의당 물러나야 하고 / 摩壘氣沮宜退舍
난초 향기 맡아 마음 꺾이니 함께 깃발 멈췄구나 / 襲蘭心折共停旄
내가 저(沮) 자가 음률[律]에 맞지 않는다고 아뢰니, 공(公)이,
“쇠(衰) 가가 어떠냐?”
물었다. 내가,
“최(摧) 자만큼 힘이 없습니다.”
하니, 공이,
“네가 옳다.”
하였다. 중국 사신에게 주는 시에,
접해와 진성 만여 리에 / 鰈海秦城餘萬里
몇 겹 구름 나무 놀을 격하였네 / 幾重雲樹隔煙微
라고, 하였다. 내가,
“운(雲) 자에 또 연(煙) 자를 붙여 온당하지 못한 것같습니다. 운(雲) 자를 춘(春) 자로 바꾸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니, ‘네 말이 옳다’하였다. 공은 시를 적을 때마다 반드시 나로 하여금 붓을 쥐게 하였고, 매번 글자에 대하여 생각하다가 생각이 나지 아니하면 나에게 하문(下問)하여, 답한 것이 뜻에 맞으면 바로 고치고 자기 의견을 고집하지 않았다. 내가 경성(京城)에 도착하여 춘(春) 자의 뜻을 가지고 동료들에게 품평을 청하니, 유항(柳沆)이 말하기를,
“너 역시 생각하지 못하였는가? 춘수(春樹)를 쓴 아래에는 운(雲) 자를 붙이는 것이 옳다마는 연(煙) 자는 본색어(本色語)가 아니다.”
하였다. 내가 탄복해 마지않았다. 운(雲) 자를 《황화집(皇華集)》에 적어 넣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 인재(忍齋)는 이름이 홍섬(洪暹)이다.
○ 종곡(鍾谷) 성 징군(成徵君)은 다만 몸가짐이 매우 고상했을 뿐 아니라, 문장이 일세에 절묘하였으나,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구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그의 시를 보는 이가 드물었다. 그 시에,
한 번 종산 속에 들어오니 / 一入鍾山裏
소나무와 대 속 초가에 누웠구나 / 松筠臥草廬
하늘이 높은데 머리 어찌 구부리랴 / 天高頭宜俯
땅은 좁아도 무릎을 펼 만하네 / 地膝滕猶舒
이름난 이 어느 누가 살았는고 / 名下何人在
숲 사이 이 늙은이 남았네 / 林間此老餘
사립문에 손은 자연 끊어지니 / 柴門客自絶
거문고와 책을 파하는 날이 없더라 / 無日罷琴書
하였다. 이와 같은 작품은 비록 옛 사람들 시집 가운데 두더라도 조금도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아깝도다. 많이 보이지 않는 것이 한스럽다.
○ 남명(南溟) 조 처사(曺處士 조식(曺植))가 사미정(四美亭) 호음(湖陰)의 시에 차운하였다. 첫째,
늙어서 매운지 신지 구미마저 잃었고 / 垂老辛酸口失宜
늙는 것 잊었으나 기는 잊지 못했네 / 縱然忘老未忘機
백 굽이 뚫린 깊은 골에 몸은 오히려 나그네요 / 百穿深壑身猶客
반쯤 잠든 높은 정자 꿈이 벌써 기이하다 / 半睡高亭夢已奇
병목(마을 이름)의 늦은 봄에 사람은 이미 갔고 / 竝木殘春人舊謝
사방(물이름)의 가랑비에 물 비로소 불어나네 / 舍邦微雨水初肥
장군은 유에 봉해질 계책 어찌 없겠는가 / 將軍肯少封留計
일개 서생이 또한 이곳에 있도다 / 一介書生亦在斯
하였고, 둘째에,
언덕에 날마다 즐거움 어기지 않아 / 斯干日日樂無違
이것을 버리고 하늘 이야기 한들 진기할 것 없네 / 舍此談天未是奇
지리산 삼장 사는 곳과 비슷하고 / 智異三藏居彷彿
무이 구곡(武夷九曲) 물이 비슷하구나 / 武夷九曲水依俙
담에 덮은 기와는 늙어 바람에 나부끼어 가고 / 鏝墻瓦老風飄去
돌길 갈림길 깊어도 말이 스스로 아네 / 石路歧深馬自知
흰 머리로 거듭 오니 옛 주인이 아니고 / 皓首重來非舊主
한 해 봄 다 가는데 옷 없다는 시 읊조린다 / 一年春盡咏無衣
하였다. 말은 고상하고 뜻이 깊어 얕은 식견으로는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후일 반드시 양자운(揚子雲)이 나와야 이것을 알 것이다.
○ 정승 김귀영(金貴榮)이 영남(嶺南) 관찰사로 나갔을 때 그 거제현루(巨濟縣樓)의 시는 이러하다.
붉은 단풍 가득한 만산에 자주 말을 멈추고 / 紅樹萬山頻駐馬
흰 구름 천 리에 홀로 누에 오르누나 / 白雲千里獨登樓
가을을 슬퍼함과 어버이를 생각하는 뜻이 아울러 나타나 있다.
○ 송이암(宋頣庵)이 서원(西原 청주의 옛 이름) 기생에게 주는 시에,
헤어질 때 띠를 풀어 옷 대신 남겨두니 / 臨分解帶當留衣
이것으로 가는 허리 한 둘레 둘러보라 / 敎束纖腰玉一圍
상상컨대, 단장하고서 더욱 아름다울 제 / 想得粧成增宛轉
다른 사람 끌어 비단 이불로 들어가리 / 被他牽挽入羅幃
하였다. 향렴체(香奩體)가 매우 사랑스럽다. 이암(頣菴)은 여성군(礪城君) 송인(宋寅)이다.
○ 사암(思菴) 박 정승(朴政丞)이 젊었을 때 승방(僧房)에 자면서 시를 짓기를,
취하여 산가에 자고 깨어보매 의심되니 / 醉睡山家覺後疑
백운이 골에 가득하고 달이 잠길 때로다 / 白雲平壑月沈時
소연히 홀로 걸어 숲 밖으로 나와보니 / 翛然獨出脩林外
돌길에 지팡이 소리 자는 새가 아는구나 / 石逕笻聲宿鳥知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숙조지(宿鳥知) 선생이라 하였다. 이것은 정곡(鄭谷)의 자고시(鷓鴣詩)와 조하(趙嘏)의 의루시(倚樓詩)와 같은 따위다. 박상국(朴相國)의 시는 이백(李白)에게서 나왔는데, 청신(淸新)하고 뛰어나 세상에 전하는 것이 매우 많다. 내가 가야산(伽倻山)에 노닐면서 그 찌푸림을 본떠서[効顰] 지어보았다.
세상 일은 홍교 밖이요 / 世事紅橋外
지팡이 소리는 학의 꿈속이로다 / 笻聲鶴夢中
이것은 이른바 제 능력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다. 사암(思菴)의 이름은 박순(朴涥)이다.
○ 관원(灌園) 박계현(朴啓賢)이 조송강(趙松岡)에게 올린 시의 일련(一聯)에,
시명은 일성적을 사양하지 않고 / 詩名不讓一聲笛
정승의 사업은 아직도 반부 글에 남아 있다 / 相業猶存半部書
하였다. 전고가 매우 타당하다.
내가 학관(學官) 유이손(柳耳孫)에게 보낸 시에,
하였으니, 이것은 호랑이를 그리다가 개를 그리고 만 것이다.
○ 가정(嘉靖) 갑자년(1564, 명종 19) 무렵에 서울에 말이 전해지기를, 어떤 사람이 시를 지어 제천정(濟川亭) 벽에 붙였으니,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일찍이 전조에 오얏 심는 것을 보았는데 / 曾見前朝種李辰
동풍이 열두 번째 봄이로다 / 東風一十二回春
학은 화표의 천 년 기둥에 돌아오니 / 鶴歸華表千年柱
눈물로 청산의 한 줌 흙을 적시더라 / 涙洒靑山一掬塵
단풍 언덕 새벽종의 신륵사요 / 楓岸曉鐘神勒寺
잔디밭 저녁 피리 광나루에 울리더라 / 煙莎晩笛廣陵津
맑은 가을 노 소리는 여강을 지나가니 / 淸秋鼓枻驪江去
누 위의 어느 누가 여동빈을 알아보리 / 樓上何人識洞賓
어느 사람이 지은 것인지 이상한 말이 돌아다녔다. 어떤 사람은 신선의 시라 하였다. 내가 일찍이 청강(淸江) 이제신(李濟臣)과 이 이야기를 언급한 적이 있다. 청강이 말하기를,
“내가 젊을 때부터 이 시를 들은 지 오래되었다. 내 친구 아무개가 지은 것이다.”
하였다. 그것을 근일에 지었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정자의 벽에 걸었다는 말 역시 맹랑한 말이다.
○ 이증영(李增榮)이 합천 군수(陜川郡守)로 있으면서 가장 잘 다스렸다. 합천사람 사문 주이(周怡)가 그에게 송별시를 지어주기를,
하였다. 옛 사람의 말에,
“소인은 사람에게 돈을 준다.”
하였으니, 이 글과 뜻이 아울러 묘한 것이다.
○ 가정(嘉靖) 병진년 무렵에 명(明) 나라 사람 유응기(劉應箕)가 왜구(倭寇)에게 잡혀 배 안에 감금되었다가 우리 나라 사람에게 사로잡혀 서울에 왔다.
그가 시를 지었다.
전쟁을 원망하지 하늘을 원망하랴 / 只怨干戈不怨天
고국 떠나 길은 천리 만리 / 離鄕去國路千千
근심에 싸인 병골은 쇠한 운명 슬프고 / 愁纒病骨哀衰運
눈물 홍안에 뿌려 젊은 나이 우노나 / 涙洒紅顔泣盛年
달 보며 고향 생각 서쪽 국경 밖이요 / 見月思歸西塞外
구름 보며 마음은 북당 앞으로 달리누나 / 看雲心逐北堂前
모구의 칡을 보니 세월 얼마 흘렀는고 / 旄丘見葛何多日
고생으로 외로운 몸 여기서 곤욕 당하네 / 尾瑣孤身因此邊
이 재상(李宰相) 아계공(鵝溪公)이 젊었을 때 이 시에 차운하여 지었다.
곤의 바다 고래 물결 하늘에 닿아 아득하고 / 鯤海鯨波杳接天
남쪽 형국(초 나라 땅) 아득하니 몇 삼천 리 되는고 / 南荊迢遞幾三千
이국 땅에 유리하니 오직 외로운 그림자만 / 流離異國惟孤影
타향에 굴러굴러 한창 어린 나이로다 / 飄泊他鄕是弱年
나비꿈 때때로 국경 밖에 전하지만 / 蝶夢有時傳塞外
기러기 편지는 집 앞에 닿을 길이 없네 / 雁書無路抵家前
알겠노라 그대의 밤마다 어버이 그리는 생각 / 知君夜夜思親處
가을비 쓸쓸히 객침가를 적셔주리 / 秋雨蕭蕭客枕邊
당시 유(劉)의 나이 15~16세요, 아계공의 나이는 17~18세여서 나이는 모두 어렸으나 시는 이미 문장을 이루었다. 자고로 일찍 현달한 사람은 반드시 숙성(夙成)하는 법이다. 아계는 지금 재상(宰相)이 되었는데, 유응기도 역시 현달하였는지 모르겠다. 어떤 이는 급제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 하니, 과연 그런지 아닌지 알 수 없다.
○ 아계(鵝溪) 상공 이산해(李山海)는 나이 7~8세도 되기 전에 능히 큰 글자를 썼고, 이것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글을 다 쓰고 나면 발에 먹물을 묻혀서 종이 끝에 자국을 찍으니, 사람들이 더욱 기이하게 생각하였다. 13세에 호서(湖西)의 향시(鄕試)를 보아 해원(解元 향시의 장원)이 되었으니, 천재가 아니면 이렇게 될 수 있겠는가? 그를 지목하기를 신동(神童)이라 하였다. 일찍 청운(靑雲)에 올라, 이름이 자자하더니, 40이 겨우 넘자 반열은 구극(九棘)에 올랐고, 수년이 못 되어 뛰어 홍화(弘化)에 오르고, 50에 정승이 되었으니, 근래에 드물게 보는 일이다. 이는 재주와 명예를 함께 가진 사람이라 할 것이다.
○ 상사(上舍) 정작(鄭碏)의 우인(友人)을 보내는 시에,
친우는 천 리에 행색이 있는데 / 故人千里有行色
늙은이는 한 봄을 좋은 회포 없어라 / 老子一春無好懷
하였으니, 만당(晩唐)의 시체(時體)를 깊이 얻었다.
○ 두보(杜甫) 시에,
하늘로부터 왔으매, 글쓴 곳이 젖었고 / 自天題處濕
여름을 당하여도 입으니 시원하다 / 當夏着來淸
라고 한 자천(自天)이나 당하(當夏) 등 글자는 경전(經傳)에서 온 말이다. 시에 경전에 있는 글을 쓰는 것은 예부터 그 법이 있는 것이다. 내가 학사 어숙권(魚叔權)에게 준 시에,
시단에선 내가 못나서 달아나면서 뒤에 섰고 / 詩壇我屈奔而殿
술자리에선 그대 높으니 술잔은 그대 먼저네 / 酒社君尊酒則先
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한단(邯鄲)의 걸음을 배우는 것이다.
○ 내 친우 박지화(朴枝華)가 남의 만장(挽章)을 쓴 시에,
구만리 높은 하늘 고래 타고 날았다가 / 天高九萬騎鯨去
햇수로 삼천 년에 학이 되어 돌아오오 / 歲到三千化鶴回
하였다. 자못 시법(詩法)을 체득하였다.
○ 사문 조징(趙澄)이 영남 도사(嶺南都事)로 있으면서 제영(題詠)을 즐겨하여 판(板)에 새겨 벽에 걸었는데, 시와 부(賦)가 반반씩 되니 사람들이 기롱하였다. 사문 신의충(申義忠)은 조징과 동년(同年) 친우였다. 공해(公廨) 변소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측간에 졸구가 없는 것 보니 / 厠間無拙句
조가 아직 안 온 것을 알겠도다 / 知趙不曾來
신후(申侯 후(侯)는 원이라는 뜻)는 이것으로 이름이 났다.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신(申)의 10자가 조(趙)의 백 편을 누를 수 있다.”
하였다.
○ 학사 신응시(辛應時)가 중국 사신 구희직(歐希稷)을 이별하는 시에,
해국의 꿈은 길이 북극에 있고 / 海國夢魂長北極
초강 안개비는 또 동풍이네 / 楚江煙雨又東風
하였으니, 매우 좋다. 구공(歐公)은 초(楚) 땅의 사람이었다.
○ 정랑(正郞) 하응림(河應臨)은 매우 시명(詩名)이 있었다. 신녕현(新寧縣) 죽정(竹亭)의 시에 차운하였다.
햇빛이 이미 산빛을 어둡게 하고 / 日色已將山色瞑
나그네 마음은 대 속과 함께 비었더라 / 客心還與竹心空
그 외의 아름다운 것이 한둘이 아니다.
○ 천사(賤士) 강윤정(姜允精)은 젊을 때부터 시로 이름났다. 그의 아방궁시(阿房宮詩)에 이런 글귀가 있다.
만 백성의 힘을 허비하여 / 虛費萬民力
석 달의 붉은 불길 만들었네 / 圖爲三月紅
군산문적시(君山聞笛詩)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지는 달 아직 남아 강물은 망망한데 / 落月未落江茫茫
한 곡조 아련하니 찬 조수 소리더라 / 一曲杳隨寒潮聲
사림(士林)들이 전하며 읊어 온다.
○ 나의 친우 임필(林苾)군은 많은 책을 널리 보았고 문장도 잘 지었는데, 특히 시에 뛰어났다. 그의 낙양명원시(洛陽名園詩)에,
곡수ㆍ낙수는 깊은 해자요 / 穀洛爲深塹
숭산ㆍ망산
은 두터운 담 / 嵩邙作厚垣
경기는 삼진의 등골에 합하였고 / 畿合三晉脊
서울은 구주의 뿌리를 잡았구나 / 都扼九州根
희씨가 처음 열었던 도읍 / 姬氏初開邑
당 나라 사람이 처음 동산을 세웠네 / 唐人始立園
군주는 전성한 날을 맞이하고 / 君逢全盛日
신하는 태평의 은혜 받았네 / 臣受太平恩
갑제는 가지런히 구름과 줄을 짓고 / 甲第齊雲列
높은 누각은 물을 눌러 껑충 뛴듯 / 危樓壓水騫
낙화는 만호에 날아 있고 / 落花飛萬戶
수양버들은 천문을 가리었다 / 垂柳掩千門
이것은 30운(韻)이나 되는 긴 것으로 다 적지 못한다. 호음(湖陰)이 보고, ‘아주 좋다, 아주 좋다.’하였다. 이상 세 사람(신응시ㆍ강윤정ㆍ임필은 시학(詩學)에 뛰어난 점이 많았으나 불행히도 모두 일찍 죽었다. 만약 하늘이 그들에게 수명을 더 주었더라면 어찌 이 정도에 그치고 말았겠는가?
○ 강윤정(姜允精)의 군산문적시(君山聞笛詩)는 장단구(長短句) 30여 운(韻)으로 되었는데, 대관재(大觀齋) 심의(沈義)공이 그 시의 짧은 구는 두 자를 더 보태고 긴 구는 몇 자를 줄여서 모두 칠언(七言)으로 하여 이 글을 자기 문집에 실었다. 대관재는 일대의 거장(巨匠)이니, 어찌 남의 글을 도둑질하였겠는가? 반드시 한 창려(韓昌黎)가 옥천자(玉川子 노동(盧仝)의 호)의 월식시(月蝕詩)를 모방한 것을 본딴 것이리라. 그 제목을, ‘희롱으로 군산문적시에 차운하다’ 한 것으로 보아 더욱 알 수 없는 일이다.
○ 《대관집(大觀集)》중의 ‘두 마리 소를 그린 부[畫二牛賦]’는 실은 그 중씨(仲氏) 정승(政丞 심정(沈貞))이 지은 것을 일부러 자기 문집에 실었고, ‘월부를 모방한 것[擬月賦]’이란, 그의 조카 승지 사순(思順) 공이 지은 것이다. 그런데 이 두 편이 《대관집》에 실린 것은 잘못이다. 그의 종손(從孫) 청천(聽天 심수경(沈守慶)의 호) 상공(相公)이 말한 것이다.
○ 중국 조사(詔使) 장승헌(張承憲)의 《황화집(皇華集)》의 서(序)는 조정에서 호음(湖陰)에게 짓도록 한 것인데, 마침 병이 나서 어숙권(魚叔權) 공에게 초안을 잡게 하여 자신이 수십 자를 고쳤다. 그러므로 문집에는 싣지 않았다. 친히 어예미(魚曳尾)에게 들은 것이다. 어(魚)의 헌호(軒號)다. 혹은 야족(也足)이라 하기도 한다.
○ 옛날 책사종(翟嗣宗)이 회남위(淮南尉)로 있었는데, 그때 감사(監司)에게 매우 곤욕을 당하였다. 역관(驛館)에서 거미를 제목으로 시 한 수를 지었다.
실을 짜며 왕래하니 북같이 빠른데 / 織絲來往疾如梭
늘 공중에 올라 그물 만들기 좋아하네 / 長愛騰空作網羅
남을 해칠 몸과 마음 매우 적지마는 / 害物身心雖甚少
하늘에 늘어진 그물도 또한 많지 않구나 / 漫天網紀亦無多
숲 사이 자는 새들 너를 미워하지마는 / 林間宿鳥應嫌汝
발 아래 나는 벌레 그가 가장 너를 두려워한다 / 簾下飛虫最懼汝
사마귀가 매미 잡는 것 배우지 말지어다 / 莫學螳螂捕蟬□
모름지기 알아야지. 참새가 너를 잡을 줄을 / 須知黃雀奈君何
임자중(林子中)이 그를 불러 경박한 시를 짓지 말라고 꾸짖었다.
○ 우리 동방(東方)에도 역시 무사(武士) 이장길(李長吉)이 있었는데, 그가 의흥 현감(義興縣監)으로 있을 때 백성들이 몹시 그를 미워하여 시를 지어 조롱하였다.
자하 자하 또 자하야 / 子賀子賀復子賀
관탕 민재 모두 비우고 / 官帑民財一倂空
오직 강산은 옮기지 못하여 / 惟有江山移不得
화공을 명하여 병풍 위에 그렸네 / 命工圖畫上屛風
자하(子賀)는 장길의 자(字)다..
○ 또 사문 조희(曺禧)가 성주 목사(星州牧使)였다. 어떤 사람이 역(驛)의 벽(壁)에 적었다.
하늘 위의 남궁자요 / 天上南宮子
구름 사이 이 사군이라 / 雲間李使君
조교는 키가 구 척이니 / 曺交長九尺
뉘 능히 우열을 가릴꼬 / 優劣孰能分
상공 남궁숙(南宮淑)ㆍ상공 이윤경(李潤慶)은 이 고을에 원을 지냈는데, 모두 치적(治績)에 명성이 있었다. 또,
백성이 비록 입을 다물고 말이 없으나 / 民雖結舌摠無言
가죽 속에는 각자의 춘추가 있다 / 皮裏春秋各自存
장초의 알음 없는 것이 정말 즐거우리 / 萇楚無知眞可樂
이 몸 어디메 도원으로 피할꼬 / 此生何處避桃源
하였다. 그는 원성을 듣게 만들었으니, 과연 좋지 못하나, 조롱하는 사람도 또한 잘한다 할 수 있겠는가?
근년에 어떤 사람이 장편을 지어 종루(鐘樓) 기둥에 걸어서 낱낱이 조정 사대부(士大夫)를 헐뜯었으니, 진실로 조정에 뜻을 얻지 못한 사람이 아니면 바로 천박하고 경솔한 사람일 것이다. 시는 비록 볼 만하였으나, 실로 책사종(翟嗣宗)의 죄인인 것이다.
○ 우리 동국(東國)에 무인(武人)으로 시에 능한 사람은 박휘겸(朴撝謙) 이후로 전혀 이름난 사람이 없다. 중묘조(中廟朝)에 중추(中樞) 이사증(李思曾)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시에 탐닉하는 버릇이 있었다. 함경 일도의 시판(詩板) 중에 상정(橡亭)이라 한 것이 그 사람이다. 그 시는 혹 볼 만한 것이 있었다.
근세에 함양군(咸陽郡)에 한 무사가 있는데, 성은 정(鄭)이요, 이름은 척(陟)이며, 스스로 호를 죽계(竹溪)라 한다. 그의 시에,
죽계의 늙은이는 벼슬을 마다 하고 / 竹溪窮老謝籫纓
이 누각에 누웠으니 병든 몸 가벼워라 / 臥着玆樓病骨輕
물새 한 울음에 산비도 멎을시고 / 水鳥一聲山雨歇
구름에 새어나온 저녁 놀 반쯤 밝았더라 / 漏雲殘照半邊明
하였다. 무인이라고해서 가벼이 볼 수 없다.
○ 조송강(趙松岡)이 영남 절도사(嶺南節度使)로 나와 나에게 말하기를,
“열읍(列邑)의 제영(題詠)을 두루 보니, 서사가(徐四佳 이름은 서거정(徐居正)) 공의 울산(蔚山) 동헌(東軒) 시에,
누각은 악양루와 겨루어 천하에 제일이요 / 樓敵岳陽天下一
땅은 봉래도와 인접하여 바다 가운데 셋이로다 / 地隣蓬島海中三
한 것이 가장 기특하고 장하였다.”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상공 안침(安琛)의 창녕(昌寧) 추월헌(秋月軒) 시에,
물결은 흩어져서 소동파의 백을 짓고 / 搖波散作東坡百
그림자 대하니 정말 이태백의 셋이로다 / 對影眞成李白三
라고 한 것과 어느 것이 낫습니까?”
하니, 공은,
“저것은 웅장하고 이것은 공교로우니, 서로 막상 막하이다.”
하였다. 내가 울산(蔚山) 남헌(南軒) 시에, 차운한 것은 이러하다.
백조 가고 난 거기에 바다 있고 / 白鳥去邊惟有海
청산 다한 곳에 다시금 마을 있다 / 靑山盡處更有村
이 역시 사가정(四佳亭)과 비슷한 뜻이다.
○ 평양성(平壤城) 서쪽에 선연(嬋姸)이라는 동(洞)이 있다. 빽빽이 들어박힌 무덤은 모두 이원제자(梨園弟子)들이 묻힌 곳이다. 이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청천(聽天) 심 상공(沈相公)이 정을 쏟았던 기생도 이 안에 묻혀 있다. 공이 한 절구를 지었으니, 그 삼구와 사구에,
장부의 한 죽음을 끝내 면치 못할 바엔 / 丈夫一死終難免
원하노니 선연동 속의 혼이 되었으면 / 願作嬋姸洞裏魂
하였다. 내가 홍양(洪陽)에 가서 놀았는데, 그때 공은 호서 절도사(湖西節度使)로 장차 이 읍에 부임하려 할 때 내가 교방가요(敎坊歌謠)를 짓기를,
인생의 뜻 맞은 곳 남북 구별없으니 / 人生適意無南北
선연동 속 혼일랑 아예 되지 마오 / 莫作嬋姸洞裏魂
하였다. 듣는 사람들이 몹시 웃었다.
○ 심 상공(沈相公)의 시는 평담(平澹)하고 난숙(爛熟)하여 조탁(雕琢)한 흔적이 없고, 백향산(白香山 백거이(百居易))의 기풍이 있어 세상에 풍화(風花)를 숭상하는 사람들은 중시하지 않았으나, 나 혼자 애완(愛玩)하여 버리지 못하니, 비록 영인(郢人)의 도끼 바탕[郢質]이라 하여도 좋다.
고금 중국 사신의 시를 고하(高下)에 대해 평한 이가 없었다. 내가 호음(湖陰)에게 품평을 청하니, ‘기순(祈順)이 제일이요, 예겸(倪謙)ㆍ동월(董越)이 다음이요, 김식(金湜)은 칠언 율시(七言律詩)가 극히 좋고, 장영(張寧)은 좀 미숙한 것같다.’ 하였다. 공은 일찍이 동규봉(董圭峯 동월(董越))의,
강 비 추위를 빚어 나무 끝에 오고 / 江雨釀寒來樹抄
재 구름 어둠을 나누어 바위 언덕에 떨어진다 / 嶺雲分瞑落巖阿
라는 구를 읊으면서 찬양한 적이 한번만이 아니었다.
○ 무릇 중국 사신이 평안 역관(平安驛館)에 올 때면, 동인(東人)의 시판(詩板)을 일체 떼어버리고, 단지 대동강(大同江) 선정(船亭)에 정지상(鄭知常)의,
비 갠 긴 둑에 풀빛은 짙은데 / 雨歇長堤草色多
라는 시만 남겨두었다. 호음 상공(湖陰相公)이 말하기를,
“목은공(牧隱公)의 부벽루(浮碧樓) 시에,
어제는 영명사를 지나 / 昨過永明寺
오늘 부벽루에 올랐네 / 今登浮碧樓
성은 비었는데 달은 한 조각이요 / 城空月一片
바위는 늙었는데 구름은 천추로다 / 石老雲千秋
한 것은 절묘하여 사람을 감동시킨다. 중국 사신 예겸(倪謙)이 발을 구르며 칭찬하였다. 이것이 정지상의 시에 미치지 못하는가?”
하고, 이것 역시 남겨두고 떼지 않았다.
○ 밀양(密陽)의 영남루(嶺南樓)와 진주(晉州)의 촉석루(矗石樓)는 강산 풍물(江山風物)이 서로 으뜸을 겨루는데, 영남루는,
가을 깊어 큰길엔 붉은 단풍 비쳐 있고 / 秋深官道映紅樹
날 저문 어촌에는 흰 연기 난다 / 日暮漁村生白煙
한 낚시 어부는 빗소리 밖이요 / 一竿漁父雨聲外
십리길 나그네는 산 그림자 가이로세 / 十里行人山影邊
라고 한 등의 시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러나 촉석루는 전할 만한 가작이란 하나도 없다. 한 사람의 시작으로 영남에는 뛰어난 시가 있고, 촉석루에는 옹졸한 것은 촉석루의 기승(奇勝)이 영남루보다 나아서 잘 형용을 하기 어려워서 그런 것이나 아닌가?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 가정(嘉靖) 임임년(1542, 중종 37)에 내가 중씨(仲氏) 참판공(參判公)을 따라 연경(燕京)에 갔다가 예부(禮部)를 관광(觀光)하는데, 절강(浙江)의 서생(書生) 5~6인이 먼저 와 있었다. 땅에 글을 적어 서로 문답하고, 한 절구를 지어보였다.
중국 조정 예부에 부평같이 모였으니 / 天朝禮部風萍集
천리의 관광객은 각각이 다른 고향 / 千里觀光各異鄕
가장 괴로운 건 내일 아침 이별하면 / 最苦明朝又分手
푸른 하늘 가을 숲이 정히 푸르리 / 碧天秋樹正蒼蒼
내가 곧 그 시의 운에 따라 지었다.
서리 바람 나무에 불어 성겨 누른 잎 떨어지니 / 霜風吹樹隕疏黃
소슬한 찬 소리에 고향 생각 괴롭도다 / 蕭瑟聲寒苦憶鄕
같은 나그네로 내가 가장 먼 곳이니 / 同作旅遊吾最遠
바다 하늘 나직한데 흩어진 산 푸르구나 / 海天低襯亂山蒼
서로 끌며 몰려와 보고는 선생이라 불렀다. 내가 사양하여 말하기를,
“중국 선비들의 과분한 칭찬이 이미 감사한데, 또 선생은 무슨 말입니까?”
하니, 답하기를,
“재주를 보는 것이지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이번 걸음에 무령현(撫寧縣) 벽에 한 율시를 지어 붙였다. 그 1 연(聯)에,
말 통하려고 땅에 글 쓰기 번거롭고 / 通言煩畫地
악을 보러 중국을 방문한 것 기쁘다 / 觀樂喜朝天
하였다. 그후 임술년간에 한 압마관(押馬官)이 와서 말하기를,
“어떤 현의 관사가 다 낡아 다시 지었는데, 그 시를 쓴 구벽(舊壁)은 완연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하였다. 케케묵고 누추한 시에서 뭐 취할 것이 있다고 그렇게 남겨두고 보는고. 중국이 인재를 아끼는 것을 알 수 있다.
○ 나의 친우 정화(鄭和)는 문익공(文翼公)의 서자로 선천(宣川)에 살았는데, 당시 사문 유영길(柳永吉) 공이 이 군에 원으로 갔다. 정화가 해구(海鷗) 알 12개를 원에게 올리니, 원이 편지로 답하기를,
“그대가 바야흐로 바닷가에 살면서 먼저 12백구를 죽였으니, 후일에 망기(忘機)하면 누구와 벗할 것인가?”
하였다. 이래서 정화가 살풍경(殺風景)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 내가 용만(龍灣) 여인에게 정을 쏟아 그를 위하여 집 한 채를 지어 주었다. 수년이 못 가 그 사람이 집을 뜯어 이사해 버렸다. 야족(也足) 어공(魚公) 야족(也足)은 어 학관(魚學官)의 호 이 용만을 19번이나 출입하였으나, 한번도 구룡연(九龍淵)을 보지 못하였다. 그 때문에 나와 그도 함께 ‘살풍경’이란 별명을 얻었다. 내가 시를 지었다.
백구 죽인 늙은이는 고기 없는 연고이고 / 殺鷗病叟緣無肉
집 뜯어 간 가인은 오지 않는다 원한이네 / 撤屋佳人怨不來
만약 살풍경 등급대로 술을 마신다면 / 若第殺風浮白飮
내가 당연하게 셋째 잔을 마셔야지 / 我今當飮第三杯
다음날, 야족공이 배를 타고 구룡연을 거슬러 올랐으나 바람이 세어 밀리고 말았다. 내가 또 먼저 시에 첩운(疊韻)하여 지었다.
아홉 용이 힘을 모아 배 하나를 물리치고 / 九龍倂力排舟退
백조가 떼를 지어 문죄하러 오누나 / 白鳥成群問罪來
이것은 어(魚)와 정(鄭)을 아울러 조롱한 것이다. 내가 집을 지을 때, 목사(牧使) 유경심(柳景深)이 그 집에 편액(扁額)하면서 ‘집권(執權)’이라 하였다. 그러다가 이어 낭패를 당하니, 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의 호) 상공이 선위사(宣慰使)로 용만에 와서 그 시에 차운하여 나를 조롱하기를,
집권한 늙은이가 권을 버리는 잔을 마시다니 / 執權翁飮釋權杯
하였으니, 고사를 잘 썼다고 할 만하다.
○ 중국 사신 왕경민(王敬民)의 ‘새벽에 출발하여 조서를 반포하러 가다[早行頒詔]’라는 시에,
천자의 위엄이 지척에 계신 듯 두터운 정으로 조서를 반포하니 / 天威咫尺頒殊渥
동국의 의관들이 모두들 절하며 조아리네 / 東國衣冠盡拜稽
하니, 원접사(遠接使) 율곡(栗谷) 이이(李珥) 상공이 그 운에 차운하여 지었다.
은은한 만세 소리 상서로운 안개 드날리니 / 殷殷呼嵩騰瑞霧
삼한의 머리들이 일시에 조아리네 / 三韓厥角一時稽
대개 계(稽) 자는 다 측성(仄聲)으로 쓰이는데, 왕공이 이미 틀린 것을 율곡이 따라 틀리게 썼으니, 어째서일까? 내가 그 시를 상공에게 평하니, 상공이 곧 운자를 바꾸었다. 그러므로 《황화집(皇華集)》에 실은 것은 초고와 다른 것이다. 율곡은 재주가 남보다 뛰어났으며, 박식 다문(博識多聞)한데도 갑작스러운 상황에서는 이렇게 착오하여 웃음거리를 면치 못할 뻔하였는데, 하물며 재주가 율곡에 미치지 못하면서 이 임무를 맡은 자는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 중국에 나만호(羅萬湖)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시(詩)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임오년(1582, 선조 15)에 황태자가 탄생하였을 때에 조서를 받들고 우리 나라에 오게 되었다가, 나이 늙었기 때문에 황홍헌(黃洪憲) 공과 바꾸게 되었다. 나(羅)의 ‘계문에서 사냥을 보다[薊門見獵]’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눈에 띄는 언덕들은 백 번 전쟁한 땅 / 滿目邱墟百戰餘
나그네 심정은 시든 풀처럼 처절하다 / 旅情衰草共悽如
차운 산 옛 토성에 가을 사냥 만났으며 / 寒山古堠逢秋獵
먼 물 외로운 등불에 밤 고기잡이 보이더라 / 遠水孤燈見夜漁
집은 소상강에 저녁 비도 많은 곳 / 家在瀟湘多暮雨
기러기 분포에서 날아오나 고향 편지 없더라 / 雁來湓浦少鄕書
친구는 한 번 이별에 삼천 리 / 故人一別三千里
슬프다 동과 서에 정처 없구나 / 惆悵東西未定居
구법(句法)이 원활하여 이른바 판자 위에 탄환(彈丸) 구르는 것같다. 이것은 전해 들은 것이고, 그의 작품을 많이 얻어 보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 여자로서 시를 잘 짓는 사람은 예로부터 드문데, 하물며 재인(才人)을 얻기 어려운 지금에랴? 옥봉 여도사(玉峯女道士)라는 이가 있었는데, 그의 낭군이 지방의 수령이 되어 공사로 서울에 갔다. 그때 북쪽 오랑캐가 침입하였다. 여자가 시를 지어 낭군에게 부쳤다.
싸우는 것은 비록 서생의 길과 다르지만 / 干戈縱異書生道
나라 근심으로 응당 머리 셀 것이네 / 憂國唯應鬢髮蒼
적을 칠 이때 곽거병을 생각하고 / 制敵此時思去病
오늘날 산가지 놀리는 것 장량을 생각하네 / 運籌今日憶張良
원성의 싸움 피는 산하를 붉게 물들이고 / 源城戰血山河赤
아보의 요망한 기운 일월도 누르스름 / 阿堡迷氛日月黃
서울 소식은 아직 오질 않으니 / 京洛音徽尙不達
창호의 봄빛 처량하네 / 滄湖春色亦悽涼
창호란 사는 곳의 물 이름이다. 그 낭군이 집에 돌아오자 또 한 절구를 적었다.
버드나무 강 언덕에 오마의 울음 소리 듣고 / 柳外江頭五馬嘶
반을 깨고 수심에 취하여 누각을 내릴 때라 / 半醒愁醉下樓時
봄꽃 붉은 빛이 야위어져 거울 보기 부끄러우나 / 春紅欲瘐羞看鏡
시험 삼아 매창 향해 반달 눈썹 그려보네 / 試畫梅窓却月眉
두 시는 청신 원활하고 장하고 고와서, 부인의 손에서 나온 것이 아닌 듯하여 매우 가상하다. 그는 사문 조원(趙瑗)이 사랑하는 여인이었다.
○ 진성(晉城)에 승이교(勝二喬)라는 기생이 있었다. 어릴 때 이름은 억춘(憶春)이었으며, 마관(馬官 찰방(察訪)) 김인갑(金仁甲) 군이 사랑하였다. 그에게 시를 가르치니, 천성이 매우 영리하여 자못 시어(詩語)를 이해하였다. 작품도 간혹 맑고 고운 것이 있었으니,
강양관 안에 서풍이 이니 / 江陽館裏西風起
뒷산은 취하려 하고 앞강은 맑았어라 / 後山欲醉前江淸
사창에 달은 밝고 온갖 벌레 우짖으니 / 紗窓月白百虫咽
홀로 누운 찬 이불에 꿈조차 못 이룬다 / 孤枕衾寒夢不成

서풍은 의상에 불고 / 西風吹衣裳
세월 따라 모습도 쇠하여 가네 / 衰容傷日月
연당에 가을비 성기고 / 蓮堂秋雨疏
이슬 가지에 찬 매미는 흐느껴 울부짖네 / 露枝寒蟬咽

서리 오는 밤 기러기 날아 떨어지는 소리 / 霜雁墮飛聲
적막하게 산성을 지나간다 / 寂寞過山城
그대 생각하는 외로운 꿈 깨니 / 思君孤夢罷
가을달 창문에 밝게 비치네 / 秋月照窓明
이와 같은 작품은 매우 이소(離騷)의 운치가 있다. 나이 30이 못 되었으나, 젊고도 총민(聰敏)하였다. 만약 스스로 중단하지 않았더라면 옥봉여도사(玉峯女道士)와 같은 지경에 이르기는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주D-001]두심언(杜審言)에게 …… 격 : 두심언은 당(唐)의 이름난 시인인데, 그의 손자가 두보다.
[주D-002]부상(扶桑) : 해가 뜨는 동쪽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일본을 가리킨다.
[주D-003]길 주서 고리(吉注書故里) : 고려 말기에 길재(吉再)가 주서(注書)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선산(善山)에 돌아가서 뒤에 조선의 벼슬을 받지 않고 절개를 지켰다.
[주D-004]함련(頷聯) : 율시의 앞의 연구(聯句)로서 제3, 제4의 두 구.
[주D-005]수양산 …… 풀이요 : 주(周) 나라가 은(殷) 나라를 멸하자 백이(伯夷)ㆍ숙제(叔齊)가 그것을 불의(不義)라 하여 주의 곡식을 먹지 않고 수양산에 들어가서 고사리를 캐어 먹었다.
[주D-006]율리의 …… 옛터네 : 도연명(陶淵明)이 진(晉) 나라 신하로서 진 나라를 빼앗은 송(宋)의 연호(年號)를 쓰지 않고 율리(栗里)에서 농사 짓고 살았다.
[주D-007]이십사교(二十四橋) : 주흘산에 있는 다리 이름이다.
[주D-008]성패로 …… 논하는 것 : 촉한(蜀漢) 제갈량(諸葛亮)이 위(魏) 나라를 토벌하여 성공하지 못하였다 하여 성패(成敗)를 가지고 그의 재주를 평할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주D-009]봄꿈은 …… 어지럽고 : 진 시황(秦始皇)의 아들 이세(二世) 때에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 나라가 곧 망하였다.
[주D-010]실없는 …… 삼가 : 춘추 시대(春秋時代) 노(魯) 나라의 권신 맹손(孟孫)ㆍ숙손(叔孫)ㆍ계손(季孫)을 가리킨다.
[주D-011]계찰(季札) : 춘추 시대(春秋時代) 오(吳)의 공자(公子) 계찰(季札)이 주(周) 나라에 관광(觀光)하여 각국의 음악을 들었다.
[주D-012]장건(張騫) : 한 무제(漢武帝) 때에 장건(張騫)이 서역(西域)에 사신으로 가서 국교를 개통하였다.
[주D-013]종고는 …… 않는다 : 부귀가 자기에게 당치 않다는 뜻이다. 《장자(莊子)》에, “종고(鐘鼓)는 안(鷃 새 이름)을 즐겁게 하지 못한다.” 하였다.
[주D-014]환괘(渙卦) : 《주역(周易)》 64괘의 하나.☰☵의 형상으로 되었음.
[주D-015]곤괘(坤卦) : 《주역(周易)》 8괘의 하나. ☷의 형상으로 되었음.
[주D-016]막막(漠漠) 음음(陰陰) : 당(唐) 나라 시인 왕유(王維)의 시에, “막막수전비백로(漠漠水田飛白鷺), 음음하목전황리(陰陰夏木囀黃鸝)”라는 시가 있는데, 이것은 남의 오언시(五言詩)에다가 ‘막막 음음’의 글자만을 보태어 표절하여 칠언시(七言詩)를 만든 것이다.
[주D-017]맑은 …… 사현위요 : 유송(劉宋) 때 시인 사현휘(謝玄暉)의 ‘맑은 강은 깨끗하기 비단같다[澄江淨如練]’는 시가 유명하다.
[주D-018]초생달 …… 한 이부 : 한퇴지(韓退之)의 시에, “새 달은 낫을 갈아놓은 것 같다[新月似磨鎌]”는 글귀가 있다. 이부(吏部)는 한퇴지의 관직이다.
[주D-019]창[槊] 비낀 …… 짓는다 : 조조(曹操)는 문무(文武)를 모두 갖추어 군중에서 창을 비껴들고 시를 지었다.
[주D-020]옥문관(玉門關)에 …… 일이니 : 한(漢) 나라 반초(班超)가 서역(西域)에 도호(都護)로 가서 오랫동안 돌아오지 못하여, “다만 생전에 옥문관(서역과의 경계)에 들어가는 게 소원이다.” 하였다.
[주D-021]명년에 …… 들 것이오 : 금원(禁苑) 안에 있는 못의 이름이다. 곁에 중서성(中書省)이 있어서, 중서성 또는 재상을 비유해서 말한다.
[주D-022]삼인 : 은(殷) 나라 말기의 세 충신, 즉 미자(微子)ㆍ기자(箕子)ㆍ비간(比干)을 가리킨다.
[주D-023]용 죽고 : 당(唐) 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백제(百濟)를 칠 때에 조룡대(釣龍臺)에서 용을 낚았다 한다.
[주D-024]말들은 …… 응했구나 : 하늘에 방성(房星)이라는 별이 있는데 말[馬]은 방성의 정기를 타고 났다 한다. 제주도에 좋은 말이 많이 난다는 뜻이다.
[주D-025]우는 …… 일곱이요 : 《시경(詩經)》에, “뻐꾹새가 뽕나무에 있으니, 그 새끼가 일곱이로다[鳲鳩在桑 其子七兮].” 한 구절이 있다.
[주D-026]삼년상을 …… 한(漢) 나라를 : 한 문제(漢文帝)가, “대공(大功)은 15일, 소공(小功)은 14일, 시마(緦麻)는 7일만에 복을 벗으라.”는 유조(遺詔)를 내려, 달을 날로 바꾸는[以月易日] 단상제(短喪制)가 그뒤부터 행해졌다. 《史記 漢文帝紀》
[주D-027]여막에 …… 등(滕) 나라보다 : 등 문공(滕文公)이 그의 부왕 등 정공(滕定公)의 상에 종래의 단상제(短喪制)를 무시하고 고례(古禮)의 삼년상(三年喪)을 행하면서 다섯 달 여막에 거처하였다. 《孟子 滕文公上》
[주D-028]천하에 …… 어렵도다 : 진 목공(秦穆公)이 천리마를 구하려고 말을 잘 보는 백락(伯樂)의 제자 구방고(九方皐)를 보냈더니, 석 달만에 돌아와서 천리마를 구해 놓았다고 아뢰었다. “무슨 말이냐?” 물으니, “누런 암말입니다.” 하였다. 목공이 사람을 보내어 말을 몰고 오니, 검은 수말이었다. 목공이 백락에게 “자네의 제자가 수말인지 암말인지, 누른지 검은지도 모르니, 어찌 말을 알아 보았겠는가?” 하니, 백락은, “구방고는 말의 천기(天機)만 보기 때문에 속만 알고 겉은 잊어버린 것입니다.” 하였다. 과연 그 말이 천하에 좋은 말이었다.
[주D-029]노인성 : 옛날 제주도의 성주(星主)가 곧 왕자였다. 제주에는 남극 노인성(南極老人星)이 비친다 한다.
[주D-030]진지를 겨루어 : 시(詩)로써 서로 겨룬다는 뜻이다.
[주D-031]난초 …… 맡아 : 공자(孔子)의 말에, “어진 사람과 사귀면 난초 있는 방에 들어가는 것과 같아, 절로 향기가 몸에 밴다.” 하였다.
[주D-032]접해(鰈海) : 조선의 근해를 말한다. 중국에서 보는 동해, 즉 우리 나라에서 가자미가 난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주D-033]황화집(皇華集) : 《시경(詩經)》에, 황황자화(皇皇者華)라는 시편은 왕명을 받은 사신(使臣)을 읊은 것이므로, 중국 사신이 우리 나라에 와서 지은 글과 거기에 화답한 접반사(接伴使)의 시를 편찬하여 《황화집(皇華集)》이라 하였다.
[주D-034]성 징군(成徵君) : 징군(徵君)은 학문 덕행(學問德行)이 있어 나라의 부름을 받았으나, 벼슬하지 않은 선비의 존칭이다. 징사(徵士)라고도 한다.
[주D-035]유(留)에 …… 계책 : 장량(張良)이 한(漢) 나라의 공신(功臣)으로서 유후(留侯)로 봉해졌다.
[주D-036]하늘 이야기 : 제(齊) 나라 추연(騶衍)이 광대(廣大)한 천지의 이치를 잘 말하므로 당시 사람들이 하늘 이야기하는 연[談天衍]이라 하였다.
[주D-037]삼장(三臧) : 불교에는 경(經)ㆍ율(律)ㆍ논(論) 등 세 가지 불서(佛書)가 있는데, 이것을 삼장(三臧)이라 하고, 이것을 통달한 중을 또 삼장이라 부르기도 함.
[주D-038]무이 구곡(武夷九曲) : 주자(朱子)가 살던 무이산(武夷山)의 시내가 아홉 굽이였는데, 주자가 구곡시(九曲詩)를 지었다.
[주D-039]옷 …… 읊조린다 : 《시경(詩經)》에 무의편(無衣篇)이 있으므로 자기의 옷 없는 데에 인용한 것이다.
[주D-040]양자운(揚子雲) …… 알 것이다 : 한(漢)의 학자 양웅(揚雄)을 가리킨다. 자운(子雲)은 그의 자다. 그가 《주역(周易)》을 모방하여 《태현경(太玄經)》을 지었더니, 그의 친구 유흠(劉歆)이 보고, “이 책은 뒷사람 장딴지나 덮을 것이다.” 하니, 그는, “후세에 반드시 알아줄 양자운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주D-041]어버이를 생각하는 뜻 : 당(唐) 나라 적인걸(狄仁傑)이 병주(幷州)에 관원으로 갈 때에 그 부모는 하양(河陽)에 있었다. 그는 태항산(太行山)에 올라서 공중에 나는 흰 구름을 바라보고, “우리 부모 계신 데가 저 구름 밑에 있다.” 하고, 서서 슬피 울었다. 김귀영(金貴榮)의 시에 흰 구름을 쓴 것이 부모 생각하는 뜻을 포함하였다는 말이다.
[주D-042]헤어질 때 …… 남겨두니 : 한퇴지(韓退之)가 중 태전(太顚)과 작별할 때에 그의 옷을 남겨두게 하였다.
[주D-043]향렴체(香奩體) : 시(詩)의 한 체로 당(唐)의 한악(韓偓)에서 시작된 미인을 읊은 노래 종류이다.
[주D-044]자고시(鷓鴣詩) : 당(唐) 나라 정곡(鄭谷)이 자고새[鷓鴣]를 읊은 시가 유명하므로, 사람들이 그를 정자고라 불렀다.
[주D-045]의루시(倚樓詩) : 당(唐) 나라 조하는, “긴 피리 한 소리에 사람이 다락에 기대었네[長笛一聲人倚樓]”라는 시가 유명하므로 사람들이 그를 조의루(趙倚樓)라 불렀다.
[주D-046]찌푸림을 본떠서[効顰] : 월(越) 나라 미인 서시(西施)가 가슴 앓는 병이 있어 가슴을 움켜 쥐고 찡그리는 그 모양도 매우 어여쁘자, 이웃 여자가 그것을 보고 저도 찡그린 고사에서 나온 말로, 덩달아 흉내 냄을 뜻한다.
[주D-047]일성적(一聲笛) : 조하(趙嘏)를 말한 것임. 주 49) 참조.
[주D-048]정승의 …… 있다 : 송(宋) 나라 정승 조보(趙普)가 태종(太宗)에게 말하기를, “신이 《논어(論語)》 반부(半部)를 가지고 태조(太祖)를 보좌하여 천하를 평정하였고, 반부를 가지고 폐하(陛下)를 보좌하여 태평의 정치를 이룩하겠습니다.” 하였다. 여기서는 송강(松岡)의 성이 조씨이므로 조하(趙嘏)ㆍ조보(趙普)의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주D-049]공권의 …… 흔들었다 : 유공권(柳公權)은 명필(名筆)이요, 유종원(柳宗元)은 문장으로 유명하였다. 유이손(柳耳孫)의 성을 따라 이 두 사람을 인용한 것이다.
[주D-050]호랑이를 …… 것이다 : 한(漢) 나라 마원(馬援)의 말에, “범을 그리려다가 도리어 강아지가 된다.” 하였다. 서투른 솜씨로 남의 언행을 흉내내려 하거나, 어려운 일을 하려 하여도 되지 않는다는 비유이다.
[주D-051]학은 …… 돌아오니 : 한(漢) 나라 요동(遼東) 사람 정영위(丁令威)가 신선이 되어 갔다가 천 년만에 고향에 돌아와 학(鶴)이 되어 화표기둥[華表柱]에 앉았다는 고사를 말한다.
[주D-052]여동빈 : 신선 여동빈(呂洞賓)의 시에, “악양에 세 번 취하여도 사람들이 알지 못하네[三醉岳陽人不識]”라는 글귀가 있다.
[주D-053]만 사람의 …… 쓸까 : 좋은 사적을 돌에 새기지 않고도 여러 사람의 입으로 전하는 것을 구비(口碑)라 한다.
[주D-054]한 마디 …… 무어랴 : 노자(老子)의 말에, “부자는 사람을 전송할 때에 재물로 노자를 주고, 어진 사람은 사람을 송별할 때에 좋은 말[言]을 준다.” 하였다.
[주D-055]북당(北堂) : 《시경(詩經)》에 북당(北堂)이란 말이 나왔는데, 그것은 부인의 거처하는 곳을 말한 것이다. 후세에는 어머니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주D-056]모구(旄丘) : 《시경(詩經)》 모구편(旄丘篇)에 “모구(旄丘 앞은 높고 뒤는 낮은 언덕)의 칡은 마디가 굵어졌다. 숙이여 백이여 어찌 이리도 오랜 세월이 걸리는가?[旄丘之葛兮 何誕之節兮 叔兮伯兮 何多日也]” 하였다. 이것은 여국(黎國) 임금이 나라를 잃고 위국(衛國)에 와서 머문 지가 오래 되어도 위국에서 자기네를 원조하여 본국으로 보내주지 않는다고 원망하여 지은 것이다.
[주D-057]나비꿈 : 《장자(莊子)》에, “장주(莊周)가 꿈에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았다.” 하였다.
[주D-058]구극(九棘) : 가시나무[棘] 아홉 그루를 심어서 조신(朝臣)의 반열로 삼았기 때문에 이름 붙여진 것이다. 《주례(周禮)》에, “조정 신하들의 서는 자리에 가시[棘]로 둘렀는데, 왼편 구극(九棘)에는 고ㆍ경대부(孤卿大夫)가 자리잡고, 오른편 구극에는 공ㆍ후ㆍ백ㆍ자ㆍ남(公侯伯子男)이 자리잡는다.” 하였다. 여기서는 경(卿 판서) 줄을 말한다.
[주D-059]홍화(弘化) : 교화를 넓히는 직책을 맡은 공으로, 삼공(三公)의 다음인 삼고(三孤) 즉 소사(小師)ㆍ소부(少傅)ㆍ소보(少保)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찬성(贊成)을 말한다. 《書經 周官》
[주D-060]달아나면서 …… 섰고 : 《논어(論語)》에서 나온 말인데, 싸우다가 패하여 달아나는데[奔] 뒤에 섰다[殿]는 말이다.
[주D-061]술자리에 …… 먼저네 : 《맹자(孟子)》에, “마을 사람보다 형을 공경하지마는, 술자리에서는 마을 사람에게 술잔을 먼저 준다.” 하였다.
[주D-062]한단(邯鄲)의 …… 배우는 것 : 남의 흉내를 내어 일을 행하여 그 본분을 잃어버림을 비유한 말이다. 한단(邯鄲)은 조(趙)의 도읍. 《장자(莊子)》에, “한단 사람이 걸음을 잘 걷는 것을 보고 연(燕) 나라 소년이 그곳에 가서 걷는 방법을 배웠는데, 습득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국의 걸음걸이까지도 잊어버리고 기어 나왔다.” 하였다.
[주D-063]동년(同年) : 과거(科擧)에 함께 합격한 사람을 말한다.
[주D-064]북극(北極) : 북극성이 모든 별 중에 가장 가운데 있고, 다른 별들이 그 주위에 있는 것과 관련하여 임금이 있는 곳을 말한다.
[주D-065]석 달의 …… 만들었네 : 진 시황(秦始皇)이 아방궁(阿房宮)을 크게 지었더니, 뒤에 항우(項羽)가 불을 질렀는데, 궁이 너무 커서 석 달 동안이나 불이 꺼지지 않고 탔다 한다.
[주D-066]낙양명원시(洛陽名園詩) : 송(宋) 나라 사람이 《낙양명원기(洛陽名園記)》라는 책을 지었는데, 그것은 오대(五代)의 전란이 있기 이전 번화한 낙양에서 유명한 정원(庭園)들을 기록한 글이다.
[주D-067]곡수(穀水) …… 망산(邙山) : 곡수ㆍ낙수, 숭산ㆍ망산은 모두 낙양에 있는 물과 산이다.
[주D-068]삼진(三晉) : 한(韓)ㆍ위(魏)ㆍ조(趙)인데, 본시 모두 진(晉)의 대부(大夫)로서 나라를 세웠으므로 삼진이라 한다.
[주D-069]희씨(姬氏) : 중국 주(周) 나라를 말한다.
[주D-070]천문(千門) : 한(漢) 나라 건장궁(建章宮)이 천문만호(千門萬戶)였다. 여기서는 큰 궁궐이란 뜻으로 썼다.
[주D-071]장단구(長短句) : 시에 오언(五言)ㆍ칠언(七言)의 일정한 제한이 없이 섞어서 짓는 시체(詩體)이다.
[주D-072]두 마리 …… 부[畫二牛賦] : 양(梁) 나라 도홍경(陶弘景)이 산중에 있었다. 양 무제(梁武帝)가 벼슬을 주겠다고 부르니, 도홍경이 소 두 마리를 그려서 바쳤는데, 한 마리는 화려한 굴레와 고삐로 꾸며 한 사람이 채찍을 들고서 몰고 있고, 한 마리는 굴레도 고삐도 없이 자유롭게 풀밭에 있었다. 그것은 부귀영화에 구속받지 않고 자유롭게 산중에 살겠다는 뜻이었다. 여기서는 그것을 제목으로 하여 글을 지었던 것이다.
[주D-073]월부를 모방한 것[擬月賦] : 남제(南齊) 때 사장(謝莊)이 지은 월부(月賦)가 유명한데, 여기서는 그것을 모의(摹擬)하여 지은 글이다.
[주D-074]사마귀가 매미 잡는 것 : 《오월춘추(吳越春秋)》에, “사마귀가 매미를 잡으려고 가만히 엿보느라 참새가 저를 쪼아 먹으려고 따르는 것을 알지 못한다.” 하였다.
[주D-075]자하(子賀)는 …… 자(字)다 : 당(唐) 나라 시인 이하(李賀)의 자가 장길(長吉)이므로 그것을 모방한 것이다.
[주D-076]구름 …… 이 사군(李使君) : 진(晉) 나라 때에 순명학(荀鳴鶴)과 육사룡(陸士龍)이 서로 처음 인사하면서, “나는 해아래[日下] 순명학이다.” 하니, “나는 구름 사이 육사룡이다.” 하였다. 이것은 높은 데 있다고 자기를 추켜서 말한 것이다. 사군(使君)은 사또란 말이다.
[주D-077]조교는 …… 구 척이니 : 《맹자(孟子)》 고자(告子) 하(下)에 “조교(曹交)는 키가 9척이나 되는데, 곡식만 먹을 뿐이다[今交九尺四寸以長 食粟而已].” 하였다. 여기서는 조희(曺禧)를 조롱한 말로 썼다.
[주D-078]가죽 …… 있다 : 진(晉) 나라 환이(桓彛)가 저계야(褚季野)를 칭찬하여, “계야는 가죽 속에 춘추(春秋)가 있어서, 비록 말하지 않아도 사시(四時)의 기운이 감추어져 있다.” 하였다. 사람마다 마음속에 각각 속셈과 분별력이 있음을 이른다.
[주D-079]장초의 …… 즐거우리 : 《시경(詩經)》에, “언덕에 장초(萇楚 초목 이름)가 있으니…… 너의 알음 없음이 부럽구나[隰有萇楚…… 樂子之無知].” 하였다. 그것은 당시에 정치는 까다롭고 부역은 중하여, 백성이 고통이 심하므로 차라리 초목처럼 아무것도 몰라 걱정 없는 것을 부러워한다는 뜻이다.
[주D-080]이 몸 …… 피할꼬 : 진(晉) 나라 무릉(武陵) 어부(漁父)가 우연히 산중에 숨어 사는 도원(桃源)이란 곳에 들어갔더니 거기에 사는 사람들은 옛적 진(秦) 나라 때에 포학한 정치를 피하여 깊은 산중으로 피해 와서 수백 년 바깥세상을 모르고 살아왔다 하였다.
[주D-081]바다 …… 셋이로다 : 삼신산(三神山)을 이른다.
[주D-082]물결은 …… 짓고 : 소동파(蘇東坡)가 물에 비친 달을 두고 지은 시에, “동파의 그림자가 물 따라 달 따라 백이 될 수 있다.”는 글귀가 있다.
[주D-083]이태백의 셋 : 이태백의 시에, “달 아래 춤추니 나와 달과 그림자 합쳐서 세 사람이네.” 하는 구절이 있다.
[주D-084]이원제자(梨園弟子) : 당 명황(唐明皇)이 음악하는 사람 양성하는 곳을 이원(梨園)이라 하였는데, 여기서는 기생을 가리킨 것이다.
[주D-085]교방가요(敎坊歌謠) : 지방에 관원이 부임할 때에 교방(敎坊 기생 양성하는 곳)에서 새 노래를 지어 영접하기도 한다.
[주D-086]풍화(風花) : 바람이니 달이니 꽃이니 하고 실속 없는 미사여구(美辭麗句)를 말한 것이다.
[주D-087]영인(郢人)의 …… 바탕[郢質] : 옛적에 영(郢)에 도끼질 잘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사람의 코끝에다 백토(白土)를 조금 붙여두고 도끼질로 그 백토를 다 깎아내어도 코는 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코를 대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유독 한 사람이 그의 기술을 알기 때문에 안심하고 코를 대주었다. 그뒤에 그 사람이 죽고 나자 도끼를 던지며, “이제는 나의 바탕이 죽었으니, 어디에 기술을 쓰랴.” 하였다.
[주D-088]악을 …… 기쁘다 : 계찰(季札)이 주(周) 나라에 가서 각국의 음악을 감상하였다.
[주D-089]망기(忘機) : 《열자(列子)》에, “바닷가의 한 사람이 매일 해오라기와 친하게 놀아서 해오라기가 사람을 피하지 아니하였다. 하루는 그의 아버지가, ‘내일은 해오라기 한 마리를 잡아서 내가 보게 하여라.’ 하였더니, 그 이튿날에는 해오라기들이 공중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하였다. 그것은 전에는 해오라기를 어떻게 하겠다는 기심(機心)을 잊었던 때문에 해오라기들도 무심하게 친해진 것이요, 뒤에는 ‘해오라기를 잡겠다.’는 기심이 있기 때문에 해오라기가 피한 것이다.
[주D-090]살풍경(殺風景) : 풍경을 해치는 것이란 뜻으로, 이상은(李商隱)의 잡찬(雜纂) 살풍경(殺風景)에, “꽃 사이에서 큰 소리로 꾸짖는 것, 꽃을 보고 눈물 흘리는 것, 이끼 위에서 자리 펴는 것, 수양을 찍어버리는 것, 꽃위에 속옷 말리는 것, 석순(石筍)에 말 매는 것, 달 아래 불 잡고 있는것, 기생과 앉은 자리에 세속 일 말하는 것, 과원(果園)에 나물 심는 것, 산 등지고 누각 짓는 것, 화가(花架) 아래 닭과 오리 기르는 것, 꽃을 대해 차 마시는 것, 거문고 태워 학(鶴) 삶는 것.”이라 하였다.
[주D-091]곽거병(霍去病) : 한 무제(漢武帝) 때의 명장(名將)으로 흉노(匈奴)를 쳐서 공을 세웠다.
[주D-092]장량(張良) : 한 고조(漢高祖)의 창업 공신. 한 고조가 말하기를, “장막 가운데서 산가지[籌]를 놀려서 천 리 밖에 승산(勝算)을 결정하는 것은 장자방(張子房 자방은 양의 자다)이다.” 하였다. 《漢書》
[주D-093]오마(五馬) : 수령(守令) 행차의 이칭으로 태수(太守)의 수레에는 사마(駟馬)에 말 한 필을 더 붙여준 데서 온 말이다.
[주D-094]봄꽃 붉은 빛 : 자기의 얼굴빛을 말한 것이다.
[주D-095]승이교(勝二喬) : 중국 삼국 시대(三國時代) 강동(江東)에 교공(喬公)의 두 딸이 절세미인으로, 언니는 손책(孫策)의 아내가 되고, 동생은 주유(周瑜)의 아내가 되었다. 그들을 이교(二喬)라 하였는데, 이 기생은 이교보다 낫다는 뜻으로 이름을 지었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17권
 변어전고(邊圉典故)
관방(關防) 진관(鎭管)ㆍ변진(邊鎭)ㆍ번곤(藩閫)의 통칭


상진(尙震)이, 늘 의주(義州)의 경계가 이(夷)와 한(漢)에 연달아 있으면서 방위할 지형이 트이고 넓은 것을 근심하였다. 옛날부터 중국에 난리가 있으면 우리나라도 반드시 그 해를 함께 받기 마련이었으니, 멀리는 위만(衛滿), 가깝게는 홍건적(紅巾賊)의 난리에서 볼 수 있다. 옛날에는 이에 대비하여 일경(一境)에 거진(巨鎭) 서너 곳을 설치하여 방비하였으니, 인주(麟州)ㆍ포주(抱州)ㆍ의주(義州)가 그곳이다. 지금은 다만 의주만 두어 방어가 허약하고 또 성참(城塹)이 없어지기도 하였으니, 만약 철기(鐵騎)로 얼음을 타고 오면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 국가에서 장성(長城)을 설치하는 것은 전적으로 이 때문이다. 상진이 전곶(箭串)에 성을 쌓은 것은 강변의 방위 때문에 시작한 것인데, 뜻은 있으나 이루지 못했으니 참으로 한스럽다. 《청강쇄설(淸江瑣說)
○ 관서(關西)에 세 길이 있는데 오직 박천(博川)ㆍ태천(泰川) 간의 한 길이 가장 중요한 관문이니, 대개 이 길이 강변 여러 진(鎭)의 안위에 관계된다. 만약 적이 이 길로 나올 줄 모르고 정주(定州)로부터 오고 아군(我軍)이 구성(龜城)ㆍ박천으로 해서 정강(定江)과 청천(淸川) 사이로 나가면 적의 귀로(歸路)는 끊기고 만다. 만일 희천(熙川) 길이 끊어지면 지세가 험하여 적병이 쉽게 나오지 못할 것이므로, 지금 적에 대비하자면 박천이 가장 긴요하고 정주 길이 그 다음이며 희천 길이 또 그 다음이다. 만약 정주와 구성에 각각 한 장수를 두어 군력을 장악하고 방어하게 하여 서로 기각(掎角)의 형세를 취하면 한 도(道)를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서애집(西厓集)》
○ “조정에서 본래 자산(慈山)ㆍ자모산성(慈母山城)으로 감사가 방어할 신지(信地)로 삼았지만, 평양(平壤)은 바로 한 도의 요충인데 서로(西路)에서 산성에 전력하면서부터 평양을 버리고 다시 수비할 의논을 하지 않으니, 적이 직로(直路)로 들어올 때에는 실로 막을 수 없습니다. 평양성이 비록 넓고 크지만 만약 나누어 자모성(子母城)으로 만들고 높이를 10장에 이르게 하면 믿어 요해처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의주(義州)는 나라의 문호(門戶)이니 방어사(防禦使)에게 산성을 지키게 해서는 안 되며, 창성(昌城)과 삭주(朔州)는 다 적이 오는 길이니, 청컨대, 두 비어사(備禦使)를 더 두어 창성ㆍ삭주ㆍ의주를 나누어 지키게 하여 다 함께 변방의 수비를 하게 하고, 부원수(副元帥)는 정주와 곽산 사이에 진주하게 하면 두 길을 절제하기 편리하겠습니다.” 하였다. 평안 감사 홍명구(洪命耈)의 장계
○ “적이 의주의 큰 길로 해서 온다면 선천(宣川)의 좌현(左峴)과 가산(嘉山)의 효성령(曉星嶺) 및 안주(安州)와 평양이 관문 수비의 중요 지점이 되며, 적이 창성으로 해서 온다면 완항령(緩項嶺)의 당아성(當峩城)이 관문 수비의 지점이 될 것입니다. 해변산성(海邊山城) 중에 가장 긴요한 곳으로는 용강(龍岡)의 황룡(黃龍)과 용천(龍川)의 용골(龍骨)에 불과합니다. 황룡산성은 삼면이 험준하고 일면이 적을 맞게 되어 있으니 진실로 반드시 수비해야 할 곳이며, 세 고을 인민을 수용해 보호할 수 있으나 군량이 부족하니 의당 생각해야 합니다. 용골은 천연적으로 험준한 지세이지만 물이 모자랄 뿐 아니라 또 좁으니 뒤로 물려 외성(外城)을 쌓으면 실로 편리할 것입니다. 성의 터전은 2천 3백 보(步)에 불과하고 산에 돌이 많으니 쌓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므로, 4백 석의 쌀과 수천 냥의 돈만 얻으면 변통되겠습니다.산읍(山邑)으로 말씀드리면, 창성의 완항령은 산이 막히지 않았고 골짜기도 넓으며 화전(火田)이 서로 이어져 있어 수목이 드무니, 그 험준함이 소문과는 다릅니다. 아마 천 명에 가까운 정병(精兵)이 아니면 지켜내기 어려울 것입니다. 구성(舊城)이 영(嶺)의 남쪽 큰 길 곁에 있으며 험준하기가 한 도에서 제일이니, 백성의 소원을 좇아 다시 수축하면 기껏 한 달 가량이 걸리는 역사일 뿐입니다. 관서(關西)의 방비 시설에서 가장 한스러운 것은 각 산성을 큰 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설치하여 다만 숨고 피하려는 계책만 도모하면 적병에게 직로(直路)를 허용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평양ㆍ안주(安州) 두 성은 신속히 완공하여 관찰사와 병사(兵使)의 신지로 하여 철옹(鐵瓮)의 자성(慈城)과 서로 공격할 수 있는 형세를 취하면 위급할 때에 거의 의지가 될 것입니다. 효성령은 가산 군수(嘉山郡守)가 이미 겸영장(兼營將)이 되었으니 고개 위에 나무를 심고 돌을 모으는 것은 그만 두어서는 안 될 것 같고, 좌현(左峴) 곁으로 두어 줄기 통행로가 있으니 비록 이 고개를 전적으로 의지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요새로 삼아 험준한 곳에 군사를 잠복시키면 도음이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선천 부사(宣川府使)는 반드시 수군(水軍)만 전적으로 관할할 것이 아니라, 바다에 이상이 없는 날에 갑자기 적의 몇몇 기병이 동으로 쳐들어 오면 휘하 병력을 이끌고 좌현을 의지하여 지키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하였다. 평안 감사 권성(權)의 장계
○ 옛날 제도에 강계(江界)의 만포 첨사(滿浦僉使)를 좌계원장(左繼援將)으로 삼아 그로 하여금 영변의 철옹성을 들어가 구원하게 하였고, 창성의 창주 첨사(昌洲僉使)를 우계원장으로 삼아 그로 하여금 곽산의 능한산성(凌漢山城)을 구원하게 하였다. 강 가에 잇단 상하 수백 리 땅에 비록 군사를 성대하게 증가시켜 수비하더라도 오히려 방어하기 어려운데 이제 그것을 덮어 버리고 작은 군사를 이끌고 두어 군데 험한 곳을 뒤에 두고 깊숙이 5, 6일 길이나 되는 곳에 들어와서 두 성을 구원하는 것은 옳은 계책이 아니다.만포는 건주(建州)와 벽동(碧潼)ㆍ창주(昌洲) 사이에 이웃하여 곧 애양(靉陽)ㆍ관전(寬奠)과 상대해 있으며, 삭주는 당 나라 장수 곡승은(曲承恩)이 일찍이 주둔했던 곳이고, 구성은 고려 박서(朴犀)가 일찍이 지키던 곳이니, 이들은 모두 백전(百戰)의 요해처여서 마땅히 중병(重兵)을 주둔시켜야 할 지역이다. 지금은 두 진의 계원(繼援)이란 호칭을 바꾸어 만포를 강변 좌영으로 삼아 강계와 속오군(束伍軍)을 분할하여 그 군사에 첨가시키고, 위원(渭原)ㆍ이산(理山)두 고을 및 고산리(高山里) 이하 여러 진보(鎭堡)에서 이산 지경 이상에 있는 것은 모두 부속시켜 상강(上江)을 방위케 하고, 창성 부사(昌城府使)로 강변 우영으로 삼아 벽동ㆍ삭주 두 고을과 창주 이하 여러 진보에서 벽동 경계 이하에 있는 것은 모두 부속시켜 하강(下江)을 방위케 하고, 다른 진에 위급함이 있으면 각기 그 영장이 또한 휘하 군사를 이끌고 가서 구원케 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다. 《식암집(息庵集)》
○ “해서(海西)의 연안(延安)과 해주(海州)는 연변(沿邊) 지방의 요지이며, 평산(平山)과 봉산(鳳山)은 육로의 요지이니, 봉산을 지키지 못하면 해서를 잃고 평산을 지키지 못하면 송도(松都)를 잃습니다. 장연(長淵)과 풍천(豐川), 강령(康翎)과 옹진(瓮津)에 이르러서는 모두 마땅히 합해서 한 진으로 만들어야 될 것입니다.” 하였다. 양성(梁誠)의 주문(奏文)
○ 황해도에서 형승(形勝)이 중요한 곳은 강음(江陰)이다. 지나간 해에 왜적이 서쪽으로 내려올 때, 흥의역(興義驛)과 강음에 진을 쳐서 형세로 삼았다. 대개 흥의는 바로 탈미곡(脫彌谷)과 오조천(吾助川) 두 길이 모이는 곳에 해당되고, 강음은 또 풍천ㆍ배천(白川)ㆍ연안ㆍ해주의 요충지이니 군사를 주둔시켜 방수(防守)하여 적군의 엄습을 막게 할 것이며, 그런 뒤에야 비로소 병영을 연결시켜 멀리 내려갈 수 있을 것이다. 한 도의 형세가 대개 이와 같다. 《서애집(西厓集)》
○ 해서의 형승은 황주(黃州) 정방산성(正方山城)을 제일 요해처로 삼으며, 동선령(洞仙嶺)ㆍ자비령(慈悲嶺)ㆍ저탄(猪灘)이 그 다음이다. 북로(北路)는 황주의 동리보(東里堡)를, 남로(南路)는 해주의 수양산성(首陽山城)을 모두 제일 요해처로 삼으며, 강음의 자로포(慈老浦)가 그 다음이다. 이태수(李泰壽)
○ 숙종 무오년(1678)에 황해 감사 권수(權脩)가 관방(關防)의 이해에 대해 상소하여 아뢰기를, “신이 두루 도내의 산성을 보니, 해주의 수양(首陽), 문화(文化)의 구월(九月), 재령(載寧)의 장수(長壽), 서흥(瑞興)의 대현(大峴)은 험하고 좁으면서 골짜기가 치우쳐 있으니, 바로 이른바 산중에 피난처이지 결코 적을 막을 요충지는 진실로 아닙니다. 오직 정방 산성은 오른쪽으로 동선(洞仙) 재[嶺]와 연해 있고 왼쪽으로 극성(棘城)의 길을 베고 있어 가장 형승의 편리함을 점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관서로 해서 본도로 통하는 길이 여섯 갈래가 있으니, 동선이 직로(直路)가 되고 남쪽으로 극성이 있으며 북쪽으로는 자비령(慈悲嶺)ㆍ판적원(板籍院)ㆍ색장(塞墻)ㆍ한남(寒南) 등 좁은 목이 있습니다. 동선은 좁고 험준해서 만약 수천 명의 정병(精兵)을 그 안에 둔다면 적의 십만 군사일지라도 그 무리를 쓸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과연 능히 이곳을 지킬 수 있다면 적이 감히 전진하지 못하고, 그 형세가 반드시 극성으로 향할 것입니다.정방산록(正方山麓)이 비스듬히 잇달아 평강(平岡)이 되고 남으로 달려 해창(海倉) 갯가로 접어 들어서 5리(里) 가량은 옛사람이 성을 쌓아 방어하던 곳입니다. 또 황주에서 동북으로 수십 리를 가면 길이 두 갈래로 나누어지니, 이어연(鯉魚淵)을 거쳐 자비령을 넘어 서흥에 이르는 것이 한 갈래이고, 판적원을 거쳐 수안(遂安)으로 가는 것이 또 한 갈래입니다. 자비령은 이제 수목이 막히고 험난해서 인마(人馬)가 다니기 어려우며, 판적원은 길 어귀가 조금 넓고 또 가로막은 영(嶺)이 없으니 반드시 보루를 쌓고 목책(木柵)을 세워 그 좁은 목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적이 수십 리의 산골짜기 무인지경을 가다가 돌연 견고한 성을 만나면 감히 오래 지체하여 우러러보며 공격하지 못할 것은 명백합니다. 색장(塞墻)은 삼등(三登)과 상원(祥原) 경계에 있는데, 양쪽이 깎아지른 듯한 바위로 차 있어 30리를 반드시 바위굴 속으로 가게 되어 있으니, 지키기는 쉬워도 통과하기는 어렵습니다.한남(寒南)은 양덕(陽德) 경계에 있는데, 특히 위태하고 험난하여 약한 군사 수백 명으로써 지킨다면 비록 등애(鄧艾)가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또한 쉽게 군사를 통과시키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 밖에는 오직 설한령(薛罕嶺)을 넘어 함경 지경으로 들어갈 따름인데, 그 중에 극성은 지형이 평평하고 막힘이 없으며 넓어서 지키기 어려우니, 반드시 성을 높이 쌓고 참호(塹壕)를 깊이 하여 험준하게 만든 뒤라야 적이 배후로 나올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관서는 길이 매우 잡다해서 적이 여러 갈래로 올 수 있고, 금천(金川) 청석골[靑石谷]은 비록 천연적으로 험한 땅이라 일컬어지지만 북으로 돌아 동으로 가서 토산(兔山) 경계로 돌아 들어가면 큰 길, 작은 길을 모두 다 지켜낼 수 없습니다. 이제 관문을 지키고 적을 막을 계책을 세우기에는 동선령 일대보다 나은 곳이 없고, 두루 방비하기에 힘들여야 할 곳은 역시 극성 한 길보다 중한 데가 없습니다.” 하였다.
○ 임술년(1682)에 산산(蒜山)ㆍ흑교(黑橋) 두 진(鎭)을 합하여 한 진으로 만들었으며, 극성을 옮겨 설치하여 승진시켜 산산 첨사(蒜山僉使)로 삼았으며, 황주(黃州)ㆍ봉산(鳳山)에 각각 밭 2백 결(結)을 주어 경비로 쓰게 하였다. 《국조보감(國朝寶鑑)》
○ 송도(松都)의 청석동(靑石洞)을 가로로 끊어 성을 쌓아 용도(甬道)의 모양과 같이 하였는데, 길이는 그 지형을 따르고 넓이는 양변의 거리가 겨우 20명이 열을 지을 정도였다. 길을 질러 관(關)을 설치하기를 함곡관(函谷關)과 산해관(山海關)처럼 하면 공역(功役)이 많이 들지 않아도 외진 곳의 산성보다 나았다. 북로(北路)의 마운(摩雲)ㆍ마천(摩天)ㆍ철령(鐵嶺)과, 영동의 대관(大關)ㆍ추지(楸地)와, 영남의 조령(鳥嶺)ㆍ죽령(竹嶺)ㆍ추풍령(秋風嶺)ㆍ괘궁령(掛弓嶺)과, 호남의 팔량령(八良嶺)ㆍ만마동(萬馬洞)ㆍ대소노령(大小蘆嶺)과, 해서(海西)의 청석동ㆍ동선령 등지는 모두 청석동의 예(例)에 따라 용도를 쌓아야 될 것이다. 《관방집록(關防集錄)》
○ 송도는 옛 도읍지로서 하나의 큰 도회(都會)이다. 더구나 대흥(大興)은 양장(羊腸)과 효산관(崤山關)ㆍ함곡관과 같이 험준하며, 청석은 마릉(馬陵)ㆍ정경(井陘)과 같이 길목이 좁으니, 만일 2만 군사로 하나의 큰 진(鎭)을 만들어 서로 왼발과 오른발의 형세가 되게 한다면, 적이 반드시 감히 우족(右足)을 엿보지 못할 것이니 앉아서 적의 사명(死命)을 좌우할 수 있을 것이다. 신완(申琓)
○ 자비령(慈悲嶺)은 서흥부(瑞興府)의 서쪽으로 60리가 되는 곳에 있으니, 일명 파령(岊嶺)이라고 하며, 평양에서 서울로 통하는 옛길이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 “원(元) 나라 때는 이곳을 그어 경계로 삼았다.” 하였으며, 파령책(岊嶺柵)은 공민왕(恭愍王) 때에 홍건적이(紅巾賊)이 침입해 오자 왕이 동지추밀원사 이여경(李餘慶)을 보내 목책을 세우고 방어하게 했다. 세조(世祖) 때에 호랑이의 해가 많고 또 중국 사신이 모두 극성(棘城)을 거쳐 다녔으므로 그 길이 드디어 폐지되었다. 이장용(李藏用)의 시(詩)에 이르기를,

자비령 길 구불구불 열 여덟 구비/慈悲嶺路十八折
한 칼 비껴들면 일만 군사 막겠구나/ 一劒橫當萬戈絶
오늘날 온 누리가 스스로 태평하니/如今四海自昇平
공연히 두견새만 지는 달에 울어대네/空有杜鵑啼落月

하였다. 《여지승람(輿地勝覽)》
○ 이천(伊川) 주음동(周音洞) 방장(防墻)은 고을 북쪽으로 1백 10리 되는 곳에 있는데, 북으로 안변(安邊) 영풍현(永豐縣)과 통하고, 서쪽으로 대천(大川)에 임하여 동쪽으로 대산(大山)을 제압하여 한 사람이 목[關]을 막아 서면 1만 군사를 막을 수 있다. 옛사람이 담을 쌓아 오랑캐를 막았는데, 유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여지승람》
○ 부산(釜山)이 기대어 형세로 삼을 곳은 다만 우수영(右水營)이 있을 뿐이다. 우수영은 마도(馬島)와 함께 향배(向背)의 형세가 다르기 때문에 바람의 순역(順逆)이 역시 때에 따라 다르니, 적이 순풍을 타고 부산으로 향하면, 수영(水營)에서는 반대로 역풍이 된다. 또 더구나 몰운대(沒雲臺)와 해운대(海雲臺) 두 대 아래에는 큰 파도가 거칠게 일어 배가 다니기에 불편하며, 갑자기 위급을 당하면 서로 구원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지금 적의 계책이 엉성하고 산만하여 노략질하려는 데 뜻이 있어 산발적으로 출몰한다면 호남(湖南)이 염려할 만하게 되고, 만일 대군을 거느리고 큰길을 따라 침공한다면 공격하여 함락시키려는 데 뜻이 있는 만큼 영남이 적의 침입을 받는 문호가 될 것이니, 마땅히 수군대장(水軍大將)을 부산에 두고 남은 군사를 나누어 주어 견내(見乃) 어귀를 지키게 하고, 고금도(古今島)에 웅거하게 하면 바야흐로 장책(長策)이 될 것이다. 《백사집(白沙集)》
○ 지금 왜(倭)에 대한 방어책을 논하는 사람들이 한갓 육전(陸戰)만 알고 바다 가운데서 역격(逆擊)할 것은 생각하지 않으니, 만약 샹륙한다면 제어하기 어려울 것이다. 좌수사가 매양 3월에 부산에 입방(入防)하는데 이를 ‘풍화(風和)’ 라 한다. 8월 이후는 ‘풍고(風高)’ 라 하여 방비를 파한다. 통영(統營)에서 부산으로 가는 거리는 사흘 길인데, 적이 만약 바람을 타고 돛을 올린다면 이것이 우리 배에는 역풍이 된다. 칠포(七浦)가 전에는 부산에 관할되었는데 지금은 사포(四浦)가 수영으로 편입되어 부산이 날로 허술하게 되니, 만일 국가에 남쪽에 대한 걱정이 없다면 몰라도 만약 위급이 생긴다면 장차 어떻게 되겠는가. 의논하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통영의 선척(船隻)을 마땅히 모두 부산에서 입방하게 해야 한다.” 고 하지만 이는 옳지 않다. 일본의 살마주(薩摩州)가 바로 우리 전라 지방과 맞닿아 있는데, 옛사람이 진을 설치하는 본의는 대장이 전라ㆍ경상 두 도 사이에 있으면서 하삼도(下三道) 수군을 겸하여 통솔하여 전라ㆍ충청에 변이 있으면 경상도를 독려하여 좌수군(左水軍)으로써 나아가 싸우게 하고, 경상좌도에 변이 있으면 전라도를 독려하여 우수군(右水君)으로써 나아가 싸우게 하려는 데 있었다.이제 모두 부산으로 옮긴다면 적이 다른 길로부터 나올 때에는 누가 막겠는가. 적이 동래(東萊)로 나오려고 하면 반드시 몰운대(沒雲臺)와 초량목[草梁項]을 경유할 것이고, 진주(晉州)ㆍ순천(順天)ㆍ흥양(興陽) 등지로 나오려면 반드시 가덕(加德) 앞 바다를 거쳐서 올 것이다. 가덕ㆍ다대포(多大浦)는 부산에서 하루 길이고 통영에서 이틀 길이니, 이제 계책을 세우기를, 통영 중군(中軍)으로 하여금 가덕에 입방하게 하여 만약 부산에 위급이 생기면 하룻만에 달려갈 수 있고, 만약 진주 이남에 적이 쳐들어 오면 바다 가운데서 공격할 수 있으니, 통사(統使)와 병사(兵使)가 서로 앞뒤, 아래 위로 도와 싸울 수 있는 형세를 만들어, 통사는 바다에서 싸우고 병사는 해안에서 싸워 적이 상륙하지 못하게 한다면 거의 조금은 괜찮을 것이다. 김세렴(金世濂)의 기(記)
○ 부산 이북에는 직로(直路)로 밀양부(密陽府)가 있고, 빙 돌아 동쪽 해변에 울산군(蔚山郡) 및 절도사의 진영(鎭營)이 있으며, 빙 돌아 서쪽으로는 김해부(金海府)가 있다. 이 세 길은 모두 요충지에 해당하니 꼭 지켜야 할 곳이다. 세 곳만 견고하게 지키면 적이 비록 다른 길로 흩어져 나오더라도 견고한 성이 뒤에 있고 강한 군사가 앞에 있어서, 견제되어 감히 내지(內地)를 가벼이 범하지 못할 것이다. 《서애집》
○ 의령현(宜寧縣)은 낙동강(洛東江) 하류에 있으며, 한 갈래는 진주의 단성(丹城)으로 이르는데 이름이 ‘거름강[岐江]’ 이고, 그 위로 15리에 정암나루[鼎津]가 있는데 제일 요충지이다. 경상ㆍ전라ㆍ충청의 접경에 이르러서는 구례(求禮)의 두치진(豆耻津), 함양(咸陽)의 팔량현(八良峴), 안음(安陰)의 육십고개[六十峴], 지례(知禮)의 우두현(牛頭峴), 김산(金山)의 추풍령(秋風嶺), 문경(聞慶)의 조령(鳥嶺), 선산(善山)의 낙동강(洛東江), 풍기(豐其)의 죽령(竹嶺)은 가장 산천이 험한 곳이니 웅거하여 지킬 수 있다. 그러나 만약 방비할 줄을 모른다면 옆으로 난 작은 길들을 또한 염려하지 않을 수 없을 뿐이다. 《서애집》
○ “죽령은 호남과 영남 사이에 있어 백이(百二)의 험함이 있으니 참으로 나라의 문호입니다. 지금 고개 아래의 몇몇 고을이 땅이 좁고 백성들이 피폐하여 그 힘으로는 도저히 요충을 지키지 못하니, 마땅히 순흥부(順興府)를 복구하여 풍기를 예속시키고, 단양(丹陽)ㆍ영춘(永春)ㆍ제천(堤川)ㆍ청풍(淸風) 네 고을을 합하여 대진(大鎭)으로 삼아서 끼고 지키게 하면 영로(嶺路)를 굳게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원주 목사(原州牧使) 유운룡(柳蕓龍)의 상소,《서애집》


 

[주D-001]등애(鄧艾) : 삼국 시대에 진(晉) 나라 장수 등애(鄧艾)가 촉(蜀) 나라를 칠 때 험한 산을 넘으면서 군사들과 함께 몸에 담요를 감고 벼랑으로 굴러 내려가 들어갔다.
[주D-002]백이(百二) : 진(秦) 나라 함곡관(函谷關)은 험하여 군사 두 사람이 지키면 백 사람을 당한다는 말이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17권
 변어전고(邊圉典故)
산성(山城)


경기도 한성부(漢城府) 북한산성(北漢山城)양주(楊州)에 속한다. 은 경성(京城)에서 북쪽으로 30리에 있으며, 동북으로 양주와의 거리가 30리이다. 숙종(肅宗) 신묘년(1711)에 석성(石城)을 쌓았다.
중흥동 석성(重興洞石城)은 중흥사(重興寺) 북쪽에 있으며, 주위가 9천 4백 17척(尺)이고, 성중에는 산이 있는데 노적가리 같다 하여 노적산(露積山)이라고 일컫는다. 《여지승람》
○ 개성부(開城府) 대흥산성(大興山城)은 천마산(天磨山)과 성거산(聖居山) 두 산 사이에 있으며, 성거산은 옛날에는 우봉현(牛峯縣)에 속하였고, 아래에 박연폭포(朴淵瀑布)가 있다. 숙종 2년 병진(1676)에 석성을 쌓았다.
○ 광주(廣州) 남한산성(南漢山城)은 경성에서 동남으로 40리 되는 한수(漢水) 남쪽에 있으며, 북으로 광주 옛 고을과 5리보다 조금 먼 거리이다. 동쪽은 백제(百濟) 옛 도읍이니, 온조왕(溫祚王) 13년(B.C.6)에 위례성(慰禮城)으로부터 여기에 도읍을 옮기고 성곽과 궁궐을 세웠으며, 위례성 민호(民戶)를 옮겨와서 12세 3백 80여 년을 지냈으며, 근초고왕(近肖古王) 26년(191)에 이르러 다시 남평양(南平壤)지금의 서울 으로 옮겼다. 초고왕이 옮긴 뒤부터 백제와 신라를 거쳐 고려에 이르기까지 1천여 년 동안의 성의 흥폐(興廢)는 다시 상고할 길이 없으며, 이조 때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당하여 이 성에 뜻을 많이 두었으나 당국(當國)한 사람이 건의하지 못하고 말았다. 《계곡집(谿谷集)》,《남한성기략(南漢城記略)》
○ 광해(光海) 신유년(1621)에 보장(保障)으로 정하였다.
○ 인조(仁祖) 갑자년(1624) 이괄(李适)의 난 후에 여러 사람이 서울 가까운 곳에 마땅히 보장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영의정 이원익(李元翼)과 연평군(延平君) 이귀(李貴)가 이 성을 보수하기를 건의하니, 처음에 심기원(沈器遠)에게 명하여 그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가 얼마 있다 심기원이 상(喪)을 당하여 갔으므로 총융사(摠戎使) 이서(李曙)가 그 임무를 대신 맡았고, 목사 문희성(文希聖)과 별장 이일원(李一元) 등이 감독하였다. 갑자년(1624) 가을에 시작하여 병인년(1626) 가을에 공사를 끝내 마침내 고을의 감영을 옮기니, 비축한 물자와 백성들이 은연히 하나의 웅진(雄鎭)이 되었다. 《남한성기략》
○ 이서가 도첩(度牒)을 발행하여 승도(僧徒)를 통제하여 구역을 나누어 맡아 공사를 책임지게 하였다.
○ 병자년(1636) 3월에 남한산성에 온조묘(溫祚廟 )를 세웠다.
○ 수원(水原) 독성산성(禿城山城)은 옛 감영의 동쪽 7리 되는 곳에 있는데, 석축(石築)이다.
○ 강화(江華) 정족산성(鼎足山城)은 옛날에는 삼랑성(三郞城)이라 일컬었으며, 단군조(檀君條)에 상세하다. 선원각(璿源閣) 사각(史閣)이 그 안에 있다. 영조 무오년(1738)에 성을 개축하였다.
○ 통진(通津) 문수산성(文殊山城)은 부의 서쪽 20리 되는 곳에 있으며, 숙종 계유년(1693)에 후릉(厚陵)에 거동할 때에 이 산을 바라보고 승전(承傳)을 보내 형세를 그려서 들이게 하고, 강도(江都) 나룻길에 중요한 곳이라 하여 갑술년(1694) 봄에 비로소 석축(石築)을 쌓으라고 하였다.
○ 충청도 청주(淸州)의 상당산성(上黨山城)은 율봉역(栗峯驛) 북산에 있는데, 석축이다. 안에 12개 우물이 있으며, 《여지승람(輿地勝覽)》에는 “지금은 없어졌다.”고 하였다. 지금은 병사(兵使)와 우후(虞侯)가 머물러 있다.
○ 공주(公州) 쌍수산성(雙樹山城)은 공산성(公山城)이라고도 하는데, 주의 북쪽 2리 되는 곳에 있으며, 석축이다. 안에 우물 셋과 연못 하나가 있으며 군창(軍倉)이 있다. 세상에 전해지기를, 백제 때의 옛 성이며, 신라 김헌창(金憲昌)이 웅거하던 곳이라 한다. 《여지승람》
갑자년 이괄의 난 때에 인조가 머물렀던 행궁(行宮)이 있으며, 지금은 충청 중군(中軍)이 거처한다.
경상도 칠곡(漆谷) 가산산성(架山山城)칠곡ㆍ의홍(義興)ㆍ신녕(新寧)ㆍ군위(軍威)ㆍ하양(河陽)에 속하며, 칠곡은 본래 성주(星州) 아래 팔거(八莒)의 속현(屬縣)이다.
○ 인조 기묘년(1639)에 경상 감사 이명웅(李命雄)이 비로소 가산산성을 쌓았으니, 주위가 3천 8백 30보(步), 1천 7백 52첩(堞)이다. 처음에는 근방 몇몇 군(郡) 지역을 떼어 한 읍(邑)을 설치하고 병영을 옮겨 진소(鎭所)로 할 작정이었으나, 조정에서 다만 성주(星州) 1현만 떼어 칠곡부를 설치하였다. 이윽고 시기하는 자들이 백성들을 부역시킨다고 탄핵하였으며, 이로부터 산성의 일은 세상 사람들이 기피하였다. 뒤에 임담(林墰)이 감사가 되어 형승(形勝)을 임금께 갖추어 올려 이명웅에게 추후로 포상하기를 청하니, 이명웅에게 이조 판서를 추증하였다. 《미수기언(眉叟記言)》
○ 선산(善山) 금오산성(金烏山城)선산ㆍ금산(金山)ㆍ개녕(開寧)ㆍ지례(智禮)에 속한다. 은 지금 별장(別將)을 두었다.
○ 금오산은 고려 때 남숭산(南嵩山)이라 일컬어 해주(海州) 북숭산(北嵩山)과 짝하였다. 산성은 석축이며, 주위가 7천 6백 44척이고 높이가 7척인데, 석벽을 이용하여 성으로 한 것이 반이나 된다. 높고 험준하고 기이하고 가파르며 안에는 연못 셋과 시내 하나가 있으며, 고려 말에 백성이 왜(倭)를 피해 들어가 살았다. 군사를 나누어 지키고 있다. 《여지승람》
○ 성주(星州) 독용산성(禿用山城) 성주ㆍ고령(高靈)에 속한다.
○ 주의 서쪽 33리 되는 곳에 있으며, 석축이고, 주위가 1만 3천 64척인데, 그 안에 시내 셋과 샘이 하나 있다. 《여지승람》
○ 문경(聞慶) 조령산성(鳥嶺山城) 문경ㆍ함창(咸昌)에 속한다. 은 지금 별장을 두고 있다.
○ 조령은 현의 서쪽 27리 되는 연풍현(延豐縣) 경계에 있는데, 세상에서 초점(草帖)이라 부른다. 《여지승람》
○ 문경의 북쪽 조령 동쪽에 한 산성이 있는데, ‘어류(御留)’라 부른다. 혹 말하기를, 고려 태조가 잠깐 머무른 곳이라고 하며, 그 안의 넓이는 남한산성에 비교하여 10분의 9가 되고, 형세의 험고(險固)함은 남한산성에 비할 바가 아니다. 동남쪽은 절벽이 만 길이나 되어 새와 짐승도 넘지 못하며, 북쪽은 동남쪽에 비해 조금 낮지만 또 인력(人力)으로는 도저히 통과 할 수 없어 성첩(城堞)을 약간만 설치하면 안심할 만하다.그 서쪽에도 통과할 만한 길은 있지만 남한산성의 가장 험한 곳과 비교해 보아도 몇 곱절이나 된다. 성을 쌓은 곳은 5~6백 파(把)에 불과하고, 성안에는 샘이며 수목이 무진장이다. 자연적인 험함은 실로 동남 지방의 제일이라 4~5만 병갑(兵甲)을 수용할 만하니, 만전(萬全)한 곳은 이를 두고는 없을 것이다. 성 북쪽의 월암(月巖)과 그 동쪽의 작성(鵲城)ㆍ순흥(順興)과 그 서쪽의 조령ㆍ희양성(曦暘城)과 그 남쪽의 고모(姑母)ㆍ토천(兎遷)이 혹은 그지없이 험한 산성이요, 혹은 사닥다리 길이어서 관(關)을 설치하여 약간의 군사를 포치하여 머룰러 둔다면 성원(聲援)이 서로 닿고 호령(號令)을 서로 통할 수 있으니, 호령(湖嶺) 삼도(三道)와 동북 기전(畿甸)을 또한 진정(鎭定)시킬 수 있어서 서북에 일이 생기면 파천하여 머물 곳이 될 것이고 남방에 위급이 있으면 방어할 곳이 될 것이다. 백강집(百江集)
○ 진주(晉州) 촉석산성(矗石山城) 진주에 속한다
○ 주의 남쪽 1리 되는 곳에 있으며 석축이고, 주위가 4천 3백 59척이며, 높이가 15척인데, 안에 우물과 샘이 각각 세 개씩 있다.
○ 대구(大丘)의 공산성(公山城), 인동(仁同)의 천생성(天生城), 의령(宜寧)의 정진(鼎津), 삼가(三嘉)의 산성, 합천(陜川)의 야로산성(冶爐山城), 성주(星州)의 가야산성(伽倻山城)은 모두 천연적으로 험한 곳이니, 마땅히 차례로 수축하여 곡식을 쌓고 군사를 주둔시켜 굳게 지키면서 움직이지 않고 청야(淸野)하여 적을 기다리면, 적이 앞으로는 노략질할 것이 없고 뒤로는 꺼리는 바가 없을 것이니, 나라를 보호하고 도적을 막는 방도에 실로 편리할 것이다. 《서애집(西厓集)》
○ 전라도 장성(長城)의 입암산성(笠巖山城)장성ㆍ태인(泰仁)ㆍ고창(高敞)ㆍ정읍(井邑)ㆍ흥덕(興德)에 속한다. 은 지금 별장과 승장(僧將)이 있다. 입암산(笠巖山) 옛 성은 석축인데, 주위가 1만 2천 28척이며, 사면은 높고 가운데는 평평하며 안에 시내가 하나 있다. 《여지승람》 정읍(井邑)
○ 정읍 입암산성은 산세가 험하고 높으며 꼭대기는 움푹 파였고 사면은 높고 가운데는 평평하다. 성이 그 지형 관계로 모양이 말 구유 같으며 각(閣)이 비계[棚] 위에 있다. 밖에서 쳐다보면 은은하고 엄연해서 그 안을 헤아릴 수 없다. 성중에서는 사방으로 눈을 가리는 것이 없으며 샘과 못이 넉넉하여 1만 마리의 말을 물 먹일 수 있다. 험하고 견고하기가 금성(金城)에는 미치지 못하나 형세는 훨씬 낫다. 동ㆍ남ㆍ북 세 문이 적의 공격을 받을 곳이고, 입암(笠巖) 한면(一面)은 위령(葦嶺)의 큰길을 굽어 보며 제압하니, 지세가 더욱 기기하고 장대하다. 《백사집(白沙集)》의 체찰사(體察使) 때의 장계
○ 담양(潭陽) 금성산성(金城山城) 담양ㆍ순창(淳昌)에 속한다. 은 지금 별장이 있다.
○ 부의 북쪽 15리 되는 곳에 있으며, 석축이고 주위가 1천 8백 4척이며, 안에 시내 하나와 샘 아홉 개가 있다. 《여지승람》
○ 담양의 금성은 어느 때에 쌓은 것인지 알 수 없다. 《역대병요(歷代兵要)》를 상고하면, “고려 말에 아기발도(阿只拔都)가 장차 광주(光州) 금성에서 말에 먹이를 먹이겠다고 소리쳤다.”고 기록되었는데, 주(註)에는 지금 담양부에 있다고 하였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우리 태조가 남원(南原)에서부터 운봉(雲峯)을 넘어 적의 형세가 매우 성함을 듣고 제장(諸將)과 함께 꾀하기를 “만일에 차질이 있으면 물러가 금성을 보전하자.”고 했다고 하니, 이 금성이 그 금성인지 알 수 없다. 동ㆍ서ㆍ남 세 문이 적의 공격을 받을 곳이며, 담양에서부터 올라오는 데는 길이 산등으로 나서 한 줄기가 백 번이나 꼬불꼬불하여 6, 리를 돌아야 비로소 남문에 도달한다.남문 밖 양 곁은 모두 깊은 구렁이며 동문 밖 6, 0보(步)는 돌이 옆으로 서서 성중의 한 면을 노려보고 있으며 화살이 올 수 있는 거리이니 가장 꺼리는 곳이다. 지금 만약 양마성(羊馬城)을 뒤로 물려 쌓는다면 먼저 점거당할 우려에 대비하게 될 것이며, 서문의 양 곁은 산이 모두 높게 솟아 적이 오면 구멍 가운데 든 것 같아서 감히 함부로 곧장 충돌하지 못할 것이다. 샘이 증암(甑巖) 밑에서 솟아 시내를 이루어 흘러내리는데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으며, 또 9개 우물이 있다. 동북과 정남에는 벽이 천 길 높이로 서 있으며, 성 모양이 기이하고 장대하며 넓다. 사변이 높고 가운데가 꺼졌으며 밖에는 큰 봉우리가 없어서 안을 엿보기가 어렵고, 성 밖의 사면은 길이 여러 갈래로 퍼져있으니 참으로 형세가 좋은 곳이다. 《백사집》
○ 정유란(丁酉亂)에 왜군이 호남의 여러 성을 보고 그 허술함을 비웃지 않는 곳이 없었으나, 담양의 금성을 보고서는 말하기를, “조선이 이 성을 굳게 지켰다면 우리 군사가 어떻게 함락시켰는가.” 하였다. 《서애집》의 체찰사 때의 장계
○ 무주(茂朱)의 적상산성(赤裳山城)은 안에 사고(史庫)가 있다. 그래서 무주 부사가 수성장(守城將)을 겸하고 있다.
○ 상산(裳山)은 현의 남쪽 15리 되는 곳에 있는데, 민간에서 치마성[裳城]이라 부른다. 사면이 절벽이며 층층이 높아서 마치 사람의 치마 같기 때문에 이름하였다. 옛사람이 험준함을 이용하여 성을 만들었으며 겨우 두 길이 통할 뿐인데 그 안은 평탄하고 넓어 개울물이 사방에서 흐르니 정말 하늘이 만든 험지이다. 글안(契丹)과 왜구의 난 때는 근처 수십 군민이 모두 이 성에 의지하여 안전하였으며, 고려 때 최영(崔瑩)이 산성을 쌓고 창고를 지어 뜻밖의 변란에 대비하자고 청했었다. 우리 세종조에 체찰사 최윤덕(崔潤德)이 고을을 돌아보다가 이에 이르러, 마침 운무(雲霧)가 자욱하여 두루 돌아보지 못하고서 성을 쌓고 창고 설치하기에 마땅치 않다고 하여 일이 결국 중단되었다. 《여지승람》 장빈호찬(長貧胡撰)
○ 상산 고성(古城)은 석축으로 주위가 2만 6천 9백 20이다.
○ 남원(南原) 교룡산성(蛟龍山城)
○ 부의 서쪽 7리 되는 곳에 있으며, 북쪽에는 밀덕(密德)ㆍ복덕(福德) 두 봉우리가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다. 산성은 석축으로 주위가 5천 7백 17척이고 높이가 10척이며, 안에는 99개의 우물과 조그만 시내 하나가 있고 군창(軍倉)이 있다. 《여지승람》 산이 조종(祖宗)이 없이 들 가운데 우뚝 솟았으며, 두 봉우리가 있는데 북쪽은 밀덕이고 남쪽은 복덕이다. 산을 둘러 성을 쌓았는데 서쪽은 높고 동쪽은 낮으며, 성은 모두 석축이고 8개 우물이 있다. 명 나라 장수 유정(劉綎)이 일찍이 이 성에 올라 지맥(地脈)을 좇아 우물을 파자 간간이 물이 나오니 유정이 말하기를, “성이 크면서 펀펀하니 인력을 반드시 들여야 하겠다.” 하였다. 성 밖 서ㆍ남ㆍ북 삼면에는 안을 들여다 볼 만한 높은 봉우리가 없고, 밀덕과 복덕 두 줄기는 동으로 뻗쳐 내렸는데, 마치 두 마리 이무기가 나란히 누워 있는 것 같다. 그 가운데는 세 동(洞)으로 나누어지는데, 가운데가 적암(赤巖)이고, 북쪽이 우암(牛巖)이며, 남쪽이 빙암(氷巖)이다.두 봉우리는 머리가 되고 두 줄기는 등이 되며 세 동(洞)은 배가 되어 폐부(肺腑)가 겹쳐 가리고 남ㆍ북이 막히어 수미(首尾)가 서로 통하지 않고, 가슴과 등이 서로 관통되지 않아서 혹시라도 급할 때를 당하면 쇠와 북[金鼓]의 호령으로 지휘할 수 없다. 동문이 적의 공격을 받을 곳인데, 문 밖에 큰 길이 있어 소와 말이 모두 통하며, 길 위에서 성안을 내려다 보면 개미 새끼까지 헤아릴 수 있다. 문에서 수백 보 되는 거리에 높은 언덕이 있는데, 화살이 미칠 수 없는 곳이며, 뒤쪽이 평평하여 적이 오면 군사를 감출 만하다. 우리 태조가 일찍이 이곳에 군사를 주둔시켰다가 적과 싸워 쳐부셨다. 《백사집》
○ 전주(全州) 위봉산성(威鳳山城)은 별장이 있다.
○ 동복(同福) 옹성산(甕城山)은 세 바위가 있는데, 모양이 독[甕]과 같으므로 옹성이라 이름하였다. 성의 남ㆍ북에 두 문이 있는데, 다만 이곳이 적의 공격을 받을 곳이다. 구불구불한 돌 길은 겨우 인적(人跡)이 통하며, 길이 벼랑 아래에 나고 성은 벼랑 위에 있어 성 위에 왕래하는 사람을 내려다 볼 수 있으며, 한 사람이 돌을 굴리면 천 사람이 지나가지 못한다.동성(東城) 아래 10여 보 되는 곳에 뾰죽한 봉우리가 마주 서 있고 사이에 좁은 길이 있는데, 두 사람이 나란히 설 수 없으며, 남에서 서쪽으로 뻗치고 북에서 동쪽까지는 모두 온 돌[全石]이 벽을 깎아질러서 만 길이나 되니, 원숭이조차 지나가지 못할 그야말로 천험(天險)이다. 성안에 7개의 우물이 있으나 그다지 풍족하지는 않으며, 서봉(西峯) 아래로 가만히 적벽(赤壁)을 통하여 새끼줄을 드리워 큰 시내에서 물을 길을 수 있는데, 깎아지른 석벽이 공중에 달려 있어 적병은 그것을 볼 수 없다. 옛 터가 많이 퇴폐했었는데, 황진(黃進)이 현감으로 있을 때, 옆으로 동북면의 한 구석을 가로질러 내성(內城)을 쌓았다. 《백사집》
○ 나주(羅州) 금성산성(錦城山城)은 서ㆍ남ㆍ북 세 면은 지세가 험준하고, 동문 밖의 한 면은 평평하여 적의 공격을 받을 곳이다. 성중에 5개의 우물이 있는데, 동문 큰 골의 2개의 우물이 가장 크다. 또 네 봉우리가 있는데, 북쪽은 정녕(定寧), 남쪽은 다복(多福), 서쪽은 오도(悟道), 동쪽은 노적(露積)인데, 정녕이 주봉(主峯)이고, 동ㆍ서ㆍ남 세 봉우리는 앞에서 손을 맞잡고 읍하는 것 같아 손짓에 서로 응하고 언어를 서로 통할 수 있다. 동ㆍ북 두 봉우리의 갈래는 고리처럼 둘러서서 골을 이루어 군사를 감출 만하며, 혹은 샘이 부족하다 말하나 성 쌓을 때에 부역하는 사람 5천 명이 동문의 샘 한 곳에서 물을 마셔도 물이 마르지 않았다고 한다. 산은 북쪽은 높고 남쪽은 낮으므로 성의 형세가 옆으로 기울어졌다.동문 밖 산등성은 수백 보로 이어져 가다가 장원봉(壯元峯)에 이르렀고, 산등성을 좇아 성안을 우러러 볼 수 있으며, 철환(鐵丸)이 미치는 거리다. 서ㆍ남 두 면은 성이 산허리를 둘러서 내외로 구분되어 첩(堞)을 지키는 사람은 몸이 산 밖에 있되, 동ㆍ남의 이면(裏面)과는 지척간이지만 서로 돌아볼 수 없으니, 이것이 병가(兵家)에서 꺼리는 바다. 역대 연표(歷代年表)를 상고하건대, 삼별초(三別抄)가 반란을 일으켜 진도(珍島)에 웅거하다가 전라도로 침범해 오니 군(郡)ㆍ현(縣)이 모두 항복했는데, 상호장(上戶長) 정여(鄭呂)가 성을 지키기를 주창하여 여러 고을 사람을 거느리고 와서 금성을 보전하기로 하고, 가시나무를 심어 책(柵)을 삼고 무기를 들고 사수(死守)하니 적이 7일 밤낮을 공격하였으나,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글안(契丹)이 침노해 오자, 현종이 남쪽으로 파천하여 군사를 이곳에 머무르게 하니, 글안이 패하여 물러났으므로 현종이 이 주(州)를 승격시켜 목(牧)으로 했다고 한다. 《백사집》
○ 강진(康津) 수인산성(修因山城)은 병영(兵營) 동쪽에 있다. 본영에서 남문에 이르자면 좁은 길을 돌고 돌아 문 밖에 닿으며, 지세가 비좁아서 사람이 나란히 서질 못한다. 북문은 더욱 험준하며, 다만 동문이 적의 공격을 받을 곳이고, 문밖에 골이 있는데 수덕(修德)이라 한다. 산세가 높았다 낮았다 하여 성의 안과 밖이 서로 환히 보이며, 화살이 모두 미친다. 동문에서 남쪽으로는 별도로 소동문(小東門)이 있으며, 문밖 백 수십 보 되는 곳에 한 봉우리가 우뚝 막아 섰는데, 물희봉(勿喜峯)이라 부른다. 적이 만약 먼저 점거하면 성중 한 면은 감히 발을 붙이지 못할 것이다.선적봉(仙跡峯)은 성 밖에 또 깎아지른 뫼가 있는데 수십 보를 돌출했으며, 네 구석이 깎아질러 쉽게 오를 수 없다. 노적(露積)이 주봉(主峯)인데, 서ㆍ남ㆍ북 세 면은 매우 험한 곳이지만 사이에 언덕이 있어 적이 의지할 만하고, 물희봉은 더욱 크게 해를 받을 곳이며, 동문 안팎은 장애가 없으니 장점이 단점을 가리지 못한다. 옛날에는 샘을 걱정했으나 동문 밖 수십 보 되는 곳에 여러 골짜기의 샘이 합해 시내를 이루었으며, 지금은 구성(舊城) 밖에 별도로 자성(子城)을 쌓으면서 시내를 에워싸 시내가 성안에 들어갔다. 주위가 7백여 척 가량 된다. 《백사집》
○ 황해도 황주(黃州) 정방산성(正方山城)은 별장이 있다.
○ 정방산은 주의 남쪽 20리 되는 곳에 있다. 《여지승람》
○ 해주(海州) 수양산성(首陽山城)은 별장이 있다.
○ 수양산은 고을의 동쪽 5리 되는 곳에 있으며, 산꼭대기에 대(臺)가 있고, 산성은 석축인데, 주위가 2만 8백 56척이고, 높이가 18척이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옛날 안함(安咸)ㆍ원로(元老)ㆍ동중(蕫仲) 세 사람이 처음 터를 잡아 쌓았으며, 산중에 또 고죽군(孤竹郡)의 옛 터가 있다 한다. 《여지승람》
○ 은율(殷栗) 구월산성(九月山城)은 별장이 있다.
○ 구월산은 현의 동쪽 10리 되는 곳에 있으며, 산허리에 물이 있는데, 고요연(高腰淵)이라 부른다. 모양이 가마솥 같고, 그 깊이는 헤아릴 수 없다. 속세에서 말하기를 용이 있어 가물 때에 비를 빌면 바로 효험이 있다고 한다. 산성은 석축인데, 주위가 1만 4천 3백 86척이고, 높이가 15척이다. 성 모양이 큰 배와 같으며, 남ㆍ북은 길이 없고 동ㆍ서에는 다만 잔도(棧道)가 있을 뿐이다. 성안은 나무가 다발로 묶어놓은 것 같으며, 물이 여러 골짜기에서 나와 시내 하나를 이루고, 성의 서쪽에 이르러서는 양 곁에 우뚝 솟은 산이 문처럼 서 있는데, 물이 문밖으로 흘러 나가 폭포가 되었다. 성중에 좌우 두 창고가 있는데, 문화(文化)ㆍ신천(信川)ㆍ안악(安岳)의 창고는 왼쪽에 속하고, 은율(殷栗)ㆍ풍천(豐川)ㆍ송화(松禾)ㆍ장연(長淵)ㆍ장련(長連)의 창고는 오른쪽에 속한다. 《여지승람》
○ 평산(平山) 태백산성(太白山城)
○ 서흥(瑞興) 대현산성(大峴山城)은 별장이 있다.
○ 대현산은 부의 북쪽 7리 되는 곳에 있으며, 고을의 진산(鎭山)이다. 산성은 석축인데, 주위가 2만 2백 38척이고, 높이가 23척이며, 안에 2개의 샘과 1개의 못이 있다. 서흥ㆍ수안(遂安)ㆍ곡산(谷山)ㆍ신계(新溪)ㆍ우봉(牛蜂)ㆍ토산(兔山)ㆍ황주(黃州)ㆍ봉산(鳳山) 등에 군창(軍倉)이 있다. 《여지승람》
○ 재령(載寧) 장수산성(長壽山城)은 별장이 있다.
○ 장수산은 군(郡)의 북쪽 5리 되는 곳에 있는데, 고을의 진산이며, 산성은 석축인데, 주위가 8천 9백 15척이고, 높이가 9척이다. 암석이 험준하게 막혔고, 안에 7개의 샘이 있으며, 군창이 있다.
○ 평안도 자산(慈山)의 자모산성(慈母山城)자산ㆍ성천(成川)ㆍ영유(永柔)에 속한다. 은 별장이 있다.
○ 자모산은 군의 서쪽 20리 되는 곳에 있으며, 산성은 석축인데, 주위가 1만 2천 7백 33척이고, 높이가 13척이다. 성안 골짜기마다 샘이 솟아 사람들이 말하기를, 99개의 샘이 있다고 한다. 군창이 있다. 《여지승람》
○ 용강(龍岡) 황룡산성(黃龍山城)은 별장이 있다.
○ 선천(宣川) 검산산성(劍山山城)
○ 검산은 군 서쪽 20리 되는 곳에 있고, 봉우리가 험준하여 칼날 같다. 《여지승람》
○ 선천 동림산성(東林山城)은 군의 북쪽 62리 되는 곳에 있으며, 바로 옛날의 선주성(宣州城)이다. 서ㆍ북은 토축(土築)이고, 동ㆍ남은 석축이며, 주위가 1만 7천 5백 62척이고, 안에 샘 5개가 있다. 《여지승람》
○ 창성(昌城) 당아산성(當峨山城) 《여지승람》에는 당아리산(堂阿里山)이라 하였다.
○ 의주(義州) 백마산성(白馬山城)은 주의 남쪽 30리 되는 곳에 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백룡마(白龍馬)가 나와 놀아서 이름하였다고 한다.
○ 영변(寧邊) 철옹산성(鐵甕山城)
○ 약산(藥山)은 부의 서쪽 8리 되는 곳에 있으며 진산이다. 고기(古記)에, “약산의 험준함은 동방에서 제일이다.” 하였으며, 봉우리들이 층층 겹겹으로 서로 둘러 서서 모양이 마치 철옹(鐵甕) 같다. 《여지승람》
○ 세종조에 평안도 도체찰사 황희(黃喜)가 약산 성터를 정하여 영변부(寧邊府)를 설치해서 도절제사 영(都節制使營)으로 삼았다. 이때에 북쪽 오랑캐가 누차 변방을 침입하므로 중요한 곳에 성을 쌓아서 막으라고 명하였다. 판관 이정(李禎 퇴계 이황의 증조)이 감독하였다. 《서애집》
○ 용천(龍川) 용골산성(龍骨山城)
○ 용골산은 일명 용호산(龍虎山)이라고 하며, 군의 동쪽 8리 되는 곳에 있는데, 진산이다.
○ 철산(鐵山) 운암산성(雲暗山城)
○ 웅골산(熊骨山)은 군의 동쪽 10리 되는 곳에 있는데 진산이며, 운엄사(雲嚴寺)가 있다. 《여지승람》
○ 곽산(郭山) 능한산성(凌漢山城)
○ 능한산은 웅화산(熊花山)이라고도 하며, 군의 동북쪽 7리 되는 곳에 있는데, 진산이다. 산성은 석축인데, 주위가 6천 9백 13척이고 높이가 13척이며, 성안에 23개의 우물과 1개의 못이 있고, 군창이 있다.
○ 평양(平壤) 보산산성(保山山城)
○ 압록강(鴨綠江) 이남 청천강(淸川江) 이북의 각 읍에는 모두 산성이 있으니, 의주(義州)의 백마(白馬), 용천의 용골, 철산의 운암, 선천의 검산, 곽산ㆍ정주의 능한, 가산(嘉山)의 효성(曉星)이 모두 험준한 곳을 택하여 요해지(要害地)에 웅거한 것이니, 고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식암집(息菴集)》
○ 구성(龜城)이 가장 요해지인데, 예전엔 산성이 있어 형세가 매우 좋았다. 지금은 편의에 따라 수축해서 적의 침입을 막아야 할 것이다. 곽산의 능한산성과 창성(昌城)의 청산산성(靑山山城)은 예전에는 창고가 있었으니, 지금 또한 마땅히 수축해야 한다.
○ 여러 곳의 산성이 자못 읍내와 서로 멀어 위급에 임해서야 비로소 고을에 사는 백성들을 거두어 산성에 들어가게 하니, 적이 멀리 있으면 어리석은 백성들은 험하고 먼 것을 꺼려 성에 들어가 보호받기를 싫어하고, 적이 가까이 있으면 산과 들로 숨어 명령을 좇으려 하지 않는데, 하물며 이웃 고을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바랄 수 있겠는가. 전라도 한 도로 말하면 담양부(潭湯府)를 마땅히 금성(金城)에 설치하여 근처 몇 고을을 떼어서 더해주고, 정읍과 장성을 입암(笠巖)에 옮겨서 또한 이와 같이 해야 할 것이다. 영남의 모든 산성도 모두 그 고을의 감영이 되게 하여 주둔 군사가 서로 바라볼 수 있고 서로 의지할 수 있는 형세를 이루게 하면 나라가 저절로 견고해 질 것이다. 강항(姜沆)의 《간양록(看羊錄)》
○ 성은 본래 고을을 보호하는 것이니, 사람의 집에 울타리가 있어 보호하는 것과 같다. 우리나라는 고을은 빈약하고 산이 많으므로 산성과 고을의 구별이 생겼으니, 본말을 알지 못함이 심하다. 대개 성을 다른 곳에 쌓고서 위급에 임해서야 비로소 고을 백성들을 거두어 들이니, 백성들이 들어가려 하지 않아 마침내 빈 성이 되어 모든 일이 어긋나며, 들어간 사람도 마음을 붙히지 못하고 서로 이끌고 도망치니, 장차 누구와 함께 성을 지키겠는가. 평시의 살던 집과 부고(府庫)와 백성을 이용하여 더불어 함께 지켜 사람마다 부모ㆍ가족에 대한 애착이 있는 것과 비교하면 이해가 서로 전혀 다르다. 가령 산성을 고수하고 읍에 있는 창고와 백성과 가축을 모두 버려 적에게 준다면 산꼭대기만 지킨들 끝내 어디로 돌아가겠는가. 반드시 망할 것이다. 《반계수록》
○ 우리나라 사람은 의레 산성을 말하지만, 지난 번 금주성(金州城)은 평지인데도 포위된 지 3년 동안 싸워 끝내 함락되지 않았다. 만약 외로운 산성에 갑자기 투입했다면 몇 달이 되지 않아서 식량이 끊어지고 사람들이 흩어져서 보전하지 못했을 것이니, 어찌 해를 넘기며 지탱하기를 바라겠는가. 그 이해를 여기서도 볼 수 있다. 《반계수록》


[주D-001]청야(淸野) : 청야는 적병이 침입할 때에 백성들을 전부 성안으로 몰아 들이고, 들에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아 적병으로 하여금 거처할 곳과 먹을 것이 없어 곤란을 당하게 하는 전술이다.

피서록(避暑錄)
 피서록(避暑錄)
피서록(避暑錄)


기려천(奇麗川)은 만주 사람이다. 그는 성격이 몹시 교만하여 윤형산(尹亨山)을 멸시하는 빛이 얼굴에 나타났으나, 형산은 일부러 알지 못하는 체하고 얼굴에나 말씨에도 겸손할 뿐이다. 대체로 윤(尹)은 기(奇)에 비하여 나이가 20여 세나 많고 벼슬도 역시 조금 높은 편이다. 그러나 그는 한인이라 해서 마치 나그네처럼 된 처지였으니, 그 정세가 그렇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여천이 거처하고 있는 방이 나의 사관과 문이 마주 보이는 터라, 내가 형산을 찾아서 이야기를 하려면 반드시 여천의 문 앞을 지나치게 되므로 나는 반드시 여천에게 먼저 들른다. 그러면 형산은 나의 뜻을 모르고서 반드시 나의 뒤를 따라서, 그곳에 잠깐 지체했다가 곧 일어서면서 다른 곳에 약속이 있다고 핑계한다. 여천은,
“윤공(尹公)이 다른 곳으로 간다는 말이야.”
하고, 그의 뒤통수에 대고 손가락질을 하면서 깔깔대고 웃는다. 그리고 형산도 언젠가 돌아앉아서,
“저 비둘기처럼 생긴 눈이 여태껏 탈을 벗지 못해.”
하면서 악평한다. 만족과 한족 사이의 심한 알력을 이로써 짐작할 수 있겠다. 또 어느날 여천이 나에게,
“전에 어떤 산동에 포정사(布政司)로 부임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탐관으로 이름이 높았답니다. 그가 일찍이,
백성을 아들처럼 사랑하자 / 視民若子
법률은 산같이 엄중하리 / 立法如山
라는 주련(柱聯) 두 구를 지어서 아문(衙門)에 붙였더니, 그날 밤에 어떤 이가 그 끝에다 잇달아서,
하면서 말을 나직이 한다. 이는 아마 형산을 가리키는 듯싶기에 나는 그 뒤에 우연히 형산더러,
“당신은 일찍이 산동 포사로 부임하신 일이 있소.”
하고 물은즉, 형산은,
“그런 일이 있었지요.”
하였다.
그 뒤에 연경(燕京)으로 돌아왔을 때 그곳 인사들과 이야기하다가 기(奇)를 아느냐고 물었으나 모두들 머리를 흔들 뿐이다. 풍병건(馮秉健)이 홀로 분개하는 어조로,
“점잖은 선비가 어찌 되놈의 새끼를 안단 말이요.”
한다. 나는 또,
“윤형산은 어떤 인물인가요.”
하고 물은즉, 모두들 기쁜 빛으로,
“그는 참으로 백락천(白樂天)과 같은 유의 인물이지요.”
하였다.
광피사표패루(光被四表牌樓) 남쪽 골목 둘째 문은 동씨(董氏)의 집이다. ‘쌍청문(雙淸門)’이란 현판이 붙었는데 강희의 어필이다. 또 지금 황제가 쓴 ‘양세삼효(兩世三孝)’라는 액자가 붙어 있다. 이곳은 구외(口外)의 민가(民家)임에도 불구하고 천자의 거둥이 세 번이나 있었다 한다.
강희가 절강(浙江)에 순행할 때에 산음(山陰)에 살고 있는 노인 왕석원(王錫元) 등 5형제를 불러 보았다. 그들은 누런 머리에 어린 아이의 이빨이며 서로 붙들고 다닌다. 황제가 행궁(行宮)에서 잔치를 열었는데 그들 다섯 중 맏이와 둘째는 쌍둥이로 나이가 80이요, 그 다음은 78, 다음은 76, 다음은 75인데, 통계하면 3백 89세이다. 그들의 자손은 모두 45명인데, 각기 비단을 나누어 주고 또 어필로 ‘일문인서(一門仁瑞)’라는 액자를 써서 주고 황태자는,
다섯 가지 비단 나무 이 세간의 영화이고 / 五枝錦樹榮今代
백세토록 높은 나이 한 집안에 모였구나 / 百秩仙籌萃一門
라는 주련을 써서 주었다. 이로 미루어서 요즘 그들의 정려(旌閭)나 표창하는 은전이 전대보다 지나침을 짐작할 수 있겠다.
북진묘(北鎭廟) 뜰에 서 있는 늙은 솔을 지금 황제가 친히 그림 그려서 검은 돌에 새겨 바위 뱃구레를 파고 간직했는데, 그 바위의 높이는 겨우 한 길 남짓하다. 이를 명(明) 때에는 취운병(翠雲屛)이라 불렀더니 지금 황제가 보천석(補天石)이라 고치고 그림 곁에 시를 지어서 새겼다.
북진묘 서이러냐 일산처럼 퍼진 솔이 / 鎭廟門西似蓋松
절반은 시들었고 푸른 잎도 상기로다 / 半存枯幹半籠葱
정신이 어렸으니 포박자(갈홍(葛洪)의 호)를 보는 듯이 / 凝神如見抱朴子
얼굴을 그리자니 진소옹(미상)이 내 아니다 / 圖貌慙非陳少翁
밑에 서서 볼 양이면 비나 개나 의심이요 / 立下忽疑晴與雨
앞에 뵈는 그 무엇이 색이 공임 깨닫고녀 / 現前可悟色兮空
유월이라 더운 날에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 何當六月其根坐
낭랑히 글을 외며 맑은 소 들어보렴 / 讀疏仡聽謖謖風
그리고는 건륭의 낙관이 찍혀 있다. 또,
“갑술년(1754년)에 내가 동쪽으로 순행하는 길에 친히 북진묘에 치제하고, 예가 끝나자 묘 속에 들어가서 두루 구경하였다. 늙은 솔 한 그루가 있는데 그 반은 벌써 철석같이 굳은 가장귀였고, 다만 동편 한 가지가 울창할 뿐이다. 오히려 기이하고 에굽은 품이 사랑스러웠다. 이내 나무 밑에 서서 이 그림을 그렸다. 구월 이십사일 어필.”
이라는 글이 있고 ‘천지위사(天地爲師)’라는 도장이 찍혔다. 황제의 글씨나 그림이 모두 공교롭다.
바위 곁에 또 삼한(三韓) 사람 김내(金鼐)의 시가 있었다.
의무려산 이마 턱에 때때로 오르거다 / 時登醫巫閭山頭
구름이랑 바다랑 한 눈에 다 보리라 / 雲舍滄桑望裏收
돌 옷과 바위 털은 티끌 자취 혐의롭고 / 石髮巖衣嫌跡擾
우는 새 읊는 매미 사람 소리 섞이누나 / 鳥鳴蟬噪帶人幽
공중에 솟은 나무 늙은 용은 어디 가고 / 凌空樹古龍飛去
그 곁에 피는 꽃이 봉황 성터 남아 있네 / 傍地花新鳳壘留
북두성 높디높아 하늘 괴는 기둥이라 / 北斗惟神天一柱
갸륵하신 우리 님은 억만 년을 누리소서 / 億年萬紀庇皇秋
그 끝에는 ‘화공(和公)’이란 낙관을 찍었으며 필력(筆力)이 몹시 옹졸하다. 혹은,
“이 시는 조선 사람 김내가 지은 것이다.”
하였으나, 이는 요동(遼東)을 또한 삼한이라 일컫는 줄을 모르고 한 말이다. 고정림(顧亭林)은 일찍이 관함이나 지명에 옛 이름을 빌려서 쓰는 것을 배격했으나, 아직도 그를 본받아 남용하는 이도 없지 않을뿐더러, 이 시가 비록 잘된 것은 아닐지라도 역시 우리나라 사람의 구기(口氣)는 아니다.
난설헌(蘭雪軒 이조(李朝)의 여류 문학가 허초희(許楚姬)) 허씨(許氏)의 시는 《열조시집(列朝詩集 전겸익(錢謙益) 저)》과 《명시종(明詩綜 주이준(朱彛尊) 저)》에 실려 있는데, 혹은 이름으로, 또는 호를 쓰되 모두 경번(景樊)으로 적혀 있다. 내 일찍이 〈청비록서(淸脾錄序 《청비록》은 이덕무(李德懋) 저)〉를 쓸 때에 상세히 고증한 일이 있었다. 무관(懋官 이덕무의 자)이 연경에 있을 때에 그것을 축 한림(祝翰林) 덕린(德麟)과 당 낭중(唐郞中) 낙우(樂宇)와 반 사인(潘舍人) 정균(庭筠)의 세 사람과 함께 돌려 가면서 읽고 모두 칭찬했다 한다. 이제 내가 이곳에 와서 시 중의 빠지고 그릇된 곳을 논하다가 이내 허씨에 대한 이야기를 했더니, 윤공(尹公)이 말하기를,
우회암(尤悔菴) 동(侗)이 지은 〈외국죽지사(外國竹枝詞)〉를 보면 그 첫머리에 귀국의 것을 지어 실었는데,
양화도 드는 어귀 살구꽃이 붉으레라 / 楊花渡口杏花紅
팔도 민요들이 그 나라의 국풍이라 / 八道歌謠東國風
못내 님을 그리노니 저 비경 여도사를 / 最憶飛瓊女道士
들보 올려 글 지려고 달나라에 노닌다오 / 上梁曾到廣寒宮”
라고 하였고, 그는 또 주석을 내기를,
“규수 허경번이 나중에는 여도사가 되었으며, 그는 일찍이 광한궁 백옥루(廣寒宮白玉樓)의 상량문(上梁文)을 지었다고 하였습니다.”
한다. 나는 이에 허경번에 대한 그릇된 것을 상세히 변명하였더니, 윤과 기 두 사람이 각기 나누어 기록하여 간직한다. 중국의 명사들이 마땅히 이 일로써 또 한 번 저서의 자료를 삼을 것이다.
대체로 규중 부인으로 시를 읊는 것은 애초부터 아름다운 일은 아니나, 이 외국의 한 여자로서 꽃다운 이름이 중국에까지 전파되었으니, 가히 영예스럽다고 이르지 않을 수 없겠다. 그러나 우리나라 부인으로서는 일찍이 그의 이름이나 자가 본국에도 나타나지 못했은즉, 이 난설의 호 하나라도 오히려 분에 넘치는 일이어늘, 하물며 경번의 이름으로 잘못 알고는 군데군데에 기록되어서 천추에 씻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가 어찌 뒷세상의 재사(才思)가 풍부한 규중 재녀들의 의당히 경계하여야 할 거울이 아니겠느냐.
여러 가지 요술 중에는 술을 만들어 낸다는 주석(酒石)이 가장 요긴한 물건이다. 만일 참으로 이러한 돌이 있다면 의당히 천하에 다시 없는 보배가 될 것이다. 세상에서 전하는 말에,
“명(明)의 천계(天啓) 연간에 왜(倭)가 유구(琉球)를 쳐서 그 임금을 사로잡았는데, 유구의 태자가 그 나라의 세보(世寶)를 싣고 가서 그 아버지를 속(贖)하려 하다가, 배가 풍파에 휩쓸려서 제주(濟州)에 닿았다. 목사(牧使) 아무가 배에 무슨 물건이 실렸느냐고 물으니, 태자가 주천석(酒泉石)과 만산장(漫山帳)이 있다고 답하였다. 주천석은 모양이 마뇌(瑪瑙)처럼 생겼는데 가운데가 오목하게 파이고 물 한 잔이 들 정도이다. 맑은 물을 채우면 곧 아름다운 술이 되고, 만산장은 바닷거미의 실에다 약으로 물빛을 들여서 뜬 것인데, 적게 펼치면 집 하나를 덮을 정도이나 넓게 펼치면 산 하나를 덮을 수 있으며, 작은 놈으로는 모기나 파리, 큰 놈으로는 뱀이나 이무기 따위가 모두 그 속에 들어가지 못한다. 목사가 그것을 얻고자 청하였으나 태자는 허락하지 않으므로, 드디어 군사를 내어서 배를 에워싸니 태자가 돌과 창을 모두 바다 속에 던졌다. 목사가 배에 실은 물건을 다 몰수하고는 태자를 죽였다. 태자가 죽기에 임하여,
착한 말은 분간 없고 몹쓸 옷을 입은 이 몸 / 堯語難分桀服身
꿈이러냐 이 죽음을 푸른 하늘 아오리까 /臨刑何暇訴蒼旻
삼량이 묘혈 판들 누구라서 속해 낼꼬 / 三良臨穴誰能贖
두 아들 배를 탈 제 도적 어이 잔폭하오 / 二子乘舟賊不仁
백골은 모래벌판 거친 풀에 얽혔어라 / 骨暴沙場纏有草
혼이야 고국 간들 슬퍼할 이 누구던고 / 魂歸古國吊旡親
죽서루 밑 저 물 소리 처량도 한져이고 / 竹西樓下滔滔水
만고의 끼친 한을 분명히 울어 예네 / 遺恨分明咽萬春
라는 시 한 편을 읊었다.”
한다. 이 사실은 이중환(李重煥 이조 때 학자. 자는 휘조(輝祖))의 《택리지(擇里志)》에 실렸으며, 목사는 대간의 탄핵을 만나서 사형에 한 등급을 감하여 멀리 귀양보냈다 하였다. 나는 일찍부터 이 기록이 하나의 전설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하였으니, 이 일이 과연 참말이라면 목사의 죄악은 비록 거리에다 시신을 진열한다 해도 남음이 있을 것인데, 이제 그의 자손이 어찌 길이 부귀를 누릴 수 있을 것인가.
유구 중산왕(中山王) 상녕(尙寧)이 해마다 중국에 파견되는 사신편에 자주 글월과 예폐를 부쳐 오더니, 갑신년 뒤로는 다시 연락이 끊어지고 말았다. 내 이번 걸음에 해외의 모든 나라 사신을 만나보지 못함이 더욱 유감이다. 아까 구경하던 요술 중의 주석으로 미루어 보면, 유구의 주석도 역시 요술의 하나인 듯싶다. 그리고 민중(閩中 복건성) 사람 왕삼빈(王三賓)이 말한 바와 같이, 바닷거미가 범을 얽는다는 것이 진실이라면 이 만산장(漫山帳)은 이치에 그럴 법도 하다.
열하의 술집들은 몹시 번화하여 연경에 비해서 손색이 없었다. 바람벽 위에는 명인들의 글씨와 그림이 많이 붙어 있다. 유하정(流霞亭)에는,
높은 이름 좋은 벼슬 이제야 아랑곳가 / 功名富貴兩忘羊
나의 삶이 얼마런고 이 술 한 잔 기울이세 / 且盡生前酒一觴
고운 꽃 삼백 포기 심어 두고 보려무나 / 多種好花三百本
낮은 울타리 비바람에 향내 줄곧 풍기리라 / 短籬風雨四時香
라는 시가 붙어 있다. 또 취구루(翠裘樓)에 들렀더니 역시 벽 사이에 써 붙인 시가 있는데 먹 흔적이 아직도 젖은 듯싶다. 우민중(于敏中)이나 아극돈(阿克敦)의 필치인 듯싶기에 술아범더러,
“이 글씨 쓴 분이 누구냐.”
고 물으니, 그는,
“아까 어떤 손님이 이걸 써서 걸어 두곤 막 나갔답니다. 그러니 그의 성명이야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한다. 그 시에 이르기를,
님을 섬겨 하올 맘은 한당만 못잖건만 / 致主初心陋漢唐
이 몸이 늙어 가서 밭집 아비 되었구나 / 暮年身計落農桑
내 낀 숲 속 소 발자국 동문 밖 나는 길에 / 草煙牛跡東郊路
술다락에 높이 누워 저녁 볕을 보내누나 / 又臥旗亭送夕陽
(육유(陸游) 작)
라고 하였다. 이 두 시는 모두 어떤 시대에 어떤 사람이 지은 것인지는 알 수 없겠으나, 바람을 쏘이면서 한 번 읊으면 사람으로 하여금 감개가 무량하게 할 뿐이다. 둘 다 부채에 써 두었다가 돌아와서 윤형산에게 물은즉, 그들의 이름을 가르쳐 주었으나 또 잊어버리고 말았다.
윤형산이 나더러,
“고려의 박인량(朴寅亮 고려 문종(文宗) 때 문학가. 자는 대천(代天))이 당신에게 어떻게 되시나요.”
하고 묻기에 나는,
“귀국을 말한다면 모수(毛遂)와 모담(毛聃 미상)과 같은 터수일 것입니다. 저는 애초에 토성(土姓)으로 여덟 집이 나눠졌으므로 관향이 각기 달라서 서로 한 겨레가 되지 못하며, 역시 감히 분양(汾陽)을 통곡(痛哭)할 수도 없는 터수입니다.”
한즉, 형산은 또,
“그러면 강희 연간에 박뇌(朴雷)라는 이가 있었는데, 그의 자는 명하(鳴夏)요, 역시 조선 사람이라 합디다. 이제 대청(大淸)이 천하를 통일하여 중외가 한 집이 되고 보니 결코 푸른 입술의 혐의란 없을 것입니다.”
한다. 나는,
“푸른 입술의 혐의란 무슨 말입니까.”
한즉, 형산은,
“송(宋)의 원풍(元豊 송 나라 신종(神宗) 때의 연호) 연간에 고려 사신 박인량이 명주(明州)에 이르렀을 때에, 상산위(象山尉) 장중(張中)이 시로써 전송하였더니, 박인량의 답시(答詩) 서문에,
‘꽃 같은 얼굴이 곱게 불을 부니 이웃 여인의 푸른 입술이 움직임을 부끄럽게 하고, 상간(桑間)의 야비한 소리로써 영인(郢人)의 백설(白雪) 곡조를 잇노라.’
는 글이 있었습니다. 언관(言官)이 낮은 벼슬에 있는 장중이 사사로 외국의 사신을 교제함은 부당한 일이라 하여 탄핵했습니다. 신종(神宗)이 좌우에게 ‘푸른 입술’이란 어떠한 고사인가 하고 물었으나, 대답하는 자 없어 조원로(趙元老)에게 물었더니, 원로가 아뢰기를, 《태평광기(太平廣記)》에, 어떤 이가 본즉 이웃집 사내가 그 아내의 불 부는 것을 보고,
불 부는 예쁜 맵시 붉은 입술 오물오물 / 吹火朱唇動
섶나무 때고 나니 하얀 팔뚝 드러났네 / 添薪玉腕斜
멀리서 보아하니 연기 가린 저 얼굴이 / 遙看煙裏面
피는 것이 꽃이런가 안개 더욱 은은해라 / 恰似霧中花
는 시를 읊었답니다. 그 아내가 그의 남편에게 하는 말이, 당신도 어찌 그를 본받지 않느냐고 하였을 때에, 남편은 대답하기를, 당신이 먼저 불을 불면 내 응당 본떠서 시를 지으리라 하고, 이내 읊되,
불 부는 님의 양은 푸른 입술 벌렁벌렁 / 吹火靑唇動
장작을 때고 나니 검정 팔뚝 비꼈구나 / 添薪墨腕斜
멀리서 보아하니 연기 가린 그 상판은 / 遙看煙裏面
무엇에 비할쏜고 구반다(추악한 귀신의 이름)가 이 아니냐 / 恰似鳩槃茶
라고 하였었는데, 이 이야기는 본래는 왕벽지(王闢之)의 《민수연담록(澠水燕談錄)》에서 나왔다 하였습니다.”
한다.
내가 학지정(郝志亭)더러,
“장군은 비록 무관 출신이지만 장고(掌故)에 몹시 익숙하고 문필이 유려하여, 비록 이름 있는 학자나 늙은 선비라도 장군의 짝이 될 자 드물까 하오니, 귀국의 무관은 반드시 문관과 학문이 넉넉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장군은 특히 유가의 연원이 깊어서 정원(定遠)의 문장이 금석에 새겼음을 본받은 것이옵니까.”
하고 물었더니, 지정은,
“저의 집은 대대로 농업에 종사하더니 이제 다행히 성스런 시대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수(隨 한(漢) 때의 장수 수하(隨何))ㆍ육(陸 미상)ㆍ강(絳 한(漢) 때의 장수 주발(周勃). 강은 그의 봉호)ㆍ관(灌 한(漢) 때의 장수 관영(灌嬰))의 한스런 일은 그 유래가 벌써 오래지 않습니까. 저 같은 자는 수레에 싣거나 말로 셀 수 있을 만큼 많으니 무엇을 칭찬할 것이 있겠습니까. 지금 태학사(太學士) 아계(阿桂)와 얼마 전에 태학사를 지낸 서혁덕(舒赫德)과 같은 분은 모두들 문장이 태평 성대를 이룩할 만하며, 무략이 어지러운 난리를 평정할 수 있고, 부귀와 수복(壽福)은 분양(汾陽)ㆍ서평(西平 미상)이요, 공로와 훈벌은 배진(裵晉 배도(裵度). 진은 봉호)ㆍ문로(文潞)와 같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문관도 할 수 없고 무관 역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제 사이(四彝)가 모두 복종하고 풍진이 고요하니, 저 같은 자는 가위 한 개의 썩은 무부(武夫)였습니다.
서른 해 쉬지 않고 옛 병서를 읽고 나서 / 三十年來學六韜
꽃다운 그 이름이 당시에 문장이라 / 英名嘗得預時髦
나라에 몸을 던져 금 갑옷 입었을 제 / 曾因國難披金甲
아무리 가난해도 보배칼을 팔진 않네 / 不爲家貧賣寶刀
뛰노는 이 팔뚝에 화살 힘이 약다 하랴 / 臂健尙嫌弓力輭
오히려 밝은 눈에 싸움 터를 바라보네 / 眼明猶識陣雲高
어젯밤 뜰 앞에서 가을 바람 일어나니 / 堂前昨夜秋風起
꽃 놓인 옛 전포를 보기도 부끄러라 / 羞見團花舊戰袍
이 조한(曹翰)의 시를 외고 나면 그들이 안장에 걸터앉아서 사면을 돌보던 모습이 못내 그리워질 뿐입니다. 옛날부터 글 읽은 장수로서 손무(孫武)ㆍ오기(吳起)ㆍ염파(廉頗)ㆍ악의(樂毅)ㆍ왕전(王翦)ㆍ조충국(趙充國)ㆍ반초(班超)ㆍ심경지(沈慶之)ㆍ한세충(韓世充) 등은 모두 70세가 넘도록 장수하였습니다.”
한다. 나는 웃으면서,
“심경지는 글 모르는 까막눈인데, 어찌 글 읽은 장수라 하시요.”
하였더니, 지정은,
“심공(沈公)이 일찍이 농사일은 사내종에게 묻는 것이 의당하고, 길쌈 일은 여종에게 묻는 것이 의당하다고 하였으므로 그의 학문은 그 당시에 벌써 인정된 것이었고, 척남궁(戚南宮)은 더욱 시 공부가 깊어서,
호각 소리 처량할사 초목 그저 쓸쓸하군 / 畫角聲傳草木哀
구름 머리 높이 솟고 돌문이 열리누나 / 雲頭起對石門開
삭풍 불어 술이 찰 제 취하지도 않거니와 / 朔風邊酒不成醉
지는 잎 기러기는 요란스레 우는구나 / 落葉歸鴻無數來
다만 당 과 쉬어 살기 아예 사라지면 / 但使元戈銷殺氣
이 몸이 헛 늙은들 그 무엇이 한이리요 / 未妨白髮老邊才
높은 봉에 이름 새김 이 내 뉘와 함께 할꼬 / 勒名峯上吾誰與
칼춤 추던 저 대 위에 그리워라 이 장군이 / 故李將軍舞劍臺
이라는 시를 읊었답니다. 그리고 보면 그의 장수 재주는 미칠 수 있겠으나 시 재주는 미칠 수 없겠습니다그려.”
하고 웃었다.
저녁 무렵에 풍윤성(豐潤城)에 올랐더니 수염이 아름다운 사람 하나를 만났다. 그는 내 앞에 와서 손을 들어 읍하면서,
“저의 성명은 임고(林皐)요, 절강에 살고 있습니다.”
하고, 나의 성명을 물어서 알자 놀라는 듯 반기면서,
“당신은 필시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의 호)의 일가시죠.”
한다. 나도 역시 놀라서,
“당신은 초정을 어떻게 잘 아시나요.”
한즉, 임고는,
“지난해에 초정이 같은 나라 사람 이형암(李炯菴 이덕무. 형암은 그의 호)과 함께 문창루(文昌樓)에 올랐다가 이내 그 고을 호형항(胡逈恒)에게 묵은 일이 있었습니다.”
하고, 성 밑에 있는 한 집을 가리키면서,
“저곳이 곧 호씨(胡氏)의 집이며, 그 바람벽 위에는 초정의 글씨가 붙어 있습니다.”
한다. 이에 변계함(卞季涵)과 정 진사(鄭進士) 각(珏)으로 더불어 함께 그 집을 찾으니 날이 벌써 어둑어둑하였다. 주인이 등불 넷을 켜서 벽을 밝혀 주기에 그 시를 한 번 낭독하니 이것은 곧 우리 집이 전동(典洞 이조 때 서울에 있던 동리)에 있을 때에 형암이 마침 왔다가 지은 것이다.
쓸쓸한 가을 소식 저 나무가 먼저 아네 / 泬㵳秋令樹先知
춥고 더움 다 잊으나 바보되고 말았구나 / 任忘暄涼做白癡
고요한 벽과 벽엔 벌레 소리 유난하곤 / 壁靜萬蟲勤自護
발 틈으로 새 한 마리 엿보기 일쑤러라 / 簾虛一鳥慣相窺
돈 벽일랑 버리거나 이 몸을 더럽힐 듯 / 抛他錢癖如將浼
나를 일러 서음(書淫)이라 하니 나는 이를 사양 않소 / 呼我書淫故不辭
중국 것만 좋다 하여 부질없이 그리 마오 / 好事中州空艶羨
요봉(청(淸) 문학가 왕완(王琬)의 호)은 문필이요 완정(왕세진(王世稹)의 호)은 시라 하네 / 堯峯文筆阮亭詩
백로지(白鷺紙) 두 폭을 붙여서 쓴 것인데, 글씨 자태가 물 흐르는 듯하고 한 글자의 크기가 마치 두 손바닥만 하다. 전날에 우리들이 중국일을 이야기할 때에 부질없이 그리워만 했던 것이 이 몇 해 사이에 차례로 한 번씩 구경하였을 뿐 아니라, 이렇게 먼 만리 타향에서 이 시를 읽으매 마치 고인의 얼굴을 만나는 듯싶었다.
유리창(琉璃廠) 육일재(六一齋)에서 유황포(兪黃圃) 세기(世琦)를 처음 만났다. 그의 자는 식한(式韓)인데, 눈매가 맑고 눈썹이 길기에 나는 그가 혹시 반정균(潘庭筠)ㆍ이조원(李調元)ㆍ축덕린(祝德麟)ㆍ곽집환(郭執桓) 등과 같은 명사인가 하고 의심하였다. 그들은 나보다 앞서 교유한 이가 있으므로 그들의 이름이 입에 향기롭고 그들의 수염이나 눈썹이 눈에 선하였던 까닭이다. 이제 유(兪)와 필담을 하는 사이에 그는 유혜풍(柳惠風 유득공(柳得恭). 혜풍은 호)이 그 숙부 탄소(彈素 유금(柳琴)의 호)를 연경으로 보내는 시에,
고운 국화 시든 난초 님의 수레 비치옵네 / 佳菊衰蘭映使車
맑은 구름 보슬비는 구월도 늦가을 / 澹雲微雨九秋餘
이 말씀 한 토막을 중토에다 전하고저 / 欲將片語傳中土
지북의 어떤 사람 다시금 글을 쓸꼬 / 池北何人更著書
를 써서 보였더니, 황포는,
“지북의 어떤 사람이란 누구를 이름이시오.”
하고 묻기에, 나는,
“이것은 완정이 지은 〈지북우담(池北偶談)〉에 실린 우리나라 김청음(金淸陰 김상헌(金尙憲). 청음은 호)의 고사를 쓴 것이지요.”
한즉, 황포는,
“글쎄, 《감구집(感舊集 왕세진 저)》 가운데 이름은 상헌(尙憲)이요, 자는 숙도(叔度)라는 이가 있더군요.”
한다. 나는,
“옳습니다. 저,
엷은 구름 가벼운 비가 시누이의 사당터에 / 淡雲輕雨小姑祠
고운 국화 시든 난초 팔월이 이때라네 / 佳菊衰蘭八月時
라는 시는 곧 청음이 지은 것이요, 또 완정의 논시절구(論詩絶句)에는,
맑은 구름 이슬비가 소고사가 여기로다 / 淡雲微雨小姑祠
빼어난 국화 지는 난초 때마침 팔월이야 / 菊秀蘭衰八月時
조선에서 오신 손님 그 말을 기억하니 / 記得朝鮮使臣語
동쪽 나라 그분네가 시를 과연 알더구먼 / 果然東國解聲詩
이라 하였으니, 혜풍의 이 시는 완정을 본받아서 지은 것입니다.”
한즉, 황포는 또,
“혜풍의 시는 실로 얻기 어려운 작품입니다. 동국 사람이 시를 안다는 말이 과연 그렇습니다. 그의 다른 작품을 더 들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한다. 나는 곧,
글을 읽다 눈물 지니 옛 역사가 아롱지네 / 看書淚下染千秋
물에 닿은 저 시인은 시름도 하도 할사 / 臨水騷人旡限愁
확사(심덕잠(沈德潛)의 자)가 시를 엮되(《청시별재(淸詩別裁)》) 너무나 초라터라 / 碻士編詩嫌草草
《치청전집》 있다 하니 어디서 구해 볼까 / 豸靑全集若爲求
를 썼더니, 황포는 손을 흔들며 붓으로 ‘치청전집’ 넉 자를 가리키면서,
“이것은 금서(禁書)랍니다. 철군(鐵君 이개(李鍇)의 자)의 선조는 애초에 귀국 사람이라지요.”
한다. 나는,
“무슨 까닭으로 금법에 걸렸나요.”
하였더니, 황포는 답을 하지 않는다. 나는 또 잇달아서 그 다음 절의,
시 짓기로 이름 높은 곽집환이 있다고녀 / 有箇詩人郭執桓
담원(곽태봉(郭泰峯)이 거처하는 곳)이 읊은 글귀 동국에 헌사롭네 / 澹園聯唱遍東韓
이제껏 삼 년이라 소식 그저 끊겼으니 / 至今三載旡消息
처량한 이 꿈속에 물 소리 뿐이로세 / 汾水悠悠入夢寒
를 읊었더니, 황포는 평하려 들면서,
“곽은 어느 고을에 살고 있는 시인입니까.”
하고 묻기에, 나는,
“그는 태원(太原)에 산답니다.”
하고, 또,
“사동망(師東望)과 양유동(梁維棟)은 어떤 인물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는 모두 다 모른다고 답한다. 나는 또,
“그러면 서점 중에는 갓 새긴 《회성원집(繪聲園集)》이 있겠습니까. 그 책머리에 사와 양의 두 서문이 있고, 역시 저의 것도 있습지요.”
한즉, 황포는 곧 ‘회성원집’ 넉 자를 써서 문수당(文粹堂)서사(書肆)의 편액(扁額)이다. 에 사람을 보내어 구했으나 없다 한다. 나는 또,
“선생은 반정균학사를 잘 아시나요.”
하고 물었더니, 황포는,
“일찍이 사귀어 본 일은 없습니다.”
한다. 나는,
“반 학사의 댁이 종인부(宗人府)에서 벽 하나가 가렸답니다. 제가 나라를 떠나올 때에 어떤 친구가 말하기를, ‘종인부 대문을 지나 오른편으로 돌면 그 댁이 있다.’ 합니다. 그러면 종인부가 여기에서 거리로 얼마나 됩니까.”
한즉, 황포는,
“선생이 예부(禮部)를 잘 알고 계시겠지요.”
하고 반문할 즈음에 마침 한 손님이 좌석에 들어앉더니,
“종인부를 찾을 것 없이 그 댁이 여기서 멀지 않소이다. 저 양매서가(楊梅書街)에 있는 단씨(段氏)의 백고약포(白槀藥鋪)에서 마주 선 문이 곧 반이 우거한 곳입니다.”
하고 설명한다. 황포가 그와 무어라고 이야기하더니 곧,
“지난해 가을에 그가 이곳으로 옮아왔다 하는데, 선생은 누구를 통해서 그를 아셨나요.”
한다. 나는,
“저의 나라 사람 홍대용(洪大容)이 건륭 병술년(1766년)에 공사(貢使)를 따라서 연경에 왔다가 반을 만났고, 그 뒤에도 그와 서로 사귀어 본 이가 있으니, 저는 비록 그를 보지 못했으나 마음으로는 벌써 서로 통했답니다. 반은 글씨와 그림에도 능하여 일찍이 스스로 복숭아와 버드나무를 그리고서,
우리 집은 서자호(서호(西湖)) 물가를 둘린 나무 / 吾家西子湖邊樹
푸른 잎 붉은 꽃이 때마침 이월이라네 / 淺碧深紅二月時
이렇듯한 저 강남을 돌아가지 못하고는 / 如此江南歸不得
연한 티끌 분가루요 가는 꿈은 실일러라 / 軟塵如粉夢如絲
는 시를 써서 홍대용에게 주었답니다.”
한즉, 황포가 크게 권주를 치면서,
“선생의 벗 홍 수재(洪秀才)의 아름다운 글귀를 듣고자 합니다.”
한다. 나는,
“일찍이 외우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혜풍(惠風)이 탄소(彈素)를 연경으로 보내는 시에서,
푸른 잎 붉은 꽃이 때마침 이월이라오 / 淺碧深紅二月時
연한 티끌 분가루요 가는 꿈은 실일러라 / 軟塵如粉夢如絲
항주가 낳은 선비 그 사람은 반향조를 / 杭州擧子潘香祖
어여쁠사 그의 시구 남시와 어떻던고 / 可憐佳句似南施
하였으니, 우리나라 시인들이 중국의 명사를 그리워함이 이렇답니다.”
한즉, 황포는 또 이에 권주를 치면서,
“반은 진실로 이름 있는 선비이긴 하나 혜풍의 것도 역시 아주 아름답습니다.”
하고, 황포는 곧 그 종이를 거두어 품속에 넣으면서,
“제가 방금 〈구당시화(毬堂詩話)〉를 쓰고 있는데 다행히 이런 한 토막 재미있는 이야기를 얻었소이다.”
하고는 이내 같이 문을 나와서 작별할 제, 황포는,
“이 길이 바로 양매서가로 가는 것입니다. 단씨의 약포는 저 문패에 큰 물고기를 그린 곳이 그 집이랍니다.”
하고, 한 곳을 가리켰다.
강녀묘(姜女廟)는 산해관 밖에 있는데, 이는 이른바 망부석(望夫石)이다. 왕건(王建 당(唐) 시인. 자는 중초(仲初))의,
고운 님 바라던 곳 강물만이 예는구나 / 望夫處江悠悠
이 몸이 돌 될망정 고개도 안 돌리네 / 化爲石不回頭
나날이 이 산 위에 바람 불고 비 내릴 제 / 山頭日日風和雨
님이 돌아오시는 땐 이 돌 응당 입 열 것을 / 行人歸來石應語
이란 시가 곧 이것을 말함이다. 세간에서는 망부석이 이 한 군데뿐이 아니라 하나는 태평(太平)에 있고, 또 하나는 무창(武昌)에 있으니, 그러면 왕건이 읊은 것은 이 돌이 아님을 알겠다. 지금 이곳에 행궁(行宮)이 있는데, 그 웅장ㆍ화려함이 북진묘(北鎭廟)에 못지 않고, 또 과친왕(果親王)이 금자(金字)로 쓴 ‘진고명적(振古名蹟)’이라는 주련이 있으며, 건륭 8년(1743년) 10월에 황제가,
서늘 바람 늙은 가지 저녁 볕에 우는 듯이 / 涼風頹樹吼斜陽
이제껏 구슬프게 고운 님을 그리웁네 / 尙作悲聲吊乃郞
천고의 내 절개를 자랑코자 하랴마는 / 千古旡心誇節義
이 몸이 죽고 죽음 강상을 위함이네 / 一身有死爲綱常
그날부터 내려오며 강녀라 이름 불러 / 由來此日稱姜女
당년에 그 슬픔은 기량을 울었다네 / 盡道當年哭杞梁
이 마음 본받아서 아름다움 지킨다면 / 長見秉彝公懿好
전한 말이 그르다손 무엇이 해로우랴 / 訛傳是處也何妨
라는 시를 지어서 돌에 새겼고, 돌 곁에는 작은 정자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진의정(振衣亭)이다. 대체로 청의 황실은 대대로 명필이 많으나 과친왕(果親王)이 더욱 이에 능하여 미원장(米元章)보다도 나을 듯싶었다.
사신을 따라서 중국에 들어가는 이는 반드시 칭호 하나씩을 가지는 법이다. 그리하여 역관을 종사(從事)라 하고, 군관을 비장(裨將)이라 하며, 놀 양으로 가는 나와 같은 이는 반당(伴當)이라 부른다. 우리나라 말에 소어(蘇魚)를 반당(盤當)이라 하니 대개 반(盤)과 반(伴)의 음이 같은 까닭이다. 그러나 압록강을 건너면 아까 이른바 반당은 은빛 모자와 정수리에 푸른 깃을 꽂고 짧은 소매에 가뿐한 행장을 차리게 된다. 이를 본 길가의 구경꾼들은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새우라고 부른다. 어째서 새우라 하는지는 모르나 대체로 무부(武夫)의 별호인 듯싶다. 또 지나는 곳마다 어린이들이 떼를 지어 몰렸다가 일제히,
“가오리가 온다. 가오리가 오네.”
하고, 또는 말 꼬리에 따라오면서 다투어가며 지껄인다. 대체로 가오리가 온다는 것은 고려(高麗)가 온다는 말이다. 나는 일행더러,
“이제 세 가지 물고기로 변하는구먼.”
하고는 웃었다. 모든 사람들은,
“어째서 세 가지 고기라 하는고.”
한다. 나는,
“길을 떠날 때에는 반당이라 하였으니 이는 소어요, 압록강을 건넌 뒤로는 새우라고 하니 새우도 역시 고기의 한 족속이요, 되놈 애들은 모두 가오리(哥吾里)하고 부르니 이는 홍어(洪魚)가 아닌가.”
한즉, 사람들은 모두 크게 웃었다. 나는 이내 말 위에서 시 한 절을 불렀다.
푸른 깃 은 정수리 의젓한 무부로서 / 翠翎銀頂武夫如
천리라 요동 길을 사신 뒤를 따랐구나 / 千里遼陽逐使車
중국 땅에 들어서자 고기 별호 세 번째와 / 一入中州三變號
예부터 못난 이 몸 종이 씹는 좀이라오 / 鯫生從古學蟲魚
고려(高麗)는 애초에 고구리(高句驪)로부터 나온 이름이었는데, ‘구(句)’ 자와 ‘마(馬)’ 변을 생략한 것이다. 만일 산과 물이 곱다고 풀이해서 ‘고려’라고 읽는다면 이는 천자문(千字文) 중에 있는 금생려수(金生麗水)의 ‘려(麗)’ 자가 될 것이니 이는 거성(去聲)에 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 사람들은 평성(平聲)의 ‘리(麗)’로 발음한다. 수ㆍ당 때에도 고구리를 모두 ‘고리’라고 불렀으니 ‘고리’란 이름은 그 유래가 벌써 오래다. 이무관(李懋官)은 일찍이,
“‘고구리’란 말은 《한서(漢書)》지리지(地理志)에 처음 나타났으며, 그들 조상은 금와(金蛙)인데, 우리나라 말로 와(蛙)를 개구리(皆句麗)라 하고 또는 왕마구리(王摩句麗)라 한다. 옛 사람들이 몹시 질박하여 곧 임금 이름으로써 나라 이름을 삼고는 성을 그 위에다 씌워서 ‘고구리’가 된 것이다.”
라고 하였으니, 이는 비록 일시의 조롱하는 말에 지나지 않는 것 같지마는 제법 이치에 맞는 말이다. 외국의 방언이 대체로 소리는 있으나 글자가 없는 것이 많으므로 중국 사람들이 그 소리를 한자로 옮겼을 때 예를 들면, 은(銀)을 몽고(蒙古)라 하고, 아름다운 금을 애신각라(愛新覺羅)라 하며, 장사(壯士)를 예락하(曳落河)라고 부르는 따위가 곧 그것이다.
산서(山西)에 살고 있는 사람 곽집환(郭執桓)의 자는 봉규(圭)요, 또는 근정(勤庭)이며, 호는 반오(半迂)요, 혹은 동산(東山)이며, 또는 회성원(繪聲園)이라 한다. 그는 건륭 병인년(1746년)에 났으며, 시와 글씨와 그림에 모두 능하고 집이 대대로 부유하였으며, 그의 집은 호산(虎山)을 뒤에 지고 앞에는 노천(蘆泉)이 흐르고 있다. 그의 아버지 태봉(泰峰)의 자는 청령(靑嶺)이요, 호는 금랍(錦衲)이니 나라에서 중헌 대부(中憲大夫)의 직함을 주었는데, 뒤에 또 자정 대부(資政大夫)에 승진되었다. 금랍은 날마다 심덕잠(沈德潛)ㆍ가락택(賈洛澤) 등 모든 명사와 더불어 그 동산에서 시를 창수(倡酬)하였다.
봉규가 일찍이 그와 한 고을에 살고 있는 등문헌(鄧汶軒) 사민(師閔)을 통하여 우리나라 명사들에게 담원팔영(澹園八詠)의 시를 청하였으니, 담원은 곧 금랍이 거처하는 곳이었으며, 이 시는 대체로 그의 아버지를 위하여 후세에 전하고자 함이다. 나는 이에 다음과 같이 써 주었다.
붉은 파초 푸른 바위 담 너머로 솟아 뵈고 / 紅蕉綠石出東墻
한 그루 오동일랑 깊숙한 찰 간직했네 / 一樹梧桐窈窕堂
평생에 오만한 몸 손님 맞이 게을리하여 / 傲骨平生迎送懶
어른님 하시는 일은 저문 산에 절만 하네 / 丈人惟拜暮山光
위는 내청각(來靑閣)을 읊었다.

남쪽 비탈 그림자는 진종일 나풀나풀 / 南陀竟日影婆娑
그림자 물에 지자 나를 불러 누구인가 / 耐可呼吾亦喚他
산들바람 잠깐 불 제 해오라기 저어가니 / 乍綴微風鳬鷺去
요란한 물결 위에 백 동파가 설렁이네 / 不禁撩亂百東坡
위는 감영지(鑑影池)를 읊었다.

코 끝에 희끗하며 보기는 보았건만 / 已觀微白鼻端依
무엇이고 맡으려니 콧구멍이 닫혔고나 / 欲辨臟神掩兩扉
다만 암향 있어 꿈에 들어 싸늘하네 / 獨有暗香侵夢冷
나부산 밝은 달에 매화 가지 춤추는 듯 / 羅浮明月弄輝輝
위는 소심거(素心居)를 읊었다.

卍자 새긴 난간 위에 울한 솔이 덮여 있고 / 松覆深深卍字欄
기운 바위 넌출 달려 푸른 빛이 어울렸네 / 垂蘿欹石翠相攅
그림 배에 바람 불어 가는 대로 두려무나 / 一任畫舫風吹去
밤새도록 들려오는 찬 여울 물소린 듯 / 盡夜寒聲瀉作灘
위는 송음정(松陰亭)을 읊었다.

가볍게 뿜는 놀은 취한 넋을 깨우는 듯 / 噀輕堪醒醉魂花
하늘 말이 높이 달려 푸른 갈기 너울너울 / 天褭行空翠鬣髿
약 캐러 갔다가 옛 신선을 찾으려니 / 採藥將尋劉阮去
적성 아침 놀에 길마저 아득코녀 / 路迷廉閃赤城霞
위는 비하루(飛霞樓)를 읊었다.

꽃은 하도 은근하여 가는 임을 붙드는 듯 / 花似將歸强挽賓
비바람 어이하여 도리어 새우는고 / 囑他風雨反逢嗔
골짝 꽃 꺾어다가 화병에 모셔 두니 / 自從洞裏修甁史
일년 삼백 육십 날이 어느 때가 봄 아니랴 / 三百六旬都是春
위는 유춘동(留春洞)을 읊었다.

옥파리채 맑은 저녁 높은 대에 홀로 올라 / 玉塵淸宵獨上臺
버들 울에 서리 내리고 기러기 슬피 울 제 / 杞棚霜落雁流哀
찢어지듯 한 소리에 가을 구름 흩어지고 / 一聲劃裂秋雲盡
깨끗한 저 하늘에 달님 이제 오신다네 / 萬里瑤空皓月來
위는 소월대(嘯月臺)를 읊었다.

꽃다운 화예부인 이 궁에 들어올 제 / 花蘂夫人初入宮
수줍은 채 말하자니 뺨이 먼저 붉었다네 / 含羞將語臉先紅
앵가의 사리쯤이 그 무엇이 묘하던고 / 鸚哥舍利元非妙
아란의 깨달은 도를 누구라서 알아주리 / 誰識阿難悟道功
위는 어화헌(語花軒)을 읊었다.
봉규가 그가 지은 ‘회성원집(繪聲園集)’ 각본(刻本) 한 권을 나에게 보내고는 서문을 청하였다. 그 글을 읽어본즉 청허(淸虛)하고도 쇄탈(灑脫)하여 세속 사람의 것과 같지 않고, 그는 약관 때부터 그 아버지의 가진 재산을 받았으며, 해내의 사객(詞客)들을 초빙하여 글과 술로 회합을 지었으니, 양유동(楊維棟)ㆍ노병순(盧秉純) 등이 모두 그 서문을 쓰게 되었다. 그의 ‘회진문서정(懷津門西亭)’이라는 시에,
향기 흩자 꽃이 지니 작은 정원 가을이라 / 香散花殘小院秋
추녀 끝에 달린 달은 갈퀴인양 되었으리 / 西亭簾角月如鉤
북으로 예는 외기러기 푸른 공중 스쳐오니 / 北來一雁橫空碧
그 그림자 동남으로 바다에 흘러드네 / 影下東南入海流
라 하였고, 또 그의 ‘제표요산수소폭(題表耀山水小幅)’이라는 시에는,
고기잡이 갯마을에 물빛은 밝았는데 / 蟹舍漁灣水色明
이슬 젖은 나무 숲에 흐렸다가 맑아지네 / 煙條露葉半陰晴
하늘가 구름 사이 외로운 배 멀리 저어 / 雲間天際孤帆遠
적막한 석양 속에 한 소리 기러기를 / 寂寞斜陽一雁聲
이라 하였고, 또 그의 ‘유감(有感)’에는,
강가에 밝은 달빛 가을이 맑노매라 / 壕梁月色照淸秋
회남의 갈대 숲에 내 꿈이 둘리누나 / 夢繞淮南蘆萩洲
초원에 잠긴 비는 갯마을이 고요하고 / 雨暗楚原連浦靜
고목에 급한 바람 강물 소리 섞여 흘러 / 風催古木雜江流
외로운 배 방향 몰라 건곤이 넓은지고 / 孤舟旡依乾坤濶
물과 구름 같은 신세 내 홀로 떠 있구나 / 隻影空持雲水浮
한없이도 쓸쓸한 건 시력이 끝난 그곳 / 最是蕭條極目處
머나먼 만리 길에 끝없는 나의 시름 / 迢遙萬里使人愁
이라 하였다. 내 일찍이 금오(金鰲 북경 궁중에 있는 다리[橋])와 옥동(玉蝀 북경 궁중에 있는 다리[橋]) 사이를 배회한 일이 있으니, 저 우촌(雨村)이조원(李調元) 과 추루(秋樓)반정균(潘庭均), 지당(芷塘)축덕린(祝德麟) 의 모든 명류는 오히려 만나 볼 기회가 있겠으나, 다만 곽씨 집환(執桓)은 세상을 떠난 지가 벌써 6년이나 되었다. 집환이 건륭 을미년 8월에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회성원집’은 아마 중간된 책[本]이 있을 듯 싶기에 유리창 안에서 구하여 보았으나, 끝내 얻지 못했으니 한스럽다.
윤경(尹卿)이 검은 종이로 장정한 작은 부채를 내어서 대와 돌을 그리고 또 젖에다 금가루를 타서,
라고 써 있고, 그 밑에는,
“윤가전(尹嘉銓)이 쓰니 이때에 나이는 70이다.”
라고 썼다.
《명시종(明詩綜)》에 나의 5세조(世祖) 금양군(錦陽君)의 대동관제벽(大同館題壁)의 한 절로서,
한 나라의 홍가(한(漢) 성제(成帝)의 연호) 연간에 일어난 고구려 / 高句麗起漢鴻嘉
쓸쓸한 옛 궁터가 풀숲에 가리웠네 / 宮殿遺墟草樹遮
슬프다 을지문덕 그이가 죽은 뒤에 / 怊悵乙支文德死
나라가 망한 것 후정화 탓 아니라네 / 國亡非爲後庭花
가 실려 있다. 고구려의 일어남은 홍가 연간이 아니요, 곧 한 원제(漢元帝)의 건소(建昭) 2년(기원전 37년)이다. 성제(成帝)의 홍가 3년에는 백제(百濟)의 태조 고온조(高溫祚)가 직산(稷山)에 왕도를 정하였던 것을 선조께서 우연히 상고하지 못하셨던 것이다. 유식한(兪式韓)의 《구당록(毬堂錄)》에는 《일지록(日知綠)》을 이끌어서 조선 역사의 자료로서 《서경(書經)》 대전(大傳)을 고증삼아, 이 시 가운데서 쓴 홍가의 그릇된 것을 변증(辨證)하였으니, 중국의 선비들이 고거(考據)와 변증에 알뜰하여 이로써 박아(博雅)하다는 말을 듣는 사람들이 대체로 이러하였다.
장주(長洲 우동이 살고 있던 지명) 우동(尤侗) 회암(悔菴)이 〈외국죽지사(外國竹枝詞)〉를 지으매, 그 첫머리에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그 다음 백여 나라의 민요(民謠)와 토산(土産)의 대개를 소개하였는데, 우리나라의 일에 대하여서도 그의 서술이 오히려 그릇된 것이 많으니 하물며 해외 만 리의 먼 곳이랴. 더군다나 문자가 없으니 무엇으로써 그들의 토속을 통할 수 있었겠는가. 그가 조선(朝鮮)을 두고 읊은 시에,
고구려를 하구려로 낮추어서 고쳤다니 / 高句麗降下句麗
조선이란 옛 이름이 보다 더 아름답네 / 未若朝鮮古號宜
천 리란 그 서울엔 온갖 연극 벌여 있고 / 千里王京陳百戱
한 나라 옛 모습을 이곳에서 보겠구나 / 漢城猶見漢官儀
라 하고는 그 주(注)에는,
“옛 조선이 고구려에게 합병되었으므로 수(隋)가 그를 쳤으되 항복받지 못하고는 그를 낮추어서 ‘하구려(下句麗)’라 하였더니, 명(明)의 홍무(洪武) 연간에 그들이 중국에 들어와서 공물을 바치고 조서(詔書)를 받들었으므로, 다시 조선의 이름을 회복시켰으며 한성(漢城)을 서울로 삼았다. 매양 조사(詔使)가 이르면 여러 가지 연극(演劇)을 진열하였다.”
라고 하고, 또 그 뒤를 이어서,
긴 저고리 넓은 소매 절풍건은 머리에다 / 長衫廣袖折風巾
다듬 종이 이리 붓은 한자 쓰면 진서라네 / 硾紙狼毫漢字眞
스스로 쓴 역사에는 전통이 오래다니 / 自序世家傳國遠
《상서》의 구주 속에 살고 있는 그들이라네 / 尙書篇內九疇人
라 하고는, 또,
작은 아이 여덟 살이 황창이라 부르는데 / 小兒八歲號黃昌
칼춤을 추다 말고 백제왕을 베었다네 / 舞劍能誅百濟王
8월이라 한가윗날 회소곡을 다시 불러 / 更唱嘉俳會蘇曲
아침 나절 그 길쌈이 대바구니 가득 찼네 / 朝來蠶績已盈筐
라고 하고, 또 그 주에,
“신라(新羅)의 황창랑(黃昌郞)이 8세에 그의 임금을 위하여 백제(百濟)에 가서 거리에서 춤추는데, 백제왕이 그를 불러 궁중에서 춤추게 하였더니, 그는 이내 그 칼로써 백제왕을 죽였다. 7월 보름에 신라왕이 왕녀(王女)로 하여금 육부(六部)의 여자들을 거느리고 넓은 뜰에서 길쌈을 시작하여, 8월 보름에 이르러서 그들의 공적을 비교하여 이에 진 자가 비용을 담당하여 주연을 벌이고 서로 노래 부르며 춤추되, 이를 ‘가위[嘉俳]’라 하였다. 그 중 한 여자가 일어나 춤추며 회소곡(會蘇曲)을 불렀더니, 그 뒤에 조선이 신라를 깨치고 끼친 소리를 모의하여 황창과 회소의 두 곡조를 만들었다.”
하였다.
기려천(奇麗川)이 《소대총서(昭代叢書 청(淸) 장조(張潮) 저)》 를 내놓고 이 글을 뽑아서 나에게 뵌다. 내가 윤형산(尹亨山)에게,
“이름을 ‘하구려(下句麗)’로 낮춘 것은 곧 왕망(王莽) 때 일입니다.”
한즉, 윤은,
“그렇습니다.”
한다. 나는 또,
“스스로 쓴 역사라는 구절은 온통 그릇된 것입니다. 기씨(箕氏)의 조선은 위만(衛滿)에게 축출된 것입니다.”
하였더니 윤은,
“그거야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에서는 복잡한 관계인 동방(東方)의 삼국(三國)을 통틀어 이야기한 것이요, 오로지 귀국만을 가리킨 것은 아닌 듯싶습니다. 그가 이른바 전통이 오래다는 것은 대체로 그의 나라 이름 조선이 벌써 기자(箕子)로부터임을 말하며, 귀국의 아름다움을 극도로 찬미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는 본시 가작(佳作)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꿈 이야기를 하다시피 또는 가죽신을 격해 놓고 가려운 곳을 긁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한다. 나는 또,
“그의 주(注)에 이르기를 조선이 신라를 깨쳤다는 것은 더욱 그릇된 말입니다. 우리나라는 고려를 이었고, 고려는 신라를 이었으니 어찌 5백 년 앞의 신라를 깨칠 수 있겠습니까.”
한즉, 여천은,
“이야말로 을축(乙丑)ㆍ갑자(甲子)라는 겁니다.”
하고, 크게 웃는다.
내가 윤경더러,
“현존한 시인(詩人)으로서 해내(海內)에 가장 으뜸될 분은 누구십니까. 그의 이름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윤경은,
“천하가 넓은지라, 홍장(鴻匠)과 묘재(妙才)가 진실로 없는 것은 아니로되, 저는 나이가 늙고 세상일을 모두 끊어버렸으므로 젊은 재자들은 아는 이가 없고, 다만 저의 늙은 벗으로서 원 태사(袁太史) 매(枚)라는 이가 있습니다. 그의 자는 자재(子才)였고 뜻이 고상하여 세속에 얽매이지 않는 선비입니다. 그는 벼슬을 사랑하지 않고 산수에 방랑하여 가장 회고적(懷古的)인 작품이 능수입니다.”
하고는, 이내 소리를 높여서 그의 시 두어 귀를 읊는다. 나는 그가 읊는 것을 잘 알아듣지 못하므로 글씨로 써서 보여 주기를 청하였다. 그의 〈박랑성시(博浪城詩)〉에,
약을 캐는 진인들은 봉래산을 향해 가고 / 眞人採藥走蓬萊
아득한 박랑의 모래벌은 망해대에 연했구나 / 博浪沙連望海臺
구정은 아직 잠기고 삼호들은 일어섰네 / 九鼎尙沈三戶起
여섯 왕이 쓰러지자 한 방망이 오는구려 / 六王纔畢一椎來
범과 용이 기개 높은들 누른 금은 다하였네 / 虎龍有氣黃金盡
산도깨비 소리 없고 흰 구슬만 슬프다네 / 小鬼旡聲白璧哀
열흘 두고 찾다 못해 손을 마침 떼었다네 / 大索十日還撒手
그대 같은 기이한 재주 예부터 몇이런고 / 如君終古儘奇才
하였으니, 그 시를 보아서도 가히 중국 사대부(士大夫)의 심경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형산이 구태여 이 시를 읊어 보임도 역시 그의 뜻이 명확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기려천(奇麗川)에게도 기피하지 않음은 무슨 배짱인지 모르겠다.
강희 무오년(1678년)에 강우(江右)에 살고 있는 계문란(季文蘭)이라는 여인이 되놈들의 노략을 당하여 심양으로 가다가 진자점(榛子店)에 이르러서 바람벽 위에 시 한 절을 썼으되,
뭉텅 머리 방망인양 옛 단장 가엾어라 / 椎髻空憐昔日粧
길 나선 초라한 양은 비단 치마 다 낡았네 / 征裙換盡越羅裳
아빠 엄마 어떠신고 그곳 몰라 애태우며 / 爺孃生死知何處
봄 바람에 흐뭇 울어 심양으로 예는구나 / 痛哭春風上瀋陽
하고는, 그 아래에 또 쓰기를,
“저라는 계집은 곧 강우에 살고 있는 우 상경(虞尙卿) 수재(秀才)의 아내로서 지아비는 놈들에게 죽음을 당하였고, 이제 왕장경(王章京)에게 팔린 몸이 되어서 심양으로 가는 길이오. 무오년 정월 21일에 눈물을 뿌려 벽을 닦고 이 시를 쓰노니, 오직 천하에 유심(有心)한 사람들은 이 글을 읽고서 이 몸을 가엾이 여겨 건져 주시옵길 바랍니다. 제 나이는 지금 21세외다.”
하였다. 그 뒤 6년 만인 계해(1683년)에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 김공(金公) 석주(錫胄)가 사신으로 이곳을 지나다가 이 일을 기록하여 돌아왔고, 또 그 뒤 30여 년을 지나서 노가재(老稼齋) 김공(金公) 창업(昌業)이 역시 이곳을 지나니 바람벽에 쓴 글자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고 하였다. 이제 나는 노가재보다도 60여 년 뒤인 이날에 또 이곳을 지나다가 이를 생각하여 배회하였으나 벽 사이의 글자는 다시 찾아 볼 곳이 없었다. 내 우연히 이 시로써 기풍액(奇豐額)에게 이야기하였더니 그는 산연(潸然)히 눈물지우며,
“진자점은 어디 있습니까.”
하고 묻기에, 나는,
“산해관 밖에 있습니다.”
하였더니, 기는 곧 시 한 절을 읊었다.
붉은 단장 아침 나절 되놈에게 팔렸으니 / 紅粧朝落鑲黃旗
호가의 슬픈 박자 그 다섯째 글귈러라 / 笳拍傷心第五詞
천하에 많은 사내 맹덕이 이제 없으니 / 天下男兒無孟德
천금이 있다손들 채문희를 속할쏘냐 / 千金誰贖蔡文姬
강희의 산장시(山莊詩)는 통틀어 36마디였는데, 모두가 야비하고 졸렬하여 운치가 없으니, 대체로 그는 억지로 읊어서 평소의 포부를 자랑한 것인데 그의 모든 신하들이 반드시 뭇 글을 수집ㆍ나열하여 전주(箋注)를 내었으니, 한 예를 들면 그의 연파치상(煙波致爽)을 읊은,
서늘한 이 산장에 가끔 와서 더위 피하니 / 山莊頻避暑
잠자코 고요하여 떠들썩한 일 드무네 / 靜黙少喧嘩
는 아무런 주석도 필요하지 않건마는 그들은 양(梁) 소통(蕭統 양(梁)의 문학가. 자는 덕시(德施)) 시의,
수레를 바삐 몰아 산장으로 가자꾸나 / 命駕出山莊
든가, 유우석(劉禹錫) 시의,
푸른 넌출 그늘 속에 산장 하나 예 있구나 / 綠蘿陰下有山莊
라든가, 대숙륜(戴叔倫) 시의,
지초 이랑 대추밭 길 오가기도 잦았고녀 / 芝田棗逕往來頻
와, 손적(孫逖 당의 문학가) 시의,
이 땅이 가장 맑으니 숲 속 정자 좋을씨고 / 地勝林亭好
시절이 태평인 제 잔치도 자주로다 / 時淸宴賞頻
와, 위징(魏徵) 구성궁 예천명(九成宮醴泉銘)의,
“황제께서 구성궁에서 더위를 피하셨다.”(그 서문의 한 구절)
와, 양 간문제(梁簡文帝 자는 세찬(世纘)) 납량시(納涼詩)의,
높은 오동 그 밑에서 더위를 피하노라니 / 避暑高梧側
가벼운 바람 들어 옷깃이 서늘하군 / 輕風時入襟
과, 백거이(白居易) 시의,
봄철을 바라보며 꽃빛이 따뜻하고 / 望春花景暖
더위를 피하니 대 바람이 서늘코녀 / 避暑竹風涼
와, 《남사(南史)》 심린사전(沈麟士傳)의,
“나이가 80이 지났으나 귀와 눈은 오히려 총명하므로 남들은 그의 몸 수양이 정(靜)ㆍ묵(黙)한 소치라고 말하였다.”
와, 황보증(皇甫曾 당의 문학가. 자는 효상(孝常)) 시의,
화창한 바람엔 풀잎이 빼어나고 / 草長光風裏
잠자코 고요한데 꾀꼬리만 우는구나 / 鶯啼靜黙間
와, 하손(何遜 양의 문학가. 자는 중언(仲言)) 시의,
뵈는 거나 듣는 것이 떠들썩한 일 전혀 없네 / 視聽絶喧嘩
등을 이끌었으니, 이 시는 겨우 두 글귀에 지나지 않을 뿐더러 내용이 풀이하지 못할 것도 없거늘 어찌 허다한 전주(箋注)를 내었을까. 제용작가(帝庸作歌)라는 글이 있으나 어찌 허다한 출전을 밝힐 것이야 있으리요. 그러므로 주자(朱子)는 일찍이 말하기를,
관관저구(關關雎鳩)란 말은 애초부터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라고 하였으니, 이야말로 시학(詩學)에서의 대성(大成)이라 아니할 수 없겠다.
가두에 떠드는 말 하간전 외는 소리 / 街頭喧誦河間傳
규중의 슬픈 노래 양백화가 이 아니야 / 閨裏悲歌楊白花
이 시는 곧 점필재(佔畢齋)가 사방지(舍方知)를 풍자한 것이다. 사방지라는 자는 사천(私賤) 계층의 출신으로서, 어렸을 때부터 여복(女服)을 가장하여 얼굴에 분과 기름을 단장하며 재봉을 배웠더니, 자라나서 조사(朝士)들의 집에 드나들곤 했다. 천순(天順) 7년(1463년) 봄에 사헌부(司憲府)에서 그 일을 풍문으로 듣고 체포하여 그가 평소에 간통하던 여보살에게 취조한즉, 보살은,
“그의 양도(陽道)가 유달리 큽니다.”
한다. 이에 여의(女醫) 반덕(班德)을 시켜서 만져 보았고, 또 영순군(永順君) 이보(李溥)와 하성위(河城尉) 정현조(鄭顯祖) 등도 번차례로 실험하며 보고는 모두 혀를 뽑으면서,
“에이, 대단하더구만.”
하였다. 이때에 중국에서도 역시 이보다 먼저(뒤인 것을 잘못 센 것 같다.) 이와 같은 일이 있었다. 오군(吳郡)양순길(楊循吉)의 《봉헌별기(蓬軒別記)》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었다.
“성화(成化) 경자년(1480년)에 경사(京師)에 과부 하나가 여공(女紅)에 능란하고 젊고도 예쁘며, 또 신이나 버선이 네 치에 지나지 않을 만큼 작았다. 모든 부귀가에서 서로 맞이하여 수놓기를 배우기도 하였다. 그는 남자를 보면 문득 부끄러운 빛으로 회피하기도 하려니와, 밤이면 그에게 배우는 여자와도 서로 자누이되 자물통을 튼튼히 잠그곤 한다. 그러므로 남들은 더욱이 그가 자기 몸조심에 가장 엄격하다고 믿었다. 이때 태학생(太學生)으로 있던 아무개가 그를 연모하여, 처음에는 그의 아내를 누이동생이라 속이고 그 과부를 자기의 집에 맞이하고, 가만히 그 아내에게 타일러 밤들어 문을 열고 거짓으로 뒷간에 가는 듯이 하고는, 갑자기 방안으로 들어가 촛불을 끄니 과부는 고함을 치자, 그는 과부의 목덜미를 껴안고는 강탈한즉 곧 남자인지라 구속하여 관청에 보내어 조사하니, 그의 성은 상(桑)이요, 이름은 중(翀)이며, 나이는 24세인데 어릴 때부터 발을 싸 매었다 한다. 법사(法司)가 그 옥사를 위에 아뢰었더니 헌종 황제(憲宗皇帝)가 이는 ‘인요(人妖)’라 하여 사형에 처하였다.”
한다.
망부석(望夫石)에는 천산(千山) 범광원(范光遠)의 시 일절이 쓰여져 있다.
성 쌓은 이 어디 가고 보이지를 않는구나 / 不見築城人
다만 정녀 아씨 그 자취 완연쿠나 / 但見貞女迹
묻노라 만리장성 너는 이를 알려니 / 試問萬里城
이 한 조각 돌에 비겨 봄이 어떠할꼬 / 何如一片石
강희때 간행한 전당시(全唐詩)는 모두 1백 20권이나 되는 거질이었으니, 마땅히 빠진 것이 없을 것이로되 당 현종(唐玄宗)의 〈어제사신라경덕왕(御製賜新羅景德王)〉이라는 5언 10운(韻)의 시가 그 속에 실리지 않았다. 《삼국사(三國史)》에,
“신라 경덕왕(景德王) 15년 봄 2월에 경덕왕은 당 현종이 촉(蜀)에 있다는 말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당의 절강으로부터 성도(成都)에 이르러서 공물(貢物)을 바쳤더니, 조서(詔書)로 말하기를, 신라왕이 해마다 조공을 바쳐서 능히 예악(禮樂)과 명분(名分)을 지키는 것을 가상하게 여겨 시 한 수를 지어준다 하고,
넷 벼리 나누어서 밝은 햇빛 나타나고 / 四維分景緯
여러 가지 기상들이 그 속에 포함되네 / 萬象含中樞
구슬과 피륙들은 온 천하에 깔려 있고 / 玉帛遍天下
다리 놓고 배를 저어 우리나라 찾아드네 /梯航歸上都
아득한 이내 회포 푸른 뭍이 막혔더니 / 緬懷阻靑陸
오랜 세월 흐르도록 우리 위해 수고했소 / 歲月勤黃圖
망망한 하늘가를 그즈음 누가 알꼬 / 漫漫窮地際
창창한 그 어란이 바다 구석 자리잡아 / 蒼蒼連海隅
갸륵한 이 나라는 명분을 지켰다네 / 興言名義國
산천이 멀다 하여 허수로이 생각하랴 / 豈謂山河殊
우리 사신 갔을 때엔 풍속 교화 전해 있고 / 使去傳風敎
그들이 이에 오면 옛 법을 배워 가네 / 人來習典謨
옷갓이 정제하니 예식을 알아 하고 / 衣冠知奉禮
충실하고 믿음 지켜 유학을 높였구나 / 忠信識尊儒
어린 정성 나타나니 하느님이 하감하고 / 誠矣天其鑒
어질도다 그의 덕은 외롭진 않으리라 / 賢哉德不孤
깃발 안고 함께 일어 인민을 기르리니 / 擁旄同作牧
아름다운 이 선물은 생추에 비할쏘냐 / 厚貺比生蒭
님이 가진 푸른 뜻을 더 한층 굳게 하여 / 益重靑靑志
바람 서리 치더라도 어디까지 변치 마오 / 風霜恒不渝
라고 하였다.”
한다. 송(宋)의 선화(宣和) 연간에 고려의 사신 김부의(金富儀)가 이 시의 각본(刻本)을 가지고 관반(館伴)으로 있던 학사(學士) 이병(李邴)에게 보였더니, 이병이 황제 휘종 황제(徽宗皇帝) 에게 올렸는데 이내 양부(兩府)와 모든 학사들에게 보이고, 황제는 또,
“이 진봉시랑(進封侍郞)이 올린 시는 당 명황(唐明皇)의 글씨가 틀림없는 것이야.”
하고 가탄하여 마지않았다. 이 시가 이미 중국에 들어가서 도군(道君 송(宋) 휘종이 자칭한 별호)의 예상(睿賞)을 겪었으나, 후세 사람이 당시(唐詩)를 엮는 이는 모두 이를 수록하지 않았음을 보아서, 비로소 옛날의 잃어버린 글은 듣고 본 것으로서만이 다할 바가 못 되고, 도리어 해외 편방(偏邦)의 선비가 이따금 천유(闡幽)의 업적이 있음을 깨달았으니, 이 어찌 우리들의 다행이 아니리요.
오중(吳中)의 사람들은 예로부터 부박하고 허탄하며, 경솔하고 변덕이 많으나 대체로 문장이 공교롭고 글씨 그림을 잘하기로 이름 높은 선비가 많았다. 그러나 중원(中原)의 인사들은 모두 그들을 미워하여 장사치나 장쾌들을 지목할 때에는, 반드시 항주풍(杭州風)이라고 일컬으니 대체로 오인(吳人)은 교활한 술책이 많았던 까닭이다. 전당(錢塘) 전여성(田汝成)의 《위항총담(委巷叢談)》에,
“항주의 풍속이 부박하고도 허탄하여 남을 자랑함에도 가벼이 하려니와, 구차히 나무라기도 잘하여 한 길에서 들은 말들을 다시 생각하여 보지도 않는다. 예를 들면 아무개가 이상한 물건을 가졌다고 하거나, 또는 아무개의 집에 범상하지 않는 일이 생겼다고 한 사람이 외치면 뭇 사람이 따라서 남의 의심나는 일에는 스스로 증언하되, 마치 자기의 눈으로 환하게 본 듯이 하여 저 바람처럼 일 때에도 머리가 나타나지 않거니와, 지나는 곳에도 그림자가 없어서 그 자취를 찾을 수 없는 까닭으로, 상말에 ‘항주 바람은 포착하자 없어져 버린다네. 좋은 것이나 나쁜 것이나 모두 한 패가 되어 있네.’라고 하였거니와, 또 이르기를, ‘항주 바람은 한 묶음 파라네. 꽃은 쭝긋쭝긋 속은 다 비었다네.’라고 하였으며, 또 그들의 습속이 거짓을 만들어서 눈앞의 이익을 맞이하되, 신후(身後)의 일을 돌보지 않음도 일쑤이다. 그리하여 술에다 재를 타고 닭에다 모래를 채우고 거위 배때기에 바람을 불어 넣고, 고기나 생선에 물을 집어 넣으며, 천에 기름과 분을 바르는 따위의 일이 벌써 송(宋) 때부터 그러하였다.”
라고 하였다. 내 일찍이 기 귀주(奇貴州)에게 육비(陸飛)의 글씨와 그림이 공교함을 이야기하였더니, 기는,
“그쯤이야 아무 것도 아닌 벌레입니다.”
한다. 이도 역시 항주풍을 두고 말함이다. 그들 북쪽 사람이 남쪽 선비를 미워함이 대체로 이러하였다.
최두기(崔杜機)성대(成大) 의 〈이화암노승가(梨花菴老僧歌)〉에,
오왕이 연극 보다가 뭉텅 상투 슬퍼했고 / 吳王看戲泣椎結
전수가 중이 되어 춘추 필법 위탁했네 / 錢叜爲僧托麟筆
라 하였으니, 우리나라 선배들이 매양 중국 일에 대하여 풍문에 휩쓸려서 실적에 충실하지 못함이 일쑤이다.
이에 이른바 오왕은 오삼계(吳三桂)를 말함이요, 전수는 전겸익(錢謙益)을 말함이다. 겸익이나 삼계가 모두 되놈에게 항복하여 머리털이 희도록 오래 살았으나 무료히 지나는 중에, 그 하나는 비록 의거(義擧)에 의탁하였으나 임금의 칭호가 벌써 참람하였고, 또 하나는 저서에 뜻을 붙였으나 대절이 이미 이지러졌으니, 비록 교활하게 후세의 공격을 회피하고자 한들 누가 믿어 주리요. 우리나라 상말에 대체로 사물(事物)에 어두운 것을 ‘몽롱춘추(朦朧春秋)’라 한다. 이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춘추를 이야기하기 좋아하나 몽롱하기가 이러한 종류와 같은 것이 많으니, 어찌 만인(滿人)들의 조소를 입지 않으리요.
송 휘종(宋徽宗)의 대관(大觀) 연간에 섭몽득(葉夢得)이 고려 사신의 관반(館伴)이 되었더니, 옛 규칙에 사신이 대궐 아래에 이른 지 달이 넘지 않아서 곧 돌려보내는 법이었는데, 휘종은 그로 하여금 전시(殿試) 신방(新榜)과 상지(上池 상림원(上林苑)의 못)를 구경시키고자 하여, 드디어 거의 70일을 머물게 되었다. 사신이 자못 몸가짐을 삼가고 행동이 아담하였으므로 섭(葉)이 그를 전송하려 점운관(占雲館)까지 이르러서 하직하였더니, 그의 부사(副使) 한교여(韓皦如)가 섭에게 옥대(玉帶)를 주면서,
“이것은 애초에 당(唐)의 고물이었으며, 우리 선조부터 대대로 보배로 삼았던 거요.”
하고는, 또 스스로 홀(笏) 위에다가 시 한 수를 써서 주었다.
눈물이 그렁그렁 이별이 장차로다 / 泣涕汍瀾欲別離
이 몸이 한 번 가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 此生旡復再來期
다만 보배 띠로 깊은 뜻을 베푸노니 / 謾將寶帶陳深意
이 물건 볼 때마다 이 사람을 잊지 마오 / 莫忘思人見物時
라 하였으나, 섭은 고려 사신의 옛 일에 물건을 끌어서 기증하는 예가 없었으므로 굳이 사양하고는 다만 그 시가 비록 박졸(朴拙)하긴 하나, 가히 그의 견권한 뜻은 짐작할 수 있겠다고 칭찬하였다 한다.
옹정(雍正) 초년에 칙사(敕使) 서산(書山)이 부벽루(浮碧樓)에 시를 썼으되,
풍물은 아름다워 옛적과 같건마는 / 風物獨依舊
산천은 어찌하여 부끄럼을 띠었는고 / 山河猶帶羞
하였으니, 서산은 만인(滿人)인데도 불구하고 별안간 한(漢)을 생각하는 말을 지음은 무슨 까닭일까.
얼마 전에 상선(商船)이 바람을 만나서 옹진(甕津)에 닿았는데, 배 가운데에는 시에 능통한 자가 있어서 율시 한 편으로 수사(水使)에게 올렸으되,
고국에 누구 있어 변한 음률 슬퍼하랴 / 故國誰憐鍾簴變
타향에 이 몸이란 성명이 부끄럽소 / 殊方還愧姓名通
천고에 주의 있어 신정에 빚은 눈물 / 千秋周顗新亭淚
바다에 뿌려본들 마를 줄이 있으랴 / 空灑滄溟水不窮
하였더니, 그 전편(全篇)을 얻어 보지 못함이 유감이려니와 그의 성명도 전하지 않음이 한스러울 뿐이다.
《석림시화(石林詩話)》 섭몽득(葉蒙得) 저(著) 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었다.
“고려가 태종조(太宗朝)로부터 오랫동안 조공을 바치지 않더니, 원풍(元豐) 초년에 이르러서 비로소 사신을 보내어 조회하매 신종(神宗)이 장성일(張誠一)을 관반(館伴)으로 삼고는, 그에게 다시 조회하는 뜻을 물었더니, 그는 답하기를,
‘우리나라가 거란과 더불어 이웃이 되었더니 그들의 주구(誅求)에 견디지 못한 국왕(國王) 왕휘(王徽)문종(文宗)의 휘 는 늘 《화엄경(華嚴經)》을 외어 중국이 재생하기를 빌었는데, 하룻저녁 꿈에 별안간 이 경사에 몸이 이르러서 성읍과 궁실의 번영함을 샅샅이 구경하고 꿈을 깨자, 이곳을 연모하여 즉시로 시를 읊으셨는데,
악한 인연 어이하여 거란에게 이웃되어 / 惡業因緣近契丹
한 해에 바친 공물 몇 가지나 괴롭혔네 / 一年朝貢幾多般
이 몸에 날개 돋쳐 먼 중국에 왔건마는 / 移身忽到中華裏
애달파라 깊은 대궐 누수 소리 날 새려네 / 可惜深宮滴漏殘
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전수지(錢受之 전겸익(錢謙益). 수지는 자)의 이른바,
김모재(金慕齋)가 지은 시인데 그의 본집(本集 《모재집(慕齋集)》)에 실려 있다. 수지가 《황화집(皇華集 화찰 저)》에 발(跋)을 달 때에 이 시를 들어서 조롱하였다. 그러나 그 실상은 화홍산(華鴻山)찰(察)이 조서를 받들고 우리나라에 왔을 때에 비로소 작용(作俑)한 것이다. 예를 들면,
넓디넓은 이 들판엔 가이 없는 물이요 / 廣野無邊水
기나긴 저 하늘엔 기러기 한 점뿐일러라 / 長天一點鴻
라는 따위가 곧 그것이다. 이는 야(野) 자는 넓게 쓰고, 천(天) 자는 길게 쓰며, 수(水) 자는 그 편방(偏傍)을 떼어서 무변(無邊)이 되고, 홍(鴻) 자는 비점(批點)을 쳐서 한 점(點)이 된다. 이를 일러서 두 글자의 뜻을 포함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배신(陪臣)이 원접사(遠接使)로서 용만(龍灣)에 가자면 반드시 사학(詞學)에 능통한 선비를 묘선(妙選)하여 종사(從事)를 삼아서 별안간 나타나는 응수(應酬)에 대비하였으며, 조사(詔使)는 역시 도중에서 으레 이러한 문제를 구상하여 두는 법이다. 이는 접반(接伴)을 곤란하게 하기 위함이다. 당시의 접반을 맡은 이들도 또한 반드시 이러한 문제를 미리 연습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것이 드디어 한 예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를 기뻐서 함은 아니거늘, 수지가 홍산을 위하여 이 《황화집》에 발을 쓸 때에 그 실상(實狀)은 모두 없애 버리고는 다만 우리나라 사람의 한 글귀를 뽑아내어 웃음거리를 삼았을뿐더러 또 그들과 함께 창수를 하지 말라고 경고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동국(東國) 인사의 마음을 후련하게 할 수 있겠는가. 내 일찍이 이 일을 들어서 유식한(兪式韓)에게 이야기 하였더니 식한은 곧 이를 적어서 품속에 간직하되 마치 귀중한 보물을 얻은 듯이 기뻐하였다.
최간이(崔簡易)의 〈삼일포시(三日浦詩)〉에,
갠 봉우리 서른 여섯 조개인 양 나비 눈썹 / 晴峰六六斂螺蛾
흰 해오라기 쌍을 지어 맑은 물결 희롱할 제 / 白鳥雙雙弄鏡波
사흘을 바장이곤 님은 다시 못 오시니 / 三日仙遊猶不再
십주 아름다운 곳이 많은 줄을 알았노라 / 十洲佳處始知多
라 하였다. 내 일찍이 사선정(四仙亭)에 올랐더니 심백수(沈伯修)가 이 시를 새겨서 정자 위에 걸었으나 이는 결코 가작은 아니다. 세상에서 전하는 말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었다.
“간이(簡易)가 왕감주(王弇州)만나러 갔더니 그는 공무가 산처럼 많이 쌓여 있어서 수십 명의 서리(書吏)가 번차례로 문서를 아뢰는데, 감주는 교의에 기대고 앉아 파리채를 휘두르면서 좌수우응(左酬右應)하되, 결재가 몹시 빠르매 뭇 사람들의 붓이 일제히 움직여서, 잠깐 사이에 구름처럼 사라져 버리고 또 10여 명의 청년이 각기 그들의 과작(課作)한 시(詩)와 문(文), 또는 소품(小品)ㆍ서종(書種) 등을 바치면 감주는 곧 붉은 먹으로써 비점(批點)을 치며 빨리 넘기는 손에는 붓이 멈춰지지 않았다. 간이는 이를 보고 크게 경복(驚服)하여 시자(侍者)더러, ‘노야께서는 전에도 늘 저러시고 계셨던가.’ 하고 물었더니, 그는 대답하기를, ‘오늘은 마침 자리가 조용하여 조금 한가하신 편입니다. 노야께서는 전일에 벌써 시 1만 수(首)를 읊었으며 글 천 권을 지으셨답니다.’ 한다. 간이는 한참 잠자코 풀이 죽어 소매 속에 간직하였던 자기의 글을 내어서 가르침을 청하였더니 감주는, ‘글짓기에 뜻을 둔 분임은 알 수 있겠으나 다만 글 읽은 게 많지 못하고 문견이 넓지 못하니, 이제 돌아가서 창려(昌黎)의 글 중에서 〈획린해(獲麟解)〉를 5백 번만 읽고 나면 마땅히 글 짓는 혜경(蹊逕)을 알 것이오.’ 하였다. 간이가 크게 부끄럽고 한스러워서 감주를 만났던 일을 깊이 숨기고는 글쓸 때에 일부러 뒤틀린 버릇으로 기괴한 글을 썼으니, 이는 이우린(李于鱗 명(明) 문학가 이반룡(李攀龍). 우린은 자)에게 배운 것이라 하였다. 우린은 원래 감주를 가장 두려워하는 바이므로 이것으로써 그를 한 번 누르려던 것이다.”
허균(許筠)주 태사(朱太史) 지번(之蕃)을 접대할 때에 주(朱)에게,
“일찍이 감주를 보신 일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주는,
“일찍이 계사년(1593년) 봄에 태창(太蒼 강소성에 있는 지명)에 가서 감주에게 배움을 청하였더니, 감주는 그때에 남사구(南司寇)로서 치사(致仕)하였는데 얼굴은 중인(中人)에 비하여 지나침이 없으나, 눈빛이 별 같고 서재를 화원(花園)에 쌓고 문도를 모아서 술 마시며 시를 읊는데, 감주는 날마다 5ㆍ6말의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고, 누구라도 시문(詩文)을 청하는 이가 있으면 시비(侍婢)로 하여금 음악으로 아뢰게 하면서 먹을 갈며 종이를 펴는 것이 마치 풍운과 귀신이 이는 듯이 빠릅니다.”
한다. 그는 또,
“그러면 감주도 누구를 두려워하는 이가 있던가요.”
한즉, 주는,
“공이 평생에 두려워하고 심복하는 이는 오직 창명(滄溟 이반룡의 호) 한 분이 있을 뿐이니, 그는 매양 글귀를 생각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이우린(李于麟)의 〈진관시(秦關詩)〉에,
푸른 용이 멀리 걸리니 진천에 비 내리고 / 蒼龍遠掛秦天雨
돌 말이 길이 우니 한원에는 바람 이네 / 石馬長嘶漢苑風
를 높은 목소리로 읊었으니 그는 어찌 두려운 이가 없으리요.”
하고 답하였다.
심분(沈汾 남당(南唐) 때의 문학가)의 《속신선전(續神仙傳)》에 이르기를,
“신라(新羅)의 빈공(賓貢) 진사(進士) 김가기(金可紀 신라 때의 문학가)가 신선이 되었다.”
고 하였는데, 장효표(章孝標)의 〈송김가기귀신라(送金可紀歸新羅)〉라는 시에,
당나라에 과거 하여 말소리도 닮았더니 / 登唐科第語唐音
해돋이를 바라보곤 고국 생각 간절하다네 / 望日初生憶故林
일엽편주 바람 일 제 고래 등에 나는 듯이 / 風高一葉飛魚背
맑은 호수 그 가운데 삼신산이 솟아나네 / 湖淨三山出海心
라 하였으니, 김가기가 본국(本國)으로 돌아온 것은 명확한 일이다. 그런데 《속신선전》에는,
“가기가 종남산(終南山) 자오곡(子午谷)에 살고 있더니, 그 뒤 3년 만에 뱃길로 본국에 돌아갔다가, 다시 와서 도복(道服)을 입고 종남산에 들어가 음덕(陰德)을 힘써 행하더니, 당(唐)의 대중(大中) 11년(857년) 12월에 별안간 표문(表文)을 올리기를, ‘신(臣)이 옥황(玉皇)님의 조서를 받자와 명년 2월 25일에 마땅히 하늘에 오르겠나이다.’라고 하였다. 선종(宣宗)이 이를 이상히 여겨서 궁녀(宮女) 네 명과 향악(香樂)과 금채(金綵)를 하사하고, 또 중사(中使) 두 사람을 보내어 가까이 모시게 하였더니, 그날에 이르러 과연 채색 구름과 난새ㆍ학새와 저ㆍ퉁소와 금ㆍ석과 깃일산과 깃발이 공중에 가득하더니, 그는 학을 타고 승천하였다. 조사(朝士)나 서민(庶民)을 나눌 것 없이 구경하는 이가 산골짜기에 모여서 누구든지 우러러 절하며 이상하게 여기지 않은 이가 없었다.”
하였고, 한무외(韓无畏)의 《전도록(傳道錄)》에는, 또,
“김가기가 최승우(崔承祐)와 중 자혜(慈惠)와 더불어 신원지(申元之)를 좇아서 도술(道術)을 배우더니, 종리 장군(鍾離將軍)과 지선(地仙) 2백의 무리를 만났다.”
고 일렀으나, 이는 아마 부회(傅會)한 이야기인 듯싶다.
나의 벗 나걸(羅杰) 중흥(仲興 나걸의 자)은 글 잘하고 괴걸(魁傑)한 선비이다. 그는 역리(易理)에 깊고 평생에 종(鍾 조위(曹魏) 때의 서예가 종요(鍾繇))ㆍ왕(王 왕희지(王羲之))의 서법(書法)을 사랑하여 휴지 한 장이나 편지 한 쪽을 얻게 되면, 언뜻 종이 뒷장에 예학명(瘞鶴銘) 두어 글자를 쓰다가 때로는 종이가 부족하여 점이나 획을 마음껏 쓰지 못할 경우에는 붓을 움직여 종이 밖에까지 뻗어서, 앉은 자리가 모두 검게 하는 까닭에 만일 문밖에 중흥의 나막신 소리가 나면 반드시 먼저 연구(硯具)를 감춘 뒤에 나가서 맞이하고, 중흥이 방에 들어오자 반드시 먼저 좌우(左右)를 살펴서 종이와 붓을 찾아도 눈앞에 뜨이지 않은 연후에야 비로소 인사를 교환하게 된다. 그의 진솔함이 이와 같았다.
지난 병신년(1776년) 동짓달에 그는 신 서장(申書狀) 사운(思運)을 따라서 연경(燕京)에 들어갔으니, 그때의 정사(正使)도 곧 금성위(錦城尉)로서 선비에 대한 대우가 높아서, 그에게 아무런 검속을 가하지 않고 부채와 환약을 공급하기도 하려니와, 자주 역관에게 타일러서 그의 통행을 편리하게 하였으나 중흥의 천성이 몹시 진솔하므로 이르는 곳마다 저지를 당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마음껏 유람하지 못하였을 뿐더러 중국의 이름 높은 선비 한 사람도 만나지 못하였다 한다. 그가 연경 길을 떠날 때에 내가 송도(松都)까지 전송하였다. 그가 돌아오자 중국의 제도를 모방하여 태평차(太平車) 한 대를 만들어서 그의 처자를 태우고는 적상산(赤裳山 전북 무주(茂州)에 있다) 속으로 들어간 지 이제 벌써 4년이 되어도 보이지 않는다. 이내 내가 이 길을 떠날 때에 상자 속에 두었던 친구들의 서찰과 시문을 찾아서 다시 간직하려다가 중흥이 옛날에 쓴 시를 발견하였는데 행초(行草)로 쓴 것이 자못 찬란하였다. 곧 행탁(行槖)에 집어넣었던 것을 이에 기 귀주(奇貴州)에게 내어 보였더니 기는,
“창건하고도 침울하며 그의 격력(格力)은 흡사 노두(老杜 두보를 높인 말)와 같아.”
하고는 크게 칭상(稱賞)하였다. 그의 〈우성(偶成)〉에,
산 사립문 비었는데 옷갓을 다 버리고 / 山扉寥廓棄冠巾
이 몸이 늙어갈수록 한가한 일뿐이라네 /老去漸能幽事親
빈 뜰에 홀로 앉으니 햇빛만 고요코야 / 階除留對日華靜
공중에 지나는 구름 한 조각 또 한 조각 / 空外翻過雲片新
꾀꼬리 어디서 오자 푸른 숲에 울어 있고 / 黃鳥忽來啼綠樹
아롱진 꽃 수없이 청춘을 수놓는다 / 斑花旡數度靑春
어느 것 한 물건이 내 뜻을 새오리요 / 知旡一物違吾意
하느님 길러 주시는 그 은덕을 저버리랴 / 不負皇天長育辰
하늘가의 금서산은 산 밖에 또 산이고 / 天外錦西山復山
요즈음 집을 지니 한가함이 늘상이라 / 近來卜宅不離閒
외로운 봉우리 갠 바위 공중에 비겼구나 / 孤峰晴石依空翠
벼랑 길 깊숙한 꽃 점점이 아롱졌네 / 側徑幽花點細斑
나는 새도 조심스레 비 맞은 채 지나가고 / 鳥避誤疑沾雨過
꿀벌은 너도 나도 꽃향기로 배불리네 / 蜂窺爭占飫香還
흥겨운 그날 그날 청려장을 짚고 일어 / 興長日日扶黎杖
보고 읊고 읊고 보니 객의 시름 사라지네 /一望一吟開旅顔
흑치 장군(백제의 장군 흑치상지(黑齒常之)) 전장터서 그 동쪽에 자리 잡아 / 戰經黑齒郡之東
타향살이 몇 해런고 일일마다 다 잘 아네 / 久住殊方事盡通
깊은 산 새벽 구름 골짜기에 잠겨 있고 / 峽曉雲移幽洞翠
시냇가 저녁놀은 옛 성에 붉었구나 / 澗曛日隱古城紅
늦게 일고 일찍 잠도 멋대로 하려니와 / 晩興早寢從他好
짧은 노래 긴 읊음이 그 맛이 무궁하구나 / 短咏長吟不自窮
다만 지체하여 흥취마저 없다 하면 / 若道淹留旡逸興
나그네 이 시름을 어느 때나 씻으리요 / 何時得豁旅愁空
라고 하였고, 또 그의 〈불매(不寐)〉에는,
밤 들어 산 구름은 보암직도 한져이고 / 入夜喜看連峽雲
먼 허공에 붉은 빛이 어지러이 떠오르네 / 遙空漸改赤紛紛
처마를 향해 앉자 새 소리도 고요하곤 / 對簷獨坐息喧雀
베개 괴고 잠깐 졸매 모기들이 모여드네 / 支枕乍眠還聚蚊
산 나무 시냇 모래 부질없이 헤어 볼까 / 峰樹溪沙漫欲數
남기성과 북두성은 저절로 무늬로다 / 南箕北斗自成文
시름이 병이 된들 무엇이 해로우랴 / 未憐愁劇添新病
아름다운 시를 낳아 비단에 수놓은 듯 / 剩得詩如刺繡紋
이라 하였고, 또 〈오침(午枕)〉에는,
낮 졸음에 잠겼더니 날씨가 찌는 듯이 / 昏昏午睡困炎蒸
모든 일에 게을러서 하는 수가 없구나 / 萬事疎慵著不能
책권을 펴 두니 엿보는 건 제비이고 / 未卷牀書窺紫燕
벼루에 먹물 고여 파리를 배불리네 / 常餘硯墨飽靑蠅
길 지나던 손님들이 부질없이 찾아오곤 / 客過小徑虛相問
밭 이랑이 거치니 아내마저 밉구나 / 妻對荒畦久欲憎
맑은 빛이 별안간에 달돋이를 보고서는 / 忽得淸光看月出
붉은 해가 솟는가봐 그릇되이 의심코녀 / 錯疑赫日碾空昇
라고 하였다.
귀주(貴州)는 이에 대하여 비평하되,
“실로 명구(名句)가 많긴 하나 이따금 음률에 맞지 않은 것이 있다.”
하니, 이는 대개 우리나라 음운(音韻)이 중국의 것과 같지 않으므로 가끔 음률에 어긋남이 있었던 것이다.
박충(朴充)과 김이어(金夷魚)는 모두 신라(新羅) 사람으로서 당(唐)에 들어가 빈공(賓貢) 진사(進士)에 합격하였다. 당 장교(張喬 당(唐) 소정 때의 문학가)의 〈송김이어봉사귀본국(送金夷魚奉使歸本國)〉이라는 시(詩)에,
바다를 건너와서 선적(빈공과의 학적(學籍))에 올랐더니 / 渡海登仙籍
고향에 돌아갈 젠 한의(중국의 문물(文物))를 갖추었네 / 還家備漢儀
라 하였고, 장교는 또 〈송박충시어귀해동(送朴充侍御歸海東)〉이라는 시에,
하늘가에 떠나온 지 이제 벌써 스물 네 해 / 天涯離二紀
대궐에 드나들어 세 임금을 섬겼구나 / 闕下歷三朝
라고 하였더니, 중국의 인사들이 나와 처음 만날 때에 반드시 먼저 항해(航海)의 노정과 어느 곳에서 상륙하였는가를 묻기에, 나는 줄곧 육로를 따라 요동으로부터 산해관을 들어 연경에 닿았다고 답하면 그들은 혹시 믿지 않은 이가 있어서,
바다에 건너와서 선적에 올랐더니 / 渡海登仙籍
라는 글귀를 외어 고증(考證)을 삼으니, 이는 우리나라가 저 먼 바다 밖에 있는 유구(琉球)나 구라(毆邏 구라파)와 같은 나라인 줄로 아는 모양인즉 중국 사람들이 가끔 무식하기가 이와 같았다.
이무관(李懋官)이 묵장(墨莊)을 찾았을 때에 반추루(潘秋樓)에게 시를 청했더니, 묵장은 한림서길사(韓林庶吉士) 이정원(李晶元)이니 촉(蜀)의 금주(錦州) 사람이요, 추루는 반정균의 호이다. 반(潘)은,
“내 앞날에 시를 쓸 때 제법 생각을 허비하여 몹시 곤작(困作)이었기 때문에 시가 많지 못함을 한했더니, 요즈음 운철소(惲鐵簫 청(淸)의 문학가)의 한류(寒柳)를 읊은 책자(冊子)를 읽은즉, 왕추사(王秋史 청(淸) 문학가 왕평(王苹). 추사는 자)가 그 뒤에다 네 편의 시를 썼으며, 이 버들은 곧 명(明) 은 상국(殷相國 미상)의 통악원(通樂園) 옛 나무였기에 느낌이 있어서 읊되,
서러운 이내 심사 화공에다 얘기할까 / 愁心都付畫工論
애처로운 긴 가지가 갯마을이 꿈에 드네 / 凄絶長條夢水邨
바다 한 편 묵은 정자 명사들은 흩어지고 / 海右亭荒名士散
하늘가 지는 잎은 옛 동산만 남았다네 / 天涯木落廢園存
반만 남은 지새는 달 봄 두고 이별할 제 / 半規殘月春留別
석양 빛 어제대로 저녁 넋을 거두었네 / 一例斜陽暮斂魂
예순 해를 읽어 오던 곱게 꾸민 그 책들을 / 六十年來看粉本
먹 향기 종이 빛깔 티끌 속에 침침할 뿐 / 墨香牋色又塵昏
그 둘째는,
슬슬 동풍 고루 불어 씻어 간 곳 새로운데 / 看遍東風窣地新
잠긴 가지 나는 가지 모두가 정이 얽혀 / 蘸波吹絮摠情塵
푸른 잎 매미 울던 그곳이 그리웁고 / 可憐碧葉吟蟬地
붉은 난간 말 매던 이 찾을 길 전혀 없네 / 不見紅欄係馬人
낡은 다락 그림자에 늙은 두보 슬퍼했고 / 衰影驛樓傷老杜
시름 어린 이 마음에 털보 그대 추억되오 / 離悰門巷憶髯秦
자주(自注) : 진관사(秦關詞)에 이르기를, “꽃 밑에는 거듭 문이요, 버들 가에는 깊은 마을이다.”라고 하였다.
작화산 저 기슭에 우뚝 섰는 가지 밖에 / 鵲華山麓髡枝外
맑은 호수 가에 앉아 수건 씻는 이만 뵈네 / 只有明湖冷濯巾
그 셋째는,
화가나 시인들이 한꺼번에 사라졌고 / 畫人吟子一時稀
아름드리 푸른 숲도 엉성해진 옛 성일네 / 減盡金城翠十圍
언덕 기슭 누운 가지 저문 눈 속 비껴 섰고 /緣岸臥枝欹暮雪
어둔 빛이 스민 다락 겨울 해를 띠었구나 / 入樓暝色帶冬暉
떨어진 잎 숨 죽인 채 소리도 적거니와 / 靜中黃葉旡多響
아득한 까치마저 두어 점이 날아가네 / 遠處昏鴉數點歸
오히려 진흙 젖은 부질없는 한이 있어 / 猶有沾泥閒恨在
다시금 봄이 온단들 한목 날지나 말아다오(버들꽃을 말한다) / 逢春莫更作團飛
그 넷째는,
칠십천 소리소리 돌 절구질 하는 듯이 / 七十泉聲亂石舂
초라한 두 나무에 들 서리 자욱하네 / 兩株憔悴野霜濃
전조에 세운 누대 모래톱이 남아 있고 / 前朝臺榭沙痕在
늙을 무렵 변방살이 숲 그늘이 층층코녀 / 晩歲關河樹影重
우연히 선비 위해 푸른 눈을 지어보나 / 偶爲士流靑眼放
흡사 기생처럼 흰 머리로 서로 만나 / 恰如女妓白頭逢
오동꽃 떨어지곤 산 생강이 늙다 한들 / 桐花零落山薑老
왕랑의 아름다운 얼굴 뉘라서 알아볼까나 / 誰識王郞濯濯容
라고 하였습니다.”
한다. 이에서도 한인(漢人)들이 접하는 것마다 감흥이 많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이것을 형산(亨山) 제공(諸公)에게 보였더니, 모두 슬픈 빛으로 눈물을 뿌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남약천(南藥泉) 구만(九萬)이 어사(御史)로 순행하다 성주(星州)에 이르러서, 밤에 본 고을의 선생안(先生案)을 열람하다가,
“제말(諸沫)은 만력(萬曆) 계사(1593년) 정월 아무 날에 도임(到任)하여 4월 아무 날에 파귀(罷歸)하였다.”
라는 말을 발견하고, 그는 우리나라에 제(諸)의 성(姓)을 지닌 이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기에, 자못 괴이하게 여겨서 윤형성(尹衡聖)에게 물었더니, 윤(尹)은,
“중국 강(江)ㆍ절(浙) 사이에 제씨(諸氏)가 살고 있으니, 제말의 조상은 아마 중국으로부터 나왔을 것이며, 임진왜란 때에 제말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쳐서 그가 향하는 곳마다 승리하니, 이름이 곽재우(郭再祐)와 같이 높았다오.”
라고 답하였다 한다. 이 일은 《약천집(藥泉集 남구만의 시문집)》 중에 실려 있다. 약천과 같은 박식으로도 오히려 백 년 이내인 제말의 사적을 알지 못하였는즉, 그가 미천한 계층의 출신인 줄도 짐작할 수 있겠다. 그는 비록 공을 세움이 이렇다 했더라도 이름이 그만 묻혔으니, 어찌 그 억울함이 원혼이 되지 않았겠는가.
성주에 살고 있던 정석유(鄭錫儒)가 급제(及第)에 오르기 전에, 본 고을의 자제들과 함께 공령(功令 과체(科體)의 시문(詩文))을 짓느라고 동헌(東軒)에 유숙하니, 그 집 뒤에는 매죽당(梅竹堂)이 있고 당 앞에는 지이헌(支頤軒)이 있었다. 하루는 정(鄭)이 지이헌 속에서 홀로 거니는데 때마침 달이 몹시 밝았다. 별안간, 검은 사모(紗帽)를 쓰고 붉은 도포(道袍) 입은 이가 대밭 속으로부터 나오더니 수염을 쓰다듬으며,
“나는 이 고을 옛 목사(牧使) 제말이다. 나는 본시 고성현(固城縣)에 살던 백성으로 임진의 난을 당하여 의병을 일으키고 왜적을 쳤으매, 조정(朝廷)에서 특히 성주 목사(星州牧使)를 제수(除授)하였다. 저 웅해(熊海)ㆍ작영(斫營)ㆍ정진(鼎津) 등지에서 왜적을 맞으면 깨뜨리지 못한 적이 없었으나, 당시의 격문(檄文)이 없어지고 역사가 전하지 못하였으니, 그때 정기룡(鄭起龍) 같은 여러 사람은 모두 나의 비장(裨將)이었다.”
하고는, 이내 허리에 찼던 보검(寶劍)을 뽑으면서,
“이 칼로써 일찍이 왜장(倭將) 몇 놈을 베었다.”
한다. 그는 이마 위에 불꽃이 펄펄 이는 듯하고 성기고 뻣뻣한 수염이 움직이면서 시를 읊었다.
머나먼 산 길에선 구름과 함께 예고 / 山長雲共去
높디높은 하늘에는 달과 함께 외롭네 / 天逈月同孤
그는 또 말하기를,
“나의 무덤은 칠원(漆原 경남 창원)에 있으나, 자손이 없어서 이제껏 묵고 있다.”
하고는, 표연히 읍하고 물러가서 다시 대숲 사이로 들어가 버렸다. 날이 밝은 뒤에 함께 그 일을 이야기한즉, 그들도 평일에 비록 선생안(先生案)에 제말이라는 이가 있었으나, 성(姓)도 쓰여 있지 않았음을 의심하였을 뿐, 그의 공렬(功烈)이 이렇게 갸륵함을 알지 못하였다가, 이제 별안간 알게 되어 감탄하고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감사(監司) 정익하(鄭益河)가 이 이야기를 듣고, 정석유를 불러 상세히 물은 뒤에 바야흐로 장계(狀啓)를 올려 조정에 알리려 하였으나, 마침 벼슬이 갈렸으므로 여의치 못하고, 다만 칠원에 통첩하여 그의 무덤을 수축하고 묘지기 두 호(戶)를 두어 지키게 하였는데, 칠원의 원으로 있던 어사적(魚史迪)이 낮에 졸다가 꿈에 한 관인(官人)이 와서 말하기를,
“나의 무덤은 이 동헌에서 몇 리쯤 되는 아무 마을 아무 좌향(坐向)에 있다. 감사가 마땅히 무덤을 수리하라 명령하실 테니, 그대는 유의할지어다.”
한다. 꿈을 깨자 이상히 여겼더니, 그날 저녁에 통첩이 이르렀으므로 어사적이 드디어 그 무덤을 크게 수리하였다 한다. 제말은 실로 시골뜨기여서 살아 있을 때는 글을 알지 못하였으므로, 비록 이런 갸륵한 공적이 있었다 해도 스스로 나타내지 못하고 본즉, 죽어서 그 억울한 영혼이 맺히어 흩어지지 않음이 이와 같을 뿐더러, 그는 또 능히 시를 읊을 줄 알았다 하였으니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신 평사(辛評事) 경연(慶衍)이 나이 열두 살에 배천(白川)에서 서울로 올라갈 제, 길에서 명(明)의 조사(詔使)를 만났다. 때마침 역놈이 신(辛)이 탔던 말을 빼앗았으므로 그는 사정이 몹시 궁박하였다. 그는 도보로 조사의 점심참에 닿아 하소연하였더니, 조사는 그의 얼굴이 백옥처럼 맑음을 보고 사랑하여, 길가에 서 있는 장승(長丞)을 가리키면서,
“그대 능히 이를 두고 시를 읊는다면 마땅히 말을 주리라.”
하여, 신이 운자(韻字)를 청하니, 조사가 운자를 내어 주었다. 신은 곧 대답하기를,
초 패왕(항적(項籍))의 혼령인 양 천추에 남아 있네 / 楚伯千秋尙有靈
오강을 건널 체면 없어 형체만 남았구나 / 渡江旡面只存形
당년에 한스런 일은 음릉 길을 잃은 것이 / 當年恨失陰陵道
언제나 길에 서서 앞잡이 노릇 하렵니다 / 長向行人指去程
하매, 조사가 크게 놀라서 탄식하여 칭상하고 문방(文房)의 여러 보물을 주었다 한다. 이 글이 무명씨(無名氏)의 작으로 《명시선(明詩選 명(明) 이반룡(李攀龍) 저)》에 실렸으며, 그는 광해(光海) 때 과거에 올라서 벼슬이 평안도(平安道) 병마(兵馬) 평사에 이르렀을 때에, 서쪽 변새에 일이 있어서 청천강(晴川江)을 아홉 번 건넜으며 이내 관에서 죽었는데, 그의 혼령이 여러 번 나타났다. 그 뒤 수십 년에 그의 벗 아무개가 그를 관서(關西) 도중에서 만났는데, 그는 친구의 자를 부르며 옛 일을 이야기함이 평소와 다름없었다. 그 벗에게 부탁하기를,
“나의 자손이 심히 가난한데 유물이 있는 것을 미처 전하지 못했네. 보도(寶刀)와 옥관자 한 쌍이 우리집 들보 위에 얹혀 있어도 집 권속들이 아무도 아는 이가 없으니 그대는 부디 이 말을 전해 주소. 이 두 가지 물건을 판다면 많은 값을 받을 것이네.”
하매, 그의 벗은 크게 이상히 여겨 돌아오자 곧 그 자손에게 이야기하여 함께 그 집을 들춰서, 마침내 보도와 옥관자를 발견하였다 한다. 우리나라에서 길 위에다가 매 10리 5리 마다 나무로 장군과 같이 깎은 등선을 세우고 지명과 이정을 기록하여 두는데, 이를 보통 ‘장승’이라고 부른다. 그것이 중국의 장정(長亭)ㆍ단정(短亭)과 같으므로, 우리나라 시민들은 흔히들 장정을 빌려 쓰면서 혹은 중국의 이정표도 우리나라 장승과 같은 줄만 알고, 또는 장정을 정장(亭長)으로 잘못 알기도 하니 심히 고루한 일이다. 내가 중국에 들어와 보니, 길에는 장정표를 세우고 아무 땅이라 쓰고는, 그 좌우에는 단정표를 세우며, 동으로 아무 데까지가 몇 리요, 서로 아무 데까지가 몇 리라고 써 있었다. 이제 열하에 오는데 장정 밖에는 장정에 흔히들 신(汛) 자를 썼는데 무엇을 말한 것인지를 모르겠다.
신장(辛丈) 돈복(敦復)씨가 일찍이 나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중종(中宗) 때 남주(南趎 조선 때 학자. 자는 계응(季應))가 열아홉 살에 급제(及第)하여 문형(文衡 대제학(大提學))의 천에 올랐으며 벼슬이 전적(典籍)에 이르렀다. 그는 어릴 때부터 이상한 일이 많았다. 매일 아침 글방 선생에게 글을 배우는데 결석할 때가 많으므로 집안 사람들이 가만히 그의 뒤를 밟은즉, 도중에 지레 어떤 숲 속으로 들어갔다. 한 정사(精舍)가 있는데 주인의 행동이 맑고 훤하여 속기(俗氣)가 없었다. 주가 그의 앞에 절하고 나아가서 글을 강론받고 반드시 해가 저문 뒤에야 돌아오곤 하였다. 집 사람들이 물으면 문득 괴변으로 대답하더니, 그 뒤 신선의 수련술(修鍊術)을 행하였고 그가 급제하자, 기묘사화(己卯士禍)를 만나 곡성현(谷城縣)에 귀양갔고, 이내 그곳에서 집을 정하고 살았다. 하루는 종을 시켜 편지를 갖고 지리산(智異山)청학동(靑鶴洞)에 들여보냈는데, 오채가 영롱한 집이 있고 극히 정려(精麗)하며 두 사람이 살고 있는데, 하나는 운관(雲冠)과 자의(紫衣)요, 또 하나는 늙은 중이었다. 둘이 종일토록 바둑만 두기에 그 종은 하루를 묵고 편지를 받아 가지고 돌아왔었다. 종이 애초에 2월에 떠나 산에 들어갈 제는 초목이 바야흐로 무성하던 것이, 산을 나올 때에는 들판에서 익은 벼를 거두는 것을 보고 괴이히 여겨 물으니 곧 9월 초순이다. 남주가 죽을 때 나이가 30세였다. 널을 들어보니 유달리 가벼운지라, 집안 사람들이 관을 열고 본즉 빈 것이었고 그 안에 시가 쓰였는데,
창해에 떠난 배는 찾을 곳이 전혀 없고 / 滄海難尋舟去跡
청산에 나는 학은 흔적조차 뵈지 않네 / 靑山不見鶴飛痕
라 하였다. 그 마을 앞에 김을 매던 농부가 공중에서 흘러내리는 음악 소리를 듣고 쳐다본즉, 남주가 말을 타고 둥실 떠서 흰 구름 사이로 올랐다 한다. 지금 충주(忠州)에 살고 있는 진사(進士) 남대유(南大有)가 그의 방손(傍孫)이라 한다.”
한유(韓愈)의 시에도,
나무와 돌에도 요물이 생기더라 / 木石生妖變
하였지마는, 당(唐)의 말년에 소주(蘇州)에 살고 있던 중 의사(義師)는 나무로 새긴 부처를 만나면, 문득 한 군데 모아서 불살라 버렸다 한다. 우리나라 양주(楊州)회암사(檜巖寺)에 옛날부터 나무로 만든 큰 부처가 있어서 극히 영검스러우므로, 원근 사람들이 승속(僧俗)을 가리지 않고 모여들어 숭배해서 향화(香火)가 심히 성하였다. 나옹(懶翁 이성계(李成桂)의 스승으로 있던 중)이 처음 주지(住持)가 되어 이 절에 도임할 제, 뭇 중들에게 명하여 그 부처를 끌어 내어 불사르게 하였다. 모두들 놀라고 두려워하여 굳이 간했으나, 나옹은 듣지 않고 중 백여 명을 시켜 큰 동아줄로써 동여매라 하고 밀쳐당겼으나 털끝도 까딱하지 않았다. 나옹이 노하여 스스로 한 쪽 손으로 밀어 곧 넘어뜨리고 절 밖에 이끌어 내어 장작을 쌓고 태우니, 더러운 냄새가 견디지 못할 만큼 풍겼다. 대개 큰 뱀이 부처 뱃속에 서리어 있던 것으로 그런 뒤에는 오래도록 재환이 없었다 한다. 대체로 나무가 오랫동안 묵으면 접신(接神)이 되므로 허물어진 절간의 나무 부처에 많이들 이상한 요물이 붙는 법이니, 곧,
“나무와 돌에도 요물이 생기더라.”
함은 이를 말함이다. 오늘 저 반선(班禪)이 우리에게 준 부처는 길이가 거의 한 자나 될뿐더러, 아마 나무로 새긴 데다 금을 입힌 것인즉 이에는 어찌 요물이 붙지 않았을 줄 알리요. 창졸간에 이 물건을 받긴 했으나, 일행의 상하가 모두 꿀 단지에 손 빠뜨린 듯이 어쩔 줄을 모르는 판이다. 내가 밤에,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잘 구처하겠습니까.”
하고 정사께 물었더니, 정사는,
“벌써 수역(首譯)을 시켜 작은 궤짝을 만들어라 하였네.”
한다. 나는,
“잘 하셨소이다.”
하였더니 정사는,
“뭐가 잘했단 말인가.”
하기에 나는,
“이는 강에 띄우고자 하는 의미뿐이겠죠.”
하고 대답하였더니, 정사가 웃기에 나도 웃었다. 대저 이 부처를 길가 사찰에다 내어버린다면 중국의 노염을 입을까 두렵고 또 이를 이끌고 입국한다면 마땅히 물의(物議)를 일으킬 테니, 저들과 우리나라의 국경에서 순류(順流)에 띄워 바다에 추방하는 수밖에 없고 보니, 띄울 곳은 압록강(鴨綠江)이 가장 좋을 것이다.
정호음(鄭湖陰) 사룡(士龍)은 평생에 호사로이 지냈다. 나이가 젊을 때 예조 좌랑(禮曹佐郞)으로 박평성(朴平城) 원종(元宗)에게 나아갔더니, 평성이 때마침 수상(首相)이 되어서 별장 깊숙한 곳에 앉아 시비(侍婢) 수십 명을 시켜 호음을 인도하여 들어오게 하니, 호음이 겹문을 지나 들어오는데 곳곳이 아롱진 누각이요, 구비구비 붉은 난간이다. 평성은 못 위 반송(盤松) 그늘 밑에 앉았는데 좌우에는 시비들이 모두 비단 치마를 질질 끌고 번갈아가면서 진귀한 음식상을 올리고, 또 기생 몇 패가 풍악을 하면서 날이 다하도록 기쁜 잔치를 열었다. 잔치가 끝날 무렵에 호음이 공사(公事)에 대한 결재를 청했으나 평성은,
“이 늙은 사람은 애초에 무인(武人)이라, 다행히 풍운(風雲)의 제회(際會)를 만나 몸이 이 자리에 이르렀으니, 다만 스스로 마음을 기쁘게 하여 성세(盛世)의 은혜를 보답할 따름이므로 그대가 가진 공사는 돌아가서 본조(本曹)의 판서(判書)에게 물어보게.”
하고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호음은 망연히 어쩔 줄 몰랐다. 그리하여 그는 이 일을 평생에 연모하였으므로 늙을 때까지 호사를 계속하였다 한다. 이 이야기는 나의 6세조(世祖) 금계군(錦溪君)의 《기재잡기(寄齋雜記)》에 실려 있다. 그리고 세속에서 전하는 말에,
“호음이 평성의 이 일을 연모하여 호백구(狐白裘)를 훔치는 수단에 익숙하니, 그가 일찍이 강원 감사(江原監司)가 되었을 때 금강산(金剛山)에 들어가 정양사(正陽寺)에서 묵는데 순금 부처를 훔쳐서 드디어 크게 치부(致富)하더니, 나이 늙으매 그 일을 심히 참회하여,
정양사 깊은 곳 향불 태던 그날 밤에 / 正陽寺裏燒香夜
40년 그릇된 일을 거원인 양 깨우쳤네 /蘧瑗方知四十非
라는 시를 읊었다.”
한다. 내 일찍이 정양사에 놀 때 과연 바람벽 위에 이 시가 쓰여 있음을 보았다. 이제 삼사(三使)들의 선사받은 금부처는 모두 셋인즉 수천 냥의 돈을 얻기에는 어렵지 않을 것이며, 만일 호음으로 하여금 이 경우를 만나게 하였으면 반드시 저 정양사에서만 잘못을 깨달았을 뿐 아니리라. 내 부사와 이 이야기를 하고 서로 크게 한바탕 웃었다. 나는 또,
“이제 이 불상이 불행히도 나무 몸뚱이인지라 멀찍이 물리쳐 버렸지만, 만일 순금으로 된 몸이었더라면 이단(異端)을 물리치자는 논(論)도 아마 좀 생각할 점이 있겠지요.”
하고는, 서로들 허리를 잡았다.
장자(莊子 《남화경(南華經)》)에 이르기를,
“말 머리엔 굴레를 씌우고 소 코엔 코뚜레 꿴다.”
하였으니, 소의 코 꿰는 일은 옛날부터 그러함을 짐작할 수 있겠다. 우리나라 소는 난 지 겨우 7, 8삭이 되면 벌써 코를 꿴다. 왕형공(王荊公)의 시에,
미련한 저 소에다 코를 꿰지 않을 양이면 / 牛若不穿鼻
맷돌 방아 찧으려도 곧잘 되지 않으리라 / 豈肯推入磨
하였으니, 맷돌 방아도 그러하다면 하물며 수레 끌기나 밭 갈기야 어떠하겠는가. 이제 책문(柵門)에 들어온 뒤 열하에 이르기까지 호(戶)마다 기르는 소가 7ㆍ8두(頭) 이하가 없고, 혹은 3ㆍ40두에 이른다. 그런데 밭을 가나 수레를 이끄나 모두 뿔을 얽매어서 부리고, 하나도 코를 꿴 놈은 없었으며, 소는 모두 유달리 크되 집집마다 방목하였으며, 작은 아이 하나가 수십 마리를 몰 수 있으나 다만 코를 꿰지 않았을 뿐 아니라 역시 뿔도 얽매지 않았으니, 중국 사람들의 소치는 기술이 비록 우리에 미칠 바 아니었으나, 다만 코를 꿰지 않는 것은 역시 고금의 다름이 있는가 싶다. 그리고 진(晉) 두예(杜預 진(晉)의 학자. 자는 원개(元凱))의 상소(上疏) 중에도,
“전목(典牧)의 종우(種牛)가 4만 5천여 두나 있으나, 수레도 이끌지 않을뿐더러 늙을 때까지도 코를 꿰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라는 말이 있다. 이를 보아도 중국서도 옛날에는 부리는 소는 모두 코를 꿰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겠다.
강녀묘(姜女廟)의 주련(柱聯)은 문 승상(文承相)이 쓴 것이 가장 비장(悲壯)하다. 그 글에,
강녀가 죽지 않았고나 천 년 묵은 조각돌이 정렬하고 / 姜女未亡也千年片石猶貞
진황은 어디로 갔는고 만리성엔 원망만 쌓였구녀 / 秦皇安在哉萬里長城築怨
라 하였는데, 글씨도 몹시 기굴(奇崛)하고 과친왕(果親王) 윤례(允禮)가 쓴 시는 역시 전려(典麗)하다.
푸른 전나무 잎은 고생살이 나머지요 / 栢葉從來常自苦
매화꽃은 곱잖아도 향기로 한몫 보네 / 梅花終古不爲姸
그 글씨는 신화(神化)한 듯싶고, 또 건륭(乾隆) 을해년(1755년) 동짓달에 황삼자(皇三子) 등금거사(藤琴居士)가 쓴 시는 또한 산한(酸寒)하다.
늙은 솔 허물어진 담장 옛 사당이 보이고녀 / 松老頹垣見古祠
임 위해 죽은 강녀 그 일이 슬프구나 / 崩城姜女事堪悲
집 방춧돌 바라다가 기절을 이루고는 / 藁砧望斷成奇節
환패만 남았으니 옛 자태를 보는 듯이 / 環佩空餘識舊姿
돌에 뿌린 눈물 자취 그날의 한이러냐 / 石洒淚痕當日恨
예는 물 구슬퍼서 이내 생각 자아내네 / 水流鳴咽後人思
정자 기슭 옷을 털매 쓸쓸하기 짝이 없어 / 振衣亭畔凄涼甚
임의 그 어린 눈동자 이제 더욱 그리워라 / 猶憶凝眸睩曼滋
그 글씨는 더욱 민묘(敏妙)하다. 그리고 방류요수(芳流遼水)는 건륭황제(乾隆皇帝)의 어필이요, 경절처풍(勁節凄風)은 과친왕의 글씨였고 ‘망부석(望夫石)’이란 세 글자는 태원(太原) 백휘(白輝)가 쓴 것이다.
중국 사람들은 글자로부터 말 배우기로 들어가고 우리나라 사람은 말로부터 글자 배우기로 옮겨가므로 화(華)ㆍ이(彝)의 구별이 이에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말로 인하여 글자를 배운다면 말은 말대로 글은 글대로 따로 되는 까닭이다. 예를 들면 천(天) 자를 읽되 ‘한날천(漢捺天)’이라고 한다면, 이는 글자 밖에 다시 한 겹 풀이하기 어려운 언문(諺文)이 있게 된다. 설부(說部) 중에 《계림유사(鷄林類事)》가 실렸는데, 천(天)을 가른 한날(漢捺)이라 하였다. 작은 아이들이 애당초에 ‘한날(漢捺)’이란 무슨 말인 줄을 알지 못한즉, 더군다나 천(天)을 알 수 있겠는가. 정현(鄭玄)의 집 여종이 모두 《시경(詩經)》으로써 문답할 수 있었다 하여, 천 년 동안 아름다운 이야기가 떠돌고 있지마는, 그 실제에 있어서는 중국 사람들은 부인이나 어린이도 모두 문자(文字)로 말을 하므로, 비록 눈으로는 정(丁) 자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으나 입으로는 봉(鳳)을 토(吐)할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경(經)ㆍ사(史)ㆍ자(子)ㆍ집(集)은 모두 그들의 입에 익은 항용하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나라 사람이, 중국의 어린이가 시내를 격해서 어머니를 부를 때,
물이 깊어서 건너지 못하외다 / 水深渡不得
라는 말을 처음 듣고는 크게 놀라서,
“중국엔 다섯 살 먹은 아이가 입을 열자 시가 이룩되데그려.”
한다. 이는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그들은 말이 이러함이요, 무슨 뜻이 있어서 글귀를 이루려는 것은 아니다. 노가재(老稼齋)가 일찍이 천산(千山)에 놀러 갔다가 어떤 술 파는 촌 할미를 보고서,
“길이 궁벽하고 사람이 드문 이곳에 누가 술을 사 마시오.”
하고 물었더니 그는,
꽃 향내 풍기니 나비 옴도 저절로 / 花香蝶自來
라고 대답하였다. 여러 말이 아니되 사의(辭意)가 명창(明暢)하여 저절로 운치 있는 말이 되었다. 이는 다름 아니라, 글자로 인하여 말 배우기로 들어간 묘증(妙證)이다. 우리 집 소비(小婢)가 사람됨이 지극히 혼미(昏迷)하여, 어느 날 떡을 얻어 먹게 되었을 때, 엿을 얻어 가지고는 기뻐서 치하하는 말로,
하니, 이는 지패(紙牌 노름의 일종)에 유행되는 말이다. 그가 애초부터 파촉이나 관중을 아는 것이 아니었으나, 다만 그 둘이 다르지 않음을 알았은즉, 그 말은 저절로 맞아버린 것이다. 이제야 비로소 중국말이 알기가 어렵지 않을 뿐더러, 반드시 정씨(鄭氏)의 여종이 천고에 유식하기로 이름 높지 못한 것을 알았노라.
《청비록(淸脾錄)》 이덕무(李德懋)의 저 에 이르기를,
“삼한(三韓) 사람으로서 중국을 골고루 구경한 사람으로는 이익재(李益齋)이름은 제현(齊賢) 만한 이가 없을 것이다. 그의 유력(遊歷)한 것이 시(詩)에 나타난 것만 하더라도 정형(井陘)ㆍ예양교(豫讓橋)ㆍ황하(黃河)ㆍ촉도(蜀道)ㆍ아미(峨眉)ㆍ공명사당(孔明祠堂)ㆍ함곡관(函谷關)ㆍ민지(澠池)ㆍ이릉(二陵)ㆍ맹진(孟津)ㆍ비간묘(比干墓)ㆍ금산사(金山寺)ㆍ초산(焦山)ㆍ다경루(多景樓)ㆍ고소대(姑蘇臺)ㆍ도량산(道場山)ㆍ호구사(虎口寺)ㆍ표모묘(漂母墓)ㆍ탁군(涿郡)ㆍ백구(白溝)ㆍ업성(鄴城)ㆍ담회(覃懷)ㆍ왕상비(王祥碑)ㆍ효릉(崤陵)ㆍ장안(長安)ㆍ정장공묘(鄭莊公墓)ㆍ허문정공묘(許文貞公墓)ㆍ관용방묘(關龍逄墓)ㆍ망사대(望思臺)ㆍ무측천릉(武則天陵)ㆍ숙종릉(肅宗陵)ㆍ빈주(邠州)ㆍ경주(涇州)ㆍ보타굴(寶陀窟)ㆍ월지사자헌마(月支使者獻馬) 등이 있으니, 그 발자취가 이른 곳이 모두 웅장한 곳이어서,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미쳐 보지 못한 곳이었고, 그 시도 마땅히 동방 2천 년 이래의 명가(名家)가 될 것이다. 그 화려하고 곱고 밝고 맑음이, 삼한의 궁벽하고 고루한 누습(陋習)을 활짝 벗어 버렸으나, 이즈음 사람들은 딱하게도 익재가 곧 이제현임을 알지 못하고, 고군협(顧君俠 미상)이 《원백가시선(元百家詩選)》을 엮을 때도 고려 사람의 시는 한 수도 뽑히지 않았으며, 당시의 목암(牧菴)요공(姚公)과 염자정(閻子靜 원(元) 문학가 염복(閻復). 자정은 자)ㆍ장양호(張養浩 원(元) 문학가. 자는 희맹(希孟)) 등도 모두 익재의 시를 칭찬하였으나, 역시 한 수도 뽑힌 것이 없으니 이는 실로 괴이한 일이다.”
고 운운하였다. 익재의 무덤은 금천(金川) 지금리(只錦里) 도리촌(桃李村 개성(開城))에 있고, 그 밑에는 곧 익재의 구택(舊宅)이요, 구택에다 서원(書院)을 세워서 향례를 치르게 되었다. 나의 연암별업(燕巖別業)이 그 서원에서 십 리도 안 되는 가까운 거리에 있으므로, 나도 일찍이 한두 번 서원에 가서 그 유집(遺集 《익재난고(益齋亂藁)》)을 읽고서, 더욱이 《청비록(淸脾錄)》의 논평한 말이 철론(鐵論)임을 믿었다. 그의 〈사귀(思歸)〉에는,
늦은 가을 청신(양자강 위에 있는 지명) 숲은 비 속에 잠겨 있고 / 窮秋雨鎖靑神樹
해 저물녘 백제성(양자강 위에 있는 지명)엔 구름이 비꼈구나 / 落日雲橫白帝城
하였고, 〈이릉조발(二陵早發)〉에는,
주사(이이(李耳)의 벼슬 이름)의 약 솥에는 구름만 감돌고 / 雲迷柱史燒丹竈
문왕(주(周) 문왕) 비 피했던 능엔 눈마저 덮여 있네 / 雪壓文王避雨陵
하였고, 〈주행아미(舟行峨眉)〉에는
비에 쫓긴 송아지는 어점으로 돌아오고 / 雨催寒犢歸漁店
물결에 밀린 해오라기 손님 배를 따르더라 / 波送輕鷗近客舟
하였고, 〈다경루(多景樓)〉에는,
밤들어 풍경 울 제 포구에 밀물 들고 / 風鐸夜喧潮入浦
도롱이채 우뚝 서니 비 새는 그 다락을 / 煙簑暝立雨侵樓
하였고, 〈함곡관(函谷關)〉에는,
흙 주머니 그 입을랑 황하 북에 묶어두고 / 土囊約住黃河北
땅덩어리 둥글둥글 백일 서편 둘렀구나 / 地軸句連白日西
라고 하였다. 우리나라 시인(詩人)들이 중국의 고사를 쓸 때, 멋대로 차용하기는 했으나, 정말 눈으로 보고 발로 밟아서 체험한 이는, 오직 익재 한 사람이 있을 따름이다. 내 이제, 한 번 고북구(古北口)를 나오자 스스로 옛사람보다 낫다고 생각되었으나, 다만 익재에 비한다면 참으로 모자라는 것이 많음을 깨달았다.
《감구집(感舊集 왕사진(王士稹) 저)》에 청음 선생(淸陰先生 김상헌(金尙憲). 청음은 호)의 시가 실려 있었다. 대개 왕이상(王貽上 왕사진. 이상은 호)의 전처(前妻) 추평(鄒平) 장씨(張氏)는 강남(江南) 진강부(鎭江府)추관(推官) 만종(萬鍾)의 딸이요, 도찰원(都察院)좌도어사(左都御史) 충정공(忠定公) 연등(延登)의 손녀이다. 숭정(崇禎) 말년에 선생이 뱃길로 중국을 향하매, 길이 제남(濟南)을 거치게 되었다. 그때 장충정(張忠定)이 한 번 보고 곧 기뻐하여 엿새를 만류하고, 선생의 ‘조천록(朝天錄)’ 1권에 서(序)를 썼다. 이상이 선생을 익숙히 알게 된 것은 대개 그 처가를 통해서이다. 그가 선생의 시를 초록하여 실은 것은 다음과 같다.
늦은 가을 바닷가엔 기러기 처음 오고 / 三秋海岸初賓雁
깊은 밤 천문에는 객성 하나 번뜩인다 / 五夜天文一客星
폭군의 모진 손에 돌다리는 끊어졌고 / 橋石已從秦帝斷
은하성 높은 배에 사신 오길 허락했네 / 星槎猶許漢臣通
조각달 오경 깊어 수역의 성 머리에 / 五更殘月水城頭
외로이 역사 읊어 배 닿은 이 누구런고 / 咏史何人獨艤舟
동쪽 바다 향해 서서 돌아갈 길 찾지 않고 / 不向東溟覓歸路
북두성 의지하여 신주(중국의 별칭)를 바라보네 / 還依北斗望神州
남쪽 장수 북쪽 손님 모래톱에 모여 들어 / 南商北客簇沙頭
그림 새 푸른 주렴 몇 군데나 배 떴던고 / 畫鷁靑簾幾處舟
죽지사 함께 불러 팔 겨르고 지나가니 / 齊唱竹枝聯袂過
성 속에 연월 가득 이곳도 양주(양자강 운화가 통하는 곳)인 듯 / 滿城煙月似揚州
이들은 모두 이상이 이른바, 맑고 완순하여 가히 읊을 만하다는 작품이다. 이상은 당시 해내의 시종(詩宗)이었으므로 사대부들은 그의 척자(隻字)ㆍ편언(片言)에 대하여 다반(茶飯)처럼 입에서 떠나지 못하므로, 청음의 성명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선생의 천고 대절(大節)은 아는 이가 없었다. 학지정(郝志亭) 성(成)이 김숙도(金叔度 김상헌. 숙도는 자)의 몇 편 가작(佳作)을 들었으면 하고 청하기에, 나는 답하기를,
“저는 애초부터 그의 시를 외는 것이 없고, 다만 이번 걸음에 청음 선생의 6대손(代孫) 이도(履度)의 별장(別章)이 있습니다.”
한즉, 지정은 크게 기뻐하면서,
“이것 역시 기이한 일이군요.”
하기에, 나는 그 시를 내어 보였다. 지정이 두세 번 읊더니 그 뒤에 이 일을 그의 초록한 《용재소사(榕齋小史)》중에 다음과 같이 실었다.
“화산(華山 김이도의 호) 김이도(金履度)는 조선 사신 김청음 상헌의 6세손인데, 그의 〈봉별연암조경(奉別燕巖朝京)〉 원고(原稿)에는 ‘부연(赴燕)’으로 된 것을 지정이 ‘조경(朝京)’이라고 고쳤다. 이란 시에,
넓디넓은 저 연산은 사면에 벌여 있고 / 四面燕山濶
높다란 이 장성은 만 리를 뻗쳤구나 / 萬里秦城高
그 중에 말 달리며 가시는 임이시여 / 中有垂鞭者
백발이 성성하시니 먼 길에 수고할사 / 白髮行邁勞
그 둘째다.
경개하신 담헌(홍대용(洪大容)의 호)이요 / 耿介湛軒子
척당할사 연암님을 / 倜儻燕巖叟
사해가 넓건마는 그의 성명 다 알리라 / 海內知姓名
앞 가고 뒤따르니 높은 바람 한 가지라 / 高風屬前後
하고, 그 뒤를 이어서, ‘건륭(乾隆) 경자년 5월 23일에 화산 김이도는 쓰다.’라고 하였다. 그의 자(字)는 계근(季謹)이요, 글씨는 종요(鍾繇)와 왕희지(王羲之)를 본받았으니 동국(東國)의 문장 기사(奇士)이다. 그의 벗 박연암(朴燕巖)ㆍ한석호(韓錫祜)와 함께 시주로써 막역의 친구를 삼았더니, 이해 8월에 박연암이 공사(貢使)를 따라 북경에 와서 나와 함께 만나 서로 기뻐하였다. 이에 나는 화산의 증행시(贈行詩) 석 장을 얻어 읽은즉, 그는 사모(四牡 《시경》의 편명. 사신을 보내는 시) 황화(皇華 《시경》의 편명. 사신을 보내는 시)의 끼친 뜻을 깊이 지니었다. 나는 그 중 두 마디를 뽑아서 기록하였다.” 원시(原詩)에는, ‘수방지성명(殊方知姓名)’과 ‘고풍계전후(高風繼前後)’라 했던 것을 지정이 수방(殊方)을 ‘사해(四海)’로, 계(繼)를 ‘속(屬)’으로 고쳤다.
지정은 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연암의 족손(族孫) 남수(南壽)의 자는 산여(山如)요, 호는 금성(錦城)이니, 그는 얼굴이 아름답기가 관옥(冠玉 옥으로 꾸민 갓)과 같다 한다. 그의 〈증행(贈行)〉에,
머리가 세었다고 임은 슬퍼하지 마오 / 莫云頭已白
이 하늘 이 땅이란 잠깐인 듯 가 없어라 / 天地忽無窮
요동성 넓은 들에 필마로 돌아 들면 / 匹馬遼東野
한 번 채찍 휘두르매 만리의 바람 부네 / 一鞭萬里風
라고 하였다.” 금성(錦城)은 우리 관형이므로 남수가 금성 박남수 산여라고 썼던 것을 지정은 그릇 호인줄 알았다.
그는 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 나라의 고사(高士) 이재성(李在誠) 중존(仲存 이재성의 자)의 호는 지계(芝溪)인데, 연암의 부제(婦弟)이다. 그의 〈증행(贈行)〉에는,
압록강 두른 물은 띠처럼 되어 있고 / 鴨綠衣帶水
만 리라 저 장성은 묵어서 가올 것을 원고(原稿)에는 ‘연성(燕城)’이라 되었던 것을 지정이 ‘장성(長城)’이라 고쳤다. / 長城宿舂之
머나먼 이 길 떠나 오가는 나그네여 원고에는 ‘고래경유객(古來經遊客)’이라 되어 있었다. / 悠悠遠行客
역력히 알고파라 묻노니 누구누구 / 歷歷知是誰
라고 하였고, 또,
열 해나 지나도록 바위 틈에 숨은 선비 / 十載巖棲客
새벽에 행장 묶어 먼 길을 떠난다니 / 晨裝告遠遊
반생을 글만 읽고 본 적이 없던 것을 / 半生方冊裏
이제야 구경하니 제왕의 거룩한 고을 / 今日帝王州
이라 하였고, 또,
뽕나무 활 다북 살은 일찍 품은 뜻이언만 / 宿昔桑蓬志
사슴 떼와 함께 놀아 불우한 지 몇 해런고 / 沈冥鹿豕群
오히려 두 눈 있으니 이 구경이 재미로서 / 猶被雙眼役
헝클어진 백발 시름 잊어나 보올까나 / 可忘白頭紛
라고 하였고, 또,
여름 비 끓는 곳에 강물은 부풀고 / 雨熱關河漲
구름은 찌는 듯이 계문 숲이 낮게 뵈네 / 雲蒸薊樹低
청컨대 임이시여 먼 길에 조심하오 / 請君愼行李
임은 떠나 가시거다 부디 평안 하옵소서 원고에는 ‘면전신행역(勉旃愼行役)’이라 되어 있다. / 去矣莫棲棲
라고 하였다.”
그는 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한석호(韓錫祜) 혜당(惠堂 한석호의 호)과 양상회(梁尙晦) 백후(伯厚 양상회의 자)와 이행작(李行綽) 유재(裕齋 이행작의 자)는 모두 개성(開城)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개성은 여씨(麗氏)의 옛 도읍인데, 그 나라 사람들은 송경(松京)이라 부른다. 이는 옛 개주(開州)이며 옛 이름은 촉막군(蜀莫郡)이다. 이곳에는 신숭(神嵩 개성(開城)의 진산(鎭山))ㆍ자하(紫霞 개성의 동명(洞名))의 좋은 경치가 있고, 문인(文人)과 운사(韻士)들은 오히려 을지생(乙支生)ㆍ정인지(鄭麟趾)가 끼친 풍채를 지녔다. 이는 우리 성조(聖朝)의 문교(文敎)가 널리 먼 나라에까지 미친 보람이었다. 혜당의 〈송연암조경(送燕巖朝京)〉에,
우연히 방향 몰라 이 몸을 붙인 곳이 / 偶爾無方住著身
한 하늘 아래건만 바다 동쪽 가이라네 / 一天之下海東濱
가까운 곳 먼 지역을 평등으로 본다 하면 / 如將遠邇看平等
문밖으로 안 나와도 만리 사람 되오리라 / 不出門時萬里人
새벽 달 뫼에 걸려 시냇집 창이 밝고 / 曉月依山磵戶明
목련화 나무 밑에 남은 정서 이끌리네 / 木蓮花下藹餘情
중국의 아름다움 꾀꼬리는 모르고서 / 黃鸝不識中州好
이별이 서러 우냐 소리소리 울더라 / 啼作陽關惜別聲
푸른 하늘 들을 덮어 사면을 둘렀는데 / 靑天蓋野四周環
동남쪽 솟은 뫼는 한점 두점 사라지네 / 漸失東南點點山
요양에 들어서는 무엇이 보이던고 / 行到遼陽何所見
햇바퀴 빙글 굴러 고국 산천 가리키네 / 日輪回指海雲間
만리 배에 몸을 싣고 바람에 저어가서 / 常願風漂萬里舟
천하 명루 곳곳마다 두루 올라 보고져라
/ 遍登天下有名樓
유유히 필마로써 금대 길 달려 본들 / 悠悠匹馬金臺路
가을 바다 외로운 돛에 설렁임과 어떻더니 / 何似孤帆碧海秋
장성이 무너지자 나라도 그렇건만 / 長城自壞國隨之
도시와 인물이야 갑자기 변탄말가 / 朝市人煙遂不移
공자문 사당에는 돌북이 상기 있어 / 夫子廟庭周石鼓
인간 세상 몇 번이나 석양을 겪었던고 / 人間幾度夕陽時
라고 하였고, 또 그의 〈춘원세우(春院細雨)〉에는,
이슬이 방울짐을 오동잎이 먼저 듣고 / 露重梧先聞
우레 소리 가벼우니 새들도 놀라지 않네 / 雷輕鳥不疑
고운 풀 깊어가니 꿈이런가 의심하고 / 嫩草深疑夢
짙어가는 꽃봉오리 흡사히 어린 듯이 / 濃花恰欲痴
검정 개미 섬돌 위에 미끄럼을 타는 듯이 / 玄蟻緣階滑
파랑 벌레 잎을 안아 그 재주 위태롭네 / 靑蟲抱葉危
물 속에 솟아 선 건 쌍무지개 멀리 뵈고 / 水立雙虹遠
연기를 뚫고 가니 외론 새 더디고나 / 煙穿獨鳥遲
시름에 잠긴 채로 홀로 앉은 나그네 / 悄悄孤客坐
그리운 님 생각에 깊이깊이 잠겼구나 / 湛湛美人思
라고 하였고, 백후(伯厚)의 〈송연암조경(送燕巖朝京)〉에는,
눈이 닿도록 바라보니 갈 길이 실이라네 / 極目山河路一絲
마음이 얽혔다면 따라갈 수 없단말가 / 心如相約未相隨
떠나려는 이 자리에 한잔 술 거듭 권하니 / 離筵更進一杯酒
때마침 석양이라 양류만 그저 청청 / 楊柳靑靑斜日時
이라 하였고, 이행작(李行綽)의 〈송별(送別)〉에는,
바닷가에 떠나는 임은 채찍 하나 믿을 뿐 / 濱海行人信一鞭
먼 하늘 유월 철에 빗줄기 길이 달려 / 遼天六月雨長懸
노정을 헤어보니 이에서 삼천 리를 / 計程從此三千里
묻노니 어느 때에 연경에 이를꼬 / 借問幾時可到燕
라”
하였다.
중국 사람들의 기록이 대체로 이와 같다. 이는 비단 원시(原詩)를 많이 점화(點化)하였을뿐더러, 그가 이른바 을지생(乙支生)과 정인지(鄭麟趾)의 끼친 바람이라는 말은 더욱 허리를 잡을 일이다. 우리나라에는 을지생이란 사람이 없은즉, 이는 아마 을지문덕(乙支文德)을 이름일 것이다. 을(乙)ㆍ정(鄭)은 실로 수천 년이나 멀리 떨어진 인물인데, 이제 그들을 나란히 열거하였으니, 이는 아마 을(乙)은 《수서(隋書)》에 나타났고, 정(鄭)은 《고려사(高麗史)》를 편찬한 까닭으로 특히 드러낸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의 기록 중에 계근(季謹)이 한석호(韓錫祜)와 더불어 술로써 막역한 벗이라 하였으니, 가장 가소로운 일이다. 이 둘은 비단 서로 얼굴을 모를 뿐 아니라, 비록 같은 때에 살고 있었으나, 이름자도 통하지 못하였은즉 어찌 시주로써 막역한 벗이 되었겠는가. 더군다나 둘 다 평생에 술을 마시지 못했으니, 이를 어찌할꼬. 명일 내 별안간 길을 떠나게 되었기에, 그 그릇됨을 지적하지 못하고 말았다.
이불(李紱 청 문학가. 자는 거래(巨來))의 《목당집(穆堂集)》 중 〈경인원조조조시(庚寅元朝早朝詩)〉에,
조선 사람 멀리 천자국에 통래한 지 오래되니 / 朝鮮內屬來王久
의관이 속될망정 괴이할 것 무엇 있나 / 肯怪衣冠太俗生
사모 쓰며 관복 입고 봄 들어서 공 바치니 / 紗帽版袍春入貢
바닷가 해돋이에 태평시절 누리고녀 / 海隅日出最昇平
하였으니, 아침 날 산장(山莊) 밖에 천관(千官)들의 퇴근하는 모습을 구경한즉, 붉은 벙거지에 마제수(馬蹄袖)를 입은 차림들이, 사람으로 하여금 부끄럽기 짝이 없음에 비하여, 우리나라 사신들의 의관이야말로 신선처럼 빛이 찬란하였다. 그러나 그 거리에 노는 아이들까지도 놀라고 괴이하게 여겨서 우리를 도리어 연극하는 배우 같다고 하니, 아아, 서글프다.
이익재(李益齋)의 자는 중사(仲思)요, 또 하나의 호는 역옹(櫟翁)이며, 관(貫)은 경주(慶州)이고, 나이 15세에 급제에 올랐었다. 충선왕(忠宣王)이 원(元)의 수도에 머물 때 만권당(萬卷堂)을 세우고 동으로 돌아올 의사가 없어서 익재를 불러 부중(府中)에 두고 중국의 명류(名流) 조자앙(趙子昻 원(元)의 문학가, 서화가 조맹부(趙孟頫). 자앙은 자)ㆍ원복초(元復初 원의 문학가 원명선(元明善). 복초는 자) 등과 함께 창수하였으며, 그는 또 서촉(西蜀)에까지 사신으로 간 적도 있거니와, 강남(江南)에도 강향(降香)하여 이르는 곳마다 제영(題詠)한 작품이 남의 입에 회자(膾炙)되었다. 그가 동으로 돌아오자, 다섯 임금을 섬겨 네 번이나 재상이 되었다. 충선왕이 고자질에 얽혀서 토번(吐蕃)에 귀양살이 갔을 때, 만 리를 달려가서 위문하되 충분(忠憤)의 마음이 간절하였다. 그 뒤에 김해후(金海侯)에 봉했더니 나이 81세에 졸하였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그의 시는 화려하고 곱고도 밝고 맑아서 우리나라 사람의 궁벽하고 고루한 기습에서 쾌히 탈피하였다. 그의 〈노상(路上)〉에,
말 위에 끄덕끄덕 촉도난을 읊으면서 / 馬上行吟蜀道難
다시금 오늘 아침 진관(감숙성에 있는 관문(關門))으로 들어갈 제 / 今朝始復入秦關
푸른 구름 저문 날에 어부수(감숙성에 있는 수명) 막혀 있고 / 碧雲暮隔魚鳧水
붉은 나무 아침 숲은 조서산(감숙성에 있는 산명)이 여기라네 / 紅樹朝連鳥鼠山
문자는 남아 있어 천고 한을 더하였고 / 文字賸添千古恨
명리에 지친 몸은 언제나 한가할꼬 / 利名誰博一身閒
나의 생각 잠긴 곳은 안화사 옛 길에서 / 令人最憶安和路
죽장 망혜 짚고 신고 오가던 그 일뿐을 / 竹杖芒鞋自往還
하였는데, 내가 살고 있는 연암(燕巖) 뒷산 기슭에서 한 재 마루턱을 격하여 안화사(安和寺)의 옛 터가 있으므로 익재의 이 시를 읊을 때마다 그가 죽장 망혜로 이 사이에 서성이던 것을 연상하기도 하려니와 저 촉도(蜀道)ㆍ진관(秦關)ㆍ어부(魚鳧)ㆍ조서(鳥鼠)의 이야기를 듣고서 오히려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을 잃은 듯이 멍하였거든, 하물며 나의 이번 걸음은 또 익재가 이르지 못한 곳일까보냐.
송(宋) 원풍(元豐) 7년(1084년)에 경동(京東) 회남(淮南) 고을에 조서를 내려 고려(高麗) 정관(亭館)을 세우게 하였으므로 밀(密)ㆍ해(海) 두 고을에 시소(時騷)가 일어 백성이 도망한 자가 있었다. 그 이듬해에 소식(蘇軾)이 그곳을 지나다가 제도의 웅장 화려함에 감탄하여 시 한 수를 읊었으되,
처마 끝 높이 솟아 담장 밖에 나르는 듯 / 簷楹飛舞垣墻外
농가 숲은 쓸쓸하여 도끼 자취 뿐이고나 / 桑柘蕭條斤斧餘
오랑캐의 종으로서 다 내주고 보니 / 盡賜昆耶作奴婢
내 몰라라 그들에게 얻은 것이 무에런고 / 不知償得此人無
하였으며, 동파(東坡)가 고려를 미워함이 이르는 곳마다 이러하니, 만일 그로 하여금 강희(康熙)가 세운 33참(站)의 찰원(察院 조선 사신의 내왕을 위해 설치한 숙소)을 보았던들, 그는 또 무어라 하였겠는가.
황산곡(黃山谷 송(宋) 문학가 황정견(黃庭堅). 산곡은 호)의 〈차운목보증고려송선(次韻穆父贈高麗松扇)〉에,
은 마구리 옥 물리고 깨끗한 고치 종이 / 銀鉤玉唾明繭紙
솔 부채 가벼운 바람 한꺼번에 보내 주네 / 松箑輕涼幷送似
가애롭다 이 부채가 책구루고려의 성(城) 이름 를 멀리 건너 / 可憐遠度幘溝漊
더위에 알맞음이 내대자(피서립(避暑笠))와 어떠한고 / 適堪今時褦襶子
라 하였고, 또
옥보다 결백한 문인 기운이 높고 차고 / 文人玉立氣高寒
삼한에 사신 가서 삼신산을 보았다네 / 三韓持節見神山
안기생(중국 신선의 이름)의 불사약을 의당코 얻어다가 / 合得安期不死藥
티끌 속 이내 몸에 옛 껍질을 벗겨 주리 / 使我蟬蛻塵埃間
하였으니, 이제 와서는 고려의 송선(松扇)이란 어떻게 만들었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내 일찍이 고 태사(高太史) 역생(棫生)의 좌상(座上)에서 반정균(潘庭筠)의 〈차왕추사한류시(次王秋史寒柳詩)〉를 외었더니 한자리에 앉았던 손들이 모두 좋다고 칭찬한다. 나는 이내,
“왕추사(王秋史)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풍명재(馮明齋) 병건(秉健)은,
“이는 곧 역성(歷城) 왕 진사(王進士)인데, 이름은 평(苹)이요, 자는 추사(秋史)이며, 자호(自號)를 칠십이천주인(七十二泉主人)이라 하였으니, 반(潘)의 시에,
칠십천 소리소리 돌 절구질 하는 듯이 / 七十泉聲亂石舂
는 곧 이를 두고 이른 것이랍니다.”
하고, 능사헌(凌蓑軒 사헌은 능야의 호) 야(野)는,
“국조(國朝)의 시인으로서는 많이들 추사를 추앙합니다. 그는 일찍이,
어지런 폭포 속에 나막신 소리 누구던고 / 亂泉聲裏誰通屐
누른 잎 숲 사이에 스스로 글을 쓰네 / 黃葉林間自著書
라는 글귀를 읊었고, 그는 또,
누른 잎 떨어질 제 황소 등에 해 늦었고 / 黃葉下時牛背晩
푸른 뫼 이지러진 곳 술 취한 손님 지나가네 / 靑山缺處酒人行
를 읊었으므로, 한때 사람들은 그를 왕황엽(王黃葉)이라 불렀던 것입니다.”
한다.
고 태사 역생 풍승기(馮乘驥 풍병건. 승기는 자) 등 모든 사람과 더불어 명성당(鳴盛堂)에서 이야기하다가 도보(道甫 이조 때의 문학가ㆍ서예가 이광사(李匡師)의 자)가 쓴 글씨첩 하나를 내어 보였다. 그들은 서로 살펴보더니, 이윽고 나에게,
“이 글씨는 동한(東韓)에 있어서 어떤 등류(等流)에 속합니까.”
한다. 나는 이에 대하여 멍하니 무엇이라 대답하기 어렵기에 다만,
“우연히 행장(行裝) 속에 들어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여, 스스로 옛날 조자(趙資)의 말처럼 슬쩍 피해버렸다.
《일하구문(日下舊聞 주이준(朱彝尊) 저)》에 《동국사략(東國史略 저자 미상)》과 《고려사(高麗史 정인지(鄭麟趾) 등의 저)》 열전(列傳)의 말을 실었는데, 그 글에,
“고려 세자(世子)가 원(元)에 들어가서 원제(元帝)를 편전(便殿)에서 만날 제, 그가 무슨 글을 읽느냐고 물으니, ‘세자는 선비 정가신(鄭可臣 고려 때의 정치가. 자는 헌지(獻之))ㆍ민지(閔漬 고려 때의 문학가. 자는 용연(龍涎))가 따라왔으며 시위하는 여가를 타서 그들에게 《효경(孝經)》과 《논어(論語)》를 질문합니다.’ 하였더니, 원제가 기뻐하여 세자에게 명하여 그들과 함께 들어오게 하고 자리를 주고서, ‘본국(本國)의 세대(世代)가 서로 전해온 순서와 치란(治亂)의 자취와 풍속의 아름다움을 말하라.’ 하여 조금도 지루하게 여기지 않고 들었다. 그 뒤 공경에게 명하여 교지(交趾 월남(越南))를 치려고 할 때 그 두 사람을 불러 함께 의론하니, 그 진술한 것이 뜻에 맞기에 정가신에게는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주고, 민지에겐 직학사(直學士)를 제수하였다.”
하고, 열전(列傳)에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원제(元帝)가 세자를 자단전(紫檀殿)에서 불러 볼 때 가신이 뒤를 따랐더니, 원제가 명하여 앉게 하고 이내 명하여, ‘갓을 벗기되 수재(秀才)는 머리를 묶을 필요가 없으니 의당 건(巾)을 써야 될 것이야.’ 하였다. 그리고 어안(御案) 앞에 어떤 물건이 있는데, 둥글면서도 조금 뾰죽하고 빛은 깨끗하며, 높이는 한 자 다섯 치며, 그 안은 술 댓 말쯤 수용될 만하다. 이는 마하발국(摩訶鉢國 미상)에서 바친 낙타조(駱駝鳥)의 알이라 한다. 원제가 세자에게 구경시키면서 이내 세자와 종신(從臣)들에게 술을 내리고 가신으로 하여금 시를 읊게 하였다. 가신이 시를 드리되,
알이라 했지마는 크기는 항아리라 / 有卵大如甕
그 속에 간직한 건 늙지 않는 봄이리다 / 中藏不老春
원컨대 천세 수를 임이 먼저 누리시고 / 願將千歲壽
남은 은택 나누어다 해동에도 미치소서 / 醺及海東人
라 하니, 원제가 기뻐하여 자기의 식탁에서 국을 하사하였다.”


 

[주D-001]우양도 …… 썼더라는군요 : 여기서 ‘우양도 …… 것이니’는 《맹자》 만장 상(萬章上), ‘우리는 …… 지키자’는 《맹자》 이루 상(離婁上), ‘보물도 …… 생기니’는 《중용》 26장, ‘이것이 …… 보냐’는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있는 말을 인용하여 엮은 것이다.
[주D-002]하였다. : ‘그 뒤에 연경 …… 하였다’는 ‘수택본’에는 소주(小註)로 되었으나, 여기서는 여러 본에 의하여 대문(大文)으로 하였다.
[주D-003]우회암(尤悔菴) 동(侗) : 청의 문학가. 회암은 호요, 동은 이름. 자는 전성(展成).
[주D-004]〈외국죽지사(外國竹枝詞)〉 : 외국의 지방 풍속을 칠언절구(七言絶句)로 읊은 것.
[주D-005]비경(飛瓊) : 중국 여도사의 이름. 여기서는 허초희를 그에게 비한 것이다.
[주D-006]나는 …… 것을 : 허경번은 본시 여도사 번 부인(樊夫人)을 경모(景慕)하여서 지은 것인데, 번천(樊川) 두목(杜牧)의 아름다운 풍모를 연모하여 지었다는 그릇된 것을 변명하였다.
[주D-007]목사(牧使) 아무 : 김려(金鑪)의 《유구왕세자외전(琉球王世子外傳)》에는 이난(李灤)이라 하였다.
[주D-008]삼량(三良) : 어진 세 사람. 춘추시대 때 진 목공(秦穆公)이 죽으매 순장(殉葬)시킨 엄식(奄息)ㆍ중행(仲行)ㆍ겸호(鎌虎)를 가리킨 말이다.
[주D-009]두 아들 …… 잔폭하오 : 전국 때 위 선공(衛宣公)의 두 아들 급(伋)과 수(壽)가 계모의 흉계에 의하여 배에서 피살된 일을 말한 것. 《左傳 桓公 16年》
[주D-010]모수(毛遂) : 전국 때 조(趙)의 평원군(平原君) 조승(趙勝)의 문하에 있던 변사(辯士).
[주D-011]분양(汾陽) : 당의 정치가 곽자의(郭子儀)의 봉호. 자도 역시 자의(子儀).
[주D-012]상간(桑間) : 하남성에 있는 지명. 음탕한 남녀들이 모여드는 곳.
[주D-013]백설(白雪)의 곡조 : 백설은 곡조 이름. 백아(伯牙)가 저속한 하리(下俚)를 탈 때에는 듣는 이가 많았는데, 백설을 타니 화답하는 자가 적었다 한다.
[주D-014]《태평광기(太平廣記)》 : 송의 이방(李昉) 등이 어명을 받들어 엮은 책.
[주D-015]왕벽지(王闢之) : 송 철종(宋哲宗) 때 학자. 벽지는 이름이요, 자는 성도(聖塗).
[주D-016]정원(定遠) : 후한의 명장 반초(班超). 정원은 봉호요, 자는 중승(仲升).
[주D-017]그러나 …… 일은 : 위의 네 장수는 모두 무식하다는 이름을 얻은 자들이다.
[주D-018]문로(文潞) : 송 인종(宋仁宗) 때 명상 문언박(文彦博). 노는 봉호. 자는 관부(寬夫).
[주D-019]사이(四彝) : 사이(四夷). 연암과 필담하였기 때문에 이(夷)를 이(彝)로 하였다.
[주D-020]그들이 …… 모습 : 전국 때 조(趙)의 장수 염파(廉頗)를 늙었다고 등용하지 않기에 그는 말에 올라서 자기는 늙었어도 전장에 나갈 수 있음을 과시하였다.
[주D-021]농사일은 …… 의당하다 : 이 몇 구절은 한(漢) 진평(陳平)의 말인데, 심경지가 빌려 썼던 것이다.
[주D-022]원(元) : 현(玄)이다. 청 나라 사람은 강희의 이름이 현엽(玄曄)이었으므로 ‘현(玄)’ 자를 피하여 ‘원(元)’ 자로 대신 썼다.
[주D-023]이 장군 : 이광(李廣)
[주D-024]돈 벽 : 화교(和嶠)가 그 가멸기가 왕자에 비길 만하였으나 오히려 돈을 아꼈으므로 그를 전벽(錢癖)이라 하였다.
[주D-025]서음(書淫) : 황보밀(皇甫謐)이 글 읽기를 지나치게 좋아하여 침식을 잊으므로 그를 서음(書淫)이라 하였다.
[주D-026]《치청전집》 : 청 이개(李鍇) 저. 치청은 그의 호. 치청산인(豸靑山人).
[주D-027]종인부(宗人府) : 황족(皇族)의 관계 사무를 보는 관부.
[주D-028]기량을 울었다네 : 전국 제(齊)의 사람. 그가 전쟁에 나갔다가 죽었는데, 그의 아내가 무덤에 가서 우는 소리가 너무나 슬펐기 때문에 제인(齊人)은 그것을 노래로 불렀다 한다.
[주D-029]봉규(圭) : 어떤 본에는 봉규(封圭)로 되었으나 잘못된 것이다.
[주D-030]담원팔영(澹園八詠) : 담원의 주위에 벌여 있는 팔경(八景)을 읊어서 축하하는 시.
[주D-031]절만 하네 : 송(宋) 서예가 미불(米芾)이 무위(無爲)라는 고을에서 커다란 괴석(怪石)을 발견하고는 의관을 갖추어 절하여 형(兄)이라 일컬었다.
[주D-032]백 동파 : 소식(蘇軾)이 미피(渼陂)에서 놀 때의 고사.
[주D-033]나부산 : 매화가 많이 난 고장.
[주D-034]적성(赤城) : 천태산(天台山) 부근에 있다.
[주D-035]화예부인 : 오대 때 촉왕(蜀王) 맹창(孟昶)의 부인으로 절색에 문장을 겸하였다.
[주D-036]아름다운 …… 같으리 : 이 시는 벌써 《망양록(忘羊錄)》 중에 있었으므로 여기에서 주석은 생략하였다.
[주D-037]진서라네 : 당시에는 국문을 언문이라 하고 한자를 진서(眞書)라 하였다.
[주D-038]구주(九疇) : 기자(箕子)가 주 무왕(周武王)에게 진술한 〈홍범편(洪範篇)〉에 실린 정치 이론.
[주D-039]육부(六部) : 신라 초기에 그 서울인 경주를 중심으로 설치한 행정 구역.
[주D-040]약을 …… 가고 : 진 시황이 서시(徐市)로 하여금 동남(童男) 동녀(童女) 5백 명을 거느리고 바다 섬으로 보내어 불사약(不死藥)을 구했다.
[주D-041]박랑의 모래벌 : 장량(張良)이 창해 역사(滄海力士)를 시켜 박랑 모래벌에서 매복하였다가 철퇴로써 진 시황을 쳤으나 잘못되어 다음 수레가 맞았다.
[주D-042]구정은 아직 잠기고 : 구정은 하우(夏禹) 때부터 내려오던 신기(神器)였으므로 나라가 망한 것을 구정이 잠겼다 한다. 여기서는 주(周)가 망했다는 말.
[주D-043]삼호들은 일어섰네 : 초(楚)의 항적(項籍)을 말한다.
[주D-044]여섯 왕이 쓰러지자 : 당시의 한(韓)ㆍ조(趙)ㆍ위(魏)ㆍ연(燕)ㆍ제(齊)ㆍ초(楚)의 6국이 망했음을 말한다.
[주D-045]손을 마침 떼었다네 : 진 시황이 저격한 범인을 열흘 동안을 찾았으나 잡지 못했다.
[주D-046]호가의 슬픈 박자 : 한말 채문희(蔡文姬)가 되놈에게 몸이 팔리어 호가십팔박(胡笳十八拍)을 지어서 스스로 슬퍼하였다.
[주D-047]채문희를 속할쏘냐 : 조조(曹操)가 천금으로 채문희를 속환하였다.
[주D-048]대숙륜(戴叔倫) : 당 현종(唐玄宗) 때 문학가. 자는 유공(幼公).
[주D-049]제용작가(帝庸作歌) : 《시경》 익직편(益稷篇)에 나오는 한 구절.
[주D-050]관관저구(關關雎鳩) : 《시경》 관저장(關雎章)의 첫 구절.
[주D-051]양백화 : 음탕한 일을 풍자한 패곡(牌曲)의 이름인 듯하나 출전 미상.
[주D-052]점필재(佔畢齋) : 이조 때의 문학가 김종직(金宗直)의 호. 자는 계온(季昷).
[주D-053]생추(生蒭) : 《시경》 소아(小雅) 백구장(白駒章)에 나오는 말로서 예물(禮物)이라는 뜻.
[주D-054]기 귀주(奇貴州) : 기풍액(奇豐額). 귀주는 그가 그 고을을 맡고 있었다.
[주D-055]최두기 …… 일쑤이다 : 최두기는 멋모르고 변절한 오삼계가 상투를 보고 명(明)을 생각해서 울었다 하고, 또 전겸익이 청(淸)에 벼슬까지 한 것을 지사인 듯 칭찬하였는데, 이는 모두 ‘몽롱춘추’라는 것이다. 최두기는 조선 정조(正祖) 때 문학가로, 두기는 호요, 성대는 이름이며, 자는 사집(士集)이다.
[주D-056]주의(周顗) : 진(晉)의 지사(志士). 자는 백인(伯仁). 신정에서 고국이 망하였음을 슬퍼하였다.
[주D-057]나라 …… 있네 : 국(國)자 속에 과(戈) 자를 떼고 일(一) 자와 인(人) 자를 더 넣은 듯하나 무슨 글자를 말하는지는 알 수 없다.
[주D-058]김모재(金慕齋) : 조선 때 유학자 김안국(金安國)의 호. 자는 국경(國卿).
[주D-059]화홍산(華鴻山) 찰(察) : 명(明)의 관리이면서 문학가. 홍산은 호요, 찰은 이름이며, 자는 자잠(子潜).
[주D-060]최간이(崔簡易) : 조선 선조(宣祖) 때의 문학가 최립(崔岦). 간이는 호요, 자는 입지(立之).
[주D-061]사흘을 바장이곤 : 국선(國仙) 영랑(永郞)ㆍ술랑(述郞)ㆍ안상(安詳)ㆍ남석(南石) 네 사람이 사흘을 놀았다 해서 삼일포라는 이름을 얻었다.
[주D-062]심백수(沈伯修) : 조선 영조(英祖) 때 관리이며, 문학가인 심염조(沈念祖). 백수는 자.
[주D-063]왕감주(王弇州) : 명의 문학가 왕세정(王世貞). 감주는 호.
[주D-064]만나러 갔더니 : 최립은 일찍이 이정귀(李廷龜)의 사행을 따라서 명에 갔다.
[주D-065]획린해(獲麟解) : 불과 2백 자도 차지 않는 단편이지마는 논리의 정연함과 조직의 체계로 보아서 전형적인 고문장의 궤범이 된다.
[주D-066]허균(許筠) : 조선 광해군(光海君) 때의 저명한 문학가ㆍ사상가. 자는 단보(端甫).
[주D-067]주태사(朱太史) 지번(之蕃) : 명의 정치가요, 문학가. 자는 원개(元介) 또는 원승(元升).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왔던 일이 있다.
[주D-068]빈공(賓貢) : 당(唐)에 외국 학생을 받기 위해 설치한 학과(學科). 곧 빈공과.
[주D-069]한무외(韓无畏) : 조선 선조(宣祖) 때 신선이 되었다는데 방술에 저명하였다.
[주D-070]최승우(崔承祐) : 신라 진성왕(眞聖王) 때 문학가. 일찍이 당에 유학하였다.
[주D-071]종리 장군(鍾離將軍) : 한 고조(漢高祖) 때 장군 종리매(鍾離昧). 한신(韓信)을 위해서 자살하였다.
[주D-072]예학명(瘞鶴銘) : 육조(六朝) 때 양(梁)의 은사 도홍경(陶弘景)이 초산(焦山) 석벽 위에 지어 새긴 글의 탑본(搨本).
[주D-073]사운(思運) : 자는 형중(亨仲). 어떤 본에는 ‘사운(思運)’이란 두 글자는 소주로 되어있다.
[주D-074]칠십천 : 왕추사가 살고 있던 성수천(聖水泉)은 원(元)의 우흠(于欽)이 품정(品定)한 72 천(泉) 중의 24천이었으므로, 그는 《이십사 천초당집(二十四泉草堂集)》이 있었다.
[주D-075]왕랑의 …… 얼굴 : 진(晉)의 왕공(王恭)의 얼굴이 아름다우므로 사람들이 탁탁한 봄 버들이라 하였다. 여기서는 왕추사가 서로 견준 것이다.
[주D-076]남약천 구만(九萬) : 조선 숙종(肅宗) 때 문학가며 정치가. 약천은 호요, 구만은 이름이며, 자는 운로(雲路).
[주D-077]선생안(先生案) : 그 고을 장관을 지낸 이의 성명과 약력을 기록한 책.
[주D-078]윤형성(尹衡聖) : 조선 숙종 때의 학자. 자는 경임(景任). 당시의 진주 목사(晉州牧使).
[주D-079]곽재우(郭再祐) : 조선 선조(宣祖) 때 저명한 장수. 자는 계수(季綬)요, 호는 망우당(忘憂堂). 홍의 장군(紅衣將軍)이라 일컬었다.
[주D-080]웅해 …… 정진(鼎津) : 모두 경상도에 있는 작은 지명들이다.
[주D-081]음릉 …… 것이 : 항적이 한 고조(漢高祖)와 싸우다가 해성(海城)에서 패하여 음릉으로 도망할 때, 어떤 노부의 말을 들어 길을 잃었고, 오강에 이르러서는 강동(江東) 사람들을 대하기 부끄러워 자살하였다.
[주D-082]정호음(鄭湖陰) 사룡(士龍) : 조선 중종(中宗) 때 문학가. 호음은 호요, 사룡은 이름이며, 자는 운경(雲卿).
[주D-083]박평성(朴平城) 원종(元宗) : 조선 연산군(燕山君)을 몰아내고 중종을 맞아들인 훈신. 평성은 봉호요, 원종은 이름이며, 자는 백윤(伯胤).
[주D-084]금계군(錦溪君) : 조선 문학가 박동량(朴東亮). 금계는 봉호요, 자는 자룡(子龍).
[주D-085]호백구 …… 수단 : 전국 제(齊)의 맹상군(孟嘗君) 전문(田文)이 진(秦)에서 붙들려 있을 때에, 그의 문객이 개구멍 도적질을 잘하여 진왕(秦王)의 흰 여우 갖옷을 훔쳐서 진왕의 애희(愛姬)에게 바치고 면했다.
[주D-086]거원(蘧瑗) : 전국 때 위(衛)의 현인으로서, 나이 50이 되어서 49세까지의 잘못을 깨달았다.
[주D-087]설부 …… 계림유사(鷄林類事) : 설부는 명의 도종의(陶宗儀)가 엮은 것이요, 계림유사는 손목(孫穆)이 지었다.
[주D-088]파촉 …… 관중(關中)이랍니다 : 파촉은 중국 사천 지방이요, 관중은 섬서 지방으로서 한 고조 유방과 초 패왕 항적이 서로 먼저 관중을 점령하려고 경쟁을 할 때 생긴 말. 꿩 대신에 닭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주D-089]시(詩)에 …… 있으니 : 정형은 하북성정형산 위에 있는 요새지. 예양교는 전국 때 절사(節士) 예양이 지백(智伯)을 위해서 조양자(趙襄子)를 저격하려고 숨었던 다리. 촉도는 사천성에서 섬서성으로 통하는 험로(險路). 아미는 사천성에 있는 산명. 공명사당은 제갈량(諸葛亮)의 사당. 공명은 그의 자. 함곡관은 하남성 서북부 황하의 계곡에 있는 요해의 관문. 민지는 하남성에 있는 호수명. 이릉은 하남성 효(殽)에 있는 명소. 맹진은 하남성에 있다. 주 무왕(周武王)이 은(殷)을 칠 때 제후를 모았던 곳. 비간묘는 은의 충신 비간의 무덤. 금산사는 강소성 진강부에 있는 명소. 초산은 강소성 단도현(丹徒縣)에 있는 명소. 다경루는 강소성감로사(甘露寺)에 있는 명소. 고소대는 강소성 오현(吳縣)에 있는 명소. 도량산은 강소성에 있는 명소이며, 호구사도 같다. 표모묘는 강소성 회음(淮陰)에 있는데, 한신(韓信)에게 밥을 먹인 표모의 무덤. 탁군은 하북성에 있는 지명. 백구는 위와 같음. 업성은 하남성에 있으며 담화도 같다. 왕상비는 하남성에 있으며 왕상은 진(晉)의 효자. 효릉은 하남성에 있는 명소. 장안은 섬서성에 있는 도시. 정장공묘는 전국 때 정장공의 무덤. 허문정공묘는 원의 유학자 허형(許衡)의 무덤. 문정은 시호. 관용방묘는 하(夏)의 충신 관용방의 무덤. 망사대는 한 무제(漢武帝)가 그의 아들 여 태자(戾太子)를 죽이고 후회하여 쌓은 대. 무측천릉은 당의 황후 무조(武曌)의 무덤. 숙종릉은 당 숙종의 무덤. 빈주는 섬서성에 있는 지명. 경주는 안휘성에 있는 지명. 보타굴은 절강성에 있는 명소. 월지사자헌마는 중앙 아시아 지방에 있던 월지국 사자가 헌납한 말을 보고 읊었다.
[주D-090]요공(姚公) : 원(元)의 문학가 요수(姚燧). 목암은 호요, 자는 단보(端甫).
[주D-091]주행아미(舟行峨眉) : 원제(原題)는 〈8월 17일 방주향아미산(八月十七日放舟向峨眉山)〉.
[주D-092]다경루(多景樓) : 원제에는 〈다경루배권일재용고인운동부(多景樓陪權一齋用古人韻同賦)〉.
[주D-093]깊은 …… 번뜩인다 : 한 나라 엄광(嚴光)이 광무제(光武帝)의 배 위에 발을 올렸을 때 태사(太史)가 여쭙기를 객성이 제좌(帝座)를 범했다 하였다. 여기에서는 김상헌이 자기가 사신으로 왔음을 말한 것이다.
[주D-094]은하성 …… 허락했네 : 한(漢)의 장건(張騫)이 서역(西域)으로 사신 가던 고사.
[주D-095]만리 …… 보고져라 : 연암의 아들 종간(宗侃)의 주(注)에, “삼가 상고하옵건대 이 두 글귀는 원집(原集) 중에 있는 것을 혜당(惠堂)이 이용한 것이다.”
[주D-096]강향(降香) : 유명한 사원(寺院)이나 묘우(廟宇)에 내리는 치전(致奠).
[주D-097]촉도난(蜀道難) : 촉도의 험준함을 읊은 이백(李白)의 시가 있다.
[주D-098]조자(趙資) : 삼국 때 오(吳)의 변사. 자는 덕도(德度). 조위(曹魏)에 사신 갔을 때 임기응변이 많았다.
[주D-099]슬쩍 피해버렸다 : ‘고 태사 역생 …… 피해버렸다’ 까지의 이 한 절은 다른 본에 없던 것을 이에 ‘일재본’에 의하여 넣었다.

용재집 제1권
 칠언 절구(七言絶句)
운향(雲鄕)의 남행시권(南行詩卷) 뒤에 적으며, 시권(詩卷) 첫머리에 있는 절구 세 수의 운(韻)을 차용하다.


구만리 푸른 하늘을 노정으로 삼고 / 九萬靑冥剩作程
구름 바라보며 다시금 영남으로 가누나 / 望雲還向嶺南行
하늘 반쪽 가로지른 죽령 재를 오르면 / 躋攀竹嶺橫天半
눈 아래 뭇 봉우리 절로 평탄함을 느끼리 / 眼底群峯自覺平

열흘 넘어 병 앓아 술을 끊고 지내니 / 一病經旬斷酒杯
문 앞에 오는 반가운 손 보이지 않구나 / 門前不見可人來
정자의 풍류 작품을 한가히 읊조리고 / 閑吟鄭子風流作
때로 푸른 회나무에 우는 꾀꼬리 소리 듣노라 / 時聽黃鸝韻綠槐

고향 돌아가고파 유장한 흥 주체 못해 / 故園歸興不禁長
홍진 속 광음이 빠른 줄 점점 깨닫노라 / 塵世光陰漸覺忙
하늘에 잇닿은 정수 끝없이 흐르는데 / 鼎水接天輸不盡
그 언제나 조각배 띄워 어랑을 두들길꼬 / 扁舟何日扣漁榔


 

[주D-001]정자(鄭子) : 남행시권을 지은 저자의 성(姓)이 정(鄭)이었기에 이렇게 부르는 듯하다.
[주D-002]정수(鼎水) : 경남 함안(咸安)과 의령(宜寧) 사이에 있는 정진(鼎津) 나루의 물이다.
[주D-003]어랑(漁榔) : 어부가 고기를 잡을 때 고기가 놀라서 그물 속으로 들어가도록 뱃전을 두들기는 긴 나무이다.

 

 

용재집 제2권
 오언율(五言律)
의령(宜寧)으로 근친(覲親) 가는 정운경(鄭雲卿)을 보내며 3수(三首)


일찍이 대궐 섬돌을 밟았고 / 早展花磚步
지금은 근친 길을 떠나누나 / 今兼綵服行
옥당에서 막 하직하고 물러나 / 玉堂初下直
역마 타고 다시 장도에 오르네 / 馹騎復長程
경연에선 주상의 은총 입었고 / 經幄勤三接
유림에선 대명을 독차지하였지 / 儒林擅大名
빨리 조정에 돌아와 입대해도 / 遄歸催入對
어버이 마음 오히려 위로되리 / 猶得慰親情

흰 구름 서린 사굴산은 멀고 / 白雲闍崛遠
가을 물 맑은 낙동강 잔잔해라 / 秋水洛江平
돌아가는 노 재촉이 성화인데 / 歸棹如星火
잔을 들매 형제가 한자리로세 / 稱觴共弟兄
조정에선 시종을 추중하였고 / 朝廷推侍從
향리에선 은영인 줄 알았지 / 鄕曲識恩榮
작은 시로 증별 노래 대신하니 / 小什當歌詠
오히려 후생을 권면할 만하여라 / 猶堪勸後生

정진 나루 물 질펀히 흐르는데 / 鼎津流浩渺
나의 집은 그곳 강가에 있었지 / 吾舍在其涯
예전에 심은 대는 천 개이련만 / 舊竹應千箇
새로 옮긴 매화는 몇 가지런고 / 新梅定幾枝
옛날에 놀던 시절 꿈만 같은데 / 昔遊渾似夢
가지 못하고 그저 시만 읊노라 / 未去但吟詩
부로들이 만약 내 소식 묻거든 / 父老如相問
머리털 이미 세었다 말하지 마소 / 休言鬢已絲

용재집 제2권
 오언율(五言律)
정운경(鄭雲卿)의 시에 차운하다. 5수(五首)


이름은 마치 사굴산처럼 무겁고 / 名垂闍崛重
마음은 흡사 정진 물인 양 맑아라 / 心似鼎津
이별한 후 소식이 끊기었더니 / 別去音塵隔
보내온 서신 흉금을 다 쏟았구나 / 書來底裏傾
하늘과 땅이 우리를 용납하니 / 乾坤容我輩
시와 술은 전생부터 맺은 인연 / 詩酒自前生
아름다운 경치 보면 그대 생각노니 / 美景思携手
아련히 내 낀 꽃 도성에 가득해라 / 煙花滿洛城

새로 보낸 시에서 깊은 정 알고 / 新詩知繾綣
종횡으로 쓰인 가는 글자 보노라 / 細字看縱橫
지금은 머리에 온통 백발이니 / 此日頭渾白
어느 때나 반가운 눈길로 만날꼬 / 何時眼共明
강호에 물고기는 제 길 찾았것만 / 江湖魚得計
종고는 새의 마음에 맞지 않아라 / 鍾鼓鳥非情

우리 양쪽의 하염없는 상념은 / 兩地無窮思
붓끝으론 결코 그리지 못하겠네 / 毫端寫不成

헤어진 지 오래매 오늘 슬퍼하고 / 乖闊悲今日
함께 어울려 놀던 옛날 생각노라 / 遊從記昔年
악기와 노래로 만류하던 그해 / 笙歌留舊歲
가인의 붉은 분 서천에 빛났지 / 紅粉耀西天
당시의 행락이 일장춘몽 같나니 / 行樂如春夢
벼슬길은 바로 이별의 자리로세 / 名途是別筵
서로 그리워도 만나지 못하는데 / 相望不相見
쇠잔한 머리털 어느새 허옇구나 / 衰鬢坐蕭然
정주(定州)에 있을 때 제석(除夕)에 함께 놀던 것을 추억하며 이렇게 언급한 것이다.

재상 자리는 내 분수에 안 맞아 / 鼎台非我分
산골짜기에 있는 내 집을 생각노라 / 丘壑憶吾家
오늘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았나니 / 今日知魚樂
새로 보낸 시편 말편자와 맞먹누나 / 新篇當馬撾
첩첩 산을 마주하고 높이 읊조리며 / 高吟對疊巚
날이 저물 때까지 꼿꼿이 앉았노라 / 危坐到棲鴉
어찌하면 우리 서로 반겨 만나 / 安得逢迎地
할 말 잊은 채 함께 차를 달일꼬 / 忘言共點茶
누옥(陋屋)이 또한 정수(鼎水) 가에 있기 때문에 언급한 것이다.

그대가 고향으로 떠난 뒤로 / 自君之出矣
누구와 더불어 다시 글을 논하리 / 誰與更論文
돌아오는 길 도리어 천리인데 / 歸路還千里
올봄은 또 반이 이미 지났구나 / 今春又半分
옛 소리 참으로 화답할 이 적고 / 古聲眞寡和
천리마는 무리가 빈 지 오래라네 / 絶足久空群
한 글자를 가벼이 놓지 말지니 / 一字休輕下
그 가치 황금 몇 근과 맞먹는다네 / 黃金直幾斤


 

[주D-001]강호에 …… 않아라 : 여기서 물고기는 고향인 의령(宜寧)에 가 있는 정운경을, 새는 조정에 몸 담고 있는 작자 자신을 비유하고 있다. 《장자》 지락(至樂)에, “해조(海鳥)가 노(魯)나라 교외에 내려앉자 노후(魯侯)가 그 새를 사당에 모셔 놓고 구소(九韶)의 음악을 연주하고 태뢰(太牢)의 성찬(盛饌)을 올리니, 새가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근심하고 슬퍼하며 고기 한 점 술 한 잔 먹지 못한 채 사흘 만에 죽고 말았다. 이는 자기를 기르는 방식으로 새를 기른 것이지 새를 기르는 방식으로 새를 기른 것이 아니다.” 하였다.
[주D-002]물고기의 즐거움 : 장자(莊子)와 혜자(惠子)가 강물 위 다리를 거닐다가 장자가 “피라미가 조용히 노니니 이는 물고기의 즐거움이로다.” 하니, 혜자가 “그대는 물고기가 아닌데 어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는가?” 하였다. 이에 장자가 “그대는 내가 아닌데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르는 줄 어찌 아는가?” 하니, 혜자가 “나는 그대가 아니므로 진실로 그대를 알지 못하니, 그대는 물고기가 아니므로 그대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르는 것은 분명하다.” 하였다. 《莊子 秋水》 여기서는 정운경의 자득한 즐거움을 뜻한다.
[주D-003]새로 …… 맞먹누나 : 정운경이 새로 보낸 시편을 받아 보니 그가 직접 말편자 소리를 울리며 찾아온 것과 같다는 뜻이다.

용재집 제3권
 칠언율(七言律)
승지(承旨) 호숙(浩叔)이 부쳐 준 시편에 차운하다.


호해의 맑은 놀이 이미 옛일이 됐건만 / 湖海淸遊迹已陳
백발도 여념이 없어 벗들도 못 만난다 / 白頭乾沒闕相親
정진 나루는 남쪽으로 천 리나 먼데 / 鼎津南望還千里
화악에 와서 이제 또 한 봄을 보내노라 / 華嶽今來又一春
승지의 자리에 그대는 스스로 올랐건만 / 池上鳳毛君自致
나는 무슨 수로 산중 깊이 은거할꼬 / 山中桂樹我何因
무단히 다시금 유연한 흥취 이노니 / 無端更起悠然趣
그야말로 선생의 시구가 신묘하기 때문 / 定是先生語有神

용재집 제3권
 오언시(五言詩)
시경 벌목(伐木)의 “상피조의 유구우성(相彼鳥矣猶求友聲)”을 운자(韻字)로 삼아 임소(任所)인 영남으로 돌아가는 소 도사(蘇都事)를 전송하다. 8수(八首)


조물주는 능한 것을 시기하나니 / 造物本忌克
문장 잘 하는 것도 박복한 상이지 / 文字亦薄相
평생 나를 아는 지음의 벗들이 / 平生知音人
태반은 벌써 땅속에 묻힌 것을 / 太半九原葬
백발 노년에 소자를 알고 보니 / 白頭識蘇子
그야말로 어른의 연배가 되었지 / 乃是丈人行
내가 경개의 시를 읊노니 / 我吟傾蓋詩
이 도가 참으로 숭상할 만해라 / 斯道眞可尙

병암에는 봉우리 우뚝이 섰고 / 屛巖立嵯峨
청학동은 등성이 빙 둘러쳤어라 / 鶴洞抱峛崺
좋은 놀이 함께 즐길 수 없으니 / 勝事將無同
피차 서로 왕래할 수도 없게 됐군 / 未可互此彼
골짜기 구름 속에서 고사리 캐고 / 采薇洞中雲
바위 아래 물에서 갓끈을 씻었지 / 濯纓巖下水
어느 때나 함께 살 곳을 잡아 / 何時與卜居
나막신 굽 부러지도록 오고갈꼬 / 來往折屐齒

봄 일도 이미 얼마 안 남았다고 / 春事已無幾
원근에 우는 새소리 재촉하건만 / 遠近催啼鳥
홀로 광문의 집에 앉아서 / 獨坐廣文舍
그저 스스로 시름에 싸일 뿐 / 只以愁自繞
내 집은 정진 나루 가에 있는데 / 我家鼎津
맑은 물결이 드넓게 출렁이지 / 晴波方浩渺
어찌하면 고깃배 한 척 타고 / 何能一釣舟
길이 백구 좇아 노닐 수 있을꼬 / 永逐輕鷗矯

내 벗인 홍직경 / 吾友洪直卿
그 사람 그만 세상을 떠났지 / 其人亦已矣
굽이친 물가 숲 우거진 곳에 / 灣碕茂林鄕
비바람에 쓸리는 무덤가 나무 / 宰木風雨靡
그 식솔들이 끼니가 군색하니 / 百口窘朝夕
선하면 복 있단 말 어찌 믿으랴 / 爲善安可恃
그대가 한 움큼 눈물을 가져다 / 憑君一匊淚
가서 청산 발치에 뿌려주시게나 / 往灑靑山趾

병든 팔로 붓 쥐기가 귀찮아 / 病臂懶把筆
시 읊는 것도 그만둔 지 오래 / 吟諷久已休
그대 위해 우연히 지어 보지만 / 爲君聊偶爾
시가 못 되어 외려 부끄럽구려 / 非詩還自羞
봄바람 부는 영남 가는 길에 / 春風嶺南道
산수가 좋은 놀이 제공하리라 / 山水供勝遊
바라만 보고 따라갈 수 없어 / 瞻望不可及
우두커니 서서 한갓 서성일 뿐 / 竚立徒夷猶

그대가 양친께 술잔을 올리면 / 君稱具慶觴
봄기운조차 더불어 화창하리라 / 春氣與和柔
어버이 모시고 기쁘게 봉양하는 / 彩衣舞翻翻
이 즐거움 밖에서 오는 게 아니지 / 此樂非外求
나는 어버이 잃은 슬픔에 젖은 채 / 我廢蓼莪詩
세월만 속절없이 몇 해를 보냈네 / 歲月空屢周
평생을 두고 깊은 아픔 안은 터 / 沒齒抱沈痛
그대 보내매 두 줄기 눈물 흐르오 / 送君雙淚流

상공이 남쪽 땅을 맡아 다스리니 / 相公鎭南土
세상 풍속이 순후하게 교화되겠군 / 化俗若淳酒
그 막부에 들어갈 이 누구인고 / 入幕者誰子
기개가 높고 우뚝한 소원우로세 / 骯髒蘇元友

술자리 차려 놓고 조용히 앉아서 / 從容樽俎間
함께 의론하여 가부를 결정하리 / 議論共可否
그대 통하여 상공에게 말하노니 / 因君報相公
이 친구 이제 백발이 되었다고 / 故人今白首

계림 숲 우거진 반월성은 / 始林半月城
그야말로 옛날 왕성 터이지 / 乃是古王京
천년 왕업 낙엽처럼 진 뒤 / 千年黃葉後
화류가 한창 분분히 번성했지 / 花柳政紛榮
그대 좋은 계절에 돌아가니 / 君歸佳麗節
농염한 미색이 눈길 빼앗으리 / 冶艷奪目睛
꽃구경하다 여가가 있거든 / 賞芳有餘暇
귀찮더라도 자주 소식 전해 주오 / 無煩數寄聲


[주C-001]소 도사(蘇都事) : 조선조 문신 소세량(蘇世良)으로, 소세양(蘇世讓)의 형이다.
[주D-001]경개(傾蓋) : 수레를 멈추고 일산을 기울인다는 뜻으로, 길에서 잠깐 만남을 뜻한다. 《사기》 추양열전(鄒陽列傳)에, “속어(俗語)에, ‘백발이 되도록 오래 사귀어도 처음 사귄 듯하고, 수레를 멈추고 잠깐 만났어도 오래 사귄 듯하다.’ 하였으니, 그 까닭은 무엇인가? 서로를 아느냐 모르느냐에 달려 있다.” 하였다.
[주D-002]병암(屛巖) : 소세량이 살던 곳으로, 그의 호이기도 하다.
[주D-003]광문(廣文)의 집 : 당(唐)나라 칠학(七學)의 하나인 광문관(廣文館)을 지칭한다. 국자감(國子監)에 속하며 진사시(進士試)를 치를 사람이 들어갔는데, 여기서는 성균관을 뜻하는 듯하다. 참고로, 두보(杜甫)가 취시가(醉時歌)에서, 정건(鄭虔)을 두고, “제공들은 많이 몰려 대성에 오르건만 광문 선생의 관청은 홀로 썰렁하고, 좋은 집에선 어지러이 고량진미 실컷 먹는데 광문 선생은 밥이 부족하여라.[諸公袞袞登臺省 廣文先生官獨冷 甲第紛紛厭粱肉 廣文先生飯不足]” 하였다.
[주D-004]그 …… 소원우(蘇元友)로세 : 소세량의 자가 원우(元佑)인데, ‘우(友)’ 자는 ‘우(佑)’의 오자(誤字)인 듯하다. 소세량이 도사(都事)로 도(道) 관찰사의 휘하에 속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주D-005]그대 …… 말하노니 : 당시 소세량이 부임하는 도의 관찰사가 용재(容齋)의 친구였던 듯하다.
[주D-006]천년 …… 뒤 : 최치원(崔致遠)이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일어날 것을 예측하여 “계림황엽 곡령청송(鷄林黃葉 鵠嶺靑松)”이라 한 구절을 차용하였다.

용재집 제4권
 조천록(朝天錄) 경신년에 질정관(質正官)으로 중국에 갔다.
행산(杏山)을 지나 연산(連山)에 묵으며


요동 하늘엔 오월에도 바람이 거세어 / 遼天五月風怒號
지루하게 비 내리니 참호에 한기 이누나 / 涔涔積雨生寒壕
열결이 기운 떨쳐 우레가 위세를 부리니 / 列缺作氣雷勢豪
수만 군대가 북을 치며 요란하게 행진하듯 / 萬軍鼓噪嚴弓刀
언덕이고 늪이고 온통 진흙탕이 미끄럽고 / 黃泥滑滑迷陵皐
평지 위 지척에 구름 파도가 뒤집히누나 / 平地咫尺翻雲濤
나그네는 여장을 꾸려 한창 부산을 떨고 / 遠人結束方騷騷
마부는 일찍 일어나 수레에 기름을 친다 / 僕夫夙起車載膏
짧은 채찍으로 말 몰아 물 천지를 헤치니 / 短策驅馬行滔滔
눈 가득 보이느니 쓸쓸한 쑥대뿐이로고 / 滿眼寂歷蓬與蒿
고국 떠나 만리 밖에서 머리털은 세지만 / 故國萬里凋鬢毛
왕명 받들고 감히 행역의 고달픔 말하랴 / 王事敢言于役勞
세상일 사람 핍박하여 도망칠 곳 없으니 / 世故逼人無所逃
멍청한 몸 이렇게 된 건 우리 무리 때문 / 一身矹矹緣吾曹
낙동강 가에서 훗날 계모 삶아 먹으리니 / 洛濱他時煮溪毛
내가 지금 못 가는 건 탐욕 때문은 아니지 / 我今未去非貪饕

평생토록 위로 북창의 도연명을 벗했나니 / 平生尙友北窓陶
서안 위엔 현금이요 동이 속엔 탁주로세 / 案上玄琴樽有醪
그저 사모할 수 있고 불러올 수 없기에 / 但可思之不可邀
진종일 눈으로 하늘 나는 기러기 보내노라 / 盡日目送冥鴻高


[주D-001]열결(列缺) : 높은 공중에 있는 틈으로 이곳에서 번개가 일어난다고 한다. 《초사(楚辭)》 원유(遠遊)에, “위로 열결에 이름이여, 아래로 큰 골짜기를 바라본다.[上至列缺兮 降望大壑]” 하였다.
[주D-002]멍청한 …… 때문 : 무능한 자신이 사행(使行)에 끼이게 된 것은 전적으로 벗들이 자기를 가만 놔두지 않고 추천했기 때문이라는 뜻인 듯하다.
[주D-003]낙동강 …… 아니지 : 낙동강 가란 필자의 고향인 정진(鼎津) 나루를 뜻하며, 계모(溪毛)란 시냇가에서 나는 나물이다. 즉 훗날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은퇴할 작정을 하고 있으니, 지금 그곳으로 가지 못하는 것은 부귀에 탐욕을 부려서가 아니라 지엄한 왕명(王命)을 받든 처지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주D-004]북창(北窓)의 도연명(陶淵明) : 이백(李白)이 도연명의 고사를 차용하여 지은 〈희증정율양(戲贈鄭溧陽)〉이란 시에, “맑은 바람 부는 북창 아래 누워, 스스로 태곳적 사람이라 하누나.[淸風北窓下 自謂羲皇人]” 하였다.
[주D-005]현금(玄琴) : 도연명이 타지 않고 벽에 걸어 두었다는, 줄이 없는 거문고인 소금(素琴)을 말한다.
[주D-006]탁주(濁酒) : 도연명이 갈건(葛巾)을 쓰고 다니다가 벗어서 탁주를 걸러 마셨다 한다.
[주D-007]눈으로 …… 보내노라 : 위(魏)나라 혜강(嵇康)의 시 〈증수재입군(贈秀才入軍)〉에 “눈으로 멀리 돌아가는 기러기를 보내고 손으로 오현금을 뜯는다.[目送歸鴻 手揮五絃]”라고 한 대목을 차용한 것으로, 매우 자적(自適)한 모습을 형용할 때 주로 쓰이는데, 여기서는 도연명을 사모하는 마음을 아울러 담고 있다.

용재집 제5권
 적거록(謫居錄) 홍치(弘治) 갑자년 여름 4월, 충주(忠州)로 귀양 간 이후 지은 시들이다.
새로이 맑게 갠 날


황량한 마을에 연일 비가 내리더니 / 荒村連日雨
오늘 저녁에야 비로소 맑게 개었구나 / 今夕卜新晴
문을 밀치며 서늘한 공기 들어오고 / 排闥微涼入
담장 엿보며 이지러진 달 솟아난다 / 窺墻缺月生
시냇가에선 노니는 물고기 부럽고 / 臨流羨魚樂
실족하여 백구와의 맹약 저버렸네 / 失跡負鷗盟
어찌하면 가벼운 배를 타고 갈꼬 / 安得輕舟去
하룻밤 창강을 떠 가면 도착하련만 / 滄江一夜程


[주D-001]실족(失足)하여 …… 저버렸네 : 귀양 온 신세가 되어, 벼슬길에서 물러나 강호에 은거하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기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주D-002]하룻밤 …… 도착하련만 : 용재의 고향인 경남 함안(咸安)과 의령(宜寧) 사이에 있는 정진(鼎津) 나루로 가고픈 마음을 나타내고 있다.
용재집 제5권
 남천록(南遷錄) 을축년 봄 정월, 함안(咸安)으로 배소(配所)를 옮긴 뒤에 지은 시들이다.
주필(走筆)로 2월 26일의 일을 뒤미처 기록하다.

문 닫고 사노니 봄이 문득 반나마 지나 / 閉戶靑春忽過半
잠 깨자 우연히 그윽한 새소리 들리도다 / 睡覺偶聞幽禽喚
살구꽃은 이울겠고 복사꽃은 흐드러져 / 杏花欲衰桃花爛
밖으로 안 나간 사이 계절이 바뀌었구나 / 今者不出時節換
나의 집은 의춘이라 정진나루 가에 있어 / 宜春內家鼎津
새벽에 떠나 저물녘 전에 부모님 배알했지 / 淸曉走謁日未旰
친구들은 유배되어 온 나를 불쌍히 여겨 / 親舊哀我窘流竄
막걸리 다투어 권하기에 수없이 마시었고 / 薄酒相牽飮無算
술 취한 뒤 느긋한 마음으로 나귀를 타고 / 醉後放意跨款段
천천히 가는 대로 놔두고 고삐 안 당겼는데 / 信步徐徐莫須按
뜻하지 않게 나귀가 놀라 탄환처럼 달리어 / 不虞狂駭若輕彈
두 눈에 붉은빛 푸른빛이 뒤섞여 보이더니 / 兩眼但覺朱碧亂
공교롭게 모래와 돌무더기에 몸이 처박혀 / 投身況値沙石攢
얼굴에 흥건한 피가 물처럼 흘러내렸지 / 面上淋漓血如灌
마부는 기가 질리고 행인들도 놀라건만 / 僕夫喪氣路人惋
정작 나는 태연히 대수롭지 않게 여겼네 / 我獨恬然略無憚
이 한 몸 갖은 고난에 신고를 다 겪었으니 / 一身辛苦備諸難
두 해 동안 귀양살이 외려 편안한 셈이지 / 兩載漂浮亦云逭
백발의 몸 벗이 드물어 적적히 지내노니 / 白首寂寂少儔伴
외진 변방에서 울울히 속박받는 신세로세 / 萬里鬱鬱爲馽絆
삶이 이 지경에 이르면 즐거울 게 없으니 / 人生到此不足玩
오늘 당장 죽더라도 무엇을 한탄하리요 / 今日縱死何所歎
돌아올 적에 주인의 위로에 사례하노니 / 歸來又謝主翁喭
동이 가득 탁주에 다시 한 상을 차렸더라 / 滿尊濁醪還一餐

용재집 제7권
 남유록(南遊錄) 경오년
예안(禮安)으로 명중(明仲)을 방문하기로 예전에 약조했다가 또 길이 어긋나 가 보지 못하게 되었기에 그저 시 한 수만 보냈다.

정진 물가에 봄이 저물었다기에 / 鼎水聞春暮
가는 여정을 늦출 수가 없었소 / 行程不可遲
이미 계서의 약속 저버린 채 / 已孤鷄黍約
속절없이 귀거래사 잇소이다 / 空續去來辭
서찰만 번거롭게 부쳐 보내지만 / 書札徒煩寄
이 마음은 틀림없이 아시겠지요 / 心懷定自知
솔바람은 아직도 귀에 들리는데 / 松風猶在耳
함께 술 취할 날은 다시 언제런고 / 一醉更何時

[주D-001]정진 물가[鼎水] : 용재가 어릴 적에 살았던 경상남도 의령(宜寧)에 있는 정진(鼎津)을 가리킨다.
[주D-002]계서(鷄黍)의 약속 : 계서는 닭고기와 기장밥이다. 한(漢)나라 범식(范式)은 자가 거경으로 산양(山陽) 금현(金縣) 사람이고, 장소(張劭)는 자가 원백(元伯)으로 여남(汝南) 사람인데, 둘은 평소 태학(太學)에서 함께 공부하면서 우정이 매우 두터웠다. 두 사람이 이별할 때 범식이 장소에게 “2년 뒤 돌아올 때 그대의 집에 들르겠다.”고 하였다. 꼭 2년째가 되는 날인 9월 15일에 장소가 닭을 잡고 기장밥을 짓고 범식을 기다리자 그 부모가 웃으며, “산양은 여기서 천리나 멀리 떨어진 곳인데, 그가 어찌 기필코 올 수 있겠느냐.” 하였다. 이에 장소가 “범식은 신의 있는 선비이니, 약속 기한을 어기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범식이 당도하였다 한다.
[주D-003]귀거래사(歸去來辭) 잇소이다 : 도연명(陶淵明)이 〈귀거래사〉를 읊고 집으로 돌아갔듯이 자신도 고향인 정진(鼎津)으로 간다는 것이다.
[주D-004]솔바람은 …… 들리는데 : 명중(明仲) 이우(李堣)의 호(號)가 송재(松齋)이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용재집 제7권
 남유록(南遊錄) 경오년
고령(高靈) 용담촌(龍潭村)을 지나다가 우연히 중열(仲說)의 천마록(天磨錄)에 실린 시의 “봄날은 흐려 비 오려는데 새들은 지저귄다.[春陰欲雨鳥相語]”는 구절을 기억하고 슬퍼하고 탄식하던 나머지 그 구절로 운(韻)을 나누어 시를 짓다. 7수(七首)


홀로 가야 땅을 지나노라니 / 獨過伽倻地
그 가야 사람이 생각나누나 / 有懷伽倻人
그 사람은 이제 볼 수 없는데 / 其人不可見
그 사이 용담의 봄 일곱 번이라 / 七變龍潭春
구차히 사는 난들 무에 즐거우랴 / 苟生我何樂
백발이 이제 다시 새로 나누나 / 白頭今更新
돌아가자 정진 나룻가로 가 / 歸哉鼎津
길이 물고기 새들과 벗하리라 / 永與魚鳥親
중열(仲說)의 농사(農舍)가 용담촌(龍潭村)에 있었다.

예전에 어찌 사람이 없었으랴만 / 向來豈無人
그대를 마음 아는 벗으로 의탁했지 / 托子以知心
평생 호해에 노닐리라 약속했건만 / 平生湖海約
무덤 가 나무가 이미 우거졌구나 / 宰木已森森
유수는 현 위에서 울리는 소리요 / 流水絃上聲
황조는 벗을 찾아 울음 우는도다 / 黃鳥求友音
동풍에 괴로운 눈물을 뿌리노니 / 東風洒苦淚
흰 해에 두터운 구름이 끼었구나 / 白日結層陰

봄 구름은 비를 못 내리고 / 春陰不能雨
그윽한 새소리 끊겼다 이었다 / 幽鳥聲斷續
오늘이 꼭 그대 시구 같으니 / 今日如君詩
이내 마음 감촉한 바 있어라 / 我心有感觸
이 생애를 어이 저버리리요 / 此生肯相負
물외의 경치 구경 이루었어라 / 物外果初欲

영남의 시편을 연구로 이루어 / 聯成嶺南篇
천마록의 뒤를 잇고자 하노라 / 擬續天磨錄

옛날 대아의 문장이 사라지니 / 大雅不復古
천지는 날로 황폐해져 갔어라 / 天地日鹵莽
사문에 이 훌륭한 분 얻으니 / 斯文得斯人
세상을 위해 법도가 되었지 / 爲世作規矩
평소 금석처럼 교분 굳었지만 / 平生金石契
나에게 무슨 취할 게 있었으랴 / 於我有何取
평생에 한 번 죽음만 남았으니 / 百年欠一死
늙은이 눈물 비오듯이 흐르누나 / 老涕隕如雨

일찍이 명산을 함께 유람하여 / 早結名山遊
만물을 훌쩍 벗어나리 기약했지 / 將期萬物表
인생이란 대저 이와 같느니 / 人生有如此
일이란 진실로 쉬이 안 끝나지 / 事固未易了
방초가 우거진 가야 땅의 봄 / 芳草伽倻春
가랑비 내리는 용담의 새벽 / 細雨龍潭曉
고개 돌려 천마산 쪽을 보니 / 回首天磨峯
지난 자취는 한 마리 나는 새 / 往迹一飛鳥

아첨하는 소인은 높은 벼슬 받고 / 伊優小者侯
강직한 군자는 제 명에 못 죽다니 / 骯髒不得葬
호오가 어쩌면 이리도 편벽되냐 / 好惡一何偏
조물주는 참으로 경박한 자이라 / 造物眞薄相
슬프다 나의 벗 가야군이여 / 哀我伽倻君
그래서 무망의 재앙 입었구나 / 所以遘無妄
비록 그러나 백대의 아래에도 / 雖然百代下
또한 절로 사람들 앙모할 만하리 / 亦自有可仰

가는 것은 진실로 잡지 못하고 / 去固不可止
오는 것 또한 맞이할 수 없느니 / 來亦莫能御
만사가 이와 같을 뿐임을 봐야 / 萬事如此耳
달인과 더불어 이야기할 수 있지 / 可與達者語
문장은 속절없이 자신 괴롭힐 뿐 / 文章空自苦
일세에 어찌 쓰일 수 있었으랴 / 一世安用許
백구는 만리에 아득히 나니 / 白鷗渺萬里
나도 이를 좇아서 가고 싶어라 / 我欲從此去


[주D-001]정진(鼎津) : 용재의 고향인 경상남도 함안(咸安)과 의령(宜寧) 사이에 있는 나루이다.
[주D-002]유수(流水)는 …… 소리요 : 지음(知音)의 노래인 〈아양곡(峨洋曲)〉을 뜻한다. 〈아양곡〉은, 춘추 시대 백아(伯牙)가 타면 그의 벗 종자기(鍾子期)만이 알아들었다는 금(琴)의 곡조로, 백아가 금을 타면서 고산(高山)에 뜻을 두자 종자기가 “높디높기가 마치 태산과 같도다.[峨峨兮若泰山]” 하였고, 또 유수(流水)에 뜻을 두자 “넓디넓기가 마치 강하와 같도다.[洋洋兮若江河]”라고 했던 고사에서 유래한다.
[주D-003]황조(黃鳥)는 …… 우는도다 : 《시경》 소아(小雅) 벌목(伐木)에, “꾀꼴꾀꼴 꾀꼬리 울음이여, 벗을 찾는 소리로다. 저 새를 보건대 오히려 벗을 찾아 우는데, 하물며 사람이 벗을 찾지 않는단 말인가.[嚶其鳴矣 求其友聲 相彼鳥矣 猶求友聲 矧伊人矣 不求友生]” 하였다.
[주D-004]이 …… 이루었어라 : 생애를 헛되이 보낼 수만은 없는 노릇인데, 이제 그토록 바랐던 물외(物外)의 유람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주D-005]천마록(天磨錄) : 연산군 8년(1502) 2월, 읍취헌(挹翠軒) 박은(朴誾)과 함께 개성 천마산(天摩山) 일대를 유람하면서 지은 시들을 모은 시 집록(輯錄)이다.

용재집 제7권
 남유록(南遊錄) 경오년
취원루(聚遠樓) 의령(宜寧)에 있다.


주인의 정사 처리는 참으로 능숙해 / 主人政事少全牛
여유로운 솜씨 새로 백척 누각 지었군 / 遊刃新修百尺樓
사해 문장이 여기 한 번 돌아보았으니 -누각에 강혼(姜渾)의 기(記)가 있다. / 四海文章曾一顧
천년의 명승지 틀림없이 길이 전해지리 / 千年名勝定長流
정진의 가을 물은 환히 맑아 볼만하고 / 鼎津秋水明堪翫
사굴산의 봄빛은 멀리 허공에 뜰 듯해라 / 闍窟春光遠欲浮
훗날 이 누각 오를 땐 내가 늙었을 터 / 他日登臨吾便老
옛 숲과 산은 그때까지 은근히 잘 있겠지 / 慇懃好在舊林丘

용재집 제10권
 [산문(散文)]
통정대부(通政大夫) 행 창원 부사(行昌原府使) 정공(鄭公) 묘갈명 병서(幷序)


공의 휘는 광보(光輔)이고 자는 운지(運之)이며 동래 정씨(東萊鄭氏)이다. 이 집안이 세상에 드러난 것은 고려 좌복야(左僕射) 휘 목(穆)으로부터 시작하였다. 그 후 8대(代)에 이르러 휘 귀령(龜齡)은 결성 현감(結城縣監)으로 벼슬을 마쳤다. 현감이 휘 사(賜)를 낳았으니, 그는 집현전 직제학으로서 어버이 봉양을 위해 진주 목사(晉州牧使)로 나갔다. 목사가 휘 난종(蘭宗)을 낳았으니, 그는 네 차례 과거에 급제하고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올랐고, 저명한 장상(將相)이 되었고 익혜(翼惠)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필법이 당대에 으뜸이라 비록 아이들이나 하인들조차도 그 이름을 알았다. 공은 바로 그의 장남이다. 지금 영중추부사공(領中樞府事公) 광필(光弼)은 의정부 영의정의 자리를 역임하여 조야(朝野)가 바야흐로 시귀(蓍龜)인 양 의지하고 있으니, 바로 공의 아우이다.
공은 소싯적부터 과거 공부를 하여 누차 낙방의 고배를 마셨고, 마침내 문음(門蔭)으로 벼슬에 올라 공과(功課)를 쌓음으로 해서 여러 차례 승진하여 통정대부에 이르렀다. 내직(內職)으로는, 먼저 와서 별제(瓦署別提)가 되었고, 주부(主簿)가 된 것이 세 곳이었으니, 사재감(司宰監)ㆍ종부시(宗簿寺)ㆍ군자감(軍資監)이다. 그리고 재차 사헌부 감찰이 되었고, 장원서 장원(掌苑署掌苑), 평시서 영(平市署令), 장례원 사의(掌隷院司議), 종친부 전부(宗親府典簿)가 되었다. 첨정(僉正)이 된 것이 세 곳이었으니, 장악원(掌樂院)ㆍ예빈시(禮賓寺)ㆍ제용감(濟用監)이다. 그리고 통례원 봉례(通禮院奉禮)가 되었다. 외직(外職)으로는 먼저 연산 현감(連山縣監)이 되었고, 평양부 판관(平壤府判官)이 되었다. 군수가 된 것이 다섯 곳이었으니, 정선(旌善)ㆍ풍기(豐基)ㆍ금산(錦山)ㆍ순창(淳昌)ㆍ초계(草溪)이다. 부사(府使)가 된 것이 두 곳이었으니, 창원(昌原)과 연안(延安)이다. 공은 네 차례 품계가 올라 당상관(堂上官)에 이르렀으며, 외읍(外邑)을 맡아 다스린 것이 아홉 고을에 이르렀으니, 비록 크게 현달했다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현달한 셈이다.
공은 천성이 방정하고 근엄하며 관직에서는 봉직(奉職)에 힘써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으니, 공을 좋아하지 않는 자들은 이로써 헐뜯었지만 그러나 공은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늙은 나이에 이르지도 않아서 벼슬을 버리고 은퇴하여 의령(宜寧) 사굴산(闍崛山) 아래 살면서 그렇게 여생을 마치리라 작정하였다. 부제학군(副提學君)이 매양 휴가를 내어 공을 뵈러 오는데, 경연(經筵)의 임무가 무거워 오래 슬하에서 뫼실 수가 없었다. 그래서 친구들이 다투어 공에게 조정으로 돌아올 것을 권하였으나 공은 듣지 않았으며, 아우 영중추부사공도 간절한 우애로 서신을 보내어 역시 그렇게 청한 것이 전후로 이어졌으나 끝내 공의 뜻을 굽힐 수 없었으니, 그 본성을 지킴이 대개 이와 같았던 것이다.
공이 병환 중일 때 부제학군이 조정에 청하여 역마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 시약(侍藥)하였으나 끝내 효험을 보지 못하고 갑신년 3월 9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68세이다. 오호라, 슬프도다. 고자(孤子)들이 그 영구(靈柩)를 모시고 광주(廣州) 성달리(省達里)로 돌아가 안장하였으니, 선영(先塋)을 따른 것이다.
공의 배필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대호군(大護軍) 이격(李格)의 따님으로 공보다 26년 먼저 세상을 떠났으며, 4남 4녀를 낳았다. 아들의 맏이 한룡(漢龍)은 수원 판관(水原判官)이고, 둘째 사룡(士龍)은 바로 부제학군으로 19세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또 중시(重試)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바야흐로 문명(文名)을 떨치고 있다. 셋째 원룡(元龍)은 진사(進士)이고, 넷째 언룡(彦龍)은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이다. 딸의 맏이는 감찰(監察) 이희업(李煕業)에게 출가하였고, 둘째는 유학(幼學) 박종상(朴從庠)에게 출가하였고, 셋째는 부장(部將) 이윤우(李允耦)에게 출가하였고, 넷째는 평사(評事) 이응(李膺)에게 출가하였다. 판관은 참봉(參奉) 유계근(柳繼根)의 딸을 아내로 맞아 4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순우(純祐)ㆍ순지(純祉)ㆍ순복(純福)ㆍ순호(純祜)이다. 부제학은 부장(部將) 성렬(成烈)의 딸을 아내로 맞았고, 진사는 호군(護軍) 박진(朴軫)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도사는 부사(府使) 이희옹(李希雍)의 딸을 아내로 맞아 1남을 낳았으니, 순가(純嘏)이다. 감찰은 2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안국(安國)과 안방(安邦)이다. 안방은 겸사복(兼司僕)이다. 딸은 남응규(南應奎)에게 출가하였다. 평사는 2남을 낳았으니, 양정(揚廷)과 빈정(賓廷)이다.
장례일이 얼마 남지 않아서 부제학군이 나와 지기(知己)의 친분이 있는 터라 공의 행장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묘도(墓道)에 새길 비문(碑文)을 부탁하였으니, 감히 승낙하고 명(銘)을 짓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글은 다음과 같다.

공의 선조는 / 公之祖先
고려 때 공을 세워서 / 奮庸高麗
작위가 복야에 이르러 / 爵爲僕射
당대에 명망이 높았어라 / 望隆一時
그 단서 끊임없이 이어서 / 厥緖聯聯
베풂은 두텁되 보답은 더뎠지 / 施厚報遲
직제학은 어버이를 위하여 / 直學爲親
영화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 棄榮若遺
먼 고을의 목사가 되어서 / 屈牧遠州
즐거운 마음으로 봉양하였네 / 色養怡怡
음덕을 쌓고 누리지 않았으니 / 積德不食
오직 후손에게 끼쳐 주었도다 / 惟後之貽
익혜공이 이를 거두었으니 / 翼惠是收
이치가 어긋남이 없구나 / 理無參差
과거에 급제하고 공신이 됨에 / 擢科策勳
마치 누군가가 도와주는 듯 / 若或相之
장수가 되고 재상이 되어서는 / 或將或相
두 직책에 모두 적임자였어라 / 出入咸宜
무엇으로써 증명할 수 있는가 / 何以爲證
승상이 써 놓은 글이 있다네 / 丞相之辭
공은 바로 그의 맏아들이라 / 公其胄子
아버지의 복을 이을 입장이지 / 享有當菑
영추공이 바로 그 아우이고 / 領樞是弟
제학은 바로 그 아들이라 / 提學吾兒
일족이 크고 존귀해지니 / 族大以貴
보고 듣는 이 모두 감탄했지 / 觀聽嗟咨
당상관의 반열은 / 堂上之班
지위인즉 낮지 않나니 / 位則不卑
아홉 고을의 수령이 되었으니 / 九邑之長
운수가 어찌 좋지 않았다 하리요 / 數豈云奇
늙을수록 더욱 원로가 되었건만 / 老而彌元
세상 사람들과는 배치되었지 / 與世背馳
사굴산의 기슭과 / 闍崛之麓
정진의 물가가 / 鼎津之湄
바로 낙토(樂土)이니 / 是惟樂地
이곳에 돌아감에 무얼 주저하리요 / 歸歟何疑
내가 한마을 이웃으로 살면서 / 我隣我里
더러 술도 마시고 바둑도 두었지 / 或樽或棋
땔나무 할 산들이 있고 / 採有陵丘
낚시질 할 못이 있어라 / 釣有陂池
여생 마치도록 한가히 노닐어 / 卒歲優游
오래오래 장수하리라 했더니 / 曰期曰頤
큰 운수는 머물지 않는 법 / 大運不留
한 번 병환을 치료치 못했구나 / 一疾莫醫
저 푸른 하늘이 밝다 여겼더니 / 謂蒼昭昭
어이해 갑자기 여기에 이르렀나 / 胡遽止斯
남은 경사 후손에게 돌아갔으니 / 餘慶有歸
이치가 끝내 날 속이지 않았구나 / 終不我欺
광주의 이 산기슭에는 / 廣州之原
솔과 가래나무들 무성하여라 / 松梓猗猗
어찌 새 무덤이 없으리요 / 豈無新阡
고인은 조고를 생각하였도다 / 祖考我思
이곳에 돌아와 안장하노니 / 反葬於是
선조의 무덤이 여기 있도다 / 先兆在玆
이 무덤의 비석을 새겨서 / 刻此墓石
밝게 보여 주노니 무너뜨림이 없기를 / 昭示無隳


[주D-001]시귀(蓍龜) : 거북과 시초이다. 옛날에 일의 시비와 길흉을 점치던 것으로 사물을 판단하는 기준을 뜻하며, 나아가서 모든 의문을 판별해 주는 원로나 국사(國士)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주D-002]승상이 써 놓은 글 : 익혜공(翼惠公) 정난종(鄭蘭宗)의 묘갈(墓碣)을 어느 승상이 썼던 듯하다.

월정만필(月汀漫筆)
월정만필(月汀漫筆)


윤근수(尹根壽) 저

○ 삼대(三代 하ㆍ은ㆍ주) 이전의 시대는 공공(公共)의 임금이 천자가 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영토는 모두 제후에 봉해 주어 제각기 나라를 이루게 하였다. 때문에 왕기(王畿)의 천 리 밖은 모두 제후의 영토였다. 훌륭한 덕이 있었기 때문에, 삼대, 삼대하고 일컫지만 천자가 소유한 영토는 사실 좁았다. 진(秦) 나라 때 와서 천하를 군현(郡縣)으로 만든 뒤에 중국은 모두 천자의 영토가 되었다.
진 나라 이후로 역년이 가장 오랜 나라는 한ㆍ당ㆍ송이었다. 당 나라는 명황(明皇)의 천보(天寶) 때에 와서 안녹산(安祿山)의 난리로 인하여 하북의 영토를 잃게 되었다. 이때 전국 때의 연(燕)ㆍ제(齊)ㆍ조(趙)ㆍ위(魏) 네 나라의 영토는 모두 재후들의 차지한 바가 되어, 당 나라가 망할 때까지 복구하지 못하였다. 송 나라는 개국하기 전에 벌써 연경ㆍ운중(雲中)의 16개 주(州)를 잃어 버렸고, 휘종(徽宗)ㆍ흠종(欽宗) 때 와서는 두 임금이 금 나라에 사로잡혔으며, 고종(高宗)은 임안(臨安)으로 수도를 옮겼다. 드디어 중원을 잃어 버리고 송 나라가 망할 때까지 회복해내지 못하였다. 당 나라ㆍ송나라는 비록 각각 3백여 년을 누리기는 하였지만, 당 나라는 하북의 영토를 잃었고 송 나라는 중원을 잃었으니, 천하가 분열된 것은 말할 것조차 못 된다. 유독 양한(兩漢 서한과 동한)만이 4백여 년을 누리기는 하였으나 서한은 2백 14년 만에 왕망(王莽)에 의해 반역을 담하였다.
그런데 대명(大明)은 홍무(洪武) 원년 무신(1368)에서 지금의 만력(萬曆) 정유년(1597)까지 2백 30년이다. 그 사이 정통(正統) 연간에 황제가 오랑캐의 적진 속에 빠지긴 하였지만 곧 바로 남쪽으로 돌아왔으므로 영토는 한자 한치도 잃지 않았다. 당ㆍ송은 정말 말할 것조차 못 되고 한은 2백 14년 만에 왕망의 찬역이 있었으며, 대명은 2백 30년이 되었어도 천하가 조용하였으니, 아, 훌륭한지고!
○ 기자(箕子)가 조선에 봉해진 뒤 몇 대를 전해 내려오다가 기준(箕準) 때 와서 위만 (衛滿)의 난리를 피해 평양에서 금마군(金馬郡)으로 도망쳤으니 바로 지금의 익산이다. 이것이 마한이 되었으며, 또한 몇 대를 전해 내려오다가 망하였다. 평안도에 지금 선우(鮮于)라는 성(姓)이 있는데, 기자의 후손이라 일컫는다. 《씨족대전(氏族大全)》에서 본 것이 기억난다. 《씨족대전》에,
“기자는 조선에 봉해지고, 소자(少子)는 우(于)에 봉해졌는데 그들의 후손이 선우씨가 되었다.”
고 하였다. 그렇다면 곧 기자와 소자의 후손이요, 기준의 후손은 아니다. 기준은 마한을 세웠는데, 그의 후손이 곧 한씨(韓氏)가 되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청주 등지에 살고 있는 한씨들은 다 기준의 후손이라한다. 이 말은 《위략(魏略 책명)》에서 나왔다. 후손이라고는 하였지만 꼭 그런지는 모르겠다. 제종조에 기자의 후손을 찾아서 대대로 벼슬을 주어서 제사를 받들게 하여 마치 고려 숭의전(崇義殿)처럼 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진정한 후손을 얻지 못한다 하여 그 논의는 드디어 중단되었다. 《여지승람(輿地勝覽)》 익산성씨조(益山姓氏條)에, 한씨 성을 가진 자가 있다고 한 것은 이를 말함이다.
중국 사람은 위국의 왕을 일러 왕자(王子)라고 한다. 우리나라가 난리를 만나 파천(播遷 임금이 도성을 떠나 딴 곳으로 피난함)하게 되면서부터 중국 사람을 자주 접촉하여 이 말을 귀에 익히 들었다. 인하여 《송감(宋鑑)》의 〈인종기(仁宗紀)〉가 기억난다. 〈인종기〉에,
“북사(北使)가 말하기를, ‘고려가 직공(職貢 신하가 왕에게 바치는 공물)을 소홀히 하니 지금 군대를 동원하여 정벌하렵니다.’하니 인종은 말하기를, ‘이것은 다만 왕자(王子)의 죄요, 백성에게 관계되는 일은 아니다. 지금 군대를 동원하여 정벌한다 하더라도 왕자는 반드시 베이지 못할 것이요, 백성만 무찔러 죽일 것이다.’하여, 마침내 군대를 중지시켰다.”
고 하였다. 여기서의 왕자는 곧 고려의 왕을 지칭한 것이니, 송 나라 때 이미 그렇게 하였다.
광녕성(廣寧城) 북쪽 5리쯤에 기자정(箕子井)이 있다. 옆 부근에 옛날 기자묘가 있고, 방건(方巾 두건의 일종으로 옛날 문인(文人)들이 쓰던 관)을 쓴 기자의 소상(塑像 진흙으로 만든 사람의 상(像))이 있었는데, 가정(嘉靖 명 세종의 연호. 1522~1566) 연간에 달자(㺚子)가 태워 버려서 지금은 없어졌다. 광녕은 기자의 봉역(封域) 안에 있었다. 또한 기자가 여기에 머무른 사실이 없는데도 우물과 사당이 있었겠는가?
○ 평양에 등나무 지팡이 한 쌍이 있었는데 ‘기자 지팡이’라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하나는 가운데가 부러져서 누런 주석으로 부러진 곳을 싸 묶었다. 이것을 칠갑(漆匣)에 담아 두었다가, 감사가 관아에 나갈 적에 효기(驍騎) 두 사람이 가지고서 앞길을 인도한다. 감사가 좌정해서 정무를 보거나 손님을 대할 때는 이것을 섬돌 위 좌우편에 갈라 놓아두는데 붉은 칠한 나무틀로써 받는다. 임진왜란 때 잃어버렸다고 한다.
○ 광녕성 서쪽 40리 지점에 요궁(遼宮)의 옛터가 있었는데, 지금은 달자(達字)의 영토가 되었다. 성의 서쪽 5리쯤에 야율초재(耶律楚材)의 무덤 이있다. 그의 후손들에 대해서 물어 보았더니, 홍무(洪武) 황제가 오랑캐인 원 나라를 몰아낼 적에 그들의 종족을 따라서 오랑캐 지역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 대릉하보(大陵河堡 《월정별집》만록에는 소릉(小凌)으로 되었음)의 서북쪽 20리쯤에 산이 있으니 즉 목엽산(木葉山)이다. 산의 서쪽에 요(遼)의 시조 아보기(阿保機)의 사당이 있는데 성에서 바라다 보이며, 산 북쪽에는 그의 무덤이 있다 한다. 유정수(劉靜修)의 시에,
목엽산 머리 비바람 스친 지 몇해더냐 / 木葉山頭幾風雨
라고 한 것이, 곧 이 산이다.
○ 안시성주(安市城主)가 당 태종(唐太宗)의 정병(精兵)에 항거하여 마침내 외로운 성을 보전하였으니, 공이 위대하다. 그런데 성명은 전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서적이 드물어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고구려 때의 사적(史籍)이 없어서 그런 것인가? 임진왜란 뒤에 중국의 장관(將官)으로 우리나라에 원병(援兵) 나온 오종도(吳宗道)란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안시성주의 성명은 양만춘(梁萬春 일반적으로는 양(楊)이라고 함)이다. 당 태종 《동정기(東征記)에 보인다.”
고 하였다. 얼마 전 감사 이시발(李時發)을 만났더니 말하기를,“일찍이 《당서연의(唐書衍義)》를 보니 안시성주는 과연 양만춘이었으며, 그 외에도 안시성을 지킨 장수가 무릇 두 사람이었다.”
고 하였다.
○ 참의 유조인(柳祖訒)은 젊어서 과거 공부에 전념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미 당상관에 오른 뒤에 소(疏)를 올려 화산군(花山君) 권반(權攀)의 전례에 의하여 과거에 응시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였다. 유조인이 일찍이 말하기를,
“명사(名士)로는 좌참찬 성공(成公)과 같고, 원훈(元勳)은 상산군(商山君) 박모(朴某)처럼 되어도 모두 소용 없고 반드시 과거에 올라서야만 세상에 전해서 행세할 수 있다.”
고 하였다. 나도 이런 말이 있다는 것은 들었는데, 마침 유조인이 찾아왔기에 이 사실을 물었더니, 정말 그렇다고 하였다. 사람들의 과거 급제에 대한 부러움이 이렇게까지 된단 말인가?
○ 황강(黃岡) 참판 김중회(金重晦 이름은 계휘(繼輝))가 같은 때 급제한 이준민 자수(李俊民子修 자수는 자(字))ㆍ이인 숙응(李遴叔膺 숙응은 자) 및 임자년 급제한 박계현 군옥(朴啓賢君沃 군옥은 자)과 승문원에 같이 벼슬하게 되었다. 자수가 참판에게 묻기를,
“네가 일찍이 사람을 볼줄 안다고 자부하더니 군옥의 앞길을 말할 수 있겠는가?”
하니, 참판은 대답하기를,
“군옥은 비록 조신(操身)하지 않아도 부형의 덕택으로 지위 명망은 병조 판서까지 이를 것이다.”
고 하였다. 나는 어떻게 되겠느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너는 비록 시골 선비이지만 그 재주가 병조 판서는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군옥보다 10년 뒤에야 될 것이다.”
고 하였다. 숙응을 부르니 대답하기를,
“숙응의 공명(功名)은 선지(瑄之 어희선(魚希瑄)의 자)와 견줄 만하고, 오히려 너희들을 따라올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그때 어선지(魚瑄之)는 바야흐로 판사가 되었던 것이다. 나중에 선지와 숙응의 벼슬을 모두 호조 판서에 이르렀고, 군옥과 자순는 모두 병조 판서에 이르렀으니, 그 말이 마치 시귀(蓍龜 시초점과 거북점)처럼 용하였다.
소로(蘇老 노수신(盧守愼)을 지칭함)는 말하기를,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호)는 존심(存心) 공부가 많았다. 우리 동방에서, 학자로는 회재를, 위대한 사람으로는 음애(陰崖 이자(李耔)의 호)를 보았노라.”
고 하였다.
○ 소재(蘇齋)는 일찍이 말하기를,
“회재는 존심(存心) 공부가 많고 퇴계(退溪)는 강학(講學) 공부가 많았다.”
고 하였다. 퇴계가 보니, 회재가 망기당(忘機堂)에게 답한 편지가, 무릇 다섯 차례를 오고 갔다. 퇴계는 옷깃을 여미고 공경한 마음으로 말하기를,
“뜻하지 않게도 선생의 학문과 견해의 높음이 여기에까지 이르셨는가.”
하였다. 망기당이란 분은 생원 조한보(曺漢輔)인데 선학(禪學)을 공부한 사람이다.
○ 온 세상의 평론이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의 호)는 선(善)을 좋아하고 선비를 사랑 하며, 전고(典故)에 널리 통하였으나 학문상의 공부에 이르러서는 별로 착실하지 못하다고 하였다.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의 호)은 벼슬한 초년에 자기의 저술한 사단ㆍ칠정의 논을 소재에게 편지를 보내서 그의 의견을 물었다. 소재는 답장에,
“음양 가운데 태극이 있고, 칠정 가운데 사단이 있다.”
고 하였다. 고봉은 또 답장을 보내기를,
“내 마음에 아주 만족하여 부질없이 자신을 가졌습니다.”
고 하였다.
○ 소재의 일기를 보니, 소재는 경석(經席)에서 율곡(栗谷)을 세 번이나 추천하였다. 하루는 경연 중에서 상이, 유능한 인재를 묻자 소재는 대답하기를,
“이이(李珥)ㆍ허엽(許曄)입니다.”
라고 하였고, 하루는 경연에서 이 아무는 크게 임용해야 된다고 추천하였으며, 하루는 상이 대제학이 될 만한 사람을 묻자, 이이ㆍ이산해(李山海)ㆍ구봉령(具鳳齡)을 추천하였다.
○ 무인년(1518, 중종 13)에 김사재 정국(金思齋正國 정국은 이름)은 황해도 관찰사로 나갔는데, 마침 종계 주청사(宗系奏請使)의 일행을 만나 전례에 따라 황강(黃江)에서 송별을 하게 되었다. 상사는 남지정 곤(南止亭袞 지정은 호)이었고, 부사는 이음애 자(李陰崖耔 음애는 호)였으며, 서장관은 한공 충(韓公忠)이었다. 사재가 상사의 객관(客館) 대청에서 술잔을 잡아 작별 인사를 나누고, 이어서 지정에게 말하기를,
“공은 선비들을 사랑하지 않는데 모름지기 더욱 유의하여 아끼고 사랑해야겠습니다.”
고 하였다. 지정은 화가 잔뜩 나서 환송의 술잔을 받지 않고 방으로 들어갔다. 사재는 공손히 사과하면서 나오기를 권했으나 끝내 나오지 않았다. 이 때문에 특별히 지정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던 것이다.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사재는 벼슬이 깎여서 쫓겨나고, 제현(諸賢)들은 큰 풍파를 만나서 20년 동안 조정에 돌아오지 못하였다. 이것은 곧 지정의 앙갚음이었다.
○ 일본 책사(冊使)가 우리나라에 도착하였다. 수행원 가운데 유산인 승종(兪山人承宗)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시에 능하고 또한 글씨에도 아주 뛰어나서 진(晉) 나라 사람의 필법이 있었다. 접반사 판서 이항복(李恒福)이 한 낭중(韓郞中 낭중은 당시 한호(韓濩)의 벼슬)이 쓴 책을 가지고 그에게 보이니, 유공(兪公)은 크게 칭찬을 하여 말하기를,
“자못 진 나라의 필법을 체득했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그 책 안에 두 장은 자획이 진 나라 필법이 아니니 아마도 이 사람의 글씨가 아닌 것 같소.”
하였다. 이 판서가 이 책을 가지고 한 낭중에게 물으니, 한 낭중이 대답하기를,
“그 책 안에 두 장은 곧 김생(金生)의 시법을 모방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김생의 필법은 우리나라에서는 비록 훌륭한 이름을 떨치고 있으나 필체가 왕희지(王羲之)ㆍ왕헌지(王獻之)의 것과는 조금 다르고, 더군다나 중국 사람들은 한번도 이 필체를 보지 못한 것이다. 유공의 감상이 정밀함을 알 수 있다.
○ 장인(丈人 조안국(趙安國))은 가정 을묘년(1555, 명종 10) 왜변 때에 여러 장수들과 함께 어겨서 평안도로 귀양을 갔다가 곧바로 공로를 세워 속죄 하겠다는 명목으로 전라도 흥양현(興陽縣)의 녹도(鹿島)로 옮겨졌다. 얼마 후에 녹도에서 배 전체의 왜구를 몽땅 사로잡았으므로 장인은 공에 참여되어 돌아오게 되었다. 그런데 왜구의 배에서 얻은 생초(生綃)에 미인의 상반신을 그린 그림을 나에게 선물로 주었다. 그림의 미인은 하얀 꽃을 손에 쥐고 마치 그 향내를 맡고 있는 듯한 것이었다. 그 위에 시를 쓰기를,
졸다 깨니 중문은 오슬오슬 추운데 / 睡起重門淰淰寒
희끗희끗 귀밑머리 마전한 홑적삼이네 / 鬢雲繚繞練杉單
한가로운 이 마음 가는 봄이 애석해 / 閑情只恐春將晩
꽃가지 꺾어 쥐고 혼자서 보고 있구나 / 折得花枝獨自看
하였는데, 당인(唐寅)이 손수 소시(小詩)를 이렇게 쓰고, 아울러 도장까지 눌렀다. 뒤에 중국 소설을 상고해 보았더니, 인은 소주(蘇州) 장주(長洲)의 이름난 선비였다. 그런데 남기(南畿)의 향시(鄕試) 자원으로서 거인(擧人) 서경(徐經)과 과실을 저질렀다. 기미년 회시(會試) 때 장고관(掌考官) 예부 시랑 정민정(程敏政)이 글제 팔아먹은 사건으로 죄를 입고 관리에게 넘겨졌다. 그래서 한평생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고 문장과 서화로 스스로를 즐겨 예술과 문장에 자못 유명해져서, 그림하면 백호(伯虎)를 꼽았다. 백호는 곧 당인의 자다. 그의 그처럼 훌륭한 재주를 가지고 스스로 이름을 떨쳐서 제 몸을 마치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개탄할 일이다. 그 뒤에 임진왜란으로 서울이 함락되어 그 그림을 잃어버렸다. 그 시 또한 훌륭한데, 행여 후대에 영원히 없어질까 염려된다. 우선 이것을 기록 하여서 재주를 품고도 시험해보지 못한 그 사람을 슬퍼한다.
○ 임금호(林錦湖 임형수(林亨秀)의 호)는 동배(同輩)들을 업신여기는 버릇이 있어, 아무리 선배일지라도 모두 버릇 없는 말을 퍼부었다. 그러나 퇴계에게만은 존경하면서 감히 함부로 굴지 못하였다. 일찍이 신영천(申靈川 이름은 잠(潛))의 죽화(竹畫)에 쓰기를,
영천이 그려낸 푸른 대나무는 / 靈川筆下碧琅玕
소상 어귀 높은 표지 눈과 달이 차갑구나 / 湘口高標雪月寒
시인을 추려본들 어느 누가 근사하리 / 揀得詩人誰得似
청수한 그 아취는 퇴계와 함께 보리라 / 淸癯宜竝退溪看
하였으니, 그를 지극히 높인 것이다. 그 뒤에 제주로 귀양가서 퇴계의 편지에 시로써 화답하기를,
그대의 높은 의리 나로서는 어림없나니 / 高義吾君我不如
편지에 넘친 인정 너무도 간절하구나 / 書來情款溢言餘
변씨의 옥이 월형(刖刑) 부름을 원래 알고 있는데 / 本知卞玉能成刖
반드시 양장이라야 수레 넘어지는 것 아니라네 / 未必羊腸可覆車
떠도는 벼슬살이 이제는 괴롭기만 해 / 浮海宦情今已苦
산 사서 돌아갈 계획 응당 소홀하지 않으리라 / 買山歸計未應踈
강매화 피고 짐을 누구와 얘기하리 / 江梅落盡誰相問
만리 밖에서 속절없이 편지만 전할 뿐이네 / 萬里空傳尺素書
하였다.
○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호)은 진퇴의 의리를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호)에게 물었다. 목은은 대답하기를,
“지금 시대에는 제각기 제 뜻대로 행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 대신들은 국가와 고락을 같이해야 하므로 떠나버릴 수 없지만, 너는 떠날 수 있다.”
하였다. 야은은 떠날 것을 결정하고 목은에게 돌아가겠다는 작별 인사를 고하였다. 목은은 그때 장단(長湍) 별장(別莊)에 있었는데, 다음과 같은 시를 써서 주었다.
나는 외 기러기 까마득히 떠 있구나 / 鴻飛一箇在冥冥
○ 목은은 고려 말엽에 수상(首相)으로서 연경에 가기를 자청하였는데, 고황제(高皇帝)를 만나보고 할 말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태조(太祖)의 의심을 살까 염려하여 태종(太宗)을 서장관으로 자신이 추천해서 데리고 떠났다. 홍무 황제(洪武皇帝)가 목은을 원 나라 조정의 한림(翰林)으로 여기면서 대화를 나누려 하였다. 목은은 본국을 부호(扶護)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니, 황제는 거짓 못 알아 듣는 체하면서 말하기를,
“네 한어(漢語 중국 말)는 납합출(納哈出)과 비슷하구나.”
고 하였다.
○ 기묘사화 때 구수복(具壽福)은 현직 이조 좌랑으로서 파직을 당하여 돌아갈 곳이 없었다. 장인은 이를 불쌍히 여겨 자기의 보은 별장에 내려가 있게 하였다. 구공은 즉시 보은으로 내려갔다. 얼마 뒤에 장인의 종으로 주간하는 자가, 구공이 여기에 붙어 살면서 자기 종처럼 부려먹는 것이 싫어서, 장인에게 참소하기를,
“좌랑 어른이 농막에 와 계시면서부터 여러 종들을 몹시 부려서 배겨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고 하였다. 장인은 사정을 알아보지 않고 발끈 화를 내서 그를 즉시 내쫓게 하였다. 그때는 마침 겨울철이었다. 구공은 쫓겨나서 야윈 말에 종 하나를 앞세우고 길을 오르긴 하였으나, 사방을 둘러봐도 갈 만한 곳이 없어, 행색이 참담하였다. 마침 호걸한 선비 하나가 사냥터에서 많은 구종(驅從)들을 거느리고, 개는 몰고 매는 어깨에 얹고서 지나갔다. 그런데 구공이 길가에서 어정버정 돌아다녔기 때문에 한 시간도 못 되는 사이에 무릇 두 차례나 만나게 되었다. 호걸한 선비는 홀연히 말 위에서 구공에게 읍하고 말하기를,
“그대는 어떤 사람이기에 이처럼 쓸쓸히 타달거리고 있소?”
하였다. 구공은 그렇게 된 까닭을 대강 말하였다. 호걸한 선비는 구공을 즉시 말에서 내리게 하였다. 털 보료를 눈 위에 깔고 또한 꿩을 구워 안주 삼아 술을 권하면서 옛날부터 친하게 지내는 사람처첨 마음을 터놓고 얘기하였다. 이어서 그의 집으로 함께 돌아갔다고 한다.
○ 소재(蘇齋)는 말하기를,
반우(返虞)는 비록 옛날부터 전해오는 예절이지만, 우리나라의 여묘(盧墓)에 거하는 예절이 참 좋은 풍속이다. 반우를 하면 좋은 집에서 처자들과 함께 거처하게 되므로 애통한 생각을 잊어버릴 때가 많아진다. 그러므로 상중(喪中)의 기강을 헐어버리니 아주 옳지 못하다.”
고 하였다. 일찍이 경석(經席)에 모시고 있으면서 거상(居喪)할 적에 반우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을 힘써 진달하였다.
진우량(陳友諒)의 아들 이(理)는 우량의 참람된 국호(國號)를 이어받아서 그대로 무창(武昌)에서 도읍하다가, 명(明) 나라 군사에게 사로잡혔다.고황제(高皇帝)가 명옥진(明玉珍)의 아들 승(昇)과 함께 고려에 귀양을 보냈다. 승은 개성에 머물러 있고, 이는 또 청양현(靑陽縣)으로 옮겨졌다. 이는 키가 보통 사람보다 우뚝하게 뛰어났다. 무창에서 첩 40명과 흰빛 준마 40필을 거느리고 왔다. 그런데 그가 죽자, 첩과 말이 한두 해 사이에 연다아 죽어 없어져서 하나도 남지 않았다고 한다.
과거에 급제한 뒤의 일이다. 통역관 고언명(高彦明)이 나에게 일러 말하기를,
“몇 해 전에 한번은 이당 화종(李堂和宗)을 만났더니 말하기를, ‘신사년(1521, 중종 16)에 가정 황제의 등극 조사(登極詔使) 수찬 당고(唐皐)가 나올 때에, 원접사 용재(容齋) 이공(李公)이 중국 사신에게 지금 천하의 문장은 누가 제일이냐고 물으니, 당 수찬이 천하의 문장은 이몽양(李夢陽)이 제일이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한다. 그때 공동(崆峒 이몽양의 호임)은 나이가 많아서 벼슬을 사직하고 변량(汴梁)에 살고 있었지만 이름이 천하에 울렸는데 우리나라는 알지 못하였다. 비록 이 말을 들었으면서도 중원(中原)에 가서 그를 방문하지 못했으니 탄식할 일이다. 근세에 와서야 《공동집》을 얻고, 비로소 그는 시와 문장이 다 훌륭하여 왕세정(王世貞)ㆍ이반룡(李攀龍) 등과 같은 문장들이 그를 매우 추존하기에 이르렀음을 알았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공동자(崆峒子)가 있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았다.
○ 당조사(唐詔使)가 서울에 도착할 적에 무릇 유관(遊觀)하는 재신(宰臣)들의 주고받는 시는 제술관 한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각각 한재신의 시를 맡아서 지었으므로, 혼잡하지 않았다. 눌재(訥齋) 박상(朴祥)이 예조 판서 홍숙(洪淑)의 시를 전담하여 지었던 것이다. 상사(上使)가 극히 감탄하여 칭찬하기를,
“예조 판서의 시는 아주 훌륭하여 원접공(遠接公 이행(李荇)을 말함)의 시보다 오히려 낫다.”
고 하였다. 이 말을 주부 정작(鄭碏)에게 들었다. 첨정(僉正) 박난(朴蘭)이 일찍이 나에게 말하기를,
“눌재의 여주 제영(驪州題詠)에,
도은ㆍ목은의 문장은 거북돌에 남아 있고 / 文章陶牧留龜石
신괴한 꾀꼬리는 말바위 기억하네 / 神怪黃驪記馬岩
라는 글귀는 문장의 힘이 매우 있다.”
고 하였다.
○ 내가 북경에 조회간 것이 무릇 네 차례였다. 가정 병인년(1566, 명종 21)에 서장관으로서 관원(灌園) 박공(朴公 이름은 계현(啓賢))을 따라서 갔다. 그 당시 예부 상서는 고공의(高公儀)였다. 섬돌 중층 위에서 범연히 바라보다가 회동관(會同館) 연회 때 한자리에 가까이 앉게 되어 자세히 살펴보니, 그 얼굴 생김새는 보통 사람에 지나지 않으나 온화스러운 군자였다. 그는 절강 인화(仁和) 사람이다. 그 뒤에 정승이 되었다. 만력 원년(1573, 선조 6)에 수상(首相) 고공(高拱)이 환관 풍보(馮保)를 없애려 하다가 실패하여 쫓김을 당하였다. 공은 지위가 셋째였는데, 환관 풍보 때문에 놀라고 걱정되어 얼마 못 가서 죽으니, 나이는 56세였다.
○ 만력 원년 계유에 주청부사로 청련(靑蓮) 이 판서(李判書 이름은 후백(後白))와 동행하였다. 육수성(陸樹聲)은 회시 장원으로 예부 상서가 되었는데, 헌칠한 키에 점잖게 서 있었다. 중국 사람은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모두 귀밑머리를 깨끗하게 쓸어내리는데, 육공만이 그러지 않았다. 그는 예부 상서에 이르기까지 관계의 경력을 쌓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 매양 임하(林下)에 있었는데 조정에서 불러 올려 승급(陞級)시켜 지금의 관직까지 오르게 된 것이다. 들으니 각로(閣老) 장거정(張居正)이 좌주(座主 과거 시험관의 경칭)였다고 한다.
○ 북경에 갔다 돌아온 사람의 말에,
성조(成祖)가 서울의 대궐을 연도(燕都)에 창건하였다. 그 지점의 동편에 깊은 못이 있었는데, 이것을 즉시 메우고 바로 그 지점 위에 동장안문을 세웠다. 뒤에 그 문이 여러 차례 화재를 당하였다. 서로 전해 오기로는 이 못의 용이 갈 곳을 잃고 성이 나서 일부러 불을 지른 것이라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문을 다시 만들어 화재를 막으려 하였는데 모든 기둥과 석가래를 모두 돌로 만들었다. 그래서 화재의 걱정은 드디어 없어졌다.”
한다.
내가 북경에 갔을 때 동장안문에 이르러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석가래와 기둥에 단청이 떨어져 나간 곳은 본바탕이 드러났는데, 모두 다음은 돌이었다. 그의 말이 정말 옳았다.
○ 동봉(東峯 김시습(金時習)의 호)은 학조(學祖)와는 같은 시대 사람이고, 학조 또한 당시의 문벌 있는 집안 사람으로서 중이 된 자여서 동봉에게 굽히지 않고 매양 그와 겨루었다. 하루는 산속으로 같이 가는데 동봉이 앞서고 학조는 뒤따랐다. 때마침 비는 개고 길 옆엔 멧돼지가 칡뿌리를 캐먹은 자리가 구덩이가 되어 꽤 깊은데, 거기 물이 그득이 고여 있었다. 동봉이 학조를 돌아 보고 말하기를,
“내가 이 웅덩에 들어가 뒹굴고 나올 터이니, 나를 따라 할 수 있느냐?”
하니, 학조는 이를 허락하였다. 즉시 두 사람은 같이 웅덩이 속으로 들어가서 뒹굴고 나왔다. 그런데 동봉은 입은 옷과 온 몸에 물 한 방울 젖은 곳이 없는데, 학조는 흙탕물이 온 얼굴에 흘러 내렸고 의복이 몽땅 젖어 있었다. 동봉은 웃으면서 학조에게 이르기를,
“네가 어찌 내 흉내를 낼 수 있겠느냐?”
고 하였다.
○ 동봉이 풍악산에 유람하려던 하루 전날이었다.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의 호) 등 훌륭한 명사들이 우거지인 용산 수정(水亭)에 찾아왔다. 동봉이 마주 애기하다가 갑자기 창밖 두어 길 밑으로 떨어져서 몹시 다쳐 숨을 쉬지 못하였다. 여러 손님들이 모두 달려가 구원하여 겨우 깨어났다. 그를 정자 안에 메다 놓고 손님들이 묻기를,
“그대가 이렇게 많이 다쳤으니 내일 어떻게 떠나겠는가?”
하니, 동봉은 대답하기를,
“자네들은 누원(樓院)에 가서 나의 송별만 기다리고 있게, 곧 조섭해서 조금이라도 낫게 된다면 병을 참고 일을 나서겠네.”
라고 하였다. 다음날 아침에 모든 손님들이 누원에 가니, 동봉을 벌써 와 있는데, 떨어져 다친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없이 자약하게 웃고 이야기하였다. 추강은 나무라기를,
“자네는 어찌하여 환술을 써서 우리들을 속이는가?”
라고 하였다.
○ 《금헌휘언(今獻彙言)》에,
“동지 뒤에 남은 날이 있으면 남은 날의 수로써 이듬해의 윤달을 결정한다. 가령, 하루가 남으면 이듬해 정월에 윤달이 들고, 이틀이 남으면 2월에 윤달이 들고, 만약 13일 이상이 남으면 다음해엔 윤달이 없다.”
고 하였다.
융경(隆慶) 6년 임신년(1572, 선조 5) 앞해는 곧 신미년이다. 그 해에 동지 후 남은 날이 4일이었는데 일관(日官)은 2월에 윤달이 든다고 하였다. 어 학관(魚學官 숙권(叔權))은 일찍이 《휘언(彙言)》을 보았으므로 윤달이 잘못되었다. 고집하여 영감사(領監事)가 다시 계산해 보라는 명령까지 하는데, 일관은 그래도 자기의 견해를 고집하여 틀리지 않는다고 힘껏 말하였다. 뒤에 대통력을 보니 그 해의 윤달은 과연 2월에 들었었다. 일관은 죄책(罪責)을 면하였다. 일관 남응년(南應年)은 말하기를,
“책력 만드는 방식에 동지의 남는 날짜로써 윤달을 삼는다고 말하였지만, 이 방법은 혹 맞지 않는 곳이 있으며, 그달 안에 중기(中氣)가 없는 달로써 윤달을 삼으면 역수에 꼭 들어맞는다.”
고 하였다. 이것 또한 알아 두지 않을 수 없다.
○ 중국 사람은 말하기를,
“송조(宋朝)가 남쪽으로 옮겨 왕이 임안(臨安)에 머물러 있다가 그대로 수도를 정하였다. 옛 서울의 신하들은 임금의 수레를 호종하여 임안에 와서 살았으므로 성내의 백성들은 모두 개봉 사람이었으며, 언어는 모두 변량(汴梁)의 음에 비롯되었다. 자손들이 전하여 지금에 이르렀으므로 항주(杭州) 성안은 중국의 말씨이고 성밖은 남방음에 시골 사투리다.”
고 하였다.
○ 호응원(胡應元)은 말하기를,
“중국 각 현의 진사 출신은 복건성 보전현(莆田縣)이 가장 많고, 그 다음이 절강성ㆍ여요현(餘姚縣)이며, 이 밖의 고을들은 모두 이 두 현만 못하다.”
고 하였다.
○ 판윤 전임(田霖)은 육진 부사(六鎭府使)로 있을 적에, 객관(客館)을 다시 수리하고 낙성연을 베풀어서 이웃 진부(鎭府)의 통판(通判)들이 다 모였었다. 공이 객관에 나가 맞아서 연회를 시작하려는데 갑자기 배앓이를 만나 매우 위급하여 즉시 관아로 돌아오고, 여러 손님들도 편안히 있을 수 없어 모두 각자 숙소로 물러났다. 그런데 갑자기 객관 정청(正廳)의 대들보 기둥이 쓰러지면서 부러졌다. 그러나 사람은 다치지 않았다. 만약 공이 병이 들지 않고 잔치를 열게 되었다면 여러 손님들과 함께 모두 눌려 죽었을 것이다. 하늘이 도운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은 집이 청도(淸道)에 있었으니, 청도는 곧 경상북도였다. 탁영이 과거에 급제하기 전에 경상북도의 향시에는 언제나 장원이었다. 같은 시기에 경상남도에서는 권홍(權弘)이 여러 번 장원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 알지는 못하였다. 회시에 응시하기 위해 두 사람 다 서울에 왔다. 하루는 권홍이 탁영을 찾아왔다. 탁영은 허겁지겁 나가 맞아서 윗자리에 안내하여 앉히고 물었다.
“그대는 향시 때마다 늘 장원만 하니, 무슨 책들을 읽어서 그처럼 문장이 훌륭합니까?”
하니, 홍은 대답하기를,
“딴 책은 별로 공부한 것이 없고 《통송(通宋)》만 숙독했을 뿐입니다.”
고 하였다. 탁영은 즉시 그 자리에 벌렁 드러누워서 업신여기는 태도를 보이고 다시는 손님의 대접을 하지 않았다.
탁영이 한번은 별과에 응시하였다. 그의 두 형인 준손(駿孫)ㆍ기손(驥孫)은 탁영의 손을 빌어서 탁영과 함께 모두 초시에 합격하였다. 전시의 날이 되어, 탁영은 두 형님의 책문만 대신 지어주고, 자기의 것은 짓지 않았다. 대개 그의 형님에게 장원을 양보하고 자기는 다음 과거 때 장원하려는 속셈이었다. 두 형님이 모두 과거에 올랐으며, 준손은 1등이 되었다. 다음 과거 때 전시의 시험관이 마음속으로는 탁영의 문장이 훌륭함을 알면서도 그 사람을 꺼려서 2등에 눌러 두었으므로 민첩(閔怗)이 곧 1등이 되었다. 탁영은 듣고 분이 나 말하기를,
“민첩은 어떠한 사람이냐?”
하고 통한해 마지않았다.
○ 동봉(東峯) 김시습(金時習)은 집을 뛰쳐나와서 방랑 생활을 하였다. 만약 성안에 오게 되면 어린아이들이 떼를 지어 뒤따라 오면서, ‘다섯살’하고 불러대었다. 대개 동봉이 다섯 살 적에 신동이란 별명이 있어서 나라의 부름을 받고 대궐에 나아갔기 때문인 것이다.
성안에 들어와서는 번번이 향교동에서 묵고 있었는데,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이 찾아가면 동봉은 예우하지 않고 벌렁 드러누워서 두 발을 거꾸로 벽 사이에 기대고 발장난을 하면서 종일 동안 얘기하였다. 동리 이웃 하인들이 모두 이르기를,
“김 아무가 서 상국을 예우하지 않고 이처럼 모욕을 주었으니, 다음에는 반드시 오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그 뒤 며칠 만에 서 정승은 다시 와서 찾아보았다.
○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은 경적(經籍)에 넓게 통하고 아울러 자ㆍ사(子史 제자 백가서와 사기)에 이르기까지 모두 거침없이 외었다. 한번은 강연에서 임문(臨文)하여 진계(進啓)할 적에 《성리대전(性理大全)》중의 말을 인용한 것이 있었다. 그런데 반 장을 외어 나가도록 한 자도 틀리지 않았다. 미암이 세상을 뜬 뒤에 내가 특진관으로 경연에 입시하였으므로 왕의 이같은 말씀을 듣게 되었다.
○ 기묘 제현들의 한 시대의 평론이, 문장은 한 나라의 법을 본받았고, 글씨는 진(晉) 나라의 법을 본받았으며, 시는 당(唐) 나라의 격조를 배웠고, 인물은 송(宋) 나라의 여러 유학자로서 표준을 삼은 것이라 하였으니, 김원충(金元冲 김정(金淨)의 자)ㆍ김대유(金大柔 김구(金絿)의 자(字))ㆍ기자경(奇子敬 기준(奇遵)의 자) 등이다. 충암(冲菴 김정의 호)과 덕양(德陽 기준의 호)의 시는 아주 훌륭하였다. 그의 유집(遺集)은 모두 부인한테 보관되어 있었는데, 보았더니 정말 당(唐) 나라의 음조였었다. 참의의 초서(草書) 두루마리가 있었는데, 흡사 진(晉) 나라 사람의 풍격이었고, 해자(楷字)는 왕희지(王羲之)ㆍ왕헌지(王獻之)의 필법을 완전히 숙달한 것이었다.
옥당에 옛날에 《한서(漢書)》가 있었는데 그 제목은 곧 충암의 글씨였다. 몇 해 전에 내가 구황 어사(救荒御史)로 충청도에 내려 가니 회덕(懷德)의 옛 집에 충암 부인이 아직까지 살아 있었다. 길가에서 통성명하였는데, 그의 손자가 충암의 전시 때의 시권(詩券)을 내보여 주었다. 자획이 《한서(漢書)》의 제목 글씨와 똑같아 자못 진 나라 사람의 필법이 있었다.
○ 유정수(劉靜修)는 백대를 전할 만한 인물이다. 〈과강부(過江賦)〉하나가 흠이었다. 정수는 또 다른 시에서,
누운 자리 지금은 누구에게 맡길꼬 / 臥榻而今又屬誰
하늘 땅 돌아보니 깃발만이 나부낀다 / 乾坤回首見旌旗
길가의 사람들은 항복한 임금 가리켜 / 路人爭指降王道
주 나라 일곱 살 애기와 흡사하다 하는도다 / 好似周家七歲兒
고 하였는데, 자못 조롱과 풍자가 들어 있어 또한 〈과강부〉의 뜻과 같았다.
○ 문경공(文敬公) 허조(許稠)는 예조 판서로 있을 때 그의 외손녀를 위해 신랑감을 고르게 되었다. 일찍이 사학(四學)에 앉아서 여러 서생들을 시험하였는데, 남학(南學)에서 광릉군(廣陵君) 이극배(李克培)를 택하여 그를 손서로 삼았다. 문경공의 집은 남부(南部)에 있었는데, 그 집을 광릉군에게 물려 주었다. 그 행랑채는 새[草]로 이은 것이었는데, 광릉의 대에 이르러서도 개조하지 않았으니, 두 분의 청렴 검소함은 공경할 만하다. 그 집이 지금은 상공(相公) 유전(柳㙉)의 집이 되었다고 한다. 외손녀는 즉 최유종(崔有悰)의 딸이다.
○ 장계(長溪) 황경문(黃景文) 정욱(廷彧)의 자)은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사대문서(事大文書 중국에 보내는 편지와 문서)는 묵초(墨草)에서 나왔다. 매양, ‘조선국왕 신성휘(朝鮮國王臣姓諱)’라고 하였는데, 대개 휘(諱) 자는 쓸 수 없기 때문이다.”
하였다.
지금 《대명회전(大明會典)》을 상고해 보니 종사(宗社)의 축문에 모두 황제 성명으로 쓰여졌다. 장계(長溪)의 말이 정말로 이와 꼭 들어맞았다. 이 소문이 장계의 귀에 들어가게 되면 더욱 자신만만해 할 것이다.
○ 일찍이 병인년(1566, 명종 21)에 북경에 가서 강절 선생(康節先生 소옹(邵雍)의 호)의 ‘생강(生薑)이 나무 위에서 난다’는 말을 국자학정 육광조(陸光祖)에게 물었더니, 말하기를,
“이것은 곧 중국의 속담입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생강은 곧 나무 위에서 난다.’고 그릇 말하자, 어떤 사람이 그 말을 부인하면서, ‘생강은 정말 땅위에서 난다.’하였더니, 나무 위에서 난다고 말하는 사람은, ‘내 말이 옳다.’고 우겼습니다. 그래서 지는 자는 노새 한 마리를 내기로 서로 약속하고 딴 사람에게 물으니 ‘생강은 원래 땅 위에서 나는 것인데, 어찌 나무 위에서 날 리가 있겠는가?’라고 하자, 그 사람은 곧 노새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복종하기는 싫어서, ‘노새는 준다만 생강은 결코 나무 위에서 나는 것이다.’라고 하였답니다. 이 속담은 사람들이 망령된 소견을 고집하는 것을 조롱한 것입니다.”
하였다.
○ 광주(廣州) 둔촌(遁村) 이집(李集)은 고려 말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전교시사에 이르렀다. 아들 셋을 두었는데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다. 맏아들 지직(之直)은 호조 참의ㆍ보문각 직제학이었다. 참의는 아들 둘을 두었는데 또한 과거에 급제하였고, 막내 아들 인손(仁孫)은 우의정이었는데 시호는 충희(忠僖)다. 충희공은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고, 둘째 아들 극감(克堪)은 형조 판서를 지냈고, 광성군(廣城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문경공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과거에 급제하고, 그의 맏아들 세좌(世佐)는 광양군(廣陽君)에 봉해졌다. 광양군의 아들 수정(守貞)은 수찬이다. 수찬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고, 막내 아들은 준경(浚慶)인데 영의정이다. 영의정의 작은 아들 덕열(德悅)은 현재 좌승지다. 8대를 연달아서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다. 또 광양군의 아우 세우(世佑)는 관찰사다. 관찰사의 아들 자(滋)는 홍문관 박사로 있다가, 연산군 때 외직으로 함창 현감이 되었다. 함창 현감의 아들은 약빙(若氷)이니 종부시 정이다. 정의 아들 홍남(洪男)은 공조 참의다. 참의의 아들은 민각(民覺)인데 장원을 하였고, 지금은 제용감 정이 되었다. 연달아 9대를 과거에 급제한 것이다.
○ 교관(敎官) 정군경(鄭君敬 작(碏)의 자)이 나에게 윤창주(尹滄洲 윤춘년(尹春年)의 호)가 임자년 가을에 쓴 증별시(贈別詩)를 보여 주었다. 시는 이러하다.
문장은 정맥이 있어 / 文章有正脈
뜻과 음이 주가 되거늘 / 意音爲之主
이 도를 오랫동안 전하지 못해 / 此道久不傳
소경 귀머거리 되고 말았네 / 已矣爲聾瞽
성과 정은 원래 맑은 것 / 性情本湛然
뜻만이 고무할 수 있다네 / 惟意能鼓舞
애와 낙은 각각 서로 응하고 / 哀樂各相應
안팎은 원래 한 법칙이다 / 表裏元一矩
원기는 정말 호연한 것이라 / 元氣信浩然
큰 악에 악보 어이 있으리 / 大樂安有譜
음조ㆍ반절은 문자에 붙어 있고 / 調切寄文子
박자는 종고에 맞춰 응하는 도다 / 節奏應鐘鼓
슬프다. 내 옛글 읽음이여 / 嗟余讀古書
십 년 동안 고생스리 노력했네 / 十年勤自苦
다행히도 하루아침에 깨달아져 / 一朝幸有得
눈으로 보듯 훤하다 할 수 있었도다 / 敢謂如目覩
정군은 나이 비록 적지만 / 鄭子雖年少
그 마음은 옛글 생각 간절했네 / 其心甚慕古
상종하여 여러 차례 물었지만 / 相從已屢問
도움 못 준 내 자신 부끄럽구나 / 自愧無所補
양기함을 근본 삼고 / 養氣以爲本
독서해서 돕게 했네 / 讀書以爲輔
혈기 정말 성하지 않으면 / 血氣苟不盛
만 권 서적 끝내 거칠어질 뿐이다 / 萬卷終鹵莽
그대는 귀 기울여 듣기 바라노니 / 願君聽慇懃
내 이 말은 진심에서 나온 것이라네 / 我言出肺腑
어찌 문장 짓는 것뿐이겠나 / 豈徒作文法
도 배움 또한 이로부터 취해지는도다 / 學道從此取
그대 지금 멀리 떠남은 / 今君有遠行
적막한 저 남방으로 돌아가는구나 / 寂寞歸南土
서로의 왕래 응당 오랫동안 없으리니 / 追隨應久廢
이별 어이 셀 수 있으랴 / 別離那可數
옛사람 흉내내어 증언하려 하나 / 贈言欲效古
내 재주는 이백ㆍ두보처럼 훌륭치 못하다네 / 我才非李杜
서성거리며 작별 차마 못하는데 / 徘徊不忍別
가을 바람 강포를 움직이도다 / 秋風動江浦
그때 정군(鄭君)의 나이 겨우 스무 살이었는데, 창주의 허여해 줌이 벌써 이와 같았다. 이 시는 자못 법도가 있어 볼 만하였다. 창주는 평생에 성률학(聲律學)을 가지고 자부하였다. 과연 독특한 견해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지금 왕감주(王弇州 명 세정(世貞)의 호)의 《치언부록(巵言附錄)》을 상고해 보니 왕경부(王敬夫 명 구사(九思)의 자)가 남곡(南曲)을 짓기를
술 또한 다 떨어져서 / 且盡杯中物
못 마시고 있는데 청산은 어두워진다 / 不飮靑山暮
라고 하여, 남방의 음은 반드시 남방, 북방의 음은 반드시 북방의 음으로 더욱 적절하게 분별하였다. 그렇다면 동일한 중원의 음이면서 남음(南音)ㆍ북음(北音)도 서로 들어가지 못하는데, 하물며 우리나라는 말과 소리가 다른 데에도 홀로 중국의 성률에 맞음이 있겠느가? 참으로 꼭 그렇지 못할 것이다. 이어 옛날 응교로서 옥당에 있을 적의 일이 기억난다. 한번은 어떤 모임에서 이 사실을 들어 부제학 소재에게 물었더니, 소재는 말하기를,
“이것은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고요하게 움직이지 않는 것은 성(性)이니 이것은 정말 맑은 것이지만, 정(情)이란 느껴서 모든 일에 통하는 것이다. 어찌 정마저 맑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 남소문동(南小門洞)에 종실(宗室) 한 분이 살고 있었다. 시를 즐기고 손님을 좋아하여, 한때의 이렇다 하는 시인 및 방외의 선비들이 모여 들어 언제나 손님이 만원이었다. 조우(祖雨)라는 중이 있었는데 일찍이 《장자(莊子)》를 가지고 재상 노사신에게 배우러 갔던 자다. 하루는 조우가 그의 집에 먼저 도착하고, 동봉 김열경(金悅卿)이 나중 이르렀다. 동봉은 조우가 이미 온 줄 알면서도 거짓 모르는 체하고 말하기를,
“조우는 노사신에게 수학하였으니 이 어찌 사람의 수에 넣을 수 있겠는가? 만약 여기에 오기만 하면 내가 반드시 그를 죽여 버리겠다.”
고 하니, 조우는 분을 견디지 못하여 동봉의 앞에 불쑥 나와서 말하기를,
“생원이 감히 대재상을 드러내 놓고 욕을 퍼부어서야 되겠는가? 만약 나를 죽이고 싶으면 그대 마음대로 죽여 보시오.”
하였다. 동봉은 조우를 움켜잡고 때리려 하는데 여러 손님들이 모두 떼어 말려서 겨우 빠져 달아나게 되었다. 노사신이 그때 정승의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그 뒤에 동봉이 수락산 속에 머물러 있었는데, 조우가 갑자기 찾아와 뵈었다. 동봉은 흔연히 맞으면서 말하기를,
“네가 고맙게 나를 찾아보러 오는가? 네가 글을 배우겠다면 내 마땅히 가르쳐 주겠다.”
하고, 즉시 종에게 밥을 지어서 먹이도록 하였다. 밥상이 준비되자, 동봉은 조우의 옆에 높이 걸터앉았다. 조우가 밥을 떠서 먹으려고 입에 숟가락이 갈 적마다 들어가기 직전에 발로 비벼 땅 위의 먼지를 일으켜서 그 숟갈 위에 날아 들게 하였다. 그래서 조우는 한 그릇 밥을 다 퍼내도록 끝내는 한 숟가락의 밥도 먹지 못하게 되었다. 조우가 말하기를,
“생원은 이미 밥을 지어서 나는 주고서 또 먹지 못하게 하니, 이것을 무슨 생각이오?”
하니, 동봉은 대답하기를,
“네가 노 아무개에게 글을 배웠으니 어찌 사람이냐?”
라고 하였다. 조우가 일찍이 송광사 주지를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우송광(雨松廣)이라고 불렀다. 80~90이 되도록 살아 있었으므로 수암(守庵) 박지화(朴枝華)가 그를 만나보게 되었던 것이다. 한번은 이 얘기를 수암에게 전하고 말하기를,
“동봉의 한 일들이 이처럼 괴상하여 나는 그가 어떠한 사람인지 모르겠소.”
하니, 수암은 대답하기를,
“동봉은 일찍이 주공ㆍ공자를 대단찮게 여기고, 탕왕과 무왕을 그르게 여긴 적이 있었다. 그런데 노사신이 그때 총애받는 정승이었기 때문에 반드시 이와 같이 하였을 것이다.”
하였다 한다.
○ 고황제(高皇帝)의 장릉(長陵)은 남경의 종산(鍾山)에 있다. 그 산에 고라니와 사슴들이 많이 서식하여도 사람들이 감히 사냥을 할 수 없다. 때문에 언제나 사람을 겁내지 않아서 가까이 가도 피하지 않으며, 산밑 시냇물에는 굵고 작은 고기들이 헤엄치고 놀고 있는데, 그물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사람이 가까이 가도 또한 놀라 달아나지 않는다고 한다.
○ 직장(直長) 송미로(宋眉老)가 일찍이 말하기를,
“이천(利川)에 진사 한 분이 있었으니 곧 모재(慕齋)의 고제자였다. 그의 성명은 잊어버렸다. 한번은 모재가 풀지 못한 문자를 적어서 창주(滄洲) 윤춘년(尹春年)에게 물었더니, 조목조목 해석하여 다시 의문과 논란의 여지가 없었다. 극히 탄복할 만하다.”
고 하였다.
○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정영위(丁令威)는 항주(杭州) 사람이다. 의무려(醫無閭)에 들어가서 신선을 배웠다. 지금 도화동(桃花洞)에 성수분(聖水盆)이 있으니 이것이 정영위의 유적인데, 학이 되어 화표주(華表柱)에 날아와서 울었다.
고 하였다. 요성(遼城) 밖 팔리참(八里站)의 서북쪽에 수산령(首山嶺)이 있고, 수산령의 동북쪽에 석봉(石峯)이 높이 솟아 있으니 곧 문황제(文皇帝)의 어가(御駕)가 머물던 산이라고 한다.
○ 추강(秋江) 남백공(南伯恭 남효온(南孝溫)의 자)이 과거에 응하지 않으니, 동봉은 그를 나무라기를,
“나는 영묘조(英廟朝 세종의 묘호)의 사람으로 노산(魯山) 때의 일을 직접 보았으니, 진실로 본조에 벼슬하기 어렵지만 자네는 그 뒤에 태어났으면서 벼슬하지 않는 것은 너무 지나치다.”
하였다. 추강은 드디어 시험에 응시할 의사가 있었다. 그러나 소릉(昭陵)의 일이 통탄할 일이다 하여, 만약 복위시킬 수만 있다면 내가 벼슬할 수 있다하고 곧 소릉 위소(復位疏)를 올렸는데, 당시 논의가 떠들썩해져 이를 배척하였다. 그래서 추강은 즉시 벼슬할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이따금 과장에 들어가서는 빈 피봉(皮封)만 내었으므로 과거 글은 장원에 뽑혔으나, 피봉을 뜯으면 성명이 없어서 방에 붙지 못하였다고 한다.
○ 만력 기축년(1589, 선조 22)에 종계 주청사(宗系奏請使)로 북경에 갔었다. 그때 마침 중양일(重陽日)이어서 국자감에서 공자를 뵈었다. 여관으로 돌아올 적에 일부러 딴 길을 택했는데, 길 위에서 보지 못한 것을 구경하려는 것이었다. 그 길을 지금 비록 기억해 낼 수 없으나, 동화문(東華門) 남쪽으로 뻗은 거리인 듯한데, 그 거리가 아주 좁았다. 학관(學官) 안정란(安庭蘭)이 중국 말을 잘하였으므로, 말머리에 서서 앞을 인도하였다. 발걸음이 그 동네의 중간쯤에 도착하니, 화분을 길가에 내다 놓은 것이 있었다. 그 꽃나무는 외줄기로 우뚝하게 바로 올라서 해마다 자란 마디가 있고, 마디마다 바야흐로 잎사귀가 붙어 있는데, 옆으로 뻗어 나간 가지가 없으며, 그 잎사귀는 꽤 두툼하면서도 넓적하여 마치 두충(杜冲)의 잎사귀와 같았다. 잎사귀 사이에 하얀 꽃이 때마침 활짝 피어 있는데, 꽃봉오리가 오얏꽃에 비해서 조금 더 크고도 두꺼웠다. 나는 생각하기를, 9월에 피는 흰꽃은 우리나라에서는 없는 것이니 반드시 이름난 꽃이리라 여기고, 곧 말을 멈추고 안생(安生)을 시켜서 길 옆에 사는 사람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이 꽃은 관가의 물건이라고 했다. 한 관리가 있다가, 이 말을 듣고 문밖에 나와서 내게 이르기를,
“당신이 이 꽃을 사겠소?”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사려는 것이 아니오. 나는 외국 사람인데, 이 꽃이 무슨 꽃인지를 몰라서 물어본 것뿐이오.”
하니, 대답하기를,
“이것은 말리화(茉莉花)입니다.”
하고, 인하여 손수 그 꽃 네댓 송이를 따서 내게 선물하였다. 냄새를 맡아보니 맑은 향기가 코를 찔렀다. 인해서 젊을 적에 본 《사문유취(事文類娶)》가운데 말리화를 두고 읊은 시가 떠올랐다. 시는 이러하다.
여러 사람 놀라게 할 고운 자태는 없지만 / 雖無艶態驚群目
다행히도 맑은 향기는 구추의 으뜸이라 / 幸有淸香壓九秋
이 꽃은 원래부터 맑은 향기가 있기로 유명한 것이다. 예관에 돌아온 즉시 소매 속의 꽃송이를 꺼내 가지고 물었더니, 여관 역부(役夫)들이 모두 말하기를,
“말리화다. 말리화는 남방에서 나는데, 서울에 옮겨 심어 그 꽃이 자못 많이 퍼졌다.”
고 하였다.
○ 모재는 벼슬하기 전부터 벌써 시를 볼 줄 안다고 당시에 이름이 났었다. 판서 성경숙(成磬叔 성현(成俔)의 자)이 한 해 동안 나서지 않고 집안에서 요양하였다. 그 사이에 두시(杜詩)를 숙독해서 사운(四韻) 여덟 수를 짓고 스스로 ‘마음에 만족한 작품이니 옛날 사람의 시에 견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때는 아들 하산(夏山) 세창(世昌)이 과거에 오르지 못하였을 때다. 하루는 하산에게 말하기를,
“내 이 시는 옛날 사람의 작품에 부끄러울 것이 없을 만한 것이다. 들으니 네 친구 김 아무개는 시의 잘잘못을 가려낸다고 하니, 네가 보통 종이에다 하인을 시켜서 베끼고 이것을 부엌 위에 수십 일 동안 매달아 연기에 오래 묵은 것처럼 만든 뒤, 그을리게 하여 김 아무개에게 보여 그것이 어느 시대의 시인가를 물어보라.”
하였다. 하산이 자기 집에 모재를 초청하여 손님 자리에 같이 앉고, 판서는 그 안방에 있으면서 벽만 가려 놓고 그 말을 들으려 하였다. 하산이 묻기를,
“집의 어른께서 시를 묵은 책 상자 속에서 찾아내셨는데, 이것이 참으로 옛날 사람의 작품임은 알 수 있다. 그러나 잘 모르겠구려. 송 나라 말엽의 작품인지, 아니면 원 나라 사람의 작품인지를 분명히 알 수 없어, 자네에게 이 시의 감정을 청하네.”
하였다. 모재는 두 편을 읽고 말하기를,
“이 시는 격이 낮다. 송 말엽의 시는 벌써 아니고, 원 나라 시 또한 아니다. 바로 현대의 작품이다.”
고 하였다. 또 묻기를,
“최고운(崔孤雲 최치원(崔致遠)의 호)이나 이목은(李牧隱 이색(李穡)의 호)의 작품은 아니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최고운ㆍ 이목은의 시는 격이 높다. 그러니 그들의 작품은 아닐 것이고, 진실로 현대 사람의 작품이다. 그러나 현대 사람의 작품으로는 매우 훌륭하다. 다른 사람은 아마 이렇게 지을 수 없을 것이다. 들으니, 대감(大監 성현을 지칭)께서 요즘 두시를 읽으셨다고 하는데, 만약 정밀하게 생각하고 다듬으시면 이만한 작품을 쓰실 수 있을 것이다. 아마 대감의 작품일게다.”
하였다. 판서가 안에서 이 얘기를 듣고 문을 열고 나와서 모재를 보고 말하기를,
“너의 시 공부가 이 정도가지 이른 것은 뜻밖이구나.”
하고, 드디어 술상을 차리고 마주 앉아서 오랫동안 조용히 얘기한 뒤에 파하였다 한다.
○ 중국의 풍속 습관은 예와 지금이 동일하지 않은 것이 있다.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기장밥은 젓가락으로 먹지 말라.”
하였는데, 주가(注家)에서는,
“젓가락으로 먹지 말라는 것은 숟가락으로 먹는 것이 편리함을 좋게 여긴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 중국에서는 밥을 뜰 때 모두 젓가락질이고, 이른바 숟가락이라는 것은 전혀 없다. 장자(莊子)가 말하기를,
하였다. 지금 중국엔 코 꿴 소가 없고, 우리나라에서만 그렇게 하고 있다. 숟가락을 사용하지 않고 소 코를 꿰지 않은 것은 어느 때부터인지 알 수 없다. 중국의 고급 사정을 잘 아는 자에게 물어 봐야겠다.
북경의 삼충묘(三忠廟)는 숭문문(崇文門) 밖 6~7리 지점 길 옆에 있고, 동쪽으로 도자하(桃子河)에 임하였는데, 제갈무후(諸葛武侯)ㆍ악무목(岳武穆)ㆍ문신국(文信國) 등 세 소상(塑像)이 있다.
○ 김전한(金典翰 전한은 벼슬 이름)은 일찍이 말하기를,
“모재가 임인년 7월부터 배앓이를 얻어서 계묘년 정월 초4일에 세상을 뜨셨다. 한번은 임인년 동짓달 밤에 밖에 나가 대변을 보고 돌아와서 전한에게 이르기를, ‘지금 하늘의 기상을 살펴보니 국가의 형편이 위태롭게 되었다. 외척이 장차 화를 전가시키면서 선비들이 살해를 많이 입게 되어 국가가 반드시 망할 것이다. 비록 망하지 않더라도 그 화를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나는 이 병으로 인해 일어나지 못하니 보게 되지 않을 것이지만, 너희들도 또한 말을 함부로 지껄여서 화기(禍機)를 건드리지 말라.’하고 연달아 4~5일을 혀를 차고 탄식하면서 먹지 않으셨다.”
고 하였다.
○ 모재가 기묘사화로 파직되어 쫓겨난 뒤에, 이천(利川)의 줏동(注叱洞)에 처음으로 갔었다. 그런데 마침 평안도 관찰사는 사로 친분이 있는 친구였다. 편지로 개가죽 배자(褙子)를 입고 밤중에 하늘의 기상을 살펴보려 한다고 하였는데, 드디어 개가죽 배자를 얻게 되었다. 또 문앞에다 높다란 누각을 짓고 흐리고 비오는 날이 아니면 밤에는 곧 털가죽 옷을 입고 누각에 올라가서 천문(天文)을 보면서 해를 마쳤다. 그러니 모재는 천문에도 극히 정통하였다.
○ 모재는 일찍이 말하기를,
“남곤이 기묘사류들을 죄에 빠뜨릴 적에 그의 본의는 그 기세를 죽이기 위해 파직시켜 내쫓으려 했을 뿐, 애당초 살해할 의사는 없었으나, 행여 왕께서 말을 들어 주지 않을까 염려하여, 일부러 장황하게 죄를 만들어 임금의 귀가 솔깃해지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런데 중묘(中廟 중종)께서 그 말을 지나치게 믿고 처분을 극히 무겁게 하였으므로 정암(靜菴)ㆍ충암(冲菴) 등이 마침내 그 생명을 보전하지 못하게 되었다. 남곤이 비록 이것을 후회는 하면서도 자기가 설치한 함정을 자기가 도로 구해낼 수 없었으므로 그들의 죽음을 눈으로 보고 한평생 한스럽게 여겼다.”
고 하였다.
○ 우참찬 백인걸(白仁傑)은 과거에 급제하기 전에 모재에게 글을 배웠다. 한림에서 파직당하고 자원하여 여주(驪州)의 교수(敎授)로 나갔다. 항상 모재의 문하에 가서 매양 을사년 충순당(忠順堂) 면대(面對)의 일을 말하기를,
“회재는 그때 면대에 참여하지 않고 한번 죽을 따름인데, 어찌 차마 이기(李芑)의 무리들과 한때 같이 면대하였는가? 모재가 만일 세상에 계셨더라면 죽으면 죽었지, 결코 그 면대에 참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였다.
○ 만력 기축년에 북경을 갔었는데, 국자감에 나아가 장차 공자를 뵈려 할 적에, 관부(館夫) 이선(李瑄) 등이 길 위에서 한 골목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 골짜기에 융복사(隆福寺)가 있으니 실로 서울의 큰 사찰이요, 경태제(景泰帝)의 잠저입니다. 경태제가 잠저시에 언젠가 중이 되어 이 절에 머물고 있었는데, 정통 황제(正統皇帝)의 북방 사냥 행차를 만나 감국(監國)을 인하여 황제 위에 올랐습니다.”
하였다. 경태제가 일찍이 중 노릇을 하였다는 설은 다른 증거도 없으니, 그런지 아닌지를 모르겠다. 인해 기억 나기로는 사십가소설(四十家小說)의 《병일만기(病逸謾記)》인데, 육익 정의(陸釴鼎儀 정의는 자임)가 찬한 글 중 한 줄거리에,
“경태제의 죽음은 환자(宦子) 장안(蔣安)이 깁[帛]으로 억지로 죽였다.”
고 하였는데, 그럴듯하다. 또 기억나기로는 북경에 갔을 적인데, 남성을 물으니, 중국 사람이 이르기를,
“장안문 동편에 궁궐 담장을 불룩 나오게 쌓은 곳에서 바라보면, 그 가운데 궁전이 대내(大內)보다 조금 낮은 것이 곧 남궁(南宮)인데, 정통황제까지의 임금들이 여기에 살았다.”
고 하였다. 식자들의 평정(評訂)을 기다려야겠다.
○ 우리나라 종계(宗系)를 변무할 적에 주문(奏文) 가운데, 국조(國祖)의 휘(諱)는 자춘(子春), 자도 자춘(子春)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예부의 관리가 이것을 의심스럽게 여긴 자가 있어서 묻기를,
“자춘은 곧 인임(仁任)이라고 하는 사람의 자(字)가 아니냐?”
하였다. 사신이 돌아오자 참판 김계휘(金繼輝)는 그 말을 듣고 말하기를,
“이것은 의심할 것이 없다. 옛사람들은 자가 그 이름과 같은 사람이 많았다. 이를테면, 곽자의(郭子儀)의 자는 자의(子儀), 양연기(楊燕奇)의 자는 연기(燕奇)이다.”
하고, 이어서 이름과 자가 같은 사람을 무릇 7명을 드는데, 책자를 상고하지도 않고 대담하는 자리에서 직접 들었으니 박식하다고 할 만하다.
○ 공헌대왕(恭憲大王) 시호를 청하기 위해 쓴 행장(行狀)은 즉 퇴계가 제술한 것이다. 감정(勘定)할 때에 경복궁의 춘추관에 일제히 모였는데, 직책이 춘추관의 일을 겸한 자는 모두 회의 좌중에 있었으므로 다 기억할 수 없고, 다만 참판 김중회(金重晦)공이 참여한 것은 기억난다. 행장의 끄트머리에,
“왕의 선형(先兄) 영정왕(榮靖王) 모비(母妃)의 일족이 죄를 입고 죽기도 하고 더러는 귀양간 사람도 있었는데, 다 은혜를 베풀어 신원해 주고, 또 석방하여 돌아오게 하였다.”
는 말이 있었다. 그 당시 논의는, 영정왕 모비의 일족이 죄를 입었다는 것은 중국 조정에서는 모르는 일이니, 지금 이 말을 제기하여 중국 조정이 알게 할 필요는 없는 것이라고 하자, 퇴계는 말하기를,
“여러분의 의사가 이미 이렇다면 이 한 줄거리는 삭제하자.”
하고, 즉시 그 자리에서 지워버렸다. 이어서 말하기를,
“이것은 실로 선왕의 훌륭한 업적이다. 비록 중국 조정에는 숨기더라도 우리나라에서는 빠뜨려서 없애버릴 수 없는 일이니, 국승(國乘)에 분명히 기재하여 후세에 알도록 해야 한다.”
고 하였다 한다.
○ 문종대왕이 손수 눈 속의 매화 한 가지를 그리고, 아울러 칠언 율시 한마디를 제하여 안평대군에게 주었다. 그 둘째 구에,
도리어 차디찬 눈 속인데도 / 却於氷雪崢嶸裏
봄바람 살짝 얻어 향기 풍기네 / 偸得春風漏洩香
라고 하였고, 다른 구절은 잊어버려서 기억이 나지 않는다. 박 참의(朴參議)의 말은 첨지 송응형(宋應泂)의 집에서 친히 보았다고 한다.
○ 노산왕(魯山王 단종)의 비(妃) 송씨(宋氏)는 적몰되어 관비가 되었는데, 신숙주(申叔舟)가 공신의 여자종으로 받아내려고 왕에게 청하기까지 하였으나, 광묘(光廟 세조의 묘호)가 그의 청을 허락하지 않고서 얼마 안 가서 궁중에서 정미수(鄭眉壽)를 양육하게 하였다.
○ 영양위(寧陽尉)가 적소에서 사사된 뒤 공주는 적몰되어 순천(順天) 관비가 되었다. 부사 여자신(呂自新)은 무인이었다. 장차 관비의 일로 부리려 하니, 공주는 곧장 대청에 들어가서 교의(交椅)를 베풀고 앉아서 말하기를,
“나는 왕의 딸이다. 내 비록 죄가 있어 정배되었지만, 어찌 수령이 감히 관비의 일을 시키는가?”
하여, 마침내 일을 시키지 못하게 되었다. 여자신은 뒤에 벼슬이 형조 판서에 이르렀는데 즉 여유길(呂裕吉)의 방조(傍祖)다.
○ 중종(中宗) 임신년에 소릉(昭陵) 복위를 위한 회의를 특별히 베풀었는데, 유순정(柳順汀)이 수상으로서 홀로 불가하다고 하였다. 조정에서 의논을 널리 모으던 그날, 어떤 한 사람의 꿈에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정미수(鄭眉壽)가 유 정승과 씨름으로 서로 겨루다가 유 정승이 지는 것을 보았다. 때는 정 해평부원군이 죽고 장사를 치르기 전날이었다. 날이 밝아 유 정승이 관과 띠를 갖추고 대궐로 나아가려는데 갑자기 중풍이 들어 마침내 일어나지 못하였다. 소릉 복위의 반대 논의가 행하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마침내 복위하게 되었다 한다.
○ 내가 옛날에 대언(代言 승지의 별칭)이 되어 은대(銀臺 승정원의 별칭)에 있었는데, 마침 양도왕조(襄悼王朝 예종)의 일기를 상고해 보게 되었다. 양도왕이 하루는 이렇게 전교하였다.
“공정왕(恭靖王 정종)은 종사(宗社)에 죄를 얻지 않았는데도 묘시(廟諡)가 없으니 이것은 전례(典禮)를 빠뜨린 것이다. 지금 마땅히 시호를 올려야 한다.”
하여, 드디어 시호를 안종(安宗)이라 하였다. 그런데 그 후에 이내 공정왕으로 부르고 안종이란 시호는 마침내 폐지되어 불리지 않았으니, 또한 무슨 까닭인지 알 수 없다. 본국의 전고에 널리 통한 자를 만나서 이를 상의해 봐야겠다.
○ 금상(今上 현재의 임금을 말함)이 즉위한 처음에 잠저 때의 구휘(舊諱)를 고치고 아래에서 삼망(三望)을 갖추었는데 모두 날일(日) 자 변의 글자로서 비의(備擬)하여 바쳤다. 그 때 경(曔) 자가 수망(首望)이었는데 부망(副望)이었는지는 확실히 기억할 수는 없으나, 그 글자가 비의된 것만은 분명하다. 마침 지금 어휘에 낙점되었다. 참판 김계휘가 나중에 비의된 소문을 듣고 놀라기를,
“경(曔) 자는 바로 공정왕(恭靖王)의 어휘다.”
하였다. 만약 낙점이 되었더면 어떻게 될 뻔했겠나. 다행히 낙점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 후에 종묘의 어보(御寶)를 이산(李山)에게 도둑맞아서 도감을 설치하여 잃어버린 어보를 다시 만들게 되었다. 내가 제조가 되어 도제조 이하의 관원들로 더불어 종묘 안 각 실의 책보(冊寶)를 살펴 보았더니 첫째 실인 강헌왕(康獻王 태조)의 실 안에 공정왕의 존호를 올린 옥책이 있었는데, 그 문장에, ‘신(臣) 경(曔)…’으로 되어 있어, 바야흐로 경(曔) 자가 공정왕의 휘가 됨을 알았다. 온 세상이 모르는 것을 김 참판만이 알고 있으니 박식하다고 할 만하다.
○ 안성부원군(安城府院君) 이숙번(李叔蕃)은 광묘(光廟 세조)가 어릴 적에 보고 말하기를,
“어린애의 눈동자가 너무도 그의 할아버지를 닮았구나. 모쪼록 형제끼리 우애하고 너의 할아버지는 본받지 말라.”
하였다 한다. 할아버지는 태종을 가리킨 것이다.
○ 가정 경신년(1560, 명종 15)에 찬성 홍섬(洪暹)이 대제학의 직을 간절히 사양하여 원한 대로 되었다. 신임 대제학을 선출해야 하므로, 승정원이 전례에 의하여 무릇 가선대부 이상의 문관을 패초(牌招 왕명으로 승지가 신하를 부르는 것)하여, 모두 경복궁의 빈청에 나아갔다. 빈청의 행랑은 길이가 무릇 몇 칸이나 되어 매우 널찍하였으나, 왕명을 받고 그 자리에 나온 재신들로 빈청이 가득하였다. 영상 상진(尙震)ㆍ좌상 이준경(李浚慶)은 북쪽 벽에 앉고, 거기서 꺾어져 서쪽 벽에는 홍 찬성이 제일 윗자리에 앉고, 그 아래로 여러 재신들이 차례대로 앉았다. 찬성은 전례대로 자신의 후임을 추천하게 되었는데, 예조 판서 정유길(鄭惟吉)ㆍ지사 윤춘년(尹春年)ㆍ동지 이황(李滉)을 추천하고, 이어서 정승의 자리 앞에 나아가서 말하기를,
“이 아무는 경술과 사장(詞章)이 실로 이 임무에 합당하지만 초야에 깊이 묻혀서 굳이 나오지 않은 데야 어찌 하겠소?”
하였다. 이보다 앞서 찬성이 대제학을 사직했을 때, 답사에,
“신임 예조 판서를 겨우 보게 되었는데, 무엇 때문에 이처럼 사직하오?”
라는 말씀이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왕이 정 예조 판서에게 뜻을 두고 있음을 짐작하였다. 이날 예조 판서는 와서 참석하였고, 윤 지사는 병으로 오지 못하였다. 내가 주서로서 추천 단자를 가지고 아랫자리부터 윗자리까지 앞에 나가서 권점을 청하였다. 그런데 가선들은 거의가 임당(林塘 정유길의 호)에게 권점을 쳤고, 박영준(朴永俊)에게 와서야 퇴계에게 권점을 치기 시작하였다. 좌찬성(홍섬을 지칭함)이 권점 칠 차례가 되자 일어나 정승의 자리 앞에 나 앉으면서 말하기를,
“사람들은 각각 한 사람에게 권점을 치지만 내 생각으로는 세 사람이 모두 합당하니 모두에게 권점을 치겠습니다.”
하였다. 정승들이 허락하니 곧 세 사람 모두에게 권점을 쳤다. 참판 김주(金澍)는 좌찬성의 앞에 있었다. 박 참판(박영준을 지칭)에게 이르기를,
“영감이 만일 추천되었다면 내가 거기에 권점을 칠 텐데, 지금 추천되지 않았구려.”
하였다. 권점이 끝나게 되어 영상의 앞에 가지고 나아가니, 퇴계는 12권점, 임당은 16권점, 창주는 겨우 5권점뿐이었다. 영상은 창주의 이름 밑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여기는 너무 적다. 나는 여기에 권점을 쳐야겠구나.”
하고 즉시 그의 이름 밑에 권점을 쳤다. 창주는 이 때문에 6권점을 얻게 되었다. 나중에 수망(首望)으로서 권점이 많다고 하여 임당을 대제학에 임명하였다. 이것을 평시의 전례로 내가 분명히 아는 일이다.
임진왜란 뒤에 무릇 대제학을 선출할 때는 현직 정승과 육조 판서만 패초해서 권점을 모을 뿐이며, 심지어 박충간(朴忠侃) 같은 이는 음관(蔭官)으로서 마침 판서가 되어 뻔뻔스레 권점을 쳤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를 비웃었다. 전례가 오래지 않아서 증거삼을 만한데, 임진왜란 후에는 마음대로 새로운 예를 만들어 내서 이를 수행하고 있으니 탄식할 뿐이다.
○ 공헌왕(恭憲王) 때 황홍헌(黃洪憲)이라는 중국 사신은 명성이 미리 알려져 있었다. 하루는 경연에서 임당 정유길에게 묻기를,
“우리 나라 조사(詔使)들이 지은 시 가운데 누구의 것이 제일가오?”
하니, 임당은,
“기순(祁順)이 첫째고, 장영(張寧)이 첫째고, 장영(張寧)은 그 다음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지금 와서 살펴보건대, 장정지(張靖之 자영의 자)의 시는 편마다 절창이라 첫째가 되어야 합당한데, 임당이 그렇게 대단한 것은 어째서인가?
○ 대개 나라가 바뀔 적에 신하로서 임금을 죽이고 나라를 빼앗은 자는, 이를테면 유유(劉裕)ㆍ소도성(蕭道成) 등인데, 모두가 국운이 짧았다. 순환을 좋아하는 하늘의 이치가 당연하다. 그런데 홀로 사마소(司馬昭)만은 성제(成濟)의 손을 빌려서 고귀향공(高貴鄕公 위주(魏主) 모(髦))을 죽였는데도 사마(司馬)씨의 진(晉) 나라는 백 년 동안 나라를 누렸으므로 일찍이 이 일을 적이 괴이쩍게 여겼더니, 뒤에 깊이 연구하여 비로소 거기에 대한 설명을 얻게 되었다. 사마의(司馬懿)는 비록 찬탈의 터전은 닦았지만 일찍이 임금을 죽이지는 않았고, 사마소(司馬昭)의 자손이 비록 천하를 차지하였으나 회제(懷帝)ㆍ민제(愍帝) 때 와서 오랑캐의 손에 사로잡혀서 죽음을 당하였으니, 하늘이 사마소의 죄악에 대한 보복이 아주 뚜렷하여, 사마소의 후손은 진실로 이미 멸망한 것이다. 원제(元帝)는 곧 사마의의 증손이며 사마소의 후손은 아니다. 사마의는 임금을 죽인 죄가 없는 만큼, 그의 후손의 향국이 조금 연장된 것은 또한 당연한 이치다.
○ 일찍이 《송사(宋史)》를 상고해 보았더니, 이를테면 장돈(章惇)ㆍ채경(蔡京)ㆍ진회(秦檜) 등이 모두 간신전(姦臣傳)에 있는데, 그들의 죄악이 워낙 많았으므로 후세 사람들이 모두 간악한 사람으로 일컫는 것이다. 그런데 《고려사(高麗史)》의 간신전에 실린 조민수(曺敏修)ㆍ변안렬(邊安烈)로 말한다면, 그들의 일과 행동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간사스러운 증상이 있음을 보지 못하였다. 조민수는 다만 선왕(先王)의 아들을 세워야 한다는 이색(李穡)의 말만 듣고 창왕(昌王)을 옹립하였을 뿐이며, 변안렬은 여흥왕(驪興王)을 개인적으로 찾아가 뵈었을 뿐이다. 이것을 가지고 죄를 만들어서 간신의 열에 넣어 두었으니 어찌 후세의 인심을 복종시킬 수 있으며, 또한 사실을 바른 대로 쓴 믿을 만한 역사가 될 수 있겠는가? 또 먼저 임금의 아들을 세워야 한다는 것은 곧 이색의 말이다. 근본을 따져서 죄를 삼는다면 이색은 장차 죄의 우두머리임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런데 사신(史臣)들이 이색은 명유(名儒)라 하여 감히 간신의 이름을 붙이지 못하고, 민수에게만 가하였을 다름이니, 한번 웃음을 터뜨릴 만하다.
이자의(李資義) 같은 분은 헌종(獻宗)을 보호하려고 꾀를 쓰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주었다. 현종은 곧 선종(宣宗)의 아들로 이미 선종을 이어서 임금이 되었으며, 자의는 친(親)으로 말하면 그의 장인이다. 그를 보호함이 또한 무슨 죄가 되겠는가? 성공하지 못하고 죽은 것이 운명이다. 비록 죽었지만 부끄러움이 없을 만한 것이다. 《고려사》에서는 그를 역신(逆臣)으로 전(傳)을 내었다. 대개 역신이란, 자신이 난역을 범한 것을 말한다. 그런데 자의에게 이런 일이 있었는가? 개탄스러울 따름이다.
○ 염흥방(廉興邦)은 고려 말엽에 임견미(林堅味)와 재물을 탐냈다고 하여 한때 죽음을 당하여 지금까지도 임견미ㆍ염흥방이라 부르고 있다. 그런데 유희령(柳希齡)이 지은 《대동시림(大東詩林)》에 시인의 성명을 기록하였는데, 염흥방의 이름에 가서는,
“요(遼)를 쳐야 한다고 간하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고 하였다. 이것은 옛날 역사에도 없던 말인데, 희령이 갑자기 이런 말을 끄집어 내었으니, 또한 전해 들은 것이 꼭 그러한 단사를 얻어서 말한 것인가? 과연 이와 같다면 염흥방은 참으로 나라의 일에 충성한 사람이다. 그의 죽음이 합당한 죄가 아닌 듯하다. 허균(許筠)은 말하기를,
“우왕(禑王)이 최영(崔瑩)의 딸을 비(妃)로 맞아들일 때 흥방이, ‘군대를 장악하고 있는 대장의 딸을 후궁으로 맞아서는 안 된다.’고 간하였다. 이 때문에 최영(崔瑩)의 노여움을 깊이 건드려서 혹독한 재앙을 당한 것이다.”
라고 하였는데, 믿을 만한 말인지 모르겠다.
○ 둔촌(遁村) 이집(李集)은 자는 호연(浩然)이며 벼슬은 판전교시사에까지 이르렀는데 고려 말에 죽었고, 본조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가 죽으니 정종지 도전(鄭宗之道傳 종지는 정도전의 자)이 곡하며 말하기를,
“손꼽아 세어본들 날 알아 줄 이 그 누구랴! 슬허 아픈 이 마음 하늘에나 물어 보련다. 약재(若齋)는 예전에 만리길 떠났는데, 둔촌 노인이 또 저 세상 사람이라네. 강개스런 그 말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맑고 산뜻한 시는 세상에 으뜸이었도다. 지금은 모두 함께 갔으니, 눈물 어리 흘리지 않으리.”
하였다. 약재는 곧 척약재(惕若齋) 김구용(金九容)이다. 고려 때 북경에 사신으로 갔었다. 고황제(高皇帝)가 공마(貢馬)의 수가 모자란다 하여 대리(大理)에 귀양을 보냈는데 도중에서 죽었다. 길 가운데서 시를 짓기를,
좋은 말 오천 필은 어느 날 도착하려나 / 良馬五千何日到
도화관 밖에는 풀만이 더부룩하도다 / 桃花門外草芊芊
하였다. 둔촌의 죽음이 아마 척약재와 같은 시기였을 것이다. 참의 유희령이 지은 《대동시림》에는 둔촌의 이름 밑에서 주석을 내기를,
“본조에 들어와서 무슨 벼슬까지 했다.”
하였으니, 이보다 더 심한 거짓말이 어디 있겠는가? 후손되는 사람은 그 억울함음 분명히 밝혀야 될 것이다.
○ 인산군(仁山君) 홍윤성(洪允成)은 춘추감으로 있을 때에 시정기(時政記 정사를 집행하여 나가는 중에 역사에 남을 만한 것을 사관이 추려서 적은 기록)에서 자기의 죄악이 낭자하게 쓰여진 것을 보고 분해하면서 말하기를,
“왜종이[倭楮]에 박은 《강목(綱目)》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또한 즐겨 보지 않는데, 더군다나 《동국통감(東國通鑑)》이겠는가? 너희들 마음대로 써라. 누가 동국의 역사를 보려하겠느냐?”
하였다.
○ 정자삼(鄭子三)은 젊을 적에 늘 황여헌(黃汝獻)의 문하에 있었다. 내가 경상도 관찰로 있을 적에 전사삼을 청해 보고 울산 군수 황여헌의 평일의 일에 대해 물어보았다. 정자삼은 말하기를,
“매양 울산 군수를 모셨더니, 하루는 울산 군수가 갑자기 한숨을 쉬면서 말하기를, ‘선조 (先朝)에서 서당(書堂)에 뽑힌 사람은 무릇 일곱 사람이다. 이행(李荇)ㆍ김안국(金安國)ㆍ김안로(金安老)ㆍ소세양(蘇世讓)ㆍ유운(柳雲)ㆍ정사룡(鄭士龍) 그리고 나다. 이행과 김안로는 정승이 되고 또 대제학을 하였으며, 김안국ㆍ소세양ㆍ정사룡 또한 대제학을 지냈으므로 대제학을 지낸 사람이 다섯이다. 유운은 죄를 입고 일찍 죽었어도 오히려 종2품까지 되었는데, 나 혼자만이 어정어정 낭관의 자리에서 헤매다가 시골로 쫓겼났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겠느냐?’라고 하더라.”
하였다.
○ 신기재(申企齋 이름은 광한(光漢))는 무릇 시를 지은 것이 있으면 곧 직강(直講) 신호(申濩)에게 보여서 그의 시정을 얻은 위에야 세상에 행하였다. 하루는 세초연(洗草宴) 계축시(契軸詩)를 가지고 신 직강에게 보였다. 신 직강이,
인간의 남긴 자취 용이 오르는 것 같구나 / 人間遺迹似龍騰
라는 구절까지 읽다가는 마음에 들지 않아 두세 번 되풀이하면서 읊었다. 기재가 말하기를,
“이것이 만족스럽지 못해 그러는가?”
하니, 신 직강이 말하기를,
“동파(東坡)의 시에서 말한 바,
고 한 것은, 난정(蘭亭)의 견지(繭紙)의 진본은 소릉(昭陵 당 태종(唐太宗)의 능) 장사 때 같이 묻었고, 그 모본(摹本)으로 세상에 전하는 것도 오히려 용이 날아오르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모본이라 비록 진본은 아니지만, 그 필세는 오히려 용이 날아오르는 것 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말을 인용하여,
천하의 보배 글은 물을 따라 흘러간다 / 天上寶書隨水化
의 대구로 사용함은 아마도 마땅치 않은 것 같다.”
하니 기재는 말하기를,
“어찌 이렇게 봐서야 되겠는가? 용이 오른다는 것은 다만 마치 용이 변화를 부려서 흔적이 없음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하고, 신 직강의 말을 옳게 여기지 않아서 ‘용이 오른다’는 말은 고치지 않고 세상에 전해졌다. 지금 보니 아마 신 직강의 말이 옳은 듯하다.
○ 모재가 여강(驪江)에 있을 때에 음애(陰崖)는 충주, 희강(希剛 이장곤(李長坤))은 우만(牛灣)으로부터 신륵사(神勒寺)에 와서 모재와 서로 모여 유숙하였다.
그때 김이숙(金頤叔 안로(安老)의 자)이 국사를 맡아 보았는데,
“파직된 중신들이 한 곳에 모여서 국가의 일을 의논한다.”
고 하였다.
○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는 이기(李芑)가 《대학》과 《성리대전》 등의 글을 잘 안다 하여 매양 그의 집에 가서 정정(訂正)하고는 물었다. 모재 김안국이 들어오게 되어, 규암이 가서 뵈니 모재가, ‘이기는 실지로 학문을 알지 못하고 거칠고 험해서 만나봐서는 안 된다.’고 극언하였다. 기의 집은 관아에 나가는 길 옆에 있었으므로 규암이 전에는 늘 들렀는데, 이로부터 전혀 가지 않았다. 이기는 분해 하며 말하기를,
“송 아무가 김 아무의 말을 듣고 곧 나를 찾아보지 않는가?”
하고, 드디어 깊이 양심을 품었다 한다.
○ 윤원형(尹元衡)이 봉상시 정이 되자, 당시의 논의는 장차 이를 공박하려 하였다. 이 영상(李領相)이 이를 말리기를,
“대상의 형제도 오히려 연줄로 벼슬을 하는데 중전(中殿)의 형제간으로 이 직을 보전하지 못해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그가 당상관에 올라서 관압사(管押使)로 북경에 가게 되었는데, 죄를 입고 살아 돌아오지 못할까 염려하니, 참판 구수담(具壽聃)이 반드시 무사할 것이라고 보증하였다. 원형은 과연 무사히 갔다 와서 그를 매우 고맙게 여겼다. 을사사화가 일어나게 되어 이 정승은 중열(仲悅)의 작은 아버지 라하여 평안 감사로 밀려나고, 구공은 연좌되어 파직되었는데, 진복창(陳復昌)이, 선왕 때의 착한 사람은 어린 임금이 새로 들어서는 초기에 없어서는 안 된다는 소(疏)를 올려, 곧 다시 임용되었으니 모두 원형의 힘이었다.
○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사재 김정국은 황해 감사로 있으면서 남곤ㆍ심정의 간사하여 남을 모함한 죄상 및 정암(靜菴)과 제현들의 자신의 몸을 잊어버리고 나라에 목숨을 바친 충성을 힘껏 진술하여, 수천 마디 말의 상소문 하나를 지었는데 무려 10장이나 되었다. 마침 막료(幕僚)에 성이 남씨며 남곤의 일족인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헌납(獻納)에 발탁되어 서울로 올라가게 되었다. 사재가 그 소를 주면서 말하기를,
“그대가 서울에 가거든 이 소를 꼭 올리게.”
하니, 남씨 또한 허락하면서 사양하지 않고 곧 소를 싸가지고 길에 올랐다. 공(사재를 지칭)의 어느 날 꿈에 신인(神人)이 공에게 일러 말하기를,
“그대가 만약 이 소를 올리게 되면 사림들은 모조리 결딴이 날 터이니, 지금 사람을 달려 보내면 도로 찾아올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공이 놀라 깨어 즉시 역졸(驛卒) 3명을 골라 헌납의 행차에 달려보내서 그 소를 도로 찾아오게 하였다. 헌납이 바야흐로 벽제관(碧蹄館)에 도착하였는데, 역졸이 뒤따르게 되어 남(南)은 곧 그 소를 돌려 주었다. 남곤이 남씨에게 소의 뜻을 묻자 남씨는 이런 일이 없었다 하고, 일체 남에게 말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를 매우 높이 여겼다. 나중에 남씨는 벼슬이 판서에까지 이르렀다. 요즘 죽산 현감(竹山縣監) 남대임(南大任)은 곧 그의 손자이다. 모재가 매양 사재에게 말하기를,
“이 소가 만약 올라가게 되었더라면 사람들은 어찌 내가 몰랐다고 말하겠는가? 우리 형제는 죽었을 것이다. 이 외에도 죽은 사람이 또한 얼마나 되었겠느냐?”
하였다. 그때 모재는 파직만 되었고, 사재는 삭직이 되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사재의 죄를 얻음이 모재보다 더 중한 것은 소가 비록 올라가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이 그가 소를 오리려 했던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남지정(南止亭)이 주청사로 갔다가 돌아올 적에 공이 황해 감사로서 황주(黃州)에 나가서 만나 보고는, 지정이 사림(士林)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나무라서 그 때문에 그의 노여움을 건드리게 되어 죄를 얻음이 더욱 무거웠다.”
고 하였다.
○ 소재가 말하기를,
“이중열(李仲悅)이 이조 좌랑으로서 윤춘년(尹春年)을 추천하지 않자, 춘년은 소를 올려 말하기를, ‘윤임(尹任)은 전하의 역적이요, 윤원로(尹元老)는 인묘(仁廟)의 역적이라’고 했다.”
고 하였다. 뒤에 와서 윤원형 형제가 비록 둘로 갈라졌으나 애당초는 한 마음이었다. 원로가 이미 인묘의 역적이 되었으면 원형은 홀로 인묘의 역적이 되지 않겠는가? 이것은 분명히 공초(供招)에 인정되어 결안(結案 형벌을 결정한 안문(案文))은 동일함이 있을 것이다.
○ 양재역 벽상서(壁上書)를 정언각(鄭彦慤)이 고변한 뒤에 당시 사류들의 죄가 결정되었다. 그때 진복창ㆍ윤춘년이 소재를 힘써 구해 주었으므로 사적(死籍)에서 벗어나고 다만 진도에 귀양가는 데에 그쳤다.
○ 소재는 이조 정랑으로 있을 적에 한때의 중망을 받았다. 마침 진복창과 함께 시원(試院)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시권(試券)을 고사(考査)할 적에 두 사람은 함께 과장을 좌우하였다. 과장이 파한 뒤에, 소재가 복창의 집에 한 번 찾아갔다가 그가 없어서 명함을 남겨두고 돌아왔다. 복창은 소재가 찾아온 것이 매우 고맙게 여겨 매양 그의 명함을 가지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자랑삼아 내보이면서,
“과회(寡悔 노사신의 자)가 나를 찾아왔다가 내가 없어서 그냥 갔다. 이것이 그가 남겨둔 명함이다.”
라고 하였다고 한다. 정미년(1547, 명조 2)에 과회가 죄를 얻었을 적에 진복창이 힘써 구해줘서 그의 죄가 가벼워졌다는 것이다.
그는 진도에 귀양살이한 지 19년 만에 비로소 놓여 돌아오게 되었는데, 서열을 밟지 않고 뛰어올라 드디어 정승에까지 올랐다. 그 사이에 복창이 대사헌으로서 죄를 얻어 갑산(甲山)으로 멀리 귀양을 가게 되었다. 소재는 복창이 자기를 힘써 구해줘서 살아나게 되었으므로 복창의 아들을 자기집 식구처럼 돌보았다. 복창의 아들이 만일 소재의 집에 오게 되면 다정하기 자식과 같아 이름을 통하지 않고 바로 들어왔다고 한다.
○ 소재는 윤창주와는 진사의 동년(同年)이다. 늦게 귀양지에서 돌아와 부제학이 되었다. 내가 직제학이 되어 옥당에 있었다. 일찍이 한 차례 모임에서 내가 묻기를,
“창주는 일평생 음률을 안다고 자부하였는데, 과연 이런 일이 있습니까?”
하니, 소재는 대답하기를,
“이것은 헛말에 지나지 않는다.”
하였다. 대개 전혀 음률을 안다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 여성군(礪城君 송인(宋寅))은 즉 남지정의 외손자이다. 일찍이 말하기를,
“지정의 시는 용재를 아주 따르지 못하며, 용재의 문장은 지정에게 못지않다. 그런데 지정의〈백사정기(白沙亭記 《월정별집》에는 정(亭)이 정(汀)으로 되어 있음)〉만은 아마도 용재가 그만큼 짓지 못할 것이다.”
고 하였다. 용재는 시에만 이름이 났고 문장은 지정에게 어림도 없었는데, 여성군이 이렇게 말하니,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 여성군이 지정의 문집을 인쇄하였으므로 판본이 그의 집에 간직되어 있는데, 그의 시는 인쇄하지 않았다. 정호음(鄭湖陰 정사룡(鄭士龍))은 일찍이 말하기를,
“지정의 시는 결코 대가(大家)인데, 어찌 후세에 전하지 않아서야 되겠느냐?”
하였다. 서진지(徐鎭之)는 우리 형제에게 일러 말하기를,
“지정의 홍경주(洪景舟)에게 한 제문에, ‘어두울 녘에 대궐문을 밀치고 곧장 바로 들어감은 우리 두 사람이 공동으로 하였다.’하였는데, 기묘사화 때 신무문(神武門) 고변한 사건을 가리킨 것이니, 웃음이 터져나올 만하다. 여성군이 이것을 빼버리어 판본 속에는 실리지 않았다.”
고 하였다.
○ 감서 허태휘(許太輝 엽(曄)의 자)는 언젠가 말하기를,
“진복창은 소인이기는 하지만 자못 재주가 있으니, 조정에서 만일 잘 다루어서 이용만 한다면 전혀 못쓸 사람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무강(李無疆)으로 말한다면 오직 권세 잡은 간신의 지시나 부추김을 받아 선량한 사람을 후려치는 것만 일삼을 뿐, 다른 재주라곤 없으니, 전혀 쓰지 못할 소인이다.”
라고 하였다.
○ 이무강은 이기(李芑)에게 붙어 아첨해서 바야흐로 양사(사헌부ㆍ 사간원)의 아장(亞長 사헌부 집의와 사간원 사간)이 되었으나 선비들의 평론을 이를 매우 더럽게 여겼다. 옥당에서 본관록(本館錄)에 권점을 찍는 날 관(館)의 전체 관원들이 모두 무강의 자를 부르며 말하기를,
“경휴(景休)가 이번 본관록에 틀림없이 피선될 거야.”
하였다. 그런데 권점이 끝나게 되어 무강의 이름 밑은 살펴보니 1권점도 없었다. 드디어 서로 놀라는 체하면서 말하기를,
“이 아무개가 어째서 오늘의 본관록에 참여되지 못하였을까?”
하였다. 한결같이 그 사람을 더럽게 여겨서 그의 이름 밑에 권점 찍기를 좋아하지 않은 것이 진정이었으면서도 겉으로는 거짓 놀랍다는 말을 하다니, 또한 우습다.
○ 진복창은 서화담(徐花潭 서경덕(徐敬德)의 호)에게 보낸 시에서,
봄철의 좋은 꽃은 피었다간 또 지고 / 春半好花開又落
비온 뒤의 못물은 흐렸다가 맑아진다 / 雨餘潭水濁還淸
푸른 솔 앙상한 바위 모양도 기이한데 / 蒼髥瘦骨多奇態
어찌하여 송암이라 이름하지 않는고? / 盍取松岩以記名
하였다. 진복창 그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감히 화담에게 호를 고치라고 권하였는가? 제 분수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겠다.
직장 이의중(李宜仲)은 영상 홍언필(洪彦弼)의 손서(孫婿)다. 그가 말하기를,
“젊을 적에 홍영상이 사궤장연(賜几杖宴)을 베풀었는데, 진복창은 대사간으로 와서 참석하였다. 잔치가 파하여 떠날 때 그는 발을 삐었다. 영상의 아들 지충추부사 섬(暹)이 다음날 복창의 집에 사람을 보내서 편지로 어제 발을 삐었는데 많이 다치지나 않았는지 위문하니, 복창은 화전지(花牋紙)에 답장을 쓰기를, ‘평소에 대감님의 가르침에 감격하고, 또 영감의 우정을 생각하여 마음 놓고 실컷 마시고 엎어지락 자빠지락 나오다가 발을 조금 삐긴 하였지만, 무어 다치기야 하였겠습니까? 지금은 벌써 회복되어 또 술자리에 나가고 있으니, 풍부(馮婦)의 범 잡음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하여, 지충추는 그의 편지 사연을 극히 칭찬하였었다.”
고 하였다. 내가 젊을 적에 한번은 임 판서(任判書)의 집에서 판서가 경상 감사로 부임할 적의 증별첩(贈別帖)을 보니, 그 속에 진복창의 별장(別章)이 있었다. 자체는 조송설(趙松雪 조맹부(趙孟頫)의 호)의 〈대우부(大雨賦)〉를 모방하였는데, 글씨가 아주 힘차고 아름다웠다.
○ 부정(副正) 신사헌(愼思獻)이 한번은 하는 말이,
“조인규(趙仁奎)가 내게 일러 말하기를, ‘우리집 어른께서 연산조에 장령이 되어 부임할 즈음에 새로 제주 목사로 임명된 사람이 있어 종루(鍾樓) 옆의 어느 집에 와 있으면서 만나기를 요구하였다. 장령께서 즉시 들러서 만나셨는데, 그 사람 하는 말이 「원래 질병이 있어 만약 바다 밖 제주의 땅으로 부임하게 된다면 장독(瘴毒)을 뒤집어쓰기 때문에 살아서 돌아오기 어렵소. 만일 나를 위해 적당하지 않다고 체직을 논해 준다면 매우 고맙겠소.」하였다. 말이 끝나자, 장령께서는 곧 작별하고 나오셔서 본부(本府)에 출근하지 않고 곧장 대궐로 나아가 피혐하시기를, 「오늘 아침 출근할 적에 제주 목사 아무가 길 옆에 와있다가 신을 보고 체직을 논해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신이 원래부터 위풍이 없었기 때문에 감히 사적인 일을 가지고 서로 부탁한 것이오니 바라옵건대 신의 직을 갈아 주시옵소서.」하였다. 연산군은 즉시 그 사람을 잡아 국문하여 마침내 죽기에 이르렀으므로, 우리집 어른께서는 평생 동안 한스럽게 여기셨다.’하였다. 그가 아들을 두지 못하는 것도 또한 이러한 악을 쌓은 소치일 것이다.”
하였다.
○ 옥당에서 예전에 학 한 마리를 길렀었다. 당시에 이렇다 하는 학사(學士)들은 흔히 이 학을 두고 시를 지었는데, 모두 하늘 천(天) 자의 운을 달아 지었다. 그 가운데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ㆍ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의 작품이 특별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하서는 시의 학을 잃어버린 뒤에 지은 것이다. 임석천 시에,
두어 마디 맑은 소리 하늘 높이 울어대고 / 數聲嘹亮沈寥天
전나무 그늘, 대밭 가를 찾아 깃든다네 / 蒼檜陰中苦竹邊
연기 비는 삼도의 달을 가린 것이 그 얼마더뇨 / 煙雨幾䨪三島月
바람 서리는 오호 연꽃을 또 거꾸러뜨렸구나 / 風霜又倒五湖蓮
검은 먼지는 가린 것이 새로운 털을 물들였건만 / 緇塵已染新毛換
붉은 이마는 오히려 옛 모습 지녔도다 / 丹頂猶存舊骨仙
강해의 늙은이는 공연히 마주보고 섰으니 / 江海老人空對立
찬 이슬이 가을 자리에 젖어옴을 모르누나 / 不知涼露濕秋筵
하였다. 김하서의 시는 다음과 같다.
뛰어난 자태 하늘 멀리 보냄을 후회하노니 / 悔放殊姿送遠天
지금은 종적이 어느 물가에 붙여 있나 / 秪今蹤跡寄何邊
시 지어 천년 화표주(華表柱)를 조상하려 하노니 / 題詩肯弔千年柱
날개 쳐서 열 길 연꽃에 깃들 만하구나 / 刷羽堪依十丈蓮
맑게 부는 옥퉁소는 누대가에 비치고 / 淸轉玉簫臺畔影
아득한 적벽강은 꿈속의 신선이라 / 微茫赤壁夢中仙
산 높고 바다 넓어 소식조차 없으니 / 山高海濶無消息
그때의 대모연을 혹시나 기억하리 / 倘記當年玳瑁筵
하였다.
○ 김유신(金庾信)은 계유년 생원시에 장원하고 뒤에 대과에 올랐는데, 자문(咨文)을 보내서 말을 점검하러 곽산(郭山)에 이르렀다가 대낮에 도깨비에게 가위눌려서 까무러쳤다. 그것은 마치 거문고 줄과 같은 끈 하나로 급히 그의 배를 동여매는 것 같았다. 옆에 사람들이 칼로 그 실끈을 베어내면 끊어졌다가는 도로 이어져서 끝내 끊어내지 못하여 어찌할 도리가 없는데 홀연히 밖으로부터 삼베 직령(直領)을 입은 서생이 들어오자, 도깨비는 공중에서 여자의 소리를 내면서 말하기를,
“정 한림(鄭翰林)은 그대의 일에 무슨 관계가 있기에, 내가 누대의 원수를 갚으려 하는데, 그대가 무엇 때문에 장난질인가?”
하였다. 서생은 군수에게 청하기를,
“대나무통 하나와 주사(朱砂) 약간을 얻어서 사용해 보겠습니다.”
하기에, 군수는 즉시 대나무통과 주사를 주었다. 서생은 즉시 조그마한 종이 두 장을 잘라서 그 위에 부적을 그려, 하나는 대나무통 바닥에 깔고, 하나는 통 위에 얹어서 공중으로 날려 보내니 여자의 울부짖는 소리가 은은히 대나무통 속에서 나는데, 처음에는 가까이서 들리다가 차츰차츰 멀리 사라져 가고 유신은 즉시 깨나서 일어나 앉았다. 서생은 말하기를,
“지금은 비록 살아나게 되었지만 오던 길로 가서는 안 된다.”
하고 가짜 널[棺]을 만들어 ‘김유신의 널’이라 쓰게 하고, 한길을 따라서 돌아가게 하고, 또 유신은 변복을 시켜 수안(遂安) 산골짝 길을 경유하여 서울로 돌아오게 하였다. 이 뒤로 유신은 살긴 살았어도 마치 넋 잃은 사람과 같다가 3년 만에 결국 죽고 말았다. 이른바 서생은 행방을 알 수 없다. 사람들의 말에, 서생은 곧 정희량(鄭希良)이라고 하였다. 정희량이 죽지 않았음을 또한 여기서 징험할 만하다. 유신은 일찍이 정희량에게 수업을 하였으므로 옛날 정을 못 잊어 와서 구해준 것이라 한다.
○ 옛날 내가 직제학으로 옥당의 일회(一會 여럿이 한 번 모이는 일)에 참여하는데, 유미암(柳眉巖 유희춘(柳希春)의 호)은 그때 통정(通政)으로 부제학이 되어 진시황(秦始皇)의 일에 대해 이야기가 미쳤다. 나는 말하기를,
“일년 만에 아들 정(政)을 낳았으니, 한단(邯鄲)의 여자는 태자 궁중에 들어온 지 실지로 12개월이 지나서 아들을 낳은 것이며, 또 그보다 앞서 2~3개월을 지나서야 바야흐로 애기 밴 것을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15개월이 넘는다. 어째서 그대로 여불위(呂不韋)의 아들이라고 하겠는가? 이것은 반드시 후세 사람들이 진시황을 몹시 미워하여 이와 같이 사실이 아닌 말을 한 것이요, 실재로는 아마 장양왕(莊襄王)의 아들로 봐도 의심이 없을 것이다.”
하니 미암은 말하기를,
“옛날 사람은 애기를 배서 달을 넘어 낳는 약이 있었으니, 이것은 정말 불위의 자식인 것이다. 직제학도 불위의 속임수에 넘어감이 지나치구나.”
하였다. 이 설은 또한 꼭 그렇지는 않으나 주자(朱子)의 《강목(綱目)》에서도, 진시황과 진원제(晉元帝)는 모두 다른 성의 아들이라고 쓰지 않은 것은, 진실로 여씨가 진(秦)을, 우씨(牛氏)가 진(晋)을 이었다고 꼭 지적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 어떤 사람이 정승 임당(林塘)을 뵙고 말하기를,
“마침 옥당에 갔다가 당직 학사를 만났는데, 바야흐로 《호음고(湖陰稿)》를 열람하다가 자못 이를 업신여겨 좋지 않다고 하고, 간혹 그의 글귀를 지우기를 마치 글 등급을 매기듯 하더이다.”
하니, 임당은 그 말을 듣고 웃으며 말하기를,
“호음 아저씨께서 다른 일로 평론받는 것은 혹 모를 일이지만, 시에 가서야 지금 세상에 어찌 등급을 매길 사람이 있겠는가?”
하였다.
○ 정 문익공(鄭文翼公 정광필(鄭光弼)의 시호)은 김탁영(金濯纓)과 함께 양남(兩南 영남ㆍ호남) 어사의 명을 받아 같은 날 임금께 하직하고 용인현(龍仁縣)에 도착하였는데, 서로 사이가 좋아서 용인관(龍仁館)의 한 객실에서 같이 자게 되었다.
탁영이 강개하게 시사(時事)를 논하는데, 말씨가 지나침이 많았다. 문익공이 여러 차례 이것을 중지시키기를,
“말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하니, 탁영은 문득 분격해서 말하기를,
“사훈(士勛 정광필의 자)도 또한 이처럼 낮고 더러운 논을 하는가? 어찌 차마 기절 없는 썩어빠진 선비가 되는가?”
하여, 밤새도록 서로 뜻이 맞지 않았다 한다.
○ 여성위(礪城尉)는 말하기를,
“남지정(南止亭)이 과거에 올라서 방(榜) 부르는 날 새벽에 동년(同年)들과 광화문 밖으로 나아가는데, 홀연히 한 선생이 홍살[紅戟] 섬돌 앞에서 ‘남곤(南袞) 신래위(新來位)’라고 부르기에, 지정이 달려가니 그 선생은 지정에 말하기를, ‘네가 장원이 되지 못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느냐? 중국에는 소동파(蘇東坡 소식(蘇軾)의 호)가 우리나라에는 내가 모두 제 2등으로 합격하였으니, 너도 이것으로 자신을 위로하고 유감스럽게 생각하지 말라.’한다. 지정이 마음속으로 누구인지 몰라, 자못 괴이쩍게 여겨 하인을 시켜 그 선생의 종에게 물어보았더니, 이는 김일손(金馹孫) 이었다.”
하였다. 대개 탁영은 평소에 장원이 되지 못한 것을 마음속에 품고 있었는데, 마침 지정이 또 제2등이 되었으므로 이를 계기로 지정을 불러 이같이 말하여 그 평소의 불평스런 뜻을 터뜨린 것이라 한다.
○ 신평산 호(申平山濩)는 말하기를,
“용인에 사는 윤(尹) 아무는 탁영의 생질이다. 탁영과 지정이 서로 사이가 좋았으므로 서울 가게 되면 지정을 찾아가 뵈었다. 지정이 정승으로 있을 적에 윤 아무가 그를 찾아 뵈니, 지정은 한숨을 쉬며, ‘세상에 어찌 다시 탁영과 같은 분이 나오겠는가?’하니, 윤은, ‘대감의 문장으로도 곧 우리 외삼촌을 이처럼 칭찬하고 부러워합니까?’하니, 지정은, ‘너희들은 문장가의 수(數)를 바로 모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것이다. 물로 비유하면, 탁영의 문장은 곧 강물이요, 나의 문장은 도랑물이다. 어찌 서로 견줄 수 있겠는가?’하였으니, 그를 추중함이 이와 같았다.”
고 하였다.
○ 유촌(柳村 황여헌(黃汝獻))이 서당(書堂)에 있을 적에 시를 지었는데, 그 글제는 아마 ‘망월(望月)’등의 말인 듯하나 기억할 수 없다. 눌재(訥齋 박상(朴祥))는 이상(二上)으로 장원이 되고, 유촌은 삼중이었는데,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의 이름으로 또 한 수를 지어 삼하가 되었으며, 모재는 차상이었다. 유촌이 늘그막에 늘 말하기를,
“눌재의 이 시는 글자마다 출처가 있어 따라갈 수 없고, 모재는 원래 시에는 모자랐다.”
하였다 한다.
○ 송강(松岡) 조사수(趙士秀)는 대사성이 된 지 3년의 오랜 세월을 매양 신관(新館)에 출사하였으므로 다니는 길이 진복창(陳復昌)의 집을 지나가도 전혀 들러 찾아보지 않았다. 복창은 배리(陪吏 부하 아전)를 문 밖에 배치하고서 무릇 자기 집 앞을 지나면서 들리지 않는 자는 곧 알리게 하였다. 송강은 이 소문을 듣고 그 뒤부터는 이현로(梨峴路)로 다니지 않고 길을 고쳐 어의동(於義洞)으로 다녓다. 복창은 또 알고 어의동에 사람을 배치해 두고 탐지하게 하였으되, 송강은 끝내 한번도 찾아보지 않았다. 선배들은 명분과 절의를 가다듬어, 소인을 보기를 마치 더럽혀지는 것처럼 여겨 전혀 한번도 만나보지 않았으니, 공경할 만하다.
○ 명묘조(明廟朝)에 심충선(沈忠宣 신연원(沈連源)의 시호인 듯)은 수상으로 영경연(領經筵)을 겸하고, 조송강(趙松岡)은 지경연으로서 같이 입시하게 되었다. 대신들의 집이 정도에 지나침을 논하는데, 송강은 충선의 첩의 집 행랑채가 너무 크다고 바로 그 자리에서 논박하여, 충선은 몸둘 바를 몰라 등에 땀이 나서 옷이 흠뻑 젖었었다. 그 뒤로 충선은 첩의 집 행랑채를 깊이 잠그고서 손님을 대하지 못하게 하고 작은 사랑채에서만 손님을 맞았다. 그러나 송강을 이조 판서에 추천하여 낙점되게 하였다. 충선은 의리에 감복하고 송강은 곧음을 지켰으니, 모두 공경할 만하다.
○ 남명(南溟 조식(曺植)의 호) 조자건(曺子建)은 하종악(河宗岳)의 아내가 실행한 일을 가지고 귀암(龜岩 이정(李楨))과 논의가 달라서 절교하기에 이르렀다. 그때 소재(蘇齋)가 부친상을 당하여 상주(尙州)에서 수제(守制 상을 당하여 상의 예제를 지킴)하고 있었는데, 이 소문을 듣고 말하기를,
“남명은 평생 동안 관직을 사랑하지 않고 속세를 떠나 고고하게 지나더니, 한 부인의 실행에 대해 무슨 관계되는 것이 있기에 친구와 절교하는 것인지, 이는 이해할 수 없다.”
하였다. 남명의 문인 유종지(柳宗智)가 곧 소재의 한 말을 남명에게 고하니, 남명은,
“소재는 전해 들리는 말만 들었을 뿐, 나의 본정은 깊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였을 것이다.”
하였다.
○ 갑오년 겨울에 내가 주청사로 북경에 가는데, 부사 최입지(崔立之 입(岦)의 자)ㆍ 서장관 신경숙(申敬叔 흠(欽)의 자)과 함께 소주(蘇州)에 도착하였다. 이튿날 길을 떠나 길을 떠나 성중을 다 지나서 삼하(三河)로 향하려는 터였다. 서문 안에는 독락사(獨樂寺)란 절이 있고, 매우 높은 불상이 있었다. 최 부사와 신 서장관은 한번도 본 적이 없으므로 두 사람을 데리고 올라가서 구경하였다. 절의 동서편 행랑방엔 점쟁이 조소봉(趙小峯)이란 자가 와서 머물고 있었다. 우리 일행이 즉시 들러서 찾아보고 내력을 물어보았더니, 자기는 소흥부(紹興府) 사람이라 하고는, 이어서 그가 이른 아침에 점친 것을 내보여 주었다. 거기에,
“오늘 아침에 눈이 내림, 고려 재상이 찾아옴.”
이라고 적혀 있었다. 때마침 눈이 뿌렸고 우리 일행도 또한 도착하였으니, 그의 술법이 자못 신묘하다. 소봉은 나에게 혼자 고요한 방에 들어가서 묻고 싶은 일을 써서 조그마한 합(盒)에 집어 넣게 한다. 그래서 시키는 대로해 가지고 나와서 소봉에게 주었더니, 소봉은 향로에 불을 피워 부처 앞에 놓고 부처를 놓고 아주 공손하게 읍례를 드렸다. 이어서 그 합을 향로 위에 들고 쏘이고 또 그 합을 부처의 두 귀 둘레를 두어 바퀴 돌린 뒤에 상 위에 내려 놓았다. 그런데 물음을 쓴 말이 한 자도 틀림이 없었다. 그리고 최 부사와 신 서장관 두 사람의 물음은 글자 수가 더욱 많았는데도 틀리지 않고 신기하게 맞혔다. 만약 사복(射覆)놀이를 한다면, 그의 말은 열어 보지 않고도 반드시 맞히리라고 자신하였다. 이어서 나의 여행에 대해 점쳐 보았더니, 즉시 쓰기를,
“명년 정월에 말해서 떨어질 환이 있을 것이니, 부디 조심하라.”
고 하였다. 그 길로 북경에 갔다가 정월 21일에 하직하고 이튿날 통주(通州)로 돌아왔고, 통주에서 25일에 소주(蘇州)를 거쳐 옥전(玉田)으로 향하는데, 도중에서 타고 있던 말이 낙타를 보고 놀라 뛰는 바람에 그만 땅바닥에 떨어졌다. 어리둥절하여 소봉의 말을 미처 기억하지 못하였는데, 최입지가 곧 말을 해주어 비로소 그의 말이 들어맞았음을 깨달았다. 또한 기이한 일이다.
○ 임진왜란 때 난여(鑾輿 임금이 타는 수레)가 난리를 피하여 서쪽으로 옮겨 평양에 머물고 있었다. 하루는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공이, 부원수 신각(申恪)이 그의 진을 마음대로 떠나서 검찰사(檢察使) 정승(政丞) 이양원(李陽元)을 따라간 것이 글렀다고 하여, 장계를 올려 그에게 죄주기를 청하였다. 그런데 비변사에서는 그가 머물고 있는 곳에서 죽이기를 청하였다. 이튿날 신각에게서 비보가 들어왔는데, 베어낸 적의 귀가 40여 급(級)이라 하였다. 비변사의 제공들은 그의 공이 죄를 덮을 만하다 하여 용서하고 죽이지 않기를 청하고 또 선전관에게 빨리 뒤쫓아가서 그가 죽기 전에 도착하도록 부탁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떠난 선전관이 빨리 가지 못하였으므로 거기에 도착하니, 신 부원수는 벌써 죽었던 것이다. 그래서 비변사의 제공들은, 모두 죽지 않아도 되는데 끝내 죽음을 면하지 못하였다고 그를 아프게 여겼다.
이어서 홍무(洪武 명 태조(明太祖)의 연호) 연간의 일이 기억난다. 고황제(高皇帝)가, 학사(學士) 송염(宋濂)은 집에 있으면서 성탄절(聖誕節 천자의 생일)에 서울에 오지 않았다 하여 역말을 보내서 그를 목 베게 하였다. 이미 며칠이 지나서 효자황후(孝慈皇后)의 간함으로 인하여 다시 중지할 것을 명하였는데, 그때는 사람이 빨리 달려가서 처형하기 전에 그를 구해 주었으니, 그 행과 불행이 바로 이렇다. 신 부원수는 무관의 직에 있으면서 자못 직무의 봉사에 충실하였다. 일찍이 연안 부사(延安府使)로 있을 적에 성첩(城堞)을 수리하느라 우물이 마르게 되자, 도랑을 파서 성의 북쪽 비봉산(飛鳳山) 냇물을 끌어와서 성안으로 대었으므로, 드디어 물이 마르는 걱정이 없어졌다. 이정암(李廷馣)이 포위당하였을 적에 자못 그의 힘을 입어서 성이 함락되지 않았다 한다.
○ 임금호(林錦湖)는 을사 권간의 비위를 거슬려 제주 목사에서 파직되어 나주의 본가로 돌아왔는데 부모가 모두 살아 있었다. 그런데 홀연히 후명(後命 유배한 죄인에게 사약을 내려 죽임)이 있어 마침내 죽음을 면치 못하였다. 죽을 무렵에 정신이 어지럽지 않고 마치 조용히 죽음에 나아가는 사람처럼 하였으니, 비록 학문의 힘은 없을지라도 또한 타고난 천품은 원래 높았던 것이다.
○ 영천(靈川) 신잠(申潛)은 참판 종호(從濩)의 둘째 아들이다. 시에 능하고 묵죽(墨竹)을 잘 치고 초서를 잘 썼다. 정덕(正德) 계유년 진사시에 장원으로 뽑히고 또 기묘년 현량과에 합격하였다. 나중에 대과(大科)는 삭제되고 진사과의 백패(白牌) 또한 잃어버렸다. 별장(別莊)이 아차산(峩嵯山) 밑에 있었는데, 그는 시를 짓기를,
홍지는 회수되고 백패는 잃어버렸으니 / 紅紙已收白牌失
진사시의 장원한 것도 헛이름일세 / 壯元進士摠虛名
돌아와 아차산 밑에 사니 / 歸去峩嵯山下住
산인이란 두 글자야 어느 누가 다투리 / 山人二字孰能爭
하였다. 간성 군수(杆城郡守)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서, 당상에 오르고 상주 목사로 영전하였는데, 열심히 공직에 봉사하였으므로 백성들이 부모처럼 사랑하였다. 공은 마침내 상주에서 죽었는데, 주민들이 공을 추모하여 덕정비(德政碑)를 세웠다.
○ 내가 젊을 적에 황화지(黃華紙)로 책자를 만들어 퇴계 선생(退溪先生)에게 법서(法書)를 청했더니, 선생께서 소 강절(邵康節 소응(邵雍)의 시호)의 시만 써 주었다. 그 중의 한 율시에,
부름에 자주 사양해도 버리지 아니함은 / 相招多謝不相遺
가슴에 품은 경륜 씀직해서 그렇지만 / 將謂胸中有所施
나아간들 어찌 금리의 임무 감당하리 / 若進豈能禁吏責
한가로운 바에야 명예 다시 무엇하리 / 旣閑安用更名爲
다행히 요순 같은 착한 임금 만났으니 / 幸逢堯舜升平日
당우의 태평성대에 달갑게 늙으려네 / 甘老唐虞比屋時
청렴하고 어진 이 조정에 가득한데 / 滿眼淸賢在朝列
나라일에 늙은이야 무슨 소용 있으리 / 老夫無以繫安危
하였다. 그의 시는 부정공(富鄭公)에게 화답한 것이 많았는데, 부공이 강절에게 벼슬하기를 권하자, 강절은 벼슬을 원하지 않는다는 작품인 것이다. 다른 시도 거의 모두가 이런 내용이어서, 온 책이 모두 한가로움을 사랑하고 명리(名利)에 나아가지 않는 내용의 말이었다. 내가 관직을 사랑하여 물러나기를 좋아하지 않을 것을 퇴계께서 미리 아시고 주신 정문일침일 줄이야 어찌 알겠는가?
또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호)를 뵐 적마다 선생은 나에게 관직을 그만두고 시골에 가서 살라고 권하였다. 나는 돌아가서 살 만한 전지가 없다고 대답하였더니, 우계는 말하기를,
“비록 돌아갈 만한 곳이 없을지라도 만일 용단을 내서 돌아가면 가난하게 살 수는 있네. 속담에, ‘산 사람의 입에 거미줄 칠 리 없다’하였으니, 참으로 격언일세.”
하므로, 나는 부끄러워서 사과할 뿐이었다. 그런데, 내 나이 60이 넘도록 아직까지 관직에 미련을 두고 물러나려 하지 않을 줄이야 어찌 생각하였겠나? 퇴계와 우계는 모두 선견(先見)이 있어서 그렇게 하였던 것이다. 이 일을 한 번씩 생각할 적마다 얼굴이 붉어진다.
○ 최치원(崔致遠)의 〈쌍계사비(雙溪寺碑)〉 및 《해동명적(海東名迹)》의 〈추풍유고음(秋風唯高吟)〉의 자체는 가로 긋고 세로 내리 긋는 획이 가늘고도 힘차기 마치 산가지와 비슷하여 곧기만 하고 모양이 적었으며, 성석린(成石璘)의 〈연복사비(演福寺碑)〉 및 〈도평의사사청기(都評議使司廳記)〉의 자체는 성(成) 자 등의 과(戈) 획과 중(中) 자 등의 바로 내리 긋는 획이 매우 길어서, 다른 사람의 글자 모양과는 아주 비슷하지도 않으므로 늘 속에 괴이쩍게 여겼었다.
그런데, 임진왜란 후 갑오년에 북경에 가서 모든 명가들의 법첩을 사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구양순(歐陽詢)이 쓴 〈예천관명(醴泉觀銘)〉과 〈황보부군비(皇甫府君碑)〉는 자획이 가늘고도 힘차기 마치 산가지와 같고, 저수량(褚遂良)의 〈성교서(聖敎序)〉는 과(戈) 획과 중(中) 자 등의 획이 매우 길었다. 그래서 최치원(崔致遠)은 구양순의 체를 배우고, 성석린은 저수량의 체를 모방하였음을 비로소 알았다. 비록 우리 동방에 있을지라도 명필에 이르러서는 감히 스스로 자체(字體)를 만들지 못하고 옛날 사람의 체를 모방하였음을 여기서 또한 짐작할 수 있다. 본조에 들어와서는 조송설(趙松雪 조맹부(趙孟頫)의 호)의 체를 모방한 사람은 매우 많으나, 왕희지(王羲之)ㆍ왕헌지(王獻之)의 체를 배운 사람은 혹간 있으며, 우영흥(虞永興)ㆍ저수량ㆍ안진경(顔眞卿)ㆍ유공권(柳公權)ㆍ소식(蘇軾)ㆍ황정견(黃庭堅)의 체는 다시 전하는 자가 없어져서, 한결같이 붓 나가는 대로 휘갈려 써서 옛날 범을 다시 찾아볼 수 없으니, 개탄해 할 따름이다.
중국 조정의 정덕(正德) 연간에 오인(吳人) 축윤명(祝允明)은 명필의 이름을 독차지하여 명 나라 법서의 제일로 추존되었다. 〈국조명신법첩(國朝名臣法帖)〉가운데 축윤명의 글씨 한 권이 있었는데, 우리나라의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의 자체는 축 윤명이 쓴 〈사수시(四愁詩)〉와 아주 똑같았다. 정호음이 일찍이 축윤명의 체를 보고서 이것을 본받은 것이지, 아니면 우현히 합치된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 지난 갑오년에 북경에 가서 옥하관(玉河館)에 머물고 있을 적에 〈순화법첩(淳化法帖)〉을 며칠 동안 모방하여 연습하였다. 부사 최입지ㆍ서장관 신경숙은 이 소문을 듣고 말하기를,
“나이 60에 비로소 법서를 모사하여 장차 얼마나 성취되겠는가? 왜 이처럼 스스로 고생하고 있소.”
하기에, 나는 웃고 말았다. 그 뒤 임진왜란 때 죽국의 대병(大兵)이 와서 구해 주고 철수해 돌아갈 적에 유격(游擊) 왕입주(王立周)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소주 사람이었다. 내가 그를 찾아가 보고, 이어서 글씨 한 폭을 써서 그와 같은 고향인 왕감주(王弇州 왕세정(王世貞)의 호)의 아들 주사(主事) 왕사기(王士騏)에게 부쳤는데, 유격은 내 글씨를 보고 말하기를,
“이 글씨의 자획은 우영흥의 글씨를 모방한 것이다.”
하였다. 나의 글씨가 어찌 만분의 일이라도 우영흥의 필법을 얻었겠는가?
○ 찬성 허자(許磁)와 좌윤 이찬(李澯)은 대과에 오르기 전에 성균관에 같이 거하였다. 허찬성은 이 좌윤보다 두 살 위로 허 찬성은 병진생, 이 좌윤은 무오생이었는데, 매양 이 좌윤의 윗자리에 앉았었다. 어느 날 허 찬성은 꿈을 꾸고는 이로부터 매양 이 좌윤에게 윗자리를 사양하고 자기는 아랫자리에 앉았다. 계미년(1523, 중종 18)에 같이 과거에 올랐는데, 이 좌윤은 2등, 허 찬성은 3등이 되었다. 허 찬성은 그제서야 그때의 꿈 얘기를 하되, ‘자기와 이 좌윤이 동방 급제를 하였는데, 자기 이름이 바로 이 좌윤의 이름 아래에 있었다. 그 뒤부터 매양 이 좌윤의 아랫자리에 앉은 것은 그 꿈이 실현되기를 바란 것이요, 이것을 숨기고 미리 말하지 않은 것은 행여 하늘의 기밀을 누설시킬까 염려해서였다.’고 하였다.
○ 이조 판서 조사수(趙士秀)가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적에, 병조 판서 이준민(李俊民)은 상주 교수(尙州敎授)로 가도사(假都事)가 되었다. 관찰사의 순행(巡行)이 경주에 도착하니, 좌윤 이찬(李澯)공은 가도사에게 아주 공경히 대하고, 부의 아랫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은 재상이 될 인물이니, 진짜 도사로 대우해야 된다.”
하니, 관찰사는 듣고 빙긋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가도사는 어떠한 재상이기에 주인 영공(令公)이 이처럼 극히 우대하시오?”
하였다. 매우 경멸한 탓으로 그의 말씨가 이와 같았던 것이다. 그 뒤 이 좌윤은 체직되어 와서 경연청에 나가고, 이 판서도 이미 한림이 되어 같이 참석하였다. 그러나 이 좌윤은 이미 늙고 병들어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한림이 앞에 가서 스스로 얘기하니, 그제서야 알아보았다. 이 판서는 뒤에 병조 판서가 되어 공명이 조 판서와 거의 비슷하였으니, 이 좌윤은 안식(眼識)이 있다고 할 만하며, 조 판서의 사람을 잃음은 실로 그를 업신여긴 데에 있었던 것이다.
○ 첨지(僉知) 이공좌(李公佐)는 가정 계미(1523, 명종 18) 8월 20일 해시(亥時)에 태어났는데 영상 박순(朴淳)과는 오주(五柱)가 모두 같았다. 둘 다 계축년(1553, 명종 8) 정시(庭試)에 급제하였는데, 박 영상은 문과 장원이 되고, 이 첨지는 무과 장원이 되었다. 박순은 벼슬이 영사에 이르러 사퇴하고 영평(永平)으로 내려간 지 3년 만에 죽으니, 수는 겨우 67세이다. 적실에는 딸 하나만 있고 아들은 없으며, 측실에 아들이 있긴 하나 나이 어려서 성취시키지 못하였다. 이 첨지는 적실에 아들 넷, 딸 하나를 두고, 측실에는 1남 1녀를 두었는데, 적자ㆍ서자 5형제가 모두 무과에 급제하였다. 이 첨지 자신도 일찍이 3품의 부사(府使)를 역임하였고, 다섯 아들이 과거에 올랐다 하여 직급이 더해져 당상에 올랐으며, 올해 나이 81세인데도 건강하다. 맏아들 응해(應獬)는 현임 가선(嘉善)인 수사(水使)이며, 그 밑에 네 아들도 모두 6품 이상이다. 벼슬 지위로 말하면, 이 첨지가 박 영상에게 어림도 없지만, 오래 살고 자식 많으며 목전의 영화로 말하면, 이 첨지만이 누린 것이요, 박 영상이 도리어 모자란다. 오주가 같은데도 성쇠의 이치는 그 사이에 다름이 있으니, 이해하지 못할 일이다. 운명을 말하는 자가 거기에 대한 해설을 구해 보나 알아내지 못하여 말하기를,
“이 첨지는 해시 초에 나고, 박 영상은 해시 말에 나서 팔자가 같지 않은 까닭이다.”
라고 하니, 이는 더욱 괴이하다.
○ 나는 소재(蘇齋)와 함께 옥당에 있었다. 소재가 얘기하던 끝에 말하기를,
“《대학(大學)》의 ‘격물치지’와 ‘성의정심’은 본디 차례와 등급이 있는 것이지만, 그 외의 《논어(論語)》와 《맹자(孟子)》에 산발적으로 나오는 것은 주자(朱子)의 말대로 차례와 등급이 꼭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후대의 학자들은 선유(先儒)의 말이라 하여 감히 다른 의견을 가지지 못하나 실제로는 꼭 그렇지가 못하다.”
하였다. 이는 곧 주자의 말이라 하여 다 따를 수 없다는 뜻이다.
○ 소재는 또 말하기를,
“고봉(高峯)이 칠언율시를 지었으므로 나는 거기에 차운(次韻)을 붙였다. 고봉의 차운은 20여 수나 되었지만, 다는 다섯 수만 차운하고 말았다.”
한다. 그의 뜻을 한 운으로 많이 짓는 것을 능사로 삼지 않았기 때문이다.
○ 대제학 유회부(柳晦夫 근(根)의 자)는 말하기를,
“지금 본 서당(書堂)에서 조(祖)ㆍ 자(子)ㆍ 손(孫) 3대가 뽑힌 자는 무릇 세 집이다. 홍 감사(洪監司)의 집은 감사 홍춘경(洪春卿), 그의 아들 도승지 천민(天民)ㆍ찬성 성민(聖民) 형제와 승지의 아들 서봉(瑞鳳)이, 정 정승의 집은 우상 정유길(鄭惟吉), 그의 아들 현임 이조 판서 창연(昌衍), 이조 판서의 아들 지평(持平) 광성(廣成)이, 이 영상의 집은 전 영상 이산해(李山海) 공, 그의 아들 현임 이조 참의 경전(慶全), 이조 참의의 아들 전 정언(正言) 후(厚)ㆍ한림 구(久)의 형제가 모두 뽑히었다.”
하였다.
○ 안자유 계홍(安自裕季弘 계홍은 자) 어른은 김홍도(金弘度)의 당에 연좌되어 파직당하였다가 몇 해 지나서야 다시 임용되었다. 그러므로 내가 먼저 이조에 들어가고 공이 잇달아 들어와서 같이 좌랑이 되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곽부(郭赴) 공은 언관을 감당할 만한 분이라고 말하자, 공은 말하기를,
“곽부는 본디 착한 분이지만 그가 언관이 되는 데 있어서는 될 수도 안 될 수도 있는 그저 그런 자격이다. 그렇지만 그의 형 월(越)은 진실로 기이한 재주를 가진 선비이고 사람이 알지 못하는 명장의 재주를 가졌다. 만일 병사(兵使)에 임용되면 반드시 훌륭한 업적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월(越)은 매양 외직에만 임용되었고, 혹 풍헌관(風憲官 풍기를 취체하는 관리)이 되어서도 돌아다니기만 하였을 뿐, 남보다 훌륭함이 있음을 보지 못하였다. 그래서 나는 항상 안장(安丈)의 말이 실정보다 지나치다고 여겼다. 월은 나중에 의주 목사만 되었을 뿐, 병사는 되지 못하였으므로 그의 장수 재질이 과연 어떠한지 알 수 없거니와, 설사 한 방면의 장수가 되었다하더라도 평화로운 시대에는 진실로 실력을 드러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아들 재우(再祐)는 임진왜란을 당하여 포의(布衣)로 병대를 끌고 정진(鼎津)을 지켜 적이 감히 건너오지 못하였다. 그 뒤 적병을 여러 번 쳐부수었고, 또한 어루만져 통솔을 잘하였으므로 군사들이 모두 임용되기를 즐겨하였다. 설사 지금 병사나 수사가 된다 하여도 그의 재주를 충분히 펴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말하기를,
“척이 만일 다시 나오면 곽재우가 반드시 대장이 될 것이고, 삼군은 바야흐로 두려움이 없이 완전히 승리하고 깨끗이 소탕하는 공을 거둘 수 있다.”
하였으니, 지금의 명장은 한 사람뿐이다. 그러나 그의 장수 재질은 진실로 내림이 있었던 것이니, 단 샘물[醴泉]은 근원이 없는 것이라고 우겨서는 안 된다. 안 노인(安老人)의 안식에 매양 감복한다.
○ 신기재(申企齋)는 말하기를,
“한지원(韓智源)의 〈제갈채(諸葛菜)〉절구는 지금의 두시(杜詩)라.”
하였다. 시는 이러하다.
팥배나무엔 이미 소공의 덕화 없어졌는데 / 甘棠已無召公化
작은 나물엔 오히려 제갈 이름 전해 오네 / 小菜猶傳諸葛名
당시에 큰 별이 떨어지지 않았던들 / 不有當年大星落
위의 동산 오의 채마밭에는 나물만이 자랐으리 / 魏園吳圃菜渾生
○ 옛날에 내가 경차관(敬差官)으로 영남(嶺南)에 내려갔을 때다. 중에게 준 시축에,
고향생각 아득해 흰구름 바라보니 / 鄕心迢遞白雲端
남국의 가을 바람 나그네길 어렵구나 / 南國秋風道路難
말 위에서 중 만나 도리어 한 번 웃으니 / 馬上逢僧還一笑
산에 가득한 푸른 숲은 날 좀 보소 하는구나 / 滿山蒼翠要人看
하였더니, 남명(南溟)은 이를 매우 칭찬하였다 한다,
○ 융경 2년 무진 (1568, 선조 1)에 중국 조정은 한림원 검토 성헌(成憲)ㆍ병과급사중 왕새(王璽)를 보내어 황태자를 세운 조서를 반포하였는데, 무릇 조사를 접대하는 책임은 도승지에게 있었다. 성공(成公)의 뺨에 꽤 큰 혹이 있었는데, 우리 나라 의원에게 치료를 받으려고 하였다. 이후백(李後白) 공이 그때 도승지였는데, 아뢰기를,
“만약 우리나라 의원이 치료하다가 낫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작은 걱정이 아닙니다. 상사(上使)에게 말하되, ‘외국엔 좋은 의원이 없다. 만약에 혹은 제거되지 않고 부스럼만 생긴다면 어찌하겠는가? 손을 대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사정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상은 그 말이 그렇겠다 여기고 상자에게 청하니, 상사도 과연 그렇겠다고 하였다. 당시의 재신들은 모두 이공을 일러서 변통수에 능하다고 하였다. 성공은 기해생이니, 계주위(薊州衛) 사람이며, 을축년에 과거하였다. 그 뒤 기축년에 내가 북경에 갔더니, 성공은 국자감 좨주로 집에 돌아와서 병을 치료하여 뺨에 있던 혹이 말끔히 치료되어 있었다.
○ 모재(慕齋)는 조정에서 돌아온 뒤 오랫동안 예조 판서로 대제학을 겸하였다. 뒤에 병조 판서로서 찬성에 올랐고 이조 판서는 되지 못하였으니, 곧 양연(梁淵)의 방해로 인하여 그렇게 된 것인데, 정승의 자리가 비어 있었는데도 또한 복상(卜相)에 참여되지 못하였다 한다.
○ 퇴계는 벼슬하기 전에 서울을 오가는 길에 여강(驪江)의 범사정(泛槎亭)에 들러서 모재를 뵌 일이 있었다. 《퇴계집》 속에,
“모재를 뵈온 뒤부터 비로소 정인 군자(正人君子)의 도를 알았다.”
는 말이 있다. 여주의 산승(山僧)이 시축을 가지고 영남으로 퇴계를 찾아가 뵈었는데, 시축 속에 모재ㆍ기재(企齋) 두 노선생(老先生)의 절구가 있었다. 퇴계는 그 절구에 다음과 같이 차운하였다.
두 노인 서거한 지 몇 해나 지났던고 / 二老仙遊知幾年
매화 피는 섣달에 중이 와서 나를 찾네 / 僧來見我臘梅天
예전에 찾아갔던 이 사람은 / 自嗟疇昔登門客
남긴 시에 눈물 뿌리며 백발을 슬퍼한다오 / 淚洒遺篇雪滿顚
유이현(柳而見 유성룡(柳成龍)의 자)이 응교로 있을 적에 판서 이윤경(李潤慶)의 시호를 의논하기 위하여 가는 길에 좌의정 소재(蘇齋)에게 들러 뵈었다. 소재는 유이현에게 이르기를,
“판서는 유명한 재상이며, 또 남정(南征) 때 공로가 있었고, 또 청덕(淸德)이 많으니, 모름지기 좋은 시호로 정해야 할 것이다.”
라고 하니, 유이현은,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고, 곧 의숙(懿肅)ㆍ익장(翼莊)ㆍ의도(懿度)로 망단(望單)을 갖추어 의정부에 보고하였다. 그 때 박사암(朴思菴 박순의 호)은 수상이었는데, 합석하여 계(啓)를 감정(勘定)할 때 시호가 그의 실정을 다 그려내지 못하였다 하여 고치라고 도로 내려 보냈다. 소 정승은 말하기를,
“이 논이 극히 합당하다.”
하고, 우상 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의 호)과 함께 같은 말로 고하였다 한다.
○ 감주(弇州 명(明) 나라 왕 세정(王世貞)의 호)의 〈왕소군도(王昭君圖)〉의 발문에,
“개보(介甫 왕안석(王安石)의 자)만이 그의 정과 일을 얻어서 말하기를,
한의 은혜 얕아지고 호의 은혜 깊어지니 / 漢恩自淺胡自深
인생의 즐거움은 마음 서로 앎에 있도다 / 人生樂在相知心
하였는데, 비록 이 두 마디 말이 죄가 되기는 하였으나, 사람으로 하여금 그 속마음을 알게 하여 풍영왕(馮瀛王)을 허여함을 기다리지 않고도 그가 순수하지 못함을 미워하였으니, 가소로울 뿐이다.”
하였다. 나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그의 소군을 두고 읊은 글은 새로운 뜻을 지어내어 앞사람을 앞서려고 힘썼으므로, 묘사의 기교를 주로 삼다보면 그 사람의 본마음과 사정을 잘못 끄집어낼 수 있는 것이지만, 풍영왕에 이르러서는 자신이 오계(五季)를 섬겨 명분과 절의는 쓸어낸 듯하였으므로, 후세의 죄줌이 의당 돌아갈 데가 있어 결코 용서할 도리가 없는데, 개보는 곧 말하기를, “몸을 굽혀 세상을 구해서 모든 보살의 덕행이 있다.”하고, 심지어는 다섯 번 걸(桀)에게 나아가고, 다섯 번 탕(湯)에게 나아갔다는 고사를 비유까지 하였으니, 그의 본마음이 참으로 풍영왕을 그르게 여기지 않은 것이다. 뒤에 와서 치우친 소견을 고집하여 여러 사람의 논의를 배척하고 신법(新法)을 힘써 주장하고, 흉사(凶邪)한 자를 인용하여 천하를 어지럽힌 것은 실로 여기서 조짐이 시작된 것이다. 이벽 계장(李璧季章 계장은 자)은 도(燾)의 아들로 일찍이 주부자(朱夫子)에게 인정을 받은 자다. 처음에는 실로 조행을 잃지 않고 사류(士流)가 되었으나, 그가 형공(荊公)의 시를 주(註)낼 적에 그의 인생의 즐거움은 마음 서로 알아줌에 있도다[人生樂在相知心]라는 말을 혼자서 용서해 말하기를, “다른 사람이 이런 글귀를 지었더라면 사람들이 반드시 그르게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하였으니, 그가 형공을 두둔하고 애석히 여긴 것은 곧 그의 본심이다. 주장하는 의논이 이와 같았다.
○ 내가 기축년(1589)에 북경으로 조회하러 갔을 적에 화숙양(華叔陽)은 제독주사(提督主事)로 우리들의 단속을 매우 까다롭게 하여 관부(館夫)들이 모두 원망하였다. 공은 시독학사(侍讀學士) 찰(察)의 아들이요, 왕봉주(王鳳洲 왕세정(王世貞)의 호)의 맏사위이다. 그때 들으니, 같은 고을에 사는 중서사인(中書舍人) 진씨(秦氏) 성을 가진 자가 충고하여 풍간하기를,
“그대의 춘부장 학사공(學士公)은 일찍이 조선에 사신을 갔다 와서 입에서 그칠 줄 모르게 조선을 칭찬하였는데, 그대가 어찌 사신을 이처럼 까다롭게 단속하오?”
하니, 공은 대답하기를,
“조선이 예의 바른 나라라고 집 어른께서 늘 칭찬하였음을 진실로 알지만, 직책이 제독에 있으니, 특별히 후하게 할 수 있소?”
라고 하였다 한다. 하루는 어떤 일을 가지고 글을 바치니, 공은 글자 네댓 자를 답으로 써서 던져 내렸다. 역관 홍순언(洪純彦)이 받아서 나에게 보이는데, 글씨가 훌륭하여 진(晉) 나라 필법이었다. 또 아주 호부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여, 여름철에는 아침마다 객관에 도착하였는데, 언제나 초록 문사단령(紋紗團領)을 입었으며, 날마다 갈아 입었다. 《이력편람(履歷便覽)》을 상고해 보니, 을해년에 죽었다 한다. 들으니, 화학사(華學士)의 병이 위독하자, 공은 자기 다리를 베어 약에 썼는데, 그로 인하여 부스럼을 앓다가 죽었다고 한다.
○ 내가 종계주청사(宗系奏請使)로 기축년(1589, 선조 22)에 북경을 갔을 적에 수상 신시행(申時行)ㆍ부수상 허국(許國)ㆍ왕석작(王錫爵)ㆍ왕가병(王嘉屛)이 각중(閣中)에서 일시에 함께 나왔다. 서공은 큰 키에 머리털이 희끗희끗하고, 허공은 작달만한 키에 수염이 듬성듬성 나고 매양 천청단령(天靑團領)을 입었으며, 왕공 석장은 머리가 새까맣고, 왕공 가병은 수염이 듬성듬성 나고 신체는 건장하기 무인(武人)과 같았는데, 우리나라의 지사(知事) 곽흘(郭屹)과 아주 비슷하였다.
신공은 임술년 과거에 장원하였는데, 을미생이며, 오현(吳縣) 사람이다. 허공은 을축년에 과거하고, 정해생이며 흡현(歙縣) 사람이다. 일찍이 검토(檢討)로써 급사중 위시량(魏時亮)과 함께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나와 등극조서를 반포한 적이 있는데, 그의 깨끗한 절조, 깊은 아량을 우리나라 사람은 마치 하늘의 신선처럼 우러러 보았었다. 왕공 석작은 임술년 회시에 제2등으로 합격하였고, 태창주(太倉州) 사람이며 갑오생이다. 또 왕공 가병은 북산음(北山陰) 사람이며, 병신생이다. 우리가 조정에 돌아올 칙서를 받을 때에 시강 육가교(陸可敎)가 칙서를 받들고 문화전문(文華殿門)에서 나에게 주었다. 육공은 작달만한 키에 수염이 적으며, 정축년에 과거하였고, 정미생이며, 난계(蘭溪) 사람인데, 호는 규일(葵日)이다.
부사 도(屠) 아무를 인하여 〈조천록서(朝天錄序)〉를 받았는데, 그의 문장이 매우 훌륭하였다. 《이력편람》을 상고해 보니, 갑오년에 남예부시랑(南禮部侍郞)에 올랐고, 무술년에 죽었다고 한다.
○ 온순(溫純)은 내가 기축년에 천자께 조회하러 갔을 때 창장호서(倉場戶書)로서 흰옷 차림에 보자기도 없이 예를 드리고 조정을 하직하였다. 관부(館夫)는 그 사람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 분은 곧 분상(奔喪 타향에서 어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는 것)하는 창량호서(倉粮戶書)입니다.”
하기에, 그를 자세히 살펴보니, 상복 위에 흑단령(黑團領)을 입었는데, 상복은 흑단령보다 조금 더 길었으며, 발에는 황색 신을 신고 있었다. 관부는 이르되,
“대궐문을 나가면 즉시 단령은 벗어버리고 상복으로 길에 오르고, 전송하는 자가 있으면 전송을 받고 떠난다.”
하였다. 《이력편람》을 상고해 보니, 공은 기해생이고, 삼원현(三原縣) 사람이며, 을축년에 과거하였다.
○ 내가 갑오년에 북경에 사신으로 갔을 때, 유원진(劉元震)은 예부 우시랑으로 시독학사(侍讀學士)를 겸하고 있었다. 하루는 비가 오는데 종이 삿갓만 쓰고 우의는 입지 않았으며, 몸에는 푸른 비단 적삼만 입고 대궐을 나아갔다. 위대한 장부였다. 《이력편람》을 상고해 보았더니, 공은 임구(任邱) 사람으로 계묘생이며, 신미년에 방(榜)이 바뀌어지고, 이부 좌시랑으로 첨사를 맡고 있으며, 현재 각로(閣老)의 물망에 오르고 있다고 한다.
손계고(孫繼皐)는 예부 우시랑의 자리에 있으면서 나의 인사를 받았다. 그는 얼굴이 그림처럼 훤하고 몸집은 매우 뚱뚱하였다. 《이력편람》을 상고해 보았더니, 공은 갑술년 과거에 장원하였고, 경술생이며, 이부 우시랑에 추천되었다가 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계유에 북경에 갔다. 조회가 파하여 대궐문을 나올 적에 이부 상서 양박(楊博)ㆍ좌도어사(左都御史) 갈수례(葛守禮)가 나란히 나왔다. 단문(端門 정전(正殿) 앞에 있는 문)을 나서기 전에 관부(館夫)가 내게 가리켜 보이며 말하기를,
“이 분들은 이부 상서 양공ㆍ좌도어사 갈공입니다.”
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그들은 당시의 명신(名臣)입니다.”
하였다. 양공은 머리가 검고 번지르르하여 아직 늙지는 않았고, 그의 모양은 우리나라의 죽은 군수 심의검(沈義儉)과 거의 비슷하였다. 갈공은 양공에 비해 몸집은 조금 더 컸으나, 머리는 하얗게 세었다. 두 분은 가정 기축년 동년 출신이다. 또 기억나기로는, 그 걸음에 있기 전후에 공부 상서 뇌예지(雷禮之)를 만났는데, 단문을 나와서 막 동장안문(東長安門)으로 향하는 길에서 관부는 또한 가리켜 보이면서 그의 관직과 성명을 말해 주었다. 지금 《가정문견기(嘉靖聞見紀)》를 상고해 보니, 세 분은 모두 융경 임신년(1572, 선조 5)에 이 관직에 있었다. 이듬해인 계유년에도 아마 전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던 모양으로, 내가 바라보았던 사람이 틀리지 않을 것이다. 양공은 원래 이부(吏部)였는데, 전직 이서(吏書)로 기용되어 병부 일을 맡아보았다. 양공ㆍ 갈공은 모두 깨끗한 절조와 무거운 신망으로 당시의 명신이었고, 뇌공은 가정 임진년(1532, 중종 27)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공이 쓴 정 단간(鄭端簡 단간은 효(曉)의 시호)의 《오학편(吾學編)》서문을 보았더니, 그 ‘박학한 학문은 천하를 감복시키고, 덕스러운 몸과 깨끗한 행실이 이미 썩지 않는 서림(書林)에 벌여 있다.’는 것을 가지고 일컬어 문체를 세웠으니, 그 문장이 매우 아름다웠다. 역시 문장에 능한 명재상이었던 모양이다. 양공은 산서 포주(蒲州) 사람이고, 갈공은 산동 덕평(德平) 사람이며, 뇌공은 강서 풍성(豐城) 사람이다.
○ 계유년에 나는 종계주청사로 상사 판서 이후백(李後白)ㆍ서장관 칠원군(漆原君) 윤탁연(尹卓然)과 같이 북경을 가게 되었다. 우리 일행이 요양에 도착하여 군사 조련을 만났는데, 병부 시랑의 순시가 요성(遼城)에 온다 하여 성안의 대소 관원들은 다 하루 이틀 길 밖으로 마중을 나갔다. 며칠 뒤에야 시랑의 행차가 요성에 도착하였다는 것과 성안의 대소 관원들이 모시고 왔다는 것을 들었다. 이 뒤에 비로소 도사(都司)에서 관리를 만나보게 되어, 조련에 나갔던 사람은 곧 좌시랑 왕도곤(汪道昆)이었다는 것을 들었다.
그 뒤 시랑 왕남명(汪湳明)이 지은 《부묵(副墨)》 및 《황명십팔가(皇明十八家)》를 모니, 왕남명의 문장이 들어 있고, 감주(弇州)의 《사부고(四部稿)》에 왕백옥(汪佰玉 왕도곤(汪道昆)의 자)을 성대히 칭찬하였으므로, 왕 시랑은 곧 근세 문장의 대가임을 비로소 알았다. 다행히 한 시대에 같이 태어나고, 마침 북경으로 가는 길에 시랑의 요성 순시를 만났다. 당시에 만일 그가 천하의 훌륭한 문장사임을 알았더라면, 곧 길가에 나가서 얼굴을 쳐다보았을 터인데 미처 몰랐던 것이니, 지금까지 늘 한이 된다.
또 후일 시랑은 조련을 마친 뒤에 매일 한 말의 금을 소비하였다는 참소를 당한 후에 다시 기용되지 못하고 일생을 미쳤다고 한다. 봉주(鳳洲)의 편지첩에 공에게 보낸 편지를 보니 이르기를,
“일찍이 하인을 보내서 안부를 여쭈려 하였으나, 이때는 절월(節鉞 사신을 말함)이 현도(玄菟) 패수(浿水)가에 계셨습니다. 이 때문에 훌륭한 가르침을 받들지 못하여 한으로 여깁니다.”
하였으니, 그 당시 왕공이 요성으로 순시 나갔을 때였다.
○ 일찍이 《작애집(灼艾集)》을 보았더니, 한 가지 논의가 있는데, ‘풍도(馮道)는 정도로 벼슬하였고, 아첨하여 따른 적이 없었다.’고 성대히 칭찬하였다. 시세종(柴世宗)이 장차 유숭(劉崇)을 친히 막으려 하매, 풍도는 힘써 간하니, 세종이 말하기를,
“나의 많은 군대로써 유숭을 친히 정벌하는 것은 마치 산이 달걀을 누르는 것과 같다.”
하매, 풍도는 말하기를,
“폐하께서 산이 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이러한 말들은 다 직절(直截)한 것이요, 임금의 의견에 아첨하여 따른 적이 없었다고 하였으니, 풍도를 일러서 훌륭하다 할 수 있겠는가? 괴짜라고 말할 만하다.
어떤 중국 사람이 말하기를,
“거래(崌崍) 장가윤(張佳胤)이 《이창명집(李滄溟集)》의 서문을 지었는데, 왕봉주(王鳳洲)에게 또 서문을 청하자, 봉주는 핑계를 대고 짓지 않았다. 이것은 아마도 만일 자기가 서문을 짓게 되면 반드시 장거래(張崌崍)의 글보다 훌륭할 것이므로, 남이 지은 글을 덮어버리고 자기의 재주를 자랑하게 될까 염려한 것이다. 그가 짓지 않은 것은 실로 봉주다운 겸허한 덕행인 것이다.”
하였다.
○ 이시애(李施愛)는 반란을 일으켜 성언(聲言)하기를,
“신숙주(申叔舟)ㆍ 한명회(韓命澮)가 권력을 남용하고 있으므로 임금 곁에 있는 이 악당을 제거하련다.”
하자, 광묘(光廟 세조의 묘호)는 신숙주와 한명회를 금부(禁府)에 하옥시키고 내시에게 부정을 살피도록 하였는데, 내시가 말하기를,
“두 사람 다 칼을 쓰기는 하였으나, 칼이 가볍고 도한 목이 닿는 끝에는 구멍이 매우 넓습니다.”
하니, 즉시 금부당상을 추국하고 의금부 도사는 저자에서 찢어 죽이게 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옥을 내원(內苑)으로 옮겨서 승지가 순찰하고 금군이 수직하게 하였다. 10일이 지난 뒤에 특별히 두 사람을 불러 접견하는데, 맨발로 대전을 내려가서 여덟 가지 사항을 들어 자신을 책망한 뒤에 손을 잡고 대전(大殿)으로 오르고 관직은 옛날 그대로 두었다 한다.
○ 김모재(金慕齋)는 늘 어의동에 사는 문관(文官) 정씨(鄭氏)가 지은 규원시(閨怨詩)를 말하였다. 시는 다음과 같다.
홍루의 조용한 낮 베개마저 허전한데 / 紅樓晝寂寢屏空
한 움큼 매화 향기 숫제 옥다발일세 / 一掬寒香玉砌叢
눈물로 지워진 거북 무늬 변방은 멀고 / 泣罷龜紋沙塞遠
발에 가린 성긴 버들엔 또 갈바람일세 / 隔簾疏柳又西風
○ 중국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천하의 이름난 지역은 소주ㆍ항주의 두 부(府)다. 속담에,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당에는 소주ㆍ항주가 있다.’고 하여, 누구나 이 말은 한다.”
고 하였으니, 항주는 즉 남송(南宋)이 수도를 세운 임안부(臨安府)이고, 소주는 즉 송(宋)의 평강부(平江府)다.
○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은 일찍이 말하기를,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이 지은 시는 격이 매우 높아 그의 시재(詩才)는 비록 열 사람이 뜯어 갈라도 한 부분은 남을 것이며, 대제학도 넉넉히 해낼 수 있다.”
라고 하였으니, 심복(心腹)된 것이다.
○ 혜장왕(惠莊王 세조) 대엔 당시 신료들치고 누구나 노산군(魯山君 단종)의 일을 애석히 여기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가 성묘조(成廟朝)의 성명(聖明)한 때에 이르러서야 잊어버리게 되었다 한다.
○ 지난 기축년(1589)에 북경에 가서 옥하관(玉河館)에 머물 적이다. 어느 집에서 기르는 앵무새를 빌려다 보았더니, 크기는 까치에 비해서 조금 더 컸으며, 짙은 녹색에다 입부리와 엄지 발톱은 모두 검었다. 긴 말은 못하고 다만, ‘손님이 온다, 찻상 보라’, ‘고양이 온다.’라는 말을 할 따름이었다. 전해 오는 말에는, 앵무새가 본산지에서 중국으로 온 지 여러 해가 되면 입부리와 엄지발톱이 붉어지고, 그래야만 긴 말을 해낸다는 것이다. 옥하관에서 나들이할 적에 길가의 어느 집 누대 벽을 바라보니, 못질한 쇠횃대에 여러 쌍의 앵무새가 앉아 있는데, 입부리와 엄지발톱이 모두 붉었다. 그러나 빌려다 뵈는 못하였다. 틀림없이 긴 말을 할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앵무새가 입을 벌려 말할 적에 보니, 혀가 비록 작긴 하였으나, 혀가 뾰족한 여느 새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고, 그 혓바닥이 둥그스름하기는 사람의 혀와 똑같았다. 이것이 사람처럼 총명하고 말을 해내는 까닭일 것이니, 물(物)에 부여한 이치 또한 묘하도다.


[주D-001]진(秦) 나라 때 …… 되었다. : 진시황(秦始皇)이 6국을 통일한 뒤에 이사(李斯)의 주의(奏議)에 따라 주(周) 나라 때부터 내려오던 봉건제도를 폐지하고 영토를 36군(郡)으로 나누었다. 이것이 곧 군현정치(郡縣政治)의 시초다.
[주D-002]고려 숭의전(崇義殿) : 이조(李朝)에서 고려 태조와 7왕 즉 혜종ㆍ정종ㆍ광종ㆍ경종ㆍ성종ㆍ목종ㆍ 헌종을 제사지내는 한편, 그곳을 숭의전이라 이름 짓고, 고려 왕족의 후손으로 하여금 관리케 했다. 초기에는 종6품에 해당하는 사(使), 종4품에 해당하는 수(守), 종6품에 해당하는 감(監), 종9품에 해당하는 여릉 참봉(麗陵參奉) 등의 관리를 두었다.
[주D-003]이를 말함이다 : 《월정별집(月汀別集)》권4에 수록된 만록(漫錄)에는 이 문장 끝에 ‘下缺’이라고 하여 생략을 표시하였다.
[주D-004]야율초재(耶律楚材) : 원(元) 나라 초기 사람. 천문ㆍ지리ㆍ노장ㆍ술수 등에 두루 능하고 태조의 신임을 받아 국정을 도맡아 했다. 시호는 문정공(文正公).
[주D-005]얼마 전 …… 《당서연의(唐書衍義)》를 보니 : 이 대문은 “頃見唐書衍義……”라고 되어 있는데, 문의가 분명치 않으므로 《월정별집(月汀別集)》 만록(漫錄)에 소재되어 있는 “頃見李監司時發言會見唐書衍義……”대로 번역하였음.
[주D-006]권반(權攀)의 전례 : 권반은 세조 5년(1459) 식년문과에서 세조의 허락으로 당상관으로서 응시하여 병과로 급제하였다.
[주D-007]변씨의 옥이 월형(刖刑) 부름 : 주(周) 나라 때 초인(楚人) 변화(卞和)가 초산(楚山)에서 박옥(璞玉)을 얻어 여왕(厲王)에게 바쳤더니, 거짓이라 하고 그의 왼발을 베었다. 그 후 무왕(武王)에게 다시 바쳤으나 역시 거짓이라고 그의 오른발을 베었다. 뒤에 문왕(文王)에게 바쳐서 옥인(玉人)이 쪼았더니 과연 보옥(寶玉)이 들어 있었다는 고사. 《韓非子》
[주D-008]양장 : 중국 산서성(山西省) 교성현(交城縣) 동남에 있는 경사진 비탈 이름. 전국 시대 조(趙) 나라의 요새지며, 마치 양 창자처럼 구불구불하다고 한다.
[주D-009]산사서 돌아갈 계획 : 은둔할 계획을 뜻함. 《세설신어(世說新語)》에 지도림(支道林)이 심공(深公)에게 산을 사자고 하였더니 심공이, “소유(巢由)가 산을 사 놓고 은둔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주D-010]반우(返虞) : 장사를 치르고 신주를 모시고 돌아오는 일. 반혼(返魂).
[주D-011]진우량(陳友諒)의 …… 사로잡혔다 : 진우량은 원 순제(元順帝) 때 서수휘(徐壽輝)의 난에 예문준(倪文俊)의 휘하로서 틈을 보아 문준과 수희를 죽이고 황제에 올라 국호를 한(漢)으로, 연호를 대의(大義)로 하다가, 4년 후에 명(明)의 태조에게 패하였다.
[주D-012]성조(成祖) : 명(明)의 3대 황제(1403~1424), 연호는 영락(永樂).
[주D-013]주 나라 일곱 살 애기 : 후주(後周)의 공제(恭帝). 7세에 제위에 올라 여덟 달 만에 송 태조(宋太祖)에게 양위당함.
[주D-014]사학(四學) : 태종 11년에 선비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세워진 서울의 중학(中學)ㆍ동학(東學)ㆍ서학(西學)ㆍ남학(南學).
[주D-015]학이 되어 화표주(華表柱)에 날아와서 울었다 : 《수신후기(搜神後記)》에, “정영위(丁令威)는 죽은 뒤 천 년 만에 학이 되어 고향에 돌아와 성문(城門) 화표주(華表柱)에 앉았다.” 하였다.
[주D-016]말머리를 …… 일이다 : 《장자》 추수편에 보인다.
[주D-017]그런데 …… 죽였는데도 : 성제는 위(魏)의 태자사인(太子舍人)으로서 사마소에게 붙어 아부하여 사마소를 치는 위주(魏主) 모(髦)를 찔러죽였다.
[주D-018]세초연(洗草宴) : 세초는 초고를 물에 씻어 버리는 것. 국사의 찬수(撰修)를 마치고 원고를 정리할 때에 베푸는 잔치.
[주D-019]세간의 남긴 자취 용이 오르는 것 같다 : 진(晉) 나라 왕희지(王羲之)는 누에고치처럼 윤택한 잠견지(蠶繭紙)에 서수필(鼠鬚筆)을 사용하여 〈난정서(蘭亭序)〉를 썼는데 매우 신기하였다. 그 후 당 태종은 그의 7세손 지영(智永)으로부터 난정서의 진적을 얻어 매우 사랑하던 끝에 이를 모각(摹刻)하여 황자(皇子)ㆍ근신(近臣)들에게 주고 진본은 자기 무덤에 순장케 하였다. 소동파는 그 모각본에 대하여 〈손신로구묵묘정시(孫莘老求墨妙亭詩)〉에서, “난정견지는 소릉에 들고, 세간에 남긴 자취 오히려 용이 오르는 듯하도다[蘭亭繭紙人昭陵 世間遺跡猶龍騰]”라고 읊었다.
[주D-020]사궤장연(賜几杖宴) : 궁중 의식의 하나. 70세 이상의 대신들에게 왕이 궤장(지팡이)를 하사하고, 동시에 베풀던 연회.
[주D-021]풍부(馮婦)의 범 잡음 : 풍부는 춘추 때 진(晉) 의 역사(力士). 군중들의 범을 쫓다가 범이 산모퉁이를 등지고 앉으니 아무도 감히 잡으려 들지 못했다. 때마침 풍부가 이를 보고 팔을 걷으면서 수레에서 내렸다. 이때 군중들은 모두 환호성을 질렀으나 뜻있는 선비들은 그 만용의 어리석음을 비웃었다.
[주D-022]날개 쳐서 열 길 연꽃에 깃들 만하구나 : 〈윤희내전(尹喜內傳)〉에서 나온 이야기다. 진인(眞人)들이 놀 때엔 모두 연꽃 위에 앉는데 그 연꽃의 크기가 지름이 열 발이나 된다 한다.
[주D-023]한단(邯鄲)의 여자 : 진 태자(秦太子)의 아들 이인(異人)이 조(趙) 나라에 볼모잡혀 있을 때에 양적(陽翟)의 큰 장사치 여불위(呂不韋)가 동거하다가 이인에게 바쳐서 진시황을 낳게 했다는 여자.
[주D-024]부정공(富鄭公) : 성은 부(富), 이름은 필(弼), 자는 언국(彦國). 송(宋)의 명상(名相)으로서 영종(英宗) 때 정국공(鄭國公)에 봉해짐.
[주D-025]저수량(褚遂良) : 당(唐)의 명필. 해서와 예서에 특출하였고, 문사(文史)에도 두루 밝았다. 당시의 명필이었던 우세남(虞世南)이 죽자 태종은 함께 글씨를 이야기할 자가 없어 탄식하였는데, 마침 위징(魏徵)의 천거로 저수량을 얻었다.
[주D-026]오주(五柱) : 연(年)ㆍ월(月)ㆍ일(日)ㆍ시(時)의 사주(四柱)에 태월(胎月)을 더하여 오주(五柱)라 한다.
[주D-027]팥배나무엔 이미 소공의 덕화 없어졌는데 : 무왕(武王)의 동생인 석(奭). 희석이 감당(甘棠) 아래에 거주하며 남국(南國)에 교화를 밝혔다 한다. “우거진 감당을 꺾지 말고 베지 말라. 소백의 거처하던 곳이다[蔽芾甘棠 勿剪勿伐 召伯所茇]”는 등 시가(詩歌) 3장(章)이 전한다. 《詩經 召南》
[주D-028]당시에 큰 별이 떨어지지 않았던들 : 제갈량(諸葛亮)의 죽음을 비유한 것.
[주D-029]칭찬하였다 한다 : 《월정별집》 만록(漫錄)에는 다음 내용이 첨가되어 있다. 또 다음과 같은 산인에게 준 절구 한 수가 있다.
[주D-030]다섯 번 탕(湯)에게 나아갔다는 고사 : 은(殷) 나라 때 이윤(伊尹)은 다섯 번 탕왕(湯王)에게 나아가서 섬기고 다섯 번 걸왕(桀王)에게 나아가서 섬겼다 한다. 《孟子 告子》
[주D-031]이와 같았다 : 《월정별집》 만록에는 내용이 더 기록되어 있는데, 이해를 돕기 위해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악을 미워하는 마음이 부족함을 알 수 있다. 뒤에 한평원(韓平原)에게 아첨해 붙어서 좋은 벼슬자리를 엽취(獵取)하였다가, 한평원이 죽음을 당하자, 이벽은 그의 당으로 몰려 좌를 얻었으니, 부끄러운 일이다.”
[주D-032]《이력편람(履歷便覽)》 : 《월정별집》만록에는 《무진이력편람(戊辰履歷便覽)》으로 되어 있음.
[주D-033]손계고(孫繼皐)는 : 《월정별집》 만록에는 ‘내가 갑오년에 북경에 사신으로 갔을 적에[於余甲午祖京時]’라는 문구가 더 들어 있음.
[주D-034]계유 : 《월정별집》 만록에는, ‘만력 원년(萬曆元年)’이 ‘계유’ 앞에 첨가되어 있음. 만력 원년은 1573년임. ‘계유’ 뒤에는, ‘주청부사로 상사 청련 이후백과 함께[以奏請副使與上使李靑蓮後白]’라는 문구가 첨가되어 있음.
[주D-035]비슷하였다 : 《월정별집》 만록에는 소자(小字)로 다음과 같은 설명이 기록되어 있다. “의검은 곧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신광한(申光漢)의 사위이며, 심암(沈嵒)ㆍ심대(沈岱)의 아버지다.”
[주D-036]유숭(劉崇) : 북한(北漢)의 태조(太祖). 뒤에 이름을 민(旻)으로 고쳤다. 지원(知遠)과 동모제(同母弟). 젊어서 무뢰하여 자자형(刺字刑)을 받고 군졸이 되었다. 지원이 진(晉)에 벼슬하여, 숭을 도지휘사로 삼음. 은제(隱帝)가 시해되자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던 곽위(郭威)가 숭의 아들 빈(贇)을 세워 왕을 삼았다가 곧 죽였다. 숭은 드디어 태수(太守)에서 제위에 오르고 국호를 북한이라 하였으며, 이름을 민(旻)으로 고쳤다. 주(周)를 치다가 여러 번 패하였고, 주의 세종(世宗)이 즉위하자 고평(高平)에서 대패하고 분이 나서 죽었다. 재위 4년, 연호는 건우(乾祐)였다.
[주D-037]홍루 : 기생들이 노는 누각(樓閣)

 용재집 제8권
 동사록(東槎錄)
언겸의 ‘신안관에서 제석에 감회가 일어[新安館除夕感懷]’ 시에 차운하다.


그 누가 나를 위해 가는 세월 붙잡을꼬 / 何人爲我挽頹光
동이 술 놓고 머물러 이별의 회포 달랜다 / 尊酒留連慰別腸
한밤에 더욱 늙어 가는 것 어이 견딜거나 / 半夜那堪添潦倒
한 해 동안 속절없이 푸른 물가 저버렸네 / 一年空復負滄浪

덧없는 인생 얼마나 남았관데 늘 나그네 몸 / 浮生餘幾常爲客
봄 흥이 많지 않아서 그저 마음이 아파라 -이날이 입춘(立春)이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 春興無多只作傷
늙고 게을러 이젠 남 뒤처지는 게 좋아 / 老懶從今喜居後
도소주를 그대 먼저 마시도록 양보했다오 -이날 밤 운경(雲卿)은 조금 몸이 편찮아 연회에 끝까지 남아 있지 못하였고, 언겸은 미리 도소주(屠蘇酒)를 마셨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 屠蘇推子最先嘗


[주D-001]한밤에 …… 저버렸네 : 세월은 덧없이 흘러가는데 아직도 고향 정진(鼎津) 나루로 가서 은거하지 못하는 아쉬운 마음을 읊은 것이다.

용재집 제9권
 산문(散文)
의령현제명기(宜寧縣題名記) 현감(縣監) 김의종(金意從)을 대신해서 짓다.


현은 옛날 신라의 장함(獐含) 땅인데 언제 처음 생겼는지는 알 수가 없다. 경덕왕(景德王)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고, 그 후 이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그사이 변혁(變革)을 겪고 부속(附屬)이 바뀐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징험할 기록이 없다. 아, 고을의 건치(建置)와 연혁은 큰일임에도 오히려 징험할 수 없다니. 게다가 이 고을에 수령이 된 이는 혹 6년, 3년 또는 1, 2년 또는 1년도 못 채우고 임기를 마쳐서 마치 나그네가 여관에 잠시 머무는 것처럼 잠깐 사이에 훌쩍 떠나 버린다. 그리하여 옛사람은 멀어지고 새 사람은 또 옛사람이 되고 마니, 그 성명이 그대로 묻혀서 전해지지 않는 것이 괴이쩍을 것도 없다.
나는 불초한 몸으로 외람되이 수령의 직책을 맡았는데, 재주는 할계(割鷄)에 부끄럽고 직임은 제금(製錦)에 무거우니, 깊은 못가에 이른 듯 얇은 얼음을 밟는 듯하다는 비유로도 나의 두려운 마음을 형언할 수 없다. 날이 가고 또 날이 가서 임기가 차니, 어깨의 무거운 짐을 풀어놓게 된 것은 비록 나 자신으로서는 다행스럽다. 그러나 새 사람으로부터 옛사람이 되고 옛사람으로부터 멀어진 사람이 되니, 몸이 금석(金石)처럼 변치 않는 것이 아니거늘 서운한 마음이 없을 수 있으리요. 이에 생각해 보건대, 옛날에도 역시 이와 같아 세월이 얼마 지나지 않아 수령의 성명을 기억하지 못하여 늙은 아전이나 백성들조차도 죄다 알 수 없게 되었으니, 어찌 이 고을의 큰 흠이 아니리요. 이제 현의 옛 장부들을 모아서 박공 습(朴公習) 이하 53원(員)의 성명을 찾아 아래에 열거함과 아울러 그들의 임기 연월(年月)을 기록하고 건치한 것이 있으면 역시 썼다. 그리고 불초의 이름을 이어 적어서 감히 스스로 겸양하지 않은 것은, 이것이 이름을 적는 장부일 뿐이기 때문이지 감히 달리 의의(意義)를 둔 것은 아니다.
개벽(開闢)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땅이 있고 수령이 있은 지 몇 갑자(甲子)가 지났는지 모르지만, 기록에 보이는 것은 경오(庚午)를 두 차례 주행(周行)한 데 불과하고 이보다 이전의 것은 전해지지 않으니, 참으로 탄식할 만하다.
오호라, 사굴산(闍窟山)은 모습이 바뀌지 않고 정진(鼎津)은 물이 길이 흐르건만, 유유한 천고의 세월 동안 이곳을 거쳐간 사람이 그 몇이런고. 과거는 이미 지나갔지만 앞으로 훗날은 무궁하니, 계속하여 이름을 써서 실추함이 없기를 실로 훗날의 군자에게 바라노라.


[주D-001]할계(割鷄) : 닭을 잡는다는 말로, 작은 고을을 다스리는 것을 뜻한다. 공자의 제자 자유(子游)가 무성(武城)의 수령이 되어 예악(禮樂)으로 고을을 다스리는 것을 보고 공자가 “닭을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리요.[割鷄焉用牛刀]” 한 데서 유래하였다. 《論語 陽貨》
[주D-002]제금(製錦) : 비단을 마름질한다는 말로, 고을을 다스리는 것을 뜻한다. 정(鄭)나라 자피(子皮)가 나이 어린 윤향(尹向)을 시켜 읍(邑)을 다스리게 하려 하자, 자산(子産)이 이르기를 “그대에게 좋은 비단이 있다면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을 가지고 바느질하는 법을 배우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 데서 유래하였다. 《春秋左傳 襄公31年》

재조번방지 2(再造藩邦志 二)
재조번방지 2(再造藩邦志 二)


이때에 각 도의 군사들이 여기저기에서 벌떼처럼 일어났다. 경기도에서는 본도 감사인 심대(沈岱)ㆍ전 사간 우성전(禹性傳)ㆍ전 정언 정숙하(鄭淑夏)ㆍ수원인(水原人) 최흘(崔屹)ㆍ고양인(高陽人) 이노(李魯)와 이산휘(李山輝)ㆍ전 목사 남언경(南彦經)ㆍ유학 김탁(金琢)ㆍ충의위 이일(李軼)ㆍ서얼 홍계남(洪季男)ㆍ선비 왕옥(王玉) 등이, 충청도에서는 전 제독관 조헌(趙憲)ㆍ중 영규(靈圭)ㆍ전 청주 목사 김홍민(金弘敏)ㆍ서얼 이산겸(李山謙)ㆍ선비 박춘무(朴春茂)ㆍ충주인(忠州人) 조덕공(趙德恭)ㆍ충의위(忠義衛) 조웅(趙熊)ㆍ보령 현감(保寧縣監) 이의정(李義精)ㆍ해미 현감(海美縣監) 정명세(鄭名世)ㆍ옥천 군수(沃川郡守) 권희인(權希仁) 등이, 전라도에서는 전 판결사 김천일(金千鎰)ㆍ첨지(僉知) 고경명(高敬命)ㆍ전 영해 부사(寧海府使) 최경회(崔慶會)ㆍ절도사 최원(崔遠)ㆍ선비 양산숙(梁山璹)ㆍ광주 목사(光州牧使) 권율(權慄)ㆍ중 처영(處英)ㆍ좌수사 이순신(李舜臣)ㆍ우수사(右水使) 이억기(李億祺)ㆍ김제 군수(金堤郡守) 정담(鄭湛)ㆍ해남 현감(海南縣監) 변응정(邊應井) 등이, 경상도에서는 진보 현령(眞寶縣令) 임계영(任啓英)ㆍ현풍인(玄風人) 곽재우(郭再祐)ㆍ고령인(高靈人) 전 좌랑 김면(金沔)ㆍ합천인(陜川人) 전 장령 정인홍(鄭仁弘)ㆍ예안인(禮安人) 전 한림 김해(金垓)ㆍ교서관 정자 유종개(柳宗介)ㆍ초계(草溪) 선비 김대기(金大期)ㆍ군위(軍威) 교생 장사진(張士珍)ㆍ훈련원 봉사 권응수(權應銖)와 정대임(鄭大任)ㆍ본도 병사 박진(朴晋)ㆍ진주 판관 김시민(金時敏) 등이, 강원도에서는 조방장(助防將) 원호(元豪)ㆍ중 유정(惟政) 등이, 황해도에서는 제도초토사(諸道招討使) 이정암(李廷馣)ㆍ중화인(中和人) 김진수(金進壽)ㆍ황주인(黃州人) 황하수(黃河水)와 윤담(尹耼)ㆍ봉산인(鳳山人) 김만수(金萬銖)가, 평안도에서는 전 도사(都事) 조호익(曺好益)ㆍ종실 호성도정(湖城都正)ㆍ중 휴정(休靜) 등이 일어나서 혹은 의병이 되어 순절하고 혹은 고단한 군사로 적에게 대항하기도 하였다.
○ 심대(沈岱)는 본관은 청송(靑松), 자(字)는 공망(公望)인데, 사람됨이 강개하였다. 난리가 일어나자 항상 분히 여기며 사명을 띠고 출입함에 있어 평탄하고 험한 것을 피하지 아니하였다. 감사 권징(權徵)이 갈려가자 자청하여 대임이 되어, 순행할 때마다 먼저 공문을 평시와 같이 보내고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며 순행하여 조금도 적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다. 군사를 모아 스스로 영솔하고 서울을 수복하고자 전진한다고 외쳤다. 매일 사람을 성중에 보내어 군사를 모집해서 내응할 것을 약속하니, 성안 사람들이 난리가 평정된 뒤에 적에게 붙었다는 죄를 받을까 염려하여 연명으로 서장(書狀)을 만들어 심대의 군영 앞에 나아가 자진하여 안에서 내응하겠노라고 말하는 자가 하루에도 수백 수천 명이었다. 그들은 명목을, ‘약속을 듣기 위해서 왔다’ ‘군기를 수송한다’ ‘적의 정세를 보고한다’ 하고, 왕래가 줄을 이어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그러나 그 중에는 적군의 눈과 귀가 되어 우리의 동정을 살피는 자도 끼어 들었는데, 심대는 전혀 의심하지 않고 믿었었다. 하루는 삭녕군(朔寧郡)에서 군사를 점검하고 있는데 적이 이를 염탐하고 밤에 몰래 대탄(大灘)을 건너서 어둠을 타고 습격해 왔다. 심대가 놀라 일어나서 급히 피하였으나 적이 쫓아가 죽이었는데, 군관으로서 장(張)씨 성을 가진 사람이 심대를 몸으로 가리고 싸우다가 죽고 적은 이윽고 본진으로 돌아갔다. 경기 사람들이 그의 시체를 거두어 산속에 묻었는데, 뒤에 적이 심씨 집의 종으로 가장하고 머리를 풀고 곡을 하며 자기 주인 시체의 소재를 묻고 다니므로, 고을 사람들이 참으로 심씨 집 사람으로 여기고 무덤 있는 곳을 가르쳐 주었더니, 적이 무덤을 파내어 시체의 머리를 베어 종루 거리에 걸어 두었는데, 50~60일이 되어도 얼굴빛이 생시와 같았다. 서울 사람들이 그 충의를 슬퍼하여 서로 재물을 거두어 지키고 있는 왜인에게 뇌물을 주고 걸어놓은 머리를 빼내어 급히 강화도로 보냈다가 적이 물러간 뒤에 시체와 함께 고향의 산에 돌아와 장사를 지냈다. 조정에서는 벼슬을 추증하고, 아들 대복(大復)은 음직으로 현감에 이르렀다.
○ 이산휘(李山輝)는 재치있게 대응하는 지혜가 있어 계략을 써서 적을 많이 사로잡았다. 하루는 도성 안의 적이 도성 밖으로 흩어져 나와 약탈을 하였다. 정토사(淨土寺)는 성의 서쪽으로 20리 떨어져 있는데 4명의 적이 절에 들어왔다. 이산휘는 중들과 서로 이리이리 하자고 약속을 하니, 중들이 다 승낙하였다. 그래서 4명의 왜적을 맞이하여 흔연히 법당에 끌어들여 자리를 펴서 앉힌 다음 급히 밥을 지었다. 왜적들은 후히 대접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의심치 아니하였다. 밥이 다 되어 중은 밥상을 공손히 바치고 노승 한 사람이 주인 자리에 앉아 왜적에게 먹기를 권하고 식사가 끝난 다음에 더운 물을 가져오도록 불렀다. 이때에 다른 중들은 이미 물을 펄펄 끓여 기다리던 참이라 4명의 중이 큰 바가지에 가득 담아서 들어오니, 왜적이 각기 자기 밥주발을 가지고 쳐다보고 물을 받으려 하였다. 여러 중들이 일시에 끓인 물을 얼굴에 급히 쏟으니, 적은 모두 땅에 엎어졌다. 여러 중들이 나무 몽둥이로 때려 죽여 그 머리를 베고, 시체는 끌어다가 절 뒤에 묻었는데, 그 눈을 보니 눈알이 모두 익었다. 이것은 비록 작은 지혜이지만, 임기응변은 이와 같았다.
○ 홍계남(洪季男)은 가장 용감하고 싸움을 잘하였는데, 단기(單騎)로 만군(萬軍) 속으로 달려들어가 적의 목을 베기를 마치 공을 던지듯이 하니, 천안(天安)과 안성(安城)의 경내에는 적이 감히 들어가지를 못하였다.
○ 조헌(趙憲)은 일찍이 서울에서 옥천(沃川)으로 물러나와 있었는데, 매양 조정에서 자신의 책략을 써주지 않기 때문에 울분으로 병이 되어 미친 듯이 바보같기도 하였다. 하루는 속리산에 놀러 갔었는데, 자리에 누워 슬피 울며 아침에 밥상을 들여도 먹지 않으므로, 중이 이상하게 여겨 까닭을 물어도 대답을 아니하였다. 뒷날에야 중 현지(玄智)에게 말하기를,
“전에 밤에 별의 변괴가 매우 심하여 시사(時事)를 알 수 있으니, 어찌 슬프지 않으랴?”
하고서, 목놓아 통곡하니, 절의 중들이 모두 미치광이라고 생각하였다. 또 일찍이 대둔산(大芚山)에 놀러 갔었는데, 한 달 남짓 있으면서 독서는 일삼지 아니하고 매일 산골짜기에 가서 높이 올라 먼 곳을 바라보거나, 풀을 깔고 시냇가에 앉는 것이 일이었으니, 대개 마음속의 근심 걱정을 잊고자 한 것이요, 경치를 구경하며 날을 보내는 데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신이 떨어지면 자기 손으로 짚신을 삼아서 신고 중에게 빌리지 아니하였다. 보통 말을 하면서도 탄식하는 소리가 끊일 새 없었고, 밥상을 대할 적에도 때로는 수저를 내던지며 탄식을 마지 않으므로 중들은 그 뜻을 알아차리지를 못하였다. 하루는 중과 마주 앉아 식사를 하는데 조헌은 먼저 몇 숟가락을 뜬 다음 나머지를 네 사람 중에게 밀어주며 말하기를,
“명년에 반드시 왜란이 있어 내가 의병을 일으켜 근왕할 것이니, 오늘 이 밥을 같이 나누어 먹은 사람은 내가 기병하였다는 말을 들으면 곧 찾아와서 나와 죽음을 같이 하자.”
하니, 중들이 그 말을 이상하게 들으면서 거짓으로 그렇게 하겠노라고 승낙을 하였다. 그뒤 늘 기와와 돌을 밥광주리에 담아서 아내에게 날마다 산언덕을 오르내리게 하였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면,
“내가 이런 고생을 미리 익히려는 것은 나중에 피란을 하기 위해서이다.”
하였다.
신묘년(1591 선조 24) 가을 7월 7일에 조헌이 금산 군수(錦山郡守) 김현성(金玄成)을 찾아가서 영벽루(暎碧樓)에 올랐는데, 선비 박정로(朴廷老)가 그 자리에 있었다. 미시에서 신시 사이에, 홀연히 붉은 기운이 동방으로부터 일어나 세 갈래로 갈라져서, 한 줄기는 북쪽으로 향하여 하늘 끝까지 뻗치고, 한 줄기는 서쪽으로 향하여 길이가 하늘 반쯤에 달하고, 한 줄기는 남쪽으로 또 하늘 반쯤까지 뻗치었는데, 그 빛이 지상에까지 비치었다. 조헌이 살펴보고 이정로(李廷老)에게 말하기를,
“수길(秀吉)의 군사가 이미 움직이고 있으니, 명년 봄에는 반드시 이 붉은 기운처럼 대거 침략해 올 것이다. 나는 장차 모친을 모시고 공주(公州)로 피란할 터이니, 그대도 나를 따르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 해 3월에 조헌은 옥천(沃川)으로부터 김포에 있는 아버지의 무덤에 와서 성묘하고 제문을 지어 제사하면서, 난리로 영원히 이별하게 된다는 뜻을 고하였다. 친구들이 괴이하게 여기고 마음속으로 믿지 않았으나 시험 삼아 난리가 나면 피할 만한 곳이 어디냐고 물으니, 조헌은,
“강화도의 마니산에 들어가면 면하게 될 듯하다.”
하였다.
4월에 그의 아내가 죽어 장사를 지내려 할 적에 친척과 손님들이 다 모였는데, 홀연히 하늘에서 천둥처럼 요란스런 소리가 들렸다. 조헌이 크게 놀라며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는 천고(天鼓) 소리이다. 적이 반드시 바다를 건너올 것이니, 다시는 어쩔 수가 없다.”
하고 눈물을 계속 흘렸다.
이때에 이르러 호남ㆍ영남 지방에 격문을 내어 의병을 모집하니, 그의 문생인 전승업(全承業)ㆍ김절(金節) 등과 선비 장덕익(張德益)ㆍ신난수(申蘭秀)ㆍ고경우(高擎宇)ㆍ노응탁(盧應晫) 및 전 참봉(參奉) 이광륜(李光輪) 등이 조헌의 의리를 사모하여 다투어 모여들었다. 전에 대둔산(大芚山)에서 약속한 넷 중에 두 사람이 왔는데, 한 사람은 이미 죽었고 한 사람은 다리에 병이 나서 오지를 못하였다. 이에 좋은 달 좋은 날을 택하여 공주에서 군사 행동을 일으키니 정예 군사가 1천 6백이었다. 그때 왜적은 청주를 점거하고 방어사 이옥(李沃)의 군사는 무너졌다. 조헌이 정예부대를 이끌고 청주로 전진하여 곧장 성의 서문 밖을 공격하는데 승장(僧將) 영규(靈圭)와 합진하여 나갔다. 그래서 직접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종일 독전하니 적병이 크게 패하였다. 아군이 개미처럼 붙어 기어 올라가려는데 홀연히 한 줄기의 소나기가 서북쪽에서 몰려와 천지가 캄캄해지니 전사들이 추위에 떨었다. 조헌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옛 사람의 말에, ‘성패는 하늘에 달렸다.’ 하더니, 참으로 그렇구나.”
하고, 징을 울려, 조금 후퇴를 명하였다. 이날 밤에 한 여자가 적진에서 도망쳐 나와 말하기를,
“적병이 멀리 이쪽 군대의 위용을 바라보고서 모두 실색(失色)이 되어 ‘저 의병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앞으로 달려들며 꺾일 기세는 조금도 없으니 저들과 싸울 수가 없다.’ 하고, 곧 불을 피우고 깃발을 세워 군사가 지키는 것처럼 해놓고 쌓인 시체를 다 불태우고 병영을 비우고 밤에 도망하였습니다.”
하였다. 그래서 조헌 등이 진격하여 머무르고 방어사에게 청하여 미곡 수만 석을 곤궁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고 소와 말 수백 마리를 각 마을에 나누어 주어 농사를 짓게 하자고 하였으나, 이옥(李沃)이 듣지 아니하고 하는 말이,
“이미 순찰사와 의논하여 결정하였으니 이것을 남겨두었다가 적이 다시 점거할 때 쓰게 해서는 아니 된다.”
하고, 곡식을 다 태우고 가버리니, 군중에는 다만 현미 몇 곡(斛)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어찌할 계책이 없어 드디어 군사들에게 각각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추위를 막을 차비를 차리도록 하고, 결심하고 근왕하러 서쪽으로 떠났다. 온양에 이르렀을 때 금산의 왜적이 다시 기승을 부린다는 소식이 들리고, 또 순찰사와 사환이 와서 조헌에게 말하기를,
“국토가 모두 적의 수중에 떨어졌는데 오직 호서와 호남만이 병화에 빠지지 않았으니, 생각하건대, 하늘이 은밀히 그대를 도와 중흥을 이룩하고자 함이 아니겠는가?”
하니, 조헌은 자못 그렇게 여기고 공주에 돌아가 순찰사와 만났으나 의논이 또 맞지 아니하여 마음이 매우 괴로웠다. 순찰사는 다시 각 고을에 공문을 보내어,
“관군(官軍)으로서 제 마음대로 의병의 진에 참가하는 자는 처벌할 것이니, 각기 원대에 복귀하라.”
하니, 조헌의 막하에 있던 관군들이 모두 흩어지고 오직 7백 의사(義士)만이 종군을 희망하였다. 조헌이 이에 군대를 이동하여 금산(錦山)으로 향하는데, 장사(將士) 한 사람이 강력히 주장하기를,
“적이 을묘년 호남의 패전에 징계되었기 때문에 지금 금산을 점거하고 있는 자들은 모두 정예한 군졸인데다가 그 숫자가 수만이 넘는데, 어찌 우리같은 오합지졸로 당해낼 수가 있겠습니까? 마땅히 군사를 멈추고 형세를 관찰하면서 조정의 명령을 기다림이 옳겠습니다.”
하니, 조헌이 울면서 말하기를,
“군부(君父)가 지금 어디 계시는데, 감히 군사의 날래고 무딘 것을 따지겠는가. 군주가 욕을 당하면 신하가 죽는 것은 고금을 통해서 당연한 일이다. 나는 한번 죽는 것만 알뿐이다.”
하고, 드디어 의승(義僧) 영규(靈圭)와 연합하여 진격하였다. 또 전라 의병장 권율과 서로 날짜를 약속하고 적을 협공하기로 하였었는데, 권율이 편지를 보내어 기일을 변경하였으나 그 편지가 도착하기 전에 조헌은 이미 금산 성 밖 10리 떨어진 곳에 이르러 권율의 군사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적이 이 사실을 염탐해서 알고 몰래 군사를 출동시켜 아군이 진을 치기 전에 군대를 셋으로 나누어 교대로 육박하여 왔다. 조헌은 군중에 영(令)을 내리기를,
“오늘은 오직 한 번 죽음이 있을 뿐이니, 죽고 살고 나아가고 물러감에 있어 의(義)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라.”
하니, 사졸들이 모두 명령에 복종할 뿐 아무도 감히 어기지를 못하였다. 오래도록 힘껏 싸웠는데, 적은 세 번이나 패하였다가 다시 합치고 아군의 화살이 다하자 적은 장막 안으로 몰려 들어왔다. 막하의 사졸 한 사람이 조헌을 붙들고 피하기를 청하니, 조헌이 웃으며 말하기를,
“장부가 죽을지언정 난리를 당하여 구차히 피할 수 없다.”
하고, 북채를 끌어잡고 더욱 급히 독전하니, 병사들은 모두 앞으로 달려가 맨주먹으로 서로 치면서도 오히려 열(列)을 떠나지 않고 마침내 조헌과 함께 전사하였다. 조헌의 아우 조범(趙範)이 죽음을 무릅쓰고 적중에 들어가 조헌의 시체를 찾아서 업고 옥천(沃川)으로 들어가서 나흘만에 염하였는데, 안색이 산 사람과 같고 노한 기운이 발발하여 눈을 부릅뜨고 수염이 꼿꼿이 섰으므로 그가 죽은 지 오래된 것을 사람들이 알지 못하였다.
○ 청주가 수복되기 전에 조정에서는 조헌이 기병(起兵)한 것을 듣고 다음과 같이 교서를 내려 선유하였다.
내가 밝지 못하여 물정을 살피지 못하고 충언을 알지 못하였도다. 나에게 진언(進言)하는 자들 중에 국가의 위망이 조석간에 달렸다고 하는 자가 있었는데, 내가 비록 그 말을 옳게 여기면서도 실로 깨닫지 못하였도다. 이제 우려할 것은 인심이 흩어지는 것인데, 다만 도적이나 외적만을 걱정하여, 성과 해자가 높고 깊으며 갑옷과 병장기가 튼튼하고 날카로우면 백성을 보위하고 국가를 편안히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민력(民力)을 다하여 이것만을 도모하였도다. 애써서 이룩한 성지와 갑병이 모두 적의 밑천이 되고 백성의 원망만 나에게 돌아올 줄을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느냐. 종묘사직은 폐허가 되고 생령(生靈)은 다 죽었는데도 막아내지 못하였으니, 그 허물은 오로지 나에게 있도다. 오늘날 비록 천백 가지의 어려움을 겪을지라도 내 죄로 인정하고 감히 고통을 말할 수 없게 되었으니, 내 마음은 슬프도다. 다행히 천지 조종(天地祖宗)의 혼령에 힘입어 인심은 조국을 사모하고 백성은 나를 버리지 않아, 여러 곳의 충의들이 곳곳에서 적을 토벌하는데 너의 이름이 또한 그 중에 있으니, 내 심히 가상히 여기도다. 너에게 이미 봉상시 첨정을 제수하였는데 너는 알았느냐? 나의 쓰라린 마음은 전후에 내린 교서에 다 말하였거니와, 너는 나의 개과(改過)할 것을 인정하고 힘써 충의를 떨쳐 구물(舊物)을 회복하는 일에 힘쓰라. 요즘 오래 호중(湖中)의 소식을 듣지 못하니 마음이 답답하여 돌아가는 사신편에 나의 뜻을 알리고 아울러 본도의 적세(賊勢)는 어떠하며, 유진한 곳은 몇이고, 그 무리는 몇만이며, 그 기세가 전일에 비하여 어떠한지, 너와 같이 도적을 잡으려고 의병을 일으킨 자는 또 누구이며, 적의 목을 벤 전과는 얼마인지 탐지하기를 명하노라. 근래에 명 나라 군사가 강을 건너 바야흐로 적을 물리칠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가을날은 맑고 길은 건조하니 이때야말로 오랑캐를 사로잡을 때이며, 말은 살찌고 활은 굳세니 실로 적을 죽이기에 알맞은 때이로다. 철마(鐵馬)는 대정(大定)ㆍ청천(晴川)에 뻗치었고, 군함은 산동과 강절(江浙)에 줄지었으니, 죄악을 쌓아온 미친 오랑캐에게는 천벌이 마땅히 내려질 것이다. 경성과 황해도에 우리 의병 또한 많은데 계속 적을 베고 승전한 소식이 끊이지 않으며 인심이 분발하니, 이는 실로 국가 재건의 좋은 기회이로다. 너는 더욱 충성을 다하여 앞으로 나아감에 게을리 하지 말고, 인(仁)으로써 군사를 어루만지고 의(義)로써 용맹을 돋우어 기회를 보아 나아가서 만전을 기한다면 그 거룩한 일이 아니겠느냐. 본도의 전몰한 장지현(張智賢) 등 이하와 일신을 돌보지 않고 적을 토벌한 승려 처일(處一)ㆍ정억만(鄭億萬) 같은 무리에게는 이미 은상(恩賞)을 내리도록 하였으니, 너는 나의 이러한 뜻으로 그들에게 간절히 위로하라. 기묘한 계책을 많이 써서 후미를 공격하기도 하고 밤에 무찌르기도 하여, 돌아가지 못하도록 하라. 일로(一路)를 먼저 말끔히 숙청하고 와서 남군(南軍)을 도와 도성(都城)을 수복하여, 원릉(園陵)의 송백(松柏)이 뽑히지 않고, 도망간 노약자가 죽지 않게 된다면 오늘날의 으뜸되는 공로는 네가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상과 관직이 나의 손에 달렸으니 산하를 두고 맹세하노라. 파천한 지 오래이나 극복할 길이 끝이 없으니, 성천(成川)의 서리와 이슬에는 종묘사직의 나부끼어 떨어짐을 민망히 여기고, 의주의 강과 늪에서는 장전(帳殿)의 쓸쓸함을 부치는도다. 고향을 생각하는 데는 귀천이 다를 것이 없으니, 돌아가고자 하는 생각이 마음속에 간절하도다. 너희들이 와서 내 수레를 맞이할 날을 발돋움하여 고대하노라. 말을 마치려 하니 눈물이 앞을 가리는구나. 네가 마땅히 생각할 것이지만 지극히 슬프도다. 아! 부끄럽게도 묘당에서는 계책이 없으니 성사는 너희들의 힘에 기대하는 바이며, 어지러운 때에 충신을 알 수 있으니 공은 오늘날에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이에 교시하니 자세히 짐작할 것으로 믿는다.
교서가 이르기 전에 조헌은 이미 죽었다. 조정에서 듣고 탄식하고 슬퍼하여 가선대부 이조참판 동지경연 의금부 춘추관사를 추증하여 포장(褒獎)하였다. 그의 친구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 정철(鄭澈)이 제문을 지어 곡하였다.
나의 벗 여식(汝式 조헌의 자)은 공자(孔子)와 안자(顔子)를 배우고 가의(賈誼)와 굴원(屈原)을 사모하여, 곧음에 죽고자 하더니 마침내 절의에 죽었구나. 슬프다, 여식(汝式)이여!
이 싸움에서 조헌(趙憲)의 아들 조완기(趙完基)는 체격과 용모가 웅장하고 성품과 도량이 남보다 뛰어났는데, 전쟁에 패하게 되자 일부러 의관을 화려하게 입었으니 아버지를 대신하여 죽고자 한 것이다. 이에 적이 그를 주장(主將)으로 알고 그 시체를 찢었다.
○ 승장(僧將) 영규(靈圭)는 용력(勇力)이 있어 잘 싸웠는데 적을 만나면 먼저 나가 싸우니, 적은 모두 우수수 쓰러졌다. 조헌이 죽게 되었을 때 적의 포위를 뚫고 들어갔으나 조헌을 찾지 못하고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 이광륜(李光輪)은 자는 중임(仲任)인데, 천성이 효도하고 우애하며 강개하고 큰 뜻이 있었다. 수백의 무리를 이끌고 조헌의 의거를 성실하게 도우다가 마침내 함께 전사하였다. 우리 조정에서는 사헌부 집의를 추증하였다.
○ 봉사 임정식(任廷式)은 천성이 소박하고 정직하며, 활쏘고 말달리는 재주가 있었다. 그는 척후병으로 밖에 나가 있다가 사태가 급한 것을 바라보고서 말을 채찍질하여 돌진해서 많은 왜병을 쳐 죽이고 전사하였다.
○ 선비 김절(金節)은 맨 먼저 조헌에게 종군하여 전공이 많았다.
○ 이려(李勵)는 고 영의정 이탁(李鐸)의 손자인데, 학문이 밝고 행실이 돈독했다. 조헌이 기병하였다는 말을 듣고 의병에 가담하였다. 또 만호 변계(邊繼)ㆍ온양 현감(溫陽縣監) 양응춘(楊應春)ㆍ봉사 곽자하(郭自河)ㆍ무인 김헌(金獻)ㆍ강인서(姜仁恕)ㆍ박봉서(朴鳳瑞)ㆍ김희철(金希哲)ㆍ정원복(鄭元福)ㆍ이인현(李仁賢)ㆍ이양원(李養元)ㆍ김인남(金仁男)ㆍ황삼양(黃三讓)ㆍ박춘년(朴春年)ㆍ한기(韓琦)ㆍ박찬(朴贊) 등은 모두 막하의 비장(裨將)으로서 먼저 나가 견고한 적진을 꺾기도 하고 혹은 용기와 충의를 떨치기도 하였다. 또 선비 박세진(朴世珍)ㆍ김선후(金善後)ㆍ박응길(朴應吉)ㆍ신경일(申慶一)ㆍ서응시(徐應時)ㆍ윤여익(尹汝翼)ㆍ박혼(朴渾)ㆍ조경남(趙慶男)ㆍ김충남(金忠男)ㆍ고명원(高明遠)ㆍ강몽조(姜夢祖) 등은 혹은 글로 혹은 행동으로 모두 조헌의 막하에서 같이 일을 하다가 이때에 와서 함께 죽었다. 뒤에 문인인 박정량(朴廷亮)ㆍ김승절(金承節)이 의사들의 뼈를 한곳에 모아 무덤을 만들고 의총(義塚)이라 불렀다. 장계곡(張谿谷 장유(張維)의 호)이 순의비(殉義碑)에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원한은 가을 하늘 속에 배어 답답함을 펴지 못하는데 / 恨入秋陰鬱不開
충사는 자취 없고 누런 먼지만 자욱하네 / 蟲沙無跡但黃埃
위급해서야 충언이 맞음을 알겠으며 / 時危始覺忠言驗
싸움은 패했어도 오히려 적세만은 꺾었도다 / 兵敗猶令虜勢摧
청산에 한 조각 비석만이 남아 / 一片靑山留琬琰
천년의 매운 절개 벽력을 울리는 듯 / 千年烈氣挾風雷
양공의 타루비를 논할 것이 무어랴 / 何論墮淚羊公石
길이 영웅들 슬픔 가누지 못하리라 / 長有英雄不盡哀
○ 조웅(趙熊)은 또한 용감한 선비였는데 말 위에 선 채로 창을 들고 달릴 수 있었다. 5백 명의 의병을 모아 충주에서 일어나 수없이 적을 죽이었다. 하루는 조웅이 깊은 안개 속에서 행군하는데 적이 방비가 없음을 틈타서 뒤를 엄습하였다. 조웅이 포위를 뚫고 나오다가 탄환에 맞아 말에서 떨어져 적에게 사로잡혔다. 적이 그의 수족을 잘랐으되 끊임없이 꾸짖으니 사지를 찢어 죽였다.
○ 김천일(金千鎰)은 자는 사중(士重)이요 그 조상은 광주인(光州人)이었는데, 그의 조부 때부터 나주(羅州)에 이사하여 와서 살았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가난하게 살다가 일재(一齋) 이항(李恒)의 문하에 출입하였는데, 독실한 뜻으로 힘껏 행하여 언제나 성현을 법도로 삼았다. 유일(遺逸)로서 천거되어 내ㆍ외직을 거쳤는데, 모두 직무를 잘 수행하였다. 대관(臺官)이 되어서는 자신을 돌보지 않는 말과 직간을 하였다. 용모는 보잘것 없고 키는 작아서 마치 입은 옷을 감당하지 못할 것처럼 보였으나 의로운 일에 당하여 용감함에 있어서는 비록 맹분(孟賁)과 하육(夏育)일지라도 꺾을 수 없었으니 충의로운 성품은 타고난 것이었다. 전직 부사로서 나주의 시골집에 은퇴하여 살았는데, 서울을 지키지 못하였다는 말을 듣고 목놓아 통곡하여 거의 기절하다가 다시 분연히 말하기를,
“내가 울기만 하면 무엇하겠는가? 나라에 환란이 있어 임금께서 파천하였는데, 나는 세신(世臣)으로서 어찌 새나 짐승처럼 도망하여 살기를 원해서야 되겠는가. 내 의거를 하여 전쟁에 나갔다가 강약(强弱)이 달라 대적할 수 없으면 죽음이 있을 따름이다. 이것이 나의 보답하는 길이다.”
하고는 글로써 고경명(高敬命)ㆍ박광옥(朴光玉)ㆍ최경회(崔慶會)ㆍ정담(鄭湛) 등에게 전란에 종사할 뜻을 전하니, 고경명(高敬命) 역시 그의 두 아들 고종후(高從厚)와 고용후(高用厚) 및 전 학유(學諭) 유팽로(柳彭老)ㆍ선비 안영(安瑛) 등을 거느리고 담양부(潭陽府)로 와서 모였고, 의사(義士) 송제민(宋濟民)ㆍ양산룡(梁山龍)ㆍ양산숙(梁山璹)ㆍ임권(林權)ㆍ이광주(李光宙)ㆍ서정후(徐廷厚) 등도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6월 3일에 피를 입에 바르고 여러 사람들과 맹세를 하였다. 김천일(金千鎰)이 평소에 몸이 약하고 병들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서 흔연히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오늘 내가 칼을 차고 말을 타니 거뜬하여서 날 것같다.”
하고, 이에 최경회(崔慶會) 등과 먼저 본군(本郡)의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향하였다.
○ 최경회(崔慶會)는 자는 우선(遇善)인데, 능성현(綾城縣)에 우거하고 있었다. 마침 모친상을 당하여 여막살이하며 예서(禮書)를 읽다가 김천일(金千鎰)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말을 듣고 바로 뛰어들어가 일을 같이 하였다.
○ 고경명(高敬命)은 자는 이순(而順)이요, 광주인(光州人)이다. 문장에 능하고 뛰어난 재주가 있었는데 애매한 죄로 시골에서 나오지 않고 거주하고 있었다. 적병이 경내에 침입하여 우리 군사는 무너지고, 또 임금의 행차가 서쪽으로 파천하여 서울이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 밤낮으로 목놓아 통곡하였다. 이광(李洸)의 군사가 금산에 이르러서 해산하고 돌아가자 글을 보내어 준절하게 책망하였다. 이때에 와서 김천일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격문(檄文)을 여러 도(道)에 전달하고 잇달아 출병하였는데, 그 격문은 다음과 같다.
전라도 의병장 절충장군 행부호군 지제교 고경명(高敬命)은 여러 도의 수재(守宰) 및 사민(士民)과 군인 등에게 삼가 급히 고하노라. 요사이 나라 운수가 중도에 비색(否塞 꽉 막혔다는 뜻)하여 섬 오랑캐가 밖에서 으르렁거리도다. 처음에는 역적 양(亮)이 맹약 어기는 것을 본뜨더니, 나중에는 춘추 때에 구오(句吳)가 주(周) 나라를 갉아먹던 짓을 함부로 하는도다. 우리의 경계가 소홀한 틈을 타서 허술한 데를 무찔러 쳐들어와서, 하늘도 속일 수 있다 하고 거침없이 북상하는도다. 장수들은 기로에서 배회하고 고을 수령들은 산골로 도망해 숨는도다. 임금과 어버이를 도적에게 버리고 있으니 어찌 차마 할 일이며, 임금으로 하여금 사직을 걱정하게 하는 것이 그대들에게 편안하겠는가. 백년 동안 길러놓은 백성으로서 어찌 한 명의 의기로운 남자가 없단 말인가. 외로운 군사로 깊숙이 들어왔으니 여진(女眞)의 본래 병법을 모르기 때문이요, 중행열(中行說)을 매질하지 못한 것은 한(漢) 나라가 대책이 없었기 때문이로다. 장강(長江)이 갑자기 천참(天塹)의 가치를 잃게 되니 오랑캐의 말굽이 이미 수도에 육박하였도다. 남조(南朝)에 사람이 없다는 비웃음은 참으로 통탄할 일이며, 북군(北軍)이 날아서 건넜다는 말이 불행히도 오늘과 비슷하도다. 우리 임금께서 태왕(太王)이 빈(邠)을 떠나던[去邠]심정으로, 명황(明皇)이 서촉(西蜀)으로 피난하듯하셨으니, 이 일은 종묘사직을 위한 지극한 계책에서 나온 것이므로 지방을 순회하는 것같은 잠깐의 노고쯤이야 꺼릴 것이 있으랴. 공락(鞏洛)의 풍진(風塵)에 놀란 왕의 얼굴에는 여러번 깊은 근심이 나타나고, 민산(岷山)과 아미산(峨眉山)의 험한 사닥다리 길에 취화(翠華 일산)가 먼길을 달리던 당 명황의 일과도 같도다. 하늘이 이성(李晟)같은 원로(元老)를 낳음은 난리를 숙청하는 일을 맡기고자 함이요, 조서를 육지(陸贄)가 기초(起草)하였듯이 애통하는 글이 또한 조정에서 내리었도다. 무릇 혈기(血氣) 있고 생명이 붙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인들 분통하여 죽고자 하지 않겠는가. 어째서 계획이 잘못되어 나라의 일이 이다지 어렵게 되었는가? 봉천(奉天)으로 피란 갔던 행차는 돌아오지 못하였는데, 상주(相州)에서 싸우던 송(宋) 나라 군사처럼 우리의 군사는 이미 무너졌도다. 저 오랑캐들이 벌떼처럼 독을 뽑는데, 이 악당들을 아직 잡아 죽이지 못하고 있도다. 적이 성안에서 숨을 붙이고 있으니 불붙은 장막 위에서 날고 있는 제비와 다를 것이 없고, 서울 지방을 점거하고 있으니 우리 안에서 날뛰는 원숭이와 같도다. 비록 명 나라 군사가 소탕할 날이 있을 것이나, 흉악한 무리가 당장 흩어져 달아남을 기대하기는 어렵도다. 고경명(高敬命)은 일편 단심의 만절(晩節)뿐이요, 흰 머리의 썩은 선비로다. 밤중에 닭소리를 들으니 국가의 고난함을 견딜 수 없어서, 중류(中流)에서 돛대를 치며 외로운 충성을 다짐하노라. 오직 개와 말이 주인을 생각하는 마음을 가졌을 뿐이요, 모기가 산을 지는 미약한 힘을 따질 겨를이 없도다. 이에 드디어 의병을 규합하여 바로 서울로 향할 것이니, 소매를 떨치고 장단(將壇)에 올라 눈물을 뿌리며 여러 동지들에게 맹세하노라. 범을 치고 곰을 잡는 장사들은 우뢰같이 올라타고 바람같이 달려오며, 뛰어 올라타고 관문(關門)을 뛰어넘는 무리들은 구름같이 합하고 비오듯이 모이니, 협박을 당하여 호응하였거나 강제로 붙들려 온 것이 아니로다. 오직 신자(臣子)로서의 충의심이 다 같이 지성에서 나온 것이니, 국가의 존망이 달린 위급한 때에 어찌 감히 작은 제몸을 아낄 수 있으랴? 이름은 의병이라 하였으니 처음부터 어떤 직분에 매인 것이 아니요, 군사란 곧음으로써 씩씩한 것이니 강하고 약한 것은 논할 것이 아니로다. 여러 인사들이 의논하지 않고도 말이 같으며, 원근의 지방에서 소문만 듣고도 다같이 일어나는 형편이니 각 군의 수령들과 각지의 인사들은 충심이 어찌 임금을 잊을 것이며, 의리로써 마땅히 나라를 위해 죽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혹은 병기로 돕고, 혹은 군량으로 도우며, 혹은 말을 달려 진두에 앞장서고 혹은 쟁기를 놓고 논두렁에서 일어나서라. 힘이 미칠 수 있는 데까지는 오직 의(義)의 길로 나아갈 뿐이니, 임금을 위해 난리를 막을 자 있다면 나는 그와 더불어 함께 일어날 것을 맹세하노라. 생각하니 행궁(行宮)이 아득하다, 서토(西土)여! 그곳 풍속의 아름다움은 멀리 기자(箕子) 때부터 비롯되었고, 군사가 강하여 일찍이 수(隋)와 당(唐)의 백만 대군을 꺾었도다. 조정의 계획이 장차 정해질 것이니 국가가 어찌 한 구석에서만 있을 수 있겠는가. 패배해도 잘만 하면 망하지 않으니, 복덕성(福德星)이 바야흐로 오(吳) 나라 분야에 임했고, 깊은 근심에서 운수가 열리나니 사람들이 노래하며 한(漢) 나라를 더욱 생각하도다. 여러 호걸들이 시국을 바로잡으니 신정(新亭)에서 마주보고 울던 일은 없을 것이며, 백성들이 임금을 기다리니 서울로 돌아오는 임금 행차를 보게 되리로다. 마땅히 힘을 내어 앞장서기를 바라면서 마음을 터놓고 간절히 고하노라.
격문(檄文)이 이르는 곳마다 사대부들이 감격하여 울면서 분연히 궐기하였다. 고경명(高敬命)이 또 조정에 글을 올려 이광(李洸)의 죄를 따지고, 여러 고을 수령들과 더불어 의병을 거느리고 김천일(金千鎰)의 뒤를 이어 출동하면서 개연히 장단(將壇)에 올라 늙고 병든 것을 사양치 않으니, 응모하는 자가 날로 모여들었다.
고경명(高敬命)이 집에 있을 때, 천문(天文)을 관찰하고 집안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금년에는 장성(將星)이 불길하니 장수는 반드시 불길할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내가 금년에 반드시 횡액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서는 사위 박숙(朴橚)에게 편지를 보내어 가족의 일을 부탁하고 전주에서부터 북으로 향하여 길을 떠났다.
그때에 의병이 모두 전라도와 충청도의 경계에 모였는데 여러 도의 군사가 모두 무너졌다는 소문을 듣고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김천일이 의병들에게 타이르기를,
“우리 군사는 의거한 것이니, 전진만이 있고 후퇴는 없다. 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마음대로 가라.”
하니, 모두가 감격하고 분발하여 아무도 몰래 도망하지 아니하고 흩어졌던 군사들도 점점 돌아왔다.
호서(湖西)에 당도했을 적에는 군사가 수천을 헤아렸다. 드디어 진군하여 수원에 둔(屯)을 치니 군세가 크게 떨치었다. 이에 장사들을 모아 이따금 출격하여 전과가 있었으며, 또 금령(金嶺)의 적을 습격하여 물리치고, 막하의 선비 양산숙(梁山璹) 등을 보내어 상소를 받들고 샛길로 행재소에 가게 하였다.
양산숙(梁山璹)은 자는 회원(會元)인데, 기묘 명현 홍문관 교리 양팽손(梁彭孫)의 손자요, 부윤 양응정(梁應鼎)의 셋째 아들이다. 일찍이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문하에 출입하였는데, 시사(時事)가 날로 그릇됨을 보고 과거에 뜻을 버리고 나주(羅州) 삼향리(三鄕里)에 은거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수백 명의 의병을 모아 김천일(金千鎰)의 막하에 모였다. 이때에 지방의 장수들이 매양 의병의 활동을 저지하려 들고 적은 더욱 성하게 몰려들자 김천일은 보좌관들과 상의하여 강화(江華)로 들어갔다. 마침 전라 병사 최원(崔遠)도 본도의 군사 수만 명을 이끌고 중로(中路)에 이르렀는데, 군의 정세가 갑자기 크게 변하여 하루에 50명을 참수(斬首)하여 필사의 뜻을 보여도 오히려 중지시키지를 못하니 김천일(金千鎰)과 합군(合軍)하여 강화도에 들어가서 사졸로 하여금 건너가지 못하게 하고 해를 넘겨 애써 지키니, 굶어 죽는 자가 속출하였으나 그 뜻은 끝까지 변하지 않았다. 신하로서 절개를 잃지 않은 사람은 오직 최원(崔遠)뿐이었다.
조정에서는 김천일(金千鎰)이 먼저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창의사(倡義使)라는 호를 내려 가상히 여겼다. 도망을 갔던 관리들도 김천일이 왔다는 말을 듣고 점점 모여들었으며, 경기의 백성들은 있는 곳마다 단결하여 모두 의병이라 칭하고 호응하였다. 김천일은 이에 군과 약속하고 강변에 목책을 만들어 세우고 전수(戰守)의 차비를 하였다. 이때에 왜적은 경성을 점거한 지 이미 오래이므로, 백성들이 피란을 했다가 서울에 많이 돌아와서 적과 섞여 살고 있었다. 김천일은 이에 결사대를 모집하여 성중에 잠입하여 순역(順逆)과 이해를 들어 효유하니, 사람들이 감동하고 기뻐하여 김천일에게 경비(經費)를 보내는 자가 수만이었고, 혹은 몰래 적을 죽여서 그 목을 바치기도 하며 자진하여 돌아오는 자가 또한 하루도 수백 명이나 되었고, 임시 막사가 사방에 널려 있었다. 김천일이 때때로 출병하여 공격하니 강의 연안에 주둔하고 있던 적병이 잇달아 도망하였다. 김천일은 제장(諸將)을 거느리고 전선 4백 척으로 강을 거슬러 직상하여 양화도(楊花渡) 나루에서 북을 치면서 군사의 위세를 보이며 수길(秀吉)의 죄상을 들어 강위에 방을 써서 걸고 성안의 도적에게 도전하였으나, 적은 끝내 발동하지 않았다. 이를 증명하는 시가 있다.
열렬하다 창의공이여 / 烈烈倡義公
충분이 흰 태양을 꿰었도다 / 忠憤貫白日
여러 군졸을 규합하여 / 糾合百千卒
범과 이리의 소굴로 내달았도다 / 直趨虎豺窟
험준한 곳에 의거하니 천연의 요새요 / 據險天塹在
목책을 가설하니 용맹한 군사가 들어섰도다 / 設柵豼貅列
적장들이 서로 혀를 깨물면서 / 衆酋爭咋舌
화살 하나 감히 쏘지 못하도다 / 一矢不敢發
그때에 고경명(高敬命)의 군사는 여산(礪山)에 머물렀는데, 장차 이산(尼山)으로 향하려던 차에 조령의 적이 나뉘어 황간(黃澗)으로 향하여 금산(錦山)으로 넘어와서 군수가 전사하였으며 적세가 창궐하다는 소문을 듣고, 휘하의 사병들이 돌아가 본도를 구원하기를 청하였다. 고경명 역시 그렇게 여기고 드디어 진산(珍山)으로 병사를 옮겨 금산의 왜적을 치려 하였다.
이때에 정예 군사가 많이 응모하여 군사의 성세는 더욱 떨치었다. 전 학유(學諭) 유팽로(柳彭老)가 고경명(高敬命)에게 말하기를,
“금산에 있는 적은 그 수가 수만(數萬)인데 우리 군사들은 제대로 훈련을 받지 못하였으니 결코 막아내기 어려울 것입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제군(諸軍)과 함께 힘을 합해 험준한 곳에 의지해 분산해 있다가 적이 교만하고 게을러지면 정예한 군사를 뽑아 사면에서 공격함이 옳을 듯합니다.” 하였다. 유팽로(柳彭老)는 한쪽 눈이 멀었고 용모가 잘 생기지 못하여 막하의 군사가 모두 업신여겨 끝내 그의 계책은 쓰이지 아니하였다.
○ 유팽로는 자는 군수(君壽)인데, 옥과현(玉果縣) 사람으로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럽고 문과에 오른 지 수년이었으나 벼슬에 나아갈 생각을 아니하였다. 사람들이 벼슬하기를 권유하면,
“내가 벼슬을 하고자 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억지로 이룰 수는 없는 것이다. 파리나 개처럼 작은 이익에 악착스레 구는 것은 나의 본심이 아니다.”
하였다. 세리(勢利)에 담박하기가 이와 같았기 때문에 세상 사람이 그의 어진 것을 모르고 홀대하였다. 완산(完山 전주)의 형세가 날로 위급하자 군사들이 모두 가서 구하고자 하므로 고경명은 부득이 군사를 나누어 금산(錦山)으로 향하였다. 그래서 방어사 곽영(郭嶸)과 언약하고 좌우익(左右翼)이 되어서 정예한 기병(騎兵) 수백을 내어 적의 소굴을 바로 공격하였으나 불리하여 후퇴하게 되었다. 고경명이 북을 울려 독전하니 모두가 죽음을 무릅쓰고 다투어 앞장서서 적을 토성 안으로 몰아넣고 성밖의 집들을 전부 불지르고, 또 진천뢰(震天雷)를 쏘아서 성안의 가옥들도 불태우니 성세가 매우 웅장하였는데, 적에게 사로잡힌 부녀자들이 힘껏 물을 길어 불을 끄고 적은 죽음을 무릅쓰고 돌출해 나왔으나 의병이 사면으로 에워싸고 공격하여, 적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감히 나오지를 못하였다. 그때 마침 해는 저물고 관군이 또 싸움을 도와주지 아니하고 성은 단단하여 갑자기 함락시킬 수 없으므로 군사를 물려 본진으로 돌아왔다. 이날 밤에 방어사가 사람을 보내서 다음날 합세하여 싸우기를 약속하였다. 고경명의 장자(長子) 종후(從厚)가 고경명에게 말하기를,
“아군이 승리하였으니, 이 승세를 지니고 군사를 완전히 후퇴시켰다가 기회를 보아 다시 나와 공격함이 옳겠습니다. 만약 많은 적과 대치하면서 들에 묵으면 밤에 습격을 받을 우려가 있습니다.”
하니, 고경명은 말하기를,
“네가 부자(父子)의 정으로 나를 걱정하느냐. 나는 싸워 죽을 따름이다.”
하자 종후(從厚)는 다시 말을 못하고 물러갔다. 방어사는 싸우지 않은 여러 장수들에게 벌을 내리고 다음날 다시 싸우도록 하였다. 이날 밤에 적이 과연 야간기습을 모의하였는데, 염탐하던 의병이 갑자기 냇가에서 사람과 말[馬]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밭 가운데 엎드려 나가 동정을 살피었다. 적병 중에 먼저 밭 가운데 매복하고 있던 자가 의병이 그들의 계획을 발각하였음을 알고 달아나버렸다. 다음날 방어사와 함께 진병하여 적진 5리쯤 되는 데까지 나아갔다. 고경명이 먼저 기병 8백여 명을 보내어 싸움을 걸자 적이 성을 비우고 나와서 바로 관군(官軍)에게 덤벼드니 영암 군수 김성헌(金成憲)은 말을 몰아 먼저 달아나고, 적이 또 광주(光州)와 흥덕(興德)두 진을 공격하니, 방어사는 멀리서 형세만 보고 흩어져버렸다. 고경명은 혼자 감당할 생각으로 군사들로 하여금 활을 잔뜩 당기고 기다리게 하는데, 갑자기 한 사람이 소리지르기를,
“방어사의 진이 무너졌다.”
하고 외치니, 의병의 진이 따라서 무너졌다. 고경명이 앉은 채로 일어나지 아니하고,
“나는 말타는 데 숙달하지 못하고 오늘 싸움에 패했으니, 오직 한번 죽음이 있을 따름이다.”
하였다. 막하의 군사 안영(安瑛) 등이 고경명을 말에 오르기를 청하면서,
“이번에 한번 후퇴하였다가 다시 뒷날 의거하기를 도모함이 옳습니다.”
하니, 고경명은,
“내 어찌 구차히 모면하랴. 그대는 빨리 빠져나가라.”
하였다. 휘하의 군사가 억지로 부축하여 말에 앉히었는데, 말이 달아나서 고경명이 말에서 떨어지니, 안영이 말에서 내려 고경명에게 말을 주고 도보로 따라갔다. 적이 급하게 달려들어 고경명은 위급하게 되었다. 종사(從事) 유팽로(柳彭老)는 말이 건장해서 먼저 빠져나가면서 그 하인을 돌아보고 대장이 벗어났느냐고 물으니, 아직 못 나왔다고 하자, 급히 말을 몰아 되돌아 들어가서 고경명을 따르고자 하니, 하인이 말고삐를 끌어잡고 울면서 말리었다. 유팽로가 듣지 아니하고 칼로 하인을 찍으려 하니, 하인이 부득이 말고삐를 놓고 그뒤를 따랐다. 고경명은 유팽로가 다시 들어오는 것을 보고,
“나는 반드시 면하지 못할 것이니 그대는 빨리 달려 나가라.”
하니, 유팽로가 말하기를,
“내가 어찌 차마 대장을 버리고 홀로 살기를 도모하겠습니까.”
하였다. 적이 경명에게 달려드니 유팽로와 안영이 자기 몸으로 막아 가리다가 함께 죽음을 당하였다.
○ 안영(安瑛)은 자는 원서(元瑞)인데, 기묘 명류 홍문관 교리 안처순(安處順)의 증손이고, 판서 이후백(李後白)의 외손이다. 남원에 살았는데 부모에게 지극히 효도하였다. 이때에 바야흐로 남원에 있었고 어머니는 서울에 있었는데, 길이 막혀 생사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강화도로 들어가 어머니의 생사를 알아보려고 하였는데, 고경명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막하에 들어갔다. 막하의 제생들이 큰 소리만 치면서 그를 깔보았지만 안영은 아무 말 없이 대오에 따랐을 뿐이었다. 싸움에 패하자 제생(諸生)들은 일시에 흩어져 달아났으나 안영만은 가지 아니하였다. 그때 고경명의 둘째 아들 고인후(高因厚)는 무사를 거느리고 앞줄에 서서 화살 속을 드나들다가 군사가 무너지자 말에서 내려 걸상에 의지하고 인솔한 대열을 정돈하여 돌격전을 벌이다가 힘이 다하여 죽었다.
고경명의 장자(長子) 고종후(高從厚)가 경명의 시체를 수습하여 산사(山寺)에 임시로 장사지내고, 다시 흩어진 무리를 수습하여, 복수군(復讐軍)이라 호칭하였다. 이보다 앞서 고경명 등이 양산숙(梁山璹)을 행재소에 보내었는데, 그가 돌아올 때 왕은 친히 불러보고 이르기를,
“돌아가면 고경명 등에게 말하여 빨리 국가를 회복하여 나로 하여금 너희들의 얼굴을 볼 수 있는 날이 있게 하라.”
하고, 고경명에게 공조 참의 지제교 겸초토사의 벼슬을 제수하고 다음과 같은 글을 주어 위로하였다.
내가 임금 노릇을 잘못하여 백성을 편안해 살 수 있게 하지를 못하였도다. 첫째로 인화(人和)를 잃었고 또 오랑캐를 막는 데 실패하여 나라를 잃고 서도로 파천하여 의주에 물러나온 지 이미 달을 넘겼도다. 종묘사직이 빈 터가 되고 생령(生靈)이 죽었으니, 아아! 이 무슨 일인가. 그 죄는 오로지 나에게 있으니 실로 한없이 부끄럽도다. 서남(西南)은 멀고 아득하여 소식을 들을 길이 없었는데, 이번에 이광(李洸)의 군사가 용인에서 무너졌다고 들리니 다시는 남쪽을 바라며 구해 주기를 기대하던 생각을 할 수 없게 되었도다. 그런데 이에 양산숙(梁山璹) 등이 해상과 육지를 거쳐 이곳에 진달하여, 너 고경명(高敬命)과 김천일 등이 의병 수천을 규합하여 본도 절도사 최원(崔遠)의 병마(兵馬) 2만과 함께 수원에 나와 둔을 쳤다고 하니, 나같이 부덕(不德)한 사람이 어찌 이처럼 사력을 다하는 사람들을 얻게 되었단 말인가? 우리 조종(祖宗) 2백 년의 깊고 두터운 인택(仁澤)이 인심을 감격시킴이 지극한 것이니, 내 매우 기쁘도다. 그래서 곧 양산숙(梁山璹) 등을 군중(軍中)으로 돌려보내니 너희들은 나의 고충을 자세히 알기 바라노라. 내가 즉위한 지 25년이 되었다. 비록 인덕(仁德)이 백성에게 미치지 못하고 혜택이 아래까지 다하지 못하였으며, 지혜는 물정을 살피지 못하고 정사는 실수가 많았으나 내 본심만은 언제나 백성을 사랑하고 구제하는 일을 본의로 알았다. 근년에 들어 변방에 소란이 많고 군정(軍政)이 느슨해진 것을 보면서도 도리어 생각하기를, ‘성과 해자가 높고 깊으며 갑옷과 병기가 굳고 날카로우면 오랑캐와 도적을 막을 수 있다.’ 하고, 중외(中外)에 신칙하여 방비를 튼튼히 하도록 하였으나, 성이 높을수록 국세는 날로 줄고, 참호가 깊을수록 백성의 원망은 날로 더해져서 뽕잎 떨어지듯 기왓장 부서지듯이 이 지경이 될 줄이야 실로 헤아리지 못하였도다. 더구나 궁중을 엄밀하게 단속하지 못하여 백성을 속이고 작은 이익을 취했으며, 왕자(王子)는 산택(山澤)의 이권을 독점하고 백성은 생업을 잃었으니, 백성이 나를 원수로 여긴들 내가 무슨 할 말이 있으랴. 이미 유사에게 명하여 모두 다 혁파하고 반환하도록 하였지만, 이러한 것들을 어찌 내가 다 알고 있었겠는가? 알지 못한다는 것도 나의 허물이니,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후회한들 어찌하랴. 차라리 스스로 희생이 되어 천지와 종사(宗社)와 백신(百神)의 신령에게 사죄하고자 하노라. 내가 손가락을 깨물며 후회하기를 이미 이와 같이 하였으니, 바라건대, 네 사민(士民)들은 내가 잘못을 고치고 새로운 정치를 계획하도록 허락해 주기 바라노라. 나의 실덕(失德)은 대략 개진(開陳)하였거니와, 이번 재난은 실로 뜻밖의 일이로다. 무지하고 흉악한 왜적이 천자의 나라를 칠 꾀를 생각하고, 나에게 역당이 되라, 길을 빌리자 하기에, 내 의리를 들어 거절하였더니, 흉악한 짐승같은 마음으로 나의 큰 덕을 저버리고 작은 원망을 맺으려고 하는도다. 내 생각하건대, 종묘사직이 망하고 신민은 버릴지라도 군신(君臣)의 직분은 천지가 살피는 바이니, 대의를 우주에 밝히고 흉중을 태양 아래에 드러내어 천지신명에게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고자 할 따름이기에, 그대로 있을 수 없어서 천조(天朝)에 호소하였도다. 황제께서 성명(聖明)하시어 나의 지극한 뜻을 살피고, 요동 총병관 조승훈(祖承訓)을 보내어 유격장군과 마병(馬兵) 1만 명을 거느리고 평양을 공격하고 서울의 적을 소탕하고자 하였고, 또 강소(江蘇)와 절강의 선봉군사 6천 명이 조석을 앞두고 강을 건너올 것이며, 본도의 병마 또한 수만 명이 모였으니, 천자의 위엄과 성세가 미치는 곳에 군사는 마땅히 더욱 분발할 것인데 하물며 궁지에 몰린 오랑캐는 죄악이 이미 극도에 달하여 천벌이 당연히 가해져야 할 것이다. 평양의 왜적은 기세가 이미 꺾이어 섬멸을 당하게 되었도다. 맑은 가을이 다가오고 태백성(太白星)이 바야흐로 높으니, 군대의 위용이 있는 곳에 살기(殺氣)는 순해지고, 충의가 향하는 곳에 어느 적인들 이기지 못하랴. 너희들은 이미 경기 땅에 있으니, 형세를 살펴 군사를 합쳐서 서울을 수복하기 원하노니! 네가 힘쓰지 않으면 내 또 누구를 의지하랴. 군량이 모자라면 경기ㆍ호남에 있는 창고의 것을 네 마음대로 가져다가 공급하고, 군기(軍器)가 다하면 경기ㆍ호남의 병장기를 네 마음대로 가져다 쓰면서 각기 힘쓰도록 하라.
이제 고경명에게 공조 참의를 제수하고 초토사의 관직을 더하며, 김천일에게는 장예원 판결사에 올려 창의사(倡義使)를 더하고, 박광옥(朴光玉) 등 이하에게는 각기 차등 있게 관직을 올려주노라. 너의 충의를 생각하면 작상(爵賞)을 바라는 것이 아니지만, 내가 그대에게 은혜를 베풀 일은 이밖에 다른 길이 없으니 받아줄 것이며, 더욱더 힘쓰기를 바라노라. 용만(龍灣) 한 구석에 국운(國運)이 어렵게 버티고 내 땅 경계는 끝났으니, 나는 장차 어디로 돌아갈꼬. 인정(人情)이 이미 끝에 달했으니, 이치가 당연히 수복되기를 그리워할 것이다. 가을 기운이 잠깐 일어나니, 변지(邊地)의 날씨는 일찍 차도다. 장강(長江)을 바라보니 또한 동으로 흐르는데, 돌아가고자 하는 일념(一念)은 강물처럼 도도하구나. 교시가 이르면 너희 신민들은 반드시 나의 뜻을 가련하게 여기고 슬퍼할 것이다. 슬프다! 하늘이 이성(李晟)을 낸 것은 성궐(城闕)을 다시 회복할 날을 기대하게 한 것이고, 날마다 장준(張俊)을 바라는 것은 원릉(園陵)이 무사하다는 기별을 기다림이라. 하루 빨리 이 간절한 소망에 부응하여 이슬과 서리를 맞는 나의 고통을 면하게 하기를 바라노라. 이에 교시하노니 자세히 알기 바라노라.
양산숙(梁山璹) 등이 고경명(高敬命)의 군진에 돌아오니, 고경명은 이미 죽었었다. 양산숙이 이에 교서를 반포하여 선유하니, 남은 군사와 백성, 억센 장수와 완악한 졸개까지도 울지 않는 이가 없으니 사람들이 당 덕종(唐德宗)이 봉천(奉天)에서 내린 애조(哀詔)에 비유하였다. 양산숙은 이에 강도(江都)로 돌아가 김천일의 군진에 들어갔다.
고경명은 폐거(廢居)하고 있던 사대부로 하루아침에 의기를 떨쳐 군사 훈련을 제대로 받지 않는 무리를 불러 모았으니, 일은 비록 이룩하지 못하였으나 의열(義烈)은 빛나 두터운 봉록을 먹는 계획없는 관리들이 부끄럽게 될 것이다. 조정에서는 고경명의 죽음을 듣고 탄식하며 애석해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임금도 역시 슬퍼하여 고경명에게 자헌대부 예조판서 겸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춘추관성균관사의 증직을 내리도록 명하고, 고인후(高因厚)에게는 예조 참의를, 유팽로(柳彭老)에게는 사간원 사간을, 안영(安瑛)에게는 장악원 첨정을 증직하여 광주(光州)에 사당을 짓게 하고, 포충사(褒忠祠)라고 사액하여 세시(歲時)마다 제사를 지내게 하였는데, 고을의 선비와 백성들이 또한 모두 분향하고 술을 올렸으니, 그의 충의에 감동하였기 때문이다. 고종후(高從厚)가 의병을 다시 모아 여러 도(道)에 격문을 돌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만력 20년(1592, 선조 25) 월 일, 복수 의병장 전 임피 현령(臨陂縣令) 고종후(高從厚)는 피눈물로 머리를 조아려 재배하고 열읍 의병청(義兵廳)의 제공들과 여러 군자들에게 삼가 고하나이다. 고자(孤子)는 하늘에 사무치는 통분을 설욕하기 위하여 기병하여 절에 있는 종들의 장수가 되었습니다. 여러 곳에 흩어져 살고 있어 그 수가 실로 많으나 열읍을 두루 다니기는 나로서 너무도 겨를이 없으므로 다만 관리의 힘만을 의뢰하고 있는 형편이라 행군할 시기를 놓칠까 걱정이 됩니다. 그래서 가슴속에 맺힌 원한을 가지고 감히 당세(當世)의 의사(義士)들에게 고합니다. 혹시 문서나 장부에 유의하여 사리(事理)에 방해됨이 있지나 않기를 바랍니다. 비록 계책상 부득이한 일이긴 하나 역시 죄는 피할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고자(孤子)는 집이 본래 가난하여 왕통(王通)의 헐어빠진 움막집이 있을 뿐이요, 성품조차 소활하여 자공(子貢)과 같은 재산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도적만은 잊을 수가 없어서 이에 감히 금혁(金革)의 변례(變禮 긴급한 경우 예를 변경함)로 상복을 벗고 군대에 나선 것인데 호걸로서 대열에 참여한 사람이 없으니 누구와 더불어 국가의 원한 깊은 원수를 갚을 수 있겠습니까? 재물이 부족하면 군사를 모을 수 없고, 병기가 날카롭지 못하면 적을 누를 수가 없습니다. 큰소리로 울부짖으며 감히 안공(顔公)처럼 미곡(米糓)을 애걸하고 맨 땅에 빈 손으로 일어나니, 조적(祖逖)처럼 병기 만들기가 어렵습니다. 군사들이 배를 주리게 되면 어찌 죽을 힘을 다하여 싸우겠습니까? 땅을 밟고 하늘을 이고 사는 이상 결코 제 한 몸이 잘되기를 꾀하는 것이 아니요, 맨주먹을 휘두르고 칼날을 무릅쓰니 천리(千里)를 싸워 나가기는 어려울 것같습니다. 오직 죽은 이를 위하여 한번 씻고자 함인데, 어찌 힘있는 분들이 가만히 앉아 바라만 볼 줄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우리 한 도(道)의 제장(諸將)들이 누군들 나라의 백성이 아니리오. 단에 올라 피로써 맹세하니, 혹은 죽은 어버이에게 의기를 허락하고 어깨를 치고 소매를 끌어잡는 사람 중에는 역시 고자(孤子)에게 연분이 있습니다. 비록 얼굴을 대해 보지는 못했지만 소리만은 서로 접속되고 있는 처지이니, 백세(百世)나 떨어져도 감응이 있는 자도 있는데 하물며 같은 시대에 태어났음에 있어서랴. 이번 6월의 군대 출동은 결사적 계획에서 나온 것입니다. 몸소 먼저 무부가 되어 비록 훈업(勳業)을 생전에 다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인륜을 유지해서 그 의열은 죽은 뒤에 더욱 빛날 것이니, 이는 한 집안의 사론(私論)이 아니요, 백세의 공론(公論)이라 하겠습니다. 저 길가는 나그네도 눈물을 흘리거늘 하물며 선비들에 있어서 어찌 슬픈 마음을 일으키지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진실로 의(義)를 사모하고 인(仁)을 힘써 행한다면 재물을 가볍게 여기고 베풀기를 좋아하여야 할 것입니다. 수전노가 되기보다는 남의 급한 것을 구해 주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아비는 자식을 가르치고 형은 아우를 격려하니 어찌 월(越) 나라가 진(秦) 나라 여윈 것을 바라보듯하겠으며, 현(縣)이 다르고 군(郡)이 다르다 하여 저들은 우리와 관계가 없다고 여기지를 마십시오. 사해(四海)는 모두 우리의 형제들이니 한 말의 곡식도 오히려 방아찧어 나누어 먹을 수 있고, 작은 고을이라도 충신이 있다하였으니 한 세상을 속여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옛말에도 있으니 여러분은 들으십시오. 한 삼태기의 흙이 산이 되고, 한 치의 쇠붙이도 사람을 죽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각자가 자기 힘에 따라 할 것이니 어찌 다 구비하기를 바라리오. 글로써 성의를 드러내지 못하고 여기에서 말을 마치겠습니다. 악의의 전[樂毅傳]을 읽으면 반드시 책을 놓고 울 것이며, 노숙(魯肅)이 창고를 털어주듯 하면 소문을 듣고 일어날 것입니다. 자산과 기계를 내어 서로 도와주시려고 하시면 여러분은 성명을 이어 서명하소서.
○ 격문이 이웃 고을에 전해지자, 사인(士人)과 무졸(武卒)들이 눈물을 뿌리며 의리를 사모하고 모여 들었다. 그 중에서 드러낼 만한 사람으로는, 정자(正字) 오빈(吳玭)이 있었는데, 광주(光州) 사람으로 의기를 자부하여 일찍이 고씨(高氏) 문중의 충효를 흠모하다가 이에 종사(從事)가 되었고, 김인혼(金麟渾)은 진원(珍原) 사람으로 하서선생(河西先生) 김인후(金麟厚)의 종제(從弟)인데, 담력과 꾀가 있어 막하의 참모가 되었으며, 오유(吳宥)는 보성(寶城) 사람으로 처음에 원수의 막하에 있다가 의리를 사모하여 와서 부장이 되었다.
그때에 권율도 본진의 군사를 일으켜 서쪽으로 근왕하러 갔다. 처음에 권율이 용인(龍仁)으로부터 본진에 돌아와서 이광(李洸)의 명령을 기다리며 말하기를,
“주장(主將)이 응당 분부가 있을 것이니, 군대의 대열을 정리하고 기다리라.”
하였더니, 오래되어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권율이 개연히 말하기를,
“종묘사직이 잿더미가 되고 왕이 파천해 계시는데 신하로서 어찌 국가의 멸망을 편안히 앉아 바라보고만 있을 수 있으랴?”
하고, 경내의 자제 5백여 명을 거느리고 또 이웃 고을에 격문을 전하여 1천여 명을 더 얻어서 경상도 경계로 나아갔다가 남원의 백성들이 집과 부락을 불태우고 관아의 창고를 약탈한다는 말을 듣고 권율이 곧 남원으로 이동하여 인심을 안정시키고 난민을 단속하였다. 순찰사 이광(李洸)이 남원에서 군사를 일으켜 권율을 임시로 본도의 도절제사(都節制使)라 칭하고, 제군(諸軍)을 독려하여 난동하는 것을 막게 하였다. 권율이 사기(士氣)를 안정시키고 격려하니 군의 위세는 날로 성하고, 제장은 부서(部署)를 정하여 배치하는데 모두 법도가 있었으며, 은혜와 위엄을 함께 시행하니 호령은 명확하고 엄숙하며, 진중에 임하여 군사와 맹세할 적에는 의로운 빛이 얼굴에 나타나니 사졸들이 용기를 떨쳐 명령을 어기는 자가 없었다. 곧 군대를 이현(梨峴)으로 이주하였다. 이때 영남의 적세는 매우 창궐하여 곧장 전라도를 공격하여 군병을 나누어 쳐들어왔다. 은 적세가 심히 성하다는 말을 듣고 영(嶺)을 의지하여 진을 굳건히 하고 군사를 엄밀히 단속하여 대기하고 있었다. 하루는 잿마루에서 적과 만나자 군사를 풀어서 급히 공격하였다. 동복 현감(同福縣監) 황진(黃進)은 용맹이 삼군(三軍)에 으뜸이었는데, 돌격전을 벌이다가 적의 탄환에 맞아 후퇴하니 온 군사가 기세가 꺾여 투지가 없이 칼을 감추고 머리를 싸고 슬슬 달아나므로 군중이 흉흉하였다. 저녁때 왜적은 우리 군사가 지친 틈을 타서 우리의 성채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권율이 칼을 빼어 크게 호통을 치며 직접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독전하니, 사졸들이 모두 용감하게 달려 나가 성위에 뛰어올라 힘껏 막아내는데, 모두가 일당백(一當百)으로 싸웠다. 이에 부르짖는 소리는 천지를 진동하고 화살과 돌은 빗발치듯 하니 적이 감당하지 못하고 드디어 갑옷을 벗어버리고 시체를 끌고 달아났는데, 땅에 버려진 군수 물품과 병장기가 낭자하였고 피는 흘러 길을 덮었다. 왜적이 다시 호남을 엿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호남을 근본으로 삼아 국가의 보장(保障 울타리)이 되었으며, 수년 사이에 동서(東西)로 나누어 군비를 공급하여 끊어지지 않게 한 것은 권율의 힘이었다. 얼마 되지 않아서 목사가 관청에 이르기 전에 본도의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권율이 방어사로 하여금 대신 이치(梨峙)를 지키게 하고 자기는 직접 전주에 이르러 도내의 군사 만여 명을 출동시켜 서쪽으로 서울로 향하였다. 이때 왜적의 괴수 행장(行長)은 이미 평양을 빼앗아 성을 점거하고 있었고, 장정(長政)은 황해도를, 융경(隆景)은 개성부를, 평수가(平秀嘉)는 제추(諸酋)를 독솔하여 대병을 이끌고 경성에 주둔하고 있었다. 병사를 풀어놓아 사방을 약탈하므로 서로(西路)가 이미 막혀 근왕하는 여러 장수들은 모두 강화도에 들어가 강을 요새로 적병을 피하고 있었다. 주상께서 의주에 계신다는 말을 듣고서 여러 장수들을 불러 말하기를,
“지금 평양 이남은 모두 적진인데 서울은 근본이 되는 땅이니, 서울을 먼저 수복하기만 못하다. 그리고 행장(行長)의 뒤를 끊어서 동쪽을 돌아보며 의심하게 하여 마음놓고 서진(西進)하지 못하도록 하면 적들이 어찌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 지금 만약 강도(江都)로 들어간다면 적에게 약함을 보이는 것이다.”
하고, 드디어 수원의 독성(禿城)에 진주하였다. 주상께서 권율이 독성에 진주하였다는 말을 듣고 차고 있던 칼을 풀어서 급히 내려보내며 이르기를,
“제장들 중에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이 칼로 다스려라.”
하였다. 권율은 주상의 명을 받고 날로 사졸을 독려하니, 평수가(平秀嘉)는 그 병세가 매우 날카로움을 꺼려 수만의 군대를 세 진으로 나누어 오산역(烏山驛) 등지에 진을 치고 왕래하며 도전하였다. 권율은 성벽을 단단히 하고 굳게 지키며 교전하지 아니하고 간혹 기병(奇兵)을 보내어 적을 대응하여 가는 곳마다 적의 날카로운 기세를 꺾었다. 적의 계책은 완전히 실패되어 약탈할 곳조차 없게 되자 며칠 뒤에 병영을 불태우고 밤에 도망하고, 기내(畿內)의 여러 왜적도 차례로 성안으로 들어가버리니, 이로부터 서로(西路)가 통하게 되었고 여러 군(郡)의 의병이 소문을 듣고 봉기하여 일시에 메아리처럼 호응하였다. 지금에 와서 중흥의 공을 논하자면 권율이 으뜸이라 하겠다.
○ 이순신(李舜臣)도 가리포(加里浦)에서 전라도 좌수영(左水營)에 달려가서 군사를 훈련하고 병선을 정돈하여 대기하고 있었다. 적병이 이미 육지에 내려 여러 군(郡)이 모두 무너졌다는 소문을 듣고 별다른 계책이 나지 않으므로 노량(露梁) 어귀에 배를 배열하여 적의 오는 길목을 막고 성을 수축하여 지키고자 하다가 또 본도를 굳게 지켜 한산(閑山) 어귀를 엿보지 못하게 하려고도 하여 결정을 짓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었다. 순천 부사(順天府使) 권준(權俊)과 광양 현감(光陽縣監) 어영담(魚泳潭)이 글을 띄워 일어나고, 또 자신이 달려와서 바다로 내려갈 계획을 힘껏 찬동하였다. 녹도 만호(鹿島萬戶) 정운(鄭運)과 이순신의 군관(軍官) 송희립(宋希立)이 발분하여 죽음을 걸고 힘을 다할 것을 자원하며 강개한 언사로 이순신에게 말하기를,
“적이 이미 영남을 격파하고 승승장구하니 그 기세가 반드시 수륙으로 닥쳐올 것인데, 공은 어찌 이다지 신중하기만 하십니까? 공이 출전하시면 정운(鄭運) 등이 선봉으로 나가겠습니다.”
하였다. 이순신은 정운(鄭運) 등의 이와 같은 태도를 보고 크게 기뻐하여 5월 초 4일 수군을 이끌고 바다로 나가려면서도 결정을 짓지 못하고 있었다. 경상 우수사 원균은 적의 세력이 큰 것을 보고서 감히 출격하지 못하고, 전선 백여 척 및 화포(火砲)와 군기를 바다 속에 다 던지고 수하의 비장(裨將) 이영남(李英男)ㆍ이운룡(李雲龍) 등을 거느리고 네 척의 배에 타고 곤양(昆陽) 해구(海口)로 가서 육지에 올라 적을 피하고자 하니, 수군 만여 명이 모두 흩어져서 수습할 수 없었다. 이영남(李英男)이 간언하기를,
“공이 왕명을 받아 수군절도사가 되었는데, 군사를 버리고 육지로 나갔다가 후일 조정에서 죄를 내릴 때 어떻게 해명하겠습니까? 전라도에 청병하여 적과 한번 싸워 이기지 못한 뒤에 도망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원균이 옳게 여기고 이영남(李英男)을 시켜 이순신에게 가서 청병을 하도록 하였다. 이순신은,
“각기 분계가 있는데 만약 조정의 명령이 없이 어찌 감히 마음대로 월경(越境)할 수 있겠는가.”
하고 사절하였다. 원균이 다시 이영남을 보내어 청하기를 무릇 오륙 차나 왕래를 하였다. 이영남이 다녀올 때마다 원균은 뱃머리에 앉아서 멀리 바라보며 통곡하였다. 그뒤 이순신은 배 40여 척을 이끌고 한산도(閑山島)에 나와서 원균의 군사와 함께 옥포(玉浦)에 이르니 앞바다에 적의 전함 30여 척이 있는데 사면을 장막으로 두르고 백기와 홍기를 세우고 바다 가운데 정박하고 있고, 유격병을 분산시켜 해안에 올라가서 가옥을 불태워 연기와 불꽃이 산에 가득하였다. 왜적이 우리 군사가 갑자기 나타난 것을 보고 일시에 배에 올라 급히 노를 저어 나와 해양 중에서 이순신의 군사와 교전하게 되었다. 이순신 등은 군사들을 독려하여 적선에 육박하여 화통(火筒)과 화전(火箭)을 바람을 따라 일시에 쏘아대니 적선 36척이 불타고 바다 물결이 모두 붉었다. 왜적은 패하여 물러갔으나 정운(鄭運)이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에 아군은 징을 쳐서 철수하고, 다음날 다시 싸우기로 약속하였다. 때마침 서쪽에서 온 사람이 왕이 서행(西幸)하였다고 전하므로 이에 각 군은 본진으로 돌아왔다. 승첩한 소식이 행재소에 알려지니 백관이 옷깃을 여미고 서로 축하하며 이순신을 가선대부로 올려 포장하였다. 하루는 이순신의 꿈에 백발의 늙은이가 이순신을 깨워 일으키면서 ‘적이 왔다.’ 하는 것이었다. 이순신이 벌떡 일어나 급히 전함 23척을 거느리고 노량(露梁)에서 원균과 만났는데, 적이 과연 이순신의 배를 엄습해 오므로 이순신이 북을 울려 교전하여 적선 한 척을 불태우고 사천(泗川) 바다 가운데로 쫓아가니 멀리 해상에 산이 하나 보이고 백 명의 왜적이 장사진(長蛇陣)을 치고 그 밑에 11척의 연안을 따라 줄지어 정박하고 있었다. 이때에 아침 조수는 이미 밀려가고 항구의 물은 얕아서 배가 전진할 수 없으므로 이순신이 말하기를,
“이곳은 물이 얕고 바다가 좁아서 배를 돌리기 어려우니 거짓 물러나는 척하고 적을 유인하여 바다의 넓은 곳에 이르렀을 때 큰 배로 돌아서서 치면 승전할 수 있다.”
하니, 원균은 분이 나서 바로 쫓아가 공격하고자 하였다. 이순신이 말하기를,
“공이 병법을 모릅니다. 그렇게 하여서는 반드시 패합니다.”
하고, 곧 소라를 불고 기를 휘둘러 후퇴하였다. 1리를 못 가서 적이 배를 타고 쫓아왔다. 이윽고 좁고 험한 길목에 다다르자 이순신이 북은 한번 크게 쳐 여러 배가 일제히 돌아서서 바다 가운데에서 늘어서니, 바로 적선과 수십 보의 거리에 서로 대치하게 되었다. 이순신이 본영에 있을 적에 늘 왜구를 근심하고 새로운 법으로 따로 배를 만들었으니 위에 판으로 덮어 마치 형상이 엎드린 거북과 같고, 노를 젖는 자는 그 안에 있는데 여장(女墻 성위의 얕은 담)이 가로막힌 것 같으며, 좌우 전후로는 화포(火炮)를 많이 싣고 종횡으로 출입하여 베짜는 북과도 같고 물오리 같기도 하였다. 이때에 와서 이순신이 거북선으로 돌진시켜 먼저 적진을 시험하고 적선 12척을 불사르니 남은 왜적이 멀리 바라보며 발을 구르고 소리를 질렀다. 한참 싸우고 있는데 적의 탄환이 이순신의 어깨에 맞아 등을 관통하였으나, 이순신은 여전히 활과 화살을 쥐고 독전하였는데 전쟁이 끝나고서야 사람을 시켜 칼끝으로 철환(鐵丸)을 파내니, 온 군사들이 비로소 알고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다. 당포(唐浦)까지 추격하였는데 또 적선 20척이 강 언덕에 줄지어 정박하고 있었다. 그 중에 큰 배가 한 척 있는데 위에는 층루를 설치하고 밖으로는 붉은 비단 장막이 드리워졌는데, 적의 괴수 한 사람이 금관을 쓰고 금의(錦衣)를 입고서 모든 적병을 지휘하고 있었다. 이순신이 제장으로 하여금 노를 저어 바로 돌격하게 하고, 순천 부사 권준(權俊)은 아래서 위를 쳐다보며 화살을 쏘아 그 괴수를 명중시키니, 왜적은 그 자리에 쓰러졌다. 온 군사가 환성을 올리고 해가 저물자, 사량(蛇梁) 앞바다로 회진(回陣)하였다. 군중에서는 갑자기 밤에 놀라 소란을 피웠으나 이순신은 꼼짝 않고 누웠다가 한참 뒤에 방울을 흔들게 하니, 군중이 안정되었다. 얼마 아니되어 다시 당항(唐項) 앞바다로 나갔는데 전라 우병사 이억기(李億祺)가 전선 25척을 거느리고 왔다. 제장들이 외로운 군사로 깊이 들어간 것을 염려하던 차에 이억기의 군사가 오니, 모두 기운이 더욱 났다. 이튿날 모든 군사가 바깥 바다로 나가니 적은 당항 앞 포구에 진을 치고 있었다. 이순신이 먼저 순찰하는 배를 보내어 형세를 탐지하게 하였더니 초선이 겨우 바다 어귀에 나가자마자 곧 신호포를 쏘아 적이 있음을 알리므로 여러 군사가 일시에 노를 급히 저어 고기 꿰미처럼 잇달아 나아가 소소강(召所江)에 이르니 적선 26척이 항구에 벌여 있었다. 그 중에 큰 배 한 척은 3층으로 판각(板閣)을 짓고 밖에 검은 비단 장막을 드리웠으며, 앞에는 푸른 일산이 세워졌는데 멀리 장막 안을 보면 은은히 시립(侍立)하고 있는 모양이 보여 그가 두목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몇 번 결전도 하지도 않고 이순신이 거짓 패한 체하고 물러나니, 층각 있는 큰 배가 아군이 물러가는 것을 보고 돛을 올리고 바로 따라왔다. 모든 군사가 양쪽에서 공격하여 날랜 기운으로 적을 무너뜨리니, 적의 괴수가 화살에 맞아 죽고 왜선 백여 척을 불태우고, 적병 백여 명의 머리를 베었으며, 물에 빠져 죽은 자도 매우 많았다. 기별이 행재소에 알려지니, 이순신은 자헌대부로, 이억기(李億祺)는 가선대부로 올렸다. 이를 증명하는 시가 있다.
흉적이 바다 가운데 출몰하는데 / 鯨鯢出沒海之央
그 사나움을 누가 한 손으로 막아내랴 / 狂浪誰能一手障
눈물을 뿌리며 배에 오르니 하늘 또한 노하는데 / 洒泣登舟天亦怒
중류에서 노를 저으니 해도 빛을 감추었네 / 中流擊楫日無光
백우선을 휘두르니 삼군이 출동하고 / 暫揮白羽三軍動
금투구를 쓰니 여러 요귀가 숨구나 / 乍着金兜衆妖藏
고개 돌리니 동한 땅에 날랜 장수 있어 / 回首東韓飛將在
웅장한 이름은 천고에 빛나리 / 雄名千古汗靑芳
그때에 적이 또 경상우도로부터 전주 경내에 들어오니 김제 군수 정담(鄭湛)과 해남 현감 변응정(邊應井)이 관군을 규합하여 이끌고 극력 막아서 종일 크게 싸워 적병을 많이 사살하였다. 적이 물러가려는데 때마침 해가 저물고 화살이 다하였다. 적이 다시 공격을 시작하니 두 사람이 힘을 다하여 전사하자, 군사가 드디어 크게 무너졌다. 다음날 적이 전주성 밖에 이르니 관리들이 성을 버리고 달아나려 하는데 본 고을 사람 전 전적 이정란(李廷鸞)이 입성하여 이속(吏屬)과 백성들을 거느리고 성첩을 굳게 지키면서 성밖에다 가짜 병사들을 많이 만들어놓고, 낮에는 깃발들을 벌여놓고 밤이면 횃불을 늘어놓아 전후의 봉우리 위에 출몰하니 적이 몇 바퀴를 돌아보고는 감히 공격하지 못하고 물러갔다.
○ 또 김덕령(金德齡)은 광주(光州)에서 나왔는데, 자는 경수(景樹)요, 뛰어난 용맹이 있어서 나는 새가 넘어가지 못하고 원숭이가 오르지 못하는 곳도 몸을 솟구쳐 넘기를 평지 밟듯이 하며, 그가 타는 백마도 그 사람같아 하루 천리를 달리고 가는 곳마다 승전하고 포위를 뚫고 전진에 뛰어들기를 마치 사람이 없는 곳에 들어가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왜적들이 서로 돌아보고 어이없이 놀라며 부르기를, ‘비장군(飛將軍)이다’ 하고, 그가 지나는 곳에는 모두 칼을 거두고 피하며 감히 교전하지 못하니, 위세와 명성이 크게 떨쳐, 용사와 무부들이 구름과 안개처럼 모여들었다. 드디어 그는 군사를 이끌고 영남에 진입하였는데, 적들이 듣고 여러 곳에 유둔한 적병을 거두어 한 곳에 합쳐 대군(大軍)을 만들어 가지고 항거하였다. 그는 좌의병(左義兵) 진보 현감(眞寶縣監) 임계영(任啓英)과 서로 구원군이 되었다.
○ 현풍(玄風)의 곽재우(郭再祐)는 김덕령(金德齡)이 온 것을 보고서 또한 집안의 종들과 지방의 호걸들을 이끌고 가재(家財)를 전부 내어 군비에 제공하여 정진(鼎津)을 견고히 지키면서 많은 적을 베니 적이 자못 두려워하며 ‘홍의장군(紅衣將軍)’이라 불렀다. 적이 의령(宜寧) 땅을 넘보지 못한 것은 사람들이 곽재우(郭再祐)의 공이라 말하였다.
○ 김면(金沔)은 죽은 무장(武將) 김세문(金世文)의 아들인데, 거창(居昌) 우척현(牛脊峴)에서 적을 막고 여러 차례 적들을 물리쳤다. 조정에서 본도의 우병사로 발탁하였는데 오래 못 가서 군중에서 전사하였다.
○ 유종개(柳宗介)가 전사하니 예조 참판을 증직하였다.
○ 장사진(張士珍) 역시 군위(軍威)에서 의병을 일으켜서 적을 매우 많이 죽이니, 적이 두려워하여 장장군(張將軍)이라 부르며 감히 그 경내에 들어오지 못하였다. 하루는 적과 서로 만나 군사를 풀어 추격하는데, 적이 복병을 하고서 유인하였다. 장사진이 승전한 기세로 밀고 나가다가 갑자기 복병한 왜적에게 빠졌으되 오히려 큰소리를 치면서 힘껏 싸웠다. 화살이 다하고 해는 저물었는데, 적 하나가 돌진하여 와서 장사진의 한 팔을 쳐서 자르니, 장사진은 한 쪽 팔로 분격하다가 드디어 말에서 떨어져 전사하였다. 조정에서 수군절도사를 증직하였다.
○ 처음에 박진(朴晋)이 밀양(密陽)에서 돌아와 산골에 들어가 충의군(忠義軍)을 비밀리 규합하여 동서로 출몰하여 가는 곳마다 적을 쳐서 무찌르고 시종 한결같은 절개로 절대로 굽히지 않아, 여러번 위태로운 일이 있었지만 피하지 아니했다. 조정에서는 전 병사(兵使) 이각(李珏)이 성을 버리고 도주하였다 하여 바로 잡아 죽이고 박진(朴晋)을 대신 병사로 삼았다. 그때에 적병은 사방에 가득하여 행조(行朝)의 소식이 남방에 통하지 않는 지 이미 오래되니, 인심이 동요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더니, 박진이 병사(兵使)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흩어졌던 백성이 차차 모여들고, 수령은 이따금 산곡(山谷) 사이에서 나타나 일을 맡으니, 비로소 조정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한효순(韓孝純)ㆍ이수일(李守一) 등이 선비와 백성을 규합하여 적의 길을 끊은 것도 역시 박진에게 의뢰하였다. 박진은 한편으로 군사를 수습하고 한편으로 급히 조정에 보고하니, 조정이 이로 인해서 적의 정세를 탐지할 수가 있었다. 주상께서 감탄하여 말하기를,
“박진의 행동을 보면 곧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 같으니 박진이 만약 죽는다면 나라 일이 잘못될 것이다. 그래서 박진같은 사람이 어찌 허무하게 죽을 이치가 있겠는가마는 의당 형세를 관찰하여 나가야 할 것이다.”
하여, 그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말하던 중에 넘쳤다. 또 활과 화살을 내리니 박진은 특별한 은혜에 감격하여 마음과 힘을 다해서 마침내 도내의 장사들을 수습하여 점차 진형을 갖추었다. 한 도의 끊어졌던 기맥을 다시 소생시켜 사람들로 하여금 적군을 공격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한 것은 박진의 공이었다. 박진은 전 봉사 권응수(權應銖)ㆍ정대임(鄭大任) 등을 시켜 향병(鄕兵) 1천여 명을 거느리고 영천(永川)에서 적을 포위하였는데, 군사들이 적을 두려워하고 나아가지 못하였다. 두 사람 모두 담력과 용기가 있어 당장 몇 사람을 베고 몸을 빼어 나가 사졸들의 앞장을 서니 사졸들이 다투어 성을 넘어 들어가 크게 싸웠다. 적은 이기지 못하고 창고 속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명원루(明遠樓)에 올라가기도 하였다. 아군은 불을 놓아 공격하니 타죽은 자가 매우 많아 냄새가 멀리 밖까지 풍겼으며, 살아남은 왜적은 경주(慶州)로 도망쳤다. 이뒤로부터 신녕(新寧)ㆍ의흥(義興)ㆍ의성(義城)ㆍ안동(安東) 등지의 왜적은 모두 한 지역에 모였으니, 좌도(左道)의 군읍들이 보전하게 된 것은 영천(永川) 싸움의 공이었다. 이에 박진은 좌도 군사 만여 명을 거느리고 경주(慶州) 성 아래에 육박하였다. 적이 몰래 북문(北門)으로 나와 대비하기도 전에 엄습하니, 박진의 군사는 놀라고 소란해져서 안강(安康)으로 돌아왔다. 이날 밤에 다시 결사대 1천여 명을 모집하여 성 밑에 잠복하고 있다가 여러 발의 진천뢰(震天雷)를 성안에 쏘아 여기저기 여러 곳에 떨어뜨렸다. 적이 무엇인지 모르고 다투어 모여들어 서로 밀치면서 구경하다가 갑자기 포가 자연 그 안에서 폭발되니, 소리는 천지를 진동하고 철편(鐵片)이 별처럼 부서지면서 맞아 쓰러지는 대로 즉사하였다. 여기저기에서 모두 폭발되니 한 포에 맞아 죽은 자가 거의 3천여 명이나 되었고, 맞지 않은 자라도 한참이나 쓰러졌다가 일어나니 적들은 놀라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원인을 알지 못하고 모두 신명(神明)이 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드디어 서생포(西生浦)로 도망하였다. 박진은 드디어 경주에 입성하여 수만여 석의 곡식을 얻었다. 사실이 알려지자 박진을 가선대부, 권응수(權應銖)는 통정대부로, 정대임(鄭大任)은 예천 군수로 올려 포상하였다.
진천뢰(震天雷)는 예전에 없던 무기인데, 군기시의 화포장(火砲匠) 이장손(李長孫)이 새로 창안해 낸 것이다. 마름쇠와 철편(鐵片) 등을 인화(引火) 장치와 함께 하나의 원구(圓球)로 만들어 대완구(大碗口)에 실어서 불을 던져 발사하면 5백~6백 보를 날아서 땅에 떨어진 지 한참만에 불이 그 속에서 일어나 폭발한다. 왜적이 이것을 가장 두려워하였는데, 지금 그 제작이 어떠한지 모르니 가탄할 일이다.
○ 적의 한 부대가 다시 해현(海縣)을 돌아나와 진주를 포위하였다. 판관 김시민(金時敏)은 목천(木川) 사람인데, 무과에 올랐고 재략(才略)이 있고 말타고 활쏘기를 잘하였다. 이때 마침 성안에 있었는데 성을 굳게 지킬 계획을 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성을 버리고 달아날 생각을 하니, 김시민이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것을 군중(軍中)에서 맹세하고, 감히 떠난다고 말하는 자는 목을 베라고 호령하였다. 그리고 경내의 사민(士民)들을 수습하여 성에 들어오게 하여 남녀를 섞어 대오를 짜고 병장기를 설치하고 깃발을 세웠는데, 적이 성 아래까지 이르러 몇 겹으로 포위하니 형세는 새알을 깨는 것과 같이 위태로웠다. 김시민은 아내와 함께 직접 술과 음식을 가지고 성을 돌아다니며 군사들에게 먹이고 밤낮없이 분투하니 사람들이 모두 감격하여 죽기로 싸웠다. 적은 대패하여 갑옷을 벗어버리고 무기를 끌고 달아나 감히 다시 진주를 엿보지 못하였다. 이 공으로 김시민은 진주 목사에 올랐는데 그 전투에서 날아온 탄환에 맞아 일어나지를 못하였다. 이때 조정에서는 교서를 내려 본도의 군민(軍民)을 선유하였다. 교시는 다음과 같다.
군신(君臣)은 천지(天地)의 상경(常經)이요, 충의는 인도(人道)의 대절(大節)이니, 이는 본래 가지고 있는 사람은 권면할 필요조차 없다. 하물며 영남은 신라 때부터 터전을 잡아 부로(父老)는 효제(孝弟)를 행하고 자제는 시서(詩書)를 익혔도다. 비록 난리를 겪은 뒤일지라도 어찌 분발하는 무리가 없겠는가. 중악(中岳)에서 달밤에 맹세하니 김유신(金庾信)의 칼은 절로 칼집에서 벗어나왔고, 한산(漢山)에서 적을 꺾을 때는 실로 몸에 꽂힌 화살은 고슴도치와도 같았도다. 전에 왜적이 처음 닥쳐왔을 때는 이상하게 한 사람도 창의(倡義)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는 장신(將臣)들이 형세를 살피기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니, 실로 사민(士民)들에게는 뜻밖의 일이었도다. 다투어 놀라 흩어지려 하니 불러모으기가 어려웠는데, 지금 열읍은 텅 비어 한 지방이 깨졌도다. 백성은 어육이 되어 재생을 도모하지 못하고 창고는 잿더미가 되어 손을 쓸 수가 없도다. 내가 서쪽으로 옮겨온 뒤로 이미 남쪽에 대한 희망이 끊어졌더니, 어찌 너희들이 앞장서서 군사를 규합하고 고심하여 적을 토벌하며 의기가 하늘에 뻗치고 열사들이 호응하게 될 줄을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말린 밥을 모아 양식으로 삼으니 백성을 괴롭혀 모은 쌀 창고는 텅 비었고, 대를 깎아 활을 만드니 무기고의 병기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정진(鼎津)에서 군사가 출동하자 도망가는 적병이 정신을 잃었고, 무계(武溪)에서 접전했을 때는 떠내려가는 시체가 강에 찼었다. 관군은 어찌하여 번번이 무너지고 의병은 어찌하여 줄곧 승첩하는가. 관군이 두려워하는 것은 형벌인데, 형(刑)이 시행되지 못하고, 의병이 맺어진 것은 의(義)인데 의는 물러나기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과 해자를 만드는 공사를 그만두고 민력을 후히 기르며, 절진(節鎭)을 봉하는 일을 그만두고 군사의 마음을 굳게 단결시킬 줄을 미리 알았던들 떠다니는 혼령들이 어찌 동래(東萊) 들녘에 흩어지며, 독한 칼끝이 어찌 평양성에 이를 수가 있었으랴. 내가 밝지 못한 때문이니 후회한들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이번에 본도의 배지인(陪持人 지방 관아의 장계를 가지고 서울로 가던 사람) 강만혼(姜萬渾)이 돌아가는 길에 한 장의 과인의 잘못을 서술한 교서로 천리 밖의 내 마음을 전하였으나, 바다와 산을 무사히 거쳐서 진중에 선포가 되었는지 모르겠도다. 이에 최원(崔遠)의 군중에 부탁하여 나의 뜻을 설명하여 알리노니, 적정을 계속 염탐하라. 너희들이 나의 글을 볼 것이니, 나의 회포를 어이 다하랴. 성천(城川)의 이슬과 서리에 종묘사직의 쓸쓸함을 민망히 생각하고, 의주 강가에 장전(帳殿)의 소슬함을 부치는도다.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은 귀천이 다를 것이 없으니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은 조석으로 간절하도다.
천조(天朝)에서 가엾게 여겨 맹장들에게 명령을 내렸으니 명 나라 군사가 이르는 곳에 산악도 빛을 띠우리라. 가을날은 맑고 길은 마르니 바로 오랑캐를 사로잡을 때요, 말은 살찌고 활은 굳세니 실로 적을 줄일 시기로다. 철마(鐵馬)는 대정(大定)ㆍ청천(晴川)에 뻗치었고 군함은 등래(登萊)ㆍ강절(江浙)에 줄지었도다. 미친 오랑캐가 죄악을 쌓았으니 천벌이 내려져야 할 것인데, 하물며 우리의 의병과 열사들이 경기ㆍ황해ㆍ충청도에서 일어났음에랴. 곳곳에서 적을 베고 날로 전과를 올리니, 실로 천지가 말없이 도와주기 때문이며 이는 바로 국가 재건의 기회로다. 바라노니 그대들이여! 더욱 정충(精忠)을 힘쓸지어다. 듣건대 김성일(金誠一)은 거창에 주둔하고 한효순(韓孝純)은 영해(寧海)를 지킨다 하니, 각기 좌ㆍ우도 관찰사 등의 호칭을 내리고 대소의 의병장들은 차등에 따라 관직을 내리노라. 너희들은 절제(節制)의 지시를 듣고 또한 서로 계획을 짜내서 돌아가는 적을 맞아 쳐서 그 후미를 공격하라. 적이 머물고 있는 곳을 염탐하여 병영을 야습할 것이니, 멀리서 통제하기 어려우므로 기회를 관찰하는 것은 너희들에게 맡기노라. 김인갑(金仁甲)이 물에 빠져 죽은 것을 슬퍼하여 판서를 추증하고, 이형(李亨) 등의 전사를 슬퍼하여 아들 하나에게 벼슬을 주노라. 상과 관직을 어찌 상관하며 옥과 비단을 어찌 아끼랴. 영남 지방을 먼저 숙청하고 하루 빨리 나를 맞이해 주기 바라노라. 내 말을 마치고자 하니 눈물이 먼저 떨어지도다. 내 어찌 잊겠는가. 너희들은 힘쓸지어다. 아! 예악의 나라에서 바다 오랑캐의 기운을 쓸어내고, 산이 숫돌처럼 되고 바다가 가는 띠가 되도록 봉토를 나누어 받는 영광을 누리도록 할지어다. 교시하니 자세히 알기 바라노라.
교서가 이르자 군민(軍民)은 감격하지 않는 사람이 없어 모두 발분하여 힘쓸 것을 생각하였다. 그때에 황해도(黃海道)와 평안도(平安道)에는 적병이 가득 차 있었는데, 연안(延安) 고을이 고립되어 위험이 더욱 심하였다. 이조 참의 이정암(李廷馣)과 아우 이정형(李廷馨)이 함께 개성(開城)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는데 임진강의 군사가 무너지자 급히 연안(延安)으로 달려갔다. 부중(府中)의 호걸 송덕윤(宋德潤)ㆍ조광정(趙光廷)이 백여 명의 무리를 모아서 맞이하면서,
“공이 예전에 이 땅에 은혜를 베푸셨으니, 여기에 머물러서 우리를 살려주시오.”
하니, 이정암은 웃으며,
“내가 죽을 자리를 얻었도다.”
하고, 바로 입성하여 5백 명을 얻어 효유하고 또 이르기를,
“누가 나를 위해서 사문(四門)을 지키겠는가? 누가 성위에 올라서 적이 참호에 접근 못하도록 막겠는가? 누가 군량을 관리하고 누가 병장기를 수선하겠는가?”
하며, 각자의 재주에 따라서 부서를 나누고, 포(礮)를 돈대(墩臺)에 모아놓고 그 옆에는 솥을 늘어놓았다. 늙은이와 어린이조차도 다 일에 힘쓰고, 사람들이 다 직무에 착실하였다. 하루는 적의 추장 장정(長政)이 재령(載寧)ㆍ신천(信川) 등 여러 고을을 약탈하고 해주(海州)를 함락시킨 뒤, 3천의 군사로 강음(江陰)의 왜적과 합세하여 총출동해 쳐들어오니 성안에서는 크게 겁을 내어 진을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도 있었다. 정암이 말하기를,
“나는 군사들과 백성들과 더불어 생사를 같이 하기로 약속하였다. 백성을 죽음에 빠뜨리고 나 혼자 살기를 도모할 수는 없다. 겁이 나는 자는 마음대로 성을 나가라. 붙잡지 않겠다.”
하니, 온 군사들이 모두 죽기로써 지킬 것을 다짐했다. 해는 이미 기울고 적병은 세 겹으로 에워쌌는데 갑자기 한 적장이 성밖을 두루 돌아보고 성루를 만지며 지나다가 수문장 장응기(張應祺)가 쏜 화살에 가슴을 맞고 죽으니 적병은 기가 죽어 감히 가볍게 나오지 못하고, 서쪽 성에서는 비충(飛衝)을 만들어놓고 성안을 내려다보는 것을 대포로 때려부수니, 불화살이 난발하였다. 성 둘레에는 초가집이 많이 있어 인심이 흉흉해지더니, 홀연히 회오리바람이 크게 불어 연기와 화염이 성밖을 휩쓰니 적은 어찌할 수가 없어 막사를 철거하여 참호를 메우고 성위로 개미같이 기어올랐다. 이정암이 할 수 없음을 알고 쌓아놓은 풀섶 위에 앉아 아들 이준(李濬)에게 이르기를,
“성이 함락되면 스스로 불타 죽겠다.”
하니, 듣는 자가 감격하여 울고 한 마음으로 다 같이 죽을 힘을 다하였다. 혹은 큰 돌을 던지고 혹은 끓는 물을 끼얹고 혹은 불탄 재를 날리며 싸우기를 4일이나 하였는데, 적도 사상자가 반이 넘었다. 이날 밤에 적이 도망을 가려고 시체를 끌어다 다 불태우고 다음날 아침에 포위를 풀고 달아났다. 아군은 추격하여 적의 머리 18개를 베고 소와 말 90여 필과 군량 1백 30여 석을 빼앗았다. 조정에서는 처음에 이정암이 포위당하였다는 말을 듣고 상하가 모두 놀랐는데, 승첩문이 도착해서도 다만 적이 어느날 포위하고 어느날 물러갔다고만 적고 장황한 말은 한 마디도 없으니, 의논하는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적을 물리치기는 쉬워도 공로를 자랑하지 않기는 어렵다.”
하였다. 주상께서 특히 가선대부 본도 도순찰사(本道都巡察使)를 명하고, 문무 장관(文武將官)들은 모두 이정암의 절제(節制)를 듣게 하고 제장(諸將) 이하는 차등에 따라 상을 주었다.
○ 전년에 신각(申恪)이 연안 부사(延安府使)로 있을 때, 조헌(趙憲)이 왜구(倭寇)가 장차 쳐들어올 때는 연안은 반드시 지켜야 할 땅이지만, 성중에 물이 없는 것이 걱정이라 생각하여, 신각에게 편지를 보내어 북신당(北神堂)의 물을 성중에 끌어들여 방비할 준비를 하라고 하였더니, 이때 와서 그의 힘을 입었다.
○ 앞서 강원도 조방장 원호(元豪)가 여주(呂州 여주(麗州))로부터 본진에 귀환하였는데, 적병이 원주ㆍ충주ㆍ양주ㆍ광주(廣州) 등지에 출몰하므로, 원호(元豪)가 그들의 태만함을 틈타서 두 번 이겼다. 처음에 구미포(龜尾浦)에서 섬멸하였고, 또 이천 부사(利川府使) 변응성(邊應星)과 합병하여 배에 사수(射手)를 싣고 안개가 끼었을 때에 마탄(馬灘)에서 요격하여 많은 적병을 죽였다. 이로 인하여 원주로 가는 왜적의 길이 끊기었다. 순찰사 유영길(柳永吉)이 또 원호를 재촉하여 급히 진격하도록 하니 원호는 이미 연승을 하였기 때문에 적을 가볍게 보는 마음이 있었다. 적이 그가 올 것을 미리 알고 복병을 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원호가 모르고 진격하다가 복병이 갑자기 덤벼들어 드디어 여기에서 죽었다.
○ 또 조호익(曺好益)은 창원(昌原) 사람인데, 훌륭한 뜻과 행실이 있었다. 남에게 무함을 당하여 온 집이 강동(江東)으로 이사를 왔는데, 가난이 날로 심하여 생도들을 가르치며 20여 년이나 살았으나 지조가 더욱 굳었다. 임금의 거가(車駕)가 평양에 이르러서 그의 죄를 용서하고 불러 의금부 도사로 임명하였다. 평양이 포위되자 그는 강동(江東)으로 가서 군사를 모아 평양을 구하고자 하였다. 평양은 이미 함락되고 군민이 모두 흩어지자 조호익은 다시 행재소로 돌아왔다. 중국 군사가 강을 건너오리라는 말을 듣고 그는 군사 수백 명을 이끌고 상원(祥原)에 출진하여 흩어져 노략질하는 적을 요격해서 많은 적을 베었다. 조호익은 활 쏘고 말 달리는 데는 익숙하지 못하였는데 다만 충의로 군사의 마음을 격려하니,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 이때에는 온 나라가 병란을 피하느라 마치 끓는 솥안에 있는 물고기같이 위급하여, 선문(禪門)의 중들도 모두가 달아났다. 이때에 청허선사(淸虛禪師) 휴정(休靜)은 묘향산에서 의병을 일으켰는데, 승니(僧尼)들이 서산대사(西山大師)라고 존칭한 사람이다. 속성(俗姓)이 최씨(崔氏)이니 그 본관은 전주이다. 행실이 고매하고 율법이 엄하며 석가의 경전에 달통하고 문장에도 능하여, 조정의 사대부들과도 두루 사귀었다. 그의 뛰어난 제자들이 나라에 널려 있었는데, 이때에 와서 문도 1천 5백 명을 규합하여 칼을 짚고 주상을 행재소에 가서 뵈었다. 상이 이르기를,
“국난이 이러하니 네가 구제할 수 없겠는가?”
하니, 대사가 눈물을 흘리고 절하면서,
“국내의 승도로서 늙고 병들어 소임을 맡을 수 없는 자는 있는 곳에서 분향수도(焚香修道)로 신의 도움을 기도하도록 하고, 그 나머지들은 다 모집해 와서 전장에 나가고자 합니다. 신들이 비록 속세를 떠났으나 국내에서 태어나 성상(聖上)의 은혜와 길러주심을 입었사오니, 어찌 한번 죽는 것을 아끼겠습니까. 원컨대, 충성을 바치고자 합니다.”
하니, 상이 크게 기뻐하여 일국도대선사 팔도선교도총섭 부종수교 보제등계존자(一國都大禪師八道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의 칭호를 하사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그의 무리를 이끌고 순안(順安)의 복흥사(伏興寺)에 주둔하고 팔로(八路)의 사찰에 격문을 전하니, 건장하고 용감한 승려들이 오지 않는 자가 없었다. 휴정(休靜)의 높은 제자 처영(處英)은 지리산에서 일어나 권율의 막하에 들어갔고, 유정(惟政)은 금강산에서 일어났다. 유정(惟政)은 호는 송운(松雲) 또는 사명산인(四溟山人)이라고 하였다. 용모가 호걸스럽고 수염을 깎지 아니하였으며, 성품과 도량이 넓고 불전(佛典)에도 달통하였다. 이때 그는 표훈사(表訓寺)에서 강경(講經)을 하고 있었는데, 적병이 산중에 들어오자 중들이 다 도망하였으나, 유정만은 가부좌하고 움직이지 않으니 적이 보고 감히 달려들지 못하고, 어떤 자는 합장하여 경례를 드리고 가기도 했다. 근왕의 교서와 휴정(休靜)의 격문이 산중에 이르자, 유정은 불탁(佛卓) 위에 펴놓고 여러 중을 불러놓고 읽으면서 눈물을 줄줄 흘리며 효유하니, 산중의 중 7백여 인이 다 일어나 서쪽으로 근왕하러 떠났는데, 평양에 이르러서는 그 무리가 천여 명이 되었다. 성의 동쪽에 주둔하여 순안(順安)의 군사들과 서로 긴밀히 구원하는 병력이 되었다. 이를 증명하는 시가 있다.
국가는 다난하고 파도도 거센데 / 邦家多難海波驚
옥련은 휩쓸려 압록강에 머물렀네 / 玉輦飄□鴨水營
어디 군사가 위급함을 구제하겠으며 / 何處蚍蜉能濟急
충의로운 맹세 몇 사람이나 할 것인가 / 幾人忠義更同盟
지금껏 은택은 다같이 입었으니 / 由來恩澤曾均被
나라 생각은 유나 선이 다를 수가 있으랴 / 却喜儒禪不異情
묘향산 휴정대사를 보아라 / 請看香山靜老宿
계도(중이 가지는 작은 칼) 휘두르는 곳에 장삼옷이 가볍도다 / 戒刀揮處衲衣輕
○ 7월. 중국 조정의 부총병(副總兵) 조승훈(祖承訓) 등이 차례로 강을 건너왔다. 상은 접반사 유성룡을 보내어 동강(東江)에서 맞이하여 의주로 왔는데, 유격 사유(史儒)를 선봉으로 삼아 가산(嘉山)으로 진격하였다. 병조 판서 이항복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조 장군은 조급하고 지모가 부족하니, 반드시 성공하지 못하리라.”
하였다. 조승훈이 가산에 이르러 우리 나라 사람에게 묻기를,
“평양의 적이 이미 물러간 것이 아닌가?”
하니 물러가지 않았다고 대답하자, 조승훈이 술잔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고 빌기를,
“적이 아직 있음은 반드시 하늘이 나에게 큰 공을 이루게 하려는 것이다.”
하였다. 이날 순안(順安)에 이르렀는데, 삼경에 수십 리를 행군하고 조승훈과 사유는 더 진군하려고 의논하였다. 군중에 왕만자(王蠻子)가 있었는데 점을 잘 친다고 하였다. 조승훈이 물으니, 왕만자는,
“오늘이 가장 좋은 날입니다. 물러서지 마시오.”
하였다. 조승훈이 그렇게 여기고 진격하여, 새벽에 성밑에 이르렀다. 군사를 지휘하여 성을 부수고 조승훈이 칠성문(七星門)으로 들어갔는데, 성내가 길이 좁고 굽은 골목길이 많아서 말이 잘 나갈 수가 없었다. 적이 험준한 곳에 의지하고 조총을 마구 쏘아대니, 철환(鐵丸)이 비오듯 하였다. 사 유격(史游擊)이 앞장서서 육박전을 벌여 군마가 많이 죽었다. 사유(史儒)가 성위에서 활을 쏘니, 적이 그가 장령(將領)인 것을 알고 일제히 총을 쏘아 사유는 탄환에 맞아 땅에 떨어지고 대조변(戴朝弁)ㆍ천총 장국충(張國忠)이 또한 탄환에 맞아 죽었다. 조승훈과 마세륭(馬世隆)은 부상을 입고 후퇴하였는데, 마세륭은 말에서 떨어져 죽고 후군(後軍)으로 진흙 속에 빠져 나오지 못한 사람은 모두 적에게 피살되었다. 조승훈은 군사가 무너지자 하룻밤에 2백 리를 달려 안주성(安州城) 밖까지 와서야 말을 세우고 역관 박의검(朴義儉)을 불러 말하기를,
“내 오늘 적을 많이 죽였다. 불행히 사유격이 전사하였고, 천시(天時)가 불리하여 큰비가 와서 진흙탕이 되어 적을 섬멸치 못하였으니, 마땅히 군대를 더 보태서 다시 나가리라. 너희 재상은 동요하지 말고 부교(浮橋)도 철거하지 말라.”
하고는, 말을 마치자 달려 이강(二江)을 건너 공강정(控江亭)에 주둔하였다. 조승훈은 전쟁에 패한 뒤로 간담이 서늘하여 적이 추격할까 두려워 이강(二江)을 건너려고 이처럼 급히 달렸던 것이다. 접반사 유성룡과 종사관 신경진(辛慶晋)이 가서 위로하고 양식과 찬을 실어 보냈다. 조승훈이 공강정에 이틀을 머무는데 밤낮 계속 큰비가 오고 군사는 들판 가운데 노숙하니, 의복과 갑옷이 다 젖어 모두 조승훈을 원망하므로 부득이 요동으로 퇴환하였다. 조승훈의 군사가 패하자 적은 더욱 교만하여져서 우리 군중(軍中)에 글을 보내왔는데, 양떼를 가지고 한 호랑이를 치는 격이라는 말이 있었으니, 양은 명 나라 군사에 비유하고 호랑이는 자신들을 비유한 것이다. 또 말하기를,
“일본의 해군 10여만 명이 다시 서해로부터 올 터인데 대왕(大王)의 행차는 이로부터 어디로 가겠는가?”
하였다. 적이 본래 수륙으로 합세하여 승전한 기세를 몰아 서쪽으로 쳐들어오려고 하였는데, 이미 이순신에게 저지당하여 나오지 못한 것이다. 이순신은 또 이달 초 6일에 원균(元均)ㆍ이억기(李億祺) 등과 노량(露梁)에서 모였는데, 적선 70여 척이 견내량(見乃梁)에 머물고 있는 것을 알고 바로 배를 정비하고 바다로 나갔다. 적은 우리 군사의 세력이 큰 것을 보고 배를 돌려 입항(入港)하였다. 항구에는 원래 70여 척이 길게 줄을 지어 진을 치고 있었는데, 항구가 좁고 물이 얕은데다가 숨겨진 섬들이 많아서 돌아 나오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이순신은 군사를 조금 내보내서 적을 유인하니, 적이 보고서 전부 나와서 추격하여 왔다. 아군은 싸우기도 하고 후퇴하기도 하여 한산도(閑山島) 바다까지 끌고 나와서 배를 돌려 접전하는데, 기를 휘두르고 북을 치며 불화살과 화포를 함께 발사하였다. 적이 기세가 꺾이어 조금 후퇴하자 장수와 군사들이 소리를 지르고 분발하여 적선 63척을 불태우니, 남은 적 4백여 명이 배를 버리고 해안에 올라 도망하였다. 여러 장병이 안골포(安骨浦) 앞바다까지 진군하였을 때 또 적선 40여 척이 있었다. 그중에 3척은 층루를 세웠는데 여러 배가 차례로 줄을 지어 정박하였다. 적은 이미 여러번 패한 터라 적접 충돌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앞에는 얕은 항구를 의거하고 뒤로는 견고함을 지고서 감히 나오지를 못하므로 이순신은 군사들을 독려하여 교대로 공격하였다. 해가 저물고 안개가 사방에 깔렸는데 남은 적 20여 척이 밤을 타서 항구를 빠져 달아나므로 추격하여 1백 50여 명을 베고 물에 빠져 죽은 자는 수없이 많았다. 이에 군공과 명성은 크게 떨치었고, 정헌대부로 진급되었다. 승전한 뒤 이순신은 문득 제장을 경계하며,
“자주 승리를 하면 교만하기 쉬운 법이니 제장은 삼가라.”
하였다. 이때 적이 여러번 호남을 엿보고 소란을 피우니, 이순신은, 국가의 군수물자가 모두 호남에 의지하고 있으니 호남이 실패하면 국가는 망한다고 생각하고, 지혜를 다하고 사려를 깊이하며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서 드디어 적의 한 팔을 자르니, 행장(行長)이 비록 평양을 빼앗기는 하였으나 감히 더 나아가지는 못하였다.
○ 조 총병(祖摠兵)이 강을 건너 돌아가서 요동 총병 양소훈(楊紹勳)에게 보고하기를,
“조선이 반역하여 전쟁중에 조선의 한 진영이 적에게 가담하였기 때문에 패전하였습니다.”
하니, 양소훈은 공문을 보내어 책망하였다. 산해관 주사(山海關主事) 장동(張棟) 역시 양승훈의 말을 신용하고 조선을 계속 의심하였다. 병부에서는 금의도지휘사(錦衣都指揮使) 황응양(黃應暘)을 보내어 의주에 가서 사실을 다시 조사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왕은 그를 중강(中江)에서 맞이하였다. 황응양이 왜의 서신을 얻어 증거를 삼고자 하므로 예조 판서 윤근수가 적이 대동강에서 보낸 서신을 두 장이나 보였으나 황응양은 믿지 아니하였다. 이항복이 서울에 있을 때 이미 이런 일이 있을 것을 염려하고 신묘년(1591, 선조 24) 통신사 등에게 준 왜의 서한을 가지고 있다가 그 편지를 보이니, 황응양이 가슴을 치며 크게 통탄하고 주상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아뢰기를,
“귀국의 사정이 이러한데도 중국의 의심을 면하지 못하고, 중국을 대신하여 병화를 입었는데도 도리어 악명을 입으니, 천하에 어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내가 조선을 위하여 사실을 해명하겠습니다.”
하고, 즉시 돌아가 병부 상서 석성(石星)에게 고하기를,
“조선의 임금과 신하가 초야를 헤매이며 나라와 함께 몸이 없어질 망정 천자의 은혜를 저버리지 아니하였으니, 군사를 일으켜서 구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니, 석성이 듣고 마음에 감동되어 이에 군사를 출동시켜 구원하기를 청하게 되었다. 이때 중국에서는 의논이 일치하지 아니하였다. 혹은 압록강을 굳게 지켜 그 변동을 관망하자고 하고, 혹은 이적(夷狄)끼리 서로 치는 것은 으레 있는 일이므로 중국이 구원할 필요가 없으니, 마땅히 압록강을 기키고 무력을 드러내서 시위하자 하고, 혹은 외번(外藩)이 나라를 잃게 되었으니, 우리가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기도 하였다. 석성은 또 화약과 적을 막아낼 병기를 먼저 주자고 하니, 과도관(科道官) 등이 상본(上本)하여, ‘병기와 화약을 외국에 주는 것을 금지한 것은 고황제의 법이니, 어길 수 없다.’ 하자, 석성이 다투어 말하기를,
“고황제(高皇帝)가 말씀하신 외국이란 워낙 멀리 있어서 명색만 속국이지 그 나라의 흥망이 중국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의 일은 국내의 일과 같은데, 만약 왜가 버젓이 조선에 살면서 요동을 침범하고 산해관에 이르게 된다면 경사(京師)가 진동할 것이니, 이는 곧 배와 가슴에 있는 병과 같은데, 어찌 예사로 논할 수 있으랴. 만일 고황제께서 오늘날에 계신다 하더라도 의심없이 반드시 내려줄 것이다.”
하였다. 그때에 사은사 신점(申點)이 옥하관(玉河館)에 있었는데 석성이 중정(中庭)에 불러들여 요동의 변을 보고한 문서를 꺼내 보였다. 신점이 크게 통곡하고 일행과 함께 조석으로 간절히 애원하고 매일같이 아문(衙門)에 이르러 강력히 원병을 요청하였더니, 황제는 문무 대신ㆍ구경(九卿)ㆍ와도(科道) 등 관(官)이 모여 여러 가지를 의론하도록 명하였다. 그 논의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만력 20년 7월 일, 먼저 해당 병부의 제본(題本)에, ‘특별히 대신 경략을 섬서(陝西) 각 진에 보낼 것과 군사를 거느려 왜노를 칠 것 등에 관하여 성지(聖旨)를 받들기를, ‘보낸 대신이 부(府)ㆍ부(部)ㆍ와도(科道) 등의 관에 도착시켜서 회의하고 와서 말하라.’ 하셨습니다. 각 아문에 이문(移文)하여 통지하는 것 외에 근래 해당 섬서독무 제신(諸臣)들의 주보(奏報)에 적의 형세가 군색해져서 멸망할 기일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경략을 보낼 필요가 없는 듯하다는 것과 왜가 조선을 범한 일에 대해서는 근래 요동 독무관의 자문에, ‘조선 팔도를 이미 다 차지하고, 또 인민을 어루만지며 쌀과 포목을 흩어주어서 항복하도록 꾀니 하는 짓이 헤아릴 수 없다.’는 것과 전항(前項)에 정왜문무대신(征倭文武大臣)을 보내야 할 것인지의 여부는 응당 속히 모여 의논하되, 본월 18일 5부(府)ㆍ9경(卿)ㆍ과도관이 궐문에 일제히 나아가 공동으로 회의한 것에 따르시리라 생각됩니다. 해당 후군도독부 장부사태부 겸태자태부 정국공(後軍都督府掌府事太傅兼太子太傅定國公) 서문벽(徐文璧)ㆍ중군도독부 장부사 정원백(中軍都督府掌府事靖遠伯) 왕학례(王學禮)ㆍ좌군도독부 장부사 오계작(吳繼爵)ㆍ우군도독부 장부사 숭신백(崇信伯) 비갑금(費甲金)ㆍ전군도독부 장부사 영강후(永康侯) 서문위(徐文偉) 등의 의논에는, ‘왜가 우리 울타리인 조선을 이겼으니 출병하여 구원하는 것이 진실로 좋은 방책입니다. 그러나 꼭 매우 급박하고 절실한 때에 모름지기 헤아려서 행해야 합니다.’ 하고, 해당 이부 상서 손농(孫鑨)ㆍ시랑 진우폐(陳于陛)의 의논은, ‘정왜대신을 보내는 것은 진실로 지력(智力)으로 치는 것이 상책이지만 우리 군사는 지형에 익지 못하고 군량을 계속 대기 어려우니, 적진에 깊이 들어가는 것을 가벼이 의논할 수 없습니다. 본 병부의 2좌(佐)에 1원(員)을 더 두되, 병기(兵機)에 익히 단련한 자를 구해서, 일이 없으면 본 병부에서 조도(調度)하고, 일이 급하면 군사를 거느리고 출정하여 제로(諸路)의 응원이 되게 하소서.’ 하고, 호부 상서 양준민(楊俊民)의 의논은, ‘강해(江海)가 넓고 멀어 험하고 평탄함을 헤아리기 어렵고 마초(馬草)와 군량을 마련하기 어려우니 윤조(綸詔 중국 황제의 조서)를 내시어 조선의 신민(臣民)에게 선유하여 의병을 모집하여 옛 나라를 광복하게 하기만 못합니다. 그런데, 그 나라에는 본디 화기(火器)가 없고, 산동 순무(山東巡撫)에서 제조한 것이 자못 많다고 들었는데, 필요한 수량을 나누어주소서.’ 하고, 호부 시랑 노유정(盧維楨)의 의논은, ‘대신은 모름지기 왜의 사정을 익히 알고 본디 홍제(弘濟)에 우수한 자를 얻어야만 바야흐로 보내기를 의논할 수 있습니다.’ 하고, 예부 시랑 한세능(韓世能)의 의논은, ‘조선을 은혜로 어루만질 것이고, 군사를 동원하여 구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으며, 또 절직(浙直)에는 총병을 설치하여 남병(南兵)을 제압하게 하고, 진강(鎭江)에는 총병을 설치하소서.’ 하고, 형부 상서 손비양(孫丕揚)의 의논은, ‘연해의 독무에 비왜칙서(備倭勅書)를 두어 그 지역을 구획하여 나누어 막게 하되, 순천(順天) 10로에는 유병영(游兵營)을, 보정(保定) 6부(部)에는 민기병영(民奇兵營)을, 산동에는 비왜위(備倭衛)를 두어, 왜와 싸운 경험이 있는 장수들을 다시 뽑아서 수전(水戰)을 가르치도록 하소서.’ 하고, 공부 상서 증동형(曾同亨)의 의논은, ‘경략(經略)을 다시 설치한다면 평일에 총독을 설치한 의의가 무엇이겠습니까. 인민은 적고 관리만 많으면 반드시 일을 그르치게 될 것이니, 계요총독부(薊遼總督府)에 비왜칙서를 증설하는 것이 편의하겠으며, 예전의 전례에 비추어 병부 시랑 1원을 증설하소서.’ 하고, 도찰원 좌도어사(都察院左都御史) 이세달(李世達)의 의논은, ‘정왜 대신을 파견하는 것은 의리에 어쩔 수가 없는 것입니다만, 시세를 헤아려서 시행함이 차례가 있어야 합니다. 왜노가 실컷 노략질하였으니, 오래지 않아 반드시 돌아갈 것이요, 만약 그대로 평양 등지에 있게 된다면 다만 앞서 분부대로 명령을 행할 뿐이니, 요동 무진장(遼東撫鎭將)이 먼저 병마(兵馬) 2개 부대를 출동시키고 다시 2개 부대를 첨가하되, 지모와 용맹이 있는 장관(將官)을 가려 군량을 많이 싸 가지고 그 경내에 바로 들어가서 조선 각 도의 용장ㆍ정병과 협동하여, 기회를 살펴 협력하여 적을 쳐부수기를 도모하고, 혹은 각 부근에 복병시켰다가 맥없이 돌아가는 것을 쳐부순다면 이기지 못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왜노로 하여금 조선의 개성과 평양을 차지하게 하여 그대로 주저앉아 떠나지 않고, 국왕이 이미 와서 내국(內國)에 붙으면 저 백성들이 임금이 없어 인심이 붙일 곳이 없어질 것입니다. 반드시 국왕에게 선유하여 저들 가운데 충의로운 배신으로 하여금 왕의 자제 중에 어진 이를 가려서 권서국사(權署國事)하게 하여, 여러 모로 각 도의 호걸들을 소집해 협력하여 근왕하게 하여 빨리 회복하도록 한 뒤에 우리의 선견 대장(先遣大將)이 정병을 거느리고 수륙으로 아울러 진격하여 섬멸한다면 실로 또한 어려울 것이 없을 듯합니다. 또 모름지기 선견 대장이 사용해야 할 병마와 선척과 마초나 군량을 어디서 준비하겠습니까? 반드시 다 넉넉해야만 장수를 보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계획으로는 요좌 진무에서 빨리 행할 것 뿐이니, 적당한 사람을 많이 차출하여 속히 조선에 가서 왜노의 거주를 정탐하여 수시로 빨리 보고하게 하여 진지(進止)를 결정하소서.’ 하고, 통정사(通政使) 두기교(杜其驕) 등의 의논은 ‘문무 대신은 재주와 명망이 충실한 자를 살펴서 5부와 첨서(僉書)의 반열을 떠나지 못하게 하고, 마땅한 사람을 추천하여 쇄약(鎖鑰)을 삼가면 요좌 봉강(封疆)의 경계로 인하여 구해낼 방도가 있으며, 또 조선이 제 나라를 회복할 마음을 격동시킬 수 있습니다.’ 하고, 대리시경(大理寺卿) 조세경(趙世卿) 등의 의논은 ‘조선이 공손히 순종한 지 오래였는데, 하루아침에 왜노의 짓밟음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즉시 수신(帥臣)을 보내어 정벌하여, 망국을 보존하고 번방을 튼튼히 하는 것이 또한 좋은 계책이지만 왜노가 조선을 새로 깨뜨리려는 속셈도 다 알기 어려우니, 관(官)을 보내어 정벌하는 것은 가벼이 의논할 수 없습니다.’ 하고, 이과도급사(吏科都給事) 이여화(李汝華) 등의 의논은 ‘대신이 적진 깊이 들어가서 정벌하는 것은 지형에 익숙하지 못하여 군량을 이어 대기 어려우므로 형세가 반드시 보낼 수 없습니다.’ 하고, 하남 도어사(河南都御史) 부호례(傅好禮) 등의 의논은 ‘왜노가 금과 비단이나 자녀들을 도모하지 않고 조선을 점거하고 있으니, 반드시 딴 뜻이 있는 듯합니다. 하물며 관백(關白)이 필부로 나라를 빼앗고 또 많은 나라를 아울러 차지하여 드디어 조선을 깨뜨렸으니, 이 또한 강적이므로 문무 대신 경략을 보내야 하나 저들의 지경에 깊이 들어가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한 것 등을 살펴보았습니다. 온전한 것으로써 승리를 취하는 것은 제왕의 군사요, 저들의 망할 것을 밀어서 우리의 보존할 방법을 튼튼하게 하는 것은 천조의 의리입니다. 모름지기 해당 조선의 주보(奏報)에 왜의 기세가 창궐하다 하니, 신들의 관직이 본 병부에 속해 있으므로 의리에 쳐 없애야 할 것입니다. 하물며 이미 우리에게 공손히 순종하는 속국을 함락하고 우리의 가까운 울타리를 거두어서 큰 멧돼지나 긴 구렁이처럼 탐욕에 한정이 없습니다. 만약 저들로 하여금 깊이 뿌리가 박히도록 한다면 반드시 화가 우리 중국에 미칠 것입니다. 신들이 애초에 특별히 문무 대신을 보내어 군대를 드날려 정벌하자는 의논은 우리의 작은 나라를 사랑하는 인덕(仁德)을 드러낼 뿐 아니라 또 저들이 내지(內地)를 범하려는 생각을 중지시키는 것이니, 병(兵)은 미리 소문내는 것을 귀히 여기는데 대개 의도하는 것이 있습니다. 도로를 알기 어렵고 마초와 군량을 계속 공급하기가 어렵다는 것으로 말하면 신하들의 의논한 내용이 진실로 이유가 있는 의견이지만, 조선 국왕이 우리에게 목숨을 맡기고 구원을 매우 급하게 바라는 것을 생각하면, 저들이 길을 인도할 것이니 도로를 알기 어려운 걱정은 없으며, 저들이 군량을 마련할 터이니 군수물자를 공급하는 것도 어려운 걱정은 없습니다. 또 담당 신하들이 일찍이 정예 인원을 보내어 평양 깊숙히 들어가서, 왜노가 인민을 불러모아 안심시키고 병장기를 정돈하면서 20여만 명이라 하는데 실제로도 수만 명임을 직접 보고 왔으니, 이러한 상황을 어찌 가벼이 볼 수 있겠습니까. 다만 요동 진무가 이미 군사를 내어 가서 응접하니 특별히 문무 대신을 보내는 것에 대하여 기다려야 할 듯하다고 한 것은 요동 진무로서도 당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러 신하들이 의논드린 것에 의거하여 말한다면, 사람마다 나라에 대한 계책이 충성스럽기는 같습니다. 그 안에 조선에 선유하여 의병을 소집하는 것같은 것이 망국을 진작시키는 으뜸가는 계책이니, 바라옵건대, 윤음을 내리시어 달려 보내어 한편으로 조선 국왕에게 직접 알려 팔도의 배신(陪臣)에게 격문을 전달하여 근왕병을 크게 모집하여 구업을 회복하도록 빨리 도모하게 하고, 우리는 강병을 더 보내어 함께 섬멸을 도모하소서. 왜노가 만일 먼저 도망친다면 우리도 깊이 들어갈 필요가 없고, 만일 군대를 거둬모아 웅거하면서 조선을 멸망시키려고 우리와 겨룬다면 하늘의 토벌을 크게 드러내어 단연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그때에 가서 크게 군대를 징발하여 문무 대신을 특별히 보낸다면 이부ㆍ공부가 의논한 대로 병부 시랑 1원을 더 설치하여 왜의 일을 오로지 처리하게 하자는 것이요, 이는 곧 신들이 말한 경략대신을 선임해야 한다는 것이거니와, 좌도어사 이세달이 청한 대신을 선임하여 강병을 거느리고 수륙으로 함께 진격하게 하자는 것은 바로 신들이 말한 무신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오니, 제신들의 의논이 신들과 같지는 않으나 그 뜻은 처음부터 서로 합치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바라옵건대, 성상께서는 신들이 예부와 이부 및 보정(保定)ㆍ산동 독무에게 공문을 보내어 일체 조회한 대로 시행하게 하소서.’
○ 성지(성지)를 받았는데, 다음과 같다.
조선이 왜의 침입으로 함몰되어 국왕이 매우 급하게 구원병을 요청한다. 이미 많은 관원의 회의를 거쳤고, 너 병부에서도 정보를 엿들어 실정을 알아냈으니, 곧 해야 할 일을 헤아려서 빨리 가서 구하고, 늦추어서 소용없게 되어 도리어 우리 변경에 해를 끼침이 없게 하라. 관을 설치하고 장수를 보내는 일에 관해서는 모두 의논드린 대로 하라. 잘 알았노라.
○ 병부에서 곧 먼저 원임 유격장군 장기공(張奇功)을 차임하여 은 2만 냥을 가지고 우리 나라에 보내주어서 마초와 양식을 사들여서 군량을 대게 하고, 또 흠차통령 절직조병 신기영 좌참장(欽差統領浙直調兵神機營左參將) 낙상지(駱尙志)를 보내는데 남병(南兵) 3천 명을 거느리고 의주 압록강 가에 둔을 치게 하였다.
낙상지는 호는 운곡(雲谷), 절강(浙江) 여요현(餘姚縣) 사람인데, 힘이 아주 뛰어나 천 근의 물건을 들 수 있으므로 낙천근(駱千斤)이라 불렀다. 또 황차통령남북조병(皇差統領南北調兵) 원임 부총병(原任副摠兵) 사대수(査大受)에게 보군(步軍) 3천 명을 거느리고 먼저 압록강을 건너가서 행궁을 호위하게 하였다. 사대수는 요동 철령위 사람이니, 영원백(寧遠伯) 이성량(李成梁)의 가정(家丁)이다. 날래고 씩씩하며 싸움을 잘하여 공을 여러번 세워 총병관에 이르렀다. 증명하는 시가 있다.
비호같은 장사들 압록강 건너오니 / 羆虎先驅渡鴨江
바다의 사나운 왜적들이 일시에 항복하리 / 鯨鯢海若一時降
황은이 넓고 넓어 하늘과 같아 / 皇恩浩蕩同天覆
다시 살아난 쇠잔한 백성 두 줄기 눈물을 흘리네 / 肉骨殘氓涕淚雙
○ 8월 1일. 순찰사 이원익(李元翼)ㆍ순변사 이빈(李薲) 등은 수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순안(順安)에 유둔(留屯)하고, 별장(別將) 김응서(金應瑞) 등은 용강(龍江)ㆍ삼화(三和)ㆍ증산(甑山)ㆍ강서(江西) 4개 읍의 군대를 거느리고 20여 개의 둔을 만들어 평양 서쪽에 진을 치고, 김억추(金億秋) 등은 수군을 거느리고 대동강 하류에 진을 쳐서 서로 지켜주는 형세를 만들었다. 그날 이원익 등이 제장들과 약속하고 일제히 진격하는데 평양성 북쪽으로부터 홀연히 적의 선봉을 만나 갑자기 맞닥뜨려 적 20여 명을 쏘아 죽였는데, 얼마 못 가서 적의 대군이 이르러 군졸이 놀라 무너지고 강변의 용사들 또한 손실이 많아 드디어 순안에 돌아와서 둔쳤다. 그때 중국 조정에서 바야흐로 나와 구원할 것을 의논할 적에 마침 섬라국(暹羅國) 사신이 와서 공물을 바쳤는데, 이 의논을 듣고서 도와서 왜국병을 멸망하고자 하였다. 병부에서 곧 제독주사(提督主事)의 게보(揭報)에 따라 상본(上本)하기를,
“섬라국왕 사신 악바라(握叭喇)가 군사를 독려하여 왜의 소굴을 소탕하기를 원하는 등의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성지를 다음과 같이 받았다.
오랑캐 나라 사신이 말한 내용에 의거하면 충의를 자세히 알 수 있으나, 일이 중대함에 관계되니 돌아갈 때 양광 총독(兩廣摠督)에게 가는 이문(移文)을 가지고 가게 하되, 일에 능숙한 관원 한 사람을 별도로 뽑아 오랑캐 나라 사신과 동행시켜 조선에 가서 조정의 덕의를 선유하고 회문(回文)을 가지고 와서야만 바야흐로 거행할 수 있다. 그 나머지는 모두 의논드린 대로 하라.
○ 병부에서 성지에 의하여 선유하고, 또 절강 사람 심유경(沈惟敬)을 유격장군으로 삼아 보내왔는데, 천자의 명을 받들고 압록강을 건너와서 왕과 의주에 모여 덕음을 선유하였다. 심유경은 절강 사람이라 하기도 하고 복건(福建) 사람이라 하기도 하였다. 그 아비가 장사하러 일본에 왕래하였기 때문에 일본의 일을 잘 알았다. 또 스스로 말하기를,
“가정 연간에는 절직총독(浙直摠督) 호종헌(胡宗憲)의 수하에 있었는데, 간첩을 사용하여 왜인을 많이 독살하여 왜국의 사정을 잘 알고 있다고 조정에 글을 올려 이로 인하여 나오게 되었고, 왜적의 실정을 정탐하는 것도 편의대로 처리할 것을 허락받았다.”
하였다. 그달 25일에 심유경이 순안에 도착하여 건산(乾山)에 올라 평양성을 바라보고 곧 통첩을 써서 자기 집 안사람 심가왕(沈嘉旺)에게 주었는데, 심가왕이 누런 보자기에 싸서 등에 짊어지고 말을 타고 곧장 달려서 보통문(普通門)을 거쳐 들어가서 적에게 힐문하기를,
“무슨 까닭으로 우리 속국에 깊이 들어와서 감히 천자의 군사에 항거하는가?”
하였다. 적의 추장 행장(行長)은 곧 절강 포로 장대선(張大膳)을 시켜 와서 서로 모여 의논할 것을 청하니, 심유경이 29일에 단기(單騎)로써 만나기로 했다. 행장은 또 심유경에게 글을 보내기를,
“가정 연간에 중국 조정의 장단(蔣丹)이란 자가 우리 일본을 유인하여 화친을 약속하고 공물(貢物)을 통하게 하겠다 하고는 복병을 하였다가 우리 사절을 남김없이 죽이더니, 오늘날 중국 조정에서 온 자도 장단의 옛일과 같은 짓을 하려는 것이나 아니오?”
하니, 심유경이 말하기를,
“중국 조정은 속국이 망하는 것을 불쌍히 여겨 군사를 보내어 와서 구원하려는 것이다. 너희 나라가 만약 마음을 고쳐 군대를 풀고 돌아간다면 일본의 백성들도 다 같은 우리 백성이니 중국 조정에서는 평등하게 보아 똑같이 사랑할 것이다. 어찌 속임수를 써서 백성의 목숨을 해치겠는가?”
하였다. 행장은 이를 믿고 기일이 되어 산밑에 진영(陣營)을 벌려 놓았다. 심유경이 가려는데 사람들이 모두 위태롭게 여겨 만류하는 자가 많으니 심유경은 웃으며,
“저들이 어찌 나를 해칠 수 있겠는가?”
하고, 집안 하인 서너 명을 데리고 떠나 왜의 진영 안에 들어가서 행장ㆍ조신(調信)ㆍ의지(義智)ㆍ현소(玄蘇)ㆍ종일(宗逸) 등과 만나보았다. 우리 군사가 대흥산(大興山) 꼭대기에 올라 바라보니, 왜군이 매우 많고 창칼이 서릿발처럼 번뜩이며, 심유경이 말에서 내려 진영 속으로 들어가는데 왜적들이 사면을 에워싸서 잡힐 듯하였다. 심유경이 중국 조정에서 백만 대군으로써 국경에 와서 진치고 있으니 너희들의 목숨이 조석에 달렸다고 큰소리치고, 또 현소를 꾸짖기를,
“하늘은 생명을 살리는 것을 좋아하는데, 너는 이미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으면서 어찌 반역하는 오랑캐를 좇아서 우리 속국을 무찌르느냐?”
하니, 현소가 머리를 조아리며,
“중국에 중봉조사(中峯祖師)의 4대손이 있었으니, 사명선사(四明禪師)라고 하였습니다. 가정(嘉靖) 18년에 나의 스승이 중국에 들어가서 사명선사를 뵈옵고 제자가 되었는데, 천자께서 그 멀리서 온 것을 가상히 여기시고 가사 한 벌을 하사하셔서 여태까지 보존하고 있습니다. 소승(小僧)은 의발을 계승하였기에 중국을 향하여 순종하려는 정성이 없지 않았는데 어찌 감히 역적을 도와 몹쓸 짓을 하겠습니까. 본국이 중국 조정과 오랫동안 끊어졌으므로 조선에 길을 빌려 봉공(封貢)을 구하고자 하는데, 조선이 도리어 군사를 집결하여 우리를 막기 때문에 오늘의 사태가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저만의 죄이겠습니까?”
하였다. 심유경이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미 정성껏 순종할 것을 생각하였다면 중국 조정에서 어찌 봉공(封貢)을 아껴서 멀리 있는 오랑캐의 소망을 끊어버리겠는가?”
하니, 행장의 무리가, “네 네.” 하였다. 이에 평양성 서북쪽 10리 밖에 표목(標木)을 세웠는데, 사람들은 모두 그 뜻을 헤아릴 수 없었다. 해가 저물어서야 돌아오는데 왜군들이 그를 매우 공순하게 전송하였다. 이튿날 행장이 편지를 보내어 문안을 드리고 또 말하기를,
“대인께서 서슬이 푸른 칼날 속에 계시면서도 안색이 변하지 않으시니, 비록 일본 사람일지라도 해칠 수 없었습니다.”
하니, 심유경이 대답하기를,
“그대는 당조(唐朝)에 곽 영공(郭令公 곽자의(郭子儀))이란 분이 있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는가. 단기로 회흘(回紇)의 10만 군진 속에 들어가서도 두려워 위축되지 않았는데, 내가 어찌 그대를 두려워하랴.”
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내가 돌아가서 성황(聖皇)께 보고하면 처분이 계실 것이다.”
하였다. 이에 9월 29일에 요동으로 돌아가서 내각(內閣)ㆍ본병(本兵)에 자세히 보고하니, 명하여 각(閣)ㆍ부(部)ㆍ구경(九卿)ㆍ와도(科道)에 회의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성지를 받들어, 실직(實職)으로 유격장군 서도지휘첨사(署都指揮僉事)를 제수하여 경략의 수하에 보내어 위임하여 쓰게 하였다. 그때 심유경이 돌아간 뒤 50일이 지나도 오지 않자 왜가 의심하여 큰 소리치기를,
“설날에는 압록강에서 말에게 물을 먹이겠다.”
하고, 적진으로부터 도망쳐 돌아온 백성도 있었는데 모두,
“적이 성을 공격하는 기구를 크게 수리한다.”
하여, 사람들이 모두 매우 두려워하였다.
11월 6일. 심유경이 다시 강을 건너왔는데, 병부에서 차부(箚付) 심유경에게 주어 왜군에게 타일러서 전군이 물러가게 하고 또 조선의 성곽과 토지와 왕자와 배신(陪臣)을 돌려주면 납관(納款)하는 일과 철병(撤兵)하는 것을 허락하겠거니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백만 대군으로써 가서 쳐 없애겠다고 하였다. 심유경이 왜군의 진영에 들어가서 며칠 동안 머물다가 돌아왔으며, 또 작은 모자 수만 개를 왜병들에게 고루 나누어 줌으로써 군대 수효가 많고 적음을 알아내어 장차 제독에게 보고하여 두 배의 군사로 치게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중국 대병(大兵)은 오히려 나오지 않아 조정에서는 다시 배신(陪臣) 심희수(沈喜壽)ㆍ윤근수(尹根壽)ㆍ정곤수(鄭崑壽) 등을 잇달아 보내서 원병 요청을 매우 급하게 하였는데, 사신의 행차가 서로 잇달아 길에 엮어놓은 듯하였다. 천자가 군사 출동을 이미 허락하니 병부 상서 석성(石星)이 정곤수 등을 화방(火房)에 불러들여 사태를 직접 물으니, 어떤 이는 눈물을 흘려 마지 않았으며, 행인사 행인(行人司行人) 설번(薛藩)을 보내와서 칙서를 받들어 유지를 내리게 하였다. 그 칙서는 다음과 같았다.
그대 나라가 대대로 동번(東藩)을 지켜 본래부터 공순하게 섬겼고, 의관(衣冠)과 문물이 낙토(樂土)로 불리었도다. 근래에 들으니, 왜노들이 창궐해서 함부로 침략질하여, 왕성(王城)을 공격하여 함락하고 평양을 노략질하여 점거하고, 백성은 도탄에 빠져 온 나라 안이 시끄러워졌으며, 국왕은 서쪽 바닷가로 피난하여 초야에서 떠돌아다닌다 하는데, 이렇게 몰락된 것을 생각하면 짐의 마음이 매우 측연하도다. 어제 급박함을 알리는 소식을 전하니, 이미 변신(邊臣)에게 칙명을 내려 군사를 내어 구원하게 하였고, 또 문무대신 2원(員)을 보내어 요양(遼陽)의 각 진(鎭)의 정병 10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적을 치는 것을 돕게 하였으니, 그대 나라 병마(兵馬)와 앞뒤로 협공하여 흉악한 왜노를 쳐 없애서 씨도 남지 않게 하기를 기약하라. 짐은 천명(天命)을 받았으니 중화와 사이(四夷)의 임금이다. 바야흐로 만국이 다 편안하고 사해가 조용한데, 보잘것 없는 저 왜놈들이 감히 함부로 날뛰는도다. 다시 동남 해변의 여러 진(鎭)에 칙명을 내리고 아울러 섬라국(暹羅國)ㆍ유구국(琉球國) 등에 선유하여 수십만 명의 군사를 모집하여 함께 일본을 쳐서 바로 그 소굴을 쳐서 부수리라. 힘써 왜적으로 하여금 항복하게 하여 바다 난리가 편안해진다면 관작과 후한 은전을 짐이 어찌 아끼겠는가. 이제 특별히 행인사 행인 설번을 차임해 보내어 칙서를 가지고 가서 그대 국왕에게 효유하노라. 그대 국왕은 조종 대대로 전해온 기업(基業)을 생각해야 하는데, 어찌 차마 하루아침에 가벼이 버릴 수 있겠는가. 빨리 치욕을 씻고 흉적을 제거하여 구국(舊國)의 광복을 힘껏 도모해야 하며, 다시 그대 나라의 문무 신민에게 각각 임금에게 은혜 갚는 마음을 굳게 하고 원수 갚는 의리를 크게 분발하도록 효유하라. 대개 선세(先世)의 영토를 회복하는 것은 큰 효도이고 군부의 환난을 급히 구하는 것은 지극한 충성이 되는 것이다. 그대 나라 군신(君臣)은 본디 예의를 알고 있으므로 반드시 짐의 마음을 본받아서 먼저 구물(舊物)을 회복하여, 국왕으로 하여금 개가를 부르며 환도(還都)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니, 이에 종묘사직을 보전하고 번방을 길이 지켜 짐의 먼 지역을 걱정하고 작은 나라를 사랑하는 뜻을 위로하라. 공경할지어다.
칙서가 이르니,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압록강 가에서 맞이하는데 목놓아 통곡하고, 신하들도 모두 통곡하니, 설번이 여러 말로 위로하였다. 왕이 설번에게 이르기를,
“왜노들이 상국을 범하려 하므로 소방(小邦)이 의리로 거절하다가 이런 참화를 당하게 되었소. 중국 조정에서 만약 왜노의 서계를 보면 그 사이의 실상을 알 것이오.”
하니, 설번은
“조정에서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하고는, 칙서를 반포한 뒤에 곧 돌아갔다.
○ 설번은 호는 앙병(仰屛)이요, 광주부(廣州府) 순덕현(順德縣) 사람이다. 기축년에 세 번 진사시에 장원을 하였으며, 얼굴이 엄숙하고 말이 민첩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또 사람을 보내어 요양(遼陽)까지 뒤따라가서 글을 올려 진정하니, 대략 이러했다.
소방(小邦)의 군병이 순안(順安)에서 군영을 치고 서쪽 통로를 가로막은 자 및 관군과 의병이 여러 곳에 나누어 둔친 자들이 모두 여름부터 가을을 보내게 되어 군사는 쇠잔하고 말은 지치며, 먹을 것은 없고 병장기는 낡았으며 더구나 옷은 없는데 추위는 닥쳐 아침저녁에 무너질 형세입니다. 적은 바야흐로 튼튼한 성에 웅거하고 창고를 독차지하여 먹을 것이 넉넉하고 날카로운 기세를 길러, 기회를 봐서 튀어나올 계획을 하고 있으니 소방의 상황이 하루가 더욱 급합니다. 이보다 앞서 누차 급함을 아룀이 한두 번만이 아닌 이유는 혹 중국 원병이 제때에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서 장황스럽게 늘어놓은 것이 아니라, 7월 24일 병부가 제본(題本)을 올려 성지를 받들기를, ‘조선이 왜노의 침략을 받아 함락되고 국왕이 원병을 청함이 더욱 급박하다. 그런데, 이미 많은 관원들의 회의를 거쳤고, 네 병부에서 득실을 탐지하였으니, 곧 행해야 할 일을 헤아려서 빨리 가서 구원하고 늦추어서 소용이 없게 되어 훗날 우리 변경의 폐해를 끼침이 없도록 하라.’ 하였는데, 소방의 임금과 신하들이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모두 소생할 날이 멀지 않았고 이 왜적을 멸망시킬 수 있다고 여겨 바야흐로 양곡을 쌓아두고 도로를 말끔히 닦아 목을 세워 몹시도 원병이 오기를 기다렸으나 여태까지 출사(出師)의 기일도 정해지지 않아 죽음을 앉아 기다리고 있사오니, 매우 답답하옵니다. 순안에 주둔한 군사가 정말 피약하기는 하나 오히려 힘껏 적을 막아 끓어서 지금 4개월이 되었으므로, 혹시 요양(遼陽)의 군사가 의주 및 탕참(湯站) 등지에 머물게 되고, 남병(南兵)의 포수 5~6천 명이 당도하여 며칠내로 압록강을 건너와서 성세(聲勢)를 벌이게 되면 협력하여 적을 섬멸하여 전승을 거두어서 위로는 황제의 작은 나라를 구휼하시는 인덕(仁德)을 펼 수 있고 아래로는 저희 나라의 끊어지게 된 목숨을 연장할 수 있으며, 앉아서 세월을 보내가며 대군이 오기를 기다려서 마침내 중국 조정에서 구제하는 지역을 밟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일의 시기가 매우 급박하므로 죽음을 무릅쓰고 간청하오니 지극히 황공함을 이기지 못하나이다.
설번이 이 글을 보고 회보하기를,
“천자께서 이미 나가 구원할 것을 허락하시어 대군이 귀국에 도착하게 되었으니, 과히 염려하지 마시고 적을 멸망시킬 기일을 기다리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 병부에서 정곤수 등이 돌아올 적에 마가은(馬價銀) 3천 냥을 주어 궁면(弓面)ㆍ화약 등을 사가지고 가서 군수물자를 돕게 하였다.
또 병부 우시랑 겸우첨도어사(兵部右侍郞兼右僉都御史) 송응창(宋應昌)을 흠차경략계요 보정 산동 등처 방해어왜군무(欽差經略薊遼保定山東等處防海禦倭軍務)로, 병부 직방청리사 원외랑(兵部職方淸吏司員外郞) 유황상(劉黃裳)ㆍ병부 직방청리사 주사 원황(袁黃)을 모두 흠차찬획 방해어왜 군무(欽差贊畫防海禦倭軍務)로 삼아 요동에 머물러서 모든 장수들을 절제(節制)하게 하였다.
송응창은 호는 동강(桐岡)이며, 항주(杭州) 우위적(右衛籍) 인화현(仁和縣) 사람이다. 가정 을축년에 진사에 올랐다. 일찍이 영하(寧夏)를 정벌한 공으로써 은 30냥과 모시 2표리(表裏)를 상으로 받고, 공에 준하여 승직(陞職)하였는데 이때에 조정에서 추천하여 조선에 관한 일을 전적으로 맡게 하였다.
유황상(劉黃裳)은 자는 현우(玄于), 호는 태경(太景), 하남(河南) 여녕부(汝寧府) 광주(光州) 사람이다. 만력 갑술년에 진사에 올랐는데, 천성이 매우 허탄하였다.
원황(袁黃)은 자는 곤의(坤儀), 호는 요환(了丸), 절강 가흥부(嘉興府) 가선현(嘉善縣) 사람이다. 만력 병술년에 진사에 올랐고 천성이 부처를 좋아하여 몸가짐을 중처럼 하였고, 일로(一路)의 관참(館站)에 표하차관(標下差官)을 두어 폐단을 금하니, 사람들이 매우 편리하게 여겼다.
○ 또 전군도독부 도독 동지가태자소보(前軍都督府都督同知加太子少保) 이여송(李如松)을 흠차제독 계요보정 산동등처 방해어왜군무 총병관(欽差提督薊遼保定山東等處防海禦倭軍務摠兵官)으로 삼아 3개 영장을 거느리고 전진하여 정벌하게 하였다.
이여송(李如松)은 호는 앙성(仰成), 요동(遼東) 철령위(鐵嶺衛) 사람이다. 아버지는 태자태보 중군도독부 좌도독 광녕총병관 영원백(太子太保中軍都督府左都督廣寧摠兵官寧遠伯) 이성량(李成梁)이다. 이성량의 조부는 본래 우리 나라 이산군(理山郡) 사람으로 독로강(禿魯江)에서 살았는데, 어떤 일로 사람을 죽이고 부부가 철령위로 도망쳐 들어가서 그대로 살았다. 그의 아버지는 변방에서 공을 세워 비로소 유격장군이 되었다. 이성량은 음직으로 지휘사가 되고, 오랑캐를 쳐부순 공으로 험산참장(險山參將)이 되어 땅 천리를 개척하여 오보(五堡)를 세워서 훈작(勳爵)을 받게 되었다. 이성량은 천성이 침착하고 엄숙하며, 지모가 많고 전투를 잘하며, 오랑캐들이 두려워하고 심복하여 생사당(生祠堂)을 세워 사모하였다.
이여송의 아우 여백(如栢)ㆍ여장(如樟)ㆍ여매(如梅)ㆍ여오(如梧)ㆍ여정(如楨)이 모두 벼슬이 총병에 이르러 금의옥대(錦衣玉帶)가 집안에 번쩍이고, 막사(幕士)나 가정(家丁)으로 도독 및 2품의 장군이 된 자 10여 명이 굽실거리며 성심으로 섬겨 노예와 같으니 세상에서는 분양왕(汾陽王) 곽자의(郭子儀)에게 비유하였으며, 또 당시의 명장 남당(南塘) 척계광(戚繼光)과 명성이 비슷하였다. 그래서 중국 조정에서도 의지하여 동북쪽의 쇄약(鎖鑰)으로 삼았다. 이여송의 어머니 숙씨(宿氏) 또한 여자 중의 배도(裵度)ㆍ곽자의(郭子儀)였다. 장수 집안에 태어나서 변방 일에 잘 알고 천성도 엄정하며, 장사(將士)를 더욱 잘 다스렸다. 요진(遼鎭)에 있을 적에 해마다 한 번씩 철령위에 돌아왔는데, 지나는 곳의 요새와 성곽의 완전하고 허술한 것, 군대의 정예하고 피폐한 것, 거마와 깃발의 정숙하고 어지러운 것 등을 살피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모든 진영의 비장들이 부인을 영원백과 다름이 없이 경외하였다. 여섯 아들 중에 다섯이 그의 소생인데 부귀가 모두 지극하였지만 자기 자신은 오히려 여자가 할 일을 지켰으며, 모든 며느리들은 담비갖옷이나 비단옷이 매우 많았지만 그녀의 생일에는 반드시 다 청포(靑布)같은 물품을 바치게 하여, 검소하기에 힘써야 함을 보여 주었으니, 이 또한 학문하는 사대부들도 어려운 것인데, 하물며 부인으로서 이와 같음에 있어서랴. 사람들이 따를 수 없는 일이다. 나이 겨우 40때에 영원백에게 소실을 두기를 권하여 예쁜 색시 왕씨(王氏)를 구해서 바치고는 자신은 여행을 하면서 왕씨로 하여금 사랑방을 차리게 하였다. 또 여러 자녀 및 며느리들로 하여금 왕씨를 자기처럼 대우하게 하고, 만약 조금이라도 마음에 맞지 않게 하면 그 자녀들에게 꾸중하기를
“왕씨는 내가 데려다놓은 사람이다. 왕씨를 업신여기면 이는 나를 업신여기는 것이다. 너희들 마음에 편안하겠느냐.”
하였다. 여러 아들들이 이미 고관 대작이 되었으되 조금이라도 교만하고 사치스러운 자가 있으면 곧 어린애처럼 땅에 엎드려서 매를 맞게 하였으나 감히 방자한 자가 없었다. 딸 하나가 소씨(蘇氏)에게 시집을 갔었는데, 그 남편과 사이가 나쁘자, 어린 아들이 가서 그 누이 편을 들어주었다. 부인이 듣고 크게 성내어,
“네가 이미 출가하였으면 이는 집을 나간 사람인데, 너희들이 문벌(門閥)의 성대함을 믿고 도리어 네 남편에게 거만을 피움이 이와 같은가.”
하고, 곧 아들을 불러 뜰에 꿇어앉히고 종아리를 수십 대나 때리니, 그 딸이 울면서 호소하였다.
그러나 부인은 그 말을 듣지 않고,
“네가 지금부터는 네 남편과 시부모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면 나를 볼 생각을 말라.”
하였으니, 그 교훈의 엄정함도 이와 같았다. 그러므로 이여송 등이 잘 지켜 마침내 큰 공훈을 세웠으며, 부인이 복록을 누리는 것이 모두 이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여송은 대대로 장수 집안이어서, 병법을 익히 알고 사람을 사랑하고 어진 선비를 사귀었으며, 용모가 괴걸(魁傑)하고 도량이 너그러우며, 행군하고 진치는 데에는 단속을 적절하게 하니 지나는 곳마다 편하게 여겼다. 신묘년(1591, 선조 24) 여름에 토관총병 유동양(劉東暘)이 발승은(哱承恩) 등과 영하(寧夏)를 점거하고 오랑캐가 반란하여 형세가 매우 창궐하였다. 발승은은 바로 항복한 호인(胡人) 발배(哱拜)의 아들이다. 부자가 사납고 전투를 잘하여 흉노병을 여러번 패하게 하였으므로 벼슬이 총병에 올라 두 군영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정(家丁) 역시 수천여 명이나 되었다. 그래서 순무도어사(巡撫都御史) 당형(黨馨)이 매양 억제하니, 발승은 부자가 달마다 주는 양식을 주지 않는다는 것으로 대중을 격동하여 난을 일으켰는데, 관군이 누차 패하여 버티지 못하였다. 이여송이 총병 소여훈(蕭如薰)ㆍ상거경(常居敬)ㆍ심사효(沈思孝)ㆍ요계가(姚繼可)ㆍ마귀(麻貴)ㆍ유승사(劉承詞)ㆍ이여장(李如樟)ㆍ양문부(楊文孚)ㆍ이영(李寧) 등을 거느리고 10만 군사로 소탕해 내니, 곧 이여송의 관직을 도독동지(都督同知)로 승진시키고, 음직으로 자식에게는 금의위 지휘동지(錦衣衛指揮同知)의 관직을 세습시키고, 상으로 은 1백 냥과 대홍저사(大紅紵絲) 4표리(表裏)를 받았는데, 군사를 돌릴 겨를도 없이 또 동쪽을 정벌하라는 명을 받았다. 그래서 휘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북경(北京)으로 달려갔다가 그대로 요동을 향하여 모든 장수를 분담시켜 왜를 정벌하였다.
정왜 부총병관서 도독첨사(征倭副摠兵官署都督僉事) 이여백(李如栢)을 중협대장(中協大將)으로 삼았다. 이여백은 호는 배성(背城), 제독의 아우인데, 친병(親兵) 1천 5백 명을 거느리게 하였다. 정왜부총병관서 도독첨사 양원(楊元)을 좌협장군(左協將軍)으로 삼았다. 양원은 호는 국애(菊厓), 정요좌위(定遼左衛)의 사람이다. 처음에는 송경략(宋經略) 중군(中軍)이었는데 끌어와 친병 2천을 거느리게 하였다. 정왜부총병관 도지휘사(征倭副摠兵官都指揮使) 장세작(張世爵)을 우협대장(右協大將)으로 삼았다. 장세작은 호는 진산(鎭山), 광동 우위(廣東右衛) 사람이다. 친병 1천 5백 명을 거느리게 하였다. 3영을 나눈 뒤에 모든 장수를 3영에 분속하였다. 흠차협수선부 동로통령 전영병도지휘사(欽差協守宣府東路統領前營兵都指揮使) 임자강(任自强)은 자는 체건(體乾), 호는 관산(冠山), 대동(大同) 양화위(陽和衛) 사람인데, 선부병(宣府兵) 1천 명을 거느리게 하고, 흠차통령계요 준화참장(欽差統領薊遼遵化參將) 이방춘(李芳春)은 자는 응시(應時), 호는 청강(晴岡), 북직례(北直隷) 대명부(大名府) 평로위(平虜衛) 사람인데, 마병(馬兵) 1천 명을 거느리게 하였다. 그는 말타며 활쏘기가 장기여서 행군하다가 새를 만나면 문득 몸을 뒤집어 달리면서 쏘아 잡았다. 군사를 아주 엄하게 대하고 상벌을 즉시 처결하여 부하들이 애모하였다. 흠차유격장군(欽差游擊將軍) 고책(高策)은 호는 대정(對庭), 산서(山西) 천성위(天城衛) 사람인데, 마병 1천 명을 거느리게 하고, 흠차통령산동 추반경략표하어왜방해 유격장군(欽差統領山東秋班經略標下禦倭防海游擊將軍) 전세정(錢世禎)은 호는 삼지(三池), 남직례(南直隷) 소주부(蘇州府) 오강현(烏江縣) 사람인데, 마병 1천 명을 거느리게 하니, 호령이 엄정하고, 흠차통령가 호소송조병 유격장군(欽差統領嘉湖蘇松調兵游擊將軍) 척금(戚金)은 호는 소당(蕭塘), 산동(山東)등주위(登州衛) 사람인데, 자칭 남당(南塘) 척계광(戚繼光)의 일가라 하고 어떤 이는 그의 손자라 한다. 그에게 보병 1천 명을 거느리게 하였다. 흠차통령선부 중영병유격장군(欽差統領宣府中營兵游擊將軍) 주홍모(周弘謨)를 군사 1천 명을, 흠차통령계진 유격장군(欽差統領薊鎭游擊將軍) 방시휘(方時輝)는 산서 울주위(蔚州衛) 사람인데, 마병 1천 명을, 흠차하양 유격장군(欽差河陽游擊將軍) 고승(高昇)은 마병 1천 명을 거느리게 하고, 흠차건창 유격장군(欽差建昌游擊將軍) 왕문(王問)은 호는 의유(義儒), 의리와 용맹이 남보다 뛰어나고 몸가짐을 매우 바르게 하여 지나는 곳마다 편안하다 하였다. 그는 마병 1천을 거느리게 하였다. 이 아홉 장수는 모두 이여백이 통솔하게 하였다.
흠차통령 요양 원임 부총병(欽差統領遼陽原任副摠兵) 왕유익(王有翼)은 호는 심헌(心軒), 하남(河南) 언능적(鄢陵籍) 사람이니, 마병 1천 2백 명을, 흠차통령계진조병 원임 부총병(欽差統領薊鎭調兵原任副摠兵) 왕유정(王維貞)은 삼만위(三萬衛) 사람인데, 마병 1천여 기를, 흠차의주위 진수참장(欽差義州衛鎭守參將) 이여매(李如梅)는 호는 방성(方城), 제독의 아우인데 마병 1천여 기를, 흠차요진 조병참장(欽差遼鎭調兵參將) 이여오(李如梧)는 또한 제독의 아우인데 마병 5천 1백여 기를, 흠차요동 총병표하영 영이병 원임참장(欽差遼東摠兵標下營領夷兵原任參將) 양소선(楊紹先)은 전둔위(前屯衛) 사람인데 마병 5천여 기를, 흠차진수요동동로부총병(欽差鎭守遼東東路副摠兵) 손수염(孫守廉)은 호는 고촌(古村), 철령위 사람인데, 마병 5천여 기를, 흠차통령보진건준조병 유격장군(欽差統領保眞建遵調兵游擊將軍) 갈봉하(葛逢夏)는 마병 2천여 기를 거느리게 하니, 이 일곱 장수를 모두 양원(楊元)이 통솔하게 하였다.
원임 부총병 조승훈(祖承訓)은 평양에서 패하여 파직되어 충군이 되었는데 백의로 종군하여 공을 세우게 하고, 흠차통령 절강유격장군 오유충(吳惟忠)은 호는 운봉(雲峯), 절강 금화부(金華府) 의오현(義烏縣) 사람인데 보병 1천 5백 명을, 부총병 왕필적(王必迪)은 남병(南兵) 1천명을, 흠차통령 창평우영병참장(欽差統領昌平右營兵參將) 조지목(趙之牧)은 마병 1천 기를, 흠차통령남북 조병탁주참장(欽差統領南北調兵涿州參將) 장응충(張應种)은 마병 1천 5백 기를, 흠차통령 산서영 원임참장(欽差統領山西營原任參將) 진방철(陳邦哲)은 보병 1천 명을, 흠차제독표하 통령대동영병 유격장군(欽差提督標下統領大同營兵游擊將軍) 곡수(谷燧)는 대동위(大同衛) 사람인데 마병 1천 기를, 흠차보정 유격장군(欽差保定游擊將軍) 양심(梁心)은 마병 1천 기를 각각 거느리게 되니, 이 여덟 장수를 모두 장세작이 통솔하게 되었다.
그 외에도 청용 장관(聽用將官)이 그 부류가 또한 많았다. 유격장군 왕수신(王守臣)은 호는 덕헌(德軒), 요동 삼만위(三萬衛) 사람인데, 조승훈과 평양을 치다가 이기지 못하고 패하여 돌아갔는데, 이때에 와서 다시 나왔고, 흠차통령 요동조병 기보양영 관전보부총병(欽差統領遼東調兵騎步兩營寬典堡副摠兵) 동양정(佟養正)은 자는 자충(子忠), 호는 몽천(蒙泉), 요동위 사람이니, 만력 경진년에 무과 진사하였고, 의주에 와서 머물었다. 통령대령영병 원임참장(統領大寧營兵原任參將) 장기공(張奇功)은 요동 사람으로 심유경과 서로 사이가 좋았는데, 심유경이 행장(行長)과 서로 만나보고서 행장을 놓아 돌려보냈다는 것을 듣고 발을 구르며 탄식하기를,
“만약 한 명만이라도 복병하였다가 잡았으면 군사 한 명 수고하지 않아도 될 것인데, 이런 기회를 놓쳤으니, 애석하다.”
하였으니, 대개 심유경의 본심을 몰랐던 것인데, 이때 와서 마병 1천 기를 거느리고 왔다.
흠차진정 유격장군(欽差眞定游擊將軍) 조문명(趙文明)은 마병 1천 기를, 흠차섬서 유격장군(欽差陝西游擊將軍) 고철(高徹)은 마병 1천 기를, 흠차통령요동좌영조병 원임 부총병 서도독동지(欽差統領遼東左營調兵原任副摠兵署都督同知) 이평(李平)은 호달(胡㺚)사람인데, 영원백 이성량(李成梁)이 그의 모습을 기이하게 여겨 거두어 자기 아들로 삼았으며, 공을 쌓아 이 관직에 이르렀는데, 마병 8백 기를 거느리게 하였다. 흠차산서 유격장군 시조향(施朝鄕)은 마병 1천 기를, 요동도지휘사 사첨사(遼東都指揮使司僉使) 장삼외(張三畏)는 요동 삼마위 사람인데, 의주에 와서 머물면서 군량과 마초를 오로지 관장하게 하였고 몸가짐을 간략하게 하여 사람들이 매우 편의하게 여겼다. 책사(策士) 사용재(謝用梓)는 호는 용암(龍巖), 절강 소흥부(紹興府) 여요(餘姚) 사람인데, 태학사 사천(謝遷)의 손자라 자칭하였는데, 참장 낙상지(駱尙志)를 따라 나왔다. 수비(守備) 웅정동(熊正東)ㆍ이대간(李大諫) 등도 청용(聽用)으로서 왔다. 대간은 호는 북천(北泉) 절강 가흥부(嘉興府) 수수현(秀水縣) 사람인데, 압록강가에 와 있었다. 또 원임 하간부동지(原任河間府同知) 정문빈(鄭文彬)ㆍ산서(山西) 노안부(潞安府) 호관현(壺關縣) 지현(知縣) 조여매(趙如梅) 등은 군량과 마초를 전적으로 관장하게 하였다. 조여매는 호는 초암(肖庵), 요동 철령위사람인데, 제독과 가장 친하여 군사(軍事)를 모두 함께 상의하였다. 제독이 부대 편성을 마치고, 세 영장을 전진하게 하고, 또 사대수(査大受)를 선봉으로 삼고, 갈봉하를 행궁 호위의 군사를 대신 거느리게 하고, 제독은 스스로 표하장관 원임 참장 도지휘사 방시춘(方時春), 영원백의 가정(家丁) 원임 참장 이영(李寧), 원임비어(原任備禦) 한종공(韓宗功)ㆍ이봉양(李逢陽) 등을 거느리고 잇달아 전진하였는데, 정병이 4만여 명이요 용장이 60여 명이며, 군호를 10만이라 하고 통원보(通遠堡)까지 와서는 유둔(留屯)하고 전진하지 않았다. 조선에서 집의 이호민(李好閔) 등을 보내어 제독에게 다음과 같이 정문(呈文)하였다.
조선국 배신(陪臣) 사헌부 집의 이호민(李好閔) 등은 적(賊)의 모계를 헤아릴 수 없고 사세가 더욱 급박하여 빨리 대병을 진출시켜 먼저 힘을 발휘해서 승리를 거두어 주시기를 바라는 일로 말씀드립니다. 이달 13일에 요동도사 군정첨서 관둔 도지휘사(遼東都司軍政僉書管屯都指揮使) 장(張)의 패문(牌文)을 받았으며, 흠차경략 계요보정산동 등처 어왜군무 병부 우시랑(欽差經略薊遼保定山東等處禦倭軍務兵部右侍郞) 송(宋)으로부터 근간에 부총병관(副摠兵官) 동양정(佟養正)의 품칭(稟稱)에 의하면 왜노가 군사를 거느리고 중화(中和)ㆍ토성(土城) 등지를 침입 점령하였다고 하고, 또 심유경(沈惟敬)의 품칭(稟稱)에 의하면 왜노가 조공 왕래를 청원하고 애걸한다고 하는 등의 정황이 각각 병부에 도착하였습니다. 여기에 의거하면 왜노가 거짓으로 조공 왕래를 빙자하고 비밀리에 토성을 공격하는 것이 분명히 우리 군사를 늦추려는 것임을 알 수 있으니 마땅히 왕래를 금지하고 엄하게 조사 힐문하여야 하기에 이 패문을 올리는 것이니 본관은 조선 국왕에게도 알려서 병마(兵馬)를 긴요한 곳에 많이 설치하여 서로 서로 힐문하게 하며, 만일 심유경 본인이나 혹 그의 보내는 사람, 혹 가정(家丁)으로 저들 주둔지에 있는 자가 평양(平壤)으로 가서 소식을 전하는 것이나, 혹 가솔 가운데 중국으로 달아 돌아오는 자를 만나면 곧 조사 나포하여 병부로 보내어 사실을 캐어 처리하게 할 수 있게 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거듭 유시를 받고, 국왕의 전지도 함께 받들었는데, 그 긴급한 소관사는 이미 경략과 병부의 전령에 의하여 이렇게 시행하게 되었다는 것으로 요동에 치보(馳報)하고, 본국의 급박한 사정을 들어 제독(提督)과 경략 두 노야(老爺) 앞에 드리고, 빨리 진병(進兵)하여 주시기를 청하게 되어 이 직책을 받들기로 위임을 받고 나왔습니다. 살펴보면 왜적의 흉모가 저희 나라에만 있지 않습니다. 지금 이미 저희 나라를 다 함락하고 평양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형세와 언사가 더욱 어긋나 그 계획이 그만두고 말 것이 아니니, 말 한 마디로 군사를 풀어 돌아간다고 하니 단정코 이럴 이치가 없습니다. 전일 심 유격(沈游擊)이 재차 적진에 가서 저들과 화친에 대한 의논을 하였는데, 그 사실을 비밀로 하여 알 수는 없지만, 분명히 은폐(銀幣)를 가지고 갔으며 또 10명의 왜노를 대동하고 경사(京師 명나라 서울)로 가는 것을 허락하고, 또 두 관원을 보내어 대마도로 갔으니, 저희 나라 군신들이 모두 해괴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유격은 해를 가리키면서 다른 일이 없다고 하니 그저 믿고 바라는 심정에 감히 의심을 하지는 못하고 이것은 반드시 일을 안전하게 성취하려는 것이라고 하니 천조의 조정 계책도 반드시 저들의 의논을 따라 춘추(春秋)의 수치로 삼는 일을 행하지 않을 것이 보장되므로 의심을 품은 채 믿음을 지키면서 성공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겨울철도 그럭저럭 지나 섣달이 다 가게 되었으니, 적을 토멸할 시기가 이미 십 중 아홉은 잃어버린 것으로 온 나라가 다 같이 민망히 여깁니다. 지금 송 경략의 유시를 받아 적으로 하여금 군사를 늦추고 겨울을 지나게 할 계획임을 알게 되니, 저희 나라에서는 비로소 전일에 조정 계획을 우러러 믿었던 것이 허사가 아니었음을 믿게 되었습니다. 또 어르신의 은덕으로 겨우 해관(海關)을 지나자 벌써 깊은 곳을 찔렀으니 탄복하는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생각하오면, 저 도적은 유격이 기한이 지나도 이르지 않는 것을 보고 현저하게 그것을 구실삼아 서쪽으로 나올 염려가 있는데, 근일 또 도순찰사 김명원(金命元)의 급보를 보면, 심 유격의 가정 왕귀(王貴)라는 자가 있는데, 그가 말하기를, ‘유격을 따라 적진에 들어가서 보았는데 적의 추장 평행장(平行長)이 유격을 향하여 본국 통사(本國通事) 김덕회(金德澮)가 유격을 이간하려고, 명(明) 나라 군사가 기회를 노려 장차 오니 반드시 살해당할 것이라고 하면서 나를 권하여 먼저 거병(擧兵)해서 서쪽으로 향하기를 권하며, 검을 들고 죽기를 청하기까지 하였다.’고 합니다. 지금 유격을 보니 그것이 간사하고 허황된 것임을 알 수 있으니 이와 함께 일반통사 김덕회(金德澮)가 옥에 갇힌 원인도 알게 되었습니다. 또 본도 순찰사 홍세공(洪世恭)의 급보에 의하면 그 중 안변(安邊) 등의 부(府)에 나갔던 초탐(哨探) 군인의 계속되는 급보인데, 왜적이 경성(京城)에 있던 무리들을 끌어내어 병력을 증가해서 살인과 약탈을 마음대로 행하는데 혹은 각처로 끼어 들고 혹은 진영을 들어 나가는 것이 목적은 본도의 양덕현(陽德縣) 지방을 향하려는 것으로서 봄철이 가까워지는데, 적의 모계가 더욱 깊어간다고 합니다. 생각하면 저 왜적이 원래 간첩이 많아서 우리 형편을 잘 알고 또 김덕회가 이미 기만당한 일로 잡혀서 갇히게 되었으니, 온갖 계교를 염탐해가면서 실익과 공을 얻으려고 반드시 못할 짓이 없을 것입니다. 안변의 왜적이 역시 말하기를, ‘양덕 지방으로 향하려 한다.’고 하니 모계(謀計)를 합하여 서쪽으로 향하는 것은 의심 없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왜적이 중화(中和)ㆍ토성(土城)을 침공하니, 이곳 진영은 전투를 제일 잘하기로 이름이 났으니 먼저 군사를 합하여 이곳을 취한 것으로써 어찌 뒤쪽의 근심을 끊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루 아침에 돌진해 나와서 우리 편이 머뭇거리고 있는 기회를 틈탄다면 어찌 군병을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군병이 원래 약하고 또 늙어서 막아낼 수가 없는데 각지의 물자와 마초는 도리어 적의 소유가 되니 그 사세가 정말 급박합니다. 낮은 관직에 있는 제가 어르신께서 이미 군병을 출발시킨 것을 모르고 사람을 보내 급박한 형편을 고하고, 당일로 어르신의 큰 군대 깃발이 앞에 서서 나가고 군사의 성세가 빛남을 보았습니다. 여기서 저희 나라의 급한 형편을 어르신께서 먼저 살피신 것을 알게 되어 우러러 바라보며 감격합니다. 곧 물러가서 저희 임금께 보고하려고도 합니다만 적이 밀려들어 조석을 보전하기 어려운 이 지경에서 날도 저물었기에 감히 입을 들어 몇 말씀 드립니다. 다시 속히 전진하여 주소서. 엎드려 바라건대, 어르신께서는 이미 큰 명을 받들어 저희 나라를 구제하시게 되었으니, 다시 속히 출동하시고 머무는 일이 없게 하여 주십시오. 기회가 누설되기 전에 나가고, 먼저 발동하여 남을 제어하는 계책을 생각하여 크게 황제의 위엄을 떨쳐주시면 이만한 다행이 없겠나이다. 긴급한 사기(事機)에 관련하여 차질을 가져오는 일은 없을까 해서 다시 번거롭게 글을 올려 청원하오니 자세히 살펴 시행하시기를 엎드려 빕니다.
제독이 올린 글을 보고, 정월에 진병하기로 허락하고서도 오히려 전진하려 하지 않았다. 조정에서 또 이조 판서 이산보(李山甫)를 보내어 제독의 군문으로 달려나가서 속히 군사의 출발을 청하였는데, 말과 태도가 간절하며 말할 때마다 눈물이 따라 떨어졌다. 제독이 술과 음식을 갖추어 대접하려 하니 이산보(李山甫)가 말하기를,
“군부(君父)께서 풀속에 계신데 의리상 차마 성례(盛禮)의 대접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고, 뜰 아래로 내려와서 통곡하니 제독이 감동하여 12월 25일에 강을 건넜다. 깃발이 1천 리에 펄럭이고 징과 북소리가 서로 들렸다. 우리 나라 백성들이 이 광경을 보고 즐거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상이 여기서 제독과 더불어 접견하여 극진히 위로하고 이어 눈물 흘리며 이르기를,
“황상의 망극한 은혜를 입어 대인을 만나보게 되었습니다. 저희 나라의 실낱같은 운명을 대인에게 부탁할 뿐입니다.”
하였다. 제독이 손을 들어 사례하며 말하기를,
“이미 황명(皇命)을 받았으니 어찌 죽기를 사양하겠습니까. 또 저희 선대는 본래 귀국 사람인데 제가 나올 때 부친이 역시 엄히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어찌 감히 귀국 일에 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사례하여 마지 않았다. 이보다 앞서 의주에는 예전부터 전해오는 이런 노래가 있었다.
막좌리 벌이 강물에 무너질 때 / 莫佐里坪盡爲江水所破
백마 장군이 마이산에서 오리라 / 當有白馬將軍從馬耳山出來
이른바 막좌리 벌이라는 것은 의주의 서쪽 성밖 땅으로서 성중 사람들이 여기서 농사짓는데 바로 인산보(麟山堡)에 연접되었으며, 마이산은 의주 통군정(統軍亭)과 마주 대한 곳으로 중국 지역이다. 이때 압록강 물이 점점 남쪽으로 옮겨 큰 들을 거의 다 파고 들어가서 의순관(義順館) 문앞에 이르러 나루터가 되었으며, 제독의 탄 말이 백마였으니, 그 말이 과연 맞았다. 또 증명하는 시가 있었다.
장군 한번 나오자 번개 빛 날으는데 / 將軍一出電光飛
흰 말 금 안장에 붉은 비단 옷이네 / 白馬金鞍赤錦衣
천자의 명을 받은 장수는 구름밖에 우뚝히 임하였고 / 玉節高臨雲外逈
천자의 군대가 저 멀리 해뜨는 곳을 가리키네 / 天戈遙指日邊歸
흉중의 병법에는 온전한 적이 없는데 / 胸中韜略無全敵
막하의 웅장한 군사는 호랑이 위엄 갖추었네 / 帳下雄兵藉虎威
압록강 머리에 북소리 진동하니 / 鴨綠江頭雷鼓震
동쪽 사람들 이마에 손 얹고 깃발을 바라보구나 / 東人加額望旌旗
○ 계사년 정월 1일. 흰 기운 세 줄기가 서북쪽에서 하늘로 뻗쳐 태양을 가로 건너질렀는데 곁에 쌍무지개가 있어 세 겹을 둘러싸니 사람들이 모두 웅장한 군사의 기운이 적을 이길 형상이라고 하였다.
○ 4일. 명 나라 대군이 숙천(肅川)에 당도하며, 선봉 부총병 사대수(査大受)를 시켜 먼저 순안(順安)으로 가서 왜노를 속여 말하기를,
“명 나라에서 이미 화친을 허락하였고, 심유격이 또 온다.”
하니, 여러 왜노들이 모두 기뻐하였으며, 현소(玄蘇)는 이런 시를 올렸다.
부상에 전쟁 그치고 중화에 복속하니 / 扶桑息戰服中華
사해 구주가 다 같은 한 집이라네 / 四海九州同一家
기쁨이 넘치는 그 기운 세상의 눈 다 녹이니 / 喜氣忽消寰外雪
천지의 봄 아직 이른데 태평화 필 것이네 / 乾坤春早太平花
왜노 추장 행장(行長)이 이에 소장(小將) 평호관(平好官)ㆍ길병패삼랑(吉兵覇三郞) 등 왜노를 보내어, 20여 명의 왜노를 거느리고, 통사(通事) 장대선(張大膳)과 함께 순안(順安)에 와서 심 유격(沈遊擊)을 맞이한다고 하는데, 실은 허실을 엿보려는 것이었다. 제독이 이에 부총병 사대수(査大受)ㆍ유격장군 이영(李寧) 등에게 격문을 보내어 유인하여 함께 술을 마시게 하고 군사를 장막 뒤에 숨겼다가 여러 왜노가 술이 취하자 이영 등이 잔을 들고 호령하니 복병이 갑자기 나타나 여러 왜노를 쳐서 거의 다 없애고, 또 길 추장과 호관을 잡았고 나머지 세 사람은 도망해 갔다. 적진 중에서는 이때에야 대군이 온 것을 알고 크게 소란하여 그치지 않았다. 제독이 이영(李寧) 등을 군령으로 처단하여 두루 보이니, 군중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찬획(贊畫) 유황상(劉黃裳)ㆍ원황(袁黃)이 급히 압록강을 건너와서 왕을 통군정(統軍亭)에서 만나 뵙고 물러나 글을 지어 우리 나라 백성들에게 이렇게 선유하였다.
너희 나라는 본래부터 문물이 발달하고 대대로 충정(忠貞)이 돈독하였다. 근래에 왜이(倭夷)가 무도하여 오랫동안 침략해 와서 너희 군신을 수풀 속에 있게 하니 계속 떠돌아다녀 그 곤궁함이 어떻겠느냐. 우리 대명(大明) 황제께서, 너희가 2백 년 동안 신하의 예절을 부지런히 지킨 것을 생각하여 만금의 비용을 아끼지 않고 장수를 명하여 정벌하게 하였다. 너희 나라에는 어찌 종실(宗室)로서 중임을 받고 충분(忠憤)이 분발할 이가 없을 것인가. 어찌 고을 관장으로서 지방을 지키며 강개히 목숨을 내놓을 이가 없을 것인가. 어찌 충신으로서 임금이 근심하면 신하가 욕된다는 생각을 품을 이가 없을 것인가. 어찌 의사(義士)로서 몸을 바쳐 나라에 보답할 생각을 일으킬 이가 없을 것인가. 마땅히 하늘같은 큰 위엄이 진동하는 기회를 타서 빨리 의병을 불러모아 각기 한 부대씩의 군사를 이끌고 함께 구벌(九伐)의 뜻을 펴야 할 것이다. 지금 왜이(倭夷)가 강한 양 날뛰지만 그 세력이 반드시 멸망될 것이요, 너희 나라가 비록 미약하지만 그 세력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니 서로 계획을 세우라.
먼저 천도(天道)로 논하자면 조선은 분야(分野)가 석목(析木)의 자리이다. 지난해 목성(木星)이 인방(寅方)으로 돌았는데 일본이 와서 범하니 이것은 우리가 세성(歲星)의 빛을 받았는데 저들이 침노하는 것으로 하늘을 거슬러 행하는 일이니 비록 강하나 반드시 약해질 것이다. 이것이 첫째 이유이다. 왜의 천성이 추운 것을 두려워하는데, 금년은 음(陰)이요, 풍목(風木)이 하늘을 맡고 양명(陽明)이 금을 마르게 하여 처음 기운이 되며, 입춘 후에도 20~30일 간이나 찬기운이 소멸되지 않는 것이 즉, 천시를 이용할 만하다. 이것이 둘째 이유이다. 너희 나라 군신이 모두 이 성에 모였는데, 새벽에 일어나 기운을 바라본즉 아름답고 왕성하여 비단이나 일산같다. 왕성한 기운이 우리에게 있으니 세력이 반드시 회복될 것이다. 이것이 셋째 이유이다.
다음 인사로 논하자면, 대국의 웅병(雄兵)이 범과 곰같으며, 무적의 대포가 한번 쏘면 1천 보(步)를 나가는데 저들이 자기 힘을 생각하지 못하니 힘없는 가루가 되고야 말 것이다. 이것이 첫째 이유이다. 경략(經略) 송(宋)은 깊은 계책과 함축 있는 모계를 귀신도 헤아리지 못하며, 제독 이(李)는 일편단심 충성심으로 온갖 전투에 용맹을 떨친 이로 옛날 명장의 기풍이 있다. 두 관직이 원래부터 충성과 절개를 가졌는데, 이제 동심 협력하여 이 도적을 섬멸하여 천자께 보답하려 하니, 두 나라의 군사를 합하여 이 궁한 도둑을 몰아내는 것은 떨어지는 것을 흔드는 것과 같다. 이것이 둘째 이유이다. 관백(關白)이 강포하여 위로 그 임금을 위협 제어하고 아래로 그 민중을 학대하여 하늘이 망하게 하려고 하여 우리에게 손을 빌리는 것이다. 이것이 셋째 이유이다.
어제 국왕을 뵈니, 거동이 침착하고 용모가 준위(俊偉)하여 형세가 반드시 중흥할 것이며, 너희 나라에서 전후에 보낸 여러 사절이 천조(天朝)에 군사를 청하는데 성의가 간절하고 측은하며 눈물이 비오듯하여 신포서(申包胥)가 초(楚) 나라의 사정을 울며 호소하던 뜻과도 유사하다. 임금과 신하가 이러하니 어찌 끝내 침체하고 곤궁하기만 할 것이며, 순(順)으로 역(逆)을 치는데 무슨 공이나 이루지 못함이 없을 것이다. 이것이 넷째 이유이다.
왜노의 믿는 것은 조총이다. 그러나 세 번 쏜 후에는 계속 쏘기 어려우며, 그 군사가 많지만 강한 자는 얼마 안 된다. 앞에 있는 1백~2백 명만 죽이면 나머지는 모두 바라만 보고도 도망해 갈 것이니, 지금이야말로 이길 수 있는 기회요, 바로 지사(志士)가 공을 세울 때이다. 천조의 명령이 우리 나라나 너희 나라를 물론하고 누구나 평수길(平秀吉)ㆍ평수차(平秀次) 및 중 현소(玄蘇)를 사로잡거나 베는 자가 있다면 사람마다 은 1만 냥을 상으로 주고 백작(伯爵)을 봉하여 대대로 계승하게 하고 평수가(平秀嘉)ㆍ평수충(平秀忠)ㆍ평행장(平行長)ㆍ평의지(平義智)ㆍ평진신(平鎭信) 등 이름 있는 여러 추장을 사로잡은 자는 은 5천 냥을 상으로 주고 대대로 지휘사를 계승하게 하며, 그 아래의 사로잡은 자에게는 각각 상여의 등급이 있게 하였다. 너희 나라 신민이 이때에 군중을 모아 함께 큰 공을 세운다면 본국의 사직을 회복할 수 있고, 또 천조의 후한 상을 탈 수도 있으며, 쇠한 나라의 유민(遺民)으로서 집안을 일으키는 시조가 될 것이니, 어찌 빛날 일이 아니겠는가. 여러 도의 신민과 의병으로 이미 일어난 자는 다시 전진하고, 아직 일어나지 못한 자는 속히 불러모아, 혹은 협력해서 왜노의 세력을 좌절시키고, 혹은 그 해이하게 돌아가는 것을 공격하며, 혹은 군량 운반을 계속하되 모든 조처를 수시로 모두 편리할 대로 하게 하라.
조정에서 선전관을 나누어 보내어, 이 선유문을 가지고 주야로 여러 곳에 분포하며, 제독은 대군을 거느리고 계속 전진하였다. 안주(安州)에 이르러 성의 남쪽에 진영을 설치하니 군대의 깃발과 위용이 정제되고 엄숙하여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체찰사 유성룡이 제독에게 보기를 청하니 제독이 들어오라고 하였다. 유성룡이 동헌으로 나가니 제독이 의자를 마련하고 서로 접대하였는데, 유성룡이 머리를 조아려 사례하며 이어 소매 속에서 평양 지도를 내어놓고 형세와 병마가 들어갈 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니 제독이 다 보고서 붉은 먹을 묻혀 붓으로 그곳들을 점찍었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적은 조총만을 믿는데 우리는 대포를 사용하여 모두 5~6리쯤 나아가니 적이 어찌 당해내리오.”
하였다. 유성룡이 물러나왔는데, 제독이 시 한 수를 부채 폭에 써서 유성룡에게 보내었다. 그 시는 이러하였다.
군사를 거느리고 밤중에 강을 건너니 / 提兵星夜渡江干
삼한이 편안치 못해서라네 / 爲說三韓國未安
임금께서 날마다 군사 오는 소식 기다려 / 明主日懸旌節報
신하들은 밤에도 술잔을 들지 못하였네 / 微臣夜釋酒杯歡
봄 들어 살벌한 기운에 마음이 오히려 장대한데 / 春來殺氣心猶壯
이 요사한 기운을 제거하니 등골 벌써 싸늘하리 / 此去妖氛骨已寒
담소간의 큰 소리가 승산이 아니지만 / 談笑敢言非勝算
꿈에도 언제나 말타고 달린다네 / 夢中常憶跨征鞍
유성룡이 백상루(百祥樓)에 있다가 이 시를 받아 보고, 읊으며 되새겨보기를 한참 동안하였다. 이날 밤 삼경에 문득 제독의 휘하 사람이 군중의 비밀 약속 세 조목을 가지고 와서 보이는데, 그 성명을 물으니 말하지 않고 갔다. 이튿날 제독이 활을 당겨 줄을 울리며 곧 두어 명 기병으로 달려 순안(順安)으로 나가고, 여러 군중에서도 연일 뒤따라 떠나갔다.
○ 6일. 명 나라 군사가 바로 평양성 밖에 이르러, 여러 장수들을 부대별로 나누어서 사면으로 둘러쌌다. 왜적 1만여 명이 벌려 섰는데, 앞에는 사슴뿔 모양의 나무 울타리를 둘러치고, 방패를 끼고 검을 휘두르며 형세가 매우 창궐하였다. 또 한 왜장은 왜적 4~5천 명을 거느리고, 대장기를 세우고 북을 달고 치고 소라를 불고 징을 두들기면서 성중을 순찰하고 여러 적들을 지휘하였다. 또 본성 안팎에 험한 시설을 하여 형세가 아래서 위로 공격하기 어려웠다. 평양성 북쪽 모란봉(牧丹峯) 위에는 적 2천 명이 있는데 청백색의 깃발을 세웠으며, 거마목(拒馬木)을 벌여 설치하고, 북치고 떠들어대며 함성을 올리면서 대기하고 있다. 그런데 그 봉우리가 높이 솟아서 형세가 제일 요긴하였다.
제독이 이에 남방 군사 1지대(枝隊)를 보내어 모란봉 길을 따라 나가며 올려칠 것같이 하니, 우리 나라에서도 승병으로 그 형세를 돕게 하였다. 적이 높은 곳에 올라가서 포를 쏘자 우리 군사들이 거짓 물러가는 체하니 적이 비로소 고개를 넘어서 따라왔다. 명 나라 군사가 무쇠 방패를 버리고 가니 적이 다투어 가졌는데 명 나라 군사가 다시 공격하여 얼마를 베고 노획하였다. 적이 물러가 봉우리 위에 머물자 제독이 징을 쳐서 군사를 거두어 군영으로 돌아와서 유진(留陣)하였다. 이날 밤 인시(寅時)에 왜 3천여 명이 함매(銜枚)하고 가만히 나와서 총병 양원(楊元)ㆍ총병 이여백(李如栢)ㆍ도지휘사(都指揮使) 장세작(張世爵) 등의 세 진영을 공격하였는데, 세 진영 장수가 각기 그 병사를 통솔하여 힘써 싸워서 죽여서 격퇴하였다.
○ 7일. 밤에, 적병 약 8백여 명이 다시 이여백의 진영을 공격하였는데, 명 나라 군사들이 일시에 기와 등불을 없애고 거마목(拒馬木) 아래서 일제히 불화살을 쏘니 대낮같이 밝았으며 적이 감히 범하지 못하였다.
○ 8일. 이른 새벽에 제독이 분향하고 날을 점쳐 길한 괘를 얻었다. 부대별로 여러 장수를 억제하여 적의 수급(首級)을 베는 일이 없도록 효유하여, 3면을 공격 포위하되 동쪽 1면을 비워두게 하고, 오유충(吳惟忠)에게 맡겨 모란봉을 공격하여 가만히 서남쪽을 취하게 하되, 왜가 고려 군사를 쉽게 여기므로 조승훈(祖承訓)을 시켜 거짓으로 복장을 모방하고 잠복하여 기다리게 하였다.
제독이 전령을 끝내고, 밥을 먹고 장비를 갖춘 다음 세 영(營)의 장수들과 함께 나누어 각기 소속 장병을 거느리고, 성밖 서북쪽을 둘러싸서 진을 칠성(七星)ㆍ보통(普通)ㆍ함구(含毬) 세 문밖에 벌였다. 적은 성위에 홍백색의 깃발을 세우고 항전하는데, 제독의 수하 병사 2백여 기(騎)가 성 아래까지 나가서 오가며 지휘하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 힘을 다할 것을 생각하였으며 진시(辰時)에는 여러 군병들을 나누어서 차례로 점차 나아갔다. 제독의 군영에서 먼저 대포를 쏘고, 각 진에서도 각종 화기를 일시에 함께 쏘니 메아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산악이 모두 움직이는 듯하였다. 큰 들판이 캄캄해지고 연기와 불길이 하늘에 닿으면 수십 리나 퍼져나가는데 불화살이 공중으로 퍼져나가는 모양이 베를 짜는 것같았다. 불길이 세고 바람이 급하여 바로 성안으로 향해 치달리니, 숲이 다 불탔으며, 먼저 밀덕(密德) 토굴을 불태워 거의 다 불붙었다.
제독이 여기서 여러 군사를 북을 쳐 호령하여 성으로 올라갔는데, 적이 가까운 거리에 엎드려 많이 총환을 사용하고, 끓는 물과 돌덩이로써 죽기를 각오하고 막아 지켰다. 또 긴 창과 큰 칼을 사용하여 밖으로 날을 가지런히 하니 총총한 모양이 고슴도치 털과 같았다. 명 나라 군사들이 차츰 물러서자, 제독이 직접 겁내어 물러서는 사람 하나를 베어서 여러 군사들에게 돌아가며 보이고, 몸을 날려 바로 앞으로 나가서 크게 외치기를,
“먼저 성위에 올라가는 자는 은 50냥을 상을 주겠다.”
고 하니, 여러 군사들이 북치고 고함을 치며 일제히 나아갔다. 용맹을 뽐내며 성으로 다가가서 마패(麻牌)를 지고, 창을 들고 서로 섞여 올라가며 혹은 총을 쏘고 포를 놓으며 혹은 성가퀴를 지키는 적을 쳐 찌르니 적이 당하지 못하고 차츰 물러가게 되었다. 제독이 몸을 날려 먼저 올라서 여러 장수들을 독려하여 일제히 올라갔다. 부총병 낙상지(駱尙志)가 함구문(含毬門)에서 창을 들고 몸을 솟구쳐 성첩을 잡고 올라가는데 적이 성가퀴 위에서 큰 돌을 굴려 떨어뜨려 그 배를 맞추었지만 낙상지는 끄덕하지 않고 크게 외치며 뛰어올랐다. 또 절강(浙江) 군사가 적의 깃발들을 뽑아버리고 명 나라 군중의 깃발을 세우니 적병이 감히 버티지 못하였다. 우리 나라 관군도 따라 들어가며 베고 사로잡은 적이 적지 않았다. 적이 바야흐로 남쪽을 고려 군사라고 하여 가볍게 여겼는데, 조승훈이 위장했던 것을 벗어버리고 명 나라 군사의 투구와 갑옷을 드러내니, 적이 급히 군사를 나누어 막는데 조승훈이 용맹을 뽐내며 나아갔다. 장세작 등은 칠성문을 따라 대포로 문루를 쳐부수고 군사들을 정돈하여 들어가고, 이여백 등은 함구문을 경유하여 들어가며, 양원은 보통문을 경유하여 들어가서 승리한 기세로 앞을 다투어 나아갔다. 유격장 오유충은 탄환에 맞아 가슴이 뚫려 피가 흐르고 다리가 부었지만, 분발하며 큰 소리로 싸움을 독려하였다. 제독은 탔던 말이 포환에 맞아 죽어 독약이 온 몸에 풍기는데, 말을 갈아타고 달려나가다 참호 속에 빠져 코끝에서 불이 나지만 군사를 휘동하여 오히려 나아가니 군사 한 명이 적 백 명을 당해내지 않는 자가 없었다. 사면으로 쳐서 죽이니 적의 무리가 무서워서 장막 속으로 달려 들어갔는데, 또 불화살을 사용하여 거의 다 불태웠다. 진중에서 머리 벤 수가 1천 2백 85급인데 그 중에는 평수충(平秀忠)ㆍ평진신(平鎭信)ㆍ종일(宗逸) 등 25명이 있었다. 생포한 것이 2명인데 통사 장대선(張大膳)도 있었다. 말 2천 9백 85필을 노획하고, 왜의 기구 4백 52건을 얻었으며, 본국에서 포로되었던 남녀 1천 2백 25인을 구출하였다. 불에 타 죽은 적이 몇만 명은 되는데, 피비린 냄새가 10리는 퍼지며 그 밖의 성에서 떨어지고 물에 빠진 적이 셀 수 없이 많았다.
행장 등이 남은 적을 거느리고 달아나서 풍월정(風月亭) 토굴로 들어갔는데, 제독이 시초(柴草)를 독려하여 운반하게 하여 사면에 쌓아놓고, 불화살을 사용하여 일시에 함께 불태워버리려 하였다. 그런데 칠성문ㆍ보통문과 모란봉의 왜적이 모두 여러 토굴을 차지하고 있어 갑자기 어찌할 수 없으며 왜적은 굴 속에서 벌집처럼 구멍을 많이 뚫고 총알을 비오듯 쏘아대니 명 나라 군사들이 쓰러지는 자가 잇따랐다.
제독이 군사를 수습하여 본영으로 돌아와서 여러 군사들을 밥 먹이고, 통사 장대선을 보내 행장에게 효유하여 말하기를,
“우리 병력으로 단번에 섬멸할 수 있지만 차마 인명을 다 죽일 수는 없어 네가 살아갈 길을 열어주니 너는 속히 여러 추장들을 거느리고 원문(轅門 진영에 설치한 문)에 나와서 나의 약속을 들으라.”
하였다. 행장이 대답하기를,
“저희들이 물러나 돌아가겠으니 뒷길을 차단하는 일이 없게 하여 주시오.”
하니, 제독이 허락하고 통역관으로 우리 나라에 알리어 한쪽의 복병을 철수하게 하였다. 그리고 비밀리 이영ㆍ조승훈ㆍ갈봉하(葛逢夏) 등에게 명하여 요로에 매복토록 하였다. 밤중에 행장이 남은 무리를 거느리고 도망해 갔는데 이영 등이 요격하여 3백 59급을 베고 2명을 생포하였다. 중화(中和)ㆍ황주(黃州) 등지에 군영을 설치했던 왜적은 평양의 포소리를 듣고 먼저 이미 도망쳤다.
그때 순변사 이일(李鎰)이 별장 김응서(金應瑞)와 더불어 함구문으로 들어갔다가 얼마 후에 성밖으로 물러나와 유둔(留屯)하였는데, 이때에 와서야 적이 도망해 돌아간 것을 알았으나 또한 뒤따라 추격하지 않았다. 제독이 이것을 나무라고 또 이일이 장수 재목이 아니고 이빈(李薲)에게 그 소임을 맡길 만하다고 하였다. 조정에서 좌의정 윤두수(尹斗壽)를 보내어 이일의 죄를 문책하는데, 군법을 시행하려 하다가 얼마 후에 놓아주고 이빈으로 대신 그 군사들을 거느리게 하였다. 황해도 방어사 이시언(李時彦)과 김경로(金敬老) 등이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고 싸우지 않으며 이시언은 굶주리고 병들어 낙후한 자 60여 명만 베었으므로 체찰사 유성룡이 베려고 하였는데, 제독이 중지시키며 말하기를,
“그 죄가 죽어야 하겠지만 적을 아직 멸하지 못하였으므로 한 명의 무사도 아껴야 한다.”
하면서, 백의로 종군하게 하였다. 황주 판관 정엽(鄭曄)만은 행장의 뒷길을 끊어 90여 급을 베고, 중도에서 또 30여 급을 베었다.
제독이 이미 평양에서 승전하니 여러 군사들이 다투어 가며 왜적의 물건을 빼앗았는데, 전세정(錢世禎)만이 군사들을 단속하여 물건을 취하지 않았다. 제독이 평양에 머물고 또 좌협(左協)대장 장세작(張世爵)과 선봉장의 총병 사대수(査大受) 등을 명령하여 진병하게 하고, 또 유성룡과 접반사 이덕형(李德馨)으로 급히 앞으로 나가서 마초와 양곡을 마련하도록 독려하고 부교(浮橋)를 만들게 하였다.
조정에서는 또 호조 판서 이성중(李誠中)을 전임으로 하여 좌랑 김계현(金繼賢)과 이자해(李自海)를 거느리고 군중 일행을 따르며 군량과 마초를 주관하게 하고, 또 박충간(朴忠侃)을 독촉하여 수송 관계를 주관하여 보살피게 하고, 또 분호조판서(分戶曹判書) 권징(權徵)을 보내 종사(從事) 황치경(黃致敬)과 권협(權悏)ㆍ중추부 경력(中樞府經歷) 신암(申黯)을 데리고 강화(江華) 교동(喬桐)으로 들어가서, 공사간의 저장 물자를 다 징발하여 군량을 보태고 이어 충청ㆍ전라도의 해상 수송을 독려하게 하였다. 또 사간원 정언 극중(黃克中)을 보내어 작업을 감찰하게 하고, 의정부 우의정 유홍(兪泓)으로 여러 가지 사무를 총독하게 하되 모두 주야로 독촉하여 시각을 지체하지 못하게 하였다. 명 나라 조정에서는 또 흠차 경리 정왜양향 호부산동 청리사 주사(欽差經理征倭糧餉戶部山東淸吏司主事) 애유신(艾維新)으로 이달에 강을 건너 양곡 운반을 독촉하게 하였다. 애유신의 호는 시우(時宇), 하남(河南) 개봉부(開封府) 난양현(蘭陽縣) 사람으로서 만력 병술년에 진사가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양곡 운송이 제때에 되지 않는다고 하여 검찰사 김응남(金應南)과 호조 참판 민여경(閔汝慶)ㆍ의주 부윤 황진(黃璡)을 곤장을 때리니 가는 곳마다 모두들 부들부들 떨었다.
○ 9일. 명 나라 군사 선봉이 이미 대동강을 건너 남쪽으로 나오는데, 나뭇가지가 길을 막아 통행할 수 없었다. 유성룡 등이 이리저리 돌아 빨리 나와 군사들 앞으로 나오는데 중화에 들려 황주에 이르니 밤이 벌써 3경은 되었다. 이때에 적병이 겨우 물러가고 경내가 황폐해지고 공허한데 민중들이 보이지 않으니 어찌할 수가 없었다. 급히 글을 황해 감사 유영경(柳永慶)에게 보내어 수운을 독촉하게 하고, 또 글을 평안 감사 이원익(李元翼)에게 보내어 김응서(金應瑞) 등이 거느린 군사 중에 싸움을 할 수 없는 자들을 뽑아서 평양으로부터 지고 이고 뒤를 따라 황주까지 보내도록 하였다. 또 평안도 세 현(縣)의 곡식을 배로 실어 운반하되 청룡포(靑龍浦)에서 황해도로 운송하게 하였는데, 일이 미리 준비가 있은 것이 아니라 임시로 갑작스럽게 하는 것인데 대군이 뒤를 따라왔지만 군량을 제대로 공급하여 겨우 무사하게 되었다. 선봉 마군(馬軍)이 뒤를 따라 계속 떠나서 개성부(開城府) 땅 청석동(靑石洞)에 이르렀는데, 그곳은 험하고 좁으며 좌우쪽에 절벽이 하늘에 닿게 높이 서고 가운데로 외길이 통한다. 적 수백 명이 모여 있다가, 명 나라 군사들은 바라보고 달아나 숨으며 감히 맞서 싸우지 못하므로 추격하여 30여 급을 베었다. 중협장(中協將) 이여백이 드디어 개성을 빼앗으니 적의 무리 수만 기(騎)가 임진강을 건너 경성으로 도망해 돌아왔다.
○ 19일. 명 나라 군사가 동파탄(東坡灘)을 경유하여 얕은 곳을 걸어서 건너 추적 습격하니 적의 무리가 크게 무너졌으며 진중에서 1백 65급을 베어 얻었다. 우리 나라 방어사 고언백(高彦伯)도 와서 협공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평안ㆍ황해ㆍ강원ㆍ경기 4도가 함께 회복되고 함경도만이 청정(淸正)이 막아 지키는 곳이 되었는데, 개성이 격파되니 그 역시 경성으로 빨리 돌아왔다. 왕이 평양으로 향하여 떠나려 하여, 누각에 올라 의주 백성들을 효유하고 모든 부역을 감면하고 또 전세(田稅) 곡식을 하사하여, 서쪽으로 명 나라 서울을 향하여 망궐례를 행하고 떠났다. 승장(僧將) 휴정(休靜 서산대사)이 용사 1백 명을 선발하여 거느리고 와서 대가(大駕)를 맞이하니 제독이 문첩(文帖)을 보내어 칭찬하고 권장하였는데 그 중에는 ‘나라를 위하여 적을 치는데 충성이 태양을 꿰니 흠앙하는 마음 금할 수 없다.’ 라는 말이 있었다. 또 아래와 같은 시를 지어주기도 하였다.
공리를 도모하는 뜻이 없었고 / 無意圖功利
도선을 배우는 데 전심하였네 / 專心學道禪
국사 급하다는 말 지금 듣고서 / 今聞王事急
총섭이 산에서 내려오셨네 / 摠攝下山巓
○ 경략(經略 송응창)이 평양의 승전 소식을 듣고서 지휘사 황응양(黃應暘)을 보내어 면사첩(免死帖 죽이지 않는다면 증명서)을 가지고 가서 서울 안의 왜노에게 붙었던 백성들을 불러내려 하는데, 안주(安州)에 이르러 왕을 뵙고 국왕의 교서를 청구하였다. 상이 잠시 장막 뒤로 들어가서, 이호민(李好閔)을 불러 교서를 지어 드리라고 하니 이호민이 구상할 겨를이 없이 즉시 초안을 작성하여 드렸는데 황응양이 이를 가지고 떠나갔다. 그 교서에 이렇게 말하였다.
아아, 너희들 경성의 민중들아! 성천자(聖天子)의 밝으신 명을 공경히 듣고 소동하는 일이 없을지어다. 성천자께서 우리 한 나라 지역이 죄없이 저 미친 도적의 핍박을 당하여 도탄에 빠져서 조석간에 다 없어지게 될 것을 불쌍히 여기사 빛난 위엄으로 천자의 군대를 명하시어 구제하게 되었다. 경략 계요 보정 산동 방어왜군무 병부시랑(經略薊遼保定山東防禦倭軍務兵部侍郞) 송응창(宋應昌)과 제독계요 보정 산동 방해 어왜군무 도독부도독동지(提督薊遼保定山東防海禦倭軍務都督府都督同知) 이여송(李如松)이 병마 5만을 거느리고 이미 금년 정월 8일 계해에 평양을 진공하여 하루아침이 다 지나기 전에 성을 함락시켜 불사르고 적을 남김없이 베었으며, 획득한 수급과 갑옷ㆍ마필ㆍ기계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병기가 가리키는 곳에 군사가 머물지 않고 풍운이 빛을 움직이고 귀신이 넋을 잃었다. 남은 추위는 숙살(肅殺)하는 위엄을 돕고, 새 봄은 양화(陽和)의 은택과 화합하니, 산을 들어다 새알을 누르는 것으로도 그 성공의 쉬움을 그대로 비유할 수 없도다. 황해도에 유둔하였던 적이 영채(營寨)를 불태우고 밤에 도망가니 어느 누구도 감히 왕사(王師)를 막을 자는 없을 것이다. 뇌성같은 호령과 대쪽을 가르는 것같은 형세로 며칠내로 저 경성에 이르게 될 것인데 너희들 경성에서 예전부터 생육(生育)하던 백성은 술과 광우리 밥을 가지고 길 양쪽에 서서 맞아 위로하는 것이 황해도의 백성들이나 다름 없을 것이니 내가 구태여 번거롭게 말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생각하면, 너희 어리석은 백성들이나 노약자로 적 속에 있는 자들은 혹시라도 겁내고 박절한 중에서 살기를 꾀하려 할지도 모르지만 이는 구멍의 개미가 살려고 달아나는 격이요, 노둔한 말이 구유의 콩을 잊지 못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 진실로 애통한 일이다. 또 포로가 되어 자력으로 벗어나지 못하는 자도 출몰하면서 적정을 정찰하고 주선하면서 틈탈 기회를 생각할 것이니 너희들의 실정을 보고 듣는 것은 나만이 아니라 성천자께서도 아마 불쌍히 여기고 근심하실 것이다. 지금 지휘사 황(黃)이 삼가 은덕의 뜻을 받들어 가서 경성의 백성들을 불러 위무하고 너희들의 죽은 목숨을 살려줄 것이니 내가 무슨 많은 말을 하리오. 오직 성천자의 은덕의 뜻을 받들어 선포할 따름이다. 우리 성황제의 천지의 부모같은 은덕이 우리의 다 끊어진 목숨을 연장하여 주시고, 다시 우리의 다 엎어진 세업을 회복하여 주시고 그 깊은 인덕(仁德)의 남은 은택이 적에게 얽매어 있는 백성들에게 함께 미치니, 천지의 함육(涵育)해 주시는 은혜를 무슨 말로 칭송할 수 있으랴. 저 산하를 돌아보니 오직 눈물이 소매를 적실 뿐이로다. 교서가 이르는 대로, 너희들 민중으로서 저들에게 유인되어 잘못을 범한 자는 서로를 거느리고 명령하는 곳으로 돌아와서 후회하는 일이 없게 할지어다.
황응양이 떠난 다음 왕이 평양으로 돌아와서 제독을 접견하고 사례하며 위로하고 효유하였으며, 또 제독에게 나아가서 서울을 회복할 것을 청하니 제독이 허락하였다. 대개 서울은 우리 나라의 도회지로, 왼쪽에는 강원도, 오른쪽에는 황해도, 동쪽은 경상도, 남쪽은 전라도가 있으며 함경도와 충청도가 서로 호응하는 형세로 되어 있어 천연의 요지를 차지하였는데, 명 나라 군사가 잇달아 이겨서 또한 적을 업신여기는 마음을 가지니 사람들이 매우 근심하였다. 제독이 먼저 사대수(査大受)를 보내어 앞길을 정찰하고 제독도 자신이 이어 떠나서 25일에 개성부에 들어왔다.
이보다 앞서 적의 추장은 평양에서 패한 것을 분개하고 또 혹시라도 서울 안의 사람들로서 내응이 있는가 의심하여 있는 대로 찾아내어 종루(鍾樓)에서 한강에 이르는 사이에 수만 여명을 늘어앉힌 다음 긴 칼을 빼어들고 남녀를 논할 것 없이 차례로 나가며 베었는데 사람들이 모두 목을 늘여 칼을 받고 감히 도망하여 흩어지는 자가 없었다. 한 사람이 함께 앉은 자에게 말하기를,
“아무래도 죽을 것인데 도망해 달아나면 살아날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니, 곁에 앉은 자들이 모두 중지시키며 말하기를,
“오활한 생각을 하지 말라. 반드시 큰일 날 것이다.”
하였다. 그 중 혹 듣지 않고 일어나서 달아나 살게 된 자도 있었다. 그러나 그 외에는 모두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낙지(樂地)에 나가기나 하는 듯하니, 인심이 정상이 아닌 것이 이러하였다. 적은 또 여염집을 거의 다 불태웠으며 여러 곳에 유둔하였던 적이 모두 서울로 모여들어 명 나라 군사에 항거할 것을 모의하였다.
우리 나라의 체찰사 이하가 잇달아 진병할 것을 제독에게 청하였는데, 제독이 여러 날을 지체하다가 27일에야 새벽에 덕진(德津)을 경유하여 내려가서 파주에 진영을 설치하였다. 어두운 새벽에 적 수백이 나와서 미륵원(彌勒院) 앞 들판에 진을 치자 사대수가 고언백(高彦伯)과 더불어 수백 기병을 거느리고 진격하여 적 1백 30급을 베고 달려가서 제독에게 품의하여 말하기를,
“적이 이미 기가 죽었으니 빨리 진군하기를 바랍니다.”
하니, 제독이 휘하 수십 인과 더불어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나왔다. 삼협 대장들이 역시 휘하 병사 수십 명을 데리고 서로 뒤를 이어 달려나왔다. 제독이 혜음령(惠陰嶺)을 넘다가 말에서 떨어져서 낯을 상하였는데 다른 말을 바꾸어 타고 앞으로 나오니 여러 장수들도 용맹을 뽐내며 앞을 다투어가며 적진을 바라보고 나왔다. 여기서 제독은 그 군사를 지휘하여 두 날개를 만들어 가지고 앞장섰다. 적이 깃발을 여현(礪峴)에 벌여 세우고 적은 군사를 유인하여 거짓 패하여 달아나면서 진흙 수렁 가운데로 끌어들이니 그만 진흙 속으로 빠져서 말이 나가지 못하였다. 왜적이 그때는 산의 후면에서 산으로 올라와서 진을 치는데 몇 만여 명이며, 칼날이 번쩍번쩍 번득이고 깃발이 해를 가렸다. 명 나라 군사들이 바라보고 모두들 겁을 집어먹었다. 좀 있더니 적의 무리가 검을 휘두르며 나와서 두어 겹으로 둘러싸는데, 제독의 거느린 군사는 모두가 북방의 기병이라 화기(火器)는 없고 단검만을 가졌다. 적병이 앞으로 다가들며 진영을 돌격하고 좌우로 휘둘러 치니 사람과 말이 모두 쓰러지고 감히 그 칼날을 당해낼 자가 없었다. 제독이 형세가 위급한 것을 보고, 장사들을 독려하여 죽기를 각오로 싸우기를 사시부터 오시까지 하였다. 금갑옷을 입은 왜장이 바로 제독을 치니 거의 몸에 미치게 되었는데, 지휘사 이유승(李有昇)이 자기 몸으로 막아 가리면서 두어 왜노를 베고 마침내는 탄환에 맞아 말에서 떨어져서 왜노들에게 사지를 찢기게 되었다. 이유승은 요동 철령위(鐵嶺衛) 사람으로 용력이 비상하고 항상 제독을 따라 좌우에서 떠나지 않았는데 여기서 죽었다. 좀 있다가 이여백(李如栢)ㆍ이영(李寧) 등이 양면으로 막아 협격하고, 이여매(李如梅)가 옆에서 금 갑옷 입은 왜적을 쏘아 죽였는데 때마침 양원(楊元)이 대군을 거느리고 겹겹이 둘러싼 적을 공격하니 왜적이 그만 물러갔는데, 명 나라 군사 중에 정예 병력이 많이 죽었다. 하늘에서는 또 큰 비가 내렸는데 서울 가까운 평지에 논두둑이 많고 얼음이 녹아 진흙에 깊이 빠지니 말이 달릴 수가 없어 사람과 말이 서로 밟고, 기구 및 갑옷과 창들은 길위에 흩어져 깔렸다. 여기에 왜는 산악을 등지고 한수(漢水)를 앞에 놓고 구슬 꿰미처럼 포진하고 널리 비루(飛樓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며 적을 쏠 수 있는 시설)를 세우고 조총을 구멍속에서 쏘아 수시로 사람을 죽이니 명 나라 군사가 그만 퇴각하였다. 날이 저물어서 제독이 파주에 돌아왔는데, 노상에서 원수(元帥)의 깃발을 보고는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것을 보전하여 잃어버리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고 하였으며, 이유승의 사위 왕심(王審)을 불러보고 크게 통곡하며 말하기를,
“호남아(好男兒)가 나를 위하여 죽었다.”
고 하였다. 우리 나라 사람들을 보고는 비록 패전한 것을 숨기지만 정신과 기운이 매우 상실되었다. 밤에, 이유승의 죽음을 생각하며 아침까지 통곡하고는 이튿날 동파(東坡)로 퇴군하려 하였다.
체찰사 유성룡ㆍ우의정 유홍(兪泓)ㆍ도원수 김명원(金命元)ㆍ부원수 이빈(李濱) 등이 제독의 장막 아래 이르러 뵙기를 청하니 제독이 장막 밖에 나와 섰고 여러 장수들이 좌우 쪽에 벌여 섰다. 유성룡 등이 말하기를,
“저희들이 들으니 노야(老爺)께서 장차 서쪽으로 돌아가시려 한다는데, 노야의 깊은 의사가 어디 있는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리고 만일 작은 실패로 경계를 삼는다면 아마도 옳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승패는 병가의 상사(常事)이니 형세를 보아서 다시 진격하여야 할 것인데 어찌하여 경솔하게 움직이려 하십니까?”
하니, 제독이 말하기를,
“내가 어제 많이 적을 죽였으니 불리한 일은 없습니다. 다만 이곳에 비가 와서 진창이 되어 군사를 주둔하기에 불편합니다. 그래서 동파로 돌아가서 군사들을 쉬어 가지고 다시 나아가려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유성룡 등이 일제히 한 목소리로 말하였지만, 제독이 이미 초안을 작성한 주본(奏本 황제에게 올리는 글)을 내어보였다. 그 중에는,
“적이 도성에 있는 자 20여 만이니 중과부적입니다.”
한 것이 있고, 끝부분에 가서는 말하기를,
“신이 병이 심하니 다른 사람으로 소임을 대신함을 청합니다.”
하였다. 유성룡이 깜짝 놀라 손으로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적병이 매우 적은데 어찌 20만이 될 수 있습니까?”
하니, 제독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알 수 있으리오. 그것은 당신네 나라 사람이 말한 것이오.”
하였는데, 이는 칭탁하여 말한 것이었다. 명 나라의 여러 장수 중에도 장세작(張世爵)과 이여백(李如栢)이 더욱 제독에게 퇴병하자고 권하였는데, 유성룡 등이 굳게 다투며 물러가지 않으니 매우 화를 내며 발로 이빈을 걷어차며 물러가라고 소리치는데, 언성과 기색이 매우 사나웠다.
이때 큰 비가 연일 와서 도로가 통하지 못하고, 적은 또 길가의 여러 산을 불태워서 벌거숭이가 되어 쑥 한 포기가 없으며 게다가 마역(馬疫)이 겹쳐서 수일 사이에 거꾸러져 죽은 말이 만 필이나 되었다. 이날 세 진영의 장수가 임진강을 도로 건너 동파역(東坡驛) 앞에 진쳤다. 이날에는 동파에서 또 개성부로 돌아오려 하자, 유성룡이 또 힘써 다투며 말하기를,
“대군이 한번 물러가면 적의 기세가 더욱 교만하고 원근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임진강 이북도 보전하지 못할 것이오니, 원컨대 좀 멈추어 기회를 보아 움직이소서.”
하니, 제독이 거짓으로 허락하였는데, 유성룡 등이 물러갔다. 그런데 제독이 그만 말을 달려 개성으로 돌아가고 여러 진영도 차례로 물러갔으며, 부총병 사대수와 유격장군 관승선(毌承宣)만을 머물러 천여 명 군사를 거느리고 임진강을 지키게 하였다. 유성룡 등이 이후로 사람을 보내어 다시 진군하기를 청하니, 제독이 느슨하게 대답하기를,
“하늘이 개고 길이 마르면 진군하여 정벌하여 초토하겠다.”
고 하였는데, 사실은 그럴 생각은 없었다. 증명한 시가 있었다.
벽제관에서의 한 번 실패에 / 一自碧蹄䘐
웅장한 기개 속으로 사라졌네 / 壯志乃暗消
도리어 기미 계책에 / 還將羈縻計
왜노의 세력만 교만해졌다네 / 徒使奴勢驕
중국 10만 군사가 / 漢家十萬師
말 잘하는 유세객만 못하다네 / 不如說舌饒
머리를 돌이켜 신성한 도읍 바라보니 / 回首望神都
살기가 하늘 높이 뻗쳤네 / 殺氣干雲霄
대군이 개성부에 이르러 매우 오래 있었는데 군량이 이미 다 되었다. 오직 수로를 따라 마른 풀을 강화도에서 가져오고, 또 배로 충청도와 전라도의 마초를 운반하여 조금씩 도착하였는데, 오는 대로 다 떨어지니 그 형세가 더욱 급하였다. 하루는 여러 장수들이 양식이 모자란다고 구실을 삼아 제독에게 회군을 청하니 제독이 매우 성내었다. 체찰사 유성룡ㆍ호조 판서 이성중(李誠中)ㆍ경기좌도 감사 이정형(李廷馨) 등을 뜰 아래에 꿇리고 큰소리로 힐책하며 군법을 가하려 하였는데, 유성룡이 다만 사죄하기를 마지 않고 눈물을 흘릴 뿐이니, 제독이 민망히 여기며 명 나라의 여러 장수들에게로 화를 돌려 말하기를,
“너희들이 예전 서하(西夏)에 종군하였을 때에는 군중에서 수일 동안 밥을 먹지 못하고도 감히 돌아가자고 말하지 못하였는데 끝내는 큰 공을 이루었다. 지금 조선에 와서 우연히 수일간 양식을 대지 못하였는데 어찌 감히 문득 돌아가자고 하느냐. 너희들은 가려면 가라. 나는 적을 멸하지 않고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요, 오직 말가죽으로 시체를 싸서 가지고 갈 뿐이다.”
하니, 여러 장수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였다. 유성룡 등이 사례하고 물러나와서 시기에 맞지 않게 양곡을 방출한 죄로 개성 경력(經歷) 심예겸(沈禮謙)을 곤장으로 때렸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전라도에서 바다로 수송해 오는 쌀과 콩 2만 2천여 석과 황해도에서 수송해 오는 마초 수만 석이 후서강(後西江)에 닿아서 겨우 무사하게 되었다. 이날 저녁에 제독이 총병 장세작을 시켜 유성룡 등을 불러 위로하고 또 군사(軍事)를 의논하였다.
이때 전하는 말이 청정(淸正)이 또 양덕(陽德)ㆍ맹산(孟山)으로 빙 둘러 와서 몰래 평양을 습격하려 한다고 하였다. 제독이 벌써부터 서쪽으로 돌아갈 마음이 있었는데, 이것을 가지고 큰 소리로,
“평양은 근본이 되는데, 만일 여기를 지키지 못하면 대군이 돌아갈 길이 없으니 구원하지 않을 수 없다.”
고 하면서, 드디어 여러 군사들에게 일제히 물러갈 것을 명령하였다.
그리하여 평양으로 향하고 유격장군 왕필적(王必迪)만을 머물러 개성부를 지키게 하며 이덕형에게 조선 군사가 세력이 외롭고 구원병이 없으니, 함께 강 북쪽으로 돌아가서 적에게 승세할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유성룡이 이때 동파에 있다가 종사관 신경진(辛慶晋)을 보내어 달려가서 제독을 보고, 퇴군할 수 없다는 의사를 진술하여 말하기를,
“선왕의 분묘가 모두 경기 지역에 있는데, 적의 수중에 떨어져 있어 신(神)과 사람의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니 차마 버리고 갈 수 없는 것이 하나요, 경기 이남의 남은 백성들이 날마다 왕사(王師)가 오기를 기다리는데, 문득 왕사가 물러갔다는 말을 들으면 다시 굳건한 뜻을 가지지 못하고 서로 무리를 거느리고 적에게로 돌아갈 것이 둘이요, 우리 나라 강토를 한 자ㆍ한 치도 용이하게 버리지 못할 것이 셋이요, 장사(將士)가 비록 힘은 약하지만 지금 바야흐로 천병(天兵)을 의지하여 함께 나가 취할 계획을 하는데, 한번 철군의 명령이 내렸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모두들 원망하고 분개하여 사방으로 흩어져갈 것이 넷이요, 한번 물러가면 적이 그뒤를 따라 갈 것이니 비록 임진강 이북이라도 온전할 수 없는 것이 다섯입니다.”
하였는데, 제독이 그 말을 듣고 아무 말 없이 떠나갔다. 조정에서 좌의정 윤두수(尹斗壽)를 보내어 퇴병하지 말 것을 청하였는데 제독이 역시 듣지 않으니 윤두수가 간절하게 사연을 말하며 동쪽으로 나가기를 청하면서 눈물이 말할 때마다 떨어지니 제독이 민망히 여기는 안색을 지었으며, 그래서 우는 각로(閣老)라는 칭호가 생기게 되었다.
진사 태현(太玄) 심조환(沈朝煥)이 이러한 동쪽에서의 사실을 듣고 두 수의 율시(律詩)를 지어 탄식하였다. 그 첫번째 시는 이러하다.
들리는 말 요양 수자리에 / 聞說遼陽戍
위태롭고 혈전도 많다네 / 羈危血戰多
오랑캐 진영이 새날개처럼 벌리자 / 虜營分鳥陣
중원의 군사들 큰 물결에 휘말렸다네 / 漢卒偃鯨波
험한 곳에 들어가는 일 병법의 비밀인데 / 入阻鞱鈴祕
떠도는 글은 도로에 잘못 전해지네 / 飛書道路訛
장군님 어려움도 많으니 / 將軍自辛苦
유세하는 그 사람 끝내 어떨런지 / 說舌竟如何
그 두번째 시는 이러하다.
오랑캐 항복 받는 계획 아직 이루지 못했는데 / 伏羌圖未上
비방하는 광주리의 글 의심할 일 많구나 / 謗篋摠堪疑
말을 잃은 것이 어찌 복은 되지 않으며 / 失馬寧非福
제후 봉한 곳에 운수가 기구하지 않으리라 / 封侯數不奇
나라의 많은 재물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데 / 國脂流海甸
전쟁에 죽은 시체 강가에 처참하다네 / 戰骨慘江垂
여러 경영하는 일들 / 多少經綸事
빈말만으로 부질없이 끌어가려나 / 空談謾欲持
○ 2월. 병부에서 제문(題文 명 나라에서 관원이 공사로 황제에게 아뢰던 글의 일종)을 올려 청하여 내고(內庫)의 은 3천 냥을 내어보내어 조선의 공로가 있거나 공사에 죽은 인원에게 주게 하였다. 조선에서 왜를 막아 공로가 있거나 공사에 죽은 관원들은 그 충성과 용맹을 칭찬할 만하니 상품을 고루 나누어주라는 성지(聖旨)를 받들어 거행하였다. 그리고 다시 국왕에게 전유하기를,
“각도 장령을 엄하게 독려하여 힘써 회복을 도모해서 중국에서 구원하는 뜻을 저버리지 말라.”
하였다. 또 흠차 순안요동 겸관해방군무 감찰어사(欽差巡按遼東兼管海防軍務監察御史) 주유한(周維翰)과 흠견 분수요동영원 겸둔전산서 포정사우포정사(欽遣分守遼東寧遠兼屯田山西布政司右布政使) 한취선(韓取善) 등을 보내어 군사를 감찰하고, 흠차 통령천귀 한토관병 참장(欽差統領川貴漢土官兵參將) 유정(劉綎)과 원임(原任) 참장 허국충(許國忠) 등으로 계속 구원하게 하였다.
주유한은 호는 도우(鞱宇)인데 북직례(北直隷) 하간부(河間府) 부성현(阜城縣) 사람이며, 만력(萬曆) 경진년에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평양으로 왔는데, 성품이 간결하고 정중하여 우리 나라 사람들과 서로 접촉하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명 나라 사람들도 꺼려하였다. 한취선은 호는 성암(惺菴)인데 산동 제남부(濟南府) 치천현(淄川縣) 사람이다. 만력 정축년에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으며, 사람됨이 매우 정직하였다. 유정은 자는 자신(子紳)이요, 호는 성오(省吾)인데, 강서(江西) 남창부(南昌府) 홍도현(洪都縣) 사람이다. 사천(四川)ㆍ파촉(巴蜀) 지방 군사 5천 명을 거느렸는데 그 중에는 해귀(海鬼) 수십 명이 있으니 그 종족이 남번(南番)에서 생장하여 낯빛이 아주 새까매서 귀신같으며, 바다 밑으로 잠수하여 다녔다. 또 키가 큰 사람이 있으니 형체가 두 길은 되는데 말을 탈 수가 없어 수레를 타고 왔다. 또 미후(獼猴)로 활과 화살을 가지고 말을 타고 앞에서 길을 인도하는데 적진중에 들어가서 말 굴레를 풀어놓기도 하였다. 허국충은 남방 군사 포수 1천 명을 거느렸는데, 머리에는 흰 사모두건을 쓰고 몸에는 소매가 짧은, 우리 나라 나장(羅將)의 옷같은 것을 입었는데 색깔은 적ㆍ백ㆍ청ㆍ황색을 사용하였으며, 불화살ㆍ대포ㆍ창ㆍ칼의 기술을 잘 사용하는데 모두 왜노보다 나았으며 잇따라 강을 건너서 왔다.
이때, 대군이 이미 서쪽으로 물러갔기 때문에 왜노의 여러 추장들이 경성에서 그 세력을 합하여 형세가 더욱 성하였다. 전라도 순찰사 권율(權慄)이 수원 독성(禿城)으로부터 휘하 정병 4천 명을 나누어서, 전라도 절도사 선거이(宣居怡)로 선봉장을 삼았는데, 자신은 조방장(助防將) 조경(趙儆)의 군사 2천 3백 명을 거느리고 양천(陽川)을 경유하여 진군하여 고양(高陽)의 행주산성(幸州山城)에 진을 쳤으며, 선거이는 금천산(衿川山)에 영채를 설치하여 멀리서 도움을 주었다. 전라도 소모사(召募使) 변이중(邊以中)이 역시 정병 수천 명을 거느리고 양천산에 주둔해 있으면서 자신이 감독 제조한 화차(火車) 3백을 나누어서 권율의 진중으로 보내었다. 서울 안의 왜적이 권율의 군사가 적은 것을 탐지하고 마음에 두지도 않으며, 발끝으로 차서 거꾸러뜨릴 계획으로 군사들을 다 거느리고 나왔다.
○ 12일. 새벽에 정탐군이 보고하기를,
“적이 좌우익(左右翼)으로 나뉘어서 홍색과 백색의 깃발을 가지고 본영을 향하여 온다.”
하였다. 권율이 군중에 명령하여 높은 곳에 올라가서 바라보니 5리쯤 거리에 있는 들판 언덕 위에 적의 무리가 이미 가득 찼는데, 선봉 백여 명의 기병이 어느 사이에 점점 가까이 오더니 잠시 후에는 수만여 명의 군사가 들판을 덮어오는데 모두 홍기와 백기를 등에 지고 황금 일산을 펴들었으며 귀신의 얼굴, 짐승의 형상으로 심히 괴이하게 분장한 자가 본영을 둘러싸고, 맨 나중에는 많은 군사로 계속 나와서 두세 겹으로 둘러쌌다. 권율이 곧 군중에 전령하여 식사를 하게 하고 활 잘 쏘는 군사들을 뽑아 내려다보이는 곳에 배치하고 화살을 내려 쏘기를 비오듯 하였다. 또 용사들을 뽑아 돌을 던져 공격하며 계속하여 화차에서 석환(石丸)을 쏘고 또 각종 화기를 발사하니, 적이 진영을 세 곳으로 나누어 한편으로 군사들을 쉬게 하면서 번갈아 가며 나왔다. 권율이 검을 빼어들고 싸움을 독려하였는데 묘시에서 유시에 이르는 동안에 적이 아홉 번 진출하였다가 아홉 번 다 퇴각하였다. 그리고는 마초 묶음을 가지고 바람을 따라 불을 놓아 우리 성채를 불태우는 것을 성중에서 물을 부어 구원하였다. 처음 승군장(僧軍將) 처영(處英)으로 승군 1천 명을 거느리고 서북쪽에서 있는 근처의 성을 지키게 하였는데, 이때 와서 승군이 좀 물러가니 적이 크게 외치며 밀고들어와 온 군사가 휩쓸렸다. 그런데 권율이 스스로 검을 휘두르며 여러 장수들을 독려하니 모두들 칼날을 무릅쓰고 육박해 나가며 싸우자 적이 지탱하지 못하고 일시에 달아나 흩어졌다. 그리고 시체를 네 무더기로 모아놓고 마초를 모아 불태우니 냄새가 10리나 퍼졌다. 우리 군사들이 싸우면서 머리 벤 수가 1백 10급이요, 왼쪽 귀가 두 개이며, 빼앗은 활ㆍ살ㆍ투구ㆍ갑옷ㆍ칼ㆍ총 등 병장기가 모두 7백 27건인데, 살아남은 왜적은 통곡하면서 성으로 돌아갔다.
총병 사대수(査大受)가 이때 임진강에 있으면서 왕래하며 정찰 탐지하다가 권율이 크게 승첩한 소식을 듣고 와서 보았는데, 진영을 정돈하여 기다리니 깃발들이 선명하고 병장기가 정밀하고 예리하며, 호령이 엄숙하고 부서 대열이 어지럽지 않으니 사대수가 공경하여 대접하며 감탄하여 말하기를,
“권씨 집안 군대는 다른 진영과 특별히 다르다. 외국에도 장수다운 장수가 있다.”
하였다. 경략 송응창(宋應昌)은 자문을 본국에 보내고, 포상을 시행하게 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왜노(倭奴)가 조선 왕국을 꺾어 함락함으로부터 삼도(三都 한양ㆍ개성ㆍ평양)와 여러 군현이 모두 소문만 듣고 달아나고 흩어지며 한 명의 영웅호걸도 의병을 일으켜 큰 국난을 배제하고 맡은 지역을 지켜 회복을 도모하는 자가 없으니, 나라에 사람이 없다고 할 만하였다. 유독 전라도 관찰사 권율이 외로운 성을 막아 지키면서 민중들을 불러모으고 자주 특이한 모계를 써서 때때로 큰 적에게 항거하였으며, 근일에는 다시 모래를 주머니에 모아 양식인 척 속여 왜를 유인하여 와서 모이게 하고 공격하여 섬멸하였으니 이는 바로 왕국이 위급할 때의 충신이요, 중흥의 명장이다. 지금 붉은 비단 네 필과 백금 50냥을 상으로 주어 충성과 용맹을 권장하게 한다.
송 경략은 또 우리 나라로 하여금 작위와 녹봉을 더하여 본국의 대신ㆍ관료들을 깨우치게 하였으며, 병부 상서 석성(石星)은 글을 올려 이렇게 아뢰었다.
조선 여러 도(道) 중에서 홀로 전라도에서 정사를 펴고 명을 거행하는 배신(陪臣) 권율이 외롭고 위태로운 곳을 지켜서 강경한 적을 항거하였으니 권장하고 상을 주는 전례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황제의 전지에,
“조선은 강국이다. 지금 전라도에서 참획한 수가 많은 것을 보니, 그 나라 백성은 아직도 진작시킬 만하다. 짐이 매우 가상히 여기는 일이니 해부(該部)에서는 알라.”
하였다.
이리하여 병부에서 홍로시(鴻臚寺) 관원을 보내어 선유하고 상여한 물건이 매우 많았다. 이 후로 명 나라 조정에서는 문무 대소 장수와 관원이 권율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반드시 말하기를,
“이 사람이 전일 행주에서 승전보를 아뢴 이인가?”
하며, 반드시 문서를 보내어 은근한 뜻을 표시하였으며, 우리 나라에서도 자헌대부로 승진시켜서 상을 주었다. 그것을 증명하는 시가 있다.
순찰사 훌륭한 이름 바다 지역을 진동하여 / 巡察英名動海區
군사 이끌고 바로 올라와 왕도를 진압했네 / 提兵直上壓王都
창을 비껴 든 장한 기운은 적을 삼킬 수 있고 / 橫戈壯氣能呑敵
피를 마셔 맹세하는 영웅의 마음은 한 몸을 버리기로 하였다네 / 歃血雄心在殞軀
황제의 글이 내려오니 삼군이 흥기하고 / 天書旣下三軍躍
옥으로 장식된 검을 반포하자 모든 장교들 나와 절하네 / 玉劍纔頒列校趨
큰 공훈 깃발 날려 사직을 보존하니 / 勳合旂常存社稷
능연각(공신의 화상을 모시는 곳)에 훗날 새 화상이 걸리겠네 / 凌煙異日掛新圖
이 제독이 행군하여 평산(平山) 보산역(寶山驛)에 이르러, 행주에서 승첩한 소식을 듣고 군사를 후퇴한 것을 뉘우치면서 이여백(李如栢)을 책망하여 말하기를,
“큰일을 지체하여 지금까지 성공하지 못한 것이 모두 너 때문이다.”
하니, 대개 이여백이 그 서울 진공을 중지하자고 하였던 것이다. 제독이 여기서 장세작(張世爵)으로 이덕형(李德馨)과 함께 다시 개성부로 가서 양곡을 모아 저장하여 기다리게 하고 제독은 인하여 평양으로 돌아가서 성안에 머물러 주둔하였다.
권율은 여기서 군사를 이동하여 서쪽으로 올라와서 제도(諸道)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및 부원수 이빈(李薲)과 더불어 파주산성을 근거하여 지키고, 방어사 고언백(高彦伯)ㆍ이시언(李時言)과 조방장(助防將) 정희현(鄭希賢) 등은 유격장이 되어 해유령(蟹踰嶺)을 차단하여 막으며, 의병장 박유인(朴惟仁)ㆍ윤선정(尹先正)ㆍ이산휘(李山輝) 등은 오른쪽 길을 따라 경릉(敬陵)ㆍ창릉(昌陵) 사이에 복병하고 각기 그 군사로 출입하며 유격전을 벌이되 적이 많이 나오면 피하고 싸우지 않으며, 적게 나오면 그뒤를 따라 요격하였다.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과 경기 수사 이빈(李蘋), 충청 수사 정걸(丁傑), 전 전라 병사 최원(崔遠)은 강화도에서 배를 타고 용산(龍山) 서강(西江)을 따라 혹은 물러가고 혹은 나오면서 적의 세력을 분산시켰다. 충청도 순찰사 허욱(許頊)은 이미 윤선각(尹先覺)을 대신하여, 권율과 더불어 서쪽으로 올라와서 양성(陽城)에 있었는데, 다시 본도로 돌아가서 수호하면서 적의 남쪽으로 공격해 올라오는 세력을 방비하게 하고, 양근 군수 이여양(李汝讓)도 용진(龍津) 상류에 있으면서 적의 여기 저기로 날뛰는 것을 방어하니 우리 나라 병세가 매우 장엄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벤 적의 머리를 모두 개성 남문 밖에 매달아놓으니 명 나라의 참장 여응종(呂應鍾)이 보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조선 사람들이 지금은 적의 머리 취하기를 공 놀리듯 한다.”
하였다. 하루는 적이 동대문으로 나와서 크게 산골짜기를 수색하였는데 양주(楊州) 적성(積城)에서 대탄(大灘)에 이르는 동안에 아무런 전과가 없자 약탈을 마지 않았다. 총병(總兵) 사대수(査大受)가 적이 습격하여 올까 두려워하여 유성룡 등을 멀리 피하게 하며 또 거느린 용사 수십 명을 나눠 보내어 와서 호위하게 하며 밤을 새워 경비하였다. 이때 적이 행주의 패전을 보복하려 하여 화군(火軍)을 거느리고 서로(西路)를 따라 나와서 광탄(廣灘)에 이르니 파주산성과는 수십 리 떨어졌다. 군사를 주둔하고 나오지 않으며 오시에서 미시에 이르기까지 공격하지 않고 도로 물러갔는데, 이렇게 하기를 세 번 정도 하고는 다시 나오지 않았다. 이때 적이 경성을 차지한 지 이미 2년이 지나 적병의 칼날이 미치는 곳에 천리 사이가 텅 비어 있고 백성들은 농사를 짓지 못하여 거의 다 굶어 죽었다. 서울 성안의 남은 백성들이 갖은 고생으로 붙들고 이끌며 메고 지고 와서 우리 군중으로 들어왔는데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사 총병이 말타고 가다가 노상에서 어린 아이가 죽은 어머니의 젖을 먹는 것을 보고 불쌍히 여기고 거두어 군중에서 기르며 우리 나라 사람을 보고 하는 말이,
“왜적이 아직 물러가지 않았는데 백성들이 이렇게 되었으니 앞일을 어찌 할 것인가.”
하며, 또 탄식하여 말하기를,
“하늘이 걱정하고 땅이 슬퍼할 일이다.”
하였다.
마침 남방의 양곡을 실은 배가 강언덕에 와서 정박하고 전라도 소모관(召募官) 안민학(安敏學)도 겉곡식[皮糓] 10만을 모집하여 배로 수운하니, 곧 전 군수 남궁제(南宮悌)를 감진관(監賑官)으로 임명하여 솔잎으로 가루를 만들어서 솔잎가루 열 홉에 쌀가루 한 홉을 섞어 물에 타서 마시도록 하였지만 사람은 많고 곡식은 적어서 살아난 사람이 얼마 안 되었다. 중국 장수도 역시 불쌍히 여겨 군량 30석을 나누어 주었지만 백의 하나도 미치지 못하였다. 하루는 밤에 큰 비가 왔다. 굶주린 백성들이 좌우쪽에 있으면서 슬피 부르는 소리가 처량하여 차마 들을 수가 없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여기 저기에서 쓰러져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경상우도 감사 김성일(金誠一)이 역시 전 전적(典籍) 이노(李魯)를 보내어 체찰사부(體察使府)에 급한 사정을 고하며 말하기를,
“전라 좌도의 곡식을 가져다가 주린 백성들을 진휼하여 구제하고 또 봄갈이 씨앗으로 사용하려 하는데 전라 도사가 구제미로 꾸어주려 하지 않으니 나누어주게 하여 주십시오.”
하므로, 체찰사부에서는 공문을 체찰부사 김찬(金瓚)에게로 보내었다. 김찬이 이때 호서(湖西)에 있었는데, 전라도로 급히 가서 직접 남원 등지의 창고를 열어 1만 석을 영남으로 옮겨 구제하게 하였다. 대저 경도(京都)에서 남변(南邊)까지는 적병이 가로질러 있고 인민들은 산위에 오르고 골짜기 안으로 들어가서 밭 갈고 심은 곳이 없으니, 적으로 하여금 다시 수개 월간만 물러가지 않게 하였더라도 백성이 다 없어졌을 것이다.
제독이 앞서 병을 칭탁하고 다른 사람으로 대신하게 하기를 청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서울의 적이 20여 만이다.’ 하고, 또 ‘관백(關白)이 배를 띄워 들어가 침범한다.’는 설이 있는 등 극히 장황하니 경략이 이를 듣고서 3월에 원임(原任) 계진 동협부총병 후부서도독첨사(薊鎭東恊副摠兵後部署都督僉事) 왕승은(王承恩)과 통령 유격장군 지휘동지(統領游擊將軍指揮同知) 왕여징(王汝徵)ㆍ중군 기고(中軍旗鼓) 장구경(張九經) 및 수영 참장(隨營參將) 소국부(蘇國賦)ㆍ원임 통판 심사현(沈思賢)ㆍ감생(監生) 도량성(陶良性)ㆍ유격장군 오종도(吳宗道) 등을 거느리고 강을 건너 안주(安州)로 나와서 주둔하였다.
왕승은은 대녕(大寧) 전위(前衛) 사람인데 얼마 안 되어 사사로이 관아에 소속된 말을 팔아먹은 사실로 경략의 규탄을 받아 파직되어 갔으며, 왕여징은 마ㆍ보병 2천 명을 거느렸는데 경략이 정주(定州)ㆍ영원(寧遠) 등지에 나누어 주둔하게 하였다. 장구경은 호를 봉죽(鳳竹)이라 하였는데, 하남(河南) 수양부위(睢陽府衛) 사람이요, 심사현은 자는 방달(邦達), 호는 사천(沙川)이라 하였는데 절강(浙江) 소흥부(紹興府) 여요(餘姚) 사람이다. 도양성은 호는 양오(養吾)인데 절강 건주부(虔州府) 진운현(縉雲縣) 사람이며, 오종도는 자는 여행(汝行), 호는 석루(石樓)인데 절강 소흥부 산양현(山陽縣) 사람으로 무진사(武進士) 출신이며 오래도록 우리 나라에 주둔하여 깊이 사정을 잘 알아 상사(上司)에 자세히 설명하였다. 경략이 급히 제독에게 격문을 보내어 기회를 타서 진병하게 하고 또 부총병 동양정(佟養正), 중군 왕승은 등을 나누어 보내어 가서 철산(鐵山) 해안에 봉화대를 설치할 만한 곳을 살펴보게 하였다. 철산군 땅에 이르니 고을 사람이 화문석(花紋席)을 주었는데 동양정이 물리치고 받지 않았다. 후에 일이 있어 파직되었다. 태현(太玄) 심백함(沈伯含 조환(朝煥)의 자)이 〈의동정개가(擬東征凱歌)〉 여덟 수를 지어 경략에게 주었다.
큰 조개는 누르고 고래는 날으는 혈전의 전장에 / 蜃壓鯨飛血戰場
군사 백만이 요양을 지났네 / 干戈百萬度遼陽
쌍무지개 밤에 비치니 요사한 기운이 조용하여 / 雙虹夜照妖氛靜
넓은 바다의 새로운 광명 붉은 해가 비치네 / 滄海新回赤日光

주나라 기자 봉했던 옛 제후 나라에 / 周箕封國古諸侯
강산을 회복하니 계책도 장하구나 / 恢復山河屬壯猷
대장은 아홉 관문 지나 용맹한 장병 몰고 가는데 / 大將九關駈虎豹
중원의 1만 기병은 준마로 달리네 / 中原萬騎控혁騮

적우전 날려 궁성에 승전 보고하는데 / 分飛赤羽報丹서
팔도의 금과 꼴로 천자의 군대에 공급한다네 / 八都金蒭供六師
행장 등 다투어 와서 씩씩한 위용을 엿보아 / 行長爭來窺虎步
오랑캐 임금이 직접 와서 용기에 절하리 / 夷王親自拜龍旗

말을 달려 티끌 일으키는 중원 장수 영웅인 것이 / 蹀馬吹塵漢將雄
관군들 일제히 모란봉에 오르네 / 官軍齊上牧丹峯
악당의 시체들 모아 큰 무덤을 만들고 동주로 표할 것이 / 封鯨作觀標銅柱
동해 넓은 물결에 큰 바람 보리 / 東海洋洋覽大風

압록강 물 깊은데 밤에 무기를 씻는 것이 / 鴨綠江深夜洗兵
중국의 조두소리 점성 곁에서 들리네 / 漢家刁斗傍苫城
오랑캐 물결 참담한데 교만한 기색 없으니 / 夷波慘惔無驕色
천자의 분부가 옥경(신선이 거처한다는 곳)에 있다네 / 天子分付在玉京

붉은 색 큰 깃발에 해 떨어지자 자색 기운 어두워지는데 / 日落紅旗紫氣昏
금인과 옥대 진영의 문에 가득하네 / 腰金拖玉滿轅門
온 군사 번개치듯 변방에 바람이 이니 / 全軍電掃邊風逐
여러 격서 날으는 곳에 바다 위의 해라도 삼키네 / 列檄雄飛海日呑

오랑캐 척후 모두 가요 부르니 / 夷方斥堠盡歌謠
말하는 선비 말이 없고 싸우는 군사 쓰러지네 / 說士無言戰士消
다시 동쪽 위세로 북벌을 엄히 하니 / 更遣東威嚴北伐
두 손으로 일월 받들어 남조를 향한다네 / 雙擎日月向南朝

작인 높이 달고 준여(군기의 일조)를 지나는데 / 鵲印高懸度隼旟
위엄을 선양하니 위타서 보내지 않으리 / 宣威不遣尉佗書
전라도 경상도에 장책 행하니 / 全羅慶尙紆長策
만세토록 요황이 황제 계신 곳을 향하리 / 萬歲要荒拱帝居
경략이 또 군자금을 청하니 천자가 다시 형금(冏金) 20만 냥을 내주어 군비에 보태게 하고, 흠차 사험군공 병부무선 청리사주사(欽差査驗軍功兵部武選淸吏司主事) 가유약(賈維鑰)을 보내어 안주(安州)에서 공을 조사하고 군사를 위로하였다. 가유약은 자는 무경(無扃)이요, 호는 지백당(知伯堂)인데 북직례(北直隷) 순천부(順天府) 준화현(遵化縣) 사람이다.
이때 평수가(平秀嘉)가 용산창(龍山倉)을 점거하였는데 쌓인 곡식이 수십만 석이요, 경성으로 그들의 소굴을 삼았다. 제독이 이에 이영(李寧)ㆍ조승훈(祖承訓) 등으로 1만 명 기병을 거느리고 개성에 주둔하게 하고, 양원(楊元)을 명하여 평양에 진을 치고 대동강을 점검하여 군량길을 잇게 하며, 이여백(李如栢)은 보산역(寶山驛) 등지에 주둔하여 도움을 주도록 하며 사대수(査大受)는 이전 그대로 임진강을 지키게 하고, 제독 자신은 몸소 동서로 살펴보면서 조절하였다.
또 비밀리 사대수를 시켜 결사대를 모아 샛길로 나가서 용산에 쌓인 곡식을 불태우게 하니 왜적이 식량이 결핍하여 동남쪽 여러 고을로 나가 노략질하여 마음대로 빼앗으니 땅굴 속에 감추었던 미곡까지 모두 파내어 가져가게 되었다. 또 가평(加平)ㆍ포천(抱川)으로 향하고 깊숙히 춘천까지 들어가서 불을 놓고 빼앗기를 거의 다하였다. 청정(淸正)은 또 졸병을 천여 명 혹은 수천 명씩 나누어 보내어 노략질하기를 마지 않으며 서울 주위 군읍에는 무덤까지도 파내니 보기에도 참담하고 가슴이 아파 통곡할 만한 일이었다. 증언하는 이런 시가 있다.
사람 사는 연기 천리간에 거칠고 쓸쓸해지니 / 人煙千里莾蕭瑟
귀신이 울고 원망하는데 밤에는 도깨비 불만 푸르르구나 / 鬼哭神怨夜燐靑
긴 끈으로 오랑캐를 얽어맨다고 부질없이 말하지만 / 浪說長纓堪繫虜
깨끗이 맑게 하는 공 누가 다시 창명을 진정하나 / 廓淸誰復鎭滄溟
제독이 철병할 의사를 가지면서도 근심에 잠겨 결정을 못하였는데 군막 중의 선비 정문빈(鄭文彬)ㆍ조여매(趙如梅)가 역시 화친하기를 권하고 군사 파하는 것을 주장하였다. 병조 판서 이항복이 처음 제독을 중강(中江)에서 맞이하고 돌아와 왕께 아뢰기를,
“제독의 군사가 기율이 있으니 반드시 이 도적을 격파할 것입니다. 다만 막하에 정문빈과 조여매 두 사람이 일을 주장하니 방해가 있을까 염려됩니다.”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과연 그대로 되었다. 그런데 두 사람 역시 경략에게 규탄을 당하였다. 대개 평양을 극복할 때는 그 기세가 매우 성하고 다시 개성에서 싸워 형세가 대쪽을 가르는 것같았는데, 두 사람이 중간에 있으면서 그 마음을 동요시켰으며 벽제(碧蹄)에서 패전하게 되자 기운이 크게 꺾였다. 또 이 역에 와서 군사를 상실하고, 질병이 성행하니 여기서 두 사람의 모계를 받아들여 급히 휴식하여 판을 매듭지으려고 한 것이었다. 그런데 왜적 역시 양식이 결핍되고 군사는 종기가 많이 생겼다. 또 명 나라 군사가 다시 호준포(虎蹲砲) 등의 대포 및 전차를 강위에 벌여놓고 전세가 날로 커지니, 적의 추장 행장(行長)이 평양에서의 패전을 경험 삼아 돌아갈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때마침 창의사 김천일(金千鎰)의 군중에 이신충(李藎忠)이라는 자가 자청하여 서울에 들어가서 적정을 탐지하다가 두 왕자 및 장계군(長溪君) 황정욱(黃廷彧) 등을 만나보고 돌아와서, 적이 화친할 의사가 있음을 말하면서 왕자의 글 및 황정욱 등의 장계를 내놓았다. 그 장계 등은 모두 두 본이 있는데 진본 장계에서는 적중의 사정을 자세히 쓰고 또 그 언문으로 자세히 적었으며, 위본 장계에는 적이 말하는 대로 썼는데 그 중에는 관백 전하라는 말도 있으며 또 신(臣) 자를 쓰지 않았으니, 그 계교가 대개 임시방편으로 적을 속이려는 의사에서 나온 것인데 스스로 주위 사람이 비밀리 엿보는 데 빠져들어가는 줄을 깨닫지 못한 것이었다.
창의사 김천일이 이신충의 전하는 글을 얻고 또 용산에서 수군이 적의 추장과 통화(通和)하는 글을 얻었는데 모두 체찰사에게 보냈다. 체찰사는 다만 위본 장계 한 건을 등록하여 행재소에 계달하고 또 말하기를,
“신하로서 차마 듣지 못하고, 말할 수 없는 말이 있습니다.”
하였다. 또 왜적의 글로 사대수(査大受)에게 보이니 사대수가 곧 가정(家丁) 이경(李慶)을 시켜 평양에 달려 보고하였다. 조정에서는 황정욱 등이 적에게 절개를 잃고 또 의심할 만한 일이 있다고 여겨 침을 뱉으며 더럽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어 후일 국문하는 단서를 열어놓았다. 이것은 모두 일찍이 철원에서 격서(檄書)를 전할 때에 사성 황신(黃愼)이 붓을 들고 지은 내용 중에,
“묘당에서 힘써 금(金) 나라와의 화친을 주장하니 진회(秦檜)의 고기를 먹어야 하고, 간신이 제일 먼저 촉(蜀)으로 행행(行幸)할 것을 주장하였으니 국충(國忠)의 머리를 베어 매달아야 한다.”
하였는데, 그 뜻이 실은 누구를 가리킨 대상이 있었기 때문에 체부(體府)에서는 이 말을 듣고 원래 벌써부터 원한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에 와서 모함하는 흔적이 있는 것을 사람들이 바로잡지 못하였다. 그런데 당시의 일은 은미하고 굴곡된 실정을 자세히 알기 어려웠고 사람들의 말 역시 믿을 수 없었다. 이후로 전쟁과 화친 두 가지의 일로 서로 논란하고 변명이 있었으니 명 나라 조정에서도 잘 분간하지 못하였다.
만력(萬歷) 20년 임진 6월부터 21년 계사 3월까지 도합 2년간이다.


 

[주D-001]조경남(趙慶男) : 원문에는 이름의 경(慶)이 경(敬)으로 되었으나 《한양 조씨 족보(漢陽趙氏族譜)》에 의거하여 경(慶)으로 고침. 또 원문에는, “선비 박세진(朴世珍)…… 조경남(趙敬男)…… 모두 조헌(趙憲)의 막하에서 같이 일을 하다가 이때에 와서 함께 죽었다.” 하였는데, 조경남은 조헌의 문인으로 종군(從軍)한 적은 있으나 임진왜란 때 전사하지 않고 1641년(인조 19)에 병사(病死)하였다.  
[주D-002]충사(蟲沙) : 전쟁터에서 죽은 군사들을 말함. 《포박자(抱朴子)》에 “전장에서 죽은 장교들은 원학(猿鶴)이 되고 군사들은 충사(蟲沙)가 되었다.” 하였음.
[주D-003]양공(羊公) : 진(晉)의 태산(泰山) 남성(南城) 사람 양호(羊祜)를 말함. 선정을 베풀어 인심을 매우 얻었으며, 그가 죽은 뒤에 백성들이 평소에 늘 오르던 현산(峴山)에 비를 세웠는데, 그 비를 바라보고 모두 눈물을 흘려 타루비(墮淚碑)라 불렀다.
[주D-004]맹분(孟賁)과 하육(夏育) : 모두 옛날의 용맹한 사람.
[주D-005]양(亮) : 금(金)의 황제. 임금을 죽이고 자리를 빼앗았으므로 역적 양이라 하였다. 송(宋)과의 맹약(盟約)을 어기고 송(宋)을 치다가 중도에서 자기의 부하에게 피살되었다.
[주D-006]외로운 …… 때문이요 : 여진족이 군사로 송(宋)에 깊이 쳐들어갔을 때 송의 장수가, “여진이 본래 병법을 모르는구나.”라고 하였다.
[주D-007]중행열(中行說) : 한 문제(漢文帝) 때의 환관(宦官). 흉노(匈奴)에게 사신으로 갔다가 항복하여 본국을 해치므로 가의(賈誼)가 임금에게 “신이 흉노를 쳐서 중행열의 등에 매를 치겠습니다.” 하였음.
[주D-008]남조(南朝)에 …… 비웃음 : 금(金) 나라가 군사를 거느리고 송(宋) 나라에 쳐들어가서, “남조[宋]에 사람이 없구나, 이 지방을 지켰더라면 내가 강을 건너지 못하였을 것이다” 하였다.
[주D-009]북군(北軍)이 …… 말 : 남북조(南北朝) 시대에 진(陳) 나라에 수(隋) 나라 군사가 창졸간에 침입하는 것을 보고 북군(北軍)이 강을 날아서 건너왔다고 놀랐다.
[주D-010]빈(邠)을 떠나던 : 태왕(太王)은 주 문왕(周文王)의 조부인 고공단보(古公亶父). 처음에 빈(邠)에 살았는데 적인(狄人)의 침입을 받자 빈을 버리고 기산(岐山)으로 옮겼음.
[주D-011]명황(明皇)이 …… 피난하듯 : 명황(明皇)은 당 현종(唐玄宗)의 시호. 안녹산(安祿山)의 난을 만나 서촉(西蜀)으로 피난하였음.
[주D-012]이성(李晟) : 당 덕종(唐德宗) 때 사람. 당(唐)의 역적 주자(朱泚)가 장안(長安)을 함락하고 덕종(德宗)이 봉천성(奉天城)으로 파천하였을 때 이성(李晟)이 주자를 쳐부수고 서울을 회복하니, 덕종이 기뻐하여, “하늘이 이성을 낳은 것은 사직(社稷)을 위해서요 짐(朕)을 위함이 아니로다.” 하였음.
[주D-013]육지(陸贄) : 당 덕종(唐德宗) 때 사람. 당 덕종이 주자(朱泚)의 난을 피해 봉천(奉天)으로 파천하였을 적에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종행(從行)하여 많은 조서(詔書)를 지었는데, 그가 기초한 조서를 보고 장수와 군사들이 느껴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주D-014]봉천(奉天)으로 …… 행차 : 당 덕종(唐德宗)이 주자(朱泚)의 난을 피해 봉천성(奉天城)으로 갔던 일을 말함. 여기서는 선조(宣祖)가 서쪽으로 파천한 것을 비유한 말.
[주D-015]밤중에 …… 들으니 : 진(晉) 나라 조적(祖逖)이 유곤(劉琨)과 같이 잠을 자다가 밤중에 닭 울음 소리를 듣고 유곤을 발로 차서 깨우며, “난리가 나겠구나, 공을 세워보세.” 하였다.
[주D-016]중류(中流)에서 …… 치며 : 진(晉) 나라 조적(祖逖)이 군사를 거느리고 강을 건너면서 중류(中流)에서 돛대를 치며 말하기를, “중원(中原)을 회복하지 않고는 돌아오지 않겠다.” 하였다.
[주D-017]복덕성(福德星)이 …… 임했고 : 옛날에 복덕성(福德星)이 있는 나라를 침범하면 침범한 나라가 망한다는 말이 있다. 복덕성이 오(吳) 나라 분야(分野)에 있을 때에 진(秦) 나라가 침범하였다가 몇 해 뒤에 오 나라는 회복되고 진 나라는 망하였다.
[주D-018]신정(新亭)에서 …… 울던 일 : 진(晉) 나라가 외래 민족에게 중원(中原)을 잃고 강동(江東)으로 옮겨 갔을 때에 여러 사람들이 서로 보며 울매, 왕도(王導)가 말하기를, “힘을 다하여 회복할 생각은 않고 울기만 하는가.” 하였다.
[주D-019]왕통(王通) : 수(隋) 나라 때의 유학자(儒學者). 벼슬하지 않고 제자를 가르치는 데 힘썼다. “선인(先人)이 남겨준 헌 집이 있으니, 벼슬하지 않겠다.”고 한 말이 있다.
[주D-020]자공(子貢) : 춘추(春秋) 때 위(衛) 나라 사람으로, 공자(孔子)의 제자로 말을 잘하고, 또 식화(殖貨)에 능하여 집에 천금을 두고 노(魯) 나라와 위(衛) 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주D-021]안공(顔公) : 당(唐) 나라의 안진경(顔眞卿)을 말함. 안진경이 평원 태수(平原太守)로 있을 때 안녹산(安祿山)의 반란이 있을 것을 미리 알고 성을 개축하고 참호를 파고 또 미리 미곡을 많이 저축하여, 난리를 대비한 일이 있다. 〈걸미첩(乞米帖)〉이 있다.
[주D-022]조적(祖逖) : 진 원제(晉元帝) 때의 사람. 군사를 이끌고 강음(江陰)에 주둔하여 병기(兵器)를 제작한 일이 있다. 그는 이곳에서 2천여 명의 군사를 얻어 진군하였다.
[주D-023]어찌 …… 바라보듯 : 춘추시대(春秋時代) 열국의 하나인 월(越)은 중국의 남방 지금의 절강성(浙江省) 소흥(紹興)을 중심으로 한 지방이고, 진(秦) 나라는 서북방으로 지금의 섬서(陝西) 지방이다. 두 나라는 서로 멀리 떨어져 양국 사이에 직접적인 이해 상관이 없음을 말한다.
[주D-024]작은 …… 있다 : 《논어(論語)》 공야장편(公冶長篇)에, “공자가 이르기를, ‘작은 고을이라도 반드시 구(丘 공자의 이름)처럼 충신(忠信)한 사람은 있으나 구처럼 학문을 좋아하지는 못한다’[子曰十室之邑必有忠信如丘者焉, 不如丘之好學也]”라고 하였다.
[주D-025]악의(樂毅) : 전국(戰國) 때 연(燕) 나라 장수. 연 소왕(燕昭王) 때 조(趙)ㆍ초(楚)ㆍ한(韓)ㆍ위(魏)ㆍ연(燕) 5개국의 군사를 거느리고 제(齊)의 70여 성을 함락하였다. 뒤에 소왕의 아들 혜왕(惠王)이 즉위하자 파직되어 망명하였음. 《사기열전》에 있음.
[주D-026]노숙(魯肅) : 삼국시대(三國時代) 오(吾) 나라 사람. 재산이 많았는데 난리중에 어려운 사람을 많이 구제하였다. 오(吳)의 장군 주유(周瑜)가 양곡을 필요로 하자, 미곡 3천 곡(斛)이 쌓인 곳간을 가리키며 흔쾌히 주유에게 주었다.
[주D-027]무계(武溪) : 강 이름. 한(漢) 나라 마원(馬援)이 남쪽 오랑캐를 무계(武溪)에서 격파하였다.
[주D-028]차부(箚付) : 장관이 관원을 보낼 때 공문서를 주는 것.
[주D-029]구벌(九伐) : 《주례(周禮)》에 의하면 옛날 천자는 여러 나라의 불법 무도한 죄악행위를 징계하는 방법으로 그 죄악의 종류에 따라 생(眚)ㆍ벌(伐)ㆍ단(壇)ㆍ삭(削)ㆍ침(侵)ㆍ정(正)ㆍ잔(殘)ㆍ두(杜)ㆍ멸(滅) 등 9개 정벌이 있었다고 한다.
[주D-030]석목(析木)의 자리 : 옛날 중국에서는 국가의 위치를 하늘에 있는 별들의 방위에 응하여 분야(分野)를 정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중국의 연(燕) 나라와 함께 동쪽 석목성(析木星)의 위치에 해당하는 자리가 된다는 것이다.
[주D-031]풍목(風木)이 하늘을 맡고 : 목(木)은 방위에 있어서 동쪽이 되고 4계절에 있어서 봄이 되니 동방은 음양의 기운이 비로소 움직이고 만물이 생겨나는 것을 의미하고, 맹춘(孟春) 즉 음력 정월의 동풍은 겨울의 동결(凍結)을 해소하며 만물의 생동을 돕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동방 나라의 이른 봄을 의미하는 말이 되는 것이다.
[주D-032]신포서(申包胥)가 …… 호소하던 뜻 : 옛날 중국에서 오(吳) 나라가 초(楚) 나라를 침공하였는데 초 나라 신하 신포서(申包胥)가 진(秦) 나라에 사절로 파견되어 가서, 울며 사정을 호소하면서 구원병을 간청하여 결국은 오 나라의 침략군을 격파하고 국가의 기초를 튼튼히 한 일이 있었다.
[주D-033]거마목(拒馬木) : 거마(拒馬)는 말[馬]을 막는다는 뜻으로, 옛날 적군을 방어하는 시설의 일부를 말하는 것인데, 나무를 앞에 차(叉) 자 형으로 세운 것.
[주D-034]함매(銜枚) : 옛날 전투시 군사들이 소리없이 행진하게 하던 한 방법인데, 마치 말에 재갈을 물리듯 입에 나무 막대를 물리고 행군하였다.
[주D-035]분호조판서(分戶曹判書) : 분조(分曹) 즉 분정부(分政府)의 호조 판서를 말하는 것이다. 임진왜란 중 왕과 정부 일행이 북으로 의주(義州)를 향하여 피난가는 도중 만일의 경우를 생각하여 세자 즉 광해군(光海君)으로 따로 일부의 정부 대신들을 데리고 분정부를 조직 강원(江原)ㆍ경기도 지방을 중심으로 임시 전수(戰守), 민정의 일을 별도 시행하게 하였는데, 분조라고 하여 육조의 관원을 따로 임명하고 집무하게 하였다.
[주D-036]비방하는 광주리의 글 : 비방하는 광주리의 글은 옛날 중국의 전국(戰國) 시대에 위(魏) 나라 장수 악양(樂羊)이 중산(中山) 땅을 치고 돌아와서 그 공을 말할 때에 임금 문후(文侯)는 광주리에 가득찬 그를 중상하는 글을 보이니, 악양은 그제야 자기의 세운 공이 많은 사람들의 중상을 받아주지 않은 임금의 힘에 의한 것임을 알고 감사하였다는 것이다.
[주D-037]말을 잃은 것이 : 진(秦) 나라 때 변방에 한 늙은이가 말을 기르다가 잃은 것이 다시 복이 되어 나갔던 좋은 말을 데리고 들어오고, 그후에도 그 말로 인하여 화와 복이 반복되었지만 그 주인 늙은이는 이러한 일시적인 화와 복에 모두 태연하여 화복을 인간 생활의 상사로 알고 지냈다는 것이다. ‘새옹지마’의 고사임.
[주D-038]용기(龍旗) : 두 마리의 용을 그린 큰 깃발로 용기(龍旗), 교룡기(交龍旗)라고도 하는데 천자의 깃발이다.
[주D-039]동주(銅柱) : 구리 기둥을 세워 국경을 표시한다는 것인데, 중국 한(漢) 나라 때 마원(馬援)이 남쪽의 먼 나라 교지(交趾)를 정벌하고 구리 기둥으로 경계 표시를 하였던 데에서 연유한 것이다.
[주D-040]점성(苫城) : 옛날 노(魯) 나라 땅 즉 지금 산동성의 한 지방이었다. 전국시대 제(齊) 나라에서 노 나라를 칠 때에 계씨(季氏)의 가신 점이(苫夷)라는 사람이 양호(陽虎)의 무모한 행동을 억제하여 이곳에서 패전을 면한 일이 있었다.
[주D-041]작인(鵲印) : 중국 한(漢) 나라 때 장호(張顥)라는 사람이 양(梁) 나라 정승이 되었는데 까치와 비슷한 새가 날아와서 땅에 앉으려 하므로 사람을 시켜 잡으니 한 개의 돌로 화하였으며, 그 돌을 깨뜨리니 충효후인(忠孝侯印)이라고 새긴 금인(金印)이 나왔다고 한다. 따라서 어진 신하의 이적(異蹟)을 작인(鵲印)으로 표시하는 것이다.
[주D-042]위타서(尉佗書) : 위타(尉佗)는 한(漢) 나라 진정(眞定) 사람인데 원래 성명은 조타(趙佗)였으며, 남해위(南海尉) 임효(任囂)가 죽은 다음 직무를 수행하면서부터 위타로 부르게 되었다. 세력이 커져 일시는 장사(長沙) 등지를 공략하고 남월(南越)의 무제(武帝)로 자칭하기도 하였는데 한 나라 문제가 육가(陸賈)를 보내어 그 무도함을 책망하니 위타가 사죄하며 한 나라의 신하가 되었다.
[주D-043]요황(要荒) : 요황(要荒)은 천자 도읍지에서 먼 지방을 말하는 것이다. 즉 중국에서는 본토 밖 5백리 되는 곳을 번복(藩服)이라 하고 거기서 다시 5백리 밖을 유복(綏服), 유복에서 5백리 밖을 요복(要服), 요복에서 5백리 밖을 황복(荒服)이라 하였다는 것인데 여기에 말하는 요황은 곧 요복ㆍ황복의 의미이니 중국에서 가장 먼 지방의 나라를 의미하는 말이다.
[주D-044]진회(秦檜) : 진회(秦檜)는 중국 송(宋) 나라 말기의 유명한 간신이다. 금(金) 나라와의 화친을 적극 주장하여 송 나라의 중흥을 방해하였을 뿐만 아니라 충신 악비(岳飛)를 죽이고, 장준(張浚)ㆍ조정(趙鼎) 등을 찬축(竄逐)하고 정권을 마음대로 하여 결국 송 나라를 위망의 지경에 이르게 하였는데, 여기서는 임진왜란 때 우리 나라 조정에서 일본과 화친을 말하는 자를 이 진회에 비유한 것이다.
[주D-045]국충(國忠) : 중국 당(唐) 나라 현종 때 양태진(楊太眞) 즉 양귀비의 족형 양국충(楊國忠)인데,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자 먼저 촉(蜀) 땅으로 피난갈 것을 주장하였으며, 피난 도중 마외역(馬嵬驛)에서 금군(禁軍)들에게 살해되었다. 여기서는 임진왜란의 발생과 함께 왕에게 피난을 건의한 대신들을 양국충에게 비유한 것이다.

간본 아정유고 제3권
 문(文) - 전(傳)
홍의장군전(紅衣將軍傳)


곽재우(郭再祐)의 자는 계수(季綏)이고 본관은 현풍(玄風)이며 황해 감사(黃海監司) 월(越)의 아들이다. 월이 일찍이 의주 목사(義州牧使)로 있었는데 재우가 곁에서 3년 동안을 모시고 있으면서 한 번도 여색(女色)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이때 나이가 20여 세로, 사람들은 모두 그의 확고한 지조에 탄복하였다.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 들어가니, 관상을 잘 보는 사람이 특이하게 여기며 ‘천하에 이름이 가득할 것이다.’ 하였다. 《춘추(春秋)》를 통달하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였으며, 여러 가지 사무에 관하여 두루 알고 병가(兵家)의 서적을 널리 읽었다. 아버지가 별세하자 집상(執喪 부모상에 예절을 다하는 것)에 슬픔을 다하였다. 이때 애첩(愛妾)이 병이 심하여 곧 죽게 되었는데 울면서 한 번 만나 보기를 청하니 재우는 사람을 시켜 영결(永訣)하기를,
“죽은 후의 부고는 받을 수 있지만 만나볼 수는 없다.”
하였다. 아버지의 복(服)을 마치자 과거 공부를 버리고 의령(宜寧)의 기강(岐江)에 정자를 짓고는 농사꾼 차림으로 한가히 노닐면서 고기잡이와 낚시질로 스스로 즐거워하여 장차 그대로 살다가 늙을 듯이 하였다.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20년(1592) 여름 4월에 왜놈들이 대거 침략해 오니 여러 고을들이 모두 지키지 못하고 패하였다. 재우는 이에 슬퍼하여 집의 사당(祠堂)에 고하고 가산(家産)을 털어 의병(義兵)을 일으켰다. 중국에 갔을 때에 명 나라 황제가 붉은 비단을 하사하였는데, 이 비단을 재단하여 전포(戰袍)를 만들어 입고 흰 말을 타고 스스로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 하늘에서 내려 온 붉은 옷을 입은 장군이라는 뜻)이라고 호하였다. 왜장 안국사(安國司)가 전라도(全羅道)로 향한다고 선언하고 곧바로 정진(鼎津)에 이르렀으나 진창 때문에 행군할 수가 없었다. 이에 먼저 포로들을 시켜 높고 건조한 곳에 기를 세우게 하고 다음날 아침에 건너려 하였다. 재우는 이것을 염탐하여 알고는 한밤중에 왜놈들의 기를 뽑아다가 바꾸어 진창 속에 꽂아 놓은 다음에 복병(伏兵)하고 기다렸더니, 과연 적이 진창 속에 빠졌다. 이때 복병이 나와서 거의 전멸시켰다. 이윽고 적이 크게 쳐들어오니 재우는 우리 편 군사가 적어 맞설 수 없음을 헤아리고는 힘이 세고 키가 큰 사람 10여 명을 뽑아서 모두 흰 말을 타고 붉은 전포를 입히고는 기에다 ‘천강홍의장군’이라고 쓴 다음 나누어 산골짜기 깊은 곳에 지키고 있게 하고는 재우가 먼저 적진(敵陣)을 습격하여 유인하니, 적은 온 무리를 총동원하여 추격하는데 납으로 만든 총알이 비오듯 쏟아졌지만 끝내 맞히지 못하였다. 재우가 수목(樹木) 사이 이곳저곳에서 나타나니 적이 바야흐로 놀라고 의심하던 차에 다시 보니 붉은 전포를 입고 흰 말을 탄 사람이 높은 봉우리와 깎아지른 절벽 사이에서 나와 빙 둘러서서 어지럽게 돌아가는데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적은 더욱 놀라고 의심하여 천신(天神)이라고 생각하여 감히 가까이하지 못하니 재우가 드디어 숲 속에서 나와 어지럽게 활을 쏘아 곧 전멸시켰다.
이때 순찰사(巡察使) 김수(金睟)가 왕을 호가하려고 용인(龍仁)에 당도하였다가 패하여 산음(山陰)으로 돌아오니 민심이 울분하였다. 재우는 격문(檄文)을 전하여 김수의 8가지 죄를 말하고 장차 군사를 이동하여 공격하려 하니, 김수가 크게 노하여 반역죄(叛逆罪)로서 행조(行朝 임금이 순행 중에 임시 머무는 곳, 즉 행재소(行在所))에 논계(論啓)하였다.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이 처음 거창(居昌)에 도착하여 재우의 격문을 보고는 한동안 놀라다가 학유(學諭) 박사제(朴思齊)에게 묻기를,
“순찰사는 조정에서 명한 관리인데 재우는 어떤 사람이기에 감히 이렇게까지 욕한단 말인가?”
하였다. 사제는,
“재우는 나의 벗입니다. 사람이 충성스럽고 효도하며, 《사기(史記)》를 읽다가 세상이 어지럽고 시기가 위태로운 때에 의사(義士)가 절의를 지킨 것을 보면 반드시 목메어 눈물을 흘리며 언제나 말하기를 ‘우리 집은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입었으니 나라에 만일 환난(患難)이 있게 되면 나는 마땅히 목숨을 바쳐 보답하겠다.’ 하였습니다. 오늘의 사건은 비록 자세히 알지는 못하나, 순찰사가 경내(境內)를 탈출한 지 오래며 지금 갑자기 군사를 패하고 돌아오므로 대중의 마음이 화합치 못하니, 어쩔 수가 없어서 부득이 이런 일을 했을 것이요, 결코 딴 마음은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성일은 낯빛을 변하면서 말하기를,
“조정의 조처에 대해서는 꼭 알 수 없으나 나는 시험삼아 재우를 위하여 조정(調整)해 보겠다.”
하고는, 김수와 재우에게 편지를 보내어 두 편을 말리고 급히 계(啓)를 올려 재우를 구원하면서 그가 장수의 재질이 있음을 극구 칭찬하였으며, 재우도 상소하여 스스로 사실을 밝히니 상이 가상히 여겨 유곡찰방 겸형조정랑(幽谷察訪兼刑曹正郞)을 제수하였다.
창원(昌原)에 있는 왜적이 진해(鎭海)에 있는 왜적들과 고성(固城)ㆍ사천(泗川)에 진영(陣營)을 연하고는 진주성(晉州城)을 대거 침략하는데, 군대의 기세가 대단하였다. 왜적들이 촉석루(矗石樓) 아래에 주둔하고 있으니 성일이 모든 장수들을 지휘하여 갑자기 쳐들어가 적을 무수히 살상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수만 명의 왜적이 다시 진주를 10겹으로 포위하고는 7주야 동안을 공격하니 재우가 선봉장(先鋒將) 심대승(沈大承)에게 밤을 틈타 진주의 북쪽에 있는 산에 올라가 횃불을 죽 늘어 놓고 북을 치며 떠들면서 큰 소리로 ‘홍의장군이 호남(湖南)의 의병들과 함께 내일 왜적을 무찌를 것이다.’ 하게 하였는데, 그 다음날 호남의 의병장(義兵將) 최경회(崔慶會)가 살천(薩川)에서 약속하지 않았는데도 오니 적들은 이것을 바라보고는 놀라 주둔하고 있던 막사를 불사르고 도망쳤다. 상은 재우가 공을 자처하지 않음을 가상히 여겨 절충장군 조방장(折衝將軍助防將)을 제수하였다.
21년 왜의 관백(關白) 평수길(平秀吉)이 진주의 지도를 보고 임진년(1592, 선조 25)에 두 번이나 패한 것을 분히 여겨 대장 행장(行長)ㆍ청정(淸正)에게 편지를 보내어 꾸짖기를,
“진주를 무찌르지 못하면 바다를 건너오지 말라.”
하니, 이에 왜적들은 다시 진주를 포위하였다. 순찰사 권율(權慄)이 행주(幸州)에서 이긴 것을 믿고 기강(岐江)을 건너 맞아 공격하려 하니, 재우가
“적세(敵勢)가 한창 강하고 우리의 군사는 훈련이 되지 못했으니 가벼이 진격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순변사(巡邊使) 이빈(李薲)과 종사(從事) 성호선(成好善)은 여러 장수들이 지체하는 것을 꾸짖고 권율과 함께 강을 건너 함안(咸安)으로 진격하다가 적의 대포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는 것을 듣고는 되돌아와 정진(鼎津)을 건넜다. 도원수(都元帥) 김명원(金命元)은 권율ㆍ이빈과 함께 전라도로 향하였으며, 흠차 총병(欽差總兵) 유정(劉綎)은 팔거(八莒)에 주둔하고, 흠차 유격(欽差游擊) 오유충(吳惟忠)은 봉계(鳳溪)에 주둔하고 있으면서도 바라보기만 하고 구원해 주지 않았다. 적이 진주성을 1백 겹으로 포위하여 8일 만에 함락하니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ㆍ병사 최경회(崔慶會)ㆍ충청 병사 황진(黃進)ㆍ복수장(復讐將) 고종후(高從厚)가 모두 죽었으며, 군사와 민간인으로 죽은 자가 6만 명이었다. 재우가 두 번이나 진주를 구원했었는데 이때에는 가지 않았으니 적을 잘 헤아림이 이와 같았다.
성주목사(星州牧使)를 제수하니,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이 재우로 하여금 삼가(三嘉)에다 악견산성(嶽堅山城)을 쌓고 현풍(玄風)에다 석문산성(石門山城)을 쌓도록 하였다. 이때 흠차 총병 양원(楊元)이 남원(南原)에 군사를 주둔하고 있었다. 원익은 양원에게 군사를 옮겨 영남(嶺南)에 주둔해 줄 것을 청하려 하니, 재우가 원익에게,
“산성을 보수하고 무기를 수선하여 때를 기다렸다가 행동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에 있어서 가장 훌륭한 계책입니다. 만일 양 총병(楊總兵 양원을 가리킨다)이 영남으로 옮겨 주둔하게 하는 것은 마치 범이 산의 숲에서 나오고 용이 깊은 못에서 떠나는 것과 같으니 여우와 삵이나 수달의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하였다. 원익이 사례하면서,
“이같이 훌륭한 장군이 있으니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하였다. 재우는 얼마 있다가 벼슬을 버리고는 의병을 거느리고 의령(宜寧)의 가력(嘉力)에 주둔하여 이광악(李光岳)을 부장(副將)으로 삼고 김덕령(金德齡)ㆍ홍계남(洪季男)을 좌우협(左右協)으로 삼아 곧바로 동래(東萊)에 도착하여 연해(沿海)에 있는 왜적들을 공격하였다. 덕령과 계남은 뛰어나게 날래고 민첩하여 말을 달리며 칼을 휘두르고 용맹을 자랑하면서 진격하니 적은 굳게 지키고 나오지 않았다. 재우는 주사(舟師 수군(水軍)을 말한다)를 재촉하여 적진 가까이까지 다가가서 광악과 함께 마주앉아 술을 마시는데 사발만한 적의 대포알이 두 사람이 있는 뱃전을 지나 물속에 떨어져 한참 동안이나 소리가 울리고 물이 끓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담소(談笑)하니 적이 더욱 두려워하여 감히 맞아 싸우지 못하였다. 재우는 드디어 군사를 정돈하여 돌아왔다.
25년, 방어사(防禦使)에 제수되어 창녕(昌寧)의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지키고 있었는데 청정이 다시 대거 침략해 오자, 재우는 창녕ㆍ밀양(密陽)ㆍ영산(靈山)ㆍ현풍의 군사를 거느리고 대오(隊伍)를 엄히 하여 명령을 위반하는 자를 목 베며, 관사(館舍)에 땔나무를 쌓아놓아 사수(死守)할 뜻을 보이니, 온 군사가 두려워하여 재우를 벼락이나 귀신처럼 여겼다. 적은 이미 성 밑까지 쳐들어왔는데도 재우는 여유만만하게 이야기하고 웃으면서 ‘굳게 지키라.’ 명령하고 이르기를,
“왜놈들 자신이 병법(兵法)을 알고 있는데 어찌 쉽게 진격해 오겠는가?”
하였는데, 1주야를 경과하자 과연 싸우지 않고 물러가 서쪽으로 황석(黃石)을 무찌르고 남원을 함락하니 여러 고을이 모두 패하였다. 원익은 걱정하여 재우에게 군사를 해체하도록 하니 재우는 즉시 편지를 써서 답하기를,
하고는 거절하고 따르지 않았다. 그 후 얼마 있다가 어머니 상(喪)으로 인하여 집으로 돌아가니 상이 특별히 3번이나 기복(起復 상중(喪中)에 벼슬에 나아가는 것)을 명하였으나 모두 상소하여 진정(陳情)하고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울진(蔚珍)으로 이사하여 살면서 손수 패랭이[蔽陽子]를 만들어 팔아서 자급(自給)하니 사람들은 그의 여막(廬幕)을 방어점(防禦店)이라 이름하였다.
복(服)을 마치고 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에 제수되어 섬에 있는 산성(山城)을 수리할 것을 청하여 2번이나 계(啓)를 올렸으나 들어주지 않으므로 드디어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고는 벼슬을 버리고 돌아오니 대신(臺臣) 홍여순(洪汝諄)이 ‘직무를 유기하고 태만하였다.’고 탄핵하여 영암(靈巖)으로 귀양갔었는데, 뒤에 풀려 돌아와서 비파산(琵琶山)에 들어가 솔잎을 먹고 벽곡(辟穀 곡식을 먹지 않고 곡식 이외의 것을 조금씩 먹는 것)하였다. 얼마 안 되어 찰리사(察理使)에 임명되니 순행하여 산성의 형세를 살피고 인동(仁同)의 천생산성(天生山城)을 보수하였으며, 여러 번 승진되어 한성 우윤(漢城右尹)을 지냈다.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자 상소하여 임해군 진(臨海君珒)을 벨 것을 청하였다. 여러 번 통제사(統制使)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상소하여 중흥(中興)에 대한 세 가지 계책을 말하였으며 부름을 받고 부총관(副摠管)에 임명되었다. 이때 김수(金睟)가 도총관(都摠管)이었는데 재우에게,
“영공(令公)이 몇 년 동안 벽곡하였으니 어떻게 운검(雲劍 의장(儀仗)에 쓰는 큰 칼)을 메겠는가?”
하고는 언제나 자기가 메었다. 한성 좌윤(漢城左尹)에 임명되어서는 상소하여 ‘전하(殿下)의 나라가 반드시 은(銀) 때문에 망할 것입니다.’라고 직언하였다. 함경도 관찰사에 임명되었을 때에 조사(詔使) 염등(冉登)이 탐욕스럽고 독직(瀆職)하며 횡포가 심하니, 재우가 상소하여 통역관과 원접사(遠接使)를 극히 비난하고 드디어 벼슬을 버리고 남쪽으로 돌아왔는데 다시 전라 병사를 제수했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조정의 신하가 영창대군 의(永昌大君㼁)를 죽일 것을 청하였는데도 사람들은 감히 말하지 못하였는데 재우가 상소를 올려 말하기를,
“이제 겨우 8세인 아이로서 모역(謀逆)이 무엇인지도 모를 터인데, 그대로 처형하였다가 자전(慈殿)께서 슬픔을 견디지 못하여 혹시라도 자결(自決)하신다면 전하께서 장차 천하에 무슨 구실로 변명하시겠습니까? 신(臣)은 오늘날 여러 신하들이 전하를 큰 불의(不義)에 빠뜨릴까 두려워합니다.”
하고는 드디어 창암(滄岩)에 집을 짓고 스스로 망우당(忘憂堂)이라 하고, 거문고와 배 1척으로 세속을 떠나 한가로이 지내면서도 언제나 변보(邊報 일선 지대의 전쟁 소식)를 들으면 곧 초연(愀然)히 기뻐하지 않으면서,
“내가 비록 늙었으나 국난(國難)이 있으면 마땅히 싸움터에 나가야한다.”
하였다.
나이 66에 졸하였다.
재우는 군사를 행함에 있어 상벌(賞罰)이 엄하고 분명하였으며 기율(紀律)이 정제(整齊)하였다. 군사들을 집안 식구처럼 사랑하여 모든 군사들의 환심을 얻었으며, 법을 행할 때에는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하더라도 조금도 용서해 주지 않았다. 말 위에서 손수 북을 치고 사람들에게 젓대와 피리를 불면서 천천히 걷는 것으로 절도(節度)를 삼아 한가한 것이 마치 싸우지 않을 듯이 하고는 곳곳에 군사를 매복(埋伏)시켰다가 왜적들이 오면 곧 활을 쏘며, 왜선을 쫓느라 언덕에 임하여 활을 쏘아 싸우지 않는 날이 없었다. 일찍이 이르기를,
“나라를 위하여 적을 토벌하는데, 적의 머리를 베어다 바쳐서 공을 요구하는 것은 의(義)에 맞지 않으며 공을 탐하여 목 베기를 좋아하면 반드시 해를 당할 것이다.”
하고는, 군사들에게 명령하여 적의 귀를 베어 오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이에 대해 이노(李魯)는,
“공의 본의는 참으로 좋지만 모든 사람이 공(公)을 따라 힘을 다하여 싸우는데 누구인들 공명에 대한 욕심이 없겠습니까? 만일 이렇게 한다면 끝내는 반드시 싸움에 게을러질 것이오.”
하였다. 왜적을 지산(砥山 현재의 의령(宜寧) 지방)에서 무찔러 무수히 사살하였는데, 이때 비로소 목 베는 것을 허락하니 군사들이 다투어 물에 뛰어들어 70여 급(級)을 베었는데도 공에 참여시키지 않았다. 군관(軍官) 조사남(曹士男)이 앞장서서 적선에 올라 칼을 휘두르며 이리저리 찌르다가 마침내 거짓 죽은 체하는 왜적에게 찔림을 당하였다. 재우는 크게 슬퍼하여 통곡하면서,
“내가 목 베는 것을 금지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하였다. 처사(處士) 조식(曹植)은 사람을 보는 안목이 있었는데, 일찍이 재우를 간택하여 외손서(外孫婿)로 삼고는 자제들이 매우 많았는데도 재우에게만 병서(兵書)를 가르쳤다. 재우는 이미 벽곡(辟穀)을 하고는 술을 마셔 크게 취할 때에 문득 문밖에다 귀를 기울이면 귓구멍에서 술이 콸콸 샘물처럼 쏟아져나오니, 대개 한갓 병서만을 안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로 기이한 술법(術法)을 통한 것이 이와 같았다 한다.
나는 다음과 같이 논한다.
“홍의장군은 성품이 뛰어나고 정직 순박하여 다른 사람과 서로 어울리지 않았으니, 조정에 있으면 마땅히 화가 미칠 것이며 싸움터에 있으면 마땅히 패할 것이다. 그러나 공리(功利)에 담박하여 물욕에 벗어났으며 형세를 살펴 승리를 취하였고, 기이한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능히 세상의 재화를 면하여 일찍이 한 번도 패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공리에 담박한 떄문이었다. 선무 공신록(宣武功臣錄 임진왜란을 평정한 공신록)에 조그마한 공로도 모두 기록하였는데, 홍의장군은 도리어 참여되지 않았다. 그러나 홍의장군의 공에 무슨 손상이 되겠는가?”


 

[주D-001]제(齊) 나라 …… 온전하였으며 : 전국 시대 제 나라는 연(燕)에게 크게 패하여 70여 성을 다 빼앗겼는데 오직 거(莒) 땅과 즉묵만이 항복하지 않았다. 이때 즉묵 사람들은 전단(田單)을 장군으로 삼고 결사적으로 항거하여 결국 제 나라를 회복하였다.《史記 卷82 單田列傳》
[주D-002]당(唐) 나라 …… 막아냈다 : 당 태종(唐太宗)이 3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에 쳐들어왔을 때 안시성주(安市城主) 양만춘(楊萬春)은 치열한 싸움을 벌여 당군(唐軍)을 물리쳤다.
[주D-003]임해군 진(臨海君珒) : 선조(宣祖)의 서장자(庶長子)였는데 성품이 사나워서 세자(世子)에 책봉되지 못하고 아우 광해군(光海君)이 세자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가등 청정(加藤淸正)에게 포로가 되기도 하였다.
[주D-004]은(銀) 때문에 망할 것 : 광해군 5년(1613)에 일어난 계축화옥(癸丑禍獄)을 말한다. 서양갑(徐羊甲) 등의 서류(庶類)들이 은상인(銀商人)을 죽이고 금품을 강탈한 죄로 체포되었다. 정인홍(鄭仁弘) 등 대북파들이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을 모함하려고 하던 차에, 서양갑 등이 김제남도 역모에 가담하였다고 허위 진술하여 사화(士禍)가 일어나 영창대군 등 많은 사람들이 참변을 당하였다.
[주D-005]조정의 …… 죽일 것 : 영창대군은 인목대비 소생으로 선조(宣祖)의 적자(嫡子)이다. 선조는 세자로 책봉한 광해군을 싫어하여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였는데, 이를 안 이이첨(李爾瞻)과 정인홍(鄭仁弘) 등이 광해군을 옹위하였다. 이들이 계축화옥(癸丑禍獄) 때에 영창대군이 역모(逆謀)에 가담했다고 무고하여 서인(庶人)으로 폐하였으며, 뒤에 마침내 강화부사(江華府使) 정항(鄭沆)의 손에 참혹하게 죽었는데 그때 겨우 14세였다.
[주D-006]적의 …… 일 : 옛날 전쟁 때에 적의 시체의 왼쪽 귀를 베어 이것으로 공(功)의 신표로 삼았다.

 

 

학봉일고 부록 제2권
 문수지(文殊誌)
학봉 선생(鶴峯先生)의 용사사적(龍蛇事蹟)


○ 공의 휘(諱)는 성일(誠一)이고, 자(字)는 사순(士純)이며, 성(姓)은 김씨(金氏)이니, 문소(聞韶) 계파(系派)로서 대대로 벼슬살이한 집안이며, 영가부(永嘉府)의 임하현(臨河縣)에서 살았다. 공은 일찍이 퇴계(退溪) 이 선생(李先生)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모나고 날카롭고 굳세고 엄한 성품을 다스려 부드럽게 하였다. 타고난 천분(天分)이 비록 곧았으나, 실천하여 닦은 공부 또한 많았다.
갑자년(1564, 명종 19)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무진년(1568, 선조 1)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내한(內翰)으로 들어갔다가 이조(吏曹)를 거치고, 옥당(玉堂)에 뽑혀 화요직(華要職)을 역임하여 한 시대의 명신(名臣)이 되었다. 다른 사람이 말하기 어려워하는 바를 능히 말하였는바, 강직한 지조와 충의의 표상을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칭송하였다.
○ 신묘년(1591, 선조 24) 겨울에 공이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으로서 차자(箚子)를 올려 시사(時事)를 극론(極論)하였는데, 말이 대단히 간절하였으며, 왕자궁(王子宮)에서 재물을 불리고 이권(利權)을 독차지하는 등의 일에 대해서도 거리낌 없이 곧바로 탄핵하였다. 그러자 상께서 깜짝 놀라면서 허물을 인책하였으며, 조야(朝野)가 모두 두려워하였다. 얼마 뒤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옮겨졌다.
○ 임진년(1592, 선조 25) 봄에 중추부(中樞府)로 전임(轉任)되었다가 얼마 되지 않아 형조 참의(刑曹參議)가 되었다. 이때 조정에서는 남방(南方)의 일을 걱정하여 장수를 바꾸기로 의논하였는데, 상께서 특별히 공에게 대신 맡도록 명하여, 드디어 공을 경상우도 병사(慶尙右道兵使)로 삼았다. 공은 명을 받고서 곧바로 떠났는데, 이는 대개 공이 일찍이 아뢰기를, “두려워할 것은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이요, 섬오랑캐는 족히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으므로, 이 명령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조정의 어진 사대부들이 모두들 탄식하고 애석해하면서 공의 앞일을 걱정하였다.
행차가 미처 병영(兵營)에 이르기도 전에 변방의 급보(急報)가 하루에 세 번이나 이르러 서울이 발칵 뒤집혔다. 상께서 크게 노하여 정원(政院)에 글을 내려 이르기를, “김성일이 일찍이 ‘일본은 근심할 것이 없다.’고 말하였는데, 이제 대거 내침(來侵)하였으니, 내가 장차 김성일을 국문(鞫問)하겠다. 의금부(義禁府)로 하여금 잡아오게 하라.” 하였다.
이때 여러 재신(宰臣)과 추신(樞臣)들이 모두 입시해 있었는데,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상공(相公)만이 홀로 자리에서 일어나 아뢰기를, “이처럼 위급하고 절박한 때에 신이 어찌 차마 성상께 거짓을 아뢰겠습니까. 김성일은, 소견은 비록 혹 왜놈들에게 가리워진 바가 있었을지라도, 그의 평소 심지만은 오로지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뿐이었습니다.” 하니, 상께서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다시 전 병사(兵使) 조대곤(曺大坤)에게 그대로 왜적을 막는 일을 맡게 하였다.
○ 공이 상주(尙州)에 와서 변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밤새워 말을 달려 본진(本鎭)으로 가려고 하였는데, 왜적들이 이미 분성(盆城 김해(金海)의 고호(古號))을 격파하고서 좌도(左道)를 치고 있었다. 행차가 의령(宜寧)에 이르러서 장차 정암(鼎巖)을 건너서 곧바로 본진으로 가려고 하였는데, 왜적들이 강우(江右)를 유린한다는 소문을 듣고는 휘하(麾下)의 장사들이 모두 머리를 맞대고 말하기를, “정암 길은 왜적들이 있는 곳과 아주 가까우니 이번에 가는 길이 반드시 위험할 것이다. 그러니 진주(晉州)를 경유하여 함안(咸安)으로 나가 왜적들이 있는 곳을 조금 돌아서 가느니만 못하다. 그런데 병사(兵使)께서는 영(令)이 엄하여 곧장 앞으로 나아가면서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니, 사실대로 말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정암에는 배가 없다는 내용으로 공에게 고하고, 또 공의 아들인 김역(金湙)을 시켜서, 강물이 불어났고 배도 없으니 진주로 가는 것이 편하다는 내용으로 말하게 하였다.
그러자 공이 군관(軍官) 김옥(金玉)을 시켜서 가 보게 하였는데, 김옥 또한 돌아와서 거짓으로 말하기를, “배가 없어서 건널 수가 없습니다. 사또께서는 속히 진주 길로 가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그런데도 공은 듣지 않고 물러가라고 한 다음 말하기를, “내가 이미 왜적들을 토벌하라는 명을 받았는데, 어찌 감히 머뭇거리면서 빙 돌아서 가겠는가. 내가 직접 가서 살펴보겠다.” 하였다.
공이 여러 군사들을 재촉해서 앞으로 나아가 정암에 도착해서 보니, 강가에 배가 있었다. 이에 공이 곧바로 김옥 등을 잡아오게 하고는 자신을 속인 죄를 캐묻고서 장차 처형하려고 하자 김옥이 소리치기를, “저의 죄는 참형(斬刑)에 처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다만 공께서는 지금 왜적들과 맞닥뜨리고 있으니, 한 번 죽어서 속죄(贖罪)하고자 합니다.” 하니, 공이 꾸짖어 말하기를, “네가 이미 공을 세워 속죄하겠다고 하였으니, 앞으로 왜적들을 만나 싸울 경우에는 마땅히 앞장서서 돌격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이번의 죄까지 아울러 다스려서 결단코 너를 용서하지 않겠다.” 하였다. 그리고는 드디어 군령장(軍令狀)을 책임지고 받들도록 하고 군마(軍馬)를 독촉하여 출발하였다.
○ 길을 가다가 해망원(海望原)에 도착하였다. 경상우도 병사 조대곤(曺大坤)이 성을 버리고 퇴각하여 주둔해 있다가 황망히 도망치려고 하였는데, 공이 도착한 것을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맞아 읍하고는 곧바로 하직 인사를 하고 떠나가려고 하였다. 공이 준엄한 말로 책망하기를, “장군은 한 지방을 맡은 장수로서 군대를 주둔시킨 채 진격하지 않아 김해성(金海城)을 함락당하게 하였으니, 그 죄는 사형에 해당된다. 더구나 세신(世臣) 숙장(宿將)으로서 이처럼 극심한 사변을 당하여서는 의리상 달아나서는 안 된다.” 하니, 조대곤이 얼굴이 새빨개졌다.
정탐하러 나갔던 군사가 왜적의 선봉이 이미 이르렀다고 급히 보고해 왔다. 잠시 뒤에 백마를 타고 새의 깃으로 만든 옷에 금빛 갑옷을 입고 은빛 투구와 금빛 가면을 쓴 왜적 2명이 칼을 휘두르면서 50여 보 앞까지 다가왔다. 장사들이 처음으로 적의 칼날을 보고는 모두 벌벌 떨면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공이 여러 군사들에게 영을 내려 동요하지 말라고 하고는 호상(胡床)에 꼿꼿하게 앉아 있었다. 조대곤이 일어나서 말을 타고 달아나려고 하자, 공이 꾸짖으면서 그러지 못하게 하였다.
왜적들이 우리측 군사가 동요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괴이하게 여겨 말에서 내려 땅에 앉아 부채질을 해댔다. 이에 공이 용사들을 선발하여 돌격하게 하였는데, 군사들이 모두 서로 돌아보면서 머뭇거렸다. 공이 김옥의 이름을 부르면서 소리치기를, “네가 전에 먼저 앞장서서 돌격해 공을 세우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오늘도 피할 것인가?” 하니, 김옥이 몸을 날려 말에 올라탔다. 그러자 여러 군사들이 그의 뒤를 따라 한꺼번에 돌진하였다. 몇 리를 뒤쫓아가자 매복하고 있던 왜적이 사방에서 일어나 단단하게 포위하였다. 여러 군사들이 해자(垓子) 한복판에서 한바탕 혼전을 벌이면서 목숨을 내놓고 서로 싸웠는데, 왜적의 우두머리를 활로 쏘아 거꾸러뜨리자, 나머지 왜적들이 모두 달아났다. 이에 우리측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추격하여 왜적들의 금 장식을 한 안장, 건장한 말, 보검 등을 노획하고, 수급(首級) 하나를 참(斬)하여 돌아왔다.
이 싸움이, 난이 일어난 처음에 왜적들과 가장 먼저 접전한 싸움인데, 군졸은 1000명도 못 되었고, 무기는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도 능히 왜적들의 예봉을 꺾었으므로, 이로부터 군사들의 사기가 조금은 진작되었다. 이에 즉시 군관(軍官) 이숭인(李崇仁)을 올려보내어 수급을 바치면서 이 사실을 치계(馳啓)하였는데, 장계의 첫머리에 ‘나라를 위해 한 번 죽는 것이 신의 소원입니다.’ 하였다.
공이 먼저 보졸(步卒)들로 하여금 천천히 퇴각하게 하고는 가장 뒤에서 말고삐를 잡고 천천히 내지(內地)로 들어갔다. 성 안에서 흩어졌던 군졸들을 끌어모아 1000여 명의 군졸을 얻었는데, 그 가운데 미련하고 사나워서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자가 있으므로, 도망가려 한 죄를 따져서 본보기로 13명의 목을 베어 군중에 조리돌리니,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 벌벌 떨었다. 군세(軍勢)가 조금 잡히자, 여융 우후(厲戎虞候) 이협(李俠)으로 하여금 감히 동요하지 못하게 하고, 장차 사력을 다해 싸워 지킬 계획을 하였다.
○ 갑자기 공을 잡아오라는 명령이 내렸다는 급한 전갈이 왔다.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가 오지 않아서 사실 여부를 확인할 만한 문서가 없으며, 큰 도적이 앞에 있는데, 한 방면을 맡은 대장이 어찌 쉽사리 진영을 버리고 갈 수 있겠습니까?” 하니, 공이 말하기를, “내가 이런 명령이 반드시 있을 것임을 알고 있었는데, 피해서야 되겠는가.” 하고는, 그날로 즉시 길을 떠나자, 군사들이 모두 새처럼 흩어져 떠나갔다.
○ 공이 가다가 직산(稷山)에 당도하였을 때 죄를 용서하고 초유사(招諭使)에 제수한다는 왕명을 받았다. 이는 왕이 서쪽으로 파천(播遷)하던 날 세자의 말을 듣고서 한 일이다. 공은 유지(有旨)를 받들어 읽고는 흐느끼면서 북쪽을 향하여 통곡하였다. 직산의 수령인 박의(朴宜)는 군자다운 사람으로, 평소에 공과 서로 친한 터였으므로 크게 기뻐하면서 현리(縣吏) 조순걸(趙舜傑)을 군아(軍牙)로 삼아 그로 하여금 함께 남쪽으로 내려가게 하였다.
공이 완산(完山)과 용성(龍城) 두 개의 큰 부(府)를 거쳐 지나갔는데, 다 지나도록 의기(義氣)를 떨쳐 일어나 나라를 위해 통탄하는 자를 한 사람도 만나지 못하였다. 운봉(雲峯)에 이르니 어떤 선비가 백의(白衣)를 입고 경계 지점에서 맞이하였는데, 그가 공의 손을 잡고 크게 통곡하고는 은밀히 말하기를, “호남 사람들이 순찰사(巡察使) 이광(李洸)이 근왕(勤王)하는 것을 느슨히 하였다는 이유로 그의 죄를 성토하고자 하니, 영공(令公)께서는 영남(嶺南)으로 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영남은 이미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이광의 목을 베어 의기가 신장되면 사람들이 용기를 낼 것입니다. 그때 호남의 전 고을을 규합하여 군사를 모아 대대적으로 훈련시키고 근왕병(勤王兵)을 동원하여 서울로 곧장 쳐들어가십시오. 그리하여 한강 가에 웅거해 있는 왜적을 내쫓고 평양성(平壤城)에 머물러 있는 왜적들을 섬멸해, 비린내를 깨끗이 씻어 내고 서쪽으로 간 난여(鑾輿)를 맞이할 경우, 이미 무너져버린 나라를 회복하는 것이 한 번의 거사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요는 공을 이루는 것이 귀한 것입니다. 어찌 영남과 호남을 구분하겠습니까. 필마로 동쪽에 간들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하니, 공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하기를, “나는 이해(利害)를 모른다. 왕명을 받들어서 일하는 것만 알 뿐이다. 그리고 순찰사의 목을 베는 것이 의리에 있어서 불가한 점은 없겠는가?” 하였다. 그러자 그 선비가 그 말을 듣고는 납득하여, 드디어 그 일이 중지되었다.
도순찰사(都巡察使) 김수(金晬)가 거창(居昌)에서부터 근왕한다는 핑계를 대고는 호남으로 가다가 운봉(雲峯)에 도착하여 공과 갑작스럽게 맞닥뜨리게 되었는데, 놀라고 무색하여 할 말을 잃었다. 이에 공이 의리로써 책망하여 말하기를, “한 지방을 맡은 신하는 마땅히 임지(任地)에서 죽어야 하는데, 어찌하여 임지를 버리고 여기에 왔단 말이오. 한 도를 모두 잃고서도 구원하지 못하였는데, 단기(單騎)로 멀리 가서 능히 일을 성사시킬 수 있겠소? 영공께서는 빨리 되돌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니, 김수가 말을 타고 망설이다가 마지못해 뻔뻔스러운 얼굴로 되돌아갔다. 영남 사람들이 당초에는 그가 영남을 버리고 간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던 차에, 김수가 다시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는 모두들 얼굴을 찡그리면서 서로 위로하였다.
영암(靈巖)의 무인(武人) 소상진(蘇尙眞)이 공의 말 앞에서 글을 올리고 따라가기를 원하자, 공이 허락하였다. 이때 강우(江右)의 8, 9개 군(郡)이 왜적에게 함락당하지 않고 있었으나, 새로 쌓은 성에는 장수가 없고, 옛 읍(邑)에는 수령이 없는 탓에, 사서(士庶)와 남녀(男女)를 막론하고 모두들 산골짜기에 가득 차 있어서, 평지에는 사람의 그림자조차 볼 수가 없었다.
○ 5월 4일에 공이 함양(咸陽)에 이르렀는데, 함양 군수 이각(李覺)은 공관(空館)에 우두커니 앉아 있고, 늙은 아전 몇 사람만이 뜰 아래에 보일 뿐이었다. 공이 군수를 독려하여 고을 사람들을 불러모았는데, 전 현령(縣令) 조종도(趙宗道)와 전 직장(直長) 이노(李魯)가 기약도 없이 모였다.
공이 그 자리에서 곧바로 초유(招諭)하는 격문(檄文)을 썼는데, 문장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왔기 때문에 붓에 먹을 적실 겨를조차 없었다. 그 격문에 이르기를,
“나라의 운수가 중간에 와서 불운한 탓에 섬오랑캐들이 몰래 군사를 동원하여 우리 강토를 함부로 유린하면서 동쪽과 서쪽 두 방면에서 돌진해 들어왔다. 그런데 큰 성과 큰 진에는 일찍이 방비책(防備策)을 설치하지 않았던 탓에 열흘 남짓한 사이에 험한 관문과 높은 고개를 넘어 곧바로 서울을 공격하게 되었다. 이에 상께서는 서울을 떠나 파천(播遷)하고, 온 나라 사람들은 도망쳐 숨게 되었다. 우리나라가 생긴 이후로 오랑캐의 화란이 오늘날처럼 참혹한 적은 일찍이 없었다.
여러 곤수(閫帥)들은 국가의 간성(干城)인데도 왜적들이 침입했다는 소문만 듣고서 무너지기도 하였으며, 적병을 겁내어 움츠러들기도 하였다. 수령들은 한 고을의 군장(君長)인데도 모두들 자신의 처자식을 안전한 곳에 피난시키고 무기고(武器庫)를 불태웠다. 그리하여 한 사람도 충의(忠義)를 떨쳐 일어나 앞장서서 왜적을 치는 자가 없었다. 그러니 불쌍한 우리 군사와 백성들이 누구를 믿고 누구를 의지해서 흩어져 도망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거센 물결에 한 번 무너지자 이를 막아낼 도리가 없어 성에는 창을 든 군사가 없었고, 고을에는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신하가 없었다. 이에 왜적들은 도착하는 곳마다 마치 무인지경(無人之境)을 쳐들어오는 것처럼 몰려들어와 마침내 영남 한 도가 왜적들의 소굴이 되어 버렸으니, 형세가 마치 흙더미가 무너지고 기왓장이 깨지는 듯하여 조석간도 보장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것이 얼마나 큰 변고인가.
그러나 이것이 어찌 단지 변장(邊將)이나 수령들만의 잘못이겠는가. 이 지방의 선비와 백성들 또한 그 책임을 면하지는 못할 것이다. 옛날에 큰 난리를 만나서도 나라를 잘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윗사람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뜻이 있었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칠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왜적들이 아직 이르지도 않았는데 선비와 백성들은 앞장서서 먼저 도망쳐 산속으로 숨어들어가 구차스럽게 목숨을 부지하려는 생각만 하였다. 이에 수령은 백성이 없게 되고 장수는 군졸이 없게 되었으니, 장차 누구와 더불어 왜적을 막을 수 있었겠는가.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옛날에 추(鄒) 나라와 노(魯) 나라가 전쟁을 할 적에 추 나라 관리들은 전사한 자가 30여 명이나 되었는데도 백성들은 한 사람도 죽지 않았다. 이것은 관리들이 평상시에 백성들의 고통을 잘 돌보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선비와 백성들이 흩어져 달아나는 변고가 있는 것이 어찌 맹자(孟子)가 말한, 너에게서 나온 것은 너에게로 되돌아간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한다. 아아, 이것이 무슨 말이란 말인가.
근년 이래로 조세(租稅)가 과연 가혹하였고, 부역(賦役)도 과연 과중하였으니, 백성들이 당연히 명령을 감당해 내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성을 쌓고 해자(垓子)를 파고 방비하는 도구를 갖추는 것은 모두가 전쟁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지금에 와서 본다면 성상께서 백성들을 보호하려는 생각이 원대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어찌 백성들을 학대하면서 자신을 이익되게 한 것이겠는가. 더구나 추 나라와 노 나라의 싸움은 비록 한쪽이 이기고 한쪽이 지기는 하였지만, 이는 다 같은 중국의 나라로서,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그다지 이익이 되거나 손해될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빨을 검게 물들이는 오랑캐의 풍습을 가진 왜적들은 우리 땅에 한 번 들어오자 즉시 웅거하려는 뜻을 품었다. 그리하여 우리의 부녀자들을 잡아가서 처첩으로 삼고, 우리의 장정들을 마구 죽여 씨를 남기지 않았으며, 즐비한 민가는 모두 불태워 잿더미로 만들고, 공사(公私)의 재물은 모두 빼앗아 차지하였다. 이에 독기는 사방에 가득 차고 죽은 사람의 피는 천 리에 흘렀으니, 백성들이 참혹하게 화를 당한 것을 어찌 차마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지금은 실로 지사(志士)는 창을 베고 자면서 왜적을 쳐 죽일 날이요, 충신은 국난을 구하기 위하여 목숨을 바쳐야 할 시기이다. 그런데 경상도 67개 고을 가운데에 아직까지 의(義)를 주창하여 의병을 일으킨 사람이 없다. 그러면서 오히려 남들보다 먼저 도망치지 못할까 걱정하고, 깊은 산속으로 숨지 못할까만을 걱정하고 있다. 그러니 어찌 탄식을 금할 수 있겠는가.
설령 산속으로 들어가서 왜적을 피하여 마침내 자신과 가족들의 목숨을 보전한다 하더라도, 열사(烈士)는 오히려 수치스럽게 여길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보전할 길이 절대로 없을 것인데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내가 그 이유에 대해서 낱낱이 말하여 사민(士民)들의 의혹을 깨뜨리고자 한다.
지금 왜적들은 서울을 침범하는 일에 급급하여 지체하지 않고 곧장 행군해 올라갔기 때문에 병화(兵禍)가 여러 고을에 두루 미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왜적들이 목적을 달성한 뒤 흉악한 무리들이 국내에 가득 차게 될 경우, 그때에도 산골짜기가 과연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곳이 되겠는가? 이를 비유해 보면 마치 큰 물결이 하늘까지 치솟고, 거센 불길이 들판을 불태우는 것과 같으니, 불쌍한 우리 백성들이 다시 어디에서 몸을 붙이고 살 수 있겠는가.
산골짜기에서 나오지 않을 경우에는 시일이 오래 지나면 식량이 떨어져서 깊은 산속에서 앉은 채로 굶어죽을 것이다. 그리고 산골짜기에서 나올 경우에는 부모와 처자식이 모두 왜적에게 사로잡혀 가서 욕을 당할 것이며, 예의를 지키는 사족(士族)은 짓밟혀 결단이 나게 될 것이다. 왜적에게 항복하면 영원토록 올빼미같이 흉악한 족속이 될 것이고, 항복하지 않으면 모두가 왜적의 칼날 아래 죽은 귀신이 될 것이다. 이것이 어찌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야만 알 수 있는 것이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단지 이해(利害)와 생사(生死)만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
아아, 군신(君臣)간의 큰 의리는 천지간에 영원히 변치 않는 큰 도리로서, 이른바 사람이 지켜야 하는 떳떳한 법도인 것이다. 무릇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으로서 임금이 피난하고 종묘사직이 넘어지며, 만백성들이 다 죽어가는 것을 가만히 앉은 채로 보면서도 아무런 관심도 없어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천지간에 영원히 변치 않는 도리로 볼 때 어떻겠는가. 더구나 지금은 부모가 왜적의 칼날에 맞아 죽고 형제와 처자식이 서로 보전하지 못하게 되어, 집안의 화가 위급한 처지이다. 그런데도 자식이나 동생된 자가 머리를 싸 쥐고 쥐새끼처럼 숨기만 하고, 죽을 각오를 하고 싸워 온전하기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자식된 도리로 볼 때 어떻겠는가.
돌아보건대, 우리 영남 지방은 본디 인재가 많이 배출되는 고장이라고 일컬어져 왔다. 1000년의 국운을 유지한 신라(新羅)와 500년의 국운을 지탱한 고려(高麗) 및 우리 조선(朝鮮) 200년 동안에 충신과 효자의 아름다운 명성과 뜨거운 의열이 청사(靑史)에 빛나는바, 아름다운 절의와 순후한 풍습은 우리나라에서 으뜸이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사민들이 모두 다 잘 알고 있는 바이다.
또 근래의 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퇴계(退溪)와 남명(南冥) 두 선생이 한 시대에 나란히 나서 도학(道學)을 처음으로 강명(講明)하면서 인심을 순화시키고 윤기(倫紀)를 바로잡는 것을 자신들의 임무로 삼았다. 이에 선비들 가운데에는 두 선생의 교육에 감화되고 흥기하여 본받는 사람이 많았다. 이들은 평소에 많은 성현들의 글을 읽었으니, 이들의 자부심이 어떠하였던가.
그런데 하루아침에 왜변(倭變)을 만나서는 오로지 살기만을 구하고 죽기를 피하는 데 급급하여, 스스로 군주를 버리고 어버이를 뒤로 하는 죄악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니 구차스럽게 한 목숨을 부지한다고 하더라도 장차 어떻게 한 하늘 아래에서 살 수가 있겠으며, 죽어 지하에 들어가서는 또한 무슨 낯으로 우리 선현(先賢)들을 뵐 수 있겠는가.
의관(衣冠)을 갖추고 예악(禮樂)을 배운 몸으로 치욕을 당할 수 있겠으며, 머리를 깎고 문신을 새기는 야만인의 풍습을 따를 수 있겠는가. 200년을 지켜 내려온 종묘사직을 차마 왜적들의 손에 넘겨줄 수 있겠으며, 수천 리의 조국 강산을 차마 왜적들의 소굴이 되도록 내버려 둘 수 있겠는가. 문명한 나라가 변하여 오랑캐의 나라가 되고, 인류가 변하여 금수가 될 것인데, 이것을 참을 수 있겠으며,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둘 수 있겠는가.
수공(首功)을 으뜸 공으로 삼는 진(秦) 나라는 애당초 순전한 오랑캐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노련(魯連)은 오히려 달가운 마음으로 바다에 빠져 죽으려 하였다. 지금 이 야만인의 풍습을 가진 섬오랑캐들은 얼마나 추잡한 종족인가. 그런데도 우리 강토를 멋대로 훔쳐서 차지하고 우리 백성들을 함부로 죽이고 욕보이도록 내버려 둔 채, 내쫓아 버리고 죽여 버릴 것을 생각하지 않는단 말인가.
설자(說者)는 말하기를, ‘저놈들은 용기가 있고 우리는 겁이 많으며, 저놈들의 무기는 날카롭고 우리 무기는 무디다. 그러니 설령 의병을 일으키더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다.’ 하고 있다. 아, 어쩌면 이리도 생각이 모자란단 말인가.
옛날의 충신과 열사는 이기고 지는 것 때문에 뜻을 바꾸지 않았고, 강하고 약한 것 때문에 기운이 꺾이지 않았다. 의리에 있어서 마땅히 해야 할 바이면 비록 백 번 싸워 백 번 다 지더라도 맨주먹을 휘두르고 번쩍이는 칼날에 맞서 싸워 만 번 죽어도 후회하지 않았다. 하물며 이 왜적들은 비록 강하다고는 하지만 군사를 이끌고 멀리 들어왔으니, 전쟁에서 꺼리는 것을 범하였다. 그러니 어찌 제대로 살아서 돌아갈 수 있겠는가. 우리 군사가 비록 겁이 많다고는 하지만, 용감하고 겁내는 것이 어찌 일정한 것이겠는가. 충의가 북받치면 약한 자도 강해질 수 있고, 적은 군사로도 많은 군사를 대적할 수 있는 법, 단지 마음 한 번 먹기에 달려 있는 것이다.
현재 무너져 도망친 군사가 산골짜기에 가득히 널려 있는데, 이들은 처음에는 비록 빠져나와 살려고 하였으나, 끝내 한 번 죽음을 면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에 모두들 스스로 떨쳐 일어나서 나라를 위하여 온 힘을 다할 것을 생각하고 있는데, 단지 앞에서 주창하는 자가 없어서 가만히 있을 뿐이다. 이런 때를 당하여 한 사람의 의사(義士)가 떨치고 일어나 큰소리로 한 번 외치기만 하면, 원근에서 구름같이 모이고 메아리처럼 호응하여 앉은 자리에서 계책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성상께서 이미 애통해하는 교서(敎書)를 내리셨으며, 또 소신(小臣)을 형편없다고 여기지 않고 백성들을 불러모아 유시하는 책임을 맡기셨다. 당(唐) 나라의 무식한 군사와 사나운 군졸들도 오히려 흥원(興元)의 조서(詔書)를 보고 울었는데, 하물며 예의를 숭상하는 지방에 사는 선비로서 어찌 팔뚝을 걷어붙이고 의분에 넘쳐 군부(君父)의 위급함에 달려나가지 않겠는가.
내가 진실로 원하노니, 이 격문(檄文)이 도착하는 날 수령은 한 고을에 분명하게 효유하고 변장은 사졸들을 격려하라. 그리고 문무(文武)의 조정 관원들과 부로(父老), 유생(儒生) 등 모든 사람들은 서로서로 유시하라. 그리하여 동지를 불러모아 충의로써 서로 맺은 다음 방비책을 세워 스스로 막기도 하고, 군사들을 이끌고 싸움을 거들기도 하라. 부자(富者)들은 유차달(柳車達)처럼 곡식을 날라 군량을 대고, 용사들은 원충갑(元冲甲)처럼 용기를 내어 왜적을 무찌르라.
집집마다 사람마다 각자가 싸우면서 일시에 함께 일어나면, 군사의 위용은 크게 진작되고 용기는 백 배나 솟구쳐서, 괭이나 고무래도 튼튼하고 날카로운 무기로 변할 것이다. 그러니 왜적들이 비록 큰 칼과 긴 창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무엇이 두렵겠는가. 만약에 일이 성공하면 나라의 부끄러움을 완전히 씻을 것이며, 일이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의로운 귀신이 될 것이다. 제군들은 힘쓸지어다.
나는 일개 썩은 선비이므로 비록 전쟁하는 일은 배우지 못하였으나, 임금과 신하의 대의는 대충 들어서 알고 있다. 온 도가 뒤엎어진 뒤끝에 책임을 떠맡았는데, 뜻은 초(楚) 나라를 보전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나 신포서(申包胥)의 충성을 본받을 수 없고, 사당에 통곡하고 군사를 일으킴에 한갓 장순(張巡)의 충렬을 사모하고 있다. 그러면서 오히려 의사(義士)들의 힘을 빌어 기울어진 국가를 다시 회복하는 공을 세우기를 기대하고 있다. 조정에서 내리는 상격(賞格)은 나중에 줄 것이니, 이 모두에 대해 마땅히 잘 알지어다.”
하였다.
○ 함양(咸陽)은 본래 문헌(文獻)의 고장이라고 일컬어져 온 곳으로, 판서 노진(盧禛)의 맏며느리는 현령 조종도(趙宗道)의 누이동생인데, 연줄을 따라 통혼이 있었던 터였다. 이에 현령 조종도가 몸소 산에 들어가서 여러 노씨(盧氏)들을 보고 창의(倡義)하기를 도타이 권면하였다. 그러자 그 뒤에 군내의 선비들도 많이 와서 모였다. 공이 이들을 위하여 의리로써 타이르니,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면서 모두들 말하기를, “영공께서 진심으로 나라를 위하여 일하고자 하면 마땅히 먼저 김수(金睟)와 조대곤(曺大坤)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인심을 고동시켜서 그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다시 김수를 맞이하여 왔단 말입니까. 우리들은 처음에 영공께서 오신다는 소문을 듣고는 마치 어린아이가 젖줄을 물려주기를 바라듯이 하였습니다. 그런데 곧바로 순찰사 김수가 돌아왔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기운이 꺾이고 위축되어 감히 나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니, 공이 말하기를, “순찰사가 본도를 버린 것도 의리가 아니요, 한 도에 원수(元帥)가 없는 것 또한 의리가 아니다. 나는 다만 의리로써 사람을 대하고 의리로써 일을 처리할 줄만 알 뿐이다. 여러분의 말은 좀 지나치지 않은가?” 하자, 그들이 대답하기를, “의리라는 것이 어디에서 생기는 것입니까? 민심을 따르지 않으면 의병을 일으키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하였다. 공은 겉으로는 비록 그들을 억누르는 체하였으나, 마음속으로는 실상 갸륵하게 여겼다.
○ 공이 처음 함양에 이르러서 곽재우(郭再祐)의 일을 듣고는 대단히 기특하게 여겨서 즉시 편지를 보내어 불렀다. 김수가 편지를 보내어 공에게 묻기를, “곽재우가 하는 짓이 어떠합니까?” 하였는데, 공이 극히 칭찬하여 답하였다.
○ 10일에 함양을 떠나서 산음(山陰)으로 향하였는데, 초유사(招諭使)의 깃발을 앞세우고 그 군(郡)에 사는 사인(士人) 황윤(黃潤)과 소상진(蘇尙眞)을 군관(軍官)으로 삼아 둘이 짝을 지어 앞장서 가게 하고, 조종도와 이노(李魯) 두 사람에게 그 뒤를 따르게 하였다. 저녁 때쯤에 산음에 이르니 고을의 수령인 김낙(金洛)이 환아정(換鵝亭)에 관사(館舍)를 설치하고 술과 음식을 풍성하게 마련하여 접대하였다. 공이 얼굴빛을 바꾸면서 김낙을 불러 책망하기를, “이와 같은 성찬은 오늘날 신하된 사람으로서는 마땅히 받아먹을 바가 아니다. 비록 먹는다고 하더라도 어찌 목구멍으로 넘어갈 리가 있겠는가.” 하고는, 두 줄기 눈물을 줄줄 흘리니, 김낙이 사죄하고 황송해하면서 물러갔다.
그 고을 사람 오장(吳長)과 의령(宜寧) 사람 이지(李旨), 단성(丹城) 사람 김경근(金景謹)이 칼을 잡고 와서 맞이하니, 공이 감사해하면서 말하기를, “여러분이 이같이 와서 나를 찾아주니, 반드시 기이한 계책이 있을 것이다. 원컨대 한 말씀 들려주기 바란다.” 하자, 김경근이 언성을 높여 큰소리로 말하기를, “김수와 조대곤을 죽이지 않고서는 대의(大義)를 펴서 나라를 회복시키는 공을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그와 같은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라. 그렇게 해서는 일을 이룰 수가 없다.” 하였다.
김낙은 어진 관원이라서 평소에 민심을 얻고 있었으므로 갑작스럽게 군사를 모집하였는데도 800여 명이나 되었다. 진주(晉州)의 전 주부(主簿) 손승의(孫承義)가 와서 뜰 아래에서 절하므로, 곧바로 고령 가수(高靈假守)로 차임하여 보냈다. 그리고는 조종도와 이노 두 사람에게 말하기를, “인재가 없어서 쓰기는 하였지만, 눈에 정기가 없으니 오래 살 수 있을까?” 하였는데,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성현(星峴)의 싸움에서 죽었다.
○ 하동 현감(河東縣監)으로부터 보고서가 올라왔는데, 창고의 곡식을 도둑질하는 토적(土賊) 15명을 잡아서 목을 베었다는 내용이었다. 공이 보고서 끝에 써서 회보하기를, “토민(土民)들이 난리를 틈타서 도둑이 되어 관창(官倉)의 곡식을 훔치기까지 하였다면, 그 죄는 목베어 마땅하다. 그러나 만일 죄 없는 백성까지 죽이는 일이 있을까 염려되니, 잘 삼가서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하였다.
○ 이틀 동안 머물고서 진주로 향해 떠나려고 할 때 조종도를 의령 가수(宜寧假守)로 삼고, 이노를 삼가(三嘉)와 단성(丹城)의 소모관(召募官)으로 삼아, 그들로 하여금 가서 군졸을 수합하도록 하였다. 이노가 말하기를, “군사를 일으킨다는 것은 큰일이므로 마땅히 먼저 규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잘못하면 혼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니, 공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어찌하면 되겠는가?” 하자, 이노가 대답하기를, “초유사의 전령목패(傳令木牌)를 많이 만들어서 먼저 응모한 여러 고을의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만 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열읍(列邑)에 호령을 시행할 수가 있어서 명분이 바르고 일이 순할 것입니다.” 하니, 공이 그러겠다고 하였다. 이에 일행이 모두 목패를 찼다.
단성에 이르니 단성 현감 이제(李磾)가 산으로부터 내려와서 머뭇거리면서 들어섰는데, 몹시 떨고 있었다.
○ 곽재우가 공의 서신을 보고 전쟁에 나아가는 관복(冠服) 차림으로 와서 공을 뵈었다. 공이 그를 보고는 이상하게 여겼으며,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서는 더욱 기이하게 여겨, 드디어 서로 국사(國事)에 힘쓰다가 죽기로 약속하고, 동행하여 진주에 이르렀다.
○ 이때 초계(草溪)에는 수령이 없어서 전 군수 곽율(郭)을 가수(假守)로 삼았으며, 의령에도 수령이 없는 데다가 조종도 역시 감당하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사양하자, 전 목사(牧使) 오운(吳澐)을 소모관(召募官)으로 삼아, 그로 하여금 곽재우와 합심하여 의병들을 불러모으게 하였다. 오운은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킨 처음부터 자신의 재물을 희사하여 군량을 공급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더욱 온 마음을 다해 일하였다.
○ 공이 단성에서 바로 진주로 나아갔다. 진주 목사 이경(李璥)과 판관 김시민(金時敏)이 지리산(智異山) 상원동(上院洞)에 숨어 있었다. 김시민은 공이 왔다는 말을 듣고 나와서 기다렸으나, 이경은 병을 핑계하고 나오지 않았다. 공이 전령(傳令)하여 나오도록 하니, 이경이 어찌할 줄을 모르다가 등창이 나서 죽었다.
판관 김시민을 독촉하여 군사를 모으게 하였는데, 판관이 일찍이 백성들에게 혜택을 베풀었으므로 백성들이 많이 모여들어 군사 수천 명을 얻은 다음, 대오를 나누어 성을 지키게 되었다. 이에 군사를 조련하고 위세를 떨치게 되어 군대의 기율이 자못 정제되었으며, 성이 무너진 곳은 고치고 못이 얕은 곳은 더욱 깊이 팠다. 공이 말하기를, “진양(晉陽)은 호남(湖南)의 보장(保障)이다. 진양이 없으면 호남이 없게 되며, 호남이 없게 되면 국가는 어찌할 도리가 없게 될 것이다. 왜적들이 항상 노리고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니, 방비를 느슨히 해서는 안 된다.” 하고는, 죽을 힘을 다해 싸워 이 성을 나가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 공이 군(軍)에 기율이 없어 모이고 흩어지는 것이 일정하지 않은 것을 보고는 조목(條目)을 정한 다음 열읍(列邑)에 명령을 전하였는데, 그 조목에 이르기를, “흩어져 도망치는 것이 풍조가 되었는바, 도망치는 자들이 스스로 이르기를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뿔뿔이 도망치면 일일이 군법을 시행할 수 없을 것이다.’ 하고 있다. 그러나 항오(行伍)에는 자연 통솔(統率)이 있는 법이다. 10명의 군사 가운데에서 도망치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통장(統將)을 참수하고, 통장 가운데에서 도망치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도훈도(都訓導)를 참수하며, 전군(全軍)이 모두 도망칠 경우에는 영장(領將)을 참수하라. 그리고 도망친 자를 잡아보내지 않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그들도 같은 죄를 주어라.”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앞서는 충의(忠義)로써 권면하였는데, 이제 와서 형법(刑法)으로써 단속하는 것은 말세의 일이다. 적용하는 것을 당기기도 하고 늦추기도 하여 은혜와 위엄을 아울러 펴라.” 하니, 군정(軍情)이 모두 고무되고 두려워하여 감히 도망치는 자가 없었다.
○ 공이 처음 진양에 이르렀을 때 목사는 산속으로 도망치고 군사와 백성들은 모여들지 않은 탓에 성 안은 적적하여 사람 모습은 보이지 않고, 오직 강물만 출렁이고 있었다. 공이 서글픈 생각으로 이리저리 거닐며 슬픔과 울적함을 견디지 못하고 있던 차에 조종도(趙宗道)가 의령(宜寧)으로부터 와서 공의 손을 부여잡고는 말하기를, “진양은 거진(巨鎭)이고 목사는 명관(名官)인데 왜적들이 이르기도 전에 일이 이미 이와 같으니, 앞으로는 다시 손써 볼 도리가 없을 것인바, 빨리 죽어서 눈으로 안 보느니만 못합니다. 영공과 함께 이 강물에 빠져 죽었으면 합니다. 괜히 왜적들의 칼날에 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고, 공의 손을 잡아당겨 강가로 이끌었는데, 잡은 손이 힘차서 풀리지 않았다. 그러자 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한 번 죽는 것이야 머지 않았지만, 헛되이 죽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녀자들이 하는 짓을 나는 하지 않을 것이다. 선왕(先王)께서 남기신 은택이 아직은 다 없어지지 않았고, 주상께서도 이미 자신을 죄책하는 교서를 내려, 하늘이 현재 화를 내린 것을 후회하는 조짐이 싹트고 있다. 다행히도 여러분들이 의병을 일으켜 도우는 데에 힘입어서 열읍에서 많은 선비들이 모집에 응하고 있다고 한다. 선비들이 백성들의 본보기가 된다면 백성들이 어찌 따르지 않겠는가. 그런 뒤에 군사를 나누어 요충지를 지키고 있으면서 왜적들이 쳐들어오는 것을 막는다면, 적은 숫자의 군대로도 하(夏) 나라를 부흥시키기에 충분하였던바, 나라를 회복시키는 공을 이루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불행히도 그렇게 되지 못할 때에는 당(唐) 나라의 장순(張巡)처럼 죽음으로써 지키거나 안호경(顔杲卿)처럼 적을 꾸짖다가 죽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그대들은 어찌하여 이처럼 서두르는가. 이 강물이 증명할 것으로,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가 아니다.” 하였다. 그리고는 인하여 서로 마주보며 눈물을 흘리면서 크게 통곡하고 헤어졌다.
○ 의병대장 김면(金沔)이 무계(茂溪)에서 승첩(勝捷)하였을 적에 왜적의 화함(花艦)에서 얻은 보화(寶貨) 몇 바리를 공에게 보내고는 행재소(行在所)에 올려보내라고 하였다. 공이 촉성루(矗城樓)의 누각에 앉아서 수량을 점고하여 살펴보니, 채금(綵錦)과 진보(珍寶) 등의 물품이 몹시 많았다. 그러자 승첩한 것을 몹시 칭찬하기는 하면서도 난처해하는 기색이 있는 듯하였다.
창원 부사(昌原府使) 장의국(張義國)과 도사 김영남(金穎男)이 번갈아 칭탄하면서 말하기를, “주상께서 내탕고(內帑庫)의 재물을 모조리 내버리고서 몸만 빠져 서쪽으로 파천하였는데, 가을이 머지않았습니다. 변방 땅은 추위가 일찍 닥칠 것인데, 상방(尙方)의 어복(御服)을 누가 지어 올리겠습니까? 그리고 왕자와 왕녀가 많고 궁인과 시녀도 많으니, 빨리 보내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니, 공이 아무 말 없이 한참 동안 있다가 말하기를, “제군들이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것은 지극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용만(龍灣)은 한 모퉁이에 있어 변방길이 멀고 험하며, 왜적들이 각처에 꽉 차 있어서 첩보(牒報)조차 전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제군들은 오로지 의기를 분발하여 왜적을 쳐서 나라를 회복하기만을 도모할 것이요, 어복을 마련하여 올리지 못하는 것이나 왕자와 시녀들이 추위에 떨 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더구나 명주와 비단은 관서(關西) 지방의 토산물(土産物)로서, 아직은 그 지방이 보전되고 있으니, 어찌 어복을 마련할 옷감이 없음을 걱정하겠는가.” 하였다. 그러자 이노가 말하기를, “지해(志海) - 김면(金沔)의 자(字) - 가 이와 같은 자잘한 일을 할 줄은 몰랐습니다. 어찌하여 이를 다 흩어서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았단 말입니까. 영공께서 하시는 일은 다만 초유(招諭)하는 일입니다. 그 밖의 공사(公事)를 어찌하여 도사에게 맡겨서 처리하게 하지 않으십니까?” 하니, 공이 말하기를, “김면이 이미 나에게 보냈는데, 도사가 이것을 받겠는가?” 하였다. 그리고는 영리(營吏)로 하여금 남원(南原)으로 가져가서 남원의 부고(府庫)에 보관해 두고 왜적이 물러가 길이 뚫리기를 기다리게 하였다.
○ 조종도를 단성(丹城), 산음(山陰), 함안(咸安)에 보내어 군사를 점고하게 하고, 이노를 의령(宜寧), 삼가(三嘉), 합천(陜川)에 보내어 군사를 사열하게 하였다.
○ 함안의 소모관(召募官) 이정(李瀞)이 촉석성(矗石城)에 와서 공을 뵈었다. 이노가 돌아와서 여러 장사들이 충의심을 분발하여 힘써 싸우고 있다는 내용으로 보고하였다. 조종도는 도중에 병이 나 돌아오지 못하고는 서신을 보내어 보고하였다. 공이 이노의 말을 듣고는 크게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어찌 직접 가서 보지 않겠는가. 내 장차 의령, 초계, 합천을 돌아서 거창으로 가겠다.” 하고는 그 이튿날 일찍 출발하였다.
일행이 가다가 수리원(愁離院)에 도착하였을 때 거창에서 보고가 올라왔는데, 지례(知禮), 금산(金山), 개령(開寧)에 있는 왜적이 합세하여 공격해 와 장차 우지(牛旨)를 넘어오려고 한다는 내용으로, 일이 매우 급박하였다. 공이 말을 세우고는 이정과 이노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내가 본래는 여러 고을을 순열(巡閱)하고자 하였으나, 지금 듣건대 거창이 위급하다고 하니, 내가 장차 그곳으로 가겠다.” 하였다.
그리고는 곧바로 삼가로 가니, 삼가 현감 장령(張翎)은 그의 어머니가 있는 곳에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현에 사는 박사겸(朴思謙) 등 10여 인이 함께 와서 공을 뵙고 분부를 기다렸는데, 지공(支供)하는 것이 창졸간인데도 아주 잘 갖추어져 있었다. 공이 말하기를, “사람들이 이 고을에는 선비가 많다고 하더니, 참으로 그러하구나.” 하였다. 제생(諸生)들이 앞으로 나와서 말하기를, “영공의 충성스럽고 강직함에 대해서는 어리석은 사람들까지도 다 알고 있는바, 공의 소문이 미치는 곳에는 사람들이 모두 감동합니다. 지금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삼면이 모두 왜적들의 공격을 받고 있는데, 우리 현이 그 한가운데 있습니다. 바라건대 영공께서는 거창으로 가지 마시고 이곳에 머물러 있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열읍에 명령을 내려 그들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가 구원하게 하거나, 아니면 용사들을 뽑아 보내어 전진(戰陣)으로 가서 힘껏 싸우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 한 나라의 흥망이 매인 몸으로 필마를 타고 맨손으로 왜적들의 칼날을 무릅쓰고 범하여서 어떻게 하자는 것입니까?” 하면서, 번갈아 가면서 찾아와 간하고는 모두 읍하고 물러갔다. 공이 웃으면서 이정과 이노에게 말하기를, “제생들이 나를 가지 못하도록 말리는 것은 내가 싸움터에 나갔다가 죽을까 싶어서 그러는 것이다.” 하였다.
이튿날 새벽에 일찍 떠나려고 하면서 이정을 보내어 고을에 돌아가 군대를 통솔하게 하고, 이노를 의령, 함안, 산음의 사저관(私儲官)으로 삼았다. 이정이 말하기를, “우리 두 사람이 모두 뒤에 남으면 공과 함께 갈 사람이 없는데, 어쩌시렵니까?” 하니, 공이 말하기를, “함안을 유숭인(柳崇仁)에게만 맡겨 둘 수 없으며, 곡식을 마련하는 것이 오늘날의 급선무이다.” 하였다.
○ 공이 거창에 이르자 산음, 함양, 안음(安陰)의 군사들이 일시에 모두 와서 모였다. 공이 뒤에 있으면서 싸움을 독려하였는데, 군사들이 모두 죽을 각오로 싸워 왜적들이 고개를 넘어오지 못하였다.
이번 길에 김면(金沔)을 진중(陣中)에서 만나보고는 이틀 밤을 자면서 위로하였다. 공이 처음으로 박성(朴惺)을 만나보았는데, 일찍이 그의 이름을 들었는지라 함께 가기로 약속하고 막하(幕下)에 두었다.
○ 공이 거창으로부터 돌아와 합천에 이르러서 의병대장 정인홍(鄭仁弘)을 진중에서 만나보았다. 삼가에 이르러서 진주 사람들이 좌랑(佐郞) 박이장(朴而章)을 내쫓았다는 말을 듣고는 크게 노하여, 고을 아전들과 도장(都將)을 묶어 끌고 와서는 곤장을 쳐 보냈다.
○ 이때 영남은 한가운데가 나눠져서 강좌(江左)에는 혈맥(血脈)이 통하지 않아 열읍(列邑)이 텅 빈 탓에 왜적들이 거리낄 것이 없었으므로, 각자 수령이라고 칭하면서 마음대로 나다니며 노략질하였다. 이에 공이 탄식하기를, “상계(上界)의 변경 지방이야 어찌할 수 없지만, 강 건너편 세 고을을 어찌 버릴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리고는 영산(靈山)은 정로위(定虜衛) 신방주(辛邦柱)를 가장(假將)으로,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 신갑(辛)을 별장(別將)으로, 생원(生員) 신방즙(辛邦楫)을 소모관(召募官)으로 삼고, 창녕(昌寧)은 충순위(忠順衛) 성천희(成天禧)를 가장으로, 보인(保人) 조열(曺悅)을 별장으로, 교서관 정자(校書館正字) 성안의(成安義)를 소모관으로 삼았다.
현풍(玄風)의 경우 사족(士族) 집안사람들이 모두 다 강을 건너서 가야산(伽倻山)으로 들어가고, 남아 있는 이민(吏民)들은 대부분 왜적에게 부역(赴役)하여, 길을 오가면서 짐을 운반하고 있었다. 공이 이 말을 듣고는 이를 미워하여 즉시 격문(檄文)을 지어 유시하였다. 그리고는 명을 내려 전 군수 엄홍(嚴泓)을 의병별장(義兵別將)으로, 곽찬(郭趲)을 소모관으로 삼았다. 그 격문에 이르기를,
“나라의 운수가 지극히 불운하여 이빨을 검게 물들이는 오랑캐들이 몰아쳐 들어왔으므로, 임금께서 도성을 떠나 피난하였으며, 종묘와 사직이 몽진하였다. 아아, 사람은 다 떳떳한 마음을 지니고 있으니, 이 땅에 살고 있는 자치고 그 누가 의리와 충성을 다하여 몸을 바쳐서 나라를 위해 죽으려고 하지 않겠는가.
돌아보건대, 우리 영남 지방은 본래부터 도덕과 학문이 가장 뛰어난 지방이라고 일컬어져 왔는데, 그중에서도 포산(苞山 현풍(玄風)의 고호(古號)) 한 현(縣)은 또 선비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다. 그러니 그동안에 의리와 절개에 죽은 자가 어찌 한이 있겠는가. 지금 왜적들이 성 안에 웅거해 있으면서 사방으로 나가 죽이고 노략질하고 있는데, 그 해를 당한 사람은 우리의 부형이 아니면 처자식이다. 위로는 임금의 원수이니 한 하늘을 함께 이고 살아갈 수 없으며, 아래로는 형제와 처자식의 원수이니 또한 어찌 갚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산골짜기 숲 속에 엎드려 숨어 있는 자들이 창을 베고 자고 쓸개를 핥으면서 원수를 갚고자 하는 마음을 잠시도 잊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한 사람도 의병을 일으켜 강개한 마음으로 왜적을 친 자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이것이 어찌 왜적들이 꽉 차 있음으로 해서 우리 백성들이 싸울 바탕이 없어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충의로운 선비는 죽고 사는 것으로써 뜻을 바꾸지 않으며, 용감한 사람은 강하고 약함으로써 뜻이 꺾이지 않는 법이다. 그러니 비밀히 서로 연락하여 효유하고 의병을 일으키기를 간절히 바라노라. 그리하여 힘이 왜적을 칠 만하면 지방을 지키면서 원충갑(元沖甲)의 군사처럼 떨쳐 일어나도 좋을 것이요, 형세가 자립할 수 없으면 군사를 이끌고 병사(兵使)의 군대로 들어가도 좋을 것이다. 또 나를 버릴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여긴다면 의병이 되어 강을 건너오는 것 또한 안 될 것이 뭐가 있겠는가.
지난번에 합천(陜川) 사람인 의령 군수(宜寧郡守) 정인홍(鄭仁弘)과 고령(高靈) 사람인 좌랑(佐郞) 김면(金沔)이 충성을 드날리고 의기를 드높여 한번 소리치자, 각 주군(州郡)에서 그에 따라 호응하였는데, 근래에 와서는 군사의 위세가 크게 떨쳐져 나라를 회복하는 공을 세울 가망이 있게 되었다. 그러니 본현의 사민(士民)들도 왜노(倭奴)들의 위협에 겁먹지 말고 더더욱 의열(義烈)의 기운을 발휘하여 한결같이 임금의 원수를 갚을 것을 생각하라. 그럴 경우 충분(忠憤)이 솟구치는 바에 용기가 백 배는 날 것으로, 저 왜적들이 어찌 감히 우리를 당해 내겠는가.
하물며 이 왜적들은 군사를 이끌고 멀리 들어왔다가 흉악한 칼날이 이미 꺾여서, 송도(松都)의 청석령(靑石嶺)에서 크게 패하였고, 서경(西京)의 대동강(大同江)에서 빠져 죽었으며, 철령(鐵嶺)을 넘은 자들은 또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에게 섬멸당하였다. 그리고 명(明) 나라 군사 5만 명이 이미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서 조승훈(祖承訓), 곽몽징(郭夢徵), 왕수신(王守臣) 등 세 대장이 각각 정병(精兵) 수만 명씩을 거느리고 길을 나누어 구원하러 내려오고 있다. 또 수군(水軍) 10만 명이 산동(山東)으로부터 곧바로 왜놈들의 소굴로 쳐들어가고 있다.
우리의 형세가 이미 떨쳐져서 왜적이 망할 날이 얼마 안 남았으니, 지금이야말로 바로 뜻있는 선비가 소매를 떨치고 일어나 공을 세울 때인 것이다. 만약 시일을 늦추다가 앉은 채로 기회를 놓치게 되면, 화란을 평정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장차 천하의 대륜(大倫)에 죄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럴 경우 무슨 면목으로 하늘과 땅 사이에 서서 살아갈 수 있겠는가.
생각건대, 백성들 가운데에는 무식하여 임금과 신하의 의리를 알지 못하는 자도 있을 것이니, 이들은 오직 상(賞)과 벌(罰)로써만 권장하고 징계할 수 있다. 그대들은 조정의 사목(事目)을 보지 못하였는가? 거기에 보면 ‘공천(公賤)과 사천(私賤)을 막론하고 적의 수급 1급을 벤 자는 급제(及第)를 주고, 2급을 벤 자는 6품직을 주고, 3급을 벤 자는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주고, 왜장을 벤 자는 녹훈(錄勳)하고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준다.’ 하였다. 무부(武夫)나 용사(勇士)들은 의병이 있는 곳으로 달려나가 뜻을 가다듬어 힘껏 싸우라. 그럴 경우 위로는 2품의 벼슬까지 할 수 있으며, 아래로는 훈신(勳臣)의 반열에 끼게 되어, 영화는 한 몸에 가득하고 혜택은 후손에게까지 미칠 것이니, 이 또한 기쁜 일이 아니겠는가.
만약 그렇게 하지 않고 줄곧 숲 속에 숨어 엎드려 있을 경우에는, 비록 왜놈의 칼날은 면한다 할지라도, 깊은 산속에서 굶어죽는 것을 면할 수 있겠는가? 설령 만에 하나 구차스럽게 살아났다고 하더라도, 하루아침에 난리가 평정되고 나면 나라에서는 그에 따른 형벌이 있을 것이다. 그럴 경우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처자식들까지도 모두 잡혀 죽는 형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니 힘써 싸워 큰 공을 세우고 중한 상을 받는 것과 비교해 볼 때 그 이해와 화복이 어떻다 하겠는가. 살아서는 열사(烈士)가 되고 죽어서는 충혼(忠魂)이 될 것이니, 그대들은 힘쓸지어다.”
하였다.
○ 김수(金睟)가 용인(龍仁)에서 크게 패하고 돌아와 산음(山陰)에 머물렀는데, 여러 고을에 통문을 돌리고 여러 장수에게 군사를 나누어 붙임으로써, 의병들로 하여금 무너지고 흩어지게 해 아무 일도 못하게 하고 있었다. 이에 민심이 더욱 떠들썩하고 여러 사람들의 노여움이 한꺼번에 폭발하여, 혹은 그의 죄를 성토하고 가서 쳐서 신인(神人)의 분노를 풀자고 하기도 하였으며, 혹은 마땅히 죄를 나열하여 격문을 돌려서 스스로 달아나게 하자고도 하였다. 그러자 곽재우가 드디어 김수의 죄를 나열하여 격문을 돌렸다.
○ 공이 일찍이 김수에 대한 원망이 도민들의 뼛골 깊숙이 사무쳐 있음을 알았으므로, 혹시라도 이로 인해 뜻밖의 변고라도 일어날까 염려하였다. 이에 즉시 곽재우에게 첩문(帖文)을 보내어 역순(逆順)의 이치로써 달래었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의병장은 처음 변란이 일어났을 때부터 재산을 있는 대로 다 털어서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자신의 몸은 돌아보지 않은 채 한결같이 나라를 위하여 왜적을 칠 마음만 가졌다. 그러니 비록 옛날의 열사(烈士)라고 하더라도 어찌 이보다 더하겠는가. 당직(當職)이 경내에 이르러서 즉시 글을 보내 불렀더니, 의병장은 늙고 졸렬한 나를 형편없는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고 단성(丹城)으로 와서 나를 만났는데, 나는 한 번 인사하는 사이에 그대가 이미 자신을 잊고 나라를 위하여 죽을 뜻이 있음을 알았다.
그 뒤에 외로운 군사를 이끌고 낙동강 가를 횡행하면서 앞장서서 왜적을 쳐 머리를 벤 것이 매우 많았으므로, 왜적들이 함부로 몰아쳐 들어오지 못하여 이 일대의 여러 성들이 지금까지 보전되었다. 이에 아름다운 명성이 사방으로 퍼지매 듣는 사람들마다 모두 고무되어 원근에서 메아리치듯 호응하였으니, 왜적을 섬멸하는 공을 세우는 것을 날짜를 세어가면서 기약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그 영웅다운 풍도와 의열한 마음은 당대에 빛날 뿐만 아니라, 장차 역사에 드리워져서 후세에 전하여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듣건대, 의병장이 순찰사의 영문(營門)에 격문(檄文)을 보내어서 감히 패역스러운 말을 함부로 하였다고 하는데, 방백(方伯)이 어떠한 관원이고 의병장은 어떠한 사람이기에 감히 이런 짓을 한단 말인가. 방백에게 실제로 죄가 있다 하더라도, 그에 대해서는 조정에서 조처가 있을 것인바, 도민(道民)이 손을 쓸 일은 아닌 것이다.
의병장은 충의로운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왜적을 치는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을 장차 이룰 판인데, 스스로 자신을 죽이고 일족까지 멸망당하는 지경에 빠지는 짓을 할 줄을 내가 어찌 헤아리기나 하였겠는가. 당(唐) 나라의 배반한 졸개가 주수(主帥)를 찬역(簒逆)하여 쫓아냈다가 화를 당한 사람이 무릇 몇 사람이나 되었는가? 그런데도 앞서 실패한 일을 다시 되풀이하려 한단 말인가?
돌아오는 길을 잃은 것은 《주역(周易)》에서 경계한 바이며, 화를 돌이켜서 복으로 삼는 것은 지혜 있는 선비가 취할 바이다. 내 말을 따르면 순하게 되어 복이 많을 것이고, 내 말을 따르지 않으면 거스르게 되어 화를 받을 것인데, 그 기미가 털끝만한 사이도 없는 만큼, 의병장은 잘 생각하길 바란다.”
하였다.
○ 곽재우가 진양(晉陽)이 위급하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거느리고 구원하러 달려오던 도중 개금원(介金院)에 이르러서 첩문(帖文)을 보고는 그 즉시 답서를 보냈는데, 그 답서에 이르기를, “역순(逆順)의 이치에 대해서는 저 역시 일찍이 대강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저는 합하(閤下)께서 저에 대해 걱정하느라 스스로를 걱정하실 겨를이 없을까 염려스럽습니다. 비록 그러나 합하는 주상께서 보내신 분이니, 어찌 감히 저 자신의 소견만을 고집하여 합하의 명령을 어기겠습니까.” 하였다.
○ 공은 또한 조정에서 김수의 장계를 보고 혹시라도 곽재우를 역적으로 몰아 죽일까 염려하여, 곧바로 사유를 갖추어서 급히 장계를 올려 곽재우에게 다른 뜻이 없음을 밝혔다. 그 계사(啓辭)에 이르기를,
“의령의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켜서 왜적을 친 일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차례 계달하였습니다. 이번에 뜻밖의 변고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일어났는바,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어 지극히 걱정됩니다.
곽재우는 바로 고(故) 통정대부(通政大夫) 곽월(郭越)의 아들이며,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손자 사위로서, 중간에 무학(武學)을 배우다가 이를 버리고 글을 읽었습니다. 그의 사람됨은 단순하고 꾸밈이 없으며, 거상(居喪)함에 있어서 극진히 슬퍼하여 향리(鄕里)에서 자못 효행을 칭송하였습니다.
변란이 처음 일어났을 때 병사(兵使)와 수사(水使)가 서로 잇달아 도주하고, 왜적들이 장차 밀양(密陽)을 범하려고 하였는데, 감사 김수(金睟)는 절제(節制)를 맡은 장수가 포위된 성 안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여기고서 밀양으로부터 영산(靈山)으로 물러나 있다가 곧바로 초계(草溪)로 향하였다고 들었습니다. 그러자 곽재우가 분연히 일어나서 말하기를, ‘병사와 수사가 도망하였는데도 처형을 하지 않았다. 그러고서 지금은 또 왜적이 좌도(左道)에서 나오고 있는데도 초계로 퇴주(退走)하였다. 그러니 감사를 베어 죽이는 것이 옳다.’ 하고는, 칼을 들고 길목에서 김수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향리 사람들이 극력 말리므로 중지하였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뒤에 우병사 조대곤(曺大坤) 및 방어사(防禦使), 조방장(助防將), 수령(守令) 등이 모두 왜적의 소문만 듣고 무너져서 달아난 탓에 열흘 남짓한 사이에 왜적이 서울의 대궐을 범하였습니다. 그러자 곽재우는 팔뚝을 걷어붙이고 의분에 못이겨 말하기를, ‘이런 무리들은 왜적을 호위하여 서울로 들어가 군부(君父)에게 화를 끼친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모두 베어 죽여야 한다.’ 하면서,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항상 큰소리쳤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하루아침에 자기 집 재산을 흩어 군사를 모집하니, 그의 첩이 ‘어찌하여 이러한 개죽음을 하려고 하십니까?’ 하면서 말리자, 곽재우는 몹시 노하여 칼을 뽑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처자식의 의복조차도 군졸의 아내들에게 다 내주었으므로 가업(家業)이 이로 인해 탕진되어 굶주림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이에 그의 매부인 허언심(許彦深)의 집에 처자식을 맡긴 다음, 모집한 장사들을 거느리고 가면서 왜적을 치겠다고 큰소리치자, 향리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는 모두들 미쳐서 발광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때는 벌써 의령과 초계 두 고을은 모두 왜적이 휩쓸고 지나가 고을이 텅 비어 있었으며, 의령의 관고(官庫)는 불에 타버린 탓에 곽재우의 군사는 식량이 없었습니다. 이에 초계와 신반현(新反縣)의 창고에 있는 곡식을 내어 군사에게 먹였는데, 합천 군수(陜川郡守) 전현룡(田見龍)이 곽재우를 도둑이라고 논하여 병사에게 보고하니, 병사가 명을 내려 체포하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의병에 응모하였던 자들이 그 말을 듣고는 뿔뿔이 흩어져 떠나려고 하였습니다.
신이 그 지방에 도착하여 즉시 글을 보내어서 곽재우를 불렀으므로 군위(軍威)가 다시 떨쳐지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곽재우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줄곧 왜적을 쳤는데, 왜적의 많고 적음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앞장서서 힘차게 돌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거느린 전사들이 용기백배하여 누구나 할 것 없이 일당백(一當百)의 용사가 되었습니다. 싸울 때에는 반드시 붉은 비단으로 만든 철릭(帖裏)을 입고 당상관의 전립(氈笠) 차림을 하고 싸우면서, 스스로 호하기를 ‘홍의천강장군(紅衣天降將軍)’이라 하였습니다.
곽재우는 말을 달려 적진을 유린하였는데, 오고가는 것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여 왜적들이 철환(鐵丸)을 일제히 쏘아도 맞히지 못하였습니다. 혹은 말 위에서 북을 치면서 천천히 가서 행군하는 절도로 삼기도 하였으며, 혹은 사람을 시켜 피리도 불고 호루라기도 불게 하여 두려워하는 뜻이 없음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때로는 산속에 의병(疑兵)을 많이 풀어놓고 피리도 불고 북도 치고 하면서 떠들어댔으며, 혹은 곳곳에 복병을 숨겨놓아 마치 사람이 없는 듯 고요하다가 왜적이 이르면 갑자기 쏴 죽이기도 하였으며, 혹은 왜적의 배를 뒤쫓아가 해안에서 활을 쏘기도 하여, 어느 하루도 싸우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싸우면 반드시 이겼으므로 왜적의 머리를 벤 것이 모든 장수 중에 가장 많았으며, 쏴 죽인 자는 그 숫자를 알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에 왜적들도 그를 홍의장군(紅衣將軍)이라고 부르면서 감히 해안에 올라와 노략질을 못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의령(宜寧), 삼가(三嘉) 두 고을의 백성들은 모두 생업에 편안하여 힘써 농사지어 오곡의 풍성함이 평소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리고 도내의 나머지 성들이 지금까지 보전된 데에는 곽재우의 공이 아주 큽니다.
그런데 갑자기 삼도(三道)의 장수가 수원(水原)에서 무너졌다는 말을 듣고는 마치 미친 사람처럼 위태로운 말과 망녕된 말을 수없이 지껄여댔습니다. 순찰사가 비록 편지를 보내어서 공적을 표창하고 계문하여 공을 아뢰었으나, 역시 뜻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혹 화를 당할지도 모른다고 경계하면 반드시 칼을 움켜잡고 성을 냈습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또 갑자기 두 차례나 순찰사의 영문(營門)에 격서(檄書)를 보내어서 낱낱이 그 죄를 열거하고는 토벌하겠다고 떠들어댔으며, 또 각 고을의 의병장들에게 통문을 돌려 토죄(討罪)하겠다는 뜻을 말하였습니다. 신은 그 말을 듣고는 놀라운 마음에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던 차에 순찰사가 신에게 공문을 보내어 의령 고을에 명하여 곽재우를 잡아 가두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곽재우가 실제로 역심(逆心)을 품었다고 한다면 현재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있으니 한 사람의 역사(力士)로는 잡을 수가 없을 것이며, 만약 역심을 품고 있지 않다면 편지 한 장으로도 넉넉히 깨우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이에 곧바로 곽재우에게 첩문(帖文)을 보내어 다방면으로 비유해 깨우쳤으며, 김면(金沔)도 글을 보내어서 경계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곽재우가 곧바로 마음을 돌려 신의 말대로 잘 따랐으며, 진주(晉州)가 위급하다는 말을 듣고는 군사를 이끌고 달려가 구원하기로 하여, 3일에 이미 길을 떠났습니다.
곽재우는 일개 도민으로서 감사를 범하려고 하여 죄를 성토하고 격서를 보내기까지 하였습니다. 그것이 비록 스스로는 나라를 위한 마음에서 분통스러워 그렇게까지 한 것이라고는 하나, 행적이 난민(亂民)에 가깝습니다. 그러니 즉시 토죄하여 제거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곽재우는 온 나라가 함몰된 뒤에 능히 외로운 군사로 용감히 왜적을 쳤으므로, 도내의 잔민(殘民)들이 그를 간성(干城)처럼 의지하고 있습니다.
이제 와서 난폭한 말을 하였다고 하여 곧바로 베어 죽이면, 보전되어 있는 남은 성은 왜적을 막을 계책이 없을 것이며, 군민(軍民)들은 그의 죄를 모르고 있어서 한꺼번에 흩어져 무너질 것입니다. 이에 신이 미봉(彌縫)하여 진정시키는 계책을 써서 재삼 계칙(戒飭)하였더니, 이미 신의 말에 순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도순찰사(都巡察使)에게 죄를 졌으니, 아마도 서로 용납하기가 어려워서 다른 변고를 야기시킬까 염려스럽습니다.
신이 듣건대, 을묘년(1555, 명종 10)의 왜변(倭變)이 일어났을 때 전라 감사 김주(金澍)가 영암(靈巖)에서 다른 고을로 달아났습니다. 그러자 전 수원 부사(水原府使) 윤기(尹箕)가 당시에 유생(儒生)으로서 포위된 성 안에 있다가 칼을 뽑아 들고 베어 죽이려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김주는 성조차 내지 않고 웃으면서 이야기하여 잘 처리하였다고 합니다. 이에 논자(論者)들이 지금까지도 윤기의 용기에 대해 칭송하고, 김주가 능히 포용한 것을 아름답게 여기고 있습니다.
지금 곽재우의 일이 비록 몹시 미치광스럽고 망녕되기는 하나, 그의 마음은 실로 다른 뜻이 없습니다. 그러니 감사가 만약 김주가 처리한 바와 같이 대처한다면, 반드시 조용해져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이 김수(金睟)에게 글을 보내어서 선처하도록 부탁한 결과, 걱정될 만한 변은 없게 되었습니다. 다만 김수가 이미 곽재우를 반적(叛賊)이라고 계문하였으며, 또 다른 사람을 사주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만약 이 일로써 조정에서 그를 죄준다면, 그가 죄에 승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 도의 인심을 수습하기가 어려울 것이므로, 몹시 마음 아프고 절박합니다.
곽재우가 충의(忠義)를 일으켜 분발한 상황과 용감히 왜적을 친 공은 온 도에 널리 퍼지고 드러나서 아이들이나 군졸들까지도 모두 곽 장군(郭將軍)이라고 일컫고 있습니다. 그리고 듣건대, 그는 용병(用兵)에 뛰어나서 장수가 될 자질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만약 미치광스럽고 망녕된 짓을 한 데 대한 주벌을 조금만 늦추어준다면, 반드시 공을 세워 보답할 것입니다.
신은 불행하게도 명을 받든 이후에 두 번이나 이런 변을 만났습니다. 신이 4월 중에 호남(湖南) 길로 오다가 운봉현(雲峯縣)에 이르렀을 때 호남 사람들이 순찰사 이광(李洸)이 근왕(勤王)하는 데 늦게 달려갔다는 이유로 토죄하고자 하면서, 신에게 비밀히 말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이에 신이 대의(大義)로써 그 말을 꺾었으며, 곧장 김수와 상의하여 이광에게 알려 대비하라고 말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김수가 말하기를, ‘그들이 근왕하는 데 늦게 달려갔다는 이유로 토죄하려고 하니, 의로운 선비라고 이를 만하다. 만약 이 사람들을 베어 죽인다면 한 도의 인심이 더욱 격해질 것이다. 이광에게 알려서는 안 된다.’ 하였습니다. 이에 신은 그의 말에 따라 그만두었습니다.
지금 이 곽재우의 일이 꼭 저번의 그 일과 같습니다. 김수가 진실로 호남 사람들을 조처한 의리로써 곽재우에 대해 조처한다면, 난처한 일이 없을 듯합니다. 신과 김면이 곽재우에게 보내 경계하여 신칙한 글과 곽재우가 보낸 답서를 아울러 등서(謄書)하여 올립니다.”
하였다.
○ 영천(永川)의 진사 정세아(鄭世雅), 생원 조희익(曺希益), 전 현령 곽회근(郭懷瑾) 등 60여 명이 공이 초유(招諭)하면서 의병을 일으킨다는 기별을 듣고는 수천 자로 된 긴 글을 지어 보냈다. 그 내용은, 강좌(江左)의 여러 수장(守將)들이 처음에는 도망쳐 숨었다가 이제서야 기어나와서 의병들을 억누르고 있는 상황을 하나하나 거론하였으며, 또 ‘경주 부윤(慶州府尹) 윤인함(尹仁涵)이 부사(府史), 이서(吏胥), 악사(樂士) 등을 이끌고 기계(杞溪)의 깊은 산속으로 숨어 한 부(府)를 통째로 왜적에게 내주고서는, 왜적이 이미 물러갔는데도 아직 한 번도 산 밖으로 나오지 않고 도리어 의병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과, ‘병사(兵使) 박진(朴晉)이 의병을 호령하고 관군을 억압함으로써 군사들이 모두 흩어져 수습할 수가 없다. 그런데도 좌도(左道)에서는 품명(稟命)할 곳이 없으니, 영공의 지휘를 듣고자 한다.’는 것이었는데, 몇 사람을 시켜서 낮에는 숨어 있다가 밤에 와서 공에게 글을 바쳤다.
공이 그 글을 받고는 매우 기뻐하여 그들을 위유(慰諭)한 다음 돌려보내면서 말하기를, “제군들이 호랑이 굴을 무릅쓰고 험난한 길을 지나서 멀리까지 와 문안하니, 참으로 충성스럽고 의로운 마음이 지극하지 않으면 어찌 능히 이럴 수 있겠는가. 사람으로 하여금 감격의 눈물이 흐르게 한다. 내가 명을 받들고 와서 초유하고 있으니, 의리상 이곳과 저곳을 구분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처럼 길이 막혀서 비록 지휘하고자 하더라도 문보(文報)가 통하지 않으니 어쩌겠는가.” 하였다. 그리고는 이어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 권응수(權應銖)를 의병대장으로 삼은 다음, 이웃 몇몇 고을에도 다 의병장을 정하여서 권응수의 명령을 받도록 하였다.
처음에 권응수가 향병(鄕兵)을 끌어모아서 왜적들을 많이 참획하였으며, 영천의 사인(士人) 조희익 등과 모의하여 네 고을의 의병들을 거느리고 영양성(永陽城)에 굳게 웅거해 있는 왜적들을 쳐 하나도 남김없이 섬멸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서는 공이 추천해 준 데에 감격하여 더욱 분발하여 싸움터에 부지런히 달려나갔으므로 왜적들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 이에 좌도의 민심이 이로 말미암아 조금 떨쳐져 모두들 왜적을 토벌할 마음을 품게 되었다.
공이 이때 거창(居昌)에 오래 머물러 있으니, 왜적들이 진양(晉陽)에 장수가 없다는 것을 탐지하고는 창원(昌原)과 진해(鎭海)에 주둔해 있던 왜적들이 서로 호응하여 고성(固城)을 경유한 다음 사천(泗川)에 집결하여 진양으로 대거 침입해 왔다. 공이 이 소식을 듣고는 급히 달려가 단성(丹城)에 이르러서 함양, 산음, 단성의 군병을 모두 동원하여 진양으로 달려갔다. 그런 다음 김시민(金時敏)을 독려하여 그로 하여금 동요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또 곤양 군수(昆陽郡守) 이광악(李光岳)을 우익(右翼)으로 삼아 구원하게 하였다.
곽재우가 공의 명령을 기다리지도 않고 먼저 달려가서 진주성에 들어가니, 군세가 자못 성하였다. 왜적들이 촉석루(矗石樓) 앞까지 와서 다만 한 줄기 강물을 사이에 두고 있으면서도 감히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였다. 공 역시 뒤쫓아와서 싸움을 독려하였다. 그러자 여러 장수들이 더욱더 명령에 복종하고 합세하여 추격하니, 왜적들이 낭패하여 달아났는데, 살상한 왜적의 숫자가 몹시 많았다. 드디어 사천, 진해, 고성의 왜적들이 모두 도망쳤다.
○ 남원(南原) 사람인 전 좌랑(佐郞) 이대윤(李大胤)과 유학(幼學) 소혜(蘇徯)가 족인(族人)을 보내 공에게 서한을 올리고 각각 백미 100석씩을 바쳐서 군수(軍需)에 보태어 쓰라고 하였는데, 공이 서한을 받고서는 칭찬하여 말하기를, “이 좌랑은 본래부터 순실(淳實)한 사람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곡식을 이렇게 많이 모아서 쌓아 놓고 있을 줄은 몰랐다.” 하였다. 그리고는 즉시 김천 찰방(金泉察訪) 조존선(趙存善)을 남원으로 보내어 곡식을 실어 오게 하였다.
○ 공이 항상 상주(尙州)의 소식을 몰라 궁금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함창(咸昌)의 사인 이홍도(李弘道)와 상주의 사인 조정(趙靖) 등이 와서 이봉(李逢)이 의기를 떨쳐 왜적을 토벌한 일을 말하니, 공이 서한을 보내어 이봉의 공을 기리고 의병장으로 삼은 다음, 상주의 전 한림(翰林) 정경세(鄭經世), 함창의 전 찰방(察訪) 권경호(權景虎), 문경(聞慶)의 유학(幼學) 신담(申譚)을 세 고을의 소모관(召募官)으로 삼아, 각각 향병을 모집하여 이봉의 지휘를 받게 하였다.
○ 5월 이후에 네 번이나 장계를 올렸으나 한 번도 회답이 오지 않았다. 간혹 회답이 있긴 하였지만, 그것은 승정원(承政院)에서 받았다고만 하는 내용일 뿐, 가타부타 별다른 말이 없었다. 공이 북쪽을 향하여 바라보면서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리면서 길게 탄식하였다.
의병대장 정인홍이 공을 삼가의 정금당(淨襟堂)으로 찾아와 뵙고는 밤중까지 마주앉아 이야기하였는데, 강개하고 격렬한 두 사람의 우국충정은 피차 똑같았다. 정인홍의 아들 정연(鄭沇)도 따라왔는데, 기개가 너무 우뚝하고 날카로웠다. 그가 돌아간 뒤에 공이 말하기를, “아깝다. 싹이 나서 결실을 맺지 못하겠구나.” 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목구멍에 병이 나 죽었다.
정인홍이 보고하는 문서의 말투가 직절(直截)하고 불손하였으며, 혹 공의 지휘를 받지 않고 편의대로 일을 처리하였다. 이에 공이 조금도 용서함이 없이 준엄한 말로 꾸짖기도 하고, 때로는 그의 군관(軍官)을 잡아다가 매질하기도 하였다.
○ 공이 의령에 도착하자 곽재우가 보낸 군졸이 와서 낙동강에 있는 왜적들이 내려온다고 보고하였다. 공이 즉시 고을의 유생(儒生)과 품관(品官)들을 불러모아서 모두 색깔이 있는 옷을 입게 하고, 인근의 남정(男丁)들을 끌어모아 군용(軍容)을 성대하게 하도록 하였다. 그런 다음 이들을 대동하고 신반현(新反縣)으로 향해 가서 곽재우의 군사들을 위로하고 기강(岐江) 가에서 군사들의 위엄을 뽐냈으나, 하루해가 다 가도록 왜적들이 오지 않았다. 이에 다시 곽재우의 집으로 돌아왔다.
○ 선전관(宣傳官) 이극신(李克新)이 유지(有旨)를 가지고 와서 비로소 경상좌도 감사(慶尙左道監司)에 제수된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즉시 분향(焚香)하고는 북쪽을 향하여 네 번 절한 다음 명을 공손히 받들었는데, 평양(平壤)이 함락당하여 대가(大駕)가 용만(龍灣)으로 몽진(蒙塵)하고, 동궁(東宮)이 안협(安峽)으로 돌아가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가슴을 치면서 대성통곡하고 흐느껴 울면서 말하기를, “백발이 다 된 외로운 신하가 왕명을 받들고 남쪽으로 온 지 이미 오래되었건만, 근왕(勤王)하는 군사를 힘써 일으키지도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도내의 왜적조차 능히 소탕하지 못하였다. 그러고서는 난여(鑾輿)가 초야를 헤매고 종묘사직이 폐허가 되는 것을 앉은 채로 바라보면서 구차한 목숨을 오늘날까지 보전하고 있다. 임금의 은혜를 잊고 나라를 저버린 부끄러움은 만 번 죽어도 씻기 어려운데, 천벌을 내리지 않고 도리어 한 방면을 맡겨 주시니, 분골쇄신한들 어찌 그 크나큰 은혜를 만분의 일이나마 보답할 수 있겠는가.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굽어보아도 발붙여 돌아갈 곳 없으니, 다만 죽음이 있을 뿐, 그 밖에 다시 무엇을 하겠는가.” 하니,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감히 쳐다보지 못하였다.
○ 인하여 선전관과 함께 돌아와서 현(縣) 안에 있는 촌사(村舍)에 이르렀다. 근방에 사는 사우(士友) 박이장(朴而章), 조종도(趙宗道), 곽준(郭䞭), 오운(吳澐), 이정(李瀞), 삼가 현감(三嘉縣監) 장령(張翎) 및 온 고을의 대소 사민(士民)들이 모두 모여서는 다들 혀를 차면서 공이 떠나가는 것을 애석해하였다. 그러자 공이 말하기를, “선전관이 임금이 계신 곳으로부터 산을 넘고 물을 건너는 등 온갖 고생을 겪으면서 와서 만리 먼 길에 임금의 명을 전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남쪽 사람들로 하여금 비로소 행재소(行在所)의 소식을 듣게 하였으니, 나이 어려서 고향을 잃고 떠돌다가 집으로 돌아가서 부모를 뵐 수 있게 된 것보다도 더 기쁘다. 그러니 모든 성의를 다하여 대접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였다. 이에 마을에 사는 사인들이 앞다투어 술을 가지고 와서 위로하면서 밤새도록 술을 마셨는데, 심지어는 눈물을 흩뿌리면서 목 놓아 울기까지 하면서 송별하였다.
○ 공이 말하기를, “이미 좌도 감사가 되었으니 우도의 일을 이제 관여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 그러나 처음부터 의병을 관섭해 왔는데, 상규(常規)에 따른다는 핑계로 우려스러운 조짐이 있는 것을 눈으로 보고서도 계달하지 않는 것은 실로 신하된 도리가 아니다. 직분을 뛰어넘는다는 혐의를 받는다 하더라도 회피해서야 되겠는가.” 하고는, 드디어 하나하나 조목을 들어 품계하기를,
“당초에 김면(金沔)은 고령(高靈)과 거창(居昌)에서 군사를 일으키고, 정인홍(鄭仁弘)은 합천(陜川)에서 군사를 일으켜, 군대의 성세가 자못 진작되었으며 형세 또한 확장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김면은 성은을 입어 합천 군수에 제수되고, 정인홍은 제용감 정에 제수되었습니다. 이에 세 고을 군사들이 각각 그 장수를 잃고서는 모두들 맥이 풀려 있으니, 이는 실로 작은 염려가 아닙니다. 그러니 일이 평정된 뒤에 부임하도록 하는 것이 기의(機宜)에 합당할 듯합니다.
전 군수 곽율(郭)은 지금 초계(草溪)의 가수(假守)로 있는데, 고을을 잘 다스려서 군사와 백성들이 사랑하여 떠받들면서 모두 진짜 군수로 삼기를 원합니다. 새 군수 곽눌(郭訥)은 현재 있는 곳을 알지 못하니, 곽율을 본군의 군수로 삼는 것이 역시 온당할 듯합니다.
의령(宜寧)은 현감 오응창(吳應昌)이 관직을 버리고 도망친 뒤로 왜구가 분탕질하여 보전할 길이 전혀 없는 형편이었는데, 곽재우(郭再祐)와 권난(權鸞)이 맨 먼저 의병을 일으키고, 전 목사 오운(吳澐)이 또 소모관이 되어 온 고을에 개유(開諭)하여 2000여 명을 끌어모은 다음, 그 가운데 노약자를 떼어내어 보인(保人)으로 주고, 군기(軍器)를 만들어 전투할 도구를 갖추었습니다. 이에 이 한 고을이 한 도의 보장(保障)이 되어 왜적들이 감히 강 서편을 엿보지 못하고 있으니, 이상 몇 사람의 공로는 실로 온 도내 사람들이 다 아는 일입니다.
의령의 새 현감 김충민(金忠敏)은 본현이 그의 외가가 있는 곳일 뿐만 아니라, 작년 10월부터 금년 3월까지 본현의 성 쌓는 감독관이 되어서는 온당치 못하게 일을 처리하여 온 고을을 병들게 하였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호랑이나 독약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현감으로 온다는 소문을 듣고는 백성들이 다들 흩어져 떠나갈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어찌 의령 한 고을만의 해만 되겠습니까. 실로 한 도의 이해가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위급한 때를 당해서는 민심을 수습하는 것이 급한 일이고, 또 의병에 관계되는 일이기에, 감히 이와 같이 직분을 뛰어넘어서 말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황송하여 대죄(待罪)합니다.”
하였다.
○ 그 다음 날 공이 산음(山陰)에서 초계(草溪)로 옮겨가 머물면서 장차 좌도로 향해 가려고 하였다. 그러자 우도 사람들이 어린이는 울고 늙은이는 한숨짓고 어른들은 울부짖으면서 마치 물을 잃은 물고기나 집이 불타는 제비와 같이 어찌할 줄 몰라하였으며, 의병들은 모두 마음이 꺾이고 맥이 풀려서 수습할 수가 없었다. 이에 선비들 수천 명이 떼를 지어 와서 날마다 뜰 아래 서서 머물러 있기를 간청하였다. 초계의 유생 이대기(李大期) 등 30여 인이 머물러 있어 달라고 진정하는 만원서(挽轅書)를 올렸다.
그 대략에,
“지금 병기(兵器)가 잘 들고 날카롭지 않은 것이 아니요, 성지(城池)가 높고 깊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참으로 고을 수령 가운데에 어진 사람이 없고, 진영의 장수에 적합한 사람을 얻지 못하여, 정사(政事)가 맹호보다도 가혹하고 법망(法網)이 가을풀보다도 촘촘한 탓에, 함부로 토색질하고 마구 주구질하여 백성들이 흩어진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급기야 왜적들이 쳐들어오는 변란이 창졸간에 일어나자 장수나 수령으로 있는 자들이 자신들이 평소에 한 일이 민심을 크게 잃어서 비록 수습하려고 하여도 백성들이 따르지 않을 것임을 잘 알았으므로, 숲 속으로 달아나 숨으면서 오히려 깊이 숨지 못할까만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이에 국가의 형세가 이 지경에 이르러서 이제 다시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게 되었습니다.
전 장령(掌令) 정인홍(鄭仁弘)과 전 좌랑(佐郞) 김면(金沔)이 합하(閤下)께서 내리신 초유(招諭)하는 격문(檄文)에 응하여 외로운 충성심에 스스로 격동되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떨쳐 일어나, 하늘에 맹세코 나라의 수치를 씻고자 기약하였습니다. 그리고는 흩어져 도망친 사람들을 끌어모으자 원근에서 의병들이 메아리처럼 호응하여, 군대의 형세가 조금은 진작되고, 의기의 칼날이 자못 예리해졌습니다. 이에 형세를 크게 펼쳐 왜적들을 쳐 죽이자, 돌진해 오던 왜적들의 기세가 많이 꺾였습니다. 그러니 강우(江右)의 8, 9개 군(郡)이 왜적들의 침입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실로 합하께서 잘 절제(節制)하신 데에 힘입은 것입니다.
이번에 교서(敎書)가 서쪽에서 내려와 좌도 감사가 되어 가시게 되자, 여정(輿情)은 이미 맥이 풀리고 사람들은 의구심을 품어, 모여들었던 자들은 흩어져 떠날 생각을 하고 있으며, 의병이 되려고 하던 자들은 도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생각건대, 저 탐악스런 아전들과 백성들을 해치는 감사는 의병들을 질시하여 온갖 방도로 모해하려고 하면서, 심지어는 불궤(不軌)를 도모하였다고까지 말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감히 자신들 멋대로 술수를 부리지 못하였던 것은 상국(相國)께서 이곳에 계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상공께서 한 번 낙동강을 건너서 동쪽으로 가시고 나면, 전날에 귀신같이 숨어 있고 물여우처럼 잠복해 있던 자들이 그 기운을 드날리게 될 것이요, 노여움을 품고 미워하던 자들 또한 마음대로 수단을 부릴 것입니다. 그럴 경우 정충(精忠)과 의열(義烈) 두 의병대장과 같은 사람들이 어찌 구차하게 공을 이루기를 바라서 저들에게 견제당하려고 하겠습니까.
이뿐만이 아닙니다. 의령(宜寧)의 의사(義士) 곽재우(郭再祐)는 칼을 차고 창의(倡義)하여 충분(忠憤)이 늠름하지만, 광망스러운 마음을 잘 절제하지 못하여 방백(方伯)의 뜻을 거슬렀습니다. 곽재우가 믿는 바는 오직 합하뿐인데, 합하께서 가시고 나면 형세상 장차 보전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곽재우가 없으면 의령이 없을 것이고, 의령이 없으면 삼가(三嘉) 이서(以西)의 지역이 장차 차례차례 함락당할 것입니다. 이것으로 볼 때 합하께서 가고 머무는 것이 어찌 의병들이 모이느냐 흩어지느냐에 관계되지 않겠으며, 나라가 보존되느냐 망하느냐가 달려 있지 않겠습니까.
일의 성패(成敗)와 이해(利害)가 숨 한 번 들이쉬고 내쉬는 사이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구구하게 임금의 명에 달려나가는 상규(常規)만을 지키려고 하다가, 놓쳐서는 안 될 사기(事機)를 그르친다면, 합하께서 전날에 초유한 공이 허사가 되지 않겠습니까? 삼가 합하께서는 깊이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영남 한 도를 위해서도 다행이고 나라를 위해서도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공이 말하기를, “이미 성상의 명이 있으니 어찌 내 임의대로 하겠는가.” 하였다. 안동(安東)은 공의 고향으로, 그곳에 가면 선롱(先壟)을 돌아볼 수 있고, 가속(家屬)들을 볼 수 있고, 친구들을 만나볼 수 있으며, 부월(斧鉞)을 잡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은 일상적인 정리로 볼 때 기뻐하는 바이다. 더구나 전쟁으로 어지러운 중이겠는가. 그런데도 좌도로 떠나가 다 이루어져 가던 공이 무너지는 것을 깊이 걱정하였으니, 나랏일을 걱정하느라 집안일을 잊는 것이 이와 같았다.
강우(江右) 여러 고을의 유생들이 앞다투어 공을 머물러 있게 해 달라는 내용으로 상소를 올렸는데, 합천(陜川), 초계, 삼가, 의령, 진주(晉州), 단성(丹城)의 경우에는 진사 박이문(朴而文)이 소두(疏頭)가 되고, 거창(居昌), 안음(安陰), 함양(咸陽)의 경우에는 진사 정유명(鄭惟明)이 소두가 되었다.
박이문이 올린 상소는 아래와 같다.
“감사(監司)는 한 도의 주인이고 절도사(節度使)는 삼군(三軍)의 장수이므로, 병졸과 백성을 훈련시킬 임무를 부여하고, 임기응변하여 적을 제압하는 방략을 책임지웠으니, 군민(軍民)의 이해와 국가의 안위가 모두 이들에게 달려 있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어찌 편벽되어서 자기 멋대로 하는 자나 겁이 많고 혼모한 자가 감당할 수 있는 직임이겠습니까.
왜적과 접전하기도 전에 열읍(列邑)이 파도처럼 무너지고 군사와 백성들이 흩어져 떠났는바, 그 죄는 참으로 용서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들을 그 지경에 이르도록 한 것은 누가 그 허물을 책임져야 하겠습니까? 본도 감사 김수(金睟)는 산과 바다 같은 성상의 은혜는 생각하지 않고 단지 실낱같이 하찮은 자신의 목숨만을 아껴서, 산골 고을로 도망치면서도 오히려 깊이 숨어들지 못할까만을 걱정하였으며, 성을 지키는 좋은 계책을 도리어 오활하다고 하였습니다. 우병사 조대곤(曺大坤)은 원래 나라의 울타리가 될 만한 재능이 없는 데다가 몹시 혼미하기까지 하여, 여러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만을 호위하게 하면서 왜적을 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러고서야 사나운 왜적이 휘몰아쳐 오는 것은, 사세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적들의 형세가 더욱더 치성하여 온 도내에 꽉 차 있으므로, 다시는 손을 쓸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좌도 감사 김성일이 왕명을 띠고 남쪽으로 내려와, 나라를 회복시킬 뜻을 간절히 품고 원근에 초유하여 충의(忠義)로써 격려하였습니다. 이에 정인홍, 김면, 곽재우 등 세 사람이 하늘에 맹세코 나라의 수치를 씻고자 기약하고는, 향리(鄕里)에서 분기하여 동지를 불러모았습니다. 그리하여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왜적을 차단하고 성에 웅거해 있는 왜적들을 쳐서, 군대의 위세가 날로 진작되고 병력이 조금은 강해졌습니다. 이에 낙동강 서쪽의 6, 7개 고을이 병화를 면하여 오늘날의 즉묵성(卽墨城)이 되었는바, 나라를 수복할 터전이 이로 인하여 마련되었습니다.
그런데 김수는 몸에 무거운 죄를 지고 세인의 배척을 받게 되자, 자기의 죄를 메꿀 수 있는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다른 사람의 공적이 이루어져가는 것을 시기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사당(私黨)을 심어 의병을 무너뜨리려 하였고, 임금을 속여 사정(私情)을 쓰는 등 못하는 짓이 없었습니다.
용인(龍仁)에서 패전하였을 때 무슨 포로를 바친 공이 있었습니까? 그런데도 말을 꾸며 거짓으로 주달하여 왜적 한 놈 죽이지 않은 김경로(金敬老)로 하여금 후한 상을 받게 하였습니다. 성주 목사(星州牧使) 이덕열(李德悅)은, 정사가 맹호보다 가혹하고 공사(公私)의 부역이 번다했으며, 성을 버리고 산에 숨어 있으면서도 백성들을 더욱 심하게 들볶았고 의병을 억눌러서 백방으로 모해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부월(鈇鉞)의 참형은 시행하지 않고 도리어 표창하는 주달을 올렸습니다.
성상의 귀를 속이고 당여(黨與)를 만들어 서로 도운 형적이 마침내 드러나게 되니, 김수인들 어찌 한 사람의 손으로 여러 사람의 눈을 가릴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조대곤의 죄는 모두가 죽여야 마땅하다고 하는데도 김수는 그를 족당(族黨)이라는 이유로 사정(私情)을 두어, 구악(舊惡)을 징계하기는커녕 새로운 명령이 또 내려지게 해, 구차스럽게 살아남은 무리들로 하여금 기탄할 바가 없게 하였습니다.
아아, 한 마리의 이리가 길에 나서면 백 마리의 여우가 아첨하고, 한 도깨비가 방 안을 엿보면 온갖 간귀(奸鬼)가 아부하는 법입니다. 김수가 의사(義士)를 질시하여 온갖 계교로 중상모략하고, 자신의 주구(走狗)들을 사주하여 제멋대로 흉계를 펴자, 김경눌(金敬訥)이나 김충민(金忠敏) 같은 자들이 앞을 다투어 그의 뜻에 영합하여, 의병을 원수처럼 배척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아아, 한 사람이 어진 이를 방해하여도 오히려 나라를 결단내기에 충분한 법입니다. 더구나 지금은 부화뇌동하는 자가 여러 고을에 흘러넘치고 있으니, 쇠약해진 운세를 만회하고 어지러운 난리를 평정하는 것은 아예 바랄 수 없을 듯합니다.
아아, 나라를 광복할 터전은 영남에 있고, 영남을 회복할 책임은 김성일에게 달려 있습니다. 김성일이 없으면 의병이 없을 것이고, 그에 따라서 또 영남도 없을 것입니다. 지금 김성일이 왕명을 받들고 강을 건너 동쪽으로 가고 나면, 간사한 무리들은 눈을 부라릴 것이고 의병들은 맥이 풀릴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날의 일이 어찌 통곡하고 눈물을 흘리는 데에만 그칠 뿐이겠습니까.
신들의 생각으로는, 한 방면을 나누어 맡는 책임은 비록 좌도와 우도로 나뉘어 있으나, 왜적을 토벌하는 사세는 본디 저곳과 이곳을 나눌 수 없을 듯합니다. 이미 내리신 어명을 비록 다시 돌이킬 수 없으나, 김성일로 하여금 좌도와 우도를 아울러 살피면서 의용군을 격려하게 한다면, 이는 실로 양도(兩道)를 전담하는 중책을 맡아 영남 한 도를 총괄해 절제하는 것이니, 위태로움을 되돌릴 기틀이 오로지 여기에 있게 될 것입니다.
아아, 형상(刑賞)의 도는 신상필벌(信賞必罰)에 있는바, 상헌(常憲)을 시행함에 있어서 이동(異同)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조대곤의 죄는 이각(李珏)과 다름이 없는데, 한 사람은 참수하고 한 사람은 유임되었으며, 김수의 악함은 이광(李洸)보다 더한데, 한 사람은 내쫓고 한 사람은 내쫓지 않았습니다. 이는 마치 배를 삼킨 큰 고기는 그물에서 빠져나오고, 음산한 그늘이 광명을 가린 것과 같은 격이라고 하겠습니다.
조대곤이 비겁하게 물러난 죄는 그에 따른 형률(刑律)이 있을 것이며, 김수와 같이 나라를 저버리고 사정을 따라서 도망쳐 숨은 죄악은 저 송(宋) 나라의 역적인 진회(秦檜)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들을 제거하면 나라의 명맥을 존속시킬 수 있고, 이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나라를 회복하기 어려울 것이니, 흥망의 기틀이 여기에서 결판날 것입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어리석은 사람의 생각이라고 하찮게 여기지 마시고 굽어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정유명이 올린 상소는 아래와 같다.
“오늘날의 일은 모두 의병의 힘에 의지하지 않음이 없고, 의병으로 하여금 종시토록 공을 이루게 한 것은 김성일의 공입니다. 이제 김성일이 좌도 감사로 옮겨 임명되었다는 말을 들으니, 전하께서 사람을 쓰는 것이 제대로 되었다고 할 만하며, 좌도의 생민들은 행복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수복하는 공을 완수하는 데에 있어서는 다 이루어져가는 즈음에 장애가 없을 수 없습니다.
사람을 쓰고 버리는 방도에는 좌도와 우도에 따라 완급(緩急)이 있습니다. 어째서 그런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도 몇 고을의 군사와 백성들은 김성일을 인자한 어머니와 같이 보고 있으며, 김성일을 장성(長城)과 같이 의지하고 있습니다. 이에 만 번 죽을 계책을 내어 왜적들을 쓸어버리고, 한 번 살아남아서 태평 시대를 보기를 기약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우도에서 빼앗아다가 좌도에 주는 일이 전혀 뜻밖에 생겼으므로, 충신들은 실망하고 있고 의병들은 맥이 풀려 있습니다.
아아, 김성일이 떠나가고 머무는 것이 어찌 유독 경상우도 의병들의 성패에만 관계가 있겠습니까. 곽재우는 가산을 전부 내놓아 의병을 모집하여 적을 치다가 간악한 사람의 저해를 면치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김성일이 서한을 보내어 장려하니, 이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욱 감격하여 몸소 강회(江淮)의 보장을 책임져서, 공이 남도에서 제일가게 되었습니다. 김성일이 떠나가면 곽재우의 일은 견제받을 염려가 있을 것이며, 구구한 몇 고을마저 보장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조정의 조치가 적당하지 못하여 백성들이 희망을 상실한다면, 중흥의 공은 다시 바랄 수 없을 것입니다.”
○ 공은 좌도로 가자니 길이 막혔고, 그대로 머물러 있자니 사세가 구애되었다. 이에 김수에게 말해서 정병(精兵)을 뽑아 호송해 줄 것을 청하고, 박성(朴惺)을 가도사(假都事)로 삼았다. 김수가 거창으로부터 와서 공을 전송하려고 하자, 공이 맞이하여 합천에서 모였다.
○ 9월 4일에 초계를 경유한 다음 밤을 틈타서 낙동강을 건너고 현풍(玄風), 창녕(昌寧), 밀양(密陽), 청도(淸道)의 지경을 몰래 통과하여 하양(河陽)에 도달하니, 좌도의 백성들이 모두들 말하기를, “어째서 이렇게 늦게 오셨습니까.” 하였다. 수문장(守門將) 신초(辛礎)를 현풍 가수(玄風假守)로 삼고,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 이숙(李潚)을 영산 가수(靈山假守)로 삼았다.
○ 이틀 후 신령(新寧)에 도착하여 다시 우도 감사로 돌아가라는 왕명을 받았다. 공이 박성에게 이르기를, “반드시 본도의 군병이 와서 기다리고 있어야만 위험한 곳을 넘고 강을 건널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안동까지는 불과 이틀 길이니, 가서 성묘하지 않으면 어찌 인정이라고 하겠는가.” 하니, 박성이 말하기를, “본도의 군병을 누가 독려하여 보내겠습니까. 더구나 이곳에는 머무를 곳도 없습니다. 그러니 가서 성묘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그날로 선산(先山)에 달려가 성묘하고, 하루를 묵은 다음 곧바로 돌아와 대구(大邱)의 동화사(桐華寺)에 도착하니, 좌도 병사 박진(朴晉)이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왜적을 칠 일에 대하여 의논하였다. 이때 대구 부사 윤현(尹晛)이 상사(喪師)의 율(律)을 범하였으므로, 공이 군법으로 다스려 곤장을 치려고 하다가 훈계만 하고서 그만두었다.
상도(上道)의 유생 400여 명이 제각기 의병을 일으키고는 전 한림(翰林) 김해(金垓)를 추대하여 의병장으로 삼고 뜻을 가다듬어 나아가 칠 계획을 세웠고, 생원 임흘(任屹)도 안동 지방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왜적을 치기로 맹세하였으며, 권응수(權應銖)의 군대도 위세가 바야흐로 떨쳐지고 있었다. 그러나 모두 병사 박진에게 견제를 당하여 뚜렷한 공을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공이 박진을 보고 곡진하게 타이르면서 그래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였다. - 김해(金垓)는 본디 병골(病骨)로서 의기를 떨쳐 일어나 자신을 잊고 왜적을 막다가 병에 걸려 진중(陣中)에서 죽었다. - 그런데도 박진은 나이 어린 무인(武人)이라서 흔쾌하게 그러겠다고 하지 않았다.
이보다 앞서 권응수가 경주(慶州)에서 싸울 적에 영천(永川)의 생원 최인제(崔仁濟), 정의번(鄭宜藩) 등 17명이 같은 날 살상당하였고, 관동(關東)에 있던 왜적이 넘어올 때 예안(禮安)에 사는 급제(及第) 유종개(柳宗介)와 안동의 유학(幼學) 윤흠신(尹欽信), 생원 임흘이 외로운 군대를 이끌고 재산(才山)과 소천(小川)의 경계에서 막아 싸웠는데, 유종개와 윤흠신 형제가 진두(陣頭)에서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공이 비로소 그 사실을 듣고는 크게 놀라면서 탄복하여 말하기를, “200년 동안 북돋아 길러낸 남은 교화가 아직은 다 끊어지지 않았구나.” 하였다.
그 뒤에 올린 장계에 이르기를, “박진은 한 도의 병권(兵權)을 혼자서 농단하여 의기를 떨쳐 일어나는 의사(義士)가 있으면 반드시 저지하고 억눌러서 그 군사를 모조리 빼앗습니다. 권응수는 날쌔고 건장하며 슬기로운 지려가 있어 무변(武弁) 중에서는 얻기 어려운 인재로서, 그로 하여금 한쪽 방면을 담당하게 하여 마음대로 하게 한다면 공을 이루기를 바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에 병사(兵使)가 있어서 뜻대로 행사하지 못하므로, 식자들이 매우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싸우다가 죽은 유생들의 가상한 충렬은 옛사람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이상의 일들은 본도의 감사가 있으니 신이 아뢰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 그러나 신 역시 좌도로부터 체임되어 왔으므로 감히 주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 마중나와 기다리고 있어야 할 강우(江右)의 군사가 오래도록 이르지 않자, 박진에게 말하여 좌도의 정병 100여 명을 거느리고서 어둠 속을 뚫고 100여 리나 걸어와 밤사이에 팔거(八莒), 하빈(河濱)을 지나고, 17일 아침에 아무 탈 없이 고령(高靈)에 이르렀다. 이날 새벽에 대구에 있던 왜적이 동쪽에서 오고, 성주(星州)에 있던 왜적은 서쪽에서 가서 하빈에 모였으니, 공의 행차가 만약 몇 시각만 지체되었더라도 일이 예측할 수 없었다. 그러자 모두들 이것은 신명(神明)이 보호한 바라고 말하였다.
도사(都事) 김영남(金穎男)은 평소부터 공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마중할 군사를 내보내지 않았고, 또 경계까지 와서 맞이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공은 이를 접어두고 문책하지 않았다.
김수와 거창에서 회합하여 관인(官印)과 부절(符節)을 인계받고 곧바로 산음으로 가 머물렀는데, 조종도(趙宗道)는 함양에서 오고, 이노(李魯)는 지리산에서 나오고, 박성(朴惺)은 안음에서 왔다.
○ 김시민(金時敏)이 일찍이 김수에게 붙었는데, 김수가 공이 좌도에 간 틈을 타서 ‘진양은 지킬 수 없으니 성을 지키는 것은 위태롭다. 들판에서 싸우면 살아날 길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김시민에게 급급히 와서 우지(牛旨)의 위급함을 구원하도록 영을 내렸다. 이에 김시민이 본주(本州)를 버리고 와 거창에 이르러 김면(金沔)의 진영으로 들어갔다. 이때 마침 개령(開寧)의 왜적들이 부대를 많이 이끌고 와서 우지를 치려고 하였다. 김시민이 김면의 명에 따라 지례(知禮)에서 왜적들을 맞아 싸우면서 앞장서서 용기를 떨쳐 나아가 싸워 왜적들의 예기를 꺾어 물리치고 왜적들을 많이 쏘아 죽였으나 자신도 왼쪽 발에 총알을 맞아 그의 진중에 머물러 있었다.
공이 진양에 수비가 없다는 것을 듣고는 크게 놀라 군관(軍官)을 보내어 김시민을 잡아오게 하니, 김시민이 죄를 받을까 두려워하여 발에 입은 부상을 핑계로 교자(轎子)를 타고 왔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에게 업혀서 들어와 공을 뵙고는 신발을 벗은 다음 맨발을 드러내어 공에게 보였다. 그러자 공이 훈계하고 신칙하여 돌려보내고는 여러 사람들에게 웃으면서 말하기를, “김시민의 정신이 어지러우니, 아마도 오래 살지 못하겠다.” 하였다.
공이 다시 오자 강우(江右)의 선비와 백성들이 서로 경하하면서 말하기를, “우리는 되살아났다. 회복을 바랄 수 있겠다.” 하였다.
거제 현령(巨濟縣令) 김준민(金俊民)을 합천(陜川)의 가장(假將)으로 삼았다. 정인홍이 밤에 성주(星州)의 왜적을 습격할 적에 김준민이 선봉이 되어 성 아래까지 바짝 다가갔다. 새벽녘에 왜적들이 모두 쏟아져 나와 마구 돌진하여 총알과 칼날이 번개가 번쩍이듯 빗발쳤으므로, 군사들이 모두 퇴각하였다. 이때 김준민이 앞으로 나아갔다 뒤로 물러섰다하면서 군사들의 뒤를 막아서서 왜적들을 쏘았는데, 쏠 적마다 모두 맞추었으므로 왜적들이 감히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군사들로 하여금 멀리 달아나게 한 뒤에야 말을 몰아 천천히 돌아왔다. 온 군대가 그 덕분에 보전될 수 있었으며, 김준민이 아니었더라면 정인홍도 위태로울 뻔하였다. 교생(校生) 주국신(周國新)은 정인홍의 명령을 두려워하여 파리한 말을 타고 따라갔다가 왜적의 추격을 받아 죽었다.
정인홍이 이번 거사(擧事)를 하면서 공에게 아뢰지 않았으므로 공이 온당치 못하게 여기고 있던 차에 계속해서 싸움에 패하였다는 것을 듣고는 더욱 화를 냈다. 정인홍의 문첩(文牒)이 왔는데, 김준민의 공은 말하지 않고 자신의 참모와 자제(子弟)들의 이름만 공을 세운 자의 명단 윗줄에 기록하였다. 그러자 공이 답하여 보내기를, “공을 과장해서 상을 노리는 것은 무변(武弁)이나 하는 짓이다. 의병장의 휘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마는, 관할 부관(副官)을 엄중하게 신칙하여 거짓으로 보고하는 폐단이 없게 하라.” 하였다. 그리고는 즉시 비장(裨將)을 보내어 정인홍의 행수군관(行首軍官)을 잡아다가, 아뢰지 않고 거사한 죄를 문책하여 볼기를 수십 대 쳤으며, 또 훈계하기를, “김준민은 날랜 장수이니 능멸하거나 모욕해서는 안 된다.” 하자, 정인홍이 불쾌하게 여겼다.
정인홍의 문생들은 항상 ‘우리 선생은 일국의 중망을 걸머지고서 사림(士林)의 영수(領袖)가 되었으므로 선생이 하는 일들을 남들이 다 의표(儀表)로 삼고 있다. 그런데 누가 감히 옳고 그름을 따진단 말인가.’ 하였는데, 이 일이 있고서는 모두들 낙담하여 말하기를, “순찰사 또한 어진 사람인데 어찌하여 우리 스승을 이와 같이 박대하는가.” 하였다.
공이 강한 자를 두려워하지 않음은 천성이었다. 국사에 관한 일에 있어서는 비록 이름 높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조금도 용서하는 법이 없었다. 남들은 다 멈칫멈칫해도 공만은 홀로 꼿꼿하게 대하였으므로, 공을 잘 모르는 사람은 공을 의심하고, 공을 잘 아는 사람은 공을 믿었다.
○ 공은 여러 진영에서 왜적의 수급을 바칠 때마다 반드시 몸소 검사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더러우니 가까이 하지 마십시오.” 하자, 공이 말하기를, “아니다. 잘못하면 우리나라 사람을 죽이는 일이 반드시 많을 것이니, 신중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이때 수령이 많이 비어서 자리를 메꾸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삼가의 전적(典籍) 박사제(朴思濟)는 의병을 일으켜서 공로가 그 본직보다 뛰어나므로 의령 현감(宜寧縣監)에 임명하고, 거창의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 변혼(卞渾)은 힘껏 싸워 왜적을 물리쳐서 일찍이 부장(部將)에 제수되었으므로 문경 현감(聞慶縣監)에 임명하고, 금산(金山)의 성균관 박사(成均館博士) 여대로(呂大老)는 그 고을에서 군사를 일으켜 여러 차례 왜적의 수급을 바쳤으므로 지례 현감(知禮縣監)에 임명하고, 진주(晉州)의 훈련원 봉사 정기룡(鄭起龍)은 날쌔고 용감하여 잘 싸워서 공로가 가장 우수하므로 관계(官階)를 뛰어넘어 상주 판관(尙州判官)에 임명하고, 진주의 부장 강덕룡(姜德龍)은 활을 잘 쏘아서 전투에 쓸 만하므로 함창 현감(咸昌縣監)에 임명하였다.
성주(星州)는 오랫동안 왜적들의 소굴이 되어서 더욱더 참혹하게 탕진된 탓에 왜적을 치고 백성을 구제하는 일을 능력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할 수가 없었으므로, 의병대장인 제용감 정(濟用監正) 정인홍(鄭仁弘)을 그 고을의 목사(牧使)에 임명하였다. 함안(咸安)의 소모관(召募官) 이정(李瀞)은 유숭인(柳崇仁)을 도와서 마침내 큰 승첩을 거두었으나, 스스로 그 공을 차지하지 않아서 다만 별제(別提)에 제수되었으므로 사근 찰방(沙斤察訪)에 임명하였다. 그리고는 이들 모두에 대해 임시로 차임하였다는 장계를 올렸다.
공이 인재를 써서 배치시키는 것이 모두 뭇사람들의 바람에 흡족하였는데, 이는 대개 조정 명령에 따라서 그렇게 한 것이다. - 이보다 앞서 도승지(都承旨)가 보낸 서장(書狀)에, “수령과 변방 장수가 혹 전투에서 죽거나 도망친 곳은, 군무(軍務)가 바야흐로 급한 이러한 때에 왕명이 내려오기를 기다려서 차임한다면 일이 반드시 허술해질 것이다. 그러니 도내에 현재 있는 사람 가운데 감당할 만한 자를 자리가 비는 대로 임시로 메꾼 다음, 일일이 계문하라.” 하였다.
왜적들이 합포(合浦)를 짓밟고 장차 파릉(巴陵)을 침범하려 하므로, 공이 산음, 단성, 삼가, 의령 네 고을의 유생을 거느리고 정호(鼎湖) 가에서 병력을 과시하였는데, 네 고을 수령과 오운, 조종도, 이노 등이 공을 따랐으며, 초계의 가수(假守) 곽율(郭)도 왔다. 깃발을 많이 만들어서 왼편과 오른편의 산 위에 줄지어 꽂았다.
오운과 조종도 두 사람이 강을 건너 함안에 군대를 주둔시켜 방어하려고 하였는데, 곽재우가 말하기를, “왜적이 만약 대거 몰려올 경우에는 강물을 등지고 싸워서는 안 된다. 일이 잘못될 경우 누가 그 허물을 책임질 것인가. 이 강 여울목에서 막으면 된다.” 하였다. 그러자 왜적들이 과연 멀리서 바라보고서는 도망쳤다.
별도로 초계의 정병 10여 명을 추려서 염탐하러 보낼 적에 곽율이 몸소 술병을 들고 가 뱃머리에서 그들을 전송하였다. 그러자 공이 탄복하면서 말하기를, “그는 참으로 훌륭한 수령이다. 자신의 참된 마음을 미루어서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 옮겨 놓았다. 사람마다 모두 그와 같이 한다면 무슨 일인들 이루지 못하겠는가.” 하였다.
○ 호남의 의병장인 전 부사 최경회(崔慶會)가 군사 1000여 명을 거느리고 산음(山陰)에 와서는 어디에 군사를 주둔시킬까를 물었다. 공이 말하기를, “진주의 살천창(薩川倉)이 어떻겠는가?” 하니, 최경회가 그러겠다고 하였다.
오장(吳長)이 공에게 진언하기를, “왜적들의 기세가 바야흐로 치성하여 장차 곧장 쳐들어올 기세이니, 호남의 군사들은 의당 단성에 주둔해 있으면서 왜적들의 예봉을 꺾어야 합니다. 살천창은 지리산 아래에 있어서 본주와의 거리가 너무나 멀어 성원(聲援)이 서로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호남의 군사들로 하여금 스스로 피란하게 하는 것이니,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였으나, 공이 듣지 않았다. 조종도가 또 말하자, 공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단성에 주둔시킬 생각을 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그 고을의 수령이 어두워서 창고 곡식을 모조리 잃었으니, 만약 호남의 군사들이 이곳에 머물러 있으면 반드시 이웃 고을들로 하여금 지공을 하게 해야 할 것이다. 살천창에 쌓여 있는 군량이 두어 달은 지탱할 수 있다. 참으로 최경회가 잘 지휘하기만 한다면, 진양(晉陽)의 외원(外援)이 될 수가 있고 단성의 내응(內應)이 될 수도 있을 뿐더러, 또한 흩어져 나와서 산을 뒤지는 왜적들을 막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자, 조종도가 말하기를, “그렇기는 합니다만, 호남의 군사가 능히 공의 말씀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점심때가 되었으므로 점심을 먹었다. 호남의 군사들이 살천창으로 갔다.
○ 김해(金海)에 있던 왜적들이 부산(釜山)의 왜적들과 함께 창원(昌原)에 모였는데, 그 무리가 수만 여 명이나 되었다. 왜적들이 정진(鼎津)을 넘어 건너지 못하고는 합세하여 나와서 곧바로 진양으로 쳐들어왔다. 김시민이 승진되어 목사가 되었는데, 공이 공문을 보내어 면려하기를, “목사는 대대로 충효의 가문에 나서 나라의 은혜를 후히 받았으니, 마땅히 죽음으로써 보답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는 곤양 군수(昆陽郡守) 이광악(李光嶽), 진주 판관 성수경(成守慶), 전 만호(萬戶) 최덕량(崔德良), 권관(權管) 이찬종(李纘宗) 등으로 하여금 김시민과 협력하여 방어하게 하였다.
왜적들이 열 겹이나 성을 포위하여 밤낮으로 공격하였다. 공은 근처의 고을에 주둔해 있으면서 결사대를 모집하여 그들에게 활과 화살을 많이 준 다음, 밤을 틈타 적진(賊陣) 중에 허술한 곳인 남강(南江)을 통해 진양성 안으로 숨어들어가게 해 장수와 사졸들을 격려하여 죽음으로써 지키게 한 것이 몇 차례나 되었으며, 간첩을 끊임없이 보내어 왜적들의 진퇴와 수비의 허실을 환하게 알았다.
곽재우의 선봉장인 심대승(沈大承)이 밤에 진주의 북쪽 산 위에 이르러서 횃불을 들고 북을 울리며 고함지르고서는 물러나오고, 고성(固城)의 가현령(假縣令) 조응도(趙凝道)는 최강(崔堈), 정유경(鄭惟敬) 등과 더불어 수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남강 건너편에서 병력을 과시하였다. 곽재우가 심대승으로 하여금 진주의 북쪽 산에 올라가서 왜적을 향해 ‘전라도의 의병과 홍의장군(紅衣將軍)이 내일 와서 군사를 합하여 너희들을 무찔러 섬멸시킬 터이니, 그렇게 알라.’고 크게 외치게 하였다. 그런데 마침 전라도의 군사가 단성에서 살천(薩川)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왜적들이 고을 경계에 이르러서 바라보니 과연 곽재우의 말과 부합되었므로, 곧바로 놀라서 달아났다. 이날 왜적들이 살천 가까운 곳까지 분탕질을 하면서 왔으나, 호남의 군사가 이미 웅거하고 있었으므로 침범해 오지는 못하였다.
김시민이 기병(奇兵)을 매복시키고 예기(銳氣)를 쌓은 다음 왜적들이 피로해지기를 기다려서 응전하였다. 왜적들이 포위하여 공격한 지 7일이 되도록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였으며, 죽거나 부상당한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에 왜적들이 그들이 묵던 천막과 쌓인 송장을 불태우고는 허둥지둥 도망쳐 버렸다. 합천(陜川)의 가장(假將) 김준민(金俊民)이 단계(丹溪)에 이르러서 왜적을 만나 급히 치니, 왜적들이 곧바로 달아나 돌아갔다. 이에 드디어 단성현에 들어가서 왜적들이 질러놓은 불을 껐다.
한창 왜적들이 쳐들어올 때 병사(兵使) 유숭인(柳崇仁), 사천 현감(泗川縣監) 정득열(鄭得說), 가배량 권관(加背梁權管) 주대청(朱大淸) 등이 같은 날 총에 맞아 죽었다.
○ 진양성의 첩서(捷書)가 한밤중에 이르렀는데, 공은 촛불을 밝히고 앉아서 성을 지키고 왜적을 물리친 상황을 자세히 캐물었다. 그리고는 즉시 아전을 불러 각 고을에 격문을 보내 원근에 사는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게 하였으며, 여러 사람을 불러서 말하기를, “만약 이 성을 지켜내지 못하였다면 성 안에 있던 수만 명이 모두 어육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온 도내의 남은 성도 전혀 보존할 만한 형세가 없어서, 다시는 성에 들어가 지키려는 뜻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이로부터 사람들은 비로소 성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하였다.
휘하의 군교(軍校)들이 들어가 치하하니, 공이 그들을 위로하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목사 김시민의 공로요, 성을 지킨 여러 장수들의 힘이다. 백발이 된 쓸모없는 선비가 무슨 공이 있겠는가. 다만 너희들도 마음을 단단히 먹고 왜적 무찌르기를 능히 김시민이 한 것과 같이 하라. 그렇게 하면 어찌 높은 벼슬만 얻겠는가. 이름이 죽백(竹帛)에 새겨져서 후세에까지 빛날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는 드디어 성을 지킨 상황을 갖추어 기록하고 김시민의 공로를 한껏 기려서 그날로 치계하였다.
사천 현감 정득열이 싸우다가 죽었으므로 전 수문장(守門將) 신갑(申)을 가수(假守)로 삼았다. 단성 현감 이제(李磾)가 도망쳐 숨어 신망을 잃은 탓에 왜적이 성 안에 마음대로 들어왔으므로, 그를 파면하고 대신 첨정(僉正) 조종도를 가수로 삼았다.
공이 장차 진양에 가서 장수와 군사들을 위로하려고 하다가 개령(開寧), 성주(星州)에 왜적들의 변란이 바야흐로 급박하였기 때문에 도사(都事)를 보내어 진주에 들러 군사를 위로하게 하고, 자신은 삼가를 향해 출발하였다.
○ 박성(朴惺)을 무곡차사원(貿穀差使員)으로 삼았다. 대개 공천(公賤)들의 공미(貢米)와 염분(鹽盆)의 세포(稅布)로 밑천을 삼았는데, 박성이 추위와 고생을 꺼리지 않고 힘껏 쫓아다녔다. 공이 또 박성과 이노에게 권하여 강우(江右)의 선비들에게 통문(通文)을 보내 의연곡(義捐穀)을 끌어모아 군수(軍需)를 돕게 하였다.
○ 소촌 찰방(召村察訪) 김수회(金壽恢)를 호남에 보내어 도사(都事) 최철견(崔鐵堅)에게 군량과 구황곡(救荒穀)을 청구하였다.
○ 개령에 있던 왜적이 지례(知禮)를 침범하고, 성주에 있던 왜적이 고령(高靈)에 침입하자, 휘하의 용사들을 나누어 보내 싸움을 돕게 하고, 또 나머지 군사로 성원하여 구원하게 하니, 왜적들이 모두 패하여 달아났다.
공이 정인홍과 김면 두 의병대장에게 공문을 보내고 명령을 전달하는 즈음에 몹시 엄격하게 대하였는데, 언사가 가혹하고 준절하여 조금도 용서함이 없었다. 이에 조종도가 조용히 말하기를, “두 사람은 다 한 시대의 명사(名士)로서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 왜적을 토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와 같이 억누르십니까?” 하니, 공이 말하기를, “내가 두 사람에게 어찌 다른 뜻이야 있겠는가. 조정 안에서 일을 같이 한다면야 비록 체모(體貌)를 모른다거나 기의(機宜)에 합당치 못한 점이 있더라도 오히려 용서하여 그 직절(直截)한 마음씨를 길러주는 것이 옳다. 그러나 지금은 조정이 멀리 서쪽 변두리에 있고 침략을 당한 화란이 예전에 없었던 바이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여러 장수들이 명령을 어기도록 내버려둬서야 되겠는가. 말이 엄준하지 않고서는 그들이 제멋대로 하는 것을 꺾을 수 없다. 이 때문에 내가 그들이 충성을 다하는 것은 기리고 제멋대로 하는 것은 막는 것이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본떠서 말류의 폐단을 방지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어찌 그들에 대해 추호라도 의심하거나 저지하려는 마음이 있어서 그러겠는가.” 하였다.
○ 정인홍과 김면 두 의병대장은 명성과 지위가 비슷하게 높아서 서로 차이가 나지 않았다. 정인홍의 참모들은 모두 그의 문생(門生)들이었는데, 그중에 권양(權瀁)과 같은 자는 경솔하고 괴망(怪妄)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스승을 높이 떠받들어 의병 가운데 제일가는 공을 세운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였다. 그런데 김면의 성망과 공적이 자못 정인홍보다 높아지자, 와언을 일으키고 비방을 조작하여 시끄러이 떠들어대면서 많은 말을 해, 두 장수로 하여금 서로 용납되지 못하게 하였다.
정인홍이 김면에게 글을 보내면서 온당치 못한 말을 드러내놓고 하였으며, 김면 또한 불만스러워하여 형세가 정말 화해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에 공이 두 진영에 가서 통렬히 말하기를, “마땅히 합심하여 왜적을 쳐서 함께 국난을 구제할 것이요, 부박한 사람들의 말을 듣고 틈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 아첨하기를 좋아하여 이간질하는 자는 내가 마땅히 추궁하여 법으로 다스릴 것이다.” 하니, 이로부터 부박한 무리들이 말썽부리는 것이 조금 수그러들었다.
○ 어느 날 이정(李瀞)이 심부름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함안(咸安)과 진양(晉陽)의 경계에서 싸우다가 죽은 백골이 무더기로 쌓여 있는 것을 보고 와서는, 여러 진영의 장수들을 시켜 거두어 묻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그때는 밤이 이미 깊었는데도 공이 영리(營吏)를 불러서 공문을 보내게 한 다음, 말하기를, “착한 말을 듣고는 밤을 묵히지 않는 것이 나의 천성(天性)이다.” 하였다. 그리고는 이정을 시켜서 전란이 일어난 초기에 사절(死節)한 사람의 이름을 모아 기록하게 하였다. 이정이 몇 명의 명단을 기록해 올리면서 말하기를, “여자는 지극히 무식한 사람들인데도 절개를 세운 자가 고을마다 없는 곳이 없건만, 남자는 여러 고을에 한 사람도 없으니, 너무나도 부끄러운 일입니다.” 하니, 공은 손을 내저어 그 말을 막으면서 말하기를, “사람으로 하여금 낯가죽이 두꺼워지게 한다. 차마 들을 수가 없다.” 하였다.
○ 온 도내의 유랑민(流浪民)이 공의 행차가 지나가면 길을 막고, 머무르면 뜰에 가득 찼는데, 공은 반드시 소금과 쌀을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거창, 함양, 산음에 진제장(賑濟場)을 설치한 다음, 별도로 유식한 자를 정하여 그 일을 맡아보게 하였으며, 수시로 그 음식물을 가져다가 직접 살피고 맛보았다. 또 솔잎가루를 많이 만들어 죽에 섞어서 먹이도록 하였다.
조금 완전한 지역이라고는 다만 이 세 고을뿐으로서, 각 진영의 군량이 다 여기서 나왔으나, 앞으로 계속해서 댈 수가 없는 형편이었으므로 밤낮으로 걱정하고 탄식하였다. 이에 최철견(崔鐵堅)에게 구제를 요청하여 두 번이나 김천 찰방(金泉察訪) 조존선(趙存善)을 보내고, 그 다음에 사근 찰방(沙斤察訪) 이정(李瀞)을 보내고, 그 다음에 창원 부사(昌原府使) 장의국(張義國)을 보내고, 그 다음에 전 좌랑(佐郞) 박이장(朴而章)을 보내고, 그 다음에 박성(朴惺)을 보냈다. 그런데도 번번이 시원스러운 조처가 없자, 공이 말하기를, “어찌 차마 이렇게 한단 말인가. 호남의 곡식이 제 집 물건이며, 영남 사람은 왕의 신하가 아니란 말인가?” 하였다.
함양은 실상 부유한 집들이 많았지만 군수가 나약해서 사사로이 쌓아둔 것을 봉고(封庫)하지 못하였다. 이에 공이 그것을 뽑아 기록한 다음 굶주린 백성에게 나누어 주도록 명령하였다. 어떤 완고한 자가 흔쾌히 따르려고 하지 않으므로 그자를 잡아다가 볼기를 치려고 하니,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는 위력을 써서 하게 해서는 안 되고, 마땅히 도리로써 일깨워 주어야만 합니다.”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그렇지가 않다. 함양은 호남 땅에 가까워서 풍속이 사나워서 사람들이 모두 재물에 인색하니, 도리로써 일깨워 주기는 어렵다. 한 사람을 볼기쳐서 만 사람의 생명을 구제하는 것이니, 나는 그만둘 수가 없다.” 하였다. 그리고는 볼기를 수십 대 친 다음 곧바로 축대 위에 끌어다 앉히고 간곡하게 타이르면서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니, 그 사람도 볼기 맞은 것을 원망하지 않고 뉘우쳐 깨닫고 돌아갔다. 그 뒤로 이 말을 들은 자들이 모두 마음을 다하지 않는 자가 없어서 목숨을 보전한 자가 매우 많았다.
공은 소소한 관문(關文)이나 통첩(通牒) 등에 대해서도 반드시 친히 지었는데 간혹 한밤이 지나 잠들기도 하였다. 이에 피로가 쌓이고 소갈증이 들어 장차 큰 병이 나게 되었다. 조종도가 번거로이 자질구레한 일까지 한다고 말하자, 공이 한숨을 쉬면서 한참 있다가 말하기를, “조정의 관리들이 맑지 못한 탓에 살육을 저지르는 데까지 이르게 되어 인심이 흩어지고 섬오랑캐들이 쳐들어오기에 이르렀으니, 우리들이 만 번 죽는다 하더라도 그 죄를 갚을 길이 없다. 그런데 어찌 감히 번거로이 수고하는 것을 생각해서야 되겠는가. 그리고 큰일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서 작은 일이라고 소홀히 한다면, 어찌 내 마음이 편하겠는가.” 하였다.
공이 산음(山陰)의 지곡사(智谷寺)에서 염초(焰硝)를 굽게 하였다. 또 호남의 숙련공을 시켜서 조총(鳥銃)을 만드는 법을 가르치게 하였는데, 비록 동(銅)은 아니었으나, 정철(正鐵)로는 만들 수 있었다. 이 일은 모두 고을의 수령인 김낙(金洛)으로 하여금 맡아 감독하게 하였다.
○ 상이 김면을 의병도대장(義兵都大將)으로 삼아서 원근의 여러 군대를 모두 관할하게 하였다. 김면은 임금의 명령을 받고 감격스럽고 송구스럽게 여겨 더더 분발하여 흉적을 무찌를 것을 기약하고는 성위(聲威)를 크게 펼쳐서 사람들을 고무시켰다. 그 뒤에 김면이 김시민을 대신하여 병사(兵使)가 되었다. 공이 거창(居昌)에 이르러 서로 모여서는 큰 술잔으로 몇 순배를 대작한 다음, 손을 잡고 심회를 토로하면서 울기도 하고 읊조리기도 하다가 먼동이 틀 무렵에야 자리를 파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공이 김면의 배리(陪吏)를 잡아다가 볼기를 치면서 말하기를, “전날에 의병대장으로서 지휘에 순종하지 않은 것도 잘못인데, 이제는 병사가 되었으니 결코 스스로 편한 대로만 하지는 말라.” 하였다. 이렇게 한 지 오래지 않아서 병사가 병으로 죽었다. 공이 그의 죽음을 듣고는 몹시 애통해하면서 곧바로 장계를 올렸는데, 그 장계에 이르기를,
“병사 김면은 본디 병이 많은 사람으로서, 산림(山林)에서 병을 요양하고 지내면서 세상일에는 뜻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처음 병란이 일어났을 때 분연히 몸을 돌보지 않고 의병을 일으켜, 이 왜적들과는 같은 하늘 아래 살지 않겠다고 맹세하였습니다. 그리고는 1년이 넘도록 피나게 싸워서 여러 차례 왜적들의 예봉을 꺾었으니, 강우(江右) 일대가 여태까지 보존된 것은 대부분 그의 공로입니다.
의병을 일으킨 뒤에는 그의 처자식들이 가까운 땅에서 유리걸식하고 있는데도 한 번도 찾아보지 않았습니다. 여름이 지나고 겨울에 접어들어서는 사뭇 서리와 눈 속에서 지냈으므로 사람들이 그가 반드시 죽으리라는 것을 알았는데도, 그는 조금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은 채 태연하였으니, 나라를 위하는 정성은 밝고 환하기가 단사(丹砂)와 같았습니다.
은전(恩典)을 입어 병사에 제수된 뒤로는 더욱더 책임의 중대함을 생각해 두렵게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몸소 여러 군대를 통솔하고 나아가 금산(金山)에 주둔하여 선산(善山)에 있는 왜적들과 서로 버티니, 왜적들이 자못 위축되어서 도망치려는 기색이 현저하였습니다. 그런데 몸을 상한 것이 쌓인 나머지 갑자기 큰 병에 걸려서 군중(軍中)에서 목숨을 마쳤습니다.
장성(長城)이 한 번 무너지매 삼군(三軍)이 모두 눈물을 삼킵니다. 하늘이 돕지 않는 것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신은 외로이 홀로 남아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김면이 의병장이 되었을 적부터 비록 공의 절제(節制)를 받기는 하였지만, 호령을 시행하는 사이에 간혹 맞서는 일이 많았다. 공은 김면의 성질이 편협하고 고집스럽다고 하면서 자못 불만스러운 뜻이 있음을 여러 차례 말과 안색에 나타내기도 했으므로, 사람들이 혹 두 사람이 서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의심하였다. 이때에 이르러서 죽음을 슬퍼하고 포양(褒揚)해서 장계함이 이와 같았으므로, 사람들이 더욱더 공의 마음쓰는 것이 공평하고 어진 사람을 좋아함이 성심에서 나온 것에 심복하였다. 공이 만시(挽詩) 3편을 지어서 보내 주었다.
○ 진양 목사(晉陽牧使) 김시민(金時敏)이 병사에 승진되었으나, 죽고 말았다. 이때 세가대족(世家大族)들이 곡식을 지리산(智異山)에 감추어 두었으므로 꿔준 것을 회수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산에서 나올 뜻이 없었다. 공이 진주에 이르러서 조안(糶案)을 가져다 보고는 크게 노하여 판관(判官) 성수경(成守慶)으로 하여금 그들 가운데 우두머리 10여 명을 지적해 뽑아서 산음으로 묶어 보내게 하니, 진주의 백성들이 크게 동요하였다.
이에 박성이 말하기를, “이들을 징계하지 않아서는 안 되니, 마땅히 엄중히 다스려서 나머지 사람들에게 경고해야 합니다.” 하니, 공이 그럴듯하게 여겨 장차 엄하게 캐물어서 형률(刑律)을 쓰려고 하였다. 그러자 이노가 말하기를, “진주 토호(土豪)들의 습관은 갑자기 고치기 어려운 것으로, 그 유래가 오래되었습니다. 국초(國初)에 하륜(河崙)이 태종조(太宗朝)의 공신(功臣)으로서 향소(鄕所)나 향교(鄕校)에 모두 전속(專屬)된 동리를 두도록 청한 다음, 사패(賜牌)를 받아서 그 부세(賦稅)와 공물(貢物)을 거두어 썼으며, 정양(鄭驤)이 찬성(贊成)으로서 이곳에 와서 좌수(座首)가 되었습니다. 상신(相臣)과 장신(將臣)이 대대로 향권(鄕權)을 잡은 탓에 비록 잔약해진 후손이라고 할지라도 옛날 습관은 오히려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 뒤 이제신(李濟臣)이 목사가 되었을 적에는 그 사패를 가져다가 불태우고 그 전속 동리를 모두 빼앗은 다음, 토호의 옥사(獄事)를 일으켜서 거실(巨室) 10여 집을 10여 년 동안이나 잡아 가두었습니다. 이에 그들의 재산을 모두 탕진하게 되어 원망하는 소리가 길에 가득하였습니다. 기축년의 변고(變故) 때에는 징사(徵士) 최영경(崔永慶)은 삼봉(三峯)이란 혐의를 받아 원통하게 죽었고, 유종지(柳宗智)는 모의하는 데 연관되었다는 이유로 억울하게 죽었고, 고을 안의 착한 선비였던 하항(河沆) 같은 무리들도 분통이 터져 목멘 채 죽었습니다. 이에 고을 사람들은 착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모두 원한이 맺혀 인심이 들끓어 흉흉한바, 사태가 어떻게 진전될지 모를 판입니다. 지금 만약 서두른다면 더욱더 소란스럽게만 될 것이니, 부드럽게 어루만지면서 이끌어 주어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교화에 순종하게 하느니만 못합니다. 죽이는 것만으로는 해결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공이 귀 기울여 듣더니만 말하기를, “내가 듣지 못한 내용이다. 태종께서 사패를 내려 주신 것도 옳은 것인가를 모르겠지만, 이제신이 불태운 것은 어쩜 그리 불경하단 말인가. 그대의 말이 진실로 옳으니,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는, 그들을 고문하려다가 중지하고 결박을 풀어준 다음, 의리를 밝혀서 말해 주었다. 그러자 그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리면서 죽여달라고 청하였다.
공이 그 자리에서 곧바로 효유(曉諭)하는 방문(榜文)을 썼는데, 그 방문에 대략 이르기를, “왜적이 온 나라 안에 가득 차서 제멋대로 횡행하는 것은 우리 백성들이 숨어 엎드려 읍과 촌이 텅텅 비고 아무런 방비가 없는 탓이다. 방비는 장수가 있어도 군사가 없으면 될 수 없는 것이요, 군사가 있어도 군량이 없으면 될 수 없는 것이다. 이 고을은 영남의 큰 고을로서 나라의 보장이 되는 곳이다. 사람마다 예악(禮樂)를 알고 집집마다 시서(詩書)를 외운다는 것은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실려 있고, 인재(人材)의 부고(府庫)이며 장상(將相)들이 대를 이었다는 것은 국론(國論)에 드러났다. 그런데 이제 이런 일이 있을 줄을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지리산을 길이 안착할 땅으로 알고, 감춘 곡식을 오래 갈 물품으로 아는가? 마땅히 빨리 환곡을 바치고 성을 지켜서 너희들의 선조를 더럽힘이 없게 하라.” 하였다.
그리고는 판관에게 영을 내려 가두어 둔 사람들을 모두 석방시키게 하였다. 그런 다음 곡식이 있는 자는 임의대로 곡식을 바치게 하되, 환곡이 있으면 말소시키고, 환곡이 없으면 곡식을 헌납했다고 기재하게 하였는데, 두 달이 못가서 곡식 수만 여 석을 얻었다.
○ 공은 명(明) 나라 군사가 많이 도착한다는 말을 듣고 항상 말하기를, “우리나라가 대대로 독실한 충정(忠貞)으로 대국(大國)을 지성껏 섬긴 것이 지금에 와서야 징험되었다. 중국 군사가 몰아쳐 내려와서 왜적을 압박한다면 왜적들이 물러가기를 기약할 수 있으니, 백성들에게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내년에 씨 뿌릴 종자를 미리 조처하지 않는다면 왜적들이 물러간다 하더라도 백성들이 살아날 수가 없을 것이다.” 하였다. 전후로 곡식을 옮기기를 계청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중간에서 지체되어 전달되지 못하거나, 혹은 밖에서 가로막혀 보고되지 않았다. 공은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걱정하는 정성이 뱃속에 꽉 차고 가슴속에 꽉 차서, 밤을 새워가며 잠을 못 이루고 걱정한 탓에 귀밑머리와 눈썹이 모두 하얗게 세었다.
○ 곽준(郭䞭)은 본디 어진 선비로서 김면(金沔)의 참모가 되어 힘쓴 공이 가장 많았으므로 천거하여 자여 찰방(自如察訪)으로 삼았다.
○ 상주(尙州)와 함창(咸昌)의 유생들이 공에게 서한을 올려 목사 김해(金澥)와 현감 이국필(李國弼)의 죄악을 낱낱이 진술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진정 이 서한대로라면 그들은 백 번 죽여도 아까울 것이 없다. 상주의 풍속은 원래 순박해서 고을 수령의 허물을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데, 지금 이와 같이 말하였으니, 김해와 이국필의 죄상을 잘 알 수가 있다. 어찌 속히 장계하여 파면시켜서 백성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김해는 그 뒤에 보은(報恩)에 있다가 강도에게 살해당하였고, 이국필은 여러 고을에 떠돌아다니면서 걸식하였다.
○ 계사년(1593, 선조 26) 정월 초하룻날 아침에 휘하의 선비 및 종사관 여러 사람이 수령들과 함께 들어와 뵈니, 공이 추연히 슬픈 기색을 띠고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말하기를, “해가 바뀌었는데도 왜적들은 아직도 국내에 가득 차 있고, 서쪽 국경은 아득히 소식이 끊긴 지 이미 오래이다. 외로운 신하가 죽지 않고 헛되이 나이만 또 한 살 더 먹었으니, 장차 무슨 얼굴로 다시 임금을 뵐 수 있겠는가.” 하고, 또 수령들에게 말하기를, “아침밥은 올리지 말라. 내가 어찌 차마 들겠는가.” 하였다.
이노가 아이의 병으로 인해 집에 들어가 있으면서 공에게 긴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이 왜적들의 형세를 보건대 7, 8년 안에는 소탕될 기약이 없는데, 여러 진영의 장수들은 단지 속히 하고자 서두르는 마음만 품어, 오늘 제거되지 않으면 내일 제거되려니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먼 앞날을 헤아리는 생각은 조금도 없고 가까운 성공만을 취하려 하여, 형식적으로 꾸미기만을 힘쓰고 실제적인 성과를 거둘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이에 주옥(珠玉)과도 같은 군량을 마치 흙 쓰듯 마구 낭비하니, 필경에는 군량이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럴 경우 비록 훌륭한 장수가 있다 한들 장차 어떻게 하겠습니까. 저의 생각으로는, 영공(令公)의 일행 중에도 형식적으로 꾸미는 폐단이 없지 않습니다. 군관(軍官) 수십 명을 감해야 하고, 영리(營吏) 10여 명 또한 도태시켜야 합니다. 이들은 앉아 있으면 식량을 소비하는 걱정이 있고, 쏘다니면 말을 징발하는 원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몇 고을의 백성들 힘이 마르고 말라서 극도에 달했으니, 영공께서 앞서 단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 진영에서 식량만 축내는 자들을 명령하지 않아도 스스로 줄일 것입니다.” 하였다.
공이 이에 대해 회답하기를, “며칠 동안에 잇달아 보낸 글을 받으니, 한없이 감사하고 위로가 돼오. 지면에 가득찬 많은 말들은 긴요한 말 아닌 것이 없으니, 삼가 명심해 마지않겠소. 붕우의 도리가 없어진 지 이미 오래인데, 오늘날에 다시 옛사람이 하듯이 한 일을 볼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소. 항상 깊이 명심할 뿐 아니라, 당장 시행하겠소.” 하였다.
○ 강언룡(姜彦龍)을 유곡 가찰방(幽谷假察訪)으로 삼은 다음, 계청(啓請)하여 정식 찰방으로 삼았다. 강언룡은 곽재우와 함께 일하면서 왜적을 치고 무기를 많이 준비한 공로가 있기 때문이었다.
○ 공이 풍원부원군(豐原府院君 유성룡(柳成龍))이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남쪽 지방에 남은 백성들이 되살아날 수 있게 되었다.” 하였다. 종자(種子)를 운반해 오고 흉년을 구제하는 것 등의 일에 대해서 공문상에서 누누이 진술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러 차례 보낸 서한에도 이 일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하였는데, 참된 마음이 환하게 밝아서 한결같이 가슴속에 맺힌 듯하여 잠깐 사이라도 잊은 적이 없었다.
○ 함양 군수(咸陽郡守)의 보고서가 올라왔는데, 그 내용은, ‘명 나라 군사가 정월 7일에 평양의 왜적을 섬멸하여 남은 왜적이 없다시피 하며, 그 나머지 도당은 모두 흩어져 달아났다. 해서(海西)에 진을 치고 있던 왜적들도 일시에 도망쳤다. 이긴 기세를 타고 추격해 와서 바야흐로 임진(臨津)까지 이르렀으니, 한양(漢陽)은 이미 금세 수복하게 생겼으며, 멀리 추격하여 남쪽으로 내려오는 것도 아침 아니면 저녁일 것이다. 그러니 호남(湖南)에도 통지해 알리라.’는 것이었다.
이에 이웃 고을 수령들이 모두 와서 모이고, 도사(都事) 역시 아림(娥林)으로부터 와서 이르렀는데, 손뼉을 치고 떠들어대면서 기쁨에 날뛰느라 목이 메었다. 모두들 말하기를, “명 나라 군사들은 대나무를 쪼개는 듯한 위세를 가졌고, 섬오랑캐들은 새털에 불이 붙는 듯한 형편이 되었으니, 열흘이 지나지 않아서 새재[鳥嶺]를 넘어올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을 맞이하고 지공(支供)하는 데 대한 조처를 조금도 늦출 수 없습니다. 도사를 하동(河東), 곤양(昆陽), 진주(晉州), 의령(宜寧) 등의 관장(官長)과 장수(將帥)에게 보내어 군량과 기타 공급에 필요한 것들을 운반해 오게 하소서.” 하였는데, 이노 혼자서만 큰소리로 말하기를, “이는 모름지기 이와 같이 급히 서두를 것이 없습니다. 명 나라 군사들이 평양을 회복하고 바닷길을 맑게 하였으므로, 그 위풍이 미치는 곳마다 흉적들이 넋을 잃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무릇 전투의 기세는 찰 때와 줄어들 때가 있고, 성할 때와 쇠할 때가 있는 법입니다. 한양에 웅거해 있는 왜적들을 당장은 패배시키기 어려울 것입니다. 왜적들이 반드시 군사와 말을 쉬게 한 다음 다시 덤비려고 꾀할 것이니, 명 나라 군사가 새재를 넘어 남쪽으로 오는 일은 몇 달 뒤에나 가능할 것입니다. 하물며 새재 이하의 여러 성에는 왜적들이 현재 꽉 차 있습니다. 설령 명 나라 군사가 빨리 온다고 한들 우리가 어디에다가 양곡을 쌓아 놓고 기다리겠습니까? 조정에서도 반드시 본도에 이것을 조처하기를 바랄 수 없을 것이며, 양호(兩湖)에 전적으로 책임지울 것입니다. 그러니 아직은 시끄러이 굴지 말고 상황이 변해 가는 것을 보아가면서 잘 조처하는 편이 옳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온 좌중이 크게 놀라 미친 자의 괴상한 말이라고 하면서 너나없이 비난하고 나무랐으나, 공만은 홀로 옳다고 하여 그르게 여기지 않았다.
김낙(金洛)이 앞으로 달려나와 말하기를, “명 나라 군사에 관해 염탐하고자 군관(軍官)과 영리(營吏)를 보냈으나, 모두 떠도는 말만 듣고 중도에 돌아왔기 때문에 늦을지 빠를지 알기 어렵습니다. 이 전적(李典籍)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공이 말하기를, “그가 기꺼이 가려 하겠는가? 물어보기는 하겠다.” 하였다. 이노가 이때 마침 밖에 있었는데, 불러서 물어보니, 그 자리에서 응낙하면서 말하기를, “그러겠습니다. 진실로 공의 명령이라면 어느 곳인들 가지 못하겠습니까.” 하였다. 그리고는 그날로 길을 떠나자, 공이 이노를 보고 말하기를, “명 나라 군사들의 소식을 염탐할 뿐만 아니라, 농사철이 이미 박두했으니 종자곡(種子穀)도 아울러 청해 가지고 오라.” 하였다.
이노가 여산(礪山)에 이르렀으나, 명 나라 군사에 관한 정식 보고가 별반 없으므로, 졸개 한 사람을 보내어 공에게 서한을 올려 보고하기를, “상도(上道)에는 현재 명 나라 군사에 관한 기별이 없습니다. 그러니 소란스럽게 하지 말고 백성들로 하여금 살아갈 길을 생각하게 하소서.” 하였다. 공이 이노의 서한을 보고는 크게 기뻐하여 곧바로 김영남(金穎男)에게 통지하여 서둘지 말고 늦추게 함으로써 백성들이 소요하지 않았다.
이노가 말을 달려 직산(稷山)에 도달하니, 직산의 수령 박의(朴宜)가 동헌(東軒)에 묵고 있었다. 이때 도체찰사 서애 상공(西厓相公)은 임진(臨津)에 머물러 있고, 부사(副使) 김찬(金瓚)은 온양(溫陽)에 머물러 있었다. 직산의 아전 조순걸(趙舜傑)을 직산 수령에게 빌려서 단기(單騎)로 임진을 향해 가려고 하였다. 수원(水原) 경계에 이르자 부사의 군관 2명이 말을 달려와서는 말하기를, “용인(龍仁), 죽산(竹山), 사평(沙平)에 주둔한 왜적이 수원, 금천(衿川) 지역에 출몰하면서 약탈하는데, 날마다 쉴새가 없으므로 저희들도 산길을 타고 간신히 피해서 오는 참이니, 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명 나라 군사의 동정을 살피고 싶다면, 저희들이 도체찰사의 처소에서 오는 길인데, 별다른 얘기는 없습니다.” 하면서, 굳이 같이 돌아가기를 청하였다. 이에 되돌아와 직산에 이르니, 직산 수령이 말하기를, “그대의 하인들은 모두 병을 앓고 있으며 길은 이렇게 막혔으니, 단신으로 뚫고 나아갈 수 없는 형세이다. 종자곡을 운반하는 한 가지 일은 서한으로 품달함이 마땅하다.” 하였다. 그런데 우연히 샛길로 가는 공차인(公差人)이 있기에 딱한 처지를 고하는 서신을 그 편에 부쳐 서애에게 올리게 하였다. 또 아산(牙山)으로 가서 배를 빌려 타고 바닷길로 갈까 했는데, 때마침 호부(戶部)의 낭관(郞官)이 조창(漕倉)에 와 머물면서 호서와 호남의 전세(田稅)를 감독해 운반하느라고 공사(公私)의 선척을 모조리 끌어갔으므로, 배편을 얻을 수가 없었다. 이에 드디어 온양에서 공주(公州)를 거쳐 부사를 알현하고 종자곡을 옮기는 일을 요청하니, 부사가 도체찰사에게 여쭈어서 조처하겠다고만 하였다. 이노가 다시 간곡하게 여러 차례 간청한 뒤에야 겨우 전라 도사에게 500석을 넘겨주게 하였다. 이에 전주에 이르러서 도사를 만나보았다.
공이 함양에 머물러 있으면서 서쪽 소식을 기다리다가 군국(軍國)의 걱정스러운 기미를 눈으로 직접 보고는 울분과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여 군교(軍校)인 수문장(守門將) 박경록(朴慶祿)을 보내어 치계하였는데, 그 치계에 이르기를,
“왜적들은 우리가 평양(平壤)을 수복하였다는 말을 듣고부터 벌과 개미처럼 모여 있던 자들이 모두 도망쳐서 돌아갈 뜻을 품고 있었는데, 중국 군사가 오래도록 머물러 있으면서 진격하지 않고 있자 다시 기운이 살아났습니다. 이에 문경(聞慶), 함창(咸昌), 상주(尙州)에 머물러 있는 왜적들이 멋대로 분탕질하기를 변란이 일어났던 처음보다도 더 심하게 하고 있습니다. 전라도의 수군(水軍)이 패전한 뒤로는 웅천(熊川), 김해(金海), 창원(昌原)에 있는 왜적들이 다시 창궐하는 조짐이 있습니다. 그런데 각 고을의 군량은 이미 다 떨어졌습니다.
곽재우(郭再祐)의 군사는 굶주림으로 인해 다 흩어졌으므로 장차 군사가 없는 장수가 되게 생겼습니다. 그리고 주사(舟師)와 격군(格軍)도 군량을 계속 댈 길이 없으므로 형세상 장차 저절로 무너질 형편이며, 병사(兵使)가 거느린 장사들도 오래 지탱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왜적들과 서로 버티면서 보름이나 한 달만 지체하면 잠깐 사이에 흙더미처럼 무너지고 말 것이니, 신이 비록 만 번 죽는다 하더라도 무슨 보탬이 있겠습니까.
부민(富民)들이 쌓아 놓은 개인의 곡식은 작년부터 다 조사하여 찾아냈는데, 처음에는 상을 줄 것이라 여겨서 바치려는 자가 꽤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래도록 상을 내리지 않으므로 백성들이 믿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에 곡식을 바치라는 영을 여러 번 내렸으나, 한 사람도 응하는 자를 볼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비록 재물과 곡식이 바닥났기 때문이기는 하지만, 백성들이 국법을 믿지 못한 데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군졸들은 한 해가 넘도록 비바람을 무릅쓰고 복무하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백 번을 싸운 끝에 살아남은 자들로서, 비록 군공(軍功)이 없다고 하더라도 마땅히 수고함을 가엾게 여겨서 보살펴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힘써 싸워 공을 세운 자에 대해서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신은 보답할 만한 물품이 없으므로 단지 조정에서 상을 주기만을 기다리면서 격려하고 권장하는 바탕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에 감히 그들의 공로를 덮어 두지 못하고 전후로 계문하면서 번거롭게 아뢰었습니다.
신이 어찌 감히 다른 사람의 공을 훔치고 은혜를 팔아서 군사들에게 환심을 사겠습니까. 대개 백성의 마음은 이미 떠났고 국가의 형세는 이미 글러버렸으므로, 이런 방법이 아니고서는 군사들의 마음을 고무시키고 인심을 모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작년에 전란이 일어나고부터 조정에서는 그래도 사람이 못났다고 하여 그 사람의 말까지 안 듣는 일은 없었습니다. 이에 의병을 일으켜 공이 있는 사람에게는 모두 은상(恩賞)을 내렸으므로, 사람마다 떨치고 일어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이 아직 죽지 않고 이에 이르러서 구차스럽게 한 모퉁이나마 보전하고 있는 것은, 터럭끝만한 것도 다 조정에서 잘 처리하신 까닭입니다.
다만 급보(急報)가 끊임없이 올라오고 군서(軍書)가 많이 쌓였으므로 해당 관서의 하리(下吏)가 미처 다 살펴보지 못한 탓에, 공이 적은데도 녹공(錄功)되거나 공이 큰데도 녹공에 빠진 경우가 있습니다. 이에 심지어는 정군(正軍)으로서 적의 수급 하나도 베지 못하였는데도 판관에 제수된 경우가 있으며, 수문장으로서 한 번 힘써 싸웠다는 이유로 목사로 뛰어오른 경우도 있으며, 종의 자식이 왜놈 중 하나를 목베었다는 이유로 그 주인이 3품의 정직(正職)에 오른 경우가 있는 반면, 장사(將士)가 수십 명의 왜적을 목베었는데도 지금까지 한 등급을 올리는 상도 받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 밖의 온당하지 못한 일들은 낱낱이 들어 말하기조차 어렵습니다.
이 때문에 뜻 있는 선비들은 모르는 체하고 있고, 장졸(將卒)들은 맥이 풀려 있습니다. 그리고는 모두들 말하기를, ‘우리들은 한 해가 넘도록 창을 메고 만 번 죽기를 무릅쓰고 피나는 싸움을 하였는데도 녹공되지 않았으니, 다시 무엇을 하겠는가.’ 하고 있습니다. 군사들의 마음이 이러하므로 장수된 자가 비록 날마다 싸움을 독려하지만, 전혀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서 도망하는 자가 잇따르고 있는데, 이들을 불러모으려고 하여도 계책이 없습니다. 그러니 신도 실로 어찌하면 좋을지 방법을 모르겠습니다.
예로부터 신용을 잃고 상주는 것을 아끼면 비록 태평할 때라도 나라를 다스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이렇게 난리가 나서 망하는 때에야 일러 무엇하겠습니까. 믿는 바는 중국의 군사로, 그들이 쏜살같이 내려온다면 회복하는 것이 며칠 안 걸릴 것입니다. 그러나 중도에서 실패할까 두려워하고 있으므로 원근의 사람들이 모두 실망하고 있습니다. 신과 같은 자는 조석간에 죽을 사람이니 무엇이 아까울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조정이 언제쯤이나 편안하게 쉴 수 있게 될는지 알 수 없으니, 생각이 이에 미치면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고 싶으나 길이 없습니다.
본도의 흉년과 굶주림은 옛날에 없던 일로서, 왜적의 칼날 밑에 살아남은 백성이 얼마 안 됩니다. 그런데 요행히 죽지 않은 자들은 서로 모여서 도둑질을 하면서 사람으로써 양식을 삼고 있습니다. 이들을 비록 계속하여 잡아 죽이기는 하지만, 또한 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데다가 곡식 종자가 한 톨도 없어 왜적이 비록 물러간다 하더라도 농사지을 만한 형편이 전혀 없으니, 도내 사람들의 목숨은 적병이 오지 않더라도 반드시 남김없이 저절로 다 죽고 말 것입니다.
호남 백성들의 형편은, 비록 꼴과 곡식을 실어 보내는 데 시달리고는 있으나, 창고의 곡식이 아직은 온전합니다. 만약 호남에서 군량과 곡식 종자를 각각 수만 섬씩 옮겨온다면, 신이 비록 직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기는 하지만, 굶주린 자를 진휼하고 왜적을 막으며, 겸하여 농사도 폐하지 않게 함으로써, 호남의 보장(保障)을 완전하게 해 국가를 회복하는 기틀이 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은 죽음이 있을 뿐, 다시는 할 일이 없습니다.
설자들이 말하기를, ‘호남의 재물과 곡식도 다 떨어졌으므로 곡식을 옮길 수 없다.’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생각없이 한 말인 듯합니다. 신이 고개 하나를 사이에 둔 곳에 있으면서 호남 선비들을 만나지 않는 날이 없는바, 그쪽 창고에 있는 곡식이 다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자세히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또 남원 부사(南原府使) 윤안성(尹安性)을 만나보니, 그가 말하기를, ‘호남과 영남은 입술과 이처럼 서로 의지하면서 도와야 할 처지로, 영남이 망하면 호남이 그 다음에 망할 것이다. 그러니 곡식을 옮기는 일을 속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조정에서 회답이 내려오기를 기다리다가는 양곡이 이미 다 떨어질 것이니, 제때에 미쳐서 하지 못할까 염려된다.’ 하였습니다. 호남 수령의 말이 이와 같으니, 공론이 어떻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앞서 계하(啓下)한 쌀과 콩 각 2000섬은 1만 명 군인의 열흘 양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무슨 일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조정에서 이미 중국 군사를 먹이기 위하여 수만 섬을 본도에 운반하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이에 그 쌀과 콩이 이미 운봉(雲峯)과 남원(南原) 등지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런데 중국 군사가 끝내 고개를 넘어오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쌓아두고 보내지 않고 있으니, 그 계책이 빈틈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어느 땅인들 왕의 영토가 아니며, 어느 백성인들 왕의 백성이 아니겠습니까. 설령 중국 군사가 넘어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것으로 굶는 사람도 살리고 군량도 계속댄다면, 양쪽 다 편하지 않겠습니까?
공명고신(空名告身), 허통(許通), 면천(免賤) 등의 항목에 대한 차첩(差帖)을 보내 줄 것을 여러 차례 계청한 바 있으니, 속히 시행하여 거꾸로 매달린 듯한 위급함을 구제한다면, 만분의 일이나마 보전할 길이 있을 듯합니다.
이처럼 중국 군사가 경내에 있어서 그들을 먹이기에도 겨를이 없는 때를 당해서 이런 번거로운 청을 하였으니, 신이 너무도 완급(緩急)을 모른다고 하겠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본도의 존망이 국가에 관계됨이 매우 크므로, 이와 같이 죽음을 무릅쓰고 다 말씀 올립니다.”
하였다. 이때는 3월 4일로, 이것이 맨 나중에 올린 장계이다. 전후로 올린 장계의 수만 마디 말들을 다 기록할 수 없으나, 이것만은 맨 마지막 장계이기에 적어둔다.
○ 이노가 돌아와서 상도(上道)에서 보고 들은 바를 빠짐없이 고하자, 공이 말하기를, “그대가 가지 않았더라면 자칫하다가 도내의 처치를 그르칠 뻔하였다. 이 사이에 만약 종자곡을 얻으면 난리에 살아남은 백성들이 다 죽지는 않을 텐데, 농사철이 이미 늦었으니 어떻게 제때 시행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 다음 날 도사와 그 밖의 여러 사람의 일행이 산음(山陰)에 이르렀다.
서애가 공의 첩장(牒狀) 및 서한을 보고는 딱한 생각이 들어서 곧바로 간절하게 주청(奏請)하니, 왕도 또한 측은하게 여겨서 주달한 것을 승락하였다. 그런 다음 풍원부원군(豐原府院君)이 그 자리에서 2만 석을 넘겨주게 하고, 호남 감사에게 공문을 보냈으나, 호남 감사가 1만 석을 감하여 보내 주었다. 이에 공이 또 최철견(崔鐵堅)에게 사람을 보내어 여러 고을에 나누어 매기지 말고 다만 남원(南原)과 순천(順天) 두 대부(大府)에 각각 5000석씩을 매겨서 운반하는 데 편리하게 해 달라고 청했더니, 최철견이 마지못해 이에 따랐다. 이때 전 좌랑(佐郞) 박이장(朴而章)이 또한 종사관(從事官)으로서 막하에 있었으므로, 공이 말하기를, “박 종사(朴從事)는 남원으로 가고, 이 종사(李從事)는 순천으로 가서 잘 살펴보고서 운반해 오라.” 하였다.
묵은 지 5일 만에 진양(晉陽)으로 가니, 사방으로 떠돌아다니는 굶주린 백성들이 쑥대머리에 귀신 얼굴을 해 가지고서 길가로 마중나온 자가 대략 수천 명이나 되었는데, 울면서 절하고 감사해하면서 축수하고는 말하기를, “아버지시여 어머니시여, 우리를 건져 주고 우리를 살려 주셨습니다. 공이시여, 만복을 누리시고 백세토록 장수하소서.” 하였다. 이보다 앞서 진주 목사 서예원(徐禮元)에게 신칙해서 진제장(賑濟場)을 설치하여 굶주린 백성들을 구호하게 하였는데, 고을에 이르러서 다시금 그 영을 신칙하니, 고을 사람들이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더욱더 일에 힘썼다.
공은 매일같이 성을 순시하고 마루와 성첩을 살펴보면서 수리하였다. 항상 뒤로 물려서 쌓은 새 성이 튼튼하지 못한 것을 걱정하여, 세 곳을 택해 포루(砲樓)를 세우고 사대(射臺)도 많이 설치하였으며, 호(壕)를 파서 성 밑에 돌리고 물을 끌어들여 깊게 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리고는 뒤를 따르는 여러 사람들을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사람의 소견이란 알 수 없는 것이다. 높은 언덕에 튼튼하게 쌓은 성을 헐고 진흙의 땅에 물려 쌓아서 왜적으로 하여금 시렁을 얽어 굽어보면서 쳐들어오기에 쉽게 하였으니, 이것 또한 운수인 것이다.” 하였다. 날마다 새로 세운 북문(北門)의 누각 위에 앉아서 군사를 사열하고 사격을 연습하게 하였다.
이때 역질(疫疾)이 창궐하기는 곳곳이 다 마찬가지였는 데다가 공에게 굶주림을 구호해 주기를 바라서 사람들이 모두들 성 안으로 모여든 탓에, 신음하는 소리가 귀에서 끊이지 않고, 굶주림에 아우성치는 형상이 항상 눈앞에 가득 찼다. 이에 공이 갈근탕(葛根湯)을 써서 앓는 이를 구제하게 하고, 모든 수단을 다해 죽을 쑤어서 굶주린 사람들을 구제하게 하였다. 막하의 여러 사람들이 공에게 간하기를, “하늘의 운행이 조화를 잃고 괴상한 기운이 가득 차서 이에 부딪치는 자는 죽고 범한 자는 병드는 판국입니다. 비록 깊은 방에 있더라도 호령(號令)을 시행할 수 있을 것이니, 문루(門樓)에 나와 앉아있지 마십시오.” 하자, 공이 사례하면서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천명에 달린 것이다.” 하면서, 듣지 않았다.
진주 판관(晉州判官) 성수경(成守慶)을 시켜서 무기를 전담해 다스리되, 조총(鳥銃)을 많이 만들게 하고, 또 화전(火箭)을 많이 만들라고 명령하였다.
남원의 곡식은 함양(咸陽), 산음(山陰), 삼가(三嘉), 합천(陜川) 등 고을로 하여금 소와 말로 번갈아 가면서 실어다가 지례(知禮), 금산(金山), 개령(開寧), 성주(星州), 고령(高靈)의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고, 순천(順天)의 곡식은 진주(晉州), 하동(河東), 곤양(昆陽), 남해(南海), 사천(泗川), 고성(固城), 거제(巨濟) 등의 고을로 하여금 배에 싣고 바다로 운반해서 사천, 거제, 고성, 함안, 단성, 진주 지방의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였다. 비록 넉넉히 나누어 주지는 못하였으나, 때맞추어서 종자를 뿌리게 하니, 황폐해진 고을의 백성들이 다 죽어 넘어지는 지경에 이르지 않고, 차츰차츰 안집하여 오늘날까지 이르게 되었는데, 이것은 모두가 공의 덕분이었다.
○ 공은 명령을 받들고 온 뒤로 능히 왜적을 소탕해 요기(妖氣)를 맑게 하지 못하여 나라의 은혜를 저버리게 될까 두려워하였다. 이에 밤낮없이 노심초사하느라 심열(心熱)이 몹시 중하였는데, 이때에 와서는 내상(內傷)에 감기 기운이 겹친 데다가 역질 기운마저 이를 틈타 파고들어 4월 19일부터 두통을 앓기 시작하여 점차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이노와 박성이 항상 곁을 떠나지 않고 있으면서 약과 미음을 올렸는데, 공은 그것을 물리치면서 말하기를, “나는 약을 마신다고 해서 살아날 사람이 아니다. 그대들은 그만두라.” 하였다. 박성이 그래도 강권해 마지않았다. 진주 고을의 늙은 의원인 김남(金南)이 와서 진맥한 다음 말하기를, “다시는 약을 드리지 마십시오. 병은 다스릴 수 없습니다. 목숨은 시운(時運)에 관계되는바, 하늘의 뜻이니 어찌하겠습니까.” 하니, 박성이 말하기를, “비록 그런 줄은 알지만 어찌 차마 약을 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때 공의 아들 김역(金湙) 역시 역질에 걸려 서편 방에서 앓고 있었는데, 공은 병세의 더하고 덜함은 묻지 않은 채 항상 두 사람에게 말하기를, “명 나라 군사들이 오래지 않아서 경내에 이를 텐데, 어떻게 지공할 것인가? 그대들은 힘쓰라.” 하였다. 병이 위독할 때에는 혼미해서 의식이 없는 가운데에서도 입을 움직이면서 가냘픈 말로 쉴새없이 말을 하였는데, 하는 말들이 모두 나랏일 아닌 것이 없었다. 때로는 간혹 목을 빼어 큰소리로 말하기를, “명 나라 군사들은 이미 도착하였는가? 주둔해 있는 왜적들은 이미 도망쳤는가?” 할 뿐, 시종 집안일에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공의 측실 부인이 자녀를 거느리고 서울에서 내려와 곤양(昆陽)의 경내에 있는 사위의 집에 와서 살고 있었는데, 여종을 보내어 병문안을 하려고 하자, 공은 손을 내저으면서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였다.
4월 그믐날에 공이 졸(卒)하였다. 이노가 박성 등과 함께 곡하고 염하였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서 김역 또한 죽었다. 박성은 고을에 머물러 있으면서 관 짜는 것을 감독하고, 이노는 두류산(頭流山) 밑에 들어가서 임시로 장례지낼 묘혈을 파는 일을 감독하였다. 3일 뒤에 박성이 단성 현감(丹城縣監) 조종도(趙宗道)와 함께 관을 호송하고 이르러 그날로 장사를 마쳤다. 그리고는 세 사람이 모두 손을 잡고는 사모하는 마음에 머뭇거리면서 차마 떠나지 못하다가 해가 저물어서야 서로 목놓아 오래도록 통곡한 다음 흩어졌다.
○ 온 도내의 선비와 백성들이 공의 초상을 듣고서는 골육지친의 부고를 받은 것처럼 모두들 하나같이 애통해하고 아까워하면서 말하기를, “충신(忠臣)이 갔고, 열사(烈士)가 죽었으니, 절의(節義)는 장차 누구에게 의탁하며, 국가는 장차 누구를 믿을꼬.” 하였다.
성 안과 성 밖에서 구호해 주기를 바라던 유랑민들이 10명, 100명씩 떼를 지어 울고 흐느끼면서 쓰러진 채 슬피 통곡해 목쉰 소리가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였으며, 사방으로 흩어져 떠나가면서 말하기를,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무심해서 우리의 어버이를 빼앗아 가는가. 이미 모두 다 끝났으니, 명이 다 되었다.” 하였다. 길에서 이 소식을 듣는 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눈물을 흘리고 서로 상심하였다.
○ 도헌(都憲) 김늑(金玏)이 공을 대신하여 직책을 맡았다. 이해 6월 그믐날에 왜적이 진양을 함락하였다. 명 나라 군사들이 새재[鳥嶺]를 넘어왔다. 총병(總兵) 유정(劉鋌)이 합천(陜川)에 주둔하고, 참장(參將) 낙상지(駱尙志)가 거창(居昌)에 주둔하니, 온 나라 안이 흉흉하고 온 도내가 허둥지둥하여 공을 고향에 반장(返葬)할 겨를이 없었다. 좌도 순찰사(左道巡察使) 한 상국 효순(韓相國孝純)이 좌도와 우도를 합하여 겸직하면서 동지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방백(方伯)으로 있으면서 차마 객사(客死)한 사순(士純)의 관을 고향으로 반장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반장하지 않는다면 지하에서 사순을 만나볼 면목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는 본부와 이웃 고을에 명령하여 편의에 따라 묘를 만들게 하고, 또 단성 현감 조종도를 상여 차사원(喪輿差使員)으로, 전 좌랑 이노를 가도사(假都事)로 삼아 그들로 하여금 보살펴서 발인(發靷)해 호상(護喪)하여 가게 하였다. 이는 조종도와 이노 두 사람이 공의 지우(知遇)를 받은 자로서, 공을 위하여 능히 마음을 다할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공의 상여가 지나는 여러 고을에서는 공의 충의에 감복하지 않은 이가 없었으므로, 난리에 분탕되었다는 핑계로 회피하지 않고 모두들 힘을 바쳤다. 그 덕분에 정한 날짜를 어기지 않고 산소에 이르러서 모월 모일에 장사 지냈다.
○ 공의 맏아들인 김집(金潗)이 분상(奔喪)하여 임시로 매장한 곳 곁에서 여묘살이를 하였다. 이때는 바야흐로 왜적들이 한창 겁략할 때였으므로, 서모(庶母)와 서제(庶弟)인 김잠(金潛) 등을 데리고 지리산 골짜기로 피하였는데, 여러 차례 급박한 상황을 만나 거의 벗어날 수가 없었는데도 끝내 왜적들에게 해를 당하지 않았다. 그리고 왜적들이 공의 묘소에 이르러서는 묘소의 용미(龍尾) 부분을 몇 촌 파다가는 그만두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말하기를, “방장산(方丈山)의 신령께서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도와주는 바가 있어서 그런 것이지, 사람의 힘으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하였다. 그러니 밝고 밝은 복을 그 어찌 속일 수 있겠는가.

현대부(賢大夫)의 고사(故事)에 대해서는 태사(太史)의 기록이 있고 태상시(太常寺)의 행장(行狀)이 있어서 매몰되어 없어지지 않게 한다. 그러나 공의 이때의 행적은 태사가 다 기록하지 못하고 태상시에서 행장을 지을 겨를이 없었다. 그런 데다 비석(碑石)에 새기고 지석(誌石)에 기록한 것도 혹 없어져서 증거로 삼을 바가 없게 되니, 학(鶴)을 그리려다가 두루미를 만드는 것이나마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학문(學問)은 연원(淵源)이 있어서 능히 스승을 얻었고, 행실(行實)은 가정에서 드러나 아버님의 뜻을 어기지 않았으며, 절의(節義)가 세상에 동한 것은 빼어난 기운을 타고나서이고, 나라를 위하여 온 힘을 쏟다가 죽은 것은 천성(天性)에서 나온 것이다. 문장(文章)이야 여사(餘事)였지만 한유(韓愈)와 두보(杜甫)에게서 나와 영원토록 썩지 않을 것이고, 아름다운 이름은 산악(山岳)과 나란하여 영원토록 전해질 것이다.
황명(皇明) 만력(萬曆) 25년(1597, 선조 30) 정유년 3월 하한(下澣)에 문수산인(文殊山人)은 삼가 기록한다.


 

[주C-001]학봉 선생(鶴峯先生)의 용사사적(龍蛇事蹟) : 역문의 ○ 표시는 원문에는 없으나, 독자의 편의를 위하여 《용사일기(龍蛇日記)》에 따라 넣었다. 이하도 같다.
[주D-001]공과 …… 되었는데 : 원문에는 이 부분이 ‘여공홀지(與公忽地)’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용사일기》에 의거하여 ‘여공홀치(與公忽値)’로 바로잡았다.
[주D-002]공사(公私)의 재물은 : 원문에는 ‘공사개장(公私蓋藏)’으로 되어 있으나, 뜻이 통하지 않아 《용사일기》에 의거하여 ‘공사축장(公私蓄藏)’으로 바로잡았다.
[주D-003]수공(首功)을 …… 진(秦) 나라 : 수공은 적병의 목을 베어오는 공을 말한다. 진 나라의 법제(法制)에는 적병의 목을 헤아려서 목 1개당 자급 1등급을 올려 주었다. 뒷날에 적병의 목을 수급(首級)이라고 하는 것은 여기에서 생긴 말이다. 《사기》 노중련열전(魯仲連列傳)에, “저 진 나라는 예의를 버리고 수공(首功)을 으뜸 공으로 삼는 나라이다.” 하였다.
[주D-004]노련(魯連)은 …… 하였다 : 노련은 노중련(魯仲連)으로, 제(齊) 나라의 장수이다. 일찍이 조(趙) 나라에 머물러 있을 적에 진 나라가 조(趙) 나라를 공격해 와서 정세가 위급하였다. 그때 위(衛) 나라에서 조 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진 나라 왕을 황제(皇帝)로 추대하여 군대를 철수시키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노중련이 진 나라는 예의를 버리고 살인만을 일삼는 무도한 나라임을 역설하면서, 만약 진 나라가 칭제(稱帝)한다면 자신은 동해(東海)에 빠져 죽을 것이라고 하여 그 일을 중지시켰다. 《史記 卷83 魯仲連列傳》
[주D-005]당(唐) 나라의 …… 울었는데 : 흥원(興元)은 당 나라 덕종(德宗)의 연호이다. 덕종 때 반적(叛賊) 요영언(姚令言)과 주자(朱泚)가 황제를 참칭(僭稱)하고 수도 장안(長安)을 침범하였으므로, 덕종이 봉천(奉天)에 피난해 있으면서 흥원 원년에 자신을 죄책(罪責)하는 조서를 반포하여 장사(將士)들을 격려하였다. 그러자 이성(李晟) 등이 그 조서를 보고는 감격하면서 용기를 내어 적병을 쳐 장안을 수복하였다. 《舊唐書 卷133 李晟列傳》
[주D-006]유차달(柳車達) : 고려 태조 때의 공신으로 문화 유씨(文化柳氏)의 시조이다. 태조 때 군량 수송에 공을 세워서 대승(大丞)에 제수되었으며, 삼한공신(三韓功臣)의 호를 받았다. 《高麗史 卷99 列傳 12》
[주D-007]원충갑(元冲甲) :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의 무신이다. 향공진사(鄕貢進士)로 원주(原州)의 별초(別抄)에 소속되어 있다가 충렬왕 17년(1291)에 합단(哈丹)이 쳐들어와 성을 포위하자, 전후 10차례에 걸쳐서 적을 크게 무찔러 성을 지켜 후세에까지 무명(武名)을 남겼다. 《高麗史 卷104 列傳 17》
[주D-008]신포서(申包胥)의 충성 : 신포서는 춘추 시대 초(楚) 나라의 대부(大夫)로, 성은 공손(公孫)인데, 신(申) 땅에 봉작되었으므로 신포서라고 한다. 오자서(伍子胥)와 더불어 친하게 지냈는데, 오자서가 오(吳) 나라로 도망치면서 신포서에게, “내가 초 나라를 전복시킬 것이다.” 하자, 신포서가 “그대가 초 나라를 전복시키면 내가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이다.” 하였다. 그 뒤에 오자서가 오 나라의 군사를 이끌고 초 나라의 수도인 영(郢)에 침입하자, 진(秦) 나라에 가서 구원병을 청하였는데, 7일 동안 음식을 먹지 않고 조정의 담에 기대어서 통곡하였다. 그러자 진 나라의 애공(哀公)이 감동하여 구원병을 내어주므로, 그 군사를 거느리고 돌아와서 국난을 평정하였다. 《淮南子 修務訓》
[주D-009]장순(張巡)의 충렬 : 당(唐) 나라 현종(玄宗) 때의 충신이다. 천보(天寶) 연간에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처음에 진원 영(眞源令)으로 있으면서 백성들을 인솔하고 당 나라의 시조인 현원 황제(玄元皇帝)의 묘(廟)에 나아가 통곡한 다음 기병(起兵)하여 반란군을 막았다. 그 뒤에는 강회(江淮)의 보장(保障)인 수양성(睢陽城)을 몇 달 동안 사수하고 있었는데, 구원병이 오지 않아 양식은 다 떨어지고 힘은 다 소진되어 성이 함락되었다. 그러자 태수(太守)로 있던 허원(許遠)과 함께 사절(死節)하였다. 《舊唐書 卷187 張巡列傳》
[주D-010]인재가 …… 하였지만 : 원문에는 ‘승핍취용(承乏取勇)’으로 되어 있는데, 두주(頭註)에, “용(勇)은 용(用)인 듯하다.” 하였다.
[주D-011]은혜와 …… 펴라 : 원문에는 ‘은위병시(恩威並施)’로 되어 있는데, 두주(頭註)에, “시(施)는 행(行)일 듯하다.” 하였다.
[주D-012]장순(張巡) : 당(唐) 나라 현종(玄宗) 때의 충신이다. 천보(天寶) 연간에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처음에 진원 영(眞源令)으로 있으면서 백성들을 인솔하고 당 나라의 시조인 현원 황제(玄元皇帝)의 묘(廟)에 나아가 통곡한 다음 기병(起兵)하여 반란군을 막았다. 그 뒤에는 강회(江淮)의 보장(保障)인 수양성(睢陽城)을 몇 달 동안 사수하고 있었는데, 구원병이 오지 않아 양식은 다 떨어지고 힘은 다 소진되어 성이 함락되었다. 그러자 태수(太守)로 있던 허원(許遠)과 함께 사절(死節)하였다. 《舊唐書 卷187 張巡列傳》
[주D-013]안호경(顔杲卿) : 당 나라 현종(玄宗) 때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났을 때 안녹산이 사사명(史思明)으로 하여금 상산군(常山郡)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때 성을 지키고 있던 위위경(衛尉卿) 안호경이 군사가 적어 성이 함락되면서 사사명의 포로가 되었는데, 동도(東都)로 끌려가서는 안녹산을 크게 꾸짖다가 처형당했다. 《舊唐書 卷187 顔杲卿列傳》
[주D-014]원근에서 메아리치듯 호응하였으니 : 원문에는 ‘원근향응(遠近嚮應)’으로 되어 있는데, 두주(頭註)에, “향(嚮)은 향(響)일 것이다.” 하였다.
[주D-015]돌아오는 …… 바 : 《주역(周易)》 복괘(復卦)에, “돌아오는 길을 잃었으니 흉하다.[迷復 凶]” 하였다.
[주D-016]절제(節制)를 …… 여기고서 : 원문에는 ‘내절제지수 부당재위성중(乃節制之帥 不當在圍城中)’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용사일기》에 의거하여 ‘위절제지수 부당재위성중(謂節制之帥 不當在圍城中)’으로 바로잡았다.
[주D-017]윤기의 …… 칭송하고 : 원문에는 ‘칭기용(稱其勇)’으로 되어 있는데, 두주에, “기(其)는 아마도 기(箕)일 것이다.” 하였다.
[주D-018]왜적들이 …… 있으니 : 원문에는 ‘적불감규유강면(賊不敢窺覦江面)’으로 되어 있는데, 《용사일기》에 의거하여 ‘적불감규유강서(賊不敢窺覦江西)’로 바로잡았다.
[주D-019]산음(山陰)에서 : 원문에는 ‘향산음(向山陰)’으로 되어 있는데, 《용사일기》에 의거하여 ‘자산음(自山陰)’으로 바로잡았다.
[주D-020]도리어 …… 올렸습니다 : 원문에는 ‘포장지주반(褒獎之奏反)’으로 되어 있는데, 《용사일기》에 의거하여 ‘포장지주반상(褒獎之奏反上)’으로 바로잡았다.
[주D-021]성상의 귀를 속이고 : 원문에는 ‘기□천청(欺□天聽)’으로 되어 있는데, 《용사일기》에 의거하여 ‘기망천청(欺罔天聽)’으로 바로잡았다.
[주D-022]반드시 저지하고 억눌러서 : 원문에는 ‘필가저억(必加沮抑)’으로 되어 있는데, 두주(頭註)에, “저(沮)는 본디 조(阻)로 되어 있다.” 하였다.
[주D-023]교자(轎子)를 타고 왔다 : 원문에는 ‘승교하래(乘轎下來)’로 되어 있는데, 두주에, “교(轎)는 본디 교(橋)로 되어 있다.” 하였다.
[주D-024]그리고는 …… 뵙고는 : 원문에는 ‘부어입알(負於入謁)’로 되어 있는데, 《용사일기》에 의거하여 ‘부어인입알(負於人入謁)’로 바로잡았다.
[주D-025]선생이 하는 일들을 : 원문에는 ‘범소시장(凡所施張)’으로 되어 있는데, 두주에, “시(施)는 아마도 시(弛)일 듯하다.” 하였다.
[주D-026]누가 …… 것인가 : 원문에는 ‘수제기구(誰濟其咎)’로 되어 있는데, 《용사일기》에 의거하여 ‘수집기구(誰執其咎)’로 바로잡았다.
[주D-027]진주의 살천창(薩川倉)이 어떻겠는가 : 원문에는 ‘진주살천창하여(晉州薩川倉何如)’로 되어 있는데, 두주(頭註)에 “살(薩)은 본디 륙()으로 되어 있다.” 하였다.
[주D-028]목사는 …… 나서 : 원문에는 ‘목사가세충효(牧使家勢忠孝)’로 되어 있는데, 《용사일기》에 의거하여 ‘목사가세충효(牧使家世忠孝)’로 바로잡았다.
[주D-029]아첨하기를 좋아하여 : 원문에는 ‘호생참간(好生讒)’으로 되어 있는데, 《용사일기》에 의거하여 ‘호생참유(好生讒諛)’로 바로잡았다.
[주D-030]지곡사(智谷寺) : 원문에는 ‘지곡사(旨谷寺)’로 되어 있는데, 《용사일기》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지곡사는 산청군 산청면 내리(內里)의 지리산 기슭에 있는 절이다.
[주D-031]이제신(李濟臣)이 …… 잡아 가두었습니다 : 이제신이 선조 11년(1578)에 진주 목사로 있으면서 토호(土豪)들의 폐단을 바로잡으려고 하다가 도리어 토호들의 모함으로 인해 병부(兵符)를 잃고 벼슬을 사임한 뒤에 향리로 들어가 은거하였다.
[주D-032]유종지(柳宗智) : 원문에는 ‘유종지(柳宗旨)’로 되어 있는데, 《용사일기》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주D-033]명 나라 …… 도착하였는가 : 원문에는 ‘천병기이호(天兵其已乎)’로 되어 있는데, 《용사일기》에 의거하여 ‘천병기이지호(天兵其已至乎)’로 바로잡았다.

 

학봉집 부록 제3권
 [명(銘)]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


공(公)의 성은 김씨(金氏)이고, 휘(諱)는 성일(誠一)이고, 자(字)는 사순(士純)이고, 자호(自號)는 학봉(鶴峯)이다.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 김부(金傅)의 아들 석(錫)이 의성군(義城君)에 봉하여졌으므로 후손들이 이곳을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그 뒤에 김용비(金龍庇)라는 분이 벼슬이 태자 첨사(太子詹事)에 이르렀는데, 백성들에게 공덕이 있었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제사를 지내고 있다. 공은 이분의 후손이다.
고조(高祖)는 휘가 한계(漢啓)로, 부지승문원사(副知承文院事)를 지냈으며 명망이 높았는데, 광묘(光廟 세조(世祖))께서 선위(禪位)를 받자 병들었다는 이유로 사직하고서 고향으로 돌아가 다시는 벼슬하지 않았다. 증조(曾祖)는 휘가 만근(萬謹)으로,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이고, 통례원 좌통례(通禮院左通禮)에 증직(贈職)되었다. 조(祖)는 휘가 예범(禮範)으로,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증직되었다. 고(考)는 휘가 진(璡)으로, 성균관 생원(成均館生員)이고,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증직되었다.
조비(祖妣)는 영해 신씨(寧海申氏)로, 숙부인(淑夫人)에 증직되었으며, 비(妣)는 여흥 민씨(驪興閔氏)로, 정부인(貞夫人)에 증직되었다. 이상은 모두 공이 귀하게 됨으로 인해서 증직된 것이다.
공은 예닐곱 살 때부터 보통 아이들과는 달리 뛰어나게 총명하였다. 아홉살 적에 정부인 민씨의 상(喪)을 당하였는데, 슬퍼하고 애모함이 어른과 같았다. 큰형님인 김극일(金克一)이 홍원(洪原)의 임소(任所)에 있을 적에 일찍이 그곳에 따라가 있었는데, 하루는 성 안에 불이 났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은 모두 달려가서 아문(衙門)의 불을 끄기에 바빴는데, 공만은 홀로 전패(殿牌)를 손에 받들고서 깨끗한 곳으로 피하니, 보는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약관(弱冠)의 나이에 동생 김복일(金復一)과 함께 소수서원(紹修書院)에서 《상서(尙書)》를 읽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탄식하면서 이르기를, “학문을 한다고 하면서 녹봉에만 뜻을 두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퇴계(退溪) 이 선생(李先生)은 오늘날의 유종(儒宗)이시니, 어찌 가서 가르침을 청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판서공(判書公)에게 편지를 보내 허락해 주기를 청하니, 판서공이 기뻐하면서 허락하였다. 이에 곧장 걸어가서 퇴계 선생을 뵈었다. 퇴계 선생에게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의 설과 선기옥형(璿璣玉衡)의 제도에 대해서 물어 본 다음 물러나와 동생과 함께 반복하여 연구하면서 직접 그림을 그려 보기도 하며 강론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러자 퇴계 선생이 그 정성스럽고 독실한 것을 가상하게 여겨 어떤 사람에게 이르기를, “이 사람은 민첩하면서도 배우기를 좋아하므로, 그와 학문을 함께 하노라면 몹시 유익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면서, 몹시 크게 기대하였다.
임술년(1562, 명종 17)에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요승(妖僧) 보우(普雨)의 말에 빠져서 아무런 까닭 없이 희릉(禧陵)을 천장(遷葬)하고 정릉(靖陵)의 묏자리를 새로 잡으려고 하였는데, 이 당시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尹元衡)이 정권을 잡고 있었으므로 온 조정 사람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공은 다섯 가지 불가한 점이 있다는 내용으로 상소를 초(草)하였는데, 말투가 꼿꼿하고 강직하여 조금도 회피하는 바가 없었다. 그러나 판서공이 직분을 벗어난 상소라 화를 불러일으킨다는 이유로 극력 저지하여 끝내 올리지 못하였다.
갑자년(1564, 명종 19)에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 공부하였으며, 무진년(1568, 선조 1)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보임(補任)되었다가 예문관(藝文館)으로 옮겨졌다. 상소를 올려 노산군(魯山君)의 묘를 봉식(封植)할 것과 사육신(死六臣)의 관작(官爵)을 회복할 것을 청하였으며, 임금의 덕과 당시의 폐단에 대해서까지 아울러 언급하였다. 그 뒤에 노릉(魯陵)을 봉식하고 사육신의 자손을 녹용(錄用)하라고 명한 것은 대개 공이 발론한 데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계유년(1573, 선조 6)에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제수되었다. 이때 소경 대왕(昭敬大王)께서 바야흐로 뜻을 가다듬어 다스리기를 구하여 날마다 유신(儒臣)들과 치도(治道)에 대해 논의하였는데, 어느 날 개연히 중간쯤 되는 임금이 되기에도 부끄럽다고 탄식하였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요(堯) 임금이나 순(舜) 임금 같은 임금입니다.”
하였는데, 공은 아뢰기를,
“요 임금이나 순 임금도 될 수가 있고, 걸(桀)이나 주(紂)도 될 수가 있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상께서 이르기를,
“그게 무슨 말인가?”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전하께서는 천부적인 자질이 영특하고 뛰어나시니 요순을 닮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의견만 고집하는 병통이 있는데, 걸주가 망한 까닭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자, 상께서 얼굴빛을 고쳤다.
공이 사관(史官)으로 있을 적에 김규(金戣)의 아부하는 태도를 보고는 마음속으로 비루하게 여기고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김규가 사간(司諫)이 되자 동료들이 장차 그와 상회례(相會禮)를 행하려 하였다. 이에 공은 곧장 대궐에 나아가 김규를 직접 대고 배척하니 조정이 엄숙해졌다. 얼마 있다가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으로 옮겨졌으며, 병조 좌랑(兵曹佐郞)으로 옮겨졌다.
을해년(1575, 선조 8)에 병조 정랑에 올랐다.
병자년(1576, 선조 9)에 이조 좌랑에 제수되었으며,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정축년(1577, 선조 10) 봄에 서장관(書狀官)으로 경사(京師)에 갔는데, 우리나라가 종계(宗系)를 변무(辨誣)할 수 있었던 데에 많은 공로를 세웠다. 겨울에 이조 정랑으로 올랐다.
무인년(1578, 선조 11)에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에 제수되었다. 일찍이 탑전(榻前)에서 조정 신하들이 뇌물을 받는 폐단에 대해 극력 진달하자, 상께서 큰소리로 누가 그런 짓을 했느냐고 캐물었다. 이에 공이 낱낱이 들어 아뢰자 같은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목을 움츠렸다.
기묘년(1579, 선조 12)에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으로 옮겨졌는데, 강직함을 견지하여 흔들리지 않았다. 이때 하원군(河源君) 이정(李珵)이 왕실(王室)의 의친(懿親)으로서 임금의 총애만을 믿고 법을 어기는데도 그것을 금지시키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그러자 공이 그 집종을 잡아다가 묶어 놓고는 엄하게 국문하면서 조금도 용서치 않았다.
상께서 경연 석상에서 묻기를,
“근래에 염치가 날로 없어지는 것은 어째서 그런가?”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대신으로 있는 자도 뇌물 받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으니 낮은 관원들이 무엇을 본받겠습니까.”
하였다. 그러자 노수신(盧守愼)이 자리를 피하여 아뢰기를,
“신의 집안 사람 가운데 변장(邊將)이 된 자가 있는데, 신이 노모를 모시고 있다는 이유로 갖옷 한 벌을 부쳐 왔으므로 신이 물리치지 못하고 받았는바, 김성일의 말이 옳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간의 바른말에 대신이 허물을 인책하니, 둘 다 잘했다.”
하였다. 공은 평소에 노수신과 사이 좋게 지냈는데, 노수신이 나와서 사례하기를, “옛날의 도의를 오늘날에 다시 볼 수가 있었다. 그대가 아니면 누가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으로 옮겨졌다가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으로 올랐다. 의정부의 옛 풍습이 노래와 여색으로 노는 걸 숭상하였는데, 묵중한 선비라고 불리는 사람조차도 대부분 이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공은 몸가짐을 잘 하여서 끝내 거기에 물들지 않았다. 가을에 명을 받들어 북관(北關)을 순시하였는데, 탐관오리 가운데에는 공이 온다는 소문만 듣고도 인끈을 풀어 놓고 떠나는 자가 있었다.
경진년(1580, 선조 13)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복제(服制)를 마치고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에 제수되었다.
계미년(1583, 선조 16)에 의정부 사인으로서 황해도 지방을 순시하였다. 돌아와 복명(復命)하기도 전에 특별히 나주 목사(羅州牧使)에 제수되었다. 나주는 아주 번화한 고을이라서 민정(民情)이 막힐까 두려워하여 북 하나를 문에다 설치하고는 백성들 가운데 원통한 사연이 있는 자는 와서 두드리라고 명하였는데, 백성들이 이로 인해 자신들의 뜻을 다 말할 수 있었다.
나주 고을은 본디 선비가 많았으나 이들이 모여서 공부할 만한 곳이 아직 없었다. 이에 공은 금성산(錦城山) 기슭에 터를 잡은 다음, 서원(書院)을 창건하고 그 뒤편에다 사우(祠宇)를 세워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일두재(一蠹齋) 정여창(鄭汝昌),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퇴계(退溪) 이황(李滉) 등 다섯 선생을 향사(享祀)하여 배우는 자들이 스승으로 받들어 존경할 바를 알게 하였다. 그리고 공무를 보는 틈틈이 이곳으로 달려가 경서의 뜻을 강론하였으며, 근태(勤怠)에 따라 고과(考課)하였다.
사직단(社稷壇)에 불이 나서 재각(齋閣)과 주방(廚房)이 모두 타 버리자, 고을 사람들이 속히 새로 짓고 감사에게는 보고하지 말라고 청하였는데, 공이 이르기를, “죄가 있는데도 이를 숨기는 것은 죄를 더 보태는 것이다.” 하고, 자신의 죄에 대해 자책하는 글을 올리고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무자년(1588, 선조 21)에 종부시 정(宗簿寺正)에 제수되었으며, 봉상시 정(奉常寺正)과 예빈시 정(禮賓寺正)으로 옮겨졌다.
기축년(1589, 선조 22)에 일본 사람 평수길(平秀吉)이 원씨(源氏)를 쳐 없애고 대신 관백(關白)이 되어 그의 심복인 현소(玄蘇)와 평의지(平義智) 등을 파견하여 와서 통호(通好)하였으므로 조정에서는 바야흐로 통신사를 보낼 것을 의논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적들의 정세를 헤아릴 수 없었으므로 가려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자 공이 가인(家人)에게 이르기를, “속히 행장을 꾸리라. 내가 반드시 가게 될 것이다.” 하였는데, 과연 공이 부사(副使)에 충원되어 가게 되었다.
다음해인 경인년(1590, 선조 23) 여름에 배를 타고 대양(大洋)에 들어섰을 때 태풍이 크게 불자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겁을 내면서 울부짖었다. 그런데도 공은 홀로 단정히 앉아 있으면서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대마도(對馬島)에 도착하였을 적에 평의지 등이 국분사(國分寺)를 유람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사신 일행이 모두 가자, 현소가 중당(中堂)에 앉은 채로 영접하였으며, 평의지는 나중에 오면서 가마를 탄 채 섬돌을 지나 올라왔다. 이에 공이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에게 이르기를, “저들이 감히 우리를 이와 같이 능멸하니, 그들과 더불어 이대로 앉아서 술잔을 주고받는다면, 이것은 스스로를 수치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그리고는 곧바로 일어나 나와 관소(館所)로 돌아오자, 서장관(書狀官) 허성(許筬)도 뒤따라 나왔다. 평의지가 이상히 여겨 그 까닭을 물으니, 역관(譯官) 진세운(陳世雲)이 병이 나서 나간 것이라고 고하였다. 공이 그 사실을 듣고는 왜사(倭使)가 보는 자리에서 진세운을 곤장 친 다음 이르기를, “이 대마도는 대대로 우리나라의 은혜를 받아 우리나라의 동쪽 울타리가 되었는바, 우리나라 사신이 오면 길을 갈 때는 뒤에서 호위하고, 만나 볼 적에는 앞에서 절하는 것이 바로 저들의 분수이다. 그런데 너는 전례(典禮)를 인용해 답하여 저들의 오만스러움을 꺾지 못하고는 도리어 말을 꾸며 대어 저들의 환심을 사려 하였단 말인가.” 하였다. 그러자 평의지가 부끄럽고 후회스러워서 가마를 매고 갔던 자에게 죄를 돌려 그의 목을 벤 다음, 엎드린 채 들어와서 사죄하였다. 이에 공이 충순(忠順)의 도리에 힘쓰라고 면려한 다음 보냈다. 이로부터 왜인들이 공의 절의(節義)에 굴복하여 감히 오만하게 굴지 못하였다.
계빈(堺濱)에 도착하였을 때 서해도(西海島)의 왜인이 사람을 시켜서 예물과 음식물을 보내 왔는데, 그가 보낸 글 가운데 ‘조선 사신이 내조하였다.[朝鮮使臣來朝]’는 말이 있었다. 이를 알지 못하고 그 음식을 받았다가 나중에 이를 깨닫고서 물어 보니, 이미 여러 종자(從者)들에게 나누어 준 뒤였다. 이에 공이 황윤길과 허성에게 말하기를,
“장차 어쩌면 좋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금수와 같은 자들과 어찌 따질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자, 공이 이르기를,
“나라를 욕되게 하는 음식을 받아먹는다면, 그 수치스러움은 혀를 차면서 주거나 발로 차서 주는 음식을 받아먹는 것보다도 더 수치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편안한 마음으로 받는단 말입니까. 저들이 보낸 음식을 보니 모두 저자에서 사 온 것들입니다. 지금 만약 저들이 보내 온 수효대로 사다가 되돌려 주면서 이르기를, ‘너희 주인이 말을 실수하였다. 이미 그것을 알았으니 그대로 받을 수가 없다. 너는 돌아가서 너희 주인에게 그렇게 고하라.’ 한다면, 말이 엄하고 의리가 발라서 치욕을 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즉시 그렇게 하자, 심부름 온 사람이 말하기를, “저희들은 소인인지라 한자(漢字)를 모르므로 이곳에 와서 남의 손을 빌려 글을 쓴 것입니다. 말을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실로 저희 주인은 모르는 일입니다. 글을 다시 고쳐 써서 올리겠으니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하면서, 사과하여 마지않았으므로 마침내 내버려 두었다.
왜국의 도성에 들어섰을 때 황윤길 등이 편복(便服)을 입은 채 들어갔다. 이에 공이 이르기를, “사신이 예복을 입는 것은 왕명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하물며 다른 나라의 도성에 들어가면서도 편복을 입고 들어가서야 되겠습니까.” 하면서, 세 번이나 거듭 말했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이날 왜도의 사녀(士女)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보면서 공에 대해서만 두 손을 교차해 공경하는 예를 표했으나, 그 나머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힐끗 보고 그만이었다. 그제서야 두 사람이 비로소 후회하였다.
이보다 앞서 우리 조정에서는 관백을 국왕으로 잘못 알아 국서(國書)에다가 서로 대등한 예(禮)에 따라 썼으며, 사신이 상견(相見)할 때의 의식에 대해서도 일정하게 지시해 준 바가 없었는데, 이곳에 와서야 관백이 국왕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이에 공이 일행들에게 이르기를, “우리들은 당 위에 올라가서 기둥 바깥에서 절해야 한다.” 하니, 허성이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그러자 공이 이르기를,
“일본은 우리나라의 여국(與國)입니다. 그리고 일본을 맡아 다스리는 자는 소위 천황(天皇)이라는 사람이고, 관백이란 자는 그의 대신(大臣)일 뿐입니다. 우리 조정에서는 그러한 실정을 모르고 국왕이라고 하면서 우리 임금과 대등한 신분으로 대우했으니, 심하게 우리 자신을 낮춘 것입니다. 지금 이미 그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알았으니, 비록 전례가 없더라도 오히려 예법에 의거하여 분명하게 따져 상견(相見)하는 예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더구나 이전에 왔던 사신들이 모두 당 위에 올라가서 절하였는데, 우리들만이 어찌 유독 스스로를 굽혀서 나라를 욕되게 하는 죄를 불러 올 수 있겠습니까.”
하니, 허성이 말하기를,
“국서에 곧장 어휘(御諱)를 쓰고서 평수길(平秀吉)을 국왕이라고 칭하였습니다. 그런데 신하 된 자가 어찌 감히 대등한 예로 예를 행하여, 아래에서 절하는 예를 폐한단 말입니까. 그리고 국서는 이미 고칠 수가 없으니, 아무리 당 위에 올라가 절한다고 하더라도 소용 없는 일입니다.”
하였는데, 공이 이르기를,
“당초에 조정에서 잘 알지 못하여 이런 지나친 예가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에 와서 비록 국서를 고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사신이 상견하는 예는 전례대로 해야 합니다. 어찌 이것을 가지고 고집해 말하면서 관백을 국왕으로 여겨 반드시 뜰 아래서 절하는 예를 행해 소위 천황의 배신(陪臣)이 되는 것을 달갑게 여겨서야 되겠습니까. 관백이 사신을 존중해서 당 위에 올라가서 만나 보게 한다면 이것은 우리 임금을 왜국의 소위 천황과 대등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히 스스로를 우리 국왕과 대등하게 여기지 않아 사신을 높이 받든다면 이는 우리 조정을 높이 받드는 것이니, 또한 옳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허성이 말하기를,
“만약 그렇게 말하였다가 저들이 따라 준다면 좋겠지만, 저들이 만약 ‘우리나라 사신도 이미 귀국 뜰에서 절하였다. 그러니 어찌 서로 다르게 해서야 되겠는가.’라고 할 경우에는 우리로서는 할 말이 없게 됩니다.”
하자, 공이 이르기를,
“하늘에는 두 개의 해가 없고, 땅에는 두 사람의 임금이 없는 법입니다. 일본의 소위 천황이 이미 국왕으로 되어 있으니 관백은 아무리 존귀하더라도 남의 신하일 뿐입니다. 그러니 사신이 소위 천황을 만나 볼 적에는 뜰에서 뵙는 것이 예이지만, 관백을 뜰에서 만나 보는 것은 예가 아닙니다. 지금 관백이 뜰에서 절하여 뵙는 예를 받는다면 이것은 천황으로 자처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뜻을 가지고 간절하게 타이른다면 저들이 반드시 굴복할 것입니다.”
하였다. 공이 또 조용히 현소에게 묻기를,
“귀국의 여러 전(殿)이 관백을 뵐 때 뜰 아래에서 절을 합니까, 당 위에서 절을 합니까?”
하자, 현소가 대답하기를,
“관백은 여러 전(殿)과 똑같은 천황의 신하인데, 어찌 뜰 아래에서 절할 리가 있겠습니까.”
하니, 공이 이르기를,
“전부터 우리나라 사신들도 모두 기둥 바깥에서 예를 행하였습니다.”
하자, 현소가 말하기를,
“참으로 옳습니다.”
하였다. 공은 대개 현소 등이 이미 우리나라에 와서 뜰 아래에서 절을 하였으니 혹시라도 그에 비기어서 하려고 할까 염려되었으므로, 미리 슬쩍 떠보아 그렇게 하는 길을 막은 것이다. 그 뒤에 마침내 공이 말한 대로 예를 행하였다.
이때 평수길이 관동(關東) 지방을 순시하고서 돌아와 있었다. 평의지가 와서 말하기를,
“내일 관백이 일찍 천궁(天宮)에 갈 것이니, 사신이 관광(觀光)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자, 공이 이르기를,
“왕명이 아직 관소에 있으니 사신 된 의리에 있어서 사사로이 나다니기가 곤란합니다.”
하였다. 그러자 평의지가 굳이 청하였으나 끝끝내 사양하였다. 왜승(倭僧)이 와서 ‘관광을 하라고 청한 것은 실은 관백의 뜻으로서, 만약 따르지 않으면 후회되는 일이 있을 것이다.’라는 뜻으로 말하자, 일행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는데 공은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다. 그 뒤로 평수길이 몇 달 동안을 질질 끌면서 국서를 제때에 받지 않고는 거짓말로 선동하여 구류되는 수치를 당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때 어떤 자가 계책을 도모하여 말하기를, “민부 경(民部卿) 법인(法印)과 산구전(山口殿) 현량(玄亮)은 관백의 심복인데, 지금 마침 사신을 접대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환심을 사 일이 성사되기를 도모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자, 황윤길이 그럴 듯하다고 여겨 예물로 바치는 폐백이라고 핑계 대고는 후하게 뇌물을 주어 도모하려고 하였다. 이에 공이 이르기를, “손님과 주인 사이에는 본래 예물로 바치는 폐백이 있는 법입니다. 그러나 왕명을 전한 뒤에 준다면 예물이 되겠지만, 지금 준다면 뇌물인 것입니다. 우리들이 성주(聖主)의 밝은 명령을 받들고 와서는 위엄과 덕화를 선양해 왜인들로 하여금 조대(朝臺) 아래에서 이마를 조아리게 하지 못하였는데, 이에 도리어 뇌물을 주어 아첨한다면 이는 임금의 명을 몹시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비록 죽더라도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니, 황윤길이 그 말에 굴복하였다. 이미 왕명을 전한 뒤에 평수길이 사람을 시켜 와서 말하기를, “서계(書契)를 짓는 대로 뒤따라 보낼 것이니, 사신은 계빈(堺濱)에 가서 기다리라.” 하자, 공이 이르기를, “국서를 받지 않았으니 이는 사신의 일을 아직 마치지 못한 것으로, 지레 나가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계빈은 백 리 밖에 있습니다. 가령 서로 따질 일이 있을 경우에는 장차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였다. 그러나 일행들이 모두 호구(虎口)를 벗어나는 것만을 다행으로 여겨 수레를 몰아 지레 떠났는데, 공이 말려도 듣질 않았다.
계빈으로 돌아와 수십 일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서계가 왔는데, 서계의 말투가 매우 패만스러워서 심지어는 ‘전하(殿下)’를 ‘각하(閣下)’라고 하고, ‘예폐(禮幣)’를 ‘방물(方物)’이라 하였으며, 또 ‘한번 뛰어 곧바로 대명국에 들어가겠다. 귀국은 앞장 서서 입조하라.[一超直入大明國 貴國先驅入朝]’는 따위의 말이 있었다. 이에 공은 이를 즉각 물리치고 받지 않은 다음 글을 보내어 현소(玄蘇)에게 이르기를, “서계를 고치지 않으면 사신은 죽음이 있을 뿐이다.” 하였다. 그러자 현소가 거짓으로 ‘대명국에 입조한다’는 뜻이라고 해명하면서 단지 ‘각하’와 ‘방물’ 등 몇 글자만을 고쳤다. 이에 공이 다시 글을 보내어서 서계에 있는 말을 하나하나 거론하면서 각 구절마다 분석하여 얼버무리는 현소의 말을 설파하였다. 그리고는 또 이르기를, “우리나라는 예의를 중하게 여겨서 귀국과 우호를 통한 지 2백 년이 되도록 일찍이 무례한 말을 가한 적이 없었으니, 이는 귀국도 아는 바이다. 이번에 귀국이 포로로 잡아간 우리나라 백성을 돌려보내고 우리나라를 침범한 무리의 머리를 베어 바치면서 옛날처럼 수교하기를 청하였다. 그래서 우리 전하께서 신의가 있는 것을 가상하게 여기시어 특별히 사신을 보내셨으니, 이는 실로 두 나라 사이의 성대한 일이다. 그런데 귀국의 서계 안에는 그런 일에 대하여 감사해 하는 뜻은 생략해 버리고, 도리어 귀국의 위세를 장황하게 떠벌리면서 과시하고자 하였는바, 위로는 대명국을 엿보고 옆으로는 이웃 나라를 위협하여, 업신여기고 위협하는 말을 늘어 놓았다. 예로써 서로 사귐에 있어서 어찌 이렇게 해서야 되겠는가.” 하였는데, 현소가 그 글을 보고는 몹시 찬탄하면서도 오히려 앞서 한 속이는 말을 고집하였다. 그러자 황윤길 등이 변고를 일으킬까 두려워하여 강하게 다투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공이 이르기를,
“만약 ‘입조’라는 두 글자를 고치지 않는다면 우리 조정이 왜놈의 속국(屬國)이 되고, 온 나라의 관원들이 죄다 그들의 배신(陪臣)이 되는 것이니, 또한 통분하지 않겠습니까. 송(宋) 나라 고종(高宗)이 이미 금(金) 나라를 신하로서 섬겼는데도 ‘조유(詔諭)’한다는 것으로 이름을 삼자, 호담암(胡澹庵)은 차라리 바다에 빠져 죽을지언정 속국이 된 조정에서 구차스럽게 살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당당한 우리나라가 오랑캐와 이웃이 되었는데, 도리어 ‘입조’라는 수치스러운 말을 달갑게 받아들이면서 죽음으로써 다투지 않는단 말입니까.”
하였다. 그러자 황윤길이 말하기를,
“현소의 답이 이와 같으니, 우선은 그의 말을 믿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는데, 공이 이르기를,
“공은 이 말을 빌려서 뒷날에 자신을 해명할 바탕으로 삼으려는 것입니까.”
하자, 허성이 말하기를,
“돌아가서 보고한 뒤에는 조정에서 나름대로 처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는 사신이 알 바가 아닙니다.”
하니, 공이 이르기를,
“아니,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대부(大夫)가 사명(使命)을 받들고 국경을 나선 뒤에는 사직을 편안하게 하고 국가를 이롭게 하는 일이면 재량껏 처리하는 것이 옛날의 도입니다. 하물며 나라를 욕되게 하는 이런 말은 죽음으로써 다투더라도 어찌 제 마음대로 처리한 죄가 되겠습니까. 그런데 일신의 이해만을 염려하여 벌벌 떨면서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하고는 이에 말하기를, ‘우리들이 알 바가 아니다’ 하면서, 치욕스런 서계를 싣고 가서 임금께 바친단 말입니까.”
하였다. 그리고는 드디어 현소에게 답서를 보내었으며, 또 선위사(宣慰使) 평행장(平行長)에게 글을 보내어 반복하여 논변하면서 반드시 고치고야 말기로 기필하였다. 그러자 일행들이 모두 사단을 일으킬까 두려워하여 서로 선동하였으며, 황윤길이 정사(正使)로서 절제권을 행사하면서 억제시켰다. 이에 공은 그 글을 바다 속에 던져 버리고는 시를 지어서 울분을 쏟았는데, 그 시 가운데 ‘물속의 어룡은 응당 글자 알아보리.[水底魚龍應識字]’란 구절이 있었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 실려 있는 우리나라의 풍속(風俗)에 관한 한 조항이 근거도 없는 데서 주워 모은 것이라 대부분이 비루하고 속되며 내용이 틀린 것들이었으므로 공은 일찍이 이를 병통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왜승 종진(宗陳)이 마침 이 책을 가지고 와서 보여 주었다. 이에 공은 국내에서 현재 통행하는 예절과 풍속을 거론하고 각 조목마다 평론하고 변증해서 잘못된 것임을 밝혀 《조선풍속고이(朝鮮風俗考異)》라는 책을 한 권 만들어 주었다.
행차가 돌아올 적에는 여러 추장(酋長)들이 각각 선물을 보내 왔는데, 이 모두를 관소(館所)의 중들에게 나눠 주어 터럭만큼도 자신에게 허물이 있지 않게 하였다.
신묘년(1591, 선조 24) 봄에 돌아와서 부산(釜山)에 도착하였는데, 행낭이 텅 비어 아무것도 없었으며, 오직 석창포(石菖蒲)와 종려나무의 분재만 몇 개 있을 뿐이었다. 안동(安東)을 지나면서도 집에는 들르지 않은 채 조정으로 올라갔다.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으로서 복명(復命)하였으며,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특별히 대사성(大司成)에 제수되었다가 부제학(副提學)으로 옮겨 제수되었다. 이에 가장 먼저 처사(處士) 최영경(崔永慶)이 무고를 당하여 말라 죽은 상황에 대해 아주 자세하게 논계하였는데, 얼마 뒤에 최영경의 관작이 회복되었다. 그러자 뭇사람들의 심정이 매우 후련하게 여겼으며, 공도 임금께서 자신을 알아주는 데 감격하여 어려운 일을 행하도록 요구하고 착한 일을 진달하는 것으로 자임하였다.
여러 차례 차자(箚子)를 올려 수천 마디의 말을 하면서 시사(時事)에 대해 극언하였는데, 하늘의 재앙이 일어나는 까닭, 백성들의 원망이 일어나는 까닭, 정치 교화가 무너지는 까닭, 국가 재정이 부족해지는 까닭 등에 대해서 하나하나 지적하여 진달하면서 숨김없이 다 말하였다. 그러면서 특히 내치(內治)를 엄하게 하여 교화의 근원을 맑게 하는 데 정성을 쏟아서, 궁방(宮房)의 폐단과 척리(戚里)들의 버릇에서부터 세자(世子)를 세우고 왕자들을 가르치는 일에 이르기까지 기휘(忌諱)하지 않고 모두 다 말하였다.
차자가 올라갈 적마다 말이 더욱더 꿋꿋하고 간절하여 사방 사람들이 전해 가면서 외웠으며, 정론(正論)이라고 칭찬하면서 경하하였다. 그러나 임금의 좌우에 있는 권귀(權貴)들은 공을 몹시 미워하였다.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옮겨졌다가 얼마 뒤에 체차(遞差)되었다.
임진년(1592, 선조 25)에 형조 참의(刑曹參議)에 제수되었다. 당시에 조정에서는 왜적이 쳐들어올까 염려하였는데, 영남 지방이 가장 먼저 침입을 받을 것이므로 군무(軍務)를 잘 아는 무변(武弁)을 천거하여 곤수(閫帥)에 의망(擬望)하였다. 그런데도 상이 특별히 공을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로 삼았다. 이에 공은 명을 받자마자 곧바로 출발하였다. 충주(忠州)에 이르러서 왜적들의 배가 바다를 뒤덮고 건너와 부산(釜山)과 동래(東萊)가 잇달아 함락당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가 곧장 본영(本營)으로 가려고 하였다. 가다가 의령현(宜寧縣)에 이르렀을 적에 휘하의 장사(將士)들이 서로 모의하기를, “왜적들이 깊이 쳐들어왔으니 곧장 갈 경우에는 위험할 것이다. 그러니 진주(晉州)를 경유하여 함안(咸安)으로 나가 왜적들의 형세를 살펴보느니만 못하다. 그런데 병사(兵使)가 반드시 우리들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니, 다른 말로 핑계 대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그리고는 공의 둘째 아들 김역(金湙)에게 부탁하여 들어가서 ‘정진(鼎津)은 강물이 불어났고 배가 없으니 진주로 가는 것이 편하다’고 고하게 하였다. 공이 군교(軍校) 김옥(金玉)을 시켜 가서 살펴보게 하였는데, 김옥이 돌아와서 거짓말로 보고하였다. 그러자 공이 이르기를, “일이 급하니 길을 돌아서 가서는 안 된다.” 하고는 곧장 말을 달려 앞으로 나아갔는데, 정진에 도착해서 보니 배가 있었다. 이에 곧바로 김옥과 김역을 끌어내어 장차 참수하려고 하였는데, 여러 장수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린 채 그러지 말라고 하고, 김옥도 앞장 서서 싸워 속죄하기를 원하였으므로 용서해 주었다.
병영에 도착하기 30리 전에서 전임 병사(兵使) 조대곤(曺大坤)을 만났는데, 그는 진(鎭)을 버리고 물러나 있다가 장차 도망치려고 하던 차였다. 그런데 뜻밖에 공이 도착하였으므로 당황스러운 기색으로 맞이하면서 병사의 인(印)을 교부하고는 하직 인사를 하고 떠나려고 하였다. 이에 공이 준엄한 말로 꾸짖기를, “장군은 지척에서 군사들을 거느리고 있으면서도 김해(金海)를 적에게 내주었으니, 군법에 있어서 용서할 수가 없는 일이다. 더구나 대대로 녹을 먹은 신하이며 경험이 많은 장수로서 이런 때를 당하여 의리상 도망칠 수 있단 말인가.” 하였다. 그때 마침 그의 편비(褊裨)가 뒤늦게 와서는 말하기를, “본영(本營)이 이미 함락되었습니다.” 하였는데, 공은 그 말이 거짓임을 알아채고는 그의 죄를 따지면서 이르기를, “너는 병사의 휘하로써 성을 지키고 있다가 왜적을 향하여 화살 한 발 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와서 현혹시키는 말을 한단 말인가.” 하고는 곧바로 목 베어서 조리돌리니, 조대곤이 넋을 잃었다.
이튿날 정탐하던 군사가 왜적들이 다가왔다고 보고하였다. 공이 왜적과의 거리가 얼마나 되느냐고 물으니, 왜적들이 5리 앞까지 왔다고 하자, 곧바로 정예로운 군사를 뽑도록 하였다. 잠시 뒤에 은투구에 금가면을 쓴 왜적 두 명이 칼을 휘두르면서 앞으로 나오자, 장사들이 모두 다리를 벌벌 떨었다. 그런데도 공은 호상(胡床)에 걸터앉은 채 군사들이 동요하지 않게 하였다. 그러자 왜적들이 우리 군사들이 동요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의심하여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 이에 공이 미리 뽑아 놓은 수십 명의 군사에게 돌격하라고 하면서 영을 내리기를, “즉시 말을 타지 않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목을 베겠다.” 하고, 김옥의 이름을 부르면서 소리치기를, “너는 오늘 앞장 서지 않을 건가?” 하니, 수십 명이 한꺼번에 돌진하였다. 몇 리를 뒤쫓아 가다가 매복하고 있던 왜적을 만나 오랫동안 싸움을 치렀는데, 군교(軍校) 이숭인(李崇仁)이 금가면을 쓰고 도전해 오는 왜적을 활로 쏘아 거꾸러뜨리자, 나머지 왜적들이 모두 달아났다. 이에 왜적의 수급(首級) 둘을 베고 좋은 말, 금안장, 보검(寶劍) 등을 노획하여 돌아왔다.
왜적들이 상륙한 후로 열진(列鎭)이 우르르 무너져 적의 예봉에 맞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가 공이 적은 병력을 가지고 왜적들의 예봉을 꺾었으므로, 이로부터 군사들의 마음이 점점 떨쳐져 왜적들과 맞서 싸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드디어 이숭인을 올려보내어 수급을 바치면서 이 사실을 치계하였다.
처음에 공이 일본에서 돌아왔을 때 중외(中外)가 흉흉하여 마치 조석간도 보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공은 외적이 침입해 오기도 전에 나라 안이 먼저 무너질까 염려하여 이를 진정시키는 말을 하였으며, 옥당(玉堂)에 있으면서 올린 차자에서도 아뢰기를, “오늘날에 두려워해야 할 것은 섬 오랑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민심에 있습니다.” 하였는데, 이는 대개 근본을 추구하는 의논이었다. 이때에 이르러서 변경에서 올라오는 보고가 날로 급하고 서울이 크게 놀라 동요하였으므로, 상이 뒤늦게 공의 말을 허물하여 잡아다가 국문(鞫問)하라고 명하였다. 그러자 좌의정 유성룡(柳成龍)과 대관(臺官)들이 구명하였으나 모두 들어주지 않았다. 그로부터 얼마 뒤에 이숭인이 도착하자, 상이 재신(宰臣)들에게 이르기를,
“김성일의 장계에 ‘한번 죽어 나라의 은혜를 갚겠다.’는 말이 있는데, 김성일이 과연 그렇게 하겠는가?”
하니, 유성룡이 대답하기를,
“김성일은, 소견은 혹 미치지 못한 점이 있을지라도 충성심은 남음이 있으니, 그 말을 저버리지는 않을 것임을 신이 책임지겠습니다.”
하고, 왕세자도 극력 구원하였으므로, 상의 노여움이 이에 풀렸으며, 곧바로 초유사(招諭使)의 직임을 제수하였다.
공이 처음에 국문받으라는 명을 받고 올라가다가 직산(稷山)에 이르렀을 때 선전관(宣傳官)이 빠른 속도로 내려오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따라가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 통곡하였는데도 공은 얼굴빛을 변치 않은 채 뒷일을 지시하였다. 그런데 선전관이 도착한 뒤에 보니 초유사에 제수하는 은혜로운 명이었다.
공이 남쪽으로 내려와 함양(咸陽)에 도착해서 보니 열읍(列邑)은 이미 텅 비었고 사민(士民)들은 모두 조수처럼 달아나 숨어 있었다. 이에 공은 그 자리에서 초유문(招諭文)을 지어 유시하였는데, 충의(忠義)가 격동하고 말투가 강개하여 보는 자들치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김면(金沔)은 거창(居昌)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정인홍(鄭仁弘)은 합천(陜川)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그 나머지 향병(鄕兵)을 끌어모아 왜적을 치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나선 자들이 곳곳에서 떼지어 일어나 일로(一路)를 바람처럼 휩쓸었다.
곽재우(郭再祐)는 변란이 일어난 처음에 맨 먼저 의병을 일으켜서는 자기 집 재산을 흩어서 군사들을 먹이고, 군량을 계속 대지 못할 경우에는 빈 고을의 창고 곡식을 가져다가 군량을 대었으므로, 인근 고을의 수령이 곽재우를 가리켜 토적(土賊)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의병들의 사기가 모두 꺾였으며, 곽재우도 어찌할 도리가 없음을 알고는 팽개치고 두류산(頭流山)으로 들어가려고 하였다. 그러던 차에 공이 이르러서 글을 보내어 격려하고 권장하자, 의병의 사기가 다시금 떨쳐졌다.
공은 진주(晉州)가 호남(湖南)의 보장(保障)이 되는 지역이므로 왜적들이 반드시 빼앗으려 할 것이라고 여겼다. 이에 판관(判官) 김시민(金時敏)에게 영을 내려 군사들을 끌어모으게 해 수천 명을 얻은 다음, 성지(城池)를 수리하고 무기를 수선하게 하였으며, 성첩(城堞)을 헤아려서 대오를 나누어 사수할 계획을 세웠다. 얼마 뒤에 김면이 우현(牛峴)을 지키고 있는데 여러 적들에게 합공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드디어 그곳으로 달려갔다. 공이 이르자 인근 고을의 군사들이 모두 모여들어 힘을 합쳐서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니, 왜적들이 퇴각하였다.
창원(昌原)에 있던 왜적들이 공이 진주를 떠났으므로 진주의 방비가 허술하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진해(鎭海)에 있는 왜적과 함께 쳐들어왔다. 공은 단성(丹城)으로 돌아와서 함양(咸陽) 등 네 고을의 군사를 모두 동원하여 구원하게 하였으며, 김시민에게 신칙하여 굳건히 지키도록 하였다. 그리고 곽재우 역시 이보다 앞서 성 안에 들어가 있어서 군세(軍勢)가 자못 성대하였다. 이에 왜적들이 남강(南江)에 이르러서는 감히 다가오지 못하였다. 공이 뒤이어서 이르자 여러 장수들이 더욱더 공의 명령을 따랐으므로 왜적들이 패주하여 드디어 사천(泗川), 진해, 고성(固城) 등 여러 고을을 회복하였다. 또 곽재우 등으로 하여금 현풍(玄風), 창녕(昌寧), 영산(靈山) 등 세 고을의 왜적들을 격퇴하게 하였으므로, 낙동강(洛東江)의 좌우가 이로부터 비로소 통하였다.
당초에 관찰사 김수(金睟)가 조처하는 일이 조급하여 뭇사람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서 각 고을에 공문을 보내어 군병을 다시 편성하였는데, 의병장에게 예속되어 있던 군사들을 대부분 빼앗아 간 탓에 사람들의 노여움이 더욱 격해졌다. 이에 곽재우가 격문(檄文)을 보내고는 김수의 목을 베려고 하였다. 그러자 김수가 군사를 풀어 자신을 방비한 다음 곽재우가 발호(跋扈)한다고 아뢰어, 일을 장차 예측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이에 공이 곽재우에게 글을 보내어 의리(義理)로써 깨우치자, 곽재우가 크게 깨달아서 즉시 포위되어 있던 진주로 달려가 구원하였다. 공은 또 김수를 조정하여 그가 유감을 풀고 함께 일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또 조정에서 제대로 살피지도 않은 채 곽재우를 패역(悖逆)으로 몰아 처형할 경우 형벌을 잘못 시행해서 온 도내의 인심을 잃을까 염려하여, 이에 즉시 사유를 갖추어 치계해서 드디어 아무런 일이 발생하지 않게 되었다.
이해 가을에 행조(行朝)에서 공을 경상좌도 관찰사로 삼았다. 그러자 사민(士民)들이 길을 막고는 말하기를, “공이 떠나고 나면 의병들이 흩어져서 영남을 보존할 수가 없게 됩니다. 공은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떠나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사민들이 이미 공을 억지로 머물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험한 길을 뚫고서 행재소(行在所)로 가 진소(陳疏)하니, 경상우도 관찰사로 바꾸어 제수하라고 명하였다.
창원에 있는 왜적들이 부산(釜山)과 김해(金海)에 있는 여러 왜적들과 합세하여 진주에서의 패배를 갚으려고 하였다. 이때 김시민이 이미 진주 목사로 승진되었으므로 공이 목숨을 바쳐서 나라의 은혜를 갚으라는 뜻으로 격려하고, 여러 장수들에게 명을 전하여 힘을 합쳐서 방어하거나 강가에서 군세를 과시하게 하였다. 그리고 결사대를 모집하여 활과 화살을 많이 싸 들고서 밤을 틈타 성 안으로 숨어 들어가게 해서 장수와 사졸들을 격려하여 죽음으로써 지키게 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감동하여 떨쳐일어났으며, 김시민이 또 많은 방략을 써서 방어하였다. 이에 왜적들이 7일 밤낮을 계속하여 공격하였으나 마침내 함락시키지 못한 채 시체를 쌓아 놓고 불태워 버린 다음 도망쳤다.
겨울에 상께서 공의 공적을 가상하게 여겨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를 제수하였다. 공은 곤수(閫帥)의 임무를 맡은 이래로 군무를 처리하느라 노심초사하여 밤낮으로 쉬지 않았는데, 공문서를 작성하고 결정을 내림에 있어서 아무리 자질구레한 것이더라도 반드시 직접 살펴보았다. 어떤 사람이 지나치게 번거롭게 한다고 간하자, 공은 탄식하면서 이르기를, “나랏일이 이 지경이 된 것은 우리들의 잘못이다. 죽어도 속죄할 수가 없는데, 수고로운 것을 어찌 감히 꺼리겠는가.”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서 병란과 흉년이 있은 뒤끝에 역질(疫疾)마저 만연하여 죽는 백성들이 줄을 이었으므로 달려가 진구(賑救)하느라 더욱더 초췌해졌으며, 심지어는 밥을 먹을 적에 빈번히 숟가락을 놓기까지 하였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나라를 위해서라도 자신의 몸을 보중하기를 청하니, 공이 이르기를, “저절로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아서 그러는 것일 뿐이다.” 하였다. 그리고 또 방문을 닫아걸고 공무를 보아 역질 기운을 피할 것을 청하니, 공이 이르기를, “죽고 사는 것은 운명이다.” 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병에 걸려 위독해지자 약을 물리치고 먹지 않으면서 이르기를, “내 병은 약을 먹고 나을 병이 아니다.” 하였다. 그때 아들 김역(金湙)이 옆방에서 병을 심하게 앓고 있었는데, 한 번도 병에 대해서는 물어 보지 않았다. 또 측실 부인이 근처에 와 살고 있으면서 여종을 보내어 병문안을 하자, 공은 손을 저어 내보내면서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면서 오직 나라를 걱정하는 한 생각만을 마음속에서 잊지 않았다. 비록 이미 혼미하여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도 가느다란 목소리로 꿈결처럼 하는 말들이 모두 나랏일에 관한 것이었다.
계사년(1593, 선조 26) 4월에 진주의 공관(公館)에서 졸(卒)하니, 나이가 56세였다. 그로부터 두 달 뒤에 진주성이 함락되어 낙동강 오른쪽도 모두 무너졌으니, 아,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공의 친구인 박성(朴惺)과 이노(李魯)는 처음부터 항상 군중에 있으면서 공과 생활을 같이 하였으므로, 이때에 이르러서 초상을 주관하여 지리산(智異山) 기슭에 임시로 매장하였다. 큰아들 김집(金潗)이 사잇길을 통해 남쪽으로 와 산속에서 여묘살이를 하였으며, 12월에 안동부 북쪽에 있는 가수천(嘉樹川)의 오향(午向) 언덕에 귀장(歸葬)하였다.
을사년(1605, 선조 38)에 조정에서 선무 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錄勳)하고 한 자급을 올렸으며, 이조 참판을 추증하였다.
공은 자질이 영특하고 시원시원하였으며, 성품은 강하고 방정하였다. 강개하고 격앙(激昻)하여 남들보다 훨씬 뛰어난 자질이 있었다. 스승의 문하에 들어가게 되어서는 더욱더 스스로 분발하고 가다듬어서 몸가짐을 단속하고 뜻을 독실하게 하는 데에 힘썼다. 일찍이 이르기를, “내가 평생에 걸쳐서 얻은 한마디 말은, ‘나의 허물을 공격하는 자는 나의 스승이다.[攻吾過者 乃吾師也]’라는 말이다.”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자신을 속이지 말라는 ‘무자기(毋自欺)’ 세 글자는 모름지기 종신토록 가슴속에 새겨 두어야 한다. 선을 행하고 악을 제거함에 있어서 한번이라도 성실치 못하면 모두가 거짓이다.” 하였다. 또 ‘관홍(寬弘)’이라는 두 글자를 벽 위에다 크게 써 붙여 놓고는 가죽을 차고 다니는 뜻을 붙이었다.
염락(濂洛)의 여러 책들에 이르러서는 좋아하지 않는 책이 없었으나, 특히 퇴계 이 선생이 정리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좋아하였는데, 마음을 가라앉혀 음미하면서 침식까지 잊을 정도였으며, 마음속 깊이 이해해서 실천하여 몸가짐을 하는 표준으로 삼았다. 말년에는 날로 더 평탄하고 신실한 데로 나아갔으니, 진실하여 다시는 모난 기상이 없었으며, 쌓은 것이 갈수록 심후해지고 발하는 것이 갈수록 밝게 빛났다.
일에 임하여 실행함에 있어서는 오직 의리에 어떠한가만 보았는바, 의리에 있어서 행할 바이면 주저하지 않고 맡아 하였으며, 이해(利害)와 화복(禍福)은 도외시하였다. 그러므로 비록 험하고 어려운 지경에 처해서 생사가 숨 한 번 쉬는 사이에 달려 있더라도 겁내지 않고 흔들리지 않은 채 정신과 기백을 더욱더 가다듬었다. 그리하여 종시토록 수립한 것이 우뚝하여 다른 사람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그러니 증자(曾子)가 말한 ‘대절(大節)에 임하여서도 빼앗을 수 없다.’고 한 것이나, 소씨(蘇氏)가 말한 ‘충성은 임금의 노여움을 범하고 용기는 삼군(三軍)의 군사를 빼앗는다.’는 것은, 천하의 큰 용기가 있는 자가 아니면 누가 여기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마는, 공은 거의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마음을 세움에 이르러서는 공평하고 관대하게 하기를 위주로 하였고, 논의를 함에 있어서는 편당(偏黨) 짓는 것을 경계하였다. 한창 조정의 의논이 분열되어 각기 서로 배척하였는데도 공은 홀로 이르기를, “자기와 당파가 다른 자라고 해서 모두 다 소인은 아니며, 자기와 당파가 같다고 해서 어찌 모두 군자이겠는가. 이쪽이냐 저쪽이냐를 따지지 말고 어진가 어질지 않은가만을 보아 취하고 버릴 뿐이다.” 하니, 국론(國論)이 이로써 정해졌다. 성균관 대사성이 되어서는 제생(諸生)들을 불러 타이르기를, “배우는 자가 힘쓸 것은 오직 글을 읽고 도를 강론하여 마음을 닦고 자신을 깨끗이 하는 것일 뿐, 조정의 시비는 관여할 바가 아니다. 만약 자신의 본분을 돌아보지 않은 채 성균관 안에서 서로 시사(時事)에 대해 떠들 경우에는 군자에게 버림을 받을 것으로, 나라에서 인재를 기르는 뜻이 아닐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는 지성으로 가르치면서 부박하고 조급한 풍조를 진정시키자 선비들의 습속이 일변하였다. 세상에서 공에 대해 논하는 자들은 한갓 공의 정직하고 굳건한 면만을 흠모하면서 마음속에 간직한 바가 관대하고 공평하며 측은해함이 이와 같다는 것을 모르니, 공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것이다.
공은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항상 선부인(先夫人)을 봉양하지 못한 것을 평생의 통한으로 여겼으며, 학문을 배우러 가거나 벼슬살이를 하러 가는 때를 제외하고는 판서공(判書公)의 곁을 떠난 적이 없이 공경하면서 봉양하는 도리를 다하였다. 판서공의 나이가 81세가 되어 병이 오래가자, 여러 형제들과 함께 밤낮으로 곁에서 모시면서 직접 약과 음식을 맛보았다.
초상을 치름에 있어서는 슬픔을 다하였고, 빈(殯)을 하기 전에는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았으며, 장사를 지내기 전에는 곡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장사를 지내고는 묘 곁에서 여묘살이를 하였으며, 최질(衰絰)을 벗은 적이 없었고 집안일에 대해 말한 적이 없었다.
친족간의 우애가 독실하였는바, 판서공이 공이 가산(家産)을 일구지 않는다는 이유로 별도로 노비를 떼어 주자, 굳이 사양하면서 가난한 형제들에게 양보하였다. 큰누이가 남편을 잃고 통곡하다가 몸을 해쳐서 죽은 탓에 고아가 된 두 어린 아들이 외가에 와서 살았는데, 공은 가르치고 기르기를 모두 지극하게 하여 자기 자식과 차별하지 않았다. 어떤 누이동생이 가난하여 가산이 없는 탓에 밥을 지을 여종이 없자 여종을 떼어 주었으며, 얼숙(孼叔)이 밥을 직접 지어서 먹자 그에게도 여종을 떼어 주었다. 또 종제(從弟)들이 어려서 고아가 되어 의탁할 데가 없자, 정성껏 돌보아 주어 그들이 제대로 살아갈 수 있게 하였다. 내외의 여러 친족들 가운데 스스로 먹고 살 수 없는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다 떼어 주면서 돌보아 주었는데, 비록 집안의 재산이 다 없어져도 괘념치 않았다.
집안을 다스림에 있어서는 엄하여 법도가 있었는바, 매번 초하루와 보름이면 자제들로 하여금 순서대로 서서 참배(參拜)하게 하여 한결같이 사마공(司馬公)의 가의(家儀)와 같게 하였으며, 노비들 역시 정초에 차례대로 절하게 하였다. 이에 온 집안의 크고 작은 사람들이 모두 예로써 어른을 섬길 줄 알아 집안이 질서가 있었다. 그리고 봉선의(奉先儀) 및 길흉경조(吉凶慶弔)에 관한 의식(儀式)을 저술하였는데, 주자(朱子)의 설을 근본으로 삼고 여러 유자들의 의논을 참고하여, 예속(禮俗)이 서로 맞고 정문(情文)이 모두 갖추어지게 한 다음, 자제들로 하여금 이를 배워 행하도록 하였다.
청성산(靑城山)의 낙동강 강물을 굽어볼 수 있는 곳에다 집을 짓고는 ‘석문정사(石門精舍)’라고 편액하였는데, 그 안에 단정히 앉아 있으면 뜻을 얻은 즐거움이 무럭무럭 생겨났다. 후생들 가운데 배우기를 청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되풀이하여 설명하고 온 마음을 다 기울여 가르쳐 본말(本末)에 대해 자세히 가르쳤는데, 매번 의(義)와 이(利)를 판별하는 것을 첫 번째 의(義)로 삼았다. 일찍이 여러 아들들에게 검(劍)을 나누어 주면서 이르기를, “너희들이 나쁜 생각이 일어날 때를 만나면 한칼에 잘라 버리기 바란다.” 하였다.
공은 문장을 짓는 데 있어서 험하고 어려운 글을 짓기를 일삼지 않아 평이하고 아름다웠다. 이에 글을 읽는 자들이 어질고 의로운 말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런데 공이 저술한 소차(疏箚)나 시문(詩文)은 모두 병화(兵火)에 없어졌으며, 지금은 단지 유고(遺稿) 몇 권과 《해사록(海槎錄)》 세 권이 집에 보관되어 있을 뿐이다.
고을의 선비들이 공이 살던 곳인 임하현(臨河縣)의 서쪽에 사우(祠宇)를 세우고 제향을 올리다가, 그 뒤에는 여강(廬江)의 퇴계 이 선생의 사당에 배향(配享)하였다.
공의 비(妣) 정부인(貞夫人) 권씨(權氏)는 본관이 안동(安東)으로, 고려 때 태사(太師)를 지낸 권행(權幸)의 후손이며, 산계(散階)에 있었던 권덕황(權德凰)의 따님이다. 정숙한 덕이 있어서 공을 섬긴 40년 동안에 공경하고 삼가기를 하루같이 하였으며, 무슨 일을 할 적에는 반드시 의리에 있어서 불가한 점은 없는가를 따지면서 헤아려 보고 여쭤 본 다음에 행하였다. 공이 죽은 뒤 30년 동안을 예법으로써 문호(門戶)를 지켜 어머니로서의 도를 크게 얻었다. 공과 같은 해인 무술년(1538, 중종 33)에 태어나 85세의 수를 누리고 죽어 공의 묘에 부장(葬)되었다.
아들은 셋으로, 장남 집(潗)은 익위사 세마(翊徫司洗馬)이고, 나머지 두 아들은 역(湙)과 굉(浤)이다. 딸은 셋으로, 장녀는 장사랑(將仕郞) 홍수약(洪守約)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 권태일(權泰一)에게 시집갔고, 삼녀는 길주 목사(吉州牧使) 김영조(金榮祖)에게 시집갔다. 측실 소생 아들은 넷인데, 잠(潛), 심(深), 침(沈), 명(溟)이며, 딸은 둘로 장녀는 이사첨(李士瞻)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정연종(鄭連宗)에게 시집갔다.
집(潗)은 아들 넷을 낳았는데, 시추(是樞)는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이고, 시권(是權)은 권지 학유(權知學諭)이고, 시강(是杠)은 생원이고, 다음은 시절(是梲)이다. 딸은 넷으로, 장녀는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오여벌(吳汝橃)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권지 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 김연조(金延祖)에게 시집갔고, 삼녀는 권상충(權尙忠)에게 시집갔고, 사녀는 김석중(金錫重)에게 시집갔다. 역(湙)은 딸 하나를 낳았는데, 권태정(權泰精)에게 시집갔으며, 측실 아들은 시가(是榎)이다. 굉(浤)은 아들이 없어서 형의 아들 시절을 후사로 삼았으며, 딸은 둘로, 장녀는 흥덕 현감(興德縣監) 김응조(金應祖)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병조 좌랑 신열도(申悅道)에게 시집갔다. 내외의 손(孫)과 증손(曾孫)은 남녀를 합하여 모두 100여 명이다.
세마(洗馬)로 있는 김집(金潗)이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지은 행장(行狀)을 가지고 와 나에게 보여 주면서 말하기를,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지 이미 오래되어 무덤가의 나무가 굵어졌는데도 묘비를 세우지 못하고 있기에 불초한 제가 항상 두렵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지금 다행히도 행적을 서술한 글이 한강 노인의 손에서 나오게 되었으니, 이것으로 후세에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신께서는 이를 근거로 해서 묘비명을 지어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이에 나 정경세(鄭經世)는 그럴 만한 사람이 못 된다고 하면서 사양하였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부탁하였으므로, 드디어 행장을 상고해 그 가운데에서 중요한 것만을 추려서 쓴 다음, 이어 명(銘)을 지었다. 그 명은 다음과 같다.

선성께서 남기신 말이 있으니 / 先聖有言
굳센 사람 볼 수가 없다고 했네 / 未見剛者
옛날에도 그런 사람 드물었는데 / 在古鮮能
세상의 도 더욱 나쁜 지금임에랴 / 況今愈下
굳세시던 공의 성품 생각하건대 / 烈烈惟公
강건함은 하늘에서 타고난 거네 / 强矯天出
공의 뜻과 기개는 의연하여서 / 志氣毅然
그 누구도 굴복시킬 수가 없었네 / 物莫能屈
홀 들고서 조정을 다스릴 때엔 / 端笏治朝
그 곧음은 화살과도 같았었네 / 其直如矢
어떤 때는 벼락치듯 천둥 울리어 / 或震之霆
비창을 잃게 하지 아니하였네 / 不喪其匕

고관들을 법대로 처리했으니 / 法行于貴
누가 감히 공의 바름 범하였겠나 / 孰敢干正
마치 범이 큰길에 나와 있으매 / 若虎在逵
여우 따위 멀리 숨는 거와 같았네 / 狐狸遠屛
깃발을 펼치고서 바다 건너매 / 張旜過海
사신 부절 손에다 잡고 갔다네 / 龍節在手
양후를 붙잡아서 묶어 놓고는 / 約束陽侯
육지 가듯 거센 풍랑 속을 갔다네 / 平陸鯨颶
섬 오랑캐 몹시도 교활하여서 / 蠻奴孔狡
갖가지로 우리나라 시험하였네 / 嘗我萬方
우리들을 모욕하고 위협하면서 / 侮我惴我
제멋대로 방자하게 날뛰었다네 / 肆厥跳踉
공께서는 그들 보길 하찮게 보고 / 公視若無
털끝조차 흔들리지 아니하였네 / 不動毛髮
의기를 떨치고 말이 엄하매 / 義奮言厲
흉악한 오랑캐들 혼 다 나갔네 / 兇醜氣奪
평탄한 건 끝내 험함 되는 법이라 / 無平不陂
나라가 전쟁으로 쪼개졌다네 / 國刳於兵
온 나라가 순식간에 궤멸되어서 / 滄海橫潰
땅 꺼지고 하늘은 기울어졌네 / 地墊天傾
공께서는 황하의 지주 되어서 / 公爲砥柱
우뚝하니 동남쪽을 지키었다네 / 屹然東南
칼 잡고서 피눈물을 주룩 흘리며 / 仗劍沫血
이 병란을 평정하길 맹서하였네 / 誓亂是戡
기력은 고갈되고 힘 다 빠져서 / 氣殫力竭
중간에서 몸 병들어 죽고 말았네 / 中道而斃
어찌하여 지니신 덕 굳건했는데 / 何德之剛
목숨은 그렇게도 연약하였나 / 而命之脃
지난날에 공이 겪은 온갖 어려움 / 公昔百艱
하늘이 어찌 공을 막은 거겠나 / 天豈公阨
뜨거운 불로 옥을 불태우면서 / 烈火燒玉
공의 덕을 시험하여 본 거였다네 / 乃以試德
어찌하여 좀 더 오래 살게 하여서 / 胡不少延
큰 임무를 맡겨 주지 아니하였나 / 降之大任
복록이야 적었지만 이름 높으니 / 嗇祿豐名
하늘의 그 뜻을 모두 알겠네 / 天意則審
가수천 그곳의 저 언덕에는 / 嘉樹之原
공의 무덤 우뚝하니 솟아 있구나 / 宰如其阡
공의 몸은 이곳에 남아 있는데 / 公形在此
공의 기백 저 하늘 위에 있구나 / 公氣在天

숭정(崇禎) 4년(1631, 인조 9) 정월 일에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세자좌부빈객(吏曹判書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世子左副賓客) 정경세(鄭經世)는 찬한다.


 

[주D-001]공이 낱낱이 들어 아뢰자 : 이 부분이 원문에는 ‘공력매지(公力枚之)’로 되어 있는데, 소주(小註)에, “비본(碑本)에는 ‘공력매지(公歷枚之)’로 되어 있다.” 하였다.
[주D-002]서해도(西海島) : 이 부분의 소주에, “비본(碑本)에는 ‘서해도(西海道)’로 되어 있다.” 하였다.
[주D-003]돌아와 : 이 부분이 원문에는 ‘환(還)’으로 되어 있는데, 소주에, “비본(碑本)에는 ‘류(留)’로 되어 있다.” 하였다.
[주D-004]호담암(胡澹庵) : 담암은 송 나라 호전(胡銓)의 호이다. 남송(南宋)의 정신(廷臣)으로, 고종 때 추밀원 편수(樞密院編修)로 있으면서 진회(秦檜) 등이 금 나라에 대한 유화책(柔和策)을 주장하자, 봉사(封事)를 올려 진회를 목벨 것을 주장하였다가 폄관(貶官)되었다.
[주D-005]가죽을 차고 다니는 뜻 : 성질이 조급한 자가 부드러운 가죽을 차고 다니면서 자신을 경계한다는 뜻이다. 한(漢) 나라의 서문표(西門豹)가 성질이 급하였으므로 가죽을 차고 다니면서 자신의 성질을 누그러뜨렸다고 한다. 《史記 卷126 滑稽列傳》
[주D-006]염락(濂洛)의 여러 책 : 주자(周子)와 정자(程子)의 성리학(性理學)에 관한 책들을 말한다. 염은 염계(濂溪)로 송 나라의 성리학자인 주돈이(周敦頤)가 살던 곳이고, 낙은 낙양(洛陽)으로 정이(程頤)가 살던 곳이다.
[주D-007]산계(散階) : 품계만 있고 직무는 없는 벼슬이다.
[주D-008]어떤 …… 아니하였네 : 교령(敎令)이 엄명하여 종묘의 제사를 폐하지 않게 하였다는 뜻이다. 비창(匕鬯)은 종묘에 제사 지낼 때 쓰는 제기(祭器)이다. 《주역》 진괘(震卦)에, “천둥 소리가 백리 밖까지 들리니 비창을 잃지 않았도다.[震驚百里 不喪匕鬯]” 하였다.
[주D-009]양후(陽侯) : 고대의 전설 속에 나오는 파도 신의 이름이다.

해동역사 제43권
 예문지(藝文志) 2 ○ 경적(經籍) 2
우리나라 서목(書目) 2 사(史), 자(子), 집(集)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三國史記)》
○ 《삼국사기》 50권은 고려의 김부식이 찬한 것으로, 먼저 신라를 기록하고 다음으로 고구려를 기록하였으며, 다음으로 백제를 기록하였는데, 기(紀)와 표(表)가 있다. 《옥해(玉海)》
○ 순희(淳煕) 원년(1174, 명종4) 5월 29일에 명주(明州)의 진사 심문(沈忞)이 해동(海東)의 《삼국사기》 50권을 올리자, 금폐(錦幣) 1백을 하사하고 책은 비각(祕閣)으로 넘겨주었다. 《상동》
○ 《삼국사기》 50권은 신라, 고구려, 백제 삼국의 일을 기록하였는데, 《동국통감(東國通鑑)》과 다른 내용이 있다. 《이칭일본전(異稱日本傳)》
○ 《삼국사기》 제13권부터 22권까지는 고구려본기인데, 우리 일본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으니, 조잡하고 소략함이 심하다. 《상동》
살펴보건대, 《삼국사기》는 본기(本紀) 28권, 연표(年表) 3권, 지(志) 9권, 열전(列傳) 10권으로 되어 있으며, 고려의 수충정난정국찬화동덕 공신(輸忠征難靖國贊化同德功臣)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태보 복야 상서 겸 예부사 집현전태학사 감수국사 상주국(開府儀同三司檢校太師太保僕射尙書兼禮部事集賢殿太學士監修國史上柱國)으로 치사(致仕)한 신하 김부식이 선지(宣旨)를 받들어서 찬한 것이다. 《고려사》에는 이르기를, “인종 23년(1145) 12월 임술에 김부식이 그가 찬한 신라, 고구려, 백제 삼국의 사기를 올렸다.” 하였으며, 양촌(陽村) 권근(權近)은 이르기를, “전조(前朝)의 문신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찬수하였는데, 방언(方言)이나 이어(俚語)가 뒤섞여 있고, 잘한 정사나 좋은 계책은 드물게 전하였으며, 필삭(筆削)한 것이나 범례(凡例)를 정한 것이 아주 합당치는 않다. 이는 대개 그 당시 전적(典籍)이 대부분 없어졌으므로 박식하였던 김 시중(金侍中)으로서도 상고할 길이 없어 간간이 올바르지 못한 고기(古記)의 설을 취하여 소략하게 됨을 면치 못한 것이니, 탄식을 금할 수가 없다.” 하였다.

고득상(高得相)의 《삼국통력(三國通曆)》
○ 해동의 《삼국통력》 12권은 고려의 고득상이 찬한 것으로, 중국 역대의 정삭(正朔) 아래에 기록하였다. 《옥해》
○ 해동의 《삼국통력》은 10권이다. 《통지(通志)》 예문지(藝文志)

해동의 《삼국통록(三國通錄)》
○ 해동의 《삼국통록》은 이름이 빠졌다. 《수초당서목(遂草堂書目)》
살펴보건대, 《삼국통록》과 《삼국통력》은 혹 같은 책인데 이름을 달리한 것인가? 상고할 수가 없다.

정인지(鄭麟趾)의 《고려사(高麗史)》
○ 주이존(朱彝尊)의 ‘《고려사》의 뒤에 쓴 발문’에,
“《고려사》는 세가(世家) 46권, 지(志) 39권, 표(表) 2권, 열전(列傳) 50권, 목록(目錄) 2권, 합계 139권으로 되어 있는데, 그 나라 사람인 정헌대부(正憲大夫) 공조판서 집현전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 겸 성균관대사성(工曹判書集賢殿大提學知經筵春秋館事兼成均館大司成) 정인지 등 32인이 편찬하였다. 명나라 경태(景泰) 2년(1451, 문종1) 8월에 표문을 올리고 아울러 이를 간행해서 국내에 반포하였다. 그 체제와 범례를 보니 조리가 있어 어지럽지 않은바, 왕씨 고려 한 시대를 징험할 수 있는 문헌이 되기에 충분하다.
《고려사》에 나오는 악지(樂志)의 가사(歌辭)는 대부분 송나라 유릉(裕陵)이 하사한 대성부(大晟府)의 악보(樂譜)이며, 여복지(輿服志)의 경우에는 ‘몽고(蒙古)에는 머리를 정수리까지 깎아 그 모양을 네모지게 하고 그 중간 부분의 머리카락은 남겨 두는 풍속이 있는데, 그것을 일러 개체(開剃)라고 한다.’는 내용이 실려 있으며, 충렬왕 4년(1278) 2월에는 온 경내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상국(上國)의 의복을 입게 하고 개체를 하게 하였으며, 16년(1290) 9월에는 백관들이 비로소 삿갓을 쓰고 조알(朝謁)하였다는 내용이 실려 있는데, 이런 것들은 《원사(元史)》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들이다.
경신년(1320, 충숙왕7)에 임금이 사막으로 도망쳐 달아난 뒤의 일과 같은 경우는, 원나라 군신들의 사적을 상세히 알 길이 없다. 그런데 고려에서는 간혹 사신을 보내 통교하면서 북원(北元)이라고 칭하였다. 북원의 임금이 응창(應昌)으로 달아났다가 홍무(洪武) 3년(1370, 공민왕19) 경술 4월에 죽었는데, 나라 사람들이 혜종(惠宗)이란 시호를 올렸는바, 이가 바로 순제(順帝)이다. 그의 아들이 임금 자리를 이어받아 남은 군사를 데리고 화림(和林)으로 달아났다. 10년(1377, 우왕3) 정사에 사신을 파견하여 고려에 도착해서 선광(宣光)이란 연호를 행하였으나, 나라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2년 뒤에 또 첨원(僉院) 보비(甫非)를 파견하여 천원(天元)이라는 기년(紀年)을 통고하였는데, 신우(辛禑)가 영녕군(永寧君) 왕빈(王彬)을 파견하여 가서 축하하게 하였다. 서로 전해 자리에 선 지 11년 만에 죽으니 북원에서 시호를 내려 소종(昭宗)이라고 하였다. 이상의 내용들은 명나라의 전적에서는 모두 숨기고 기록하지 않은 것들인데, 《고려사》에 의지하여 그 사적들이 약간 남아 있게 되었다. 그러니 후대에 세대를 논하고 연호를 기록하는 자들이 마땅히 이어받을 바이다.”
하였다. 《폭서정집(曝書亭集)》
○ 정난군신(靖難君臣)들이 명나라 《태조실록(太祖實錄)》을 개수(改修)한 것은 방효유(方孝孺)로 인해서였는데, 방효유의 아버지인 방극근(方克勤)은 순리(循吏)였는데도 그 사실을 기록하지 않았으며, 황관(黃觀)과 경청(景淸)이 《서전회선(書傳會選)》을 찬수하면서는 그 이름을 삭제하고 또 ‘방 선생(方先生)이 머리를 조아리고 애걸하였다.’고 거짓으로 썼다. 정인지가 찬한 《고려사》를 보면, 정몽주(鄭夢周)가 이성계(李成桂)를 죽이려고 도모하였다가 이루지 못하고 이방원(李芳遠)에게 피살되었는데, 이방원은 오히려 관작을 추증하고 시호를 내려 줄 줄 알았으며, 정인지 등도 역시 그 사실을 직서(直書)하였다. 이것은 하국(下國)의 사관(史官)이 양사기(楊士奇) 등의 무리들에 비해 훨씬 나은 것이니, 탄식할 만하다. 《상동》
○ 《고려사》는 2권이다. -편수(編修) 왕여조(汪如藻)의 가장본(家藏本)이다.- 구본(舊本)에 정헌대부(正憲大夫) 공조판서 집현전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 성균관대사성(工曹判書集賢殿大提學知經筵春秋館事成均館大司成) 정인지가 왕명을 받들어 찬수하였다고 제(題)하였다. 《명실록(明實錄)》을 상고해 보니, 경태(景泰) 2년(1451, 문종1)에 고려의 사신 정인지가 일찍이 표문을 올려 이 책을 조정에 올렸는데, 세가(世家) 46권, 지(志) 39권, 표(表) 2권, 열전(列傳) 50권, 목록(目錄) 2권이었다. 주이존(朱彝尊)의 《폭서정집》을 보면 이 책에 대한 제발(題跋)에, ‘체제와 범례가 볼만하고 조리가 있어서 어지럽지 않다.’ 하였다. 지금 이 본은 세가(世家) 한 권과 후비열전(后妃列傳) 한 권만이 겨우 남아 있으니, 이는 대개 우연히 보존되었다가 잔결(殘缺)된 것으로, 완전한 책이 아니다. 《사고전서총목(四庫全書總目)》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경태 2년 8월, 즉 우리 문종대왕(文宗大王) 원년 신미에 전(牋)을 올렸는데, 32왕의 세가(世家)가 46권이고, 12항목의 지(志)가 39권으로 천문(天文), 역(曆), 오행(五行), 지리(地理), 예(禮), 악(樂), 여복(輿服), 선거(選擧), 백관(百官), 식화(食貨), 병(兵), 형법(刑法)이며, 연표(年表)가 2권이고, 열전(列傳)이 50권으로 후비(后妃)ㆍ종실(宗室)ㆍ공주(公主)의 열전이 있고 그다음에 명신(名臣) 열전이 있고 그 아래에 양리(良吏), 충의(忠義), 효우(孝友), 열녀(烈女) 및 방기(方伎), 환자(宦者), 혹리(酷吏), 폐행(嬖幸), 간신(姦臣), 반역(叛逆) 등의 열전이 있으며, 목록(目錄)이 2권으로, 총 합계 139권이다.
찬수한 사관(史官)은 32인으로,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정인지(鄭麟趾),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김조(金銚)ㆍ이선제(李先齊), 겸 춘추관 편수관(兼春秋館編修官) 정창손(鄭昌孫)ㆍ신석조(辛碩祖)ㆍ최항(崔恒)ㆍ노숙동(盧叔仝), 겸 춘추관 기주관(兼春秋館記注官) 이석형(李石亨)ㆍ신숙주(申叔舟)ㆍ최덕지(崔德之)ㆍ어효첨(魚孝瞻)ㆍ김예몽(金禮蒙)ㆍ김순(金淳)ㆍ양성지(梁誠之)ㆍ이예(李芮)ㆍ김지경(金之慶)ㆍ김윤복(金潤福), 겸 춘추관 기사관(兼春秋館記事官) 이극감(李克堪)ㆍ윤기견(尹起畎)ㆍ박원정(朴元貞)ㆍ김명중(金命中)ㆍ조근(趙瑾)ㆍ홍우치(洪禹治)ㆍ예승석(芮承錫)ㆍ윤자운(尹子雲)ㆍ이효장(李孝長)ㆍ이인전(李仁全)ㆍ유자문(柳子文)ㆍ김효우(金孝宇)ㆍ김용(金勇)ㆍ한서봉(韓瑞鳳)ㆍ오창백(吳昌伯)이다. 단종(端宗) 2년(1454)에 처음으로 간행해서 중외에 널리 반포하였다.
또 살펴보건대, 또한 정도전(鄭道傳), 정총(鄭摠) 등이 찬수한 《고려국사(高麗國史)》 37권이 있다. 이것은 바로 태조조에 정도전 등에게 명하여 편년체(編年體)의 방식으로 편찬하였다가 태종조에 와서 다시 유신(儒臣)들에게 명하여 교정한 것인데, 정인지가 올린 전문(箋文)에서 “작자가 한둘이 아니었으나 사서(史書)를 끝내 완성하지 못하였습니다.”고 한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정가신(鄭可臣)의 《천추금경록(千秋金鏡錄)》
○ 고려의 정가신이 세자를 따라서 원나라에 갔을 때, 자단전(紫檀殿)에서 소대(召對)하고는 시를 읊게 하였다. 정가신은 동국에 있으면서 《천추금경록》을 찬하였다. 《일하구문(日下舊聞)》
살펴보건대, 《고려사》의 정가신열전을 보면, 정가신의 자(字)는 헌지(獻之)이고 나주인(羅州人)이며, 관직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고 일찍이 《천추금경록》을 찬하였다. 또 세가(世家)를 보면, 공민왕 20년(1371) 4월 계유에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 이인복(李仁復)과 이색(李穡) 등에게 명하여 고려의 《천추금경록》을 증수(增修)하게 하였다.

민지(閔漬)의 《세대편년절요(世代編年節要)》
○ 민지가 정가신의 《천추금경록》을 증수(增修)하고는 《세대편년절요》라고 이름하였는데, 7권으로 되어 있다. 《상동》
살펴보건대, 《고려사》 민지열전을 보면, 민지의 자는 용연(龍涎)이고 여흥인(驪興人)인데, 충렬왕이 일찍이 민지에게 명하여 정가신이 찬한 《천추금경록》을 증수하게 하였다. 그 뒤에 권보(權溥)와 함께 교정하여 완성하고는 《세대편년절요》라고 이름한 다음 올렸다. 경호대왕(景虎大王)부터 원왕(元王)에 이르기까지를 7권으로 나누어 만들고 세계도(世系圖)와 함께 올렸다.

고려의 《편년강목(編年綱目)》
○ 민지가 또 본국의 《편년강목》 42권을 편찬하였는데, 애석하게도 그 책을 얻어볼 수가 없다. 《상동》
살펴보건대, 《고려사》 민지열전을 보면, 민지가 또 고려의 《편년강목》을 찬하였는데, 위로는 국조(國祖)인 문덕대왕(文德大王)부터 시작해서 아래로 고종(高宗)에 이르기까지를 서술하였으며, 책은 총 42권인데, 소목(昭穆)에 대한 논은 《편년절요》와 다르다. 또 충숙왕세가(忠肅王世家)를 보면, 4월 경자에 검교첨의정승(檢校僉議政丞) 민지가 고려의 《편년강목》을 찬하여 올렸다. 또 충목왕세가(忠穆王世家)를 보면, 2년(1346) 10월에 이제현(李齊賢), 안축(安軸), 이곡(李穀), 안진(安震), 이인복(李仁復)에게 명하여 《편년강목》을 증수해서 찬하여 올리게 하였다.

고려의 《고금록(古今錄)》
○ 고려에서 기록한 《고금록》에, “대요(大遼) 통화(統和) 12년(994, 성종13)에 비로소 역법(曆法)을 고치고 정삭(正朔)을 반포하였다.” 하였다. 《요사(遼史)》
살펴보건대, 《고려사》 박인량열전(朴寅亮列傳)을 보면, 박인량은 문종조에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문사(文詞)가 고상하고 아름다워 남조(南朝)와 북조(北朝)에 올리는 고주(告奏)와 표장(表狀)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으며, 일찍이 《고금록》 10권을 찬하여 비부(祕府)에 보관하였다. 또 세가를 보면, 충렬왕 10년(1284) 6월 병자에 감수국사(監修國史) 원부(元傅), 허공(許珙), 한강(韓康) -나의 선조인 문혜공(文惠公)이다.- 등으로 하여금 《고금록》을 찬하게 하였는데, 10월에 이르러서 책을 완성하였으며, 공민왕 6년(1357) 윤8월 을사에 이인복(李仁復)에게 명하여 《고문록(古文錄)》을 편수하게 하였다. 그렇다면 《요사(遼史)》에서 칭한 바는 바로 박인량이 찬한 책이다.

서거정(徐居正)의 《동국통감(東國通鑑)》
○ 외국의 서책으로는 오직 고려에서 저술한 것만이 가끔 중국으로 유입되었는데, 정인지의 《고려사》, 신숙주의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서부터 《동국통감》이나 《동국사략(東國史略)》 등 여러 책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을 고증할 수가 있다. 《폭서정집(曝書亭集)》
○ 《동국통감》 56권은 조선의 서거정 등이 찬수한 것으로, 삼한(三韓)의 시종(始終)을 기술한 책인바, 그 사이에는 가끔 일본에 대한 사실을 기록하여 드러내었는데, 오직 한스러운 것은 근대(近代)의 일에 대해서는 하찮은 일까지 기록하였으면서 상대(上代)의 일에 대해서는 큰일도 대부분 빠뜨린 것이다. 《이칭일본전(異稱日本傳)》
살펴보건대, 《동국통감》 57권은 성화(成化) 21년(1485), 우리 성종대왕 16년 을사 7월 26일에 순성명량좌리 공신(純誠明亮佐理功臣) 숭정대부(崇政大夫) 달성군(達城君)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 서거정 등이 교지를 받들어서 찬한 다음 전문(箋文)을 올려 진헌하였다. 이 책을 찬집(撰輯)한 여러 신하는 달성군(達城君) 서거정(徐居正), 광원군(廣原君) 이극돈(李克墩), 행 호군(行護軍) 정효항(鄭孝恒), 참의 손비장(孫比長), 행 호군 이숙감(李淑瑊), 전 도사(都事) 김화(金澕), 교리(校理) 이승녕(李承寧), 사의(司議) 표연말(表沿沫), 전적(典籍) 최보(崔溥), 박사(博士) 유인홍(柳仁洪) 등 10인인데, 이극돈이 서문을 짓고 서명하기를, “순성좌리 공신(純誠佐理功臣) 가선대부(嘉善大夫) 광원군(廣原君) 겸 동지의금부사 세자우부빈객(兼同知義禁府事世子右副賓客) 신(臣) 이극돈은 삼가 서(序)합니다.” 하였다.

《조선사략(朝鮮史略)》
○ 《조선사략》은 12권이다. 이 책을 찬한 사람의 성명은 드러나지 않았으며, 편년체(編年體)의 체제를 모방하여 조선 제국(諸國)의 흥폐(興廢)의 시말을 기록하고 사신(史臣)의 사론(史論)을 붙였다. 첫 권에는 단군(檀君), 기자(箕子) 및 삼국이 처음 선 것을 기록하였으며, 2권에서 4권까지는 신라(新羅)를 기록하였고, 5권에서 12권까지는 고려(高麗)를 기록하였는데, 기년(紀年)은 요(堯) 임금 무진년부터 시작하였다. 《절강서목(浙江書目)》
○ 《조선사략》은 6권이다. -절강(浙江)의 포사공(鮑士恭)의 가장본(家藏本)이다.- 일명 《동국사략(東國史略)》이라 하며, 찬한 사람의 이름은 드러나 있지 않다. 바로 명나라 때 조선 사람이 그 나라의 치란과 흥폐의 사실을 기록한 것인데, 단군(檀君)에서 시작하여 고려의 공양왕 왕요(王瑤)에서 끝났다. 신라의 박씨(朴氏) 이전은 소략하고 고려 왕씨(王氏) 이후는 모두 편년체로 기재하였는데, 사적(事蹟)이 자못 체제를 갖추었다. 그리고 이성계(李成桂), 이방원(李芳遠)을 태조(太祖), 태종(太宗)으로 칭하였으니, 이는 그 신하들의 말이다. 또 간간이 사신의 사론과 역년도(歷年圖) 등을 붙였다.
대개 정인지의 《고려사》는 기전체(紀傳體)를 모방하였고, 이 책은 편년체를 모방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나라에서는 이 두 가지가 유포되어 있다. 전증(錢曾)의 《독서민구기(讀書敏求記)》를 보면, 왕씨(王氏)의 유신(遺臣)인 정몽주(鄭夢周) 등의 일에 대해서 그 사실을 없애지 않은 것을 가지고 양사(良史)라고 하였다. 지금 일을 서술한 것이 자세한가 소략한가를 보니, 비록 체요(體要)에 잘 부합되지는 않으나, 유문(遺聞)을 모아 편집한 것이 자못 잘 갖추어져 있는바, 일을 열거한 외국의 전(傳)을 보는 자들이 역시 이를 보고 참고할 수가 있다.
책 끝에는 만력 경술년(1610, 광해군2)에 쓴 조기미(趙琦美)의 발문(跋文)이 있는데, 거기에 “풍중영(馮仲纓)의 집에서 빌려다가 기록하였다.”고 하였는바, 대개 왜(倭)가 조선을 함락하여 군사를 보내 조선을 구원할 때 얻은 본이다. 《사고전서총목(四庫全書總目)》
살펴보건대, 《동국사략》은 두 가지 본이 있다. 한 본은 태종 3년(1403) 계미에 권근(權近)에게 명하여 하륜(河崙), 이첨(李詹)과 같이 수찬(修撰)하여 올리게 한 것이고, 한 본은 세조 때 고령군(高靈君) 신숙주(申叔舟)가 찬한 것이다.

《대요사적(大遼事蹟)》
○ 고려에서 올린 《대요사적》에는 여러 왕들의 책문(冊文)이 실려 있으며, 월삭(月朔)이 자못 보이므로 인하여 첨부해서 기입하였다. 《요사(遼史)》
살펴보건대, 《대요사적》은 바로 고려에서 찬하여 요나라에 올린 것이다. 《고려사》를 보면, 충혜왕 4년(1343) 3월 임오에 원나라에서 직성사인(直省舍人) 실덕(實德)을 파견하여 송(宋), 요(遼), 금(金) 세 나라의 사적(事蹟)을 찾아가지고 갔는데, 바로 이 책이다.

신숙주의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
○ 주이존의 ‘《해동제국기》 발문’에,
“속국(屬國)들 가운데에는 오직 고려만이 역사책이 있어 《동국통감》, 《동국사략》이 있다. 그다음으로는 안남국(安南國) 사람들의 지략(志略)이 있으며, 일본의 《동감(東鑑)》과 같은 책들은 방언으로 써서 뜻을 알 수가 없다.
전에 망우(亡友) 종광한(鍾廣漢)이 《역대건원고(歷代建元考)》를 찬하면서 백성들이 처음 생긴 때부터 명나라 때까지 기록하였는데, 밖으로는 먼 외국까지 기록하였으며, 참호(僭號)까지도 모두 기록하였다. 그러다가 《동감》을 구하고서는 기쁨이 극에 달해 기록으로 남겨 드러내었다.
그러나 《동감》은 단지 그 나라 87년간의 일만을 기록하였을 뿐, 오히려 중간에 빠진 것이 많았다. 내가 뒤늦게 조선 사람 신숙주가 쓴 《해동제국기》를 얻었는데, 비록 완전한 책은 아니지만 일본의 군장(君長)들이 임금 자리를 이어받고 연호를 정한 것에 대해 주(周)나라 때부터 명나라 때에 이르기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에 이것을 취해 종광한이 남긴 책을 보충하였다. 그러자 일본의 국토 넓이와 8도(道) 66주(州)가 마치 눈앞에 쌀을 모아 놓은 것과 같고 산천이 눈앞에 있는 듯하였는바, 장홍(張洪)이나 설준(薛俊), 후계고(候繼高), 이언공(李言恭), 정약증(鄭若曾) 등이 서술한 것과 비교해 볼 때 훨씬 더 일목요연하였다.
신숙주의 자는 범옹(汎翁)이고 조선에서 벼슬하여 관직이 의정(議政)에 이르렀으며, 고령군(高靈君)에 봉해졌는데, 성화(成化) 7년(1471, 성종2) 12월에 이 책을 완성하였다.”
하였다. 《폭서정집(曝書亭集)》
○ 임회후(臨淮侯) 이언공(李言恭)이 《일본고(日本考)》를 찬하여 그 나라에 대해 기록하였는데, 토속(土俗)을 기록한 것이 자못 상세하다. 그러나 국왕들이 대를 전한 세계(世系)가 명확하지 못한바, 이 편들을 합하여 《해동제국기》와 비교해 보면, 신숙주가 요체를 얻은 것만 못하다. 《상동》
○ 신숙주가 성화 7년 12월에 국가의 명을 받아 《해동제국기》를 찬하였는데, 책을 완성하고는 서문을 지어 일본의 대서(代序)와 8도, 66주에 대해 기록한 것이 자못 상세하다. 《정지거시화(靜志居詩話)》
○ 명나라 성화 7년 신묘 겨울에 신숙주가 《해동제국기》의 서문을 지었는데, 이르기를,
“동해 가운데 자리 잡은 나라가 한둘이 아니나, 그 가운데에서 일본이 가장 오래되고 또 가장 큰 나라입니다. 그 땅은 흑룡강(黑龍江) 북쪽에서 시작하여 우리나라의 제주도 남쪽에까지 이르며, 유구국(琉球國)과 서로 접하여 있는바, 그 지세가 몹시 깁니다. 그 초창기에는 곳곳에서 모여 살면서 각자 나라를 이루고 있었는데, 주(周)나라 평왕(平王) 48년(기원전 772)에 그의 시조인 협야(狹野)가 군사를 일으켜 정벌하여 비로소 주군(州郡)을 설치하였습니다. 그러나 대신(大臣)들이 각자 점령하고 통치하였으니, 마치 중국의 봉건제도(封建制度)와 같아 그다지 심하게 통속(統屬)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의 습성은 강하고 사나우며 창칼을 잘 쓰고 배를 모는 데 익숙합니다. 우리나라와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고 있는바, 그들을 제대로 잘 무마한다면 예의를 차려 조빙(朝聘)할 것이고, 제대로 무마하지 못하면 함부로 노략질할 것입니다.”
하였다. 지금 살펴보건대, 협야는 협야존신무천황(狹野尊神武天皇)이다. 뒤에 천하를 평정하고 8주(洲)를 차지하였으므로 다시 호를 올려 신일본반여언존(神日本磐余彦尊)이라고 하였다. 기록한 전후 일본도(日本圖)는 잘못되어 참모습을 잃었으며, 그 외군(外郡)과 마을, 섬의 이름은 대부분 틀리게 전해졌다. 《이칭일본전》
살펴보건대, 《해동제국기》는 성화 신묘년, 즉 우리 성종 2년에 해동의 제국이 조빙하러 왕래한 예전 일과 관소(館所)나 음식 및 접대하는 규례를 찬수하도록 명하였는데, 그 나라의 지세를 그림으로 그리고, 세계(世系)의 시말과 풍속이 숭상하는 바에서부터 우리 사신을 접대하는 절목 등을 대충 서술하여 이를 모아 책으로 편집한 것이다. ○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에, “《해동제국기》에 이르기를, ‘도로는 일본의 이수(里數)를 썼는데, 그들의 1리는 우리나라의 10리에 준한다.’ 하였다.”고 인용하였다.

백제(百濟)의 지리서(地理書)
○ 일본 추고천황(推古天皇) 10년(602, 무왕3)에 백제국의 중 관륵(觀勒)이 와서 지리서를 바쳤다.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

고구려(高句麗)의 봉역도(封域圖)
○ 태종(太宗) 정관(貞觀) 2년(628, 영류왕11)에 고구려의 왕 고건무(高建武)가 사신을 파견하여 축하하고 아울러 봉역도를 바쳤다. 《구당서(舊唐書)》

고려의 지리도(地里圖)
○ 성종(聖宗) 통화(統和) 3년(985, 성종4) 7월 신축에 고려의 사신이 와서 고려의 지리도를 바쳤다. 《요사(遼史)》

조선의 《팔도지도(八道地圖)》
○ 조선의 김안국(金安國)이 대마도주(對馬島主)에게 보낸 편지에 ‘제포(薺浦)에 머물러 있는 왜인들이 난을 일으켰으므로 도주에게 보내니 그들의 죄를 다스리라.’ 하였는데, 내가 조선의 《팔도지도》를 구해서 조사해 보니, 제포는 경상도 웅천(熊川)에서 남쪽으로 5리 되는 곳에 있었다. 《이칭일본전》

《조선지(朝鮮志)》
○ 《조선지》 2권은 조선의 소 찬성(蘇贊成)이 편찬하였다. 가정(嘉靖) 연간에 시독(侍讀) 화찰(華察)이 사신으로 나갔을 때 그 나라에서 찬성에게 명하여 이 책을 만들어 바치게 하였는데, 나라 안의 산천(山川), 고적(古蹟), 풍속(風俗)을 갖추어 기록하였다. 권의 끝에는 조자(跳咨)의 발문이 있다. 《절강서목(浙江書目)》 ○ 살펴보건대, 소 찬성은 바로 소세양(蘇世讓)이다.
○ 《조선지》는 2권이다. -절강(浙江) 범무주(范懋柱)의 집에 있는 천일각(天一閣) 소장본(所藏本)이다.- 찬한 자의 이름은 드러나 있지 않으며, 책 속에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를 칭하였으니 명나라 때 만들어진 책이다.
권의 앞머리에 강역(疆域)의 연혁(沿革)을 대략 서술하였으나 제목을 붙이지 않았으며, 그 아래에 6항목의 대강(大綱)을 나누어 경(經)으로 삼았는데, 경도(京都), 풍속(風俗), 고도(古都), 고적(古迹), 산천(山川), 누대(樓臺)이다. 소속된 8도(道)를 위(緯)로 삼았는데, 가운데를 경기(京畿), 서남쪽을 충청(忠淸), 동남쪽을 경상(慶尙), 남쪽을 전라(全羅), 서쪽을 황해(黃海), 동쪽을 강원(江源) -살펴보건대, 마땅히 강원(江原)으로 되어야 한다.-, 서북쪽을 평안(平安), 동북쪽을 함경(咸鏡)이라 하였다.
모두가 중국의 지지(地志)와 대략 같은데, 오직 경도(京都)에는 궁전(宮殿)과 조서(曹署)만 기재하고 성시(城市), 풍속(風俗)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으며, 대부분 그 나라의 전제(典制)를 기록하였는데, 고사(故事)와 뒤섞어서 한 편을 만들었다. 또 여러 도에는 모두 사지팔도(四至八到)가 없으며, 고적에는 대부분 신기하고 괴이한 일이 뒤섞여 있어서 자못 소설(小說)과 같은바, 체례(體例)에 있어서는 모두 흡족하지 못하다. 그러나 유문(遺聞)과 쇄사(鎖事)가 있어 중국 측의 사서(史書)에 상세하게 나오지 않는 것이 가끔씩 들어 있어서 고증하는 참고 자료로 삼기에 충분하다. 서술한 것 역시 고상하고 깨끗하여 쓸데없이 길기만 하고 통서(統緖)가 없는 여러 주군(州郡)들의 여도(輿圖)와 비교해 볼 적에는 오히려 낫다.
송(宋)나라 왕운(王雲)이 일찍이 《계림지(鷄林志)》를 찬하였으나 그 책이 전해지지 않고 있고,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은 산천(山川)과 고적(古跡)에 대해서는 역시 소략하다. 이 책은 그 나라 사람이 서술한 데에서 나왔으니 마땅히 사실 그대로를 서술하였을 것이다. 《사고전서총목》
○ 《조선국지(朝鮮國志)》 -범무주의 천일각 소장본이다.- 는 찬한 사람의 성명이 드러나 있지 않다. 보존되어 있는 것으로 오직 경도(京都), 풍속(風俗), 산천(山川), 고도(古都), 고적(古跡) 다섯 부문만 남아 있다. 그 내용 중에 ‘우리 강헌왕[我康獻王]’이라고 칭한 것으로 보아 조선 사람이 지은 것임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명일통지(明一統志)》를 인용하면서 ‘대명(大明)’이라고 칭하였으니 명나라 때 지은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또 왕씨(王氏)의 여러 왕들을 칭하면서 고려 왕(高麗王)이라고 칭하였으니 명나라 중엽에 이씨가 나라를 차지한 다음 조선(朝鮮)이라고 국호를 개칭한 뒤에 지은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상동》
살펴보건대, 《조선지》와 《조선국지》는 같은 책이며, 지금의 《여지승람(輿地勝覽)》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낙랑(樂浪)의 《설령(挈令)》
○ 낙랑의 《설령》에는 직(織) 자를 쓰면서 실사변[糸]에 식(式)을 붙여 썼다. 신(臣) 현(鉉) 등이 말하기를, “《설령》은 율령(律令)에 관한 책이다.” 하였다. 《설문(說文)》

최항(崔恒)의 《경국대전(經國大典)》
○ 송하견림(松下見林)이 말하기를, “《경국대전》은 조선의 영성부원군(寧城府院君) 최항 등 9인이 찬한 책인데, 제3권 예전(禮典) 사자조(寫字條)에, ‘왜학(倭學)《이로파(伊路波)》, 《소식(消息)》, 《서격(書格)》, 《노걸대(老乞大)》, 《동자교(童子敎)》, 《잡어(雜語)》, 《본초(本草)》, 《의론(議論)》, 《통신(通信)》, 《구양물어(鳩養物語)》, 《정훈왕래(庭訓往來)》, 《응영기(應永記)》, 《잡필(雜筆)》, 《부사(富士)》로 한다.’ 하였다. 지금 살펴보건대, 《이로파》, 《소식》 이하는 대부분 국속(國俗)에 관한 비천한 책이고, 호어(胡語)에 관한 책인 《노걸대》가 뒤섞여 있어서 애석하게도 조선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 일본의 국사(國史)에 관한 여러 책을 알지 못하게 하였다.” 하였다. 《이칭일본전》

이극증(李克增)의 《대전속록(大典續錄)》
○ 송하견림이 말하기를, “《대전속록》은 조선의 광천군(廣川君) 이극증 등 8인이 함께 찬한 책인데, 제3권 예전(禮典)의 대사객조(待使客條)에 왜인을 접대하는 규례가 있고, 제5권 형전(刑典) 금제조(禁制條)에 ‘왜인들이 가지고 오는 잡물(雜物)을 포소(浦所)에서 몰래 무역한 사람 및 그 실상을 알고도 고발하지 않은 통사(通事)는 《경국대전》의 잠매금물조(潛賣禁物條)에 의거하여 논죄한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하였다. 《상동》
살펴보건대, 《경국대전》은 세조조에 편찬하도록 명하여 성종 2년(1471) 신묘에 이르러서 완성하였고, 《대전속록》은 성종 24년(1493) 계축에 반포하였고, 중종(中宗) 38년(1543) 계묘에는 또 《후속록(後續錄)》을 반포하였으며, 정조(正祖) 갑인년(1794, 정조18)에 이르러서 《대전통편(大典通編)》이 완성되어 율령(律令)에 관한 책이 크게 갖추어졌다.

설순(偰循)의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 송하견림이 말하기를, “《삼강행실도》는 조선의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 설순이 편찬하였다.” 하였다. 《상동》

신용개(申用漑)의 《속삼강행실도(續三綱行實圖)》
○ 남곤(南袞)은 이조 참판을 지냈는데, 정덕(正德) 9년(1514, 중종9)에 《삼강행실도》를 다시 편집하였다. 《열조시집(列朝詩集)》
○ 송하견림이 말하기를, “《속삼강행실도》는 조선의 신용개 등이 찬하였다.” 하였다. 《이칭일본전》
살펴보건대, 정덕 9년은 바로 중종 9년 갑술인데, 신용개가 남곤 등과 함께 《삼강행실도》를 다시 편집하였다.

김부식(金富軾)의 《봉사어록(奉使語錄)》
○ 고려 김부식의 《봉사어록》은 1권이다. 《송사(宋史)》

유성룡(柳成龍)의 《징비록(徵毖錄)》
○ 송하견림이 말하기를, “《징비록》은 조선의 체찰사(體察使) 유성룡이 지었다.” 하였다. 《이칭일본전》

이상은 사류(史類)이다.

권근(權近)의 《입학도설(入學圖說)》
○ 《고려사》를 보면, 권근의 자는 사숙(思叔)이고, 신우(辛禑) 때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를 지냈으며, 《입학도설》을 지었다. 《경의고(經義考)》

고려의 《박학기(博學記)》
○ 주(周)나라 세종(世宗) 때 수부랑(水部郞) 한언경(韓彦卿)이 고려에 사신으로 갔다 왔다. 한언경이 《박학기》라는 책 하나가 있는 것을 보고는 3백여 가지의 일을 베꼈는데, 지금 천부(天部) 가운데에서 7가지 일을 초록(抄錄)하였는바, ‘하늘을 가려 걷기에 장애가 되는 것[迷空步障] -안개[霧]를 가리킨다.-, 두려운 가루[威屑] -서리[霜]를 가리킨다.-, 물이 맺힌 것[敎水] -이슬[露]을 가리킨다.-, 얼음의 아들[冰子] -우박[雹]을 가리킨다.-, 공기의 어미[氣母] -무지개[虹]를 가리킨다.-, 금가루를 뿌린 것[屑金] -별[星]을 가리킨다.-, 가을 하늘의 큰 노인[秋明大老] -은하수[天河]를 가리킨다.-’이다. 《청이록(淸異錄)》

김시습(金時習)의 《유금오록(游金鰲錄)》과 《관동일록(關東日錄)》
○ 조선의 《매월당시권(梅月堂詩卷)》은 어느 사람이 지었는지 모른다. 그 안에는 《유금오록》과 《관동일록》이 있는데, 대부분 신라의 고사(故事)를 기록하였다. 《열조시집》
살펴보건대, 김시습의 자는 열경(悅卿)이고 호는 매월당(梅月堂)이며, 단종조 사람이다.

백제의 천문서(天文書)
○ 일본 추고천황(推古天皇) 10년(602, 무왕3)에 백제국에서 승려 관륵(觀勒)을 보내어 천문서를 보내자, 대반촌주(大伴村主) 고총(高聰)으로 하여금 천문(天文)을 배우게 하였다.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

고려사(高麗師)의 《성요서(星曜書)》
○ 《성요서》는 고려의 국사(國師)가 찬한 것인데, 국사에게서 얻었다. 《담연거사집(湛然居士集)》

《고려일력(高麗日曆)》
○ 수술가류(數術家類)에는 《고려일력》 1권이 있다. 《수초당서목(遂初堂書目)》

《중간신응경(重刊神應經)》
○ 한계희(韓繼禧) -나의 선조인 문정공(文靖公)이다.- 가 지은 《중간신응경》의 서문에 이르기를,
“삼가 생각건대, 우리 주상 전하 6년(1475)에 예조에 명하여 의교(醫敎)를 엄하게 하는 데 관해 신칙하고 침구전문법(鍼灸專門法)을 설치하였습니다. 그러고는 의술에 뛰어난 자를 선발하여 스승으로 삼고 자질이 밝고 민첩한 자를 뽑아 제자로 삼아, 권장하고 격려하는 법을 모두 갖추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일본의 승려 양심(良心)이란 자가 《신응경(神應經)》을 가지고 와서 바쳤으며, 겸하여 일본의 신의(神醫)인 화개씨(和介氏)단파씨(丹波氏)의 종기를 치료하는 팔혈법(八穴法)을 전하였습니다.
비록 팔혈법을 시험해 보지는 않았으나, 《신응경》은 전수된 것이 멀리 근원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논한 절량보사법(折量補瀉法)은 모두 옛날 현인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이며, 혈(穴)을 취한 것도 대부분 옛사람이 미진하였던 부분을 계발한 것들이며, 혈을 드러낸 것은 모두 요체를 뽑아내어 많은 효험을 얻은 것들입니다. 글은 간략하면서도 일이 모두 갖추어져 있는바, 사람들이 책을 펼쳐 보면 잠깐 사이에 증세와 혈이 눈앞에 분명하게 보이게 하였습니다. 이에 성상께서는 가상하게 여겨 팔혈법을 《신응경》 끝에 붙여 인쇄해서 널리 배포하게 하였으며, 영구히 전하도록 하였습니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의료(醫療)의 처방은 약이(藥餌)와 침구(鍼灸)를 어느 한쪽만 치우치게 하거나 폐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약재는 우리나라에서 생산되지 않는 것이 자못 많은바, 대개 중국에서 구하더라도 또 모두 중국에서 산출되는 것들은 아닌 탓에 시장을 전전하면서 구하더라도 구하기가 몹시 어려운 것들입니다. 그러니 어찌 모두 진짜와 가짜, 묵은 것과 새것을 가릴 수 있겠습니까. 가난한 아랫사람들이나 먼 외방에 사는 사람들은 역시 두루 쓰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직 침과 뜸의 처방은 재물을 허비하면서 멀리까지 가서 구하는 수고나 채집하여 말리고 조제하는 어려움이 없이 침 한 방 뜸 한 번에 모든 처방이 다 가능합니다. 그리하여 손바닥 사이에서 운용하고 담소하는 사이에 판별되어 빈부귀천이나 원근 완급에 마땅치 않은 곳이 없습니다. 더구나 효험을 보는 것이 항상 약으로는 미칠 수 없는 곳에 있어서 공용(功用)의 신묘함을 다 말할 수조차 없는 데이겠습니까. 그런데도 용렬한 의원이 이를 잘 알지 못하고 비천한 것으로 여기며, 심지어는 모욕하면서 쓰지 않으려고까지 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병든 자들이 생사(生死)와 요수(夭壽)를 모두 무당이나 음사(淫祀)에 맡기고 있으니, 어찌 애통하지 않겠습니까.
성상께서는 이런 점을 민망하게 여기시어 전문(專門)을 설치하고 과정(課程)을 더욱 엄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침 먼 외방에서 와서 바친 것이 진기하여 완상할 만한 이상한 물품이 아니라, 백성들을 구제하고 세상을 구제할 수 있는 신묘한 처방이었는바, 이를 기약하지도 않았는데 가지고 와 바쳐 백성들을 아끼고 만물을 사랑하는 성상의 성대한 덕에 부응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습니까.
성화(成化) 10년(1474, 성종5) 11월 21일에 추충정난익대순성명량경제좌리 공신(推忠定難翊戴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 숭록대부(崇祿大夫) 서평군(西平君) 신(臣) 한모(韓某)는 삼가 서합니다.”
하였다. 《이칭일본전》
○ 송하견림(松下見林)이 말하기를, “명나라 헌종(憲宗) 성화(成化) 9년(1473, 성종4)은 일본의 후토어문원(後土御門院) 문명(文明) 5년인데, 이때 능등국 자사(能登國刺史) 전산의통(畠山義統)이 신농국(信濃國) 사람 양심(良心)을 파견하여 조선에 사신으로 가게 하였다. 양심은 중이면서 의원인 자이다. 화개씨(和介氏)는 화기씨(和氣氏)로, 화기시우(和氣時雨)와 단파강뢰(丹波康賴)가 모두 의술로 이름을 드날렸으며, 자손들이 가업을 이어받아 의술이 더욱더 정밀해졌다. 대개 삼장지방(三藏之方)이나 팔처구법(八處灸法)은 모두 신대(神代) 때부터 전해져 온 법이다.” 하였다. 《상동》

허준(許浚)의 《동의보감(東醫寶鑑)》
○ 《동의보감》은 바로 명나라 때 조선 사람 양평군(陽平君) 허준이 찬한 책이다.
살펴보건대, 조선의 풍속은 본디 문자를 알고 책 읽기를 좋아한다. 그런 데다가 허씨(許氏)는 또 세족(世族)으로, 만력(萬曆) 연간에 허봉(許篈)과 허성(許筬), 허균(許筠) 삼 형제가 모두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이들의 누이동생 경번(景樊)은 재주와 명성이 오빠들보다 위로, 중국 북방의 여러 나라들 가운데에서 가장 걸출한 집안이다.
동의(東醫)라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나라가 동쪽에 있으므로 동쪽의 의술이란 뜻에서 동의라고 한 것이다. 옛날에 이동원(李東垣)이 《십서(十書)》를 지어 북의(北醫)라는 이름으로 강주(江州)와 제주(淛州)에서 행세하였고, 주단계(朱丹溪)가 《심법(心法)》을 지어 남의(南醫)라는 이름으로 관중(關中)에서 이름을 드러냈다. 지금 양평군은 궁벽한 번방에 살면서도 능히 책을 지어 중국에서 행하니, 전하기에 족한 말은 다른 지역에서도 충분히 전해지는 것이다.
보감(寶鑑)이라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햇빛이 뚫고 나오고 구름이 흩어지는 것처럼 몸 안이 속속들이 다 보이게 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책을 펴면 환하게 빛이 비치는 것이 거울과 같게 해서이다. 옛날에 나익지(羅益之)가 《위생보감(衛生寶鑑)》을 짓고 공신(龔信)이 《고금의감(古今醫鑑)》을 지어 모두 감(鑑)으로써 이름을 삼으면서 과장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가만히 논해 보건대, 사람은 오장(五臟)이 있고 병은 칠정(七情)에 그친다. 그 사이에는 품부받은 것에는 치우치고 온전한 차이가 있고, 감염된 정도에는 깊고 얕은 차이가 있으며, 증세에는 통하고 막힌 차이가 있다. 그리고 맥박이 뛰는 것을 짚어 보면 부맥(浮脈), 중맥(中脈), 침맥(沈脈)의 삼부(三部)가 있는바, 이를 상세히 살펴보면 밭이랑을 가르는 것과 같아 뛰어넘을 수가 없으며, 횃불을 밝히는 것과 같아서 가릴 수가 없는 것이다.
대황(大黃)이 체한 것을 내리게 한다는 것만 알고 속을 차게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며, 부자(附子)가 허한 기력을 보한다는 것만 알고 독을 남긴다는 것을 모르면 구제할 바가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지인(至人)은 병이 발생하기 전에 치료하고, 이미 병이 생긴 이후에는 치료하지 않는 법으로, 병이 이미 발생한 뒤에야 비로소 치료한다면 이는 의술에 있어서 하등에 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병이 든 이후에도 용렬한 의원에게 내맡기니 어찌 치료될 리가 있겠는가. 심지어 이익을 생각하는 자는 사람의 병을 낫게 하는 것을 공으로 여기고, 처음 의술에 종사하는 자는 사람을 죽이면서 의술을 배우기까지 한다. 그러니 《대역(大易)》의 약을 쓰지 말라는 점괘남쪽 사람들의 항심(恒心)이 없으면 의원도 될 수가 없다는 경계는 일찌감치 이런 무리들을 위하여 가리어진 것을 제거해 준 것이다.
편작(扁鵲)이 말하기를, “사람들의 병통은 질병이 많은 것이 병통이고, 의원들의 병통은 병을 치료하는 방도가 부족한 것이 병통이다.” 하였다. 그러나 헌기(軒岐) 이래로 대대로 명의(名醫)가 나와서 지금까지 저술한 의서(醫書)가 수레에 실어 운반하면 소가 땀을 흘리고, 방 안에 쌓으면 마룻대까지 닿을 정도로 많다. 그러니 의서가 적은 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의술에는 효험이 있는 것과 효험이 없는 것이 있으니, 이 어찌 옛사람들이 각자의 소견을 가지고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의술이 정밀하지 않으면 말이 상세하지 못하고, 한 가지에 빠져 들면 도를 해치게 되는 법이니, 이는 사람의 병을 치료하고자 하면서 사람의 마음을 치료하지 않고, 사람의 마음을 치료하고자 하면서 사람의 뜻을 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 이 《동의보감》을 보니 앞부분은 내경편(內景篇)으로 병의 근원에 대해 설명하였고, 그다음은 외형편(外形篇)으로 몸의 겉에 생기는 병에 대해 설명하였으며, 그다음은 잡병편(雜病篇)으로 증세에 대한 처방을 설명하였고, 끝 부분은 탕구편(湯灸篇)으로 처방을 설명하였다. 《동의보감》에서 인용한 서목(書目)은 《천원옥책(天元玉冊)》에서부터 《의방집략(醫方集略)》에 이르기까지 총 80여 종인데, 대부분이 우리 중국의 의서이며 동방에서 찬한 의서는 3종에 불과할 뿐이다.
허준은 옛사람들이 이루어 놓은 의술을 따르면서 능히 오묘한 이치를 체득하여 밝혔는바, 둘 사이에서 완전하지 못한 점을 보충하여 천하에 따스한 햇볕을 퍼뜨렸다. 책을 완성하고는 대궐에 바쳤는데, 도리어 책이 비각(祕閣)에 보관되게 되어 세상 사람들이 구해 볼 수가 없었다.
전 차사(醝使)인 산좌(山左) 사람 왕공(王公)이 절도사(節度使)가 되어 월(粵) 지방에 와서는 의원들이 잘못 처방하는 것을 민망하게 여겨 사람을 파견해 도성에 가서 초록(抄錄)해 오게 하였는데, 미처 간행하기도 전에 차질이 생기게 되었다. 순덕(順德)의 명경과(明經科) 출신인 좌한문(左翰文)은 내가 총각 때부터 사귄 사람인데, 《동의보감》을 간행해서 널리 퍼뜨릴 생각을 품고서 3백여 민(緡)을 쓰면서도 조금도 아까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대개 그 마음은 사람들을 구제하고 사물을 이롭게 하는 마음이고, 그 일은 음(陰)과 양(陽)을 조섭(調燮)하는 일이다. 천하의 보배는 천하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 마땅한 법이니, 좌한문은 대단히 어진 사람이라고 하겠다.
판각을 다 마치고는 나에게 서문을 써 달라고 부탁하기에, 드디어 기쁜 마음으로 책 끝에다가 쓴다. 원임(原任) 호남소양예릉흥녕계양현사(湖南邵陽醴陵興寧桂陽縣事)인 반우(番禺)의 능어(凌魚)는 찬한다. 《동의보감 서문》
살펴보건대, 《동의보감》은 선묘조(宣廟朝) 때 허준에게 명해서 찬집(撰輯)한 것으로, 모두 25권인데, 내경(內景) 4편, 외경(外景) 4편, 잡병(雜病) 11편, 탕액(湯液) 3편, 침구(鍼灸) 1편, 목록(目錄) 2편으로 되어 있다.

고구려의 비기(祕記)
○ 고종(高宗) 총장(總章) 원년(668)에 이적(李勣)이 고구려를 정벌하였는데, 가언충(賈言忠)이 말하기를, “고구려의 비기에 이르기를, ‘900년이 못 되어 80대장(大將)이 이를 멸할 것이다.’ 하였는데, 고씨(高氏)는 한(漢) 때부터 나라를 세워 지금 900년이 되었고, 이적의 나이가 지금 80입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꼭 이겨 다시는 거병(擧兵)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비기는 바로 진(秦)나라의 녹도(錄圖)나 한나라의 부참(符讖)과 같은 것이다.

이상은 자류(子類)이다.

최치원(崔致遠)의 《사륙문(四六文)》과 《계원필경(桂苑筆畊)》
○ 최치원은 고려(高麗) 사람으로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였으며, 고변(高騈)을 따라 회남(淮南)에서 종군하였다. 《사륙문》 1권을 저술하였으며, 또 《계원필경》 20권이 있다. 《신당서(新唐書)》
○ 최치원은 《사륙문》 1권이 있으며, 당(唐)나라 사람이다. 또 《계원필경》 20권이 있는바, 당나라 최치원의 표전(表牋)과 격문(檄文)이다. 《통지예문략(通志藝文略)》
살펴보건대, 최치원의 자는 고운(孤雲)이며, 신라 사람이다. 나이 12세 때 당나라에 들어가 건부(乾符) 원년(874, 경문왕14) 갑오에 배찬(裴瓚)이 주관한 과거에서 급제하여 시어사(侍御史)가 되었고, 고변의 행영(行營)에서 종사(從事)하면서 황소(黃巢)에게 보내는 격문(檄文)을 지었다. 대개 《당서》가 송나라 때 만들어졌으므로 신라를 고려라고 한 것이다.

조운흘(趙云仡)의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
○ 송하견림(松下見林)이 말하기를, “《삼한시귀감》 상권과 하권은 석간(石澗) 조현흘(趙玄仡)이 정선(精選)하고 졸옹(拙翁) 최해(崔瀣)가 비점(批點)하였다.” 하였다. 《이칭일본전》 ○ 살펴보건대, 조현흘은 마땅히 조운흘로 되어야 한다. 인물전(人物傳)에 상세히 나온다.

《서상잡영(西上雜咏)》
○ 고려의 시 3권이 있다. 조씨(晁氏)가 말하기를, “원풍(元豐) 연간에 고려에서 최사제(崔思齊), 이자위(李子威), 고호(高號), 강수평(康壽平), 이수(李穗)를 보내어 조공하게 하였는데, 상원일(上元日)에 동쪽 궁궐에서 잔치를 하였다. 신종(神宗)이 어제시(御製詩)를 관반(館伴)인 필중행(畢仲行)에게 하사하자, 필중행과 이들 5인 및 양부(兩府)의 신하들이 모두 화답하여 올렸다. 그 뒤에 사인(使人) 김제(金稊), 박인량(朴寅亮), 배□(裵□), 이강손(李絳孫), 노류(盧柳), 김화진(金化珍) 등이 도중에서 70여 편을 창화(唱和)하여 스스로 편찬한 다음 《서상잡영》이라고 이름하였는데, 이강손이 서문을 지었다. 《문헌통고(文獻通考)》

설손(偰遜)의 《근사재일고(近思齋逸藁)》
○ 설손은 회골(回鶻) 사람으로 집안 대대로 원나라에서 벼슬하였다. 순제(順帝) 때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여 한림(翰林)을 역임하고 단본당 정자(端本堂正字)에 선발되었다. 공민왕 7년(1358)에 병란을 피하여 동쪽으로 가 부원후(富原侯)에 봉해졌으며, 《근사재일고》를 지었다. 《명시종(明詩綜)》

정몽주(鄭夢周)의 《포은집(圃隱集)》
○ 정몽주의 자는 달가(達可)이고 고려 영일현(迎日縣) 사람이다. 공민왕 9년(1360)에 과거에 응시해서 1등으로 급제하였으며, 여러 관직을 역임한 다음 정당문학(政堂文學), 진현관 대제학(進賢館大提學)에 올랐다. 《포은집》이 있다. 《상동》 ○ 이 이하의 여러 사람들의 관작과 관향 및 사실은 인물전에 상세히 나온다.
○ 송하견림이 말하기를, “《포은집》은 정몽주가 지은 것이다. 정몽주는 일찍이 일본에 사신으로 왔었는데, 권채(權採)의 《포은집》 서문에 이르기를, ‘서쪽으로 경사(京師)에 조회하고, 동쪽으로 일본에 사신으로 갔었다.’ 하였다.” 하였다. 《이칭일본전》

《포은봉사고(圃隱奉使藁)》
○ 송하견림이 말하기를, “정몽주는 홍무(洪武) 정사년(1377, 우왕3)에 우리 일본에 사신으로 왔다가 《포은봉사고》를 지었는데, 좋은 작품이 많다. 또 《포은집》이 있는데, 보지는 못하였다.” 하였다. 《상동》

이색(李穡)의 《목은집(牧隱集)》
○ 이색의 자는 영숙(頴叔)이고, 정동성(征東省)의 향시(鄕試)에서 1등으로 급제하였으며, 다음 해에 원나라에 가서 정시(庭試)에 응시하여 2갑(甲)으로 진사시에 급제하였다. 여러 관직을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었고, 한산 백(韓山伯)에 봉해졌다. 《목은집》이 있다. 《명시종》

이숭인(李崇仁)의 《도은집(陶隱集)》
○ 이숭인의 자는 자안(子安)이고 경산부(京山府) 사람이다.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하였고, 관직이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에 이르렀다. 《도은집》이 있다. 《상동》
살펴보건대, 《해동예문고(海東藝文考)》에 이르기를, “《도은집》에는 황명(皇明)의 문화전 대학사(文華殿大學士) 장부(張溥)와 예부 시랑(禮部侍郞) 고손지(高巽志)가 지은 발문이 실려 있다.” 하였다.

허금(許錦)의 《야당집(野堂集)》
○ 조선의 허종(許琮)의 증조부인 허금은 자가 재중(在中)이며, 《야당집》이 있는데, 공용경(龔用卿)과 오희맹(吳希孟) 두 사람의 서문이 있다. 《정지거시화(靜志居詩話)》

김구용(金九容)의 《척약재집(惕若齋集)》
○ 김구용은 자가 경지(敬之)이고 안동(安東) 사람이다. 진사시에 급제하여 삼사 좌윤(三司左尹)에 제수되었다. 《척약재집》이 있다. 《명시종》

최해(崔瀣)의 《동문선(東文選)》
○ 고려는 문교(文敎)가 다른 나라들보다 훨씬 뛰어났는바, 일찍이 대사성을 지낸 계림인(鷄林人) 언명보(彦明父) 최해(崔瀣)가 원나라 이전의 시를 뽑아서 기록하고 이름을 《동인지문(東人之文)》이라고 하였는데, 모두 25권이다. 생각건대 반드시 볼만한 책일 것인데, 애석하게도 구해 볼 길이 없다. 《정지거시화》
살펴보건대, 동사(東史)를 보면, 최해는 자가 언명(彦明)이고 호가 졸재(拙齋)이며 계림 사람이다. 9세 때 능히 시를 지었고, 고려 충렬왕 계묘년(1303, 충렬왕29)에 박리(朴理)의 방(榜)에 급제하였으며, 그 뒤에 원나라 조정의 신유년(1321, 충숙왕8) 제과(製科)에 급제하였다. 관직이 성균관 대사성에 이르렀으며, 벼슬이 오르거나 깎이는 것으로 기뻐하거나 화내지 않으면서 시와 술로써 스스로를 즐겼다. 일찍이 우리나라 명현들이 지은 시를 뽑아 모은 다음 제목을 《동인지문》이라 하였는데, 모두 25권이다.

《속동문선(續東文選)》
○ 송하견림이 말하기를, “《동문선》은 130권이고 목록이 상, 중, 하 3권이다. 대개 탈간(脫簡)이 많은데, 목록 상권과 하권을 검색해 보면 제8권에 윤소종(尹紹宗)의 ‘이 상국이 왜구를 대파하고 군대의 위세를 떨치면서 환도한 것을 축하하다.[賀李相國大破倭寇振旅還都]’라는 시와 신숙주(申叔舟)의 ‘일본의 승려 수린의 시축에 제하다.[題日本僧壽藺詩軸]’라는 칠언 고시(七言古詩)가 있고, 제18권에 권근(權近)의 ‘일본의 승려 대유가 환국하는 것을 전송하다.[送日本釋大有還國]’라는 시와 최항(崔恒)의 ‘일본의 사에게 제하다.[題日本師]’라는 칠언 배율(七言排律)이 있고, 제88권에 이숭인(李崇仁)의 ‘정달가가 일본에 사신으로 가는 것을 전송하는 시와 서문[送鄭達可奉使日本詩序]’ 및 ‘일본의 천우상인이 환국하는 것을 전송하는 서문[送日本天祐上人還國序]’이 있는데, 지금은 모두 빠져 있다.” 하였다. 《이칭일본전》

권근(權近)의 《응제집(應制集)》
○ 주이존(朱彝尊)의 ‘고려 권 수재(權秀才)의 《응제집》 발문’에,
“고려의 수재 권근은 자가 사숙(思叔)이고 별호(別號)는 양촌(陽村)이다. 홍무 연간에 남경(南京)에 왔었는데, 고황제(高皇帝)께서 예의로써 접대하고 옷과 음식을 하사하였으며, 이어 시를 읊게 하였다. 그러자 양촌은 먼저 본국 흥폐의 전말과 사신으로 오면서 지나온 곳에 대해 읊었으며, 다음으로 본국 이합(離合)의 형세와 산하(山河)의 경치, 인국(隣國)의 정세에 대해 읊고, 겸하여 동인(東人)들이 감화를 받은 뜻에 대해 서술하였다. 시를 다 읊고 나자 정화(精華)가 환히 빛나고 소리가 쟁쟁하였다.
황제가 보고서는 칭탄하면서 인하여 유삼오(劉三吾), 허관(許觀), 경청(景淸), 대덕이(戴德彝), 장신(張信) 등에게 명하여 함께 남시루(南市樓), 북시루(北市樓), 내빈루(來賓樓), 중역루(重譯樓), 학명루(鶴鳴樓), 취선루(醉仙樓) 등을 유람하게 하였다. 황제가 또 3편의 어제시(御製詩)를 하사하였는데, 이는 홍무 병자년(1396, 태조5)의 일이었다.
건문(建文) 4년(1402, 태종2) 봄에 조선의 공정왕(恭定王) 이방원(李芳遠)이 지신사(知申事) 박석(朴錫)으로 하여금 의정부에 내려 판각하여 간행하게 하였다. 이에 가정대부(嘉靖大夫)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인 그 나라 사람 이첨(李詹) 및 그 나라에 사신으로 간 한림사관 병부주사(翰林史官兵部主事)인 금릉(金陵) 사람 단목효사(端木孝思)가 나란히 서문을 지었으며, 회남(淮南) 사람 육옹(陸顒)과 반이(番易) 사람 축맹헌(祝孟獻)이 그 뒤에다가 제시(題詩)하였다. 황제가 양촌에게 주루(酒樓)를 유람하도록 한 사실은 실록(實錄)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내가 《응제집》을 보니, 천순(天順) 원년(1457, 세조3)에 조선에서 간행한 본이었다.”
하였다. 《폭서정집(曝書亭集)》
○ 권근의 《응제집(應制集)》에 공경히 제하다.
황제의 어제시와 권근의 응제시는 합하여 한 질인데, 선배들이 제하거나 찬한 것이 상세하니, 내가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더구나 황제가 지은 어제시는 고금을 내리비추고 우주에 아득한 데이겠는가. 권근의 시어(詩語)도 역시 부드럽고 순하여 문체(文體)를 얻었는바, 읽어 보면 기뻐할 만하여 나라에서 소중히 보관하기에 마땅하다. 그러나 홍무(洪武) 시대에서 지금까지는 세차(世次)가 이미 오래되었으니, 조선의 시가 과연 모두 권근과 같은지는 모르겠다.
《시경》 삼백편(三百篇)이 나온 이후로 시는 당나라 때보다 더 성한 적이 없었다. 양백겸(楊伯謙)의 저술에서는 이 시기를 셋으로 나누었는데, 초당(初唐)의 음(音)은 오히려 풍부하였으며, 성당(盛唐) 때에는 침착하였고, 만당(晩唐)의 유향(遺響)은 점차 유창하고 아름다워졌다. 이는 모두 당시의 정치가 감응한 데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군국(郡國)과 향리(鄕里)에서 숭상하고 좋아하는 바가 서로 달라 마침내 처음의 뜻을 잃을 수밖에 없었던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비록 성대하였던 주(周)나라 이후에도 정위(鄭衛)의 음악은 끝내 변하지 못하였고, 오초(吳楚)의 시(詩)는 저술이 미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은 천자께서 거룩한 자질로 거룩하신 분들의 뒤를 이었으므로 조선에서 조공을 바치러 오는 사신들이 줄을 이어 들어오고 있는바, 귀로 듣고 눈으로 보아 점점 물들어서 처음의 뜻을 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세대가 오래되고 치도가 이루어졌으니 필시 더욱더 나아진 점이 있을 것이다. 성음(聲音)의 도는 정치의 도와 서로 통하는 법으로, 도움 되는 바가 적지 않을 것이니, 그 처음을 높이고 그 끝을 아름답게 하면 아마도 제후의 법도에 광명이 있을 것이다.
이에 그 시를 장엄하게 외운 다음 다시 시를 지어 뒤를 잇는 바이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은하수에 해와 별이 드리워짐에 / 雲漢垂日星
반짝반짝 저 하늘에 달려 있구나 / 煌煌麗穹昊
하수와 낙수에서 도서 나오매 / 河圖與洛書
천년토록 지극한 도 이어받았네 / 千載承至道
삼가고 삼가는 동국의 신하 / 斤斤東國臣
마음과 시 조서와 들어맞았네 / 心聲契敷詔
잘 간직해 잊지 않길 맹서했으니 / 什襲矢弗諼
두 나라가 영원토록 잘 지내리라 / 邦土永爲好
누려온 세월 이미 오래됐으니 / 歷年亦已久
풍아가 날마다 묘해질 걸세 / 風雅日臻妙
내 어찌 알았으랴 지역 다른데 / 焉知地尙殊
처음 뜻이 작아지지 아니했을 줄 / 初意弗微眇
옛날에는 도타움을 숭상했는데 / 古則貴敦柔
중간에는 시끄러움 많아졌다네 / 中更多叫噪
그 어찌 시어에만 그러하리오 / 豈惟詞語間
정치에도 요체가 되는 거라네 / 政治實樞要
나의 걸음 날마다 나라 지나매 / 我行日逾邁
풍속 보고 심오함을 내 알았다네 / 觀風知蘊奧
충정은 대대로 더욱 도탑고 / 忠貞世彌篤
문헌은 계속해서 이어나가리 / 文獻須繼紹
돌아가서 천자에게 보고할 적에 / 歸當告天子
시 올려서 덕화 더욱 펴게 하리라 / 陳詩補聲敎
마음속에 무언가를 얻은 듯하여 / 充然如有得
머리를 조아리며 예 올리누나 / 稽首三舞蹈
《장영(張寧)의 봉사록(奉使錄)》

살펴보건대, 《양촌집》을 보면, 홍무 29년 병자 7월 19일에 표문(表文)을 찬출한 일로 사신을 따라 북경에 갔다가 9월 11일에 입조(入朝)하였다. 그러자 황제가 칙명을 내려 문연각(文淵閣)에 머물러 있게 하고 3일 동안 유관(游觀)하도록 명하였으며, 잔치를 하사하고는 명제(命題)하여 시 24편을 읊게 하였다. 그러고는 이어 어제시(御製詩) 3편을 하사하였다. 그다음 해 3월에 칙서를 받들고서 귀국하였다.
양촌이 직접 쓴 《응제집》 발문은 다음과 같다.
“홍무 병자년 여름에 명나라 황제가 우리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표문을 지은 자를 징소(徵召)하였는데, 신(臣) 근(近)이 표문을 다듬는 데 참여하였던 까닭으로 우리 임금에게 고하고 명나라 조정에 달려갔다. 그러자 황제는 죄를 용서하여 불문에 붙이고는 은혜로운 명을 내려 문연각에 머물러 있으면서 반열을 따르게 하고, 광록시(光祿寺)에서 음식을 하사하고 내부(內府)에서 옷을 하사하게 하였으며, 3일 동안 유가(游街)하게 하였다. 그러고는 잔치를 베풀어 주면서 명제(命題)하여 시 몇 수를 지어 바치게 하였으며, 장구(長句) 사운(四韻)의 어제시(御製詩) 3편을 하사해 주었다. 이는 천광(天光)이 내리비추어 미물(微物)을 꾸며 준 것으로, 참으로 이 세상에서 만나기 어려운 특별한 은총이다.
나는 그때 또 한림 학사(翰林學士) 유삼오(劉三吾)와 교분을 맺게 되었는데, 유삼오는 연치와 덕망이 모두 높았으므로 내가 태산 북두(泰山北斗)와 같이 우러렀다. 그리고 허관(許觀), 경청(景淸), 장신(張信), 대덕이(戴德彝) 등 제공(諸公)들은 모두 난새나 봉황처럼 영준하여 궁궐에서 이름을 날리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도 모두 나를 해외(海外)의 소생(小生)이라고 비루하게 여기지 않고 겸손하게 예로써 대우하여 따뜻한 얼굴로 대해 주었다. 이에 나는 매양 공손하게 옷자락을 걷어잡고 나아가 수업하면서 의심스러운 바를 질문하여 알지 못하는 것을 배우고자 하였다. 그러나 언어가 다르고 또 통역할 사람조차 없어서 마침내 소원을 이루지 못한 채 하루아침에 갑자기 칙지(勅旨)를 받들고 우리나라로 돌아오고 말았다.
지난날의 일들을 추억해 보니, 꿈속에서 천상에 올라갔다가 깨고 보니 진토(塵土)에 있는 것만 같이 어렴풋하기만 하다. 그러나 다행히도 황제께서 내려 주신 어제시가 책 상자 안에서 빛나고 있으니, 마땅히 열 겹으로 잘 싸서 고이 간직하여 자손 대대로 영원토록 보배로 삼아야 할 것이다. 홍무 30년(1397, 태조6) 정축 3월 상순에 양촌 권근은 본국에 와서 쓴다.”

신숙주(申叔舟)의 《범옹집(汎翁集)》
○ 신숙주의 자는 범옹이고,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공이 있어 고령군(高靈君)에 봉해졌다. 《범옹집》이 있다. 《명시종》
○ 신숙주가 지은 시집(詩集) 20권은 그의 손자인 신종호(申從濩)가 편찬하였으며, 영도(寧都) 사람 상서(尙書) 동월(董越)이 그 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서문을 지었다. 《정지거시화》
살펴보건대, 정통(正統) 10년(1445, 세종27)에 주사(主事) 황찬(黃瓚)이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나왔을 적에 범옹이 당(堂)의 현판을 써 주기를 요청하자, 황찬이 마침내 희현당(希賢堂)이라고 당호를 써 주고, 이어 《희현당시집(希賢堂詩集)》의 서문을 지어 주었다.

강씨(姜氏)의 《진산세고(晉山世稿)》
○ 송하견림(松下見林)이 말하기를, “《진산세고》 4권은 조선의 하관(夏官) 강 상공(姜相公)이 그의 할아버지, 아버지, 형 삼대가 지은 것을 편찬한 것인데, 편찬한 시기는 명나라 성화(成化) 계사년(1473, 성종4)이다.” 하였다. 《이칭일본전》
살펴보건대, 《해동예문고(海東藝文考)》를 보면, 《진산세고》는 본조의 통정(通亭) 강회백(姜淮伯), 강회백의 아들인 완역재(玩易齋) 강석덕(姜碩德), 강석덕의 아들인 인재(仁齋) 강희안(姜希顔) 삼대의 세고(世稿)이다.

서거정(徐居正)의 《북정고(北征藁)》
○ 서거정의 자는 강중(剛中)이고 의정부 우참찬을 지냈으며, 문학(文學)에 뛰어났는데, 저술한 것으로는 《북정고》가 있다. 《열조시집(列朝詩集)》
○ 《북정고》는 천순(天順) 경진년(1460, 세조6)에 서거정이 왕명으로 들어와 조근(朝覲)할 적에 지은 것이다. 주사(主事) 기순(祁順)이 서문을 지었다. 《정지거시화》

김시습(金時習)의 《매월당시집(梅月堂詩集)》
○ 조선의 《매월당시(梅月堂詩)》 2권은 어떤 사람이 지은 것인지 모르는데, 시가 몹시 천박하여 볼만한 것이 없다. □□에 이르기를, “십 년 동안 유락하여 신도를 바라봤네.[十年流落 瞻望神都]”라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이능은 어찌하여 끝내 오랑캐에게 투항하려 하였으며, 오원은 어찌하여 오나라에서 죽음 면하기를 기약하였나.[李陵豈欲終投虜 伍員何期免死吳]” 하였으며, 또 “□□□□대군이 서울에 잡아두려고 하기에 산으로 돌아가게 해 주기를 청하면서 지었다.” 하였다. 《열조시집》

허기(許愭)의 《매헌집(梅軒集)》
○ 조선 사람 허종(許琮)의 할아버지인 허기는 자가 원덕(原德)이고, 관직이 봉상시 정(奉常寺正)이었으며, 《매헌집》이 있다. 《정지거시화》

허종(許琮)의 《상우당시집(尙友堂詩集)》
○ 허종의 자는 종경(宗卿)이고 안흥(安興) 사람이다. 진사시(進士試)를 거쳐 이조 판서가 되었으며,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참정부 의정(參政府議政)에 이르렀다. 《상우당시집》이 있다. 《명시종》

허씨(許氏)의 《양천세고(陽川世藁)》
○ 허흡(許洽)과 그의 동생 허항(許沆)이 모두 시로 이름이 났는데, 일찍이 선대(先代)의 시를 모아서 《양천세고》라고 이름하였다. 허항은 이조 참판을 지냈으며, 형제가 모두 국정(國政)을 잡았었다. 《정지거시화》
살펴보건대, 《해동예문고》를 보면, 《양천세고》는 바로 야당(野堂) 허금(許錦), 허금의 아들인 매수(梅叟) 허기(許愭), 허기의 손자인 상우당(尙友堂) 허종(許琮), 허종의 동생인 이헌(頤軒) 허침(許琛), 허종의 종질인 문병(文炳) 허반(許磐) 등 4대, 5인이 지은 것이며, 중국 사신 공용경(龔用卿)이 서문을 짓고는 소노(蕭盧)라고 지목하였다.

이희보(李希輔)의 《안분당집(安分堂集)》
○ 이희보의 자는 화종(和宗)이고, 예빈시 부정(禮賓寺副正)을 거쳐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안분당집》이 있다. 《명시종》

소세양(蘇世讓)의 《청심당시집(淸心堂詩集)》
○ 소세양의 자는 언겸(彦謙)이다. 처음에 성균관 대사성으로 있다가 호조 판서로 옮겼으며, 의정부 좌찬성을 역임하였다. 《청심당시집》이 있다. 《상동》

김안국(金安國)의 《모재집(慕齋集)》
○ 김안국의 자는 국경(國卿)이고 호는 모재이며, 형조 판서를 거쳐 영의정을 지냈다. 《모재집》이 있다. 《상동》

신광한(申光漢)의 《기재집(企齋集)》
○ 신광한의 자는 한지(漢之)이고, 의정부 좌참찬을 지냈다. 《기재집》이 있다. 《상동》

서경덕(徐敬德)의 《화담집(花潭集)》
○ 서경덕은 조선의 생원(生員)이며, 《화담집》이 있다. 《상동》
○ 《서화담집(徐花潭集)》은 2권이다. -절강 순무(浙江巡撫)가 채집하여 올린 본(本)이다.- 명나라 가정(嘉靖) 연간에 조선의 생원 서경덕이 찬하였다. 서경덕은 가난하게 살면서도 학문을 강마하여 56세 때 그 나라의 제학(提學) 김안국(金安國)이 유일(遺逸)로 천거하여 참봉(參奉)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극력 사양하여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는 화담(花潭)에 거처하면서 인하여 화담으로 호를 삼았다.
이 문집은 잡문(雜文)과 잡시(雜詩)가 모두 2권이다. 그 글 가운데 원이기(原理氣) 1편의 끝에는 부기(附記)가 있는데 ‘선생(先生)’이라고 칭하였으며, 귀신생사론(鬼神生死論) 1편의 끝에도 역시 부기가 있는데, 거기에 ‘이상 4편은 모두 선생께서 병이 위독할 때 지은 것이다’ 하였으며, 시 가운데 ‘신기재의 운을 차운하다[次申企齋韻]’ 1수에는 원작(原作)을 기록해 놓았는데, 거기에 ‘기재(企齋)가 선생께 준 시이다’ 하였다. 그러니 이는 대개 문인(門人)들이 편집한 것이다.
서경덕의 학문은 한결같이 송유(宋儒)를 조종으로 삼았는데, 특히 주자(周子)의 태극도설(太極圖說)과 소자(邵子)의 황극경세(皇極經世)에 마음을 쏟아 연구하였다. 문집 가운데 잡저(雜著)에서는 모두 이 두 책의 종지(宗旨)를 발휘하였다. ‘심 교수를 전송하는 서[送沈敎授序]’에는 전체가 소자의 학문이며, ‘상제를 논한 소[論喪制疏]’와 ‘박지화에게 답한 편지[答朴枝華書]’ 역시 자못 예제(禮制)에 대해 마음을 쏟아 연구하였으니, 대개 정학(正學)에 힘쓴 동국의 선비인 것이다.
시의 경우는 억지로 말하면 격양집파(擊壤集派)라고 하겠으나, 또한 그 나라의 방언(方言)이 뒤섞여 있으며, ‘가을이 다 지나고 계절 바뀌자, 낙엽 져서 천지가 삐쩍 말랐네.[窮秋盛節換 木落天地瘦]’라고 한 것과 같은 것은 그 체가 교도(郊島)와 근사하나, 많이 보이지는 않는다. 그 나머지 무현금명(無絃琴銘)의
거문고의 현을 쓰는 것이 아니라 / 不用其弦
그 현을 타는 것을 쓰는 거라네 / 用其弦弦
음률 밖에 울리는 궁상 소리를 / 律外宮商
내가 그 참모습을 깨달았도다 / 吾得其天
소리로써 즐기는 것이 아니라 / 非樂之以音
음악의 소리를 즐기는 거고 / 樂其音音
귀로다가 소리 듣는 것이 아니라 / 非聽之以耳
마음으로 소리를 듣는 거라네 / 聽之以心
음악 듣기 잘 하였던 저 종자기는 / 彼哉子期
어찌하여 내 거문고 소리 안 듣나 / 盍耳吾琴
한 것과 같은 데에 이르러서는 조금은 소황(蘇黃)의 뜻을 얻었으나, 역시 어쩌다가 우연히 합치된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문사(文士)들 가운데 음영(吟詠)으로 상국(上國)에 알려지고, 우뚝하게 염락(濂洛)과 관민(關閩)의 설을 전하여 향리에서 가르친 것은 서경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니 역시 호걸스런 선비라고 할 만하다. 그러므로 시문(詩文)은 비록 격이 낮지만 특별히 표목(標目)을 보존하여 그 사람을 드러내는 바이다. 《사고전서총목》

유근(柳根)의 《서경집(西坰集)》
○ 유근의 자는 회부(晦夫)이고 과거에서 장원하였으며, 자호(自號)는 은병거사(隱屛居士)이다. 《서경집》이 있다. 《명시종》

이호민(李好閔)의 《오봉서소집(五峯書巢集)》
○ 이호민의 자는 효언(孝彦)이고 과거에서 탐화(探花)를 차지하였으며, 추상(樞相)을 지냈다. 《오봉서소집》이 있다. 《상동》

허균(許筠)의 《백월거사집(白月居士集)》
○ 허균의 자는 단보(端甫)이고, 허봉(許篈)의 동생이다. 형과 더불어 모두 진사시에 1등으로 합격하였으며, 자호는 백월거사이다. 문집이 있다. 《상동》

이달(李達)의 《손곡집(蓀谷集)》
○ 《손곡시집(蓀谷詩集)》은 6권인데, 지은 사람의 이름이 실려 있지 않다. 그 안에 들어 있는 ‘억석행을 읊어 정랑 신설에게 주다[憶昔行贈申正郞渫]’라는 시(詩)로 보아 만력(萬曆) 연간에 조선의 배신(陪臣)이 신종황제(神宗皇帝)가 속국(屬國)을 다시 일으켜 세워 준 뒤에 이 시를 지어 읊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천계(天啓) 연간에 총병(摠兵) 모문룡(毛文龍)이 피도(皮島)를 지키고 있을 적에 그에게 동국의 도적(圖籍)을 구해 달라고 부탁하였더니, 이 문집을 구하여 보내왔다. 《열조시집》
살펴보건대, 이달의 자는 달부(達夫)이고 호는 손곡(蓀谷)이다. 《열조시집》에 손곡의 시 36수를 실으면서도 성명을 기록하지 않았다. 죽타(竹坨) 주이존(朱彝尊)의 《명시종(明詩綜)》에서는 이미 이달의 시 1수가 실려 있고, 또 손곡의 시 5수가 실려 있는데도 말하기를, ‘그 이름이 상세하지 않다’ 하였으니, 중국 사람들이 외국의 시를 기록함에 있어서 소루하기가 이와 같은 것은 괴이할 것도 없다.

최전(崔澱)의 《양포집(楊浦集)》
○ 최전의 자는 언침(彦沈)이고, 해주(海州) 사람이며, 진사시에 급제하였다. 《양포집》이 있다. 《명시종》

정사룡(鄭士龍)의 《호음초당집(湖陰草堂集)》
○ 정사룡의 자는 운경(雲卿)이고, 정진(鼎津) 사람이며, 이조 판서를 지냈다. 《호음초당집》이 있다. 《상동》

김안로(金安老)의 《명허헌집(明虛軒集)》
○ 김안로의 자는 이숙(頤叔)이고, 의정부 좌의정을 지냈다. 《명허헌집》이 있다. 《상동》

김상헌(金尙憲)의 《조천록(朝天錄)》
○ 김상헌의 자는 숙도(叔度)이며, 《조천록》이 있다. 《어양시화(漁洋詩話)》

이숙원(李淑媛)의 《옥봉집(玉峯集)》
○ 이숙원은 자호(自號)가 옥봉주인(玉峯主人)이며, 승지학사(承旨學士) 조원(趙瑗)의 첩이다. 문집이 있다. 《열조시집》
살펴보건대, 조원은 호가 운강(雲江)이고, 시는 만당(晩唐) 시대의 것과 비슷하다. 소실 이씨(李氏)는 종실(宗室)의 후예로, 호가 옥봉이며, 시 32편이 있는데 11편이 《열조시집》에 기록되었다.

허씨(許氏) 누이동생의 《난설헌집(蘭雪軒集)》
○ 허경번(許景樊)은 자가 난설(蘭雪)이고 조선 사람이며, 그의 오빠는 허봉(許篈)과 허균(許筠)이다. 금릉(金陵)의 주 장원(朱壯元)이 동국에 사신 나갔을 때 그의 문집을 구해 돌아와 드디어 중국에 널리 전해졌다. 《상동》
살펴보건대, 만력 병오년(1606, 선조39)에 난우(蘭嵎) 주지번(朱之蕃)과 한림(翰林) 양유년(梁有年)이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나와 둘 다 《난설헌집》의 소인(小引)을 지었는데, 그 글이 본 문집에 실려 있다.

《동인시화(東人詩話)》
○ 《동인시화》 상권과 하권은 조선의 강중(剛中) 서거정(徐居正)이 저술한 것이다. 《이칭일본전》

《황화집(皇華集)》
○ 《황화집》 30권 -내부(內府) 소장본(所藏本)이다.- 은 명나라 때 사신들이 창화(唱和)한 작품을 조선국에서 간행한 것이다. 그런데 오직 천순(天順) 원년, 2년, 3년, 4년, 8년, 성화(成化) 12년, 굉치(宏治) 원년, 5년, 정덕(正德) 16년, 가정(嘉靖) 16년에 지은 시만 수록되어 있다. 상고해 보건대, 명나라 때 조선에 사신을 파견한 것이 겨우 10년에만 그치지 않는바, 빠진 것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 세상에 전해지는 본(本)이 모두 같으니, 혹 사신들이 모두 시에 능하지는 못하여 이 《황화집》을 만든 자가 이에 그친 것인가? 《사고전서총목》
○ 진감(陳鑑)의 자는 즙희(緝煕)이며, 개주위(蓋州衛) 사람이다. 정통(正統) 연간에 진사시에 급제하였으며, 한림 학사가 되었다가 조선에 사신으로 갔을 때 편찬한 《황화집》이 사람들에게 칭해진다. 《청일통지(淸一統志)》
살펴보건대, 진감은 천순 원년(1457, 세조3)에 고윤(高閏)과 함께 사신으로 나왔다.
○ 정지(靜之) 장영(張寧)은 해령(海寧) 사람이며, 호가 방주(方洲)이다. 조선에 사신으로 나갔을 적에 조선 사람들이 존중하였는데, 그가 지은 글을 모아 판각하여 《황화집》을 만들었다. 《서호지여(西湖志餘)》
살펴보건대, 장영은 천순 4년(1460, 세조6)에 사신으로 나와 《황화집》을 지었는데, 우리나라의 최항(崔恒)이 서문을 썼다.
○ 조선의 병조 판서 어세겸(魚世謙)이 홍치(弘治) 원년(1488, 성종19)에 《황화집》의 서문을 지었으며, 성현(成俔)의 시 4수를 기록하였다. 《정지거시화》
살펴보건대, 이것은 바로 홍치 원년에 동월(董越)이 사신으로 나왔을 때 지은 《황화집》이다.
○ 《황화집》은 2권이고, 《속집(續集)》은 1권이다. -안휘 순무(安徽巡撫)가 채집하여 올린 본이다.- 명나라 한림원 수찬 당고(唐皐)와 병과 급사중(兵科給事中) 사도(史道)가 정덕(正德) 16년(1521)에 세종(世宗)이 즉위한 데 대한 조서를 반포하기 위하여 조선에 사신으로 가서 그 나라의 번신(藩臣)과 날마다 창화(唱和)하였는데, 조선의 국왕이 특별히 서국(書局)에 명하여 이 《황화집》을 편찬하게 하였다.
《황화집》의 권 첫머리에는 가정(嘉靖) 원년(1522, 중종17)에 의정부 좌의정 남곤(南袞)이 쓴 서문이 실려 있으며, 두 사신이 국경에 도착해서부터 귀국할 때까지 의정부 우의정 이행(李荇) 등과 창화한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황화속집》의 권 첫머리에는 가정 원년에 쓴 이행의 서문이 실려 있으며, 오직 당고가 국왕과 이별하면서 준 율시(律詩) 2편과 의정부 영의정 김전(金詮) 이하가 화답한 시만 실려 있다.
상고해 보건대, 당고가 사신으로 간 사실은 《명사(明史)》 본기(本紀) 및 조선열전(朝鮮列傳)에는 보이지 않고, 오직 《세종실록(世宗實錄)》에만 그 일이 8월 을사조에 실려 있다. 남곤이 쓴 이 책의 서문에 이르기를, “12월 을유에 왕경(王京)에 이르렀다.”고 하였으니, 명을 받든 때부터 거의 5개월이나 지난 뒤이다. 또 남곤이 쓴 《황화집》 서문에는 이르기를, “처음 서울에 들어온 때부터 국경을 나갈 때까지 겨우 30일 남짓하였는데, 기행(紀行)의 작품이라든지 높은 데 올라가 읊은 시가 약간 편이 있다.” 하였다.
지금 상고해 보니 《황화집》 가운데 처음에 국경에 들어가서 지은 것으로는 당고의 ‘영훈루에 올라서[登迎薰樓]’라는 시가 있는데, 그 표(標)에 이르기를, “동지(冬至)로부터 10일 뒤이다.” 하였다. 《실록》을 상고해 보면 이해 11월 14일이 동지였으니, 이 시를 지은 날짜는 24일이다. 그리고 국경을 나갈 때 지은 시로는 당고의 ‘안산에 이르러 번경(藩京)의 여러 군자들에게 회포를 부치다.[至鞍山寄懷藩京諸君子]’라는 시가 있는데, 표에 이르기를, “납월(臘月) 신축이다.” 하였다. 《실록》을 상고해 보면, 이해 12월 기묘일이 초하루이니, 신축일은 바로 이달 23일이다. 그러니 서문에서 창화한 것이 30일 남짓하였다고 이른 것과 서로 딱 맞아떨어진다. 《사고전서총목》
○ 가정(嘉靖) 16년(1537, 중종32)에 수찬으로 있던 명치(鳴治) 공용경(龔用卿)과 자순(子醇) 오희맹(吳希孟)이 조선에 사신으로 가자 조선국왕이 배신(陪臣) 10인을 파견해 잔치를 벌이게 하였는데, 모두 시편(詩篇)을 지어 화답하여 동국의 일대 성사가 되었다. 이 《황화집》은 김안로(金安老)가 서문을 지었다. 《정지거시화》
○ ‘《황화집》의 발문’에,
“본조의 시종신(侍從臣)들이 고려에 사신으로 가면 으레 《황화집》을 짓는데, 이 《황화집》은 가정 18년(1539, 중종34) 기해에 황천상제(皇天上帝)의 태호(泰號)와 황조(皇祖)와 황고(皇考)의 성호(聖號)를 올린 데 대해 조서를 반포할 적에 석산(錫山) 사람 수찬 화찰(華察)이 가서 조서를 반포하고 유시할 때 지은 것이다. 동국은 문체(文體)가 평탄하고 직설적이어서 사림(詞林)의 제공들이 격조를 폄하하기를 아끼지 않으면서 더 나아가서는 먼 데 사람을 회유하는 뜻을 붙인다. 그러므로 화려한 말을 쓰는 경우가 아주 적다. 배신(陪臣)들이 시를 지을 때에는 매번 두 글자를 가지고 일곱 글자의 뜻을 함축하는데, ‘나라[國] 안에 창[戈]이 없으니 한 사람이 앉아 있네.[國內無戈坐一人]’라는 시구와 같은 것은 그 나라 사람들이 이른바 동파체(東坡體)라고 하는 것인데, 제공들은 이 시에 대해 수답하지 않는 것이 옳다.”
하였다. 《유학집(有學集)》
○ 가정 23년(1544, 중종39)에 태감(太監) 곽방(郭)과 화정(華亭) 사람인 행인(行人) 장승헌(張承憲)이 조선에 사신으로 갔다. 이때 중관(中官)이 함께 가 도중에서 수창한 작품이 없다가 예를 마치고 돌아올 적에 시를 봉해서 관반(館伴)에게 주고는 서로 더불어서 화답하였다. 그러자 이를 간행해서 《황화집》 1권을 만들었는데, 정사룡(鄭士龍)이 서문을 지었다. 《정지거시화》
○ 가정 25년(1546, 명종1)에 행인 왕학(王鶴)이 책립(冊立)하기 위해 조선에 사신으로 나갔는데, 조선 사람들이 《황화집》을 판각하였다. 그러자 국왕이 신광한(申光漢)에게 명하여 후서(後序)를 짓게 하였다. 《열조시집》
○ 문목공(文穆公) 허국(許國)은 자가 유정(維楨)이다. 융경(隆慶)으로 개원(改元)한 뒤에 한림 검토(翰林檢討)에 제수되어 조서를 받들고 조선에 사신으로 갔다. 사신의 행차가 지나는 곳마다 경치를 감상하고 풍속을 살폈으며, 간간이 기술한 것이 있는데, 《황화집》의 ‘조기자(弔箕子)’라든지 ‘알단군(謁檀君)’ 같은 여러 작품들은 지금까지도 그 나라 사람들이 전하여 외우고 있다. 《복숙산방집(復宿山房集)》

이상은 집류(集類)이다.


 

[주D-001]유릉(裕陵)이 …… 악보(樂譜)이며 : 송나라에서 대성아악(大晟雅樂)을 하사한 것은 휘종(徽宗) 정화(政和) 5년(1115, 예종10)인바, 유릉(裕陵)은 영우릉(永祐陵)의 잘못인 듯하다.
[주D-002]응창(應昌) : 열하성(熱河省)의 서쪽, 찰합이(察哈爾)의 북쪽에 있는 지명으로, 원나라 순제(順帝)가 이곳에서 죽었다.
[주D-003]화림(和林) : 수원성(綏遠省)에 있는 지명으로, 화령(和寧)이라고도 한다.
[주D-004]10년 …… 행하였으나 : 이때 북원(北元)에서 두개달(豆个達)을 파견하여 경효대왕(敬孝大王) 즉 공민왕을 제사하자, 비로소 북원의 선광(宣光)이란 연호를 사용하였다.
[주D-005]방효유(方孝孺) : 원문에는 ‘方孝儒’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았다.
[주D-006]서전회선(書傳會選) : 명나라 태조가 채침(蔡沈)의 《서전》에 나오는 상위(象緯)의 운동과 주자(朱子)의 《시전(詩傳)》에 나오는 것이 서로 다른 것을 보고는 천하의 유신들을 모아 정정하게 하여 만든 책이다.《明史 卷141 方孝孺列傳》
[주D-007]정몽주(鄭夢周)가 …… 알았으며 : 이 부분이 원문에는 ‘몽주유화증관역명(夢周猶和贈官易名)’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폭서정집》 권44에 의거하여 ‘몽주도이성계불극 위방원소살 방원유지증관역명(夢周圖李成桂不克 爲芳遠所殺 芳遠猶知贈官易名)’으로 바로잡았다.
[주D-008]충숙왕세가(忠肅王世家) : 원문에는 ‘忠肅王世宗’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바로잡았다.
[주D-009]이성계(李成桂) …… 말이다 : 이 부분이 원문에는 ‘其稱太祖太宗乃其臣子之事’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 권14에 의거하여 ‘其稱李成桂李芳遠爲太祖太宗乃其臣子之詞’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0]봉역도(封域圖) : 봉역(封域)은 제후가 분봉(分封)받은 지역이다. 봉역도는 제후국의 지도를 말하는데, 이를 바치는 것은 종주국(宗主國)에 대한 충성을 뜻한다.
[주D-011]지리도(地里圖) : 원문에는 ‘地理國’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바로잡았다.
[주D-012]조자(跳咨) : 인명인 듯한데, 누구인지 확인할 수가 없다.
[주D-013]사지팔도(四至八到) : 사지는 동, 서, 남, 북을 말하고, 팔도는 동남, 서남, 동북, 서북을 말하는데, 옛날의 지리도서(地理圖書)에서는 이를 가지고 주현(州縣)의 방위나 거리를 표시하였다.
[주D-014]왜학(倭學) : 조선 시대 때 사역원(司譯院)에 딸린 일본어를 전문으로 학습하던 곳이다.
[주D-015]이로파(伊路波) : 일본어 학습의 기초가 되는 서적으로, 같은 글자를 반복하지 않고 지은 시인데, 한글로 발음이 표기되어 있다. 성종 23년(1492)에 간행한 본이 현재 일본에 있다고 한다.《大典會通硏究 2(禮典 諸科), 韓國法制硏究院, 1994》
[주D-016]소식(消息) : 일본의 서간문(書簡文)을 모은 책으로 보이며, 현재 일본에 있는 소식류(消息類)의 판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가마꾸라막부 시대의 것이라고 한다.《大典會通硏究 2(禮典 諸科), 韓國法制硏究院, 1994》
[주D-017]서격(書格) : 현존하지 않는 책으로, 내용을 알 수가 없다.《大典會通硏究 2(禮典 諸科), 韓國法制硏究院, 1994》
[주D-018]노걸대(老乞大) : 몽어학(蒙語學)의 학습서로, 세종의 명에 의해 편찬되었는데, 내용은 중국의 북부 지방을 여행하는 고려인과 중국인 사이의 대화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우리말로 번역된 것 이외에 몽고어와 왜어로도 번역되어 있다.《大典會通硏究 2(禮典 諸科), 韓國法制硏究院, 1994》
[주D-019]동자교(童子敎) : 일본인의 초학(初學) 교과서로 14, 5세기경에 널리 읽혔으며, 그 내용은 유교와 불교의 가르침을 오언시(五言詩)로 읊고 그 오른쪽에 일본음으로 풀어쓴 책이다.《大典會通硏究 2(禮典 諸科), 韓國法制硏究院, 1994》
[주D-020]잡어(雜語) : 현존하지 않는 책이다.《大典會通硏究 2(禮典 諸科), 韓國法制硏究院, 1994》
[주D-021]본초(本草) : 송나라의 당신미(唐愼微)가 편찬한 의서(醫書)로, 여기서 말하는 《본초》는 일역본(日譯本)으로 보인다.《大典會通硏究 2(禮典 諸科), 韓國法制硏究院, 1994》
[주D-022]의론(議論) : 원문에는 ‘譏論’으로 되어 있는데, 《경국대전(經國大典)》 예전(禮典)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의론》은 현존하지 않는다.
[주D-023]통신(通信), 구양물어(鳩養物語) : 일본 어학 서적의 일종으로, 현존하지 않는다.
[주D-024]정훈왕래(庭訓往來) : 14세기 말경부터 20세기 초까지 가장 많이 읽혔던 일본어 초등 교과서로, 그 내용은 일본 무사들이 알아 두어야 할 사항이 서간문의 형식으로 서술되어 있다.《大典會通硏究 2(禮典 諸科), 韓國法制硏究院, 1994》
[주D-025]응영기(應永記) : 14세기 말에서 15세기 전기 사이의 전쟁터에서 쓰인 서간문이다.《大典會通硏究 2(禮典 諸科), 韓國法制硏究院, 1994》
[주D-026]잡필(雜筆) : 중급 무사(中級武士)들의 일상생활에 관련된 사항을 광범위하게 서술한 경구(警句)나 단문(短文) 등을 불규칙하게 배열해 놓은 책이다.《大典會通硏究 2(禮典 諸科), 韓國法制硏究院, 1994》
[주D-027]부사(富士) : 부사평야(富士平野)의 사냥터에서 띄운 5통의 편지로 되어 있으며, 15세기 후기의 필사본이 현존하고 있다.《大典會通硏究 2(禮典 諸科), 韓國法制硏究院, 1994》
[주D-028]갑인년(1794, 정조18) : 《대전통편》은 정조 8년(1784)에 편찬을 시작하여 정조 10년(1786)에 완성하였는바, 잘못된 것인 듯하다.
[주D-029]화개씨(和介氏) : 화기씨(和氣氏)이다. 일본의 대표적인 의가(醫家)로, 화기광세(和氣廣世) 때부터 의술에 정통하였으며, 그 의술이 화기정설(和氣貞說) 등으로 전해졌다.
[주D-030]단파씨(丹波氏) : 화기씨와 더불어 일본의 대표적인 의가로, 단파강뢰(丹波康賴) 등이 배출되었다.
[주D-031]단파강뢰(丹波康賴) : 일본의 대표적인 의가(醫家)로, 912년에서 995년까지 살았으며, 《의심방(醫心方)》을 저술하였다.
[주D-032]경번(景樊) : 허난설헌(許蘭雪軒)의 별호(別號)이다.
[주D-033]이동원(李東垣) : 동원은 금(金)나라 이고(李杲)의 호이다. 이고는 《주역》과 의술에 정통하여 《내외상변혹론(內外傷辨惑論)》, 《난실비장(蘭室祕藏)》 등을 저술하였다.
[주D-034]주단계(朱丹溪) : 단계는 원나라 사람인 주진형(朱震亨)의 호이다. 주진형은 의술에 아주 뛰어났으며, 《국방발휘(局方發揮)》, 《단계심서(丹溪心書)》 등의 저서를 남겼다.
[주D-035]칠정(七情) : 한의학에서 말하는 일곱 가지 감정으로, 희(喜), 노(怒), 출(怵), 사(思), 비(悲), 공(恐), 경(驚)을 말하는데, 희가 지나치면 심장을, 노가 지나치면 간을, 사가 지나치면 비장을, 비가 지나치면 폐를, 공이 지나치면 신장을 손상시키며, 걱정을 오래하면 기가 막히고, 갑자기 놀라면 기가 위축된다고 한다.
[주D-036]부맥(浮脈), 중맥(中脈), 침맥(沈脈) : 부맥은 가볍게 짚으면 잘 느껴지고 세게 눌러 짚으면 잘 느껴지지 않는 맥으로 양맥(陽脈)에 속하며, 침맥은 가볍게 짚으면 잘 느껴지지 않고 세게 눌러 짚으면 잘 느껴지는 맥으로, 음맥(陰脈)에 속한다.
[주D-037]대황(大黃) : 1.5m가량 자라는 마디풀과에 속하는 약초로, 우리나라의 북부 고산지대에서 나며, 성질이 차서 뿌리를 대소변이 불통하는 것을 치료하는 데 쓴다.
[주D-038]부자(附子) : 바곳의 구근(球根)으로, 성질이 열(熱)하고 양기(陽氣)를 돋우므로 체온이 부족하여 생기는 모든 병에 쓴다.
[주D-039]대역(大易)의 …… 점괘 : 《대역》은 《주역(周易)》을 말한다. 《주역》 무망괘(无妄卦) 구오(九五)에, “예기치 않았던 병이다. 약을 쓰지 말라. 기쁨이 있으리라.” 하였다.
[주D-040]남쪽 …… 경계 : 《논어》 자로(子路)에,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남쪽 사람들의 말에 사람이 항심이 없으면 무당이나 의원도 될 수가 없다.’고 하니, 이는 참 좋은 말이다.” 하였다.
[주D-041]헌기(軒岐) : 황제(黃帝) 헌원씨(軒轅氏)와 그의 신하인 기백(岐伯)의 병칭이다. 황제가 기백으로 하여금 초목(草木)을 맛보면서 약초를 가려내 질병을 치료하게 하였으므로, 중국 의학의 시조(始祖)로 일컬어진다.
[주D-042]월(粵) : 고대에 월(粵) 종족이 살던 지방으로, 중국 남부 지방을 가리킨다.
[주D-043]반우(番禺)의 능어(凌魚) : 반우는 광동성(廣東省)에 속하는 현의 이름이고, 능어는 청나라 사람으로, 자가 서파(西波)이고 《운재집(耘齋集)》을 저술하였다.
[주D-044]고려(高麗) : 여기서는 신라를 가리킨다.
[주D-045]서상잡영(西上雜咏) : 원문에는 ‘西上新咏’으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았다.
[주D-046]공정왕(恭定王) 이방원(李芳遠) : 원문에는 ‘恭定王’으로만 되어 있는데, 《폭서정집》 권52에 의거하여 보충해서 번역하였다.
[주D-047]실록(實錄) : 원문에는 ‘寶錄’으로 되어 있는데, 《폭서정집》 권52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주D-048]양백겸(楊伯謙) : 백겸은 명나라 양외(楊巍)의 자이다. 양외는 시를 잘 지었으며, 만력 연간에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지냈다. 《존가시고(存家詩稿)》가 있다.
[주D-049]정위(鄭衛)의 음악 : 춘추 시대 정나라와 위나라의 민간 음악으로, 난세(亂世)의 음악인데, 음란한 음악을 말한다.
[주D-050]하수(河水)와 …… 나오매 : 복희씨(伏羲氏) 때 용마(龍馬)가 하수(河水)에서 도(圖)를 등에 업고 나왔으며, 우(禹) 임금이 홍수를 다스릴 때 낙수(洛水)에서 나온 거북의 등에 마흔다섯 점으로 된 그림이 있었다고 한다.
[주D-051]斤斤 : 원문에는 ‘斥斥’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바로잡았다.
[주D-052]강 상공(姜相公) : 강희안(姜希顔)을 가리킨다.
[주D-053]격양집파(擊壤集派) : 《격양집》은 송나라 소옹(邵雍)이 찬한 책이다. 시풍(詩風)은 백거이(白居易)에 근원을 두었는데, 대개 논리를 근본으로 삼고 수식을 말단으로 삼았는바, 억지로 교묘하게 읊는 것을 배격하였다.
[주D-054]교도(郊島) : 당나라의 시인인 맹교(孟郊)와 가도(賈島)를 말한다.
[주D-055]궁상(宮商) : 궁은 슬픈 소리이고 상은 쇳소리와 같은 소리인데, 합하여 음률(音律)을 말한다.
[주D-056]종자기(鍾子期) : 옛날에 음악을 잘 들었다고 하는 사람이다. 백아(伯牙)는 금(琴)을 잘 탔고, 종자기는 소리를 잘 들었는데, 백아가 금을 타면서 뜻이 높은 산에 있으면 종자기가 말하기를, “좋구나, 아아(峨峨)하기가 태산(泰山)과 같구나.” 하고, 뜻이 흐르는 물에 있으면 종자기가 말하기를, “좋구나, 양양(洋洋)하기가 강하(江河)와 같구나.” 하였다. 그 뒤에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다시는 금을 타지 않았다고 한다.《列子 湯問》
[주D-057]소황(蘇黃) : 송나라 때의 문학가인 소식(蘇軾)과 황정견(黃庭堅)을 가리킨다.
[주D-058]염락(濂洛)과 관민(關閩)의 설 : 염계(濂溪)의 주돈이(周敦頤), 낙양(洛陽)의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관중(關中)의 장재(張載), 민중(閩中)의 주희(朱熹)가 제창한 학설로, 송나라의 정주학(程朱學)을 말한다.
[주D-059]주 장원(朱壯元) : 주지번(朱之蕃)을 가리킨다. 주지번은 선조 39년(1606)에 사신으로 나왔다.

 [주D-060]굉치(宏治) : 홍치(弘治)를 가리킨다. 《사고전서총목》이 청나라 고종 때 편찬되었는데, 고종의 이름이 홍력(弘曆)인바, 황제의 이름을 휘하여 굉치로 쓴 것인 듯하다.
[주D-061]명을 …… 뒤이다 : 이 부분이 원문에는 ‘趾奉命幾五月也’로 되어 있는데, 《사고전서총목》 권39에 의거하여 ‘距奉命幾五月也’로 바로잡았다

해동역사 제69권
 인물고(人物考) 3 본조(本朝)
정사룡(鄭士龍)


○ 정사룡은 자가 운경(雲卿)이고, 정진인(鼎津人)이다. 내자시 정(內資寺正)을 거쳐서 형조 판서로 옮겨졌다가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역임하고 호조 판서가 되었다가 다시 이조 판서를 지냈으며, 품계가 자헌대부(資憲大夫)이다. 《호음초당집(湖陰草堂集)》이 있다. 《명시종》
○ 운경 정사룡은 가정(嘉靖) 연간에 다섯 차례나 관반에 충임되어 도의로써 교제하고 예의로써 접하여 여러 사람의 칭찬을 받았다. 수지(守之) 당고(唐皐)가 준 시에 이르기를, “정자는 시의 재주 뛰어나거니, 그 어찌 자고 아래 있을 것인가.[鄭子有詩才 豈在鷓鴣下]” 하였다. 또 운강(雲岡) 공용경(龔用卿)은 “차분하고 담박하여 화려하고 아름다운 말을 구사하지 않아 당나라 시인의 유의(遺意)가 있다.” 하였다. 일찍이 십완당(十玩堂)을 정진(鼎津)에다가 지었는데, 십완이란 대나무, 매화, 소나무, 국화, 시냇물, 돌 및 종이, 벼루, 붓, 먹 10가지를 뜻한다. 수지(守之) 및 급사중(給事中) 극홍(克弘) 사도(史道)가 모두 그를 위하여 시를 읊었다.
화정(華亭) 행인(行人) 장승헌(張承憲)이 사신으로 갔을 적에 국왕이 그의 시를 간행해서 《황화집(皇華集)》에 넣게 하고는 운경을 시켜서 서문을 짓게 하였는데, 그 서문에 이르기를, “옛날의 시인들은 대부분이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서 시를 지어 일찍이 무익한 말은 하지 않았다.” 하였으니, 이 역시 시인의 뜻을 얻은 것이다. 그의 시구에 ‘즐기는 곳이라고 말하지 말라, 뒤바뀌어 송별하는 자리 되리라.[不謂交地 翻成送別亭]’ 하였는바, 운치가 충분히 있다. 《정지거시화》


 

[주D-001]품계가 자헌대부(資憲大夫)이다 : 원문에는 ‘堦資憲大夫’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階資憲大夫’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2]자고(鷓鴣) : 당(唐)나라의 시인 정곡(鄭谷)을 가리킨다. 정곡이 자고시(鷓鴣詩)로 이름을 날렸으므로, 이렇게 부른다. 여기서는 정사룡과 정곡의 성이 같으므로 끌어다가 쓴 것이다.
[주D-003] : 원문에는 ‘觀’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해동역사 제69권
 인물고(人物考) 3 본조(本朝)
이행(李荇)


○ 이행은 자가 택지(擇之)이고 관직은 의정부 우찬선(議政府右贊善)이다. 《명시종》
○ 가정(嘉靖) 원년(1522, 중종17)에 세종(世宗)이 들어와서 대통(大統)을 이었을 적에 사명을 받들고서 조선에 사신으로 간 자는 한림 수찬(翰林修撰) 흡인(歙人) 수지(守之) 당고(唐皐)와 병과 급사중(兵科給事中) 탁주인(涿州人) 극홍(克弘) 사도(史道)이다. 그 당시의 관반 중에서는 오직 이행의 시가 가장 많다. 그 나머지 의정(議政) 김전(金詮), 의정 남곤(南袞), 시정(寺正) 정사룡(鄭士龍), 시부(寺副) 이희보(李希輔), 승지(承旨) 윤희인(尹希仁), 승지 서후(徐厚), 사성(司成) 소세양(蘇世讓), 판서(判書) 이항(李沆) 및 작질(爵秩)을 알 수 없는 두 사람인 홍숙(洪叔)과 성운(成雲)이 모두 수창(酬唱)한 시가 있다. 그러나 필시 이행이 거벽(巨擘)인 듯하다. 《정지거시화》

해동역사 제69권
 인물고(人物考) 3 본조(本朝)
어숙권(魚叔權)


○ 호군(護軍) 어숙권은 집안이 가난하여 녹봉을 받기 위해 벼슬살이를 하였는데, 오랫동안 낮은 관직에 있었다. 그가 거처하는 집을 야족와(也足窩)라고 이름하였다. 《허문목집(許文穆集)》

해동역사 제69권
 인물고(人物考) 3 본조(本朝)
유성룡(柳成龍)


○ 만력 정유년에 총독 형개가 관문(關門)을 나가지 않고 있다가, 남원(南原)에서 패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조선국왕에게 자문을 보내어 책려(策勵)해서 지키게 하였다. 조선의 국왕이 자문을 받고서는 여러 장수들을 독려하여 한강(漢江)의 여러 여울을 나누어 지키도록 하였다. 그리고 또 한강 상류의 용진(龍津) 등처는 요충지에 해당되었으므로 경기 도체찰사(京畿都體察使) 유성룡을 파견해 강변 일대를 순시하면서 수어(守禦)하는 형세를 살펴보게 하였다. 《양조평양록(兩朝平攘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