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가 담양전씨/담양전씨 문과편

潭陽田氏文科篇)

아베베1 2011. 2. 4. 19:21

(潭陽田氏文科篇)


○潭陽田氏文科篇


可植[주:都事][주:黃伯竹堂]九疇[주:牧使][주:主簿]
皥民[주:郡守][주:校正][주:□正馪弟]時雨[주:縣監]
齋賢

 

 

담양전씨(潭陽田氏) ::

 
▣ 유래
   시조 : 전득시(田得時)
시조 충원공 전득시(田得時)의 익호(瀷號)는 충원(忠元)이다.  그는 고려 중엽 때 전남 담양에서 출생하고 고려 의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좌복야(左僕射),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렀으며 담양군(潭陽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그의 후대에 와서는 10여개의 파로 분류되지만 관향을 담양으로 하는 같은 조상의 자손으로 단일본이다.
 
▣ 인물
  고려와 조선시대를 통틀어 문과 급제자 127명, 봉군 15명 판서급 22명, 정승 3 명 등을 배출한다.
시조 전득시의 후손은 6세(世)까지 독자로 내려오다가 7세에 이르러 전녹생(田祿生), 전귀생(田貴生), 전조생(田祖生)의 3형제가 태어났는데 이들이 "삼은전선생(三隱田先生)"으로 이들의 후손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다.
고려말의 석학 전조생은 충혜왕이 임종시 어린 두 왕자의 보필, 정사를 처리해 줄 것을 부탁했던 당대의 명 신이요 대문장가였다. 후에 충정왕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정치가 문란, 이 때문에 찬성사를 끝으로 벼슬을 사양했다. 공민왕이 왕위에 오르자 충정왕을 강화까지 호송하고 은거하다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의 충절로 두문동에 들어가 순절했다.
전우(田愚)는 한말 성리학의 대가로 13 세때 사서삼경을 읽고 20세 안에 초과, 중과 등 양과에 오른 수재 였으며 만년에는 부안의 계화도에 은거, 많은 후진들을 길러냈다. 그 는 우리나라 500년 유문(儒門)의 도통(道統)을 계승한 최후의 대종(大宗)이었다.
영조 때 삼도통제사 등을 지낸면서 병선과 병차를 제작했던 전운상(田雲祥)도 담양 전씨가 배출한 명장이었다. 그가 만든 해골선은 거북선에 필적하는 해전용 철갑선이다.
그밖에 임진왜란 때 왕의 의주 피난길을 도와 호성(扈聖)원종공신에 오른 전윤(田潤)과 전득우(田得雨) 등이 있다.
 
▣ 과거급제자(조선시대)
   전가식(田可植) : 문과(文科) 정종1년(1399) 식년시 을과(乙科) 장원급제
 전위(田○, 1564 甲子生) : 문과(文科) 선조34년(1601) 식년시 병과(丙科)
 전규풍(田圭豊, 1874 甲戌生) : 문과(文科) 고종30년(1893) 별시 병과(丙科)
 전구주(田九疇, 1874 甲戌生) : 문과(文科) 중종11년(1516) 식년시 병과(丙科)
 전예(田藝, 1874 甲戌生) : 문과(文科) 정종1년(1399) 식년시 동진사(同進士)
 전벽(田闢, 1586 丙戌生) : 문과(文科) 선조39년(1606) 식년시 병과(丙科)
 전흡(田○, 1595 乙未生) : 문과(文科) 인조17년(1639) 식년시 병과(丙科)
 전시우(田時雨, 1670 庚戌生) : 문과(文科) 숙종41년(1715) 식년시 병과(丙科)
 전석원(田錫元, 1874 甲戌生) : 문과(文科) 고종28년(1891) 식년시 병과(丙科)
 전재오(田栽五, 1807 丁卯生) : 문과(文科) 순조31년(1831) 식년시 병과(丙科)
등 모두 46명의 과거 급제자가 있다.
(문과 12명, 무과 8명, 사마시 26명)

▣ 세거지
  경남 의령군 용덕면 죽전리.
담양 전씨 가문이 20여대에 걸쳐 5백여 년 동안 내리 살아온 전씨 집성촌이다.
자손이 대나무처럼 죽죽 자라 번성한다해서 죽전리(竹田里)인 마을에 담양 전씨의뿌리를 내린 최초의 인물은 고려시대의 명신 전조생(田祖生)의 6세손인 운암공(雲菴公) 전훈(田勳)이다. 그가 관향인 담양에서 이 마을로 이주하게 된 내력은 확실치 않다.
 
▣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전라남도 담양
담양(潭陽)은 전라남도 북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현재 담양은 조선시대의 담양도호부(潭陽都護府)와 창평현(昌平縣)을 1914년에 병합한 지역이다. 봉산면·무정면 이북지역은 대체로 옛 담양도호부 영역이고, 창평면·고서면·대덕면·남면·수북면 등 남부는 옛 창평현 지역에 해당한다. 백제의 추자혜군(秋子兮郡)이었던 것을 신라 경덕왕이 추성군(秋成郡)으로 고쳤고, 995년(고려 성종 14)에는 담주도단련사(潭州都團練使)를 두었다가, 1018년(현종 9) 도단련사를 폐지하였고, 담양군으로 개편하여 나주(羅州)에 편입시켰다. 1172년(명종 2)에는 감무(監務)를 두었고, 1391년(공양왕 3)에는 원율현(原栗縣: 담양군 금성면 원율리 일대)을 병합하였다.
1395년(태조 4) 군으로 승격하였고, 1399년(정종 1)에 부(府)로 다시 승격하였으며, 1413년(태종 13)에 담주에서 담양으로 개칭되어 도호부(都護府)가 되었으나, 1728년(영조 4)에 현(縣)으로 강등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담양군이 되어 남원부(南原府)의 관할하에 있었으며, 1905년(광무 9)에 담양부를 담양군으로 고쳤고, 1908년(순종 2)에 폐지된 옥과군 일부가 담양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에 군면 폐합으로 창평군(昌平郡)이 폐지되어 담양군에 병합되었다. 1943년에 담양면이 담양읍으로 승격되었다. 1976년에는 담양호와 광주호가 건설되어 용면 및 남면의 일부가 수몰되었다.
 
▣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담양전씨는
1985년에는 총 26,603가구 109,215명,
2000년에는 총 39,912가구 128,007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