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최씨 문성공 족보/최씨전(崔氏傳) 목은 이색

최씨전(崔氏傳) 목은이색 (동문선의 기사)

아베베1 2011. 2. 6. 10:53

동문선 제100권
 전(傳)
최씨전(崔氏傳)


이색(李穡)

신사년 십운과(十韻科)에 합격한 최림(崔霖)은 아버지의 이름이 성고(成固)인데 낭장이요, 어머니는 장씨(蔣氏)인데 모관 아무개의 딸이다. 최림은 술을 좋아하며 시를 읊고 절간에 다니며 놀기를 좋아 하는데, 술을 받아 주지 않는 자라면 거기를 떠나버린다. 한계(寒溪)라는 중과 매우 뜻이 맞아서 친숙히 서로 쫓아다니므로 예법을 중히 여기는 사람들은 상당히 그를 비난하기도 하였으나, 워낙 재주가 높기 때문에 차츰 그를 대우하며 공경하였다. 계사년 가을 향시에서 내가 최씨와 함께 합격하게 되었는데, 중서당(中書堂)에서 회시를 보게 됐을 때에 최씨는 안질이 생겨서 글씨를 쓰기가 곤란하였다. 곧 탄식하기를, “내가 기왕에 합격된 것은 요행으로 된 것이다. 지금 나보다 재주가 높은 사람이 둘이나 있는데, 두 사람을 꺾어버리고 내가 과거에 오른다는 것은 나의 바라는 바가 아니었는데, 눈까지 이렇게 되는 것은 하늘의 뜻이다. 나는 과거를 포기하겠다.” 하고, 마침내 시험에 응시하지 않았다. 이미 본국에 돌아와서 병부원외랑으로 옮겨갔다가 병신년에 다음 해의 신정(新正)을 하례하는 표를 받들고, 서울에 왔다가 일을 모두 마치고 돌아가다가 요하(遼河)에 이르러 도둑을 만나서 사신ㆍ부사(副使) 및 삼절(三節)의 사람과 아전까지 모두 피해되었다. 아, 슬프다.
기주(蘄州)의 진중길(秦中吉)은 나의 아버지와 젊을 적부터 친하게 지냈던 분이다. 널리 배웠고 문장에 능하여 그에게서 공부한 사람으로서 높은 과거에 합격하고 훌륭한 벼슬을 지내는 사람이 많았는데, 진공(秦公)은 늙어서도 오히려 과거장에 나다니려 하였다. 나의 아버지가 정해년 공거(貢擧)의 고시관이 되었을 때, 진공은 말하기를, “내가 가정(稼亭)과 어릴 적부터 같이 공부하였으니, 비록 요행으로 합격이 된다 할지라도 남들은 반드시 가정이 나를 보아준 것이라 할 터이니, 나로 말미암아 이런 이름을 얻는다면 이것은 내가 가정에게 폐를 끼치는 것이지, 될 수 있는 일인가.” 하며, 마침내 응시하지 않았다. 벼슬이 5 품을 지냈으니 관료의 대열에 서게 됨이 확실하건만 물러가서 여러 학생들과 경전과 역사를 강론하기에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최씨는 그의 사위였다. 그의 문장은 또한 진씨로써 미칠 바가 아니었으나 벼슬에 달하지 못하고 불행히 죽었으니, 아, 최씨의 화인가. 진씨의 화인가. 진씨는 오래 살았고 최씨는 일찍 죽었지만 그 이름에 있어서는 최씨나 진씨가 모두 후세에 전하게 될 것이니, 이것으로나마 지하에서 행여 스스로 위로함이 있을 것이다.
최씨는 뜻이 크고 결단성 있게 말을 하였으니, 만일 그가 죽지 아니하여 그의 문장이 더욱 발전되었다면 마땅히 졸옹(拙翁)에게 양보하지 않았을 것이다. 벼슬에 있은 지 오래 되지 못하여 뜻을 나타내지 못하였고, 문장을 지은 것이 적어서 재주를 발전시키지 못하고, 그의 정기는 요하(遼河)의 하늘에 흩어졌으며, 그의 넋은 요하의 들판을 가리었으니, 마땅히 학(鶴)이 되어 화표(華表)를 말하며 돌아오리니, 1천 년이 지난 뒤에 최씨의 전기를 읽고 또 그의 음성을 들으리로다.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 나는 이것으로 그의 대강을 기록하여 최씨전(崔氏傳)을 지었다.


 

목은문고 제20권
 전(傳)
최씨전(崔氏傳)


신사년의 십운과(十韻科)에 급제한 최림(崔霖)의 부친은 휘(諱)가 성고(成固)로 낭장(郞將)이요, 모친 장씨(蔣氏)는 모관(某官) 모(某)의 딸이다. 그는 술 마시기를 좋아하며 시를 흥얼대곤 하였는데, 절간에 놀러 다니기를 좋아하면서도 술을 사 주지 않으면 곧장 떠나곤 하였다. 그런데 그가 한계(寒溪)라는 승려와 서로 의기투합하여 술에 흠뻑 취한 채 어울려 노닐곤 하였으므로, 예법(禮法)을 고수하는 인사들은 자못 못마땅하게 그를 보기도 하였으나, 그의 재질이 워낙 뛰어난 까닭에 겉으로는 약간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계사년(1353, 공민왕2) 가을에 행한 정동행성(征東行省)의 향시(鄕試)에서 내가 다행히도 최씨와 함께 나란히 급제하는 영광을 안았다. 그리하여 중국의 중서당(中書堂)에서 회시(會試)를 보게 되었는데, 그때 최씨가 눈병에 걸리는 바람에 글자를 보기도 힘들었다. 이에 최씨가 탄식하기를 “내가 그동안 급제한 것은 다만 요행일 뿐이다. 지금 나보다 재질이 뛰어난 인물이 두 사람이나 있는데, 내가 그 두 사람을 누르고 이번에 꼭 급제하려고 하는 것은 당초에 내가 바랐던 바가 아니다. 지금 내 눈이 이렇게 된 것도 필시 하늘의 뜻일 것이니, 나는 앞으로 기거(寄擧)나 해 볼까 한다.” 하고는, 마침내 회시에 응시하는 것을 포기하였다. 그리하여 일단 귀국하고 나서 관직을 역임한 끝에 병부 원외랑(兵部員外郞)에 이르렀는데, 병신년(1356, 공민왕5)에 표문(表文)을 받들고 신정(新正)을 축하하기 위해 경사(京師)에 갔다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요하(遼河)에서 도적을 만나는 바람에 정사(正使)와 부사(副使)를 비롯해서 삼절(三節)과 그 밖의 인원 모두가 살해되고 말았으니, 아, 슬픈 일이다.
기주(蘄州)의 진중길(秦中吉)은 나의 선군(先君 이곡(李穀))과 소싯적에 친하게 지내던 분으로, 학식이 넓고 글을 또 잘하였다. 그래서 그분에게 수업을 받은 자들 중에 우수한 성적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서 현달한 자들이 많이 나왔는데, 정작 진공(秦公) 자신은 급제를 하지 못한 채 노년에 접어든 나이에도 과거 시험장에 모습을 드러내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선군이 정해년(1347, 충목왕3)에 지공거(知貢擧)를 맡게 되자, 진공이 이르기를 “나는 가정(稼亭 이곡)과 어려서부터 함께 배운 처지이다. 따라서 내가 다행히 급제를 한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필시 가정이 나에게 사정을 봐주었다고 말할 것이다. 나 때문에 그런 소리를 듣는다면, 이는 내가 우리 가정에게 죄를 짓는 일이니, 어찌 그래서야 되겠는가.” 하고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벼슬길에 나아가 5품의 관직을 역임하고 어사(御史)의 반열(班列)에까지 서게 되었는데, 물러나서는 제생(諸生)과 경사(經史)를 강론하는 일을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최씨는 바로 그의 사위이다. 최씨의 문장으로 말하면 또 진씨(秦氏)가 따라갈 수 있는 바가 아니었는데, 벼슬길에서 현달하지 못한 채 불행히도 죽고 말았으니, 아, 이것을 최씨의 불운(不運)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진씨의 불운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진씨는 오래 살았고 최씨는 일찍 죽었다. 그러나 그 이름으로 말하면, 최씨나 진씨나 모두 후세에 전해질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점에서는 저 구천(九泉) 아래에서 그런대로 그들이 자위(自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최씨는 기개(氣槪)가 있어서 과감하게 발언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그가 만약 일찍 죽지 않고 문사(文辭)를 더욱 발전시켰더라면, 응당 졸옹(拙翁 최해(崔瀣))에게도 그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벼슬자리에 오래 있지 못해서 뜻을 미처 펴 보지 못하였고, 글을 지은 것도 적어서 재질을 제대로 발휘해 보지도 못하였다. 그리하여 정기(精氣)는 요하(遼河)의 하늘 가로 흩어져 버리고, 체백(體魄)은 요하의 들판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으나, 어쩌면 화표주(華表柱)를 찾아와서 탄식한 학(鶴)처럼 그가 다시 이곳에 돌아올는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으로부터 천년쯤의 세월이 지난 뒤에 최씨전을 읽은 사람이 그의 말소리를 또 듣게 된다면, 어찌 비감(悲感)에 젖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그래서 그에 관한 대략적인 내용을 적어서 이렇게 최씨전을 짓는 바이다.


[주D-001]기거(寄擧) : 천거(薦擧)를 통해서 벼슬하는 것을 말한다. 《설부(說郛)》 권44상(上) 진사시 예부 급공권(進士試禮部給公券) 조에 “먼 지방의 빈한한 선비가 향시에 합격하고 나서 예부의 회시에 응시할 자격을 얻게 되었는데도, 이에 필요한 경비를 조달하려 해도 안 될 경우에는 차라리 천거를 통해서 벼슬하려고만 할 뿐 아예 응시를 하지 않고 있으니, 참으로 염려스러운 일이다.[遠方寒士 預鄕薦欲試禮部 假丐不可得則寧寄擧不試 良爲可念]”라는 기록이 보인다.
[주D-002]삼절(三節) : 상절(上節)ㆍ중절(中節)ㆍ하절(下節)의 병칭으로, 외교 사절을 수행하는 관원들을 가리킨다.
[주D-003]화표주(華表柱)를 …… 학(鶴) : 요동(遼東) 사람 정영위(丁令威)가 신선이 되고 나서 천년 만에 학으로 변해 다시 고향을 찾아와서는 요동 성문의 화표주 위에 내려앉았는데, 소년 하나가 활을 쏘려 하자 허공으로 날아올라가 배회하면서 “옛날 정영위가 한 마리 새가 되어, 집 떠난 지 천년 만에 이제 처음 돌아왔소. 성곽은 의구한데 사람은 모두 바뀌었나니, 신선술 왜 안 배우고 무덤만 이리도 즐비한고.[有鳥有鳥丁令威 去家千年今始歸 城郭如故人民非 何不學仙冢纍纍]”라고 탄식하고는 사라졌다는 전설이 전한다. 《搜神後記 卷1》

東文選卷之一百
 傳
崔氏傳

辛巳十韻科。崔霖。父諱成固。郞將。母蔣氏。某官某之女。霖嗜酒吟詩。好游僧房。非沽酒者去之。有寒溪釋甚相得。淋漓相從。禮法之士。頗短之。猶以才高。故稍貌敬焉。癸巳秋鄕試。僕幸獲與崔氏聯中。及會試中書堂。崔氏眼疾作。艱於書字。乃歎曰。吾所得僥倖者也。今才高於予者。二人焉。屈二人而必得之。非吾所望也。眼之如此。必天也。吾將寄擧焉。乃不赴試。旣還國。遷至兵部員外郞。歲丙申。奉表賀明年正于京師。旣訖事。還至遼河遇賊。使副三節人吏皆被害。嗚呼悲哉。蘄州秦中吉。吾先君少相善也。博學能文。從之受業者。多高科顯仕。而秦公老矣。猶欲出游塲屋。先君知丁亥貢擧。秦公曰。吾與稼亭。束髮同學。雖幸而獲中。人必謂稼亭私我也。由我而得是名。是我累吾稼亭也。可乎哉。乃不赴。歷官五品。立于班心矣。退而與諸生。講論經史。無少倦。崔氏其外甥也。其文章。又非秦氏所可及。而宦不達。不幸而亡。嗚呼。崔氏之禍歟。秦氏之禍歟。秦氏壽。而崔氏夭。若其名也。崔氏也。秦氏也。皆可傳也。庶可以自慰於九原矣。崔氏倜儻敢言。使其不死。益進其文辭。當不讓拙翁矣。居官未久。志未效。爲文少。才不展。精氣散於遼天。體魄蔽於遼野。當鶴言華表而來歸也。千載之下。讀崔氏傳。而又聞其言也。豈不悲哉。予以是略書大槩。以爲崔氏傳云。


 동문선 제101권
 전(傳)
열부최씨전(烈婦崔氏傳)


정이오(鄭以吾)

열부(烈婦)의 성은 최씨(崔氏)요, 이름은 아무다. 전라도 영광군(靈光郡) 사람으로 진주(晉州)에 옮겨가서 살았는데, 어느 세대부터인지는 알 수 없다. 도염서승(都染署丞)인 인우(仁祐)의 딸이요, 진주의 호장(戶長)인 정만(鄭滿)의 아내다. 아들과 딸 네 사람이 있었는데, 그 하나는 아직 갓난아이로 있을 때인데, 기미년 8월에 왜적이 진주를 함몰하여 성중 사람들이 모두 달아나버리고 아무도 방어하는 자가 없었다. 이때에 만(滿)은 아전의 사무로 인하여 서울에 가 있었다. 적이 최씨가 사는 마을에 들이닥쳤는데 열부는 나이가 바야흐로 33세였고, 또한 얼굴이 잘생겼다. 그 아들과 딸들을 업고 안고 이끌고 산 속으로 달아나서 피했더니 적들은 사방으로 몰려와서 약탈하다가 열부를 보고는 칼로 위협하여 끌고 가려하였다. 열부는 나무를 끌어안고 그들에 항거하며 적을 꾸짖기를, “죽기는 마찬가지다. 적에게 더럽힘을 당하고 죽기보다는 차라리 의를 지키며 죽겠다.” 하고, 꾸짖는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적은 칼로 밀쳐서 그를 관통시키어 드디어 나무 밑에서 죽였다. 적은 10살되는 딸과 8살 되는 아들을 사로잡아 물러갔다. 홀로 남아있는 습(習)은 겨우 6살이었다. 시체 곁에 있던 갓난아이는 아직도 젖을 빨고 있는데, 피가 가득히 입으로 넘어 가더니 또한 죽고 말았다. 그 집의 종들이 흩어나갔다가 다시 모여들어서 시체를 가져다가 임시로 빈소를 설치하고 만(滿)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기사년에 이르러 도관찰사(道觀察使)인 장하(張夏)가 그 사실을 보고하여 그 마을 문에 정표하고 아들 습(習)에게 시골에서 아전 노릇하는 의무를 면제하였다.
사신(史臣)은 이르기를, “대개 사람의 마음이 극도에 이르면 세상의 사변이 그 마음을 빼앗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세상을 만나면 비록 열렬한 장부일지라도 죽고 사는 것을 결단하기가 어려운데, 더구나 일개의 부인이겠는가. 적의 잔인스러움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적에게 더럽혀지지 않겠다는 정의감이 마음 속에 복받쳐서 생명보다 중히 여겼기 때문이었다. 지금 강성(江城)은 절의를 지키다가 죽은 땅이다. 산도 슬퍼하며 구름도 참담하고 물소리도 흐느끼며 흐른다. 지금에 지나는 길손도 머리털이 쭈삣하며 일어서는구나. 아, 장렬하여라.” 하였다.


東文選卷之一百一
 傳
烈婦崔氏傳

烈婦姓崔名某。全羅道靈光郡人。移居晉州。蓋不知自何世也。都染署丞仁祐之女。晉州戶長鄭滿之妻。生子女四人。其一未脫襁褓中。歲己未八月。倭賊陷晉州。闔境奔竄。無敢禦者。時滿因吏役如京。賊攔入崔氏居里。烈婦年方三十三。且有姿色。抱負携持其子女。走避山中。明日。賊四出驅掠。見烈婦。露刃以驅。烈婦抱木而拒之。罵賊曰。等死爾。汚賊以生。無寧死義。罵不絶口。賊推刃洞貫。遂斃於木下。賊虜十歲女八歲子以退。獨習年方六歲。在死側。小兒猶飮乳。血淋漓入口。亦斃焉。其家奴散而復完。將屍草殯。以待滿還。及己巳歲。都觀察使張夏。上其事。旌表門閭。免子習鄕役云。史臣曰。夫人心之極。世變之不能奪。遭世如此。雖烈丈夫。决死生猶難。况一婦人乎。非不知賊之殘忍。以不汚賊之義。激於衷而重於生也。今江城死節之地也。山哀雲慘。水聲嗚咽。今過者竪髮起立。嗚呼烈哉。


㵢谿集卷之七
 
題烈婦崔氏傳後 a_015_200b


崔氏。晉州戶長鄭滿妻。洪武己未倭陷015_200c晉州。露刃怯崔氏。欲汚之。崔遂罵賊不從。死之。其後觀察使張夏上其事。旌門。免子習鄕役云。郊隱鄭以吾嘗作傳。
望眞山兮鬱嵯峨。菁之水兮浩煙波。訪苔碑兮三尺。餘淸風兮宰木。十載深閨兮貯貞姿。蘭蕙爲神兮人不知。奉侍巾櫛兮刀筆吏。頭戴一天兮誓無貳。生當麗季兮澒洞風塵。海寇搶攘兮魚肉南民。虜子女兮爲己有。無不汚兮賊之手。哀我辰兮遭艱難。凜辭氣兮怒凶頑。甘白刃兮玉碎珠沈。尸路傍兮血淋淋。匍匐就乳兮孤倪。015_200d孰觀者兮不悲。嗚呼幽冤兮化爲精衛。含木塡溟兮千秋萬世。下視馮公兮禽獸不如。樹厥名聲兮吹大虛。盛朝嘉奬兮旌厥宅。鉅公有傳兮發潛德。我歌且謠兮瘴雲愁。欲酹芳魂兮江海頭。雜椒荔兮薦芳醑。靈霏霏兮容與

가정집 제9권
 서(序)
최 시승(崔寺丞)이 등제(登第)한 것을 축하한 시의 서문


인재를 뽑는 제도가 시행된 지 오래되었다. 그 과목을 늘리고 줄인 것은 시대에 따라 같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인재를 빈객으로 예우하고 작록을 수여하면서 문호(文虎 문신과 무신)로 임용한 것은 일찍이 다른 적이 있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당초에는 육예(六藝)가 삼물(三物)의 하나를 차지하면서 사(射)와 어(御)도 그 속에 들어 있었던 것인데, 후세에 와서 호예(虎藝 무예)의 과가 별도로 설치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문호의 경로를 통하지 않고 들어와서 벼슬하는 자들을 이(吏)라고 하였으니, 이는 대개 고대에 도필(刀筆 문서 기록)의 임무를 맡은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해서 벼슬하는 길이 마침내 셋으로 나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뒤로는 각 시대마다 숭상하는 풍조에 따라서 경중의 차이가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당(唐)나라 진신(搢紳)의 경우에는 인신(人臣)으로서 최고의 지위에 이르렀다고 할지라도 진사과(進士科)의 고시를 거치지 않은 자들은 그다지 대단하게 여기지 않았으며, 송(宋)나라의 전성기에 이르러서는 이 과거 출신자들을 특히 더 중시하였다.
본국은 당나라와 송나라의 제도를 본받아 대대로 문사(文士)를 존중해 왔다. 그리하여 시종(侍從)과 헌체(獻替)의 관직이나 선거(選擧)와 전사(銓仕)의 직책 등은 실제로 문사들이 모두 독점하였고, 호반(虎班)이나 이속(吏屬) 등은 감히 이 자리를 쳐다보지도 못하였다. 그런데 더구나 지금은 성스러운 원나라가 문치를 숭상하여 과거에 대한 조칙을 거듭 내리고 있는 때인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래서 글공부를 하는 선비들이 있는 힘을 모두 발휘하고 용맹심을 한껏 과시하며 서로 다투어 기예를 다투는 시험장에 나아가 실력을 겨루려 하고 있는 것이다.
지원(至元) 6년(1340, 충혜왕 복위 1) 겨울에 삼사사(三司使) 김공(金公 김영돈(金永旽))과 전법 판서(典法判書) 안공(安公 안축(安軸))이 춘관(春官 예조(禮曹))에서 인재를 선발하였는데, 이때 춘헌(春軒 최문도(崔文度)) 최공(崔公)의 아들 예경(禮卿 최사검(崔思儉))이 그 시험에 급제하였다. 최공은 손님을 좋아하기로 동방에서 제일가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축하하려고 찾아오는 사람들의 어깨가 서로 부딪칠 정도였다.
내가 춘헌에게 나아가 축하한 다음에 물러 나와 예경에게 말하기를,
“과거에 등제하려고 하는 것은 벼슬길에 오르려고 해서이다. 본국의 옛날 제도를 보건대, 관직이 일단 6품에 이른 자는 더 이상 유사에게 나아가서 시험을 보지 못하게 했다. 그대는 일찍이 낭장(郞將)을 거쳐 감찰 규정(監察糾正)을 겸임하였고 전객시 승(典客寺丞)에 전임되었으며, 나이도 한창 장년(壯年)으로서 날로 발전해 마지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는 근래의 규례를 원용하여 백의의 무리와 함께 과거 시험장에서 붓과 종이를 희롱하였다. 그대는 장차 녹명(鹿鳴)의 노래를 부르고는 계해(計偕 연경(燕京)의 회시(會試) 응시생들)와 함께 천자의 뜰에 나아가서 대책을 묻는 시험 문제를 쏘아 맞히려고 하는 것인가? 그대는 장차 헌체하여 우리 임금의 허물을 보완하고 아름다운 점을 받들어 따르려고 하는 것인가? 그대는 장차 전선(銓選 인사 행정)에 참여하여 사류(士流)를 품평하면서, 혹 꾸짖고도 벼슬을 주고 혹 웃고도 주지 않는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인가? 아니면 호부(虎夫)가 호기를 부리며 함부로 행동하는 것을 괴롭게 여기고, 이원(吏員)이 정신없이 경쟁하며 이익을 추구하는 것에 징계된 나머지, 우리 유자(儒者)의 오활한 점에 몸을 기대고서 사림(詞林)이나 취향(醉鄕)으로 달아나 스스로 숨으려고 하는 것인가?”
하니, 예경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임금을 섬기고 어버이를 섬기는 것에 대해서는 원래 가훈이 있다. 하지만 부귀와 이달(利達) 같은 것은 구하는 데에 방법이 있고 얻는 데에 명이 있는 것이니 내가 어떻게 하겠는가. 우리 집안은 예부공(禮部公) 휘 균(均) 이하로부터 서로 잇따라 5대에 걸쳐서 등제하였다. 그리고 예부공의 아들인 문정공(文定公) 휘 보순(甫淳)은 충헌왕(忠憲王 고종(高宗))의 명상(名相)으로서 네 차례나 예위(禮圍 과거 시험)를 관장하였고, 조부 문간공(文簡公 최성지(崔誠之))은 또 덕릉(德陵 충선왕(忠宣王))의 재상으로서 문형(文衡)을 주관하였다. 그러다가 존공(尊公 부친) 때에 와서는 어려서 국자제(國子弟 왕세자와 공경대부의 자제)를 따라 천조(天朝)에서 숙위(宿衛)하였기 때문에 과거 공부를 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일찍이 조모 김씨(金氏)가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이르시기를 ‘네가 과거에 급제하여 가업을 회복하는 것을 본다면 여한이 없겠다.’라고 하신 것이다. 자애로운 그 모습은 지금 뵐 수 없게 되었어도 그때 해 주신 말씀은 아직도 귀에 남아 있다. 이것이 바로 내가 구구하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하였다.
내가 이 말을 듣고는 의롭게 여겨지기에 술잔을 들어 권하면서 말하기를,
군자의 가르침을 보면, 옛날로 회귀하여 시조를 추모하게 하였으니, 이는 대개 자기가 태어난 근원을 잊지 않게 하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더군다나 부지런히 배우기를 좋아하면서 기필코 가업을 이으려고 하는 자의 경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뒷날에 입신양명할 것을 이를 통해서 알 수가 있겠다. 사람들은 거자가 올해 주사(主司)를 제대로 만났다고 하지만, 내 생각에는 주사가 올해 거자를 제대로 얻었다고 여겨지는데, 이는 예경을 보면 충분히 그렇게 말할 수가 있다.”
하였더니, 객들도 모두 그렇다고 하고는 각자 시를 짓고 나서 나의 말을 시권(詩卷)의 첫머리에 적어 넣게 하였다.


[주D-001]인재를 빈객으로 예우하고 : 주(周)나라 때에 향대부(鄕大夫)가 소학(小學)에서 현능(賢能)한 인재를 천거할 적에 그들을 향음주례(鄕飮酒禮)에서 빈객으로 예우하며 국학(國學)에 올려 보낸 것을 말한다. 《주례(周禮)》 지관(地官) 대사도(大司徒)에 “향학(鄕學)의 삼물 즉 세 종류의 교법(敎法)을 가지고 만민을 교화한다. 그리고 인재가 있으면 빈객의 예로 우대하면서 천거하여 국학에 올려 보낸다. 첫째 교법은 육덕이니 지ㆍ인ㆍ성ㆍ의ㆍ충ㆍ화요, 둘째 교법은 육행이니 효ㆍ우ㆍ목ㆍ연ㆍ임ㆍ휼이요, 셋째 교법은 육예이니 예ㆍ악ㆍ사ㆍ어ㆍ서ㆍ수이다.〔以鄕三物敎萬民而賓興之 一曰六德 知仁聖義忠和 二曰六行 孝友睦婣任恤 三曰六藝 禮樂射御書數〕”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2]진사과(進士科) : 조선 시대의 문과(文科)와 유사한 형태의 과거 제도이다. 참고로 《고금사문유취(古今事文類聚)》 전집(前集) 권26 사진부(仕進部) 중진사과(重進士科)에 “진사과는 수나라 대업(大業) 연간에 시작되어, 당나라 정관ㆍ영휘 연간에 전성기를 맞았다. 인신(人臣)으로서 최고의 지위에 이르렀다고 할지라도 진사과의 고시를 거치지 않은 자는 그다지 대단하게 여기지 않았다. 사람들이 급제자들을 추중하여 백의 경상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백의의 신분에서 경상의 지위에 나아갈 수 있는 바탕이 되기 때문이었다.〔進士科始隋大中 盛貞觀永徽之際 縉紳雖位極人臣 不由進士者 不以爲美 其推重謂之白衣卿相 以白衣之士卽卿相之資也〕”라는 말이 나오는데, 가정이 본문에서 이 글의 일부분을 그대로 인용해서 쓰고 있다.
[주D-003]헌체(獻替) : 행해야 할 일을 진헌(進獻)하고 행해서는 안 되는 일을 폐지하도록 임금에게 건의한다는 헌가체부(獻可替否)의 준말로, 중대한 국사를 조정에서 의논하는 것을 말한다.
[주D-004]녹명(鹿鳴) : 《시경》 소아(小雅)의 편명으로, 본래는 임금이 신하를 위해 연회를 베풀며 연주하던 악가(樂歌)인데, 후대에는 군현의 장리(長吏)가 향시에 급제한 거인(擧人)들을 초치하여 향음주례(鄕飮酒禮)를 베풀어 주며 그들의 전도를 축복하는 뜻으로 이 노래를 불렀다.
[주D-005]임금의 …… 것인가 : 《효경(孝經)》 사군(事君)에 “군자가 임금을 섬김에, 나아가서는 충성을 다할 것을 생각하고 물러나서는 허물을 보완할 것을 생각하여, 임금의 아름다운 점은 받들어 따르고 임금의 잘못된 점은 바로잡아 구제한다.〔君子之事上也 進思盡忠 退思補過 將順其美 匡救其惡〕”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주D-006]구하는 …… 것이니 :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구하는 데에 방법이 있고 얻는 데에 명이 있는데도, 이런 것을 구하려 든다면 꼭 얻는다고 할 수가 없으니, 이것은 구하는 대상이 나 자신의 밖에 있기 때문이다.〔求之有道 得之有命 是求無益於得也 求在外者也〕”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7]군자의 …… 것이다 : 제사를 지내는 목적에 대해서 말한 《예기》 제의(祭義)의 내용을 풀어서 인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