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최씨 시조공에 대한 기록/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휘 보순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守大尉 門下侍郞 同中書門下平章事(휘 보순)

아베베1 2011. 2. 12. 10:34

최보순(崔甫淳)에 대하여
1162년(의종 16)∼1229년(고종 16). 고려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예부상서를 지낸 균(均)의 아들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황주의 장서기(掌書記)를 거쳐 소부감(小府監)이 되었다.
1208년(희종 4) 금나라의 황제 즉위 축하문을 잘못 썼다 하여 파직되었다.
그뒤 이부시랑(吏部侍郞)이 되고, 1212년(강종 1)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로 과거를 주관하여 위대여(魏大輿) 등을 시취(試取)하였다.  이듬해 동지공거(同知貢擧)로서 지공거가 되어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 이주장(李柱長)과 함께 허수(許受) 등을 시취하였다.
1222년(고종 9) 참지정사(參知政事)로서 또 지공거를 맡았으며, 중서시랑평장사 판병부사(中書侍郞平章事判兵部事)를 거쳐 이듬해 수문전대학사 동수국사(修文殿大學士同修國史)를 역임하였다.

1227년 감수국사(監修國史)가 되어 수찬관(修撰官) 김양경(金良鏡)·임경숙(任景肅)·유승단(兪升旦) 등과 함께 《명종실록》을 찬수하였다.
이듬해 수태사 판이부사(守太師判吏部事)에 올랐다.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東文選卷之三十
 批答
崔甫淳讓金紫光祿大夫參知政事集賢殿大學士同修國史判禮部事。不允敎書。[李奎報]

云云。夫代天理物。貳王行政者。宰相之任也。國以之重輕。民由之肥瘠。以人爲鑒。唐宗保魏徵之明。用汝作舟。商后倚傅說之濟。如非遠量。曷副輿情。卿該通天人。諳練典故。業文而資之武。體柔而濟以剛。精神折衝。弄敵人於掌上。論議有據。藏國子於胸中。貞松不爲寒暑變其容。良玉不因燥濕渝其性。擧國安危而是託。非卿德望而孰當。是用直越鴻樞。擢登鳳閣。申峻史臣之職。兼崇書殿之資。用玆西省之新榮。雪爾南曹之舊屈。大抵王者之用人也。雖未嘗究閱其爲人。苟僉言之皆允。猶柄用而不疑。况如卿者。在昔納言密邇之時。朕已親試。置斯當軸論思之地。誰復異詞。毋執小謙。更陳牢讓。所請宜不允云云。

 동국이상국전집 제8권
 고율시(古律詩)
모춘(暮春)에 박사 최보순(崔甫淳)과 함께 주부(注簿) 윤세유(尹世儒)를 찾아 술상을 차려놓고 동파(東坡)의 시운을 따라 각각 짓다

마주앉아 세 잔씩 마셨으나 / 對酌三杯酒
수인장은 엿볼 수 없네 / 難窺數仞墻
꽃이 지니 시 생각 어지럽고 / 落花詩思亂
해는 지는데 취한 노래 흥겹구나 / 殘日醉歌長
내 살쩍에는 처음에는 흰 털이 났고 / 我鬢初抽綠
그대는 일찍부터 명성이 알려졌네 / 君名早飮香
서로 만나 글 얘기하며 마시는데 / 相逢文字飮
이량을 연주할 게 뭐 있나 / 何必奏伊凉

[주C-001]최보순(崔甫淳) : 벼슬은 판이부사(判吏部事)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주C-002]윤세유(尹世儒) : 고려(高麗) 시중(侍中) 윤관(尹瓘)의 손자로, 벼슬이 예부 원외랑(禮部員外郞)에 이르렀다. 《高麗史》
[주D-001]수인장(數仞墻) : 두어 길 되는 담장으로, 인격과 도덕이 높다는 뜻이다. 《논어(論語)》 자장(子張)에 “선생님의 담장은 두어 길이 되기 때문에 그 문(門)을 찾아 들어가지 않는다면, 종묘(宗廟)의 아름다움과 백관(百官)의 훌륭함을 볼 수 없다.” 하였다.
[주D-002]이량(伊凉) : 이주(伊州)와 양주(凉州)의 두 악곡(樂曲). 《악원(樂苑)》에 “이주는 상(商)에 해당한 곡조요 양주는 궁(宮)에 해당한 곡조이다.” 하였다.
동국이상국전집 제33권
 교서(敎書)ㆍ비답(批答)ㆍ조서(詔書)
최보순(崔甫淳)이 금자광록대부 참지정사 집현전태학사 동수국사 판예부사(參知政事集賢殿太學士同修國史判禮部事)를 사양한 데 대한 불윤교서

운운. 대저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고 임금을 보좌하여 정사해가는 것이 재상의 소임인데, 따라서 나라의 위신이 중해지거나 경해지고, 백성이 잘살거나 못살게 되는 것이다. 당태종(唐太宗)은 사람을 거울삼아, 위징(魏徵)의 총명을 싸고 돌고, 상(商) 나라 임금은 신하를 배[舟] 삼아, 부열(傅說)이 건너줌을 힘입었다. 원대한 역량있는 사람이 아니고서 어찌 여정(輿情 민심)에 맞겠는가. 경은 천ㆍ인(天人)을 해박하게 통하고 전고(典故)를 익숙하게 알며, 문장(文章)을 전업(專業)하여 무(武)를 뒷받침하고, 몸이 연약하나 강단으로 보충하되, 정신으로 대항하여 적(敵)을 손바닥 위에서 놀리고, 의논이 근거가 있어 국자감(國子監)을 가슴속에 간직했으며, 절개 있는 솔이 한서(寒暑) 때문에 그 모양을 변하지 않듯 하고, 좋은 옥이 열기나 습기 때문에 그 성질이 변하지 않듯 한다. 국가의 안위(安危)를 부탁해야 하는데, 경 같은 덕망있는 사람이 아니고 누가 하겠는가. 이래서 바로 홍추(鴻樞 추밀원)를 뛰어넘어 봉각(鳳閣 중서성)으로 발탁해 올리되, 거듭 사신(史臣)의 직(職)으로 올리고 겸해서 서전(書殿 집현전(集賢殿))의 자급(資級)으로 높이어, 이 서성(西省 중서성)의 새 영화로써 남조(南曹 이조(吏曹))에서의 전일 굴욕을 씻게 한 것이다. 대저 왕자(王者)가 인재를 임용할 때, 비록 일찍이 그의 사람됨을 파보지 못하였더라도, 진실로 여러 사람의 말이 모두 좋다고 하면, 오히려 중하게 쓰고 의심하지 않는 것인데, 더구나 경 같은 사람은 지난날 근밀(近密)한 납언(納言)으로 있을 때, 짐(朕)이 이미 친히 시험했기에 이 요로인 논사(論思)하는 자리에 두는 것인데, 누가 다시 딴 말을 하겠는가. 조그마한 겸손을 고집하여 다시 굳이 사양하는 말을 하지 말라. 소청을 마땅히 윤허하지 않겠다. 운운.

[주D-001]위징(魏徵)의 총명 : 당 태종이 신임하는 신하 위징(魏徵)이 죽자, “청동(靑銅) 거울 보고 의관을 바룰 수 있고, 옛 역사를 거울삼아 흥망을 알 수 있고, 곧은 사람으로 거울삼아 잘잘못을 알 수 있는데, 지금 위징이 죽었으니, 원감이 없어졌다.” 하였다. 《唐書 卷97》《舊唐書 卷71》
[주D-002]부열(傅說)이 건너줌 : 고종(高宗)이 꿈에 성인을 만나고서, 백공(百工)들을 시켜 수소문하여 부열을 찾아내게 되자 정승을 삼으며 말하기를 “만약 큰 내를 건너게 된다면 그대로 주즙(舟楫)을 삼겠다.” 하였다. 《書經 說命上》
동문선 제30권
 비답(批答)
최보순이 금자광록대부 참지정사 집현전대학사 동수국사 판예부사를 사양한 것에 대해 윤허하지 않는 교서[崔甫淳讓金紫光祿大夫參知政事集賢殿大學士同修國史判禮部事不允敎書]

이규보(李奎報)

운운.
대저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고 임금을 도와 정사를 행하는 것은 재상(宰相)의 책임이라, 나라의 안위가 정승에게 달렸고 백성들의 생활 역시 정승에게 달렸다. 당 태종(唐太宗)은 위징(魏徵)을 거울로 삼아 밝음을 보유했었고, 은 고종(殷高宗)은 부열(傅說)을 배로 삼아 강물을 건넜도다. 그러니 원대한 도량이 아니면 어찌 여론(輿論)에 흡족하게 부합되겠는가. 경(卿)은 학문은 천인(天人)을 통달하고 지식은 전고(典故)에 익숙하며, 문(文)을 업으로 하되 무(武)에도 능하고 바탕은 부드럽되 강함을 겸했으며, 정신으로 절충(折衝)하면 적을 손바닥 위에서 가지고 놀고, 논의(論議)에 근거가 있어 국자(國子)를 가슴 속에 감추었도다. 절개는 단단한 소나무와 같아 춥거나 덥거나 간에 그 모습을 변하지 않았고, 품격은 좋은 옥과 같아 건조하거나 습하거나 간에 그 성질을 변하지 않았도다. 그러니 온 나라의 안위를 맡기려면 경과 같은 덕망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어느 누가 그것을 감당하겠는가. 그러므로 이제 경을 추밀(樞密)에서 발탁하여 참정(參政)에 올리고, 사신(史臣)의 직책과 집현전 학사의 자격을 겸하게 하였도다. 이번 서성(西省 중서성)의 새로운 영전으로써 앞서 남조(南曹 이조(吏曹))의 불우했음을 보상하는도다.
대개 왕자(王者)가 사람을 씀에 있어서 비록 그 사람됨을 자세히 알아보지 못하여도, 뭇 사람들이 다 좋다고 말하면 그대로 임용하여 의심하지 않는 법이다. 그런데 하물며 경과 같은 이는 옛날에 승지(承旨)로 가까이 출입할 적에 짐이 이미 몸소 겪어본 바이다. 그러니 이제 경을 논사(論思)하는 요직에 둠에 있어서 누가 다시 이의(異議)를 제기할 것인가. 겸손을 고집하여 다시 사양하지 말라. 청한 바는 윤허하지 않노라. 운운.

 

 

 

시대
고려
연대
1229년(고종16년)
유형/재질
묘지명·묵서명 / 돌
문화재지정
비지정
크기
세로 60.6cm, 가로 100cm, 글자크기 1.2cm
출토지
미상
소재지
(일본)동경(東京)대학교
서체
해서(楷書)
찬자/서자/각자
  미상 / 미상 / 미상

 

 

 

 

 

위치 :미상 해제 :최보순(甫淳 : 1162~1229)의 자는 청노(淸老)이고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아버지 균(均)은 상서예부랑중(尙書禮部郞中)을 지냈는데 조위총의 난을 평정하다가 전사하였다. 1182년(명조 12)에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쳤으며 관직은 수대위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守大尉 門下侍郞 同中書門下平章事)에 이르고 수대부 감수국사 주국(守大傅 監修國史 柱國)을 더 하였다. 네 번 과거를 주관하여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고, 희종대에는 안남대도호부(安南大都護府)에서 제방을 쌓고 물길을 내어 수재를 없앴다. 또 1227년(고종 14)에는『명종실록』의 편찬을 주도하였다. 1229년(고종 16)에 별세하니 향년 68세였다. 합문지후(閤門祇候) 진중기(秦仲基)의 딸과 결혼하여 2남 3녀를 두었다. 부인은 용구현부인(龍駒縣夫人)에 봉해졌다.

 

崔首相墓誌」
▨▨▨水接于天遙源長發祟岳之峰柱于地層構深盤盖鍾靈於此爲姓爲名者其惟我公乎公姓崔名甫淳字淸」
老流化府人也考均仕爲尙書禮部郞中當大定十四年甲午東蕃二十餘城跋扈飛揚於萬死中不顧死生奉承」
王命單騎獨往諭以禍福各令歸順定亂之後返於路次乃爲他賊所害惜乎爲國亡身者也 本朝錄功追封▨徒」
蓋死於王事者其後必昌公其嫡子也公資貌魁奇胷懷宏大弘和博達而遇節必立恢曠放㢮而應機能斷其居室」
也孝悌慈愛洽乎宗族而內行著焉其在國也仁義禮智浸于朝廷而外美彰焉此其大略也始自勝衣至于弱冠孜」
孜焉仡仡焉心周孔之書體班楊之作鼇弄筆海虎戄詞場及 明宗在位泰定二十二年壬寅登乙第由是驥伸逐」
日之蹄鵬展摩霄之翮在丁未年除齊安書記其守節也淸於氷潔於水其勸農也焚薈蔚漑鹵赤地千里化爲良」
田一秋大稔萬戶皆足時黜陟使褒美之曰淸白守公存恤百姓興利除害因奏之」
朝以此擢入國學循資轉秩六」管諸生樂聞嘉言甚於鍾鼓▨▨▨承慶知人者也一見大驚曰眞宰相器也因此直登中書注意之捷梯俄受監察」御史山立班心霜淸物表 神宗在位承安▨年庚申始入鳳池歷登左右正言司諫至居舍人皆兼三字琅琅諫」舌直磨天缺艷艷詞花如帶春露▨縫袞職潤色▨▨泰和二年壬戌秋南方群盗如猥毛而公以中軍兵馬判官」楯頭磨墨倚馬作檄萬擧萬全之計皆▨其手三年賊平 大上王卽位大和四年甲子以功拜居郞直寳文閣」依前知制誥兼太子文學司經乙丑冬爲入丹大使酋長聚看曰東國有賢人矣還爲禮部郞中居注典誥上方重外」勅令郞官出宰百里公例爲安南大都護副使峙堤坊決㙲澮除人水禍其慈化過於」
齊安萬萬矣半年入拜禮賓少」
卿遷國子司業兼御史雜端又遷少府監皆兼制誥凡兩爲按廉使前則慶尙後則全羅憂國如家愛民若子皆賀」
▨德之星出於南方矣察訪以守節奉公蘇復百姓褒奏之 康宗卽位大安三年辛未進拜吏部侍郞右諫議大夫」
翌年壬申遷尙書左丞依前制誥是年春爲監試座主考閱精强拔犀角擢象齒時無倒牓之誚崇慶二年癸酉拜太」
僕卿仍兼諫議制誥翰林侍講學士乙亥春出爲東界都統理疲民若烹小鮮禦黠虜如搏暴虎所以一方皆安枕矣」
丁丑春判秘書省依前制誥 今上在位貞祐六年戊寅詔爲樞密院右承宣翰林學士又兼左散騎常侍充史館修」
撰官知兵部事他皆厭聞請謁牢閉深坐不接賓客公獨大闢其戶容受百官章奏判决如流使君之澤無壅於上民」
之情無欝於下幾三載遷銀靑光祿大夫尙書右僕射席未暇暖於貞祐八年庚辰旋入中書拜金紫光祿大夫叅知」
政事集賢殿大學土同修國史判禮部事其間四掌春場一爲同提舉三爲上提擧所牓皆賢隋侯之櫝無魚目卞和之」
樻無鼠璞矣壬午冬拜中書侍郞平章事判兵部事修文殿大學士示優游之德寛以濟猛推廣厚之心權以合經甲」
申冬爲守大尉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加守大傅監修國史柱國甞掌閑人之選有三度闕者官司當收田丁」
▨憫其如此更加考試乃▨于▨無一闕焉人皆感▨▨▨寡婦孤兒欲訴寃結爲吏卒所禁未得至前公呼來堂下」
▨▨▨底明白是非决之如神聞之者無不隕涕如此者不可勝數戊子冬爲三韓壁上正▨▨▨▨▨▨▨吏部事」
▨並如故是年夏初夜直中書忽然感疾 上驚惶命上方醫將萬金良藥理之須臾卽愈然時時復作尋具表▨▨」
▨▨上恐大臣釋位無與共政遣使敦諭挽留不去公强視事非所好也及冬末入政事堂除吏旣畢退息私第翌」
年己丑正月初二日曉問其時刻面壁偃臥如睡而終享年六十有八公凡仕五朝兩入憲臺四登諫掖一爲納言▨」
▨文昌爲相十年爲二宰六年爲冡宰二年是時達旦于加在於西北萬奴在東曰本在南如虎垂涎窺覦我國終未」
呑噬者以我公在朝故爾然則陰功隱德鎭壓三韓者有如此也公之室龍駒縣夫人秦氏乃閤門祇候仲基之女也」
子二人長爲內侍閤門祇候季爲國子博士兼直翰林院女三人一適禮部員外郞崔氏二亦皆爲官人之婦」
上聞訃軫悼乃命有司庀葬具加賻禮冊命諡曰文定公仍令百官祖送以是年二月初七日葬于白駒山麓禮也噫」
功名富貴壽考哀榮人臣之道無一缺焉門生吏部員外典誥星山綏之辱知最厚聊拾德爵齒之萬一上于貞珉其銘曰」
(公之生兮天降靈 五嶽秀兮公之容 學識富兮龜九肋 始達兮一日千里 吟藥西垣」公之出兮斗儲精 四溟深兮公之胷 文章麗兮鳳五色 大成兮十旬遠至 視草北門」煩大手兮高文 再憑熊兮閔南民」
陳讜議兮鯁言 暫分虎兮鎭東藩」) (▨▨一開兮▨之平 爲龍喉兮翔貴 瑠甁貯名 三取白日兮授五龍而飛天 爲亞相兮朝廷鼎重」春場四闢兮鏡之淸 含鷄舌兮奏事 金鉉調羨 一遏洪濤兮使六鼇而戴山 爲冡宰兮社稷盤安」歷仕五君 賢長城兮橫萬里」永鎭三韓 啓大炉兮鑄億人」)
(漢之安危兮在於兩握 何白鷄兮入夢 天子慟兮淚如兩 噫 龍亡大澤兮鰌鱓舞 國無人兮」
唐之輕重兮繫于一身 馭赤虬兮不廻 國人哭兮聲如雷 虎逝深山兮狐狸歌 其終奈何」
百身難續 唯餘芳烈」萬人出祖 長留竹索」)

[출전 : 『韓國金石全文』中世下篇 (1984)]

최보순묘지명(崔甫淳墓誌銘)  
 
 


최수상(崔首相) 묘지
▨▨의 물은 하늘가에 닿아 있어 그 샘이 먼 곳으로부터 나오고, 숭악(崇岳)의 봉우리는 땅바닥에 기둥을 대고 있어 그 뿌리가 깊숙하게 박혀 있다. 대개 영(靈)들이 이 곳에 모이는데, 성씨를 가지게 되고 이름이 지어진 것은 오직 우리 공뿐인가.
공의 성은 최씨(崔氏)이고, 이름은 보순(甫淳)이며, 자는 청로(淸老)이며, 유화부(流化府) 사람이다. 아버지 균(鈞)은 벼슬하여 상서예부낭중(尙書禮部郞中)이 되었다. 대정(大定) 14년 갑오년(명종 4, 1174)에 동번(東蕃)의 20여 성이 제멋대로 날뛰자, 만사(萬死) 중에서도 생사를 돌보지 않고 왕명을 받들어 단기로 홀로 가서 화복(禍福)으로서 설득하여 각기 귀순하게 하였다. 난을 평정하고 돌아오는 길에 다른 적에게 살해당하였으니, 슬프다,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이로다. 우리 조정에서 공훈을 추록하여 ▨도(司徒)로 추봉하였다. 대개 임금을 섬기다 돌아가신 이는 그 후손이 반드시 창성하게 되니, 공은 그 분의 적자(嫡子)이다.
공은 성품과 생김새가 뛰어나게 훌륭하고 가슴에 품은 뜻이 넓고 컸다. 해박하고 통달한 지식으로 널리 화합하면서도 때를 만나면 반드시 행하였으며, 자유분방하며 얽매이지 않았으나 기회를 만나면 능히 결단하였다. 집에서는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으며 자애로와 종족들을 흡족하게 하니 집안에서의 행실이 뛰어났고, 나라에는 인의(仁義)와 예지(禮智)가 조정에 스며들게 하니 밖으로도 훌륭함이 뚜렷하였다. 이것이 그 대략이다.
처음 옷을 입기 시작할 때부터 약관(弱冠)의 나이에 이르기까지 부지런하고 용맹하게 주공(周公)과 공자(孔子)와 같은 성인의 책을 마음에 새기고 반고(班固)와 양웅(楊雄)과 같은 문장가의 행적을 몸으로 본받으니, 문필의 바다에서 자라를 희롱하는 듯하고 문장의 경연장에서 호랑이를 놀라게 하는 듯하였다. 명종(明宗)이 재위하던 태정(泰定) 22년 임인년(명종 12, 1182 )에 을제(乙第)에 합격하게 되자, 이로 말미암아 천리마가 해를 좇는 발굽을 내닫고 붕(鵬)새가 하늘을 어루만지는 깃촉을 펴게 되었다.
정미년(명종 17, 1187)에 제안서기(齊安書記)에 임명되니, 절의를 지키는 것이 얼음보다 맑고 물보다 깨끗하였다. 농사를 장려하여 우거진 풀숲을 불사르고 메마른 땅에 물을 대게 하니 쓸모 없는 땅 천 리가 양전(良田)으로 바뀌었다. 첫 해 가을에 곡식이 크게 익어 만 호(戶)의 백성들이 모두 풍족하게 되었으므로, 당시의 출척사(黜陟使)가 훌륭하다고 칭찬하며 “청렴하고 공정한 수령이 백성을 편안하게 구휼하고, 이로운 것은 늘리고 해로운 것은 없앴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조정에 알리자, 이 때문에 발탁되어 국학(國學)에 들어갔다. 차례대로 승진해 가니 6관(六管)의 여러 생도들이 듣고 즐거워하여, 말하는 것이 종과 북보다 심하였다. ▨▨ 우경승(于承慶)은 사람을 볼 줄 아는 이었는데, 한 번 보고는 크게 놀라 “참으로 재상감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로 인해 바로 중서주의(中書注意)로 뛰어 올랐다가, 얼마 되지 않아 감찰어사(監察御史)에 임명되니, 산과 같이 꼿꼿이 서서 중심에 자리 잡고, 서리같이 맑게 세상 밖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신종(神宗)이 재위하던 승안(承安) 5년 경신년(신종 3, 1200)에 비로소 봉지(鳳池, 中書門下省)에 들어가 좌우(左右) 정언(正言)과 사간(司諫)을 두루 역임하고 기거사인(起居舍人)이 되었는데, 모두 지제고(知制誥)[三字]를 겸하였다. 낭랑하게 간(諫)하는 목소리는 임금의 허물을 바르게 다듬었고, 아름다운 꽃과 같은 글을 올려 임금의 은택을 크게 하니, 천자의 직책을 ▨ 도와주어 ▨▨ 윤이 나게 하였다.
태화(泰和) 2년 임술년(신종 5, 1202 ) 가을에 남쪽 지방에서 도둑 떼들이 고슴도치의 털처럼 일어나자, 공을 중군병마판관(中軍兵馬判官)으로 기용하였다. 방패 머리에서 먹을 갈고 말을 탄 채 격문을 지으니 온갖 계책이 모두 그 손에서 ▨(나왔는데), 3년에 적을 평정하였다.
대상왕(大上王, 熙宗)이 즉위한 대화(大和) 4년 갑자년(1204)에 공훈으로 기거랑 직보문각(起居郞 直寶文閣)에 임명되고, 이전처럼 지제고(知制誥)와 태자문학사경(太子文學司經)을 겸하였다. 을축년(희종 1, 1205) 겨울에 거란(契丹)에 들어가는 사절의 우두머리가 되니, 추장들이 모여 바라보며 말하기를, “동국(東國)에 현인(賢人)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돌아와 예부낭중 기거주 전고(禮部郞中 起居注 典誥)가 되었다. 임금이 바야흐로 지방을 중시하여 칙령으로 낭관(郞官)들을 백 리(里)에 보내어 다스리게 하였다. 공은 관례에 따라 안남대도호부사(安南大都護副使)가 되었는데, 뚝을 높게 쌓고 고랑을 터서 사람들의 수화(水禍)를 제거하니, 그 자애롭게 다스린 것이 제안(齊安)에 있을 때보다 만의 만 배나 더하였다. 반 년 만에 들어와 예빈소경(禮賓少卿)에 임명되고, 국자사업 겸 어사잡단(國子司業 兼 御史雜端)에 오르고, 또 소부감(少府監)으로 승진하였는데 모두 제고(制誥)를 겸하였다. 모두 두 번 염안사(廉按使)가 되었는데, 처음은 경상도(慶尙道)이고 나중은 전라도(全羅道)였다. 나라를 걱정하기를 집안처럼 하고, 백성을 사랑하기를 자식처럼 하니, 모두 현인[德星]이 남방(南方)에 나왔다고 ▨ 하였다. 찰방(察訪)이 절의를 지키며 나라를 위하여 힘을 다하여 백성들이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고 포상하기를 아뢰었다.
강종(康宗)이 즉위한 대안(大安) 3년 신미년(1211)에 이부시랑 우간의대부(吏部侍郞 右諫議大夫)로 승진하여 임명되고, 이듬해 임신년(강종 1, 1212)에 상서좌승(尙書左丞)에 올랐는데, 이전처럼 제고(制誥)를 겸하였다. 이 해 봄에 감시(監試)의 좌주(座主)가 되어 꼼꼼하고 분명하게 살펴서 무소의 뿔이나 코끼리의 어금니와 같이 귀하고 훌륭한 이들을 뽑으니, 당시 방(榜)이 거꾸로 걸렸다는 비방이 없었다.
숭경(崇慶) 2년 계유년(고종 즉위, 1213)에 태복경(太僕卿)에 임명되고, 이어 간의 제고 한림시강학사(諫議 制誥 翰林侍講學士)를 겸하였다. 을해년(고종 2, 1215) 봄에 동계도통(東界都統)이 되어 나가자 곤궁한 백성들을 돌보는 것을 작은 물고기를 굽듯이 하고, 간악한 적을 제어하기를 포악한 호랑이를 잡듯이 하니, 이에 온 고을이 모두 편안하게 베개를 베게 되었다. 정축년(고종 4, 1217) 봄에 판비서성(判秘書省)이 되고, 이전과 같이 제고(制誥)를 겸하였다.
지금의 임금<高宗>이 다스리는 정우(貞祐) 6년 무인년(고종 5, 1218)에 조서를 내려 추밀원우승선 한림학사(樞密院右承宣 翰林學士)가 되고, 또 좌산기상시 충사관수찬관 지병부사(左散騎常侍 充史館修撰官 知兵部事)를 겸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청탁하는 것을 듣기 싫어하여 문을 닫아걸고 깊숙하게 들어앉아 손님을 만나지 않았으나, 공은 홀로 그 문을 활짝 열고 백관이 올리는 글을 받아들이면서 흐르는 물과 같이 판결하니, 임금의 은택이 위에서 막히지 않고 백성들이 마음이 아래에서 막히지 않게 되었다. 거의 3년이 되자 은청광록대부 상서우복야(銀靑光錄大夫 尙書右僕射)가 되었는데, 앉은 자리가 채 더워지기도 전인 정우(貞祐) 8년 경진년(고종 7, 1220)에 갑자기 중서(中書)에 들어가 금자광록대부 참지정사 집현전대학사 동수국사 판예부사(金紫光錄大夫 叅知政事 集賢殿大學士 同修國史 判禮部事)에 임명되었다.
그 동안 과거[春場]를 네 차례 맡았다. 한 번은 동제거(同提擧)가 되고 세 번은 상제거(上提擧)가 되었는데, 방(牓)에 붙은 자들이 모두 뛰어나서 수후(隋侯)의 구럭에 물고기 눈알이 없고, 변화(卞和)의 바구니에 쥐고기 포가 없듯이 쓸모 없는 이가 없었다.
임오년(고종 9, 1222) 겨울에 중서시랑평장사 판병부사 수문전대학사(中書侍郞平章事 判兵部事 修文殿大學士)에 임명되자, 덕을 여유롭게 베풀면서 너그러움으로 사나움을 다스리고, 넓고 후덕한 마음으로 임시로 합당하게 다스렸다. 갑신년(고종 11, 1224) 겨울에 수대위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守大尉 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었다가 수대부 감수국사 주국(守大傅 監修國史 柱國)을 더하였다.
일찍이 한인(閑人)의 선발을 담당하였는데, 세 번 빠진 자가 있으면 관사(官司)에서 마땅히 전정(田丁)을 거두었다. ▨(공은?) 그와 같이 하는 것을 딱하게 여겨 한 번 더 시험을 치르게 하니, 이에 ▨우(于)▨하여 한 사람도 빠지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 감복하였다. ▨▨ 과부와 고아 등이 억울한 일을 호소하고자 하면 이졸(吏卒)들이 막아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으나, 공은 불러서 당하(堂下)로 오게 하고 ▨▨▨ 끝까지 옳고 그른 것을 분명하게 하면서 마치 귀신 같이 판결하니, 듣는 자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와 같은 일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있다.
무자년(고종 15, 1228) 겨울에 삼한벽상(三韓壁上) 정(正)▨▨▨▨▨▨▨이부사(吏部事)가 되고, ▨ 나머지는 이전과 같았다. 이 해 4월[夏初]에 밤에 중서성(中書省)에 숙직하다가 갑자기 병이 들었다. 임금이 놀라 상방의(上方醫, 御醫)에게 명하여 만금(萬金)의 양약(良藥)으로 치료하게 하니, 잠시 뒤에 바로 나았다. 그러나 때때로 다시 발병하니, 곧 글[表]을 갖추어 ▨▨▨▨(물러날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대신이 자리를 비우면 정사를 함께 돌보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사신을 보내어 간곡하게 타이르며 떠나지 말도록 만류하였다. 공이 할 수 없이 나와서 업무를 보았으나 원하는 바는 아니었다. 12월[冬末]에 정사당(政事堂)에 들어가 관리의 인사에 관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물러나 쉬다가, 이듬해 기축년(고종 16, 1229) 정월 초2일 새벽에 시각을 묻고는 벽을 향해 누웠는데 잠을 자듯이 돌아가시니, 향년 68세이다.
공은 모두 다섯 임금을 섬기면서 두 차례 헌대(憲臺)에 들어가고, 네 번 간액(諫掖)에 올랐으며, 한 번 납언(納言)이 되었다. ▨▨ 복야(僕射)[文昌]가 되어 상(相)으로 재임한 것이 10년이고, 2재(二宰)로 있던 것은 6년이며, 총재(冢宰)가 된 것은 2년 동안이었다. 이 때 달단(達旦) 우가(于加)가 서북에, 만노(萬奴)가 동쪽에, 일본(日本)이 남쪽에 있으면서 호랑이가 침을 흘리듯이 우리 나라를 엿보았으나, 끝내 삼키지 못한 것은 우리 공이 조정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즉 음공(陰功)과 은덕(隱德)으로 삼한(三韓)을 안정시킨 것이 이와 같았다.
공의 부인은 용구현부인 진씨(龍駒縣夫人 秦氏)로 합문지후(閤門祗候) 중기(仲基)의 딸이다. 아들은 두 명인데, 장남은 내시 합문지후(內侍 閤門祗候)이고, 막내는 국자박사 겸 직한림원(國子博士 兼 直翰林院)이다. 딸은 세 명인데, 장녀는 예부원외랑 최씨(禮部員外郞 崔氏)에게 시집갔고, 두 명 역시 관인(官人)의 아내가 되었다.
임금이 부음을 듣고 매우 슬퍼하고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장례도구를 갖추게 하고 부의를 더하였으며, 예를 갖추어 책명(冊命)하고 시호를 문정공(文定公)이라 하였다. 이어 백관으로 하여금 전송하게 하여 이 해 2월 초7일에 백구산(白駒山) 기슭에 장례지내니, 예(禮)에 따른 것이다. 아, 공명과 부귀와 장수와 영화를 갖추어 인신(人臣)의 도리에 하나도 빠진 것이 없도다. 문생(門生) 이부원외랑 전고(吏部員外郞 典誥) 성산 수지(星山 綏之)가 외람되게도 가장 두텁게 보살핌을 받았으므로, 덕망과 작위와 연치(年齒)의 만 분의 일을 겨우 거두어 굳은 돌에 새긴다.
명(銘)하여 이른다.
하늘에서 정령이 내려와 공이 태어나고
북두(北斗)의 정기가 쌓여서 공이 출세하였으니,
공의 용모는 오악(五嶽)과 같이 빼어나고
공의 마음은 사해[四溟]와 같이 깊도다.
학식이 풍부한 것은 갈비뼈가 아홉 개인 거북과 같고
문장이 뛰어난 것은 오색(五色)의 봉(鳳)새와 같아서,
처음에는 하루에 천 리를 가더니
대성하게 되자 백 일동안 지극히 먼 곳까지 이르도다.
서쪽 담장에서 천자가 내려주신 약(藥)을 마셨고
북쪽 문에서 풀을 보았으니,
큰 손을 바쁘게 놀리자 훌륭한 글이 나오고
바른 의견을 베푸니 강직하고 굽히지 않는 말[言]이었도다.
두 번 안찰사(按察使)가 되어 남쪽 백성을 보살피고
잠시 병마사(兵馬使)가 되어 동번(東藩)을 진압하였으며,
▨▨가 한 번 열리니 ▨가 공평해지고
과거[春場]를 네 번 담당하니 거울(鏡)이 맑아지도다.
용후(龍喉)가 되어 귀한 곳을 날아다니고
계설(鷄舌)을 머금어 일을 아뢰니,
유리 병에 이름을 남기고
금 솥을 길들여 조화롭게 하도다.
세 번 과거를 여니 다섯 용이 하늘을 날고
한 번 큰 물결을 막으니 여섯 자라가 산을 이었으며[戴],
아상(亞相)이 되니 조정이 세 발 달린 솥과 같이 무거워지고
총재(冢宰)가 되니 사직이 반석과 같이 편안하도다.
두루 다섯 임금을 섬기고
영원히 삼한(三韓)을 다스리니
훌륭한 장성(長城)이 만리(萬里)에 걸쳐 있고
큰 가마[大爐]에 불을 지펴서 수많은 사람이 다듬어지도다.
한(漢)의 안위(安危)가 양 손에 달려 있고
당(唐)의 경중(輕重)이 한 몸에 걸려 있는 듯하였네.
어찌하여 흰 닭은 꿈에 나타나고
붉은 용을 부렸으나 돌아오지 않는가.
천자가 통곡하니 비오듯 눈물이 흐르고
나라 사람들이 울부짖으니 그 소리 우레가 치는 듯하도다.
아,
용이 큰 연못에서 죽으니 미꾸라지와 두렁허리[鰌鱓]가 춤을 추고
호랑이가 깊은 산에서 죽으니 여우와 너구리가 노래하는데,
나라에 사람이 없으니
끝내 어찌하겠는가.
백 사람의 몸으로도 그 공적을 잇기 어려운데
만 사람이 나와 전송하였으니,
오직 나머지 진한 향기는
길이 사서(史書)[竹素]에 남으리로다.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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