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최씨 시조공에 대한 기록/휘 문도 평장사 묘지명

崔良敬公墓銘(題額)」고려평장사 휘 문도

아베베1 2011. 2. 12. 10:57

최문도(崔文度)에 대하여
미상∼1345년(충목왕 1). 고려의 문관.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희민(羲民), 호는 춘헌(春軒). 찬성사대제학(贊成事大提學) 비일(毗一)의 손자이며, 성지(誠之)의 아들이다.  일찍이 원나라에 가서 숙위(宿衛)하였으며, 몽고의 말과 글에 능통하였다.
1320년(충숙왕 7)
충선왕토번(吐蕃: 西藏)에 유배되었을 때 아버지와 함께 다녀왔으며, 귀국 후 전법판서(典法判書)가 되었다.  그뒤 사신으로 평양쌍성(雙城)에 주재하였고, 1344년(충목왕 즉위) 성절사(聖節使)원나라에 다녀왔으며,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이르렀다. 성리학에 밝았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시호는 양경(良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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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良敬公墓銘(題額)」

有元高麗國匡靖大夫都僉議叅理上護軍春軒先生崔良敬公墓誌銘幷序」

推誠亮節佐理功臣三重大匡金海府院君領藝文館孝思觀事李 齊賢譔」
春軒崔良敬公諱文度字羲民年五十有四至正五年六月癸丑卒卜得八月壬申葬于玉金山之」
麓以祔先塋禮也子曰思儉先歿孫皆幼長女壻左諫議大夫鄭誧在京師未歸次女壻版圖正郎」
閔璿以羅夫人之命丐文於予將鑱石納壙予老矣懦於紀譔自以平生相爲知已義不可辭把筆」
題其端曰春軒先生墓銘或詰之曰春軒少爲將官且其齒下於子六年子乃先生豈有說乎答」
曰春軒光陽君諱誠之之子也賛成事大提學致仕諱毗一其王父也戶部侍郎知制誥諱佑其曾」
王父也賛成事大司學致仕金諱晅其外王父也固儒雅搢紳之胄也然而光陽君 遇知於」
德陵典機密專選擧二十餘年聲勢籍甚春軒宿衛中朝習蒙古字語綺襦紈袴之與處韋韝毳帽」
之與遊是宜富驕而於而格物致知脩己理人之道莫得其門而入焉顧能出則手弓劒入則目簡編濂」
溪二程晦菴之書皆彙而觀之夜分而寢雞鳴而起必將詳節目極蘊奧心得躬行然後乃己溫然」
如春陽湛然如秋波雖僕妾靡甞一見其卒怒而遽喜也」
德陵遜于西蕃春軒奉光陽君奔問洮隴往返萬里婉容愉色不懈益虔光陽安焉若在庭闈之」
中也忠肅王入朝瀋府用事者煽起鬩墻之禍讒口交騰擧無全人春軒身從其居而志從其義直而能」
敬彼此無憾喪二親三年立家廟事亡之如存子男女皆先夫人金氏出事羅夫人亦莫知其爲繼母」
焉其判書典法司也嬖倖莫能遂其姦奉使平壤雙城也頑獷莫能肆其欺及乎入密直升僉義一」
國之士喜於柄用而民蒙其惠天不假年奄爾淪逝莫不彈指驚嗟或至霣涕嗚呼春軒之道盡於」
己而信於人行於家而及於國存係蒼哉之望歿興殄瘁之悲求之於今盖絶無而僅有者也予以」
老自居以儒自私而不先生春軒可乎哉可乎哉其銘曰」
  儒而匪儒 世則是繁  匪儒而儒 獨吾春軒」
  至正五年八月 日書」

[출전 : 『韓國金石全文』中世下篇 (1984)]

 
 

 

(* 이 묘지명은 원석이 현재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 남아 있고, 이제현의 문집인 『익재난고』 7과 『동문선』 124에도 글이 실려 있다. 이 글들은 거의 비슷한데, 원석의 명문을 위주로 하여 번역하되 서로 차이가 나는 곳은 각주로 설명하기로 한다.)

최 양경공(崔 良敬公) 묘명(墓銘)<題額>
원 고려국 광정대부 도첨의참리 상호군(有元 高麗國 匡靖大夫 都僉議叅理 上護軍) 춘헌선생(春軒先生) 최양경공(崔良敬公) 묘지명 및 서문
추성양절좌리공신 삼중대광 김해부원군 영예문관 효사관사((推誠亮節佐理功臣 三重大匡 金海府院君 領藝文館 孝思觀事) 이제현(李齊賢) 지음
춘헌 최양경공의 이름은 문도(文度)이고, 자는 희민(羲民)이다. 54세인 지정(至正) 5년(충목 1, 1345) 6월 계축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날을 가려 8월 임신일에 옥금산(玉金山) 기슭의 선영(先塋)에 함께 묻으니[祔葬], 예(禮)에 따른 것이다. 아들은 사검(思儉)인데 먼저 죽었고, 손자들은 모두 어리다. 큰 사위인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정포(鄭誧)가 (원의) 서울에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데, 둘째 사위인 판도정랑(版圖正郞) 민선(閔璿)이 나부인(羅夫人)의 분부를 받고 나에게 글을 부탁하여 돌에 새겨 무덤에 넣으려 하였다.
나는 늙어서 글쓰는 것이 게으르지만 스스로 평생 동안 서로 참된 벗으로 지냈으니 의리로 사양할 수 없어, 붓을 잡고 그 첫머리에 ‘춘헌선생 묘명(春軒先生 墓銘)’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이것을 보고) 어떤 이가 캐어물어 “춘헌은 젊어서 무관(武官)이었고 또 나이도 그대보다 여섯 살이나 적습니다. 그대는 그러한데도 선생이라고 하니, 어찌 설명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니,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춘헌은 광양군(光陽君) 성지(誠之)의 아들로, 찬성사 대제학(贊成事 大堤學)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은퇴한 비일(毗一)이 그의 할아버지이고, 호부시랑 지제고(戶部侍郞 知制誥) 우(佑)가 그의 증조부이며, 찬성사 대사학(贊成事 大司學)으로 은퇴한 김훤(金晅)은 그의 외조부가 되니, 진실로 훌륭한 선비이고 벼슬한 집안[搢紳]의 후손입니다. 그러하니 광양군은 덕릉(德陵, 忠宣王)의 신임을 얻어 기밀을 장악하고 관리의 인사를 전담한 것이 20여 년이 되어 명망과 권세가 대단하였습니다. 춘헌은 원의 조정에 숙위(宿衛)하여 몽고(蒙古)의 문자와 말을 익혀 화려한 비단옷을 입은 사람들과 함께 있으며, 가죽으로 만든 화살통과 새의 솜털로 만든 모자를 쓴 사람들과 더불어 교유하니, 마땅히 부귀하고 교만할 만하였습니다.
그러나 격물(格物)과 치지(致知), 수기(修己)와 이인(理人)의 도(道)는 그 문을 찾아 들어가지 않음이 없었으니, 생각해보건대 능히 나가면 손에 활과 칼을 잡고, 들어오면 눈에 책을 붙일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염계(濂溪, 周敦頤)와 2정(二程, 程顥와 程頤), 회암(晦庵, 朱熹)의 책을 모두 모아 보느라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고 닭이 울면 일어났으니, 반드시 절목(節目)을 자세히 하여 깊은 뜻을 다 알아 마음 속으로 깨닫고 몸소 실천한 뒤에야 그친 것입니다.
따사롭기가 봄볕과 같고 고요하기는 가을의 물결과 같아서, 비록 종이나 첩이라도 일찍이 한 번도 그가 급하게 화를 내거나 갑자기 기뻐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덕릉이 서번(西蕃)으로 유배가게 되었을 때 춘헌은 광양군을 모시고 조(洮, 臨洮)와 농(瀧, 隴西)까지 가서 문안을 드렸습니다. 왕복 만 리나 되는 길이었지만 유순하고 즐거운 얼굴빛으로 게으르지 않고 더욱 삼가니, 광양군이 마치 집안의 안방 한 가운데 있는 것처럼 편안하였습니다. 충숙왕(忠肅王)이 원의 조정에 들어갔을 때 심왕부(瀋王府)에서 일을 벌이려는 자들이 형제간의 싸움을 선동하며 참소하는 말이 번갈아 끓어올라 온전한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춘헌은 몸은 머무는 곳을 따르고 뜻은 의리에 맞게 하여 정직하면서도 능히 공경하여 피차 간에 아무 유감이 없게 하였습니다.
양친이 돌아가시자 3년상을 치르고 가묘(家廟)를 세워 돌아간 분을 살아 계신 것처럼 잘 섬겼습니다. 자녀로 아들과 딸은 모두 첫 부인 김씨(金氏)가 낳았으나, 나부인(羅夫人)을 잘 대하여 또한 그가 계모인 것을 알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가 전법사(典法司)의 판사(判書)를 맡자 폐행(嬖幸)들이 능히 간사함을 이루지 못하였고, 평양(平壤)과 쌍성(雙城)에 명을 받아 갔을 때에는 욕심 많고 사나운 무리들이 함부로 속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어서 밀직사(密直司)에 들어오게 되고 첨의(僉議)로 승진하자 온 나라의 선비들이 (그가) 중용되어 정권을 잡은 것을 기뻐하였고 백성들은 그 혜택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이 수명을 더 주지 않아 문득 세상을 떠나니 세월의 빠름에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고 혹은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습니다.
아, 춘헌은 자신의 도리를 다하여 사람들을 미쁘게 하였고, 집에서 행하여 나라에 미치게 하였으며, 살아서는 백성들의 기대를 받았고 죽어서는 다함 없는 슬픔을 일으키게 하였습니다. 이제 (이런 사람을) 찾으려고 하여도 대개 절대로 찾을 수가 없고, 어쩌다 있을 것입니다. 내가 나이가 많다고 자부하고 선비[儒]라고 자만하면서 춘헌을 선생이라 부르지 않는다면 마땅한 일이겠습니까. 마땅한 일이겠습니까.”
명(銘)하여 이른다.
선비[儒]이면서 선비가 아닌 사람이 세상에는 참으로 많으나
선비가 아니면서 선비인 사람은 오직 우리 춘헌(春軒)뿐이리.
지정 5년 8월 일 쓰다.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하)』(2001)]

 

益齋亂稿卷第七
 碑銘
匡靖大夫僉議參理上護軍羅公墓誌銘 a_002_565a


至正四年甲申八月己丑。匡靖大夫僉議參理羅公卒。王命有司弔誄。贈諡良節。其年十一月庚寅。以禮葬于松林縣藥師院之北原。公諱益禧。籍貫羅州。三韓功臣大匡諱聰禮十一世孫。曾祖諱孝全。皇贈太中大夫禮部尙書,知都省事。祖諱得璜。皇金紫光祿大夫守司空,尙書左僕射,判戶部事致仕。皇懷遠大將軍,管軍上萬002_565b戶,奉翊大夫知密直司事,軍簿判書,上將軍,世子元賓諱裕爲公考。皇銀靑光祿大夫同知樞密院事,兵部尙書,上將軍趙諱文柱之女▣▣郡夫人爲公妣。娶翰林直學士,朝列大夫三重大匡,判都僉議司事,默軒先生閔諱漬之女。生男女二人。女適奉翊大夫同知密直司事,上護軍崔文度。男曰英傑。今爲奉翊大夫密直副使,上護軍。公自以將家子。幼習武藝。不暇讀書。而天性耿介。慕節義。恥與人爭訟。母夫人分家產。別遺臧獲。爲口四十。公辭焉曰。以一男居五女002_565c之中。烏忍苟得其贏。以累鳲鳩之仁。夫人義而許之。年十七。受皇朝宣命。帶金符爲上千戶。懷遠卒後。襲爵爲管軍上萬戶。階虎德將軍。帶三珠虎符。忠烈王季年。爲神虎衛護軍。賜金紫兼僉議中事。德陵痛革舊弊。朝士一切罷黜。於郞官。獨留公。時命令一下。百司奉行。若恐不及。公守法多所封駁。權貴側目。或撼以危言。不爲動。落職十年。方爲檢校上護軍。七年。遷監門衛上護軍。轉千牛衛兼中門使。換左常侍。三遷爲匡靖大夫商議評理。封錦城君。年五十七。授其子002_565d世爵。閑居又十七年。每念民生休戚。人材用捨。負手慼鼻。獨行園庭。若有隱憂。嘗一尹雞林。三鎭合浦。廉勤慈惠。南民至今稱頌之。今王嗣政。起復爲僉議參理。世所謂五宰者。貌甚癯。耳頗重聽。然臨事慷慨不少懈。一日語判三司事李齊賢曰。吾君幼。委任宰相。彼負且乘者。不誡覆轍。吾其引避。毋俱爲十手所指。公當云何。齊賢謝曰。僕前以二三策曉執政者。未見施行。常愧不能勇去。敢不惟公言是從。後十許日。聞公告以病。意謂欲遂前計。嗚呼。烏知其竟不起也。亟002_566a往弔哭而退。子與壻繼而踵門。乞鄙文將鑱石納竁。義不可辭。受而爲銘。明日上書自免。庶幾不負公言於存沒也。其銘曰。爲官惠慈。爲將廉恥。惟義之求。不怵勢利。由稟受能。匪學以致。鏃而羽之。入不此止。顧予何人。晚辱知己。敢負一言。而謂公死。

 가정집 제2권
 기(記)
춘헌기(春軒記)


어떤 객이 춘헌(春軒)에 와서 춘(春)이라고 이름 붙인 뜻을 물어보았으나, 주인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객이 다시 앞으로 나앉으며 말하였다.
“우주 사이의 원기가 조화의 힘에 의해 퍼져서 땅에 있는 양(陽)의 기운이 위로 올라가 하늘과 막힘없이 통하게 되면, 만물의 생동하는 뜻이 발동할 뿐 아니라 사람의 마음도 덩달아 활짝 펴지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봄이 오면 온갖 꽃이 아름답게 피어나고 새들이 즐겁게 노래하니, 봄의 풍광은 사람의 기분을 마냥 들뜨게 하고 봄의 경치는 사람의 마음을 따스하게 감싸 주는 법이다. 그래서 봄 누대에 오른 듯도 하고 봄바람 속에 있었던 듯도 하다는 그 뜻을 취해서 이렇게 이름 붙인 것인가?”
주인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자 객이 또 말하였다.
“원(元)은 천지가 만물을 내는 근본이요, 춘은 천지가 만물을 내는 시절이요, 인(仁)은 천지가 만물을 내는 마음이니, 이름은 비록 다르다고 하더라도 그 이치는 매한가지이다. 그래서 노쇠하고 병든 자들이 봉양을 받을 수 있고 곤충과 초목이 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것도 모두 이러한 이치 때문이라는 그 뜻을 취해서 이렇게 이름 붙인 것인가?”
이에 주인이 말하기를,
“아니다. 굳이 그 이유를 대야 한다면 온화하기 때문이라고나 할까? 여름에는 장맛비가 지겹게 내리고 겨울에는 매서운 추위가 몰아치고 가을에는 썰렁해서 몸이 으스스 떨리니, 사람에게 맞는 것은 온화한 봄이 아니겠는가. 객이 말한 것이야 내가 어떻게 감히 감당하겠는가.”
하자, 객이 웃으면서 물러갔다.
내가 그때 자리에 있다가,
“그만한 덕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자처하지 않는 것은 오직 군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내가 알기에 주인은 흉금이 유연(悠然)해서 자기를 단속하고 남을 대할 적에 속에 쌓였다가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 화기(和氣) 아닌 것이 없으니, 대개 기수(沂水)에 가서 목욕하고 바람 쐬며 노래하는 부류에 속하는 사람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니 주인이 취한 뜻이 어찌 온화하다고 하는 정도로 그치겠는가. 그런데 객이 어찌하여 그런 것은 물어보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하고는, 마침내 붓을 잡고 이 내용을 벽에다 써 붙였다.
주인은 완산 최씨(完山崔氏)로, 문정공(文定公)의 후손이요 문간공(文簡公)의 아들이다. 박학강기(博學强記)한 데다가 특히 성리(性理)의 글에 조예가 깊어서, 동방의 문사들이 질의할 것이 있으면 모두 그를 찾아가서 묻곤 한다.


 

[주D-001]봄 누대에 …… 하고 : 《노자(老子)》 제 20 장에 “사람들 기분이 마냥 들떠서, 흡사 진수성찬을 먹은 듯도 하고 봄 누대에 오른 듯도 하네.〔衆人熙熙 如享太牢 如登春臺〕”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2]봄바람 …… 하다 : 주희의 《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 권4에 “주공섬(朱公掞)이 여주(汝州)에 가서 명도(明道) 선생을 만나 보고 돌아와서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한 달 동안이나 봄바람 속에 앉아 있었다.〔某在春風中坐了一月〕’라고 했다.”는 말이 실려 있다.
[주D-003]기수(沂水)에 …… 부류 : 공자의 제자 증점(曾點)이 “늦은 봄에 봄옷이 만들어지면 관을 쓴 벗 대여섯 명과 아이들 예닐곱 명을 데리고 기수에 가서 목욕을 하고 기우제 드리는 무우에서 바람을 쏘인 뒤에 노래하며 돌아오겠다.〔暮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고 자신의 뜻을 밝히자, 공자가 감탄하며 허여한 내용이 《논어》 선진(先進)에 나온다.
[주D-004]주인은 …… 아들이다 : 주인의 이름은 최문도(崔文度)이다.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문정공(文定公) 최보순(崔甫淳)의 5세손이요, 광양군(光陽君)에 봉해진 문간공(文簡公) 최성지(崔誠之)의 아들이다. 자는 희민(羲民)이고, 관직은 첨의 평리(僉議評理)에 이르렀다. 1345년(충목왕 1)에 죽었으며, 시호는 양경(良敬)이다. 아들의 이름은 사검(思儉)이다.

 


 

 

 

 

 

 

 

 

 

 

 

 

 

 

 

 

 

 

 

 

 

 

 

 

 

 

 

 

 

 

 

 

 

 

 

 

 

 

 

 

 

 

 

 

 

 

 

 

 

 

 

 

 

 

 

 

 

 

 

 

 

 

 

 

 

 

 

 

 

 

 

 

 

 

 

 

 

 

 

 

 

 

 

 

 

 

 

 

 

 

 

 

 

 

 

 

 

 

 

 

 

 

 

 

 

 

 

 

 

 

 

 

 

 

 

 

 

 

 

 

 

 

 

 

 

 

 

 

 

 

 

 

 

 

 

 

 

 

 

 

 

 

 

 

 

 

 

 

 

 

 

 

 

 

 

 

 

 

 

 

 

 

 

 

 

 

 

 

 

 

 

 

 

 

 

 

 

 

 

 

 

 

 

 

 

 

 

 

 

 

 

 

 

 

 

 

 

 

 

 

 

 

 

 

 

 

 

 

 

 

 

 

 

 

 

 

 

 

 

 

 

 

 

 

 

 

 

 

 

 

 

 

 

 

 

 

 

 

 

 

 

 

 

 

 

 

 

 

 

 

 

 

 

 

 

 

 

 

 

 

 

 

 

 

 

 

 

 

 

 

 

 

 

 

 

 

 

 

 

 

 

 

 

 

 

 

 

 

 

 

 

 

 

 

 

 

 

 

 

 

 

 

 

 

 

 

 

 

 

 

 

 

 

 

 

 

 

 

 

 

 

 

 

 

 

 

 

 

 

 

 

 

 

 

 

 

 

 

 

 

 

 

 

 

 

 

 

 

 

 

 

 

 

 

 

 

 

 

 

 

 

 

 

 

 

 

 

 

 

 

 

 

 

 

 

 

 

 

 

가정집 제9권

 서(序)
최 시승(崔寺丞)이 등제(登第)한 것을 축하한 시의 서문


인재를 뽑는 제도가 시행된 지 오래되었다. 그 과목을 늘리고 줄인 것은 시대에 따라 같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인재를 빈객으로 예우하고 작록을 수여하면서 문호(文虎 문신과 무신)로 임용한 것은 일찍이 다른 적이 있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당초에는 육예(六藝)가 삼물(三物)의 하나를 차지하면서 사(射)와 어(御)도 그 속에 들어 있었던 것인데, 후세에 와서 호예(虎藝 무예)의 과가 별도로 설치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문호의 경로를 통하지 않고 들어와서 벼슬하는 자들을 이(吏)라고 하였으니, 이는 대개 고대에 도필(刀筆 문서 기록)의 임무를 맡은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해서 벼슬하는 길이 마침내 셋으로 나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뒤로는 각 시대마다 숭상하는 풍조에 따라서 경중의 차이가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당(唐)나라 진신(搢紳)의 경우에는 인신(人臣)으로서 최고의 지위에 이르렀다고 할지라도 진사과(進士科)의 고시를 거치지 않은 자들은 그다지 대단하게 여기지 않았으며, 송(宋)나라의 전성기에 이르러서는 이 과거 출신자들을 특히 더 중시하였다.
본국은 당나라와 송나라의 제도를 본받아 대대로 문사(文士)를 존중해 왔다. 그리하여 시종(侍從)과 헌체(獻替)의 관직이나 선거(選擧)와 전사(銓仕)의 직책 등은 실제로 문사들이 모두 독점하였고, 호반(虎班)이나 이속(吏屬) 등은 감히 이 자리를 쳐다보지도 못하였다. 그런데 더구나 지금은 성스러운 원나라가 문치를 숭상하여 과거에 대한 조칙을 거듭 내리고 있는 때인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래서 글공부를 하는 선비들이 있는 힘을 모두 발휘하고 용맹심을 한껏 과시하며 서로 다투어 기예를 다투는 시험장에 나아가 실력을 겨루려 하고 있는 것이다.
지원(至元) 6년(1340, 충혜왕 복위 1) 겨울에 삼사사(三司使) 김공(金公 김영돈(金永旽))과 전법 판서(典法判書) 안공(安公 안축(安軸))이 춘관(春官 예조(禮曹))에서 인재를 선발하였는데, 이때 춘헌(春軒 최문도(崔文度)) 최공(崔公)의 아들 예경(禮卿 최사검(崔思儉))이 그 시험에 급제하였다. 최공은 손님을 좋아하기로 동방에서 제일가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축하하려고 찾아오는 사람들의 어깨가 서로 부딪칠 정도였다.
내가 춘헌에게 나아가 축하한 다음에 물러 나와 예경에게 말하기를,
“과거에 등제하려고 하는 것은 벼슬길에 오르려고 해서이다. 본국의 옛날 제도를 보건대, 관직이 일단 6품에 이른 자는 더 이상 유사에게 나아가서 시험을 보지 못하게 했다. 그대는 일찍이 낭장(郞將)을 거쳐 감찰 규정(監察糾正)을 겸임하였고 전객시 승(典客寺丞)에 전임되었으며, 나이도 한창 장년(壯年)으로서 날로 발전해 마지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는 근래의 규례를 원용하여 백의의 무리와 함께 과거 시험장에서 붓과 종이를 희롱하였다. 그대는 장차 녹명(鹿鳴)의 노래를 부르고는 계해(計偕 연경(燕京)의 회시(會試) 응시생들)와 함께 천자의 뜰에 나아가서 대책을 묻는 시험 문제를 쏘아 맞히려고 하는 것인가? 그대는 장차 헌체하여 우리 임금의 허물을 보완하고 아름다운 점을 받들어 따르려고 하는 것인가? 그대는 장차 전선(銓選 인사 행정)에 참여하여 사류(士流)를 품평하면서, 혹 꾸짖고도 벼슬을 주고 혹 웃고도 주지 않는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인가? 아니면 호부(虎夫)가 호기를 부리며 함부로 행동하는 것을 괴롭게 여기고, 이원(吏員)이 정신없이 경쟁하며 이익을 추구하는 것에 징계된 나머지, 우리 유자(儒者)의 오활한 점에 몸을 기대고서 사림(詞林)이나 취향(醉鄕)으로 달아나 스스로 숨으려고 하는 것인가?”
하니, 예경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임금을 섬기고 어버이를 섬기는 것에 대해서는 원래 가훈이 있다. 하지만 부귀와 이달(利達) 같은 것은 구하는 데에 방법이 있고 얻는 데에 명이 있는 것이니 내가 어떻게 하겠는가. 우리 집안은 예부공(禮部公) 휘 균(均) 이하로부터 서로 잇따라 5대에 걸쳐서 등제하였다. 그리고 예부공의 아들인 문정공(文定公) 휘 보순(甫淳)은 충헌왕(忠憲王 고종(高宗))의 명상(名相)으로서 네 차례나 예위(禮圍 과거 시험)를 관장하였고, 조부 문간공(文簡公 최성지(崔誠之))은 또 덕릉(德陵 충선왕(忠宣王))의 재상으로서 문형(文衡)을 주관하였다. 그러다가 존공(尊公 부친) 때에 와서는 어려서 국자제(國子弟 왕세자와 공경대부의 자제)를 따라 천조(天朝)에서 숙위(宿衛)하였기 때문에 과거 공부를 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일찍이 조모 김씨(金氏)가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이르시기를 ‘네가 과거에 급제하여 가업을 회복하는 것을 본다면 여한이 없겠다.’라고 하신 것이다. 자애로운 그 모습은 지금 뵐 수 없게 되었어도 그때 해 주신 말씀은 아직도 귀에 남아 있다. 이것이 바로 내가 구구하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하였다.
내가 이 말을 듣고는 의롭게 여겨지기에 술잔을 들어 권하면서 말하기를,
군자의 가르침을 보면, 옛날로 회귀하여 시조를 추모하게 하였으니, 이는 대개 자기가 태어난 근원을 잊지 않게 하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더군다나 부지런히 배우기를 좋아하면서 기필코 가업을 이으려고 하는 자의 경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뒷날에 입신양명할 것을 이를 통해서 알 수가 있겠다. 사람들은 거자가 올해 주사(主司)를 제대로 만났다고 하지만, 내 생각에는 주사가 올해 거자를 제대로 얻었다고 여겨지는데, 이는 예경을 보면 충분히 그렇게 말할 수가 있다.”
하였더니, 객들도 모두 그렇다고 하고는 각자 시를 짓고 나서 나의 말을 시권(詩卷)의 첫머리에 적어 넣게 하였다.


 

[주D-001]인재를 빈객으로 예우하고 : 주(周)나라 때에 향대부(鄕大夫)가 소학(小學)에서 현능(賢能)한 인재를 천거할 적에 그들을 향음주례(鄕飮酒禮)에서 빈객으로 예우하며 국학(國學)에 올려 보낸 것을 말한다. 《주례(周禮)》 지관(地官) 대사도(大司徒)에 “향학(鄕學)의 삼물 즉 세 종류의 교법(敎法)을 가지고 만민을 교화한다. 그리고 인재가 있으면 빈객의 예로 우대하면서 천거하여 국학에 올려 보낸다. 첫째 교법은 육덕이니 지ㆍ인ㆍ성ㆍ의ㆍ충ㆍ화요, 둘째 교법은 육행이니 효ㆍ우ㆍ목ㆍ연ㆍ임ㆍ휼이요, 셋째 교법은 육예이니 예ㆍ악ㆍ사ㆍ어ㆍ서ㆍ수이다.〔以鄕三物敎萬民而賓興之 一曰六德 知仁聖義忠和 二曰六行 孝友睦婣任恤 三曰六藝 禮樂射御書數〕”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2]진사과(進士科) : 조선 시대의 문과(文科)와 유사한 형태의 과거 제도이다. 참고로 《고금사문유취(古今事文類聚)》 전집(前集) 권26 사진부(仕進部) 중진사과(重進士科)에 “진사과는 수나라 대업(大業) 연간에 시작되어, 당나라 정관ㆍ영휘 연간에 전성기를 맞았다. 인신(人臣)으로서 최고의 지위에 이르렀다고 할지라도 진사과의 고시를 거치지 않은 자는 그다지 대단하게 여기지 않았다. 사람들이 급제자들을 추중하여 백의 경상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백의의 신분에서 경상의 지위에 나아갈 수 있는 바탕이 되기 때문이었다.〔進士科始隋大中 盛貞觀永徽之際 縉紳雖位極人臣 不由進士者 不以爲美 其推重謂之白衣卿相 以白衣之士卽卿相之資也〕”라는 말이 나오는데, 가정이 본문에서 이 글의 일부분을 그대로 인용해서 쓰고 있다.
[주D-003]헌체(獻替) : 행해야 할 일을 진헌(進獻)하고 행해서는 안 되는 일을 폐지하도록 임금에게 건의한다는 헌가체부(獻可替否)의 준말로, 중대한 국사를 조정에서 의논하는 것을 말한다.
[주D-004]녹명(鹿鳴) : 《시경》 소아(小雅)의 편명으로, 본래는 임금이 신하를 위해 연회를 베풀며 연주하던 악가(樂歌)인데, 후대에는 군현의 장리(長吏)가 향시에 급제한 거인(擧人)들을 초치하여 향음주례(鄕飮酒禮)를 베풀어 주며 그들의 전도를 축복하는 뜻으로 이 노래를 불렀다.
[주D-005]임금의 …… 것인가 : 《효경(孝經)》 사군(事君)에 “군자가 임금을 섬김에, 나아가서는 충성을 다할 것을 생각하고 물러나서는 허물을 보완할 것을 생각하여, 임금의 아름다운 점은 받들어 따르고 임금의 잘못된 점은 바로잡아 구제한다.〔君子之事上也 進思盡忠 退思補過 將順其美 匡救其惡〕”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주D-006]구하는 …… 것이니 :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구하는 데에 방법이 있고 얻는 데에 명이 있는데도, 이런 것을 구하려 든다면 꼭 얻는다고 할 수가 없으니, 이것은 구하는 대상이 나 자신의 밖에 있기 때문이다.〔求之有道 得之有命 是求無益於得也 求在外者也〕”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7]군자의 …… 것이다 : 제사를 지내는 목적에 대해서 말한 《예기》 제의(祭義)의 내용을 풀어서 인용한 것이다.

 

고려사절요 제25권
 충혜왕(忠惠王)
갑신 5년(1344), 원 지정 4년


○ 봄 정월에 원 나라에서 유탁(柳濯)을 합포 만호(合浦萬戶)에 임명하였다. 전 만호 첨의상의(僉議商議) 양지수(楊之秀)는 신임 만호에게 자리를 교대하여 주지 않으려 오랫동안 있다가, 마침내 나와서 도내에 나다녔으나, 아무도 위문하는 이가 없었다. ○ 재상이 백관들과 국가 원로를 민천사에 모으고 도성(都省)에 올릴 글에 서명하려 하였는데, 원로들이 많이 나오지 않아 일이 마침내 성취되지 못하였다. ○ 왕이 역의 수레로 달리니 고생이 이루 말할 수 없었는데, 게양현까지 이르지 못하고, 병자일에 악양현(岳陽縣)에서 훙(薨)하였다. 독살당하였다고도 하고, 귤을 먹고 운명하였다고도 한다. 나라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슬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소민들은 기뻐 날뛰면서, “이제는 다시 살 수 있는 날을 보겠다." 고까지 하였다. 백성들에게 덕택이 미치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처음에 궁중과 길거리에 노래가 유행하기를, “아야마고지나(阿也麻古之那)가 이제 가면 언제 오리." 라 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사람들이 해석하기를, “악양(岳陽)에서 죽는[亡故] 어려움[難]이여, 오늘 가면 어느 때에 돌아올 것인가." 하였다.
사신이 말하기를, “충혜왕은 영특하고 슬기로운 재능을 좋지 못한 데에 사용하였고, 나쁜 불량배들을 가까이하면서 음란하고 방종한 행동을 멋대로 자행해서, 안으로는 부왕에게 꾸지람을 받고, 위로는 천자에게 죄를 얻어, 죄수의 몸이 되어 길에서 죽었으니, 마땅하도다. 비록 늙은 신하 이조년(李兆年)의 간절한 간언이 있었으나 말을 듣지 않았으니, 어찌 하겠는가." 하였다.
○ 2월에, 원 나라에서 있던 원자 흔(昕)의 나이 겨우 8살이었다. 고용보가 안고 들어가 황제에게 뵈오니, 황제가 묻기를, “너는 아비를 배우겠느냐, 그렇지 않으면 어미를 배우겠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어머니를 배우겠습니다." 하였다. 황제가 그의 천성이 착한 것을 좋아하고 악한 것을 미워함을 칭찬하고, 드디어 왕위를 계승하게 하였다. 왕은 교서를 내리어 국내의 신료들에게 잘못된 정치를 고치고 백성들을 위무ㆍ구휼하라고 훈계하였다. ○ 윤달에 왕이 정승 채하중, 사공(司空) 강호례(姜好禮), 정당문학 정을보(鄭乙輔), 동지밀직 김상기(金上琦)ㆍ설현고(薛玄固), 밀직제학 장항(張沆)에게 명하여 국정을 참의(叅議)하게 하고, 함양군(咸陽君) 박충좌(朴忠佐), 양천군(陽川君) 허백(許伯)을 판전민도감사(判田民都監事)에 임명하고, 한범(韓范)ㆍ장송(張松)ㆍ심노개(沈奴介)ㆍ전두걸불화(田頭乞不花) 등 15명을 섬으로 추방하고, 정천기(鄭天起)ㆍ소경부(蘇敬夫)ㆍ조성주(趙成柱) 등을 시골로 추방하였다. 모두 선왕이 총애하던 폐신(嬖臣)이었다. ○ 감찰사(監察司)에서 선왕 때의 불량배들의 직첩을 모두 몰수하였다.
○ 3월에 계림군공(雞林郡公) 왕후(王煦)와 전 전법판서(典法判書) 최문도(崔文度)가 원 나라에 가서 성절을 하례하였다. ○ 원 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와서 모시를 구하였다.
○ 여름 4월에 기(祺)를 강릉부원대군(江陵府院大君)으로, 현(玹)을 익흥부원군(益興府院君)으로 봉하였다. 채하중(蔡河中)을 우정승에, 한종유(韓宗愈)를 좌정승에, 이제현(李齊賢)을 판삼사사에, 김륜(金倫)ㆍ권겸(權謙)ㆍ박충좌(朴忠佐)를 찬성사에, 나익희(羅益禧)ㆍ손수경(孫守卿)을 참리에, 김승사(金承嗣)와 김상기(金上琦)를 삼사(三司)의 우좌사(右左使)에 임명하였다. ○ 을유일에 왕이 원 나라에서 우리나라에 이르렀다. 다음날, 원 나라의 사신 상가(桑哥)가 조서를 반포하였는데, 이르기를, “옛적에 우리 조종이 만방을 모두 차지하여 밖으로 사해까지 닿았다. 이때에 고려가 의(義)를 사모하고 순종하는 정성을 바치니 동국을 세워서 자손에게 전하여 대대로 제후의 자리를 지키도록 하였다. 그런데 누가 생각하였으랴. 근자에 고려국왕 보탑실리(寶塔實理)는 방자하게 무도한 짓을 자행해서 나라 안에 해독을 끼쳐, 백성들은 명을 감당하지 못하여 서울에 나와서 호소하였다. 이제 그를 정죄(定罪)하여 먼 지방으로 귀양보냈다. 그러나 생각하건대, 선대로부터 우리 역대의 조정을 섬기는 데 두 마음이 없었는데 하루 아침에 후손이 잘 계승하지 못하면, 드디어 대대로 내려오던 작위를 잃게 되었으니 나로서 어찌 차마 보고만 있겠는가. 또 생각하건대 해우(海隅)의 창생들도 또한 나의 적자(赤子)인데, 오래도록 도탄에 빠져 있었으니 진실로 나의 마음이 안타깝다. 그리하여 이에 그 아들 팔독마타아지(八禿麻朶兒只)에게 명하여 정동행성 좌승상 고려국왕(征東行省左丞相高麗國王)을 그대로 이어 받들게 하고, 나의 덕택을 널리 펴서 나의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라. 보탑실리가 행한 학정은 모두 개혁하고, 산림으로 도피한 백성들은 급히 유사에게 영을 내려 하루 빨리 불러내어 위무하여 주고, 농사를 힘쓰며 학문을 일으키게 하라. 모든 정치를 바로잡는 일은 모두 법전에 따르게 하여 백성들에게 각자 마음 놓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하라." 하였다. 이날 왕은 상가(桑哥)에게 연회를 베풀었는데, 기생과 풍악을 사용하고, 백관들은 모두 잠화(簪花)를 머리에 꽂고 시좌(侍座)하였으며, 그 잔치를 군신경회연(君臣慶會宴)이라 하였다.
사신 원송수(元松壽)가 말하기를, “3년상은 천자로부터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통용되는 것이다. 악양(岳陽)에서 당한 선왕의 상이 아직 우리나라에 돌아오지도 않았는데, 기생과 풍악을 사용하고 백관들에게 머리에 꽃을 꽂게 하였으니, 이것이 예법에 비추어 어떻게 된 것인가." 하였다.
○상락군(上洛君) 김영돈(金永暾)이 대궐 뜰에 나아갔는데, 신예(辛裔)ㆍ노영서(盧英瑞)가 붉은 신[紫靴]을 신고 종모(椶帽)를 쓴 채로 대궐문 안에서 호상(胡床)에 걸터앉아 거만한 태도로 예를 갖추지 않았다. 김영돈이 이들을 앞에 불러 놓고 말하기를, “내가, 주상께서 왕위를 계승하시와 동쪽으로 돌아오시어 삼한을 다시 바로잡게 되셨다는 말을 듣고, 기쁨을 참지 못하여 대궐로 나와 전하를 뵈옵고자 하는데, 공들은 어찌하여 전대의 불량배들이 걸치던 사치스러운 관복을 아직도 바꾸지 않고 있는가. 이것이 어찌 풍기를 개혁하는 도리인가." 하니, 노영서 등이 부끄러워서 물러갔다.
○ 5월에 환자 고용보에게 공신호를 주었다.
○ 원 나라에서 보낸 이휴(李庥)ㆍ진근(秦瑾) 등이 와서 왕을 책봉하여 개부의동삼사 정동행중서성 좌승상 상주국 고려국왕(開府儀同三司征東行中書省左丞相上柱國高麗國王)이라 하였다. ○ 김해군(金海君) 이제현(李齊賢)이 도당(都堂)에 글을 올리기를, “지금 우리 국왕께서는, 옛적 원자 같으면 입학할 나이로, 천자의 밝은 명을 받아 조종의 중업(重業)을 계승하시었습니다. 그런데 전왕이 실패한 뒤이니, 더구나 매우 조심하여 경건하고 삼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공경하고 삼가는 실은 덕을 닦는 것이 가장 중요하오며, 덕을 닦는 방법은 학문을 닦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지금 좨주(祭酒) 전숙몽(田淑蒙)이 지명되어 왕의 스승이 되어 있으니, 다시 어진 학자 두 사람을 더 선택하여 숙몽(淑蒙)과 함께 《효경》ㆍ《논어》ㆍ《맹자》ㆍ《대학》ㆍ《중용》을 강의하여서 격물치지(格物致知), 성의정심(誠意正心)의 도(道)를 배우시도록 하고, 사대부가의 자제 가운데서 정직ㆍ근후하며 학문을 좋아하고 예를 소중히 여기는 자 10명을 선발해서 시학(侍學)으로 삼아 좌우에서 보좌ㆍ인도하게 하고, 사서(四書)의 공부가 익숙하여지면 육경(六經)을 차례대로 공부하여 교만ㆍ사치ㆍ음란ㆍ방탕과 노랫가락이나 여색이나 사냥질과 같은 쾌락을 이목에 접하지 않도록 하여 습관이 성격을 이루게 되면, 모르는 중에 덕(德)이 이루어질 것脄오니, 이것이 당면한 가장 급한 일입니다. 군신의 의(義)는 한 몸과 같으니, 머리와 팔다리가 친하지 않으면 되겠습니까. 오늘날 재상들이 연회가 아니면 접촉할 수 없으며, 특히 부르심을 받기 전에는 나아가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무슨 이치입니까. 바라옵건대, 날마다 편전(便殿)에 앉으시어 항상 재상들과 함께 정사를 논의하시고, 혹은 날짜를 정해서라도 나아가 뵈옵게 하여, 비록 아무 일이 없더라도 이 예는 폐하지 않게 하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대신들은 전하와 날로 소원해질 것이며, 환시(宦侍)들과는 날로 친근하여져서 백성들의 좋고 나쁜 것이나 종묘 사직의 안위를 왕에게 알려 드릴 수 없을까 걱정됩니다. 정방(政房)의 명칭은 권신들의 세대에 생긴 것이지 옛 제도는 아닙니다. 마땅히 정방제도를 혁신하여 이것을 전리(典理)와 군부(軍簿)에 귀속시키고, 고공사(考功司)를 설치하여 그 공과를 평정하며, 그 재능의 유무를 의논하여 매년 6월과 12월에는 도목(都目)을 받아서 정안(政案)을 조사하여 파면 또는 승진시켜서 이것을 항규로 한다면, 청알(請謁)하는 무리를 근절시키고, 요행으로 벼슬을 바라는 길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만일 어물어물 넘기고 옛 제도를 복구하지 아니하면, 장래에 양장(梁將)ㆍ조륜(祖倫)ㆍ박인수(朴仁壽)ㆍ고겸지(高謙之)와 같은 무리가 들고 일어나서 흑책(黑冊 인사문서를 고치고 지우고 하는 것)의 폐단을 막지 못할까 깊이 걱정이 됩니다. 응방(鷹坊)과 내승(內乘)은 백성에게 해독을 끼침이 더욱 심한 것이라, 전에 이미 영을 내려 폐지하게 하였으나, 뒤에 다시 폐지하는 것이 지연되어 중앙과 지방이 모두 실망하였고, 마침내 고용보(高龍普)가 말을 달려 나와 책망을 당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어찌 마음에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덕녕(德寧 江原 襄陽)ㆍ보흥(普興) 등의 고(庫)와 같이, 무릇 옛 제도에 없는 것은 일절 없애버리면, 아마도 애쓰시고 딱하게 여기는 황제의 뜻을 영구히 저버리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자사나 수령으로 합당한 사람을 얻으면 백성들은 복을 받을 것이고, 좋은 사람을 얻지 못하면 백성들은 해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품계가 높던 자를 강등시켜 임명하면 교만하고 방자하여 법을 지키지 아니하며, 나이 들어서 벼슬을 구하는 자는 어둡고 나약하여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혹 청탁을 통해서 시골에서 기용되어 금어(金魚)를 늘어뜨리는 자는 더구나 말할 것도 없습니다. 청하건대, 옛 제도와 같이 조사(朝士)로서 아직 입참하지 않은 자에 대하여는 반드시 감무(監務)ㆍ현령(縣令)을 거쳐서 4품(四品)에 이르게 하고, 그 다음에 으레 수령이 되게 하는데, 감찰사(監察司)ㆍ안렴사(按廉使)가 반드시 성적을 고사하여 상벌을 주도록 하고, 만일 부득이하여 이른바 벼슬이 품계보다 높은 자, 나이 많은자, 청탁을 통하여 시골에서 기용되는 자가 있으면, 차라리 경관(京官)을 줄지언정 백성들과 가까이하는 임무는 주지 아니하기를 20년 동안 실시한다면, 흩어져 나간 백성이 돌아오지 않거나 공부(貢賦)가 부족하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금은과 비단은 우리나라에서는 생산되지 아니합니다. 전에는 공경(公卿)들이 의복으로 무늬없는 천만을 쓰면서도 명주 비단옷 입는 듯이 하였고, 그릇은 놋쇠ㆍ동ㆍ자기만을 사용하였습니다. 덕릉(德陵 충선왕)께서 옷 한 벌을 짓고자 하여 그 값을 물었다가 비싸서 그만두었으며, 의릉(毅陵 충숙왕)께서는 일찍이 전왕에게, '금실로 수 놓은 옷과 새깃을 꽂은 갓은 우리 조상의 옛 법이 아니었다'고 책하였으니, 국가 4백여 년 동안 사직을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검소한 덕에 의하였던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근래에 사치한 풍속이 극심하게 되었는데, 민생이 곤궁하고 나라의 경비가 부족한 것은 바로 이때문입니다. 바라옵건대 지금부터는 재상들이 비단 옷을 입거나 금이나 옥으로 그릇을 만들지 못하게 하고, 또한 성장을 하고 말탄 자는 그 뒤를 옹위하지 못하게 하여, 각자가 검약하기를 힘쓰며 위로는 왕에게 풍간(諷諫)하게 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감화시키면, 풍속이 순후하게 될 것입니다. 기왕에 강제로 징수하고 횡포하게 거두어 들인 포(布)는 마땅히 곧 납부자에게 돌려주어야 할 것이오나, 관리들이 이를 기화로 농간을 부리면 궁민들은 실지로 혜택을 입지 못할 듯 하오니, 마땅히 여러 관사(官司)에 분부하여 내년에 바칠 잡공(雜貢)으로 충당하게 하여 먼저 납부하기 위하여 빌리는 폐단을 면하게 하옵소서. 행성(行省)에서도 이미 통첩이 와 있으니 조속히 시행하도록 하십시오. 세 곳의 식읍(食邑)이 설립된 뒤로는 백관들의 봉록(俸祿)도 마련되지 못하온데, 무릇 한 나라의 왕이 여러 신하들의 염결(廉潔)한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생활비를 빼앗아 사생활을 위한 창고를 채운다면 어찌 후세에 비난을 받지 않겠습니까. 바라건대, 이것을 양궁(兩宮)에 알리어 식읍을 폐지하고 광흥창(廣興倉)에 환속시켜 그 봉록에 충당하도록 하옵소서. 경기(京畿)지방의 토전은 조상 때부터 내려오던 구분전(口分田)을 제하고 나머지는 모두 떼어 주어 녹과전(祿科田)으로 만든 지 거의 50년인데, 근자에는 권력 있는 집안에서 거의 모두 빼앗아 가졌기 때문에, 중간에 여러 번 혁파할 것을 논의하였으나, 문득 위언(危言)으로 왕을 기만하여 마침내 실시되지 못하게 하였는데, 이는 대신들이 고집하지 못한 소치입니다. 과연 이것을 혁파할 수 있다면 기뻐하는 자는 매우 많을 것이요, 기뻐하지 않을 자는 권호(權豪) 수십 명뿐일 것입니다. 무엇을 꺼려서 실시하지 못하십니까. 주 ㆍ군에서 여러 해 동안 포흠(逋欠)된 공부(貢賦)는 관계관들이 모든 계책을 다하여 강력히 징수하여도 10분의 1도 거두어 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다만 원망을 살 뿐이오니, 바라건대 영을 내리시어 지정(至正) 3년 이전에 포흠한 공부(貢賦)는 일체 면제하도록 하옵소서. 몇 해 전에 횡포하게 거두어 들이니 빈궁한 백성들이 아들과 딸을 잡히거나 파는 자가 있었습니다. 바라옵건대, 각 도(道)의 존무사(存撫使)와 안렴사(按廉使)를 시켜 방을 붙여서 그 백성들이 서울에 와서 고할 것을 허락하고, 관재(官財)로 그 값을 계산하여 갚아주어 아들과 딸을 도로 찾게 하고, 산 사람도 자수하게 하되 만일 자수하지 않으면 그 값을 주지 않고 강제로 부모에게 돌려주게 하며, 심한 자에 대하여는 죄를 다스리게 하옵소서." 하였다. ○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이곡(李穀)이 원 나라에서 재상에게 글을 보내어 말하기를, “우리 삼한이 나라 구실을 못한 지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풍속은 퇴폐하고 형정(刑政)은 문란하여 백성이 제대로 살 수 없게 되어 도탄 속에 있는 것과 같았습니다. 다행히 지금 국왕께서 명을 받고 본국으로 가시었으니 백성들이 기대하기를 큰 가뭄에 단비를 바라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국왕께서는 젊으신 나이에 겸공하고 말수가 없어서 일국의 정치를 여러 분에게 들어서 결정하시니, 곧 그 사직의 안위와 인민의 이해와 사군자(士君子)의 진퇴가 모두 여러 분들에게 달려있습니다. 대개 군자를 등용하면 사직이 편안하고, 군자를 물리치면 인민이 고통을 받는 것은 고금의 상리입니다. 그러한즉, 사람을 쓰는 것은 역시 정치하는 근본인데, 대개 사람을 쓰기는 쉽지만 사람을 알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사정(邪正)을 묻지 않으며 고하를 논하지 않고 오직 재물만을 보며, 오직 세력에 따라 나에게 아부하는 자는 비록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라도 그를 등용하고, 나와 달리하는 자는 비록 청렴하고 근신하는 자라도 이를 물리친다면 사람 쓰는 것이 아주 쉽지 않습니까. 사람을 쉽게 쓰기 때문에 정치는 날로 문란하며, 정치가 날로 문란하여지기 때문에 국가는 따라서 위태로워지고 망할 것이니, 이것은 먼 옛날에서 찾아볼 필요가 없이 바로 눈 앞에서 본 뚜렷한 경험이 있습니다. 옛 사람은 그러함을 알고 있었으니 한 번 사람을 등용하거나 물리침에 있어서 반드시 그 행하는 바와 그의 과거를 살피는 것은 오직 재물에 안목이 흐려지고 권세에 뜻을 빼앗길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붉은색과 자주색이 서로 엇갈리고 옥석(玉石)이 서로 혼동되니, 사람을 안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날의 우리나라 풍속은 재물이 있는 것을 능력이 있는 것으로 여기고, 세력이 있으면 지식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이때문에 조관(朝官)이나 유신(儒臣)의 복장까지 하고, 바른 말과 정당한 언론도 시골 사람의 미친 소리로 생각하게 되었으니, 나라가 나라 구실을 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곡(穀)이 친척들과 헤어져 고국을 떠나 오래도록 황제의 서울에 나그네로 머물러 있는 것은 바로 이때문입니다. 근자에 들으니, 여러 분들이 정사를 보좌하고, 교화를 고쳐나가는 것이 전일보다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 명목상으로는 비록 늙은이를 높인다 하나 실제로는 젊은이가 권력을 잡고 있으며, 명목상으로는 비록 청렴을 숭상한다 하나 실제로는 탐관이 실권을 맡고 있으며, 불량배를 내쫓았다 하나 세력이 큰 자가 그 악을 고치지 않고 있으며, 옛 신하를 갈았으나 새 사람들이 도리어 구신들에게 붙었다고 합니다. 사람을 알아보기를 어렵게 여기지 않고, 사람 쓰는 것을 매우 쉽게 여기는 것이니, 이것은 국왕께서 위임하신 뜻이 아닐진대, 원 나라 조정에서 이를 들으면 옳지 않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어떤 이는 말하기를, '여러 분들에게 글을 보낼 필요가 없다. 다만 그들의 노여움을 살 뿐이요, 도움될 바가 없을 것이다' 하였으나, 곡은 이에 답하기를, '만일 사직이 편안하게 되고 인민들에게 이롭게 된다면 응당 그 본말을 자세히 갖추어서 이를 조정에 말하며, 이를 천자에게 아뢸 것인데, 어찌 제공들의 노여움 때문에 입을 다물 수 있을 것인가'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감히 어리석은 말씀을 올리오니 반드시 제공들은 살펴주십시오." 하였다.
○ 보흥고(寶興庫)ㆍ덕녕고(德寧庫)ㆍ내승(內乘)ㆍ응방(鷹坊)을 폐지하고 그곳에서 차지했던 토지와 노비를 각각 원 주인에게 돌려보냈다. ○ 원 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와 피물(皮物)을 요구하였다. ○ 밀직(密直) 전사의(全思義)를 원 나라에 보내어, 책명(冊命)을 내린 것에 대해 사례하였다. ○ 원 나라에서 최화상(崔和尙)ㆍ임신(林信)ㆍ박양연(朴良衍)ㆍ민환(閔渙)ㆍ김첨수(金添壽)ㆍ임이도(林以道)ㆍ승신(承信)ㆍ남궁신(南宮信)ㆍ왕석(王碩) 등을 여러 지방에 유배하였다.
○ 6월에, 신궁(新宮)에 저장한, 세 식읍에서 들여온 포 4천여 필을 내어 광흥창(廣興倉)에 귀속시켰다. ○ 전 첨의 찬성사(僉議贊成事) 유방세(劉方世)가 졸하였다. ○ 경화공주(慶華公主)가 훙하였다. ○ 계유일에 대행왕(大行王)의 상여가 악양으로부터 도착하였다. ○ 서연관(書筵官)을 두어 4번(番)으로 나누어 격일마다 왕을 모시고 공부하게 하였다. 안진(安震)이 왕에게 아뢰기를, “신들은 모두 양부(兩府)의 관원이기 때문에 하루종일 시강할 수 없사오니, 마땅히 바른 선비를 선택하여 고문(顧問)으로 두십시오. 춘추수찬(春秋修撰) 원송수(元松壽)와 예문검열(藝文檢閱) 허식(許湜)이 바로 그에 합당한 인물입니다." 하였다. ○ 가을 8월에 과거법을 개정하여 초장(初場)은 육경(六經)의 뜻과 사서(四書)의 의(疑)를 시험하고, 중장은 고부(古賦)를, 종장에서는 책문(策問)을 시험하도록 하였다. ○ 경신일에 충혜왕을 영릉(永陵)에 장사지냈다. ○ 왕이 서연(書筵)에 참석하였는데, 강의가 끝난 뒤에 기거랑(起居郞) 박윤문(朴允文)이 늦게 나왔다. 환자 이백(李伯)이 왕에게 고하기를, “박윤문을 시켜서 빨리 저의 형의 고신에 서명하게 하여 주십시오." 하니, 왕이 이르기를, “만일 그렇게 한다면 전대의 최화상(崔和尙)이 하던 것과 무엇이 다르냐. 네가 사사로이 그에게 청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 왕이 신궁을 헐어버리고 숭문관(崇文館)을 지으라고 명하였다. ○ 찬성사 박충좌(朴忠佐)가 정관정요(貞觀政要)를 강의하고, 또 연(燕)의 소왕(昭王)이 황금대(黃金臺)를 지어놓고 곽외(郭隗)를 맞이한 일을 말하였더니, 왕이 초(鈔) 50정(錠)을 하사하였다. ○ 원 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와서 말안장을 요구하였다. ○ 9월 초하루 정해에 일식(日蝕)이 있었다. ○ 첨의참리(僉議參理) 나익희(羅益禧)가 졸하였다. 나익희는 성품이 깔끔하며 절의를 사모하고, 남과 다투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그 어머니가 재산을 나누어 줄 때, 따로 남녀 노비 40명을 더 주었더니, 사양하며 말하기를, “한 아들이 다섯 딸 사이에 끼어 있는데 어떻게 차마 특별히 분재(分財)를 더 받아서 여러 자식에게 고르게 나누어 주는 어머니의 사랑에 누가 되게 하겠습니까." 하니, 어머니도 의롭게 여기어 이를 허락하였다. 충선왕(忠宣王)이 새로운 법을 만들기를 좋아하였는데, 익희는 여러 번 글을 올려 반대하였다. 금성군(錦城君)이 되어 한가로이 은거하면서도 매양 백성들이 잘 살고 못사는 것과, 인재가 등용되나 안되나 하는 것을 생각하며, 뒷짐지고 미간을 찌푸리며 홀로 정원을 거닐어 남모르는 걱정이 있는 것 같았다. 이때에 다시 정부에 들어와서 이제현(李齊賢)에게 말하기를, “우리 왕이 어리셔서 정치를 재상에게 위임하였는데, 저 좋지 못한 자들이 또 높은 자리에 들어와서도 전일의 실패를 거울삼아 경계하지 않으니, 나는 장차 물러나서 여러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함께 받지 않겠다." 하더니, 얼마 안 되어 졸하였다. 시호는 양절공(良節公)이다. ○ 공주가 병이 나서 이 죄 이하의 죄수에게 사(赦)를 베풀었다.
○ 겨울 10월에 왕후(王煦)를 우정승에, 김륜(金倫)을 좌정승에, 김영후(金永煦)ㆍ강윤성(康允成)을 찬성사에, 전사의(全思義)ㆍ강우(姜祐)를 참리(叅理)에, 이천(李蒨)을 정당문학에, 권적(權適)을 판밀직사사에, 허백(許伯)을 밀직사사에, 봉천우(奉天祐)ㆍ안축(安軸)을 지밀직사사에, 민사평(閔思平)을 감찰대부에 임명하였다.
○ 11월에 하을지(河乙沚) 등 33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 윤안지(尹安之)ㆍ안보(安輔)ㆍ곽인(郭珚)을 원 나라에 보내어 과거에 응시하게 하였는데, 안보는 제과(制科)에 합격하였다.
○ 12월에 덕성부원군(德成府院君) 기철(奇轍)을 원 나라에 보내어 신정을 하례하게 하였다. ○ 심왕(瀋王) 호(暠)가 원 나라에서 왔다. ○ 원 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와서 충선왕과 충숙왕의 시책(諡冊)을 주었다. ○ 공주가 직성군(直城君) 노영서(盧英瑞)를 광양(光陽)에, 우대언(右代言) 전숙몽(田淑蒙)을 동래(東萊)에 귀양보냈다. ○ 정방(政房)을 폐지하여 그 일을 전리사(典理司)와 군부사(軍簿司)에 귀속시켰다.
○ 경기(京畿) 지방의 녹과전(祿科田) 중에서 권귀(權貴)한 자에게 빼앗긴 것을 모두 그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고려사절요 제25권
 충목왕(忠穆王)
을유 원년(1345), 원 지정 5년


○ 봄 정월 갑오일에 지진이 일어나 이틀 동안 계속되었다. ○ 정방(政房)을 다시 두었다. ○ 을묘일에 지진이 있었다.
○ 2월에 정안부원군(定安府院君) 허종(許琮)이 졸하였다. 충렬왕(忠烈王)이 허종을 궁중에서 길렀고, 자란 뒤에 충선왕(忠宣王)의 딸 수춘옹주(壽春翁主)에게 장가들었다. 세상일에 관여하지 않고 매일 의약으로 사람 살리는 것을 일삼았으며, 부귀하게 생장하였으면서도 교만한 빛이 없고 예를 지키고 덕을 베풀기를 좋아하였다. ○ 덕녕공주가 여러 재상들을 불러서 말하기를, “이제부터는 흥해군(興海君) 배전(裴佺)에게 다시는 왕을 가까이 모시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이보다 먼저 배전은 공주의 총애를 받았는데, 어떤 사람이 배전의 죄악을 기록한 익명서를 판도사의 문에 붙였으므로 공주가 그를 물리친 것이다.
○ 3월에 판삼사사(判三司事) 권겸(權謙)을 원 나라에 보내어 성절을 하례하게 하였다.
○ 여름 4월에 김영후(金永煦)를 좌정승에, 박충좌(朴忠佐)를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전사의(全思義)ㆍ손수경(孫守卿)ㆍ안축(安軸)을 찬성사에, 이천(李蒨)ㆍ이몽가(李蒙哥)ㆍ장항(張沆)을 참리(叅理)에, 정을보(鄭乙輔)를 정당문학에, 인당(印璫)을 밀직사(密直使)에 임명하였다.
○ 5월에 원 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와서 무늬 놓은 모시[紋苧布]를 요구하였다.
○ 6월에 첨의평리(僉議評理) 최문도(崔文度)가졸하였다. 문도는염락(溓洛)학파의 성리학(性理學) 서적 보기를 즐겨하였으며, 어버이를 극진한 효도로 섬겼다. ○ 왕이 내전에서 보살계(菩薩戒)를 받았다.
○ 가을 7월 갑신일에 혜성이 나타났으며 정해일에 또 나타났다. ○ 원 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와서, 곰과 염소의 가죽[熊猠皮]을 요구하고, 또 왕에게 의복과 술을 주었다. ○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정포(鄭鋪)가 원 나라에서 졸하였다. 정포는 학문을 좋아하고 문장을 잘 지었다. 충혜왕 때에 좌사의가 되어 왕에게 글을 올려 정부의 시책을 많이 논박하였으므로, 집정자들의 미움을 받아 울주(蔚州)의 수령으로 나가 있었다. 비록 벽지 생활을 하는 중에도 시를 읊으면서 태연히 지냈다. 상국에 가서 벼슬할 뜻이 있어 일찍이 개연히 말하기를, “대장부가 어찌 답답하게 일방(一方)에만 있을 수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원 나라에 가서 별가불화 승상(別哥不花丞相)을 보았는데, 그는 정포를 한 번 보고 유별나게 여기어 천자에게 천거하려 하였는데 마침 그때 병으로 죽었다. ○ 심왕(瀋王) 고(暠)가 훙하였다. 장례는 공주의 예에 준하여 행하였다.
○ 겨울 10월에 염찰소복사(廉察蘇復使)를 양광(楊廣)ㆍ전라ㆍ경상의 3도로 파견하였다. ○ 경령전(景靈殿)에 참배하였다.
○ 12월에 좌정승 김영후를 원 나라에 보내어 방물을 바치게 하였다. ○ 왕후(王煦)를 파면하고, 김영후를 우정승에, 인승단(印承旦)을 좌정승에, 이곡(李穀)을 밀직사(密直使)에 임명하였다. 왕후는 정방을 폐지하고 과전(科田)을 폐지한 까닭에 욕심 많고 나쁜 무리의 미움을 받아서 파면되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실망하였다.


 

 

동사강목 제14상
을유년 충목현효왕(忠穆顯孝王) 원년 휘는 흔(昕), 몽고 휘는 팔사마타아지(八思麻朶兒只), 충혜왕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덕녕공주(德寧公主)다. (원 순제 지정 5, 1345)


춘정월 지진이 있었다.
○ 정방(政房)을 다시 설치하였다.
찬성사 박충좌(朴忠佐)ㆍ김영후(金永煦)와 참리(參理) 신예(辛裔)ㆍ지신사(知申事) 이공수(李公遂)를 제조관(提調官)으로 삼았다. 그때에 비록 뭇 소인배들을 북전(北殿))에서 쫓아내기는 하였으나, 신예ㆍ강윤충ㆍ전숙몽(田淑夢) 등이 서로 잇달아 정권을 휘두르매, 불과 몇 달 동안에 그들의 인척(姻戚)과 옛친구들이 경상(卿相)의 대열에 늘어서게 되었다. 대언(代言) 정사도(鄭思度)는 비위를 맞추고 아첨하여 등용되어 오랫동안 정방(政房)에 있으매 나라 안팎에서 온갖 잡배(雜輩)가 몰려들었고, 당시 사람들이 예(裔)를 지목하여 ‘신왕(辛王)’이라 불렀다.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이곡(李糓)이 원(元)에 있으면서 재상들에게 글을 주어 이르기를,
“우리 삼한(三韓)은 나라가 나라답지 못한 지가 오래여서 풍속은 무너지고 정치는 어지러워져서 백성들이 생업을 이어나가지 못하게 되었는데, 이제 국왕께서 천명(天命)을 받으니 백성들이 마치 큰 가뭄에 단비를 바라듯 바라고 있는데, 국왕께서 어리신 나이로 겸손하고 공순(恭順)하며 화묵(和黙)하신지라 한 나라의 정사(政事)를 제공(諸公)에게 물으시니, 사직(社稷)의 안위(安危)와 인민의 이해(利害)와 선비와 군자의 진퇴(進退)가 모두 제공들에게서 나오고 있습니다.
대저, 군자를 기용하면 사직이 편안해지고 군자를 물리치면 인민이 병들게 되니, 이는 고금의 상리(常理)입니다. 그러므로 인재를 기용하는 것 또한 다스림의 근본이라 할 것입니다. 대개 사람을 그냥 쓰기는 쉬워도 사람됨을 알아보고 쓰기는 어려운 법인데 사악(邪惡)한지 올바른지를 묻지 않고, 존귀하고 비천함도 논하지 않고, 오로지 뇌물을 좋아하고 세력만을 의지하여, 자기에게 빌붙는 자는 비록 간사한 아첨군이라 하더라도 이를 등용하며, 자기 뜻과 다른 자는 비록 염치 있고 삼가는 자라 할지라도 물리친다면, 그 사람을 씀이 가볍다 하지 않겠습니까? 가볍게 사람을 쓰는 까닭에 정치가 날로 어지러워지고, 정치가 어지러운 까닭에 나라가 이에 따라 위태롭고 망해간다는 예는 이를 구태여 옛 역사에서 멀리 구하기를 기다릴 것도 없이, 바로 눈앞에 밝은 거울이 나타나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도 그러한 것을 알고, 사람을 한 번 등용하고 물리칠 때에는 반드시 그가 행하는 바와 지내온 내력을 살펴보되 오로지 재물에 더럽혀질까 세력에 뜻을 빼앗길까 근심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선한 자와 악한 자가 서로 다투고 옥석(玉石)이 서로 뒤섞이니 그 사람을 알아보는 것이 어렵다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우리 나라의 습속이 재산이 있는 것을 능하다 여기고, 세력을 가지는 것을 지혜롭다 여기며, 심지어는 조의(朝衣)와 유관(儒冠)의 행동을 창우(倡優)의 잡희(雜戲)로 여기고, 곧은 말과 바른 의론을 시골 사람들의 헛소리로 여기게까지 되었으니, 나라가 나라답지 아니한 것도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요사이 듣건대, 제공(諸公)이 이러한 방법으로 정사를 보좌하고 교화(敎化)를 갱정(更正)하는 것이 지난날과 서로 그리 멀지 아니하니, 명색은 비록 어른을 높인다 하지만 젊은 자가 실제로 권세를 주재하고, 명분은 비록 염치를 숭상한다 하지만 실제로 욕심 있는 자가 권력을 잡고 있으며, 악소배(惡少輩)들을 물리치고서도 집권자들은 자신들의 악을 고치지 못하였고, 옛 신하를 갈아치우고서도 새로 들어선 자들이 도리어 옛 신하에게 빌붙었으니, 인재를 알아보는 것을 어렵게 여기지 않고 사람을 가볍게 기용하는 것은 국왕께서 정사를 맡기신 본 뜻이 아닌 듯합니다. 원의 조정에서 이를 듣는다면 불가(不可)하다 하지 않겠습니까?”
하였으나, 집정(執政)하는 자가 채용(採用)하지 못하였다.
○ 돌[石]이 스스로 장단나루[長湍渡]를 건너왔다.

하4월 김영후(金永煦)를 좌정승으로, 박충좌(朴忠佐)를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손수경(孫守卿)ㆍ안축(安軸)을 찬성사로 삼았다.

5월 원이 사신을 보내어 문저포(紋苧布)를 요구하였다.
당초 충렬왕(忠烈王) 때에 어느 여승(女僧)이 화문 백저포(花紋白苧布)를 공주에게 바쳤더니 공주가 보배로운 물건으로 여겼으며, 마침내는 중국의 진품(珍品)이 되었다. 충숙왕(忠肅王) 때에 채하중(蔡河中)이 여러 차례 문저포를 짜서 원에 바쳤는데, 이로 인하여 원나라 사람의 요구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6월 참리(參理) 최문도(崔文度)가 졸하였다.
문도는 젊어서 아버지 성지(誠之)를 따라 원에 들어가 숙위(宿衛)하였다. 몽고(蒙古)의 말과 글자를 익혀, 왕손ㆍ귀공자와 더불어 거처하기도 하고 위구취막(韋韝毳幙)들과 더불어 노닐기도 하였는데, 염락(濂洛)의 성리학(性理學) 서적을 즐겨 보았으며, 밤 늦게 자고 닭이 울면 일어났다. 어버이를 효성스럽게 섬겼으며, 성품이 온후하고 양순하여 일찍이 갑자기 즐거워하거나 급히 성낸 적이 없었다. 시호는 양경(良敬)이다.

추7월 혜성(彗星)이 자미원(紫微垣)에 나타났다.
○ 심왕(瀋王) 고(暠)가 죽었다.
공주(公主)의 예(例)로써 장사하였다. 아들 독타불화(篤朶不花)가 심왕에 습봉(襲封)되었다.
○ 좌사의 대부(左司議大夫) 정포(鄭誧)가 졸하였다.
포(誧)는 해(瑎)의 손자로, 학문을 좋아하고 문장을 잘 지었다. 충혜왕(忠惠王) 때에 글을 올려 그릇된 것을 봉박(封駁)한 바가 많았으므로 집정자들이 미워하여 울주(蔚州)의 수령(守令)으로 내어보냈는데, 시를 읊으며 태연하였다. 상국(上國)에 벼슬하고자 하여 원에 들어갔더니 승상 별가불화(別哥不花)가 한 번 보고나서 그를 남다르게 여겨 천자에게 천거하려 하였는 데, 때마침 병들어 죽었다.

8월 기내(畿內)의 사급전(賜給田)을 혁파하여 다시 녹과(祿科)에 채웠다.
구제(舊制)에, 관리의 녹봉이 박하여 경기전(京畿田)을 사람마다에게 몇 묘(畝)씩을 내려주고서 이를 녹과(祿科)라 일컬었는데, 권문 귀족들이 이것을 거의 남김없이 빼앗아 가지고 사급전(賜給田)이라고 불렀으니, 여러 영부(領府)가 더욱 많은 피해를 당하였다. 왕후(王煦)가 영을 내려 이를 복구시킨 것이다.

동12월 왕후를 파면하고, 김영후(金永煦)를 우정승으로, 인승단(印承旦)을 좌정승으로, 이곡(李糓)을 밀직사(密直使)로 삼았다.
후(煦)가 재상이 되어 폐정(弊政)을 개혁하기로 마음을 다져먹고 정방(政房)을 폐지하고 녹과전(祿科田)을 복구한 까닭에 간사하고 탐오한 자들의 미움을 받아 파직당한 것이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의 기대가 어그러졌다. 승단(承旦)은 후(侯)의 서자(庶子)이다.
○ 편수관(編修官) 안보(安輔)가 원에 가서 제과(制科)에 급제하였다.
보(輔)는 축(軸)의 아우인데, 제과에 급제하여 요양행중서성 조마(遼陽行中書省照磨)를 제수받고 문서를 담당하는 직분을 맡았을 뿐 다른 임무가 없었는데, 성(省)의 관리가 그의 재능을 중히 여겨 모두들 예모(禮貌)를 차려 그를 대하였다. 얼마 안 있어 어머니가 연로하다 하여 벼슬을 버리고 귀국하였다.


[주D-001]위구취막(韋韝毳幙) : 위구(韋韝)는 활을 당길 때 쏠리지 않게 무두질한 가죽으로 만든 팔찌이며, 취막(毳幙)은 모직으로 만든 천막. 여기서는 몽고식으로 야영하며 사냥하는 한량들을 말한다.
[주D-002]염락(濂洛) : 송대(宋代)의 성리학을 창도한 주돈이(周惇頤)와 정호(程顥)ㆍ정이(程頤)를 일컫는 말. 호남성(湖南省) 도현(道縣) 염계(濂溪)에서 주돈이의 염계학파가 일어났으며, 그의 문하(門下)인 이정(二程)은 낙양(洛陽) 출신이었다.

 

목은시고 제1권
 시(詩)
요즘 창화(唱和)하는 일 때문에 가동(家僮)이 자주 원재(圓齋)의 집에 갔는데, 돌아오면 반드시 공(公)이 밖으로 나가려고 한다고 말하였다. 적이 생각건대, 공이 나가면 다른 데를 가려는 것이 아니라, 어버이에 대한 혼정신성(昏定晨省)을 급하게 여긴 것일 뿐이다. 공의 나이가 50세 가까이 되었는데 고당(高堂)께서도 무양(無恙)하시니, 즐거워라, 이 사람이여. 하늘이 무슨 까닭으로 나만 유독 양친(兩親) 다 여읜 비감(悲感)을 갖게 했단 말인가. 이에 정모(鄭母)에 대한 시(詩)를 지어서 스스로 슬퍼하는 바이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저 훌륭했던 노래자(老萊子)는 / 彼美老萊
백발에 채색옷을 입고 / 白髮彩衣
춤추고 어린애 장난 하여 / 而舞而戱
늙은 부모 기쁘게 하였네 / 以樂庭闈
누가 그 덕음을 이어서 / 孰嗣其音
모친의 마음 기쁘게 할꼬 / 而順母心
고인을 짝할 뿐만 아니라 / 不寧配古
금세도 교화할 만하구려 / 可以化今
오직 우리 서원 정씨는 / 惟我西原
진실로 문무가 빈빈했는데 / 允虎允文
원재가 그것을 이어받아 / 圓齋承之
그 명성 크게 떨치었네 / 大播其芬
그 명성 크게 떨친 것을 / 其芬播而
가까이서 자세히 살펴보니 / 近而察之
오직 이 효성스런 생각이 / 維是孝思
그 밑바탕이 되었기에 / 迺爲之基
오직 의리와 충성에도 / 惟義惟忠
쓰임이 또한 무궁하여라 / 用之不窮
효도가 오직 근본이 되어 / 孝惟其本
마음속에 쌓인 때문일세 / 積之于中
그 쌓인 게 무엇인고 하면 / 惟中伊何
정성이요 다른 게 아니라서 / 誠也匪他
하느님이 장수를 내리어 / 天錫眉壽
모친이 많은 수를 누리도다 / 母壽之多
사람들 또한 말을 하기를 / 人亦有言
근원 있어 흐름도 있다 하네 / 有流有源
근원이 끝없이 흐르리니 / 源之長矣
훌륭하여라 춘헌이여 / 美哉春軒


[주C-001]원재(圓齋) : 고려 말기의 문신(文臣) 정공권(鄭公權)의 호이다.
[주C-002]정모(鄭母) : 바로 정공권의 모친을 이른 말이다.
[주D-001]춘헌(春軒) : 고려 말기의 문신(文臣) 최문도(崔文度)의 호인데, 그가 정공권(鄭公權)의 외조부이므로 이른 말이다.

 

익재집 습유
 시ㆍ서ㆍ서ㆍ의(詩書序議)
설곡시 서(雪谷詩序) 《동문선(東文選)》에 보인다.


설곡(雪谷) 정중부(鄭仲孚)는 최춘헌(崔春軒 춘헌은 최문도(崔文度)의 호)의 사위인데, 최졸옹(崔拙翁 졸옹은 최해(崔瀣)의 호)에게 수학(受學)하였다. 졸옹은 원래 사람을 추허(推許)하는 예가 적었으며, 춘헌은 자기가 좋아한다고 해서 아첨하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매양 나를 대하면 중부(仲孚)의 훌륭함을 칭찬하였으므로 내가 이에 그 사람됨을 알게 되었다.
중부는 처음 벼슬하여 사한(史翰)을 역임한 지 10년도 못되어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제배(除拜)되었으며, 나아가 울주(蔚州)를 다스릴 적에는 은혜로운 정사를 베풀었으므로 그가 떠날 때는 백성들이 어린이는 이끌고 노인은 부축하여 나와서 울며 끌어당기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나라의 표문(表文)을 받들고 경사(京師 원 나라의 서울)에 갔을 적에는 승상(丞相) 별가보화공(別哥普化公)에게 중히 여김을 받아 공(公)이 천자에게 추천하려 하였으나, 중부는 병으로 일어나지 못하였다. 아들 추(樞)가 영구(靈柩)를 받들고 우리나라로 돌아오니, 이 사실을 들은 자는 놀라고 애석해 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아, 옛날에 재주가 있으면서도 오래 살지 못한 사람으로는 당(唐) 나라의 이장길(李長吉)과 송(宋) 나라의 형돈(邢敦)이 있었는데, 이 두 사람 역시 백성에게 사랑을 받았고 대인(大人)에게 중히 여김을 받았기는 하지만, 우리 중부(仲孚)같기야 하였겠는가! 우리나라의 선비들이 중부의 불행에 대하여 놀라고 애석해 하는 것이 더욱 마땅하다.
그가 저술한 시(詩)와 문(文) 약간 편이 있는데, 추(樞)가 엮어 전후집(前後集) 두 책으로 만들었다. 이 책을 보니 처연한 마음이 일어 되풀이 해서 읽었으며, 인하여 그 끝에 졸어(拙語) 몇 마디 써서 정씨(鄭氏)에게 돌려보낸다. 추(樞)는 지금 도관낭중(都官郞中)으로 있는데, 실은 나의 문생(門生)이다.


[주D-001]이장길(李長吉) : 당(唐) 나라의 종실(宗室)인 이하(李賀)를 말하는데, 장길은 그의 자(字)이다. 시문(詩文)에 능하였고 문체(文體)가 숭엄(崇嚴)하였는데, 벼슬은 협률랑(協律郞)을 지냈다. 《唐書 卷203》
[주D-002]형돈(刑敦) : 송(宋) 나라 사람으로 태평흥국(太平興國 송 태종(宋太宗)의 연호) 때에 진사(進士)에 응시하였다가 낙방하고 나서 옹구(雍丘)에 은둔하여 살았다. 성품이 정직하고 경사(經史)를 즐겨하였으며, 회화(繪畫)에도 능하였다. 《宋史 卷457》

 

 

졸고천백 제1권
춘헌호기(春軒壺記)


내가 젊어서 경전을 읽기 시작하였을 때에는 투호(投壺)의 예(禮)가 군자들이 빈주(賓主) 사이의 즐거운 흥취를 조절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만 알았지 그 제도에 대해서는 탐구해보지 못하였다. 그 후 사마 문정공(司馬文正公 사마광(司馬光))의 투호도서(投壺圖序)를 보고 나서 그 대략은 알게 되었으나 또 사우(師友) 가운데 물어서 질정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이에 매번 내가 변방 한구석에서 생장한 탓에 중원(中原)의 사대부들과 서로 만나 화살을 안고 배움을 청하여 투호를 몸소 익힐 수 없는 현실을 한스럽게 여겼다.
지치(至治) 신유년(1321, 충숙왕 8) 봄에 내가 외람되이 회시(會試)를 보러 연경에 가서 원나라 조정에 들어가 입대(入對)한 후 칙지(勅旨)가 아직 내려오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그때에 요양(遼陽)에서 온 홍중의(洪仲宜)의 무리와 문명전(文明殿)의 동저(東邸)에서 함께 머물고 있었는데, 한가로이 지내면서 소일할 만한 일이 없기에 홍중의의 족부(族父) 집에서 호시(壺矢)를 빌려와 시험 삼아 해 보았는데, 마음이 매우 즐거워졌다. 그러나 칙지를 받고 동쪽으로 돌아와 개모(盖牟)에 부임하여 분주히 지내다 보니 투호는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지금 나는 병으로 물러나 집에서 지낸 지 10여 년이나 되었다. 천성적으로 바둑과 장기를 좋아하지 않는 데다 음악도 제대로 이해할 줄 몰라 책을 보는 여가에 가만히 다른 기예를 익혀 보았으나 흥미를 일으킬 만한 것이 없었는데, 오직 이 투호만은 내 마음속에서 언제나 어른거렸다. 이는 투호가 마음을 다스리고 덕행을 관찰하기 위한 기예에 가까워 그만둘 수 없어서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집안에 투호가 없을 뿐만 아니라 나라 안의 사대부들 가운데도 이를 가지고 있는 이가 없어서, 내가 아무리 좋아한들 어쩔 도리가 없었다.
춘헌(春軒) 최후(崔侯)는 옛것을 배워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는 사람이다. 자제들이 스승도 없이 대충 배워 잘못된 지식을 바로잡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정주(程朱)의 저술들을 널리 수집하여 그들과 함께 강습하였다. 또 그들이 긴장만 하고 이완을 하지 않아 쉬지도 못하고 공부만 할까 두려워한 나머지 투호가 없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여, 이를 멀리서 사다가 놓고는 때때로 배우기를 원하면서도 할 줄 모르는 이들을 불러다가 그림을 보아가며 가르치니, 뜰 안 가득히 봄바람 부는 기수(沂水) 가의 기상(氣像)이 물씬 풍겨났다. 만약에 최후가 투호를 독실히 좋아하고 부지런히 탐구하지 않았다면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훗날 우리나라의 후진(後進)들 가운데 학교에 들어가서는 학업을 닦고 학교에서 물러나 쉴 때는 기예를 즐기어 날마다 자신이 익히지 않은 것을 익혀서 대단하게 변하는 자가 나온다면, 우리 최후로 말미암아 교화된 것이 아니라고 기필하지는 못할 것임을 알겠으니, 아, 그를 칭송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익재(益齋) 이상(李相 이제현(李齊賢))과 근재(謹齋) 안군(安君 안축(安軸))이 이미 여기에 명(銘)을 달고 시(詩)를 지었으니 내가 다시 그에 대해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저 내가 투호를 좋아하는 뜻과 최후가 투호를 가져다 두게 된 연유나 서술하여 기록해 두는 바이다.
지순(至順) 계유년(1333, 충숙왕 복위 2) 5월 경신일에 쓰다.


[주D-001]회시(會試)를 …… 가서 : 1321년 3월에 안축(安軸)과 함께 원나라 과거에 응시하여 합격한 일을 두고 말한 것이다.
[주D-002]개모(盖牟)에 부임하여 : 최해의 송봉사이중보환조서(送奉使李中父還朝序)에 의하면, 최해는 1321년(지치 원년)에 원나라 과거에 합격자 43명 중 21등으로 합격하여 개모별가(盖牟別駕)에 제수되었고, 부임한 지 수개월 만에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왔다고 한다.
[주D-003]춘헌(春軒) 최후(崔侯) : 춘헌은 최문도(崔文度 : ? 〜 1345)의 호이다. 자는 희민(羲民)이며, 본관은 전주(全州), 찬성사(贊成事) 최성지(崔誠之)의 아들이다. 《고려사(高麗史)》 최문도열전(崔文度列傳)에 의하면, 성리서(性理書)를 즐겨 보아 부모에게 효도하고 성품이 온화하였으며, 첨의참리(僉議參理)를 지냈다고 한다. 시호는 양경(良敬)이다.
[주D-004]봄바람 …… 기상(氣像) : 공자(孔子)가 하루는 제자들에게 평소 자신을 알아주는 자가 나타나면 어찌하겠느냐고 묻자 자로(子路)와 염유(冉有)와 공서화(公西華)가 차례대로 각자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피력하였다. 그러나 곁에서 비파를 타고 있던 증점(曾點)은 “저는 앞의 세 사람과는 다릅니다. 늦은 봄날에 봄옷을 입고 어른 5, 6명과 동자 6, 7명을 데리고 기수(沂水)에 가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쐰 후 노래를 부르며 돌아오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공자가 이 말을 듣고는 탄식을 하며 증점의 말에 동조를 하였다. 《論語 先進》 이곡(李穀)은 춘헌기(春軒記)에서 최문도(崔文度)가 춘헌(春軒)을 지은 진정한 뜻이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쐰 후 노래하며 돌아오는 풍류〔浴沂風詠之流〕’에 있음을 말했다. 《稼亭集 卷2 春軒記, 韓國文集叢刊 第3輯 113쪽》 따라서 최해는 이러한 표현을 통해 최문도가 젊은이들에게 학문과 투호를 가르치는 장소가 춘헌(春軒)임을 나타내고 있다.
[주D-005]학교에 …… 즐기어 : 국역 대본에는 ‘莊修游息’으로 되어 있는데, 《동문선》에는 ‘莊’ 자가 ‘藏’으로 되어 있고, 또 이 말의 전거(典據)인 《예기(禮記)》 학기편(學記篇)에도 “군자는 학문에 대해서 학교에 들어가서는 학업을 닦고 학교에서 물러나 쉴 때는 기예를 즐긴다.〔君子之於學也 藏焉 修焉 息焉 游焉〕”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莊’ 자는 ‘藏’의 오자로 판단되어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6]명(銘) : 이 명은 《국역 익재집》 권9에 ‘최춘헌(崔春軒)의 호시명(壺矢銘)’이란 제목으로 전문(全文)이 수록되어 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병은 그 속이 비었고 화살은 곧고 바르거니 곧은 것이 아니고 빈 것이 아니면 병도 아니고 화살도 아니다. 반드시 신중히 하고 반드시 넣되 사냥꾼이 시위를 당기듯이 하라. 속여서 많은 점수를 내더라도 그렇게 이김은 기롱을 듣게 되거니, 세게 던지다가 떨어뜨리지 말고 돌려 넣으려다 비뚤어지게 말지어다. 군자의 유희이며 군자의 규모로다.〔壺虛其心 矢直其理 匪直匪虛 匪壺匪矢 必愼必中 若虞張機 詭遇獲十 勝不償譏 勿激而墜 勿旋而倚 君子之嬉 君子之規〕”
[주D-007]시(詩) : 안축의 시문은 후대에 《근재집(謹齋集)》으로 편찬되었으나 그 내용은 대부분 《관동와주(關東瓦注)》, 즉 1330년 강릉도 존무사(江陵道存撫使)로 나가서 지은 시문이고 나머지는 습유(拾遺) 작품 몇 편을 제외하고는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안축이 지었다고 하는 투호시(投壺詩) 역시도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가정집 제16권
 율시(律詩)
최춘헌(崔春軒)이 새로 전법 판서(典法判書)에 임명된 것을 축하하는 시를 지어 부치다

 

[주C-001]최춘헌(崔春軒) : 춘헌은 최문도(崔文度 : ?〜1345)의 호이다. 한국문집총간 3집에 수록된 《가정집》 권2에 〈춘헌기(春軒記)〉가 실려 있다.

 

 

가정집 제18권
 율시(律詩)
평생에 종유(從游)한 이들을 하나하나 셀 수가 있는데, 그중에서 졸재(拙齋)와 춘헌(春軒)이 서로 잇따라 세상을 떠난 뒤를 이어 중부(仲孚) 사의(司議)가 또 황천객이 되었다. 이에 삼애시(三哀詩)를 지어서 치암(恥菴)과 급고당(汲古堂)에게 부쳐 드리다.


세리의 교제는 예로부터 궁해지기 쉬운 것 / 勢利從來道易窮
시종일관 담담하게 사귀는 이들이 또 있으랴 / 淡交誰復有初終
한 시대의 모범 생각나네 춘헌 어르신 / 一時模楷懷春叟
천 수의 문장 그리워라 졸재 노인장 / 千首文章憶拙翁
문정도 옛날과 달리 적적하기만 한데 / 寂寂門庭非舊日
천지에 또 망망하게 가을바람 불어오네 / 茫茫天地又秋風
그중에서 정자가 가장 나이 어리니 / 箇中鄭子最年少
이 한은 우리가 모두 품을 수밖에요 / 此恨知公與我同


 

[주C-001]평생에……부쳐 드리다 : 졸재(拙齋)는 최해(崔瀣 : 1287~1340)의 호이고, 춘헌(春軒)은 최문도(崔文度 : ?~1345)의 호이고, 치암(恥菴)은 박충좌(朴忠佐 : 1287~1349)의 호이다. 급고당(汲古堂)은 미상이다.
[주D-001]시종일관……있으랴 : 참고로 《장자》〈산목(山木)〉에 “군자의 사귐은 담담하기가 물과 같고, 소인의 사귐은 달기가 단술과 같다.〔君子之交淡若水 小人之交甘若醴〕”라는 말이 나온다.

 


崔文度


崔文度誠之羅益禧婿字羲民春軒
溫良人未甞見其卒怒遽喜事親盡孝两
喪三年立家廟事之如存出身雖非儒科
而於儒者之道無憾出手弓釰入目簡編
濂溪二程晦菴之書皆彚而觀之夜分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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寐官至僉議叅理忠穆乙酉卒謚良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