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신묘년 산행 /2011.2.13. 수락산(금지샘)

2011.2.13. 재경금지샘 산악회 수락산 산행

아베베1 2011. 2. 14. 22:07
 재경금지샘산악회 수락산 산행

2월정기 산행 수락산 산행 입구 수락가든 곰바위 능선 매월정 깔딱고개 슬랩지역 정상 (주봉) 기차바위갈림길 쫄쫄이 약수터 수락폭포 석림사 장암역 중랑구 망우동 금란교회앞 00식당 뒷풀이 즐거운 시간 이었고 다시 만날 시간을 기대해봅니다
선.후배님 즐거운 한주 되시고 늘 좋은 일만 있으시길 .... 수없이 많이 다녔던 곳이지만 추억이 남는 시간 이었습니다.

 

 

 

 

 

 

 

 

 

 

 

 

 

 

 

서(書)
박태보 사원에게 보냄 4월 27일


동봉영당(東峰影堂)은 내 생각에 의심 가는 것이 있습니다. 그를 유자(儒者)라고 주장하자니 명분은 바른데 사적이 뒷받침하기 어렵고, 승려라고 주장하자니 승려들이 그의 마음을 어찌 알겠습니까. 단지 그 허탄한 말을 빙자할 따름일 것이니 절의(節義)와 풍교(風敎)에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이렇기 때문에 이익은 없고 손해만 있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참으로 옳지만은 않은 내 견해로 남의 다 된 일을 기필코 막으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벌써 건물을 절반 이상 완성하였을 것이므로 조만간 한번 찾아갈 것이니, 한가히 지내는 중에 좋은 감상거리가 하나 더해질 것입니다.
내가 당한 구설에 대해서는 이미 들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내가 일찍 장자(長者)에게 말하지 않고서 사적으로 공의(公議)를 등진 일을 논했다고 하여 그것을 죄로 삼고 있습니다. 전날 장문의 편지를 제때에 보내지 않은 일을 염려했던 그대의 견해 또한 명견(明見)이었으니, 가장 어려운 의리를 정밀히 분석한 공부에 대해 부끄럽고 탄복하였습니다. 기왕의 일은 말할 것이 못되지만 앞으로 또 무슨 낭패를 당할지 알 수 없으니, 이것이 두렵습니다.


 

[주D-001]동봉영당(東峰影堂) : 동봉(東峰)은 김시습(金時習)의 여러 호 가운데 하나이다. 김시습이 거처하던 구지(舊址)가 수락산 동봉에 있었다. 박세당이 동봉의 서쪽에 영당을 짓고, 1686년에 부여 무량사(無量寺)에 있던 김시습의 자화상을 봉안하고 춘추로 제향하였다. 《국역 서계집 4 연보》

명재유고 제34권
 제문(祭文)
사원(士元)에게 제사 지낼 때의 제문


유세차 숭정 기사년(1689, 숙종15), 초하루가 병인일인 6월 10일 을해일에 유봉(酉峰)에 병들어 칩거해 있는 이 사람은 사원이 땅속으로 들어간다는 말을 듣고도 가서 영결하지 못하게 되었기에, 동생 윤졸(尹拙)을 대신 보내어 영전에 술 한 잔을 올리면서 다음과 같이 글을 지어 고하는 바이다.
아아, 인재를 찾기가 어렵다는 탄식은 삼대(三代) 때부터 있어 왔는데, 더구나 지금과 같은 말세에 더욱이 어찌 쉽게 찾을 수 있겠는가. 그대와 같은 재주를 옛사람에게 비해 보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당세에서 찾아본다면 그 걸출함에 짝할 사람이 없다는 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다. 그대는 총명함이 매우 뛰어나고 사리에 대한 고찰이 철저하므로 그 역량을 확충해 가면 선현(先賢)의 학문을 충분히 계승할 수 있으며, 식견과 사려가 매우 깊은 데다 견지한 뜻이 강하고 바르므로 그 뜻을 행해 간다면 세도(世道)의 중임(重任)을 충분히 맡을 수 있는 사람이다. 나의 비루함으로는 그대를 따라갈 수 없지만 내 심지 확고부동하여 실로 평생 뜻을 같이할 것을 기약하였는데, 그대가 어찌 갑자기 이런 지경에 이름으로써 세인들이 일컬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대가 단지 공원로(孔原魯)나 추지완(鄒志完)이 이룬 정도를 행하였고 성대한 조정에 간언(諫言)한 사람을 죽였다는 오명을 끼치게 한 정도로만 인식되게 하였는가. 아아, 하늘이여. 도대체 이 세상에 그대를 태어나게 하고 그대에게 재능을 부여해 준 것은 과연 무슨 뜻이었단 말인가. 아아, 너무나 애통하다.
그 당시에 뇌성벽력이 쳐서 하룻밤 사이에 원통한 피가 조정의 뜰에 뿌려졌는데, 그때 그대의 일편단심은 귀신이 옆에 있었어도 드러낼 수 없는 상황이었고 비록 사람들이 대신 죽고자 해도 그렇게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대는 어려운 처지에 놓여서도 구차하게 모면하려 하지 않았고 죽음에 임해서도 임금을 속이지 않았으니, 그때 몸은 비록 죽어 갔지만 견지한 뜻만은 빼앗을 수 없었다. 그때 그대의 철석같이 단단한 심장과 충의로 뭉쳐진 간담은 밝은 태양과 빛을 겨룰 만큼 열렬한 것이었으니, 이와 같은 신하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후일 성상께서 비록 후회하였지만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날 수 없는 것이니, 어찌 되돌릴 수 있었겠는가. 아아, 그때 그 뜰 안에 가득 모여 있던 자들치고 그 누군들 사람의 마음이 없었겠는가마는, 임금의 잘못을 익숙하게 보면서도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으니, 저 비루한 사람들을 어찌 꾸짖을 것이 있겠는가. 우리 조정의 인후(仁厚)한 기풍이 하루아침에 끊어지고 병들게 되었다는 탄식이 어찌 곽임종(郭林宗)의 사사로운 통곡에 그칠 뿐이겠는가. 아아, 너무나 애통하다.
재앙이나 복이 바라지도 않았는데 자연스럽게 이르러 오는 경우는 모두 천명이라고 할 수 있기에, 군자는 원칙대로 행하면서 그 천명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바르면서도 과격하지 않고 곧으면서도 남의 단점을 들추는 일이 없이 논의는 항상 대체(大體)를 따르고 각박한 것을 중시하지 않으며 기개와 절조는 충후한 데에 바탕을 두어 일찍이 편벽된 적이 없는 그대로서는, 의당 형벌의 화를 당하지 않아야 할 것 같은데 결국에는 그렇게 되고 말았다. 그리고 듣건대 그대가 국문장에 나아갔을 때 또 그 태도가 차분하고 언사가 분명하여 듣는 사람들을 절실하게 만들고 뭔가를 느끼게 하는 논리만 있었고 저촉이 되거나 반발을 부르는 기운이 전혀 없었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이런 화를 면하지 못하였으니, 그렇다면 이것이 어찌 그대의 천명이 아니겠는가. 그 기이한 화를 당한 행적을 보면 그대의 선조(先祖)인 반남(潘南) 문정공(文正公)과 거의 같다. 문장(文章)이나 지행(志行)도 모두 최고의 수준이라고 할 만한데, 문정공의 경우에는 자손들이 번성하여 지금까지 우리 동방의 으뜸가는 가문이 되었다. 이를 보면 하늘이 선한 사람에게 복을 주는 것이 오래될수록 더욱 드러나는 법인데, 어찌하여 그대에게 있어서만은 유독 한 점의 혈육도 남겨 두지 않았단 말인가. 그 재앙은 같은데 받은 복이 같지 않으니, 공의 경우에는 명이 거듭 불행한 것이 또 어찌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아아, 너무나 애통하다.
너무나 불쌍한 우리 누님이 일찍 남편의 상을 당하고 그대를 얻어서 아들로 삼았는데, 그대는 어렸을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일가가 모두 칭송하고 부러워하였다. 게다가 그대는 또 묘령의 나이에 입신양명하여 누님을 영광스럽게 하고 그것으로 봉양하였으니, 이는 우리 백고모(伯姑母)에게 이혜중(李惠仲)이 있는 것과 같다 할 수 있다. 작년에 그대가 파주(坡州)의 관아에 있을 때 누님의 면전에서 만년의 복을 경하드렸는데, 그때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우리 누님이 노년에 또 이런 혹독한 고통으로 애간장이 녹아도 호소할 곳이 없게 될 줄을. 아아, 하늘이여. 어찌 차마 이렇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어리석은 나로서는 그대에게 기대한 것이 실로 많았다. 우리 선친이 남긴 글이 아직 정리되지 않은 채로 있는데, 내가 부족하고 보잘것없는 탓으로 선친께 욕을 끼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에, 그 문집을 일찍 세상에 내놓아서 취모멱자(吹毛覓疵)의 빌미가 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장차 세상의 분란이 다소 진정되기를 기다려 그대에게 그 문집의 편정(編訂)을 맡겨 간행함으로써 영구히 후세에 남길 작정이었다. 그리고 또 나는 항상 사람들이 참소를 당하는 재앙이 실로 후세에까지 유전되는 것을 애통하게 여겼다. 예컨대 율곡(栗谷)이 입산(入山)했다는 비방이나 우계(牛溪)가 선비를 죽였다는 무함 같은 것이 그것으로, 이는 단지 당시의 혼란 속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이런 일종의 사악한 설이 지금까지 전습되어 그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선친께서 당하신 일도 어찌 양현(兩賢)보다 심하지 않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한 줄기 정기(正氣)를 지닌 채 거센 물결 속의 지주(砥柱)처럼 우뚝하게 서서 명실의 구분을 매우 분명히 하고 공사(公私)를 확실히 분변함으로써 사류(士類)의 나아갈 방향을 인도하고 세상의 교화를 돕는 것을 내 오직 그대에게 의지하려고 했었는데, 이러한 계획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게 될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사문(斯文)의 대들보가 무너지는 바람에 다른 부류들이 은밀히 좋아하고 있으니, 우리 도(道)에 있어서의 재앙을 또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지난번에 내 조카 가교(可敎)를 잃었는데 지금 다시 그대를 잃고 말았으니, 노쇠함과 병으로 인해 죽을 날이 가까운 나로서는 이 실낱같은 목숨을 누구에게 의탁한단 말인가. 도와주는 사람 없는 맹인처럼 또한 죽기 전까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아아, 너무나 애통하다.
나는 처음에 그대가 고문을 당하던 당일에 죽지 않았다는 얘기를 듣고는 ‘하늘이 실로 그대를 살리려 하는구나.’라고 생각하였고, 또 피와 살이 터지고 문드러진 뒤에도 평소와 같이 정신이 의연하였다는 얘기를 듣고는 또 ‘마음이 가는 곳에 기운도 반드시 따라가는구나.’라고 생각하고, 결국 끝내는 무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면서 그대가 남쪽으로 오면 큰길에서 만나 악수할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여러 날 소식이 없다가 부음이 갑자기 이르러 오니, 이제는 그 모든 것이 끝났으니, 너무나 슬프고 애통할 뿐이다. 나라에 충성을 다하고자 하다가 도리어 죄를 더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자 하다가 그 봉양을 다 마치지 못하고 말았다. 또 평소에 지니고 있던 포부가 이제는 한결같이 모두 수포가 되고 말았으니, 그대 스스로 불행을 애도해 보건대 그대 또한 어찌 눈을 감을 수 있겠는가. 너무나 슬프고 애통하며 이제 모든 것이 끝나 버리고 말았다.
지금 그대의 대인(大人)께서 그대를 장차 거처하고 있는 곳의 옆 산기슭에 묻으려 하고 있는데, 인간 세상 부자간의 정리에서 오는 그 애통함을 어찌 차마 다시 말로 할 수 있겠는가. 재주가 없는 아들이 병사하였더라도 그 슬픔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인데, 더구나 그대처럼 상리(常理)에서 크게 벗어난 죽음을 당한 경우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나는 병든 몸으로 칩거하고 있는 중이라 사람 간의 도리를 거의 못하고 있기에, 달려가서 마주하고 한 번 통곡한 뒤에 그대의 관이 땅에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없는 형편이다. 그래서 홀로 궁벽한 산골짜기에서 울고만 있을 뿐이니, 나의 심정이 어떠하겠는가. 아아, 그대가 세상을 떠났다는 얘기를 들은 뒤로 정신이 하나도 없어 한 달이 지나도록 진정할 수가 없다. 오래 이 세상에 남아서 끝없는 세상의 변화를 눈으로 보기보다는 차라리 영원히 잠들어 깨어나고 싶지 않다. 곧 있으면 나도 저승으로 그대를 따라가지 않겠는가. 글로 내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없고 통곡으로도 내 슬픔을 다 풀 길이 없다. 밝고 밝은 영령은 부디 이런 마음을 알아주길 바란다. 아아, 너무나 슬프고 애통하다.


 

[주C-001]사원(士元) : 박태보(朴泰輔, 1654~1689)의 자이다. 호는 정재(定齋)이다. 박세당(朴世堂)의 아들인데, 숙부인 박세후(朴世垕)에게 입양되었다. 1689년(숙종15)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위를 반대하다가 심한 고문을 받고 진도로 유배 가던 도중에 노량진에서 죽었다.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풍계사(豐溪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주D-001]공원로(孔原魯)나 추지완(鄒志完) : 공원로는 송나라 인종 때의 신하인 공도보(孔道輔, 1086~1139)로, 원로는 그의 자인데, 1033년에 곽 황후(郭皇后)가 폐위되자, 황후를 경솔히 폐위시켜서는 안 된다고 간하다가 지방으로 좌천된 인물이다. 《宋史 卷297 孔道輔列傳》 추지완은 송나라 철종(哲宗) 때의 신하인 추호(鄒浩, 1060~1111)로, 지완은 그의 자인데, 철종과 휘종(徽宗) 2대에 걸쳐 유 황후(劉皇后)의 복위를 간하다가 받아들여지지 않고 지방으로 좌천된 인물이다. 《宋元學案 卷35 陳鄒諸儒學案 鄒浩》
[주D-002]하룻밤 …… 뿌려졌는데 : 숙종조에 인현왕후가 폐위될 때 박태보가 강력히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그것이 숙종의 노여움을 사서 궁궐 뜰에서 국문을 당하였다. 그 당시 박태보는 온갖 고문을 당하여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는데도 말투가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다고 한다. 《明齋遺稿 卷35 朴士元墓表》
[주D-003]후일 …… 후회하였지만 : 박태보가 세상을 떠나고 얼마 안 되어 숙종이 크게 후회하면서 관직의 회복을 명하였고, 그 뒤 1694년(숙종20)에 중궁을 복위시키고 박태보에게 정경(正卿)을 추증하고 사제(賜祭)와 정려(旌閭)를 하도록 조처하였다. 《明齋遺稿 卷35 朴士元墓表》
[주D-004]곽임종(郭林宗)의 사사로운 통곡 : 곽임종은 후한(後漢) 때의 명현(名賢)인 곽태(郭太, 128~169)로, 임종은 그의 자이다. 그는 학문과 덕망이 뛰어나 당대의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다. 영제(靈帝) 건녕(建寧) 원년(168)에 태부(太傅)인 진번(陳蕃)과 대장군 두무(竇武)가 환관의 전횡을 막기 위해 모살(謀殺)하려다가 실패한 일이 벌어진다. 그 일로 오히려 진번과 이응 등 100여 명이 피살되고 이어 700여 명이 유배당하거나 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이때 곽태가 이 소식을 듣고는 들에서 통곡하며 말하기를, “현인이 이제 사라졌으니 나라가 병들게 되었다는 시가 있는데, 이제 한나라도 망하게 되었구나.[人之云亡 邦國殄瘁 漢室亡矣]” 하였다 한다. 《後漢書 卷68 郭太列傳》
[주D-005]반남(潘南) 문정공(文正公) :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의 충신인 박상충(朴尙衷, 1332~1375)으로, 반남은 그의 호이다. 자는 성부(誠夫)이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당시 친명파(親明派)의 한 사람으로 친원파(親元派) 이인임(李仁任)을 주살할 것을 주장하여 정몽주(鄭夢周) 등과 함께 귀양 가다가 도중에 죽었다. 《壄隱逸稿 卷4 附錄 遺事》
[주D-006]그대에게 …… 말인가 : 박태보는 이후원(李厚源)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둘을 낳았는데 모두 요절하였고 딸 하나만 남았다. 그래서 형 박태유(朴泰維)의 작은아들인 박필모(朴弼謨)를 후사로 삼았다. 《明齋遺稿 卷35 朴士元墓表》
[주D-007]누님이 …… 삼았는데 : 박태보의 아버지는 박세당(朴世堂)이다. 박세당은 형 박세후(朴世垕)가 일찍 죽자 박태보를 그의 후사(後嗣)로 보냈는데, 이 박세후의 부인이자 박태보의 양어머니가 바로 명재의 누나이다.
[주D-008]묘령의 나이에 입신양명하여 : 박태보는 1675년(숙종1)에 22세의 나이로 사마시에 입격하여 생원이 되었고 1677년 24세 때 알성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明齋遺稿 卷35 朴士元墓表》
[주D-009]백고모(伯姑母)에게 …… 있다 : 이혜중은 이민적(李敏迪, 1625~1673)으로, 혜중은 그의 자이다. 이경여(李敬輿)의 아들로, 작은아버지 이정여(李正輿)에게 입양되었는데, 이정여의 부인이 바로 명재의 고모이다. 여기서는 명재의 고모가 이민적을 헌신적으로 키웠고 이민적도 효성이 지극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박태보도 명재의 누나에게 지극한 효자였다는 말이다.
[주D-010]작년에 …… 경하드렸는데 : 1688년(숙종14)에 박태보가 어머니 봉양을 이유로 파주 목사(坡州牧使)로 나가게 되고, 그해에 명재의 누나 환갑연을 파주 관아에서 치렀는데, 이를 말한 것이다. 《明齋遺稿 卷35 朴士元墓表》
[주D-011]노년에 …… 줄을 : 기사환국 때 박태보가 고문을 받고 유배 가다가 죽은 것을 말한다.
[주D-012]율곡(栗谷)이 입산(入山)했다는 비방 : 율곡 이이(李珥)가 젊은 시절에 잠시 금강산(金剛山)에 입산하여 선(禪)에 뜻을 둔 것을 두고 명재 당시에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라는 설이 유포된 것을 말한다.
[주D-013]우계(牛溪)가 …… 무함 : 기축옥사(己丑獄事) 때에 우계 성혼(成渾)이 최영경(崔永慶)을 억울하게 죽도록 했다는 경상도 유생들의 상소로 성혼의 관직이 추탈(追奪)되기도 한 것을 말한다.
[주D-014]오늘날 …… 일 : 윤선거가, 병자호란 때 강화의 성이 함락되자 남한산성으로 가서 병든 부친을 뵙고 죽겠다고 하고는 미복(微服) 차림으로 빠져나온 것을 두고 노론(老論)으로부터 공격받은 일을 말한다.
[주D-015]그대의 대인(大人) : 박세당을 말한다.
[주D-016]그대를 …… 있는데 : 박태보는 양주(楊州) 수락산(水落山) 서쪽 장자곡(長者谷)에 매장되었다.

 

명재유고 제35권
 묘표(墓表)
박사원(朴士元) 묘표 기묘년(1699, 숙종25)


오호라, 이곳은 반남(潘南) 박군 태보(朴君泰輔) 사원(士元)의 묘이다. 세상의 도가 땅에 떨어진 뒤로 참된 학문을 하는 선비가 드물고 참된 재주를 지닌 사람을 보기 어렵게 되었으니, 우리 사원과 같은 사람을 어떻게 다시 볼 수 있겠는가. 몇 년 만 더 살았더라면 군의 학문이 무거운 임무를 짊어지고서 심원한 경지에 이를 수 있었을 것이며, 군의 재주가 큰일을 맡아서도 현혹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늘이 군을 세상에 내려 주고서 다시 중도에서 죽게 하였으니, 도대체 무슨 뜻이란 말인가.
군은 갑오년(1654, 효종5)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출중하여 특정한 분야 없이 널리 공부하였고, 책을 보면 반드시 그 의미를 파고들어 아무리 은미한 말이나 심오한 뜻이 담겨 있다 하더라도 한 번만 보고도 분석해 내어 사람들의 의표(意表)를 찔렀다. 문장은 이치를 담는 데에 주력하여 한 자라도 구차하게 쓰지 않았으며 함축되고 노련하게 지었으니, 본디 가법(家法)이 있었던 것이다.
22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24세에 과거에 장원하였으며, 얼마 후 죄 아닌 죄로 선천(宣川)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에 풀려났다. 경신년(1680, 숙종6)에 비로소 옥당(玉堂)에 선발되어 호당(湖堂)에 들어가니, 당대 뛰어난 선비들이 아무도 앞서지 못하였다.
군은 사람됨이 과감하고 명쾌하여 일을 만나면 앞뒤 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밀고 나갔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더욱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군 또한 외직을 요청하여 이천 현감(伊川縣監)으로 5년 동안 나가 있었다. 오랜 뒤에 전랑(銓郞)을 거쳐 응교로 승진하였다가 또다시 부모 봉양을 이유로 파주 목사(坡州牧使)로 나갔다. 그 이듬해가 바로 기사년(1689, 숙종15)이다.
상이 중궁(中宮)을 바꾸려고 하자 군이 당시에 관직을 그만두고 집에 있다가 여러 사람과 함께 상소를 올려 기휘(忌諱)를 범하는 간언을 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마자 정국(庭鞫)을 설치하였는데, 군이 앞에 나서서 자신이 한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윽고 온갖 고문을 당하여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으나 말투는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으므로 듣는 사람들이 장하게 여기면서도 애처로워하였다. 진도(珍島)로 유배를 가다가 노량강(露梁江) 가에 이르러 세상을 마치니, 같은 해 5월 5일이었다.
예전에 노소재(盧蘇齋)강주천(康舟川)의 묘문(墓文)에 “하늘을 우러러 가슴을 치기를 천 번 치고 만 번 치도다.[仰天搥胸 千椎萬椎]”라는 말로 슬퍼하였는데, 그 글을 읽을 때마다 예의에 맞지 않는 표현이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 보니 그것이 지극한 슬픔에서 저도 모르게 나온 것임을 알겠다.
군이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상이 매우 후회를 하면서 관직의 회복을 명하였고, 6년이 지난 갑술년(1694, 숙종20)에 상이 잘못을 크게 깨달아 중궁을 복위시키고 군에게 정경(正卿)의 벼슬을 추증하고 사제(賜祭)와 정려(旌閭)의 조처를 내려 충혼(忠魂)을 위로하였다. 해와 달이 바뀜에 따라 은전이 구천에까지 미쳤으나 다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애통하고 애통한 일이다.
군은 식견과 사려가 깊고 원대하며, 논의가 강경하고 충후하였다. 옥당(玉堂)에 있을 때 문묘(文廟)의 배향(配享)과 출향(黜享)에 대해 논하면서,
“겸손한 덕을 숭상하고 신중한 도를 지켜서 임금의 치우친 생각을 바로잡는다.”
하였으니,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는 대의(大義)를 매우 잘 실천한 것이다.
일찍이 암행 어사로 나갔다가 돌아와 전라도 한 도에서 일어나는 흥판(興販)의 폐단에 대해 아뢰고, 경향(京鄕) 각지에서 이익의 추구에 매달리는 사태를 망국의 징조라고 말하기까지 하였으니, 또한 맹자가 의(義)와 이(利)를 분별한 것과 부합된다 하겠다. 나는 이 두 가지 일을 보고서 늘 진심으로 탄복하여 ‘이와 같은 식견과 주장에 견줄 만한 것은 세상에 별로 없다.’라고 생각하였다. 만약 군이 죽지 않았더라면 임금이 반드시 등용하여 도움을 받았을 텐데 지금 그렇게 되지 못하고 후세에 군을 아는 사람들에게 공원로(孔原魯)추지완(鄒志完)의 절개 정도로 인식되는 데에 그치고 말았으니, 아, 이는 군의 운명이요 시운(時運)의 불행이라 하겠다. 옛사람이 그 억울함을 하늘에 하소연하고 싶어도 그러지 못한 것이 어찌 악 무목(岳武穆) 한 사람뿐이었겠는가.
정묘년(1687, 숙종13)에 우리 선친이 무함을 당했을 때 여러 문인이 소장을 올려 변호하려고 하자 군이 이들을 위해 붓을 잡았는데, 사림에서 그 내용을 옳게 여겼다. 그 밖에 세도(世道)와 관계된 문장들이 매우 많았다. 유집(遺集) 약간 권이 세상에 전하므로 후세 사람들이 상고해 볼 수 있다.
군의 호는 정재(定齋)이고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선대는 고려 말에 문정공(文正公) 상충(尙衷)이 있고, 조선 중종 때에 사간(司諫)을 지낸 소(紹)가 있었는데, 모두 정학(正學)과 대절(大節)을 지키다 당시에 곤액을 당하였다. 군이 이 두 분을 닮았으나 불행의 정도는 그중에서도 제일 심하였다. 증조 휘 동선(東善)은 참찬을 지내고 정헌공(貞憲公)의 시호를 받았고, 조부 휘 정(炡)은 참판을 지내고 충숙공(忠肅公)의 시호를 받았다. 부친 세당(世堂)은 지금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있으며, 모친 의령 남씨(宜寧南氏)는 현령 일성(一星)의 따님이다. 판추공(判樞公)의 숙형(叔兄) 휘 세후(世垕)가 일찍 죽어 군을 후사로 삼았는데, 양가(養家)의 모친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바로 내 누님이다.
군의 효성은 지극한 성품에서 나와 양가의 모친을 모시면서 안색을 살피고 뜻에 순종하여 부드러운 얼굴로 봉양한 것이 비록 자기를 낳아 준 부모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을 정도였다. 예전에 우리 큰 고모가 현숙하고 명철하였으나 일찍 과부가 되어 이민적(李敏迪)을 양자로 들였는데 모자간에 사랑이 매우 깊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우리 고모를 보고 덕만 있고 명이 박하니 하늘이 훌륭한 아들로 보답한 것이라고 하였다. 일가친척들이 우리 누님을 칭찬할 때도 또한 그런 말을 하였다. 이는 우리 집안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외부 사람들은 더러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 누님은 늙어서 또 군을 저세상으로 먼저 떠나보내 그 복을 끝까지 누리지 못하였으니, 우리 고모보다 명이 더욱 박하다 하겠다. 너무도 슬픈 일이다.
군은 상공(相公) 이후원(李厚源)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둘을 낳았으나 모두 요절하였고, 딸 하나만 남았다. 판추공이 또다시 군의 형인 지평 태유(泰維)의 작은아들 필모(弼謨)를 군의 후사로 삼고, 또 군의 묘표를 세우고자 나에게 편지를 보내,
“그 애가 비록 짧은 세상을 살았지만 그래도 후세에 전할 만한 행적이 없지 않으니, 부디 한마디 적어 주어서 끝내 잊히지 않게 해 주게나.”
하였고, 군의 벗 남학명(南鶴鳴)이 또 자신이 지은 행장 한 통을 가지고 와서 보여 주었다. 나는 늙고 혼매하여 문장이 먼 미래까지 전해지기에는 부족하다. 하지만, 군이 세운 업적이 어찌 사람들이 말을 하고 안 하고에 따라 드러나거나 묻히는 그런 것이겠는가. 다만, 그 대강을 모아 위와 같이 서술하여 후세 사람들에게 이 사람의 묘소임을 알게 할 뿐이다. 아, 슬프도다.


 

[주D-001]죄 아닌 …… 유배되었다가 : 1677년(숙종3) 10월에 증광 별시 고시관으로 들어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의 ‘미진불여악석(美疢不如惡石)’이라는 구절을 시제(試題)로 낸 일로 논척을 받고 선천에 유배된 것을 가리킨다.
[주D-002]노소재(盧蘇齋) : 소재는 노수신(盧守愼)의 호이다.
[주D-003]강주천(康舟川) : 주천은 강유선(康惟善)의 호이다.
[주D-004]공원로(孔原魯) : 원로는 공도보(孔道輔:985~1039)의 자이다. 그는 송나라 인종(仁宗) 때 인물로 명도(明道) 2년(1033)에 곽황후(郭皇后)가 폐위되자 “황후는 천하의 어머니이므로 경솔히 폐위시켜서는 안 된다.”고 강력히 간하다가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宋史 卷297 孔道輔列傳》
[주D-005]추지완(鄒志完) : 지완은 추호(鄒浩:1060~1111)의 자이다. 그는 송나라 철종(哲宗) 때 인물로 철종과 휘종(徽宗) 2대에 걸쳐 유황후(劉皇后)의 복위를 간하다가 두 번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고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宋元學案 卷35 陳鄒諸儒學案鄒浩》
[주D-006]옛사람이 …… 사람뿐이었겠는가 : 옛사람은 남송의 학자 여조겸(呂祖謙:1137~1181)을 가리키고, 악무목은 남송의 충신 악비(岳飛:1103~1142)로 무목(武穆)은 시호이다. 고종 때에 악비가 금나라에 대한 북벌을 주장하다 화친을 주장하는 진회(秦檜)의 모함에 걸려 죽은 사건을 두고서 여조겸이 “매번 악 무목의 죽음을 생각할 때마다 곧장 하늘에 호소하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하였다.”고 한 데서 나온 말로 여기서는 박태보(朴泰輔)를 악비에 견준 것이다. 《葛庵集 卷21 書東巖李公潑南溪李公洁事實記後, 韓國文集叢刊 128輯》
[주D-007]유집(遺集) …… 전하므로 : 박태보(朴泰輔)의 《정재집(定齋集)》은 원집 9권과 별집 5권이 7책으로 편집되었으며, 부친 박세당(朴世堂)에 의해 1702년(숙종28) 양주(楊州)에서 목판으로 간행되었다. 이 묘표는 문집이 간행되기 3년 전에 쓴 것이다.

 

명재유고 제41권
 신도비명(神道碑銘)
이조 판서 박공(朴公) 신도비명


공의 휘는 태상(泰尙), 자는 사행(士行), 성은 박씨이다. 그 선조는 나주(羅州) 반남현(潘南縣) 사람이다. 고려 말에 휘(諱) 상충(尙衷)이란 분이 있었는데 우문관 직제학(右文館直提學)으로 문덕(文德)과 충절(忠節)이 있어 세간에서 반남 선생(潘南先生)이라고 일컬었으며 뒤에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증조 휘 동선(東善)은 의정부 좌참찬으로 영의정에 증직되었고 시호는 정헌(貞憲)이다. 조부 휘 정(炡)은 정사 공신(靖社功臣)에 책훈되고 이조 참판으로 금주군(錦洲君)에 봉해지고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으며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고(考) 휘 세견(世堅)은 승정원 우승지로서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비(妣) 정부인(貞夫人) 해주 최씨(海州崔氏)는 판관 곤(滾)의 따님이고 대사헌 유원(有源)의 손녀이다.
공은 숭정 9년 병자년(1636, 인조14) 12월 5일에 태어났다. 어릴 때 병이 많아 10세가 되어서야 책을 읽었는데, 이해하고 깨우침이 남보다 월등하여 스승을 번거롭게 할 것도 없이 학문이 날로 진보되었다. 갑오년(1654, 효종5)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갑진년(1664, 현종5)에 모친상을 당했는데 예를 극진히 하여 상을 치러 향당(鄕黨)의 칭찬을 받았다. 기유년(1669)에 동몽교관(童蒙敎官)에 보임되었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신해년(1671)에 정시(庭試)에 장원으로 뽑혔는데 이름을 열어 보고는 시험을 주관한 여러 공들이 인재를 얻은 것을 서로 축하하였다. 규례대로 성균관 전적에 제수되었다가 이틀 뒤에 병조 좌랑에 제수되었다. 아직 창방(唱榜)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제수된 것은 세상에 드문 일이었다. 공은 갑자기 승진된 것을 혐의하여 나아가지 않았다.
임자년(1672, 현종13) 여름에 다시 전적, 병조 좌랑을 거쳐 정언으로 옮겨졌다. 가을에 호서 지방에 고시(考試)하러 갔는데, 과장을 여는 날에 화약고(火藥庫)에 불이 났다고 급히 외치는 자가 있었다. 뜰에 가득한 사람들이 놀라 술렁거리고 함께 자리하고 있던 자들도 일어나 살피고자 하니, 공이 저지하며 말하기를, “이는 과장을 어지럽히려고 일을 벌인 것뿐이다.” 하였다. 이윽고 제생들이 우르르 일어나 문을 열어 불을 피하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이에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만약 불이 염초(焰硝)에 붙었다면 사람들이 이미 불길 속에 있을 것인데 피할 수 있겠는가?” 하니, 제생들이 서로 돌아보며 거짓임을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 이후 천천히 와언(訛言)을 퍼뜨린 자를 찾아내어 죄를 주었다. 다시 지평에 제수되었다. 궁궐 안의 사람 중에 도사(禱祀)를 행하는 자가 있었는데 공이 법대로 잡아 다스리니 부중(府中)이 엄숙해졌다.
계축년(1673) 봄에 다시 병조 좌랑을 거쳐 정언이 되었다. 한번은 임금 앞에서 일을 논할 때에 말이 몹시 강직하였으므로 현묘(顯廟)가 매우 노하였는데, 공은 오히려 강하게 간쟁하였다. 영상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근래 대신들은 한 번 온당치 않다는 하교를 받들면 대번에 인피하고 굳게 간쟁하지 못하는데 오늘 박태상은 참으로 간신(諫臣)의 체모를 얻었으니 의당 너그러이 용납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의 노여움이 마침내 풀렸다. 정 상공이 물러나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성상께서 거듭 진노하셨는데도 사기(辭氣)가 조금도 누그러들지 않았으니 박 정언은 참으로 두려워할 만한 자이다.” 하였다.
체직되어 병조 좌랑이 되었다가 지평으로 옮겼다. 재이(災異)로 인해 동료와 함께 차자를 올렸는데 일곱 가지 일로 진계(陳戒)하였다. 가을에 홍문관에 뽑혀 들어가 부수찬이 되고 교리에 올랐다. 이어 북평사(北評事)로 나갔는데, 군사와 백성에게 피해를 주는 변방 고을의 고질적인 폐습을 방백에게 보고하여 개정하였다.
갑인년(1674) 가을에 조정에 들어가 이조 좌랑에 제수되고 정랑으로 승진되었다. 을묘년(1675, 숙종1) 봄에 호남 암행 어사가 되었다가 돌아와 수찬이 되었다. 여름에 다시 부수찬에 제수되었다. 상소하여 득실을 논하였는데 당시의 기휘(忌諱)에 저촉되어 면직되었다. 가을에 사예(司藝)에 오르고 상주 목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병진년(1676, 숙종2) 여름에 또 암행 어사로서 관북(關北)을 염찰(廉察)하였다. 가을에 홍주 목사(洪州牧使)에 제수되어 정치를 평이하게 하고 백성들을 가까이하여 민심을 소통시키기에 힘썼다. 예전부터 바닷가의 주현(州縣)에서는 경계 내에서 세선(稅船)이 전복될 경우 으레 그 쌀을 건져 내어 민가에 나누어 주고 가을에 상환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관원들이 소홀히 하고 태만하여 제때에 일을 시행하지 않아서 쌀이 물에 빠진 지 며칠이 지난 뒤에 건져 내는 바람에 부패하여 먹을 수 없게 만드니, 백성들이 억울함과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였다. 공이 고을에 부임한 다음 해에 익산(益山)의 세선이 고을 경계에서 전복되었다. 공은 보고를 듣고 즉시 100여 리를 달려가 해안에 이르렀는데 해가 이미 저문 뒤였다. 달빛에 의지하여 돛을 올리고 바닷길로 또 20여 리를 가서 배가 전복된 곳에 다다랐다. 수부(水夫)에게 명하여 뱃머리를 여러 방향으로 나누고 밧줄을 묶어 등에 지게 하여 침몰된 배를 끌어냈다. 배를 끌어내고 보니 쌀가마가 다 온전하였다. 이를 옮겨 실어 해안에 가져다가 볕에 말리니 쌀이 그리 많이 손상되지 않았다. 마침 흉년 든 해였으므로 백성들이 오직 뒤늦을까 염려하며 앞다투어 가져갔으니, 이로 인해 소생한 자들이 또한 매우 많았다.
정사년(1677) 가을에 어버이가 연로하다는 이유로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무오년(1678)에 군자감 정에 제수되고, 기미년(1679)에 종부시 정으로 옮겼다가 성균관 사예, 예빈시 정, 사복시 정에 전보되었다. 겨울에 중시(重試)에 뽑혀 통정대부에 오르고 동부승지에 제수되었고 전보되어 좌승지에 이르렀다.
경신년(1680) 봄에 상이 시정(時政)을 개기(改紀)할 때 이원정(李元禎)이 이조 판서로서 제일 먼저 죄를 입었는데, 비망기(備忘記)에 “태아(太阿)를 거꾸로 쥐었다.”라는 말이 있었다. 정원의 동료가 삭제하여 고치기를 청하려고 하자 공이 허락하여 연명으로 아뢰었다. 상이 전에 김상 수항(金相壽恒)을 무함했던 대신(臺臣)을 나국(拿鞫)하고자 하니, 공이 나아가 아뢰기를, “저들이 참으로 그 죄를 면할 수 없습니다만, 당시 성상의 하교가 준엄하신지라 저들이 오직 상의 뜻에 영합함으로써 사적인 뜻을 이루고자 한 것뿐이니, 지금 다시 탐문할 단서가 없습니다. 그리고 대신을 나국하는 것은 결국에 후일의 폐단을 야기하게 될 것입니다.” 하고 이어 말하기를, “임금도 한때의 희로(喜怒)에 좌우되어 당장의 기분만 풀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가납하였다. 그러고 물러났는데 다른 한편에서 논의하는 자들이, 이원정을 위해 복역(覆逆)하는 계사를 올리는 데에 참여한 것이 부당하였고 상공 김수항을 무함한 무리들은 용서해서는 안 된다고 하여 끊임없이 비난하였다.
여름에 이조 참의에 제수되었다. 당시 정상 재숭(鄭相載嵩)이 전장(銓長)이었는데 하루는 묻기를, “우리들이 정사를 새롭게 시작하는 때에 물정을 잘 몰라서 주의(注擬)하는 사이에 요직에 있는 사람들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많았으니 장차 어찌해야 하는가?” 하니, 공이 말하기를, “다만 공평한 마음으로 공정하게 하면 됩니다. 사람들이 잘하지 못한다고 하면 물러나면 그만입니다. 그 나머지 요령을 요하는 일은 본래 아는 자가 있어 알아서 처리할 것입니다. 어찌 꼭 하지 못하는 바를 억지로 하여 다른 사람의 뜻에 부합하고자 하겠습니까.” 하자, 정공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내 뜻도 그와 같다.” 하였다. 이로부터 훈척의 집안에서 모두 공에 대해 불만을 품었다.
가을에 체직되어 형조 참의가 되었다가 병조 참지와 병조 참의로 전보되었다. 겨울에 인경왕비(仁敬王妃)가 훙(薨)하였는데, 춘조(春曹 예조)에 참의 자리가 비어 있었으므로 영상 김수항이 공에게 임시로 춘조의 일을 맡게 하였다. 당시 상은 창경궁에 있었고 빈전(殯殿)은 경덕궁(慶德宮)에 있었다. 상이 아직 두창(痘瘡)을 치르지 않았는데 상사(喪事)가 난 빌미가 두창이었으므로 두 궁이 서로 소통할 수 없었다. 이에 예제를 변통할 것이 많았는데, 공이 합당하게 조처하여 정리와 형식에 부족한 점이 없었고 일을 잘 처리하였으므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영상 김수항이 더욱 공경하고 감복하여 말하기를, “평소 박 영공(朴令公)이 문아(文雅)에 우수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 재주와 식견이 이 정도인 줄은 헤아리지 못하였다.” 하였다. 이윽고 예조 참의에 제수되고 곧이어 대사간으로 옮겼다. 병으로 체직되었다가 다시 예조로 돌아왔다.
신유년(1681, 숙종7) 봄에 다시 이조 참의에 제수되었는데, 공은 전형(銓衡)의 자리가 달갑지 않아서 다섯 번 사직 상소를 올리고 두 번 소패(召牌)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상이 끝내 허락하지 않아 마지못해 직임에 나아가서는 조급히 승진하려는 풍조를 힘써 억제하여 사로(仕路)를 맑게 하였다. 공이 처음 전조에 들어올 때 당시 권세 있는 자가 공보다 먼저 인척을 끌어다 그 자리에 앉히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의논할 때 또 인척의 자제를 추천하여 먼저 전랑(銓郞)에 의망하니, 공이 이를 막았다. 그 사람이 당시 언관의 자리에 있었는데 마침내 경신년(1680)에 있었던 정원의 일을 거론하여 눈치를 살피며 머뭇거렸다는 내용으로 공을 탄핵하였다. 상이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간파하여 윤허하지 않았고 또 공이 사직 상소를 올린 데 대해 너그러운 비답을 내려 안심시켰다. 공은 강력히 사직하여 마침내 체직되었다.
경신년 사건이 일어난 초기에는, 가령 눈치를 살피는 자가 그러한 상황을 만났다면 바로 기회를 틈타 사세에 투합할 적기였는데, 공이 진달한 바는 사리를 곧이곧대로 진달하고 시비를 분명히 밝힌 것이었다. 위로 임금의 덕을 바로잡기를 명백하고 화평하게 하였으며 당론이 쟁탈하는 사이에서 편중된 바가 없었으니, 공처럼 성품이 단아하고 바르면서 지식과 도량이 있지 않다면 이처럼 처리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런데 사심을 가지고 헐뜯고 비방하기를 이렇게까지 하니 공의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공은 다만 말하기를, “당시 성상의 진노가 지엄해서 입시한 여러 신하들이 모두 두려워 떨었고 상 앞에 있는 기주관(記注官)도 누락함을 면치 못하여 전하는 소문이 사실과 어긋났으니, 이렇게 논박하는 의논이 나온 것도 괴이쩍을 것 없다.” 하면서 태연하여 개의치 않았다. 여름에 다시 호조 참의가 되었다. 겨울에 인천 부사로 나가게 되었는데 친병(親病)으로 인해 부임하지 않았다.
임술년(1682, 숙종8)에 예조 참의, 판결사(判決事), 대사성 겸 승문원부제조를 역임하였다. 겨울에 대사간에 제수되었는데 병으로 체차되었다. 계해년(1683) 봄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을축년(1685)에 삼년상을 마치고 형조 참의에 제수되었다가 병조로 전보되었다. 상이 국자감의 장관은 많은 선비들의 모범이므로 그 선발을 신중히 하고자 하여 대신에게 선택하여 의망하도록 특명을 내리자 대신이 공을 선택하여 올렸다. 이에 대사성에 다시 제수되었다.
여름에 평안도 관찰사에 제수되어 하직 인사를 하는 날에 상이 인견하여 이르기를, “경이 오래도록 근시(近侍)의 자리에 있었으므로 경의 마음가짐이 공평함을 잘 알고 있으니, 힘쓰라.” 하였다. 대개 공이 3년 사이에 열 번 승정원에 들어갔는데 이치에 근거하고 법을 지켜 치밀하고 간절하게 아뢰었고, 강연(講筵)에 출입하여 크게 보익한 것이 많았다. 이에 상이 그 현명함을 알았으므로 이와 같이 특별히 하교하신 것이었다. 관서 지방은 중국을 왕래하는 길이므로 으레 금을 내어 상인에게 빌려 주고 이문을 취하여 그것을 공용(公用)에 충당하였다. 관리가 날마다 문서를 끼고 계산하는 것이 이득과 재물이 불어나고 줄어들고 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공이 항상 이마를 찡그리며 말하기를, “어찌 사대부로서 이런 거간꾼 노릇이나 하겠는가.” 하였다.
겨울에 북사(北使)가 와서 변방 백성들이 국경을 넘어오는 것에 대해 힐문하였으므로 조정이 부신(符信)도 없이 공을 불러 조사하여 처벌하고자 하자 공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번신(藩臣)을 종이쪽지 하나로 부르니, 만약 변고가 있다면 어찌 낭패될 염려가 없겠는가.” 하고 즉시 경계에 나아가 주둔하고서 감히 가볍게 관차(官次)를 떠날 수 없다는 뜻으로 치계하였다. 이에 조정이 비로소 선전관을 보내 부신을 가지고 가서 불러오게 하였다. 부신을 맞추어 보고 나서 공이 차고 있는 것을 거두고자 하니 공이 손을 들어 저지하며 말하기를, “혹 나를 체포하라는 교지(敎旨)가 있었는가. 그렇지 않다면 나는 스스로 번신의 자격으로 부름에 나아가야 하는데, 이 부신을 어떻게 얻을 수 있겠는가.” 하니, 부신을 가진 자가 주저하며 물러났다. 그가 일에 임하여 자세히 살피는 것이 이와 같았다. 감영을 떠나는 날에 사인(士人)과 부녀자들이 달려 나와 수레를 에워싸고 말하기를, “우리 부모를 잃었다.” 하였고, 심지어 성곽에 올라가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며 우는 이들도 있었다. 공이 부임한 지 겨우 5개월인데 은혜와 사랑으로 인심을 감복시킨 것이 이와 같았다. 북사가 돌아가자 즉시 이조 참판에 제수되었고 얼마 안 되어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병인년(1686, 숙종12)과 정묘년(1687) 두 해에 걸쳐 대사성 겸 비변사유사당상, 동지경연사, 이조 참판, 호조 참판, 대사헌, 도승지 겸 예문관제학, 동지성균관사, 공조 참판, 예조 참판, 병조 참판을 역임하였다. 공이 조정에 있는 것을 꺼리는 자가 있어 함경 관찰사로 나가게 되었다. 북쪽 지방이 몇 해 동안 흉황이 들어 많은 백성들이 떠돌아다니며 생업을 잃었는데, 공이 부임하여 부세를 감면해 주고 이로운 것은 늘리고 해로운 것은 제거하였다. 이 때문에 곤궁에 빠진 자들을 구휼하는 혜택이 잘 시행되었다.
무진년(1688) 가을에 또 흉년이 들자 공은 백성들이 장차 크게 곤궁해질 것을 알고 미리 주군에 경계를 내려 물자를 아끼고 곡식을 저축하도록 하였다. 또 열읍의 창고에 저축된 곡식 및 백성들의 호수(戶數)를 계산한 다음 인구(人口)를 세어 보리가 익을 때까지 식량을 비축해 두되, 그 부족한 부분은 영남 근방의 해안과 관서 근방의 산촌 고을의 창고 곡식을 옮겨 주기를 청하여 3만여 석을 얻어 제때 고르게 배급하여 먹여 주니 사람들이 흉년을 잊고 지냈다.
기사년(1689, 숙종15) 여름에 임기를 채우고 들어와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가 형조 참판으로 옮겼다. 가을에 호조에 전보되었다. 겨울에 조위사(弔慰使)에 충원되어 연경에 갔는데, 행장이 초라하자 상서(象胥 역관(譯官)) 무리들이 서로 말하기를, “재상의 마음을 우리들이 모두 아는데 공처럼 청렴하고 검약한 분은 본 적이 없다.” 하였다.
경오년(1690) 봄에 복명하고 재차 예조 참판이 되었다. 공은 기사년(1689)에 조정에 돌아온 뒤로 벼슬살이하는 것이 즐겁지 않아 매양 제수될 때마다 번번이 병을 핑계로 사면하였다. 가을에 강릉 부사(江陵府使)로 나갔다. 전에 이 관부를 맡은 자들이 대부분 한가롭게 지내면서 정사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적체된 송사가 혹 수십 년이 된 것도 있었는데, 공이 부지런히 판결하여 문서가 비게 되었다. 경내에는 세도 있는 호족들의 전장(田莊)이 많이 있어서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었는데 공이 모조리 정리하여 다스리니 간사하고 포악한 자가 자취를 감추고 힘없고 약한 자들이 살 곳을 얻게 되어 고을 전체가 잘 다스려졌다. 한가한 날에는 매화를 키우고 대나무를 옮겨 심고는 그 안에서 시를 읊으며 세상을 잊은 듯이 유유자적하였다. 3년 만에 돌아가게 되니 고을 사람들이 비석을 세워 칭송하였다.
돌아온 뒤에 다시 도성에 들어가지 않고 선조의 묘 아래 집을 지었다. 이곳에서 계부(季父)인 서계공(西溪公 박세당(朴世堂))과 조석으로 배회하며 서로 종유하는 것으로 여생을 보낼 계획을 세웠다.
계유년(1693)에 황해도 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갑술년(1694) 여름에 상이 또 권세 부리는 자를 다 내치고 옛 신하를 불러들이면서 공에게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를 특별히 제수하였다. 당시 옛 신하는 대부분 지방에 있었고 조정에는 거의 없었다. 상이, 공이 왔는지를 하루에 서너 번 하문하므로 공이 어쩔 수 없이 도성에 들어와 숙배하였다.
얼마 안 되어 승진하여 형조판서 겸 동지경연성균관사 홍문관제학 세자우빈객에 제수되었고 곧이어 홍문관과 예문관 양관의 대제학에 천망, 제수되어 중궁 복위 옥책문(中宮復位玉冊文)을 지어 올렸다. 중궁을 복위하려던 처음에 상신(相臣)은 지방에 있었고 예조에 장관이 없었는데 갑자기 명이 내렸으므로 예의(禮儀)가 많이 허술해질 상황이었다. 이에 병조 판서 서공 문중(徐公文重)이 대신 및 종백(宗伯 예조 판서)이 조정에 들어온 다음 의절(儀節)을 강정(講定)해서 대례(大禮)를 중히 하기를 청하고자 하여 공을 만나 그 일을 의논하였는데, 정원에서 이미 먼저 이 뜻을 아뢰었다. 이때 수상인 남공 구만(南公九萬)과 서공을 무함하고자 하는 자가 있어 유생 박상경(朴尙絅)을 사주하여 상소를 올리게 하였다. 그리고 대관 정호(鄭澔)와 더불어 서로 연달아 두 상공이 성명(成命)을 막고자 했다고 논척하였다. 이어 공까지 아울러 논박하였는데 말이 지극히 참혹하였다. 공이 도성을 나와 상소를 올리고 대죄하니, 상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려 용서해 주고 이어 예조 판서에 제수하였다. 책례할 기일이 임박하였으므로 돈유하여 돌아오기를 재촉하니 공이 어쩔 수 없이 직임을 수행하였다.
가을에 우참찬 겸 동지경연춘추관사에 제수되었다. 겨울에 좌참찬, 예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전보되었다. 을해년(1695, 숙종21) 봄에 왕세자의 입학례(入學禮)가 있었는데 공이 대제학으로서 참여하였으니 이는 옛날 박사(博士)의 직임에 해당되었다. 세자가 또 관례(冠禮)를 행하였는데 공은 종백으로서 찬관(贊冠)이 되었다. 또 존명(尊名)을 정하여 올렸으며, 성대한 예식을 주선하니 진실로 여망(輿望)을 흡족하게 하고 관리들의 우러러보는 바가 되었다.
여름에 대사헌을 거쳐 다시 좌참찬이 되었다. 당시 죄인 명부에 올라 있는 자가 매우 많았으므로 대신(大臣)이 조당(朝堂)에 모여 의논하고 죄를 풀어 주기를 청하였는데 대신(臺臣)이 따르지 않고 모두 인피하였으므로 의논이 성사되지 못하였다. 이사명(李師命)과 이상(李翔)을 복관(復官)시키는 문제에 대해서는 부제학(副提學) 오도일(吳道一)이 이사명을 용서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수찬 민진형(閔震炯)이 이상을 신원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하여, 모두 대간의 반대에 부딪쳤다. 공이 구언(求言)으로 인하여 상소를 올리기를, “대신(大臣)과 대신(臺臣)의 논의가 분산되어 있으니 조속히 조처를 내리시어 생각과 뜻이 서로 믿음을 주고 가부간에 서로 이해하여 조화롭게 진정되도록 노력함으로써 인심을 감복시키소서. 이사명과 이상의 일은 애당초 명백하게 분변할 단서가 없었는데 지레 먼저 복관시켰으니 어찌 시비의 의논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이러한 일들에 대해 명백한 하교를 내리신 적이 없습니다. 상벌이 얼마나 큰 권한인데 스스로 총람하지 않으시고 다만 관습만 따라 행하십니까. 이러고서도 어찌 무너진 기강을 떨쳐 세우고 세인(世人)들이 권려(勸勵)할 바를 알게 되기를 바라겠습니까.” 하니, 상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렸는데, 장황한 하교 가운데, “스스로 총람하지 않고 다만 관습만 따라 행한다는 말은 실로 나의 병통에 적중하였다.”라고 하고, 두 사람을 복관시키라는 명령을 모두 환수하였다.
가을에 예조 판서로 옮겼고 상의 약시중을 든 공로로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랐다. 공조 판서를 거쳐 또다시 예조 판서가 되었다. 병자년(1696, 숙종22) 봄에 이조 판서에 제수되어서는 선발하고 주의(注擬)하는 일을 한결같이 공정하게 하여 청탁이 행해지지 않았다. 이해에 크게 기근이 들어 서울에 모여든 유민(流民)들이 무려 수만 명이었다. 조정에서 의논하여, 도성의 동쪽과 서쪽 밖에 진휼하는 장소를 마련하여 나누어 거처하게 하되 재신을 택하여 관장하게 하였는데, 공이 도성 동쪽을 주관하게 되었다. 공은 날마다 그곳에 가서 직접 나누어 구휼하는 것을 점검하였는데 슬퍼하고 불쌍히 여기는 것이 진심에서 우러나왔다. 굶주린 백성들이 공이 오는 것을 보면 모두 앞을 둘러싸고 손을 들어 말하기를, “공이 불쌍히 여겨 돌보아 주심이 이와 같으니 죽더라도 여한이 없습니다.” 하였다.
공이 계해년(1683)에 부친상을 당하고부터 이미 병을 얻었고 뒤에 사명(使命)을 받들어 멀리 나가 복역하면서 또 손상을 입게 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더욱 심하게 고생하여 심신이 몹시 지치게 되었다. 집안 식구가 걱정하여 조금이라도 몸을 조섭할 생각을 하기를 권하자 공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내 병이 위태로운 것을 어찌 내가 모르겠는가. 다만 나라가 불행하여 누차 변고를 만났는데 오늘날 조정 신하들은 물러나 보신할 것만 생각한다. 내가 금년에 지위가 여기에 이르렀으니 힘이 다 빠지도록 직무를 수행하다가 죽어도 오히려 이것이 내 분수일 뿐이다.” 하였다. 갑자기 감기 기운이 있다가 갈수록 피곤하고 기운이 없어졌다. 여러 번 상소를 올려 전조(銓曹)의 직임을 체직시켜 달라고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공은 병중에도 소를 올려 진정(賑政)을 논하였으니, 꿈속 말처럼 은근히 말하는 것이 모두 나라를 우려하고 시대를 근심하는 것이었다.
상이 궁궐 안의 사람을 보내 병문안을 하고 수라간의 귀한 음식을 내렸다. 대신이 입대(入對)하여 전조의 업무가 비게 되었다는 이유로 공의 직임을 우선 해임하기를 청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난번에 사람을 보내 병을 살피게 하였는데 조석을 버티기 어렵다고 하였다. 지금 제법 여러 날이 지났으니 차도가 있지 않겠는가?” 하였다. 대신이 이미 위독하다고 아뢰자 상이 근심스럽게 여겼으니, 몹시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여기에 이르렀다. 체직되어 형조 판서로 옮겼다가 또 체직되어 부호군에 붙여졌다.
마침내 5월 7일에 건덕방(建德坊) 집의 정침(正寢)에서 임종하였으니, 연세가 61세였다. 부고가 올라오자 이틀간 조회를 폐하고 조제(弔祭)와 부의(賻儀)를 모두 의례대로 하였다. 유사를 각별히 신칙하여 상장(喪葬)을 돕되 특별히 넉넉하고 후하게 하도록 하며 이르기를, “그렇게 해서 몹시 애도하며 진심으로 보살피는 나의 뜻을 표하라.” 하였다. 왕세자도 궁관(宮官)을 보내 조문하고 관(棺) 1구(具)를 택하여 내렸다. 위로 관원에서 아래로 서인, 노복에 이르기까지 탄식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해 7월 6일에 양주(楊州) 수락산(水落山) 묘좌(卯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으니 선영(先塋)을 따른 것이다.
공은 위인이 단정하고 순수하며 차분하고 조용하였으며 타고난 자질이 도에 가까웠다. 용의(容儀)는 단아하고 엄정하였으며 말에 거칠고 속된 기가 없었다. 효도와 우애의 행실은 더욱 독실하고 지극하였다. 승지공이 만년에 풍질(風疾)을 앓아 침상에 누워 지낸 것이 10년이었는데, 공은 근무하러 출사할 때 이외에는 곁을 떠난 적이 없이 간호하며 응대하기를 시종 한결같이 하였으며, 병이 조금이라도 도지면 하룻밤 사이에 안색이 금방 까맣게 변했다. 자(字)가 사수(士受)인 아우 좌랑공 태소(泰素)와는 서로 지기(知己)가 되어 화락하게 매우 잘 지냈는데 그가 죽게 되자 애통해하며 말하기를, “내 몸 반쪽이 떠났으니 내가 어떻게 살꼬.” 하였다. 그의 자식을 친자식같이 돌보며 만날 때마다 눈물을 머금었다.
외가가 역병을 만나 상사(喪事)가 겹쳐 일어나니 친척이나 친구도 감히 돌아보는 이가 없었는데, 공은 치료해 주고 장사 치르는 일까지 마음을 다해 구호하였다. 겨우 동복(僮僕) 몇 사람과 함께 한 달 남짓한 사이에 다섯 번의 상사를 치러 내니 사람들이 모두 하기 어려운 일이라 여기고 그 의리에 감복하였다.
본성이 준엄하고 결백하였으며 진취하는 데에 더욱 신중을 기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사람의 악덕 중에 조급증만 한 것이 없다. 온갖 죄와 허물이 모두 이로부터 나온다.” 하여 앞다투어 달려 나가는 습성이 있는 사람을 보면 자신을 더럽힐 것처럼 여기며 피할 뿐만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교유가 매우 단출하였다.
공은 관직에서 물러나 소제하고 조용히 앉아 오직 서사(書史)로써 스스로 즐겼다. 질박하고 평담하다고 기롱하는 자가 있었는데 혹자가 이르기를, “질박하고 평담한 것도 저절로 되기 어렵다.” 하였다. 집이 평소 매우 가난하여 벼슬하기 전에는 향촌에 살면서 몸소 비천한 일을 하기도 하였다. 이는 보통 사람들은 감내하지 못할 일인데 태연하게 처신하였으며 경재(卿宰)의 귀한 신분이 되어서도 변하지 않았다. 졸할 때에는 독에 남은 곡식이 없었고 농에 여벌 옷이 없었다. 염하고 장사 지내는 데에 필요한 물품도 부의(賻儀)가 들어온 뒤에 마련하였으니, 조문하는 사람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공은 조정에 들어와서 청요직(淸要職)과 화현직(華顯職)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뭇사람들의 중망이 쏠렸지만 공은 번번이 공손하게 물러나 사양하여 득실(得失)이나 총욕(寵辱)을 마음에 담아 둔 적이 없었다. 수십 년 이래 당론(黨論)이 갈수록 심해지고 서로 배척하는 것이 풍조를 이루었다. 공은 분의를 생각하고 정도를 지켜 굽히거나 흔들린 적이 없었다. 매양 일을 논할 때마다 반드시 임금의 덕을 규계하고 간언함으로써 잘못을 바로잡는 것을 우선하니 당시의 청의(淸議)가 의지하여 중히 여겼다. 공은 기국과 도량이 바르고 단정하였으며 말하고 웃는 것도 절도가 있었는데 마음속은 화락하고 평이하여 경계를 두지 않았다. 후배들을 가르치고 이끌어 주기를 좋아하여 매양 고인의 언행으로써 정성껏 지도하였다. 시문(詩文)을 지을 때는 사리가 통창하고 말은 간결하게 하였으며 허언과 과장을 좋아하지 않았다. 감식력이 더욱 뛰어나 당시의 신진 학자들이 다투어 공부한 것을 가지고 나와 질정하고 그 품평을 얻고는 저마다 놀라고 탄복하였다. 시험을 관장하여 문사(文士)를 뽑을 때는 오로지 통달하고 전아(典雅)한 것을 구하고 화려하고 기교가 있는 것은 물리쳤다. 근세에 고관(考官)의 직임을 잘 수행하여 공정하고 사심이 없었던 자를 말할 때에는 오직 공을 최고로 친다.
공은 비록 과거 시험으로 출세하였지만 어려서부터 경훈(經訓)을 정밀히 연구하였으므로 조예가 깊었다. 창강(滄江) 조공 속(趙公涑)은 공의 장인으로, 그가 인정하는 사람이 적었는데 유독 공만은 애중(愛重)하였다. 공이 왔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의관을 고쳐 정제하고 만나 보면서 말하기를, “이는 대유(大儒)이다. 연소하다고 소홀하게 대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김상 석주(金相錫冑)가 일찍이 찾아가 질문한 적이 있었는데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오늘날 사람들이 예를 아는 선비를 꼽을 때는 반드시 산림(山林)을 일컫는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학문이 넓고 예가 깊은 분으로는 박공을 넘을 자가 없다.” 하였다.
공은 항상 말하기를, “사람이 성실함이 없으면 만사를 이룰 수 없다.” 하였다. 이 때문에 ‘존성(存誠)’으로 재호(齋號)를 삼았고 또 호를 ‘만휴자(晩休子)’라고 하였다.
정부인(貞夫人) 풍양 조씨(豐壤趙氏)와의 사이에 2남 3녀를 두었다. 장남 필순(弼純)은 참봉이고 차남은 필건(弼健)이다. 장녀는 부사 신확(申瓁)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시직(侍直) 이수함(李壽涵)에게 시집갔고 삼녀는 사인(士人) 이병철(李秉哲)에게 시집갔다.
필순은 2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사임(師任)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필건은 2남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신확은 2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석하(錫夏), 익하(翊夏)이며 사위는 조해수(趙海壽), 이헌장(李獻章), 이진순(李眞淳)이다. 이수함은 1녀를 두었는데 윤지온(尹志溫)에게 시집갔다. 이병철은 2남 1녀를 두었는데 어리다.
공이 우리 집안과 인척이 되는데, 공이 약관일 때에 내 선친이 한 번 보고는 깊이 칭찬하면서 호걸스러운 선비라고 지목하였다. 나 또한 어려서부터 공의 부자 형제들과 함께 노닐었으므로 사소한 일까지 모르는 것이 없었고, 마음으로 친밀하게 허여하여 좋아하고 사모하는 것이 늙도록 변함이 없었다. 사수(士受)는 일찍 세상을 떴고 공 또한 이어 서거하니, 훌륭한 사람을 잃는 아픔은 매양 가슴에 절실하다.
필순의 형제가 공의 사업과 행실을 적은 기록을 가지고 와서 묘명(墓銘)을 구하였다. 내가 문장에 서툰 줄 알면서도 이렇게 부탁하는 것은 내가 공을 잘 안다고 여겨서이니, 인정과 의리로 보아 사양할 수가 없어서 삼가 그 기록을 요약하고 명을 지었다.
명은 다음과 같다.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낸 집안에서 / 喬木世家
보옥 같은 훌륭한 자질을 타고났다 / 璵璠令質
효도와 우애를 실천하였으며 / 孝友實行
행실은 깨끗하고 절개는 아름다웠다 / 淸修姱節
문학으로 조정에 올라 / 文學登朝
단아하고 바름을 스스로 지켰다 / 雅正自守
내외직을 역임하였는데 / 歷試內外
한 벼슬도 구차하게 하지 않았다 / 一官不苟
세상길은 여러 갈래라 / 世路多岐
평지도 있고 언덕도 있는데 / 互有平陂
조용히 진정(眞情)에 맡기고 / 從容任眞
치우치지도 붙좇지도 않았다 / 不比不隨
지위가 총재에 이르러도 / 位至冢宰
몸가짐은 빈한한 선비 같았다 / 身如寒士
안팎이 똑같고 / 表裏若一
시종이 다르지 않았으니 / 始終無貳
내가 공의 덕을 흠모함이 / 我欽公德
진실로 하나의 성에 있다 / 亶在一誠
이것으로 자호를 삼았으니 / 于以自號
일평생이 증험이 될 만하다 / 可驗平生
당처럼 높다란 봉묘에 / 有崇若堂
의관이 보관되어 있다네 / 衣冠所閟
이렇게 공에 대해 명을 지으니 / 以玆銘公
아마도 부끄러움이 없으리라 / 庶幾無愧


 

[주D-001]상소하여 …… 면직되었다 : 박태상(朴泰常)이 당시 조정 신하들의 불화를 지목하면서 탄핵을 받아 유배되거나 파직당한 송시열(宋時烈), 남구만(南九萬), 이익상(李翊相)을 구호하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는데, 상이 당론만 일삼는다고 질책하는 비답을 내렸다. 이로 인해 재차 정사(呈辭)하여 체차되었다. 《국역 숙종실록 1년 5월 16일》 《承政院日記 肅宗 1年 5月 26日》
[주D-002]개기(改紀) : 경신환국(庚申換局)을 말한다. 남인의 영수(領袖)인 영의정 허적(許積)의 서자인 허견(許堅)이 인평대군의 세 아들과 함께 역모를 도모하였다는 고변으로 인해 남인들이 대거 축출되고, 김수항(金壽恒)이 영의정이 되어 서인 주도의 정권으로 바뀌게 된 일이다.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라고도 한다.
[주D-003]태아(太阿)를 거꾸로 쥐었다 : 태아는 보검의 이름이다. 《한서(漢書)》 권67 〈매복전(梅福傳)〉에 “태아를 거꾸로 쥐고 자루는 초(楚)에 주었다.” 하였는데, 남에게 큰 권한을 주고는 스스로 권한을 잃었다는 뜻으로 쓰인다.
[주D-004]복역(覆逆) : 왕이 내린 비답, 전교 등에 대해 왕명을 받들 수 없다고 반려하는 것, 또는 그 뜻으로 아뢰는 것을 말한다.
[주D-005]그 사람 : 지평 김진귀(金鎭龜)를 말한다. 《국역 숙종실록 7년 3월 26일》
[주D-006]혹 나를 …… 있었는가 : 대본은 ‘寧有旨追我乎’인데, 한국문집총간 154집에 수록된 《명곡집(明谷集)》 권33 〈이조 판서 만휴 박공 시장(吏曹判書晩休朴公諡狀)〉에 의거하여 ‘追’ 다음에 ‘逮’를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서계집 제7권
 서(序) 9수(九首)
《반남박씨세보(潘南朴氏世譜)》 서


보(譜)란 무슨 말인가. 기록함이 넓음을 말한다. 널리 그 종족(宗族)을 기록한 책을 ‘족보(族譜)’라 하니, 이 책은 박씨(朴氏)의 종족을 널리 기록한 것인데, 또 어찌하여 ‘족보’라 하지 않고 ‘세보(世譜)’라고 하는가. 세(世)로써 그 종족을 이으면 ‘세’라 하고 ‘족’이라 하지 않아도 괜찮기 때문이다.
박씨는 뿌리가 신라(新羅)에서 시작되어 자손들이 널리 퍼졌다. 여러 고을에 흩어져 살면서 낮게는 평민이나 종이 되기도 하고 높게는 공경(公卿)이나 대부(大夫)가 되기도 하였으니, 그 수를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그리하여 각각 기록할 만한 세손(世孫)을 시조(始祖)로 삼고 시조가 일어난 곳을 관적(貫籍)으로 나타냈으니, 반남으로 관적을 나타내고 호장(戶長) 응주(應珠)를 시조로 삼은 가문(家門)이 우리 종족이다. 우리 종족이 세상에 드러난 때는 고려(高麗) 말엽인데, 본조(本朝)에 와서야 창성(昌盛)하기 시작하여 30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더욱 번성하고 창대해져서 여러 성(姓) 중에 으뜸이 되었다. 고어(古語)에 “뿌리가 깊으면 가지가 무성하고 근원이 멀면 흐름이 장구하다.” 하였는데, 이 말이 어찌 관면(冠冕)과 문벌(門閥)을 이르는 말이겠는가. 이는 공덕(功德)이 전대에 쌓이면 복택(福澤)이 후대에 넘친다는 뜻이니, 하늘이 장차 이로써 세상을 권면하는 징험을 삼은 것이다. 따라서 우리 종족의 번성함과 창대함이 이와 같으므로 세보를 만들 때 상세히 기록하지 않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예전의 족보는 소략한 문제가 있고, 또 수십 년 전에 만들어서 뒤에 출생한 자손들이 실리지 못하였으니, 끊어진 가계(家系)를 잇고 누락된 내용을 보충하는 것은 반드시 후대에 해야 할 일이었다.
족제(族弟) 세채(世采) 화숙(和叔)이 처음 지금의 세보를 만들다가 중간에 족질(族姪) 태징(泰徵)에게 맡겨 17년 만에 완성을 보았으니, 과거의 소략한 문제가 있던 것이 모두 상세하게 기록되었고, 늦게 출생한 후손도 이어서 모두 실리게 되었으며, 널리 오류를 바로잡은 것 또한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 체례(體例)는 분묘(墳墓)의 소재를 반드시 쓰고 어디에서 이주하였는지를 반드시 썼으니, 이는 먼 조상을 추념하고 종족을 분변하려 해서이다. 그리고 외손(外孫)은 대자(大字)로 쓴 줄에 넣지 않았으니, 이는 잘못된 풍속을 바로잡고 이성(異姓)을 분별하려 해서이다. 또 벼슬을 하였는지, 모씨(某氏)에게 장가들었는지, 향년(享年)이 몇인지, 모일(某日)에 졸(卒)했는지를 반드시 자세히 썼으니, 이는 소씨(蘇氏)의 족보에서 그 좋은 점을 택한 것이다.
내가 이로 인하여 느끼는 점이 있으니, 친친(親親)에 대해 박하게 한 소명윤(蘇明允 소순(蘇洵))의 인(仁)하지 못함을 애석하게 여긴다. 소명윤이 자신의 족보를 만들 적에, 위로는 고조(高祖)까지만 싣고 아래로는 아들까지만 실었으며, 방계(傍系)는 8촌인 시마(緦麻)까지만 실었다. 이와 같은데도 “우리의 족보를 보는 자는 효제(孝悌)의 마음이 유연(油然)히 생길 것이다.”라고 하니, 너무 심하지 아니한가. 저 소명윤은 장차 천하 사람들을 모두 들어 자기 조상을 조상으로 여기지 않고 자기 자손을 자손으로 여기지 않아, 기년복(朞年服)과 공복(功服)을 입는 가까운 종족을 남남으로 보게 만들었을 뿐이니, 그러고도 도리어 종족에 대해 후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족보를 만들어 기록하는 것은 모르거나 잊지 않고자 해서이다. 천하에 고조와 증조의 이름과 작위를 잊고 시마와 공복의 항렬(行列)을 모르는 자는 있지 않으니, 소씨처럼 싣는다면 또 족보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런데도 마침내 “다행히 남남이 되기 전에 소홀히 하고 잊는데 이르지 않도록 하였다.”라고 한단 말인가. 고조와 증조, 시마와 공복도 오히려 족보가 있어야 잊지 않는 관계라면 남남이 되는 것을 겨우 면하는 데 지나지 않을 것이니, 그렇다면 소씨가 친친에 대해 너무 박하지 아니한가. 옛날 사마천(司馬遷)이 《사기(史記)》를 지을 적에, 황제(黃帝) 이래의 씨(氏)와 성(姓)의 유래를 상세히 기록하지 않음이 없었고 또 대부분 몇 대(代)인지를 밝혔으니, 만약 예로부터 보첩(譜牒)이 없고 또 보첩을 만드는 자들이 대다수 소씨처럼 간략하게 만들었다면 사마천이 어디에서 근거를 취할 수 있었겠는가.
지금 세보에 실은 것은 시조인 호장(戶長)으로부터 우리 형제까지 15세(世)가 되고, 우리 형제의 자손까지가 또 3세인데, 이보다 아래의 자손은 다만 아직 보이지 않아 기록하지 못하였을 뿐이다. 그리고 별도로 종통을 이룬 방계(傍系)도 모두 수록하였는데, 여기에 수록되지 않은 것은 다만 증빙할 길이 없어서 기록하지 못한 것뿐이다. 이와 같이 널리 실은 까닭은 친친(親親)의 의리를 극도로 넓히기 위함이다.
아, 아들로부터 아버지로 거슬러 올라가고 아버지로부터 아들로 아래로 내려오는 18대 종족이 모두 부자의 친한 관계가 아님이 없다. 내 몸에 있어 이미 그러하니, 곧 내 종족 또한 그러할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만 갈래가 한 근원임을 생각하고 천 가지가 한 뿌리임을 살핀다면, 반드시 장차 금할 수 없는 정(情)이 우러나고 차마 할 수 없는 의(義)가 생겨날 것이니, 어찌 친(親)이 다하고 복(服)이 없다고 해서 종족을 남처럼 보는 데에 이르기까지 하겠는가.
금상(今上) 9년 계해년(1683, 숙종 9) 5월 갑진일에 반남 박세당이 삼가 쓰다.


 

[주D-001]뿌리가 …… 장구하다 : 백거이(白居易)의 해주자사배군부인이씨묘지명(海州刺史裴君夫人李氏墓志銘)에 “근원이 먼 자는 흐름이 길며 뿌리가 깊은 자는 가지가 무성하다.〔夫源遠者流長 根深者枝茂〕”라고 한 말이 보인다.
[주D-002]소씨(蘇氏)의 족보 : 소순(蘇洵) 집안의 족보서(族譜序)를 가리킨다. 《唐宋八家文 卷17 蘇氏族譜引》

 

서계집 제8권
 기(記) 4수(四首)
석천동기(石泉洞記)


석천동(石泉洞)은 잠수(潛叟)가 사는 곳이다. 잠수가 조정에서 시종(侍從)으로 벼슬한 지 10년이었는데, 어느 날 병으로 물러나 선부봉(仙鳧峯) 아래에 은거하고는 사는 곳의 샘물을 ‘석천(石泉)’이라 이름하고 이어 그 골짜기를 ‘석천동(石泉洞)’이라 이름하였다. 이 지역이 도성의 동쪽에 해당되기 때문에 또 그 산등성이를 ‘동강(東岡)’이라 하고, 시내를 ‘동계(東溪)’라 하였으며, 또 이곳에 잠수가 산다고 하여 그 물을 ‘잠수(潛水)’라 하고 언덕을 ‘잠구(潛丘)’라 하였다.
‘석천’이라 이름한 까닭은 산속의 뭇 샘물이 모여 이 시내가 되었고, 온 산이 모두 바위인데 시냇물이 구불구불 흘러서 바위를 따라 오르내리며 담(潭)이 되기도 하고 폭포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석천’이라 이름한 것이다. 맑은 샘물이 바위 위로 흐르고 하얀 바위가 샘물에 씻겨 샘물은 바위 때문에 더욱 맑고 바위는 샘물 때문에 더욱 희니, 아름답고 즐겁도다. 잠수가 사는 곳이여. 잠수는 날마다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끌며 아침저녁으로 수석(水石) 사이를 소요(逍遙)하는데, 질병과 우환이 있지 않으면 이곳에 거닐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그야말로 즐거워 늙음이 닥쳐오는 줄도 모르는 자라 하겠다.
시내에서 북쪽으로 8, 9보 떨어진 곳에 집이 있으니 곧 잠수가 거처하는 집이요, 집에서 동쪽으로 수백 보 떨어진 곳에 언덕이 있으니 곧 잠수의 무덤자리이다. 이 언덕을 ‘낙구(樂丘)’라 하고, 이 집을 ‘정사(精舍)’라 하였으니, 잠수가 살아서는 여기에 거처하고 죽으면 이곳에 묻힐 것이다. 비록 삽을 메고 따라다니게 한 유령(劉伶)과는 다를 법하지만, 잠수의 경우 또한 자신을 위한 도모를 잘 하였다고 할 만할 것이다.
그 회일(回日)ㆍ영월(迎月)ㆍ백학(白鶴)ㆍ채운(彩雲)ㆍ선부(仙鳧) 등 봉우리들의 기이함과, 선유(仙游)ㆍ도장(道藏)ㆍ토운(吐雲)ㆍ서하(栖霞) 등 계곡들의 빼어남과, 취선대(聚仙臺)ㆍ초학대(招鶴臺)와 수옥정(漱玉亭)ㆍ난가정(爛柯亭)과, 객성기(客星磯)와 음우담(飮牛潭)과 크고 작은 폭포와 샘물의 빼어난 경치로 말하면 도성 근교에서 보기 드문 경치인데, 잠수가 골라서 이름을 붙인 곳까지 합하면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리하여 지금 우선 그중에 한두 곳을 기록하여 후인(後人)들로 하여금 잠수가 이곳에서 즐거워한 바를 알게 하노라.


[주D-001]잠수(潛叟) : 잠수는 박세당의 호이다. 무신년(1668, 현종 9) 1월 40세에 벼슬을 버리고 양주 수락산(水落山) 석천동(石泉洞)에 은거하였다.
[주D-002]삽을 …… 유령(劉伶) : 유령은 진(晉)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이다. 성품이 남달리 술을 좋아하여 늘 녹거(鹿車)를 타고 술을 담은 호로병 하나를 가지고 다녔는데, 한 사람에게 삽을 메고 따라다니게 하여 자기가 죽으면 그 자리에 묻어 달라고 하였다. 그가 지은 주덕송(酒德頌)이 《고문진보(古文眞寶)》 후집(後集)에 실려 있다. 《晉書 卷49 劉伶傳》
연려실기술 제31권
 현종조 고사본말(顯宗朝故事本末)
임금이 온천에 갔을 때 이경석이 차자로 송시열과 틀어지다

기유년(1669) 3월, 임금이 온천에 행차하였을 때에, 영부사 이경석이 차자를 행재(行在)에 올려 빨리 돌아오기를 청하였는데, 차자의 대략에, “때는 바야흐로 늦은 봄 화창한 계절이요, 여름철이 다가왔지만, 찬 기운이 쌀쌀할 뿐만 아니라 된서리가 날마다 지붕을 덮어 하늘이 재변을 나타내 보임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남쪽 지방에서는 지진으로 땅이 갈라지고 병선(兵船)이 침몰되어 죽은 사람의 수효가 백 명에 가깝습니다. 또 들으니 질병이 없는 곳이 없어서 행차하시는 데에 따라간 군사들 중에서도 간혹 누워 앓는 사람이 있으니, 예방하고 피함을 주밀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또 깊이 염려한 것은 평소에 조정에서 걸핏하면 신을 들메고[納覆] 가는 것이 서로 연달았고, 오늘의 행재소에는 달려가서 문안하는 이가 있다는 기별은 들을 수 없는 일입니다. 대체로 그런 사실이 있었는데도 신이 듣지 못한 것인지요. 전하께서 병환으로 멀리 임시 처소에 가 계시니, 사고가 있다든가 늙고 병들어 멀리 떨어져 있는 자가 아니면, 신하된 직분이나 의리로 보아서 이럴 수 없습니다.이것은 나라의 기강과 의리에 관계되는 일이니 신이 매우 걱정하옵니다. 그렇지 않다면 옛말에, ‘자기가 잘난 척하는 기색이 사람을 천리 밖에서 거절한다.’ 하였는데, 지금 그와 근사한 것인지요. 이 점이 전하께서 조심하고 염려해야 할 부분입니다.” 하였다. 《백헌집》
○ 이때 판부사 송시열이 마침 혐의되는 일이 있어서 감히 행재소에 나아가 뵈지 못하고, 다만 전의(全義)에 나가서 머물러 있다가 이경석이 차자를 올렸다는 소식을 듣고 곧 차자를 올려서 대죄하였다. 《강상문답(江上問答)》 송시열의 상소 끝에, “적이 생각하건대, 옛날 손종신(孫從臣)같이 오래 살고 편안하여 크게 한 세상의 존중을 받기는 하였지만 그가 의리를 알고 기강을 진작하였다고 일컬음을 받지 못했으므로 그를 불쌍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었습니다.그 당시에 너무도 용렬하고 어리석은 자가 있어서 처신하는 것이 보잘것없었으므로 도리어 손종신 같은 사람에게 비난을 받았다면 여러 사람들이 얼마나 낮춰 보고 비웃었겠습니까. 지금 신의 당한 경우가 불행하게도 그런 경우와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우암집》
○ 이경석이 또 차자를 올려서 전일 상소에 대죄하였는데, 그 차자의 대략에 “신이 망령되이 올린 차자를 가지고 시열이 자기를 논란하고 배척한 것으로 잘못 인식한 모양입니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송시열과는 전부터 보통 사이가 아니라고 지목을 받았는데 뜻밖에도 신이 믿음을 받지 못하였고, 차자의 사연이 명백하지 못하여 이렇게 되었습니다.신이 차자 중에서 말한 ‘사고가 있거나, 늙고 병들고 멀리 떨어져 있는 자가 아니면 신의 직분과 의리로서 이렇게 할 수 없다.’는 말이 정말 송 판부사를 지목 배척한 말이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그가 슬픔을 당하고 또 병환이 있다는 말을 들었으니 혹시 곧 달려가 뵈지 못할 것으로 짐작하였고, 또 어떻게 그가 끝내 오지 않을 것으로 단정하고, 먼저 가서 배척하였겠습니까.설혹 배척할 만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군자의 교제는 서로 의로써 권면하는 것인데 어떻게 차마 전일에 서로 좋아하던 정의를 배반하고서 심하게 배척할 수가 있겠습니까. 신의 마음이 원래 그런 것이 아니었는데 이야말로 불행이 심한 것입니다.” 하였다. 《백헌집》
○ 과거에, 송시열은 세상에 명망이 중하니, 이경석이 인조조 때부터 여러 번 천거하여 언제든지 불러오기를 청하였다. 시열과 송준길이 경석을 주인으로 삼아서 서울에 들어오면, 베옷과 짚신의 초라한 차림으로 경석의 집을 찾아갔으며, 경석은 반드시 자기와 평등한 지위로 대접하여 선비에게 자신을 낮추는 예를 다하였다.그리고 효종이 새로 들어선 때에도 경석이 먼저 시열을 불러다가 나라 일을 같이 할 것을 청하였으며, 또 그가 사퇴한다는 말을 들으면 곧 임금께 글을 올려서 만류하기를 청하고, 반드시 사사로운 편지를 보내어서 머물기를 권고하였다. 따라서 시열이 명망과 지위가 높아진 다음에도 경석을 공경하여 존중하는 뜻이 항상 말이나 서신 중에 나타났다.그런데 이때에 와서 갑작스럽게 한 장의 글을 올려, 손적(孫覿)의 일을 인용하여 극도로 욕하고 훼방하니 대체로 경석의 차자 중의, ‘신을 들멘다.[納覆]’는 등의 말이 자기를 지목한 것으로 오인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때 시열은 유림의 영수로 당세에 추앙을 받고 있어, 그가 옳다 그르다 말하는 것을 선비들이 감히 하지 못하는 터였다. 그런데 그의 경석을 비난하는 상소가 한번 나오니, 온 세상이 떠들썩하여 비록 그 문하에 출입하고 높여서 사모하거나 친밀하던 사람들도 의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준길이 역시 경석을 대하여서 놀랍고 한탄스러운 일이라고 말하였다. 《청야만집》
○ 이때 시열이 송규렴(宋奎濂) 판서 에게 보낸 편지에, “오늘 나의 상소를 보고 그(경석)를 존경하여 높이고 기뻐하며 따르던 사람들이 화내어 나를 꾸짖고 분하게 여겨 배척하는 것은 본래 괴이할 것이 없거니와 온 세상이 모두 떠들어대며 사사 원수 보듯 한다. 동춘(同春 송준길의 호)까지도 역시, ‘놀랍고 한탄스럽다.’고 말하니, 다른 사람이야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대체로 그 사람(경석)은 향원(鄕愿)의 마음가짐으로 청인(淸人)의 세력을 끼고서 일생을 행세하는 방법으로 삼는다. 만일 경인년의 일이 아니라면, 개도 그 똥을 먹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경인년)에 죽지 않고 살아오게 된 것은 어찌 대종성 노획부(大宗城鹵獲婦)의 선물이 아니겠는가.”고 하였다.
○ 이때 이단상(李端相)이 박세채(朴世采)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하기를, “우암장(尤菴丈)이 지금 공론이 백헌(白軒) 정승을 따르고 당신을 비방한다고 하며, 심지어는 동춘장(同春丈)까지도 역시 크게 의심한다고 말한다 하니, 이것이야말로 불행도 심한 일이오. 천천히 우암장에게 글을 보내서, 그 상소에서 말한 의사를 물어 보려 하오.” 하더니, 수개월 후에 단상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미처 알아보지 못하였다. <백헌연보>
○ 일찍이 무신년 10월에 임금이, 경연관 이규령(李奎齡)의 아룀과 완평부원군 이원익(李元翼)의 고사에 의하여, 이경석에게 궤장을 내려주고 또 1등 풍악과 술을 내리니, 경석이 임금의 은혜에 감격하여 그 뜻을 시로 적어 읊고, 좌중의 여러 사람에게 부탁하여 화답하게 하였는데, 송시열이 그 서문(序文)을 지어서 말하기를, “공이 조정에 있어서의 시종(始終)은 임금께서 내리신 교서에 이미 갖추어 있다. 그러나 경인년 2월의 일은 나타내지 않으셨다.대체로 그때에는 종묘 사직의 존망이 당장 결정되는 판인데, 비록 미봉할 길이 있기는 하였으나 이해에 영리한 자들은 모두 팔짱을 끼고 물러서서, 월(越) 나라 사람이 진(秦) 나라 사람의 수척한 것을 보듯 하였다. 이때에 오직 공만이 한 몸을 내어 놓아 죽고 사는 것을 가리지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고 동요하지도 않아서 나라가 결국 무사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임금의 알아주심이 더욱 융숭하고 선비들의 마음도 더욱 따랐다. 하늘의 보우를 받아 수(壽)하고 강녕하여 마침내 우리 임금의 은혜로운 사급과 예우를 받았으니, 어찌 우연한 일이리오.” 하였다. 《우암집》
○ 《강상문답(江上問答)》에서 말하기를, “옛날 백헌 정승이 <삼전도 비문(三田渡碑文)>을 지었는데, 그 비문에 말한 것은 실로 사람들의 마음에 부끄럽게 여길 만한 점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벼슬에 있으면서 청렴결백하고 또 경인년에 한 일의 한 가지가 칭찬할 만하기 때문에 당시에 청음(淸陰 김상헌) 등 여러 어진 이들이 모두 그와 더불어 벗하고 잘 지냈다.그런데 이때 우암(尤菴)의 상소 끝에, ‘손종신……’이라고 한 것이 있었는데, 백헌 정승은 처음에는 그것이 무슨 의미의 말인지를 몰랐다가 나중에 허적이 그것은 이경석이 <삼전도 비문>을 지은 것을, 옛날 손적의 사실에 비유한 것임을 알고서 백헌 정승에게 일러 주니, 백헌 정승이 크게 노하여 이 우암의 소를 동춘(同春)에게 보이니, 동춘이 놀랍고 한탄스러운 일이라고 말하였다.” 하였다.
○ 경석이 조정에서 벼슬한 지 50년 동안, 일찍이 한 번도 다른 사람과 다툰 일이 없었는데, 이때에 와서 다만 한 장의 상소로써 그 본심을 진술하였을 뿐, 평상시에 자제들에 대하여서도 한 번도 다른 사람의 장점과 단점을 들어서 말한 적이 없었다. <백헌연보>
○ 숙종 -원문 빠짐- 연간에 김창흡(金昌翕)이 이덕수(李德壽)에게 준 편지에, “누가 와서 말하기를,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가, 옛날 노 나라의 문인(聞人)으로써 우암옹(右菴翁)에 비하였다.’ 한다.대체로 우암옹이 백헌 정승에게 대한 것은 스스로 할 말이 있었다. 그 기개와 절조가 못나고 약한 것으로 말하면 삼전도 비에서는 청인을 극력 칭찬하였으며, 그 의견이 허술한 것으로 말하면 신덕왕후(神德王后)를 부묘(祔廟)하자는 의논에 굳이 이의를 하였으니, 이런 것이 원래 사람들의 마음에 불만을 가져왔고, 또 흠도 없고 칭찬할 것도 없어서 향원과 같은 점이 있으므로 우암이 공격하기를 더욱 힘주어 하고, 말이나 기색으로 용서하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하였다.
○ 성균관 사학의 유생 홍계적(洪啓迪) 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에, “전 판서 박세당(朴世堂)이 지은 고 상신 이경석의 비문을 보니 송시열을 여지없이 꾸짖고 욕하였는데, 그 중에는 시열이 노성인(老成人)을 업신여기고, ‘상서롭지 못한 행실이 있으므로 상서롭지 못한 보응을 받았다.’하였으며, 또 그 비명(碑銘)에는, ‘거짓말이면서도 구변을 잘하며, 괴벽한 행실이면서도 고집하며 그른 것을 옳은 것처럼 매끈하게 꾸미는 것은 이미 세상에 문인(聞人)이 있다. 즉 올빼미와 봉황새는 성질이 달라서 성내고 꾸짖는데, 불선한 사람이 군자를 미워하는 것이 군자에게 무슨 관계이리오.’ 하였습니다.아아, 시열이 경석을 풍자한 것은 《춘추(春秋)》의 대의(大義 존명배청(尊明排淸))를 밝힌 것인데, 《상서(商書)》의 이른바, 노성한 이를 업신여긴다든가 《맹자》의 이른바, 상서롭지 못하다는 것을 과연 여기에 견주어서 말할 수 있겠습니까.그리고 만일 현인군자가 불행하게 화에 걸린 것으로써 상서롭지 못한 보응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면, 주자(朱子)가 위학(僞學)으로 화를 받은 것도, 손적을 비난함으로써 그렇게 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옛날에 공자가 정사를 어지럽히는 대부 소정묘(少正卯)를 베려하니, 자공(子貢)이 나와서 말하기를, ‘소정묘는 노 나라의 이름난 사람입니다.’하였는데, 이때 공자는 소정묘의 죄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거짓을 말하면서 박식이요, 그른 것을 꾸미면서 미끈하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박세당이 인용한 것이 실로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옛날에 어진 사람을 해치고 나라에 화를 입힌 소인인들 어떻게 군자로서 소정묘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가령 시열더러, 정사를 어지럽힌 신하라고 한다면, 이것은 효종의 정사가 어지러웠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과연 효종께서 10년간 왕위에 계셨는데 어지러운 것이 무슨 정사였습니까. 세당이 시열을 무함하는 것이 어찌 결국 위로 효종을 무함하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 이하성(李厦成)이 그 조부(경석)를 위하여 무함임을 변명하는 소를 올리기를, “아아, 정축년의 일이야 무엇이라 말을 하겠습니까. 우리 인조대왕께서 몸을 굽히고 욕을 참으신 것은, 종묘 사직을 위하고 만백성을 위하여 부득이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저들 청인이 의심하고 성냄이 점점 심했기 때문에 먼저 기회를 만들어 가지고 우리 편에서 어떻게 하는가를 보려고 비(碑)를 세우게 하고 비문을 지어 바치라는 독촉이 심하니, 이것이 그해 12월이었습니다.인조께서 처음에 신풍부원군(新豐府院君) 장유(張維)ㆍ전 부사 조희일(趙希逸) 및 신의 조부에게 함께 의논하여 하룻밤 사이에 지어 오라고 명하였습니다. 이때 대제학은 결원이었으며, 신의 조부가 마침 예문관 제학의 직위에 있었는데, 소를 올려서 끝까지 사양하였지만 사세가 급박하였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지어서 바쳤던 것입니다.
세 사람의 글을 청국으로 들여보냈더니, 마침 명(明) 나라 학사(學士)로서 청국에 항복한 자가 있다가 글을 보고서 신풍의 글에서 인용한, ‘정백이 양을 이끌었다.’는 말은 원래가 제후들이 서로 침공하는 일을 말한 것으로서 이 비문에는 적당하지 않다고 하며, 또 신의 조부가 지은 것은 매우 소략하고 전혀 포장을 하지 않았다고 하니, 청인들이 더욱 의심하고 노하여 고쳐 짓기를 독촉하였으며, 으르렁거림이 더욱 심하였습니다. 조정에서 걱정하고 무서워하여 어떻게 할 줄을 몰랐습니다.
이 때에 신풍은 이미 세상을 떠났는데, 전하께서 신의 조부만을 불러다 면대하여 타이르시기를, ‘지금 저들이 이 비문으로 우리의 입장을 시험하려 하니, 우리나라의 존망이 여기에 의하여 판가름나는 것이다. 구천(句踐)은 회계(會稽)에서 신첩(臣妾) 노릇을 하다가도 끝내는 오 나라를 멸하는 공을 이루었다.후일에 나라가 다시 일어서는 것은 오직 내게 있으며, 오늘의 할 일은 다만 문자에서 그들의 마음을 맞추도록 하여 사세가 더욱 격화하지 않도록 하는 것뿐이다.’ 하였으므로, 신의 조부가 역시 생각하기를, 임금의 욕됨이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한 몸을 돌아볼 수 없다 하여 꾹 참고 명을 받들었습니다. 이것이 정축년에 신의 조부가 비문을 짓게 된 실상입니다.
그 후에 신의 조부가 이조 판서가 되어서는 항상 산림에 숨어 있는 어진 선비를 끌어서 등용하는 데에 힘썼습니다. 시열은 이때 전 참봉으로서 학문과 행실로 이름이 있었기 때문에 제일 먼저 추천하여 좋은 벼슬을 시켰으며, 그 후로 글을 올리거나 경연에 나오면 항상 시열을 불러 올려 예로써 대우하시라는 뜻으로 아뢰었습니다.효종대왕께서 왕위를 이으시고 신의 조부가 영상이 되었을 때도, 시열과 당시의 명사들을 등용하여, 새 정치를 힘을 모아 돕도록 하였으며, 시열 역시 신의 조부를 주인으로 섬겨 서울에 들어오면 예고 없이 베옷과 짚신으로 신의 집을 찾았습니다. 신의 조부 역시 대등하게 대우하여 선비에게 자신을 낮추는 예를 다하였습니다.
그 후 신의 조부는 청국의 압력으로 벼슬에서 떠났기 때문에 조정에서 같이 일을 하지는 못하였지만, 그 두터운 정의는 오래도록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만일 시열이 사퇴한다는 말을 들으면 신의 조부는 곧 전하께 글을 올려서 만류하기를 청하였으며, 또한 반드시 시열에게 편지를 보내서 조정에 머물러 있기를 권고하며 선대왕의 은혜를 갚기를 의리로써 책망하였습니다.시열이 명망과 지위가 높아진 다음에도 신의 조부에 대하여 공경하고 존중히 여겼음을 평소의 말이나 기색과 서신 속에서 언제나 찾아볼 수 있었으며, 심지어는 주공 구역이란 말을 인용하여, 칭찬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기해년에 상례를 의논할 때에, 신의 조부는 시왕(時王)의 제도를 주장하고, 시열은 《의례(儀禮)》에 있는 네 가지의 설을 주장하여 비로소 의견이 갈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축년 여름에 억울한 죄인들을 심리할 때에 선정신(先正臣) 송준길이 윤선도의 위리안치를 너그럽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신의 조부가 아뢰기를, ‘봄 하늘의 우로는 초목의 아름답고 악함을 가리지 않는 것이니, 위에서는 마땅히 유신(송준길(宋浚吉))의 말을 들어서, 죽을 나이가 다 된 사람을 먼 곳의 귀신이 되지 않게 하여야 한다.’고 하니, 드디어 그렇게 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시열이 이 소식을 듣고서 분하게 여겼습니다.
그 뒤에 또 그 아들을 보내어 혼인하기를 청하였으나 일이 성취되지 않으니, 시열은 그것이 신의 조부가 자기에게 불만이 있어서 그런 것인 줄 잘못 알고 편지에까지 그런 말을 나타내고 또한 편지를 친한 사람에게 보내어서 뚜렷이 유감과 원망의 뜻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러나 신의 조부는 시열을 대접하기를 처음과 조금도 달리하지 않았습니다.
무신년에 선대왕께서 신의 조부를 원로(元老)라고 하여 궤장(几杖)을 내려 주실 때에, 신의 조부가 전하의 은혜를 빛내게 하는 글을 당대의 이름난 선비들에게 요청하였는데 시열에게도 청하니, 시열이 사양하지 않고 지었습니다. 거기에는, ‘공이 조정에 있어서의 모든 것은 임금의 교서 중에서 모두 말하였지만, 경인년 2월의 일만은 은미하게 하여 드러내지 않으셨다.이때는 나라의 존망이 당장에 결정지어지게 되었지만, 이해에는 영리한 자들이 팔짱을 끼고 물러서서 월 나라 사람이 진 나라 사람의 수척함을 보듯 하였다. 여기서 오직 공이 홀로 한 몸으로 사생을 돌보지 않고 무서워하지도 않으며 동요하지도 않아 청인들과 담판하여 국가가 결국 무사하게 되었다.이로부터 임금의 알아주심이 더욱 융숭하고 선비들의 마음이 더욱 따랐다.’ 하였으며, 그 아래 다시 계속하여, ‘하늘의 보우를 받아서 수하고 강녕하여 끝내 임금의 은혜로 대우하심을 받았으니, 어찌 다만 우연한 일이리오. 아아, 여기서 임금과 신하 사이의 깊은 정리를 볼 수 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송시열의 글에서 말한 바 경인년의 일이란 곧 신의 조부가 청인들에게 항쟁하여 담판한 것을 가리킨 것입니다. 지금 그 글을 보면 신의 조부의 충절을 칭송한 것이 지극하다고 하겠으나, 그 편말(篇末)의 한 구절, ‘수하고 강녕하여……’라는 말을 인용하여 견준 것이 애매하여 자못 그 뜻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 뒤 기유년 봄에 선대왕께서는 온천에 행차하시고, 신의 조부가 명을 받아 서울을 지키고 있던 중에, 차자를 행재소에 올려서 먼저 군왕으로서 재화를 만나 수신하고 반성하는 도리를 말하고, 뒤이어서 말하기를, ‘평소 조정에서는 납리(納履)하는 기색이 서로 잇달았는데 오늘날 행재소에는 달려가서 문후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전하께서 불행하게도 병환이 있어 멀리 임시 처소에 나가 계시는데, 만일 늙고 병들고 사고가 있는 자가 아니면 신하된 직분과 의리상 이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국가의 기강과 의리에 관계되는 일이므로 신이 매우 염려하는 일입니다.또 생각하면, 옛사람이 말하기를, 스스로 잘난 척하는 기색은 사람을 천 리 밖에서 거절한다 하였는데, 오늘의 일이 역시 그것에 가까운 듯합니다. 따라서 이 일은 전하께서 깊이 깨쳐 생각하고 처리하여야 할 일인가 하옵니다.’고 하였습니다.
이때 시열이 마침 병이 나서 시골집에 있으면서 미처 행재소에 나아가서 문후하지 못하였다가, 신의 조부의 차자를 보고서 자기를 가리키는 말로 오인하고 곧 한 장의 소를 올렸는데, 그 첫머리에는 공손히 사죄하는 말을 하고 나중에는 ‘옛날 손종신(孫從臣)과 같이 수하고 강녕하여 비록 크게 당대의 높이는 바가 되었지만 그가 의리를 알고 기강을 진작시켰다고 일컬어지지 않아서 혹 불쌍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었습니다.그런데 당시에 매우 용렬하고 비루한 자가 있어서, 그 처신이 보잘것없는데 도리어 그 사람에게서 비난을 받았다면 여러 사람이 낮춰 보고 비웃음이 어떠하였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신이 당한 경우가 불행하게도 그와 비슷합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신의 조부는 다시 짧은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에 ‘신이 망령되이 말씀드린 차자로써 시열이 자기를 논란 배척한 것으로 잘못 인식한 모양이지만, 신의 본심은 결코 그렇게 할 의사가 없었음을 천지신명에게 증명하더라도 부끄럽지 않겠습니다.그러나 유감인 것은 전부터 서로 아는 사이가 보통 처지도 아니었는데, 뜻밖에도 신이 믿음을 받지 못하여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마음으로 매우 부끄러워하는 바입니다.’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설령 배척할 만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군자의 교제는 서로 의(義)로써 권면하는 것인데, 어찌 차마 전일에 좋아하던 사이를 배반하고 심하게 배척할 수가 있겠습니까.신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는데 이렇게 되었으니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하였습니다. 아아, 여기서 시열이 신의 조부를 공격한 것과, 신의 조부가 시열을 대우한 것만 보아도, 또한 시열의 분노하는 -원문 빠짐- 기색과 신의 조부의 화평스러운 말을 한번에 환하게 분간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것이 신의 조부와 시열이 교제한 모든 내막입니다.
아아, 홍계적(洪啓廸) 등은 말하기를, 시열이 신의 조부에게 처음에는 은혜도 원한도 없었다고 하였으나 도리어 은혜가 원한이 된 경위는 신이 위에서 이미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 계적이, 시열이 한 말을 여러 번 이어받아서 말하기를, 신의 조부가 지은 <삼전도 비문>의 글이, 저 손적(孫覿)이 지은 어느 글과 서로 유사하다고 하였습니다.대체로 송(宋) 나라 흠종(欽宗)이 금(金) 나라 오랑캐에게 잡혀 있으면서 비록 금인이 글을 지어 오라고 시킴에 손적에게 글을 지으라 하기는 하였지만 흠종의 마음으로는 손적이 그대로 시행하지 않기를 바랐던 것인데, 그것을 어찌 감히 인조대왕이 종묘 사직을 위해서 몸을 굽히고 욕을 참으면서 신의 조부를 면대하여 은근히 분부하시니, 그 말씀이 침통 절박하고 구천(句踐)의 고사를 인용하여 타이르기까지 한 데에 비길 수 있겠습니까.또 손적은 그 임금의 본뜻에는 따르지 않고 금인들이 후하게 주는 물건만을 탐내어서 사양할 만한데에도 사양하지 않았으나, 신의 조부는 위험한 정세가 더욱 격화되는 시기에 성조(聖祖)의 간절하고 측은한 말씀을 따라, 부득이한 정세에 핍박되어서 한 일인데 어떻게 비할 수 있겠습니까.
그때를 당해서 신의 조부 혼자 예문관에 있었는데 끝내 모면하려고 하였다면 조정에서는 장차 추한 오랑캐의 핍박과 곤욕을 받게 되었는데도 한 문신의 손을 빌려서 그 위태로운 형편을 해결하지 못한단 말입니까. 혹은 청인들이 그 글을 지을 사람이 없다고 하여 그만두고 요구하지 않았겠습니까.만일 신의 조부가 세속을 떠나서 일찍 은둔 생활을 하였다면 모르지만, 이미 높은 벼슬을 지내고 한 몸을 나라에 바쳤으며 모든 험난한 일을 벌써 이것저것 많이 경험한 터인지라 사생(死生)과 영욕(榮辱)을 혼자만 달리할 수가 없는 일인데, 한 편의 글을 짓는 일에 스스로 그 이름을 결백하게 하기 위하여 임금의 핍박과 곤욕을 가만히 앉아서 보고, 끝내 명을 받들지 않았다면, 그것은 일시 높은 의논이나 하는 선비들의 칭찬은 받을 수는 있었겠지만, 임금을 섬겨서 몸을 바치는 신하의 도리상으로 볼 때에는 과연 어떠하겠습니까.그런데 신의 조부가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취하였으니, 과연 나라를 위하여 한 일이겠습니까. 몸을 위하여 한 일이겠습니까. 그 명백한 충심은 백 세 후에도 증명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슬픈 일이니, 계적의 말이 어찌 이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계적 등은 또 말하기를, ‘시열이 손적의 일을 인용하여 신의 조부를 풍자하고 비방한 것은, 시열의 사사로운 뜻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실은 주자(朱子)의 끼친 뜻을 따른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시열이 신의 조부가 <삼전도 비문>을 지은 그때에 벌써 비평과 논란을 하고 서로 사귀어 놀지 않았다면, 비록 신의 조부를 비방한 그것이 정확한 의논은 못 되더라도 산림 처사로서의 고결한 의논이라고는 할 수 있을 것입니다.그러나 그보다 수년 후에 신의 조부의 천거를 받고 서로 사모하고 좋아하였으며 더구나 그가 자기의 몸을 얼마나 신중히 하였으면서도 몸소 베옷 입은 선비의 차림으로 대신의 집을 찾아 왕래가 잦은 것이 어떻게 도를 즐겨하여 남의 세력을 잊고, 선배를 스스로 따른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또 이때 시열이 신의 조부에 대하여 높여서 예의로 대우하는 의사와 칭찬하는 말이 또 저러하였으니, 그의 마음이 본래 심복되어 따랐던 것입니다.그러다가 그의 명망과 지위가 신의 조부와 서로 같게 되고 기세가 더욱 성하여지게 되니 서로 논란할 때에 감정이 생기고, 서로 알력되는 곳에서 틈이 일어나 점점 의심하고 갈려지게 되었으며, 투기하고 미워하게까지 되었습니다.
생각하면 신의 조부의 한평생 명예와 절조는 한 점의 더러움도 들어서 말할 것이 없었는데, 흠을 30년 전에서 찾으려 하여 처음에는 가만히 옛말을 인용하여 신의 조부를 칭송하고 찬미하는 글에서 비추었다가, 나중에는 드러내 놓고 욕설과 비방을 하며 위에 올리는 소장(疏章)에까지 나오게 되었습니다.시열이 신의 조부를 높여서 사모한 것이, 신의 조부가 <삼전도 비문>을 짓기 전이 아니었습니다. 또 시열이 신의 조부를 욕하고 비방한 것이 역시 그 글을 지은 사실을 들은 날에 시작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같은 한 사람인데 전에는 존모하고 경복하여 주공(周公)에 비하기까지 하였으며, 나중에는 업신여기고 꾸짖고 욕하여 그만 손적에게 비하였으니 아아, 이것이 무슨 마음가짐이겠습니까. 이것이 무슨 마음가짐이겠습니까.
만일 시열이 과연 주자의 뜻을 좇았다고 한다면, 주자도 다른 사람과 교제하는 데 있어서 공경하여 사모하다가 비방하여 욕설하는 것이 이렇게 앞뒤가 다른 일이 있었습니까. 또 <삼전도 비문> 지은 일로 말한다면 신풍부원군이 비문을 지을 때에는, 마침 상복을 입고서 부득이 왕명을 좇았으며, 그 진술한 문구가 세상에 전파하여 선정(先正)이 외우기도 하였습니다.그리고 희일(希逸)은 면관(免官)당하였다가 불려 나와서 명에 응하였던 것인데, 글을 지은 다음 왕명으로 쓰지 않았습니다. 또 고 판서 이식(李植)은 남한산성에 피난하여 따라가서 여러 번 화친을 청하는 글을 지었는데 그 수치스러운 문구와 뜻을 선배들의 기록 중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갑신년 교서 중에는, ‘또 다행히 천하가 하나가 되는[청국이 통일한 것] 기회를 만나서 다행히 하늘이 덮어주고 땅이 실어주어 낳아주고 자라게 하여 주는 청국의 은혜를 입었다.’라든가, ‘마땅히 천자의 주신 말씀의 사랑을 좇아서’라는 등의 말도 있었습니다. 생각하면 저들 세 신하인들 어찌 이런 것을 좋아서 지었겠습니까.다만 국가가 지탱하나 망하나 할 즈음 위태롭고 의심스러운 날에 국가의 큰 계책에 따르고, 군부의 고심을 받들어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것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던 것이니, 그들의 깨끗한 명예와 맑은 덕명이 원래 이것으로 하여 더하고 손상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신의 조부의 경우에 있어서는, 처지의 곤란한 것이 앞에 말한 세 신하의 경우보다 배나 더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 글이 사용되고 되지 못하는 데에는 행[쓰이지 않는 것]과 불행[쓰인 것]이 있는 것이지, 그 글을 지은 것은 한 가지였습니다. 지금 만일 시열이 스스로 주자의 끼친 뜻에 의하여서 신의 조부를 공격한 것이라고 한다면 저들 세 신하는 마땅히 먼저 시열의 배척을 받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시열이 신풍부원군(장유)의 비문을 지으면서, ‘대의를 높인 것이 해나 별처럼 빛났다.’ 하였고 또, ‘대개 공이 <삼전도 비문>을 지은 이 일로써 죄줄 사람도 있고 알아줄 사람도 있다 하였다.’고 하였으며, 그(장유)의 문장을 논평하는 데에 있어서는, 의리가 정주(程朱)를 위주하였다고까지 하였습니다.그리고 이식의 문집에 서문을 짓는 데에서는, ‘의리의 정밀함과 의논의 바른 것이 유학을 보호하고 세도에 이바지하였다.’고 하였으며, 갑자년에 몸소 이식의 묘소에 가서 제사드리는 글에서는, ‘맨 먼저 도를 깨달았다.’고 칭찬하고, 또 ‘의논과 문장이 시종 주자 문풍(門風)에 어긋나지 않았다.’ 하였으며, 또한 ‘이 글로써 평생 우러러 사모하던 성심을 표시한다.’고 하였습니다.그리고 조희일(趙希逸)의 비문을 짓는 데 있어서는 바로, ‘<삼전도 비문> 지을 사람을 신중히 선택하였는데 공이 병 때문에 사면하였다.’ 하고, 또 말하기를, ‘그 모문(某文) 짓는 것을 사퇴한 것으로 보면 그 지조가 확고한 것을 볼 수 있는 것으로서 칭찬할 만한 일이다.’고 하였습니다.
아아, 글을 지어서 청인에게 보낸 사실은 처음부터 피차가 다를 것이 없는데, 어떤 사람에 대하여서는 혹 그 대의를 높여 칭찬하며 그 심사를 드러내어 밝히고(장유에 관한 것) 혹은 참 선비로 ‘죄아지아(罪我知我)라고’ 대우하며 우러러 사모하기에 겨를이 없으며(이식에 관한 것) 심지어는 실지 사실을 고치고 바꾸어서 도리어 그를 찬양하는 장본을 삼았습니다(조희일에 관한 것).무릇 이렇게 그 말을 음으로 변하다가 양으로 변하다가 하고 그 의논을 다르게 했다가 같게 했다가 하는 것은 모두 보통 사람의 마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시열이 신의 조부에 대해서만 비난과 훼방을 하는 것이 과연 사사로운 마음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과연 처음부터 신의 조부에게 은혜도 원한도 없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우리나라의 정축년의 일과, 송 나라 정강(靖康)연간의 일은 그때와 형세가 벌써 다릅니다. 인조대왕이 신의 조부에 대하여 타이르시기를 간곡하게 하신 것이, 저 송 나라 흠종과 손적이 그대로 하지 않으리라고 하였던 사실과 형편이 서로 반대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설령 털끝만치 비슷한 점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을 사실에 의지하여 바른대로 쓰고,그 잘못을 분명하게 말하는 것은 주자의 이른바 말을 세워 뒤에 남겨서 세상의 도의를 위하여 생각하는 것인데, 이와 반대로 글을 지어 칭송하고 찬미하면서 가만히 비방을 하는 것은 시열이 어떤 일로 인하여 감정을 푸는 것이기 때문에 명백하고 솔직하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열을 주자에게 비한다면 그 마음가짐과 행사하는 데에 있어서 서로 배치됨을 잘 찾아볼 수 있는 것인데, 계적이 말한, ‘실로 주자의 끼친 뜻을 좇았다.’는 것이 과연 말이 될 수 있습니까.
시열이 신의 조부를 욕할 때에는 시열이 한창 사림의 영수로 있을 때이니만큼, 그의 말과 의논이 옳고 그른 것을 일세의 선비들이 감히 논란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의 조부를 비난하는 상소가 한번 알려지자 온 세상이 떠들썩하였으며, 비록 그 문하에 출입하면서 그를 높여 사모하고 또 친밀한 사람이라도 그르다고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선정신 송준길도 신의 조부를 대하여 놀라고 한탄하면서 말하기를, “우리들이 처음 산림에서 나오게 된 것이 공 때문이었는데 지금은 주인이 없어졌소.”라고 하였습니다. 동춘이 이단상(李端相)에게 글을 보낸 사실과 단상이 박세채(朴世采)에게 글을 보낸 사실은 이미 위에서 나왔다. 고(故) 감사 조세환(趙世煥)이 일찍이 시열을 장기(長鬐)의 적소(謫所)에서 방문하였을 때에, 시열 자신도 그 일을 말하면서, ‘지금 와서는 후회한다.’고 하였다 합니다.준길은 시열의 친구로서 그때의 정의가 형제 같았으며, 단상은 시열을 스승처럼 섬겼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시열에 대하여 의심한 것이 개탄하고 애석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았으며 시열 자신이 세환에게 말한 것으로 보더라도, 그가 위급하고 곤궁할 때에 본심이 속에서 우러나온 것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대체로 준길의 공정한 마음과 단상의 정밀한 지식으로도 그 말이 이러하였으니, 그 밖의 당시 항간의 여론도 모두 그러하였습니다. 수십 년간이나 그를 높여 받들던 사람이 수 없이 많았지만, 이 점에 대해서는 끝내 한 마디의 시열을 두둔하는 다른 말을 꺼내지 못하였으며, 시열도 역시 스스로 자기가 옳다고 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시열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들도 반드시 시열이 자기의 그른 것을 알고 잘 후회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와서 비록 세월이 가고 세상이 변하였으며, 나이 많고 덕이 높은 이들이 모두 세상을 떠났다 하더라도 그때의 정해진 의논은 아직도 없어지지 않았습니다.그런데 계적 등 하찮은 후생이 애당초 그것이 무슨 일인지도 모르던 터인데, 지금 와서 도리어 시열이 원한을 풀이하던 자취를 덮으려 하여 말하기를, ‘처음에는 은혜도 원한도 없었다.’고 하며, 그의 사심을 부리던 계교를 숨기려 하여, ‘경석의 잘못은 스스로 공론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아아, 과연 계적의 무리로서 참으로 시열을 높이고 사랑할 줄을 안다면, 그의 은밀히 남을 비방하는 습성을 덮어주고, 그가 자신의 그른 것을 깨닫고 허물을 뉘우칠 줄 아는 은미한 의사를 드러내서 찬양하여 스스로 백 년 후에 해명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비길 수 없는 곳(주자(朱子))에 비하고, 감히 인용할 수 없는 시대의 사실(송 나라 일)을 인용하여 요사하게 떠벌려서 전하의 귀를 현혹하려고만 하니, 이것은 주자를 무함하고 시열을 그르치는 것이 심하다고 하겠습니다.계적 등이 말하는 시열이 신의 조부를 풍자하여 경고하였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과실이 있으면 조용히 책망하여 그 사람으로 스스로 반성하고 회개할 수 있게 하여야 되겠는데, 시열은 그렇지 않아서 서로 틈이 벌어질 초기에 벌써 은밀히 남모르는 비장을 하여 놓고, 한 가지의 말이 자기의 뜻에 거슬리면 그만 더러운 욕설이 낭자하여졌으니, 계적의 이른바, ‘풍자하여 경고한다.’는 것은 아무리 찾아보려 하여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영릉(寧陵 효종의 능) 지문(誌文)의 말에 이르러서는 더욱 그릇됨이 심한 것입니다. 왕릉의 지명(誌銘)은 무덤 속에 간직하여 후일의 증거가 되게 하기 위하여서만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그 성한 덕과 아름다운 행실을 금석에 새겨서 칭송하여 가깝고 먼 후세에 보여 주자는 것입니다.시열이 명을 받들어 영릉의 지문을 지을 때에는, 글의 뜻이 오로지 대행대왕의 항상 부지런히 큰 일[北伐]을 위하여 준비하던 계책을 밝히는 데 있었으니, 실지를 위주하고 소문을 뒤로 한다는 원칙에서 볼 때에 이미 너무 노골적임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우리 효종대왕께서는 10년간이나 근심하고 근면하면서 큰 뜻을 분발하여 장차 대의를 천하에 펴 보려 하던 것인데, 하늘이 돕지 않아서 중도에 세상을 떠나신 것입니다.따라서 비록 대왕의 크신 생각과 신묘한 계책이 미처 실시되지는 못하였으나 거룩하신 뜻은 빛나기가 일월과도 광채를 같이하는 것으로서 일국의 충신ㆍ의사가 모두 소리 없이 울고 마음 속으로 알고 있는 것이니, 시열이 지은 지문(誌文)에 한두 마디 말을 더 적어 넣기를 기다린 뒤에야만 후세에 널리 알려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하물며 이때에 있어서는 나라의 큰 상사가 있어 걱정되고 위태로움이 한창 심하고, 청국이 말썽을 부리어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언어나 문자 중에 번거롭고 누설함이 있을까 경계하여야 할 때이니, 붓 끝의 실없는 말이 앉아서 실지의 화를 초래하게 될 것으로서, 깊고 먼 식견을 가진 이의 할 짓이 아닙니다.
신의 조부는 이때 한산한 처지에 있었는데, 현종이 내시를 시켜 시열이 지은 글 초고를 가지고 신의 조부에게 와서 수정하게 하였습니다. 신의 조부가 이미 일일이 정정(訂正)하고, 비풍ㆍ하천 등의 문구에 이르러서는, ‘없어도 좋겠다.’는 뜻으로 부전(附箋)을 붙여서 아뢰었는데, 영의정 정태화 등이 그 말을 따르기를 청하니, 현종께서 깊이 옳게 여겨 곧 명하여 그 말들을 빼고 고치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시열이 좋아하지 않으며 그 글을 전부 버리고 다시 짓기를 청하니, 전하께서 다시 명하여 그 문구들을 빼지 말라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계적 등이 신이 조부가 저들 청인의 비위 거슬릴 것을 무서워하여 사실대로 기록한 어구를 빼려 하였다고 하니, 아아,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만일 계적 등의 말과 같다면 시열은 마땅히 저들 청인에게 미움받을 것을 생각하지 않았어야 할 듯합니다.그런데 시열이 이 지문을 지어 올리는 차자에서는, ‘벽두에서 무서워하고 꺼려서 될 수 있는대로 완곡하게 하였다.’고 하고, 위정(魏挺)의 묘비명을 인용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외인에게 쓰기를 부탁하여 더욱 말이 많게 할 수 없어서 다만 세상일을 모르는 천식(賤息 자기의 자녀)을 시켜 병풍 사이에 숨어서 쓰게 하였다.’고 한 것은 웬일이며, 또 허적의 말을 따라서 인쇄하여 내지 않게 하기를 청한다고 하고, 전하께서 보실 것을 한 권도 찍어 드리지 않는 것은 웬일입니까.이것으로써 시열이, 청인들의 비위를 거스르지나 않을까 하는 근심은 원래부터 깊었으나, 다만 그 말이 자기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자기를 논의할 것을 싫어하였던 것이니, 여기서도 그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신의 조부의 경우에 있어서는 당시 몸이 국외(局外)에 있었으며, 또 그 글이 다른 사람이 지은 것이니 설령 다른 날 말썽 생기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화복(禍福)과 이해(利害)가 처음부터 자신에게 관계되는 일은 아니었지만 반드시 그것을 적당히 재량하여 잘하도록 하려고 한 것은 실로 노신의 나라를 근심하는 지성에서 나온 것이요, 차마 새로 들어선 임금의 은근하게 부탁하는 뜻을 저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그런데 지금 신의 조부의 한 일을 가리켜서 말하기를, ‘청인들의 비위 거슬릴 것을 두려워하여서 한 것이라.’고 하니, 아아, 허물없는 것에서 허물을 찾으려 하여도 끝내는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 춘추의 대의를 시열만이 알고, 신의 조부는 몰랐다고 한다면, 신의 조부가 저들을 결코 청 나라라고 칭할 수 없다고 아뢴 글이 어찌하여 병자년 전에 있었겠습니까. 윤황(尹煌)등을 너그럽게 용서하여 놓아 주고 김상헌과 정온의 기개를 북돋워야 한다는 요청은 어찌하여 정축년 후에 있었겠습니까. 명 나라 조정에 연락하여야 한다는 상소는 어찌하여 경진년 봄에 있었겠습니까.하물며 경인년의 변란으로 온 나라가 모두 물 끓듯 하고, 나라의 위태로움이 경각에 있었는데, 신의 조부가 분발하여 몸을 돌보지 않고 청인에게 항변하며 스스로 책임을 지고 죽을 곳에 나가기를 즐거운 곳에 들어가듯 하였으니, 어찌 이런 경우에는 두려워하지 않고 시열이 지은 영릉 지문의 두 어구 말을 두려워하였겠습니까. 시세가 서로 같지 않고 처지가 각각 달랐다는 것은, 원래 변명을 기다리지 않고서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계적 등이 말하기를, ‘효종대왕의 큰 뜻과 거룩한 사업이 거의 희미하여져서 후세에 분명히 드러나지 못할 뻔하였다.’ 하였으니, 아아,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시열의 글이 완성된 다음에도 그것은 다만 돌에 새기고 묘실(廟室)에 비장되었을 뿐이요, 일찍이 나라 안에 알려지고 여러 사람들에게 보여 주어서 대왕의 그 넓은 뜻과 큰 사업을 천한 사람과 부녀ㆍ아동들까지도 누구나 다 입으로 외우고 마음속에 간직하게 한 일이 없었는데,효종대왕의 큰 계획과 사업을 세상에 알리는 일이 과연 시열이 지은 지문의 두어 글귀의 말에 의하여 이루어질 수 있었을 것입니까. 전일에 이런 문구를 끝내 뽑아버렸더라면 이 일로 인해서 효종대왕의 큰 사업이 장차 어두워져서 끝내 드러날 수 없게 될 것이겠습니까.
계적 등이 말하기를, ‘시열이 손적의 일을 인용하여 신의 조부를 풍자하여 경고한 것은 신의 조부로 하여금 참회하고 깨우치게 하려 한 것으로서 역시 효종대왕 당일의 끼친 교훈을 실천한 것이다.’ 하였으니, 아아,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적어도 이 능지(陵誌)의 일만은 만약 시열이 신의 조부에 대하여 감정을 품어 오던 사실의 일단이라고 한다면 가하거니와, 이것으로 하여 신의 조부를 풍자하여 경고한 것이라고 하는 것은 더욱 같지 않은 말입니다.시열은 그 감정으로 다른 사람의 흠집을 찾고, 분한 김에 되는대로 꾸짖는 버릇이 이르지 않는 데가 없었지만 이 사실에 대해서만은 애당초 한 마디도 언급한 것이 없었으니, 여기서 그 자신으로서도 감히 이것으로써 신의 조부를 허물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물며 신의 조부는 여기에 대하여 원래부터 양심으로써 반성하여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니, 다시 무슨 부끄럽고 뉘우침이 있을 것이겠습니까.
지금 시열이 죽은 지도 이미 오래되었는데 계적 등이 여기서 다시 시열도 끄집어 내지 않았던 의사를 거슬러 생각하여 그것으로 사람을 공격하는 근거를 삼으려 하니, 이 역시 거듭 시열을 그르치게 하는 일이 심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더군다나 오늘 와서 효종대왕이 끼친 교훈 등의 말을 한다는 것은 어찌 오늘의 신자(臣子)로서 감히 끌어다 붙이고 주워 모아서 그 당파를 비호하는 말로 쓸 수 있겠습니까. 아아, 무엄하기도 심하고 더욱 가슴 아픈 일입니다.
계적 등은 또 말하기를, ‘남한산성에서 화친이 이루어진 후로 온 세상의 기개와 절조는 없어지고, 춘추 대일통의 의리에 어두웠는데, 시열이 춘추대의에 충실하여 효종대왕의 뜻에 보답하였기 때문에 신의 조부와 의사가 불합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의 어그러지고 망령되기 이를데 없는 것이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아마도 인조대왕이 부득이하여 우선 오랑캐를 덤비지 않게 얽어 매어둔 것은 장차 다시 힘을 기르기를 도모한 것이요, 효종대왕이 개연히 분발하여 장차 대의를 펴 보려 한 것은 곧 인조대왕의 의사를 잘 계승한 것으로서 전성(前聖)이나 후성(後聖)은 그 계획이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춘추 대일통의 의리가 어떻게 전에는 어둡고 후에는 밝은 것이며, 신하된 자로서 어찌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신의 조부는 효종대왕에 대하여 서로 마음으로 통한 것은 이미 효종대왕께서 심양에 가 계실 때에 볼 수 있으며, 군신의 친밀한 정의가 합한 것은 효종대왕께서 국정을 맡던 당시에 더욱 현저하였습니다.따라서 비록 강한 이웃 나라에게 핍박당하는 큰 책임을 맡았지만 효종대왕 재위 10년간에 예로 대우하기를 날로 융숭히 하여 다른 정승이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그동안에 있은, ‘충성이 해를 뚫는데 내가 바야흐로 믿는다.’ 하는 □ 유시나, ‘충성되고 바른 마음은 천지신명도 증명할 것이다.’라는 포장(褒獎)은 더욱 신의 조부가 효종대왕에게 특별한 인정을 받은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아아, 아침 해가 처음 올라오니(효종의 즉위) 만백성이 모두 눈을 씻고 보는데, 효종대왕의 어진 덕을 열어 넓히고 새 정치를 빛내어서 사방 초야에 있는 선비들에게도 모두 갓을 털고 옷끈을 매고 효종의 크게 일을 도모하려는 뜻에 도움을 이바지하려고 생각하게 한 것이 누구의 공이었습니까.이렇게 본다면 시열도 신의 조부가 아니었으면 역시 어떻게 춘추대의의 말로써 효종대왕께 아뢸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효종대왕께서 춘추대의를 밝혀서 선대왕의 뜻을 받아 선대왕이 사업을 계승한 것이 실은, 신의 조부가 그 시초에서 협찬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그렇다면 신의 조부가 효종대왕께 대하여 군ㆍ신의 의기가 서로 잘 합한 것이 시열보다 먼저였으며, 문무의 계책을 협찬하여 왔으며, 그때 그때의 일마다 진력한 사람은 신의 조부만이었습니다. 송시열처럼 편안하고 한가한 때에 담론하는 것과 신의 조부처럼 위급한 때에 진력하는 일은, 벌써 경우가 다르고 정신과 행사도 같지 않은 것이니, 그 의기가 그와 서로 합하지 않은 것은 있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아아, 춘추의 대의는 원래 시열이 자처한 것입니다. 그런데 춘추의 대의명분은 그 중한 점이 오랑캐를 물리치는 데에 있는 것인데, 여기에 대하여 대의를 붙들고 대의 아닌 것을 억누르는 도리가 마땅히 근엄하여야 할 것인데, 지난 경인년의 변이 있을 때에 이만(李曼)이 청인의 위협에 겁내어서 스스로 임금을 잊어버리고 나라를 저버리는 죄에 빠졌으니, 왕법으로 처단하는 것이 마땅히 먼저 이 사람에게 실시되었어야 할 것입니다.그렇지만 청인이 정직하다고 칭찬하면서 우리에게 그를 쓰라 하였기 때문에 조정에서 엄한 형벌을 주지 못하고 우선 목숨을 유지하게 하였는데, 시열이 이미 신의 조부와 대립하려고 하여서 다시 이만의 벼슬길을 열어 주고, 좌우로 주선하여 주었습니다.아아, 시열이 청인들이 이만을 정직하다고 칭찬한 말을 받들어 따른 것이 지극하였으니, 춘추의 대의가 원래 이럴 수가 있습니까. 계적 등이 걸핏하면 춘추를 들고 나와서 신의 조부를 비방하는 것이 더욱 한 번의 냉소꺼리도 되지 않습니다.
계적은 또 세당(世堂)이 지은 비문 중의 말을 끄집어 내서 시열의 무함당한 것을 송사하고, 신의 조부를 무함할 꾀를 쓰고 있습니다. 그 중에도 ‘행위순비(行僞順非)’ 네 글자는 처음부터 세당의 글이 아니었는데, 계적 등이 어디서 얻어 가지고서 전하께 아뢰는 말에서, ‘그 글을 보옵건대’라고까지 하는지 모르겠습니다.계적 등의 상소 중에서 진(眞)이 되느니, 시(是)가 되느니, 하는 말들이 매우 어그러지나 행위니 순비니 하는 것이 벌써 근거 없는 것을 지어 낸 것이니 가소로운 일이요, 변명할 것도 못 되겠습니다. 그러나 그 중의 누가 올빼미고 누가 봉황이며 누가 군자요, 누가 불선한 사람 등의 말로 반복하여 가며 마구 비방하여 다시 말할 여지가 없는 데에는 통탄할 일입니다.
대체로 음흉하고 사나우며, 다른 짐승을 쳐서 만족할 줄을 모르는 것은 올빼미의 성질이요, 평화스럽고 상서로워 썩은 쥐를 노리는 솔개와 다투지 않는 것은 봉황의 덕입니다. 물건을 끌어다 사람에 비유하는 데에 있어서는 그 성질에 따라서 평론하여야 하는 것이니, 올빼미와 봉황의 분별이 제각기 돌아갈 데가(올빼미는 시열에게, 봉황은 경석에게) 있을 것인데, 이른바, 누가 불선인(不善人)이요, 누가 군자라는 것도 역시 미루어서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점은 백세 후의 공정한 의논만을 기다릴 것이요, 신들이 애써 변명할 것도 아니겠습니다.
처음 시열이 일찍 도덕 있는 이를 친하여 갑자기 중한 이름을 얻게 되었는데, 신의 조부가 천거 선발하여 끌어들인 것은 참으로 선비를 사랑하고 어진 이를 진출시키는 성심에서 나왔던 것입니다.그런데 갑자기 그 사람의 배반을 당하여 업신여김을 적지 않게 받았으며, 그 남은 감정의 영향으로 끼친 화가 아직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당시 시열의 지위와 세력이 한창 성하였을 때에는 온 세상을 거느려서 자기를 따르게 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옆으로 살피고 엿보면서 그 의심과 성냄을 쌓았으나, 신의 조부는 언제나 허심탄회로 일찍 시열의 그런 것을 깨닫지 못하고 나라를 위하는 충성된 말이 여러 번 그의 칼날을 범함을 면치 못하였습니다.그런데 오늘에 와서 신의 조부를 의논하는 자가 만일 신의 조부가 사람을 아는 데에 실수하고, 처세에 소루하였다고 한다면 혹 말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계적 등의 상소에서, 종이 위에 가득 찬 그 능멸하고 업신여기는 말은 이것이 어떻게도 그렇게 실지와는 너무나 동떨어지는 것입니까. 아아, 평생을 통하여 사모하다가 나중에 가서 버리는 것은 옛사람이 깊이 수치스럽게 생각한 바입니다. 세상에서 시열의 심술을 의심하는 것도 대다수가 이런 일들 때문입니다.
기유년의 시열의 상소도 실은 그 중의 하나인데, 무릇 옳은 것을 옳다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 하는 양심을 가진 사람으로서야 누가 시열의 그런 것을 모르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계적 등이 시열을, 순수하고 조그만 흠도 없는 지위에 끌어올리면서 신의 조부를 무함하고 욕설하여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니, 전하를 속일 수야 있겠습니까. 공정한 의논을 막을 수야 있겠습니까.아아, 전에 시열과 좋아하다가 끝까지 잘 보전한 이가 몇 사람이나 됩니까. 오늘의 사대부들 중에서도 그에게 욕을 먹지 않은 사람이 드물지만 다만 숨기고 말하지 않는 것뿐입니다. 혹 시열의 욕한 일이 전의 선대에게 관련되더라도 오히려 분주하게 따라다니면서 성낼 줄을 모르는 것은 단지 편당되어 붙기에만 급하여 경(편당)ㆍ중(선대의 욕)이 거꾸로 되는 줄을 모르고 있으니, 아아, 얼마나 어리석고 수치스러운 일입니까.
세당이 글을 지은 것은 사실 금년 봄의 일로서 아직도 탈고가 되지 못하였으나, 사대부들간에는 차츰차츰 비문 내용에 대하여 말이 전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시열을 따르는 자들이 듣고서는 감정을 품고, 상소하려고 의논하는 자도 있었으나 좀 지식 있는 사람들이 많이 옳지 않다고 하기 때문에 마침내 중지되었던 것입니다.그런데 뜻밖에도 전 주부 김창흡(金昌翕)이라는 자가 극성스럽게 시열을 옹호하기 위하여 장문의 편지를 써서 세당의 제자에게 보냈는데, 그 말이 어그러지고 흉악하여 신의 조부를 꾸짖어 욕한 것은 차마 들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편지의 한 통의 등본이 먼저 태학으로 들어갔는데, 태학생 중의 경박한 무리들이 그 의사를 받아서 따르고, 잠잠해지던 말을 다시 선동하여서 끝내는 전하를 속이려고 한 데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그런데 지금 계적 등의 상소를 보면 그 맥락과 기관이 모두 창흡의 글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으니, 계적과 창흡 사이에 한 꼬지로 꿴 것은 빤히 볼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신 등이 창흡의 한 사사로운 편지를 가지고서 사사로이 서로 반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창흡의 집안 의논을 가지고서 증거 대겠습니다.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은 신의 조부의 연배보다 훨씬 앞서지만 신의 조부에 대해서는 추천하여 권장함이 특별히 후하였으며, 그의 상소 중에서 칭찬하여 말한 것으로 보더라도 사문(斯文)의 큰 종장(宗匠)이라고까지 높였습니다. 그리고 고(故) 정승 김수항(金壽恒) 같은 이도 신의 조부 섬기기를 매우 공경하였으며, 신의 조부를 조상하는 글을 지을 때에는 벽두에서 선생으로 칭호하고, 그 글에서는, ‘하늘의 정기를 받고 낳아서 나라의 으뜸 신하가 되었도다.마음은 적자심(赤子心) 그대로 보전하였고, 행실은 온전히 인륜을 극진히 하였도다. 효도와 우애에 근본하고 나아가서는 충성을 온전히 하였도다.조정에 상서로움이 봉황 같고 기린 같았도다. 한 절개로 세 조정을 섬겼는데 조금도 흠점이 없었도다. 위태로움을 당하여 말로 항쟁하니 나라를 위하여 한 몸을 잊었도다. 우뚝한 그 인격, 우리 국민을 든든케 하였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그가 지은 만시(輓詩)에서는, ‘몸ㆍ이름ㆍ출신ㆍ은퇴 모두 허물이 없는데, 충효와 문장ㆍ덕업도 온전하네’라고 하였습니다.
아아, 우리나라에서 큰 절개를 세우고 맑은 의논을 유지한 사람으로서 상헌의 위에 오를 사람이 없으며, 밝은 식견으로 좀처럼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상헌 이상 없을 것인데, 사문의 큰 종장이라는 칭도가 정축년 10년 후에 있었으니, 그가 일찍이 <삼전도 비문> 지은 일로 흠잡지 않고 시종일관 공경하고 중히 여겼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수항인들 역시, 어찌 좋아하는 이에게 아첨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겠습니까마는 그가 신의 조부에 대하여 덕행을 높여 받들고 명절(名節)을 찬양한 것이 또한 이러하였습니다.
그런데 창흡의 편지 중에서 이른바, 기절이 못나고 약하며 의견이 허무하여 향원(鄕愿)의 규모와 같은 점이 있다는 말은 어찌도 그렇게 일일이 서로 반대되는 것입니까. 상헌은 창흡의 할아버지요, 수항은 창흡의 아버지입니다. 그런데도 창흡이 오만하게 스스로 높은 체하며, 저의 선인들을 없는 것처럼 보고 삿된 의론을 지어내어 시열을 높이기에만 급급하여 그 패륜 무례함이 여기에까지 이르렀습니다.그런데 저 계적의 무리는 그의 턱짓만 따르고 그의 입의 거품을 우러러 받아먹는 자이니, 이에 또 무엇이라고 말할 것이겠습니까. 하물며 수항의 글에서 이미, ‘봉황 같고 기린 같다.’고 하였으며, 선왕조에서 하사하신 제문(祭文)에서도, ‘백관의 모범으로 상서의 봉황과 상서의 기린이다.’라고 하였으니, 그 당시 상ㆍ하에서 신의 조부의 미덕을 이렇게 형용하여 말한 것은 자연히 정론이 있었던 것이요, 오늘 박세당의 비문에서 일컬은 것만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무리들이 봉(鳳)이라는 한 글자에 노하여 나쁜 말로 도로 꾸짖는 것은 도대체 또 무엇입니까.
창흡이 처음에는 신의 조부가 정릉(貞陵) 부묘(祔廟)의 의논에 대하여 의견을 달리하였다고 하면서 한 큰 흠으로 지목하였는데, 온 세상이 들고 일어나서 그것이 사실과 다름을 공격하였으므로 계적의 상소에서는 그것을 감히 다시 들어 말하지 못하고, 여기서 영릉(寧陵) 지문(誌文)에 대한 것을 가지고 날조하여 말을 만들었으니, 그들의 거짓으로 만든 자취가 이에 이르러 더욱 숨길 수 없는 것입니다.
아아, 오늘의 이 일은 전하의 밝으심으로 이것을 공정하다고 하십니까. 태학은 공론이 있는 곳인데, 소가 태학에서 올라왔으니 마땅히 공정하다고 할 것입니다.다만 신 등이 적이 들으니, 창흡이 그 말을 선동하자 한두 귀족의 서로 잘 지내는 자들이 따라서 찬동하여, 이에 그 몇 집에서 그들의 20세 이상의 자제들과 또 그들의 이웃과 인척 친척들을 권유하며, 시골 선비들 중의 성균관ㆍ사학에 붙어 있는 자들을 위협하여 그 수효를 늘인 것입니다. 또한 그 상소도 실상은 그들 개인의 집에서 나온 것인데, 이것은 실지가 몇 집의 부자 형제들이 사사로이 주장한 것이니, 이것을 어떻게 태학의 공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아, 누구나 자기 조상에 대해서는 비록 정말 과오가 있더라도 그것을 지적하여 훼방하는 자가 있으면 그 통절한 마음이란 참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인데, 하물며 신의 조부는 전후의 하신 일이 순전히 충심으로 애국하는 데에 있었고, 처음부터 털끝만치도 잘못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창흡과 계적 등이 전에 시열이 감정풀이 하던 말을 부연하여 더러운 욕설이 도리어 시열보다도 더한 점이 있으니, 남의 자손된 처지에 하루아침에 이런 일을 당할 때에 그 가슴 아프고 뼈가 쑤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생각하오면 밝으신 전하께서 위에 계신 것이 해가 중천에 떠 있는 것 같아서, 인간의 한 남자나 한 여자의 원통한 일이라도 불쌍히 여기고 살피시어 쾌히 풀어 주시는 터이온데, 신의 조부는 두 조정에서 사보(師保)의 중한 지위와 당대에 태산 교악 같은 인망을 지니고 있었는데, 돌아간 후 30년 오늘에 와서 졸지에 조그만 더벅머리 아이들에게 무한한 더러운 욕을 당하여 실상이 밝혀지지 못하고 있습니다.생각하오면 전하의 생각도 여기에 미치시면 역시 조금 슬프게 느껴지실 것입니다. 하물며 전하께서는 일찍이 어렸을 때에 신의 조부의 명망과 덕행을 들으시고 한번 보려고 하시니, 선대왕께서 특별히 명하여 진알하게 하였는데, 그때의 조용한 문답이 이미 군신간의 서로 허락하는 정의를 이루었던 것이니, 오늘에 있어서도 항상 생각하시는 마음이 역시 그 사람을 언어나 용모 밖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서, 이 점은 세 분 대왕이 신의 조부를 예법으로 대우한 데에만 그칠 정도가 아니라고 봅니다.
신 등의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믿는 바는 오직 밝으신 전하뿐이오니 어찌 피눈물을 뿌려 소리 없이 울면서 급한 소리로 전하께 크게 호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 등은 또 생각하옵니다. 신의 조부가 평소에 너그럽고 부드러운 것으로 가르치고 무도한 사람에 대하여 보복하지 않는 것으로 자처하여 그 넓은 도량과 후한 덕이 더욱 다른 사람들의 탄복하는 바가 되었습니다.그리고 신 등이 아직도 기억하는 바이지만, 신의 조부가 기유년의 일을 당하였을 때에는 다만 한 장의 상소로써 그 본의를 밝혔을 뿐, 곧 다시 평탄한 마음으로 애당초 그런 말을 듣지 않은 것처럼 하였으며, 자손들을 대하여서도 일찍이 한 번이라도 무고하여 온 그 사람의 장ㆍ단점을 들어서 말한 적이 없었으니, 이 일은 신 등이 두고두고 마음속에 간직하여 잊지 못하옵니다.그런데 지금 와서 만약 털끝만치라도 실지에서 벗어난 말과 다른 사람을 탄핵하는 의사가 있다면 이것은 아래로 신의 조부를 저버리고, 위로 밝으신 전하를 속이는 일이옵니다. 신 등이 비록 매우 보잘것없지만 결코 감히 이런 일은 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 김창흡의 소의 대략은, “신의 증조부는 경석(景奭)과 대대로 교분이 보통 사이가 아니었으며, 신의 부친은 또 경석을 기구(耆舊)의 대신이라 하여 항상 존경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의 증조가 경석을 칭찬한 글 가운데에 이른바, ‘사문의 종장’이라 한 것은 글짓는 사람들을 높여 칭찬하는 데에 보통 쓰는 말입니다.어떻게 그 말이 그를 도덕과 명절(名節)이 순수하고 흠이 없어서 참으로 유림의 대종사가 된다고 말한 것이겠습니까. 지금 하성(厦成) 등이 이 한 구절의 말을 들어서, 드디어는 신의 증조부에게 경석의 <삼전도 비문> 지은 일을 흠으로 삼지 않았다고 하니, 어찌 심히 가소로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의 증조부가 비문 지은 일에 대해서는 비록 일찍이 분명히 지적하여 배척하지는 않았지만 그 의사가 어디에 있었다는 것은 다음 한 가지의 일로 미루어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즉 신의 증조부가 일찍이 상신 이정귀(李廷龜)의 비문을 짓고서 그 집 자제들에게 부탁하기를 ‘부디 <삼전도 비문> 글씨를 쓴 사람에게는 이 비문 글씨를 쓰이지 말라.’ 하였습니다.이렇듯 그 비문의 글씨를 쓴 사람에게 대해서도 남의 묘비를 더럽히지 못하게 했는데, 하물며 비문을 지은 사람에게 대해서야 어찌 흠으로 삼지 않겠습니까. 그 후 이씨 집에서 경석에게 그 비문을 쓰게 하니, 신의 부친 형제가 일찍이 탄식하기를, ‘선조의 뜻이 저러하였는데도 도리어 비문 지은 사람에게 글씨를 쓰게 하니 어찌 한심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습니다.
하성 등이 인용한 바, 신의 증조부가 지은 만장ㆍ제문 등에서 경석을 칭찬했다는 말은 실지로 있었습니다만, 만장 제문 등의 자체가 주로 그 몸가짐을 칭찬하는 것이기 때문이고, 평상시에 남이 논한 일을 평하며 일에 따라서는 비난하고 깎아 말하던 것과는 같을 수 없는 것입니다.신의 부친이 경석에게 대하여 일컬은 바, ‘세 조정을 한결같은 절개로 받들어 몸과 명예에 허물이 없었다.’는 것도 역시 그가 집에서는 효도하고 삼가며, 조정에 나가서는 충성하고 정성을 다하여 한때 어진 재상이 되었다는 것뿐입니다.그런데도 하성 등은 이것으로써, ‘신의 부친이 경석을 높여 받들고 기쁜 마음으로 복종하며 아주 흡족하여 서로 막힘이 없었다.’ 하면서, 후세의 사람들에게 감히 경석의 말이나 행실의 잘잘못을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하니 역시 지나친 것입니다.” 하였다. 《농암집(農岩集)》

[주D-001]조정에서 …… 것 : 선비가 조정에 뜻이 맞지 않으면 신끈을 졸라매고 조정을 떠나서 돌아간다는 것이다.
[주D-002]향원(鄕愿) : 향원은 온 고을 사람이 모두 점잖다[愿]고 칭찬하여 흠잡을 것은 없는 사람이나,이럭저럭 처세나 하고 착한 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을 말한다.
[주D-003]삼전도 비문(三田渡碑文) : 병자호란 뒤에 청 나라에서 우리 조정을 협박하여 자기네를 칭송하는 비문을 삼전도(三田渡)에 세우게 하였는데, 당시의 이름 있는 문사(文士)들이 글짓기를 싫어하였으나 이경석은 나라를 위하여 부득이 글을 지었는데, 송시열은 그것을 가지고 후일에 경석을 비방하였다.
[주D-004]노 나라의 문인 : 공자가 집정한 지 7일 만에 노(魯) 나라의 문인(聞人 名士)인 소정묘(少正卯)를 죽였는데, 그의 죄목(罪目)이, ‘행위순비(行僞順非)’ 등이었다.
[주D-005]상서롭지 …… 받았다 : 《맹자》에, “상서롭지 못한 실상(보복)은 어진 사람을 가리는(蔽賢) 것이다.” 하였다.
[주D-006]신풍의 글 : 신풍부원군 장유도 처음에 <삼전도 비문>을 지었는데, 청 나라 사람의 비위에 맞지 않아 쓰지 못하였다.
[주D-007]정백이 …… 이끌었다 : 초왕(楚王)이 정(鄭) 나라를 쳐서 점령할 때에 정백(鄭伯)이 항복하고 죄인의 차림으로 양을 몰고 초왕을 맞이하였다 한다.
[주D-008]주공 구역 : 구역(九罭)은 《시경》의 편명인데 주공(周公)을 칭찬한 말이다.
[주D-009]수하고 강녕하여 : 이것은 송 나라의 손적(孫覿)을 칭찬한 글에 나온 말인데,여기서는 송시열이 이경석의 수(壽)하고 강녕한 것을 칭송하는 척하면서 암암리에 금 나라 사람을 위하여 글을 지은 손적에 비유한 것이다.
[주D-010]비풍ㆍ하천 : 비풍(匪風)ㆍ하천(下泉)은 《시경》의 편명인데, 주(周) 나라의 천자가 미약하여진 것을 슬퍼하여 지은 시다.
[주D-011]적자심(赤子心) : 《맹자》에, “대인(大人)은 적자의 마음을 잃지 않는다.” 하였는데, 적자심은 순진한 어린아이의 마음을 말한 것이다.

 

 

 

 

 

 

 

인물지에서발췌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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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원(士元)
정재(定齋)
시호 문열(文烈)
생졸년 1654 (효종 5) - 1689 (숙종 15)
시대 조선 중기
본관 반남(潘南)
활동분야 문신 > 문신

[상세내용]

박태보(朴泰輔)에 대하여
1654년(효종 5)∼1689년(숙종 1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사원(士元), 호는 정재(定齋).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세당(世堂)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현령(縣令) 남일성(南一星)의 딸이다. 당숙인 세후(世垕)에게 입양되었다.

1675년(숙종 1) 사마시에 합격하고, 생원으로서 1677년 알성문과에 장원하여 전적(典籍)을 거쳐 예조좌랑이 되었을 때 시관(試官)으로 출제를 잘못하였다는 남인들의 탄핵을 받아 선천(宣川)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에 풀려났다.

1680년 부수찬·수찬·부교리·지평(持平)·정언(正言)을 거쳐 교리가 되었는데, 이때 문묘 승출(陞黜)에 관한 문제와 당시 이조판서 이단하(李端夏)를 질책한 상소로 인하여 파직되었다.

그뒤 서인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그의 환수를 청함에 1682년 홍문관사가독서(賜暇讀書)에 선발, 사가독서를 마치고 나서 이천현감(伊川縣監)으로 나간 것을 시작으로 부수찬·교리·이조좌랑, 호남의 암행어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가 호남에 암행어사로 다녀온 뒤에 중앙에 보고한 과감한 비리 지적에 조정의 대신들이 감탄하였으며, 호남지역의 주민들로부터도 진정한 어사라는 찬사를 받았다.

또한 당시 서인 중에서 송시열(宋時烈)윤선거(尹宣擧)가 서로 정적으로 있을 때, 윤선거의 외손자임에도 불구하고 친족관계라는 사심을 떠나 공정하게 의리에 기준을 두고 그 옳고 그름을 가려 통쾌하게 논조를 전개하여나갔던 바도 있다.

이어 응교를 거쳐 파주목사로 나갔을 때, 조정에서 성혼(成渾)이이(李珥)의 위패를 문묘에서 빼어버렸는데, 그가 부임하여 재직하는 파주에서는 조정의 정책에 따르지 않고 그대로 이를 존속시켜나갔다 하여 인책, 면직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 때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위를 강력히 반대하는 소를 올리는 데 주동적인 구실을 하였다가 심한 고문을 받고 진도로 유배 도중 옥독(獄毒)으로 노량진에서 죽었다. 재주가 뛰어나서 젊은 나이에 장원급제를 한 경력이 있으며, 학문적인 태도도 깊고 높아 당대의 명망 있는 선비들과도 깊은 교유관계를 가졌다.

특히 그가 교유한 친우는 주로 서인의 소론파들로 최석정(崔錫鼎)·조지겸(趙持謙)·임영(林泳)·오도일(吳道一)·한태동(韓泰東) 등이 있다. 타고난 성품도 뛰어나 지기(志氣)가 고상하고 견식이 투철하여 여러 차례의 상소를 통해서 보여준 바와 같이 시비를 가리는 데는 조리가 정연하고 조금이라도 비리를 보면 과감히 나섰으며 의리를 위해서는 죽음도 서슴지 않았다.

그가 죽은 뒤 왕은 곧 후회하였고,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정려문이 세워졌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풍계사(豊溪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정재집》 14권, 편서로 《주서국편 周書國編》, 글씨로는 박임종비(朴林宗碑)·예조참판박규표비(禮曹參判朴葵表碑)·박상충비(朴尙衷碑) 등이 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景宗實錄
正祖實錄
純祖實錄
燃藜室記述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定齋集
朝鮮金石總覽

 

숙종 3년 정사(1677,강희 16)
 3월26일 (임인)
문묘에서 작헌례를 행하고 과거를 보아 인재를 뽑다

임금이 문묘(文廟)에서 작헌례(酌獻禮)를 친행(親行)하고,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과장(科場)을 차리고 문과(文科)를 보여 박태보(朴泰輔) 등 7인을 뽑았다. 임금이, 무과(武科) 규정에 편전(片箭)을 두 번 맞추게 하는 것이 어렵다고 하여, 한 번 맞춘 사람도 또한 급제(及第)를 주도록 명하고, 이어 관무제(觀武才)를 시행하고, 또 문신(文臣)에게도 관혁(貫革)을 쏘도록 하고 내관(內官)들도 또한 쏘도록 하였다.
【원전】 38 집 352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왕실-행행(行幸)


[주D-001]관무제(觀武才) : 무과 시험(武科試驗)의 하나로, 초시(初試)와 복시(覆試) 두 가지가 있음. 초시에는 2품 이상의 문무관 2명, 복시에는 2품 이상의 문관 1명과 무관 2명을 보내어 시험을 보게 하였는데, 특별한 어명(御命)이 있을 때에만 이 시험을 보았음. 복시는 반드시 임금이 친림(親臨)한 가운데 시행하였는데, 여기에서 성적이 우수한 사람은 즉시 지방의 수령(守令)이나 변장(邊將)에 임명하거나 품계를 올려 주었음.

 

숙종 15년 기사(1689,강희 28)
 5월4일 (기해)
박태보의 졸기

박태보(朴泰輔)가 길을 떠나 과천(果川)에 이르러 병이 위중해져 드디어 죽었다. 박태보의 자(字)는 사원(士元)이니, 박세당(朴世堂)의 아들이다. 사람됨이 청개 경직(淸介勁直)하였는데, 일찍이 괴과(魁科)로 발탁되어 문학(文學)으로 이름이 있었고, 또 정사에 재능이 있었다. 창졸지간에 일어난 변고(變故)를 당하여 한 몸으로 곤극(坤極)을 붙들고 인기(人紀)를 세워서 세도(世道)의 중함이 되었다. 의(義)를 진달하고 이치를 분변하여 끝까지 조금도 굽히지 않았으며, 도거(刀鋸)를 마치 다반(茶飯)처럼 보았으니, 아! 장렬(壯烈)하도다. 다만 그 성품이 평소에 편협하고, 또 윤선거(尹宣擧)의 외손으로 사론(士論)이 둘로 나뉘었을 때 힘껏 송시열(宋時烈)을 헐뜯었고, 윤선거의 강도(江都)의 일은 ‘죽을 만한 의(義)가 없다.’고까지 하였다. 또 송시열의 아버지 송갑조(宋甲祚)를 무함하여 그 외증조(外曾祖) 윤황(尹煌)을 추장(推奬)하는 뜻에 어긋남을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므로, 사람들이 환혹(抅惑)됨을 병통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에 이르러 송시열은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리고 소식(素食)을 하였고, 이어 자손에게 박태보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죽을 때 나이가 39세인데, 뒤에 증직(贈職)·정려(旌閭)하고 시호(諡號)를 문열(文烈)이라 하였다.
【원전】 39 집 187 면
【분류】 *왕실-비빈(妃嬪) / *사법-행형(行刑) / *인물(人物) / *인사-관리(管理) / *윤리-강상(綱常)


[주D-001]도거(刀鋸) : 형구(刑具).
[주D-002]환혹(抅惑) : 현혹됨.
[주D-003]소식(素食) : 생선이나 고기를 쓰지 않은 음식.

 

 

숙종실록보궐정오 15년 기사(1689,강희 28)
 5월4일 (기해)
전 응교 박태보의 졸기

전 응교(應敎) 박태보(朴泰輔)를 죽였다. 박태보는 오두인(吳斗寅) 등과 더불어 상소하여 왕비를 폐하는 것을 간쟁하다가 임금의 위엄과 노여움에 저촉되었는데, 박태보는 상소를 짓고 썼기 때문에 오두인·이세화(李世華) 등과 함께 정국(庭鞫)을 당했다. 박태보는 직언(直言)으로 항거하고 조금도 굽히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형(刑)을 받음이 더욱 혹독하였다. 이미 여러 차례 엄형(嚴刑)을 받고, 또 화락(火烙)과 압슬(壓膝)을 가하여 형벌의 독함이 다 갖추어지고 지독하여 몸이 모두 문드러졌으나, 정신은 끝내 흐트러지지 아니하여 대답하고, 서명(署名)하는 데 있어서도 반드시 꿇어 앉고 행동을 절도에 맞게 하였다. 밤이 깊어서 임금이 굽히지 아니할 것을 알고는 국문을 파하였는데, 곧 대신(大臣)의 말로써 절도(絶島)에 위리 안치(圍籬安置)하라고 명하였으나, 노량(露梁) 육신사(六臣祠) 옆 길에서 죽었고, 오두인도 극변(極邊)으로 귀양가다가 길에서 죽었으며, 홀로 이세화만 귀양갔다가 살아 돌아와서 신사년에 이르러 인현 왕후(仁顯王后)가 승하하기 하루 전에 졸(卒)하였다.
박태보는 청명 특절(淸明特絶)한데다 경술(經術)까지 뛰어나 이치를 봄이 밝고 의(義)를 행함에 용감하며, 자율(自律)의 엄함은 척폭(尺幅)을 끊은 듯하고 자신(自身)의 독실함은 분육(賁育)도 빼앗을 수 없었다. 아는 것이 뛰어나고 말과 의논이 강하고 과감하며, 상소하고 일을 논하는 데에 권귀(權貴)를 용서하지 아니하니, 맑은 이름과 곧은 도(道)는 경신년 사류(士類) 가운데서 첫번째가 되었고, 문장(文章)과 정사(政事)는 다만 그 곧은 도(道)의 찌꺼기에 불과하다. 세상과 합치됨이 적어서 벼슬길에 어긋났는데, 변고를 당함에 미쳐서 7척의 몸을 버리고 곤극(坤極)을 붙들어, 의연(毅然)히 강상(綱常)의 중함을 맡아서 뇌정(雷霆)에 부닥치고 정확(鼎鑊)이 늘어 있는 데에도 편안한 자세로 떳떳한 법을 잃지 아니하였으며, 조용히 죽음에 나아가기를 낙지(樂地)에 나아가는 것과 같이하였으니, 세상에서 모두 그 충성을 가여워하고 그 절개를 장하게 여겼으며, 비록 평소에 망령되게 비난한 자라고 하더라도 모두 슬퍼하며 심복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우연히 창졸간에 이루어진 것이겠는가? 대저 가정 학문의 바름과 본래 수양의 돈독함을 속일 수 없음이 있는 것이다. 박태보의 형 박태유(朴泰維)도 문장에 능하고 대성(臺省)에 있으면서 곧은 이름이 있었는데, 당로(當路)를 거슬러서 외방으로 내쳐졌다가 갑자기 죽으니, 아는 이가 그 명이 짧음을 애석하게 생각하였다.
【원전】 39 집 211 면
【분류】 *왕실-비빈(妃嬪) / *사법-행형(行刑)


[주D-001]화락(火烙) : 단근질하는 형벌.
[주D-002]신사년 : 1701 숙종 27년.
[주D-003]분육(賁育) : 맹분(孟賁)과 하육(夏育). 춘추 전국 시대의 용사(勇士)임.
[주D-004]정확(鼎鑊) : 형구(刑具).
[주D-005]당로(當路) : 집정자(執政者). 또는 요로(要路).

 

경종 3년 계묘(1723,옹정 1)
 10월29일 (을해)
증 영의정 박태보·좌의정 윤증에게 시호를 내리다

증(贈) 영의정(領議政) 박태보(朴泰輔)에게 문렬(文烈)이란 시호(諡號)를, 좌의정(左議政) 윤증(尹拯)에게 문성(文成)이란 시호를 내렸다.
【원전】 41 집 304 면
【분류】 *인사(人事)



약천집 제27권
 제문(祭文)
노강서원(魯岡書院)에 팔송(八松) 윤공 황(尹公煌) 과 노서(魯西) 윤공 선거(尹公宣擧) 두 선생을 봉안한 제문 을묘년(1675, 숙종 1)


아, 팔송이시여 / 於惟八松
태어날 때 특이한 자품을 받았고 / 生稟異質
파산에 위금하여 / 委禽坡山
그 가르침을 이었네
/ 承其旨訣
인정을 받음은 이한(李漢)과 같고 / 受知如漢
도를 들음은 황간(黃幹)과 같았다오 / 聞道似幹
학문이 넉넉하여 벼슬길에 올라서 / 學優登仕
왕의 계책을 도우시니 / 王猷是贊
주나라를 높인 대의가 / 尊周大義
해와 별처럼 빛났도다 / 炳如日星
곧은 말로 화의(和議)를 배척하고 / 直辭攻和
올곧은 의논으로 경서를 붙들었네 / 㞃議扶經
천지가 뒤집혀 오랑캐가 득세하자 / 天翻地覆
죽음으로 맹세하시니 / 以死自誓
몸은 굽혔으나 도가 펴져 / 身屈道伸
후세에 칭찬을 받고 있네 / 有辭來世
노서에 이르러 / 逮于魯西
대대로 훌륭한 덕을 이으시어 / 奕世載德
이미 시와 예를 전하고 / 旣傳詩禮
또 학문을 묻고 배웠네 / 且從問學
호굉(胡宏)이 강후(康侯)를 잇고 / 宏承康侯
채침(蔡沈)이 서산(西山)을 이었다오 / 沈繼西山
몸을 깨끗이 하고 지조를 지키며 / 潔身守志
영화를 사양하고 한가롭게 거처하시니 / 辭榮處閒
크고 굳세어 중한 임무를 맡고 / 弘毅任重
효도와 공경이 신명을 통하였네 / 孝悌通神
그 몸에 넉넉하여 / 裕于厥躬
후인에게까지 베푸시니 / 施及於人
와서 도를 구하는 자가 있으면 / 有來求道
모두 인도하여 밝혀 주었다오 / 咸牖以明
좋은 말씀과 남겨 주신 가르침 / 緖言遺敎
백대에 모범이 될 수 있네 / 百代可程
돌아보건대 이 고향은 / 睠玆鄕邦
지팡이 짚고 신 신고 노니신 곳이니 / 杖屨所游
덕스러운 모습을 생각하면 / 追惟德容
어렴풋이 자취가 남아 있는 듯하다오 / 僾然若留
의귀할 곳이 있으니 / 依歸有所
어찌 경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詎宜無營
이에 사당을 세워 / 於焉建祠
영령을 편안히 모시었네 / 于以妥靈
변두를 함께 진열하고 / 具陳籩豆
선비들 사방에서 모였다오 / 四合冠衿
두 대를 함께 제향하니 / 兩世同享
유림에 빛나도다 / 事光儒林
지산은 우뚝하고 / 枝山嶷嶷
우물은 콸콸 솟으니 / 並井湯湯
우리 후학들 돌보아 / 惠我末學
저 산과 우물처럼 무궁하게 하옵소서 / 與之無疆


 

[주D-001]파산(坡山)에 …… 이었네 : 파산은 파주(坡州)로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집안을 가리키며, 위금(委禽)은 사위가 되었다는 뜻이다. 금(禽)은 기러기〔雁〕인데 혼례(婚禮)에서 납채(納采)할 적에 나무로 만든 기러기를 올리던 데에서 왔다. 곧 윤황이 우계의 사위가 되어 그의 가르침을 받았음을 뜻한다.
[주D-002]이한(李漢) : 당(唐)나라 한유(韓愈)의 사위로서 창려문집서(昌黎文集序)를 지었다.
[주D-003]황간(黃幹) : 주자(朱子)의 문인으로 주자의 적통을 계승하였다.
[주D-004]호굉(胡宏)이 강후(康侯)를 잇고 : 강후는 북송(北宋)의 학자인 호안국(胡安國)의 자(字)이며, 호굉은 그의 아들로 부친의 학통을 이어 유명하였다.
[주D-005]채침(蔡沈)이 서산(西山)을 이었다오 : 서산은 북송의 채원정(蔡元定)을 가리키는바, 주자(朱子)의 문인으로 일찍이 복건성(福建省) 건양현(建陽縣) 서북쪽에 있는 서산(西山)에 은거(隱居)하며 강학하니 배우는 자들이 ‘서산 선생’이라 칭하였다. 채침은 그의 아들로 또한 주자에게 배우고 사위가 되니 부자(父子)가 학문을 계승하여서 유명하였다.

 

약천집 제27권
 제문(祭文)
서계(西溪) 박형(朴兄)에 대한 제문

계미년 9월 갑진삭 16일 기미에 부제(婦弟)인 의령 남구만은 자형(姊兄)인 서계 박공(朴公)의 부음을 멀리서 듣고 삼가 닭 한 마리와 술 한 병을 보내어 영연(靈筵)에 올리며 제문을 고합니다.

이 아우는 형과 / 維弟與兄
나이는 같으나 달이 늦으며 / 年同月後
또 저의 누님이 / 且我之姊
형에게 시집가 아내가 되었으니 / 歸兄爲婦
정의(情誼)는 형제와 같고 / 情比天倫
의리는 존경하는 벗과 같았습니다 / 義則畏友
약관 시절에 종유하여 / 勝冠從游
이제 백발에 이르니 / 今至白首
어질고 미련함은 비록 다르나 / 賢愚雖懸
서로 정은 친하였습니다 / 相與則厚
형은 일찍 용퇴하여 / 兄早勇退
세속을 초탈하였는데 / 超脫科臼
이 아우는 명예와 이익을 탐하여 / 弟耽名利
진세에 매몰되었으니 / 乾沒塵垢
높은 풍도를 우러러볼 때마다 / 每仰高風
더욱 나의 추한 모습 느꼈습니다 / 益覺我醜
지난번 죄를 받고 귀양 갔다가 / 頃從罪謫
석방되어 전원으로 돌아오니 / 放還畎畆
산천이 멀리 막혀 / 山川隔遠
그리운 생각 간절하였습니다 / 戀思紛糾
서로 만나기를 어찌 바라리오 / 會面何望
소식 또한 끊어진 지 오래되었습니다 / 阻音亦久
세상일이 다단하여 / 世事多端
별별 일이 다 있었습니다 / 靡所不有
어이하여 세상 밖에 있는데 / 胡處物表
마침내 많은 구설수를 듣는단 말입니까 / 乃增多口
하늘과 인간 중에 / 於天於人
어디와 합하고 어디와 합하지 않았습니까 / 孰畸孰偶
그 이유를 알 수 없으니 / 不得其解
장차 누구에게 묻겠습니까 / 將問誰某
그러나 밖에서 이르는 것은 / 然於外至
이미 밀치고 받지 않았습니다 / 旣擠不受
본래 얻고 잃음이 없으니 / 本無得喪
어찌 좋고 나쁨이 있겠습니까 / 安有休咎
병환을 막 걱정하고 있었는데 / 方憂美疢
부음이 손에 이르니 / 赴書及手
아마도 이 세상을 슬퍼하여 / 豈悲斯俗
사는 것을 구차하게 여겨서입니까 / 謂生爲苟
백 세에 미치지 못하니 / 未及百年
어찌 장수했다고 말하겠습니까 / 何足曰壽
이 아우는 잔약하고 병들어 / 念弟孱病
날로 노쇠함에 이르니 / 日就摧朽
갈 날이 장차 임박하여 / 逝將朝暮
형을 좌우에서 따르리다 / 隨兄左右
이로써 스스로 위로하며 / 用此自慰
서글픈 마음 달랩니다 / 不令心剖
멀리서 제문을 봉함하여 / 遙封誄文
닭과 술을 올리며 / 副以雞酒
계당을 바라보고 / 瞻望溪堂
한 종을 절하여 보냅니다 / 拜送一走
말은 이에 그치나 / 言則止此
뜻은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 意不可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