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신묘년 산행 /2011.2.15. 삼각산

2011. 2.15. 도봉산 산행(매표소 다락능선 미륵봉 전망바위 와이계곡 주봉)

아베베1 2011. 2. 17. 13:43

 

 푸르른  도봉산만 부질없이 바라보네   空望道峯靑

 

 

 

 

 

 

 


사가시집 제1권
 부류(賦類)
압구정부(狎鷗亭賦)



이 관람의 광대함을 좋아한 이가 있음이여 / 客有好玆觀覽之博大兮
끝없이 넓은 나의 소원을 품었도다 / 齎予志之瀁瀁
어찌 답답하게 내 이 한구석에 있으리요 / 夫豈鬱鬱予一隅兮
혼돈 상태와 광활한 공간을 뛰어넘어 / 超澒洞與空廣
사방 끝을 다하여라 어찌 끝이 있으랴 / 窮四際兮焉極
고금을 열력하며 함께 오르내리도다 / 閱古今而俯仰
갑자기 하토의 적소를 내려다봄이여 / 忽臨睨夫下土之積蘇兮
그 누가 나의 호탕함을 알겠는가 / 孰知予之浩蕩
한고에서 나의 수레를 멈추고 / 弭予節兮漢皐
압구정에 올라 이리저리 바라보니 / 登狎鷗兮騁目
건곤의 혼돈 상태를 열었음이여 / 開乾坤之混沌
우주의 광대함이 확 트이었도다 / 廓宇宙之盤辟
인간 세계로부터 운우 위에 치솟아 / 軼雲雨於下界
항해를 취하여 하늘에 다다르도다 / 挹沆瀣而上薄
줄줄이 서 있는 사방 산들을 마주하고 / 面四山之立立兮
세차게 흐르는 강물을 굽어보도다 / 俯江流兮湯湯
아스라이 만 리가 요원 광활함이여 / 渺萬里兮泱莽
광활함 속에 삼라만상을 포함했도다 / 涵衆象於淼茫
동으로 바라보면 산악들이 지극히 높아 / 東望則列岳峻極
위로 하늘 높이 치솟았고 / 上磨寥廓
겹겹의 등성이와 봉우리들은 / 重岡複嶺
용이 날고 범이 뛰는 듯하네 / 龍跳虎躍
금대는 지극히 높고 / 金臺兮嶔岑
화개는 우뚝하도다 / 華蓋兮崒嵂
여섯 자라는 힘을 크게 써서 / 六鼇奰屭
봉래 영주를 머리에 이었도다 / 頭戴蓬瀛

하늘의 별들은 빛을 나눠주고 / 天星分曜
지축은 신령함을 나타내도다 / 地軸效靈
낙천정은 드높아 용마루가 화려하고 / 樂天崇兮畫棟
화양정은 우뚝해라 높다란 정자로다 / 華陽屹兮危亭
월악산은 첩첩으로 깊숙하여 / 月岳嶙峋
한강의 발원지가 되었으니 / 有江發源
여강으로 들어서 질펀히 흐르다가 / 納驪水兮汪汪
용진을 삼키어 더욱 광대해지도다 / 呑龍津兮沄沄
광나루를 구불구불 돌아서 / 逶迤廣津
삼전도를 질펀히 흐르다가 / 演漾三渡
세차게 흘러 백 번 꺾여져서 / 奔流百折
더욱 제멋대로 쏟아져 흐르도다 / 益肆以注
저자도는 희미하게 눈에 들오고 / 島楮子兮熹微
새매들의 늪은 빙 둘러 있도다 / 藪鷂兒兮回互
큰 들은 손바닥처럼 편평하고 / 鉅野掌平
살곶이 교외의 주위에는 / 箭郊周遭
말 목장이 빙 둘러 있는데 / 沙苑盤回
물과 풀이 매우 넉넉하여 / 水草肥饒
검고 누런 준마의 떼가 / 驪黃騄駬
아침놀의 무늬를 이루어 / 雲錦成章

바람을 따르고 번개를 쫓는 듯 / 追風逐電
매우 날래서 날아오를 듯하도다 / 天驕騰驤
고기 잡고 나무하고 말 치는 곳이 / 畋漁樵牧
번다하게 여기저기 널려 있고 / 紛紜布濩
짐꾼이며 실어나르는 수레는 / 擔負馱輦
앞뒤로 줄을 이어 달리도다 / 前鶩後續
남으로 바라보면 뭇 산들이 얽혀 있어 / 南望則群山糾紛
푸르른 초목들이 무성하고 / 薈蔚葱蘢
태수가 수시로 왕래할 적엔 / 五馬盤桓
대궐을 향해 공손히 읍을 하네 / 拱挹朝宗
오른쪽으론 관악산 청계산이 험준하고 / 右冠岳淸溪之崚嶒
왼쪽으론 대모산성이 불룩 솟아 있어 / 左大母山城之穹窿
도성의 경내로부터 / 曰自畿甸
사방의 요충으로 나누어졌고 / 區分四衝
관산과 하수가 아득하여라 / 關河綿邈
큰길은 숫돌처럼 평탄하도다 / 周道如砥
지방 고을들은 별처럼 나열하여 / 列郡星羅
경계를 나누어 각각 다스리고 / 界畫疆理
역관은 바둑알처럼 펼쳐 있어 / 驛館碁布
사마의 수레가 나란히 다니고 / 轍駟方軌
여염집은 사방에 가득하여 / 閭閻撲地
비늘처럼 빗살처럼 늘어서 있도다 / 鱗次櫛比
누런 벼논과 푸른 밭둑은 / 黃畦綠塍
시야 가득 구불구불 펼쳐 있고 / 彌望逶迤
심고 매고 거두고 방아 찧어 / 耕耘穫舂
농사일을 서로 다투어 힘쓰고 / 競效農功
누에 치고 실 켜고 명주베 짜서 / 蠶繰紡織
아낙의 일을 다투어 다스리니 / 爭脩女紅
농토와 상전의 천 리 벌판에 / 農桑千里
집집마다 자급자족하도다 / 家給人豐
서쪽으로 바라보면 해문이 탁 트여서 / 西望則海門唅呀
가득한 물이 용솟음쳐 흘러서 / 瀰漫汨潏
작은 물결과 큰 파도가 / 鰌濤鯨浪
밀물 썰물을 삼키고 뱉고 하도다 / 呑吐潮汐
한강은 웅장한 관문이 되어 / 漢江雄關
산천의 요해를 누르고 있는데 / 控扼襟帶
선박들이 줄을 이어 왕래하매 / 舸艦牽聯
돛 그림자가 하늘을 가리도다 / 檣帆掩靄
깎아지른 절벽들은 험준하고 / 絶壁巃嵷
높은 누각들은 우뚝 솟아서 / 傑閣岧嶢
아래로는 물가를 굽어 임하고 / 下臨芳渚
위로는 높은 하늘을 찌르도다 / 上揷層霄
고관 대작 공경 사대부 중에 / 縉紳卿士
장수나 지방관에 임명되어 / 杖鉞分符
혹 전송을 하거나 영접할 때면 / 或餞或迓
높은 수레들이 길에 그득하고 / 冠蓋塞途
수시로 왕래하는 장사꾼들은 / 來商往旅
서로 따라 앞서고 뒤서고 하여 / 攀援後先
분잡하게 서로 줄을 이어서 / 紛紜絲絡
시끄럽게 떠들며 늘어섰도다 / 喧鬧騈闐
초목이 무성한 성단에 접근함이여 / 近星壇之蓊鬱
아득한 데에 노량과도 연접하도다 / 控露梁於澶漫
율도엔 연기가 활짝 걷히고 / 栗島兮煙開
마포엔 물결이 차가운데 / 麻浦兮波寒
용산의 조운선들이 빽빽이 이어지고 / 龍山之漕舶織織
양화도의 바람 돛이 펄펄 나부끼거든 / 楊渡之風帆飛飛
가을 흥취의 호기를 들이마시고 / 吸秋興之灝氣
맑게 내리는 단비를 맞기도 하도다 / 來喜雨之淸霏
북으로 바라보면 도봉산은 험준하고 / 北望則道峯峭截
삼각산은 높고도 뾰족하며 / 三山巑岏
화산은 연꽃이 핀 것 같고 / 華岳蓮開
종남산은 용이 서린 듯하니 / 終南龍蟠
귀신이 아끼고 비장한 곳으로 / 神慳鬼祕
천지가 전환하여 일신되었도다 / 乾轉坤旋
금성 탕지로 험고함 이루니 / 金城設險
대궐 광채가 하늘에 빛나도다 / 玉闕麗天
상서로운 해는 빛을 거듭하고 / 瑞日兮重光
상서로운 구름은 오색이 찬란하도다 / 祥雲兮五色
왕도는 하 넓고 넓음이여 / 王道兮蕩蕩
사문은 지극히 화목하도다 / 四門兮穆穆
장수와 재상 공경들은 / 將相公卿
고요 기 위청 곽거병과 같고 / 皐夔衛霍
문인이며 재사들은 / 文人才士
반고 사마천 유향 순숙과 같아 / 班馬劉荀
뛰어난 영재가 줄을 이어서 / 翹英接武
날개에 붙고 비늘을 부여잡도다 / 附翼攀鱗
천문 만호는 / 千門萬戶
개밋둑 벌집처럼 널려 있어 / 綴蟻點蜂
구준과 춘대를 누리면서 / 衢樽春臺
격양가 부르며 화락하도다 / 擊壤熙雍
공장과 장사꾼 놀이꾼들은 / 工商遊冶
어지러이 서로 달려 왕래하니 / 紛紛駾駾
거수와 마룡은 / 車水馬龍
웅성웅성 많이도 다니어라 / 彭彭藹藹
사방이 모여드는 도회가 되어서 / 爲四方之都會
팔방의 창이 탁 트여 밖이 없으니 / 洞八窓兮無外
이는 바로 시야를 넓혀서 사방을 두루 보아 / 此所以豁雙眸騁四望
높은 데서 조망하여 스스로 유쾌해짐이로다 / 登眺自快者也
봄 경치가 화창함에 이르러서는 / 至如韶光駘蕩
만물을 발육시키는 가운데 / 萬物發毓
바람은 순주처럼 훈훈하고 / 風醇如酒
햇볕은 옥같이 온화한지라 / 日溫如玉
꽃나무는 서로 고운 꽃을 피워 / 花木喧姸
청홍의 채색들이 찬란하고 / 紅碧酣縟
맑은 강물은 새로 벌창하여 / 澄江新漲
포도처럼 푸르게 물들어서 / 葡萄染綠
움킬 만도 하고 마실 만도 하며 / 可掬可啜
거울처럼 맑고 환해지나니 / 宜鑑宜燭
이때엔 난간에 기대 배회하면서 / 當此時憑闌徙倚
술잔을 들어 정서를 즐긴다면 / 擧酒敍暢
난정의 풍류에다 / 有蘭亭風流
무우의 기상을 겸하게 되리로다 / 舞雩氣像者矣
남풍이 재물 풍부케 함에 미쳐서는 / 及其南薰阜財
만물을 기르는 여름날이라 / 恢台長嬴
보릿가을은 언뜻 지나가고 / 麥秋奄逝
초여름 장마가 쾌히 걷히고 / 梅霖快晴
뜨거운 더위가 발산하는지라 / 火傘旣張
무서운 태양이 한창 성하여 / 畏日方赫
산을 태우고 들을 태우며 / 焦山燎原
무쇠와 옥이 녹아 흐르고 / 金流玉鑠
소낙비는 강물을 쏟듯 내려서 / 急雨懸河
급한 여울에 눈발이 튀어오르고 / 驚湍湧雪
어룡들은 까불며 춤을 추고 / 魚龍簸舞
오리들은 물속을 출몰하나니 / 鳧鴨出沒
이때엔 옷깃을 풀고 두건을 벗고 / 當此時披襟露頂
읊조리고 술마시고 한다면 / 俯仰詠觴
무더위를 씻고 청량함을 취할 수 있으리로다 / 可以滌煩暑而賭淸涼者矣
하늘 높고 기후 맑은 때에 미쳐서는 / 迨至天高氣晶
바람은 나무 끝에 불어대고 / 風號樹杪
은하수는 영롱히 반짝거리고 / 明河耿熒
깨끗한 달은 하얗게 빛나며 / 皓月皦皎
난초 꽃의 향기는 농후하고 / 蘭香馥郁
국화의 향기는 그윽한 가운데 / 菊馨窈窕
구름 걸친 산은 푸르디푸르고 / 雲山蒼蒼
가을 기럭은 아득히 날아가며 / 霜鴻渺渺
도랑물은 마르고 못물은 맑아 / 潦盡潭淸
하늘과 물이 한 빛을 이룰 제 / 天水一色
티끌 하나 없는 옥호의 맑은 / 玉壺無塵
그림자는 구슬이 잠긴 듯하나니 / 淨影沈璧

이때엔 기둥 기대어 먼 데를 바라보면서 / 當此時倚柱遐矚
광막한 속에 정신으로 노닌다면 / 神遊沖漠
또 하필 등림 부하여 요락을 슬퍼할 것 있으랴 / 又何必賦登臨而悲搖落者乎
그리고 짙은 구름이 어두컴컴하고 / 若乃凝雲潑墨
매서운 바람에 솜이 부러지며 / 嚴風綿折
눈은 내려 우뚝하게 쌓이고 / 積雪嵯峨
얼음은 겹겹으로 꽁꽁 얼며 / 層氷沍結
참새들은 서로 짹짹거리고 / 冷雀査査
까마귀는 두려워 두리번거리며 / 寒鴉矍矍
얼음은 틈새 없이 꽁꽁 얼어 / 凍合無縫
배가 묶여 건너지 못하는지라 / 舟膠不涉
장사꾼들은 오가지도 못한 채 / 商旅踟躕
검은 살결에 소름이 일어나고 / 肌黧膚粟
어부들은 머뭇거리는 가운데 / 漁子逡巡
손이 트고 머리털이 솟구치거든 / 龜手蝟髮
이때엔 영서로 추위를 물리치고 / 當此時靈犀辟寒
술 마시고 갖옷을 껴입나니 / 醉擁貂貉
또한 어찌 나귀 타고 추위를 참거나 / 亦何數夫騎驢忍凍
드러눕고 맨발 벗은 걸 셀 것 있으랴 / 僵臥跣足者乎
이상은 바로 사시가 순환하는 가운데 / 此所以四時循環
즐거이 시절과 함께 자적하는 것이로다 / 樂與時適者也
곁에서 누가 힐난하길 물은 용 때문에 신령하고 / 傍有詰者曰水靈以龍
산은 신선 때문에 신령해지나니
/ 山靈以仙
아무리 뛰어난 경계가 있더라도 / 有地雖勝
사람 없이는 전해지지 않고말고 / 非人不傳
그러기에 무창의 남루는 / 武昌南樓
원규를 인하여 드러났고
/ 以元規而著顯
양양의 현수는 / 襄陽峴首
숙자를 인하여 알려졌거늘 / 以叔子而昭宣

지금 그대는 주인의 덕업을 근본하지 않고 / 今子不本主人之德之業
정자 이름의 소이연도 추구하지 않았으니 / 不究之亭之名之所以然
주렴 모퉁이의 한 굽이만을 보고 / 得非覩簾隅之一曲
당실의 완전한 모양은 빼놓은 격이 아닌가 / 而遺堂室大全者乎
아 그 연원을 상고하건대 / 粤惟□源
성악이 신령함을 잉태하여 / 星岳孕靈
명문의 선인 음덕을 입어 / 名門食德
대대로 영재가 태어나서 / 世有俊英
고관 대작이 대대로 이어져 / 蟬貂聯奕
종정에 공훈이 새겨졌도다 / 鼎刻鐘銘
그중에 당당한 상당군은 / 堂堂上黨
창성한 시기에 태어나서 / 生膺昌期
잠저 시절의 광묘로부터 / 光廟龍潛
한번 만나서 알아줌을 받았으니 / 一見受知
풍운의 기이한 만남이요 / 風雲奇遇
어수가 서로 만난 것이로다 / 魚水相得
손으로 붉은 태양 붙들어서 / 手扶紅日
구오의 용이 날아오르니 / 龍飛九五

천지가 조용하고 편안해지매 / 乾淸坤寧
만물이 모두 우러러보도다 / 萬物咸覩
공은 이때에 / 公於是時
유악 안에 조용히 들앉아서 / 從容帷幄
소조의 논의를 하고 / 蕭曹論議
양평의 계책을 내니 / 良平籌策

태산과 황하로 맹세하여 / 泰山黃河
운대와 기린각에 초상 걸렸네 / 雲臺麟閣
나가면 장수요 들오면 재상으로 / 出將入相
문모와 무략을 겸비했으니 / 文謨武略
재차 조정의 우두머리 되어선 / 再長巖廊
임금을 보좌하여 다스렸고 / 燮理黼黻
누차 부월 잡고 지방에 나가선 / 屢杖鐵鉞
온 강역을 진정시켰으니 / 鎭定疆域
공은 그와 같이 클 수 없고 / 功莫與京
덕은 그와 같이 높을 수 없도다 / 德莫與崇
지위가 높을수록 맘은 되레 작아지고 / 位尊而心轉小
은총이 높을수록 몸은 더욱 공손하여 / 寵極而身愈恭
항상 겸손한 마음을 갖고 / 恒存挹損
늘 만족함을 알려고 경계해 / 每戒知足
묘당에 있으면서도 강호를 생각하고 / 處廟堂而思江湖
고량진미가 넘쳐도 담박함을 즐기도다 / 飫膏粱而嗜淡薄
정자를 여기에 얽어 세우니 / 有亭斯構
넓고도 한적하고 적막하여라 / 寬閑寂寞
위로는 녹야당을 뒤따르고 / 上追綠野
아래로는 독락원을 벗삼아서 / 下友獨樂
이에 아침엔 대궐로 달려가고 / 於是朝趨丹鳳
저녁엔 백구와 가까이하니 / 莫狎白鷗
깊은 맹약 맺어서 저버릴 수 없음이여 / 托深盟兮不可寒
기심을 잊고 서로 평화로이 지내도다 / 庶息機而相夷猶也
푸르고 깨끗한 물결 먹을 수는 없지만 / 波綠潔而不可飱兮
백설 같은 깃털을 깨끗이 씻어주도다 / 白雪羽毛之無塵也
때로 왕래하며 서로 가까이하거니 / 時往來而相近兮
누가 아득하여 길들이기 어렵다 했는고 / 孰曰浩蕩而難馴也
아 퇴청하여 먹으며 종용 자득하여라 / 羌退食而逶蛇兮
이리저리 배회하면서 자유자재하도다 / 聊逍遙以自由也
거북 물고기를 모아서 주인이 됨이여 / 會龜魚而作主兮
나날이 구렁을 찾고 언덕을 지나도다 / 日尋壑而經丘也
내 자취 이미 쓸모없는 재목 같음이여 / 跡已同於散木兮
마음 또한 이 때문에 빈 배가 되었으니 / 心亦以之虛舟也
이것이 어찌 세속 밖에 멀리 초월해서 / 此豈非超乎流俗之表
즐거이 조물주와 함께 노는 이가 아니겠는가 / 而樂與造物而同遊者乎
나아가서는 큰 띠 띠고 홀을 꽂고 / 進則垂紳正笏
왕궁을 보호하고 왕의 직무 보충하고 / 保王躬而補袞職
물러와서는 야인 복장의 차림으로 / 退則黃冠野服
물고기와 짝하고 사슴을 벗삼도다 / 侶魚蝦而友麋鹿
사직하고픈 생각은 비록 간절하나 / 掛冠之念雖切
만백성의 기대가 더욱 중해지고 / 而萬姓之望愈重
물러나 쉬려는 뜻 또한 급급했지만 / 退休之志亦勤
임금의 은총은 더욱 깊어만 갔으니 / 而一人之眷益寵
그래서 은하수 빛이 창벽에 도는 건 / 是以雲漢昭回於櫳壁者
하늘 문채가 초목에 입혀지는 것이요
/ 天章之衣被草木也
규벽이 문지방 위에 찬란한 건 / 奎壁燦爛於楣宇者
신조로써 일월의 빛을 그려낸 것이라 / 宸藻之繪畫日月也

산천이 이 때문에 닫히고 열리고 / 山川以之闔闢
귀신이 이 때문에 멀어졌거니와 / 鬼神以之扃鐍
천조의 큰 솜씨로 화려하게 꾸미고 / 賁飾天朝之大手
한 시대의 큰 문장으로 단장했으니 / 粧點一代之鉅筆
이 때문에 명성이 천지간에 가득 차서 / 此所以聲名滿於天地
태산북두처럼 우러르게 된 것이로다 / 而仰若山斗者也
그러나 압구는 해옹의 한가한 일이거늘 / 然狎鷗者海翁之閑事
이로써 정자를 명명함은 무엇을 취한 건가 / 而獨揭此名亭何取耶
한 위공은 / 猗韓魏公
바로 송 나라 현상으로서 / 是宋賢相
원훈 공신에 현량한 보필 되어 / 元勳碩輔
높은 덕과 큰 아량이 있었는데 / 宿德偉量
그 실명을 압구정이라 했으니 / 名亭狎鷗
고상한 풍류를 넉넉히 보겠도다 / 足見雅尙
아 먼 조상의 아름다운 모범을 / 繄鼻祖之懿範
먼 후손이 본받아야 하고말고 / 宜耳孫之取則
전세의 한공과 후세의 한공은 / 前韓後韓
행적이 아주 서로 똑같아서 / 同符合轍
문덕 무략으로 천하를 다스려 / 文武經緯
천지의 조화 육성을 참찬하여 / 參贊化育
충성은 일월을 꿰뚫을 만하고 / 忠貫日月
공은 사직을 보존하였거니와 / 功存社稷
국가의 안위를 한 몸에 지고서 / 佩國家之安危
민심을 산악처럼 진정시켰으니 / 鎭民心如山岳
공과 충헌은 / 公與忠獻
둘이면서 하나인 셈이로다 / 二而爲一
급류를 탄 날에 한가함을 구하고 / 求閑於急流之日
한창 강건할 때에 숨어 지내면서 / 佚處於强健之時
산수 속의 한가로운 낙을 다하고 / 盡山水優游之樂
물아간의 시기하는 사심을 없애서 / 無物我忌克之私
시종 한 가지 절조를 굳게 지키어 / 終始堅乎一節
진퇴 거취가 시의에 합당하였으니 / 進退合於時宜
공과 충헌 두 사람 가운데 / 公與忠獻
누가 더 낫고 못하다 할꼬 / 孰仲孰伯
모두 나는 백구를 잊고 백구는 날 잊었으니 / 皆能我忘鷗而鷗忘我
이 때문에 서로 친해질 수 있었던 걸세 / 是以能相熟而相狎也
나는 객과 함께 농서의 보리를 다 거두고 / 吾將與客窮隴西之麥
강남의 나락을 다 수확해서 / 殫江南之稻
감주를 만들고 술도 만들고 / 爲醴爲酒
동해의 물결에 소금을 치고 / 鹽東海之波
오창의 곡식을 곱게 빻아서 / 屑敖倉之粟
면을 만들고 건량도 만들어 / 爲麵爲糗
천지를 흘겨보아 여관으로 삼고 / 睥睨天地而籧廬
일월을 여닫아서 창문으로 삼고 / 開闔日月爲戶牖
남기를 부여잡고 올라가 / 攀南箕
북두로 술을 떠 마시고 / 酌北斗

공을 따라 이 정자에 노닐면서 / 邁從公于斯亭
공의 백세 향수를 축복드리리 / 祝眉壽而黃耈
그리고는 다시 백구와의 맹약을 찾아 / 然後更與白鷗而尋盟
세한 불변의 굳은 우정을 맺고 / 結歲寒之耐友
푸른 절벽 위에 황견을 새겨서 / 鐫黃絹於蒼崖
만고에 전하도록 하겠다 하누나 / 傳萬古而不朽
이 말에 객은 깜짝 놀라 얼굴 고치고 / 客矍然改容
빗자루 휘두르듯 붓을 휘둘러 / 落筆揮帚
무지개를 뱉어내어 부를 써내리니 / 吐虹霓而作賦
어슴푸레 손에서 벼락을 치는 듯하구나 / 恍若霹靂之在手也


 

[주D-001]적소(積蘇) : 쌓아 놓은 땔나무를 말한다. 주 목왕(周穆王)이 일찍이 도사(道士)를 따라 천상(天上)에서 노닐 적에 인간세계(人間世界)를 내려다보니, 그 궁사(宮榭)들이 마치 포개 놓은 흙덩이나 쌓아 놓은 땔나무〔累塊積蘇〕처럼 보였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列子 周穆王》
[주D-002]한고(漢皐) : 주(周) 나라 때 정교보(鄭交甫)란 사람이 한고대(漢皐臺) 아래서 두 여인(女人)을 만나 구슬 두 개를 얻었다는 고사가 있기는 하나, 여기서는 한강(漢江) 가의 뜻으로 보아야 할 듯하다.
[주D-003]항해(沆瀣) : 선인(仙人)이 마신다는 밤중의 기〔夜半氣〕를 말하는데, 《초사》 원유(遠遊)에, “육기를 먹고 항해를 마심이여, 정양으로 양치질하고 아침 놀을 머금는다.〔飡六氣而飮沆瀣兮 漱正陽而含朝霞〕” 하였다.
[주D-004]금대(金臺) : 곤륜산(崑崙山)에 있다는, 신선(神仙)이 거처하는 곳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곧 압구정을 가리킨 것이다.
[주D-005]화개(華蓋) : 귀인(貴人)들의 수레 위에 받치는 일산(日傘)을 말한다.
[주D-006]여섯 …… 이었도다 : 발해(渤海)의 동쪽에는 대여(岱輿), 원교(員嶠), 방호(方壺), 영주(瀛洲), 봉래(蓬萊)의 다섯 신산(神山)이 있는데, 이 산들이 조수(潮水)에 표류(漂流)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천제(天帝)의 명에 따라 금색의 자라〔金鼇〕 15마리가 이 산들을 머리에 이고 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列子 湯問》
[주D-007]검고 …… 이루어 : 당 현종(唐玄宗) 때 감목사(監牧使) 왕모중(王毛仲)이 수만 필의 말을 잘 길러서 각 색깔별로 대열(隊列)을 나누어 놓으니, 바라보기에 마치 아침놀〔雲錦〕 빛과 같았다는 데서 온 말이다.
[주D-008]천지가 전환하여 일신되었도다 : 새로운 임금이 등극(登極)하여 천하를 일신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주D-009]상서로운 …… 거듭하고 : 일월(日月)같이 밝은 덕을 전왕(前王), 후왕(後王)이 계속해서 펴는 것을 의미한다. 《서경(書經)》 고명(顧命)에, “옛 임금이신 문왕, 무왕이 빛난 덕을 거듭 베푸시어 백성들이 의지할 바를 정해 주고 가르침을 펴셨다.〔昔君文王武王 宣重光 奠麗陳敎〕” 하였다.
[주D-010]왕도(王道)는 …… 넓음이여 : 《서경》 홍범(洪範)에, “비뚤어지지 않고 치우치지 않으면 왕도가 넓고 넓으리라.〔無偏無黨 王道蕩蕩〕”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11]사문(四門)은 지극히 화목하도다 : 《서경》 순전(舜典)에, “사방의 문으로 손님을 맞이하게 하시니, 사방의 문이 화목하였다.〔賓于四門 四門穆穆〕”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12]고요(皐陶) …… 곽거병(霍去病) : 고요와 기(夔)는 순(舜) 임금의 두 현신(賢臣) 이름이고, 위청(衛靑)과 곽거병은 모두 한대(漢代)의 명장(名將) 이름이다.
[주D-013]반고(班固) …… 순숙(荀淑) : 반고는 《한서(漢書)》의 저자이고,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의 저자이며, 유향(劉向)은 전한(前漢) 때의 학자(學者)이고, 순숙은 후한(後漢) 때의 학자이다.
[주D-014]날개에 …… 부여잡도다 : 봉황(鳳凰)의 날개에 붙고 용(龍)의 비늘을 부여잡는다는 뜻으로, 전하여 영주(英主)를 섬겨서 공명(功名)을 세우는 것을 의미한다.
[주D-015]구준(衢樽)과 춘대(春臺)를 누리면서 : 구준은 큰 길거리에 설치한 술동이를 말한 것으로, 《회남자(淮南子)》 무칭훈(繆稱訓)에, “성인의 도는 마치 큰 길거리 한가운데에 술동이를 두어 지나는 사람마다 크고 작은 양에 따라 각각 적당하게 떠 마시도록 하는 것과 같다.〔聖人之道 猶中衢而致樽邪 過者斟酌 多小不同 各得所宜〕” 한 데서 온 말인데, 이는 임금이 인정(仁政)을 베푸는 데에 비유한 것이고, 춘대는 《노자(老子)》 제 12 장에, “세속의 중인들은 화락하여 마치 푸짐한 잔칫상을 받은 듯, 다스운 봄날 높은 누대에 올라서 사방을 조망한 듯 즐거워한다.〔衆人熙 如享太牢 如登春臺〕” 한 데서 온 말로, 태평성대를 의미한다.
[주D-016]격양가(擊壤歌) : 요(堯) 임금 때에 한 노인(老人)이 배불리 먹고 배를 두드리며 흙덩이를 치면서〔擊壤〕 노래하기를, “해가 뜨면 나가서 일하고 해가 지면 들어가서 쉬도다. 우물 파서 물을 마시고 밭 갈아서 밥을 먹거니, 임금의 힘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으랴.〔日出而作 日入而息 鑿井而飮 耕田而食 帝力何有於我哉〕” 했다는 데서 온 말로, 역시 태평성대를 의미한다.
[주D-017]거수(車水)와 마룡(馬龍) : 이것은 “수레는 흐르는 물과 같고, 말은 헤엄치는 용과 같다.〔車如流水 馬如游龍〕”는 데서 온 말로, 전하여 거마(車馬)의 왕래가 빈번한 것을 형용한 말이다. 《後漢書 卷10上 皇后紀 明德馬皇后紀》
[주D-018]무우(舞雩)의 기상(氣像) : 공자(孔子)가 일찍이 자로(子路), 증점(曾點), 염유(冉有), 공서화(公西華) 등의 제자에게 각각 자기의 포부를 말해 보라고 했을 때, 증점이 말하기를, “저문 봄에 봄옷이 이루어지거든 관자 5, 6인, 동자 6, 7인과 함께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 읊조리며 돌아오겠습니다.〔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論語 先進》
[주D-019]남풍(南風)이 …… 함 : 옛날에 순(舜) 임금이 오현금(五絃琴)을 만들어 타면서 남풍시(南風詩)를 지어 노래했는데, 그 시에, “남풍의 훈훈함이여, 우리 백성의 노염을 풀어줄 만하도다. 남풍이 제때에 불어옴이여, 우리 백성의 재물을 풍부하게 하리로다.〔南風之薰兮 可以解吾民之慍兮 南風之時兮 可以阜吾民之財兮〕”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20]무서운 태양 : 《춘추좌씨전》 문공(文公) 7년 조에, “조최는 겨울날의 태양이고, 조돈은 여름날의 태양이다.〔趙衰冬日之日也 趙盾夏日之日也〕” 하였는데, 그 주석에, “겨울날의 태양은 사랑스럽고, 여름날의 태양은 무서운 것이다.〔冬日可愛 夏日可畏〕”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21]티끌 …… 듯하나니 : 옥호(玉壺)는 밝은 달을 비유한 말이고, 구슬이 잠긴 듯하다는 것은 곧 밝은 달 그림자가 물속에 잠긴 것을 형용한 말이다.
[주D-022]등림(登臨) …… 있으랴 : 요락(搖落)은 초목의 잎이 흔들려 떨어지는 것을 말한다. 전국 시대 송옥(宋玉)의 구변(九辯)에, “슬프다, 가을의 기후됨이여. 쓸쓸하여라, 초목은 낙엽이 져서 쇠하였도다. 구슬퍼라, 흡사 타향에 있는 듯하도다. 산에 올라 물을 굽어봄이여, 돌아갈 사람을 보내도다.〔悲哉秋之爲氣也 蕭瑟兮 草木搖落而變衰 憭慄兮 若在遠行 登山臨水兮 送將歸〕”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23]영서(靈犀)로 추위를 물리치고 : 영서는 곧 한기(寒氣)를 물리칠 수 있는 서각(犀角)을 말한다. 당 현종(唐玄宗) 초기에 교지국(交趾國)에서 황금빛의 서각 하나를 바쳐 왔는데, 그 사자(使者)의 청(請)에 따라 이것을 금반(金盤)에 담아 전중(殿中)에 놓아두자, 다스운 기운이 발산하므로, 상(上)이 그 까닭을 물으니, 사자가 대답하기를, “이것은 추위를 물리치는 서각입니다.〔此辟寒犀也〕”라고 했다는 데서 온 말이다.
[주D-024]나귀 …… 참거나 : 나귀를 탄다는 것은, 소식(蘇軾)의 증사진하충수재(贈寫眞何充秀才) 시에서 당(唐) 나라 시인 맹호연(孟浩然)의 눈 속에 나귀 타고 시 읊던 모습을 일러 “그대는 못 보았나 눈 속에 나귀 탄 맹호연이, 눈썹 찌푸리고 시 읊느라 뫼산 자 어깨 으쓱인 것을.〔君不見雪中騎驢孟浩然 皺眉吟詩肩聳山〕”이라 한 데서 온 말이고, 추위를 참는다는 것은, 소식의 사인견화(謝人見和) 시에, “서생의 사업은 참으로 가소로워라, 추위 참고 외로이 읊자니 붓끝이 안 나가네.〔書生事業眞堪笑 忍凍孤吟筆退尖〕”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25]드러눕고 …… 걸 : 드러누웠는다는 것은, 후한(後漢)의 명상(名相) 원안(袁安)이 일찍이 미천했을 때, 한번은 낙양(洛陽)에 큰 눈이 내려서 낙양 영(洛陽令)이 친히 민가(民家)를 순행하다 보니, 원안의 집만 유독 눈도 치우지 않은 채 방 안에 가만히 드러누워서 일어나지 않았던 데서 온 말이고, 맨발을 벗었다는 것은, 삼국(三國) 시대 위(魏)의 고사(高士) 초선(焦先)이 풀을 엮어서 옷을 만들어 입고, 두건도 쓰지 않고 맨발로 다녔다〔結草以爲裳 科頭跣足〕는 데서 온 말이다.
[주D-026]물은 …… 신령해지나니 : 유우석(劉禹錫)의 누실명(陋室銘)에, “산은 높은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신선이 있으면 이름이 나고, 물은 깊은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용이 있으면 신령해진다.〔山不在高 有仙則名 水不在深 有龍則靈〕”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27]무창(武昌)의 …… 드러났고 : 원규(元規)는 진(晉) 나라 재상 유량(庾亮)의 자이다. 유량이 일찍이 정서장군(征西將軍)이 되어 무창에 있을 때, 장강(長江) 가에 누각(樓閣)을 세웠던바 이를 남루(南樓)라 하는데, 어느 가을날 밤 천기(天氣)가 아주 쾌청할 적에 유량이 이 남루에 올라가서 그의 좌리(佐吏)인 은호(殷浩), 왕호지(王胡之) 등과 함께 시를 읊조리며 고상한 풍류(風流)를 만끽했던 일로 인하여 이 남루가 세상에 널리 드러나게 되었던 것을 이른 말이다.
[주D-028]양양(襄陽)의 …… 알려졌거늘 : 현수(峴首)는 현산(峴山)의 다른 이름이고, 숙자(叔子)는 진(晉) 나라 명장(名將) 양호(羊祜)의 자이다. 양호가 일찍이 양양 태수(襄陽太守)로 있으면서 선정(善政)을 베풀었던 관계로 그 지방 백성들이 양호의 덕을 사모하여 현산에 비(碑)를 세워서 그를 기렸는데, 이 비를 바라보는 이는 모두 눈물을 떨구었다 하여 두예(杜預)가 이를 타루비(墮淚碑)라 이름하기까지 했던 데서 온 말이다.
[주D-029]성악(星岳)이 신령함을 잉태하여 : 소식(蘇軾)의 조주한문공묘비(潮州韓文公廟碑)에, “신백과 여후는 산악에서 내려왔고, 부열은 죽은 뒤에 별이 되었다.〔申呂自嶽降 傅說爲列星〕” 하였는데, 부열은 은 고종(殷高宗)의 현상(賢相)으로 일찍이 은(殷) 나라를 중흥시키고 죽어서 별이 되었다는 데서 온 말이고, 신백(申伯)과 여후(呂侯)는 산신령이 내려와서 탄생했다는 주 선왕(周宣王) 때의 두 현상으로, 《시경》 대아(大雅) 숭고(崧高)에, “높디높은 산악이, 우뚝 하늘에 닿았도다. 이 산에서 신령을 내려, 보후와 신백을 내셨도다. 보후와 신백 두 사람은, 주 나라의 기둥이라, 사국의 번병이 되어, 사국에 덕을 베풀도다.〔崧高維嶽 駿極于天 維嶽降神 生甫及申 維申及甫 維周之翰 四國于蕃 四國于宣〕” 한 데서 온 말이다. 여후는 보후와 같다.
[주D-030]상당군(上黨君) : 조선 세조(世祖)의 일등공신(一等功臣)으로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에 봉해진 한명회(韓明澮)를 가리킨다.
[주D-031]잠저(潛邸) 시절의 광묘(光廟) : 광묘는 능호(陵號)가 광릉(光陵)인 세조(世祖)를 가리킨 것으로, 세조가 왕위(王位)에 오르기 전인 수양대군(首陽大君) 시절을 말한다.
[주D-032]풍운(風雲)의 기이한 만남이요 : 용호(龍虎)가 풍운을 만나서 득세(得勢)하듯이, 명군(明君)과 현신(賢臣)이 서로 만난 것을 의미한다.
[주D-033]어수(魚水)가 …… 것이로다 : 이 또한 임금과 신하가 서로 잘 만난 것을 의미한 말로, 촉한(蜀漢)의 선주(先主)가 이르기를, “나에게 공명이 있는 것은 마치 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다.〔孤之有孔明 猶魚之有水也〕”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34]손으로 …… 날아오르니 : 붉은 태양은 임금을 상징한 말이고, 구오(九五)의 용(龍)이 날아오른다는 것은, 《주역(周易)》 건괘(乾卦)에, “구오는 나는 용이 하늘에 있음이니, 대인을 만나는 것이 이롭다.〔九五 飛龍在天 利見大人〕” 한 데서 온 말로, 왕위(王位)에 오르는 것을 의미한다.
[주D-035]만물이 모두 우러러보도다 : 《주역》 건괘 문언(文言)에, “구름이 용을 따르고 바람이 범을 따르는지라, 성인이 일어나매 만물이 우러러보도다.〔雲從龍 風從虎 聖人作而萬物覩〕”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36]소조(蕭曹)의 …… 내니 : 소조는 한 고조(漢高祖)의 개국 공신(開國功臣)인 소하(蕭何)와 조참(曹參)을 합칭한 말이고, 양평(良平)은 한 고조의 모신(謀臣)인 장량(張良)과 진평(陳平)을 합칭한 말이다.
[주D-037]태산(泰山)과 황하(黃河)로 맹세하여 : 한 고조의 공신에 대한 봉작(封爵)의 서사(誓辭)에, “황하가 띠처럼 가늘어지고 태산이 숫돌처럼 닳도록 나라가 영원히 편안한 그날까지 복록이 후손에게 미치리라.〔使河如帶 泰山如厲 國以永寧 爰及苗裔〕” 한 데서 온 말로, 공신에 책록(冊錄)된 것을 의미한다.
[주D-038]운대(雲臺)와 …… 걸렸네 : 운대는 후한(後漢) 때에 공신의 초상(肖像)을 걸었던 곳이고, 기린각(麒麟閣)은 전한(前漢) 때에 공신의 초상을 걸었던 곳으로, 이 역시 공신에 책록된 것을 의미한다.
[주D-039]녹야당(綠野堂) : 당(唐) 나라 때의 명상(名相) 배도(裴度)가 조정에서 은퇴하여 낙양현(洛陽縣) 남쪽에 세운 별장 이름이다.
[주D-040]독락원(獨樂園) : 송(宋) 나라 때 사마광(司馬光)이 재상(宰相)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 낙양현(洛陽縣) 남쪽에 세운 원명(園名)이다.
[주D-041]누가 …… 했는고 : 두보(杜甫)의 증위좌승(贈韋左丞) 시에, “백구가 아득한 물결 속에 숨거든, 만 리 밖의 백구를 누가 능히 길들일꼬.〔白鷗沒浩蕩 萬里誰能馴〕”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42]아 …… 자득하여라 : 《시경》 소남(召南) 고양(羔羊)에, “크고 작은 양의 가죽이여, 흰 실로 다섯 줄을 꿰맸도다. 퇴청하여 집에서 먹으니, 종용하고 자득하도다.〔羔羊之皮 素絲五紽 退食自公 委蛇委蛇〕” 한 데서 온 말인데, 이 시는 남국(南國) 사람들이 문왕(文王)의 정사(政事)에 교화되어 높은 지위에 있는 이들이 모두 검소하고 정직하므로, 한 시인(詩人)이 그것을 찬미하여 부른 노래이다.
[주D-043]나날이 …… 지나도다 : 도잠(陶潛)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이미 깊숙하게 들어가 구렁을 찾고, 또한 험한 길을 따라 언덕을 지나도다.〔旣窈窕以尋壑 亦崎嶇而經丘〕”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44]마음 …… 되었으니 : 《장자》 산목(山木)에, “배를 나란히 하여 하수를 건널 때에 다른 빈 배가 와서 나의 배에 부딪쳤을 경우에는 아무리 속 좁은 사람일지라도 성을 내지 않는다.〔方舟而濟於河 有虛船來觸舟 雖有惼心之人不怒〕” 한 데서 온 말로, 빈 배란 곧 물욕(物欲)이 전혀 없어서 마음이 아주 넓고 평온한 것을 의미한다.
[주D-045]은하수 …… 것이요 : 소식(蘇軾)의 조주한문공묘비(潮州韓文公廟碑)에, “서쪽으로 함지에 노닐고 부상에 다다르니, 초목에까지 은하수 밝은 빛을 입히었도다.〔西游咸池略扶桑 草木衣被昭回光〕” 한 데서 온 말로, 이 묘비의 본뜻은 한유(韓愈)가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초목에까지 문(文)과 도(道)의 은택을 입혔다는 것인데, 여기서는 압구정(狎鷗亭)의 주인 한명회(韓明澮) 또한 한씨(韓氏)이기 때문에 특별히 한유에 관한 글을 끌어댄 것이다.
[주D-046]규벽(奎壁)이 …… 것이라 : 규와 벽 두 별은 문운(文運)을 주관한다는 데서, 전하여 문원(文苑), 또는 문장(文章)을 의미하고, 신조(宸藻)는 제왕(帝王)의 시문(詩文)을 가리키며, 일월의 빛을 그린다는 것은 한유(韓愈)의 진찬평회서비문표(進撰平淮西碑文表)에, “천지의 얼굴과 일월의 빛은 그려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두꺼운 낯으로 뻔뻔스레 글을 지어서 분부에 답하는 바입니다.〔乾坤之容 日月之光 知其不可繪畫 强顔爲之 以塞詔旨〕”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47]천조(天朝)의 …… 꾸미고 : 당시 중국의 한림학사(翰林學士) 예겸(倪謙)이 압구정(狎鷗亭)의 기문(記文)을 지은 것을 비롯하여 중국의 수많은 문사(文士)들이 시(詩)를 지어서 압구정을 찬미(讚美)한 것을 이른 말이다.
[주D-048]한 위공(韓魏公) : 북송(北宋) 시대 현상(賢相)으로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진 한기(韓琦)를 가리킨다. 그의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그의 실명(室名) 또한 압구정(狎鷗亭)이었다.
[주D-049]급류(急流)를 …… 구하고 : 송(宋) 나라 때 한 도승(道僧)이 진단(陳摶)에게 전약수(錢若水)의 사람됨을 가지고 말하기를, “이는 급류 속에서 용감히 물러날 수 있는 사람이다.〔是急流中勇退人也〕”라고 했었는데, 뒤에 과연 전약수가 벼슬이 추밀 부사(樞密副使)에 이르렀을 때 40세도 채 안 된 나이로 용감하게 관직에서 물러났던 데서 온 말로, 전하여 관로(官路)가 한창 트인 때에 용감하게 은퇴하는 것을 말한다.
[주D-050]오창(敖倉) : 진(秦) 나라 때의 창고(倉庫) 이름이다.
[주D-051]남기(南箕)를 …… 마시고 : 남기는 남쪽에 있는 기성(箕星)을 말하는데, 이 별자리는 마치 키〔箕〕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북두성(北斗星) 자리 또한 말〔斗〕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므로, 술을 뜬다는 뜻으로 쓴 것이다.
[주D-052]황견(黃絹) : 후한(後漢) 때 채옹(蔡邕)이 조아비문(曹娥碑文)을 보고는 그 비석(碑石) 배면(背面)에다 은어(隱語)로 ‘황견유부외손자구(黃絹幼婦外孫齍臼)’ 여덟 글자를 새겨 놓았는데, 뒤에 양수(楊脩)가 이것을 해석하기를, “황견은 색사(色絲)이니 글자로는 절(絶) 자가 되고, 유부는 소녀(少女)이니 글자로는 묘(妙) 자가 되고, 외손은 여자(女子)이니 글자로는 호(好) 자가 되고, 자구는 매운 맛을 받는 것이니 글자로는 사(辭) 자가 되므로, 이른바 절묘호사(絶妙好辭)라는 것이다.”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뛰어난 문장(文章)을 의미한다.
[주D-053]무지개를 뱉어내어 : 시문(詩文) 짓는 재주가 풍부함을 이른 말이다.
[주D-054]손에서 …… 듯하구나 : 재사(才思)나 문장(文章)이 매우 민첩하고 유창한 것을 형용한 말이다.

 

서계집 제4권
 시(詩)○보유록(補遺錄) 여기에 실린 여러 작품들은 모두 원고(原稿)에는 빠진 것으로, 난고(亂藁) 및 지인이 전송하던 것을 뒤미처 얻어 보록(補錄)한 것이다.
도봉산(道峯山)을 바라보며 짓다



조화옹의 기교에 마음 몹시 놀라니 / 奇巧心偏怪化翁
수많은 손놀림이 신묘 막측하구나 / 幾般摶弄妙難窮
온갖 형상이 땅 아래에 조밀한데 / 萬形掩翳黃塵下
한 바위 봉우리가 창공을 찌르네 / 一骨嵯峨碧落中
달을 보매 세상의 어둠 아랑곳없고 / 看月不妨人界黑
꽃을 흩날리매 내내 하늘이 붉어라 / 散花長得佛天紅
벼랑 중턱 노송에 걸린 높다란 둥지 / 半崖松老危巢倒
몇 조각 구름이 학의 뒤를 따르네 / 數片雲隨鶴背風
제2연이 어떤 본에는 ‘온갖 형상이 웅장한 대지에 낮게 깔려 있는데 하나의 봉우리가 광활한 우주에 우뚝 솟았네.[萬形低壓氛埃壯 一掌高開宇宙空]’로 되어 있다.


 

고종 37년 경자(1900, 광무 4)
  6월15일 (을유, 양력 7월 11일)
 함녕전에서 산릉을 간심한 도감의 당상 이하를 소견할 때 비서원 승 김덕한 등이 입시하여 간심한 결과에 대해 논의하였다
○ 3경(三更).
상이 함녕전(咸寧殿)에 나아갔다. 산릉을 간심한 도감의 당상 이하가 입시하였다. 이때 입시한 비서원 승 김덕한, 비서원 낭 정규년ㆍ박제황, 산릉도감 제조(山陵都監提調) 이도재(李道宰), 궁내부 대신서리 윤정구(尹定求), 학부 대신 김규홍(金奎弘), 장례원 소경 심상황(沈相璜), 학부 기사 이병헌(李秉憲)이 차례로 나와 엎드리고, 상지관(相地官) 홍종혁(洪鍾爀), 오택영(吳擇泳), 제갈형(諸葛炯), 박인근(朴寅根), 이종설(李鍾卨), 오성근(吳聖根), 최석영(崔錫永), 정해준(鄭海準)이 차례로 나와 기둥 밖에 엎드렸다.
상이 이르기를,
“사관은 좌우로 나누어 앉으라.”
하였다. 이어 도감 당상 이하에게 앞으로 나오라고 명하니, 이도재 등이 앞으로 나왔다. 상이 이르기를,
“여러 신하들이 가서 본 곳들 중 어느 곳이 가장 낫던가?”
하니, 김규홍이 아뢰기를,
“신은 본디 풍수지리(風水地理)에 어두워 감히 우러러 아뢰지 못하겠습니다만, 여러 지사(地師)가 대령하였으니 하문하시면 자세히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여러 지사는 순서대로 입시하여 각기 소견을 아뢰라.”
하니, 이병헌이 아뢰기를,
“소신이 이번 간심하러 갈 때에 방외(方外) 상지관을 거느리고 여러 곳을 자세히 간심하였습니다만, 소신이 본래 학식이 없고 산에 대한 안목이 넓지 못한 데다 더구나 지극히 중차대한 일이니 어찌 감히 논의하여 주달하겠습니까. 너무나 황송합니다. 여러 지사가 대령하였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차례로 나와 아뢰라.”
하였다. 홍종혁이 아뢰기를,
“이번에 간심한 곳들 가운데 금곡(金谷)이 용맥(龍脈)과 혈(穴)이 모두 좋았습니다. 그러나 용요(龍腰)가 낮고 수색(水色)이 멀리 보이고 혈의 면(面)이 평평하여 얕게 구덩이를 이루었으니, 크게 쓰기에는 온당치 못한 곳입니다. 군장리(軍藏里)는 용맥과 혈은 모두 왕성하게 살아 있는데, 혈당(穴堂)에 물이 비스듬히 쏟아지고 용세(龍勢)는 웅강(雄强)한 형세가 없는 것이 조금 흠입니다. 차유현(車踰峴)은 용맥이 웅장하게 뻗어 있고 혈이 두툼하게 형성되어 있으며 사(砂)수(水)는 관쇄(關鎖)가 잘 되어 있으므로 별다른 흠이 없으나, 다만 국세(局勢)가 협착합니다. 분수원(分水院)은 용맥과 혈, 사(砂), 수(水), 배포(排布)가 크게 쓰일 곳이 될 만합니다. 문봉리(文峯里)는 용맥과 혈은 훌륭하나 기맥(氣脈)이 평탄하고 유장(悠長)하며 낮고 약해서, 크게 쓰일 곳은 아닙니다. 원당리(元堂里)는 용맥과 혈이 모두 허하고 실속이 없으니 본디 고려할 곳이 아닙니다. 이외에는 다시 우러러 아뢸 말씀이 없습니다.”
하고, 오택영이 아뢰기를,
“금곡은 천마산(天摩山)으로부터 용맥의 기(氣)가 묶인 것이 협곡을 건너가고 또 입묘봉(立妙峯)의 중심에서 맥(脈)이 뻗어 나와 봉우리로 솟아 용맥이 세 마디를 이룬 다음 평평한 언덕의 용맥이 되었다가 목처럼 가늘게 잘록한 모양으로 혈을 이루었고 양쪽의 사가 혈을 호위합니다. 그러니 수색이 멀리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산의 골육(骨肉)을 왕성하게 하는 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멀리 보이는 수색이 과연 많이 보이지 않는가?”
하자, 오택영이 아뢰기를,
“산을 왕성하게 하는 원수(源水)가 혈을 호위하며 혈당(穴堂)을 지나가니, 이것은 만궁(彎弓)한 물이고 멀리 보이는 물이 아닙니다. 군장리는 묘적산(妙積山)의 가운데 허리 부분에서 뻗어 나온 용맥이 거듭하여 구불구불 감돌아 왕자맥(王字脈)이 있고 맥 아래 또 세 봉우리로 솟았다가 도로 조산(祖山)을 향하며 혈을 이루는데, 국세가 주밀(周密)하고 용호(龍虎)가 겹으로 안고 있으며 주작(朱雀)이 날아올라 춤추는 형국이니, 필시 영원히 창성할 땅일 것입니다. 차유현은 묘적봉으로부터 왼쪽으로 용맥이 꿈틀거리듯 뻗어 나와 혈을 이루었는데 국세가 주밀하고 혈형(穴形)이 풍후(豐厚)하며 수구(水口)나성(羅星)이 있으니 길격(吉格)이라 하겠지만, 안산(案山)이 특히 높으니 필시 곡요사주격(曲腰事主格)일 것입니다. 원당리는 뻗어 온 용맥이 삼각산(三角山)의 중간 허리 부분에서 세 마디를 이루며 봉우리로 솟아 혈을 만들었는데 혈형이 미미하고 얕으니, 금지옥엽이 들어갈 만한 땅이라고들 하나 청룡(靑龍)이 낮고 잔약하며 야색(野色)이 멀리 보이고 백호(白虎)가 물을 따라 가로질러 가는 형국이므로, 자손이 고향을 떠나게 되는 탄식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분수원은 용맥이 비록 멀리서 뻗어 와 봉우리가 솟지 않았지만 청수(淸秀)하니 형국을 이룬 것이 매우 좋습니다. 혈이 바르게 뻗어 있고 풍후하나, 안산이 가까이에 마주 서 있고 밖으로 조응(照應)하는 조산(祖山)이 없습니다. 이외에는 다시 아뢸 말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을 택하여 아뢰라. 본 바대로 차례로 주달하라.”
하자, 제갈형이 아뢰기를,
“이번 첫 번째 간심을 위해 여러 곳을 두루 관찰하여 보니 크게 쓰일 곳은 단지 다섯 곳뿐이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다섯 곳은 다 좋다고 하던가?”
하자, 제갈형이 아뢰기를,
“금곡은 을좌(乙坐)이고 혈의 언저리가 둥글고 실하며 우각(牛角)이 옆에서 돕고 있으니 상지(上地)라 할 만한데, 다만 혈이 얕은 것이 불만스럽습니다. 군장리는 임좌(壬坐)이고 삼태산(三台山)이 주산(主山)이 되고 혈당(穴堂)이 풍후하고 용호가 중첩해 있으며 삼장(三帳)이 구비되어 있으니 상지라 할 만합니다. 차유현은 임좌이고 개장(開帳)이 선명하고 혈의 언저리가 실하고 둥글며 혈을 중심으로 한 사방의 용맥이 완전하니, 군자가 자리잡을 곳으로서 상등(上等)이라 할 만합니다. 화접동(花蝶洞)은 술좌(戌坐)이고 소조산(少祖山)이 특히 높으며 뻗어 온 용맥이 거미줄 같고 평지에서 혈을 이루었는데, 높이 솟아 기복(起伏)을 이루었고 용맥은 살아 있고 혈은 분명하니 상지라고 할 만합니다. 이외에는 주목할 곳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상지관은 차례로 아뢰라.”
하였다. 박인근이 아뢰기를,
“이번 각처를 간심하니 화접동은 용맥의 기운이 특이하고 자기(紫氣)가 혈을 이루었고 사(砂)와 물이 격에 맞으므로 크게 쓰일 곳으로 적합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매화락지형(梅花落地形)은 혈이 한두 곳이 아니라고 하던데 과연 그런가?”
하자, 박인근이 아뢰기를,
“지사의 말이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장리는 웅장한 산에서 용맥이 뻗어 나왔는가?”
하니, 박인근이 아뢰기를,
“군장리는 용맥이 왕방(旺方)에서 뻗어 나와 생왕방(生旺方)으로 이어져 혈을 맺었고 금수(金水) 방향으로 개장하였는데, 장(帳) 가운데 귀인이 단정히 있고 긴 유형(乳形)의 혈을 이루었으며 수법(水法)이 격에 맞으니 크게 쓰일 땅이라고 할 만합니다. 금곡은 용맥이 천마산(天馬山)에서 중첩해서 개장하며 뻗어 나왔는데, 얕은 와형(窩形)의 혈을 이루었고 안팎의 사세(砂勢)가 주밀하고 수법이 격에 맞으니 크게 쓰일 곳이라고 할 만합니다. 분수원은 뻗어 온 용맥이 마디마다 송영(送迎)을 하고 중첩해서 개장하며 귀성(貴星)이 특별히 높고 긴 유형의 혈을 이루었으며 명당(明堂)이 평평하고 바르며 사와 수가 격에 맞으니 크게 쓰일 땅일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가장 우수한 것을 택하여 재차 간심하라.”
하였다. 김규홍이 아뢰기를,
“재차 간심할 때 총호사가 없어서는 안 되는데 현재 신병이 있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총호사의 병세가 조금 낫기를 기다려 며칠 뒤에 재차 간심하라.”
하였다. 이어 전교하기를,
“청계산(淸溪山)도 거론할 곳이 있다.”
하니, 이도재가 아뢰기를,
“지사의 말도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여러 지사는 차례로 아뢰라.”
하니, 이종설이 아뢰기를,
“금곡은 천마산(天馬山)에서 뻗어 온 용맥이 마디마다 기복을 이루고 다시 목처럼 가늘게 잘록한 모양이 되었다가 혈을 이루었습니다. 혈이 화심(花心)과 같아 소국(小局)이라고들 하나 화심으로 국(局)을 이루었기 때문에 국이 작은 것입니다. 군장리는 묘적산에서 뻗어 나온 용맥이 세 봉우리로 기복을 이루고 혈을 이루었는데 혈형이 풍후하고 용호가 긴밀히 끼고 있으며 안산이 바로 마주 대하고 있고 조산(朝山)이 공읍(拱揖)하고 있으니 상지(上地)라 할 만합니다. 차유현은 묘적산 왼쪽 귀에서 뻗어 나온 용맥이 중심에서 벗어나 있고, 혈형이 풍후하며 수구(水口)에 나성(羅星)이 있습니다. 그러나 국세가 좁고 안산이 특히 높으니 큰 흠인 듯합니다. 화접동은 불암산(佛巖山) 아래 한 줄기 미미한 용맥이 혈을 이룬 곳에 이르러 중간에서 끊어져 형체가 없는데, 기두(起頭)가 높이 솟았고 혈형이 정밀합니다. 그러나 물이 사방(巳方)으로 흘러들어 가니, 이것이 작은 흠이 됩니다. 더는 아뢸 말씀이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건지산(乾芝山)은 그림으로 보면 매우 높은 듯한데 조경단(肇慶壇)에 비하면 높은 것이 아닌 듯하다.”
하니, 김규홍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오성근이 아뢰기를,
“이번 간심한 여러 곳 가운데 분수원, 차유현, 군장리, 금곡 등 네 곳은 용맥과 혈, 사(砂), 수(水)가 모두 격에 맞으니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가장 길한 땅으로 보입니다. 그 나머지는 의법(倚法)에 따라 쓸 곳입니다. 이외에는 다시 아뢸 말씀이 없습니다.”
하였고, 최석영이 아뢰기를,
“군장리의 용맥과 혈은 단정하고 두툼합니다. 그러나 연운(年運)이 어떨지 모를 것 같고, 금곡은 용맥과 혈이 살아 있고 분명하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나 그 혈장(穴場)이 낮고 짧은 것이 작은 흠이 될 듯합니다. 차유현은 높은 곳에서 용맥이 시작하여 금수 방향으로 넓게 개장하였는데, 지룡(枝龍)이 주맥이 되었고 순미(純美)하게 혈이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정중(正中)하게 결국(結局)하지 않은 것이 거슬립니다. 청제산(靑帝山)은 하늘 높이 솟구친 목성(木星)으로 물을 에워싸고 있고 우뚝 서 있으며 용세(龍勢)가 웅장하고 혈형(穴形)이 분명하니 상지라고 할 만합니다. 그러나 내당(內堂)의 물이 곧게 흐르니, 이것이 큰 흠입니다. 현달산(見達山)은 용맥과 혈이 특이하고 단정하여 자체가 하나의 형국(形局)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현무(玄武)가 곧바로 곧게 내려가니, 이것이 작은 흠입니다. 문봉리(文峯里), 이는 기이(奇異)한 형국인데, 세상에서 칭하기를 ‘보검(寶劍)이 궤 속에서 나오는 형상[寶劒出匣形]’이라고 합니다. 용맥과 혈이 분명하지만, 백호(白虎)에 각(角)이 뾰족하고 긴 사(砂)가 있고 청룡(靑龍)에 부분적으로 격에 맞지 않은 외사(外砂)가 있으니 큰 흠인 듯합니다. 분수원은 용세가 기묘하고 멀리서 뻗어 왔으며 혈형은 두툼하고 단정합니다. 그리고 내외의 명당이 길격(吉格)에 들어맞습니다. 그러나 다만 조응하는 외안산(外案山)이 없는 것이 아쉽습니다. 원당리는 도봉산(道峯山)과 망월산(望月山)에서 용맥이 뻗어 나와 중첩하여 개장하였고 용맥과 혈이 살아 있고 분명합니다. 그러나 용신(龍身)이 파괴되어 생기가 점차 쇠하니 큰 흠인 듯합니다. 이외에는 다시 삼가 아뢸 말씀이 없습니다.”
하였고, 정해준이 아뢰기를,
“이번 간심한 여러 곳 가운데 화접동은 용호(龍虎)가 기절(奇絶)하고 특히 빼어나며 장중(帳中)에서 맥이 뻗어 나와 평지대와돌형(平地大臥突形)을 만들었고 혈형이 두툼하고 용세가 웅장하며 명당이 광활합니다. 신의 얕은 견해로는 제일가는 대지(大地)로 보입니다. 금곡은 용세가 웅장하고 맥이 평평한 산등성이로 이어졌으며 용맥의 마디마다 기복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혈형이 짧고 좁아 압도하는 모양이 없으며 명당이 좁아 손이 주인보다 나은 상이니, 크게 쓰기에는 맞지 않은 듯합니다. 군장리는 용호가 중첩해 있고 마디마디가 생왕하는 형국이고 혈형이 두툼하며 내외의 명당이 과연 수법(水法)에 부합되니 크게 쓰일 땅이라고 할 만합니다. 차유현은 골짜기 가운데에 큰 형세의 용맥이 있고 오이 덩굴처럼 혈을 이룬 관계로 기(氣)가 전일하지 못하니, 크게 쓰일 땅으로는 적합하지 못한 듯합니다. 분수원은 용호가 중첩해 있고 용맥의 마디마디가 영송을 하여 마치 비룡(飛龍)이 구름 위에 오르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혈당이 살아 있고 분명하며 주산(主山)과 안산(案山)이 다정하게 마주하고 있고 산들의 기운이 호대(浩大)하니 크게 쓰일 땅이 될 만합니다. 원당리는 용호가 길격에 해당한다 하나 혈이 열려 있고 얕은 와형(窩形)이니, 이것이 작은 흠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원당리의 윤총(尹塚)은 누구의 무덤인가?”
하자, 윤정구가 아뢰기를,
“윤관(尹瓘)의 무덤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윤관이라면 북관(北關)에서 공로가 있었던 그 사람인가?”
하니, 윤정구가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책이 다섯 수레[書有五車矣]’라는 말이 있는데, 풍수지리 서적도 다섯 수레라고 할 만하다. 이 서적들은 청(淸) 나라에서 온 것인가, 우리나라에도 있는 것인가?”
하니, 김규홍이 아뢰기를,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온 것도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주자(朱子)의 주의(奏議)에도 능을 천봉(遷奉)하는 논(論)이 있다.”
하니, 김규홍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사관에게 자리로 돌아가라고 명하였다. 이어 물러가라고 명하니, 신하들이 차례로 물러 나왔다.


[주D-001]혈(穴) : 신의 정기(精氣)가 응결하는 곳을 말한다. 이곳에 시신을 묻는다.
[주D-002]사(砂) : 혈(穴)을 중심으로 하여 전후 좌우에 나열된 산, 물, 암석, 지형(地形), 건물, 수목(樹木) 등 모든 환경 조건을 말한다.
[주D-003]수(水) : 강(江), 바다, 호수, 못, 시내, 도랑을 포함한 모든 물을 일컫는다. 뿐만 아니라 실제 물이 고이지 않은 낮은 지대와 흐르지 않는 내, 개울, 도랑도 수라 한다.
[주D-004]조산(祖山) : 혈(穴)의 처음 근원이 되는 태조산(太祖山)에서 혈이 있는 산인 주산(主山)에 이르는 사이에 태조산 다음으로 높고 큰 산이 소조산(少祖山)이고, 그 다음으로 높고 큰 산이 종산(宗山)이고 주산 뒤에 그보다 높이 솟은 산이 부모산(父母山)이고, 이 부모산 뒤에 그보다 높이 솟은 산이 조산이다.
[주D-005]용호(龍虎) : 청룡(靑龍)과 백호(白虎)를 말한다. 사신(四神) 가운데 동쪽을 맡은 신은 청룡이고, 서쪽을 맡은 신은 백호이고, 남쪽을 맡은 신은 주작(朱雀)이고, 북쪽을 맡은 신은 현무(玄武)이다. 여기서 유래하여 혈(穴)을 기준으로 하여 동쪽에 있는 용맥을 청룡이라 하고, 서쪽에 있는 용맥을 백호라 하고, 남쪽에 있는 용맥을 주작이라 하고, 북쪽에 있는 용맥을 현무라 한다. 용호는 이 가운데 청룡과 백호를 말하는 것인데, 혈의 뒤를 북쪽, 앞을 남쪽으로 하는 법을 따르면 왼쪽이 동쪽이 되고 오른쪽이 서쪽이 되므로,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라 한다.
[주D-006]수구(水口) : 혈(穴)을 중심으로 하여 사방의 물을 한 곳으로 모아 빠져나가게 하는 고장지(庫藏地)를 말한다. 고장지는 진(辰), 술(戌), 축(丑), 미(未)를 말하는데, 이것으로 혈의 사대국(四大局)이 결정된다. 곧 고장지가 진일 경우는 수국(水局), 술일 경우는 화국(火局), 축일 경우는 금국(金局), 미일 경우는 목국(木局)이다.
[주D-007]나성(羅星) : 나성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반듯하고 둥그스름한 큰 암석이 수구를 막는 것을 말하고, 또 하나는 주위의 먼 산들이 성(城)같이 둘러싸고 있는 것을 말한다.
[주D-008]안산(案山) : 혈(穴) 앞쪽에 솟아 있는 산을 말한다.
[주D-009]우각(牛角) : 혈(穴) 바로 뒤나 가까운 옆에 송아지 뿔 모양으로 솟은 것이 있으면 이를 우각사(牛角砂)라 하여 매우 좋은 사(砂)로 본다. 그 가운데 진혈(眞穴)이 있다는 증거다.
[주D-010]개장(開帳) : 조산(祖山)으로부터 용맥(龍脈)이 뻗어 나가는 모습으로, 양쪽으로 팔뚝을 활짝 벌려 안을 것 같은 모양을 이룬 것을 말한다. 그 가운데로 중심맥이 출맥(出脈)하게 되는데, 이를 천심(穿心)이라고 한다.
[주D-011]소조산(少祖山) : 혈(穴)의 처음 근원이 되는 산인 태조산(太祖山)에서 혈이 있는 주산(主山)에 이르는 사이에 태조산 다음으로 높고 큰 산이 소조산이다.
[주D-012]기복(起伏) : 용맥(龍脈)이 위로 솟은 것을 기(起)라고 하고, 아래로 엎드려 있는 것을 복(伏)이라고 한다.
[주D-013]송영(送迎) : 산의 정기(精氣)를 다음 산으로 보내고 다음 산은 이를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주D-014]조산(朝山) : 안산(案山) 너머로 멀리 높게 솟은 산들을 말한다.
[주D-015]의법(倚法) : 작혈법(作穴法)의 하나이다. 혈(穴)이 있는 자리에서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약간 당겨 붙이는 방법을 말한다.
[주D-016]현무(玄武) : 사신(四神) 가운데 동쪽을 맡은 신은 청룡(靑龍)이고, 서쪽을 맡은 신은 백호(白虎)이고, 남쪽을 맡은 신은 주작(朱雀)이고, 북쪽을 맡은 신은 현무(玄武)이다.
[주D-017]외안산(外案山) : 안산(案山)이 중첩되어 있는 경우에 혈에서 가까운 산을 내안산(內案山)이라 하고, 이 내안산의 뒤에 있는 산을 외안산(外案山)이라고 한다.

서계집 제2권
 시(詩)○석천록 상(石泉錄上) 무신년(1668, 현종9)에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석천에 거처한 이후에 지은 것이다.
천주봉(天柱峯)



도봉산(道峯山)이 땅에서 치솟아 하늘에 닿을 듯 삐죽삐죽한 봉우리가 우뚝하니 조화옹이 유독 여기에만 솜씨를 부렸다. 고인들이 이 산은 바로 신선이 살고 있어서 봉호(蓬壺)의 으뜸이 되기 때문에 도봉이라고 명명하였다고 하였다. 또 용이 날고 봉황이 춤추는 등 상서로움과 신령함을 기르고 모아 무강한 기틀을 공고히 하는 것은 임안(臨安)의 천목산(天目山)과 비교해 보면 현격히 차이가 나는데도 산의 봉우리들은 거의 이름이 없으니 매우 괴이하게 여길 만하다. 그 가운데 가장 높은 봉우리 하나를 근래에 이르러서야 곧 ‘만장(萬丈)’이라 명명하였는데 속됨을 면치 못하였으므로 내가 매우 한스럽게 여겼다. 지금 ‘천주(天柱)’라고 명명하고자 하니, 그 형상을 본뜬 것이다. 인하여 절구 4수를 짓는다.

옛적에 이 봉우리의 이름을 만장이라 하였는데 / 舊云萬丈是峯名
새 이름을 지어 다시 실정에 걸맞게 하려 한다 / 要與新名更稱情
도리어 하늘에 기둥 없어도 되게 하였으니 / 却遣天無柱亦得
그 어느 것이 이 봉우리와 높음을 다투겠는가 / 擎高誰與此峯爭

공공의 몸을 백억 개로 만들어 / 便化共工身百億
몸통 하나에 머리 하나씩 붙였어라 / 一身還着一頭來
머리마다 떠받아 깨져도 계속해서 떠받지만 / 頭頭觸碎頭頭觸
우뚝한 이 봉우리 어찌 갑자기 꺾이겠는가 / 看見孤撑詎忽摧

천주는 본래 옥황상제의 뜰과 가까워 / 天柱由來近帝庭
동서 만리에 깊은 바다 굽어본다네 / 東西萬里俯重溟
난새 참마와 규룡 수레 항상 내왕하여 / 鸞驂虬駕常來往
밤마다 성단에 온갖 신령이 모인다네
/ 夜夜星壇會百靈

형악에 천주봉 높다는 말 들었는데 / 衡嶽曾聞天柱高
오봉 중에 높이 다투면 어느 것이 가장 으뜸인가 / 五峯爭長孰推豪
도리어 비바람 치는 어둑한 밤에 / 還輸風雨冥冥夜
홀로 삼경에 토호 세는 것만은 못하리라
/ 獨向三更數兎毫


 

[주D-001]봉호(蓬壺) : 산 이름이다. 해중(海中)에 삼산(三山)이 있는데, 하나는 방호(方壺)로 곧 방장(方丈)이고, 둘째는 봉호로 곧 봉래(蓬萊)이고, 셋째는 영호(瀛壺)로 곧 영주(瀛洲)이다. 모양이 병처럼 생겼다고 한다. 《拾遺記》
[주D-002]천목산(天目山) : 절강성(浙江省) 임안현 서북쪽에 있는 산으로, 부옥산(浮玉山)이라고도 한다. 동천목(東天目)과 서천목(西天目)의 두 봉우리가 있다.
[주D-003]공공(共工) : 고대 전설상의 천신(天神)이다. 전욱(顓頊)과 제위(帝位)를 다투다가 노하여 부주산(不周山)을 들이받으니,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이 기울고 땅을 매어 놓은 밧줄이 끊어져서, 하늘은 서북쪽으로 기울어 해와 달과 별은 서북쪽으로 옮겨 가고 땅은 동남쪽이 낮아져 물은 동남쪽으로 흘렀다고 한다. 《淮南子 天文訓》
[주D-004]난새 …… 모인다네 : 난새 참마와 규룡 수레는 신선이 타는 것이고, 성단(星壇)은 미성(尾星)과 기성(箕星)에 제사 지내던 단이다. 여기서는 천주봉(天柱峯)에 밤마다 신선들이 모인다는 뜻으로 말하였다.
[주D-005]오봉(五峯) : 형산(衡山)의 다섯 봉우리로 자개(紫蓋), 천주(天柱), 운밀(雲密), 석름(石廩), 축융(祝融)이다.
[주D-006]도리어 …… 못하리라 : 도봉산(道峯山)의 천주봉이 구름보다 높이 솟아 있기 때문에 비바람 치는 아무리 어두운 밤이라 할지라도 달 속에 있는 토끼의 털을 셀 수 있지만, 형산(衡山)의 천주봉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말인 듯하다. 즉 도봉산의 천주봉이 형산의 천주봉보다 훨씬 더 높다는 뜻으로 말한 듯하다.

서계집 제4권
 시(詩)○보유록(補遺錄) 여기에 실린 여러 작품들은 모두 원고(原稿)에는 빠진 것으로, 난고(亂藁) 및 지인이 전송하던 것을 뒤미처 얻어 보록(補錄)한 것이다.
도봉산(道峯山). 운로의 시에 차운하다.



승경이 명류를 만나기란 고래로 드물거니와 / 勝境名流古罕逢
어딘들 유종들 다 모인 이곳만 하랴 / 誰如此地萃儒宗
시의 근원은 천길 폭포와 함께 빼어나고 / 詞源共拔千尋瀑
기상의 높음은 만장 봉우리를 능가하네 / 氣岸爭陵萬丈峯
누각에 기대노라니 이내의 빛이 점점이 오고 / 倚閣嵐光來片片
개울 건너노라니 솔 그림자 겹겹이 잠겼구나 / 步溪松影倒重重
석루의 노장들 풍류가 건재하니 / 石樓諸老風流在
오늘 같은 모임이 자주 있어야 좋겠네 / 好事如今合比蹤


연려실기술 별집 제16권
 지리전고(地理典故)
총지리(摠地理)



우리나라 땅의 경계는 해좌(亥坐) 사향(巳向)인데 정동은 경상도의 영해부(寧海府)이니, 서울에서 7백 45리 떨어져 있으며, 정서는 황해도의 풍천부(豐川府)이니, 서울에서 5백 35리 떨어져 있으며, 정남은 전라도의 해남현이니, 서울에서 8백 96리 떨어져 있으며, 정북은 함경도의 온성부(穩城府)이니, 서울에서 2천 1백 2리 떨어져 있다. 동과 서를 합치면 도합 1천 2백 80리요, 남과 북을 합치면 2천 9백 98리가 된다.
○ 고려 때에는 은병(銀甁)을 돈으로 썼는데 이것을 ‘활구(闊口)’라고 했으며, 우리나라의 지형을 본뜬 것이라고 한다. 지금은 활구의 제도를 보지 못하나, 대개 우리나라 땅 모양이 좁고 길어서 서울에서 남쪽으로는 장흥에 이르기까지 9백 75리요, 북쪽으로는 강계에 이르기까지 1천 3백 30리가 되며,동북쪽으로는 경흥에 이르기까지 2천 3백 59리요, 서남쪽으로는 진도에 이르기까지 9백 리가 되며, 서북쪽으로는 의주에 이르기까지 1천 1백 40리요, 동남쪽으로는 울산에 이르기까지 9백 20리이며, 동쪽으로는 영해(寧海)에 이르기까지 5백 40리요, 서쪽으로는 고양(高陽)에 이르기까지 30리이니, 이것을 보면 활구가 둥글고 길쭉한 모양임을 알 수 있다. 《소문쇄록》
○ 전라도의 김제군 벽골제호(碧骨堤湖)를 경계로 해서 전라도를 호남이라 부르고, 충청도를 호서라고도 부른다. 또는 제천에 의림지호(義林池湖)가 있기 때문에 충청도를 호서라고 한다.
○ 경상도의 고을들은 조령과 죽령 두 고개 남쪽에 있기 때문에 영남이라 부른다.
○ 강원도는 바닷가에 있는 9군(郡)이 단대령(單大嶺) 동쪽에 있기 때문에 영동이라 한다. 단대령은 대관령이라고도 하기 때문에 강원도를 또 관동이라고도 한다.
○ 황해도는 경기해(京畿海)의 서쪽에 있으므로 해서라고 부른다.
○ 함경도는 철령관(鐵嶺關)의 북쪽에 있으므로 관북이라 부르며, 평안도는 철령관 서쪽에 있으므로 관서라고 부른다. 《역대아람(歷代兒覽)》
○ 우리나라의 도읍을 정했던 곳은 한두 곳이 아니다. 김해는 금관국(金官國)의 도읍이었고, 상주는 사벌국(沙伐國)의 도읍이었고, 남원은 대방국(帶方國)의 도읍이었고, 강릉은 임영국(臨瀛國)의 도읍이었고, 춘천은 예맥국(濊貊國)의 도읍이었으니, 이들은 모두 조그마한 지경을 점거한 것으로 지금의 소읍 같은 것은 이루 셀 수 없이 많다.경주는 동경(東京)으로 신라 1천년의 도읍터인데 산천이 서로 둘러 있고 땅이 기름진데, 그 중에 문천(蚊川) 한 구비가 노닐 만하고 나머지는 별로 기이한 명승지가 없다. 평양은 기자(箕子)가 도읍했던 곳으로 팔조(八條)의 정치와 정전의 제도가 아직도 뚜렷하게 남아 있으니, 지금의 외성(外城)이 그것이다. 그 후에 연 나라 위만(衛滿)에게 점거되었다가 또 고구려가 도읍한 곳인데, 그 국경은 남으로 한강에 이르고 북으로 요하에 이르렀으며 군사 수십만을 거느린 가장 강한 나라이었다. 고려에서는 서경(西京)을 설치하여 봄과 가을에 왕래하며 순유(巡遊)하는 곳으로 삼았으니, 지금도 사람과 물자가 풍부한 것은 모두 그 남아 있는 교화 때문이다. 영명사(永明寺)는 바로 동명왕(東明王)의 구제궁(九梯宮)이니 기린굴(麒麟窟)과 조천석(朝天石)이 있으며 영숭전(永崇殿)은 고려 장락궁(長樂宮)의 터이다. 도읍의 진산(鎭山)은 금수산(錦繡山)이요, 그 윗봉우리는 모란봉인데, 모두 작은 산으로서 송도와 한성의 주산(主山)처럼 웅장하거나 높지는 않다.북쪽에는 내[川]가 없으므로 몽고 군사가 휘몰아 쳐들어왔고, 남쪽은 강이 둘렀으므로 묘청(妙淸)이 점거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니 한스러운 일이다. 성문은 넓고 크며 누각은 높으며, 동쪽에는 대동문(大同門)ㆍ장경문(長慶門)의 두 문이, 남쪽에는 함구문(含毬門)ㆍ정양문(正陽門)의 두 문이, 서쪽에는 보통문(普通門)이, 북쪽에는 칠성문(七星門)이 있다. 8도에서 오직 이 도읍터만이 서울과 서로 겨룰 만하다. 동쪽 10리 밖 구룡산(九龍山) 밑에 안하궁(安下宮)의 옛터가 있는데 어느 시대에 지은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아마 별궁인 것 같다.
성천(成川)은 송양국(松壤國)의 도읍이었고 옛 강동(江東)은 양양국(陽壤國)의 도읍이었는데, 비록 지형은 좁으나 산과 물이 좋아 경치가 좋고 그 중에도 용강산성(龍岡山城)은 가장 웅장하여, 지금까지도 높이 솟아 허물어지지 않았다. 전해 오는 말로는 용관국(龍官國)이라고 하는데 어디에 근거한 말인지 알 수가 없다. 부여는 백제의 도읍터로 탄현(炭峴) 안에 반월성(半月城)터가 아직도 뚜렷하다.비록 백마강으로 참호를 삼았으나 좁고 얕아 왕자가 거처할 곳은 되지 못하니 그렇기 때문에 소정방(蘇定方)에게 멸망되고 말았다. 전주는 견훤이 점거했던 곳이나 오래 못 가서 고려에 항복했는데, 지금도 고도의 유풍이 있다. 철원은 궁예가 점거했던 곳으로서 태봉국(泰封國)이라 불렀는데, 지금도 겹성[重城]의 옛 터전과 궁궐의 층계가 남아 있으며 봄이면 꽃이 어지러이 핀다. 땅의 형세가 험하고 막혔으므로 강을 따라 물건을 운반하기가 어렵다.
오직 송도만은 왕씨(王氏)가 왕업을 일으킨 땅으로, 5백 년 기업을 튼튼히 한 곳이다. 곡봉(鵠峯)을 주산으로 하고 줄기가 뻗어 산세가 둘러 있으니, 비록 작은 산이라도 모두 구역이 정해져 있다. 물이 맑고 깨끗하여 방방곡곡에 놀 만한 곳이 많다. 고종 이후로 강화에 도읍을 옮겼는데, 이곳은 바다 속에 있는 조그마한 섬으로서 도읍이라고 일컬을 수가 없다.우리 태조가 개국하면서 도읍을 옮길 뜻이 있어 먼저 계룡산 남쪽에 가서 지세를 살펴보고 서울의 규모를 생각하다가 얼마 안 되어 이를 중지하고 한양에 도읍을 정하였다. 술자가 말하기를, “옛날에 공암(孔巖)이 앞에 있다는 참언이 있고 삼각산이 서쪽으로 서역평(曙驛坪)에 연해 있어 참으로 아름다운 땅이라 했더니 뒤에 다시 보니, 모든 산이 밖을 향해 달아나는 형세이므로 백악 남쪽과 목멱산 북쪽이 제왕 만대의 땅으로서 하늘과 함께 무궁할 것이다.”고 하였다.세속에 전하기를, “송경(松京)은 산과 골짜기가 사면을 쌓고 있어 서로 감싸고 감추어 주는 형세이기 때문에 시대마다 세력을 부리는 권신들이 많고, 한도(漢都)는 서북쪽이 높고 동남쪽은 낮기 때문에, 큰 아들이 가볍게 되고 작은 아들이 무겁게 될 형세이므로 오늘날까지 왕위의 계승과 명공(名公)ㆍ높은 대신에는 대개 작은 아들이 많다.” 하였다. 《용재총화》
○ 비류(沸流)와 온조(溫祚)가 부아악(負兒岳)에 올라가서 살 만한 땅을 골랐는데, 비류는 미추홀(彌趨忽)에 도읍하고 온조는 위례성(慰禮城)에 도읍했다. 뒤에 온조(溫祚)는 도읍을 남한산성 곧 지금의 광주(廣州)로 옮겼다가, 또 북한산성으로 옮겼는데 바로 이곳이 지금의 한양인데, 그가 정한 명당(明堂)은 어디인지 알 수 없다.한양이 이씨(李氏)의 도읍터라는 것이 도선(道詵)의 도참(圖讖)에 써 있었기 때문에 고려가 남경(南京)을 한양에 세워 오얏나무를 심고 이씨(李氏)의 성을 가진 사람을 골라서 이씨를 부윤(府尹)으로 삼았다. 임금도 또한 해마다 한번씩 순행하고 용봉장(龍鳳帳)을 묻어서 지세를 눌렀다. 내가[서거정(徐居正)] 일찍이 《고려사》를 상고해 보건대, 한양의 명당은 다만 임좌(壬坐) 병향(丙向)의 자리라고만 쓰여 있고 어디라고는 명백히 말하지 않았는데, 지금 경복ㆍ창덕 두 궁(宮)의 정전(正殿)이 모두 임좌 병향인 것을 보면, 고려 때 말한 곳이 아마 이 두 궁(宮)터에서 벗어나지 않은 듯하다.근래에 술사 최양선(崔揚善)은 승문원 옛 터가 바로 명당이라 했고 어느 사람은 또 종묘의 낙천정(樂天亭)이 명당자리라고 하나 모두 얕은 소견이며 믿을 수 없는 말들이다. 《필원잡기》
○ 세조가 인지의(印地儀)를 만들어 노래[歌]로 찬송했는데 그 법제는 동(銅)을 부어 24위(位)의 그릇을 만들고 그 가운데를 비워 구리 기둥을 세우고 옆으로 구멍을 뚫어 그 위에 구리 저울을 놓고 낮추고 올리면서 보게 하였으니 이것을 규형(窺衡)이라 불렀다.땅을 측량할 적에 영구(靈龜 지남철)로 사방을 바로잡았으니, 오시(午時) 초일각(初一刻)이 어느 표(標)에 멀고 가까운가를 알려고 하면 먼저 묘시(卯時) 초일각이나 혹은 유시(酉時) 초일각에 표를 해서 엿보게 하고, 다시 묘시와 유시에 표한 곳을 먼저 법에 의해서 사방을 바로잡아 정오(正午) 초일각에 표한 곳을 어느 방위 몇 각(刻)으로 정한다.이렇게 한 뒤에 명당으로부터 끈으로 앞의 묘시(卯時) 초일각까지 재어서 1천 1백 척에 표하면 세 곳의 오정(午正) 일각(一刻)의 표가 3천 3백이 될 것이니, 이것으로 24위를 바로잡고, 가로 세로와 구부러지고 바른 것을 모두 이것으로써 바로잡았다. 임금이 일찍이 이륙(李陸)ㆍ김유(金紐)ㆍ강희맹(姜希孟) 등을 불러서, 이 법을 강론하고 후원에서 시험하게 하였더니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이에 곧 영릉(英陵) 사산(四山)을 측량하였으며, 그 뒤에 또 경성의 지형을 측량하도록 명하고 모두 이 법을 쓰게 하였다.그러나 경성은 민가가 즐비하여 측량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부득이 이륙 등의 어리석은 의견을 썼으니 한 성 안에 무릇 표를 세운 곳은 모두 이 법을 써서 바로잡고 원근ㆍ고저ㆍ대소ㆍ평험(平險)에 이르기까지 역시 종이에 베끼고 그 속에 24위를 정하고, 지상에서 가장 가까운 곳 하나를 측량하고 이를 줄여서 작은 자로 하면, 다시 땅을 재지 않아도 이 자로 땅 위에 그은 곳을 재어 보면, 번거롭게 걸으면서 재지 않아도 산하와 천지와 성곽과 집들이 모두 제곳을 떠나지 않으면서 원근과 고저가 자연히 추호도 차이가 없게 될 것이다. 《청파(靑坡)》
○ 곤륜산(崑崙山) 한 줄기는 큰 사막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동쪽으로 의무려산(醫巫閭山)이 되고 이곳으로부터 크게 끊어져서 요동 들판이 된다. 들판을 건너가서 불쑥 일어난 것이 백두산이 되어 여진과 조선의 경계에 있으니 이것이 곧 《산해경(山海經)》에 이른바 불함산(不咸山)이다. 북쪽으로 뻗친 한 줄기가 두 강을 끼고 영고탑(寧古塔)이 되고, 남쪽으로 뻗어나간 한 줄기가 조선 산맥의 맨 첫째가 된다. 산꼭대기에 있는 큰 못[池]으로부터 분수령이 되어 남쪽으로 내려간 것은 연지소봉(燕脂小峯)ㆍ백산(白山)이 되고 허항령(虛項嶺)ㆍ보다회산(寶多會山)ㆍ완항령(緩項嶺)ㆍ설령(雪嶺)이 된다.이곳으로부터 동쪽으로 뻗쳐서 장백산이 되고, 한 줄기는 북쪽으로 달려 경성ㆍ부령(富寧)을 지나 두만강을 끼고 동쪽으로 뻗어 경흥에서 그친다. 설령으로부터 남쪽으로 달려서 두리산(豆里山)ㆍ참두령(斬頭嶺)이 되며, 서쪽으로 꺾어져 남쪽으로 가서 황토령(黃土嶺)ㆍ천수령(天守嶺)ㆍ조가령(趙可嶺)ㆍ후치령(厚致嶺)이 되고, 북쪽으로 꺾어져서 태백산이 되며, 그 중간에 뻗친 한 줄기는 서남쪽으로 내려와서 함흥부가 된다.
○ 태백산으로부터 서쪽으로 내려가서 백계산(白階山)이 되고, 남쪽으로 부전령(赴戰嶺)이 되며, 서남쪽은 초황령(草黃嶺)ㆍ설한령(雪寒嶺)이 되며 서쪽으로 뻗친 한 산맥은 평안도가 된다. 원 산맥 줄기는 남쪽으로 내려가서 상검산(上劍山)ㆍ하검산(下劍山)ㆍ오봉산(五峯山)ㆍ마유령(馬踰嶺)ㆍ두미령(頭尾嶺)이 되며, 또 동으로 꺾어졌다가 남쪽으로 내려가서 거모령(巨毛嶺)ㆍ쌍가령(雙加嶺)ㆍ거차리령(巨次里嶺)이 되고, 모흘(亇屹)ㆍ마유령(馬踰嶺)ㆍ노인치(老人峙) 3령은 모두 안변(安邊)ㆍ영풍(永豐)에 있다. 가 되고 박달치(朴達峙)가 되며,동쪽으로 꺾어져 세 지방의 분수령이 되는데 동쪽에서 일어나 철령이 되고, 동북쪽으로는 황룡산(黃龍山)이 되고, 남쪽으로 뻗쳐서 축곶령(杻串嶺)ㆍ추지령(楸池嶺)ㆍ금강산ㆍ회전령(檜田嶺)ㆍ진부령ㆍ흘리령(屹里嶺)ㆍ석파령(石波嶺)ㆍ설악(雪岳)ㆍ한계산(寒溪山)이 되고, 오색령(五色嶺)ㆍ 연수파(連水波)ㆍ오대산ㆍ대관령ㆍ두타산ㆍ백복령(百復嶺)이 되었으며, 서쪽으로 꺾어져 태백산이 되고, 서남쪽으로는 우치(牛峙)ㆍ마아령(馬兒嶺)ㆍ소백산ㆍ죽령이 되고,또 불쑥 솟아서 월악(月岳)ㆍ주흘산(主屹山)ㆍ조령ㆍ의양산(義陽山)ㆍ청화산(淸華山)ㆍ속리산ㆍ화령(火嶺)ㆍ추풍령이 되고, 황악(黃嶽)ㆍ무풍령(舞豐嶺)ㆍ대덕산ㆍ덕유산ㆍ육십치(六十峙)ㆍ본월치(本月峙)ㆍ팔량치(八良峙)ㆍ지리산이 된다.
○ 세 지방의 분수령으로부터 산세가 불쑥 일어나서 철령이 되고, 한 가지는 동남쪽으로 뻗쳐 내려가다가 금성(金城)ㆍ 금화(金化) 사이를 지나 꾸불꾸불 내려가서 영평(永平) 백운산이 되고, 적목치(赤木峙)가 되었으며, 북쪽으로 되돌아서 주엽산(注葉山)이 되고, 축석현(祝石峴)이 되었으며, 서북쪽으로는 불곡산(佛谷山)이 되고, 남쪽으로 내려가서 도봉산ㆍ삼각산ㆍ백악ㆍ인왕산이 되고, 한양 경성이 되었다.
○ 검산령(劍山嶺)으로부터 남쪽으로 거차리령(巨次里嶺)에 이르러, 서쪽으로 뻗은 한 줄기는 남쪽으로 내려가서 청량산, 고달산(高達山)이 되고 곡산(谷山)ㆍ학령(鶴嶺)이 된다. 이곳으로부터 두 산맥으로 나뉘어져 한 산맥은 서쪽으로 내려가서 황해도가 되고, 한 산맥은 남쪽으로 뻗쳐 이천(伊川)ㆍ토산(兔山)ㆍ금천(金川) 경계를 지나서 화장산(華藏山)ㆍ성거산(聖居山)ㆍ천마산ㆍ오관산(五冠山)이 되고 송악 송경(松京)이 된다.
○ 황해도 산맥은 학령(鶴嶺)으로부터 서쪽으로 뻗쳐 덕업산(德業山)이 되었으며, 북쪽으로 내려가서 재고개(梓古介)ㆍ석달령(石達嶺)ㆍ증격산(甑擊山) 곡산의 진산 이 되고, 서쪽으로 꺾어져 수안(遂安)의 언진산(彦眞山)ㆍ망진산(望眞山)이 되며 서쪽으로 뻗은 한 줄기는 황주(黃州)의 구현(駒峴)이 되며, 정맥은 남쪽으로 내려가서 고음초산(古音初山)이 된다. 또 두 산맥으로 나뉘어져 서쪽으로 뻗친 한 줄기는 태산준령(泰山峻嶺)이 되고, 가로 뻗쳐서 서흥(瑞興)ㆍ봉산(鳳山)이 되고, 끊기지 않고 북쪽으로 뻗쳐서 대현산(大峴山)ㆍ자비령(慈悲嶺)ㆍ파령(岊嶺)ㆍ동선령(洞仙嶺)이 된다.남쪽으로 뻗은 한 줄기는 동쪽으로 꺾였다가 다시 서쪽으로 돌아 차유령(車踰嶺)이 되고, 정족산(鼎足山)이 되며, 남쪽으로는 평산(平山)ㆍ면악(綿岳) 혹은 멸악산(滅惡山)이라고도 한다. 이 된다.남쪽으로 뻗은 또 한 가지는 배천(白川)의 치악산과 연안의 비봉산(飛鳳山)이 된다. 정맥은 서남쪽으로 가다가 해주의 창금(唱金)ㆍ수양(首陽)ㆍ북고(北高)의 여러 산이 되고, 또 들로 내려가서 평강(平崗)이 되며, 서북쪽으로 내려가 신천(信川)의 치산(雉山)ㆍ달마산(達摩山)이 되며, 북쪽으로 돌아서 문화(文化)의 구월산이 된다.
○ 덕유산은 경상ㆍ전라ㆍ충청 세 도(道)의 어귀를 차지하고 서쪽으로 뻗은 한 가지는 다시 북쪽으로 돌아 고달산(高達山)과 전주 동쪽에 있는 진안(鎭安)의 마이산이 되는데 두 돌봉우리가 치솟아 하늘에 닿았으며, 서북쪽으로는 웅치(熊峙)가 되고, 서쪽으로 뻗친 한 산맥은 전주부(全州府), 동쪽은 위봉산성(威鳳山城), 북쪽에는 기린봉(麒麟峯)이 되었으며, 한 산맥은 전주의 서북쪽에 이르러 건지산(乾止山)이 된다.
○ 마이산의 한 산맥은 서남쪽으로 가다가 북으로 뻗어 금구(金溝)의 모악(母岳)이 되며, 서남쪽으로 뻗어 순창의 부흥산(復興山)과, 정읍의 내장산과, 장성의 입암산(笠巖山)ㆍ노령(蘆嶺)이 되고, 또 남쪽으로는 나주부 금성산(錦城山)이 되었다.입암산으로부터 동쪽으로 뻗어 추월산(秋月山)ㆍ광덕산(廣德山)이 되고, 동남쪽으로 무등산이 되며, 남쪽으로 장흥의 천관산(天冠山)에 이르고, 서북쪽으로 돌아 영암의 월출산이 되며, 남쪽으로 만덕미(萬德尾) 황등산(黃等山)에서 그치고, 동북쪽으로 돈 것은 송광(松廣) 계족산(鷄足山)이 된다.
○ 마이산의 또 한 줄기는 웅치(熊峙)로부터 북으로 뻗쳐 한 줄기는 석산(石山)이 되며 거꾸로 내려가다가 구봉산(九峯山)ㆍ주취산(珠崒山)ㆍ운제산(雲梯山)ㆍ탄현(炭峴)ㆍ이치(梨峙)가 되며, 대둔산(大芚山)이 되어 충청도 지경에 들어가서 금수(錦水)를 등지고 돌아 계룡산이 된다. 계룡산 한 줄기가 서쪽으로 내려가다가 크게 끊어져서 판치(板峙)가 되고, 불쑥 솟아서 북치(北峙)가 되며, 공주부 월성산(月城山)이 된다.
○ 월성산 한 줄기는 서남쪽으로 뻗어 백제의 옛 수도인 부여의 부소산(扶蘇山)이 된다.
○ 속리산 한 줄기는 서쪽으로 뻗다가 북으로 달려 거질화령(巨叱火嶺)이 되고, 달천(達川)을 끼고 동쪽으로 꺾어져 서북쪽으로 가다가 삼생산(三生山)ㆍ두타산이 되며 죽산 경계에 이르러 칠장산(七長山)이 된다. 칠장산으로부터 한강을 따라 서북쪽으로 오다가 흩어져서 한남(漢南)의 여러 산이 되고, 양지(陽智)를 따라 남ㆍ동ㆍ북쪽으로 가다가 여주의 영릉(英陵)이 되고, 용인으로부터 곧장 북으로 뻗은 것은 남한산성이 된다.광교산(光敎山)으로부터 남쪽으로 뻗어서 화성이 되고 북으로 뻗어 청계산(淸溪山)ㆍ관악산이 되며, 서쪽으로 뻗어 수리산(修理山)ㆍ소래산(蘇來山)이 되고 통진의 문수산(文殊山)에 이르러 바다를 건너서 강화부가 된다.
○ 칠장산으로부터 서남쪽으로 뻗은 것이 한 영맥(嶺脈)이 되어 대문령(大門嶺)과 마일령(磨日嶺)이 되며, 전의(全義)에서 크게 끊어졌다가 서쪽에서 일어나 차령(車嶺)이 되며, 또 서쪽으로 무성(武城)ㆍ오서(烏棲)ㆍ가야(伽倻) 등 여러 산이 되며, 흩어져서 내포(內浦)의 여러 산이 된다.
○ 태백산 동쪽 줄기는 동남쪽으로 가다가 금장산(金莊山)ㆍ백암산(白巖山)ㆍ평해(平海) 경계가 되고 주령(珠嶺)ㆍ삼승령(三乘嶺)이 되며, 서쪽으로 꺾여져 영해(寧海) 북쪽에 이르러 월명산이 되며, 바다를 따라 남쪽에 이르러서는 신라의 고도인 경주의 금오산이 된다.고개 동쪽 11읍(邑) 영해ㆍ영덕(盈德)ㆍ청하(淸河)ㆍ흥해(興海)ㆍ영일ㆍ경주ㆍ장기ㆍ울산ㆍ언양(彦陽)ㆍ기장(機張)ㆍ동래 의 물은 모두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며 경주에서 서쪽으로 뻗어 북쪽으로 돌아서 대구부가 된다.
○ 지리산 서쪽 줄기는 화개(花開) 남쪽에 이르러 하동의 경양산(慶陽山)이 되며, 청천강(菁川江)을 끼고 동쪽으로 뻗어 곤양(昆陽)ㆍ사천ㆍ진해의 북쪽을 지나서 창원의 청룡산이 되고, 가락국의 고도인 김해에 이르러 구지봉(龜旨峯)이 된다.
○ 주취산(珠崒山) 북쪽 한 줄기는 서쪽으로 내려가서 탄현(炭峴)이 되고 운제산(雲梯山)ㆍ정토산(淨土山)이 되며 용화산(龍華山)이 되었으며, 기준(箕準 기자(箕子)의 후손으로 위만에게 쫓겨 남쪽으로 피난감)의 옛 성터가 그곳에 있다.
○ 평안도 산맥은 설한령(雪寒嶺)으로부터 서쪽으로 뻗은 두 줄기 중의 한 줄기가 희천(熙川)의 적유령(狄踰嶺)을 따라 서남쪽으로 뻗어 또 두 갈래로 나뉘어져 북으로 내려간 것은 위원(渭原)ㆍ초산(楚山) 두 읍의 여러 산이 되고, 서남쪽으로 뻗은 것은 흩어져서 청천강 이북과 압록강 이남 여러 고을의 산이 된다.
○ 설한령의 한 줄기는 서남쪽으로 뻗어 영원(寧遠)을 따라 서북쪽으로 가서 묘향산에 이르러 두 강 사이를 끼고 꾸불꾸불 내려가다가 알일령(遏日嶺)과 유현(柳峴)이 된다. 안주 구봉산(九峯山)에 이르러 다시 남쪽으로 뻗어 자모산(慈母山)과 서경 평양부의 금수산(錦繡山)이 된다.
○ 양덕(陽德) 남곡산(南谷山) 북령(北嶺) 산맥의 한 줄기는 서쪽으로 내려가서 함박산(含朴山)이 되고, 거꾸로 북으로 내려가서 성천(成川)의 검학산(劍鶴山)이 된다.
○ 자모산의 한 줄기는 영유강(永柔江) 서쪽을 따라 서남쪽으로 뻗어 용강(龍崗)의 황룡산(黃龍山)이 된다.
○ 총전령(葱田嶺)의 한 줄기는 거꾸로 북쪽으로 내려가서 강계부(江界府)와 폐 4군의 여러 산이 된다.
○ 강원도 오대산의 서북쪽 한 줄기는 홍천 동쪽에 이르러 세 줄기로 나뉘어 하나는 서북쪽으로 내려가서, 춘천의 봉의산(鳳儀山)이 되는데 옛 맥국(貊國)의 땅이다. 한 줄기는 서남쪽으로 내려가서 원주부 치악산이 되며, 한 줄기는 서쪽으로 뻗어 검의산(劍倚山)ㆍ팔봉산(八峯山)이 되고 용문산(龍門山)에서 그친다.
○ 두만강은 바로 토문강(土門江)이며 백두산 큰 못이 근원이다. 동쪽 흐름 수십 리는 물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데 돌 틈을 따라 백리를 숨어 흐르다가 비로소 큰 물이 솟아나서 동량(東良)ㆍ북사(北斜)ㆍ지하(地河)ㆍ목하(木河)ㆍ수주(愁州)ㆍ동건(童巾)ㆍ다온(多溫)ㆍ속장(束障) 등을 거쳐 경원 회질가(會叱家)에 이르고, 남쪽으로 흘러 경흥ㆍ사차마도(沙次磨島)에 이르러 나뉘어서 5리를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여지승람》
무산(茂山) 서북에 있는 냇물은 근원이 설잠(雪岑) 북쪽에서 나왔고, 박하천(朴下川)은 근원이 장백산 북쪽에서 나왔는데, 두 물이 합쳐져서 두만강으로 들어가고 무산을 거쳐서 동쪽으로 회령에 이르고 북쪽으로 꺾어져 종성을 거쳐 온성(穩城)에 이르고, 동쪽으로 꺾어져 남으로 흐르다가 경원을 지나 경흥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 훈춘강(訓春江)은 근원이 여진 땅에서 나와 동림성(東林城)에 이르러 두만강으로 들어간다. 《여지승람》에는 경원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 수빈강(愁濱江)은 근원이 백두산으로부터 나와서 북쪽으로 흘러 소하강(蘇下江)이 되는데, 혹은 속평강(速平江)이라고도 한다. 공험진(公嶮鎭) 선춘령(先春嶺)을 지나서 거양(巨陽)에 이르고 다시 동으로 1백 20리를 흘러 아민(阿敏)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여지승람》에는 경흥으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 함흥의 성천강(成川江) 혹은 군자하(君子河)라고도 한다. 은 그 근원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갑산(甲山) 경계 화기령(樺岐嶺) 태백산 남쪽 에서 나오고, 하나는 희천(熙川) 경계 황초령(黃草嶺) 동남쪽 에서 나와 합류하여 함흥부 서북쪽 탑란동(塔蘭洞)을 지나서, 성 남쪽 만세교(萬歲橋)에 이르고 함흥부 남쪽 35리 도련포(都連浦)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 초원(草原)의 금강진(金江津)은 근원이 검산령(劍山嶺) 동쪽에서 나와 초원의 남쪽을 지나서 바다로 들어간다.
○ 영흥(永興)의 용흥강(龍興江)은 그 근원이 넷이 있으니, 하나는 함흥부 서쪽 50리 떨어진 정변사(靜邊社)에서 나오는데 이름을 비류수(沸流水)라고 한다. 그 물 근원인 구멍의 둘레가 5척 3촌이요, 깊기는 끝이 없으며 물이 솟아 내가 된다.또 하나는 함흥부 서북쪽 2백 10리 거리의 마유령(馬踰嶺) 희천(熙川)의 경계 요해지에서 나왔고, 하나는 함흥부 서쪽 1백 80리 거리의 애전현(艾田峴) 맹산(孟山) 경계에서 나오고, 다른 하나는 양덕현(陽德縣) 거차령(居次嶺)에서 나와서 고암(庫巖)에서 송어탄(松魚灘)과 합했는데, 이름을 횡천(橫川)이라 한다. 용신당(龍神堂)을 지나서 진정사(鎭靜寺) 서쪽 절벽 밑에 이르러 창경연(鶬鶊淵)이 되었다.그 밑에 광탄(廣灘)이 있고 광탄 가운데 백마같이 생긴 흰 돌이 있는데, 그 돌이 물 속에 잠기고 물 위에 나타나는 것을 보고 물의 수위를 짐작한다. 읍성 동북쪽을 지나서 이 강물이 남쪽으로 흐르다가 고원(高原)의 덕지탄(德之灘)ㆍ문천(文川)의 전탄(箭灘)과 합해서 바다로 들어간다.
본 이름은 횡강(橫江)인데, 하륜(河崙)이 사신이 되어 이곳에 이르렀을 때, 도순문사(都巡問使) 강회백(姜淮伯)이 중류에 술자리를 베풀고 “함흥부는 도조와 환조께서 터를 정한 자리이며, 또 태조께서 여기서 탄생하셨는데, 아직도 이 강에 이름이 없으니 또한 한 가지 흠이 아닙니까?” 하니 하륜이 용흥(龍興)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 의주의 압록강은 혹 마자하(馬訾河)라 하고 청하(靑河)ㆍ용만이라고도 하는데, 서쪽의 요동 도사(都司)까지 1백 60리가 된다. 근원은 백두산인데 남쪽으로 흘러 갑산(甲山)ㆍ혜산진(惠山鎭)을 거쳐 혜산강(惠山江)이 되고 허천강(虛川江)과 합한다.
○ 허천강은 근원이 북청ㆍ북제령(北諸嶺)ㆍ벌성포천(伐成浦川)인데, 산 북쪽 파천(波川)ㆍ독산천(禿山川)ㆍ황수천(黃水川) 등 여러 물과 합해서 북쪽으로 흘러 갑산(甲山)ㆍ청주기(靑州岐)에 이르고 허천역(虛川驛) 옆을 지나 허천강이 된다. 장백산 서쪽 여러 냇물과 합했고, 또 운총천(雲寵川)과 합류하여 혜산강으로 들어간다.
○ 두 강이 합해서 서쪽으로 흐르다가 삼수(三水)의 경계로 들어가서 압록강이 되고, 가을파지(加乙波知)에 이르러 장진강(長津江)과 합하니, 장진강은 곧 부전령(赴戰嶺)과 황초령(黃草嶺) 이북에 있는 물이다. 또 서쪽으로는 후주강(厚州江)과 합해서 서북쪽으로 흘러 무창(茂昌)ㆍ여연(閭延)을 지나 남으로 꺾여 흘러서, 옛 우예(虞芮)에 이르러 자성강(慈城江)과 합하고, 서남쪽으로는 위원(渭源) 경계에 이르러 독로강(禿魯江)과 합한다.
독로강은 그 근원이 둘인데, 하나는 희천(熙川) 적유령(狄踰嶺)에서 나와 신광진(神光鎭)을 지나고, 하나는 함경도 경계 화을첩(和乙岾) 밑 설한령(雪寒嶺) 북쪽 총전령(葱田嶺) 서남쪽에 있는 물 밑에 나와서 평남진(平南鎭)을 거쳐 강계(江界) 입석(立石)에서 합하여 북쪽으로 흘러 강계에 이르며, 남쪽은 독로강이 되고, 서쪽은 위원 북쪽 오로량(吾老梁)에 이르러 압록강으로 들어간다.
○ 초산(楚山) 산양회(山羊會)에 이르러 건주위(建州衛) 만주강(滿洲江)과 합하며, 만주강은 혹은 파저강(婆猪江)이라고도 하고 또는 퉁가강(佟家江)이라고도 하는데, 아이보(阿耳堡)에 이르러 동건강(童巾江)과 합한다.
동건강은 근원이 고리산(古理山)과 숭적산(崇積山)에서 나와 남쪽으로 꺾어져 서쪽으로 흐르다가 희천(熙川) 경계에 있는 우현진(牛峴鎭)과 운산(雲山) 경계의 차령진(車嶺鎭)의 여러 냇물과 합쳐서 서쪽으로 흘러 압록강으로 들어간다.
○ 벽동(碧潼)ㆍ창성(昌城)ㆍ삭주를 거쳐 의주 북쪽에서 옥강(玉江)과 합한다.
옥강은 의주 동북쪽 60리에 있는데 그 근원은 천마산(天磨山)과 여자산(呂子山)에서 나와 옥강진(玉江鎭)에 이르러 압록강으로 들어가는데, 그 속에서 담청색 옥이 나기 때문에 옥강(玉江)이라고 한다.
○ 적도(赤島) 동쪽에 이르러 세 갈래로 나뉘어지는데, 하나는 남쪽으로 흘러 굽이쳐서 구룡연(九龍淵)이 되는데, 이것을 압록강이라 하니 물빛이 오리 머리 같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하나는 서쪽으로 흘러 서강(西江)이 되고 하나는 중류를 따라 흐르는데, 이것을 소서강(小西江)이라 한다.검동도(黔同島)에 이르러 다시 합쳐서 하나가 되고 수청량(水靑梁)에 이르러 또 두 갈래로 나뉘어져, 한 갈래는 서쪽으로 흘러 적강(狄江)과 합하고 적강은 압록강 서북쪽에 있으니 오랑캐 땅에서 동북쪽으로 흘러 내려왔다. 한 갈래는 남쪽으로 흘러 큰 강이 되어 위화도를 거쳐 암림곶(暗林串)에 이르러 서쪽으로 흐르다가 미륵당(彌勒堂)에서 다시 적강과 합하여 대총강(大摠江)이 되어 고진강(古津江)과 합한다.
고진강은 근원이 보광산(普光山) 북쪽 선천(宣川) 경계 에서 나와서 식송진(植松鎭)을 거쳐 미륵당에서 삭주 지경의 천마산 남쪽 여러 냇물과 합류하여 이루어진 강이다. 옛 정령(定寧)ㆍ옛 영주(寧州)ㆍ옛 인산(麟山)을 지나 서쪽으로 흘러 압록강으로 들어가는데, 천순(天順) 연간에 서장관 강기수(姜耆壽)가 여기 빠져 죽었기 때문에 서장강(書狀江)이라고도 한다.
○ 남쪽으로 서해로 들어간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여진이 일어난 곳에 압록강이 있었다.” 하였고 옛 기록에 “천하의 세 곳에 큰 강이 있으니 황하ㆍ장강ㆍ압록강이 이것이다.” 하였다.
○ 안주(安州) 청천강은 혹은 살수(薩水)라고도 하는데, 그 근원은 영변(寧邊) 묘향산에서 나와서 10여 리를 흐르다가 어천(魚川)과 합한다. 어천은 근원이 적유령(狄踰嶺)에서 나와 동쪽으로 10리를 흘러 어천이 되었다. 영원 서쪽 경계에 있는 물이 서쪽으로 40리를 흐르다가 희천(熙川) 봉단성(鳳丹城)에서 합하고 아래로 흘러 영변 장항진(獐項津)이 된다.이 강은 안주부 동남쪽에 이르러 화천강(花遷江)이 되고, 또 남쪽으로 5, 6리를 흐르다가 안주 무골도(無骨島)에 이르러 또 구음포진(仇音浦津)과 합한다. 구음포진은 근원이 초산과 벽동(碧潼) 지경에서 나와 운산(雲山)의 동천(東川)이 되고 영변을 거쳐 동쪽으로 흐르다가 또 개천(价川) 장항강(獐項江)과 합한다. 장항강은 바로 묘향산 남쪽 분탄(犇灘)의 하류인데 동천과 합쳐서 남쪽으로 흐르다가 안주 북성(北城) 아래에 이르러 청천강이 되고 서쪽으로 30리를 흐르다가 박천강(博川江)과 합한다.
○ 박천강은 근원이 창성(昌城)의 부운산ㆍ삭주의 천마산ㆍ청룡산ㆍ옛 구주(龜州)의 팔령산(八嶺山)에서 나오는데 청천강과 합류하여 태천(泰川) 동쪽에서 오지천천(烏知遷川)이 되고, 남쪽으로 흘러 구성(龜城)의 구림천(仇林川)ㆍ팔령천(八嶺川)과 합해서 동쪽으로 흘러 박천(博川) 서쪽에서 곶적강(串赤江)과 합해서 박천강이 된다. 이 강이 가산(嘉山) 동쪽에 이르러 대령강(大寧江)이 되어 정주 가마천(加磨川)과 동쪽으로 흐르다가 합하고, 고성진(古城鎭)에 이르러 청천강과 합하며 남쪽으로 흐르다가 노강(老江)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는 대정강(大定江)이라 하였고, 옛날에는 개사강(蓋泗江)이라 불렀는데, 세상에서 전하기를, “주몽이 북부여로부터 남쪽으로 달아나다가 여기에 이르니, 고기와 자라가 모여서 다리를 만들었으며 이로 인하여 무사히 건넜기 때문에 이름을 대령강이라 하였다.” 한다.
○ 평양의 대동강은 그 근원이 둘이 있으니, 하나는 영원(寧遠) 가막동(加幕洞)에서 나와 남쪽으로 흐르다가 맹산현(孟山縣) 북쪽에 이르러서 다시 꺾여 서쪽에서 흘러가다가 덕천 경계에서 삼탄(三灘) 영원 맹산(孟山)의 물이 여기에 이르러서 합쳐 흐르기 때문에 삼탄이라고 부른다. 과 합쳤고 남쪽으로 흘러 개천(价川) 경계에서 순천강(順川江)이 된다. 다시 순천 경계에 이르러 성암진(城巖津)이 되었는데, 위에는 사탄(斜灘)이 있고 밑에는 기탄(岐灘)이 있으며 자산(慈山) 경계에 이르러 우가연(禹家淵)이 되어 은산(殷山)의 대천(大川)과 합했으며 이로부터 다시 동쪽으로 흘러 강동 경계에 이르러 잡파탄(雜派灘)이 된다.
○ 하나는 양덕(陽德) 북쪽 문음산(文音山)과 오강산(吳江山) 및 맹산의 대모원동(大母院洞)에서 나와 다시 합해서 성천(成川)의 비류강이 되어 흘골산(紇骨山) 밑을 지나는데 산 밑에 사석혈(四石穴)이 있어 물이 그 구멍 속으로 통해 흐르다가 솟아 올라 서쪽으로 나왔기 때문에 이름을 비류강이라 한다. 다시 꺾어져 남쪽으로 흐르다가 강동 경계에 이르러서 잡파탄과 합류하여 서진강(西津江)이 되고 다시 웅성강(熊城江)과 합한다.
웅성강의 근원은 옛 양덕 북쪽 40리에 있는 고원(高原) 경계 우라발산(亏羅鉢山) 거차리령(巨次里嶺) 남쪽 에서 나오는데, 흘러서 양덕(陽德)의 남천(南川)이 되고 곡산(谷山)으로 들어가서 말흘탄(末訖灘)이 되어 곡산 여러 냇물과 합한다. 이 물은 다시 수안을 지나 북쪽을 삼등(三登) 남쪽에 이르러서 웅성강이 되고, 또 서북쪽으로 흘러 서진강으로 들어간다.
○ 평양성 동북쪽에 이르러 마탄(馬灘)이 되고, 성 동쪽에 이르러 백은탄(白銀灘)과 대동강이 된다. 이로부터 서쪽으로 흘러 구진익수(九津溺水)가 되고 그 하류는 평양강과 합한다. 평양강은 근원이 순안(順安)의 법홍산(法弘山)에서 나와서 보통문(普通門) 밖을 지나 웅성강과 합류하여 중화 서쪽에 이르러 이진강(梨津江)이 되고, 강서의 구림천(九林川)과 합해서 용강(龍崗) 동쪽에 이르러 동쪽 급수문(急水門)으로 빠진다.
○ 금천(金川)의 저탄(猪灘)은 근원이 수안의 언진산(彦眞山)에서 나오는데 아래로 흘러 흑석탄(黑石灘)이 되고 보음탄(甫音灘)이 되며 신계(新溪) 서쪽을 지나서 사팔적탄(沙八赤灘)이 된다. 이 물은 평산(平山) 북쪽에 이르러 기탄(岐灘)이 되고 또 남쪽으로 가서 전탄(箭灘)이 되며, 저탄에 이르러 비로소 커져 하류는 금천 조읍포(助邑浦)의 조운(漕運)하는 곳이 된다.
○ 남쪽은 말롱포(末籠浦)가 되고, 그 남쪽은 배천(白川), 동쪽은 금곡포(金谷浦)의 조운하는 곳이며, 또 그 남쪽은 광정도(匡正渡)와 벽란도가 된다.
○ 서울의 한강은 옛날에는 한산하(漢山河)라 일컬었고, 고려에서는 사평도(沙平渡)라 일컬었다. 그 근원은 둘인데, 충주의 금천(金遷)으로부터 흘러온 것을 남강이라 일컫고, 춘천의 소양강으로부터 온 것을 북강이라 일컫는다.
○ 남강은 그 근원이 둘이 있으니, 하나는 강릉의 오대산 우통수(于筒水) 금강연(金剛淵)에서 나온다. 한강이 비록 여러 곳의 물을 받아들였지만 우통수가 그 주류이다. 오대산 물이 두타산 북림계(北臨溪)와 삼척의 죽현(竹峴) 물과 합해서 남쪽으로 흘러, 정선 동쪽 여량역(餘粮驛)을 지나 군(郡) 북쪽에 이르러 광탄진(廣灘津)이 되고, 군 남쪽은 대음강(大陰江)이 되고, 군 서쪽은 용암연(龍巖淵)이 된다.또 흘러가다가 영월 후진(後津)이 되고 금봉연(金鳳淵)에 이르러 금장강(錦障江)과 합한다. 금장강은 바로 평창(平昌)의 연촌진(淵村津) 하류이며, 또 서쪽으로 주천강(酒泉江)과 합하는데 주천강은 바로 원주 동쪽 주천현 거슬산(琚瑟山) 여러 물의 하류이다.또 남쪽으로 흘러 영춘(永春)에 이르러서 눌어탄(訥魚灘)이 되고, 또 남쪽으로 흘러 남진(南津)이 되며, 서남쪽으로 흘러 단양에 이르렀으며, 북쪽으로는 상진(上津)과 하진(下津)이 되고, 서쪽은 소요항탄(所要項灘)이 된다. 또 북쪽으로 꺾어지고 서쪽으로 흘러서 청풍강이 되고, 병풍산 밑에 이르러 북진(北津)이 되며, 제천의 광탄(廣灘) 하류에 와서 합하고, 충주 북쪽 10리에 이르러 북진이 되며, 충주 서쪽 10리 금천에 이르러 달천(達川)과 서로 합한다.
○ 하나는 근원이 보은의 속리산에서 나와 산 위에서 물이 세 줄기로 나뉘어지는데, 그 하나는 구요(九遙) 팔교(八橋)의 냇물이 되어 서쪽으로 흐르다가 북으로 꺾어져 청주 동쪽에 이르러 청천(靑川)이 되고, 청천은 파곶(葩串) 하류와 합하여 괴산에 이르러 괴진(槐津)이 되며, 연풍천(延豐川)과 합한다. 또 북쪽으로 충주 서남쪽에 이르러 달천이 되고, 서쪽으로 금천에 이르러 청풍강과 합하고, 서쪽으로는 월락탄(月落灘)이 된다.그 서쪽에 가흥창(嘉興倉)이 있고, 또 그 서북쪽으로는 원주의 흥원창(興元倉)이 있는데, 섬강(蟾江)과 합한다. 섬강은 바로 오대산 서쪽 횡성(橫城)ㆍ원주의 여러 물인데 서쪽에서는 여주의 여강(驪江)이 되고 양근(楊根)의 대탄(大灘)과 월계천(月溪遷)이 된다. 군(郡) 서쪽 45리 병탄(幷灘)에 이르러 북강과 합하기 때문에 세속에서는 이수두(二水頭)라고도 한다.
○ 북강(北江)은 그 근원이 둘이 있으니, 하나는 인제 서화현(瑞和縣) 소파령(所波嶺)ㆍ소동라령(所冬羅嶺)과 춘천 기린현(基麟縣)의 네 냇물이 합쳐서 인제 미륵천(彌勒川)이 된다. 이 물은 서쪽으로 흘러 주연진(舟淵津)이 되고 양구 남쪽에 이르러 초사리탄(草沙里灘)이 되며, 춘천 동북쪽에 이르러 청연(靑淵)ㆍ주연(舟淵)ㆍ적암탄(赤巖灘)이 된다. 또 춘천부 북쪽 6리에 이르러 소양강이 되고, 우두산(牛頭山) 서쪽에 이르러 보제진(菩提津) 하류와 합했다.그 하나는 회양(淮陽)의 화천(和川) 하류에서 덕진(德津)이 되어 은계(銀溪)와 합했으며, 양구의 대연(大淵) 하류에서 회양ㆍ용연(龍淵)ㆍ남곡(嵐谷)의 물이 되어 금성(金城)의 남천(南川)이 되었고, 철령 남쪽 금강 서쪽에 있는 여러 냇물이 모두 합해서 금성(金城)이 보제진이 되는데 속칭 모천(牟遷)이라고도 한다. 이 물이 서쪽으로 흘러서 통구(通溝) 다경진(多慶津)이 되고 금강 남쪽의 물이 서쪽으로 흘러오다가 양구의 곡계(曲溪)와 합치고 서쪽으로 흘러와 합쳐서 낭천(狼川)에 이르러 마탄(馬灘)이 되고, 남쪽으로는 대리진(大利津)이 된다.또 춘천 북쪽에 이르러 모진(母津)이 되고 우두촌(牛頭村) 앞에 이르러 소양강과 합해서 서쪽으로 흘러 신연진(新淵津)이 된다. 또 홍천강과 합해서 가평 동쪽에 이르러 안판탄(按板灘)이 되고, 양근(楊根) 서쪽에 이르러 용진(龍津)이 되고 병탄에 이르러 남강과 합한다.
○ 남강과 북강이 합해서 서쪽으로 흐르다가 광주(廣州) 경계에 이르러서 도미천진(渡迷遷津)이 되고, 광진(廣津)이 되고 또 송파(松波)ㆍ삼전도ㆍ저자도(楮子島)ㆍ뚝섬 두모포(豆毛浦)가 된다. 경성 남쪽에 이르러 한강도가 되고 또 서쪽으로는 서빙고ㆍ동작진ㆍ흑석(黑石)ㆍ노량(露梁)ㆍ용산강ㆍ마포ㆍ남타(南沱)ㆍ율도(栗島)ㆍ토정(土汀)ㆍ현석(玄石)ㆍ서강(西江) 농암(籠巖)이 된다. 금천(衿川) 북쪽에 이르러 양화도(楊花渡)가 되고, 양천 북쪽에 이르러 공암진ㆍ행주가 된다.또 교하(交河) 서쪽에 이르러 임진강과 합하고, 통진 북쪽에 이르러서는 조강(祖江)이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임진강은 그 근원이 둘이 있으니, 하나는 안변(安邊)과 영풍(永豐) 냇물이 남쪽으로 흐르다가 방장치(防墻峙)를 지나서 이천(伊川)으로 들어간다. 미탄(美灘)의 물은 근원이 박달치(朴達峙)에서 나와서 서남쪽으로 흐르다가 합해서 옛 성진(城津)이 되며 신계(新溪) 경계를 지나 안협의 제당연(祭堂淵)이 된다.평강(平康) 분수령 물은 안협(安峽)의 저구리탄(猪仇里灘)이 되고 이 물이 합해서 포리진(浦里津)이 되어 토산으로 들어가서 동천(東川)이 된다. 다시 삭녕에 이르러 삭녕도가 되고 연천 서쪽에 이르러 징파도(澄波渡)가 되며, 마전(麻田)에 이르러 후근도(朽斤渡)가 되어 양주의 대탄(大灘)과 합한다.
○ 그 하나는 철령 물이 서쪽으로 꺾어져 남으로 흐르다가 평강(平康)의 정자연(亭子淵)을 지나서 철원의 체천(砌川)이 되는데 양쪽 언덕이 모두 석벽이어서 섬돌 같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이 물은 순담(筍潭) 화적연(禾積淵)을 지나서 영평 북쪽에 이르러 직탄(直灘)이 되고, 또 서쪽으로 흐르다가 영평의 전탄(箭灘)과 합한다.포천의 여러 물은 북쪽으로 흐르다가 백로주(白鷺洲)가 되고 백운산의 여러 냇물과 합해서 흐르다가 영평 남쪽에 이르러 전탄이 되고, 또 마흘천(磨訖川)이 되며, 양주 북쪽에 이르러 대탄이 되고, 서쪽으로 흐르다가 연천의 아미천(峩嵋川)과 합하여 마전으로 들어가서 삭녕강과 합한다.
○ 적성(積城) 북쪽에 이르러 이포진(梨浦津) 구연강(仇淵江)이 되고, 장단 동쪽에 이르러 두기진(頭耆津)이 되며, 사미천(沙彌川)과 합해서 용산진과 임진도(臨津渡)가 되고, 동남쪽으로는 덕진(德津)이 된다. 다시 교하(交河) 북쪽에 이르러 낙하도(洛河渡)가 되고, 봉황암을 지나 오도성(烏島城)에 이르러 한수와 합한다. 오도성은 속칭에 오두현(鼇頭峴)이라 한다.
○ 공주의 금강은 근원이 옥천(沃川)의 적등진(赤登津)에서 나오고, 적등진은 근원이 덕유산 서북에서 나오니, 장수ㆍ진안의 여러 냇물이 합해서 북쪽으로 흐르다가 용담(龍潭) 달계천(達溪川)이 되고, 무주에 이르러 대덕산(大德山)ㆍ적상산(赤裳山) 냇물과 합해서 금산 경계에 이르러 소이진(召爾津)ㆍ지화진(只火津)이 된다. 다시 이 물은 옥천에 이르러 호진(虎津)이 되고, 또 북쪽으로 흘러 적등진이 된다.상주 중모현(中牟縣) 물은 황간(黃澗)ㆍ영동(永同)을 지나고, 속리산 물은 보은ㆍ청산(靑山)에서 합류해서 북쪽으로 화인진(化仁津)이 되고, 회인(懷仁)을 지나서 말흘탄(末訖灘)이 되며, 서쪽으로 흘러 문의에 이르러서 이원진(利遠津)이 되는데, 이것을 또 형각진(荊角津)이라고도 한다. 이 물은 또 서쪽으로 동진(東津)과 합하고, 연기(燕岐)ㆍ동진ㆍ진천(鎭川)ㆍ청안(淸安)의 여러 냇물이 합류해서 청주 작천(鵲川)이 되고, 남쪽으로 흘러 목천ㆍ전의의 여러 냇물과 합해서 동진이 된다.다시 공주 북쪽에 이르러 금강이 되고 남으로 꺾어져 웅진과 부여에 이르러 백마강이 된다. 또 은진(恩津)에 이르러 강경포(江景浦)가 되고, 또 서쪽으로 꺾어져 석성의 고다진(古多津)ㆍ임천(林川)의 남당포(南堂浦)ㆍ한산(韓山)의 상지포(上之浦)ㆍ서천의 진포(鎭浦)가 되어 바다로 들어가는데, 임천에서 서천포에 이르기까지를 모두 진포라고 한다.
○ 계룡산 한 골짜기의 물이 동쪽으로 흐르다가 진잠(鎭岑) 남쪽에 이르러 차탄(車灘)이 되고 진산(珍山)의 옥계(玉溪) 하류와 합했으며 또 동쪽으로 공주ㆍ유성에 이르러 여러 냇물과 합해서 회덕의 갑천(甲川)이 되고, 또 선암천(船巖川)이 되며 북쪽으로 흘러서 형각진(荊角津)으로 들어간다.
○ 나주의 영산강은 그 근원이 여덟이 있는데, 하나는 담양의 추월산(秋月山)에서 나오고, 하나는 창평(昌平)의 무등산 서봉학(瑞鳳壑)에서 나오고, 하나는 광주의 무등산에서 나와서 합하여 남쪽으로 흐르다가 서쪽으로 꺾어져 칠천(漆川)이 되며, 하나는 장성의 백암산에서 나오고, 하나는 노령 남쪽에서 나오는데 흘러가다가 합해서 선암도(仙巖渡)가 되며, 하나는 능주(綾州)의 여참(呂岾) 북쪽에서 나와서 화순의 물과 합해서 흐르다가 다시 남평(南平)을 둘러 서쪽으로 흐르고, 하나는 영광 수연산(隨緣山)에서 나와서 작천(鵲川)이 되고,하나는 나주 북쪽 도야산(都野山)에서 나와서 장성천이 되는데, 합해서 흐르다가 나주 동쪽에 이르러 광탄이 되고 나주 남쪽은 영산강이 되는데, 이 강의 본이름은 금강진(錦江津)이다. 다시 서쪽으로 흘러 회진강(會津江)이 되고 무안에 이르러 대굴포(大掘浦)가 되고 덕보포(德甫浦)가 되며, 남쪽으로 흘러 두령량(頭靈梁)이 되고 서쪽으로 흘러 영암해로 들어간다. 고려 때에 이 물을 거슬러 흐르는 3대강(三大江)의 하나라고 하였다.
○ 광양의 섬진강은 근원이 진안(鎭安)의 중대(中臺) 마이산에서 나와서 합하여 임실의 오원천(烏原川)이 되고, 서쪽으로 꺾어져 남쪽으로 흘러 운암(雲巖) 가단(可端)을 지나서 태인의 운주산(雲住山) 물과 합하여 순창의 적성진(赤城津)이 되는데 이것을 ‘화연(花淵)’이라고도 한다. 이 물은 또 저탄(猪灘)이 되고, 또 동쪽으로 흘러서 남원의 연탄(淵灘)이 되며, 또 순자진(鶉子津)이 된다. 다시 옥과에 이르러 방제천(方梯川)이 되며, 곡성에 들어가서 압록진(鴨綠津)이 되고, 구례에 이르러 잔수진(潺水津)과 합하였다.잔수진은 근원이 동복(同福) 서석(瑞石) 동쪽에서 나와 현(縣) 남쪽 달천(達川)이 되고, 남쪽으로 흘러 보성 북쪽에 이르러서 죽천이 되는데, 이것을 또 ‘정자천(亭子川)’이라고도 한다. 다시 동북으로 흘러 순천의 낙수진(洛水津)이 되며, 잔수진에 이르러 순자강과 합하여 남쪽으로 흐르다가 화개(花開) 서쪽 경계에 이르러 용왕연(龍王淵)이 되는데, 여기는 바닷물이 들어오는 곳이다. 또 광양 남쪽 60리에 이르러 섬진강이 되는데, 그 동쪽 언덕은 바로 하동(河東)의 악양(岳陽)으로서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고려 때에는 이 물이 거슬러 흐르는 3대강의 하나라 하였고, 이름을 ‘두치강(斗峙江)’이라 하였다.
○ 만경(萬頃)의 신창진(新倉津)은 근원이 고산(高山)의 남천(南川)에서 나오는데, 운제산(雲梯山)과 주취산(珠崒山)의 물이 현(縣) 남쪽을 지나 흘러서 전주 북쪽으로 들어가 직연(直淵)이 되고 안천(鴈川)이 된다. 이 물은 또 삼례역(參禮驛) 남쪽에 이르러서 전주 남천의 북류와 합하며 또 서쪽으로 흘러 옥야(沃野)ㆍ이성(利城)을 거쳐 김제 경계에 이르러 신창진이 되는데, 바닷물이 들어온다. 만경현을 지나서 북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
○ 부안의 동진(東津)은 내장산과 노령 북쪽 여러 냇물이 합해서 북으로 흘러서 고부(古阜)의 모천(茅川)이 되며, 서쪽으로 꺾어져 태인의 남천(南川)과 합해서 북쪽으로 흘러 부안의 동진이 된다. 금구(金溝) 상왕산(象王山)의 물은 김제의 벽골제(碧骨堤)가 되고 서쪽으로 흘러 동진으로 들어간다. 흥덕(興德) 우등산(牛登山) 물은 고부의 눌제천(訥堤川)이 되어, 북쪽으로 흐르다가 동진으로 들어가고 서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 경상도의 낙동강은 근원이 태백산에서 나와서 동쪽으로 꺾어져 서쪽으로 흐르다가, 다시 꺾어져 남쪽으로 흘러서 경상도의 중간을 가로지르며, 또 동쪽으로 꺾어져 남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태백산 동쪽 줄기는 바다를 따라 남쪽으로 흐르고 서쪽 줄기는 서쪽으로 흐르다가 남으로 꺾어지며, 남쪽은 지리산에 이르고 다시 동쪽으로 가서 김해에 이른다. 경상도는 모두 한 수구(水口)를 이루니, 낙동강은 상주 동쪽을 말함이다.낙동강의 상류와 하류는 비록 지역에 따라 이름은 다르지만, 모두 통틀어 낙동강이라 부르며, 이 강은 또 ‘가야진(伽倻津)’이라고도 한다. 강 동쪽은 좌도(左道)가 되고, 강 서쪽은 우도(右道)가 된다. 고려 때에는 이 강과 호남의 섬진강ㆍ영산강 두 강을 거슬러 흐르는 3대강이라고 하였다.
○ 태백산의 황지(黃池)는 산을 뚫고 남쪽으로 나와서 봉화에 이르러 매토천(買吐川)이 되며, 예안에 이르러 나화석천(羅火石川)과 손량천(損良川)이 된다. 또 남쪽으로 흘러 부진(浮津)이 되며, 안동 동쪽에 이르러 요촌탄(蓼村灘), 물야탄(勿也灘), 대항진(大項津)이 된다.영양ㆍ진보(眞寶)ㆍ청송의 여러 냇물이 모두 합하여 서쪽으로 흘러 용궁(龍宮)의 비룡산(祕龍山) 밑에 이르러 하풍진(河豐津)이 된다. 풍기ㆍ순흥(順興)ㆍ봉화ㆍ영천의 물은 합하여 예천의 사천(沙川)이 되고, 문경(聞慶)ㆍ용연(龍淵)ㆍ견탄(犬灘)의 물은 남쪽의 함창(咸昌) 곶천(串川)에 와서 합한다.
○ 상주 북쪽에 이르러 송라탄(松蘿灘)이 되며, 상주 북쪽 동북 35리에 이르러 낙동강이 되며, 의성ㆍ의흥(義興) 여러 냇물은 군위ㆍ비안(比安)을 거쳐 와서 합쳐진다.
○ 선산 북쪽에 이르러 견탄(犬灘)이 되며, 선산부(善山府) 동쪽에서는 이매연(鯉埋淵)이 되고 여차니진(餘次尼津)이 되며, 선산부 동남쪽으로는 보천탄(寶泉灘)이 되었다. 속리(俗離)ㆍ황악(黃岳) 동쪽 물은 지례(知禮)의 감천(甘川)이 되어 금산(金山)ㆍ개령(開寧)을 거쳐 합친다.
○ 인동 서쪽에 이르러 칠진(漆津)이 되며, 성주 동쪽에 이르러 소야강(所耶江)이 되고 동안진(東安津)이 되니, 바로 대구 서쪽 경계이다. 영천(永川)ㆍ신령(新寧)ㆍ하양(河陽)ㆍ자인(慈仁)ㆍ경산(慶山)의 여러 물과 합하여 대구의 금호(琴湖) 달천진(達川津)이 되어 모두 합치고, 또 남쪽으로 흘러 무계진(茂溪津)이 되어 현풍(玄風)을 지나 서쪽으로 흐른다.
○ 고령 동쪽에 이르러 개산강(開山江)이 되며, 성주의 가천(伽川)은 고령으로 들어가서 합천의 야천(倻川) 하류와 합하여 동쪽으로 흘러서 다시 합친다.
○ 초계(草溪) 동쪽 창녕 서쪽에 이르러 감물창진(甘勿倉津)이 되며, 거창 덕유산 동남쪽 여러 냇물은 합하여 합천의 남강(南江)이 되고, 또 초계의 황둔진(黃芚津)이 되어 동쪽으로 흘러가서 합한다.
○ 영산(靈山) 서쪽에 이르러 기음강(岐音江)이 되어 촉석강(矗石江)과 합하여진다.
○ 진주의 촉석강은 그 근원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지리산 북쪽 운봉(雲峰) 경계에서 나와서, 함양의 임천(瀶川)이 되고 남쪽으로 흘러 용유담(龍遊潭)이 되고 엄천(嚴川)이 된다.이 물은 산청 경계에 이르러 안의의 동천(東川) 하류와 합하여 진주 서쪽에서 우탄(牛灘)이 되며, 단성(丹城)에 이르러 신안진(新安津)이 되는데, 삼가(三嘉)의 여러 냇물이 흘러 합쳐서 진주 서쪽에 이르러 소남진(召南津)이 된다. 하나는 지리산 남쪽에서 나와서 산을 돌아 동쪽으로 흐르다가 진주 서쪽에서 합쳐서 청천강(菁川江)이 되며, 성(城) 아래에 이르러 촉석강이 된다. 다시 동쪽으로 의령에 이르러 정암진(鼎巖津)이 되며, 영산(靈山)의 기음강(岐音江)에 이르러 낙동강과 합하고, 칠원 북쪽에 이르러 모질포(亐叱浦)가 된다. 이 물은 다시 흘러서 매포(買浦)가 되는 것이니, 이것을 혹은 ‘무포(茂浦)’라고도 한다.창원 북쪽에 이르러 주물연진(主勿淵津)이 되며, 밀양 남쪽 30리, 김해 북쪽 50리 경계에 이르러서 뇌진(磊津)이 되는데, 이곳은 혹 ‘해양강(海陽江)’이라고도 한다. 청도와 밀양의 물은 응천(凝川)이 되어서 영남루(嶺南樓)를 남쪽으로 돌아서 합쳐진다.
○ 또 동쪽으로는 삼랑창(三浪倉)이 있고 남쪽으로 흘러 옥지연(玉池淵) 황산강(黃山江)이 된다. 또 남쪽으로 양산(梁山)의 동원진(東院津)이 되며, 또 남쪽으로는 세 갈래 물이 되어서 김해부 남쪽 취량(鷲梁)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 보충 : 은하수의 형상은 하늘의 반쪽을 가로질렀는데, 동북쪽에서 시작하여 서남쪽에서 그쳤는데, 머리는 간방(艮方)이고 꼬리는 곤방(坤方)이다. 우리나라에 큰 강이 셋이 있는데, 압록강ㆍ대동강ㆍ한강으로서, 이 세 강은 모두 머리는 간방이고 꼬리는 곤방이다. 《성호사설》
○ 보충 : 우리나라 지도가 옛날에는 모두 평평하고 정방형이기 때문에 형세를 알 수 없었다. 영종(英宗) 경인년에 신경준(申景濬)에게 명하여 <동국지도(東國地圖)>를 만들게 하니, 관청에 보관했던 십여 가지를 내어 오고 또 널리 여러 사람들의 금ㆍ고본(今古本)을 찾아 내었으나, 정항령(鄭恒齡)이 가지고 있는 것이 가장 완전하였다.여기에 약간 교정을 더해서 <열읍도(列邑圖)> 8권과 <팔도도(八道圖)> 1권과 <전국도(全國圖)> 한 폭을 만들었는데, 주척(周尺 주 나라 척도(尺度)를 기준으로 삼음) 두 치로 한 선(線)을 하고 세로는 76선, 가로는 1백 31선으로 하게 하였다. 또 동궁에게 이와 같이 만들어 바치도록 하고, 임금이 친히 짧은 서문을 지어 족자 위에 썼다. 정씨(鄭氏)의 지도는 항령의 아버지로부터 시작하여 항령의 아들 원림(元霖)에 이르러 보충되었으니, 대개 3대(代) 50여 년이 걸려 비로소 이루어진 것이었다.


용재집 제3권
 오언시(五言詩)
도봉산(道峯山)의 맑은 날 구름



구름은 빈 곳에서 일어나고 / 雲從虛處生
봉우리는 공중에 비끼었나니 / 峯向空中橫
이 둘이 만나 고운 자태 짓고 / 邂逅作媚娬
아침 해는 맑게 갠 하늘 비춘다 / 朝日弄新晴
고요히 앉아 이 광경 구경하는 / 宴坐自娛翫
주인 또한 속세의 정을 잊노라 / 主人亦忘情

추강집 제2권
 시(詩)○칠언율시(七言律詩)
말 위에서 즉흥으로 읊다 진퇴격(進退格)



동복 둘 한 필 말에 사립 쓴 나그네 / 二童一馬一蓑笠
등 넝쿨 퍼져 있어 갈 길이 험난하네 / 藤蔓漫漫路險難
송현원에는 메밀꽃 이곳저곳 피어 있고 / 蕎麥離披松峴院
도봉산에는 푸른 구름이 곳곳에 떠 있네 / 蒼雲歷落道峰山
푸른 자루에 붉은빛 터져서 목면이 희고 / 靑囊紅綻木綿白
비취 절벽에 노란빛 뽐내며 산국이 차네 / 翠壁黃誇山菊寒
대낮에 우르릉 쾅쾅 놀란 우레 지나더니 / 白日闐闐驚雷過
빠른 바람 계곡 비에 자던 새가 돌아오네 / 迅風溪雨宿禽還


 

[주C-001]진퇴격(進退格) : 율시(律詩)에서 압운(押韻)하는 하나의 격식이다. 진퇴운(進退韻)이라고도 한다. 한 수의 시에 두 개의 서로 가까운 운부(韻部)로써 격구(隔句)로 번갈아 압운하는 것이다. 일진일퇴(一進一退)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해동역사 제32권
 석지(釋志)
명승(名僧)



○ 정 법사(定法師) : 정 법사는 고려 사람이다. 《고시기(古詩紀)》 ○ 살펴보건대, 정 법사의 영고석시(詠孤石詩) 한 수가 《진시(陳詩)》에 실려 있으며, 고려는 바로 고구려이다.
○ 신성(信誠) : 당나라 고종(高宗) 총장(總章) 원년(668) 12월에 고구려를 격파하고 승 신성을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 삼았는데, 먼저 항복한 데 대해 상을 내린 것이다. 《책부원귀(册府元龜)》 ○ 신성에 대한 일은 본서 인물고(人物考) 천남생전(泉男生傳)에 상세하게 나온다.
혜관(慧灌) : 일본 추고천황(推古天皇) 32년(624)에 고려(高麗)의 승 혜관이 와서 조회하자, 그로 하여금 원흥사(元興寺)에 머물게 하였다. 그해 여름에 크게 가물자 기우(祈雨)하도록 명하였다.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
혜자(慧慈) : 일본 추고천황 때 고려의 사문(沙門) 혜자가 와서 태자(太子)의 사(師)가 되었는데, 백공(百工)이 모두 혜자를 조사(祖師)로 삼았다. 《상동》
혜편(慧便) : 일본 민달천황(敏達天皇) 13년(584)에 파마국(播磨國)에서 수행(修行)하는 자를 찾아 고려의 승으로서 환속한 자를 찾아내었는데, 이름이 혜편이었다. 《일본서기(日本書紀)》 ○ 살펴보건대, 이상의 혜관, 혜자, 혜편 세 승은 백제의 승인 듯하나, 상고할 수가 없다.
○ 진표(眞表) : 진표는 백제 사람이다. 집이 금산(金山)에 있으며, 대대로 수렵을 일삼았는데, 뒤에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서 칼로 머리카락을 잘랐다. 그러고는 고통스럽게 참회하면서 온몸을 들어 땅에다가 짓찧었으며, 뜻이 계법(戒法)을 구하는 데 있었다.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자신에게 계법을 전해 주기를 서원(誓願)하면서 밤을 낮삼아 공력을 쏟았는데, 빙빙 돌면서 물동이를 두드리되, 마음 마음마다 간단(間斷)이 없었고 생각 생각마다 부지런히 하였다. 7일이 지난 다음 아침이 되자, 지장보살(地藏菩薩)이 현신하여 손으로 쇠로 된 석장(錫杖)을 흔들면서 진표를 위하여 가르침을 발하고 계율을 발하였으며, 이어 앞에서 방편(方便)을 주었다. 그러자 진표는 이 상서로움에 감동하여 전보다 더욱더 용맹하게 정진하였다. 14일이 되자, 어떤 커다란 귀신이 무서운 모습으로 나타나서는 진표를 바위 아래로 밀어 떨어뜨렸는데, 진표의 몸이 상한 곳이 없었다. 이에 기어서 석단(石壇) 위로 올라가자, 다시금 마귀의 형상이 끊임없이 나타났는데, 백 가지 천 가지의 형상으로 나타났다. 21일째 되는 날, 아침 동이 틀 무렵에 길한 상서를 나타내는 새가 울면서 말하기를, “보살이 온다.” 하였는데, 이에 보니 흰 구름이 자욱하게 깔려 높고 낮음을 분간할 수가 없고, 산천이 평탄하여 은색의 세계를 이루었다. 도솔천(兜率天)의 주인이 그 속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고서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석단 주위를 돌았는데, 향기로운 바람과 꽃비가 한꺼번에 어우러져 모여들었다. 조금 있다가 자씨(慈氏)가 천천히 걸어 나와서 석단 앞에 이르러서는 손을 드리워서 진표의 이마를 어루만지면서 말하기를,
“선재(善哉)라. 대장부가 계법을 구함이 이와 같아 두 번에 이르고 세 번에 이르렀구나. 소미로(蘇迷盧)는 손으로 밀쳐 버릴 수 있지만 너의 마음은 물리칠 수가 없구나.”
하고는, 이어 계법을 주었다. 진표는 몸과 마음이 화락해지면서 마치 삼선(三禪)의 경지와 같아져, 의식(意識)이 낙근(樂根)과 더불어 서로 호응하였다. 그리고 4만 2천 가지의 복하(福河)가 항상 흘러 일체의 공덕(功德)에 의해 이윽고 천안(天眼)이 트였다. 자씨(慈氏)가 직접 세 벌의 법의(法衣)와 와발(瓦鉢)을 주고는 다시 진표(眞表)라는 이름을 내려 주었다. 또 무릎 아래에서 두 개의 물건을 꺼내었는데, 상아도 아니고 옥(玉)도 아닌 것이 바로 첨(籤)과 같은 것이었다. 그 가운데 하나에는 구자(九者)라고 씌어 있고, 다른 하나에는 팔자(八者)라고 씌어 있어 각각 두 자씩 씌어 있었는데, 이것을 진표에게 주면서 이르기를,
“만약 사람이 계법을 구하고자 할 경우에는 마땅히 먼저 죄를 참회하여야만 하는데, 죄와 복은 성품을 지키는 것[持性]과 성품을 범하는 것[犯性]이다.”
하였다. 다시금 108개의 첨을 더 주었는데, 각 첨 위에는 백팔 번뇌(百八煩惱)의 명목이 씌어 있었다. 여래(如來)가 사람에게 계법을 줌에 있어서는 혹 90일 동안이나 40일 동안이나 21일 동안을 고통을 참으면서 정진하여 참회해 기한이 다 차면 구자첨(九者籤)과 팔자첨(八者籤) 두 첨에다가 백팔 번뇌의 첨을 합하여서 부처 앞에서 하늘을 바라보면서 첨을 던지는데, 땅에 떨어진 첨을 보고서 그 죄가 없어졌는지 그대로 남아 있는지를 징험한다. 만약 백팔 개의 첨이 사방으로 날아가고 오직 팔자첨과 구자첨만이 단(壇) 한가운데 우뚝하게 서 있을 경우에는 바로 상상품계(上上品戒)를 얻는다. 만약 여러 첨이 비록 멀리 날아갔다 하더라도 혹 한두 개의 첨이 날아와서 팔자첨과 구자첨에 부딪치면 이 첨을 뽑아 보고서 거기에 무슨 번뇌의 이름이 씌어 있는가를 보고,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참회하게 한다. 그런 다음 다시 참회한 번뇌첨을 가지고 구자첨과 팔자첨과 함께 던져서 그 번뇌첨이 날아간 자는 중품계(中品戒)라 이름한다. 만약 여러 첨이 팔자첨과 구자첨을 뒤덮으면 죄가 없어지지 않아서 계를 얻을 수가 없으며, 다시금 더 참회해서 90일이 지나면 하품계(下品戒)를 얻는다. 자씨가 다시금 거듭 고하면서 가르치기를,
“팔자첨은 신훈(新熏)이고, 구자첨은 본유(本有)이다.”
하면서, 여러 차례 부탁하였다. 자씨의 행차가 이미 돌아감에 산천을 덮었던 구름이 걷혔다. 이에 진표가 천의(天衣)을 가지고 천발(天鉢)을 잡았다. 그런데도 진표는 오히려 오하(五夏)를 더 비구(比丘)로 있으면서 수행한 다음 길을 따라 산을 내려왔다. 그러자 초목들이 가지를 낮게 드리워서 길을 덮음에 계곡이 높고 낮음이 없이 평탄하게 되었으며, 새와 짐승이 다 진표의 발걸음 앞에 엎드려 있었다. 또 공중에서 소리가 울려 촌락과 고을에 고하기를,
“보살이 산에서 나오는데 어찌하여 영접하지 않는가.”
하였다. 그러자 남녀의 백성들이 머리카락을 펴서 진흙을 덮는 자도 있었고, 옷을 벗어서 길에 까는 자도 있었고, 천과 담요로 발을 감싸는 자도 있었고, 꽃자리와 아름다운 방석으로 구덩이를 메우는 자도 있었다. 이에 진표가 여러 사람들의 마음에 곡진히 부응하여 일일이 다 밟고 지나갔는데, 어떤 여자가 반 단(端)의 백첩(白氎)을 가지고 와서 길 가운데에 폈는데, 진표는 이를 보고 놀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이를 피하여 다른 길로 갔다. 그 여자가 불평등하게 대하는 것을 보고 괴이하게 여기니, 진표가 말하기를,
“내가 자비심이 없어서 평등하게 대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마침 보니 그 천 사이에는 모두 도야지 새끼가 있기에 내가 산 목숨을 상하게 될까 염려되어 밟지 않고 피해 간 것이다.”
하였다. 그 여자는 본디 도축하는 집의 여자로 고기를 팔아서 이 포(布)를 산 것이었다. 이때부터 항상 호랑이 두 마리가 있어 진표의 좌우에 붙어서 따라다녔는데, 진표가 호랑이에게 말하기를,
“나는 성안으로 들어가지 않을 것이니, 너희들이 길을 인도하라.”
하였다. 그러고는 가다가 수행할 만한 곳을 만나면 천천히 걸어서 갔다. 호랑이가 30리쯤 가다가 어느 산 언덕으로 올라가서는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이에 진표가 주장자를 나뭇가지에 걸고서 풀을 깔고 단정히 앉으니, 사방의 신자들이 권하지 않아도 스스로 찾아왔다. 그들과 함께 가람(伽藍)을 짓고는 금산사(金山寺)라고 이름하였다. 《신승전(神僧傳)》
○ 도침(道琛) : 현경(顯慶) 5년(660)에 백제(百濟)를 평정하자, 부도(浮屠) 도침이 주류성(周留城)에 있으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신당서》 ○ 백제세기(百濟世紀)에 상세하게 나온다.
관륵(觀勒) : 일본 추고(推古) 10년(602)에 백제국의 승 관륵이 와서 천문지리서(天文地理書)와 역서(曆書), 둔갑방술서(遁甲方術書)를 바쳤다. 《화한삼재도회》
법명(法明) : 대직관겸족(大織冠鎌足)이 집정(執政)할 때 백제의 선니(禪尼)인 법명이 대마도(對馬島)에 와서 오음(吳音)으로 《유마경(維摩經)》을 읽었는데, 그때 오음으로 읽었으므로 “대마도에서 읽은 것이 일본에서 오음으로 불경을 읽게 된 기원이다.” 한다. 《일본유마회연기(日本維摩會緣起)》
묵호자(墨胡子) : 사문(沙門) 묵호자는 신라 사람이다. 눌지왕(訥祗王) 때 고구려로부터 일선군(一善郡)에 이르자, 군인(郡人) 모례(毛禮)란 사람이 자기 집에 토굴(土窟)을 짓고 그를 거기에서 살게 하였다. 이때 양(梁)나라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왕에게 향(香)을 하사하였는데, 임금과 신하가 그것의 용도와 이름을 몰랐다. 이에 묵호자가 말하기를,
“이것을 사르면 향기가 아름답게 퍼져 신성(神聖)에게 치성을 드릴 수 있습니다. 이른바 신성이란 것은 삼보(三寶)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첫 번째는 불타(佛陀)이고, 두 번째는 달마(達摩)이고 세 번째는 승가(僧伽)입니다. 만약 이를 살라서 축원을 드리면 반드시 영검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 왕녀(王女)의 병이 위독하였는데, 묵호자가 향을 사르고 축원을 드리자 병이 얼마 있다가 나았다. 이에 왕이 기뻐하면서 몹시 후하게 보답하였다. 《화한삼재도회》 ○ 살펴보건대, 이것이 신라 불교의 시초인데, 《삼국사기》 신라본기(新羅本紀)에 실려 있는 것과 내용이 같다.
○ 무루(無漏) : 석(釋) 무루의 성은 김씨(金氏)로, 신라국왕의 둘째 아들이다. 어려서 바다 배를 따라 중국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오천축국(五天竺國)으로 가서 팔탑(八塔)을 예배하려고 하였다. 이미 사막(沙漠)을 건너서 우전국(于闐國)을 지나 서쪽으로 가 총령(蔥嶺)에 이르러서 큰 절에 들렀는데, 그 절의 비구(比丘)들은 모두 예측할 수 없는 중들이었다. 중들이 무루가 천축으로 가는 뜻을 물어보고는 기절(奇節)이 없으면서 천축으로 간다고 여겼다. 이에 승들이 말하기를,
“옛 기록에 이름나지 않은 사람은 천축으로 갈 수가 없다고 하였다. 이곳에는 독룡(毒龍)이 사는 연못이 있는데, 그곳에 가서 독룡을 교화하여 징험이 있으면 그곳을 건너갈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무루가 그들의 요청에 의하여 연못가의 언덕에 올라가 보니, 오직 호상(胡床) 하나만 보였다. 이에 그 호상에 앉아 있었다. 밤이 장차 다하려고 할 때에 이르러서 우레와 번개가 치더니 그 괴물이 기운(氣運)을 토하매 갖가지로 변화가 일어나면서 밝았다가 어두워지곤 하였다. 무루는 눈을 감은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얼마 뒤에 큰 뱀이 나타나서는 그의 무릎 위에서 머리를 쳐들었다. 이에 무루는 그를 몹시 불쌍하게 여겨 삼귀(三歸)를 받게 하자 뱀이 떠나갔다. 그러고는 다시 노인의 형상으로 변하여 와서는 감사해하면서 말하기를,
“법사의 덕분에 도탈(度脫)하게 되었으니, 의리상 이곳에 오래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3일 후에 비늘이 덮인 몸을 받은 고통에서 벗어나 좋은 곳에서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이곳에서 남쪽으로 가면 반석(盤石)이 있는데, 그곳이 이 제자가 형체를 버린 곳이니, 역시 저의 유해를 찾아 거두어 주시기 바랍니다.”
하니, 무루가 묵묵히 이를 허락하였다. 그러자 또 말하기를,
“모름지기 천축국에 가고자 하는 사람은 이곳에 관음성상(觀音聖像)이 있는데, 그곳에다 기도하면 영검이 있으니, 기도하면서 고해야 합니다. 그러면 길하고 상서로운 조짐을 얻을 것이니, 의심하지 마십시오.”
하였다. 무루가 이에 관음성상 앞에 서서 선정(禪定)에 들어갔다. 이와 같이 하여 49일이 지나자 온몸에 종기가 생겨 몸을 지탱할 수가 없게 되었는데, 곧바로 탄알만 한 크기의 쥐새끼가 나타나 왼쪽 넓적다리에서 누런 색깔의 고름을 여러 말 빨아내자 종기가 모두 나았다. 무루가 기한이 다 되어 응험을 얻자, 여러 중들이 말하기를,
“선사를 보건대 화연(化緣)이 마땅히 당나라 땅에 있겠다. 마음속에 다른 사람을 교화할 뜻을 간직하고 있으면 이익되는 바가 많을 것이다.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면서 부질없이 보고 듣는다 하더라도 억지로 교화할 수 없다는 것을 선사는 알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무루는 성현(聖賢)의 말이 반드시 헛된 말이 아닐 것이라고 여겨 즉시 되돌아왔는데, 출발할 즈음에 중들이 무루에게 말하기를,
“난(蘭)을 만나면 즉시 그곳에 머물러라.”
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산의 이름에 난(蘭) 자가 들어간 곳이 있었다. 이에 말[馬] 앞에서 그 말을 기억해 내고는 드디어 그 산속으로 들어가서 백초곡(白艸谷)이란 곳을 찾아내어 집을 짓고 그곳에서 살았다. 얼마 뒤에 안사(安史)의 난(亂)이 일어나 숙종(肅宗)이 영무(靈武)에서 군사를 훈련시키고 있었는데, 여러 차례 금색(金色)을 한 사람이 어전(御前)에서 보승불(寶勝佛)을 염불하는 꿈을 꾸었다. 다음 날에 꿈속에서 있었던 일을 가지고 좌우의 신하들에게 묻자, 어떤 사람이 대답하여 아뢰기를,
“사문(沙門) 가운데 행적이 일반 중들과 다른 사람이 이 산에 살고 있는데, 항상 그 부처의 이름을 외우고 있습니다.”
하였다. 이에 그를 불러오자, 황제가 보고서 이르기를,
“참으로 꿈속에서 본 그 사람이다.”
하고는, 곧바로 내사(內寺)에 있게 하고 공양하였다. 무루는 여러 차례 표장(表章)을 올려서 예전에 숨어 살던 곳으로 되돌아가게 해 주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황제의 마음에 그를 몹시 아꼈으므로 산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는데, 얼마 뒤에 없어졌다. 어느 날 갑자기 내문(內門)의 오른쪽 미닫이 위에 두 발이 생겨났는데, 땅 위로 몇 자가량 떠 있었다. 문지기가 이 사실을 상주하자, 황제가 보련(步輦)을 타고 직접 그곳에 임하여, 옛날에 숨어 살던 산 아래에 장사 지내 주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유표(遺表)를 찾아내었다. 이에 즉시 그대로 하게 하고는 중사(中使)를 파견하여 상여를 호송해 가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무루가 회원현(懷遠縣)에서 교화를 많이 행하였으므로, 그를 인하여 그곳에다 집을 짓고는 하원(下院)이라고 불렀는데, 상여가 이곳에 이르러서는 신좌(神座)를 들 수가 없었다. 이에 여러 사람들이 의논하여 별도로 당우(堂宇)를 지어 그곳에다 안치하였는데, 지금에 이르러서도 진체(眞體)가 단정하게 그대로여서 변하거나 부서지지 않았다. 《신승전(神僧傳)》
○ 무루(無漏)는 신라의 승이다. 현종(玄宗)이 어느 날 저녁에 어떤 사문(沙門)이 온몸에 금빛을 띠고 보승여래(寶勝如來)의 이름을 외우고 있는 꿈을 꾸었는데, 이에 대해 좌우의 신하들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하란(賀蘭) 백초곡(白艸谷)에 이름이 무루라고 하는 신라의 승이 있는데, 항상 이 부처의 이름을 외우고 있으니, 자못 이상합니다.”
하였다. 이에 황제가 그를 불러 행재소(行在所)에서 만나 보고는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참으로 꿈속에서 본 바로 그 승이다.”
하고는, 드디어 호승(胡僧) 불공(不空)과 더불어 행궁(行宮)에 머물면서 기도하게 하였다. 입적(入寂)할 때는 합장을 하고서 땅에서 몇 자가량 공중에 뜬 채로 죽었다. 예전에 그가 살던 골짜기에 장사 지내려고 하였는데, 호송하여 가다가 회원현(懷遠縣)의 하원(下院)에 이르자 문득 시신을 들 수가 없었다. 이에 마침내 향니(香泥)를 전신에 바른 다음 하원에 두었다. 《속문헌통고》
지장(地藏) : 석(釋) 지장의 속성(俗姓)은 김씨(金氏)로, 신라국왕의 지속(支屬)이다. 마음은 자비로웠으나 얼굴 모습이 추악하였으며, 천부적으로 영오(穎悟)함을 타고났다. 머리를 깎고 출가한 다음 바다를 건너 중국으로 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사방을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지양(池陽)에 이르러서 구자산(九子山)을 보고는 마음속으로 몹시 좋아하였다. 이에 곧바로 산봉우리로 올라가서 그곳에서 살았다. 지장이 일찍이 독충(毒蟲)에 쏘이고도 단정히 앉아서 무념 상태에 있었는데, 잠시 뒤에 어떤 아름다운 부인이 예를 올리고는 약을 먹이면서 말하기를,
“소아(小兒)가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원컨대 샘물을 나오게 하여 허물을 보충하고자 합니다.”
하였다. 말을 마치고는 사라졌는데, 앉은 자리의 좌우를 보니 샘물이 펑펑 솟아올랐다. 그러자 당시 사람들이 “구자산의 신령이 샘물을 솟아나게 하여 쓸 수 있게 한 것이다.” 하였다. 지덕(至德) 연간 초에 제갈절(諸葛節)이란 사람이 촌부들을 데리고 산기슭에서 높은 곳으로 올라갔는데, 아주 깊이 들어가자,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고 오직 지장만이 홀로 석실(石室) 안에서 눈을 감고 있었다. 그 방에는 다리가 부러진 솥이 있었고, 솥 안에는 흰 흙과 쌀을 섞어서 밥을 지어 먹고 있었다. 여러 아이들이 이를 보고는 경탄하면서 말하기를,
“화상(和尙)이 이와 같이 고생하고 있는 것은 산 아래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잘못이다.”
하였다. 그러고는 서로 더불어서 선방(禪房)을 지었는데, 몇 년이 지나지 않아서 큰 절이 되었다. 신라에서도 그 소문을 듣고 바다를 건너 서로 찾아왔다.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많아짐에 따라 그들을 먹일 길이 없었다. 이에 지장이 돌을 헤쳐서 청백색의 흙을 얻었는데, 껄끄럽지가 않고 국수와 같아서 그것을 대중들에게 먹였다. 그의 대중들이 법설(法說)을 들어 정신을 기르기를 청하면서 음식으로 목숨을 기르지 않으니, 남방 사람들이 ‘삐쩍 마른 대중[枯槁衆]’이라고 부르면서 모두들 숭앙하였다. 용담(龍潭)의 곁에 흰 흙무더기가 있었는데, 아무리 취해도 없어지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대중들을 모아 놓고 이별을 고하였는데, 간 곳을 알 수가 없었고, 단지 산이 울고 돌이 떨어지며 종이 울리는 소리만 들렸다. 결가부좌한 채 죽으니, 나이 99세였다. 그의 시신을 함 속에 앉혀 두었다. 그 뒤 3년이 지나서 탑 속에 넣으려고 하였는데, 얼굴 모습이 마치 살아 있는 사람 같았다. 그리고 시신을 마주 들 즈음에는 골절(骨節)이 마치 쇠로 된 사슬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신승전》
○ 김지장(金地藏)은 신라국의 승이다. 지덕(至德) 연간에 바다를 건너와 청양(靑陽)의 구화산(九華山)에 살았다. 일찍이 바위 틈에 있는 흰 흙을 밥과 섞어 먹자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나이 99세에 갑자기 대중들을 불러 모은 다음 이별을 고하였는데, 단지 산이 울고 바위가 떨어지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으며, 잠시 뒤에 함 속에서 입적(入寂)하였다. 3년이 지난 뒤에 장차 탑 속에 넣으려고 하면서 보니 얼굴이 마치 살아 있는 사람 같았으며, 마주 들 때에는 골절이 모두 쇠사슬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속문헌통고》 ○ 《전당시(全唐詩)》에, “김지장은 신라국의 왕자이다. 지덕(至德) 초에 바다를 건너와 구화산(九華山)에서 살았다.” 하였다. ○ 《구화산록(九華山錄)》에, “화성사(化城寺)가 구화산에 있는데, 절이 매우 아름답다. 당나라 때 신라의 왕자 김지장이 수행하던 곳이다. 김지장탑(金地藏塔)이 또 절 뒤에 있다.” 하였다. ○ 주필대(周必大)의 《성재집(省齋集)》에 실려 있는 ‘김지장탑을 배알하다.[謁金地藏塔]’는 시는 다음과 같다. “덩굴 잡고 험산 타긴 재빠르기 원숭인데, 돌 모서리 옷 걸리고 신발 자주 뚫어지네. 멀리서 김지장탑 찾아온 걸 이상하게 생각 말라, 일찍이 옥계 앞을 천천히 걸었노라.[攀蘿度險捷猱猿 石角鉤衣屨屢穿 莫訝遠尋金地藏 也曾徐步玉階前]”
도수충(屠粹忠)의 김지장찬(金地藏贊)에,
밥에는 진흙이 뒤섞이어 있었고 / 食飯雜泥
함 열자 골상이 생시처럼 나타났네 / 開函見骨
산봉우리 어찌하여 구 자로 이름했나 / 峯何取九
살아 백 년 채우지 못하였네 / 生不滿百
하였다. 《삼재조이(三才藻異)》
○ 금사(金師) : 승 금사는 신라 사람이다. 수양(雎陽)에 살았는데, 녹사참군(錄事參軍) 방완(房琬)에게 이르기를,
“태수(太守) 배관(裴寬)이 바뀔 것입니다.”
하였다. 방완이 언제 바뀔 것인가를 묻자, 말하기를,
“내일 오전에 칙서가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리고 공과 더불어 군(郡)의 서남쪽 모퉁이에서 서로 만날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방완이 칙서가 오는가를 살피고 있었는데, 오전에 역사(驛使)가 두 차례 봉첩(封牒)을 가지고 왔으나 그런 내용이 아니었으므로, 방완은 금사의 말이 틀린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정오가 되자 또 한 역사가 봉첩을 가지고 와서는 말하기를,
“배공(裴公)의 관직이 바뀌어 안륙별가(安陸別駕)로 되었다.”
하였다. 이에 방완이 수레를 보내어 금사를 맞이해 오게 하고, 또 자신이 직접 갔는데, 과연 군의 서남쪽 모퉁이에서 배관을 만났다. 금사를 불러다 물으니, 금사가 말하기를,
“관직은 비록 바뀌었으나, 복장은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의 생질들은 각각 흩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그 뒤에 칙서가 도착해서 별가에 제수하였는데, 자주빛 인끈은 그대로 있었고, 생질들은 각자 흩어지게 되었다. 《신승전》
○ 무상(無相) : 석(釋) 무상은 신라국 사람으로, 그곳 왕의 셋째 아들이다. 현종(玄宗)이 불러다 보고는 선정사(禪定寺)에 있게 하였는데, 호를 무상(無相)이라 하였다. 마침내 깊은 계곡으로 들어가 바위 아래에서 좌선(坐禪)하였다. 검은 소 두 마리가 있어 앉아 있는 자리의 아래에서 뿔을 마주 댄 채 빙빙 돌면서 몸 가까이 다가와 아주 위태로웠고, 차갑기가 얼음 같은 털북숭이 손이 소매 속으로 들어와서는 몸을 더듬으면서 배에까지 이르렀다. 그런데도 무상은 조금도 경동하지 않았다. 매번 입정(入定)에 들 때마다 대부분 5일을 기한으로 하였는데, 눈이 많이 쌓이자 갑자기 맹수 두 마리가 다가왔다. 그러자 무상은 스스로 몸을 깨끗이 씻고 알몸으로 맹수 앞에 누워서 자신의 몸을 맹수에게 보시(普施)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두 마리의 짐승이 머리에서 발끝까지 냄새를 맡으면서 빙빙 돌다가는 그대로 떠났다. 무상은 가끔씩 밤중에 좌상(坐床) 아래로 내려가 호랑이의 수염을 움켜잡고 있었다. 얼마 뒤에 산에서 산 지 조금 오래되자 옷은 떨어지고 머리카락은 길게 자라 사냥꾼들이 이상한 짐승인 줄 알고 활로 쏘려다가는 멈추곤 하였다. 다시 무덤 사이에 정사(精舍)를 짓고 사니, 성도 현령(成都縣令) 양익(楊翌)이 사람들을 현혹시킨다고 의심하였다. 이에 그곳에 와서는 그의 무리 20여 명에게 명해서 그를 잡아 끌고가게 하였다. 그런데 그의 무리들이 무상의 몸 가까이 다가가자 모두들 몸이 떨리면서 정신을 잃었다. 조금 뒤에는 큰 바람이 갑자기 일어나면서 모래와 돌이 바람에 날려 곧장 청사(廳舍) 안으로 날아들었으며, 발과 장막이 바람에 날아갔다. 이에 양익은 머리를 조아리고 엎드려 절하면서 숨이 차서 감히 말을 못하였다. 양익이 잘못을 뉘우치자 바람이 그쳤다. 이에 무상을 받들어 모시고 예전에 있던 곳으로 되돌려 보냈다.
무상이 성도(成都)에 이르렀을 때 홀연히 어떤 역사(力士) 한 사람이 나타나서는 말하기를,
“저의 힘을 희사하여 땔나무를 베어 스님께서 밥 지을 때 쓰도록 공양하겠습니다.”
하였다. 무상의 동생이 신라에서 새로 왕이 되었는데, 무상이 갑자기 본국으로 돌아와서 나라를 위태롭게 할까 두려워하였다. 이에 장차 자객을 보내어 죽이려고 하였는데, 무상은 이런 사실을 이미 모두 알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말하기를,
“땔나무를 하는 현자(賢者)는 잠시 이리 오라.”
하고는, 그에게 말하기를,
“오늘 밤에 작연(灼然)이라는 손님이 올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불자(佛子)가 상하지 않게 하라.”
하였다. 밤이 되자 땔나무를 하는 자가 칼을 가지고 방석을 끼고는 선자(禪者)의 곁에 홀로 앉아 있었는데, 얼마 뒤에 벽 위에서 어떤 물체가 떨어지는 것을 느끼고는 드디어 몸을 날리면서 칼을 휘두르니, 거한의 몸체와 목이 나누어져 땅에 떨어졌다. 뒷문에 본디 큰 구덩이가 있었으므로 그를 끌어다가 그곳에 매장한 다음, 다시 흙으로 덮어 그 흔적을 없애 버리고는 땔나무를 하던 자가 떠나갔다. 날이 밝으려고 할 때 무상이 땔나무를 베던 자를 불러서 사례하려고 하였으나 이미 보이지 않았다. 무상이 일찍이 부도(浮圖) 앞에 있는 잣나무를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 잣나무가 탑 높이와 똑같아지면 탑이 무너질 것이다.”
하였다. 회창(會昌 841~846) 연간에 이르러서 탑이 무너졌는데, 잣나무와 탑의 높이가 똑같았다. 또 말하기를,
“절 앞에 있는 두 개의 작은 연못은, 왼쪽은 국이고 오른쪽은 밥이다.”
하였는데, 대중들에게 먹일 때 음식이 모자라면 사람들을 시켜서 그것을 퍼내게 하니, 과연 사람들을 먹일 수 있었다. 그의 신이(神異)함이 대부분 이와 같았다. 지덕(至德) 원년(756, 경덕왕15)에 죽으니, 나이 77세였다. 《상동》
현광(玄光) : 석 현광은 해동(海東) 웅주(熊州)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였으며, 형산(衡山)으로 가서 사대화상(思大和尙)을 만나 본 뒤에 강남(江南)에 머물러 있었다. 본국에서 온 배에 부탁하여 몸을 싣고 해안을 떠났는데, 이때 채색 구름이 해를 가리더니 아름다운 음악 소리가 하늘에 울려 퍼졌다. 그러면서 붉은 깃발과 오색 깃발이 휘날리며 하늘에 소리가 울려 퍼지기를, “천제(天帝)께서 해동(海東)의 현광 선사(玄光禪師)를 부르신다.” 하였다. 현광이 공수(拱手)의 예를 올리고는 사양하여 피하니, 푸른 옷을 입은 사람이 나타나서 앞에서 인도하였다. 조금 뒤에 궁성(宮城)으로 들어갔는데, 인간 세상의 궁전이 아니었다. 호위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물고기들이었으며, 귀신들도 간간이 섞여 있었는데, 누군가 말하기를,
“오늘은 천제께서 용왕궁(龍王宮)에 내려오셔서 선사의 법설을 들어 친히 법문(法門)을 증득(證得)하려고 하신다. 우리들 수부(水府)에서도 선사의 은혜를 받고자 한다.”
하였다. 이미 보전(寶殿)에 올라간 다음에 다시 높은 대(臺)로 올라가서는 물음에 따라서 말해 주었다. 대략 7일간 그렇게 한 다음에 용왕이 몸소 나와 전송하였다. 그가 탔던 배는 바다에 떠 있는 채 가지 않고 있었다. 현광이 다시 배에 오르자, 뱃사람이 반나절이 지났을 뿐이라고 하였다. 현광이 웅주(熊州)의 옹산(翁山)에 집을 짓고 머물렀는데, 그 집이 사찰로 되었다. 그 뒤에는 간 곳을 모른다. 《상동》
○ 법융(法融), 이응(理應), 순영(純英) : 조열지(晁說之)의 《반야경소(般若經疏)》 서문에 이르기를,
“진(陳)나라에서 수(隋)나라로 넘어오는 사이에 천태산(天台山)의 지자대사(智者大師)가 멀리 용수(龍樹)에게 연원(淵源)을 대어 하나의 대교(大敎)를 세웠는데, 아홉 번 전하여 형계(荊溪)에 이르렀고, 형계가 다시 전하여 신라에 이르러서 법융, 이응, 순영에게 전하였다. 그러므로 이 가르침이 일본(日本)에 전파되어 해외에서 성하여졌다.”
하였다. 《석문정통(釋門正統)》
○ 원효(元曉) : 당나라 초기에 해동(海東)에 원효란 자가 있었는데, 성은 설씨(薛氏)이다. 동해(東海)의 상주(湘州) 사람이다. 어린 나이에 마음을 내어 불법(佛法)으로 들어와 스승을 따라 배웠으며, 항상 떠돌아다녀 있는 곳이 일정하지 않았다. 의리의 굴레를 용감하게 깨뜨리고 법문(法文)의 진(陣)을 마음대로 넘나듦에 씩씩하고도 굳세어서 앞으로 나아감에 걸리는 것이 없었다. 이에 그곳 사람들이 만인(萬人)을 상대할 사람이라고 하였다. 일찍이 상법사(湘法師)와 더불어 당나라로 들어갔으나 인연이 닿지 않아 당나라로 들어갈 마음이 없어졌다. 얼마 뒤에는 말투가 미치광이 같고 행동거지가 제멋대로여서 거사(居士)와 같이 술집과 사창가를 돌아다녔는바, 마치 지공(誌公)이 쇠칼과 쇠지팡이를 잡고 다니는 것 같았다. 혹 소(疏)를 지어서 저잣거리에서 강론하기도 하고, 혹 가야금을 뜯으면서 사우(祠宇)에서 노닐기도 하였으며, 혹 여염집에서 자기도 하고 산속에서 좌선(坐禪)하기도 하여, 마음 내키는 대로 인연에 따라 행동하여 전혀 정처가 없었다. 이때 국왕이 백좌(百座)를 두고 《인왕경(仁王經)》을 강하면서 널리 덕이 높은 사람을 찾았다. 그러자 본주(本州)에서 그의 명망이 높다는 이유로 천거하여 나아가게 하였는데, 덕이 높다고 하는 여러 사람들이 원효의 사람됨을 싫어하여 왕에게 들이지 말라고 참소하였다. 얼마 뒤에 왕이 당나라로 사신을 보내어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을 구하였다. 왕이 대안성자(大安聖者)를 불러 보충하게 하였다. 그런데 대안은 헤아릴 수 없는 사람으로, 형상과 복장이 특이하였으며, 매번 시장 바닥에서 동발(銅鉢)을 두드리면서 ‘대안대안(大安大安)’이라는 소리를 외쳐댔으므로 그렇게 불렀다. 대안이 말하기를,
“속히 원효에게 가져다주어야만 강론할 수가 있습니다. 나머지 다른 사람은 안 됩니다.”
하였다. 이때 원효가 상주(湘州)에 있었는데, 사자(使者)에게 말하기를,
“이 경(經)은 시본이각(始本二覺)으로 종지(宗旨)를 삼는다. 그러니 나를 위하여 각승(角乘)을 마련하라.”
하였다. 그런 다음 책상을 가져다가 두 뿔 사이에 놓고 벼루와 붓을 다시 그 위에 놓아두었다. 그러고는 처음부터 끝까지 소 수레 위에서 소(疏)를 저술해 5권을 이루었다. 또 《약소(略疏)》 3권을 지어 황룡사(皇龍寺)에서 강론하였다. 그러자 왕과 신하와 도사(道士)와 속인(俗人)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법당을 에워쌌는데, 원효가 설법하는 것이 위의가 있고 어지러운 것을 풀어 감에 있어서 법도가 있었다. 그러고는 다시 큰소리로 말하기를,
“지난날에 백 개의 서까래를 뽑을 때에는 내가 비록 참여되지 못하였지만, 오늘 아침에 대들보 하나를 건너지르는 데는 오직 나만이 할 수가 있다.”
하니, 당시의 덕이 높다고 이름난 여러 사람들이 모두들 고개를 숙이고 부끄러운 기색을 띠었으며, 마음속으로 참회하였다. 처음에 원효가 자취를 보이는 것을 알기가 어렵고 사람을 교화함에 있어서 일정하지 않아, 혹 쟁반을 던져서 대중을 구하고 물을 뿜어 불을 끄기도 하였으며, 혹 여러 곳에서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고 혹 천지 사방에 죽었다고 고하기도 하였으니, 역시 배도(盃渡)나 지공(誌公)의 무리이다. 《탐현기(探玄記)》에 이르기를,
“원효 법사는 이 경소(經疏)를 저술하여 사교(四敎) 등급을 세웠다.”
하였다. 《회현기(會玄記)》
○ 당나라 초기에 해동의 원효 법사(元曉法師)가 역시 사교(四敎)를 세웠는데, 첫 번째 삼승교(三乘敎)는 사제(四諦)와 연기(緣起)에 관한 경(經)이고, 두 번째 삼승통교(三乘通敎)는 《반야경(般若經)》, 《해심밀경(解深密經)》 등이고, 세 번째 일승분교(一乘分敎)는 《범망경(梵網經)》 등이고, 네 번째 일승만교(一乘滿敎)는 《화엄경(華嚴經)》 등이다. 《현담(懸談)》 ○ 삼가 살펴보건대, 원효는 바로 신라 사람 설총(薛聰)의 아버지이다.
○ 의상(義湘) : 의상은 해동 화엄종(華嚴宗)의 초조(初祖)이다. 원효(元曉)와 함께 당나라로 들어가다가 밤중에 고총(古塚)에서 자게 되었는데, 이를 인하여 유심(唯心)의 진리를 통달하게 되었으므로 원효는 신라로 돌아가고 의상은 당나라로 들어갔다. 종남산(終南山)에 가서 현수 국사(賢首國師)와 함께 지상(至相)을 섬겨 화엄종을 전수받아 해동으로 돌아와 크게 넓혔다. 《회현기(會玄記)》
○ 홍혜(弘惠) : 피일휴(皮日休)의 ‘신라 홍혜상인을 전송하며[送新羅弘惠上人]’라는 시의 서문에, “경인년(870) 11월에 신라의 홍혜상인이 신라의 동서(同書)와 더불어서 나에게 영취산(靈鷲山) 주 선사(周禪師)의 비문(碑文)을 지어 주기를 청하여, 이를 가지고 돌아감에 시를 지어 전송하였다.” 하였다. 《전당시(全唐詩)》
○ 《전등록(傳燈錄)》에 실려 있는 신라의 여러 승은 다음과 같다.
남악(南嶽) 양 선사(讓禪師)법사(法嗣)에 신라국 본여 선사(本如禪師)가 있다.
서당(西堂) 장 선사(藏禪師)의 법사에 계림(鷄林) 도의 선사(道義禪師), 신라국 혜철 선사(慧徹禪師), 신라국 홍척 선사(洪陟禪師)가 있다.
마곡(麻谷) 철 선사(徹禪師)의 법사에 신라 무염 선사(無染禪師)가 있다.
장경(章敬) 운 선사(惲禪師)의 법사에 신라국 현욱 선사(玄昱禪師), 신라국 각체 선사(覺體禪師)가 있다.
남전(南泉) 원 선사(願禪師)의 법사에 신라국 도균 선사(道均禪師)가 있다.
염관(鹽官) 안 선사(安禪師)의 법사에 신라국 품일 선사(品日禪師)가 있다.
대매(大梅) 상 선사(常禪師)의 법사에 신라국 충언 선사(忠彦禪師), 신라국 가지 선사(迦智禪師)가 있다. 승이 묻기를, “어떤 것이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하니, 가지 선사가 말하기를, “네가 과두(裹頭)해 가지고 오기를 기다려서 너에게 말해 주리라.” 하였다. 승이 묻기를, “어떤 것이 대매 선사(大梅禪師)의 종지(宗旨)입니까?” 하니, 가지 선사가 이르기를, “낙(酪)과 근본[本]을 동시에 던져 버리라.” 하였다.
귀종(歸宗) 상 선사(常禪師)의 법사에 신라 대모화상(大茅和尙)이 있다. 대모화상이 설법을 하러 당(堂)에 올라가서 말하기를, “부처님의 스승을 알고자 하면 무명(無明)의 마음속에서 알아차려야 할 것이며, 상주(常住)하여 마르지 않는 성품을 알고자 하면 만물(萬物)이 변천하는 속에서 알아차리라.” 하였다. 승이 묻기를, “어떤 것이 대모화상의 경계입니까?”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기봉(機鋒)을 드러내지 않겠노라.” 하였다. 승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기봉을 드러내지 않습니까?”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맞설 자가 없기 때문이다.” 하였다.
신라(新羅) 증 선사(證禪師)의 법사에 문성대왕(文聖大王)과 헌안대왕(憲安大王)이 있다.
신라 척 선사(陟禪師)의 법사에 흥덕대왕(興德大王)과 선강태자(宣康太子)가 있다.
천룡화상(天龍和尙) 법사에 신라 언충 선사(彦忠禪師)가 있다.
앙산(仰山) 적 선사(寂禪師)의 법사에 신라 오관산(五冠山) 순지 선사(順支禪師)가 있는데, 본국에서는 요오대사(了悟大師)라 부른다. 승이 묻기를, “어떤 것이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하니, 순지 선사가 불자(拂子)를 세웠다. 승이 말하기를, “그것만이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순지 선사가 불자를 놓아 버렸다. 승이 묻기를, “이(以) 자도 아니고 팔(八) 자도 아니면 그것이 무슨 자입니까?” 하니, 순지 선사가 원상(圓相)을 그려 보였다. 어떤 승이 선사의 앞에서 다섯 꽃으로 된 원상을 그리니, 순지 선사가 그 그림을 지워 버리고 따로 하나의 원상을 그렸다.
임제(臨濟) 현 선사(玄禪師)의 법사에 신라국 지리산화상(智異山和尙)이 있다. 어느 날 대중들에게 말하기를, “겨울이 춥지 않으니 섣달 뒤에 보리라.” 하고는, 문득 자리에서 내려갔다.
석상(石霜) 저 선사(諸禪師)의 법사에 신라국 흠충 선사(欽忠禪師), 신라 행적 선사(行寂禪師), 신라 낭 선사(朗禪師), 신라 청허 선사(淸虛禪師)가 있다.
동산(洞山) 개 선사(价禪師)의 법사에 신라국 금장화상(金藏和尙)이 있다.
구봉(九峯) 건 선사(虔禪師)의 법사에 신라 청원화상(淸院和尙)이 있다. 승이 묻기를, “말을 달려 공을 다투면 누가 그것을 얻습니까?” 하니, 청원화상이 이르기를, “누가 그것을 얻지 못하는 자이겠는가?” 하였다. 승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다투지 않는 것이 좋겠군요.” 하니, 청원화상이 이르기를, “다투지 않더라도 역시 허물이 있는 것이다.” 하였다. 승이 말하기를, “어찌하여야만 허물이 없게 할 수 있습니까?” 하니, 청원화상이 이르기를, “요컨대 애당초 잃지 않았어야 하는 것이다.” 하였다. 승이 말하기를, “잃지 않는 곳을 어떻게 하면 단련할 수 있습니까?”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두 손으로 떠받들어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였다.
운개(雲蓋) 원 선사(元禪師)의 법사에 신라 와룡화상(臥龍和尙)이 있다. 승이 묻기를, “어떤 것이 대인(大人)의 상(相)입니까?” 하니, 와룡 선사가 이르기를, “자라장(紫羅帳) 속에는 손을 드리우지 않는다.” 하였다. 승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손을 드리우지 않습니까?”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존귀하지 않아서이다.” 하였다. 승이 묻기를, “12시 가운데 어떻게 마음을 써야 합니까?”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원숭이가 털 있는 짐승을 잡아먹었다.” 하였다.
곡산(谷山) 장 선사(藏禪師)의 법사에 신라 서암화상(瑞巖和尙)이 있다. 승이 묻기를, “흑과 백이 모두 없어지고 불안(佛眼)이 열렸을 때는 어떠합니까?”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네가 속[內]으로만 집착할까 염려된다.” 하였다. 승이 묻기를, “어떤 것이 새로 탄생한 왕자입니까?”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깊은 궁궐에 있어서 끌어내어도 나오지 않는다.” 하였다. 또 신라의 박암화상(泊巖和尙)이 있다. 승이 묻기를, “어떤 것이 선(禪)입니까?”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옛 무덤은 집이 되지 못한다.” 하였다. 승이 묻기를, “어떤 것이 도(道)입니까?”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한갓 거마(車馬)의 자취만 남겼구나.” 하였다. 승이 묻기를, “어떤 것이 교(敎)입니까?”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패엽(貝葉)으로는 다 거두어들이지 못한 것이니라.” 하였다. 또 신라의 대령화상(大嶺和尙)이 있다. 승이 묻기를, “겨우 동관(潼關)에 와서 그만둘 때에는 어떠합니까?”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그것은 단지 길거리의 살림이니라.” 하였다. 승이 말하기를, “그 가운데의 살림이 어떠합니까?”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체득하면 얻으나 맞닥뜨리면 얻지 못하느니라.” 하였다. 승이 말하기를, “체득하면 얻는데 어찌하여 맞닥뜨리면 얻지 못합니까?”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체득한다는 것이 어느 정도 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인가?” 하였다. 승이 말하기를, “그 가운데의 일이 어떠합니까?”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존귀하지 않느니라.” 하였다.
설봉(雪峯) 존 선사(存禪師)의 법사에 신라국 대무위 선사(大無爲禪師)가 있다.
운거(雲居) 응 선사(膺禪師)의 법사에 신라 경유 선사(慶猷禪師), 신라 혜 선사(慧禪師), 신라 운주화상(雲住和尙)이 있다. 승이 묻기를, “여러 부처님들이 말씀하시지 못한 것을 어떤 사람이 말합니까?” 하니, 운주화상이 이르기를, “노승이 말할 수 있느니라.” 하였다. 승이 말하기를, “여러 부처님들이 말씀하시지 못한 것을 화상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하니, 운주화상이 이르기를, “여러 부처님들이 바로 나의 제자이니라.” 하였다. 승이 말하기를, “화상께서는 그 뜻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니, 운주화상이 이르기를, “군왕(君王)을 상대하지 않았더라면 20방(棒)은 때렸어야 하겠구나.” 하였다.
백조(白兆) 원 선사(圓禪師)의 법사에 신라국 혜운 선사(慧雲禪師)가 있다.
장경(長慶) 능 선사(稜禪師)의 법사에 신라국 구산화상(龜山和尙)이 있다.
홍주(洪州) 백장산(百丈山)명조(明照) 안 선사(安禪師)는 신라 사람이다.
영주(郢州) 파초산(芭蕉山)의 혜청 선사(慧淸禪師)는 신라국 사람이다.
육조대사(六祖大師)가 입적(入寂)하였을 때 흙덩이 속에 넣으면서 철엽(鐵葉)과 칠포(漆布)를 가지고 목 부분을 감쌌는데, 육조대사가 일찍이 말하기를, “5, 6년 뒤에 어떤 사람이 와서 나의 머리를 가져갈 것이다.” 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그 뒤에 장만(張滿)이란 자가 홍주(洪州)의 개원사(開元寺)에서 신라의 승 김대비(金大悲)에게 돈 2만 냥을 받고는 육조대사의 머리를 가지고 해동(海東)으로 가서 공양하게 하였다. 그런데 한밤중에 탑을 열다가 발각되었다. 《이상 모두 전등록》
○ 신라의 무명승(無名僧) : 상주(商州) 사람 가운데 병이 들어서 수족(手足)이 제대로 자라지 않아 걸음을 못 걷는 자가 있었는데, 수십 년 동안 병을 잘 고치는 의원들이 온갖 처방을 하였으나, 치료하지 못하였다. 이에 집안사람이 길가에다 놓아두고는 구해 줄 자를 찾았는데, 우연히 어떤 신라의 중이 보고는 고하기를,
“이 병은 약초 하나면 치료할 수가 있는데, 이 땅에도 그 약초가 있는지 모르겠다.”
하였다. 그러고는 병자를 위하여 산으로 들어가서 그 약초를 찾아내었는데, 바로 위령선(威靈仙)이었다. 병자로 하여금 이를 복용하게 하니, 며칠이 지난 뒤에는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그 뒤에 산인(山人) 등사제(鄧思齊)가 이를 알고는 드디어 그 사실을 전하였다. 《본초도경(本草圖經)》
부(附) 신라의 무착 선사(無著禪師) -《전당시(全唐詩)》에 석법조(釋法照)의 ‘무착 선사가 신라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며[送無著禪師歸新羅國]’라는 시 한 수가 실려 있다.-
신라의 승 아각(雅覺) -《문원영화(文苑英華)》에 장교(張喬)의 ‘승 아각이 신라로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며[送僧雅覺歸新羅]’라는 시 한 수가 실려 있다.-
도신(道侁) : 조선(朝鮮)의 최씨(崔氏) 집 채마밭에서 자란 오이[瓜]의 길이가 한 자 남짓하였는데, 여자가 이를 먹고 임신을 하였다. 아들을 낳아 7일 동안 버려두었는데, 비둘기와 제비가 날아와 날개로 아이를 덮어서 길렀다. 자라나서 승이 되어 당나라로 들어와 일행(一行)의 지리법(地理法)을 전수받았다. 《삼재조이(三才藻異)》 ○ 살펴보건대, 도신은 신라 말기에 당나라로 들어가서 일행의 지리법을 배웠는바, 세상에서는 동방지리가(東方地理家)의 시조라고 칭한다.
도수충(屠粹忠)의 도신찬(道侁贊)에,
후손을 하늘이 이어 줌에 / 瓜瓞天綿
칠일 동안 새들이 날개로 덮었다네 / 鳥覆其七
법중들의 가슴속 포부 가운데 / 法衆胸羅
승이 그 가운데 하나를 얻었도다 / 僧得其一
하였다. 《상동》
제관(諦觀) : 송나라 태조(太祖) 건륭(建隆) 원년(960, 광종11) 10월이다. 당초에 천태교(天台敎)의 경전이 오대(五代) 때의 난리를 겪으면서 불에 타 완질이 갖추어지지 않았다. 오월왕(吳越王) 숙(俶)이 사신을 파견하여 일본(日本)과 고려(高麗)로 가서 이를 구하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고려에서 사문(沙門) 제관(諦觀)을 파견하여 천태교에 관한 논소(論疏)의 여러 글을 가지고 나계(螺溪)에 이르러서 적 법사(寂法師)를 알현하게 하니, 일종(一宗)의 교문(敎文)이 다시 중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나계(螺溪)가 이를 보운(寶雲)에게 전수하고, 보운이 이를 법지(法智)에게 전수하고, 법지가 크게 강설(講說)을 열어 드디어 교관(敎觀)을 중흥시켰다는 이름을 독차지하게 되었다. 《오월왕전(吳越王傳)》
○ 여가(如可) : 송나라 단공(端拱) 2년(989, 성종8)에 고려가 승 여가를 파견하여 표문을 가지고 와 알현하면서 《대장경(大藏經)》을 내려 주기를 요청하였는데, 이를 내려 주고, 이어 여가에게 자의(紫衣)를 하사하여 귀국하게 하였다. 《송사》
○ 의천(義天) : 의천의 성은 왕씨(王氏)로, 고려국 인효왕(仁孝王)의 넷째 아들이다. 영화를 버리고 출가하여 우세 승통(祐世僧統)에 봉해졌다. 원우(元祐) 초에 중국으로 들어가 도를 묻자, 주객(主客) 양걸(楊傑)에게 칙명을 내려 의천을 전당(錢塘)의 혜인원(惠因院)에 가서 법(法)을 전수받게 하였다. 금산(金山)에 이르자, 불인(佛印)이 앉은 채로 그의 예를 받았다. 이에 양걸이 놀라서 불인에게 물으니, 불인이 말하기를,
“의천은 이국(異國)의 중일 뿐입니다. 만약 내가 도를 굽히고 세속의 방식을 따라 제방(諸方)이 이미 한쪽 눈을 잃은 것처럼 행동한다면 무엇을 가지고 중국의 선법(禪法)을 보여 주겠습니까.”
하니, 조정에서는 그가 예를 아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전당의 혜인원에 이르러서 《화엄소초(華嚴疏鈔)》를 가지고 의심나는 부분을 자문받아 깨우치면서 해가 바뀌어서야 끝마쳤다. 이에 화엄(華嚴) 일종(一宗)의 글 뜻이 없어졌다가 다시 전해졌다. 《속문헌통고》 ○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의천이 선종(宣宗) 2년(1085) 을사에 송나라로 들어갔는바, 바로 원풍(元豐) 8년이다. 그 뒤에 원우(元祐) 4년(1089, 선종6)에 수개(壽介) 등을 파견하여 정원(淨源)에게 제전(祭奠)을 올리고, 겸하여 금탑(金塔)을 바쳤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원우 초에 중국으로 들어가서 도를 물었다.”고 한 것은 틀린 것이다.
송 원풍(元豐) 8년에 고려국의 왕자 승통(僧統) 의천(義天)이 들어와 조공을 바쳤는데, 인하여 정원 법사(淨源法師)에게 수교(首敎)를 배우기를 청하면서 금으로 쓴 한역본(漢譯本) 《화엄경(華嚴經)》 3백 본을 절로 들이고, 금을 시주하여 화엄대각(華嚴大閣)과 화엄장탑(華嚴藏塔)을 건립하여 숭배하니, 영종(寧宗)이 화엄경각(華嚴經閣)이라고 쓰고 이종(理宗)이 이암(易庵)이라고 썼다. 원나라 연우(延祐) 4년(1317, 충숙왕4)에 고려의 심왕(瀋王)이 조서를 받들고서 이곳에서 향(香)을 올리고 경(經)을 읽었으며, 지정(至正) 말년에 절이 불탔다가 조선 초에 중수하였는데, 세속에서는 고려사(高麗寺)라고 칭한다.
원우 4년에 고려의 승통 의천이 정원(淨源)에게 제전(祭奠)을 올린다는 명분으로 탑 2개를 바쳤는데, 이때 마침 소자첨(蘇子瞻)이 항주(杭州)의 지사(知事)로 있다가 상소를 올려 이르기를,
“금탑(金塔)을 바치는 것을 거절하여 그가 오고자 하는 뜻을 끊어 버리소서.”
하니, 신종(神宗)이 따랐다. 《이상 모두 서호지(西湖志)》 ○ 살펴보건대, 《동파집(東坡集)》에 이르기를, “원우 4년에 고려의 승통 의천이 수하시자(手下侍者) 수개(壽介)ㆍ계상(繼常)ㆍ영류(領流)와 원자(院子) 김보(金保)ㆍ배선(裵善) 등 5명을 데리고 와서 항주(杭州)에서 죽은 승을 제사하였다.” 하였는데, 예문지(藝文志)에 상세하게 나온다.
일찍이 상고해 보건대, 고려사(高麗寺)는 본디 선종(禪宗)의 사찰로, 천성(天成) 2년(927)에 오월(吳越)의 충무왕(忠武王)이 실로 절을 창건하고 칙명을 내려 혜인사(慧因寺)라고 이름하였으며, 송나라 신종조(神宗朝)에 이르러서 진수 법사(晉水法師)란 자가 있어서 마명대사(馬鳴大士)의 가르침을 전하면서 《화엄경(華嚴經)》의 여러 경의(經義)에 주석을 내고 해석하였는데, 이것이 사람들에게 유전(流傳)되었다. 고려의 세자가 -살펴보건대, 왕자 의천(義天)은 세자가 아니다.-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 조회함에 미쳐서는 사문(沙門)이 되어 모시면서 스승의 법을 전해 받기를 청하였다. 이에 고려사(高麗寺)라고 칭하게 되었다. 지금에 이르러 남아 있는 법파(法派)는 고려의 세자로부터 이미 17대나 전해졌다. 신종조(神宗朝) 때에는 좌승(左丞) 포맹종(蒲孟宗)이 항주(杭州)를 안무(安撫)하면서, 혜인사(慧因寺)가 고려사(高麗寺)로 바뀌었고 선종(禪宗)이 교종(敎宗)으로 바뀌었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려 돌에 이름을 새기기를 주청하였다. 그 뒤로 종(宗)과 교(敎)가 번갈아 나왔는데, 《전등록(傳燈錄)》에서 칭한 회상사(懷祥寺), 의령사(義寧寺)는 바로 선종이다. 《서하집(西河集)》
살펴보건대, 《고려사》 종실열전(宗室列傳)에 이르기를, “문종(文宗)의 넷째 아들 대각 국사(大覺國師) 왕후(王煦)는 자(字)가 의천(義天)인데, 송나라 철종(哲宗)의 휘(諱)를 피하여 자로서 불리어졌다. 왕후는 문종 19년(1065) 을사에 출가(出家)하였는데, 천성이 총명하여 오교(五敎)를 문득 통달하고 널리 유술(儒術)을 섭렵하여 정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에 호(號)를 우세 승통(祐世僧統)이라 하였다. 왕후가 송나라로 들어가서 불법(佛法)을 구하려고 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선종(宣宗) 2년(1085) 4월에 이르러서 왕후가 몰래 제자 두 사람을 데리고 송나라 상인 임영(林寧)의 배를 따라 송나라로 갔다. 송나라에 도착하자 황제가 수공전(垂拱殿)에서 인견하였는데, 객례(客禮)로 대우하면서 총애함이 지극하였다. 왕후가 사방을 돌아다니면서 불법을 묻기를 청하니, 황제가 조서를 내려 주객원외(主客員外) 양걸(楊傑)을 관반(館伴)으로 삼아 오중(吳中)의 여러 사찰을 두루 돌아다니게 하였다. 그 뒤 조서를 받들고서 동쪽으로 돌아오자, 왕이 태후(太后)를 모시고 봉은사(奉恩寺)에서 왕후를 맞이하였다. 왕후가 석전(釋典) 및 경서(經書) 1천 권을 바쳤다. 그리고 또 흥왕사(興王寺)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할 것을 주청한 다음, 4천 권이나 되는 많은 서책을 요(遼)나라와 송나라에서 사와 이를 모두 다 간행하였다. 처음으로 천태종(天台宗)을 창시하여 국청사(國淸寺)에 두었다. 그 뒤에 해인사(海印寺)로 물러나 있다가 숙종(肅宗) 때에 졸하니, 책봉하여 대각 국사(大覺國師)라고 추증하였다.” 하였다.
또 살펴보건대, 동파(東坡) 소식(蘇軾)이 올린 상소에 이르기를, “복건(福建)의 상인이 항주(杭州)에서 고려의 화물(貨物)을 받아 본문 사이에다 주석을 달면서 《화엄경(華嚴經)》을 만드는데, 비용을 아주 많이 들여 인판(印板)을 만들어서는 공공연하게 배로 실어 가고 있습니다.” 하였다. 그렇다면 왕후(王煦)가 바친 석전(釋典)은 항주에서 새겨 만든 것인가? 우리나라의 해인사(海印寺)에 있는 장경판(藏經板)은, 고지(古志)에 “신라 애장왕(哀莊王) 정묘년에 새겨 만든 것이다.”고 하였는데, 애장왕이 재위한 19년 동안에는 정묘년이란 해가 없다. 이는 대개 선종(宣宗) 4년 정묘년에 의천(義天)이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고서 간행한 것인데, 애장왕 정묘년으로 잘못 전해진 것이다. 의천이 해인사로 물러나 있었으니, 해인사에 판(板)을 보관하는 것 역시 안 될 것이 없다.
○ 진각(眞覺) : 항주(杭州) 용화사(龍華寺)의 영조(靈照) 진각 선사(眞覺禪師)는 고려 사람이다. 거처함에 있어서 오직 납의(衲衣) 한 벌만 입고 지냈으므로 민중(閩中) 사람들이 ‘조포납(照布衲)’이라고 불렀다. 승이 묻기를,
“보리수(菩提樹) 아래에서 중생을 제도하였다는데, 어떤 것이 보리수입니까?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크기가 고련수(苦楝樹)만 하다.”
하였다. 승이 그 까닭을 물으니, 이르기를,
“본디 좋은 말[馬]이 아닌데 어찌하여 수고롭게 채찍질을 해 대는가.”
하였다. 천복(天福) 정미년(947, 정종2)에 항주의 대자산(大慈山)에서 입적하여 탑에 안치되었다. 《속문헌통고》
○ 《전등록》에 실려 있는 고려의 여러 승은 다음과 같다.
천룡(天龍) 기대사(機大師)의 법사(法嗣)에 고려 설악산(雪嶽山) 영광 선사(令光禪師)가 있다. 승이 묻기를, “어떤 것이 화상의 가풍(家風)입니까?”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분명히 기억하라.” 하였다. 승이 묻기를, “어떤 것이 제법(諸法)의 근원입니까?”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지시한 데 대해 사례하노라.” 하였다.
청량(淸涼) 익 선사(益禪師)의 법사에 고려 도봉산(道峯山) 혜거 국사(慧炬國師)가 있다. 처음에 정혜(淨惠)의 문하에서 기봉(機鋒)을 발하였는데, 고려의 왕이 그를 사모하여 사신을 보내어 돌아오기를 청하자 드디어 고국으로 돌아갔다. 국왕이 마음의 법문을 듣고 예우하기를 아주 극진하게 하였다. 어느 날 왕궁으로 들어오기를 청하자 설법을 하러 당(堂)에 올라갔다. 혜거 국사가 위봉루(威鳳樓)를 가리키면서 대중에게 이르기를, “위봉루가 여러 상좌(上座)들을 위하여 벌써 다 거량을 마쳤다. 여러분들은 알겠는가? 만일 알았다면 어떻게 알았는가? 모른다 하면 어째서 위봉루를 모르는가? 진중(珍重)하라.” 하였다. 혜거 국사의 설법은 중국에 퍼지지 않았으며, 또한 어디에서 죽었는지도 모른다. 또 고려 영감 선사(靈監禪師)가 있다. 승이 묻기를, “어떤 것이 청정한 가람(伽藍)입니까?” 하니, 영감 선사가 이르기를, “소의 외양간이 그것이다.” 하였다. 승이 묻기를,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하니, 영감 선사가 이르기를, “저 어리석은 놈을 끌어내라.” 하였다.
보문(普門) 변 선사(辨禪師)의 법사에 고려국 혜홍 선사(慧洪禪師)가 있다.
육왕(育王) 심 선사(諶禪師)의 법사에 고려국 탄연 국사(坦然國師)가 있는데, 왕위를 버리고 사문(沙門)이 되었다. 《이상 모두 전등록》 ○ 살펴보건대, 《전등록》에 실려 있는 우리나라의 여러 승들은 드러난 사실이 별로 없으므로, 지금 각자 별도로 조목을 세워 기록하지 않고, 단지 신라와 고려로 구분하여 조목을 세운 다음 합쳐서 기록하였다.
환상인(幻上人) -《원시선(元詩選)》에 부약금(傅若金)의 ‘환상인이 고려로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며[送幻上人還高麗]’라는 시 한 수가 실려 있다.-
식무외(式無外) -《원시선》에, 장저(張翥)의 ‘식무외가 고려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다.[送式無外歸高麗國]’라는 시 한 수가 실려 있다. ○ 살펴보건대, 고려 정포(鄭誧)의 《설곡집(雪谷集)》에 ‘식무외상인이 연경에서 노닐다가 장차 강남으로 가는 것을 전송하며[送式無外上人遊燕京將往江南]’라는 시가 있다.-
엄상인(嚴上人) -《열조시집(列朝詩集)》에 유기(劉基)의 ‘차운하여 신라 엄상인의 가을날에 부쳐 보인다는 시에 화답하다.[次韻和新羅嚴上人秋日見寄]’라는 시 2수와 ‘거듭 운을 써서 신라 엄상인의 시에 답하다.[重用韻答新羅嚴上人]’라는 시 2수가 실려 있다. ○ 살펴보건대, 신라는 마땅히 고려로 되어야 한다.-
굉연(宏演) -《열조시집》에 조선의 석(釋) 굉연의 ‘자청궁에서 노닐며[遊紫淸宮]’라는 시 한 수가 실려 있다.-
○ 송운대사(松雲大師) : 일본 경장(慶長) 11년(1606, 선조39)에 조선의 송운대사가 와서 강화(講和)를 요청하였다. 《이칭일본전(異稱日本傳)》
○ 무명 선사(無名禪師) : 강희(康煕) 30년(1691, 숙종17)에 내가 자성(慈聖) 현 선사(賢禪師)를 보내어서 고려사(高麗寺)로 들어가 당에 올라가 설법하게 하였는데, 그때 재관(宰官)과 사민(士民)들 몇 명이 당 아래에 늘어서서 절을 하였다. 그러고는 모두들 말하기를,
“선사가 고려의 선사에게 법을 받았는데, 현 선사에게 법을 준 고려 선사가 아직도 방장(方丈)으로 있다.”
하였다. 이에 모두들 첨앙하는 예를 올릴 생각으로 그를 찾았으나 어디론가 가고 없었다. 얼마 뒤에 음식의 공양을 마치고 수희(隋喜)를 하고자 하여 욕당(浴堂)에 이르니, 노납(老衲)이 흰머리를 드리우고 화로를 끼고 있는 것이 보였는데, 다 떨어진 가사를 입은 채 두 눈을 감고 구부리고 앉아 있었다. 따르는 자가 말하기를,
“이 사람이 바로 그 노선사(老禪師)이다.”
하였다. 이때 보고 있던 사람 수십 명이 모두 공경하는 마음으로 우두커니 서 있으면서 그를 놀라게 하지 않고 있다가, 얼마 뒤에 모두 탄식하면서 흩어져 갔다. 《서하집(西河集)》


 

[주D-001]혜관(慧灌) : 고구려 영류왕(榮留王) 때의 승으로, 수나라에 가서 길장(吉藏)에게 삼론종(三論宗)의 종지를 배우고 돌아와, 영류왕 7년(624)에 일본으로 가 삼론종을 선양하여 일본 삼론종의 개조(開祖)가 되었다.
[주D-002]고려(高麗) : 고구려이다. 《일본서기》에서는 고구려를 통상 고려로 표기하고 ‘고마’로 읽고 있는데, 이러한 훈독(訓讀)은 맥(貊)에서 연유한 듯하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241쪽》
[주D-003]혜자(慧慈) : 영양왕(嬰陽王) 6년(595)에 일본에 건너가 백제의 승 혜총(慧聰)과 함께 법흥사(法興寺)에 살면서 포교하였으며, 성덕태자(聖德太子)의 스승으로 있었다.
[주D-004]혜편(慧便) : 일찍이 일본에 건너가 불도를 펴려 하였으나, 일본의 백성들이 너무 미개하여 속세에 숨어 있었다. 그러다가 평원왕(平原王) 26년(584)에 백제의 사신 녹량(鹿梁)이 미륵불상(彌勒佛像)을 가지고 오자, 일본의 대신인 소아마자(蘇我馬子)가 불상을 모시고 봉향(奉香)할 사람을 구함에 혜편이 마침내 뽑혔다. 이에 소아가 혜편을 스승으로 모셨으며, 그의 세 딸을 혜편에게 보내어 비구니(比丘尼)가 되게 하였는데, 이것이 일본 비구니의 시초이다.
[주D-005]파마국(播磨國) : 현재의 일본 병고현(兵庫縣) 일대에 있었다.
[주D-006]금산(金山) : 《삼국유사(三國遺事)》 권4 진표전간(眞表傳簡)에는 진표의 출생지를 완산주(完山州) 만경현(萬頃縣)이라고 하였다.
[주D-007]도솔천(兜率天)의 주인 : 미륵보살(彌勒菩薩)을 가리킨다. 도솔천은 욕계(欲界) 육천(六天) 가운데 제4천(天)으로, 수미산(須彌山) 꼭대기에서 12만 유순(由旬)되는 곳에 있는 천계(天界)이다.
[주D-008]자씨(慈氏) : 미륵보살(彌勒菩薩)을 말한다.
[주D-009]소미로(蘇迷盧) : 수미산(須彌山)을 가리킨다. 수미산은 불교(佛敎)의 세계설(世界說)에서 세계의 한가운데에 높이 솟아 있다고 하는 산으로, 꼭대기에는 제석천(帝釋天)이 살고 있고, 중턱에는 사천왕(四天王)이 살고 있다고 하는데, 높이는 물 위로 8만 유순(由旬)이고 물 아래로 8만 유순이며, 가로의 길이도 그와 같다고 한다.
[주D-010]삼선(三禪) :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의 삼계(三界) 가운데 색계의 제삼선천(第三禪天)을 말한다. 이 천(天)을 정생희락지(定生喜樂地)라 하며, 심묘(深妙)의 선정(禪定)에 따라 심신(心身)의 쾌락이 생긴다.
[주D-011]천안(天眼) : 육안(肉眼), 천안(天眼), 혜안(慧眼), 법안(法眼), 불안(佛眼)의 오안(五眼) 가운데 하나로, 색계(色界)의 천인(天人)이 가지고 있는 눈을 말한다. 사람 가운데에서도 선정(禪定)을 닦으면 얻을 수 있으며, 색계(色界) 사대(四大)로 만든 청정한 안근(眼根)이 거칠고 자세하고 멀고 가까운 일체의 모든 색(色)과 중생(衆生)의 미래에 있을 생사(生死)의 상(相)을 미리 알 수가 있는데, 여기에는 선정(禪定)에 의하여 수득(修得)한 천안과 태어나면서부터 얻는 생득(生得)한 천안이 있다.
[주D-012]와발(瓦鉢) : 흙으로 만든 바리때로, 부처가 제자들에게 쓰게 한 것이다.
[주D-013]첨(籤) : 첨은 끝이 뾰족하여서 물건을 꿸 수 있도록 만든 도구인데, 여기서는 점을 치는 대쪽인 간(簡)의 뜻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4 진표전간(眞表傳簡)에는 간자(簡子)를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주D-014]하나에는 …… 있어 : 《삼국유사》 권4 진표전간에는 이 부분에 대해 “미륵보살이 감응해 나타나 189개의 간자(簡子)를 주면서 이르기를, ‘이 가운데에서 제8간자는 새로 얻은 묘계(妙戒)를 비유한 것이요, 제9간자는 구족계(具足戒)를 얻은 것에 비유한 것이다. 이 두 간자는 나의 손가락뼈이며, 나머지는 모두 침향(沈香)과 단향(檀香)으로 만든 것이다.’ 하였다.” 하였다.
[주D-015]신훈(新熏) : 신훈종자(新熏種子)를 가리킨다. 유식종(唯識宗)에서 팔식(八識) 가운데 제8 아뢰야식(阿賴耶識) 중에 있는 종자로, 후천적으로 여러 가지 정신 작용에 의하여 훈부(熏附)한 것을 말한다.
[주D-016]본유(本有) : 본유종자(本有種子)를 가리킨다. 신훈종자의 반대 개념으로, 아뢰야식에 잠재되어 있는 종자로서, 훈습(薰習)에 의하여 생긴 것이 아니라 선천적으로 존재한 것을 가리킨다.
[주D-017]오하(五夏) : 5년 동안 수행하였다는 뜻으로, 하(夏)는 하안거(夏安居)를 뜻한다.
[주D-018]주류성(周留城)에 …… 일으켰다 : 주류성은 지금의 충청남도 한산(韓山) 지방에 있던 백제의 성으로, 지라성(支羅城)이라고도 한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금강(錦江) 하류의 한산 부근에 있는 건지산성(乾至山城)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백제 부흥 운동의 중심지였다.
[주D-019]관륵(觀勒) : 삼론(三論)의 대가로, 무왕(武王) 3년(602)에 일본에 건너가 원흥사(元興寺)에 있으면서 불교 전파에 힘썼다.
[주D-020]법명(法明) : 백제의 비구니로, 의자왕(義慈王) 15년(655)에 대마도에 가서 오음으로 《유마경》을 독송하였다.
[주D-021]대직관겸족(大織冠鎌足) : 일본의 대신으로, 천지천황(天智天皇) 8년(669)에 내대신(內大臣)이 되었다. 《해행총재(海行摠載)》 권1 일본국기(日本國紀)에는 대직관(大職冠)으로 되어 있다.
[주D-022]오음(吳音) : 중국 오월(吳越) 지방에서 쓰인 음으로, 일본에서는 불교도가 경전을 독송(讀誦)할 때 대개 오음으로 읽으며, 불교어(佛敎語)는 대개 오음으로 발음된다.
[주D-023]묵호자(墨胡子) :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는 흑호자(黑胡子)로 표기되어 있다.
[주D-024]일선군(一善郡) : 지금의 선산(善山)이다.
[주D-025]승가(僧伽) : 범어 Samgha의 음역으로, 입도자(入道者)를 뜻한다. 불제자(佛弟子), 비구(比丘), 사문(沙門)이라고도 한다.
[주D-026]오천축국(五天竺國) : 동, 서, 남, 북, 중의 다섯 천축국을 말한다.
[주D-027]팔탑(八塔) : 팔대영탑(八大靈塔)을 가리킨다. 팔대영탑은 석존(釋尊)과 관계가 깊은 성지(聖地) 여덟 곳에 세운 탑으로, 부처가 탄생한 가비라국(迦毘羅國) 남비니원(藍毘尼園)의 탑, 성도(成道)한 마가타국(摩迦陀國) 이련하원(泥連河園)의 탑, 최초로 설법한 파라내국(波羅奈國) 녹야원(鹿野園)의 탑, 신통력을 나타낸 사위국(舍衛國) 기타원(祇陀園)의 탑, 도리천(忉利天)에서 칠보(七寶)의 계단으로 내려온 승가시국(僧伽尸國) 곡녀성(曲女城)의 탑, 대중을 교화하여 돌아오게 한 마갈타국(摩竭陀國) 왕사성(王舍城)의 탑, 수량(壽量)을 생각하여 열반(涅槃)에 들 것을 예언한 비야리성(毘耶離城)의 탑, 입멸(入滅)한 구시나성(拘尸那城)의 탑을 말한다.
[주D-028]우전국(于闐國) : 서역(西域)의 여러 나라 가운데 하나로, 총령(蔥嶺)의 북쪽에 있으며, 우전(于殿), 계단(谿丹), 굴단(屈丹), 구달살라(瞿怛薩那) 등으로도 표기한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오는 경전(經典)이 모두 이곳을 경유하여 들어왔다.
[주D-029]총령(蔥嶺) : 지금의 파미르 고원(高原)에 뻗어 있는 큰 산맥을 말한다. 옛날에 중국에서 인도로 가기 위하여서는 반드시 넘어야 하던 산맥이다.
[주D-030]삼귀(三歸) : 불문(佛門)에 처음 귀의할 때 하는 의식으로, 불(佛), 법(法), 승(僧)에 귀의함을 말한다. 삼귀의(三歸依), 삼귀계(三歸戒)라고도 한다.
[주D-031]도탈(度脫) : 생사(生死)의 바다를 건너서, 미계(迷界)를 벗어나 오계(悟界)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주D-032]화연(化緣) : 교화하는 인연을 말한다. 부처와 보살이 이 세상에 출현하는 것은 교화할 인연이 있는 까닭이므로, 만일 이 화연이 다하면 곧 열반(涅槃)한다.
[주D-033]산의 …… 곳 : 하란산(賀蘭山)이다.
[주D-034]안사(安史)의 난(亂) : 안녹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이 일으킨 난을 말한다.
[주D-035]영무(靈武) : 당나라 때 현(縣)을 두었던 곳으로, 신성(新城)의 서북쪽에 있었다.
[주D-036]보승불(寶勝佛) : 금강계(金剛界) 만다라(曼茶羅) 팔엽연대(八葉蓮臺)의 남방월륜(南方月輪) 중앙에 위치해 있는 부처를 말한다. 일체의 재물과 보배를 맡은 부처이다. 보생불(寶生佛)이라고도 한다.
[주D-037]불공(不空) : 진언종(眞言宗)의 부법(付法) 제6조(祖)로, Amoghavajra의 음역이다. 불공금강(不空金剛)이라고도 한다. 사자국(獅子國) 사람으로, 남양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다가 16세 때 중국에 들어와 밀학(密學)을 닦아 부법의 조(祖)가 되었다. 현종(玄宗)이 그에게 귀의하여 궁중에 단을 만들고 관정(灌頂)을 받았다.
[주D-038]지장(地藏) : 중국에서 활동한 우리나라의 승으로, 그가 죽을 때 대중(大衆)에게 고하고 함 속에 들어가 가부좌하고 죽었는데, 함 속의 얼굴이 3년 뒤에도 그대로였다 한다. 그 자리에 탑을 세웠는데, 최근에 그 탑 속을 확인한 결과 아직도 죽을 때의 모습과 같이 유체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그를 육신보살(肉身菩薩)로 추앙하고 있으며, 그가 있던 곳에 육신전(肉身殿)을 세웠다.
[주D-039]도수충(屠粹忠) : 청나라 정해(定海) 사람으로, 호가 지암(芝巖)이며, 《삼재조이》의 저자이다.
[주D-040]방완(房琬) : 원문에는 ‘方琬’으로 되어 있다. 《신승전(神僧傳)》 권6에 의거하여 ‘房琬’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41]부도(浮圖) : 범어인 Stupa의 음역으로, 탑(塔)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승의 사리나 유골을 넣은 석종(石鐘)을 부도라고 한다.
[주D-042]현광(玄光) : 신라 진흥왕 때의 승으로, 중국 진(陳)나라로 가서 형산(衡山)의 혜사(慧思)에게 《법화경(法華經)》 안락행품(安樂行品)을 배운 다음 돌아왔다. 뒤에 남악(南岳)의 조영당(祖影堂)에 28인을 그렸는데, 그 가운데 들었고, 천태산(天台山) 국청사(國淸寺)의 조당(祖堂)에도 들었다.
[주D-043]웅주(熊州) : 신라 9주의 하나로, 지금의 공주(公州)이다.
[주D-044]조열지(晁說之) : 송나라 사람으로 자가 이도(以道)이며, 사마광(司馬光)을 흠모하여 호를 경우(景迂)라고 하였다. 소식(蘇軾)의 천거에 의해 관직에 나왔으며, 여러 서책을 박람하였고, 서화에 뛰어났다.
[주D-045]지자대사(智者大師) : 수(隋)나라의 승으로 천태종(天台宗)을 개창한 지의(智顗)를 말한다. 《법화경(法華經)》을 중심으로 해서 불교를 통일하여 천태종을 완성하였으며, 진왕(陳王) 양광(楊廣)에게서 지자대사(智者大師)의 호를 받았다. 《법화현의(法華玄義)》, 《법화문구(法華文句)》 등의 저서가 있다.
[주D-046]용수(龍樹) : 인도의 대승 불교(大乘佛敎)를 크게 드날린 Nagarjuna의 음역이다. 마명(馬鳴)의 뒤에 세상에 나와 대승 법문(大乘法文)을 성대히 선양하매 대승 불교가 이로부터 발흥하였다. 제2의 석가(釋迦), 팔종(八宗)의 조사(祖師)라고 일컫는다.
[주D-047]형계(荊溪) : 중국의 승으로 형계(荊溪)에 살았던 잠연(湛然)을 가리킨다. 잠연은 천태종의 5세로, 종풍(宗風)을 선양하고, 주석서(註釋書)를 많이 지었다. 묘락대사(妙樂大師), 기주 법사(記主法師)라고도 한다.
[주D-048]상주(湘州) 사람이다 : 원문에는 ‘相州’로 되어 있는데, 《송고승전(宋高僧傳)》 권4에 의거하여 ‘湘州’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원효의 출생지가 《삼국유사》 권4에는 압량군(押梁郡) 불지촌(佛地村)이라고 되어 있는데, 지금의 경산군(慶山郡) 압량면(押梁面) 신월동(新月洞) 부근으로 추측된다.
[주D-049]상법사(湘法師) : 원문에는 ‘相法師’로 되어 있는데, 《송고승전》 권4에 의거하여 ‘湘法師’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50]지공(誌公) : 원문에는 ‘志公’으로 되어 있는데, 《송고승전》 권4에 의거하여 ‘誌公’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지공은 양(梁)나라의 승 보지(寶誌)로, 성은 송씨(宋氏)이고, 시호는 묘각대사(妙覺大師)이다. 음식을 수시로 먹었고, 머리카락의 길이가 몇 자나 되었으며, 신통한 일을 많이 나타내었고, 예언을 많이 하였다.
[주D-051]백좌(百座) : 《인왕경(仁王經)》을 강독하는 불교의 법회로, 인왕회(仁王會), 인왕도량(仁王道場)이라고도 하는데,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호국적(護國的)인 성격이 강하였다.
[주D-052]인왕경(仁王經) : 구마라습(鳩摩羅什)이 번역한 《불설인왕반야바라밀경(佛說仁王般若波羅蜜經)》과 당나라 불공(不空)이 번역한 《인왕호국반야바라밀다경(仁王護國般若波羅蜜多經)》 두 종류가 있다. 부처가 16국 왕으로 하여금 그 나라를 보호하고 편안하게 하기 위해서는 반야바라밀을 수지(受持)하여야 한다고 말한 경이다.
[주D-053]대안성자(大安聖者) : 신라 진흥왕 때부터 선덕왕 때까지 활동하였던 고승으로, 원효가 그에게 사사(事師)하였던 듯하다.
[주D-054]시본이각(始本二覺) : 시각(始覺)과 본각(本覺)을 말한다. 본각은 우주 법계의 근본 본체인 진여(眞如)의 이체(理體)를 말하고, 시각은 수행에 의하여 증(證)한 각체(覺體)를 말한다. 기신론(起信論)은 심생멸문(心生滅門)의 아리야식(阿梨耶識)을 무명(無明)인 불각(不覺)과 진여(眞如)인 각(覺)으로 나누며, 각은 다시 시각과 본각으로 나눈다.
[주D-055]각승(角乘) : 각(覺)과 각(角)이 음이 같으므로 소의 두 뿔로 시각(始覺)과 본각(本覺)을 비긴 것이고, 승(乘)은 불법(佛法)을 수레에 비긴 것이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635쪽 주》
[주D-056]약소(略疏) : 원효의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을 말하는데, 중국에서 크게 유행하였다.
[주D-057]배도(盃渡) : 진(晉)나라의 승으로, 기주(冀州) 사람이며, 성명은 미상이다. 항상 나무로 만든 잔[盃]을 타고 물을 건넜으므로 사람들이 배도화상(盃渡和尙)이라고 불렀다. 세세한 행실에 구애되지 않았으며, 신통력이 탁월하였는데, 세상에서는 그의 유래를 알지 못하였다.
[주D-058]탐현기(探玄記) : 당나라 법장(法藏)이 지은 《화엄경탐현기(華嚴經探玄記)》를 말한다. 모두 20권으로 되어 있다.
[주D-059]경소(經疏) : 원효가 지은 《반야삼매경소(般若三昧經疏)》, 《반야심경소(般若心經疏)》, 《금강반야경소(金剛般若經疏)》 등을 말한다.
[주D-060]사교(四敎) : 이른바 원효사교(元曉四敎)를 말한다. 원효사교는 원효가 부처의 일생 동안의 가르침을 판단하여 4교로 나눈 것으로, 삼승교(三乘敎), 삼승통교(三乘通敎), 일승분교(一乘分敎), 일승만교(一乘滿敎)를 말한다.
[주D-061]사제(四諦)와 …… 경(經) : 사제는 사성제(四聖諦)라고도 하며, 고(苦), 집(集), 멸(滅), 도(道)를 말한다. 제(諦)는 불변여실(不變如實)의 진상(眞相)이란 뜻이다. 연기(緣起)는 범어 Pratiyasamutpada의 음역으로 인연생기(因緣生起), 즉 연이 되어서 결과가 일어난다는 뜻이다. 경은 이들 내용이 실려 있는 《아함경(阿含經)》을 말한다.
[주D-062]유심(唯心)의 …… 들어갔다 : 원효가 34세 때 동학(同學)을 하던 의상(義湘)과 함께 불법을 닦으러 당나라로 가던 길에, 요동(遼東)에 이르러서 어느 무덤 사이에서 자다가 목이 말라 물을 마셨는데, 다음 날 아침에 깨어 보니 해골 속에 있는 더러운 물이었음을 알았다. 이에 급히 토하다가 깨닫기를, “마음이 나면 여러 가지 법이 나고 마음이 없어지면 해골과 둘이 아니다. 부처님 말씀에, 삼계가 오직 마음뿐[唯心]이라 하셨으니, 부처님이 어찌 나를 속이겠는가.” 하고는 곧바로 본국으로 돌아왔다.
[주D-063]현수 국사(賢首國師) : 중국 화엄종의 제3조인 법장(法藏)으로, 현수는 그의 자(字)이다. 속성(俗姓)이 강(康)이었으므로 강장 국사(康藏國師)라고도 한다.
[주D-064]지상(至相) : 종남산 지상사(至相寺)에 주석(住錫)하면서 화엄종을 드날렸던 지엄(智儼)을 가리킨다. 지엄은 화엄종의 제2조로, 지상 존자(至相尊者), 지상대사(至相大師)라고도 칭한다.
[주D-065]피일휴(皮日休) : 당나라의 문장가로, 자가 습미(襲美), 일소(逸少)이며, 육귀몽(陸龜蒙)과 친하게 지내 당시에 피륙(皮陸)이라고 칭하였다. 함통(咸通 860~873) 연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주D-066]남악(南嶽) 양 선사(讓禪師) : 형산(衡山)의 남악(南嶽) 관음원(觀音院)에서 주석하였던 회양(懷讓)을 가리키는데, 육조(六祖) 혜능(慧能)의 전법(傳法) 제자로, 대혜 선사(大慧禪師)라고도 한다.
[주D-067]법사(法嗣) : 법통(法統)을 사속(嗣續)하는 제자라는 뜻으로, 스승의 인가(印可)를 받아 법을 전하는 자를 말한다.
[주D-068]서당(西堂) 장 선사(藏禪師) : 강서(江西)의 개원사(開元寺)에 있었던 서당지장(西堂智藏)을 가리킨다.
[주D-069]계림(鷄林) : 신라를 말한다. 중국에서는 흔히 계림과 신라를 혼용하였다.
[주D-070]도의 선사(道義禪師) : 법호는 원적(元寂)으로, 중국에 가서 강서(江西)의 개원사에서 법장에게서 의심을 결단하고 법을 이어받으니, 법장이 “불법을 전하는 것을 그대가 아니면 누구에게 하겠는가.” 하고는 드디어 이름을 도의(道義)라고 고쳤다.
[주D-071]혜철 선사(慧徹禪師) : 동리산파(桐裡山派)의 개조(開祖)로, 혜철(惠哲)이라고도 하며, 자는 체공(體空)이고 시호는 적인(寂忍)이다. 지장(智藏)이 이미 죽은 뒤에 중국에 들어가서 심인(心印)을 받았다.
[주D-072]홍척 선사(洪陟禪師) : 남한조사(南漢祖師)라고도 하며, 시호는 증각(證覺)이다. 당나라로 들어가서 법장에게 심인을 받았다.
[주D-073]마곡(麻谷) 철 선사(徹禪師) : 보철(寶徹)을 가리킨다. 마곡은 산서성(山西省) 하동현(河東縣) 남쪽에 있는 지명으로 보철이 이곳에 주석하면서 설법하였다.
[주D-074]무염 선사(無染禪師) : 신라 때 구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 하나인 성주산파(聖住山派)의 개조로, 휘(諱)는 무주(無住)이고, 시호는 대랑혜(大朗慧)이다. 중국에 들어가 마곡 보철(麻谷寶徹)을 참방(參訪)하여 인가(印可)를 받고 여러 곳을 두루 찾아다님에 그의 이름이 알려져 동방대보살(東方大菩薩)이라 불리었다.
[주D-075]장경(章敬) 운 선사(惲禪師) : 당나라 때의 승인 회운(懷惲)을 가리킨다. 장경은 경조(京兆)에 있는 사찰의 이름이다.
[주D-076]현욱 선사(玄昱禪師) :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봉림산파(鳳林山派)의 개조로, 현육(玄育), 혜목(慧目)이라고도 하며, 시호는 원감(圓鑑)이다. 회운(懷惲)이 입적한 뒤에 중국에 들어가 인가를 받았다.
[주D-077]남전(南泉) 원 선사(願禪師) : 보원(普願)을 가리키는데, 남전(南泉)은 지명인 동시에 그의 호이다. 마조도일(馬祖道一)의 제자로, 지양(池陽)의 남전(南泉)에 선원을 짓고 30년 동안 내려가지 않았으며, 학인(學人)을 준엄하게 다루어서 남전참묘(南泉斬猫), 남전겸자(南泉鎌子), 남전모란(南泉牡丹) 등 많은 일화를 남겼다.
[주D-078]도균 선사(道均禪師) : 도윤(道允)을 가리키며, 도운(道雲)이라고도 한다. 호는 쌍봉(雙峰)이며, 시호는 철감(澈鑑)이다. 황해도 봉산(鳳山) 출신으로, 헌덕왕 17년(825)에 당나라로 들어가 남전 보원(南泉普願)에게 법을 받았으며, 문성왕 4년(842)에 귀국하였다.
[주D-079]염관(鹽官) 안 선사(安禪師) : 원문에는 ‘監官’으로 되어 있는데,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권10에 의거하여 ‘鹽官’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제안(齊安)을 가리키며, 염관은 항주(杭州)에 있는 현(縣) 이름이다. 당나라 말기의 호법승(護法僧)으로, 지엄(智儼)에게서 배웠으며, 염관현의 해창원(海昌院)에서 강설하였다.
[주D-080]품일 선사(品日禪師) : 구산선문 가운데 도굴산파(闍崛山派)의 개조로, 범일(梵日)이라고도 하며, 시호는 통효(通曉)이다. 흥덕왕 6년(831)에 당나라에 들어가 제안 선사를 참방하여 제안 선사의 “평상심(平常心)이 바로 도이다.”라는 한마디 말에 크게 깨우치고 6년 동안 섬겼다.
[주D-081]대매(大梅) 상 선사(常禪師) : 법상(法常)을 가리킨다. 대매는 그의 호이면서 동시에 절강성(浙江省) 영파부(寧波府)에 있는 산 이름으로, 그는 이곳에 호성사(護聖寺)를 짓고 종풍을 크게 떨쳤다.
[주D-082]서쪽에서 온 뜻 : 초조(初祖)인 달마(達磨)가 서천(西天)으로부터 중국에 와서 선법(禪法)을 전한 뜻이 무엇인가 하는 것으로, 그 뜻을 참구(參究)하는 것이 바로 불조(佛祖)의 심인(心印)을 참구하는 것이다. 선문답에서 자주 인용되는 문구이다.
[주D-083]과두(裹頭) : 승들이 입는 가사(袈裟)로 머리를 싸매는 것으로, 선문답(禪問答)에서 자주 인용된다.
[주D-084]근본[本] : 근본은 낙(酪)을 만드는 근본인 우유(牛乳)를 뜻한다.
[주D-085]귀종(歸宗) 상 선사(常禪師) : 지상(智常)을 가리킨다. 귀종은 여산(廬山)에 있는 사찰의 이름이다.
[주D-086]상주(常住) : 이 부분이 원문에는 ‘常任’으로 되어 있는데,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제10권에 의거하여 ‘常住’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87]기봉(機鋒) : 기(機)는 수행에 따라 얻은 심기(心機)이고, 봉(鋒)은 심기의 활용이 날카로운 모양을 뜻한다. 선객(禪客)이 다른 사람을 대할 때의 예민한 활용을 말한다.
[주D-088]신라(新羅) 증 선사(證禪師) : 대증 선사(大證禪師)를 가리킨다.
[주D-089]신라 척 선사(陟禪師) : 홍척 선사(洪陟禪師)를 가리킨다. 홍직 선사(洪直禪師)라고도 한다.
[주D-090]천룡화상(天龍和尙) : 중국 항주(杭州)의 승으로, 명주(明州) 대매산(大梅山) 법상 선사(法常禪師)의 법을 이어받았다.
[주D-091]앙산(仰山) 적 선사(寂禪師) : 혜적(慧寂)을 가리킨다. 앙산은 그의 호이며, 위앙종(潙仰宗)의 개조로, 대앙산(大仰山)에서 크게 선풍(禪風)을 드날렸다.
[주D-092]오관산(五冠山) 순지 선사(順支禪師) : 오관산은 장단(長湍) 주위에 있는 산이다. 순지는 헌안왕(憲安王) 3년(859)에 당나라에 가서 혜적(慧寂)에게서 법을 받았으며, 그의 시호(諡號)가 요오 선사(了悟禪師)이다.
[주D-093]불자(拂子) : 원문에는 ‘佛子’로 되어 있는데, 《경덕전등록》 권13에 의거하여 ‘拂子’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불자는 불가에서 벌레를 쫓거나 먼지를 터는 데 쓰는 도구이다.
[주D-094]임제(臨濟) 현 선사(玄禪師) : 의현(義玄)을 가리킨다. 임제종(臨濟宗)의 개조(開祖)로, 황벽 희운(黃蘗希運)의 제자이며, 임제는 그의 호이다.
[주D-095]석상(石霜) 저 선사(諸禪師) : 경저(慶諸)를 가리키며, 석상은 그의 호이다.
[주D-096]행적 선사(行寂禪師) : 문성왕(文聖王) 10년(848)에 당나라에 건너가 15년 동안 명산을 돌아다니면서 수도하였으며, 석상 경저에게서 심인(心印)을 받아 귀국하여 효공왕(孝恭王) 때 국사(國師)가 되었다. 시호는 낭공대사(朗空大師)이다.
[주D-097]동산(洞山) 개 선사(价禪師) : 조동종(曹洞宗)의 개조인 양개(良价)를 가리킨다. 동산은 그의 호이면서 동시에 강서성(江西省) 서주부(瑞州府) 고안현(高安縣)에 있는 산 이름으로, 동개가 이 산의 보리원(普利院)에서 크게 선풍(禪風)을 떨쳤다.
[주D-098]구봉(九峯) 건 선사(虔禪師) : 도건(道虔)을 가리킨다. 구봉은 균주(筠州)에 있는 산 이름이다.
[주D-099]운개(雲蓋) 원 선사(元禪師) : 지원(志元)을 가리킨다. 운개는 담주(潭州)에 있는 산 이름이다.
[주D-100]대인(大人) : 부처나 보살을 가리킨다.
[주D-101]자라장(紫羅帳) 속 : 자라장은 자색의 비단으로 된 휘장으로, 귀인이 있는 곳에 치는 장막이다. 선어(禪語)에서는 이를 가장 존귀한 곳인 제왕(帝王)의 거처를 뜻하는바, 일반 사람이 엿볼 수 없는 제왕의 거처를 상식적(常識的)인 사고가 미치지 못하는 절대적인 경지에 비유한 것이다.
[주D-102]12시 : 하루 24시간을 말한다. 예전에는 하루를 12시로 나누었다.
[주D-103]패엽(貝葉) : 불경(佛經)을 가리킨다. 패다라(貝多羅) 나무의 잎에다가 쓴 경문(經文)을 말한다.
[주D-104]동관(潼關) : 원문에는 ‘潼開’로 되어 있는데, 《경덕전등록》 권17에 의거하여 ‘潼關’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동관은 섬서성(陝西省)에 있는 관문(關門)의 이름이다.
[주D-105]설봉(雪峯) 존 선사(存禪師) : 원문에는 ‘雲峯’으로 되어 있는데, 《경덕전등록》 권19에 의거하여 ‘雪峯’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의존(義存)을 가리킨다. 설봉은 복주(福州)에 있다.
[주D-106]운거(雲居) 응 선사(膺禪師) : 도응(道膺)을 가리킨다. 운거는 그의 호이면서 동시에 강서성(江西省) 건창(建昌)에 있는 산 이름으로, 도응이 이곳에 주석하여 동산(洞山)의 종풍(宗風)을 크게 떨쳤다.
[주D-107]경유 선사(慶猷禪師) : 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기까지 활동하였던 승려로, 시호는 법경(法鏡)이다. 진성여왕(眞聖女王) 2년(888)에 당나라에 들어가서 운거 도응의 가르침을 받고 귀국하였으며, 고려 태조는 그를 왕사(王師)로 섬겼다.
[주D-108]방(棒) : 막대로 때리는 것이다. 선가(禪家)의 종장(宗匠)이 사람을 대할 때 방으로 치거나 대갈(大喝)을 발하는데, 방은 덕산(德山)에게서 시작되고 갈(喝)은 임제(臨濟)에게서 나왔다.
[주D-109]백조(白兆) 원 선사(圓禪師) : 지원(志圓)을 가리킨다. 백조는 안주(安州)에 있는 산 이름이다.
[주D-110]장경(長慶) 능 선사(稜禪師) : 혜릉(慧稜)을 가리키며, 장경은 그의 호이다. 설봉(雪峯) 의존(義存)의 제자로 초경(招慶)과 장경(長慶) 두 곳에서 개당(開堂)하여 설법하였다.
[주D-111]홍주(洪州) 백장산(百丈山) : 강서성(江西省) 남창부 봉신현에 있는 산으로, 대웅산(大雄山)이라고도 하며, 백장대사(百丈大師)가 백장청규(百丈淸規)를 만들어서 선문(禪門)의 의식(儀式)을 제정한 곳이다.
[주D-112]명조(明照) 안 선사(安禪師) : 동산(洞山) 양개 선사(良价禪師)의 법사(法嗣)인 소산(疏山) 광인 선사(光仁禪師)의 법사를 이었다. 《경덕전등록》 권17에 그의 문답(問答)이 실려 있다.
[주D-113]영주(郢州) 파초산(芭蕉山)의 혜청 선사(慧淸禪師) : 앙산(仰山) 남탑(南塔) 광용 선사(光涌禪師)의 법사로, 《경덕전등록》 권12에 그의 문답이 실려 있다.
[주D-114]그 뒤에 …… 발각되었다 : 일설에는 김대비가 장정만(張淨滿)에게 돈을 주고 조계(曹溪)의 육조탑(六祖塔)에서 육조대사의 머리를 훔쳐 내어 해동으로 돌아와 공양하였는데, 지금의 지리산 쌍계사(雙溪寺) 탑전(塔殿)에 봉안한 육조정상탑(六祖頂相塔)이 그것이라고 한다.
[주D-115]위령선(威靈仙) : 미나리아재비과에 속하는 낙엽 활엽 만목(蔓木)으로, 여름에는 희고 큰 꽃이 피는데, 주로 인가 부근에 관상용으로 심는다. 이 위령선의 뿌리는 한의(韓醫)에서 담이나 풍(風), 습(濕) 등을 다스리는 데 쓴다.
[주D-116]도신(道侁) : 신라 말기에 활동하면서 《도선비기(道詵秘記)》를 지은 도선(道詵)을 가리킨다.
[주D-117]일행(一行)의 지리법(地理法) : 일행은 당나라의 승으로, 밀교(密敎)를 익혀서 지리법에 능통했다고 한다. 일행이 죽은 해는 727년으로, 도선은 그보다 대략 2백 년 뒤에 활동하였으며, 또한 당나라에는 가지 않았는바, 도선이 일행의 지리법을 직접 전수받은 것은 아니다.
[주D-118]법중(法衆) : 불법(佛法)을 따르는 중승(衆僧)을 가리키는바, 출가한 오중(五衆)을 모두 칭한다.
[주D-119]제관(諦觀) : 고려의 승으로 《천태사교의(天台四敎儀)》를 지었다. 《천태사교의》는 각지에 유포되어 일본에도 전해졌다. 그가 천태종의 서적을 중국에 전하여 천태교가 중국에서는 다시 유행하였으나, 그가 본국으로 돌아오지 못하여 고려 천태종의 맥은 끊기게 되었는데, 의천(義天)이 중국에 가서 천태교를 배운 다음 고려로 돌아와 천태종을 수립하였다.
[주D-120]오월왕(吳越王) 숙(俶) : 오월의 창건자인 전류(錢鏐)의 손자로, 자가 문덕(文德)이고 시호가 충의(忠懿)이다.
[주D-121]적 법사(寂法師) : 중국 천태종(天台宗)의 중흥조(中興祖)인 의적(義寂)을 가리킨다. 《송고승전(宋高僧傳)》 권7에 그의 전기(傳記)가 실려 있다.
[주D-122]나계(螺溪) : 나계 존자(螺溪尊者) 의적(義寂)을 가리킨다.
[주D-123]교관(敎觀) : 교상(敎相)과 관심(觀心)의 두 문(門)을 말한다. 교상은 이론이고 관심은 실천의 뜻이다. 교관이문(敎觀二門), 교문관문(敎門觀門)이라고도 한다.
[주D-124]인효왕(仁孝王) : 인효(仁孝)는 문종(文宗)의 시호(諡號)이다. 문종은 묘호(廟號)이다.
[주D-125]우세 승통(祐世僧統) : 우세는 “넓은 지혜로 가르침의 근본을 열고 큰 진리로 세상을 돕는다.[廣智開宗弘眞佑世]”라는 뜻의 별호이고, 승통은 승려를 다스리는 고위 직책이다.《金崙世, 東師列傳, 廣濟院, 1991, 64쪽 주》
[주D-126]원우(元祐) 초 : 《동사강목》 제7 하에는 송 신종 원풍(元豐) 8년(1085, 선종2) 4월에 왕의 아우 왕후(王煦)가 도망하여 송나라로 들어갔다고 하였다.
[주D-127]전당(錢塘)의 혜인원(惠因院) : 이때 혜인원에 정원 선사(淨源禪師)가 있었다. 송 철종이 의천에게 법을 가르칠 만한 승을 천거하게 하자, 중국 불교계에서 동경(東京) 각엄사(覺嚴寺)의 유성 선사(有誠禪師)를 천거하였는데, 유성 선사가 다시 전당 혜인원의 정원 선사를 자기 대신 천거하였다.
[주D-128]불인(佛印) : 이름은 요원(了元)이며, 자는 각로(覺老)이다. 개선(開先) 선섬(善暹)의 법을 이었으며, 소식(蘇軾)과 서로 시를 지어 화답하기도 하였다.
[주D-129]제방(諸方) : 여러 종파의 승려들을 말한다.
[주D-130]정원(淨源) : 북송의 승으로, 호는 잠수(潛叟)이고, 자는 백장(伯長)이다. 항주(杭州)의 혜인원(惠因院) 등에 있었으며, 의천(義天)에게서 금으로 쓴 《화엄경(華嚴經)》 세 가지 역본(譯本) 180권을 받아서 장경각(藏經閣)을 짓고 봉안하였다.
[주D-131]수교(首敎) : 《동사열전(東師列傳)》 권1 대각국사전(大覺國師傳)에, “표문을 올려서 현수의 가르침을 전해 주기를 청하였다.[乞傳賢首敎]” 하였는바, 중국 화엄종의 제3조인 법장(法藏), 즉 현수 법사(賢首法師)의 가르침을 말한다.
[주D-132]오월(吳越)의 충무왕(忠武王) : 오월은 오대(五代) 시대 때 10국 가운데 하나이며, 충무왕은 오월을 개국한 전류(錢鏐)를 가리킨다.
[주D-133]진수 법사(晉水法師) : 정원 선사(淨源禪師)를 말한다. 진수는 그의 호이다.
[주D-134]마명대사(馬鳴大士) : 중인도(中印度) 마갈타국 사람으로, 부처가 죽은 지 6백 년 뒤에 세상에 나온 대승(大乘)의 논사(論師)이다. 북쪽으로 월지국(月支國)에 들어가서 대승 불교(大乘佛敎)를 전하였으므로 대승 불교의 시조로 일컬어진다. 저서로는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대장엄론경(大莊嚴論經)》, 《불소행찬(佛所行讚)》 등이 있다.
[주D-135]종(宗)과 교(敎) : 종은 종지(宗旨), 곧 불교의 근본 취지를 의미하는 것으로 선종(禪宗)을 뜻하며, 교는 경론(經論)에 의해 표현한 언교(言敎)의 의미로 교종(敎宗)을 뜻한다.
[주D-136]오교(五敎) : 신라 불교가 한창 성하였을 때 경교(經敎)를 공부하던 불교의 다섯 가지 종파(宗派)로, 열반종(涅槃宗), 남산종(南山宗), 화엄종(華嚴宗), 법상종(法相宗), 법성종(法性宗)을 말한다.
[주D-137]고련수(苦楝樹) : 멀구슬나무로, 전단(旃檀)을 말한다.
[주D-138]천룡(天龍) 기대사(機大師) : 중기(重機)를 가리킨다. 천룡은 산 이름이며, 청원(淸原) 행사(行思)의 법손(法孫)이다.
[주D-139]청량(淸涼) 익 선사(益禪師) : 문익(文益)을 가리킨다. 청량은 건당(建唐)에 있는 절 이름이며, 법안종(法眼宗)의 개조이다.
[주D-140]보문(普門) 변 선사(辨禪師) : 원문에는 ‘普明辨禪師’로 되어 있는데, 《경덕전등록》 권26에 의거하여 ‘普門辨禪師’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희변 선사(希辨禪師)를 가리키며, 보문은 절강성(浙江省)에 있는 사찰의 이름이다.
[주D-141]육왕(育王) 심 선사(諶禪師) : 개심(介諶)을 가리킨다. 육왕은 절강성(浙江省) 영파부(寧波府)에 있는 산 이름으로, 개심이 이곳에 있는 광리사(廣利寺)에 주석하였다.
[주D-142]탄연 국사(坦然國師)가 …… 되었다 : 탄연은 고려 의종(毅宗) 때의 승으로, 사위의송(四威儀頌)과 상당어구(上堂語句)를 중국 광리사의 개심(介諶)에게 써 보냈더니 찬탄하면서 가사(袈裟)와 의발(衣鉢)을 전해 왔다. 그의 속성은 손씨(孫氏)로, 여기에서 왕위를 버리고 사문이 되었다고 한 것은 잘못 말한 것이다.
[주D-143]경장(慶長) : 원문에는 ‘長慶’으로 되어 있는데, 《동양연표(東洋年表)》에 의거하여 ‘慶長’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144]수희(隋喜) : 남의 착한 일을 보고 따라서 기뻐하는 마음을 말하는데, 오회(五悔) 가운데 하나이다.

춘정집 추보(追補)
 연화문(緣化文)
양주(楊州) 해촌(海村)의 덕해원(德海院) 조성을 위한 연화문(緣化文)



도봉산 아래 / 道鳳山之下
해촌이란 등성이 있는데 / 有原曰海村
도성에서 겨우 한 번 쉴 거리라서 / 距城僅一息
행인이 다투어 분주히 이른다 / 行人競來奔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올 즈음이면 / 至若夏秋交
빗줄기가 항상 세차게 퍼붓고 / 密雨恒傾盆
엄동에는 눈이 정강이까지 쌓여 / 窮冬雪沒脛
매서운 한기 속에 해가 저문다 / 寒嚴日仍昏
헐벗고 서서 어디에 깃들 것인가 / 赤立何所寓
벌판에 처한 형세가 짐승이 웅크린 듯하다 / 野處如獸屯
내가 측은하게 여겨 / 鄙夫爲惻然
널리 존비(尊卑)에 고하여 / 普告卑與尊
이에 원 하나를 창건하려 하니 / 於焉創一院
음덕은 갖추어 논하기 어려우나 / 陰德難具論
한기를 따뜻하게 하고 습기를 말리며 / 燠寒乾其濕
고통과 괴로움이 기쁨으로 변할 것이다 / 苦辛變懽忻
천자가 거듭 선을 권하고 / 帝明重勸善
성상이 마침 은혜를 베푸니 / 聖上方推恩
원컨대 각기 돈을 시주하여 / 願言各施錢
인정에 일조하기 바란다 / 仁政一助云


 

간이집 제6권
 초미록(焦尾錄)
차운하여 도봉서원(道峯書院)에 제하다. 도봉이란 이름은 옛날 이곳에 사찰(寺刹)이 처음 창건될 때부터 붙여졌다고 한다.



옛 절터에 새 서원 영욕이 서로 점철된 듯 / 榮辱新規與舊基
도봉이란 그 이름 기이한 인연을 깨닫겠네 / 道峯終覺設名奇
봉우리마다 수려한 빛 하늘을 향해 치솟았고 / 巖巖秀色當空聳
콸콸 흐르는 찬 시냇물 잠시도 쉬질 않는구나 / 活活寒流不蹔衰
선현을 모신 이곳 혼령이 오르내리나니 / 揭妥前賢森陟降
학문 닦는 후학이여 미위를 삼가 살필지라 / 藏脩後學謹微危
만정의 이적보단 정사가 더 낫고말고 / 幔亭異迹輸精舍
오늘날 우리 동방 무이정사(武夷精舍)를 보겠도다 / 今見吾東一武夷


 

[주C-001]도봉서원(道峯書院) : 선조(宣祖) 6년(1573)에 조광조(趙光祖)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도봉산에 세워진 사액(賜額) 서원이다.
[주D-001]미위(微危) :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에 나오는 바 “인심은 위태하고 도심은 은미하니, 오직 정밀하고 일관되게 하여 그 중도(中道)를 진실로 잡아야 한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라는 16자(字)를 압축해서 말한 것이다. 주희(朱熹) 등 송유(宋儒)가 이것을 요(堯)ㆍ순(舜)ㆍ우(禹) 세 성인이 서로 도통(道統)을 주고받은 십륙자심전(十六字心傳)이라고 강조한 뒤로부터, 개인의 도덕 수양과 치국(治國)의 원리로 숭상되어 왔다.
[주D-002]만정(幔亭)의 …… 낫고말고 : 만정은 무이산(武夷山)의 산신인 무이군(武夷君)이 진 시황(秦始皇) 2년에 마을 사람들을 산꼭대기로 초청하여 만정(幔亭)의 연회를 베풀고 술과 음식을 주었다는 ‘무이만정(武夷幔亭)’의 고사를 말한다. 《雲笈七籤 卷96》 정사(精舍)는 주희(朱熹)가 한탁주(韓侂冑)를 피하여 무이산으로 들어가서 문인들과 함께 강학(講學)을 하였던 무이정사(武夷精舍)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각각 절간과 서원의 비유로 사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