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신묘년 산행 /2011.3. 6 삼각산 시산제

2011.3.6. 삼각산 시산제 (산마루 )

아베베1 2011. 3. 7. 10:15

 

                          삼각산 승가사 9층석탑

 

고려사절요 제11권
 의종 장효대왕(毅宗莊孝大王)
정해 21년(1167), 송 건도 3년ㆍ금 대정 7년


○ 봄 정월에 전라주로 안찰부사(全羅州路按察副使) 윤평수(尹平壽)가 민간에서 은(銀) 80근을 거두어 바쳤다.
○ 연등(燃燈)하는 날, 왕이 봉은사(奉恩寺)로 갔다가 밤에 돌아와 관풍루(觀風樓)에 이르렀을 때, 좌승선 김돈중(金敦中)의 말[馬]이 본래 길이 잘 들지 않는데다 징[鉦]과 북소리에 더욱 놀라 한 기사(騎士)의 시방(矢房 화살통)을 들이받아서 화살이 튀어나와 왕이 탄 가마 옆에 떨어졌는데, 돈중이 이 일을 자수하지 않았다. 왕이 깜짝 놀라 유시(流矢)가 날아온 것으로 오인하고, 빨리 달려 궁으로 돌아와서 궁성에 계엄(戒嚴)을 폈다.
○ 유사에 명하여 저자거리에 방(榜)을 걸기를 "활을 쏜 적(賊)을 고하는 자가 있으면, 유무직(有無職)을 막론하고 동반(東班)의 정랑(正郞)과 서반(西班)의 장군(將軍)직을 소원에 따라 제수할 것이고, 공사(公私)의 천례(賤隷)도 또한 관직에 참여를 허락할 것이며, 아울러 은(銀) 2백 근을 줄 것이다. 여자일 경우는 은 3백 근을 준다." 하였다. 잡지 못할까 염려하여, 황금 15근과 은병(銀甁) 2백 개를 거리에 달아 두고 적을 잡게 하였다. 이로부터 용력 있는 자를 뽑아서 내순검(內巡檢)이라 부르고, 두 번(番)으로 나누어 언제나 자색옷을 입고서 활과 검을 가지고 의장(儀仗) 밖에 나누어 배치시켰는데, 비와 눈도 피하지 않고, 밤이면 새벽까지 순찰하고 경계하였다.
○ 왕이 적을 잡지 못한다고 조서를 내려 재신과 추신을 힐책하니, 체포된 자가 연달았다. 대령후(大寧侯) 경(暻)의 가동(家僮) 나언(羅彦)ㆍ유성(有成)ㆍ황익(黃益) 등에게 혐의를 두고 심하게 국문(鞫問)하니, 나언 등이 허위 자백을 하였다. 여러 왕씨와 재신ㆍ추신ㆍ백관ㆍ기로(耆老)들이 대궐로 나아가 죄인의 체포를 하례하고, 나언ㆍ유성ㆍ황익 및 유성의 처(妻)를 참수형에 처하였다. 또 임금의 호위를 신중히 하지 않았다 하여, 견룡(牽龍 임금의 시위와 궁궐의 호위를 맡았던 군대)ㆍ순검(巡檢)ㆍ지유(指諭 무관직)에서 14명을 시골로 귀양보냈다.
○ 3월에 왕이 비를 무릅쓰고 장흥원(長興院)에 행차하여, 중 각예와 더불어 밤에 술을 마시고, 우승선 김돈중에게 명하여 시를 짓게 하였다.
○ 왕이 몰래 금신굴(金身窟)에 이르러 나한재(羅漢齋)를 베풀고, 현화사(玄化寺)로 돌아와 이공승ㆍ허홍재(許洪材)ㆍ각예 등과 더불어 중미정(衆美亭) 남쪽 못에 배를 띄워 술을 마시며 매우 즐겼다. 이보다 앞서, 청녕재 남쪽 기슭에 정자각(丁字閣)을 세우고, 중미정이란 현판을 달았다. 정자 남쪽 시내[澗]에 흙과 돌을 쌓아 물을 저장하고, 언덕 위에 초가(草家) 정자를 지었는데 오리가 놀고, 갈대가 우거진 것이 완연히 강호(江湖)의 경치와 같았다. 그 가운데에 배를 띄우고 소동(小僮)으로 하여금 뱃노래와 어부노래를 부르게 하여, 놀이를 마음껏 즐겼다. 처음 이 정자를 지을 때에 역군으로 하여금 본인이 식량을 싸 오게 하였는데, 한 역군이 매우 가난해서 마련하지 못하여 역군들이 밥 한 숟가락씩을 나누어 주어 먹였다. 하루는 그의 아내가 음식을 갖추어 가지고 와서 남편에게 먹이고 말하기를, “친한 사람을 불러서 함께 먹으시오." 하였다. 역군이 말하기를, “집이 가난한데 어떻게 장만했는가. 다른 남자와 관계하고 얻어 왔는가. 아니면 남의 것을 훔쳐 왔는가." 하니, 아내가 말하기를 "얼굴이 추하니 누가 가까이하며, 성질이 옹졸하니 어찌 도둑질을 하겠소. 다만 머리를 깎아 팔아서 사 가지고 왔소." 하고, 이내 그 머리를 보이니, 그 역군은 목이 메어 먹지 못하고, 듣는 자도 슬퍼하였다.
○ 귀법사(歸法寺) 동쪽 고개에 행차하여, 시신(侍臣)들과 더불어 술자리를 베풀었다.
○ 여름 4월 1일 무진에 일식이 있었다.
○ 하청절(河淸節)이기에 만춘정(萬春亭)에 행차하여, 재신과 추신 시신과 더불어 연흥전(延興殿)에서 연회를 열었는데, 대악서(大樂署)와 관현방(管絃坊)에서 채붕(綵棚)ㆍ준화(樽花)ㆍ헌선도(獻仙桃)ㆍ포구락(抛毬樂) 등의 놀이를 갖추어 행하고, 또 정자 남쪽 포구에서 배를 띄우고 물결을 따라 오르내리며 서로 시를 부르고 화답하다가, 밤에 이르러 비로소 파하였다. 만춘정은 판적요(板積窯) 안에 있는데, 연흥전(延興殿)이 있고, 남쪽에는 시냇물이 굽이쳐 돌고, 좌우에 송죽(松竹)과 화초를 심었다. 또 아담한 모정(茅亭)ㆍ초루(草樓)가 모두 일곱 군데나 있는데, 현판이 있는 것이 네 개가 있었으니, 영덕정(靈德亭)ㆍ수락당(壽樂堂)ㆍ선벽재(鮮碧齋)ㆍ옥간정(玉竿亭)이요, 다리를 금화교(金花橋)라 하고, 문은 수덕문(水德門)이라 이름하였다. 임금이 타는 배는 비단으로 꾸몄는데 뱃놀이하기 위한 것이다. 무릇 3년이나 걸려서 완성한 것으로, 모두 박회준ㆍ유장ㆍ백선연이 왕을 부추겨 한 것이다.
사신이 말하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는 용도를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데에 있거늘, 의종이 못과 정자를 많이 만들어 재물을 손상하고 백성을 괴롭혔으며, 항상 총애하는 자들과 향락만을 일삼고 국정을 돌아보지 않는데도 재상과 대간으로서 말하는 자가 하나도 없었으니, 마침내 거제(巨濟)로 쫓겨가게 된 것은 마땅하다." 하였다.
왕의 아우 중 충희(冲曦)가 왕을 청녕재로 모시고 음식을 바치니, 왕이 각예(覺倪)와 시신을 불러 같이 마시고, 늦게 중미정 남지(南池)에서 배를 띄워 밤까지 놀았다. 충희는 바로 현희(玄曦)이다.
○ 청녕재에 잔치를 벌이고, 시를 지어 여러 신하로 하여금 화답해 올리게 하였다.
○ 5월에 임진현(臨津縣)에 행차하였다. 다음날 재추인 김영윤ㆍ서공ㆍ이공승ㆍ최온(崔溫)과 승선 이담(李聃)ㆍ허홍재(許洪材)ㆍ김돈중(金敦中) 등과 더불어 남강(南江)에 배를 띄워 날이 다하도록 즐겼다. 사간 임종식(林宗植)과 시어(侍御) 고자사(高子思)도 연회에 참석하였다. 한밤중이 돼서야 보현원(普賢院)으로 옮겼는데, 시종들은 미처 따르지 못하고, 고자사는 취해서 가지 못하였다.
사신이 말하기를, “임금의 한 몸에 사직(社稷)과 백성이 매여 있고, 대간의 직책이란 허물을 바로잡고 그릇된 것을 규탄하는 데 있다. 왕이 비록 위태로운 행차를 조심하지 않아 스스로 그 몸을 가볍게 한다 하더라도 종식(宗植) 등이 간언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따라서 환락에 빠져 임금을 수행하는 체모를 잃었으니, 매우 비루하다." 하였다.
장단현(長湍縣) 응덕정(應德亭)에 거둥하여, 배 가운데에 채붕(綵棚)을 매어 놓고 여악(女樂)과 잡희(雜戲)를 실었다. 물에 뜬 것이 모두 19척이었는데, 모두 채색 비단으로 장식하고 좌우의 총애받는 자들과 더불어 잔치하여 즐겼다. 5경에 이르러서 서쪽 언덕에 올라 과녁을 세우고 그 위에 촛불을 놓고 좌우에게 명하여 쏘게 하였는데, 맞히는 자가 없었다. 내시 노영순(盧永醇)이 아뢰기를, “성인[왕]께옵서 과녁을 맞히심을 기다려서 신들이 맞히겠습니다." 하므로, 왕이 쏘아 즉시 촛불을 맞히니, 좌우에서 만세를 부르고 이담이 뒤따라 맞히니, 능라견(綾羅絹)을 하사하였다. 이틀 동안 머무르면서 물놀이를 관람하고, 응덕정에서 촛불을 잡고 배에 올라 여러 가지 풍악을 성대하게 벌이고, 황락정(皇樂亭)을 지나다가 술자리를 베풀고 밤에 보현원에 이르렀다. 또, 만춘정에 행차하여 술자리를 벌이고, 밤에 이담의 별장으로 들어갔다.
○ 6월에 현화사(玄化寺)로 이어하였다. 이에 앞서 왕이, “성동(城東)의 사천(沙川) 용연사(龍淵寺) 남쪽에 두서너 길 되는 석벽이 냇가에 깎아 세운 듯이 서 있어, 그 이름을 호암(虎巖)이라 하는데, 흐르는 물이 여기 와서 머물러 괴어 있고, 수목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다."는 말을 듣고, 내시 이당주(李唐柱)ㆍ배연(裵衍) 등에게 명하여 그 곁에 정자를 짓고 연복정(延福亭)이라 이름하고는, 네 귀퉁이에 기이한 꽃과 나무를 심었다. 물이 얕아서 배를 띄울 수 없으므로, 제방을 막고 호수를 만들었다. 그 땅이 흰 모래로 되어 있고 물결이 세차서 비만 오면 무너지고, 무너질 때마다 보수하니, 인민들이 주야로 쉬지 못해서 매우 괴로워하였다. 이날 재상ㆍ시신과 함께 정자 위에서 연회를 베풀고, 환락을 다한 뒤에 파하였다.
○ 가을 7월에 귀법사에 행차하였다가, 그 길로 현화사에 거둥하여 말을 달려서 달령(㺚嶺)의 다원(茶院)까지 갔는데, 호종하는 신하들이 모두 미처 따르지 못하였다. 왕이 홀로 다원 기둥에 의지하여, 모시고 있는 이들에게 이르기를, “정습명(鄭襲明)이 만일 살아 있다면, 내가 어찌 여기에 올 수 있겠느냐." 하였다.
○ 8월에 남경에 행차하였다. 행차가 가돈원(加頓院)에 이르니, 광주(廣州)에서 의위(儀衛)와 악부(樂部)를 갖추어 맞이하고, 말과 견여(肩輿)와 양산(陽傘)을 바쳤다.
○ 9월에 남경 유수가 예를 갖추어 거가(車駕)를 맞고, 양산 및 말과 소를 바쳤다. 밤에 내시(內侍)와 중방(重房)에게 활을 쏘게 하여, 과녁을 맞힌 자에게는 능견(陵絹)을 하사하였다.
○ 삼각산(三角山) 승가사(僧伽寺)ㆍ문수사(文殊寺)ㆍ장의사(藏義社) 등의 사찰에 행차하였다.
○ 연흥전(延興殿)에서 여러 신하들과 함께 연회를 베풀고, 개인마다 말 한 필씩을 하사하였다.
○ 남경을 출발하여 파평현(坡平縣) 강에 이르러, 배 가운데서 여러 신하와 함께 연회를 베풀었는데, 시신들이 모두 취하여 예의를 잃었고, 추밀원사 이공승(李公升)은 쓰러져서 거가(車駕) 앞에 실었다.
○ 남경으로부터 돌아와 중앙과 지방에 조서를 내려 은전(恩典)을 차등 있게 베풀었다. 이 행차 때에, 광주(廣州)의 장서기(掌書記) 김유(金鏐)가 백성에게서 추렴하여 진귀한 그릇 등을 바꾸어 가지고 환관에게 많은 뇌물을 주었다. 이에 백선연ㆍ왕숙공 등이 김유를 천거하여 내시(內侍)로 들였다.
○ 겨울 11월에 예빈소경(禮賓少卿) 최현(崔儇)을 금 나라에 보내어 생신 하례를 사례하게 하였다.
○ 금 나라에서 소부감 이위국(李衛國)을 보내어 생신을 하례해 왔다.


 

 

      삼각산 승가사 9층석탑 기단

                            삼각산 승가사 9층석탑 정면

   삼각산 승가사 사적비

    삼각사 일주문을 지나서 9층석탑 가는 곳

   삼각산 승가사 연혁 신라경덕왕 1230년

    삼각산 승가사 안내판

   삼각산 승가사 일주문

     삼각산 사모바위주변에서 구조헬기의 모습

       사모바위에서 바라본  비봉의 모습

 

 

 

 다산문집

시(詩)

승가사를 지나가며[歷僧伽寺]


일백 굽이 바윗길 끝없이 뻗었는데 / 百曲巖蹊細不窮
산허리 절간 하나 단풍에 기대어 있네 / 山腰禪閣倚丹楓
용사가 북으로 가자 큰 비석이 우뚝하고 / 龍師北過豐碑屹
옥불이 동으로 오니 대웅보전 드높구나 이때 연경(燕京)에서 옥불 하나를 내려주어 이 절에 봉안하였다. / 玉佛東來寶殿崇
서울 장안 수많은 집 차가운 빗속이라면 / 萬室榱題寒雨裏
겹성의 성가퀴는 저녁 연기 속이로세 / 重城睥睨暮煙中
서산에 해는 지고 종소리 일어날 제 / 西峯日沒鍾聲起
높은 누각 홀로 올라 떠가는 기럭 보낸다 / 獨上危樓送遠鴻


 

[주D-001]용사 : 법호(法號)에 용(龍) 자가 들어간 스님을 가리키는 듯하나 자세치 않다.

 

속동문선 제6권
 오언배율(五言排律)
송 대허관찰충청(送大虛觀察忠淸)


권건(權健)

선을 쌓으면 남은 경사 있다 함은 / 積善留餘慶
분명히 제전(중국 상고의 황제) 때부터이었다 / 分明自帝顓
집을 이으매 벌열이 함께 했고 / 承家俱閥閱
대를 이어서 모두 초선이었다 / 奕世盡貂蟬
충효로 문과 지개를 삼고 / 忠孝爲門戶
잠영은 앞과 뒤에 빛난다 / 簪纓耀後前
가 땅에 맹세하매 표검하는 날이요 / 盟柯摽劒日
한나라의 재상 되매 취장하는 해이다 / 相漢趣裝年
팔두의 재주는 대적할 사람 없고 / 八斗才無敵
삼수의 말은 가장 고왔다 / 三愁語最姸
요요하여라 화주(빛난 문벌)가 있고 / 遙遙華曺在
혁혁하여라 큰 이름 온전하다 / 赫赫大名全
성치에서는 삼황오제에 올랐고 / 聖治登三五
황하는 1천을 즈음했다 / 黃河際一千
비웅은 능히 점을 맞쳤고 / 非熊能叶卜
유악은 일찍 현인을 낳았다 / 維嶽早生賢
꿈속에서 문통처럼 붓을 얻었고 / 夢裏文通筆
집에서는 자경의 담요를 전했다 / 家傳子敬氈
가슴에는 얼마나 운몽품었던가 / 胸懷幾雲夢
덕과 행실은 연건 같았다 / 德行等淵騫
필진에서는 군사 영을 넓혔고 / 筆陣恢軍令
시단에서는 장수 권한 잡았네 / 詩壇握將權
쏘면 버들잎을 뚫는 재주요 / 射穿楊葉妙
더위 잡아 계수 가지를 먼저 꺾었나니 / 攀折桂友先
잠깐 누른 종이의 방을 보다가 / 乍看黃紙牓
갑자기 살구꽃의 언치[韉]를 모았다 / 俄簇杏花韉
조악은 새 날개를 내었고 / 周鶚生新翮
교룡은 옛 못을 떠났도다 / 蛟龍徙舊淵
몸을 날려 봉각에 깃들었고 / 騰身巢鳳閣
편편히 걸어 화전에 올랐네 / 平步上花磚
기둥 밑에서 하늘말[天語]을 들었고 / 柱下聆天語
이두에서는 해 곁에 있었고야 / 螭頭傍日邊
서리 발굽이 잠깐 미끄러지자 / 霜蹄蹔顚蹶
구름 길에서 조금 머뭇거리고 / 雲路少迍邅
몇 해 동안 그 몸이 한가하여 / 幾歲身休假
같이 놀며 소매가 이내 잇닿았었네 / 同遊袂接連
용감(절)에서는 등불을 마주했고 / 龍龕對燈火
석정(솥)으로는 삶고 볶기 일삼았다 / 石鼎事熟煎
대지팡이로 승가(북한산 승가사) 길을 걸었고 / 竹杖僧伽路
짚신으로 쌓인 돌[積石]위에 올랐거니 / 芒鞋積石巓
거문고를 안고는 험한 산에 오르고 / 携琴凌犖确
술에 취해서는 구름과 연기에 누워 있었도다 / 中酒臥雲煙
야인의 성질이 금지와 친하고 / 野性偎金地
술 깬 뒤에는 석천에 양치했네 / 餘酣漱石泉
살기 어려운 여러 날을 궁하면서 / 崎嶔窮數日
붓을 휘둘러 많은 글을 지었도다 / 揮洒動連篇
훌륭한 경치를 마음에 기억하고 / 勝賞心猶記
맑은 놀이에 꿈이 절로 끄을려 / 淸遊夢自犖
광산에서 바야흐로 방탕할 때에 / 匡山方跌宕
봉도(봉래섬)에서 갑자기 서련하였네 / 蓬島欻蟬聯
어찌 뜻했으리 두세 선비가 / 豈意二三士
다 같이 열 여덟의 신선에 참여할 줄을 / 同參十八仙
빛을 나누매 연촉이 찬란하고 / 分光蓮燭爛
내리는 물건 받으매 수포가 고왔도다 / 拜賜獸袍鮮
삼절의 재주나 이름이 장하거니 / 三絶才名盛
거듭 영화로워 특별한 대우가 치우쳤네 / 重華眷遇偏
용서(대궐 뜰)에서는 나란히 배수하고 / 龍犀齊拜手
난전(임금 있는 대궐)에서는 언제나 어깨에 따랐었나니 / 鑾殿慣随肩
옥루는 삼경의 달이었는데 / 玉漏三更月
청릉에서는 몇 밤이나 잤던고 / 靑綾幾夜眠
구름을 바랄 때는 시름에 늙을 것 같더니 / 望雲愁欲老
격문을 받으매 기쁨에 미칠 것 같구나 / 捧檄喜如顚
오마(관찰사의 행차)는 진실로 영화여라 / 五馬眞榮矣
쌍번(쌍깃대)이 어찌 우연인가 / 雙幡豈偶然
짖는 개에 놀랠 사람 없거니 / 無人驚吠犬
어찌 부들풀의 채찍을 보일 것인가 / 何用示蒲鞭
은혜로운 정치는 하내에 머무는데 / 惠政留河內
훌륭한 이름은 영천에서 비롯하네 / 能名自潁川
중서에 잠깐 시험을 치렀더니 / 中書纔歷試
총마는 빙빙 돌도다 / 騘馬遶回旋
쇠같은 얼굴은 물보다 차고 / 銕面寒於水
굳센 창자는 곧기가 줄[弦]과 같구나 / 剛腸直似弦
조양에서는 소리가 홰홰 나고 / 朝陽聲翽翽
계성에서는 그림자가 훨훨 난다 / 鷄省影翩翩
후설로서 언제나 가까이하니 / 喉舌尋常近
사륜은 비밀히 말씀하셨네 / 絲綸密勿宣
위엄스런 얼굴은 해 밖에서 친하고 / 威顔親日表
거니는 발은 별 자리를 핍박한다 / 步履逼星躔
회계를 맡으매 백성들이 중히 여겨 / 會計民曹重
맑은 물망을 혼자 차지하였도다 / 澄淸物望專
위엄스런 명성은 초목에도 연하고 / 威聲連草木
화한 기운은 들 밖까지 넘쳤나니 / 和氣溢郊鄽
당우에게 자순할 여가 있었고 / 棠苃咨詢暇
훤당(어머니)에도 정성하기 편하였네 / 萱堂定省便
민정을 살피는데 사자가 되었고 / 觀風得使者
송을 지으매 그 사람이 있었도다 / 作頌有人焉
손을 나누어 멀리 감을 슬퍼하고 / 分手嗟行邁
갈림길에 다달아 이별하는 자리에 참여했나니 / 臨岐參別筵
게으르매 즐거이 졸을 지키리 / 疏慵甘守拙
쇠약한들 마침내 누가 가엾다하리 / 衰謝竟誰憐
누른 책으로 애오라지 벗을 삼고 / 黃卷聊爲友
고비(선생 앉는 자리)에는 다행이 인원 채운다 / 皐比辛備員
어찌 견디리 관리가 되어 / 豈揕能作吏
전원에 돌아가는 시 짓지 못함을 후회할 줄을 / 悔不賦歸田
슬퍼하며 바라보면 중원(충주)이 멀거니 / 悵望中原遠
멀리서 숙초의 우거짐을 알겠네 / 遙知宿草芉
송추의 구름은 햇빛을 가리나니 / 松楸雲掩映
복랍으로 눈물은 쉬지 않으리
/ 伏臘涕潺湲
가서는 모름지기 몸 조심하고 / 去去須珍重
편지나 부디 일찍 전하라 / 魚書會早傳


 

[주D-001]가(柯) 땅 : 예전 춘추 때에 제(齊)나라와 노(魯)나라가 서로 이웃하여 여러 번 전쟁을 했는데 항상 노나라가 졌다. 그 때 노나라 장수 조말(曺沫)이란 사람도 세 번 패배를 당하였으므로, 그 원한을 풀 기회를 기다리다가 제나라의 임금과 노나라의 임금이 강화하기 위하여 가(柯)라는 땅에서 회합할 때에 조말이 노나라 임금을 모시고, 그 강화 장소에 가서 제나라 임금을 만나 직접 칼을 들이대고 몇 번 전쟁에 빼앗아간 땅을 도로 내놓으라고 협박한 것을 말함이니, 이 대허라고 하는 분의 성이 조씨(曺氏)이므로 조씨의 고사를 말한 것이다.
[주D-002]한(漢)나라의 재상 : 한나라 초년에 조참(曹參)이란 사람이 지방에 태수로 있었는데, 중앙에서 소하라는 정승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곧 서울로 갈 준비를 명령하면서, “이제 내가 곧 들어가서 정승이 될 것이다.”하였는데, 과연 황제의 부르는 명령이 내리고 들어가서 정승이 되었는데, 이것도 조씨의 고사로 인용한 말이다.
[주D-003]팔두(八斗)의 재주 : 삼국시대 조조(曹操)의 아들 조식이 재주가 많아 후세 사람들이 천하의 재주가 모두 1석(一石 10두(斗))인데, 조식이 혼자서 8두(八斗)를 차지하였다고 한다.
[주D-004]황하(黃河)는 1천을 즈음했다 : 황하(黃河)는 대단히 탁한 강물이다. 그러나 그 물이 1천 년에 한 번씩 맑아지고, 맑아지면 성인이 나서 세상을 지극히 태평하게 다스린다고 하였다.
[주D-005]비웅(非熊)은 능히 점을 맞쳤고 : 예전 주(周)나라의 문왕이 내일 사냥을 가려할 때에 꿈에 이상스러운 짐승을 보고, 이튿날 점을 쳐보니, “곰도 아니요[悲熊], 큰 곰도 아니요, 얻는 것은 큰 현인(賢人)을 얻어 국가가 창성할 것이다.”하였는데, 과연 강태공을 얻어서 그를 스승으로 하여 국가가 창성하였다.
[주D-006]유악(維獄)은 일찍 현인(賢人)을 낳았다 : 악(嶽)이라는 말은 큰 산이란 말이나, 중국에서 동서남북 중앙에 각기 큰 산 하나씩을 악이라 이름 지어 국가적으로 숭배하였다. 그래서 그 악의 신령이 가끔 인간으로 태어나서 국가에 큰 공헌을 한다고 한다.
[주D-007]꿈속에서 문통(文通)처럼 붓을 얻었고 : 남북조시대의 강엄(江淹)이란 사람의 자가 문통이었다. 그는 젊을 때에 곽박이라는 예전 시인이 오색 붓을 하나 주었다. 그 후로는 그의 문학적 재주가 발전되어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주D-008]운몽(雲夢) : 문장으로 학식이 풍부한 것을 가슴속에 운몽(雲夢)같은 큰 호수가 일곱 여덟이 들어 있다고 말한다.
[주D-009]연건(淵騫) : 연(淵)은 안연(顔淵)이요, 건(騫)은 민자건(閔子騫)이니, 모두 공자의 제자로서 덕행(德行)이 있는 분들이다.
[주D-010]살구꽃 : 예전 과거 볼 때에는 대개 살구꽃 필 때에서 전부터 과거에 급제한 사람과 행하는 관계가 깊다.
[주D-011]이두(螭頭) : 대궐 궁전 앞 뜰의 돌에는 꿈틀거리는 용을 조각하는 고로 여기 이두(螭頭)라는 말은 용의 머리라는 말이니 조각한 용의 머리 있는 곳이란 말이다.
[주D-012]광산(匡山) : 이태백이 광산에서 글을 읽었다고 한다. 여기 이 말은 우리 두사람도 이태백이 글을 읽은 것처럼 같이 읽었다는 말이다.
[주D-013]선련(蟬聯) : 같이 벼슬 하였다는 말.
[주D-014]수포(獸袍) : 당나라에서 글 잘하는 학사(學士)들에게 짐승을 수놓은 비단갖옷을 상으로 하사하였었다.
[주D-015]짖는 개에 놀랠 사람 없거니 : 지방의 태수로 가서 정치를 잘하여 경내에 도적이 없으므로 개가 놀라서 짖지 않는다는 말이다.
[주D-016]어찌 부들풀의 채찍을 보일 것인가 : 한나라의 유관(劉寬)이라는 사람이 태수로 있으면서 죄를 범한 사람에게 부들로 볼기를 때렸는데, 아프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볼기 맞는 부끄러움을 알리기 위함이라고 말하였다 한다.
[주D-017]은혜로운 정치는 하내(河內)에 머무는데 : 한나라 구순(寇恂)이라는 사람이 하내(河內)태수로 정치를 잘하여서 백성들이 임금께 구순이 임기가 끝났으니 한 임기만 더 있게 해주기를 바란다고 탄원하였다 한다.
[주D-018]영천(穎川) : 한나라 조광한(趙廣漢)이라는 사람이 영천(穎川) 태수로서 정치를 잘하였으므로 명성이 높아졌다.
[주D-019]총마(驄馬) : 한나라의 환전(桓典)이란 사람이 관리를 탄핵하는 어사(御史)가 되었는데 그는 항상 푸른 말[驄馬]을 타고 다녔으므로 그를 총마어사라고 말하였다. 그후로는 총마라 하면 어사를 말하는 것이 되었다.
[주D-020]조양(朝陽) : 주나라의 문왕 때에 기산(箕山)이라는 산에서 아침 해가 돋을 때 봉황(鳳凰)새가 울었다 한다. 그 후로 조정에서 바른 말하는 것은 아침 볕에 봉황이 운다고 말하여 왔다.
[주D-021]계성(鷄省) : 승정원(承政院)의 별칭인 듯하다.
[주D-022]송추(松楸)의 …… 쉬지 않으리 : 송추는 소나무와 가래나무라는 말인데, 선조의 산소를 말함이다. 복랍(伏臘)은 여름의 복(伏)과 섣날의 납향(臘享)을 말함인데 복은 한여름이요, 납은 깊은 겨울이므로 여름 제사 겨울 제사를 말하는 것으로 통용된다. 여기의 말은 자기가 벼슬하느라고 고향에 가지 못하여 산소에 제사 지내지 못해 여름 겨울이면 눈물이 난다는 말이다.

 

기언 제46권 원집
 [기사(記事)]
설공(雪公) 편년 기사(編年記事) 상


선생은 한양(漢陽) 동쪽 성 아래 동네에서 났다. 허씨(許氏)는 본디 가락(駕洛) 수로왕(首露王)의 후예이다.
신라 말엽에 허선문(許宣文)이란 자가 있어 나이 90여 세에 고려(高麗) 태조(太祖)를 섬기다가 공암 촌주(孔巖村主)에 봉해졌고 그 뒤로 고려 중엽에 와서는 첨의중찬(僉議中贊) 허공(許珙)이 있는데 삼광(三光 일(日)ㆍ월(月)ㆍ성신(星辰))을 공경하였으며, 오곡(五穀)을 밟지 않았고, 버려진 해골(骸骨)을 보면 반드시 묻어 주었다고 한다. 지금 공암 허씨 중에 중찬의 자손(子孫)들이 많다. 우리 중종ㆍ명종 때에 이르러서 좌찬성 허자(許磁)가 있는데 그의 9세손(九世孫)이다. 그는 자주 간쟁(諫爭)하다가 아첨하던 신하 이기(李芑)의 참소를 당하여 귀양 가서 세상을 뜨니 그 사실이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선생은 좌찬성의 증손이다. 아버지는 국자 진사(國子進士) 허량(許亮)인데 일찍 돌아갔고, 어머니는 안동 권씨(安東權氏)이다. 만력(萬曆) 16년 우리 선조(宣祖) 21년(1588) 11월에 선생이 태어났고, 그 다음해 2월에 진사공(進士公)이 27세로 세상을 떴는데 선생은 언제나 기일(忌日)이 되면 음식을 먹지 않고 호곡(號哭)하며 평생 동안을 초상(初喪) 때와 같이 하였다.
선생에게는 숙부(叔父) 허교(許喬)가 있는데, 바로 우리 선자(先子)이신 포천공(抱川公)이다. 그는 숙부(叔父) 섬기기를 친아버지 섬기듯이 하여 아침저녁으로 모시면서 얼굴에 항상 온화한 빛이 있었으며 병석에 눕게 되면 옷에 띠를 풀지 않았다. 우리 선자가 늘 칭찬하기를,
“아무가 아침저녁으로 나에게 잘하는구나. 젊은 나이로 예(禮)를 좋아하되 게을리 하지 않으며, 그 말을 듣고 그 행실을 보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공경스런 마음이 일어나게 하여 남들이 능하지 못한 것에 능하니, 남보다 뛰어난 행실이다.”
하였다. 선생의 초명(初名)은 열(說)이었는데 뒤에 후(厚)로 고쳤고, 자는 중경(重卿)이다. 남방 선비로 이름은 김섬(金暹), 자(字)는 퇴가(退可)라 하는 이가 있어 난을 치른 뒤에, 연로하여 처자(妻子)를 거느리고 우리 선자에게 손님으로 와 있었는데, 선생의 연소하면서도 배움을 좋아하는 것을 보고 옛사람들이 몸을 닦던 방법을 가르치니, 선생이 크게 기뻐하여 드디어 스승으로 섬겼는데 그때에 선생의 나이 15세였다. 그 뒤로 김 선생이 죽자 그를 위하여 심상(心喪) 3년을 하였다.
선생은 시정(寺正) 권용중(權用中)에게 사서(四書)를 배웠는데 시정(寺正)은 선생의 모친 권부인(權夫人)의 숙부(叔父)이며, 이소(履素) 선생의 문인(門人)이다.

23세(1610, 광해군2)에 모은(暮隱) 장언침(張彦忱) 선생에게 《주역》을 배웠다. 장 선생은 동주인(東州人)인데 과거를 통하여 벼슬길에 나갔으나 폐왕(廢王 광해군을 가리킴) 때를 당하여 벼슬이 현달(顯達)하지 못한 채 돌아갔다.

26세에 이정호 영언(李挺豪英彦)과 함께 덕신 공자(德信公子 덕신정(德信正) 이난수(李鸞壽))에게 배웠는데 《역(易)》의 건괘(乾卦)ㆍ곤괘(坤卦)와 《대학》을 강론하여 《경전해(經傳解)》와 《대학구결(大學口訣)》이 있다.

무오년에 경성(京城)이 요란하여 상대부(上大夫)들이 많이 피란하였다. 선생은 관동(關東)으로 들어갔고 목(穆)은 영남(嶺南)으로 나갔는데, 신유년에 선생이 영남을 유람하여 만나게 되었다. 그래서 학문(學問)과 학력(學力)에서 얻은 것이 어떤 일인가를 논의하였는데 선생이 말하기를,
“해진 옷을 입고 궂은 음식을 먹으면서 남들과 더불어 거처하되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하였는데, 나는 거기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하였다. 선생은 자수(自守)하기를 엄중히 하여 어디에 있든지 사심이 없었는데, 이것은 특별히 겸약(謙約)으로써 사람에 보인 것으로 용맹스럽게 가서 힘써 행한 실상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간혹 선생의 예절(禮節)이 번거롭고 세밀하다 하여 선생을 의심하는 자도 있으므로, 목(穆)은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그것은 마음을 다하는 것이지 번거로운 것이 아니다. 군자의 학문이란 작은 것은 버리고 큰 것만 하지 않음으로써 다 극진히 하고 박학을 이룰 수 있는데 학문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도(道)가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다. 예의 삼백(禮儀三百)과 위의 삼천(威儀三千)은 천리(天理)의 유행(流行)함이요 자연(自然)의 법칙인데, 절목(節目)의 자세함을 어떻게 버릴 수가 있는가?”
하였다.

목(穆)이 일찍이 남들과 더불어 일을 의론할 때에 풍속을 따라 행하면 역시 심한 해는 없다고 말하였는데, 선생이 말하기를,
“풍속을 따르는 것이 이치를 보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이것은 나를 일깨운 말이었으므로 즉시 깨닫고 말하기를,
“또한 훌륭하지 않은가. 진실로 이치에 어긋난 자는 일을 하면 폐단이 생겨서 그 해(害)가 반드시 클 것이니, 방국(邦國)에서부터 여리(閭里)와 거실(居室)의 사사로운 데에 이르기까지 다 그러하다.”
하였다.

선생이 남으로 유람할 때에 한강(寒岡 정구(鄭逑))과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두 어진 이를 보고 며칠 놀고는 말하기를,
“삼대(三代)의 기상이 여기에 있도다.”
하였다.

선생이 젊었을 때에 승가사(僧伽寺)에서 글을 읽었다. 김자점(金自點)이 한미(寒微)할 때에 산과 물을 찾아 놀다가 승가사에 와서 선생을 보고는 자못 정성을 다하여 마지않았으나 선생이 기쁘게 여기지 않고 말하기를,
“저 사람은 길한 사람이 아니다. 후일에 반드시 화의 우두머리가 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 뒤 이인거(李仁居)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횡성(橫城) 산골에 숨어 살면서 손수 농사를 지어 먹었다. 인조(仁祖)가 중흥(中興)하던 해에 불러서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나오지 않으니, 사대부(士大夫)들이 그를 추종하는 자가 많았다. 선생 또한 한 번 산중(山中)에 찾아가 만나 보고 나서 말하기를,
“저 사람은 길한 사람이 아니다.”
하였다. 훌륭하다. 옛사람들이 기미(幾微)를 보아 드러날 것을 알았다는 것이 바로 이를 두고 말한 것인가.

정묘년 10월에 이인거(李仁居)의 옥사(獄事)가 있자 선생도 사변(辭變)에 연좌되어 구속되었다. 어명을 받은 날 저녁에 선부인(先夫人)이 전에 있던 병환으로 절명(絶命)하였는데 선생은 이미 어명에 나간 뒤였다. 상이 그가 사건에 관계가 없음을 알았고, 또 상사(喪事)를 당하여 애통하리라 생각하여 곧 풀어 주니, 선생이 집에 돌아오기를 분상(奔喪)의 예(禮)와 같이하였으며, 집에 온 지 4일 만에 성복(成服)을 하고 다음달에 발인(發引)하여 연서(漣西 연천(漣川)) 족산(族山)에 돌아와 장사 지내는데, 배로 출발하여 두미(斗尾) 어귀에 이르자, 날씨가 매우 추워, 강물이 얼어붙어서 강가에 초빈하고 초빈 곁에 있으면서 상복을 벗지 않고 날마다 한 줌 쌀로 죽을 끓여 마시며 살았다. 강가에 장지를 점치니 길하므로 곧 장사 지내고 강 남쪽에 우거(寓居)하면서 매양 조석으로 무덤을 바라보며 슬피 부르짖어 통곡하니 강가의 나무가 말라 죽었다. 여름에 큰물이 나서 길이 막히자 제물(祭物) 준비가 넉넉지 못했는데 하룻밤 사이에 향기로운 버섯이 지붕 아래에 돋아나니, 사람들이 다들 효자(孝子)의 정성에 감동한 것이라고 하였다. 3년 10월에 상사(祥事)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실당(室堂)에서 제사를 올리는데 남자와 부인이 차례로 서기를 사당의 의식과 같이 하여 한 번의 헌작(獻酌)으로 철상하고 신주(神主)를 받들어 사당으로 들어갔다.
일찍이 조상하지 못한 자가 와서 조상을 하면 절하기를 초상시와 같이 하였는데, 이때 선생의 나이가 42세였다.


 

[주D-001]이소(履素) : 조선의 학자 이중호(李仲虎)의 호(號)이다. 유우(柳藕)의 문인(門人)으로 시문(詩文)에 뛰어났다.
[주D-002]이인거(李仁居)의 옥사(獄事) : 익찬(翊贊) 벼슬을 지낸 이인거(李仁居)가 인조(仁祖) 5년(1627)에 강원도 횡성(橫城)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체포되어 사형을 받을 때 그와 연루된 사람을 다스리던 사건이다. 이인거는 스스로 중흥대장(中興大將)이라 하고 관군(官軍)을 소집하여 군기(軍器)를 탈취하고 서울을 침범하려 하다가 원주 목사(原州牧使) 홍보(洪寶)에게 체포되어 서울에서 사형을 받았다.
[주D-003]분상(奔喪)의 예(禮) : 타향(他鄕)에서 부모가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가는 예를 말한다.

 

 

백사집 제1권
 시(詩)
승가사(僧伽寺)에서 거듭 노닐다.


거듭 오니 어느덧 한 해가 저물었는데 / 重來不覺歲崢嶸
우리 무리 삼인이 예전에 이 곳을 왔었네 / 吾輩三人昔此行
탑 위의 고황과는 구면이 남아 있는데 / 塔上古皇餘舊面
언덕 머리 새 제비는 봄의 소리를 짓누나 / 岸頭新燕作春聲
장안의 거마 소리는 땅에서 진동하고 / 長安車馬地中殷
강한의 파도 소리는 하늘 밖에 울리도다 / 江漢波濤天外鳴
막걸리 석 잔 마시고 옷소매 떨치고 떠나니 / 白酒三杯拂衣去
산승은 다만 늙은 서생이라 말하누나 / 山僧只道老書生
일찍이 택중(擇中), 익지(益之)와 함께 와서 놀았기 때문에 언급한 것이다

백사집 제1권
 시(詩)
승가사(僧伽寺)에서 거듭 노닐다.


거듭 오니 어느덧 한 해가 저물었는데 / 重來不覺歲崢嶸
우리 무리 삼인이 예전에 이 곳을 왔었네 / 吾輩三人昔此行
탑 위의 고황과는 구면이 남아 있는데 / 塔上古皇餘舊面
언덕 머리 새 제비는 봄의 소리를 짓누나 / 岸頭新燕作春聲
장안의 거마 소리는 땅에서 진동하고 / 長安車馬地中殷
강한의 파도 소리는 하늘 밖에 울리도다 / 江漢波濤天外鳴
막걸리 석 잔 마시고 옷소매 떨치고 떠나니 / 白酒三杯拂衣去
산승은 다만 늙은 서생이라 말하누나 / 山僧只道老書生
일찍이 택중(擇中), 익지(益之)와 함께 와서 놀았기 때문에 언급한 것이다

완당전집 제1권
 고(攷)
진흥왕의 두 비석에 대하여 상고하다[眞興二碑攷]

 

이상의 신라 진흥왕 순수비는 함경도(咸鏡道) 함흥부(咸興府) 북쪽으로 1백 10리쯤 되는 황초령(黃草嶺) 아래에 있었던 것인데, 비가 지금은 없어졌다. 나는 이단(二段)의 탁본(拓本)만을 취득하여 이를 합해서 관찰한 결과 모두 12행(行)으로 되어 있는데 그 길이와 넓이는 알 수가 없다.
지금 탁본을 가지고 보건대, 밖은 난격(欄格)으로 되어 있어 하단(下段) 제2행의 짐(朕) 자와 제3행의 응(應) 자 밑은 바로 난격과 접(接)하였고, 응(應) 자는 제5행 맨 밑의 口와 서로 마주하였으며, 상단(上段)은 망결(亡缺)되었다. 현존한 글자로 가장 높이 위치한 것은 제5행의 미(未) 자이다.
그리고 지금 위로 미(未) 자에서부터 아래로 口에 이르기까지를 한(漢) 나라 건초척(建初尺)으로 재본 결과 길이가 4척 4촌 5푼이다. 넓이로 말하면, 제1행에 난격이 있고 제12행의 하단 밖에도 난격이 있어 이를 건초척으로 재본 결과 넓이가 1척 8촌이다. 그러나 난격 밖의 길이와 넓이 및 두께에 대해서는 모두 알 수가 없다.
비문이 모두 12행임은 난격으로 정할 수 있고 그 하단 글자의 끝도 또한 난격으로 정할 수 있으나, 다만 상단은 망실되어 그 끝까지가 몇 자인지를 정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제 가장 높이 위치한 제5행을 기준으로 삼아 아래에 서술하는 바이다.
제1행은 20자가 완전하다. 가장 위에 위치한 팔(八) 자는 제5행에 비하면 넉 자가 모자란다. 가장 아래에 위치한 야(也) 자는 제5행의 제24자에 해당한 口자와 서로 마주하였고 아래는 그대로 비어 있다. 그러나 이 줄은 기왕 제수(題首)이고 보면 이 야(也) 자가 바로 그 끝이요, 망결된 글자가 있는 것이 아니다.
제2행은 글자가 완전한 것이 28자이고 불완전한 것이 한 자이다. ―모두 29자임― 가장 위의 세(世) 자는 제5행에 비하면 두 자가 모자라고, 아래 맨 끝의 짐(朕) 자는 제5행과 끝이 같다.
제3행은 글자가 완전한 것이 27자이고 불완전한 것이 한 자이며 깎인 것이 두 자이다. ―모두 30자임― 가장 위의 소(紹) 자는 제5행에 비하면 한 자가 모자라고 아래 맨 끝의 응(應) 자는 제5행과 끝이 같다.
제4행은 글자가 완전한 것이 26자이고 불완전한 것이 한 자이며 깎인 것이 석 자이다. ―모두 30자임― 가장 위의 사(四) 자는 제5행에 비하면 한 자가 모자라고 아래 맨 끝의 화(化) 자는 제5행과 끝이 같다.
제5행은 글자가 완전한 것이 27자이고 불완전한 것이 한 자이며 깎인 것이 석 자이다. ―모두 31자임― 가장 위의 미(未) 자는 이 비문 가운데서 가장 높이 위치한 글자이다. 아래 맨 끝의 口자는 제4행의 화(化) 자와 끝이 같다.
제6행은 글자가 완전한 것이 19자이고 깎인 것이 여덟 자이며 빈칸이 하나이다. ―모두 28자임― 가장 위의 자는 제5행에 비하면 두 자가 모자라고 맨 아래 口자는 제5행에 비하면 한 자가 모자란다.
제7행은 글자가 완전한 것이 18자이고 불완전한 것이 두 자이며 깎인 것이 한 자이고 빈 칸이 둘이다. ―모두 23자임― 가장 위의 氺자가 제5행에 비하면 일곱 자가 모자라고 맨 아래 (冫+七)자는 제5행에 비하면 한 자가 모자란다.
제8행은 글자가 완전한 것이 19자이고 불완전한 것이 두 자이다. ―모두 21자임― 가장 위의 자는 제5행에 비하면 여덟 자가 모자라고 맨 아래의 자는 제5행에 비하면 두 자가 모자란다.
제9행은 글자가 완전한 것이 16자이고 불완전한 것이 석 자이다. ―모두 19자임― 가장 위의 阝자는 제5행에 비하면 아홉 자가 모자라고 맨 아래 冖자는 제5행에 비하면 두 자가 모자란다.
제10행은 글자가 완전한 것이 14자이고 불완전한 것이 두 자이다. ―모두 16자임― 가장 위의 乀자는 제5행에 비하면 13자가 모자라고 맨 아래의 자는 제5행에 비하면 두 자가 모자란다.
제11행은 13자가 모두 완전하다. 가장 위의 전(典) 자는 제5행에 비하면 15자가 모자라고 맨 아래 사(舍) 자는 제5행에 비하면 석 자가 모자란다.
제12행은 12자가 모두 완전하다. 가장 위의 훼(喙) 자는 제5행에 비하면 16자가 모자라고 맨 아래의 윤(尹) 자는 제5행에 비하면 석자가 모자란다.
이상 모두 12행에서 글자가 완전한 것이 2백 39자이고 불완전한 것이 13자이며 깎인 것이 17자이고 빈칸이 셋으로 총 2백 72자이다.
비석의 상단이 이미 망실되었으니 그 규수(圭首)와 전액(篆額)은 자세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북한산(北漢山)의 비 또한 이 비와 동시에 세워진 것인데 규수를 만들지 않았으니, 이 비도 북한산의 비와 같은 예일 듯하다.
비문(碑文)에 이르기를 “8월 21일 계미(癸未)라” 하고, 또 이르기를 “세차(歲次) 무자(戊子) 추팔월(秋八月)이라” 하였으니, 상고하건대 신라 진흥왕 29년이 무자년으로 그 해가 바로 대창(大昌)으로 개원(改元)한 해이다. 이 해가 고구려(高句麗) 평원왕(平原王) 10년, 백제(百濟) 위덕왕(威德王) 15년에 해당하고, 중국(中國)에서는 진 폐제(陳廢帝) 백종(伯宗)의 광대(光大) 2년, 북제 후주(北齊後主) 위(緯)의 천통(天統) 4년, 후주 무제(後周武帝) 옹(邕)의 천화(天和) 3년, 후량 세종(後梁世宗) 귀(巋)의 천보(天保) 7년에 해당한다.
《북사(北史)》 제후주본기(齊後主本紀)에 의거하면 “천통 4년 6월 초하루(갑자)에 큰 비가 내렸고 갑신일에는 큰 바람이 불었다.”고 하였고, 또 주무제본기(周武帝本紀)에는 “천화 3년 6월 갑술일에 패성(孛星)이 나타났다.”고 하였으며, 《남사(南史)》 진폐제본기(陳廢帝本紀)에는 “광대 2년 6월 정해일에 혜성(彗星)이 나타났다.”고 하였으니, 바로 이 해 6월 초하루가 갑자일이고 24일이 정해일인 것이다. 주무제본기에는 “7월 인일에 양충(楊忠)이 죽었다.”고 하였고, 진폐제본기에는 “7월 무신일에 신라국(新羅國)에서 사신을 내어 조공(朝貢)하였다. 임술일에 영양왕(永陽王)을 세웠다.”고 하였으니, 갑자에서 임술까지가 모두 59일인데, 그 사이에 반드시 작은 달이 있었을 것이고 보면 7월 그믐날이 의당 임술일이고 8월 초하루가 의당 계해일이 된다. 또 주무제본기에는 “8월 을축일에 한원라(韓元羅)가 죽었다. 계유일에 제(帝)가 대덕전(大德殿)에 임어했다.” 하였으니, 을축일이란 곧 8월 3일이고 계유일이란 곧 11일인 것이다. 이것으로 본다면 8월 21일이 의당 계미일이 되니 이 비문에 기록된 것과 서로 부합이 된다.
신라왕의 시호는 중엽부터 시작되었고, 처음에는 모두 방언(方言)으로 호칭하였다. 그러므로 거서간(居西干)이라 칭한 것이 하나이고, 차차웅(次次雄)이라 칭한 것이 하나이고, 이사금(尼師今)이라 칭한 것이 16이고, 마립간(麻立干)이라 칭한 것이 넷이다.
《삼국사(三國史)》에 의거하면 지증마립간(智證麻立干) 15년조에 “왕이 훙하였다. 시호를 지증(智證)이라 하였으니, 신라의 시법(諡法)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하였다. 이로부터는 왕이 훙한 뒤에는 반드시 그 시호를 썼다. 그러므로 진흥왕본기(眞興王本紀)에도 37년조에 “왕이 훙하였다. 시호를 진흥(眞興)이라 하였다.”고 했다. 그러나 이 비석은 진흥왕이 스스로 만들어 세운 것인데도 엄연히 진흥대왕(眞興大王)이라 칭하였고, 북한산의 비문에도 진흥이란 두 글자가 있다. 이것으로 본다면 법흥(法興)이니 진흥이니 하는 칭호는 장사지낸 뒤에 칭한 시호가 아니요, 바로 생존시에 부른 칭호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북제서(北齊書)》 무성제(武成帝) 하청(河淸) 4년의 조서(詔書)에는 “신라국왕 김진흥(金眞興)을 사지절 동이교위(使持節 東夷校尉)로 삼는다.” 하였고 《수서(隋書)》 개황(開皇) 14년조에는 “신라왕 김진평(金眞平)이 사신을 보내와서 하례하였다.” 하였으며, 《당서(唐書)》 정관(貞觀) 6년조에는 “진평(眞平)이 졸하고 그의 딸 선덕(善德)을 왕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이상의 사실에 의거해 보면 진흥이니 진평이니 하는 등의 칭호는 분명히 시호가 아니다.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으로부터 이후로 비로소 시법이 있었다. 그러므로 《당서》의 기록에서 김무열(金武烈)이라 칭하지 않고 김춘추(金春秋)라 칭하였으니, 여기에서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이 비석에서 진흥이라 칭한 것도 역시 생존시에 호칭한 것이다.
지금의 함흥부(咸興府)는 옛날 동옥저(東沃沮)의 땅이다. 한 무제(漢武帝)가 여기에 현도군(玄菟郡)을 설치하였고, 후한(後漢) 초기에는 불내후국(不耐侯國)이 되었다가 뒤에 고구려(高句麗)에 소속되었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예전(濊傳)에 의거하면 “불내예(不耐濊)가 한말(漢末)에 다시 고구려에 소속되었다.” 하였고, 또 동옥저전(東沃沮傳)에는 “나라가 작아서 대국(大國)의 사이에서 핍박을 받아 마침내 고구려에 신속(臣屬)하였다.” 하였는데, 여기에 말한 동옥저와 불내가 곧 지금의 함흥이다. 《삼국사》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 국조왕(國祖王)조에 의하면 “4년에 동옥저를 정벌하여 그 땅을 빼앗아 성읍(城邑)으로 삼고, 지경을 개척하여 동으로 창해(創海)에 이르렀다.” 하였는데, 이때가 바로 한 광무제(漢光武帝)의 중원(中元) 원년에 해당한다.
함흥의 땅은 분명히 후한 때부터 이미 고구려에 소속되었는데, 이 비문에서 “관할 지경을 순수한다.[巡狩管境]”고 하였고 보면, 진흥왕 때에는 함흥이 또 신라의 소관이 되었던 것이다. 이 비문에는 또 “사방으로 지경을 열어 백성과 토지를 널리 획득하고 이웃 나라와 서약을 맺어 화사(和使)를 서로 통한다.” 하였으니, 진흥왕 때 이 땅을 새로 얻은 것이고, 그 이웃 나라라는 것은 바로 고구려이다.
《삼국사》 신라본기에 의하면, 진흥왕 17년에 비렬홀주(比列忽州)를 설치했다가 29년에는 비렬홀주를 폐하고 달홀주(達忽州)를 설치했다고 하였는데, 비렬홀은 지금의 안변부(安邊府)이고 달홀은 지금의 고성군(高城郡)이다. 여기에 의거하여 보면 비렬홀은 또한 진흥왕이 새로 얻은 것이기 때문에 ‘백성과 토지를 널리 획득했다’고 칭한 것이다. 이 비석 또한 진흥왕 29년(무자)에 세워졌을 것인데, 그 순수(巡狩)의 일은 필시 사서(史書)에서 빠뜨렸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 비석이 세워진 자리는 바로 고구려와의 정계(政界)인 것이다.
지금 안변에서 북쪽으로 함흥까지가 3백 리이고, 함흥에서 북쪽으로 황초령(黃草嶺)까지가 1백 리인데, 그 사이에 반드시 군현(郡縣)이 있었을 터이련만, 《삼국사》 지지(地志)에 의하면 신라의 자취가 겨우 비렬홀에 미쳤으니, 사서에서 빠뜨린 것인지, 혹은 함흥이 당시에 비렬홀에 속했었는지 모르겠다.
《동국지지(東國地志)》에 이르기를 “신라 진흥왕이 지금의 안변부를 비렬주로 삼고 고원(高原)을 정천군(井泉郡)으로 삼았으며, 함흥의 황초령 및 단천(端川)에도 순수비가 있고 보면 옥저도 때로 신라에서 빼앗은 바가 되었던 것이다.” ―《문헌비고(文獻備考)》에 나온다.― 하였다. 그러나 정희(正喜)는 상고하건대, 정천군은 지금의 덕원(德源)이요 고원(高原)이 아니니, 단천에 순수비가 있다는 것은 또한 분명한 증거가 없다.
신라본기 법흥왕(法興王)조에 의하면 “23년에 비로소 연호(年號)를 칭하여 건원(建元) 원년이라고 했다.” 하였고, 진흥왕조에는 “12년에 연호를 고쳐 개국(開國)이라 하였다. 29년에 연호를 고쳐 대창(大昌)이라 하였다.”고 하였으니, 이때에는 대체로 천자(天子)의 제도를 썼기 때문에 비문에서 짐(朕)이라 칭하였고, 또 제왕이 연호를 세운다[帝王建號]는 말도 있으니, 이 해에 연호를 대창으로 고쳤기 때문이었다.
진흥왕본기에 이르기를 “왕이 어려서 즉위하여 일심으로 불교(佛敎)를 받들었고, 말년에 이르러서는 머리를 깎고 중의 옷을 입고 스스로 법운(法雲)이라 호하여 여생을 마치었다.” 하였고, 또 직관지(職官志)에는 이르기를 “국통(國統)이 1인이니 또는 사주(寺主)라고도 하는데, 진흥왕 12년에 혜량법사(惠亮法師)를 사주로 삼았고, 대도유나(大都唯那)가 1인인데 진흥왕이 비로소 보량법사(寶良法師)를 여기에 임명하였으며, 대서성(大書省)이 1인인데 진흥왕이 안장법사(安藏法師)를 여기에 임명하였다.” 하였으니, 이 비문에 기록된 사문도인(沙門道人)이라는 것도 혜량ㆍ안장의 유일 것이다. 비문의 법장(法藏)ㆍ혜인(慧忍)이라는 것은 두 중의 이름인데, 대신(大臣)의 위에 기록한 것은 그들을 높인 때문인가 보다.
대등(大等)이란 신라의 관명(官名)이다. 《삼국사》 법흥왕본기에 “18년에 이찬(伊飡) 철부(哲夫)를 상대등(上大等)으로 삼아 국사를 총리하게 하였으니, 상대등이란 관직이 여기서 비롯되었는데 그 지위는 지금의 재상과 같다.” 하였고, 아래로 진평왕(眞平王) 때에 이르러서는 처음에 노리부(弩里夫)를 상대등으로 삼았고 그 다음은 수을부(首乙夫)를 상대등으로 삼았으며, 선덕왕(善德王) 때에는 처음에 수품(水品)을 상대등으로 삼았고 그 다음은 비담(毗曇)을 상대등으로 삼았는데, 그 관직에서 죽거나 계승하는 일을 사서에서는 반드시 기록하였다.
또 직관지에 이르기를 “상대등은 혹은 상신(上臣)이라고도 한다. 사신(仕臣)은 혹은 사대등(仕大等)이라고도 한다.” 하였으니, 여기에 의거하여 보면 대등(大等)이 두 가지가 있는 것이다. 또 색복지(色服志)에는 “진골(眞骨)의 대등은 복두(幞頭)를 임의로 쓴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비문에도 대등이 있으니, 여기에 의거한다면 당시 상대등ㆍ사대등 두 대등 외에 또 그냥 대등이라고만 칭한 관직도 있었던가?
제7행의 거(居) 자 아래에 이지러지고 상반신(上半身)만 남은 (冫+七)자는 이것이 혹 칠(柒) 자인가 싶다. 상고하건대, 진흥왕 때에 거칠부(居柒夫)가 있었으니 여기에 기록된 것이 혹 사람인가 싶다. 《삼국사》 진흥왕본기에 의하면 “6년에 대아찬(大阿飡) 거칠부에게 명하여 문사(文士)들을 널리 모아서 국사(國史)를 찬수하게 했다.” 하였고, 또 거칠부전(居柒夫傳)에는 “진흥대왕 6년(을축)에 조지(朝旨)를 받들어 국사를 찬수하고 진찬(珍飡) 벼슬이 더해졌다.”고 하였으니, 그의 벼슬이 대아찬에서 파진찬(波珍飡)으로 승진한 것이다. 또 진흥왕본기에 “12년에 거칠부 등을 명하여 고구려를 침략하게 해서 승승장구하여 10개 군(郡)을 탈취했다.” 하였는데, 이때는 사관(史官)이 그의 관직을 기록하지 않았다.
또 진지왕본기(眞智王本紀)에는 “원년에 이찬(伊飡) 거칠부를 상대등으로 삼았다.” 하였으니, 그가 이찬 벼슬을 한 것은 어느 해였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 비문에는 대등이라고 칭하였는데, 그가 대등 벼슬을 한 것도 어느 해였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직관지에 이르기를, “사신(仕臣)은 혹은 사대등(仕大等)이라고도 한다. 진흥왕 25년에 처음으로 설치했는데, 직위는 급찬(級飡)에서 파진찬(波珍飡)까지로 했다.”고 하였는데, 이 비석은 29년에 세웠으니 즉 사대등을 설치한 뒤인 것이다.
그리고 신라의 관제(官制)에 급찬이 파진찬의 밑에 있으니, 거칠부가 6년에 이미 파진찬이 되었다면 응당 다시 급찬으로 강등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거칠부의 벼슬이 처음에 대아찬에서 파진찬으로 승진한 것은 6년에 있었던 일이고, 그 다음 파진찬에서 사대등으로 승진한 것은 반드시 25년 이후에 있었던 일이며, 그 다음 사대등에서 이찬으로 승진한 것은 반드시 29년 이후에 있었던 일이고, 맨 마지막에 이찬에서 상대등으로 승진한 것은 바로 진지왕 원년에 있었던 일인 것이다. 그런데 이 비석을 세운 것이 그가 사대등으로 있을 때에 해당하니, 여기에 기록된 사람은 틀림없이 거칠부인 것이다.
수가(隨駕)의 조목에 훼부(喙部)라 칭한 것이 여섯이고 사훼부(沙喙部)라 칭한 것이 셋이니, 서로 뒤섞어 칭한 까닭을 자세히 알 수 없다. 나는 생각하건대, 신라의 육부(六部) 가운데 양부(梁部)ㆍ사량부(沙梁部)가 있으니, 아마 이것이 훼부ㆍ사훼부의 변칭(變稱)인 듯하다.
최치원(崔致遠)이 말하기를 “진한(辰韓)은 본디 연인(燕人)이 피난간 곳이기 때문에 ‘㴍水’의 이름을 취하여 거주하는 읍리(邑里)를 ‘沙㴍’ ‘漸㴍’라 칭한다.” 하였고, 《문헌비고(文獻備考)》에는 이르기를 “신라 사람의 방언에 ‘㴍’의 음을 ‘道’로 읽기 때문에 지금 혹 ‘沙梁’의 ‘梁’ 또한 ‘道’로 칭한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㴍’자는 자서(字書)에도 보이지 않고, 연(燕) 지방에 탁수(涿水)가 있었으니 ‘㴍’은 아마 ‘涿’의 와전인 듯하다. 또 《양서(梁書)》 신라전(新羅傳)에 이르기를 “그곳 풍속은 성(城)을 건모라(健牟羅)라 호칭하고, 그 안에 있는 읍(邑)을 탁평(啄評)이라 하고 밖에 있는 읍을 읍륵(邑勒)이라 하여 마치 중국에서 군현(群縣)을 말하듯이 한다. 그 나라에는 여섯 탁평이 있고 52개의 읍록이 있다.” 하였으니, 곧 여섯 탁평이 아마 육부일 듯한데 그것은 평(評) 자와 부(部) 자가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다.
《당서(唐書)》 신라전에는 탁평(啄評)을 훼평(喙評)으로 기록하였으니, 대체로 ‘喙’자와 ‘啄’자가 서로 비슷하고, ‘啄’자와 ‘涿’자가 서로 비슷하고 ‘涿’자와 ‘㴍’자가 서로 비슷하며, ‘㴍’은 또 ‘梁’으로 변하여 방언이 서로 전습하는 가운데 점차로 와오(訛誤)된 것이니, 훼부(喙部)가 바로 양부(梁部)라는 것이 근거가 있는 듯하다. 만일 훼부와 사훼부가 계품(階品)이었다면 응당 저렇게 뒤섞어 써서 존비(尊卑)가 구별이 없게 하지 않았을 것이니, 각각 거주하는 곳을 기록한 것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겠다.
《삼국사》 직관지에 의하면 신라의 관호(官號)가 17등으로 되어 있는데, 첫째는 이벌찬(伊伐飡)으로 혹은 이벌간(伊罰干), 또는 각간(角干)이라고도 하며, 둘째는 이척찬(伊尺飡)으로 혹은 이찬(伊飡)이라고도 하며, 셋째는 잡찬(迊飡)으로 혹은 잡판(迊判) 또는 소판(蘇判)이라고도 하며, 넷째는 파진찬(波珍飡)으로 혹은 파미간(破彌干)이라고도 하며, 다섯째는 대아찬(大阿飡), 여섯째는 아찬(阿飡)으로 혹은 아척간(阿尺干)이라고도 하며, 일곱째는 일길찬(一吉飡)으로 혹은 을길간(乙吉干)이라고도 하며, 여덟째는 사찬(沙飡)으로 혹은 사돌간(沙咄干)이라고도 하며, 아홉째는 급벌찬(級伐飡)으로 혹은 급벌간(及伐干)이라고도 하며, 열두번째는 대사(大舍), 열세번째는 사지(舍知)로 혹은 소사(小舍)라고도 하며, 열네번째는 길사(吉士)이다.
이것으로 본다면 찬(飡)과 간(干)이 서로 혼용되었다. 또 색복지(色服志)에 이르기를 “이찬(伊飡)과 잡찬(匝飡)은 금관(錦冠)을 쓴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잡(迊)과 잡(匝)은 서로 같은 것이다. 또 귀산전(貴山傳)에 이르기를 “부친 무은(武殷)은 아간(阿干)이었다.” 하였으니, 아찬(阿飡)이 바로 아간인 것이다. 또 이르기를 “진평왕 건복(建福) 19년에 파진간(波珍干) 건품(乾品)ㆍ무리굴(武梨屈)ㆍ이리벌(伊梨伐)과 급간(級干) 무은(武殷)ㆍ비리야(比梨耶)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百濟)를 막게 하였다.” 하였으니, 급벌간(及伐干)이 바로 이 급간(級干)인 것이다. 또 직관지에 “길사(吉士)는 혹은 계지(稽知), 또는 길차(吉次)라고도 한다.” 하였으니, 이것이 곧 《당서》에서 길주(吉主)라고 칭한 것이다. 이 비문에는 소사(小舍) 아래에 길지(吉之)가 있는데, 지(之)와 지(知)는 음이 서로 비슷하니 이는 아마 제14등관인 길사(吉士)인 듯하다.
그렇다면 비문에 있는 잡간(迊干)은 바로 제3등관이고, 그 다음 대아간(大阿干)은 바로 제5등관이고, 그 다음 급간(及干)은 바로 제9등관이고, 그 다음 대사(大舍)는 바로 제12등관이고, 그 다음 소사(小舍)는 바로 제13등관이고, 그 다음 길지(吉之)는 바로 제14등관이니 기록한 것이 모두 차서가 있어 문란함이 없이 가지런하다.
복동지(服冬知)ㆍ비지부지(比知夫知) 등은 모두 인명(人名)이다. 신라본기에 의하면, 내물왕(奈勿王) 때에는 이찬(伊飡) 대서지(大西知)가 있었고, 법흥왕 때에는 내마(奈麻) 법지(法知)가 있었으며, 진평왕 때에는 이찬 노지(弩知)가 있었으니, 그 때의 인명은 많이 방언(方言)으로 했던 것이다.
또 거칠부전(居柒夫傳)에는 이르기를 “진흥대왕 12년에 왕이 대각찬(大角飡) 거칠부와 구진(仇珍), 각찬(角飡) 비태(比台), 잡찬(迊飡) 탐지(耽知), 잡찬 비서(非西), 파진찬(波珍飡) 노부(奴夫), 파진찬 서력부(西力夫), 대아찬(大阿飡) 비차부(比次夫), 아찬(阿飡) 미진부(未珍夫) 등 여덟 장군(將軍)을 명하여 고구려를 침공하게 했다.” 하였는데, 여기에 나오는 비차부가 곧 이 비문의 비지부지인 듯하다. 관명(官名)에서 계지(稽知)와 길차(吉次)가 이미 서로 통하고 보면 인명(人名)에서 비지(比知)와 비차(比次)가 어찌 서로 다를 것이 있겠는가.
진흥왕 12년에 비차부의 벼슬이 이미 대아간이었는데, 29년 순수(巡狩)할 당시에도 아직 그 벼슬로 어가(御駕)를 따라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제9행의 가장 윗글자는 우방(右傍) 阝만 남았는데 이는 부(部) 자인 듯하다. 셋째번에 있는 것은 혜(兮) 자인데 이는 인명의 하단(下段)이다. 신라 벌휴왕(伐休王) 때에 을길찬(乙吉飡) 구수혜(仇須兮)와 조비왕(助賁王)의 비(妃) 아이혜(阿爾兮)가 있었고, 진평왕 때에는 상사인(上舍人) 실혜(實兮)가 있었으니, 신라 사람은 혜(兮) 자로 이름을 지은 경우가 또한 많다. 그렇다면 기록된 것은 반드시 두 자로 된 이름이다.
또 제11행의 가장 위의 전(典) 자는 바로 관명(官名)이다. 신라의 관직은 전(典) 자로 호칭된 것이 많으니, 이를테면 회궁전(會宮典)ㆍ빙고전(氷庫典)ㆍ금전(錦典)ㆍ약전(藥典)ㆍ율령전(律令典) 등의 유가 바로 그것이다.
종인(從人)은 대사(大舍)의 종인이다. 직관지에 의하면, 세택(洗宅)은 종사지(從舍知) 2인이 있고, 숭문대(崇文臺)ㆍ악전(嶽典)ㆍ감전(監典) 등의 관서에도 모두 종사지 2인씩이 있는데, 사지(舍知)는 곧 소사(小舍)이다. 소사에게 이미 종인이 있고 보면 대사에게 또한 어찌 종인이 없을 수 있겠는가.
또 사간조인(沙干助人)이란 곧 사찬(沙飡)의 조인(助人)이다. 직관지에 의하면, 예궁전(穢宮典)에 조사지(助舍知) 4인이 있고, 회궁전(會宮典)에 조사지 4인이 있다. 사지(舍知)에게 이미 조인이 있고 보면 다른 관(官)에도 반드시 조인이 있을 것이니, 사간에게 조인이 있었던 것이 바로 그것이다. 사간은 바로 제팔등관(第八等官)이니, 응당 길사(吉士)의 밑에 기록하지 않겠지만, 사간의 조인은 낮은 것이기 때문에 끝에다 기록한 것이다. 길사의 밑에 또 소사(小舍)만 있고 그 이름은 이지러진 것은 이 또한 소사의 조인인 것이다.
제9행의 ‘(䒑/衆)內’와 제11행의 ‘(䒑/衆)公’에서 두 ‘(䒑/衆)’ 자가 서로 같은데 혹은 회(懷) 자 같기도 하고 혹은 애(哀) 자 같기도 하다. 그러나 《삼국지》에 의거하면, 법흥왕과 진흥왕을 애공사(哀公寺) 북봉(北峯)에 장사지냈다고 하였는데, 이 비문 또한 애공이니, 두 ‘(䒑/衆)’ 자는 분명히 애(哀) 자인 것이다.
또 제10행의 가장 위의 ‘一’은 아마 사(舍) 자인 듯하다. 제9행에는 대사애내(大舍哀內)가 있고, 제10행에는 또 대사약사(大舍藥師)가 있으니, 그 사이에 기록된 것은 반드시 다 대사일 것이고, 여난(與難) 또한 의당 벼슬이 대사였던 것이다.
제1행 태왕(太王)의 태(太)는 바로 대(大)와 같은 것이요, 명기(銘記) 밑에 야(也) 자가 있는 것은 특별한 예(例)이다. 제2행의 ‘●’은 역(亦) 자에서 위의 점이 빠진 것이고, ‘(日/丁)’은 시(是) 자에서 아래 파(波 파임을 이름)가 빠진 것이다. 제3행의 ‘(그/尸)’은 위(違) 자이다. 제4행의 ‘寸耎’은 봉연(封堧) 두 자의 왼쪽이 이지러진 듯하다. 제5행의 ‘十’은 래(來) 자이고, ‘口’은 여(如) 자이다. 제7행의 ‘咅’는 부(部) 자이고, ‘(冫+七)’은 칠(柒) 자인 듯하다. 제9행의 ‘阝’은 ‘부(部)’ 자이고, 10행의 맨 위의 ‘乀’은 사(舍) 자이며, 맨 밑의 ‘’ 또한 사(舍) 자이다. 그 나머지 불완전한 글자들은 모두 알 수가 없다.
대등훼부거칠(大等喙居咅) ―대등은 관명(官名)이고 훼부는 지명(地名)이며, 거칠은 인명(人名)의 상단(上段)이다.― 지(知) ―인명의하단이다.― 잡간훼부복부지(迊干喙部服不知) ―잡간은 관명이고, 복부지는 인명이다.― 대아간비지미지(大阿干比知未知) ―대아간은 관명이고 비지미지는 인명이다.― 급간미지(及干未知) ― 급간은 관명이고 미지는 인명의 상단이다.― 혜((䒑/亅)) ―인명의 하단이다.― 대사사훼부영지(大舍沙喙部另知) ― 대사는 관명이고 영지는 인명이다.― 대사애내(大舍(䒑/衆)內) ―애내는 인명이다.― 종인훼부(從人喙部) ―종인은 대사(大舍)의 종인이고 인명은 이지러지고 없다.― 훼부여난(喙部與難) ―여난은 인명이고 그의 벼슬은 또한 의당 대사(大舍)인 것이다.― 대사약사(大舍藥師) ―약사는 인명이다.― 사훼부□형(沙喙部(䒑/馬)兄) ―’(䒑/亅)兄’ 인명이고 그 벼슬은 역시 의당 대사이다.― 소사(小人) ―관명만 있고 인명은 이지러졌다.― 전훼부분지(典喙部分知) ―전(典)은 관명의 하단이고 분지는 인명이다.― 길지애공흔평(吉之(䒑/衆)公欣平) ―길지는 관명이고 애공흔평은 인명이다.― 소사(小舍) ―관명만 있다.― 훼부비지(喙部非知) ―관명은 이지러졌고, 비지는 인명이다.― 사간조인사훼부윤(沙干助人沙喙部尹) ―사간조인은 관(官)이고 윤은 인명의 상단이다.―
《문헌비고(文獻備考)》에 이르기를 “진흥왕 순수 정계비(眞興王巡狩定界碑)가 함흥부의 북쪽 초방원(草坊院)에 있는데, 그 비문에 대략 ‘짐이 태조의 기반을 이어 왕통을 계승하여 몸가짐을 스스로 삼간다.[朕紹太祖之基 纂承王統 兢身自愼]’ 하였고, 또 이르기를 ‘사방으로 지경을 개척하여 백성과 토지를 널리 획득하고, 이웃 나라와 맹약을 맺어 화사(和使)를 서로 통한다.[四方托境 廣獲民土 隣國誓信 和使交通]’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무자년 가을 8월에 관할 지경을 순수하여 민심을 채방한다.[歲次戊子秋八月 巡狩管境 訪採民心]’ 하였습니다. 신(臣)은 삼가 상고하건대, 초방원은 지금 함흥부의 북쪽으로 백여 리쯤 되는 초황령(草黃嶺) 아래에 있는데, 방(坊)이 《여지승람(輿地勝覽)》에는 황(黃)으로 되어 있으니, 이는 곧 방과 황의 음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정희(正喜)는 상고하건대, 황초령(黃草嶺)이 지금 함흥부의 북쪽으로 1백 10리쯤에 있고 그 영(嶺) 밑에는 원(院)이 있는데, 고금에 걸쳐 이를 기록하는 이들이 혹은 초방(草坊)으로, 혹은 초방(草方)으로, 혹은 초황(草黃)으로, 혹은 황초(黃草)로도 기록을 해왔으나 그 실상은 한가지이다.
근세의 유 문익공 척기(兪文翼公拓基)의 집에 소장된 《금석록(金石錄)》 ―곧 비목(碑目)들을 나열해 놓은 것이다.― 에 의하면 ‘삼수 초방원의 진흥왕순수비[三水草坊院眞興王巡狩碑]’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대체로 삼수군에 초평원(草坪院)이 있어 이를 혹은 초방(草坊)이라고도 일컫기 때문에 지금 사람들이 혹은 삼수에서 이를 찾으려는 데서 비롯된 것이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이 비문 제2행의 맨 밑에 짐(朕) 자가 있고, 제3행의 맨 위에 소(紹) 자가 있으나, 상단(上段)이 이미 이지러져서 소(紹) 자의 위로 몇 자가 더 있었는지를 지금 알 수 없는 일인데, 《문헌비고》에서는 “짐이 태조의 기반을 이었다.[朕紹太祖之基]”고 새기어, 소(紹) 자를 곧바로 짐(朕) 자에 승접시킨 것은 잘못이다. 또 왕위(王位)를 왕통(王統)이라고 한 것도 잘못이다.
《해동집고록(海東集古錄)》에 이르기를 “비문은 모두 12행이고 행마다 35자씩이어서 전 비문은 4백 20자인데, 이지러져서 분변할 수가 없고 분변할 만한 것은 겨우 2백 78자이다.”고 하였다. ―《문헌비고》에서 나온 말이다.―
정희는 상고하건대, 12행에 행마다 35자인 경우, 전 비문에 빈칸이 하나도 없어야만 4백 20자가 된다. 그러나 지금 현존한 탁본(拓本)을 가지고 본다면 이미 제1행의 하단에 빈칸이 일곱 자나 있고 제6행에는 빈칸이 한 자가 있으며 제7행에도 빈칸이 두 자나 있어 4백 20자가 될 수 없으니, 그 설(說)이 엉성하다. 또 탁본 가운데 글자가 완전한 것이 2백 39자이고 불완전한 것이 13자인데, 지금 여기에는 “분변할 만한 것이 겨우 2백 78자이다.” 하고, 또 “행마다 35자이다.”고 하였으니, 모두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 모르겠다. 이때에 본 것도 아마 지금의 탁본에 불과했을 터인데, 사견으로 억측하여 근거 없이 말을 한 것이다.
《문헌비고》에 이르기를 “지금 신라본기를 상고하건대, 진흥왕 16년인 무자년 겨울 10월에 북한산(北漢山)에 순수하여 봉강(封疆)을 개척해서 정하고, 12월에 북한산으로부터 오면서 경유하는 주군(州郡)에 모두 1년분의 조세(租稅)를 면제해 주었으니, 무자년은 과연 진흥왕이 함흥에 순수한 해이다. 그리하여 8월에 봉강을 정하고 10월에 북한산을 왔다가 12월에 환도(還都)한 것인데, 8월의 일만 유독 사서에 빠진 것일 뿐이다. 삼국(三國)이 정립(鼎立)해 있을 때에 신라의 땅은 비렬홀(比列忽)을 넘어가지 못했는데, 비렬홀은 바로 지금의 안변부이다. 그리고 삼국이 통합된 이후에도 천정(泉井)을 넘어가지 못했는데, 천정은 곧 지금의 덕원부(德源府)이다. 함흥은 안변의 북쪽으로 2백여 리쯤에 있고, 단천(端川)은 함흥의 북쪽으로 3백 60리쯤에 있는데, 이 순수비를 가지고 본다면 단천 이남이 일찍이 신라 영토로 꺾여 들어왔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사실은 국사(國史)와 야승(野乘)에 모두 나타나지 않은 것인데, 유독 먼 변방의 편석(片石) 하나가 남아서 천고의 고사(故事)가 되었다.”고 하였다.
정희는 상고하건대, 진흥왕 원년이 경신년이고 16년이 을해년이고 29년이 무자년이니, 여기에서 16년을 무자년이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진흥왕이 16년에 과연 북한산에 순수한 사실이 있으나 이는 함흥에 봉강을 정한 일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므로, 사서에서 빠뜨린 것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찌하여 이렇게 여러 말을 늘어놓았단 말인가. 이것도 잘못이다. 지금 안변에서 함흥까지가 3백 10리이고 함흥에서 단천까지가 3백 80리이니, 도리(道里)를 논한 것도 잘못되었다. 그리고 단천에 진흥왕비가 있다는 분명한 증거를 보지 못했으니, 단천 이남의 지역이 신라로 꺾여 들어왔다는 것도 틀린 말이다.

 

 

이상의 신라 진흥왕순수비는 지금 경도(京都)의 북쪽으로 20리쯤 되는 북한산 승가사(僧伽寺) 곁의 비봉(碑峯) 위에 있다. 길이는 6척 2촌 3푼이고 넓이는 3척이며 두께는 7촌이다. 바위를 깎아서 밑받침으로 삼았고, 위에는 방첨(方簷)을 얹었는데 지금은 그 방첨이 밑에 떨어져 있다. 전액(篆額)이 없고 음기(陰記)도 없다.

비문은 모두 12행인데 글자가 모호하여 매행마다 몇 자씩인지를 분별할 수가 없다. 아래로는 제6행의 상(賞) 자와 제8행의 사(沙) 자가 글자의 끝이 되었고, 위로는 현존한 제1행의 진(眞) 자가 가장 높은데 그 이상은 분별할 수가 없다.
전 비문 가운데 분별한 것이 70자인데, 이를 서로 비교 대조해 보면, 제1행의 가장 높이 위치한 진(眞) 자로부터 제8행 아래 맨 끝의 사(沙) 자까지를 기준하여 모두 21자이다. 그중에 분변할 만한 것은 제1행에 12자, 제2행에 3자, 제3행에 4자, 제4행에 3자, 제5행에 7자, 제6행에 4자, 제7행에 3자, 제8행에 11자, 제9행에 11자, 제10행에 8자, 제11행에 4자이고, 제12행은 모호하여 한 자도 알아볼 수가 없다.
북한산(北漢山)은 한 무제(漢武帝)의 강역(疆域)이었는데, 뒤에 고구려의 소유가 되었고, 진흥왕 때에 이르러서는 신라에 소속되었다. 《삼국사》 본기에 의거하면, 진흥왕 16년에 왕이 북한산에 순행하여 봉강(封疆)을 획정(劃定)하였고, 18년에는 북한산주(北漢山州)를 설치했으니, 이는 진흥왕이 새로 얻은 것이다. 또 29년에는 북한산주를 폐하고 남천주(南川州)를 설치했는데, 남천주는 지금의 이천부(利川府)이다. 진평왕 25년에 이르러서는 고구려가 북한산성을 침략하였고, 26년에는 남천주를 폐하고 다시 북한산주를 설치하였다. 이것으로 본다면 북한산은 신라와 고구려의 경계이니, 이 비석은 곧 경계를 정한 것이었다.
이 비문에 연월(年月)이 마멸되어 어느 해에 세워졌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진흥왕본기에 의하면 남천주를 설치한 때가 비렬홀주(比列忽州)를 폐한 때와 서로 같은 해인데, 황초령의 비가 비렬홀주를 폐하던 해에 세워졌고 보면 이 비도 의당 같이 남천주를 설치하던 때에 세워졌어야 한다. 그러나 이 비에는 남천군주(南川軍主)라는 글자가 있으니, 반드시 남천주를 설치한 이후에 세워졌을 것이다. 또 진흥왕의 재위(在位) 기간이 37년이고 보면, 그것이 세워진 때는 29년에서 37년에 이르기까지의 사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 비문 제1행의 태왕(太王)이란 글자와 제5행의 충신정성(忠信精誠)이란 글자와 제7행의 도인(道人)이란 글자는 모두가 황초령의 비문과 같다. 또 부지(夫智)는 곧 황초령비문의 대아간(大阿干) 비지부지(比知夫知)이니, 지(智)는 지(知)와 같은 것이다. 급간(及干) 미지(未智) 또한 황초령비문에 있는 것이니, 이 두 비가 동시에 세워진 것인가 싶다.
제8행의 급간내대지(及干內大智)는 급간은 곧 관명이고 내대지는 곧 인명이다. 간남천군주사(干南川軍主沙)란 것으로 말하면, 간(干)은 바로 관명의 하단이니 아간(阿干)ㆍ잡간(迊干) 등과 같은 것이다. 지금 탁본을 보건대, 간(干) 자의 윗자는 마치 잡(迊) 자인 듯하나 감히 단정할 수는 없다. 군주(軍主)는 곧 도독(都督)이다. 《삼국사》 직관지에 “도독은 9인이다. 지증왕(智證王) 6년에 이사부(異斯夫)를 실직주 군주(悉直州軍主)로 삼았는데, 문무왕(文武王) 원년에 이를 총관(總管)으로 고쳤고, 원성왕(元聖王) 원년에 도독으로 일컬었다. 관등(官登)은 급찬(級飡)에서 이찬(伊飡)까지로 했다.” 하였으니, 외관(外官)으로 중대한 관직이다. 사(沙)는 바로 거주하는 부명(部名)의 상단이거나 혹은 인명의 상단일 것이다. 제9행의 대내□지(大奈□智)에서 대내□(大奈□)는 관명이다. 직관지에 대내마(大奈麻)ㆍ내마(奈麻) 두 명칭이 있는데 여기에 기록된 것은 바로 대내마인 것이다. 지(智)는 곧 인명의 상단이다. 차내(次奈)에서 차(次)는 곧 인명의 하단이요, 내(奈)는 바로 관명의 상단이니 반드시 내마(奈麻)일 것이다.
이 비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어 요승 무학이 잘못 찾아 여기에 이르렀다는 비[妖僧無學枉尋到此之碑]라고 잘못 칭해왔다. 그런데 가경(嘉慶 청 인종(淸仁宗)의 연호 1796~1820) 병자년 가을에 내가 김군 경연(金君敬淵)과 함께 승가사(僧伽寺)에서 노닐다가 이 비를 보게 되었다. 비면(碑面)에는 이끼가 두껍게 끼어 마치 글자가 없는 것 같았는데, 손으로 문지르자 자형(字形)이 있는 듯하여 본디 절로 이지러진 흔적만은 아니었다. 또 그때 해가 이끼 낀 비면에 닿았으므로 비추어 보니, 이끼가 글자 획을 따라 들어가 파임획[波]을 끊어버리고 삐침획[撇]을 만멸시켰는지라, 어렴풋이 이를 찾아서 시험삼아 종이를 대고 탁본을 해내었다. 탁본을 한 결과 비신은 황초령비와 서로 흡사하였고, 제1행 진흥(眞興)의 진(眞) 자는 약간 만멸되었으나 여러 차례 탁본을 해서 보니, 진(眞) 자임에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마침내 이를 진흥왕의 고비(古碑)로 단정하고 보니, 1천 2백 년이 지난 고적(古蹟)이 일조에 크게 밝혀져서 무학비(無學碑)라고 하는 황당무계한 설이 변파(辨破)되었다. 금석학(金石學)이 세상에 도움이 되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우리들이 밝혀낸 일개 금석의 인연으로 그칠 일이겠는가.
그 다음해인 정축년 여름에 또 조군 인영(趙君寅永)과 함께 올라가 68자를 살펴 정하여 돌아왔고, 그후에 또 두 자를 더 얻어 도합 70자가 되었다.

비의 좌측에 새기기를 “이는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인데 병자년 7월에 김정희와 김경연이 와서 읽었다.[此新羅眞興王巡狩之碑 丙子七月金正喜金敬淵來讀]” 하고, 또 예자(隸字)로 새기기를 “정축년 6월 8일에 김정희와 조인영이 와서 남은 글자 68자를 살펴 정했다. [丁丑六月八日 金正喜趙寅永來審定殘字六十八字]” 하였다.


[주D-001]육부(六部) : 신라 수도인 경주(慶州)의 행정 구역. 신라 건국 이전부터 있었던 육촌(六村)을 신라 유리왕(琉璃王) 때에 육부로 고쳤다고 하는데, 즉 알천 양산촌(閼川梁山村)을 양부(梁部)로, 돌산 고허촌(突山高墟村)을 사량부(沙梁部)로, 자산 진지촌(觜山 珍支村)을 본피부(本彼部)로, 무산 대수촌(茂山 大樹村)을 점량부(漸梁部)로, 금산 가리촌(金山 加利村)을 한기부(漢祇部)로, 명활산 고야촌(明活山高耶村)을 습비부(習比部)라 하고 육부에 각각 이(李)ㆍ최(崔)ㆍ정(鄭)ㆍ손(孫)ㆍ배(裵)ㆍ설(薛)의 육성(六姓)을 주었다고 한다.

완당전집 제9권
 시(詩)
승가사에서 동리와 함께 해붕화상을 만나다[僧伽寺 與東籬會海鵬和尙]


그늘진 골짝에는 비가 일쑨데 / 陰洞尋常雨
한송이 푸르러라 아스란 저 봉 / 危峯一朶靑
솔바람은 불어서 탑 쓸어주고 / 松風吹掃榻
별을 길러 병으로 돌아보내네 / 星斗汲歸甁
돌은 본래의 면목 입증한다면 / 石證本來面
새는 무자의 경을 참견하누나 / 鳥參無字經
좌부는 속절없어 박락해가니 / 苔趺空剝落
규전을 뉘가 다시 새길 건지 원 / 虯篆復誰銘

임하필기 제32권
 순일편(旬一編)
승가사(僧伽寺)의 비석에 대한 고찰


북한산(北漢山) 남쪽에 승가사가 있다. 그 위가 비봉(碑峯)인데, 기둥 하나가 사람처럼 우뚝 서 있다. 시속에서는 고려 승 도선(道詵)의 비인데 지금은 글자가 없어졌다고 전한다. 병자년(1816, 순조16)에 운석(雲石) 조공(趙公 조인영(趙寅永))이 추사(秋史)와 함께 답사하여 비석에 남아 있는 글자를 찾아보니 진흥왕비(眞興王碑)였다. 그래서 마침내 공인(工人)에게 탑본하게 하여 자세히 글자를 살펴보니, 완전히 닳아 없어져 억지로 해석할 수 없는 것을 제외하고 자획이 분명하여 의심의 여지가 없는 글자가 모두 92자였다. ‘진흥왕’이라는 세 자, ‘순수(巡狩)’라는 두 자, ‘남천(南川)’이라는 두 자 같은 것은 모두 실제 사실로 증명되며 사서(史書)의 내용으로 고증을 해 본 것이다. 상고하건대,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진흥왕 16년(555)에 왕이 북한산주(北漢山州)를 순행하여 봉강(封疆)을 넓혀 정하였고, 29년(568)에 북한산주를 폐하고 남천주(南川州)를 두었다고 하였다. 이 비는 바로 그 사적을 기록한 것이다. 비문에 ‘진흥’이라는 두 자가 있는데, 지증왕본기(智證王本紀)에 근거하면 신라의 시법(諡法)이 이때부터 시작되었고, 지증왕 뒤로 법흥왕(法興王)을 거쳐 진흥왕에 이르렀다. 진흥왕 때 미리 시호를 일컫지 않았을 것이므로 진흥왕 사후에 세운 듯하다. 진평왕(眞平王) 26년(604) 기록에 의거하면 이때 남천주를 폐하고 다시 북한산주를 두었는데, 비문에 ‘남천’이라는 두 자가 있으니 또한 남천주를 폐하기 전인 듯하다. 진흥왕 원년(540)은 양 무제(梁武帝) 대동(大同) 6년이고, 진평왕 원년(579)은 진 선제(陳宣帝) 태건(太建) 11년이니, 따져 보면 양(梁)ㆍ진(陳) 사이에 새긴 것이다. 또 상고하건대, 함흥부(咸興府)의 초방령(草芳嶺)에 진흥왕 북순비(北巡碑)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탑본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임하필기 제11권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신라(新羅) 지역의 연혁


신라의 사방은 동으로는 바다를 다하고, 서남으로는 낙동강(洛東江)에 이르며, 북으로는 계립령(鷄立嶺)과 죽령(竹嶺) 두 영(嶺)에 이르렀다. 당(唐)나라 중종(中宗) 때 백제 및 구려(句麗)의 남쪽 경계를 합병하여 구주(九州)를 나누어 설치하니, 삼면이 바다이고 북으로는 대동강(大同江)을 한계로 하였다. 6소경(小京), 120군(郡), 298현(縣)이었다. 아달라왕(阿達羅王) 3년(156)에 계립령을 개척하니 지금 문경(聞慶) 북쪽에 있는데, 세속에서 마골산(麻骨山)이라 부른다. 아달라왕 5년에 죽령을 개척하니 지금 풍기(豐基) 북쪽에 있다. 진흥왕(眞興王) 16년(555)에 북한산(北漢山)에 행차하여 개척한 강토를 정하였으니, 지금 삼각산(三角山) 승가사(僧伽寺) 북쪽 봉우리 위에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가 있다. 비문은 모두 열두 줄로서, 제1행에, “진흥대왕 및 중신(衆臣) 등이 순수할 때 기록한다.”라고 하였고, 나머지는 마모되어 분별할 수 없다. 동북 경계는 함흥 황초령(黃草嶺)에 이르니, 진흥왕순수비가 함흥부(咸興府) 북쪽 초방원(草坊院)에 있다. 비문의 대략에, “세차(歲次) 무자년(568, 진흥왕29) 가을 8월에 관할 경내를 순수하며 민심을 채방(採訪)하였다.” 하였다. 비문이 12행에 420자가 되는데, 분별할 수 있는 것은 겨우 278자이다.

청장관전서 제2권
 영처시고 2(嬰處詩稿二)
승가사(僧伽寺)


이 절을 들은 지 이미 오래라 / 此寺聞惟夙
제군들의 모임이 역시 훌륭하군 / 諸君會亦良
나무가 가지런해 평평히 가지를 내려다보고 / 樹齊平俯杪
별이 커서 가까이 빛을 휘어잡겠네 / 星大近攀光
굴 속의 부처는 무단히 웃는데 / 窟佛無端笑
봉우리의 비석은 만고에 푸르구나 / 峯碑萬古蒼
서자의 퉁소 소리 듣고 나서 / 洞簫徐子捻
한밤중에 홀연히 서늘해지네 / 夜半倏生涼

청장관전서 제57권
 앙엽기 4(盎葉記四)
승가사(僧伽寺)의 석상(石像)


삼각산(三角山) 승가사(僧伽寺) 석굴(石窟)에 석상(石像)이 있는데, 얼굴이 늙은 할머니 같고 머리에 쓴 물건은 유가(儒家)의 폭건(幅巾)과 흡사하며 등 뒤에 연꽃과 같은 석장(石障)이 있는데 그 뒤에 ‘태평(太平) 4년(고려 현종 15, 1024) 갑자’라 새겨져 있다.
상고하건대, 고려(高麗) 현종(顯宗) 15년에 거란(契丹)의 연호를 썼었으니 곧 요 성종(遼聖宗) 융서(隆緖 성종의 이름)의 태평 4년이며 송 인종(宋仁宗)의 천성(天聖) 2년이다.
지금의 경자년(1780, 정조 4)까지 갑자로 따져보면 13번의 갑자년이 들어 있어 모두 8백 17년이 되었다. 《여지승람(輿地勝覽)》의 기록을 보면 이 석상(石像)은 수태도인(秀台道人)의 상이라고 하였다.

택당선생집 제1권
 시(詩)
승가사(僧伽寺)


북극성과 짝하는 존엄한 영산(靈山) / 配極尊靈嶽
선정(禪定) 닦는 도량 화성이 여기 숨어 있네 / 棲眞閟化城
멀리 아래로는 민가의 일만 등불 / 燈光萬家逈
하늘 위로는 상방의 맑은 경쇠 소리 / 磬韻上方淸
어수선한 세상일 잠깐 접어 두고 / 擾擾區中事
물외(物外)의 심경 유유히 젖어 보노매라 / 悠悠象外情
시원한 솔바람 잠이 솔솔 올락말락 / 松風涼睡思
말없이 앉아 있노라니 밝아 오는 마음 자리 / 默坐寸心明

[주D-001]북극성과 …… 영산(靈山) : 승가사가 있는 삼각산(三角山)이 도성 북쪽에 높이 솟아 있다는 말이다. 참고로 두보(杜甫)의 시에 “북극성과 짝하는 곳 노자(老子)의 사당을 숨겼나니, 높은 그 산마루 대 울타리 길게 쳤네.[配極玄都閟 憑高禁籞長]”라는 표현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2 冬日洛城北 謁玄元皇帝廟》
[주D-002]화성(化城) : 불사(佛寺)의 별칭이다.
[주D-003]상방(上方) : 사찰의 주지(主持)가 거처하는 곳으로, 보통 사찰을 뜻한다


해동역사 속집 제7권
 지리고(地理考) 7
신라(新羅)



강역총론(疆域總論)
○ 신라는 한(漢)나라 선제(宣帝) 오봉(五鳳) 1년(기원전 57)에 경주(慶州)에 나라를 세웠으니, 바로 진한(辰韓)의 사로국(斯盧國)이다.
《양서(梁書)》 신라열전(新羅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라는 본디 진한의 종족이다.
《북사(北史)》 신라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라는 또한 사로(斯盧)라고도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라는 시조 혁거세(赫居世)가 전한(前漢) 오봉 1년에 개국하고는 국호를 서라벌(徐羅伐)이라고 하였으며, 혹은 사라(斯羅), 사로(斯盧), 신라(新羅)라고도 하였다. 시조 이래로 금성(金城) -지금의 경주이다.- 에 거처하였다.
○ 그 뒤에 신라는 진한의 여러 나라를 병합하여 그 사방 경계가 동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낙동강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계립령(鷄立嶺)과 죽령(竹嶺)에 이르렀는바, 대개 경상좌도(慶尙左道)의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옛 신라국은 지금 조선의 경상도로, 신라의 땅은 고구려의 동남쪽에 있었다.
《문헌비고(文獻備考)》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삼국사기》에 이르기를, “신라는 북쪽으로 계립령에 이르른다.” 하였는데, 이는 상대(上代) 때의 지역을 말한 것이다. -살펴보건대, 계립령은 바로 조령(鳥嶺) 근처의 지역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진한 12국은 지금의 경상좌도 지역이며, 신라는 바로 그 12국 가운데 한나라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거하면, 탈해왕(脫解王) 이후로 10여 개의 작은 나라를 병탄하여 북쪽으로는 조령에 이르고, 동쪽으로는 바다에 닿고, 서쪽으로는 가야(伽倻)와 이웃하여 경상좌도 지역을 전부 차지하였다. 그런즉 진한의 여러 나라가 신라에 병탄된 것은 분명하다.
○ 조위(曹魏) 때부터 신라는 점차 조령 북쪽 지역을 차지하기 시작해서 진(陳)나라 때에는 북쪽 경계가 함흥(咸興)까지 이르렀다.
《수서(隋書)》 신라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라국은 고구려의 동남쪽에 있으며, 한나라 때에는 낙랑(樂浪) 지역을 차지하였다. 혹 사라(斯羅)라고도 칭하며, 옥저(沃沮), 불내예(不耐濊), 한(韓)의 지역을 차지하였다. -《자치통감(資治通鑑)》 주(注)에 이르기를, “수나라 때에는 옥저 지역이 이미 신라에 편입되었다.”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조령 북쪽은 바로 한나라 때 낙랑군의 남쪽 경계이다. 동한(東漢) 이후로 신라가 그 지역을 침입하였는바, ‘낙랑 지역을 차지하였다’고 한 것은 맞는 말이다. 그 뒤에는 또 북쪽으로 국경을 넓혀서 양(梁)나라와 진(陳)나라 때에는 동북쪽으로 함흥 등지에 이르고 서북쪽으로 삼각산(三角山)까지 경계로 삼았다. 함흥 북쪽은 옛 옥저이며, 함흥 남쪽은 바로 불내예인바, ‘옥저와 불내예 지역을 차지하였다’고 한 것은 맞는 말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북계조(北界條)에 상세하게 나온다.
○ 양(梁)나라와 진(陳)나라 사이에는 신라가 가야(伽倻)의 여러 나라를 병합해서, 동쪽과 남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백제와 지리산(智異山)을 경계로 하였다.
《양서》 신라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라국은 백제에서 동남쪽으로 5000여 리 되는 곳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통전(通典)》에는 500리로 되어 있는데, 이것이 맞다.- 그 땅은 동쪽으로는 큰 바다에 닿아 있고, 남쪽과 북쪽은 고구려, 백제와 접하고 있다. 그 나라의 풍속에 성(城)을 ‘건모라(健牟羅)’라 하고, 성안에 있는 읍(邑)을 ‘탁평(啄評)’이라 하고, 성 밖에 있는 읍을 ‘읍륵(邑勒)’이라 하는데, 이는 중국 말로 군현(郡縣)을 뜻한다. 나라 안에는 6개의 탁평이 있고, 52개의 읍륵이 있다. -《신당서(新唐書)》에는 이르기를, “신라에서는 성안에 있는 읍을 ‘탁평’이라 하고, 성 밖에 있는 읍을 ‘읍륵’이라 하는데, 6개의 탁평과 52개의 읍륵이 있다.” 하였다. ○ 삼가 살펴보건대, 6개의 탁평은 바로 신라의 6부(部)이다. 6부 가운데 양부(梁部)와 사량부(沙梁部)가 황초령신라비(黃草嶺新羅碑)에는 ‘탁부(啄部)’와 ‘사탁부(沙啄部)’로 되어 있는데, 탁평(啄評)은 탁부(啄部)의 오기(誤記)인 듯하고, 탁평(啄評)은 또 탁평(啄評)의 오기인 듯하다. 6부는 모두 경주(慶州)의 경내에 있으므로 ‘안에 있는 것은 탁평이라고 한다’ 한 것이다.
《구당서(舊唐書)》 신라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라국은 한나라 때에는 낙랑 지역에 있었는데, 동쪽과 남쪽은 모두 큰 바다에 닿아 있고, 서쪽으로는 백제와 접하였고, 북쪽은 고구려와 이웃하였다. 동서 간의 거리는 1000리이고, 남북 간의 거리는 2000리이며, 성읍(城邑)과 촌락(村落)이 있다.
《신당서》 신라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라는 동서가 1000리이고 남북이 3000리이다. 동쪽은 장인국(長人國)에 닿았고, 동남쪽은 일본, 서쪽은 백제, 남쪽은 바다, 북쪽은 고구려에 닿았다. -또 이르기를, “장인(長人)은 사람과 비슷하게 생겼는데, 키가 3장(丈)이고 톱니 치아에 갈퀴 손톱을 하였으며, 검은 털이 온몸을 덮고 있다. 화식(火食)을 하지 않고, 새와 짐승을 날로 씹어 먹으며, 간혹 사람을 잡아먹기도 한다. 부인(婦人)을 얻으면 의복(衣服)을 만들게 한다. 그 나라는 산이 수십 리에 이어지는데, 입구의 골짜기에 튼튼한 쇠문짝을 만들어 달고는 관문(關門)이라고 한다. 신라는 그곳에 항상 쇠뇌를 잘 쏘는 군사 수천 명을 주둔시켜 지킨다.” 하였다.
《동국통감(東國通鑑)》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라는 동쪽과 남쪽은 바다에 닿았고, 서쪽은 지리산에 이르고, 북쪽은 한수(漢水)에 닿았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신라는 법흥왕(法興王) 때부터 6가야의 지역을 모두 병합하였다. -이에 대한 내용은 변진조(弁辰條)에 나온다.- 서쪽으로는 지리산을 경계로 삼았다. 지금 조령 남쪽에서 뻗어내려 지리산에 이르기까지 1000여 리 산맥이 동서를 나누어서 동쪽은 경상도로 바로 신라 지역이고, 서쪽은 충청도와 전라도로 바로 백제 지역이다. 이것이 신라의 대개이다. 그러나 충청도의 영동(永同), 황간(黃澗), 청산(靑山), 보은(報恩), 옥천(沃川) 다섯 고을 및 전라도의 운봉(雲峯), 무주(茂朱) 두 고을은 본디 신라에 속하였다.
○ 당나라 중종(中宗) 때 신라는 백제 지역 및 고구려의 남쪽 경계를 병합하여 9개 주를 나누어 설치하였다. 이때 사방의 경계는, 삼면은 모두 바다까지 닿았고, 북쪽으로는 대동강(大同江)을 경계로 삼았다.
《구당서》 신라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현경(顯慶) 5년(660) -신라 태종왕(太宗王) 7년- 에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토평(討平)하였다. 이때부터 신라가 점차 고구려와 백제 지역을 소유하여 그 경계가 점차 넓어져서 서쪽으로 바다에까지 이르렀다.
《신당서》 신라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라는 백제의 땅을 많이 차지하고 드디어는 고구려의 남쪽 경계까지 이르러 상주(尙州), 양주(良州), 강주(康州), 웅주(熊州), 전주(全州), 무주(武州), 한주(漢州), 삭주(朔州), 명주(溟州) 등 9개 주를 설치한 다음, 주에는 도독(都督)을 두어 10개 혹은 20개의 군을 통솔하게 하였으며, 군에는 태수(太守)를 두고, 현에는 소수(小守)를 두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라가 당나라와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하고는 드디어 9개 주를 두었다. 본국의 경계 안에 3개의 주를 두었으니 상주(尙州) -지금의 상주(尙州)이다-, 양주(良州) -지금의 양산현(梁山縣)이다-, 강주(康州) -지금의 진주(晉州)이다.- 이고, 옛 백제국의 경계 안에 3개의 주를 두었으니, 웅주(熊州) -지금의 공주(公州)이다-, 전주(全州) -지금의 전주이다-, 무주(武州) -지금의 광주(光州)이다.- 이고, 옛 고구려의 경계 안에 3개의 주를 두었으니, 한주(漢州) -지금의 광주(廣州)이다.-, 삭주(朔州) -지금의 춘천부(春川府)이다-, 명주(溟州) -지금의 강릉부(江陵府)이다- 이다. 9개 주가 관할하는 군현(郡縣)은 무려 450개였는바, 신라의 지리적 범위가 이렇듯 넓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신라 태종왕 7년(660)에 백제가 망하였고, 문무왕(文武王) 8년(668)에 고구려가 망하였다. 신문왕(神文王) 5년(685) -당나라 중종 2년- 에 이르러서 세 나라의 땅을 합하여 9개 주를 설치하였으며, 경덕왕(景德王) 때에 군현(郡縣)의 이름을 고쳤다. 아홉 주가 관할하는 바는 소경(小京)이 6개, 군(郡)이 120개, 현(縣)이 298개였다.
또 살펴보건대, 한주, 삭주, 명주가 고구려 지역이라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백제본기를 두루 상고해 보면, 삭주는 혹 고구려의 옛 지역이라고 할 수도 있으나, 한주의 경우에는 본디 백제에 속해 있었고, 명주는 본디 신라에 속해 있었다. 간혹 고구려의 침입을 받아 잠시 잃기는 하였으나 곧바로 수복하였는바, 고구려의 강역은 일찍이 한수(漢水) 남쪽, 대관령(大關嶺) 동쪽 지역까지 미치지 못하였다. 그런즉 강릉(江陵) -바로 명주(溟州)이다.- 과 광주(廣州) -바로 한주(漢州)이다.- 를 어떻게 고구려 지역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대개 신라가 9개 주를 나누어 설치하고서는 세 주가 관할하는 바가 대부분 고구려의 남쪽 경계 지역임을 범범하게 말한 것인데, 김부식(金富軾)이 이를 제대로 고찰하지 않고서 마침내 세 주의 관내를 모두 고구려 지역이라고 한 것이다. 이에 영남의 순흥(順興) 등 9개 고을이 명주에 예속되어 있자, 이곳을 그대로 고구려 지역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한수 남쪽의 수원(水原) 등 10개 고을이 한주에 예속되어 있자, 이곳을 그대로 고구려 지역이라고 하였다. 고구려의 경계는 본디 한수 남쪽을 넘어오지 않았는데, 더구나 조령의 남쪽이겠는가.
○ 신라 말기에는 8개 주를 모두 견훤(甄萱)과 궁예(弓裔)가 차지하여 단지 양주(良州)만이 남아 있었으며, 그 뒤에는 고려(高麗)에 병합되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경순왕(敬順王) 9년(935) -후당(後唐) 노왕(潞王) 2년- 에 사방의 토지가 모두 다른 사람의 차지가 되었으므로 왕이 온 국토를 들어 고려 태조(太祖)에게 항복하니, 태조가 신라를 고쳐 경주(慶州)라고 하였다.

북계(北界)의 연혁(沿革)
○ 후한(後漢) 때 신라는 동해 가를 따라 낙랑의 영동(嶺東) 7개 현을 모두 차지하고 북쪽으로 철령(鐵嶺)까지를 경계로 삼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남해왕(南解王) 16년(19) -왕망(王莽) 11년-북명(北溟) -지금의 강릉(江陵)이다.- 사람이 밭을 갈다가 예왕(濊王)의 도장을 발견해 바쳤다. ○ 파사왕(婆娑王) 때 -한나라 장제(章帝) 때이다.- 실직국(悉直國) -지금의 삼척(三陟)이다.- 이 와서 투항하였다. ○ 일성왕(逸聖王) 4년(137) -한나라 순제(順帝) 12년- 에 말갈(靺鞨)이 변경에 들어와 장령(長嶺)의 5책(柵)을 불살랐다. -삼가 살펴보건대, 한나라 때에는 말갈이란 칭호가 없었다. 혹자는 불내예(不耐濊)라고도 한다.- ○ 아달라왕(阿達羅王) 4년(157) -한나라 환제(桓帝) 11년- 에 장령진(長嶺鎭)을 순행하여 수졸(戍卒)들을 위로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삼척이나 강릉 등지는 본디 낙랑의 영동 7개 현이다. 후한(後漢) 초기에는 계립령(鷄立嶺)과 죽령(竹嶺) 두 고개의 길을 열지 못하였으므로 신라가 동해 가를 따라서 그곳 7개 현의 지역을 차지하고는 북쪽으로 장령(長嶺)까지를 경계로 삼은 것이다. 《고려사(高麗史)》 지지(地志)를 근거로 보면, 지금의 영흥부(永興府)를 고구려 때에는 장령진(長嶺鎭)이라고 칭하였는바, 여기에서 이른 장령은 철령(鐵嶺)을 지칭하는 듯하다.
○ 한나라 환제(桓帝) 때 신라는 비로소 계립령과 죽령 두 고개의 길을 열고서 점차 북쪽 경계를 개척해 춘천(春川) 등지까지 이르렀다.
《삼국지(三國志)》 삼한전(三韓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환제와 영제(靈帝) 말기에 한(韓)과 예(濊)가 강성해져서 군현(郡縣) -삼가 살펴보건대, 낙랑군(樂浪郡)을 말한다.- 이 제압하지 못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한은 바로 신라와 백제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아달라왕(阿達羅王) 3년(156) -한나라 환제 10년- 에 계립령의 길을 열었다. -계립령은 문경현(聞慶縣)에서 북쪽으로 28리 되는 곳에 있으며, 속칭 마골산(麻骨山)이라고 부른다.- 5년(158)에 죽령(竹嶺)의 길을 열었다. -죽령은 풍기군(豐基郡) 북쪽에 있다.- ○ 나해왕(奈解王) 27년(222) -위(魏)나라 문제(文帝) 3년- 에 백제가 우두주(牛頭州) -지금의 춘천(春川)이다.- 에 쳐들어오자 이벌찬(伊伐湌) 충훤(忠萱)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막았다.
○ 조위(曹魏) 정시(正始) 연간에는 신라의 북쪽 경계 지역을 낙랑에게 빼앗겼다.
《삼국지》 삼한전(三韓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부종사(部從事) -삼가 살펴보건대, 낙랑의 남부종사(南部從事)이다.- 오림(吳林)이, 낙랑이 본디 한국(韓國)을 통치하였다고 해서 진한(辰韓)의 8개 국을 분할하여 낙랑에 붙였다. 그런데 역관(譯官)이 말을 전하면서 다르게 전달하여, 신지(臣智)가 한(韓)의 분노를 자극해서 대방군(帶方郡)의 기리영(崎離營)을 공격하였다. 이에 두 군 -삼가 살펴보건대, 낙랑군과 대방군이다.- 이 군사를 일으켜 정벌하니, 드디어 한이 멸망되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이것은 바로 정시(正始) 7년(246)의 일이다. 진한은 신라를 가리킨다. 오림이 분할한 8개 국은 바로 조령 북쪽에 있는 춘천 등지이다. 조령 남쪽의 군현들은 오림이 분할할 수가 없었으며, 역시 낙랑이 받을 수 있는 곳도 아니었다. 그리고 한(韓)이 멸망되었다고 하는 것은 바로 조령 북쪽의 한 우두머리[渠帥]가 두 군에 의해 멸망된 것이다. 계림(鷄林)의 한을 두 군이 어떻게 멸망시킬 수 있었겠는가.
○ 서진(西晉) 이후로는 안변(安邊)의 춘천(春川) 지역을 다시 신라가 차지하였으며, 유송(劉宋) 초기에도 역시 그러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기림왕(基臨王) 3년(300) -진(晉)나라 혜제(惠帝) 11년- 에 비열홀(比列忽) -지금의 안변(安邊)이다.- 에 순행하였다. 우두주(牛頭州)에 이르니 낙랑과 대방 두 나라가 귀복(歸服)하였다. ○ 내물왕(奈勿王) 42년(397) -진나라 안제(安帝) 1년- 에 북쪽 변경의 하슬라(何瑟羅) -바로 강릉이다.- 에 가뭄이 들었다. ○ 눌지왕(訥祗王) 22년(438) -송나라 문제(文帝) 15년- 에 우두군(牛頭郡)에서 산골짜기의 물이 갑자기 쏟아져 내려 50여 가(家)가 떠내려갔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이때 춘천은 오히려 신라에 속해 있었으므로 재상(災祥)이 사관(史官)에게 상세히 보고된 것이다. 그렇다면 진(晉)나라 때부터 송(宋)나라 때까지 춘천 동쪽, 철령 남쪽 지역은 그대로 신라의 지역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 송나라 문제(文帝) 15년(438) 이후로는 신라의 계립령과 죽령 서쪽 지역과 북쪽 지역이 모두 고구려에 함락되었다.
《삼국사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라본기에 이르기를, “눌지왕 34년(450) -송나라 문제 27년- 에 고구려의 변장(邊將)이 실직(悉直)의 들판에 와서 사냥을 하였는데, 신라의 하슬라(何瑟羅) 성주(城主)가 군사를 내어 살해하였다. 고구려 왕이 노하여 우리의 서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하였다. ○ 열전(列傳)에 이르기를, “고구려 왕이 김춘추(金春秋)에게, ‘마목현(麻木峴), 죽령의 서쪽과 북쪽 지역은 본디 우리의 땅이다.’ 하였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고구려의 온달(溫達)이 말하기를, “계립현(鷄立峴)과 죽령 서쪽 지역은 우리의 땅이다.” 하였다. 대개 마목현은 바로 계립현으로, 방음(方音)으로 마(麻)를 겨릅[鷄立]이라고 한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신라 눌지왕 22년(438) -송나라 문제 15년- 이전에는 춘천 등지를 매번 신라에서 관할하였는바, 고구려의 경계는 반드시 죽령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34년에 이르러서 고구려가 실직의 들판에서 사냥을 하였고, 또 고구려 왕이 우리의 서쪽 변경을 침입하였다고 하였는데, 실직은 지금의 삼척이고, 서쪽 변경은 삼척의 서쪽을 가리키는바, 죽령 서쪽과 북쪽 지역이 고구려에게 함락된 것이 이즈음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므로 고구려가 사냥을 하면서 삼척에 이르른 것이며, 고구려가 침입한 것에 대해서도 반드시 우리의 서쪽 변경을 침입하였다고 한 것이다. 이 당시에 고구려는 백제의 한수 북쪽에 있는 여러 부(部)를 빼앗아 차지하여, 그 남쪽 경계가 백제의 동쪽에서 대관령의 서쪽 지역까지는 계립령과 죽령 두 고개에까지 이르렀으며, 동쪽으로는 신라의 삼척 등지와 경계를 접하였던 것이다.
○ 이 당시에 대관령 동쪽의 바닷가 지역은 여전히 신라에 속해 있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자비왕(慈悲王) 11년(468) -송나라 명제(明帝) 4년- 9월에 하슬라 사람들을 징발하여 이하(泥河)에 성을 쌓았다. ○ 소지왕(炤智王) 3년(481) -송나라 순제(順帝) 5년- 에 비열성(比列城) -지금의 안변(安邊)이다.- 에 순행하여 군사를 위로하고 군복을 하사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이 당시에 대관령 서쪽 지역은 비록 고구려에게 함락당하였으나, 영동의 강릉 등지는 신라가 관할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김부식의 《삼국사기》 지리지에서는 강릉이 본디 고구려의 지역이라고 하였으며, 강릉이 관할하는 순흥(順興) 등 9개 고을을 모두 고구려 지역이라고 하였으니, 매우 잘못된 것이다. 강릉이 고구려 지역이라는 형적이 본디 없는데, 더구나 강릉이 관할하는 영남의 여러 현이겠는가. 영남이 참으로 고구려 지역이었다면 고구려 왕이 김춘추(金春秋)를 꾸짖을 적에나 온달(溫達)이 군사들에게 맹서할 적에 어찌하여 영남 지역을 거론하지 않고 반드시 죽령 서쪽과 북쪽을 말하였겠는가. 영남 지역은 본디 고구려와는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 양(梁)나라 간문제(簡文帝) 2년(551)에 신라가 다시 조령 북쪽의 충주(忠州) 등지 및 한수(漢水)의 동쪽과 북쪽 지역을 빼앗아 취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진흥왕(眞興王) 12년(551) -양나라 간문제 2년- 에 왕이 거칠부(居柒夫)에게 명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침략하게 하였다. 백제가 먼저 공격해 평양(平壤)을 격파하자, 거칠부 등이 승세를 타고 죽령 바깥쪽, 고현(高峴) 안쪽의 10개 군을 탈취하였다. ○ 18년(557) -진(陳)나라 무제(武帝) 1년- 에 국원성(國原城) -지금의 충주(忠州)이다.- 을 소경(小京)으로 삼았다.
《삼국사기》 온달열전(溫達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온달이 상주하기를, “신라가 우리 한수 북쪽의 땅을 빼앗아 군현으로 삼았습니다. 원컨대 군사를 거느리고 한번 가서 반드시 우리 땅을 도로 찾아오겠습니다.” 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출발에 임해서 온달이 맹서하기를, “계립현(鷄立峴)과 죽령 서쪽 지역을 우리에게 귀속시키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 하였다. 그러고는 나가서 신라의 군사들과 싸우다가 죽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이 당시에 한양(漢陽) 남쪽 지역은 백제에 속하였다. 그런즉 거칠부가 취한 바는 바로 충주 북쪽 지역 및 한수의 동북쪽 지역이다. 온달이 이른 바 ‘우리 한수 북쪽 땅을 빼앗아 갔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 양나라 원제(元帝) 2년(553)에 신라가 또 지금의 한양(漢陽), 이천(利川) 등지를 취하였는바, 신라의 서쪽과 북쪽 경계가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 사이로 끼어들어가, 북쪽으로는 고구려와 삼각산(三角山)을 경계로 하였고, 서쪽으로는 안산(安山)의 앞바다까지 닿았다.
《통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라의 서쪽과 북쪽 경계는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끼어들어가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진흥왕 14년(553) -양나라 원제 2년- 에 백제의 동북쪽 변방 지역을 탈취해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다. ○ 16년(555)에 왕이 북한산(北漢山) -지금의 한양이다.- 을 순행하여 강역을 획정(劃定)하였다. ○ 18년(557)에 신주를 폐지하고 북한산주(北漢山州)를 설치하였다. ○ 29년(568) -진(陳)나라 임해왕(臨海王) 3년- 에 북한산주를 폐지하고 남천주(南川州) -지금의 이천(利川)이다.- 를 설치하였다.
《고려사》 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서희(徐煕)가 말하기를, “삼각산 북쪽은 고구려의 옛 땅이다.”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백제의 동북쪽 변방은 바로 한양, 이천 등지이다. 이 당시에 신라가 이미 그 지역을 차지하였으므로 진흥왕이 순행하면서 북한산주에 이르러서 강역을 획정하였던 것이다. 북한산은 지금의 삼각산으로, 삼각산의 승가사(僧伽寺) -경성(京城)에서 북쪽으로 10리 되는 곳에 있다.- 북쪽 산봉우리 위에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가 있다. 비문은 모두 12행인데, 마멸되어서 판독할 수가 없고, 판독할 수 있는 것 가운데, 제1행에는 ‘진흥태왕 및 중신들이 순수할 때 기록한 것이다[眞興太王及衆臣等巡狩時記]’란 글이 있고, 제8행에는 ‘남천군주(南川軍主)’라는 글이 있으며, 세운 날짜는 상고할 수가 없다. 생각건대 이는 진흥왕 16년에 강역을 획정할 때 세운 것이며, 이곳이 고구려와 국경을 나눈 곳이다.
또 살펴보건대, 이 당시에 신라에서 당나라와 통하는 길은 매번 당은포(唐恩浦), 당항성(棠項城) 등지를 경유하는데, 당은포는 바로 남양부(南陽府)이고, 당항성은 바로 안산군(安山郡)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성읍조(城邑條)에 나온다.- 그렇다면 신라의 서쪽과 북쪽 경계는 충주, 이천에서 안산, 남양의 바다에 이르는 지역으로,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 사이에 끼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 이 당시에 신라의 동북쪽 경계는 함흥(咸興)의 황초령(黃草嶺)까지 이르렀다.
《문헌비고》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진흥왕순수비가 함흥부 북쪽 초방원(草坊院)에 있는데, 그 비문에 대략, “세차(歲次) 무자년(568) 가을 8월에 관내 지역을 순수하며 민심을 살폈다.” 하였다. 비문은 12행이며 행마다 35자로 전체 비문의 글자 수는 420자인데, 판독할 수 있는 글자는 겨우 278자이다. 삼국(三國)이 정립해 있던 시기에는 신라 지역이 안변부를 지나지 못하였는데, 함흥은 안변에서 북쪽으로 200여 리나 되는 곳에 있다. 이 사실은 국사(國史)와 야승(野乘)에 나타나 있지 않은 것인데, 홀로 먼 지방의 한 조각 비석이 천고의 고사(故事)를 남겼다. -삼가 살펴보건대, 무자년은 바로 진흥왕 29년이다.
○ 당나라 초기에는 신라의 서북쪽 경계가 임진(臨津) 등지에 이르렀다.
《구당서》 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상원(上元) 2년(675) -신라 문무왕 15년- 에 유인궤(劉仁軌)가 군사를 거느리고 지름길로 호로하(瓠蘆河)를 건너가 신라 북방의 큰 진(鎭)인 칠중성(七重城)을 격파하였다.
《자치통감》의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내가 살펴보건대, 《당서》 유인궤열전에 나오는 호로하는 마땅히 고구려의 남쪽 경계, 신라의 칠중성 북쪽에 있어야 한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칠중성은 지금의 적성현(積城縣)이고, 호로하는 바로 임진강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보면, 선덕왕(善德王) 7년(638) -당나라 태종 12년- 에 고구려가 북쪽 변경의 칠중성을 침공하였다고 하였다. 그런즉 적성이 신라 지역이 된 것은 이미 당나라 초기의 일이었다.
○ 당나라 개원(開元) 연간에 이르러서는 신라의 동북쪽 경계는 덕원군(德源郡), 서북쪽 경계는 대동강(大同江)에 이르러서 발해(渤海)와 경계를 접하고 있었다.
《책부원귀(冊府元龜)》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당나라 현종(玄宗) 개원 24년(736)에 신라가 사신을 보내와, 칙서를 내려 패강(浿江) 남쪽 지역을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謝恩)하였다.
《신당서》 발해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발해는 남쪽으로 신라와 접하여 이하(泥河)를 경계로 삼았다.
《문원영화(文苑英華)》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당현종칙신라왕서(唐玄宗勅新羅王書)에 이르기를, “경(卿)이 패강에 방수(防戍)를 설치하고자 하는데, 이곳은 발해의 요충지에 해당되는바, 참으로 좋은 계책이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 칙서는 바로 개원 26년(738)에 내린 칙서이다.
《문헌비고》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합한 뒤로 동북쪽은 천정군(泉井郡)의 탄항관(炭項關)을 경계로 삼았는데, 지금의 덕원(德源)이고, 서북쪽은 당악현(唐嶽縣)으로 경계를 삼았는데, 지금의 중화(中和)이다. 중화에서 동쪽으로 지금의 상원(祥原), 수안(遂安), 곡산(谷山)을 거쳐 덕원에 이르기까지가 모두 신라의 변새(邊塞)이고, 그 밖에 지금의 함경도와 평안도는 모두 발해가 차지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이하(泥河)는 마땅히 덕원군(德源郡)에 있어야 하고, 패강(浿江)은 지금의 대동강이다. 당나라 현종이 내린 칙서에 의거하면 패강 북쪽은 분명히 발해 지역이었다. 대개 당나라 고종(高宗) 때 고구려를 격파하고서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그 지역에 설치하였다가 개원(開元) 이후로는 안동도호부를 서쪽의 요서(遼西) 지역으로 옮겼다. 그러므로 패강 북쪽 지역은 발해에 편입되고, 남쪽 지역은 신라에 속하게 된 것이다.
○ 신라 말기에 궁예(弓裔)가 비로소 대동강 서북쪽 지역을 취하였다.
《삼국사기》 궁예열전(弓裔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궁예가 말하기를, “옛날에 신라가 당나라에 청병(請兵)하여 고구려를 격파하였기 때문에 평양 옛 서울이 황폐하여 풀만 무성하다.” 하였다. 성책(聖冊) 1년(905) -당나라 애제(哀帝) 2년-패서(浿西) 13진(鎭)을 나누어 설치하였다. 평양성주(平壤城主) 검용(黔用)이 항복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패수의 서북쪽 지역은 바로 발해의 압록부(鴨綠府) 남쪽 경계이다. 발해가 한창 거란(契丹)과 서로 싸우고 있었으므로 궁예가 그 지역을 차지한 것이다.

성읍(城邑)
금성(金城)
《신당서》 신라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왕은 금성(金城)에 거처하는데, 성 주위가 8리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보면, 혁거세(赫居世) 21년(기원전 37)에 궁성(宮城)을 쌓고는 금성이라고 하였는데, 그 성은 지금 경주부에서 동쪽으로 4리 되는 곳에 있다.
○ 계림(鷄林)
《구당서》 신라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용삭(龍朔) 3년(663)에 조서를 내려 신라국을 계림주 도독부(鷄林州都督府)로 삼고, 신라 왕 김법민(金法敏)에게 계림주 도독(鷄林州都督)을 제수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보면, 탈해왕(脫解王) 9년(65)에 시림(始林)에서 닭이 우는 변괴가 있어서 다시 이름을 계림이라고 고치고는 인하여 국호로 삼았는데, 시림은 지금 경주에서 남쪽으로 4리 되는 곳에 있다.
○ 상주(尙州)ㆍ양주(良州)ㆍ강주(康州)ㆍ웅주(熊州)ㆍ전주(全州)ㆍ무주(武州)ㆍ한주(漢州)ㆍ삭주(朔州)ㆍ명주(溟州)
《신당서》 신라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강역총론조(疆域總論條)에 나온다.
○ 당은군(唐恩郡)ㆍ장구진(長口鎭)
《신당서》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등주(登州)에서 동북쪽으로 바닷길로 갈 경우, 바닷가를 따라 동쪽으로 가면 오골강(烏骨江) -삼가 살펴보건대, 강은 압록강 서쪽에 있다.- 에 이르며, 이어 남쪽으로 바닷가를 따라가면 오목도(烏牧島), 패강(貝江)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대동강이다.- 입구, 초도(椒島)를 지나서 신라 서북쪽에 있는 장구진에 도달한다. 또 마전도(麻田島), 고사도(古寺島), 득물도(得勿島)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덕물도(德勿島)이다. 덕(德)과 득(得)은 옛날에 통용하였다.- 를 지나 1000리를 가면 -삼가 살펴보건대, 오골강(烏骨江)에서 당은포(唐恩浦)까지가 1000리임을 이른 것이다.- 압록강의 당은포 입구에 이르고, 이어 동남쪽으로 육로를 통해 700리를 가면 신라의 왕성에 이른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의 남양부(南陽府)는 신라 때 당은군(唐恩郡)이라고 칭하였다. 그런즉 당은포는 남양의 바다 포구이다. 《신당서》에 당은포에서 육로를 통해 700리를 가면 신라의 왕성에 이른다고 하였는데, 왕성은 지금의 경주(慶州)이다. 경주는 과연 남양부에서 동남쪽으로 700여 리 되는 곳에 있다. 그리고 소정방(蘇定方)이 올 적에 신라 왕이 이천(利川)에 나와 주둔해 있으면서 배를 보내어 소정방을 덕물도(德勿島)에서 맞이하였는데, 덕물도는 남양의 앞바다에 있다. 이것으로 볼 때 당시에 당나라와 통하는 길은 반드시 남양을 경유하였을 것이므로, 당은포가 남양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신당서》에서 압록강(鴨綠江)의 당은포라고 한 것은, 당시에 전사(傳寫)하면서 잘못 쓴 것이다. 장구진은 마땅히 초도 근처에 있어야 하는데, 초도는 지금의 풍천(豐川) 앞바다에 있는바, 생각건대 지금의 장연(長淵)이나 은율(殷栗) -본명은 율구(栗口)이다.- 등지이다. 당나라 때 신라는 대동강을 경계로 삼았으므로 초도와 장구진이 신라의 서북쪽 경계가 된 것이다.
당항성(棠項城)
《구당서》 백제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정관(貞觀) 16년(642)에 백제가 고구려와 모의해서 당항성을 탈취해 신라에서 당나라에 입조(入朝)하는 길을 끊으려고 하였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당항성은 조선의 전주(全州) 동북쪽에 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당항성은 신라에서 당나라로 통하는 길이다. 당시에 당나라로 통하면서는 매번 남양부의 앞바다를 경유하였은즉, 당항성은 마땅히 남양 근처에 있어야 한다. 《삼국사기》 지리지를 근거로 하여 보면, 지금의 안산군(安山郡)은 본디 장항구현(獐項口縣)인데, 당(棠)과 장(獐)은 음이 비슷한바, 이른바 당항이란 것은 안산인 듯하다.
칠중성(七重城)매초성(買肖城)
《신당서》 신라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라가 고구려의 반군(叛軍)을 받아들여서 백제의 지역을 침략해 지키고 있자, 황제가 노하여 군사를 동원해 정벌하였다. 상원(上元) 2년(675)에 유인궤(劉仁軌)가 신라의 군사를 칠중성(七重城)에서 격파하였다. 조서를 내려서 이근행(李謹行)을 안동진무대사(安東鎭撫大使)로 삼아 신라의 매초성(買肖城)에 둔병(屯兵)하게 하였는데, 신라와 세 번 싸워서 모두 이겼다. -삼가 살펴보건대, 칠중성은 지금의 적성현(積城縣)이고 매초성은 바로 매성(買省)의 와전으로, 지금의 양주(楊州)이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칠중성은 조선의 경주(慶州) 북쪽 경계 안에 있다.
○ 천정군(泉井郡)
《고금군국지(古今郡國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라의 천정군(泉井郡)에서 발해의 책성부(柵城府)까지는 39개 역(驛)이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천정군은 지금의 덕원군(德源郡)이다.
○ 청해진(淸海鎭)
《신당서》 신라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장보고(張保皐)가 신라로 돌아가서 그 나라의 왕을 알현하고는 말하기를, “온 중국이 신라 사람들을 노비로 삼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청해(淸海)에 진(鎭)을 설치하여 해적들이 사람들을 잡아 서쪽으로 가지 못하게 하소서.” 하였다. 청해는 해로(海路)의 요충지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청해가 우리나라 역사서에는 청해진(淸海鎭)으로 되어 있다. 지금의 강진현(康津縣) 완도(莞島)이다.
○ 김주(金州)
《책부원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후당(後唐) 천성(天成) 2년(927)에 신라국의 김주사마(金州司馬) 이언모(李彦模)를 가간교우상시(可簡較右常侍)로 삼았다. -삼가 살펴보건대, 김해부(金海府)를 고려 때 김주라고 칭하였는데, 이곳에서 김주라고 칭한 것이 과연 김해부를 가리키는지는 미상이다.
○ 천주(泉州)
《오대사(五代史)》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후당(後唐) 동광(同光) 2년(924)에 신라국의 천주 절도사(泉州節度使) 왕봉규(王逢規)가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쳤다. -삼가 살펴보건대, 천주에 대해서는 상고할 수가 없다.
사비성(沙鼻城)ㆍ기노강성(岐奴江城)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천지천황(天智天皇) 2년(663) -당나라 용삭(龍朔) 3년- 3월에 장군을 파견하여 신라를 정벌해 신라의 사비기성(沙鼻岐城)과 노강성(奴江城)을 빼앗았다. -삼가 살펴보건대, 두 성은 상고할 수가 없다.


[주D-001]사로국(斯盧國) : 이병도(李丙燾)는, 서나(徐那), 서라(徐羅), 서야(徐耶), 사로(斯盧), 사라(斯羅), 신라(新羅)는 같은 음을 다르게 표기한 것이라고 하였다. 서(徐), 사(斯), 신(新)은 바로 ‘소벌(蘇伐)’의 소(蘇)와 같이 ‘솟[高, 上]’의 사음(寫音)인 것 같다. 나(那), 라(羅), 야(耶), 로(盧)는 ‘나라[國]’의 고어(古語)인즉, 바로 상국(上國)이라는 뜻이다.” 하였다.《국역삼국사기 1쪽 주》
[주D-002]불내예(不耐濊) : 지금의 함경도 안변군(安邊郡)의 옛 이름으로 추정된다.
[주D-003]건모라(健牟羅) : 큰 성(城)이라는 뜻이며, 후에는 금성(金城)이라고 썼다. 고구려ㆍ백제의 왕도(王都)에 상당한 것으로 왕성을 중심으로 한 왕기(王畿)를 말하는데, 우리말의 ‘큰마을’을 음사(音寫)한 것이다. 이병도는 “건모라는 고대어(古代語)에서 대촌(大村), 대읍(大邑)을 뜻하는 ‘큰므르’, ‘큰몰’의 사음(寫音)이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619쪽》
[주D-004]탁평(啄評) : 신라 때 지방 행정 구역의 하나로, 건모라의 내읍(內邑)을 말한다. 신라에는 6탁평이 있었다.
[주D-005]읍륵(邑勒) : 신라 때 지방 행정 단위의 하나로, 신라어의 읍(邑)과 촌(村)을 의미하는 ‘벌(伐)’, ‘불[火, 弗]’의 대음(對音)이다. 곧 ‘읍’의 종성(終聲)인 ‘ㅂ’과 ‘륵’의 초성인 ‘ㄹ’을 반절한 것으로 생각된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95쪽 주》
[주D-006]소수(小守) : 신라의 관직명으로, 외사정(外司正) 밑에 있는 지방 관원이다.
[주D-007]북명(北溟) : 이곳에서의 북명에 대해 이병도는 지금의 원산(元山) 방면이라고 하였다.《국역삼국사기 7쪽 주》
[주D-008]실직국(悉直國) : 이에 대해 이병도는 종래의 삼척설(三陟說)은 거리상 너무 멀어 불가하고, 지금의 월성군(月城郡) 근처라고 하였다.《국역삼국사기 17쪽 주》
[주D-009]장령(長嶺) : 이병도는, “영흥(永興)의 장령진(長嶺鎭)이 있으나, 이 당시에 신라의 판도가 이곳까지 미쳤다고 보기는 어려운바, 강원도 방면의 어느 곳일 것이다.” 하였다.《국역삼국사기 19쪽 주》
[주D-010]신지(臣智) : 삼한 시대 군장(君長) 칭호의 하나이다. 이병도는 “신(臣)은 대(大)를 의미하는 옛말인 것 같고, 지(智)는 벼슬아치, 장사치, 조라치, 갓바치 등의 직업자(職業者)의 호칭인 ‘치’의 사음(寫音)일 것이다. 즉 신지는 대인(大人), 대관(大官)의 뜻이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240쪽》
[주D-011]50여 가(家) : 원문에는 ‘五千餘家’로 되어 있는데, 《삼국사기》 권3에 의거하여 ‘五十餘家’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2]이하(泥河) : 여기에서의 이하는, 이병도는 강릉의 오십천(五十川)이라고 하였다.
[주D-013]평양(平壤) : 지금의 평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북한성(北漢城)에 있었던 남평양(南平壤)을 가리킨다.
[주D-014]고현(高峴) : 이병도는 지금의 철령(鐵嶺)인 듯하다고 하였다.《국역삼국사기 644쪽》
[주D-015]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 : 비문은 모두 12행에 행마다 32자가 해서체로 새겨져 있는데, 순조(純祖) 16년(1816)에 김정희(金正喜)와 김경연(金敬淵)이 비문을 조사하고 판독하였다. 그 비문은 다음과 같다. “眞興太王及衆臣等巡狩□□之時記, 言□令甲兵之□□□年□□□霸主設□, 之所用□祀嶽之時新羅大王, 耀德不用兵故□□□□□□□文大得人民□□, □是巡狩管境□□□□□□□□如有忠信精誠, □可加賞□功以□□□□□□衆路過漢城陟□, 見道人□居石窟□□□□刻石誌辭, 尺干內夫智一尺干智㖨多刻□智迊干南川軍主□, 夫智及干未智大奈□□□□沙喙屈丁次奈□□, 夫□指□空幽則□□□□□□□立所造非□, □守見□□□□刊石□□□記幷” 《朝鮮金石總覽上, 조선총독부, 경인문화사, 11쪽》
[주D-016]민심을 살폈다 : 원문에는 ‘坊采民心’으로 되어 있는데, 조선광문회본 《해동역사》에 의거하여 ‘訪采民心’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7]호로하(瓠蘆河) : 《동사강목》 제4 하에 “지금의 마전(麻田) 징파도(澄波渡) 하류에 호로하가 있는데, 그 남쪽이 바로 칠중성(七重城)이다.” 하였는데, 징파도는 지금의 임진강(臨津江)에 있다.
[주D-018]칠중성(七重城) : 지금의 경기도 파주시 적성(積城)이다. 칠중성은 진평왕(眞平王)과 선덕왕 때 신라 북경(北境)의 요충지로서 신라와 고구려 간 교통로의 중심이었다.
[주D-019]이하(泥河) : 발해가 신라와 경계를 접했던 이하에 대해서는, 함경도 덕원(德源) 부근의 용흥강(龍興江)이라는 설이 정설로 되어 있으나, 이와는 달리 정약용(丁若鏞)은 강릉(江陵) 북쪽, 양양(襄陽)이라고 보고 있으며, 강원도 명주군에 있는 연곡천(連谷川)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주D-020]애제(哀帝) : 원문에는 ‘末帝’로 되어 있는데, 연대가 맞지 않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1]패서(浿西) : 이병도는 패서의 위치를 예성강(禮成江) 북쪽 지역이라고 하였다.
[주D-022]검용(黔用) : 원문에는 ‘黔勇’으로 되어 있는데, 《삼국사기》 권50 궁예열전에 의거하여 ‘黔用’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3]금성(金城) : 이병도는, “금성은 금성탕지(金城湯池)에서 그 뜻을 취해온 것이 아니라 ‘검성(儉城)’, 즉 ‘임금의 성’이라는 뜻인 듯하다.” 하였다.《국역삼국사기 3쪽 주》
[주D-024]시림(始林)에서 …… 삼았는데 : 이에 대해 이병도는, “시림을 계림이라고 한 것은 ‘始’의 음(音)과 ‘鷄’의 훈(訓)이 같은 데에서 사용된 것이지 전설과 같이 닭이 울어서 계림으로 고친 것은 아니다.” 하였다.《국역삼국사기 13쪽 주》
[주D-025]당항성(棠項城) : 지금의 경기 남양(南陽)으로, 신라에서 당나라로 통하는 요충지였다. 당항성(黨項城)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주D-026]칠중성(七重城) : 지금의 경기도 파주시 적성(積城)이다. 칠중성은 진평왕(眞平王)과 선덕왕 때 신라 북경(北境)의 요충지로서 신라와 고구려 간 교통로의 중심이었다.
[주D-027]매초성(買肖城) : 지금의 경기도 양주(楊州)로 추정되고 있으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다. 《동사강목》 제4 하에는 “매초는 매성군(買省郡)으로, 지금의 양주이다.” 하였다.
[주D-028]천주 절도사(泉州節度使) 왕봉규(王逢規) : 왕봉규는 신라 말기의 호족(豪族)으로, 처음에 지금의 의령(宜寧)인 천주현(泉州縣)이라고도 하는 의상현(宜桑縣) 일대를 근거지로 하여 세력을 떨치다가 뒤에 지금의 진주(晉州)인 강주(康州) 지역도 석권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확보하고 중국과 활발한 교섭을 벌여 후당(後唐)으로부터 천주 절도사(泉州節度使), 회화장군(懷化將軍) 등의 직을 제수받았다. 뒤에 견훤(甄萱)의 지배하에 들어가 세력이 소멸되었다.
[주D-029]사비성(沙鼻城)ㆍ기노강성(岐奴江城) : 사비기성(沙鼻岐城)과 노강성(奴江城)의 잘못이다. 사비기는 무주(茂朱)의 옛 이름인 삽계[朱溪]이고, 노강은 무주 동쪽에 있는 눈나리[雪川]를 가리킨다.《완역일본서기 480쪽 주》

세종 4년 임인(1422,영락 20)
 8월8일 (임진)
평양군 조대림과 찬성사 맹사성을 사찰에 보내 재를 올리다

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은 진관사(津寬寺)로, 찬성사(贊成事) 맹사성(孟思誠)은 승가사(僧伽寺)로 보내어 재(齋)를 올려 부처에게 기도하였다.
【원전】 2 집 489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왕실-비빈(妃嬪) / *사상-불교(佛敎)


대한불교조계종 직할 교구 조계사에 속한 사찰로, 북한산 비봉 동쪽에 있다. 756년(경덕왕 15)에 낭적사의 승려 수태()가 창건하고 당나라 고종 때 천복사()에서 대중을 가르쳤던 승가()를 기리는 뜻에서 승가사라고 이름지었다. 1024년(현종 15) 지광()과 성언()이 중수하고, 1090년(선종 7)에 영현()이 중수하였다. 1099년(숙종 4)에는 의천()이 불당을 고쳐 지었다. 1422년(세종 4)에 7종을 합하여 선교양종으로 통합할 때 선종에 속하였으며, 조선 후기에는 불교 부흥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1941년에 도공()이 크게 고쳤으나 6·25전쟁으로 불에 타 크게 망가진 것을 1957년에 도명()이 크게 수리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산신각·향로각·동정각(범종각·대방(요사채 등이 있다.
 
유물로는 절 뒤편 자연 입석에 부조로 새긴 마애석불석가여래좌상(보물 215)이 전하고, 석굴 안에는 고려 현종 때 조성된
승가사석조승가대사상(보물 1000)이 남아 있다.

 


고려사절요 제11권
 의종 장효대왕(毅宗莊孝大王)
정해 21년(1167), 송 건도 3년ㆍ금 대정 7년

순조 16 1816 병자 嘉慶 21 31 北漢山 僧伽寺 곁의 碑峯에 있는 비석이 眞興王巡狩碑임을 고증하다
순조 16 1816 병자 嘉慶 21 31 北漢山 僧伽寺 곁의 碑峯에 있는 비석이 眞興王巡狩碑임을 고증하다


고려사절요 제11권
 의종 장효대왕(毅宗莊孝大王)
정해 21년(1167), 송 건도 3년ㆍ금 대정 7년


○ 봄 정월에 전라주로 안찰부사(全羅州路按察副使) 윤평수(尹平壽)가 민간에서 은(銀) 80근을 거두어 바쳤다.
○ 연등(燃燈)하는 날, 왕이 봉은사(奉恩寺)로 갔다가 밤에 돌아와 관풍루(觀風樓)에 이르렀을 때, 좌승선 김돈중(金敦中)의 말[馬]이 본래 길이 잘 들지 않는데다 징[鉦]과 북소리에 더욱 놀라 한 기사(騎士)의 시방(矢房 화살통)을 들이받아서 화살이 튀어나와 왕이 탄 가마 옆에 떨어졌는데, 돈중이 이 일을 자수하지 않았다. 왕이 깜짝 놀라 유시(流矢)가 날아온 것으로 오인하고, 빨리 달려 궁으로 돌아와서 궁성에 계엄(戒嚴)을 폈다.
○ 유사에 명하여 저자거리에 방(榜)을 걸기를 "활을 쏜 적(賊)을 고하는 자가 있으면, 유무직(有無職)을 막론하고 동반(東班)의 정랑(正郞)과 서반(西班)의 장군(將軍)직을 소원에 따라 제수할 것이고, 공사(公私)의 천례(賤隷)도 또한 관직에 참여를 허락할 것이며, 아울러 은(銀) 2백 근을 줄 것이다. 여자일 경우는 은 3백 근을 준다." 하였다. 잡지 못할까 염려하여, 황금 15근과 은병(銀甁) 2백 개를 거리에 달아 두고 적을 잡게 하였다. 이로부터 용력 있는 자를 뽑아서 내순검(內巡檢)이라 부르고, 두 번(番)으로 나누어 언제나 자색옷을 입고서 활과 검을 가지고 의장(儀仗) 밖에 나누어 배치시켰는데, 비와 눈도 피하지 않고, 밤이면 새벽까지 순찰하고 경계하였다.
○ 왕이 적을 잡지 못한다고 조서를 내려 재신과 추신을 힐책하니, 체포된 자가 연달았다. 대령후(大寧侯) 경(暻)의 가동(家僮) 나언(羅彦)ㆍ유성(有成)ㆍ황익(黃益) 등에게 혐의를 두고 심하게 국문(鞫問)하니, 나언 등이 허위 자백을 하였다. 여러 왕씨와 재신ㆍ추신ㆍ백관ㆍ기로(耆老)들이 대궐로 나아가 죄인의 체포를 하례하고, 나언ㆍ유성ㆍ황익 및 유성의 처(妻)를 참수형에 처하였다. 또 임금의 호위를 신중히 하지 않았다 하여, 견룡(牽龍 임금의 시위와 궁궐의 호위를 맡았던 군대)ㆍ순검(巡檢)ㆍ지유(指諭 무관직)에서 14명을 시골로 귀양보냈다.
○ 3월에 왕이 비를 무릅쓰고 장흥원(長興院)에 행차하여, 중 각예와 더불어 밤에 술을 마시고, 우승선 김돈중에게 명하여 시를 짓게 하였다.
○ 왕이 몰래 금신굴(金身窟)에 이르러 나한재(羅漢齋)를 베풀고, 현화사(玄化寺)로 돌아와 이공승ㆍ허홍재(許洪材)ㆍ각예 등과 더불어 중미정(衆美亭) 남쪽 못에 배를 띄워 술을 마시며 매우 즐겼다. 이보다 앞서, 청녕재 남쪽 기슭에 정자각(丁字閣)을 세우고, 중미정이란 현판을 달았다. 정자 남쪽 시내[澗]에 흙과 돌을 쌓아 물을 저장하고, 언덕 위에 초가(草家) 정자를 지었는데 오리가 놀고, 갈대가 우거진 것이 완연히 강호(江湖)의 경치와 같았다. 그 가운데에 배를 띄우고 소동(小僮)으로 하여금 뱃노래와 어부노래를 부르게 하여, 놀이를 마음껏 즐겼다. 처음 이 정자를 지을 때에 역군으로 하여금 본인이 식량을 싸 오게 하였는데, 한 역군이 매우 가난해서 마련하지 못하여 역군들이 밥 한 숟가락씩을 나누어 주어 먹였다. 하루는 그의 아내가 음식을 갖추어 가지고 와서 남편에게 먹이고 말하기를, “친한 사람을 불러서 함께 먹으시오." 하였다. 역군이 말하기를, “집이 가난한데 어떻게 장만했는가. 다른 남자와 관계하고 얻어 왔는가. 아니면 남의 것을 훔쳐 왔는가." 하니, 아내가 말하기를 "얼굴이 추하니 누가 가까이하며, 성질이 옹졸하니 어찌 도둑질을 하겠소. 다만 머리를 깎아 팔아서 사 가지고 왔소." 하고, 이내 그 머리를 보이니, 그 역군은 목이 메어 먹지 못하고, 듣는 자도 슬퍼하였다.
○ 귀법사(歸法寺) 동쪽 고개에 행차하여, 시신(侍臣)들과 더불어 술자리를 베풀었다.
○ 여름 4월 1일 무진에 일식이 있었다.
○ 하청절(河淸節)이기에 만춘정(萬春亭)에 행차하여, 재신과 추신 시신과 더불어 연흥전(延興殿)에서 연회를 열었는데, 대악서(大樂署)와 관현방(管絃坊)에서 채붕(綵棚)ㆍ준화(樽花)ㆍ헌선도(獻仙桃)ㆍ포구락(抛毬樂) 등의 놀이를 갖추어 행하고, 또 정자 남쪽 포구에서 배를 띄우고 물결을 따라 오르내리며 서로 시를 부르고 화답하다가, 밤에 이르러 비로소 파하였다. 만춘정은 판적요(板積窯) 안에 있는데, 연흥전(延興殿)이 있고, 남쪽에는 시냇물이 굽이쳐 돌고, 좌우에 송죽(松竹)과 화초를 심었다. 또 아담한 모정(茅亭)ㆍ초루(草樓)가 모두 일곱 군데나 있는데, 현판이 있는 것이 네 개가 있었으니, 영덕정(靈德亭)ㆍ수락당(壽樂堂)ㆍ선벽재(鮮碧齋)ㆍ옥간정(玉竿亭)이요, 다리를 금화교(金花橋)라 하고, 문은 수덕문(水德門)이라 이름하였다. 임금이 타는 배는 비단으로 꾸몄는데 뱃놀이하기 위한 것이다. 무릇 3년이나 걸려서 완성한 것으로, 모두 박회준ㆍ유장ㆍ백선연이 왕을 부추겨 한 것이다.
사신이 말하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는 용도를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데에 있거늘, 의종이 못과 정자를 많이 만들어 재물을 손상하고 백성을 괴롭혔으며, 항상 총애하는 자들과 향락만을 일삼고 국정을 돌아보지 않는데도 재상과 대간으로서 말하는 자가 하나도 없었으니, 마침내 거제(巨濟)로 쫓겨가게 된 것은 마땅하다." 하였다.
왕의 아우 중 충희(冲曦)가 왕을 청녕재로 모시고 음식을 바치니, 왕이 각예(覺倪)와 시신을 불러 같이 마시고, 늦게 중미정 남지(南池)에서 배를 띄워 밤까지 놀았다. 충희는 바로 현희(玄曦)이다.
○ 청녕재에 잔치를 벌이고, 시를 지어 여러 신하로 하여금 화답해 올리게 하였다.
○ 5월에 임진현(臨津縣)에 행차하였다. 다음날 재추인 김영윤ㆍ서공ㆍ이공승ㆍ최온(崔溫)과 승선 이담(李聃)ㆍ허홍재(許洪材)ㆍ김돈중(金敦中) 등과 더불어 남강(南江)에 배를 띄워 날이 다하도록 즐겼다. 사간 임종식(林宗植)과 시어(侍御) 고자사(高子思)도 연회에 참석하였다. 한밤중이 돼서야 보현원(普賢院)으로 옮겼는데, 시종들은 미처 따르지 못하고, 고자사는 취해서 가지 못하였다.
사신이 말하기를, “임금의 한 몸에 사직(社稷)과 백성이 매여 있고, 대간의 직책이란 허물을 바로잡고 그릇된 것을 규탄하는 데 있다. 왕이 비록 위태로운 행차를 조심하지 않아 스스로 그 몸을 가볍게 한다 하더라도 종식(宗植) 등이 간언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따라서 환락에 빠져 임금을 수행하는 체모를 잃었으니, 매우 비루하다." 하였다.
장단현(長湍縣) 응덕정(應德亭)에 거둥하여, 배 가운데에 채붕(綵棚)을 매어 놓고 여악(女樂)과 잡희(雜戲)를 실었다. 물에 뜬 것이 모두 19척이었는데, 모두 채색 비단으로 장식하고 좌우의 총애받는 자들과 더불어 잔치하여 즐겼다. 5경에 이르러서 서쪽 언덕에 올라 과녁을 세우고 그 위에 촛불을 놓고 좌우에게 명하여 쏘게 하였는데, 맞히는 자가 없었다. 내시 노영순(盧永醇)이 아뢰기를, “성인[왕]께옵서 과녁을 맞히심을 기다려서 신들이 맞히겠습니다." 하므로, 왕이 쏘아 즉시 촛불을 맞히니, 좌우에서 만세를 부르고 이담이 뒤따라 맞히니, 능라견(綾羅絹)을 하사하였다. 이틀 동안 머무르면서 물놀이를 관람하고, 응덕정에서 촛불을 잡고 배에 올라 여러 가지 풍악을 성대하게 벌이고, 황락정(皇樂亭)을 지나다가 술자리를 베풀고 밤에 보현원에 이르렀다. 또, 만춘정에 행차하여 술자리를 벌이고, 밤에 이담의 별장으로 들어갔다.
○ 6월에 현화사(玄化寺)로 이어하였다. 이에 앞서 왕이, “성동(城東)의 사천(沙川) 용연사(龍淵寺) 남쪽에 두서너 길 되는 석벽이 냇가에 깎아 세운 듯이 서 있어, 그 이름을 호암(虎巖)이라 하는데, 흐르는 물이 여기 와서 머물러 괴어 있고, 수목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다."는 말을 듣고, 내시 이당주(李唐柱)ㆍ배연(裵衍) 등에게 명하여 그 곁에 정자를 짓고 연복정(延福亭)이라 이름하고는, 네 귀퉁이에 기이한 꽃과 나무를 심었다. 물이 얕아서 배를 띄울 수 없으므로, 제방을 막고 호수를 만들었다. 그 땅이 흰 모래로 되어 있고 물결이 세차서 비만 오면 무너지고, 무너질 때마다 보수하니, 인민들이 주야로 쉬지 못해서 매우 괴로워하였다. 이날 재상ㆍ시신과 함께 정자 위에서 연회를 베풀고, 환락을 다한 뒤에 파하였다.
○ 가을 7월에 귀법사에 행차하였다가, 그 길로 현화사에 거둥하여 말을 달려서 달령(㺚嶺)의 다원(茶院)까지 갔는데, 호종하는 신하들이 모두 미처 따르지 못하였다. 왕이 홀로 다원 기둥에 의지하여, 모시고 있는 이들에게 이르기를, “정습명(鄭襲明)이 만일 살아 있다면, 내가 어찌 여기에 올 수 있겠느냐." 하였다.
○ 8월에 남경에 행차하였다. 행차가 가돈원(加頓院)에 이르니, 광주(廣州)에서 의위(儀衛)와 악부(樂部)를 갖추어 맞이하고, 말과 견여(肩輿)와 양산(陽傘)을 바쳤다.
○ 9월에 남경 유수가 예를 갖추어 거가(車駕)를 맞고, 양산 및 말과 소를 바쳤다. 밤에 내시(內侍)와 중방(重房)에게 활을 쏘게 하여, 과녁을 맞힌 자에게는 능견(陵絹)을 하사하였다.
○ 삼각산(三角山) 승가사(僧伽寺)ㆍ문수사(文殊寺)ㆍ장의사(藏義社) 등의 사찰에 행차하였다.
○ 연흥전(延興殿)에서 여러 신하들과 함께 연회를 베풀고, 개인마다 말 한 필씩을 하사하였다.
○ 남경을 출발하여 파평현(坡平縣) 강에 이르러, 배 가운데서 여러 신하와 함께 연회를 베풀었는데, 시신들이 모두 취하여 예의를 잃었고, 추밀원사 이공승(李公升)은 쓰러져서 거가(車駕) 앞에 실었다.
○ 남경으로부터 돌아와 중앙과 지방에 조서를 내려 은전(恩典)을 차등 있게 베풀었다. 이 행차 때에, 광주(廣州)의 장서기(掌書記) 김유(金鏐)가 백성에게서 추렴하여 진귀한 그릇 등을 바꾸어 가지고 환관에게 많은 뇌물을 주었다. 이에 백선연ㆍ왕숙공 등이 김유를 천거하여 내시(內侍)로 들였다.
○ 겨울 11월에 예빈소경(禮賓少卿) 최현(崔儇)을 금 나라에 보내어 생신 하례를 사례하게 하였다.
○ 금 나라에서 소부감 이위국(李衛國)을 보내어 생신을 하례해 왔다.

 

三角山重修僧伽崛記 李預

盖聞恒星匿彩 彰異兆於大虛 滿月端容 耀休光於賢劫 力摧魔外之衆 獨作天人之師 曁㲲身之旣灰 憫世眼之將滅 故金人之體飛漢夢以告來 貝葉之詮傳竺乾而重譯 憑玆衆正 導彼群生 若聞雷而解聾 如執熱以得濯 繇是列刹相峙 丕冒幅員之區 神僧間生 漸弘調御之法 至如康會踐吳王之殿 道安登晋帝之車 石趙圖澄 姚秦羅什 則僧稠上杰 梁朝乃寶誌明公 皆化跡多奇 亦聲名甚偉 然而生前沒後 濟品物以無殊 此土他方 罄歸依而不異者 卽李唐僧伽大師獨步矣 大師俗姓何氏 西域何國人也 年三十 振錫東遊 唐國時龍朔初 隸名於楚州龍興寺 後於泗州臨淮縣信義坊 乞地施標 將立伽藍於其標下 握得故香積寺銘記 幷金像一軀 上有普照王佛字 遂立寺焉 景龍二年 中宗皇帝遣使迎師入內道場 尊爲國師 帝及百官 執弟子之禮 以師事焉 尋出居薦福寺 常獨處一室 而頂上有穴 恒以絮窒之 夜則去絮 香從頂穴中出 煙氣滿房 非常芬馥 及曉香還頂中 又以絮窒之 師常濯足 人取其水飮之 痼疾皆愈 中宗一日於內殿 語師曰京畿無雨 已是數月 願師慈悲 解朕憂迫 師乃將甁水汛洒 俄傾陰雲聚起 甘雨大降 中宗大喜 詔賜所修寺額 以臨淮寺爲名 師請以普照王寺爲名 盖欲依金像上字也 景龍四年三月二日 於長安薦福寺 端坐而化 神色如生 享年八十有三 在西土三十年 入中國五十二載 中宗卽令於薦福寺起塔 漆身供養 我而大風歘起 臭氣徧滿於長安 中宗問曰 是何祥也 近臣奏曰 僧伽大師化緣在臨淮 恐是欲歸彼處 故現此變也 中宗黙然心許 其臭頓息 頃刻之間 奇香遍洽 卽以其年五月 送至臨淮 起塔供養 卽今塔是也 中宗別勅度弟子慧岸慧儼木义三人 各賜衣鉢 令嗣香火 後問萬回師曰 僧伽大師何人也 萬回曰是觀音化身也 如法華經云 應以比丘身得度者 卽皆現之而爲說法 此則是也 大宋有朝散大夫蔣之奇 秘書著作郞柳紳 天壽寺大師贊寧 各撰大師傳 中條山居士辛崇所集大師行狀三十六條 盖有靈異 竝印行於世 故此不錄焉 案崔公致遠文集 昔有新羅代狼迹寺僧秀台 飫聆大師之聖跡 尋選勝于三角山之南面 開巖作窟 刻石模形 大師道容 益照東土 國家如有乾坤之變水旱之災 凡所可疑之事 禱以禳之 無不立應 故遣使春秋設齋各三日 歲杪兼獻襯衣 用爲恒例 孰云乎去聖愈遠 咸嘆乎旣明且慈 至如無兒婦 稽顙而祈 卽生良胤 失馬翁淪誠以白 還得舊驂 告病苟哀 蟻榻之鬪聲忽息 求官儻切 鷺庭之滯迹俄翔 或乞鹽而海客炙來 或請帽而京姬製獻 其餘神驗 不可殫論 故我太祖開國之後 歷代之君 皆親瞻禮焉 彼唐有九帝駕幸淸凉山 歸仰文殊菩薩 卽可以同日而語矣 大安六年 宣王駕幸詣窟 修齋施納寶物 以致敬焉 重瞳俯回 十里周覽 梁紋壁繪 凝野馬以頗昏 瓦縫簷牙 被 缺 邪而半壤 特命龜山寺住持禪師領賢 權住神穴寺 專掌重修之務 賢公擇工也 得般爾之巧手 度木也取豫章之良材 俾執風斤 勉施日力 奉晬容而不動 粧聖窟以增華 鹿苑可期 鷲峯無遠 仍命臣撰重修記而未奏 曁壽昌五年秋 我主上命有司 備車駕與王妃太子及祐世僧統倂兩府群僚 千從萬騎 雲委霧合 匝地盈山 行幸到窟設齋 仍獻白銀香椀手爐各一事 金剛子水精念珠各一貫 純金束帶一腰 倂金花果繡幡茶香衣對錦綺等 用伸歸敬之禮 仍遣禪師領賢 摠監營作之事 以畢其功焉 賢師是新羅代窟主禪師如哲所創神穴寺先祖王師子膺之法胤也 美矣崇眞之朝 營玆植福之田 足使聖日長明 仁風永覆者也 銖衣盡石 慈悲之室猶存 碧海飛塵 功德之林尙茂 上謂曰菩薩神通之化 招提修葺之由 宜刻貞珉 夐流後世 爰徵不敏之伎 俾演無疆之休 臣譽乏渾金 科叨片玉 逢時積幸 濫膺文苑之備員 避命無階 輒讚梵宮之能事 時乾統六年丙戌歲十月日 謹記

[출전 : 『東文選』 권64]

 

삼각산중수승가굴기 [전액(篆額)]

대개 들으니 항성(恒星)의 빛을 숨겨서 허공에 이상한 징조를 드러내고 보름달의 단아한 모습이 아름다운 광채를 현겁(賢劫)에 드러낼 때에 (부처님께서는) 힘써 마귀와 외도의 무리를 물리치고 홀로 하늘과 인간의 스승이 되셨다. 인간으로의 몸이 이미 재로 변하니 세상의 밝은 눈이 사라지게 됨을 안타까이 여겨 금인(金人)의 몸으로 한나라 황제의 꿈으로 날아와 (불교가 중국으로) 옴을 고하였고, 패엽(貝葉)의 가르침을 천축(天竺 : 인도)에서 전하여 거듭 번역되었다. 이 많은 올바른 가르침에 의거하여 저 많은 중생들을 인도하니 마치 우레 소리를 듣고 막힌 귀가 열리고 뜨거운 물건을 집음에 물수건을 얻은 것과 같았다. 이로부터 여러 사찰이 서로 솟아서 세상에 가득 하였으며, 훌륭한 승려들이 때때로 태어나 수행하는 방법을 점차 넓혀갔다. 강승회(康僧會)는 오(吳)나라 왕의 궁전에 들어갔고 도안(道安)은 진(晉)나라 황제의 수레에 올랐으며, 석조(石趙)의 불도징(佛圖澄)과 요진(姚秦)의 구마라집(鳩摩羅什)은 승려들 중의 뛰어난 인재였다. 양(梁)나라 때의 보지(寶誌)와 명공(明公)은 모두 감화의 자취가 매우 기이하며 명성이 또한 대단히 위대하였다. 하지만 태어나기 전과 죽은 이후에 중생들을 제도함에 다름이 없고 이 나라와 저 나라에서 모두 다 귀의하여 다름이 없는 사람은 곧 이당(李唐 : 李淵이 세운 당(唐)나라) 때의 승가대사(僧伽大師)가 홀로 있을 뿐이다. 대사의 속성은 하(何)씨이고 서역의 어느 나라 사람이다. 나이 30세에 지팡이를 휘둘러 동쪽으로 오셨으니 당나라 용삭(龍朔 : 당나라 고종(高宗)의 연호, 661~663년까지 사용) 초기였다. 초주(楚州) 용흥사(龍興寺)에 이름을 걸어 두었다가 후에는 사주(泗州) 임회현(臨淮縣) 신의방(信義坊)에서 토지를 얻어 표지를 세우고 장차 그 표지 아래에 사찰을 세우려 하였다. 땅을 파다가 옛 향적사(香積寺)라고 새겨진 기록과 함께 ‘보조왕불(普照王佛)’이라는 글자가 있는 금불상 한 구(軀)를 얻고서 드디어 절을 세웠다. 경룡(景龍 : 당나라 중종(中宗)의 연호 707~710년까지 사용) 2년(708)에 중종(中宗) 황제께서 사신을 보내어 스님을 내도량(內道場)으로 맞이하고서 국사로 존경함에 황제와 백관들이 제자의 예를 취하여 스승으로 섬기었다. 얼마 후 궁궐을 나와 천복사(薦福寺)에 머무르셨는데, 늘 홀로 한 방에 계셨다. (대사의) 정수리 위에는 구멍이 있어 늘 솜으로 막아 두었는데, 밤에 솜을 빼면 향기가 정수리의 구멍으로부터 나와 기운이 방에 가득하였다. 보통의 향기가 아니었다. 새벽이 되면 향기가 다시 정수리로 돌아갔고 다시 솜으로 막았다. 스님이 평소에 발을 씻으면 사람들이 그 물을 가져다 마시고 병이 모두 나았다. 중종황제께서 하루는 내전에서 스님에게 “경기 지역에 비가 내리지 않은지 이미 여러 달이 되었습니다. 원컨대 스님께서는 자비심으로 짐의 근심을 풀어주십시오”라고 말씀하심에 스님이 곧 병의 물을 뿌리니 얼마 지나지 않아 먹구름이 생겨나 단비가 크게 내렸다. 중종황제께서 크게 기뻐하시고 (스님이) 지어 놓은 절에 이름을 내려 ‘임회사(臨淮寺)’라고 하였는데 스님은 ‘보조왕사(普照王寺)’를 이름으로 해달라고 부탁하였으니 이는 금불상 위에 있는 글자에 의하려고 한 것이었다. 경룡 4년(710) 3월 2일에 장안(長安)의 천복사에서 단정하게 앉아 돌아가시니 얼굴 빛은 살아계실 때와 같았다. 향년은 83세로 서역에 계신 것이 30년, 중국에 들어오신 후로 52년이었다. 중종황제께서 곧 천복사에 탑을 세우고 시신에 옷칠을 하여 공양하라고 명령하셨는데 얼마 후 큰 바람이 갑자기 일어나면서 그 냄새가 장안에 가득하였다. 중종황제께서 “이것이 무슨 징조인가”라고 물으니 근신이 아뢰기를 “승가대사는 교화의 인연이 임회에 있으므로 아마도 그곳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여서 이와 같은 변화를 나타낸 것 같습니다”고 아뢰었습니다. 중종황제께서 잠자코 마음으로 그렇게 하려고 생각하자 그 냄새가 곧바로 없어지고, 잠깐 동안에 기이한 향기가 두루 퍼졌다. 곧바로 그해 5월에 임회현으로 보내어 탑을 세우고 공양하였으니 지금의 탑이 그것이다. 중종황제께서는 별도로 칙령을 내려 제자인 혜안(慧岸)과 혜엄(慧儼), 목차(木叉) 등 3인을 정식으로 출가시키고 각기 승복과 발우를 하사하며 스님의 제사를 잇도록 하셨다. 훗날 만회(萬回) 스님에게 “승가대사는 어떠한 사람인가”라고 묻자, 만회 스님은 “관음보살의 화신이십니다. 『법화경(法華經)』에 이르기를 ‘마땅히 비구의 몸으로 구제해야 할 사람은 곧 그렇게 나타나서 설법한다’고 하였는데 이 (승가대사의) 일이 그러한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송나라 때에 조산대부(朝散大夫) 장지기(蔣之奇)와 비서저작랑(秘書著作郞) 유신(柳紳), 천수사(天壽寺) 대사 찬녕(贊寧) 등이 각기 스님의 전기를 지었고, 중조산(中條山) 거사 신숭(辛崇)이 모은 대사의 행장 36조에는 모두 신령하고 기이한 일들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인쇄되어 세상에 전해지고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기록하지 않는다.
최치원(崔致遠) 공의 문집을 살펴보니 옛날 신라 때에 낭적사(狼迹寺)의 승려 수태(秀台)가 대사의 신성한 행적을 듣고서 삼각산 남쪽에서 아름다운 장소를 골라 바위를 뚫어 굴을 만들고 돌로 (대사의) 형상을 조각하니 대사의 훌륭한 모습이 동토(東土 : 우리나라)를 더욱 비추게 되었다. 나라에 천재지변이나 홍수와 가뭄의 재이가 있거나 의심스러운 일이 있을 때에 기도하여 물리칠 것을 빌면 그 자리에서 응험이 없었던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사신을 보내어 봄과 가을에 제사를 각기 3일간 드리고 연말에 아울러 임금님의 옷을 바치는 것으로서 항상적인 규칙으로 삼았다. 누가 옛 성인이 더욱 멀어졌다고 할 수 있겠는가. 모두 밝고 또한 자비롭다고 감탄한다. 심지어 아이가 없는 부인이 머리를 조아리고 기도하면 곧바로 훌륭한 아들을 낳고, 말을 잃어버린 노인이 정성을 다하여 아뢰면 곧바로 옛 말을 찾으며, 병든 사람이 간절히 고하면 병상에서 신음하던 소리가 곧 멈추고, 관직을 구하는 소리가 간절하면 조정에 막혔던 자리가 곧바로 열리었다. 혹은 소금을 구하면 바다 상인이 소금을 구워 가져오고, 때로 모자를 청하면 서울의 여자가 만들어 바치었다. 그 밖의 신기한 영험들은 모두 다 이야기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 태조께서 나라를 여신 이후 역대의 임금님들이 모두 직접 찾아와 예를 드렸으니 저 당나라에서 아홉 황제께서 청량산에 행차하여 문수보살에게 귀의하며 경의를 표한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태안(太安 : 거란 도종(道宗)의 연호, 1085~1094년까지 사용) 6년(선종 7, 1090)에 선종께서 이 굴에 행차하시어 재(齋)를 지내고 보물을 시납하여 경의를 표하시었다. 두 눈동자[重瞳 : 순(舜) 임금의 눈에 눈동자가 둘 있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여, 국왕의 눈을 가리킴]를 돌리어 10리를 두루 살펴보시니 들보의 무늬와 벽의 그림은 먼지가 쌓여 흐릿하게 되었고 기와의 이음새와 처마의 추녀는 비바람에 반쯤 무너져 있었다. 이에 특별히 귀산사(龜山寺) 주지인 선사 영현(領賢)을 시켜 임시로 신혈사(神穴寺)에 머물며 중수의 임무를 책임지고 맡게 하였다. 영현은 장인을 골라 반이(般爾)와 같은 재주 있는 사람을 얻고, 나무를 살펴 예장(豫章)과 같은 좋은 목재를 취한 후, 연장을 쥐고 매일 힘써 일하게 하였다. (대사의) 모습을 받들어 본래와 같이 하고 신성한 굴은 잘 꾸미어 화려함을 더하니 녹야원[鹿圓 : 석가가 깨달음을 얻은 후 처음 설법한 곳]에 곧 이루어 질 것이고 영취산(鷲峰 : 석가가 생전에 머물며 설법을 하신 곳)이 멀지 않았다. 이어서 신(臣)에게 중수기를 지으라고 명령하시었지만 미처 완성하지 못하였는데 수창(壽昌 : 거란 도종(道宗)의 연호, 1095~1100년까지 사용) 5년(숙종 4, 1099) 가을에 우리 임금께서 담당 관청에 명하여 수레를 갖추어 왕비와 태자, 우세승통(祐世僧統 :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을 가리킴) 그리고 양부(兩府 :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과 중추원(中樞院))의 여러 신하들과 함께 천여 명의 종자와 만 필의 말을 이끌고 구름과 안개를 일으키며 땅과 산을 가득히 매우며 행차하였다. 굴에 이르러 재를 지내고 백은 향완(香椀)과 손 향로 각 1개씩과 금강석과 수정으로 만든 염주 각 1벌, 순금 옷띠 하나, 그리고 금으로 만든 꽃과 과일, 수놓은 번(幡), 차(茶), 향, 옷, 비단 등을 바쳐 귀의하고 공경하는 예를 베풀었다. 그리고 영현선사를 시켜 공사를 감독하게 하여 그 일을 마치었다. 영현선사는 신라 때 이 굴의 주지였던 여철(如哲) 선사가 창건한 신혈사 조사이었던 왕사(王師) 자응(子膺)의 법제자이다. 아름답도다! 진리를 숭상하는 조정에서 이 복을 심는 밭을 만들었으니 성스러운 해가 길게 비추고 인자한 바람이 영원히 감싸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가벼운 옷이 돌로 되어도 자비의 방은 여전히 남을 것이요 푸른 바다가 먼지 되어 날릴지라도 공덕의 수풀은 여전히 무성할 것이다. 임금님께서는 “보살의 신통스런 교화와 사찰을 중수한 사유를 마땅히 좋은 돌에 새겨 후세에 전하여야 할 것이다”고 말씀하시고 (나와 같은) 보잘 것 없는 재주의 사람을 뽑아서 끝없는 아름다움을 적게 하시니, 신(臣)은 좋은 재능을 타고나지 못하였고 아름다운 문장을 짓지도 못하지만 다행히 좋은 시대를 만나 외람되이 문장을 맡는 관료에 참여하였으니, 명령을 피할 수 없어 곧바로 사찰의 훌륭한 일을 칭송하는 바이다.
때는 건통(乾統 : 거란 천조제(天祚帝)의 연호 1101~1110년까지 사용) 6년 병술년(예종 1년, 1106) 10월 일에 삼가 씀.


 위치 :서울특별시 도봉구 우이동 북한산 승가굴 해제 :삼각산 승가굴(僧伽窟)의 연혁 및 중수과정에 대하여 기록한 비석. 삼각산의 승가굴은 중국에서 관음보살의 화신으로 추앙받는 승가대사(僧伽大師)의 석상을 모신 굴원(窟院)으로서 신라 때에 수태(秀珆)라는 승려에 의해 만들어진 곳이다. 고려의 역대 국왕들은 남경(南京 : 지금의 서울)에 행차할 때에 이곳을 방문하여 예불하고 기도하였는데, 특히 선종(宣宗)은 1090년(선종 7)에 이곳을 방문하여 재(齋)를 지내면서 중수를 명령하였고, 숙종(肅宗)도 1099년(숙종 4)에 이곳을 방문하고 많은 물자를 희사하며 중수를 마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비석은 이와 같은 왕실 지원에 의한 중수가 완료된 뒤인 1106년(예종 1)에 건립되었다. 비문은 현재 마멸이 심하여 극히 일부밖에 읽을 수 없는데, 『동문선(東文選)』에 원문이 전하여 그 내용을 알 수 있다. 비문의 찬술자에 대하여 『동문선』에서는 이예(李預)라고 하고 있는 것과 달리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의 승가사(僧伽寺) 항목 및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의 승가비(僧伽碑) 항목에서는 이오(李䫨)라고 밝히고 있다. 비문의 글씨는 고려 중기에 서승(書僧)으로 유명하였던 탄연(坦然 : 1070~1159)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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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 ,
(), 2002, ,
(), 1999, 12
(), 1997, 74,
(), 1996, ,
(), 1995, ,
(), 1993, 53,
(), 1992, 25,
() , 1992, ,
(), , , 1987
 
소재지(출토지) 國立中央博物館(原 京畿道 高陽郡 恩平面 舊基里 碑峰)  이미지보기
                     
시대 568년 
크기 높이 약 155cm、폭 71.5cm、두께 약 16.6cm 
서체 및 재질 隷書 
주제분류 문화>문화재>금석문>碑文 
역주자 盧重國 
槪觀

槪觀
가. 碑의 現況
원래 京畿道 高陽郡 恩平面 舊基里 碑峰에 있었는데,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國寶 제3호이다. 無學大師枉尋碑 또는 沒字碑 등으로 불리어 오던 중, 朝鮮 純祖 16년(1816)에 金正喜가 친구 金敬淵과 더불어 僧伽寺에 놀러 갔다가 이 비를 발견, 이끼를 뜯어내고 拓出하여 ‘眞’자를 확인하였다. 이듬해 趙寅永과 더불어 이 비를 다시 조사하여 68자를 확인하였고, 그 후 또 2자를 확인하였다. 이들은 탁본을 중국의 金石家 劉燕庭에게 주었고, 이것이 그의 『海東金石苑』에 실리게 되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今西龍 등이 이 비를 재조사하여 『大正五年度古蹟調査報告』에 報告文을 실었다.
비의 재료는 良質의 堅緻한 花崗岩이다. 趺座 위의 碑身 높이는 약 155.1cm, 폭은 약 71.5cm, 두께는 약 16.6cm이다. 우측 상단 아래 약 25.1cm 되는 지점에서 좌측 상단 아래 약 45.4cm 되는 지점에 걸쳐 切斷되었으나, 접합하여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비의 상단에는 碑蓋가 들어갈 수 있도록 폭 약 69cm, 높이 약 6.7cm 정도를 柄形으로 팠다.
비문은 12행으로 각 행 21자 혹은 22자이나, 읽기 어려운 것이 많다. 비의 좌측면에는 ‘此新羅眞興大王巡狩之碑 丙子七月 金正喜 金敬淵來讀’이 새겨져 있고, 그 옆에 ‘己未八月二十日 李濟鉉 龍仁人’이 새겨져 있으며, 또 隷書로 ‘丁丑六月八日 金正喜 趙寅永同來 審定殘字六十八字’가 새겨져 있다. 篆額 및 碑陰記는 없는 것 같다. 비의 서체는 「黃草嶺碑」와 酷似하다.
나. 建立年代 및 性格
정확한 연대를 알려주는 干支가 없어 분명히 하기 어렵지만, 비문 중의 ‘南川軍主’가 하나의 단서가 된다. 『三國史記』에 의하면, 眞興王 29년(568) 10월에 北漢山州를 폐하고 南川州를 설치했다고 한다. 따라서 본 비는 568년 10월 이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본 비는 題記에 ‘巡狩’라는 표현이 있어, 진흥왕이 한강유역을 순수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碑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본 비에 보이는 ‘南川軍主’는 眞興王代의 州制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며, 內夫智·武力智 등 일부 隨駕人名은 「黃草嶺碑」와 「磨雲嶺碑」에도 보이고 있어 이들의 활동 및 官等表記의 변화를 이해하는 데 보완자료가 된다.

 

判讀文

眞興太王及衆臣等巡狩□□之時記
 □言□令甲兵之仿□□□□□□覇主設賞□□
  之所用高祀西□□□□相戰之時新羅□王□
 德不兵故□□□□□建文大淂人民
 是巡狩□□□民心 欲勞賚如有忠信精誠
  □可加□□以□□□□□□路過陟□
   見道人□居石窟□□□□刻石誌辭
  尺干內夫智一尺干沙喙迊干南川軍主
  夫智
及干未智大奈□□沙喙屈丁次
  □指□空幽則□□□劫初立造非
     狩見□□□□□□□□歲記□□□

韓國古代史硏究會 共同硏究팀의 共同判讀

解釋文
가. 文章構成
본 비는 마멸된 부분이 많지만, 그 내용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부분은 제1행 제1자에서 제15자까지로 題記部分에 해당된다. 둘째 부분은 제2행 제2자부터 제6행 12자 정도까지로 비의 건립 배경을 기록한 紀事部分이다. 셋째 부분은 제6행 제13자 정도부터 제7행 제18자까지로 隨駕關聯部分이다. 넷째 부분은 제8행 제3자부터 제11행 제19자까지로 隨駕人名 列記部分이다.
둘째 부분은 내용상 다시 두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제1단락(제2행 제2자에서 제5행 제1자까지)은 巡狩의 당위성과 비의 건립 배경을 기록한 것이고, 제2단락(제5행 제2자에서 제6행 제12자 정도까지)은 民心의 採訪과 褒賞 약속을 기록한 것이다.
나. 解釋文 및 註釋
판독대비표
行字















西









Ⅰ-11
Ⅰ-12 境ㅇ
Ⅱ-3
Ⅱ-4
Ⅱ-9 仿?
Ⅱ-11
Ⅱ-12
Ⅱ-15
Ⅱ-18
Ⅱ-19 ? ?
Ⅱ-20 賞ㅇ
Ⅱ-21 ?
Ⅲ-3 之ㅇ
Ⅲ-7
Ⅲ-8 西 西 西 西
Ⅲ-9 ? 嶽ㅇ
Ⅲ-14
Ⅲ-15
Ⅲ-18
Ⅲ-19 羅ㅇ
Ⅲ-20 太ㅇ
Ⅳ-2 ? 耀 耀 耀 耀
Ⅳ-5 ? 用ㅇ
Ⅳ-8
Ⅳ-13 ? 强ㅇ
Ⅳ-14 建ㅇ
Ⅳ-20 牜?
Ⅳ-21 ?
Ⅳ-22 彳?
Ⅴ-6 ? 管ㅇ
Ⅴ-7 境ㅇ 境ㅇ
Ⅴ-8 訪ㅇ 訪ㅇ
Ⅴ-9 採ㅇ 採ㅇ 採ㅇ
Ⅴ-10 民ㅇ 民ㅇ 民ㅇ
Ⅴ-11 心ㅇ 心ㅇ 心ㅇ
Ⅴ-12 以ㅇ 以ㅇ 以ㅇ
Ⅴ-13 欲ㅇ
Ⅴ-14 勞ㅇ 勞ㅇ 勞ㅇ
Ⅴ-15
Ⅴ-22 ?
Ⅵ-3
Ⅵ-6 貢?
Ⅵ-7 爵ㅇ
Ⅵ-8
Ⅵ-9
Ⅵ-12
Ⅵ-13
Ⅵ-16 宋?
Ⅵ-19 漢?
Ⅵ-22
Ⅶ-3
Ⅶ-4
Ⅶ-15
Ⅶ-16
Ⅶ-17
Ⅷ-1 智ㅇ 智ㅇ
Ⅷ-2 一ㅇ 一ㅇ
Ⅷ-11 沙ㅇ
Ⅷ-13
Ⅷ-14 力?
Ⅷ-22 沙? 沙ㅇ
Ⅸ-11 ? 末ㅇ 末ㅇ
Ⅸ-14 ?
Ⅹ-3 ?
Ⅹ-4     
Ⅹ-5 指?
Ⅹ-10 水?
Ⅹ-15
Ⅹ-16
Ⅹ-21 艹? 里ㅇ
ⅩⅠ-6 ? 巡ㅇ
ⅩⅠ-7
ⅩⅠ-12
ⅩⅠ-13
ⅩⅠ-17
ⅩⅠ-19 井?
眞興太王[註 001] 및 衆臣들이 □□[註 002]을 巡狩[註 003]할 때의 기록이다.
… □言□令甲兵之□□□□□□□霸主設□賞□□ …
… 之所用 高祀西□[註 004]□□□□ 서로 싸울 때 新羅의 太王이 □ …
… □德不□兵故□□□□□□建文 크게 人民을 얻어 □□□ …
… 이리하여[註 005] 管境을 巡狩하면서 민심을 □□하고[註 006] 勞苦를 위로하고자 한다. 만일 충성과 신의와 정성이 있고 □ …
… 賞을 더하고 … 漢城[註 007]을 지나는 길에 올라 □ …
… 道人이[註 008] 石窟에[註 009] 살고 있는 것을 보고 … 돌에 새겨 辭를 기록한다.
… 尺干,[註 010] 內夫智[註 011] 一尺干, 沙喙[註 012] 武力智[註 013] 迊干[註 014]이다. 南川軍主는[註 015] 沙喙 … 夫智 及干,[註 016] 未智[註 017] 大奈□[註 018] □□□ 沙喙 屈丁次 奈[註 019]이다.
… 谷□指□ 비고 그윽한 즉 水□□□□劫 처음에 세워 만든 바는 非□ …
… 巡狩하여 見□□□□□□□□歲記井□□□[註 020]

眞興太王 : 신라 제24대왕. 재위기간은 540~576년. 자세한 것은 본 서 「磨雲嶺碑」의 ‘眞興大王’항 참조.
□□ : 이 부분(제1행 제11·12자)은 마모가 심하여 글자를 확인하기 어려우나 「黃草嶺碑」나 「磨雲嶺碑」에 의해 ‘管境’으로 추독할 수 있다.
巡狩 : 제왕이 제후의 지역을 순행하여 정사를 살피는 것을 말한다. 자세한 것은 본 서 「磨雲嶺碑」의 ‘巡狩’항 참조.
西□ : □자를 ‘嶽’으로 추독한 견해가 있는데, 이를 따르면 ‘西岳’이 된다. 西岳은 五岳의 하나이므로, 진흥왕대에 이미 五岳의 제도가 마련된 것을 시사해 준다.
□是 : □자는 분명하지 않으나, 「黃草嶺碑」와 「磨雲嶺碑」에 의해 ‘於’로 추독된다.
□□ : 마멸이 심하여 판독이 어려운데, 「黃草嶺碑」나 「磨雲嶺碑」에 의해 ‘訪採’로 추독할 수 있다. ‘訪採民心’은 ‘민심을 살펴’로 해석된다.
漢城 : 오늘날의 서울지역을 말한다. 漢城은 본래 백제의 수도였으나, 475년 고구려에 점령되었다. 551년에 백제는 신라, 가야와 더불어 고구려를 공격하여 한강 하류지역을 회복하였는데, 553년 신라가 다시 백제를 공격, 한강유역을 모두 점령하게 됨으로써 漢城은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 한강유역을 차지한 신라는 이 지역을 新州로 하고 州治를 漢城에 두었다. 「昌寧碑」에도 ‘漢城軍主’라 하여 漢城이 보인다.
道人 : 佛門에 들어 道를 닦아 깨달은 사람, 즉 승려를 말한다. 道人에 대해서는 본 서 「磨雲嶺碑」 ‘道人’항 참조.
石窟 : 李德懋의 『雅亭遺稿』에 의하면 僧伽寺 북쪽에 석굴이 있다고 하는데, 이것을 가리키는 것인지 모른다.
… 尺干 : ‘尺’의 앞자(제9행 제2자)를 ‘一’로 추독한 경우도 있는데, 그렇다고 하면 ‘一尺干’이라는 관등이 된다. 一尺干은 신라 경위 17관등 중 제2관등이다.
內夫智 : 「磨雲嶺碑」에도 나온다. 이 內夫智는 「赤城碑」의 內禮夫智, 『三國史記』居柒夫傳에 보이는 奴夫 波珍飡, 『三國史記』眞平王 元年條에 보이는 上大等 弩里夫 伊飡과 동일인물로 생각된다. 자세한 것은 본 서 「磨雲嶺碑」‘內夫智’항 참조.
沙喙 : 신라 6부의 하나. 본 서 補註 1-2) 참조.
武力智 : 원비문의 ‘另’은 ‘武’의 異體字이다. 武力智는 金庾信의 할아버지로, 金官加耶의 마지막 왕인 仇衡王의 셋째 아들이다. 仇衡王이 신라에 항복한 후 新羅 王京에 살게 되었고, 眞骨身分으로 편입되었다. 「赤城碑」에는 另力智의 관등이 阿干支로 보이는데, 「昌寧碑」와 「黃草嶺碑」및 「磨雲嶺碑」에는 迊干으로 나온다. 자세한 것은 본 서 「磨雲嶺碑」 ‘另力智’항 참조.
迊干 : 신라 경위 17관등 중 제3관등. 본 서 補註 2-4) 참조.
南川軍主 : 南川州에 대해서는 『三國史記』권4 眞興王 29년조에 ‘冬十月 廢北漢山州 置南川州’라 하고 있고, 권35 지리2 漢州條에는 ‘漢州 本高句麗漢山郡 新羅取之 景德王改爲漢州 今廣州 領縣二 黃武縣 本高句麗南川縣 新羅幷之 眞興王爲州 置軍主 景德王改名 今利川縣’이라 하고 있다. 이 기사를 종합할 때, 南川州는 본래 고구려의 南川縣이었는데 진흥왕 29년에 北漢山州를 폐하면서 南川縣을 南川州로 승격하고 軍主를 설치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軍主는 州의 장관으로서 智證王代에 처음으로 설치되었으며, 行政權과 軍事權을 가졌다.
及干 : 신라 경위 17관등 중 제9관등. 본 서 補註 2-10) 참조.
未智 : 「黃草嶺碑」와 「磨雲嶺碑」에도 보이는데 구체적인 행적은 알 수 없다. 「黃草嶺碑」와 「磨雲嶺碑」에서는 未智의 所屬部는 喙部로 나온다.
大奈□ : □자(제9행 제11자)는 마모가 심하여 판독하기 어려운데, 「黃草嶺碑」와 「磨雲嶺碑」에 의해 ‘麻’로 추독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본 비에 남아 있는 자획에서 미루어 볼 때, 또 바로 아래에 나오는 ‘屈丁次’의 경우 밑에 여백이 있는데도 ‘奈’자만 관등명으로 새겨져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北漢山碑」에서는 大奈麻의 ‘麻’자가 생략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奈 : 奈의 아래에는 두 자가 더 들어갈 수 있는 여백이 있다. 그럼에도 ‘屈丁次’의 관등은 ‘奈’로만 표기되어 있다. 이는 奈麻의 ‘麻’자가 생략된 것이 아닐까 한다.
□□□ : 제11행 제20·21·22자를 대부분의 判讀文에서는 ‘萬代名’으로 판독하고 있는데, 이 부분은 깨어져 나간 부분이어서 지금으로서는 판독이 불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