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저 조익 /포저 조익 한시

포저 조익 송별(送別) 25수

아베베1 2011. 3. 16. 15:12

조익(趙翼)

 

조선 선조(宣祖)-효종(孝宗) 때의 문신·학자.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으로 좌의정(左議政)을 역임함. 성리학(性理學)의 대가로 예학에 밝았으며 음률(音律)·병법(兵法)·복서(卜筮)에도 능했음.

조익지석(趙翼誌石

시대
조선
연대
1660년(현종1년)
유형/재질
비문 / 돌
문화재지정
비지정
크기
높이 215cm, 너비 143cm, 두께 13cm
출토지
충청남도 예산군 신양면 신양리 산 33-1번지
소재지
(한국)조병언-
서체
해서(楷書)
찬자/서자/각자
  윤선거(尹宣擧) / 미상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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左議政 趙翼 誌石
1
有明朝鮮國大匡輔國崇綠大夫議政府左議政兼領 經筵監春秋」
 館事 世子傅諡文孝公浦渚趙先生墓誌銘幷序」
崇禎乙未三月十日浦渚趙先生考終于廣州鷗浦之正寢春秋七十」
有七疾革內醫賚藥診視訃聞輟朝三日諸曺郞來職喪 上再遣侍」
臣 王世子遣宮官致 弔祭用其年六月十日禮葬于大興縣東華山
白石洞巽坐乾向之阡實先僉樞公墓北岡也貞敬夫人玄氏以明年」
丙申十二月十七日自他山遷祔焉旣而其孤侍郞君述家狀一通示」
宜擧且屬以幽堂之銘宣擧謝非其人侍郞曰銘貴誠不貴文子與吾」
昆弟也子何辭焉宣擧盖屢辭不敢承而侍郎督之下置宜擧竊念先」
生吾先子之所畏也而宣擧亦猥游紀諶之間獲承函丈之教其義有」
不得而終辭者乃敢略敍世系踐歷德行事業以及夫出處學問大致」
而係之以銘嗚呼小子尙敢銘先生之墓乎哉謹按先生諱翼字飛卿」
自號存齋其曰浦渚學者所稱也其先豊壤縣人遠祖孟高麗門下侍」
中其後有諱賢範水軍節度同知中樞於先生爲高祖曾祖諱安國亦」
2
世其武歷官銀臺累持閫節嘗討倭寇不妄殺人人以是知其後必大」
祖諱侃儀賓都事考諱瑩中僉知中樞妣海平尹氏縣監春壽之女性」
仁達理宗黨稱爲女中君子淸陰金文正公尙憲銘其墓以萬歷己卯」
四月七日生先生于京城東第先生年二十四擢第選補槐院時奸黨」
專國排斥異已越六年例由博士陞典籍監察戊申出爲平安評事已」
酉選入玉堂歷司書兵曹佐郞辛亥帶三字銜拜修撰仁弘投疏誣斥」
晦退二先正先生上聯箚極論其罪於是貶爲高山察訪癸丑棄官歸」
廣州時光海政亂爾瞻縱臾旣誣殺國舅仍起廢 母后之論自是決」
意不復仕連拜玉堂騎省關西佐幕大同督郵又以儐使製述官促召」
皆不赴癸亥 仁祖大王反正首起爲吏曹佐郞時議更張弊政設行」
四道大同之法完平李相元翼啓請先生兼裁省宣惠郞廳未幾選湖」
堂讀書陞正郞兼校書教理惠民醫學教授訓局都廳甲子逆适稱兵」
扈 駕幸公州賊平還京三月遷檢詳舍人歷典翰司諫應教陞直提」
學中興以後獨先生居是職遞爲司僕寺正十二月復由典翰直提學」
3
陞同副承旨兼宣惠廳副提調乙丑二月遞拜刑曹參議俄還銀臺丙」
寅轉都承旨七月特陞漢城左尹八月出守開京丁卯十二月以大司」
諫 召還戊辰移副提學又移吏曹參判兼備局有司堂上己巳四月」
兼同知成均館事洊長憲府薇垣玉堂自是後十數年所居不出三司」
間拜大司成兵曹參判知申亞銓特 命仍兼師儒以專訓迪實職兼」
帶盖異數也辛未三月丁內艱制終特陞禮曹判書甲戌兼同知 經」
筵成均館事 世子右副賓客又兼藝文提學以不習詞章力辭該曹」
引司馬光翰林學士事白 上不許丙子拜工曹判書判尹秋復長春」
官十二月金虜入寇四日而傅國都 上將幸江都先生自擬隨 駕」
令參判奉 廟主以行命一男奉僉樞公先出倉卒相失是日風雪極」
寒先生號泣求尋比得其所在則 大駕移向南漢賊兵已塞路矣遂」
痛哭與二三士夫紏義旅于南陽府使尹棨遇賊死衆皆驚潰事無可」
爲者乃人江都分司翌日甲津失守先生出視津上賊逼不動從者救」
之以免 上還都言路論諸不及扈從者先生於是就理能職歸鄕里」
4
戊寅柳碩李烓等復以前事搆誣竝論金文正公至請流竄 上雅知」
先生顚沛出於不幸終不從癸未以 王孫輔養官 召入朝陳情乞」
歸養乙酉拜宗伯丙戌拜冢宰皆不就五月丁外艱戊子服闋拜左參」
贊特降馹 召己丑以宗伯兼 世子左賓客五月 仁祖大王昇遐」
時先生纔移都憲大臣請攝儀胄事八月進拜右議政陞左揆摠護」
山陵之役庚寅冬遞爲領中樞府事先是太學諸生上疏請栗谷牛溪」
兩先生從祀文廟 上未之許而一種邪說投間誣詆先生上箚極陳」
兩賢德行之實至是諸生又申前請而邪說又作語絶醜悖先生上箚」
言二臣祀典宜自朝廷議定仍明其誣賢罔 上之狀 上皆不省先」
生遂四疏求去自是不復歸朝累疏乞致仕辛卯三月坐徴事削官爵」
八月敍復判中樞府事去相位凡七年而卒今 上初載賜諡文孝先」
生始生有黑龍夢見之兆三歲有排碁成卦之戱聞者異之五歲有隣」
老解衣置一處令先生守視至暮而還則先生猶守不去八歲聞重峯」
趙先生憲坐訟兩賢爲群小所斥卽憤惋草疏指陳邪正諸長者見而」
5
驚歎其天資之幼成者旣如此而又重之以充養之功淸明醇粹德性」
藹然溫和仁愛底氣象望之知其爲大人君子其持身也每日晨起整」
衣冠端拱危坐未嘗傾側跛倚非大疾病未嘗晝臥俚俗罵詈之言不」
出於口以伊川殉欲之戒爲至言其官西北終不近女色晚年喪配後」
不復卜姓自奉甚儉無所嗜好終身不進奢美之味不服染色之衣釋」
褐五十年位至三公京鄕無環堵之室外方禮餽稍過皆不受親族爲」
邑宰一物未嘗有求其在饔司耆局所當得者皆均分而不自專傳者」
以爲美談性不喜勢利之塗未嘗以權位自居歷官皆極淸要而門庭」
常淡如也人以爲宰相中布衣於先生始見之矣其事親也極其愛敬」
尹夫人歿後僉樞公獨居壽至九耋先生晝夜不離側飮食坐臥以至」
便旋之所皆自扶持其丁憂水漿不入口者三日豆米爲糜而不執匙」
者三月朞而猶啜粥三年不脫衰絰涕淚所漬枕席皆腐吉後亦不」
卽御於內人曰善居喪者乃執喪也唯此爲眞居喪者謂其非出於勉」
强也尹夫人遷葬在歿後二十年而哀戚無異袒括之日父母所嗜終」
6
身不忍食每當生朝悲咽不自勝諱辰先期十餘日號慕如初喪遇祖」
父母喪處之如重哀推之方喪以情居瘠哭泣悲慟哀動白僚凡會哭」
之日涕泗交流膽聆莫不感嘆祭祀極盡誠敬雖盛寒必沐浴日必冠」
帶拜家廟前易簣數日亦且力疾行之始太常議易名以文忠文敬擬」
首末而 聖批允其副先生至行盖已格于 上下矣其居家也撫愛」
宗族雖疎遠曲致恩意其窮而賤者尤加矜憐於諸子雖甚愛之有過」
不少寬假行已莅官教以正直不欺爲主親舊有喪皆盡情發哀相知」
也亦爲之食素義厚者或至月餘牛馬死皆埋之畜离不食雖大供具」
皆買之而不殺凡有生之物雖鷄豚螻蟻之徴必加隱恤僮僕隣里皆」
從化之每當荒歲必減損常食曰人皆飢餓我何心美食講求救荒之」
法廣傳閭里人多賴之其接物也誠實惻怛無毫髮邊幅常曰凡揣度」
最害事見事之疑似而揣其情目致喜怒則致人寃枉多矣故雖於徴」
賤必以忠恕行之嘗有不平者見其可取則坦懷待之不復置纖芥亦」
有薦進者平居豈弟樂易雖對吏胥輿儓不見有念厲之色然見人不」
7
正不忍正視疾惡斥邪凜然有不可犯者當朝議分裂之際絶不以偏」
黨爲心同不必與異不必非如李完平韓西平浚謙世所稱臭味不同」
者而誠信愛慕皆如親懿張新豊維崔完城鳴吉李延陽時白自少相」
善而至當論議是非不以親故有所苟合知先生者相謂日世之名爲」
賢士君子盖未有全無機關者獨趙公一生未見有修飾意思眞所謂」
不失赤子心者也嗚呼先生所稟於天者純乎陽德之剛生物之仁是」
以孝悌忠信之行誠於身而孚於物光明正大之心由乎中而達乎外」
聞其風而覿其貌者無不斂衽心服至於小人雖或巧爲謗詆然其極」
口不過以爲迂闊不近物情而已終不得不以善人歸之是豈可以聲」
音笑貌爲之哉先生愛 君憂國出於血誠立朝進言必則古昔慨然」
有格 君化民之志議者謂栗谷文成公以後論王道粹然無雜者唯」
先生一人而已嘗謂人主一身爲出治之本故自立志講學之道至發」
號施令之間內而宮禁外而朝廷事無大小苟係 上躬必深探其本」
而極言之癸亥有輪對之啓甲子 上方講大學論語則有進困得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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說疏乙丑有應 旨封事丙寅沙溪金先生長生承 召入京將欲還」
鄕則有請留啓戊辰臺諫論昭武寧 杜兩勳冒濫不公請改勘 上」
以已定難改不從則有箚 仁獻王后之喪宰臣有請別建一廟以奉」
 禰祭則有箚其祔也 上欲自主之則有箚己巳宰臣有論朋黨引」
朱子與留正書爲言 上批有朱子之言不能無弊之語則有箚庚午」
臺諫論 王子私田規外免稅之不可 上峻批拒之則有箚執義尹」
公論勳戚家婦女冒人宮闈之罪 嚴批特遞則有箚憲府論公私賤」
投屬內司之弊 上怒責之則有箚李公命俊論金斗男趙琦等女入」
宮事 上怒命揀擇嬪御則有箚癸酉雷震明政殿柱 上召諸臣求」
問闕失則有箚丙子朝廷絶虜和 上下教求所以大振作之方則有」
封事秋議遣通信使則有箚乙酉有論 世子講學疏戊子儀曺議大」
臣請矯 王子婚禮之僭 上嚴教斥之則有箚己丑有進論孟淺說」
疏有論治道疏愼獨齋金先生集與諸賢士召至京師則有請優禮啓」
 上講中庸則有進困得疏庚寅兪棨趙錫胤等以非罪被譴則有箚」
9
 上講書經則有論經筵疏甲午都城大水 上下教求言則有疏乙」
未有進書經淺說疏前後所言無非聖賢至論明白剴切懇惻條理李」
月沙廷龜見先生章箚歎曰儒先言語無以加矣嘗謂爲治必以仁政」
爲先而法制之未善者不可以不變故自田制兵制科擧等制至於一」
事一務苟係保民活國興化善俗之策無不援据古訓參酌時宜深思」
極言懇扣不已其論田制者曰大同以均民役革流弊也其論科擧之」
制者曰廢背講爲臨讀專主文義添講近思錄也其論兵制者曰良女」
所生從母役也曰爲僧者許納米還俗勿定軍役也曰減軍兵番布而」
上自卿相下至儒生雜品皆出布一匹用爲養兵資也曰嬰兒定役者」
待年十五而後徴其役也曰逃故在十年以前者皆許蕩滌也論號牌」
則曰此非先王之美政也論量田則曰田雖增賦不可加也論學政則」
曰四學及鄕教宜令讀小學太學宜令讀近思錄也曰宜倣程子說擇」
有經學者爲太學之師倣朱子說設山長主書院之教也論邊事於丙」
寅則曰救活海邊遇災之民也曰救活遼民也曰江邊待變之策也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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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子則曰激衆心也通下情也廣取士也擇將才也用土人也固城池」
也便弓制也導民人也是皆竭誠規畵務爲經遠之猷其方物發慮又」
皆鑿鑿切中時要請者曰此眞經世之文濟時之論也嗚呼先生遭遇」
昌辰歷事 三朝凡所論殆數千萬言 聖志必欲以帝王之心爲心」
 聖學必欲以帝王之學爲事以三代之道爲必可行以三代之治爲」
必可致終始一說未嘗少貶以投合俗人耳目 仁祖知先生學術忠」
誠深加敬重而當國諸臣無深識遠慮類皆媕婀憚事凡所陳達率多」
沮塞洎乎晚節進位勻軸若將卒行其志而適會狼狽去國汔未有所」
施設雖卷懷鄕園而未嘗一日忘斯世每聞 袞職之闕時政之失憂」
形於色眠食爲之不寧噫當 孝考末年奮發大志方欲懋聖學行王」
道立經改紀振民練兵以興至治而先生歿已數年矣有志之士咸以」
不及復用爲恨也先生始自北郵而歸也仍絶迹於城市西平開帥府」
辟從事固請三年而不應西平歎曰皎潔之身吾何敢强汚之哉時賊」
臣連起大獄以羅織人親戚懼禍及先生逌然曰死生命也轉寓於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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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之新昌縣道高山下飢寒困苦人不堪其憂而處之泊如朴潛冶知」
誡權晚悔得已亦不仕家居相與往復講磨雖當天地閉塞之日遠近」
皆知敬慕以爲彛倫賴以不墜嗚呼昔晉金傭之禍董養歎曰天人之」
理旣滅大亂作矣遂荷擔入蜀夫養一學子也固宜藏踪匿影以避淫」
禍若先生則旣已立于朝矣圭組利祿誘於前刀鉅鼎鑊怵乎後而乃」
能奮然夬決不惑不懼扶樹一世之綱常屹爲狂流之砥柱非夫易所」
謂特立遯世者殆不足以與此其視養之所處又豈不甚難矣哉至其」
末年一退毅然以防淫辭衛斯道自任終於跋前疐後而不悔則又卓」
乎其有巖巖之氣象矣奧自 宣廟癸未以後邪正未卞是非靡定及」
多士倡爲尊賢之擧也 上意槪疑其爲黨論先生以爲東方麗代以」
前士不知有聖賢之學本朝靜庵退溪二先生始得不傳之統於千載」
之後繼是而作者唯牛栗兩賢而已不幸仁弘者出而竝毁退溪及兩」
賢乙亥以後醜正之徒紹述仁弘其充塞仁義陷溺人心實爲世道無」
窮之害必欲闢之而後已故極力陳卞覬悟 聖聰言旣不行則遂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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身而退大臣臺諫交章請留 上追遣近臣 諭以還入先生具一疏」
畢陳當去之義卽日渡江歸鷗浦實庚寅十一月十六日也安牛山邦」
俊聞先生退以書賀之手製草履而送之自是常祿及月俸皆不入弊」
廬蕭然無異寒士唯左右經籍探討溫繹俛焉不知其老也所居有湖」
山之勝或命肩輿或泛扁舟時與林翁野老倘佯焉未嘗以達尊自高」
是時金文正公亦退居于石室人有二龍閑臥之歎嗚呼昔程氏之學」
厄於崇觀迄于南渡時則有若尹和靖自以不敢捨其所學力辭召命」
有若胡文定特請加之封號載之祀典其後晦庵夫子亦以淵源被斥」
引退而欲以胡公所議奏行古賢之尊其道統而謹其去就者盖如此」
若先生則可謂兼胡尹之義而獨得乎考亭之旨矣先生爲學不階師」
承自得於古人言語少時人有問四端七情之說答以四端是七情中」
善者後見栗谷所論則不異焉其見解之超詣類此以持敬存心爲一」
生本領工夫著持敬圖說心學宗方以自省常曰持敬以收斂操存爲」
要以精神湛然在裏爲驗又曰學者爲學其大意只要做私欲盡去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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理純全底人只要做光明灑落不媿天地鬼神底人只要做擔當天下」
事參天地贊化育底人其本只在心存又曰心存時神明不昧萬理渾」
具此時則雖聖賢之心亦只如此但聖人能持之久而學者不能耳誠」
能用功純熟久而不失則聖賢同歸矣以爲立志當一以聖賢爲法聖」
賢之言與事專在四書欲學聖賢無出於此故用功最深且專遇有疑」
難處輒逐一箚記積成卷帙間或立言於先賢成說之外人有疑之者」
則曰吾固知罪我在此然此理乃天下古今所同然之公物也先聖之」
立言垂訓後賢之解釋經義乃所以求此理也如或有疑當反復深思」
究極其所歸而已孔子之後集諸儒之大成者朱子也有功於後學多」
於孟子其釋經可謂盡矣而猶有曰不盡釋云者欲因其所釋而求之」
以及於其所未釋此誠先賢之所望於後學者也宣擧之見於渚上先」
生爲披大學說以授之曰此余積功所在錄之爲書者非欲求多於先」
賢要以質疑於後人爾盖先生之意本末如此非如王栢之徒自立一」
家有妨於大一統之義也平生手不釋卷年過七十聰明不減每於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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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看書夜分而後就枕或至達朝誨人諄諄不倦見有向善勤學者誠」
心喜悅勸導而成就之尊敬古先聖賢恒若奉對每與人說聖賢格言」
至行必咨嗟激切聽者感發其於禪道音律琴書兵法卜筮等書無不」
一見通曉而皆不屑爲於文章尤得之天才學語已識字未齔能屬文」
稍長汎覽博通刻意追古作者尹月汀根壽先生之從祖姑壻而尹夫」
人之季父也先生從之學月汀每見所作歎曰兩漢手也旣冠遂去之」
而專心於學月汀深惜之謂曰何不且數年從事使人得見希世之文」
乎申玄軒欽亦嘗稱之曰少日氣槪直欲斬平秀吉文章直欲作秦漢」
以上語旣而棄之醇如折節爲聖門之學變化氣質豈有如此人哉凡」
所著述辭達理通信筆寫出汪洋不窮張新豊每言義理之文非吾輩」
所及也有文集十五卷庸學困得各一冊論孟書經淺說各三冊易象」
槪略居業錄各一冊心法十二章開惑淺語道村雜錄和一冊家禮鄕」
宜二冊伊洛精要五冊朱書要類六冊朱文要抄十冊左氏史記漢書」
韓柳歐文抄等書藏于家先生始以不復名所居室以衣錦名堂又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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齋曰恭曰讀論曰日新最後曰存先生歿三年學者建書院於鷗浦之」
上以祠先生玄夫人籍星州郡守 贈參判德良之女高麗名臣德秀」
之後性莊正塞淵不憂貧窶不樂芬華親黨戚疎咸萃如歸而滿堂供」
具接應不倦內外族姻貴富隆極而質素勤儉未嘗求丐諸子婦女不」
敢競爲侈習仁孝之聞爲門闌所服凡擧丈夫子五人女子子一人長」
曰夢陽縣監次曰進陽郡守曰復陽吏曹參議文德直道見推士類曰」
來陽進士曰顯陽生員壯元女壻進士李相胄縣監有一男曰持綱別」
坐一女適進士安重郡守有二男曰持韓持常四女適柳謜厚尹推進」
士尹徴周季未行參議有四男曰持衡持成持謙持元二女適進士洪」
九成季未行進士有一男曰持憲二女適生員金一振朴泰斗生員有」
二男曰持恒持正門閭之大至先生而有慶 贈兵使都事兩祖左贊」
成 贈僉樞公領議政曾祖祖妣妣貞敬夫人孝子不匱錫以祚胤子」
姓兄弟蘭芳玉潔才猷文行大擅家聲而福善之理不克永終夢陽來」
陽顯陽三子及李相胄夫婦先以病歿先生卒後子孫男女相繼夭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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君子又以是疑於天道云銘曰」
維孝與忠人道之綱 維出與處君子之防 我觀斯世人鮮是克」
嗟惟先生獨盡其則 愉愉于家懇懇于庭 志切 君民行通神明」
植我彛倫明我正道 一身以殉百世可考 譬木有本其枝乃達」
譬泉有源其流乃活 本源於人則惟此心 此心之存一言曰欽」
先生之學盖得諸此 表裏行箴所以一致 常師聖賢日用經籍」
憤樂相循沒齒無斁 疊疊之業肫肫之德 荒年菽粟大冬松栢」
斯文有享大名在跡 小子何知維以篆石」
--(1행 비움)--
崇禎庚子 月 日           門人坡平尹宣擧撰」

 

 

 

중국 명나라 시대, 조선의 대광보국숭록대부이며 의정부 좌의정, 겸 영경연감 춘추관사이며 세자의 사부이며 시호(諡號)는 문효공, 호(號)는 포저인 조선생의 묘지명(서문을 함께 기록하였다.)

1655년 3월 10일에 포저 조선생이 광주(廣州) 구포(鷗浦)의 댁에서 춘추 77세로 돌아가셨다. 병이 위독하자 임금께서 내의(內醫)들을 보내 약을 하사하시고 진찰하도록 하셨다. 부음(訃音)이 전해지자 조정에서는 삼일 동안 조회를 열지 않았고, 여러 조랑(曹郞)들이 와서 사(喪事)를 도왔다. 주상께서는 거듭 신하들을 보내시고 왕세자(王世子)께서 관리를 보내서서 조문, 제사하셨다. 그 해 6월 10일에 대흥현(大興縣) 동화산(東華山) 백석동 손좌(巽坐) 건향(乾向) 손좌(巽坐) 건향(乾向)의 등성이에 장사지냈다. 이곳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내신 선고(先考)의 묘소 북쪽 등성이이다. 정경부인(貞敬夫人) 현씨(玄氏)는 다음해인 1656년 12월 17일에 다른 곳에서 천장(遷葬), 합부(合祔)하였다.
얼마 뒤에 그 아들 시랑군(侍郞君)이 가장(家狀) 한 편을 지어서 나에게 보여주고, 또 유당(幽堂)의 명문(命文)을 부탁하였다. 내가 명문을 짓기에 적합한 인물이 아니라는 뜻으로 사양하니, 시랑(侍郞)이 말하기를 “명문은 정성을 귀하게 생각하는 것이지 좋은 문장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대와 나는 형제와 같은 사이인데 그대가 어찌 사양하는가”라고 하였다. 내가 여러 번 사양하여 감히 받들지 않았는데 시랑(侍郞)이 계속 독려하였다. 내가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선생은 우리 아버지께서 외경(畏敬)하시던 분이시고, 내가 또한 외람되게도 기심(紀諶)의 사이에 놀아서 함장(函丈)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니 그 의리가 끝까지 사양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에 감히 선생의 세계(世系)와 천력(踐歷), 덕행(德行), 사업(事業), 그리고 출처(出處)와 학문의 크게 성취하신 바를 대략 서술하여 명(銘)에 이어 놓으려 한다. 아, 그러나 나같이 부족한 사람이 감히 선생의 묘에 명(銘)을 할 수 있겠는가.
삼가 살피건대 선생의 휘(諱)는 익(翼)이고, 자(字)는 비경(飛卿)이다. 스스로 호(號)를 존재(存齋)라고 하셨으니 포저(浦渚)는 학자(學者)들이 일컬은 것이다. 그 선대는 풍양현(豊壤縣) 사람이었고, 원조(遠祖) 맹(孟)은 고려(高麗)의 문하시중(門下侍中)이었다. 그 뒤에 휘(諱) 현범(賢範)은 수군절도사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는데 선생에게 고조(高祖)가 되시고, 증조(曾祖) 휘(諱) 안국(安國)은 또한 그 무(武)를 세습하여 은대(銀臺)에서 관직을 역임하였고, 여러번 군사 지휘권을 잡았다. 일찍이 왜구(倭寇)를 토벌할 때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않으니 사람들이 이 일로 인해서 그 후손들이 반드시 대성(大成)할 것을 알았다. 조부(祖父) 휘(諱) 간(侃)은 의빈부(儀賓府) 도사(都事)를 지내셨다. 선고(先考) 휘(諱) 영중(瑩中)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내셨다. 선비(先妣) 해평(海平) 윤씨(尹氏)는 현감(縣監) 춘수(春壽)의 딸이신데 성품이 인자하시고 사리(事理)에 통달하여 종당(宗黨)이 여인 가운데 군자라고 일컬었다. 시호(諡號)가 문정공(文正公)인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이 그 묘소에 명문을 지었다. 만력(萬曆) 기묘년(己卯年, 1579년) 4월 7일에 경성(京城) 동쪽의 댁에서 선생을 낳으셨다.
선생은 24세(1602년)에 과거에 뽑히셨고, 괴원(槐院)에 보임(補任)되셨다. 이때 간당(奸黨)들이 국정(國政)을 전횡(專橫)하니 심히 배척하였다. 육 년 뒤에 박사(博士)에서 승진하여 전적(典籍), 감찰(監察)이 되었고, 무신년(戊申年, 1608년)에는 평안도(平安道) 평사(評事)가 되었으며, 기유년(己酉年, 1609년)에는 옥당(玉堂)에 들어가 사서(司書)와 병조좌랑(兵曹佐郞)을 역임(歷任)하였다. 신해년(辛亥年, 1611년)에 삼자함(三字銜)을 띠고 수찬(修撰)이 되었다. 이때 정인홍(鄭仁弘)이 상소(上疏)하여 회재(晦齋)선정(先正)을 무고(誣告)하여 배척하니 선생이 연차(聯箚)를 올려 그 죄를 지극히 논박(論駁)하였다. 이로 인해 고산(高山) 찰방(察訪)으로 폄직(貶職)되었다. 계축년(癸丑年, 1613년) 관직을 버리고 광주(廣州)로 귀향(歸鄕)하였다. 이때 광해군의 정치가 혼란스러워 이이첨종용하여 국구(國舅)를 무고(誣告)하여 죽이고, 모후(母后)를 폐하자는 논의(論議)를 일으켰다. 이로부터 선생은 결단코 다시는 벼슬살이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굳히셨다. 그래서 옥당(玉堂)과 기성(騎省), 관서좌막(關西佐幕), 대동(大同) 독우(督郵)에 연이어 제수되고, 또 빈사(儐使) 제술관(製述官)으로 재촉하는 부름을 받았으나 다 나아가지 않았다.
계해년(癸亥年,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이조좌랑(吏曹佐郞)이 되었다. 이때 잘못된 정사(政事)를 경장(更張)하고, 사도(四道)에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완평(完平) 이원익(李元翼)계(啓)를 올려 선생이 재생청(裁省廳)선혜청(宣惠廳)낭청(郎廳)을 겸하게 하도록 청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호당(湖當) 독서(讀書)에 선발되었고, 정랑(正郞)에 승직되어 교서(校書), 교리(敎理), 혜민의학교수(惠民醫學敎授), 훈국도청(訓局都廳)을 겸하였다.
갑자년(1624년) 역적 이괄(李适)군사를 일으키자 공주(公州)로 가는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하였다. 이괄의 난이 평정되고 서울로 돌아와 3월에 검상(檢詳)사인(舍人)이 되었다가 차례로 전한(典翰), 사간(司諫), 응교(應敎)를 역임하고 직제학(直提學)에 올랐으니 중흥(中興)한 뒤로 홀로 선생이 이 관직을 맡았다. 체직(遞職)되어 사복시정(司僕寺正)이 되었다가 12월에 다시 전한(典翰), 직제학(直提學)을 거쳐 동부승지(同副承旨) 겸 선혜청(宣惠廳) 부제조(副提調)에 승진하였다.
을축년(乙丑年, 1625년) 2월에 체직되어 형조참의(刑曹參議)가 되었고, 얼마 뒤에 은대(銀臺)로 돌아왔다. 병인년(丙寅年, 1626년)에 도승지(都承旨)가 되고, 7월에 특별히 한성좌윤(漢城左尹)에 승진하였고, 8월에 개성(開京)에 출수(出守)하였다. 정묘년(丁卯年, 1627년) 12월에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어 서울로 돌아왔고, 무진년(戊辰年, 1628년) 부제학(副提學)으로 옮겼다가 또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 옮겨 비국(備局)의 유사당상(有司堂上)을 겸하였다. 기사년(己巳年, 1629년) 4월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를 겸하고, 잇달아 헌부(憲府)미원(薇垣), 옥당(玉堂)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이로부터 십수년 간 거한 바가 삼사(三司) 삼사(三司) : 조선시대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 홍문관(弘文館)을 가리키는 말.
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대사성(大司成)과 병조참판(兵曹參判), 지신(知申)
, 아전(亞銓)을 배수(拜受)하고 특명(特命)으로 사유(師儒)를 겸하여 훈적(訓迪)을 전담(專擔)하도록 하였으니 실직(實職)겸하는 것은특이한 경우이다.
신미년(辛未年, 1631년) 3월에 어머니 상을 만났는데 상이 끝나자 특별히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승진하였다. 갑술년(甲戌年, 1634년) 동지경연관사(同知經筵館事), 성균관사(成均館事), 세자우부빈객(世子右副賓客)을 겸하였다. 또 예문제학(藝文提學)을 겸하게 되자 사장(詞章)을 익히지 못했다는 것을 핑계로 힘껏 사양하였으나 해당 관청에서 사마광(司馬光)이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역임한 일을 인용하여 고하니 주상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다. 병자년(丙子年, 1636년) 공조판서(工曹)의 판서(判書)와 판윤(判尹)에 제수되었고, 가을에 다시 춘관(春官)의 장(長)이 되었다. 12월에 금(金)나라가 처들어 와서 4일 만에 국도(國都)에 다다르니 주상께서 장차 강화도로 행차하시려 하였다. 선생이 스스로 어가를 수행하려고 참판으로 하여금 묘주(廟主)를 받들게 하고, 큰 아들로 하여금 아버지 첨추공(僉樞公)을 모시고 먼저 출발하도록 하였는데 잠깐 사이에 서로의 행방을 잃었다. 이날 바람과 눈이 매우 차가워 선생이 울부짖으며 찾으셨는데 그 소재(所在)를 알았을 때 어가(御駕)는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옮겨가고, 적병(賊兵)들이 길을 막고 있었다. 이에 선생께서는 통곡(痛哭)하시고 2·3명의 사부(士夫)들과 함께 남양(南陽)에서 의병을 모았다. 그런데 남양부사(南陽府使) 윤계(尹棨) 가 적에게 죽자 모인 군사들이 모두 놀라 궤산(潰散)하니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이에 강화도 분사(分司) 에 들어갔는데 다음날 갑진(甲津)이 무너졌다. 선생이 나룻가에 나가서 살펴보시다가 적이 다가와도 움직이지 않으셨는데 따르는 사람들이 구해주어서 화를 면(免)하였다.
주상께서 서울로 돌아오신 다음 조정의 말이 왕을 호종(扈從)하지 못한 사람들의 죄를 논하게 되었다. 선생이 이에 의금부(義禁府)에 나가 심리를 받은 다음 벼슬을 그만두고 향리(鄕里)로 돌아왔다. 무인년(戊寅年, 1638년)에 유석(柳碩)과 이계(李烓) 등이 전날에 있었던 일을 가지고 무고(誣告)하고 아울러 김상헌(金尙憲)을 논죄(論罪)하여 유배보내기를 청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주상께서 선생의 잘못됨이 불행(不幸)에서 비롯되었음을 알아주셔서 마침내 그들의 청(請)을 따르지 않으셨다.
계미년(癸未年, 1643년)에 왕손보양관(王孫輔養官)의 직책으로 소명(召命)이 있으셨으나 조정에 들어가 선생의 정회(情懷)를 진달(陳述)하고 돌아왔다. 을유년(乙酉年, 1645년)에 종백(宗伯) 을 배수하고, 병술년(丙戌年, 1646년)에 총재(冢宰)를 배수하였으나 다 나가지 않으셨다. 이해 5월에 부친상(父親喪)을 당했다. 무자년(戊子年, 1648년)에 복(服)이 끝나자 좌참찬(左參贊)을 제수하시고 특별히 역말을 내려서 부르셨다. 기축년(己丑年, 1649년)에 종백(宗伯)의 신분으로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을 겸하였다. 이해 5월에 인조대왕(仁祖大王)께서 승하(昇遐)하셨다. 이때 선생께서는 막 도헌(都憲)에 이직(移職)하셨는데 대신(大臣)들이 의조(儀曹) 의 일을 섭행(攝行) 할 것을 청하였다. 8월에 우의정(右議政)을 배수하고, 좌의정(左議政) 으로 승진하여 산릉(山陵)의 일을 모두 돌보았다.
경인년(庚寅年, 1650년) 체직(遞職)되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다. 이보다 앞서 태학(太學)의 제생(諸生)들이 상소(上疏)하여 율곡(栗谷)
우계(牛溪) 두 선생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였는데 주상께서 윤허(允許)하시지 않으시고, 일종(一種)의 사설(邪說)이 틈을 타서 무고하고 헐뜯었다. 이에 선생이 차(箚)를 올려 두분 선현(先賢)의 덕행(德行)의 사실을 지극히 개진(開陳)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태학의 제생들이 또 전과 같은 청을 올림에 사설이 또 일어나 말이 대단히 추악하고 도리에 어긋났다. 선생이 차(箚)를 올려 두 신하(율곡과 우계)의 사전(祀典)
은 마땅히 조정에서 의논하여 정해야 한다고 말하고, 인하여 선현(先賢)을 무고(誣告)하고 주상을 기망(欺罔)한 정상(情狀)을 밝혔으나 주상께서 다 살피지 않으셨다. 그러자 선생이 드디어 네 번의 상소(上疏)를 통해 조정에서 떠나겠다고 요구하고 이로부터 다시는 조정에 돌아가지 않았으며 여러번 상소하여 치사(致仕)를 구하였다.
신묘년(辛卯年, 1651년) 3월 작은 일에연좌되어 관작(官爵)을 삭탈(削奪)당했다가 8월에 풀려나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복위(復位)하셨고, 재상의 자리를 떠난 지 7년 만에 운명하셨다. 금상(今上) 1년(1660년)에 문효(文孝)라는 시호(諡號)를 하사(下賜)하셨다.
선생이 처음 태어나실 때 흑룡(黑龍)이 꿈에 나타나는 길조(吉兆)가 있었다. 3세에 바둑돌을 늘어놓아 괘(卦)를 이루는 놀이를 하니 듣는 사람들마다 기이하게 생각하였다. 5세에 이웃의 노인이 옷을 벗어서 한 곳에 두고 선생으로 하여금 지켜 보게 하였는데 저물녁에 돌아와 보니 선생이 그때까지도 자리를 떠나지 않고 지키고 있었다. 8세에 중봉(重峰) 조헌(趙憲)
선생이 송사(訟事)에 연좌되고, 두 선현(율곡과 우계)이 여러 소인배들에게 배척된다는 소리를 듣고 곧바로 분개하여 글을 써서 옳고 그름을 진술하였는데 여러 어른들이 그 글을 보고 경탄하였다. 그 어려서부터 성취된 천부적 자품이 이미 이와 같았고, 또 충양(充養)의 공을 거듭하니 청명(淸明)하고 순수(純粹)한 덕성(德性)과 온화(溫和)하고 인애(仁愛)한 기상은 바라봄에 대인(大人) 군자(君子)가 될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몸가짐은 매일 새벽에 일어나 의관(衣冠)을 정제하고 단정하게 앉아서 일찍이 한쪽으로 기울거나 기대지 않았으며 큰 질병이 아니면 일찍이 낮에 눕는 일이 없었다. 세속의 욕이나 상스러운 말들을 입에 담지 않고, 이천(伊川)의 순욕의 경계를 지극한 말이라 여겼다. 서북지역에서 관직 생활할 때는 끝까지 여색(女色)을 가까이 하지 않았고, 만년(晩年)에 상처(喪妻)한 뒤로는 다시 부인을 얻지 않았다. 스스로를 봉양(奉養)함이 매우 검소하여 기호(嗜好)하는 바가 없었고, 종신(終身)토록 사치스럽고 맛있는 음식을 내오게 하지 않았으며 염색한 옷을 입지 않았다. 벼슬길에 나간 지50년에 삼공(三公)의 지위에 올랐으나 경향(京鄕)에 환도(環堵)의 집이 없었고, 외방(外方)에서 보내오는 예물이 조금이라도 지나친 것이 있으면 전혀 받지 않았으며, 친족(親族) 가운데 읍재(邑宰)가 된 사람이 있어도 물건 하나 요구하는 일이 없었다. 옹사(饔司)와 기국(耆局)에서 마땅히 얻을 수 있는 것들은 모두 균등하게 나누어 써서 전용(專用)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전해서 미담(美談)을 삼았다. 성품이 세리(勢利)의 길을 좋아하지 않아 일찍이 권력있는 자리에 스스로 거하지 않아서 역임(歷任)한 관직이 모두 청요직(淸要職)이었으나 집안은 항상 담박하였으니 사람들이 재상(宰相) 가운데 베옷 입은 사람을 선생에게서 처음 보았다고 하였다.
어버이를 섬김에는 사랑과 공경을 지극히 하였다. 어머니 윤씨(尹氏) 부인(夫人)이 돌아가신 뒤로 아버지 첨추공(僉樞公)께서 홀로 사셔서 연세가 90에 이르셨는데 선생이 밤이나 낮이나 곁을 떠나지 않고, 먹고 마시는 것과 안고 누우실 때 심지어 소변 보시는 데까지 스스로 부축하고 다녔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수장(水漿)을 입에 넣지 않은 것이 삼일이었고, 콩과 쌀로 죽을 만들어 먹고 숟가락을 잡지 않은 것이 석 달이었고, 기년(期年)에도 오히려 죽을 먹었으며, 상사를 치루는 삼 년 동안 최질(衰絰)을 벗지 않았고, 눈물에 적은 침석(枕席)이 다 썩을 정도였다. 담제(禫祭)를 지낸 뒤에도 또한 곧바로 안에 들어가지 않으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잘 거상(居喪) 한다는 것은 곧 집상(執喪)하는 것이니 오직 이와 같이 하는 것이 참된 거상(居喪)이라고 하였으니 선생의 행동이 억지로 노력하는 데서 나온 것이 아님을 이른 것이다. 어머니 윤씨의 천장(遷葬)이 돌아가신 뒤 20년 뒤에 있었는데 슬퍼하는 것이 단괄(袒括)의 날과 다름이 없었다. 부모님께서 좋아하시던 음식은 죽을 때까지 차마 먹지 못하였다. 매년 부모님의 생신(生辰)을 맞이하면 목 메이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였고, 휘일(諱日) 십 일 전부터 호곡(號哭)과 사모(思慕)함이 초상 때와 같았다. 조부모(祖父母) 상을 만나서는 처하는 것이 대단히 슬픈 듯이 했고 추모하는 것이 초상 때와 같이 해서 진정으로 슬퍼하고 비통하게 곡해서 슬퍼함이 모든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무릇 곡하는 날에는 눈물과 콧물이 흘러 내려서 보고 듣는 사람들이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제사를 모실 때는 정성과 공경을 지극히 다하여 비록 대단히 추운 날씨라도 반드시 목욕하였으며 날마다 반드시 관대를 갖춰 입고 가묘에 배알(拜謁)하였는데 돌아가시기 몇일 전까지도 또한 힘써 행하였다. 처음 태상부(太常府)에서 시호(諡號)를 의논할 때에 문충(文忠)과 문경(文敬)을 첫 번째와 마지막에 두었는데 주상께서 그 두 번째 것으로 정하셨으니 선생의 지극한 행실이 대개 이미 상하에 이른 것이다.
선생이 집에 거처하실 때는 종족(宗族)들을 사랑으로 어루만져서 비록 소원(疏遠)한 관계라 하더라도 곡진히 은의(恩意)를 이루었는데 그 중 가난하고 천한 사람은 더욱 더 불쌍하게 여겼다. 여러 자녀(子女)들에 대해서는 비록 매우 사랑하였으나 과실이 있으면 조금도 너그럽게 하지 않았다. 처신(處身)과 관직에 임하는 태도에 대해서는 정직(正直)과 기만(欺瞞)하지 않음을 강조하여 가르쳤다.
친구 가운데 상사(喪事)가 있으면 다 진정으로 슬퍼하였고, 서로 아는 사이일 때는 또한 그들을 위해서 음식을 소박(素朴)하게 드셨는데 의(義)가 두터운 사람에 대해서는 혹 한 달 여에 이르기까지 하였다. 소나 말이 죽으면 다 묻어주었고 기르던 가축을 먹지 않았으니 비록 큰 공구(供具)라도 다 사서 사용하고 죽이지 않았다. 무릇 생명이 있는 물건은 비록 닭이나 돼지, 누의(螻蟻)와 같은 미물이라도 반드시 다 불쌍하게 여겼으니 종들과 이웃의 사람들이 다 선생을 따라 교화(敎化)되었다. 매번 흉년을 당하면 반드시 평상시 드시던 음식보다 적게 잡수시며 말씀하시기를 사람들이 다 굶주리는데 내가 어찌 맛있는 음식에 마음을 둘 수 있겠는가 하시고, 구황(救荒)의 방법을 강구하여 널리 고을에 전하니 사람들이 많은 도움을 받았다.
선생이 사물을 대하는 것이 성실(誠實)하고 측달(惻怛) 하여 터럭 만큼도 꾸밈 이 없었다. 항상 말하기를 무릇 사물을 헤아리는 것은 가장 해로운 일이므로 일의 의사(疑似) 한 것을 보고서 그 실정(實情)을 헤아려야 하니 그 일로 인해서 기쁨이나 노여움을 이룬다면 사람들을 억울한 죄에 빠뜨리는 경우가 많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비록 미천한 것이라도 반드시 충서(忠恕)로써 행하였다. 일찍이 불평이 있는 사람이 있어도 취할 만한 것을 발견하면 허심탄회하게 대해서 다시 조금도 꺼리는 마음을 두지 않아서 천진(薦進)한 사람도 있었다. 평소 거처할 때에는 기상이 온화(溫和)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비록 이서(吏胥)들과 하인을 대할 때도 성내거나 사나운 낯빛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의 정직하지 못한 것을 보면 차마 똑바로 바라보지도 않았으니 악(惡)을 미워하고 사(邪)를 물리치는 당당한 모습은 범접할 수 없는 면이 있었다.
조정의 논의가 분열되는 때를 당해서는 절대로 편당(偏黨)으로 마음을 두지 않아서 같은 당이라도 반드시 함께 하지도 않았으며 다른 당이라도 반드시 배척하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이원익이나 한준겸 과 같은 인물들은 세상에서 함께 하지 못할 사람들이라고 일컬었는데도 진실로 믿고 아껴서 다 좋은 사이로 지냈으며, 장유최명길, 이시백과 같은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서로 잘 지낸 사이였지만 논의(論議)의 시비(是非)에 이르러서는 친한 사이라 하여 구차히 함께 하지 않았으니 선생을 아는 사람들이 서로 일러 말하기를 세상에서 어진 사군자(士君子)라고 이름 불리는 사람들이 대개 기관(機關) 이 전혀 없는 사람이없거늘 오직 조익 선생만은 평생 의사(意思)를 꾸밈이 없었으니 진실로 이른바 적자(赤子) 의 마음을 잃지 않은 사람이라고 하였다.
아! 선생이 하늘에서 품부(稟賦) 받은 것은 순수한 양덕(陽德)의 강(剛)과 생물(生物)의 인(仁)이다. 이러므로 효제(孝悌)와 충신(忠信)의 행함이 자신에게 성실하게 한 뒤에 사물에 미쳐서 믿음을 얻었고, 광명(光明) 정대(正大)한 마음이 중심(中心)에서 말미암아 나와서 외부에 도달하였으니 선생의 풍모(風貌)를 듣고 보는 사람들이 옷깃을 여미고 진심으로 복종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소인(小人)들에게 이르러서는 혹 교묘하게 헐뜯는 이들이 있기도 하였으나 그 온갖 말들이 우활(迂闊)하여 사물의 실정에 가깝지 못하다는 정도에 지나지 않아서 마침내는 선인(善人)이라고 인정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좋은 목소리와 웃는 얼굴로 외모를 꾸며서 하는 것이겠는가 선생이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것은 혈성(血誠)에서 나왔다. 조정에 서서 진언(進言)할 때는 반드시 옛 것을 본받아 개연(慨然)이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고 백성을 교화시키려는 뜻을 두었으니 의논하는 사람들이 이르기를 문성공(文成公) 율곡(栗谷) 이후 왕도(王道) 에 대해서 논의한 것이 순수해서 잡된 것이 없기로는 오직 선생 한 분 뿐이라고 하였다. 일찍이 이르기를 인주(人主)의 한 몸은 정치를 내는 근본이므로 뜻을 확립하여 학문을 강마하는 도(道)로부터 호령하여 명령을 시행하는 사이에 이르기까지와 안으로는 궁궐과 밖으로는 조정, 일의 대소(大小)에 관계 없이 모든 것이 진실로 주상의 한 몸에 관계된다고 하여 반드시 깊이 그 근본을 탐구하여 극진히 말하였다.
계해년(癸亥年, 1623년)에는 윤대(輪對)의 계(啓)가 있었고, 갑자년(甲子年, 1624년)에는 주상께서 바야흐로 ?대학(大學)?과 ?논어(論語)?를 익히려 하셨으므로 「진대학곤득논어천설소(進大學困得論語淺說疏)」가 있었고, 을축년(乙丑年, 1625년)에는 응지(應旨)한 봉사(封事)가 있었다. 병인년(丙寅年, 1626년)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선생이 소명(召命)을 받들어 서울에 올라왔다가 장차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자 머무르도록 청하는 계(啓)가 있었고, 무진년(戊辰年, 1628년)에 대간(臺諫)들이 소무공신(昭武功臣)영사공신(寧社功臣)에 대한 처우가 지나치고 공평하지 못하다하여 다시 헤아려 고칠 것을 청하였으나 주상께서 이미 정해진 일이라 고치기 어렵다하여 받아주시지 않자 차(箚)를 올렸다.
인헌왕후(仁獻王后) 의 상(喪)에 재신(宰臣)들이 별도로 한 묘(廟)를 건립하여 녜제(禰祭)를 받들자고 청할 때 차(箚)가 있었고, 그 합부(合祔)할 때에 주상께서 스스로 주관하시고자 할 때도 차(箚) 가 있었다. 기사년(己巳年, 1629년) 재신(宰臣)들이 붕당(朋黨)을 논하면서 주자(朱子)가 유정(留正)에게 보낸 편지를 인용하여 말하자 주상께서 주자의 말에도 어폐(語弊)가 없지 못하다는 뜻으로 비답(批答)하자 차(箚)가 있었다. 경오년(庚午年, 1630년) 대간에서 왕자(王子)의 사전(私田)에 대해서 면세(免稅)하는 것이 불가(不可)하다는 것을 논함에 주상께서 준엄(峻嚴)하게 비답하여 거절하자 차(箚)가 있었다. 집의(執義)인 윤공(尹公)이 훈척가(勳戚家)의 부녀자(婦女子)들이 대궐을 함부로 드나드는 죄에 대해서 논함에 엄격히 비답하여 체직(遞職)하자 차(箚)가 있었다.
사헌부(司憲府)에서 공천(公賤)과 사천(私賤)내수사(內需司)에 투속(投屬)하는 폐단을 논함에 주상께서 노하여 책망하자 차(箚)가 있었다. 이명준(李命俊)이 김두남(金斗男)과 조기(趙琦) 등의 딸이 입궁(入宮)한 일을 논하였는데 주상께서 노하여 명령을 내려 빈어(嬪御)로 간택하자 차(箚)를 올렸다. 계유년(癸酉年, 1633년) 명정전(明政展) 기둥에 우레와 번개가 치자 주상께서 여러 신하들을 부르셔서 잃은 바를 구하여 물으심에 차(箚)를 올렸다. 병자년(丙子年, 1636년) 조정이 오랑캐와 화의(和議)를 맺자 하교(下敎)하셔서 국운(國運)을 크게 진작(振作)시킬 수 있는 방도를 구하심에 봉사(封事)를 올렸다. 그해 가을 통신사(通信使)를 파견하는 문제에 대해서 논의함에 차(箚)를 올렸다.
을유년(乙酉年, 1645년) 세자(世子)의 강학(講學)에 대해 논한 상소(上疏)가 있고, 무자년(戊子年, 1648년) 예조(禮曹)에서 대신(大臣)들이 왕자(王子)의 혼례를 바로잡기를 청하는 참람(僭濫)함을 논함에 주상께서 엄한 하교로 배척하시니 차(箚)를 올렸다. 기축년(己丑年, 1649년) 논맹천설소(論孟淺說疏)가 있고, 치도(治道)를 논의한 소(疏)가 있으며,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이 여러 어진 선비들과 함께 서울에 올라옴에 넉넉히 예우(禮遇)할 것을 청하는 계(啓)가 있었으며, 주상께서 ?중용(中庸)?을 익히심에 「진용학곤득소(進庸學困得疏)」가 있었다.
경인년(庚寅年, 1650년) 유계(兪棨)조석윤(趙錫胤)등이 죄가 없는데도 꾸지람을 당하자 차(箚)가 있었다. 주상께서 ?서경(書經)?을 익히심에 경연(經筵)에 대하여 논의한 상소가 있었다. 갑오년(甲午年, 1654년) 도성에 큰 홍수가 발생함에 주상께서 하교(下敎)하셔서 대책을 구하시니 소(疏)가 있었다. 을미년(乙未年, 1655년) 「진서경천설소(進書經淺說疏)」가 있었다.
이상과 같이 전후의 말한 바가 성현(聖賢)의 지론(至論)이 아닌 것이 없었고 논리가 명백하고 적절하였으며 내용이 간절하고 조리(條理)가 있었다.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가 선생의 글을 보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선생의 언어는 더 더할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선생이 일찍이 이르기를 정치는 반드시 인정(仁政)으로 최우선을 삼아야 하고 법제(法制)의 좋지 못한 것들은 불가불(不可不) 바꿔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전제(田制)와 병제(兵制), 과거(科擧) 등의 제도로부터 한 가지 일, 한 가지 업무에 이르기까지 진실로 백성을 보호하고 나라를 살리며, 교화를 일으키고 풍속을 선하게 하는데 관계된 방법은 옛 가르침을 이끌어서 의거(依據)하고, 시의(時宜)를 참작(參酌)하며, 심사숙고하여 극진히 말해서 간절히 지혜 짜내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선생이 전제(田制)를 논한 것은 곧, 대동법(大同法)으로 백성들의 부역(賦役)을 균등하게 하고 유폐(流弊)를 개혁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과거제(科擧制)에 대해 논한 것은 곧, 배강(背講)을 폐지하고 임독(臨讀)할 것과 오로지 문의(文義)의 파악에 주안점을 둘 것, ?근사록(近思錄)?을 더하여 강(講)할 것 등이었다. 병제(兵制)를 논한 것은 곧, 양녀(良女)의 소생(所生)은 모역(母役)을 따를 것, 승(僧)이 된 자가 쌀을 납부하고 환속(還俗)하는 것을 허락하되 군역(軍役)을 정하지 말 것, 군병(軍兵)의 번포(番布)를 감하고 위로는 경상(卿相)으로부터 아래로는 유생(儒生)과 잡품(雜品)에 이르기까지 모두 포(布) 한 필(匹)을 내서 군사를 기르는 자본으로 삼을 것, 영아(嬰兒)들 가운데 역(役)이 정해진 이들은 열 다섯 살이 되기를 기다려 그 역(役)을 징발(徵發)할 것, 도망가거나 죽은 지 10년 이상 된 사람은 모두 탕척(蕩滌)을 허락할 것 등이었다.
호패(號牌)에 대해서 논한 것은 곧, 이것이 선왕(先王)의 아름다운 정사(政事)가 아니라고 한 것이며, 양전(量田)에 대해서 논한 것은 곧, 전답(田畓)이 비록 증가하더라도 세금은 더하지 아니한다는 것이다. 학정(學政)을 논한 것은 곧, 사학(四學)과 향교(鄕敎)는 마땅히 하여금 ?소학(小學)?을 읽게 하여야 하고, 태학(太學)은 마땅히 하여금 ?근사록(近思錄)?을 읽게 할 것, 마땅히 정자(程子)의 설(說)을 본받아 경학(經學)이 있는 사람을 선택해서 태학(太學)의 선생을 삼고, 주자(朱子)의 설(說)을 본받아 산장(山長)이 서원(書院)의 교육을 주관하도록 할 것 등과 같은 것이다.
변사(邊事)를 논한 것은 병인년(丙寅年, 1626년)의 재앙을 만난 해변(海邊)의 백성들을 구제할 것, 요(遼)의 백성들을 구제할 것, 강변(江邊)의 변고(變故)를 대비하는 대책(對策)과 병자년(丙子年, 1636년)의 민중(民衆)의 마음을 격동(激動)시킬 것, 하층민(下層民)의 실정을 파악할 것, 널리 능력있는 선비를 취할 것, 장수의 재목을 선택할 것, 지역의 인사를 등용할 것, 성지(城池)를 견고하게 할 것, 궁제(弓制)를 편리하게 할 것, 백성들을 인도할 것 등이었다.
이상의 모든 일은 정성을 다해 계획하여 먼 앞날을 내다보고 경영하는데 힘쓴 방책들이었다. 그 일의 성격에 따라 생각을 일으킨 것이 또 다 분명하게 시대의 요구에 맞았으니 선생의 글을 읽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것은 진실로 경세(經世)의 문장이며 한 시대를 구제하는 의논이라고 하였다.
아! 선생이 번창한 시대를 만나 세 조정을 섬겼는데 무릇 논의한 바가 자못 수천만 언(言)이나 된다. 임금의 지(志)는 반드시 제왕(帝王)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게 하고자 하였고, 임금의 학문은 반드시 제왕(帝王)의 학문으로 일을 삼고자 하였으며, 삼대(三代)의 도(道)를 반드시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삼대의 정치를 반드시 성취할 수 있다고 여겨서 시종일관 한 마디 말도 일찍이 조금 깎아 내려서 속인들의 이목(耳目)에 맞추려 하지 않았다. 인조(仁祖)께서 선생의 학술(學術)과 충성(忠誠)을 아셔서 깊이 공경(恭敬)과 경중(敬重)을 더하셨으나 국정을 담당한 여러 신하들이 깊은 학식과 먼 앞날을 염려함이 없이 모두 주저하고 일을 꺼려서 선생께서 진달(進達)한 말들이 대부분 저지되어 실천되지 못했다. 만년(晩年)에 이르러서는 지위가 재상(宰相)의 자리에 올라 장차 마침내 그 뜻을 행할 수 있을 것 같더니 마침 낭패(狼狽)스러운 일을 만나 국정에서 물러났으니 거의 시행한 바가 없었다. 비록 시골에 묻혀 살았으나 일찍이 하루도 세상의 일을 잊은 적이 없었다. 매번 주상께서 잘못 하시는 것과 시정(時政)의 과실(過失)을 들으면 걱정이 얼굴에 나타나고, 그로 인해 침식(寢食)이 편안하지 못하였다.
아, 효종 말년에 대지(大志)를 분발시켜서 바야흐로 성학(聖學)에 힘쓰고, 왕도(王道)를 행하며 기강을 확립하고 기율(紀律)을 고치며 백성을 진작(振作)시키고 병사들을 훈련시켜서 지치(至治)를 일으키고자 하였으나 선생이 돌아가신 지 이미 여러 해인지라, 뜻있는 선비들이 다 다시 등용하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겼다.
선생이 처음 서울에서 귀향하실 때 성시(城市)에 자취를 끊었는데 서평(西平)수부(帥府)를 열어 종사자들을 물리치고서 진실로 청하기를 3년이나 하였으나 응하지 않았으니 서평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희고 깨끗한 몸을 내가 어찌 감히 억지로 더럽힐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때에 적신(賊臣)들이 연달아 대옥(大獄)을 일으켜 죄를 꾸며서 사람들을 잡아 넣으니 친척(親戚)들이 화(禍)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러자 선생이 느긋하게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천명(天命)에 달린 일이라고 하였다.
주거를 호서(湖西)의 신창현(新昌縣) 도고산(道高山) 아래로 옮기시니 기한(飢寒)과 곤고(困苦)에 사람들이 그 근심을 이기지 못하거늘 선생은 태연하게거처하였다. 잠야(潛冶) 박지계(朴智誡)와 만회(晩悔) 권득기(權得己)가 또한 벼슬하지 않고 집에 거처하고 있었으므로 서로 오가며 학문을 강마(講磨)하였으니 비록 천지(天地)가 폐색(閉塞)되는 날을 당하더라도 원근(遠近)의 사람들이 다 공경하고 사모하여 이륜(彛倫)이 선생을 힘입어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으로 여겼다.
아, 옛날 진(晉)나라 금용(金傭)의 화(禍)에 동양(董養)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하늘과 사람의 이치가 이미 사라짐에 대란(大亂)이 일어났다고 하고 드디어 짐을 꾸려서 촉(蜀)으로 들어 갔다. 동양은 한 학자이므로 진실로 마땅히 자취를 감춰서 화를 피해야 하지만 선생과 같은 분은 이미 조정에 출사하였으니 높은 벼슬과 많은 녹봉(祿俸)이 앞에서 유혹하고, 칼과 톱과 정확(鼎鑊)이 뒤에서 위협해도 이에 능히 분연(奮然)히 결단을 내려서 의혹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한 시대의 강상(綱常)을 부지하여 세우고 우뚝하게 광류(狂流) 가운데 지주(砥柱)가 되었으니 ?주역(周易)?의 이른바 홀로 우뚝 서서 세상을 피해 마음에 번거로움이 없는 사람이 아니면 자못 이러한 경지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이다. 동양(董養)의 처세한 바와 비교할 때 또 어찌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니었겠는가.
말년에 한 번 물러나서는 의연하게 음사(淫辭)를 막고 사도(斯道)를 지키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를 삼아서 전발후치(前跋後疐) 선조(宣祖) 계미년(癸未年, 1583년) 이후로 사(邪)와 정(正)이 분변(分辨)되지 않고, 옳고 그름이 정해지지 않아서 많은 선비들이 선현(先賢)들을 높이려고 하였지만 주상의 뜻은 당론(黨論)일 뿐이라고 의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선생이 생각하기를, 우리나라가 고려시대 이전에는 선비들이 성현(聖賢)의 학문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고, 본조(本朝)정암(靜庵)퇴계(退溪) 두 서생이 비로소 천 년의 뒤에 세상에 전해지지 않던 도통(道統)을 얻었었으며 이를 이어서 일어난 사람은 오직 우계(牛溪)와 율곡(栗谷) 두 선현(先賢) 뿐이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정인홍(鄭仁弘)이 나와서 퇴계와 우계·율곡을 함께 훼손하였고, 을해년(乙亥年, 1635년) 이후 바른 것을 미워하는 무리들이 정인홍을 이었으니 그들이 인의(仁義)를 틀어 막고 인심을 함닉(陷溺)시켜서 실상 세도(世道)의 무궁한 해가 되니 반드시 그들을 물리친 뒤에 그칠 것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힘을 다해서 시비를 분변하여 임금에게 진달하여 임금의 총명을 깨우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미 선생의 말이 실행되지 않자 드디어 조정에서 물러났다. 이에 조정의 대신(大臣)들과 대간(臺諫)에서 서로 임금에게 글을 올려 잡아 머무르게 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임금께서 가까운 신하를 보내서 다시 조정으로 돌아오게 하였으나 선생은 상소문 하나를 올려 마땅히 떠나야 하는 의(義)를 모두 진술하고 그날로 한강을 건너 구포(鷗浦)로 돌아왔으니 경인년(庚寅年, 1650년) 11월 16일의 일이었다.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이 선생의 물러남을 듣고 글로 축하해 주었고, 손수 짚신을 만들어 보내 주었다. 이때부터 상록(常祿)과 월봉(月俸)이 다 들어오지 않았으므로 쓰러져가는 집이 쓸쓸하기 그지없어 한빈(寒貧)한 선비와 다를 바가 없었으나 선생은 오직 경서와 서적을 좌우에 두시고 공부하는데 힘쓰셔서 그 늙음을 알지 못하였다.
거처하신 곳에 호수와 산의 좋은 경치가 있었으니 혹은 가마를 명하고, 혹은 작은 배를 띄워 숲과 들의 늙은이들과 노닐었으나 일찍이 달존(達尊)으로 스스로를 높이지 않았다. 이때 문정공(文正公) 김상헌이 또한 석실에 퇴거(退居)하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두 마리 용이 한가롭게 누워있다고 탄식하였다. 아!, 옛날 정씨(程氏)의 학문은 숭관(崇觀)에게 액(厄)을 당하였으나 남도(南渡)의 때 윤화정 같은 이는 스스로 자신의 배우는 바를 버리지 못한다 하여 애써 소명(召命)을 사양하였고, 호문정(胡文定) 같은 사람은 정자(程子)에게 봉호(封號)를 더하고 사전(祀典)에 기재(記載)할 것을 특별히 청하기도 하였다. 그뒤 회암(晦庵) 부자(夫子)가 또한 학문의 연원(淵源) 때문에 배척되어 물러났으나 호문정이 의논하여 주청(奏請)한 것을 행하고자 하였다. 옛 현인들이 그 도통(道統)을 높이고 그 거취(去就)를 삼간 것이 대개 이와 같았다. 선생과 같은 분은 호문정과 윤화정의 의(義)를 겸하고 홀로 주희(朱熹)의 뜻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선생이 학문을 수양한 것은 사승(師承)을 이어받지 않고 스스로 옛 사람들의 언어(言語)에서 얻은 것이다. 어렸을 때에 어떤 사람이 선생에게 사단(四端)칠정(七情)의 말에 대해 물었는데 대답하기를, 사단(四端)은 칠정(七情) 가운데 선(善)한 것이라고 하였는데 뒷날 율곡(栗谷)의 논한 바를 보니 선생의 대답과 다르지 않았다. 선생의 높은 견해(見解)가 이와 같았다. 경(敬)을 유지(維持)하는 것과 마음을 보존하는 것으로써 일생동안 본령(本領)의 공부(工夫)를 삼아서 「지경도설(持敬圖說)」과「심학종방(心學宗方)」을 지어서 자성(自省)하였다. 항상 말하기를 지경(持敬)은 수렴조존(收斂操存)으로 핵심을 삼고, 정신(精神)이 고요하게 내 몸 속에 있는 것으로 징험(徵驗)을 삼는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학자(學者)의 공부는 그 큰 뜻이 다만 사욕(私欲)을 모두 제거하여 천리(天理)를 온전히 보존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이며, 다만 밝고 맑게 하여 천지(天地)와 귀신(鬼神)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이며, 다만 천하의 일을 담당하여 천지(天地)에 참여하여 삼재(三才)가 되고 만물의 화육(化育)을 돕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이니 그 근본이 다만 마음을 보존하는 데 있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마음이 보존되었을 때에 정신이 맑고 어둡지 않아서 만가지 세상 이치가 온전히 갖추어지니 이러한 때는 비록 성현(聖賢)의 마음이라 하더라도 또한 다만 이와 같을 따름이다. 다만 성인은 능히 오래도록 유지하고 일반 학자들은 그렇지 못하니 진실로 능히 공부가 아주 대단히 익숙해져서 오래도록 잃지 않는다면 성현의 경지에 함께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뜻을 세움에는 마땅히 한결같이 성현(聖賢)으로써 본보기를 삼아야 하는데 성현(聖賢)의 말씀과 행하신 일이 오로지 사서(四書)에 있으니 성현을 배우고자 한다면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공부한 것이 가장 깊고 전일(專一)하였다. 공부하다가 의심나거나 어려운 곳을 만나면 문득 차기(箚記)하였는데 그것들이 쌓여 권질(卷帙)을 이루었다. 간혹 선현(先賢)들이 이루어 놓은 말 이외의 것에 대해 이야기하여 다른 사람이 의심하면 말하기를 내가 진실로 나에게 죄를 주는 것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안지만 그러나 이 이치는 곧 천하(天下) 고금(古今)의 같은 것이다. 선성(先聖)들이 입언(立言)하여 교훈을 드리우고 후현(後賢)들이 경의(經義)를 해석하는 것은 곧 이 이치를 구하기 위한 것이다. 만일 혹 의심하는 것이 있으면 마땅히 반복해서 깊이 생각하여 그 귀취(歸趣)를 지극히 궁구(窮究)할 뿐이다. 공자의 뒤에 여러 선비들이 크게 성취한 것을 모은 사람은 주자(朱子)이니 후학(後學)들에게 맹자(孟子)보다도 큰 공(功)이 있고 그 경서를 풀이한 것이 극진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다 풀지 못한 것이 있다고 하는 것은 그 풀어 놓은 것을 바탕으로 삼아 탐구해서 그 풀지 못한 것에 이르려는 것이니 이것이 진실로 선현(先賢)이 후학(後學)에게 희망한 것이라고 하였다.
내가 물가에서 선생을 뵈었을 때 선생께서 대학설(大學說)을 펼쳐서 주시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내가 공부한 것을 기록해서 책으로 만든 것이니 선현(先賢)보다 해설이 자세하고 많기를 구한 것이 아니라 후인(後人)들에게 질의하고자 한 것이라고 하였다. 대개 선생의 뜻이 처음과 끝이 이와 같으셨으니 왕백(王栢)의 무리가 스스로 일가(一家)를 세워서 대일통(大一統)의 의(義)를 방해한 것과는 같지 않다.
선생은 평생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연세가 칠십이 넘어서도 총명(聰明)함이 조금도 감소하지 않았다. 매일 등불 아래서 책을 보다가 자정이 넘어서야 취침하였고 혹은 아침까지 계속 읽기도 하였다. 사람을 가르칠 때는 정성을 다해서 게을리 하지 않았고, 선(善)을 향해 부지런히 공부하는 사람을 보면 진실한 마음으로 기뻐하여 학문을 권면하고 잘 인도해서 좋은 인재가 되도록 하였다. 옛 성현(聖賢)을 존경하여 항상 받들어 대하는 것과 같이 하였다. 매번 사람들과 성현의 격언(格言)과 지극한 행사(行事)를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감탄하여 열성적으로 말하여 듣는 사람들이 느껴서 흥기하게 하였다.
선도(禪道)와 음율(音律), 금서(琴書), 병법(兵法), 복서(卜筮) 등의 책에 대해서도 한 번 보아서 밝게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지만 다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문장(文章)에 대해서는 더욱 천부적 재주를 얻어서 말을 배울 때 이미 글자를 알았고, 7,8세 이전에 능히 글을 지을 줄 알았으며 조금 성장해서는 많은 책을 섭렵하여 읽고 세상의 이치에 널리 통해서 옛날의 글 짓는 사람을 따르고자 노력하였다.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는 선생의 종소고서(從祖姑壻)이면서 어머니 윤씨(尹氏)의 계부(季父)였는데 선생이 이분을 따라 배웠다. 월정이 매번 선생의 지은 글을 보고서 탄식하여 말하기를, 양한(兩漢)의 솜씨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미 관례를 치룬 다음에는 문장에 힘쓰지 않고 학문에만 전심(專心)하니 월정이 깊이 애석하게 여겨서 일러 말하기를 어찌 또 몇 년 더 문장을 익히는 공부에 종사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에 드문 글을 볼 수 있도록 하지 않느냐고 하였다. 현헌(玄軒) 신흠(申欽)이 또 일찍이 칭찬하여 말하기를, 젊은 시절 기개(氣槪)는 다만 매우 빼어나고 뛰어나려고만 하고 문장은 다만 진한(秦漢)시대 이전의 말을 지으려고 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내던져 버리고 순후하게 의지를 꺾어서 성문(聖門)의 학문을 배우니 기질(氣質)을 변화시킴이 어찌 이와 같은 사람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무릇 선생의 저술은 본인의 의사를 충분히 나타내고 이치에 통해서 붓에 맡겨 글을 지어냄이 대단히 많아서 끝이 없었다.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 장유(張維)가 매번 말하기를 의리(義理)에 관계된 문장은 우리들이 따라갈 수 있는 바가 아니라고 하였다. 문집 15권(卷)이 있으니 「대학곤득후설(大學困得後說)」과 「중용곤득후설(中庸困得後說)」 이 각 1책(冊)이고, ?논어?와 ?맹자?와 ?서경?에 대한 천설(淺說)이 각 3책(冊)이며, 역상개략(易象槪略)과 거업록(居業錄)이 각 1책이고, 심법12장과 개혹천어(開惑淺語)와 도촌잡록(道村雜錄)이 각 1책이며, 가례향의(家禮鄕宜)가 2책이고, 이락정요(伊洛精要)가 5책, 주서요류(朱書要類)가 6책, 주문요초(朱文要抄)가 10책이다. 좌씨(左氏)와 사기(史記)와 한서(漢書)와 한유·유종원·구양수의 글을 초(抄)한 것 등이 집에 소장되어 있었다.
선생이 처음 불복(不復)이라는 명칭으로 사시는 집에 이름을 붙이고, 의금(衣錦)이라는 명칭으로 당(堂)에 이름 붙이고, 또 재(齋)에는 공(恭)과 독론(讀論)과 일신(日新)이라고 이름하였다가 최후에는 존(存)이라고 이름하였다. 선생이 돌아가시고 3년 뒤에 학자들이 서원(書院)을 구포(鷗浦)가에 세워서 선생의 제사를 모셨다.
부인 현씨(玄氏)는 본관(本貫)이 성주(星州)이다. 군수(郡守)를 지냈으며 참판(參判)에 추증(追贈)된 덕량(德良)의 딸이고, 고려(高麗)의 명신(名臣)인 덕수(德秀)의 후예(後裔)이다. 성품이 엄숙하고 정직하며 깊고 성실해서가난하다고 해서 걱정하지 않았고, 화려함을 즐기지 않았다. 가깝고 먼 친척들이 모여들어 집에 가득해도 음식을 접대하는데 게을리하지 않았고 내외의 족척(族戚)과 인척(姻戚)들이 대단히 부귀(富貴)하였으나 소박하고 근검(勤儉)해서 일찍이 무엇을 요구하거나 구걸함이 없었으니 여러 자녀들과 며느리들이 감히 사치를 일삼지 않았다. 어질고 효성스러운 소문은 온 집안의 사람들이 복종하였다.
아들 다섯과 딸 하나를 두었는데 큰 아들 몽양(夢陽)은 현감(縣監)이고, 둘째 아들 진양(進陽)은 군수(郡守)이고, 셋째 아들 복양(復陽)은 이조참의(吏曹參議)인데 문덕(文德)이 있고 도를 곧게 지켜서 사류(士類)들의 추앙을 받았다. 넷째 내양(來陽)은 진사(進士)이고, 다섯째 현양(顯陽)은 생원(生員)이다. 딸은 진사(進士)인 이상주(李相冑)에게 시집갔다. 현감인 몽양은 지강(持綱)이라는 아들을 두었는데 별좌(別坐)이고, 딸은 진사(進士)인 안중(安重)에게 시집갔다. 군수인 진양은 지한(持韓)과 지상(持常)이라는 두 아들을 두었고, 네 딸은 유원후(柳謜厚), 윤추(尹推), 진사(進士)인 윤징주(尹徵周)에게 시집가고 막내딸은 아직 출가하지 않았다. 참의(參議)인 복양은 네 아들을 두었으니 지형(持衡)과 지성(持成)과 지겸(持謙)과 지원(持元)이고, 두 딸 가운데 첫째는 진사(進士)인 홍구성(洪九成)에게 시집가고, 막내는 출가하지 않았다. 진사(進士)인 내양은 지헌(持憲)이라는 아들을 두었고, 두 딸은 생원(生員)인 김일진(金一振)과 박태두(朴泰斗)에게 시집갔다. 생원(生員)인 현양은 지항(持恒)과 지정(持正)이라는 두 아들을 두었다.
큰 집안이 선생에 이르러 경사가 있어서 병사(兵使)와 도사(都事)를 지낸 두 선조는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고, 첨추공(僉樞公)은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증조비(曾祖妣)와 조비(祖妣), 선비(先妣)는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다. 효자(孝子)가 끊이지 않고 자손을 계속 이어 주어서 자손과 형제들이 난초처럼 향기롭고 옥처럼 깨끗하며 재주와 문행(文行)이 있어서 집안의 명성이 크게 떨치니 착한 사람에게 복을 내려주는 이치가 길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몽양·내양·현양 세 아들과 이상주(李相冑) 부부(夫婦)는 병으로 먼저 죽었고, 선생이 돌아가신 뒤 남녀 자손들이 서로 이어 요절(夭折)하니 군자(君子)들이 이 일을 가지고 천도(天道)에 대해 의심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짓는다.
효와 충은
인도의 기강이요
출세와 처세는

군자의 지킴일세
내가 지금 세상을 살펴보니
이를 실천한 사람 드문데
아, 오직 선생은
홀로 그 법을 다하셨네
집에서는 기쁘게 하고
조정에서는 정성스럽게 해서
뜻은 임금과 백성에게 간절했고
행함은 천지신명에게 통했네
우리에게 이륜을 심어주고
우리에게 정도를 밝혀주어
한 몸이 순도(殉道)하였으니
백세에 살피겠네
비유하자면 나무에 뿌리 있어야
가지가 번창하고
비유하자면 샘에 근원 있어야
물줄기가 뻗어 나가니
사람에게 본원은
오직 이 마음이라
마음의 보존은
한 마디로 공경뿐이라네
선생의 학문이
대개 여기에서 얻었으니
표리와 행장
일치하는 까닭일세
항상 성현을 스승 삼아
날마다 경서를 공부했네
좋고 나쁜 일 반복되었지만
죽을 때가지 싫어하지 않았네
아름다운 업적과
정성스런 도덕은
흉년 속의 숙속과 같고
한 겨울 소나무 잣나무 같았네
사문에서 누림 있고
큰 이름 자취 있으니
내가 무엇을 알겠는가
오직 돌에 새겨 전하네

숭정(崇禎) 경자년(更子年, 1660년) 모월(某月) 모일(某日)에 문하생 파평(坡平) 사람 윤선거(尹宣擧)는 짓는다.

 

포저집 제1권

 시(詩)
송별(送別) 25수



봄이 다한 시절에 남쪽으로 돌아가던 날 정평(定平)의 부백(府伯)과 작별하며 남긴 시
하늘 끝에서 두 번째 본 정주의 봄빛 / 天涯再見定州春
영각과 우헌으로 우연히 이웃이 되었소 / 鈴閣郵軒偶是鄰
한 동이 술로 떠나고 남고 헤어지는 오늘 / 今日去留樽酒別
낙화도 인간의 이별을 애석하게 여기는 듯 / 落花還似惜離人

덕원(德源)의 윤 명부(尹明府)와 작별하며 남긴 시
청산은 저물려 하고 강물은 동으로 흐르고 / 靑山欲暮水東流
남쪽 객 돌아갈 생각하니 앞길이 유유해라 / 南客懷歸道路悠
온종일 이별의 술자리 그래도 헤어지기 싫어 / 盡日離筵猶惜別
다시 머물러 앉았나니 산부용꽃 그늘 아래 / 刺桐花下更淹留

함흥(咸興)에서 조인보(趙仁甫) 정호(廷虎) 와 작별하고 돌아오다가 초원(草原)에 도착해서 짓다.
산하에 봄빛이 다해서 나그네 심정 쫓기는데 / 關河春盡客情催
게다가 이별을 하려니 바다 모퉁이 더 느꺼워 / 又別心知碧海隈
말들도 갈기 나부끼며 각자 남쪽 북쪽으로 / 征馬翩翩各南北
옛 성으로 해 저물녘에 혼자 돌아왔다오 / 古城殘日獨歸來

지리산(智異山)으로 돌아가는 승려 성은(聖隱)을 보내며
맑은 가을 병도 많아 사립문도 닫은 채 / 淸秋多病掩柴扉
세상일 마음 아파 혼자 눈물 흘리는 몸 / 世事傷心涕獨揮
부러워라 매인 바 없는 우리 산승이여 / 却羨山僧無所累
남쪽 북쪽 어디고 훌쩍 잘도 오고 가네 / 飄然南北好來歸

서장관(書狀官) 윤장경(尹張卿) 홍국(弘國) 을 전송한 시 2수
봄에도 추운 강마을에 눈발이 막 그친 때 / 春寒水國雪初晴
들었나니 서쪽으로 그대가 옥경에 가신다고 / 聞子西征向玉京
요동 그리고 연경까지 천리 만리 길 / 遼塞燕山千萬里
가련타 병 많은 몸 어떻게 가시려나 / 可憐多病若爲行

그대와 헤어진 뒤로 얼마나 세월이 흘렀던가 / 悠悠離別閱年華
더구나 그대의 이번 걸음 만리나 멀고 머니 / 况是君行萬里賖
봉서를 보며 시름겨워 잠 못 이루는 이 한밤 / 中夜封書愁不寐
눈보라 치는 창문가에 불똥만 자꾸 떨어지오 / 一窓風雪落燈花

김생 거원(金生巨源)을 전송하며
한밤의 술자리 얼근해라 몇 순배나 돌았는고 / 夜酌醺醺度幾巡
만났다 바로 이별이라니 우리 모두의 슬픔일세 / 乍逢旋別共悲辛
가련하도다 내일이면 남포의 길에 / 明日可憐南浦路
산 넘고 물 건너 돌아가는 한 사람 / 千山萬水一歸人

일본에 사신으로 가는 강 판교(姜判校) 홍중(弘重) 를 전송하며
훼복이 바야흐로 왕에게 귀의했고 보면 / 卉服方來王
동인을 오랑캐에게도 적용해 줘야 할 터 / 同仁及遠夷
교린 정책은 옛 법도를 따라야 하겠지만 / 交鄰遵古道
사명을 받든 신하는 현안을 중시해야겠지 / 奉使重當時
나그네 가는 길은 저 멀리 해 뜨는 곳 / 客路扶桑逈
이별하는 정자에는 슬프게 지는 낙엽 / 離亭落木悲
채찍 휘둘러 떠나면서 돌아보지도 않으니 / 揮鞭去不顧
알겠도다 그대야말로 사내대장부라는 것을 / 知子是男兒

일본에 사신으로 가는 신 지평(辛持平) 계영(啓榮) 을 전송하며
탄핵문 작성하는 일을 잠시 멈추시고 / 暫輟彈文草
왕명을 받든 사신의 배에 오르셨도다 / 還乘奉使船
나그네 가는 길은 오로지 해 뜨는 방향으로 / 客程唯指日
검푸른 파도는 넘실넘실 저 멀리 하늘까지 / 溟漲遠浮天
충성과 신의로 고래 등 파도를 굴복시키고 / 忠信鯨波伏
뛰어난 재명을 섬 오랑캐에게 전하시리라 / 才華卉服傳
이제는 알겠도다 역사책의 기록 속에 / 從知史氏記
장건만 그 명성을 독점하지 않을 줄을 / 不獨美張騫

임천(林川)에 부임하는 이자시(李子時) 민구(敏求) 를 전송하며
사원에 일찍이 동시에 선발됐고 / 詞苑曾同選
중서성에서 숙직도 함께한 사이 / 中書共直廬
함께 노니는 즐거움이 싫지 않았으니 / 並遊懽不厭
이별을 한하는 그 마음이 어떠하리요 / 恨別意何如
바다 위엔 저녁나절 차가운 구름이요 / 海上寒雲夕
강변의 성읍엔 낙엽이 처음 지는 때 / 江城落葉初
아득히 하늘 끝에서 서로 생각하리니 / 相思渺天末
전하는 소식도 응당 뜸하지 않으리라 / 音信未應踈

영남(嶺南)을 안찰(按察)하러 나가는 이자시를 전송하며
삼십 세에 신라 땅 칠십 고을의 안찰사 / 三十才名七十州
지금의 방백은 옛날의 제후가 아니겠소 / 卽今方伯古諸侯
청명한 계책 독점하며 사대부 압도하시더니 / 淸猷早擅簪紳右
이젠 산하의 구석까지 혜택을 멀리 펴시누나 / 惠澤遙宣嶺海陬
한수 북쪽 연화 속에 송별 자리 열렸소만 / 漢北煙花開祖席
낙수 동쪽 운수에선 감사님 영접을 나오리다 / 洛東雲樹引鳴騶
남쪽 백성 기갈 들린 듯 기대하고 있을 테니 / 南人想望如飢渴
어서 깃발 나부끼며 조금도 멈추지 마오시라 / 征旆翩翩莫少留

일본에 사신으로 가는 임 첨지(任僉知) 광(絖) 를 전송하며
아득하여라 아침 해가 뜨는 구역 / 杳杳扶桑域
망망하여라 바다 건너 후미진 곳 / 茫茫積水隈
무기를 쓰던 것은 지난날의 일이요 / 干戈往歲事
문치의 덕을 펼칠 때가 이제 왔도다 / 文德此時來
부절을 세우면 풍파가 잠잠하고 / 建節風波靜
돛배를 띄우면 장무가 개이리라 / 揚帆瘴霧開
남금이 자연히 따라올 줄 알겠노니 / 南金知自至
전대를 잘하는 현재를 얻었으니까 / 專對得賢才


조사(詔使)의 연위사(延慰使)로 나가는 해숭위(海嵩尉)를 전송하며
자봉이 조서 물고 동해의 끝에 날아왔으니 / 紫鳳啣書到海陬
성초가 먼 길 위로하며 영접해야 마땅한 일 / 星軺迎勞道途脩

공주의 저택 동산의 흥취를 잠깐 옮겨서 / 暫移主第林間趣
청천의 성 누대를 멀리 향하게 되었구려 / 遙指淸川城上樓
가는 곳마다 연화가 모두 빼어난 풍경이요 / 隨處煙花皆勝賞
한 강물 섬에선 우수를 씻을 수 있으시리 / 一江島嶼可消憂
서경에서는 연지의 모임을 또 가지시리니 / 西京又作連枝會
빛나는 영광을 지금 누가 더불어 짝하리요 / 榮耀當年孰與儔

중국에 조회하러 가는 민 참판(閔參判)을 전송하며
젊은 나이에 방백으로 명성과 공적 드러내며 / 少年聲績著方州
천리 강산에 은혜의 정사 넉넉하게 펼치신 분 / 千里湖山惠政優
중국에 새로운 황제의 큰 운세가 열린지라 / 中國聖神開泰運
소방이 조하 올리려고 명사를 선발하였도다 / 小邦朝賀簡名流
천위 가까이 은혜 받을 일만 생각날 것이니 / 啣恩但覺天威近
국경 밖 바닷길이 먼 것을 어찌 아랑곳하랴 / 出境寧知海路悠
예부터 우리 동방은 황제의 편애를 받았으니 / 從古吾東偏帝眷
조서가 응당 우리 임금님 대궐에 내려오리라 / 紫泥應降鳳凰樓

관동(關東) 지방으로 부임하는 이 관찰(李觀察)을 전송하며
예로부터 선경으로 일컬어지는 관동 지방 / 關東自昔號仙區
바닷가에 줄지어 선 옥돌 깎아 세운 산들 / 玉立峯巒列海陬
아 내가 평생토록 꿈속에서 그리던 땅에 / 嘆我平生夢想地
기뻐라 그대가 오늘 깃발 날리며 부임하니 / 喜君今日旆旌遊
시의 소재 제공해 줄 금강산의 가을빛이요 / 金剛秋色供詩料
조각배 띄우기 좋은 경포대의 봄 물결이라 / 鏡浦春波泛小舟
병든 이 몸이 혹시라도 그대의 후임자가 되면 / 瘦病倘從瓜後代
멋진 자취 찾으면서 번뇌를 씻을 수 있으련만 / 會尋遐躅滌煩愁

호서(湖西) 지방을 안찰(按察)하러 가는 윤중소(尹仲素) 이지(履之) 를 전송하며
승상으로 국가를 경륜하는 날이라면 / 丞相經邦日
감사로서 백성의 풍속을 묻는 해로다 / 監司問俗年

충성심과 근실함은 대대로 이은 가풍 / 忠勤家世續
나라 위한 공적은 사신이 전하는 바라 / 事蹟史臣傳
금강의 물결이 누대 앞에 희게 빛나고 / 錦水樓前白
계룡의 산맥이 성곽 밖에 이어지는 곳 / 鷄山郭外連
지친 백성들 멈춰 서서 새 은택 고대하며 / 勞人佇新澤
가는 곳마다 감사님 깃발을 쳐다보리라 / 到處望旌旃

관동(關東) 지방을 안찰하러 가는 윤중소를 전송하며
나는 병들어 철을 넘기며 누웠는데 / 一病經時臥
쌍정은 오늘이 부임하시는 날 / 雙旌此日行
떠나는 길에 나가 전송하지도 못한 채 / 未成臨路送
한갓 석별의 정만 시 한 수로 엮다니요 / 徒結惜離情
농사일도 가을 들어 수월해진 이때 / 民事秋來簡
시내와 산이 해내에 그 이름 자자하니 / 溪山海內名
신선의 구역을 두루 찾아보노라면 / 仙區應遍到
마음과 뼈가 저절로 시원해지리이다 / 心骨自能淸

정원(政院)에서 관서(關西) 지방으로 군대를 사열하러 떠나는 승지 이천장(李天章)을 전송하며
헤어지는 시간이 오래되지는 않겠지만 / 分離雖不久
그래도 작별하려니 절로 가슴이 아프오 / 臨別自傷情
비바람이 남은 더위 거두기는 하였소만 / 風雨收殘暑
산 넘고 물을 건너 또 몇 리나 가실는지 / 關河問幾程
옥새에 임해 나부끼는 대장의 깃발이요 / 吾知繫以纓
금성탕지로 모여들 맹수 같은 장사로다 / 從此胡奴頸
지금부터는 북쪽 변방 오랑캐의 목덜미에 / 貅虎集金城
긴 밧줄을 묶어서 잡아 올 줄을 알겠도다 / 旌旗臨玉塞


중국에 사신으로 가는 동년(同年) 송 참의(宋參議) 극인(克訒) 를 전송하며
생각나네 옛날 금방에 함께 올랐을 때 / 憶昔同金榜
멋진 풍류로 서울 거리를 뒤흔든 일을 / 風流動洛城
어찌하다가 몸이 늙어 쇠한 오늘날에 / 如何衰暮日
황제의 도성으로 떠나보내게 되었는고 / 送此帝京行
구름 사이에 아득히 바라다보일 쌍궐이요 / 雙闕雲間逈
바다 위를 경쾌하게 지나갈 배 한 척이라 / 孤帆海上輕
알고말고 그대가 응대를 훌륭하게 하여 / 知君善應對
우리나라에 기필코 영광을 안겨 줄 것을 / 定作小邦榮

해서(海西) 지방으로 부임하는 권 안사(權按使) 첩(怗) 를 전송하며
생각하면 헤어진 뒤로 해를 넘겼는데 / 念子經年別
나는 지금도 딱하게 병석에 누웠다오 / 嗟吾臥病時
가시는 길에 나가서 전송도 하지 못한 채 / 未能躬祖餞
그저 이렇게 석별의 정만 아쉬워하다니요 / 徒此惜分離
나그네 가는 길은 뜨거운 구름 속에 / 客路炎雲裏
황량한 성곽은 장기 서린 바닷가에 / 荒城瘴海湄
묻고 묻는 나랏일이 급하기만 하니 / 咨詢王事急
달리고 달리는 일을 꺼리지 않으시리 / 應不憚驅馳


이 순천(李順天) 덕수(德洙) 이 부임하는 것을 전송하며
하룻밤 향기로운 한 동이 술을 앞에 하고 / 一夜芳樽酒
몇 년 동안 도성 떠나는 심정을 위로하네 / 經年去國心
어버이 영광되게 하는 계책은 이뤘어도 / 榮親計已遂
친구를 이별하는 한은 얼마나 깊으리요 / 別友恨何深
비가 뜸하니 바람이 섬돌에 일어나고 / 雨歇風生砌
밤이 많이 지나니 달이 숲에 숨는구나 / 更多月隱林
서로들 바라보며 이야기가 싫지 않아 / 相看語不厭
성 위에 새벽 구름이 어느새 잠겼어라 / 城上曉雲沈

중국에 조회하러 가는 권 부사(權副使) 계(啓) 를 전송하며
왕의 교화로 지금 천하가 한집안인데 / 王化今無外
오랑캐 먼지가 요동 관문을 가로막았네 / 胡塵阻薊門
의관이 북쪽 황궁에 가서 조회하는 때 / 衣冠朝北闕
옥백이 동쪽 번방에서 나가게 되었도다 / 玉帛出東藩
사신의 길은 검푸른 발해를 건너가고 / 客路通溟渤
고향 생각은 변방 요새를 넘어오리라 / 鄕心度塞垣
은혜로운 조서 받들고 귀국하실 적에 / 佇看恩詔返
봄빛이 평원에 가득함을 보게 되리라 / 春意滿平原

의사(義士) 차군 중철(車君仲轍)이 평양(平壤)으로 돌아갈 적에 전송한 시 병서(幷序)
차군 중철은 평양 사람이다. 갑진(甲津)이 무너질 적에 우리 부자(父子)를 적의 칼날 아래에서 빠져나오게 해 주었으니, 나에게는 실로 죽음에서 목숨을 구해 준 은혜가 있다고 하겠다. 그의 사람됨을 살펴보면, 충직하고 성실하며 질박하고 솔직하여 기교를 부리거나 거짓으로 꾸미는 모습을 전혀 볼 수 없었다. 그런가 하면 부모에 대한 효심이 독실하였고 사람들에게 신의를 지켰으며, 의리를 중하게 여기고 이익은 가볍게 여기면서, 남이 위급한 상황에 처한 것을 보면 자신의 생사는 돌아보지도 않고 떨쳐 일어나곤 하였는데, 여기에 또 용기와 힘이 보통 사람을 뛰어 넘었으니, 참으로 보기 드문 인사라고 하겠다. 그런데 서로 헤어진 지 일 년 만에 홀연히 천리 밖에서 내방(來訪)을 하였으니, 이 역시 옛사람의 풍도를 지닌 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나는 시에 대해서는 평소에 깊이 공부해 보지 않았고 또 시를 짓지 않은 지도 오래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의 의리에 특별히 감격한 나머지 한 편을 지어서 증정하게 되었는데, 시인들이 이 작품을 보면 비웃을 것이 또한 분명하다고 하겠다. 비록 그렇긴 하나 나는 단지 시라는 형식을 통해서 나 자신의 뜻을 읊어 보려고 한 것일 따름이니, 표현하는 솜씨가 좋고 나쁜 것이야 굳이 따질 것이 뭐가 있겠는가.

생각하면 예전에 강도에 있던 날에 / 憶昨江都日
오랑캐 비린내가 갑진에 휘감기자 / 腥羶迷甲津
창졸간에 잔약한 군사를 출동시켜서 / 倉卒出殘兵
강변에다 어수룩하게 늘어놓았고 / 聵聵羅江濱
누선이 위아래를 메우고 있었건만 / 樓船塞上下
고래처럼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할 뿐 / 突兀如鯨鱗
연계와 같아서 전진을 하지도 못한 채 / 連鷄不得前
깃발들만 어지럽게 우왕좌왕하였는데 / 旌旆徒紛繽

겨우 사발 크기만 한 적의 작은 배들이 / 小船僅類盤
무인지경을 치달리듯 날쌔게 건너오자 / 飛渡如無人
삽시간에 언덕의 수비가 텅 빈 가운데 / 須臾岸上空
바람과 먼지 따라 와해되고 말았어라 / 瓦解隨風塵
내가 이때 전쟁의 현장을 구경하면서 / 我時觀戰場
민산과 같은 기상으로 홀로 우뚝 서서는 / 獨立氣如岷
장차 뒤꿈치를 돌리지 않겠다 결정하니 / 計將不返踵
기러기 터럭보다 이 몸이 가벼워졌는데 / 鴻毛輕此身

나의 옆에 서 있던 두 아이놈은 / 兩兒在我傍
나의 간곡한 말을 듣고 안타까워하였고 / 悶我語諄諄
그대도 차마 자리를 떠나지 못한 채 / 君亦不忍去
우리와 함께 있으면서 서성거리다가 / 與之同逡巡
급기야 적이 밀어닥쳐 형세가 급해지자 / 奔突勢相逼
나를 잡아끌고서 강변 쪽으로 향했어라 / 牽我趨江漘
흉악한 적들이 제멋대로 치달리는 속에 / 豺虎恣縱橫
시내가 또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아서 / 有溪阻邅屯
막다른 골에 몰려 어디로 갈 지 모른 채 / 途窮無所往
마치 새장 속의 메추리 신세가 되었을 때 / 有若籠中鶉
그대가 물속에 뛰어들어 배를 끌고 와서는 / 游泳挐舟來
이 몸을 싣고 진수를 건너는 듯하였나니 / 載我如涉溱
적에게 쫓길 걱정도 이제는 모두 사라져서 / 追者已不及
문득 멈춰 서고 보니 서쪽 언덕에 있더이다 / 却立止西垠
그 당시에 그대가 만약 없었더라면 / 當時若微君
우리 부자 모두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 父子俱沈淪
만번 죽을 고비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으니 / 得出萬死中
그때 목숨을 하늘에 기댈 수나 있었으리 / 命豈係蒼旻
장강의 물결이 거세게 일어나는 상황에선 / 長江波洶湧
하늘의 힘도 실로 한계가 있었으리이다 / 天實限界畛
대장의 임무를 하중의 인물에 내맡겼으니 / 任用得下中
백만 군사가 있다 한들 어떻게 의지하랴 / 百萬將何因
하루아침에 험한 요새를 제대로 못 지켜서 / 一朝失其險
쌓인 백골이 성벽과 가지런하게 되었는데 / 白骨齊城闉
나에게 일 여의 병력도 있지 않은 상황에서 / 我無一旅衆
의분에 떠는 충성심을 어떻게 펼 수나 있었으랴 / 忠憤何由伸
종사가 함락되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며 / 眼看宗社陷
눈물로 공연히 수건만 적실 따름이었어라 / 涕淚空盈巾
강화 조약이 체결되어 요기가 물러가고 / 和成氛氣收
다행히 온 누리에 새로운 광명이 비쳤는데 / 幸見寰宇新
참소하는 입들이 검고 흰 것을 뒤바꿔서 / 讒舌變白黑
자친이 놀라 베틀에서 내려오게 하였도다 / 下機驚慈親

충성을 바친 것이 거꾸로 죄가 되는 세상 / 忠誠反爲罪
상심한 채 돌아가 농민 속에 뒤섞여서 / 摧藏偶農民
몸소 밭을 갈아도 굶주림을 면치 못해 / 躬耕不救餒
생활이 갈수록 빈궁하고 군색해지는 속에 / 生事日窘貧
어버이 계신 곳 찾아뵈러 길을 떠났나니 / 君去訪庭闈
그대의 집이 있는 고향은 바로 관서 지방 / 家鄕在西秦
신성에서 평양 하늘 바라다보노라면 / 新城望箕城
구름 낀 산만 저 멀리 삐죽삐죽 보일 따름 / 雲山緬嶙峋
하늘 끝에 떨어져서 그대의 모습 떠올릴 뿐 / 相思隔天涯
한번 찾아가려면 열흘도 넘는 길이라서 / 程期餘一旬
소식이 감감해도 알아볼 길이 없이 / 音書杳莫憑
계절만 바뀌어 겨울과 봄이 지났는데 / 歲序逾冬春
기뻐라 산자락에서 까치들이 우짖으며 / 山樊喜鵲喧
멀리서 손님이 홀연히 찾아오셨도다 / 遠客忽來臻
깜짝 놀라 대문으로 부리나케 달려가서 / 驚愕走至門
대청 마루로 영접하며 안내는 하였으나 / 延之坐堂茵
천만뜻밖에 갑자기 일어난 일인지라 / 事出萬不意
생시가 아니고 꿈인가 의심까지 하면서 / 還疑夢非眞
정말 미칠 것처럼 너무도 기쁜 마음에 / 喜極至欲狂
정신없이 안부도 두루 묻지를 못했다오 / 茫然失所詢
지금 춘삼월이 저물어 가오마는 / 于時三月暮
천기는 그래도 꽃다운 시절이라 / 天氣屬芳辰
들꽃은 모두 공중에 날리려 하고 / 山花欲飛盡
녹음이 솔과 대에 슬슬 생기는 때 / 綠陰生松筠
문밖으로 나서면 시냇물 소리 굴러 가고 / 門外澗水轉
뜰 안에는 운율에 맞는 새들의 노랫소리 / 園中鳥音勻
도대체 이 몸이 어떤 사람이기에 / 顧我是何人
천리 먼 곳에서 귀빈을 맞게 되었는고 / 能致千里賓
막걸리로 마음을 서로 위로하면서 / 薄酒相慰勉
정답고 흥겹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 款款窮昏晨
산중이라 특별한 음식 있을 리 없고 / 山中無異味
농어와 순채도 없으니 부끄러울 뿐 / 愧乏鱸與蓴
생각건대 그대는 관서의 수재로서 / 惟君關西秀
웅장한 지략이 상식을 뛰어넘고 / 壯略超常倫
충심으로 효성과 우애가 독실한 데다 / 深衷篤孝愛
의리를 중시하며 금은을 가볍게 여기는 분 / 貴義輕金銀
버들잎 뚫고서 궁전 뜰에 올라 / 穿楊登殿前
기문의 호신으로 발탁될 분이건만 / 期門爲虎臣
국가의 간성을 초야에 내버리다니 / 干城棄草萊
인재의 선발이 왜 이토록 어긋났는가 / 是何乖選掄
그대의 의기는 산악보다도 무겁고 / 意氣重山岳
그대의 성신은 귀신도 감동시킬 터 / 誠信感鬼神
생각이 나자 곧바로 찾아 나서면서 / 思來卽命駕
천리 먼 길을 이웃 동네로 알았나니 / 視遠如比鄰

지기에게 보답하려는 마음만 있었을 뿐 / 只爲謝相知
산 넘고 물 건너는 어려움은 잊었어라 / 跋涉忘勤辛
이런 의리는 옛날에도 보기 드물었으니 / 此義古所罕
말세에 어찌 자주 들을 수 있는 일이리요 / 叔世聞豈頻
그런데 지금 나는 내 눈으로 보았으니 / 於今親見之
이 감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으리요 / 感激難俱陳
즐겁게 보낸 날이 열흘도 채 못 되어 / 懽欣未十日
이별하려니 수심이 이마에 가득한데 / 恨別愁眉嚬
떠나시는 길에는 음산한 구름이 저 멀리 / 去路雲陰遠
이별하는 정자에는 푸른 풀빛이 가지런 / 離亭草色均
우리가 무슨 말을 주고받을 수 있으리까 / 相贈欲何言
노력하여 부디 몸을 아껴 보전하시기를 / 努力須自珍
옛날의 정전에다 깊이 밭도 갈아 보고 / 深耕古井地
대동강에 낚싯줄도 한가이 드리우겠지만 / 閑垂浿江綸
그대와 같은 충의지사가 세상을 멀리 떠나 / 如君忠義士
어찌 끝내 노루 사슴과 지낼 수 있으리요 / 豈終群麋麕
시기가 도래하면 곧장 떨쳐 일어나서 / 時來焂奮迅
걸출한 명성을 임금님도 듣게 되시리니 / 聲譽達紫宸
조만간 변방의 요기를 말끔히 소탕하고 / 早晩淸塞垣
기린각에 그 공명을 길이 전하시리이다 / 功名畫麒麟

우상(右相) 이공(李公) 시백(時白) 이 북경(北京)으로 떠날 날짜가 박두하였기에, 강변에 나아가서 손을 잡고 송별하려고 감히 생각을 하였는데, 큰비가 계속 쏟아져 도로가 막히는 바람에 이 계획을 실천에 옮길 수가 없기에, 사람 편에 절구(絶句) 두 수를 부쳐서 이 감회를 전하였다.
노년에는 서로들 이별이 없어야 할 터인데 / 衰年非是別離時
강 다리에서 전송할 계획도 차질이 났구려 / 相送河橋計又差
손꼽아 헤어 보니 세모에 귀국하실 텐데 / 却算歸程應歲暮
요동 관문 눈보라 조심해 말을 달리시길 / 薊門風雪愼驅馳
물은 내에 가득한데 비는 계속 주룩주룩 / 水滿川原雨不休
술병 들고 전송할 길도 없어서 한스럽소 / 一壺相送恨無由
남아의 봉시야말로 평생의 뜻이거니 / 男兒蓬矢平生志
북경 만리 길 멀다고 어찌 꺼리리요 / 豈憚燕山萬里脩


 

[주D-001]정주(定州) : 평안도 정주가 아니라, 함경도 정평(定平)의 옛 이름이다.
[주D-002]영각(鈴閣)과 우헌(郵軒) : 영각은 지방 장관의 별칭으로 부백을 가리키고, 우헌은 역마(驛馬)로 공문서를 전달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포저 자신을 가리킨다. 광해군 3년(1611)에 포저가 홍문관(弘文館)의 수찬(修撰)과 지제교(知製敎)로 있을 적에, 정인홍(鄭仁弘)이 이황(李滉)과 이언적(李彦迪)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수 없다고 헐뜯자, 동료들과 함께 이를 반박하는 차자(箚子)를 올렸다가 함경도의 고산도 찰방(高山道察訪)으로 좌천되었다.
[주D-003]초원(草原) : 정평(定平)의 속역(屬驛)이다.
[주D-004]훼복(卉服) : 섬 오랑캐가 입는 갈포(葛布)의 복장이라는 뜻으로, 일본을 가리킨다. 《서경(書經)》 우공(禹貢)에 “섬 오랑캐는 훼복을 공물로 바친다.〔島夷卉服〕”는 말이 나온다.
[주D-005]동인(同仁) : 일시동인(一視同仁)의 준말로, 모두를 평등하게 여겨 똑같이 사랑한다는 뜻이다. 한유(韓愈)의 원인(原人)에 “성인은 일시동인한다.〔聖人一視而同仁〕”는 말이 나온다.
[주D-006]교린(交鄰) …… 하겠지만 : 교린 정책은 이웃 나라와 평화롭게 지내는 정책을 말하는데, 《맹자》 양혜왕 하(梁惠王下)에 이대사소(以大事小)와 이소사대(以小事大)의 경우를 들어 설명한 대목이 나온다.
[주D-007]장건(張騫)만 …… 줄을 : 어렵고 힘든 사신의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한 신하로 보통 장건을 꼽곤 하는데, 이제는 신계영도 그에 못지 않은 명성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한 무제(漢武帝) 때에 박망후(博望侯) 장건이 흉노를 제압하기 위하여 서역(西域)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온 고사가 있고, 또 대하(大夏)에 사신으로 나가서 황하(黃河)의 근원을 찾을 적에 장건이 배를 타고 은하수로 올라가서 견우(牽牛)와 직녀(織女)를 만났다는 전설에 기인하여 그를 선사객(仙槎客)이라고 부르기도 하기 때문에, 일본의 사행(使行)에 장건을 결부시켜 인용한 것이다. 《漢書 卷61 張騫傳》 《天中記 卷2》
[주D-008]남금(南金)이 …… 얻었으니까 : 일본에 가서 사명을 훌륭하게 완수하고는 극진한 예우를 받으며 돌아올 것이라는 말이다. 전대(專對)는 사신으로 나가서 독자적으로 응대하며 외교 현안을 바람직하게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남금은 남방에서 생산되는 황금으로, 옛날 회이(淮夷)가 노 희공(魯僖公)에게 남금을 조공(朝貢)으로 바친 고사가 있다. 《시경》 노송(魯頌) 반수(泮水)에 “은혜를 깨달은 오랑캐들이 남방의 좋은 황금을 많이 조공으로 바쳤다.〔大賂南金〕”는 말이 나온다.
[주D-009]해숭위(海嵩尉) : 선조(宣祖)의 딸 정혜옹주(貞惠翁主)와 결혼한 윤신지(尹新之)의 봉호이다.
[주D-010]자봉(紫鳳)이 …… 일 : 중국의 사신이 왔으니 조정에서도 연위사를 보내 맞이하는 것이 예법상 합당하다는 말이다. 자봉은 황제의 조서(詔書)를 자고(紫誥)라고 하기 때문에 조사를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성초는 급히 떠나는 연위사의 수레를 뜻한다. 고대의 천문학에서 사신은 하늘의 성신(星辰)과 응한다고 믿었다.
[주D-011]서경(西京)에서는 …… 가지시리니 : 형님인 윤이지(尹履之)가 마침 평안 감사(平安監司)로 재직중이니, 형제의 우애를 나누는 즐거운 시간을 또 갖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연지(連枝)는 같은 뿌리에서 벋어 나온 나뭇가지라는 뜻으로, 보통 형제간의 친밀한 관계를 비유할 때 쓰는 표현이다.
[주D-012]승상(丞相)으로 …… 해로다 : 부친인 윤방(尹昉)이 좌의정(左議政)으로 있는 때에 아들인 윤이지가 충청도 관찰사로 나가게 되었다는 말이다.
[주D-013]쌍정(雙旌) : 관찰사를 가리킨다. 당(唐) 나라 때 절도사(節度使)에게 쌍절(雙節)과 쌍정을 하사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주D-014]이천장(李天章) : 천장(天章)은 이명한(李明漢)의 자(字)이다.
[주D-015]옥새(玉塞) : 중국 감숙성(甘肅省) 돈황(敦煌)에 있는 옥문관(玉門關)의 별칭인데, 여기서는 관서(關西) 즉 평안도 지방의 요새(要塞)를 뜻하는 말로 쓰였다.
[주D-016]금성탕지(金城湯池) : 쇠로 만든 성곽과 펄펄 끓는 물로 채워진 해자(垓字)라는 뜻으로, 견고한 요새지를 말한다.
[주D-017]지금부터는 …… 알겠도다 : 한(漢) 나라 간의대부(諫議大夫) 종군(終軍)이 남월(南越)에 사신으로 나가기를 자청(自請)하면서, 긴 밧줄 하나만 주면 남월 왕을 묶어서 궐하(闕下)에 바치겠다고 한 고사가 전한다. 《漢書 卷64 終軍傳》
[주D-018]금방(金榜) : 대과(大科) 급제자 명단을 발표한 게시판이다.
[주D-019]쌍궐(雙闕) : 궁전 앞 양쪽에 높이 세운 누관(樓觀)으로, 중국의 도성을 뜻한다. 참고로 포조(鮑照)의 악부시(樂府詩)에 “잔잔한 물처럼 잘 닦인 장안 거리, 높은 궁궐이 구름 속에 떠 있는 듯.〔九衢平若水 雙闕似雲浮〕”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文選 卷28 結客少年場行》
[주D-020]묻고 …… 않으시리 : 방백(方伯)의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할 것이라는 말이다. 《시경》 소아(小雅) 황황자화(皇皇者華)에 “달리고 또 달리며 두루 묻고 또 묻네.〔載馳載驅 周爰咨詢〕”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왕명을 받든 신하가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하여 부지런히 방문하고 자문을 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D-021]갑진(甲津) : 갑곶진(甲串津)의 준말로, 강화부(江華府)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
[주D-022]시라는 …… 따름이니 : 《서경(書經)》 순전(舜典)에 “시는 자신의 뜻을 읊은 것이요, 노래는 읊은 그 말을 길고 짧게 조절하며 늘인 것이다.〔詩言志 歌永言〕”라는 말이 나온다.
[주D-023]누선(樓船)이 …… 우왕좌왕하였는데 : 장신(張紳)이 거느린 전선(戰船)들이 전투는 하지 않고 방관만 하고 있었던 것을 말하는데, 《포저집》 25권 병정기사(丙丁記事)에 이때의 상황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연계는 끈에 묶인 닭들이라는 뜻으로, 전국 시대에 진 효공(秦孝公)이 행동 통일을 기하지 못하는 제후들을 비유하면서, ‘끈에 묶인 닭들이 동시에 횃대에 올라갈 수 없는 것과 같다.〔猶連鷄之不能俱上於棲〕’고 표현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지휘계통이 확립되지 않아 군사 작전이 일사분란하게 전개되지 못하고 지리멸렬하게 된 상태를 형용한 말이다. 《戰國策 卷3 秦策1》 참고로 이백(李白)의 시에 “연계와 같아서 전진을 하지도 못한 채, 말에게 물만 먹이며 공연히 머뭇거리누나.〔連鷄不得進 飮馬空夷猶〕”라는 시구가 전한다. 《李太白集 卷10 經亂離後 天恩流夜郞云云》
[주D-024]민산(岷山)과 …… 서서는 : 오랑캐를 평정하여 국토를 수복하고 싶은 강개한 마음이 솟구쳤다는 말이다. 이백(李白)이 제갈량(諸葛亮)의 전기를 읽고 지은 시에 “제갈무후(諸葛武侯)가 촉 땅의 민산에 우뚝 서서는, 장안(長安)을 집어 삼킬 장한 뜻을 품었도다.〔武侯立岷蜀 壯志呑咸京〕”라는 구절이 나온다. 《李太白集 卷8 讀諸葛武侯傳 云云》 포저는 어려서부터 제갈량을 흠모하였는데, 본 시집의 맨 첫 번째에 나오는 우음(偶吟) 시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주D-025]장차 …… 가벼워졌는데 : 차라리 적군과 싸우다 죽을지언정 비굴하게 도망가지는 않겠다는 결의를 다지자, 육신에 대한 애착도 없어지면서 홀가분해졌다는 말이다. 한(漢) 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유파촉격(喩巴蜀檄)’에 “칼날을 맞부딪치고 날아다니는 화살을 맞을지언정 결코 뒤돌아보지 않고 뒤꿈치를 돌리지 않겠다고 각오하면서 사람들마다 분노하며 자기 원수를 갚는 것처럼 하였다.〔觸白刃 冒流矢 義不反顧 計不旋踵 人懷怒心 如報私仇〕”는 말이 나온다.
[주D-026]이 몸을 …… 듯하였나니 : 마치 자기의 애인을 사랑하는 것처럼 끔찍히 아껴 주었다는 말이다. 《시경》 정풍(鄭風) 건상(褰裳)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치맛자락을 걷어잡고 진수(溱水)를 건너가겠다.〔褰裳涉溱〕”라는 말이 나온다.
[주D-027]하중(下中)의 인물 : 하중은 하등(下等) 중의 중등(中等)이라는 뜻으로, 인물을 9품(品)으로 나눌 때 제일 마지막에서 두 번째인 8등급에 해당되는 용렬한 사람을 말하는데, 보통 능력과 자격이 없으면서도 거꾸로 중용(重用)되는 사람을 지칭할 때 쓰는 표현이다. 《사기(史記)》 이장군 열전(李將軍列傳)에, 전한(前漢)의 이채(李蔡)는 사람됨이 하중에나 속하는 인물이라서, 명성이 종형(從兄)인 이광(李廣)보다 훨씬 아래였는데도, 이광은 작읍(爵邑)도 얻지 못하고 관직도 구경(九卿)에 불과했던 반면에, 이채는 열후(列侯)가 되고 지위가 삼공(三公)에 이르렀다는 소위 ‘이채위인재하중(李蔡爲人在下中)’이라는 고사가 나온다.
[주D-028]일 여(旅)의 병력 : 중흥(中興)을 도모할 만한 최소한의 병력을 말한다. 500명을 1여(旅)라 하고, 사방 10리 되는 땅을 1성(成)이라 하는데, 하(夏) 나라 소강(少康)이 보잘것없는 이 병력과 이 땅을 가지고 마침내 과(過)와 과(戈)를 멸망시키고 우왕(禹王)의 기업을 회복시켰다는 고사가 전한다. 《春秋左氏傳 哀公 元年》
[주D-029]참소(讒訴)하는 …… 하였도다 : 자친이 믿을 정도로 교묘하게 꾸며대면서 잇따라 참소를 하여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되었다는 말이다. 춘추 시대에 증삼(曾參)의 모친이 증삼의 살인 소식을 전해 듣고서 처음에는 믿지 않다가 계속해서 세 사람이 그 이야기를 전하자 사실로 믿고는 놀란 나머지 베틀에서 내려와 담장을 넘어 도망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戰國策 卷4 秦策2》
[주D-030]버들잎 …… 올라 : 활쏘기 등 뛰어난 무예 솜씨로 무과(武科)에 당당히 급제할 것이라는 말이다. 춘추 시대 초 공왕(楚共王)의 장군인 양유기(養由基)가 일백 보 떨어진 거리에서 버들잎을 활로 쏘아 백발백중시켰다는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4 周本紀》
[주D-031]기문(期門)의 …… 분이건만 : 왕을 호종(扈從)하는 무관에 임명될 것이라는 말이다. 한 무제(漢武帝)가 민정 시찰을 하기 위해 미행(微行)할 때면 기사(騎射)에 능한 무사들과 궁전 문 앞에서 몰래 만나기로 약속하고 출발을 했기 때문에 그들을 기문이라고 불렀다. 그 뒤 한 평제(漢平帝) 때에 관명(官名)을 호분랑(虎賁郞)으로 고쳤는데, 이들 중에서 명장이 많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漢書 卷28 地理志 下》
[주D-032]생각이 …… 알았나니 : 삼국 시대 위(魏) 나라 여안(呂安)과 혜강(嵇康)이 벗으로 절친하게 지냈는데, ‘상대방이 그리워질 때마다 서로 천리 길을 멀다 하지 않고 방문했다.〔每一相思 輒千里命駕〕’는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世說新語 簡傲》
[주D-033]옛날의 …… 보고 : 기자(箕子)가 조선 땅에 온 뒤에 평양(平壤)에서 정전법(井田法)을 시행했다는 전설이 있다.
[주D-034]기린각(麒麟閣)에 …… 전하시리이다 : 공신(功臣)의 봉호(封號)를 받고 길이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한 선제(漢宣帝)가 공신 11명의 초상화를 그려서 기린각에 걸어 놓게 한 고사가 있다. 《漢書 卷54 附 蘇武傳》
[주D-035]남아(男兒)의 …… 뜻이거니 : 옛날에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뽕나무로 활을 만들고 쑥대로 화살 여섯 개를 만들어 천지 사방에 대고 한 대씩 쏘면서 사방을 경영하는 큰 인물이 되라고 기원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를 상호봉시(桑弧蓬矢)라고 하였다. 《禮記 內則》

포저집 제1권
 시(詩)
영회(詠懷) 9수



우음(偶吟) 어렸을 때 지은 것이다.
제갈공명은 세상에 드문 공명의 소유자로 / 諸葛功名世上稀
풍운이 감응하여 제왕의 스승이 되신 분 / 風雲相感帝王師
오랜 옛날 전신의 일을 멀리 생각하니 / 千秋遙想前身事
숙자가 고리 찾은 일과 나도 비슷할 듯 / 叔子探鉤我庶幾


독서(讀書) 2수
차가운 밤 산골 마을 조용도 한데 / 寒夜山村靜
친하게 지내는 건 책상 위의 서책뿐 / 床書只自親
책 속에 천고의 뜻이 들어 있어서 / 卷中千古意
등불 아래 십 년 동안 글을 읽었네 / 燈下十年人
단서를 찾아 이치를 뚫으면 기쁘다가도 / 理透欣尋緖
되돌아 보면 실천을 못하니 부끄럽기만 / 行難愧省身
단지 걱정은 정신과 기력이 미흡한 것 / 但愁精力淺
어찌 감히 부지런히 노력하지 않을쏜가 / 那敢厭勤辛

문 닫고 경서의 뜻을 궁구하노라니 / 閉戶窮經旨
유거에 세월이 또 새롭게 바뀌었네 / 幽居歲月新
깊이 인식하게 되면 타인도 바로 나요 / 識通人亦我
마음이 고요하면 만물이 모두 봄빛이라 / 心靜物皆春
우리 성품은 근원이 맑은 줄을 알겠는데 / 溯本知元善
흘러가며 자꾸만 흐려지는 게 탈이로세 / 沿流歎未純
사도가 우리 안에 있게 할 수만 있다면 / 但能斯道在
옛날 이상 사회와 이웃할 수도 있으련만 / 今古卽爲鄰

주자(朱子)의 훈몽(訓蒙) 절구(絶句)를 본떠서 대학(大學)의 내용을 소재로 지어 보다. 3수
선을 행하려면 최고의 경지를 목표해야만 / 爲善須皆極處臻
그렇지 않으면 어려서부터 포기하기 마련 / 不然自小棄其身
나의 성품도 순 임금과 원래 다름없는데 / 此德元來與舜似
고작 구 푼의 사람으로 그쳐서야 되겠는가 / 如何只作九分人
이것은 ‘지선의 경지에 머무르는 데에 있다.〔在止於至善〕’는 말을 소재로 한 것이다.

잘못을 고쳐 선을 이루는 전기로 삼으려면 / 革非成善若爲機
세 구절의 반명이 소중한 교훈이 되리로다 / 三句盤銘是要規
매일 자신을 격려하며 힘써야 할 것이니 / 貴在朝朝能自勵
범부가 성인이 되는 길이 여기에 있도다 / 凡人作聖實由斯
이것은 ‘진실로 어느 날 새롭게 하였으면 이를 계기로 나날이 새롭게 하고, 다시 날마다 더 새롭게 되도록 해야 한다.〔苟日新 日日新 又日新〕’는 말을 소재로 한 것이다.

선은 기필코 행하고 악은 행하지 말라 / 善必爲之惡不爲
이는 하늘이 사람에게 명하신 바이니라 / 是皆天命我人斯
보든 보지 않든 항상 이 말씀 명심하여 / 無有顯微常顧此
종일토록 추호라도 어긋남이 없게 하라 / 莫敎終日一毫違
이것은 ‘이 하늘의 밝은 명을 돌아본다.〔顧諟天之明命〕’는 말을 소재로 한 것이다.

논어(論語)를 읽고
분발하여 식사도 밤잠도 모두 잊고 폐했으며 / 發憤忘飡又廢眠
소악을 배우곤 석 달 동안 고기 맛도 모르셨네 / 學韶三月味全捐

성인께서도 이와 같이 애쓰며 수고하셨는데 / 勤苦聖人猶若此
범부가 편히 거하면서 거드름 부리면 되겠는가 / 凡人何可自安然

육언 절구(六言絶句)의 당시(唐詩)를 우연히 보고는 이를 본떠서 짓다.
고요한 밤 등불 밝히고 홀로 있나니 / 靜夜燃燈獨居
한가한 방 안 좌우에는 오직 도서뿐 / 閑房左右圖書
아득히 천고의 시간에서 마음 노닐며 / 遊心杳杳千古
까마득 태허 속에서 진리를 찾노매라 / 索理冥冥太虛

우음(偶吟)
세상에 영합을 못하는 몸 가련키도 하다마는 / 自憐鄙拙耻趨時
이제까지 배운 것이 바로 물기가 아니던가 / 所學從來是勿欺
먼 옛날 거슬러 올라 오로지 성현을 사모하며 / 千古聖賢惟遠慕
한평생 경전의 말씀 더듬어 추구해 왔노매라 / 一生經傳獨尋窺
남의 뜻 맞춰 주기 싫어 원래 깊이 숨었다만 / 深潛本不蘄人合
한번 나가기만 하면 세상과 갈등을 빚으니 원 / 乍出旋看與世違
우스워라 티끌 세상 오래 있기가 어렵나니 / 堪笑塵寰難久處
의구한 청산에 들어가서 소요하며 살아야지 / 靑山依舊可棲遲


 

[주D-001]풍운(風雲)이 감응하여 : 유비(劉備)와 제갈공명 같은 훌륭한 임금과 신하가 서로 만나서 의기투합한 것을 말한다. 《주역(周易)》 건괘(乾卦) 문언(文言)의 “구름은 용을 따르고 바람은 범을 좇는다.〔雲從龍風從虎〕”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주D-002]오랜 …… 비슷할 듯 : 전생에 작자 자신이 제갈공명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말이다. 서진(西晉)의 정남장군(征南將軍) 양호(羊祜)가 다섯 살이 되었을 적에, 이웃에 사는 이씨(李氏)의 동쪽 담 뽕나무 밑으로 곧장 가서 금고리〔金環〕를 찾아내어 가지고 놀았는데, 이씨 집에서 이것을 보고는 “어려서 죽은 내 아들이 가지고 놀다가 잃어버렸던 물건이다.”고 경악해 마지않았으며, 당시 사람들도 이씨의 아들이 양호로 환생(還生)했다고 믿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晉書 卷34 羊祜傳》 숙자(叔子)는 양호의 자(字)이다.
[주D-003]분발하여 …… 모르셨네 : 공자의 학문에 대한 열정을 표현한 말이다. 《논어(論語)》 술이(述而)에 공자가 자신을 평하여 “진리를 터득하지 못하면 분발하여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진리를 터득하면 즐거워서 걱정도 잊어버린 가운데, 늙음이 나에게 닥쳐오는 것도 알지 못한다.〔發憤忘食 樂以忘憂 不知老之將至〕”고 말한 대목과, “공자가 제 나라에서 순 임금의 음악인 소악(韶樂)을 듣고는, 이를 배우는 석 달 동안 고기 맛도 잊어버린 채, 음악이 이렇게까지 기막힌 경지에 이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하였다.〔子在齊聞韶 三月不知肉味 曰不圖爲樂之至於斯也〕”는 대목이 나온다.
[주D-004]물기(勿欺) : 자기의 속마음을 속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논어》 헌문(憲問)에 “자기를 속이지 말고 임금님 앞에서도 바른 말을 하라.〔勿欺也 而犯之〕”고 자로(子路)에게 충고한 공자의 말이 나온다.

 

 

포저집 제1권
 시(詩)
영사(詠事) 26수



봄날 산중의 일을 읊다.
배나무는 꽃받침에 흰 망울 돋아나고 / 梨萼纔生白
복사꽃은 벌써 붉은 봉오리 터뜨렸네 / 桃花已放紅
뜨락의 홰나무는 이제 막 그늘 드리우고 / 庭槐初落影
문간의 버들은 바야흐로 바람에 휘청휘청 / 門柳正斜風
산 빛깔은 동서남북이 각기 다른데 / 四面山光別
앞에 보이는 들판은 모두 똑같은 색 / 前瞻野色同
산새들은 긴 날을 조잘대며 노래하고 / 幽禽喧永日
장난치는 나비들은 갠 하늘에 난분분 / 戱蝶亂晴空
차례대로 펼쳐지는 봄날의 멋진 경치 / 次第芳辰景
조물의 솜씨 얼마나 대단한지 알겠도다 / 紛紜造化工
날씨도 이젠 홑적삼이 적당한 시절 / 炎凉單袂適
세계가 온통 화폭 속에 잠겨 있는 듯 / 世界畫圖中
움직이든 쉬든 기쁨이 넘쳐 흐르나니 / 動息歡愉足
하늘과 사람이 위아래에서 감통하도다 / 天人上下通
그런데 어찌하여 만물은 즐거운데 / 如何百物好
유독 우리 백성들만은 곤궁하단말가 / 獨此庶民窮
눈에는 화락한 풍경이 가득 들어와도 / 滿目雖堪悅
마음에 걸리는 건 되레 근심 걱정뿐 / 關心反有忡
알괘라 흥망성쇠 원래 정해져 있으리니 / 隆衰知素定
기쁨과 슬픔 역시 하늘에 맡길 도리밖에 / 憂樂任蒼穹

궁중에 서 있는 봄날의 소나무
봄이 비원의 나무에 돌아왔나니 / 春歸御苑樹
우뚝 선 한 그루 저 소나무에도 / 特立一株松
뿌리 박고 사는 곳이 궁중이긴 하지만 / 托植依丹禁
푸른 산봉우리에서 옮겨 온 것이라오 / 移來自碧峯
무성한 잎을 보소 학이 깃을 칠 만하고 / 葉深堪宿鶴
나이 많은 비늘 보소 용이 다 되었잖소 / 鱗老久成龍
모진 눈보라에도 푸르름을 변치 않다가 / 雪苦靑無改
따스한 햇빛 받아 더욱 진하게 푸르도다 / 陽和翠更濃
바람 불면 멀리서부터 피리 소리요 / 風生籟自遠
달이 뜨면 거무스름 포개지는 그림자들 / 月出影仍重
이슬 방울이 새 이끼 위에 가느다랗게 뚝뚝 / 露滴新苔細
솔향기가 풀 내음 뒤섞여 진하게 배어나네 / 香連雜卉穠
구천의 의장이 납시면 광채가 어른어른 / 光搖九天仗
오경의 종소리 들리면 함께 떨며 파르르 / 聲動五更鍾
궁중에서 언제나 보며 감상을 해 주시니 / 長帶瑤臺賞
대악에 봉해진 것보다도 훨씬 낫고말고 / 全勝岱岳封
일천 산의 소나무가 본디 하나의 종자련만 / 千山固一種
이 나무만 선용의 특혜를 누리게 되었나니 / 唯此爲先容
귀하고 천하게 됨도 실로 이와 같은 것 / 貴賤良如此
운수를 잘 만나느냐에 원래 달려 있느니라 / 由來只在逢

봄비
아득히 강하늘에 내리는 봄비 / 漠漠江天雨
부슬부슬 물마을에 자욱하도다 / 霏霏滿水村
교외 들판엔 남은 눈도 모두 녹고 / 郊原殘雪盡
밭도랑엔 물이 콸콸 넘쳐흐르누나 / 溝洫亂流奔
농부들은 보리 파종을 걱정하겠지만 / 田父憂牟種
서생은 나물 뿌리가 그저 기쁘기만 / 書生喜菜根
적적한 집 찾아 주는 사람이 없어 / 無人慰窮寂
종일토록 사립문을 닫고 앉았노라 / 終日閉柴門

사월에 비가 내리는 가운데 고목이 된 복숭아나무 가지에 늦게야 꽃이 핀 것을 보고 노래하다.
정원의 복숭아나무 아래 녹음이 벌써 쌓였는데 / 園中桃樹綠陰堆
붉고 흰 꽃이 섬돌 앞에 가장 늦게 꽃 피웠네 / 紅白階前最後開
쇠잔한 빛의 가지 하나 참으로 유다른데 / 殘色一枝誠異矣
꽃다운 자태 독점하니 이 또한 기이하군 / 芳姿獨在亦奇哉
훈풍이 늦으니 꽃 피고 싶어도 어찌했겠나 / 榮華無奈薰風晩
고목이 밀우를 만나 불끈 힘이 솟았으리 / 衰歇仍逢密雨催
내일 아침엔 바람에 나부껴 모두 떨어지겠지 / 定是明朝飄落盡
난간에 서서 애석한 생각을 가누기 어려워라 / 臨軒嗟惜意難裁

진간재집(陳簡齋集)을 우연히 열람하다가 장 적공(張迪功)의 시에 차운한 시를 발견하고는 한 수 짓다.
전원의 봄빛이 이제 다하려 하는 이때 / 田園春色屬將闌
병객은 문 닫은 채 추위를 여태 겁낸다오 / 病客關門尙畏寒
밭에 풀이 무성해도 뽑을 힘이라도 있나 / 數畝草深無力斸
집에 꽃이 좋은들 누구와 함께 구경하리 / 一堂花好共誰看
독서에 게을러서 경서는 책상에 가득한데 / 懶繙經籍空盈案
만식하는 산나물은 소반을 채우지 못하누나 / 晩食山蔬不滿盤
애닲도다 좋은 시절에 즐거운 생각이 안 들다니 / 惆悵芳辰歡意少
술잔을 들며 어디에 가서 시름을 풀 수 있을거나 / 綠樽何處解憂端

함흥곡(咸興曲) 5수
만세교 위엔 내 낀 버들 휘휘 늘어지고 / 萬歲橋頭煙柳斜
행인들 건너간 강물은 혼자서 출렁출렁 / 行人渡盡水空波
어스름 저녁 여기저기 울리는 노랫소리 / 薄暮歌聲無數發
강변 쪽에 색시네 집이 많이들 있다나요 / 向江多是女郞家

상공이 낙민루에서 객을 전별하는지라 / 相公餞客樂民樓
수국의 이 가을날 풍악 소리 요란하이 / 歌管紛紛水國秋
신사와 미인이 어울린 아득히 높은 이 누대를 / 烏帽紅粧高縹緲
행인들 모두 다리 위에서 머리 돌려 바라보네 / 行人橋上盡回頭

봄날이 간 때에 변방 고을엔 꽃이 성에 만발하니 / 春盡邊州花滿城
남방의 상인이 찾아와서 회포를 가눌 수 있으리요 / 南方賈客不勝情
돈을 싸 들고 창루에 찾아가 하룻밤을 즐기리니 / 將錢却向娼樓宿
처처에 달 밝은 아래 풍악 소리가 울릴 수밖에 / 處處月明絲管聲

군영의 애잔한 뿔피리 소리 아침을 열면 / 轅門晨啓角聲哀
주군의 제공이 지시 받으러 달려와서는 / 州郡諸公受事來
저녁에 성루에서 성대한 연회에 모였다가 / 向晩城樓紛宴集
은 장식 안장에 각자 미녀 싣고 간다네요 / 銀鞍各載翠娥回

어스름 저녁에 서로 함께 돌아오는 행락객들 / 薄暮遊人相與還
성 안팎의 온갖 꽃들 이제는 시들 때이니까 / 城中城外百花殘
지금은 변방 요새에 전란의 경보도 끊어져서 / 如今沙塞風塵絶
달 밝은 밤 영문에서도 문을 닫지 않는다오 / 明月營門夜不關

우제(偶題)
옛날에 도군은 굶주림에 늘상 시달렸지만 / 古者陶君常苦饑
그래도 찾는 사람 있어 취할 때가 많았는데 / 招尋猶自醉多時
지금 나는 부황이 들고 마시기도 어려우니 / 如今顑頷還難飮
옛사람보다 못한 것을 더욱 알 만하도다 / 不及前人益可知

춘화의진대(春和議賑貸) 과제(課製)
옛날에 한 나라 문제는 밝고 거룩하여 / 漢帝昔明聖
번거롭고 가혹한 법령을 제거하였나니 / 政令除繁苛
인자한 그 마음이 만물을 덮어 주어 / 仁心覆萬物
온 누리에 고통받는 사람이 없었다오 / 四海無扎瘥
한 해가 바뀌어 봄기운이 돌아오자 / 歲換春氣回
천지 사이에 화기가 넘쳐흐르면서 / 融融天地和
먼 산에는 아득히 아지랑이 뒤덮이고 / 杳靄冪遠山
긴 둑은 안개 낀 꽃으로 옷 입었다오 / 煙芳被長坡
그윽한 새 울음소리 숲 기슭에서 들려오고 / 幽禽咽林麓
가녀린 잎새들이 정원의 나무에 움트는 때 / 嫩葉生庭柯
봄을 맞아 만물이 모두 새롭게 바뀌는데 / 覽此時物變
곤궁한 우리 백성들은 어찌해야 좋단말가 / 柰我生民何
농가에는 묵은 곡식이 죄다 떨어졌으리니 / 田家舊穀盡
무슨 수로 씨 뿌리고 농사를 다시 지으리요 / 何以事稼禾
백성의 고통을 측은하게 여기는 그 심정이 / 惻念民疾苦
마치 자신이 병에 걸려 괴로운 듯했는지라 / 有若纏痒痾
백성 구제할 대책을 강구하도록 명했나니 / 渙然下明詔
세상 모두가 은혜의 물결에 몸을 적셨도다 / 四海皆恩波
안자가 말했던 그대로 밭갈이 살피도록 하고 / 省耕聞晏子
추가의 말 그대로 당읍의 곳간을 열게 했으며 / 發棠師鄒軻
곤궁한 이에게 빠짐없이 혜택이 돌아가게 하고 / 振施周困窮
백발의 늙은이들을 위문하고 봉양하게 하였도다 / 存問及皤皤
하늘이 주신 봄날과 임금이 베푼 인자함이 / 天春與主仁
한쪽으로 치우침 없이 똑같이 공평하였는데 / 溥博無偏頗
그런 성왕이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나셨는지라 / 聖王沒已久
돌이켜 생각하노라니 더욱 비감이 드노매라 / 緬想增悲哦
나는 다행히도 성명의 시대를 만난 데다 / 我幸逢聖明
봄바람이 지나가는 계절을 또 만났으니 / 東風又來過
정치를 시행하되 이 봄날에 맞게 하여 / 發政及春時
옛 성왕과 동등하게 되기만을 바라노라 / 願與此同科

욕기(浴沂) 과제
늦은 어느 봄날 날씨도 화창하고 / 暮春天氣和
따스한 햇빛에 바람이 또 살랑살랑 / 日暖風亦微
기수의 물은 바야흐로 넘실거리고 / 沂水方浩浩
초목에도 향그런 꽃이 피어나는 때 / 卉木紛芳菲
관 쓴 벗과 아이들 십여 명 모두 / 冠童十數人
몸에 맞게 새로 봄옷 지어 입고서 / 便體皆春衣
맑은 물에 목욕하여 재액을 씻어내고 / 祓除浴淸流
노래 부르며 바람 쐬고 돌아온다네요 / 詠歌乘風歸
처음부터 분수 넘는 생각이 없이 / 初無出位想
자연의 변화에 호연히 순응하나니 / 浩然順天機
천지의 기운과 같은 그 기상이여 / 氣象似天地
요순 시대가 아마도 그러했으리라 / 唐虞其庶幾
증점은 여기에 뜻을 두고 있었기에 / 點也志在玆
조용히 뜯던 거문고를 내려놓았나니 / 乃捨鼓瑟希
유독 다른 제자들과 생각이 달랐으나 / 獨異諸子撰
성인의 마음과는 어긋나지 않았도다 / 不與聖心違

이 도리는 본래가 자유자재한 것 / 此理本自在
소리개 날고 물고기 뛰는 것을 보라 / 鳶魚觀躍飛
인욕이 모두 없어진 사람이 아니라면 / 苟非人欲盡
누가 이런 기상을 발휘할 수 있겠는가 / 孰能此發揮
이런 마음의 즐거움을 얻게만 된다면 / 如得此心樂
목마름과 배고픔도 잊을 수가 있을 터 / 足以忘渴饑
공안이 즐긴 단사 표음의 생활이나 / 孔顔樂簞瓢
증씨가 언급한 욕기의 이 기상이나 / 曾氏言浴沂
즐기는 그 경지 본래 가락이 같건마는 / 其樂本同調
예로부터 지음이 드물기만 하였어라 / 知音終古稀
옛날의 성현들을 두루 찾아뵙고 / 歷觀前聖賢
천추토록 남기신 광휘 앙망하면서 / 千秋仰餘輝
좋은 말씀 접하고 그윽히 감회를 발하나니 / 嘉言激幽賞
이분들이 안 계시면 누구를 의지하겠는가 / 微斯誰可依

단오첩(端午帖)
석류꽃 막 피어서 청포에 어른거리는 때 / 榴花初發暎靑蒲
명절날에 임금님이 옥호의 은사를 내리셨네 / 令節天恩賜玉壺
반열 뒤에서 기뻐 춤추며 느끼는 깊은 감회 / 蹈舞後班深有感
차생에 어찌 뜻했으랴 요순 시대 만날 줄을 / 此生何意際唐虞

중양일(重陽日)에 정원(政院) 섬돌 위의 들국화를 보고 읊조리다. 4수
봄나들이 나갈 때야 아무 꽃이나 좋겠지만 / 尋芳不耻品名卑
옮겨다 심으려면 꽃들 중에서 가려야 할 터 / 移取應從衆草披
대궐에 천한 꽃 핀 것이야 괴이할 것 있소 / 莫怪微花登玉殿
원래 영광은 스스로 때에 맞아야만 하니까 / 由來榮辱自當時

섬돌 옆에 국화 심은 건 꽃을 따려 함이니 / 種菊階邊爲採英
내 섞이고 이슬 젖어 줄기에 꽃을 피워야지 / 和煙浥露擢寒莖
그런데 왜 중양절을 넘기도록 피지 않아 / 如何蹉過重陽節
들국화 혼자서 영광을 독점하게 만들었노 / 却使山花獨擅榮

도성의 가을 기운이 숲동산에 가득한 때 / 禁城秋色滿林園
명절이 아까우니 억지로 술잔을 들 수밖에 / 爲惜佳辰强對樽
품격은 없어도 찬 향기만 취하면 그만이니 / 但取寒香無取格
술잔에 띄워 곤드레만드레 취한들 어떠하리 / 不妨泛酒醉昏昏

들국화야 국화 중에서 본래 사랑도 못 받으니 / 山花於菊本非奇
감히 이름난 동산에서 일찍 피려고 다퉜겠소 / 敢向名園較早遲
알 만하오 세간에 그래도 공도가 남아 있어 / 可識世間公道在
소외된 곳에서 대궐 위로 바쳐 올려진 줄을 / 却從疎外進丹墀

파초(芭蕉)를 노래하다.
예전에 횡거(橫渠) 선생의 파초 시를 보긴 하였으나, 그때는 이 시가 얼마나 친절한지를 아직 알지 못하였다. 금년에 파초 하나를 대청 앞에 심어 놓고 살펴보니, 일단 하나의 잎사귀가 활짝 펴져서 사방으로 드리워지면 또 새 잎사귀가 마치 채찍처럼 속에서 돌돌 말려 곧장 위로 뽑혀 나왔고, 이 잎사귀가 또 점차 커져서 저번처럼 되면 또다시 새 잎사귀가 뽑혀 나왔는데, 이러한 현상이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지곤 하였다. 내가 이것을 보고서 비로소 횡거가 시를 지은 그 뜻이 얼마나 친절한지를 알고는 마침내 느낀 점이 있어서 시를 지었다.

앞 잎사귀 드리우면 뒷 잎사귀 벌써 삐죽 / 前葉纔舒後葉抽
뽑혀 나오고 활짝 펴짐이 계속 이어지나니 / 旋抽旋暢不曾休
우리도 이것을 보고 모쪼록 학문을 발전시켜 / 吾人進學須看此
날로 열심히 추구하며 새로운 경지 이뤘으면 / 勉勉新功日日求

춘일(春日)
바람이 온화하니 촌로가 와서 자리 다투고 / 風和野老來爭席
햇볕이 따스하니 아동이 뜰 가득 장난치네 / 日暖兒童戱滿庭
산중 집에 봄이 오니 신나는 일이 하도 많아 / 春至山家多勝事
한가한 속에 남은 세월을 절로 즐길 만하여라 / 閑中自可娛殘齡

하일(夏日)
마을 사람 모두 나가 논밭에 흩어지고 / 村人皆出散田疇
낮 시간 긴 산속은 고요하고 그윽해라 / 長日山中靜且幽
들리는 것은 나무에서 조잘대는 새소리뿐 / 庭樹唯聞鳥音鬧
책상 가득 경서를 세밀히 들춰 보노매라 / 滿床經籍細尋求

야목정사(野牧亭舍) 춘첩(春帖) 4수
봄이 와서 기쁜 기색이 천지에 가득한 때 / 春來喜氣滿乾坤
강토가 안정되고 국세가 드높아지기만을 / 疆場淸寧國勢尊
다시 원하건대 논밭에 곡식이 잘 익어서 / 更願田疇禾黍熟
노인이 배불리 먹고 자손들 재롱 받기만을 / 老人含哺弄兒孫

온화한 바람 맑은 기운이 새봄을 알려 주니 / 和風淑氣報新春
만물을 고루 생육하는 천지의 뜻이 펴지리라 / 自此乾坤生意均
누런 머리 늙은 신하 소망이 무엇이냐 하면 / 黃髮老臣奚所望
다만 하나 성상의 덕이 인으로 일관하시기를 / 只祈聖德一於仁

새봄이 돌아왔다는 아동의 말을 듣고 보니 / 兒童傳說早春回
천지에 화창한 기운이 이는 것을 느끼겠네 / 便覺乾坤淑氣催
더욱 기쁜 건 숲 정자에 신나는 일이 많아 / 更喜林亭多勝事
노인네가 마음껏 술잔을 들 수 있다는 것 / 老人能盡十千盃

어느 틈에 동산에 다시 봄기운이 돌아와서 / 忽覺丘園春氣回
언덕 시내 꽃과 버들 서로들 몰래 재촉하네 / 岸花溪柳暗相催
노인의 소원은 단 하나 풍년의 낙을 누리면서 / 老人只願豐年樂
전야에 나가 어울리며 백 잔의 술에 취하는 것 / 田野相從醉百盃

야목정사에 제하다.
원량과 비슷한 나의 오두막이요 / 矮室如元亮
동정과 흡사한 호수와 산이로세 / 湖山似洞庭
실로 선경이라 할 내와 노을 속에서 / 煙霞眞異境
늙고 병든 한 몸이 여생을 보내노라 / 老病一殘生
뭇 산봉우리가 처마 앞에 도열하고 / 衆峀簷前列
긴 시냇물이 눈 아래 가로 비낀 곳 / 長川眼底橫
삼공의 자리와도 바꿀 수 없다고 한 / 三公不可換
이 말이 어찌 참이 아니라 하겠는가 / 此語豈非誠


 

[주D-001]나이 …… 되었잖소 : 소나무의 울퉁불퉁한 거죽을 시에서 흔히 용의 비늘로 표현한다.
[주D-002]바람 …… 소리요 : 강하고 약한 바람에 나무들이 각각 다르게 반응하면서 온갖 다양한 피리 소리를 낸다는 이른바 ‘천뢰(天籟)’에 대한 설명이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나온다.
[주D-003]구천(九天)의 …… 어른어른 : 왕이 행차할 때면 의장대(儀仗隊)의 휘황한 빛이 소나무에도 어리비친다는 말이다.
[주D-004]대악(岱岳)에 봉해진 것 : 오대부송(五大夫松)을 말한다. 진 시황(秦始皇)이 태산(泰山)에 올라가 봉선(封禪)의 제사를 올리고 돌아올 적에 홀연히 폭풍우를 만나 소나무 아래로 피했는데, 그 소나무가 공을 세웠다고 하여 오대부(五大夫)의 관직에 봉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6 秦始皇本紀》 대악은 태산의 별칭이다.
[주D-005]선용(先容) : 남보다 먼저 보살핌을 받고 보기 좋게 꾸며져서 임금의 총애를 받는 것을 말한다. 전한(前漢) 추양(鄒陽)의 ‘옥중상서(獄中上書)’에 “뿌리와 가지가 구불구불 휘어진 나무도 임금의 총애를 받는 수가 있는데, 그 이유는 좌우에서 모시는 신하가 임금을 위해 먼저 그 나무를 아름답게 꾸며 주기 때문이다.〔蟠木根柢 輪囷離奇 而爲萬乘器者 何則 以左右先爲之容也〕”라는 말이 나온다. 《史記 卷83 鄒陽列傳》
[주D-006]서생은 …… 기쁘기만 :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생활이 즐겁기만 하다는 말이다. 송(宋) 나라 왕신민(汪信民)이 “사람이 항상 나물 뿌리를 캐 먹고 살 수만 있다면, 어떤 일이든 모두 행할 수가 있다.〔人常咬得菜根則百事可做〕”고 하였는데, 이 말을 호안국(胡安國)이 전해 듣고는 무릎을 치면서 찬탄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東萊呂紫微師友雜誌》
[주D-007]진간재집(陳簡齋集)을 …… 짓다 : 간재는 남송(南宋)의 명신이요 시인인 진여의(陳與義)의 호이고, 장 적공은 종9품(從九品)인 적공랑(迪功郞)의 품계로 남경 윤(南京尹)의 속관(屬官)을 지낸 장구신(張矩臣)을 말한다. 두 사람 모두 관직의 고하를 떠나 지기(知己)로서의 진실한 우정을 보여 주었는데, 장구신의 문집은 전하지 않고 《간재집(簡齋集)》 10권에 진여의가 장구신의 시에 차운한 시 4수가 보인다. 참고로 그 시의 제목을 소개하면 ‘차운장적공춘일(次韻張迪功春日)’과 ‘우화세제감회 용전운(又和歲除感懷用前韻)’과 ‘장적공휴시견과 차운사지 2수(張迪功攜詩見過次韻謝之二首)’ 등인데, 포저의 이 시도 차운한 것은 물론이다.
[주D-008]만식(晩食) : 배가 고플 때에는 거친 음식을 먹어도 고기 맛과 같다는 ‘만식당육(晩食當肉)’의 준말로 시장이 반찬이라는 뜻인데, 보통 채소와 나물을 먹는 담박한 식생활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주D-009]도군(陶君) : 도잠(陶潛)을 말한다.
[주D-010]춘화의진대(春和議賑貸) : 한 문제(漢文帝)가 곤궁한 백성을 구제할 대책을 논의하라고 신하들에게 조서를 내린 고사를 시의 제목으로 삼은 것이다. 문제 원년 3월에 “지금은 바야흐로 봄빛이 화창한 시절이다. 그래서 초목과 뭇 생물들이 모두 스스로 즐거워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백성들 가운데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과 곤궁한 사람들이 죽음의 구렁에 떨어지기도 하는데, 이를 걱정하면서 보살펴 주지 않고 있다. 백성의 부모가 된 임금의 입장에서는 장차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이들을 구제할 대책을 논의하여 아뢰어라.〔方春和時 草木群生之物皆有以自樂 而吾百姓鰥寡孤獨窮困之人或阽於死亡 而莫之省憂 爲民父母將何如 其議所以賑貸之〕”라고 조서를 내린 내용이 《한서(漢書)》 문제 본기(文帝本紀)에 나온다.
[주D-011]번거롭고 …… 제거하였나니 : 한 문제는 보기 드문 성군으로, 가급적 백성의 편의 위주로 많은 법령을 개정하였는데, 대표적인 예로 요언비방죄(妖言誹謗罪)와 육형(肉刑)의 형벌을 없앤 일과 혜제(惠帝)의 수많은 후궁(後宮)들을 개가(改嫁)시킨 일과 도주전(盜鑄錢)의 법령을 없애고 백성들이 스스로 주조(鑄造)하게 한 일 등을 꼽을 수 있다.
[주D-012]안자(晏子)가 …… 하고 : 《맹자(孟子)》 양혜왕 하(梁惠王下)에 안자가 제 경공(齊景公)에게 “봄에는 밭갈이가 잘되었는지 살펴보고서 부족한 것이 있으면 보충해 주고, 가을에는 수확이 잘되었는지 살펴보고서 부족한 것이 있으면 도와주어야 한다.〔春省耕而補不足 秋省斂而助不給〕”고 말한 내용이 나온다.
[주D-013]추가(鄒軻)의 …… 했으며 : 옛날 맹자가 했던 것처럼 나라의 창고를 열어서 곡식을 백성들에게 나눠 주게 했다는 말이다. 전국 시대 제(齊) 나라에 기근이 들자 맹자가 일찍이 선왕(宣王)에게 건의하여 당읍(棠邑) 창고의 곡식으로 구제하게 한 일이 있었는데, 그 뒤에 다시 기근이 들자 제 나라 사람들 모두가 그 일을 또 맹자에게 부탁했다는 내용이 《맹자》 진심 하(盡心下)에 나온다. 추가의 추는 맹자의 출신 지역이고, 가는 맹자의 이름이다.
[주D-014]욕기(浴沂) : 공자의 제자 증점(曾點)이 “늦은 봄에 봄옷이 만들어지면 관을 쓴 벗 대여섯 명과 아이들 예닐곱 명을 데리고 기수에 가서 목욕을 하고 기우제 드리는 곳에서 바람을 쏘인 뒤에 노래하며 돌아오겠습니다.〔暮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고 자신의 뜻을 밝히며 대답하자, 공자가 찬탄하며 허여했던 고사를 시의 제목으로 삼은 것이다. 《論語 先進》
[주D-015]처음부터 …… 없이 : 《주역(周易)》 간괘(艮卦) 상사(象辭)에 “군자는 간괘를 보고서 자신의 생각을 분수에 넘지 않게 한다.〔君子以 思不出其位〕”는 말이 나오는데, 《논어》 헌문(憲問)에도 이와 똑같은 증자(曾子)의 말이 소개되어 있다.
[주D-016]증점은 …… 않았도다 : 증점이 대답하기 전에 자로(子路)와 염유(冉有)와 공서화(公西華)가 먼저 답변을 올렸는데, 공자가 마지막으로 증점의 생각을 묻자, ‘증점이 조용히 거문고를 뜯고 있다가 크게 한바탕 튕기고서 내려놓은 뒤에 일어나서는 세 사람과 생각이 다르다고 하면서〔鼓瑟希 鏗爾 舍瑟而作 對曰 異乎三子者之撰〕’ 자신의 뜻을 말하여 공자의 허여를 받은 것을 말한다.
[주D-017]소리개 …… 보라 : 만물이 모두 제자리를 얻고서 각자의 가능성을 최대한 발휘하며 한껏 삶을 누리는 경지를 말한 것인데, 《시경(詩經)》 대아(大雅) 한록(旱麓)에 “소리개는 하늘 높이 솟구치고, 물고기는 못 속에서 뛰노누나.〔鳶飛戾天 魚躍于淵〕”라는 구절이 나온다.
[주D-018]공안(孔顔)이 …… 생활이나 : 공자와 그 제자 안회(顔回)가 보여 준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생활을 말한다. 《논어》 옹야(雍也)에 “어질다, 안회여. 한 그릇 밥과 한 표주박 물을 마시며 누항에 사는 것을 사람들은 근심하며 견뎌 내지 못하는데, 안회는 그 낙을 바꾸지 않으니, 어질도다, 안회여.〔賢哉 回也 一簞食 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 不改其樂 賢哉 回也〕”라고 칭찬한 공자의 말이 실려 있고, 또 술이(述而)에 “거친 밥 먹고 물 마시며 팔을 굽혀 베더라도 즐거움이 또한 그 속에 있다.〔飯疏食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주D-019]횡거(橫渠) 선생의 파초 시 : 횡거는 송(宋) 나라 철학자 장재(張載)의 호인데, 《장자전서(張子全書)》 13권 잡시(雜詩)에 칠언절구의 이 파초 시가 나온다. 참고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파초의 속이 차서 새 가지가 뻗고 나면, 새 속이 돌돌 말리면서 슬며시 벌써 따라오네. 새 속을 보고 우리의 새 덕을 기르고, 금방 따르는 새 잎을 보고 우리의 새 지식 기르기를.〔芭蕉心盡展新枝 新卷新心暗已隨 願學新心養新德 旋隨新葉起新知〕”
[주D-020]촌로가 …… 다투고 : 예절에 구애받지 않고 서로 허물없이 순박하게 어울려 노니는 것을 말한다. 춘추 시대 양자거(陽子居)란 사람이 예모를 엄히 차릴 때에는 다른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였는데, 그가 노자(老子)의 가르침을 받고 소탈한 태도를 취하자 사람들이 ‘좋은 자리를 서로 다툴〔爭席〕’ 정도로 친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장자(莊子)》 우언(寓言)에 나온다.
[주D-021]원량(元亮) : 진(晉) 나라 도잠(陶潛)의 자(字)이다.
[주D-022]삼공(三公)의 …… 하겠는가 : 송(宋) 나라 대복고(戴復古)가 후한(後漢)의 은사(隱士) 엄자릉(嚴子陵)의 고사를 소재로 읊은 시 ‘조대(釣臺)’에 “어떤 일에도 욕심 없이 오직 하나의 낚싯대뿐, 삼공의 자리도 이 강산과 바꿀 수 없고말고. 평소 광무제를 잘못 알고 지낸 탓에, 세상 가득 허명을 야기했을 뿐이라오.〔萬事無心一釣竿 三公不換此江山 平生誤識劉文叔 惹起虛名滿世間〕”라는 내용이 나온다. 《石屛詩集 卷6》
포저집 제1권
 시(詩)
행역(行役) 7수


철령(鐵嶺)을 넘는 도중에
하늘을 가로질러 길 하나 뚫린 험한 준령 / 大嶺橫天一路通
물은 가없이 흐르고 여기저기 산돌배꽃 / 山梨開遍水無窮
말 타고 왔다 갔다 지금 몇 번째인고 / 鞍馬去來今幾度
가련토다 길에서 보내는 나의 신세여 / 可憐身世道途中

홍원(洪原)의 벽 위에 있는 시에 차운하여 제하다.
함관령 고갯길로 말을 몰아 들어가니 / 驅馬咸關道
산들이 부쩍 늘어 더 많이 바라보이누나 / 群山望更多
맑은 물가에 버들만 자주 나타날 뿐 / 渚晴頻見柳
봄이 이슥한데도 꽃은 아직 안 피었네 / 春晩尙無花
검푸른 바닷물은 하늘가 저 끝까지 / 溟海天邊盡
임금님 계신 곳은 아득히 저 해 아래 / 長安日下賖
삼 년 동안 도성 떠나 흘리는 눈물이여 / 三年去國淚
운명인걸 어떡하나 어긋나도 별수 없지 / 時命任蹉跎

요로원(要路院)의 기둥에 차운하여 제하다.
야윈 말로 산골 객점에 투숙하노라니 / 羸馬投山店
험하기도 해라 돌길이 길게 뻗쳐 있네 / 崎嶇石路延
오래된 섬돌 가엔 수줍은 꽃들이 피었고 / 幽花發古砌
잔잔한 시내엔 푸른 나무 그늘이 드리웠네 / 綠樹蔭平川
난세를 만나 눈물을 흘릴 일도 많다마는 / 世亂多堪涕
사람들 굶주리는 것이 무엇보다 가련해라 / 人飢盡可憐
나그넷길에 끝없이 펼쳐지는 이 심회를 / 客行無限意
저녁 햇빛 앞에서 애오라지 읊어 보노라 / 聊賦夕陽前

갈원(葛院) 도중에 짓다.
시골 객점 하나가 갈림길에 임해 있고 / 野店臨岐路
집 주위에 푸른 산이 띠처럼 둘렸어라 / 靑山繞屋連
마을 주변엔 세버들이 휘휘 늘어지고 / 村邊垂柳細
언덕 위엔 이름 모를 꽃들이 산뜻해라 / 原上雜花鮮
처처에서 타고 가던 말을 좀 쉬게 하며 / 處處休征馬
집집마다 밥 짓는 저녁 연기를 보노매라 / 家家起夕煙
나그넷길에도 흥치가 없진 않은데 / 客行還有興
다만 유감은 술을 살 돈이 없는 것 / 沽酒恨無錢

칠월 십오 일 밤에 소사(所沙)의 다리 위에 올라가서 눈앞의 정경을 읊다. 3수
질펀히 퍼진 맑은 강물 고요하고도 잔잔한데 / 浩浩澄江淨且平
묽은 구름 속 초승달이 거꾸로 매달려 빛나누나 / 淡雲微月倒空明
높이 걸린 다리 위에 가없는 바람과 이슬이여 / 無邊風露危橋上
심신이 홀연히 곱절이나 청랑해짐을 느끼겠네 / 頓覺身心一倍淸

달이 머문 물결 속은 금을 깔아 놓은 듯 / 月留波裏爲金地
공중에 매달린 다리는 바로 목천이로세 / 橋在空中是木天
지금 갈리는 길목에서 별천지를 만나다니 / 岐路卽今成異境
티끌 세상 속의 몸이 신선이 된 것 같구나 / 塵蹤偶此似登仙

물의 표면은 고르기가 거울과 같고 / 水面平如鏡
다리 모양은 구부러져 그림쇠 같네 / 橋形曲似鉤
밤이 깊어 인적도 모두 끊어지고 / 夜深人過盡
밝은 달만 강물 속에 가득하누나 / 明月滿江流

[주D-001]함관령(咸關嶺) : 함경도 함주군(咸州郡) 덕산면(德山面)과 홍원군(洪原郡) 운학면(雲鶴面) 사이에 있는 재 이름이다.
[주D-002]요로원(要路院) : 충남 아산군(牙山郡) 음봉면(陰峯面)에 있었다.
[주D-003]갈원(葛院) : 진위(振威)의 속원(屬院)이다.
[주D-004]목천(木天) : 나무로 만든 천붕(天棚)을 말한다. 천붕은 여름철 더위를 피하기 위하여 뜰에 나무를 높이 세워서 차양을 설치한 것이다.
포저집 제1권
 시(詩)
사람들에게 지어 준 시 11수


중양일(重陽日)에 임 첨지(林僉知)와 회음(會飮)하며
우연히 서로 부르고 따르는 사이가 되어 / 偶爾相徵逐
기분 좋으면 곧장 찾는 우리 이웃사촌 / 驩然卽比鄰
산골 집에도 중구일이 어김없어서 / 山家重九日
모정에 서너 사람 모여들 앉았어라 / 茅榭四三人
나뭇잎은 서리 내려 붉게 물들고 / 紅葉經霜後
국화꽃은 비를 맞아 더욱 샛노랗네 / 黃花冒雨新
큰 잔에 아무렴 넘치게 따라야 하고말고 / 深杯宜滿酌
이렇게라도 좋은 시절 즐겨야 할 테니까 / 聊此樂良辰

남자수(南子受)에게 주다.
저는 나귀 타고 찾아 준 것도 고마운데 / 多謝蹇驢訪
동이를 열고 보니 술이 또 맑게 고였네 / 開樽酒復淸
다정하게 함께 나눈 하룻밤의 이야기요 / 慇懃一夜話
중하게 서로 아낀 우리의 십 년 우정이라 / 珍重十年情
선방엔 외로이 촛불 하나 냉랭한 속에 / 孤燭禪齋冷
일천 숲은 눈이 쌓여 밝게도 빛났지요 / 千林積雪明
애닲다 오랫동안 힘들여 공부했건만 / 憐君久攻苦
여태까지 서생으로 늙어가고 있으니 / 猶作老書生

헤어지고 나서 봄이 저무는 때에 이무백(李茂伯) 윤우(潤雨) 에게 부치다.
봄날의 산에 곳곳에서 꾀꼬리 소리 들리는 때 / 春山處處聽流鶯
변방 고을 홀로 떠나는 그대를 슬피 전송했지 / 惆悵邊州送獨行
헤어진 뒤 이지러졌다 가득 찬 관산(關山)의 달 / 關月別來虧又滿
여정을 살피니 지금쯤은 수성에 도착했겠구려 / 計程今已到輸城

고산역(高山驛)을 출발하면서 덕원(德源)의 윤 부사(尹府使)에게 부치다.
하늘 끝에서 작별하려니 배나 더 구슬퍼져 / 天涯一別倍悽然
촉 땅 잔도(棧道) 걸린 데로 오늘 말 타고 떠난다오 / 羸馬今朝蜀棧懸
그건 그렇고 전날 밤에 손잡고 헤어지던 곳 / 却說前宵分手處
옛 성 주변 산부용꽃 지던 일 잊히지 않으리다 / 刺桐花落古城邊

남양(南陽)의 술자리에서 입으로 읊다.
만추의 계절이라 보이는 경물도 처량한데 / 雲物凄然屬暮秋
한 동이 술로 푸른 강가에서 서로 만났소 / 一樽相遇碧江頭
술잔이 돌아올 때마다 모조리 비워야 하고말고 / 杯行到處皆須盡
내일 술이 깨고 나면 다시금 시름에 잠길 테니 / 明日醒來更有愁

신자인(辛子仁)에게 주다.
야로가 나를 불러 주고 말이 또 점잖아서 / 野老招尋語更淸
하나의 술잔 주거니 받거니 밤이 깊도록 / 一盃相屬到深更
취하고 보니 자리 아래에 지란들의 모임 / 醉看座下芝蘭聚
천문을 봐도 덕성이 응당 자리를 옮겼으리 / 天上應須動德星


임 첨지에게 주다.
근면하고 온후하신 시골 이웃 노인께서 / 勤厚鄕鄰老
물굽이 굽어보는 곳에 잔치를 열었다오 / 開筵俯碧灣
흐르는 세월 따라 똑같이 흰 머리칼 / 光陰俱白首
손님과 주인 모두 황관을 마주했네 / 賓主對黃冠
세금 바치려고 일년 내내 고생했으니 / 征賦終年苦
하루라도 술잔 들며 즐겁게 놀아야지 / 盃盤一日懽
인생이란 너무나도 즐겁지가 않은 것 / 人生大不樂
술 취한 속에서나 잠깐 기분 낼 수밖에 / 醉裏且爲寬

지나는 길에 이형(李兄)을 찾아보았더니 밭에 나갔다고 하기에, 밭에서 그와 함께 어울리며 술을 가져다 마시고는 시를 지어 증정하였다. 이날 요동(遼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다.
그대가 밭농사 지으러 나갔다기에 / 聞子治田去
들길을 휘돌아 그대 뒤를 따랐지요 / 相從野路迂
지친 소는 물속에서 밭갈이하고 / 疲牛耕白水
길을 가던 말은 풀밭에서 휴식하고 / 征馬駐靑蕪
밭두둑 사이에 둘이 나란히 앉았다가 / 偶坐畝間地
모래톱 위에서 술병을 함께 기울였소 / 共傾沙上壺
세상 속에 즐거운 곳이 어디 있으리까 / 寰中無樂處
지금부턴 뗏목 타고 나가고 싶소이다 / 從此欲乘桴

시냇가의 술자리에서 임 첨지와 그 자리에 있던 제현(諸賢)에게 증정하다. 2수
일찍이 산림 속에서 노닐자 약속하였기에 / 曾有林中約
밭두둑 사이에서 서로 손잡고 찾아왔소 / 相携十畝間
된서리 내려 초록 나뭇잎 시들시들하고 / 淸霜凋碧樹
맑은 물이 푸른 산을 감싸고 도는 이곳 / 白水繞靑山
귀뚜라미는 일생 중에 지금이 황혼이요 / 蟋蟀流年暮
뜨내기 인생은 반일의 한가한 시간일세 / 浮生半日閑
술 취한 노랫소리 사방 자리에 요란하니 / 醉歌喧四座
각자 밤이 깊어야만 집에들 돌아가시겠네 / 各待夜深還

서로 이끌고 자리에 모인 반가운 손님들 / 相將靑眼客
누구 할 것 없이 흰머리 노인들이로세 / 俱是白頭翁
지금은 어느덧 만추의 시절도 지나가고 / 節序三秋過
사방 들판 풍경 역시 텅 비어 쓸쓸할 뿐 / 風煙四野空
자리 아래에 울리나니 시냇물 소리요 / 溪聲鳴座下
술잔 속에 떨어지나니 산의 빛이로세 / 山色落盃中
잔 들고 노래하면 절로 즐거워지는걸 / 觴詠自爲樂
어찌 꼭 녹동을 튕기게 해야 하리요 / 何須奏綠桐

정 부총(程副摠) 용(龍) 에게 삼가 증정하다.
씩씩하게 시대를 구제할 계책 안고 / 仡仡匡時畧
속국의 군대를 사열하러 오셨도다 / 來觀屬國兵
유랑하는 백성의 소망 이미 흡족해졌고 / 流人望已協
교만한 오랑캐는 간담이 떨어졌으리라 / 驕虜膽應驚
층층의 물결 끝없이 펼쳐진 바닷길이요 / 海路層波濶
흰 눈이 쌓여 밝게 비치는 산성이로세 / 山城積雪明
예로부터 대장부가 할 일을 말한다면 / 從來男子事
만리에 공명을 세우는 것이 아니더이까 / 萬里立功名


[주D-001]수성(輸城) : 경성(鏡城)의 속역(屬驛)이다.
[주D-002]고산역(高山驛) : 안변(安邊)의 속역이다.
[주D-003]취하고 …… 옮겼으리 : 훌륭한 자제들이 성대히 모였으니, 하늘의 덕성(德星)도 한곳에 모이는 상서(祥瑞)가 나타날 것이라는 뜻으로 짐짓 치켜세워 준 말이다. 타인의 뛰어난 자제들을 지란옥수(芝蘭玉樹)로 비유하곤 하는데, 이는 진(晉) 나라 사현(謝玄)이 숙부인 사안(謝安)에게 “지란옥수가 집안 섬돌에 피어나 향기를 내뿜게 하겠다.”고 대답한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晉書 卷79 謝安傳》 또 동한(東漢)의 명사(名士) 진식(陳寔)이 자제들을 이끌고 순숙(荀淑) 부자(父子)를 찾아갔을 때 하늘에 덕성이 모이는 천문 현상이 일어났다는 고사가 전한다. 《世說新語 德行》
[주D-004]황관(黃冠) : 황관초복(黃冠草服)의 준말로, 농부나 촌로의 복장을 말한다.
[주D-005]지금부턴 …… 싶소이다 : 명(明) 나라 땅이 후금(後金)의 군대에 의해 유린당하는 것을 보고 비감에 젖어 토로한 말이다. 《논어》 공야장(公冶長)에, 공자가 난세(亂世)를 개탄하면서 “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로나 나갈까 보다.〔道不行 乘桴浮于海〕”라고 말한 내용이 실려 있다.
[주D-006]어찌 …… 하리요 : 굳이 풍악을 울릴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녹동(綠桐)은 푸른 오동나무로 만든 거문고를 뜻한다.
[주D-007]예로부터 …… 아니더이까 : 후한(後漢)의 명장 반초(班超)가 일찍이 집이 가난해서 관청의 문서를 붓으로 베껴 쓰며 모친을 봉양하다가, 만리후(萬里侯)에 봉해질 골상(骨相)을 지녔다는 관상가의 말에 힘을 얻어 분발하면서, “대장부라면 이역 만리에 나아가 공을 세워 봉후(封侯)의 영예라도 누려야 할 것이다.” 하고는, 과연 서역(西域)에 나아가 큰 공을 세운 뒤에 정원후(定遠侯)로 봉해진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47 班超列傳》

 

포저집 제1권
 시(詩)
화답하며 차운한 시 44수



유 동지(柳同知) 영순(永詢) 에게 차운하여 화답하다.
부질없이 옛사람들만 노래 부르면서 / 空歌古之人
천년 전 옛날 일을 보는 듯하였을 뿐 / 千載如見之
이 세상에서 지음은 만나기 어려워서 / 知音世所稀
더불어 기약할 사람 없이 시름겨웠소 / 悄悄無與期
더부룩 쑥대 속에 파묻힌 한 칸 방에 / 一室沒蓬蒿
낡은 침상에 대발을 쓸쓸히 드리운 채 / 空簾垂敝床
흰 구름만 푸른 산에 머무는 이곳에서 / 白雲宿靑山
일년 내내 울타리 안에 갇혀 지냈는데 / 終歲閉幽墻
놀랍게도 거마의 소리 홀연히 들려와서 / 忽驚車馬至
띳집 아래 내려가 절하고 맞아들였지요 / 拜迎茅茨下
들국화는 아직 향기를 토해 내지 않고 / 山花未吐芳
들보의 제비는 사일이라 하직하는 때 / 梁燕初辭社
아침 내내 그리고 이어 저녁 늦게까지 / 終朝復竟夕
다정히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들었소만 / 款款承誨語
부끄러워 어떡하나 가난과 병이 겹쳐 / 還羞貧病甚
밥상에 오직 기장밥만 드시게 하였구려 / 對案惟飯黍
빈궁한 거처에 귀빈이 왕림해 주시어 / 窮居貴客臨
오두막집에 저절로 광채가 발했는데 / 圭蓽自生彩
더구나 일찍이 듣지 못했던 말을 듣고 / 况聞未曾聞
바다를 보듯 마음이 활짝 열렸음이리까 / 豁若觀溟海

환희에 잠겨 양쪽 다 싫어함이 없이 / 驩然兩不厭
해가 서산에 넘어갈 것만 걱정했나니 / 但恐白日沈
이제부턴 행여 서로 버려두지 말고 / 從今倘不遺
편지 띄워 자주 부르고 찾고 합시다 / 尺書頻招尋

이자릉(李子陵) 경엄(景嚴) 의 사천(斜川) 시에 차운하다.
도연명이 팽택 영을 그만두고서 / 陶令辭彭澤
전원으로 돌아와 휴식을 하며 / 田園爰歸休
때때로 물외의 흥치가 발동하면 / 時動物外興
언제고 냇가에 나가 노닐었는데 / 常爲川上遊
천년 전의 그 일을 그리워하니 / 緬懷千載上
그대는 속류가 아님을 알겠도다 / 知君非俗流
임천 속에 별천지가 열렸는지라 / 林川開異境
자연에 파묻혀 한가하기 물새요 / 冥機閑似鷗
시내 이름도 도연명의 사천이니 / 川名與之同
고금이 일구와 같다고 하리로다 / 古今如一丘
푸른 산이 이어져 병풍이 되고 / 碧山爲屛障
사슴이 뛰놀며 함께 놀아 주고 / 麋鹿爲朋儔
계옹이며 촌로와 다정하게 어울리며 / 溪翁與村老
막걸리 잔을 서로들 주고받고 하니 / 白酒相與酬
모르겠네 그 옛날 도연명의 사천도 / 不知古斜川
즐거움이 지금과 같았는지 어땠는지 / 其樂如今不
사람의 삶이란 고작해야 백 년 안쪽 / 人生百歲內
명랑하게 살면 되지 무엇을 걱정하랴 / 曠然何所憂
사천첩을 대하니 뿌듯해지는 이 감회여 / 覽圖愜幽賞
말에 꼴을 먹이고서 한번 가 보고 싶네 / 秣馬將往求

최고봉(崔孤峯)의 시에 차운하다.
빈궁하니 문 닫고 지내야 마땅한 일 / 窮居惟是閉門宜
벽엔 그저 경서와 고시만 가득할 뿐 / 滿壁經書與古詩
눈앞의 한가한 정취 누리면 그만이지 / 聊取目前閑趣足
몸 밖의 명예를 구해서 무엇 하겠는가 / 豈求身外令名垂
때를 틈타 이끗을 노리는 사람들 모두 교활한데 / 乘時射利人皆巧
수졸하며 가난을 감수하는 나는 유독 바보로세 / 守拙甘貧我獨癡
저녁 노을 아침 안개 아무리 보아도 싫지 않아 / 暮靄朝煙看不厭
푸른 산과 서울 거리는 본래 그 길이 다르니까 / 靑山紫陌本殊歧

난석정(爛石亭)의 시에 차운하다. 2수
어느 해 폭풍우 속에 벼락이 내리꽂혀 / 急雨何年怒震霆
산봉우리 박살 내며 평지를 가득 메웠는고 / 峯巒摧倒滿平庭
골짜기 산이 이로부터 기묘한 경치를 더했나니 / 溪山自是添奇勝
귀신의 조화가 끝없이 별의별 형상을 빚는구나 / 神化無端賦衆形
촉군의 강에 팽개쳐진 옛 보루와 같다 할까 / 却似蜀江遺舊壘
한 나라 때에 떨어진 항성은 혹시 아닐는지 / 還疑漢世隕恒星
이 경치 마음에 들어 은자가 지었을 이 정자여 / 幽人築室當斯境
물에 뜬 달과 솔바람 소리 더더욱 청랑하고녀 / 水月松風更覺玲

뇌성벽력 치면서 푸른 산 모퉁이 무너질 때 / 蒼山崩角走雷霆
헌황이 반역의 무리를 치는 것과 같았으리 / 勢似軒皇伐不庭
점점이 고르게 깔려 한동네에 오밀조밀 / 點點平鋪同一巷
드높이 점잖게 선 모습들 각자 형형색색 / 峩峩儼立各殊形
반짝 빛나는 것은 신선 동천의 옥돌과 같고 / 烱如仙洞羅羣玉
촘촘히 늘어선 것은 밤하늘 뭇 별자리로세 / 森若天衢列衆星
모두 은자의 집을 위해 색상을 더해 주나니 / 摠爲幽居增色相
물빛이며 구름 그림자 역시 다함께 영롱해라 / 水光雲影共瓏玲

최대용(崔大容) 유해(有海) 이 통어사(統禦使)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호서(湖西)에 가는 길에 신창(新昌)을 지나가다가 나의 집에 들러서 유숙(留宿)하였는데, 이천장(李天章) 명한(明漢) 과 창수(唱酬)한 시를 보여 주기에 그 시에 차운해서 증정하였다.
푸른 봉우리 동쪽 가에 한가히 닫힌 사립문 / 蓬門閑掩碧峯東
으슥한 골에서 옛 벗과 함께할 줄 알았으랴 / 深巷寧期舊友同
헤어진 십 년 세월 속에 갈수록 보고 싶었던 벗 / 離合十年情轉苦
천고의 역사를 토론할 땐 그 얼마나 웅변인지 / 討論千古辯何雄
가을 구름 저 너머엔 호서로 가는 나그네 길 / 湖山客路秋雲外
밤비 내리는 속에는 초옥의 외로운 등불이라 / 草屋孤燈夜雨中
우리들 얘기 새벽까지 이젠 또 이별할 시간 / 話到曉天愁又別
몇 마디 기러기 소리가 차가운 하늘을 건너가네 / 數聲歸鴈度寒空

대용(大容)의 절구(絶句)와 율시(律詩)에 차운하다.
해후하니 두 사람 모두 푸른 눈동자 / 邂逅俱靑眼
평생토록 붉은 마음 함께하는 사이 / 平生共赤心
도서를 통해 이기를 연구도 해 보오만 / 圖書窮理氣
은미한 뜻이 갈수록 깊이 숨어 버리네요 / 微意轉深沈

음침한 골에 아무도 오지 않더니 / 幽巷無人到
아 그대가 홀로 찾아 주었구려 / 嗟君乃獨尋
앞으로 머리가 백발이 다 되도록 / 前期指白首
우리 서로 단심을 변치 마십시다 / 相照卽丹心
비가 개이니 찬 하늘이 더욱 멀고 / 雨霽寒霄逈
서리가 많으니 낙엽이 쌓이는 때 / 霜多落葉深
막다른 길에서 몇 년이나 헤어졌던가 / 窮途幾年別
술잔 잡고 한 번 길게 읊조리노이다 / 把酒一長吟

송자심(宋子深) 연(淵) 의 시에 차운하여 증정하다.
사방 경계 고요해서 티끌 세상 저 멀리 / 境靜囂塵遠
세상 욕심 잊었으니 출세가 더딜 수밖에 / 機忘進取遲
중망도 나의 출처와는 상관이 없는 터에 / 望非關出處
몸이 어찌 국가의 안위와 관계 있으리요 / 身豈係安危
백벽의 은혜를 끝내 갚기 어렵다 해도 / 白璧終難報
청운의 뜻은 본래 기약하지 않았소이다 / 靑雲本不期

이웃집에 봄철의 술이 익기를 기다려서 / 鄰家春酒熟
촌로와 노니는 것이 기약이라면 기약일까 / 期與野翁隨

순찰사(巡察使) 상공(相公)이 선원전(璿源殿)에서 제사를 올릴 적에 지은 시에 받들어 차운하다.
용안이라 일각이 제왕의 진영이라면 / 龍顔日角帝王眞
풍패가 남긴 기업이 바로 자신일레라 / 豐沛遺基卽紫宸

일백 년 세상의 공을 우뚝 수립하신 위에 / 宇宙百年功旣遠
일만 리 농토에 혜택이 아직도 새로워라 / 農桑萬里澤猶新
백성이 평생토록 사모해 마지않는 상공 / 黎民沒世思何極
작전에 임하실 때면 제사를 꼭 올리시네 / 相國臨戎祭必親
오르내리며 양양히 위에 계시는 듯하니 / 陟降洋洋如在上
예로부터 이런 분에게 복을 내리셨으리라
/ 想應從古福斯人

용재(慵齋)가 조사(詔使)에게 화답한 시를 우연히 보고는 여기에 차운하다. 2수
은자의 마음에 흡족한 호산의 봄 경치여 / 湖山春景愜幽情
풀 색깔과 꽃 빛깔이 두 언덕에 환하도다 / 草色花光兩岸明
북쪽 하늘 바라보면 깎아 세운 세 봉우리 / 削立三峯當北望
동쪽에서 가로 걸쳐 치달리는 강물 하나 / 奔流一水自東橫
배 드는 개펄 갈대숲엔 조수가 막 밀려오고 / 蒹葭浦口潮初漲
성 머리 안개 낀 나무에는 달님이 뜨려는 때 / 煙樹城頭月欲生
피리 소리 북소리 하늘 위 잔치 자리인 듯 / 簫鼓怳疑天上坐
새로운 시가 세상 먼지 말끔히 또 씻어 주네 / 新詩又使俗塵淸

나그네 심정 애태우는 수국의 봄 풍광이여 / 水國春光惱客情
언덕의 꽃 물가의 풀 이제 청명을 지났도다 / 岸花汀草過淸明
하늘가에 줄 지었나니 먼 봉우리 들쭉날쭉 / 參差遠峀天邊列
성곽 너머 가로누웠나니 긴 강물 출렁출렁 / 洶湧長江郭外橫
물결이 일렁이는 속에 진동하는 풍악이요 / 仙樂喧訇波浪動
바닷바람이 불어오자 흔들리는 돛대로세 / 錦帆搖蕩海風生
고상한 연회에 끼인 부유 얼마나 다행이요 / 腐儒何幸陪高宴
뗏목 타고 태청으로 들어간 듯도 하오이다 / 疑是乘槎入太淸

권생 위기(權生爲己)에게 차운하다.
쌀독이 자주 비는 것은 오류가 아니오만 / 屢空非五柳
몸에 병이 많은 것은 상여와 같다 할까 / 多病似相如
마음을 같이하는 벗이 있는 그 덕분에 / 賴有同心友
급한 편지 자꾸 보내 폐를 끼쳐 드렸소 / 頻勞一字書
천리나 헤어지는 일을 어떻게 견디리요 / 那堪千里別
더군다나 쓸쓸한 늦가을의 이 계절에 / 况在九秋餘
내일 도성의 길을 밟고 지나가노라면 / 明日周京道
구슬픈 심정으로 비거를 읊으시겠지요 / 悽然賦匪車


중추(中秋)에 휴암(鵂巖)에서 달구경을 하며 민원경(閔遠卿)의 시에 차운하다.
바위 아래 울리는 물소리 맑고도 유장하고 / 巖下鳴川淸且長
산 머리에 휘영청 달빛 철철 흘러넘치누나 / 峯頭明月正流光
술 취한 흥치 밤 늦도록 아직 싫지 않으니 / 醉興夜來猶未厭
남은 술로 중양절을 다시 기다려 모입시다 / 更期餘酒待重陽

남귀암(南龜庵)이 길야은(吉冶隱)을 읊은 시에 차운하다.
이분은 목숨보다 의리를 중히 여겼나니 / 斯人重義甚於生
이 도를 어떻게 작록의 영예에 비교하랴 / 此道何如爵祿榮
만고토록 이 양심을 누가 잃지 않았던고 / 千載秉彛誰勿喪
지금까지 선생이 꽃다운 명성을 점하도다 / 至今夫子有芳聲

군신과 부자 그리고 스승과 제자 사이에 / 君臣父子及師生
극진한 도 편안한 마음이 가장 영광이지 / 道盡心安是最榮
죽기 전에 부끄러움이 없게 하면 그만이니 / 只要當時無所愧
죽은 뒤의 명성까지 기필할 것이 있겠는가 / 豈期身後更流聲

봉수와 오산에서 보낸 한평생 / 鳳水烏山度一生
세간의 고관대작이 무슨 영화리요 / 世間軒冕豈爲榮
당년에 행한 의리 어떤 사람이 이었는고 / 當年行義人誰繼
세상에 부질없이 만고의 명성만 남겼구려 / 宇宙空留萬古聲

나라가 망하는데 누가 목숨을 버리겠나 / 國亡誰是肯捐生
좌명의 영예를 분분히 종정에 새겼도다 / 鍾鼎紛紛佐命榮
고려의 은사가 계신 금오산의 한 조각 빗돌 / 一片烏山麗士在
홀로 윤기를 붙들고서 풍성을 세우고 있구나 / 獨將倫紀樹風聲

고려의 운이 다할 적에 선생이 계셨나니 / 麗朝運訖有先生
역사책에 천추토록 그 이름 영예로우리라 / 竹帛千秋姓字榮
곡조가 같은 옛사람을 한번 찾아본다면 / 尋得古人同調者
서산과 초택 정도가 함께 명성을 드리우리 / 西山楚澤共垂聲

월사(月沙) 이 상공(李相公) 정귀(廷龜) 이 시를 지어 고봉(孤峯)과 작별할 적에, 말구(末句)에서 나의 안부를 물어보셨는데, 이 시가 미처 전해지기도 전에 고봉이 그만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뒤로 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에 와서, 그의 사위인 윤탁(尹倬)이 유적(遺籍) 중에서 이 시를 찾아내어 나에게 보여 주기에, 내가 반복해서 슬피 탄식하며 눈물을 머금고 차운하였다. 2수
두 분 공께서 주고받은 말씀들 / 二公酬唱語
우정이 얼마나 깊었는지 알겠도다 / 勤懇見交情
초 땅에 묻혀서 두우를 쏘던 검이라면 / 射斗曾埋楚
형 땅에 숨었던 연성의 구슬이라 할까 / 連城舊隱荊

광휘를 접하고는 홀연히 눈이 부셨으니 / 光輝忽爛目
슬피 오열하며 자연히 소리를 삼킬 밖에 / 悲咽自呑聲
허전하고 쓸쓸해라 산양 땅의 피리 소리 / 惆悵山陽笛
어느 누가 사생을 하나로 할 수 있겠는가 / 誰能一死生

상국께서 나의 안부 물으셨을 때 / 相國曾相問
고봉이 갑자기 이 세상을 떠났지 / 孤翁已溘然
생전에도 이별이요 죽어서는 영영 이별 / 存亡俱是別
그 뒤로 세월이 몇 차례나 흘러갔던가 / 歲月幾回遷
지난 일 생각하며 슬피 눈물 흘렸는데 / 往事成悲涕
지금 와서 그 시를 또 접하게 되었구나 / 今來得此牋
구름 숲은 도성 거리와 떨어져 있으니 / 雲林隔城市
언제쯤이나 다시 찾아뵐 수 있을는지 / 重拜在何年

도 영공(都令公)이 단오절에 상으로부터 하사를 받고 감회에 젖어서 지은 시에 삼가 차운하다.
여러 현인들의 뒤에 슬쩍 끼인 덕에 / 謬忝諸賢後
은상의 영광을 외람되게 나도 받았네 / 叨承錫賚榮
자하의 술은 잔 속에 철철 넘치고 / 紫霞杯裏滿
흰 깃털 부채는 손 안에서 가뿐하이 / 白羽手中輕
은혜는 크나큰데 몸이 작으니 어떡하나 / 恩大知身小
사람은 미천한데 청직이라서 부끄럽네 / 人微愧職淸
다행히 성군을 만난 천재일우의 이 시대에 / 幸逢千載會
보답할 일을 생각하니 가슴이 물결치는구나 / 圖報激深情

유 동지(柳同知)가 차계(叉溪)의 성대한 모임에서 지은 시에 삼가 차운하면서 주인인 윤 상주(尹尙州) 영공(令公)에게 아울러 증정한 오언율(五言律) 2수
푸른 시냇가에 임한 그윽한 거처 / 幽居臨碧澗
오월에도 으스스 한기가 절로 드네 / 五月自生寒
속진 속의 시끄러움 오래 전부터 싫어해서 / 久厭塵中鬧
물외의 한가함 즐기려고 손잡고들 찾아왔소 / 相携物外閑
정자의 그늘 속에 솔과 잣 그림자 엇갈리고 / 亭陰交檜柏
못가의 수초 사이에 난초 지초도 섞였구려 / 池草雜芝蘭
세상일을 구태여 따질 게 뭐가 있으리까 / 世事何須問
맑은 술 듬뿍 채워 기쁨을 실컷 누립시다 / 淸樽且盡歡

종남산 아래 펼쳐진 멋들어진 경치 / 佳境終南下
못가 누대에 저녁 풍경이 청랑하도다 / 池臺晩景淸
도성 거리와 가깝다고 혹 혐의하지 마오 / 莫嫌朝市近
이끗 명성 다투는 일 이미 끊어졌으니까 / 已絶利名爭
술잔 날리며 읊조리면 그저 그만이지 / 但是宜觴詠
굳이 풍악까지 울릴 필요가 있으리까 / 何煩奏管笙
얼근히 술에 취해 산길을 돌아 나올 제 / 醉歸山徑轉
숲을 뚫고 환히 비추는 저녁 햇빛이여 / 返照透林明

정원(政院)에서 심 승지(沈承旨)의 시에 차운하다. 2수
오래도록 술 마시고 시 읊는 일도 그만둔 채 / 久廢含盃與賦詩
지금은 문서 더미 속에 물시계 소리가 더디기만 / 簿書叢裏漏籌遲
뜨락의 꽃이 다 지도록 한 번 감상할 틈도 없이 / 園花落盡無由賞
하루만 지나도 머리칼이 실처럼 되려 하는구려 / 一日經來鬢欲絲

기밀에 참여한 뒤로는 시 읊는 일도 드물기만 / 自參機密罕吟詩
너무 늦게 흰머리로 대궐에 온 것이 우습기도 / 白首王門笑太遲
우악한 은총을 입었으니 시골로 떠날 수가 있나 / 身被渥恩歸不得
매일 붓 적셔 실처럼 가늘게 글씨만 초할 밖에 / 朝朝染翰草如絲

정원에서 이여고(李汝固) 식(植) 의 시에 차운하다.
엷은 구름은 봉황대 위에서 흩어지지 않고 / 輕陰不散鳳凰臺
사방 경치 애틋해라 저녁 햇빛에 쫓기누나 / 雲物依依暮色催
서리 맞고 낙엽 진 숲에 벌써 깜짝 놀랐는데 / 霜後已驚林葉落
달빛 속 슬픈 기러기 소리 또 듣게 되다니요 / 月中更聽鴈聲哀
화잠을 쓴 검은 머리는 시름 따라 흰머리로 / 華簪鬒髮愁仍換
구업이 있는 푸른 산은 오직 꿈길 속에서만 / 舊業靑山夢獨回
쇠하고 병든 몸 우연히 숙직을 함께하였소만 / 衰病偶同淸署直
주옥의 시에 답하려니 졸렬한 재주가 부끄럽소 / 瓊琚酬唱愧非材

정원에서 여러 동료들의 시에 차운하다.
내가 봐도 가련해라 보좌할 정성은 미미한데 / 自憐補袞寸誠微
현인들 틈에 감히 끼어 대궐에 발을 디뎠으니 / 猥忝諸賢跡禁扉
새벽녘 금전에 추창할 땐 부산한 등 그림자요 / 金殿曉趨燈影過
조회 마친 옥 섬돌에는 점잖은 패옥 소리로세 / 玉堦朝下珮聲歸
병들어 쇠한 머리칼로 국록만 축내 부끄럽소만 / 病將衰鬢羞縻祿
특별한 은혜 받은지라 옷깃 떨치고 못 떠난다오 / 身爲殊恩未振衣
멀리 생각나는 것은 창랑의 낚시하던 벗님 / 遙憶滄浪舊釣侶
요즘 들어 무슨 일로 서신이 통 안 오는지 / 近來書信到全稀

여러 노선생(老先生)들의 시에 삼가 차운하여 대승상(大丞相) 문하(門下) 완평(完平) 에 엎드려 바치다.
시대는 오백 년의 설에 해당하고 / 時當五百歲
기회는 일천 년의 때를 만났도다 / 際遇一千年
지금 필적할 자가 없는 국가의 원로 / 元老今無匹
삼존을 갖춘 분이 전에 또 있었던가 / 三尊孰有前
상의 은택 우악해서 특별히 예우하며 / 恩光優異數
원로를 초청해서 성대히 베푼 잔치 자리 / 耆舊盛初筵
지금의 세대를 일컬어 성스럽다 하거니 / 世代稱爲聖
의관들을 바라보아도 모두 신선 같아라 / 衣冠望若仙
중사를 시켜 보내신 궁중의 술동이요 / 御樽中使送
시신이 대독케 한 은혜로운 왕의 분부 / 寵綍侍臣宣
어찌 역사책에만 그 이름 전하게 하랴 / 何獨傳方冊
풍악을 울리게 함이 마땅하다 하시도다 / 端宜被管絃
삼태성의 별자리가 남극에서 빛을 발해 / 台躔耀南極
그 은덕 그 혜택을 동방에 두루 끼쳤고 / 德澤遍東堧

봉강 밖의 외적들을 막아 나라를 수비하며 / 守在封疆外
조화에 앞서는 공을 세워 사직을 지켰도다 / 功存造化先

멀리 상고 시대의 이상 정치를 추모하며 / 遠追隆古蹟
백성의 어깨를 가볍게 해 주신 어른이여 / 永息小民肩
종묘사직이 반석처럼 다시 안정되었으니 / 盤石安宗社
지금부터는 잘못될 걱정을 할 것이 있으리요 / 從玆豈畏顚

청음(淸陰) 김상(金相) 상헌(尙憲) 의 시에 차운하다.
전해 듣건대 강가에서 대로가 일어나셨다니 / 傳聞大老起江瀕
세상 모두가 나라에 손님이 계심을 보겠도다 / 擧世咸觀國有賓
성군이 상고 시대의 이상 정치를 펼치시니 / 聖主方興隆古治
날마다 빈번히 불러 자문하실 줄 알겠도다 / 應知顧問日煩頻

원운(元韻)은 다음과 같다.
누가 알았으랴 석실의 산중 늙은이가 / 誰知石室山中老
기영의 모임에 손님으로 다시 참석할 줄을 / 還作耆英會上賓
흰머리 노인의 자취가 참으로 우스워라 / 白頭蹤迹眞堪笑
염치도 없이 풍진 속을 들락날락거리니 / 來往風塵不憚頻

진산(珍山)의 사군(使君)인 송자심(宋子深)의 시에 차운하다.
옛 벗님이 적성 옆의 원님이 되셨는데 / 故人爲吏赤城傍
세모에 떨어져 사니 정말 애가 끊길 듯도 / 歲暮離居正斷腸
편지 한 통 멀리서 오니 그래도 위로될 만 / 一札遠來猶可慰
고을 안의 산수도 바로 신선의 마을이라네요 / 邑中山水是仙鄕

둔암(芚庵) 송자심(宋子深)의 시에 차운하다.
세상 욕심 다 없어진 팔십 다 된 쇠한 노인 / 八十衰翁無世情
긴긴 밤 잠 못 들고 새벽닭 소리 듣노매라 / 不眠長夜聽鷄鳴
어느 때나 우리 다시 침상에 함께 누워 / 何時更得同床席
옛일을 하나하나 분명히 평론해 볼거나 / 一一評論古事明

원운은 다음과 같다.
며칠 함께 이불 덮고 옛일을 얘기하다 보니 / 數日連衾討故情
상공의 마음속에 불평의 울림이 있는 듯도 / 相公心似不平鳴
흉중의 경륜을 세상에 모두 보여 줄 것까지야 / 何須展盡胸中蘊
그저 충정한 마음으로 성명의 뜻만 받드소서 / 但保忠貞奉聖明

해숭위(海嵩尉) 윤신지(尹新之) 가 부쳐 온 시에 차운하다.
늙고 병들어 시골에 온 것은 형세상 자연스러운 일 / 老病歸田勢自然
감히 말하리요 속세의 인연 떠나 은거할 생각이라고 / 敢言遐想出塵緣
호산의 경치 모두가 한가한 정취를 자아내니 / 湖山物色皆閑趣
그저 이렇게 소요하며 세월을 보낼 생각이오 / 聊且逍遙送歲年

서 장령(徐掌令) 정연(挺然) 이 부쳐 온 시에 차운하다.
산골에 몇 년 있다 보니 온갖 생각 텅 빈 채 / 丘壑多年萬念虛
푸른 이끼와 낙엽만이 가난한 집에 가득할 뿐 / 靑笞黃葉滿貧居
강변의 조수는 약속 지켜 왔다 갔다 하고 / 江潮有信來還去
구름은 아무 생각 없이 말았다 폈다 하고 / 雲物無心捲復舒
좋을시고 넉넉하게 한가히 보내는 세월 속에 / 好是優閑遣日月
그래도 습기가 남아 있어 시서를 좋아한다나요 / 猶餘習氣愛詩書
다정하기도 하여라 왕년의 금란의 벗이여 / 慇懃昔歲金蘭友
새 시를 지어서 오두막까지 보내 주셨구려 / 爲寄新篇到弊廬

윤 장령(尹掌令)이 배생(裵生)에게 준 시에 차운하다.
충과 효의 미덕이 완전했는지라 / 孝忠全美德
정표하여 풍성을 세워 주었도다 / 旌表樹風聲
선현의 자취를 우러러보며 그리워하고 / 景仰懷前躅
후생과 교유하며 미래를 기대하는도다 / 交遊托後生
아름다운 선비의 시구를 지금 보니 / 今觀佳士句
이를 통해 고인의 마음을 알겠도다 / 乃見古人情
바야흐로 믿겠노라 공후의 존귀함도 / 方信公侯貴
진정 지푸라기처럼 가볍다는 것을 / 眞如一芥輕

족숙(族叔) 장 동지(張同知) 영(泳) 가 구십의 연세로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에 올랐다. 이에 민 이상(閔二相) 형남(馨男) 노야(老爺)가 시를 지어 축하하자, 장 동지가 여기에 차운해서 답하였는데, 두 분의 시가 모두 벽 위에 걸려 있었다. 이에 수연(壽筵)에서 삼가 차운하여 증정하였다. 9수
덧없어라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 草草世間人
희년을 칠순으로 꼽곤 하나니 / 稀年指七旬
어느 분이 구십을 훌쩍 넘겼다면 / 誰能過九十
현인을 하늘이 총애하셨음이로다 / 端宜寵賢仁
임금님이 보살펴 주신 가선의 품계라면 / 資秩紆天眷
나날이 새로워지는 심신의 건강이시라 / 康寧覺日新
우주 안에서 삼존을 갖추었고 보면 / 三尊宇宙內
천지 사이에 작은 몸도 부끄럽지 않아라 / 不愧藐然身

전설을 들어 보면 옛날의 한 선인은 / 聞說古仙人
오래 살아서 일천 년을 넘었다 하나 / 長生過百旬

오직 믿을 만한 것은 성인의 말씀이니 / 聖言惟可信
오래 사는 것은 인을 행함에 있나니라 / 壽考在爲仁

다만 충화의 기운 오래 보전하면 그뿐 / 但保冲和久
어찌 꼭 뱉어 내고 들이마셔야 하겠는가 / 何須吐納新
나는 절로 가련해라 칠십을 겨우 넘겨 / 自憐踰七十
벌써 병이 들고 쇠잔한 몸이 되었으니 / 已作病殘身

옛날에 강현의 어떤 노인네는 / 昔者絳縣人
살아온 햇수가 이만여 순이라고 / 其生二萬旬

일찍이 듣건대 조무가 사과를 했다는데 / 曾聞趙武謝
지금은 성군의 인자한 은총을 입었네요 / 今被聖君仁
빙설처럼 윤기 나는 선인의 살결이요 / 氷雪仙肌潤
새로 금초 내리신 임금님의 은택이라 / 金貂主澤新
도성 저잣거리와 멀리 떨어진 운림에서 / 雲林城市遠
부디 귀중하신 몸을 길이 보전하시기를 / 長保不貲身

조용히 사시는 어른 저번에 찾아뵙고 / 我昔拜幽人
돌아온 뒤로 지나간 날이 어느새 열흘 / 歸來日已旬
선행을 쌓아 경사가 있는 줄 알겠고요 / 從知慶在善
장수는 어진 분의 몫인 것을 믿겠네요 / 信是壽由仁
동산 수풀엔 가을빛이 저물어 가고 / 園林秋色暮
솔과 국화의 시절이 새로 돌아온 때 / 松菊歲華新
오직 바라옵건대 무릉도원 속에서 / 惟願桃源裏
늙지 않는 몸을 길이 즐기시기만을 / 長娛不老身

사람을 애태우는 계절의 풍광이여 / 年光惱殺人
이제는 가을도 열흘밖에 안 남았네 / 秋盡只餘旬
하늘이 굽어 살펴 올해도 풍년이요 / 歲熟由天悶
임금님이 인자하여 청명한 시대로세 / 時淸荷主仁
시냇가에는 여전히 늙은 소나무요 / 澗邊松樹老
울타리 옆에는 국화가 새로 핀 때 / 籬畔菊花新
높은 대청 위를 다투어 우러러보나니 / 爭仰高堂上
삼존을 한 몸에 모두 갖추신 그분 / 三尊備一身

평화스러워라 태고 시대 사람이요 / 熙熙太古人
날도 길어라 열흘이나 지나간 듯 / 長日似經旬
가정은 화목해서 화기가 애애하고 / 戚戚家庭睦
마을 풍속은 어질어서 순박하기만 / 循循里俗仁
다시 멀리 향유하실 기이의 복이라면 / 期頤享更遠
갈수록 새로워지는 감지의 봉양이로세 / 甘旨養逾新
얼마나 다행인가 전란을 치른 뒤인데도 / 何幸干戈後
색동옷 입은 자제들을 볼 수 있으시니 / 猶看彩服身

우리 숙부님은 참으로 신선이시라 / 吾叔眞天人
연세가 이미 아흔을 넘기셨는데도 / 行年踰九旬
용모와 얼굴은 언제나 즐겁고 기쁘시고 / 容顔常悅豫
속마음은 저절로 온화하고 인자하시네 / 情性自溫仁
도의 경지로 말하면 가난해도 즐기시고 / 道味貧猶樂
맑은 수도로 말하면 늙을수록 새로워라 / 淸修老更新
유거를 찾아뵌 것 역시 오래 전의 일 / 幽居阻已久
그저 장빈의 신세를 탄식할 따름일세 / 只歎漳濱身

아련히 조카 모습 눈 속에 아른거려 / 望望眼中人
이별한 지 겨우 스무 날이 지났건만 / 離違纔兩旬
평소의 정감 담아 맑은 시 지으시어 / 淸詩寫情素
자애로운 마음으로 나에게 부치셨네 / 投寄出深仁
바닷가 빗줄기에 무더위 씻겨 가고 / 海雨炎氛洗
강변의 다락에도 기상이 새로운 때 / 江亭氣象新
동산 숲에 가을 달 휘영청 떴을 테니 / 園林秋月好
나의 몸을 그곳에 다시 맡기고 싶네 / 更擬致吾身

수풀과 샘물 속에 은사 한 분 계시어 / 林泉有逸人
기쁨과 즐거움 속에 세월을 보내시네 / 懽樂度時旬
오래 사시는 것은 하늘이 편애하심이요 / 年壽天偏厚
안온하고 느긋함은 성품이 인자하심이라 / 安恬性本仁
독서의 취미는 늙어도 게을리 않으시고 / 耽書老不倦
고인을 사모하여 뜻은 갈수록 새로워라 / 慕古意彌新
세상의 치란일랑 어떤 것도 묻질 마오 / 理亂都休問
충화의 기운으로 이 몸 보전하시느니 / 冲和保此身


[주D-001]들보의 …… 때 : 춘분(春分)과 추분(秋分)에서 가장 가까운 무일(戊日)을 각각 춘사일(春社日)과 추사일(秋社日)이라 하는데, 제비는 춘사일에 우리나라에 왔다가 추사일에 강남으로 떠난다고 한다.
[주D-002]밥상에 …… 하였구려 : 고기 반찬도 마련하지 못하는 등 극진하게 대접하는 데에 미흡했다는 말이다. 《논어》 미자(微子)에, 은자(隱者)인 하조(荷蓧) 장인(丈人)이 자로(子路)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서 ‘닭을 잡고 기장밥을 지어 먹이며〔殺鷄爲黍而食之〕’ 극진하게 대접했다는 말이 나온다.
[주D-003]더구나 …… 열렸음이리까 : 상대방의 뛰어난 면모를 접하고서 자신의 부족한 식견을 한층 넓힐 수 있었다는 말이다. 《장자》 추수(秋水)에, 황하 귀신인 하백(河伯)이 끝이 보이지 않는 북쪽 바다에 처음 이르러서 자신의 좁은 소견을 탄식하며 북해 귀신에게 심경을 토로하는 이른바 ‘망양지탄(望洋之歎)’의 이야기가 나온다.
[주D-004]환희에 …… 없이 : 이백(李白)의 오언절구 ‘독좌경정산(獨坐敬亭山)’에 “뭇 새는 높이 모두 날아가 버리고, 흰 구름은 혼자서 한가롭게 떠나가네. 서로 보며 양쪽 다 싫어함이 없는 것은, 오직 이 몸과 경정산 둘뿐.〔衆鳥高飛盡 孤雲獨去閒 相看兩不厭 只有敬亭山〕”이라는 절묘한 표현이 나온다.
[주D-005]이자릉(李子陵) …… 차운하다 : 진(晉) 나라 도잠(陶潛)이 1월 5일에 날씨가 화창하고 경치가 아름답자 이웃에 사는 두세 명과 함께 사천(斜川)에 놀러 나가서 시를 읊은 고사가 있다. 《陶淵明集 卷2 遊斜川 幷序》 그런데 포저와 동갑인 이경엄(李景嚴)이 사는 곳에도 사천이라는 지명이 있고 또 풍광이 수려했으므로, 이 경치를 화폭에 담고는 여기에 당대 명사들의 시를 모아 사천첩(斜川帖)을 만들었는데, 포저의 이 시도 여기에 차운한 것이다.
[주D-006]고금(古今)이 …… 하리로다 : 이자릉의 사천이 도연명의 사천과 다를 것이 없게 되었다는 말이다. 한(漢) 나라 양운(楊惲)이 흉노의 선우(單于)가 피살된 이유와 진(秦) 나라가 멸망한 까닭이 똑같다고 하면서 “옛날이나 지금이나 하나의 산골에 사는 오소리처럼 다를 것이 없다.〔古與今如一丘之貉〕”고 말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前漢書 卷66 楊惲傳》
[주D-007]최고봉(崔孤峯) : 고봉은 최준(崔浚)의 호이다. 《월사집(月沙集)》 15권 ‘만최첨지(挽崔僉知)’에 “그의 이름은 준(浚)이요,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생질이다.”라는 자주(自註)가 붙어 있으며, 그 만시의 말구에 “취한 뒤의 드높은 노래 어떻게 다시 들으리요, 고봉이 있는 남쪽을 보며 소매에 눈물을 적시노라.〔醉後高歌那復聽 孤峯南望淚盈裾〕”라는 표현이 나온다.
[주D-008]수졸(守拙) : 자신의 소박한 본성을 지키면서 전원(田園)에 돌아가 사는 것을 말한다. 도잠(陶潛)의 시에 “남쪽 들판 언저리 황량한 밭을 일구고서, 졸렬한 본성 지키며 전원에 돌아와 사노매라.〔開荒南野際 守拙歸田園〕”라는 구절이 있다. 《陶淵明集 卷2 歸田園居》
[주D-009]저녁 …… 않아 : 이백(李白)의 오언절구 ‘독좌경정산(獨坐敬亭山)’에 “뭇 새는 높이 모두 날아가 버리고, 흰 구름은 혼자서 한가롭게 떠나가네. 서로 보며 양쪽 다 싫어함이 없는 것은, 오직 이 몸과 경정산 둘뿐.〔衆鳥高飛盡 孤雲獨去閒 相看兩不厭 只有敬亭山〕”이라는 절묘한 표현이 나온다.
[주D-010]촉군(蜀郡)의 …… 보루 : 난석(爛石) 즉 기암괴석의 형상을 석서(石犀) 즉 돌로 조각한 물소에 비유한 것이다. 진(秦) 나라 효문왕(孝文王) 때에 이빙(李氷)이 촉군 태수(蜀郡太守)로 부임한 뒤에 강물의 범람을 막을 목적으로 물소 다섯 마리를 돌로 조각하여 강변에 세움으로써 촉강(蜀江)의 수정(水精)을 진압하려 했던 고사가 있다. 《華陽國志 蜀志》
[주D-011]한(漢) 나라 …… 항성(恒星) : 하늘에서 떨어진 운석(隕石)이 아닐까 의심되기도 한다는 말이다. 《한서(漢書)》 초원왕 유교전(楚元王劉交傳)에 “밤에 항성이 보이지 않더니, 한밤중에 별들이 한 차례 비처럼 쏟아져 내리면서, 화재가 열네 군데나 발생하였다.〔夜常星不見 夜中星隕如雨一 火災十四〕”는 기록이 보인다.
[주D-012]헌황(軒皇)이 …… 같았으리 : 번개가 쳐서 산을 무너뜨릴 때의 기세가 흡사 상고 시대에 황제(黃帝)가 치우(蚩尤) 등 반역의 무리를 정벌할 때의 상황과 흡사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헌황은 황제 헌원씨(軒轅氏)를 가리키고, 부정(不庭)은 조정에 조회하지 않는다는 말로 반역을 뜻한다.
[주D-013]신창(新昌) : 포저가 광해군 5년(1613) 계축년에 벼슬을 버리고 광주(廣州)의 농가(農家)로 돌아와서 살다가, 다시 광주가 도성과 가까운 것을 혐의한 나머지 호서(湖西)의 신창현(新昌縣) 도고산(道高山) 아래로 옮겨서 1623년 인조 반정(仁祖反正) 때까지 우거(寓居)한 사실이 있다.
[주D-014]푸른 눈동자 : 반가운 사람끼리 나누는 정다운 눈빛이라는 말이다. 삼국시대 위(魏) 나라 완적(阮籍)이 속된 사람을 만나면 ‘흰 눈〔白眼〕’을 치켜 뜨고, 반가운 인사를 만나면 ‘푸른 눈〔靑眼〕’ 즉 검은 눈동자를 보였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世說新語 簡傲》
[주D-015]붉은 마음 : 적자지심(赤子之心) 즉 갓난아이처럼 거짓 없이 참된 마음을 말한다.
[주D-016]중망(衆望)도 …… 터에 : 조정에 있든 없든 상관이 없을 만큼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도 보잘것없다는 뜻의 자조적(自嘲的)인 표현이다. 출처는 출사(出仕)와 은퇴(隱退)를 뜻한다.
[주D-017]백벽(白璧)의 …… 않았소이다 : 자신을 알아준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지 못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어지러운 조정에 나가서 다시 벼슬할 뜻은 없다는 말이다. 전국 시대 우경(虞卿)이 처음 조왕(趙王)을 만났을 때 백벽 한 쌍을 선물로 받았던 고사에서 유래하여, 백벽이 왕의 지우(知遇)를 받는 전고로 쓰이게 되었다. 《史記 卷76 虞卿列傳》 청운(靑雲)은 입신출세하려는 욕망을 뜻한다.
[주D-018]용안(龍顔)이라 …… 자신일레라 :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의 고사를 빌려서 조선 왕의 초상화와 대궐을 비유한 말이다. 일각(日角)은 이마 한복판의 뼈가 융기(隆起)한 것으로, 이를 용안이라고 하는데, 유방이 바로 용안의 상(相)을 갖췄다는 말이 《사기》 고조 본기(高祖本紀)에 나온다. 풍패(豐沛)는 유방의 고향이자 처음 군사를 일으킨 곳으로 유방 자신을 가리키고, 자신(紫宸)은 대궐을 가리킨다.
[주D-019]오르내리며 …… 내리셨으리라 : 선원전의 귀신도 상국 같은 사람에게 복을 내려 줄 것이라는 말이다. 《시경》 주송(周頌) 민여소자(閔予小子)에 “문왕(文王)의 혼령이 뜨락에 오르내린다.〔念茲皇祖 陟降庭止〕”는 말이 나오고, 《중용장구(中庸章句)》 16장에 “제사를 지낼 때면 귀신이 양양히 그 위에 있는 듯도 하고 좌우에 있는 듯도 하다.〔承祭祀 洋洋乎如在其上 如在其左右〕”는 말이 나온다.
[주D-020]용재(慵齋) : 성현(成俔)의 호이다.
[주D-021]뗏목 …… 하오이다 : 한(漢) 나라 장건(張騫)이 무제(武帝)의 명을 받들고 황하(黃河)의 근원을 찾으러 배 타고서 갔다가 은하수 위로 올라가 하늘 궁궐을 구경했다는 전설을 인용한 것이다. 《天中記 卷2》 태청(太淸)은 하늘을 뜻한다.
[주D-022]쌀독이 …… 아니오만 : 전원에 돌아가서 유유자적하게 지낸 도잠(陶潛)과는 달리 포저 자신은 공자의 제자 안회(顔回)처럼 빈궁한 생활을 감수하며 지낸다는 말이다. 《논어》 선진(先進)에 “안회는 거의 도의 경지에 접근하였다. 그는 자주 쌀독이 비는 데도 태연하였다.〔回其庶幾乎 屢空〕”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또 도잠이 지은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에 “집 옆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가 있기에 이를 나 자신의 호로 삼았다.〔宅邊有五柳樹 因以爲號焉〕”는 말이 나온다.
[주D-023]상여(相如) : 한(漢) 나라의 문장가인 사마상여(司馬相如)를 말한다. 그는 항상 목이 마르는 소갈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史記 卷117 司馬相如列傳》
[주D-024]내일 …… 읊으시겠지요 : 광해군(光海君)의 난정(亂政)을 개탄하며 슬픈 생각에 잠길 것이라는 말이다. 《시경》 회풍(檜風) 비풍(匪風)은 주(周) 나라의 정사가 혼란한 것을 슬퍼하여 지은 시인데, 그 안에 “바람이 몰아쳐서도 아니요, 수레가 흔들려서도 아니외다. 주 나라 서울 길 돌아보니, 마음이 서글퍼져서라오.〔匪風飄兮 匪車嘌兮 顧瞻周道 中心弔兮〕”라는 구절이 나온다.
[주D-025]남귀암(南龜庵)이 …… 시 : 귀암은 조선 초기의 개국공신인 남재(南在)의 호이다. 그가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덕을 흠모하여 지은 ‘기길야은(寄吉冶隱)’이라는 칠언절구가 그의 문집인 《귀정유고(龜亭遺藁)》 첫머리에 나오고, 또 《야은집(冶隱集)》 하권 언행습유(言行拾遺)에 귀암이 똑같은 운자(韻字)를 써서 봉계처사(鳳溪處士) 길 선생(吉先生)에게 바친 시들과 이후 여기에 차운한 여러 명사들의 시가 줄을 이어서 나온다.
[주D-026]봉수(鳳水)와 오산(烏山) : 선산(善山)의 봉계(鳳溪)와 금오산(金烏山)을 가리킨다. 길재는 봉계처사(鳳溪處士)와 금오산인(金烏山人)으로 일컬어지기도 하였다.
[주D-027]좌명(佐命)의 …… 새겼도다 : 고려의 많은 신하들이 태조 이성계를 도와서 개국공신의 영예를 누렸다는 말이다. 좌명은 천명(天命)을 받은 제왕의 창업을 보좌(輔佐)한다는 뜻으로 개국공신을 의미한다. 종정(鍾鼎)은 종과 솥처럼 오래도록 마멸되지 않을 금석(金石)을 뜻한다.
[주D-028]서산(西山)과 초택(楚澤) : 백이(伯夷) 숙제(叔齊)와 굴원(屈原)을 가리킨다. 백이 숙제가 주(周) 나라 곡식을 먹지 않고 수양산(首陽山)에서 고사리만 뜯어 먹다가 죽었는데, 서산은 수양산의 별칭이다. 전국 시대 초(楚) 나라 굴원이 굽히지 않고 바른 소리를 하다가 조정에서 쫓겨난 뒤에 지은 ‘어부사(漁父辭)’에 “못가를 어슬렁 걸어다니며 혼자서 읊조렸다.〔行吟澤畔〕”는 구절이 나온다.
[주D-029]고봉(孤峯) : 최준(崔浚)의 호이다. 그의 자(字)는 덕원(德遠)이다. 《월사집(月沙集)》 14권에 ‘최덕원(崔德遠) 준(浚) 에게 차운한 시’ 등 3편의 시가 나오는데, 포저의 이 시도 여기에 차운한 것임을 확인할 수가 있다. 《월사집》 15권 ‘만최첨지(挽崔僉知)’에 “그의 이름은 준(浚)이요,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생질이다.”라는 자주(自註)가 붙어 있으며, 그 만시의 말구에 “취한 뒤의 드높은 노래 어떻게 다시 들으리요, 고봉이 있는 남쪽을 보며 소매에 눈물을 적시노라.〔醉後高歌那復聽 孤峯南望淚盈裾〕”라는 표현이 나온다.
[주D-030]초(楚) 땅에 …… 할까 : 월사와 고봉 두 사람 모두 걸출한 재능의 소유자라는 말이다. 용천(龍泉)과 태아(太阿)의 두 보검이 옛날 오(吳) 나라 지역인 예장군(豫章郡) 풍성(豐城) 땅에 묻혀서 밤마다 북두성과 견우성 사이에 자기(紫氣)를 내뿜고 있다가 발굴되어 세상에 나왔다는 전설이 있는데, 보통 오초(吳楚)로 병칭하기 때문에 오(吳)를 초(楚)로 바꿔서 쓴 것이 아닌가 한다. 《晉書 卷36 張華傳》 연성은 연성벽(連城璧)의 준말로, 전국 시대 진(秦) 나라 소왕(昭王)이 조(趙) 나라 혜문왕(惠文王)에게 열 다섯 성과 바꾸자고 청한 초(楚) 나라 변화(卞和)의 이른바 화씨벽(和氏璧)을 말한다. 형(荊)은 형만(荊蠻)의 준말로, 초(楚) 나라의 별칭이다.
[주D-031]허전하고 …… 소리 : 친하게 지내다 세상을 떠난 사람을 추억하며 슬픔에 잠기는 것을 말한다. 삼국 시대 위(魏) 나라 혜강(嵇康)과 여안(呂安)이 사마소(司馬昭)에게 살해된 뒤, 그들의 친구인 상수(向秀)가 혜강이 살던 산양(山陽) 땅을 지나다가 이웃집에서 들려오는 피리 소리를 듣고는 옛 추억을 떠올리고 슬퍼하며 ‘사구부(思舊賦)를 지은 고사가 전한다. 《晉書 卷49 向秀傳》
[주D-032]어느 …… 있겠는가 : 장자(莊子)의 글을 보면 특히 ‘제물론(齊物論)’ 같은 곳에서 삶과 죽음이라는 것을 다르게 여길 것 없이 하나로 볼 줄 알아야 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지만, 죽음이란 사람에게 어쩔 수 없이 슬픈 것이 아니겠느냐는 뜻이다. 진(晉) 나라 왕희지(王羲之)의 ‘난정기(蘭亭記)’에 “죽음과 삶을 하나로 본다는 말도 허황된 것이요, 오래 살고 빨리 죽는 것을 같게 본다는 말도 함부로 지어낸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固知一死生爲虛誕 齊彭殤爲妄作〕”는 말이 나온다.
[주D-033]자하(紫霞)의 술 : 옛날 항만도(項曼都)라는 사람이 선인(仙人)에게 한 번 얻어 마시고는 몇 개월 동안 배가 고프지 않았다고 하는 술 이름으로, 보통 궁중에서 빚은 미주(美酒)를 비유하는데, 혹 유하주(流霞酒)라고도 한다. 《抱朴子 袪惑》
[주D-034]시대는 …… 해당하고 : 왕도정치(王道政治)를 행하는 성군(聖君)이 나올 때가 됐다는 말로, 인조반정(仁祖反正)을 미화한 말이다. 《맹자》 공손추 하(公孫丑下)에 “오백 년마다 왕자가 반드시 나오게 되어 있다.〔五百年必有王者興〕”는 말이 나오고, 진심 하(盡心下)에 요순(堯舜)과 탕(湯)과 문왕(文王)과 공자(孔子) 사이의 세월이 각각 5백여 년이라는 말이 나온다.
[주D-035]기회는 …… 만났도다 : 성군과 현신이 만나는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를 맞았다는 말이다. 진(晉) 나라 반악(潘岳)의 서정부(西征賦)에 “천 년에 한 번 있을 융성의 기회를 만났나니, 황상의 덕이야말로 천지와 일치하도다.〔遭千載之嘉會 皇合德于乾坤〕”라는 말이 나온다.
[주D-036]삼존(三尊)을 …… 있었던가 :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 이원익(李元翼)이야말로 모든 세상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는 말이다. 삼존은 삼달존(三達尊)의 준말로, 누구든 높이 받들어 모셔야 할 작위(爵位)와 고령(高齡)과 덕행(德行)의 세 가지를 말한다. 《孟子 公孫丑下》
[주D-037]삼태성(三台星)의 …… 끼쳤고 : 영의정인 이원익이 장수하면서 백성들에게 은덕을 골고루 베풀었다는 말이다. 삼태성은 삼공(三公)을 상징한다. 남극은 남극성(南極星)의 준말로, 사람의 수명을 주관한다는 노인성(老人星)의 별칭인데, 흔히 장수하는 노인을 비유할 때 이 별을 인용하곤 한다.
[주D-038]봉강(封疆) …… 지켰도다 : 이원익이 왜란(倭亂)과 호란(胡亂) 등 외적의 침입을 당했을 적에, 귀신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신묘한 계책을 세워서 국난을 극복했다는 말이다. 당(唐) 나라 이화(李華)의 ‘조고전장문(弔古戰場文)’에 “나라의 수비는 사방의 오랑캐들을 잘 대처하는 데에 있다.〔守在四夷〕”는 말이 나오고, 두목(杜牧)의 ‘하평당항표(賀平黨項表)’에 “위엄은 풍정을 극하였고, 모책은 조화에 앞섰다. 암암리에 예산을 운용하여, 단독으로 신기를 결단하였다.〔威極風霆 謀先造化 潛運睿算 獨決神機〕”는 말이 나온다.
[주D-039]세상 …… 보겠도다 : 신분은 신하이지만 나라의 원로인 만큼 임금의 손님처럼 극진한 예우를 받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요(堯) 임금이 순(舜)과 번갈아 가며 주인이 되고 손님이 되면서 벗으로 지냈다는 말이 나온다.
[주D-040]석실(石室) : 양주(楊州)에 있는데, 김상헌의 호가 또 석실산인(石室山人)이다.
[주D-041]적성(赤城) : 도교(道敎)의 전설 속에 나오는 삼십육 동천(三十六洞天)의 하나로, 진(晉) 나라 손작(孫綽)이 ‘유천태산부(遊天台山賦)’에서 “적성의 붉은 노을이 일어나며 절로 표지가 세워진다.〔赤城霞起而建標〕”고 표현한 뒤로 선경(仙境)의 대명사로 쓰이게 되었는데, 여기에서는 진산군의 대둔산(大芚山)을 의미한다.
[주D-042]불평(不平)의 울림 : 한유(韓愈)가 지은 ‘송맹동야서(送孟東野書)’의 첫머리에 “대개 어느 존재를 막론하고 자기 뜻에 맞지 않으면 울림의 현상이 있게 마련이다.〔大凡物不得其平則鳴〕”라는 명언이 나온다.
[주D-043]금란(金蘭)의 벗 : 마음을 같이하는 벗이라는 뜻이다. 《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두 사람이 마음을 같이하면 쇠도 자를 수 있고, 그런 사람들의 말에서는 난초 향기가 풍겨 나온다.〔二人同心 其利斷金 同心之言 其臭如蘭〕”는 말이 나온다.
[주D-044]희년(稀年)을 …… 하나니 : 사람이 70세까지 살기도 지극히 어렵다는 말인데, 두보(杜甫)의 ‘곡강(曲江)’ 시에 “인생 70은 예로부터 드물었다오.〔人生七十古來稀〕”라는 명구가 나온다.
[주D-045]삼존(三尊) : 삼존은 삼달존(三達尊)의 준말로, 누구든 높이 받들어 모셔야 할 작위(爵位)와 고령(高齡)과 덕행(德行)의 세 가지를 말한다. 《孟子 公孫丑下》
[주D-046]전설을 …… 하나 : 요동(遼東) 사람 정령위(丁令威)가 신선이 되고 나서 천 년 만에 학으로 변해 다시 고향을 찾아 와서는 요동 성문의 화표주(華表柱) 위에 내려앉았는데, 소년 하나가 활을 쏘려 하자 허공으로 날아 올라가 배회하면서 “옛날 정령위가 한 마리 새가 되어, 집 떠난 지 천 년 만에 이제 처음 돌아왔소. 성곽은 의구한데 사람은 모두 바뀌었나니, 신선술 왜 안 배우고 무덤만 이리도 즐비한고.〔有鳥有鳥丁令威 去家千年今始歸 城郭如故人民非 何不學仙冢纍纍〕”라고 탄식하고는 사라졌다는 전설이 전한다. 《搜神後記 卷1》
[주D-047]오직 …… 있나니라 : 《논어》 옹야(雍也)에 “인을 행하는 자는 산을 좋아하고 고요하며 오래 산다.〔仁者樂山 仁者靜 仁者壽〕”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주D-048]어찌 …… 하겠는가 : 도가(道家)의 양생술(養生術) 같은 것에 현혹될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장자》 각의(刻意)에, 건강 증진법을 설명하는 가운데 “탁한 기운을 몸 밖으로 뱉어 내고 맑은 기운을 몸 안으로 들이마신다.〔吐故納新〕”는 말이 나온다.
[주D-049]옛날에 …… 순(旬)이라고 : 춘추 시대에 기(杞) 나라의 성을 쌓을 때 강현(絳縣)에서 동원된 노인이 있었는데, 그 노인도 모르는 나이를 추산해 보니 2만 6660일로 73세에 해당되었으므로, 조무(趙武) 즉 조맹(趙孟)이 자기 고을 출신의 노인을 토목공사에 동원한 책임을 지고 사과하며 우대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春秋左氏傳 襄公 30年》
[주D-050]빙설(氷雪)처럼 …… 살결이요 : 《장자》 소요유(逍遙遊)에 “묘고야(藐姑射) 산에 사는 신인(神人)은 ‘살결이 마치 얼음이나 눈과 같은데〔肌膚若氷雪〕’, 오곡(五穀)은 먹지 않고서 바람을 호흡하고 이슬을 마시기만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주D-051]금초(金貂) : 황금당(黃金璫)과 초미(貂尾)로 장식한 관(冠)으로, 높은 품계의 관원을 뜻한다.
[주D-052]선행(善行)을 …… 알겠고요 : 《주역(周易)》 곤괘(坤卦) 문언(文言)에 “선행을 쌓은 집안은 반드시 자손에까지 경사가 미친다.〔積善之家 必有餘慶〕”는 말이 나온다.
[주D-053]장수(長壽)는 …… 믿겠네요 : 《논어》 옹야(雍也)에 “인을 행하는 자는 산을 좋아하고 고요하며 오래 산다.〔仁者樂山 仁者靜 仁者壽〕”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주D-054]삼존(三尊) : 삼존은 삼달존(三達尊)의 준말로, 누구든 높이 받들어 모셔야 할 작위(爵位)와 고령(高齡)과 덕행(德行)의 세 가지를 말한다. 《孟子 公孫丑下》
[주D-055]기이(期頤)의 복 : 백 년의 수명을 누리면서 자손의 봉양을 받는 것을 뜻한다. 《예기(禮記)》 곡례 상(曲禮上)에 “백 년은 인간이 살 수 있는 최고의 수명이니, 자손들은 최대한으로 봉양을 해야 마땅하다.〔百年曰期 頤〕”는 말이 나온다.
[주D-056]감지(甘旨)의 봉양 : 자녀가 효성스럽게 어버이를 받들어 모시는 것을 말한다. 《예기》 내칙(內則)에 “날이 샐 무렵에는 아침 문안을 올리고, 맛 좋은 음식을 올려서 효심을 표시해야 할 것이다.〔昧爽而朝 慈以旨甘〕”라는 말이 나온다.
[주D-057]색동옷 …… 있으시니 : 춘추 시대 초(楚) 나라의 은사(隱士)인 노래자(老萊子)가 나이 70에도 어버이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색동옷을 입고서 춤을 추며 재롱을 떨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初學記 卷17 孝子傳》
[주D-058]장빈(漳濱) : 병에 걸려 신음한다는 뜻의 시어(詩語)이다. 건안 칠자(建安七子)의 하나인 삼국 시대 위(魏) 나라 유정(劉楨)이 “나는 심한 고질병에 걸린 탓으로, 맑은 장수 물가에서 와병 중이라오.〔余嬰沈痼疾 竄身淸漳濱〕”라고 표현한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文選 卷23 贈五官中郞將》

 

포저집 제1권
 시(詩)
만사(挽詞) 63수



선종대왕(宣宗大王)의 천릉(遷陵)에 즈음한 만사
역복을 선성에게 이어받고서 / 曆服承先聖
총명으로 백왕의 으뜸이 되셨나니 / 聰明冠百王
마음가짐은 순 임금과 우왕을 스승 삼고 / 存心師舜禹
뛰어난 덕은 요 임금과 탕왕을 이었도다 / 駿德繼堯湯
낭묘에 원로들을 초치하여 등용하고 / 廊廟登耆舊
주항에 준재들을 이끌어 들였으며 / 周行引俊良
보필하는 신하들을 예법으로 대하였고 / 臣鄰待以禮
백성들을 다친 사람 보는 듯하셨도다 / 民物視如傷
은일의 선비들을 산림에서 찾아내고 / 逸士搜巖穴
유능한 인재들을 상서에서 길렀나니 / 人才育序庠
은혜가 흡족한 시대를 장차 보게 되고 / 行看恩薄洽
덕치의 교화가 점점 향기롭게 되었도다 / 馴致德馨香
그런데 국운이 웬 일로 중도에 막혀 / 天步何中否
왜적이 그만 제멋대로 날뛰는 바람에 / 倭夷乃陸梁
초분이 험악해지는 다급한 상황에서 / 蒼黃楚氛惡
멀리 촉산으로 순수를 하시게 되었도다 / 巡狩蜀山長
다난해도 하늘의 도수가 원래 있는지라 / 多難元天數
다시 회복해서 광복의 기쁨을 맞이하여 / 重恢復日光
강토를 보전하고 안정되게끔 하였으니 / 已全寰宇謐
거룩한 대왕의 공이 더욱 드러났도다 / 益見聖功彰
정수에 안개와 구름 암담하게 뒤덮이고 / 鼎水煙雲暗
오산에 풀과 나무 황량하게 우거졌나니 / 梧山草樹荒

슬퍼라 틈새를 지나는 일백 년 인생이여 / 百年悲過隙
만백성 애끊는 듯 비통 속에 잠겼어라 / 萬姓痛摧腸
전장과 법도가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고 / 典則今猶在
안 계셔도 그 현친을 못 잊어 하는 가운데 / 賢親沒不忘
이괘의 밝음이 이미 둘이나 일어났으니 / 离明旣兩作
국가의 대업이 자연히 거듭 창성하리로다 / 大業自重昌
뜻을 잘 계승하고 모훈을 준수하며 / 善繼遵謨訓
순수하고 참되게 약상을 받들던 중에 / 純誠奉禴嘗
물이 주 나라 계묘에 침입한다는 말이 있어 / 水侵周季墓
사람들이 송 나라 황당을 의논하였어라 / 人議宋皇堂

추모하는 효손의 심정이 끝이 없어서 / 追孝思無極
혼령을 혹시 놀라게 할까 두려워하며 / 安靈恐有妨
시초와 거북점을 쳐서 길조를 얻은 뒤에 / 蓍龜得吉兆
옛 능과 가까운 등성이로 옮기게 되었어라 / 松柏近先岡
상설을 하며 신읍을 경영함은 물론이요 / 象設營新邑
옛 능묘의 의관도 모두 새로 바꾸면서 / 衣冠改舊藏
임금님 마음에 후회가 없도록 하였나니 / 宸情期勿悔
복된 땅이 상서를 두루 갖추게 되었도다 / 福地協諸祥
이제 국운이 천년 만년 끝없이 이어지고 / 寶祚綿千祀
뭇 생령이 안락을 길이 누리게 되었는데 / 羣生獲永康
미천한 신하가 옛날의 일을 떠올리면서 / 微臣思昔日
우러러 절하노라니 눈물이 가득 고입니다 / 瞻拜涕盈眶

인조대왕(仁祖大王)의 만사
만물에 으뜸으로 나오신 총명함과 / 聰明出庶物
삼왕을 이은 성대한 덕을 지니시고 / 懋德繼三王
어렵고 큰 선왕의 기업을 계승하여 / 艱大嗣先業
인자한 은덕을 온 누리에 펼치셨도다 / 仁恩覃八方
인륜이 일찍이 무너지고 타락하여 / 彛倫曾斁廢
종사가 멸망의 위기에 봉착했을 때 / 宗社阽危亡
백성들은 모진 피해를 당한 반면에 / 萬姓罹凶害
간신들은 못할 짓 없이 날뛰었도다 / 羣奸恣陸梁
하느님이 성상의 덕을 돌아보시자 / 天心眷聖德
그림자가 따르듯 충신들이 모여들어 / 影附聚忠良
하루도 못 되어 요기가 활짝 걷히고 / 不日妖氛豁
하루아침에 대의가 널리 펼쳐졌도다 / 崇朝大義張
비렴은 처형하여 저자에 진열하고 / 飛廉就顯戮
창읍은 황량한 변방에 유배하였으며 / 昌邑放遐荒
성모는 궁전으로 다시 모셔 오고 / 聖母迎宮壺
현신을 다시 조정에 나오게 하였도다 / 賢臣進廟堂
걱정하고 애쓰면서 병폐를 제거하여 / 憂勞除弊瘼
정치가 평화와 안정을 회복하였나니 / 治化復平康
덕정에 감화됨이 포로처럼 신속하고 / 德被蒲蘆速
은택이 빗줄기처럼 내려지는 가운데 / 恩行霔雨霶
조정은 엄숙하게 기강이 확립되고 / 朝紳見肅穆
서민은 즐겁게 농사짓게 되었도다 / 民庶樂田疆
비와 태는 원래 서로 순환하는 것이라서 / 否泰元相代
병란과 흉년으로 몇 차례 재앙도 당했다만 / 兵荒屢作殃
세상의 운세가 어렵고 힘들다 할지라도 / 艱難屬世運
경계하고 격려하며 국가의 기강을 떨쳤도다 / 惕勵振王綱
하늘의 경고를 요탕도 받지 않았던가 / 天警堯湯遇
완악한 삼묘를 순우도 당하지 않았던가 / 苗頑舜禹當
조화의 공에 끼일 만한 지극한 정성으로 / 至誠參造化
긍휼히 여겨 만신창이를 일으켜 세웠기에 / 勤恤起痍瘡
민심이 흡족하여 길이 받들기 원하면서 / 願戴群情洽
임금님 오래 사시기를 모두 기원하였는데 / 咸祈聖筭長
정호에 용의 그림자 멀리 사라지고 / 鼎湖龍影遠
몽사에 태양이 떨어져 깊이 잠겨서 / 濛汜日光藏
우위는 빈 골짜기로 자리를 옮겨 가고 / 羽衛移空谷
운소만 아스라이 제향 위에 감도누나 / 雲韶杳帝鄕

예전에 이 몸이 초야에 묻혀 있다가 / 昔臣從草野
창성한 시대를 만났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 何幸際時昌
지위는 외람되게 경재에까지 올라갔고 / 致位叨卿宰
청반도 모두 역임하며 의기양양하였어라 / 淸班盡歷揚
그동안 보살펴 주시는 은총을 받았는데 / 從來蒙眷寵
털끝만큼도 보답해 드릴 길이 없었으니 / 無路報毫芒
통곡을 하며 옛날 일을 떠올리는 지금 / 慟哭思前日
오장이 찢기는 슬픔을 어떻게 참으리요 / 那堪裂肺腸

권 좌랑(權佐郞) 득이(得已) 의 죽음을 애도하며
풍도와 절조 드높이 공경들을 내려다보며 / 高風峻節傲公卿
그동안 혼탁한 세상에서 독야청청하였도다 / 世混由來見獨淸
영예를 사양해 상자의 뒤를 따른 것만도 기뻤는데 / 已喜辭榮追向子
바다에 들어가 봉맹을 본받았다는 말을 바로 들었지 / 旋聞入海效逢萌
옛 시대 인물을 본 것 같아 항상 찬탄하였는데 / 同時每嘆如殊代
병에 걸려 이승 저승 나뉠 줄 어떻게 알았으랴 / 一疾那知隔此生
멀리 생각건대 이 세상의 선류들 중에 / 遙想寰中諸善類
몇 사람이나 나처럼 슬프게 애도할는지 / 幾人嗟悼似吾情

계운궁(啓運宮)의 만장(挽章)
멀리 고려 시대부터 경사가 이어진 가문 / 流慶垂休遠自麗
왕실에 출가하여 덕성이 모두 걸맞았네 / 于歸王室德咸宜
현성을 독생하여 혼란한 세상을 극복하고 / 篤生賢聖傾時否
요순의 뜻을 세워 태평을 이루게 하였다오 / 邁志唐虞致世熙
나라를 받들어 봉양하는 효도를 받는 때에 / 大孝方隆一國養
병마가 느닷없이 백 년의 수명을 재촉했네 / 沈痾遽促百年期

온 나라가 다투어 앙망하며 극진히 애도하니 / 邦人爭仰情文盡
풍초처럼 풍속이 절로 감화된 것을 알리로다 / 風草應知俗自移

정수몽(鄭守夢) 엽(曄) 의 죽음을 애도하며
성군이 출현하신 천재일우의 기회에 / 聖作千年會
이팔의 재능 지니고 조정에 올랐어라 / 朝登二八才
학궁에선 글 읽는 소리 낭랑하게 하고 / 弦歌興泮璧
어사대에선 기강을 엄숙하게 하였어라 / 綱紀振霜臺

앞으로 달려갈 길이 아직 멀고 멀건만 / 未極長途騁
큰 건물의 서까래가 느닷없이 부러졌네 / 俄摧大廈材
일찍이 소문의 소망 이룬 바도 있었기에 / 掃門曾遂願
이렇게 만사 지어 슬픔을 토로하나이다 / 薤露寫悲哀

성 영동(成永同) 문준(文濬) 에 대한 만사
동방에 오래 전에 전래된 우리 도가 / 吾道東來久
파산에서 양대에 걸쳐 다시 전해졌네 / 坡山兩世傳
학문의 연원은 집안에서 유래했고 / 淵源自家學
어진 명성은 제현에 울려 퍼졌어라 / 德譽動諸賢
요순 시대의 뜻을 시험해 보지 못한 채 / 未試唐虞志
기애의 연세에 끝내 세상을 마쳤구려 / 終摧耆艾年
이 몸을 알아줌이 일찍이 얕지 않았기에 / 遇知曾不淺
만사를 지으려니 눈물이 끝없이 흐릅니다 / 薤露涕漣漣

원 우윤(元右尹) 황(鎤) 의 죽음을 애도하며
곧은 절조가 실로 화살 같아서 / 直節良如矢
빈궁과 영달에 끝내 변치 않았네 / 窮通竟不移
천하의 선비와 벗할 줄을 알았거니 / 乃知天下士
세상 아이들에게 눈길이나 줬으리요 / 豈效世間兒
선인을 돕는다는 말은 참으로 허언이라 / 與善眞虛語
외로운 충성심 안고 그만 세상 떠났구려 / 孤忠遽止斯
내가 왜 헤일 수도 없이 눈물을 흘리냐고요 / 吾何泣無數
지금부터는 나의 종기를 잃었으니까요 / 從此失鍾期

오 지사(吳知事)에 대한 만사
전장에 임했던 날 얼마나 씩씩하였던가 / 仡仡臨戎日
용맹스러운 노장의 명성 한껏 날렸어라 / 桓桓老將名
높은 연세는 일흔을 훌쩍 뛰어넘었고 / 尊年踰七秩
추부에서는 고경의 반열에 오르셨다오 / 樞府列孤卿
시작한 일을 손자에게 물려주고서 / 緖業歸孫子
문장 실력으로 서울을 진동시켰지요 / 文章動洛京
이 세상에서 무슨 유감이 있으리이까 / 世間奚所憾
영원한 안식처에서 편히 눈을 감으시라 / 暝目就佳城

성 무주(成茂朱) 협(浹) 의 죽음을 애도하며
선생은 이 세상 속의 기인으로서 / 夫子世中奇
마음가짐이 혜와 이를 합쳤다 할까 / 持心惠且夷
이른 나이에 세속을 비루하게 여기고서 / 早歲鄙流俗
옛것을 좋아하며 엿보지 않음이 없었어라 / 好古無不窺
끊어졌던 학문이 송에서 이어져 내려오며 / 絶學繼自宋
그 학설이 하도 넓어 끝이 보이지를 않자 / 其言浩無涯

흐름 속으로 빠져 들어 깊이 몸을 담그고서 / 沈潛涉其流
정밀한 의리의 귀취를 끝까지 구명하였어라 / 精義窮所歸
통달한 그 식견으로 세상을 초월하였으니 / 達識旣高世
명예와 이끗의 길을 어찌 좇으려 하였으랴 / 肯從名利歧
모난 자루와 둥근 구멍은 끝내 어긋나는 법 / 枘鑿竟不合
흰머리 되도록 진흙탕 길을 감수하였어라 / 皓首甘塗泥
평소 사람 구제하려는 경세제민의 뜻을 / 平生濟人志
의술로 방향을 전환하여 널리 베풀면서 / 反托醫方施
살려낸 사람이 무려 몇 천 명에 달했으니 / 所活幾千人
범로가 생각했던 것과 실로 일치하였는데 / 范老誠一規
선생의 도가 높은 것을 그 누가 알았으리 / 道尊人莫知
의술이 심오한 것만 짐작하였을 뿐이었네 / 但知深於醫
후학인 나도 나름대로 작은 뜻 지니고서 / 末學抱微尙
세상과 서로 등 돌리고 치달리는 동안 / 與世相背馳
쓸쓸하게도 동행할 사람 찾지 못한 채 / 涼涼誰與偶
강습에 도움 받을 곳도 보이지 않았는데 / 講習無所資
유독 어르신께서 돌보아 주신 그 덕분에 / 獨蒙長者顧
다행히도 가르침 받고 인도를 받았었지 / 幸煩誨且提
생각하면 예전에 선생을 처음 뵈었을 때 / 念昔初承顔
연세가 실로 나보다 갑절이나 많았는데 / 尊年實倍之
한번 눈을 마주치자 그 속에 도가 있어 / 目擊道斯存
서로들 진심을 숨김없이 터놓게 되었지요 / 肝膽相爲披
자기를 알아주는 이가 예로부터 흔하던가 / 知音古來少
나이의 많고 적음을 마침내 잊게 되었는데 / 遂忘年差池
부끄럽게 정장과 같은 어진 덕도 없는 터에 / 慚非鄭莊賢
현달로부터 추중을 외람되게도 받았다오 / 猥被賢達推
그동안 흐른 세월 어찌 많지 않으리요 / 日月豈不久
지금 어느덧 스무 해가 되려 하는데 / 于今卄載垂
그중에도 생각하면 지난 십 년 동안은 / 憶昔十年間
서로 모여 서울에서 함께 어울렸지요 / 相聚在洛師
벗으로 지내시던 한두 분 선생 역시 / 有友一二生
모두 월등한 인품을 지닌 분들이라서 / 俱是超人姿
저녁 늦게까지 담론을 벌이기도 하고 / 談論或竟夕
말을 타고 빈번하게 뒤따라 다니면서 / 鞍馬頻追隨
근원을 탐색하여 천인의 관계를 규명하고 / 探源極天人
의리를 분석하여 추호도 빠뜨림 없었지요 / 析義分銖錙
소득이 있으면 함께 토론도 벌이고 / 有得共論討
의심이 있으면 공동으로 사유하면서 / 有疑同思惟
난초 향기처럼 그 마음이 같았나니 / 同心臭如蘭
이런 낙을 이 세상에서 쉽게 얻으리요 / 此樂世間稀
좋은 일은 원래 오래갈 수 없다던가 / 盛事不可久
새벽 별빛처럼 홀연히 서로 흩어져서 / 星散忽分離
각각 다른 곳으로 이별하게 되었는데 / 分離各異地
그중에서 영남 길은 더욱 요원하였어라 / 嶺路尤阻脩
연로한 어르신이 천리 멀리 계시건만 / 几杖隔千里
누구를 통해 소식을 전할 수나 있었으리 / 音信傳憑誰
빨리 가난해지는 것이 사리상 당연하다 해도 / 速貧理固宜
궁벽한 산골에서 얼마나 기한을 참으셨을까 / 窮山忍寒饑
한번 찾아뵈려는 뜻을 이루지 못한 채 / 未諧命駕志
부질없이 경수의 생각만 쌓여 갔는데 / 徒積瓊樹思
어찌 알았으리요 부음이 전해질 줄을 / 寧知訃書至
밥상을 대하고서도 놀라 탄식하였어라 / 當食驚且咨
봉함을 뜯어 돌아가신 날짜를 보고서는 / 發封見月日
목놓아 슬피 울며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 長呼涕漣洏
신위를 만들어 놓고 절에서 곡을 하노라니 / 爲位哭僧廬
아득히 남쪽 하늘가에 비바람이 치더이다 / 風雨杳南陲
예전에 뵐 때는 기운이 아직 정정하셨고 / 曾見氣貌壯
수염과 머리가 조금도 쇠하지를 않았는데 / 髭髮不少衰
어떻게 해서 갑자기 이렇게까지 되었나요 / 如何奄至此
사람의 수명은 참으로 알기가 어렵구려 / 壽者誠難知
어쩌면 헤어진 뒤 칠팔 년의 세월 동안 / 別來七八年
예전과 달라져서 그런 것은 아니리까 / 無乃異前時
일찍이 삶과 죽음의 이치를 얘기하면서 / 嘗言死生理
취산은 우리의 소관이 아니라고 하셨으니 / 聚散非吾私
이번에 죽음의 변화를 맞이했을 적에도 / 於今已觀化
생각건대 헌신짝 버리듯 태연하셨으리라 / 想應恬如遺
생각하면 예전에 도성 서쪽 초당에서 / 憶昔城西廬
발 포개고 이불 함께 덮으며 지냈는데 / 交跖同衾帷
한번 이별하고 나서 이승 저승 갈렸으니 / 一別遂今古
그런 즐거움을 다시는 누리지 못하겠네 / 玆遊已莫追
혜자의 무덤 지나면서 장생도 슬퍼했고 / 莊生哀惠子
종기가 죽자 백아도 거문고를 버렸나니 / 伯牙悲鍾期
마음 알아주는 이를 어찌 다시 얻으리요 / 知心復何得
이렇게 통곡하는 것도 당연하지 않으리까 / 此慟寧不宜
나는 평소에 시문을 잘 짓는 솜씨가 없고 / 平生乏詞藻
붓과 벼루도 내버려 둔 지 이미 오래인데 / 筆硯久廢委
지금 선생의 죽음을 통곡하는 이 마당에 / 今爲哭夫子
어설픈 글로나마 애도를 하지 않으리요 / 可無抽蕪辭
이렇게라도 나의 정을 쏟지 않을 수 없었으니 / 聊爾寫吾情
이것이 어찌 시를 잘 지을 줄 알아서리이까 / 豈是能爲詩

민중경(閔重卿)에 대한 만사
옛날에 내가 산림과 계곡 찾아가서 / 昔我蹈林壑
그대와 마을을 함께하며 지낼 적에 / 與子同里社
그대의 농장은 반곡 안에 자리했고 / 仙莊盤谷中
나의 오두막은 도봉 아래 있었지요 / 敝廬道峯下
그 당시 하늘과 땅의 기운이 막혀 / 是時天地閉
수레도 버리고서 자취를 끊었는데 / 絶迹車已舍

다행히도 마음이 같은 한 분이 계셔서 / 唯幸同心人
형체를 잊고 전야에서 함께 노닐었다오 / 忘形在田野
술이 있으면 항상 둘이서 기울였나니 / 有酒常共傾
여름 겨울 상관없이 초청하고 찾아가며 / 招尋無冬夏
눈 속에서 술 항아리를 열기도 했고 / 或開雪中缸
꽃 사이에서 술잔을 들기도 했지요 / 或把花間斝
그대의 아들은 또 재질이 출중해서 / 賢子才出群
참으로 보기 드물게 총명하였는데 / 穎悟誠爲寡
나에게 뭔가 배우려고 기대하면서 / 從吾冀有聞
유아한 인물이 되겠다고 다짐하기에 / 立心期儒雅
오도를 강론하며 수사까지 올라가고 / 講道泝洙泗
글을 평론하며 반마도 언급하였지요 / 論文及班馬
그대 집안의 부자 사이에 노닌 그 덕분에 / 君家父子間
흐뭇하게 지냈으니 다른 무엇이 필요할까 / 情好寧外假
서로 따르며 친하게 지낸 십여 년 동안 / 相從十數年
우리 둘 다 즐거워서 떨어지지 못했지요 / 懽然兩不捨
용이 날아올라 온 세상이 맑아져서 / 龍飛寰宇淸
초야에서 현인들이 떨쳐 일어날 적에 / 草澤群賢起
이 몸도 띠풀처럼 함께 뽑혀 나왔는데 / 我從茅茹征
그대는 사슴과 벗하며 그대로 머물렀지요 / 君隨麋鹿止
한번 헤어지고 나서 어느새 몇 년 세월 / 一別幾寒暑
구름 낀 산속과 떨어진 복잡한 도성에서 / 雲山隔城市
나랏일로 날마다 정신없이 바쁜 가운데 / 王事日鞅掌
언제고 그칠 사이 없이 노심초사하는 동안 / 勞悴何時已
얼굴이며 머리카락 풍진에 모두 바뀌면서 / 風塵顔髮改
인생의 석양이 점점 다가오는 걸 느꼈다오 / 頹暮覺漸邇
예전에 노닐었던 일을 돌이켜 생각건대 / 回思昔日遊
고상한 흥치 즐기면서 환희에 찼었는데 / 高興眞可喜
이젠 다시 얻지 못할 까마득한 추억이라 / 邈然難復得
헛된 이름 탓하면서 혼자 탄식만 하였는데 / 自嘆浮名累
반가운 소식을 오래도록 듣지 못하던 차에 / 好音久未聞
부음이 전해지다니 이것이 어찌 된 일이요 / 訃書胡乃至
이제 그대를 다시는 만나 볼 수 없으니 / 嗟哉不可見
바람 앞에 비통한 눈물 흩뿌릴 수밖에요 / 臨風洒哀淚
벗님들도 하나 둘 날이 갈수록 떠나가니 / 朋知日凋喪
우리 인생은 여인숙의 길손과 같소그려 / 此生還如寄
아 그대의 성품은 평화롭고 담박해서 / 嗟君冲淡性
다른 사람들과 갈등을 빚는 일도 없이 / 與物無崖異
평생토록 하나의 동산을 지키고 살면서 / 平生守一丘
몸 밖의 공명 따위는 바라지도 않았고 / 不向身外冀
그대의 자제 역시 스스로 설 줄 알아 / 有子能自立
뜻과 행동이 옛사람과 견줄 만하였지요 / 志行古人比
사람의 삶이란 것은 실로 하루살이요 / 人生眞蜉蝣
세상만사도 모두 하나로 돌아가는 것 / 萬事皆一致
장수와 요절도 오히려 같다고 할 것인데 / 壽夭尙可齊
곤궁과 영달 따위야 더구나 관심을 둘까 / 窮達况致意
시시한 세상 속에서 또 무엇을 하기보단 / 悠悠更何爲
솔 아래 땅에서 길이 쉬는 것이 나으리라 / 永歸松下地
길도 멀지만 관직에 몸이 또 묶였으니 / 路遠官又係
어떻게 찾아가서 영결을 할 수 있으리요 / 何由得歸視
애오라지 이렇게 애도하는 글을 엮어 / 聊此綴哀詞
끝없는 내 생각을 토로하는 바이외다 / 寫我無限思

구 주부(具主簿)에 대한 만사
사람이 태어나 장수하기 바라지만 / 人生願爲壽
칠십까지 살기도 예로부터 드문 법 / 七十稀於古
비록 미천하고 빈궁했다 말하지만 / 雖云賤且貧
그래도 장흥고 주부의 신분이시오 / 猶主長興簿
비록 아들은 두지 못했다 하지만 / 雖無一男子
외손이 무려 다섯이나 되지 않소 / 外孫多至五
끝없이 펼쳐진 하늘과 땅 사이에 / 悠悠天地間
하나의 기운이 흩어지고 모이면서 / 一氣紛散聚
온갖 종류의 현상들이 생겨났나니 / 賦物有萬類
모두 우연일 뿐 누가 주재하였겠소 / 偶爾誰是主
귀하고 천하든 장수하고 요절하든 / 貴賤與壽夭
기뻐하고 성낼 것이 뭐가 있으리요 / 奚足爲喜怒
그대 정도만 되어도 자족해야 하리니 / 如君亦自足
그대보다 못한 이들도 부지기수라오 / 不如者何數
달인은 어떤 상황에도 편히 거하다가 / 達人安所遇
자연의 변화 따라 땅으로 돌아가외다 / 隨化歸於土
두 집안이 인척 관계를 맺은 이래로 / 自從婚媾來
여러 차례나 얼굴을 접하곤 하였는데 / 屢幸接眉宇
근년에 새벽별처럼 각자 흩어지고 나서 / 邇年各星散
남포와 멀리 떨어져 소식이 끊긴 중에 / 音塵隔南浦
다정하게 지내던 우리 민 사의로부터 / 慇懃閔司議
옥수가 꺾였다는 말을 홀연히 전해 듣고 / 忽傳摧玉樹
깜짝 놀라 슬퍼하며 탄식을 하노라니 / 怛然驚且悲
남쪽 하늘에 비바람이 암담하더이다 / 南天暗風雨
지금 갑자기 이승 저승 나뉘었으니 / 幽明倏已分
한평생 그 모습을 어떻게 다시 보리 / 一生那復覩
그저 이렇게 만사를 지어 부치오마는 / 聊爾寄哀詞
마음속의 감회야 어떻게 다 토하리요 / 此懷寧盡吐

어떤 이에 대한 만사
기린각의 훈명이 백미에 속하였고 / 麟閣勳名屬白眉
반룡의 사적이 동료 중에 월등했네 / 攀龍事蹟出倫夷
가정에서 영웅의 솜씨를 길러 내어 / 家庭養出英雄手
억만 년 사직의 기틀을 조성하였도다 / 社稷扶成億萬基
우도를 잡고 소읍을 지금 재단하는 중에 / 方見牛刀裁小邑
어찌하여 계몽을 꾸고 명을 재촉하였는가 / 柰何鷄夢促脩期
태의가 약을 보내고 중관이 조문하였으니 / 太醫送藥中官弔
앞뒤로 받은 은혜와 영광 누가 비슷하리요 / 前後恩榮孰似之

유회보(柳晦甫) 찬(燦) 의 천장(遷葬)에 즈음한 만사
생각나네 옛적에 이 상국에게 수학할 때 / 億昔受學李相國
그대와 내가 한동네에서 살았던 일이 / 君居乃與同井里
그 당시는 우리 모두 소년 시절이었는데 / 是時與子俱少年
말쑥한 얼굴에 가사인 것을 금방 알았다오 / 粉面一見知佳士
어울려 노닐며 담소한 지 얼마 되지 않아 / 相從晤語時未幾
구름과 물 저 너머로 멀리 헤어졌는데 / 相別悠悠隔雲水
흰머리 되어 지난날을 지금 추억하며 / 如今皓首思曩日
손꼽아 보니 벌써 삼십육 년 전이로세 / 屈指倏忽經三紀
그동안 천지가 온통 어둠 속에 파묻혀서 / 向來天地屬晦暝
삼강오륜이 무너지고 인륜이 끊어진 채 / 綱常淪亡絶人理
흉도가 포학하게 구는 참혹한 때를 맞아 / 羣凶逞虐酷周來
사람을 잡아 죽이기를 풀을 베듯 하였지 / 殘滅人生類草薙
그대의 부옹은 장자의 칭호를 받으면서 / 君家婦翁稱長者
수양의 어른으로 선정을 베풀고 있었는데 / 作尹首陽施政美
근거 없는 죄를 얽고 투망질을 하듯 하여 / 無端羅織如網加
화가 계속 퍼진 끝에 그대까지 당했지 / 其禍連延及之子

지분 옥쇄한 이 일을 끝내 어디에 호소하랴 / 芝焚玉碎竟何訴
밝은 태양도 빛을 잃고 참담하기만 하였는데 / 白日慘慘無光晷
나는 그때 종적을 감추고 강호에 거하면서 / 我時埋蹤在江湖
아무 말 못한 채 초야에서 마음만 아팠다오 / 嘿嘿傷心草莽裏
원래 예덕은 하늘이 싫어하는 바라 / 由來穢德天所厭
하늘과 땅을 세척하고 성인이 일어나서 / 洗滌乾坤聖人起
간악한 흉적을 처형하여 세상을 맑게 하고 / 姦兇伏罪寰宇淸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며 제사를 내렸도다 / 悼悶無辜紛贈祀
지하에 숭반의 은총이 영광스럽게 가해지고 / 崇班泉下耀恩榮
자제도 수록되어 벼슬길 빛나게 올랐으니 / 收錄遺孤登顯仕
천도는 막막해 못 믿겠다 그 누가 말했는고 / 誰言天道漠難憑
천리를 믿을 수 있는 것을 여기에서 알겠도다 / 到此方知理可恃
당시 초상을 치를 적에 너무도 창황해서 / 當時窀穸事蒼黃
좌씨가 말한 대로 장례가 미흡했는지라 / 葬故有闕徵左氏
지관이 터를 잡아 새로운 묘역을 얻었는데 / 靑烏載卜得新阡
산과 물이 감싸고 돌아 복 받을 명당 자리 / 山川鬱紆宜祥祉
지금부터는 이곳에서 길이 안식을 취하리니 / 眞宅從玆萬世安
가련토다 자식의 도리를 이제야 마쳤구나 / 可憐子道其畢矣
그대와 나의 옛 교분을 자제가 알고서는 / 孤子知吾實有舊
한 폭의 애도하는 글을 은근히 청하기에 / 一幅慇懃求作誄
아스라이 옛날 일을 추억하여 지으면서 / 茫然追記昔年事
시종 슬프고 기쁜 소회를 모두 토로했소이다 / 備寫始終悲且喜

인열왕후(仁烈王后)에 대한 만사 2수
국가 중흥의 성대한 운세를 만나 / 運値中興盛
십란의 재질로 치세를 이뤘도다 / 治因十亂才

규방의 예의범절이 이미 정대했는지라 / 閨闈儀已正
바람 앞의 풀처럼 풍속이 변화되었도다 / 風草俗能回
대춘의 장수를 모두 축원하던 차에 / 共祝長椿壽
소내의 재변을 만나 경악하였도다 / 翻驚素柰災
어진 은혜가 백성들 마음에 사무쳤으니 / 恩仁入人遠
산골 벽촌에서도 모두들 슬퍼하리로다 / 窮谷盡銜哀

서원의 경사가 멀리 뻗쳐서 / 西原餘慶遠
왕실의 휘음을 이으셨도다 / 王室嗣音徽

곤극이 한창 경사를 펼치는 때에 / 坤極方流慶
헌성이 홀연히 빛을 감추었도다 / 軒星忽隱輝

바른 몸가짐은 여훈에 드리워지고 / 儀刑垂女訓
검소한 덕은 남긴 옷에 드러났도다 / 儉德見遺衣
남국에서 관저를 노래한 것처럼 / 南國關雎詠
천추토록 후비를 찬양하리로다 / 千秋美后妃

고(故) 하 사부(河師傅) 낙(洛) 의 천장(遷葬)에 즈음한 만사
한 사람의 몸에 장원과 제이명(第二名) / 壯元第二一人身
천백 년 이래로 어찌 흔한 일이리요 / 千百年來見豈頻
대궐에 상소 올려 바른 의논 신장했고 / 抗疏紫宸伸正議
칼날 앞에 몸을 던져 인륜을 세웠도다 / 捐軀白刃植彛倫

삼엄한 사기는 역사책 속에 기록되고 / 森嚴辭氣傳方冊
충효의 가성은 사방을 진동시켰도다 / 忠孝家聲聳四鄰
이제 고향 땅에서 편히 쉬게 되었나니 / 窀穸故山今有日
죽어서도 그 명성 영원토록 전하리라 / 名稱沒世永無垠

홍생(洪生)에 대한 만사
나와 홍 양재의 교분으로 말하면 / 我與洪良宰
아동 시절 이웃으로 노닐던 사이 / 兒時實接鄰
아들을 두었으니 참으로 한혈마요 / 有男眞汗血
뛰어난 가락은 양춘곡에 견줬어라 / 絶調比陽春
계림의 나뭇가지 꺾지 못한 채 / 未折林中桂
자리 위의 보배가 문득 깨졌구나 / 飜摧席上珍

왔다가 가는 인생 일장춘몽이거니 / 去來還一夢
어찌 꼭 눈물로 수건을 적시리요 / 何必涕沾巾

이 병판(李兵判) 부인에 대한 만사
삼한에서 으뜸으로 명망 있는 집안에서 / 望族三韓甲
덕을 쌓은 가문으로 시집을 오셨다네 / 于歸積德門
존귀한 봉호가 교서 위에 빛나는 데다 / 崇封光紫誥
방백을 역임해서 영광을 또 누렸다오 / 榮享歷雄藩
진수에 걸릴 줄을 어찌 생각했으리요 / 何意嬰晉竪
초혼을 복하다니 다시 깜짝 놀랐어라 / 飜驚復楚魂
슬프고 처량하다 호리로 가는 길이여 / 悲涼蒿里路
환한 대낮에 황량한 언덕에 묻히다니 / 白日閉荒原

청음(淸陰) 김 판서(金判書)의 숙모에 대한 만사
사대에 삼공을 배출한 벌족이라면 / 四世三公族
문벌이 휘황하게 빛나는 가문이라 / 門闌赫赫輝
임금의 은혜가 군읍에 누차 내리고 / 王恩屢郡邑
부덕은 시부모님에게 흡족하였도다 / 婦德洽庭闈
석인에 대한 한은 있었다 하더라도 / 縱有碩人恨
택상을 의지하고 기댈 수 있었어라 / 猶從宅相依

고금에 누가 구십의 수명을 누렸던가 / 古今誰九十
칠순의 나이도 드물다고들 말하는걸 / 七秩亦云稀

목 참의(睦參議)의 부인에 대한 만사
전통을 자랑하는 삼한의 벌족 / 閥閱三韓舊
도요의 지자가 화락케 하였도다 / 桃夭之子宜
낭군은 일찌감치 조정에 진출하여 / 郞君曳裾早
진신 사이에서 문장으로 이름난 분 / 詞藻搢紳推
금슬의 즐거움이 한창 무르녹는 때에 / 琴瑟歡方恊
봉황의 그림자 하나 홀연히 사라졌네 / 鸞凰影忽離
동쪽 성곽 길에 나부끼는 붉은 만장 / 丹旌東郭路
석양빛 속의 백양나무 서글프도다 / 殘日白楊悲

강 좌윤(姜左尹) 인(絪) 에 대한 만사
자취는 뒤섞여서 티끌 세상 따랐지만 / 混迹隨塵世
마음은 보존하여 옛 성현을 사모했네 / 存心慕古賢
경서를 연구하여 깊은 도리 깨우치고 / 窮經玄理遂
고을에 베푼 선정 길이 전해지는도다 / 爲郡政聲傳
재신의 반열에서 원로 뒤를 따르다가 / 宰列趨黃髮
번화한 거리에선 주선을 또 압도했지 / 康衢倒酒仙
통달한 사람에게 불가할 것이 있으리요 / 達人無不可
실로 유유자적하게 왔다가 그냥 갈 뿐 / 來去信悠然

오 승지(吳承旨) 숙(䎘) 에 대한 만사
애석하도다 우리 오 승지여 / 可惜吳承旨
문장으로 사해에 이름을 전하신 분 / 文章四海傳
세 차례나 관찰사로 공명을 수립했고 / 功名三按節
두 번이나 사신으로 중국에 다녀왔지 / 使事再朝天
바야흐로 탄탄대로 달리리라 여겼는데 / 方見長途騁
강사의 나이에 그만 꺾이고 말았는가 / 飜摧强仕年
슬픈 만사 지어서 멀리 부치려고 하니 / 哀詞寫寄遠
남쪽 묘역에 비바람 소리 아득하오그려 / 風雨杳南阡

이지봉(李芝峯) 수광(睟光) 에 대한 만사
천황의 물결에 산악의 영기를 받으신 분 / 派出天潢岳降神
시풍은 성당이요 인품은 옥과 같았어라 / 盛唐詩調玉其人
맑고 고결한 명망으로 상의 은총 듬뿍 받고 / 淸脩標望傾宸眷
집안을 이은 문장으로 진신을 진동시켰다오 / 家世文章動搢紳
정사를 행할 당시 조감으로 일컬어졌는데 / 秉軸當時稱藻鑑
유혼이 어찌 느닷없이 별자리로 화했는가 / 游魂何遽化星辰
일찍이 말석에서 의범을 가까이 뵈었기에 / 曾陪席末親儀範
애사를 쓰노라니 눈물이 수건을 적십니다 / 手寫哀詞淚滿巾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 한공(韓公) 준겸(浚謙) 에 대한 만사
강과 바다처럼 아량이 넓고도 깊었던 분 / 雅量恢恢河海深
지고한 그 신념을 부귀가 흔들 수 있었으랴 / 巍然富貴豈能
그동안 경사와 복을 하늘이 거듭 내렸는데 / 由來慶福天申佑
갑자기 부음이 들리다니 명을 어찌 믿겠는가 / 一夕凶音命可諶
세상에 뛰어난 영기는 별자리로 돌아갔어도 / 間氣英靈還列宿
인후한 덕과 명성은 사람들 마음에 남았어라 / 仁聲厚德在人心
나를 알아주신 것이 우연이 아니었거니 / 自惟知顧誠非偶
통곡하며 이제부턴 거문고 부수고 싶어라 / 慟哭從玆欲破琴

완평(完平) 이 상국(李相國) 원익(元翼) 에 대한 만사
일찍이 상림 일으켜서 사방에 은택을 입혔으니 / 曾作商霖澤四方
아동이 군실을 외우는 일을 잊을 수 있으리요 / 兒童君實誦何忘

두 조정을 섬기면서 삼존을 한 몸에 갖추시고 / 兩朝事業三尊備
십 년 세월을 고향 동산 일묘궁에서 보냈도다 / 十載丘園一畝荒

뛰어난 영기가 홀연히 우주로 되돌아갔으니 / 間氣倏驚歸宇宙
태산과 들보의 비통함을 백성이 어찌 견디리요 / 邦人無奈痛山樑
이 몸도 문생의 말석에 끼이는 행운을 얻었기에 / 愚蒙幸忝門生後
오늘 만사를 지으려니 눈물이 옷을 적십니다 / 此日題詞淚滿裳

김 지사(金知事) 선생 계도(繼燾) 에 대한 만사
아동 시절 책을 끼고 문인으로 끼었는데 / 童年挾冊忝門人
손꼽아 헤어 보니 사십 년도 더 넘었네 / 屈指今餘四十春
회고해 보면 내 허명도 도시 가르쳐 주신 덕분 / 環顧虛名都是敎
그동안 조정의 높은 자리 어찌 까닭이 없으리요 / 從來窃位豈無因
당시에 배우던 이들도 대부분 황천객 되었는데 / 當時學子多重壤
선생께서는 장수를 누려 구순을 훌쩍 넘기셨네 / 高世遐齡過九旬
들보가 부러지고 태산이 무너진 이 아픔이여 / 梁木泰山嗟已矣
망연히 천지간에 서서 홀로 상심하노이다 / 茫然天地獨傷神

연릉부원군(延陵府院君) 이공(李公) 호민(好閔) 에 대한 만사
문장을 일찍 독점하며 독보의 명성 드날리다 / 早擅騷壇獨步名
영도에 추대되어 문단의 맹주로 오르신 분 / 推先瀛島主文盟
행조의 교서를 지어내자 군민이 눈물 흘렸고 / 行朝敎草軍民泣
빈관의 시를 읊조리자 사개가 깜짝 놀랐지요 / 儐館詩成使价驚
팔순이 넘는 연세는 예로부터 드문 일이요 / 八秩高年古來少
숭반의 높은 작위 역시 이 세상의 영광된 일 / 崇班峻級世間榮
문하에서 외람되게 기대를 해 주신 몸이기에 / 憶曾門下叨期許
오늘 애가를 부르려니 슬픔이 배나 더합니다 / 此日哀歌倍愴情

정 판부사(鄭判府事) 광적(光績) 에 대한 만사
청년 시절 촉망 받으며 동방에 이름 날렸는데 / 靑春雅望聞吾東
벼슬길 들어선 이래로는 운수가 궁박하였어라 / 釋褐年來甲子窮
연치와 관작 둘 다 높아 조야에서 우러렀고 / 齒爵兩尊朝野仰
맑은 조행 한 절조는 시종 변함이 없었어라 / 淸脩一節始終同
전란의 와중에 배 타고서 멀리 피난 가시다가 / 孤舟遠避風塵際
떠도는 도중에 원대한 생각이 함께 꺾였구려 / 遐筭仍摧旅泊中
일찍이 부하 관원으로 어진 모습을 뵈었기에 / 曾忝下僚親德範
애사를 지어 부치려니 눈물이 하염없나이다 / 哀辭題寄涕無從

정우복(鄭愚伏) 경세(經世) 에 대한 만사
도산의 자취 이어받고 고정의 마음 찾으면서 / 陶山遺躅考亭心
몇 년이나 산림 속에서 깊이 연구를 하던 중에 / 幾歲林泉玩索深
성군을 보좌하러 나와 보불을 빛나게 하고 / 出佐聖君光黼黻
문교를 오래 담당하며 청금을 교화시켰어라 / 久專文敎化靑衿

삽상한 기운이 아연히 하늘과 땅으로 돌아가고 / 俄然爽氣歸天地
새 저술만 홀로 남아 고금을 비추게 되었나니 / 獨有新篇照古今
남쪽 구름 슬피 보며 공연히 흘리는 눈물이여 / 悵望南雲空洒淚
이생에서 휘음을 다시는 들을 길이 없겠네요 / 此生無復聽徽音

월사(月沙) 이 상국(李相國) 정귀(廷龜) 에 대한 만사 2수
멀리 대당에서 유래한 가문의 출신으로 / 仙源遠自大唐來
어려서 온 누리에 문장의 이름 날리신 분 / 早歲文章播九垓
선조 때에 이미 일월의 빛을 의지했는데 / 已在先朝依日月
만년에 또 성군을 만나 염매가 되셨다오 / 晩逢明聖作鹽梅

사업이 빛나고 빛나서 아동들도 외우고 / 昭昭事業兒童誦
집안의 자제도 하나하나 한혈의 재질이라 / 一一門闌汗血才
영기가 홀연히 티끌 세상 버리고 떠나시니 / 爽氣忽遺塵世去
인간 세상에 통곡 소리만 천둥처럼 울리누나 / 人間謾有哭如雷

생각하면 옛날에 문하에서 배우던 날 / 憶昔摳衣日
지금 꼽아 보니 어언 사십 년 전이라 / 如今四十春
외람되게 뛰어올라 벼슬살이하는 동안 / 僣踰官序進
나도 모르게 어느새 귀밑머리 희끗희끗 / 倏忽鬢毛新
보살펴 주신 은혜를 어찌 끝내 잊으리요 / 恩顧終何忘
이제는 휘음을 다시 들을 수도 없겠구나 / 徽音更莫親
강물 너머 길 따라 나부끼는 붉은 만장 / 丹旌江外路
눈물을 흩뿌리며 한없이 통곡하나이다 / 洒涕慟無垠

신 진사(申進士) 광추(光樞) 에 대한 만사
그대와 상종하며 지냈던 몇 년 세월 / 與子相從歲幾遷
인친과 붕우의 의리 모두 완전하였어라 / 姻親朋友義俱全
거침없는 문장 솜씨는 사람들을 압도했고 / 文辭暢達超羣士
단정한 뜻과 행동은 옛 현인을 사모했지 / 志行端方慕古賢
뛰어난 재질이 언젠가는 쓰이리라 여겼는데 / 常謂美才當有用
운수가 기박해서 오래 못 사시니 어떡하오 / 奈何奇蹇竟無年
출세와 수명은 모두가 운명인 줄을 아오마는 / 窮通脩短知皆命
눈물이 절로 흐르는 것을 어찌할 수 없구려 / 到此那堪涕自漣

김 별좌(金別坐)에 대한 만사
그대와 이웃하며 십 년을 넘게 사는 동안 / 與子鄰居餘十載
머리칼은 눈처럼 희고 아이들도 다 자랐소 / 鬢毛如雪長兒童
근심 슬픔 이별 만남에 서로 보살펴 주었나니 / 憂哀離合情相恤
가난 질병 소외 오활은 우리 모두가 같았다오 / 貧病踈迂事亦同
열흘을 못 보다가 병석에 누웠다 들었는데 / 不見僅旬聞臥疾
무상한 세상 갑자기 떠나실 줄이야 알았겠소 / 那知浮世遽長終
가련토다 강남의 길로 돌아가는 만장이여 / 可憐歸旐江南路
침상에 엎드려 부질없이 눈물만 흘립니다 / 涕淚空流伏枕中

정 감사(鄭監司) 백창(百昌) 에 대한 만사
민첩하고 미묘한 겸인의 재질 발휘하여 / 敏妙兼人質
온 누리에 문장 솜씨 두루 전하신 분 / 文章四海傳
드높은 그 재주 참으로 아까웠나니 / 高才誠所愛
불우할 때 서로들 또한 동정했었지 / 蹇劣亦相憐
꿈속의 일처럼 망망한 티끌 세상이요 / 塵世茫如夢
냇물이 흘러가듯 허망한 우리 인생이라 / 浮生逝若川
옛날 함께 지내던 일 돌이켜 생각하니 / 追思平昔意
애달픈 눈물만 줄지어 저절로 흐르누나 / 哀淚自漣漣

우 좌랑(禹佐郞)의 부인인 종숙모(從叔母)에 대한 만사
왕년에 공주에서 밥을 얻어 먹을 적에 / 昔歲公山就食辰
종숙모님이 나를 아낀다 매번 생각했지요 / 每思吾母愛諸親
작별한 뒤로 두 번 다시 뵙지를 못했는데 / 分散一生難再覿
놀랍게 부음을 들으니 슬픔이 배나 더합니다 / 驚聞下世倍悲辛

박 철원(朴鐵原) 선() 에 대한 만사
그대와 친당의 인연 맺고 같은 해에 태어났는데 / 生爲親黨且同年
동문으로 또 공부할 적에 사랑을 실로 독점했지 / 學又同門愛實專
먼 친척들까지도 화목한 의리를 모두 칭송하고 / 瓜葛共稱敦睦義
동향에도 은혜를 베푼 명성이 전해지고 있다오 / 桐鄕更說惠聲傳
어떡하다 만년에 들어 우리 서로 헤어졌는지 / 如何暮景飜相失
쇠잔한 내 육신 돌아보며 홀로 쓸쓸하였다오 / 顧我殘骸獨自憐
이제 다시는 볼 수 없어 한없이 통곡을 하면서 / 長慟從玆那復見
만사 한 편을 지으려니 눈물이 샘처럼 솟아나오 / 一篇哀挽涕如泉

이 김화(李金化) 진행(震行) 에 대한 만사
아 그대는 나보다 나이가 팔 년인가 아래로서 / 嗟君少我八年間
어려서부터 어울리며 자주도 왕래를 하였지요 / 幼長相隨幾往還
우리 모두 모친상 당해 간장이 끊어졌는데 / 二母終天腸已絶
아이였던 우리도 지금은 반백이 되었다오 / 兩兒於世鬢皆斑
풍진 속에 모진 고생 겪어 온 미관말직 / 風塵末宦多酸苦
독기 자욱한 남방에서 어려움도 많았지 / 瘴癘蠻鄕備險艱
애석해라 무상한 인생 여기에서 그치다니 / 可惜浮生其止此
눈 속에 장례를 보노라니 눈물만 흐릅니다 / 雪中看葬涕潸潸

이 판서(李判書) 천장(天章) 명한(明漢) 에 대한 만사
재상의 가문에서 난초 싹을 일찍이 보았나니 / 相門曾見茁蘭芽
소싯적부터 집안에 걸맞게 명성이 뛰어났지 / 少小英聲稱乃家

부자간에 대제학은 전에 듣지 못했던 일 / 兩世文衡前未有
당시의 총재로 그 누가 더할 수 있었으랴 / 當時冢宰孰能加
평생의 정의가 천륜에 비할 만도 하였건만 / 平生情義天倫比
만년엔 멀리 떨어져 서로 소식이 뜸했지 / 晩歲音塵地角遐
쌍벽의 부음을 갑자기 듣게 될 줄 알았으랴 / 何意遽聞雙璧隕
강해에 망연자실한 채 홀로 비탄에 잠기노라 / 茫然江海獨傷嗟

이 참판(李參判) 도장(道章) 소한(昭漢) 에 대한 만사
이 몸이 승상의 옛 문생으로 수업하며 / 吾爲丞相舊門生
기재가 일찌감치 꽃피는 걸 보았지 / 曾識奇才自夙成
가업인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드날리고 / 家業文章名海宇
형제간에 조정의 공경 반열에 올랐다오 / 弟兄班序列公卿
하루아침에 아가위 꽃이 질 줄 알았으랴 / 一朝何意棠華盡
허망한 세상 참으로 목근의 영화와 같구나 / 浮世眞如木槿榮
백발이 다 된 고인이 멀리 떨어진 산야에서 / 白首故人山野遠
모질게 만사 한 편 지어 슬픈 마음 부치노라 / 忍題薤露寄哀情

김 감찰(金監察) 도(濤) 에 대한 만사
옛날 이 몸이 구도할 적에 사람들 모두 비웃었지만 / 昔吾求道衆皆嗤
오직 그대만은 종유하면서 나를 가장 믿어 주었지 / 唯子從遊最信之
심오하고 미묘한 뜻 토론하며 희열에 잠기고 / 談討杳微看悅懌
속마음 털어놓으며 얼마나 어울려 다녔던가 / 洞開肝膽幾追隨
헤어진 십 년 세월 동안 공연히 생각만 하였는데 / 十年濶別空相憶
천리 밖에서 흉한 소식을 들을 줄 어찌 알았으랴 / 千里凶音豈所期
애석하여라 우리 선인을 어떻게 다시 또 볼거나 / 可惜善人那復見
바람결에 눈물 뿌리며 끝없는 비통함 전하노라 / 臨風洒涕痛無涯

이 동지(李同知) 원득(元得) 에 대한 만사
아동 시절에 장인의 항렬에서 뵈었는데 / 兒時曾見丈人行
인친 관계 맺고 나서는 연치도 잊었지요 / 逮結姻親齒亦忘
이른 나이로 학궁에 성대히 떨친 명성이요 / 早歲盛名傳泮璧
지금까지도 동향에선 은혜를 못 잊어 한다오 / 至今遺愛在桐鄕
만날 때마다 속마음을 모조리 토로하였고 / 逢來每寫心肝盡
안부 묻고는 체력이 강해서 항상 기뻤지요 / 問及常欣體力强
오래 사시는 데에 장애가 있을 줄 알았으랴 / 何意高年還有限
바람결에 눈물 뿌리며 홀로 슬픔에 젖나이다 / 臨風洒泣獨悲傷

황 참봉(黃參奉) 종해(宗海) 에 대한 만사
명성이 자자하였건만 일찍 과거를 그만두고 / 早謝科場藉甚名
산림 속에서 은거하며 한평생을 보내셨네 / 棲遲林壑度平生
경서의 뜻을 음미하며 즐긴 단표의 낙 / 遺經有味簞瓢樂
천작이 존귀하니 녹위는 가벼웠고말고 / 天爵爲尊祿位輕
세상을 벗어나 고사전에 길이 기록될 분 / 世外長留高士傳
구름 사이에 홀연히 소미의 빛이 가려졌네 / 雲間忽晦少微精
한번 뵙지도 못했으니 탄식한들 어이하리 / 終孤一見嗟何及
그저 만사 한 편 지어 슬픈 심정을 부칩니다 / 謾寫哀詞寄此情

윤 참의(尹參議) 황(煌) 의 부인에 대한 만사
우뚝하여라 대를 이은 종유의 집안이요 / 卓卓宗儒世
성대하여라 올곧은 선비의 명성이었네 / 振振直士名
한 가문이 한 나라의 기대를 받는 가운데 / 門庭望一國
평생이 기록될 만한 부녀의 모범을 보였네 / 壼範記平生
자제들에게 시서의 업을 닦게 하면서 / 諸子詩書業
삼종의 도덕과 의리를 밝히셨다오 / 三從德義明
연세도 높으시어 여든에 이르렀으니 / 高年又八秩
이만하면 편히 눈을 감으실 수 있으리라 / 斯可沒而寧

박 풍덕(朴豐德) 대화(大華) 의 모부인(母夫人)에 대한 만사
당 나라에서 건너온 명문 집안의 후예로서 / 仙系唐家苗裔延
가정의 법도가 모범이라 모두 칭찬하였다오 / 閨門懿範共稱賢
영원의 지위와 명망은 중국에서도 흠모했고 / 鴒原位望華夷慕
오조의 은혜와 영광은 군읍으로 이어졌어라 / 烏鳥恩榮郡邑連
연세도 구순이신지라 누구에게나 존경을 받고 / 壽考九旬尊旣達
손자도 십여 명인지라 경사가 끊이지 않으리라 / 孫曾十數慶將綿
하늘의 수명을 다 누렸으니 무슨 유감 있으리요 / 天年歸盡終何憾
세상만사 모두 잊고 영원히 안식을 취하시라 / 深閉松楸萬事捐

김 평창(金平昌) 정립(正立) 에 대한 만사
아동 시절에 같은 동네 게다가 동갑이라 / 兒時同井又同庚
죽마고우로 형제처럼 어울려서 노닐었지 / 葱竹交遊若弟兄
오랜 이별 부평초 신세를 매양 한탄하면서 / 每恨萍蹤長作別
쇠잔한 인생 흰머리를 함께 동정하였어라 / 共憐霜髮已殘生
지난달에 편지 보내 안부를 삼가 물었는데 / 前月書來勤問訊
일조에 유명을 달리해 부음을 듣게 되다니 / 一朝音至間幽明
낙산 동쪽 옛 친구들 거의 세상 떠난 지금 / 駱東舊友今殆盡
통곡하노라 도성 가득 눈 덮인 차디찬 언덕 / 慟哭寒原雪滿城

남 정승(南政丞) 이웅(以雄) 에 대한 만사
애석하여라 우리 남 승상이여 / 可惜南丞相
훤칠하게 장자의 풍모를 갖추신 분 / 頎然長者風
일생을 거나한 술기운 속에 숨기고서 / 一生逃酒域
만사를 하늘의 뜻에 맡기곤 하였어라 / 萬事付天公
지금 다행히도 성군의 시대를 만났는데 / 方幸明時遇
이것이 웬일이요 수명이 그만 다하다니 / 俄驚大限窮
이제부턴 서로들 만나 볼 수 없겠기에 / 今來不相見
가을 하늘 바라보며 눈물을 뿌립니다 / 洒淚向秋空

유 참의(兪參議)에 대한 만사
주상께서 반정하고 즉위하시던 그날에 / 昔在龍飛日
원로의 반열에서 함께 어울렸던 사이 / 翶翔鵷鷺行
관아의 동료로 근무한 것이 몇 해였던가 / 幾年同一署
만년에는 타향에 서로 떨어지게 되었어라 / 晩歲隔他鄕
만나고 헤어짐을 어떻게 예정을 하겠소만 / 離合何能定
이렇게 빨리 바쁘게도 유명을 달리하다니요 / 幽明倏爾忙
지금 와서 장례식 소식을 전해 듣고서 / 今來聞大葬
서쪽 하늘 바라보며 홀로 슬퍼하오이다 / 西望獨悲傷

조 지사(趙知事) 위한(緯韓) 에 대한 만사
견수하는 영광을 얻은 그 뒤로 / 自獲肩隨後
지금 헤어 보니 어언 사십 년 / 如今四十年
청담을 나눴던 옛 추억만 생각하며 / 淸談思宿昔
산천에 막힌 채 오래 이별하였어라 / 離濶隔山川
이제 상유에 저녁 햇빛이 비치는 때 / 及此桑楡暮
안개 이슬보다 앞설 줄 어찌 알았으랴
/ 何知霧露先
슬프다 어떻게 또 뵐 수나 있으리요 / 可嗟那復見
부질없이 눈물만 하염없이 흐릅니다 / 徒爾涕漣漣

유 참의(兪參議)에 대한 만사
그대와 종유한 뒤로 해가 몇 번 바뀌었던가 / 與子遊從歲幾遷
반생에 걸친 우리 우정 어찌 우연이었으리 / 半生情好豈徒然
만날 때마다 속마음을 모두 털어놓았고 / 相逢每倒心肝吐
오래 헤어졌어도 자주 편지를 전했지요 / 久別頻勞手字傳
지난겨울 병문안하며 얼굴도 보지 못하고서 / 問疾前冬顔莫接
오늘 영구를 대하려니 눈물만 공연히 흐르누나 / 臨柩此日涕空漣
해마다 잇따라 친구들의 죽음을 곡하다니 / 年年連哭親朋逝
백발의 이 인생 홀로 남아 가엾기만 해라 / 白首人間獨自憐

청음(淸陰) 김 상국(金相國)에 대한 만사
옥 같은 바탕 온유해라 바라보면 신선인 듯 / 玉質溫溫望若仙
한 시대의 청론을 누가 앞설 수 있었으랴 / 一時淸論孰能前
중화와 오랑캐 모두 목격한 당당한 절의요 / 堂堂節義華夷見
온 누리에 두루 전해진 광명정대한 문장이라 / 炳炳文章海宇傳
재상의 지위 높은 연세 우러름을 받은 위에 / 極位遐齡人所仰
고명과 덕행으로 아름다움을 독점하신 분 / 高名懿行美尤專
음성과 용모를 이제는 영원히 접할 수 없겠기에 / 音容自此長相隔
추천에 통곡을 하노라니 눈물이 샘처럼 흐릅니다 / 慟哭秋天涕似泉

송 첨정(宋僉正) 자심(子深) 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대와 어울려 노닌 오십 년 세월 / 與子交遊五十秋
둘 다 어느새 흰 눈이 머리에 가득 / 居然俱至雪盈頭
몸은 시와 술 속에 잠겨 시일을 보내고 / 身潛詩酒遣時日
뜻은 청고를 숭상하여 속류를 벗어났네 / 志尙淸高遠俗流
금세에 누가 나처럼 마음을 알아주었으랴 / 今世知心誰似我
이생에 나도 기쁜 벗 다시 만나기 어려우리 / 此生懽遇更無由
북쪽을 보며 통곡하는 기막힌 이 심정이여 / 北望慟哭情何極
비바람 소리만 쓸쓸하게 바닷가를 채우누나 / 風雨蕭蕭滿海陬

이 참판(李參判) 경헌(景憲) 에 대한 만사
공의 형제와는 예전부터 친했나니 / 與公兄弟舊相親
집안끼리 혼인을 일찍 맺었음이라 / 爲是門闌早托姻
멀리 떨어져 소식을 몰라 걱정하던 중에 / 離濶每愁音信斷
만나고 보니 둘 다 늘어난 하얀 머리카락 / 逢來俱是鬢毛新
옛날 아껴 준 은근한 정을 추억하였는데 / 慇懃眷厚思前日
오늘 갑자기 이승 저승 이별을 하다니요 / 倏忽幽明隔此辰
붉은 만장 나부끼며 떠나가는 광릉의 길 / 丹旐翩翩廣陵道
만사 써서 부치면서 홀로 수건을 적십니다 / 哀詞書寄獨沾巾

정 판서(鄭判書) 광성(廣成) 에 대한 만사
선을 쌓은 어진 명성 대대로 전하면서 / 積善仁聲世共傳
오공 사대의 경사를 계속 이어 왔어라 / 五公四代慶連延

중년에 속세 벗어나 운해에서 머물다가 / 中年高蹈棲雲海
만년에 특은을 받고 일변으로 돌아왔네 / 晩歲殊恩返日邊

세 아들 대과에 급제한 일도 드물다 할 것인데 / 三子大科聞亦少
수태의 봉양을 또 받은 것은 전에 없었던 일 / 首台榮養見無前

여든의 장수 누리고서 자연의 변화를 따랐으니 / 遐齡八十聊乘化
이 같은 복록을 이 세상에서 그 누가 견주리요 / 福祿人間孰比肩

황 서윤(黃庶尹) 위(暐) 에 대한 만사
진양성에서 떨친 정충의 대절이여 / 精忠大節晉陽城
해내에 만고토록 그 명성 드리우리 / 海內長垂萬古名
경사가 남아 후손이 출중한 재질 발휘하여 / 餘慶後孫才出類
사과에서 장원하여 마침내 이름을 치달렸네 / 詞科第一遂馳聲
이제 선조의 뜻을 따라 진충보국하려는 차에 / 方期盡瘁追先志
중년에 세상을 마칠 줄이야 어찌 생각하였으랴 / 何意中身隕此生
하늘의 도가 이런 것인지 누구에게 물어볼까 / 天道如斯誰可問
공연히 슬픈 만사 지어 나의 심정을 부치노라 / 空將哀挽寄吾情

영가 부부인(永嘉府夫人)에 대한 만사
모교와 의가 양쪽 모두 재상의 가문 / 姆敎宜家摠相門
당시의 명문으로 누가 이보다 높았으랴 / 當時名閥更誰尊
성녀를 독생하여 휘음을 멀리 전했나니 / 篤生聖女徽音遠
곤궁에서 정덕하여 세상을 교화시켰도다 / 正德坤宮俗化敦

모두들 인덕이 심후하여 장수하리라 여겼는데 / 共謂深仁遐壽享
물처럼 빨리도 흘러가는 인간 세상을 어찌하랴 / 奈何人世逝川奔
오늘 나의 비통함이 어째서 끝이 없냐 하면 / 胡爲此日悲無已
명공과 일찍이 의형제를 맺었던 사이니까 / 曾與明公義弟昆

경 세마(慶洗馬) 대후(大後) 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대 혼인하던 청춘의 모습 생각나는데 / 憶君姻好在靑春
벌써 육순 가까운 쇠한 얼굴로 변하다니 / 已見衰顔近六旬
일생을 믿고 따르면서 속마음 토로하였나니 / 信向一生惟照膽
서로 떨어져 있을 때는 얼마나 애를 태웠던가 / 離違兩地幾勞神
반갑게 만나 담소한 지 겨우 한 달이 지났는데 / 相逢懽笑纔經月
흉한 소식이 오늘 갑자기 전해질 줄 알았으랴 / 豈意凶音遽此辰
하늘이 어째서 이와 같이 선인에게 보답하나 / 天與善人何若是
평소의 일을 추억하며 홀로 수건을 적시노라 / 却思平日獨沾巾

정 참판(鄭參判) 홍명(弘溟) 에 대한 만사
나도 문장 잘하는 선비를 알아보고서 / 我識文章士
왕년에 어울려 노닌 적이 있었더랬는데 / 交遊在昔年
장공은 벌써 길고 긴 어둠 속으로 / 張公已窀穸
이자 역시 차가운 땅 깊은 곳으로 / 李子亦寒阡

지금 홀로 기옹 노인이 남아 계셔서 / 獨有畸翁老
산골과 해변에서 서로 그리워하였는데 / 相思嶺海邊
흉한 소식이 지금 또 나에게 전해지다니요 / 凶音今又至
남쪽 하늘 바라보며 샘처럼 눈물 흘립니다 / 南望淚如泉

김 청주(金淸州) 효성(孝誠) 의 죽음을 애도하며
이 땅에 떨어지면 모두가 친척이라 / 落地爲親戚
우리 서로 따르면서 진심을 나눴는데 / 相從共赤心
어찌된 일인가 쇠하고 병든 이날에 / 如何衰病日
영원히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게 되다니 / 聞此永歸音
상소하여 직언한 명성 멀리 전해지고 / 抗疏聲名遠
분우하여 펼친 혜택이 깊기만 한데 / 分憂惠澤深
뜬구름처럼 모든 일이 끝나버렸기에 / 浮雲萬事已
통곡하면서 눈물로 옷깃을 적시노라 / 慟哭涕沾襟

현생 위(玄生偉)에 대한 만사
옛날 내가 장가들려고 신부 고을에 들어갈 때 / 昔吾迎婦入新鄕
어린아이 자네가 옆에 서 있는 것을 보았었지 / 見子髫年立在傍
왕년의 번화했던 곳도 모두 적막하게 되고 / 往歲繁華皆寂寞
당시의 친척들 역시 지금은 전부 영락했네 / 當時親戚盡凋亡
살 비비며 지내던 옛 추억 아련히 떠오르는데 / 磨肌遠記平生舊
나를 버리고 바쁘게 세상을 떠날 줄 알았으랴 / 棄我何期一夕忙
인간 세상 백발노인 끝없이 흘리는 눈물이여 / 白首人間無限淚
북풍이 몰아치는 날에 앞 언덕 어리어 비치누나 / 北風吹日照前岡

정생 종(鄭生琮)에 대한 만사
세상에 나온 것도 똑같은 해요 / 生世旣同年
옛날에 살던 집도 똑같은 동네 / 舊廬又一里
뒤에 다른 곳으로 옮겨 살 적에도 / 徙居雖異鄕
바라보이는 거리라서 역시 가까워 / 相望亦自邇
때때로 서로들 왔다 갔다 방문하며 / 有時來相訪
못 잊어 하는 우정이 그지없었어라 / 眷眷情無已
지금에 와선 똑같이 백발이 되었지만 / 於今共白首
근력이 나하고는 비할 바가 아니라서 / 筋力非我比
백 살쯤은 너끈히 살 것이라고 여겼는데 / 謂當至期頤
한번 병에 걸리더니 일어나지 못하였네 / 一疾奄不起
지란이 눈앞에 가득한 속에 / 芝蘭滿眼前
두 자제가 등제하여 현달하였고 / 二郞登顯仕
자손들도 누가 누군지 모를 정도요 / 兒孫至難卞
향리에선 연치로 존경을 받았지 / 鄕黨尊其齒
광휘가 마을을 환히 비치는 가운데 / 光輝照閭巷
고당에서 많은 복을 향유하였나니 / 高堂享多祉
분분히 태어나서 죽어 가는 그 사이에 / 紛然生及死
몇 사람이나 이런 행운을 누렸겠는가 / 幾人能若是
생각건대 그대는 아무런 유감없이 / 想君無所憾
기꺼운 마음으로 황천으로 가겠지만 / 怡然泉壤裏
친척과 벗들의 마음은 어떠하겠소 / 唯是親與舊
통곡하며 비애를 금하지 못한다오 / 戚戚悲不止
나이가 같은 사람이 홀연히 가셨으니 / 同甲去倏爾
이 몸도 얼마나 더 이승에 머물겠소 / 我亦豈久此
지금 상여가 떠난다는 소식 듣고 / 今聞柳車行
만사 지어 이 심정을 표하나이다 / 此情書作誄

이생 격(李生格)에 대한 만사
정암의 의리 정신 우리 동방에 우뚝하니 / 靜庵行義表吾東
그 후예가 범인들과 다른 것도 당연한 일 / 後裔於人自不同
고상한 생각 담담하여 세상길 멀리 벗어났고 / 澹澹高懷知遠俗
인자한 마음 따뜻해서 위급한 사람을 도와줬네 / 溫溫惠意喜周窮
생각나면 찾아와서 정다운 눈빛 보여 주며 / 有時命駕開靑眼
몇 번이나 술잔 들고 진심을 토로하였던가 / 幾度含盃話赤衷
애석하도다 이제는 어떻게 다시 보겠는가 / 可惜自今那復見
만사 지어 부치려니 눈물만 끝없이 흐르네 / 哀辭題寄涕無從

배생 종도(裵生宗度)의 죽음을 애도하며
하늘이 낸 뛰어난 재질 이 세상에 드문 터에 / 天生美質世間稀
부자가 서로 이었으니 더더욱 희한하다 하리 / 父子相仍益見奇
백리 길 짊어진 정성이 지극했음은 물론이요 / 百里勤勞誠旣竭
물 마시고 쌀독이 비어도 낯빛이 화락하였다오 / 一瓢空匱色常怡
잠깐 한때만 헤어져도 일각이 삼추 같았는데 / 乍離時月如三歲
갑자기 유명 달리하여 영결할 줄이야 알았으랴 / 何意幽明遽永辭
끝났도다 이제 현탑을 다시 내릴 수 있겠는가 / 已矣更無懸榻下
바람 앞에 눈물 뿌리며 애사를 지어 부치노라 / 臨風洒涕寄哀詞

종제(從弟) 학(翯)의 죽음을 애도하며
전날엔 한집에서 함께 웃고 즐겼는데 / 去日同堂懽笑人
어찌하여 오늘 밤엔 볼 수가 없단말가 / 何爲今夕見無因
나의 인생도 어느덧 서산에 해가 지는 나이 / 吾生已迫西山暮
세상에서 마음 아픈 일 얼마나 또 남았으랴 / 在世傷懷亦幾辰


[주D-001]역복(曆服) : 구원(久遠)한 사업이라는 뜻으로 왕위(王位)를 가리킨다. 《서경(書經)》 대고(大誥)의 “끝없이 큰 역복을 이어받았다.〔嗣無疆大歷服〕”고 한 성왕(成王)의 말에 대해서, 보통 역(歷)은 구(久)요 복(服)은 사(事)로 풀이하는데, 채침(蔡沈)은 역은 역수(歷數)요 복은 오복(五福)이라고 해설하였다. 역(歷)은 역(曆)으로 쓰기도 한다.
[주D-002]주항(周行) : 원래는 주 나라 조정 신하들의 자리를 뜻했는데, 뒤에 조정의 반열(班列)이라는 의미로 쓰이게 되었다.
[주D-003]백성들을 …… 듯하셨도다 :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문왕은 백성들을 보기를 다친 사람 보는 것처럼 가엾게 여겨 보살펴 주었다.〔文王 視民如傷〕”는 말이 나온다.
[주D-004]상서(庠序) : 국가의 교육 기관을 말한다. 하(夏) 나라 때에는 교(校)라고 하였고, 은(殷) 나라 때에는 서(序)라고 하였고, 주(周) 나라 때에는 상(庠)이라고 하였다. 《孟子 滕文公上》
[주D-005]초분(楚氛) : 남쪽으로 침입한 왜적의 진영에서 발산되는 요기(妖氣)를 가리킨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양공(襄公) 27년에 “남쪽에 있는 초 나라 진영의 분위기가 매우 험악하니, 장차 대처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질까 두렵다.〔楚氛甚惡 懼難〕”는 말이 나온다.
[주D-006]멀리 …… 되었도다 : 선조(宣祖)가 의주(義州) 방면으로 피난길을 떠난 것을 말한다. 당 현종(唐玄宗)이 안록산(安祿山)의 난을 당하여 검각(劒閣)을 넘어서 촉(蜀) 땅으로 피한 고사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주D-007]정수(鼎水)에 …… 우거졌나니 : 선조의 죽음을 비유한 말이다. 상고 시대에 황제(黃帝)가 정호(鼎湖)에서 솥을 만들어 연단(鍊丹)을 하다가 그 일이 완성되자 신하들과 함께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있고, 순(舜) 임금이 남쪽으로 순수(巡狩)하다가 창오산(蒼梧山) 밑에서 붕어(崩御)하여 그곳에 장사 지낸 고사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史記 卷1 五帝本紀》
[주D-008]슬퍼라 …… 인생이여 : 《장자》 지북유(知北游)에 “천지간의 인생이란 마치 하얀 망아지가 담장의 틈새를 지나가는 것처럼 순간일 따름이다.〔人生天地之間 若白駒之過隙 忽然而已〕”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9]전장(典章)과 …… 있고 : 선조가 남긴 훌륭한 제도와 법률이 후손들에게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는 말이다. 《서경》 오자지가(五子之歌)에 “밝고 밝으신 우리 선조는 만방의 임금이시니, 전장과 법도를 마련하시어 자손들에게 물려주셨다.〔明明我祖 萬邦之君 有典有則 貽厥子孫〕”는 말이 나온다.
[주D-010]안 계셔도 …… 가운데 : 선조가 세상을 떠났어도 백성들이 그 덕을 잊지 못하고 사모한다는 말이다. 《대학장구(大學章句)》에 “아 예전의 임금님을 잊지 못하겠다는 내용의 시가 있는데, 치자(治者)는 그 임금님이 어질게 대해 준 것을 어질게 여기고 친하게 대해 준 것을 친하게 여기며, 피치자(被治者)는 그 임금님이 즐기게 해 준 것을 즐겁게 여기고 이롭게 해 준 것을 이롭게 여기기 때문에, 세상을 떠나셨어도 잊지 못하는 것이다.〔詩云 於戱 前王不忘 君子賢其賢而親其親 小人樂其樂而利其利 此以沒世不忘也〕”라는 말이 나온다.
[주D-011]이괘(離卦)의 …… 일어났으니 : 밝고 밝은 임금이 출현했다는 뜻으로, 인조(仁祖)의 반정(反正)을 가리킨다. 《주역》 이괘 상사(象辭)에 “밝음이 두 번 일어나는 것이 이괘의 상이다. 대인은 이로써 밝은 것을 이어서 사방에 비춘다.〔明兩作 離 大人 以 繼明 照于四方〕”는 말이 나온다.
[주D-012]뜻을 …… 준수하며 : 인조가 선조의 효손(孝孫)으로서 선조의 뜻에 어긋나지 않게 훌륭한 정치를 펼치고 있다는 말이다. 《중용장구(中庸章句)》에 “효라고 하는 것은 선인의 뜻을 잘 계승하고 그 사업을 잘 발전시키는 것을 말한다.〔夫孝者 善繼人之志 善述人之事者也〕”라는 말이 나온다. 모훈은 《서경》에 나오는 요전(堯典) · 대우모(大禹謨) · 이훈(伊訓) · 탕고(湯誥) 등의 글을 병칭한 전모훈고(典謨訓誥)의 준말로, 보통 성현의 말씀이나 경전의 글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선왕의 법도라는 뜻으로 쓰였다.
[주D-013]약상(禴嘗) : 약사증상(禴祠蒸嘗)의 준말로, 종묘에 지내는 사계절의 제사 이름이다.
[주D-014]물이 …… 의논하였어라 : 인조(仁祖) 8년(1630)에 선조(宣祖)의 능인 목릉(穆陵)에 물 기운이 있다는 이유로 능을 옮겨야 한다는 의논이 조정에서 일어나게 된 것을 말한다. 처음에는 목릉이 건원릉(健元陵)의 서쪽 산등성이에 있었는데, 원주 목사(原州牧使)인 심명세(沈命世)가 상소하여 “목릉은 땅이 풍수지리상 길하지 못하고 게다가 물 기운이 있다.”고 하자, 마침내 건원릉의 두 번째 산등성이로 천릉(遷陵)하기에 이르렀는데, 결과적으로는 능의 봉분 안이 건조하여 조금도 습기가 없었으므로 비평을 면치 못했던 사실이 있다. 주 나라 계묘(季墓)는 주 문왕(周文王)의 부친인 왕계(王季)의 무덤을 가리킨다. 왕계를 와수(渦水) 서쪽에 안장했는데, 난수(欒水)가 무덤을 침입하여 관곽이 밖으로 드러나자, 문왕이 “선군(先君)께서 아마도 여러 신하들과 백성들을 보고 싶으신 모양이다.” 하고는, 사흘 뒤에 다시 장례를 치른 고사가 전한다. 《古今事文類聚 前集 卷50 水囓王季墓》 송 나라 황당(皇堂)은 송 인종(宋仁宗)의 능을 가리킨다. 황제의 능을 황당이라고 한다. 인종을 영소릉(永昭陵)에 안장하기 며칠 전에 황당의 기둥이 파손된 사건이 일어났는데, 모두가 이 사실을 보고하지 않고 숨기려 하자, 한기(韓琦)가 정색하고 반박하면서 시일을 어기더라도 다시 보수하여 장례를 행해야 한다고 주장한 고사가 전한다. 《古今事文類聚 前集 卷50 皇堂棟損》
[주D-015]상설(象設) : 생전의 거처를 본떠서 건물을 세우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능소(陵所)의 침전(寢殿)을 가리킨다.
[주D-016]임금님 …… 하였나니 : 장례를 행할 적에는 ‘반드시 정성을 다하고 신실하게 하여 결코 후회됨이 없도록 하라〔必誠必信 勿之有悔焉耳矣〕’고 자사(子思)가 거듭해서 당부한 말이 《예기(禮記)》 단궁 상(檀弓上)에 보인다.
[주D-017]만물에 …… 총명함과 : 세상을 안정시킬 수 있는 제왕의 자격을 갖췄다는 말이다. 《주역》 건괘(乾卦) 단사(彖辭)에, 건도(乾道) 즉 제왕의 도를 논하면서 “만물에 으뜸으로 나옴에 만국이 모두 편안하도다.〔首出庶物 萬國咸寧〕”라고 한 말이 나온다.
[주D-018]삼왕(三王) : 하(夏) · 은(殷) · 주(周) 삼대(三代)의 성왕(聖王)을 말한다.
[주D-019]어렵고 …… 계승하여 : 《서경》 대고(大誥)에, “내가 하는 일은 하늘이 시키신 것이다. 하늘이 내 몸에 크고 어려운 일을 물려주고 던져 주셨다.〔予造天役 遺大投艱于朕身〕”고 한 주 성왕(周成王)의 말이 나온다.
[주D-020]비렴(飛廉) : 은(殷) 나라의 폭군 주(紂)에게 아첨을 하여 총애를 받은 신하의 이름으로, 광해조(光海朝) 때의 권신(權臣)들을 가리킨다.
[주D-021]창읍(昌邑)은 …… 유배하였으며 : 광해군을 강화(江華)로 유배했다가 다시 제주도(濟州道)로 이배(移配)한 것을 말한다. 창읍은 한 무제(漢武帝)의 손자인 창읍왕 유하(劉賀)를 말한다. 소제(昭帝)가 죽은 뒤에 곽광(霍光)의 도움으로 즉위했으나, 행동이 음란하기 그지없어 즉위 27일 만에 태후(太后)의 명에 의하여 폐위되었다.
[주D-022]성모(聖母) : 서궁(西宮)에 유폐되었던 인목대비(仁穆大妃)를 말한다.
[주D-023]덕정(德政)에 …… 신속하고 : 《중용장구》에 “정치의 효과는 빨리 자라는 갈대처럼 신속하게 나타난다.〔夫政也者 蒲盧也〕”는 말이 있다.
[주D-024]비(否)와 …… 것이라서 : 세상일의 성쇠(盛衰)와 운명의 순역(順逆)이 극에 이르면 서로 뒤바뀌게 되는 것을 말한다. 《주역》의 비괘(否卦)는 하늘과 땅의 기운이 서로 막혀서 통하지 않는 것을 상징하고, 태괘(泰卦)는 그 반대로 만물이 형통하게 되는 것을 상징한다.
[주D-025]하늘의 …… 않았던가 : 요(堯) 임금 때의 9년 홍수와 탕왕(湯王) 때의 7년 가뭄을 말한다.
[주D-026]완악한 …… 않았던가 : 순(舜) 임금과 우왕(禹王)이 삼묘(三苗)를 정벌한 일과 귀순시킨 일 등이 《서경》 순전(舜典) · 대우모(大禹謨) · 익직(益稷) 등에 나온다.
[주D-027]정호(鼎湖)에 …… 감도누나 : 인조의 죽음을 비유한 표현들이다. 정호는 황제(黃帝)가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호수 이름이고, 몽사(濛汜)는 해가 지는 곳을 말한다. 우위(羽衛)는 왕의 의장(儀仗)을 가리키고, 운소(雲韶)는 황제(黃帝)의 음악인 운문(雲門)과 순 임금의 음악인 대소(大韶)를 병칭한 것이다. 제향(帝鄕)은 천제(天帝)의 거소인데, 보통 제왕의 서울을 말한다. 참고로 백거이(白居易)가 지은 황제의 만사에 “정호의 용은 점점 멀리 사라지고, 몽사에는 태양이 지금 막 잠겼어라. 오직 운소의 음악만이 뒤에 남아서, 치세의 정음을 길이 전해 주누나.〔鼎湖龍漸遠 濛汜日初沈 唯有雲韶樂 長留治世音〕”라는 구절이 보인다. 《白樂天詩集 卷16 開成大行皇帝挽歌詞 三》
[주D-028]상자(向子) : 후한(後漢) 상장(向長)의 존칭으로, 자(字)는 자평(子平)이다. 왕망(王莽) 때에 대사공(大司空) 왕읍(王邑)이 몇 년 동안 그를 부르면서 왕망에게 천거하려고 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고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생활을 하다가 자녀들을 모두 시집 장가 보낸 뒤에 오악(五岳)의 명산을 두루 유람하며 생을 마쳤다는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83 向長列傳》
[주D-029]봉맹(逢萌) : 후한(後漢)의 고사(高士)이다. 왕망의 시대에 인륜이 끊어졌다고 탄식하면서 관(冠)을 벗어서 동도문(東都門)에다 걸어 놓고는 가족들을 데리고 바다로 나가 요동(遼東)에 정착하였으며, 광무제(光武帝) 즉위 후에도 계속 부름을 받았으나 모두 응하지 않고 수양을 하며 천수를 누리고 죽었다. 《後漢書 卷83 逢萌列傳》
[주D-030]계운궁(啓運宮) :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의 부인으로 인조(仁祖)의 생모이다. 인조 4년에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뒤에 정원대원군이 원종(元宗)으로 추존될 적에 함께 인헌왕후(仁獻王后)의 존호가 가해졌다. 좌찬성(左贊成) 구사맹(具思孟)의 딸이다.
[주D-031]나라를 …… 재촉했네 : 왕의 모친으로서 오래도록 효도를 받지 못하고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는 말이다. 《맹자》 만장 상(萬章上)에 “효자의 일 가운데 어버이를 높이는 것보다 큰 것이 없고, 어버이를 높이는 일 가운데에는 천하를 받들어 봉양하는 것보다 큰 것이 없다. 그런데 천자의 부친이 되었으니 최고로 높임을 받은 것이요, 천하를 받들어 봉양을 하였으니 최고로 봉양을 한 것이다.”라는 말이 나오고,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백년은 인간이 살 수 있는 최고의 수명이니, 자손들은 최대한으로 어버이를 봉양해야 마땅하다.〔百年曰期 頤〕”는 말이 나온다.
[주D-032]풍초(風草)처럼 …… 알리로다 : 계운궁이 모범을 보이자 아랫사람들이 이를 본받아서 모두 교화되었다는 말이다. 《논어》 안연(顔淵)에 “윗사람이 행하는 것은 바람과 같고, 아랫사람이 이를 본받는 것은 풀과 같다. 풀 위에 바람이 불어오면 풀은 한쪽 방향으로 쏠리게 마련이다.〔君子之德風 小人之德草 草上之風 必偃〕”라고 한 공자의 말이 나온다.
[주D-033]이팔(二八)의 …… 올랐어라 : 팔원(八元) · 팔개(八愷)와 같은 뛰어난 실력을 소유하고 조정에 진출했다는 말이다. 팔원은 상고 시대 고신씨(高辛氏)의 재자(才子) 8인을 말하고, 팔개는 고양씨(高陽氏)의 재자 8인을 말하는데,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문공(文公) 18년 조에 그들의 이름이 수록되어 있다.
[주D-034]학궁(學宮)에선 …… 하였어라 : 정엽이 대사성(大司成)으로서 학제(學制)를 개정하는 등 성균관을 다시 크게 일으키고, 대사헌(大司憲)을 다섯 차례나 맡으면서 관원의 기강을 엄하게 확립한 것을 말한다.
[주D-035]일찍이 …… 있었기에 : 포저가 언젠가 정엽이 주선해 준 덕으로 원하던 일을 이룬 적이 있었다는 말이다. 전한(前漢)의 위발(魏勃)이 제상(齊相)으로 있던 조참(曹參)을 만나려고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조참의 사인(舍人)의 대문 앞을 청소해 준 인연으로 조참을 만나 그의 주선으로 내사(內史)에 임명된 이른바 ‘소문(掃門)’의 고사가 있다. 《史記 卷52 齊悼惠王世家》
[주D-036]파산(坡山)에서 …… 전해졌네 : 성수침(成守琛)과 그의 아들 성혼(成渾)의 학덕을 기린 말인데, 모두 파주(坡州)의 파산 서원(坡山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성문준은 성혼의 아들이다.
[주D-037]기애(耆艾)의 연세 : 60대의 나이를 말한다. 나이 60을 기(耆)라 하고, 50을 애(艾)라 한다.
[주D-038]곧은 …… 같아서 : 공자가 위(衛) 나라 대부(大夫) 사어(史魚)에 대해서 “나라에 도가 있을 때에도 화살처럼 곧았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도 화살처럼 곧았다.〔邦有道 如矢 邦無道 如矢〕”라고 칭찬한 말이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보인다.
[주D-039]천하의 …… 알았거니 : “천하의 뛰어난 선비만이 천하의 뛰어난 선비들을 벗할 수 있는 법이다.〔天下之善士 斯友天下之善士〕”라는 말이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나온다.
[주D-040]선인(善人)을 …… 허언(虛言)이라 : 사마천(司馬遷)이 “하늘의 도에는 친소(親疎)의 구별이 없지만, 항상 선인과 함께하며 도와준다.〔天道無親 常與善人〕”는 혹자(或者)의 말을 소개한 뒤에, 이와 어긋나는 여러 가지 예를 거론하면서 과연 천도가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질문했던 내용이 《사기(史記)》 백이 열전(伯夷列傳)에 나온다.
[주D-041]종기(鍾期) : 종자기(鍾子期)의 준말로, 지기(知己)를 뜻한다. 춘추 시대 거문고의 명인 백아(伯牙)는 거문고를 잘 타고 친구인 종자기는 거문고 소리를 잘 알아들었는데, 백아가 높은 산에 뜻을 두고 연주하면, 종자기가 “멋지다. 마치 태산처럼 높기도 하구나.”라고 평하였고, 흐르는 물에 뜻을 두고 연주하면 “멋지구나. 마치 강하처럼 넘실대는구나.”라고 평하는 등, 백아가 생각한 것은 종자기가 반드시 다 알아들었으므로, 종자기가 죽은 뒤로는 백아가 자기의 거문고 소리를 알아들을 사람이 없다 하여 마침내 거문고를 부숴버리고 종신토록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는 고사가 전한다. 《列子 湯問》

 

 시조(始祖) 맹(孟) - 조씨(趙氏)의 세계(世系)는 한양(漢陽)의 풍양현(豐壤縣)에서 비롯된다. 공은 고려(高麗) 태조(太祖)를 보좌하여 통합삼한 벽상 개국 공신(統合三韓壁上開國功臣)의 훈호(勳號)를 하사받았으며, 관직은 삼중대광(三重大匡) 문하시중 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이르렀다. 묘소는 풍양현 적성동(赤城洞)에 있다. 광해(光海)가 성릉(成陵)을 추봉(追封)할 적에 분묘가 평평하게 되었다가 능호(陵號)가 취소되면서 원상 복구되었다. 외족(外族)의 후손인 장공 유(張公維)가 묘비(墓碑)의 글을 지었고, 선생이 음기(陰記)를 지었다.
1세(世) 신혁(臣赫) -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부사(密直副使) 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 상호군(上護軍) 문하시중 평장사에 이르렀다. 〇 공의 위로 누대(累代)의 보첩(譜牒)을 잃어서 세계와 명자(名字)를 모두 상고할 길이 없게 되었으므로 세수(世數)를 공으로부터 시작한다.
2세 천옥(天玉) - 봉상대부(奉常大夫)로 봉상시 소윤(奉常寺少尹)에 이르렀다. 〇 홍무(洪武) 10년(1377, 우왕〈禑王〉 3)에 원수 부사(元帥副使)의 신분으로 서해(西海)에서 왜적을 토벌하다가 전사하였다.
3세 우(玗) - 아조(我朝)에 들어와 조봉대부(朝奉大夫)로 군기시 부정(軍器寺副正)이 되었다. 〇 부인은 양성 이씨(陽城李氏)이니, 공주 목사(公州牧使) 조(操)의 딸이다.
4세 계팽(季砰) - 세종조(世宗朝) 선덕(宣德) 10년 을묘년(1435, 세종 17)의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통정대부(通政大夫) 남원 부사(南原府使)에 이르렀으며, 예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세조조(世祖朝)에 좌익 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이 되었다. 묘소는 남양부(南陽府) 수작리(壽作里)에 있다. 〇 부인은 여흥 이씨(驪興李氏)이니, 감찰(監察) 극복(克福)의 딸이다.
5세 지진(之縝) - 장사랑(將仕郞)으로 공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남양에 있다. 〇부인은 동래 정씨(東萊鄭氏)이니, 호조 판서 이한(而漢)의 딸이다.
6세 현범(賢範) -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으며,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광주(廣州) 북방리(北坊里) 직동(直洞)에 있다. 〇 부인은 파평 윤씨(坡平尹氏)이니, 파성군(坡城君) 찬(贊)의 딸이요, 좌참찬(左參贊)으로 좌의정에 추증된 공간공(恭簡公) 형(炯)의 손녀이다.
7세 안국(安國) - 무과에 급제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 남병사(南兵使)에 이르렀다. 승지와 포도대장(捕盜大將)을 거쳤으며,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광주에 있는데 위치는 위와 같다. 〇 부인 여산 송씨(礪山宋氏)는 첨사(僉使) 집(輯)의 딸이요,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생원 세임(世任)의 딸이다.
8세 간(侃) - 자(字)는 사행(士行)이다. 의빈부 도사(儀賓府都事)로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광주에 있는데 위치는 위와 같다. 〇 부인 의령 남씨(宜寧南氏)는 현감(縣監) 규(奎)의 딸이요, 상주 김씨(尙州金氏)는 사평(司評) 발(潑)의 딸이다.
동지공(同知公) 이하 3세에는 선생이 지은 묘표(墓表)가 있다.
9세 영중(瑩中) - 자는 군수(君粹)이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대흥군(大興郡) 백석촌(白石村)에 있다. 청음(淸陰) 김 문정공(金文正公 : 김상헌〈金尙憲〉)이 묘갈(墓碣)을 지었다. 〇 부인 해평 윤씨(海平尹氏)는 정경부인(貞敬夫人)을 추증받았는데, 현감으로 좌참찬에 추증된 춘수(春壽)의 딸이요, 해징부원군(海澄府院君)에 추증된 변(忭)의 손녀이다.
10세 익(翼) - 바로 선생이니, 선생에 대한 내용은 연보와 행장에 상세히 보인다.
11세 몽양(夢陽) - 자는 헌길(獻吉)이요, 관직은 현감이다.
11세 진양(進陽) - 자는 여명(汝明)이요, 관직은 군수(郡守)이다.
11세 복양(復陽) - 자는 중초(仲初)요, 호는 송곡(松谷)이다. 관직이 이조 판서에 이르렀으며, 문형(文衡)을 맡았다. 시호(諡號)는 문간(文簡)이다.
11세 내양(來陽) - 자는 장길(長吉)이다. 진사(進士)로 일찍 죽었다. 선생이 지은 묘지(墓誌)가 있다.
11세 현양(顯陽) - 자는 경명(景明)이다. 생원시(生員試)에서 장원하였는데, 일찍 죽었다. 선생이 지은 묘지가 있다.
12세 지강(持綱) - 관직은 현령(縣令)이다.
12세 지한(持韓)
12세 지형(持衡)
12세 지성(持成)
12세 지겸(持謙) - 부제학(副提學)으로 대사성(大司成)을 겸하였다.
12세 지원(持元)
12세 지헌(持憲) - 관직은 정랑(正郞)이다.
12세 지항(持恒) - 관직은 목사(牧使)이다.
12세 지정(持正) - 관직은 목사이다.
13세 명우(命祐)
13세 명적(命迪) - 진사(進士)이다.
13세 명덕(命德)
13세 명흥(命興) - 관직은 군수이다.
13세 명정(命禎) - 관직은 군수이다.
13세 명인(命仁)
13세 명형(命亨)
13세 명정(命禎) - 지겸(持謙)의 후사로 나갔다.
13세 명재(命才)
13세 명휘(命徽) - 관직은 현감이다.
13세 명원(命遠) - 지정(持正)의 후사(後嗣)로 나갔다.
13세 명원(命遠)
14세 한종(漢宗)
14세 한규(漢規)
14세 한사(漢師) - 생원이다.
14세 한모(漢模)
14세 한유(漢儒) - 명흥(命興)의 후사로 나갔다.
14세 한정(漢鼎)
14세 한좌(漢佐)
14세 한보(漢輔) - 전임 판관(判官)이다.
14세 한유(漢儒)
14세 한보(漢輔) - 명덕(命德)의 후사로 나갔다.
14세 한필(漢弼) - 지금 직장(直長)이다.
14세 한위(漢緯) - 대사간(大司諫)이다.
14세 한숙(漢淑) - 생원이다.
14세 한숙(漢淑) - 명형(命亨)의 후사로 나갔다.
14세 한철(漢哲) - 생원이다.
14세 한덕(漢德)
14세 한일(漢逸)
14세 한길(漢吉)
14세 한종(漢宗) - 명우(命祐)의 후사로 나갔다.
14세 한명(漢明)
14세 한장(漢章)
14세 한경(漢慶)

[주C-001]포저 선생 세계도 : 본 세계도는 원문의 의미를 살려 도표화하고 원문의 소주(小註)는 별도로 번역하여 뒤에 첨부하였다. 단 출계한 사실은 도표에도 반영하여 참고할 수 있도록 하였다.
[주D-001]광해(光海)가 …… 복구되었다 : 광해군의 생모인 공빈(恭嬪) 김씨(金氏)가 1577년(선조 10)에 죽자 조맹(趙孟)의 무덤 뒤로 30보쯤 되는 곳에 장지를 정하였다. 그 뒤 1610년(광해군 2)에 공빈을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숭(追崇)하고 그 무덤을 성릉(成陵)이라고 칭하면서 조맹의 분묘를 평평하게 만들었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난 뒤에 그 휘호(徽號)가 취소되면서 원상을 회복하게 되었다. 이 내용은 《포저집(浦渚集)》 권3 ‘시조의 분묘를 복구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한 소〔請復始祖墳疏〕’에 자세히 나온다.

 

 

포저 연보 제2권
 부록(附錄)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


우재(尤齋) 송시열(宋時烈) 지음

국조(國朝)는 문교(文敎) 위주로 백성을 다스리면서 고대의 법도를 존중하고 숭상하였다. 특히 퇴계(退溪)와 율곡(栗谷)이 나온 이후로는 선비가 된 자들이 이(理)와 사(事)는 일치하는 것이고 효(孝)는 충(忠)으로 옮길 수 있는 것임을 더욱 알게 되었으니, 그 설은 결코 바꿀 수 없는 것이라 하겠다.
포저(浦渚) 선생 조공(趙公)은 스승에게 전해 받는 길을 통하지 않고 경서(經書)의 가르침을 독실하게 신봉하였다. 그리하여 이를 가는 어린 나이 때부터 백발의 노인이 될 때까지 게으름을 부리는 일 없이 시간이 갈수록 더욱 경건한 자세를 견지하며 목숨이 다한 뒤에야 그만두겠다고 기약하였다. 그러고 보면 선생이야말로 성현(聖賢)이 “시(詩)에서 인을 좋아함이 이와 같다.”라고 말한 경우와 또 “늙어서도 학문을 좋아하는 자는 더욱 사랑스럽다.”라고 말한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공의 휘(諱)는 익(翼)이요, 자(字)는 비경(飛卿)이다. 고(考) 첨추공(僉樞公) 영중(瑩中)은 진실하고 순수하였으며 천진(天眞)함을 잃지 않았다. 비(妣) 윤씨(尹氏)는 매우 부덕(婦德)이 있었는데, 만력(萬曆) 기묘년(1579, 선조 12) 4월 7일에 공을 낳았다. 이에 앞서 흑룡(黑龍)이 가인(家人)의 꿈에 나타나 방 안으로 날아 들어왔다 한다.
공이 3세에 바둑알을 배열하며 놀았는데 역(易)의 괘상(卦象)을 만들었으므로 보는 이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5세에 글을 지을 줄 알았다. 이웃에 사는 노인이 옷을 벗어 놓고는 공에게 지키라고 하였는데, 저물녘에 돌아와 보니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공의 신실하고 순수함이 그때부터 이와 같았다. 8세에 상소문을 작성하여 사정(邪正)을 논변하였는데, 장로(長老)들이 놀라며 말하기를 “누가 이 글을 어린아이가 지었다고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남에게 보여 주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는 대개 중봉(重峯) 조헌(趙憲)이 이 문성(李文成 이이(李珥))과 성 문간(成文簡 성혼(成渾)) 두 선생을 구원하려다가 죄를 입은 때였기 때문이다.
성동(成童 15세)의 나이에 《상서(尙書)》를 읽었는데, 기삼백(朞三百)과 선기옥형(璇璣玉衡)의 주설(註說) 같은 것도 모두 환히 깨달았다. 또 홍범(洪範 상서의 편명)을 모방하여 인륜에 대한 설을 짓고는 그 이름을 이범(彛範)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제가(諸家)의 서적을 두루 섭렵하였는데,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가 공이 지은 글을 볼 때마다 “이것은 진(秦) · 한(漢) 사이의 글 짓는 수법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성리(性理)의 학문에 온 마음을 기울이면서 “《대학》은 성현의 심법(心法)으로서 체용(體用)이 모두 갖추어져 있고, 《중용》의 계구(戒懼) 신독(愼獨)이야말로 한 편의 체요(體要)이니, 가장 힘을 쏟아야 할 곳이다.”라고 하고는 이에 지경도(持敬圖) 등 제설(諸說)을 지어서 스스로 경계하였다.
조고(祖考)의 명(命)을 받들어 마지못해 과거 시험장에 나아갔는데, 고관(考官)이 그 글을 보고는 감탄하였다. 나이 24세에 임인년(1602, 선조 35)의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보임(補任)되었으나, 임금의 총애를 받는 권신(權臣)에게 미움을 받은 나머지 7년 동안이나 조용(調用)되지 못하다가 전적(典籍)에 올랐다. 감찰(監察)을 거쳐 평안도 평사(平安道評事)로 나가서는 기민(饑民)을 진휼(賑恤)하는 임무를 맡아 구제하는 일에 온 힘을 기울였다. 기유년(1609, 광해군 1)에 홍문록(弘文錄)에 등록되었으며, 사서(司書)와 병조의 낭관(郞官)이 되었다. 백사(白沙) 이공 항복(李公恒福)이 공이 과제(課題)로 지은 글을 보고는 감탄하기를 “세상에 어떻게 이런 식견과 문장이 있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신해년(1611)에 비로소 옥당(玉堂)에 들어가서 수찬(修撰)과 지제교(知製敎)가 되었다. 정인홍(鄭仁弘)이 문원(文元 이언적(李彦迪))과 문순(文純 이황(李滉)) 두 선생을 추악하게 헐뜯자, 공이 동료와 함께 차자를 올려 변론했다가 고산 찰방(高山察訪)으로 좌천되었다. 이때 문익공(文翼公) 한준겸(韓浚謙)이 감사(監司)로 있으면서 공을 지기(知己)로 허여하였다.
계축년(1613, 광해군 5)에 시사(時事)가 더욱 크게 변하면서 폐모(廢母)에 대한 논의가 일어나기 시작하자, 공이 관직을 버리고 시골로 돌아와서 10여 년 동안 두문불출하였다. 빈사(儐使)가 조사(詔使)를 영접할 때 공을 제술관(製述官)으로 차출하였고, 도원수(都元帥 한준겸)가 공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지명하였으나, 모두 응하지 않았다. 그리고 공은 거주하는 곳이 경성과 가까운 만큼 마음이 편치 못하다고 하여 광주(廣州)에서 호서(湖西)의 신창현(新昌縣)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는 도고산(道高山) 아래에다 띳집을 얽어 만든 뒤에 경사(經史)에 침잠하며 스스로 즐기는 한편, 잠야(潛冶) 박지계(朴知誡) 및 만회(晩悔) 권득기(權得己)와 함께 끊임없이 학문을 강론하였다.
계해년(1623)에 인묘(仁廟)가 즉위하였다. 조의(朝議)가 “이제 새로 정사를 펼치게 된 때에 전조(銓曹)에는 일등(一等)의 인물을 등용해야만 한다.”라고 하였는데, 공이 으뜸으로 꼽혀 좌랑(佐郞)이 되고 나서 공평하고 합당하게 모든 일을 극진하게 처리하니, 물론(物論)이 흡족하게 여겼다. 공이 일찍이 윤대(輪對)할 적에 진언(進言)하기를 “한(漢) · 당(唐)의 임금들이 삼대(三代 하(夏) · 은(殷) · 주(周))의 임금에게 미치지 못한 까닭은 학문의 공이 없었기 때문입니다.”라고 하니, 상이 귀담아 들었다.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이산해(李山海)의 무함을 받아 관직을 추삭(追削)당한 일에 대해서 공이 극력 신설(伸雪)하며 변론하였다. 폐세자(廢世子) 지(侄)가 위리안치(圍籬安置)된 상태에서 도망쳐 나온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과 창석(蒼石) 이준(李埈)과 팔송(八松) 윤황(尹煌)이 죽음을 면하게 해 줄 것을 청하였는데, 공이 그 의논에 동조하였다.
재생선혜청(裁省宣惠廳) 낭청(郞廳)을 겸하였다. 공이 오래도록 민간에 있으면서 백성을 괴롭히는 폐단을 익히 보아 왔기 때문에 재처(裁處)하고 구획(區畫)하는 것 모두가 시의(時宜)에 합당하였는데, 이서(吏胥)들이 근거 없는 말을 퍼뜨려 동요시켰다. 이에 공이 상소하여 극론(極論)하고는 이어서 아뢰기를 “정자(程子)의 말에 의하면 관저(關雎)와 인지(麟趾)의 아름다운 뜻을 지닌 뒤에야 《주관(周官)》의 법도를 행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삼가 우려하는 것은 전하의 뜻이 혹시라도 확고하게 세워지지 않아서 고대의 제왕을 자신의 목표로 삼지 못하실까 하는 점입니다. 그리하여 심술(心術)의 은미(隱微)한 사이로부터 나오는 모든 일이 대부분 고식적(姑息的)이고 구차하게 된다면, 성대한 정치와 교화가 펼쳐질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기 어려울 것입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에 따라 선과 악이 나뉘는 기틀을 깊이 살펴서 현인을 가까이하고 학문에 매진하여 날마다 정일(精一) · 극복(克復) · 격치(格致) · 성정(誠正)의 공부에 힘쓰소서.”라고 하였다.
갑자년(1624, 인조 2)에 역적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대가(大駕)를 호종(扈從)하여 남쪽으로 내려갔다. 반란이 평정된 뒤에 검상(檢詳)과 사인(舍人)을 거쳐 응교(應敎)와 전한(典翰)을 역임한 뒤에 직제학(直提學)으로 승진하였다. 일찍이 경연(經筵) 석상에서 진언하기를 “《대학(大學)》과 《논어(論語)》야말로 만세토록 학문을 하는 대법(大法)이라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 속에 온축된 그 의리를 끝까지 연구하여 몸과 마음으로 날마다 쓰는 사이에 징험하면서 실천해 나간다면, 은현(隱見)과 표리가 명백하고 순수해져서 정령(政令)을 베풀고 사업을 행하는 것 모두가 천지의 화육(化育)처럼 대공지정(大公至正)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정언(正言) 홍호(洪鎬)가 박승종(朴承宗)을 추장(追獎)할 것을 청하자 헌부(憲府)가 망언을 했다고 탄핵하니, 공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만약 그의 말이 망녕되다고 하여 처벌한다면, 망녕되지 않은 말까지 나오기 어려워지지 않을까 삼가 걱정됩니다.”라고 하였다. 그 일로 인하여 체직(遞職)되었다가 얼마 뒤에 다시 들어와 승지(承旨)로 승진하면서 선혜청(宣惠廳)의 일을 겸관(兼管)하였다. 이때 진언하며 건의하였는데, 그중에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분명하게 조칙(詔勅)을 내려서 각 주(州)와 현(縣)으로 하여금 거두어들이는 돈과 곡식의 총계를 빠짐없이 작성하게 한 뒤에 이를 대대적으로 균등하게 조절하도록 함으로써 각 주와 현마다 빈부의 차이가 너무 심하게 벌어지지 않게 한다면, 백성들의 고락(苦樂)이 또한 그다지 크게 차이가 나지는 않을 것이니,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오늘날 백성을 기르는 정사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당시에 오리(梧里) 이공(李公 이원익(李元翼))이 대동법(大同法)의 일을 주관하였는데, 이론(異論)을 제기하는 자들이 벌 떼처럼 일어났다. 이에 공이 개연(慨然)히 다시 쟁론하여 아뢰기를 “만약 뭇사람들의 말에 동요된다면, 이는 작사도방(作舍道傍)하는 것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작은 일도 해낼 수 없을 것인데, 하물며 국가의 안정된 정치를 이루어 낼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이공이 탄식하기를 “우리와 같은 사람은 참으로 조모(趙某)의 죄인이다.”라고 하였다.
얼마 뒤에 또 승지의 신분으로 유지(有旨)에 응하여 진언하였는데, 대체적인 내용은 궁리(窮理)하고 격물(格物)하는 학문을 힘쓰지 않으면 안 되고 관대하게 포용하는 도량을 넓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과, 반드시 명선(明善) · 성신(誠身)하는 공부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인헌왕후(仁獻王后)의 상(喪)에 김사계(金沙溪 김장생(金長生)) 선생이 대궐에 들어가 위문하고 곧바로 돌아가려 하자, 공이 극력 만류할 것을 청하며 아뢰기를 “오늘날의 숙덕(宿德)으로 그보다 나은 이는 없습니다. 그러니 그가 비록 산림(山林)에 있다고 하더라도 응당 불러들여야 할 것인데, 지금 이미 올라온 터에 그가 있는지 없는지도 몰라서야 어찌 될 일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얼마 뒤에 도승지를 사직하니, 상이 비답을 내리기를 “공의 청검(淸儉)과 재학(才學)이야말로 이 직임에 합당하다.”라고 하였다.
공이 승도(僧徒)를 환속시키되 연한을 정하여 군역(軍役)을 부담 지우지 않으면 기꺼이 따를 자가 분명히 많을 것이라고 청하였고, 또 서쪽 변방의 모병(募兵)과 둔전(屯田)에 대한 바람직한 계책을 논하였으며, 난리를 피해서 우리나라에 온 요동(遼東) 백성들을 내지(內地)로 이주시켜 중국 황제의 은혜에 보답할 것을 청하는 동시에 오랑캐에 대한 대비책을 건의하였으나, 조정이 채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소를 올려 논하였으나 또 시행되지 않았다. 어버이 봉양을 위해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에서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나갔다.
정묘년(1627, 인조 5)에 오랑캐가 쳐들어오자 공이 선박을 거두어 모아 사녀(士女)를 모두 싣고 해도(海島)로 들어갔다. 오랑캐가 물러가자 행조(行朝)에 달려가 위문하고는 소를 올려 서쪽 변방에 대한 일을 매우 자세히 논하였다. 조정에 들어와서 대사간이 되었다. 어떤 이름 있는 재신(宰臣)이 훈적(勳籍)에 외람되게 참록(參錄)되었으므로 이를 논하여 삭제시켰다.
이에 앞서 조의(朝議)가 사친(私親)에 대한 복제(服制) 문제로 의논의 차이를 보였다. 그러다가 천부(遷祔)할 때를 당하여 별도로 예묘(禰廟 부친의 사당)를 세울 것을 청하는 자가 있자, 공이 변론하기를 “제왕의 가문에서는 형의 신분으로 아우의 뒤를 계승했을지라도 부자(父子)라고 이르는 법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손자의 신분으로 조부의 뒤를 계승한 경우에만 유독 부자의 의리가 없다고 하겠습니까. 그럴 경우에 예위(禰位)가 없게 되는 것은 의심할 일이 아니니, 한 선제(漢宣帝)가 소제(昭帝)의 뒤를 이은 경우가 바로 여기에 해당됩니다.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가 중흥(中興)한 것은 실로 창업(創業)한 것과 같은데도 위로 원제(元帝)를 계승했다고 하면서 별도로 사친(四親)의 사당을 세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자(朱子)는 백승(伯升)의 아들을 후계자로 세워서 사묘(私廟)를 받들게 하는 것이 더 좋았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이렇게 큰 전례(典禮)에 대해서 어찌 황당무계한 한두 사람의 말만 믿고 행해서야 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능원군(綾原君 인조의 아우) 보(俌)가 주재하게 되었는데, 그 부제(祔祭)를 행할 적에 상이 직접 주재하려고 하자 공이 또 쟁집(爭執)하였다.
얼마 뒤에 이조 참판에 임명되었다가 기사년(1629, 인조 7)에 사체(辭遞)된 뒤에 국자(國子)와 삼사(三司)의 장관을 역임하였다. 연평(延平) 이귀(李貴)가 붕당(朋黨)을 논하면서 주자(朱子)가 유정(留正)에게 보낸 서한을 인용하자, 상이 이르기를 “주자의 말에도 폐단이 없을 수 없다.”라고 하니, 공이 부제학(副提學)의 신분으로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전하께서 선현이 그렇게 말한 본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깊이 궁구해 보지도 않고서 무작정 폐단이 있다고 단정하시니, 이는 이치를 살피는 것이 소략할 뿐만 아니라 성현을 경시한 잘못이 있다고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또 왕자(王子)의 사전(私田)에 세금을 면제해 주면 안 된다고 논하면서 아뢰기를 “전하께서 자기의 사욕을 극복하는 일에 깊이 유의하지 못하시는 일이 혹 있지 않나 삼가 걱정됩니다.”라고 하였다. 상이 일찍이 죄가 되지도 않을 일을 가지고 나공 만갑(羅公萬甲)을 유배 보내고 또 장공 유(張公維)를 외직(外職)으로 좌천시켰으므로 공이 간쟁하였으나 상이 무시하였다. 사체(辭遞)하여 대사성이 된 뒤에 관학(館學)의 제생(諸生)에게 글로 타이르면서, 먼저 《근사록》을 읽어 문로(門路)를 바르게 하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학제(學制)에 대해서 논계(論啓)하니 상이 모두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경오년(1630) 봄에 유지(有旨)에 응하여 진언하면서 민생의 고통스러운 정상을 극론(極論)하고는 그 기회에 풍정(豐呈)과 묘향(廟享)에 관한 일을 논하니, 상이 많이 채납(採納)하였다. 윤공 황(尹公煌)이 어떤 일을 말하다가 상의 뜻을 거슬러 미움을 받자, 공이 아뢰기를 “궁금(宮禁)에 관한 일은 사람들이 말하기 어려워하는 바인데 감히 말하였으니, 그 직분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장악원(掌樂院)이 여악(女樂)을 교습시킬 것을 청하자, 공이 아뢰기를 “초(楚)나라는 쇠칼이 날카롭고 광대의 솜씨는 졸렬하다는 말을 듣고서 진왕(秦王)이 걱정스러운 기색을 띠었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지금은 민생이 곤고한 데다 하늘이 경고하고 있는 때이니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또 듣건대 황성(皇城)이 적에게 포위되어 계엄(戒嚴)을 풀지 않고 있다 하니, 오늘날의 일을 보면 모두가 통곡해야 할 일들뿐입니다. 따라서 군신(君臣) 상하가 밥 먹을 겨를도 없이 오직 두려워하고 걱정해야 할 것인데, 어찌 기악(妓樂)을 한데 모아 놓고 시끄럽게 떠들게 해서야 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여름에 가도(椵島)의 비장(裨將) 유흥치(劉興治)가 그 도독(都督 진계성(陳繼盛))을 살해하자, 상이 우리나라 경내에서 왕인(王人 중국 조정이 파견한 사람)이 피살되었다는 이유로 군대를 동원하여 토벌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듣건대 유흥치가 중국 조정에 주품(奏稟)해서 한 일이지 제멋대로 죽인 것이 아니라고 하였으므로, 공이 파병(罷兵)할 것을 청하였다.
헌부(憲府)가 내수사(內需司)의 폐단을 논하자 상이 노하여 문책하니, 공이 간하기를 “전하께서는 남의 말을 듣기 좋아하는 정성이 지극하지 못하고, 용인하여 받아들이는 도량이 넓지 못합니다. 정치의 효과가 드러나지 않는 것은 실로 여기에 이유가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궁중에 외간의 여자가 부정한 방법으로 들어온 일이 있자, 공이 진언하기를 “전하께서는 자기 몸을 엄하게 단속하고 계시니 여색에 빠져서 미혹될 걱정은 물론 없을 것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군자가 기미를 살펴서 점차 확대되지 않도록 미리 걱정을 해야 하는 것처럼, 신하 역시 임금을 사랑하면서 그 기미가 보일 때에 예방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사욕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용기 있는 행동이 중요하고, 환란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겁을 낼 줄 아는 것이 중요한 법입니다. 그리고 듣건대 화공(畫工)이 대궐 안에 들어와서 몇 달 동안이나 나가지 않고 있다고 하니, 이 또한 어찌 완물상지(玩物喪志)하는 하나의 단서가 되지 않겠습니까. 신들이 전하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즉 한결같이 성인을 모범으로 삼아 이 마음에 해를 끼치는 편파적인 기호(嗜好)를 일체 끊어 버리시고, 그리하여 본원(本源)의 바탕이 청명하고 순수하게 되어 티끌만큼이라도 가려지는 바가 없게 함으로써 온갖 교화가 이로부터 흘러나오게 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아뢰기를 “어떤 일이든지 노여움 때문에 촉발되는 경우는 반드시 그 바름을 잃게 마련입니다. 전하께서 빈어(嬪御)를 두지 않으신 것은 바로 제왕의 훌륭한 절행(節行)이라고 할 것인데, 지금 신하가 아뢴 말 때문에 갑자기 간택하라는 명을 내리셨으니, 이는 노여움으로 인한 충동을 면치 못한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때에 공이 병 때문에 누차 직명(職名)을 사양하곤 하였다.
신미년(1631, 인조 9)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거상(居喪)을 마치고 다시 옛 관직으로 복귀한 뒤에 천변(天變)을 인하여 더욱 절실하게 경계하는 말씀을 올렸다. 상이 예조 판서로 승진시키면서 이르기를 “경은 재질과 덕망이 모두 우수하니 직무에 마음을 다하라.”라고 하였다. 명(明)나라의 반장(叛將)이 오랑캐에 투항하여 사기(事機)가 걱정스럽게 되자 공이 은밀히 계책을 진달하였으며, 또 과거(科擧) 제도를 변통할 것과 사유(師儒)를 잘 가려서 인재를 양성할 것을 청하였다. 이때 삼사(三司)가 사친(私親)을 부묘(祔廟)하는 일과 관련하여 쟁론하다가 모두 멀리 유배당하자, 공이 대사헌의 신분으로 극력 변호하다가 상의 뜻에 거슬려서 체직되었다. 전조(銓曹)가 부제학(副提學)은 공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하면서 관례(慣例)를 무시하고 제수할 것을 청한 결과 다시 임명되었다가 체직되었다. 다시 대사헌이 된 뒤에 전결(田結)과 조세(租稅)에 대한 폐단을 논하였다.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을 겸임하게 하자 공이 사장학(詞章學)을 익히지 못했다고 사양하니, 송(宋)나라 사마광(司馬光)이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사양했어도 허락하지 않았던 고사를 상이 인용하면서 허락하지 않았다.
을해년(1635, 인조 13)에 관학(館學)의 유생들이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과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였는데, 정인(正人)을 헐뜯는 한 패의 무리가 또 투소(投疏)하여 무함하였다. 공이 당시에 학직(學職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으로 있으면서 세도(世道)를 깊이 걱정한 나머지 상소하여 극론하였으나, 회답을 받지 못하자 학직을 사체(辭遞)하였다. 이때 제멋대로 주장하는 일이 마구 발생하여 사태를 안정시킬 수가 없었으므로 공이 재차 상소하는 한편 연석(筵席)에 들어가서 매우 자세히 논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이는 말할 것도 없이 현인이다. 내가 그의 도덕을 부족하게 여겨서가 아니라 단지 문묘에 종사하는 일은 중한 전례(典禮)이기 때문에 감히 섣불리 허락하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병자년(1636) 봄에 공조 판서가 되었다가 어떤 일로 체직된 뒤에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임명되었다. 당시에 오랑캐와 이미 틈이 벌어졌으므로 공이 조목별로 여덟 가지의 계책을 올렸는데, 그것은 즉 첫째, 대중의 마음을 격동시키는 것과 둘째, 아랫사람의 의견을 위에 통하게 하는 것과 셋째, 무사(武士)들을 광범위하게 시취(試取)하는 것과 넷째, 장수가 될 인재를 가려 뽑는 것과 다섯째, 토병(土兵)을 쓰는 것과 여섯째, 성지(城池)를 견고하게 하는 것과 일곱째, 활의 제도를 간편하게 고치는 것과 여덟째, 인민을 교도(敎導)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정에서 이 계책을 제대로 쓰지 못하자, 공이 윤상 방(尹相昉)에게 극언하기를 “지금 화란(禍亂)이 언제 닥칠지 모르는 상황인데도 사람들의 계책이 이와 같을 뿐이니, 반드시 가만히 앉아서 위욕(危辱)을 당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강도(江都)에 먼저 들어가서 스스로 방비를 굳건히 하는 것만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윤상이 이 말에 동의하여 상에게 아뢰었으나, 또 시의(時議)에 저지되고 말았다. 가을에 또 예조 판서가 되었다. 명(明)나라의 감군(監軍) 황손무(黃孫茂)가 조서(詔書)를 받들고 왔을 때에 공이 성신(誠信)으로 대하고 속이지 말 것을 청하였다.
겨울에 오랑캐가 대거 침입하였다. 상이 강도로 행행(行幸)하려 하였으나, 오랑캐의 기병(騎兵)이 이미 도성에 육박하였으므로 어찌할 겨를 없이 방향을 바꿔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향하였다. 이때 공은 첨추공(僉樞公 포저의 부친)의 행방을 몰랐으므로 호곡(號哭)하며 동분서주하다가 일단 소재를 파악하고 나서 행재(行在)로 급히 달려가려 하였으나, 그때는 이미 오랑캐가 사방에 그득한 상태였다. 이에 공이 통곡하며 물러 나와 남양 부사(南陽府使) 윤계(尹棨)와 참의(參議) 심지원(沈之源)과 승지 김상(金尙)과 태상(太常) 이시직(李時稷)과 교리(校理) 윤명은(尹鳴殷)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근왕(勤王)할 계획을 세우고는 공이 대장이 되었는데, 윤계가 갑자기 오랑캐에게 살해되어 어떻게 해 볼 수가 없게 되었으므로 마침내 강도에 들어가게 되었다. 정축년(1637, 인조 15) 정월에 오랑캐가 강을 건너 강도로 들어왔는데도 공이 강기슭에 앉아서 떠나려 하지 않자, 두 아들이 공을 부둥켜안고 아래로 굴러 떨어진 뒤에 조그마한 배에 공을 끌어올리고 출발하였다. 대개 공은 행재로 들어가지 못하게 된 뒤로는 밤낮으로 통곡만 할 뿐 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다.
난리가 안정된 뒤에 공을 탄핵한 자가 있어 심문을 받게 되었는데, 상이 그 전말을 살펴보고는 단지 파직만을 명하였다. 뒤에 대론(臺論)이 다시 일어나자, 상이 이르기를 “이 사람은 독서인(讀書人)이 아닌가. 나는 원래 그가 현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라고 하였다. 계미년(1643, 인조 21)에 재차 상소하여 관직을 사양하고, 조정에 들어가서 다시 두 번이나 사양하니, 비로소 고향에 돌아가 어버이를 봉양할 것을 허락하였다. 을유년(1645)에 예조 판서에 임명되었으나 또 간절히 사양하였다. 가을에 세자를 책립(冊立)하자, 상소하여 세자를 교도하는 방도에 대해서 극론하고는 이어서 아뢰기를 “이와 함께 전하께서도 학문에 힘쓰고 덕을 발전시키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병술년(1646)에 또 전에 했던 말을 거듭 아뢰니, 상이 표창하여 내구마(內廐馬)를 하사하였다. 그리고 이조 판서에 임명하였으나,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여름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거상(居喪)을 마친 뒤에 참찬(參贊)의 임명을 받자 조정에 들어가서 사은(謝恩)하고는 나이가 많다고 인혐(引嫌)하며 치사(致仕)를 청하였다. 상이 허락하지 않고 잇따라 관직을 제수하자 공이 마지못해 직무를 수행하면서 때때로 격언(格言)을 진달하였다.
기축년(1649)에 인묘(仁廟)가 승하(昇遐)하였다. 이때 초상(初喪)에 관한 의절(儀節) 중에는 공이 정한 것이 많았다. 또 공이 장릉(長陵) 대신 다른 길지(吉地)를 선정하려고 하였으나 조정의 논의가 엇갈려서 저지되었다. 우의정에 임명되고 다시 좌의정으로 옮겨진 뒤에 총호사(摠護使)가 되어 장례를 마쳤다. 그리고는 차자를 올려 학문에 힘쓰며 좋은 정치를 이루는 방도와 현인을 존중하며 인재를 양성하는 방도에 대해서 논하는 한편, 10여 인의 인물을 논하며 천거하였다.
이때 효묘(孝廟)가 바야흐로 뜻을 가다듬고 좋은 정치를 행하려고 하였으므로 공도 정성을 다해서 보좌하려고 노력하였는데, 전후로 진언한 것을 보면 모두 《서경》의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미약하니 오직 정밀하고 한결같이 해야 한다〔危微精一〕’는 것으로 성학(聖學)의 요체를 삼고, 《맹자(孟子)》의 ‘사람에게 차마 모질게 대하지 못하는 어진 정사〔不忍人之政〕’로 정치의 근본을 삼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와 함께 전부(田賦)와 병제(兵制)에 이르기까지 모두 철저히 대책을 강구하여 본말을 완전히 갖추었는데, 그 건의가 제대로 쓰이지 못한 것을 식자들이 애석하게 여겼다.
불량한 무리가 몰래 청국(淸國)과 내통하여 화단(禍端)이 이미 싹튼 것을 공이 간파하고는 사변(事變)이 발생하기 전에 주도면밀하게 방비할 것을 청하였다. 경인년(1650, 효종 1)에 오랑캐의 사자 6, 7명이 우리나라에 오고 또 많은 군대를 동원하여 국경을 위협하였으므로 온 나라 사람들이 경악하였는데, 공이 지성으로 주선한 결과 사태가 역시 원만하게 해결되었다. 말미를 청하여 고향에 돌아가서 모부인(母夫人)을 천장(遷葬)하니, 상이 특별히 은례(恩例)를 베풀었다.
학사(學士) 심대부(沈大孚)와 유계(兪棨)가 인묘(仁廟)의 시호를 논하다가 상의 뜻을 거슬러 미움을 받자 공이 그들을 변호하는 말을 하니, 상이 더욱 노여워하여 두 사람을 유배 보내라고 명하였다. 이에 공이 대죄(待罪)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충실(忠實)한 것이야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마음을 편히 가지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대사헌 남선(南銑)과 부제학(副提學) 조석윤(趙錫胤)이 또 심대부와 유계의 일을 논하다가 파직되니, 공이 물러나겠다고 청하여 마지않았다. 그리하여 심대부와 유계가 마침내 풀려났으나, 공은 떠나게 해 줄 것을 더욱 강력히 청하였다.
인묘의 소상(小祥) 때에 공이 연복(練服)의 제도에 대해서 논하였으나 시행되지 않았다. 상이 사직(社稷)에 기우제(祈雨祭)를 지낼 적에 음악의 사용 여부를 의논하게 하니, 공이 월불(越紼)의 일을 예로 들며 사용할 것을 청하였다. 공이 또 진언하기를 “선(善)을 분명히 알아서 자기 몸을 참되게 하고 인(仁)을 추구하면서 덕(德)을 발전시키는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사서(四書)만큼 중요한 것이 없으니. 모쪼록 반복해서 깊이 음미하며 일생의 공부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의리(義理)가 무궁한 것을 알 수 있게 되면서 날이 갈수록 덕이 성대하게 발전하는 유익함이 있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진정 성인(聖人)이 되려고 추구하는 뜻이 있으시다면, 글을 읽을 적에 반드시 그 의미를 찾고 행동으로 옮길 적에 반드시 그 법도를 따르려고 해야 할 것이요, 그리하여 천리(天理)를 반드시 완전히 회복하고 자기의 사욕을 반드시 말끔히 제거하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생민(生民)들이 자연히 모두 제자리를 얻게 되어 만세토록 성인이라고 일컬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상이 하교하여 구언(求言)을 하자, 공이 긴요한 것을 뽑아내어 조목별로 나열한 뒤에 그대로 시행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조신(朝臣)의 붕당(朋黨)을 의심하자, 공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치를 살필 것을 청하였다. 또 영아(嬰兒)에게 군역(軍役)을 배정하는 것과 양녀(良女)가 낳은 자식을 사노(私奴)가 되게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논하였다. 또 한 집안에 군역을 배정받은 자가 3인일 경우에는 다른 사람들은 다시 배정하지 못하게 할 것과, 승려가 된 자에게는 미곡 3석을 납부하게 할 것과, 위로 공경(公卿)으로부터 아래로 서얼(庶孼)에 이르기까지 군역이 없는 자들 모두를 대상으로 포목 1필(匹)씩 내게 하여 군병을 양성하는 자본으로 삼을 것을 아뢰었다. 이 모두는 공이 시의(時宜)를 헤아려 판단해서 시행하려고 했던 것들이다.
관학(館學) 유생들이 또 양현(兩賢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자, 이상진(李象震)과 유직(柳㮨) 등이 서로 잇따라 투소(投疏)하였는데 그 말이 너무나도 추악하고 패려(悖戾)하였다. 관학 유생들이 상이 이 일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좌지우지한다고 여기고는 권당(捲堂)을 하고 나가니, 공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이이(李珥)는 천품이 고매하고 학문이 정대한 데다 식견이 탁월하고 덕행이 순전(純全)하니, 백세(百世)의 사표(師表)라고 이를 만합니다. 그리고 성혼(成渾)은 단장(端莊)하고 엄중(嚴重)하여 출처(出處)와 행사(行事) 모두 옛 성현의 법도를 따랐으니, 참으로 유자(儒者) 중의 뛰어난 인물이라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두 신하를 문묘에 종사하는 것은 실로 시대가 변하여도 바꿀 수 없는 정론(定論)이라고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또 아뢰기를 “성현은 반드시 천지의 순수한 기운을 품부받고 태어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공자(孔子)와 맹자(孟子) 이후로 1천 수백여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나왔습니다. 우리 동방의 경우는 본조(本朝)에 이르러 조광조(趙光祖)와 이황(李滉)이 성현을 학문의 대상으로 삼고서 혹은 조정에 진출하여 정치를 하기도 하고 혹은 초야에 물러나 자기 몸을 닦기도 하였는데, 그 뒤를 이은 사람이 바로 이이와 성혼입니다. 그래서 문묘에 종사해야 한다고 온 나라 사람들이 똑같이 주장하고 있는데, 유독 양현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당류(黨類)의 자손들이 나와서 배척하며 헐뜯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유직이 상소한 것을 보면 너무도 무함하며 기망(欺罔)하고 있습니다. 이황이 이이를 애지중지하며 권장하고 허여한 것은 그의 문집을 살펴보면 알 수가 있는데, 유직은 이황이 이이를 매우 미워했다고 하였습니다. 이이의 학문이 육씨(陸氏)와는 결코 근사하지도 않은데, 유직은 육가(陸家)에게서 나온 학술이라고 하였습니다. 이황이 학문을 논하면서 이이의 설을 많이 따른 사실은 《성학십도(聖學十圖)》나 《중용(中庸)》 소주(小註) 같은 곳에서 확인할 수가 있는데, 유직은 털끝만큼도 계오(契悟)한 바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황이 죽은 뒤에 이이가 홀로 그를 문묘에 종사할 것을 청하였는데, 유직은 이이가 이황을 있는 힘을 다해서 공격했다고 하였습니다. 성혼의 소를 보면 맨 먼저 강학(講學)과 궁리(窮理)를 요체로 삼았는데 유직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하였고, 성혼이 ‘마음과 몸을 수습하고 정신을 아껴 보존한다〔收拾身心 保惜精神〕’는 주자(朱子)의 설을 인용한 것에 대해서 유직은 도가(道家)의 학설이라고 단정하였습니다.
유직은 또 이이가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해서 논한 것은 이황과 다르다고 헐뜯었습니다. 대저 《맹자》에서 사단을 말한 것은 단지 정(情) 중에서 선(善)한 한쪽만을 거론하여 말한 것이고, 《예기(禮記)》에서 칠정을 말한 것은 선하고 악한 감정을 모두 거론하여 말한 것입니다. 이황이 사단과 칠정을 상대(相對)해서 논한 것이 비록 권근(權近)의 구설(舊說 입학도설(入學圖說))에 근거한 것이긴 하지만, 자세히 살피지 못한 잘못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이가 일찍이 이에 대해 변론하여 말하기를 ‘대저 의리(義理)는 천하의 공유물이다. 만약 의심만 쌓아 두고서 말하지 않는다면, 이 의리는 끝내 어두워진 채 밝혀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정자(程子)가 지은 《주역(周易)》의 전(傳)으로 말하면 일생의 정력을 모두 바친 역작이라고 할 것인데, 주자가 잘못된 곳을 지적한 곳이 매우 많습니다. 그리고 주자의 말에 대해서도 요로(饒魯)가 잘못을 지적한 곳이 많았고, 진력(陳櫟)은 ‘주자에게 아첨하는 신하가 되고 싶지 않다’라고 말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이이의 학문으로 말하면, 식견이 월등하게 고매할 뿐더러 언론이 정밀하고 타당하여 백세(百世) 뒤에까지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인데야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그리고 이통기국(理通氣局)과 같은 하나의 구(句)로 말하면 선현(先賢)이 미처 밝혀내지 못한 것을 밝힌 것인데, 유직은 그만 그 학문이 이기(理氣)를 일물(一物)로 여긴 것이라고 하였으니 이 또한 무함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설(邪說)이 횡행하게 되면 그 화는 홍수나 맹수의 해보다도 더 심할 것이니, 신은 삼가 이 점을 걱정하는 바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아뢰기를 “관학(館學)의 유생들이 권당(捲堂)할 경우에는 열성(列聖)이 반드시 선유(宣諭)하여 돌아오게 하였으니, 이는 성조(聖朝)에서 인재를 대우하는 도리로 볼 때 이와 같이 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그들이 망녕된 말을 했다고 하여 노하신 나머지 선유하지 않는다면, 인재를 대우하는 도리가 되지 못할 듯합니다.”라고 하니, 상이 너그럽게 답하였다.
함경도의 유생들이 양현(兩賢)을 위해 상소하니, 상이 엄한 유지(有旨)를 내렸다. 또 영남의 유생들이 유직이 처벌받았다는 이유로 과장(科場)에 들어와서 난동을 부리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에 공이 아뢰기를 “관북(關北) 지방이 비록 궁벽(窮僻)한 곳이기는 하지만, 인간으로서의 떳떳한 본성을 그 사람들도 모두 평등하게 품부받았으므로 지금 두 신하의 도덕을 흠모한 나머지 서로들 자발적으로 올라온 것입니다. 그리고 영남 유생들이 과연 유직이 바른 도리를 행하다가 처벌받았다고 여긴다면, 스스로 과거에 응시하지 않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만 과거 시험장에 떼로 몰려와서 공공연히 멋대로 난동을 부렸으니, 이는 바로 요군자무상(要君者無上)의 죄에 해당된다고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상의 비답 중에 언짢게 여기는 내용이 있었다. 이에 공이 면직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다가 공이 더욱 강력히 청하자 마침내 체직(遞職)을 명하였다. 공이 떠날 결심을 굳혔다는 말을 상이 듣고는 재차 사관(史官)을 보내어 만류하였으나, 공이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하였다. 그 뒤에 또 어떤 일로 서추(西樞 중추부(中樞府))의 산직(散職)이 삭직(削職)되었다. 그러나 상이 공을 생각하는 마음은 끝이 없었다. 계사년(1653, 효종 4)에 공의 아들 복양(復陽)이 입시(入侍)했을 때, 상이 그를 불러 앞으로 나아오게 한 뒤에 공의 기거(起居)를 물어보고는 유지(有旨)를 내려 복양으로 하여금 공에게 가서 유고(諭告)하게 하니, 공이 상소하여 감사의 뜻을 진달하였다.
갑오년(1654)에 도성(都城)에 큰물이 졌다는 말을 듣고는 상소하기를 “송(宋)나라 휘종(徽宗) 선화(宣和) 연간에 변경(汴京)에 큰물이 지자 이강(李綱)이 이적(夷狄)의 침입으로 병란(兵亂)을 당할 조짐이라고 하였는데, 과연 정강(靖康)의 화(禍)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지난 병자년에 본조(本朝)의 경우도 그러하였는데, 이번의 수재(水災)는 병자년보다 더 심하다고 합니다. 만약 전일과 같은 환란이 다시 있게 된다면, 모르겠습니다만 어떻게 대처할 것입니까. 옛날에 맹자가 등 문공(滕文公)에게 ‘임금이 그들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단지 선행에 힘쓸 따름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힘을 쓰는 방도로 말하면, 방책(方冊)에 실려 있는 이제(二帝 요(堯)와 순(舜))와 삼왕(三王 하우(夏禹)와 상탕(商湯)과 주(周) 문왕(文王) · 무왕(武王))의 군신(君臣)이 논한 것 및 공자(孔子)와 맹자의 말을 보면 알 수 있으니, 오직 이를 성심껏 믿고 따르면서 힘써 행하면 될 것입니다.”라고 하니, 상이 우악(優渥)하게 비답을 내렸다.
그 뒤에 상이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내가 일찍이 조복양(趙復陽)으로 하여금 나의 뜻을 조상(趙相)에게 유고(諭告)하게 하였는데도 조상이 오지 않고 있다.”라고 하고는 다시 하유(下諭)하여 불렀으나, 공이 또 늙고 병들었다는 이유로 끝내 나오지 않았다. 을미년(1655, 효종 6) 2월에 병이 들자, 상이 재차 내의(內醫)를 파견하고 약물을 보내어 치료하게 하였다. 공은 병이 위독하기 전까지는 여전히 힘을 내어 일어나서 의관을 정제하고 가묘(家廟)를 배알(拜謁)하였다. 그러다가 3월 10일에 이르러 고종(考終)하니, 춘추 77세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상이 매우 애도하며 철조(輟朝)하고 조문과 부의(賻儀)를 의례(儀禮)대로 하였다. 왕세자도 궁관(宮官)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 드렸다. 그해 6월 계해일에 대흥현(大興縣) 동화산(東華山) 건향(乾向)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공은 총명함이 뛰어난 데다 덕성이 천연적으로 갖추어져서 순수(純粹) · 혼후(渾厚)하고 화락(和樂) · 통철(洞徹)하였으므로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상운(祥雲)이요 서일(瑞日)과 같았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어버이를 섬김에 정성과 공경을 다하였다. 첨추공(僉樞公)이 기거(起居)를 잘 하지 못하자 공이 밤낮으로 그 곁을 떠나지 않으면서 앉고 눕고 용변을 보는 일 등을 모두 직접 시중들었다. 그러다가 상(喪)을 당해서는 나이가 70에 가까웠는데도 수장(水漿)을 입에 대지 않았다. 삼년 동안 최질(衰絰)을 벗지 않고서 밤낮으로 하루같이 호곡(號哭)하였으므로 침석(枕席)이 모두 젖었으며, 상복을 벗고 나서도 그대로 외침(外寢)에 거하였다. 그 뒤에 선부인(先夫人)을 천장(遷葬)할 때에도 그지없이 애통해하는 것이 초상(初喪)을 당했던 때와 다름이 없었다.
공은 술을 좋아하였으나 뒤에 어버이의 경계를 듣고 나서는 다시 입에 가까이하지 않았다. 부모님이 즐기던 음식은 종신토록 차마 먹지 못하였으며, 그 일에 말이 미치면 언제나 눈물을 보이곤 하였다. 그리고 부모님의 생신이나 기신(忌辰)이 돌아올 때면 자신을 가누지 못한 채 슬피 눈물을 흘리곤 하였다. 제사를 올릴 때에는 엄동설한에도 반드시 목욕을 하였는데, 매우 노쇠해진 때에 이르러서도 그렇게 하였다. 친척이나 고구(故舊)의 상을 당했을 때에도 며칠 동안 소식(素食)을 하였고, 복례(僕隷)와 같은 미천한 아랫사람이 죽었을 때에도 그를 위해 고기를 먹지 않았다.
공은 항상 정자(程子)의 ‘망생순욕(忘生徇欲)’이라는 말을 더없이 경계해야 할 격언으로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비록 성려(盛麗)와 함께 방 안에 있을지라도 가까이하는 일이 절대로 없었다. 의복은 몸을 가리면 되었고, 식사는 두 가지 반찬을 넘지 않았으며, 조정에 몸담은 50여 년 동안 전택(田宅)을 늘린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흉년을 당할 때마다 반드시 평소의 음식을 줄이거나 죽을 끓여 먹기도 하면서 “사람들이 모두 굶주리는 때에 무슨 마음으로 나만 잘 먹겠는가.”라고 말하곤 하였다.
대개 공의 충군(忠君)하고 우국(憂國)하는 정신은 지극한 정성과 간절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공은 과거에 급제했을 때부터 이미 경세제민(經世濟民)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예컨대 대동법을 시행하여 백성을 구제하려고 한 것과, 군정(軍政)을 개혁하여 군병을 양성하려고 한 것과, 과거 제도를 변통하여 사습(士習)을 바로잡으려고 한 것 등은 모두 옛 제도를 고증하고 시의(時宜)를 참작한 것으로서, 공이 있는 힘을 다해 주장하며 시행하기를 요청해 마지않던 것들이었다. 그런데 인조대왕은 공의 학술과 충성심을 알고서 매우 공경하며 존중하였으나, 국정(國政)을 담당한 신하들은 실제로 원대한 계책이 없었으므로 공이 주장하며 건의한 것들이 대부분 저지되어 시행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 뒤 효묘(孝廟)가 즉위한 초기에 이르러서도 미처 시행할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그래서 공이 항상 탄식하여 말하기를 “치도(治道)는 오직 경술(經術)에 통달하고 이치를 궁구한 사람만이 알 수가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고, 또 “치도는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니다. 임금이 덕을 닦는 것이 첫째요, 그다음은 현인을 임용하는 것이요, 그다음은 법도대로 수치(修治)하는 것일 뿐이다.”라고 했던 것이다.
공은 종족(宗族)을 어루만져 아끼면서 빠짐없이 거두어 구휼하였다. 자식들에 대한 교육은 매우 엄격해서 잘못을 저지르기만 하면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다. 사람들을 대할 때에는 한결같이 너그럽고 온화하였으므로 누구나 심취(心醉)하여 진정으로 열복(悅服)하였다. 그러나 정직하지 못한 사람을 보면 엄한 말로 통렬히 배척하였다. 사설(邪說)을 배격하고 사도(斯道)를 보위(保衛)하는 일에 의연(毅然)히 몸을 바쳐 따르면서, 득실(得失)이나 영욕(榮辱) 따위에는 기뻐하거나 슬퍼하는 뜻이 전혀 없이 진퇴(進退)와 출처(出處)가 정대하였으므로 사람들이 트집을 잡아 비난할 수가 없었다.
공은 소싯적에 장공 유(張公維) · 최공 명길(崔公鳴吉) · 이공 시백(李公時白)과 가장 친하게 지냈다. 그래서 당시에 사람들이 사우(四友)라고 일컬을 정도로 정분이 매우 두터웠으나, 언론(言論)과 심사(心事) 면에서는 모두 꼭 같지는 않았다. 또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김공(金公)에 대해서는 경애(敬愛)함이 매우 지극하였으나, 일을 논할 때면 또한 구차하게 영합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완평(完平 이원익(李元翼)) 이공(李公)과 서평(西平 한준겸(韓浚謙)) 한공(韓公)으로 말하면 공과 비교해서 연배가 매우 현격하였으나 공을 특별히 친애하면서 지기(知己)로 인정하였는데, 완평은 항상 “조모(趙某)는 지금의 세상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하곤 하였다.
공은 평생토록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항상 말하기를 “성현을 배우려 한다면 사서(四書)를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라고 하였다. 또 일찍이 말하기를 “공자(孔子) 이후로 제유(諸儒)를 집대성한 이는 주자(朱子)이다. 그의 공은 맹자보다도 크다.”라고 하였다. 공은 언제나 지경(持敬)과 존심(存心)을 일생에 걸쳐 행해야 할 근본 공부로 삼았다. 일찍이 말하기를 “지경은 수렴(收斂)과 조존(操存)을 요체로 삼는데, 정신이 담연(湛然)히 그 속에 있으면 그 공부가 되고 있다는 증거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학문을 하는 목적은 단지 사욕을 모조리 없애고 천리(天理)가 순전(純全)한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일 따름이요, 단지 광명하고 쇄락하여 천지와 귀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일 따름이요, 단지 천하의 일을 담당하면서 천지의 일에 참여하여 화육(化育)을 돕는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일 따름인데, 그 근본은 단지 마음을 보존하는 데에 있다.”라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마음을 보존하고 있을 때에는 신명(神明)이 어둡지 않아 만 가지 이치가 온전히 갖춰지게 된다. 이러한 때에는 성현의 마음이라 할지라도 단지 이와 같을 뿐이다. 다만 성현은 이런 마음을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는 데에 반해 학자는 그렇게 하지 못할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공은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의관을 정제하고 가묘(家廟)를 참배한 뒤에 서실(書室)로 물러나와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있곤 하였다. 진대(進對)할 일이 있을 때마다 미리 재계(齋戒)하여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고 공경히 하였다. 수재(水災)나 한재(旱災)를 당해서 명을 받들고 제사를 지낼 때면 곧바로 반응이 나타나지 않는 때가 없었다. 문장을 지을 때에는 단지 사리(事理)가 통하게만 하였을 뿐이요 화려하게 꾸미는 것은 일삼지 않았는데, 붓 가는 대로 내맡긴 채 자유자재로 써 내려가면서도 그 의미가 막힘없이 도도하게 펼쳐졌다. 그래서 계곡(谿谷 장유(張維))이 매양 말하기를 “의리(義理)에 관한 글은 우리들이 따라가기 어렵다.”라고 말하곤 하였다. 문집 15권이 있고, 그 밖에 수십 책(冊)의 저술이 집에 소장되어 있는데, 더러 간행되기도 하였다. 공이 일찍이 경서(經書)의 해설서인 각종 《곤득(困得)》과 《천설(淺說)》 등 몇 편을 상소하면서 함께 올렸는데, 그때마다 양조(兩朝)에서 모두 총장(寵獎)하는 은혜를 내렸다.
조씨(趙氏)는 당초에 풍양(豐壤)에서 나왔다. 시조인 휘(諱) 맹(孟)은 고려 태조(太祖)를 도와 개국공신(開國功臣)에 책훈(策勳)되었으며, 관직이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그 뒤로 사대부가 끊이지 않고 나왔다. 공의 증조는 절도사(節度使) 휘 안국(安國)이고, 조부는 도사(都事) 휘 간(侃)인데, 첨추공(僉樞公)까지 3세(世)에 걸쳐 공이 귀하게 된 덕분에 모두 대관(大官)을 추증받았다. 비(妣) 윤씨(尹氏)는 현감(縣監) 춘수(春壽)의 딸이다. 공의 배위(配位)인 성주 현씨(星州玄氏)는 부덕(婦德)을 잘 갖추었는데, 참판에 추증된 덕량(德良)의 딸이요 고려의 명신(名臣)인 덕수(德秀)의 후예로서, 정부인(貞夫人)에 봉해졌다가 뒤에 정경부인(貞敬夫人)으로 추증되었다.
5남 1녀를 두었다. 몽양(夢陽)은 현감이고, 진양(進陽)은 군수이고, 복양(復陽)은 이조 판서이고, 내양(來陽)은 진사(進士)이고, 현양(顯陽)은 생원시(生員試)에서 장원하였다. 딸은 진사 이상주(李相冑)에게 출가하였다. 몽양의 아들 지강(持剛)은 현령이고, 진양의 아들은 지한(持韓)이다. 복양의 아들은 지형(持衡)과 지성(持成)과 지겸(持謙)과 지원(持元)인데, 지겸은 일찍이 부제학(副提學)을 지냈다. 내양의 아들 지헌(持憲)은 정랑(正郞)이다. 현양의 아들 지항(持恒)은 부사(府使)이고 지정(持正)은 군수이다.
내가 그윽이 생각하건대 옛날의 이른바 도학(道學)은 반드시 마음으로 터득한 것을 몸으로 실천하였고 그것을 다시 정사(政事)에 확대해서 적용하였기 때문에 세상의 다른 학술들에 의해 분열됨이 없이 정치가 그 도학 하나에서 나오게 된 것〔不爲天下裂而治出於一〕이라고 여겨진다. 그런데 세도(世道)가 쇠미해지면서 이(理)와 사(事)가 둘로 나뉘고 본(本)과 말(末)이 어긋나게 된 결과, “도를 항상 세상에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었다〔使道常無用於天下〕”는 격이 되고 말았으니, 참으로 경계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오직 우리 공은 근본과 실질에 힘쓰고 허탄하게 큰소리만 치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이는 마치 ‘뿌리가 무성하게 퍼져야 열매가 여물고 기름을 부어 닦아야 광채가 나는 것〔根茂而實遂 膏沃而光曄〕’과 같다고 할 것이니, 집에서나 나라에서나 모두 스승으로 본받을 만하다고 하겠다.
동춘(同春) 송공 준길(宋公浚吉)이 늦게야 공의 문하에 들어가서는 마음속 깊이 진정으로 열복(悅服)하며 항상 칭송해 마지않았다. 세상에서는 혹 공의 저술 가운데 주자(朱子)와 다른 점이 간혹 있기도 하다고 의심을 한다. 이에 대해서는 동춘이 일찍이 공의 말을 외워서 나에게 들려 준 바가 있다. 그것은 즉 “주자는 공자 이후의 제일인자(第一人者)이다. 가령 내가 《대학》의 성의장(誠意章)을 논한 부분 중에 주자의 《대학장구(大學章句)》와 약간 다른 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주자어류(朱子語類)》의 설을 채용한 것이니, 이 역시 주자의 뜻이다.”라는 것이다. 아, 공의 학술을 알려고 한다면 이 점을 살펴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예로부터 현인(賢人)들은 / 自古先民
위기기학(爲己之學)을 하여 / 學以爲己
스스로 넉넉하게 된 뒤에 / 自足之餘
세상에 경륜을 펼쳤는데 / 惟用之致
후세에는 그렇게 하지 않고서 / 後世不然
장구와 문사만 일삼은 나머지 / 章句文辭
끝내는 쓸모없는 물건이 되어 / 終於無用
세인의 조소만 받게 되었어라 / 俗人攸嗤
아 생각건대 포저 노선생은 / 嗟惟浦老
혼자서 스승을 제대로 얻었나니 / 能自得師
그 스승이 과연 누구였던가 / 其師維何
그것은 바로 성현이 남기신 글 / 聖賢之書
깊이 사색하고 극력 궁구하여 / 潛思力究
배지도 않고 뜨지도 않게 하며 / 不密不疏
현실에 그대로 응용을 하고 / 乃踐其實
몸을 참되게 보존하였다오 / 乃誠其身
어버이 섬김에 효성을 다한 것은 / 事親克孝
증민과 하등 다를 것이 없었는데 / 曾閔之隣
그 효성을 미루어 국가에 충성하여 / 移以事君
책난하는 일을 법도로 삼았나니 / 責難爲程
삼대(三代)의 제왕이 걸었던 길을 / 曰帝曰王
임금이 그대로 따르게 하였으며 / 惟君所行
세상을 경륜한 그 계책 역시 / 經綸之策
한당 정도에 비할 바가 아니었네
/ 匪漢唐規
성심을 바탕으로 백성을 보호하며 / 誠心保民
지극한 정치의 토대를 마련하였나니 / 至治之基
사람들은 오활하다고 생각하였지만 / 人以爲迂
실로 그보다 긴요한 것은 없었고 / 實莫與要
상투적인 말이요 죽은 법이라 하였지만 / 常談死法
진정 살아 있는 절묘한 것이었다오 / 寔活寔妙
시대가 비록 머나먼 고대라 할지라도 / 雖是邃古
내용이 비록 전이요 모라고 할지라도 / 雖典雖謨
진정 바른 도를 구하고자 할진대 / 苟究其道
이를 놔두고 어디에서 구하리오 / 捨此何求
그래서 추성의 말을 살펴보아도 / 故鄒聖言
이것을 계책으로 삼았었는데
/ 以斯爲猷
공이 종사한 학문을 보더라도 / 惟公所學
오직 이것으로 일관했더라오 / 惟一於是
그 뒤 삼공(三公)의 지위에 올라 / 旣處三事
한번 시험해 볼 희망을 가졌는데 / 庶幾其試
그때 마침 사문이 불행하게도 / 適値斯文
사설의 재앙을 당하게 되자 / 戹於邪說
이를 저지하고 배격하다가 / 是閑是距
끝내는 그 일로 낭패를 당했지요 / 終以顚蹶
공이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은 / 其進與退
도와 성쇠(盛衰)를 함께할 따름 / 與道消息
내 고향 호수가 맑게 비치고 / 我湖空明
내 고향 곡식이 풍성한 그곳 / 我稼豊殖
한가로이 유유자적하면서 / 優哉悠哉
부끄러움 없는 호연한 기상이여 / 浩然無怍
그 도가 갈수록 더욱 빛나서 / 其道愈光
북두(北斗)요 태산(泰山)과 같았는데 / 如斗如嶽
끝내는 도를 위해 몸을 바쳤으니 / 卒以殉身
하늘의 뜻이 아니라고 누가 말하랴 / 孰云非天
임금은 애도하며 비탄에 잠기고 / 宸情惻愴
사림은 슬픔의 눈물을 흘렸어라 / 士林洏漣
생각하면 이 하나의 분묘야말로 / 惟玆一丘
백세토록 공경해야 할 곳이기에 / 百世攸軾
내가 이 빗돌에 명을 새겨서 / 我銘斯碑
후세에 무궁히 보이려 하노라 / 以示無極


 

[주D-001]시(詩)에서 …… 같다 : 《시경(詩經)》 소아(小雅) 차할(車舝)의 “높은 산은 누구나 우러러보게 마련이고, 큰길은 누구나 함께 걸어가게 마련이다.〔高山仰止 景行行之〕”라는 말에 대해서, 공자(孔子)가 “시에서 인을 좋아함이 이와 같다. 사람들은 큰길을 걸어가다가 힘이 다해서 계속 걸을 수 없을 때에야 중도에 그만둔다. 마찬가지로 몸이 이미 늙은 것도 잊고서 앞으로 남은 세월이 얼마 되지 않는 것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날마다 열심히 노력하다가 죽은 뒤에야 그만두어야 하는 것이다.〔詩之好仁也如此 鄕道而行 中道而廢 忘身之老也 不知年數之不足 俛焉日有孶孶 斃而後已〕”라고 평한 말이 《예기(禮記)》 표기(表記)에 나온다.
[주D-002]늙어서도 …… 사랑스럽다 : “여진백은 늙어서도 학문을 좋아하여 철저하게 이해하려고 노력하였다. 이에 대해서 정숙이 말하기를 ‘늙어서도 학문을 좋아하는 자는 더욱 사랑스럽다. 사람이 젊었을 때에는 원래 노력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노년에 이르면 의지와 근력이 쇠해지게 마련인 데다 배워도 미치지 못할 걱정이 있고 배울 햇수도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상태이다. 하지만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성인께서 말씀하지 않으셨던가. 얼마 배우지 못하고 햇수가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끝내 도를 듣지 못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呂進伯老而好學 理會直是到底 正叔謂老喜學者尤可愛 人少壯則自當勉 至於老矣 志力須倦 又慮學之不能及 又年數之不多 不曰朝聞道夕死可矣乎 學不多 年數之不足 不猶愈於終不聞乎〕”라는 말이 주희(朱熹)가 편찬한 《이정유서(二程遺書)》 권10 낙양의론(洛陽議論)에 나온다. 정숙(正叔)은 정이(程頤)의 자(字)이다.
[주D-003]정자(程子)의 …… 하였습니다 : 《근사록(近思錄)》 권8 치체류(治體類)에 나오는 정호(程顥)의 말이다. 관저(關睢)는 주 문왕(周文王)과 후비(后妃)의 덕을 찬양한 것이고, 인지(麟趾)는 후손에게까지 그 덕이 미친 것을 칭송한 것인데, 임금이 수신(修身)을 한 뒤에 먼저 문왕처럼 궁중 내부에서부터 시작해서 제가(齊家) · 치국(治國) · 평천하(平天下)의 도를 행해야만 《주관(周官)》 즉 《주례(周禮)》에 나오는 여러 가지 제도를 행할 수 있는 자격이 있게 된다는 말이다.
[주D-004]정일(精一) : 정밀하게 살피고 한결같이 지키면서 중도(中道)를 행하는 것을 말한다.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의 “인심은 위태하고 도심은 은미하니, 오직 정밀하고 한결같이 하여 그 중도를 진실로 잡아야 한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라는 말을 압축한 것이다.
[주D-005]극복(克復) : 극기복례(克己復禮)의 준말로, 자신의 사욕을 이기고 천하의 공도(公道)인 예(禮)로 복귀하는 것을 말한다. 안회(顔回)가 인(仁)에 대해서 묻자, 공자가 극기복례를 하는 것이 인이라고 일러 준 내용이 《논어》 안연(顔淵)에 나온다.
[주D-006]격치(格致) · 성정(誠正) : 《대학》의 8조목에 속하는 격물(格物) · 치지(致知) · 성의(誠意) · 정심(正心)을 가리킨다.
[주D-007]주자(朱子)가 …… 것이다 : 주희(朱熹)가 친구인 장식(張栻)에게 보낸 서한의 말을 줄여서 소개한 것인데, 《어찬주자전서(御纂朱子全書)》 권64 치도(治道)2 재부(財賦)에 답장경부(答張敬夫)의 글로 인용되어 나온다. 장남헌(張南軒)은 주희의 친구인 장식(張栻)을 가리킨다. 학자들이 그를 존경하여 남헌선생이라고 불렀다. 자(字)는 경부(敬夫)이다. 이 내용은 《어찬주자전서(御纂朱子全書)》 권64 치도(治道) 2 재부(財賦)에 ‘답장경부(答張敬夫)’의 글로 인용되어 나오는데, 포저가 중간 부분을 많이 생략하고 인용하였다. 참고로 본문과 관련된 부분의 전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내 생각에는 무엇보다도 국가 경비 예산의 명목을 재정(裁定)해서 끝내는 실속 있게 운영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분명하게 조칙을 내려서 백성의 힘이 쇠잔해진 것을 애달프게 여기고 그들에게 은택을 내릴 방안을 강구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각 주(州)와 각 현(縣)마다 백성의 전지(田地)에 1묘(畝)당 한 해의 수입이 얼마이며, 세금으로 납부하는 액수는 얼마이며, 부과한 액수 이외에 별도로 납부하는 것은 또 얼마이며, 각 주와 각 현에서 한 해에 거두어들이는 금과 곡물의 총계는 얼마이며, 각종 지출하는 비용의 총계는 얼마이며, 남는 것은 어디로 돌아가고 부족한 것은 어디에서 취하는지를 각자 구비해서 작성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는 이들 자료가 모두 모이기를 기다린 다음에 충후하고 재능과 식견이 출중한 인사 몇 사람을 뽑아, 종류별로 모아 상고하고 연구해서 대대적으로 균등하게 조절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남는 곳에서 취하고 부족한 곳에 주도록 하여, 각 주와 각 현마다 빈부의 차이가 너무 심하게 벌어지지 않게 힘써야 할 것이니, 그렇게 하면 민생의 고락(苦樂)이 또한 그다지 크게 차이가 나지는 않을 것이다. 이렇게 한다면 비록 옛사람이 정전법(井田法)을 시행해서 백성의 생활 근거를 마련해 주려고 했던 뜻을 곧장 회복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만에 하나쯤은 역시 방불하게 될 것인데, 이렇게 한 뒤에야 차마 백성을 모질게 대하지 못했던 선왕의 정치를 그런대로 시행할 수 있게 될 것이다.〔愚意 莫若因制國用之名而遂修其實 明降詔旨 哀憫民力之凋悴 而思所以膏澤之者 令逐州逐縣 各具民田一畝歲入幾何 輸稅幾何 非汎科率又幾何 州縣一歲所收金穀總計幾何 諸色支費總計幾何 有餘者歸之何許 不足者何所取之 俟其畢集 然後選忠厚通練之士數人 類會考究 而大均節之 有餘者取 不足者與 務使州縣貧富不至甚相懸 則民力之慘舒亦不至大相絶矣 是則雖未能遽復古人井地之法 而於制民之産之意 亦彷佛其萬一 如此然後先王不忍人之政 庶乎其可施也〕”
[주D-008]작사도방(作舍道傍) : 길가에 집을 지으면서 행인들에게 물어보면 의견이 각기 달라서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는 것처럼, 국가의 정책을 결정할 적에도 다른 주장들이 많아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시경》 소아(小雅) 소민(小旻)에 “집을 지으면서 행인에게 묻는 것과 같은지라, 이 때문에 결국 완성을 보지 못하도다.〔如彼築室于道謀 是用不潰于成〕”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9]명선(明善) · 성신(誠身) : 선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서 자기 몸을 참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중용장구(中庸章句)》 제 20 장에 “몸을 참되게 하는 길이 있으니, 선을 분명히 알지 못하면 몸을 참되게 하지 못할 것이다.〔誠身有道 不明乎善 不誠乎身矣〕”라는 말이 나온다.
[주D-010]천부(遷祔) : 신주를 옮겨 종묘에 합사(合祀)하는 것이다.
[주D-011]한 선제(漢宣帝)가 …… 경우 : 선제는 무제(武帝)의 아들인 여 태자(戾太子) 거(據)의 손자로서, 무제의 소자(少子)인 소제(昭帝)의 뒤를 이었다. 선제의 생부는 사황손(史皇孫)이다.
[주D-012]후한(後漢) …… 하였습니다 : 광무제가 왕실의 먼 후예로 기반도 전혀 없는 상황에서 난세를 평정하고 천하를 차지한 것은 창업한 것과 다름이 없으니, 자기의 선조를 왕으로 추존하고 제사를 올린다 해도 안 될 것이 없었을 텐데, 광무제는 원제(元帝)의 뒤를 이었다고 자처하고는 본친(本親)에 대해서는 위호(位號)도 가하지 않은 채 단지 사묘(四廟)만 세웠다. 이 일에 대해서 부친을 무시했다는 후대의 비판도 없지 않았지만, 주희(朱熹)는 오히려 광무제의 처사를 미흡하게 여기면서 “백승의 아들을 후계자로 세워 사묘를 받들게 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였다.〔立伯升之子以奉私廟 此最得之〕”라고 평한 내용이 《회암집(晦庵集)》 권47 답하숙경(答何叔京)에 나온다. 사묘(四廟)는 고조 · 증조 · 조부 · 부친의 사당이고, 백승은 광무제의 맏형인 유연(劉縯)의 자(字)이다.
[주D-013]주자(朱子)가 …… 서한 : 주희(朱熹)가 사대부의 붕당을 걱정하는 승상 유정(留正)에게 글을 보내 군자의 당을 적극 옹호하면서, “군자가 당을 이루는 것을 미워하면 안 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그 당이 되는 것을 꺼리지 말아야 할 것이요, 자기 자신이 그 당이 되는 것을 꺼리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임금까지도 이끌어서 그 당이 되게 하는 일을 꺼리지 말아야 한다.〔不惟不疾君子之爲黨 而不憚以身爲之黨 不惟不憚以身爲之黨 是又將引其君以爲黨而不憚也〕”라고 한 내용 등을 말한다.
[주D-014]초(楚)나라는 …… 띠었습니다 : 전국 시대 진(秦)나라 소왕(昭王)이 범수(范睢)에게 “내가 듣건대 초나라는 쇠칼이 날카롭고 광대의 솜씨는 졸렬하다고 하였다. 쇠칼이 날카롭다면 군사들이 용맹스러운 것이요, 광대의 솜씨가 졸렬하다면 생각이 원대한 것이니, 초나라가 원대한 생각과 용맹스러운 군사들을 이끌고 우리 진나라를 도모할까 나는 두렵다.〔吾聞楚之鐵劍利而倡優拙 夫鐵劍利則士勇 倡優拙則思慮遠 夫以遠思慮而御勇士 吾恐楚之圖秦也〕”라고 말한 내용이 《사기(史記)》 권79 범수채택열전(范睢蔡澤列傳)에 나온다.
[주D-015]완물상지(玩物喪志) : 《서경》 여오(旅獒)에 나오는 말로, 쓸데없는 일에 정신이 팔려서 자기의 본심을 잃어버리는 것을 말한다.
[주D-016]명(明)나라의 반장(叛將) : 경중명(耿仲明)과 공유덕(孔有德) 등을 말한다. 이들은 원래 가도(椵島)의 도독(都督) 모문룡(毛文龍)의 심복이었는데, 모문룡이 명나라의 경략(經略) 원숭환(袁崇煥)에게 처형당한 뒤에 부하들을 이끌고 등주(登州)로 들어가서 후금(後金)과 밀통하며 약탈을 자행하다가 명나라 군대에게 쫓긴 나머지 후금에 투항하였다.
[주D-017]월불(越紼) : 임금이 상기(喪期)에 구애받지 않고서 천지와 사직에 제사를 올리는 것을 말한다. 《예기》 왕제(王制)에 “부모의 상을 당해서 3년 동안은 직접 제사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천지와 사직의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만은 예외로서, 이때에는 영구차에 매어 놓은 줄을 넘어가서라도 일을 거행할 수 있다.〔喪三年不祭 唯祭天地社稷 爲越紼而行事〕”라는 말이 나온다.
[주D-018]권당(捲堂) : 성균관 유생들이 불만이 있을 때 일제히 수업을 거부하고 명륜당(明倫堂)을 빠져나와 동맹 휴학을 하던 일을 말하는데, 공관(空館)이라고도 한다.
[주D-019]육가(陸家) : 송(宋)나라 상산(象山) 육구연(陸九淵)과 그의 학술을 계승 발전시킨 명(明)나라 양명(陽明) 왕수인(王守仁)의 이른바 육왕학파(陸王學派)를 말한다.
[주D-020]마음과 …… 보존한다 : 임금에게 그렇게 하도록 권하면서 항상 천하의 일을 염두에 두라고 부탁한 말인데, 《회암집(晦庵集)》 권29 여조상서서(與趙尙書書)에 나온다.
[주D-021]사단칠정(四端七情) : 사단은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성품에서 우러나오는 측은지심(惻隱之心) · 수오지심(羞惡之心) · 사양지심(辭讓之心) · 시비지심(是非之心)을 말하고, 칠정은 사람의 일곱 가지 감정인 희로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欲)을 말한다.
[주D-022]맹자에서 …… 것이고 : 사람에게 선을 행할 가능성이 있음을 밝히기 위해 말한 것으로,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나온다.
[주D-023]예기(禮記)에서 …… 것입니다 : 《예기》 예운(禮運)에 나온다.
[주D-024]주자의 …… 하였습니다 : 원문은 “饒魯陳櫟至曰不願爲朱子佞臣”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송시열이 간략하게 정리하려다가 너무 생략해서 빚은 실수로서, 원래의 뜻을 독자들이 오해할 염려가 있기 때문에 《포저집》 권6 ‘유직이 기망한 것을 변론한 소〔卞柳稷欺罔疏〕’에 의하여 바로잡아 국역하였다. 요로는 주희의 제자 황간(黃幹)의 문인이고, 진력은 정우선생(定宇先生)으로 일컬어진 원(元)나라 학자로, 모두 주희의 학설을 선양하였다.
[주D-025]이통기국(理通氣局) : 이이의 독창적인 이기론으로, 서경덕(徐敬德)의 기일원론(氣一元論)을 부정하고 정주학의 이일분수설(理一分殊說)을 체계화한 것이다. 기(氣)는 유형(有形) · 유한(有限)하여 개체에 국한되지만 그 근본이 하나인 것은 이(理)가 통하기 때문이요, 이는 무형 · 무한하여 만물에 내재하지만 만 가지로 나뉘는 것은 기가 국한하기 때문이라는 뜻인데, 이이가 성혼에게 준 시 가운데 “물은 같지만 모나고 둥근 그릇에 따라 다르게 보이고, 공기는 같지만 크고 작은 병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水逐方圓器 空隨大小甁〕”라는 구절 속에 이 뜻이 잘 드러나 있다.
[주D-026]요군자무상(要君者無上) : 자기 의견을 임금에게 강요하며 임금은 안중에도 두지 않는 태도를 말한다. 《효경(孝經)》 제 11 장 오형(五刑)에 “임금에게 강요하는 것은 윗사람을 무시하는 것이요, 성인을 비방하는 것은 법도를 무시하는 것이요, 효행을 비난하는 것은 어버이를 무시하는 것이니, 이는 큰 환란을 초래하는 길이다.〔要君者無上 非聖人者無法 非孝子無親 此大亂之道也〕”라는 말이 나온다.
[주D-027]정강(靖康)의 화(禍) : 송나라 흠종(欽宗) 정강 2년(1127)에 금(金)나라 군대가 휘종(徽宗) · 흠종(欽宗) 두 황제와 황태후 · 황후 · 황태자 · 종실 등 3천 명을 포로로 잡아 데리고 간 사건을 말하는데, 이로 인해 북송(北宋)이 마침내 멸망하였다.
[주D-028]맹자가 …… 하였습니다 : 등 문공(滕文公)이 맹자에게 “제(齊)나라 사람이 설(薛) 땅에 성을 쌓으려고 한다. 내가 매우 두렵기만 한데,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라고 묻자, 맹자가 이렇게 대답한 내용이 《맹자》 양혜왕 하(梁惠王下)에 나온다.
[주D-029]정자(程子)의 …… 말 : 정이(程頤)가 72세의 나이에도 건강한 이유를 제자가 묻자, “나는 생을 잊고 욕심을 따르는 것을 부끄러워한다.〔吾恥忘生徇慾〕”라고 대답한 말이 《심경부주(心經附註)》 권1 징분질욕장(懲忿窒慾章)에 나온다.
[주D-030]성려(盛麗) : 미인을 비유한 말이다. 남녀의 운우지락(雲雨之樂)을 노래한 송옥(宋玉)의 신녀부(神女賦)에서 그 미녀의 용모를 형용하며 “성의(盛矣) 여의(麗矣)”라고 표현한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윤증(尹拯)이 지은 포저의 연보(年譜)에, 포저가 33세 되던 1611년(광해군 3) 8월에 경시관(京試官)으로 관서(關西)에 갔을 때 삼화현(三和縣)의 이름난 기녀(妓女)가 포저의 방기(房妓)가 되어 10여 일 동안이나 선생의 방에 함께 있었는데, 포저가 끝내 그녀를 가까이하지 않고는 돌아갈 즈음에 절구(絶句) 한 수를 지어 주자, 그녀가 사람들에게 “마음속으로 경복(敬服)하여 종신토록 잊을 수가 없다.”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주D-031]세상의 …… 것 : 《장자(莊子)》 천하(天下) 서론 말미에 “완전한 도술이 장차 세상의 부분적인 방술(方術)들에 의해서 분열될 위기에 놓여 있다.〔道術將爲天下裂〕”라는 명구(名句)가 나온다.
[주D-032]도(道)를 …… 만들었다 : 《회암집(晦庵集)》 권70 독양진간의유묵(讀兩陳諫議遺墨)에 “내가 일찍이 한 시대에 출현한 제현의 논을 차례로 고찰하며 지극히 타당한 것이 있는지 찾아보았더니, 오직 구산 양씨가 ‘내와 외를 분리시키고 심과 적을 나눔으로써 도를 항상 세상에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었으며, 그리하여 경세의 일 모두를 사지로 천착하는 결과를 빚고 말았다.’라고 지적한 것이 가장 근사하게 여겨졌다.〔嘗歷考一時諸賢之論 以求至當 則唯龜山楊氏指其離內外判心迹 使道常無用於天下 而經世之務皆私智之鑿者 最爲近之〕”라는 주희(朱熹)의 말이 나온다. 양씨(楊氏)는 정자(程子) 형제의 제자로, 구산선생(龜山先生)이라고 일컬어졌던 양시(楊時)를 말하는데, 사양좌(謝良佐) · 여대림(呂大臨) · 유작(游酢)과 함께 정문 사선생(程文四先生)으로 칭해진다.
[주D-033]뿌리가 …… 것 : 한유(韓愈)의 답이익서(答李翊書)에 “그대가 장차 옛 작가의 경지에 이르려고 한다면, 빨리 이루어지기를 기대해서도 안 될 것이요, 권세와 이익의 유혹에 넘어가서도 안 될 것이다. 우선 그 뿌리를 길러서 열매 맺기를 기다리고, 기름을 부어서 광채가 나기를 기대해야 할 것이니, 뿌리가 무성하게 퍼져야 열매가 여물고 기름을 부어 닦아야 광채가 나는 것이다.〔將蘄至於古之立言者 則無望其速成 無誘於勢利 養其根而竢其實 加其膏而希其光 根之茂者其實遂 膏之沃者其光曄〕”라는 말이 나온다.
[주D-034]위기지학(爲己之學) :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면서 공부하는 위인지학(爲人之學)에 반대되는 말로, 오직 자신의 덕성을 닦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을 말한다. 《논어》 헌문(憲問)에 “옛날의 학자들은 자신을 위한 학문을 하였는데, 오늘날의 학자들은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한 학문을 한다.〔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라는 공자(孔子)의 말이 나온다.
[주D-035]증민(曾閔) : 효자로 일컬어진 공자의 제자 증자(曾子)와 민자건(閔子騫)의 병칭이다.
[주D-036]책난(責難) : 어려운 일을 하도록 요구한다는 뜻으로, 신하가 임금을 성군(聖君)의 길로 적극 인도하는 것을 말한다.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자기 임금에게 하기 어려운 일을 하도록 요구하여 요순과 같은 성군이 되게 하는 것을 공손하다고 하고, 선도(善道)를 개진하여 임금의 사심(邪心)을 막는 것을 공경스럽다고 하고, 우리 임금은 해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해친다고 하는 것이다.〔責難於君謂之恭 陳善閉邪謂之敬 吾君不能謂之賊〕”라는 말이 나온다.
[주D-037]삼대(三代)의 …… 아니었네 : 《포저집》 권14 ‘윤대할 적에 구두로 진달한 계사〔輪對口陳啓辭〕’에 “자질의 아름다움은 한계가 있는 반면에 학문의 유익함은 끝이 없는 법입니다. 한(漢)나라와 당(唐)나라의 시대 이래로 임금의 자질이 아름다워서 일시적으로 정치의 안정을 이룬 때도 있었습니다마는 삼대(三代)의 경지에 미칠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삼대의 제왕이 닦았던 학문을 닦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삼대 이전의 제왕을 스스로 목표로 정하소서. 미천한 신 역시 감히 삼대 이하의 임금으로 전하에게 기대하지 않겠습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주D-038]내용이 …… 할지라도 : 《서경》의 요전(堯典) · 순전(舜典)을 이전(二典)이라 하고, 대우모(大禹謨) · 고요모(皐陶謨) · 익직(益稷)을 삼모(三謨)라 한다. 이를 합쳐서 전모(典謨)라고 하는데, 보통 요순과 같은 고대 성군의 훌륭한 정치를 말할 때 인용된다.
[주D-039]추성(鄒聖)의 …… 삼았었는데 : 맹자가 삼대(三代)의 제왕, 그중에서도 요순(堯舜)을 이상 정치의 전형으로 거론하면서 현실에 대한 처방을 제시했다는 말이다.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맹자가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고 말하면서 그때마다 요순을 일컬었다.〔孟子道性善 言必稱堯舜〕”라는 말도 있지만, 《맹자》 전편을 통해 요순을 언급한 곳이 부지기수로 나온다. 추성은 맹자를 가리킨다. 그의 고향이 추(鄒)이고 아성(亞聖)으로 칭해졌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주D-040]사설(邪說)의 재앙 : 관학(館學) 유생들이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묘(文廟) 종사(從祀)를 청하자, 영남의 유생인 유직(柳㮨) 등이 반대 상소를 올리며 저훼(詆毁)한 사건을 말한다.
[주D-041]도를 …… 바쳤으니 :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도가 있는 세상에서는 그 바른 도에 입각하여 내 몸을 바치고, 도가 없는 세상에서는 도를 위해 바른 내 몸을 바친다.〔天下有道 以道殉身 天下無道 以身殉道〕”라는 맹자의 말이 나온다

 

 

포저 연보 제3권
 부록(附錄)
시장(諡狀)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 지음

공의 증조(曾祖) 안국(安國)은 가선대부(嘉善大夫) 함경남도 병마절도사(咸鏡南道兵馬節度使)로, 순충보조 공신(純忠補祚功臣)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 한풍군(漢豊君)에 추증되었고, 증조비(曾祖妣) 여산 송씨(礪山宋氏)와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모두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다. 조부 간(侃)은 통훈대부(通訓大夫) 의빈부 도사(儀賓府都事)로,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에 추증되었고, 조비(祖妣) 의령 남씨(宜寧南氏)와 상주 김씨(尙州金氏)는 모두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고(考) 영중(瑩中)은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관상감사 세자사(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觀象監事世子師)에 추증되었고, 비(妣) 해평 윤씨(海平尹氏)는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공의 휘(諱)는 익(翼)이고, 자(字)는 비경(飛卿)이다. 호(號)는 존재(存齋)인데, 학자들이 포저(浦渚) 선생이라고 부른다. 그 선조는 풍양인(豊壤人)이다. 시조 맹(孟)은 고려 태조(太祖)를 보좌하여 삼한(三韓)을 통일한 공로로 통합개국 공신(統合開國功臣)의 훈호(勳號)를 하사받았으며, 관작(官爵)은 태사 평장사(太師平章事)에 이르렀다. 그 뒤로 700여 년을 전해 오는 동안 벼슬을 한 자손들이 계속 이어졌다. 한풍공(漢豊公)은 무과를 통해 진출하여 승지(承旨)를 역임하고 당시의 명장(名將)으로 꼽혔는데, 뒤에 계자(季子)인 풍양군(豊壤君) 경(儆)이 왜적을 토벌한 공로로 봉증(封贈)을 받았다. 의정공(議政公)은 성신(誠信)하고 곤핍(悃愊)하여 고인의 풍도가 있었는데,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김 문정공(金文正公)이 실로 그 묘에 명(銘)을 지었다. 윤 부인(尹夫人) 역시 성품이 지극하고 품행이 순후하였다. 공을 임신했을 때 가인(家人)의 꿈에 흑룡이 방 모퉁이로 날아들었는데, 그러고 얼마 뒤에 공을 낳았다. 이때가 만력(萬曆) 기묘년(1579, 선조 12) 4월 7일이었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질이 특이하여 말을 배우기도 전에 문자를 식별할 줄 알았다. 3세에 바둑돌을 배열하여 《주역(周易)》의 괘(卦) 모양을 만들었으므로 식자(識者)가 대단히 기이하게 여겼다. 5세에 글을 지을 줄 알았으며, 노는 것도 보통 아이들과는 판이하였다. 이웃집 노인이 옷을 벗어서 한곳에 놔둔 뒤에 공에게 지켜보라고 하고는 다른 곳에 갔다가 저물녘에 돌아왔는데 공은 그때까지도 그곳을 떠나지 않고 지키고 있었으니, 공의 순수하고 성실한 성격이 어릴 때부터 이미 이와 같았다. 8세에 중봉(重峯 조헌(趙憲)) 조 문열공(趙文烈公)이 직언(直言)을 하다가 배척을 당했다는 말을 듣고는 비분강개하여 소초(疏草)를 작성하였는데, 그 안에 사정(邪正)을 분명히 지적하여 진술하였으므로 여러 장로(長老)들이 경탄하며 말하기를 “사람들이 이 글을 보면 어찌 어린아이가 지었다고 말하겠는가.” 하고는 밖으로 새어 나가지 못하게 금하였다.
성동(成童 15세)의 나이에 《서경(書經)》을 읽었는데 기삼백(朞三百)과 선기옥형(璿璣玉衡)에 대한 해설을 보고는 그 즉시로 막힘없이 깨닫자, 노유(老儒)들이 모두 탄복하면서 따라갈 수 없다고 칭찬하였다. 그리고 《서경》의 홍범(洪範)을 모방해 글을 지으면서 인륜에 대해 서술하고는 그 이름을 이범(彛範)이라고 하였다. 공은 서적을 두루 섭렵하여 널리 통하였다. 그리하여 선도(禪道), 문장, 음률, 서화(書畫), 병법, 복서(卜筮) 같은 분야에도 모두 통효(通曉)하였다. 공은 또 항상 제갈 무후(諸葛武侯 제갈량(諸葛亮))와 같은 인물이 되겠다고 스스로 기약하였다.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 윤 문정공(尹文貞公)은 공의 종조고(從祖姑)의 사위이고 윤 부인(尹夫人)의 계부(季父)이다. 공이 소싯적에 그에게 가서 수학하였는데, 문정공이 공의 작품을 볼 때마다 감탄하며 말하기를 “이런 문장은 양한(兩漢) 시대의 수법으로서 천하의 기문(奇文)이라 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에는 그동안 좋아하던 문장을 모두 버리고 성리(性理)의 학문에 마음을 집중하여 순수하게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맨 먼저 사서(四書)에 대해 정밀하게 사색하고 자세히 탐구하면서 완전히 이해하지 않으면 그냥 지나가지 않으며 말하기를 “《대학(大學)》 속에는 그야말로 천고의 성현이 만들어 놓은 규모가 들어 있다. 그리고 《중용(中庸)》의 존덕성(尊德性)과 계신(戒愼) · 근독(謹獨) 공부 또한 《대학》과 공통적으로 한 가지 일일 뿐이다. 우리가 자기 몸을 바쳐 옛 학문을 함에 있어 일생 동안 노력을 경주하여 행해야 할 것으로 어찌 이것 말고 다른 것을 구해서야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지경도설(持敬圖說), 심학종방도찬(心學宗方圖贊), 원조(元朝)와 야기(夜氣) 등의 잠(箴)을 지어 밤낮으로 살피고 돌아보면서 곧바로 옛 성현을 준칙으로 삼았을 뿐 벼슬을 위한 학업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찬성공(贊成公)이 강요하여 부득이 과거에 응시하였는데 붓을 잡고는 단번에 수천 어의 글을 지으니, 고관(考官)들이 보고는 극구 감탄하며 칭찬하였다. 임인년(1602, 선조 35)에 등제(登第)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보임(補任)되었으며, 부정자(副正字)를 거쳐 관례에 따라 박사(博士)로 승진하였다. 이때 임금의 총애를 받는 재상의 아들이 등제하였는데, 동료 관원이 그를 승문원에 분관(分館)하려고 주도하였으나 공이 끝내 동의하지 않았다. 공이 벼슬길에 오른 이래로 성망(聲望)이 날로 높아졌으나 교유하는 일이 거의 없었던 데다가 당로자(當路者)들이 또 대부분 권신(權臣)의 당인(黨人)이었기 때문에 참하관(參下官)으로 6년이나 있었는데도 공을 후원해 주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시의(時議)가 애석하게 여겼다.
정미년(1607, 선조 40) 겨울에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으로 승진했다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로 이배(移拜)되었다. 무신년(1608)에 평안도 평사(平安道評事)에 임명되었다. 이때 서로(西路)에 기근이 크게 들었다. 감사(監司)가 공에게 기민(饑民)을 진휼(賑恤)하는 임무를 맡겼는데, 공이 성의를 다해 조처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구제해 살렸다. 기유년(1609, 광해군 1)에 홍문록(弘文錄)에 참록(參錄)되었다. 시강원 사서(侍講院司書)에 임명되었다가 병조 좌랑(兵曹佐郞)으로 옮겼다. 일찍이 과제(課製)로 동해무조석론(東海無潮汐論)을 지었는데,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이 문충공(李文忠公)이 이 글을 보고는 경탄하여 말하기를 “세상에 어떻게 이런 식견을 지닌 문장이 있을 수 있는가. 한번 만나 보고 싶다.”라고 하였다. 신해년(1611, 광해군 3)에 지제교(知製敎)에 선발되고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에 임명되었다. 당시에 홍문관의 소장(疏章)과 차자(箚子)는 모두 공의 손에서 나온 것이었다.
당초에 공은 정인홍(鄭仁弘)과 이이첨(李爾瞻)의 간사함에 대해서 예언한 바가 있었다. 그래서 이이첨이 누차 공과 교분을 맺고 싶어 하였으나 공은 끝내 응대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때에 와서 정인홍이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와 퇴계(退溪 이황(李滉)) 두 선생을 매우 추악하게 헐뜯으며 배척하였으므로 공이 동료 관원들과 함께 차자를 올려 변론하였는데, 이이첨이 장관(長官)의 신분으로 이의(異議)를 제기하였다. 당시에 이이첨 등의 권세가 한창 치성하였으므로 공이 좌천되어 고산도 찰방(高山道察訪)으로 나가게 되었는데, 그곳은 북관(北關)으로 통하는 대로(大路)에 위치하였다. 그곳에서 공이 법대로 시행하여 폐단을 없애자 역무(驛務)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생활이 크게 개선되었으므로 그 이야기가 지금까지도 끊이지 않고 전해 온다. 그때에 서평(西平 한준겸(韓浚謙)) 한 문익공(韓文翼公)이 감사로 있다가 공을 보고는 진심으로 열복(悅服)하며 지기(知己)로 허여하였다.
계축년(1613, 광해군 5)에 관직을 버리고 광주(廣州)의 농장으로 돌아왔다. 당시에 광해(光海)의 난정(亂政)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가운데 이이첨 등이 국구(國舅)와 대군(大君)을 무함하여 죽이고 잇따라 폐모론(廢母論)을 일으켰으며, 또 선묘(宣廟)가 승하(昇遐)할 때에 의심스러운 일이 있었다는 말도 들렸다. 이에 공이 비통하게 여기며 말하기를 “이러한데도 벼슬을 할 수 있겠는가. 나의 뜻은 이미 정해졌다.”라고 하였다. 그 뒤로 10여 년에 걸쳐 수찬, 병조 정랑(兵曹正郞), 평안 도사(平安都事), 대동 찰방(大同察訪) 등의 관직에 잇따라 임명하고, 또 조사(詔使)가 왔을 때 제술관(製述官)으로 급히 불렀으나 모두 응하지 않았다.
경신년(1620, 광해군 12)에 한 문익공이 도원수(都元帥)가 된 뒤에 계청(啓請)하여 공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삼고 3년 동안이나 계속 글을 보내 수락해 줄 것을 간절히 요청하였다. 그러나 공이 누차 서한을 보내 극력 사양하였는데, 그 내용 중에 “옛날 범 문정(范文正 범중엄(范仲淹))이 섬서(陝西)를 안무(安撫)하게 되었을 적에 구양공(歐陽公 구양수(歐陽脩))을 참좌(參佐)로 지명하여 부르자, 구양공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물러남은 함께하는 것이 좋으나 나아감은 함께하지 않는 것이 좋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동안 내가 공과 함께 10년 동안 초야에서 지내면서 물러남을 이미 함께하였으니, 이제 나아감은 함께하지 않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습니까.”라는 말이 있었다. 이에 문익공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교결(皎潔)한 몸을 이 시대에 더럽히려 하지 않으니 내가 어떻게 감히 강요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때 적신(賊臣)이 잇따라 대옥(大獄)을 일으키며 자기와 의견을 달리하는 이들의 죄를 조작하여 처벌하였다. 이에 친척들이 화를 당할까 두려워한 나머지 공에게 한번 출사(出仕)하라고 많이 권하였으나, 공은 빙그레 웃으면서 말하기를 “화복(禍福)은 명(命)에 달려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기전(畿甸)에 있는 농장이 서울과 가까운 것을 더욱 싫어하여 호서(湖西) 신창현(新昌縣) 도고산(道高山) 아래로 옮겨 우거(寓居)하였는데, 남들은 견디기 어려워하는 기한(飢寒)과 곤고(困苦)의 근심 속에서도 담박하게 지내면서 오직 학문에 정신을 집중하고 경의(經義)를 탐구하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았다. 당시에 승지 박지계(朴知誡)와 좌랑 권득기(權得己)도 모두 벼슬하지 않고 집에 있었으므로 서로 글을 왕복하며 토론을 벌이곤 하였다. 그 시대가 비록 하늘과 땅의 기운이 서로 막혀 통하지 않는 때이긴 하였지만, 원근의 사람들이 모두 공경하고 사모할 줄을 알고서 이륜(彛倫)이 공 덕분에 추락하지 않게 되었다고 하였다.
계해년(1623, 인조 원년) 3월에 인조대왕(仁祖大王)이 반정하였다. 거의(擧義)한 제공(諸公)이 초정(初政)을 행하기에 앞서 “전조(銓曹)에는 당대의 첫째가는 자를 등용해야 한다.”고 의논하고는 맨 먼저 공을 이조 좌랑으로 삼았다. 공이 유신(維新)하는 초기를 당하여 분연히 일어나 이 일을 자신의 임무로 삼고는 악인을 배격하고 선인을 선양하며 유능한 인재를 올려 주고 무능한 자를 축출하면서 각각 재질에 따라 선발하여 녹용(錄用)하였는데, 이 모두가 공론(公論)에 부합하였다. 일찍이 윤대(輪對)에 들어가서 아뢰기를 “자질의 아름다움은 한계가 있는 반면에 학문의 유익함은 한계가 없습니다. 한당(漢唐) 이후의 임금 중에 아름다운 자질을 발휘하여 정치의 안정을 이룬 사람이 간혹 있었습니다만 삼대(三代)의 경지에는 미치지 못하였는데,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학문의 공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학문에 힘을 기울여 단연코 삼대를 자신의 목표로 삼으소서.”라고 하니, 상이 경청(警聽)하였다.
송강(松江) 정 상공 철(鄭相公澈)이 과거 선조(先朝) 때에 무함을 받고 삭관(削官)을 당했는데, 이때에 와서 그 자제가 억울하다고 호소하자 공이 극력 신변(伸辨)해 주니 상이 받아들였다. 폐세자(廢世子)가 위리(圍籬)를 뚫고 도망치다가 붙잡힌 사건이 발생하자, 조정이 자진(自盡)하라고 명을 내렸다. 이에 영상 완평(完平 이원익(李元翼)) 이공(李公), 집의 이공 준(李公埈), 장령 윤공 황(尹公煌)이 안 된다고 반대하니 대론(臺論)이 이들을 공척(攻斥)하려고 하였는데, 공이 공척하면 안 된다고 극력 주장하여 마침내 그 논의가 중지되었다. 얼마 뒤에 승문원 제술관(承文院製述官)을 겸대하고 명(明)나라 조정에 보내는 자문(咨文)과 게첩(揭帖)을 지어 응수하였다.
처음에 이상(李相 이원익)이 대동법(大同法)의 시행을 건의하였는데, 이를 기전(畿甸)에 시험 실시하자 백성들이 매우 편하게 여겼다. 그러다가 이때에 와서 다시 전라 · 경상 · 충청 · 강원 등 4개 도(道)에 시행할 것을 청하면서 공에게 재생선혜청 낭청(裁省宣惠郞廳)의 직책을 겸하게 하여 그 일을 전담토록 하였다. 공은 오래도록 시골에 있으면서 민간의 폐해를 익히 보아 왔기 때문에 민생을 구제하는 방법으로는 이 대동법보다 좋은 것이 없다고 항상 말하였다. 그래서 정성을 다해 헤아리고 강구하여 절목(節目)을 정했는데, 이 법이 완성되자 사람들이 유언비어를 퍼뜨려 선동하는가 하면 당로자(當路者)가 또 저지하기까지 하였다. 이에 공이 입대(入對)하여 극력 진달하는 한편 또 이에 대한 소장을 올려 논하였는데, 그 대략에,
“우리나라의 재정 정책은 법도가 없어서 전세(田稅)는 가볍고 공물(貢物)은 무겁습니다. 전세의 제도를 보건대 1결(結)당 하등전(下等田)에는 4두(斗)를 부과하고 중등전에는 6두를 부과합니다. 1결의 농지에는 볍씨를 30두에서 40두까지 파종할 수가 있는데, 토질이 비옥하고 풍년이 들었을 경우에는 곡물을 40석(石)에서 50석까지 수확할 수 있고, 토질이 보통이고 평년작일 경우에는 20석에서 30석까지 수확할 수 있으니, 1결에 4두를 부과하는 것은 너무 가볍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각사(各司)에서 쓰는 잡물(雜物)을 모두 열읍(列邑)에 나누어 배정하여 민결(民結)에서 받아들이도록 하고 있는데, 이른바 공물이라고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이 밖에 또 본도(本道)의 감영(監營) · 병영(兵營) · 수영(水營) 및 본읍(本邑)에서 쓰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누어 배정하는 품목 가운데에는 더러 토산물(土産物)이 아닌 경우도 있고, 또 토산물이라 할지라도 백성들이 직접 납부하지 못하고 반드시 방납(防納)하는 사람들을 통하게 되어 있는데, 이들이 청탁하여 대납(代納)을 하고는 매번 몇 배나 되는 값을 징수하곤 하니, 이것이 바로 공물의 폐단으로서 백성들에게 걱정을 끼치는 점이라고 하겠습니다. 여기에 또 탐관오리가 연줄을 타고 침탈하는가 하면, 권세 있는 무리들이 자기들의 부담을 지지 않고 힘없는 백성들에게 떠넘기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이처럼 갖가지로 피해를 받고 있는데도 국가의 재정은 세입이 적기 때문에 항상 부족하게 되는 걱정을 안고 있으니, 이는 바로 법제가 좋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지금 이 선혜청의 법이야말로 고대의 제도와 가장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결(田結)에 부과하는 것을 모두 미곡(米穀)과 포목(布木)으로 하고, 중외(中外)의 수용(需用)도 이것으로 공급할 수 있으며, 여기에 또 쓰고 남아 저축한 것으로 흉년을 대비할 수 있습니다. 징수하는 수량은 정전법(井田法)의 10분의 1보다 가벼워 1결에 부과하는 것이 16두에 불과한데 그 속에는 운송하는 비용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전세와 삼수량(三手糧) 등을 모두 합친다 해도 20여 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1결당 1년의 소득을 보면 토질이 보통이고 평년작일 경우 최소한 20석에서 30석은 거둘 수가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20여 두의 미곡을 부과한다 해도 10분의 1이 채 되지 않으니, 백성들에게 거두어들이는 것이 가볍다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과거에는 경외(京外)의 상사(上司)와 본읍(本邑)에 물건을 바칠 때에 그 품질이 기준에 벗어나지 않는 경우가 드물었으므로 퇴짜를 맞을까 걱정한 나머지 반드시 또 뇌물을 바치곤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물건 하나를 납부할 적에도 중간에 쓸데없이 들어가는 비용이 바치는 물건 값보다 더 많았습니다. 그리하여 한 해가 다 가도록 분주히 돌아다니다 보면 자연히 농사를 그만두게 되는 사태에까지 이르곤 하였습니다. 이처럼 백성들의 재물을 모두 고갈시킨 위에 농사지을 힘까지 피폐하게 만들었으니, 백성들이 곤궁해진 것 또한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왕자(王者)의 정치는 공평해지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런데 한 도(道) 안의 부역을 보면 대읍(大邑)은 항상 부담이 가볍고 소읍(小邑)은 항상 무거우며, 크기가 서로 비슷한 고을 중에서도 이곳은 무겁고 저곳은 가벼운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경관(京官)의 경우는 비록 대신(大臣)이라 할지라도 그 녹봉이 많지 않은 반면에 외관(外官)의 경우는 받는 것이 한도가 없습니다. 이 대동법이 한번 확정되면 부과하는 액수가 경감되는 것은 물론이요, 1년에 두 차례 운송하여 납부하는 것 외에 더는 침탈하고 독촉하는 소란이 없어져서 쓸데없는 비용이 들어가지 않을 것이며, 또 힘을 다해서 농사일에 전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방납하는 무리가 교활하게 재주를 부릴 수 없게 되고, 권세를 부리는 자들이 부역을 면하려고 도모할 수 없게 되고, 대읍과 소읍이 각각 너무 넘치고 너무 부족한 폐단이 없어질 것이니, 어찌 공평한 정치가 되지 않겠습니까. 또한 1결에 20여 두를 부과할 경우 풍년이 든 해에는 납부하기가 매우 쉬울 것이요, 흉년이 들면 또 감면해 줄 수도 있습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왜란(倭亂)을 겪은 뒤로 전적(田籍 토지 대장)이 흩어져 없어진 것은 제도(諸道)가 똑같습니다마는, 그런 와중에도 병화를 입지 않은 덕분에 예전의 전적이 그대로 보존된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란을 겪지 않은 지역은 전제(田制)가 매우 치밀하게 행해져 전결이 많은 반면, 왜란을 겪은 지역은 전제가 엉성하게 행해져 전결이 매우 적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세(賦稅)가 무거워서 감당할 수 없는 사람도 있고, 잘 먹고 살면서 부세를 내지 않는 사람도 있고, 부세를 내긴 하지만 부담이 매우 가벼운 사람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 모든 토지를 대상으로 양전(量田 토지 조사)을 다시 행해서 결복(結卜)의 많고 적은 불균형이 일체 균등해지도록 한 뒤에야 백성들의 부담이 균일하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현재 4도(道)의 전결 35만 결에서 납부하는 미곡이 35만 석 내지 36만 석인데, 이 속에 포함된 운수 비용과 중외(中外)의 경비를 제외하고도 남는 것이 12만 석 내지 13만 석에 이를 것이니 이만하면 매우 풍족하다고 할 만합니다. 후일에 양전을 해서 얻은 전결이 비록 50만에서 60만 결에 이른다고 하더라도 백성들에게 부과하는 총액은 35만 석 내지 36만 석을 넘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니, 그렇게 하면 1결당 납부하는 두(斗)의 수량을 줄여 줄 수 있어서 부세가 더욱 가벼워질 것입니다. 전제가 일단 균등해지고 부역도 이에 따라 가벼워지면 백성들이 어찌 안정된 생활 속에서 생업을 즐길 수 있게 되지 않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뜻을 굳게 정하여 힘껏 행하시고 근거 없는 주장에 동요되지 마소서.
그런데 맹자(孟子)는 말하기를 ‘한갓 법만 가지고는 저절로 행해지지 않는 법이다.’라고 하였고,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관저(關睢)와 인지(麟趾)의 아름다운 뜻을 지닌 뒤에야 《주관(周官)》의 법도를 행할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대개 이러한 덕을 반드시 갖추어야만 비로소 이러한 정치를 행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전하의 총명한 지혜와 관후한 인덕이야말로 어느 임금보다도 탁월하니 제왕의 자질을 지니셨다고 이를 만합니다. 신이 우려하는 것은 단지 전하의 뜻이 혹시라도 확고하게 세워지지 못한 탓으로 고대의 제왕을 자신의 목표로 삼지 못한 채 혹시라도 그저 후세의 임금 정도의 일로 자처하고 계시지는 않은가 하는 점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심술(心術)의 은미한 사이로부터 호령을 발하고 행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거의 대부분이 고식적이고 구차하게 되고 말 것이니, 우리 동방에 성대한 정치와 교화가 펼쳐지리라는 희망을 가지기 어려워질 듯싶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에 따라 선과 악이 나뉘고 이와 함께 세도(世道)가 다스려지고 어지러워지는 기미에 대해 깊이 연구하소서. 그리하여 현인을 가까이하고 학문을 힘쓰는 데 더욱 노력하시는 한편, 날마다 유정유일(惟精惟一) · 극기복례(克己復禮) · 격물치지(格物致知) · 성의정심(誠意正心)의 공부에 종사하여 정치를 행하는 근본으로 삼으신다면 옛날 제왕의 성대한 업적을 다시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해(利害) 관계를 자세히 설명하여 나의 의혹을 풀어 주니 참으로 기쁘다.”라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대동법이 마침내 폐지되지 않을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호당(湖堂)에 선발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그 뒤에 이조 정랑으로 승진하면서 교서관 교리(校書館校理)와 혜민서 의학교수(惠民署醫學敎授)와 훈련도감 도청(訓鍊都監都廳)을 겸하였다. 겨울에 명을 받들고 양호(兩湖)에 가서 대동법의 이해(利害)에 대해 두루 물어보고 와서 복명(復命)하고는 또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양호의 민심을 자세히 살펴보고 나서 이 대동법이야말로 오늘날의 급선무로서 이 법이 아니면 나라를 다스릴 길이 없다는 사실을 더욱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민생에 피해를 끼치는 것 중에 큰 것이 세 가지 있는데, 방납인(防納人)과 각사(各司)의 하인(下人)이 침포(侵暴)하는 것, 탐관오리가 착취하는 것, 위세 부리는 자들이 부역에 응하지 않고 힘없는 백성에게 떠넘기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 세 가지 해독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위에 요순(堯舜)과 같은 성군이 있다 하더라도 민생은 여전히 도탄에 빠져 허덕일 것입니다.”
하였다.
갑자년(1624, 인조 2) 정월에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상이 공주(公州)로 행행(行幸)하였는데 공이 호종(扈從)하였다. 역적이 평정되어 대가(大駕)가 도성으로 돌아온 뒤에 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에 임명되었다가 곧이어 사인(舍人)으로 승진하였는데, 전후에 걸쳐 이 직책을 맡은 것이 네 차례였다. 여름에 전한(典翰)과 사간(司諫)과 응교(應敎)를 거쳐 직제학(直提學)으로 승진하였는데, 인조조(仁祖朝)에서 직학사(直學士)는 오직 공 한 사람뿐이었다.
이때 상이 바야흐로 《대학(大學)》과 《논어(論語)》를 강독 중이었으므로 공이 상소하여 진계(陳戒)하였는데, 그 대략에,
“《논어》는 성인의 언행을 기록한 책이고, 《대학》은 선왕(先王)이 수기치인(修己治人)하던 법을 성인이 설한 것이니, 이 두 책이야말로 만세토록 학문을 하고 정치를 하는 대법(大法)이라고 할 것입니다. 전하께서 임어(臨御)하신 이래로 맨 먼저 이 두 책을 강독하시면서 변별하고 분석하는 것이 매우 정밀할 뿐만 아니라 이해하고 깨닫는 것이 매우 빠르시니, 전하의 총명은 범인이 따라갈 수 있는 바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다만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는 단연코 성현의 학문을 자신의 임무로 여기면서 몸을 닦고 일을 처리할 적에 성현을 법도로 삼겠다고 뜻을 두고 계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혹시라도 ‘나의 자질이 원래 뛰어난 만큼 한결같이 옛 성현을 본받을 필요는 없는데, 경연을 열어 학문을 강론하는 것도 단지 고사(古事)에 비추어 조금 보탬이 되게 하려는 것일 뿐이다.’라고 생각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전하께서 참으로 성현의 학문을 자신의 임무로 여기고 계신다면, 그 규모와 통로, 방법과 순서가 모두 두 책 안에 구비되어 있으니, 온축(蘊蓄)된 그 의리를 연구하여 몸과 마음으로 날마다 쓰는 사이에서 자세히 살피시어 강론한 그 도리를 실천할 수 있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한다면 은현(隱顯)과 표리(表裏) 모두가 명백하고 순수해져 정령(政令)을 베풀고 사업을 행하는 사이에 천지의 조화처럼 대공지정(大公至正)하지 않은 것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성현의 사업을 내가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그저 내 의견대로 하면 그만이다.’라고 하신다면, 이미 높고 원대한 뜻이 없어서 반드시 날로 새로워지는 공이 없게 된 나머지 지금은 범하지 않던 일도 다른 날에는 혹 범하는 결과를 면치 못할 수도 있고, 지금은 잘하던 일도 다른 날에는 혹 잘못하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전하께서 후일에 세우는 공업(功業)이 높게 되느냐 낮게 되느냐 하는 것은 바로 오늘날 뜻을 크게 세우느냐 작게 세우느냐 하는 데에 달려 있다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가납(嘉納)하였다.
정언(正言) 홍호(洪鎬)가 박승종(朴承宗)의 죽음을 표창하고 적몰(籍沒)한 가산을 되돌려 줄 것을 청하니, 헌부(憲府)가 탄핵하며 그의 파직을 청하였다. 이에 공이 동료와 함께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그의 말이 망녕되기는 합니다만, 마음속에 품은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진달드려야 한다는 신하의 도리로 볼 때에는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만약 그의 말이 망녕되다고 하여 죄를 준다면, 말을 망녕되게 하지 않는 자들까지도 진언하는 것을 어렵게 여기지 않을까 삼가 걱정됩니다.”라고 하니, 상이 비답하기를 “박승종이 폐모론(廢母論)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은밀히 사주하여 옥사를 일으킨 점에 있어서는 이이첨(李爾瞻)과 다름이 없다. 그대들은 자세히 알지도 못하면서 이런 말을 하는가.”라고 하였다. 공이 동료와 함께 대죄(待罪)하니, 상이 본직(本職)을 체직하고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임명하였다. 겨울에 다시 전한에 임명하자,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뒤이어 직제학을 거쳐 통정대부(通政大夫) 동부승지로 승진했다가 얼마 뒤에 우부승지로 승진하였다.
선혜청이 계청(啓請)하여 공을 부제조(副提調)로 삼고는 대동법에 관한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대동법을 처음 정할 적에는 1결당 미곡 16두를 거두게 하고, 경외(京外)의 수요와 비용도 모두 그 속에 포함시켰다. 그런데 그 뒤에 단지 10두만 거두어 경중(京中)의 공물(貢物)의 비용으로 쓰게 하고, 외방의 수요는 우선 옛 관례를 그대로 따르게 하였으므로 그 사이에 병폐가 많이 발생하였다. 이에 공이 별도로 미곡 5두를 거두어 외방의 수요에 충당할 수 있도록 법제화할 것을 청하는 한편, 또 아뢰기를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무엇보다도 분명하게 조칙(詔勅)을 내려 각 주(州)와 현(縣)으로 하여금 거두어들이는 금(金)과 곡물의 총계는 얼마이며 제읍(諸邑)에서 지출하는 비용의 총계는 얼마인지를 각자 구비해서 제출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는 이들 자료를 종류별로 모아 상고하고 연구하여 대대적으로 균등하게 조절함으로써 각 주와 현마다 빈부의 차이가 너무 심하게 벌어지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백성들의 고락(苦樂)이 또한 그다지 크게 차이가 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오늘날 백성을 기르는 정사 역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니, 이제 한결같이 주자가 말한 대로 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대동법을 몇 년 동안 시행해서 상당히 효과를 거두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이의를 제기하는 자들이 많아졌으므로 이상(李相 이원익(李元翼))도 더 이상 당초의 뜻을 견지하지 못하고 마침내 위에 아뢰어 혁파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공이 또 상소하여 쟁론하였는데, 그 대략에,
“대저 법을 만들어 제치(制治)하는 일이 어찌 보통 사람의 생각으로 미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높고 원대한 식견과 넓고 큰 포부를 지니고 있지 않으면 이런 일에 참여할 수가 없는 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옛날에 성현과 호걸들이 법을 만들 적에도 처음에는 뭇사람들의 의심을 받게 마련이었습니다. 의심을 받을 뿐만 아니라 이 법을 싫어하는 자가 꼭 없다고 할 수도 없었을 것이고, 이와 함께 이 법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폐단이 나오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현과 호걸들은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홀로 보고서, 이 법이 유리하고 편리한 만큼 반드시 백성을 구제할 수 있고 나라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뭇사람들의 말에 동요되는 일 없이 아무런 의심도 품지 않고 시행하여 천하의 사업을 성취하고 천하의 정치를 안정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법을 제정하는 초기에 이해의 소재를 분명히 파악하지 못하는가 하면, 이미 시행한 뒤에 또 뭇사람들의 말에 동요된 나머지 작사도방(作舍道傍)하는 것처럼 금방 착수했다가 금방 그만두는 식이 된다면, 작은 일도 해낼 수 없을 것인데 하물며 국가의 안정된 정치를 이루어 낼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으나, 상이 이미 혁파한 일을 다시 의논할 수는 없다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상이 공의 상소를 보고는 탄식하며 말하기를 “우리와 같은 무리는 실로 조 승지의 죄인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2월에 체직되어 형조 참의(刑曹參議)가 되었다. 4월에 다시 우부승지가 되었다가 얼마 뒤에 좌부승지로 승진하였으며, 명을 받들고 개성부(開城府)에 가서 조사(詔使)를 문후(問候)하였다. 상이 재이(災異)로 인해 하교하여 구언(求言)을 하자, 공이 유지(有旨)에 응하여 수천 언의 봉사(封事)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전하께서는 궁리(窮理)하고 격물(格物)하는 학문에 힘쓰지 않으면 안 되고, 관대하게 용납하는 도량을 키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경연(經筵)에 임하여 강독할 때에도 그저 관례적으로 옛 규례를 따르는 일로 치부하지 마시고, 실제로 선을 분명히 알아 몸을 참되게 하는 경지에 이르도록 힘을 쓰소서. 그리고 반드시 사리에 통달하고 성격이 강직하여 과감하게 직간을 하면서 용안(龍顔)을 범할 수 있는 자를 구하여 언책(言責)의 자리에 있게 하고, 뜻과 성실함과 지혜를 지닌 호걸의 인재를 구하여 당세의 임무를 맡겨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백성을 병들게 하는 일을 대략 헤아려 보건대 공물을 방납하게 하는 병폐, 탐관오리가 착취하는 병폐, 대읍과 소읍 및 권세 부리는 호족과 힘없는 평민 사이의 부역이 불균등한 병폐, 전결의 경중(輕重)이 일정하지 않은 데 따른 병폐, 군병에게 도고(逃故)의 사태가 발생할 경우에 족린(族隣)을 마구 침해하는 병폐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분발하시어 폐정(弊政)을 개혁하고 백성을 구제하겠다는 마음을 내소서. 그리하여 이해(利害)를 따져 법을 만들어서 백성들이 수화(水火)의 고통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해 주소서.
그리고 호패법(號牌法)으로 말하면 당초에 왕자(王者)의 아름다운 정사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단지 한정(閑丁)을 얻어서 궐액을 보충할 목적으로 만든 것일 뿐인데, 대처하기 어려운 일이 허다히 발생하고 있으니 차라리 이 법의 시행을 우선 정지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 대신 속오군(束伍軍) 제도를 다시 복구하여 궐액을 보충하고 군액(軍額)을 늘리는 한편 그들의 부역을 덜어 주면서 때때로 군사 훈련을 받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와 함께 국내의 장정들을 대상으로 유직(有職) · 무직(無職)과 양인(良人) · 천인(賤人)을 막론하고 모두 한 말씩 미곡을 거둔 뒤에 위졸(衛卒)의 보인(保人)과 솔정(率丁)을 모두 군호(軍戶)에 편입시켜 그들에게 그 미곡을 지급하여 보내게 하면, 중외(中外)의 병력이 그런대로 충족되면서 이에 따른 각종 폐단도 자연히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였으나,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에 호패법을 새로 시행하는 과정에서 이 법을 범하여 사형을 당하는 백성들이 매우 많았다. 이에 공이 상주(上奏)하여 아뢰기를, “옛날에 성왕(聖王)이 주참(誅斬)하는 형벌을 만든 목적은 그 죄가 크고 극악한 자를 처형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나머지는 각각 정범(情犯)의 경중에 따라 처벌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법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주참하는 형벌을 적용하기까지 하니, 이 또한 너무 중하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만물이 나서 자라는 계절인 봄과 여름에 백성의 목숨을 많이 뺏는 것은 선왕의 뜻에 비추어 볼 때에도 삼가 어긋나는 점이 있을 듯하니, 사목(事目) 중에 주참의 조항을 감사정죄(減死定罪)로 개정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본청(本廳)에 내려 보내 의논하게 하였으나 저지되어 시행되지 못하였다.
6월에 우승지로 승진했다가 얼마 뒤에 다시 좌승지로 승진하였다. 경연에 나아갈 때마다 반드시 성인의 학문과 선왕의 정사를 상에게 권면하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떻게 하면 조정이 화합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자, 공이 대답하기를 “이른바 화합이라는 것은 구차하게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정의 일 처리가 한결같이 공정하게 이루어지면 굳이 화합하려고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저절로 화합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오래도록 근밀(近密)한 자리에 있으면서 일마다 직간(直諫)하였으며, 교명(敎命) 중에 불가한 점이 있으면 번번이 봉환(封還)하곤 하였다.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들이 공이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말 머리 앞에서 매번 호소하곤 하였는데, 그럴 때면 공이 자세히 살핀 다음에 진계(陳啓)해서 억울함을 풀어 준 경우가 많았다. 어떤 죄인이 법률상 사형에 해당되지 않는데도 특별히 사율(死律)을 적용받자, 공이 법을 견지하며 논주(論奏)하고는 형장(刑場)으로 뒤쫓아 달려가서 사형 집행을 막으니, 도성 사람들이 차탄(嗟歎)하였다.
병인년(1626, 인조 4) 봄에 상이 인헌왕후(仁獻王后)의 상을 당하였다.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김 선생이 입경(入京)하여 위문하고는 즉시 시골로 돌아가려고 하자, 공이 상주하여 아뢰기를 “오늘날의 숙덕(宿德)으로는 김장생보다 나은 사람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가 산림(山林)에 있다고 할지라도 응당 불러들여야 할 것인데, 지금 올라왔다가 위문하는 일을 끝내자마자 돌아가려고 합니다. 현인을 욕심내고 덕을 좋아해야 하는 전하의 도리로 볼 때, 그가 가든 말든 방임해 둔 채 떠났는지도 몰라서야 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6월에 승진하여 도승지에 임명되었다. 공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그대의 청검(淸儉)과 재학(才學)으로 볼 때 진실로 이 직임에 합당하니 사직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당시에 승군(僧軍)을 동원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쌓으니, 승려들이 매우 원망하며 괴로워하였다. 공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지금 그들의 노고에 보답하고 그들의 마음을 위로해 줄 수 있는 길은 오직 그들의 환속(還俗)을 허락해 주고 그들에게 군역(軍役)을 배정하지 말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승려가 된 것은 본래 군역을 피하기 위해서이니, 이제 환속을 허락하고 군역을 배정하지 말게 하면 그들 모두가 반드시 즐거운 마음으로 환속하려 할 것입니다. 그들 자신은 군역에 배정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장가들어 자식을 낳게 되면, 10여 년 후에는 군액이 반드시 늘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예로부터 세도(世道)를 걱정하는 이들은 이단(異端)이 치성(熾盛)하여 백성에게 해를 끼칠까 항상 우려하였는데, 지금 그렇게 하면 그들을 정상인으로 만들어 정상적인 생활을 하며 부역에 응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왕자(王者)의 정치는 밖에 광부(曠夫)가 없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 그들로 하여금 가정을 이루는 즐거움을 누리게 하여 살 곳을 잃은 백성들이 되지 않게 해 준다면 국가에 유익한 점이 또 많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상이 이 건의를 조정에 내렸으나 폐기되고 시행되지 않았다.
7월에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에 발탁되었다.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우비(優批)를 내리며 허락하지 않았다. 또 상소하여 서쪽 변방의 사의(事宜)에 대해 진달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듣건대 서쪽 지방이 육지는 심한 바람으로 재해를 입고 해변은 바닷물이 넘치는 재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의주(義州)에서 숙천(肅川)에 이르는 6, 7일이 걸리는 노정(路程)의 해당 지역에 재해를 입은 전지(田地)가 몇 만 결인지 모르고 그 가호(家戶)가 몇 천 호인지 모른다 하니, 신의 생각에는 그곳의 부담을 전액 감면해 주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옛사람 중에는 기근을 계기로 해서 군병을 모집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만약 이때를 당하여 장정을 불러 모아 관청에서 요포(料布)를 지급한다면, 응모(應募)하는 자들이 필시 많아서 수천 내지 수만 병력을 앉아서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을 대오(隊伍)로 편성하여 요해지(要害地)에 주둔시키고, 금년에 수병(戍兵)으로 편입될 남쪽 지방의 병력을 폐지하는 대신 그들을 먹일 식량으로 이들을 먹이도록 하는 한편, 남쪽 지방에서 전세(田稅)로 바치는 포목 가운데 수병에게 지급할 것들을 그대로 바쳐서 들여보내게 한 뒤에 반절은 모집한 군병들에게 지급하고 나머지 반절은 남겨 두었다가 내년에 둔전(屯田)하는 비용으로 쓰게 했으면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굶주리는 백성들이 살아날 수 있음은 물론 변방의 방비도 완전해질 수 있으며, 남쪽의 병력도 번거롭게 징발하는 폐단을 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먹고살기 위해 우리나라로 넘어온 요동(遼東) 백성들이 남녀를 합쳐 거의 20만 내지 30만 명에 이르고 있는데, 만약 양식을 계속 대줄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계속 대주지 못하면 반드시 변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들을 내지로 옮겨 여러 고을에 분산 수용해서 생계를 세우게 한다면, 변란이 일어날 근심을 해소할 수도 있고 수십만 명에 달하는 중국 백성의 목숨을 살릴 수도 있으며 평안도 한 지방의 힘을 덜어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중신(重臣)을 파견하여 지성으로 구제해 살리겠다는 뜻을 도독(都督)에게 말하게 하고, 또 요동 백성을 효유(曉諭)하여 이러한 사실을 모두 알게 한다면 당연히 따르지 않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노적(奴賊)의 정상을 살펴보건대 우려할 만한 점이 많으니, 변고에 대비할 방책을 어찌 조금이라도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의주(義州)는 성곽이 견고하고 병력도 많으니 지켜낼 수 있겠지만, 창성(昌城)과 삭주(朔州) 등의 진보(鎭堡)는 병력도 미약하고 식량도 부족하니 비록 유능한 장수가 있다고 하더라도 필시 지켜낼 수가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원위(元魏)가 활대(滑臺)를 수비하던 병력을 철수시켰던 계책처럼, 그 지역을 잠시 비우고 물러나 내지의 요해지를 지키다가 내년 봄이 되기를 기다려 진보로 돌아가 둔전을 설치해서 성곽도 보수하고 식량도 모으는 계책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비국(備局)에 내려 의논하게 하였으나 채용되지 않았다.
이에 공이 또 상소하여 아뢰기를 “이 계책이야말로 눈앞에 닥친 위급한 환란을 해소할 수 있고, 수십만 명의 목숨을 살릴 수 있고, 우리나라를 재건해 준 중국의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고, 취렴(聚斂)하고 전수(轉輸)하는 폐단을 줄일 수 있고, 관서(關西)의 백성을 보존할 수가 있습니다. 한번 시행하기만 하면 많은 이익을 거둘 수가 있으니, 이보다 좋은 계책은 더 없겠기에 다시 번거롭게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상이 다시 의논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 계책이 바로 시행되지 않는 사이에 요동 백성들은 이미 내지로 흘러 들어왔고, 그다음 해에는 창성과 삭주 등의 지역이 공의 말대로 노병(虜兵)에게 도륙(屠戮)을 당하고 말았다.
8월에 어버이 봉양을 위해 청하여 개성 유수(開城留守)가 되었다. 오로지 인서(仁恕) 위주로 정사를 행하면서 대체(大體)를 견지하려고 노력하였으며, 부세(賦稅)를 견감하고 적체된 옥사(獄事)를 처리하는 한편, 백성에게 해를 끼치는 간교하고 교활한 자들은 조금도 용서 없이 치죄(治罪)하였다.
정묘년(1627, 인조 5) 정월에 후금(後金)의 군대가 침입하자 상이 강도(江都)로 행행(行幸)하였다. 공이 선박을 수집하여 사녀(士女)들을 모조리 섬으로 피신시키고는 홀로 편비(褊裨) 10여 명과 함께 경내(境內)에 머물러 있다가, 적이 물러가자 강도로 달려가 문후(問候)하였다. 공은 강화(講和)를 믿을 수 없는 만큼 비어(備禦)할 대책을 늦추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상소하여 아뢰기를 “서로(西路)를 막아 지킬 계책을 세우는 일이야말로 매우 긴급한 일입니다. 황주(黃州)에서 경성(京城)까지 그 사이에 지킬 만한 성이 있는 곳은 오직 평산(平山)뿐입니다. 따라서 평산이야말로 경성을 지키는 울타리라고 할 것이니, 이곳을 버리고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옳은 계책이 아닙니다. 평산성은 험고한 데다 대로에 위치해 있는 만큼 적으로서는 반드시 쟁취해야 할 곳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성을 굳게 지킨다면, 적이 감히 이 성을 등 뒤에 둔 채 경성으로 오는 일은 결코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은 1만여 명의 병력이 없으면 지킬 수가 없습니다. 신이 맡고 있는 개성부의 군병 2000여 명에 평산의 병민(兵民)을 모두 합치고 여기에 또 근방에 있는 경기(京畿)와 해서(海西)의 군병을 보태어 도합 1만여 명의 병력을 확보한 뒤에 성곽을 수선하고 보전해 지킬 계획을 세운다면, 경성을 막아 주는 울타리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고는 이어서 수비할 방략(方略)을 계획하여 올렸으나, 조정이 제대로 채용하지 못하였다.
12월에 대사간으로 부름을 받고 조정에 돌아왔다. 무진년(1628, 인조 6) 정월에 체직되어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이때 소무(昭武)와 영사(寧社)의 두 공신(功臣)을 책훈(策勳)할 적에 함부로 참록(參錄)하여 불공정하게 처리한 경우가 많았으므로 차자를 올려 논하였으나, 상이 이미 감정(勘定)한 일이라고 하여 따르지 않았다. 이에 공이 또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선하지 못한 일인 줄 알면 속히 고쳐서 선한 쪽으로 따르는 것이 바로 천하의 공리(公理)입니다. 임금이 정치를 행하는 것부터 학자가 자기 몸을 닦고 범인(凡人)이 일을 행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러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만약 이미 정해졌다고 해서 고치지 않는다면 선하지 못한 것이 끝내 선하지 못하게 되고 말아 더 이상 선해질 희망이 없어지게 되니, 이것이 어찌 천하의 공리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당시에 이름 있는 재신(宰臣)이 자격도 없이 외람되게 원훈(元勳)에 참록되었는데, 공이 곧바로 배척하며 극력 간쟁하여 마침내 감정된 것을 고치니 시론(時論)이 옳게 여겼다.
이에 앞서 인헌왕후(仁獻王后)의 상을 당했을 적에 조정의 의논이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공이 일찍이 ‘복의(服議)’를 지었는데, 그 대략적인 내용은 “주상(主上)이 이미 지손(支孫)의 신분으로 들어와서 대통(大統)을 이은 이상, 인후(人後 타인의 후사)가 된 자가 친부모에 대해서는 강복(降服)하는 예법을 따르는 것이 마땅하니 기년복(朞年服)을 입는 것이 옳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때에 와서 병조 참판 최명길(崔鳴吉)이 상소하여 별도로 하나의 사당을 세워서 예제(禰祭 부친에 대한 제사)를 봉행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공이 차자를 올려 변론하며 아뢰기를,
“누구든지 인후(人後)가 되면 바로 그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조카의 신분으로 숙부의 뒤를 잇는 것은 원래 순리(順理)라고 하겠지만, 형의 신분으로 아우의 뒤를 이을 때에도 부자(父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손자의 신분으로 조부의 뒤를 이은 경우만 어찌 부자의 도리가 유독 없겠습니까. 그런데 이론을 제기하는 자는 종묘에 고위(考位)가 비게 된 것을 보고는 마침내 예묘(禰廟)가 없을 수 없다고 하면서 본생(本生)의 사당을 따로 세워 예묘라고 부르려 합니다. 그러나 예묘가 없게 되는 것은 변례(變禮)에 속한 일로서, 옛날의 임금 중에도 그러한 경우가 있었으니 한 선제(漢宣帝)가 바로 그러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어찌 질손(姪孫)은 괜찮고 친손(親孫)은 안 된다는 법이 있겠습니까.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가 중흥하여 천하를 소유한 것은 실제로 창업한 것과 다름이 없었는데, 스스로 원제(元帝)의 뒤를 계승했다고 하면서 낙양(洛陽)에 사친(四親)의 사당을 별도로 세웠습니다. 그런데 주자(朱子)는 이를 오히려 미진하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백승(伯升)의 아들을 후계자로 세워 사묘(私廟)를 받들게 했더라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주자가 어찌 무턱대고 그렇게 논의했겠습니까. 이는 제왕 가문의 막대한 전례(典禮)인 만큼 그야말로 경전(經傳)을 참고하여 예법의 본의에 합치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인데, 어떻게 한두 사람의 황당무계한 주장만을 믿고 전고에 없는 예를 새로 만들어 내서야 되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또 최명길이 상소하여 쟁론하여 마지않자, 공이 또 차자를 올려 수천 언을 반복해서 아뢰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상의 아우인 능원군(綾原君) 보(俌)에게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다. 그 뒤에 부묘(祔廟)할 적에 상이 또 직접 제사를 주관하려고 하자, 공이 동료와 함께 네 차례나 차자를 올려 간쟁하였다.
뒤이어 이조 참판에 임명되고 비변사(備邊司) 유사당상(有司堂上)을 겸하였다. 기사년(1629, 인조 7) 4월에 사체(辭遞)하고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를 겸하였으며, 양사(兩司)의 장관을 거쳐 다시 부제학이 되었다. 병조 판서 이공 귀(李公貴)가 차자를 올려 붕당(朋黨)에 대해 논하면서 주자(朱子)가 유정(留正)에게 보낸 서한의 내용 일부를 인용하였는데, 상의 하교 중에 “주자의 말에도 폐단이 없을 수 없다.”는 말이 있었다. 이에 공이 차자를 올려 변론하였는데, 그 대략에 “전하께서 선현이 무슨 뜻으로 그렇게 말했는지 깊이 따져 보지도 않고서 무턱대고 폐단이 있다고 단정하시다니, 이치를 살피는 면이 소략할 뿐만 아니라 성현을 경시하는 잘못을 범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와 함께 군자와 소인의 정상에 대해 매우 자세하게 차례로 진달하였다.
그리고 왕자(王子)의 사전(私田)에 대해 규정 외로 면세(免稅)해 주면 안 된다고 논하면서 아뢰기를 “삼가 생각건대 전하의 격물치지 공부에 미진한 점이 있는 듯도 싶고,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으로 사욕을 이기고 이기심을 극복하는 면에서도 혹 깊이 유의하지 않는 점이 있는 듯싶습니다. 옛날의 현신(賢臣)이 반드시 임금의 마음 가운데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일을 급선무로 여겼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라고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의 말이 옳다. 나의 식견이 밝지 못했는데, 이 뒤로는 응당 자세히 살피겠다.”라고 하였다.
교리 나공 만갑(羅公萬甲)이 일찍이 집정(執政) 대신(大臣)의 잘못을 말하였다. 이에 우상(右相) 김공 류(金公瑬)가 노한 나머지 상에게 아뢰어 제재하여 억누를 것을 청하자 상이 유배 보내라고 명하니, 공이 차자를 올려 그 부당함을 아뢰었다. 태학사(太學士) 장공 유(張公維)도 상소하여 신구(伸救)하자, 상이 노하여 그를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좌천시켰다. 이에 공이 또 상소하여 간쟁하였으나, 아무 회답이 없었으므로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8월에 대사성에 임명되었다가 뒤이어 병조 참판으로 옮겨졌다. 특명으로 대사성을 겸대(兼帶)하게 하자 공이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우비(優批)를 내려 허락하지 않았다. 이로부터 다른 관직으로 옮길 때에도 항상 대사성을 겸대하였다. 공이 글을 지어 관학(館學)의 제생(諸生)에게 유시(諭示)하면서 먼저 《근사록(近思錄)》을 읽게 하니, 제생 중에서 분발하여 선(善)을 지향하는 자가 많았다. 공이 이어 차자를 올려 학정(學政)에 대해서 논하니, 상이 모두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직책을 옮겨 도승지에 임명되었다가 체직되어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경오년(1630, 인조 8) 봄에 다시 부제학이 되었다. 종묘의 수목에 벼락이 치자 상이 하교하여 구언(求言)하였다. 공이 차자를 올려 중외(中外) 민생의 고달픈 정상을 극력 진달한 뒤에 포부(逋負)한 부세(賦稅)의 징수와 군병의 징발을 정지할 것, 각 아문에서 무판(貿販)하며 소요를 일으키고 해를 끼치는 일을 일체 금단할 것, 경중(京中)의 시민(市民)이 납부한 물품 역시 모두 값을 계산하여 지급해 줄 것 등을 청하는 한편, 또 아뢰기를 “풍정(豐呈)을 거행하는 것이 자전(慈殿)을 기쁘게 해 드리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기는 합니다만, 그야말로 천변(天變)을 두려워하며 몸을 닦고 반성해야 할 날을 당하여 대대적으로 오락을 즐기는 자리를 마련하여 하늘의 경고를 소홀히 하는 것은 온당치 못합니다. 그리고 오향(五享)의 제사를 능침(陵寢)에 올리는 것은 본래 바른 예법이 아닙니다. 지금 태묘에 변이(變異)가 발생한 일을 계기로 해서 역시 변통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니, 상이 많이 채납(採納)하였다.
풍정을 행할 적에 외간의 많은 부녀자들이 함부로 들어왔으므로 물의가 비등하였다. 집의 윤공 황(尹公煌)이 이 일을 논하니, 상이 사실과 다르다고 하면서 특명으로 체직시켰다. 이에 공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궁금(宮禁)에 관한 일은 사람들이 말하기 어려워하는데, 과감하게 말하며 용안(龍顔)을 범하였으니 그 직분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닷없이 꺾어서 부러뜨리고 말았으니, 앞으로는 언로(言路)가 마침내 막혀 아첨하는 풍조만 만연하지 않을까 매우 걱정됩니다.”라고 하니, 상이 차자의 말이 매우 정당하다고 답하였다. 풍정이 끝난 뒤에 제도(諸道)의 기녀(妓女)들을 해산하여 돌려보내려고 하자, 장악원(掌樂院)이 그들을 계속 남겨 두어 음악을 익히게 할 것을 계청(啓請)하였다. 공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여악(女樂)은 본래 국가에서 기를 것이 못 됩니다. 초(楚)나라는 쇠칼이 날카롭고 광대의 솜씨는 졸렬하다는 말을 듣고서 진왕(秦王)이 걱정스러운 기색을 띠었습니다. 여악의 기예가 정묘(精妙)한 수준에 이르지 못한다 하더라도 국가의 해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지금은 민생이 곤고한 데다 하늘이 경고하는 뜻을 보이고 있는 등 걱정스러운 일이 이루 셀 수 없으니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또 듣건대 황성(皇城)이 적에게 포위되어 계엄(戒嚴)을 아직도 풀지 않고 있다 하니, 안으로 국내의 일을 보거나 밖으로 천하의 형세를 살펴보아도 모두 통곡해야 할 일들뿐입니다. 따라서 군신 상하가 밥을 먹을 겨를도 없이 오직 두려워하고 걱정해야 할 것인데, 이런 때에 어찌 기악(妓樂)을 한데 모아 놓고 음악 소리로 시끄럽게 떠들게 해서야 되겠습니까.”라고 하니, 상이 마침내 해산해 보내라고 명하였다.
4월에 피도(皮島)의 장수 유흥치(劉興治)가 도독(都督) 진계성(陳繼盛)을 살해하자, 상이 군대를 일으켜 토벌할 일을 의논하였다. 그런데 뒤에 듣건대 유흥치가 중국 조정에 진주(陳奏)하여 사기(事機)가 처음과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였다. 이에 공이 차자를 올려 파병(罷兵)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는데, 얼마 뒤에 과연 공이 말한 것처럼 되었다.
헌부(憲府)가 공천(公賤)과 사천(私賤)이 내수사(內需司)에 투속(投屬)하는 폐단에 대해 논하니, 상이 노하여 꾸짖었다. 이에 공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누구보다도 뛰어난 지혜를 지니시고 좋은 정치를 구현하기 위해 매우 열심이십니다. 다만 자신의 과실을 듣기 좋아하는 정성이 지극하지 못하고 남을 포용하는 도량이 넓지 못하니, 정치의 효과가 아직껏 드러나지 않는 것은 실로 여기에 이유가 있습니다. 지난번에 윤황(尹煌)이 궁중이 엄숙하지 못하다고 논하자 특명으로 체직시켰는데, 이번에 이 발언에 대해서도 그와 같이 대하고 계십니다.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궁중이나 내수사의 일에 대해서는 감히 말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니, 이 또한 국인(國人)에게 전하의 사심을 보이는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앞으로는 사람들이 더 이상 감히 말하는 일이 없어져서 전하께서 자신의 허물을 들을 길이 없게 될까 참으로 걱정됩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김씨(金氏)와 조씨(趙氏) 두 여자가 궁중으로 들어오자, 이공 명준(李公命俊)이 상소하여 그 일을 논하였다. 공도 그 뒤를 이어서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사리를 환히 살피시고 자기 몸을 엄하게 단속하시니, 여색에 빠져 미혹될 걱정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군자가 기미를 알면 그 조짐이 확대되지 않도록 걱정해야 하는 것처럼, 임금을 사랑하는 신하의 입장에서는 그 기미가 보일 때 미연에 방지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사욕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용기 있는 행동이 중요하고, 환란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겁낼 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완전히 마음을 바꿔 뉘우치고 깨달아서 머지않아 되돌아온다면, 일식이나 월식의 허물과 같아서 애당초 병폐가 되지 않을 것이요, 이와 함께 선으로 돌이키고 예를 회복하는 공부가 이루어져 옛날의 제왕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듣건대 화공(畫工)이 대궐에 들어와서 몇 달 동안이나 나가지 않고 있다 하는데, 이것이 또 어찌 완물상지(玩物喪志)하는 하나의 단서가 되지 않겠습니까. 신들이 전하께 바라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한결같이 성인을 본보기로 삼아 이 마음에 해를 끼치는 편파적인 기호(嗜好)를 일체 끊어 버리시고, 그리하여 본원(本源)의 바탕이 청명하고 순수하게 되어 티끌만큼이라도 가리는 바가 없게 함으로써 온갖 교화가 이로부터 흘러나오게 해 주셨으면 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얼마 뒤에 비국(備局)의 계사(啓辭)가 상의 노여움을 크게 촉발시킨 결과, 그러한 소문의 출처를 조사해서 알아내고 빈어(嬪御)를 간택하라는 하교가 있었다. 이에 공이 또 차자를 올려 진계(陳戒)하며 아뢰기를 “어떤 일을 막론하고 노여움 때문에 촉발되는 경우는 반드시 그 바름을 잃게 마련이니, 《대학》에서 이야기한 ‘마음에 노여워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가령 처음부터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한다면 그렇게 말을 한 자가 꾸며 내었다고 하겠습니다만, 만약에 그런 일이 실제로 있었다고 한다면 그렇게 말을 한 것 또한 당연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문의 출처를 조사해서 알아내라고 한다면, 이 어찌 사람들이 듣고서 크게 놀랄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제왕이 빈어를 두는 것은 본래 일상적인 일이라고 하겠습니다만, 빈어를 두게 되어 있는데도 두지 않는다면 이것은 더더욱 성대한 덕을 드러내는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동안 전하께서는 마음을 맑게 하고 욕심을 줄여서 빈어를 두지 않으셨으니, 이는 전하의 거룩한 덕 중에서도 가장 높은 경지를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 신하들이 아뢴 말 때문에 갑자기 이런 분부를 내리셨으니, 또한 노여움으로 인해 마음이 흔들려 그 바름을 얻지 못하시어 신민들이 이를 통해 전하의 깊고 얕은 수준을 엿보려 하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합니다.”라고 하니, 상이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였다.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 이 문충공(李文忠公)이 공의 차본(箚本)을 읽을 때마다 참으로 유현(儒賢)의 말이라면서 탄복하였다.
10월에 사체(辭遞)하고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12월에 다시 부제학이 되었다가 자리를 옮겨 이조 참판에 임명되었다. 공이 무진년 가을부터 병환을 앓기 시작하였는데, 이때에 와서는 병세가 점점 심해지면서 고질화되었다. 그래서 관직에 임명을 받을 때마다 번번이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였다. 신미년(1631, 인조 9) 3월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계유년(1633, 인조 11) 5월에 복제(服制)를 마치고는 잇따라 대사간과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명정전(明政殿)의 기둥과 문에 벼락이 치자 상이 신하들을 불러 과오를 물었다. 공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지금 이렇게 하늘이 견책하는 뜻을 보인 것은 반드시 임금의 행위 가운데 하늘의 마음을 어긴 것이 있기 때문일 터인데, 우선 요즈음의 과오를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대군(大君)의 저택이 정해진 제도를 벗어나 웅장하고 사치스러워서 두 해가 지나도록 공사가 아직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국조(國朝) 이래로 여기에 견줄 만한 것이 있지 않았으니, 이것이 어찌 자제를 올바르게 되도록 가르치는 길이라고 하겠습니까. 그리고 상방(尙方)의 장인(匠人)들이 날마다 궁중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그들이 만들어 내는 물건은 지극히 정교할 것이 분명합니다. 사람의 마음이란 한꺼번에 두 군데에 쓸 수가 없는 것이어서 마음을 무익한 곳에 쓸 경우에는 의리상 당연히 행해야 할 곳에 전념하지 못하게 마련이니, 이 또한 마음을 맑게 하고 욕심을 줄이는 공부에 방해되는 점이 있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그리고 언로(言路)가 통하느냐 막히느냐에 국가의 흥망이 직결되어 있는데, 간언(諫言)을 들어주는 전하의 미덕이 점차 처음과 같지 않으니, 이것이 바로 신민들이 크게 실망하는 점입니다.”
하고, 이어서 임금이 뜻을 확립하여 학문에 힘을 기울여야 하는 도리에 대해 진달하였다. 또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앞서 차자를 올리면서 진달드린 마음 확립에 관한 설이 유생들의 상투적인 이야기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마는, 이 세상의 온갖 일은 모두가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옛날의 제왕은 천지의 마음을 자기의 마음으로 삼고 그 사이에 털끝만큼이라도 사심이 뒤섞이지 않게 하였기 때문에 행하는 일마다 모두 천리(天理)의 바름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후세의 임금들은 자기 한 몸의 사적인 일만을 위주로 하였기 때문에 일을 행하는 사이에 간혹 억지로 애를 써서 착하게 되는 경우가 있긴 하였으나 그것은 단지 임시로 빌려 온 것일 뿐이었습니다. 좋은 정치를 구현하려는 전하의 정성이 또한 지극하지 않다고 할 수 없는데도 정치의 효과는 드러나지 않고 온갖 일이 결딴이 나고 있으니, 이는 전하의 한 마음이 옛날의 제왕처럼 되지 못하고 후세의 중간 정도 되는 임금으로 자처하는 일을 면치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이 마음 확립에 관한 설을 바치게 된 이유인데, 마음을 확립하는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학문으로 그 요체를 삼아야 합니다. 책 속에 들어 있는 글은 똑같아도 그 글을 읽는 사람에 따라 역시 달라지는 법입니다. 그 글을 읽는 사람이 성현의 말씀을 오늘날 자기가 행해야 할 일로 받아들인다면, 한 마디 한 구절이라도 나의 지혜를 개발하고 나의 행동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성현의 말씀을 원래 일반적으로 좋은 이야기일 뿐 지금 행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니 나의 행동을 꼭 그대로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면, 글은 글대로 나는 나대로가 되어 도무지 아무 관계도 없게 되고 말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글을 읽는다면 비록 여러 경서를 모조리 외운다 한들 나의 일에 또 무슨 유익함이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 글을 읽는 사람들이 많지만 도를 아는 자가 적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떨치고 일어나 스스로 노력하며 한결같이 옛날 제왕의 법도를 따르려고 면려한 결과, 자기 한 몸의 사욕을 결연히 극복하고 천리의 공도(公道)로 순일하게 복귀함으로써 정치의 근본이 되는 마음이 이와 같이 바르게 되기만 한다면, 행해지는 일마다 모두 자연히 의리에 부합하고 인심에 합당하게 될 것이니, 그렇게 되면 백성들도 마음속으로 저절로 즐거워하고 하늘의 노여워하는 뜻도 되돌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가납(嘉納)하였다.
9월에 체직되어 호군(護軍)이 되었다. 10월에 특지(特旨)로 승진하여 예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공이 상소하여 극력 사양하니, 상이 비답을 내리기를 “경은 재질과 덕성이 우수한 데다 맡은 직책에 마음을 다하기 때문에 발탁해서 이 임무를 수여하였으니, 사양하지 말고 속히 나와서 공경히 직책을 수행하라.”라고 하였다. 공이 또 병을 이유로 고사(固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공이 이에 알아준 은혜에 감격하여 억지로 나와 명을 배수(拜受)하였다. 중국의 반장(叛將) 경중명(耿仲明) 등이 수군(水軍)을 이끌고 심양(瀋陽)으로 투항하였다. 공이 비밀 계책을 진달하며 아뢰기를 “원수(元帥)로 하여금 피도(皮島)의 중국 장수와 은밀히 상의하여 서둘러 방비하게 함으로써 피도가 함락되지 않게 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나, 그 계책을 제대로 쓰지 못하였다.
공이 차자를 올려 과거(科擧)의 강경(講經)하는 제도를 변통할 것을 청하였는데, 그 대략에,
“우리나라에서 인재를 뽑을 때에는 사서삼경을 배강(背講)하는 것으로 규정을 삼고 있습니다. 그래서 과거에 응시하는 선비들이라면 있는 힘을 다해 암송하려고 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강경(講經)을 통해 급제한 자들을 보면, 거의 대부분 보고 들은 것이 부족하고 문리(文理)에 어두울 뿐만 아니라 문자에 대한 실력도 짧으며 고루하고 무식해서 사장(詞章)을 통해 급제한 자들보다도 오히려 못한 실정입니다. 그 이유는 대개 칠서(七書)의 경문(經文)과 주석의 글이 너무 많아서 사람의 정력으로는 모두 기억하는 것이 절대로 불가능한 까닭에, 한 편(篇) 중에서 경문이 적은 것만을 택하고 한 장(章)의 주(註) 중에서 쉽게 외울 수 있는 훈고(訓誥)만을 택하여 익힐 뿐 그 밖의 것은 모두 읽지 않기 때문입니다. 온 세상의 선비들이 익히는 것이 이와 같으니 인재가 없는 것이 당연하고, 인재를 시험하여 뽑는 방식이 이와 같으니 좋은 정치가 나오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늘이 인재를 낼 때에는 내외의 차이를 두지 않으니, 우리 동방의 수천 리 안에도 영특한 준재들이 필시 적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로 하여금 경술(經術)에 마음을 쏟게 한다면 그 재질을 성취하는 면에서 필시 볼 만한 점이 많을 것인데, 그만 암송하는 일에 몰두하게 한 나머지 끝내 쓸모없는 사람이 되게 한다면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지금 경술을 일으켜 인재를 배출하고 사습(士習)을 바로잡아 풍속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는 오직 과거(科擧)의 이 방법을 변통해야만 할 것입니다.
무릇 크고 작은 모든 과거에 경서를 강독하게 하되 강독하는 책을 모두 임독(臨讀)하게 하면서, 오직 강독하는 것이 생소한가 익숙한가 하는 것만을 살피고 그 의의(意義)의 소재만을 물어보아야 할 것이요, 토를 붙여서 읽는 것이 언해(諺解)와 다른 점이 있다 하더라도 문리에 통하기만 하면 배척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선비 된 자들이 누구나 경학에 종사하게 될 것이요, 경서를 공부할 때에도 반드시 모두 그 의의를 탐구하는 것을 위주로 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서삼경에 대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그 의의를 통하게 되면, 비록 그 글을 모조리 암송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자연히 식견을 갖춘 선비가 될 것이요, 침잠하고 반복하는 사이에 또 더러 선심(善心)을 분발하여 희현(希賢)하고 희성(希聖)하는 공부를 하는 사람도 나올 것이니, 그 효과가 어찌 성대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고 보면 드문드문 띄어 읽으면서 그저 구두(句讀)만 익히다가 쓸모없이 되고 마는 것과 비교해 볼 때, 어떻게 같은 차원에서 그 득실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송나라 현인의 책 가운데에는 오직 《근사록》이 가장 순수하고 정대합니다. 초학자들에게 학문을 하는 방향을 알려 주기 위해서는 이 책보다 더 적절한 것이 없으니, 경서 외에 이 책도 시험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신은 삼가 우리나라의 많은 인재들이 배강(背講)하는 방법에 얽매인 나머지 끝내는 용렬하고 비루한 수준에 머물게 되고 이에 따라 성현의 학문이 세상에 드러나지 못하게 되는 것을 항상 탄식하였습니다. 그래서 항상 이 제도를 변통했으면 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던 차에 이번에 마침 외람되게 예관(禮官)이 되었는데, 이 일이 바로 신의 직분과 관련이 되기에 감히 어리석은 생각을 진달하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대신에게 의논하라고 명하였는데, 대신이 조종(祖宗)의 법제를 가볍게 바꿀 수는 없다고 하였으므로 그 일이 끝내 시행되지 못하였다.
이때 교양관(敎養官 지방 유생의 교육을 담당하는 관원)을 설치하자고 청하는 자가 있었다. 이에 공이 또 상주하여 아뢰기를,
“정자(程子)의 말을 살펴보건대 그 내용은 대체로 천하의 현사(賢士)들을 널리 구하여 경사(京師)에서 강학(講學)하게 하고 그들의 학문이 이루어진 뒤 천하에 나누어 보내 가르치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일이 어찌 아침저녁 사이에 행해서 한 달 안에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지금 경학에 밝고 품행이 방정하여 사람들이 경외하는 자를 가려 뽑아 태학(太學)의 사유(師儒)로 임명한 뒤에 날마다 제생(諸生)과 함께 경전의 뜻을 강론하며 오랜 세월을 두고 연마하게 해야 할 것이니, 그렇게 하면 선비가 된 사람들이 점점 나아갈 방향을 알게 되어 경학을 깊이 연구하고 행실을 단속하게 될 것이요, 풍속도 이에 따라 점차 아름답게 변할 것입니다. 외방(外方)의 제읍(諸邑)에서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을 많이 얻는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니, 이 역시 점진적으로 시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산야 가운데에도 옛사람을 사모하며 글을 읽는 사람들이 반드시 있을 것이니, 각 도(道)의 감사(監司)로 하여금 마음을 다해 찾아서 자세히 기록하여 보고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들의 학문과 품행에 대해 깊고 얕은 정도를 살펴보고 나서, 송나라 때 서원에서 교육을 주관하던 자의 일에 의거하여 산장(山長)의 칭호를 수여하고 늠료(廩料)를 넉넉히 지급하면서 그 지역의 후생들을 가르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초야에서 선을 행하는 사람들이 녹용(錄用)되는 은혜를 입게 되어 부질없이 늙어 가지 않을 것이요, 젊은 후생들도 많이 분발하고 흥기할 것이니, 향토의 풍속이 점차로 변하여 선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의논하여 행하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뒤에 변란이 일어나서 시행되지 못하였다.
공이 전후에 걸쳐 예부(禮部)에 있을 적에 절행(節行)을 포숭(褒崇)하고 이웃 나라와 우호하고 민속을 교화하는 일과 관련하여,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생각이 미치는 한 정성을 다하여 상주해서 행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갑술년(1634, 인조 12) 8월에 동지경연사와 동지성균관사를 겸하였다. 얼마 뒤에 체직되어 호군(護軍)이 되었다. 이때 중국 조정이 원종대왕(元宗大王)을 추존(追尊)하는 일을 허락하였다. 이에 상이 종묘에 신위(神位)를 들이는 의례(儀禮)를 의논하라고 명하였는데 삼사(三司)가 안 된다고 간쟁하니, 상이 대로하여 대사헌 강석기(姜碩期), 대사간 조정호(趙廷虎), 부제학 김광현(金光炫) 등 10여 인을 찬출(竄黜)하라고 명하였다. 9월에 공이 대사헌에 임명된 뒤 제신(諸臣)의 사면을 강력히 요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자 사체(辭遞)하였다. 그동안의 관례에 의하면 부제학은 반드시 종 2 품 이하의 관원을 의망(擬望)하게 되어 있었으나, 이때에 적임자를 구하기가 어려워서 이조가 파격적으로 계청(啓請)한 결과 공을 부제학으로 삼았다. 또 세자시강원 우부빈객을 겸하였다. 11월에 체직되고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이때 삼남(三南) 지방에 양전(量田)을 실시하였다. 공이 두 차례 차자를 올려 청하기를 “공부(貢賦) 등 경상수입(經常收入)의 액수를 심사하여 결정하게 하되, 결수(結數)가 예전보다 갑절이나 많아졌다고 하더라도 공부 등의 경상수입은 예전보다 많아지지 않게 해야 할 것입니다. 가령 1000결의 고을에서 그동안 부담하던 공부의 액수가 미곡 1000석이었다면, 지금 양전하여 2000결을 얻었다 하더라도 공부의 액수는 1000석을 초과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1000석을 2000결에 균등하게 배분하면 전일에는 1결에 1석을 내던 것이 지금은 1결에 1석의 절반만 내도 될 것입니다. 이러한 점을 참작해서 마련(磨鍊)해 두었다가 양전이 끝나는 대로 즉시 시행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사체하고 서반(西班)의 관직에 제수되었다. 12월에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을 겸대하게 하였는데, 공이 사장학(詞章學)을 익히지 않았다는 이유로 세 차례나 상소하여 극력 사양하니 상이 해조(該曹)에게 의논하게 하였다. 해조가 사마광(司馬光)이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사직했을 때 허락하지 않았던 고사를 인용하고, 또 사장학을 익히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문장으로 선생과 견줄 만한 사람이 실로 드물다고 말하였으므로 상이 마침내 사직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 사이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대사헌에 제수된 것이 다섯 번이었다.
을해년(1635, 인조 13) 9월에 관학(館學) 유생들이 상소하여 이 문성공(李文成公 이이(李珥))과 성 문간공(成文簡公 성혼(成渾))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였는데, 이론(異論)을 제기하는 한 떼의 무리가 투소(投疏)하여 추악하게 헐뜯었다. 이에 공이 세도(世道)를 깊이 걱정한 나머지 차자를 올려 극력 변론하였으나 상이 회답하지 않자 사체하였다. 당시에 잘못된 논의가 마구 일어나서 분란이 날로 심해졌으므로 공이 재차 차자를 올려 논하는 한편 동지성균관사의 면직을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뒤에 입대(入對)하는 기회에 두 신하의 도덕에 관한 실상을 극력 진달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이는 말할 것도 없이 현인이다. 지금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큰 다행이겠는가. 내가 그의 도덕을 부족하게 여겨서가 아니라 단지 문묘에 종사하는 일은 그 사체(事體)가 중대하기 때문에 감히 섣불리 허락하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병자년(1636) 2월에 지중추부사와 공조 판서에 임명되었으나, 당시에 의정공(議政公 포저의 부친)이 공조의 소속 관아인 선공감(繕工監)의 첨정(僉正)으로 재직 중이었기 때문에 사체하였다.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인열왕후(仁烈王后)의 상(喪)을 당하여 한성부에 일이 많은 탓으로 방민(坊民)의 부담이 매우 컸지만, 공이 적절하게 분담시키고 방도를 세워 조발(調發)하였으므로 소요 없이 일이 제대로 이루어졌다. 여름에 대사헌으로 복귀했다가 체직되고 지중추부사를 제수받았다.
당시에 변방의 근심스러운 사태가 날로 심각해졌으므로 상이 바야흐로 크게 진작시킬 방도를 강구하였다. 이에 공이 봉사(封事)를 올려 변방의 방비를 굳건히 하고 폐정(弊政)을 개혁할 방도에 대해 조목별로 진달하였는데, 첫째는 대중의 마음을 격동시키는 것이고, 둘째는 아랫사람의 의견을 위에 통하게 하는 것이고, 셋째는 무사(武士)들을 광범위하게 시취(試取)하는 것이고, 넷째는 장수가 될 인재를 가려 뽑는 것이고, 다섯째는 그 지방의 원주민을 등용하는 것이고, 여섯째는 성지(城池)를 견고하게 하는 것이고, 일곱째는 활의 제도를 간편하게 고치는 것이고, 여덟째는 인민을 교도(敎導)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뢰기를 “오늘날 크게 걱정스러운 것은 민생이 곤궁한 것과 병력이 쇠잔한 것입니다. 그러니 대동법을 다시 시행하여 민생을 구제하고, 양전으로 새로 생긴 전결(田結)의 부세를 덜어서 군병을 양성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함께 과거(科擧)의 강경(講經)하는 규정을 변통하여 사습(士習)을 바로잡고 인재를 배양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스리는 방법에 관련된 것일 뿐입니다. 다스리는 도(道)로 말하면 마음을 바로잡아 조정을 바로잡고 조정을 바로잡아 백관을 바로잡는 바로 그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소(疏)가 올라오자 묘당(廟堂)에 내려 의논하게 하였으나, 모두 채용되지 않았다.
공이 전후에 걸쳐 정성을 다해 진달한 말들이 민생을 안정시키고 나라를 경륜하는 방도가 아닌 것이 없었으나 계책을 말해도 행해지지 않는 데다가 질병이 또 고질화되었으므로 항상 답답하게 여기면서 물러나려고 하였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때에 와서 화란(禍亂)이 장차 닥칠 기미가 매우 분명하였는데도 비어(備禦)할 계책을 세웠다는 말은 들리지 않고, 오직 정묘년에 패했던 일을 징계하여 산성(山城)을 많이 쌓기만 할 뿐 침입할 길목에 해당하는 제진(諸鎭)은 모두 버려두고 지키려 하지 않았으며, 평양(平壤)의 사민(士民)들이 본성(本城)을 사수하겠다면서 누차 감사(監司)와 여러 사신(使臣)들에게 호소하였는데도 조정에서는 모두 들어주지 않았다.
이에 공이 경연 석상에서 진언하기를 “오늘날 적을 방어할 계책으로는 성을 지키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는데, 의주(義州) · 안주(安州) · 평양 · 황주(黃州) 같은 곳은 모두 직로(直路)에 위치한 중진(重鎭)들입니다. 비록 그 성곽에 무너진 곳이 있다고 하더라도 수선하고 보완하여 사민(士民)을 단결시킨 뒤에, 급한 사태가 발생했을 경우 성안에 들어가 청야(淸野) 작전을 전개하면서 한편으로는 적이 돌진해 오는 것을 막고 한편으로는 사민을 보전해 살리는 것이 바로 오늘날의 가장 바람직한 계책이니, 급히 서둘러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백마산성(白馬山城)과 자모산성(慈母山城), 정방산성(正方山城) 같은 곳은 비록 험고하다고 말을 하지만, 대로(大路)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창졸간에 백성들을 수습하여 들어오기가 어렵습니다. 제진(諸鎭)의 백성들이 먼저 어육(魚肉)이 되어 직로가 텅 비게 될 경우 짓쳐들어오는 적의 기세를 막을 수 없을 것이 분명한데, 지금 요해지(要害地)의 대진(大鎭)을 모두 지키지 않는다니 이것이 도대체 무슨 계책입니까. 그리고 평양 백성들이 자기들의 힘으로 수선해서 지키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 백성들은 지성으로 지키려고 하는데 조정에서는 지성으로 금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라고 하고, 또 보병(步兵)을 엄선하여 이릉(李陵)오린(吳璘)이 행했던 방법대로 거듭 밝혀 단련시키기를 청하였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공이 또 입대(入對)하여 여러 대진을 지키지 않는 것은 잘못된 계책이라고 극언하면서, 이는 자진해서 울타리를 철거하고 문을 열어 도적을 끌어들이는 격이라고 아뢰니, 상이 체부(體府)에 말하게 하였다. 그런데 체부가 좋아하지 않으면서 기롱하고 모욕하는 말까지 하였고 상도 이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자, 공이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윤상 방(尹相昉)에게 말하기를 “지금 화가 언제 닥칠지 모르는데 사람들의 계책이 이와 같으니, 적의 철기(鐵騎)가 졸지에 쳐들어오면 필시 앉아서 위욕(危辱)을 당하고 말 것이다. 그러기보다는 차라리 강도(江都)로 먼저 들어가서 우선 근본을 굳건히 하는 계책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니, 윤상도 그 의견을 대단히 옳게 여겨 상에게 아뢰었으나, 또 시의(時議)에 저지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공이 염려했던 대로 남한산성의 화를 자초하였다.
8월에 예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명나라의 감군(監軍) 황손무(黃孫茂)가 조칙(詔勅)을 받들고 우리나라에 왔다. 이민구(李敏求)가 접반사(接伴使)가 되어 평안도에서 관례로 바치는 금침(衾枕)을 국왕이 특별히 보낸 것이라고 칭하니 감군이 매우 기뻐하였다. 그리고 황해도에서 관례로 바치는 것은 바치지 않고서 폐단을 제거했다고 스스로 자랑하며 치계(馳啓)하여 보고하였다. 이에 공이 아뢰기를 “감군이 서울에 들어와서 이 일을 사례할 경우에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는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이것이 비록 사소한 일이라고 할지라도 관계되는 바는 작지 않습니다. 천승(千乘)의 임금이 사람을 대하는 도리는 이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보통 사람도 속여서는 안 될 텐데 더군다나 황제의 명을 받들고 온 사신인데야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그러니 지금 관서(關西)에서 준비한 것은 관례에 따른 것이지 특별히 보낸 것이 아닌데 반신(伴臣)이 말을 잘못했다고 말하고, 해서(海西)에서 준비한 것도 바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감군도 전하께서 성심으로 접대한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12월에 변방의 급보가 이른 지 며칠도 되지 않아 적의 유격 기마병이 벌써 기보(畿輔)에 육박하였으므로 상이 강도(江都)로 행행(行幸)하려 하였다. 공이 참판 여이징(呂爾徵)으로 하여금 종묘와 사직 및 숙녕전(肅寧殿)의 신주(神主)를 모시고서 먼저 떠나게 하고, 공 자신은 대가(大駕)를 호종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얼마 뒤에 들리는 말에 의하면, 숙녕전의 신주는 먼저 받들고 떠났으나 종묘의 신주는 모셔 내오지 못했다고 하였다. 이에 대신(大臣)이 놀라워하며 공에게 가서 확인하도록 하였으므로 공이 가서 보니 그때 신주를 막 모셔 내오고 있었다. 그래서 마침내 뒤쫓아 가서 참판과 만나 신주를 한곳에 모두 모셔 놓은 뒤에 돌아와서 대가를 호종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날 아침에 늙고 병든 사람은 먼저 떠나게 하라는 상의 분부가 있었으므로, 공이 아들 진양(進陽)으로 하여금 의정공(議政公)을 모시고 먼저 강도로 향하게 하였다. 그러다 의정공을 잃고 길가에 엎드려 있는 진양을 공이 홀연히 보고는 어쩔 줄을 모른 채 호읍(號泣)하며 행방을 분주히 찾아 나서게 되었다.
이튿날 김포(金浦)에 도착해서 대가가 방향을 돌려 남한산성으로 향했다는 말을 비로소 듣고는 산성으로 가는 길을 찾아보려고 하였으나 길이 막혀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이에 방황하며 통곡하다가 의병을 모아 근왕(勤王)의 계책을 세우자고 상의하고는, 남양 부사(南陽府使) 윤계(尹棨)와 조사(朝士)로서 미처 호종하지 못한 참의 심지원(沈之源), 승지 김상(金尙), 정(正) 이시직(李時稷), 교리 윤명은(尹鳴殷) 등과 회의한 결과 공이 대장(大將)이 되고 심지원과 윤계 등이 참좌(參佐)가 되기로 하였는데, 일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윤계가 적에게 붙잡혀 죽고 말았다.
공이 이에 화량(花梁)의 해변으로 갔는데, 그곳에서 공사(公私)의 선박을 모아 사녀(士女)들을 모두 섬 안으로 건너가게 하여 수만 명의 목숨을 살리기도 하였다. 그리고는 호서(湖西)로 가서 의병을 모집하려고 하였으나 호서도 이미 결딴이 난 상태라서 강도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적병이 도강(渡江)할 무렵에 공이 나가 갑진(甲津)에 이르렀는데, 적이 먼저 대포를 어지럽게 쏘아대었으므로 강 언덕에 감히 나오는 자가 없었다. 그런데 공은 홀로 몇 사람과 함께 언덕 위에 앉아서 포화가 우레처럼 날아와 좌우에 번갈아 떨어지는데도 안색이 변치 않았으며, 적이 강 언덕으로 올라오는데도 꼼짝 않고 그대로 앉아 있을 뿐 두 아들인 몽양(夢陽)과 진양(進陽)이 피하기를 청해도 따르지 않았다. 이에 두 아들이 다급한 나머지 함께 부둥켜안고 절벽 아래로 떨어졌는데, 그때 마침 함께 따라왔던 장사(壯士)가 작은 배 한 척을 구하여 공을 끌어안고 배에 태운 다음에 적의 칼날이 거의 닿으려는 찰나에 가까스로 키를 틀어 출발하였다. 공이 엉겁결에 대가와 길이 어긋나 호종하지 못한 뒤로는 언제나 비통한 심정을 스스로 금하지 못하면서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며 울었으므로 옆에 있는 사람들이 차마 볼 수 없을 정도였는데, 이때에 와서는 비분강개하여 먹지도 않으면서 아예 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상이 환도(還都)한 뒤에 대간이 호종하는 대열에 참여하지 않은 신하들의 죄를 논하였는데, 공에게 유감을 품고 있던 자가 그 기회를 이용하여 없는 사실을 날조해서 무함하였다. 이에 공이 신문에 응하면서 그 당시 일의 시말을 자세히 진술하니, 상이 단지 파직하라고만 명하였으므로 공이 신창(新昌)의 농장으로 돌아와 우거하였다. 무인년(1638, 인조 16)에 유석(柳碩)과 이규(李烓) 등이 대관(臺官)이 되어 공과 김 문정공(金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을 함께 논하며 유배 보내라고 청하기까지 하였다. 이에 병조 판서 이공 시백(李公時白)이 상소하여 공의 충효와 유석 등이 무함한 정상에 대해 극력 진달하였는데, 상도 평소에 공의 지극한 충성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끝내 죄를 더 가하지 않았다. 그리고 뒤에 경연 석상에서 하교하기를 “그는 글을 읽은 사람이 아닌가. 나는 원래 그가 현인임을 알고 있다.”라고 하였다. 공은 전야(田野)에서 노친(老親)을 봉양하며 우유자적(優游自適)하는 가운데 아침저녁으로 부지런히 예전에 해 오던 공부를 복습하고 정리하였다. 그리고 언제나 “나랏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은 모두 신하들의 죄이다.”라고 자책하면서 걱정하고 돌아보는 일을 잠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계미년(1643, 인조 21)에 공을 보양관(輔養官)으로 불렀다. 공이 두 차례 상소하며 사양하였는데, 그중에 “평생토록 임금을 사랑한 신의 정성이 거꾸로 임금을 저버렸다는 이름을 얻고 말았습니다. 신에 대한 사람들의 말이 또한 너무 지나치기는 합니다만, 이미 이런 죄를 진 처지에 장차 무슨 면목으로 다시 조정의 반열에 끼일 수 있겠습니까.”라는 내용이 있었다. 상이 허락하지 않고 재촉하여 부르니, 공이 입조(入朝)한 뒤에 상소하여 진정(陳情)하며 고향에 돌아가 노친을 봉양하게 해 줄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비답을 내리기를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경은 감정을 억제하고 함께 걱정하며 힘쓰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이 또 상소하여 간절한 심정을 진달하니, 상이 비로소 귀향을 허락하며 귤 등의 물품을 하사하였다.
을유년(1645)에 예조 판서에 임명되었으나 간절히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가을에 왕세자를 책립(冊立)하니, 공이 상소하여 보양(輔養)하고 권도(勸導)하는 방법 및 입지(立志)와 강학(講學)의 방도에 대해 극력 진달하는 한편, 춘방(春坊 세자시강원)의 관원을 엄선하되, 직질(職秩)의 고하(高下)나 초야의 인사에 구애받지 말고 모두 뽑아서 세자와 함께 아침저녁으로 강론하고 연마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 말미에 아뢰기를 “신은 이 기회에 또 삼가 드릴 말씀이 있으니, 그것은 즉 학문에 노력하여 덕성을 증진시키는 공부를 동궁(東宮)에게만 권면할 것이 아니라 전하께서도 유념해 주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재위하신 날이 이미 오래되어 용안(龍顔)도 옛날의 용안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신이 이렇게 하시라고 전하께 바라는 이유가 있습니다. 옛날 성탕(成湯)은 하(夏)나라를 멸망시키고 새 왕조를 세운 뒤에 덕도 이미 성대하고 나이도 이미 만년에 접어들었지만, 오히려 ‘두려운 마음으로 위태롭게 여겨 조심하면서 장차 깊은 못에 빠질 것처럼 여긴다.〔慄慄危懼 若將隕于深淵〕’라고 하였고, 위 무공(衛武公)은 나이가 95세나 되었는데도 억(抑)의 시를 지어 사람들에게 날마다 곁에서 외우게 하였습니다. 옛날의 성현은 덕이 성대하다고 하여 그치지도 않았고 나이가 많이 들었다고 하여 게을리 하지도 않았습니다. 중년이 된 뒤에 스스로 분발하고 쇠약해진 중에 떨쳐 일어나는 것이 상식적인 수준에서 말한다면 매우 어려운 일처럼 여겨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덕성을 닦지 않을 수 없고 사업은 떨쳐 일으키지 않을 수 없고 백성은 보호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한다면, 걱정되고 두려워지는 심정을 스스로 금할 수 없을 것이니 어렵게 여길 것이 또 뭐가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상이 포답(褒答)하였는데 그중에 “가언(嘉言)과 지론(至論)을 유념하여 시행하겠다.”는 등의 말이 있었다. 원소(原疏)는 안에 그대로 두었다가 한 달여가 지난 뒤에야 비로소 조정에 내렸다.
병술년(1646, 인조 24) 봄에 또 상소하여 동궁의 강학하는 방도에 대해 논하니, 상이 구마(廏馬)를 하사하여 포상하였다. 4월에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으나, 노친을 끝까지 봉양하게 해 줄 것을 간절히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이달에 부인 현씨(玄氏)가 세상을 떠났다. 5월에 의정공(議政公)이 작고하였다. 무자년(1648, 인조 26) 7월에 상을 마치자 좌참찬에 임명하고는 특명을 내려 역마(驛馬)를 타고 올라오게 하였으므로, 공이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이에 공이 상경하여 사은(謝恩)하고는 누차 상소하여 나이를 이유로 치사(致仕)를 청하였으나, 상은 모두 우비(優批)를 내리며 허락하지 않았다. 공이 차마 바로 떠날 수가 없었으므로 서울에 부득이 머물러 있게 되었다. 9월에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겨울에 삼재(三宰 좌참찬)를 거쳐 대사헌으로 두 차례 복귀하였다.
상이 어떤 일과 관련하여 간언(諫言)한 자를 배척하였으므로 공이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전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유능하며 지혜롭다고 과대평가하는 반면에 신하들에 대해서는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옛날 성탕(成湯)에 대해서 ‘잘못을 고치는 데에 인색하지 않았다.〔改過不吝〕’라고 하였고, ‘간언을 받아들이는 데에 거스르는 일이 없었다.〔從諫弗咈〕’라고 하였으니, 그러고 보면 성탕 역시 고쳐야 할 잘못이 있고 간언을 올려야 할 실수가 있었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문왕(文王)에 대해서 ‘듣지 않아도 법도에 합치되었고, 간언을 올리지 않아도 선의 경지에 들었다.〔不聞亦式 不諫亦入〕’라고 노래하였고 보면 어찌 잘못을 범하는 일이 또 있었겠습니까마는, 주공(周公)이 말하기를 ‘소인들이 당신을 원망하며 욕한다고 누가 일러 주거든, 크게 덕을 공경하는 마음을 스스로 일으켜서 원망하고 욕하는 잘못이 있게 된 것은 나의 잘못 때문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니, 이렇게 한다면 감히 노여움을 품지 않을 뿐만이 아닐 것이다.〔厥或告之曰 小人怨汝詈汝 則皇自敬德 厥愆曰朕之愆 允若時 不啻不敢含怒〕’라고 하였으니, 이것을 보면 문왕 역시 잘못이 없다고 자처하지는 않았다고 할 것입니다. 성탕이나 문왕 같은 성인들도 감히 잘못이 없다고 자처하지 않았는데, 더군다나 성탕이나 문왕보다 못한 사람이야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잘못이 없을 수 없는데도 스스로 잘못이 없다고 여긴다면 이는 잘못을 옳은 것으로 오인한 것입니다.
신하들 가운데 강직한 사람은 항상 적은 반면에 나약한 사람은 항상 많은 법입니다. 그들이 임금의 뜻을 받들어 순종하면 부귀를 누리고 임금의 뜻을 거스르면 배척을 당하는 것을 보게 된다면, 누가 임금의 귀에 거슬리는 말을 굳이 올려서 배척당하는 일을 자초하려 하겠습니까. 요즈음 조정에 간언을 과감하게 올리는 인사가 더 이상 나오지 않고 있는데, 이것이 어찌 전하께서 자신은 높이 평가하고 타인은 낮게 평가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어렵고 위태로운 날을 당하여서는 군신 상하가 밤이나 낮이나 바람직한 방도를 강구하면서 언로(言路)를 활짝 열고 널리 구제할 방도를 모색한다 하더라도 오히려 부족할까 걱정이 됩니다. 그런데 지금 그만 충성스러운 간언을 듣기 싫어하여 정대한 인사를 배척하고 계시니, 장차 우리나라가 어디로 갈지 모르겠기에 신은 삼가 답답하기만 합니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옛날 성인들이 사람들을 포용했던 도량과 남의 말을 잘 들어주었던 법도를 깊이 살피시어, 항상 마음을 비우고 자기를 잊고서 남의 장점을 취하는 일을 힘쓰도록 하소서. 이렇게 한다면 언로가 크게 열리고 아랫사람들의 마음이 모두 통하게 되어 ‘필부필부가 스스로 극진히 하여 섬길 대상을 얻지 못한다.’는 탄식이 없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기축년(1649, 인조 27) 4월에 또 삼재(三宰)와 예조 판서를 거쳐 대사헌으로 복귀하고 세자시강원 좌빈객을 겸하였다. 5월에 인조대왕(仁祖大王)이 승하(昇遐)하였다. 공이 대신(大臣)들과 함께 와내(臥內)로 들어갔는데 응당 고명(顧命)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가 있었으나, 공이 “나라에 저군(儲君 세자)이 있으니 오직 왕위를 계승하는 예식만 거행하면 된다. 상이 이미 승하하였는데 어떻게 고명의 절차를 거칠 수가 있겠는가.”라고 말하자 바로 그만두었다. 이때 결원이 된 예조 판서의 후임자를 아직 정하지 못하였으므로 대신이 공을 겸직시키도록 청하였다. 그래서 초상(初喪)의 의절(儀節) 중에는 공이 의정(擬定)한 것이 많았다고 한다. 대신과 육경(六卿)과 삼사(三司)의 장관이 염빈(殮殯)할 때에 들어와 참여하도록 공이 청하였다. 또 예법에 따라 왕위를 계승할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 김 문정공(金文正公)이 기전(畿甸)의 우거에서 서울에 들어와 임곡(臨哭)하고는 돌아가려고 하자, 공이 아뢰기를 “김상헌은 바로 오늘날 세상의 대로(大老)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초기에 그를 조정에 있게 하여 국인(國人)의 사표(師表)가 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니, 그가 머물러 있도록 특별히 간곡하게 분부하여 현인을 공경하고 덕을 좋아하는 정성을 보이소서.”라고 하였다. 상이 이들 건의에 대해서 모두 따랐다.
이에 앞서 인열왕후(仁烈王后)를 장릉(長陵)에 장사 지낼 적에 택조(宅兆)가 길하지 못하다고 말하는 자가 있었다. 그러다가 이때에 와서 대행대왕(大行大王)도 그곳에 장사 지내려고 하자, 공이 상소하여 주자(朱子)의 산릉(山陵)에 대한 의논을 인용하면서 아뢰기를 “장릉에 하자가 있다고 말하는 술사(術士)들이 매우 많습니다. 이는 국가의 막중하고 막대한 일인 만큼 지극히 신중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중에 후회하기보다는 처음에 조심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지금 술사들을 널리 불러 모아 다시 자세히 살피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만약 결함이 없다고 한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또 있겠습니까마는, 만약 혹시라도 길하지 못한 점이 있다면 반드시 완전무결한 길지(吉地)를 다시 가려서 써야 할 것이니, 그렇게 해야만 군부(君父)의 장례를 극진히 행해야 할 신자(臣子)의 도리에 유감이 없게 될 것입니다. 신이 마음속으로 항상 그곳을 의심해 왔는데 지금 만약 말씀드리지 않는다면, 이는 안으로는 자기 마음을 속이고 위로는 군부를 속이는 것으로서 불충(不忠)한 죄가 크다고 할 것입니다.”라고 하니, 상이 해조(該曹)로 하여금 다시 의논하게 하였다. 이에 그 의논을 좋아하지 않는 자들이 뒤따라 비방을 하였으므로 공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으며 이르기를 “경은 나의 부족한 점을 바로잡아 보좌해야 마땅하다.”라고 하였으나, 재차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7월에 삼재(三宰)를 거쳐 다시 대사헌으로 복귀하였다. 병으로 사직하니, 상이 내의(內醫)를 보내 병을 살펴보게 하고 약물을 하사하였다. 뒤이어 우의정에 임명되었다. 공이 극력 사양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으면서 “경의 재학(才學)과 덕행이야말로 나를 보필하기에 매우 합당하다.”라고 하교하였다. 9월에 좌의정으로 승진하였다. 산릉 총호사(山陵摠護使)가 되어 쓸데없는 비용을 줄여 민폐를 제거하려고 노력하였는데, 그러면서도 일 처리에 미진한 점이 없었다.
졸곡(卒哭)이 끝난 뒤에 차자를 올려 치도(治道)에 대해서 논하기를,
“왕자(王者)가 거상(居喪)하는 것은 필부와는 같지 않습니다. 계승한 것은 바로 종묘사직의 대통(大統)이요, 군림하고 있는 것은 수천 리의 강토이기 때문에 보살펴야 할 억조창생이 지극히 많고 처리해야 할 정무가 지극히 번다하기만 하니, 비통한 심정이 가슴속에 절실하다 할지라도 힘을 내어 정사를 처리하는 일을 잠시도 중단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지금 전하는 하늘의 위임을 받아 선왕의 대업을 이었습니다. 따라서 반드시 조정이 청명해지고 정사가 잘 다스려져 만물이 모두 제자리를 얻게 해야만 비로소 ‘잘 계승하고 잘 발전시켰다〔善繼而善述〕’고 말할 수 있을 것인데,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이에 합당한 법도를 따라야만 합니다.
《서경》에 이르기를 ‘일을 행할 적에 옛 법도를 따르지 않고서 길이 세대를 이어갔다는 말은 신이 듣지 못하였다.〔事不師古 以克永世 非說攸聞〕’라고 하였고, 맹자(孟子)는 말하기를 ‘요 임금이 백성을 다스린 방식으로 백성을 다스리지 않으면 백성을 해치는 것이다.〔不以堯之所以治民治民 賊其民者也〕’라고 하였고, 장자(張子)는 말하기를 ‘나라를 다스리면서 삼대를 법도로 삼지 않으면 끝내는 구차하게 될 뿐이다.〔爲治不法三代 皆苟而已〕’라고 하였습니다. 성인의 도는 방책(方冊)에 자세히 기재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성심으로 믿고 따르면서 일심으로 탐색해 나간다면 그 도를 얻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일단 그 도를 얻고 나면 몸을 닦고 나라를 다스리는 것 모두가 우뚝하게 천리(天理)의 바름에서 나오게 되어 세상의 어떤 사람도 그 경지에 미칠 수가 없을 것인데, 다만 걱정은 사람들이 이를 믿지 않고 탐색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뜻을 세운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지극히 정성스러운 한마음으로 도를 자임하면서 성인의 가르침을 반드시 믿겠다고 다짐하고 선왕의 다스림을 반드시 봉행하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천근한 규례에 얽매이지 않고 사람들의 말에 동요되거나 현혹하지 않는 가운데 반드시 삼대와 같은 성대한 정치를 천하에 펼치겠다고 기약하는 것이다.〔所謂立志者 至誠一心 以道自任 以聖人之訓爲必可信 先王之治爲必可行 不狃滯於近規 不遷惑於衆口 必期治天下如三代之盛也〕’라고 하였습니다. 임금이 이와 같이 도를 믿기만 한다면, 어찌 좋은 정치를 이루지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
지금 졸곡(卒哭)도 이미 지나 정무(政務)에 마음을 두고 치도(治道)에 정신을 기울여야 할 것이니, 뒷날 정치와 교화가 융성하게 되는 것은 실로 오늘에 기초한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도를 믿으시는 마음이 혹 깊지 않고 뜻을 세우신 것이 혹 견고하지 않아서, 혹 성인의 정치를 목표로 삼지 않고 계시지나 않나 하는 걱정이 삼가 듭니다.”
하니, 상이 가납하였다.
이때 신독재(愼獨齋) 김공 집(金公集)이 몇 명의 징사(徵士)와 함께 소명(召命)을 받고 올라왔다. 이에 공이 아뢰기를 “그들을 후하게 예우하고, 추위를 막을 물자도 내리소서.”라고 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제 새로 교화를 펴는 때에 그동안 폐기된 온갖 일들을 모두 재정비해서 거행해야 하겠습니다만, 그중에서도 선비를 교육하는 방도에 대해서는 더욱 소홀히 하면 안 될 것이니, 모쪼록 경학(經學)에 통달한 사람을 얻어서 태학(太學)의 스승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고, 또 차자를 올려 인재 10여 인을 천거하였다.
이때 상이 바야흐로 좋은 정치를 구현하기 위해 뜻을 가다듬고 있었으므로 공도 정성을 다해 보좌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정치를 행하는 도에는 근본〔本〕이 있고 거행하는 일〔事〕이 있습니다. 가령 순(舜) 임금이 우(禹)에게 위미정일(危微精一)의 말을 전해 준 것은 정치의 근본에 해당하고, 사악(四岳)과 구관(九官)에게 명하여 각종 직책을 분담시켜 다스리게 한 것은 정치의 일에 해당합니다. 옛날에 제왕이 정치를 행한 도는 바로 이 두 가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두 개의 요체가 있으니, 첫째는 뜻을 바르게 세우는 것이요, 둘째는 행하는 방법을 자세히 살펴서 가리는 것입니다. 무엇을 일컬어 뜻을 바르게 세우는 것이라고 하겠습니까. 마음을 다스리고 몸을 닦는 일을 반드시 옛날의 제왕과 똑같이 하려 하고, 나라를 경륜하고 백성을 보호하는 일을 반드시 옛날의 제왕과 똑같이 하려 하면서, 이 두 가지 일에 있어 모두 기필코 그 도리를 완전히 얻어서 털끝만큼이라도 미진한 점이 없게 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무엇을 일컬어 행하는 방법을 자세히 살펴서 가리는 것이라고 하겠습니까. 옛날의 성인이 자기를 다스리고 백성을 다스릴 적에는 모두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하는 도리가 있었습니다. 가령 자기를 다스리는 데에는 격물(格物) · 치지(致知) · 성의(誠意) · 정심(正心) · 수신(修身) · 제가(齊家)의 조목이 있었고, 백성을 다스리는 데에는 ‘사람을 차마 해치지 못하는 마음〔不忍人之心〕’을 지니고서 ‘사람을 차마 해치지 못하는 정사〔不忍人之政〕’를 행했으니 예컨대 정전법(井田法)을 시행한 일, 뽕나무를 심고 가축을 기르게 한 일, 학교에서 가르치게 한 일 등이 모두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삼대(三代)의 융성한 정치를 어찌 후세 사람들이 이룰 수 없겠습니까. 그렇게 하기만 하면 역시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하늘의 명을 받고 조종(祖宗)의 대통(大統)을 이은 지금, 상란(喪亂)을 당한 뒤끝이라서 백성의 생활은 곤고해지고 나라의 형세는 쇠약해졌습니다. 따라서 기필코 자기 몸을 닦는 방법과 백성을 보호하는 방도를 극진히 강구하여 행할 수 있어야만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책임과 조종으로부터 전수받은 뜻을 저버리지 않게 될 것입니다. 전하는 인덕(仁德)을 하늘에서 타고 나신 위에 총명한 자질이 또 고금에 으뜸이십니다. 그리고 선왕의 상을 당한 이래로 예법을 초과하여 거상(居喪)을 하시며 마음속 깊이 애통해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미 국인(國人)이 감격하여 떠받들면서 누구나 목을 길게 빼고 바라보고 있으니, 이러한 때에 큰일을 이루지 못하여 신령과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면 어찌 천고의 크나큰 한이 되지 않겠습니까.
신이 외람되게 선왕의 지우(知遇)를 받고 고관의 반열을 두루 역임하는 동안 자신의 분수를 헤아리지도 못한 채 가슴속에 품은 생각을 진달드린 것이 몇 차례나 되었습니다. 신이 진달드린 것으로 말하면, 바로 임금이 학문을 증진시키기 위한 방법과 덕을 닦는 요체에 관한 것이었으며, 또 전부(田賦)의 폐단과 군역의 고달픔과 과거의 배강(背講) 제도의 폐해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 몇 가지 폐단에 대해서 신이 건의한 것이야말로 신이 평생토록 마음을 온통 기울여 헤아리면서 변통해 보려고 했던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백성을 안정시키고 세상을 구하기 위한 방책 역시 이 몇 가지 속에 들어 있으니, 이것을 제대로 시행하기만 한다면 그동안 나라에 계속 쌓여 왔던 병폐들이 모조리 제거될 수 있을 것이요, 이러한 병폐가 제거되어 정치가 제대로 이루어지면 마치 병이 나아서 환자의 몸이 편해지는 것처럼 될 것입니다.”
하고, 선조(先朝) 때에 소차(疏箚)를 올려 논한 심학(心學) · 대동(大同) · 병제(兵制) · 강경(講經) 등의 네 가지 일을 모아 한 권의 책자로 만들어서 올렸다. 상이 신하들에게 이 일을 의논하게 하였으나, 다수의 신하가 변경하는 것을 어렵게 여겼으므로 마침내 폐기되었다. 이에 공이 또 입대(入對)하여 극력 진달하였으나 끝내 행해지지 못하였다.
이때 역신(逆臣) 김자점(金自點)의 무리가 뜻대로 되지 않자 원망을 품고는 안으로 반역을 도모하면서 은밀히 청(淸)나라 사람에게 고자질하였다. 그리하여 화란(禍亂)의 조짐이 이미 싹텄으므로, 공이 사전에 미리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청하면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할 것이라고 하였으나, 요상(僚相 동료 재상)이 경동(驚動)시키면 안 된다고 반대하였다. 경인년(1650, 효종 1) 봄에 과연 북사(北使 청나라 사신)가 우리나라에 와서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지 예측할 수 없었으나, 공이 의연히 동요됨이 없이 성의를 다하여 주선한 결과 간신히 미봉(彌縫)할 수 있었다. 12월에 휴가를 청하여 윤 부인(尹夫人)을 공주(公州) 땅으로 천장(遷葬)하니, 상이 본도(本道)로 하여금 상사(喪事)를 돌보게 하고 제전(祭奠)을 지급하게 하였다.
전(前) 교리 유계(兪棨)가 일찍이 선왕의 시호(諡號)에 인(仁)이라는 글자를 거듭해서 써야 할 필요는 없다고 논하고, 전 응교 심대부(沈大孚)는 조(祖)라고 칭하면 안 된다고 논하였는데, 이 논의가 모두 상의 뜻에 거슬렸으므로 결국 폐기되고 쓰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서 공이 탑전(榻前)에서 그들의 일을 언급하자 상이 두 사람을 유배 보내라고 명하였다. 공이 차자를 올려 대죄(待罪)하면서 중한 처벌을 내려 주기를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이 충성스럽고 신실한 것이야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이번의 조치도 경의 말 때문에 나온 것이 아니니, 경은 안심하라.” 하였다. 대사헌 남선(南銑)과 부제학 조석윤(趙錫胤) 등이 그 일을 쟁론하다가 파직되자 공이 극력 물러나겠다고 청하니, 상이 두 차례나 사관(史官)과 승지를 보내 돈유(敦諭)하였다. 공이 이에 차자를 올려 정세(情勢)를 통절히 진달하니, 상이 유계와 심대부 등을 풀어 주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남선과 조석윤은 여전히 서용(敍用)하는 은혜를 받지 못하였는데, 공이 또 차자를 올려 논하자 그들도 모두 다시 서용되었다. 공이 누차 상소하여 더욱 간절히 면직을 청하였으나 상이 끝내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마지못해 출사(出仕)하였다. 또 잇따라 네 차례나 상소하여 치사(致仕)를 청하였으나 상이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인조대왕(仁祖大王)의 연제(練祭 소상(小祥))를 지낼 기일이 가까이 다가오자, 공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가례(家禮)》 소상(小祥) 연복조(練服條)에는 절목(節目)이 분명하지 않은데, 구준(丘濬)의 《의절(儀節)》에는 ‘조금 굵고 푹 익힌 삼베〔稍粗熟麻布〕로 최복(衰服)을 새로 만들어 입는 것이 옳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고례(古禮)를 상고해 보건대, 연제를 마치면 무거운 상복을 가벼운 상복으로 바꿔 입어야 하는 만큼 중의(中衣)와 관은 연포(練布)로 만들고, 최상(衰裳 상복의 상의와 하의)은 졸곡(卒哭) 뒤에 쓰는 관의 마포(麻布)의 승수(升數)를 적용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졸곡 뒤에 쓰는 관은 바로 대공(大功) 칠승포(七升布)인데, 대공포(大功布)에 대해서는 《의례(儀禮)》에도 연포를 사용한다는 글이 원래 없으니, 이것을 가지고 유추해 보면 연제 때의 최상에는 연포를 사용하지 않는 듯합니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와 선조(先朝)의 등록(謄錄)을 보면 모두 최복을 바꾸지 않고 계속 착용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예에는 절차가 있고 그에 따른 형식이 있는 법입니다. 옛날의 제도를 보면 초상(初喪) 때부터 탈상(脫喪) 때까지 상복을 점차 가벼운 쪽으로 바꾸는 곡절이 매우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임금이 행하는 예법은 온 나라의 의칙(儀則)이 되어야 마땅하니 구차하게 행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옛 예제(禮制)에 따라 연포로 관과 중의를 만들고, 조금 촘촘한 생포(生布)로 별도의 최복을 만들게 하소서. 그리고 친상(親喪)을 당한 모든 국인(國人)들도 이 예제를 따르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상이 이 건의를 해조(該曹)에 내렸으나, 끝내 시행되지 않았다.
이때 오래도록 가뭄이 들자, 상이 사직에 친히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려고 하였다. 해조가 음악을 사용해야 할지의 여부를 대신에게 의논하게 하기를 청하였는데, 의논에 차이가 많았다. 공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예는 물론 정성이 근본이 되고 형식은 말단이 된다고도 하겠습니다마는, 근본과 말단을 모두 극진히 해서 완비하는 것이 훨씬 더 좋을 것입니다. 옛날에 종묘에 올리는 제사는 거상 중에는 폐지하였지만, 천지와 산천에 지내는 제사는 영구차에 매어 놓은 줄을 넘어가서 거행하였으니, 그러고 보면 외신(外神)과 종묘의 신령을 섬기는 예법은 그 사체(事體)가 같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번에 음악을 사용하는 것이 어찌 사람이 음악을 좋아해서 슬퍼하는 마음을 해치는 일에 속하는 것이겠습니까. 단지 신령을 모시는 일을 조심스럽게 행하면서 감히 예법을 줄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일 따름입니다. 원하옵건대 사리를 깊이 살펴 신령을 섬기는 예법에 미진한 점이 있지 않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상이 대신(大臣)과 육경(六卿)에게 다시 의논하게 하니, 공의 말을 따랐다.
이때 상이 부지런히 경연에 참석하였는데, 무더운 계절을 당해서도 하루에 혹 세 차례씩 강독을 하기도 하였다. 공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옛날의 성인이 지극한 덕으로 지극한 정치를 행하였으니, 이제(二帝)와 삼왕(三王)이 바로 그분들입니다. 그분들의 정일(精一)의 법과 경계(儆戒)의 엄함, 지인(知人)의 밝음과 애민(愛民)의 자애로움 등이 방책(方冊)에 실려 있지 않은 것이 없으니, 만약 이것을 읽고 추구하며 어느 것 하나도 이것을 본받지 않는 것이 없게 한다면, 덕이 어찌 옛날에 미치지 못할 것이며, 정치가 어찌 옛날에 미치지 못하겠습니까. 전하는 도를 구하려는 뜻이 절실하여 학문을 열심히 하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어떤 때는 하루에 세 차례씩이나 강독하는 등 전하께서 뜻을 독실하게 지니고 부지런히 공부하시니, 이를 통해서도 우리 동방에 태평의 운세가 도래한 것을 알 수가 있는데, 이는 실로 종묘사직과 생령의 무궁한 복이 된다고 할 것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신의 생각에는 전하께서 자세히 살펴야 할 점이 또 있지 않나 여겨지기도 합니다. 아무리 열심히 공력을 들여도 그 요령을 얻지 못하면 효과를 거두기가 어렵고, 아무리 수고롭게 일을 해도 지향하는 뜻이 높지 않으면 성취하는 것이 오히려 낮아지는 법입니다. 학자가 지식을 얻고 선을 밝히고 인(仁)을 구하고 도덕을 증진시키기 위해 공부하려면 사서(四書)만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만약 사서에서 얻은 것이 있지 않으면서 그저 오경(五經)을 아무 의미 없이 읽어 간다면, 박이과요(博而寡要)의 폐단을 면하지 못할까 걱정됩니다.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옛것을 충분히 익히고서 새로운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스승이 될 자격이 있다.〔溫故而知新 可以爲人師矣〕’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책이든 모두 충분히 익혀야 마땅한 법인데, 하물며 사서야말로 여러 책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책인 데야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이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더욱 맛이 있습니다. 전하께서 이 책을 이미 숙독하셨겠습니다만, 다시 반복해서 깊이 음미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른 책을 강론할 때라도 한가한 여가에 다시 이 사서를 익히고 연구하면서 일생의 공부로 삼는다면, 그 의미가 무궁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날로 즙희(緝熙)하는 유익함이 있게 될 것입니다.
맹자(孟子)는 말하기를 ‘순은 어떤 사람이고, 나는 어떤 사람인가. 그렇게 하기만 하면 또 그렇게 되는 것이다.〔舜何人也 予何人也 有爲者 亦若是〕’라고 하였습니다. 옛날의 군자들은 뜻을 세운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전하께서 전후에 걸쳐 강독하신 것 모두가 성인의 책입니다. 만약 성인이 되려고 추구하는 뜻이 없다면 그만이지만, 참으로 성인이 되려고 추구한다면, 글을 읽을 때에도 반드시 그 의미를 탐구해 보려고 노력하고, 직접 행동으로 옮길 때에도 반드시 그 법도대로 따르려고 노력하면서, 천리(天理)를 기필코 완전히 회복해 보겠다고 다짐하고, 사욕(私欲)을 기필코 완전히 극복해 보겠다고 다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호령을 내리고 시행할 때에나 말을 듣고 일을 조처할 때에 어느 것 하나도 지극한 경지에 이르지 않음이 없게 해야 할 것이니, 이렇게 하면 백성들 모두가 자연히 살 곳을 얻게 되고 만세토록 성군으로 칭송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에는 천리를 반드시 회복하지 못하고 사욕을 반드시 제거하지 못한 가운데, 도덕은 날이 갈수록 허물어지고 정치는 하루가 다르게 추락하고 말 것이니, 나라를 다시 떨쳐 일으킬 희망이 없어지게 될 뿐만이 아니라, 끝내는 쇠퇴하고 혼란해지는 결과를 면치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덕이 높아지고 낮아지는 것과 정치가 부패하고 융성해지는 것이 오직 뜻을 세움이 높으냐 낮으냐 하는 데에서 결판이 난다고 할 것입니다.
전하께서 지극히 열심히 학문을 강론하고 계시니 신은 삼가 경축하고 싶은 심정을 가누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전하께서 도를 추구하는 면에 있어서 혹시라도 그 요체를 터득하지 못하신 점이 있지 않나 걱정이 되기도 하고, 또 전하께서 혹시라도 요순과 같은 경지를 자기의 목표로 삼지 못한 점이 있지 않나 걱정도 되기에, 감히 어리석은 소견을 모두 토로하여 도움이 될 수 있기를 우러러 바라게 되었으니 이는 실로 야인(野人)이 근폭(芹曝)을 바치려 했던 것과 같은 정성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우비(優批)를 내리며 가납(嘉納)하였다.
7월에 병으로 사직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고 내의(內醫)를 보내어 병을 살피게 하였다. 공이 물러가 쉬게 해 줄 것을 간절히 청하였으나, 상이 또 허락하지 않고 우비를 내려 돈유(敦諭)하였다. 이공 시백(李公時白)이 새로 재상에 임명되었는데, 그는 공과 인척(姻戚) 관계에 있었다. 이런 경우에는 법규에 따라 직위가 아래인 사람이 체직되어야 했는데, 공이 두 차례나 차자를 올려 고사(固辭)하며 아뢰기를 “우상(右相)은 이제 막 임명되었으니 곧바로 체직시킬 수는 없는 일입니다. 신은 오래도록 직위에 있었고 이미 심하게 노쇠하고 병들었습니다. 그래서 구구하게 바라는 것은 오직 물러나서 쉬는 것뿐인데, 지금이 바로 그때라고 하겠습니다.”라고 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상이 하교하여 구언(求言)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중외(中外)에서 올린 장소(章疏)의 설화(說話)가 중복되고 우선순위가 서로 뒤섞여 있으니, 관례에 따라 회계(回啓)하노라면 번잡스럽기만 할 것입니다. 그중에 쓸 만한 것들을 뽑아내고 조목별로 열거해서 별도로 1건으로 만든 뒤에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게 하면 일이 매우 착실하게 될 것이다.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상이 붕당(朋黨)을 짓는다고 조정 신하들을 의심하면서 누차 그러한 기색을 안색과 언사(言辭)에 드러내자, 그 틈을 노려 눈치를 보며 환심을 사려고 하는 자가 나오기도 하였다. 공이 이를 근심한 나머지 차자의 형식을 갖추어 예로부터 지금까지 발생한 붕당의 화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고 이어서 경계하는 말을 진달하였다.
또 하나의 차자를 갖추어 군정(軍政)을 변통할 일에 대해서 자세히 개진하였는데, 그 내용을 보면 예컨대 영아(嬰兒)를 군역에 충정(充定)했다고 하더라도 나이 15세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군역의 부담을 지우게 할 것, 10년 이전에 도망치거나 물고(物故)된 경우는 모두 깨끗이 면제해 줄 것, 민간의 양인(良人) 출신의 여성이 낳은 자식은 모친을 따라서 양인이 되게 하여 군역을 배정할 것, 낳은 자식이 많다고 하더라도 군역에 배정된 자가 3인일 경우에는 나머지는 모두 군역에 배정하지 말고 매년 포목 1필씩만 징수하도록 할 것, 승려가 된 자들에게는 3석(石)의 미곡(米穀)을 바치고 환속(還俗)할 수 있도록 허락한 다음에 군역을 배정하지 말게 할 것, 군병의 번포(番布)를 절반으로 감하도록 허락하는 대신 위로 경상(卿相)으로부터 아래로 유생(儒生)과 품관(品官)의 서얼(庶孼)에 이르기까지 군역이 없는 자는 모두 포목 1필씩 내어 군대를 양성하게 함으로써 환란을 서로 구하는 방도로 삼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 내용이 모두 질서 정연하여 조리에 맞고 당시의 폐해를 구제할 수 있는 절급한 일들이었으나, 그때 마침 공이 재상의 지위에서 물러나게 되었으므로 위에 올리지 못하였다.
관학 유생(館學儒生) 등이 또 상소하여 두 현신(賢臣)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니, 이상진(李象震) 등이 상소하여 헐뜯고 배척하였으며, 영남 유생 유직(柳㮨) 등이 그 뒤를 이어 상소하였는데, 그 말이 그지없이 추악하고 패려하였다. 이에 태학(太學)의 제생(諸生)이 유직에게 중벌을 가하고 진소(陳疏)하여 변론하였는데, 상이 그 소를 물리치고 꾸짖자 제생이 권당(捲堂)을 하고 떠나니, 상이 공을 명초(命招)하여 제생들을 다시 들어오도록 타이르게 하였다. 이에 공이 요상(僚相)과 함께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문묘 종사를 청하는 것은 바로 사문(斯文)의 중론(重論)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유생들만 꾸짖을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조정에서 의논하여 정해야 할 것입니다. 이이(李珥)는 천품이 고매하고 학문이 정대한 위에 식견이 탁월하고 덕행이 순전(純全)하니, 백세(百世)의 사표(師表)라고 이를 만합니다. 그리고 성혼(成渾)은 단장(端莊)하고 엄중(嚴重)하여 출처(出處)와 행사(行事)가 모두 옛 성현의 법도를 따랐으니, 참으로 유자(儒者) 중의 뛰어난 인물이라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두 신하를 문묘에 종사해야 한다는 의논이야말로 결코 바꿀 수 없는 정론(定論)이라고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또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성현(聖賢)은 반드시 천지의 순수한 기운을 품부받고 태어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공자(孔子)와 맹자(孟子) 이후로 1천 수백여 년을 지나서야 비로소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나왔습니다. 우리 동방의 경우는 본조(本朝)에 이르러 조광조(趙光祖)와 이황(李滉)이 성현을 학문의 대상으로 삼고서, 혹은 조정에 진출하여 정치를 하기도 하고 혹은 초야에 물러나 자기 몸을 닦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이이와 성혼이 나와서 면학(勉學)하고 역행(力行)하며 임금을 성군(聖君)으로 만들고 백성에게 혜택을 베푸는 도리 등을 강구하면서 한결같이 성현을 법도로 삼았으니, 참으로 호걸지사(豪傑之士)라고 할 것입니다. 이들이 천지 사이의 순수한 기운을 품부받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와 같이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세도(世道)가 불행하여 조정의 논의가 둘로 나뉘어 반목하게 된 탓으로, 당시에 이분들을 존경하고 사모한 사람들이 물론 대다수였습니다마는 질투하고 미워하는 자들도 있었으니, 생각하면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입니다. 지금도 종사(從祀)를 청하는 논의에 대해서 온 나라 사람들이 거의 모두 동의하고 있는데, 유독 당시에 질투하고 미워한 당류(黨類)의 자손 몇몇이 나와서 헐뜯으며 비방하고 있습니다. 자식이 아버지의 잘못된 점을 고쳐서 선하게 한다면 효도한다고 말할 만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그들의 부조(父祖)가 한때 지녔던 잘못된 견해를 고수하고 있으니, 이 또한 효도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유직의 상소 내용은 특히 간악하고 교활한데, 그가 갖가지로 무망(誣罔)하는 말을 늘어놓은 것이 이루 다 헤아릴 수도 없이 많습니다. 이황이 이이를 얼마나 극진하게 애지중지하며 추장(推獎)하고 허여(許與)했는지에 대해서는 이황의 문집을 통해서 상고할 수가 있는데, 유직은 이황이 이이를 매우 미워했다고 하였습니다. 이이의 학문은 육씨(陸氏)와 근사한 곳이 하나도 없는데, 유직은 이이의 학문이 육가(陸家)에서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이이가 《성학십도(聖學十圖)》 가운데 차서(次序)가 잘못된 곳이 있다고 지적하자 이황은 즉시 그 말에 따라 고쳤는데, 유직은 털끝만큼도 계오(契悟)한 바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황이 죽은 뒤에 이이가 홀로 그를 문묘에 종사할 것을 매우 강력히 청하였는데, 유직은 이이가 있는 힘을 다해서 이황을 공격했다고 하였습니다. 성혼의 소를 보면 맨 먼저 강학(講學) · 궁리(窮理) · 격물(格物)의 일을 분명히 말하였는데, 유직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성혼이 ‘마음과 몸을 수습하고 정신을 아껴 보존한다.〔收拾身心 保惜精神〕’라는 주자의 말을 인용하여 진달하였는데, 이것에 대해서 유직은 도가(道家)의 학설이라고 강변하였습니다. 그의 말은 모두 흑백을 혼란시키고 시비를 뒤바꿔 터무니없이 날조하며 제멋대로 공격하여 배척한 것이니 참으로 참소하는 자의 망극한 정태(情態)라고 할 것이요, 남을 함정에 빠뜨리는 간사한 수단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런 행위는 선현을 무함하는 정도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전하를 기망(欺罔)하는 것 역시 극에 달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유직은 또 이이가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해서 논변한 것은 이황과 다르다고 하면서 심지어는 이황의 죄인이라고까지 하였습니다. 대저 맹자가 사단을 말한 것은 사람이 선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단지 사람의 정(情) 가운데에서 선한 부분만을 거론하여 말한 것이니, 사단 이외에는 다른 정이 없다는 것을 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만약 사람의 정에 사단만 있고 더 이상 불선(不善)한 정은 없다고 한다면 사람들 모두가 성인이 되어야 할 것이니, 어찌 불선한 사람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사단은 맹자가 정 가운데에서 선한 것만을 끄집어내어 말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기》에 이르기를 ‘무엇을 사람의 정이라고 하는가. 기뻐하고 성내고 슬퍼하고 두려워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욕심내는 이 일곱 가지이다.〔何謂人情 喜怒哀懼愛惡欲七者〕’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즉 사람의 정의 선한 것과 악한 것을 총괄해서 말한 것입니다. 따라서 칠정 가운데 악한 것을 거론해서 사단과 상대되는 개념으로 쓴다면 그것은 가능하겠지만, 만약에 사단을 칠정과 상대되는 개념으로 쓴다면 그것은 안 될 일입니다. 이황이 사단과 칠정을 대립시켜 논한 것은 비록 권근(權近)의 구설(舊說 입학도설(入學圖說))을 따른 것이기는 하지만, 자세히 대조하여 검토하지 못한 잘못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의리(義理)는 천하의 공유물입니다. 학자가 궁리하고 격물하는 공부를 하는 것은 단지 의리의 소재(所在)를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마음속으로 의심이 되는데도 시비를 따져 가리지 않는다면, 이 의리는 끝내 어두워진 채 밝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정자(程子)가 지은 《주역(周易)》의 전(傳)은 그야말로 일생의 정력을 모두 바친 역작이라고 할 것인데, 주자(朱子)가 잘못된 곳을 지적한 곳이 매우 많습니다. 그리고 주자의 말에 대해서도 요로(饒魯)가 잘못을 지적한 곳이 많았고, 진력(陳櫟)은 ‘주자의 충신이 될지언정 주자의 아첨하는 신하는 되고 싶지 않다.’라고 말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정자나 주자의 말이라 하더라도 간혹 의심할 만한 곳이 없을 수 없는데, 더군다나 이황의 말에 어찌 잘못된 곳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유직은 이것을 이이의 하자(瑕疵)로 삼고 있으니 너무도 무식하다고 하겠습니다.
이이가 사단칠정에 대해서 논한 글을 보면, 식견이 월등하게 뛰어나고 언론이 통쾌하기만 하니, 예전의 제유(諸儒) 중에서도 이 정도의 수준에 이른 자는 드물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통기국(理通氣局)의 논으로 말하면 선현이 미처 밝히지 못했던 것을 밝히고 이기(理氣)의 본체(本體)를 형상화하여 직절(直截)하고 분명하게 설명함으로써 백세토록 후학을 깨우칠 수 있게 하였으니, 그 학문이 정밀하고 탁월하여 사람들의 수준을 월등하게 뛰어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처럼 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는 통하고 기는 국한다〔理通氣局〕’라고 말했고 보면, 이(理)와 기(氣)를 분별한 것이 지극히 분명하다고 말해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유직은 그만 이이의 학문이 이와 기를 하나의 물건으로 취급했다고 하였으니, 이 또한 너무나도 가소롭고 애처로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사설(邪說)이 멋대로 횡행하는데도 이를 막지 않는다면, 듣는 이들을 현혹시키고 오도(誤導)한 결과 장차 한 세상 사람들을 미혹시키기에 이를 것이니, 그 화(禍)가 어찌 홍수나 맹수의 화보다 못하겠습니까. 간사한 자가 참소하며 무함하는 해독을 끼치는 것에 대해서는 왕자(王者)의 정치에서 반드시 엄금해야 할 것입니다. 신은 삼가 가슴 아프게 여기는 바입니다.”
하였다.
또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전하께서 어찌하여 그만 이 두 현신(賢臣)에 대해서 부족하다고 여기는 생각을 지니고 계신지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성인은 남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을 걱정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두 신하와 같은 현인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지 못하시다니, 이것이 어찌 전하께 기대하던 바이겠습니까.
천하의 사리에는 원래 옳고 그른 구별이 있고, 사람의 본심에는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정대함이 있습니다. 따라서 옳은 것을 옳다고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해야만 마음의 정대함이 될 것이요 사리의 당연함이 될 것입니다.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곧은 자를 기용하고 굽은 자를 버려두면 백성이 복종할 것이다.〔擧直錯諸枉則民服〕’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곧은 자를 기용하고 굽은 자를 버려두면 굽은 자를 곧게 만들 수 있다.〔擧直錯諸枉 能使枉者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임금의 그 마음이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정대함을 잃지 않아야만 기용하고 버려두는 것을 타당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아 조정을 바르게 한다.〔正心以正朝廷〕’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분별하는 일이 없이 그저 양쪽 다 포용하려고 힘쓰기만 한다면, 이는 의도가 개재된 사심(私心)에서 나온 것으로서 자연의 이치를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한 마음속에서부터 벌써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정대함을 잃게 되어 옳고 그름과 굽고 곧음이 잡다하게 뒤섞이게 되면, 끝내는 굽은 자들이 위세를 부리고 곧은 자들이 폐기되는 처지에 놓이고 말 것이니, 이는 바로 대란(大亂)을 초래하는 길이라고 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 상에게 강무(剛武)한 점이 부족하다고 상소한 자가 있었다. 이에 공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전하께서 신료들을 접견하실 때마다 부드러운 안색으로 대하며 가부(可否)를 상의하고 계시니, 이는 임금과 신하 사이의 매우 아름다운 일이라고 할 것인데, 그는 그만 이것을 가지고 강무한 점이 부족하다고 말하였습니다. 또 아조(我朝) 300년 동안에 한 사람의 조사(朝士)도 죽이지 않은 그 일이야말로 성덕(盛德)이라고 할 것인데, 그는 그만 죽이지 않은 것을 잘못이라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새로 교화를 펴기 위해 구언(求言)하시는 날에 감히 살육의 설을 올리다니, 아, 이 또한 참혹한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하였다. 이때 관학 유생이 권당(捲堂)하는 사태가 며칠 동안 계속 이어지자, 공이 또 아뢰기를 “공관(空館)하는 변고가 일어나면 반드시 근시(近侍)를 보내 선유(宣諭)하게 하는 것이 이미 하나의 관례처럼 되었는데, 지금은 전하께서 망언이라고 노여워하며 개유(開諭)할 뜻이 없으십니다. 예로부터 공관의 사태가 일어났을 때에 유생들에게 어찌 잘못한 점이 없었겠습니까마는, 열성(列聖)께서 심하게 책망하지 않고 반드시 타일러서 다시 들어오게 하였으니, 이는 성인이 모두를 포용하는 도량과 임금이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로 볼 때에 이와 같이 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니, 상이 너그럽게 답하였다.
함경도 유생 등이 상소하여 양현(兩賢)의 문묘(文廟) 종사(從祀)를 청하니, 상이 엄하게 하교하였다. 또 영남 유생들이 유직(柳㮨)에 대한 처벌이 아직 풀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과장(科場)에서 시험을 거부하고 나가니, 조정이 이를 근심하였다. 이에 공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왕자(王者)가 세상을 다스리고 사람을 대하는 도리는 오직 시비(是非)와 사정(邪正)을 평등하게 살펴서 취하고 물리칠 따름이니, 그 사이에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계교(計較)하는 사심을 개입시킬 수 있겠습니까. 《주역》에 ‘쉽고 간단한 가운데에서 천하의 이치가 얻어진다.〔易簡而天下之理得矣〕’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말한 것입니다. 두 현신을 종사해야 한다는 논의는 실로 거국적인 공론(公論)입니다. 관북(關北) 지방이 비록 누추한 고장이라고 일컬어지기는 합니다만, 아름다운 덕을 좋아하는 양심은 그곳 사람들도 똑같이 하늘로부터 품부받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두 신하의 덕의(德義)와 명성이 멀리까지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고 보면, 어찌 관북의 유생들만 유독 그 풍도를 듣지 못했겠습니까. 그리고 스스로 생각할 때에 이름이 유적(儒籍)에 오른 신분인 만큼 타도(他道)의 유생에게 뒤지는 것이 부끄럽게 여겨져서 서로 이끌고 상경한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그만 그들이 사주를 받고 왔다고 의심을 하시는데, 삼가 그렇지는 않을 듯싶습니다. 종사에 대한 이 논의는 그야말로 온 세상의 공론이라고 할 것인데, 무엇 때문에 굳이 먼 지방에서 피폐하고 쇠잔한 유생들까지 불러다가 그들의 힘을 빌리려고 하겠습니까. 관북 지방에서는 예전부터 경성에 와서 과거에 응시하는 자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들 스스로 성심(誠心)이 없었다면, 어찌 남의 사주를 받았다고 해서 올 리가 있겠습니까.
유직 등이 선현(先賢)을 무함하고 군부(君父)를 기망하였으니, 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음속으로 통분하면서 미워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영남의 유생 등이 그만 유직을 정삭(停削)한 처벌이 아직 풀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스스로 과거를 포기하고는 마치 절개를 지키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으니, 이는 참으로 괴이한 변고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설령 유직이 정직한 발언을 하다가 벌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제생(諸生)이 그를 애석하게 여기는 뜻이 있다면 오직 자기만 과거에 응시하지 않으면 될 것인데, 과거 시험장에 떼 지어 몰려와서는 공공연히 시관(試官)에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제멋대로 지껄이고 나갔습니다. 그들이 벌인 이 일로 말하면 집단으로 국가의 명령에 항거하려고 한 것이요, 그들이 꾀한 계책으로 말하면 조정을 위협하고 견제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는 바로 ‘요군자무상(要君者無上)’이라고 하는 것에 해당하는 것이니, 그러한 풍조가 만연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의 뜻을 삼가 살펴보건대, 영남 유생들에 대해서는 매번 너그럽게 용납해 주시는 반면에 현인을 사모하는 발언을 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번번이 통렬하게 꺾어 버리시는가 하면 심지어는 현인까지도 경시하며 소홀히 대하고 계시니, 이 점을 신은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지금 종사의 논의를 배척하여 끊어 버림으로써 나라를 보전하는 방도로 삼으려 하신다면, 그들이 능멸하고 모욕하는 것이 갈수록 심해지는 가운데 나라의 형세도 날로 쇠퇴할 것 같아서 삼가 걱정됩니다. 사람의 마음을 복종시키느냐 복종시키지 못하느냐 하는 것은 오직 처치를 온당하게 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어찌 죄 있는 자를 용인하고 비호한다고 해서 사람의 마음을 복종시킬 수 있겠습니까. 영남 유생들이 과거 시험을 거부한 것은 모두 그들의 본심이 아니라고 할 것인데, 원근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실로 해괴하고 의아스러운 말들이 많습니다. 그러니 지금 먼저 감사(監司)를 파면하고 다시 공정한 사람을 가려 차견(差遣)해서 제생에게 유고(諭告)하여 그 의혹을 풀어 주게 하는 한편 유직이 현인을 무함하고 전하를 기망한 죄를 다스리게 한다면, 일도(一道)가 아무 일 없이 안정을 되찾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그런데 어비(御批)에 온당치 못하게 여기는 내용이 들어 있었으므로, 공이 차자를 올려 면직을 청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구구하나마 천성적으로 악을 미워하는 마음을 아직 상실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바르지 못하고 곧지 못한 일을 하는 것을 볼 때마다 천하게 여기고 미워하는 마음을 스스로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언사(言辭)가 다듬어지지 못한 탓으로 위곡(委曲)하게 표현하지 못한 실수가 있었고 자세히 설명드리려고 애쓰다가 과격하게 되는 잘못을 면치 못하였으니, 더 이상 이 자리를 차지하고서 죄를 쌓을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공이 더욱 강력히 해직을 청하니, 11월에 체직하고 영중추부사로 삼았다. 공이 마침내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을 하니, 상이 듣고는 사관(史官)을 보내 머물러 있으라고 유시(諭示)하도록 하였다.
이때 마침 유직(柳㮨)의 당인(黨人)이 상소하여 공을 비방하였다. 이에 공이 그날로 도성을 빠져나오니, 상이 또 사관을 보내 돈유(敦諭)하도록 하라고 명하며 간절히 머물러 있게 하였다. 사관이 공을 뒤쫓아 도성 교외에까지 이르자, 공이 대답하여 아뢰기를 “신이 이제는 너무도 노쇠해서 조정에 있어도 도와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구구한 이 몸이 남아 있고 떠나는 문제 역시 염치와 관련이 있는데, 이미 길을 떠난 이상에는 감히 전하의 유시를 받들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곧장 한강(漢江)을 건너 상소하여 진정(陳情)한 뒤에 광주(廣州) 구포(鷗浦)의 옛집으로 물러나 거하였다. 또 상소하여 본직(本職)과 겸대(兼帶)한 직책의 해면(解免)을 청하는 한편, 누차 상소하여 치사(致仕)를 청하였으나 상이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녹봉을 비롯해서 제사(諸司)에서 관례에 따라 바치는 것들을 모두 받지 않았다. 당시에 사람들이 말하기를 “조상(趙相)이 도성을 떠난 뒤로는 충간(忠諫)을 다시 듣지 못하게 되었다.” 하였다.
이에 앞서 공이 조정에 있을 적에 고(故) 윤상 방(尹相昉)의 집안의 자제가 고(故) 태학사(太學士) 이공 식(李公植)이 지은 시장(諡狀)을 가지고 와서 개술(改述)을 청하였는데, 이는 시호(諡號)를 청하는 글에는 이미 죽은 사람의 성명을 저자(著者)로 기입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때 공이 공무(公務)로 바빠서 틈을 낼 수가 없었으므로, 이공의 문자 중에 몇 군데만 고쳐 돌려주면서 저자로 공의 이름을 기입하게 하였다. 그런데 그 시장 중에 강도(江都) 당시의 일을 말한 대목에서 서인(庶人)으로 강등된 강씨(姜氏)를 빈궁(嬪宮)이라고 칭한 곳이 있었는데, 여러 사람의 눈을 거치면서도 모두 방심해 지나치고는 고치지 못하였다. 상이 이를 보고는 엄한 비답을 내리자, 공이 소장을 올려 대죄(待罪)하면서 실상을 자세히 진달하였다. 상이 금부(禁府)에 조율(照律)하라고 명하니, 대간(臺諫)이 대신에 대해 조율을 시행할 수는 없다고 간언하였으나, 결국에는 관작(官爵)을 삭탈(削奪)하였다. 뒤이어 다시 서용(敍用)하여 판중추부사에 임명하였는데, 공이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신묘년(1651, 효종 2) 겨울에 역옥(逆獄)이 일어났다. 공이 즉시 조정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상이 온당치 못하다는 분부를 내리자, 공이 도성에 들어와 상소하여 대죄하니, 상이 위유(慰諭)하였다. 옥사가 완결되자 물러나기를 청하면서 두 차례나 상소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공이 하직 인사도 하지 않고 곧장 향리로 돌아와서 또 상소하여 치사(致仕)를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상서(上書)하는 사람들이 덕망이 높은 원로(元老)를 황야에 있게 하면 안 된다고 많이 말하였고, 상도 공을 생각하여 누차 불렀지만 공은 모두 극력 사양하였다. 조정에 결정하기 어려운 논의가 있을 때면 모두 공을 찾아와서 자문을 구하였다.
공은 조정에서 물러난 뒤에는 쓸쓸히 퇴락한 집에서 오직 좌우에 서사(書史)만을 쌓아 두고 그 속에 침잠하여 깊은 뜻을 연구하면서 혹시라도 미치지 못하는 점이 있을까 두려워하였다. 또 거하는 곳에 호수와 산의 승경(勝景)이 있었으므로 가마를 타기도 하고 거룻배를 띄우기도 하면서 임야(林野)의 늙은이들과 진솔하게 소요하곤 하였는데, 만나는 자들마다 공이 정승을 지낸 사람인 줄을 알지 못하였다. 공은 오직 세도(世道)와 나라에 대한 생각을 잊지 않고 마음속으로 걱정하면서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기도 하였다.
계사년(1653) 봄에 다시 소명(召命)을 받았으나 극력 사양하였다. 공의 아들 복양(復陽)이 옥당(玉堂)의 관원으로 입시(入侍)하자, 상이 그를 불러 앞으로 나아오게 한 뒤에 공의 기거(起居)에 대해서 매우 간절히 물어보고는, 공에게 가서 상의 뜻을 유고(諭告)하고 경성으로 모셔 오게 하였다. 복양이 명을 받들고 돌아가서 상의 뜻을 고하니, 공이 상소하여 사례하고 고사(固辭)하였다. 그 뒤에 상이 또 특명으로 부르는 한편, 다시 정원(政院)으로 하여금 별도로 유지(諭旨)를 지어 급히 부르게 하였다. 그러나 공이 모두 극력 사양하고 이어서 치사를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갑오년(1654, 효종 5) 7월에 도성에 큰물이 지자, 상이 하교하여 구언(求言)하였다. 공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송나라 휘종(徽宗) 선화(宣和) 연간에 변경(汴京)에 큰물이 지자, 이강(李綱)이 이적(夷狄)의 침입으로 병란(兵亂)을 당할 조짐이라고 하면서 상소하여 극언하였는데, 과연 정강(靖康)의 화(禍)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지난 병자년에 본조(本朝)의 경우도 서울에 큰물이 졌는데 끝내는 큰 환란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의 수재(水災)는 병자년보다도 심하기 때문에 대소(大小)의 인심이 모두 놀라서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전일과 같은 환란이 일어난다면, 모르겠습니다만 어떻게 대처할 것이며 어떻게 막아낼 것입니까.
옛날에 등 문공(滕文公)이 맹자(孟子)에게 ‘제나라 사람이 설 땅에 성을 쌓으려고 합니다. 내가 매우 두려운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齊人將築薛 吾甚恐 如之何〕’라고 묻자, 맹자가 ‘임금이 그들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단지 선행에 힘쓸 따름입니다.〔君如彼何哉 强爲善而已矣〕’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윤(伊尹)은 말하기를 ‘하느님은 일정하지 않으시다. 선을 행하면 온갖 상서로운 일을 내려 주지만, 악을 행하면 온갖 재앙을 내려 준다.〔惟上帝不常 作善降之百祥 作不善降之百殃〕’라고 하였습니다. 선은 사람의 본성인 만큼 사람으로 태어나서 선한 일을 행하지 못한다면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필부가 선을 행하는 경우는 자기 몸 하나만을 선하게 하는 데에 그치는 것이지만, 임금의 경우는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기르는 도가 모두 선을 행하는 데에 있는 만큼, 나라의 안위(安危)와 백성의 이합(離合)이 바로 여기에서 결판이 난다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평일에 나라를 다스릴 적에 당연히 선을 행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아야 할 뿐만이 아니라, 나라가 위급하고 멸망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에 이를 붙들어 유지하고 떨쳐 일으키는 방책 역시 이렇게 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어떻게 힘을 써야 할지에 대해서는 이제(二帝)와 삼왕(三王)의 군신(君臣)이 논하였고, 공자와 맹자가 말하였는데, 방책(方冊)에 구체적으로 실려 있는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행하는 도로 말하면 오직 참된 마음으로 믿고 향하면서 힘껏 실행하는 데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마음을 보존하고 일을 처리할 즈음에 한결같이 옛 성현의 훈계를 법도로 삼은 뒤에, 혹 사적인 뜻에 이끌린 나머지 바른 도리에 합당하지 못한 점이 있을 경우에는 모두 고쳐 제거하여 바른 도리를 따른다면, 숨겨지거나 드러나거나 안이나 밖이나 간에 모두 선으로 일관되어 선하지 못한 요소가 뒤섞이는 일이 없게 될 것인데, 이렇게 하는데도 하늘의 마음이 즐거워하지 않고 백성의 마음이 감복하지 않는 경우는 있지 않았습니다. 선을 행해야 한다는 이 설이야말로 부유(腐儒)의 상투적인 이야기라고 여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위태롭게 여기고 두려워하는 날을 당하여 이런 말씀을 올리는 것이 어쩌면 현실에 절실하지 못한 오활한 의견으로 비칠 수도 있겠습니다만, 위로 하늘의 마음에 응하고 아래로 사람의 마음을 복종시키기 위해서는 이보다 더 절실한 말은 없을 것입니다.”
하고, 현인을 등용하는 도리를 아울러 진달하며 반복해서 자세히 아뢰니, 상이 우비(優批)를 내려 답하였다.
그 뒤에 상이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내가 일찍이 조복양(趙復陽)에게 나의 뜻을 조상(趙相)에게 유고(諭告)하게 하였는데도 오지 않는다.”라고 하고는, 이어 하유(下諭)하여 불렀으나 공이 또 노쇠하고 병들었다는 이유로 고사(固辭)하면서 끝내 나오지 않았다. 을미년(1655, 효종 6) 2월에 병이 들자, 상이 두 차례나 내의(內醫)를 파견하고 약물(藥物)을 보내어 치료하게 하였다. 공은 병이 위독하기 전까지는 여전히 힘을 내어 일어나서 의관(衣冠)을 정제하고 가묘(家廟)를 배알(拜謁)하였다. 그러다가 3월 10일에 이르러 고종(考終)하니 춘추(春秋) 77세였다. 원근에서 공의 서거 소식을 듣고는 비탄에 잠기며 인인(仁人)이 죽었다고 애석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 부음(訃音)이 전해지자 상이 매우 애도하며 철조(輟朝)하고 조문(弔問)과 부의(賻儀)를 의례(儀禮)대로 하였다. 왕세자도 궁관(宮官)을 보내 조문하고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그해 6월 계해일에 대흥현(大興縣) 동화산(東華山) 건향(乾向)의 언덕에 안장(安葬)하였다.
공은 총명함이 뛰어난 데다 덕성이 천연적으로 갖추어져서 순수(純粹) 혼후(渾厚)하고 화락(和樂) 통철(洞徹)하였으며 인애(仁愛)의 기운이 용모에 흘러넘쳤으므로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상운(祥雲)이요 서일(瑞日)과 같았다. 공은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어버이를 섬김에 정성과 사랑을 다하였다. 의정공(議政公)이 만년에 기거(起居)를 잘하지 못하자 공이 밤낮으로 그 곁을 떠나지 않으면서 마시고 먹는 일과 앉고 눕고 용변을 보는 일 등을 모두 직접 시중들었다. 그러다가 상(喪)을 당해서는 공의 나이가 칠십에 가까웠는데도 3일 동안 수장(水漿)을 입에 대지 않았으며, 3년을 하루같이 최질(衰絰)을 벗지 않고서 밤낮으로 호곡(號哭)하였으므로 거처하는 침석(枕席)이 모두 눈물에 젖어 썩었는데, 전상(前喪)과 후상(後喪)이 모두 그러하였다. 그리고 상복을 벗고 나서도 여섯 달이 지나도록 그대로 외침(外寢)에 거하였다. 선부인(先夫人)의 천장(遷葬)을 별세한 지 20년 뒤에 행하였는데, 당시에 공의 나이가 72세였는데도 그지없이 애통해하는 모습이 초상을 당했던 때와 다름이 없자, 사람들이 이를 더욱 어려운 일로 여겼다.
공은 술을 좋아하는 성격이었으나 윤 부인(尹夫人)이 일찍이 걱정하였으므로 상을 당한 뒤에도 여전히 다시 입에 가까이하지 않았다. 부모님이 즐기던 음식은 종신토록 먹지 않았으며 그 일에 말이 미치면 꼭 눈물을 흘리곤 하였다. 생일이 돌아올 때면 자신을 가누지 못한 채 슬피 눈물을 흘리곤 하였으므로 자제들이 감히 주식(酒食)을 올리지 못하였다. 기일(忌日)이 다가오면 10여 일 전부터 초상 때처럼 밤낮으로 슬피 호곡하였다. 제사를 올릴 때에는 정성과 공경을 다하여 엄동설한(嚴冬雪寒)에도 반드시 목욕을 하였는데, 매우 노쇠해진 때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변치 않았다. 친척이나 고구(故舊)의 상을 당했을 때에도 모두 마음을 다하여 슬퍼하면서 며칠 동안 술과 고기를 먹지 않았고, 그저 알고 지내는 사람이나 복례(僕隷)와 같은 미천한 아랫사람이 죽었다는 말을 들어도 반드시 고기를 물리치곤 하였다. 그래서 한 달 사이에 고기를 먹는 날이 많지 않았다.
공은 항상 이천(伊川) 선생이 생을 잊고 욕심을 따르는 것을 매우 부끄러워한다고 한 말을 지언(至言)으로 여겼다. 그래서 젊은 나이에 사명(使命)을 받들고 관서(關西) 지방에 갔을 적에 이름난 미녀가 거의 반 달 동안이나 곁에서 모셨는데도 끝내 가까이하지 않았으며, 만년에는 무려 20년이란 오랜 세월 동안 홀로 지내기도 하였다. 의복은 몸을 가리기만 하면 되었고, 음식은 두 가지 이상의 반찬을 놓지 않았다. 조정에 50여 년 동안 몸담으면서 삼공(三公)의 지위에까지 이르렀건만 경성에는 주택이 없었고 시골에는 전장(田莊)이 없었다. 사람들이 보내 준 물건이나 봉록(俸祿)으로 들어온 것은 모두 친척들에게 나누어 주어 모조리 없앤 뒤에야 그만두었다. 그리고 의리에 맞지 않는 것은 조금도 남으로부터 취하지 않았으며, 집안이 가난해 자주 양식이 떨어져서 더러 끼니를 잇지 못할 때에도 태연하기만 하였다. 기근이 든 해를 당할 때마다 반드시 평소의 음식량을 줄이거나 죽을 끓여 먹으면서 말하기를 “사람들이 모두 굶주리는 판에 내가 무슨 마음으로 잘 먹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리고 구황(救荒)하는 처방을 마련하여 민간에 널리 배포하였으므로 그 덕분에 살아난 사람이 많았다.
공의 인민애물(仁民愛物)하는 정신은 천성적으로 타고난 것이었다. 그리고 충군우국(忠君憂國)하는 마음 역시 지극한 정성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그리하여 학업을 닦을 때부터 이미 경국제세(經國濟世)하는 일을 자신의 임무로 삼고는 개연(慨然)히 선우후락(先憂後樂)의 뜻을 지녔다. 그 뒤에 성명(聖明)의 시대를 만나 지우(知遇)를 받고 군신(君臣) 간에 의기투합한 가운데,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을 때에는 삼대(三代)의 제왕을 반드시 본받을 수 있다고 하였고 치도(治道)를 논할 때에는 삼대의 정교(政敎)를 반드시 행할 수 있다고 하였다. 공이 국가와 백성을 위하여 경영하고 계획한 것 모두가 깊은 식견과 원대한 계책에서 나온 것이었다. 예컨대 대동법을 시행하여 민생을 구제하고 군정을 개혁하여 군병을 양성하고 과거제도를 변통하여 사습(士習)을 바로잡고 인재를 기르려고 한 일 등은 옛 제도에 근거하고 시의(時宜)를 참작한 것으로서, 공이 있는 힘을 다해 건의하면서 시행하기를 간청하여 마지않았던 것들이었다. 그런데 인조대왕(仁祖大王)은 공의 학술과 충성을 알고서 매우 공경하고 존중하였으나 국정을 담당한 제신(諸臣)이 인순고식(因循姑息)의 미봉책(彌縫策)만 일삼을 뿐, 실제로 넓고 원대한 생각이 없었으므로 공이 건의한 것들 대부분이 저지되어 시행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 뒤 효묘(孝廟)가 즉위한 초기에 이르러서도 미처 시행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서 가슴속에 포부를 간직한 채 향리로 돌아오게 되었으나, 하루도 이 세상일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임금의 과오나 시정(時政)의 잘못을 들을 때마다 근심스러운 기색을 얼굴에 드러내며 침식(寢食)을 편히 하지 못하였다. 그리고는 항상 탄식하여 말하기를 “치도(治道)는 오직 경술(經術)에 통달하고 이치를 궁구한 사람만이 알 수가 있는 것이요, 보통 사람이 사사로운 지혜로 억측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임금을 성군으로 만들어 백성이 혜택을 받게 하는 것은 오직 도덕군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요, 용렬한 속인들이 억지로 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옛날에 성현들이 자기를 닦고 남을 다스렸던 방도가 모두 경전(經傳)에 들어 있으니, 이것을 본받지 않고 좋은 정치를 이룬다는 것은 이치상 있을 수 없다.” 하고, 또 말하기를 “오늘날 사람들은 일이 있을 때마다 관례를 따라야 한다고 말을 하는데, 이 말이 일을 가장 해치는 것이다. 나라에서 말하는 관례라고 하는 것은 치세(治世)의 관례가 아니고 바로 쇠란(衰亂)의 관례일 뿐인데, 그러한 관례를 그대로 따라 답습한다면 쇠란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겠는가. 사람이 말하는 관례라고 하는 것은 선하게 하는 관례가 아니고 비루하게 하는 관례일 뿐인데, 그러한 관례를 그대로 따라 답습한다면 비루한 것을 어떻게 고칠 수가 있겠는가.” 하고, 또 말하기를 “치도는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니다. 임금이 덕을 닦는 것이 첫째요, 그다음은 현자를 임용하고 불초자를 물리치는 것이요, 그다음은 폐기된 법도를 다시 닦고 해를 끼치는 잘못된 정사를 개혁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가 바로 치도의 요체로서 세대가 변해도 바뀔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공은 종족을 어루만져 아껴 주면서 빠짐없이 거두어 구휼(救恤)하였으며, 비록 관계가 소원한 종족이라도 곡진하게 은의(恩意)를 베풀었다. 자제들을 가르칠 때에는 매우 엄하게 하여 잘못을 범하면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다. 사람들을 대할 때에는 한결같이 성신(誠信)과 충서(忠恕)를 위주로 하였고 털끝만큼도 계교(計巧)하거나 편당(偏黨)하려는 마음이 없었다. 평소에는 화기애애하였으므로 사람들 모두가 심취(心醉)하여 열복(悅服)하였으나, 정직하지 못한 사람을 보면 엄한 말로 통렬히 배척하여 차마 정시(正視)할 수 없을 정도였다. 사설(邪說)을 배격하고 사도(斯道)를 보위(保衛)하는 일에 의연(毅然)히 몸을 바쳐 따르면서, 득실(得失)이나 영욕(榮辱) 따위에는 기뻐하거나 슬퍼하는 뜻이 전혀 없이 진퇴(進退)와 출처(出處)가 정대하였으므로 사람들이 트집을 잡아 비난할 수가 없었다.
공은 소싯적에 장공 유(張公維) · 최공 명길(崔公鳴吉) · 이공 시백(李公時白)과 가장 친하게 지내었다. 그래서 당시에 사람들이 사우(四友)라고 일컬을 정도로 정분(情分)이 매우 두터웠으나, 언론(言論)과 심사(心事) 면에서는 꼭 모두 같진 않았다. 또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김공(金公)에 대해서는 경애(敬愛)하는 마음이 매우 지극하였으나, 일을 논할 때면 또한 구차하게 영합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완평(完平 이원익(李元翼)) 이공(李公)과 서평(西平 한준겸(韓浚謙)) 한공(韓公)으로 말하면 공과 비교해서 연배(年輩)가 많이 차이가 났으나, 공을 특별히 친애하면서 지기(知己)로 인정하였는데, 완평은 항상 “조모(趙某)는 지금 세상의 사람이 아닌데, 그 경륜(經綸)의 재질을 아는 사람이 드물다.”라고 말하곤 하였다.
공은 평생토록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성현의 경지를 반드시 배워서 이를 수 있다고 여기고는 항상 말하기를 “경서를 볼 때에도 곧장 성현의 본지(本旨)를 터득해야 하고, 몸을 닦을 때에도 곧장 성현의 심법(心法)을 체득해야 한다. 차라리 성현을 배우다가 그 경지에 이르지 못할지언정 성현 이하의 지위에 안주하고 싶지는 않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성현의 언어와 사적(事績)은 오로지 사서(四書)에 실려 있는 만큼 성현을 배우려면 이 사서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여기고는, 일생토록 가장 깊이 그리고 가장 전일하게 여기에 공력을 쏟으면서 침잠하고 반복하여 정밀하게 사색하고 힘껏 실천하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의심스럽거나 어려운 대목을 접할 때마다 일일이 기록해 둔 것이 쌓여서 권질(卷帙)을 이루었다.
공은 또 일찍이 말하기를 “공자(孔子) 이후로 제유(諸儒)를 집대성(集大成)한 분이 주자(朱子)이니, 후학에게 공을 끼친 것이 맹자(孟子)보다 많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주자가 경전을 해석한 것이 극진하다고 할 수 있는데도 오히려 완전히 해석하지 못했다고 스스로 말하였다. 이 이치는 바로 천하 고금이 똑같이 그렇게 여기는 공물(公物)이니, 학자로서는 오직 상세히 사색해서 자득하는 것이 귀중하다고 하겠다.”라고 하였다. 나이 20여 세 때에 사람들과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해서 논하다가 생각나는 대로 말하기를 “사단은 칠정 중의 선한 것이다.” 하였는데, 나중에 퇴계(退溪 이황(李滉))와 율곡(栗谷 이이(李珥)) 등 여러 선생들의 허다한 논의를 확인해 보니 그 결론은 바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공의 견해가 탁월한 것이 대개 이와 같았다.
공은 지경(持敬)과 존심(存心)을 일생에 걸쳐 행해야 할 근본 공부로 삼았다. 항상 말하기를 “지경은 수렴(收斂)과 조존(操存)을 요체로 삼는데, 정신이 담연(湛然)히 그 속에 있으면 그 공부가 제대로 되고 있는 증거이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학자가 학문을 하는 대체적인 뜻은 단지 사욕(私欲)을 모조리 없애고 천리(天理)가 순전(純全)한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일 따름이요, 단지 광명(光明)하고 쇄락(灑落)하여 천지와 귀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일 따름이요, 단지 천하의 일을 담당하면서 천지의 일에 참여하여 화육(化育)을 돕는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일 따름인데, 그 근본은 단지 마음을 보존하는 데에 있다.”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마음을 보존하고 있을 때에는 신명(神明)이 어둡지 않아 만 가지 이치가 온전히 갖춰지게 된다. 이러한 때에는 성현의 마음이라 할지라도 단지 이와 같을 뿐이다. 다만 성현은 이런 마음을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는 데에 반해서 학자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일 따름이다. 참으로 공부를 순일하고 완숙하게 해서 오래도록 이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게 된다면, 성현의 경지와 똑같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공은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의관(衣冠)을 정제하고 가묘(家廟)를 참배한 뒤에 서실(書室)로 물러 나와 종일토록 단정한 자세로 꼿꼿이 앉아 있곤 하였으며 저속한 언어나 꾸짖는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리고 나태하거나 방자한 기색이 몸에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가인(家人)이나 자제라 할지라도 공이 기대어 앉거나 누워 있는 때를 본 적이 있지 않았다. 공은 진대(進對)할 일이 있을 때마다 미리 재계하여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공경히 하였으며, 아무리 추운 계절이라도 반드시 목욕을 하곤 하였다. 수재(水災)나 한재(旱災)를 당해서 명을 받들고 제사를 지낼 때면 일심으로 재계하면서 정결히 하였는데, 기도를 하기만 하면 반응이 나타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공이 구포(鷗浦)에 거할 적에 행랑채에서 불이 났는데 서풍이 불어오는 때라서 얼마 안 되는 사이에 안채의 서쪽 처마까지 불길이 번졌다. 그런데 마치 신명이 돕기라도 하듯이 홀연히 동풍이 반대로 일어나면서 불이 꺼졌으므로 불을 끄러 왔던 이웃 동네 사람들이 모두 놀라며 기이하게 여겼다.
사람을 가르칠 때에는 반복해서 일러 주면서도 피곤한 줄을 몰랐고, 선을 지향하며 열심히 배우는 자를 보면 진심으로 기뻐하면서 반드시 권장(勸獎)하고 교도(敎導)하였다. 그리고는 항상 세상 사람 중에 이 학문에 뜻을 둔 자가 드물어서 함께 이야기할 만한 자가 없는 것을 개탄해 마지않으며 말하기를 “주 문왕(周文王) 같은 성군을 기다리지 않고도 일어나는 사람은 호걸지사(豪傑之士)이다. 그러나 그런 호걸지사가 세상에 어찌 항상 있겠는가. 지금의 세태는 실로 국가가 인도하는 방법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하였다.
공은 일찍이 말하기를 “학문을 하는 공부는 곧 길을 가는 것과 같다. 길이 아무리 멀더라도 쉬지 않고 가면 자연히 목적지에 도달하겠지만, 만약 중지하고 가지 않으면 아무리 가까운 거리라도 어떻게 이를 수 있겠는가.” 하였다. 공이 학문을 좋아하는 정성은 늙어갈수록 더욱 독실하였다. 비록 사무를 처리하고 빈객을 응대하는 때라도 마음과 눈길은 책에 가 있지 않은 적이 없었다. 나이 칠십이 지난 뒤에도 등불 아래에서 책을 볼 수 있었으며, 밤늦게까지 혹은 새벽까지 독서하는 즐거움에 근심을 잊으면서 죽은 뒤에야 그만두었으니, 공이 학문을 좋아한 것은 천성이었다고 말할 만하다.
문장을 지을 때에는 단지 사리(事理)가 통하게만 하였을 뿐이요 화려하게 꾸미는 것은 일삼지 않았는데, 붓 가는 대로 내맡긴 채 자유자재로 써 내려가는 가운데 그 의미가 막힘없이 도도하게 펼쳐졌다. 그래서 계곡(谿谷 장유(張維)) 장공(張公)이 매양 말하기를 “의리(義理)에 관한 글은 우리들이 따라가기 어렵다.”라고 말하곤 하였다.
문집(文集) 15권이 전한다. 《중용곤득(中庸困得)》과 《대학곤득(大學困得)》 각 1책, 《논어천설(論語淺說)》 · 《맹자천설(孟子淺說)》 · 《서경천설(書經淺說)》 각 3책, 《역상개략(易象槪略)》 · 《거업록(居業錄)》 각 1책, 《심법십이장(心法十二章)》 · 《개혹천어(開惑淺語)》 · 《도촌잡록(道村雜錄)》 각 1책, 《가례향의(家禮鄕宜)》 2책, 《이락정요(伊洛精要)》 5책, 《주서요류(朱書要類)》 6책, 《주문요초(朱文要抄)》 10책, 그리고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 《사기(史記)》 · 《한서(漢書)》와 한유(韓愈) · 유종원(柳宗元) · 구양수(歐陽脩)의 글을 초록(抄錄)한 것 등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 공이 일찍이 경서(經書)의 해설서인 각종 《곤득(困得)》과 《천설(淺說)》 등 몇 책을 상소하면서 함께 올렸는데, 그때마다 양조(兩朝)에서 모두 총장(寵獎)하는 은혜를 내렸다.
공의 배위(配位)는 성주 현씨(星州玄氏)로 매우 부덕(婦德)이 있었다. 증(贈) 참판 덕량(德良)의 딸이요, 고려 명신 덕수(德秀)의 후예이다. 정부인(貞夫人)에 봉해졌다가 뒤에 정경부인(貞敬夫人)으로 추봉(追封)되었다. 5남 1녀를 두었다. 장남 몽양(夢陽)은 현감이고, 다음 진양(進陽)은 군수이고, 다음 복양(復陽)은 이조 참의이고, 다음 내양(來陽)은 진사이고, 다음 현양(顯陽)은 생원시(生員試)에서 장원하였다. 딸은 진사 이상주(李相冑)에게 출가하였다. 군수와 참의 외에는 모두 공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몽양은 1남 지강(持綱)을 두었다. 진양은 1남 지한(持韓)을 두었다. 복양은 4남을 두었는데 지형(持衡) · 지성(持成) · 지겸(持謙) · 지원(持元)이다. 내양은 1남 지헌(持憲)을 두었다. 현양은 2남을 두었는데 지항(持恒)과 지정(持正)이다.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나는 궁벽한 시골에서 공보다 늦게 태어나 문하에 나아가서 직접 모실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기축년에 선대왕(先大王 인조(仁祖))의 대장(大葬) 때에 외람되게 봉릉관(封陵官)의 신분으로 나아가서 총호사(摠護使)의 자리에 있던 공을 멀리서 뵙게 되었는데, 슬픔에 잠긴 안색과 애통해하는 곡읍(哭泣)이 백관을 감동시켰다. 공의 효성은 천성에서 우러나왔다는 말을 평소에 듣고 있었는데, 이는 대개 그 효성을 임금에게 미루어 행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이로부터 내가 마음속으로 항상 경복(敬服)해 오다가 상하(牀下)에서 절하여 뵙고 문하생이 된 뒤로 공으로부터 너무도 후한 지우(知遇)와 추장(推獎)을 받았다. 일찍이 맹자(孟子)의 말을 듣건대 “대인이란 갓난아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을 잃지 않은 사람이다.〔大人者 不失其赤子之心者也〕” 하였고, 주공섬(朱公掞)은 명도(明道)에 대해 봄바람 속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고 평하였는데, 이 두 가지의 말을 가지고 공의 기상을 상상해 본다면 거의 비슷하리라고 여겨진다.
참의공(參議公 포저의 아들 복양(復陽))이 가전(家傳)을 나에게 주면서 공의 행적을 간추려 태사씨(太史氏 사관(史官))에게 고할 시장(諡狀)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내가 의리상 감히 문장이 졸렬하다는 이유로 사양할 수 없기에, 마침내 대체적인 내용만을 이상과 같이 기록하고 미세한 공의 말과 행실은 모두 기재하지 않았다.


 

[주D-001]중용(中庸)의 …… 뿐이다 : 《포저집》 권20 ‘《중용》의 공부와 《대학》의 공부를 겸행해야 한다〔中庸大學工夫兼取〕’라는 제목의 글 중에 “《중용》의 공부란 존덕성(尊德性)과 계신공구(戒愼恐懼)와 근독(謹獨)이 바로 그것이요, 《대학》의 공부란 성의(誠意)가 바로 그것이다. 이 두 책의 공부를 비교해서 논하건대 존덕성과 계신공구는 성의 이전의 공부이고, 《중용》의 근독은 《대학》의 성의와 같은 일이라고 하겠다.”라는 등의 말이 나온다.
[주D-002]방납(防納) : 공물을 대신 납부하는 것을 말한다. 즉 납세 의무자인 백성들 대신에 중간 상인이나 관리가 물품을 구입해서 상납하고 그 대가를 백성들에게 받는 것을 말하는데, 몇 배의 값을 강제로 요구했기 때문에 이로 인한 백성들의 피해가 막심하였다.
[주D-003]삼수량(三手糧) : 훈련도감(訓鍊都監) 소속의 사수(射手) · 살수(殺手) · 포수(砲手)를 양성할 목적으로 특별히 징수하던 세미(稅米)를 말하는데, 삼수미(三手米)라고도 한다.
[주D-004]한갓 …… 법이다 : 법과 제도가 아무리 훌륭해도 이를 행해야겠다는 사람의 의지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그저 선하기만 한 것으로는 정치를 하기에 부족하고, 한갓 법만 가지고는 저절로 행해지지 않는 법이다.〔徒善不足以爲政 徒法不能以自行〕”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5]관저(關睢)와 …… 있다 : 《근사록(近思錄)》 권8 치체류(治體類)에 나오는 정호(程顥)의 말이다. 관저는 주 문왕(周文王)의 후비(后妃)를 찬양한 시이고, 인지(麟趾)는 문왕의 훌륭한 자손을 노래한 시인데, 임금이 수신(修身)은 물론이고 먼저 문왕처럼 궁중 내부부터 시작해서 제가(齊家) · 치국(治國) · 평천하(平天下)의 도를 행해야만 《주례(周禮)》에 나오는 여러 가지 제도를 행할 수 있는 자격이 있게 된다는 말이다.
[주D-006]무엇보다도 …… 것이다 : 주희(朱熹)가 친구인 장식(張栻)에게 보낸 글로, 《국역포저집》 3집 9쪽 주 11)에 그 내용이 상세히 나온다.
[주D-007]제치(制治) : 혼란을 방지할 목적으로 미리 정책을 시행하는 것을 말한다. 《서경(書經)》 주관(周官)에 “혼란이 오기 전에 정책을 시행하고, 위태로워지기 전에 국가를 보위한다.〔制治于未亂 保邦于未危〕”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8]작사도방(作舍道傍) : 집을 지으며 행인들에게 물어보면 각각 의견이 달라서 결정이 내려지지 않는 것처럼, 국가의 정책을 결정할 적에도 다른 주장들이 많아서 얼른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소민(小旻)에 “집을 지으며 행인에게 묻는 것과 같은지라, 이 때문에 결국 완성을 보지 못하도다.〔如彼築室于道謀 是用不潰于成〕”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9]왕자(王者)의 …… 것입니다 : 결혼 적령기가 지났는데도 장가를 들지 못해 혼자서 사는 사내가 없도록 하는 것이 왕도 정치라는 말인데, 《맹자》 양혜왕 하(梁惠王下)에 태왕(太王)의 시대에는 “안에는 남편 없이 독수공방을 원망하는 여자가 없었고, 밖에는 아내 없이 혼자 사는 사내가 없었다.〔內無怨女 外無曠夫〕”라는 말이 나온다.
[주D-010]옛사람 …… 있었습니다 : 송(宋)나라의 부필(富弼)이 청주 겸 경동로 안무사(靑州兼京東路安撫使)로 나가서 종전과 다르게 구휼(救恤) 대책을 철저히 세워 기민(飢民) 50여만 명의 목숨을 구하는 한편, 그 기회에 이들을 또 군병으로 모집하여 1만 명의 병력을 확보했다는 기록이 《송사(宋史)》 권313 부필전(富弼傳)에 보인다.
[주D-011]원위(元魏)가 …… 계책 : 원위는 후위(後魏) 혹은 북위(北魏)라고도 한다. 송 문제(宋文帝) 유의(劉義)가 원가(元嘉) 27년(450)에 영삭장군(寧朔將軍) 왕현모(王玄謨)로 하여금 대군을 거느리고 군사 요충지인 활대(滑臺)를 공격하게 하였는데, 이에 원위 태무제(太武帝)인 척발도(拓跋燾)가 군대를 철수했다가 10월에 친정(親征)하여 송군(宋軍)의 주력 부대를 대파한 이른바 활대지전(滑臺之戰)을 가리킨다. 《宋書 卷5 文帝本紀, 卷76 王玄謨傳》 《南史 卷16 王玄謨傳》
[주D-012]소무(昭武)와 영사(寧社) : 1627년(인조 5)의 이인거(李仁居)의 모반 사건과 1628년의 유효립(柳孝立)의 모반 사건을 처리한 뒤에 각각 내린 공신의 칭호이다.
[주D-013]한 선제(漢宣帝)가 바로 그러하였습니다 : 선제는 무제(武帝)의 아들인 여 태자(戾太子) 거(據)의 손자로서, 무제의 소자(少子)인 소제(昭帝)의 뒤를 이었으니 종손(從孫)의 신분으로 종조(從祖)를 계승한 경우에 속한다. 선제의 생부는 사황손(史皇孫)이다. 질손(姪孫)은 형제의 손자로, 종손과 같은 말이다.
[주D-014]후한(後漢) …… 하였습니다 : 광무제(光武帝)가 왕실의 먼 후예로 기반도 전혀 없이 난세를 평정하고 천하를 통일한 것은 창업한 것과 다름이 없다고 할 것이니, 자기의 선조를 왕으로 추존하고 제사를 올린다 해도 안 될 것이 없었을 텐데, 원제(元帝)의 뒤를 이었다고 자처하고 본친(本親)에 대해서는 위호(位號)도 가하지 않은 채 단지 사묘(四廟)만 세웠다. 이 일에 대해서 부친을 무시했다는 후대의 비판도 없지 않았지만, 주희(朱熹)는 오히려 광무제의 처사를 미흡하게 여기면서 “백승의 아들을 후계자로 세워 사묘를 받들게 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였다.〔立伯升之子以奉私廟 此最得之〕”라고 평한 내용이 《회암집(晦庵集)》 권47 답하숙경(答何叔京)에 나온다. 사묘(四廟)는 고조 · 증조 · 조부 · 부친의 사당이고, 백승(伯升)은 광무제의 맏형인 유연(劉縯)의 자이다.
[주D-015]주자(朱子)가 …… 내용 : 주희가 사대부의 붕당을 걱정하는 승상 유정(留正)에게 글을 보내 군자의 당을 적극 옹호하면서, “군자가 당을 이루는 것을 미워하면 안 될 뿐만 아니라 자신도 그 당이 되는 것을 꺼리지 말아야 할 것이요, 자신이 그 당이 되는 것을 꺼리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임금까지도 인도하여 그 당이 되게 하는 일을 꺼리지 말아야 한다.〔不惟不疾君子之爲黨 而不憚以身爲之黨 不惟不憚以身爲之黨 是又將引其君以爲黨而不憚也〕”라고 한 내용 등을 말한다.
[주D-016]풍정(豐呈) : 진풍정(進豐呈)의 준말로 대궐 안에서 베푸는 잔치의 한 가지인데, 진연(進宴)보다도 규모가 크고 의식이 성대하였다.
[주D-017]오향(五享)의 제사 : 1년에 5회에 걸쳐 종묘에 올리는 제사를 말한다. 사계절의 첫 달인 1월 · 4월 · 7월 · 10월의 상순(上旬)과 12월 납일(臘日)에 행한다.
[주D-018]초(楚)나라는 …… 띠었습니다 : 전국 시대 진(秦)나라 소왕(昭王)이 범수(范睢)에게 “내가 듣건대 초나라는 쇠칼이 날카롭고 광대의 솜씨는 졸렬하다고 하였다. 쇠칼이 날카롭다면 군사들이 용맹스러운 것이요, 광대의 솜씨가 졸렬하다면 생각이 원대한 것이니, 초나라가 원대한 생각과 용맹스러운 군사들을 이끌고 우리 진나라를 도모할까 나는 두렵다.〔吾聞楚之鐵劍利而倡優拙 夫鐵劍利則士勇 倡優拙則思慮遠 夫以遠思慮而御勇士 吾恐楚之圖秦也〕”라고 말한 내용이 《사기(史記)》 권79 범수채택열전(范睢蔡澤列傳)에 나온다.
[주D-019]머지않아 되돌아온다면 : 《주역》 복괘(復卦) 초구(初九)에 “머지않아 되돌아오니 후회하는 일이 없을 것이요, 크게 좋을 것이다.〔不遠復 无祗悔 元吉〕”라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는 사욕을 극복하고 도덕성을 회복한다는 ‘극기복례’의 뜻으로 인용하였다.
[주D-020]일식이나 월식의 허물 : 《논어》 자장(子張)에 “군자의 허물은 일식이나 월식과 같다. 허물이 있을 때에는 사람들이 모두 보게 되고, 허물을 고치면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보게 된다.〔君子之過也 如日月之食焉 過也人皆見之 更也人皆仰之〕”는 말이 나온다.
[주D-021]완물상지(玩物喪志) : 쓸데없는 물건을 가지고 노는 데에 정신이 팔려서 소중한 자기의 본심을 잃어버리는 것을 말한다. 《서경》 여오(旅獒)에 “사람을 가지고 희롱하면서 놀다 보면 자기의 덕을 상실하고, 물건을 가지고 희롱하면서 놀다 보면 본래의 뜻을 잃게 된다.〔玩人喪德 玩物喪志〕”는 말이 나온다.
[주D-022]배강(背講) : 책을 보지 않고 암송하며 강독하는 것으로, 배독(背讀) 혹은 배송(背誦)이라고도 한다. 이와 반대로 책을 펴 놓고 눈으로 보면서 강독하는 것을 임강(臨講) 혹은 임독(臨讀)이라고 한다.
[주D-023]희현(希賢)하고 희성(希聖)하는 공부 : 송유(宋儒) 주돈이(周敦頤)의 《통서(通書)》 지학(志學)에 “성인은 하늘처럼 되기를 원하고, 현인은 성인이 되기를 원하고, 선비는 현인이 되기를 원한다.〔聖希天 賢希聖 士希賢〕”라는 말이 나온다.
[주D-024]산장(山長) : 송나라와 원나라 때에 강학(講學) 등 서원의 일을 총괄하게 한 관직 이름이다.
[주D-025]양전(量田) : 토지를 측량하여 토지 대장을 재정리하는 것을 말한다.
[주D-026]공부(貢賦) : 현물세(現物稅)라 할 공물(貢物)과 전세(田稅)인 부세(賦稅)를 병칭하는 말이다.
[주D-027]청야(淸野) : 들판을 말끔히 청소한다는 뜻으로, 백성과 가축과 식량 등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그 일대를 텅 비게 함으로써 적군이 물자를 얻을 수 없게 하는 것을 말한다.
[주D-028]이릉(李陵) : 한 무제(漢武帝) 때에 5000명의 보병(步兵)을 이끌고 출전했다가 흉노(匈奴)의 8만 기병(騎兵)에게 포위된 상태에서 8일 동안이나 밤낮으로 계속 싸웠으나,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화살과 식량이 다 떨어진 끝에 흉노의 선우(單于)에게 투항하였다. 그는 흉노가 비장군(飛將軍)이라고 부르면서 두려워했던 한나라의 명장 이광(李廣)의 손자이다.
[주D-029]오린(吳璘) : 남송(南宋) 고종(高宗) 때에 금(金)나라 군대의 침입을 막아내어 촉(蜀) 땅을 20여 년이나 지킨 인물로, 형인 오개(吳玠)와 함께 금나라에 항거한 남송의 형제 명장으로 일컬어졌다.
[주D-030]두려운 …… 여긴다 : 《서경》 탕고(湯誥)에 나온다.
[주D-031]위 무공(衛武公)은 …… 하였습니다 : 춘추 시대 위 무공이 95세의 나이에도 늙었다고 자처하지 않고 경계하는 잠(箴)을 지어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하면서, 신하들에게 “내가 늙었다고 하여 버리지 말고 반드시 아침저녁으로 공경히 하는 마음으로 서로들 나를 경계하라.〔無謂我老耄而舍我 必恭恪於朝夕 以交戒我〕” 하였는데, 《시경》 대아(大雅) 억(抑)의 시가 바로 그것이다. 《國語 楚語上》
[주D-032]잘못을 …… 않았다 : 《서경》 중훼지고(仲虺之誥)에 나온다.
[주D-033]간언을 …… 없었다 : 《서경》 이훈(伊訓)에 나온다.
[주D-034]듣지 …… 들었다 : 《시경》 대아(大雅) 사제(思齊)에 나온다.
[주D-035]소인들이 …… 것이다 : 《서경》 무일(無逸)에 나온다.
[주D-036]필부필부가 …… 못한다 : 《서경》 함유일덕(咸有一德)에 “임금은 백성이 아니면 일을 시킬 수가 없고 백성은 좋은 임금이 아니면 섬길 대상이 없게 되니, 임금이 스스로 과대평가하고 백성을 과소평가하면 안 될 것이다. 필부필부가 스스로 극진히 하여 섬길 대상을 얻지 못하게 되면 임금이 누구와 더불어 공을 이룰 수 있겠는가.〔后非民罔使 民非后罔事 無自廣以狹人 匹夫匹婦不獲自盡 民主罔與成厥功〕”라는 말이 나온다.
[주D-037]고명(顧命) : 임금이 죽기 전에 후사(後嗣) 등 국가의 대사를 대신에게 부탁하며 유언하는 것을 말한다.
[주D-038]대행대왕(大行大王) : 임금이 죽은 뒤에 아직 시호를 올리기 이전의 칭호로, 여기서는 인조(仁祖)를 가리킨다.
[주D-039]잘 계승하고 잘 발전시켰다 : 《중용장구(中庸章句)》 제 19 장에 “대저 효라고 하는 것은 선인(先人)의 뜻을 잘 계승하고 선인의 사업을 잘 발전시키는 것을 의미한다.〔夫孝者 善繼人之志 善述人之事者也〕”라는 말이 나온다.
[주D-040]일을 …… 못하였다 : 《서경》 열명 하(說命下)에 나오는 재상(宰相) 부열(傅說)의 말이다.
[주D-041]요 임금이 …… 것이다 :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나온다.
[주D-042]나라를 …… 뿐이다 : 송나라 신종(神宗)이 치도(治道)에 대해서 묻자 장재(張載)가 대답한 말인데, 참고로 정확한 원문은 “爲治不法三代 終苟道也”이다.
[주D-043]뜻을 …… 것이다 : 정이천(程伊川)의 말로, 《근사록》 권8 치체류(治體類)에 나오는데, 포저가 문자를 약간 달리해서 인용하였다.
[주D-044]위미정일(危微精一) : 《서경》 대우모(大禹謨)의 “인심은 위태하고 도심은 은미하니, 오직 정밀하고 일관되게 하여 그 중도(中道)를 진실로 잡아야 한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라는 16자(字)를 압축한 말이다.
[주D-045]구준(丘濬)의 의절(儀節) : 구준은 명(明)나라 사람으로, 관직이 문연각 태학사(文淵閣太學士)에 이르렀으며 특히 주자학에 정통하였다. 《의절》은 《가례의절(家禮儀節)》의 준말로, 주희(朱憙)의 《가례(家禮)》를 해설한 책이다.
[주D-046]고례(古禮)를 …… 하였습니다 : 원문만으로는 이해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내용을 보충해서 국역하였다. 《포저집》 권13 ‘소상의 복제를 논한 차자〔論小祥服制箚〕’에 자세히 나온다.
[주D-047]천지와 …… 거행하였으니 : 임금이 상기(喪期)에 구애받지 않고 천지와 사직에 제사를 올리는 것을 말한다. 《예기(禮記)》 왕제(王制)에 “부모의 상을 당해서 3년 동안은 직접 제사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천지와 사직의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만은 예외로서, 이때에는 영구차에 매어 놓은 줄을 넘어가서라도 일을 거행할 수 있다.〔喪三年不祭 唯祭天地社稷 爲越紼而行事〕”라는 말이 나온다.
[주D-048]외신(外神) : 천지와 산천의 신령을 말한다. 반면에 종묘 등에 모신 일가(一家)의 신령은 내신(內神)이라고 한다.
[주D-049]이제(二帝)와 삼왕(三王) : 요(堯)와 순(舜)을 이제라 하고, 하(夏)나라의 우왕(禹王)과 상(商)나라의 탕왕(湯王)과 주(周)나라의 문왕(文王) · 무왕(武王)을 삼왕이라 한다.
[주D-050]정일(精一) : 《서경》 대우모(大禹謨)의 “인심은 위태하고 도심은 은미하니, 오직 정밀하고 일관되게 하여 그 중도(中道)를 진실로 잡아야 한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라는 16자(字)를 압축한 말이다.
[주D-051]박이과요(博而寡要) : 사마천(司馬遷)의 부친 사마담(司馬談)이 제자백가를 평론한 말 가운데, 유가(儒家)에 대해서 “유자는 아는 것은 많은데 실제로 요긴한 것은 부족하고, 수고는 많이 하면서도 효과는 적다.〔儒者 博而寡要 勞而少功〕”라고 비판한 대목이 나온다. 《史記 卷130 太史公自序》
[주D-052]옛것을 …… 있다 : 《논어》 위정(爲政)에 나온다.
[주D-053]즙희(緝熙)하는 유익함 : 성현의 경지에 점점 접근해 가는 것을 말하는데, 《시경》 대아(大雅) 문왕(文王)의 “심원하도다, 우리 문왕이시여. 아, 실로 계속해서 공경하는 덕을 밝히셨도다.〔穆穆文王 於緝熙敬止〕”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054]순(舜)은 …… 것이다 :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안연(顔淵)의 말로 인용되어 나온다.
[주D-055]근폭(芹曝) : 성의(誠意)만 지극할 뿐 식견이 모자라는 예물이라는 뜻으로, 포저가 자신의 건의를 하찮게 여겨 겸손하게 말한 것이다. 옛날 촌사람이 미나리 맛이 기막히다면서 윗사람에게 바쳤다가 조소를 당한 헌근(獻芹)의 고사와, 따뜻한 햇볕을 임금에게 바치면 중상(重賞)을 받을 것이라며 기뻐했다는 헌폭(獻曝)의 고사에서 나온 것이다. 《列子 卷7 楊朱》
[주D-056]권당(捲堂) : 성균관 유생들이 불만이 있을 때 일제히 수업을 거부하고 명륜당(明倫堂)을 빠져나와 동맹 휴학을 하던 일을 말하는데, 공관(空館)이라고도 한다.
[주D-057]호걸지사(豪傑之士) : 남보다 훨씬 뛰어난 재능과 덕을 발휘하여 세상에 우뚝 서게 된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과 진심 상(盡心上)에 이에 대한 사례와 설명이 나온다.
[주D-058]육가(陸家) : 송나라 육상산(陸象山)과 그의 학술을 계승 · 발전시킨 명나라 왕양명(王陽明)의 이른바 육왕학파(陸王學派)를 말한다.
[주D-059]성학십도(聖學十圖) : 이황이 선조(宣祖)의 경연(經筵)에서 유학의 대강을 해설하고 심법(心法)의 요체를 명시하기 위해 제유(諸儒)의 도설(圖說)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첨부한 책이다.
[주D-060]마음과 …… 보존한다 : 주희(朱憙)가 임금에게 이와 같은 일을 권하면서 항상 천하의 일을 염두에 두라고 부탁한 말인데, 《회암집(晦庵集)》 권29 여조상서서(與趙尙書書)에 나온다.
[주D-061]사단칠정(四端七情) : 사단은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성품에서 우러나오는 측은지심(惻隱之心) · 수오지심(羞惡之心) · 사양지심(辭讓之心) · 시비지심(是非之心)을 말하고, 칠정은 사람의 일곱 가지 감정인 희로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欲)을 말한다.
[주D-062]맹자가 …… 위해서였습니다 :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나온다.
[주D-063]무엇을 …… 가지이다 : 《예기》 예운(禮運)에 나온다.
[주D-064]주자의 …… 하였습니다 : 원문은 “饒魯陳櫟等 至有願爲朱子忠臣 不願爲朱子佞臣等語”로 되어 있는데, 이는 송준길(宋浚吉)이 간략하게 정리하려다가 너무 생략해서 빚은 실수로서, 원래의 뜻을 오해할 염려가 있기 때문에 《포저집》 권6 ‘유직이 기망한 것을 변론한 소〔卞柳稷欺罔疏〕’에 의하여 바로잡아 국역하였다. 요로(饒魯)는 주희의 제자 황간(黃幹)의 문인이고 진력(陳櫟)은 정우선생(定宇先生)으로 일컬어진 원(元)나라 학자로 모두 주희의 학설을 선양하였다.
[주D-065]이통기국(理通氣局) : 서경덕(徐敬德)의 기일원론(氣一元論)을 부정하고 정주학(程朱學)의 이일분수설(理一分殊說)을 체계화한 이이(李珥)의 독창적인 이기론(理氣論)이다. 기는 유형 · 유한하여 개체에 국한되지만 그 근본이 하나인 것은 이가 통하기 때문이요, 이는 무형 · 무한하여 만물에 내재하지만 만 가지로 나누어지는 것은 기가 국하기 때문이라는 뜻인데, 이이가 성혼(成渾)에게 준 이기영(理氣詠)의 “물은 같지만 모나고 둥근 그릇에 따라 다르게 보이고, 공기는 같지만 크고 작은 병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水逐方圓器 空隨大小甁〕”라는 구절 속에 이 뜻이 잘 드러나 있다.
[주D-066]성인은 …… 하였습니다 : 《논어》 학이(學而)에 “남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을 걱정해야 한다.〔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주D-067]곧은 …… 것이다 : 《논어》 위정(爲政)에 나온다.
[주D-068]곧은 …… 있다 : 《논어》 안연(顔淵)에 나온다.
[주D-069]임금의 …… 한다 : 전한(前漢) 동중서(董仲舒)가 무제(武帝) 즉위 초에 올린 현량(賢良) 대책문(對策文) 가운데 “임금이 된 자는 자기 마음을 바로잡아 조정을 바르게 하고, 조정을 바로잡아 백관을 바르게 하고, 백관을 바로잡아 만백성을 바르게 하고, 만백성을 바로잡아 사방을 바르게 해야 한다. 사방이 바르게 되면, 멀고 가까운 곳 모두가 감히 한결같이 바른길로 나아오지 않음이 없게 되어 사특한 기운이 그 사이에 범접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爲人君者 正心以正朝廷 正朝廷以正百官 正百官以正萬民 正萬民以正四方 四方正 遠近莫敢不壹於正 而亡有邪氣奸其間者〕”라는 내용이 나온다. 《漢書 卷56 董仲舒傳》
[주D-070]쉽고 …… 얻어진다 :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나오는데, 《주역》에서는 이(易)와 간(簡)을 각각 건(乾)과 곤(坤)의 상징성을 풀이하는 단어로 사용하였다.
[주D-071]정삭(停削) : 유생이 과오를 범했을 때 과거의 응시 자격을 일시 박탈하는 정거(停擧)와 유적(儒籍)에서 제명하는 삭적(削籍)을 합친 말이다.
[주D-072]요군자무상(要君者無上) : 자기 의견을 받아들이도록 임금에게 강요하면서 임금은 안중에도 두지 않는 태도를 말한다. 《효경(孝經)》 제 11 장 오형(五刑)에 “임금을 위협하는 것은 윗사람을 무시하는 것이요, 성인을 비방하는 것은 법도를 무시하는 것이요, 효행을 비난하는 것은 어버이를 무시하는 것이니, 이는 큰 환란을 부르는 길이다.〔要君者無上 非聖人者無法 非孝者無親 此大亂之道也〕”라는 말이 나온다.
[주D-073]정강(靖康)의 화(禍) : 송나라 흠종(欽宗) 정강 2년(1127)에 금(金)나라 군대가 남하(南下)하여 송나라 수도 변경(汴京)을 함락하고 휘종(徽宗) · 흠종(欽宗) 두 황제와 황태후 · 황후 · 황태자 · 종실 등 3000명을 포로로 잡아 데리고 간 사건을 말하는데, 이로 인해 북송(北宋)이 마침내 멸망하였다.
[주D-074]등 문공(滕文公)이 …… 대답하였습니다 : 《맹자》 양혜왕 하(梁惠王下)에 나온다.
[주D-075]이윤(伊尹)은 …… 하였습니다 : 이윤이 태갑(太甲)을 경계시킨 말로 《서경》 이훈(伊訓)에 나온다.
[주D-076]이천(伊川) 선생이 …… 말 : 정이(程頤)가 태어날 때에는 몸이 약했는데 72세가 된 지금에 와서 근력을 비교해 보면 젊었을 때보다 줄어든 것이 없다고 하자, 제자인 장사숙 역(張思叔繹)이 양생(養生)을 잘해서 그런 것이냐고 물어보니, 정이가 말없이 있다가 “나는 생을 잊고 욕심을 따르는 것을 부끄러워한다.〔吾以忘生徇欲爲深恥〕”고 대답한 내용이 《심경부주(心經附註)》 권1 징분질욕장(懲忿窒慾章)에 나온다.
[주D-077]인민애물(仁民愛物) :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군자는 우선 친한 이를 친하게 대하고 나서 다른 사람들을 인자하게 대하며, 사람들을 인자하게 대하고 나서 다른 살아 있는 것들을 아껴 준다.〔親親而仁民 仁民而愛物〕”는 말이 나온다.
[주D-078]선우후락(先憂後樂) : 먼저 근심하고 뒤에 즐긴다는 뜻으로, 송나라 범중엄(范仲淹)이 지은 악양루기(岳陽樓記)의 “옛사람들은 높이 묘당에 있을 때에는 백성을 걱정하였고, 멀리 강호에 있을 때에는 임금을 걱정하였다. 따라서 조정에 나아가서도 걱정이요 물러나서도 걱정이었으니 어느 때에 즐거워할 수가 있었겠는가. 이는 필시 천하의 근심은 누구보다도 먼저 근심하고 천하의 즐거움은 모두가 즐거워한 뒤에 즐기겠다는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居廟堂之高 則憂其民 處江湖之遠 則憂其君 是進亦憂 退亦憂 然則何時而樂耶 其必曰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歟〕”라는 말에서 유래한다.
[주D-079]주 문왕(周文王) …… 때문이다 : 국가 정책이 잘못되어서 일반 백성들을 흥기시켜 호걸지사처럼 만들지 못한다는 말이다.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문왕 같은 성군을 기다린 뒤에 일어나는 자는 일반 백성이다. 그러나 저 호걸지사로 말하면 비록 문왕이 없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일어난다.〔待文王而後興者 凡民也 若夫豪傑之士 雖無文王猶興〕”는 말이 나온다.
[주D-080]대인이란 …… 사람이다 :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나온다.
[주D-081]주공섬(朱公掞)은 …… 평하였는데 : 주희(朱熹)의 《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에 “주공섬이 여주(汝州)에 가서 명도(明道) 선생을 만나 보고 돌아와서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한 달 동안이나 봄바람 속에 앉아 있었다.〔某在春風中坐了一月〕’라고 했다.”는 말이 실려 있다.

포저집 제1권
 시(詩)
만사(挽詞) 63수



선종대왕(宣宗大王)의 천릉(遷陵)에 즈음한 만사
역복을 선성에게 이어받고서 / 曆服承先聖
총명으로 백왕의 으뜸이 되셨나니 / 聰明冠百王
마음가짐은 순 임금과 우왕을 스승 삼고 / 存心師舜禹
뛰어난 덕은 요 임금과 탕왕을 이었도다 / 駿德繼堯湯
낭묘에 원로들을 초치하여 등용하고 / 廊廟登耆舊
주항에 준재들을 이끌어 들였으며 / 周行引俊良
보필하는 신하들을 예법으로 대하였고 / 臣鄰待以禮
백성들을 다친 사람 보는 듯하셨도다 / 民物視如傷
은일의 선비들을 산림에서 찾아내고 / 逸士搜巖穴
유능한 인재들을 상서에서 길렀나니 / 人才育序庠
은혜가 흡족한 시대를 장차 보게 되고 / 行看恩薄洽
덕치의 교화가 점점 향기롭게 되었도다 / 馴致德馨香
그런데 국운이 웬 일로 중도에 막혀 / 天步何中否
왜적이 그만 제멋대로 날뛰는 바람에 / 倭夷乃陸梁
초분이 험악해지는 다급한 상황에서 / 蒼黃楚氛惡
멀리 촉산으로 순수를 하시게 되었도다 / 巡狩蜀山長
다난해도 하늘의 도수가 원래 있는지라 / 多難元天數
다시 회복해서 광복의 기쁨을 맞이하여 / 重恢復日光
강토를 보전하고 안정되게끔 하였으니 / 已全寰宇謐
거룩한 대왕의 공이 더욱 드러났도다 / 益見聖功彰
정수에 안개와 구름 암담하게 뒤덮이고 / 鼎水煙雲暗
오산에 풀과 나무 황량하게 우거졌나니 / 梧山草樹荒

슬퍼라 틈새를 지나는 일백 년 인생이여 / 百年悲過隙
만백성 애끊는 듯 비통 속에 잠겼어라 / 萬姓痛摧腸
전장과 법도가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고 / 典則今猶在
안 계셔도 그 현친을 못 잊어 하는 가운데 / 賢親沒不忘
이괘의 밝음이 이미 둘이나 일어났으니 / 离明旣兩作
국가의 대업이 자연히 거듭 창성하리로다 / 大業自重昌
뜻을 잘 계승하고 모훈을 준수하며 / 善繼遵謨訓
순수하고 참되게 약상을 받들던 중에 / 純誠奉禴嘗
물이 주 나라 계묘에 침입한다는 말이 있어 / 水侵周季墓
사람들이 송 나라 황당을 의논하였어라 / 人議宋皇堂

추모하는 효손의 심정이 끝이 없어서 / 追孝思無極
혼령을 혹시 놀라게 할까 두려워하며 / 安靈恐有妨
시초와 거북점을 쳐서 길조를 얻은 뒤에 / 蓍龜得吉兆
옛 능과 가까운 등성이로 옮기게 되었어라 / 松柏近先岡
상설을 하며 신읍을 경영함은 물론이요 / 象設營新邑
옛 능묘의 의관도 모두 새로 바꾸면서 / 衣冠改舊藏
임금님 마음에 후회가 없도록 하였나니 / 宸情期勿悔
복된 땅이 상서를 두루 갖추게 되었도다 / 福地協諸祥
이제 국운이 천년 만년 끝없이 이어지고 / 寶祚綿千祀
뭇 생령이 안락을 길이 누리게 되었는데 / 羣生獲永康
미천한 신하가 옛날의 일을 떠올리면서 / 微臣思昔日
우러러 절하노라니 눈물이 가득 고입니다 / 瞻拜涕盈眶

인조대왕(仁祖大王)의 만사
만물에 으뜸으로 나오신 총명함과 / 聰明出庶物
삼왕을 이은 성대한 덕을 지니시고 / 懋德繼三王
어렵고 큰 선왕의 기업을 계승하여 / 艱大嗣先業
인자한 은덕을 온 누리에 펼치셨도다 / 仁恩覃八方
인륜이 일찍이 무너지고 타락하여 / 彛倫曾斁廢
종사가 멸망의 위기에 봉착했을 때 / 宗社阽危亡
백성들은 모진 피해를 당한 반면에 / 萬姓罹凶害
간신들은 못할 짓 없이 날뛰었도다 / 羣奸恣陸梁
하느님이 성상의 덕을 돌아보시자 / 天心眷聖德
그림자가 따르듯 충신들이 모여들어 / 影附聚忠良
하루도 못 되어 요기가 활짝 걷히고 / 不日妖氛豁
하루아침에 대의가 널리 펼쳐졌도다 / 崇朝大義張
비렴은 처형하여 저자에 진열하고 / 飛廉就顯戮
창읍은 황량한 변방에 유배하였으며 / 昌邑放遐荒
성모는 궁전으로 다시 모셔 오고 / 聖母迎宮壺
현신을 다시 조정에 나오게 하였도다 / 賢臣進廟堂
걱정하고 애쓰면서 병폐를 제거하여 / 憂勞除弊瘼
정치가 평화와 안정을 회복하였나니 / 治化復平康
덕정에 감화됨이 포로처럼 신속하고 / 德被蒲蘆速
은택이 빗줄기처럼 내려지는 가운데 / 恩行霔雨霶
조정은 엄숙하게 기강이 확립되고 / 朝紳見肅穆
서민은 즐겁게 농사짓게 되었도다 / 民庶樂田疆
비와 태는 원래 서로 순환하는 것이라서 / 否泰元相代
병란과 흉년으로 몇 차례 재앙도 당했다만 / 兵荒屢作殃
세상의 운세가 어렵고 힘들다 할지라도 / 艱難屬世運
경계하고 격려하며 국가의 기강을 떨쳤도다 / 惕勵振王綱
하늘의 경고를 요탕도 받지 않았던가 / 天警堯湯遇
완악한 삼묘를 순우도 당하지 않았던가 / 苗頑舜禹當
조화의 공에 끼일 만한 지극한 정성으로 / 至誠參造化
긍휼히 여겨 만신창이를 일으켜 세웠기에 / 勤恤起痍瘡
민심이 흡족하여 길이 받들기 원하면서 / 願戴群情洽
임금님 오래 사시기를 모두 기원하였는데 / 咸祈聖筭長
정호에 용의 그림자 멀리 사라지고 / 鼎湖龍影遠
몽사에 태양이 떨어져 깊이 잠겨서 / 濛汜日光藏
우위는 빈 골짜기로 자리를 옮겨 가고 / 羽衛移空谷
운소만 아스라이 제향 위에 감도누나 / 雲韶杳帝鄕

예전에 이 몸이 초야에 묻혀 있다가 / 昔臣從草野
창성한 시대를 만났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 何幸際時昌
지위는 외람되게 경재에까지 올라갔고 / 致位叨卿宰
청반도 모두 역임하며 의기양양하였어라 / 淸班盡歷揚
그동안 보살펴 주시는 은총을 받았는데 / 從來蒙眷寵
털끝만큼도 보답해 드릴 길이 없었으니 / 無路報毫芒
통곡을 하며 옛날 일을 떠올리는 지금 / 慟哭思前日
오장이 찢기는 슬픔을 어떻게 참으리요 / 那堪裂肺腸

권 좌랑(權佐郞) 득이(得已) 의 죽음을 애도하며
풍도와 절조 드높이 공경들을 내려다보며 / 高風峻節傲公卿
그동안 혼탁한 세상에서 독야청청하였도다 / 世混由來見獨淸
영예를 사양해 상자의 뒤를 따른 것만도 기뻤는데 / 已喜辭榮追向子
바다에 들어가 봉맹을 본받았다는 말을 바로 들었지 / 旋聞入海效逢萌
옛 시대 인물을 본 것 같아 항상 찬탄하였는데 / 同時每嘆如殊代
병에 걸려 이승 저승 나뉠 줄 어떻게 알았으랴 / 一疾那知隔此生
멀리 생각건대 이 세상의 선류들 중에 / 遙想寰中諸善類
몇 사람이나 나처럼 슬프게 애도할는지 / 幾人嗟悼似吾情

계운궁(啓運宮)의 만장(挽章)
멀리 고려 시대부터 경사가 이어진 가문 / 流慶垂休遠自麗
왕실에 출가하여 덕성이 모두 걸맞았네 / 于歸王室德咸宜
현성을 독생하여 혼란한 세상을 극복하고 / 篤生賢聖傾時否
요순의 뜻을 세워 태평을 이루게 하였다오 / 邁志唐虞致世熙
나라를 받들어 봉양하는 효도를 받는 때에 / 大孝方隆一國養
병마가 느닷없이 백 년의 수명을 재촉했네 / 沈痾遽促百年期

온 나라가 다투어 앙망하며 극진히 애도하니 / 邦人爭仰情文盡
풍초처럼 풍속이 절로 감화된 것을 알리로다 / 風草應知俗自移

정수몽(鄭守夢) 엽(曄) 의 죽음을 애도하며
성군이 출현하신 천재일우의 기회에 / 聖作千年會
이팔의 재능 지니고 조정에 올랐어라 / 朝登二八才
학궁에선 글 읽는 소리 낭랑하게 하고 / 弦歌興泮璧
어사대에선 기강을 엄숙하게 하였어라 / 綱紀振霜臺

앞으로 달려갈 길이 아직 멀고 멀건만 / 未極長途騁
큰 건물의 서까래가 느닷없이 부러졌네 / 俄摧大廈材
일찍이 소문의 소망 이룬 바도 있었기에 / 掃門曾遂願
이렇게 만사 지어 슬픔을 토로하나이다 / 薤露寫悲哀

성 영동(成永同) 문준(文濬) 에 대한 만사
동방에 오래 전에 전래된 우리 도가 / 吾道東來久
파산에서 양대에 걸쳐 다시 전해졌네 / 坡山兩世傳
학문의 연원은 집안에서 유래했고 / 淵源自家學
어진 명성은 제현에 울려 퍼졌어라 / 德譽動諸賢
요순 시대의 뜻을 시험해 보지 못한 채 / 未試唐虞志
기애의 연세에 끝내 세상을 마쳤구려 / 終摧耆艾年
이 몸을 알아줌이 일찍이 얕지 않았기에 / 遇知曾不淺
만사를 지으려니 눈물이 끝없이 흐릅니다 / 薤露涕漣漣

원 우윤(元右尹) 황(鎤) 의 죽음을 애도하며
곧은 절조가 실로 화살 같아서 / 直節良如矢
빈궁과 영달에 끝내 변치 않았네 / 窮通竟不移
천하의 선비와 벗할 줄을 알았거니 / 乃知天下士
세상 아이들에게 눈길이나 줬으리요 / 豈效世間兒
선인을 돕는다는 말은 참으로 허언이라 / 與善眞虛語
외로운 충성심 안고 그만 세상 떠났구려 / 孤忠遽止斯
내가 왜 헤일 수도 없이 눈물을 흘리냐고요 / 吾何泣無數
지금부터는 나의 종기를 잃었으니까요 / 從此失鍾期

오 지사(吳知事)에 대한 만사
전장에 임했던 날 얼마나 씩씩하였던가 / 仡仡臨戎日
용맹스러운 노장의 명성 한껏 날렸어라 / 桓桓老將名
높은 연세는 일흔을 훌쩍 뛰어넘었고 / 尊年踰七秩
추부에서는 고경의 반열에 오르셨다오 / 樞府列孤卿
시작한 일을 손자에게 물려주고서 / 緖業歸孫子
문장 실력으로 서울을 진동시켰지요 / 文章動洛京
이 세상에서 무슨 유감이 있으리이까 / 世間奚所憾
영원한 안식처에서 편히 눈을 감으시라 / 暝目就佳城

성 무주(成茂朱) 협(浹) 의 죽음을 애도하며
선생은 이 세상 속의 기인으로서 / 夫子世中奇
마음가짐이 혜와 이를 합쳤다 할까 / 持心惠且夷
이른 나이에 세속을 비루하게 여기고서 / 早歲鄙流俗
옛것을 좋아하며 엿보지 않음이 없었어라 / 好古無不窺
끊어졌던 학문이 송에서 이어져 내려오며 / 絶學繼自宋
그 학설이 하도 넓어 끝이 보이지를 않자 / 其言浩無涯

흐름 속으로 빠져 들어 깊이 몸을 담그고서 / 沈潛涉其流
정밀한 의리의 귀취를 끝까지 구명하였어라 / 精義窮所歸
통달한 그 식견으로 세상을 초월하였으니 / 達識旣高世
명예와 이끗의 길을 어찌 좇으려 하였으랴 / 肯從名利歧
모난 자루와 둥근 구멍은 끝내 어긋나는 법 / 枘鑿竟不合
흰머리 되도록 진흙탕 길을 감수하였어라 / 皓首甘塗泥
평소 사람 구제하려는 경세제민의 뜻을 / 平生濟人志
의술로 방향을 전환하여 널리 베풀면서 / 反托醫方施
살려낸 사람이 무려 몇 천 명에 달했으니 / 所活幾千人
범로가 생각했던 것과 실로 일치하였는데 / 范老誠一規
선생의 도가 높은 것을 그 누가 알았으리 / 道尊人莫知
의술이 심오한 것만 짐작하였을 뿐이었네 / 但知深於醫
후학인 나도 나름대로 작은 뜻 지니고서 / 末學抱微尙
세상과 서로 등 돌리고 치달리는 동안 / 與世相背馳
쓸쓸하게도 동행할 사람 찾지 못한 채 / 涼涼誰與偶
강습에 도움 받을 곳도 보이지 않았는데 / 講習無所資
유독 어르신께서 돌보아 주신 그 덕분에 / 獨蒙長者顧
다행히도 가르침 받고 인도를 받았었지 / 幸煩誨且提
생각하면 예전에 선생을 처음 뵈었을 때 / 念昔初承顔
연세가 실로 나보다 갑절이나 많았는데 / 尊年實倍之
한번 눈을 마주치자 그 속에 도가 있어 / 目擊道斯存
서로들 진심을 숨김없이 터놓게 되었지요 / 肝膽相爲披
자기를 알아주는 이가 예로부터 흔하던가 / 知音古來少
나이의 많고 적음을 마침내 잊게 되었는데 / 遂忘年差池
부끄럽게 정장과 같은 어진 덕도 없는 터에 / 慚非鄭莊賢
현달로부터 추중을 외람되게도 받았다오 / 猥被賢達推
그동안 흐른 세월 어찌 많지 않으리요 / 日月豈不久
지금 어느덧 스무 해가 되려 하는데 / 于今卄載垂
그중에도 생각하면 지난 십 년 동안은 / 憶昔十年間
서로 모여 서울에서 함께 어울렸지요 / 相聚在洛師
벗으로 지내시던 한두 분 선생 역시 / 有友一二生
모두 월등한 인품을 지닌 분들이라서 / 俱是超人姿
저녁 늦게까지 담론을 벌이기도 하고 / 談論或竟夕
말을 타고 빈번하게 뒤따라 다니면서 / 鞍馬頻追隨
근원을 탐색하여 천인의 관계를 규명하고 / 探源極天人
의리를 분석하여 추호도 빠뜨림 없었지요 / 析義分銖錙
소득이 있으면 함께 토론도 벌이고 / 有得共論討
의심이 있으면 공동으로 사유하면서 / 有疑同思惟
난초 향기처럼 그 마음이 같았나니 / 同心臭如蘭
이런 낙을 이 세상에서 쉽게 얻으리요 / 此樂世間稀
좋은 일은 원래 오래갈 수 없다던가 / 盛事不可久
새벽 별빛처럼 홀연히 서로 흩어져서 / 星散忽分離
각각 다른 곳으로 이별하게 되었는데 / 分離各異地
그중에서 영남 길은 더욱 요원하였어라 / 嶺路尤阻脩
연로한 어르신이 천리 멀리 계시건만 / 几杖隔千里
누구를 통해 소식을 전할 수나 있었으리 / 音信傳憑誰
빨리 가난해지는 것이 사리상 당연하다 해도 / 速貧理固宜
궁벽한 산골에서 얼마나 기한을 참으셨을까 / 窮山忍寒饑
한번 찾아뵈려는 뜻을 이루지 못한 채 / 未諧命駕志
부질없이 경수의 생각만 쌓여 갔는데 / 徒積瓊樹思
어찌 알았으리요 부음이 전해질 줄을 / 寧知訃書至
밥상을 대하고서도 놀라 탄식하였어라 / 當食驚且咨
봉함을 뜯어 돌아가신 날짜를 보고서는 / 發封見月日
목놓아 슬피 울며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 長呼涕漣洏
신위를 만들어 놓고 절에서 곡을 하노라니 / 爲位哭僧廬
아득히 남쪽 하늘가에 비바람이 치더이다 / 風雨杳南陲
예전에 뵐 때는 기운이 아직 정정하셨고 / 曾見氣貌壯
수염과 머리가 조금도 쇠하지를 않았는데 / 髭髮不少衰
어떻게 해서 갑자기 이렇게까지 되었나요 / 如何奄至此
사람의 수명은 참으로 알기가 어렵구려 / 壽者誠難知
어쩌면 헤어진 뒤 칠팔 년의 세월 동안 / 別來七八年
예전과 달라져서 그런 것은 아니리까 / 無乃異前時
일찍이 삶과 죽음의 이치를 얘기하면서 / 嘗言死生理
취산은 우리의 소관이 아니라고 하셨으니 / 聚散非吾私
이번에 죽음의 변화를 맞이했을 적에도 / 於今已觀化
생각건대 헌신짝 버리듯 태연하셨으리라 / 想應恬如遺
생각하면 예전에 도성 서쪽 초당에서 / 憶昔城西廬
발 포개고 이불 함께 덮으며 지냈는데 / 交跖同衾帷
한번 이별하고 나서 이승 저승 갈렸으니 / 一別遂今古
그런 즐거움을 다시는 누리지 못하겠네 / 玆遊已莫追
혜자의 무덤 지나면서 장생도 슬퍼했고 / 莊生哀惠子
종기가 죽자 백아도 거문고를 버렸나니 / 伯牙悲鍾期
마음 알아주는 이를 어찌 다시 얻으리요 / 知心復何得
이렇게 통곡하는 것도 당연하지 않으리까 / 此慟寧不宜
나는 평소에 시문을 잘 짓는 솜씨가 없고 / 平生乏詞藻
붓과 벼루도 내버려 둔 지 이미 오래인데 / 筆硯久廢委
지금 선생의 죽음을 통곡하는 이 마당에 / 今爲哭夫子
어설픈 글로나마 애도를 하지 않으리요 / 可無抽蕪辭
이렇게라도 나의 정을 쏟지 않을 수 없었으니 / 聊爾寫吾情
이것이 어찌 시를 잘 지을 줄 알아서리이까 / 豈是能爲詩

민중경(閔重卿)에 대한 만사
옛날에 내가 산림과 계곡 찾아가서 / 昔我蹈林壑
그대와 마을을 함께하며 지낼 적에 / 與子同里社
그대의 농장은 반곡 안에 자리했고 / 仙莊盤谷中
나의 오두막은 도봉 아래 있었지요 / 敝廬道峯
그 당시 하늘과 땅의 기운이 막혀 / 是時天地閉
수레도 버리고서 자취를 끊었는데 / 絶迹車已舍

다행히도 마음이 같은 한 분이 계셔서 / 唯幸同心人
형체를 잊고 전야에서 함께 노닐었다오 / 忘形在田野
술이 있으면 항상 둘이서 기울였나니 / 有酒常共傾
여름 겨울 상관없이 초청하고 찾아가며 / 招尋無冬夏
눈 속에서 술 항아리를 열기도 했고 / 或開雪中缸
꽃 사이에서 술잔을 들기도 했지요 / 或把花間斝
그대의 아들은 또 재질이 출중해서 / 賢子才出群
참으로 보기 드물게 총명하였는데 / 穎悟誠爲寡
나에게 뭔가 배우려고 기대하면서 / 從吾冀有聞
유아한 인물이 되겠다고 다짐하기에 / 立心期儒雅
오도를 강론하며 수사까지 올라가고 / 講道泝洙泗
글을 평론하며 반마도 언급하였지요 / 論文及班馬
그대 집안의 부자 사이에 노닌 그 덕분에 / 君家父子間
흐뭇하게 지냈으니 다른 무엇이 필요할까 / 情好寧外假
서로 따르며 친하게 지낸 십여 년 동안 / 相從十數年
우리 둘 다 즐거워서 떨어지지 못했지요 / 懽然兩不捨
용이 날아올라 온 세상이 맑아져서 / 龍飛寰宇淸
초야에서 현인들이 떨쳐 일어날 적에 / 草澤群賢起
이 몸도 띠풀처럼 함께 뽑혀 나왔는데 / 我從茅茹征
그대는 사슴과 벗하며 그대로 머물렀지요 / 君隨麋鹿止
한번 헤어지고 나서 어느새 몇 년 세월 / 一別幾寒暑
구름 낀 산속과 떨어진 복잡한 도성에서 / 雲山隔城市
나랏일로 날마다 정신없이 바쁜 가운데 / 王事日鞅掌
언제고 그칠 사이 없이 노심초사하는 동안 / 勞悴何時已
얼굴이며 머리카락 풍진에 모두 바뀌면서 / 風塵顔髮改
인생의 석양이 점점 다가오는 걸 느꼈다오 / 頹暮覺漸邇
예전에 노닐었던 일을 돌이켜 생각건대 / 回思昔日遊
고상한 흥치 즐기면서 환희에 찼었는데 / 高興眞可喜
이젠 다시 얻지 못할 까마득한 추억이라 / 邈然難復得
헛된 이름 탓하면서 혼자 탄식만 하였는데 / 自嘆浮名累
반가운 소식을 오래도록 듣지 못하던 차에 / 好音久未聞
부음이 전해지다니 이것이 어찌 된 일이요 / 訃書胡乃至
이제 그대를 다시는 만나 볼 수 없으니 / 嗟哉不可見
바람 앞에 비통한 눈물 흩뿌릴 수밖에요 / 臨風洒哀淚
벗님들도 하나 둘 날이 갈수록 떠나가니 / 朋知日凋喪
우리 인생은 여인숙의 길손과 같소그려 / 此生還如寄
아 그대의 성품은 평화롭고 담박해서 / 嗟君冲淡性
다른 사람들과 갈등을 빚는 일도 없이 / 與物無崖異
평생토록 하나의 동산을 지키고 살면서 / 平生守一丘
몸 밖의 공명 따위는 바라지도 않았고 / 不向身外冀
그대의 자제 역시 스스로 설 줄 알아 / 有子能自立
뜻과 행동이 옛사람과 견줄 만하였지요 / 志行古人比
사람의 삶이란 것은 실로 하루살이요 / 人生眞蜉蝣
세상만사도 모두 하나로 돌아가는 것 / 萬事皆一致
장수와 요절도 오히려 같다고 할 것인데 / 壽夭尙可齊
곤궁과 영달 따위야 더구나 관심을 둘까 / 窮達况致意
시시한 세상 속에서 또 무엇을 하기보단 / 悠悠更何爲
솔 아래 땅에서 길이 쉬는 것이 나으리라 / 永歸松下地
길도 멀지만 관직에 몸이 또 묶였으니 / 路遠官又係
어떻게 찾아가서 영결을 할 수 있으리요 / 何由得歸視
애오라지 이렇게 애도하는 글을 엮어 / 聊此綴哀詞
끝없는 내 생각을 토로하는 바이외다 / 寫我無限思

구 주부(具主簿)에 대한 만사
사람이 태어나 장수하기 바라지만 / 人生願爲壽
칠십까지 살기도 예로부터 드문 법 / 七十稀於古
비록 미천하고 빈궁했다 말하지만 / 雖云賤且貧
그래도 장흥고 주부의 신분이시오 / 猶主長興簿
비록 아들은 두지 못했다 하지만 / 雖無一男子
외손이 무려 다섯이나 되지 않소 / 外孫多至五
끝없이 펼쳐진 하늘과 땅 사이에 / 悠悠天地間
하나의 기운이 흩어지고 모이면서 / 一氣紛散聚
온갖 종류의 현상들이 생겨났나니 / 賦物有萬類
모두 우연일 뿐 누가 주재하였겠소 / 偶爾誰是主
귀하고 천하든 장수하고 요절하든 / 貴賤與壽夭
기뻐하고 성낼 것이 뭐가 있으리요 / 奚足爲喜怒
그대 정도만 되어도 자족해야 하리니 / 如君亦自足
그대보다 못한 이들도 부지기수라오 / 不如者何數
달인은 어떤 상황에도 편히 거하다가 / 達人安所遇
자연의 변화 따라 땅으로 돌아가외다 / 隨化歸於土
두 집안이 인척 관계를 맺은 이래로 / 自從婚媾來
여러 차례나 얼굴을 접하곤 하였는데 / 屢幸接眉宇
근년에 새벽별처럼 각자 흩어지고 나서 / 邇年各星散
남포와 멀리 떨어져 소식이 끊긴 중에 / 音塵隔南浦
다정하게 지내던 우리 민 사의로부터 / 慇懃閔司議
옥수가 꺾였다는 말을 홀연히 전해 듣고 / 忽傳摧玉樹
깜짝 놀라 슬퍼하며 탄식을 하노라니 / 怛然驚且悲
남쪽 하늘에 비바람이 암담하더이다 / 南天暗風雨
지금 갑자기 이승 저승 나뉘었으니 / 幽明倏已分
한평생 그 모습을 어떻게 다시 보리 / 一生那復覩
그저 이렇게 만사를 지어 부치오마는 / 聊爾寄哀詞
마음속의 감회야 어떻게 다 토하리요 / 此懷寧盡吐

어떤 이에 대한 만사
기린각의 훈명이 백미에 속하였고 / 麟閣勳名屬白眉
반룡의 사적이 동료 중에 월등했네 / 攀龍事蹟出倫夷
가정에서 영웅의 솜씨를 길러 내어 / 家庭養出英雄手
억만 년 사직의 기틀을 조성하였도다 / 社稷扶成億萬基
우도를 잡고 소읍을 지금 재단하는 중에 / 方見牛刀裁小邑
어찌하여 계몽을 꾸고 명을 재촉하였는가 / 柰何鷄夢促脩期
태의가 약을 보내고 중관이 조문하였으니 / 太醫送藥中官弔
앞뒤로 받은 은혜와 영광 누가 비슷하리요 / 前後恩榮孰似之

유회보(柳晦甫) 찬(燦) 의 천장(遷葬)에 즈음한 만사
생각나네 옛적에 이 상국에게 수학할 때 / 億昔受學李相國
그대와 내가 한동네에서 살았던 일이 / 君居乃與同井里
그 당시는 우리 모두 소년 시절이었는데 / 是時與子俱少年
말쑥한 얼굴에 가사인 것을 금방 알았다오 / 粉面一見知佳士
어울려 노닐며 담소한 지 얼마 되지 않아 / 相從晤語時未幾
구름과 물 저 너머로 멀리 헤어졌는데 / 相別悠悠隔雲水
흰머리 되어 지난날을 지금 추억하며 / 如今皓首思曩日
손꼽아 보니 벌써 삼십육 년 전이로세 / 屈指倏忽經三紀
그동안 천지가 온통 어둠 속에 파묻혀서 / 向來天地屬晦暝
삼강오륜이 무너지고 인륜이 끊어진 채 / 綱常淪亡絶人理
흉도가 포학하게 구는 참혹한 때를 맞아 / 羣凶逞虐酷周來
사람을 잡아 죽이기를 풀을 베듯 하였지 / 殘滅人生類草薙
그대의 부옹은 장자의 칭호를 받으면서 / 君家婦翁稱長者
수양의 어른으로 선정을 베풀고 있었는데 / 作尹首陽施政美
근거 없는 죄를 얽고 투망질을 하듯 하여 / 無端羅織如網加
화가 계속 퍼진 끝에 그대까지 당했지 / 其禍連延及之子

지분 옥쇄한 이 일을 끝내 어디에 호소하랴 / 芝焚玉碎竟何訴
밝은 태양도 빛을 잃고 참담하기만 하였는데 / 白日慘慘無光晷
나는 그때 종적을 감추고 강호에 거하면서 / 我時埋蹤在江湖
아무 말 못한 채 초야에서 마음만 아팠다오 / 嘿嘿傷心草莽裏
원래 예덕은 하늘이 싫어하는 바라 / 由來穢德天所厭
하늘과 땅을 세척하고 성인이 일어나서 / 洗滌乾坤聖人起
간악한 흉적을 처형하여 세상을 맑게 하고 / 姦兇伏罪寰宇淸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며 제사를 내렸도다 / 悼悶無辜紛贈祀
지하에 숭반의 은총이 영광스럽게 가해지고 / 崇班泉下耀恩榮
자제도 수록되어 벼슬길 빛나게 올랐으니 / 收錄遺孤登顯仕
천도는 막막해 못 믿겠다 그 누가 말했는고 / 誰言天道漠難憑
천리를 믿을 수 있는 것을 여기에서 알겠도다 / 到此方知理可恃
당시 초상을 치를 적에 너무도 창황해서 / 當時窀穸事蒼黃
좌씨가 말한 대로 장례가 미흡했는지라 / 葬故有闕徵左氏
지관이 터를 잡아 새로운 묘역을 얻었는데 / 靑烏載卜得新阡
산과 물이 감싸고 돌아 복 받을 명당 자리 / 山川鬱紆宜祥祉
지금부터는 이곳에서 길이 안식을 취하리니 / 眞宅從玆萬世安
가련토다 자식의 도리를 이제야 마쳤구나 / 可憐子道其畢矣
그대와 나의 옛 교분을 자제가 알고서는 / 孤子知吾實有舊
한 폭의 애도하는 글을 은근히 청하기에 / 一幅慇懃求作誄
아스라이 옛날 일을 추억하여 지으면서 / 茫然追記昔年事
시종 슬프고 기쁜 소회를 모두 토로했소이다 / 備寫始終悲且喜

인열왕후(仁烈王后)에 대한 만사 2수
국가 중흥의 성대한 운세를 만나 / 運値中興盛
십란의 재질로 치세를 이뤘도다 / 治因十亂才

규방의 예의범절이 이미 정대했는지라 / 閨闈儀已正
바람 앞의 풀처럼 풍속이 변화되었도다 / 風草俗能回
대춘의 장수를 모두 축원하던 차에 / 共祝長椿壽
소내의 재변을 만나 경악하였도다 / 翻驚素柰災
어진 은혜가 백성들 마음에 사무쳤으니 / 恩仁入人遠
산골 벽촌에서도 모두들 슬퍼하리로다 / 窮谷盡銜哀

서원의 경사가 멀리 뻗쳐서 / 西原餘慶遠
왕실의 휘음을 이으셨도다 / 王室嗣音徽

곤극이 한창 경사를 펼치는 때에 / 坤極方流慶
헌성이 홀연히 빛을 감추었도다 / 軒星忽隱輝

바른 몸가짐은 여훈에 드리워지고 / 儀刑垂女訓
검소한 덕은 남긴 옷에 드러났도다 / 儉德見遺衣
남국에서 관저를 노래한 것처럼 / 南國關雎詠
천추토록 후비를 찬양하리로다 / 千秋美后妃

고(故) 하 사부(河師傅) 낙(洛) 의 천장(遷葬)에 즈음한 만사
한 사람의 몸에 장원과 제이명(第二名) / 壯元第二一人身
천백 년 이래로 어찌 흔한 일이리요 / 千百年來見豈頻
대궐에 상소 올려 바른 의논 신장했고 / 抗疏紫宸伸正議
칼날 앞에 몸을 던져 인륜을 세웠도다 / 捐軀白刃植彛倫

삼엄한 사기는 역사책 속에 기록되고 / 森嚴辭氣傳方冊
충효의 가성은 사방을 진동시켰도다 / 忠孝家聲聳四鄰
이제 고향 땅에서 편히 쉬게 되었나니 / 窀穸故山今有日
죽어서도 그 명성 영원토록 전하리라 / 名稱沒世永無垠

홍생(洪生)에 대한 만사
나와 홍 양재의 교분으로 말하면 / 我與洪良宰
아동 시절 이웃으로 노닐던 사이 / 兒時實接鄰
아들을 두었으니 참으로 한혈마요 / 有男眞汗血
뛰어난 가락은 양춘곡에 견줬어라 / 絶調比陽春
계림의 나뭇가지 꺾지 못한 채 / 未折林中桂
자리 위의 보배가 문득 깨졌구나 / 飜摧席上珍

왔다가 가는 인생 일장춘몽이거니 / 去來還一夢
어찌 꼭 눈물로 수건을 적시리요 / 何必涕沾巾

이 병판(李兵判) 부인에 대한 만사
삼한에서 으뜸으로 명망 있는 집안에서 / 望族三韓甲
덕을 쌓은 가문으로 시집을 오셨다네 / 于歸積德門
존귀한 봉호가 교서 위에 빛나는 데다 / 崇封光紫誥
방백을 역임해서 영광을 또 누렸다오 / 榮享歷雄藩
진수에 걸릴 줄을 어찌 생각했으리요 / 何意嬰晉竪
초혼을 복하다니 다시 깜짝 놀랐어라 / 飜驚復楚魂
슬프고 처량하다 호리로 가는 길이여 / 悲涼蒿里路
환한 대낮에 황량한 언덕에 묻히다니 / 白日閉荒原

청음(淸陰) 김 판서(金判書)의 숙모에 대한 만사
사대에 삼공을 배출한 벌족이라면 / 四世三公族
문벌이 휘황하게 빛나는 가문이라 / 門闌赫赫輝
임금의 은혜가 군읍에 누차 내리고 / 王恩屢郡邑
부덕은 시부모님에게 흡족하였도다 / 婦德洽庭闈
석인에 대한 한은 있었다 하더라도 / 縱有碩人恨
택상을 의지하고 기댈 수 있었어라 / 猶從宅相依

고금에 누가 구십의 수명을 누렸던가 / 古今誰九十
칠순의 나이도 드물다고들 말하는걸 / 七秩亦云稀

목 참의(睦參議)의 부인에 대한 만사
전통을 자랑하는 삼한의 벌족 / 閥閱三韓舊
도요의 지자가 화락케 하였도다 / 桃夭之子宜
낭군은 일찌감치 조정에 진출하여 / 郞君曳裾早
진신 사이에서 문장으로 이름난 분 / 詞藻搢紳推
금슬의 즐거움이 한창 무르녹는 때에 / 琴瑟歡方恊
봉황의 그림자 하나 홀연히 사라졌네 / 鸞凰影忽離
동쪽 성곽 길에 나부끼는 붉은 만장 / 丹旌東郭路
석양빛 속의 백양나무 서글프도다 / 殘日白楊悲

강 좌윤(姜左尹) 인(絪) 에 대한 만사
자취는 뒤섞여서 티끌 세상 따랐지만 / 混迹隨塵世
마음은 보존하여 옛 성현을 사모했네 / 存心慕古賢
경서를 연구하여 깊은 도리 깨우치고 / 窮經玄理遂
고을에 베푼 선정 길이 전해지는도다 / 爲郡政聲傳
재신의 반열에서 원로 뒤를 따르다가 / 宰列趨黃髮
번화한 거리에선 주선을 또 압도했지 / 康衢倒酒仙
통달한 사람에게 불가할 것이 있으리요 / 達人無不可
실로 유유자적하게 왔다가 그냥 갈 뿐 / 來去信悠然

오 승지(吳承旨) 숙(䎘) 에 대한 만사
애석하도다 우리 오 승지여 / 可惜吳承旨
문장으로 사해에 이름을 전하신 분 / 文章四海傳
세 차례나 관찰사로 공명을 수립했고 / 功名三按節
두 번이나 사신으로 중국에 다녀왔지 / 使事再朝天
바야흐로 탄탄대로 달리리라 여겼는데 / 方見長途騁
강사의 나이에 그만 꺾이고 말았는가 / 飜摧强仕年
슬픈 만사 지어서 멀리 부치려고 하니 / 哀詞寫寄遠
남쪽 묘역에 비바람 소리 아득하오그려 / 風雨杳南阡

이지봉(李芝峯) 수광(睟光) 에 대한 만사
천황의 물결에 산악의 영기를 받으신 분 / 派出天潢岳降神
시풍은 성당이요 인품은 옥과 같았어라 / 盛唐詩調玉其人
맑고 고결한 명망으로 상의 은총 듬뿍 받고 / 淸脩標望傾宸眷
집안을 이은 문장으로 진신을 진동시켰다오 / 家世文章動搢紳
정사를 행할 당시 조감으로 일컬어졌는데 / 秉軸當時稱藻鑑
유혼이 어찌 느닷없이 별자리로 화했는가 / 游魂何遽化星辰
일찍이 말석에서 의범을 가까이 뵈었기에 / 曾陪席末親儀範
애사를 쓰노라니 눈물이 수건을 적십니다 / 手寫哀詞淚滿巾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 한공(韓公) 준겸(浚謙) 에 대한 만사
강과 바다처럼 아량이 넓고도 깊었던 분 / 雅量恢恢河海深
지고한 그 신념을 부귀가 흔들 수 있었으랴 / 巍然富貴豈能
그동안 경사와 복을 하늘이 거듭 내렸는데 / 由來慶福天申佑
갑자기 부음이 들리다니 명을 어찌 믿겠는가 / 一夕凶音命可諶
세상에 뛰어난 영기는 별자리로 돌아갔어도 / 間氣英靈還列宿
인후한 덕과 명성은 사람들 마음에 남았어라 / 仁聲厚德在人心
나를 알아주신 것이 우연이 아니었거니 / 自惟知顧誠非偶
통곡하며 이제부턴 거문고 부수고 싶어라 / 慟哭從玆欲破琴

완평(完平) 이 상국(李相國) 원익(元翼) 에 대한 만사
일찍이 상림 일으켜서 사방에 은택을 입혔으니 / 曾作商霖澤四方
아동이 군실을 외우는 일을 잊을 수 있으리요 / 兒童君實誦何忘

두 조정을 섬기면서 삼존을 한 몸에 갖추시고 / 兩朝事業三尊備
십 년 세월을 고향 동산 일묘궁에서 보냈도다 / 十載丘園一畝荒

뛰어난 영기가 홀연히 우주로 되돌아갔으니 / 間氣倏驚歸宇宙
태산과 들보의 비통함을 백성이 어찌 견디리요 / 邦人無奈痛山樑
이 몸도 문생의 말석에 끼이는 행운을 얻었기에 / 愚蒙幸忝門生後
오늘 만사를 지으려니 눈물이 옷을 적십니다 / 此日題詞淚滿裳

김 지사(金知事) 선생 계도(繼燾) 에 대한 만사
아동 시절 책을 끼고 문인으로 끼었는데 / 童年挾冊忝門人
손꼽아 헤어 보니 사십 년도 더 넘었네 / 屈指今餘四十春
회고해 보면 내 허명도 도시 가르쳐 주신 덕분 / 環顧虛名都是敎
그동안 조정의 높은 자리 어찌 까닭이 없으리요 / 從來窃位豈無因
당시에 배우던 이들도 대부분 황천객 되었는데 / 當時學子多重壤
선생께서는 장수를 누려 구순을 훌쩍 넘기셨네 / 高世遐齡過九旬
들보가 부러지고 태산이 무너진 이 아픔이여 / 梁木泰山嗟已矣
망연히 천지간에 서서 홀로 상심하노이다 / 茫然天地獨傷神

연릉부원군(延陵府院君) 이공(李公) 호민(好閔) 에 대한 만사
문장을 일찍 독점하며 독보의 명성 드날리다 / 早擅騷壇獨步名
영도에 추대되어 문단의 맹주로 오르신 분 / 推先瀛島主文盟
행조의 교서를 지어내자 군민이 눈물 흘렸고 / 行朝敎草軍民泣
빈관의 시를 읊조리자 사개가 깜짝 놀랐지요 / 儐館詩成使价驚
팔순이 넘는 연세는 예로부터 드문 일이요 / 八秩高年古來少
숭반의 높은 작위 역시 이 세상의 영광된 일 / 崇班峻級世間榮
문하에서 외람되게 기대를 해 주신 몸이기에 / 憶曾門下叨期許
오늘 애가를 부르려니 슬픔이 배나 더합니다 / 此日哀歌倍愴情

정 판부사(鄭判府事) 광적(光績) 에 대한 만사
청년 시절 촉망 받으며 동방에 이름 날렸는데 / 靑春雅望聞吾東
벼슬길 들어선 이래로는 운수가 궁박하였어라 / 釋褐年來甲子窮
연치와 관작 둘 다 높아 조야에서 우러렀고 / 齒爵兩尊朝野仰
맑은 조행 한 절조는 시종 변함이 없었어라 / 淸脩一節始終同
전란의 와중에 배 타고서 멀리 피난 가시다가 / 孤舟遠避風塵際
떠도는 도중에 원대한 생각이 함께 꺾였구려 / 遐筭仍摧旅泊中
일찍이 부하 관원으로 어진 모습을 뵈었기에 / 曾忝下僚親德範
애사를 지어 부치려니 눈물이 하염없나이다 / 哀辭題寄涕無從

정우복(鄭愚伏) 경세(經世) 에 대한 만사
도산의 자취 이어받고 고정의 마음 찾으면서 / 陶山遺躅考亭心
몇 년이나 산림 속에서 깊이 연구를 하던 중에 / 幾歲林泉玩索深
성군을 보좌하러 나와 보불을 빛나게 하고 / 出佐聖君光黼黻
문교를 오래 담당하며 청금을 교화시켰어라 / 久專文敎化靑衿

삽상한 기운이 아연히 하늘과 땅으로 돌아가고 / 俄然爽氣歸天地
새 저술만 홀로 남아 고금을 비추게 되었나니 / 獨有新篇照古今
남쪽 구름 슬피 보며 공연히 흘리는 눈물이여 / 悵望南雲空洒淚
이생에서 휘음을 다시는 들을 길이 없겠네요 / 此生無復聽徽音

월사(月沙) 이 상국(李相國) 정귀(廷龜) 에 대한 만사 2수
멀리 대당에서 유래한 가문의 출신으로 / 仙源遠自大唐來
어려서 온 누리에 문장의 이름 날리신 분 / 早歲文章播九垓
선조 때에 이미 일월의 빛을 의지했는데 / 已在先朝依日月
만년에 또 성군을 만나 염매가 되셨다오 / 晩逢明聖作鹽梅

사업이 빛나고 빛나서 아동들도 외우고 / 昭昭事業兒童誦
집안의 자제도 하나하나 한혈의 재질이라 / 一一門闌汗血才
영기가 홀연히 티끌 세상 버리고 떠나시니 / 爽氣忽遺塵世去
인간 세상에 통곡 소리만 천둥처럼 울리누나 / 人間謾有哭如雷

생각하면 옛날에 문하에서 배우던 날 / 憶昔摳衣日
지금 꼽아 보니 어언 사십 년 전이라 / 如今四十春
외람되게 뛰어올라 벼슬살이하는 동안 / 僣踰官序進
나도 모르게 어느새 귀밑머리 희끗희끗 / 倏忽鬢毛新
보살펴 주신 은혜를 어찌 끝내 잊으리요 / 恩顧終何忘
이제는 휘음을 다시 들을 수도 없겠구나 / 徽音更莫親
강물 너머 길 따라 나부끼는 붉은 만장 / 丹旌江外路
눈물을 흩뿌리며 한없이 통곡하나이다 / 洒涕慟無垠

신 진사(申進士) 광추(光樞) 에 대한 만사
그대와 상종하며 지냈던 몇 년 세월 / 與子相從歲幾遷
인친과 붕우의 의리 모두 완전하였어라 / 姻親朋友義俱全
거침없는 문장 솜씨는 사람들을 압도했고 / 文辭暢達超羣士
단정한 뜻과 행동은 옛 현인을 사모했지 / 志行端方慕古賢
뛰어난 재질이 언젠가는 쓰이리라 여겼는데 / 常謂美才當有用
운수가 기박해서 오래 못 사시니 어떡하오 / 奈何奇蹇竟無年
출세와 수명은 모두가 운명인 줄을 아오마는 / 窮通脩短知皆命
눈물이 절로 흐르는 것을 어찌할 수 없구려 / 到此那堪涕自漣

김 별좌(金別坐)에 대한 만사
그대와 이웃하며 십 년을 넘게 사는 동안 / 與子鄰居餘十載
머리칼은 눈처럼 희고 아이들도 다 자랐소 / 鬢毛如雪長兒童
근심 슬픔 이별 만남에 서로 보살펴 주었나니 / 憂哀離合情相恤
가난 질병 소외 오활은 우리 모두가 같았다오 / 貧病踈迂事亦同
열흘을 못 보다가 병석에 누웠다 들었는데 / 不見僅旬聞臥疾
무상한 세상 갑자기 떠나실 줄이야 알았겠소 / 那知浮世遽長終
가련토다 강남의 길로 돌아가는 만장이여 / 可憐歸旐江南路
침상에 엎드려 부질없이 눈물만 흘립니다 / 涕淚空流伏枕中

정 감사(鄭監司) 백창(百昌) 에 대한 만사
민첩하고 미묘한 겸인의 재질 발휘하여 / 敏妙兼人質
온 누리에 문장 솜씨 두루 전하신 분 / 文章四海傳
드높은 그 재주 참으로 아까웠나니 / 高才誠所愛
불우할 때 서로들 또한 동정했었지 / 蹇劣亦相憐
꿈속의 일처럼 망망한 티끌 세상이요 / 塵世茫如夢
냇물이 흘러가듯 허망한 우리 인생이라 / 浮生逝若川
옛날 함께 지내던 일 돌이켜 생각하니 / 追思平昔意
애달픈 눈물만 줄지어 저절로 흐르누나 / 哀淚自漣漣

우 좌랑(禹佐郞)의 부인인 종숙모(從叔母)에 대한 만사
왕년에 공주에서 밥을 얻어 먹을 적에 / 昔歲公山就食辰
종숙모님이 나를 아낀다 매번 생각했지요 / 每思吾母愛諸親
작별한 뒤로 두 번 다시 뵙지를 못했는데 / 分散一生難再覿
놀랍게 부음을 들으니 슬픔이 배나 더합니다 / 驚聞下世倍悲辛

박 철원(朴鐵原) 선() 에 대한 만사
그대와 친당의 인연 맺고 같은 해에 태어났는데 / 生爲親黨且同年
동문으로 또 공부할 적에 사랑을 실로 독점했지 / 學又同門愛實專
먼 친척들까지도 화목한 의리를 모두 칭송하고 / 瓜葛共稱敦睦義
동향에도 은혜를 베푼 명성이 전해지고 있다오 / 桐鄕更說惠聲傳
어떡하다 만년에 들어 우리 서로 헤어졌는지 / 如何暮景飜相失
쇠잔한 내 육신 돌아보며 홀로 쓸쓸하였다오 / 顧我殘骸獨自憐
이제 다시는 볼 수 없어 한없이 통곡을 하면서 / 長慟從玆那復見
만사 한 편을 지으려니 눈물이 샘처럼 솟아나오 / 一篇哀挽涕如泉

이 김화(李金化) 진행(震行) 에 대한 만사
아 그대는 나보다 나이가 팔 년인가 아래로서 / 嗟君少我八年間
어려서부터 어울리며 자주도 왕래를 하였지요 / 幼長相隨幾往還
우리 모두 모친상 당해 간장이 끊어졌는데 / 二母終天腸已絶
아이였던 우리도 지금은 반백이 되었다오 / 兩兒於世鬢皆斑
풍진 속에 모진 고생 겪어 온 미관말직 / 風塵末宦多酸苦
독기 자욱한 남방에서 어려움도 많았지 / 瘴癘蠻鄕備險艱
애석해라 무상한 인생 여기에서 그치다니 / 可惜浮生其止此
눈 속에 장례를 보노라니 눈물만 흐릅니다 / 雪中看葬涕潸潸

이 판서(李判書) 천장(天章) 명한(明漢) 에 대한 만사
재상의 가문에서 난초 싹을 일찍이 보았나니 / 相門曾見茁蘭芽
소싯적부터 집안에 걸맞게 명성이 뛰어났지 / 少小英聲稱乃家

부자간에 대제학은 전에 듣지 못했던 일 / 兩世文衡前未有
당시의 총재로 그 누가 더할 수 있었으랴 / 當時冢宰孰能加
평생의 정의가 천륜에 비할 만도 하였건만 / 平生情義天倫比
만년엔 멀리 떨어져 서로 소식이 뜸했지 / 晩歲音塵地角遐
쌍벽의 부음을 갑자기 듣게 될 줄 알았으랴 / 何意遽聞雙璧隕
강해에 망연자실한 채 홀로 비탄에 잠기노라 / 茫然江海獨傷嗟

이 참판(李參判) 도장(道章) 소한(昭漢) 에 대한 만사
이 몸이 승상의 옛 문생으로 수업하며 / 吾爲丞相舊門生
기재가 일찌감치 꽃피는 걸 보았지 / 曾識奇才自夙成
가업인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드날리고 / 家業文章名海宇
형제간에 조정의 공경 반열에 올랐다오 / 弟兄班序列公卿
하루아침에 아가위 꽃이 질 줄 알았으랴 / 一朝何意棠華盡
허망한 세상 참으로 목근의 영화와 같구나 / 浮世眞如木槿榮
백발이 다 된 고인이 멀리 떨어진 산야에서 / 白首故人山野遠
모질게 만사 한 편 지어 슬픈 마음 부치노라 / 忍題薤露寄哀情

김 감찰(金監察) 도(濤) 에 대한 만사
옛날 이 몸이 구도할 적에 사람들 모두 비웃었지만 / 昔吾求道衆皆嗤
오직 그대만은 종유하면서 나를 가장 믿어 주었지 / 唯子從遊最信之
심오하고 미묘한 뜻 토론하며 희열에 잠기고 / 談討杳微看悅懌
속마음 털어놓으며 얼마나 어울려 다녔던가 / 洞開肝膽幾追隨
헤어진 십 년 세월 동안 공연히 생각만 하였는데 / 十年濶別空相憶
천리 밖에서 흉한 소식을 들을 줄 어찌 알았으랴 / 千里凶音豈所期
애석하여라 우리 선인을 어떻게 다시 또 볼거나 / 可惜善人那復見
바람결에 눈물 뿌리며 끝없는 비통함 전하노라 / 臨風洒涕痛無涯

이 동지(李同知) 원득(元得) 에 대한 만사
아동 시절에 장인의 항렬에서 뵈었는데 / 兒時曾見丈人行
인친 관계 맺고 나서는 연치도 잊었지요 / 逮結姻親齒亦忘
이른 나이로 학궁에 성대히 떨친 명성이요 / 早歲盛名傳泮璧
지금까지도 동향에선 은혜를 못 잊어 한다오 / 至今遺愛在桐鄕
만날 때마다 속마음을 모조리 토로하였고 / 逢來每寫心肝盡
안부 묻고는 체력이 강해서 항상 기뻤지요 / 問及常欣體力强
오래 사시는 데에 장애가 있을 줄 알았으랴 / 何意高年還有限
바람결에 눈물 뿌리며 홀로 슬픔에 젖나이다 / 臨風洒泣獨悲傷

황 참봉(黃參奉) 종해(宗海) 에 대한 만사
명성이 자자하였건만 일찍 과거를 그만두고 / 早謝科場藉甚名
산림 속에서 은거하며 한평생을 보내셨네 / 棲遲林壑度平生
경서의 뜻을 음미하며 즐긴 단표의 낙 / 遺經有味簞瓢樂
천작이 존귀하니 녹위는 가벼웠고말고 / 天爵爲尊祿位輕
세상을 벗어나 고사전에 길이 기록될 분 / 世外長留高士傳
구름 사이에 홀연히 소미의 빛이 가려졌네 / 雲間忽晦少微精
한번 뵙지도 못했으니 탄식한들 어이하리 / 終孤一見嗟何及
그저 만사 한 편 지어 슬픈 심정을 부칩니다 / 謾寫哀詞寄此情

윤 참의(尹參議) 황(煌) 의 부인에 대한 만사
우뚝하여라 대를 이은 종유의 집안이요 / 卓卓宗儒世
성대하여라 올곧은 선비의 명성이었네 / 振振直士名
한 가문이 한 나라의 기대를 받는 가운데 / 門庭望一國
평생이 기록될 만한 부녀의 모범을 보였네 / 壼範記平生
자제들에게 시서의 업을 닦게 하면서 / 諸子詩書業
삼종의 도덕과 의리를 밝히셨다오 / 三從德義明
연세도 높으시어 여든에 이르렀으니 / 高年又八秩
이만하면 편히 눈을 감으실 수 있으리라 / 斯可沒而寧

박 풍덕(朴豐德) 대화(大華) 의 모부인(母夫人)에 대한 만사
당 나라에서 건너온 명문 집안의 후예로서 / 仙系唐家苗裔延
가정의 법도가 모범이라 모두 칭찬하였다오 / 閨門懿範共稱賢
영원의 지위와 명망은 중국에서도 흠모했고 / 鴒原位望華夷慕
오조의 은혜와 영광은 군읍으로 이어졌어라 / 烏鳥恩榮郡邑連
연세도 구순이신지라 누구에게나 존경을 받고 / 壽考九旬尊旣達
손자도 십여 명인지라 경사가 끊이지 않으리라 / 孫曾十數慶將綿
하늘의 수명을 다 누렸으니 무슨 유감 있으리요 / 天年歸盡終何憾
세상만사 모두 잊고 영원히 안식을 취하시라 / 深閉松楸萬事捐

김 평창(金平昌) 정립(正立) 에 대한 만사
아동 시절에 같은 동네 게다가 동갑이라 / 兒時同井又同庚
죽마고우로 형제처럼 어울려서 노닐었지 / 葱竹交遊若弟兄
오랜 이별 부평초 신세를 매양 한탄하면서 / 每恨萍蹤長作別
쇠잔한 인생 흰머리를 함께 동정하였어라 / 共憐霜髮已殘生
지난달에 편지 보내 안부를 삼가 물었는데 / 前月書來勤問訊
일조에 유명을 달리해 부음을 듣게 되다니 / 一朝音至間幽明
낙산 동쪽 옛 친구들 거의 세상 떠난 지금 / 駱東舊友今殆盡
통곡하노라 도성 가득 눈 덮인 차디찬 언덕 / 慟哭寒原雪滿城

남 정승(南政丞) 이웅(以雄) 에 대한 만사
애석하여라 우리 남 승상이여 / 可惜南丞相
훤칠하게 장자의 풍모를 갖추신 분 / 頎然長者風
일생을 거나한 술기운 속에 숨기고서 / 一生逃酒域
만사를 하늘의 뜻에 맡기곤 하였어라 / 萬事付天公
지금 다행히도 성군의 시대를 만났는데 / 方幸明時遇
이것이 웬일이요 수명이 그만 다하다니 / 俄驚大限窮
이제부턴 서로들 만나 볼 수 없겠기에 / 今來不相見
가을 하늘 바라보며 눈물을 뿌립니다 / 洒淚向秋空

유 참의(兪參議)에 대한 만사
주상께서 반정하고 즉위하시던 그날에 / 昔在龍飛日
원로의 반열에서 함께 어울렸던 사이 / 翶翔鵷鷺行
관아의 동료로 근무한 것이 몇 해였던가 / 幾年同一署
만년에는 타향에 서로 떨어지게 되었어라 / 晩歲隔他鄕
만나고 헤어짐을 어떻게 예정을 하겠소만 / 離合何能定
이렇게 빨리 바쁘게도 유명을 달리하다니요 / 幽明倏爾忙
지금 와서 장례식 소식을 전해 듣고서 / 今來聞大葬
서쪽 하늘 바라보며 홀로 슬퍼하오이다 / 西望獨悲傷

조 지사(趙知事) 위한(緯韓) 에 대한 만사
견수하는 영광을 얻은 그 뒤로 / 自獲肩隨後
지금 헤어 보니 어언 사십 년 / 如今四十年
청담을 나눴던 옛 추억만 생각하며 / 淸談思宿昔
산천에 막힌 채 오래 이별하였어라 / 離濶隔山川
이제 상유에 저녁 햇빛이 비치는 때 / 及此桑楡暮
안개 이슬보다 앞설 줄 어찌 알았으랴
/ 何知霧露先
슬프다 어떻게 또 뵐 수나 있으리요 / 可嗟那復見
부질없이 눈물만 하염없이 흐릅니다 / 徒爾涕漣漣

유 참의(兪參議)에 대한 만사
그대와 종유한 뒤로 해가 몇 번 바뀌었던가 / 與子遊從歲幾遷
반생에 걸친 우리 우정 어찌 우연이었으리 / 半生情好豈徒然
만날 때마다 속마음을 모두 털어놓았고 / 相逢每倒心肝吐
오래 헤어졌어도 자주 편지를 전했지요 / 久別頻勞手字傳
지난겨울 병문안하며 얼굴도 보지 못하고서 / 問疾前冬顔莫接
오늘 영구를 대하려니 눈물만 공연히 흐르누나 / 臨柩此日涕空漣
해마다 잇따라 친구들의 죽음을 곡하다니 / 年年連哭親朋逝
백발의 이 인생 홀로 남아 가엾기만 해라 / 白首人間獨自憐

청음(淸陰) 김 상국(金相國)에 대한 만사
옥 같은 바탕 온유해라 바라보면 신선인 듯 / 玉質溫溫望若仙
한 시대의 청론을 누가 앞설 수 있었으랴 / 一時淸論孰能前
중화와 오랑캐 모두 목격한 당당한 절의요 / 堂堂節義華夷見
온 누리에 두루 전해진 광명정대한 문장이라 / 炳炳文章海宇傳
재상의 지위 높은 연세 우러름을 받은 위에 / 極位遐齡人所仰
고명과 덕행으로 아름다움을 독점하신 분 / 高名懿行美尤專
음성과 용모를 이제는 영원히 접할 수 없겠기에 / 音容自此長相隔
추천에 통곡을 하노라니 눈물이 샘처럼 흐릅니다 / 慟哭秋天涕似泉

송 첨정(宋僉正) 자심(子深) 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대와 어울려 노닌 오십 년 세월 / 與子交遊五十秋
둘 다 어느새 흰 눈이 머리에 가득 / 居然俱至雪盈頭
몸은 시와 술 속에 잠겨 시일을 보내고 / 身潛詩酒遣時日
뜻은 청고를 숭상하여 속류를 벗어났네 / 志尙淸高遠俗流
금세에 누가 나처럼 마음을 알아주었으랴 / 今世知心誰似我
이생에 나도 기쁜 벗 다시 만나기 어려우리 / 此生懽遇更無由
북쪽을 보며 통곡하는 기막힌 이 심정이여 / 北望慟哭情何極
비바람 소리만 쓸쓸하게 바닷가를 채우누나 / 風雨蕭蕭滿海陬

이 참판(李參判) 경헌(景憲) 에 대한 만사
공의 형제와는 예전부터 친했나니 / 與公兄弟舊相親
집안끼리 혼인을 일찍 맺었음이라 / 爲是門闌早托姻
멀리 떨어져 소식을 몰라 걱정하던 중에 / 離濶每愁音信斷
만나고 보니 둘 다 늘어난 하얀 머리카락 / 逢來俱是鬢毛新
옛날 아껴 준 은근한 정을 추억하였는데 / 慇懃眷厚思前日
오늘 갑자기 이승 저승 이별을 하다니요 / 倏忽幽明隔此辰
붉은 만장 나부끼며 떠나가는 광릉의 길 / 丹旐翩翩廣陵道
만사 써서 부치면서 홀로 수건을 적십니다 / 哀詞書寄獨沾巾

정 판서(鄭判書) 광성(廣成) 에 대한 만사
선을 쌓은 어진 명성 대대로 전하면서 / 積善仁聲世共傳
오공 사대의 경사를 계속 이어 왔어라 / 五公四代慶連延

중년에 속세 벗어나 운해에서 머물다가 / 中年高蹈棲雲海
만년에 특은을 받고 일변으로 돌아왔네 / 晩歲殊恩返日邊

세 아들 대과에 급제한 일도 드물다 할 것인데 / 三子大科聞亦少
수태의 봉양을 또 받은 것은 전에 없었던 일 / 首台榮養見無前

여든의 장수 누리고서 자연의 변화를 따랐으니 / 遐齡八十聊乘化
이 같은 복록을 이 세상에서 그 누가 견주리요 / 福祿人間孰比肩

황 서윤(黃庶尹) 위(暐) 에 대한 만사
진양성에서 떨친 정충의 대절이여 / 精忠大節晉陽城
해내에 만고토록 그 명성 드리우리 / 海內長垂萬古名
경사가 남아 후손이 출중한 재질 발휘하여 / 餘慶後孫才出類
사과에서 장원하여 마침내 이름을 치달렸네 / 詞科第一遂馳聲
이제 선조의 뜻을 따라 진충보국하려는 차에 / 方期盡瘁追先志
중년에 세상을 마칠 줄이야 어찌 생각하였으랴 / 何意中身隕此生
하늘의 도가 이런 것인지 누구에게 물어볼까 / 天道如斯誰可問
공연히 슬픈 만사 지어 나의 심정을 부치노라 / 空將哀挽寄吾情

영가 부부인(永嘉府夫人)에 대한 만사
모교와 의가 양쪽 모두 재상의 가문 / 姆敎宜家摠相門
당시의 명문으로 누가 이보다 높았으랴 / 當時名閥更誰尊
성녀를 독생하여 휘음을 멀리 전했나니 / 篤生聖女徽音遠
곤궁에서 정덕하여 세상을 교화시켰도다 / 正德坤宮俗化敦

모두들 인덕이 심후하여 장수하리라 여겼는데 / 共謂深仁遐壽享
물처럼 빨리도 흘러가는 인간 세상을 어찌하랴 / 奈何人世逝川奔
오늘 나의 비통함이 어째서 끝이 없냐 하면 / 胡爲此日悲無已
명공과 일찍이 의형제를 맺었던 사이니까 / 曾與明公義弟昆

경 세마(慶洗馬) 대후(大後) 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대 혼인하던 청춘의 모습 생각나는데 / 憶君姻好在靑春
벌써 육순 가까운 쇠한 얼굴로 변하다니 / 已見衰顔近六旬
일생을 믿고 따르면서 속마음 토로하였나니 / 信向一生惟照膽
서로 떨어져 있을 때는 얼마나 애를 태웠던가 / 離違兩地幾勞神
반갑게 만나 담소한 지 겨우 한 달이 지났는데 / 相逢懽笑纔經月
흉한 소식이 오늘 갑자기 전해질 줄 알았으랴 / 豈意凶音遽此辰
하늘이 어째서 이와 같이 선인에게 보답하나 / 天與善人何若是
평소의 일을 추억하며 홀로 수건을 적시노라 / 却思平日獨沾巾

정 참판(鄭參判) 홍명(弘溟) 에 대한 만사
나도 문장 잘하는 선비를 알아보고서 / 我識文章士
왕년에 어울려 노닌 적이 있었더랬는데 / 交遊在昔年
장공은 벌써 길고 긴 어둠 속으로 / 張公已窀穸
이자 역시 차가운 땅 깊은 곳으로 / 李子亦寒阡

지금 홀로 기옹 노인이 남아 계셔서 / 獨有畸翁老
산골과 해변에서 서로 그리워하였는데 / 相思嶺海邊
흉한 소식이 지금 또 나에게 전해지다니요 / 凶音今又至
남쪽 하늘 바라보며 샘처럼 눈물 흘립니다 / 南望淚如泉

김 청주(金淸州) 효성(孝誠) 의 죽음을 애도하며
이 땅에 떨어지면 모두가 친척이라 / 落地爲親戚
우리 서로 따르면서 진심을 나눴는데 / 相從共赤心
어찌된 일인가 쇠하고 병든 이날에 / 如何衰病日
영원히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게 되다니 / 聞此永歸音
상소하여 직언한 명성 멀리 전해지고 / 抗疏聲名遠
분우하여 펼친 혜택이 깊기만 한데 / 分憂惠澤深
뜬구름처럼 모든 일이 끝나버렸기에 / 浮雲萬事已
통곡하면서 눈물로 옷깃을 적시노라 / 慟哭涕沾襟

현생 위(玄生偉)에 대한 만사
옛날 내가 장가들려고 신부 고을에 들어갈 때 / 昔吾迎婦入新鄕
어린아이 자네가 옆에 서 있는 것을 보았었지 / 見子髫年立在傍
왕년의 번화했던 곳도 모두 적막하게 되고 / 往歲繁華皆寂寞
당시의 친척들 역시 지금은 전부 영락했네 / 當時親戚盡凋亡
살 비비며 지내던 옛 추억 아련히 떠오르는데 / 磨肌遠記平生舊
나를 버리고 바쁘게 세상을 떠날 줄 알았으랴 / 棄我何期一夕忙
인간 세상 백발노인 끝없이 흘리는 눈물이여 / 白首人間無限淚
북풍이 몰아치는 날에 앞 언덕 어리어 비치누나 / 北風吹日照前岡

정생 종(鄭生琮)에 대한 만사
세상에 나온 것도 똑같은 해요 / 生世旣同年
옛날에 살던 집도 똑같은 동네 / 舊廬又一里
뒤에 다른 곳으로 옮겨 살 적에도 / 徙居雖異鄕
바라보이는 거리라서 역시 가까워 / 相望亦自邇
때때로 서로들 왔다 갔다 방문하며 / 有時來相訪
못 잊어 하는 우정이 그지없었어라 / 眷眷情無已
지금에 와선 똑같이 백발이 되었지만 / 於今共白首
근력이 나하고는 비할 바가 아니라서 / 筋力非我比
백 살쯤은 너끈히 살 것이라고 여겼는데 / 謂當至期頤
한번 병에 걸리더니 일어나지 못하였네 / 一疾奄不起
지란이 눈앞에 가득한 속에 / 芝蘭滿眼前
두 자제가 등제하여 현달하였고 / 二郞登顯仕
자손들도 누가 누군지 모를 정도요 / 兒孫至難卞
향리에선 연치로 존경을 받았지 / 鄕黨尊其齒
광휘가 마을을 환히 비치는 가운데 / 光輝照閭巷
고당에서 많은 복을 향유하였나니 / 高堂享多祉
분분히 태어나서 죽어 가는 그 사이에 / 紛然生及死
몇 사람이나 이런 행운을 누렸겠는가 / 幾人能若是
생각건대 그대는 아무런 유감없이 / 想君無所憾
기꺼운 마음으로 황천으로 가겠지만 / 怡然泉壤裏
친척과 벗들의 마음은 어떠하겠소 / 唯是親與舊
통곡하며 비애를 금하지 못한다오 / 戚戚悲不止
나이가 같은 사람이 홀연히 가셨으니 / 同甲去倏爾
이 몸도 얼마나 더 이승에 머물겠소 / 我亦豈久此
지금 상여가 떠난다는 소식 듣고 / 今聞柳車行
만사 지어 이 심정을 표하나이다 / 此情書作誄

이생 격(李生格)에 대한 만사
정암의 의리 정신 우리 동방에 우뚝하니 / 靜庵行義表吾東
그 후예가 범인들과 다른 것도 당연한 일 / 後裔於人自不同
고상한 생각 담담하여 세상길 멀리 벗어났고 / 澹澹高懷知遠俗
인자한 마음 따뜻해서 위급한 사람을 도와줬네 / 溫溫惠意喜周窮
생각나면 찾아와서 정다운 눈빛 보여 주며 / 有時命駕開靑眼
몇 번이나 술잔 들고 진심을 토로하였던가 / 幾度含盃話赤衷
애석하도다 이제는 어떻게 다시 보겠는가 / 可惜自今那復見
만사 지어 부치려니 눈물만 끝없이 흐르네 / 哀辭題寄涕無從

배생 종도(裵生宗度)의 죽음을 애도하며
하늘이 낸 뛰어난 재질 이 세상에 드문 터에 / 天生美質世間稀
부자가 서로 이었으니 더더욱 희한하다 하리 / 父子相仍益見奇
백리 길 짊어진 정성이 지극했음은 물론이요 / 百里勤勞誠旣竭
물 마시고 쌀독이 비어도 낯빛이 화락하였다오 / 一瓢空匱色常怡
잠깐 한때만 헤어져도 일각이 삼추 같았는데 / 乍離時月如三歲
갑자기 유명 달리하여 영결할 줄이야 알았으랴 / 何意幽明遽永辭
끝났도다 이제 현탑을 다시 내릴 수 있겠는가 / 已矣更無懸榻下
바람 앞에 눈물 뿌리며 애사를 지어 부치노라 / 臨風洒涕寄哀詞

종제(從弟) 학(翯)의 죽음을 애도하며
전날엔 한집에서 함께 웃고 즐겼는데 / 去日同堂懽笑人
어찌하여 오늘 밤엔 볼 수가 없단말가 / 何爲今夕見無因
나의 인생도 어느덧 서산에 해가 지는 나이 / 吾生已迫西山暮
세상에서 마음 아픈 일 얼마나 또 남았으랴 / 在世傷懷亦幾辰


 

[주D-001]역복(曆服) : 구원(久遠)한 사업이라는 뜻으로 왕위(王位)를 가리킨다. 《서경(書經)》 대고(大誥)의 “끝없이 큰 역복을 이어받았다.〔嗣無疆大歷服〕”고 한 성왕(成王)의 말에 대해서, 보통 역(歷)은 구(久)요 복(服)은 사(事)로 풀이하는데, 채침(蔡沈)은 역은 역수(歷數)요 복은 오복(五福)이라고 해설하였다. 역(歷)은 역(曆)으로 쓰기도 한다.
[주D-002]주항(周行) : 원래는 주 나라 조정 신하들의 자리를 뜻했는데, 뒤에 조정의 반열(班列)이라는 의미로 쓰이게 되었다.
[주D-003]백성들을 …… 듯하셨도다 :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문왕은 백성들을 보기를 다친 사람 보는 것처럼 가엾게 여겨 보살펴 주었다.〔文王 視民如傷〕”는 말이 나온다.
[주D-004]상서(庠序) : 국가의 교육 기관을 말한다. 하(夏) 나라 때에는 교(校)라고 하였고, 은(殷) 나라 때에는 서(序)라고 하였고, 주(周) 나라 때에는 상(庠)이라고 하였다. 《孟子 滕文公上》
[주D-005]초분(楚氛) : 남쪽으로 침입한 왜적의 진영에서 발산되는 요기(妖氣)를 가리킨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양공(襄公) 27년에 “남쪽에 있는 초 나라 진영의 분위기가 매우 험악하니, 장차 대처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질까 두렵다.〔楚氛甚惡 懼難〕”는 말이 나온다.
[주D-006]멀리 …… 되었도다 : 선조(宣祖)가 의주(義州) 방면으로 피난길을 떠난 것을 말한다. 당 현종(唐玄宗)이 안록산(安祿山)의 난을 당하여 검각(劒閣)을 넘어서 촉(蜀) 땅으로 피한 고사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주D-007]정수(鼎水)에 …… 우거졌나니 : 선조의 죽음을 비유한 말이다. 상고 시대에 황제(黃帝)가 정호(鼎湖)에서 솥을 만들어 연단(鍊丹)을 하다가 그 일이 완성되자 신하들과 함께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있고, 순(舜) 임금이 남쪽으로 순수(巡狩)하다가 창오산(蒼梧山) 밑에서 붕어(崩御)하여 그곳에 장사 지낸 고사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史記 卷1 五帝本紀》
[주D-008]슬퍼라 …… 인생이여 : 《장자》 지북유(知北游)에 “천지간의 인생이란 마치 하얀 망아지가 담장의 틈새를 지나가는 것처럼 순간일 따름이다.〔人生天地之間 若白駒之過隙 忽然而已〕”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9]전장(典章)과 …… 있고 : 선조가 남긴 훌륭한 제도와 법률이 후손들에게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는 말이다. 《서경》 오자지가(五子之歌)에 “밝고 밝으신 우리 선조는 만방의 임금이시니, 전장과 법도를 마련하시어 자손들에게 물려주셨다.〔明明我祖 萬邦之君 有典有則 貽厥子孫〕”는 말이 나온다.
[주D-010]안 계셔도 …… 가운데 : 선조가 세상을 떠났어도 백성들이 그 덕을 잊지 못하고 사모한다는 말이다. 《대학장구(大學章句)》에 “아 예전의 임금님을 잊지 못하겠다는 내용의 시가 있는데, 치자(治者)는 그 임금님이 어질게 대해 준 것을 어질게 여기고 친하게 대해 준 것을 친하게 여기며, 피치자(被治者)는 그 임금님이 즐기게 해 준 것을 즐겁게 여기고 이롭게 해 준 것을 이롭게 여기기 때문에, 세상을 떠나셨어도 잊지 못하는 것이다.〔詩云 於戱 前王不忘 君子賢其賢而親其親 小人樂其樂而利其利 此以沒世不忘也〕”라는 말이 나온다.
[주D-011]이괘(離卦)의 …… 일어났으니 : 밝고 밝은 임금이 출현했다는 뜻으로, 인조(仁祖)의 반정(反正)을 가리킨다. 《주역》 이괘 상사(象辭)에 “밝음이 두 번 일어나는 것이 이괘의 상이다. 대인은 이로써 밝은 것을 이어서 사방에 비춘다.〔明兩作 離 大人 以 繼明 照于四方〕”는 말이 나온다.
[주D-012]뜻을 …… 준수하며 : 인조가 선조의 효손(孝孫)으로서 선조의 뜻에 어긋나지 않게 훌륭한 정치를 펼치고 있다는 말이다. 《중용장구(中庸章句)》에 “효라고 하는 것은 선인의 뜻을 잘 계승하고 그 사업을 잘 발전시키는 것을 말한다.〔夫孝者 善繼人之志 善述人之事者也〕”라는 말이 나온다. 모훈은 《서경》에 나오는 요전(堯典) · 대우모(大禹謨) · 이훈(伊訓) · 탕고(湯誥) 등의 글을 병칭한 전모훈고(典謨訓誥)의 준말로, 보통 성현의 말씀이나 경전의 글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선왕의 법도라는 뜻으로 쓰였다.
[주D-013]약상(禴嘗) : 약사증상(禴祠蒸嘗)의 준말로, 종묘에 지내는 사계절의 제사 이름이다.
[주D-014]물이 …… 의논하였어라 : 인조(仁祖) 8년(1630)에 선조(宣祖)의 능인 목릉(穆陵)에 물 기운이 있다는 이유로 능을 옮겨야 한다는 의논이 조정에서 일어나게 된 것을 말한다. 처음에는 목릉이 건원릉(健元陵)의 서쪽 산등성이에 있었는데, 원주 목사(原州牧使)인 심명세(沈命世)가 상소하여 “목릉은 땅이 풍수지리상 길하지 못하고 게다가 물 기운이 있다.”고 하자, 마침내 건원릉의 두 번째 산등성이로 천릉(遷陵)하기에 이르렀는데, 결과적으로는 능의 봉분 안이 건조하여 조금도 습기가 없었으므로 비평을 면치 못했던 사실이 있다. 주 나라 계묘(季墓)는 주 문왕(周文王)의 부친인 왕계(王季)의 무덤을 가리킨다. 왕계를 와수(渦水) 서쪽에 안장했는데, 난수(欒水)가 무덤을 침입하여 관곽이 밖으로 드러나자, 문왕이 “선군(先君)께서 아마도 여러 신하들과 백성들을 보고 싶으신 모양이다.” 하고는, 사흘 뒤에 다시 장례를 치른 고사가 전한다. 《古今事文類聚 前集 卷50 水囓王季墓》 송 나라 황당(皇堂)은 송 인종(宋仁宗)의 능을 가리킨다. 황제의 능을 황당이라고 한다. 인종을 영소릉(永昭陵)에 안장하기 며칠 전에 황당의 기둥이 파손된 사건이 일어났는데, 모두가 이 사실을 보고하지 않고 숨기려 하자, 한기(韓琦)가 정색하고 반박하면서 시일을 어기더라도 다시 보수하여 장례를 행해야 한다고 주장한 고사가 전한다. 《古今事文類聚 前集 卷50 皇堂棟損》
[주D-015]상설(象設) : 생전의 거처를 본떠서 건물을 세우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능소(陵所)의 침전(寢殿)을 가리킨다.
[주D-016]임금님 …… 하였나니 : 장례를 행할 적에는 ‘반드시 정성을 다하고 신실하게 하여 결코 후회됨이 없도록 하라〔必誠必信 勿之有悔焉耳矣〕’고 자사(子思)가 거듭해서 당부한 말이 《예기(禮記)》 단궁 상(檀弓上)에 보인다.
[주D-017]만물에 …… 총명함과 : 세상을 안정시킬 수 있는 제왕의 자격을 갖췄다는 말이다. 《주역》 건괘(乾卦) 단사(彖辭)에, 건도(乾道) 즉 제왕의 도를 논하면서 “만물에 으뜸으로 나옴에 만국이 모두 편안하도다.〔首出庶物 萬國咸寧〕”라고 한 말이 나온다.
[주D-018]삼왕(三王) : 하(夏) · 은(殷) · 주(周) 삼대(三代)의 성왕(聖王)을 말한다.
[주D-019]어렵고 …… 계승하여 : 《서경》 대고(大誥)에, “내가 하는 일은 하늘이 시키신 것이다. 하늘이 내 몸에 크고 어려운 일을 물려주고 던져 주셨다.〔予造天役 遺大投艱于朕身〕”고 한 주 성왕(周成王)의 말이 나온다.
[주D-020]비렴(飛廉) : 은(殷) 나라의 폭군 주(紂)에게 아첨을 하여 총애를 받은 신하의 이름으로, 광해조(光海朝) 때의 권신(權臣)들을 가리킨다.
[주D-021]창읍(昌邑)은 …… 유배하였으며 : 광해군을 강화(江華)로 유배했다가 다시 제주도(濟州道)로 이배(移配)한 것을 말한다. 창읍은 한 무제(漢武帝)의 손자인 창읍왕 유하(劉賀)를 말한다. 소제(昭帝)가 죽은 뒤에 곽광(霍光)의 도움으로 즉위했으나, 행동이 음란하기 그지없어 즉위 27일 만에 태후(太后)의 명에 의하여 폐위되었다.
[주D-022]성모(聖母) : 서궁(西宮)에 유폐되었던 인목대비(仁穆大妃)를 말한다.
[주D-023]덕정(德政)에 …… 신속하고 : 《중용장구》에 “정치의 효과는 빨리 자라는 갈대처럼 신속하게 나타난다.〔夫政也者 蒲盧也〕”는 말이 있다.
[주D-024]비(否)와 …… 것이라서 : 세상일의 성쇠(盛衰)와 운명의 순역(順逆)이 극에 이르면 서로 뒤바뀌게 되는 것을 말한다. 《주역》의 비괘(否卦)는 하늘과 땅의 기운이 서로 막혀서 통하지 않는 것을 상징하고, 태괘(泰卦)는 그 반대로 만물이 형통하게 되는 것을 상징한다.
[주D-025]하늘의 …… 않았던가 : 요(堯) 임금 때의 9년 홍수와 탕왕(湯王) 때의 7년 가뭄을 말한다.
[주D-026]완악한 …… 않았던가 : 순(舜) 임금과 우왕(禹王)이 삼묘(三苗)를 정벌한 일과 귀순시킨 일 등이 《서경》 순전(舜典) · 대우모(大禹謨) · 익직(益稷) 등에 나온다.
[주D-027]정호(鼎湖)에 …… 감도누나 : 인조의 죽음을 비유한 표현들이다. 정호는 황제(黃帝)가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호수 이름이고, 몽사(濛汜)는 해가 지는 곳을 말한다. 우위(羽衛)는 왕의 의장(儀仗)을 가리키고, 운소(雲韶)는 황제(黃帝)의 음악인 운문(雲門)과 순 임금의 음악인 대소(大韶)를 병칭한 것이다. 제향(帝鄕)은 천제(天帝)의 거소인데, 보통 제왕의 서울을 말한다. 참고로 백거이(白居易)가 지은 황제의 만사에 “정호의 용은 점점 멀리 사라지고, 몽사에는 태양이 지금 막 잠겼어라. 오직 운소의 음악만이 뒤에 남아서, 치세의 정음을 길이 전해 주누나.〔鼎湖龍漸遠 濛汜日初沈 唯有雲韶樂 長留治世音〕”라는 구절이 보인다. 《白樂天詩集 卷16 開成大行皇帝挽歌詞 三》
[주D-028]상자(向子) : 후한(後漢) 상장(向長)의 존칭으로, 자(字)는 자평(子平)이다. 왕망(王莽) 때에 대사공(大司空) 왕읍(王邑)이 몇 년 동안 그를 부르면서 왕망에게 천거하려고 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고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생활을 하다가 자녀들을 모두 시집 장가 보낸 뒤에 오악(五岳)의 명산을 두루 유람하며 생을 마쳤다는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83 向長列傳》
[주D-029]봉맹(逢萌) : 후한(後漢)의 고사(高士)이다. 왕망의 시대에 인륜이 끊어졌다고 탄식하면서 관(冠)을 벗어서 동도문(東都門)에다 걸어 놓고는 가족들을 데리고 바다로 나가 요동(遼東)에 정착하였으며, 광무제(光武帝) 즉위 후에도 계속 부름을 받았으나 모두 응하지 않고 수양을 하며 천수를 누리고 죽었다. 《後漢書 卷83 逢萌列傳》
[주D-030]계운궁(啓運宮) :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의 부인으로 인조(仁祖)의 생모이다. 인조 4년에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뒤에 정원대원군이 원종(元宗)으로 추존될 적에 함께 인헌왕후(仁獻王后)의 존호가 가해졌다. 좌찬성(左贊成) 구사맹(具思孟)의 딸이다.
[주D-031]나라를 …… 재촉했네 : 왕의 모친으로서 오래도록 효도를 받지 못하고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는 말이다. 《맹자》 만장 상(萬章上)에 “효자의 일 가운데 어버이를 높이는 것보다 큰 것이 없고, 어버이를 높이는 일 가운데에는 천하를 받들어 봉양하는 것보다 큰 것이 없다. 그런데 천자의 부친이 되었으니 최고로 높임을 받은 것이요, 천하를 받들어 봉양을 하였으니 최고로 봉양을 한 것이다.”라는 말이 나오고,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백년은 인간이 살 수 있는 최고의 수명이니, 자손들은 최대한으로 어버이를 봉양해야 마땅하다.〔百年曰期 頤〕”는 말이 나온다.
[주D-032]풍초(風草)처럼 …… 알리로다 : 계운궁이 모범을 보이자 아랫사람들이 이를 본받아서 모두 교화되었다는 말이다. 《논어》 안연(顔淵)에 “윗사람이 행하는 것은 바람과 같고, 아랫사람이 이를 본받는 것은 풀과 같다. 풀 위에 바람이 불어오면 풀은 한쪽 방향으로 쏠리게 마련이다.〔君子之德風 小人之德草 草上之風 必偃〕”라고 한 공자의 말이 나온다.
[주D-033]이팔(二八)의 …… 올랐어라 : 팔원(八元) · 팔개(八愷)와 같은 뛰어난 실력을 소유하고 조정에 진출했다는 말이다. 팔원은 상고 시대 고신씨(高辛氏)의 재자(才子) 8인을 말하고, 팔개는 고양씨(高陽氏)의 재자 8인을 말하는데,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문공(文公) 18년 조에 그들의 이름이 수록되어 있다.
[주D-034]학궁(學宮)에선 …… 하였어라 : 정엽이 대사성(大司成)으로서 학제(學制)를 개정하는 등 성균관을 다시 크게 일으키고, 대사헌(大司憲)을 다섯 차례나 맡으면서 관원의 기강을 엄하게 확립한 것을 말한다.
[주D-035]일찍이 …… 있었기에 : 포저가 언젠가 정엽이 주선해 준 덕으로 원하던 일을 이룬 적이 있었다는 말이다. 전한(前漢)의 위발(魏勃)이 제상(齊相)으로 있던 조참(曹參)을 만나려고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조참의 사인(舍人)의 대문 앞을 청소해 준 인연으로 조참을 만나 그의 주선으로 내사(內史)에 임명된 이른바 ‘소문(掃門)’의 고사가 있다. 《史記 卷52 齊悼惠王世家》
[주D-036]파산(坡山)에서 …… 전해졌네 : 성수침(成守琛)과 그의 아들 성혼(成渾)의 학덕을 기린 말인데, 모두 파주(坡州)의 파산 서원(坡山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성문준은 성혼의 아들이다.
[주D-037]기애(耆艾)의 연세 : 60대의 나이를 말한다. 나이 60을 기(耆)라 하고, 50을 애(艾)라 한다.
[주D-038]곧은 …… 같아서 : 공자가 위(衛) 나라 대부(大夫) 사어(史魚)에 대해서 “나라에 도가 있을 때에도 화살처럼 곧았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도 화살처럼 곧았다.〔邦有道 如矢 邦無道 如矢〕”라고 칭찬한 말이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보인다.
[주D-039]천하의 …… 알았거니 : “천하의 뛰어난 선비만이 천하의 뛰어난 선비들을 벗할 수 있는 법이다.〔天下之善士 斯友天下之善士〕”라는 말이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나온다.
[주D-040]선인(善人)을 …… 허언(虛言)이라 : 사마천(司馬遷)이 “하늘의 도에는 친소(親疎)의 구별이 없지만, 항상 선인과 함께하며 도와준다.〔天道無親 常與善人〕”는 혹자(或者)의 말을 소개한 뒤에, 이와 어긋나는 여러 가지 예를 거론하면서 과연 천도가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질문했던 내용이 《사기(史記)》 백이 열전(伯夷列傳)에 나온다.
[주D-041]종기(鍾期) : 종자기(鍾子期)의 준말로, 지기(知己)를 뜻한다. 춘추 시대 거문고의 명인 백아(伯牙)는 거문고를 잘 타고 친구인 종자기는 거문고 소리를 잘 알아들었는데, 백아가 높은 산에 뜻을 두고 연주하면, 종자기가 “멋지다. 마치 태산처럼 높기도 하구나.”라고 평하였고, 흐르는 물에 뜻을 두고 연주하면 “멋지구나. 마치 강하처럼 넘실대는구나.”라고 평하는 등, 백아가 생각한 것은 종자기가 반드시 다 알아들었으므로, 종자기가 죽은 뒤로는 백아가 자기의 거문고 소리를 알아들을 사람이 없다 하여 마침내 거문고를 부숴버리고 종신토록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는 고사가 전한다. 《列子 湯問》
[주D-042]고경(孤卿) : 삼공(三公)에 버금가는 관직으로, 보통 고관(高官)을 뜻한다.
[주D-043]마음가짐이 …… 할까 : 자기 자신은 깨끗하면서도 주위 사람들과 곧잘 어울리며 조화되는 성격이었다는 말이다. 혜와 이는 화성(和聖)으로 일컬어지는 유하혜(柳下惠)와 청성(淸聖)으로 일컬어지는 백이(伯夷)를 가리키는데, 백이의 풍도를 들은 자는 완악한 자도 청렴해지고 나약한 자도 뜻을 세우게 되며, 유하혜의 풍도를 들은 자는 각박한 자도 돈후해지고 비루한 자도 관대해진다는 말이 《맹자》 진심 하(盡心下)에 나온다.
[주D-044]끊어졌던 …… 않자 : 정자(程子)와 주자(朱子) 등 송유(宋儒)들에 의해서 재해석된 신유학(新儒學) 즉 성리학(性理學)의 깊고 넓은 학문 세계를 말한다.
[주D-045]모난 …… 법 : 군자와 소인은 속성상 서로 용납되지 않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전국 시대 초(楚) 나라 송옥(宋玉)의 ‘구변(九辯)’에 “구멍은 둥근데 자루는 모가 나니, 서로 어긋나 들어가지 못할 것을 내 진정 알겠도다.〔圜鑿而方枘兮 吾固知其鉏鋙而難入〕”라는 말이 나온다.
[주D-046]범로(范老)가 …… 일치하였는데 : 범로는 소범 노자(小范老子)의 준말로, 송(宋) 나라 범중엄(范仲淹)을 말한다. 그가 용도각 직학사(龍圖閣直學士)로 있다가 섬서 경략사(陝西經略使)로 나가서 수년 동안 변방을 지킬 적에, 강족(羌族)이 그를 존경하여 용도 노자(龍圖老子) 혹은 소범 노자라고 부르면서, “그의 흉중에 수만 갑병(甲兵)이 들어 있다.”고 두려워하며 감히 침범을 하지 못했던 고사가 있다. 또 범중엄이 소싯적에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훌륭한 정승이 될 수 없다면, 반드시 훌륭한 의원이 될 것이니, 의술을 통해서도 사람들을 구제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吾不能爲良相 必爲良醫 以醫可以救人也〕”라고 포부를 밝힌 고사가 《광사유부(廣事類賦)》에 나온다.
[주D-047]한번 …… 있어 : 《장자》 전자방(田子方)에 “그런 사람들은 언뜻 눈을 마주치기만 해도 그 속에 도가 들어 있음을 짐작케 한다.〔若夫人者 目擊而道存〕”는 말이 나오는데, 서로 쳐다보기만 해도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하여 굳이 말을 할 필요도 없는 지기(知己)가 되는 것을 말한다.
[주D-048]정장(鄭莊) : 전한(前漢)의 정당시(鄭當時)를 말한다. 장(莊)은 그의 자(字)이다. 양(梁)과 초(楚) 사이에서 임협(任俠)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사람들을 사귀기를 좋아하여 장안(長安)의 사방 교외에다 역마(驛馬)를 비치하고는 귀천을 막론하고 손님들을 맞아들여 극진하게 대접을 하였는데, 그와 교제하는 사람들 모두가 천하의 명사(名士)였다는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120 鄭當時列傳》
[주D-049]난초 …… 같았나니 : 마음을 같이하는 벗이라는 뜻이다.《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두 사람이 마음을 같이하면 쇠도 자를 수 있고, 그런 사람들의 말에서는 난초 향기가 풍겨 나온다.〔二人同心 其利斷金 同心之言 其臭如蘭〕”는 말이 나온다.
[주D-050]빨리 …… 해도 : 《예기》 단궁 상(檀弓上)에 “관직을 그만둔 뒤에는 빨리 가난해지려고 하는 것이 낫고, 사람이 죽으면 빨리 썩게 하는 것이 낫다.〔喪欲速貧 死欲速朽〕”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주D-051]경수(瓊樹) : 옥 나무라는 뜻으로, 인품이 고결하여 항상 사모하는 사람에 대한 비유로 쓰인다. 진(晉) 나라 왕융(王戎)이 태위(太尉) 왕연(王衍)의 자태에 대해서 ‘요림 경수(瑤林瓊樹)’라는 표현을 쓰면서 비롯되었다. 《晉書 卷43 王戎傳》
[주D-052]밥상을 …… 탄식하였어라 :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남의 초상을 당해서는 “밥상을 대하고 먹을 적에 탄식을 하지 않는 법이다.〔當食不歎〕”라는 말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주D-053]취산(聚散) : 기(氣)가 흩어지고 모이는 현상을 말한다. “삶이란 한 조각 뜬구름이 일어나는 것이요, 죽음이란 한 조각 뜬구름이 흩어지는 것이다.〔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라는 말처럼 생사(生死)와 같은 뜻으로 곧잘 쓰인다.
[주D-054]혜자(惠子)의 …… 슬퍼했고 : 장자(莊子)가 친구인 혜시(惠施)의 묘소를 지나가다가 종자(從者)에게 운근성풍(運斤成風)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비감에 젖었던 고사가 《장자》 서무귀(徐无鬼)에 나온다. 그 이야기는, 초(楚) 나라 장석(匠石)이 자기 짝의 코끝에다 하얀 흙을 살짝 발라 놓고는 자귀를 바람 소리가 나게 휘둘러서 흙만 떼어 내고 사람은 다치지 않게 하곤 했는데, 자기 짝이 죽고 나서는 그 솜씨도 발휘할 수가 없게 되었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주D-055]종기(鍾期)가 …… 버렸나니 : 종기(鍾期)는 종자기(鍾子期)의 준말로, 지기(知己)를 뜻한다. 춘추 시대 거문고의 명인 백아(伯牙)는 거문고를 잘 타고 친구인 종자기는 거문고 소리를 잘 알아들었는데, 백아가 높은 산에 뜻을 두고 연주하면, 종자기가 “멋지다. 마치 태산처럼 높기도 하구나.”라고 평하였고, 흐르는 물에 뜻을 두고 연주하면 “멋지구나. 마치 강하처럼 넘실대는구나.”라고 평하는 등, 백아가 생각한 것은 종자기가 반드시 다 알아들었으므로, 종자기가 죽은 뒤로는 백아가 자기의 거문고 소리를 알아들을 사람이 없다 하여 마침내 거문고를 부숴버리고 종신토록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는 고사가 전한다. 《列子 湯問》
[주D-056]도봉(道峯) : 충청도 아산군(牙山郡) 신창현(新昌縣)의 도고산(道高山)을 말한다.
[주D-057]그 당시 …… 끊었는데 : 《주역》의 비괘(否卦)와 같은 광해군의 난정(亂政)에 환멸을 느끼고서 세상을 떠나 혼자 절의(節義)를 지키며 숨어 살기로 다짐했다는 말이다. 비괘의 상사(象辭)에 “하늘과 땅의 기운이 서로 통하지 않고 막힌 것을 비라고 한다.〔天地不交 否〕”는 말이 나온다. 또 비괘(賁卦) 초구(初九) 효사(爻辭)에 “자기의 발걸음을 아름답게 함이니, 수레를 버리고서 발로 걸어간다.〔賁其趾 舍車而徒〕”고 하였고, 그 상(象)에 “수레를 버리고 걸어가는 것은 의리상 수레를 탈 수 없기 때문이다.〔舍車而徒 義弗乘也〕”라고 하였는데, 이는 차라리 벼슬을 그만두고 빈궁하게 살지언정 의리를 굳게 지키는 군자의 길을 제시한 말이다.
[주D-058]오도(吾道)를 …… 올라가고 : 송대(宋代)의 성리학(性理學)은 물론, 그 근원이라 할 공맹(孔孟)의 사상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유학을 한번 정리해 보았다는 말이다. 수사(洙泗)는 중국 산동성(山東省)에 있는 두 강 이름으로, 이곳이 공자의 고향에 가깝고 또 그 강물 사이에서 그가 제자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곧잘 유가(儒家)의 대명사로 쓰인다.
[주D-059]반마(班馬) : 《한서(漢書)》의 저자 반고(班固)와 《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司馬遷)의 병칭이다.
[주D-060]이 몸도 …… 나왔는데 :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서 그동안 불우한 세월을 보내던 인재들이 조정에 나올 적에 포저도 함께 진출했다는 말이다. 《주역》 태괘(泰卦) 초구(初九) 효사(爻辭)에 “서로 엉켜 있는 띠풀의 뿌리가 뽑혀 올라오듯, 어진 사람들과 어울려서 함께 나아가니 길하다.〔拔茅茹 以其彙 征吉〕”는 말이 나온다.
[주D-061]사람의 …… 하루살이요 : 소식(蘇軾)의 ‘전 적벽부(前赤壁賦)’에 “하루살이 목숨으로 천지 사이에 붙어 있는 인생, 망망한 바다 속 조그마한 좁쌀 한 알이로다.〔寄蜉蝣於天地 渺蒼海之一粟〕”라는 말이 나온다.
[주D-062]세상만사도 …… 것 : 《주역》 계사전 하(繫辭傳下)에 “세상의 일을 보면, 귀착점은 같은데 가는 길이 다르고, 모두 하나로 돌아가는데 생각은 가지각색이다.〔天下 同歸而殊塗 一致而百慮〕”라는 말이 있다.
[주D-063]장수(長壽)와 …… 것인데 : 《장자》 제물론(齊物論)에 “상자보다 장수한 자가 없다고 할 수도 있고, 팽조도 요절했다고 할 수도 있다.〔莫壽乎殤子 而彭祖爲夭〕”는 말이 나오는데, 상자는 19세 이하의 어린 나이로 죽은 자를 가리키고, 팽조는 상고 시대의 선인(仙人)으로 800세의 장수를 누렸다는 전설상의 인물이다.
[주D-064]솔 아래 땅 : 땅속의 무덤을 가리킨다. 묘지에 소나무를 많이 심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인데, 참고로 이백(李白)의 시에 “옛날에는 술을 꽤나 좋아하시더니, 지금은 솔 아래 진토가 되셨구려.〔昔好盃中物 今爲松下塵〕”라는 표현이 나온다. 《李太白集 卷22 對酒憶賀監》
[주D-065]옥수(玉樹)가 …… 듣고 : 부음(訃音)을 접했다는 말이다. 진(晉) 나라 유량(庾亮)이 죽었을 때, 하충(何充)이 “옥 나무가 땅속에 묻히는구나.”라면서 탄식한 고사가 있다. 《世說新語 傷逝》
[주D-066]기린각(麒麟閣)의 …… 속하였고 : 그가 형제 중에서도 특히 걸출하여 공신(功臣)의 봉호(封號)를 받고 길이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는 말이다. 한 선제(漢宣帝) 때에 공신 11명의 초상화를 그려서 기린각에 걸어 놓게 한 고사가 있다. 《漢書 卷54 附 蘇武傳》 또 삼국 시대 촉(蜀) 나라 마량(馬良)이 다섯 형제 가운데 가장 뛰어난 면모를 보였는데, 그의 눈썹에 흰 털이 있었으므로 백미(白眉)라고 불렀다는 고사가 있다. 《三國志 蜀志 馬良傳》
[주D-067]반룡(攀龍)의 …… 월등했네 : 인조반정(仁祖反正) 때에 누구보다도 뛰어난 공을 세웠다는 말이다. 반룡은 반룡부봉(攀龍附鳳)의 준말로, 제왕을 따라 공을 수립하는 것을 말한다. 한(漢) 나라 양웅(揚雄)이 지은 《법언(法言)》 연건(淵騫)의 “용의 비늘을 그러잡고 봉의 날개에 붙는다.〔攀龍鱗 附鳳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주D-068]우도(牛刀)를 …… 중에 :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한 채 고을 수령으로 좌천되어 불우하게 된 것을 비유한 말이다. 공자의 제자 자유(子游)가 무성(武城)의 수령으로 있을 때, 조그마한 고을에서 예악(禮樂)의 정사를 펼치는 것을 보고는, 공자가 웃으면서 “닭을 잡는 데에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랴.〔割鷄焉用牛刀〕”라고 말했던 고사가 있다. 《論語 陽貨》
[주D-069]어찌하여 …… 재촉하였는가 : 오래 살지 못하고 병이 들어서 갑자기 죽은 것을 말한다. 진(晉) 나라 사안(謝安)이 일찍이 환온(桓溫)의 수레를 타고 16리를 가다가 흰색의 닭을 보고 멈추는 꿈을 꾸었으나 그때는 해몽(解夢)을 하지 못하다가, 환온이 죽은 뒤에 그의 재상 직위를 물려받고 16년이 되었을 때 병에 걸리자, “꿈속에서 환온의 수레를 탄 것은 그의 재상 지위를 이어받은 것이고, 16리는 재상으로 있은 지 16년째라는 말이고, 흰 닭은 유(酉)를 뜻하는데 금년이 유년(酉年)이니, 내가 아마도 낫지 않고 죽을 모양이다.” 하고는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죽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晉書 卷79 謝安傳》
[주D-070]사람을 …… 하였지 : 광해군 때에 별의별 옥사(獄事)를 일으켜서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살육하였다는 말이다. 《자치통감(資治通鑑)》 당 소종(唐昭宗) 천복(天復) 3년 조에 “선악을 살피지도 않고 시비를 가리지도 않은 채 풀을 베듯 하고 금수를 사냥하듯 사람들을 마구 죽이니, 어찌 난리가 일어나지 않겠는가.〔不察臧否 不擇是非 欲草薙而禽獮之 能無亂乎〕”라고 논한 사마광(司馬光)의 비평이 보인다.
[주D-071]그대의 …… 당했었지 : 광해군 8년(1616)에 유찬(柳燦)의 장인인 최기(崔沂)가 해주 목사(海州牧使)로 있을 적에 이이첨(李爾瞻) 등이 무고하게 옥사를 일으켜 최기가 고문을 받다 죽었고 유찬 역시 여기에 연루되어 함께 옥중에서 죽었다. 수양(首陽)은 해주(海州)의 옛 이름이다.
[주D-072]지분(芝焚) 옥쇄(玉碎) : 인품이 고결한 벗이 의리를 지키다가 장렬하게 죽은 것을 슬퍼할 때 쓰는 표현이다. 진(晉) 나라 육기(陸機)가 망우(亡友)를 애도하며 지은 ‘탄서부(嘆逝賦)’에 “아, 지초가 불탔으니 혜초가 탄식할 수밖에.〔嗟芝焚而蕙嘆〕”라는 말과, 삼국 시대 위(魏) 나라 완적(阮籍)의 ‘조모공문(弔某公文)’에 “어찌 슬퍼하지 않으리요, 옥돌이 부서지듯 하고 얼음이 깨지듯 하였으니.〔如何不弔 玉碎氷摧〕”라는 표현이 나온다. 당시 옥사에서 허균(許筠)이 유찬에게 서신을 보내 자기 말대로만 따르면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될 것이라고 유혹하였으나, 유찬이 오히려 그 편지를 공개하면서 간인(奸人)들의 정상을 낱낱이 폭로한 끝에 모진 고문을 받고 죽었다는 내용이 《계곡집(谿谷集)》 14권 ‘증 이조참판 유공 묘지명(贈吏曹參判柳公墓誌銘)’에 나온다.
[주D-073]예덕(穢德) : 더럽고 음란한 행위라는 뜻으로 폭군을 비유하는 말인데, 여기서는 광해군을 가리킨다. 《서경》 태서 중(泰誓中)에 “죄 없는 백성들이 원망하며 하늘에 호소하자, 폭군 주(紂)의 더러운 행위가 뚜렷이 드러났다.〔無辜龥天 穢德彰聞〕”는 말이 나온다.
[주D-074]지하(地下)에 …… 가해지고 : 인조반정 뒤에 유찬이 사헌부 지평에 추증되고, 또 아들 유시영(柳時英)이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됨에 따라 다시 이조 참판에 증직된 것을 말한다.
[주D-075]천도(天道)는 …… 말했는고 : 사마천(司馬遷)이 “하늘의 도에는 친소(親疎)의 구별이 없지만, 항상 선인과 함께하며 도와준다.〔天道無親 常與善人〕”는 혹자(或者)의 말을 소개한 뒤에, 이와 어긋나는 여러 가지 예를 거론하면서 과연 천도가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질문했던 내용이 《사기(史記)》 백이 열전(伯夷列傳)에 나온다.
[주D-076]좌씨(左氏)가 …… 미흡했는지라 :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은공(隱公) 원년에 “혜공이 세상을 떠났을 적에 송 나라와 전투를 벌인 데다가, 또 태자가 어려서 장례식의 일에 미흡한 점이 있었다. 그래서 개장을 한 것이다.〔惠公之薨也 有宋師 太子少 葬故有闕 是以改葬〕”라는 말이 나온다.
[주D-077]국가 …… 이뤘도다 : 인열왕후가 인조(仁祖)를 잘 내조하였다는 말이다. 십란(十亂)은 주공 단(周公旦) · 소공 석(召公奭) 등 주 무왕(周武王)을 도와 난세(亂世)를 평정하고 태평 시대를 이루었던 10인의 훌륭한 신하를 말하는데, 이 중에 문모(文母) 즉 무왕의 왕비인 읍강(邑姜)이 끼어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書經 泰誓中》
[주D-078]바람 …… 변화되었도다 : 인열왕후를 본받아서 나라 안의 부녀자들이 모두 교화되었다는 말이다. 《논어》 안연(顔淵)에 “윗사람이 행하는 것은 바람과 같고, 아랫사람이 이를 본받는 것은 풀과 같다. 풀 위에 바람이 불어오면 풀은 한쪽 방향으로 쏠리게 마련이다.〔君子之德風 小人之德草 草上之風 必偃〕”라고 한 공자의 말이 나온다.
[주D-079]대춘(大椿) : 봄과 가을이 각각 8000년이나 된다는 전설상의 나무 이름이다.《莊子 逍遙遊》
[주D-080]소내(素柰) : 흰 능금나무 꽃으로, 왕후의 죽음을 의미한다. 삼오(三吳)의 여자들이 멀리서 보면 능금 꽃처럼 보이는 흰 꽃을 머리에 꽂고는 직녀(織女)의 죽음을 애도한다고 하였는데, 그 뒤에 진 성제(晉成帝)의 두 황후(杜皇后)가 죽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晉書 后妃傳下 成帝杜皇后》
[주D-081]서원(西原)의 …… 이으셨도다 : 청주 한씨(淸州韓氏)인 한준겸(韓浚謙)의 딸이 인조의 왕후가 된 것을 말한다. 《시경》 대아(大雅) 사제(思齊)에 “태사가 왕실의 아름다운 명성을 이었다.〔太姒嗣徽音〕”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주 문왕(周文王)의 왕비인 태사가 문왕의 모친인 태임(太任)을 이어서 왕실의 여주인이 되었다는 뜻이다. 서원은 청주의 옛 이름이다.
[주D-082]곤극(坤極)이 …… 감추었도다 : 인열왕후가 42세의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을 말한다. 곤극은 음덕(陰德)의 극이라는 뜻으로 왕후를 가리키고, 헌성은 왕후를 상징하는 헌원성(軒轅星)의 준말이다.
[주D-083]남국(南國)에서 …… 것처럼 : 관저(關雎)는 《시경》 주남(周南)의 맨 처음에 나오는 편명으로, 태사(太姒)의 덕을 노래한 것이다. 남국은 주 나라의 교화를 입은 남방의 제후국이라는 뜻이다. 자하(子夏)의 ‘모시 서(毛詩序)’에 “관저는 후비(后妃)의 덕을 드러낸 것으로서 국풍(國風)의 첫머리를 장식한다. …… 주남과 소남(召南)이야말로 ‘왕도를 처음부터 단정하게 펴는 길〔正始之道〕’이요 ‘왕자의 교화의 기초〔王化之基〕’가 되는 것이니,…… 이것이 관저의 뜻이다.”라고 하였다. 《文選 卷45》
[주D-084]대궐에 …… 세웠도다 : 선조(宣祖) 때 왕자의 사부(師傅)였던 하락(河洛)이 반대파로부터 탄핵을 당하는 이이(李珥)를 변호하기 위해 장문의 상소를 올려 격렬하게 반박했던 일과, 왜적이 침입하여 온 집안이 참화를 당할 적에 몸으로 맞서서 어버이를 구하려 했던 일을 말한다.
[주D-085]한혈마(汗血馬) : 흘리는 땀방울이 마치 피처럼 붉은 말이라는 뜻으로, 대완(大宛)의 준마를 가리키는데, 보통 똑똑한 남의 아들을 비유할 때 쓰는 말이다.
[주D-086]양춘곡(陽春曲) : 전국 시대 초(楚) 나라에서 백설곡(白雪曲)과 함께 가장 고아(高雅)한 가곡으로 꼽히던 노래로, 뛰어난 시문을 비유할 때 쓰는 말이다. 초 나라 송옥(宋玉)의 ‘대초왕문(對楚王問)’에 “양춘곡과 백설곡은 얼마나 고상한지 온 나라를 통틀어도 이 노래를 이어서 창화(唱和)할 자가 수십 명에 지나지 않는다.〔其爲陽春白雪 國中屬而和者 不過數十人〕”라는 말이 나온다.
[주D-087]계림(桂林)의 …… 깨졌구나 :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시험해서 과거에 급제하지도 못한 채 그만 죽고 말았다는 말이다. 진(晉) 나라 극선(郤詵)이 현량(賢良) 대책(對策)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한 뒤에 “계림의 나뭇가지 하나를 잡아 꺾고, 곤산(昆山)의 옥돌 조각을 손에 쥐었다.〔桂林之一枝 昆山之片玉〕”고 자신을 지칭한 월궁 절계(月宮折桂)의 고사가 전한다. 《晉書 卷52 郤詵傳》 또 《예기(禮記)》 유행(儒行)에 “유자는 자신의 자리 위에 진귀한 보배라 할 학식을 쌓아 놓고서 초빙해 주기를 기다리는 법이다.〔儒有席上之珍以待聘〕”라는 공자의 말이 실려 있다.
[주D-088]진수(晉竪)에 …… 생각했으리요 : 난치병에 걸렸다는 말이다. 진수는 병마(病魔)를 뜻한다. 춘추 시대 진 경공(晉景公)의 꿈에 병마가 ‘더벅머리 두 아이〔二竪〕’로 변해서 고황(膏肓)으로 들어갔는데, 결국은 병을 고치지 못하고 죽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春秋左氏傳 成公 十年》
[주D-089]초혼(楚魂)을 …… 놀랐어라 : 부음(訃音)을 갑자기 전해 듣게 되었다는 말이다. 《초사(楚辭)》 초혼(招魂)의 “혼령이여 돌아오라 옛날 살던 곳으로〔魂兮歸來 反故居些〕”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초(楚) 나라 굴원(屈原)이 초 회왕(楚懷王)을 애도해서 지었다는 설도 있고, 송옥(宋玉)이 그의 스승인 굴원을 위해 지었다는 설도 있다.
[주D-090]호리(蒿里) : 태산(泰山) 남쪽에 있는 산의 이름인데, 사람이 죽으면 여기에 묻었던 고사에서 유래하여, 후세에 묘지(墓地)를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주D-091]석인(碩人)에 …… 있었어라 :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숙모가 남편과는 불행하게 사별(死別)했어도, 외손(外孫)이 귀하게 되어 만년을 편히 보낼 수 있었다는 말이다. 석인은 덕이 있는 어진 사람으로 여기서는 남편을 가리킨다. 《시경》 위풍(衛風) 고반(考槃)에 “산골 시냇가에 움막이 있나니, 현인의 마음이 넉넉하도다.〔考槃在澗 碩人之寬〕”라는 말이 나온다. 택상(宅相)은 외손이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을 말한다. 진(晉) 나라 위서(魏舒)가 어려서 외가(外家)인 영씨(寧氏)의 집에서 양육되었는데, 집의 풍수를 보는 자가 “귀한 외손이 나올 것이다.〔當出貴甥〕”라고 예언한 대로, 위서가 사도(司徒)의 관직에까지 올라 현달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晉書 卷41 魏舒傳》
[주D-092]도요(桃夭)의 …… 하였도다 : 부인이 시집을 와서 온 집안을 화락하게 하였다는 말이다. 《시경》 주남(周南) 도요(桃夭)에 “싱싱한 복숭아나무에 화사하게 꽃 피었네. 우리 아가씨 시집가서 온 집안 화락케 하리로다.〔桃之夭夭 灼灼其華 之子于歸 宜其室家〕”라는 구절이 나온다.
[주D-093]석양빛 …… 서글프도다 : 인생무상을 읊은 고시(古詩)에 “수레 달려 위쪽 동문을 빠져나가, 북망산의 묘지를 멀리 바라보니, 백양나무는 바람 속에 소소히 울어 대고, 넓은 길 양편에는 송백이 가득하더라.〔驅車上東門 遙望郭北墓 白楊何蕭蕭 松柏夾廣路〕”라는 말이 나오는 데에서 유래하여, 죽은 사람을 애도할 때 백양(白楊)이라는 표현을 쓰게 되었다. 《文選 卷29 古詩19首 第13》
[주D-094]강사(强仕)의 …… 말았는가 : 인조 12년(1634)에 오숙이 명 나라 사신으로 조선에 온 감군(監軍) 황손무(黃孫武)의 접반사(接伴使)로 가도(椵島)에 갔다가 돌아오는 도중에 송도(松都)에서 40대 초반의 젊은 나이로 죽은 것을 말한다.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나이 40에는 신념이 흔들리지 않아 강하다고 할 수 있으니, 이때부터는 벼슬길에 나가도 좋다.〔四十曰强而仕〕”는 말이 나온다.
[주D-095]천황(天潢)의 …… 분 : 이수광이 제왕의 후예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로서, 천부적으로 뛰어난 자질을 품부받고 태어났다는 말이다. 북주(北周) 유신(庾信)의 글에 “물결은 하늘의 못에서 나눠 받았고, 가지는 태양의 나무에서 갈려 나왔다.〔派別天潢 支分若木〕”는 표현이 있다. 《庾子山集 卷15 周大將軍義興公蕭太墓誌銘》 또 《시경》 대아(大雅) 숭고(崧高)에 “산악에서 신령스러운 기운을 내려 보내, 보후(甫侯)와 신후(申侯)를 태어나게 하였도다.〔維嶽降神 生甫及申〕”라는 말이 나온다.
[주D-096]시풍(詩風)은 …… 같았어라 : 당대(唐代)의 시풍을 시기별로 흔히 초당(初唐) · 성당(盛唐) · 만당(晩唐)의 셋으로 분류하는데, 성당은 개원(開元)에서 대력(大曆) 연간에 이르는 기간에 이백(李白) · 두보(杜甫) · 왕유(王維) · 맹호연(孟浩然) 등이 활동한 당시(唐詩)의 전성 시기를 말한다. 또 《시경》 소아(小雅) 백구(白駒)는 현인을 칭송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는데, 그중에 “싱싱한 꼴 한 다발을 망아지에게 먹이노니, 그 주인님은 옥처럼 고결한 분이로세.〔生芻一束 其人如玉〕”라는 구절이 나온다.
[주D-097]유혼(遊魂)이 …… 화했는가 : 뛰어난 인물의 죽음을 뜻한다. 은 고종(殷高宗)의 재상 부열(傅說)이 죽은 뒤에 기미성(箕尾星)을 타고앉아 부열성(傅說星)이 되었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것이다. 《莊子 大宗師》
[주D-098]그동안 …… 내렸는데 : 한준겸의 딸이 인조(仁祖)의 왕후가 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시경》 대아(大雅) 가락(假樂)에 “하늘이 군자를 보호하고 도우시며 거듭 복을 내려 주신다.〔保佑命之 自天申之〕”는 말이 나온다.
[주D-099]갑자기 …… 믿겠는가 : 《서경》 함유일덕(咸有一德)에 “아, 믿기 어려운 것은 하늘이요, 무상한 것은 명이로다.〔嗚呼 天難諶 命靡常〕”라는 말이 나온다.
[주D-100]통곡하며 …… 싶어라 : 지기(知己)의 죽음을 뜻하는 말이다. 춘추 시대 거문고의 명인 백아(伯牙)는 거문고를 잘 타고 친구인 종자기는 거문고 소리를 잘 알아들었는데, 백아가 높은 산에 뜻을 두고 연주하면, 종자기가 “멋지다. 마치 태산처럼 높기도 하구나.”라고 평하였고, 흐르는 물에 뜻을 두고 연주하면 “멋지구나. 마치 강하처럼 넘실대는구나.”라고 평하는 등, 백아가 생각한 것은 종자기가 반드시 다 알아들었으므로, 종자기가 죽은 뒤로는 백아가 자기의 거문고 소리를 알아들을 사람이 없다 하여 마침내 거문고를 부숴버리고 종신토록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는 고사가 전한다. 《列子 湯問》
[주D-101]일찍이 …… 있으리요 : 이원익이 정승으로 국가를 경륜하여 백성들에게 큰 혜택을 안겨 주었으므로, 온 나라에서 그를 우러러보며 사모하였다는 말이다. 상(商) 나라 임금 무정(武丁)이 부열(傅說)을 얻어 재상으로 임명하고 나서 “만약 나라에 큰 가뭄이 들면, 내가 그대를 단비로 삼으리라.〔若歲大旱 用汝作霖雨〕”라고 말한 고사가 있다. 《書經 說命上》 또 송(宋) 나라 재상 사마광(司馬光)의 인덕을 칭송한 소식(蘇軾)의 시에 “아이들도 선생의 자인 군실을 모두 외우고, 하인들도 선생의 성인 사마를 다 안다오.〔兒童誦君實 走卒知司馬〕”라는 말이 나온다. 《蘇東坡詩集 卷15 司馬君實獨樂園》
[주D-102]두 …… 보냈도다 : 선조와 인조의 조정에서 활동하는 동안 세상 사람들 모두가 높이 떠받들어야 할 삼달존(三達尊)의 영예를 누렸으며, 광해군의 난정(亂政) 때에는 사직을 하거나 귀양을 가는 등의 이유로 전원에서 살면서 청빈한 생활을 고수하였다는 말이다. 삼달존은 작위(爵位)와 고령(高齡)과 덕행(德行)을 말한다. 《孟子 公孫丑下》 일묘궁(一畝宮)은 지극히 빈한한 선비의 누추한 거처를 뜻하는데, 《예기》 유행(儒行)의 “유자는 일묘의 담장을 두른 집에서 산다.〔儒有一畝之宮〕”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주D-103]태산(泰山)과 들보의 비통함 : 모두가 존경하는 걸출한 위인의 죽음을 슬퍼한다는 말인데, 공자(孔子)가 죽음에 임박하여 “태산이 무너지려는가, 들보가 부러지려는가, 철인이 쓰러지려는가.〔泰山其頹乎 梁木其壞乎 哲人其萎乎〕”라고 노래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禮記 檀弓上》
[주D-104]영도(瀛島)에 …… 분 : 오봉(五峯) 이호민이 문형(文衡) 즉 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이 되었다는 말이다. 영도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인 영주(瀛洲)를 말하는데, 홍문관을 영각(瀛閣)으로 부르기도 한다.
[주D-105]빈관(儐館)의 …… 놀랐지요 : 이호민이 접빈사(接賓使)로 나가서 중국의 조사(詔使)를 맞을 때 지은 시를 보고 조사들이 경탄했다는 말이다. 선조(宣祖) 35년(1602)에 명(明) 나라 한림원 시강(翰林院侍講) 고천준(顧天埈)과 행인사 행인(行人司行人) 최정건(崔廷健)이 황태자의 책립(冊立) 조서를 반포하기 위해서 조선에 왔다.
[주D-106]도산(陶山)의 …… 교화시켰어라 : 정경세는 학문의 연원을 고정(考亭) 즉 주자(朱子)에 두고서 도산(陶山) 즉 이황(李滉)의 학통을 계승하였는데, 조정에서 고위직을 두루 역임하다가 광해군 8년(1616)에 고향으로 돌아가서 학문 연구에 전념하던 중에, 인조 원년(1623)에 홍문관 부제학으로 부름을 받고 조정에 다시 진출하여 성균관 대사성 등을 역임하며 인재를 양성한 것을 말한다.
[주D-107]새 저술 : 《주문작해(朱文酌海)》 · 《상례참고(喪禮參考)》 · 《양정편(養正篇)》 등을 들 수 있는데, 특히 《주문작해》는 이황의 《주서절요(朱書節要)》와 함께 주자학 연구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자료로 꼽힌다.
[주D-108]멀리 …… 출신으로 : 이정귀가 명문인 연안 이씨(延安李氏)의 후예라는 말이다. 연안 이씨의 시조는 이무(李茂)인데, 그가 당 고종(唐高宗) 때 중랑장(中郞將)으로 있다가 소정방(蘇定方)의 부장(副將)으로 신라에 들어와서 백제를 평정한 공으로 연안후(延安侯)에 봉해졌으므로 그의 후손들이 연안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주D-109]어려서 …… 분 : 유년 시절부터 비범한 재질을 보이기 시작하더니, 8세 때에 벌써 한유(韓愈)의 장편시인 ‘남산시(南山詩)’에 차운하여 경탄을 자아냈고, 14세 때에 승보시(陞補試)에 장원(壯元)한 것 등을 말한다.
[주D-110]선조(先朝) …… 되셨다오 : 일찍이 선조(宣祖)의 지우(知遇)를 받고 깍듯한 예우를 받았는데, 다시 인조(仁祖)의 조정에서 재상으로서 국가를 경륜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당(唐) 나라 최융(崔融)의 ‘위종감청정정사표(爲宗監請停政事表)’에 “이처럼 귀하게 된 것은 모두 풍운의 시대를 만나서 일월의 빛을 의지한 덕분이다.〔斯皆應風雲之會 依日月之光〕”라는 표현이 나온다. 또 《서경》 상서(商書) 열명 하(說命下)에, 무정(武丁)이 부열(傅說)을 재상으로 임명하면서 “내가 술이나 단술을 만들려고 할 때에는 그대가 누룩이 되어 주고, 내가 국을 끓이려 할 때에는 그대가 소금과 매실이 되어 주오.〔若作酒醴 爾惟麴蘖 若作和羹 爾惟鹽梅〕”라고 부탁한 내용이 나온다.
[주D-111]사업이 …… 외우고 : 이정귀가 뛰어난 일을 많이 해서 아이들까지도 그의 자(字)를 외울 만큼 잘 알고 있다는 말이다. 송(宋) 나라 재상 사마광(司馬光)의 인덕을 칭송한 소식(蘇軾)의 시에 “아이들도 선생의 자인 군실을 모두 외우고, 하인들도 선생의 성인 사마를 다 안다오.〔兒童誦君實 走卒知司馬〕”라는 말이 나온다. 《蘇東坡詩集 卷15 司馬君實獨樂園》
[주D-112]집안의 …… 재질이라 : 이정귀의 아들인 이명한(李明漢)과 이소한(李昭漢) 등도 모두 땀방울이 피처럼 붉은 대완(大宛)의 한혈마(汗血馬)처럼 뛰어난 재질의 소유자라는 말이다. 특히 이명한의 경우는 부친을 이어 홍문관 대제학이 되었고, 또 그의 아들인 이일상(李一相)이 대제학을 지냈는데, 이처럼 3대에 걸쳐서 문형(文衡)을 지낸 것은 수백 년 동안 없었던 일로 일컬어진다.
[주D-113]동향(桐鄕)에도 …… 있다오 : 지방관(地方官)으로 고을 백성들에게 선정(善政)을 베풀었다는 말이다. 한(漢) 나라의 대사농(大司農) 주읍(朱邑)이 일찍이 동향의 관리가 되어 은혜를 베풀어 인심을 얻었으므로, 자기가 죽으면 이곳에 묻어 달라고 유언을 했는데, 과연 그 뒤에 고을 백성들이 사당을 세우고 대대로 제사를 지내 주었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漢書 卷89 循吏傳 朱邑》
[주D-114]재상의 …… 뛰어났지 : 이명한이 이정귀(李廷龜)의 아들로서 뛰어난 재질을 발휘했다는 말이다. 난초 싹은 준수(俊秀)한 자제를 비유하는 말이다. 백거이(白居易)가 58세의 늦은 나이에 아들 하나를 얻고서 지은 시에 “가을 달 아래 늦게 나온 붉은 계수의 열매요, 봄바람에 새로 자란 보랏빛 난초의 싹이로다.〔秋月晩生丹桂實 春風新長紫蘭芽〕”라는 표현이 나온다. 《白樂天詩集 卷10 予與微之 老而無子云云》
[주D-115]쌍벽(雙璧)의 …… 알았으랴 : 이명한과 그의 동생 이소한(李昭漢)이 같은 해에 똑같이 세상을 떠난 것을 말한다.
[주D-116]하루아침에 …… 알았으랴 : 이소한이 형 이명한이 죽은 지 10여 일 뒤에 죽은 것을 말한다. 아가위 꽃은 우애 깊은 형제를 비유하는 말이다. 《시경》 소아(小雅) 상체(常棣)의 “아가위 꽃송이 활짝 피어 울긋불긋, 지금 사람 중에 형제만 한 이는 없지.〔常棣之華 鄂不韡韡 凡今之人 莫如兄弟〕”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주D-117]허망한 …… 같구나 : 사람의 삶이란 것이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시드는 꽃처럼 허무하기 그지없다는 말이다. 목근(木槿) 즉 무궁화 꽃이 약 100일 동안 계속해서 피긴 하지만, 반드시 이른 새벽에 피었다가 저녁에 시들면서 날마다 새 꽃을 보여 주기 때문에, 조영모락(朝榮暮落)의 뜻으로 곧잘 인용되곤 한다.
[주D-118]지금까지도 …… 한다오 : 목민관으로 선정을 베풀어서 그 고을 백성들이 지금도 사모하고 있다는 말이다. 한(漢) 나라의 대사농(大司農) 주읍(朱邑)이 일찍이 동향(桐鄕)의 관리가 되어 은혜를 베풀어 인심을 얻었으므로, 자기가 죽으면 이곳에 묻어 달라고 유언을 했는데, 과연 그 뒤에 고을 백성들이 사당을 세우고 대대로 제사를 지내 주었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漢書 卷89 循吏傳 朱邑》
[주D-119]경서(經書)의 …… 낙 :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생활을 즐기면서 오로지 학문 연구에 몰두했다는 말이다. 단표(簞瓢)는 일단사 일표음(一簞食一瓢飮)의 준말이다. 《논어》 옹야(雍也)에 “어질다, 안회여. 한 그릇 밥과 한 표주박 물을 마시며 누항에 사는 것을 사람들은 근심하며 견뎌 내지 못하는데, 안회는 그 낙을 바꾸지 않으니, 어질도다, 안회여.〔賢哉 回也 一簞食 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 不改其樂 賢哉 回也〕”라고 칭찬한 공자의 말이 실려 있다.
[주D-120]천작(天爵)이 …… 가벼웠고말고 : 양심을 저버리지 않고 자신의 덕성을 닦으면서 살아가려고 하였을 뿐, 벼슬을 해서 높은 지위를 얻는 것은 아예 생각하지도 않았다는 말이다. 천작은 사람이 주는 작위(爵位)라는 뜻의 인작(人爵)과 상대되는 말로, 아름다운 덕행과 같은 천연(天然)의 작위라는 뜻인데, 《맹자》 고자 상에 “인의 충신과 선을 좋아하여 게을리하지 않는 이것이 바로 천작이요, 공경대부 같은 종류는 인작일 뿐이다.〔仁義忠信樂善不倦 此天爵也 公卿大夫 此人爵也〕”라는 말이 나온다.
[주D-121]구름 …… 가려졌네 : 처사(處士)의 죽음을 말한다. 소미(少微)는 처사를 상징하는 별자리의 이름이다.
[주D-122]우뚝하여라 …… 집안이요 : 부인 창녕 성씨(昌寧成氏)가 당대의 유종(儒宗)인 성수침(成守琛)의 손녀요 성혼(成渾)의 딸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주D-123]성대하여라 …… 명성이었네 : 정묘호란 때 척화(斥和)를 주장하며, 이귀(李貴) · 최명길(崔鳴吉) 등의 주화론자(主和論者)들을 처벌하도록 강력히 요구했던 윤황의 사람됨을 표현한 말이다.
[주D-124]자제들에게 …… 하면서 : 부인의 소생으로 윤순거(尹舜擧)와 윤문거(尹文擧) 등의 걸출한 아들이 있다.
[주D-125]삼종(三從) : 옛날에 여자로 태어나서 출가하기 전에는 아버지를 따르고, 출가해서는 지아비를 따르고, 지아비가 죽은 뒤에는 아들을 따랐던 부녀자의 도리를 말한다. 《儀禮 喪服傳》
[주D-126]당(唐) 나라에서 …… 후예로서 : 풍덕 부사 박대화의 모친이 연안 이씨(延安李氏)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연안 이씨의 시조는 이무(李茂)인데, 그가 당 고종(唐高宗) 때 중랑장(中郞將)으로 있다가 소정방(蘇定方)의 부장(副將)으로 신라에 들어와서 백제를 평정한 공으로 연안후(延安侯)에 봉해졌으므로 그의 후손들이 연안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주D-127]영원(鴒原)의 …… 흠모했고 : 그의 모친이 중국에까지 문명(文名)을 날렸던 이정귀(李廷龜)의 누님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韓國文集叢刊 114 宋子大全 卷177 豐德府使朴公墓碣銘》 영원은 척령재원(鶺鴒在原)의 준말로, 우애 있는 형제를 뜻하는데, 《시경》 소아(小雅) 상체(常棣)의 “할미새가 언덕에서 호들갑 떨듯, 어려움이 있을 때는 형제가 돕는 법이라오.〔鶺鴒在原 兄弟急難〕”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128]오조(烏鳥)의 …… 이어졌어라 : 박대화가 효렴(孝廉)으로 천거를 받고서 여러 고을의 수령을 두루 거친 것을 말한다. 오조는 반포(反哺)하는 까마귀로, 효성스러운 자제를 비유하는 말이다.
[주D-129]연세도 …… 받고 : 《맹자》 공손추 하(公孫丑下)에 “이 세상에 누구나 존경하는 것이 세 가지 있으니, 관작과 연치와 덕이 그것이다.〔天下有達尊三 爵一齒一德一〕”라는 말이 나온다.
[주D-130]원로(鵷鷺) : 원추새와 백로인데, 이 두 새는 모습이 한아(閑雅)하고 질서가 있다 하여 조정 반열에 늘어선 백관을 비유하는 말로 곧잘 쓰인다.
[주D-131]견수(肩隨) : 나이 많은 사람과 길을 갈 적에 어깨를 나란히 하여 걸어가면서도 약간 뒤로 물러서서 따라가는 것을 말한다. 《禮記 曲禮上》 조위한은 포저보다 12년 선배이다.
[주D-132]이제 …… 알았으랴 : 아침 안개나 이슬이 스러지는 것보다도 빠르게, 만년에 접어들어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했다는 말이다. 상유(桑楡)는 노년을 뜻하는 말로, 서쪽으로 지는 햇빛이 ‘뽕나무와 느릅나무〔桑楡〕’ 가지 끝에 비친다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주D-133]선을 …… 왔어라 : 후한(後漢) 양진(楊震)과 그의 아들 양병(楊秉), 그의 손자 양사(楊賜), 그의 증손 양표(楊彪)와 양기(楊奇) 등이 4대에 걸쳐 삼공(三公)의 지위에 오른 ‘사대 오공(四代五公)’의 고사가 전하는데, 정광성의 집안도 이에 못지않게 선행을 대대로 쌓아 온 결과 자손에까지 경사가 미치는 영광을 누렸다는 말이다. 참고로 정광성의 고조 정광필(鄭光弼)은 영의정이었고, 증조 정복겸(鄭福謙)은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조부 정유길(鄭惟吉)은 좌의정이었고, 부친 정창연(鄭昌衍)도 좌의정이었다. 또 《주역》 곤괘(坤卦) 문언(文言)에 “덕행을 쌓은 집안은 자손에까지 경사가 미친다.〔積善之家 必有餘慶〕”는 말이 나온다.
[주D-134]중년에 …… 돌아왔네 : 정광성이 병자호란 뒤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효종(孝宗)이 즉위한 뒤에 형조 판서의 부름을 받고 조정에 복귀한 것을 말한다. 일변(日邊)은 도성의 별칭으로, 동진(東晉)의 명제(明帝)가 어렸을 적에 부왕인 원제(元帝)에게 장안(長安)과 태양 사이의 거리를 답변한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世說新語 夙惠》
[주D-135]세 아들 …… 일 : 세 아들은 정태화(鄭太和)와 정치화(鄭致和)와 정만화(鄭萬和)를 가리키는데, 당시에 태화는 영의정이었고 치화는 경기도 관찰사였으며 만화는 사간원 정언이었다.
[주D-136]여든의 …… 따랐으니 : 도잠(陶潛)의 ‘귀거래사(歸去來辭)’ 맨 마지막에 “자연의 변화 따라 죽을 때 되면 가면 그뿐, 주어진 천명 즐기면 되지 다시 무엇을 의심하랴.〔聊乘化以歸盡 樂夫天命復奚疑〕”라는 구절이 나온다.
[주D-137]진양성(晉陽城)에서 …… 대절(大節)이여 : 황위의 조부 황진(黃進)이 임진왜란 때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진주성(晉州城) 전투에 참여하여 9일 동안이나 용전분투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것을 말한다. 참고로 송 고종(宋高宗)이 충신 악비(岳飛)에게 ‘정충악비(精忠岳飛)’라는 네 글자를 친히 써서 깃발에 새기게 한 고사가 있다.
[주D-138]영가 부부인(永嘉府夫人) : 효종(孝宗)의 왕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모친인 안동 김씨(安東金氏)의 봉호이다.
[주D-139]모교(姆敎)와 …… 가문 : 친가(親家)와 시가(媤家)가 모두 재상의 집안이라는 말인데, 부인이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의 딸이요, 우의정 신풍부원군(新豐府院君) 장유(張維)의 부인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예기》 내칙(內則)에 “여자 아이는 열 살이 되면 규문 밖에 나가지 아니하며, 여자 교사로부터 상냥한 말씨와 유순한 태도와 어른의 말을 듣고 순종하는 법을 가르침 받는다.〔女子十年不出 姆敎婉娩聽從〕”는 말이 나오고, 《시경》 주남(周南) 도요(桃夭)에 “우리 아가씨 시집을 가심이여, 시가를 의당 화목하게 하리로다.〔之子于歸 宜其室家〕”라는 말이 나온다.
[주D-140]성녀(聖女)를 …… 교화시켰도다 : 후비(后妃)로서의 완전한 덕을 갖춘 인선왕후를 낳아 나라의 모범이 되게 하였다는 말이다. 성녀는 장차 후비가 될 여자를 가리키고, 휘음(徽音)은 후비의 아름다운 덕을 뜻하고, 곤궁(坤宮)은 곤녕궁(坤寧宮)의 준말로 왕후의 거처를 의미한다. 정덕(正德)은 《서경》 대우모(大禹謨)에 나오는 삼사(三事)의 하나로, 윗사람이 자신의 덕을 먼저 바로잡아 백성을 다스리는 것을 말한다.
[주D-141]명공(明公) : 장유(張維)를 말한다. 포저가 젊었을 적에 장유 · 최명길(崔鳴吉) · 이시백(李時白)과 가장 친하게 지냈으므로 사람들이 이들을 사우(四友)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송자대전(宋子大全)》 162권 ‘포저 조공 신도비명(浦渚趙公神道碑銘)’에 나온다.
[주D-142]그대 …… 생각나는데 : 《포저집》 30권 ‘제경세마대후문(祭慶洗馬大後文)’에 “그대가 한미한 우리 가문에 장가 든 것이 지금 40여년이 지났고, 또 나에게 문자를 물은 것이 30여년이 지났다.”는 말이 나온다.
[주D-143]하늘이 …… 보답하나 : 선인(善人)에게 복을 주고 악인(惡人)에게 재앙을 내린다는 하늘의 뜻을 도대체 믿을 수가 없다는 말인데, 사마천(司馬遷)이 《사기》 백이 열전(伯夷列傳)에서 ‘백이 숙제(叔齊)와 안연(顔淵) 같은 선인은 비참하게 살다가 죽고, 도척(盜跖) 같은 악인은 천하를 횡행하며 오래 살다가 죽었으니, 그러고 보면 하늘이 선인에게 보답해 준 것이 어떻다고 하겠느냐.〔天之報施善人 其如何哉〕’고 의혹을 제기하면서, ‘과연 천도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옳은 것이냐 그른 것이냐.〔儻所謂天道 是耶非耶〕’라고 통렬하게 물음을 던지는 대목이 나온다.
[주D-144]장공(張公)은 …… 곳으로 : 조선 중기 사대 문장가로 꼽히는 계곡(谿谷) 장유(張維 1587~1638)와 택당(澤堂) 이식(李植 1584~1647)도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되었다는 말이다.
[주D-145]기옹(畸翁) : 정홍명의 호이다.
[주D-146]이 땅에 …… 친척이라 : 도잠(陶潛)의 잡시(雜詩) 12수(首) 중 첫 수에 “땅에 떨어진 사람들은 모두가 나의 형제, 어찌 꼭 골육의 친척들만 있겠는가.〔落地爲兄弟 何必骨肉親〕”라는 표현이 나온다. 《陶淵明集 卷4》
[주D-147]영원히 …… 되다니 : 부음(訃音)이 전해졌다는 말인데, 역시 도잠의 ‘자제문(自祭文)’에 “이제 내가 여인숙과 같은 이 세상을 하직하고, 본래의 내 집으로 영원히 돌아가려 한다.〔陶子將辭逆旅之館 永歸於本宅〕”는 말이 나온다. 《陶淵明集 卷8》
[주D-148]분우(分憂)하여 …… 한데 : 선정(善政)을 베풀어 백성들이 마음속으로 깊이 사모한다는 말이다. 분우는 임금의 걱정을 나눠 갖는다는 뜻으로 지방 장관을 가리킨다.
[주D-149]옛날 …… 때 : 포저의 부인은 성주 현씨(星州玄氏)이다.
[주D-150]살 …… 떠오르는데 : 옛날에 정답게 지내면서 가까이 지낸 사이를 추억한 것이다. 한유(韓愈)의 ‘송궁문(送窮文)’에 “살갗을 비비고 뼈를 서로 부딪치며 가깝게 지냈다.〔磨肌戛骨〕”는 표현이 나온다.
[주D-151]지란(芝蘭) : 지란옥수(芝蘭玉樹)의 준말로, 상대방의 뛰어난 자제들을 비유하는 말이다. 진(晉) 나라 사현(謝玄)이 숙부인 사안(謝安)에게 “지란옥수가 집안 섬돌에 피어나 향기를 내뿜게 하겠다.”고 대답한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晉書 卷79 謝安傳》
[주D-152]향리에선 …… 받았지 : 《맹자》 공손추 하(公孫丑下)에 “세상에서 누구나 존경해야 할 대상이 세 가지 있으니, 작위와 연치와 덕성이 그것이다. 조정에서는 작위만 한 것이 없고, 향리에서는 연치만 한 것이 없고〔鄕黨莫如齒〕, 세상을 돕고 백성의 어른 노릇을 하는 데에는 덕성만 한 것이 없다.”는 말이 나온다.
[주D-153]정암(靜庵) : 조광조(趙光祖)의 호이다.
[주D-154]생각나면 …… 주며 : 삼국 시대 위(魏) 나라 여안(呂安)과 혜강(嵇康)이 친하게 지내면서 상대방이 그리워지면 서로 천리 길을 멀다 하지 않고 방문했던〔每一相思 輒千里命駕〕 고사와, 같은 시대에 완적(阮籍)이 속된 사람을 만나면 흰 눈〔白眼〕을 치켜 뜨다가 반가운 인사를 만나면 푸른 눈〔靑眼〕 즉 검은 눈동자를 보였다는 고사가 있다. 《世說新語 簡傲》
[주D-155]부자(父子)가 …… 하리 : 《포저집》 권30 ‘제배생종도문(題裵生宗度文)’에 “돌아가신 그대의 부친은 지극한 품행이 우뚝 뛰어났고 어버이에 대한 효성이 나라에까지 알려졌으며, 학문을 통해 선각(先覺)의 뜻을 실천하려 하면서 나라에 충성을 바쳐 한 몸을 잊고 환란 속에 뛰어들었으므로, 주상이 그 정성을 환히 살피시고 마을에 정표(旌表)하게 하였다.”는 말이 나온다.
[주D-156]백리 길 …… 물론이요 : 어버이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는 말이다. 공자의 제자 자로(子路)가 자신은 나물을 뜯어 먹으면서도, ‘어버이를 위해서는 백리 밖까지 나가서 쌀을 구한 다음에 먼 길을 짊어지고 와서〔爲親負米百里之外〕’ 쌀밥을 해 드렸다는 고사가 전한다. 《孔子家語 卷2 致思》
[주D-157]물 …… 화락하였다오 : 빈궁한 속에서도 도를 즐기는 생활을 하였다는 말이다. 《논어》 옹야(雍也)에 “한 그릇 밥과 한 표주박 물을 마시며 누항에 사는 것을 사람들은 근심하며 견뎌 내지 못하는데, 안회는 그 낙을 바꾸지 않으니, 어질도다, 안회여.〔一簞食 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 不改其樂 賢哉 回也〕”라고 칭찬한 공자의 말이 나오고, 또 선진(先進)에 안회는 쌀독이 자주 비는데도 태연하였다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주D-158]끝났도다 …… 있겠는가 : 그를 어진 선비로 깍듯이 예우하곤 하였는데, 이제는 그가 찾아오는 일도 영영 없게 되었다는 말이다. 후한(後漢)의 진번(陳蕃)이 다른 손님은 일절 접대를 하지 않다가, 현인 서치(徐穉)가 오기만 하면 특별히 걸상 하나를 내려 놓고 환담을 하고 나서는 그가 가면 다시 올려 놓았다는 현탑(懸榻)의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徐穉列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