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저 조익 /포저 조익의 학맹편

학맹편(學孟編)》 서문

아베베1 2011. 3. 16. 15:19

포저집 제26권
 서(序) 24수(二十四首)


군자의 학문이란 사람의 도리를 극진히 하는 학문을 말한다. 사람의 도리란 어떤 것인가. 하늘이 만물을 낼 적에 사람이 그중에서도 빼어난 기운을 품부받아 가장 신령스러운 존재가 되었다. 그리하여 마음속에 인(仁) · 의(義) · 예(禮) · 지(智)의 성(性)을 갖추게 된 까닭에, 외물과 접촉할 때에는 측은(惻隱) · 수오(羞惡) · 사양(辭讓) · 시비(是非)의 정(情)이 발동하고, 행동으로 드러날 때에는 부자지친(父子之親) · 군신지의(君臣之義) · 부부지별(夫婦之別) · 장유지서(長幼之序) · 붕우지신(朋友之信)이 있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사람의 도리이다.
사람이 태어나면서 갖추게 되는 성(性)은 같지 않은 것이 없다. 따라서 사람이 행해야 할 도리 역시 같지 않은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도는 하나일 뿐이다.〔道一而已矣〕”라고 말한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사람이 상성(上聖)의 자질을 품부받지 못한 이상에는 그 기품(氣稟)에 물욕(物欲)의 폐가 있는 까닭에 반드시 그 성을 해치게 마련이요, 따라서 사람의 도리도 극진하게 행할 수 없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학문을 통해서 그 도(道)를 극진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대저 학문을 통해서 그 도를 극진하게 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그것은 사람의 도리를 극진하게 행한 옛사람을 모범으로 하여 배우는 것 뿐이다. 사람의 도리를 극진하게 행한 옛사람은 누구인가. 성인이 바로 그 분이다.
이 도를 요(堯) 임금은 순(舜) 임금에게 전하였고, 순 임금은 우(禹) 임금에게 전하였고, 우 임금은 탕왕(湯王)에게 전하였고, 탕왕은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에게 전하였다. 이분들은 이 도를 오직 정밀하게 살피고 순일하게 지키면서 제대로 생각하고 제대로 공경하였다. 그리하여 그들 자신의 마음속에 보존하고 행동으로 드러낼 적에 모두 사람의 도리를 극진하게 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제가(齊家)와 치국(治國)과 평천하(平天下)를 하는 일에 있어서도 모두 인물(人物)의 성을 극진히 함으로써 천지의 화육(化育)을 돕고 천지와 더불어 같은 반열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우리 부자(夫子)에 이르러서는 멀리 요 임금과 순 임금을 조종(祖宗)으로 받들어 계승하고, 가까이로는 문왕과 무왕의 법도를 드러내 밝혔으며, 위로는 천시(天時)를 법도로 삼고 아래로는 수토(水土)의 이치를 따르면서, 이를 집대성(集大成)하여 사람이 행해야 할 최고의 표준을 세웠다. 부자가 비록 요 임금이나 순 임금과 같은 지위를 얻어서 요 임금이나 순 임금과 같은 은택을 한 세상에 베풀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이를 육경(六經)에 드러내고 문인에게 전하여 무궁히 드리워지게 함으로써 인도(人道)가 만세토록 밝아지게 하였다.
그러므로 “성인은 인륜의 최고 표준이다.”라고 말한 것인데, 성인과 인도의 관계는 마치 규구(規矩)와 방원(方圓)의 관계와 같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사람의 도리를 극진히 할 방도를 찾으면서 성인을 배우지 않는다면, 이는 원과 네모를 그리려고 하면서 그림쇠와 곡척을 사용하지 않는 것과 같으니, 어떻게 사람의 도리를 극진하게 할 수가 있겠는가. 비록 그렇긴 하지만 성인의 도는 끝없이 넓고 크기 때문에 사람이 하늘에 올라갈 수 없는 것과 같다고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옛날에 성인의 도를 전한 사람의 학문을 반드시 먼저 배워야 하는 것이요, 그런 뒤에야 성인을 배울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맹자(孟子)는 아성(亞聖)으로서 실로 부자(夫子)의 손자인 자사(子思)를 사숙(私淑)하여 부자가 전한 도를 이어받았다. 맹자는 전국 시대에 인욕(人欲)의 탁한 물결이 마구 흘러넘치고 이단(異端)의 학설이 벌떼처럼 일어나는 때를 당하여, 《맹자》 7편(篇)의 글을 지어서 요순과 삼왕(三王)과 공자(孔子)의 도를 미루어 밝혔다. 이와 함께 저급한 패공(霸功)을 축출하고 잘못된 이단을 배척하는 한편, 인심(人心)과 성정(性情)의 이치를 밝혀 천하 후세 사람들을 깨우침으로써, 사람의 본성은 원래 선하다는 것과 성인의 경지도 배움을 통해서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맹자가 성을 논할 때 반드시 요순을 일컬었고, 효제(孝悌)를 논할 때 반드시 요순을 일컬었고, 교우(交友)를 논할 때 반드시 요순을 일컬었고, 임금을 섬기고 백성을 다스리는 일과 관련해서도 반드시 요순을 일컬었으며, 또 순 임금처럼 되지 못하는 것을 종신(終身)의 근심으로 삼았으니, 이는 요순이야말로 인도(人道)를 극진히 행한 분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배움을 통해서 사람의 도리를 극진히 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요순의 경지에 이른 뒤에야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맹자는 왕도 정치(王道政治)를 논할 때에는 문왕(文王)이 기주(岐周)를 다스릴 때의 일을 일컬었고, 정벌(征伐)을 논할 때에는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이 백성을 구제한 일을 일컬었다. 또 금성(金聲) 옥진(玉振)의 비유를 들어서 공자가 대성인이라는 것을 논하는 한편, 천리(天理)와 인욕을 기미(幾微)의 사이에서 분석하고, 존망(存亡)의 이치를 의리(義利)의 사이에서 결단하였다.
나아가 지언(知言)과 양기(養氣)의 설이나, 산목(山木)과 계견(鷄犬)의 설명이나, 천작(天爵)과 인작(人爵)의 논이나, 정초(旌招)와 획금(獲禽)의 비유나, 첩부(妾婦)와 장부(丈夫)의 변론 등을 보면, 그의 말이 정심(精深)하고 준절(峻切)하고 명백하고 통쾌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리하여 멀리 백세(百世) 뒤에까지도 사람들을 깨우치고 격려해 줄 수 있게 되었으니, 이는 마치 귀에 대고 말해 주고 면전에서 가르쳐 주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그래서 한자(韓子)가 “성인의 도를 구해 보려면, 반드시 《맹자》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求觀聖人之道者 必自孟子始〕”라고 말한 것이니, 이는 참으로 적절한 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뒤 맹자 이후로 1천 4, 5백 년이 지나서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출현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분명하게 알고 확실하게 보고서 성인의 경지를 지향하여 그동안 단절되었던 계통을 잇게 된 소이(所以)를 찾아보면 실로 이 《맹자》라는 책에서 터득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평생토록 발휘하며 논변한 것 모두가 여기에 뿌리를 둔 것이었는데, 여기에 또 이 책을 주해(註解)하여 그 뜻을 드러내어 밝힌 결과, 《맹자》 7편의 취지가 세상에 환히 알려지게 되었다.
내가 삼가 이 책을 읽으면서 그 글을 음미하고 그 뜻을 탐구하는 동안, 마치 성현이 나의 앞에 임해서 직접 가르쳐 주시는 것만 같기에 숙연해지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다만 이 책의 내용이 잡다하게 뒤섞인 채 분산되어서 조리가 없는 듯하기에, 삼가 나의 분수를 헤아리지 않고 감히 종류별로 분류하여 10권으로 다시 편집해 공경하고 사모하는 자료로 삼고자 하였다. 그렇게 엮은 다음에 반복해서 참고하고 완미해 보니 절목이 분명해져서 질서 있게 정리된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하였다. 무릇 학자가 성(性)을 알고 심(心)을 보존하는 일과 학문에 힘을 쓰고 윤기(倫紀)를 살피는 일, 수신(守身) 처세(處世)하는 도리와 왕정(王政)의 요체, 성도(聖道)가 전해진 것 등이 각각 조리 있게 뒤섞이지 않아 그 뜻이 찬연히 드러나게 되었다. 그래서 이 책을 명명하여 《학맹편(學孟篇)》이라고 하였다.
삼가 생각건대, 맹자의 도는 바로 요순과 삼왕과 공자의 도인데, 요순과 삼왕과 공자의 도는 바로 사람의 도이다. 사람이 되어 요순과 삼왕과 공자를 배우지 않는다면 본래 사람의 도를 극진히 할 수가 없는데, 요순과 삼왕과 공자의 도는 또 맹자를 통하지 않고서는 배울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의 도를 극진히 하는 방법은 요순과 삼왕과 공자를 배우는 것이요, 요순과 삼왕과 공자의 도를 배우는 방법은 맹자를 배우는 것이다.
옛날에 주자(朱子)가 주자(周子)와 정자(程子)와 장자(張子)의 글을 뽑아서 《근사록(近思錄)》을 만든 다음에, “《근사록》은 사자의 계제이다.〔近思錄 四子之階梯〕”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내가 이 책을 차례로 편집할 때에도 《근사록》의 차서를 대략 따랐으니, 나도 삼가 시험삼아 “맹씨는 요순과 삼왕과 공자를 배우는 계제이다.〔孟氏 學堯舜三王孔子之階梯〕”라고 말해 보려 한다.
혹자(或者)는 말하기를 “그대가 이렇게 편집한 의도는 물론 좋다. 그러나 정자와 주자가 사람들을 가르칠 적에는 반드시 《논어(論語)》와 《맹자》를 도에 들어가는 요체로 삼았고, 이와 함께 반드시 《논어》를 먼저 읽게 하고 나서 《맹자》에 들어가도록 하였다. 그런데 지금 그대는 그만 전적으로 《맹자》를 위주로 해서 학문을 논하고 있으니, 이렇게 한다면 선현(先賢)의 취지에 어긋나는 점이 있지 않겠으며, 끝내는 편협하고 애루(隘陋)한 병통을 면할 수 없는 점이 있지 않겠는가.”라고 할지도 모르겠는데, 이에 대해서는 내가 이렇게 답변하겠다.
그 말이 물론 옳기는 하다. 그런데 예로부터 성현의 말씀에는 각각 간략하고 상세한 차이가 있어 왔다. 이는 사람들에게 높고 낮은 수준의 차이가 있고 시대에도 성쇠(盛衰)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성현의 말씀이 같지 않은 차이가 있게 된 것이다. 요 임금이 순에게 전해 줄 때에는 “진실로 그 중도(中道)를 잡도록 하라.〔允執厥中〕”라고 하였는데, 순 임금이 우(禹)에게 전해 줄 때에는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미약하니, 오직 정밀하게 살펴서 한결같이 행해야만 진실로 그 중도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라고 당부하였다. 이에 대해서 선유(先儒)는 말하기를, 요 임금이 한마디 말씀만 해도 순이 벌써 깨달았기 때문에 다시 더 일러 주지 않았지만, 순 임금이 세 마디 말을 덧붙인 것은 우가 깨닫지 못할까 걱정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대저 《논어》와 《맹자》로 말하더라도 이 두 책에 간략하고 상세한 차이가 있는 것 역시 이와 같다고 할 것이다. 《논어》는 문인의 손으로 이루어진 것으로서, 부자(夫子)가 평소에 훈계한 미언(微言)이 담겨 있는 책인 데에 반해, 이 7편은 맹자가 천하 후세 사람들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직접 저술한 것이다.
부자의 시대는 선왕(先王)의 시대와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선왕의 정치가 당시에 비록 천하에 행해지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선왕이 끼친 은택은 아직 남아 있었다. 그래서 천하 사람들이 아직도 선왕의 도를 존숭할 줄을 알았고, 이단(異端)의 학설 역시 아직은 기승을 부리지 못하는 때였다. 그리고 3000명의 제자로 말하더라도 모두 천하의 영재(英才)들이었는데, 부자가 이들을 모두 얻어서 교육하였으니, 그들이 마음속으로 기뻐하고 진심으로 복종하면서 보고 느끼는 사이에 터득한 것이 또한 깊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자가 성(性)과 천도(天道)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을 하지 않고, 단지 인사(人事)에 관한 하학(下學)의 방면만을 가르치면서, 제자들이 도달한 수준에 따라 계발시켜 스스로 터득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부자의 말씀을 보면 또 혼연(渾然)히 의미를 안에 함축하고서 겉으로 모두 드러내지 않았으므로, 초학자가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당시에 직접 교육을 받은 제자들이라 할지라도 혹시 숨기는 것이 있지 않나 하고 의심할 정도였다. 그러니 더군다나 천년 뒤에 태어나서 점진적으로 쌓은 공부도 없이 무작정 대문과 담장을 엿보려 하고 백관의 풍부함과 종묘의 아름다움을 구경하려고 한다면, 이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맹자의 시대로 말하면 성인의 시대와 이미 멀리 떨어져서 미언(微言)이 사라진 지 오래된 상태였다. 그리하여 처사(處士)들의 잘못된 의논이 세상에 횡행하는 가운데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의 학설이 길을 메우고 있었고, 상앙(商鞅)과 오기(吳起)와 소진(蘇秦)과 장의(張儀) 등의 주장이 분분히 세상에 치달리고 있었으므로, 천하 사람들이 선왕의 도가 있다는 것을 더 알지 못한 채 방향을 잃고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지 못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고자(告子)의 무리가 인의(仁義)를 외면(外面)에 속하는 것으로 여겼는가 하면, 당시에 문하에서 수업을 받고 있던 공손추(公孫丑)까지도 오히려 관안(管晏)에 대해서 질문을 하는 형편이었으며, 그 밖의 제자들을 보더라도 이 도를 다시 전해 줄 만한 자가 있지 않았다. 그래서 맹자가 인심(人心)과 성정(性情)의 도리가 끝내 천하에 밝혀지지 않게 될 것과 요순과 삼왕과 공자의 도가 끝내 없어져서 전해지지 못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맹자》 7편을 짓게 된 까닭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선(性善)과 인의(仁義)에 관한 맹자의 설명이나 이욕(理欲)과 공사(公私)에 대한 맹자의 변론은 모두 전성(前聖)이 아직 드러내지 않은 것을 확충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설명을 할 때에 반드시 빈틈없이 상세하게 하려고 하고, 변론을 할 때에 반드시 빈틈없이 분명하게 하려고 했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영기(英氣)가 표출되고 규각(圭角)이 드러나게 된 것이었는데, 더 이상 빠진 것이 없이 드러내 밝혀 깨우쳐 주면서도 오히려 사람들이 깨닫지 못할까 걱정하였으니, 맹자가 천하 후세를 위해 생각한 것이 또한 심원하다고 하겠다.
대개 요 임금이 드러내어 밝히지 않은 것을 순 임금이 드러내어 밝혔고, 부자가 드러내어 밝히지 않은 것을 맹자가 드러내어 밝혔으니, 이를 종합해서 말해 본다면 《논어》는 정일집중(精一執中)의 요체만을 말한 것이요, 《맹자》는 위미(危微)의 도리까지 합쳐서 모두 드러내 밝혔다고 할 것이다. 인심유위(人心惟危)와 도심유미(道心惟微)를 일러 주지 않아도 제대로 윤집궐중(允執厥中)하는 것은 순과 같은 경지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법이다. 마찬가지로 성정(性情)의 이치와 공사(公私)의 구분에 대한 것 역시, 성인의 문하에서 직접 훈도를 받지 않고서는 이를 드러내어 밝혀 주지 않은 상태에서 도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더군다나 중인(中人)의 재질 정도를 지니고서 난세(亂世)의 말류(末流)에 처한 사람의 경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이것이 바로 맹자가 천하 후세 사람들을 깨우쳐 주면서 반드시 빠짐없이 상세하게 드러내고 분명하게 밝히려고 했던 까닭이다.
지금 이 시대는 또 맹자의 시대와 거의 2000년이나 떨어져 있다. 내가 외진 변방에 뒤늦게 태어나서 배우고 있는 처지인 만큼, 비록 습속을 벗어나서 스스로 분발하며 희성(希聖) 희현(希賢)에 뜻을 둔다고 하더라도 대순(大舜)과 같은 준철(濬哲)의 자질을 지니지도 못하였고, 3000명의 제자가 성인의 훈도를 받으며 귀의했던 것과 같이 사우(師友)를 통해 보고 느끼는 유익한 공부도 못 하고 있는 실정이다. 게다가 사장(詞章)에 치중하는 과거(科擧)의 폐습과 불씨(佛氏)의 근리(近理)한 학설 등 인심(人心)을 못된 구렁에 빠뜨리고 바른길로 가지 못하게 막는 풍조가 또 맹자의 시대보다도 더 심각한 형편이다.
그러니 만약 상세하게 설명하고 분명하게 변론한 《맹자》라는 이 책을 먼저 공부하여 성정(性情)과 위미(危微)의 도리를 밝히고 의리(義利)와 공사(公私)의 구분을 밝혀 보지도 않은 채, 무작정 혼연(渾然)히 깊은 뜻을 함축하고 있는 《논어》의 미언(微言)을 궁구하려고 한다면, 어떻게 알고서 좋아하는 단계에 나아갈 수가 있겠으며, 끝내는 외물(外物)과 이설(異說)의 유혹에 뜻을 뺏기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학문을 하려면 먼저 의리(義利)와 내외(內外)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 뒤에야 박문약례(博文約禮)하는 공부에 착수할 수가 있다.”라고 하였고, 채서산(蔡西山 채원정(蔡元定)) 선생이 학자를 가르칠 때에도 반드시 도덕(道德)과 성명(性命)의 이치를 먼저 깨우치게 하였으니, 그 뜻이 또한 대체로 이와 같았다. 그러고 보면 《맹자》를 먼저 공부해야 한다고 하는 나의 뜻도 본시 선현의 취지에 근본하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맹자》만을 배워야 한다고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맹자》를 연구하여 그 맛을 체득해서 패연(沛然)히 소득이 있게 한 뒤에 문채를 이루어 통달하도록 해야 할 것이요, 그리고는 《논어》의 세계에 들어가서 성인의 온축(蘊畜)된 말씀의 뜻을 탐구하면, 얼음이 풀리듯 융해되고 마음이 즐거워지는 가운데 이치에 따르게 되어, 아는 것과 보존하는 것 모두가 날로 고명(高明)해지고 순수해지면서 의(義)가 정밀해지고 인(仁)이 원숙해질 것이다.
이렇게 된 다음에 다시 육경(六經)을 연구하고 두루 천하의 서적을 섭렵한다면, 넓고 큰 것을 끝까지 추구하면서도 정밀하고 은미한 것을 완전히 파악하게 되고〔致廣大而盡精微〕, 높고 밝은 최고의 경지를 이루면서도 중용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니〔極高明而道中庸〕, 편협하거나 애루(隘陋)하게 될 걱정이 뭐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맹자》를 공부할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완숙하게 읽고 정밀하게 사색해야 할 것이요, 자기에게 절실한 일로 받아들여서 탐구해야 할 것이요, 자신의 몸에 돌이켜서 체득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나의 선한 성품이 본래 요순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고서 명성(明誠)의 공을 이루어 기필코 성인의 경지에 이르겠다고 다짐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의(仁義)의 마음을 보존하고 효제(孝悌)의 행실을 돈독히 하여 일상생활 가운데에서 인사(人事)에 관한 하학(下學)의 공부를 쌓아야 할 것이요, 내외(內外)의 구분을 자세히 살펴서 제대로 처신하고 출처(出處)의 도리를 분명히 하여 의롭게 행동해야 할 것인데, 이렇게 하면 자신을 다스리는 일이 일단은 극진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함께 왕도(王道)의 근본과 인정(仁政)의 요체에 대해서도 반드시 평소에 강구하고 미리 밝혀 두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뒷날 임금을 바른 길로 인도하며 왕도를 행하는 도구로 삼아서, 공리(功利)를 위주로 하는 패자(霸者)의 사심을 배격하고, 옳은 듯하면서도 그른 이단(異端)의 학설을 변론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요순과 삼왕과 공자의 도가 어떠한 것인지 들어서 알 수가 있다. 그것은 바로 맹자를 통해서 요순과 삼왕과 공자의 도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요순과 삼왕과 공자를 배우면 사람의 도리를 극진하게 할 수 있으니, 이렇게 한 뒤에야 사람이라는 이름을 더럽히지 않을 수 있게 될 것이요, 맹자를 잘 배웠다는 말도 들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만력(萬曆) 신축년(1601, 선조 34) 11월 병술일에 풍양(豐壤) 조익(趙翼)은 삼가 서(序)하다.


 

[주D-001]도는 하나일 뿐이다 : 등 문공(滕文公)이 세자일 때에 다시 맹자를 찾아오자, 맹자가 자기의 말을 의심하지 말라고 하면서 일러 준 말이다. 《孟子 滕文公上》
[주D-002]인물(人物)의 …… 것이다 : 《중용장구(中庸章句)》 제 22 장에 “자기의 성을 극진히 할 수 있으면 타인의 성을 극진히 할 수 있으며, 타인의 성을 극진히 할 수 있으면 사물의 성을 극진히 할 수 있으며, 사물의 성을 극진히 할 수 있으면 천지의 화육을 도울 수 있으며, 천지의 화육을 도울 수 있으면 천지와 더불어 같은 반열에 참여할 수 있다.〔能盡其性 則能盡人之性 能盡人之性 則能盡物之性 能盡物之性 則可以贊天地之化育 可以贊天地之化育 則可以與天地參矣〕”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3]성인은 …… 표준이다 : 《맹자(孟子)》 이루 상(離婁上)에 “그림쇠와 곡척은 원과 네모를 그릴 때의 최고 표준이요, 성인은 인륜의 최고 표준이다.〔規矩 方員之至也 聖人 人倫之至也〕”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4]삼왕(三王) : 삼대(三代)의 성왕(聖王)이란 뜻으로, 하(夏)의 우왕(禹王), 상(商)의 탕왕(湯王), 주(周)의 문왕과 무왕을 가리킨다.
[주D-005]순 임금처럼 …… 삼았으니 : 순 임금도 사람이요 나도 사람인데 어찌하여 나는 순 임금처럼 되지 못하고 무지몽매한 촌사람으로 그쳐야 하겠느냐고 걱정하는 것이 당연하니, 군자는 이와 같은 종신(終身)의 근심은 있을지언정 일조(一朝)의 걱정은 없는 법이라고 말한 내용이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나온다.
[주D-006]금성(金聲) …… 한편 :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공자는 집대성한 분이시다. 집대성이란 종(鍾)과 같은 금의 소리가 먼저 퍼지게 하고 나서, 맨 마지막에 경쇠와 같은 옥의 소리로 거둬들이는 것을 말한다.〔孔子之謂集大成 集大成也者 金聲而玉振之也〕”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7]지언(知言)과 양기(養氣)의 설 : 맹자가 자신의 장점을 묻는 제자의 질문에 대해서 “나는 말을 제대로 판단할 줄 안다. 그리고 나는 나의 호연지기를 잘 기른다.〔我知言 我善養吾浩然之氣〕”라고 대답한 뒤에 자세히 설명해 준 내용이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나온다.
[주D-008]산목(山木)과 계견(鷄犬)의 설명 : 물욕이 사람의 양심을 해치는 것을 우산(牛山)의 나무에 비유해서 설명한 내용과, “닭이나 개가 도망치면 사람들이 찾을 줄을 알면서도 마음이 도망치면 찾을 줄을 모른다. 학문의 길은 다른 것이 아니다. 놓친 그 마음을 찾는 것일 뿐이다.〔人有鷄犬放 則知求之 有放心而不知求 學文之道 無他 求其放心而已矣〕”라고 말한 내용이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나온다.
[주D-009]천작(天爵)과 인작(人爵)의 논 : 천작은 선천적으로 하늘로부터 받은 작위(爵位)라는 뜻이고, 인작은 남으로부터 받은 작위라는 뜻이다. 《맹자》 고자 상에 “인의충신과 선을 좋아하여 게을리 하지 않는 이것이 바로 천작이요, 공경대부와 같은 종류는 인작일 뿐이다.〔仁義忠信樂善不倦 此天爵也 公卿大夫 此人爵也〕”라는 말과 “남이 귀하게 해 준 것은 본래 귀한 것이 아니다. 조맹이 귀하게 해 준 것은 조맹이 천하게 만들 수가 있다.〔人之所貴者 非良貴也 趙孟之所貴 趙孟能賤之〕”라는 말이 나온다.
[주D-010]정초(旌招)와 획금(獲禽)의 비유 : 정초는 산지기를 격에 맞지 않게 깃발로 부른 것을 말하고, 획금은 부정한 수단으로 짐승을 사냥한 것을 말한다. 군자는 이와 같이 도리에 맞지 않는 일에는 일절 응하지 않는 것을 설명한 말인데,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자세한 내용이 나온다.
[주D-011]첩부(妾婦)와 장부(丈夫)의 변론 : 전국 시대 종횡가인 공손연(公孫衍)과 장의(張儀)는 윗사람에게 순종하고 아첨하면서 출세했던 사람이니 첩부와 같다고 비판하면서, 진정한 대장부에 대해 설명한 대목이 《맹자》 등문공 하에 나온다.
[주D-012]성인의 …… 한다 : 당(唐)나라 한유(韓愈)의 송왕훈서(送王塤序) 끝 부분에 나온다.
[주D-013]주자(朱子)가 …… 말하였다 : 주자(周子)와 정자(程子)와 장자(張子)는 각각 송유(宋儒)인 주돈이(周敦頤)와 정호(程顥) · 정이(程頤) 형제와 장재(張載)의 존칭이다. 남송(南宋)의 섭채(葉采)가 지은 근사록집해서(近思錄集解序)에 “일찍이 듣건대, 사자는 육경의 계제요 근사록은 사자의 계제라고 주자가 말하였다.〔嘗聞 朱子曰 四子六經之階梯 近思錄四子之階梯〕”라고 하였다. 사자(四子)는 사자서(四子書)의 준말로 공자 · 증자(曾子) · 자사(子思) · 맹자의 《논어》 · 《대학》 · 《중용》 · 《맹자》의 사서(四書)를 말하고, 계제(階梯)는 층계와 사닥다리라는 뜻으로 예비 단계라는 말과 같다.
[주D-014]3000명의 …… 교육하였으니 : 《사기(史記)》 권47 공자세가(孔子世家)에 “공자가 시서예악을 교재로 해서 가르친 제자가 약 3000명이었으며, 그중에서 몸으로 익혀 육예에 통달한 자가 72인이었다.〔孔子以詩書禮樂敎 弟子蓋三千焉 身通六藝者七十有二人〕”라는 말이 나온다.
[주D-015]부자가 …… 가르치면서 : 자공(子貢)이 공자로부터 형이상학적인 가르침을 얻어 듣고 난 뒤에 “선생님이 문물제도 등 겉으로 드러나는 일에 관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누구나 얻어 들을 수 있으나, 인간의 성리(性理)와 천도에 관한 말씀은 아무나 얻어 들을 수가 없다.〔夫子之文章 可得而聞也 夫子之言性與天道 不可得而聞也〕”라고 말하면서 기뻐한 내용이 《논어》 공야장(公冶長)에 나온다.
[주D-016]당시에 …… 정도였다 : 《논어》 술이(述而)에 공자가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내가 숨기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나는 너희들에게 숨기는 것이 하나도 없다.〔二三子 以我爲隱乎 吾無隱乎爾〕”라고 말한 내용이 나온다.
[주D-017]대문과 …… 한다면 : 노(魯)나라 대부(大夫) 숙손무숙(叔孫武叔)이 자공(子貢)을 공자보다 낫다고 칭찬하자, 자공이 “궁궐의 담장에 비유해 보건대, 나의 담장은 어깨에 닿을 정도여서 집안의 좋은 것들을 모두 엿볼 수 있지만, 부자의 담장은 그 높이가 몇 길이나 되기 때문에 정식으로 대문을 통해서 들어가지 않으면 종묘의 아름다움과 백관의 풍부함을 볼 수가 없다.〔譬之宮牆 賜之牆也及肩 窺見室家之好 夫子之牆數仞 不得其門而入 不見宗廟之美 百官之富〕”라고 말한 내용이 《논어》 자장(子張)에 나온다.
[주D-018]고자(告子)의 …… 하면 : 고자는 일찍이 묵자(墨子)의 가르침을 받고 맹자에게 와서 수업하기도 하였는데,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에 대해 성무선악설(性無善惡說)을 주장하여 토론을 벌였으며, 인(仁)은 내면에 속하고 의(義)는 외면에 속한다는 이른바 인내의외설(仁內義外說)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본문의 내용은 포저의 착각이거나 탈자가 있는 듯하다. 《孟子 告子上》
[주D-019]당시에 …… 형편이었으며 : 공손추(公孫丑)가 제(齊)나라의 명상(名相)인 관중(管仲)과 안영(晏嬰)을 높이 평가하며 맹자에게도 그렇게 되기를 기대하자, 맹자가 그들에게 자신이 비유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면서 신랄하게 반박한 내용이 《맹자》 공손추 상에 나온다.
[주D-020]중인(中人)의 재질 : 《논어》 옹야(雍也)에 “중인 이상의 재질을 지닌 사람에게는 차원이 높은 이야기를 해 줄 수 있지만, 중인 이하의 재질을 지닌 사람에게는 그런 이야기를 해 줄 수가 없다.〔中人以上 可以語上也 中人以下 不可以語上也〕”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주D-021]희성(希聖) …… 둔다 : 현인이 되고 나아가 성인이 되겠다는 뜻을 세웠다는 말인데, 송유(宋儒) 주돈이(周敦頤)가 《통서(通書)》 지학(志學)에서 “선비는 현인이 되기를 희구(希求)하고, 현인은 성인이 되기를 희구하고, 성인은 하늘처럼 되기를 희구한다.〔士希賢 賢希聖 聖希天〕”라고 한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022]준철(濬哲) : 《서경(書經)》 순전(舜典)에 “깊고 지혜롭고 문채가 나고 환하게 밝으며, 온화하고 공손하고 미쁘고 성실하다.〔濬哲文明 溫恭允塞〕”라는 말로 순 임금의 덕을 표현하였다.
[주D-023]알고서 좋아하는 단계 : 《논어》 옹야(雍也)에 “도를 아는 것은 도를 좋아하는 것만은 못하고, 도를 좋아하는 것은 도를 즐기는 것만은 못하다.〔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주D-024]명성(明誠)의 공 : 하늘과 사람의 도가 합치되는 경지를 말한다. 《중용장구》 제 21 장에 “하늘의 참됨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밝아지는 것을 성이라 하고, 인간이 밝아짐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참됨을 회복하는 것을 교라고 하니, 참되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참되게 마련이다.〔自誠明 謂之性 自明誠 謂之敎 誠則明矣 明則誠矣〕”라는 말이 나온다.

포저집 제26권
 서(序) 24수(二十四首)
《대학사람(大學私覽)》 서문


《대학(大學)》은 선유(先儒)가 공씨(孔氏)의 유서(遺書)라고 하였으니, 이는 성인이 아니고서는 그렇게 지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예전에 《예기(禮記)》 속에 수록되어 있던 이 글을 정자(程子)가 비로소 표출하여 제자에게 전수하였는데, 다만 세대가 멀리 떨어져서 와전된 탓으로 착간(錯簡)된 부분이 많았기 때문에 이정자(二程子 정호(程顥) · 정이(程頤))가 모두 순서를 고쳐서 바로잡았다. 그리고 그 뒤에 주자(朱子)가 이천(伊川 정이)이 개정한 것을 기초로 하여 다시 바로잡으면서, 그 사이에 빠진 글이 있으면 또 옛 성현의 유의(遺意)를 헤아려 전(傳)을 지어 보충하고 장구(章句)를 만들어 그 뜻을 드러내 밝혔다. 이에 착간된 것이 바로잡히고 빠진 것이 보완되어 은미한 표현과 심오한 취지가 찬연히 드러나지 않은 것이 없게 되었다. 그리고 그 뒤로 또 여러 선유들이 서로 비교하고 연역(演繹)하여 장(章)을 나누고 구(句)를 해설하여 각자 논하고 저술하였으니, 《대학》 한 편에 담긴 깊은 뜻이 이에 남김없이 모두 드러났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내가 나름대로 살펴보건대, 이 책 속에는 강(綱)이 있고 목(目)이 있으며 경(經)이 있고 전(傳)이 있는데, 강은 크게 규모가 완비되었고 목은 바르게 순서가 잡혀 있으며, 경은 간략하면서 빠짐이 없고 전은 절실하면서 분명하였다. 이 책이야말로 역대 성인들이 마음을 전한 요전(要典)이요 백왕(百王)이 정치를 행한 대법(大法)으로서, 그 뜻이 《상서(尙書)》와 서로 표리(表裏)의 관계를 이루고 있는데, 이 책이 성인이 전한 글 속에서 나와 천하 사람들이 만세토록 법도로 삼을 수 있게 되었으니,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하루라도 강명(講明)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선현(先賢)이 또 이를 표장(表章)하고 논석(論釋)하여 크게 천명한 결과, 옛날 성인의 성의(誠意) 정심(正心)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의 법이 해와 별처럼 밝게 빛나고 큰길처럼 평탄해졌으니, 사람들이 만약 스스로 구하기만 하면 누구든지 구해서 얻지 못할 것이 없게 되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후세 사람들은 대부분 이 책에 다시 마음을 두지 않고서 일체 방치해 둔 채 공부를 하려고 하지 않는단 말인가. 학문을 하는 자도 여기에 힘을 쓰지 않고서 오직 이익을 추구하며 자기의 사적인 일만을 도모하고 있고, 정치를 행하는 자도 여기에 뿌리를 두지 않고서 오직 남을 배척하며 자기만 옳다고 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인욕(人欲)이 마구 흘러넘치고 천리(天理)가 막혀 통하지 않게 된 나머지 천하가 어둠에 휩싸여 어지러운 날이 항상 많게 되었으니, 아, 애석한 일이다.
내가 소싯적에 배움의 기회를 놓치고는 나이가 약관(弱冠)이 되려고 할 즈음에야 처음으로 이 책을 읽게 되었는데, 오래도록 탐색하다 보니 자못 터득한 것이 있는 듯한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이 책을 접한 뒤로 지금 어언 7, 8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지금 옛날에 읽었던 내용을 다시 되새기노라니 더욱 감발(感發)되는 점이 있는 것 같기도 하였다. 이에 감히 명도(明道 정호)가 정한 것에 대략 의거해서 경(經)을 2장(章)으로 나누되, 전(傳)의 앞 4장은 경의 전장(前章)에 소속시켜 상권(上卷)으로 하고, 전의 뒤 6장은 경의 후장(後章)에 소속시켜 하권(下卷)으로 하였다.
내가 이렇게 한 것은 감히 《대학》 본문의 뜻을 터득했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단지 경(經)과 전(傳), 그리고 강(綱)과 조(條)를 가지고 각각 같은 종류끼리 분류해서 보기에 편리하게 하려고 한 것일 뿐이다. 그리고 이와 함께 평소에 어쩌다가 깨닫게 된 어리석은 소견을 그 사이에 기록해 두었는데, 어쩌면 한두 가지쯤 새로 드러내어 밝힌 것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참람되고 망녕되게 행한 죄를 비록 피할 수 없게 되었다고는 하더라도, 이렇게 한 것은 감히 사람들에게 전하려고 해서가 아니라, 단지 혼자 사적으로 볼 때에 편리하게 하는 동시에 나의 가슴속에 새기고서 행하려고 한 것일 뿐이다. 그래서 이 책의 이름을 《대학사람》이라고 하였다.
만력 병오년(1606, 선조 39) 12월 기미일에 삼가 서하다.


 

[주D-001]대학(大學)은 …… 하였으니 : 《대학장구(大學章句)》 경(經) 1장의 앞에 “《대학》은 공씨가 남긴 글로서 초학자가 덕으로 들어가는 문이다.〔大學 孔氏之遺書 而初學入德之門〕”라는 말이 정자(程子)의 말로 인용되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