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백련사원묘국사비(白蓮寺圓妙國師碑

萬德山白蓮社圓妙國師碑銘 幷序 崔 滋

아베베1 2011. 3. 16. 20:32

萬德山白蓮社圓妙國師碑銘 幷序 崔 滋

如來爲一大事因緣出現於世廣演群經然猶大小權實莫能一貫逮乎機與時會如癰欲潰然後極唱妙蓮攝九界三乘入一佛乘久黙之懷乃暢而無復餘蘊洎雙林滅度玄綱解紐惟龍樹大士病之發明宗極破一切異論開三觀妙門惠文惠思祖述相繼而智者大師天縱妙悟再敡木鐸至於章安結集之二威傳授之尤溪述之毗陵記之憲章大備可擧而行本朝有玄光義通諦觀德善智宗義天之徒航海問道得天台三觀之旨流傳此土奉福我國家其來尙矣至如開普賢道場廣勸禪誦蓋闕如也惟師當宗敎寢夷之日立大法幢駭未聞之俗生無根之信使祖道中興施及無垠非承本願力應生季末爲如來所使行如來事者安能如是哉師諱了世字安貧俗姓徐氏新繁縣人也父必中爲戶長母徐氏同鄕人也以大定癸未冬十月誕生生而穎悟容儀魁偉自齠年有老戍氣度十二出家依江陽天樂寺沙門均定爲沙彌始天台敎觀時學士林宗庇知江陽一見而器之以爲佛法有賴矣二十三中僧選專志宗乘遍叅講肆不數年間洞曉指歸己爲一家雋望承安三年戊午春上都設法會于高峯寺名緇雲集異論蜂起師登坐一吼衆皆讋服莫敢枝梧以天性好山水雖跡名敎非其志也是年秋與同志十餘輩遊歷名山初止靈洞山長淵寺開堂演法丕勤誘進請益成蹊時曹溪牧牛子在公山會佛岬聞風暗契以偈寄師勸令修禪云波亂月難顯室深燈更光勸君整心器勿傾甘露漿師見而心愜徑往從之然爲法友助揚道化居數年牧牛子移社於江南師亦隨而南焉自智異山道過南原歸正寺其住持玄恪夢有人告曰明日三生持法華師來宜淨掃迎之主人如敎掃門庭具殽饌以待師乘晚果至玄恪具說所夢又師屢夢智者衆講妙宗或在華長庵安禪不動竟服魔魅或山神指畫寺基或龍巖社道人希亮夢金蓮座待師等異夢靈恠頗多然此非儒者所宜言故不悉云泰和八年戊辰春寓居月生山藥師蘭若見溪山淸絶堂宇頹圮迺事修葺甞宴坐一室陶神妙觀忽自念言若不發天台妙解永明壽百二十病何由逃出因自警悟及講妙宗至是心作佛是心是佛不覺破顔自後樂說妙宗辯慧無㝵抑籲衆修懺懇至精猛日禮五十三佛十二遍雖祁寒酷暑未甞懈倦禪流號爲徐懺悔耽津縣有信士崔彪崔弘李仁闡等來謁師曰今法侶漸盛山居甚隘吾郡南海山側有古萬德寺基地位淸勝可創伽藍盍往圖之師往見而肯之以大安三年辛未春矢厥謀命門人元瑩之湛法安等幹事募工營構凡立屋八十餘間至貞祐四年秋告成設法會以落成九年春帶方守卜章漢聞師道韻請以管內白蓮山爲道場師率其徒往焉見其地阻且無水意欲徑還偶㧞一石淸泉忽迸乃異之留數年十一年癸未崔彪等奉書請云本社法筵久廢不可雲遊誠請再三故幡然取道而還大闢道場至戊子夏五月有業儒者數人自京師來叅師許以剃度授與蓮經勸令通利自是遠近嚮風有信行者源源而來寢爲盛集以壬辰夏四月八日始結普賢道場修法華三昧求生淨土一依天台三昧儀長年修法華懺前後勸發誦是經者千餘指受四衆之請遊化然緣僅三十妙手度弟子三十有八人凡創伽藍幷蘭若五所王公大人牧伯縣宰尊卑四衆題名入社者三百餘人至於展轉相敎聞一句一偈遠結妙因者不可勝數師自遁影山林五十年未甞踏京華塵土未甞親導鄕黨親戚事性少緣飾純厚正直目不邪視言不妄發夜不炳燈燭寢無茵褥所爲檀襯悉頒施貧乏方丈中唯三衣一鉢而己每禪觀誦授之餘誦法華一部念准提神呪一千遍彌陁佛號一萬聲以爲日課甞自謂一門敎海浩汗學者迷津乃撮綱要出三大部節要鏤板流行後進多賴焉上聞而嘉之越丁酉夏賜號禪師厥後屢降綸旨歲時錫賜公府亦所師於乙巳年夏四月以院門佛事付上首弟子天因退居別院蕭然坐忘專求西邁是年六月晦日齋時呼監院告言老僧今日困暑口爽小有遠行信速爲我造竹禪床來床成謂諸老宿曰此床擧措輕便試坐須有快處至七月三日就客室示微疾倚臥唱云諸法實相淸淨湛然言之者失理示之者乖宗吾宗法華一大事隨分妙解唯此而巳又唱元曉澄性歌云法界身相難思議寂然無爲無不爲至以順彼佛身心故必不獲已生彼國每坐臥袞袞唱念不輟至六日澡浴更衣坐定彌日比暮呼天因使前囑佛乘大義己仍曰商行寄金吾去無患矣天因問云未審氣息小異昔如何荅云吾欲囘向久矣但盛暑非宜待立秋停留至今卽口授令書寶誌偈云雞鳴丑一顆圓珠明己矣至未了之人聽一言只這如今誰動口帖在禪床前露柱吟詠自若至七日丑時命侍者擊磬集衆索水盥漱着法服升坐跏趺面西而坐告衆云五十年山林朽物今日行矣各自努力爲法勉旃天因問云臨終在定之心卽是淨土更欲何之師云不動此念當處現前我不去而去彼不來而來感應道交實非心外言訖卽歛念然印如入禪定就視之己化矣享齡八十三臘七十顔色鮮白異常手足柔軟頭頂久煖是日耽津守率胥吏十餘人馳詣圓寂所命畵手朴輔寫遺像又有近邑四衆五十餘人爭前瞻禮無不墮淚哀敬焉上聞之悼命有司冊爲國師諡曰圓妙塔曰中眞特遣貴人賷敎書卽其社追獎申命臣滋撰辭于碑臣職卑才下固不足以當是任然上命嚴密未獲牢辭謹按行錄旣序之且銘曰
鶴林示寂妙道漸離空有互諍矛盾相持各權所得而無正信龍樹排邪發揮正印智者繼起判釋申明人知一路直進其行師其嫡孫達三種觀普賢道場祖開東韓勸誦蓮經誦者日盛噫師之心確乎剛正利名不誘魔外難凌孤立海內光揚祖燈悟解方明修懺愈切延死待時非以詭譎淸心在丑喪事宜秋臣雖筆鈍未工撰修師之終始無愧勒石此山寧頹此名不易

〔출전 : 『東文選』 권117〕

 

 

만덕산(萬德山) 백련사(白蓮社) 원묘국사(圓妙國師) 비명(碑銘)과 서(序)
최자(崔滋) 지음

석가여래가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부처가 이 세상에 출현한 오직 하나의 큰 목적. 대승 소승 권교 실교의 여러 가지 부류의 중생을 모두 인도하여 一佛乘의 가르침을 알게 하기 위한 것)을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나, 널리 여러 가지 경전을 널리 설했으나 오히려 대소(大小, 대승과 소승) 권실(權實, 궁극적인 가르침과 방편)을 하나로 관통하지 못했다가 근기(根機)와 때가 서로 만나 마치 곪은 것이 터지려는 것처럼 된 뒤에 마지막으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설하고, 구계(九界, 온 세상)와 삼승(三乘)을 포섭하여 하나의 불승(佛乘)에 들어가서, 오랫동안 감추었던 포부가 활짝 열려 다시는 나머지가 없었다. 석가여래가 쌍림(雙林) 에서 열반하고 불교의 기강이 해이해짐에 이르러, 오직 용수대사(龍樹大士)가 이를 걱정하여 종지의 극치(極致)를 발명하고, 일체의 이론(異論)을 깨트려 버리고 삼관(三觀)의 현묘(玄妙)한 문을 열었다. 혜문(惠文)과 혜사(惠思)가 이를 조술하여 이어왔고, 지자(智者)대사는 하늘이 낳은 총명으로 다시 목탁 소리를 드날렸으며, 장안(章安, 관정(灌頂)) 대사가 결집(結集)하고, 이위(二威) 대사가 전하며, 우계(尤溪) 대사가 계승하고, 비릉(毗陵) 대사가 기록하기에 이르러 법통이 크게 갖추어져 세상에 행할 만하였다.
고려에서는 현광(玄光)ㆍ의통(義通)ㆍ제관(諦觀)ㆍ덕선(德善)ㆍ지종(智宗)ㆍ의천(義天)과 같은 이들이 바다를 건너가서 교리를 묻고 천태종(天台宗)의 삼관(三觀)의 종지를 배워서 이 땅에 전해 퍼지게 하여 우리 나라를 복되게 한 것은 그 내력이 오래되었다. 그러나 보현도량(普賢道場)을 열고 널리 불경을 읽도록 권하기까지는 한 일이 없었다. 오직 우리 대사가 종교가 쇠해 가려던 때를 당하여 크게 법당(法幢)을 세워, 법을 듣지 못하던 사람들을 놀라게 하여 뿌리 없던 신심(信心)을 서게 하고, 조사(祖師)의 도리가 다시 일어나 천하에 널리 미치게 하니, 본원력(本願力, 부처나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려고 새운 큰 서원의 힘)을 이어받은 것이 아니라면 말세에 태어나 여래(如來)가 시킨 바 되어 여래의 일을 행하기를 어찌 이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
대사의 휘는 요세(了世)요, 자는 안빈(安貧)이며, 속성은 서씨(徐氏)인데, 신번(新繁, 지금의 경남 의령(宜寧)) 고을 사람이다. 아버지 필중(必中)은 호장(戶長)이 되고, 어머니 서씨도 같은 고장 사람이다. 대정(大定) 계미년(의종 17, 1163) 겨울 10월에 탄생하였다. 태어날 때부터 총명하고 용모가 웅대하였으며 어릴 때부터 노성한 기운이 있었다. 12세에 강양(江陽, 지금의 경남 합천군(陜川郡)) 천락사(天樂寺)의 승려 균정(均定)에게 가서 사미(沙彌, 머리를 깎고 처음 출가한 승려. 정식 승려가 되기 위해서는 다시 구족계(具足戒)를 받아 비구(比丘)가 되어야 함)가 되어 처음으로 천태교관(天台敎觀)를 알게 되었다. 이때 학사 임종비(林宗庇)가 강양 군수였는데, 한 번 보고는 그릇이 될 만함을 알아 보고 불법이 믿을 만한 자가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22세에 승과에 급제하여 불교의 종지에 뜻을 오로지하고, 두루 강석(講席)에 참가하였다. 몇 년이 되디 않아 지귀(指歸, 이치가 돌아갈 바 곧 중요한 이치)를 확실히 깨달아, 벌써 일가(一家)의 높은 명망이 있었다. 승안(承安) 3년 무오년(신종 1, 1198) 봄에 서울에 가니 고봉사(高峯寺)에서 법회가 열렸는데, 이름 있는 승려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여러 가지 이론이 벌떼같이 일어났으나 대사가 법좌에 올라 한 번 사자후를 하니, 대중들이 모두 경복하여 감히 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천성이 산수를 좋아하여 비록 명교(名敎)에 자취를 남겼으나 그의 본 뜻은 아니었다.
이 해 가을에 동지 10여 명과 이름난 산의 절들을 돌아다녔다. 처음에 영동산(靈洞山) 장연사(長淵寺)에 머물러 법당을 열어 법을 설하고, 후진을 애써 부지런히 가르치니 가르침을 청하는 이가 점차 많아졌다. 때마침 조계(曺溪)의 목우자(牧牛子, 보조(普照)국사 지눌(知訥))가 공산(公山, 대구 팔공산) 모임의 불갑(佛岬)에 있다가 그 소문을 듣고 속으로 뜻이 통하여, 대사에게 게송을 보내 선법(禪法)을 닦으라고 권했다. 게송에 이르기를,
파도가 어지러우니 달 드러나기 어렵고
방이 깊으니 등불 더욱 빛난다
권하노니 그대는 마음 그릇을 바로 하여
감로장이 쏟아지게 하지 말라
하였다. 대사가 보고 마음에 맞아 빨리 가서 그에 따랐으나 법우(法友)가 되어 불도의 교화를 도왔다. 몇 년을 지내다가 목우자가 강남으로 옮겨가므로 대사도 따라서 남쪽으로 갔다.
길이 지리산으로부터 남원(南原) 귀정사(歸正寺)를 지나는데, 그 절의 주지 현각(玄恪)의 꿈에 어떤 사람이 와서 하는 말이, “내일 삼생지법화사(三生持法華師, 삼생 동안이나 법화를 수행한 자)가 올 것이니, 깨끗이 소제하고 맞이하라” 하였다. 주인이 꿈에 시킨 대로 뜰을 쓸고 음식을 장만해 두고 기다렸더니, 대사가 과연 어둠을 타고 이르러 현각이 그 꿈 얘기를 했다. 또 대사가 여러 차례에 걸쳐 지자(智者) 대사가 여러 사람에게 『묘종(妙宗)』을 강설하는 꿈을 꾸었고, 혹은 화장암(華長庵)에 머물며 참선하면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어 끝내 마귀들에게서 항복 받기도 하고, 혹은 산신이 절터 자리를 가리켜 주기도 하고, 혹은 용암사(龍巖社) 도인 희량(希亮)이 금련좌(金蓮座)에서 대사를 기다리는 꿈을 꾸는 등 신이한 꿈이 신령스럽고 괴이한 것이 많았다 하나, 이것은 우리 유자(儒者)가 말할 바가 아니므로 다 쓰지 않는다.
태화(泰和) 8년 무진년(희종 4, 1208) 봄에 월생산(月生山) 약사난야(藥師蘭若, 난야는 본래 작은 절을 말함)에 머물고 있었다. 물은 맑고 산은 빼어난데 절의 당우가 허물어진 것을 보고는 힘써 수리해 놓았다. 어느 때 방 안에 조용히 앉아 정신을 도야하고 미묘한 이치를 관찰하면서 문득 생각하기를, “만약에 천태(天台)의 미묘한 지해를 얻지 못하면 영명연수(永明延壽)의 백 20가지 병통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하고, 이로 인해 스스로 깨우침을 얻었다. 『묘종(妙宗)』을 강설하다가, “이 마음이 부처가 된다. 이 마음이 곧 부처이다”는 대목에 이르러서 저절로 파안대소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이후로는 『묘종』을 설법하기 좋아하였으며 언변과 지혜가 막힘이 없었다. 여러 사람에게 권하여 참회를 닦기를 간절하고 지극하고 용맹스럽게 하여 매일 53불에게 열두 번씩 예경(禮敬)하고, 비록 모진 추위와 무더운 더위라고 한 번도 게을리 하지 않아 승려들이 서참회(徐懺悔)라고 불렀다.
탐진현(耽津縣, 지금의 전남 강진(康津))에 신사(信士, 불교 신도) 최표(崔彪)ㆍ최홍(崔弘)ㆍ이인천(李仁闡) 등이 대사를 찾아와 뵙고 말했다. “지금 승려들은 점점 많이 모여 산사가 심히 협소한데, 우리 고을 남해의 산 옆에 만덕사(萬德寺) 옛터가 맑고 빼어나 절을 지을 만합니다. 어찌 가서 시도하지 않으십니까.”
대사가 가서 보고 허락하여 대안(大安) 3년 신미년(희종 7, 1211) 봄에 공사를 시작하여, 제자 원형(元螢)ㆍ지담(之湛)ㆍ법안(法安) 등을 시켜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공장(工匠)을 모집하여 집 80여 간을 지었다. 정우(貞祐) 4년(고종 3, 1216) 가을에 준공이 되어 법회를 열고 낙성식을 했다.
9년 봄에 대방(帶方, 지금의 전북 남원(南原)) 태수(太守, 지금의 군수) 복장한(卜章漢)이 대사의 도가 높다는 소문을 듣고 관내에 도량을 열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대사가 제자를 데리고 가보니, 그 땅이 막히고 또 물이 없어 마음 속으로 그만 돌아오려다가 우연히 돌 하나를 잡아 빼니 맑은 샘물이 용솟음쳐 나와 이에 이상이 여겨 몇 년을 머물렀다. 11년 계미년(고종 10, 1223)에 최표 등이 글월을 보내, “우리 절이 법회가 오랫동안 폐지되었으니 대사께서는 구름처럼 여기저기 다니실 수 없습니다” 하고 두 번 세 번 성심으로 청해 왔으므로 곧 돌아와서 크게 도량을 열었다. 무자년(고종 15, 1228) 여름 5월에 유학을 공부하는 사람 여러 명이 서울에서 내려와 뵈니 대사가 제자로 받아들여 머리를 깎고 『법화경』을 주어 가르쳐서 통달하게 하였다. 이로부터 이곳저곳에서 높은 소문을 듣고 신행(信行)이 있는 자가 끊임없이 와서 점점 큰 모임이 되었다.
임진년(고종 19, 1232) 여름 4월 8일에 처음으로 보현도량(普賢道場)을 결성하고 법화삼매(法華三昧)를 수행하여, 극락정토(極樂淨土)에 왕생하기를 구하되, 오로지 천태삼매의(天台三昧儀)에 따라 하였다. 오랫동안 법화참회(法華懺悔)를 수행하고 주변에 권하여 발심(發心)시켜 이 경을 외운 자가 천여 명이나 되었다. 사부대중(四衆)의 요청을 받아 교화시켜 인연을 지어준 지 30년에 묘수(妙手)로 제자를 만든 것이 38명이나 되었으며, 절이나 난야를 지은 것이 다섯 곳이고, 왕공대인(王公大人, 왕실과 조정의 주요 인사)과 목백현재(牧伯縣宰, 여러 지방 고을의 수령)들과 같은 신분이 높고 낮은 사부대중들이 이름을 써서 결사(結社)에 들어온 자들이 3백여 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서로 전도해서, 한 구절(句) 한 게송(偈)을 듣고 멀리 좋은 인연을 맺은 자들은 헤아릴 수가 없었다.
대사가 산 속에 자취를 감춘 지 50년 동안에 서울 땅에는 발을 붙인 적이 없었고, 고향 마을의 친척들의 일에 관여한 적이 일찍이 없었다. 천성은 겉으로 꾸밈이 적고 순수하고 후덕하며 정직하여, 눈으로 사특한 것을 보지 않았고, 말을 함부로 하지 않았으며, 밤에는 등불을 켜지 않았고, 잠잘 때는 자리를 쓰지 않았다. 단월들이 시주(施主)한 것은 모두 다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었고, 방장(方丈, 사방 여섯 자 되는 수행자의 작은 방) 가운데는 삼의(三衣, 승려에게 소지가 허락된 세 가지 옷)와 바릿대 하나 밖에 없었다. 매일 선정(禪定) 수행하고 경을 가르치는 여가에 『법화경』 한 부를 외우고, 준제신주(准提神呪)를 천 번,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아미타불에게 귀의함)을 만 번 염불하는 것을 일과로 하였다.
일찍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불교의 경론(經論)들이 너무 많아 배우는 자들이 들어갈 바를 잘 알지 못한다” 하고는 중요한 대강을 뽑아 『삼대부 절요(三大部節要)』를 만들어 판각하여 배포하여 후진들이 다들 이에 힘입었다. 왕이 듣고 가상히 여겨 몇 해 뒤인 정유년(1237, 고종 24, 1237) 여름에 선사(禪師)의 칭호를 내리고, 그 뒤에도 여러 번 교서를 보내고 해마다 세찬(歲饌)을 보냈으며 관청에서도 그렇게 하였다.
대사는 을사년(고종 32, 1245) 여름 4월에 사원(寺院) 안의 불사를 상수제자인 천인(天因, 백련사 제2세 사주인 정명국사(靜明國師), 1205~1248)에게 부탁하고, 별원(別院)에 물러 나와 고요히 앉아 오로지 서방정토(西方淨土)에 왕생하기를 구하였다. 이 해 6월 그믐날 재(齋)를 올릴 때 감원(監院)을 불러 말하기를, “늙은 몸이 오늘 더위에 시달려 입맛이 틀려 멀리 갈 것 같은 기별이 있으니, 빨리 나에게 대나무로 선상(禪床)을 만들어 오너라” 하였다. 선상이 만들어지자 여러 원로들에게 말하기를, “이 상이 거처하기에 가벼워 편하니 시험삼아 앉아 보면 반드시 상쾌한 데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7월 3일에 객실로 옮겨 약간의 병세를 보이면서 비스듬히 누워 읊기를,
모든 법의 본체는
맑고 깨끗하다
말하는 자는 이치를 잃고
내보이는 자는 종지에 어긋난다
우리 천태종의 법화경에 나오는 일대사 인연을
분수에 따라 정묘하게 알지니라
오직 이것뿐이라
하였다. 또 원효의 「징성가(澄性歌)」를 부르기를,
법계의 몸의 모양은 알기 어렵다
적막하여 하는 것도 없고 안 하는 것도 없다
저 부처님의 몸과 마음에 순종하기에 이르면
틀림없이 그 나라에 태어나리라
하였다. 매일 앉으나 누우나 거듭거듭 창하면서 염불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6일에 이르러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 하루 종일 좌정하고 있었다. 날이 저물자 천인(天因)을 불러 앞에 앉히고 불법의 대의를 부탁하고 난 뒤에, “가을철이 들었으니 내가 가도 걱정이 없을 것이다” 하니, 천인이 묻기를, “기식이 전과 약간 다른 것 같은 데 어떻습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내가 열반하려고 한 지가 오래나, 무더위 때라 적절치 않아 입추를 기다리느라고 지금껏 참았노라” 하고, 즉시 입으로 불러 보지(寶誌)에 게송을 쓰게 하였는데,
닭이 축시에 우니 한알 밝은 구슬이 빛을 다하였다
깨닫지 못한 사람들아, 내 한 말 들으라
다만 지금 누가 입을 열 것인가
하고는 선상 앞 기둥에 붙여 놓고 평상시와 같이 읊었다. 7일 축시(丑時, 새벽 1시부터 3시 사이)에 이르러 시자(侍者, 고승을 시봉하면서 모시는 승려)를 시켜 경쇠를 쳐서 여러 사람을 모으게 하고, 물을 가져다 세수를 하고 법복을 입고 법좌에 올라 가부좌하고서 서향하여 앉아 대중들에게 말하기를, “50년 동안 산 속에 썩은 이 물건이 오늘 떠나갑니다. 각자 노력하고 법을 위해 힘쓰시오” 하였다. 천인이 묻기를, “세상을 떠날 때 선정(禪定)에든 마음이 곧 극락정토인데, 다시 어디로 가시렵니까” 하니, 대사가 말하기를, “이 생각을 동요하지 않으면 바로 이 자리에서 도가 나타나나니. 나는 가지 않아도 가는 것이며, 저들은 오지 않아도 오는 것이어서, 감응(感應)하여 도와 오고가는 것이지 실상은 마음 밖에 있지 않다” 하고, 말을 마치자 곧 생각을 거두고 고요한 것이 선정(禪定)에 든 것 같았는데, 가까이 가보니 이미 입적하였다. 향년 83세이고 승랍(僧臘, 출가한 이후의 나이)은 70년이었다. 얼굴 빛이 맑고 희어 보통 사람과는 달랐으며, 손과 발이 부드럽고, 머리 정수리가 오래도록 따뜻하였다.
이 날 탐진(耽津) 군수가 서리 10여 명을 데리고 입적한 곳에 이르러서 화공 박보(朴輔)를 시켜 유상(遺像)을 그리게 하였다. 인근 고을의 사부대중(四部大衆) 50여 명이 앞다투어 우러러 배례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왕이 부음을 듣고 슬퍼하여 유사에게 명하여 국사(國師)로 책봉하고, 시호를 원묘(圓妙), 탑 이름을 중진탑(中眞塔)이라 하였다. 특히 귀인에게 교서를 내려 그 절에 가서 예식을 갖추도록 하고, 신 최자(崔滋)에게 당부하여 비명을 찬술하라 하셨다. 신은 벼슬이 낮고 재주가 부족하여 진실로 이 소임을 감당할 수 없으나, 왕의 분부가 엄중하고 은근하므로 고집해 사양할 수 없어, 삼가 행록(行錄)을 보고 서(序)를 쓴다. 또 명(銘)하기를,
학림(鶴林)에서 적멸을 보이고
미묘한 진리가 차차 흩어졌다
공(空)이니 유(有)니 서로 다투어
모순으로 서로 맞섰다
제각기 얻은 바를 저울질하고
바른 믿음은 갖지 못했다
용수(龍樹)대사가 사특한 것을 물리치고
바른 법을 발휘하였다
지자(智者) 대사가 이어 일어나
판가름하여 거듭 밝혔다
사람들은 한 가지 길을 알아
곧장 그 길로 나아갔다
대사는 바로 그 적손으로
삼종 관법에 통달하였다
보현도량을
우리 나라에 처음 열었으며
『법화경』을 외도록 권하여
외우는 자가 날로 늘어났다
아, 대사의 마음은
명확하고 굳세며 올바랐다
이해와 명예에 끌리지 않아
마귀와 외도가 침범하지 못했다
나라 안에 외로이 서서
조사의 법등을 빛내었다
깨달음과 앎이 밝은데도
참회행 닦기를 간절히 했다
죽기를 늦추고 때를 기다린 것은
거짓 속임이 아니다
마음 밝힘은 축시에 있는 것이요
상사는 가을이 좋은 것이다
내 비록 붓이 둔해서
글을 잘 짓지는 못하나
대사의 한 평생은
돌에 새겨 부끄럼이 없다
이 산이 오히려 무너질지언정
이 이름은 바뀌지 않으리

 

동문선 제27권
 제고(制誥)
만덕산 백련사주 요세 증시 원묘국사 교서(萬德山白蓮社主了世贈諡圓妙國師敎書)


민인균(閔仁鈞)

교하노라. 운운. 비상한 사람이 있어야만 비상한 증직이 있는 것이다. 국가가 3백여 년 이래로 대화상(大和尙)을 추숭하여 국사를 삼은 것은 오직 대각(大覺)ㆍ무애지(無碍智)ㆍ보조(普照)ㆍ진각(眞覺) 등의 대덕(大德) 뿐이었다. 그 뒤로는 비상한 덕이 있어서 앞 시대 사람으로 하여금 아름다움을 독차지하지 못하게 한 사람은 바로 우리 대사이다. 대사는 풍후한 자질과 위대한 물망으로 때에 응하여 빼어나서 능히 법당(法幢)을 세우고 법고(法鼓)를 두들겼다. 그리하여 법을 넓히고 사람을 이롭게 한 공효가 빛나고 빛나 저 일월과 더불어 밝음을 다툰다. 그러니 표창하는 명을 내가 어찌 아끼리오. 이제 원묘국사(圓妙國師)를 제수한다. 운운,


동문선 제83권
 서(序)
만덕산 백련사 정명국사 시집 서(萬德山白蓮社靜明國師詩集序)


임계일(林桂一)

문장을 만드는 것은 진실로 불씨(佛氏)의 여사(餘事)이다. 그러나 당(唐)ㆍ송(宋)시대로부터 고승(高僧) 40여 명의 시집(詩集)이 세상에 유행하였으니, 이 역시 숭상할 만한 일이다. 간혹 부도(浮屠)를 정하게 배우지 못한 자가 도리어 문장의 유(流)에 의탁하여 스스로 방일하는 일도 있으나, 유(儒)ㆍ불(佛)을 겸비하고 도행(道行)이 고결(孤潔)한 경지에 이른 자는 전고(前古)에 구해도 들어보기 힘들다.
국사의 이름은 천인(天因)이요 성은 박씨니 연산군(燕山郡)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영리하여 널리 듣고 많이 기억하였으며 문장에 능함으로써 칭도를 받았다. 수사(秀士)에 천거되어, 현관(賢關)에 들어가 곧장 과거를 보았으나 일생을 두고 춘관(春官)에 실패하니, 사림이 다 애석하게 여겼다. 곧 세상을 사절하고 동사생(同舍生) 허적(許迪)과 전 진사 신극정(申克貞)과 더불어 옷을 털고 먼 길을 떠나 만덕산(萬德山)에 당도하여, 원묘국사(圓妙國師)에게 참알(叅謁)하고, 이미 염인(染因)이 떨어지자 송광산(松廣山) 심화상(諶和尙)을 찾아가서 조계(曹溪)의 요령을 터득하고, 구산(舊山)으로 돌아와 스승의 훈계를 승복하여 연경(蓮經)을 외며 비로소 보현도량(普賢道場)을 열었다. 두 해가 지나자 지리산에 돌아가 은거하였고, 또 석장(錫杖)을 비슬산(毗瑟山)에 옮겨 종적을 감춘채 진(眞)을 닦고 여러 해만에 돌아왔다가, 후에 원묘국사가 천태교관(天台敎觀)을 전수하여 혜식(慧識)이 과연 발달하고 기변(機辨)이 바람처럼 일어났다. 국사가 이미 늙게 되자 자기 자리를 물려주려고 하니, 스님은 곧 몸을 빼서 상락(上洛) 공덕산(功德山)으로 피하였다. 그 즈음에 현 상국(相國) 최자(崔滋) 공이 상락의 태수로 있으면서 미면사(米麵社)를 창건하고 맞아들이므로 스님은 거기서 늙을 작정이었는데, 국사가 다시 사람을 보내어 강박하고 또 꾸짖기를, “어찌 배절(背絶)하기를 그리도 경솔히 하느냐.” 하므로, 마지못하여 와서 원문(院門)을 주장하게 되었으니 중망(衆望)에 따른 것이다. 정미년 겨울에 호적(胡賊)을 피하여 상왕산(象王山) 법화사(法華社)에 들어갔는데 미질(微疾)을 앓으니, 임금이 내사를 보내어 편지를 전하고 약을 보내주었다. 이듬해 7월 칠석에 문인(門人) 원완(圓脘)에게 법통을 넘겨주고 따라서 부탁하기를, “내가 죽거든 후한 장사나 탑 같은 것을 세우지 말고, 지위있는 이에게 찾아가서 비명(碑銘)도 받지 말고, 다만 버려둔 땅에 가서 화장하도록 하라.” 하였다. 그날로 산 남쪽의 용혈암(龍穴庵)으로 물러가 문을 닫고 일을 끊으며 담담하게 있었다. 8월 4일에 문도의 제자를 불러서 말하기를, “나는 떠나게 되었다.” 하고, 편지를 만들어 최상국(崔相國)의 정참정(鄭叅政)과 법제(法弟) 천길(天吉)에게 부쳤다. 5일에 이르러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 좌석에 올라 말소리를 가다듬고 말하기를, “대장부의 하늘에 솟구치는 기염(氣焰)을 어디에 쓰겠는가.” 하였다. 모신 자가 묻기를, “사방의 정경(淨境)이 앞에 있는데, 어느 곳에 유희(遊戱)하시렵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유일성경(惟一性境)이라.” 하였다. 또 여러 승려에게 고하기를, “병든 중이 10여 일이 되도록 곡기를 끊으면 다리가 몹시 힘이 없다. 그러나 법신(法身)의 음조(陰助)를 얻으면 다리 힘이 차츰 건장해진다. 그 다리 힘을 가지면 천당에도 갈 수 있고, 불찰(佛刹)에도 갈 수 있으며, 오온(五蘊)이 통하여 개운하고 삼계(三界)에 흔적이 없어진다.” 하고, 한 게(偈)를 설법하기를, “반륜(半輪)의 밝은 달과 흰 구름, 가을바람이 샘물소리를 보내는데, 거기는 어딘가. 시방(十方) 무량의 불찰은 미래의 불사를 다했구려.” 하였다. 그 말이 끝나자 마자 죽으니 나이는 44세요, 불랍(佛臘)은 23세였다. 제자 정관(正觀)이 꿈에 어느 지방을 가니 사람이 크게 외치기를, “인화상(因和尙)이 이미 상품(上品)을 얻어 하세(下世)했다.” 하였고, 그 밖에도 특이한 상서가 많이 행장(行狀)에 실려있는데 여기서는 생략한다. 스님이 출가함으로부터 저술을 기뻐하지 아니하여, 사람과 주고받은 시문이 자못 많았으나, 문인(門人)의 찬록(撰錄)을 허락하지 않았고, 10중 8, 9는 유실되었다. 그러나 말년의 유고를 여러 편 수습하여 세 권으로 나누었는데, 내가 다행히 향사(香社)에 제명(題名)하였으니, 평소의 분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스님이 죽은 뒤로 국가에 사고가 많아서 미처 비석을 세워 공덕을 찬양하지 못하였으나, 또한 스님의 본뜻이기도 하다. 다만 그 행적이 인멸(堙滅)되면 뒷사람이 어떻게 기술할 수 있을까 염려하던 차에 마침 도인(道人)이 있어 행장과 시집을 가지고 와서 보여주므로, 나는 감히 비졸(鄙拙)하다고 자처하지 않고 스님의 유적을 대략 서술하였으나, 이는 다만 태산의 한 터력을 전할 따름이다.


東文選卷之八十三
 序
萬德山白蓮社靜明國師詩集序[林桂一]

文章之作。固釋氏之餘事。然自唐,宋間。高僧四十餘人詩集。行於世。斯亦可尙已。或有業浮屠未精者。反託文章之流以自放。至如儒釋兼資。道行孤潔。求之前古。罕聞焉。國師諱天因。系出朴氏。燕山郡人也。弱齡穎悟。博聞強記。以能文稱。擧秀士入賢關。以直赴第。一生失意春官。士林皆爲嘆惜。卽謝世。與同舍生許迪,前進士申克貞。拂衣長往。抵萬德山。參圓妙國師。旣零染因。造謁松廣山諶두001尙。得曹溪要領而還舊山。祗服師訓。誦蓮經。始開普賢道塲。涉二稔。歸隱智異山。又移錫毗瑟山。屛跡修眞。累歲迺還。後國師傳天台敎觀。慧解果發。機辯風生。及國師旣耄。欲令繼席。師卽脫身。避之上洛功德山。會今相國崔公滋守洛。創米麵社以邀之。師將老焉。國師再遣人。強迫且讓云。何背絶之甚率。不得已來主院門。從衆望也。丁未冬。避胡寇入象王山法華社。示微疾。上遣中使。以書遺藥餌。明年孟秋初七。法付門人圓睆。仍囑曰。吾沒後。無厚葬立塔。無謁有位求碑銘。但就棄地茶毗耳。是日。退寓山南龍穴庵。掩關絶事淡如也。八月四日。召門弟曰。吾當行矣。爲書寄崔相國及鄭參政。法弟天吉。至五日。浴靧更衣。陞座厲聲云。大丈夫衝天氣焰。於何處用。侍者問四土淨境現前。未審遊戲何土。答唯一性境。又告衆云。病僧絶粒十餘日。脚甚無力。然得法身冥資。脚力稍健。將此脚力。天堂亦得。佛刹亦得。五蘊廓淸。三界無迹。說一偈曰。半輪明月白雲秋。風送泉聲何處是。十方無量光佛刹。盡未來際作佛事。言訖而逝。年四十四。臘二十三。弟子正觀。夢遊何方。似有人大謼云。因和尙已得上品下生矣。其他瑞異。多載行狀。此略之。師自出家。不喜著述。因與人往還詩文頗多。不許門人撰錄。十失八九。但攟拾末年遺藁許多篇。離爲三卷。予幸題名香社。親炙有素。師旣沒。國家多故。未遑立豐碑頌功德。亦師之雅志也。猶恐其軌躅堙滅。後人何述焉。適有道人。袖行狀與詩集來示。予不敢以鄙拙自解。略敍師之遺迹。是特太山一毫耳。


 

東文選卷之二十七
 制誥
萬德山白蓮社主了世。贈謚圓妙國師敎書。[閔仁鈞]

敎云云。有非常之人然後有非常之贈。國家自三百餘年已來。追崇大和尙爲國師者。唯大覺,無碍智,普照,眞覺等大德而已。後之有非常之德而無專美于前人者。卽吾師其人也。師以豐資偉望。應時挺生。能竪法幢擊法鼓。其弘法利人之効。炳炳與日月爭明。褒贈之命。朕何惜焉。今賜圓妙國師云云。


 東文選卷之二十七
 制誥
官誥

門下。罕古之榮。難於所授。絶倫之識。例必有褒。追惟釋院之宗師。實是東韓之老德。宜有加於冊命。而無閒於存亡。萬德山白蓮社主了世。辰象毓靈。海山鍾粹。聦明發於乳育。姿表偉於髫年。割斷親緣。幼執參師之禮。探揚聖敎。尋登選佛之塲。歷扣禪關。周流講肆。窮三藏之旨。括百家之言。與伴侶者數人。痛輪迴於長劫。卽投身於靈洞。冬安夏安。甞息影於公山。晝懺夜懺。刱精廬於萬德古址。立熏範於普賢道塲。每趁禪餘。無忘日課。准提一千編。功不廢於祈寒。彌陁一萬聲。念猶勤於酷熱。或求生於安養。常了誦於法華。普勸尊卑。常令講習。升堂沐潤者。風馳於後。入室聆芳者。景附於前。非惟鷺序鸞行。題名結社。雖至牛童馬竪。引領歸心。顧惟竺法之中。多以台宗爲本。自唐而返。英純講授於羅朝。至宋亦然。大覺流傳於祖代。有權實而不有。無修悟而不無。會三乘於獨妙之門。融萬法於純圓之表。功施衍暢。蔭益弘多。及乎佛性堙微。人根淺鈍。有流於溝蕩而不住。有滯於文句而不移。謂枯坐是禪。等三觀於桎梏。以竅號爲慧。齊八戒於粃糠。師於是時。力救此弊。芟蕪穢以開正路。作堤防以障橫流。然後智者之微言。朗公之極唱。東陽之宗趣。南岳之敎觀。揭起于玆。撞翻若是。以至口不噵鄕閭之事。足不踏京師之塵。坐無褥茵。居無燈火。撰䟽要以頒徒衆。散檀施以濟貧窮。居白蓮山。剩得逬泉之貺。住華長林。能降打案之魔。殊祥異夢之或聞。妙跡奇功之可述。非夫多生願力。一向精勤。規奉法於國家。誓報恩於佛祖者。疇克爾哉。且至虛寓於有物。大化復於無形。問答未終。去來自在。霜炎已換而樹林猶愴。門院久寂而邑落同悲。旣以謚而易名。第加誠而進秩。可特授圓妙國師云云。於戱師之生。度門宏闢而眞風邁古。師之死。法雷猶響而遺澤在人。聊洒渥於幽扃。俾揚光於永世。絲綸一下。泉石皆知云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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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 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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