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환훤당 김굉필 신도비

김굉필신도비(金宏弼神道碑) 등 연구자료

아베베1 2011. 3. 28. 16:26

본관명 서흥(瑞興)   
성씨명 김씨(金氏)
본관소재지 황해도(黃海道) 서흥군(瑞興郡)
본관이칭
시조명 김보(金寶)

[상세내용]

본관 연혁

서흥(瑞興)은 황해도 북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고구려시대에 오곡군(五谷郡) 또는 우차탄홀(于次呑忽)이라 하였으며,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신라 때에는 오관군(五關郡)으로 고쳤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동주군(洞州郡)으로 바꾸었다가 1270년(원종 11)에 안태(安胎)로 불렸다가 서흥으로 고쳐 부르고 현령을 두었다. 1415년(태종 15)에 지군사(知郡事)로 승격하였고, 서흥군(瑞興郡)으로 개칭하였다. 1424년(세종 6)에 입조환자(入朝宦者) 윤봉(尹鳳)의 고향이라 하여 도호부(都護府)로 승격하였다가, 1671년(현종 12)에 현으로 강등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서흥군이 되었다.

성씨의 역사

서흥김씨 시조 김보(金寶)는 신라 왕실의 후예로 경순왕의 넷째 아들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5세손이다. 고려 중엽에 금오위정용중랑장(金吾衛精勇中郞將)을 지냈다. 그의 손자 김천록(金天祿)은 고려 때 이름난 무장으로 1270년(원종 11) 김방경(金方慶)의 부장(部將)으로 삼별초(三別抄)를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으며, 1274년(원종 15) 여원연합군(麗元聯合軍)이 일본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할 때도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워 1280년(충렬왕 6) 광정대부(匡靖大夫) 도첨의시랑 찬성사(都僉議侍郞贊成事)·상장군(上將軍)·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에 오르고 서흥군(瑞興君)에 봉해졌다. 원나라에서도 충현교위관군총파(忠顯校尉管軍摠把)가 되었다고 한다. 이후 후손들은 김보를 시조로 삼고 김천록이 봉군받은 지명인 서흥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분적종 및 분파

파명(派名)을 살펴보면, 크게는 경기파(京畿派),
영남현풍파(嶺南玄風派), 영남초계파(嶺南草溪派),
호남나주파(湖南羅州派), 호남해남파(湖南海南派)로
나뉘어지고, 작게는 경기파에 양지파(陽智派), 숙천파(肅川派)로,
영남현풍파에 장파(長派), 중파(仲派), 계파(季派)로 각각 나뉘어졌다.

주요 세거지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지리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면 본말리
경기도 안성시 고삼면 일원
경상남도 합천군 초계면 일원
경상남도 창녕군 유어면 풍조리
경상남도 창녕군 고암면 가상리
경상남도 밀양시 청도면 두곡리
경상남도 의령군 낙서면 여의리
황해도 금천군 고동면 나성리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서흥김씨는 8,980가구 총 28,313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참고문헌]

《자랑스런 나의 족보》(뿌리찾기운동본부, 2000)   《韓國人의 姓譜》(삼안문화사, 1986)     《姓氏의 고향》(중앙일보사, 2002)    엠파스 한국학지식(http://kdaq.empas.com/koreandb)
뿌리를 찾아서(http://www.rootsinfo.co.kr)
傳統族譜文化社(http://www.genealogy.co.kr)

 

[서흥김씨(瑞興金氏)의 인물들]

[서흥김씨(瑞興金氏)의 과거 및 취재 합격자]

무과
김광연(金光淵) 김만전(金萬銓) 김진룡(金進龍) 김초(金礎) 김충직(金忠直)
문과
김기운(金麒運) 김대곤(金大坤) 김배윤(金培胤) 김석보(金錫輔) 김석원(金錫源)
김석희(金錫熙) 김응문(金應文) 김치곤(金致坤) 김희국(金熙國)
생원진사시
김굉필(金宏弼) 김규선(金奎瑄) 김규응(金奎應) 김규한(金奎漢) 김규화(金奎華)
김노동(金魯東) 김대식(金大埴) 김대진(金大振) 김상(金詳) 김상언(金相彦)
김석보(金錫輔) 김수개(金壽愷) 김양전(金養琠) 김언상(金彦庠) 김우건(金宇建)
김우성(金佑聖) 김운하(金韻夏) 김윤장(金允章) 김인식(金麟埴) 김입(金立)
김중엽(金重曄) 김태영(金兌榮) 김하석(金夏錫) 김화식(金華埴) 김후(金厚)
음관
김규응(金奎應) 김규찬(金奎燦) 김규찬(金奎燦) 김규한(金奎漢) 김대곤(金大坤)
김대진(金岱鎭) 김석린(金錫麟) 김석보(金錫輔) 김석희(金錫熙) 김항진(金恒鎭)
김화식(金華埴) 김희국(金熙國)

 

요약정보]

UCI G002+AKS-KHF_13AE40AD49D544B1454X0
대유(大猷)
사옹(簑翁)/한훤당(寒暄堂)
시호 문경(文敬)
생졸년 1454 (단종 2) - 1504 (연산군 10)
시대 조선 전기
본관 서흥(瑞興)
활동분야 문신 > 문신

[상세내용]

김굉필(金宏弼)에 대하여
1454년(단종 2)∼1504년(연산군 10).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서흥(瑞興). 자는 대유(大猷), 호는 사옹(簑翁)·한훤당(寒暄堂).
1. 집안환경·소학입문
아버지는 충좌위사용(忠佐衛司勇) 유(紐)이며, 어머니는 중추부사(中樞副使) 승순(承舜)의 딸인 청주한씨이다. 그의 선조서흥의 토성(土姓)으로서 고려 후기에 사족(士族)으로 성장하였는데, 증조부인 사곤(士坤)이 수령과 청환(淸宦)을 역임하다가 아내의 고향인 경상도 현풍현에 이주하게 되면서 그곳을 주근거지로 삼게 되었다.
할아버지인 의영고사(義盈庫使) 소형(小亨)이 개국공신 조반(趙胖)의 사위가 되면서 한양에도 연고를 가지게 되었는데, 할아버지 이래 살아오던 정릉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호방하고 거리낌이 없어, 저자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매로 치는 일이 많아 그를 보면 모두 피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성장함에 따라 분발하여 점차 학문에 힘쓰게 되었다. 근기지방의 성남(城南)·미원(迷原) 등지에도 상당한 경제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나, 주로 영남지방의 현풍합천의 야로(冶爐: 처가), 성주의 가천(伽川: 처외가) 등지를 내왕하면서 사류(士類)들과 사귀고 학문을 닦았다.
이때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들어가 《소학》을 배웠다. 이를 계기로 《소학》에 심취하여 스스로를 ‘소학동자’라 일컬었을 뿐 아니라, 이에서 받은 감명을 “글을 읽어도 아직 천기를 알지 못하였더니, 소학 속에서 지난날의 잘못을 깨달았네. 이제부터는 마음을 다하여 자식 구실을 하려 하노니, 어찌 구구히 가볍고 따스한 가죽옷과 살찐 말을 부러워하리오.”라고 술회하였다고 한다.
이후 평생토록 《소학》을 독신(篤信)하고 모든 처신을 그것에 따라 행하여 《소학》의 화신이라는 평을 들었으며, 나이 삼십에 이르러서야 다른 책을 접하였고 육경(六經)을 섭렵하였다.
2. 관계진입·사화연루
1480년(성종 11)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게 되었으며, 이때에 장문의 상소를 올려 원각사(圓覺寺) 승려의 불법을 다스릴 것을 포함한 척불과 유학의 진흥에 관한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1494년 경상도관찰사 이극균(李克均)에 의해 이학(理學)에 밝고 지조가 굳다는 명목의 유일지사(遺逸之士)로 천거되어 남부참봉에 제수되면서 관직생활이 시작되었다.
이어서 전생서참봉·북부주부 등을 거쳐 1496년 군자감주부에 제수되었으며, 곧 사헌부감찰을 거쳐 이듬해에는 형조좌랑이 되었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장(杖) 80대와 원방부처(遠方付處)의 형을 받고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다가 2년 뒤 순천에 이배되었다.
그는 유배지에서도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 힘써 희천에서는 조광조(趙光祖)에게 학문을 전수하여 우리나라 유학사의 정맥을 잇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무오당인이라는 죄목으로 극형에 처해졌다.
3. 신원
중종반정 뒤 연산군 때에 피화한 인물들의 신원이 이루어짐에 따라 도승지에 추증되었고, 자손은 관직에 등용되는 혜택을 받게 되었다.
그뒤 사림파의 개혁정치가 추진되면서 성리학의 기반구축과 인재양성에 끼친 업적이 재평가됨에 따라 그의 존재는 크게 부각되었는데, 이는 조광조를 비롯한 제자들의 정치적 성장에 힘입은 바 컸다.
그 결과 1517년(중종 12) 정광필(鄭光弼)·신용개(申用漑)·김전(金詮) 등에 의하여 학문적 업적과 무고하게 피화되었음이 역설되어 다시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도학(道學)을 강론하던 곳에는 사우가 세워져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그의 문인들이 피화되면서 남곤(南袞)을 비롯한 반대세력에 의하여 그에게 내려진 증직 및 각종 은전에 대한 수정론이 대두되었다.
당시의 이같은 정치적 분위기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뒤 그를 받드는 성균관유생들의 문묘종사(文廟從祀) 건의가 계속되어 1577년(선조 10)에는 시호가 내려졌고, 1610년(광해군 2)에는 대간과 성균관 및 각 도 유생들의 지속적인 상소에 의하여 정여창(鄭汝昌)·조광조·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과 함께 오현(五賢)으로 문묘에 종사되었다.
4. 학문성향
학문적으로는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김숙자(金叔滋)·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유학사의 정통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김종직을 사사(師事)한 기간이 짧아 스승의 후광보다는 자신의 학문적 성과와 교육적 공적이 더 크게 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사우(師友)들 가운데에는 사장(詞章)에 치중한 인물이 많았던 데 반해, 정여창과 함께 경학(經學)에 치중하였다.
이러한 학문적 성향으로 말미암아 ‘치인(治人)’보다는 ‘수기(修己)’에의 편향성을 지니게 되었으며, 현실에 대응하는 의식에 있어서도 그러한 성격은 잘 나타나, 현실상황에 적극적, 능동적으로 대응하려는 자세는 엿보이지 않았다.
이로 인해 20여인에 달하는 문인들은 두 차례 사화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크게 타격을 받지는 않았으며, 유배지 교육활동을 통해 더욱 보강되어, 후일 개혁정치를 주도한 기호계(畿湖系) 사림파의 주축을 형성하게 되었다.
《소학》에 입각한 그의 처신(處身), 복상(服喪)·솔가(率家)자세는 당시 사대부들의 귀감이 되었으며, ‘한훤당의 가범(家範)’이라 하여 숭상되었다. 아산의 인산서원(仁山書院), 서흥의 화곡서원(花谷書院), 희천의 상현서원(象賢書院), 순천의 옥천서원(玉川書院), 현풍의 도동서원(道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경현록》·《한훤당집》·《가범(家範)》 등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참고문헌]

成宗實錄     燕山君日記    中宗實錄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景賢錄          景賢續錄     景賢續錄補遺
大東野乘      燃藜室記述    嶺南士林派의 形成(李樹健, 嶺南大學校出版部, 1979)
朝鮮前期畿湖士林派硏究(李秉烋, -潮閣, 1984)

[이미지]

 

김굉필신도비(金宏弼神道碑)

 

玄風 金宏弻神道碑   塞暄堂金先生神道碑銘幷 序
皇明啓文明之運我朝鮮 列聖應運繼作積德隆化於是乎眞儒出於東方道學爰有傳焉卽先生是也先生諱宏弼字大猷號寒暄堂謹按 國朝儒先錄及景賢錄所載則金氏籍黃海道瑞興府高麗朝金吾衛精勇中郞將諱寶其九世祖也郞將之孫諱天 祿官至匡靖大夫都僉議侍郞賛成事瑞興君公有武略從征日本有功元帝宣授忠顯校尉管軍摠把後三世諱善保奉順大夫判書雲觀事是先生高祖也曾祖諱中坤 本朝初登第歷事四朝有聲稱官至通政大夫禮曹叅議娶玄風郭氏自是玄風仍爲鄕居矣祖諱小亨奉訓郞義盈庫使考諱紐登武科禦侮將軍忠佐衛司勇妣淸州韓氏嘉善大夫中樞院副使 贈兵曹判書淸城君諱承舜之女先生景泰甲戌五月乙亥生于漢陽貞陵洞之第少豪逸不覊稍長發憤業文喜讀昌黎集每至張中丞傳後叙巡呼雲曰南八男兒死耳不可爲不義屈未甞不三復流涕焉就佔畢齋金先生請學佔畢先生授以小學曰苟志於學當從此始光風霽月都在此中先生遂服膺焉手不釋卷作詩有曰小學書中悟昨非佔畢齋批曰此言乃作聖根基魯齊後豈無其人乎人有問及時事者必曰小學童子何知大義其律已一以是書爲繩墨立志必以古聖爲準的年三十後始讀他書探賾六經務要精通靜處一室深夜不寐雖家人子弟莫窺其所爲惟聞蓮子纓抵書案輕輕有聲因知其尙觀書也體驗充廣自强不息下學上達道成德立此先生爲學門路之直修進之密也成化庚子卽 成廟朝先生入上庠時姦僧潛囘佛像惑衆先生䟽陳數千言反覆詳論明白剴切其闢異之正格君之誠然也丁未丁外艱廬墓三年至弘治甲寅以行義薦授南部叅奉乙卯爲燕山時移典牲署叅 奉丙辰特叙六品拜軍資監主簿遷司憲府監察丁巳轉刑曹佐郞戊午史獄起以先生遊佔畢齋門決配凞川庚申移配順天甲子冬終命加焉年五十一歸葬于玄風烏舌里松林甫老洞卽先塋傍也家被籍沒諸子分配矣正德丙寅中廟靖國命雪先生罪 贈通政大夫都承旨兼 經筵叅賛官尙瑞院正丁丑以公論獻議例贈未足表異請加 贈崇品歲廩其妻錄用子孫家 允復 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兼領 經筵事又 命每歲春秋仲月官爲致祭萬曆乙亥 宣廟賜諡文敬公光海庚戌擧國儒生咸上章請以五賢從祀于文廟遂得如請而先生居首又先生遺敎之鄕及宗尙國儒之地各自立祠設院本縣則額以道東今在壠下此先生始終也嗚呼其嘉言懿行何可數也而不幸遭時不淑禍出罔極其得傳者宜無幾矣今就其所傳而畧擧焉則平居鷄嗚而起省問親所如儀昏定亦如之凡所以事之者盡其道丁憂哀毁終始以禮卽吉必晨謁祠堂次詣母夫人母夫人性嚴或有不愜意正色不言則惶恐不敢退必起敬起孝須得悅豫始退此可以見其百行之原也訓諸子曰爾等心存敬畏無敢懈惰人或議己切勿相較又曰言人之惡如含血噴人先其口宜戒之敎諸女以順舅姑謹祭祀敬娣姒勤婦職恤奴婢母多言愼財利等目爲勸戒又以爲我國士大夫鮮立家訓故化導不及於妻孥敎澤不下於臧獲仍倣內則制爲儀節至於內外僕類亦皆分男女序長幼視職勤惰明升降勸懲之規吉凶有費節豐約紓縮之差每以朔望讀法整頓此其家範也曾祖妣郭氏先世墳塋在玄風者久遠圯壤樵牧不禁先生謂郭門諸族曰此爲子孫者所不忍覩切宜禁護又以令節用時羞告虔囙相與講睦不亦可乎於是莫不樂從以爲恒式此孝睦之推也若其應官處俗不求甚異於人一以至誠其爲刑郞擧止有法升降之際周旋折旋必中規矩未甞少違獄訟明恕人皆稱服又雖仕務迫遽不廢講授此乃達不離道也與鄭一蠹汝昌志同道合每相見硏磨道義商確古今或至達曙其在凞川得趙靜庵光祖遂傳其長進遠大之機軸凡其住止之地遠近士子之聞風慕從者坌集鄰閭塡溢人家執經升堂坐不能容先生誨誘不倦講論諄諄雖有以謗興請止乃引喩以理不抑不沮隨才成就後多名人此師道自任敎育爲樂也佔畢公居吏部事無建明則先生上詩諷之此事師無隱也一蠧宰縣置一金盞先生曰不意公作此無益後必誤人甞治曹梅溪偉之喪索平日齒髮其家人告無則曰久從太虗不意其疎如此此交道必信也方在謫所雖禍機叵測先生處之夷然不改常操禍及之日沐浴冠帶而出屨脫還着神色不變徐以鬚含口曰身軆髮膚受之父母不可竝此受傷乃從容而就焉此臨凶不亂也乃擧此一二事餘可以推想矣盖先生剛柔兼質健順備德持己以敬存心以誠講究己精涵養旣厚確而不滯通而不流此果吾儒義理之學中正之道而濂洛諸賢之所以泝沿洙泗者也我東方自有文獻以來以儒名者亦豈少哉而所尙詞藻所慕功名間有所謂特立者亦不過爲一節一行之士耳孰有能撥脫勇健篤實踐履輕枝葉而就本實外口耳而反心身者乎麗氏之末惟有鄭先生圃隱知行此道爲海東首儒而至我 朝先生實唱發其關鍵焉雖其旣不果得位行道又未及著書垂敎而猶能宗一世儒林立斯文赤幟同時輔仁則有一蠧公躬承旨訣則有靜庵公厥後接武而起者平實有如李晦齋精純有如李退溪皆作我東之眞儒爲百世之師範亦先生正脉中私淑者也至今後學得知夫道學之爲正學而莫不宗尙之此固先生爲功也夫人順天朴氏 贈貞敬平陽府院君天祥之四世孫司猛禮孫之女居在陝川郡冶爐縣先生初受室未歸時別設所寓之堂而號之後乃歸玄風舊居卽縣西戴尼山之陽率禮村先生始號爲簑翁謂雖雨外濕而內不濡旣而曰爲名以露非渾然處世之道卽改之夫人後先生三十六歲而卒子男四人長彦塾展力副尉次彦庠司憲府監察次彦序次彦學女壻五人長南部叅奉河珀次訓鍊院正李長培次司憲府監察鄭應祥次士人姜文叔次忠義衛鄭成璘孫四人曰岱東部叅奉曰立副正曰翊曰昱曾孫男八人壽忱壽悅壽恒壽愷生員壽恢察訪壽恬壽悰壽怡玄孫男十三人應夢昌陵叅奉應吉應福司果應成府使應賢應白應哲應信應憲應先曰定曰審曰岩司果第五代孫前察訪大振方爲宗嗣今內外裔至有爲六七代者凡男女老幼幷二百四十餘人豈非積餘之蔓祉哉先生之外曾孫有曰寒岡鄭公逑實有以繼述先生之志業趾美增光者多矣甞 爲先生集景賢續錄甚備而不幸災於火莫傳豈不爲永恨哉至是再周之甲子卽天啓四年宗子大振與其同爲後者及鄕之士類相議曰墓道迨無顯刻不獨爲後裔之羞亦斯文共當其責以告于方伯則方伯李公敏求卽爲之施措盡其誠明年乙丑石旣具諸公命顯光以其文嗚呼自非善言德行者安能說出可彷佛其萬一哉只據兩冊叙以銘焉銘曰覆惟一天載惟一地道在其間不亡不二旣無古今寧有夏夷求之以人便自覺知曰道何道率其秉彝先生是契自任不疑謂聖賢業吾分內事事無難事在我植志行遠自邇登高自卑晦翁有書作聖之基光風霽月師不我欺服膺身踐今悟昨非不出日用妙會天機根深枝暢源濬泉達叅驗貫穿究極包括次第階級規模節目厥有成法信行斯篤勿忘勿助無過不及眞積力久是成是立成不獨成立必俱立推爲麗澤亦樂敎育泝接伊洛淵源洙泗道果東矣庶普厥施旣不見容反爲禍祟時耶命耶道不可恃有待天定難誣此理功存百世澤在多士咸仰正學愈久彌光松林之原洛流縈岡幽宅在是鐫賁無疆

 

 

한훤당 김선생 신도비명 병서(寒暄堂 金先生 神道碑銘 幷序)

명(明) 나라가 문명(文明)의 운(運)을 열자, 우리 조선의 여러 왕(聖王)들이 그 운을 따라 계속하여 일어나서 덕을 쌓고 교화를 높였다. 이에 진유(眞儒)가 동방에서 나와 도학(道學)이 이에 여기에 전해지게 되니, 바로 선생이 그 분이다.
선생은 휘(諱)가 굉필(宏弼)이고 자(字)가 대유(大猷)이며, 호(號)는 한훤당(寒暄堂)이다. 국조(國朝)의 ?유선록(儒先錄)?과 ?경현록(景賢錄)?에 기재된 것을 삼가 살펴보면 김씨는 황해도(黃海道) 서흥부(瑞興府)가 본적(本籍)이니, 고려조(高麗朝)에 금오위 정용 중랑장(金吾衛精勇中郞將)을 지낸 휘 보(寶)가 9세조이다.
낭장의 손자인 휘 천록(天祿)은 벼슬이 광정대부(匡靖大夫) 도첨의시랑 찬성사(都僉議侍郞贊成事)에 이르고 서흥군(瑞興君)에 봉해졌다. 서흥군은 무략(武略)이 뛰어나 일본(日本) 정벌에 종군(從軍)하였다가 공을 세우매, 원(元) 나라 황제가 충현교위 관군총파(忠顯校尉管軍摠把)를 제수하였다. 그 후 3세조 휘 선보(善保)는 봉순대부(奉順大夫) 판서운관사(判書雲觀事)이니, 바로 선생의 고조(高祖)이다. 증조(曾祖)는 휘가 중곤(中坤)인데 본조(本朝, 조선조를 가리킴) 초기에 급제하여 네 조정을 차례로 섬겨 명성이 있었고, 관직이 통정대부(通政大夫) 예조 참의(禮曹參議)에 이르렀다. 현풍 곽씨(玄風郭氏)에게 장가드니, 이로부터 현풍이 거주하는 고을로 되었다. 조고(祖考)는 휘가 소형(小亨)인데 봉훈랑(奉訓郞) 의영고 사(義盈庫使)이다. 선고(先考)는 휘가 유(紐)인데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어모장군(禦侮將軍) 충좌위사용(忠佐衛司勇)이 되었다. 선비(先妣)는 청주 한씨(淸州韓氏)인데, 가선대부(嘉善大夫)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로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고 청성군(淸城君)에 봉해진 휘 승순(承舜)의 따님이다.
선생은 경태(景泰) 갑술년(단종 2, 1454년) 5월 을해(乙亥)에 한양(漢陽)의 정릉동(貞陵洞) 집에서 탄생하였다. 선생은 젊어서 호걸스럽고 뛰어나 얽매이지 않았다. 차츰 자라면서 분발하여 글을 배웠다. ?창려집(昌黎集)? 을 즐겨 읽었는데, 「장중승전 후서(張中丞傳後敍)」 에서 “장순(張巡)이 남제운(南霽雲)을 부르며 이르기를, ‘남팔(南八)은 남아(男兒)이니 죽을 뿐이다. 불의(不義)에 굽혀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라고 한 부분에 이르러서는, 반복하여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점필재(佔畢齋) 김 선생(金先生, 김종직)을 찾아가 배울 것을 청하자, 점필재 선생은 ?소학(小學)?을 주며 말씀하기를, “만일 학문에 뜻을 둔다면 마땅히 여기서부터 시작하여야 한다.광풍제월(光風霽月) .
의 기상(氣像)이 모두 이 가운데에 있다.”라고 하셨다. 선생은 마침내 그 말씀을 가슴에 새겨두고 손에서 ?소학? 책을 놓지 않았다.
선생이 시(詩)를 지었는데, “‘?소학? 가운데서 어제의 잘못을 깨닫는다[小學書中悟昨非]”라는 글귀가 있었다. 점필재가 평론하기를, “이 말은 바로 성인(聖人)이 되는 근기(根基)이다. 노재(魯齋)
의 뒤에 어찌 그러한 사람이 없겠는가!”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세상일을 묻는 자가 있으면 선생은 반드시 말씀하기를, “소학동자(小學童子)가 어찌 대의(大義)를 알겠는가?” 하였으며, 몸을 다스림에 한결같이 이 책을 승묵(繩墨, 규칙)으로 삼고 뜻을 세움에 반드시 옛 성인을 표준으로 삼았다.
나이 30이 된 뒤에 비로소 다른 책들을 읽고 육경(六經)을 탐구하였는데, 정밀하게 통달함을 힘썼다. 방 하나에 고요히 거처하여 밤이 깊도록 잠을 자지 않으니, 비록 집안 식구와 자제들이라도 그 하는 바를 엿보지 못하였다. 오직 연자(蓮子)의 갓끈이 책상에 닿아 작게 소리가 들렸으므로 아직도 책을 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체험하고 확충하며 스스로 힘써서 쉬지 않았으며, 아래로 인간(人間)의 일을 배우고 위로 천리(天理)를 통달하여 도가 이루어지고 덕이 확립되었다. 이것이 바로 선생이 학문을 함에 있어 문로(門路)가 바르고 진수(進修)함이 치밀한 점이었다.
성화(成化) 경자년(성종 11, 1480년)은 바로 성종조(成宗朝)였다. 선생이 상상(上庠, 성균관)에 들어갔는데, 간사한 중[僧]이 몰래 불상(佛像)을 돌려놓아 사람들을 현혹하였다. 이에 선생은 수천 자(字)의 상소(上疏)를 올렸는데, 반복해서 자세히 논하여 명백하고 간절하였다. 이단(異端)을 배척한 바름과 군주를 바로잡으려는 정성이 그러하였다.
정미년(성종 18, 1487년)에 부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묘(廬墓)살이를 하였다. 홍치(弘治) 갑인년(성종 25, 1494년)에 이르러 행의(行義)로 천거되어 남부 참봉(南部參奉)에 제수되었다. 다음 해인 을묘년(연산군 1, 1495년)은 연산군(燕山君) 때인데 전생서 참봉(典牲署參奉)으로 옮겼다. 병진년(연산군 2, 1496년)에 특별히 6품직으로 서용(敍用)되어 군자감 주부(軍資監主簿)에 제수되었다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로 옮겼다. 정사년(연산군 3, 1497년)에 형조 좌랑(刑曹佐郞)으로 전직하였다.
무오년(연산군 4, 1498년)에 사옥(史獄) .
이 일어나자, 선생은 점필재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하여 희천(熙川)으로 유배(流配)되었다가 경신년(연산군 6, 1500년)에 순천(順天)으로 옮겨지고 갑자년(연산군 10, 1504년) 겨울 사약(死藥)이 내려졌다. 이때 나이가 51세였다. 현풍(玄風)의 오설리(烏舌里) 송림(松林) 보로동(甫老洞)으로 돌아가 장례하니, 바로 선영(先塋)의 곁이었다. 집이 적몰(籍沒)되고 여러 아들들은 이곳저곳에 나뉘어 유배되었다.
정덕(正德) 병인년(중종 1, 1506년)에 중종(中宗)이 반정(反正)하고 선생의 죄를 씻을 것을 명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 도승지 겸 경연참찬관 상서원정(都承旨兼經筵參贊官尙瑞院正)을 추증하였다.
정축년(중종 12, 1517년)에 공론에 따라 의논을 올리기를, “준례에 따른 추증으로는 표창하여 특별히 대우함에 부족하오니, 청컨대 숭품(崇品)을 더 추증하고 해마다 그 아내에게 녹봉을 내리며 자손들을 기록하여 등용하소서.”라고 하였다. 마침내 윤허(允許)를 받아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우의정 겸 영경연사(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事)에 추증되고, 다시 매년 중춘(仲春)과 중추(仲秋)에 관청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명하였다. 만력(萬曆) 을해년(선조 8, 1575년)에 선조(宣祖)는 문경공(文敬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광해군(光海君) 경술년(광해군 2, 1610년)에 온 나라의 유생(儒生)들이 일제히 글을 올려 오현(五賢) 을 문묘(文廟)에 종사할 것을 청하였는데, 마침내 소청한 대로 윤허를 받아 선생이 첫 번 째 자리에 올랐다. 선생의 가르침이 남아 있는 지방과 국가의 유현(儒賢)을 높이고 숭상하는 지역에서는 각각 사당을 세우고 서원(書院)을 설치하였다. 본현(本縣, 현풍현을 가리킴)에는 도동서원(道東書院)이라고 사액(賜額)하여 지금 선영의 아래에 있다. 이상이 선생의 시말(始末)이다.
아! 선생의 아름다운 말씀과 훌륭한 행실을 어찌 다 들 수 있겠는가! 그런데 불행히 나쁜 때를 만나 화(禍)가 망극하였으므로, 그 전하는 것이 얼마 되지 않음은 당연한 일이다. 이제 그 전하는 것을 대략 들기로 한다.
평소 닭이 울면 일어나서 어버이가 계신 곳에 문안하기를 의식대로 하고 저녁에 잠자리를 정하는 것도 이와 같이 하여 무릇 어버이를 섬김에 그 도리를 다하였다. 상(喪)을 당해서는 슬퍼하고 몸이 수척해지기까지 할 정도로 시종 예(禮)를 따랐으며 상복(喪服)을 벗은 뒤에는 반드시 새벽에 사당에 참배하고 그 다음에는 모부인(母夫人)에게 나아가 뵈었다. 모부인은 성품이 매우 엄하였는데 혹 뜻에 만족하지 못한 일이 있어 정색(正色)하고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면 선생은 감히 물러가지 못하고 반드시 공경과 효도를 더하여 모름지기 기뻐함을 얻고야 비로소 물러갔다. 이는 효행이 백 가지 행실의 근원임을 볼 수 있다.
선생은 여러 아들들을 훈계하여 말씀하기를, “너희들은 항상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두어 감히 게을리 하지 말며, 사람들이 혹 자신을 비판하거든 절대로 따지지 말라.” 하였다. 또 말씀하기를, “남의 악을 말하면 마치 피를 입에 머금고 남에게 뿜는 것과 같아서 먼저 자기 입을 더럽히게 된다. 마땅히 경계하라.” 하였다. 또한 여러 딸들을 가르치되 시부모에게 순종하고 제사를 정성껏 받들며 동서들을 존경하고 부인의 직책을 부지런히 하며 노비들을 구휼하고 말을 많이 하지 말며 재리(財利)를 삼가는 등의 조목으로 권고하고 경계하였다.
선생은 또 말씀하기를, “우리나라 사대부들은 가훈(家訓)을 세운 이가 적기 때문에 교화가 처자식에게 미치지 못하고 가르침과 은택이 노비들에게 내려가지 못한다.” 하였다. 그래서 ?내칙(內則)?을 따라 의절(儀節)을 만들었다. 마침내 내외의 노비에 이르러서도 모두 남녀(男女)를 구분하고 장유(長幼)를 차례지었다. 맡은 일을 게을리 하는가 부지런히 하는가를 살펴보아 올리고 내리며 권면하고 징계하는 규정을 분명히 하였다. 길흉(吉凶)의 일에 비용을 들이게 되면 풍족하게 하고 검약하게 하는 것을 적절히 가감하여 조절하였다. 매양 초하루와 보름에는 가법(家法)을 읽어 정돈하였다. 이것은 선생이 집안에서 행한 법도였다.
증조비(曾祖妣) 곽씨(郭氏)의 선대 분묘가 현풍(玄風)에 있었는데, 세월이 오래 되어 무너졌으며 나무꾼과 목동(牧童)들을 금하지 않았다. 선생은 곽씨 문중의 여러 종족(宗族)들에게 이르기를, “이는 자손이 된 자가 차마 볼 수 없으니 철저히 금하고 보호하라.” 하였고, 또 “명절에 철에 따른 음식을 올려 경건히 고유하고, 그럼으로써 서로 화목을 다지면 좋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에 곽씨 문중들이 모두 기꺼이 따라 떳떳한 법식으로 삼았다. 이는 효도와 화목을 미루어 넓힌 것이었다.
관청에서 사무에 수응하고 세속에 대처함에 있어서는 일반인과 아주 다르게 하려고 하지 않고 한결같이 지성으로 하였다. 형조(刑曹)의 낭관(郞官)이 되어서는 행동거지에 법도가 있어, 당에 오르고 당에서 내리는 때에 둥글게 돌고 네모지게 꺾어 돌아 반드시 법도에 맞아서 조금도 어기지 않았다. 옥사(獄事)와 송사를 분명히 처리하되 너그럽게 용서하여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고 복종하였다. 또 비록 관청의 사무가 아무리 급박하더라도 강학(講學)과 전수함을 폐하지 않았다. 이는 바로 영달하여도 도를 떠나지 않은 것이다.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과 뜻이 같고 도가 합하여 서로 만날 때마다 도의를 연마하고 고금의 일을 상의하여 혹 밤을 새우기도 하였다. 희천(熙川)에 있을 때에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를 얻어, 마침내 길고 원대한 데로 나아가는 기축(機軸)을 전수하였다. 무릇 거주하고 머무는 곳에는 원근의 선비들이 선생의 풍도(風度)를 듣고 사모하여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래서 학도들이 이웃 마을에까지 가득하고 사람들의 집에 꽉 차서 경서(經書)를 잡고 당(堂)에 오르는 자들이 다 앉을 수도 없었다. 선생은 가르치고 인도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고 강론하기를 간곡히 하였다. 비록 비방이 일어난다 하여 중지할 것을 청하는 자가 있었으나 마침내 이치로 타일러, 꺾지도 않고 기분이 상하게 하지도 않으면서, 재주에 따라 성취시켰기에, 뒤에 유명한 사람이 많았다. 이는 스승의 도로 자임(自任)하여 영재를 교육함을 낙(樂)으로 삼은 것이다.
점필재(佔畢齋)가 이부(吏部, 吏曹)에 있으면서 임금께 건의하여 밝히는 일이 없자, 선생은 시(詩)를 올려 풍자하였다. 이는 스승을 섬김에 숨김이 없는 것이다.
일두(一蠹)가 고을의 원이 되어 금잔(金盞) 하나를 장만하자, 선생은 “공(公)이 이처럼 무익(無益)한 일을 할 줄 몰랐다. 뒤에 반드시 사람을 그르칠 것이다.” 하였다. 일찍이 매계(梅溪) 조위(曺偉)의 상을 치를 적에 평소에 빠진 이빨과 머리털을 찾았으나 집안사람들이 없다고 말하자, 선생은 말씀하기를, “오랫동안 태허(太虛, 조위의 字)와 종유(從遊)하였는데 그 엉성함이 이와 같을 줄을 몰랐다.” 하였다. 이는 붕우 사이에 사귀는 도를 반드시 성실히 한 것이다.
유배지에 있을 때 비록 화(禍)의 기미를 예측할 수 없었으나 선생은 태연히 대처하여 떳떳한 행동을 고치지 않았다. 화가 이르던 날에는 목욕한 다음 관(冠)을 쓰고 띠를 매고 나왔다. 신이 벗겨지자 다시 신고 정신과 안색을 바꾸지 않으며 천천히 수염을 쓰다듬고 입을 다물며 말씀하기를, “신체와 머리털과 피부는 부모에게 받았으니 이것까지 상함을 받아서는 안 된다.” 하고 마침내 조용히 죽음에 나아갔다. 이는 흉액에 임하여 어지럽지 않은 것이다. 이 한두 가지 일을 든다면 나머지는 미루어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선생은 강유(剛柔)의 자질을 겸하고 건순(健順)의 덕(德)을 겸비하여 몸 갖기를 경(敬)으로써 하고 마음 두기를 성(誠)으로써 하였다. 그리하여 도의를 강구(講究)함이 이미 정밀하고 함양(涵養)함이 또한 두터우여, 확고하면서도 막히지 않고 통하면서도 흐르지 않았다. 이는 과연 우리 유학(儒學)의 의리(義理)의 학문이요 중정(中正)한 도(道)인바, 송(宋)나라 염락(濂洛)의 여러 현자(賢者)가 수사(洙泗)를 거슬러 올라가 이은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

우리 동방(東方)은 문헌이 있은 이래로 유학(儒學)으로 이름난 자가 어찌 적겠는가마는 숭상하는 바가 사조(詞藻 문장)이고 사모하는 바가 공명(功名)이었다. 간혹 이른바 우뚝하게 선 자가 있었으나, 또한 한 절개와 한 행실의 선비가 됨에 불과하였다. 그러니, 그 누가 용맹하게 벗어나고 독실하게 실천하여 지엽을 가볍게 여기고 근본과 열매에 나아가며 구이(口耳)의 학문을 외면하고 심신(心身)으로 돌아왔겠는가!
고려 말기에 포은(圃隱) 정 선생(鄭先生)이 이 도를 알고 이 도를 행하여 해동(海東)의 첫 번째 유자(儒者)가 되었다. 우리 조선조에 이르러는 선생이 실로 그 관건(關鍵)을 창도하여 개발하였다. 비록 지위를 얻어 도를 행하지 못하였고 또 미처 저술하여 가르침을 남기지 못했으나 오히려 한 세상의 유림(儒林)의 종주(宗主)가 되고 사문(斯文)의 적치(赤幟)를 세웠다.
같은 시기에 인(仁)을 도운 자로는 일두공(一蠹公)이 있었고 몸소 가르침을 받든 자로는 정암공(靜菴公)이 있었다. 그 뒤에 선생의 발걸음을 이어 일어난 자로는 평실(平實)함이 이회재(李晦齋, 이언적) 같은 분이 있었고 정순(精純)함이 이퇴계(李退溪, 이황) 같은 분이 있었다. 이는 모두 우리 동방의 진유(眞儒)가 되고 백세(百世)의 사범(師範)이 되는바, 또한 선생의 정맥(正脈) 가운데에서 사숙(私淑)한 분들이다. 지금에 이르러 후학들이 도학이 올바른 학문이 됨을 알아 높이고 숭상하지 않는 이가 없으니, 이는 진실로 선생의 공이다.
부인은 순천 박씨(順天朴氏)로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다.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 천상(天祥)의 4대손이고 사맹(司猛)인 예손(禮孫)의 따님인데, 거주한 곳이 합천군(陜川郡) 야로현(冶爐縣)에 있었다. 선생이 처음 장가들어 본집으로 돌아오지 않았을 때 별도로 우거하는 집을 마련하고 당호(堂號)를 지었었다. 뒤에 마침내 현풍의 옛날 거주하던 곳으로 돌아오니, 바로 현풍현의 서쪽 대니산(戴尼山)의 남쪽에 있는 솔례촌(率禮村)이었다. 선생이 처음에는 사옹(簑翁)이라 호하였다. 비록 비가 와서 밖은 젖어도 안은 젖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선생은 이윽고 말씀하기를, “이름을 지은 뜻이 너무 드러나니, 세상에 처하는 도가 아니다.” 하고는 다시 고쳤다. 부인은 선생보다 36세 뒤에 별세하였다.
아들은 4명이다. 장자인 언숙(彦塾)은 전력부위(展力副尉)이고, 차자인 언상(彦庠)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이며, 다음은 언서(彦序)와 언학(彦學)이다. 여서(女壻)는 5명이다. 맏이는 남부 참봉(南部參奉) 하백(河珀)이고, 다음은 훈련원 정(訓鍊院正) 이장배(李長培), 사헌부 감찰 정응상(鄭應祥), 사인(士人) 강문숙(姜文叔), 충의위(忠義衛) 정성린(鄭成璘)이다. 손자는 4명이다. 동부참봉(東部參奉)인 대(岱), 부정(副正)인 입(立), 그리고 익(翊), 욱(昱)이다.
증손은 8명이다. 수침(壽忱), 수열(壽悅), 수항(壽恒), 생원(生員)인 수개(壽愷), 찰방(察訪)인 수회(壽恢), 수념(壽恬), 수종(壽悰), 수이(壽怡)이다. 현손은 13명이다. 창릉 참봉(昌陵參奉)인 응몽(應夢), 그리고 응길(應吉), 사과(司果)인 응복(應福), 부사(府使)인 응성(應成), 응현(應賢), 응백(應白), 응철(應哲), 응신(應信), 응헌(應憲), 응선(應先), 정(定), 심(審), 사과인 탕(宕)이다. 제 5대손인 전 찰방(前察訪) 대진(大振)이 현재 종손(宗孫)이며 이제 내외손으로 6, 7대에 이른 자가 모두 남녀노소를 합하여 총 2백 40여 명에 이른다. 이 어찌 선(善)을 쌓은 남은 복이 아니겠는가!
선생의 외증손에 한강(寒岡) 정구(鄭逑) 공이 있으니, 실로 선생의 뜻과 사업을 계승하여 아름다움을 계승하고 광채를 더한 것이 많다. 일찍이 선생을 위하여 ?경현속록(景賢續錄)?을 엮은 것이 매우 구비되었으나, 불행히 화재로 불타서 전하지 못하니, 어찌 영원한 한(恨)이 되지 않겠는가!
이 재주(再周)의 갑자년에 이르니, 바로 천계(天啓) 4년(1624년)이다. 종손인 대진이 역시 선생의 후손이 되는 자와 지방의 선비들과 상의하기를, “묘도(墓道)에 아직까지 선생의 덕을 드러낸 신도비(神道碑)가 없으니 비단 후손의 수치일 뿐만 아니라 또한 사문(斯文)이 함께 그 책임을 맡아야 한다.” 하여 방백(方伯, 監司)에게 아뢰었다. 방백인 이민구(李敏求) 공이 즉시 그 일을 위해 조처해서 정성을 다하였다. 그리하여 다음 해인 을축년(인조 3, 1625년)에 돌이 갖추어지자, 제공(諸公)들이 나에게 글을 지을 것을 명하였다.
아! 스스로 덕행을 잘 표현하는 자가 아니면 어찌 그 만분의 일인들 방불하게 말할 수 있겠는가! 다만 ?유선록(儒先錄)?과 ?경현록(景賢錄)? 두 책에 근거하여 서술하고 명(銘)을 한다.
명은 다음과 같다.

덮어줌은 오직 한 하늘이요
실어줌은 오직 한 땅이다.
도가 그 하늘과 땅의 사이에 있어,
없어지지 않고 변하지 않네.
이미 고금에 차이가 없거늘,
어찌 중하와 오랑캐의 구분이 있겠는가.
사람에게서 찾으면
곧 스스로 알게 되리라.
도는 무슨 도인가
병이(인륜)를 따르는 것이네.
선생은 이것과 계합(契合)하시어
자임하여 의심하지 않았네.
성현의 사업이
내 분수 안의 일이니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요
나의 입지(立志)에 달려 있도다.
먼 곳에 감은 가까이서부터 시작하고
높은 곳에 오름은 낮은 데서부터 하니
회옹에게 책(?소학?) 이 있어
성인이 되는 기본이라네.
광풍제월 기상이 이 책에 있다 하니
스승은 나를 속이지 않았도다.
가슴속에 새겨두고 몸소 실천하여
어제의 잘못을 오늘에 깨달았네.
일상생활에 벗어나지 않고
하늘의 기틀을 묘하게 깨우치니
뿌리가 깊음에 가지가 번창하고
근원이 깊음에 샘물이 멀리 뻗네.
참험하여 꿰뚫고
연구하여 포괄하니,
학문의 차례와 계급
규모와 절목이
이미 완성된 법이 있으므로
믿고 행함을 독실하게 하였네.
잊지 않고 조장하지 않으며
과와 불급이 없었네.
참을 쌓고 힘쓰기를 오래도록 하여,
완성하고 세우니
완성은 홀로 완성되지 않고
서면 반드시 함께 서는 것이라,
미루어 붕우들과 강론하고
또한 후진 교육을 즐거워하였네.
거슬러 올라가 이락에 접하고,
연원을 찾아 수사에 이르니
도가 과연 동방으로 와서
그 베품을 널리 하였도다.
하지만 용납 받지 못하여
도리어 화의 빌미가 되니
시운인가 천명인가
도를 믿을 수 없었네.
하늘이 정해지기를 기다리니,
이 이치를 속이기 어렵도다.
공로가 백세토록 보존되고
은택이 제제다사에게 남아 있으니
모두들 올바른 학문이라 우러러보아
오랠수록 더욱 빛나네.
송림의 언덕은
낙동강이 산을 감고 도는 곳.
유택이 이곳에 있으니
비석을 새겨 무궁한 후세에 남기네.

 
 
 
(14541504) ·, 관은

(), (), ()·(). () , 1498 , 2 . 1504( 10) , . . 1517( 12) . 1577( 10) , 1610( 2) ()··()·() () . . , . () . 12 () () () . (15541637) (), (), (). 20 . 1636 · , () .

 
(), , , 1999
(), 1998, · ,

 

 

     
     
 

 

연려실기술 제6권
 연산조 고사본말(燕山朝故事本末)
무오당적(戊午黨籍)




김종직(金宗直)
김종직은 자는 계온(季溫)이며, 호는 점필재(佔畢齋)요, 본관은 선산(善山)이고, 강호(江湖) 숙자(叔滋)의 아들이다. 세조 기묘년에 문과에 오르고 성종(成宗) 때 벼슬이 형조 판서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며, 임자년에 죽으니 나이 62세였다. 무오년에 화가 묘에 미쳤다. 숙종(肅宗) 때 영의정을 증직하였다.
○ 공이 총각 때 날마다 수만 자(字)를 기억하고 20세 때에는 문명을 크게 떨쳤다. 어세겸(魚世謙)이 공의 시를 보고 찬탄하여, “나는 그의 종 노릇 밖엔 할 수 없다.”고까지 말하였다. 계유년에 진사, 기묘년에 문과에 올랐다. 성종(成宗)이 문사들을 뽑았는데 공이 제일이었다. 학문과 문장으로 당대의 영수(領袖)가 되었으니,사방에서 학자들이 모여들어 각각 그 그릇의 크고 작음에 따라 배워 얻는 것이 있었고, 한번 종직의 칭찬을 받으면 갑자기 유명한 선비로 되었다. 당대의 도학(道學)ㆍ문장가들이 모두 그의 문하에서 쏟아져 나왔다.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김일손(金馹孫)ㆍ유호인(兪好仁)ㆍ조위(曹偉)ㆍ남효온(南孝溫)ㆍ홍유손(洪裕孫)ㆍ이종준(李宗準) 같은 여러 현인들은 그 중에도 뛰어났고, 그 밖에도 성공한 사람이 많았다. 《명신록》 《국조기사》
○ 공이 상주 노릇하는 3년 동안 조석 상식에 곡을 할 때마다 지나는 사람이 듣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홍유손이 말하기를, “정성이 사람을 감동케 한다더니 과연 헛말이 아니로다.” 하였다. 《추강냉화》
○ 공의 체구가 왜소하여 어세공(魚世恭) 자는 자경(子敬) 이 농담으로, “그에게서 누가 재주를 빼앗아 간다면 한 어린 아이만 남을 거라.”고 하니, 듣는 사람들이 깔깔 웃었다. <비명(碑銘)>
○ 성종이 처음 환취당(環翠堂)을 세우고 글 잘 짓는 신하들로 하여금 당기(堂記)를 지어 올리게 하고 공을 시켜 등급을 정하게 하였다. 그때 좌승지로 있었다. 서거정(徐居正)의 글이 겨우 삼하(三下)이고 나머지는 모두 낙제였다. 왕이 다시 공에게 명하여 짓게 하였는데, 붓을 들고 단번에 써내려가 한 자도 수정하지 않으니 임금이 크게 칭찬하고 인중 위에 걸게 하였다. 서거정이 문형을 맡은 지 26년 동안 사퇴하지 않았다. 하루는 그 조카에게 묻기를, “바깥 의논이 나를 어떻다 하느냐?” 하니 대답하기를,“모두들 너무 오래 문형을 잡고 있다고 싫어합니다.” 하였다. 거정이 실망한 빛으로, “내가 그만두면 필경 김종직이 맡게 될 것이다.” 하였다. 이것은 공을 시기해서 한 말이다. 어떤 이는 무오년의 화가 여기에서 싹텄다고 하는 이도 있다. 《부계기문(涪溪記聞)》
○ 고사(故事)에 대제학이 체직될 때는 나가는 이가 반드시 자신의 후임을 천거하게 되어 있었다. 서거정이 체직될 때 사람들은 모두 김공(金公)에게 촉망을 두었었는데, 거정은 그를 시기하여 홍귀달(洪貴達)을 천거하여 여론이 떠들썩하였다. 김시습의 시에, “평생토록 가소로운 일은 귀달이 문장을 잘한다는 것이라네.” 한 것은 아마 그를 조롱함일 것이다. 《부계기문》
○ 조의제문(吊義帝文)은 분명히 뜻이 있어 나온 것이다. 공의 문집을 상고해 보면, 도연명(陶淵明)의 술주(述酒)와 고풍(古風)에 화답한 시, 양 간문(梁簡文)과 당 문종을 읊은 두 수의 시 및 홍연(弘演)을 읊은 작품들이 모두 우연히 지은 것이 아닌 듯 하다.생각건대, 공이 탕(湯)과 무왕(武王)을 비난할 뜻이 있었다면 차라리 김시습처럼 서슴치 않고 행동하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그런데 세조 기묘년에 과거에 올라 벼슬이 대부에 이른 처지에서 이러한 말을 작품에 나타낸 것을 보면 옛날 예양(豫讓)의 이른바 신하로서 두 가지 마음을 품은 자이니, 부끄럽다 하지 않겠느냐. 《명재집(明齋集)》
○ 그가 남효온(南孝溫)과 함께 단종조(端宗朝) 때 진사가 되었는데 《청야만집(靑野漫輯)》에 말하기를, “단종이 을해년에 손위(遜位)하였고 추강(秋江)은 곧 점필재의 문인이며 갑술년에 났는데, 점필재와 함께 단종조에 진사가 되었다는 것은 착오이다.”고 하였다. 세조가 즉위한 뒤 효온은 과거보기를 그만두었고,공은 곧 세조조(世祖朝)에 발신하였다. 그것은 늙은 어머니가 있었기 때문이었으나 당시 의논이 그를 부족하게 여기는 이가 많았다. 그의 전후의 출처가 조금 분명치 못한 점이 있었으니 기왕 세조를 섬기게 된 바에는 조의제문(吊義帝文)은 지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때 사관이었던 김일손(金馹孫) 같은 이들이 사책(史冊)에까지 기록하기를,“그 글(조의제문)을 지어 충성된 울분을 표시하였다.” 고 한 것은 무슨 소견에서 나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결백하게 꾸준히 나간 이는 오직 매월당(梅月堂) 한 사람뿐이다. <축수편>
○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말하기를, “김종직(金宗直)은 학문(도학)하는 사람이 아니고 평생 사업이 오직 문장에 있었다. 그의 문집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고 하였다.
○ 공의 아버지 숙자(叔滋)는 야은(冶隱) 길재(吉再)에게 배워, 당시의 선비들로 약간 이름 있는 사람들은 모두 공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이승건(李承健)이 한림(翰林)으로 있으면서 사초에 쓰기를, “남인(南人 영남인)들이 서로 추켜 올려서 선생은 제자들을 칭찬하고 제자들은 선생을 칭송하여 일당(一黨)을 지었었다.”고 하였는데, 그 뒤에 이극돈(李克墩)이 승건의 사초를 보고 매양 직필(直筆)이라고 일컬었다. <정암연주(靜庵筵奏)>


김일손(金馹孫) 갑신년에 나다.
김일손은 자는 계운(季雲)이며, 본관은 김해(金海)요, 호는 탁영자(濯纓子)이다. 수로왕(首露王)의 후예이고 대대로 청도(淸道)에서 살았다. 김종직에게 수업하였다. 병오년에 생원에 장원하였고, 같은 해에 갑과에 오르고 벼슬이 이조 정랑에 이르렀다.
○ 공의 아버지 맹(孟) 자는 자진(子進) 은 벼슬이 집의에 이르렀다. 용마(龍馬)의 꿈을 꾸고 세 아들을 낳아 준손(駿孫)ㆍ기손(驥孫)ㆍ일손(馹孫)이라 이름을 지었는데, 모두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이 나고 과거에 올랐다. 《허백정집(虛白亭集)》
○ 그가 청도에서 아직 과거에 오르지 못하고 있을 때, 매양 좌도(左道) 향시(鄕試)에는 장원을 하였다. 일찍이 별시(別試)에 나갔을 때, 두 형 준손과 기손은 공의 힘을 빌어 함께 초시에 합격하였다. 전시를 치르는 날이 되자 공은 두 형의 책문(策文)을 대신 지어주고 자기 것은 짓지 않았다. 그것은 형들에게 먼저 장원을 시키고 자기는 뒤에 과거를 보아 장원을 얻으려함이었다.두 형이 함께 과거에 올랐는데 준손(駿孫)이 첫째가 되었다. 후방 전시(後榜殿試)에서 고시관이 그의 작품인 줄 짐작하고 그를 시기하여 짐짓 둘째에 놓고, 민첨(閔怗)을 첫째로 합격시키니, 공이 듣고 성을 내며, “민첨이 어떤 사람이냐?” 하였다. 《월정만필(月汀漫筆)》 ○ 방목을 상고해 보니, 병오년의 장원은 민이(閔頤)이다.
○ 성종(成宗) 임인년에 기손과 일손(馹孫)이 함께 뽑혔는데, 문묘(文廟)에서 석채전(釋菜奠)을 올린 뒤에 책문(策問)을 내어 과거를 보았다. 일손이 첫째가 되고 기손이 둘째로 뽑혔다.왕이 친히 시권을 보고 기손(驥孫)을 갑과(甲科)로 발탁하고 특별히 공당(公堂)에서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 방목을 상고해 보니, 기손(驥孫)과 준손(駿孫)이 임인년에 나란히 뽑혔다는데 아마 여기에 오자가 생긴 모양이다.
○ 공은 성품이 간략하고 높이 자처하여 남을 칭찬하는 일이 적었다.
○ 공은 강개하여 큰 절개가 있었고, 그릇과 도량이 컸으며, 또 문장이 하해같이 넓고 깊었다. 《명신록》
○ 그가 정광필(鄭光弼)과 함께 양남 어사(兩南御史)의 명을 받고 용인(龍仁)에 이르러 객관에 같이 묵었는데, 공이 강개하여 시사(時事)를 논함에 있어 과격한 말이 많았다. 정(鄭)이 누누히 말리며, “그렇게 말할 것이 아니라.”고 하니, 공이 문득 분연히 말하기를, “사훈(士勛 정광필의 자(字))도 이처럼 저속한 의논을 하니 어찌 차마 기절이 없는 썩은 선비 노릇을 할까보냐.”고 하였었다. 《월정만필》
○ 공은 참으로 세상에 드문 재주요, 묘당(廟堂)의 그릇이었다. 소장과 차자의 문장은 넓고 깊음이 큰 바다와 같았고, 인물을 시비하고 국사를 논의함은 마치 청천백일 같았다. 애석하도다. 연산군이 어찌 차마 그를 거리에 내놓고 죽였는가.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
○ 공은 실로 세상에 드문 선비였다. 불행한 때를 만나 화를 입고 죽었으나, 그 화의 본말과 신원(伸寃)을 다하지 못한 일은 후생으로서 자세히 알 수 없다. 공의 묘를 옮기던 때에 남곤이 지어 보낸 만시(輓詩)에 모두 갖추어 짓기를,“귀신은 아득하고 어두우며 천도는 진실로 알기 어려우니 귀신과 천도는 좋아하고 미워함이 인간과는 달라 화와 복을 항상 거꾸로 베푸는구나. 길고 긴 이 우주에 오래 사나 짧게 사나 하루살이와 같은 것이니, 촉루의 즐거움이 인간의 임금보다 나은지 어찌 알랴. 달관으로 한 웃음에 부치니 뜬 구름처럼 아득하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세상에 이름난 사람은 한번 나기 매양 더딤이로다. 수백 년이 걸려서야 겨우 한번 보게 되네. 그를 보고도 성취시키지 못하니 태평의 다스림을 어느 때에나 보랴. 무슨 다행으로 나는 그대와 동시대에 태어났네. 서한(西漢) 시대의 문장이요, 송 나라 원풍(元豊)ㆍ희녕(熙寧) 시대의 인물이었네. 정치의 잘못됨을 한숨 쉬고 통곡하며 옳은 일이라면 용감히 하였도다. 강관의 무리들이 옆에서 이를 갈며 엿보는 줄 어찌 알았으랴. 큰 칼 쓴 죄인으로 문득 사형장으로 간단 말인가. 세상 만사에 없는 일이 없구나. 동해 바다가 끝없이 넓도다. 지금은 세상이 바로 되어가 혹독한 법도 풀어지고 선하고 악한 것이 구별이 되었는데, 어찌하여 무오년의 원통함은 아직도 신설(伸雪)하지 못하는고. 춘추의 필법에는 내 임금의 허물을 휘(諱)하는 예가 있어 정공(定公)ㆍ애공(哀公)의 기록에는 숨긴 말이 많다 하나, 이렇게 춘추를 지은 성인은 하늘과도 같아서 후세 사람 따를 바 못되고 붓을 잡아 들은 대로 쓰는 것은 사가(史家)의 상례이다. 들은 바가 바르고 틀림이 있다 해도 그것은 한 사람의 사견(私見)이다. 그것을 정리ㆍ편찬하는 데는 실록청(實錄廳)이 있으니 허위로 된 것이면 깎으면 그만인데 다만 뱃속의 칼이 터럭 속의 흉터를 억지로 찾아냈네. 위(魏) 나라 사람들이 국악(國惡)을 써서 길거리에 보인 것과는 비할 것도 아니로다. 벼슬 자리에서 직무를 행하지 못했다면 그 죄는 매를 치면 될 것이요, 현능한 인재에는 특별히 용서하고 감형하는 옛법도 있는 바다. 이런 말씀 아뢰어 임금의 의혹을 풀어 드릴 이 없구나.10년의 세월이 지나니 식자들의 가슴에 영원한 슬픔이 맺혔도다. 성동의 낮은 언덕 초라하여 시체 감출 곳 되지 못하네. 사랑하는 자질들이 좋은 땅 가려 이장을 하려 하도다. 그대는 지금 하늘 위에서 굽어 보면 먼지만 자욱하리. 솔개나 굼벵이나 가리지 않는데 하물며 이땅저땅 상관하랴마는, 인간에서 구구하게 성묘하고 제사드리기 편리함을 취함이네. 처량하다, 목천현(木川縣)의 구불구불한 산기슭이여. 후일 도지(圖誌)를 편찬할 제 이 무덤 기록하여 빼지 마오.” 하였다. 끝구절은 김공의 묘가 마땅히 도지에 기록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그러나 그 뒤 《속 여지승람(續輿地勝覽)》을 편찬할 때에 낭관들이 그의 묘를 기록해 올렸더니 당상관 한 사람이 “그는 벼슬이 재상에 오르지 못하였고 또 근후한 사람도 되지 못하였다.” 하여 마침내 삭제하고 말았다. 이는 남곤(南袞)만도 못한 사람이라 하겠다. 《패관잡기》
○ 그의 생질 윤모(尹某)가 남곤을 찾아가 보니, 곤(袞)이 매우 탄식하며, “세상에 다시 탁영(濯纓) 같은 이가 또 나올 수 있을까.” 하였다. 윤(尹)이 말하기를 “공처럼 뛰어난 문장을 지닌 분이 이렇게까지 저의 외숙을 칭찬하고 부러워하시오.” 하니, 곤은 말하기를,“너희들이 바로 문장의 등급을 알지 못함이로다. 물에다 비하면 탁영(濯纓)은 강하(江河)와 같고 나는 개천에 지나지 못하다. 어떻게 비교가 되겠느냐.” 하였다. 《월정만필》


권오복(權五福)
권오복은 자는 향지(嚮之)이며, 호는 수헌(睡軒)이요, 본관은 예천(醴泉 예천 권씨이며, 본성은 흔(昕)씨이다.)이다. 성종(成宗) 병오년에 진사ㆍ문과에 오르고, 교리로 호당(湖堂)에 참여했다가, 무오년에 김일손(金馹孫)과 함께 죽었다. 문집이 있어 세상에 전한다.
○ 문장이 맑고 건실하며 필법이 굳세고 힘이 있어 당시의 선비들이 높이 받들고 존중하였다. 일손과는 교분이 매우 두터웠다.
○ 손순효(孫舜孝)가 읍령(泣嶺)에 올라서 파괴령(破怪嶺)이라 이름을 고쳤더니, 공이 시를 지어,

반드시 탐천(貪泉)이 은지(隱之)를 그르친 것이 아니니 / 不必貪泉誤隱之
공연히 재[嶺] 이름을 가지고 무지한 사람을 놀라게 하지 말라 / 休將名字駭無知
구구하게 파괴(破怪)라는 이름이 도리어 괴이하게 생각되니 / 區區破怪還堪怪
읍령에다 타루비(墮淚碑)나 새기게 하소 / 泣嶺須刊墮淚碑

하였다. 《여지승람》
○ 공이 자작 시고(詩稿)를 김일손에게 고쳐 달라 하고 시 한 수도 지어 같이 보냈다. 그 시에,

뱀을 그리면서 발을 붙인 것을 졸(拙)하다 하지 말고 / 畵蛇着足休嫌拙
까뀌를 둘러 콧등에 붙은 흙 깎아 떼어 주오 / 須把風斤斲堊墁

하였다. 일손은 글로 답하기를,

내게 영인(郢人)의 자귀[斤]가 없는데 / 吾無風斤何以
어찌 향지(嚮之)의 콧등에 붙은 흙을 깎아 뗄 수 있겠느냐 / 斲嚮之之堊也

하였다. <본집(本集)>
○ 흉포하고 망극한 변을 당하여 죽음의 형틀이 앞에 있어도 꿋꿋이 정신 차려 조용히 죽음에 나갔다. 그 기절의 강하고 굳셈은 천품으로 타고났으니 과연 어떠한가. 아아, 만사가 끝나고 무덤은 닫혀 말이 없다. 오직 그 남기고 간 문장이 하늘에까지 빛나고 북두에까지 뻗혔으며 땅에 던지면 쇳소리를 내는 것이 오히려 그의 전형(典型)을 방불케 하고 무궁한 먼 생각을 자아내게 하니 그 무도한 형벌인들 어떻게 백세에 끼친 향기를 없앨 수가 있으랴. 교리 벼슬로 있다가 노친을 봉양하기 위하여 외임으로 나온지 3년 만에 잡혀 죽으니 그때 나이 32세였다. 《소고집(嘯皐集)》 서(序)
○ 유고(遺稿)는 흩어져 거의 없어졌는데, 그의 종손(從孫) 달성 부백(達成府伯) 권모(權某)가 주워 모아 출판하고 또 당시에 화를 입은 이의 명부를 책 뒤에 붙였다. 《서애집(西厓集)》ㆍ무오당적발(戊午黨籍跋)
○ 천계(天啓) 연간에 어떤 사람이 상을 당하여 묘지를 과천(果川) 지방에 정하였더니, 그 곁에 고분(古墳) 하나가 있었는데 이것이 공의 무덤이었다. 그 집에서 일을 시작한 지 며칠 지난 뒤에 자제 한 사람이 역사(役事) 감독을 하고 있었는데, 역군의 잘못으로 고분 앞에 계절(階節) 돌 몇 조각을 빼내게 되었다.그런데 그날 밤 꿈에 홍포(紅袍)를 입은 장자(長者)가 고분으로부터 나와 성낸 듯한 빛을 띄우므로 그 사람이 자신도 모르게 앞으로 나아가 절하며 그 성명을 물었더니, 장자가 대답하기를, “나는 권한림(權翰林) 아무개다.” 하고, 무덤을 가리키며, “저게 나의 집이다. 근자에 역군들이 와서 내 집을 짓밟고 뜰 돌을 빼내어 심히 불안하게 하는데, 그대는 어찌 금하지 않느냐.” 하였다.그 사람도 선비이며, 본래 공의 사적을 잘 알고 있기에 청하여 묻기를, “선생이 ‘항우가 오강을 건너지 않는다’는 부(賦)를 지으신 분이 아니요?” 하니, “그렇다.” 하였다. 그 사람은 “예, 그러십니까. 빨리 고쳐 드리겠습니다.” 하였다. 이윽고 꿈을 깨니 땀이 흘러 흥건히 온몸을 적시었다. 이튿날 고분 앞에 가서 깨진 곳을 고치고 글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 《야승(野乘)》


권경유(權景裕)
권경유는 자는 군요(君饒)인데 뒤에 자범(子汎) 호는 치헌(痴軒) 이라 고쳤으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계묘년에 진사에 오르고 성종(成宗) 을사년에 문과에 올랐다. 남상(南床)으로 호당(湖堂)에 참여하고, 교리 벼슬을 하였다. 김일손(金馹孫)과 같은 날에 죽었다.
○ 공은 언어와 행동이 어리숙하였으며, 정사나 하는 일에 있어서도 어리숙하였다. <탁영자(濯纓子)> <치헌기(癡軒記)>
○ 성품이 맑고 곧아서 속사(俗士)들과 접촉하지 않았으며 간신(諫臣)의 풍모가 있었다. 교리로서 외직을 청하여 제천(堤川)으로 나가서 물처럼 맑고 깨끗하게 정사를 하니 백성들은 그를 사랑하였고 이속들은 그를 두려워하였다. 사관(史官)이 되었을 때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吊義帝文)을 실었더니, 유자광(柳子光)과 이극돈(李克墩)이 연산주에게 말하여 내정(內庭)에서 국문을 하는데, 실정대로 불지 않는다고 붓을 던지고 소리를 질렀으나 강직하게 굽히지 않고 조용히 죽음을 받았다. 《사우언행록》
○ 성품이 강하고 굳세고 사물의 근본을 알았으며 일을 만들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추강집(秋江集)》


이목(李穆) 아들 세장(世璋)은 문과를 거쳐 감사가 되다.
이목은 자는 중옹(仲雍)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젊어서 김종직(金宗直)에게 배웠다. 열 아홉 살 기유년에 진사가 되고, 을묘년에 문과에 장원하였다. 호당에 참여하고 영안 평사(永安評事)가 되었다. 무오년에 화를 입고 갑자년에 화가 묘에까지 미쳤으니, 그때 나이는 28세였다. 공주충현서원(公州忠賢書院)
○ 공은 뜻이 높고 기운이 세찼다. 성종이 언젠가 병이 나서 대비가 무당을 불러 기도를 올리는데, 성균관(成均館) 안 벽송정(碧松亭)에다 굿을 차려 놓았었다. 공이 유생들을 데리고 나와 무당을 매질하여 내쫓았다. 무당이 궁중에 호소함에 대비가 크게 노하여 임금의 병환이 나은 뒤에 이 말을 고하였더니, 왕이 거짓 성을 내어 성균관에 명하여 그 유생들을 모두 적어 들이라 했다.유생들이 필경 크게 견책이 내리리라 생각하고 모두 피해 숨었는데 공은 혼자 숨지 않았었다. 왕이 조금 뒤에 대사성을 불러 전교를 내리기를, “네가 능히 여러 유생들을 인도하여 선비의 기습(氣習)을 바르게 하였으니 내가 가상히 여긴다.” 하고, 특별히 술을 내려 주었다. 《명신록》
○ 윤필상(尹弼商)이 정승이 되어 마음대로 정사를 하는데, 마침 그때 가뭄이 들었다. 공이 상소를 올리기를, “윤필상(尹弼商)을 삶아 죽여야만 하늘이 비를 내리게 되리이다.” 하였다. 필상이 길에서 만나 그를 불러, “자네가 꼭 늙은 나의 고기를 먹어야만 하겠는가.” 하니, 공이 말대꾸도 하지 않고 돌아갔다.그 뒤에 필상이 왕에게 대비의 뜻을 따라 불교 숭상하기를 권하니, 공이 유생들을 거느리고 필상의 간사함을 논하여 간귀(奸鬼)로 지목하고 주살하기를 청하였다. 왕이 크게 노하여 친히 묻기를, “네가 어찌 정승을 귀(鬼)라고 욕하느냐?” 하니, 공이 아뢰기를, “그의 소행이 저러한데도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있으니, 귀(鬼)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였다.임금이 장차 옥에 가두려하다가 다른 정승들이 힘써 구하므로 공주(公州)로 귀양 보내는 것으로 그쳤다. 이 일로 인해 그가 곧다는 소문이 더욱 떨쳐졌다. 을묘년에 문과에 장원하였는데 무오년 옥사가 일어나자, 과연 필상(弼商)이 김일손(金馹孫)ㆍ권오복(權五福)과 함께 얽어 넣어 참혹한 화를 입었다. 사형에 임하여 기색이 조금도 평상과 다름이 없고, 스스로 절명가를 지었다. 필상은 그래도 한이 풀리지 않았다. 《명신록》


허반(許磐)
허반은 자는 문병(文炳)이며,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계묘년에 진사에 오르고 무오년에 문과(文科)에 올랐다.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로 있으면서 화를 입었다.
○ 공은 매우 언변이 뛰어나고 허탄스럽고 협기가 있어, 문무 사부(文武士夫)ㆍ의술ㆍ점복하는 이들과 가기(歌妓)ㆍ악공들이 모두 그 밑에 와 굽실거리니, 스스로 잘 났다 생각하여, “나라 사람들이 모두 내 손아귀에 들어 있다.” 고 하였다. 연산조 때 궁중 일을 조작해 말한 자라고 국문을 당하여 참형에 처해졌다. 《사우언행록》
○ 공이 성리학에 뜻을 두어 출세하는 데 욕심이 적고 일마다 옛것을 본받으려 하였다. 사우(師友) 김굉필(金宏弼)은 그의 천성이 단아함에 탄복하였다. 음관으로 벼슬하여 사직서 참봉이 되었다. 그때 좌상 홍응(洪應)이 제조로 있었는데, 공이 그에게 말하기를, “왕세자는 나라의 저군(儲君)이니, 뒷날 동방의 만 백성이 우러러 신뢰할 분인데, 지금 환시(宦侍)와 더불어 거처하면서 서연에 드시는 때가 적고 희롱하고 노는 때가 많다.” 하였다.


강겸(姜謙)
강겸은 자는 겸지(謙之)이며, 본관은 진주(晋州)요, 관찰사 자평(子平)의 아들이고, 대간 형(詗)의 아우이다. 성종 경자년에 문과에 올라 한림ㆍ옥당을 거쳐 직강에 이르렀다. 무오년에 곤장을 맞고 귀양갔다가 갑자년에 사형을 당했다.
○ 그는 정대하고 절조가 있었다. 《사우언행록(師友言行錄)》


표연말(表沿沫)
표연말은 자는 소유(少游)이며, 호는 남계(藍溪)요, 본관은 신창(新昌)이다. 문과 감찰 계(繼)의 아들이다. 성종 임진년에 문과에 오르고 병오년에 중시에 합격하였다. 호당에 참여하고 벼슬이 동지 성균관사에 이르렀다. 무오년에 귀양가다가 도중에 죽었다.
○ 문장으로 이름이 났으며, 교류하던 이들은 모두 당대의 명사들이었다.
○ 공이 예문관에 봉직하고 있을 때 연회에 금육(禁肉 당시 국법으로 먹기를 금하는 고기)을 쓴 일이 있었는데, 임금에게 알려지게 되자 공도 연회에 참여한 죄로 같이 파면되었다. 그 뒤로 향회(鄕會)에 금육을 내놓는 데가 있으면 곧 일어서서, “다시는 법을 범할 수 없다.” 고 하였다.부모상을 당하여 한결같이 가례(家禮)대로 지켰다. 김종직이 그때 선산 부사(善山府使)로 있었는데, 그의 행실로 천거하여 한 계급 올리도록 하였다. 《추강냉화》


홍한(洪澣) 신미년에 나다.
홍한은 자는 온진(蘊珍)이며,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성종 을사년에 문과에 오르고 벼슬이 이조 참의에 이르렀다. 무오년에 곤장을 맞고 귀양가다가 도중에 죽었다. 중종이 참판을 증직하였다.
○ 공은 성품이 강직하여 남을 칭도하는 일이 적었으니 권력 있는 귀인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정여창(鄭汝昌) 경오년에 나다.
정여창은 자는 백욱(伯勗)이며, 호는 일두(一蠹)요, 본관은 하동(河東)이고, 함양(咸陽)에 살았다. 계묘년에 진사에 오르고 성종 경술년에 문과에 올라 한림을 거쳐 벼슬이 안음 현감(安陰縣監)에 이르렀다. 무오년에 곤장을 맞고 종성(鍾城)으로 귀양갔다. 갑자년 4월에 죽었으니 그때 나이 55세였다. 함양(咸陽)에 장사 지냈더니 갑자년에 화가 미쳤었다.중종이 우의정을 증직하고 치제하였다. 선조(宣祖) 때 문헌(文獻)이라 시호를 내리고, 경술년에 문묘에 배향케 하였다. 중종(中宗) 정묘년에 도승지를 증직하고, 또 정축년에 우의정을 증직하였다.
○ 공의 아버지 육을(六乙)이 의주 통판(義州通判)으로 있을 때 공은 겨우 여덟 살이었는데, 명 나라 사신 장녕(張寧)이 지나가다 공을 보고서 기이하게 생겼다고 칭탄하며 여창(汝昌)이라 지어주고 해설하는 글까지 지어 주었으니, 여창이란 이름은 능히 가문을 창성하게 하리라는 뜻이다. 《명신록》 ○ 육을(六乙)은 벼슬이 병마우후(兵馬虞候)였다.
○ 포은(圃隱) 이후 우리나라 성리학은 실로 김굉필(金宏弼)로부터 주창되었는데, 뜻을 같이한 이가 곧 공이다. 김굉필은 이(理)에 밝고 공은 수(數)에 밝았는데, 불행한 때를 만나 비명에 죽었으니 애석하도다. 푸르른 하늘이라 어떻다 말하랴. 《병진정사록》
○ 공은 친구들과 사귀어 노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으나, 오직 김굉필과는 지기(知己)로 삼아 늘 도학을 논의하고 글을 강론하며 서로 떠나지 않았다. 《명신록》
○ 어머니 최씨를 지극히 섬겨 한번도 뜻을 어기지 않았다. 하루는 어머니가 꾸짖기를, “아버지 없는 아이가 배우지 않아 어찌하느냐.” 하니, 공이 이 말에 감동하고 뜻을 굳게 하여 밥 먹는 것도 잊은 채 공부하였다.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을 찾아가 배우기를 청하자 옛사람들의 학문하는 법도로 가르쳤는데, 여러 해를 연마하니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에 더욱 정통하게 되었다. 《동유연원록(東儒淵源錄)》
○ 공이 젊었을 때 술을 좋아하여 하루는 친구와 과히 마시고 취하여 들에 쓰러져 밤을 새고 돌아왔다. 어머니가 꾸짖기를, “너의 아버님은 이미 돌아가셨는데 네가 이와 같이 행동하면 내가 누구를 믿고 살겠느냐.” 하였다. 그가 깊이 자책하고 공부에 힘써서 임금이 내리는 술이나 음복할 때 외에는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병진정사록》
○ 공은 일찍 아버지를 여읜 것을 마음 아파하여 스승에게나 친구를 찾아가는 외에는 늘 어머니 곁에 있으면서 어린아이처럼 어머니 마음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는 것으로 소일하였다.병오년에 어머니가 이질을 앓게 되자 향을 태우고 하늘에다 부르짖으며 제 몸을 대신하여 어머니 목숨을 살려 달라고 빌었는데, 기둥에 머리를 부딪쳐 피가 적삼을 적셨다. 《연원록(淵源錄)》
○ 일찍이 지리산에 구경가다 진산(晋山)의 악양동(岳陽洞)을 보고는 그곳의 산수를 사랑하여 섬진강(蟾津江) 어귀에 집을 짓고 대와 매화를 심으며 장차는 그곳에서 늙으려 하였다. <행장>
○ 산수에 정을 붙여 풍월을 읊조리고, 혹은 강에 배를 띄워 노저으며, 혹은 시내에 낚시질을 하며, 때로는 소를 타고 쌍계(雙溪)ㆍ청학(靑鶴) 모두 동네 이름이다. 을 왕래하였다. 호숫가에 조그만 정자를 지어 편액을 악양(岳陽)이라 하고 공부하는 처소로 삼으니, 원근에서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붐비어 들었다. 《연원록》
○ 지리산에 들어가 3년 동안 나오지 않았다. 오경의 심오한 뜻을 다 깨쳤다. 성종이 경자년에 성균관에 명을 내려 경학에 밝고 행실이 닦여진 선비를 구해 들이라 하니, 관중(館中)에서 공이 제일이라 하였다. 지관사(知館事)로 있던 서거정(徐居正)이 그를 데려다 강경(講經)을 시키려 했으나 그가 하지 않았다. 《사우명행록》
○ 공의 아버지 육을(六乙)은 시애(施愛)의 난에 죽었는데 그때 공의 나이 어렸었다. 뒤에 어머니 상을 당하여 예절을 한결같이 가례에 따라 행하였다. 성종 경술년에 이조 참의 윤극(尹克)이 효행과 학식이 사림에 비길 사람이 없다고 공을 추천하였다. 특별히 소격서 참봉으로 불렀더니,공이 말하기를, “이것은 자식된 도리로 당연한 일일 뿐이다. 효행이라 할 것이 무엇 있는가.” 하고 소를 올려 굳이 사양하였다. 임금이 친히 붓을 들어 소장 끝에 “네 행실을 들으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는구나.” 하고 쓰고, 벼슬 사양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이에 나와서 이 해에 문과에 오르고 내한(內翰)을 거쳐 안음 현감(安陰縣監)이 되었다. 《사우명행록》
○ 연산(燕山)이 동궁으로 있을 때, 설서(說書)로 있던 공이 동궁을 올바른 길로 이끌려고 하자, 연산이 매우 싫어하였다. 마침내 외임(外任)을 구하여 갑인년에 안음 현감으로 나갔다. 《연원록》
○ 안음 현감으로 있던 시절 공무의 여가에 그 고을에서 총명한 자제들을 뽑아 서재(書齋)를 지어 거처하게 하고 친히 가르쳐 일과로 강독을 하게 하니, 학자들이 듣고 먼 데서도 찾아왔다. 봄ㆍ가을로는 양로예(養老禮)를 행하여 내외청(內外廳)을 베풀어, 안에서는 부인을 시켜 안 노인들을 대접케 하고,밖에서는 공이 관디를 하고 손수 접대하니 노인들이 모두 취하고 포식하여 가무를 즐겼다. 정사가 깨끗하여 백성들이 기뻐하였으니, 경내(境內) 백성들은 속임수로 공을 저버리지 말자고 서로 경계하였다. 《유선록(儒先錄)》
○ 안음현에 광풍루 제월당(光風樓霽月堂)이 있는데 그가 원으로 가서 세우고 이름 지은 것이다. 《여지승람》
○ 평생에 시 짓기를 즐겨하지 않았으나 오직 한 편의 시가 세상에 전하니,

바람에 잎사귀가 새록새록하니 / 風蒲獵獵弄輕柔
4월 화개(花開) 고을 벌써 보릿가을[麥秋]이로다 / 四月花開(縣名)麥已
두류산(頭流山) 천첩만첩 다 돌아본 후에 / 看盡頭流千萬疊
외로운 배로 다시 큰 강 따라 내려온다 / 孤舟又下大江流

라 하였다. 가슴 속에 한 점 티끌도 없음을 짐작할 수 있다. 《병진정사록》
○ 홀로 시를 전공하는 이를 취하지 않았다. 공이 말하기를, “시란 성정에서 발로하는 것이니 어찌 힘써 공부할 것이랴.” 하였다. 《추강냉화》
○ 성품이 단정하고 침묵하며 몸가짐이 매우 엄하였다. 종일 단정하게 앉아 있었는데 아무리 더운 여름이라도 처자들이 그 살이 드러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술도 마시지 않으며 고기 등속의 불결한 것도 먹지 않으며 쇠고기나 말고기도 먹지 않았다. 겉으로는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지만 마음속은 항상 깨어 있었다.젊어서 성균관에 거재할 때 남들과 잠을 자는데, 코를 골면서도 자지 않는 것을 남이 잘 몰랐다. 어느 날 밤에 최진국(崔鎭國)에게 들켜 그 사실이 밝혀지자 온 관중이 떠들썩하고, “정모(鄭某)가 참선을 하느라고 자지 않는다.”고 말을 하였다. 《사우명행록》
○ 일찍이 향회(鄕會)에 쇠고기를 내놓은 자가 있었는데, 어떤 자가 금물(禁物)을 썼다고 관에다 일러바쳐 죄를 당하게 되니, 모부인(母夫人)이 그 일을 깊이 걱정스러워하였다. 공이 이로부터 결코 쇠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유선록》
○ 무오년에 김굉필(金宏弼)과 함께 귀양갔었는데, 공이 말하기를, “환난(患難)은 성인도 면할 수 없는 일이다.” 하며 조금도 마음이 동요되지 않았다. 종성(鍾城)으로 귀양간 7년 동안 태연히 있었다. 처음에 뜰에 피우는 화로를 돌보는 소임을 맡았었는데, 매양 사신이 공관(公館)에 들면 번번이 불피우는 심부름을 공손하게 잘 하였다. 《연원록(淵源錄)》 《경현록(景賢錄)》
○ 일찍이 《중용ㆍ대학주소(中庸大學註疏)》와 《주객 문답》 및 《진수 잡저(進修雜著)》 등을 지었는데, 무오년에 화가 일어나자 처자들이 모두 불살랐다. 《유선록》
○ 공의 학문은 주자(朱子)ㆍ정자(程子)를 기준으로 삼았으니, 글을 읽는데는 이치를 궁구함을 우선으로 삼고, 마음을 쓰는데는 속임이 없는 것을 위주로 하여 일용공부(日用工夫)가 성(誠)ㆍ경(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정치하는 율령(律令)과 조례(條例)에 이르러서도 끝까지 궁구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고을을 다스리는 데서 이미 그 단서를 볼 수 있었다.한훤(寒暄 김광필)과 함께 점필재(佔畢齋)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뜻을 같이 하고 도가 합치되어 막역한 사이로 지냈으며, 도를 논하고 학문을 강하여, 항상 함께 행동하였다. 애석하게도 그 좋은 말로 남긴 의논이 조금도 세상에 전하지 않고 평일의 저술이 무오년의 화에 불탔으니, 어찌 후학에게 한이 되지 않겠는가. 동계정온(桐溪鄭蘊) 소론(所論)
○ 김일손(金馹孫)이 일찍이 공과 함께 지리산을 유람하며 금대암(金臺庵)에 이르렀는데 중들의 정진하는 모습을 보고는 김공이 감탄하여 말하기를,“이렇게 공부하는 방법이 정(精)하고 잡되지 않으며 진(進)하여 물러남이 없으니, 우리가 성현을 배우는 데에도 이렇게 공부를 하면 도를 얻을 날이 있지 않겠느냐.” 하였다. 산 꼭대기에 속설에 ‘성모묘(聖母廟)’ 라고 불리는 사당이 있었는데, 김공이 글을 지어 제사를 지내려 하니, 공이 말하기를, “일찍이 ‘태산(泰山)이 임방(林放)만 못하겠느냐.’ 하지 않았는가.” 하였다. 김공이 그 말을 듣고 지내려던 제사를 그만두었다. 공은 이렇듯 동배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연원록》


무풍정(茂豊正) 총(摠)
무풍정(茂豊正) 이총(李摠)은 자는 백원(百源)이며, 태종대왕의 별자(別子)인 온녕군(溫寧君) 정(程)의 손자이다. 호는 서호주인(西湖主人)이며, 갑자년에 화를 입었다. 온 가족이 모두 멀리 절도(絶島)로 귀양갔다. 병인년 6월에 공의 아버지 우산군(牛山君) 종(踵)과 형인 용성정(龍城正) 원(援), 아우 한산부정(韓山副正) 정(挺)ㆍ화원부정(花原副正) 간(揀)ㆍ금천부정(錦川副正) 변(抃)ㆍ청양부정(靑陽副正) 건(揵) 등 여섯 부자가 동시에 화를 입었다.
○ 공은 시에 능하고 거문고를 잘 탔다. 양화도(楊花渡)에 별장을 짓고 작은 배와 고기잡는 그물을 마련하여 항상 손수 어선을 저으며 시인들을 맞아 날마다 좋은 시를 모으니 무려 천백 편이 되었다.
○ 일찍이 남효온(南孝溫)과 보제원(普濟院) 위에서 작별할 때 빈객들이 모두 춤추고 노래하는데, 공이 효온의 부채에다 시를 쓰기를,

서로 알고 지낸 8년 동안 / 相知八年內
만남은 적고 작별만이 잦네 / 會少別離多
천리로 떠나는 손을 잡고서 / 臨分千里手
눈물을 가리며 맑은 노래를 듣네 / 掩泣聞淸歌

하니, 좌중이 모두 붓을 놓았다고 한다. 《추강집》
○ 공은 남효온(南孝溫)ㆍ김일손(金馹孫)ㆍ강경서(姜景叙) 같은 이들과 함께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출입하였다. 일찍이 들에 있는 정자에서 거문고를 타는데 그 음율이 살성(殺聲)을 발하므로 다음날 반드시 잡혀 갈 것을 짐작하였다. <족보(族譜)>
○ 공은 스스로 ‘구로주인(鷗鷺主人)’ 이라 부르며 고상ㆍ방종하여 구속받지 아니하였으니, 진(晋) 나라 시대의 기풍이 있었다. 서사(書史)를 읽고 시문을 배우며 음률을 해득하였으니, 모두 그 묘경(妙境)에 이르렀다. 김뉴(金紐)가 그의 거문고 소리를 듣고 찬탄하며 말하기를, “정말 궁중의 모란꽃이 개인 하늘 아래 난만하게 핀 것 같도다.” 하니,이유추(李有秋)가 그 말을 듣고, “김(金) 재상이 귀가 있구나.” 하였다. 서호(西湖)에 정자를 짓고 늘 고기잡는 배를 띄워 놓으니 시인과 문사가 강 위에서 놀기를 끊이지 않았는데,속된 선비가 찾아오면 배를 저어 반드시 피하곤 하였다. 남효온의 시에, “왕손이 배를 저을 줄 안다.[王孫解刺舟]”는 것이 이것이다. 한 형과 네 아우가 모두 그럴듯한 인물이었고, 다섯 아들이 아버지를 따라 일시에 죽음을 받으면서도 웃고 이야기하며 태연하였다. 《사우명행록》
○ 중종이 도정(都正)을 증직하고 숙종 을유년에 정려(旌閭)하였다. 영종(英宗) 무오년에 군(君)으로 봉하고, 시호를 내려 소민공(昭愍公)이라 하였다.


강경서(姜景叙)
강경서는 자는 자문(子文)이며, 호는 초당(草堂)이요, 본관은 진주(晋州)이다. 성종 정유년에 문과에 오르고 정사년에 중시(重試)에 합격하였다. 점필재(佔畢齋) 문하인으로 무오년에 곤장을 맞고 회령(會寧)으로 귀양갔다가 뒤에 풀려 돌아왔다. 벼슬이 좌승지에 이르렀는데 뒤에 예조 판서를 증직하였다.
○ 공은 천성이 정직하고 강개하였다.
○ 일찍이 하인 하나가 공의 아들에게 달걀 몇 개를 보냈다. 부인 박씨(朴氏)가 물리치며, “어린아이라고 해서 어찌 남편의 맑은 덕에 누를 끼칠까보냐.” 하였다.
○ 부인 박씨(朴氏)는 공이 곤장을 맞고 귀양가는 것을 보고 슬퍼하여 음식을 끊어 이듬해에 죽었다. 중종 2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여지승람》


이수공(李守恭) 갑신년에 나다.
이수공은 자는 중평(仲平)이며, 본관은 광주(廣州)요, 영의정 극배(克培)의 손자이다. 성종 무신년에 문과에 장원하고, 벼슬이 전한(典翰)에 이르렀다. 무오년에 종성(鍾城)으로 귀양갔다가 광양(光陽)으로 옮겨 갑자년에 사사(賜死) 당하였으니, 그때 나이 41세였다. 중종 초년에 도승지를 증직하였다.
○ 간신(諫臣)의 기풍이 있었다.


정희량(鄭希良) 기축년에 나다.
정희량은 자는 순부(淳夫)이며, 호는 허암(虛庵)이요,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임자년에 생원과에 장원하고, 을묘년에 문과에 올라 봉교(奉敎)로 임명되었다. 무오년에 의주(義州)로 귀양갔다가 3년 만에 김해(金海)로 옮기었다. 갑자년에 괴이한 재앙으로 인해 모든 죄수를 놓아줄 때 돌아왔으나 갑자년 5월에 멀리 도망갔으니,어디서 죽었는지 알 수 없다. 나이는 34세였고 아들이 없었다.
○ 공은 높은 절개를 좋아하여 나쁜 사람과 같이 있거나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였다. 학문을 널리 닦아 통달하였는데, 더욱 역학(易學)의 수(數)에 조예가 깊었다.
○ 성종(成宗)이 세상을 떠나 성복(成服)을 하고 나서, 대행왕(大行王 성종)을 위하여 불사(佛事)를 하는 문제에 대해서 성균관의 여러 유생들을 거느리고 글을 올렸는데, 말이 너무 박절했으므로 서해도(西海道 황해도)로 귀양갔다가 조금 후에 석방되었다. 그 해에 과거에 뽑혀 예문관에 있었는데, 또 궁중의 잘못한 일을 극력으로 논난하였다.
○ 무오년에 의주(義州)로 귀양갔다. 귀양가 있는 동안에 술을 빚어 마시니 그 술은 거르지도 않고 짜지도 않았으므로 술 이름을 ‘혼돈(混沌)’ 이라 하였으니 태고 때의 순박함을 숭상함이었다. 술이 취하면 번번이 노래를 불렀는데 그 노래는,

나는 내가 빚은 탁주를 마시고 / 我飮我濁
나는 내가 타고난 천진(天眞)을 온전히 한다 / 我全我天
나는 술을 스승으로 삼으니 / 我乃師酒
성인(청주의 숨은 말)도 현인(탁주의 숨은 말(隱語))도 내 스승이 아니다 / 非聖非賢
자기의 즐거움을 즐기는 이는 마음으로 즐기게 되니 / 樂其樂者 樂於心
늙음이 장차 닥쳐옴도 알지 못한다 / 不知老之將至
사람들이 누가 나의 술 즐겨함을 알리오 / 人孰知餘之樂是 酒也

하였다. <본집>
○ 경신년에 김해(金海)로 옮기었다. 그 이듬해 봄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는데도 분상(奔喪)하지 못하여 늘 울적하고 슬픈 마음을 품고 있었으나 하늘에 호소할 길이 없었다. 그러던 참에 수로왕능(首露王陵)이 자못 영험이 있다는 말을 듣고 애사(哀詞)를 지어 호소했는데, 글에 성명은 쓰지 않고 정(鄭)자를 나누어 전읍(奠邑) 두 자로 썼다.그날 밤 꿈에 눈동자가 겹으로 된 매우 위대한 신인(神人)이 나타나서, “너는 장차 놓여날 것이다.” 하였다. 공이 꿈을 깨어 여러 벗들에게 이야기하고 또 기록하여 간수해 두었더니, 그해 겨울에야 놓여 나왔다. 《금관지(金官志)》
○ 공은 젊을 때부터 글을 잘 한다는 명성이 있었는데 특히 시를 잘하였다. 성품과 기질이 강건하여 생과실을 몇 말을 먹어도 체하지 아니하였다. 또 술을 잘 마시어 일찍이 말하기를,“나는 탁주는 큰 그릇으로 세 그릇을 마시고 청주는 두 그릇을 마시며 소주는 한 그릇을 마시는데, 술에 따라 양(量)을 조금씩 줄이되 반드시 먼저 가슴을 씻는다. 잔으로 예를 차려 마시는 것은 좋아하지 않고, 다만 큰 사발로 거뜬히 기울이는 것을 좋아한다.” 하였다.
○ 공은 음양학(陰陽學)에 능통하였는데 서울 안에서 명운(命運)을 잘 추산(推算)하기로 소문난 사람에게 반드시 가서 질문해 보고는, “엉터리구나.” 하였다.다만 주부(主簿) 오순형(吳順亨)에게는 굴복하면서, “이 사람이 추산하는 것은 정확하여 허황한 점이 없는데, 다만 세상을 겁내어 그 재주를 다 보이지 않는다.” 하였다. 일찍이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추산하여 보았는데, 난 시[生時]가 확실하지 않았으므로 탄식하기를, “만약 아무 간지(干支)에 났으면 크게 귀하게 될것이고, 아무 간지에 났으면 말할 수 없이 나쁘다.” 하면서 매양 세상을 피해 도망갈 의사가 있었다. 김해(金海)로 귀양갔다가 놓여 와서 어머니 상을 입고 고양(高陽) 《사재척언》에는 풍덕(豊德) 또는 덕수현(德水縣) 남쪽이라 하였다. 에서 시묘 살이를 하였다.일찍이 말하기를, “갑자년의 화는 무오년보다도 더 심할 것이니 우리들도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하였다. 5월 5일에 종들을 밖에 내보내고 홀로 나가서 밭 두렁을 거닐고 있었다. 아이 종이 찾아오니, “너는 필관채(筆管菜)를 캐어서 저녁 반찬이나 준비하라.”고 보내버렸다. 아이 종이 돌아오니 공은 있지 아니하였다. 이웃 사람을 불러 사방으로 샅샅이 뒤를 밟아 찾았으나,다만 남강(南江) 조강(祖江)의 상류(上流) 가의 모래밭에 신 두 짝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반드시 강물에 빠졌을 것이라고 하여 잠수하는 사람을 모아 가지고 잠수와 배로 강의 위 아래를 두루 찾았으나 끝내 그 시체는 찾지 못하였다. 공의 친족 해평군(海平君) 정미수(鄭眉壽)가 각 고을에 공의 생김새와 복색을 알리어 찾아보자고 청하니,연산군은 “미친놈이 도망가서 죽었는데 무엇하러 찾느냐.” 하였다. 마침내 그 흔적도 모른 채 얼마 안 가서 갑자년의 화가 일어나니, 사람들은 “그가 자취를 피해 숨은 것이고 죽은 것이 아니라.” 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이상한 중이 서쪽 여러 산에 왕래하는데 일찍이 희량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분명히 그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하며, 혹은 “머리를 깎지 않은 채 방사(方士 신선의 술법을 닦는 사람)가 되어 종적을 숨기고 왕래한다.” 하였다. 《사재척언》 《용천담적기》
○ 가천원(加川院)의 벽 위에 절구 두 수가 있는데, 그 절구에,

새는 무너진 담 구멍을 엿보고 / 鳥窺頹垣穴
중은 석양의 샘물을 긷네 / 僧汲夕陽泉
산과 물로 집을 삼은 손님아 / 山水爲家客
천지는 어디가 끝간 데인고 / 乾坤何處邊

하고, 또

전일 바람 비에 놀라 / 風雨驚前日
문명한 이때를 저버렸네 / 文明負此時
외로운 지팡이도 천지간에 노니 / 孤笻遊于宙
시끄러움이 싫어져 시까지 짓지 않으련다 / 嫌閙並休詩

하였다. 이행(李荇)이 마침 이곳을 지나다가 보고는, “이것은 반드시 허암(許庵 정희량(鄭希良))이 지은 것이라.” 하고 원(院)의 주인에게 물으니, “누더기를 입은 중이 조금 전에 이곳을 지나다가 쓴 것입니다.” 하였다. 이행은 데리고 다니는 사람을 시켜 찾아보게 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혹은 말하기를,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 써 놓고 남을 의혹시키는 것이니, 허암이 쓴 것이 아니다.” 하였다. 《명신록》 《용천담적기》
○ 사주 보는 사람 김륜(金倫)이 젊을 때 향산(香山)에서 놀다가 이천년(李千年)이란 도사를 만나 육칠 년 동안 따라다니면서 술수를 배웠다. 후에 부모를 뵙기 위해 그를 작별하고 영동(嶺東)으로 돌아올 때, 기해년에 강서(江西)의 구룡산(九龍山)에서 만나기로 서로 약속하면서 손수 시를 써서 주었는데,

여든된 산속의 늙은 이는 / 八十山中老
삼팽(三彭)을 벌써 소제해 버렸네 / 三彭已掃除
인간 세상을 꿈꾸지 않을 것이며 / 人間應不夢
학(鶴)과 짝하는 외에 다른 뜻은 없도다 / 鶴伴意無餘
누운 평상에는 달빛만 차갑고 / 雪榻蟾光冷
구름 창에는 해 그림자가 희미하구나 / 雲牕日影踈
티끝없는 거울(맑음)이 / 誰知無累鑑
만 세 동안 절로 맑고 깨끗함을 누가 알리오 / 萬代自淸虛

하고, “정묘년 늦은 봄에 송죽처사(松竹處事) 우재(愚齋)가 쓰다.” 하였고, 또 단계(丹溪)에 이르러 시를 써서 주었으니,

한가함 얻어 한 번 취함이 하늘의 놀이인데 / 偸閑一醉是天遊
이 가운데 강바람은 손님을 만류하네 / 箇裏江風挽客留
탁목봉이 높으니 하늘이 가까운 듯 / 啄木峯高天若近
수림정 아래에는 땅이 둥실 뜬 듯 / 秀林亭下地疑浮
두 낭자의 혼백은 천 년 전의 일이고 / 二娘魂魄千年事
아홉 굽이 강물은 만고에 흐르네 / 九曲江聲萬古流
가슴 속에 진루가 오래 끼었더니 / 胷海久牽塵累擾
단계에 이른 이 날 내 근심을 씻도다 / 丹溪此日洗吾愁

하고, “계사년[黑蛇之歲]에 우옹(愚翁)이 쓰다.” 하였다. 공을 모시던 나이 열서넛된 아이에게도 역시 시를 써서 주었으니,

천지간에 집이 없는 산수 손님은 / 天地無家山水客
생애가 한□ 뜻은 평안하네 / 生涯一缺意如如
이끼 낀 산길은 흰구름에 잠겼는데 / 苔痕山路白雲鎖
달그림자는 맑고 차고 대그림자는 성기네 / 月影淸冷竹影踈



푸른 산에는 구름이 만 겹이고 / 碧山雲萬疊
푸른 바다는 끝없이 넓도다 / 滄海濶無邊
묻노니 무슨 일로 / 爲問緣何事
돌아갈 마음 대궐로 향하는고 / 歸心北闕懸

하였으니, 시의 격조가 높고 글 솜씨도 보통이 아니었다. 데리고 다니는 아이도 시 짓는 솜씨와 글쓰는 법이 보통이 아니었으니 그가 평범한 방사(方士)가 아님이 분명하다. 김륜(金倫)은 일찍이 공이 기록한 생년 월 일 시(生年月日時)의 오행(五行)을 소상히 알고 있었다.판사 신경광(申景光)이 점치는 것을 좋아하여 선비와 높은 관직에 있는 이의 오행(五行)을 기록해 두었는데 공의 사주도 역시 그 속에 기록되어 있었다. 김륜이 서울에 왔다가 이것을 보고 놀라면서, “이것은 우리 스승 이천년(李千年)의 팔자라.”고 하였다. 이로써 그가 죽지 않았음을 더욱 믿게 되었다고 한다. 《사재척언》
○ 한 수재(秀才) 혹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이라고 한다. 가 산중에서 《주역(周易)》을 읽고 있었는데, 한 늙은 중이 곁에 있다가 그 태도가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을 보고 이따금 구두의 틀린 것을 고쳐 주었다. 수재는 그 중이 허암인가 의심이 나서, “당신이 주역을 아시오?” 하니, 중은 “모르오.” 하고 사양하였다.또 “주역의 내용은 매우 깊어서 읽기 어렵소.” 하니, “선비의 주역 읽는 것을 보니 능히 통달하였소.” 하였다. 또 문답하기를, “당신이 정허암을 아시오?” 하니, “모르오.” 하였다. “허암은 정희량의 호입니다.” 하니, “그 성명은 자못 듣고 있으며 그 사람된 품도 대강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허암이 종적을 숨기고 나오지 않으니, 아까운 일입니다.” 하니, “나오지 못할 것입니다.정아무[鄭某 정희량을 말한다.]는 어버이의 상중에 시묘 살이를 하다가 상례를 마치지 못했으니 불효요, 임금의 명을 피해 도망갔으니 충성하지 못한 것입니다. 효도하지 못하고 충성하지 못하여 죄가 크니 무슨 낯으로 다시 세상에 나오겠습니까.” 하고, 조금 후에 작별하고 나갔는데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축수편>
○ 사화가 일어나서 사림이 모두 살해되니, 집 안에 간수해 둔 사초도 보존된 것이 없었다. 후일에 연산군 일기 수정청(燕山君日記修正廳)에서 사초 구하기를 몹시 서두르니, 공의 자제들이 집 벽 속에서 사초를 찾아 바치었다. 이에 힘입어 일기를 편수하였으니 대개 사화가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사초를 감춰 두었던 것이다. 《퇴도언행록(退陶言行錄)》


정승조(鄭承祖)
정승조는 자는 술이(述而)이며,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성종(成宗) 갑인년에 문과에 올라 한림을 거쳐 감찰에 이르렀으며 무오년에 곤장을 맞고 귀양갔다.


이종준(李宗準)
이종준은 자(字)는 중균(仲鈞)이며, 호는 용헌(慵軒) 또는 호를 장륙(藏六)ㆍ부휴자(浮休子)ㆍ상우당(尙友堂)ㆍ태정일민(太庭逸民)이라 하였다. 이요,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성종(成宗) 을사년에 문과 제 2등에 올라 벼슬이 사인(舍人)에 이르렀으며, 무오년에 화를 입었다.
○ 공은 문장을 잘 짓고 글씨와 그림에도 능하였다. 일찍이 서장관이 되어 연경(燕京)으로 가다가 역관(驛館)에 있는 그림 병풍이 좋지 못함을 보고 붓으로 칠해버렸다. 역관(驛官)이 통역을 불러 힐문하니, 통역은 “서장관이 글씨를 잘 쓰고 그림을 잘 그리므로 반드시 그 뜻에 만족하지 아니하여 그렇게 한 듯합니다.” 하니,역관이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오는 길에 그 곳에 이르니, 새 병풍 두 벌을 펼쳐 놓았으므로 공이 한 편에는 글씨를 쓰고 한 편에는 그림을 그렸는데, 모두 정묘한 경지에 이르렀다. 보는 사람이 탄복하고 칭찬하였다.
○ 공은 당시에 풍류로 명성이 있었다. 일본 호송관(護送官)으로 임명되어 동래(東萊)에 이르렀는데, 나이 12, 3세 되는 기생이 있었다. 공은 그 기생을 몹시 사랑하여 이름을 방안아(榜眼兒) 공이 문과 제 2등이 되었었다. 라 고쳐주며, “네가 시집가기 전에 내가 재차 사신갈 명을 받는다면 너와 인연을 맺을 것이니, 네 이름을 고치는 것은 그 뜻을 표시하는 것이라.” 하였다. 공이 이 해에 북평사(北評事)로 임명을 받았으므로 남쪽과 북쪽이 멀리 떨어져 있어 다시 오지 못하였다. 《추강냉화》
○ 권경유(權景裕)는 공과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였는데, 남효온(南孝溫)이 어느 날 공과 함께 달밤을 이용하여 권경유의 집에 이르니, 경유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신을 거꾸로 신고 나와 맞이하여 함께 달빛 아래 앉았다. 공이 짐짓 청수(淸瘦)한 태도로 대하니, 경유는 크게 탄복하고 꿇어앉아 옷자락을 받들었다. 밤새도록 실컷 이야기하다가 이튿날 아침에야 비로소 공인줄 알고 서로 크게 웃었다. 드디어 뜻이 통하는 벗이 되었다. 《사우명행록》
○ 신(申) 지평 아무개 이 집은 가난해도 술을 좋아하여 일찍이 자기의 호를 장륙(藏六)이라 하였다. 공은 그 호를 좋아하여 술 한 병과 그 호를 바꾸자고 청했으나, 신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 무오년에 북계(北界 함경도(咸鏡道))로 귀양가는데, 고산역(高山驛)을 지나가다가 옛적 송 나라 이사중(李師中)이 지은 “바른말 하다가 귀양가는 당개(唐介)를 송별하던 외로운 충성을 다른 이는 따르지 못하리라 자신한다.[孤忠自許衆不與]”는 율시 한 수를 벽 위에 써 놓고 갔다.감사가 이것을 임금에게 알리니, 연산주는 원망하는 뜻이 있다고 하여 잡아다가 국문하고 죽였다. 홍귀달(洪貴達)이 공을 구하려 했으나 되지 아니하였다.


최부(崔溥)
최부는 자는 연연(淵淵)이며, 호는 금남(錦南)이요, 본관은 탐진(耽津)이다. 성종 임인년에 진사과와 문과에 올랐고, 병오년에 중시(重試)에 합격하여 호당(湖堂)을 거쳐 사간이 되었다. 무오년에 곤장을 맞고 귀양 갔다가 갑자년에 죽음을 당하였다.
○ 공은 널리 학문에 통하고 잘 기억하였으며, 영웅호걸의 기상이 있어 구속을 받지 아니하였다.
○ 성종 때 공은 사간이 되었고 정광필(鄭光弼)과 남곤(南袞)은 좌우 정언(左右正言)이 되었다. 공이 계축(契軸)에 시를 썼는데 그 끝 글귀에,“뒷사람이 손으로 가리키고 어루만질 적에 누가 간사하고 누가 충성스럽다 할는지 모르겠네.” 하였으니, 이 글귀가 비록 우연히 지은 것이지만, 그 글 뜻을 음미하여 보면 오로지 정(鄭 충성됨)ㆍ남(南 간사함) 두 분의 뒷날 행사를 위해 말한 것인 듯하다. 《기재잡기》
○ 공은 나주(羅州)사람이고 응교가 되었다. 송흠(宋欽)은 영광(靈光)사람이다. 정자(正字)가 되었다. 같은 때에 옥당에 있었는데 함께 휴가를 얻어 시골로 내려갔다. 서로 시오 리 가량 떨어져 있었는데 어느 날 송흠은 공을 방문하였다. 서로 이야기하던 중에 공이 “그대는 무슨 말을 타고 왔느냐?” 하니, 송흠은 “역말을 타고 왔네.” 하였다.공은 “나라에서 주는 역말은 그대의 집까지이고, 그대의 집에서 내 집에 오는 것은 사사 걸음인데 어찌 역말을 타겠느냐.” 하였다. 조정에 올라와서 공이 이 뜻을 임금에게 아뢰어 그를 파면시켰다. 송흠이 공에게 와서 하직하니 공은 “그대같이 나이 젊은 사람은 이 후에도 마땅히 조심해야 될 것이다.” 하였다. 《전언왕행록》
○ 공은 교리가 되어 제주(濟州)에 왕명으로 심부름 갔다가 성종 19년 무신에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이 되었다. 아버지의 상사(喪事)를 듣고 돌아오는 길에 표류하여 중국 절강 태주부(浙江台州府)로 갔었는데 중국에서 관원을 시켜 데려다 주었다. 성종이 공에게 ‘표해록(漂海錄)’ 을 지으라 하므로 그대로 서울에 머물러 지어 바치고 그 후에 아버지의 초상에 갔으니,사람들이 이 일을 가지고 그를 비난하였다. 공이 일찍이 중국 사람을 만나 명수(命數)를 추산해 보니, 다만 고시(古詩) “고소성 밖의 한산사, 밤 종소리가 객선(客船)에 들려오네.” 를 써 주므로 그 뜻을 알 수 없었다. 뒤에 표류해서 태주(台州)에 이르러 밤에 종소리를 듣고 물으니, 그 곳이 곧 한산사 고소성이었다. 《국조기사》


이원(李黿)
이원은 자는 낭옹(浪翁)이며, 호는 재사당(再思堂)이요,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익제(益齊)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이고 박팽년(朴彭年)의 외손이다. 성종 기유년에 문과에 올라 벼슬이 좌랑에 이르렀다. 무오년에 곤장을 맞고 나주(羅州)로 귀양갔다가 갑자년에 죽음을 당하였다. 중종(中宗) 초년에 도승지를 증직하였다.
○ 공은 기상이 당당하여 절개를 위해 죽을 각오가 있었으니, 어린 임금을 부탁할 만 하였다. 《사우명행록》
○ 공의 아버지 공린(公麟) 벼슬은 현령이다. 이 박팽년의 딸에게 장가들어 혼례를 거행하던 날 밤 꿈에 늙은 첨지 8명이 절하면서 청하기를, “우리들은 장차 솥에 삶겨 죽게 되었는데, 만약 죽는 생명을 살려 주시면 후하게 은혜를 갚겠습니다.” 하였다. 공린이 놀라서 일어나 보니,음식 만드는 사람이 자라 여덟 마리로 국을 끓이려고 하므로 즉시 강물에 놓아 보내게 하였다. 자라 한 마리가 빠져 달아나기에 어린 종이 삽을 가지고 잡으려다가 잘못하여 그 목을 끊어 죽였다. 그날 밤에 또 꿈을 꾸니 7명이 와서 감사하였다. 그 후에 공린이 아들 8명을 낳았는데 이름을 오ㆍ귀ㆍ원ㆍ타ㆍ별ㆍ벽ㆍ경ㆍ곤(鼇 龜 黿 鼉 鼈 鼊 鯨 鯤)으로 지었으니, 그 꿈의 상서를 기념한 것이었다.모두 재주와 명성이 있었다. 공은 문장과 행의(行義)로써 더욱 세상 사람의 추앙을 받았는데 갑자년에 비명에 죽었으니, 그 징험이 더욱 뚜렷한 셈이다. 지금도 이씨(李氏)들은 자라를 먹지 아니한다. 《부계기문》
○ 팔 형제를 순씨(荀氏)의 팔룡(八龍)에 비하면서 공을 지목하여 자명(慈明)이라 하였다. 태상(太常 시호를 주는 것을 맡은 관청)에 있으면서 김종직(金宗直)의 시호를 문충(文忠)으로 하자고 의논하였다는 이유로 무오사화 때에 죄를 만들어 나주(羅州)로 귀양보냈다.갑자년에 죄가 더하니 공의 종이 공을 업고 도망하려 하였으나 공은 “임금의 명은 피할 수 없다.” 하였다. 종은 이장곤(李長坤)의 일을 인용하여 울면서 권고하였으나 끝내 듣지 아니하였다. 형장에 이르러서도 말이 더욱 굳세니, 연산주가 더욱 노하여 형벌을 가등(加等)하였다.
○ 남효온(南孝溫)이 일찍이 말하기를, “익재(益齋)의 후손이고 박팽년(朴彭年)의 외손이니, 두 집의 어짐이 한 사람에게 모이었다.” 하였다.
○ 공의 아우 별(鼈) 자는 낭선(浪仙)이다. 은 공과 더불어 울면서 교외에서 작별하고, 이 뒤로는 과거를 보지 아니하였다. 평산(平山)에 살면서 그 당(堂) 이름을 ‘장륙당(藏六堂)’이라고 하였다. 늘 소를 타고 술을 싣고 고을의 노인과 더불어 낚시질을 하고 혹은 사냥도 하였으니 시를 읊고 술을 따르며 해가 저물어도 돌아갈 줄을 몰랐다. 매양 술이 취하면 눈물을 흘리면서 슬퍼하기도 하였다. 일찍이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내가 우는 닭을 죽이려고 하나 순같은 성인이 있을까 염려된다. 죽이지 않으려고 하나 역시 도척(盜跖)같은 횡포한 자가 있구나. 풍우가 휘몰아치는 밤에 울어 그치지 않으니 순과 도척이 함께 듣게 된다. 선과 악을 각기 힘쓰니 울지 않는 것은 닭의 천성이 아니다. 하였다. 《패관잡기》
○ 공은 타고난 자질이 호탕하고 영걸스러우며, 풍채가 뛰어나고 문장도 높고 깨끗하였다. 비록 방랑불우(放浪不遇)한 때라도 슬퍼하고 원망하는 말이 없었다. 한 평생 서적을 많이 보았지마는 성인의 도를 훼방한 글은 읽지 아니하였다. 김일손(金馹孫)은 남의 문장을 추켜올리는 일이 적었는데 공의 ‘금강록(金剛錄)’을 보고는, “이보다 더 잘 지을 수 없다.” 하였다.


이주(李冑)
이주는 자는 주지(冑之)이며, 호는 망헌(忘軒)이요, 본관은 고성(固城)이고, 용헌(容軒) 원(原)의 증손(曾孫)이다. 성종 무신년에 문과에 올라 호당(湖堂)을 거쳐 정언이 되었다. 무오년에 귀양갔다가 갑자년에 사형을 당하였다.
○ 공은 어질고 글을 잘 지었다. 시의 격조는 옛태가 있었으며 세상을 구제할 만한 재주가 있었다. 일찍이 정언이 되어 나라 일을 말할 때에는 강개하고 기절이 있었다. 임술년 봄에 남효온(南孝溫)이 귀양살이하는 진도(珍島)로 공을 방문하여 벽파정(碧波亭)에서 유숙하였다. 뒤에 연산주에게 살해를 당하였다. 《사우명행록》


김굉필(金宏弼) 처음에는 호를 사옹(簑翁)이라 하다. 갑술년에 나다.
김굉필은 자는 대유(大猷)이며, 호는 한훤당(寒暄堂)이요, 본관은 서흥(瑞興)이다. 공의 아버지는 뉴(紐)인데 무과에 올라 사용(司勇)이 되었다. 김굉필은 경자년에 생원과에 오르고, 갑인년에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참봉에 임명되고, 벼슬이 형조 좌랑에 이르렀다.무오년에 곤장을 맞고 희천(熙川)으로 귀양갔다가 경신년에 순천으로 옮기었다. 갑자년에 화를 당했으니 나이 51세였다. 중종(中宗) 정묘년에 도승지를 증직하고 정축년에 특별히 우의정을 증직하였으며, 선조(宣祖) 을해년에 영의정을 증직하고 문경(文敬)이란 시호를 주었다. 광해군(光海君) 경술년에 문묘(文廟)에 배향하였는데, 배향된 오현(五賢) 중에서 공이 그 으뜸이다.
○ 공은 현풍(玄風)에 살았다. 젊을 때 호탕하고 뛰어나 구속을 받지 아니하였으니, 거리에 놀고 다니면서 사람들을 회초리로 때렸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보면 곧 피하여 숨었다. 장성하자 학문에 힘을 썼다. 처음에 김종직에게 가르침을 청하니 김종직은 바로 《소학(小學)》을 가르치면서, “진실로 학문에 뜻을 둔다면 이 책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주염계(周㾾溪)의 광풍제월(光風霽月)같은 쇄락(灑落)한 인품도 역시 이에 벗어나지 않는다.” 하였다. 공은 명심하여 게으르지 아니하였으니, 특출한 행실이 비할 데 없었다. 평상시에도 반드시 갓을 쓰고 띠를 띠고 있었으며 밤중이 되어서야 잠을 자고 닭이 울면 일어났다. 본부인 외에는 일찍이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다.사람들이 혹시 나라의 일을 물으면 반드시, “소학을 읽는 동자가 어찌 알리요.” 하였다. 일찍이 시를 지었는데,

글을 업으로 삼아도 오히려 천기를 알지 못했더니 / 業文猶未識天機
소학 책 속에서 그 전의 잘못을 깨달았네 / 小學書中悟昨非

하였다. 김종직이 이를 평하기를, “이 말은 성인이 되는 기초이니 허노재(許魯齋) 후에 어찌 그만한 사람이 없으리오.” 하였다. 나이 30이 된 후에 비로소 다른 글을 읽었으며, 후진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아니하였으니 명양정(鳴陽正) 현손(賢孫) 이장길(李長吉)ㆍ이적(李勣)ㆍ최충성(崔忠成)ㆍ박한공(朴漢恭)ㆍ윤신(尹信) 등은 모두 그의 제자였다. 나이가 들고 덕이 높아져서는 세상을 바꿀 수 없고 도가 행해지지 못할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자기의 명성을 숨겼으나, 사람들은 그를 알고 있었다. 《명신록》 《사우명행록》
○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과 뜻이 같고 도가 합하여 특별히 서로 잘 지내었다. 도의를 연마하고 고금의 일을 토론하여 때로는 밤을 새우기까지 하였다. 일찍이 정여창이 공에게 장차 비방하는 논의가 일어날 것이니 제자를 모아 학문을 강론하는 것을 중지하라고 권고했으나, 공은 듣지 않으면서,“중[僧] 육행(陸行)이 불교를 가르칠 때 그 무리가 천여 명이나 되었다. 어떤 사람이 말리면서, ‘화환이 두렵도다.’ 하니, 육행은 ‘먼저 도를 깨달아 안 사람이 뒤늦게 깨달은 사람을 깨우치는 법이니, 내가 아는 것을 남에게 알리는 것뿐이다. 재화와 복은 하늘에 달린 것이니 내가 어찌 간여하리오.’ 하였다 하니,육행은 비록 중이지마는 그의 말은 취할 점이 있다.” 하였다. 공에게 배운 이로서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ㆍ금헌(琴軒) 이장곤(李長坤)ㆍ사재(思齋) 김정국(金正國) 같은 분은 모두 학행이 뛰어난 제자이었다.
○ 어머니 한씨(韓氏)는 성품이 엄하고 예법이 있었다. 공은 아침마다 안부를 살펴 대청 아래에서 절하였다. 혹시 불쾌한 기색이 있으면 공은 고개를 숙이고 엎드려서 감히 물러가지 아니하고 공경과 효도를 다하여 어머니의 기뻐하심을 보고서야 물러 갔다. 일찍이 그 자제들을 훈계하기를,“너희들은 항상 마음을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게을리하지 말 것이며 남이 혹시 너희를 비평하더라도 절대로 서로 맞서서 말하지 말아라. 남의 나쁜 점을 말하는 것은, 피를 머금었다가 남에게 뿜으려면 자기 입이 먼저 더러워지는 것과 같으니 너희들은 마땅히 이를 경계로 삼을 것이라.” 하였다. 《동유연원록》
내칙편(內則篇)을 모방하여 가범(家範)을 짓고, 의절(儀節)을 마련하여 자손들에게 가르쳐 더욱 인륜을 중시하게 하고, 아래로는 남녀 종들에게까지도 안팎의 직책을 분별하여 각기 명칭이 있었으니 안의 일은 계집종에게 주관하게 하고, 그 명칭을 도주(都主)ㆍ주적(主績)ㆍ주사(主辭)ㆍ주포(主庖)라 하였으며 밖의 일은 사내종에게 주관하게 하고 그 명칭은 도전(都典)ㆍ전사(典辭)ㆍ전시(典廝)라고 하였다.능력을 헤아려 임무를 맡기는데, 절하고 꿇어앉고 작업하는 것에 모두 일정한 규칙이 있었다. 봉급의 차이도 부지런하고 게으른 것을 비교하여 더 주기도 하고 감하기도 하였으며 길사와 흉사의 경비도 풍년 들고 흉년 든 것에 따라서 늘이기도 하고 줄이기도 하였다. 또 1일과 15일에 국법을 읽고 훈계를 듣는 규정이 있었다. 《경현록(景賢錄)》
○ 공은 늘 초립(草笠)을 쓰고 연자(蓮子) 갓끈을 매었다. 노년에는 단칸방에 단정히 앉아 책상을 마주 대하고 글을 보며 밤이 깊어도 자지 않으므로 연자(蓮子) 갓끈이 책상에 대질리어 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니 그 소리로 그가 아직도 글을 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유선록》
○ 공이 부참봉(部叅奉)이 되었을 때 귀복(鬼服 가장(假裝)한 옷)과 온갖 희롱을 일체 상관의 지시에 따라 행하였다. 공은 그 당시에 자신의 명망이 무거움을 알고 보통 사람과 구별되지 않으려고 힘썼다. 공은 처음에 호를 사옹(簑翁)이라 하면서, “비록 큰 비를 만나 밖은 젖어도 안은 젖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얼마 뒤에 바꾸면서 말하기를, “이름을 지어 날리는 것은 혼연히 처세하는 도리가 아니다.” 하였다. 《연원록》
○ 공은 유학을 진흥시키고 후생을 가르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멀고 가까운 지방의 선비들이 소문을 듣고 사모하여 찾아와서 그가 사는 마을에는 학도들이 거리를 메웠으니,경서를 배우려고 당에 올라도 자리가 좁아 다 수용할 수 없었다. 자기가 사는 시냇가에 작은 서재를 짓고 ‘한훤당(寒暄堂)’이라는 호를 붙였다. 또 가야산(伽倻山)에 내왕하면서 학문을 강구했는데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의 시에,

듣건대 김공이 거처하는 곳이 가야산이라 하니 / 聞說金公棲築倻山
응당 무이산(武夷山)이리라 / 應是武夷山者是也

한 것이 이것이다. 《연원록》
○ 정여창(鄭汝昌)이 안음(安陰) 현감으로 있을 때에 공이 방문하였다. 정여창이 금잔 하나를 만들어 두니 공이 책망하기를, “자네가 이런 소용 없는 일을 할 줄은 생각하지 못했네. 후일에 반드시 이것으로 남을 그르칠 것이네.” 하였다. 그 후에 고을 원이 과연 이 때문에 장물죄(贜物罪)를 지었다고 하였다. 《경현록(景賢錄)》 ○ 순천(順天) 사람이 경현당(景賢堂)을 세워 제사지내었고 이귀암(李龜巖)은 《경현록(景賢錄)》을 지었다.
○ 갑자년에 형벌을 더하니 공이 명을 듣고는 목욕하고 관디를 갖추었는데 얼굴 빛이 변하지 아니하였다. 손으로 수염을 손질하여 입에 물면서, “이것까지 상해를 받을 수 없다.” 하였다.
○ 김종직(金宗直)이 이조 참판으로 있으면서 나라 일에 대하여 별로 건의한 적이 없었다. 이에 공은 시를 지어 바쳤는데 그 내용인즉,

겨울에는 갖옷 입고 여름에 얼음물 마시는 것이 도이지만 / 道在冬裘夏飮氷
날이 개면 행하고 장마지면 그침을 어찌 오로지 하랴 / 霽行潦止豈專能
난초도 세속을 따르면 끝내는 변하게 될 것이니 / 蘭如從俗終當變
누가 소는 밭갈고 말은 탈 수만 있음을 믿으리오 / 雖信牛耕馬可乘

하니, 김종직이 화답하기를

분수 밖의 벼슬이 대관에까지 이르렀으나 / 分外官聯到代氷
나라 일을 바로 잡고 세상 구제함을 내가 어찌 하리오 / 匡君救俗我何能
마침내 후배에게 오소(迂踈) 옹졸하다고 조롱 받겠지만 / 終敎後輦嘲迂拙
세리의 용렬함은 따를 수 없는 것이네 / 勢利區區不足乘

하였다 이는 대개 공이 시에 나타낸 뜻을 싫어한 것이었으니 이로부터 김종직과 서로 분리되었다. 《사우명행록》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의 이른바 서로 분리되었다는 것은 지금에 와서 그 당시 어느 때 어떤 일로 해서인지 상고할 수 없다. 지금 《점필재전집(佔畢齋 全集)》을 살펴보면, 다만 시문을 제일로 삼고 일찍이 도학에는 마음을 두지 않았으므로 한훤당이 이것을 질문한 것이다.비록 스승과 제자의 분수가 중하다고 하지만 진실로 지기가 합하지 않으면 어찌 끝내 서로 분리되지 않겠는가. 또 어찌 어떠한 일에 드러나게 서로 배척해야만 서로 분리되었다고 이르리오. 《퇴계집(退溪集)》


붙임 신영희(辛永禧)
신영희는 자는 덕우(德優)이며, 호는 안정(安亭)이요, 본관은 영월(寧越)이다. 대제학 석조(碩祖)의 손자이다. 계묘년에 진사과에 올랐으나 과거를 좋아하지 아니하여 다시 과거를 보지 아니하였다.
○ 호방하여 구속을 받지 않고 대절이 있어서 세속의 테두리를 벗어났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이 일찍이 말하기를, “지금 선비의 기개를 보면 옛날 동한(東漢) 시대 말기와 같으니 멀지 않은 시일에 화가 일어날 것이다. 그대는 속히 숨으라.” 하였다.공은 갑자기 직산(稷山) 사산(斜山) 아래로 가서 남효온(南孝溫)ㆍ홍유손(洪裕孫)들과 함께 죽림우사(竹林羽士)라 하였는데 문장과 행의(行義)가 한 시대의 영수가 되었다. 작은 당을 지어 당 이름을 안정(安亭)이라 하였다. 기재(企齋) 신광한(申光漢)이 산장을 지나가다가 시를 지었는데,

마을 이름을 노인이라 하니 어찌 알지 못하랴 / 村號老人那不識
동네 이름을 빈사라 하니 이를 좋아해서 온다 / 里名貧士愛玆來
나뭇군 아이는 선비의 풍류가 멀어져 감을 알지 못하지만 / 樵兒不識風流遠
오히려 사산 별곡만은 부르고 있네 별곡(別曲)은 공이 지은 것이다 / 猶唱蛇山別曲回

하였으며, 김종직이 일찍이 공의 남정시(南征詩)를 보고, “이 시는 마땅히 청산 백석(靑山白石) 사이에서 읊어야 될 것이라.” 하였다. 《해동잡록》
김굉필이 일찍이 나를 책망하기를, “그대와 벌써 교분을 끊으려고 해도 정리상 차마 끊지 못했다.”고 하므로 내가 물으니, “그대가 아니었다면 능히 결단하였을 것이다.” 하였다.다시 물으니, “백공(伯恭) 남효온(南孝溫)과 백원(百源) 무풍정(茂豊正)과 정중(正中) 수천정(秀泉正)과 문병(文炳) 허반(許磐)은 모두 진(晋) 나라 선비들의 풍습이 있다. 진 나라는 청담(淸談)으로 폐해를 입었으니 10년이 못 가서 화가 이 무리들에게 미칠 것이다.나는 맹세코 지금부터 자네들과 다시 내왕하지 않을 것이다.” 하더니 후에 모두 몸을 보전하지 못하였다. 신영희(申永禧)가 지은 《사우언행록(師友言行錄)》
○ 김굉필이 신영희를 방문하여 말하기를, “화가 멀지 않은 시일에 일어날 것이니, 나같은 사람은 진실로 면할 수 없지마는 그대는 멀리 피하라.” 하고 드디어 서로 교분을 끊었다. 남효온(南孝溫)의 병이 위독하여 김굉필이 가서 문병하였으나 효온이 거절하고 보지 않으므로 굉필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효온은 벽을 향해 누워서 말 한 마디 없이 영원히 결별하였으니, 이는 굉필과 절교하는 것이었다. 굉필이 영희를 끊으려고 한 것과 효온이 굉필을 끊으려고 한 것은 세상 일이 어지럽고 위태한 관계로 철인(哲人)이 아니면 능히 화를 면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연원록》
○ 공은 기개가 있어 세상에서 뜻을 얻지 못하였다. 남의 계집종을 관계하여 그 주인에게 욕을 보았으므로 마음에 불평을 품고 죽었다. 《소문쇄록》


붙임 수천부정(秀泉副正)
수천부정(秀泉副正) 정은(貞恩)은 자는 정중(正中)이며, 호는 설창(雪窓) 또는 월호(月湖) 또는 남곡(嵐谷) 이다. 익녕군(益寧君) 나(袳)의 아들이며 태종(太宗)의 손자이다.
○ 공은 음률이 세상에서 제일 뛰어났다. 슬프게 악기를 타면 길가는 사람도 반드시 울었다. 날마다 시와 술을 즐겼으니 무풍정(茂豊正)과 명성이 같았다.김굉필의 꾸짖음을 듣고는 자신의 옛 습관을 모두 고쳤으나 일부러 속된 태도를 취하면서 문을 닫고 밖에 나오지 아니하고 감히 예전 친구들과 내왕하지 아니했으니 과연 혼자 몸을 보전하였다. 사람된 품이 독실하고 겸손했으며 식견과 도량이 있고 총명하고 민첩하였다. 《사우명행록》


붙임 홍유손(洪裕孫)
홍유손은 자는 여경(餘慶)이며, 남양 향리(南陽鄕吏) 순치(順致)의 아들이다. 호는 조총(蓧叢) 또는 광진자(狂眞子)라고 하였다.
○ 일찍이 걸어서 영남(嶺南)으로 가서 김종직(金宗直)을 보고 두시(杜詩)를 배웠다. 김종직이 “이 사람은 벌써 안자(顔子)의 즐겨하는 뜻을 알았다.”고 하니 배우는 이가 모두 그를 따랐다.두류산(頭流山 지리산)에 들어가서 학문을 익히고 서울에 와서 김종직에게, “세상 일에 대하여 건의하지 않고 어찌 공연히 벼슬만 하고 있느냐.”고 간하였다. 또 “지금의 학자들은 모두 불교와 노자(老子)를 미워하면서도 행하는 일은 한 가지도 불교와 노자를 벗어난 것이 없다.둥글게 행하고 모난 것을 싫어함은 노자의 사상이고, 자기 혼자만 행하고 남을 걱정하지 않는 것은 불교라.”고 하니 김종직이 크게 미워하였다. 이로부터 매양 “여경(餘慶)이 간사하다.”고 하니 공도 또한 자기를 감추고 드러내지 아니하였다. 《추강냉화》


조위(曹偉)
조위는 자는 태허(太虛)이며, 호는 매계(梅溪)요,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영의정 석문(錫文)의 종질(從姪)이다. 성종 갑오년에 문과에 올라 호당(湖堂)을 거처 호조 참판이 되었다. 무오년에 곤장을 맞고 의주(義州)로 귀양갔다가 또 순천(順天)으로 옮겨졌다. 계해년에 죽으니 나이 50세이었으며 갑자년에 추형(追刑)하였다.
○ 재주가 뛰어나고 학식이 넓었다. 시문을 잘하여 문장으로 성종에게 크게 우대를 받았다.
○ 성종 때에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하여 지방관으로 나갈 때 특별히 한 계급을 올려 함양 군수(咸陽郡守)로 임명되었다. 유호인(兪好仁)과 함께 임금의 우대가 극진하니, 사람들이 모두 영광스럽게 여겼다. 《동각잡기》
○ 매양 세말에 지은 시를 임금에게 올리게 하니 임금의 마음에 맞았으므로 그 부모에게 곡식을 내려주게 하였다. 군수로 있을 때 품계가 찼고 어버이 상을 당하자 또 부의(賻儀)를 내려 주었는데, 지방관에게 부의의 특전을 내리는 것은 그 전에는 없었던 일이었다. 《소문쇄록》
○ 공은 김종직의 처남[妻弟]이다. 성종이 명을 내려 김종직이 지은 시문을 편집하게 하니 공이 조의제문(吊義帝文)을 문집 첫머리에 실었다. 연산 무오년에 옥사가 일어나자 유자광(柳子光)이 참소하기를, “조의제문을 첫머리에 실은 것은 자못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하니, 연산주가 크게 노하였다. 이때 공은 하정사(賀正使)로서 연경(燕京)에 가 있었는데, 연산주는 “공이 압록강을 건너오거든 바로 베어 죽이라.” 하였다. 공의 일행이 요동(遼東)에 이르러 비로소 그 말을 들었다. 공의 서제(庶弟) 신(伸)이 일찍이 요동에 점 잘 치는 사람 추원결(鄒源潔)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 가서 길흉을 물으니 다른 말은 없고 다만 두 글귀의 시를 써 주었다. 그 시에,

천층 물결 속에서 몸을 뛰쳐 나오나 / 千層浪裡飜身出
응당 바위 밑에서 세 밤을 유숙한다 / 也須巖下宿三宵

하였다. 조신(曹伸)이 공에게 보고하기를, “첫 글귀는 화를 면할 듯도 한데, 아래 글귀는 해석하기 어렵습니다.” 하고 서로 함께 슬피 울었다. 압록강까지 돌아와서 바라다보니 강가에서 관원이 기다리는 모습이 보였다. 일행은 놀라 얼굴빛이 변하였으니 의금부 도사가 와서 형벌을 행하려는 것인 줄 알았다. 서로 마주 보고 목이 메이도록 울면서 생명이 경각간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는데,강을 건너서야 정승 이극균(李克均)이 그를 구해 내어 다만 잡아다가 문초하려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일행은 기뻐하면서 그제야 점 치는 사람이 써 준 시의 첫 구절이 이것을 뜻하는 것임을 깨달았으나, 아래 글귀는 해석하지 못했는데, 마침내 죽지는 않고 곤장을 맞고 순천(順天)으로 귀양갔다가 병들어 죽으니 고향인 금산(金山)에 장사 지내었다.갑자년에 화가 일어나자 그 전의 죄를 추록(追錄)하여 관을 쪼개고 송장의 목을 베었다. 시체를 끌어 내어 묘앞 바위 밑에 두고 3일 동안이나 내버려 두었으니 조신은 그제야 두 글귀가 모두 맞은 것을 깨닫고 괴이하게 여겨 탄식하기를 마지 아니하였다. 《병진정사록》


박한주(朴漢柱)
박한주는 자는 천지(天支)이며, 호는 우졸자(迂拙子)요,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성종 을사년에 문과에 올라 헌납에 임명되었다. 무오년에 곤장을 맞고 벽동(碧潼)으로 귀양갔다가 갑자년에 사형을 당하였다. 중종(中宗) 때에 도승지를 증직하였다.
○ 공은 일찍이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는데, 말이 곧고 간절하였다. 지방으로 나와 예천 군수(醴泉郡守)가 되어서는 고을을 태평하게 다스렸다. 연산군이 그를 불러 간관에 임명하였는데 공이 의견을 아뢰기를, “후원(後苑)에서 말을 달리고 공을 차며 용봉장막(龍鳳帳幕)을 펼쳐 놓고 잔치 놀음하는 때가 많으니, 임금께서 어찌 이러한 정사를 하십니까.” 한즉,연산군이 노하여 답하기를, “용봉장막이 네 물건이냐?” 하였다. 이에 박한주는 “이것은 모두 백성의 재력에서 나온 것이니, 신민의 장막이라 해도 옳을 것입니다. 어찌 임금님의 사사로운 물건입니까.” 하였다. 이어 노사신(盧思愼)ㆍ임사홍(任士洪)의 간사함을 탄핵하자 마침내 그들에게 무함을 당하였다.


임희재(任熙載)
임희재는 자는 경여(敬輿)이며, 본관은 풍천(豊川)이요, 사홍(士洪)의 아들이다. 무오년에 문과에 올라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가 되고 호당(湖堂)에 들어갔다. 김종직의 제자였다는 이유로 곤장을 맞고 귀양갔다.
○ 공은 글씨를 잘 썼다. 일찍이 한 절구를 병풍에 쓰기를,

요ㆍ순을 본받으면 저절로 태평할 것인데 / 祖舜宗堯自太平
진시황은 무슨 일로 백성을 괴롭혔는지 / 秦皇何事苦蒼生
재화가 집안에서 일어날 줄을 모르고 / 不知禍起蕭墻內
공연히 오랑캐를 막으려고 만리장성을 쌓았구나 / 虛築防胡萬里城

하였다. 연산주가 어느날 갑자기 사홍의 집에 갔다가 이것을 보고, “누가 쓴 것이냐?” 하니, 사홍이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이에 연산이 노한 기색을 띄면서, “경의 아들은 불초한 사람이다. 내가 죽이려고 하는데 경의 의사는 어떠한가?” 하니, 사홍은 꿇어앉아 아뢰기를,“이 자식의 성질과 행실은 전하의 말씀처럼 온순하지 못합니다. 신이 아뢰고자 하다가 미처 아뢰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니 드디어 화를 입었다. 혹은 “공이 일찍이 그 아버지의 잘못을 간하자, 사홍이 좋아하지 아니하여 아들을 참소했다.”고 한다. 《국조기사》


강백진(康伯珍)
강백진은 자는 자온(子韞)이며, 본관은 신천(信川)이요, 김종직의 사위이다. 성종 정유년에 문과에 올라 사간이 되었다. 무오년에 곤장을 맞고 귀양갔다가 갑자년에 사형을 당하였다.


유정수(柳廷秀)
유정수는 자는 국준(國俊)이며,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성종 계묘년에 문과에 올랐다. 무오년에 사화가 일어나자 그때 장령의 신분으로 극력 구원하다가 마침내 곤장을 맞고 초산(楚山)으로 귀양가니 울분이 쌓여 병들어 죽었다. 아들 관(灌)은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렀다.


이계맹(李繼孟) 무오년에 곤장을 맞고 귀양가다. 기묘당적(己卯黨籍)조에 상세하다


강혼(姜渾)
강혼은 자는 사호(士浩)이며, 호는 목계(木溪)요, 본관은 진주(晋州)이다. 생원과에 장원하고 성종 병오년에 문과에 올라 호당(湖堂)에 들어갔다. 무오년에 곤장을 맞고 귀양 갔다가 놓여 돌아왔다.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참여하여 벼슬이 숭록대부 판중추(崇祿大夫判中樞)에 이르고 진천군(晋川君)으로 책봉되었다. 시호는 문간공(文簡公)이다.
○ 공은 문명(文名)이 김일손(金馹孫) 다음이었다. 김종직의 제자라는 이유로 곤장을 맞고 귀양갔다. 연산주가 말년에 그 첩을 잃고 매우 슬퍼하여 여러 신하를 시켜 제문을 짓게 할 때 공이 제문을 지어 그 슬프고 쓰라린 형상을 지극히 다하여 표현하니, 연산주가 기뻐하였다. 이로부터 연산주에게 자못 사랑을 받았으나 선비들의 공론은 그를 천하게 여기었다.중종이 왕위에 오르자 도승지로서 반교문(頒敎文)을 짓게 되었는데, 문득 썼다가 도로 지워버려 문리(文理)를 이루지 못하니 사람들이 도깨비 글이라 하였다. 아마 밤에는 마음대로 행동하다가 밝은 날에는 스스로 기운을 잃은 것을 말한 것이다. 《음애일기》 《국조기사》
○ 공은 젊을 때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연산주에게 총애를 받게 된 뒤에는 학문을 가지고 음란한 정치를 아름답게 꾸며 아첨하였으니 궁인(宮人)의 애사(哀詞)재소(齋疏)를 짓는데, 그 곱고 아름다운 문장을 남김없이 표현하였다. 이로부터 임금의 은혜와 사랑이 날로 더하여 갑자기 승진하여 도승지가 되니, 관계(官階)가 통정대부(通政大夫)에서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이르렀으나 오히려 도승지의 직은 옮기지 않았다. 이 때문에 청류(淸流)의 논의에 죄를 얻었다. 《음애일기》
○ 성몽정(成夢井)이 말하기를, “강혼이 대궐 안 여러 각(閣)의 아름다운 명칭을 지어 올려서 폐주에게 아첨하였으니, 문장은 비록 넉넉하나 어찌 귀하다 하리오.” 하였다.


 

[주D-001]촉루의 …… 나은지 : 《장자(莊子)》에서 나온 말인데, 죽은 사람의 두골(頭骨)이 남쪽만 향해서 앉아 있는 임금보다 걱정없고 편하기가 나으므로 바꾸지 않겠다고 한 우언(寓言)에서 온 것이다.
[주D-002]원풍(元豊)ㆍ희녕(熙寧) : 송(宋) 나라 원풍ㆍ희녕년간에 명현(名賢) 한기(韓琦)ㆍ부필(富弼)ㆍ소식(蘇軾) 등이 나온 시대를 말한 것이다.
[주D-003]한숨 쉬고 통곡하며 : 한 문제(漢文帝) 때의 가의(賈誼)가 상소하니, “지금 천하의 사세(事勢)는 통곡할 만한 것이 있고 한숨질만 한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주D-004]강관의 무리들 : 전한(前漢) 때의 문인 가의가 나이 젊고 재주가 있어 정치를 개혁할 것을 주창하였는데, 훈구대신인 강후(絳侯)ㆍ관영(灌嬰) 등이 헐뜯고 방해하였다고 한다.
[주D-005]뱃속의 칼 : 당대(唐代)의 재상 이임보(李林甫)가 입에는 꿀을 바르고 뱃속에는 칼을 품고서 사람들을 많이 해쳤다고 하는 고사에서 온 말.
[주D-006]위(魏) 나라 …… 보인 것 : 북위(北魏) 때의 사관들이 황실(皇室) 선대의 악한 것을 써서 돌에 새겨 큰 길가에 내보였다가 살육을 당하였다는 고사에서 온 말.
[주D-007]솔개나 …… 않는데 : 중국 전국 시대(戰國時代)의 사상가인 열자(列子)가 “사람이 죽은 뒤에 땅 속에 묻히면 굼벵이들이 파먹을 것이요, 묻지 않고 숲 속에 버리면 까마귀나 솔개들이 쪼아 먹을 것이니 죽은 이에게는 묻는 것이나 묻지 않는 것이나 매한가지이다.”라고 한 말에서 온 말이다.
[주D-008]탐천(貪泉) : 중국 광동 남해현(南海縣)에 탐천이 있는데, 관리들이 그 물을 마시면 탐욕이 생기게 된다고 한다. 청렴한 관원인 오은지(吳隱之)가 “나는 마셔도 마음이 변하지 아니할 자신이 있다.” 하고 마시었다고 한다. 여기서는 읍령이나 탐천이란 이름에 상관없이 흐리고 깨끗함이 사람에게 달렸다는 뜻이다.
[주D-009]타루비(墮淚碑) : 진(晉) 나라의 현인 양호(羊祜)가 형주(荊州)에 있을 때의 덕을 사모하여 그 곳 백성들이 현산(峴山)에 세운 비를 말하는데, 사람들이 그 비 앞을 지날 때에는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하여 그 비를 ‘타루비’ 라 하였다.
[주D-010]영인(郢人)의 자귀[斤] : 영(郢) 땅의 사람이 자귀질을 잘 하여 남의 콧등에 흙을 조금 붙여 두고 그것을 깎는데 코를 다치지 않고, 또한 코의 주인도 자귀질의 솜씨를 믿기 때문에 까딱하지 않고 있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
[주D-011]하늘에 …… 뻗혔으며 : 진 나라의 장화(張華)가 천문을 본즉 두우성(斗牛星)사이에 광채가 나므로 전환(電煥)에게 물었더니, “그 밑 땅 속에 반드시 보검(寶劍)이 있는 까닭이다.” 하여 전환을 두우성의 분야(分野)인 풍성(豊城)에 수령으로 보내어 땅 속을 파니 과연 보검이 나왔다는 고사가 있는데 여기서는 문장의 광채를 말한 것이다.
[주D-012]땅에 …… 내는 것 : 진의 문인 손흥공(孫興公)이 천대산부(天臺山賦)를 지어서 남에게 보이며, “이 글은 땅에 던지면 반드시 쇳소리[金聲]가 날 것이다.” 하였다.
[주D-013]태산(泰山)이 …… 못하겠느냐 : 《논어(論語)》에 나오는 말로서 노(魯) 나라 권신 계씨(季氏)가 태산에 제사를 지냈는데, 그것은 비례의 제사이므로 공자가 말하기를, “태산이 임방(일찍이 공자에게 예의 근본을 물은 제자)만 못해서 비례의 제사를 받겠느냐.” 했다고 한다.
[주D-014]간지(干支) : 육갑(六甲)의 갑(甲)ㆍ을(乙)ㆍ병(丙)ㆍ정(丁) 등은 간(干)이라 하고, 자(子)ㆍ축(丑)ㆍ인(寅)ㆍ묘(卯) 등은 지(支)라 하는데, 간과 지가 합한 갑자(甲子)ㆍ을축(乙丑) 등이 간지이다.
[주D-015]삼팽(三彭) : 도가(道家)의 서(書)에 의하면 사람의 몸 가운데, “삼팽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천상(天上)에 올라가서 사람의 죄악을 보고한다.”는 말이 있다. 수양한 사람은 삼팽이 없어져서 죽지 아니한다는 것이다.
[주D-016]하늘의 놀이 : 《장자(莊子)》에서 나온 말인데, 사람이 모든 것을 초월하여 자유자재한 경지가 이룩되었음을 말한다.
[주D-017]두 낭자 : 《단계(丹溪)》에 두 낭자에 관한 고사가 있기 때문에 시에 그 말을 쓴 것이다.
[주D-018]방안아(榜眼兒) : 문과의 제2등 합격을 방안이라 하는데, 여기서는 자기가 사랑하는 표적으로 이름을 고쳐 준 것이다.
[주D-019]장륙(藏六) : 자라[鱉]가 네 발과 머리와 꼬리의 여섯 가지를 움추려 감추는 것을 ‘장륙’이라 하는데 이것은 몸을 보전하여 화를 피하겠다는 뜻이다.
[주D-020]팔룡(八龍) : 한(漢) 나라 순숙(荀淑)의 아들 팔 형제가 모두 훌륭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말하기를 ‘순씨 팔룡(荀氏八龍)’이라 하였다.
[주D-021]자명(慈明) : 순씨팔용(荀氏八龍) 가운데 가장 나은 사람.
[주D-022]내가 …… 염려된다 : 맹자의 말에, “닭이 울 때부터 일어나서 부지런히 착한 일만 하는 것은 순(舜)의 무리요, 닭이 울 때부터 부지런히 이익만 구하는 것은 도척(盜賊 중국 춘추시대의 몹시 악한 사람인데, 몹시 악한 사람을 비유한 말로 쓰인다)의 무리이다.” 하였다.
[주D-023]오현(五賢) :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조광조(趙光祖)ㆍ이언적(李彦迪)ㆍ이황(李滉)의 다섯 학자를 말한다.
[주D-024]주염계(周㾾溪)의 광풍제월(光風霽月) : 송(宋) 나라 문장가 황곡산이 같은 문장가인 주염계를 화창한 바람과 비 갠 뒤의 달[光風霽月]이라고 칭송하였다.
[주D-025]허노재(許魯齋) : 원(元) 나라 허형(許衡)의 호(號)가 노재인데, 평생에 주자(朱子)의 《소학(小學)》을 중히 여겼다고 한다.
[주D-026]내칙편(內則篇) : 《예기(禮記)》의 한 편명(篇名)인데 여자의 행실에 관한 교훈이 실려 있다.
[주D-027]무이산(武夷山) : 주자(朱子)가 서원(書院)을 짓고 제자를 가르치던 곳이다.
[주D-028]안자(顔子) : 공자의 수제자. 그가 궁하게 살면서도 그 즐거워함을 변하지 아니 하였다는 말이 있다. 송 나라 주무숙(周茂叔)이 정자(程子)에게, “안자가 즐거워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내라.” 하고 가르쳤다.
[주D-029]추형(追刑) : 살았을 때에 미처 형을 가하지 못하던 것을 죽은 뒤에 시체에 형벌을 가하는 것.
[주D-030]애사(哀詞) : 사람이 죽은 뒤에 그를 애도하여 지은 운문(韻文)으로 된 조사(弔辭).
[주D-031]재소(齋疏) : 절에서 재(齋)를 올릴 때에 쓰는 축원문(祝願文).

 

 

연려실기술 제6권

 연산조 고사본말(燕山朝故事本末)
무오년의 사화(史禍)


유자광(柳子光)은 부윤(府尹) 규(規)의 서자이다. 건장하고 날래며 힘이 세었으며, 높은 곳에도 원숭이 모양으로 잘 타고 올라 갔다. 어릴 때 무뢰배가 되어 장기와 바둑이나 두고 활쏘기로 내기나 하고 새벽이나 밤길에 돌아다니다가 여자를 만나면 낚아 채어 간음하였다.유규(柳規)는 자광의 어미가 미천한 신분이고, 또 하는 짓이 이처럼 방종하고 패역하므로 여러 번 매질하고 자식으로 여기지 아니하였다. 갑사(甲士)에 소속되어 건춘문(建春門)을 지키고 있었는데 이시애(李施愛)가 반란을 일으키자 자광은 글을 올려 스스로를 천거하였다. 세조(世祖)가 그를 기특히 여기고 불러다가 대궐 뜰에서 시험해 보았다.이어 전지에 나갔다가 돌아오니 세조가 매우 사랑하였다. 병조 정랑으로서 문과를 보아 장원으로 뽑혔다. 예종(睿宗) 초년에 남이(南怡)의 모반을 고발하여 공신이 되어 무령군(武靈君)으로 봉해졌으며 벼슬의 등급을 뛰어 1품(一品)의 관계(官階)를 얻게 되었다. 상시 자기 자신을 호걸이라 일컬었다. 천성이 음험하여 남을 잘 해쳐서,재능과 명망이 있어 임금의 사랑이 자기보다 위에 있는 이가 있으면 반드시 모함하니 사람들이 그를 흘겨보았다. 자광이 한명회(韓明澮)의 문호가 귀하고 성함을 질투하고 있었는데, 마침 성종(成宗)이 신하들의 간하는 말을 받아들임을 보고 기이한 의논으로써 임금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려고, “한명회가 발호할 뜻이 있습니다.”고 글을 올렸으나, 임금은 그를 죄주지 아니하였다.후에 임사홍(任士洪)ㆍ박효원(朴孝元) 등과 함께 현석규(玄錫圭)를 배제하려 하다가 계획이 실패되어 오히려 자기가 동래(東萊)로 귀양 갔다가 조금 후에 풀려 돌아 왔으나, 임금은 그가 정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인 줄 알므로 다만 공신의 봉작만 회복시켜 주고 실무에 당하는 관직은 주지 아니하였다.자광은 임금의 은택 입기를 희망하여 온갖 수단을 다 썼으나 되지 않으므로 마음속에 항상 불평을 품고 있었다. 이극돈(李克墩)의 형제가 조정에서 권력을 잡고 있음을 보고는 능히 자기 일을 성취시켜 줄 수 있음을 알고 문득 몸을 굽혀 깊이 서로 결탁하였다. 《유자광전(柳子光傳)》 남곤(南袞)이 지은 것이다. 《동각잡기(東閣雜記)》에서 나왔다.
○ 자광이 일찍이 함양군(咸陽郡)에서 놀다가 시를 지어 군수에게 부탁하여 나무 판에 새겨 벽에 달아 두었다. 후에 김종직(金宗直)이 이 고을에 군수로 와서 이것을 떼어 불태워 버리면서, “자광이 어떤 놈이기에 감히 이럴 수 있느냐.” 하였다. 자광은 몹시 분하여 이를 갈면서도 김종직이 한창 임금의 신임을 받을 때였으므로 도리어 교분을 맺고 종직이 죽었을 때는 제문을 지어 울면서 그를 왕통(王通)과 한유(韓愈)에 비하기까지 하였다. 《동각잡기》
○ 김일손(金馹孫)은 일찍이 김종직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이극돈(李克墩)이 일찍이 전라 감사로 있을 때 성종(成宗)의 초상을 당하였는데, 서울에 향을 바치지도 않고 기생을 싣고 다닌 일이 있었다. 김일손이 그 사실과 또 뇌물 먹은 일을 사초에 썼더니 이극돈이 고쳐 주기를 청했으나 그 청을 거절하자 김일손에게 감정을 품고 있었다. 《국조기사》
○ 김일손이 헌납이 되어 권세 있는 사람을 꺼리지 않고 할 말을 다 하며 글을 올려, “이극돈과 성준(成俊)이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 장차 우승유(牛僧儒)와 이덕유(李德裕)처럼 당을 만들 것이다.” 라고 논하니 이극돈이 크게 노하였다. 후에 사국(史局)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수하기 위한 것이다. 이 열리자 이극돈이 당상이 되어 김일손이 쓴 사초에 자기의 나쁜 일을 상세히 쓴 것과 또 세조(世祖) 때의 일을 쓴 것을 보고 이것으로 자기의 원한을 보복하고자 하였다.어느 날 다른 사람을 물리치고 총재관(摠裁官) 어세겸(魚世謙)에게, “김일손이 선왕(先王 세조)의 일을 거짓으로 꾸미고 헐뜯었으니 신하로서 이 같은 일을 보고서 임금께 알리지 않는 것이 옳겠습니까. 나의 생각에는 사초를 봉하여 위에 아뢰어서 처분을 기다리면 우리들은 후환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어세겸은 깜짝 놀라면서 답하지 아니하였다.얼마 지낸 뒤에 극돈은 유자광에게 의논하니 유자광은 소매를 걷어 올리고 팔뚝을 뽐내면서, “이것이 어찌 의심하고 주저할 일입니까.” 하고 노사신(盧思愼)ㆍ윤필상(尹弼商)ㆍ한치형(韓致亨)을 찾아가서는 세조에게 받은 은혜를 잊을 수 없다는 점을 먼저 말하여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 놓은 뒤에 그 일을 말하였다.대개 노사신과 윤필상은 세조의 총애를 받던 신하이고, 한치형은 그 족당이 궁중에 관련되었으니 반드시 자기의 말에 따를 것으로 알고 말했던 것인데 세 사람은 과연 모두 그 말을 따랐다. 함께 차비문(差備門) 밖에 나가서 도승지 신수근(愼守勤)을 불러 내어 귀에 대고 한참 동안 이야기하고 임금께 아뢰었다.이전에 신수근이 승지로 될 적에 대간과 시종신들은 외척이 권력잡을 발단이라고 하며 옳지 못하다고 힘써 간하였더니, 신수근은 이들에게 감정을 품고 일찍이 다른 사람에게, “조정은 문신들의 수중에 있는 물건이니 우리들은 무엇을 하겠는가.” 하였다. 이때에 와서 김일손 등에 대한 여러 사람의 원한이 뭉치고 뭉쳐 있었다.또 폐주가 시기하고 포학하여 학문을 좋아하지 않는 까닭에 글하는 선비를 더욱 미워하여, “명예를 구하고 임금을 능멸하여 나를 자유스럽지 못하게 한 자는 모두 이 무리들이다.” 라는 말을 하면서, 항상 마음이 답답하고 불쾌하여 한 번 통쾌하게 처치했으면 하면서도 감히 손을 대지 못하던 차에 유자광 등이 아뢴 말을 듣고, “이 나라에 충성한다.” 하면서,특별히 후하게 칭찬하고 남쪽 빈청(賓廳)에서 죄인을 국문하도록 명하고 내시 김자원(金子猿)을 시켜 왕명의 출납을 맡게하고 나머지 사람은 참여해 듣지 못하게 하였다. 검열(檢閱) 이사공(李思恭)이 뵈옵기를 청했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유자광전(柳子光傳)》
○ 의금부 경력 홍사호(洪士灝)와 도사 신극성(愼克成)에게 명하여 곧 함양(咸陽)에 가서 김일손을 잡아오게 하였다. 또 액정서(掖庭署) 하예(下隸) 중에서 말 잘 달리는 자를 시켜 죄인을 잡아오는 걸음이 더디고 빠른 것을 도중에 살펴 빨리 보고하라 하였다.이때 김일손은 풍병(風病)으로 집에 있다가 잡혀 왔다. 폐주는 수문당(修文堂)에 나와서 국청(鞫廳)을 설치하였는데, 노사신(盧思愼)ㆍ윤필상(尹弼商)ㆍ한치형(韓致亨)ㆍ유자광(柳子光)ㆍ신수근(愼守勤)과 주서(注書) 이희순(李希舜)이 국문에 참여하였다. 《야언별집》
○ 김일손을 국문할 때, “사초에 어찌하여 선왕조(先王朝 세조조)의 일을 거짓으로 꾸며 썼느냐?” 하니 공술(供述)하기를, “사기(史記)에 ‘이보다 먼저[先是]’란 말도 있고, ‘처음에 이르되[初云]’란 말도 있으므로 세조 때의 일을 추기(追記)에서 기록했으며,덕종(德宗)의 귀인(貴人) 권씨(權氏)의 일은 귀인의 조카되는 허반(許磐)에게 들었습니다.” 하였다. 또 소릉(昭陵) 회복을 청한 일을 국문하니, “선왕께서 숭의전(崇義殿)을 세우고 왕씨(王氏 고려왕조)의 후손을 봉하기에 성조(聖朝)에서 인정(仁政)을 행하기를 원한 때문에 소릉을 복위하자고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김일손이 일찍이 충청 도사가 되었을 때 글을 올려 소릉(昭陵)을 회복하자고 청한 때문에 아울러 국문한 것이었다. 또 후전곡(後殿曲)의 일을 국문하니, “옛날 서호(西湖)에 있을 적에 무풍부정(茂豐副正) 총(摠)이 거문고를 가지고 찾아와서 후전곡을 타는데, ‘그 소리가 매우 애처롭고 슬퍼서 태평 세상의 음곡은 아니다.’ 하고 함께 논의한 일이 있었으므로 사초에 쓴 것입니다.” 하였다.“사초를 함께 의논한 사람이 있느냐?”고 두 번 세 번 추궁해 물었으나, 다만 “신은 자백을 다 했으니 혼자 죽겠습니다.” 하였다. 홍사호(洪士灝)가 김일손의 집 문서를 수색하여 이목(李穆)의 편지를 발견하였는데 그 편지에 사초에 관계되는 일을 대개 말하면서 “그대의 사초는 성중엄(成重淹)의 방(房)에 있는데,중엄은 날마다 일을 기록하지 않는 점을 들어 당상이 기재하지 않으려 한다고 말했으나 나는 김계운(金季雲) 일손의 자 은 글자 한 자도 빠뜨림이 없이 다 기록했다고 말했다.” 하였다. 폐주가 홍사호에게 묻기를, “김일손이 오는 도중에 무슨 말을 하더냐?” 하니, “일손이 ‘이것은 반드시 이극돈이 사초를 고발한 것이다. 극돈의 일을 내가 사초에 썼더니 극돈이 깎아 버리기를 청했으나 내가 듣지 않았으므로 원한을 품은 것이라.’ 하였습니다.” 하였다. 《야언별집》
○ 허반(許磐)은 공술하기를, “덕종(德宗)의 소훈(昭訓) 윤씨(尹氏)의 일이 의심이 나서 김일손에게 말했더니, 일손이 필시 잘못 알고 권씨(權氏)로 여긴 것입니다.” 하였다. 《야언별집》
○ 이목(李穆)은 공술하기를, “노산군(魯山君)의 숙의(淑儀) 권씨(權氏)는 바로 권람(權擥)의 친족입니다. 그 논밭과 집과 노비를 권람이 다 차지하고 주지 않아서 숙의를 굶주리게 한 까닭으로 신이 일찍부터 권람을 하찮게 보았습니다.” 하였다. 이상 《야언별집》
○ 유자광이 옥사를 맡고 있었는데 매양 김자원(金子猿)이 임금의 명령을 전달할 때는 반드시 앞에 나아가서 공손하게 조심하는 태도를 다하여 그 명이 엄하고 혹독한 듯 하면, 스스로 임금의 마음을 안 것처럼 다시 고개를 숙이고 엎드리면서 거듭 물러날 뜻이 있는 것처럼 하고서는 명을 다 듣고 물러 나와서는 매우 기뻐서는 스스로 자부하는 기색이 있었다.이어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지금은 조정의 중신을 바꾸어 배치할 시기이니, 마땅히 이러한 큰 조치가 있어야만 될 것이고 보통으로 다스려서는 안될 것이라.”고 큰 소리를 쳤다. 또 임금께 아뢰기를, “이 사람의 무리들이 매우 성하니 변고를 예측할 수 없습니다. 마땅히 방비를 엄밀히 해야 될 것입니다.” 하였다.이에 금위병(禁衛兵)을 뽑아서 궁문 안팎을 경계하여 모든 사람의 드나드는 것을 단속시켰다. 옥에 갇힌 사람이 국문을 받으러 갈 때도 군사를 시켜 압송하게 하였다. 유자광은 오히려 옥사를 다스림이 느슨해져 제 뜻대로 다 되지 않을까 염려하여 밤낮으로 죄 만들기를 계획하였다. 하루는 소매 속에서 책 한 권을 내 놓으니 바로 김종직(金宗直)의 문집이었다.그 중에서 조의제문(弔義帝文)과 술주시(述酒詩) 술주시는 유유(劉裕)가 임금을 죽인 죄를 꾸짖고 도연명(陶淵明)의 충분(忠憤)한 뜻을 표현한 것이다. 를 들추어 내어 여러 추관(推官)에게 두루 보이면서, “이것은 모두 세조를 가리켜 지은 것인데 김일손의 악한 행실은 모두 김종직이 가르쳐서 그렇게 된 것이다.” 하고 제가 주석을 달아 글귀마다 해석하여 폐주로 하여금 알기 쉽게 하고 이내 아뢰기를,“김종직이 우리 세조를 비방하고 헐뜯었으니 마땅히 대역부도(大逆不道)로써 논죄하고, 그가 지은 글은 세상에 전파해서는 안 되니 아울러 모두 불살라 없애야 될 것입니다.” 하였다. 폐주는 그 말을 따라 김종직의 시문을 간직하고 있는 자는 이틀 안으로 각기 자진해서 바치라 하고 빈청(賓廳)의 앞뜰에서 불사르게 하며,또 여러 도의 관사에 써 붙인 현판은 모두 그 곳에서 떼어 없애도록 하였다. 일찍이 성종(成宗)이 김종직에게 환취정(環翠亭)의 기문(記文)을 짓게 하여 문 위에 달아 두었었는데, 이것도 아울러 떼어 버리도록 청했으니 함양(咸陽)의 원한을 보복함이었다. 《유자광전(柳子光傳)》
○ 무오년 7월 17일에 교지를 내렸는데, 그 내용은, “김종직은 초야의 천한 선비로서 세조조에 과거에 오르고 성종께서 경연에 뽑아 두어 오랫동안 시종의 지위에 있어 벼슬이 형조 판서에까지 이르렀으니 임금의 총애와 은혜가 조정에서 으뜸이었다. 그가 병들어 벼슬에서 물러나니 성종은 오히려 그가 있는 고을 수령을 시켜 특별히 쌀과 곡식을 내려 주어 그 여생을 마치게 하였다.지금 그 제자 김일손이 편수한 사초 속에 부도한 말로 선왕조의 사실을 거짓으로 기록하고 또 그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기재하였는데 그 글 내용은 이러하다. ‘정축년 10월 □일에 내가 밀양(密陽)에서 경산(京山 성주(星州))으로 가다가 답계역(踏溪驛)에서 하룻밤을 유숙하였는데 그 날 밤 꿈에 풍채 좋은 신인(神人)이 칠장복(七章服)을 걸치고 와서는 「나는 초 회왕(楚懷王)의 손자 심(心)인데,서초 패왕(西楚覇王 항우(項羽))에게 죽음을 당하여 빈강(彬江 중국 남방에 있는 강)에 빠져 잠겨 있다.」 하고는 갑자기 보이지 아니하였다. 나는 깜짝 놀라 잠을 깨어 생각하니, 회왕은 남방 초(楚) 나라 사람이고, 나는 동이(東夷 조선(朝鮮))의 사람이다. 땅이 서로 만 리나 떨어져 있고 시대가 또한 천여 년이나 떨어져 있는데 내 꿈에 나타나는 것은 무슨 징조일까.또 역사를 상고해 보아도 강물에 던졌다는 말은 없는데, 아마 항우가 사람을 시켜 비밀히 쳐죽여 그 시체를 물에 던졌던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마침내 글을 지어 그를 조문하노라. 하늘이 사물과 법측을 마련하여 사람에게 주었으니, 누가 그 사대(四大)오상(五常)을 높일 줄 모르리오. 중화 사람에게만 넉넉하게 주고 동이 사람에게는 부족하게 준 것이 아니며 어찌 옛적에만 있고 지금은 없어졌으리오. 나는 동이 사람이고 천 년이나 뒤에 났는데도 삼가 초의 회왕을 슬퍼하노라. 옛날에 조룡(祖龍 진시황)이 어금니와 뿔을 휘두르니 사해의 물결이 모두 피로 물들었다. 비록 전어[鱣]ㆍ상어[鮪]ㆍ미꾸라지[鰍]ㆍ고래[鯢]인들 어찌 자신을 보전할 수 있으리오. 그 물에서 빠져 나오고자 하여 바쁘게 날뛰었다. 이때 6국(國)의 후손들은 세력이 없어지고 딴 곳으로 피란하여 겨우 평민과 같이 지냈다. 항량(項梁)은 남국(南國 초(楚))의 무장 집안의 자손으로서 진승(陳勝)에 뒤이어 일을 일으켰다. 회왕(懷王)을 찾아내어 백성의 바람을 따랐으니 멸망했던 초 나라를 다시 보존하게 되었다.건부(乾符)를 쥐고 천자가 되었으니, 세상에서 미씨(羋氏 초의성)보다 높은 이가 없었다. 장자(長者 유방(劉邦))를 함곡관(函谷關)에 들어가게 하니, 또한 그 인의(仁義)를 볼 수 있겠다. 양처럼 패려궂고 이리처럼 탐욕스럽게 관군(冠軍 송의(宋義))을 함부로 죽였는데도 어찌 그 항우를 잡아 처형시키지 않았는가.아아, 형세가 그렇지 못하였으니 나는 회왕(懷王)을 위해 더욱 두렵게 여긴다. 길러 놓은 자에게 도리어 해침을 당했으니, 과연 천운이 어긋났도다. 침(郴)의 산이 험하여 하늘에 닿으니 햇빛이 어둑어둑 저물려 한다. 침의 물이 밤낮으로 흐르니 물결이 넘쳐서 돌아오지 않는다. 영원한 천지간에 한이 어찌 다하리오. 혼령이 지금도 정처 없이 헤매고 있구나.나의 마음이 쇠와 돌을 뚫을 만하니 왕(회왕)이 갑자기 꿈에 나타났도다. 주자(朱子)의 필법을 따르려니 생각이 불안하고 조심된다. 술잔을 들어 땅에 부으니 영령(英靈)이 와서 흠향하기를 바라노라. ……’ 하였다. 그 글에 ‘조룡(祖龍)’이라 한 것은 진시황이니 종직이 의제(義帝 회왕(懷王))를 노산군(魯山君)에 비한 것이요.‘양처럼 패려궂고 이리처럼 탐욕스럽게 관군을 함부로 죽였다.’는 것은 세조가 김종서 죽인 것을 가리킨 것이며, ‘어찌 항우를 잡아 죽이지 않았느냐.’ 한 것은 노산군이 어찌 세조를 잡아 죽이지 않았느냐는 것이고, ‘길러 놓은 자에게 도리어 해침을 당했다.’는 것은 노산군이 세조를 잡아 죽이지 않았다가 도리어 세조에게 죽음을 당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주자(朱子)의 필법을 따른다.’는 것은 김종직이 자기 스스로 주자인 체 하여 마음 속으로 이 부(賦)를 지어 《통감강목(通鑑綱目)》의 필법에 견준 것이다. 김일손은 그 글을 칭찬하여 ‘충분(忠憤)한 마음을 나타낸 것이다.’ 하였으니,생각해 보면 우리 세조 대왕이 불안하고 위태한 시기를 당해서 간악한 신하가 반란을 도모하여 화란(禍亂)이 거의 일어나려 할 때 역적의 무리를 베어 죽이니 종사가 위태한 지경에서 다시 편안해져서 자손들이 서로 계승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공업은 매우 높고 크며 덕은 백왕에 뛰어난데, 뜻밖에 김종직이 그 제자들과 더불어 세조의 덕을 비방하고 김일손을 시켜 사초에 무함하여 쓰기까지 하였으니,이것이 어찌 짧은 시일에 만들어진 것이랴. 신하 노릇 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몰래 가지고 있으면서 세조ㆍ예종ㆍ성종의 세 임금을 두루 섬겼으니 내가 지금 생각해 보니 참혹하고 떨림을 금하지 못하겠다. 해당한 죄명을 의논하여 아뢰어라.” 하였다. 《이세영일기(李世英日記)》ㆍ《조야기문(朝野記聞)》
○ 유자광은 폐주의 노여움을 이용하여 한꺼번에 모조리 잡아 죽일 계획으로 윤필상(尹弼商) 등에게 눈짓하면서, “이 사람들의 죄악은 무릇 신하된 우리로서는 한 하늘 밑에서 함께 살 수 없는 원수이니 마땅히 그 무리들을 찾아내어 모두 죽여 없애야만 조정이 맑고 깨끗해질 것이요,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나머지 무리들이 일어나 얼마 안 가서 다시 화란(禍亂)이 생길 것입니다.” 하니 좌우에 있는 이들이 입을 다문 채 말이 없었다. 노사신(盧思愼)은 손을 흔들며 말리기를, “무령(武靈 유자광)은 어찌 이런 말까지 하시오. 옛날 당고(黨錮의 일을 듣지 못했습니까. 금고(禁錮)의 법망(法網)이 날로 혹독하여 선비의 무리들을 용납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한(漢) 나라도 뒤따라 망했으니 청류(淸流)의 의논이 마땅히 조정에 있어야 될 것이요, 청류의 의논이 없어지는 것은 나라의 복이 아닌데 무령은 어찌 틀린 말을 하시오.” 하니,유자광은 조금 기가 꺾이었으나 범죄 사실에 관련된 사람은 남김없이 죄를 다스리고자 하였다. 노사신이 또 말리기를, “당초에 우리들이 임금께 아뢴 것은 사초의 일뿐인데, 지금은 지엽(枝葉)으로 연루되어 사초 일에 관계되지 않은 사람도 잡혀 갇힌 이가 날로 늘어나니 이것은 우리들의 본 뜻이 아니오.” 하니 유자광은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유자광전》
○ 이목(李穆)이 태학(太學)에 있던 시절 글을 올려 윤필상(尹弼商)을 간악한 귀신이라고 지목한 일이 있었고, 조순(趙舜)이 정언으로 있을 때 노사신을 논박한 일이 있었다. 이때에 와서 윤필상은 이목이 일찍이 김종직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았다는 이유로 무함하여 죽이고 또 노사신에게, “조순도 죽여야 될 것이오.” 하니 노사신은 “이것이 무슨 말이오?” 하고 끝내 듣지 아니하였다. 《병진정사록》
○ 죄를 결정하는 날에 노사신이 홀로 의사가 같지 않으므로 유자광은 불쾌한 기색을 나타내면서 힐난하였다. 각자가 자신의 의견을 임금께 아뢰었는데 폐주는 유자광 등의 의논을 따랐다. 이날 대낮에 캄캄해지며 비가 퍼붓고 큰 바람이 동남쪽에서 일어나 나무를 뽑고 기왓장을 날려 보내니, 성 안의 백성들이 엎어지고 떨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유자광전》
○ 7월 27일에 난역(亂逆)한 신하를 처형했다는 사유를 종묘에 고하였으니 그 글의 대략에, “어찌 간사한 신하가 몰래 모반할 마음을 품고서 옛일에 가탁하여 문자에 드러낼 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흉악한 사람들이 당을 지어 세조의 덕을 모함하고 헐뜯으니 난역부도(亂逆不道)한 죄악이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하였다.사죄(赦罪)를 반포하는 글에는, “간사한 신하 김종직은 나쁜 마음을 품고 몰래 그 무리들을 모아 음흉한 계획을 시행하려고 한 지가 오래 되었다. 항적(項籍 항우)이 의제(義帝)를 죽인 일에 가탁하여 문자로 표현하여 선왕(세조)을 나무라고 헐뜯었으니 하늘에 닿을 정도로 악독한 죄를 진만큼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대역죄로 논단하여 관을 쪼개어 송장의 목을 베게 하노라.그 무리 김일손ㆍ권오복(權五福)ㆍ권경유(權景裕)는 간악한 덩어리로 뭉쳐서 서로 호응하고 도와 그 글(조의제문(弔義帝文))을 칭찬하기를 충분에서 나왔다고 사초에 기록하여 영원히 뒷세상에 전하고자 했으니 그 죄가 김종직과 같다. 아울러 능지처참하도록 한다. 김일손을 또 이목(李穆)ㆍ(허반(許磐)ㆍ강겸(姜謙) 등과 더불어 선왕의 일을 거짓 꾸며서 서로 전하여 말하고 사초에 썼으니 이목과 허반도 목을 베어 죽이는 형벌에 처하고, 강겸은 곤장 백 대를 치고 가산을 적몰하여 먼 변방에 보내어 관노를 만들게 한다.표연말(表沿沫)ㆍ홍한(洪瀚)ㆍ정여창(鄭汝昌)ㆍ무풍부정(茂豐副正) 총(摠) 등은 난언죄(亂言罪)를 범했고, 강경서(姜景敍)ㆍ이수공(李守恭)ㆍ정희량(鄭希良)ㆍ정승조(鄭承祖) 등은 난언을 알고도 고하지 아니하였으니 아울러 곤장 백 대를 치고 3천 리 밖으로 귀양 보낸다.이종준(李宗準)ㆍ최부(崔溥)ㆍ이원(李黿)ㆍ이주(李冑)ㆍ김굉필(金宏弼)ㆍ박한주(朴漢柱)ㆍ임희재(任熙載)ㆍ강백진(康伯珍)ㆍ이계맹(李繼孟)ㆍ강혼(姜渾)은 모두 김종직의 제자로서 붕당을 만들어 서로 칭찬하고 혹은 나라의 정치를 비방하여 세상의 일을 비평했으니, 임희재는 곤장 백 대를 치고 3천 리 밖으로 귀양 보내고,이주는 곤장 백 대를 쳐서 먼 변방에 부처시키고, 그 나머지 사람은 모두 곤장 80대를 쳐서 먼 지방에 부처시키되 귀양 간 사람들은 모두 봉수(烽燧)ㆍ노간(爐干)의 역을 맡게 한다. 성중엄(成重淹)은 곤장 80대를 쳐서 부처시키고, 이의무(李宜茂)는 곤장 80대를 쳐서 도년(徒年)에 처한다. 역사를 편수하는 관원으로서 김일손의 사초를 보고도 즉시 아뢰지 않은 어세겸(魚世謙)ㆍ이극돈(李克墩)ㆍ유순(柳洵) 윤효손(尹孝孫)ㆍ김전(金詮) 등은 관직을 파면시키고, 홍귀달(洪貴達)ㆍ조익정(趙益貞)ㆍ허침(許琛)ㆍ안침(安琛) 등은 좌천시킨다. 신하가 무장(無將)하고 이미 부도한 죄를 처단하였으니,우레 소리 섞인 비가 내림으로써 마땅히 정국이 혁신되는 은혜를 입게 될 것이라.” 하였다. 이에 좌의정 한치형(韓致亨) 등은 나아가 경하하였다. 《이세영일기》
○ 유자광은 바라던 일을 이루었으므로 의기양양하여 집에 돌아왔다. 이후로부터 자광의 위엄이 조정과 민간에 군림하였으니 조정에서는 그를 독사처럼 대하여 감히 그 뜻을 거스리지 못하고, 유림들은 기운이 꺾여서 발을 움직이지 못하고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학문하는 곳은 두서너 달 동안에 글 읽는 소리가 끊어지고,부형들은 서로 경계하기를, “학문은 과거나 볼 만하면 그만이지 무엇 때문에 많이 하리오.” 하였다. 유자광은 스스로 훌륭한 계책을 얻은 듯이 꺼리는 일이 없었으니, 이익만을 탐하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무리들이 문간에 가득 차게 되었다. 견식이 있는 이는 가만히 탄식하기를, “무술년의 옥사는 정인(正人)이 간악한 무리를 공격한 것이고, 무오년의 옥사는 간악한 무리가 정인의 무리를 죄에 빠뜨린 것이다.20년 사이에 한 번은 이기고 한 번은 패했으니 나라의 치란도 이에 따라 달라졌다. 대개 군자가 형벌을 쓸 적에는 항상 너그러이 시행하는 데서 실수가 생기고, 소인이 원망을 보복할 적엔 반드시 남김없이 멸망시키고야 마니, 무술년에 군자들이 그 형벌을 끝까지 시행하였더라면 어찌 오늘의 화가 있었으리오.” 하였다. 《유자광전》
○ 윤필상ㆍ노사신ㆍ한치형 등에게 각기 반당(伴倘 배종(陪從)하는 하인) 10명ㆍ노비 13명ㆍ구사(丘史) 7명ㆍ밭 100결(結)ㆍ옷의 안팎 감ㆍ구마(廐馬) 등 물건을 내려 주고 유자광 이하 사람에게는 차등을 두어 상을 주었다. 의금부 도사들에게는 말을 하사하였다. 《이세영일기》
○ 김종직의 죄를 추론(追論)할 때에 대간이 생전의 관작만 깎아 버리자고 청하였더니, 너무 가벼운 벌을 논했다는 이유로 모두 죄를 입었다. 《점필재문집(佔畢齋文集)》은 조위(曹偉)가 편집하고 홍석견(洪錫堅)이 전라 감사로 있을 때 간행하였는데, 조위는 연경(燕京)에 가서 돌아오지 않았고 홍석견은 유자광이 구원하여 중한 형벌을 면하게 되었으니,함양(咸陽) 사람들이 김종직의 사우(祠宇)를 세우고자 할 때 홍석견이 “이것은 그의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이지 고을에서 공적으로 의논할 일은 아니다.” 고 하였으므로 이때에 유자광은 이 일을 들어 홍석견을 구원하였다. 《이세영일기》


 

[주D-001]사대(四大) :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에 있는 말인데, 도(道)ㆍ천(天)ㆍ지(地)ㆍ왕(王)의 네 가지가 크다는 것이다.
[주D-002]오상(五常) :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ㆍ신(信)의 다섯 가지를 말한다.
[주D-003]6국(國) : 전국시대(戰國時代)의 한(韓)ㆍ위(魏)ㆍ조(趙)ㆍ제(齊)ㆍ초(楚)ㆍ연(燕)의 여섯 나라를 말하는데, 모두 진(秦)에게 멸망 당하였다.
[주D-004]진승(陳勝) : 진(秦)의 2세 황제 때에 처음으로 반란을 일으킨 사람.
[주D-005]건부(乾符) : 왕위를 말한 것이다.
[주D-006]당고(黨錮) : 동한(東漢) 말년에 간신들이 천하의 명사(名士)를 명당(明黨)이란 죄명으로 일망타진하여 금고시킨 것을 말하는데, 금고라는 것은 다시 벼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주D-007]봉수(烽燧)ㆍ노간(爐干)의 역 : 산 위의 봉화를 관리하고 관청의 횃불을 맡은 천역.
[주D-008]신하가 무장(無將)하고 : “신하는 장(將)함이 없어야 하는데 장하면 반드시 베인다.[人臣無將 將則必誅]”는 말이 《춘추전(春秋傳)》에 있는데, 여기서 장은 장차 임금을 어떻게 하려 한다는 뜻이다.

 

 

해동잡록 2 본조(本朝)

김굉필(金宏弼)


○ 본관은 서흥(瑞興), 자는 대유(大猷)이며, 호는 한훤당(寒暄堂)이다.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으며, 일찍이 점필재를 종사하여 《소학》을 배웠는데 평생을 《소학》으로써 몸을 단속하였다. 성리학에 정통하여 사문(斯文)을 일으키고 후생을 가르쳐 인도하는 일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갑인년에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참봉에 임명되었고, 다시 형조 좌랑으로 발탁되었다. 연산조에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점필재(佔畢齋)의 문인이라 하여 희천(熙川)에 유배되고, 다시 순천(順天)으로 옮겼으며, 갑자년에 죄를 더하였다. 중종 초에 도승지를 예증(例贈)하고, 13년에 특별히 우의정을 더 추증(追贈)하였으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선생이 희천에 귀양갔을 때 조정암(趙靜庵 조광조(趙光祖))이 따라 가서 노닐면서 학문하는 큰 법칙을 배웠다. 오래 있다 돌아올 제 멀리 갈 때까지 바라보면서 말하기를, “우리 도가 동쪽으로 간다.” 하였다. 〈비서(碑序)〉
○ 동방의 선비들이 모두 문장을 업으로 삼고 성리학에 잠심하여 염락관민(溓洛關閩)의 실마리를 구하는 것은 선생으로부터 비롯하였다. 《무오사적(戊午事蹟)》
○ 선생은 성리학에 연원(淵源)이 있어 몸가짐을 삼가고 게을리하지 아니하였다. 일찍이 영희(永禧) 신덕우(辛德優)에게 이르기를, “그대와 교분을 끊으려 했으나 정리상 차마 그러지 못한다.” 하기에, 물으니, 말하기를, “백공(伯恭 남효온(南孝溫))과 백원(伯源 무풍정(茂豐正))은 모두 진(晉) 나라 선비의 풍도를 지니고 있다. 진 나라는 청담(淸談)으로 폐해를 입었으니 10년이 못 가서 화가 이 무리들에게 미칠 것이다. 나는 맹세코 지금부터 자네들과 다시 내왕하지 않을 것이다.” 하더니 과연 그들이 뒤에 모두 몸을 보전하지 못하였다. 《사우명행록》
○ 선생은 특출한 행실이 비길 데가 없었다. 평상시에도 반드시 갓을 쓰고 띠를 띠고 있었으며, 인정(人定 밤에 통행을 금하기 위하여 종을 치던 일)이 지난 뒤에야 잠을 자고 첫닭이 울면 일어났다. 동상
○ 선생은 늘 초립(草笠)을 쓰고 연자(蓮子) 갓끈을 드리웠다. 만년에는 단칸방에 고요히 앉아 책상을 마주 대하여 책을 보고 밤이 깊도록 자지 아니하였다. 다만 연자 갓끈이 책상에 닿아 자그락거리는 소리가 나, 그 소리로 그가 아직도 책을 보고 있음을 알았다. 《유선록(儒先錄)》
○ 선생의 학문하는 방법이 꾸준히 힘써 정밀하게 쌓았으므로 확실하면서도 정체(停滯)하지 않았고, 융통성이 있으면서도 범속(凡俗)에 흐르지 않았으며, 평소 서당에 나아가서는 마치 소상(塑像)처럼 단정히 앉아 있었다. 〈행장(行狀)〉
○ 선생은 닭이 울 때 일어나 종일 똑바로 앉아 학문을 닦고 익히기를 게을리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집안 사람들도 일찍이 그의 게으른 모습을 보지 못하였다.
○ 선생의 《가범(家範)》에 〈거가의(居家儀)〉가 있는데, 안팎이 첫닭이 울면 모두 일어나 머리빗고 세수하고 관을 쓰고 띠를 띠고 나서, 남자는 바깥 일을 하고 여자는 집안 일을 하되 남자는 안에 들어가지 않고 여자는 밖에 나가지 않는다. 본집(本集)
○ 1, 사춘(司春)이라 하는데 가례(家禮)를 맡고, 2, 사하(司夏)라 하는데 집안의 재화(財貨)를 맡고, 3, 사추(司秋)라 하여 집안의 형벌을 맡아 보고, 4, 사동(司冬)이라 하여 집안의 음식 범절을 맡아본다. 또 상형사생(賞刑赦眚 상벌 규정 같은 것)이란 것이 있다. 동상
○ 계집종은 안 일을 맡아보는데, 1은 주포(主庖)라 하여 음식 잘 만드는 자에게 맡기고 남자로서 또한 그러한 자는 전포(典庖)라 부른다. 사내 종으로서 음식 범절을 맡아 보는 자를 사동(司冬)이라 하였다. 선생이 내칙(內則)을 본떠서 《가범(家範)》을 짓고 의절(儀節)을 마련하여, 자손들에게 보이되 훈계하는 방법은 인륜(人倫)을 더욱 중하게 여겼다. 아래로는 남녀 종들에게까지도 안팎으로 직책을 분별하여 모두 명칭이 있었으니, 안의 일은 계집으로 주관하게 하고 그 명칭을 도주(都主)ㆍ주적(主績)ㆍ주사(主辭)ㆍ주포(主庖)라 하였으며, 바깥 일은 사내 종으로 주관하게 하고 그 명칭은 도전(都典)ㆍ전사(典辭)ㆍ전시(典廝)라고 하였다. 능력을 헤아려 임무를 맡기되 절하고 꿇어 앉고 작업하는 것에 모두 일정한 규칙이 있었다. 한 번 승급하고 한 번 내리는데 상벌의 제도가 있었으며, 길흉에 대비하는 저축도 빈부에 따라 더하고 덜하였다. 매양 초하루 보름마다 친히 독서(讀書)의 예를 제정하였으나, 시행하지 못하고 화가 일어났다. 〈경현록(景賢錄)〉
○ 선생은 점필재에게 《소학》을 배웠다. 〈독소학(讀小學)〉이라는 시를 지었는데,
글을 읽어도 아직 천기(天機)를 알지 못하였더니 / 業文猶未識天機
《소학》책 속에서 어제의 잘못을 깨달았다 / 小學書中悟昨非
이제부터는 마음을 다하여 자식의 직분을 하려 하노니 / 從此盡心供子職
어찌 구차스레 부귀를 부러워하리오 / 區區何用羨輕肥
하였는데, 점필재가 이를 평하기를, “이말은 곧 성인(聖人)이 되는 기초이다.” 하였다. 동상
○ 선생이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와 뜻이 같고 도(道)가 합하여 특별히 서로 사이가 좋았다. 서로 만날 적마다 도의를 연마하고 고금 일을 토론하여 때로는 밤을 새우기까지 하였다. 동상
○ 일두(一蠹)가 안음현(安陰縣)의 원으로 있을 때 한훤(寒暄 김굉필)이 찾아 갔더니 일두가 금잔 하나를 만들어 두었으므로 한훤이 책망하기를, “자네가 이런 소용없는 일을 할 줄은 생각하지 못했네, 뒷날 반드시 이것으로써 사람을 그르칠 것이네.” 하였다. 그 뒤에 고을원이 과연 이 일로써 장물죄(臟物罪)를 지었다고 하였다. 동상
○ 선생은 화가 적소(謫所)에 미치매, 명을 듣고 목욕하고 관대(冠帶)를 갖추고 낯빛을 변하지 아니하였으며, 벗겨진 한 쪽 신을 도로 신고 손으로 그 수염을 손질하여 입에 물면서, “신체발부(身體髮膚)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인데 이것까지 해를 받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이내 죽음을 받았다. 동상
○ 일찍이 옛말을 인용하여 자제들을 훈계하기를, “남의 악한 것을 말하는 것은 마치 피를 머금어 남에게 뿜는 것 같으니 먼저 제 입을 더럽히는 것이다.” 하였다. 동상
○ 일찍이 딸들을 가르치면서 말하기를, “훗날 너희들의 집에 가서 동서들을 만나거든 반드시 공경하고 언행을 삼가야 하며, 형제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마음을 저버릴까 두려워하라.” 하였다. 동상
○ 전하지 않는 새로운 학설을 얻어서 의연(毅然)이 남달리 뛰어났으므로 당시의 학자들이 태산북두(泰山北斗)와 같이 그를 존경하였으며, 비록 그의 문하에 나아가 배우지 못하였으나 사숙(私淑)하여 착하게 된 이가 또한 많았다. 동상
○ 어린아이 두서넛을 데리고 성남 별장에서 글을 읽고 있었는데, 성광자(醒狂子 주계군(朱溪君) 심원(深源))과 남추강(南秋江 남효온(南孝溫))이 함께 찾아 갔더니, 시를 지어 주기를,
세상길은 갈래도 많은데 / 世路自多岐
후진들이 서로 가기를 다투네 / 後進爭長往
번거로운 말이 다시 요란스럽고 / 繁辭更啁啾
이설이 분분하게 시끄럽구나 / 異說紛擾攘
용문의 여운이 끊어지니 / 龍門餘韻絶
내 마음 누가 씻어 줄꼬 / 我懷誰滌蕩
그대 진실로 스스로 즐거워하며 / 吾子固囂囂
요금을 숭상하도다 / 瑤琴性所尙
석달 동안 맛을 잊어버릴 줄 알아 / 三月觧忘味
향기를 혼자 상상하는구나 / 暗香徒像想
하였다. 동상
○ 선생은 후배를 가르쳐 인도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먼데 가까운데서 소문을 듣고 모여 온 학도들이 집안에 차고, 날마다 경서를 가지고 당(堂)에 오르므로 자리가 좁아 다 수용할 수가 없었다. 동상
○ 선생이 벗들과 같이 거처할 제 첫닭이 울면 일어나 함께 앉아 호흡을 세는데 남들은 겨우 밥 지을 동안도 못 되어 다 잊어 버렸으나 홀로 선생만은 또렷이 세어서 밝을 때까지 잊어버리지를 않았다. 동상
○《소학》을 점필재에게서 배울 때에 점필재가 말하기를, “광풍제월(光風霽月)이라는 것도 결국 또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였는데, 선생은 이 말을 명심하고 지켜서 잊어버리지 아니하였다. 동상
○ 선생은 평소에 아침에 일어나 머리 빗고 세수하고 의관을 정제하고는 먼저 가묘(家廟)에 참배하였다. 무오년의 옥사를 만나 희천(熙川)으로 유배되었다가 이내 순천(順天)으로 이배(移配)되었는데, 그때 화가 어떻게 번질지 그 형세를 헤아릴 수가 없었으나 그는 태연자약하게 처하여 몸가짐이 평상시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동상
○ 선생은 조상의 산소가 오래되어 헐었으므로 여러 친족들에게 말하기를, “조상의 산소가 이렇게 되었으니 자손들이 마땅히 보호하고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명절에는 음식을 장만하여 제사지내고 또 친목을 도모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에 기꺼이 따르지 않는 이가 없었으므로 그것이 길이길이 고정된 격식이 되었다. 동상
○ 선생은 한창려(韓昌黎)의 글을 즐겨 읽었는데, 매양 〈장중승전(張中承傳)〉 후서(後敍)의 장순(張巡)이 남제운(南霽雲)을 부르며 말하기를, “남팔(南八)아, 남아(男兒)는 죽을지언정 불의에 굴해서는 안 된다.” 하는 구절에 이르러서는 세 번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동상
○ 현풍현(玄風縣)에 세상 사람들이 태리산(台離山)이라고 부르는 산이 있는데, 선생이 이 산 밑에 살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선생 때문에 대니(戴尼)라고 불렀다. 그가 성인의 도(道)를 높이 받듬이 마치 머리에 이는 것 같음을 말한 것이다. 동상
○ 선생의 처음 호는 사옹(蓑翁)이었는데 비록 큰 비를 만나 겉은 젖어도 속은 젖지 않음을 뜻한다고 하였다. 얼마 후에 고치면서 이름이 너무 드러난 것 같아 혼연(渾然)히 처세하는 도가 아니라고 하여 마침내 고쳤다. 동상
○ 선생은 순천(順天)에 귀양갔다가 마침내 죽음을 당하였는데, 순천 고을 사람이 경현당(景賢堂)을 세워 제사지냈고 이구암(李龜岩)이 《경현록(景賢錄)》을 지었다. 본집(本集)
○ 가야산(伽倻山) 서쪽에 말곡촌(末谷村)이 있는데 말곡향(末谷鄕)이라고도 한다. 선생이 일찍이 거기에 서재를 짓고 학문을 닦았다. 김모재(金慕齋 김안국(金安國))가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제 이 골짜기를 지나면서 시를 지었는데,
듣건대, 김 공이 거처하는 곳이 있다하니 / 聞有金公棲築處
가야산이 곧 무이산(武夷山)이로다 / 倻山應是武夷山
하였다. 동상
○ 함께 귀양살고 같이 승평(昇平)으로 이배(移配)되었다. 〈제매계문(祭梅溪文)〉 무오년에 희천(熙川)으로 귀양갔을 때에 매계(梅溪 조위(曺偉))는 의주(義州)로 귀양갔으며 경신년에 같이 승평부(昇平府)로 이배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 김대유(金大猶)는 《소학》으로 자신의 몸을 닦아, 옛 성현으로 법도를 삼아 후학을 불러다가 성심껏 쇄소(洒掃)의 예를 가르쳤으므로 육예(六藝)의 학문을 닦은 이가 전후에 가득하여 비방하는 의론이 일어나려 하였으나 그래도 그만두지 아니하였다. 《추강냉화》
○ 선생이 지은 〈노방송(路傍松)〉이라는 시가 있는데,
한 그루 늙은 소나무 길가에 서 있으며 / 一老蒼髥任路塵
오가는 길손 영송하느라 수고롭구나 / 勞勞迎送往來賓
겨울철에 너와 마음 같이하는 이를 / 歲寒興爾同心事
지나는 사람 중에 몇 사람이나 보았는가 / 經過人中見幾人
하였다. 《경현록(景賢錄)》


 

[주D-001]염락관민(濂洛關閩) : 염계(濂溪)의 주돈이(周敦頤), 낙양(洛陽)의 정호(程顥)와 정이(程頤)의 형제, 관중(關中)의 장재(張載), 민중(閩中)의 주희(朱熹) 등 성리학(性理學)의 원조를 가리킨다.
[주D-002]내칙(內則) : 《예기(禮記)》의 편명으로 여자의 행실에 관한 교훈이 담겨 있다.
[주D-003]광풍제월(光風霽月) : 맑은 바람과 비갠 뒤의 달이라는 뜻인데 마음이 상쾌하고 깨끗함을 형용하는 말이다. 《송사(宋史) 주돈이전(周敦頤傳)》에, “그의 마음이 쇄락(洒落)함이 광풍제월과 같다.” 하였다.
[주D-004]무이산 : 중국 복건성(福建省)에 있는 산 이름인데, 주자(朱子)가 서원(書院)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친 곳이다. 주자의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