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사화관련 기록 /무오년의 사화(史禍)

무오년의 사화(史禍)

아베베1 2011. 3. 28. 16:44

연려실기술 제6권
 연산조 고사본말(燕山朝故事本末)


유자광(柳子光)은 부윤(府尹) 규(規)의 서자이다. 건장하고 날래며 힘이 세었으며, 높은 곳에도 원숭이 모양으로 잘 타고 올라 갔다. 어릴 때 무뢰배가 되어 장기와 바둑이나 두고 활쏘기로 내기나 하고 새벽이나 밤길에 돌아다니다가 여자를 만나면 낚아 채어 간음하였다.유규(柳規)는 자광의 어미가 미천한 신분이고, 또 하는 짓이 이처럼 방종하고 패역하므로 여러 번 매질하고 자식으로 여기지 아니하였다. 갑사(甲士)에 소속되어 건춘문(建春門)을 지키고 있었는데 이시애(李施愛)가 반란을 일으키자 자광은 글을 올려 스스로를 천거하였다. 세조(世祖)가 그를 기특히 여기고 불러다가 대궐 뜰에서 시험해 보았다.이어 전지에 나갔다가 돌아오니 세조가 매우 사랑하였다. 병조 정랑으로서 문과를 보아 장원으로 뽑혔다. 예종(睿宗) 초년에 남이(南怡)의 모반을 고발하여 공신이 되어 무령군(武靈君)으로 봉해졌으며 벼슬의 등급을 뛰어 1품(一品)의 관계(官階)를 얻게 되었다. 상시 자기 자신을 호걸이라 일컬었다. 천성이 음험하여 남을 잘 해쳐서,재능과 명망이 있어 임금의 사랑이 자기보다 위에 있는 이가 있으면 반드시 모함하니 사람들이 그를 흘겨보았다. 자광이 한명회(韓明澮)의 문호가 귀하고 성함을 질투하고 있었는데, 마침 성종(成宗)이 신하들의 간하는 말을 받아들임을 보고 기이한 의논으로써 임금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려고, “한명회가 발호할 뜻이 있습니다.”고 글을 올렸으나, 임금은 그를 죄주지 아니하였다.후에 임사홍(任士洪)ㆍ박효원(朴孝元) 등과 함께 현석규(玄錫圭)를 배제하려 하다가 계획이 실패되어 오히려 자기가 동래(東萊)로 귀양 갔다가 조금 후에 풀려 돌아 왔으나, 임금은 그가 정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인 줄 알므로 다만 공신의 봉작만 회복시켜 주고 실무에 당하는 관직은 주지 아니하였다.자광은 임금의 은택 입기를 희망하여 온갖 수단을 다 썼으나 되지 않으므로 마음속에 항상 불평을 품고 있었다. 이극돈(李克墩)의 형제가 조정에서 권력을 잡고 있음을 보고는 능히 자기 일을 성취시켜 줄 수 있음을 알고 문득 몸을 굽혀 깊이 서로 결탁하였다. 《유자광전(柳子光傳)》 남곤(南袞)이 지은 것이다. 《동각잡기(東閣雜記)》에서 나왔다.
○ 자광이 일찍이 함양군(咸陽郡)에서 놀다가 시를 지어 군수에게 부탁하여 나무 판에 새겨 벽에 달아 두었다. 후에 김종직(金宗直)이 이 고을에 군수로 와서 이것을 떼어 불태워 버리면서, “자광이 어떤 놈이기에 감히 이럴 수 있느냐.” 하였다. 자광은 몹시 분하여 이를 갈면서도 김종직이 한창 임금의 신임을 받을 때였으므로 도리어 교분을 맺고 종직이 죽었을 때는 제문을 지어 울면서 그를 왕통(王通)과 한유(韓愈)에 비하기까지 하였다. 《동각잡기》
○ 김일손(金馹孫)은 일찍이 김종직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이극돈(李克墩)이 일찍이 전라 감사로 있을 때 성종(成宗)의 초상을 당하였는데, 서울에 향을 바치지도 않고 기생을 싣고 다닌 일이 있었다. 김일손이 그 사실과 또 뇌물 먹은 일을 사초에 썼더니 이극돈이 고쳐 주기를 청했으나 그 청을 거절하자 김일손에게 감정을 품고 있었다. 《국조기사》
○ 김일손이 헌납이 되어 권세 있는 사람을 꺼리지 않고 할 말을 다 하며 글을 올려, “이극돈과 성준(成俊)이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 장차 우승유(牛僧儒)와 이덕유(李德裕)처럼 당을 만들 것이다.” 라고 논하니 이극돈이 크게 노하였다. 후에 사국(史局)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수하기 위한 것이다. 이 열리자 이극돈이 당상이 되어 김일손이 쓴 사초에 자기의 나쁜 일을 상세히 쓴 것과 또 세조(世祖) 때의 일을 쓴 것을 보고 이것으로 자기의 원한을 보복하고자 하였다.어느 날 다른 사람을 물리치고 총재관(摠裁官) 어세겸(魚世謙)에게, “김일손이 선왕(先王 세조)의 일을 거짓으로 꾸미고 헐뜯었으니 신하로서 이 같은 일을 보고서 임금께 알리지 않는 것이 옳겠습니까. 나의 생각에는 사초를 봉하여 위에 아뢰어서 처분을 기다리면 우리들은 후환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어세겸은 깜짝 놀라면서 답하지 아니하였다.얼마 지낸 뒤에 극돈은 유자광에게 의논하니 유자광은 소매를 걷어 올리고 팔뚝을 뽐내면서, “이것이 어찌 의심하고 주저할 일입니까.” 하고 노사신(盧思愼)ㆍ윤필상(尹弼商)ㆍ한치형(韓致亨)을 찾아가서는 세조에게 받은 은혜를 잊을 수 없다는 점을 먼저 말하여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 놓은 뒤에 그 일을 말하였다.대개 노사신과 윤필상은 세조의 총애를 받던 신하이고, 한치형은 그 족당이 궁중에 관련되었으니 반드시 자기의 말에 따를 것으로 알고 말했던 것인데 세 사람은 과연 모두 그 말을 따랐다. 함께 차비문(差備門) 밖에 나가서 도승지 신수근(愼守勤)을 불러 내어 귀에 대고 한참 동안 이야기하고 임금께 아뢰었다.이전에 신수근이 승지로 될 적에 대간과 시종신들은 외척이 권력잡을 발단이라고 하며 옳지 못하다고 힘써 간하였더니, 신수근은 이들에게 감정을 품고 일찍이 다른 사람에게, “조정은 문신들의 수중에 있는 물건이니 우리들은 무엇을 하겠는가.” 하였다. 이때에 와서 김일손 등에 대한 여러 사람의 원한이 뭉치고 뭉쳐 있었다.또 폐주가 시기하고 포학하여 학문을 좋아하지 않는 까닭에 글하는 선비를 더욱 미워하여, “명예를 구하고 임금을 능멸하여 나를 자유스럽지 못하게 한 자는 모두 이 무리들이다.” 라는 말을 하면서, 항상 마음이 답답하고 불쾌하여 한 번 통쾌하게 처치했으면 하면서도 감히 손을 대지 못하던 차에 유자광 등이 아뢴 말을 듣고, “이 나라에 충성한다.” 하면서,특별히 후하게 칭찬하고 남쪽 빈청(賓廳)에서 죄인을 국문하도록 명하고 내시 김자원(金子猿)을 시켜 왕명의 출납을 맡게하고 나머지 사람은 참여해 듣지 못하게 하였다. 검열(檢閱) 이사공(李思恭)이 뵈옵기를 청했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유자광전(柳子光傳)》
○ 의금부 경력 홍사호(洪士灝)와 도사 신극성(愼克成)에게 명하여 곧 함양(咸陽)에 가서 김일손을 잡아오게 하였다. 또 액정서(掖庭署) 하예(下隸) 중에서 말 잘 달리는 자를 시켜 죄인을 잡아오는 걸음이 더디고 빠른 것을 도중에 살펴 빨리 보고하라 하였다.이때 김일손은 풍병(風病)으로 집에 있다가 잡혀 왔다. 폐주는 수문당(修文堂)에 나와서 국청(鞫廳)을 설치하였는데, 노사신(盧思愼)ㆍ윤필상(尹弼商)ㆍ한치형(韓致亨)ㆍ유자광(柳子光)ㆍ신수근(愼守勤)과 주서(注書) 이희순(李希舜)이 국문에 참여하였다. 《야언별집》
○ 김일손을 국문할 때, “사초에 어찌하여 선왕조(先王朝 세조조)의 일을 거짓으로 꾸며 썼느냐?” 하니 공술(供述)하기를, “사기(史記)에 ‘이보다 먼저[先是]’란 말도 있고, ‘처음에 이르되[初云]’란 말도 있으므로 세조 때의 일을 추기(追記)에서 기록했으며,덕종(德宗)의 귀인(貴人) 권씨(權氏)의 일은 귀인의 조카되는 허반(許磐)에게 들었습니다.” 하였다. 또 소릉(昭陵) 회복을 청한 일을 국문하니, “선왕께서 숭의전(崇義殿)을 세우고 왕씨(王氏 고려왕조)의 후손을 봉하기에 성조(聖朝)에서 인정(仁政)을 행하기를 원한 때문에 소릉을 복위하자고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김일손이 일찍이 충청 도사가 되었을 때 글을 올려 소릉(昭陵)을 회복하자고 청한 때문에 아울러 국문한 것이었다. 또 후전곡(後殿曲)의 일을 국문하니, “옛날 서호(西湖)에 있을 적에 무풍부정(茂豐副正) 총(摠)이 거문고를 가지고 찾아와서 후전곡을 타는데, ‘그 소리가 매우 애처롭고 슬퍼서 태평 세상의 음곡은 아니다.’ 하고 함께 논의한 일이 있었으므로 사초에 쓴 것입니다.” 하였다.“사초를 함께 의논한 사람이 있느냐?”고 두 번 세 번 추궁해 물었으나, 다만 “신은 자백을 다 했으니 혼자 죽겠습니다.” 하였다. 홍사호(洪士灝)가 김일손의 집 문서를 수색하여 이목(李穆)의 편지를 발견하였는데 그 편지에 사초에 관계되는 일을 대개 말하면서 “그대의 사초는 성중엄(成重淹)의 방(房)에 있는데,중엄은 날마다 일을 기록하지 않는 점을 들어 당상이 기재하지 않으려 한다고 말했으나 나는 김계운(金季雲) 일손의 자 은 글자 한 자도 빠뜨림이 없이 다 기록했다고 말했다.” 하였다. 폐주가 홍사호에게 묻기를, “김일손이 오는 도중에 무슨 말을 하더냐?” 하니, “일손이 ‘이것은 반드시 이극돈이 사초를 고발한 것이다. 극돈의 일을 내가 사초에 썼더니 극돈이 깎아 버리기를 청했으나 내가 듣지 않았으므로 원한을 품은 것이라.’ 하였습니다.” 하였다. 《야언별집》
○ 허반(許磐)은 공술하기를, “덕종(德宗)의 소훈(昭訓) 윤씨(尹氏)의 일이 의심이 나서 김일손에게 말했더니, 일손이 필시 잘못 알고 권씨(權氏)로 여긴 것입니다.” 하였다. 《야언별집》
○ 이목(李穆)은 공술하기를, “노산군(魯山君)의 숙의(淑儀) 권씨(權氏)는 바로 권람(權擥)의 친족입니다. 그 논밭과 집과 노비를 권람이 다 차지하고 주지 않아서 숙의를 굶주리게 한 까닭으로 신이 일찍부터 권람을 하찮게 보았습니다.” 하였다. 이상 《야언별집》
○ 유자광이 옥사를 맡고 있었는데 매양 김자원(金子猿)이 임금의 명령을 전달할 때는 반드시 앞에 나아가서 공손하게 조심하는 태도를 다하여 그 명이 엄하고 혹독한 듯 하면, 스스로 임금의 마음을 안 것처럼 다시 고개를 숙이고 엎드리면서 거듭 물러날 뜻이 있는 것처럼 하고서는 명을 다 듣고 물러 나와서는 매우 기뻐서는 스스로 자부하는 기색이 있었다.이어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지금은 조정의 중신을 바꾸어 배치할 시기이니, 마땅히 이러한 큰 조치가 있어야만 될 것이고 보통으로 다스려서는 안될 것이라.”고 큰 소리를 쳤다. 또 임금께 아뢰기를, “이 사람의 무리들이 매우 성하니 변고를 예측할 수 없습니다. 마땅히 방비를 엄밀히 해야 될 것입니다.” 하였다.이에 금위병(禁衛兵)을 뽑아서 궁문 안팎을 경계하여 모든 사람의 드나드는 것을 단속시켰다. 옥에 갇힌 사람이 국문을 받으러 갈 때도 군사를 시켜 압송하게 하였다. 유자광은 오히려 옥사를 다스림이 느슨해져 제 뜻대로 다 되지 않을까 염려하여 밤낮으로 죄 만들기를 계획하였다. 하루는 소매 속에서 책 한 권을 내 놓으니 바로 김종직(金宗直)의 문집이었다.그 중에서 조의제문(弔義帝文)과 술주시(述酒詩) 술주시는 유유(劉裕)가 임금을 죽인 죄를 꾸짖고 도연명(陶淵明)의 충분(忠憤)한 뜻을 표현한 것이다. 를 들추어 내어 여러 추관(推官)에게 두루 보이면서, “이것은 모두 세조를 가리켜 지은 것인데 김일손의 악한 행실은 모두 김종직이 가르쳐서 그렇게 된 것이다.” 하고 제가 주석을 달아 글귀마다 해석하여 폐주로 하여금 알기 쉽게 하고 이내 아뢰기를,“김종직이 우리 세조를 비방하고 헐뜯었으니 마땅히 대역부도(大逆不道)로써 논죄하고, 그가 지은 글은 세상에 전파해서는 안 되니 아울러 모두 불살라 없애야 될 것입니다.” 하였다. 폐주는 그 말을 따라 김종직의 시문을 간직하고 있는 자는 이틀 안으로 각기 자진해서 바치라 하고 빈청(賓廳)의 앞뜰에서 불사르게 하며,또 여러 도의 관사에 써 붙인 현판은 모두 그 곳에서 떼어 없애도록 하였다. 일찍이 성종(成宗)이 김종직에게 환취정(環翠亭)의 기문(記文)을 짓게 하여 문 위에 달아 두었었는데, 이것도 아울러 떼어 버리도록 청했으니 함양(咸陽)의 원한을 보복함이었다. 《유자광전(柳子光傳)》
○ 무오년 7월 17일에 교지를 내렸는데, 그 내용은, “김종직은 초야의 천한 선비로서 세조조에 과거에 오르고 성종께서 경연에 뽑아 두어 오랫동안 시종의 지위에 있어 벼슬이 형조 판서에까지 이르렀으니 임금의 총애와 은혜가 조정에서 으뜸이었다. 그가 병들어 벼슬에서 물러나니 성종은 오히려 그가 있는 고을 수령을 시켜 특별히 쌀과 곡식을 내려 주어 그 여생을 마치게 하였다.지금 그 제자 김일손이 편수한 사초 속에 부도한 말로 선왕조의 사실을 거짓으로 기록하고 또 그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기재하였는데 그 글 내용은 이러하다. ‘정축년 10월 □일에 내가 밀양(密陽)에서 경산(京山 성주(星州))으로 가다가 답계역(踏溪驛)에서 하룻밤을 유숙하였는데 그 날 밤 꿈에 풍채 좋은 신인(神人)이 칠장복(七章服)을 걸치고 와서는 「나는 초 회왕(楚懷王)의 손자 심(心)인데,서초 패왕(西楚覇王 항우(項羽))에게 죽음을 당하여 빈강(彬江 중국 남방에 있는 강)에 빠져 잠겨 있다.」 하고는 갑자기 보이지 아니하였다. 나는 깜짝 놀라 잠을 깨어 생각하니, 회왕은 남방 초(楚) 나라 사람이고, 나는 동이(東夷 조선(朝鮮))의 사람이다. 땅이 서로 만 리나 떨어져 있고 시대가 또한 천여 년이나 떨어져 있는데 내 꿈에 나타나는 것은 무슨 징조일까.또 역사를 상고해 보아도 강물에 던졌다는 말은 없는데, 아마 항우가 사람을 시켜 비밀히 쳐죽여 그 시체를 물에 던졌던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마침내 글을 지어 그를 조문하노라. 하늘이 사물과 법측을 마련하여 사람에게 주었으니, 누가 그 사대(四大)오상(五常)을 높일 줄 모르리오. 중화 사람에게만 넉넉하게 주고 동이 사람에게는 부족하게 준 것이 아니며 어찌 옛적에만 있고 지금은 없어졌으리오. 나는 동이 사람이고 천 년이나 뒤에 났는데도 삼가 초의 회왕을 슬퍼하노라. 옛날에 조룡(祖龍 진시황)이 어금니와 뿔을 휘두르니 사해의 물결이 모두 피로 물들었다. 비록 전어[鱣]ㆍ상어[鮪]ㆍ미꾸라지[鰍]ㆍ고래[鯢]인들 어찌 자신을 보전할 수 있으리오. 그 물에서 빠져 나오고자 하여 바쁘게 날뛰었다. 이때 6국(國)의 후손들은 세력이 없어지고 딴 곳으로 피란하여 겨우 평민과 같이 지냈다. 항량(項梁)은 남국(南國 초(楚))의 무장 집안의 자손으로서 진승(陳勝)에 뒤이어 일을 일으켰다. 회왕(懷王)을 찾아내어 백성의 바람을 따랐으니 멸망했던 초 나라를 다시 보존하게 되었다.건부(乾符)를 쥐고 천자가 되었으니, 세상에서 미씨(羋氏 초의성)보다 높은 이가 없었다. 장자(長者 유방(劉邦))를 함곡관(函谷關)에 들어가게 하니, 또한 그 인의(仁義)를 볼 수 있겠다. 양처럼 패려궂고 이리처럼 탐욕스럽게 관군(冠軍 송의(宋義))을 함부로 죽였는데도 어찌 그 항우를 잡아 처형시키지 않았는가.아아, 형세가 그렇지 못하였으니 나는 회왕(懷王)을 위해 더욱 두렵게 여긴다. 길러 놓은 자에게 도리어 해침을 당했으니, 과연 천운이 어긋났도다. 침(郴)의 산이 험하여 하늘에 닿으니 햇빛이 어둑어둑 저물려 한다. 침의 물이 밤낮으로 흐르니 물결이 넘쳐서 돌아오지 않는다. 영원한 천지간에 한이 어찌 다하리오. 혼령이 지금도 정처 없이 헤매고 있구나.나의 마음이 쇠와 돌을 뚫을 만하니 왕(회왕)이 갑자기 꿈에 나타났도다. 주자(朱子)의 필법을 따르려니 생각이 불안하고 조심된다. 술잔을 들어 땅에 부으니 영령(英靈)이 와서 흠향하기를 바라노라. ……’ 하였다. 그 글에 ‘조룡(祖龍)’이라 한 것은 진시황이니 종직이 의제(義帝 회왕(懷王))를 노산군(魯山君)에 비한 것이요.‘양처럼 패려궂고 이리처럼 탐욕스럽게 관군을 함부로 죽였다.’는 것은 세조가 김종서 죽인 것을 가리킨 것이며, ‘어찌 항우를 잡아 죽이지 않았느냐.’ 한 것은 노산군이 어찌 세조를 잡아 죽이지 않았느냐는 것이고, ‘길러 놓은 자에게 도리어 해침을 당했다.’는 것은 노산군이 세조를 잡아 죽이지 않았다가 도리어 세조에게 죽음을 당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주자(朱子)의 필법을 따른다.’는 것은 김종직이 자기 스스로 주자인 체 하여 마음 속으로 이 부(賦)를 지어 《통감강목(通鑑綱目)》의 필법에 견준 것이다. 김일손은 그 글을 칭찬하여 ‘충분(忠憤)한 마음을 나타낸 것이다.’ 하였으니,생각해 보면 우리 세조 대왕이 불안하고 위태한 시기를 당해서 간악한 신하가 반란을 도모하여 화란(禍亂)이 거의 일어나려 할 때 역적의 무리를 베어 죽이니 종사가 위태한 지경에서 다시 편안해져서 자손들이 서로 계승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공업은 매우 높고 크며 덕은 백왕에 뛰어난데, 뜻밖에 김종직이 그 제자들과 더불어 세조의 덕을 비방하고 김일손을 시켜 사초에 무함하여 쓰기까지 하였으니,이것이 어찌 짧은 시일에 만들어진 것이랴. 신하 노릇 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몰래 가지고 있으면서 세조ㆍ예종ㆍ성종의 세 임금을 두루 섬겼으니 내가 지금 생각해 보니 참혹하고 떨림을 금하지 못하겠다. 해당한 죄명을 의논하여 아뢰어라.” 하였다. 《이세영일기(李世英日記)》ㆍ《조야기문(朝野記聞)》
○ 유자광은 폐주의 노여움을 이용하여 한꺼번에 모조리 잡아 죽일 계획으로 윤필상(尹弼商) 등에게 눈짓하면서, “이 사람들의 죄악은 무릇 신하된 우리로서는 한 하늘 밑에서 함께 살 수 없는 원수이니 마땅히 그 무리들을 찾아내어 모두 죽여 없애야만 조정이 맑고 깨끗해질 것이요,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나머지 무리들이 일어나 얼마 안 가서 다시 화란(禍亂)이 생길 것입니다.” 하니 좌우에 있는 이들이 입을 다문 채 말이 없었다. 노사신(盧思愼)은 손을 흔들며 말리기를, “무령(武靈 유자광)은 어찌 이런 말까지 하시오. 옛날 당고(黨錮의 일을 듣지 못했습니까. 금고(禁錮)의 법망(法網)이 날로 혹독하여 선비의 무리들을 용납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한(漢) 나라도 뒤따라 망했으니 청류(淸流)의 의논이 마땅히 조정에 있어야 될 것이요, 청류의 의논이 없어지는 것은 나라의 복이 아닌데 무령은 어찌 틀린 말을 하시오.” 하니,유자광은 조금 기가 꺾이었으나 범죄 사실에 관련된 사람은 남김없이 죄를 다스리고자 하였다. 노사신이 또 말리기를, “당초에 우리들이 임금께 아뢴 것은 사초의 일뿐인데, 지금은 지엽(枝葉)으로 연루되어 사초 일에 관계되지 않은 사람도 잡혀 갇힌 이가 날로 늘어나니 이것은 우리들의 본 뜻이 아니오.” 하니 유자광은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유자광전》
○ 이목(李穆)이 태학(太學)에 있던 시절 글을 올려 윤필상(尹弼商)을 간악한 귀신이라고 지목한 일이 있었고, 조순(趙舜)이 정언으로 있을 때 노사신을 논박한 일이 있었다. 이때에 와서 윤필상은 이목이 일찍이 김종직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았다는 이유로 무함하여 죽이고 또 노사신에게, “조순도 죽여야 될 것이오.” 하니 노사신은 “이것이 무슨 말이오?” 하고 끝내 듣지 아니하였다. 《병진정사록》
○ 죄를 결정하는 날에 노사신이 홀로 의사가 같지 않으므로 유자광은 불쾌한 기색을 나타내면서 힐난하였다. 각자가 자신의 의견을 임금께 아뢰었는데 폐주는 유자광 등의 의논을 따랐다. 이날 대낮에 캄캄해지며 비가 퍼붓고 큰 바람이 동남쪽에서 일어나 나무를 뽑고 기왓장을 날려 보내니, 성 안의 백성들이 엎어지고 떨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유자광전》
○ 7월 27일에 난역(亂逆)한 신하를 처형했다는 사유를 종묘에 고하였으니 그 글의 대략에, “어찌 간사한 신하가 몰래 모반할 마음을 품고서 옛일에 가탁하여 문자에 드러낼 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흉악한 사람들이 당을 지어 세조의 덕을 모함하고 헐뜯으니 난역부도(亂逆不道)한 죄악이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하였다.사죄(赦罪)를 반포하는 글에는, “간사한 신하 김종직은 나쁜 마음을 품고 몰래 그 무리들을 모아 음흉한 계획을 시행하려고 한 지가 오래 되었다. 항적(項籍 항우)이 의제(義帝)를 죽인 일에 가탁하여 문자로 표현하여 선왕(세조)을 나무라고 헐뜯었으니 하늘에 닿을 정도로 악독한 죄를 진만큼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대역죄로 논단하여 관을 쪼개어 송장의 목을 베게 하노라.그 무리 김일손ㆍ권오복(權五福)ㆍ권경유(權景裕)는 간악한 덩어리로 뭉쳐서 서로 호응하고 도와 그 글(조의제문(弔義帝文))을 칭찬하기를 충분에서 나왔다고 사초에 기록하여 영원히 뒷세상에 전하고자 했으니 그 죄가 김종직과 같다. 아울러 능지처참하도록 한다. 김일손을 또 이목(李穆)ㆍ(허반(許磐)ㆍ강겸(姜謙) 등과 더불어 선왕의 일을 거짓 꾸며서 서로 전하여 말하고 사초에 썼으니 이목과 허반도 목을 베어 죽이는 형벌에 처하고, 강겸은 곤장 백 대를 치고 가산을 적몰하여 먼 변방에 보내어 관노를 만들게 한다.표연말(表沿沫)ㆍ홍한(洪瀚)ㆍ정여창(鄭汝昌)ㆍ무풍부정(茂豐副正) 총(摠) 등은 난언죄(亂言罪)를 범했고, 강경서(姜景敍)ㆍ이수공(李守恭)ㆍ정희량(鄭希良)ㆍ정승조(鄭承祖) 등은 난언을 알고도 고하지 아니하였으니 아울러 곤장 백 대를 치고 3천 리 밖으로 귀양 보낸다.이종준(李宗準)ㆍ최부(崔溥)ㆍ이원(李黿)ㆍ이주(李冑)ㆍ김굉필(金宏弼)ㆍ박한주(朴漢柱)ㆍ임희재(任熙載)ㆍ강백진(康伯珍)ㆍ이계맹(李繼孟)ㆍ강혼(姜渾)은 모두 김종직의 제자로서 붕당을 만들어 서로 칭찬하고 혹은 나라의 정치를 비방하여 세상의 일을 비평했으니, 임희재는 곤장 백 대를 치고 3천 리 밖으로 귀양 보내고,이주는 곤장 백 대를 쳐서 먼 변방에 부처시키고, 그 나머지 사람은 모두 곤장 80대를 쳐서 먼 지방에 부처시키되 귀양 간 사람들은 모두 봉수(烽燧)ㆍ노간(爐干)의 역을 맡게 한다. 성중엄(成重淹)은 곤장 80대를 쳐서 부처시키고, 이의무(李宜茂)는 곤장 80대를 쳐서 도년(徒年)에 처한다. 역사를 편수하는 관원으로서 김일손의 사초를 보고도 즉시 아뢰지 않은 어세겸(魚世謙)ㆍ이극돈(李克墩)ㆍ유순(柳洵) 윤효손(尹孝孫)ㆍ김전(金詮) 등은 관직을 파면시키고, 홍귀달(洪貴達)ㆍ조익정(趙益貞)ㆍ허침(許琛)ㆍ안침(安琛) 등은 좌천시킨다. 신하가 무장(無將)하고 이미 부도한 죄를 처단하였으니,우레 소리 섞인 비가 내림으로써 마땅히 정국이 혁신되는 은혜를 입게 될 것이라.” 하였다. 이에 좌의정 한치형(韓致亨) 등은 나아가 경하하였다. 《이세영일기》
○ 유자광은 바라던 일을 이루었으므로 의기양양하여 집에 돌아왔다. 이후로부터 자광의 위엄이 조정과 민간에 군림하였으니 조정에서는 그를 독사처럼 대하여 감히 그 뜻을 거스리지 못하고, 유림들은 기운이 꺾여서 발을 움직이지 못하고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학문하는 곳은 두서너 달 동안에 글 읽는 소리가 끊어지고,부형들은 서로 경계하기를, “학문은 과거나 볼 만하면 그만이지 무엇 때문에 많이 하리오.” 하였다. 유자광은 스스로 훌륭한 계책을 얻은 듯이 꺼리는 일이 없었으니, 이익만을 탐하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무리들이 문간에 가득 차게 되었다. 견식이 있는 이는 가만히 탄식하기를, “무술년의 옥사는 정인(正人)이 간악한 무리를 공격한 것이고, 무오년의 옥사는 간악한 무리가 정인의 무리를 죄에 빠뜨린 것이다.20년 사이에 한 번은 이기고 한 번은 패했으니 나라의 치란도 이에 따라 달라졌다. 대개 군자가 형벌을 쓸 적에는 항상 너그러이 시행하는 데서 실수가 생기고, 소인이 원망을 보복할 적엔 반드시 남김없이 멸망시키고야 마니, 무술년에 군자들이 그 형벌을 끝까지 시행하였더라면 어찌 오늘의 화가 있었으리오.” 하였다. 《유자광전》
○ 윤필상ㆍ노사신ㆍ한치형 등에게 각기 반당(伴倘 배종(陪從)하는 하인) 10명ㆍ노비 13명ㆍ구사(丘史) 7명ㆍ밭 100결(結)ㆍ옷의 안팎 감ㆍ구마(廐馬) 등 물건을 내려 주고 유자광 이하 사람에게는 차등을 두어 상을 주었다. 의금부 도사들에게는 말을 하사하였다. 《이세영일기》
○ 김종직의 죄를 추론(追論)할 때에 대간이 생전의 관작만 깎아 버리자고 청하였더니, 너무 가벼운 벌을 논했다는 이유로 모두 죄를 입었다. 《점필재문집(佔畢齋文集)》은 조위(曹偉)가 편집하고 홍석견(洪錫堅)이 전라 감사로 있을 때 간행하였는데, 조위는 연경(燕京)에 가서 돌아오지 않았고 홍석견은 유자광이 구원하여 중한 형벌을 면하게 되었으니,함양(咸陽) 사람들이 김종직의 사우(祠宇)를 세우고자 할 때 홍석견이 “이것은 그의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이지 고을에서 공적으로 의논할 일은 아니다.” 고 하였으므로 이때에 유자광은 이 일을 들어 홍석견을 구원하였다. 《이세영일기》


 

[주D-001]사대(四大) :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에 있는 말인데, 도(道)ㆍ천(天)ㆍ지(地)ㆍ왕(王)의 네 가지가 크다는 것이다.
[주D-002]오상(五常) :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ㆍ신(信)의 다섯 가지를 말한다.
[주D-003]6국(國) : 전국시대(戰國時代)의 한(韓)ㆍ위(魏)ㆍ조(趙)ㆍ제(齊)ㆍ초(楚)ㆍ연(燕)의 여섯 나라를 말하는데, 모두 진(秦)에게 멸망 당하였다.
[주D-004]진승(陳勝) : 진(秦)의 2세 황제 때에 처음으로 반란을 일으킨 사람.
[주D-005]건부(乾符) : 왕위를 말한 것이다.
[주D-006]당고(黨錮) : 동한(東漢) 말년에 간신들이 천하의 명사(名士)를 명당(明黨)이란 죄명으로 일망타진하여 금고시킨 것을 말하는데, 금고라는 것은 다시 벼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주D-007]봉수(烽燧)ㆍ노간(爐干)의 역 : 산 위의 봉화를 관리하고 관청의 횃불을 맡은 천역.
[주D-008]신하가 무장(無將)하고 : “신하는 장(將)함이 없어야 하는데 장하면 반드시 베인다.[人臣無將 將則必誅]”는 말이 《춘추전(春秋傳)》에 있는데, 여기서 장은 장차 임금을 어떻게 하려 한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