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사화관련 기록 /갑자년의 사화

갑자년의 사화

아베베1 2011. 3. 28. 16:46

연려실기술 제6권
 연산조 고사본말(燕山朝故事本末)
갑자년의 사화


갑자년 봄에 임금은 그 어머니가 비명에 죽은 것을 분하게 여겨 그 당시 논의에 참여하고 명을 수행한 신하를 모두 대역죄로 추죄(追罪)하여 팔촌까지 연좌시켰으니, 그때 사약을 가져갔던 승지 이세좌(李世佐)의 친족도 연좌되어 화를 입었다. 《국조기사》
윤필상(尹弼商)ㆍ한치형(韓致亨)ㆍ한명회(韓明澮)ㆍ정창손(鄭昌孫)ㆍ어세겸(魚世謙)ㆍ심회(沈澮)ㆍ이파(李坡)ㆍ김승경(金升卿)ㆍ이세좌(李世佐)ㆍ권주(權柱)ㆍ이극균(李克均)ㆍ성준(成俊)을 십이간(十二奸)이라 하여 어머니를 폐한 사건에 좌죄(坐罪)시켜 모두 극형에 처하였다.윤필상ㆍ이극균ㆍ이세좌ㆍ권주ㆍ성준은 죽음을 당하고 그 나머지는 관을 쪼개어 송장의 목을 베고 골을 부수어 바람에 날려 보냈으며, 심하게는 시체를 강물에 던지고 그 자제들을 모두 죽이고 부인은 종으로 삼았으며 사위는 먼 곳으로 귀양보냈다. 연좌되어 사형에 처할 대상자 중에 미리 죽은 자는 모두 송장의 목을 베도록 하고 동성의 삼종(三從)까지 장형(杖刑)을 집행하고 여러 곳으로 나누어 귀양보내고, 《미수기언》에는, “한치형ㆍ윤필상ㆍ이극균ㆍ이파ㆍ성준ㆍ이세좌는 모두 그 가족을 멸망시켰다.” 하였다. 또 그들의 집을 헐어 못을 만들고 비(碑)를 세워 그 죄명을 기록하였다. 《미수기언》ㆍ《풍암집화》
○ 옥당의 여러 신하 즉 권달수(權達手)ㆍ박은(朴誾) 등도 모두 참혹한 형벌을 받았으니 예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다. 《국조기사》
○ 폐주의 음란한 행실과 잔학한 행위가 한창일 때 어떤 사람이 언문(한글)으로 폐주의 악행을 기록하여 거리에 붙였다. 어떤 사람이 이것을 고하자 임금은 “이것은 그 당시 죄를 입은 사람의 친족들이 한 짓이다.” 하고 귀양간 사람을 다 잡아다 곤장을 치고 참혹하게 고문하였다. 또 온 나라에 언문을 익히지 못하게 하였다. 《동각잡기》
이때 신수영(愼守英)이 임금에게 총애를 받아 권세를 부렸는데, “익명서(匿名書)로 조정을 비방한 것은 죄를 지은 자들이 마음에 불평을 품고 원망한 것입니다.” 하여 드디어 갑자년에 사화가 있게 되었다. 《미수기언》
○ 봄에 응교 권달수와 이행(李荇) 등을 옥에 가두었는데, 권달수는 사형에 처하고 이행은 곤장을 쳐서 충주(忠州)로 귀양보냈다. 《용재집(容齋集)》 위의 윤비 복위(尹妃復位) 조에 상세하다.
○ 4월에 박은을 동래로 귀양보냈다가 6월에 서울 옥으로 옮겨 가두어 혹독한 고문을 하고 마침내 사형에 처하였다. 이행은 박은의 일에 연좌되어 다시 곤장을 치고 유배지로 돌려 보냈다. 《용재집》
○ 엄숙의(嚴淑儀)와 정숙의(鄭淑儀)를 안뜰에서 함부로 마구 때려서 죽이고, 즉시 그 흔적을 없애 버렸다. 그의 아들 안양군(安陽君) 항(㤚)과 봉안군(鳳安君) 봉(㦀)도 섬에 귀양보냈다가 조금 후에 죽였다. 인하여 말하기를, “행과 봉은 이미 그 아내와 인연을 끊었으니 그 아내는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내라.” 하였다. 《연산사적록(燕山事蹟錄)》
이때 임금이 성을 내어 엄숙의와 정숙의를 때려 죽이니, 소혜왕후(昭惠王后)는 병들어 자리에 누웠다가 갑자기 일어나 바로 앉으면서, “이 사람들이 모두 부왕의 후궁인데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하니, 폐주가 자신의 머리로 몸을 들이 받았다. 이에 왕후는 “흉악하구나.” 하며 자리에 눕고 말하지 아니하였다. 《소문쇄록》
○ 이보다 앞서 임사홍(任士洪)과 박효원(朴孝元) 등은 서로 결탁하여 간악한 짓을 하므로 성종(成宗)은 그들이 정치를 어지럽게 할 사람인 줄 알고 쓰지 아니하였다. 임사홍의 아들 광재(光載)는 예종(睿宗)의 딸에게 장가를 들고 숭재(崇載)는 성종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숭재는 성질이 음흉하고 간사하기가 그 아버지의 배나 더하였다.남의 첩을 빼앗아 임금에게 바치니 임금이 그를 매우 총애하여 그의 집에 자주 행차하였다. 이에 사홍은 임금을 뵈옵고 울면서, “폐비(연산군의 어머니) 는 엄숙의ㆍ정숙의 두 사람의 참소로 사약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니, 임금은 드디어 두 사람을 죽이고 무도한 짓을 마음대로 행하여 조정에 있는 신하 백여 명을 죽였으니,지위가 높고 행동이 점잖은 사람과 명분과 절의를 지키는 선비 중에 죽음을 면한 이가 드물었다. 이 일은 모두 임사홍이 사적인 감정을 품고 임금을 유도한 것이다. 《국조기사》
○ 우리 조정(이조(李朝))에서 많은 인재를 배양한 것으로 치자면 성종만한 임금이 없었으나, 다만 임사홍의 간사함을 알지 못하여 채수(蔡壽) 등이 사홍을 논박할 때 그들을 함께 물리침으로 해서 임사홍의 간사함을 천천히 길러 연산군의 음란하고 포악한 행실을 돕게 하여 종사(宗社)가 거의 위태할 뻔 했으니 애석한 일이다. <축수편>
○ 공신옹주(恭愼翁主) 엄씨(嚴氏)가 낳았다. 는 한경침(韓景琛)에게 시집가서 일찍이 혼자 되었는데, 이 때에 아산(牙山)으로 귀양가면서 신주를 안고 가서 아침 저녁으로 반드시 울고 전(奠)을 드렸다. 중종(中宗) 2년에 정문(旌門)을 세웠다. 《여지승람(輿地勝覽)》
○ 9월 29일에 전교하기를, “무오년 사초 사건으로 그 무리들을 지방으로 귀양보냈는데, 그 당시에 간사하고 음흉한 무리들이 사사로운 정리로 죽일 자를 살리고 살릴 자를 도리어 죽였으니 이 무리들을 두었다가 어디 쓸 것인가. 모두 잡아 오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무오년의 무리들은 재주를 믿고 서로 결탁하여 조정의 일을 비난했으니, 난신을 처단하는 전례대로 모두 죄를 더 주라.” 하였다. 《국조기사》
○ 10월에 남효온(南孝溫)을 추형(追刑)하여 관을 쪼개고 시체의 목을 베었다. 그 아들 충세(忠世)도 죽였다.
성종 신묘년에 남효온이 소를 올려 소릉(昭陵)을 회복하자고 청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이때에 와서 역적으로 지목되고 죄 없는 사람도 얽어서 죄를 만들어 모두 죽였다. 갑자년의 사화는 무오년보다도 더 심하였다. 《국조기사》
○ 참찬 홍귀달(洪貴達)ㆍ응교 권달수(權達手)ㆍ주계군(朱溪君) 심원(深源)ㆍ이조 정랑 이유녕(李幼寧)ㆍ정자(正字) 변형량(卞亨良)ㆍ전한(典翰) 이수공(李守恭)ㆍ사간 곽종번(郭宗藩)ㆍ헌납 박한주(朴漢柱)ㆍ사간 강백진(康伯珍)ㆍ응교 최부(崔溥)ㆍ홍문 박사(弘文博士) 성중엄(成重淹)ㆍ좌랑 이원(李黿)ㆍ김굉필(金宏弼)ㆍ신징(申澄)ㆍ직제학 심순문(沈順門)ㆍ대사간 강형(姜詗)ㆍ직제학 김천령(金千齡)ㆍ부제학 정인인(鄭麟仁)ㆍ정언 이주(李冑)ㆍ보덕 조지서(趙之瑞)ㆍ승지 정성근(鄭誠謹)ㆍ현감 정여창(鄭汝昌)ㆍ정랑 성경온(成景溫)ㆍ교리 박은(朴誾)ㆍ참판 조위(曹偉)ㆍ감사 권주(權柱)ㆍ정랑 강겸(姜謙)ㆍ승지 홍식(洪湜)ㆍ환관 김처선(金處善)은 혹은 김종직(金宗直)의 제자라는 이유로 혹은 바른 말로 간했다는 이유로 모두 참혹한 화를 당하였고, 이미 죽은 사람은 모두 시체를 욕보였다.
○ 9월에 지난 날 폐비의 휘호를 반대하던 것을 다시 추론(追論)하여 이행(李荇)을 옥에 가두고 고문하니 거의 죽을 뻔하였고, 12월에 사형을 감면하여 곤장을 치고 함안(咸安)에 소속된 관노로 삼았다. 《용재집》
○ 당양군(唐陽君) 홍상(洪常)은 함평(咸平)으로 귀양갔다가 얼마 뒤에 안성(安城)으로 옮겼다. 또 거제(巨濟)로 귀양갔다가 제주(濟州)로 옮겼다. 중종반정(中宗反正) 후에 불러 돌아왔다. 《용재집》
○ 을축년 가을 8월에는 또 익명서(匿名書)로 인하여 이행을 잡아 가두고 고문하였고 병인년 1월에 거제(巨濟)로 귀양보냈다가 가을에 다시 잡아 가두고 죽도록 곤장을 치게 하였는데, 유배지로 떠나려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 마침내 면하였다. <용재행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