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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년에 정국(靖國)하여 중종(中宗)을 추대하다

아베베1 2011. 3. 28. 16:47

연려실기술 제6권
 연산조 고사본말(燕山朝故事本末)
병인년에 정국(靖國)하여 중종(中宗)을 추대하다


폐주가 들로 사냥을 나갈 때, 당시 진성대군(晋城大君)이었던 중중(中宗)이 모시고 따라갔다. 사냥을 마치고 난 뒤에 임금은 준마를 타고서 중종에게 말하기를, “나는 흥인문(興仁門)으로 들어갈 터이니 너는 숭례문(崇禮門)으로 들어오라. 나보다 뒤에 오면 마땅히 군법으로 다스리겠다.” 하니 중종이 매우 두려워하였다. 영산군(寧山君) 전(恮)이 가만히 아뢰기를, “걱정마십시오.내 말은 임금이 타신 말보다 매우 빠른데, 내가 아니면 제어할 수 없습니다.” 하고, 즉시 하인 옷으로 바꾸어 입고 말고삐를 잡고 따라가니 말이 나는 듯이 달려갔다. 대궐 문에 이르니 조금 후에 임금이 이르렀다. 이에 중종이 죽음을 면하였으니 사람들은 “영산군과 그 말은 모두 중종을 위하여 때를 맞추어 난 것이다.” 하였다. 《부계기문(涪溪記聞)》 ○ 영산군은 곧 중종의 서형(庶兄)인데 그 당시 이름이 있었다. 후에 이과(李顆)의 옥사에 관련되어 정국공신(靖國功臣)에게 살해되었다 한다. 살펴보건대 이과의 옥사는 중종 2년에 있었고, 영산군은 중종 8년에 막개(莫介)가 반역을 고발한 박영문(朴永文)ㆍ신윤무(辛允武) 등의 옥사에 관련되어 귀양갔다가 이홍간(李弘幹)의 아룀으로 인하여 석방되었다.
○ 성희안(成希顔)은 성종(成宗) 때에 옥당에 뽑혀 들어가서 은혜와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다. 폐주가 왕위를 이은 뒤에 양화도(楊花渡) 혹은 망원정(望遠亭)이라 한다. 에 임금을 따라 놀러 갔다. 따라간 신하들에게 시를 짓도록 명하자 성희안이 “임금은 본래 청류(淸流)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글귀를 지으니, 임금이 매우 노하여 자신을 비난하는 글이라고 여겼다.이로 인해 드디어 이조 참판의 벼슬자리에서 떨어져 집에 있었다. 성희안은 평소에 뛰어난 지략이 있었는데 폐주의 어지러운 정사가 날로 심해지는 것을 보고는 분개하여 반정(反正)할 뜻이 있었다. 그러나 함께 계획할 사람이 없으므로 도와줄 이가 없는 것을 답답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지중추 박원종(朴元宗)은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처남인데,부귀한 집에서 자라났으나 기상이 크고 얽매임이 없어 시정(市井)에 드나들다가 무과에 올라 중요한 관직을 두루 지냈다. 풍채가 좋고 일찍 귀한 신분이 되었기 때문에 무사들이 그를 높이 받들었다. 마침내 기절을 꺾고 글을 읽어 대의에 통하여 시류에 편승하지 않았다. 또 그 누이가 임금에게 몸을 더렵혀 병이 나서 죽은 것으로 인하여 마음 속으로 항상 불평을 품고 분하게 여기었다.성희안은 박원종이 큰 일을 부탁할 만한 사람이라고는 여겼으나 서로 교분이 없었다. 동리 사람 신윤무(辛允武)란 이가 두 집에 다니면서 매우 친근하였으므로 성희안이 신윤무를 시켜 가만히 의향을 물어보니 박원종은 옷소매를 떨치고 일어나면서, “이는 내가 밤낮으로 마음 속에 품고 있던 것이다.” 하였다. 이에 성희안은 저녁에 박원종의 집으로 가서 서로 통곡하고,“우리가 평생에 충성과 절의를 지켜 왔으니 마땅히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 것입니다. 대장부의 죽고 사는 것은 명에 달렸으니, 종사의 위태함이 경각에 있음을 보고 어찌 구제하지 않으리오.” 하고, 드디어 의논을 결정하였다. 몇 개월 지나는 동안 스스로 고립되어 성공하기 어려움을 염려하다가, 이조 판서 유순정(柳順汀)이 당대의 명망 있는 이라 그에게 알리지 않을 수 없다 하여 그들의 의사를 알리니,유순정은 한참 동안 머뭇거리다가 이왕 이 일에 참여하여 들었으므로 마지못하여 따라올 뿐이었다. 드디어 신윤무와 군기시 첨정 박영문(朴永文)ㆍ사복시 첨정 홍경주(洪景舟) 등에게도 두루 알려서 각기 동지를 불러 모으게 하니 모여든 자는 대개 무사가 많았다. 이들은 의리는 헤아리지 않고 공을 세우기를 좋아했으므로 의논함이 없어도 의견이 서로 맞아 곳곳에서 좋아 날뛰었다. 《음애일기》 《동각잡기》
○ 박원종 등은 귀양갔던 이과(李顆)가 병사(兵使)ㆍ수사(水使)ㆍ수령들과 함께 본도(本道)의 군사와 군마를 거느리고 올라온다는 말을 듣고 시기를 앞당겨 먼저 거사하였다. 《기묘속록(己卯續錄)》
이때 유빈(柳濱)ㆍ이과ㆍ김준손(金駿孫) 등은 호남으로 귀양가 있었는데, 임금의 음란함이 날로 심하여 사직이 위태로움을 보고 중종(中宗)을 추대하려고 격서(檄書)를 서울로 보냈는데, 그 격서가 이르기 전에 벌써 반정(反正)이 되었다. 그 격서의 대략에, “태조는 힘들고 어려운 처지에서 나라를 창업하였으며,세종은 덕화가 밝았고 성종(成宗)은 한결같이 선대의 법도를 따라 용도를 절약하고 사람을 사랑하였기에, 백성이 편안하고 물질은 풍성하여 태평한 세상이 되었더니 뜻밖에 뒤를 이은 임금이 포학 무도하여 부왕의 후궁을 때려 죽이고, 옹주와 왕자를 귀양보내 죽이었다. 간언을 올리는 대간을 귀양보내고 죽였으며, 대신을 욕보이고 충직하고 선량한 신하를 죽여,이들 부자ㆍ형제들까지 연좌시키는 것이 진(秦) 나라 법보다 더 심하였다. 무덤을 파서 해골에까지 화가 미치게 되었으니 시체를 토막토막 베는 형벌과 뼈를 부수는 형벌은 무슨 형벌인가. 남의 아내와 첩을 빼앗아 마음대로 음욕(淫慾)을 행하고 남의 집을 부수어 원유(園囿)를 넓히었다. 선왕의 능침은 모두 여우와 토끼의 놀이터가 되고, 선성(先聖)의 사우(祠宇)는 곰과 범을 기르는 우리로 변하였다.세금을 한없이 많이 거두니 백성들은 생계를 유지해 나갈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종실 형제들의 아내와 첩까지도 핍박하여 서로 간통하고, 삼년상은 예로부터 다 행하는 것인데도 그 기한을 짧게 줄이고, 부모의 기일도 또한 모두 폐지시켰으니, 인륜은 무너지고 인도가 없어졌다. 그밖에 토목 공사와 노래ㆍ여색을 즐기고 못을 파며 대(臺)를 쌓고 사냥을 일삼으며 새ㆍ짐승과 화초를 좋아하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다.많은 죄가 걸ㆍ주(桀紂)보다도 오히려 더 심하니, 백성들의 한때의 고생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만일 크게 간악한 자가 신기(神器 왕위(王位))를 엿보아 하루 아침에 일어난다면 왕조가 바뀌는 화가 생길 것이 두렵다. 성종이 26년 동안 신하들을 잘 대우하고 충의(忠義)를 배양한 것은 바로 오늘을 위해서이다.진성대군(晋城大君)은 성종대왕의 친 아드님이니 어질고 덕이 있어 온 나라의 칭송이 그에게 돌아간다. 이에 아무 아무 등은 진성대군을 추대하여 아무 달 아무 날에 의병을 일으키려 한다. 격서를 모든 도에 돌려서 기일을 약속하여 서울로 모일 것이니, 조정에 있는 공경(公卿)과 백관들은 마땅히 진성대군을 추대하여 종실의 위태함을 붙들라. ……” 하였다. 《동각잡기》
○ 병인년 9월 2일에 폐주가 장단(長湍)의 석벽(石壁)에서 놀고자 할 때 따라가는 재상들에게 다만 하인 한 사람만 데리고 가게 하였다. 성희안(成希顔)은 그날 성문을 닫아 막고 진성대군을 추대하기로 벌써 계획이 이루워졌는데 폐주가 마침 장단에 가려던 계획을 취소하였다. 장수와 병졸들은 분발하려는 생각에 기밀한 일이 이미 누설되었으므로 형세가 중지할 수 없게 되었다.이에 초하룻날 밤중에 장수와 병졸들을 훈련원에 모이게 하니 약속을 같이 한 모든 벼슬아치ㆍ군사ㆍ백성들과 풍문을 들은 자들이 다투어 달려왔으므로 골목과 길이 꽉 막히었다. 이에 부서를 나누어 변수(邊修)와 최한홍(崔漢洪)은 내성(內城) 동쪽을 지키게 하고 심형(沈亨)과 장정(張珽)은 내성 서쪽을 지키게 했는데, 창졸간에 군사가 없으므로 역군(役軍)들을 몰아서 호위하게 하였다. 성희안은 유순정ㆍ박원종과 함께 바로 광화문(光化門) 혹은 돈화문(敦化門)이라고도 한다. 앞 수백 보 쯤 되는 지점에 나아가서 말을 세우고 진을 쳤다. 《국조보감(國朝寶鑑)》에는, “밤 삼경에 창덕궁(昌德宮) 어귀에 진을 쳤다.” 한다. 박원종은 부채를 휘두르며 군사를 지휘하였는데 그 모습이 신과 같아 모두 “이 일을 먼저 발의한 이는 반드시 박영공(朴令公 박원종)일 것이다.” 하였다. 《음애일기》ㆍ《동각잡기》
○ 처음에 성희안이 우의정 김수동(金壽童)에게 가서 이 계획을 고하니 김수동은 “이는 나라의 큰 일이오. 나는 애초에 그 일의 내용을 알지 못하는데 갑자기 한 재상의 말만 듣고 바쁘게 서둘 수 있겠는가.” 하고 곧 베개를 베고 누우면서, “그대는 내 머리를 베어 가라.” 하고 이어 목을 내밀어 책상 위에 얹었다.성희안이 진성대군을 세운다는 뜻을 고하니, 수동은 “그렇다면 내가 마땅히 갈 것이니 그대는 먼저 가시오.” 하였다. 성희안이 일어나 나가자 수동은 천천히 의관을 정제하고 사람들을 벽제(辟除)하면서 왔다. 이때 성희안과 박원종 등은 모두 군복을 입고 창덕궁 앞에 진을 치고 있었다. 김수동은 진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서는 곧장 윗자리로 가 앉았다.즉시 병조 판서를 불러, “그대들은 사람을 보내 진성대군(晋城大君) 집을 호위했느냐?” 하니, “미처 못했습니다.” 하므로, “마땅히 판서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호위하라.” 하였다. 《전언왕행록(前言往行錄》 《해동악부》
○ 이때 형조 정랑 장정(張珽)이 칼을 뽑아 들고 앞으로 나와, “진성대군의 저택이 매우 허술한데 어찌 시위를 아니하는가.” 하니, 세 대장(大將 성희안ㆍ박원종ㆍ유순정)은 두 손을 마주 잡으면서, “우리들의 실수이다.” 하였다. 이에 드디어 심순경(沈順經)을 보내어 위사(衛士)를 거느리고 가서 호위케 하니, 장정은 후에 일등공신으로 책정되었다. 《기재잡기》
운수군(雲水君) 효성(孝誠) 덕천군(德泉君)의 둘째 아들이다. 이등공신으로 책정되었다. 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시위하게 하였다. 《기묘속록》
○ 신윤무(辛允武)를 시켜 용사 이심(李) 등 10여 명을 거느리고 가서 연산군을 꾀어서 악한 짓을 하게 한 신수영(愼守英)을 먼저 쳐 죽이고 그 다음은 임사홍(任士洪) 좌참찬 과 신수근 좌의정 등을 쳐 죽이게 했으니, 신윤무는 이심을 시켜 쇠몽둥이를 가지고 길 왼쪽에 숨어 있게 하고,한편 별감 한 사람을 시켜 명패를 가지고 가서 대궐에 가도록 그들을 재촉하게 하였다. 그들이 놀라서 창황히 대궐로 가는데 이심이 힘껏 내려쳐서 말에서 떨어 뜨리니 머릿골이 다 쏟아져 나왔다. 신수근도 맞아서 땅에 떨어지니 종 하나가 그 위에 엎드려 제 몸둥이로 쇠몽둥이를 막았다. 이에 이심은 드디어 종까지 함께 쳐 죽였다. 신수겸(愼守謙)은 이때 개성 유수였으므로 일이 성공하기를 기다려 천천히 사람을 보내어 죽이기로 하였다.
신수근 등이 비록 권세를 빙자하고 임금의 총애를 믿어 사치하고 방자하였으나, 그 당시에 음란한 임금에게 아부하여 나라의 근본을 기울게 한 자가 어찌 그 사람뿐이리오. 그런데 홀로 이 세 사람만 베어 죽인 것은 신수근이 본래 교만하고 방자스러워 법규에 따르지 않았으며, 또 국구가 되면 세력이 강하여 제어할 수 없게 될까 염려한 까닭이었다. 《음애일기》
○ 이심은 네 사람을 죽였으므로 튀긴 피가 얼굴에 가득히 묻었고 의복도 전부 붉게 물들었다. 그 공로를 남에게 보이고자 며칠이 지나도록 낯을 씻지도 않았으며 옷을 바꾸어 입지도 않았으니, 보는 사람들은 모두 그를 추하게 여겼다. 《음애일기》
○ 처음에 반정하려는 의논이 결정될 적에 세 대장이 “아무 아무는 죽여야 된다.” 하였는데, 강혼(姜渾)의 이름도 나왔다. 일을 일으키던 날에 유순(柳洵)을 묵은 정승이라 하여 부르니 유순이 달려갔다. 이때 시간이 삼경도 되지 않았는데 벽제(辟除)를 하면서 대궐에 나아가는 도승지 강혼을 만났다.이에 유순이 하인을 시켜 이르기를, “오늘은 너무 이르니 반드시 경고(更鼓)의 시간을 잘못 들었을 것이오. 영감(令監)은 내가 가는 대로 꼭 따라 오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말 못한 일이 있을 것이오.” 하니, 강혼은 의아스럽게 여겨 이내 그 뒤를 따라갔다. 남소문(南小門) 어귀에 이르러 멀리 바라보니 훈련원에 사람과 말이 빽빽히 들어차고 등불이 휘황하였다. 유순은 말을 멈추면서,“오늘은 나를 뒤따라 잠시도 떠나지 마시오. 큰 일이 닥쳐 왔소.” 하니, 강혼은 그제야 매우 두려워하여 말에서 내려 유순을 가깝게 따라 나아가니 세 대장은 유순을 보고 일어나서 자리를 양보하였다. 자리에 앉은 뒤에 박원종이 눈을 부릅뜨고 강혼을 보면서, “이 이가 누구요?” 하니 유순은 “강혼인데 내가 데리고 왔소.” 하였다. 박원종이 “전에 약속이 있어 먼저 죽이기로 했으니 지금 남겨둘 수 없소.” 하니,유순은 움찔하면서 말이 없었다. 유순정이 이를 보고 급히 박원종에게 “지금 요란한 시기에 서기(書記)할 사람이 없으니 서기를 맡겼다가 뒤에 죽여도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였으므로, 박원종이 투덜거리다 말았다. 강혼은 드디어 소매를 걷어 올리고 붓을 잡고 이쪽 저쪽 다 받아 써서 능히 알맞게 하니 모두 다 잘한다고 하였다. 결국은 공신으로 책정되어 진천군(晋川君)이 되었다.
이로부터 강혼은 유순을 부형처럼 섬겨 아침 저녁으로 반드시 가서 뵈옵고 새로운 음식이 있으면 반드시 올렸다. 유순이 죽은 후에는 그 부인을 섬겨 조금도 게을리한 적이 없었다. 《기재잡기》
○ 구수영(具壽永)은 임금의 음란한 행실을 인도하고 악을 퍼뜨린 죄가 있어 아울러 죽이려고 했는데, 그 족질(族姪) 구현휘(具賢暉)가 반정의 계획에 참여했으므로 구수영에게 달려가서 고하였다. 구수영이 훈련원에 나아가서 살려주기를 애걸하니 박원종 등이 그를 용서해 주었다. 《음애일기》
구현휘는 곧 구수영의 동성(同姓) 서얼(庶孼)이었다. 용력(勇力)이 뛰어나 세 공신(성희안ㆍ박원종ㆍ유순정)의 계획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곧 일을 일으키려 할 때 장차 구수영이 화를 면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세 공신이 밤에 한 곳에 모여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구수영에게 가만히 알려서 술과 안주를 가지고 함께 세 공신이 모인 곳으로 나아갔다.구수영은 구현휘의 소개로 세 공신을 보고, “일찍이 평소 궁궐에 드나들면서 올바른 말로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했으니, 임금의 뜻을 감히 거스리지 못하고 명대로 거행한 일이야 어찌 없었다 할 수야 있겠습니까. 그러나 척당이 된 관계로 처지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또 사위 구수영의 사위 두 사람은 안양군(安陽君) 항(㤚)과 임희재(任熙載)이다. 가 화를 입고난 뒤에는 더욱 감히 임금의 뜻을 거스르는 일은 할 수 없었지마는 그 본 마음이야 어찌 척당의 연줄을 타고 또 그것을 믿고서 다른 사람을 해친 일이 있겠습니까. 나를 용서하든지 죄를 주든지 다만 오늘에 달려 있습니다.” 하니,세 공신도 그렇게 여겨 같이 술잔을 나누고 헤어졌다. 마침내 반정 계획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뒤에 공신을 책정할 때 구수영은 2등공신이 되고 구현휘는 3등공신이 되었다. 구씨가승(具氏家乘) ○ 《기재잡기(寄齋雜記)》에는, “구수영은 박원종 등이 광화문(光化門) 밖에서 진을 쳤다는 말을 듣고 온 집안이 목놓아 울었다. 한 건장한 종이 있어,‘사람의 죽고 사는 것은 천명에 달려 있으니 어찌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겠습니까.’ 하고 급히 좋은 안주와 술을 갖추어 말을 타고 종들을 거느리고 벽제 소리를 내며 몰려 가서 세 대장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세 대장은 밤새도록 한데서 앉아 있었으므로, 시장하여 먹고 싶던 차에 종이 안주와 큰 술잔을 차례로 바쳤더니 여러 사람들은 그것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 묻지도 않고 문득 너댓 잔씩 다 마시고 나서야,‘이것이 뉘집 물건이냐?’ 고 물으니 종은 구수영을 가리키면서, ‘구대감께서 가져온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세 대장은 서로 돌아보면서 깜짝 놀랐다. 종은 ‘오늘의 모임에는 이것이 큰 공을 이룰 것인데 이것이 아니면 여러분들이 매우 시장하신데 어찌 큰 일을 마칠 수 있습니까.’ 하여, 드디어 구수영이 공신으로 책정되었다.” 하였는데,이 말은 너무 이치에 맞지 않는다. 광화문에서 진을 치고 있을 때는 사람들을 살리고 죽이고 할 명부를 이미 만들어 의논을 정하고 있었다. 죄가 종사(宗社)에 관계되면 당장 국구가 될 사람도 오히려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찌 좋은 술과 안주의 공으로 이심(李)의 쇠몽둥이를 피하고 도리어 공신으로 책정되었으랴.또 과연 술과 안주로 화를 면했다면 어찌 2등공신 13명 안에 들어갈 수 있으리오. 기재(寄齋)의 시대는 음애(陰涯) 보다도 더욱 멀었으니 전문(傳聞)이 잘못되었음은 괴이할 것이 못된다.
○ 이때 여러 사람의 의논이 “유자광(柳子光)은 일을 많이 겪어 꾀가 많으니 이 일을 알리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거사할 임시에 이르러서야 사람을 보내어 일러주고 또 만약 숨거나 머뭇거리면 때려 죽이겠다고 경계하였다. 유자광은 이 말을 듣고 말을 타고 군복을 입고 나갔다. 또 심부름하는 종을 시켜 두꺼운 유지(油紙) 비옷을 싸 가지고 따라오게 하니, 사람들이 그 뜻을 알지 못하였다. 진중(陣中)에 와서 장수와 병졸을 파견할 때 급작스러워서 부신(符信)을 만들 만한 것이 없었다. 곧 유지를 오려서 부신을 만드니 사람들은 그 지혜에 탄복하였다. 《동각잡기》
○ 박원종은 심순경(沈順徑)과 더불어 교분이 매우 가깝고 정의가 아주 친하여 서로 간격이 없었으나 큰 계획이 결정되지 않은 날에는 오히려 감히 그 일의 단서를 발표하지 못하였다. 어느 날 심순경을 대하여 술낌에 종사가 위태한 사실과 정사의 어지러운 일을 말하여 그 의사를 알아보니 심순경도 또한 동감임을 표시하였다.박원종은 그 누이가 죽으면서 반드시 원수를 갚아 달라는 부탁이 있었음을 남김없이 말하고 심순경은 또 그 가문의 화가 참혹했던 것을 말하였다. 이에 눈물을 거두고 의논을 정하고 나서는 비록 처자와 형제일지라도 이 일을 알리지 아니하였다. 일을 일으키는 날에 심순경은 그 어머니에게 “오늘은 여러 친구들과 교외에서 무예를 연습하고 활 쏘기를 겨루고자 하니 술을 마시고 얼근히 취해서 가겠습니다.” 하니 어머니가 술을 주었다.술을 다 마시고 난 후에 꿇어앉아 술 한 잔을 그 어머니에게 드리면서, “이것은 어머니의 장수를 비는 장수 술잔입니다.” 하니, 그 어머니는 웃으면서 받았으니 실상 그것이 영결하는 것인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의 누이는 종실 안현군(安賢君)의 아내인데 또한 술잔을 드리고 헤어졌다. 드디어 군기(軍器)와 군장(軍裝)을 검열하고 모두 가져 가서 해가 져도 돌아오지 않았으나 집안 식구는 오히려 알지 못하였다.밤이 새고 일 되어 가는 기틀이 잡힌 뒤에야 그 기미를 깨달았다. 그 누이는 남편과 함께 이불을 쓰고 서로 붙들고 울면서, “나는 죄를 많이 얻었으니 장차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인정도 적구나. 이 사람아, 친동기가 한 방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알리지 않는구나.” 하였다. 안현군은 대개 종실 중에서 임금의 악을 인도하여 사랑을 받은 자였다.그 어머니는 그 말을 듣고 민망히 여겨 곧 사람을 시켜 심순경에게 말하였다. 순경이 박원종에게 간청하여 안현군을 불러서 일을 같이 하게 하여 마침내 공신에 참여되었다. 《기재잡기》
○ 폐인(嬖人 임금에게 총애 받는 내시 등) 전동(田同)ㆍ김효손(金孝孫)ㆍ강응(姜凝)ㆍ심금손(沈今孫) 등을 군영(軍營) 앞에서 베어 죽였다. 감옥의 문을 열어 죄수들을 내놓아 모두 군에 참가하게 하였다. 날이 밝을 무렵에 대궐 밖으로 진군하였다.
○ 해가 뜰 무렵에 벼슬아치들이 모두 모였으나 무슨 이유인지 모르는 자도 있었다. 입직한 도총관 민효증(閔孝曾)과 참지 유경(柳涇)은 먼저 나가고 승지 이우(李堣)는 그 다음에 나갔다. 처음에 대궐 안에서는 변고가 났다는 말을 들었으나 그 까닭을 헤아리지 못하였다. 임금은 차비문(差備門) 안에 앉아 승지를 불러 들어와 앉게 하고서,“이 같이 태평한 때에 어찌 다른 변고가 있으랴. 아마 흥청(興淸)의 본부(本夫)들이 서로 모여서 도적질하는 것이니 빨리 정승과 금부 당상을 불러 처치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이우를 명령하여 열쇠를 가지고 대궐문을 돌아 다니면서 살피게 하였다. 이우는 먼저 사람을 보내어 사태를 알아 보게 하고 조정이 벌써 소속된 데가 있는 것을 자세히 알고는 그만 몸을 피해 밖으로 나가 버렸다.폐주는 이우가 벌써 나갔다는 말을 듣고 갑자기 앞으로 나아가서 윤장(尹璋)과 조계형(曹繼衡)의 옷소매를 잡았다. 두 사람은 거짓으로 공손히 하는 척하면서 소매를 뿌리치고 문구멍으로 빠져 나가려고 하였으나 조계형은 이때 임금의 총애를 받던 신하이므로, 문을 지키던 장사들이 상을 받으려고 붙들어 군영 앞에 나아갔다. 성희안(成希顔) 등은 그들을 모두 용서해 주었다.입직한 군사들은 혹은 수구(水口)로 빠져 나오기도 하고 혹은 성에서 줄에 매달려 넘어오기도 하며 다투어 군영 앞으로 달려갔다. 환관과 여러 색인(色人 궁중의 잡무를 맡는 사람들) 등은 모두 나가고 다만 후궁과 기생의 무리만이 서로 모여 목놓아 우니 소리가 밖에까지 진동하였다. 이에 군문(軍門) 안에서 회의를 열어 유자광(柳子光)ㆍ이계남(李季男)ㆍ김수경(金壽卿)ㆍ유경(柳涇)으로 하여금 머물러서 대궐 문을 지켜 도주할지 모르는 폐주를 지키게 하고,성희안 등은 백관을 거느리고 경복궁 문 앞에 나아가서 자순대비(慈順大妃 성종의 계비이며 중종의 어머니)에게 처분을 청하니 조금 후에 문을 열고 그들을 들어오게 하였다.
○ 대비에게 아뢰기를, “지금 임금이 임금의 도리를 잃고 정사가 어지러워 백성이 도탄에 빠지고 종사가 매우 위태하므로 모든 관원과 백성들은 진성대군을 추대하여 임금을 삼기 위하여 감히 대비의 명을 받으려고 합니다.” 하니, 대비는 “우리 아이가 어찌 중한 책임을 감당하겠오.지금 세자가 나이 장성하였으니 왕위를 이을 만하오.” 하고 사피하였다. 이에 유순(柳洵) 등이 여러 번 아뢰어서 명을 받았다. 《국조보감》
○ 성희안 등은 근정전(勤政殿) 서쪽 뜰에 나아가서 줄지어 앉고 유순정ㆍ정미수(鄭眉壽)ㆍ강혼을 시켜 진성대군을 그의 사저에서 맞아 오게 하였다. 진성대군이 평시서(平市署)의 이웃집으로 피해 가니 유순정 등은 이문(里門) 밖에 앉아 두 번 세 번 왕위에 오르기를 권하였다.이에 임금은 군복 차림으로 연을 타고 법물(法物)을 갖추어 나오니 저자에서는 가게 문을 닫지 않고 부로(父老)들은 만세를 부르면서 눈물을 흘리는 이도 있었다. 오시(午時)에 경복궁으로 들어가서 해가 저물기 전에 백관의 반열을 정하였다.
○ 유순 등이 의논하기를, “옛날부터 임금을 폐하고 새로 세울 적에 그 죄를 따진 것은 창읍왕(昌邑王)을 폐할 때 뿐이니 지금도 마땅히 잘 조처합시다.” 하고 승지 한순(韓洵)과 내시 서경생(徐敬生)을 창덕궁으로 보내어 폐주에게 국새(國璽)를 내놓고 정전(正殿)을 피해 나가도록 청하였다. 폐주는 “내가 내 죄를 안다.” 하면서 곧 국새를 내어 상서원(尙瑞院)의 낭관에게 주었다. 미시(未時)에 백관들이 전정(殿庭)에 들어와서 반열이 정해졌다. 《국조보감》
○ 대비의 교지를 선포하였는데, “우리나라가 백년 동안이나 덕을 쌓아 백성의 마음에 흡족하여 만년토록 튼튼한 왕업이 마련되었는데, 불행히도 사군(嗣君 연산군)이 임금된 도리를 잃어 백성이 도탄에 빠졌다. 모든 신하들이 말하기를, ‘종사(宗社)가 중요하니, 진성대군 휘(諱) 은 일찍부터 인덕이 있어 백성의 마음이 모두 쏠리었다.’ 하여 세우기로 하였다.내가 생각하건대 어두운 임금을 폐하고 밝은 임금을 세우는 것은 고금에 통하는 의리이니 이에 여러 사람의 소원에 따라 진성대군을 왕위에 오르게 하고 임금은 페하여 연산군(燕山君)으로 삼는다. 백성의 생명이 끊어지려다가 다시 이어졌으며, 종묘와 사직이 이미 위태했다가 다시 편안하게 되었다.” 하였다. 《국조보감》
○ 중종은 면류관과 곤룡포를 갖추어 입고 근정전에서 왕위에 올랐으며 이가 중종(中宗)이 되었다. 부부인(府夫人) 신씨(愼氏)를 왕비로 책봉하였다. 백관의 하례를 받고 교지를 반포하여 모든 죄인을 사면하였다. 연산주 때의 나쁜 정사를 모두 고치게 하니 신하들이 천세를 부르며 기뻐 고함치는 소리가 우레 소리와 같았다. 《국조보감》
○ 김수동(金壽童)이 대궐에 들어가서 연산주를 폐하고 울면서, “노신이 죽지 않고 있다가 차마 이 일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너무 인심을 잃었으니 또한 어찌 하겠습니까. 잘 보중(保重)하여 가시옵소서.” 하였다. 유자광(柳子光)은 곽광(霍光)이 창읍왕(昌邑王)을 폐했던 고사(故事)에 따라 전왕(前王 연산주)을 대궐 안으로 나오게 하고 대비에게 주(主 연산주)를 폐한 사유를 고하고자 하니 성희안(成希顔) 등이 말렸다. 폐하고 난 후에 전한(典翰) 김전(金詮)은 눈물을 흘리고 장순손(張順孫)은 춤을 추었다. 《음애일기》 《해동악부(海東樂府)》
대체 반정의 일은 성희안에게서 계획이 나와 박원종이 완성하였다. 위태함을 편안하게 만들고 재화를 복으로 변하게 하였으니 실로 우리나라가 만세(萬世)토록 뻗어나갈 사업이었다. 그러나 성희안은 성품이 과단성은 있었으나 학술이 없었으며, 유순정(柳順汀)은 천성이 너그럽고 나약하여 집념(執念)이 없었으며, 박원종은 추솔하고 사나우며 견식이 없었다.비록 충성과 절의에 북받쳐 공을 이루게 되었으나 일처리에 마땅함을 잃었으니, 전에 입은 은혜로 적신 유자광을 용납하여 뒷날의 화를 열어 놓고 자질구레한 인아친척(姻婭親戚)들에게 모두 철권(鐵券)을 주었으며, 뇌물의 많고 적음으로 훈공의 등급을 정하였으니 연거속구(連車續狗)의 허물은 지금까지도 비난거리가 되었다.
○ 폐주 연산군을 교동(喬桐)에 안치시키고, 폐비 신씨(愼氏)를 정청궁(貞淸宮)으로 나가 있게 하며 폐세자(廢世子) 황()ㆍ창녕대군(昌寧大君) 인(仁)ㆍ양평군(陽平君) 성(誠)과 돈수(敦壽)등은 모두 가마를 타고 귀양가게 하였다. 《국조보감》
변이 일어나던 처음에 폐주는 급히 활과 화살을 가지고 오라 했는데, 측근자들은 이미 밖으로 나가고 아무도 없었다. 이에 폐주는 창황히 달려 들어가서 왕비에게 함께 나가서 간절히 빌자고 하니, 왕비는 “일이 벌써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빌어본들 무엇이 도움되리오. 순하게 받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전일에 여러 번 간해도 끝내 고치지 않다가 지금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스스로 화를 초래한 사람이야 비록 죽어도 마땅하겠지마는 이 불쌍한 두 아이는 끝내 어찌될고.” 하며 이내 가슴을 치며 크게 통곡하니, 폐주는 머리를 숙이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한들 무엇하리오. 뉘우쳐도 어찌 할 수가 없다.” 하였다. 날이 새기 전에 왕비는 대궐에서 나가는데 신었던 비단 신이 자주 벗겨져서 갈 수가 없었으므로,비단 수건을 찢어 신을 동여 매었다. 세자와 대군은 유모와 함께 청파촌(靑坡村)의 무당 집에 나가 있었는데, 해가 저물도록 먹지 못했으므로 무당이 밥을 대접하였다. 대군이 “어찌 새끼 꿩을 올리지 않느냐?” 하니, 유모는 울면서, “내일은 이런 밥을 얻어 먹어도 다행일 것입니다.” 하였다. 이를 보는 자도 또한 눈물을 흘렸다. 《장빈호찬(長貧胡撰)》
○ 대신들은 폐주를 안치시킬 절목(節目)을 의논하여 나인 4명, 내시 2명, 반감(飯監) 1명만 따라가게 하고, 당상관 한 사람이 군사를 거느리고 호위하여 가게 하였다. 연산군은 붉은 옷에 갓을 쓰고 띠도 띠지 않고 내전문으로 나와 땅에 엎드리면서, “내가 큰 죄를 지었는데도 특별히 임금의 은혜를 입어 죽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였다.평교자(平轎子)를 타고 선인문(宣仁門)ㆍ돈의문(敦義門)을 나올 적에 갓을 숙여 쓰고는 머리를 들지 못하였다. 연희궁(衍禧宮)에 유숙하고, 금포(金浦)에 유숙하고, 통진(通津)과 강화(江華)에 유숙하고 교동(喬桐)에 당도하였다. 따라갔던 장수 심순경이 복명하기를, “아무 탈 없이 모시고 갔습니다. 가는 길에는 노인과 아이들이 모두 달려와서 다투어 서로 손가락질하면서 통쾌하게 여겼습니다.안치소(安置所)에 도착해 보니 둘레에 친 울타리가 좁고 높아서 해를 볼 수가 없었으며, 다만 작은 문 하나가 있어 음식을 통하였습니다. 울타리 안에 들어가자 시녀들은 모두 목놓아 울었습니다. 신이 하직을 고하니 말씀을 전하기를, ‘나 때문에 멀리 오느라고 수고했으니 고맙다.’ 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 중종(中宗)이 전교하기를, “전왕의 소식을 들으니 마음이 안되었다. 나는 종사가 위태하고 신민이 추대하므로 여러 사람의 뜻을 어길 수 없어 사피하지 못하고 이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전왕은 나와 의리로는 임금과 신하였고 정의로는 형과 아우이다. 지금 날씨가 점차 추워지니 의복과 음식물을 실어 보내라.” 하였다. 대신들이 아뢰기를,“신 등은 폐주에 대한 대의(大義)가 이미 끊어졌으니 감히 마음을 쏠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전하의 전교는 지극한 정의에서 나온 것이오니 의복과 음식을 내려 보냄이 마땅하옵니다.”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교동(喬桐)에는 반드시 털옷이 없을 것이니 털옷과 어물(魚物)을 따로 보내고자 한다.” 하니, “전하의 명은 지당하십니다. 그러하오나 지나치면 거북스러움이 있으니 간신히 배고픔과 추위만 면하게 하면 될 것입니다.” 하였다. 《동각잡기》
○ 연산군은 평소 소행이 한없이 잔인ㆍ패려하여 사람 죽이기에 거리낌이 없었으니, 폐위되어 물러갈 적에 마땅히 형벌을 받을 줄로 알고 몹시 두려워하였다. 이 날 큰 바람이 일어나 배가 거의 뒤집힐 뻔 하다가 간신히 교동에 당도하였다. 좌우로 호위하여 고을 뜰에 들어감에 장수와 군사들이 둘러섰으니 땅에 엎드려 땀을 흘리면서 감히 쳐다 보지도 못하였다.반정하던 때에 세자와 왕자는 다 보전하지 못 하는 것이므로 궁에서 나갈 적에 신씨(愼氏)는 반드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여겼는데, 교동에 가서 별일 없다고 하니 신비는, “그 때에 여러 대장에게 청해서 귀양간 곳에 따라가지 못한 것이 한이 된다.” 고 탄식하였다. 《소문쇄록ㆍ국조기사》
일찍이 연산군이 절구를 지었으니

여러 어진 이들과 화정에 연회하여 / 時許群賢宴畵亭
꽃과 술을 즐기며 태평을 깨달았네 / 閑憑花酒覺昇平
어찌 다만 은혜 입은 것만 좋아하랴 / 何徒爭喜鴻私厚
모두가 충성하여 정성 바치게 하고자 하노라 / 咸欲思忠獻以誠

하였다. 또,

중현대의 모임이 은대보다 넓은데 / 重賢寬於會銀臺
봄 바람 길 위에는 붉은 준마가 달려 가네 / 春滿長途叱撥催
취해서 한가하게 달을 즐길 뿐만 아니라 / 不啻醉憐閒夜月
돌아올 때도 악대를 이끌고 다시 거닐어 오네 / 歸牽歌菅可重徊

하였다. 조신(曹伸)이 뒷날에 차운(次韻)하였으니,

남의 집 헐어서 정자를 만들고 / 撤人廬舍摠爲亭
많은 여자 뽑아서 운평을 만들었네 / 採却靑紅作運平
원훈과 간신을 다 죽이고 / 誅盡元勳屠諫輔
내시들만 남겨서 충성하게 하였네 / 只留皂帽表忠誠

하였다. 또

서총대 쌓느라고 만인이 죽었는데 / 萬人駢死築葱臺
춤을 춘 기생에게 비단을 내려주네 / 舞罷迓祥賜錦催
부끄러운 기색으로 여러 아우의 뼈를 찾고자 / 忸怩欲尋諸弟骨
문득 해상에서 잠시 거닐고 있네 / 却於海上暫徘徊

라 하였다.
○ 12월에 이르러 호위하는 장수가 연산군이 역질(疫疾)로 매우 고통받는다고 아뢰었다. 이에 중종이 의관을 보내어 치료하게 하였으나 도착하기 전에 운명하였다. 시녀들은 “연산군이 죽음에 다달아 다른 말은 없었으며, 다만 신씨가 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신씨는 곧 그의 왕비였다.임금은 전교를 내리기를 “후한 예로 장사 지내 주고 또 조회와 개시(開市)를 정지하고 묘지기를 정함이 어떠한가?” 하였다. 대신은 의논하여 아뢰기를, “장사는 왕자의 예로써 지내줄 것이나, 조회와 개시를 정지하고 묘지기를 정하는 것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였다. 전교를 내리기를, “그렇다면 감사를 시켜 상사를 보살피게 하고, 본관(本官)은 묘소에 화재를 금하고 수목의 벌채를 금하게 하라.” 하였다. 《패관잡기》
○ 이에 공조참의 겸 경연참찬관(工曹叅議兼經筵叅贊官) 유숭조(柳崇祖)가 차자를 올렸으니 그 대략에, “전일에 전왕이 인심을 크게 잃어 종사가 위태할 뻔했는데, 두세 대신이 천명과 인심에 따라 왕대비의 명을 받들어 전하를 추대하니 전하께서는 신민의 추대에 마지못하여 왕위에 올랐는데,전왕을 받드는 정성은 더욱 돈독하여 재부(宰夫 가축을 잡는 천직)와 선감(膳監)과 사랑받던 여자와 시종과 장사들에게 호위를 맡겨 뜻밖의 변고를 방비하게 하고 의복과 음식물도 길 왕래가 끊어지지 않을 정도로 내려주셨습니다. 불행히 역질을 만나 갑자기 승하하자 전하께서 매우 슬퍼하시어 수라상을 폐하시고 조회를 정지하면서 초상 장사의 예절을 다하려고 대신에게 의논하셨는데,대신이 의논해 아뢴 것은 아마 의리에 합당치 못한 듯 하옵니다. 신이 삼가 생각하건대, 임금과 아버지는 한 가지입니다. 아버지가 비록 아버지 구실을 하지 못하더라도 아들은 아들된 도리를 하지 않을 수 없으니, 순제(舜帝)가 어찌 고수(瞽瞍)가 완악하다고 생존했을 때에 섬기고 죽은 뒤에 장사 제사 지내는 예절을 폐지했겠습니까. 태갑(太甲)이 법도를 파괴하고 예절을 문란하게 하자 이윤(伊尹)은 그를 동궁(桐宮)에 내쫓아 그가 잘못을 뉘우치고 깨닫기를 기다렸습니다. 태갑이 혹시 잘못을 뉘우쳐 고치지 못하고 죽었다면 초상 장사의 예절을 어찌 처리하였겠습니까. 유왕(幽王)과 여왕(厲王)은 정치를 문란히 하여 나라를 망쳤으므로 나쁜 시호를 얻었지마는 왕의 칭호는 없애지 않았습니다.전왕은 종사에 죄를 얻었으니 종묘에 모셔 제사지낼 수는 없지마는 신하가 임금을 위해 치르는 초상 장사의 예절은 마땅히 이와 같을 수는 없습니다. 장사에는 능의 의식을 쓰며 따로 사당을 세우고 중국에 부고를 하는 것이 정의와 의리를 다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송태조(宋太祖)가 공제(恭帝 후주(後周))에게,우리 태조가 고려 공양왕(恭讓王)에게 초상 장사를 치러 주고 시호를 올렸던 예절을 본받을 것입니다. 중국의 사신이 만약 이 일을 묻는다면 미리 대책을 준비하지 않을 수 없사오니 겉만 꾸며서 대답하는 것은 정성으로 중국을 섬기고 아랫 사람에게 보이는 도리가 아닙니다.” 하였다. 임금이 널리 의논케 하였더니 모두 시행할 수 없다 하였다.유자광은 그 말을 극력 배척하여 법 맡은 관원에게 맡겨 그 실정을 국문하자고 청하기까지 하였으며, 박원종은 “그 사람을 근시(近侍)의 자리에 있게 할 수 없습니다.” 하니, 중종은 경연관의 벼슬을 갈게 하였다. 사헌부와 사간원에서는 유승조를 죄 주면 언로가 방해된다 하여 벼슬을 갈지 않기를 청하고 다투었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동각잡기》
○ 중종(中宗) 11년 병자에 도승지 이자화(李自華)를 보내어 연산군의 묘에 제사지냈는데 그 제문에, “나는 보잘 것 없는 몸으로 국운이 중간에 비색함을 당하여 위로는 조종(祖宗)을 생각하고, 아래로는 신하에게 추대되어 마지못하여 왕위에 올랐으니 실로 두렵고 부끄러운 나의 마음이 어찌 끝이 있으리오.끝까지 서로 우애있게 지냄으로써 이 뜻을 풀고자 했는데, 한번 병들어 돌아갔으니 하늘은 어찌 그리 참혹한가. 세월이 흘러가니 추모하는 마음 더욱 간절하도다. 이에 사람을 보내어 제수를 드리고 삼가 나의 심정을 고하오니 제물은 극히 박하지마는 나의 적은 정성을 흠향하기 바라오.” 하였다. 《국조보감》 《동각잡기》
○ 병자년 10월에 참찬관(參贊官) 김굉(金硡)이 아뢴 말에 의하여 연산군의 후사를 세워 줄 일을 대신들에게 의논하게 하였는데 마침내 폐비 신씨에게 자기 뜻대로 후사를 세우도록 하였다. 단종기(端宗記)에 상세하다.
○ 중종 13년 무인에 승지 권발(權橃)과 김정국(金正國)은 연산군의 후사를 세워야 함을 극력으로 논했으나 시행되지 못하였다. 단종기(端宗記)에 상세하다.
○ 중종 34년 기해에 한산 군수(韓山郡守) 이약빙(李若氷)이 소를 올려 연산군을 위해 후사를 세우기를 청하였다. 단종기(端宗記)에 상세하다.
○ 명종(明宗) 을사년에 이언적(李彦迪)이 의논해 아뢰기를, “전일에 사신이 북경에 갔을 때 중국 사람이 혹시 양로왕(讓老王 처음 반정하였을 때 중국에는 연산군이 자진하여 아우에게 양위하였다고 알렸다.)이 생존했는가, 별세했는가를 물으니 통역관이 감히 바른 말을 하지 못하고 별세한 것을 생존했다고 대답했으니 이것은 의리에도 미안할 뿐 아니라 뒷날에도 난처하게 될 것입니다.지금 상신(相臣)을 보내어 중국의 예부(禮部)에서 양로왕이 생존했는가, 별세했는가를 물으면 마땅히 사실대로 대답해야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쪽에서 만약 ‘그때에 왜 부고를 내고 시호를 청하지 않았느냐?’ 하면 대답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니 반드시 사리에 따라 잘 말해야 될 것입니다.또 ‘너희 나라의 통역관이 지난 겨울에 와서도 양로왕이 지금도 생존해 있다 했는데 어찌 그 말이 다르냐?’고 하면, ‘그때의 통역관은 아는 것이 없어서 창졸간에 잘못 대답한 것이 매우 해괴하니 마땅히 그 죄를 다스려야 되겠다.’고 대답해야 될 것입니다.” 하였다. 《회재집(晦齋集)》
○ 중종 때에 폐비 신씨가 세상을 떠났다.
○ 심언광(沈彦光)이 신비의 만장(輓章) 세 수(首)를 지었으니 그 첫째에,

꿈 같은 장추궁에 몇 해 봄을 지냈던가 / 一夢長秋度幾春
표령한 신세가 다시 슬프게 되었네 / 飄零身世更悲辛
매양 보통 부부간의 이별을 들어도 눈물이 흐르는데 / 每聞契濶堪流涕
하물며 그 당시에 신하된 사람이랴 / 何况當時北面人

하였고, 그 둘째에,

10년 동안 소후가 수궁에 있었는데 / 十年蕭后在隋宮
말로의 생애는 안정되지 못했도다 / 末路生涯逐轉蓬
술지하라고 한 말은 참으로 약석이었건만 / 述志一言眞藥石
임금은 오히려 깊은 충곡(衷曲)을 살피지 못하였네 / 乾心猶不省深衷

하였고, 그 셋째에,

한 시대의 충량은 모두 간하다가 죽었는데 / 一世忠良眞剖心
임금은 무슨 일로 날마다 음란했던가 / 君王何事日荒淫
그 당시에 중전이 덕이 있었으니 / 當年中壼多陰敎
계명계가 깊지 않은 것이 아니로다 / 不是鷄鳴戒不深

하였다. 《어촌집(漁村集)》 《신씨족보(愼氏族譜)》


 

[주D-001]창읍왕(昌邑王) : 한 무제(漢武帝)의 아들로서 소제(昭帝)를 계승하여 황제가 되었다가 덕이 없어 폐위되었다.
[주D-002]곽광(霍光) : 창읍왕(昌邑王)을 폐출하고 선제(宣帝)를 세운 대신.
[주D-003]철권(鐵券) : 공신에게 주어 영구히 보존케 하는 것.
[주D-004]연거속구(連車續狗) : 옛날 중국 남북조 시대에, “보궐(補闕 : 관명)은 수레를 잇달아 실을 정도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관직을 남발한 것을 조롱한 말이며, 또 서진(西晉) 때에, “수달피의 꼬리가 부족하여 개꼬리로 잇는다.”란 말이 있는데 이것도 관직이 남발되어 벼슬아치가 다는 수달피의 꼬리가 부족하여 개꼬리로 잇는다는 말인데, 여기서는 이러한 고사에서 공신이 너무 많은 것을 말하였다.
[주D-005]고수(瞽瞍) : 순(舜)의 아버지인데 완고하여 아들을 죽이려 하던 자이다.
[주D-006]태갑(太甲) : 은왕(殷王) 성탕(成湯)의 아들로서 왕위에 올랐는데, 덕이 없어 이윤(伊尹) 등에게 동궁(桐宮)으로 추방 당하였다. 후에 그가 잘못을 깨닫고 고쳤으므로 다시 복위시켰다.
[주D-007]장추궁 : 한대(漢代)에 태후가 거처하던 곳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신비(愼妃)가 왕비 자리에 있었던 것을 말한다.
[주D-008]술지하라고 한 말 : 왕비 신씨(愼氏)가 연산군(燕山君)에게 바른 말로 경계한 것을 말한다.
[주D-009]계명계 : 《시경(詩經)》에 ‘계명편(鷄鳴篇)’이 있는데 여기에 왕후가 왕에게 정사에 부지런할 것을 권한 계명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