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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조의 상신

아베베1 2011. 3. 28. 16:49

연려실기술 제6권
 연산조 고사본말(燕山朝故事本末)
연산조의 상신




정활(鄭佸)
정활은 자는 군회(君會) 혹은 경회(景會) 이며, 본관은 동래(東萊)요, 영의정 창손(昌孫)의 아들이다. 세조 을유년에 문과에 오르고, 을묘년에 정승이 되어 좌의정에 올랐는데 1년이 못 되어 죽었다. 시호는 공숙공(恭肅公)이다.
○ 기절(氣節)이 있고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를 알고 있었다.
○ 성종 때에 대사헌이 되어 임금에게 아뢰기를, “정전(正殿)에서 여악(女樂)을 쓰는 것은 옛법이 아니오니 쓰지 마소서.” 하였다. 당시의 풍속이 무당을 숭상하였는데, 공은 무당들을 모두 성 밖으로 내쫓았다. 이조 판서로 있는 3년 동안 청탁이 행해지지 않았다. 좌의정이 되어 북경에 사신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죽었다.


어세겸(魚世謙)
어세겸은 자(字)는 자익(子益)이며, 본관은 함종(咸從)이요, 판중추 효첨(孝瞻)의 아들이다. 세조 병자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문형(文衡)을 맡았으며 익대(翊戴) 공신으로 함종부원군이 되었다. 을묘년에 정승이 되어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궤장(几杖)을 하사 받았다.무오년에 사초(史草)에 관한 일 때문에 정승에서 파면 당하였고 경신년에 죽으니 나이가 71세였다.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 갑자년에 무덤이 화를 입었다.
○ 공은 기개가 활달하였다. 천성이 소탈하여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고 출세에 욕심이 없었으며 함부로 이록(利祿)에 관한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비록 활쏘고 말타는 재주가 있었지만 한 번도 스스로 자랑한 일이 없었고 재직시에는 청렴하고 분명하여 가는 곳마다 공적을 남겼다.
○ 임인년에 성종(成宗)이 광릉(光陵)으로 행차를 하여 영전(影殿)을 봉선사(奉先寺)에서 참배하게 되었을 때 대사헌으로 있던 공이 따라 갔었다. 그때 절에서 백관들에게 식사 대접을 하려 하니 공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당당하게 호종하는 신하가 중의 시식(施食)을 받으면 국체가 어찌 되겠습니까.또한 백관이 다 각기 먹을 것을 가지고 왔으니 밥 걱정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너는 먹기 싫거든 마음대로 하라.” 하니, 그와 대간들이 모두 먹지 않았다. <행장>ㆍ《동각잡기》
○ 일찍이 성종이 정사를 하던 날에 이조ㆍ병조의 당상관들과 육승지와 두의빈(儀賓 임금의 사위 즉 부마(駙馬))을 창경궁(昌慶宮) 대문 안으로 불러들이고 술이 두어 순배 돌자, 월산대군(月山大君)이 안에서 은병 세 개를 받들어 내왔다. 은병들은 모두 허리 양면에 금자로 어제시(御製詩)를 새겨 대군에게 준 것이었는데 향기로운 술이 가득 담겨져 있었다.대군은 자리에 있는 이에게 시켜서 어제시에 화답하고 술을 부어 마시게 하였는데, 이에 내사(內使 임금의 명을 전달하는 내시)가 나와 왕명을 전하기를, “대군이 나의 졸작을 여러 재상들에게 보였다 하니 내가 매우 부끄러이 여기노라. 시가 별로 잘 되지는 않았으나 운자(韻字)는 있으니 여러 재상들은 화답하여 올리라.” 하였다. 그때 공이 지어 올린 시에,

겉에는 천금 글자가 빛나고 / 外耀千金字
안에는 만세춘이 가득찼네 / 中藏萬歲春
규장(奎章 임금의 문필)이 겨우 새어 나오자 / 奎章纔漏泄
술잔에 사람 벌써 취했어라 / 斟酌已醺人

하였다. 장편이어서 글귀가 많으므로 다 적지는 못한다. 《동각잡기》
○ 공이 병들었을 때 내의(內醫 궁내(宮內)의 의원)가 와서 진찰하고 침뜸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인생 칠십이면 희수(稀壽)요, 정승은 최고의 품계인데 두 가지를 모두 얻었거늘 다시 무엇을 바라 침뜸까지 하며 더 살고자 애쓰겠느냐.” 하고 마침내 죽었다. <행장>
○ 연산주 때에 공은 대신으로 있으면서 출근을 늦게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오고당상(午鼓堂上)이라 일컬었으니 오정 북[午鼓]이 울릴 때쯤 하여 늦게 출근했기 때문이다. 《최금남전(崔錦南傳)》
○ 일찍이 팔도 도사(都事)를 지냈으므로 산천 풍토를 두루 보고 기록하였다.


한치형(韓致亨)
한치형은 자는 형지(亨之)이며, 본관은 청주(淸州)요, 좌의정 확(確)의 조카이다. 음관으로 벼슬하여 좌리 공신으로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이 되었다. 병진년에 정승이 되어 영의정에 이르렀다. 시호는 질경공(質景公)이고 임술년에 죽으니 나이 69세였다. 갑자년에 화가 무덤에 미쳤다.
○ 공이 형조 판서로 있을 때 너무 부지런하여 늦게 퇴출하기 때문에 낭관(郞官)들이 견디지 못하여 아침 저녁으로 괴로워했다. 그 조카 건(健)이 정랑으로 있었는데, 한가한 날 가서 기다렸다가 조용히 말하기를, “함종부원군 어세겸(魚世謙)은 늦게 출근하고 일찍 퇴출해도 무관한데 아저씨께서는 그리 애쓰실 게 뭐 있습니까.” 하고 말하니,공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기를, “어함종(魚咸從)은 문장과 도덕이 출중하여 비록 직무에 태만하여도 오히려 취할 게 있지만 나와 너는 달리 뛰어난 점이 없으니 직책을 조심해 지키는 것이 옳지 않으냐. 내 뜻이 그러하다.” 고 하니 건이 부끄러워 물러갔다. 《충민공잡기(忠敏公雜記)》
○ 공이 남방으로 순찰하러 갈 때 종사관 두어 사람이 따라 갔었는데, 문득 보니 강가의 화사한 집에 꽃과 대나무가 둘러 있고, 수양버드나무에는 붉은색 준마를 매어 놓고, 폭건(幅巾 벼슬하지 아니한 선비가 한가히 있을 때 쓰는 건)을 쓴 선비가 난간에 기대어 매를 길들이는 것을 구경하고 있으니 종사관들이 한창 괴롭게 길가던 다음이라 그것을 보고 모두 부러워하였다.이에 공이 돌아다 보며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저 이에게 전옥서 참봉(典獄署叅奉)이라도 준다면 금방 저 집을 폐쇄해 버리고 말을 달려 조정에 들어갈 것이 분명하다.” 하였다. 《소문쇄록》


성준(成俊)
성준은 자는 시좌(時佐)이며,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우의정 봉조(奉祖)의 조카로 세조(世祖) 기묘년에 문과에 오르고 무오년에 정승이 되어 영의정에 이르렀다. 갑자년에 직산(稷山)으로 귀양가서 사형을 당하였으니 그의 나이 69세였다. 시호는 명숙공(明肅公)이다. 중종이 그의 충직을 표창하여 관직을 회복시키고 예장(禮葬)하였다.
○ 예종(睿宗) 때 장령으로 있다가 파면되었는데 얼마 안 되어 특별히 서용되었다. 이조에서 아뢰기를, “마침 결직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시강원은 이미 파하였으나 성준을 위하여 특별히 설치해서 직을 주라.” 하였다. 예종의 세자 시절 공이 강관(講官)으로 있었던 터라 보필하는 데 재질이 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이같이 명한 것이다.
○ 무오년에 공이 영상이 되었는데, 하루는 내연(內宴)이 있어 재상들도 들어갔다. 한참 술이 얼큰할 때 폐주가 요염하게 생긴 한 기생을 껴안으니 공이 아뢰기를, “노신이 아직 죽지 않았사오니 전하는 결코 이렇게 하실 수 없습니다.” 하니 연산이 꺼려서 그만두었다. 연산주가 겉으로는 공경하고 존중하는 체 하였지만 속으로는 싫어하였다.
○ 공은 기량이 크고, 총명이 출중하여 글을 읽으면 두어 번만 읽어도 곧 외워 잊지 않았으며, 활쏘고 말타는 데도 능하므로 동년배들이 모두 추앙하여 장상(將相)으로 기대하였다.
○ 성종(成宗)이 즉위하자, 사간으로 있던 공이 글을 올려 시정(時政) 열일곱 건을 논하였는데 말이 매우 간절하고 곧았다. 성종이 그 말을 받아들이고 특별히 통정(通政)으로 올리고 대사간을 제수하였다. 그때 오백창(吳伯昌)이 권문에 아첨하여 재상이 되었는데,공이 그의 탐람한 죄상을 들어 배척하니 말이 대신에게까지 걸리게 되었다. 이에 성종이 대신을 위무하기 위하여 오백창과 함께 파직시켰다. 뒤에 전라 감사가 되어 어전에 하직할 때 임금이, “그대가 대간으로 있을 때 이미 충직함을 알았다. 항상 그 마음을 가지고 끝까지 변함이 없으라.” 하였다.


이극균(李克均)
이극균은 자는 방형(邦衡)이며, 본관은 광주(廣州)요, 우의정 인손(仁孫)의 둘째 아들이다. 세조 병자년에 문과에 오르고, 경신년에 정승이 되어 좌의정에 이르렀다. 갑자년에 죽음을 당하였으니 그의 나이 68세였다.
○ 공이 인동(仁同)으로 귀양가서 사사(賜死) 당할 때 말하기를, “나에게 무슨 죄가 있어 이러느냐.” 하고, 분기가 발발하여 유실(幽室 사약을 먹고 죽는 그윽한 방)에 들어 갔다가 다시 나와서 형관에게, “내 나이 장차 칠십이고 몸에는 온갖 병이 얽혔으니 지금 죽어도 한은 없다만 나라를 위한 공로가 있고 몸에 아무런 죄가 없음을 네가 돌아가 반드시 임금께 아뢰라.만약 그러하지 않는다면 내 넋이 있어 꼭 너를 벌하고야 말 것이다.” 하였다. 형관이 돌아가 그렇게 아뢰니 폐주가 더욱 노하여 뼈를 부수도록 하였다. 《소문쇄록》
○ 연산주가 선전관 이종례(李宗禮)ㆍ김우증(金友曾)ㆍ김수담(金粹潭) 등을 안으로 불러들여, “너희들이 이극균(李克均)을 아느냐?”고 물으니 모두 감히 대답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굳이 묻자 폐주의 뜻에 아부하여, “간신의 일을 감히 말에 나타낼 수 없습니다.” 하였다. 연산이 “그렇다.” 하였다. 《소문쇄록》


유순(柳洵)
유순은 자는 희명(希明)이며, 호는 노포당(老圃堂)이요,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세조 임오년에 문과에 오르고 병술년에 중시(重試)와 발영시(拔英試)에 합격하였다. 계해년에 정승이 되어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궤장(几杖)을 하사 받았다. 정국(靖國) 공신으로 문성부원군(文城府院君)이 되었으며, 시호는 문희공(文僖公)이다. 정축년에 죽었으니 그의 나이 77세였다.
○ 공은 문장에 능하였다. 어려서 남학(南學)에서 배울 때 ‘금릉사(金陵詞)’를 지었는데 글과 뜻이 노련하고 건전하여 사람의 입에 회자되었다. 비서(碑序)
○ 공은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하였으니, 형인 위(渭)가 매우 곤궁하게 지냈으므로 사시로 옷을 지어 보냈는데 반드시 가볍고 따뜻한 것을 골라 보냈다. 《이요헌집(二樂軒集)》 ○ 위(渭)는 포천(抱川)에서 살았다.
○ 성종(成宗) 때 부제학이 되었는데, 임금이 미인도(美人圖)를 내놓고, “시를 지어 올리라.” 하였다. 그 시의 끝 귀에, “임금이 스스로 여색을 멀리하여, 그림을 펴 보고도 오히려 한 번 눈살을 찌푸린다.” 하였다. 성종이 칭찬하고 공인을 시켜 병풍을 꾸미게 하였다. 《명신록》
○ 공이 독서를 즐겨 늙어서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루는 등불을 돋우고 처음 보는 책을 읽으면서 감탄하여, “노부(老夫)가 하마터면 이 책을 알지 못하고 죽을 뻔 하였다.” 하였다. 《패관잡기》
○ 갑자년 살육이 벌어지던 때 공은 수상(首相)으로 그 틈에 어름어름하여 겨우 몸을 보전하였고, 반정하던 때에도 수상으로 회의에 참여는 하였으나 놀래고 겁내어 어찌할 바를 몰라 황급히 말하기를, “성영감이 할 것인가? 유영감이 할 것인가?” 하였으니,그것은 성희안(成希顔)과 유순정(柳順汀)이 스스로 임금이 되려는 줄 알고 의심하여 말한 것이다. 그 마음 먹은 바를 더듬어 본다면 몸을 보존하고 나라를 팔아 먹으려 하는 것 뿐이니 장차 저런 정승을 무엇에 쓰랴. 《조야첨재》
○ 공은 평민 신분으로 일어나서 글과 글씨로 출신하고 좋은 벼슬을 두루 거치며 세상의 미움을 받지 않고 정승에 이르렀다. 폐주 때에는 수상으로 있으면서 전적으로 “네, 네” 대답하는 것만 일삼았다.반정 뒤에도 공신에 끼었으나 이미 더러워졌음을 자신도 알고 별로 주장하고 건의하는 것도 없었고 매사를 그럭저럭 하니 대간에서 상소를 하여 파면을 청하여도 벼슬을 사양하지 않고 있다가 기사(己巳)년 윤 9월에 천변으로 인하여 다시 탄핵되어 파면되었다. 《음애일기》
○ 아무리 직무가 번다하여도 독서를 그친 일이 없었다. 자학(字學)에도 매우 정밀하였고 의학ㆍ지리 공부에도 힘을 썼다.
○ 연산 때에는 수상(首相)이 되어 물러날 수도 없고 또 바로 잡으려 해도 기휘(忌諱)에만 저촉되므로 항상 속을 태우고 고민하였다. 중종(中宗) 때에 아뢰기를, “신이 반정 당시 수상으로서 변을 듣고 창황하여 어찌 할 줄을 몰랐는데도 공신에까지 참여하게 되었으니 태평 시대에 부끄럽습니다.” 하니, 듣는 이가 그 말이 옳다 하였다.


허침(許琛) 갑자년에 나고 62세에 죽다.
허침은 자는 헌지(獻之)이며, 호는 이헌(頤軒)이요,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성종(成宗) 을미년에 문과에 오르고 진현시(進賢試)에 합격하였다. 갑자년에 정승이 되어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
○ 공은 그 형 종(琮)과 함께 명상(名相)으로 일컬었다. 그의 누님도 글과 행실과 식견이 있고 백 살이나 살아 그 문중에서는 지금까지도 ‘백 세 할머니’라고 일컫는다. 형제가 모두 누님을 극진히 섬기고 조정에 큰 일이 있으면 꼭 가서 물었다. 성종(成宗)이 윤비(尹妃)를 폐하려 할 때 형제가 물으니 대답하기를,“그 아들이 세자로 있는데 그 어머니를 죄 주고서 국가가 어찌 무고하겠느냐.” 하였으므로 종(琮)은 신병을 칭탁하여 나가지 않았고, 침(琛)은 반대 의견을 말했다가 체직되었다. 뒤에 폐주가 그때 폐비론을 주장하던 사람들을 모두 죽였는데 그는 홀로 면하였으니 사람들이 그 탁견에 감복하였다. 《식소록》
○ 부인 유씨(柳氏)는 공이 죽은 뒤 시묘살이를 하면서 조석으로 손수 전찬(奠饌)을 올렸다. 그때 단상법(短喪法)이 엄했는데도 예를 지켜 3년상을 마쳤다. 중종 2년에 정려(旌閭)하였다. 《여지승람》


박숭질(朴崇質)
박숭질은 자는 중소(仲素)이며, 본관은 반남(潘南)이다. 좌의정 은(訔)의 손자이며 부윤 훤(萱)의 아들이다. 세조 병자년에 생원과와 문과에 오르고, 갑자년에 정승이 되어 좌의정에 이르렀으나 일부러 말에서 떨어져 정승에서 물러났다. 기사(耆社)에 들어갔으며, 시호는 공순공(恭順公)이다.


강귀손(姜龜孫)
강귀손은 자는 용휴(用休)이며, 본관은 진주(晋州)요, 좌찬성 희맹(希孟)의 아들이다. 성종 기해년에 문과에 오르고 을축년에 우의정이 되고 진원군(晋原君)에 봉해졌다. 병인년에 북경(北京)에 갔다가 정묘년 돌아오는 도중에 죽었다. 시호는 숙헌공(肅憲公)이다.
○ 신비(愼妃)의 오빠 수근(守勤)의 딸이 중종(中宗)의 잠저(潛邸) 때 부인이 되었다. 폐주 연산이 한참 거칠고 어지러울 때 신수근은 좌상으로 있었고, 공은 같이 우상으로 있었는데, 어두운 임금을 폐하고 밝은 임금을 세우려는 뜻이 있었다. 그때 마침 공이 북경으로 가게 되었는데, 하루는 수근과 만나 조용히 “매부[연산군]와 사위[중종] 중에 누가 더 가까운가?” 하고 심중을 떠보았더니,수근이 말하기를, “세자가 영명하니 다만 그를 믿을 뿐이오.”라고 대답하니 공은 아무 말도 않고 길을 떠났다. 날마다 말이 누설될까 염려하더니 북경에서 돌아오기 전에 등창이 나서 죽었다. 《동각잡기(東閣雜記)》 ○ 《기묘속록(己卯續錄)》에는, “박원종이 그를 시켜 비밀히 수근의 마음을 떠 보았더니 수근이 말하기를, ‘매부를 폐하고 사위를 세우는 일을 나는 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수근(愼守勤) 경오년에 나고 57세에 죽다
신수근은 자는 근중(勤仲) 또는 경지(敬之)이며, 본관은 거창(居昌)이요, 영의정 승선(承善)의 아들이다. 음관으로 벼슬하여 익창군(益昌君)을 습봉(襲封 봉작의 세습)했다. 병인년에 정승이 되어 좌의정에 이르고 반정 때에 죽음을 당하였다. 영종(英宗) 기미년에 단경왕후(端敬王后 수근의 딸)를 추복(追復)할 때 영상(領相)으로 증직하였다. 시호는 신도공(信度公)이다.
○ 반정 며칠 전에 박원종이 와서 공을 보고 장기를 두자고 청하여 짐짓 두 궁(宮)을 바꾸어 자신들의 뜻을 내비치니 장기 놀이에는 장(將)과 졸(卒)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장을 궁이라고 한다. 공이 장기판을 밀치며, “내 머리를 베라.” 하므로 원종이 그 뜻을 움직일 수 없음을 알고 마침내 제거하기로 결정하였다. 《국포집(菊圃集)》 <행장>
○ 인종(仁宗) 때 특명으로 복작(復爵)시켰다.
○ 이자(李耔)ㆍ남곤(南袞)ㆍ이행(李荇)이 항상 공을 헐뜯었는데, 곤은 본디 소인이고, 행은 복비(復妃) 논의를 강력히 방해했으니 그렇게 말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이자가 이렇게 한 것은 괴이한 일이다. 자(耔)는 남을 모함하는 이가 아닌데 이러하였으니 필경 누가 그를 속인 것이 아닐까. 자가 젊었을 때 심정(沈貞)과 함께 공부하였고 또 김안로(金安老)와는 동서간이 되는데, 그들이 모두 마음이 음험한 소인들이니, 아마도 이자가 그들이 모함하는 말을 듣고 그대로 기록한 것이 아니겠는가. 《국포집》
○ 공의 아우 수겸(守謙) 음관으로 벼슬하여 형조 판서에 이르렀다 은 반정 때 개성 유수로 있었다. 박원종 등이 심복을 보내어 같이 거사할 것을 권유했더니 수겸이 대답하기를, “우리 형제의 마음이 정해진 지가 이미 오래이니 내 형에게 물어 보라.” 하고 이내 문을 닫고 10여 일이나 정무를 보지 않았다.9월 4일에 역사(力士)가 소매 속에 철퇴를 넣고 금오랑(金吾郞 죄인을 잡아가는 금부 도사)이라 일컬으며 내아(內衙 지방 수령의 관사의 내실)로 들어가 때려 죽였다. 그때 유모 예덕(禮德)이 쫓아 나와 철퇴를 막아 서더니 함께 죽었다. <신씨족보(愼氏族譜)>


김수동(金壽童)
김수동은 자는 미수(眉叟)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요, 좌의정 질(礩)의 조카이고, 좌의정 사형(士衡)의 현손이다. 성종 정유년에 문과에 오르고 병인년에 정승이 되어 영의정에 이르렀다. 정국(靖國) 공신으로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이 되었다. 시호는 문경공(文景公)이다. 임신년에 죽었으니 그의 나이 53세였다.
○ 공은 일찍 급제하여 주서(注書)가 되어 직무를 잘 수행하였다. 채수(蔡壽)가 당시 승지로 있으면서 공의 단정하고 진중함을 아꼈는데, 자신의 아들 채소권(蔡紹權 판서)의 아명(兒名)을 ‘수동(壽童)’이라 하였다. 《해동악부(海東樂府)》
○ 일곱 살 때에 시를 지을 줄 알았으므로 사람들이 재주를 기특하게 여겼다. 글씨도 잘 썼는데 예서에 능하였다.
○ 공은 단정하고 무게가 있고 지혜가 많았다. 서생 때부터 수상이 되기까지 사람들이 그를 시비하지 못했다. 흉악하고 잔인한 연산주 때에 총애를 받아 정승으로 들어갔으나, 때에 따라 신축성 있게 처신하여 위로는 임금에게 죄를 입지 않았고 아래로는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였으니, 공의 힘으로 목숨을 보전한 이가 많았다.그때 벼슬아치들이 다투어 집을 사치하게 꾸미고 대문 밖에는 뇌물짐이 저자를 이루었으나, 공은 홀로 그렇지 않았다. 반정하는 날에 성희안(成希顔)이 가서 말하니 함부로 굽혀 따르지도 않고 조급히 굴지도 아니하고 조용히 헤아린 뒤에 행동하여 사림들이 공의 도량에 탄복했다고 한다. 《음애잡기》
○ 반정 초에 공에게 우상으로 기복(起復)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공이 말하기를, “신과 신의 아우 병조 참의 수정(壽正)이 지난 달에 친모 상을 당했을 때 연산 당시의 단상법(短喪法)으로 상복을 벗고 봉직해 왔는데 지금 새로운 시대를 당하였으니, 해직하고 나가서 상을 마치게 해주소서.” 하였다. 임금이 정부ㆍ육조에 명하여 상의하게 하였더니,유순(柳洵) 등이 말하기를, “국정 개혁 초에 경륜과 제도를 마련함에 있어 수동(壽童)이 없으면 안 되겠으니, 선조(先朝)에서 기복하던 법에 따라 정무에 종사케 하고, 수정은 해직하고 나가서 상을 마치도록 허락하소서.” 하였다. 중종(中宗)이 “옳다.” 하고 조금 있다 좌상으로 승진시켰다. 《국조보감》
○ 그 뒤에 다시 상을 마치기를 청하여 허락을 얻었다.
○ 박원종(朴元宗)이 갈리고 공이 수상(首相)으로 들어가니 인심이 조금 흡족해졌다. 《음애일기》
○ 중종조(中宗朝)에 사직하고 집에 나와 있다가 죽었다. 무오ㆍ갑자사화에 선비들이 많이 죽었는데, 현명한 공이 그때에 은퇴하지 못하고 또 반정한 뒤에야 은퇴하였다. 군자가 그에게 모든 것을 잘하기를 요구하노니 어찌 그를 위해 세 번 탄식하지 않겠는가. 《해동악부》
○ 연산 때 판의금으로 있었는데 형벌의 그물에서 벗어나는 사람이 적었다. 그가 추관(推官)으로 있으면서 너그럽게 조처하기를 힘써 공의 힘으로 살아난 이가 많았다. 병인년에 계모 상을 당했는데, 그때 단상제(短喪制)를 시행하여 위반하는 자에게는 죄가 무거웠다. 5월에 복제 기간이 끝나고 우찬성으로 불려 들어가니, 어머니 상에 정리를 다하지 못함을 송구하게 여겼다. 7월에 정승이 되었다.


 

[주D-001]정사를 하던 날 : 인물을 추천하여 임관하는 정례(定例)의 날이다.
[주D-002]남학(南學) : 서울에 동(東)ㆍ서(西)ㆍ남(南)ㆍ중(中)의 사부학당(四部學堂)이 있었는데, 그중의 남부학당을 말한다.
[주D-003]복비(復妃) : 여기서는 중종의 폐비 신씨를 복위시키자는 의논을 말한 것이다.